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관계는 느리지만 차근히 발전해 나갔다. 원나잇은 스테디가 되었고, 침대 안에서도, 밖으로 나와서도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이제 엘리엇은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러 가지 않는다. 대화다운 대화도 없이 오늘 좋았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혼자서 나서는 일도 없다.
그들은 종종 저녁을 함께 먹었고, 거의 매번 토요일 아침을 함께 먹었다. 섹스 하고 있는 순간이 아니라도 그는 아파트에 머물러 준다. 화제를 잘 잡으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수 있을 때도 많았다.
처음에 주소를 받았을 때를 생각하고서 션은 혼자서 웃었다. 엘리엇에게서 만나자는 말과 함께 이곳의 주소를 받았을 때는 그의 집에 초대를 받은 줄로 알았다. 환호하면서 대체 방문 선물로 무엇을 사 가야 할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을 했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고삐를 잡고 또 잡아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다. 설마하니 호텔 대신 사용하려고 아파트를 살 줄은 상상도 못 했고, 이곳이 그의 집이 아니라 안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자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밖에서 약속을 잡는 식으로 만났다면 지금 같은 모습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머물러 있지도 않고, 아마 전과 똑같이 관계가 끝나면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엘리엇에게 단순히 일탈을 위한 밀회 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이곳에서 편안해 보인다. 그를 붙들어 두려고 션은 노력을 많이 했지만, 설령 그가 노력했더라도 호텔이었다면 결코 이렇게 자신의 품에서 잠드는 일 같은 것은 없었으리라.
션은 행복감을 느끼면서 잠든 엘리엇을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에 흩어진다. 가볍게 끌어안으려 했지만 잠결에 엘리엇이 그를 밀어내고 베개를 찾아 머리를 옮겼다. 션은 몸을 기울여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콧날을 손끝으로 더듬고 옅은 금색 털이 솟은 미간에 입 맞춘다.
션은 엘리엇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가 왜 쳐다보느냐고 묻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엘리엇은 약간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 부분 중의 하나였다. 바에서 만나 모텔로 들어가던 때는, 그런 곤란해하는 얼굴조차 하지 않고 평온하게 한 귀로 흘렸었으니까.
그는 혀를 내밀어 엘리엇의 눈썹 안쪽을 살짝 핥았다. 표정이 찡그려진다. 귀여웠다. 이번에는 입술을 핥는다. 잠결에도 감각이 있는지, 키스하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엘리엇이 혀를 내밀었다. 그 혀에 혀를 가볍게 대었다 떼기를 몇 번이나 한다. 안달이 난다. 몇 시간 전까지도 몸을 섞었는데, 또다시 안고 싶어졌다.
성욕이 솟구쳤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더 깊이 닿고 싶어서 몸부림이 나기 때문이다. 꽉 끌어안고 어루만지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다. 그건 꼭 관계를 갖는 것에 이어진다기보다는, 하나로 합쳐지고 싶은 충동에 가깝다. 서로 별개의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개체로서의 경계선을 잃고 타인과 융합되는 일에는 진절머리가 날 터인데, 엘리엇과 함께라면 오히려 바라는 일이 되고 만다.
잠에서 깨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입술을 댄다. 션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엘리엇의 위로 올라갔다. 깨어나면 곤란하니까 무게는 싣지 않는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감촉이 가슴과 배에 맞닿아 와서 더없이 행복했다. 조심스럽게 손과 손을 깍지 끼어 쥔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그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품 안에 가두고 있을 때는 꼭 자기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아침이 오고 눈을 뜨면, 그는 돌아갈 것이다.
함께 덮고 있는 시트 안이 훈훈하다. 실내는 항상 쾌적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렇게 끌어안은 채로 약간 땀이 날 만큼 더운 상태는 몹시 행복했다. 콧방울을 입술로 가볍게 물었다가 놓는다. 엘리엇이 숨이 막혔는지 약간 입을 벌렸다. 션은 정말이지 키스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인중에 입술을 누르는데, 손에 쥐고 있는 엘리엇의 손이 움직거렸다.
