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20/52)

8.

우겨서라도 현장에 한 자리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션은 설계 팀 일원이지만, 사실 전공은 기술 분야였고 작은 회사에 있었던 무렵에는 경호 팀에서도 간혹 지원을 요청받을 정도로 몸 쓰는 일에도 재주가 있었다.

종종 영업까지 맡으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역시 얼굴의 영향이 크다. 어떤 클라이언트는 그의 얼굴 때문에 도리어 화를 내거나, 반대로 사죄하는 얼굴에서 사디스틱한 쾌감을 느끼면서 그것을 더 즐기려고 도를 넘어서는 일도 있었지만, 사람의 감정이 빤히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션은 그런 문제로 큰 스트레스나 고통을 느껴 본 일은 없다.

결혼식은 런던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쯤 걸리는 피처버트가의 성에서 이루어졌다. 피처버트가의 성이라고 해도 전통적인 의미는 거의 없다. 몇 년 전에 그가 파산한 어느 귀족에게서 사들인 것으로서, 이번 결혼식에 아주 제대로 써먹었다.

피처버트 씨는 결혼식을 위해서 성을 전부 수리하고 오래된 느낌까지 살릴 수 있도록 가구며 카펫을 모조리 갈아 치웠다. 개중에는 옛 루마니아 왕가의 엘리사베타 왕비가 쓰던 가구를 통째로 옮겨 왔다는 방까지 있었다.

션이 묻지 않아도 입이 가벼운 피처버트가의 대리인은 이번 결혼식을 위해 소더비와 크리스티에 쏟아부은 돈만 해도 물경 70만 파운드가 넘는다고 말했다. 물론 성을 수리한 것은 결혼식만을 위한 것은 아닐 테지만, 훌륭한 사진사가 찍은 결혼식 사진은 진짜 오래된 귀족들 간의 엄숙한 결합처럼 보였다.

풀러 가로 옮겨와 이루어진 이브닝 파티 쪽은 오히려 현대적인 분위기였다. 현장 책임자인 잭이 “진짜 귀족이 오니까 진짜인 척할 수는 없는 거겠지.”라고 비웃었다. 실제로 이브닝 파티에 참석 의사를 표시한 사람 중에는 헤리퍼드 공작이니, 리암 왕제이니 하는 거물급 인사뿐만이 아니라, 어디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여전히 상원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는 세습 귀족들도 제법 있었다.

보안 팀은 저택의 정문에서부터 CCTV를 빈틈없이 설치하고 입장객 모두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했다. 특히 신랑 신부의 친구들 쪽은 거의 몸수색을 당했다. 그 외의 입장객은 양가의 부친들이 직접 나서서 맞이했기 때문에 사람을 확인하는 문제는 훌쩍 줄었다.

“헤리퍼드 공작은 아직도?”

잭이 신랑 신부를 위한 첫 번째 건배가 이루어지는 도중에 홀 구석에 서 있는 션에게 다가와 물었다.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에 있는 사람 중에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헤리퍼드 공작뿐이다.

“거참, 이 난리를 치게 해 놓고 말도 없이 불참인가?”

“풀러 씨는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잖아. 미안한 걸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금 와도 이상하지 않지.”

수고하라고 잭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는 모니터실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파티장은 그에게 불편한 기분을 들게 한다. 신랑 신부보다 더 눈에 띄는 것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존재감을 미리부터 죽이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한 일이다.

모니터실에 있는 직원들은 션이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담당자가 따로 있는데도 나서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그를 험담하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풀러에게 아부하여 출세하고 싶어 한다고 수군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료한 얼굴로 모니터를 기계적으로 체크 하는 도중에 보고가 들어왔다.

“헤리퍼드 공작께서 도착하셨답니다.”

“정문은 닫았나?”

“닫았댑니다.”

“알았어. 수고하라고 전해 줘.”

밀리는 공작의 얼굴이 궁금한 듯 보고 나서 꼭 말해 달라고 했지만, 션은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래도 부탁을 받기도 했고, 봐두면 이야깃거리가 될까 하여 어디에 있나 하고 모니터를 훑었다.

그가 엘리엇을 바로 발견하지 못한 것은 모니터 너머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의 GFG가 강력해도 모니터 너머로 사람의 감정을 읽어 들일 수는 없다.

몇 개의 화면을 살피는 사이에 신랑 신부의 댄스가 끝났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리암 왕제가 파트너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갔다. 두리번거리던 대니얼 풀러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환한 웃음을 띠고, 그 주위로 점잖은 연령대의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션은 그게 헤리퍼드 공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공작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엘리엇…….”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엘리엇이다. 작고 화질이 좋지 않은 모니터 너머였지만, 션이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변한 곳이 없었다. 차분하고, 냉담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풀러와 인사를 나누는 표정이 션을 바라볼 때와 똑같았다. 션은 충격을 받았다. 헤리퍼드 공작이었다고? 이름이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에 관한 소문이 션이 알고 있는 엘리엇과는 워낙 달랐기 때문에 그는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모니터실을 뛰쳐나갔다. 뒷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무작정 홀로 뛰어든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는 술렁임이 퍼졌지만, 션은 깨닫지 못했다.

“이봐. 션?”

잭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잭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엘리엇에게 다가갔다. 아니, 헤리퍼드 공작에게. 그와 인사라도 한마디 나누려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션을 쳐다보았다.

“당신……!”

그 순간에는, 이름조차도 생각나지 않았다.

팔을 붙잡힌 엘리엇이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런 곳에서는 만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이다.

“션?”

사실 팔을 붙잡으면서도 그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엘리엇일까.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헷갈릴 수가 없는 이 무색투명한 보석을 보면서도 말이다. 엘리엇의 주위에 있는 청량한 공기가 폐까지 가득 찬 흙탕을 써늘하게 씻어 내린다. 그 차가움은 폐부까지 얼려 버리는 듯했다.

“어떻게……. 드디어……!”

션은 거의 울부짖듯이 외쳤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깨닫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드디어 찾았다.

그는 사실 엘리엇을 찾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이름조차도 진짜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엘리엇이 비록 이름은 본명이라고 말했지만, 션은 그걸 이제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엘리엇의 진심과 거짓을 하나도 분별해 낼 수 없었으므로 그가 했던 말들을 모두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매력적이라고 말해 주었던 칭찬도 이제는 믿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끌렸다면, 그렇게 내버렸을 리가 없으니까.

그가 팔을 뿌리치려는 듯이 들었다. 션은 그 팔도 움켜잡았다. 다시는 놓을 줄 아는가. 놓으면 또다시 사라질 텐데. 원래부터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션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니, 엘리엇에게는 그것이 사실이었으리라. 그러나 션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틀어쥔 채 붙들어 끌어당기자 엘리엇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니얼 풀러가 뭐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엘리엇을 강제로 홀에서 끌고 나왔다.

