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4/52)

2.

그것은 일상 속의 작은 해프닝이었고, 직접 구조에 동참하지도 않은 션의 입장에서는 지나가다가 목격한 사고 현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보다 오랫동안 그 일을 기억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거의 온종일 그날의 일을 생각했다. 그 남자는 진짜였을까. 태어나서부터 28살이 될 때까지 본 수많은 사람 중에 무색투명한 사람은 오로지 그 남자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본 것은 정말로 실재하는 사람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마침내 자기가 꿈을 꾸었던 게 아닐까 하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션은 퇴근 후에 종종 그 근처를 배회하게 되었다. 자주 그 길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무색이라면 자신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계획도 없이 길을 맴돌면서 집에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지 않느냐고 그는 자조했다.

퇴근하고 나면 어차피 혼자다. 애인은 없고, 만들 예정도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만한 친구도 없었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것도 꺼려졌으므로 단골 펍이나 카페에도 목적 없이는 가지 않는다.

가끔 팀원들과 함께 술이라도 한잔하러 가든가 동창회라는 명목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기껏해야 저녁밥을 챙겨 먹고 운동을 다녀와서 텅 빈 집에 머무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산책을 핑계 삼아 몇십 분쯤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나 눈에 띄는 낯선 가게에 들어가 식사를 하는 것쯤은 나쁘지 않은 일정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생각보다 그의 눈에 빨리 띄었다. 교통사고가 있었던 날로부터 3주 후의 금요일이었다. 허탕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것처럼 마주치지 못한 채 션이 포기하고 식사를 하러 들어갔던 참의 일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고 아무 생각 없이 거리에 시선을 던지는데 그 남자가 옷깃을 세우며 바로 가게 옆을 지나갔다.

습관처럼 주위를 셧아웃하고 있었기 때문에 색이 옅은 금발이 옆을 지나치고 나서야 션은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면서 지갑을 뒤져서 10파운드짜리를 두 장 계산서에 끼워 웨이트리스에게 던지듯이 건네주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당황하여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남자는 벌써 길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션은 서둘러 그를 뒤따라갔다. 우선 붙잡아서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걸지까지는 생각해 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생각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 멈칫하는 사이에 남자가 어느 건물의 바깥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션은 당황하여 거기에 멈춰 섰다. 공공건물도, 가게도 아닌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할 수는 없다. 문을 두드릴까. 그러면 대체 뭐라고 말하지? 역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놓치면 언제 또 마주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션은 크게 마음을 먹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GFG를 쓸 각오까지 했는데, 창문으로 비치는 실내의 모습은 예상외로 평범한 바였다.

그러나 션은 쉽게 문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바에 울렁거릴 정도로 가득 차 있는 감정이 그에게 몹시도 익숙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이런 장소에 드나드는 건가. 그렇게 깨끗한 공기를 몸에 감고서? 역시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문을 열었다.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딸랑딸랑 구식 종소리가 음량 크게 깔린 재즈 속으로 사라졌다. 구역질 나는 욕망들이 어두운 보라색으로 넘실대었다. 음욕, 소유욕, 폭력과 지배 욕구들은 그가 가장 잘 알면서 또한 증오하는 것들이었다. 그 얄팍하면서도 근원적인 감정들 속으로 들어가면서 션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정말로 잠깐의 상대를 찾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클럽이나 정신 나간 대마초 파티에도 초대된 적이 있지만, 이만큼 지독하지는 않았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인 자신의 GFG로 인해 마굴로 변하다시피 한 알 아시리의 폐쇄적인 내실 정도에나 이렇게 자욱하게 욕망이 끼어 있었을까.

3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두통과 구역질을 느꼈다. 잠깐만 찾아보고 나가자고 생각하면서 바로 다가섰다. 단발머리의 여자 바텐더가 상냥한 얼굴로 “무얼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션은 진 토닉을 주문해 놓고 옆을 보았다. 바 저쪽 편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시가를 물고 다른 바텐더와 이야기하는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언뜻 보면 약간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장소이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직업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여자 바텐더조차도 이 끈적끈적한 공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데, 그 남자는 혼자 맑은 공기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션은 두통을 잊었다.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바텐더 쪽도 욕망이나 충동과는 거리가 먼 날카로운 색을 띠고 있었으나 그것은 션의 눈길을 전혀 끌지 못했다. ‘특별하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그 남자에 비하면 바텐더 쪽은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이다.