“아.”
깨어나려나.
미안함 반, 기쁨 반이 섞인 기분으로 션은 엘리엇의 속눈썹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체모는 모두 머리칼과 똑같이 뿌리까지 백금을 녹여 부은 듯한 플래티넘 블론드였으나 속눈썹만은 갈색에 가까웠다. 군데군데 섞인 금색 눈썹이 반짝거린다. 그 안에서 들여다보이는 눈동자는 관념 같은 물색이다. 션은 그의 눈빛이 그가 두르고 있는 공기만큼이나 보석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자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엘리엇이 중얼거렸다. 션은 그가 손을 빼내지 못하도록 손을 꽉 깍지 끼어 잡았다.
“잠 안 자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나직하게 속삭이자 엘리엇이 약간 몸을 경직시켰다. 션은 기쁘게 웃었다.
“키스해도 될까요?”
“잠도 안 자고, 도대체가…….”
엘리엇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거절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닿기만 했던 입술을 제대로 겹치고 탐스러운 혀를 건지러 입속으로 유영해 들어간다. 엘리엇이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잠에서 막 깨어난 터라서 굳은 듯했다. 션은 그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가 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목을 끌어안아 왔다.
이러면 탐욕스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션은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짚었다. 일부러 회음부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리자 허벅지에 엘리엇의 고환과 성기가 닿아 왔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바에서 남자를 건져 원나잇을 하던 사람치고는 이상하게 보수적인 데가 있다.
꼭 욕정이 솟구쳐서만은 아니다. 그를 붙들어 두는 데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션은 몸에서 힘을 빼 너무 무겁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무게를 실었다. 그렇다고 해서 욕심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엘리엇의 물건이 약간 커졌다. 션은 그가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것도 그의 허벅지에 눌렀다.
“음…….”
혀를 섞으며 더 깊이 그의 입술을 탐닉한다. 등을 훑어내려 엉덩이 골 사이로 손을 밀어 넣자 엘리엇이 허리를 들었다. 어젯밤에 자신이 드나들었던 구멍은 깨끗한 상태였다. 그리고 아직 부드러워서 손가락 정도는 굳이 젤까지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하아. 션. 윽.”
마른 손가락이 뒤에 들어가자 엘리엇이 몸을 약간 경직시켰다. 그대로 션은 달래듯이 등을 쓸어안고 몸을 옆으로 눕혀 엘리엇이 자신의 어깨를 베고 눕게 했다. 그가 다리를 들어 자신의 몸에 엉켜 왔다. 항문이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조인다. 그것만으로도 션은 황홀경에 든 기분이 된다.
“하아.”
엘리엇이 다시 달뜬 한숨을 그의 어깨에 길게 내쉬었다. 마주 닿은 아랫도리를 가볍게 비빈다. 그것은 금세 부풀어 올라 질척거리고 서로의 사타구니를 적셨다.
“션, 조금 더, 아니, 내가 하겠네.”
엘리엇이 아예 그의 몸 위로 올라왔다. 션은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쥐고, 엘리엇이 자기 물건을 그의 것과 겹쳐 쥐는 것을 어지러운 기분으로 내려다보았다. 엘리엇이 손을 움직여 흘러내린 윤활액을 두 물건에 펴 발랐다. 마주 닿은 성기에서부터 찌릿찌릿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
“션.”
그가 재촉하듯이 불렀다. 션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그의 뒤를 가볍게 후볐다. 막 잠에서 깨어난 엘리엇은 적극적으로 움직일 정도의 기운은 없는지 힘없이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가볍게 어루만질 뿐이다. 그러나 션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견디지는 못했다. 못 참고 들썩이면서 손에 완급을 주어 션의 것을 만진다.
“자네, 더 커졌, 하앙.”