“경비원! 잭! 경비원은! 왜 안 움직여!”

그의 뒤에서 풀러가 또다시 소리쳤지만, 션이 “아무 일도 아니야. 자리를 지켜.”라고 말하는 바람에 직속 상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사장의 말을 들어야 혼란스러워진 경비원들은 빨리 자리를 찾지 못했다. 리암이 풀러의 어깨를 잡았다.

“됐습니다, 대니얼.”

“리암 경, 그렇지만!”

“엘리엇의 경호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지적하자 풀러가 움찔했다. 엘리엇이 입구 쪽에 남겨놓은 경호원들은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가기는 했으나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설 작정 같지는 않았다.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내버려 둡시다. 엘리엇도 괜찮다는 것 같고.”

“허, 이거 참, 이런 일이…….”

“이거 훌륭한 결혼식에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엘리엇이 아무래도 두 분에게 톡톡한 보상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작은 결혼 선물 정도로는 용서해 주지 마십시오. 그럼, 두 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샴페인을 들까요?”

리암은 난처해하는 신랑 신부를 향해 웃으며 말하고 웨이터의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집어 들어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피처버트가 눈치 빠르게 모든 사람에게 샴페인 잔을 돌리도록 지시했다. 션과 엘리엇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서 힐끔힐끔 시선을 던지는 사람의 수는 적지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뒤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풀러도 식은땀을 흘리며 리암을 따라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지만, 초조한 몸을 그대로 눌러두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땅히 뒤따라올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션은 침착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뒤에서 엘리엇의 경호원들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션! 지금 뭐 하는 거야!」

「맥케인 씨, 미쳤어요?!」

「기다려 봐! 리암 왕제가,」

아우성이 정신 사나웠다. 그는 CCTV가 설치되지 않은 방 중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헤드셋을 벗어서 부숴 버렸다.

엘리엇이 침착한 태도로 매무새를 다듬었다. 그 모습은 얄밉도록 전과 같았다. 자신이 미쳐 가는 동안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공기를 두른 채 여기 서 있다. 그것은 변함없이 션에게는 세상에 비할 바 없이 청려하게 보였지만, 그는 그 사실에 거의 증오심을 품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까. 션은 하루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잠든 일이 없다.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할까, 억지로 안아 버릴까, 눈물을 흘리며 그리웠다고 말할까, 사랑한다고 말할까. 그러나 그중 어느 것 하나도 그는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울분에 차서 물었다.

“헤리퍼드 공작이시라고요?”

“맞네. 헤리퍼드와 콘월의 공작이며 우스터와 웨스터모어랜드, 더비, 콘월과 데본, 멘느의 백작인 엘리엇 위체가 내 이름일세.”

차분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다. 이제 션이 다 알게 되었으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차라리 그가 혼란해했더라면 션도 좀 진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냉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과 작위를 말하는 엘리엇의 목소리는, 너와 나의 사이에 그만큼의 거리가 있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션은 눈앞이 까맣게 물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는 이제까지 상대의 신분이 장애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원한다면 누구라도 반하게 할 자신이 있었고, 성장기의 체험 덕에 신분이니 작위 같은 것에 동경을 품은 일도 없다. 그는 미란 알 아시리를 존경하기는 했으나 자신을 용서한 그의 인품을 존경할지언정 그가 범접할 수 없이 높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 그는 엘리엇과 자신의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엘리엇이 스스로 자기 삶에 끼워 주지 않는다면 션은 조금도 그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다. 아파트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려 했고 자신의 이름을 전부 입에 담는 일도 없었으면서, 그러나 알아 버린 뒤에는 숨길 필요조차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가 션을 밀어내는 데에는 어떤 수고로움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찾아도, 찾아도, 찾아도, 찾아도 나오지 않은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거지. 어마어마한 보안 요원들을 수백 명은 거느리고 계실 테니!”

션은 엘리엇의 팔을 다시 움켜쥐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엘리엇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작 한마디 명령을 뱉었을 뿐일 텐데 자신은 그렇게 발버둥 쳐도 그의 흔적조차 붙잡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진짜 귀족이라는 자들은 같은 땅덩이에 발을 딛고 있어도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네가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럼 어째서! 어째서 연락을 주지 않았습니까! 당신 쪽에서 나를 찾는 건 간단했잖아요.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까지 알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가?”

엘리엇의 그 말에 션은 머리끝까지 열이 치솟았다. 엘리엇의 시선이 자기 아랫입술에 닿는 것을 느낀다. 행복해야 마땅할 그 시선이 지금은 소름 끼쳤다.

션은 그를 밀쳐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서성거렸다. 돌아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쾌하게 여길 가치도 없었어요? 어차피 아무리 해도 당신을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네.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부정하지는 않겠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 생각도 못 했네. 우연이 대단하군.”

“우연이 아닙니다.”

“응?”

“우연 같은 것일 리 없잖습니까? 혹시 당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회사로 들어오는 상류층의 집이나 파티, 대규모 회사의 리셉션의 보안 의뢰 같은 것은 가능한 한 많이 참여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가까이에 있었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얼마나 찾았는데. 그가 자신을 두고 나가 버린 그날로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거리를 헤맸다. 이러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흥신소에 돈을 쏟아붓고 준형의 바가 있는 거리의 길목을 지켰다. 사람이 바뀐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일에 골몰했다. 그를 찾고 싶어서. 찾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당신 이름을 몇 번이나 들었던 줄 압니까? 거의 매일이었어요. 사장님이 얼굴을 알리기 싫어하는 귀빈이 있으니까 보안에 특별히 만전을 기해야 한다면서 당신 이름을 수없이 말했다고요. 보고서도 받았죠. 목록의 맨 윗줄에 당신 이름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게 진짜 당신 이름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엘리엇이라고 적힌 이름에 설레고, 설레고. 그 누구신지 모르는 언론에 노출되기 싫어하는 고귀한 분을 위해서 손님을 따로 고르고 좌석을 배치하고. 하다못해 사진 한 장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정이 남아 있었다면, 한 번쯤 만나 줘도 괜찮지 않았는가 말이다. 자신이 미쳐 버리기 전에 어째서 안 되는 건지 진짜 이유를 말해 주면 되지 않았나. 어차피 자신이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션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엘리엇이 자신의 GFG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증폭이다. 그것은 있는 감정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애정의 씨앗도 없다면 사랑이 싹틀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마치 사물처럼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길거리 어디에나 널려 있는 그 무의미한 몸뚱이들만큼이나 완전히 무가치하게 여긴 것이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군. 나는 지옥 같았는데. 당신이 없으니까 공기가 아니라 진흙을 마시고 사는 것 같았어, 정말로 찾지 못하게 되면 그냥 죽어 버리자고도 생각했는데, 당신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션은 주먹으로 벽을 쳤다. 몇 번이나 후려쳤다. 혼자서 반하고 혼자서 사랑에 빠지고, 혼자서 행복해하고 혼자서 고통스러워하고, 혼자서 찾아 헤매고 혼자서 미쳤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절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엘리엇은 아무 감정 없는 사람처럼 담담한 시선만 던진다.

