4. May.
금요일 저녁에 션이 밀리와 함께 퇴근하는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션 맥케인?”
대체로 불편한 일과 이어지는, 낯익은 뉘앙스의 부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션은 느릿느릿 돌아섰다.
건장한 남자가 둘. 모두 칼같이 단정한 검은 정장을 입고, 오후의 길고 둔한 일광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었다. 감정의 색은 경계심 가득한 짙은 파랑. 첩보 영화에서, 라기보다는 다른 영화에 스쳐 지나가는 첩보 요원 같은 행색이다. 션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전형적일 필요는 없을 텐데. 그가 미소를 짓자 무표정한 요원들의 어깨 너머로 미묘한 감정들이 넘실거렸다.
“아는 사람이야?”
밀리가 불안한 듯이 그의 등에 붙었다. 요원들이 일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딱딱하게 말했다.
“부르십니다.”
주어 없는 말이었지만 션은 놀라지 않았다. 요원들이 약간 거칠게 그의 팔을 잡았다. 밀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잠깐, 당신들 뭐예요?! 누군데 이렇게 강제로!”
“괜찮아, 밀리. 걱정 안 해도 돼.”
“잠깐, 션? 션!”
밀리가 소리를 질렀지만 요원들의 장벽을 뚫지 못했다. 션은 괜찮다고 손짓하면서 억지로 검은 세단까지 끌려갔다. 요원 중 하나가 마치 억압하는 것처럼 머리를 누르려 했으나 션은 신경 쓰지 않고 차 안으로 쏙 들어가 앉았다. 현실적으로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기도 하고, 용건이 있다고 SSB 요원을 보낼 사람도 하나뿐이었다.
연행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순순히 차에 올라타자 요원들은 끼어 앉아 도주로를 막는 대신에 앞좌석에 탔다. 밀리가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션은 그녀에게 괜찮다고 문자라도 칠 생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핸드폰이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은 저희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조수석에 탄 요원이 언제 빼냈는지 션의 핸드폰을 보여 주고는 눈앞에서 전원을 끄고 배터리를 빼서 비닐 팩에 넣었다. 션은 등받이에 기대어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알버트 왕자님이 왜 저를 보려고 하시는 겁니까?”
대답은 없다. 기대도 안 했다. 만나 보면 알겠지, 하고 션은 편하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차는 멀리 가지 않았다. 채링 크로스에서 골목 하나를 꺾어 들어가 차를 길에 대고 요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안내된 곳은 사채업이나 불법 환전소가 자리 잡고 있다면 딱 좋을 것 같은 어느 낡은 건물의 2층 사무실이었다.
이런 곳이 SSB의 안가인가 싶어서 션은 의아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낡은 목조 계단을 올라가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었다. 안쪽은 좀 첩보 영화 같은 광경을 기대할 수 있으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페인트칠조차 되지 않은 사무실에 철제 벤치를 놓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십여 명이 대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 영화 같긴 했다.
그중 하나가 션을 보고 안쪽의 문으로 다가가서 노크를 했다. 희미하게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요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안쪽 방도 매한가지였다. 대기실보다 더 낡아 빠진 방에 거친 스틸 책상이 하나 놓여 있다. 환기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거리고 소음을 냈다.
“앉게.”
알버트가 자리를 권했다. 션은 거절했다. 소파라면 또 모를까, 취조실처럼 생긴 곳에서 스틸 책상을 마주 보고 앉을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본론부터 말씀하십시오. 친교를 나누자고 부르신 건 아닐 테고.”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그것도 들어 봐야 알 것 같군요.”
앉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션은 별로 알버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시민으로서 해야 할 협력은 다 했다. 그는 공화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왕실에 특별한 경의와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상대가 왕자라고 해서 필요 이상의 예의를 갖출 생각은 없었다.
“자네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걸세.”
션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자기 밑으로 들어오면 연봉을 얼마 주겠다든가 하는 이야기이려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버트의 제안이라는 것은 정말로 션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영역의 이야기였다.
“자네, 정치해 볼 생각 없나?”
“예?”
션은 눈을 깜박거렸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약간 신경질적인 태도로 알버트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손버릇이나 표정에는 엘리엇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절 당황시키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라면 아주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오늘은 4월 1일이 아닌데요?”
“내가 자네와 농담 따먹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불러낼 만큼 한가해 보이나?”
“전 제가 정치에 소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관심도 없고요.”
“자네의 소질 따위에는 흥미 없네. 내가 가능성을 본 건 얼굴이야.”
션은 안색을 굳혔다. 용모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서 역린이었다. 그러나 션이 그러거나 말거나 알버트는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자네는 아주 잘생겼지. 보통의 회사에 다니기에는 아까워.”
