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끼이이익!
쿵!
날카로운 파열음에 이어 충격이 들려와, 션은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소곤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차갑고 서늘한 것이 뺨을 스쳐 션은 그것이 낯익은 백금발이리라고 생각하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제야 뺨을 스친 것이 빗방울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인 모텔의 작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션은 흐린 눈을 뜨고 잠시 자신이 어디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준형의 바가 내려다보이는 호프집에 있었을 것이다.
중간부터 기억이 없었다. 술에 취한 채 혼자 여기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면 주위에 위험할 거라는 자각이 있어서 그랬는지, 귀소본능처럼 익숙한 모텔로 찾아든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야, 이 개새끼가!”
창문 너머로 큰 욕설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길로 난폭 운전을 하며 들어온 차가 있어서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그게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을까 멍하게 생각하다가 션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점검하고 GFG의 증폭 능력을 차단하자 바깥에서 갑자기 욕설이 뚝 그쳤다. 하지만 채 2분도 되지 않고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션은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엉망이다. 눈이 시뻘겋고, 얼굴도 그랬다. 션은 따뜻한 물을 틀어서 얼굴을 적셨다. 숙취 때문에 속이 뒤집힌다. 음주를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또 그래 봐야 뭘 하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을 위해서, 자제 따위를 해야 하는 건데.
엘리엇이 사라진 지 이제 두 달이 넘었다.
그것은 헤어진 것이 아니다. 션에게는 그랬다. 사라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엘리엇은 깨끗하게 증발했다. 그는 자신이 엘리엇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그는 엘리엇의 풀 네임도 몰랐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어느 동네에 사는지도, 휴일에는 무엇을 하러 다니는지도 잘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전화번호였는데, 그마저도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결번이라는 무정한 음성을 듣고도 션은 믿을 수가 없어서 수백 통 넘게 같은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다고 해서 이미 끊긴 회선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걸었다가 끊고, 걸었다가 끊고. 그러다가 그는 그 전화번호조차도 처음부터 엘리엇의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는 션과 연락하기 위해서 아예 핸드폰을 따로 만들었던 것이다. 종종 연락이 안 되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파트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션은 며칠 전에도 엘리엇의 아파트에 들어가 보았다. 그 아파트에는 이제 관리인만 없을 뿐이지, 현관의 비밀번호까지 이전 그대로였다. 아니, 굳이 바꿀 이유조차 없었던 것이리라. 먼지가 내려앉은 테이블에 손자국을 남기고 그는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건물은 텅 비어 있다.
션은 가장 먼저 준형의 바에 찾아갔었다. 그러나 준형이 그에게 엘리엇의 연락처를 알려 줄 리가 없다.
“요즘 오지 않아요.”
그는 변함없이 영업용 웃음을 띤 얼굴로 그렇게만 말했다. 션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준형을 억압해서 강제로 토설하게 할 수는 없었다. 모든 GFG 능력자는 능력의 종류와 관계없이 일정 부분 정신 방어를 가지고 있다. 준형은 적어도 A급 이상으로 보이는 GFG 능력자였고, 그렇다면 정신 조작계에는 미치지 못해도 상당한 수준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때려 부수기 어려울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대부분의 상위급 능력자가 그러하듯이 센터 1)의 관리를 받고 있을 것이다. 그를 제압해서 뇌를 뒤지고 나면 자신이 억제 처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트러블이 생기면 시간의 낭비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엘리엇의 친구를 해칠 수는 없었다. 찾아내지 못하면 다시는 만나지도 못할 텐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여졌다. 엘리엇에게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아직까지는 그만큼의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그는 아파트의 명의자와 핸드폰 번호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므로 처음부터 흥신소 두 곳에 의뢰했지만, 한 곳은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다른 한 곳은 그나마 핸드폰 번호의 명의가 한 번도 영국에 들어온 적이 없는 필리핀의 어느 노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뿐이다.
