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노려보고 있는 션을 보며 조슈아가 물었다.
“왜 저런대?”
“몰라. 기다리는 전화가 있는가 보던데.”
“여자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밀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자가 아니라면 저러겠느냐는 의견과 여자라면 저러겠느냐는 의견이 반으로 엇갈려 수군대는 것을 들을 정신도 없는 션은 고개를 내젓고 책상에 엎어졌다.
“션, 일에 집중해. 오늘까지 마감인 보고서는 다 하고 그러고 있어?”
“알고 있어.”
션은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핸드폰을 도로 서랍에 넣었다. 거기는 평소에 놔두는 제자리가 아니었고, 션의 제정신도 제자리에 없었다.
엘리엇이 명함을 받아 간 것이 사흘 전의 일이었다. 션이 핸드폰을 쳐다보기 시작한 것도 딱 그때부터의 일이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정말로 연락을 주려는 걸까. 션도 당장 전화를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자기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는 대신에 션의 연락처를 물어본 것부터가 아직 연락을 주고받겠노라고 확실하게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대하지 말자. 션은 마음을 다잡았다. 전화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지만, 온다고 하더라도 엘리엇은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깊은 관계가 되자는 것도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핸드폰을 하루에 서른 번도 넘게 쳐다보게 되고야 만다. 기대를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연락이 오면, 밖에서 만나게 된다. 바에서 우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원하여 만나자고 말하는 것이다. 완전히 체감이 달랐다. 무얼 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기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션은 자신의 운수에 대해서 별로 자신이 없었다. 불운은 원래부터 몰려오지만, 좋은 일이 찾아온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한꺼번에 좋은 일이 밀어닥치면, 그 뒤에 또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길까 걱정부터 들었다.
화요일에 준형의 바에 들렀던 것은 엘리엇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절반은 괜한 초조감 때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준형 때문이었다.
준형에게 썩 호감은 없으나 션이 알고 있는 엘리엇의 친구는 준형뿐이다. 친하게 지내 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좋게 해 주면 좋지 않겠는가. 션은 남의 호감을 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준형은 난공불락이었다.
벌써 꽤 여러 번 가게에 드나들었는데도 그의 가드는 단단한 정도를 넘어서서 24자리의 알파벳과 숫자를 섞은 암호 키와 홍채, 지문 인식에 실물 자물쇠를 8개쯤 한꺼번에 달아 놓은 금고를 연상시켰다.
그는 잘 웃고 경청하며 친절하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색조차도 흔들림 없는 엷은 경계를 지속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엘리엇과는 다른 의미에서 약한 수준의 GFG는 통하지 않을 남자였다.
그러니까 화요일에 바의 문을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서늘하고 청명한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엘리엇은 무색 잔을 들고 있었다. 정말로 준형과 이야기를 하러 왔을 뿐인 것 같았다. 션은 평소에 자주 준형에게 말을 걸어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에 끼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후일의 불행을 걱정할 만한 일인데, 엘리엇이 먼저 유혹까지 해 주었다. 아니, 유혹이라기보다는 제안이라는 말이 가깝다는 건 알고 있다. 그는 원래부터 특별히 성욕을 수치스럽다거나 원나잇이 부끄럽다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언제나처럼 평이한 어조로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그러나 션에게는 그가 예정을 어기고서라도 자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일 정도로 기뻤다. 화요일은 그가 섹스를 피하는 날인 게 틀림없었다. 주중인 데다가, 그는 늘 금요일에만 나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무색 잔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먼저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권한 것은 벌써 한 달 전부터 션의 머릿속에 맴돌던 말이었다. 해 볼까 말까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너무 매달리는 것처럼 보여서 그가 귀찮아하지 않도록 션은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할 이야기 같은 건 없지 않으냐고 냉정하게 말하고 가 버리는 대신에 기꺼이 션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주었다. 이만하면 정말 대단한 발전 아닌가. 비록 모텔 자판기의 싸구려 커피였지만 말이다.
계속 만나기로 했으니, 언젠가는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슴이 벅차서 터질 것 같기도 하고, 자기가 너무 간절히 바란 나머지 망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귀가 환각에 잠겨서 헛소리를 들은 걸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엘리엇이 그의 명함을 받아 간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하아.”
밀리와 조슈아가 다시 수군대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션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일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바에 갈까 말까 고민이 된다. 엘리엇이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 그러나 가지 않았다가 혹시 그가 다른 사람과 나가게 되면 어떻게 하나. 사실 화요일에 이미 한 번 관계를 가졌으므로 엘리엇이 또 바에 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상외의 일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뒤에서 이상하다고 수군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션은 혼자서 헛웃음을 쳤다. 의처증 걸린 남편도 아니고 말이다. 애초부터 자기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다시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밀리가 물었다.