이번에는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잘생겼으니 모델이 되어 보라든가, 배우를 해 보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숱하게 들어왔지만, 정치를 해 보라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과연 왕족은 생각하는 스케일이 달랐다.
“일단 얼굴을 내밀기만 해도 지지율이 쭉쭉 올라갈 걸세. GFG 같은 건 사용할 필요도 없어. 비서진과 싱크 탱크를 붙여 주겠네. 적당한 토크쇼와 패널 토론에 두어 번 참석하면 그걸로도 일반인에 대한 지명도는 충분해지겠지. 게다가 헤리퍼드의 지명권이 있으니 상원 입성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어.”
“지명권?”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상원의 세습 의원직은 작위별로 하나씩 마련되어 있어. 공작에게는 남보다 많은 투표권이 보장되어 있고. 엘리엇은 의석수만 해도 혼자서 12석을 가지고 있고, 투표에서는 16표를 행사해. 봉신 계약이 사라졌음에도 아직 ‘헤리퍼드 휘하’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족의 의석은 38석에 달하며 그 투표권 수는 42표라네. 곧, 투표권으로 따지자면 58표가 엘리엇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알버트가 상상 이상으로 구체적인 제안을 들고 와서 션은 당황했다.
“엘리엇은 지금까지 12명의 대리인을 지명하여 의석을 채우고 그 자신은 출석한 일이 없네. 그리고 사실상 아무런 정치적 견해도 표출하지 않았지. 대리인들에게도 대체로 의정에 참석하는 것 외에 아무런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고, 상원에서 표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명예 선언이나 왕실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하원의 뜻을 따르도록 해 왔네.”
“매우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엘리엇의 힘은 좀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 지금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역사의 발전적인 흐름을 따라갈 거라면 낭비 없이 빠르게 이루어내는 쪽이 낫지 않겠나. 예를 들면, 동성 결혼 합법화 법안을 네 번이나 반려하게 놔둘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션은 약간 움찔했다. 엘리엇이 자신과 결혼할 계획이 없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지만, 전혀 관심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네가 엘리엇의 의석을 대신하기를 바라고 있네. 그의 배우자로서.”
이번에야말로 션은 눈에 띄게 움직거렸다. 그게 미끼라는 건 션도 알고 알버트도 알았으나, 빤히 보여도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의 용모가 가지는 이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유리한 점이 있네. 아버지는 아일랜드계이고 어머니는 잉글랜드계, 어려서 불행한 과거를 겪었지만 그걸 딛고 일어서서 바르게 성장한 이상적인 중산층 청년이야.”
물론 이력이 그렇다는 이야기라고 알버트가 굳이 덧붙였다.
“치정문제가 약간 있긴 하지만 그건 덮을 수 있어. 오히려 스토킹한 여자를 용서하고 보호해 준 일까지 있으니 영웅은 아니지만, 신사라고 할 수 있겠지. 여자들은 모두 자네에게 빠질 테고, 남자들은 공감할 걸세. 종교 문제는 지금도 전혀 없지만, 형식상으로라도 국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면 더 좋긴 하겠지. 튀니지에서 성장했으니까 무슬림의 호감도 얻을 수 있을 걸세.”
“진심이십니까?”
“성별을 제외한다면 헤리퍼드 공작의 상대로는 완벽해. 언론과 국민을 향해 보여주기에. 도덕성에 흠이 없는 전통 있는 상급 귀족과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만나서 사랑에 빠져 결연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어딜 가나 잘 먹히지. 일단 얼굴을 내밀기만 하면 자네는 인기를 휩쓸 거야. 상원은 보수적인 집단이지만, 여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정도로 굳건한 사람이 흔한 것도 아닐세. 3년 이내에 자네를 상원 의원장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겠네.”
“엘리엇 씨가 원치 않을 겁니다.”
“가끔은 엘리엇이 아니라 자네가 원하는 걸 관철시키는 게 좋지 않겠나?”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어떤 사고를 불러일으켰는지 알고 있는 알버트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왕자님이 얻으시는 게 뭡니까? 딱히 동성 애인이 있어서 결혼하고 싶으신 것도 아닐 테고.”
“진보.”
“진보?”
“현재 상원의원의 자격을 가지는 것은 귀족뿐일세. 작위를 양도받은 종신 귀족이 지명되는 일은 종종 있지만 대부분은 세습 귀족의 의석을 대리할 뿐이고, 하원에서 지명하는 경우에도 기존에 작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아니면 상원에서 거부돼. 하지만 자네라면 다르지. 자네가 정식으로 엘리엇과 결연한 후에 지명된다면, 상원에서는 헤리퍼드 공작의 반려자를 거부할 수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빌 유니언은 부부와는 다르기 때문에 자네는 위체가 아니라 여전히 맥케인으로 남아 있을 테고, 듀크 콘소트가 아니라 평민일 테지.”