아파트 명의도 거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 션은 중개업자를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GFG를 이용하여 상대를 매혹시키고 이성을 뒤흔들어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었지만, 결국 진짜로 집을 사들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션은 처음으로 군이나 국가에 투신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까지 억제하는 방향으로만 컨트롤을 발전시켜 온 것도 후회했다. 능력을 좀 더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면 지금쯤 엘리엇을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숨기려고만 하지 않고 활용해 왔다면, 지금쯤 사람 하나쯤은 찾을 만한 조직과 자금력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엘리엇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마,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자네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네.’
션은 엘리엇의 그 말을 떠올렸다.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션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말씨는 진실했지만, 감정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션은 지금까지 타인을 그런 식으로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위선자도, 거짓말쟁이도 숱하게 만나왔고, 그건 사실 주위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는 늘 만나는 순간 상대에 대한 판단을 끝냈고 그것은 틀린 일이 없다. 엘리엇을 제외하고. 오로지, 엘리엇만 제외하고.
션으로서는 좋아하지만, 낭비가 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 같은 것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하면 함께 있고 싶어지고, 갖고 싶어지고 원하게 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본능적인 감정이고, 그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엘리엇의 그 말은 거짓이다. 아주 조금 정도는 좋아했는지도 모르지만, 션을 얻기 위해 다른 희생을 단 한 가지도 치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작은 감정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반대로 어쩌면 진짜였는지도 모른다고, 엘리엇은 다른 것을 잃고 싶지 않았어도 적어도 자신을 좋아했던 것만은 사실인지도 모른다고 믿으려 애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서도 믿고 싶어 하는 그런 모순된 감정에 그는 밤마다 열병 걸린 사람처럼 앓았다.
‘나는 자네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네. 그게 바로 자네와 내가 결코 공감할 수 없다는 증거이지.’
하다못해 동조라도 일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엘리엇만이 예외였을까. 션은 절망감을 느꼈다. 세상에 유일하게, 단 한 사람, 동조를 일으켜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만이 그에게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유혹할 자신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원하는 사람만은 그의 것이 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라고. 그가 말하는 신의 은총 따위는 뺨에 닿는 숨결 한 올만큼의 가치도 없는데.
션은 세수를 하고, 머리를 적셔 대충 정리만 하고 모텔 밖으로 나섰다.
4월인데도 날씨가 우중충해서 기온이 싸늘했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점퍼를 걸쳐 입고 옷깃을 세웠다. 모텔 앞에서 싸우던 남자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자들에게 흘끗 시선만 주고 그는 걸음을 옮겼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남자가 뒤에서 션의 어깨를 잡아챘다.
“지금 꼬라봤어?”
션은 그 남자의 손을 탁 쳐 내고, 어깨를 털었다.
“지금 사람을 무시해?”
남자가 성을 내는 순간에 심부 깊은 곳에 절망감을 쑤셔 박는다. 고작해야 그가 느끼는 고통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감정을 전이시켰는데도 남자는 넋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션은 마치 조소하듯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절제력을 풀어 놓고 걷자 금세 길거리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추돌 사고가 생기고, 아이가 차도로 뛰어들려 하고,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저 부딪쳤을 뿐인데 상대에게 주먹질을 하려 드는 자도 있었다.
거리를 이 꼴로 만드는 것이 화풀이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션은 그렇게 했다. 도로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나서서 정리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곁눈질로 힐끗 보고 션은 어디에선가 엘리엇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러는 일은 물론 없었다.
‘선행을 하고, 동정심을 가져라. 너 이상으로 네게 홀리는 이를 불쌍히 여겨라. 그것이 알라의 보살핌을 구할 것이다.’
억누르고 자제해서, 타인을 휘말려 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괴로워질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자비로운 말을 성실하게 되새겨 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참으로 쓸데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신은 한 번도 그를 보살핀 일이 없었으니까.
* * *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준형의 바에 찾아가고, 처음에 엘리엇을 찾을 때 그랬던 것처럼 길거리를 헤매는 것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을 닥치는 대로 사로잡아서 묻거나 준형의 정신 방어를 강제로 부수고 들어가지 않을 바에야 말이다.
지금이라도 센터에 자신의 GFG가 사용 가능한 것임을 알리고 어딘가에 투신할까. SSB라면 어렵지 않게 사람을 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미란 알 아시리에 대한 감사와 지켜야 할 도리가 아직까지 그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션 자신도 깨닫고 있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GFG를 사용했을 때부터 그의 도덕률은 이미 무너져 버렸다.