그리고 그제야 션은 바텐더가 퍼뜨리고 있는 미세한 GFG의 실을 깨달았다. 지각계 GFG이다. 션의 감정 지각 능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종류가 완전히 다르고 범위 역시 넓은 편이었다. 그는 흠칫 놀라 자신의 능력을 깊이까지 눌러 숨기고 계속 남자를 관찰했다. 그러다가 여자 바텐더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손님!”

“아. 미안합니다. 뭐라고요?”

“무슨 색 잔을 드릴까요?”

여자가 난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션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남자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녹색의 잔을 부탁했다. 잔의 색이 뭔가의 신호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별도, 인종도, 모든 것이 제각각인 장소에서 같은 잔을 든 자는 비슷한 종류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실내를 가득 채운 동물적인 본능들 밑으로 보다 더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기류가 흐르는 것을 알았다.

단순히 섹스 상대를 찾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 션은 어쩐지 안심했다.

바텐더가 그에게 술잔을 주었다. 녹색 잔을 받아 드는 순간, 가까이에 있는 녹색 잔을 든 남자들이 거의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으나 션은 자기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깨닫지도 못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입천장이 바짝바짝 탔다.

당장 뭘 어째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일단 말을 걸어 보자. 저 사람을 알고 싶다. 차분하면서도 선명하던 음성을 다시 한번 들어 보고 싶다. 그것뿐이었다.

한 걸음을 내디디는 데에 그만큼의 용기가 필요했던 것도 처음이었다. 션은 다른 사람들처럼 잔을 들고 일어섰다. 짧은 사이에 이루어진 수많은 견제를 뚫고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안녕, 음. 괜찮다면…….”

“실례.”

션은 그 남자를 앞길을 막은 방해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은 채 팔로 밀어내는 동작을 취하자 말을 건 남자가 움찔하며 길을 비켰다. 션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금발의 남자에게 다가섰다.

“저어…….”

입을 열었지만, 쉽사리 첫 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바텐더가 웃음을 거두고 션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그 시선을 따라와 뒤를 돌아보았다. 션은 잠시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의 눈에 자신은 대체 어떻게 비쳤을까. 분명히 남들과는 달랐으리라고 생각한다. 용모에는 자신이 있는 것을 넘어서서 저주스러운 기분까지 들곤 했으나, 이 순간에 이 남자가 그것을 좋게 평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

“앉겠나?”

남자가 태연하게 물었다. 놀라지도 않고, 특별한 것을 바라보듯이 보지도 않고, 반쯤 무관심한 채로 말이다. 션은 이번에도 당황했다.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에게도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어서 놀랐고, 스스로의 용모가 지닌 힘을 과신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옆자리에 앉으라는 것만으로도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진심으로 기뻤다.

바텐더가 대뜸 반말로 물었다.

“이런 남자가 취향? 제법 안 좋은 취향인데, 그거.”

“아, 저어. 그렇게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이런 곳은 별로 온 적이 없어서.”

“안 좋은 취향이라는 건 그쪽을 걱정해서 한 이야기야. 엘리엇은 썩 같이 지내기 좋은 성격이 아니거든. 뭐어, 입 다물고 앉아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일 때도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름을 알았다. 좋은 이름이다. 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 꼭 어울린다.

“엘리엇 씨라고 하시는군요. 아, 저는 션입니다. 션 맥케인.”

악수를 청해 놓고서 손안에 땀이 너무 많이 고인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엘리엇은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사실 아예 션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름은 그렇다 치지만, 이런 곳에서 본명을 전부 밝히는 것은 좋지 않아.”

“아……. 그렇다면 혹시 엘리엇 씨도……?”

“아니, 일단 이름은 본명이지만.”

엘리엇은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대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도 일단은 충분하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에서 이제 얼굴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으로도 벌써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션은 그가 시가를 눌러 끄고 “나갈까?”라고 묻는 바람에 다시 한번 당황하여 얼빠진 채로 “네?” 하고 되묻고 말았다. 엘리엇이 새파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타인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션은 한 박자 늦게야 비로소 그가 말하는 것이 ‘섹스 하러 갈까?’라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목적의 가게이니 그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약간의 실망감과 두근거림이 동시에 손발로 퍼졌다.

