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March. (26/52)

2. March.

“문제가 있나?”

대니얼 풀러가 초조하게 물었다. 당혹감을 누르고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션은 약간 테이블에서 물러나 괜스레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오브라이언 본사 빌딩 최상층을 전부 터서 만든 회의실은 황송하도록 넓고 천장이 높다. 전면 유리에는 반쯤 블라인드가 쳐져 있지만, 그래도 런던을 발아래에 둔 전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션은 다시 한번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서 제안받았을 때는 살짝 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근무 조건이었다. 그러나 임원 회의실로 안내되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협의된 사항 중에 변경된 점은 아무것도 없네.”

“풀러 씨가 직접 나오셨다는 것 말고는 말이죠.”

션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풀러가 하하 웃었다.

“왜? 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풀러 씨가 직접 계약서를 들고 오실 필요는 없죠. 노파심에서 미리 말씀드리는데, 제게 잘해 주신다고 해서 오브라이언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분이 공정한 분이라는 건 자네보다 내가 더 잘 알지. 그것과는 관계없어. 자네는 놓치기 아까울 만큼 능력이 있잖나. 전에 우리 회사에 있을 때도 밀리와 함께 기획설계부 투톱이었고, 지난 2년 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으니 실력에 변함은 없으리라 믿네.”

관계가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 연봉이 션의 경력에 받을 수 없는 정도도 아니다.

풀러는 싱긋 웃었다. 아부라는 것은 뇌물로 보이지 않게, 그러나 호의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그 경계선에서 하는 것이 최고다. 엘리엇은 공사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다. 풀러가 션에게 갑자기 뻥튀기된 연봉과 놀아도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책을 내민다고 해서 오브라이언을 잘 봐줄 리는 결코 없다. 

그러나 반대로, 받은 것보다 많은 것을 베풀어야 한다고 교육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호의는 반드시 돌아온다. 게다가 엘리엇 본인이 아니라 그 애인이 받은 것이라면 틀림없이. 션이 다니는 회사라는 것만으로도 늘 염두에 둘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푹 빠져 있어도 사교계에 소개시키지 못하는 비공식적인 평민 애인이라면 기껏해야 바깥에 숨겨 놓은 좀 부끄러운 노리개나 똑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머릿속에 똥만 찬 늙은이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션이 애매하게 웃었다.

“말씀을 참 기분 좋게 하시는군요.”

“고객 응대 포함해서.”

션은 난처해졌다. 그는 본인의 성격과 상관없이 무조건 자기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엄청난 강점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수당을 세 배로 올리셔도 예전처럼 남들한테 휴가 양보하고 출근할 생각도 없고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자네가 도통 제때 쉬지 않아서 곤란했었지. 이번에는 뭐든, 쉬는 날은 우선순위로 올려 줄 테니 말만 해. 이건 자네를 특별 대우하는 게 아닐세. 예전에 남들에게 양보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이지.”

풀러가 흔쾌히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거절하면 자기 쪽이 더 엘리엇의 권세를 의식하고 있는 꼴이 될 것 같아 션은 그냥 계약서에 서명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계약서를 풀러의 비서가 회수해 간 뒤, 둘은 악수를 했다.

“점심시간이 다 됐군. 어떤가? 같이?”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아쉽지만 할 수 없지.”

거절을 당했는데도 풀러는 싱글싱글 그저 웃으며 엘리베이터까지 그를 배웅했다.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흑심 있는 호의를 받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 흑심의 종류 자체가 여태까지 겪었던 것과 완전히 달라서 낯선 기분이었다.

1층 로비에서 서성거리는 한 무리의 사내놈 떼거리와 마주쳤다. 낯익은 얼굴이 많이 보였다. 션이 인사를 건네기 전에 조슈아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어이, 션!”

“오오!”

“도로 올지도 모른다더니 진짜로 왔네?”

“계약서 쓰러 왔어?”

환영의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의 손에 등과 머리를 투다닥 맞았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으나 머리가 헝클어져서 션은 툭툭 그 손을 받아치며 웃었다.

“왜? 불만 있냐?”

“불만 있지, 당연히. 인사 한마디 없이 때려치우고 도망갔던 놈이. 손 모자라서 우리가 얼마나 난리 난 줄이나 알아?”

“도망은 누가.”

“소문 자자하던데. 네가 밀리의 육탄 공격을 받고 해외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어, 난 에밀리라고 들었는데.”