엘리엇이 열어 보지도 않고 돌려준 반지 상자는 그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다. 션은 항상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그것을 바라보고, 미처 나올 기회도 없이 거기 갇혀 버린 것이 자신의 가장 인간다운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그것은 호시탐탐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른다. 모든 해악이 튀어나온 듯이 그는 엘리엇에게 잔인한 일을 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를 가두고 사로잡아서, 벗어나지 못할 굴레에 묶어 두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이 수렁 속에서 건져 주지 않는다면, 그를 붙들어 함께 늪 밑바닥에 가라앉으리라고 생각했다.
“엘리엇은 이제 오지 않아요.”
준형이 그의 앞에 모히토를 내놓으며 말했다.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션은 그가 이제 완전히 새파랗게 날을 세우고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션도 이제 애써 좋은 사람인 체하려고 하지 않았다.
“불편하시면, 연락처를 가르쳐 주시면 어떻습니까?”
“이것 참. 아무리 가게 주인이라고 해도 손님 고를 자유가 있다는 건 아셨으면 좋겠는데.”
준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쫓아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역시 운영 원칙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자신이 더 돌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준형이 자신의 행동을 엘리엇에게 보고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션은 가끔 했다. 그의 GFG가 다른 대부분의 사람에게 단순히 접촉해 있는 정도인 것과 달리 자신에게는 온몸을 휘감을 듯이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엘리엇이 그만큼 자신에게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아직까지도 주시할 만큼 자신에게 흥미가 있다면, 다시 연락해 왔을 테니까.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아시잖습니까? 손님과 개인적인 연락을 하는 일 같은 건 없어요. 엘리엇이 이런 곳에 연락처를 남길 리가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가 정말로 맥케인 씨를 피하려고 생각한다면 여기는 절대로 다시 오지 않겠죠. 바보가 아닌데.”
“…….”
“알면서도 고집부리는 건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지 말고 뒤를 돌아보세요. 당신에게 반한 사람들이 널려 있으니까. 하긴, 여기에서 만난 사람이 그다지 제대로 된 사람일 가능성은 없군요. 오지 않는 쪽이 좋습니다.”
너도 그렇지 않느냐는 비웃음이 말속에 섞인 것 같았다. 션은 그래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수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바에서 나오는데 뒤에서 클로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션 씨!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션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클로이는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가슴팍을 부여잡고 말했다.
“마스터의 말은 사실이에요! 엘리엇 씨는 정말로 오랫동안 온 적이 없으세요. 2월 초에 한 번 들르셔서 무색 잔에 술만 한잔하시고 바로 돌아가셨으니까요. 그 뒤로는 오시지 않았어요. 혹시 오신다면, 제가 알려 드릴게요. 그러니까, 저어…….”
“알려 줘서 고마워요.”
션은 그녀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클로이가 붉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자주 오지 마세요. 션 씨를 위해서, 좋지 않아요.”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감사의 뜻을 담아 인사했다.
희망은 한 꺼풀 더 사라졌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넘을 때까지 일을 하고, 밖으로 나와 거리를 헤매거나 준형의 바가 있는 골목 근처에서 머무르면서 오가는 사람을 감시하고, 새벽에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이고 나온다.
션은 자신의 생활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예 연결점이 없으면 모르려니와 처음 만났던 그 거리와 바가 있는 골목이라는 희망이 있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그나마 그것만이 그의 절망적인 희망을 지탱해 주었다.
* * *
그는 일을 늘렸다. 일상에 빈 시간을 만들수록 미쳐 가는 시간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상류층에 접근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놓칠 수 없었다. 최근 오브라이언은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중이었고, 대니얼 풀러는 사교계에 편입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션에게 운이 좋은 일이었다.