션은 그러지 말라고 그가 다정하게 말해 주고 걱정해 주기를 바랐다. 아니면 화를 내면서 이미 헤어지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소리라도 지르기를 바랐다. 혹은, 차라리 너와 더 할 이야기가 없다고 싸늘하게 돌아서도 괜찮다. 다른 모든 연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엘리엇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을 뿐이다.

“자네는 나와 재회한 것이 기쁘지 않은가?”

“기쁘냐고요?”

션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뻤을 겁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러 왔더라면, 그 자리에 엎드려서 당신 발등에 키스라도 했을 거예요! 정말로 우연히, 어느 길목에서 마주쳤더라면 울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당신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이렇게 확인해서, 기쁠 리 있겠습니까!”

“왜 자네가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네. 자네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당신의 그 말이 나한테 얼마나 비웃음처럼 들리는 줄 압니까?”

부드러운 손길이나 눈가를 어루만지는 감촉에 여전히 홀릴 것 같으면서도 치가 떨린다.

“션.”

“당신이 지금까지 스쳐 보낸 자위 도구 중에서 고작해야 조금 나은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는 신세라는 게 얼마나 비참한 줄 아느냐고요. 당신의 ‘좋아함’에는 ‘다음에 만나자’라는 뜻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걸 아는데도, 이렇게, 미친 것처럼 환희하는 내가 어디까지 끔찍하게 느껴지는지 짐작이나 합니까?”

“……그런 적 없네.”

대답하기 전에 엘리엇이 약간 머뭇거린 것을 션은 알아챘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수없이 절망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엘리엇이 말할 때마다 수렁 속에 처박히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보다 더 밑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절망에는 바닥이 없었다. 이만하면 자신도 주제를 알고 물러설 법도 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엘리엇을 갈망하는 자신에게 기가 막혔다.

“알고야 있었습니다만. 당신 같은 사람들은 나 같은 건 사람으로 보지도 않죠, 공작님. 아니, 값싼 소유욕을 부리는 자들에 비하면 당신이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은 고마운 일이기까지 해.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일 줄이야.”

“왜 그렇게 말하는가? 나는 자네를 다시 만나서 기쁘다네. 그건 진심일세.”

“당신의 진심이라는 건 기껏해야 1페니짜리 동전만도 못한 거잖아. 하긴, 그런 동정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이로군요.”

“동정 같은 건 한 적 없네.”

션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가질 수 있지?”

“션…….”

“찾으면 다리를 자를까 하고 생각했었어. 정말로 그럴 작정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나를 버리고 간 몇 달 동안 계속 그 생각만 했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고, 달아나지 못하게 다리를 잘라서 침대에 묶어 놓는 거야. 내가 없으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고, TV조차 없으면 온종일 심심해서라도 나를 기다리지 않을까? 식사를 할 때마다 모두 다 내가 먹여 주고, 화장실에 갈 때까지도 나에게 안겨 가고,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내 것을 품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만큼 쾌락에 절이고 미치게 만들면, 이 머릿속에, 숨결 속에, 눈동자 속에 나 외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게 될까?”

그것은 상상하기는 했지만, 감히 구체화시켜 본 적 없는 헛된 망상이었다. 불쑥 고개를 들었다가도 죄책감으로 억눌러 넣곤 했던 그런 생각들이 지금은 가장 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이 사람은 제 곁에 머물러 주지 않으리라.

션은 가만히 그의 관자놀이를 쓸어내렸다. 키스할 정도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간다. 엘리엇의 숨결은 달았다. 그대로 물어뜯어 먹어 치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좋다. 아예 먹어서 소화시켜 버리면 그의 몸은 적어도 완전히 자신과 하나가 될 것이 아닌가. 그 누구도 그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될 테니.

그는 살의를 느꼈다.

“자네는 이상하군.”

“압니다.”

“여기에서 이러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야. 우선 돌아가세.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 연락처를 주겠네. 오늘 밤에 일이 끝나면, 아파트로 오도록 해. 거기에서.”

“당신은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고작해야 그건 또다시 섹스나 하자는 뜻이 아닌가. 션은 멍하게 엄지로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몸을 벌려서 살점을 쑤셔 넣는다고 해서 진짜로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1년 내내 그렇게 했어도 이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한 조각도 들어 있지 않은데 그게 한 푼의 가치라도 있는 일인가.

그것을 깨달은 찰나에, 그는 결정해 버렸다.

“션……?”

션 맥케인 앞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다. 엘리엇은 특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GFG에서 정말로 완전히 자유로우리라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엘리엇이 유일하게 자신의 GFG 속에서 맑고 밝은 불변이었기에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떻게 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망가뜨려서라도 가지는 게 낫다. 잃어버리느니 부숴 버리는 게 나았다.

“나는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놓칠 수 없어.”

그는 선언하고, GFG를 최대한도로 개방했다. 억눌려 온 만큼 내부에 압축되고 압축되어 무거운 밀도를 가지게 된 힘이 해방되자마자 분화하는 화산처럼 솟구친다. 션은 동조와 증폭을 한꺼번에 엘리엇의 안에 때려 박았다.

나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 좋아. 이 절망을 알고, 이 사랑도 알고,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 좋다.

머리를 전부 열어젖혀 지배한다. 모든 것을 지우고 전부 자신으로 채워 버린다. 나만 생각하고 나 이외의 어느 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러면 내 것이 되고, 나 또한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과거에 겪어 본 적이 있는 진창 속의 완전하고 무의미한 합일을 소망한다. 세상도, 윤리도, 그 밖의 모든 것도 전부 잊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나만 탐닉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좋다고 션은 생각했다.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므로 섬세하게 그의 마음에서 호의를 이끌어 내고 적확한 자리에 감정을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해일처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휩쓸었다.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모든 감정을 싹 쓸어 버리면 자신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션은 스스로도 자기 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했다. 그의 힘은 바다와 같이 한계가 없어서 사람 하나로는 넓이도, 깊이도 인지할 수 없었고, 주위를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힘의 양은 컵으로 살짝 떠낸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엘리엇의 곁에서 자기를 해방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제어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힘의 전부를 끌어내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게다가 광역 범위로 영향력을 미치는 것과 하나의 타깃을 향해 힘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집중된 션의 GFG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했다.