“어디 아파? 눈은 제대로 뜨고 있어? 도와줄까?”
“괜찮아. 일도 거의 끝나 가고.”
평소보다 손이 느린 것은 사실이지만, 딴생각이 좀 든다고 해서 일을 전부 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 서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션은 눈에 띄게 놀라서 서랍을 열고 핸드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는 얼른 전화를 받으며 일어섰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맥케인 님? 좋은 금융 상품이 있어서 알려 드리려고…….」
션은 전화를 툭 끊었다. 밀리가 “뭐야?”라고 물었다.
“광고. 넌 일 다 끝나고 그러냐?”
“10분 안에 끝나.”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션은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40분. 대부분의 팀원들은 하루의 일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문자가 울렸다. 션은 또다시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평생 연락이라고는 한 적이 없던 대학 동창이 새삼스럽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온 것이었다.
실망하여 그는 전화기를 내던지다시피 다시 서랍에 넣었다. 조슈아가 물었다.
“진짜로 여자 전화라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비슷해.”
션은 기운 없이 웃었다. 밀리가 “그래.”라고 약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에게서부터 넘실대며 넘어오는 어두운 질투가 션의 기분까지 우울하게 만들었다. 바에는 언제쯤 갈 수 있을까. 그사이에 엘리엇이 오지는 않을까. 갈까 말까 고민하던 게 어느 틈에 간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기운을 내야겠다. 일을 빨리 끝내야 갈 수 있을 테니까. 마음을 다지려고 서랍을 잠가 놓고 다시 진지하게 모니터와 마주한다. 6시 전에는 일어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7시까지는 하려고 애써 보자고 생각하는데, 5시가 되자마자 팀원의 절반이 칼같이 일어섰다. 션은 부러운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올리버가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도와줄까?”
“아니, 됐어. 내가 잘못한 건데. 오늘까지는 끝내야지.”
“그래. 수고해.”
“내일 봐.”
“뭐 간식거리라도 사다 줄까? 저녁은?”
“괜찮아. 7시를 넘기진 않겠지.”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그는 혼자가 되었다. 밀리가 마지막까지 도와주겠다며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썩 단정하지도 못한 마음 상태인데, 자기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을 옆에 놔둘 정도로 그는 모험심이 강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 놓는 편이 집중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션은 느릿느릿 일을 하나씩 처리했다. 바는 생각하지 말자. 엘리엇이 자기 말을 어길 사람으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전화하겠다는 말을 그가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한지, 그렇다면 어디까지의 약속인 건지도 모르겠다.
연애를 하겠다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 자신하고만 만나겠다는 말은 아닐 테고, 우선권을 주기는 한다는 건지, 아니면 자신하고만 만나되 아내가 있으니 육체관계 외의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구차해서 입 밖에 내서 물어보지도 못한 잡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며 보고서를 쓰겠다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션은 숨넘어가게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어, 션. 아직 사무실이야?」
“타일러.”
한숨이 나왔다. 방금 퇴근한 사람이 웬일일까.
“안 끝나네.”
「웬일이야? 무슨 특별 프로젝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헤매는 건 처음 보는데. 아, 어쨌든 여기 샌드위치 집인데, 너 배는 안 고픈가 싶어서 말이야. 뭐라도 안 필요해?」
“아니야.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지.”
밥이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지만, 타일러의 호의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시작은 순수한 호의라도, 저녁 시간에 단둘이 되는 경험은 특별한 것이 되어 버리기가 쉽다. 그는 오브라이언의 팀원들을 좋아했고, 벌써 몇 년이나 머물러 있는 이 자리가 편안했다. 그러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넌 좀 너무……. 아니다. 수고하고. 끊는다.」
“잘 들어가. 고맙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쪽이 낫다.
션은 차라도 마실까 하고 일어서서 잠깐 한숨을 돌린다. 사람 일이 참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친절을 보여 주는 사람이 엘리엇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특별한 경험을 더더욱 특별한 것으로 바꾸고 싶다.
전화가 또 왔다.
“여보세요.”
「션 씨? 저 메건 칸이에요.」
거래처 직원이었다.
“지난번에 넘겨 드린 보고서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그런 것은 아니고…….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혹 괜찮으시다면…….」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메건 씨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생각은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은 미안한 마음보다 번거로운 마음이 앞섰으나 희망을 갖지 못하게 빨리 끊어 주는 쪽이 그녀를 위하는 일이다.
