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8/52)

6.

기쁨이 컸던 만큼 절망도 컸다.

션은 아파트를 뛰쳐나오면서 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했지만, 되돌아가 사과하지는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버스를 타러 가는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엘리엇의 이름을 보고 그는 전원을 꺼 버렸다. 지금은 이야기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아니, 벌써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엘리엇이 자신을 애인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연애를 할 마음이 없다는 것도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생길 때까지의 관계라고 못도 박았다. 결코 션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매번 자각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그사이에 아파트에서 나간 일이 없었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간혹 헤어지기 전에 광장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거나 차를 마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아파트 공간이 조금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엘리엇은 밖으로 나가자고 한 적이 없고, 오로지 관계를 그 안에 머무르게 하겠다고 처음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내켜 하지 않았었지.’

자신과 함께 외출하느니 차라리 집 안에 영화관을 만들어 버린다. 섹스의 전희로서는 다정한 말을 건네기도 하고 식사도 하고 다음 날까지 함께 끌어안고 자지만, 그것조차도 엘리엇에게는 육체관계의 일부이며 그 이외의 모든 다정한 말은 같이 자는 사람에 대한 예의인 모양이다. 처음 잤던 날에 차분한 말씨로 충고를 해 주었던 것처럼.

여전히 자신은 ‘몸’에 불과하다.

션은 그 사실을 실감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조금 더 오래 옆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졌다고 자신은 착각했던 것 같다. 데이트 따위를 생각하고. 아니, 포기하고. 포기했다는 것은 기대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사정이 있었으니까 다음에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집에 초대할 계획을 세우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장을 봐서 저녁 준비 같은 걸 하고, 그가 자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 어떻게 지냈는지, 조금은 자신의 생각을 해 주었는지 따위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션은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진정하자. 격한 감정은 주위를 파도치게 한다. 이런 순간에조차도 자신은 마음껏 괴로워할 수가 없다.

“이보세요, 괜찮아요?”

누군가가 물었다. 한 명이 물꼬를 트자 순식간에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션은 대답하지 않고 구역질을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떴다.

“여보세요!”

“당신, 괜찮아요? 얼굴이 새파란데!”

어린아이 하나가 울기 시작했다. 션은 어금니를 악물고 감정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GFG의 범위를 확장시켜 타인에 대한 불쾌감을 사방에 퍼뜨렸다. 모여든 동정과 연민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에는 1분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렀는지도 잊은 것처럼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분분히 흩어졌다.

이렇게 쉬운데.

그는 허탈한 얼굴로 자신을 중심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비어 가는 광장을 바라보았다.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이시키는 것은 이렇게도 쉽다. 아는 것도 항상 그랬을 터이다. 오로지 엘리엇만 제외하고.

능력 같은 게 없이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션에게는 그게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다들 어떻게 서로 관계 맺고 공감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걸까.

그는 엘리엇을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무게의 마음이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약간의 변화 정도를 기대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함께할 만한 일도 많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적어도 션은 그렇게 믿었고, 이제 서로를 충분히 믿을 수 있고 알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한 걸음을 더 내디디려 한 것이었는데.

션은 다시 눈을 가린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것도 결국은 자신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 엘리엇은 자신의 삶과 분리된 밀실 안에서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렸을 뿐이다. 그리고 역시 밀실 안에서 같이 하는 일이라면 늘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엘리엇에게 있어서 그 바깥의 일은 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문제이니 말하지 않고, 예의 바른 신사답게 역시 션이 밀실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당하고, 논리적인 일이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그것만으로는 더 견딜 수가 없어졌다는 데에 있다. 그는 이제 엘리엇의 시간이 아니라 그의 삶을 원했다. 벌써 훨씬 전부터 몸만으로 괜찮지 않았다.