그러나 엘리엇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는 감정에 도취하고 희열에 떠는 대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힘껏 션의 따귀를 갈기고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렸다. 부지불식간의 일이라 션은 정통으로 얻어맞고 뒤로 자빠졌다.

“엘리엇?”

엘리엇은 그를 한 대 더 치려고 한 것 같지만, 오래 주먹을 쥐고 있지 못했다. 체머리를 흔들며 비틀거린다. 션은 당황하여 그를 부축하러 달려갔다. 뭐가 잘못된 건가. 비록 이렇게까지 온 힘을 다해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그는 자기 능력의 작용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제대로 동조가 일어났다면 엘리엇은 현란하고 강렬한 감정에 푹 빠져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 들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조는 발생하지 않았다. 증폭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엘리엇의 쇼크 상태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잘못된 약물을 주사하거나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션은 당황하여 마구 비틀리는 엘리엇의 몸을 붙잡았다. GFG를 거두어들이고 지금의 상태를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쇼크를 일으킨 요소와 반대되는 것을 확인하고 증폭시켜 중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의 GFG 중에, 유일하게 억제와 관련된 능력은 없다.

그가 션을 또다시 힘껏 후려쳐 떨쳐 내고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품을 뒤졌다. 비상벨이 굴러떨어지고 핸드폰이 켜졌다. 션은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션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동조를 끊을 때 갑자기 거절당하는 충격으로 쇼크에 빠지는 사람은 간혹 있지만,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 채로 이러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일라──! 도와줘, GFG에──!”

「엘리엇? 엘리엇?!」

바닥에 굴러떨어진 수화기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솟구쳤다. 션은 엘리엇을 억지로 붙들어 안았다. 엘리엇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완전히 풀어진 눈동자가 사방으로 제멋대로 돌았다.

“엘리엇, 내 말 들어 봐요. 숨 깊이 들이쉬어요. 곧 사람 불러올 테니까. 진정해요. 빌어먹을, 어째서.”

헤드셋을 부숴 버려서 사람을 부를 수가 없었다. 핸드폰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고, 바닥에 떨어진 엘리엇의 핸드폰을 주워 들려다가 그것도 실패하고 말았다.

비상벨 소리와 안에서 일어나는 수라장 소리를 들은 경호원들이 문을 박살 냈다. 엘리엇이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면서 일어서려다가 넘어지고 일어서려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이 바닥에서 수없이 튕기며 뒹군다. 뛰어 들어온 경호원들이 션의 팔을 꺾어 잡고 뒤로 끌어냈다. 그 뒤를 따라 달려온 리암과 풀러가 엘리엇에게 달려갔다.

“정신 차려, 엘리엇! 엘리엇! 맙소사! 구급차를 불러! 뭣들 하고 있어!”

리암이 고함을 질렀다. 풀러가 구경났느냐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팔을 내저어 쫓아낸다.

“헤리퍼드가에 연락해! 벌써 출발했어? 엘리엇, 정신 차려. 정신을 놓으면 안 돼. 엘리엇, 내 목소리 들려? 10분만 버텨. 아일라가 S급 치유계 능력자를 부른다고 했어. 그때까지 버텨야 해. 정신을 놓으면 뇌가 녹아 버려!”

션은 제압당한 채로 리암이 엘리엇의 어깨를 움켜잡고 경련하는 몸을 누르며 외치는 것을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들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엇의 옆에 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 그는 돌아 버린 사람처럼 자신을 제압하는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프로 경호원 여럿이 달려들어 억누르는 것을 이길 수는 없었다.

곧 구급차가 왔다. S급 치료사가 달려들어 엘리엇의 머리에 손을 댔다. 션은 저항하는 것을 잊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치료사의 손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빛이 엘리엇의 머리로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치 이런 사태를 준비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열 명도 넘는 치료사가 달려와 집단으로 엘리엇을 둘러싸고 치유력을 쏟아 부었다. 경련을 일으키던 다리가 천천히 가라앉더니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션이 볼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일차적인 발작이 멈추자 이번에는 구급대원들이 그를 들것에 옮겨 실었다. 리암이 들것을 내보내고 일어서서 그의 앞으로 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큭.”

입술이 터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두 번째 주먹에는 입 안쪽이 찢어졌다. 세 번째 주먹에는 엘리엇의 손톱에 찢긴 눈썹 위의 상처가 더 크게 터졌다.

누군가가 션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션은 그런 것은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는 애타게 리암에게 물었다.

“엘리엇은 어떻게 된 겁니까?”

“운이 좋으면 살겠지. 더 운이 좋으면 미치지도 않을 거고. 살아난다면 알려 주겠다. 끌고 가.”

리암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션은 경호원들에게 끌려 차에 태워졌다. 리암이 그것을 확인하고 파트너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신도 차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 엉망진창이 된 결혼식은 재개되지 못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션은 한 시간 안에 세 번이나 옮겨졌다. 가장 처음에 갇힌 곳은 센터였던 것 같다. 제어 능력이 없는 자연 발현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리스트레인 룸에서 양손과 머리에 지긋지긋한 제어기를 차고, 그 직후에 새로운 사람이 와서 낯선 집으로 끌려갔다.

방에 처박아지고 나서 10분도 되지 않아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그를 끌어냈다. 옮겨 간 곳도 리스트레인 룸이었으나 센터의 보호 시설과는 명백히 달랐다. 벽에는 회칠이 되어 있고 철제 책상과 의자 서너 개만 놓여 있는 그 방이 GFG 범죄자를 수감하기 위한 방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아…….’

그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하려던 짓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더한 짓도 하려고 했으니까. 손이 조금씩 떨렸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두렵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엇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괜찮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덜컹. 문이 열렸다. 총을 찬 요원 넷이 들어와 방 안을 확인하고, 그 뒤에 키가 훤칠하고 냉혹하게 생긴 남자가 문 안으로 들어선다. 션은 그의 얼굴을 알았다. 션만이 아니라 이 나라 사람이라면 어지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지 않는 이상 모를 리 없는 사람이었다.

“알버트…… 왕자……?”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션의 턱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품평하는 시선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친다. 션은 불쾌감을 느꼈지만 약간 이마를 찡그리는 선에서 그것을 참았다. 참을성이 점점 없어지고 있기는 했으나 지금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으켰다가는 엘리엇의 소식을 알게 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엘리엇이 남자에게 정신 빠진 짓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믿지 않았는데, 얼굴을 보니 그럴듯하군.”