단정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어리광 부리듯 비음 섞인 교성으로 바뀐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션에게 멈추라고 가슴팍을 눌렀다. 그리고 엉덩이를 돌리듯이 움직이며 션의 손목을 잡고 손가락을 빼내게 했다. 그리고 션의 위로 몸을 구부렸다.
키스하려는 건 줄 알고 션은 숨을 멈추고 기다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엘리엇이 머리맡의 서랍을 열어 콘돔을 꺼냈다.
“아침인데요?”
싫어서가 아니라 확인하는 차원에서 묻자 엘리엇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말없이 그것을 션의 성기 끝에 끼우고,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잡고 애무하듯이 훑어 내리며 씌웠다.
“으윽.”
션은 엘리엇의 손이 훑고 지나가는 감촉과 기대감 때문에 목을 울렸다.
“역시 화나셨어요?”
“아닐세. 자네 탓이긴 하네만.”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는 션의 성기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의 뒷구멍을 맞추고는,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하, 아, 아아…….”
젤을 사용하지 않아서 빡빡했지만, 콘돔에 발라진 윤활액의 도움도 있어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엘리엇이 목을 젖히고 신음하며 스스로 자신을 삼키는 것을 션은 혼이 빠질 정도로 바라보았다.
“아, 아아, 자네, 탓, 아아, 으, 하아앗……!”
“엘리엇 씨…….”
굵고 긴 물건이 구멍 속으로 전부 들어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충분히 풀어 놓지 않아서 움직이지 못할 만큼 엘리엇의 몸에 빠듯하게 끼인 채로 션은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엇이 안달 나는 사람처럼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체머리를 흔들었다.
“자네는, 아아, 너무, 길어, 하아.”
“엘리엇 씨.”
“끝이, 안 나, 아윽.”
“그런 말씀 하시면, 윽, 곤란합니다, 헉.”
가 버릴 것 같은 것을 참으며 시트를 움켜쥐었는데, 엘리엇이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자는 사람에게, 아, 그런 걸, 아, 들이댄 게, 누군가. 앗. 잠깐!”
“그런 말씀 하시면, 곤란하다니까요.”
션은 엘리엇의 허리를 잡았다. 더 깊게 들어가도록 꾹 내리자 엘리엇이 교성을 올렸다.
“제 탓이라니, 너무 기쁘지 않습니까.”
“가만히 좀, 있게!”
그가 힘주어 션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점잖은 얼굴과 달리 그는 위로 올라가는 것도 꽤 좋아한다. 물론 션도 그것이 좋았다. 품 안에 넣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좋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탐하는데 싫을 리 없다.
엘리엇이 욕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션은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의 일출은 늦는 데다가 흐린 날이라서, 아침 6시인데도 바깥은 캄캄했다. 그는 가판대에서 신문을 이것저것 쓸어 사서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엘리엇은 욕실에서 나와서 침실로 돌아가 있었다. 머리를 빗고 있는 뒷모습을 훔쳐보고 션은 주방으로 돌아왔다. 식사를 준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커피를 내리고, 빵을 썰어 쿠키와 함께 오븐에 넣는데, 엘리엇이 셔츠와 바지를 걸치고 단정해진 모습으로 나왔다.
“커피 냄새가 나는데?”
“차로 드릴까요?”
“음…….”
엘리엇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으나 커피를 부탁했다. 션은 내심 홍차 우리는 법을 어디 가서 배워야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신문 사 왔습니다.”
“고맙네. 한 대 피워도 되겠나?”
“그러세요.”
그가 거실에 딸린 수납장에서 시가와 라이터를 꺼냈다. 션이 싫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그는 매번 허락을 받는다. 그런 점마저도 좋았다.
엘리엇이 느긋하게 시가를 물고 신문을 뒤적이는 동안에 오븐이 타이머 종료음을 울렸다. 먹을지 안 먹을지 모르지만, 배가 고플 것 같으니 일단 커피와 함께 엘리엇의 손이 닿는 곳에 가져다 놓는다.