그럴 예정은 조금도 없었지만,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실망감은 이상한 것이다. 션은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장소가 장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낯선 남자와 섹스를 하려고 한다고 해서 지금 막 이름을 알게 된 자신이 무슨 상관인가.

심장이 정신없이 맥박 쳤다. 이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그는 엘리엇을 알고 싶었던 것이지, 원나잇 같은 것을 하려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를 놓쳐서, 그가 다른 남자를 붙잡아 나갈 거라고 생각하자 그것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가 긍정하자 엘리엇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션은 얼른 술잔을 마저 비우고 엘리엇을 따라 나갔다. 알코올이 목과 위를 화끈하게 데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엘리엇은 정말로 익숙한 것 같았다. 도중에 한 번 션을 돌아보았을 뿐이고, 주춤거리는 기색도 없이 가까운 무인 모텔로 들어가 익숙한 듯이 방을 지정했다. 그 모텔은 간판이 작아서 밤이라 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자주, 이렇게 하십니까?”

방으로 들어서면서 션은 긴장해서 물었다. 엘리엇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경험이 적은 편은 아닐세. 자네는 별로 원나잇 경험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네. 나는 익숙하고.”

바텐더와 친근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단골일 테고, 그렇다면 자주 그 가게에 들르는 모양이다. 션이 그 정보를 소화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엘리엇이 고갯짓했다.

“샤워는 나 먼저?”

“아,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션은 화들짝 놀라 대답했지만 엘리엇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꺼려졌다. 그러나 그가 샤워하고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심장이 터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망치듯이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기의 물을 틀고 숨을 몰아쉬면서, 차라리 여기에서 나갔을 때 엘리엇이 가 버리고 없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겨우 구색만 맞춰 놓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션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밖으로 나오자 희미하게 미소 비슷한 것을 띠었다.

“몸이 좋군.”

“아, 예. 운동을 조금…….”

“그런가.”

션이 몸을 단련한 것은 비상시를 대비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순수하게 운동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엘리엇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체가 되었다. 션은 그가 알지 못하게 눈을 내리깐 채로 시선을 피했다. 물소리가 나기 시작한 뒤에야 고개를 들었지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욕실 문이 반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투명도가 제법 높은 데다가 좁은 욕실이라서 안에서 샤워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대로 비쳤다.

물론 남자와 자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션은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했다. 섹스는 그가 기피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쾌감은 긴장을 풀게 하고 육체적 교감은 쉽사리 정신적인 연결을 가져온다.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과도 자고 나면 헤어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에 빠져 있곤 했다. 섹스 중에 생기는 약간의 호감과 만족감이 번갈아 가며 동조와 증폭을 일으키기 때문에 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서 시작된 것인지 자신에게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사람을 깊이 사귀는 것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몇 번 애인이 생겼던 것은 그런 일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 연정은 막 시작될 때는 도취된 듯한 쾌감을 가져오지만, 결코 끝이 좋지 않았다. 션은 남과 서로 조금씩, 한 걸음씩 가까워지며 마음을 합쳐 가는 과정을 겪은 일이 없다. 그의 연인들이 품은 연모는 그 자신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강제로 이끌어진 것이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서로 맞는 부분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맞춰 가려는 노력조차도 쉽지 않았다. 션은 자신이 품은 애정을 의심하고, 상대는 의심하는 션에게 집착하며 종내에는 육체적 관계에 매달리는 것밖에 남지 않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 남자는 어떨까. 션은 반은 의심하고, 반은 기대하면서 욕실에서 나온 엘리엇의 손을 잡았다. 엘리엇은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자네는 탑인가?”

“탑……? 아아, 예에. 특별히 선호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쪽이 좋습니다.”

“잘됐군.”