그러나 알버트 튜더에게서 매혹되었다거나 반대로 혐오를 품었다거나 하는 기미는 일절 없었다. 션이 GFG를 가능한 한 수준까지 통제하고, 리스트레인 룸과 제어기가 그것을 돕고 있는 덕분이다. 온통 싸늘한 검푸른 색은 그것대로 매우 독특했다. 션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의 소식을 알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알버트가 그의 앞에 몇 장의 문서를 던지고 그 위에 볼펜을 떨어뜨렸다.

“서명해.”

“이게…… 뭡니까?”

“자네 목숨을 살려 줄 서류지.”

션은 서류를 끌어당겨 훑어보았다. 그것은 SSB에 종신 고용되겠다는 계약서였다. 국가와 왕실을 위해 GFG를 사용하는 대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와 문제를 처리해 준다는 요지의 내역서가 따로 붙어 있었다.

“서명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 해야 할걸. 정신 조작계 GFG 능력자가 의도적으로 정신 지배를 시도하다가 사람을 중태에 빠뜨렸어. 그게 헤리퍼드 공작이라면 반역죄로도 볼 수 있지. 지금으로서는 자네가 범죄나 다른 수작을 위해 일부러 억제 처리를 받은 것으로 위장해 왔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야. 그렇다면 매우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범죄이지. 서명하면 살려 주겠네.”

“엘리엇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중태라고요?”

“지금 남 일을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엘리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먼저 알려 주십시오.”

알버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집중 치료실에 들어갔어. E급의 치료사가 둘이나 붙었으니 목숨은 건지겠지. 정신면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도 말할 수 없군. 보나 마나 의사는 본인의 정신력에 달린 일이라고 할 거야.”

션은 숨을 들이켰다.

“재판에 회부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쪽이 좋아. 명예 선언에 의하여 헤리퍼드 공작은 처형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가문의 존속을 위협하는 경우에 한하여 적을 다섯까지 재판 없이 직접 죽일 수 있지. 공작 부인은 벌써 영국에 들어왔어. 그녀는 절대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 걸세.”

“…….”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그가 혀를 찼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자네 문제는 이 방에서 끝나게 되어 있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앞으로 최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군. 빼돌리는 데에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헤리퍼드의 눈을 오래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네. 서명할 텐가?”

션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결정하게.”

알버트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서류를 그의 앞으로 밀어 놓고 밖으로 나갔다.

철컹. 문이 잠겼다. 션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아픈 머리를 눌렀다. 엘리엇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그는 찬찬히 자신의 머릿속을 뒤지고 GFG를 점검했다. 이상은 없다. 너무 강한 힘을 사용한 게 문제였을까. 아니다. 알 아시리에서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제력을 행사한 게 문제였을까.

“으으…….”

그는 신음하며 고개를 숙여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서류는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엘리엇이 살아만 있어 준다면, 자신은 죽어도 관계없다. 그리고 그가 죽는다면, 당연히 따라 죽을 것이다.

언제가 되어야 소식이 올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다시 문이 열린 것은 알버트 왕자의 말대로 딱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취조실에는 시계가 없었으므로 션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기다린 시간이 무한처럼 길었을 뿐이다.

문을 콰당 걷어찬 것은 붉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션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리스트레인 룸으로 들어섰다. 머리칼과 마찬가지도 눈동자도 불타는 듯하여 타고난 기질의 매서움을 보여 주는 듯했다.

션은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엘리엇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가끔 이야기했으니까.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그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아일라’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스칼렛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네. 그녀의 머리칼은 햇빛 아래에서 보면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거든. 성격도 그렇고.’

그녀는 그가 사랑하는 아내인 것이 틀림없었다. 껍데기처럼 비어 가던 마음속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너야?”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엘리엇을 배신한 게.”

내가 배신한 것은 내 마음이지 그와 나의 사이에 배신을 운운할 만한 감정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션은 생각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같은 것은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션의 뺨따귀를 세차게 후려쳤다. 기세만큼이나 매서운 손이었다.

“나쁜 자식……. 엘리엇이 너를 어떻게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있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알 필요 없어. 어차피 죽을 테니까.”

“엘리엇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걸 알아서 뭐 하게!”

션은 두 번째로 뺨으로 날아오는 손을 붙잡았다. 리암에게는 맞아 주었지만, 아일라에게까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엘리엇의 아내에게는 그럴 수 없다. 그녀에게 마땅히 그를 때릴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아일라의 손목을 움켜쥔 순간, 뒤에서부터 경호원들이 그를 붙잡아 팔을 꺾고 책상에 엎어 눌렀다. 처박힌 코가 찡했지만 션은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아일라가 경멸이 가득한 얼굴로 손목을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엘리엇한테도 이렇게 했어?”

“무슨, 뜻입니까?”

“엘리엇한테도 이런 짓을 했느냐고!”

“그만해, 아일라 스칼렛.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었어?”

열린 문 안으로 왕자가 들어오면서 끼어들었다. 아일라가 홱 돌아서며 날카롭게 말했다.

“잘나신 SSB의 안가겠지. 죄인을 빼돌린 주제에 아주 당당하다?”

“돌아가. 엘리엇이 깨어나면 연락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이자는 우리가 보호하고 있을 테니.”

“누구 마음대로. 이자는 헤리퍼드의 죄인이야.”

“헤리퍼드의 죄인은 없어. 모든 영국 법은 공법이고 죄인은 법에 의해서 처벌되니까.”

“그렇게 당당하시면 왜 정식 절차를 밟아서 센터나 구치소로 데려가는 대신에 빙빙 돌려 가며 비밀리에 이곳으로 끌고 왔을까? 응?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런 건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알버트 왕자가 어리석은 자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혀를 찼다.

“제어 가능한 U급의 GFG를 보유할 수 있는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 아일라.”

“엘리엇이 죽을 뻔했어!”

“죽었다면 다른 문제이지만, 살았잖아. 엘리엇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종국적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이니까. 그는 너와 달라. 냉정해. 깨어나면, 내 판단이 틀렸다고 하지 않을 거야. 약간의 희생은 기꺼이 감수해 줄 거다.”

아일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깨어나면? 그런 보장이 어디에 있어. 설령 깨어난다 해도, 정말로 그걸로 없던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 이자를 놓아주라고? 국가의 유용한 자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미쳤어! 엘리엇은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중이야. 그딴 게 나라를 위해서 감수해야 할 희생이라면, 30년 전에 이미 한 번 치러 줬잖아! 너희 빌어먹을 SSB가 GFG 범죄자를 쓸모가 있을 거라며 보호하는 바람에! 30년 전에, 너희가 이미 한 번 불쌍한 엘리엇을 죽였었다고! 그리고 지금 석 달 내내 겪었던 그 끔찍한 짓을 지금 처음부터 전부 다 한꺼번에 다시 겪고 있어! 그걸, 이자가 저질렀다고!”