알버트는 션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만일 자네가 상원에 들어간다면, 진짜 의미에서 평민이 처음으로 상원에 진출하는 일이 될 걸세. 그건 매우 의미 있는 선례가 될 거야. 비록 엘리엇의 영향력을 빌린 것이라 해도.”
“복잡한 이야기군요.”
“자네에게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이 모든 이야기는 자네가 엘리엇과 정식으로 결연한다는 전제 조건으로 가능한 것이니까.”
션은 입을 다물었다. 알버트의 수작이 유쾌하지 않았으나, 다른 모든 걸 다 떠나서 그거 하나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단호하게 돌아서지 못하고 뭉개고 서 있는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왜 엘리엇 씨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겁니까? 결연은 방법일 뿐이고 결국 정치적 스탠스의 문제인 것 같은데요.”
“문제 해결의 비중은 자네 생각과 반대일세. 정치적인 부분보다 아일라와 이혼시키는 게 더 어려워.”
알버트가 책상 위로 묵직한 책자 한 권을 꺼내 놓았다. 거의 앨범만 한 두께였다.
“이건 엘리엇과 아일라의 혼전 계약서 사본이야. 굳이 읽어 볼 필요까지는 없네. 대부분 작위와 권리, 토지, 법인의 지분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그래도 션은 책자를 넘겨 보았다.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딱딱하게 적혀 있는 계약서와 해당되는 자산의 목록뿐이었다.
“중요한 건 이혼에 따라서 이 많은 재산과 권리가 이동하게 될 거라는 걸세. 엘리엇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야.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이혼하게 될 경우 손해를 보는 것이 아일라 쪽이라서 이혼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닐세. 그렇게 될 경우에 생겨나는 여러 가지 변화, 관련된 자들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을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로펌, 미술관, 은행의 담당자, 부동산 회사, 공작 부인에게 배속되어 있는 비서, 보안 요원, 아일라의 이름으로 지원하고 있는 자선단체, 예술가, 문학협회, 그 밖에도 여럿. 재산 자체는 엘리엇에게는 대단치 않은 일이지.”
“그런 문제라면 더더군다나 제가 이야기할 수는…….”
“지원이 끊기면 생계가 막막하다거나 고용주가 바뀐다고 해서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이 아닐세. 적어도 자네보다는 엘리트일 텐데.”
“…….”
“명의가 엘리엇에게 되돌아온다고 해서 반드시 하던 활동을 중단할 필요는 없어. 그런 변화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단순히 엘리엇의 기분 문제이지. 비슷한 이야기를 기존에도 여러 차례 했고, 아일라 스스로도 이혼을 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엇은 아직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았네. 논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침이 아니라 기분 문제라면,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겠지. 자네의 GFG를 말하는 게 아니야.”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션을 올려다보았다.
“이혼하라고 졸라 보게.”
션은 짧게 신음했다. 엘리엇이 혼인 서약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히 그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한 번도 그것에 대해서 엘리엇에게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귀족의 이혼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엘리엇이 쓰러졌을 때만 생각해 보더라도 헤리퍼드에서 아일라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토마와의 사이에 자식까지 있는데도 그녀가 먼저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아마 절차의 복잡성과 현실적인 필요성이 알프스산맥의 만년설처럼 앞길을 막고 있을 테고, 자기가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엘리엇이 그 청을 선뜻 들어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거기다 말해 봤다가 거절당한다면 타격이 너무 커서 사흘 밤낮은 인사불성이 될 것 같았다. 기껏해야 아일라가 실제로는 토마의 아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 정도가 그가 하고 있는 소심한 요구였는데, 엘리엇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마 그가 아일라를 알랑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제는 당신 아내가 아니라는 의도에서 그런다는 사실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를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했다.
그가 침묵하고 있자 알버트가 혀를 찼다.
“케이론의 방의 주인이 될 사람이면서 뭘 불안해하고 있는 건가. 밀어붙이면 무조건 통해. 엘리엇은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이 전혀 없어. 자네를 밀어낼 게 아니라면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걸세. 이건 자네의 당연한 권리야.”
“그 방에 뭔가 의미라도 있는 겁니까?”
케이론의 방이라는 것은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의 본관 3층에 있는 공간의 이름으로, 침실, 거실, 서재와 오락실까지 네 개의 방이 마름모 모양으로 맞닿아 있는 큰 아파트먼트이다. 모두 잘 보존된 라그레네의 벽화와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고, 신고전 시대의 가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고풍스러운 격조가 있었다.