한 달의 기다림은 소망에 추처럼 매달려 그의 사랑을 추악한 감정으로 끌어 내린다. 션은 부당한 배신감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사 뒀던 와인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 들고, 초와 치즈를 챙기고, 미리부터 회사 앞의 인도 요릿집에 드나들면서 향신료를 나눠 달라고 주방장을 꾀고, 일찌감치 집을 나서 저녁을 준비했던가. 그럴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저 늦은 밤이 되면 가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그를 눕혀 실컷 쾌락이나 탐하고 새벽에 돌아왔으면 됐었을 것을.

그는 엘리엇이 당황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로 션이 화를 내는 것에 놀란 것 같았다.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는 말에는 심지어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마음은 그렇게도,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었나.

‘말한 적도 없는 주제에.’

션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결국 겁나서 제대로 고백 한 번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다. 하지만 엘리엇이 스스로 마음을 열어 주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차분하게 정이 깊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목구멍까지 치솟은 갈망을 억누르고 움츠린 채 이 감정이 들키면 그에게 내쳐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숨겼을 뿐이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다.

* * *

션은 휴가를 냈다. 도저히 이대로 일을 하러 나갈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크리스마스 때부터 신년에 이르기까지 남들 쉬는 동안 줄곧 일만 했기 때문에 밀린 연가가 쌓여 있었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회사에 전화를 하자 밀리가 아프냐고 놀라더니 팀원 전원이 전화기를 돌려 가면서 건강한 네가 웬일이냐고 따지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걱정도 해 주면서 한마디씩 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월요일에 다시 한번 엘리엇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션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아서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과는 하고 싶지 않았다. 엘리엇의 놀라던 얼굴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끔거린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상처가 더 아파서 거기에까지 마음 돌릴 여유가 없다.

엘리엇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도저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폭발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생각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그렇게나 마음을 쏟았는데, 짐작조차 하지 못한 엘리엇이 너무한 것이다. 원망스러웠다. 엘리엇에게 무신경한 기질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자신에게 정말로 관심이 조금도 없어서 알지 못했던 게 아닐까.

목요일에는 문자가 왔다. 내일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말에 거절의 답변을 보내고 션은 핸드폰을 던지듯이 팽개쳤다. 생각해 보면 금요일의 예정을 묻는 것 외에 엘리엇이 먼저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그래도 당황하고 있긴 한 것 같다고 션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와서 전달이 되기는 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이제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고 있을까. 곤란하다고 내치고 차단해 버리지 않고 전화를 걸어 주고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션은 엎드려서 내던졌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모르겠다. 그렇게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은 분명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태연한 얼굴로 몸을 섞으려 든다면 심장이 찢기는 기분일 것 같다. 그러나 보지 않으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요일에 뜨는 태양이 졌다. 만나는 날을 위하여 다른 모든 날을 견디고 있었으니, 이제 그 희망이 없어진 이상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든 날이 새카만 늪 속이다.

회사가 그의 실연이나 절망 따위를 이해해 줄 리가 없어서 일요일을 넘기고 두 번째 주의 월요일에는 출근을 해야 했다. 점심시간 즈음에 전화가 한 번 더 왔다. 엘리엇이 낮에 전화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션은 그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업무상 핸드폰은 꺼 놓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문자함과 부재중 통화 기록에는 엘리엇의 이름이 전보다 훨씬 빈번하게 새겨졌다.

수요일 저녁에도 문자가 왔다. 만약에 한마디라도 보고 싶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면 션은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하던 일을 내던지고라도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에도 묻어나는 차분한 어조로 금요일의 일정을 묻는 내용에는 조금도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션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엘리엇이 당황해하면서 전화라도 걸어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연락은 거기에서 완전히 끊겼다. 금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또 지나도 엘리엇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오는 일은 없었다.

션은 그렇게 뛰쳐나오고 나서도 아직 자기가 엘리엇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제 끝장났다고 생각했지만, 엘리엇이 몇 번이고 먼저 연락을 해 주는 사이에 다시 한번 희망을 품은 것이다. 그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으리라고. 자신이 그러했듯이, 연락이 안 될수록 애가 타고 그리운 마음이 점점 커지리라고 말이다. 이 괴로움의 단지 십 분의 일, 아니, 천 분의 일만이라도.