그녀의 손가락이 션을 가리켰다.

“그런데 보호? 자원? 나라를 위해서? 또? 뻔뻔스럽게!”

그녀가 션의 앞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더니 갈기갈기 찢어서 션의 머리 위로 뿌렸다.

“헤리퍼드는 지금까지 할 만큼 했어. 엘리엇도 그래. 받을 게 있으면 있었지, 이 이상 나라에도, 왕실에도 갚아야 할 것이 없어!”

“그렇다 해도 네가 결정할 일은 아니다, 아일라. 엘리엇이 깨어나서 그렇게 말한다면, 기꺼이 처형하도록 하지.”

“네겐 유감스럽게도, 알버트, 나에게는 권리가 있어. 아직까지는 내가 헤리퍼드 공작 부인이니까.”

그녀가 등을 꼿꼿하게 펴고 오만할 정도로 날카롭게 말했다. 션은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헤리퍼드 공작 부인. 그 이름이 가지는 권력이나 힘에 대해서 션은 일절의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엘리엇의 아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몹시 그 이름에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션은 멍하게 엘리엇의 옆에 있는 아일라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거기 있는 엘리엇의 웃는 모습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아내의 이야기를 할 때 그가 어떤 식으로 웃는지 션은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연인과 더불어 행복해졌기 때문에 엘리엇도 자기를 본격적으로 만나 보기로 했다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문득 웃었다. 엘리엇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는데도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이만큼이나 많이 알고 있다. 어이가 없었다.

“공작 부인? 네가 실질적으로 엘리엇과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엘리엇이 나하고 이혼했다고 왕실에 보고라도 했어? 아니면 공식 석상에서 법적 절차는 밟지 않았지만, 혼인 관계가 해소되었다고 발표했어? 무엇을 위해서 이혼 서류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공작 부인의 반지는 아직 내 손에 있고, 엘리엇이 의식불명인 이상 헤리퍼드의 모든 권리는 내가 대리해. 이자는 헤리퍼드로 데려가겠어.”

“데려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엘리엇의 무덤에 순장이라도 할 셈이야?”

“엘리엇은 아직 안 죽었어!”

문이 세 번째로 열렸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온 것은 리암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요원 몇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알버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엉망진창이군. 안가가 이렇게 간단히 들통나면 곤란한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얼스터 백작께서는.”

“그만해. 나는 아일라를 뒤따라온 거니까.”

리암이 심호흡하여 숨을 고르고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르게 했다.

“아일라, 미리 의논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보고가 급하게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어. 빨리 오지 않으면 손쓸 수 없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그녀가 알버트를 노려본 채로 말했다. 알버트는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히 아일라 때문에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션이 사라지고 아일라가 뛰쳐나가는 것을 봤을 때부터 이미 상황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리암은 머리가 아픈 것을 느꼈다. 다행히도 아직 늦지는 않았다.

“둘 다 그만둬. 지금은 엘리엇이 중요하잖아.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이것도 중요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게 할 수 없어. 공작 시해 미수범을 끌고 가.”

“아일라!”

“사적 처벌이다, 이건!”

헤리퍼드의 경호원들이 션의 어깨를 붙잡고, SSB의 요원들이 위협적으로 앞으로 나섰다. 리암이 소리를 질렀다.

“둘 다 그만 좀 해! 알, 네게는 그럴 권리가 없어! 그리고 아일라! 너도 그래. 네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엘리엇이 처형권의 행사를 원할 리 없잖아!”

“엘리엇은 못 그러겠지. 그러니까 내가 할 거야. 이게 엘리엇을 위하는 일이야. 쓸데없이 마음 흔들리게 살려 놓을 필요 없어.”

“아일라!”

“냉정하게 생각하지 그래. 데려간다고 해도 뭘 어쩔 건데. 센터의 리스트레인 룸으로는 션 맥케인의 GFG를 막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가둬 둘 셈이야?”

“엘리엇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좀!”

“깨어나지 못한다면! 넌 어차피 이자를 살려서 이용할 작정이잖아!”

“U급의 GFG입니다, 외삼촌. 그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아시잖습니까?”

“엘리엇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을 배제하고 이루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션은 앵무새처럼 또다시 물었다. 이 사람들은 이상하다. 엘리엇이 죽어 가고 있는데, 그런 것보다 엉뚱한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거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션은 그들이 자신을 GFG 그 자체로 취급하든, 죄악이 묻은 돌덩어리로 취급하든 그런 것은 조금도 관심 없었다. 그는 다만 엘리엇에게 가고 싶었고, 엘리엇에게 죄스러워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엘리엇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태이며, 그 책임에 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아마도 SSB라든가, 왕실 같은 것이― 개입해 있으리라는 것뿐이었다.

그것에는 좀 화가 났다. 게다가 초조해졌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해서 그에게 설명을 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손목을 묶고 있는 제어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GFG를 끌어 올렸다. 리스트레인 룸이고 제어기고 간에 그에게는 약간 거추장스러운 보조 장치 정도에 불과했다. 억제력 이상의 힘을 끌어 올리자 제어기에서 파지직거리면서 전류가 튄다. 방해 전파를 발생시키는 리스트레인 룸의 코일들이 시퍼런 불빛을 내면서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소리가 난다.

“헉,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일이!”

“억제력을 강화해!”

누군가가 소리 질렀지만, 리스트레인 룸의 억제력은 이미 최고 수준으로 가동되고 있는 중이었다. 션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센터의 리스트레인 룸이 제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여기는 괜찮으리라고 생각하시다니 참 이상하군요, 알버트 왕자님.”

“막아!”

알버트가 외쳤다. 그러나 GFG를 완전히 개방한 상태인 션의 말은 명령 같은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다.

“멈춰.”

방을 지키고 있던 요원과 경호원들이 한꺼번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초점을 잃은 자들에게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총을 내려놓고 앉아.”

요원들이 천천히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알버트가 새파랗게 질렸다. 이변을 깨닫고 밖에서 서둘러 쫓아온 자들이 더 있었지만, 그들도 예외는 아니다. 어디까지 그 힘이 통했는지 바깥도 이내 조용해졌다.

아일라가 경악하며 핸드백을 마구 뒤졌다. 그러나 그녀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하얀 핸드백에서 굴러 나온 작은 리볼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감히 그것을 줍지 못하고 션의 GFG에 휩쓸린 채 목이 졸린 듯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알버트는 그것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결국 무기력증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를 흔들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션은 천천히 알버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손끝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구속구의 열쇠를 가져오게 하세요.”

“나에게, 명령을…….”