엘리엇이 그 방을 새로 개장하여 내주겠다고 했을 때 션은 너무 분수에 넘친다고 생각했었다. 넓이부터가 윌슨 그로브의 자기 집보다도 넓었지만, 넓이는 둘째 치고 그곳의 침대에 누우면 박물관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식은 떼어 내고 그림은 가리면 돼. 좀 고리타분할 것 같아서 걱정했지만, 가구와 전등을 바꾸고 문짝을 교체하면 산뜻해질 거라더군. 아일라나 어머니 방을 비우는 건 너무 야단스럽고, 2층에 방 하나를 마련하는 것도 자네 위치를 낮추는 일이 되니까 거기가 좋을 것 같네.’
션으로서는 그냥 엘리엇의 침실에 가까운 곳에 작은 방 하나만 내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써 주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감사히 그 뜻을 받아들이자, 그다음에는 건축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찾아와 더 황공스럽게 만들었다.
“거기는 대대로 공작가의 후계자가 쓰는 방일세. 찰스 공이 돌아가시고 작위를 상속받기 전까지 엘리엇이 쓰던 곳이기도 하고. 몰랐나?”
“몰랐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알버트가 “들여보내지 마.”라고 말하고 있는데, 보고하는 요원을 제치고 한 여자가 들어섰다. 딱 맞는 녹색의 투피스로 몸을 감싼 중년 여성은 절대 SSB의 관계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대체가, 일 처리들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알버트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여자가 생글생글 웃었다.
“오랜만에 만나 뵙습니다. 알버트 전하.”
“놀랍군, 벌커리 경. 엘리엇이 자네를 직접 보내던가?”
“예, 전하. 헤리퍼드 합하께서는 이번 일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자네가 온 걸 보면 그 심각성을 알겠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아는지.”
알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커리 경이 생긋 웃었다.
“합하께서는 이번 일을 매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계신답니다. 그 뜻을 전해 드렸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녀가 션에게 가볍게 묵례해 보이면서 나가자고 눈짓했다. 그렇게 심각한 일은 없었는데, 하고 션은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녀를 따라가야 할 타이밍인 듯했다.
엘리엇이 보냈다고는 해도 남의 손에 연달아 두 번이나 이유도 모르고 좌지우지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돌려받고 밖으로 나오자 골목 바로 밖에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다가 벌커리 경에게 차 문을 열어 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사람을 모두 물리고 오히려 션에게 자기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션은 딱히 신사도를 지키려고 애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연장자인 여성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것이 어색하여 머뭇거렸다.
“타십시오.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니까요.”
그녀가 헤리퍼드 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일에 밝지 않은 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알버트나 경호원들의 태도도 그렇지만, 그녀가 손수 차 문을 열어 주는 것에는 ‘자격’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섣불리 입을 여는 것은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션은 리무진의 푹신한 뒷좌석에 앉았다. 벌커리 경이 그를 뒤따라 건너편 자리에 오르자 경호원들이 서둘러 앞좌석에 올라타고, 곧 차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자벨 벌커리입니다. 헤리퍼드 가문의 수석 비서직을 맡고 있습니다.”
“션 맥케인입니다.”
션은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엘리엇의 저택에 초대를 받고 나서부터 조금씩 그의 아랫사람들이 션의 생활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은 집사였고, 그다음은 요리장, 하녀장, 운전사 순서로, 대부분 사적인 부분을 돕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션도 거기까지는 크게 당혹하지 않았다. 그도 알 아시리 가문에서 자랐다. 사람을 부리는 쪽은 아니었지만, 귀족가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고 사람을 적당히 셧아웃해서 보지 않는 것에도 매우 익숙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가문의 수석 비서라면 사생활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람이다. 엘리엇이 그런 사람을 자기에게 보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몹시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엘리엇은 운전사조차 보내는 일이 적었다.
“오늘은 놀라셨지요? 알버트 전하께서는 강경한 성미이시라 종종 돌출된 행동을 하십니다.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설마 감시 같은 걸 하고 있으시진 않았을 테고.”
만약 그렇다면 조금 기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자벨이 입가에 손을 대고 웃었다. 감정은 한 올 흔들림 없이 가라앉아 있는데 얼굴만 보면 정말로 농담을 하면서 즐거이 웃는 사람 같다. 믿을 만한지 어떤지 션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겉과 속이 분리된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친구 되시는 베일리 양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밀리는 엘리엇 씨의 번호를 모르는데요.”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의 공식 연락처는 전화번호부에도 적혀 있으니까요. 맥케인 씨의 이름은 비서실에서도 중요 인사의 목록 맨 윗줄에 있었기 때문에, 베일리 양을 엘리엇 님에게 연결해 드렸습니다.”
알버트의 앞에서는 합하라고 부르고, 여기에서는 엘리엇 님이다. 션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 정도는 이상할 게 없지만 이자벨이 말하는 유려한 어조가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알버트 전하와는 무슨 말씀을 나누셨나요?”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맥케인 씨,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가 제때 대처할 수 있어요.”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남이 대처해 줄 일도 아니고.”
