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February.
연애는 귀찮은 일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엘리엇은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곤함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주말을 션과 함께 보내는 것은 좋다. 즐거웠다. 그 이외의 날에는 매일 저녁에 통화를 한다. 사실 할 만한 이야기는 그다지 없었다. 딱히 용건도 없는데 전화를 건다거나 하루에 한 번씩 안부를 전한다는 것이 별로 의미 있는 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절차라면 의무를 게을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의무의 영역을 벗어나는 부분에서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도 션은 왠지 마음이 상한 것 같지만, “괜찮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억지로 캐내는 것도 뭣한 일이고, 그 마음 상한 일이 만약 자신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사생활에 대한 간섭이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나아질까. 지금까지 그런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엘리엇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이나 아일라를 상대로는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자식으로서의 의무,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문제가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해결해 주면 되었다. 애초부터 어머니나 아일라는 사양한다는 것을 모르는 성격이었고, 아버지 쪽은 아예 자신이 입을 열어 관여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 외의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다지 관계없는 일이었다.
‘역시 잘 모르겠군. 3주 연속해서 만났으니까 한 주 정도 만나지 못해도 그렇게 이상할 건 없는데.’
조금 전의 대화 내용을 돌이켜 본다. 이번 주에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자 션은 나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엘리엇 씨는 바쁘시니까요. ……저보다 중요한 일도 얼마든지 있으실 테고. 의무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약간 쉬었다가 말한 것은 아마 말할까 말까 망설였기 때문이리라.
엘리엇은 그 ‘의무’라는 것에 어디까지 포함되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션에게 비하면, 자신이 연락을 건네는 간격이 의무처럼 느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의무적이기도 했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의자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이 눈에 띄었다.
수요일이 14일이었다. 숫자 밑에 작은 글씨로 ‘St. Valentine’s Day’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밸런타인 축일에 뭔가를 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아일라와 약혼이 성립된 10살 때부터 그녀가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매해 그녀에게 카드와 초콜릿 케이크, 보석을 선물해 왔지만, 그건 연인들의 이벤트 같은 게 아니라 약혼자로서, 남편으로서의 의례적인 행동이었다.
선물은 밸런타인 축일 직후에 열리는 모임에서 그녀가 자랑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인 것이 당연했다. 실제로는 거의 항상 그녀가 고른 것을 비서가 구매해 와서 그가 서명한 카드를 붙여서 보내는 식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아일라는 알아서 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는 타입이었으므로 편했다.
아일라가 떠나고부터는 비서도 챙기지 않는다. 잊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후회도 했다. 생각해 보면 션과 헤어지기 전에, 그 계기가 되었던 날도 밸런타인 축일을 앞두었던 때였다. 그때 한 번 초콜릿을 사려다가 실패한 셈이니 기억할 법도 한데. 작년에는 어땠더라. 그는 기억 속에서 다이어리를 팔랑팔랑 넘겼다.
엘리엇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므로 작년 이맘때 무엇을 했는지는 금세 끄집어낼 수 있었다. 밸런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한 기억은 없으나 어느 날 션이 큰 초콜릿 파이를 만들어서 내왔었다. 엘리엇은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션도 그랬으므로 갑자기 웬 초콜릿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음.”
션이 티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아마 서운했던 적이 이번 한 번은 아니리라. 다른 것도 아니고 날짜와 관련된 것이다. 미리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상관없이, 아마 자신은 원래부터 매우 무심하고 배려 없는 성격을 타고났으리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똑 닮았다고 하는 외조부 제임스에 대한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탁상 달력을 집어 들고 날짜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만졌다. 금, 토, 일의 행사는 빠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선물 정도는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거기에서부터 고민이 생겼다.
엘리엇은 메모지를 꺼내서 세 줄을 적었다. 샴페인이나 와인, 초콜릿, 선물. 예전에 리암에게 적어도 초콜릿과 샴페인은 직접 고르라고 충고를 들었지만, 역시 선물도 직접 고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엘리엇은 션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샴페인은 와인 셀러에서 적당한 것을 꺼내면 될 것이고, 초콜릿은 어떻게 할까? 선물에 이르러서는 머릿속이 새하얗다. 마음만 최선을 다한다 어쩐다 하지, 현실은 이런 수준이다.
그는 30분가량 빙글빙글 의자만 돌리고 앉아 있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생각해도 안 될 때는 조언을 구하는 게 좋다. 그리고 그는 남에게 묻는 것을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 * *
『삼쫀, 저놔 받으세요오!』
『삼쫀, 저나 왔어요!』
『삼쫀, 전화예요! 리암 삼쫀 저놔예요!』
바에 놓인 핸드폰이 소리를 질렀다. 준형은 그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삼세번이라는데, 취객의 벨 소리는 몇 번을 들어 줘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앵앵대는 꼬맹이 목소리를 직접 따서 20종으로 서로 다른 말을 하게끔 만들어 놓은 벨 소리는.
저걸 꺼도 될까. 생각하는데, 클로이가 웃으며 말했다.
“해리 왕자님이 이제는 말씀을 아주 잘하시네요.”
“삼촌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니야? 할머니의 남동생이잖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가는 지금보다 세 배로 술을 드실 것 같은데요?”
아직 영업시간도 안 된 바에 들어와서 안 팔겠다는 술을 권력으로 퍼마시고 기절하여 바에 엎어져 있는 리암을 가리키며 클로이가 웃었다. 준형은 한숨을 쉬었다. 비싼 술을 병째 비웠으니 매상에는 보탬이 되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다. 그런 심경을 아는 듯 그녀가 키들거렸다.
“어쩔 수 없죠. 마스터에게는 아무리 주정을 해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데, 거기다가 사람의 눈까지 피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하시겠어요.”
“이거 오늘 문 열어도 되나. 여기다 놔두고 다른 손님을 들일 수는 없잖아.”
잠깐 멈췄던 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지 몰라도 인내심 있는 사람이다.
“제가 받아 볼까요?”
“혹시 헤어진 여자면 어떡하려고 그래.”
“어차피 답 없이 깨진 거잖아요? 어떻게 다시 시작할까 고민하실 필요도 없게 그냥 상처에 소금을 확 뿌려 드리죠.”
“클로이.”
준형은 자신의 성격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클로이가 그런 자신의 조수 역할을 해낼 만큼 꼬인 데가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머, 잔인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마스터는 이상한 곳에서 무르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주정쟁이가 귀찮게 하는 거예요.”
“물러서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왕족을 내다 버릴 수는 없잖아. 알버트 왕자랑 이 이상 원한을 쌓고 싶지 않다고.”
“다 핑계죠. 어라, 엘리엇 씨예요. 안녕하세요.”
클로이가 즐겁게 말하면서 핸드폰을 끌어당겨 액정을 확인하고는, 경쾌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직 오픈 전이에요. 리암 경은 벌써 새벽 4시처럼 취해서 쓰러지셨지만요. 아, 마스터.”
준형은 그녀의 손에서 전화를 빼앗아 올렸다. 왕실 쪽의 사람이라면 가족이든 친지이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특히 비서나 경호원과는 접촉하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했지만, 엘리엇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클로이가 “너무해요.”라고 화를 냈다.
“네가 궁금한 건 어차피 그 엉덩이 예쁜 미남 쪽의 소식이겠지. 물어볼 거 없이 자료를 뒤지면 되니까 잔이나 닦아.”
“치. 실황보다는 즐겁지 않죠.”
“애인한테 일러 버린다.”
클로이가 입술을 한 자나 내밀고 행주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준형은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엘리엇이 당혹한 목소리로 “준.” 하고 불렀다. 약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있나?”
「리암과 면식이 있는 줄 몰랐는데.」
“최근에 너 때문에 생겼지. 급한 일이면 깨워 줄까? 각성제 한 방이면 벌떡 일어날 텐데.”