“브랜든이 아니었어?”

“브랜든은 남자잖아.”

“남자니까.”

“그만들 좀 해. 왜 이렇게 남 말 하기를 좋아해?”

밀리가 뾰족하게 소리 질렀다. 갑자기 싸악 조용해졌다.

“션, 너도 너야. 그러고 어영부영 듣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뒤에서 떠들어 대지.”

“화젯거리가 되는 건 숙명 같은 거니까.”

농담을 농담으로 받자 올리버가 “좀 생겼다고 뻐기긴.” 하고 뒤통수를 갈겼다. 이건 꽤 데미지가 있어서 션은 윽 소리를 내며 뒷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환한 미소에 무리를 둘러싼 양 사이드에서 달콤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떻게 변한 게 없냐, 이 팀은.”

“아직 3년도 안 됐는데 뭐가 얼마나 변했겠어? 아, 신입 하나 들어오긴 했어.”

“오.”

“해리가 그만뒀고.”

“신입이 해리를 대신할 만한 인재야?”

“글쎄. 풀러 씨는 잘 키워서 써라 이런 식이라서. 너 들어오고 나면 숨통 좀 트이겠다.”

“션 씨, 점심은?”

아치가 불쑥 끼어들어서 물었다. 그는 션이 그만두기 얼마 전에 들어온 사람이라 그다지 친하지 못해서, 좀 떨어진 곳에 서서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 보려고 안달을 하다가 비로소 생각해 낸 화제를 꺼낸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올리버가 “아 참.” 하고 시계를 보더니 션의 어깨에 척 팔을 걸쳤다.

“가자. 우리 오늘 바비큐 먹으러 가기로 했다.”

“아, 난 선약이 있어서.”

“점심 약속? 네가?”

올리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션을 쳐다보았다.

“왜? 내가 약속 있는 게 이상해?”

“너 친구 없잖아?”

당당한 대꾸였다. 거기에 심지어 타일러와 조슈아가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션은 황당했지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도 친구 비슷한 것은 여기에 있는 사람이 다였기 때문이다. 밀리가 픽 웃으며 지원사격을 했다.

“친구는 없어도 애인은 있겠지.”

“오. 그럴싸한데.”

“그럴싸하긴 뭐가 그럴싸해. 뻔하지.”

“출근은 언제부터 하냐?”

“이달 말부터야. 이사도 해야 하고.”

“아직 안 들어왔어?”

“이사한다는 게 어디 쉽냐. 물까지 건너야 되는데. 세 놨던 집도 이래저래 복잡하게 되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그들은 왁자지껄하면서 로비에서 빠져나갔다. 션도 얼렁뚱땅 무리에 뒤섞여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발을 멈췄다. 건너편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의 테라스에 엘리엇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크림색 재킷에 노타이라는 편안한 차림으로 무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플래티넘 블론드가 반짝반짝 빛난다. 입에 문 시가는 이미 반 넘게 타들어 가 있었다.

“아.”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어서 션은 걷지 못하고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팀원들이 왜 그러느냐고 그를 돌아보았다가, 시선의 방향을 따라가 엘리엇을 향했다.

“왜?”

“아!”

이 중에 션의 애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밀리가 상대가 누구인지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분분히 꽂히는데, 이걸 말을 해도 되는 건가 하고 밀리가 당혹한 시선을 션에게 던졌다. 션은 그것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못 박혀 엘리엇을 바라본다.

바깥에서 함께 있는 것에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익숙해진 것은 어두운 저녁의 공항에서 그를 마중하는 것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뿐이었다. 번화한 런던에서 그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온갖 색채가 뒤섞인 세상 속에서 변함없이 그는 홀로 투명하고, 그가 만들어 내는 고요한 공간은 션을 새롭게 매료시켰다.

밀리가 지른 소리가 귓속에 박혔는지 엘리엇이 고개를 들고는 션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시가를 재떨이에 뭉개 끄고 잡지를 덮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다가왔다. 푸른 눈동자에 옅은 미소가 그려진다. 심장이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션은 손을 내밀었다. 끌어안으려고 한 것인데, 엘리엇이 가볍게 그 손을 밀어냈다. 거절당했지만 션은 서운함도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캐번디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공연히 거기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보다는 찾아오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네. 폐가 되었나……?”