션이 딱 잘라 끊자 이자벨이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예의 그 연주하는 듯이 매끄러운 억양으로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신다면 먼저 변호사를 부르시거나 제게 연락 주세요. 언제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지만, 션은 핸드폰을 건네지 않았다. 엘리엇이 신뢰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볼 때 오로지 자기 자신의 눈만 믿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다지 그가 믿어도 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가문의 수석 비서라면 아마도 충성심이 강하고, 유능하며, 엘리엇이 신뢰하는 사람이리라. 그러나 자신의 입장이 마냥 그녀를 믿기에는 위태로웠다.
션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알버트와 했던 이야기는 조금도 대단한 것이 못 되지만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설령 그녀가 엘리엇이 신뢰하는 수석 비서라도, 어투만 정중한 명령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하루에 두 번 납치되는 것도, 주도권을 빼앗기는 기분도 영 별로였다.
이자벨은 약간 난처한 듯이 가늘게 눈가를 찡그렸다가, 대신에 명함을 꺼내어 뒷면에 다른 핸드폰 번호와 파텔이라는 이름을 메모했다.
“명함에 있는 것은 제 번호이고, 파텔은 주임 변호사입니다. 맥케인 씨가 찾으신다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지만, 가끔은 연락을 받을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럴 때는 파텔에게 말씀하시면…….”
“사양하겠습니다.”
“맥케인 씨.”
“오늘의 일만 해도 밀리가 놀라서 그런 것이지, 구조가 필요한 상황 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알버트 전하도 제게 해를 끼칠 목적이었던 게 아니고. 변호사는, 살다 보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굳이 그쪽을 통해서 구하고 싶지 않군요. 정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엘리엇 씨에게 연락해 보죠.”
“맥케인 씨, 고집부리실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엘리엇 님을 매번 곤란하게 하실 건가요? 그리고 이제 귀한 몸이시니, 저나 변호사 없이 이렇게 가볍게 행동하시면 안 되십니다.”
이자벨이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조곤조곤 말했다. 션은 그녀가 보이는 감정이 분명히 호의의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를 이해했다. 태도는 정중하지만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서 통제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알버트가 말한 ‘당연한 권리’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엘리엇이 예전에 왜 자기와 계속 만나는 것이 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도.
‘별걸 다 걱정하셨군. 다정한 사람이니까.’
션은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엘리엇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은 현실적인 생활을 위해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 그 외의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이자벨을 보고 나니 더욱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차는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가 있는 런던 동쪽으로 향했다. 차창에 보이는 풍경이 변하기 시작한 뒤에야 그것을 깨닫고 션은 물었다.
“엘리엇은 타운 하우스에 있습니까?”
“지금은 요나 클럽에 계십니다. 오늘 밤에는 늦게 돌아오실 겁니다.”
“그럼 윌슨 그로브에서 내려 주십시오.”
“가서 기다리시지요.”
부드러운 얼굴로 맞춰 주는 건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알버트가 말한 것처럼 케이론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이 공작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고용인들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도록 놓아두는 것은 엘리엇의 뜻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엘리엇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비할 바 없이 션의 기쁨이었지만, 남이 시켜서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물었다.
“그건 엘리엇 씨의 명령입니까?”
물론 엘리엇은 그에게 부탁을 하는 일은 있어도 명령하는 일은 없다. 이자벨이 안색을 살짝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럼 윌슨 그로브로.”
“……예.”
이자벨은 다시 미소했지만 경직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어깨 위로 아른거리는 불쾌감을 바라보면서 케이론의 방과 엘리엇의 침실이 있는 2층 복도에 딸린 작은 방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캐번디쉬의 아파트와 3인용 소파도 생각한다.
차는 오래가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 션은 가만히 앉아서 이자벨이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려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인사 없이 계단을 올랐다.
* * *
엘리엇은 전화를 끊고 흡연실 앞의 테라스로 되돌아갔다. 양지바른 곳에 드러누운 고양이처럼 늘어져 있던 리암이 손을 까닥거렸다.
“누구야, 션이야?”
“이자벨.”
“무슨 일 있어?”
“별일 아닐세. 션을 집에까지 바래다주었다는군.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이자벨이 직접?”
“알이 션을 불러낸 모양이라, 마중하러 가라고 내가 그랬네.”
“음.”
리암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이 갑자기 왜? 또 션을 SSB에 끌어들어야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션 자신이 원한다면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원하지도 않는데 그런 강요를 당하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네. SSB 문제가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라도 마찬가지야. 오늘 밤에 션에게 전화해 봐야겠군.”
“지금 안 하고? 어차피 바쁜 용건이 있어서 여기 나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중에. 션도 나에게 뭐든 이야기하려면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겠지.”
“고민이 많겠어. 그나저나 케이론의 방에 이어 이자벨을 마중 보낼 정도라면, 마음의 결심이 섰나 봐?”