「아니, 그럴 만한 일은 아닐세.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걸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리암이 거기에서 술을 마셨다고?」
“그래. 실연이라네. 에린 밀러라는 여자에게. 결혼 의사를 타진했더니 쿨하게 차 버렸다더라. 양다리 걸치다 들켰으면 그래도 싸지. 어쨌거나 코냑을 두 병 비우고 인사불성 상태야.”
리암이 여기에 와서 술을 마신 것은 그런 사연을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만―남과 함께 마시면 마시는 대로, 혼자 술집에 들어가면 또 그런대로 스캔들이 되고, 그렇다고 외롭게 혼자 집에 처박혀 마시기는 싫은 것이다― 준형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사건의 전말을 요약해서 엘리엇에게 말해 버렸다.
준형의 귀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엇의 귀로 들어간 것도 다시 나오는 일은 없다. 그리고 리암이 다른 사람에게 ‘정말로’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은 덮었으니까. 이따금은 사태를 간소화해서 퍼뜨리는 것이 굳건히 입을 다무는 것보다 비밀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혹시 픽업하러 올 수 있으면 와 주면 좋겠는데. 직접.”
안 된다면 여기에서 재우는 수밖에 없다. 집 주소야 금방 알아낼 수 있지만, SSB 소속의 경호원들과 마주치는 것은 이쪽에서도 사양이었다.
「지금은 무리로군. 시간도 그렇고, 가게로는 나 혼자밖에 못 가니까. 리암의 무게를 한쪽 다리로 지탱할 수는 없어. 근처의 아무 모텔에나 던져 놓으면 나중에 데려가겠네.」
“하하, 그걸로 괜찮은 거야? 경호원도 없다고, 지금. SSB는 내 구역으로는 못 들어오는 거 알잖아.”
「별일 있겠는가. 자네 말마따나 자네 구역인데.」
“계속 신경 쓰라 이거군. 알았어. 요금은 나중에 너한테 청구할 거야.”
「알아서 하게. 그럼.」
“근데, 무슨 일이었어?”
준형은 전화를 끊으려는 엘리엇을 붙잡았다. 호기심이 섞여 있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된다. 엘리엇이 수화기 너머에서 침음성을 흘렸다.
“뭐야, 무슨 고민 있어?”
「별거 아니야. 리암이 올해 밸런타인 축일을 어떻게 준비하려고 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네. 하지만 취했다면 됐어. 묻어 갈 생각이었지만, 실연당했다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테니.」
전반부를 듣고 나서 잠깐 준형은 대답할 말을 잊었다.
「준?」
수화기 너머에서 의아해하는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가 밸런타인 준비를 하다니 격세지감이다.”
「오늘까지 잊고 있어서 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말았다네. 이번 주에는 만나지 못하겠다고 했었거든.」
엘리엇이 한숨 쉬는 소리가 준형에게까지 들렸다. 준형은 하하 웃었다.
“서운해할 만한데. 그 녀석은 하나하나 의미 부여를 하는 성격이니까. 작년에는 어떻게 했는데?”
「작년에도 잊었어. 잊었었다는 걸 아까 깨달았다네. 그래서 올해는 최소한 선물만이라도 제대로 해서 보내려고 하는데, 뭘 사야 할지…….」
“무슨 일이래요?”라고 클로이가 끼어들었다. 준형은 “밸런타인 선물을 사야겠다는데?”라고 엘리엇에게도 들릴 만큼 큰소리로 대답하고 경쾌하게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찾아가.”
「이번 주에는 정말로 시간이 없어. 콘월의 예술 축제는 외조부님 때부터 78년째 후원하고 있는 행사란 말일세.」
“꼭 주말 아니어도 되잖아. 로테르담까지 뭐 얼마나 걸린다고. 평일 하루 갔다 오려면 좀 부담되기는 하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얼굴 보러 가는 게 제일이고.”
「약속도 없이 그럴 수는…….」
“갑자기 가면 더 좋아할걸. 션이 머리 질끈 묶은 쌩얼인데 속없이 집 앞에 다 와서 전화한다고 화낼 리도 없고, 들고 갈 꽃다발이 1유로짜리 장미 한 송이도 아닐 거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한 큐에 만사 해결이지. 날 믿어. 마법의 단어가 될 테니까.”
“션 씨라면 분명히 기뻐하겠죠.”
엘리엇에게는 들리지도 않겠지만, 클로이가 끄덕거리면서 동의했다. 그리고 옆에서 조언하는 준형에게 한 번 더 훈수를 두었다.
“선물은 간단하게 해. 거기까지 찾아가는 것도 어딘데 거창하게 할 것까진 없으니까.”
“잘 생각해 보고, 션 씨한테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걸 고르세요! 넥타이라든가, 지갑 같은 걸로! 근데 그 사람한테 안 어울리는 게 있긴 할까요?”
“라는군.”
「……고맙네. 생각해 보지.」
엘리엇이 헛기침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상담료는 안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늦었다. 준형은 핸드폰을 쳐다보고 약간 웃었다. 쫓아낼 수도 없는 고귀한 주정뱅이를 상대한 스트레스가 좀 날아가고 기분이 나아졌다. 클로이가 해해거리며 그의 팔에 이마를 비볐다.
“잘됐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근데.”
“네?”
“넌 맥케인에게 관심 있는 게 아니었어?”
“싫어요. 비현실하고 연애하는 건. 저는 해리엇처럼 귀여운 애가 좋아요. 션 씨가 그야 물론 무지 잘생겼고, 섹시하고, 다리도 길고, 허리 라인이랑 허벅지도 끝내주고, 목소리도 녹아내리는 데다가 그 정신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후들후들 떨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남자랑 연애라니.”
돌기 전에야 못 할 일이라고 클로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예 남 주는 건 너무 피 토하고 싶을 것 같고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는 거리가 딱이죠. 그보다도 마스터, 아까 그거 말이에요.”
“그거?”
“1유로짜리 장미하고 머리 질끈 묶은 쌩얼. 너무 리얼한 예시인데요? 경험담이에요?”
“쉿, 클로이. 넌 지금 내 가장 큰 비밀을 알아 버린 거야.”
준형은 입술 가운데에 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흐음, 의외네요.”
“뭐가?”
“마스터가 장미를 샀다는 거. 마스터가 여자 집 앞에 가서 전화를 했다는 거. 마스터가 유치한 짓 하다가 차였다는 거.”
“젊을 땐 다 그런 거지.”
“그래도 뭔가, 마스터는 태어날 때부터 입에 총을 물고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자살 지망자도 아니고 입에 총을 왜 물어?”
그는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로 쓱쓱 클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팅하는 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며 클로이가 화를 내고 바 저쪽 끝으로 도망가더니 청소를 하겠다면서 대걸레를 가지러 나갔다.
준형은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전에 전원을 꺼서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오픈 시간이 되기 전에 바에 널브러진 리암을 처리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 그대로 놔뒀다가는 시선이 떨어진 사이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일어나실 수 있습니까, 전하?”
“으, 음……. 울렁거려…….”
신음인지 잠꼬대인지 웅얼거리는 소리만 새어 나온다. 더 흔들었다가 구토라도 하면 청소가 골치라 준형은 그를 도로 굴려 놓았다. 진짜로 어디 근처 모텔에라도 던져 놓는 수밖에 없겠다. 바 뒤에 사무실이 있지만,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서 거기에 재울 수는 없다.
지갑을 찾아 들고 시체처럼 늘어진 리암을 들쳐 메려 하자 마침 대걸레를 가지고 들어오던 클로이가 말했다.
“창고 쪽은 어때요?”
“술 창고?”
“모포 하나 덮어 드리면 서늘하니 적당할 텐데. 에어 매트도 하나 갖다 놓고요. 내일 아침까지 푹 주무실걸요?”
준형은 잠깐 솔깃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 바는 별로 안전한 곳이 못 되고, 술 창고는 기온이 낮다. 그러다 사고라도 생기면 골치 아프고, 새벽에는 자신도 퇴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안하니까. 어디 적당히 처박아 놓고 올게.”