그가 힐긋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션은 머리가 흐트러질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어요? 기쁩니다.”

다시 팔을 뻗어 손을 맞잡자 엘리엇은 그것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대신 션에게 뒤를 신경 쓰라고 눈짓했다. 뒤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밀리를 눈치채고 션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인가?”

“예. 이쪽은 밀리입니다. 올리버, 조슈아, 잭…….”

가까운 순서대로 이름을 입에 올리자 엘리엇이 가볍게 그들에게 묵례해 보였다.

“아,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밀리가 바짝 얼어서 인사하자 엘리엇이 정식 호칭을 부르기 전에 쉿, 말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했다.

“엘리엇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션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베일리 양.”

그가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밀리의 손을 끌어다 손등에 키스했다. 밀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처음 보는 수줍은 반응에 우글대던 남자들이 입을 벌렸다. 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 아뇨.”

달아오른 얼굴로 밀리가 살며시 손을 뺐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서 평소의 괄괄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어째 움츠리는 동작까지도 소녀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션이 황당하게 그녀를 쳐다보는데 엘리엇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색함 없이 인사를 건넸다.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마주 인사했다. 전원과 다 개별적으로 말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됐다고 판단한 듯 그가 부드러운 태도로 밀리에게 말했다.

“실례이지만, 선약이 되어 있으니 션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예.”

“그럼 이만.”

그가 션에게 가자고 손짓했다. 션은 여전히 당황한 채로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대충 흔들어 보이고 엘리엇을 따라나섰다.

밀리가 하아, 하고 황홀한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해졌던 팀원들이 다시 와글거리며 다 같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올리버가 이상한 얼굴로 말했다.

“으아, 놀랐다. 저 사람이 션 애인인 거 맞지?”

“귀족인가? 뭔가 분위기가.”

“그거야 말투만 들어 봐도……. 요새 풀러 씨가 저런 식으로 말하잖아.”

“밀리, 넌 알고 있었어?”

“이야기 정도는.”

“역시 남자랑 사귀는 거였어.”

“역시라니, 조시는 짐작하고 있었어?”

“뭔가 감이 이렇게.”

뭐가 어떻다는 건지 손짓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면서 조슈아가 대꾸했다.

“그 녀석 좀 게이 같은 구석도 있고.”

“친절하고 매너가 있다고 하는 거지.”

“해마다 옷을 바꿔 입고 말이야. 저번에는 소매가 닳았다고 새 셔츠를 샀다더라고. 핑크색 줄이 들어간 걸로.”

“그건 세련되었다고 하는 거야.”

조슈아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밀리가 한숨을 쉬면서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게이가 아니신 조슈아 씨, 게이가 될 각오로 옷차림을 바꾸기 전에는 여친이 안 생길 거야. 적어도 칼라가 샛노래지기 전에는 새로 사 입어.”

진짜로 기분이 상했는지 그의 안색이 변했다. 올리버가 끼어들었다.

“자아,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션이 우리들 앞에 애인을 내놓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니까.”

“그게 뭐. 션이 내놓았다기보다는 애인 쪽에서 찾아온 거잖아.”

“그것도 그러네.”

시끌시끌한 와중에 괜스레 밀리는 우울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타일러가 모두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묘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걸음을 늦춰 타일러와 나란히 걸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타일러가 그녀가 옆에 온 것을 알고는 미소하며 물었다.

“왜?”

“충격……받았어?”

“음. 그런가.”

타일러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션이 비밀이 많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런 걸로 충격받진 않아. 커밍아웃이 쉬운 것도 아니고, 그만큼 가까운 사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것도 그래.”

밀리가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그녀는 3년 전에 이미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때,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몇 번이나 했던 말이었다. 타일러가 꼭 그때의 그녀처럼 허한 눈으로 혼잣말했다.

“그냥 스스로 좀 웃기다 싶네. 왜 그 녀석이 나를 경계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서. 꽁꽁 싸매고 혼자 살려고 하는 게 안 돼 보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타일러, 너.”

밀리는 소곤거리다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타일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좀 그런 기분이었다는 것뿐이니까.”

“세상에 괜찮은 남자는 다 유부남 아니면 게이라더니.”

“뭐야? 날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어?”

“요만큼?”

두 손가락 사이를 1㎝쯤 떼어 보이며 말하자 타일러가 웃었다.

“근무 끝나고 맥주라도 마시러 갈래?”

