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21/52)

9.

회복실로 옮겨졌다고는 해도 아직 엘리엇은 면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션은 여러 개의 센서를 몸 여기저기에 붙이고 누워 있는 엘리엇의 모습을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치료사 네 명이 달라붙어 비상시를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고,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들이 바쁘게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션은 유리창에 달라붙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커피 어때?”

그를 회복실 앞에 놓아두고 자리를 비웠던 리암이 깨끗한 매무새가 되어 종이컵을 두 개 들고 돌아왔다. 션은 감사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손안이 따뜻해졌다. 둘은 잠시 그것을 마시며 각자 엘리엇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 리암이 입을 열었다.

“아일라에게 너무 화내지 말아 주게. 그녀는 30년 동안 자기가 엘리엇을 보호해야 한다고 책임감을 느껴 왔거든. 저렇게까지 울분을 느끼는 건 물론 1차적으로 자네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절반 정도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일 거야. 알은, 솔직히 변명할 여지도 없고. 미안하네.”

“아닙니다. 부인에게는……. 죄송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혀끝을 깨물고 싶은 마음으로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었다. 제어기를 찬 채 엘리엇을 시야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의 상태는 훨씬 안정되었다. 그는 여전히 아일라를 밉게 생각했으나 마음은 격분 대신에 부드럽고 온화한 절망에 물들어 지금은 자책감이 더 깊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제 GFG에는 공격성이 없을 텐데…….”

“면역 때문이야.”

션은 의아하게 리암을 돌아보았다. GFG에 면역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오히려 GFG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정신 장벽은 약해진다. 뇌가 침입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면역이요? GFG에 대한?”

“진짜로 그런 능력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엘리엇의 주치의가 붙인 명칭이지만 말이야. 엘리엇에게는 GFG가 통하지 않아. 아, 치유계와 강화계는 제외야. 그건 육체에 물리적으로 직접 작용하는 거니까. 그것 말고, 정신 쪽으로 작용하는 GFG가 통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테스트 결과로는 S급의 텔레파시스트가 보내는 신호도 수신할 수 없었다고 해. 나야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GFG라는 건 의식하지 않고 있는 감정 영역을 통해서 작용한다고 하지 않는가?”

“비슷합니다.”

“엘리엇은 원래부터도 감성이 매우 약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빈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애를 쓰지.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고……. 5살 때 엘리엇은 GFG에 의해 정신 지배를 당한 적이 있다네.”

리암이 마치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건조하게 내뱉었다. 션은 숨을 멈췄다.

“5살, 때요?”

“정확히는 4살 8개월부터 석 달 동안이었어. 지금도 옛날 신문 같은 걸 찾아보면 조그맣게 나오긴 할 거야. 당시에 언론을 통제하려고 왕실도, 헤리퍼드도 총력을 기울였지만, 사건이 워낙 컸으니까 한계가 있었거든.”

리암이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범인은 A급 능력자였는데, 그 이전에도 전적이 있었다네. GFG를 이용하여 여자 여럿을 노예로 삼고, 또 남자도 몇 명 그랬어. 그러다가 한 번 잡혔는데, SSB에서 종신 계약을 대가로 풀어 줬었지. 등급 높은 정신 조작계 GFG는 드물지 않은가. 한 번에 수십 명을 집단으로 매혹‧세뇌시킬 수 있는 능력자를 전속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쪽 입장에서는 매력적이었을 테니까. 그랬는데 그자는 오히려 SSB에서 몇 년 일하고는 정보를 얻어서 엘리엇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던 거야. 아일라가 SSB가 뻔뻔스럽게 군다고 말한 건 그런 뜻일세.”

“그렇, 군요.”

A급의 매혹과 세뇌 능력이 어떤 것인지는 겪어 본 적이 없을 리암보다 션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어떤 곳에 사용할 수 있는지 말이다. 듣기에야 그저 두 가지 능력일 뿐이지만, 상대에게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작용하는 그 힘은 매우 광범위한 위력을 가진다.