그러시든가요, 하고 클로이가 손을 흔들었다.
준형은 리암을 어깨에 떠멘 채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겨울이라 해가 벌써 지고 어두웠다. 왕실의 총아를 길거리에 버렸다가는 사방팔방에 원수를 만들게 되겠지. 그는 스트레스가 도로 밀려오는 걸 느끼며 가장 가까운 모텔로 발길을 향했다.
* * *
수석 비서인 이자벨 벌커리가 문을 열었을 때 엘리엇은 피곤한 듯 이맛살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앉은 채였고, 책상 위에는 구겨진 메모지가 몇 개나 나뒹굴고 있었다. 책상을 깨끗하게 쓰는 사람인데 별일이다 싶어 그녀는 물어보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요즘 젊은 남자들은, 대체 뭘 좋아하지?”
마치 본인은 그만 한 자식이라도 하나 있는 것처럼 엘리엇이 탄식했다. 이자벨은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글쎄요……. 제 아들은 스포츠카라면 정신을 못 차리던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약간. 그것보다, 일이 더 있나?”
“없습니다. 감사 팀에서 올라온 서류는 아까 보여 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다행이군. 내일은?”
“관광청과 콘월 관리부에서 협약한 내용에 대해서 최종 결재를 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오전 중에는 공청회에 참석하시고, 오후까지 계속할 예정입니다. 애프터 눈 티는 모티머 남작 부인의 티 파티에 참석하기로 하셨고요, 만찬 일정은 없습니다.”
“맞아, 티 파티가 있었지. 수요일 밤에는 피처버트 씨 댁에서 카드놀이 예정이었고. 수요일 것을 취소하지.”
“지금요? 이틀밖에 안 남았습니다.”
“대신 오후 중이든 목요일이든 다음 주든, 젊은 쪽의 풀러 부인에게 온 초대장이 있으면 거기에 허락의 답신을 보내고, 없으면 이쪽에서 풀러 씨 부부와 피처버트 씨 부부를 함께 만찬에 초대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 그것도 어려울 것 같으면 뭐든 편의를 봐줄 수 있는 게 없나 찾아보게. 수요일 저녁을 비워야겠어.”
“알겠습니다.”
이자벨은 당혹스럽게 대답했으나 모시는 분이 하라고 하면 무조건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일정의 변경이 드문 엘리엇이 매우 특이한 경우로, 그의 모친이었던 앨리스나 외조부 제임스에 비하면 이 정도 변덕이야 고마울 정도로 사소한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피처버트는 세습 귀족의 신분도 아니고, 아주 약간 편의를 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문제는 일정을 갑자기 바꾸겠다고 말한 쪽이 아니다. 수요일 저녁을 왜 비우려고 하는가이다. 젊은 남자가 좋아하는 것, 수요일 밤의 일정, 이렇게 두 가지를 합해 보자 답은 바로 나왔다.
“로테르담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마도.”
엘리엇이 톡톡 손잡이를 검지로 두드리며 대답했다.
물론 이자벨은 수요일이 무슨 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쇼핑만 하러 가도 사방에 꽃과 샴페인과 초콜릿 천지인데 모를 수가 없다. 사실 그녀는 션에게 보낼 선물도 준비해 두었다. 5년 전까지 매년 아일라에게 보냈던 것처럼 말이다. 엘리엇은 카드만 적으면 된다. 작년에는 헤리퍼드의 고용인들에게도 아직 비공개였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이미 타운 하우스의 침실까지 방문한 적까지 있는 애인을 위해서 적절한 준비를 하는 것은 비서진의 당연한 의무였다.
“아마도, 라는 건 아직 결정은 하지 않으셨다는 뜻인가요?”
“일정이 적절히 조정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리고…… 선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직접 고르실 겁니까?”
그녀는 여섯 달 후에나 출시될 새 태블릿 PC의 시제품을 선물로 골라 두었다. 수요일 오전 중에 직장 동료 모두가 나눠 먹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초콜릿 바구니와 함께 배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엘리엇이 직접 챙기겠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자벨은 마음속으로 션의 위치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단순히 비공식적인 애인이니 정처였던 아일라보다 세 단계쯤 아래 수준으로 준비했는데, 엘리엇이 다급히 일정을 갈아치우고 선물 때문에 메모지를 구겨 던져 가며 고민할 정도라면 문제가 달랐다.
“고른다고 해도, 딱히 뭔가 생각이 있는 건 아닐세. 선택지가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스포츠카라……. 그건 좀 과한 느낌인데.”
“밸런타인 선물은 소박하게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녀는 꽃다발도, 초콜릿 바구니도, 태블릿 PC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엘리엇이 모처럼 직접 고민해서 고르는 것이다. 주인의 달콤한 즐거움을 방해할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애인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너무 완벽한 모범보다는 적당히 인간적인 결함이 있는 쪽이 인기도 더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정부는 스펙이다. 감당할 수 있는 한 많을수록 좋다. 그녀는 아직 션을 직접 보지 못했으나 사진만 봐도 남자라는 결점을 커버할 수 있을 만큼의 미모가 아닌가.
골치 아픈 일을 만들 가족도 없고, 하이에나처럼 들러붙을 친척도 없다. 연고자라고 할 만한 상대가 있다면 알 아시리 가문인데, 이미 내친 식솔을 이용해서 뭘 어찌하려 들 만큼 품위 없는 가문이 아니다. 본인 자신도 미모를 이용하여 세상을 편하게 살 생각 같은 건 없는 듯하고, 남자라는 것도 주제넘게 공작 부인의 자리를 노릴 우려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꼭 결점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적절히 교육을 시키고 관리해 준다면 엘리엇이 곁에 두고 쉬기에 거의 완벽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엘리엇이 저런 얼굴로 선물을 고민하게 하는 상대라면 그걸로도 충분하긴 했다. 그녀는 콘월 공작가와 헤리퍼드 공작가는 물론이고 엘리엇 개인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일정 문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완벽하게 조정해 두겠습니다. 내일 중에 잠깐이라도 쇼핑을 하실 수 있도록 할까요? 이곳으로 오도록 부르면 주문 제작도 가능할 겁니다. 하루 안에 수배할 수 있는 사람 중에 최고의 플로리스트와 쇼콜라티에를 찾아보겠습니다.”
“음……. 그것도 역시 과하다 싶군. 꽃은 됐고, 초콜릿도, 좀 더 생각해 보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십시오.”
“자네도.”
이자벨은 공손히 절하고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문을 닫고 나서야 참았던 웃음을 꺼내어 머금는다. 제임스 공이 은퇴하고 엘리엇이 콘월의 공작위를 물려받은 16년 전부터 그의 전속으로 일해 왔으나 저렇게 막막하기도 하고 동요하기도 하는 듯한 묘한 표정이 뒤섞인 이상한 얼굴은 본 적이 없다. 그녀의 17살짜리 둘째 아들도 그것보다는 연애에 능숙할 것이다.
자기 상태에 대해 자각이 없는 엘리엇은 이자벨이 나간 후에도 생각에 잠긴 채 이래저래 고민했다. 일단 시간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 초콜릿은 만들게 하면 될까? 아일라가 있던 시절에 이따금 후식이나 티타임에 초콜릿이 나왔던 것을 떠올리며 그는 생각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무렵에 아일라가 “집에서 먹던 것을 선물로 받는 건 싫으니까 따로 주문해.”라고 요구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에 비서가 알아서 외부에 주문을 맡겼을 터이나, 아마 그전에는 타운 하우스의 주방에서 만들어 올려보냈을 것이다.
집의 파티시에에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7시였다. 집무실에서 나오자 집사부의 데이비드가 세 명의 하인과 함께 서 있었다.
“저녁 식사는 간단히 준비했습니다.”