그가 고개를 숙여 션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쳤다. 냉정한 얼굴에 비해 키스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션은 엘리엇을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럴 생각으로 말을 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울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지만,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물 냄새와 옅은 향수 냄새가 섞인 체취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맑은 하늘 냄새와 닮아 있었다. 그 키스를 마치기도 전에 션은 자기가 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엘리엇의 희고 마른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뼈가 도드라진 손목을 잡고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는다. 재촉하듯이 그를 부추기는 손은 확실히 익숙해 있었다. 고간 사이로 엘리엇의 손이 파고들어 성기를 쥐는 순간 션은 무너질 뻔했다. 그가 허리를 꺾으며 당황하자 엘리엇이 흐리게 웃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남자가 처음이라서 긴장한 것이 아니다. 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귓가와 귓불을 물었다. 젤을 까서 손에 묻히자 엘리엇이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들었다. 션은 손가락으로 그의 항문을 더듬었다. 엘리엇이 낮게 숨을 뱉었다. 신음처럼 흘러나온 음성은 션의 눈앞을 하얗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흥분한 게 처음이라서요. 엘리엇 씨의 몸은 지나치게 매력적입니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을 말했는데, 립 서비스라고 생각한 듯 엘리엇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고맙네.”라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의 체취를 들이마시고 싶어져서 션은 몸을 꽉 끌어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그의 안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읏.”

엘리엇의 목구멍에서 음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꿈틀대는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엉덩이를 잡아당겨 아랫도리를 마주한다. 마주 닿은 피부는 뜨겁고 성기가 서로 맞닿아 비벼질 때마다 몸부림치게 된다. 손가락으로 뒤를 파헤칠 때마다 엘리엇이 헐떡대면서 어깨를 붙잡고 매달려 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쾌감이었다.

그는 거의 삽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를 들썩대면서 엘리엇의 다리 사이에 자기 것을 비볐다. 뒤에 들어간 손가락으로 풀어 주는 것까지 잊을 뻔했다. 엘리엇이 팔을 잡고 이제 됐다고 말해서야 션은 비로소 그의 몸에 자기 것을 비벼 대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엇이 손을 뻗어서 콘돔을 가져다가 껍질을 깠다. 션은 당황했지만, 몸을 일으킨 그는 능숙하게 션의 것을 붙잡고 그것을 씌웠다. 말린 것을 도로록 풀어 내리면서 뿌리까지 애무하는 손길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션은 새빨개진 채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왜?”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엘리엇이 다른 손을 뻗었다. 끝부분을 잡아 공기를 빼는 손길이 귀두까지 집어서, 션은 조금 정액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격렬하게 그를 쓰러뜨리고 다리를 크게 벌렸다. 신중해지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자신을 밀어 넣는다. 엘리엇의 말마따나 그는 익숙했다. 애무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뒷구멍은 약간 뻣뻣했지만, 그렇게 큰 문제 없이 션의 물건을 받아 삼켰다.

션은 세 번에 걸쳐서 천천히 움직여 깊은 곳까지 자신을 파묻고 경이로운 기분으로 자기 아래에서 밭은 숨을 내쉬는 엘리엇을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그는 신음했다. 동조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도.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숙여 온통 붉어진 엘리엇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당신은 정말, 굉장해요. 엘리엇 씨, 읏…….”

단순히 쾌락의 강도로 말하자면, 동조를 일으켜 서로의 쾌감까지 완전히 받아들이는 쪽이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두 배 이상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션은 그것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훨씬 좋았다. 자기 자신이 온전한 인간임을 자각한 채로 타인과 부둥켜안는다. 서로 손과 몸만으로 상대를 기쁘게 한다. 서로 별개의 육체가 겹쳐져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것은 그에게 정말로 놀라운 체험이었다.

“아, 세상에……. 아아.”

“으, 응, 자네는, 으응, 천천히……. 으읏!”

엘리엇의 손이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힘겨운 듯이 숨을 몰아쉬면서 목을 젖혔다. 션은 도드라진 목울대를 물고 빨았다. 옅게 맺힌 땀마저 달았다.

“아아, 으응, 자네는, 헉, 길어, 헉!”

“기분 좋아요? 저는, 기분 좋은가요? 으웃, 당신은…….”

“깊어, 으응, 거기, 거기, 하아, 하아.”

“아아, 세상에……. 이런, 일이……!”

“천천히, 하윽!”