“그때야 나도 어렸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잘 알고 있는 건 아닐세. 하지만 엘리엇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만은 알지.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상태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찰스 경은……. 아, 엘리엇의 부친 되시는 선대 공작님 말일세. 찰스 경은 엘리엇이 사지 멀쩡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하늘이 도우신 거라고 기뻐하셨다네. 사지가 멀쩡하다기에는 팔다리 중에 움직이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래. 그렇지만 엘리엇은 돌아왔다네. 어떻게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설명할 수 없었어. 뇌에 병변이 생겼지만, 그 문제는 진단조차 되지 않았네. GFG의 작용 원리에는 미지수인 점이 많으니까. S급의 치료사가 붙어서 치유력을 쏟아부음으로써 물리적인 회복은 되었지만,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원인이 뭔지도 결국 알아내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어디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여겨지기는 하는데 알아낼 방법이 없지. 전례가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머리를 열어 볼 수도 없지 않나.”

“예…….”

정신 지배라고 말할 정도로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면서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예는 없다. 자신과 관련된 일이었으므로 션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을 꽉 감았다. 알 아시리의 여자들과 그리고 몇 명의 남자들을 떠올린다. 한 번도 의도적으로 상대를 사로잡은 바 없음에도 그들은 결국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갈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후의 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사로잡혔던 애인들은 단지 일부분의 동조가 일어났을 뿐인데도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고, 앞으로도 일평생 노력해야 할 것이었다. 하물며 어린아이라면, 완전히 망가졌다고 봐야 옳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엘리엇은 GFG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졌다네. 그래서 면역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런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도록, 심지어 치료사를 부르는 일조차 어디에도 남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여 감췄으니까. 왕실과 SSB, 헤리퍼드의 총력을 기울여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말일세. 엘리엇 자신이 성격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 스트레스가 엘리엇의 정신에 부하를 주는 것도 곤란하고, 어릴 때 일을 캐내는 자가 있을까 봐 그러는 것이기도 해. 무엇이 트리거가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출되면 알아보는 자가 생기고, 그러면 관심을 가지는 자도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다. 차라리 괴팍한 성미로 알려지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도록. 션은 처음으로 엘리엇이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행이 아니다. 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신중하게 자기를 보호했어도 결국 자신이 강제로 면역 방어를 때려 부수지 않았는가. 그는 30년 전의 일을 처음부터 전부 다시 겪고 있다고 아일라가 말했다. 발작을 일으키던 엘리엇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션은 유리창에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내가 이렇게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용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세. 엘리엇은 우리 모두에게 아픈 손가락이야. 그 자신은 이제 어른이고, 공인으로서나 개인으로서 자기가 완전히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또 그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션은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다시 센터나 SSB에 구금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리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처분을 기다려야 할 몸으로 나서서 말할 수도 없으므로 션은 얌전히 집에 처박혔다.

몇 번이나 전화벨이 울리기에 그는 전화선을 뽑아 버렸다. 핸드폰 배터리는 나간 지 오래였다. 그는 불도 켜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다가 일어나서 배가 고파지면 뭔가를 먹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잠을 잤다. 문득 눈을 뜨고서 팔이 허전하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헛웃음을 치며 돌아누웠다.

그는 카이루완을 떠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중에 가장 몸서리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혼자 있으면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혼자 있으면 자유롭다.

그러나 엘리엇을 알아 버린 몸은 처절하게 싸늘하고 마음은 텅 비어 공허했다.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다정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렇게도 모자랐던 것이 사막에서 만난 한 방울의 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원래부터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되는, 그저 한 모금조차도 감사하고 감사한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엘리엇의 최선이었음을 이제 이해할 것 같았다.

‘엘리엇은 자네와 연애를 하고 있었어.’

리암은 차에서 그를 내려 주기 전에 그런 이야기도 했다.