“저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하셨을 텐데……. 미란 님께서 날 풀어 줄 때 컨트롤을 익히는 것 대신에 억제 처리를 조건으로 다셨던 이유를 이해 못 하신 것 같군요. 감정의 증폭과 동조를 동시에 가진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증폭 능력만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동조가 있는 이상 저는 상대방에게 언제든지 긍정의 대답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건.”

“그분은 내게 빚을 지워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당신 자신이 나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이상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왕자님의 기량은 미란 님에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군요. 이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궁금하십니까?”

알버트는 숨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제 구속구를 풀어 주시겠습니까?”

알버트는 인터폰을 들어 침착한 목소리로 더 이상 사람이 들어오지 말고, 구속구의 열쇠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자기 의지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션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것을 빨리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자네, 이래서는 안 되네.”

리암이 얼어붙은 채로 신음했다. 션은 약간 멍이 든 손목을 주무르며 이번에는 아일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노기와 욕망으로 동시에 번들거렸다. 션은 한숨을 쉬고 의자에 앉았다.

“앉으시죠. 세 분 다.”

세 사람이 각자 침착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아일라의 몸이 션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과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싸우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엘리엇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어린애를 이해시키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아일라가 핸드폰을 꺼내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얌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집중 치료실이야. 눈에 띄는 차도는 없다고 하고.”

“그렇습니까.”

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보자 시커먼 공동이 그 안에 뚫려 있다.

어떻게 할까. 그는 침묵한 채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을 앞에 두고 고민했다. 뭔가가 잘못되었던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의 GFG는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고 원하는 대로의 결과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 것은 엘리엇 쪽이었을까.

두통이 심해서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떻게 할까? 이 사람들을 전부 다 장악해 버릴까. 그러면 엘리엇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주위의 모든 사람을 전부 세뇌해 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그를 가질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런던 전체라도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엘리엇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배제해 버리면 그것도 단둘만의 세상이기는 할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엘리엇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맡길 작정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리암은 빨리, 알버트가 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일라는 거의 온몸을 벌벌 떨면서 그의 말을 거역하려고 애썼다.

역시, 죽여 버릴까.

션은 살의를 품으며 아일라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몽땅 다 가진 주제에 필요 없다고 떠났다는 이 여자부터 제거할까. 아니면 엘리엇이 보는 앞에서 미친 듯이 자신에게 달려들게 만들까? 그러면 그의 안에 이 여자가 남긴 아름다운 그림자는 사라질까?

“자네, 이러면 안 돼.”

리암이 신음하며 그녀를 가로막으려 했으나 온 힘을 다해 의자에서 일어서기는 했어도 두 걸음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아일라를 해치면 헤리퍼드의 적이 돼. 그건 엘리엇의 적이 된다는 뜻일세. 그러고 싶은가?”

그럴 수는 없다.

션의 심경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리스트레인 룸의 벽에 푸른빛이 지직거리며 달렸다. 엘리엇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서 그는 물끄러미 아일라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에게 힘이 통하지 않는 이상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행동을 잘하는 수밖에 없다. 션은 엘리엇에 대해서 하나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아내를 해친 자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결국 해치지 못한다.

그가 심적으로 불안정해지면서 리스트레인 룸의 과부하가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다. 푸른빛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았고, 건물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그 순간 션의 뒤통수에서 찰칵, 하고 공이치기 당기는 소리가 났다.

곧 비상 발전기로 불이 들어왔다. 실내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것을 인지한 다음에야 션은 자신에게 개입하고 있는 지각계 GFG를 느꼈다. 그는 눈으로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서도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하군. 리스트레인 룸과 제어기를 터뜨리는 능력자가 있다는 건 이야기로밖에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당신…….”

보통 사람이 아니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션은 놀랐다. 준형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네 GFG가 통하기는 하지만, 나는 원래부터 손가락하고 머리하고 심장이 각각 따로 노는 인간이라서. 너, 눈으로 보이지?”

“…….”

“보인다면 긴말할 거 없겠군. GFG를 거둬.”

“어떻게 내 지각에 걸리지 않고 들어온 겁니까?”

“영업 비밀이야.”

션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나에게 명령하지 마십시오. 휘둘리는 데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납니다.”

“자네, 후회할 거야.”

알버트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바닥까지 깔린 목소리는 오히려 지금 그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는 것 같았다. 션은 킥 웃었다. 두렵기는커녕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의 뒤통수에 총구를 꾹 누르며 준형이 나직하게 말했다.

“맥케인. 잘 생각해. 이건 아직까지는 불행한 사고야. 하지만 네가 알버트 왕자나 리암 왕제, 공작 부인을 해치는 순간에 테러가 되는 거라고. 엘리엇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니면, 영국 전체와 싸울 생각이냐?”

션은 그렇게 된다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별로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긴장된 침묵이 실내에 퍼졌다. 적막해진 리스트레인 룸에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션은 아일라에게 받아 보라고 눈짓했다. 그녀는 그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더듬더듬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리? 나야. 아!”

그녀의 얼굴이 확 하고 빛났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서 기쁘게 외쳤다.

“엘리엇이 회복실로 옮겨졌대. 아직 의식불명이지만 고비는 넘겼고, 지금은 뇌파도 정상이라고.”

“아아!”

리암이 탄성을 지르고, 준형의 기세도 한 꺼풀 꺾였다. 온통 새까맣던 실내에 일부분 부드러운 바람이 감돌기 시작하는 바람에 션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가 망설이는 것을 깨달은 리암이 말했다.

“자네도 이제, 그만하게.”

“…….”

“거기 총 든 친구의 말이 맞아. 엘리엇이 깨어났을 때를 생각해. 그는 자네를 보호하고 싶어 했어. 쓰러지는 순간에도 자네를 다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네. 그런데 자네가 자기 때문에 이런 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션은 입을 다물었다. 엘리엇이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했더라는 말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반박하려는 입은 열리지 않았다.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힘없이 리암을 바라보았다. 리암이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엘리엇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 같은가? 그가 죽으면, 이게 유언이 될 거야. 나는 그 말이 내게 남겨진 거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는 자네가 건강히……. 몸 성히, 행복하기를 바라서 그리 말했을 걸세. 부디 그 마음에서 등 돌리지 말게.”

진심으로 그 말을 믿은 것도 아니면서, 마치 둘로 분열된 인격 중 하나가 갈아 치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션은 기운을 잃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다 바보같이 느껴져서 그는 GFG를 거둬들였다. 영국과 싸워? 엘리엇의 주변 사람을 전부 제거해서 그를 손에 넣는다? 그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자신이야말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가 건강히, 몸 성히, 행복하면 된다고.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닌가.