“죄송합니다,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자제하기 어려웠다. 션은 억누르고 있던 GFG를 모조리 풀어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엇은 그의 GFG가 아니라 성기를 받아들인 채 헐떡였다. 그 해방감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맙소사. 션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첫 경험을 하는 소년처럼 서투르게 엘리엇에게 달려들었다.

동조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섹스는 한 적이 없다. 상대가 느끼는 감각을 다이렉트하게 전달받을 수 없게 되자 타인의 육체에 쾌감을 주는 법도 잘 알지 못하게 된다. 혼자의 쾌감에 몰두하여 제멋대로 가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살펴야 했다. 그 사실조차 션은 처음으로 알았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엘리엇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온몸으로 포옹한 채 짐승처럼 헐떡대며 황홀한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뇌가 일으키는 착각이 아니라 진짜 몸을 끌어안는다.

갖고 싶었다. 중간부터 정신을 놓다시피 하고 끌어당겨 탐욕스럽게 집어삼킨다. 성기가 불규칙적으로 아무 데나 쑤시자 그가 안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션의 어깨에 이마를 밀어붙였다.

“거기, 말고, 으, 조금, 바깥으로, 으응!”

션은 그의 엉덩이를 잡아당기며 자신을 더 깊이 파묻으려고 몸부림쳤다. 너무 깊은 삽입에 엘리엇이 괴로워하며 몸을 젖혔다. 하얗던 눈시울이 새빨갛게 물든다. 박아 넣을 때마다 눈을 찡그리기도 하고 입을 벌리고 숨김없이 교성을 올리는 얼굴에 션은 넋을 잃었다.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었나.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본 일이 없어서 션에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체험이었다.

“으읍……!”

엘리엇의 다리가 션의 허벅지에 감겼다. 그는 엘리엇을 꽉 안은 채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신음하는 혀를 건져 올려 휘감고 격렬하게 키스하면서 절정의 열락을 토해 냈다.

* * *

엘리엇은 그에게 연락처 하나 남겨 주지 않고 먼저 떠났다. 붙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엘리엇은 그에게 흥미가 없는 얼굴이었고, 원나잇 상대를 일상에 끼워 넣을 마음이 없다는데 더 졸라 댈 수는 없었다.

겨우 섹스밖에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것만이라도 션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몸만이라도 좋다. 다시 한번 그를 보고 싶었다.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일이었다. 또다시 바에서 보게 된다면 다음 기회가 있으리라고 여지를 남겨 준 것이 펄쩍 뛰어오를 만큼 기뻤다.

션은 그 뒤로 몇 주간 준형의 바에 시간이 날 때마다 들렀다. 엘리엇이 언제쯤 거기에 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엇을 만나지 못한 날에는 무료하게 앉아 무색의 잔을 받아 들고 클로이라는 여자 바텐더와 별것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의미 없는 시선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재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찾아오는 손님이 모두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마스터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다는 것을 두어 번 만에 알아챘지만 중요한 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엘리엇이 마스터와 꽤 친근해 보이더라는 점이었다.

그도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일까. 매우 부유하고 신분이 높으리라는 것은 고급스러운 옷차림이나 말씨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사람이 어떤 이유로 이런 곳에 드나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신분 높은 손님이 많이 계세요. 이름을 들으면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분들도 계시고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만, 솔직히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일을 하려면 여기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마스터가 있는 한 절대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거든요. 어쨌든 엘리엇 씨는 아주 점잖은 분이죠. 좀 더 양지에 있는 가게로 가셔도 될 텐데. 어머, 사실은 이런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되는데. 션 씨가 물어보면 왜 자꾸 대답하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클로이는 친근한 웃음 몇 번을 건네자 그런 이야기까지 해 주었지만, 엘리엇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언제 오는지 그런 직접적인 정보를 말하는 법은 없었다. GFG를 약간만 발현해도 입에 채워진 자물쇠를 충분히 풀 수 있겠지만 션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일단 마스터인 준형이 가게 안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런 힘을 이용하여 엘리엇에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 하나 없이, GFG와 아무 관계도 없이 그저 션 맥케인으로서 그와 관계되고 싶었다. 애가 닳는다고 해서 힘을 이용하여 정보를 알아내고 주위 사람을 녹여 버리는 방식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진짜’ 관계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은 좀 더 평범하게, 또 한 번의 우연을 기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션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처음 엘리엇을 안았던 그 날부터 한순간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팔 안에 있는 체온을 끌어안는 행복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며칠 되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자꾸만 준형의 가게로 발길을 옮긴다.