‘자네에게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엘리엇에게는 그랬다네. 그는 한평생 헤리퍼드 공작의 후계자로서, 또 공작으로서 살아왔는데―그렇게 사는 법밖에 알지 못하니까― 자네와 만나는 동안에는 정말 최저한의 행사에만 얼굴을 내밀고 아무 데도 나서지 않았어. 엘리엇 같은 입장에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시간을 비워 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원래부터 자주 나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반년 가까이 왕실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아서 아예 유령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었지. 게다가, 자네는 이게 얼마나 우리한테 놀라운 일인지 짐작도 못 하겠지만 엘리엇은 그동안에 아일라에게 전화조차 걸지 않았다네.’

‘그렇습니까…….’

‘그리고 자네, 밸런타인데이 직전에 해로드 백화점에 간 적 있었지?’

그걸 리암이 어떻게 알까, 하고 션은 놀랐다. 그러자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있었거든. 자네 얼굴을 본 기억이 나. 여자와 함께 있었지?’

‘예. 친구입니다만…….’

프러포즈 링을 사러 갔던 날의 이야기였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엘리엇은 자네를 위해서 초콜릿을 살 작정이었다네. 아니, 사실 내가 반은 억지로 끌고 간 거긴 한데……. 그의 성격에 정말로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못 이기는 척 끌려와서 이것저것 진지하게 보고 있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자네가 여자와 있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변해서 혼자 가 버리더군.’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션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가슴을 쥐어뜯었다.

만나자고 전화했을 때, 그리고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션은 먼지가 내려앉은 반지 상자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만약에 그날 밀리와 함께 있지 않았으면 그는 헤어지자고 말하는 대신에 함께 있어 주었을까? 토라져 시간을 끄는 대신에 끌어안고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받아 주었을까?

그것도 모두, 뒤늦은 이야기이다.

* * *

일주일째의 아침에 TV를 틀자 오전부터 시사 프로그램에서 헤리퍼드 공작의 의식불명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션은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는 뉴스 같은 데에서 헤리퍼드 공작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도 없는데, 쓰러지자마자 온 채널에서 난리도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는 CE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부사장이 대리인으로서 경영진을 이끌고 비상 체제에 들어가 있지만 의식불명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정부에서 새로 CEO를 선출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과 법적 절차에 관해 무슨 전문가라는 사람이 긴 인터뷰를 했다.

“지금까지 헤리퍼드 공작가는 정권의 성향과 관계없이 일관되고 안정적인 정책을 시행해 왔습니다. 경영진이 따로 있을 때도 공작가의 의향은 매우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지요. 그러나 만약 현 공작이 장기간 복귀하지 못할 경우 CE는 정부에 의해 선출된 새로운 경영진의 의향에 따라서 지금보다도 훨씬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정책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공작에게는 후계자가 없으므로 이대로 사망한다면 CE의 지분은 100% 정부로 환수됩니다. 35년 만에 기간산업이 다시 정부의 손으로 들어오는 놀라운 일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될지는…….”

패널들은 그 사실이 영국의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떠들어 댔다. 션은 불쾌감을 느끼고 TV를 도로 꺼 버렸다.

옆으로 길게 드러누워서 또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찾아온 것은 집배원이었다. 오브라이언에서 보내진 해고 통지였다. 그는 그것을 다 읽어 보지도 않고 대충 식탁에 던져두고 다시 드러누웠다. 변론이나 항의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후에 한 번 더 벨이 울렸다. 이번에 찾아온 것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을 대동한 리암이었다.

“혼자 오려고 했는데, 알이 그렇게는 보내 주질 않아서.”