“난처한 일이야. 일단 왔을 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작정이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커져 버려서.”
“커지지 않을 수가 있나. 거기를 수리한다는 건 자네 아이디어가 아니었지?”
“음.”
엘리엇은 작게 신음했다. 케이론의 방에 션을 들이겠다는 것은 집사부의 벤이 제안하고 윌리엄이 그에게 건의한 것이다. 마음의 비중으로 따지자면 아일라보다 못하지 않았으나 애인을 위해서 공작 부인의 방을 비우는 것은 그야말로 구설이 될 일이고, 그렇다고 직계가족이 쓰지 않는 공간을 새로 만드는 것은 정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었으므로 그 의견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벽화에 보존 처리를 시작하자마자 소문에 날개가 돋았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신중하게 결정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좀 떠밀려서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곤란하다네. 션도 갑작스러울 걸세. 이런 것을 생각한 게 아닐 텐데.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추진하는 게 낫겠다 싶어.”
“다음 단계는 사교계에 선보이는 건가. 계획은 있고?”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네. 여름에 자네 크루즈에 탈 생각인데 괜찮겠지?”
“가십은 대환영이지.”
리암이 게으르게 손을 까닥대며 대꾸했다. 말은 대환영이라고 하지만 늘 적극적으로 권하던 것에 비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해서 엘리엇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불편하다면 그만두겠네.”
“불편하긴. 처음부터 그러라고 했었잖아.”
“요즘 영 의욕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일 있는가? 에린 양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것 때문에 그래?”
그가 펄쩍 소파에서 뛰어오르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엘리엇을 쳐다보았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았어?”
“준이 그러더군. 자네가 에린 양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고 나서 준의 바에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고.”
“제이는 너한테 그런 이야기까지 해?”
“변명은 아니네만, 마침 그때 내가 전화를 했었어. 전에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아, 그랬나? 그랬지, 참.”
주르륵 리암이 다시 소파로 미끄러졌다.
“사과는 했는가?”
“아니.”
“나에게는 멋진 선물을 사고 로맨틱한 양초에 불을 밝히고 와인을 따른 후에 애절한 목소리로 다시 조르면 되는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바람피운 걸로 오해를 받았으면 얄짤 없지.”
“오해라면, 오해를 풀어 주면 될 게 아닌가?”
“그게 또, 아닌 것도 아니라서…….”
엘리엇이 덤덤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심으로 대응에 곤혹하고 있는 것뿐인데, 지레 그 눈빛을 오해한 리암이 손사래를 쳤다.
“에린은 오해를 한 게 맞다고! 딱히 바람피우다 들킨 것도 아니고!”
“오해가 아닌 건 아니라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음.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에린은 오해를 했는데 그 오해한 상대와는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고…….”
“엘리엇한테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잘 이해를 못 하지.”
불쑥 라이언이 끼어들었다. 리암이 “엑.” 하고 괴성을 내며 소파에 달라붙듯이 몸을 피하는 흉내를 냈다.
“리암, 품위를 지키게.”
“먼저 예의가 없는 건 선배 쪽이잖아.”
리암은 툴툴거렸지만, 엘리엇은 라이언과는 서로 몸가짐을 지적할 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라이언은 테니스를 치고 왔는지 푸른 줄이 들어간 피케 셔츠에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그가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집어 갔다.
“여자가 둘이든 셋이든 어때?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거지.”
“그 말, 부인한테 해도 돼?”
“이해 못 하는 사람하고 살려면 안 들켜야 되는 거고.”
“선배의 부인이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가 궁금한 거지.”
“어느 쪽일 것 같아?”
리암과 입씨름을 하던 그가 엘리엇을 돌아보면서 빙긋 웃었다. 엘리엇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부도덕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화창한 날씨로군. 라이언, 샤워부터 하는 게 어떻겠어?”
“갈아입을 옷을 실수로 적셔 버려서 다시 가지러 보냈어. 그사이에 담배나 한 대 피울까 하고.”
그가 재떨이에 내려놓은 엘리엇의 시가를 가져다 물었다. 리암이 이채를 띠며 그를 쳐다보고, 엘리엇을 돌아보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둘이 친했어?”
“글쎄.”
엘리엇이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라이언이 싱긋 웃으며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내가 담배를 가르쳤지.”
“그 말에는 어폐가 있어, 라이언. 내기 체스에서 지고 나서 판돈 대신 억지로 시가 상자를 떠안긴 것뿐이지 않아.”
“자르는 법이랑 불붙이는 법을 가르쳐 줬잖아?”
그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이언이 킥 웃으며 그의 팔을 툭 치고 시가를 문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 있으면 이따 당구나 한 게임 하자. 얼마나 늘었는지 봐 줄 테니 기다려.”