션이 팀장을 맡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밀리가 한두 차례 클라이언트에게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징계받을 이유까지는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니얼 밀러는 그녀를 밀어내고 션을 그 자리에 올렸다. 션이 팀장이라면 어지간한 일로는 실수가 있어도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파기하지 않았고, 션 자신도 상류층의 일을 맡는 것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인맥을 넓히고, 가능하다면 상류층과 안면을 튼다. 예전에는 그렇게 얼굴을 내미는 자리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엘리엇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팀장이 되면서 그는 일을 어느 정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원하는 일은 대니얼 풀러의 희망과 맞아떨어졌으므로 오브라이언은 넘쳐나는 프로젝트에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팀원들은 불만을 가졌다. 대부분의 직원은 대형 빌딩이나 이름이 알려진 회사의 보안 시스템 구축을 맡기를 원한다. 그것에 비하면 무슨 귀족의 생일파티이니 보석상의 경비 설계 같은 것은 아무리 스케줄이 여유롭고 돈이 되더라도 보람이 없는 일이다.
대니얼 풀러의 아들 결혼식 날짜가 잡히고 나서부터는 불평도 제법 컸다.
“아들 결혼식에 회사까지 끌어다 쓴다는 게 말이 되냐.”
“정식으로 계약도 되어 있고, 돈도 제대로 받고 있잖아.”
“무슨 결혼식에 보안 프로젝트를 다 쓰냐고.”
“그럴 만해. 손님 명단을 봐. 방금 온 건데.”
밀리가 올리버에게 명단을 건네주었다.
“휘유. 어마어마하군. 사장님이 노력 많이 하셨는데? HSBC 상임이사라든가 브라이언 영 하원의원, 이런 사람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헤리퍼드 공작이라니 이거 진짜야?”
“뭐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 피처버트 자작도 귀족이잖아?”
“격이 다르지. 이쪽은 명예 선언에 연서한 진짜 귀족이라고. 뒤에 ‘오브 헤리퍼드’라고 붙었잖아. 피처버트 씨가 돈으로 간신히 작위 호칭만 사들인 걸 생각하면 전혀 급수가 다르지.”
“격으로 따지면 리암 왕제가 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공작이 1번이지?”
“희소성 문제겠지, 뭐. 리암 왕제야 여기저기 얼굴도 많이 내밀고, 실제로 하는 일도 없고. 맨날 여자랑 불륜한 이야기만 나오던데.”
“불륜은 아니지. 아직 싱글이니까.”
“그건 둘째 치더라도, 솔직히 회사 입장에서는 CE가 무조건 우선 아니겠어? 헤리퍼드 공작이 사주잖아. 인터뷰나 기자회견은 부사장이 대신하지만.”
“어? 그래?”
특별히 큰 사건이 있었거나 관심이 있는 일도 아닌데 전력 회사 사주의 이름 같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다. 타일러가 한마디 보탰다.
“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에 안 배웠어? 명예 선언에 의해서 헤리퍼드 공작가는 국가 전력 사업을 책임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적당한 명목만 붙으면 전력 공급 정책을 일정 범위 내에서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전기 요금 나올 때 뒤에 등급 봐봐. 산업용 전기 A, B, C라고 따로 있을 테니. 지정된 기업이나 산업은 전력 요금이 낮아지고 비상시에 우선권을 받을 수 있게 돼.”
그것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는지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고등학교를 카이루완에서 다닌 션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명단을 봐야겠다고 손을 내밀자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친 명단이 비로소 그의 손에도 들어왔다.
맨 위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리엇 R. 위체 오브 헤리퍼드.’ 약간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는 무심결에 엘리엇이라는 이름 위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이 이름이 그의 이름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아마 확률은 낮을 것이다. 엘리엇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다. 상류층의 부유하고 젊은 남자라는 조건을 붙여 보아도 제외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귀족과 부호의 명단을 놓고 웹상에서 알아낼 수 있는 한 많이 엘리엇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들의 사진을 찾아보기도 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니, 친구 중 누군가 하나쯤은 바보 같은 사진을 올릴 법한데도 수만 장의 사진 속에서 그의 얼굴을 하나도 건져 낼 수 없었다. 하다못해 졸업 사진이라도 남아 있을 법한데 말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사진이 있어서 놓쳤을지도 몰랐다.