엘리엇은 이런 시중을 받는 것에 아주 익숙해서 다 먹고 나서 뒤늦게야 깨닫고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션은 자기 손이 닿은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으므로 고맙다는 인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엘리엇의 목소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엘리엇 씨,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 대 정도인걸. 그나마도 한 대를 다 피우는 일은 별로 없다네.”
“그러실 정도면 차라리 끊지 않으시고요.”
“담배는 신사의 도락이라네.”
엘리엇이 웃었다.
“농담이거나 핑계 대고 하는 말이 아니라 흡연실이 중요해. 아무래도 클럽에는 보수적인 사람이 많아서 말일세.”
그 클럽이 션이 아는 클럽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은 명백했다. 거리감에 갑자기 외로워져서 션은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엘리엇은 약간 놀란 듯했지만, 눈을 감아 주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담배 맛이 났고, 션의 입술에서는 커피 냄새가 남아 있어서 서로 다른 향이 뒤섞였다.
입술을 떼고 귓불을 살며시 어루만진 후에 션은 뒤로 물러났다. 조금은 엘리엇이 당황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키스의 뒤에도 그는 동요의 빛 하나 없이 태연한 표정인 채로 들고 있던 시가를 도로 입에 물고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괜찮아.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1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려서 여기까지 왔다. 엘리엇이 그에게 호의를 가져 주고 있는 것은 명백하고, 당분간은 다른 남자가 생길 리 없다. 그러니까 여유 있게 생각하자. 조금만 더, 라는 욕심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참을 수 있었다.
팔락팔락 신문지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렸다. 션은 그사이에 침실로 들어가 시트를 갈았다. 이 집은 엘리엇의 고용인에 의해 관리되고 있고, 드레스룸에 있는 선반에는 항상 깨끗한 침대 시트가 여러 장 보관되어 있다.
션은 그것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엘리엇에게는 단순히 호텔 대신 쓰려고 만든 장소일지라도 그에게는 바깥의 생활을 모두 내던져도 좋을 만큼 소중한 공간이다.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낯선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집을 청소하고 드레스 룸에 엘리엇의 옷을 마련해 두는 것도 싫은데, 그들이 몸을 섞으며 뒹군 침대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볼 것을 생각하면 불쾌하고 껄끄러웠다. 그래서 하다못해 시트라도 갈아 두는 것이다.
요즘에 션은 종종 단둘이 있는 세상을 상상하곤 했다. 외부의 인간 따위는 필요 없다. 엘리엇과 단둘이서, 영원히 아무것도 바깥일을 생각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서로에게만 몰두한 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커먼 늪이 기어 올라온다. 엘리엇이 좀 더 금전적으로 무능력하고,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인간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벌써 내 것이 되었을까.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내 집으로 그대로 안아 데려가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 텐데.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오로지 나로 채워 버릴 수 있었을 텐데.
혹은, 그에게 만약 GFG가 통했다면?
그는 화들짝 놀라 생각을 멈췄다. 그런 욕망이 얼마나 진절머리 나고 끔찍한 일인지 누구보다도 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은 가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을 갖고 싶다거나 차지하겠다는 탐욕은 션에게 있어서 쓰레기보다 못한, 저주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하물며 GFG를 이용해서라니. 그는 자기가 한순간이라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엘리엇은 엘리엇인 대로가 좋다. 션은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거실로 나오자 엘리엇은 아직 신문을 읽고 있었다. 션은 그에게 다가가 어리광을 부리듯이 옆에서부터 끌어안았다. 그가 품은 맑고 청명한 공기가 자신의 엉망진창인 마음까지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션.”
“조금만요.”
그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지만, 션을 더 밀어내지는 않았다. 션은 그를 끌어안은 채 엘리엇의 시선을 따라 신문을 훑었다. 오랫동안 보는 것은 대개 경제면이고, 정치면에서는 뭔가 생각난 것이라도 있는 듯 몇 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내려놓은 시가를 들어 한 번 빨기도 하고, 커피도 마셨다.