“그래.”
식욕은 그다지 없었으나 가능한 한 거르지 않는다. 엘리엇은 재킷을 데이비드에게 맡기고 식당으로 향했다.
원래부터 먹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므로 혼자서 하는 식사는 간단했다. 얇게 저민 쇠고기 몇 점에 치즈를 얹어 구운 빵과 샐러드가 전부이다. 최고의 재료에 최고의 솜씨로 만들어진 식사를 의욕 없이 위장으로 밀어 넣다가 엘리엇은 문득 식당이 원래 이렇게 조용했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일에 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먹을 때나 만찬 때가 아니라면 혼자인 쪽이 당연하니까. 예전에는 아일라가 있긴 했어도, 그녀가 애인에게 열중해 있는 동안에는 같이 먹을 때가 혼자일 때보다 더 적었다.
‘익숙해진다는 건 놀라운 거로군.’
뱃속이 헛헛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와인으로 샐러드를 목구멍에 넘겼다. 션이 같이 먹을 때에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소란하니까 차이가 나서 그런 것이다. 맛이 있느냐 없느냐부터 시작해서 재료가 이렇다 저렇다, 건강이 이렇다 저렇다. 다음에는 무엇을 먹으러 가자, 무엇을 만들자. 예전에는 이랬다, 같은 사소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가지를 쳐서 나중에는 어째서 그런 화제가 되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되곤 했다.
한 사람이 접시 하나를 놓고 하는 이야기가 서른 명이 함께 하는 만찬보다 풍요로워진다. 엘리엇은 문득 션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식사를 물리고 나자 디저트가 나왔다. 단맛이 거의 없는 오렌지 크레이프를 쪼개다가 그는 데이비드를 돌아보았다.
“파티시에를 불러 주게.”
“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얼떨결에 되물은 데이비드가 실책을 깨닫고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주방에 일어난 파란은 데이비드의 실수와는 비교 대상도 되지 않았다. 여태까지 어느 셰프도 불려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먹는 것에 관심이 없다. 제아무리 멋진 요리를 내놓아도 칭찬을 받은 일이 없고, 반대로 질책을 들은 일도 없다. 물론 프로이자 예술가인 헤드 셰프가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타 버린 계란 프라이를 내가도 아마 별반 꾸중이 있지는 않으리라고들 생각했다.
이따금 공작의 이름으로 상여금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손님을 대접한 후에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는 것이고 엘리엇 자신이 만족했다는 표시를 한 적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티시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폴 뒤부아는 마흔도 되기 전에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두 개를 받은 레스토랑의 디저트를 책임지고 있었고, 지금도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시에 중 하나이며 아직도 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으나 엘리엇에게 칭찬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9년 전에 막 스카우트되었을 때는 좋았다. 선대 공작 부인은 파티를 사랑했으며 티 파티와 디저트 파티를 삶의 정수로 여겼다. 별일이 없을 때는 가까운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초대하여 맛있는 케이크와 차를 대접하곤 했으며, 그건 그녀가 직접 하는 거의 유일한 사회봉사였다.
아일라가 있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녀는 선대 공작 부인처럼 파티를 열거나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는 성격이었으나 식탁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알았다.
그러나 공작 본인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출신인 헤드 셰프는 물론이고 영국인까지 포함하여 조리장 대부분이 “역시 영국 놈은 어쩔 수 없다.”라고 뒤에서 험담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배를 채우는 것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디저트에는 그야말로 있는 절차이니까 예의상 입에 넣는다는 수준이라 오더가 있기는커녕 불만조차 듣는 법이 없다.
윌리엄의 말로는 블루베리 파이를 좋아한다는데, 최고로 만들었을 때나, 설탕을 때려 부어 범벅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나 말 한마디 없이 똑같이 접시를 비울 뿐이다. 아일라가 집에서 나간 뒤로 뒤부아의 의욕은 하향 곡선을 그리다가 이제는 완전히 바닥을 쳐서, 이러나저러나 똑같다면 신경 쓸 필요가 뭐 있느냐며 이제는 윌리엄이 직접 시중드는 날이 아니라면 대충 모양새까지 날림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부르심이다. 맛은 분간도 못 하는 주제에 무시당하면 싫은 모양이라고 뒤부아는 조리모를 벗어서 바닥에 내던졌지만, 결국 도로 주워서 주섬주섬 썼다. 주방 팀은 조마조마한 침묵 속에서 그가 매무새를 고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르러 온 풋맨도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뒤부아는 이 기회에 공작에게 요리의 소중함에 대해 설교하고, 잘리기 전에 때려치우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풋맨의 뒤를 따랐다.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을 줄 아는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과 호텔들이 그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었고, 런던만이 아니라 파리로 돌아가도 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게를 내서 미슐랭의 별 하나 정도는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배포는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쪼그라들어 식당 문이 열릴 때쯤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뒤부아는 마음속으로 ‘당당하게, 당당하게.’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엘리엇과 일대일로 마주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상대는 권력자이며 뒤부아가 굴욕을 느끼면서도 몇 년이나 일터를 떠나지 못하게 할 만큼 권위 있는 집안의 주인이다. 대식당이 열리는 일이 좀처럼 없어서 그렇지, 영국에서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의 주방은 왕실을 제외하고 파티시에가 올라갈 수 있는 자리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엘리엇은 오렌지 크레이프를 깨끗이 비운 다음이었다. 뒤부아는 흘끗 빈 접시를 눈으로 훑었다. 대충 수저로 휘저은 반죽을 구워서 고용인들의 간식에 사용하려고 만든 오렌지 시럽과 호두를 뿌렸을 뿐이다. 날림으로 한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심하게 대충한 것은 처음이라 뒤부아는 쪼그라든 채로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네.”
해고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뒤부아가 눈을 뒤룩거리는 동안 엘리엇이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풋맨이 식탁 의자를 하나 빼서 엘리엇 쪽으로 각도를 돌려주었다.
“디저트가 마음에 안 드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자리에 앉으면서 뒤부아는 무심코 적대적으로 내뱉었다가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데이비드가 그의 앞에 찻잔을 놓고 홍차를 따르다가 딸그락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엘리엇이 “음?” 하고 시선을 들었다.
“디저트에 불만을 느낀 적은 없네. 오늘 것도 괜찮더군. 달지 않고 양도 적당해.”
“하. 예.”
앞엣것은 한숨이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부탁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요일까지 초콜릿으로 뭔가 만들어 줄 수 없을까 하는 걸세.”
“초콜릿이요?”
뒤부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밸런타인 축일에 쓰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너무 늦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엘리엇은 곤혹한 듯이 약간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라 난처해. 이왕 선물할 것이라면 제대로 하고 싶다네. 시간이 모자랄 것 같다면 내일과 모레의 일은 전부 빼도 괜찮아. 간단치 않은 요청인 건 알고 있네. 그래서 부탁을 하는 것이니, 정 어렵다면 거절해도 어쩔 수 없지만.”
“아닙니다!”
뒤부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섰다. 때려치우겠다는 생각은 이미 없었다. 처음으로 받은 오더다. 게다가 공작의 애인을 위한 밸런타인 초콜릿이다. 이건 티파티보다 더 큰 일이다. 대형 주문이다. 단 하나로 승부해야 하는 이상 시간이 짧다고 해서 간단히 할 수는 없다.
의욕이 솟구쳤다. 쭈그러진 자존심을 한 방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몇 달 전에 그 애인의 방문에 대비하여 헤드 셰프가 보조 몇 명만 데리고 남아 요리를 했을 때 뒤부아는 휴가 팀에 끼어야만 했지만, 밸런타인 선물을 만드는 것은 당연히 그런 간단한 저녁 식사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
엘리엇이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부아는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얼른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어떤 것을 만들고 싶으신지 생각해 두신 건 있으십니까?”
엘리엇이 당황했다. 부탁하면 거기에서 끝이겠거니 하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데다가 뒤부아의 기세에 눌린 탓이다.