션은 그가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전화를 해야 할까 하고 고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늘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엘리엇은 그러지 않았다. 2주라면 충분히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했을까. 대개 격주로 남자를 만나던 사람이니, 그 정도의 간격 동안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섹파는 포기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남자를 찾으러 바에 갔을까. 션은 멍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미칠 것이다. 그는 엘리엇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키스를 받는 것을 상상했다. 과거에 그가 엘리엇을 알기 전에도 수많은 남자가 이미 그 입술을 맛보고 몸속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 남자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침착한 목소리로 오늘 좋았다고 말했을까. 새로운 남자를 그 아파트로 데려와 션과 수없이 뒹굴었던 침대에서 다리를 벌릴까. 상상 속의 남자는 얼굴조차 불분명했지만, 션은 그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꿈을 꾸었다. 실제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헤어지는 게 나을까. 그는 그런 생각도 했다. 그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을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기쁨을 몰랐던 때는 괴로움 역시 몰랐다. 아무 일 없이 타인과 피부를 맞대고 평온하게 보내는 기쁨을 몰랐을 때는 적막한 집 안에 홀로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침잠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외로움을 알아 버렸다. 매일의 일과가 처참하고 기계적인 일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다. 그는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단 알아 버린 이상 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쪽이 나았다.

그는 핸드폰을 도로 끌어당겨 엘리엇의 이름을 띄워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발신을 누르지는 못했다.

* * *

한 주가 더 지나자 조금은 머리가 식었다. 그렇게까지 흥분했던 것은 기다림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라고 션은 생각했다. 마음이 진정되자 이제 다소나마 자신의 태도를 객관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죄책감이 생겨났다.

엘리엇은 그리 섬세한 성격이 못 된다. 그날의 태도를 보면, 아마도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시사에 밝은 것에 비해 이상하게 인간관계나 물정에 어두운 면이 있는 사람이다. 아마도 진짜로 연애를 해 본 경험은 없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러 나간다는 것이 데이트를 하러 가자는 말로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아마도 그것은 지나치게 희망적인 추측일 것이다. 그러나 함께 있는 것조차 싫은 것은 아닐 거라고 션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집 안에 영화관을 만드는 것보다도 손쉬운 거절이 있었을 테니까. 그가 최소한 자신에게 성적으로 끌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분명한 것은 그것뿐이기는 했다.

그걸로도, 그를 붙잡아 둘 수는 있을 것이다. 션은 GFG가 없이도 자신의 용모와 육체가 남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혹하고 유혹해서, 하다못해 몸이라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해 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어차피 이제 그저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이어 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고 전과 똑같이 지내자고 한다면 엘리엇은 기꺼이 그렇게 해 주겠지만, 션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고백을 하자. 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아파트 안에 머무르는 것도 좋다. 다만, 뭔가 약속이 있다면 좋겠다. 기약 없는 기다림 대신 무엇이라도 확실한 연결이 하나쯤 있다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것이 되어 달라고 고백을 하자. 그것이 맞는 순서이다. 지금까지처럼 겁을 집어먹은 채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거절을 당하면……. 거절당하는 것은 지금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그는 마음을 다졌다.

둑이 터진 것처럼 억눌렀던 소망과 사랑이 온통 뉘를 휩쓰는 물줄기처럼 쏟아져 흘러내렸다.

“부탁 하나 하자.”

그가 밀리를 휴게실로 불러낸 것은 금요일의 일이었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받아 든 밀리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프러포즈 링을 사려고 하는데, 좀 도와줘.”

잠깐 말뜻을 접수 못한 그녀가 눈을 깜박깜박했다. 펄쩍 뛰어 일어서기 전에 감정 상태가 먼저 폭발적으로 부피를 불렸다. 그 폭발의 정점은 외적으로 발현되었다.

“프러포즈?!”