그는 처음에 이 자리에 던져졌을 때처럼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엘리엇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못한 자신의 추악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자신은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었던 것 같다. 오물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도 오물이다. 별수 없는 일이었다.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운 움직임이 허용되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알버트였다. 그가 민첩하게 일어나 긴급용 벨을 누르려는 순간 준형의 총이 그것을 쏴 버렸다. 알버트가 고개를 돌리며 사납게 외쳤다.

“JK 2)! 네가!”

“제 클라이언트는 왕자님이 아니라 엘리엇이라서 말이죠.”

“JK와 션 맥케인을 제압해!”

“하지 마, 알!”

리암이 소리쳤다.

“너야말로 헤리퍼드를 적으로 돌리려는 거냐! 엘리엇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마! 만약에 조금이라도 뭔가 하려 든다면, 네가 엘리엇을 해치려고 했다고 누님에게 말씀드리겠어.”

“여기가 어디인지 잊으셨습니까? SSB입니다. 여기서 감히……!”

“먼저 문제를 일으킨 건 너야!”

리암이 벌떡 일어섰다.

“센터에서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람을 SSB로 빼돌린 것부터가 이미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거야! 하물며 엘리엇이 깨어나서, 네가 그의 목숨을 빌미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체스 말로 쓰려고 했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의 인내는 무한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한해서야.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는 거라고. 너도 알잖아.”

“이건 한두 명의 감정 문제로 취급할 일이 아닙니다.”

“상원에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들춰내면 곤란해지는 건 네 쪽이야, 알. 자칫하면 앤드류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어. 왕실에서 헤리퍼드 공작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라는 걸 잊지 마!”

알버트가 그를 노려보았다.

“외삼촌은 누구 편인지 모르겠군요.”

“나는, 사랑의 편이지. 항상.”

리암이 소매를 끌어당겨 이마를 닦았다. 알버트는 잠시 그를 바라보고는, 이내 말없이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명령이 된 듯이 바닥에서 몸을 튕기듯 일으키며 거리를 확보하고 실내를 장악했던 SSB 요원들이 총을 집어넣고 알버트를 따라 나갔다. 모두 자리를 비우는 것을 확인하고는 리암이 의자에 늘어졌다. 긴장이 풀리자 사지가 뻗어 버릴 것 같았다.

준형이 말했다.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왕제 전하.”

“자네는 엘리엇의 에이전트이지? 방금 자네 때문에 헤리퍼드와 SSB가 완전히 등을 돌릴 뻔한 건 아는 건가?”

“션 맥케인을 살리려는 건 엘리엇의 유언이라면서요. 그 의견에 동의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SSB와 헤리퍼드가 척진 것은 30년 전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저보다도 공작 부인에게 화를 내셔야죠.”

그런 말을 해도 아일라는 아예 책상에 엎드린 채 말이 없었다. 그런대로 잘 견뎌 낸 알버트나 처음부터 영향을 적게 받은 리암과 달리 션의 적의를 정면으로 받은 탓에 너덜너덜하게 지쳐 있었다.

“아일라, 일어날 수 있겠어?”

그녀가 엎드린 채 고개를 저었다. 리암도 힘없이 그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묻기는 했지만 힘들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GFG의 영향이 끊기는 순간 정상으로 돌아온 SSB 요원들과 달리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헤리퍼드의 경호원들을 한 번씩 걷어차 깨우면서 준형이 빠르게 말했다.

“빨리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버트 왕자가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니까요. 공작 부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면 후계자가 없는 헤리퍼드는 와해됩니다. 알버트 왕자라면 분열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 말이 맞다. 이곳은 SSB의 비밀스러운 장소 중 하나이고, 병원에서 뛰쳐나와 달려온 아일라가 그런 경우의 대비까지 전부 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리암은 애써 아일라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를 일으키려고 애썼다. 아일라가 울음을 다 멈추지 못해 벌벌 떨면서도 눈물과 녹아내린 화장이 뒤엉켜 덩어리진 얼굴을 들었다. 경호원들이 다가와 대신 그녀를 부축했다. 그는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는 션을 불렀다.

“자네도 가세.”

“…….”

“엘리엇을 보러 가야지.”

션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아일라도 정신을 차린 듯이 입을 열었다.

“리암? 저 남자를 엘리엇에게 데려가겠다고?”

“아일라.”

“안 돼. 저 남자는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엘리엇 옆에 데려가다니, 말도 안 돼.”

그녀가 혀를 깨물 정도로 떨면서도 강경하게 말했다. 리암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알의 말이 맞아. 넌 이미 엘리엇 옆을 떠난 사람이고, 네가 이럴 권리는 없어.”

“하지만!”

“위험한 순간에 엘리엇이 네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넌 엘리엇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잖아.”

“그걸 내가 왜 몰라. 엘리엇이 진심이었으니까,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거라고.”

“아니야, 넌 하나도 몰라. 안다면 이렇게 할 리가 없어. 설령 알고 있다 해도 아일라, 모든 결정권은 엘리엇에게만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리고 엘리엇은 아직 죽지 않았어. 네 권한은 엘리엇이 모든 판단 능력을 상실했을 때만 유효한 거야.”

“그렇지만……!”

“그랬었죠.”

문득 준형이 끼어들어 웃음을 섞어 대꾸했다. 그러자 아일라가 어린애처럼 흐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충격이 몸에서 다 빠져나가지 않은 탓이다.

“병원에는 내가 가 볼게. 넌 일단 집으로 가. 알았지?”

“리암 경께서는 혼자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더 이상 무리한 짓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리고 나는 엘리엇의 친구이니까.”

아일라는 몇 걸음을 간신히 걸었지만, 구두 한쪽 굽이 부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벗어서 내던졌다. 절뚝거리며 문밖으로 사라질 때쯤에는 울음도 그쳤다.

리스트레인 룸이 고요해졌다. 어느 틈에 준형도 사라지고 없었다. 리암은 션의 건너편에 앉았다. 션은 갈라진 나무토막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이제 가십시오. 엘리엇이 깨어날 때까지 얌전히 여기 있겠습니다.”

“같이 병원에 가야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션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다시 두통을 억누르려고 두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제가 죄인이라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더 이상 사고를 치지 않을 테니, 가십시오. 엘리엇이 깨어나면 그 소식만 전해 주십시오.”

“나를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게. 일어서. 공식적인 처분이 나기 전에 엘리엇을 봐야지.”

션은 그 말에 리암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인 처분이라는 말에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리암이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로군. 얼굴을 닦고 나와. 나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네.”

션은 말없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제어기를, 차고 싶습니다.”

아무리 억제해도 자신의 GFG는 완전히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엘리엇에게 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차마 그냥 갈 수 없었다.

리암이 “그래.”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고, 먼저 리스트레인 룸에서 나갔다. 션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구겨져 엉망인 옷을 바르게 다시 입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자신의 죄와 마주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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