“글쎄. 특별히는…….”
“안 됩니다. 이미지가 확실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니까요.”
그러니 말씀해 보십시오, 하고 뒤부아가 눈을 빛냈다. 엘리엇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들고 가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작았으면 좋겠군. 너무 화려한 것도 좀 그래.”
“하지만 인상적인 쪽이 좋겠지요?”
“받는 사람이 기뻐할 수 있다면 좋지만…….”
“꽃은 무얼로 준비하셨습니까?”
엘리엇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문답이 다소 불편했기 때문이다.
“아직 없네.”
“그럼, 초콜릿을 받으실 분에게 무슨 꽃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장미……일까.”
“밸런타인이라고 해서 꼭 장미꽃만 사는 건 아닙니다. 받으실 분이 좋아하시는 것도 있을 테고…….”
엘리엇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션도 남자다. 특별히 꽃을 좋아한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해바라기 꽃다발과 선인장 화분을 선물받은 적은 있지만, 그건 자신이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션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장미로군. 그게 제일 어울려.”
마음속에 애인의 모습을 그리고 그 위에 꽃을 덧붙여 본 결과 그 이외의 답은 없었다. 물어본 주제에 되레 뒤부아가 부끄러워했다. 다른 꽃도 아니고 장미를 남자에게 어울릴 거라고 확고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남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럼 그분이 선호하시는 과일이라든가 향은 어떻습니까?”
“과일은 대부분 좋아하네. 오렌지와 딸기를 잘 먹었던 것 같은데……. 상큼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던 것 같아, 향은…… 잘 모르겠군. 민트 차를 자주 마셨지.”
하나씩 생각해 보자 의외로 재미있었다. 엘리엇은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션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무심결에 웃음을 머금었다.
메모를 끝낸 뒤부아가 일어섰다.
“수요일 오후까지, 최고로 완성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좋아하는 과일, 음식, 보디 소프의 향, 마사지를 해 주겠다며 가져오는 아로마 오일 같은 것들을 떠올리다가 어깨를 주물러 주곤 하는 손의 온도와 달콤하게 속삭여 오는 목소리로 생각이 이어져 간다.
생각만으로 뺨이 약간 뜨거워졌다. 이래서 션이 하루에도 두세 번씩 전화를 거는구나 하고 엘리엇은 거의 경이로운 기분으로 자신의 느낌을 관조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몇 번이나 되새기다가, 전화를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만두고 만다. 전화를 끊고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션은 아직 화가 나 있을 테고, 그것이 조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초조하다. 수요일이 빨리 되었으면 싶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하고, 그런 복잡한 마음인 채로 엘리엇은 가만히 앉아 찻물에 이는 말간 파문을 내려다보았다.
* * *
수요일에, 화창한 날씨로, 밸런타인이라는데도 회사 전체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르로이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상하네. 비 오는 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침침한 거 같지. 축축 늘어지고.”
“그러게. 퇴근하고 여자 친구 만나러 갈 건데 이렇게 기분이 처져서야…….”
그 우울감의 근원이 되고 있는 션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힘없이 웃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탓인지 컨트롤이 잘 먹히지 않는다. 딱히 침울해 죽겠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르로이의 말처럼 살짝 처지는 기분이 가는 곳마다 퍼져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빌딩 전체가 유행성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의욕 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러다 제때 퇴근 못 하겠다. 오늘 늦으면 마누라한테 혼난다고. 기운 내, 기운.”
커피를 가져온 팀장이 여러 사람의 등짝을 한 대씩 후려치며 자리로 되돌아갔다.
“션, 너도 기운 내. 애인 만나러 가야지. 아, 넌 원거리 연애였나?”
“예.”
“주말에 만나면 되지. 지금이 좋을 때야. 결혼해 봐. 본 얼굴 또 보는데도 맨날 빨리 들어와라 어째라 귀찮다고.”
그 주말에도 못 만난답니다. 금실 좋은 주제에 입에는 불평불만을 달고 사는 팀장에게 션은 마음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사치스러워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럴 작정은 아니었다. 엘리엇이 밸런타인을 기억해 주기를 기대한 것은 절대 아니고, 한 주쯤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서운한 것도 아니다. 그가 바쁜 것은 잘 알고 있고, 일정이 자신처럼 월화수목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말에 더 중요한 일이 몰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못 만나는 주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션은 말하는 순간부터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그럴 정도라면 하지 않는 쪽이 좋았으련만, 후회할 줄 알면서도 서운한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변하지 않는 것에 초조해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엘리엇이 알면 실망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자신의 얄팍함이 스스로도 실망스러웠다. 일생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 있는 그대로, 그가 그런 사람인 것을 사랑하자,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자고 결심하지 않았나. 엘리엇은 계속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그저 믿고 사랑만 하자고 마음먹고서는, 그래도 때때로 어린애처럼 불쑥불쑥 생떼가 솟아 나오고 만다.
‘확인하고 싶다면 정직하게 물어보는 게 빠르다는 것을 아는데도.’
가끔은 먼저 말해 주는 것을 듣고 싶어지게 된다.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을까. 함께 살게 되면 불안감이 가실까.
이 정도의 위태로움과 불안이 있는 쪽이 엘리엇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션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매일 저녁 그가 걸지 않으면 엘리엇이 전화를 걸어 오곤 했는데 어제는 오지 않았다. 그 통화가 엘리엇에게 있어서 의무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션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걸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화가 났다고 생각해서 걸지 못한 것일까. 혹은,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엘리엇답지 않은 일이고, 또 의미가 있는 일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무거운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의식의 한쪽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거나 실수하지는 않았었는지, 말한 것이 좋은 영향을 미쳤을지 나쁜 영향을 미쳤을지, 그런 생각을 계속한다.
그러는 사이에 이럭저럭 시간도 가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동조의 영향은 아직도 동료들에게 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퇴근하는 발걸음들은 다들 가벼웠다.
션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집은 회사에서 멀다.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얻었기 때문이다.
우울감은 가시지 않은 채였으므로 그는 평소처럼 버스를 타는 대신에 기분 전환 삼아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간단히 저녁 식사거리를 사서 포장해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둘러보면서 걷는데, 거리가 평소보다 화사했다. 꽃을 들고 가는 사람도 많고, 어디든 꽃과 초콜릿이 진열되어 있다. 시에서 하는 이벤트라나, 무슨 협회에서 하는 홍보라나, 긴급 비상벨을 본뜬 붉은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장미꽃이 여기저기 비치되어 있다. 손대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션은 꽃집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밖에 나와 있는 꽃통을 들여다보았다. 꽃은 사지 못했다. 원래는 이런 이벤트를 강요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가 준비한 것은 초콜릿이 가향된 홍차 한 캔이었다. 엘리엇이 오면 간단한 쿠키와 같이 대접하는 것으로 혼자 조용히 기념할 작정이었다.
꽃을 보자 사고 싶어졌다. 그러나 줄 수 있게 될 때는 다 시들어 버린 다음일 테고, 오늘은 꽃값도 비싸다. 낭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어느 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장미는 식상하고, 백합도 뭔가 딱 들어맞지 않는다.
쭈그려 앉아 꽃을 들여다보며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그림자가 졌다. 션은 흘끗 옆을 돌아보았다.
“goedemiddag.”
머리가 허옇게 센 노신사가 그의 옆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꽃을 들여다보다가 싱긋 웃어 보였다. 션도 마주 웃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Voor geliefden?”
“예에, 뭐……. 오늘 주지는 못할 테지만요.”
네덜란드어가 짧아서 대답은 영어로 했지만, 감응 능력과 안색만으로도 대강 전달은 된 듯하다. 노신사가 위로하듯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온 꽃집 주인에게 뭐라고 말했다. 션은 고개를 갸웃하고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동전이 오갔으나 꽃을 받지 않고, 그가 션을 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een mooie dag verder!”