외침은 가감 없이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시선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션은 난처해졌다.

“뭐? 진짜?”

“애인이 있어?”

“뭐야, 누가 션의 애인 본 적 있어?”

“누구? 설계부의 맥케인에게 애인?!”

순식간에 복도가 사람으로 시끌시끌해졌다. 션은 현기증을 느꼈다.

“밀리, 원망할 거야…….”

“아, 미안. 놀라서……. 뭐 해요! 다들 구경났어욧?! 일 안 해?!”

밀리가 눈을 치켜뜨며 새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어지간해서는 화내는 일이 없어서 만만한 션과 달리 그녀는 위세 있는 보안 설계부 팀장이고 성격도 강해서 금세 사람들은 별거 아니라며 흩어져서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봤지만, 노골적으로 물어 오지는 않았다.

션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밀리가 해결해 주기는 했지만, 원인도 그녀이므로 고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밀리는 션이 그러는 기색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진짜야? 애인이 있었어? 그것도 곧 프러포즈 할 만큼 깊은 관계인 여자가? 왜 숨겼는데?”

다다다 쏘아붙이는 목소리 하나하나에 놀람과 질투와 원망의 색이 묻어 있다. 션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휴게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의논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역시 밀리에게 말한 것은 잘못이었을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어제 혼자 매장에 갔다가 호기심 외에도 여러 가지가 뒤섞인 감정을 발산하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돌아온 입장에서 도저히 다시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열대를 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션에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여자가 아주 적었다. 사실 밀리밖에 없었다. 대부분 그와 면식이 생긴 여자는 우정 같은 평화로운 감정이 생기기 전에 먼저 이성으로서의 반응부터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아니야.”

“뭐?”

“반지를 주고 싶은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고.”

교분의 깊이로 따지자면 올리버나 타일러에게 상담해야겠지만, 션이 부러워할 정도로 여러 측면에서 남자다운 인생을 살아온 그들이 보석이나 반지에 대해서 알 리가 없다. 이런 일은 역시 여자의 도움을 얻는 편이 낫다.

밀리가 다시 눈을 깜박거렸다. 션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반지라니. 처음부터 너무 과한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승부를 걸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션 자신은 반지 같은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고, 더군다나 쓸 수 있는 예산 안에서 가장 비싼 것을 산다고 해도 호텔 대신 사용하려고 시내 한복판에 아파트를 건물째 사 버리는 사람에게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 될 리 없다. 그러니 차라리 좀 더 보기에 예쁘고, 의미가 있는 물건을 사고 싶었다.

“너, 게이였어?”

밀리가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거리듯이 물었다. 션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셈이네.”

그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성별에 대한 선호 이전에 그에게는 모든 인간이 다 동일하게 보인다. 오로지 엘리엇만 제외하고 말이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런 걸 의식해 본 적은 없다. 오로지 엘리엇만이 특별했으니까. 엘리엇이 여자였다면 그는 이성애자였을 것이고, 노인이었다면 매우 유별난 성벽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션은 진심으로 그가 어린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부끄럽다거나 숨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단지 친구라고는 해도 그렇게 깊은 교우가 있는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밝힌 적이 없을 뿐이다.

밀리도 그건 이해하는 듯했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녀가 늘 자신을 바라볼 때 반짝이곤 했던 붉은 보라색의 달콤한 흥분과 기대, 불안과 초조가 찬찬히 옅어지는 것을 션은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그녀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처음으로 모르는 척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정직하게 처음부터 대상 외라고 대답해 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는 이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렇구나. 아…….”

“진정했어?”

“아, 미안. 전혀, 절대로, 편견 같은 건 없으니까. 좀 놀라긴 했지만. 그, 뭐라고 해야 할까. 납득이 가기도 하고.”

“납득?”

“아니, 납득이라는 건 좀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뭐랄까, 네가 여자랑 평범하게 사귄다는 건 잘 상상이 안 간다고 해야 하나. 아,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지. 네가 유별나거나 이상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쨌든 넌 여자한테는 진짜 관심이 없었으니까. 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피하지 않으면 곤란해지는 일이 적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건.”