“됐어. 영양가도 없는데.”

“나 게이 아니야. 그리고 동병상련의 고통이라도 나눠 보자는 거지.”

“유효기간 끝나긴 했는데, 특별히 상대해 줄게.”

밀리도 킬킬 웃으면서 타일러가 내민 손바닥을 짝 때렸다. 아치가 두 분 뭐 하시느냐고 재촉하러 왔다. 둘은 걸음을 재촉해서 다시 무리에 섞여 들었다.

* * *

동료들과 헤어진 션은 바로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엘리엇이 붙잡았다.

“좀 걷는 게 어떨까?”

“다리는 괜찮으세요?”

“딱히 아프거나 하지는 않네.”

션은 엘리엇을 인도 안쪽으로 밀었다.

“그럼 조금만 걸을까요?”

“점심도 이 근처에서 간단하게 하지. 오래 다니던 회사 근처이니 자주 가 본 곳이 있을 것 같은데.”

“없지는 않은데, 딱히 먹을 만한 집도 없어서……. 엘리엇 씨 입엔 맞지 않을 거예요.”

“나보다 자네가 까다롭잖나.”

엘리엇이 웃음을 섞어서 대답했다. 션이 약간 얼굴을 붉혔다.

“엘리엇 씨에게 맛없는 걸 대접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죠. 그리고 솔직히 이 근처에는 진짜 괜찮은 곳이 없어요.”

“근처에 맛있는 타이 음식점이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기억하고 계셨어요?”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네.”

션이 미소하며 손을 내밀었다. 받아 줄까 어떨까 걱정하면서 엘리엇의 손을 잡았는데, 생각 외로 떨쳐 내지지 않았다. 손바닥이 너무 축축한 것 같아 걱정이 되어 한 번 놓고 손수건을 꺼내 꼼꼼하게 닦는다. 엘리엇이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

“괜찮아요?”

“싫은가?”

“그럴 리가요.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엘리엇 씨는 조심성이 많으니까요.”

다시 손을 잡으며 깍지를 끼자 엘리엇이 약간 웃었다.

“언제까지 자네를 숨겨 두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하지 않았었나.”

“지금이 그때인가요?”

“생각해 보면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들 아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까. 집에도 오가는데. 언론을 막는 건 언제나 하고 있는 일이고. 귀찮은 일만 안 생기면 그만이지.”

“그건 그렇지만.”

“굳이 드러내지는 않아도,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 풀러 씨도 알지 않던가?”

“솔직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엘리엇 씨가 저 때문에 불편해지실 것 같아서.”

“청탁을 한 것도 아니고, 자네를 통해서 뭘 해 보자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네. 자네가 잘 대처하리라고 믿네.”

“네.”

“그것보다도, 내가 자네에게 폐를 끼친 것 같은데. 친구들과 같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

“밀리는 이미 알고 있었고, 올리버에게는 조만간 이야기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상관없어요. 그런 걸로 차별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지낼 만한 가치도 없고.”

“그것도 맞는 말이군.”

“엘리엇 씨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한낮에 손을 잡고 대로변을 걷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다. 느릿한 엘리엇의 보조에 맞추어 둘은 천천히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션에게는 익숙한 일이고 엘리엇도 그리 불편하지 않은 듯했다. 마주 잡은 손바닥 안이 뜨거워 그 열만이 션에게 몹시 신경 쓰였다.

“아파트 문제는 해결됐는가?”

“아직이요. 좀 골치가 아프네요. 세입자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놔서 다 뜯어서 아예 리모델링을 해야 할 모양이더라고요. 아예 팔고 나와서 다른 데에다가 살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복잡하면 우선 캐번디쉬에 머무르는 건 어떤가? 좁지만 한동안이라면 괜찮지 않겠는가?”

“좁지야 않죠. 두 층 다 쓸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원래 제 집보다 훨씬 넓고. 그런데 음…….”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엘리엇의 물음에 션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에 머무르면 안 되겠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전에도 몇 번 방문해 본 적이 있지만, 타운 하우스의 객실은 본관에서 동떨어진 동관에 있다. 그 정도라면 같은 집에서 산다는 의미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본관에 마련해 준다는 방은 아직 준비 전이었고, 그렇다고 엘리엇의 침실에 묵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용인들의 눈도 있고, 엘리엇도 그런 개념은 전혀 없는 것 같고 말이다.