대신 꽃집 주인이 밖에 나와 있는 꽃통에서 꽃창포 한 송이를 뽑아 비닐에 도로록 말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아까 그분이 주시는 겁니다.”
션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미 노신사는 가 버린 뒤이다. 그는 허리를 펴고 난처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꽃집 주인은 그에게 이것저것 친절하게 말을 걸었지만, 꽃바구니를 사려는 손님이 세 명이나 한꺼번에 닥쳐드는 바람에 미안한 듯한 얼굴로 손님을 응대하러 갔다.
션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모르는 사람에게 꽃 한 송이를 받은 것뿐인데 기분이 무척 상쾌해졌다. 타인에게 호의를 받는 일에 대해서 그는 경계심을 갖고 있지만, 몇 마디 인사와 함께 꽃만 주고 가 버린 탓인지 좋은 기분이 든다. 션은 마음속으로 노신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엘리엇에게 주려고 생각했을 때조차도 꽃이 좋다든가 싫다든가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지만, 이래서 꽃이 정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배달이라도 보내 볼까. 션은 킥 웃었다. 꽃 배달부가 엘리엇에게까지 도착할 수는 있을까. 미리 이야기하지 않고는 아마 어려울 테고, 그렇다고 예고하고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전화를 하자고 생각했다. 길에서 남자에게 꽃을 받았다고 말하면 엘리엇은 뭐라고 말할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까, 어이없어할까, 조금은 의식해 줄까.
꽃을 들고 가는 그를 향해서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고 해피 밸런타인이라고 외쳤다. 그도 웃으면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에 돌아와 꽃창포를 유리컵에 꽂고 저녁 식사를 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에 전화를 걸었지만 무정한 신호음만 줄기차게 울렸다. 저녁 식사 약속이 있거나 한 걸까 하고 션은 8시 반까지 기다려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바쁜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엘리엇은 그처럼 정시에 출근했다가 정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다. CE를 그만두고 나서 그는 오히려 더 바빠졌다. 헤리퍼드 산하의 법인과 단체는 한두 개가 아니다. 엘리엇은 CE를 경영하던 중에는 그것을 이유로 다른 일을 대리인에게 맡겨 두었지만, 경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후에는 이제 그쪽 일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의무의 영역에 넣고 있는 사교 활동까지 더하면, 일주일에 5일을 CE에 출근하고 주말 동안에는 모임에 참석한다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때보다 훨씬 할 일이 많다. 아일라가 쉬려고 CE를 그만뒀으면서 왜 끊임없이 일을 만드느냐고 엘리엇을 닦아 세운 적도 있었다. 션은 아일라를 싫어하지만, 그날만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말에 공감하면서 응원했었다.
그러니 전화가 꺼져 있는 것은 자신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 것이다. 단순한 저녁 식사가 아니라 만찬이라든가 파티, 교회의 모임, 중요한 회의가 길어진다든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엘리엇은 만약 통화를 하고 싶지 않다면, 잠깐이라도 받아서 “지금은 통화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사람이니까.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말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지레짐작하면서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아는데도 자꾸만 불안해지는 것은 자신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 런던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곳에서 별반 실적다운 실적을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영국의 두 회사에서 이직 제안이 왔다. 그중 한 곳은 오브라이언이다. 기존보다 더 대우를 높여 줄 테니 돌아오라고 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오브라이언은 이직해서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대우가 좋은 편이었으므로 거기에서 연봉이 더 오르면 사실상 션의 경력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곳 동료들에게는 정도 많이 들었고, 대표이사가 흑심을 품고 그러는 것만 아니라면 좋다고 펄쩍 뛰어오를 판이었다. 밀리는 망설이는 션에게 없는 사실도 아니고 그걸로 무슨 청탁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러든가 말든가 놔두고 기회를 잡으라고 타박을 했다.
기회는 기회인지라 돌아갈까 하는 쪽으로 마음이 크게 기울어 있었다. 돌아간다고 해도 곧바로 같이 살자든가 하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아마 한동안은 예전처럼 금요일 저녁에 캐번디쉬의 아파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가끔은 서로의 집에 오가기도 하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밖에서 만났다가 헤어지는 일도 있으리라. 그것은 무척 행복한 미래예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연락이 닿지 않거나 만나지 못하는 날에, 가까이에 있으면 지금보다 견디기가 더 쉬울까?
모르겠다.
션은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괜스레 문자함을 뒤졌다. 이틀간 자신이 보내지 않았으므로 월요일 오후에 벤티 사이즈의 커피를 마시는 중이라고 했던 것이 마지막 문자였다.
벨 소리가 울린 것은 얼핏 잠이 들었던 때의 일이다. 눈을 뜨자 침실의 불은 켜진 채였다. 부부가 흥이 나서 춤이라도 추는지 음악 소리와 함께 가끔씩 발소리를 내던 윗집도 조용했다. 벨이 다시 울렸다. 시계를 보자 아직 10시 정도였다.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스토커라든가 망상에 빠진 여자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션은 슬리퍼를 끌고 일어섰다.
멍한 머리를 긁적이며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대답이 없다. 다시 묻자 헛기침 소리가 났다.
“날세.”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션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현관 앞에 엘리엇이 한 아름 가득 안기는 꽃다발을 하나 들고 서 있었다. 멋쩍은 듯 다시 헛기침을 한다. 엘리엇이 여기 있다는 사실 쪽에 먼저 놀라야 할지, 꽃다발 때문에 놀라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된 채로 션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벨을 누르셨어요?”
“늦은 시간이고, 미리 약속했던 것도 아닌데 문까지 따고 들어와도 되는 건가 싶어서.”
그리고 그가 다시 목을 울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돌아갈 생각이었네. 자고 있었던 것 같은데 미안하게 되었,”
그가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션은 번쩍 그를 안아 올렸다. 엘리엇이 당황한 소리를 냈지만, 꽃다발을 받는 것보다는 단연 이쪽이 좋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근력 지구력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엘리엇을 안아 드는 것은 쉽지 않다. 아플 때야 몸을 맡겨 주었지만, 서 있으면 키가 크게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바닥에서 발을 떨어지게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장미꽃을 든 그를 끌어안자 진짜로 큰 꽃다발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복이 한가득 품에 들어왔다.
집 안으로 들어와 내려놓자 엘리엇이 약간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제가요?”
“전화가 그렇게 끊어졌으니까. 어제도 걸지 않았고.”
“사실 엘리엇 씨가 어떻게 하시나 보려고 안 걸었어요.”
션은 난처한 웃음을 띠고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까지는 못 참을 것 같아서 한번 걸었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비행기에 타고 계실 때였나 봐요.”
“다행이군. 화가 나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고민했는데.”
엘리엇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가 다시 꽃다발을 션에게 내밀었다. 션은 그것을 받고 깜짝 놀랐다. 생화라고 말해도 믿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미꽃에서 단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초콜릿이군요, 이거.”
“좀 더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사실 월요일에 자네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알았다네. 집의 파티시에에게 부탁한 건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아뇨. 너무 굉장한데요.”
“기억하고 있었던 건 자네였잖나. 그리고 내가 갑자기 찾아온 쪽이 문제이고.”
“근데 정말 어쩐 일이세요? 연락 없이 오실 건 생각도 안 해 봤는데.”
다정하게 손목을 끌어 소파에 앉히며 묻는다. 엘리엇이 조금 한숨을 쉬었다.
“올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
“예.”
“자네가,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고개 숙인 옆얼굴과 드러난 귓불이 붉었다. 션은 꽃다발을 내려놓고 엘리엇의 곁에 앉았다. 머리칼에 입술을 누르자 그가 몸을 굳혔다. 돌아보고서는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내리깔고 마는 표정이 아까보다 조금 더 난처해 보였다.
“불안하셨어요?”
“조금.”