“안 될 건 없지.”
엘리엇은 이래도 문제가 없는 걸까 생각하며 대꾸했다. 옷이 도착했는지 클럽 보이가 부르러 왔다. 라이언은 경쾌하게 그쪽으로 향했다. 다시 둘이 되고 나자 리암이 엘리엇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라이언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야. 자주 만났나 봐?”
“음. 요즘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원래 누구한테나 저런 식이니까.”
“라이언이 발 넓은 게 일품이긴 하지만 누구한테나는 아니지. 보라는 듯이 탄탄한 허벅지를 자랑하면서 젖은 머리로 클럽하우스에 들어와 피우던 시가를 빼앗아 가는 상대는 없으니까.”
“…….”
역시 리암이 보기에도 이상한 건가 싶어서 엘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라이언이 자신을 유혹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싶은 생각은 들었는데, 확신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일에 진짜 감이 끝내준다고 자부하는데, 잔 적 있지?”
“……옛날 일일세.”
엘리엇이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리암이 자기가 물어 놓고도 “진짜?”라고 놀란 입 모양을 만들었다.
“전혀 몰랐는데? 대학 때 일이야? 라이언이랑? 약혼녀 있었잖아. 그것도 목을 질질 매달고 있던.”
“라이언은 바이야. 남자랑은 매력 있으면 잘 수도 있다는 정도인 것 같지만. 약혼녀에게 목을 맸던 건 그녀가 자파스 가문의 상속녀였기 때문이지. 나랑 잔 건 내가 손쉬운 상대라서 그렇고.”
그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그때의 그는 성적 취향의 문제에 대해 생각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정작 뭔가를 시도해 볼 용기가 없는 상태였다. 애인을 사귀는 것은 무리라고 느껴졌고 원나잇으로 시작하기에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라이언이 내민 손에 선뜻 몸을 맡긴 것은 그 때문이다. 첫 행위에는 약간의 강압이 섞여 있었지만, 합의가 되기까지는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는 상대와 안전하게 자 볼 수 있다면 사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라이언과 사귄다거나 연애를 한다거나 하는 달콤한 분위기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몇 번 자고 난 뒤에는 사귀게 되는 건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라이언은 오히려 자기 이전보다 더 건조하게 그를 대했고 그도 라이언과 더 깊은 관계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섹스 파트너였다고 할 수 있었다.
션과 만날 때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공통점은 라이언과 훨씬 많았는데도 교감도, 애정도 찾아볼 수 없는 관계였다. 그는 라이언이 자기에게 손을 내민 이유도 아마 작위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이언은 원래부터 돔 성향이 있고, 자기보다 지위가 우월한 남자를 정복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
관계가 오래 지속된 것은 엘리엇 자신이 성적 관계를 지배나 우열 관계로 인식하지 않았으므로, 라이언이 어디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불쾌해하거나 다른 조치를 취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라이언이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은 자신이 과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이 정말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원래부터 타인의 감정은 잘 파악하지 못하는 편이다.
엘리엇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리암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옛날 일이라도 션이 알게 하지는 마. 그 친구 진짜 무섭다고.”
“션이?”
“알이랑 원수가 될 거냐, 션이랑 원수가 될 거냐 하면, 나는 알 삼백 명이랑 원수가 되는 쪽을 택하겠어. 죽을 때에는 인간답게 죽고 싶으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엘리엇이 쳐다보았다. 진짜 당사자만 모르는 거라고 리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션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 파묻혀서 수첩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스팸이라면 상대를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 끌어당겨 확인했는데, 엘리엇이었다.
[자고 있는가?]
웬일일까. 션이 놀라고 기뻐서 전화를 걸려는데, 곧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션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엘리엇 씨?”
「내가 잠을 깨웠나?」
약간 웃음이 깃든 목소리가 들렸다. 션은 “아뇨.” 하고 여전히 놀람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자지 않고 있었습니다. 엘리엇 씨는 이제 귀가하셨어요?”
「지금 막 들어왔다네. 오늘 모임에서 다들 휘스트에 열중해 버리는 바람에 몸을 빼기 쉽지 않아서.」
“그러셨군요.”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문자를 보냈는데, 생각해 보니 어차피 잠을 깨운 것 같아서. 그리고 자네라면 깨웠어도, 음, 예의와 관계없이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네.」
평소에는 용건 없이 이야기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 어쩐지 말이 많았다. 말꼬리도 살짝 늘어지는 것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른한 것 같기도 하다.
“술 취하셨군요.”
「……그런 것 같아.」
엘리엇이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는 크게 주벽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술에 취하면 조금씩은 감정이 요동치는 듯 잘 웃기도 하고 잘 찡그리기도 한다. 드물게도 바로바로 나오는 순수한 반응에 션도 몹시 즐거워졌다.