대신 엘리엇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에 키스했다. 엘리엇은 약간 당혹한 듯 손을 빼내려 했지만,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다.

“이사 준비에 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윌리엄에게 이야기하게.”

“그렇지 않아도 벤 씨에게 핸드폰 번호를 받았어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 사이에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타이 음식점은 핸드폰 매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와 본 게 2년도 더 전이니까요.” 하고 션은 난처하게 웃었다.

“어쩌죠? 근처에 인도 커리집도 하나 있긴 하지만 예약 없이는 안 될 테고, 그런 데가 아니라면 정말 간단하게 한 끼 때울 곳밖에 없는데.”

“그럼 치즈 버거라도 먹을까?”

엘리엇이 길 건너의 햄버거 가게를 가리켰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션은 웃었다.

“엘리엇 씨가 드실 만한 음식이 아니에요.”

“음식을 가리진 않네. 왜 내가 먹어 본 적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어? 드셔 본 적 있으세요?”

“대학 다닐 때 일이니까 옛날이긴 하군.”

“엘리엇 씨는 의외로 소탈한 생활에 익숙하신 것 같아요.”

션은 명랑하게 그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버거는 별로 안 당겨요. 식사라기보다는 급하게 위장을 채워 넣는 것 같아서요. 식사의 의미가 안 느껴진다고 할까.”

“역시 나보다 자네가 까다롭다니까.”

“바쁘거나 귀찮을 때야 저도 자주 저런 걸로 해결하지만, 엘리엇 씨하고 있을 때까지 그러고 싶진 않아요. 장을 보러 가요. 제가 만들게요.”

“너무 번거롭지 않겠는가?”

“엘리엇 씨랑 같이 있는데 뭐가 번거로워요? 파에야는 어떠세요? 저번에 보니 잘 드시던데.”

“뭐라도 괜찮아.”

“해물? 닭고기?”

“해물이 좋겠군.”

엘리엇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션은 흘끗 그의 무표정한 옆얼굴을 보고 물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네만……. 나는 제대로 돕지도 못하는데 자네 혼자 자꾸 뭘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 오늘 아침에 귀국했으니 피곤할 텐데.”

“뭐 얼마나 먼 거리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엘리엇 씨 집으로 가면 주방에 들어갈 일이 없을 테니까요.”

션은 손가락을 얽은 손을 고쳐 쥐었다.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인생을 망가뜨리지 말고 단정하게 잘 살아 보겠다고 대충 살지 않고 집을 꾸미기도 하고 요리도 했다. 그러나 외로움이 가시는 일은 없었다. 애인이 있었던 때도 있지만, 누군가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이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외조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이다.

엘리엇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그것이 비록 별로 필요 없는, 아주 작은 일일 뿐이라도. 자기가 만든 음식을 앞에 놓고 마주 보고 앉아 먹는 걸 보는 시간이 행복하다.

“그전에 제가 한 음식을 잔뜩 먹여 드리고 싶어요.”

엘리엇이 생경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션은 웃고, 다시 한번 그의 손을 끌어당겨 이번에는 손등에 키스했다.

“저녁은 템스강 유람선에서 먹는 게 어떨까요? 생각해 보니 저, 런던에서 살게 된 게 10년은 넘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유람선을 타 본 일이 없었거든요.”

“나쁘지 않군. 배를 띄우게 할까? 아마 저녁 안에 올 수 있는 게 한 대 있긴 할 텐데.”

엘리엇이 핸드폰을 꺼내려고 잡은 손을 놓았는데, 션이 다시 잡았다.

“사실 예약해 뒀어요.”

“그래?”

그래도 자기 요트가 더 편하지 않겠느냐고 엘리엇은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이 또 션에게 남의 눈을 피하려 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까 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나도 유람선은 타 본 적 없다네. 템스강을 구경한 일도 없군.”

“잘되었네요.”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션의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퍼져서 엘리엇은 조금 손을 움츠렸다.

“그런데 전에도 말씀하시는 거 보면, 대학 때는 혼자 사셨나 봐요.”

“외조부님의 방침이었다네.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 정도는 스스로 마련해 봐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거라고 말일세.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직접 돈을 벌어서 생활한 건 아니었네만.”

“그럼 아르바이트도 해 보셨어요?”

“반년 정도 했었네. 생활비를 번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아는 교수님의 서가를 정리해서 사설 도서관으로 만드는 일이었으니 그냥 경험을 한 것이지.”