무엇을 질문해도 솔직한 대답이 돌아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션은 그의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겹쳤다. 엘리엇이 손바닥을 뒤집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안심이 되네요.”
“뭐가?”
“엘리엇 씨도 불안해한다는 게요.”
입술을 댄 채로 속삭이자 엘리엇이 도로 눈을 내리감으며 미소를 띠었다.
“그런가.”
“기쁘세요?”
“아마. 자네도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거라면, 내가 자네와 공유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로군.”
“그렇다고 해서 항상 불안해지고 싶진 않습니다.”
“그건 그래.”
다시 웃음을 띠는 입술에 짤막하게 입 맞추고 션은 일어섰다. 홍차 캔을 따기 위해서였다.
“차를 준비할 테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아.”
엘리엇의 손이 그의 손가락을 붙들었지만, 힘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미끄러지듯이 떨어졌다. 대신 같이 일어선다.
“내가 하겠네.”
“솜씨를 믿을 수 없으셔도 지금은 참으세요.”
밸런타인 선물인데 그에게 준비시킬 수는 없다. 엘리엇이 주방까지 따라왔다가 식탁에 꽂힌 꽃창포를 보고 약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건?”
“어느 멋진 신사분한테 선물 받은 겁니다.”
“오늘?”
엘리엇의 미간이 더 갈라졌다. 그리고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고 있는 션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드문 애정 표시에 그는 킥 웃었다.
“왜요? 질투하세요?”
“그래.”
예상외의 대답이라서 션은 물도 없이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러나 쿨룩거려도 엘리엇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가슴팍을 더 꽉 껴안는다.
“뭐 어때. 자네는 내 것이잖나.”
“엘리엇 씨.”
션은 숨 막히는 기분이 되었지만 엘리엇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엘리엇을 더 초조하게 하고 싶은 기분과 당장 돌아서서 끌어안고 싶은 기분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별일 아니었어요. 주고 가 버려서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싫어.”
엘리엇이 드물게도 어린애 같은 말투로 고집스럽게 말하고 션의 뒷목을 깨물었다. 아픔보다도 자릿한 흥분이 등을 타고 달린다. 션은 힘으로 엘리엇의 팔을 풀어내고 돌아섰다. 엘리엇은 고개를 들었다. 션이 등허리를 감아 안는다. 그는 뜨거워지는 푸른 눈동자를 스르르 내리감았다. 키스는 예상한 것보다 더 달고 아주 길었는데, 눈을 뜨자 백일몽이라도 꾼 것처럼 한순간 같았다.
“그러면, 저를 좀 더 독점하세요.”
‘어떻게?’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입술이 겹쳐졌기 때문에 엘리엇은 묻지 못했다. 대신 션의 어깨를 손가락이 파랗게 변할 정도로 붙잡는다. 관능과 다른 감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 낯선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서 머뭇거린다. 그대로 끝없이 잠기고 싶은 기분과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혀끝을 부드럽게 얽는다.
물이 끓으면서 주전자 뚜껑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팔을 엘리엇의 허리에 감은 채로 션이 곁눈으로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엘리엇은 젖은 입술을 핥으며 손을 뻗어 그것을 껐다.
“아아, 안 돼요, 엘리엇 씨. 못 참게 되어 버려요.”
션이 진득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혀가 엘리엇의 입술 위에서 애무하듯이 움직였다. 엘리엇은 어쩔 수 없이 두 걸음을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오늘은 평일이고, 그는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충동을 참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어렵게 몸을 떼어 내자 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깨 근육을 풀듯이 한 번 으쓱하고는 상체를 쭉 빼서 그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에 다시 불을 붙이고 금색 포숑 캔을 꺼내서 포장을 뜯었다.
“12시가 넘기 전에 드리고 싶으니까요.”
“그게 자네가 준비한 밸런타인 선물인가?”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는 아니지만요. 엘리엇 씨는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까요. 작년의 초콜릿 파이는 실패였고……. 새삼스럽게 선물을 하는 것도 엘리엇 씨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이 정도라면 괜찮을까 했어요. 윌리엄 씨의 솜씨에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요.”
그래도 일단은 이것저것 샀다며 그가 도기로 만든 주전자와 새 찻잔 세트를 가리켜 보였다. 늘 머그잔 신세였던 것을 생각하고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모양새에 신경 쓰는 건 윌리엄이야. 나는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데.”
“저 혼자 신경 써도 괜찮아요. 그래도 특별한 날에는 뭔가 평소와 다르게 하고 싶으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떼를 써서 죄송하다며 션이 어색하게 웃었다.
곧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했다. 션은 포트를 예열하고 캔에서 찻잎을 덜어 냈다. 뜨거운 물을 붓자 달콤한 초콜릿 향기가 확 퍼졌다. 익숙지 않은 일에 약간 불안정하게 손이 떨린다. 순서를 헷갈려서 차를 따르려다가 얼른 다시 예열을 하러 돌아가는 모습을 엘리엇은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샴페인이 있어.”
엘리엇은 식탁에서 일어서서 거실에 내려놓았던 나무 상자와 꽃다발을 가져왔다. 상자 안에는 라벨이 아름다운 로제 샴페인이 한 병 들어 있었다.
“지금은 자네가 주는 차를 마셔야 하니까 안 되겠군.”
“다음 주까지 아껴 둘게요.”
션이 엘리엇의 앞에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초콜릿과 코코넛 향기가 나는 홍차는 사실 엘리엇의 입에 맞지 않았지만, 그 따뜻함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향긋하게 퍼졌다. 션이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엘리엇 씨는 오늘 아주 크게 실수하신 겁니다. 투정을 부리면 일정을 어겨서라도 만나러 와 준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 전 아마 끔찍한 떼쟁이가 될 테니까요.”
“자네는 매번 그런 식으로 나를 위협하는데, 정작 정말로 나를 불편하게 한 적은 없지 않나. 그리고 나는 말해 주지 않으면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되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만일 실수가 있다면 빨리 말해 주면 좋겠네. 자네를 슬프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네. 저야말로……. 괜한 일로 그래서 죄송해요.”
“그런 말 말게. 내 잘못이니까. 어제도, 연락하지 않아서 미안하네. 옳지 않은 일이었지.”
션의 뺨을 어루만지며 엘리엇이 가만히 속삭였다.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얹으며 션이 뺨을 손안에 비볐다.
“그렇게 치면 토라져서 연락하지 않은 제가 더 잘못한 거지요. 엘리엇 씨가 의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좀 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성실하게 의무적으로 연락하는 것과 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고, 그래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는 후자가 더 기쁠 겁니다. 그만큼 제게 신경이 쓰이신다는 뜻이니까요. 절 좋아하세요?”
엘리엇은 낯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션이 함박웃음을 짓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일 기쁜 건, 제게 전화를 하거나 만나러 와서 그렇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죠.”
“그런 건가.”
“그런 거예요.”
그가 다시 고개를 기울여 엘리엇에게 입 맞춰 왔다. 짧게 입술과 입술을 맞물고 홍차 향과 초콜릿 냄새가 옅게 밴 혀끝을 서로 맞댔다가 다시 풀어낸다. 그리고 이마를 마주한 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자네를 생각하는 게 전보다 어려워졌다고 생각했다네.”
“어려워요?”
“그래. 전에는 이렇게까지 복잡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끝이 나질 않아.”
몸만의 관계일 때에는 모든 것이 단순했다. 만지면 쾌감이 있었고, 함께 있으면 나른한 편안함이 있었고, 그가 어리광을 부리면 순수하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약간 만족감이 있었던 것도 같다. 내버려 두고 돌아가는 것에도 약간의 아쉬움뿐이었다.
좋아한다는 자각이 생긴 후에도 큰 차이는 없었다. 해야 할 일과 감정 사이의 균열은 눈에 띄지 않았고, 미래는 명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를 다시 만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결심하고 행동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느라 약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이렇게 마음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쉽지가 않다. 뭔가가 잘못될 거라는 걱정 때문은 아니다. 그런데도 좀처럼 션에 대한 생각이 끝나지 않을 뿐이다. 부유감과 추락감이 동시에 뱃속을 휘저어 조마조마한 기분이 되고 만다.