밀리가 흥미진진하게 말을 이었다.
“이 공작은 엄청나게 괴팍한 사람이라던데 말이야. 경영을 직접 하고 있는데도 언론을 극도로 싫어해서 얼굴마담을 따로 내보낼 정도이니까. 소문으로는 위클리 메일이 망한 이유가 헤리퍼드 공작의 사진을 찍어서 내보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있더라? 극도로 오만해서 전통 있는 귀족이 아니면 상대도 안 한대.”
“넌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듣고 오냐?”
“구글링만 해 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뭐. 윔블던에서 챔피언이 직접 선물한 사인 볼을 지나가는 어린애한테 던져 줬다든가, 루이스 카터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든가.”
“그것도 소문이잖아.”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전혀 없는 일은 아닌가 봐. 공개 리셉션에는 아무 데도 참석하지 않는다니까. 자선활동을 해도 돈으로만 기부할 뿐이지, 직접 위문을 하거나 그러는 일은 없는 것 같고.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된 일도 있다네.”
엘리엇이 폐쇄적인 모임에만 참석하는 것은 언론과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서이고 그것은 아동기로부터 이어진 습관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그런 오해를 받는 일이 많았다.
보안은 전체적으로 괴팍한 귀빈을 위해 섬세하게 짜였다. 대니얼 풀러가 두 번이나 회의실을 급습했을 정도였다.
“헤리퍼드 공작께서는 특히나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시니까 말일세. 이분이 원래 이런 결혼식 같은 것에 쉽게 참석하는 분이 아니야. 운 좋게! 특별히! 나를 생각하셔서 참석해 주시는 거니까 유념해야 할 걸세. 특히 언론! 사진!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써야 하네!”
그는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밀리가 다분히 빈정대는 태도로 대꾸했다.
“홍보 차원에서 계획하신 건데, 오히려 언론에 팍팍 뿌려야 하지 않나요?”
“무슨 소리! 이런 건 굳이 이쪽에서 나서서 알리려고 하면 천박해 보일 뿐이지. 아무튼 조심해. 조심에 또 조심. 헤리퍼드 공작께서 참석하신다고 하면 어중이떠중이까지 기웃거릴 우려가 있으니까.”
“리암 왕제 쪽에서 요청받은 것은 없습니까? 피처버트가에서 보내온 손님 명단 중에는 이쪽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아, 그분은 그렇게 신경 많이 쓸 것 없네. 리암 경은 워낙에 노출되는 데에 익숙한 분이기도 하고, 특별히 신경 쓰는 것도 없는 분이라서.”
역시 희소성이 문제인 것 같았다.
그밖에는 그럴듯한 이름이 없었다. 사장 겸 클라이언트가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기는 했지만, 유명인보다도 명사와 재계 인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손님 명단이라서 그렇게까지 언론 같은 곳에서 관심을 가질 리도 없다.
더군다나 신랑인 브라이언 풀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신부인 알렉산드라 피처버트도 특별한 사회적 활동 없이 집에서 신부 수업 중이었다. 헤리퍼드 공작이 유명하다고는 해도 가문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도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가문의 후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헤리퍼드 보안부에 요청하여 받은 프로필도 매우 형식적인 것이었다. 언론의 관심사라면 역시 리암 튜더이겠으나, 대니얼 풀러의 말마따나 워낙에 가벼운 일로도 파티에 얼굴을 잘 내미는 사람이니 기껏해야 이번에는 어떤 끝내주는 미녀를 옆에 끼고 나타날까 하는 것이 심심풀이로 이야기될 뿐이었다.
퇴근길에 션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자신의 GFG가 반경을 넓혀 가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내쉬는 숨결에 섞인 습기가 공기 전체를 축축하게 한다. 이끼 낀 소택지처럼 모든 것이 넘실거린다. 그는 그 공간 전체를 지배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지배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거기에는 그가 소망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추운 날에 헤어져서 또다시 옷깃을 세워야 하는 날이 다가온다. 절망감이 부풀어 오르는 만큼 그의 GFG는 성장하여 파워를 늘리고, 그는 하루하루를 마치 진흙탕 속에서 기어 다니며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