그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션이 악의를 품는다면 어차피 사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이런저런 말을 할 필요까지도 없어서 그는 그냥 리암에게 들어오라고 권했다. 리암은 집 안으로 들어와 션과 마주 앉아 두 장의 서류를 꺼냈다. 한 장은 두 번 다시 엘리엇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각서의 원안이었고, 다른 한 장은 국외 추방령이었다. 밑에는 금분으로 튜더 로즈가 찍혀 있었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일라가 물러서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네. 여왕 폐하께서도 적절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사실 나도 그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네. 자네와 엘리엇 사이에 있었던 일은 모두 기밀로 취급될 거고, 국외 추방에 관한 것도 어디에도 밝혀지지 않을 걸세. 각서도 자네 쪽에서 만나러 오는 것을 금지하는 것뿐이야. 엘리엇이 깨어난다면 결정권은 그가 갖게 될 걸세.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자네를 엘리엇의 곁에 둘 수는 없어.”

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마지막으로 엘리엇 씨를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리암은 약간 어두운 얼굴을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션은 옷을 갈아입고 리암을 따라나섰다. 나가려다가 문득 반지 상자가 눈에 띄어서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엘리엇은 회복실에서 이제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 치료사가 대기하고는 있으나 24시간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병실에는 낯선 얼굴의 노집사와 아일라가 있었다. 아일라는 션의 얼굴을 보고는 사나운 얼굴로 발딱 일어섰지만, 리암이 억지로 그녀를 붙들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노집사는 션에게 명백하게 적의를 품고 있었으나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뿐이니 자리를 피해 주라는 리암의 말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비로소 단둘이 되었다.

얼마 만에 둘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닫힌 문 안에 단둘만 있는 것보다 그것을 열고 나가 좀 더 넓은 세상에서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가슴이 가득 찼다.

션은 천천히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엘리엇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얬다. 벌써 야위었을 리도 없는데, 창백해서 그런지 전보다 더 말라 보였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엘리엇의 이마와 콧등을 쓸어 보았다.

“엘리엇.”

이름을 부른다. 션은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손을 뻗어서 눈꺼풀에 얹어 본다. 이렇게 가렸다가 치우면 떠 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깊이 잠들어 있을 때도 이렇게 하면 간혹 눈을 뜬 채로도 손을 치우지 않고 가만히 있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안색이 엉망이로군요…….”

내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션은 진심으로 깊게 후회했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에게 미친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고백한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찾아 헤맨 것도, 그를 연회장에서 끌고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머리가 식고 나서 뒤늦게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말로 들어 주려고 했던 것 같다. 모르는 체할 거라면 처음에 자신이 붙잡았을 때, 싸늘하게 내치고 경호원을 시켜서 끌고 가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원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장벽을 쌓아서 접근조차 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다시 당신을 본 것이 기적처럼 기쁜 일이라고 진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꺼내어 말하고, 그가 준다는 진짜 연락처를 믿고 기다렸더라면, 지금쯤 그 아파트에서 그를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평온한 얼굴에 키스할 수 있었을까.

“리암 경이 배려해 준 덕분에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먼발치에서도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는데요.”

가정은 소용없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과거에 관해서 들었습니다. 당신이……. 아뇨.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와서 소용도 없는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으니까요. 제가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도 잘 압니다.”

엘리엇의 뺨에 툭툭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그는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손등으로 그것을 닦고 션은 더 이상 자신의 눈물 따위가 그를 더럽히지 않도록 소매로 얼굴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목이 너무 아파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끝까지 사과를 해야 했다.

“당신을 잘못되게 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치게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못했다.

그는 반지 상자를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반지를 꺼내어 엘리엇의 약지에 끼워 보았다. 사이즈는 맞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고른 건데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션은 반지를 도로 빼내어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자격도 없었다. 신분의 차이라든가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은 여전히 GFG를 가지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엘리엇에게는 충분히 위험하다.

그리고 자신이 하려던 행위는 어린 엘리엇을 찢어 버린 자가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그러고 싶은 욕망이 아직도 그의 안에 있었다. 자신은 엘리엇의 옆에 있어서는 안 될 인간이다.

“용서를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고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수단을 써서라도 당신을 원했던 마음은 진짜였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션은 엘리엇의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제 이마에 대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면 지금쯤 내 숨도 멎어 있을 겁니다. 빨리 눈을 뜨십시오. 모두들 당신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갈라진 목소리에 눈물이 섞였으나, 이 모든 말은 진심이다.