“그건 제 생각을 많이 한다는 뜻이잖아요?”
“준이 직접 만나러 가서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뭐든지 해결될 거라고 하더군. 마법의 단어가 될 거라고. 사실 그래서 왔다네.”
“제이 씨요? 음. 틀린 말은 아니네요.”
션이 애매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가 엘리엇과 깊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캐묻는 대신에 그냥 엘리엇의 턱을 당기고 도로 깊게 입을 맞추었다. 엘리엇은 눈을 내리깐 채로 속삭였다.
“나에게도 마법의 단어로군.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려.”
초조감도, 불안감도, 두근대는 심장 떨림도, 모두가 하나의 고동이 되어 안도와 따뜻한 평안과 충만함이 뒤섞인 것이 된다. 엘리엇은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분석할 수 없었지만, 그 감각은 그를 행복스럽게 한다. 그래서 이렇게 손가락 끝을 마주 대고 미소한 채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졌다.
션이 기쁜 듯이 웃고 다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여러 차례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엘리엇이 낮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초콜릿은 먹지 않을 건가?”
“감히 만지기가 무서운데요. 저거 거의 예술품 아니에요?”
단 냄새만 아니라면 어떻게 봐도 생화처럼 보이는 꽃다발은 보기만 해도 황송스러워서 놔둔다 해도 이걸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냉장고에 넣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유리 케이스라도 사야 하는 건가 생각하는데, 엘리엇이 꽃대 하나를 툭 꺾었다. 순간적으로 션이 “아.” 하고 신음했다. 연분홍색의 장미 봉오리가 내밀어졌다.
“임자가 먹지 않아서야 의미가 없지 않나. 만든 사람한테도 실례라네.”
“그렇지만 너무 대단한 물건이라 아까워서.”
“자네가 무척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전해 주겠네.”
엘리엇이 션의 입술 앞에서 꽃봉오리를 흔들었다. 지나치게 유혹적이라서 션은 더 거절하지 못하고 엘리엇의 손에서 장미꽃을 받아 물었다. 약간 쌉싸름한 초콜릿에 살짝 베리 향이 나는데, 지금까지 먹어 본 초콜릿 중에 가장 훌륭한 맛이었다. 꽃받침은 달콤한 사탕이었다. 진짜 먹는 게 맞구나 하는 놀라운 기분이 되었다.
“맛있네요.”
“그런가?”
션은 조심스럽게 검푸른색 꽃송이 하나를 뜯었다. 그리고 그 꽃송이를 입에 문 채 그대로 엘리엇을 끌어당겨 꽃송이 절반을 엘리엇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음.” 하고 엘리엇이 낮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기울여 션이 먹여 주는 것을 순순히 받아먹었다. 단맛이 서로의 혀와 입술 사이로 오간다. 식탁 위에서 가볍게 닿아 있던 손가락이 뜨겁게 얽힌다. 깍지를 끼어 마주 잡은 채 둘은 서로에게 더 가까이 입술을 마주 대고 깊게 키스했다. 혀와 입천장에 묻은 초콜릿을 혀끝으로 긁어 핥고 할딱이며 다시 서로의 입술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
“달아…….”
엘리엇은 취한 듯이 중얼거렸다. 션이 애틋하게 그 입술을 핥으며 소곤거렸다.
“맛있죠?”
“그렇군.”
션이 이번에는 꽃잎 하나를 뜯으며 키들거렸다.
“꽃잎이 하트 모양이네요.”
한 잎은 금세 혀와 혀 사이에서 녹아 없어져 버렸다. 애가 타는 듯이 엘리엇이 그의 혀를 휘어 감아 제 입 속으로 끌어넣는다. 초콜릿이 아쉬운지 션의 혀가 아쉬운지 알 수 없다. 또다시 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단맛을 내는 것이 서로의 입술밖에 남지 않게 된 다음이었다.
“하나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달콤하게 조른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션이 내미는 꽃을 순순히 받아먹었다. 절반 정도 내민 꽃부리를 물자 션이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탁탁 튀는 오렌지 향이 섞인 여섯 번째 꽃송이가 녹아서 사라질 때쯤에는 입술에도, 입 속에도, 혀에도 열이 가득 고였다. 초콜릿에는 관심이 없지만 이건 마치 온갖 색으로 꽉 찬 무지개 같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엘리엇 씨.”
그는 꽃다발을 묶은 리본을 풀어 션의 손목에 묶었다. 섬세한 혀끝에 닿는 입술이 떨리고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초콜릿이 묻은 손가락을 혀로 핥자 션이 검지로 그의 혀 안쪽을 누르며 팔을 끌어당겼다. 초콜릿을 한가득 입에 채운 키스가 다시 깊게 맞물린다. 엘리엇은 잘게 몸을 떨며 션을 두 팔로 가득 부여안았다.
그리고 둘은 꽃송이가 서로의 몸에 전부 녹아들 때까지 아득한 황홀경에 빠져든 채 끝없이 키스를 나누었다.
* * *
난방이 꺼졌는지 공기가 써늘해서 엘리엇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포옥 안겨 있는 몸은 따뜻하지만, 볼과 이마가 시리다. 그는 조심스럽게 션의 품에서 빠져나와 이불을 끌어당겨 션에게 목까지 덮어 주고 몸을 일으켰다. 피로가 다 가시지 않아 침침한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시계를 확인하자 아침 6시였다. 아직 알람은 울리지 않았지만 이제 가야 할 때였다.
“음. 엘리엇 씨, 아직 일러요.”
“이제 가 봐야 해. 자네는 더 자도록 하게.”
그는 고개를 숙여서 션의 어깨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매트리스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조용한 걸음으로 옷장을 열어 새 셔츠와 속옷을 꺼내 입고 커프스링크를 찾아 침대 머리맡을 뒤진다. 괜스레 왔다 갔다 하면서 잠든 사람을 깨우느니 런던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어도 소용없었는지 어느 틈에 션이 깨어서 뒤에서부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엘리엇은 난처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더 자게. 시간 나면 전화하겠네.”
“저 부탁 하나 하고 싶습니다.”
“뭔가?”
“제가…….”
말을 뱉어 놓고 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볍게 말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역시 거절당하면 쇼크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 앓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무엇이라도 말해 달라고, 그래야 이해할 수 있다고 엘리엇이 그랬으니까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엘리엇 씨가 갑자기 보고 싶어지면, 런던으로 가도 될까요?”
“타운 하우스로?”
“네. 연락 없이도.”
엘리엇이 잠깐 침묵했다. 션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의 옆구리에 이마를 댔다.
“그러게.”
잠깐의 침묵은 전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엘리엇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항상 정시에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다른 곳에 가 있을 수도 있고, 연락을 주지 않으면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네.”
“그래도요. 그냥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엘리엇이 약간 웃으며 다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자네 방을 마련해 두게 해야겠군. 자아, 이제 놓아주게. 가 봐야겠어.”
“아, 엘리엇 씨.”
“나올 필요 없네. 더 자도록 해. 몇 시간 후에 출근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요.”
“이쪽이 더 좋아. 일상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 말에 션은 녹았다. 애타는 손을 놓아주자 엘리엇이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키스하면서 아직도 손목에 묶여 있던 리본을 풀어주었다. 어젯밤에 달이 지도록 쉼 없이 맛보고 나눈 입술인데도, 닿을 때마다 황홀하여 늘 예상보다 길어지고야 만다.
길지만 짧은 키스 끝에 엘리엇은 션을 달래어 도로 재워 놓고 집에서 나왔다.
새벽바람이 서늘하다.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엘리엇은 마음을 남겨 놓은 채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성큼성큼 공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