“개인 서가를 도서관으로 만드셨다고요? 기증을 받은 게 아니라?”

“아버님 때부터 거의 백여 년간 쌓인 것이라 분량이 어마어마했었어. 그 돈이 좀 모였을 때 잘 써 보려고 투자를 해서 불렸는데, 그때 같이 일하던 사람 중에 재능 있는 친구가 몇 있어서 지원하는 데 썼다네. 지금은 도서관학 연구소가 되었지.”

“지금도 지원하고 계세요?”

“운이 좋게도 그때 만든 재단이 아직 실패하지 않았거든. 내 자랑이라네.”

엘리엇이 드물게도 기쁜 티를 내며 말해서 션도 기쁘게 웃었다.

“도서관학이라면 전혀 모르는 분야라서 아쉽습니다. 궁금한데.”

“나도 전혀 모른다네.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들 이름을 아는 모양이야. 같이 살던 선배는 벌써부터 명성을 챙기느냐며 놀렸었지만.”

“같이 살던 사람도 있었어요?”

“1년 반 정도였네만.”

엘리엇은 선선히 대답했다.

“친했어요?”

“지금은 이해했네. 자네 질투하고 있군.”

션이 소리 내서 웃어버리며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손까지는 잡았지만, 길에서 포옹은 곤란하다고 생각한 엘리엇은 뒤로 물러서서 션의 손을 피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주 조금입니다. 제가 모르는 엘리엇 씨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게 슬프거든요.”

엘리엇의 귓가가 조금 붉어졌다. 션은 팔을 풀고 다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가 질투하면 좋으세요?”

“약간.”

“약간이에요?”

“안심이 되니까.”

엘리엇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션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여 재빨리 그의 입술을 훔쳤다. 엘리엇이 황급히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한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고 다른 손은 마주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자네, 부주의해.”

“전에도 밖에서 한 적 있잖아요.”

“하지만 대낮이고, 대로변인데…….”

방금 껴안은 것도 그렇고, 그러면 안 된다고 책망할 작정이었지만 션이 녹아내릴 것처럼 웃으면 엘리엇은 더는 말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가슴팍을 쿡쿡 뭔가로 쑤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션을 노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화제가 끊겨서 둘은 잠시 더 말없이 걸었다. 션은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엘리엇은 화가 났을까. 말하지 않는 것은 그럴 만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작은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것은 신경 쓰이는 것이다.

“택시를 잡아야겠어요.”

걷는 것이 불안해져서 션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고 차도 쪽으로 나가려 했다. 빨리 자리를 옮기는 게 분위기 환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리엇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꼭 붙잡힌 채 션은 의아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캐번디쉬에 있는 아파트 말인데.”

“네.”

“자네가 내 집으로 들어오더라도, 그건 그대로 두고 간혹 갔으면 좋겠어.”

엘리엇은 션이 걱정하던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화제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션은 놀랐다. 지금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엇이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그의 손을 끌어당겨 두 손 안에 감쌌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거기가 마음에 들어. 정말로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실감이 나서. 그리고…… 사실은 자네가 해 주는 계란 토스트가 우리 집 요리사가 만드는 디너보다 더 맛있게 느껴진다네.”

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엘리엇은 그게 어떤 고백의 말인지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부끄러워한 것은 션 쪽이었다. 그는 션이 안달이 나서 괴로워하며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자신이 무언가 말실수라도 했는가 하고 입을 다물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역시 이해하지 못한 듯이 의아하게 션을 바라보았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아뇨, 그냥, 키스하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힌 채 그를 힘껏 끌어당겼다. 지팡이가 바닥을 구르고 엘리엇이 당황한 소리를 냈지만, 참지 않고 꽉 끌어안으며 턱을 붙잡고 입술을 겹친다. 엘리엇이 당황하며 그를 제지했다.

“볼 테면 보라고 하세요. 엘리엇 씨의 얼굴을 본 사람의 기억을 전부 지워 버리면 되니까.”

“션.”

입술을 마주 댄 채 소곤거리자 엘리엇이 난처한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해요.”

“그런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세.”

“사랑해요.”

“션. 한길가야.”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엘리엇이 살짝 눈매를 찡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션은 그의 손을 다시 잡아 올려 이번에는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사랑해요.”라고 다시 한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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