“신의 은총이 당신에게 함께하기를. 안녕히 계십시오, 엘리엇.”

션은 엘리엇의 뺨에 키스하면서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했던 작별 인사와 똑같은 말을 속삭였다. 그러면서 그렇게도 납득할 수 없었던 그때 그의 말을 션은 가슴 속 깊이 이해했다.

그 작별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번 별이 뜨는 밤을 알아 버렸다. 앞으로 세상은 더욱 지독하고 캄캄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아프게 하느니 자기가 견디는 것이 나았다.

부디 과거의 모든 일로부터 벗어나, 나로부터도 벗어나 그저 행복하기를.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 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션은 병실 밖으로 나왔다. 눈물 자국은 훔쳐 냈지만 붉어진 눈동자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일라가 마치 그가 엘리엇을 목 졸라 죽이기라도 했을 것처럼 병실로 뛰쳐 들어갔다. 노집사가 그 뒤를 따른다. 션은 억지로 웃음 비슷한 것을 띠었다. 아마 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서를 쓸 만한 장소가 여기에 있을까요?”

리암을 따라온 SSB 요원 중 하나가 그를 별실로 안내해 주었다. 그는 건네받은 볼펜으로 꾹꾹 눌러 가며 다시는 영국에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며 엘리엇을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서명했다.

“출국 기한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입니다.”

“예.”

각서를 받아 가방에 넣은 요원이 다시 일러 주었다. 션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런던에 더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리암이 그에게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션은 무심히 그 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수표 한 장이다. 금액은 적혀 있지 않았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세. 갑자기 연고지를 떠나게 되었고, 직장도 잃었으니 여기저기 쓸 일이 있지 않겠나. 필요한 곳에 보태 쓰도록 해.”

션에게는 이런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지만, 딱히 불쾌감도 들지 않았다. 이런 것이 엘리엇 주변의 사람들에게 안심이 된다면 받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감흥 없이 그것을 받아서 품에 넣고 리암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리암이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엘리엇이 있는 병원에서 자기 발로 떠나고 싶어서 그는 정중히 거절하고 돌아서서 혼자 밖으로 나왔다.

걸으면서 엘리엇, 엘리엇, 엘리엇. 그는 입속으로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일단 이름은 진짜라고 말했던 첫 만남 때를 떠올리면서 그는 다시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에게 꼭 어울리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번에는 거기에 성을 붙였다. 엘리엇 위체. 그리고 혼자 웃었다.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가. 고결하게 들리는 특별한 이름이다.

그리고 션은 가장 먼저 보이는 자선 가게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여기에서 기부할 수 있습니까?”

“아, 예. 영수증을 발행하시겠어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션은 반지 상자를 꺼내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약간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션을 올려다보던 나이 어린 자원봉사자가 상자를 열어 보고 당황하며 물었다.

“이거 혹시 진짜, 예요?”

“안에 보증서가 들어 있을 겁니다. 혹시 여기에서는 접수 안 됩니까?”

“아, 아뇨. 그게, 되, 되시기는 하는데, 그……. 여, 영수증을 끊으셔야 할 것 같은데…….”

“해야 한다면 주십시오. 현금 기부도 가능하다면 하고 싶은데.”

“접수되긴 하는데요. 그…….”

션은 이번에는 리암에게 받은 수표를 꺼냈다. 얼마를 써야 적당할지 몰라서 잠깐 고민하다가 5만 파운드를 적었다. 백지수표를 줬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겠지만, 너무 큰 액수를 적는 것도, 그렇다고 너무 작은 액수를 적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는 그것에도 몹시 당황했지만, 떨리는 손으로 영수증을 써 주었다.

션은 그것을 대강 받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엎어져, 들을 사람도 없는데 그조차 죄가 되기라도 할세라 숨을 죽여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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