“저는 좋습니다. 언제든 걸어 주셔도. 취하셨을 때도 괜찮아요. 너무 많이 드시는 건 걱정되지만요. 건강에 안 좋으니까.”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않았네.」
“엘리엇 씨는 주량이 세잖아요. 취해서 저한테 전화하셨을 정도라면 적어도 위스키 한 병은 드셨을 것 같은데요?”
「그 정도는 아닐 걸세. 아마.」
“다음에 몇 잔째에 취하는지 한 번 재어 볼까요?”
「내 건강을 걱정한 게 아니었는가?」
“제 앞에서라면 괜찮아요. 귀여워지는 걸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그러자 엘리엇이 다시 소리를 내서 웃었다. 션은 행복한 기분으로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그가 앞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히 붉어진 얼굴로 밝게 웃고 있을 텐데.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자네밖에 없다네.」
“엘리엇 씨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저 말고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걱정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올 지경인데요.”
「하하.」
“못 보는 게 억울하니까 웃지 마세요.”
농담을 한 것인데, 엘리엇이 진지하게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이 회선 건너편에서 침묵이 찾아들었다. 션은 아니라고, 웃어도 된다고 다시 말했는데 대답이 없다. 심장이 맥동하는 것을 가만히 누르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내 엘리엇이 다소 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처럼 취한 것 같아서 세수를 다시 하고 왔네.」
그래도 여전히 말끝에는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션도 안도하면서 함께 웃었다.
“술은 좀 깨셨어요?”
「아니. 오히려 정말 취했다 싶군. 졸려.」
“그럼 이제 주무세요.”
「처음에는 분명히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를 걸었는데. 이왕 걸었으니 묻는 말인데, 오늘 별일 없었지?」
“알버트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별로……. 의미 없는 제안을 하셨을 뿐이니까요.”
실은 의미 없는 제안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션은 들리지 않게 조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결연이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리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자신은 좀 더 은밀한, 사적인 영역에서만 머물러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곁에 있을 수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곁에 있게 되자 좀 더 인정받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받고 싶어졌다. 이 사람이 내 것이라고 선언하고 싶다.
비논리적인 일이다.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아직 시간조차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런 사소한 일이 여럿 모여 그가 자신과 같이 있는 시간을 즐겁지 않게 여기게 되는 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무슨 제안인지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건가?」
“대단한 건 아니지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션은 나직하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할까 말까 말할까 말까 다시 고민했으나 결국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른다고 해서 들어줄 것 같지 않다. 알버트는 마치 엘리엇이 아일라와 이혼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처럼 말했지만, 엘리엇은 아마 애정만으로 자신과 공적 관계를 만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엇이 그의 복잡한 심경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고 기다리다가, 그가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느린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면 괜찮아. 강요하지 않겠네. 하지만 혹시라도, 알이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자네에게 뭔가를 강요한다거나 자네 혼자서 대처하기 힘들다면 꼭 이야기해. 내가 도울 수 있는데도 때를 놓쳐서 그러지 못한다면 슬플 것 같으니까.」
“네. 정말로 괜찮아요. 만나는 데에 좀 강경한 수단을 쓰시기는 했어도 협박 같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제안이었을 뿐이니까요. 걱정 마세요. 마중도 보내 주셨잖아요.”
「그래.」
션은 상냥하게 말했다.
“이제 주무세요, 엘리엇 씨. 피곤하시겠어요.”
「음…….」
엘리엇이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왜요?”
「끊고 싶지 않아서…….」
“통화는 내일도, 모레도 할 수 있고, 만나도 되잖아요.”
「그렇지.」
엘리엇이 다시 고집을 부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자네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게 좋아.」
션은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감정 때문에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목이 메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침대에 누우세요. 주무실 때까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되니까.”
「음…….」
엘리엇이 작은 소리를 내며 부스럭거렸다. 정말로 침대에 눕고 있는 것 같았다.
“누우셨어요? 자세는 편하세요?”
「이어폰을 끼었네.」
“지금 엘리엇 씨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주무실 때까지 안고 있어 드릴 텐데요.”
「자네는 다정해.」
엘리엇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션은 미소를 띠고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막상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니까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뭐라도 좋아. 누워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옆에 있는 것 같군.」
“다음에는 동화책이라도 사다 놔야겠어요. 엘리엇 씨 졸리실 때 읽어 드리게요.”
「기대하겠네. 자네는 목소리가 좋으니까, 듣고 있으면 기분 좋을 것 같아.」
졸음에 겨운 어조가 약간 아이 같아졌다.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는 사이에 엘리엇의 대답이 띄엄띄엄해졌다. 션은 “엘리엇?”하고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지만 “응…….”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확실히 잠투정에 가까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는 숨결로 속삭이듯이 작게 말하고 송화구에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누웠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