더 바랄 것은 없다. 이렇게 그가 일상적인 일을 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같이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도 하고, 통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매주 만나 몸을 섞는다. 그런데도 매 순간이 아쉬웠다. 이렇게 끌어안고 있을 때조차도.
“왜 그러는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은 듯 엘리엇이 고개를 돌렸다. 션은 어렵게 팔을 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좋아서.”
끌어당겨 안은 채로 내 품 안에서 살면 안 되시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참았다.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엘리엇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호의가 단순한 섹스 파트너에 대한 것보다는 조금 더 깊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못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자신은 대체 가능한 ‘몸’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허용해 주는 범위가 넓은 만큼 반대로 틀림없이 ‘선’에 민감한 종류의 사람일 것이다. 이 아파트를 벗어난 것에 관해서는 결코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션은 고개를 젓고 그에게서 물러났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로 눈을 감는다. 자신이 사실은 인간관계에 무척 서투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항상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기만 했었으므로 정작 이쪽에서 다가가는 방법은 잘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엘리엇이 좀 더 마음을 열어 줄까, 어떻게 해야 좀 더 이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까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가 쉽사리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상념은 절반의 행복과 절반의 괴로움 사이에 떠돌다가 결국 그를 사랑한다는 원론적인 결론으로 가 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잠깐 잠이 든 것 같다.
엘리엇이 그를 가볍게 흔들었다. 션은 잠결에 그것을 알고는 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겨 안으려 했으나 엘리엇은 그렇게 순순히 안겨 주지 않았다.
“더 잘 거라면 침실로 가게.”
“싫은데요. 그러면 엘리엇 씨는 돌아가실 게 아닙니까.”
“션.”
“이름, 더 불러 주세요.”
“돌아가지 않을 테니 일어나게.”
션은 한쪽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렸다. 엘리엇이 난처한 얼굴로 단서를 붙였다.
“자네가 또 무리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아까 건 엘리엇 씨도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자네는 본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식으로 굴면서 나더러 거절하라는 게.”
“거보세요. 결국 엘리엇 씨 쪽이 저를 부추기시는 거 맞잖습니까?”
일부러 볼멘 듯이 대꾸하자 엘리엇이 약간 눈썹을 치켜세웠다. 갑자기 기뻐져서 션은 소리 내서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엘리엇 씨도 좀 더 주무시고 가세요.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요.”
“오늘 날씨는 암만 봐도 해가 나올 것 같지 않다네.”
“그러면 하루 종일 저와 함께 주무시죠.”
엘리엇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션의 코끝을 가볍게 검지로 밀고는 팔을 끌어당겨 억지로 일으켰다. 션은 어린애처럼 그에게 매달려 침대에까지 끌려갔다. 그가 신경 써 주는 것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지만, 엘리엇은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딱히 귀찮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도로 끌어당겨 품에 넣고 시트를 끌어당겨 덮자 엘리엇은 더 저항하는 대신에 그냥 션의 팔을 베고 누웠다.
“잠옷을 사야겠어.”
“갑자기 잠옷은 왜요?”
“저번부터 생각했다네. 입고 자면 옷이 구겨지고 벗고 자면 자네가 그냥 두질 않잖나.”
“전자에는 동의하지만, 후자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적이 없기라도 하다는 건가.”
“아뇨. 목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다고 해서 엘리엇 씨가 매력적이지 않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엘리엇이 입을 다물었다. 션은 킥킥 웃으며 그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금세 시트 안이 더워졌다.
“일어나면, 점심을 먹으러 나가요. 광장 쪽에 새로 티 룸이 생겼던데, 혹시 보셨습니까?”
“본 것 같기도 하고…….”
그가 가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잠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은 많이 졸렸던 모양이다. 오전 늦은 시간까지 잘 것을 도중에 깨우는 바람에 일어난 것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지칠 만큼 안기도 했다.
이제 적어도 오늘 오후까지는 머물러 있을 것이다. 션은 안심한 기분으로 그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 집에서 벗어나서도 그를 안은 채 있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도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