“응, 나도 알아. 그랬구나. 말해 줘서 고마워.”

그녀가 어딘가 후련한 얼굴로 대답했다. 션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것으로 그녀의 마음이 해결되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근데 사귀는 남자가 있는 거였어? 그런 것치고는 크리스마스랑 연말 내내 출근했잖아. 아, 참. 토요일 출근은 절대 안 한다고 뻗댔었지. 저쪽 가족들은 아직 모르시고?”

“그런 이야기는 좀 그렇고, 이래저래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이야. 사실 아직 확실한 관계도 아니고.”

“그러면 프러포즈는 시기상조 아냐?”

“더 늦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고백이라도 해 봐야겠어.”

“그렇구나.”

“어제 이 앞에 있는 매장에 가 봤었는데.”

“티파니에?!”

“혼자서는 진짜 못 사겠더라. 쳐다보는 사람도 많고.”

션은 두 손으로 다시 한번 얼굴을 문질렀다.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더니 눈이 충혈되고 편두통도 좀 있었다.

“그런 거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언제 갈래? 토요일?”

“토요일도 좋아. 언제라도 상관없어.”

“근사한 점심 정도는 살 거지?”

“당연히 그래야지.”

션은 약하게 웃었다. 밀리가 손뼉을 쳤다.

“좋아. 토요일 점심때 만나자고. 해로드 백화점 앞에서 보자.”

“해로드?”

“왜? 예산 모자라? 티파니에 갔었다며.”

티파니와 해로드 백화점의 매장들 중에 어디가 비쌀지 션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다음 주에 밸런타인데이가 있는데 엄청 복잡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아무튼 그 앞에서 만나자.”

“알았어.”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밀리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열 번쯤 실연당한 것 같은 얼굴 하지 말고 기운을 내라고. 나도 가만히 있는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너, 내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알고 있었지?”

“음, 뭐어…….”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굳이 나를 골라 상담을 하더라니.”

굳이 말하자면 방금 실연당한 셈인데도 그녀는 명랑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밝은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서 션은 약간 웃었다. 그녀는 방금 불확실한 이성적인 호감 대신에 확실한 감정 하나와, 션의 비밀―션 자신은 남이 아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지만, 그녀에게는 그렇게 여겨질 것이다―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션은 엘리엇과 우정을 나누거나 그의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역시 자신은 그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안아 보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아마도 그의 애인을 질투하게 되었으리라.

그는 새삼스럽게 밀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녀가 바라는 대로, 농담을 섞어 대꾸해 주었다.

“안목 있는 여자라면 대부분 나한테 관심이 있더라고.”

“잘나셨어. 얼굴 좀 생긴 거 가지고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올리버한테 이야기해 봐야 본전도 못 건질 것 같고.”

“아, 확실히. 별로 도움도 안 되겠지만, 문제도 생기겠다.”

“그렇지?”

션이 동의를 구하자 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내가 이런 이야기 어디 가서 할까 봐 걱정은 안 해도 돼. 나는 네가 나한테 이야기해 준 게 정말, 정말, 기쁘거든.”

“고맙다.”

“그럼, 일하러 갈까.”

그녀가 가볍게 션의 등을 밀었다.

사무실로 돌아가자 수군수군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밀리가 날카롭게 구경거리라도 있느냐고 대응하자 금세 쑥 줄어들었다. 션의 모니터에 동시다발적으로 밀리한테 프러포즈한다는 게 사실이냐부터 시작해서 애인이 애 가진 게 진짜냐는 것 같은 터무니없는 루머를 확인하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정말로 엘리엇이 여자이기라도 하면, 그래서 운 좋게 아이라도 생겼다면, 그러면 엘리엇의 고지식한 성격상 떠나지 못할 텐데. 그런 헛생각을 잠시 하다가, 그래 봤자 소용없었을 거라고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