아직 사무실이고, 기다리는 전화가 있다는 말로 통화를 끝내고 그는 책상 앞에 털썩 앉아 몸을 길게 폈다. 오늘따라 전화도 많이 와서 희망도 반복적으로 깎여 나가는 기분이다. 금요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탓에 차라리 일은 그럭저럭 진도가 나갔다. 8시 반쯤 되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종결지어 버릴까, 아니면 이 정도에서 끝내고 집으로 가져갈까.
피곤해진 션은 의자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잠시 멍하게 있었다. 바에 갈까 말까. 역시 가지 않는 쪽이 좋겠다. 매주 그런 장소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션이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배도 고프니, 오늘은 적당히 식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서 일찍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으레 주말의 약속을 잡자는 전화이겠거니 싶어 션은 이제 다소 짜증이 났다. 액정을 확인했는지만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션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엘리엇 씨?!”
「연락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있는가.」
“아, 하지만 마음이 바뀌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애타는 마음이었는지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간절하게 말한다. 소극적으로 덧붙인 것은 너무 구차해 보이는 것 같아서 변명한 것이다.
“엘리엇 씨는 그쪽의 일을 일상생활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으니까요.”
「내가 불편할 때 전화를 건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언제라도 괜찮아요. 저어…….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뭐라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물은 건데, 묻고 나니 바보 같아서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엘리엇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회사에서 먹고 귀가했다네. 자네는?」
“저는 지금부터 먹으러 갈 작정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집이시군요.”
「그래. 벌써 9시가 다 되어가질 않나.」
“업무가 애매하게 남아서 아예 다 해 버리고 들어갈 작정이었습니다. 저어…….”
당신 전화를 기다리느라고 일을 못 해서 야근을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션은 조금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건 지나치게 사생활을 캐묻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역시 신경이 쓰인다.
“부인께서, 같이 계십니까?”
「설마. 그녀는 훨씬 전부터 파리에 있는데. 반년은 넘었어.」
“그럼 별거 중?”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눈앞이 환해졌다. 그가 기혼자라는 것 사실 자체도 신경이 쓰이지만, 그 이상으로 질투가 났었으니까.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느끼는 미움은 증오처럼 뜨거워, 그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열사에 서 있는 듯했다.
그 여자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 떠서 엘리엇의 얼굴을 보고 함께 밥을 먹고, 저녁에 돌아와 마주 앉아서 하루의 일을 이야기하고 나란히 누워 잠들고, 남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공인된 약속과 오래도록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그런 시간들 말이다.
엘리엇이 그녀를 여자로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여전히 그러했다. 몸을 나누는 관계는 아닐지라도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인 것은 사실일 테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혼자다. 그도 혼자다.
하잘것없는 일로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그게 놀라운 일인가?」
“어쩐지 안심이 되어서요.”
「아내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혼자와 사이가 얽혀서 단단히 틀어진 경험이 있기도 하고요.”
「그렇군.」
“죄송합니다.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신경 쓰고 있지 않네.」
언젠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어도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 줄까?
꼭 그럴 것만 같았다. 엘리엇이라면 분명히 무심하도록 차분한 얼굴로 자신을 용서해 줄 것 같았다. 그것이 단순히 다정하던 커플을 헤어지게 했다든가, 가정을 파탄 냈다든가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고 목숨마저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것이 무관심에서 오는 것이라도 좋으니, 그가 “괜찮다”라고 말해 준다면 자신은 정말로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가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귓가에 가까이 닿는 목소리에 기뻐서, 무엇이든 말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엘리엇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느릿하게 말했다.
「그럼 이만 끊겠네. 오늘은 전화번호를 알려 주려는 것뿐이었으니까.」
“엘리엇 씨!”
션은 거의 외치듯이 물었다.
“제가 걸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게나. 연락하라고 번호를 알려 주는 게 아닌가.」
엘리엇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션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았다. 전화 한 통화에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되는 자신의 행복감이 어쩐지 눈물 나게 웃겼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네요.”
「받지 못할 때는 꺼 둘 걸세. 그러니까 용건이 있으면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예. 저는 언제나 켜져 있으니까 엘리엇 씨도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럼 끊겠네.」
“예.”
숨을 크게 들이켠다. 그리고 여태까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인사를 했다. 예전 애인이나 그에게 접근하려던 사람들이 항상 좋다고 말했던 속삭임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애썼다. 그가 즐거운 꿈을 꾸고, 거기에 자신이 끼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진심을 다해 말했다.
“굿 나잇.”
엘리엇이 약간 웃는 기척이 있었다. 전화가 끊겼다.
션은 잠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핸드폰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이 벅차서 온종일 애달팠던 것조차 어느 틈에 날아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