솔직히 바는 그에게 기분 좋은 장소가 되지 못했다. 어두운 욕망의 소용돌이들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거의 시궁창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거기에서 엘리엇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질퍽하고 답답한 공기나 치근대는 사람들에게 거절의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조차도 더 놀라운 기쁨을 위해서 감내해야 할 일에 불과했다.

“가끔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준형이 그렇게 말했다. 션은 웃으며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무색 잔에 말을 거는 쪽이 룰 위반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맥케인 씨 때문에 손님이 줄어서요.”

얼핏 보기에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기 때문에 션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준형이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룰 위반자에게는 한동안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맥케인 씨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매상이야 그럭저럭 유지됩니다만, 실질적인 손님 수는 줄었어요. 우리야 사람으로 장사하는 곳이니까.”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준형이 그런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깜박거리며 주위를 밝히는 색은 의혹과 불안, 그리고 약간의 경계심이다. 션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엘리엇의 친구인 것 같으니까, 잘 보여야 했다.

엘리엇은 션과는 별로 이야기하려 들지 않지만―이야기하기가 싫다기보다도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준형과는 가끔 웃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몹시 부럽고 질투가 났다.

엘리엇은 연락처를 주거나 약속을 해 주는 일은 없었지만,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바에서 션을 만나면 거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기뻐하지도 않았다. 서로 재어 볼 필요가 없으므로 말을 길게 나누는 일도 없었다. 그가 다가가 인사를 하면 으레 “또?”라는 얼굴을 하고, 마시려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몸만이라도 괜찮다고 했던 것은 진심이었지만, 정말로 그가 자기에게 원하는 것이 몸뿐이라는 사실은 그리 기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션은 엘리엇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엘리엇의 옆구리에 분홍색으로 남은 화상의 흉터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귀두 부분에 약간 튀어나온 점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정하게 마주 안는 것을 좋아하고, 격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깊게 넣은 채 살며시 벌리듯이 옆으로 흔들어 주면 허리를 뒤로 젖히고 교성을 올리며 팔목을 붙잡아 왔다.

삽입한 채로 몸을 일으켜 허벅지 위에 앉히면 가장 심하게 느끼지만, 너무 자극이 심한 탓인지 매번 버둥거리면서 거부하는 몸짓을 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절정을 맞이하고 나서 몸에 여운이 남아 있을 때 따뜻하게 포옹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까지 알게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엘리엇의 이름을 전부 알지 못한다. 엘리엇은 위스키를 마시고, 시가를 피운다. 몸에 냄새가 스미지 않은 것을 보면 많이 피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옷은 기성품이 아니다. 향수를 사용한다. 수염은 많이 나지 않는 편이고, 몸은 말랐지만, 근육이 고르게 발달되어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션은 관찰로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았지만, 그것에 관해서 엘리엇에게 들은 적은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에 연결되는 정보가 아니라면 묻는 일에는 대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주지만, 스스로 먼저 칵테일보다 위스키가 좋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션에게 어느 쪽이 좋으냐고 묻는 일도 없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전부인가.’

허탈하게도, 그것이 사실이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다. 기혼자와 관계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금기 중의 하나였다. 엘리엇이 원래부터 게이고, 아내와는 정략결혼이라서 애정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해도 껄끄러움이 완전히 가시는 것은 아니다.

반면, 엘리엇의 감정을 훔쳐본 경험은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대부분의 표정이 흐린 그 무심한 얼굴에 번지는 온화한 미소, 따뜻한 감정,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입술을 떠올릴 때마다 션의 심장은 아플 정도로 질주했다.

엘리엇의 주위에는 어떤 종류의 격정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션은 그의 곁에 있는 동안에 헤아릴 수 없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모텔의 방문을 닫고 단둘이 되면 그 좁은 공간은 우주가 된다.

안고 싶다. 갖고 싶다. 그리 무심한 사람이 몸속 깊은 곳까지 자신의 성기로 꿰뚫린 채 절정의 교성을 올리고 무너진 얼굴로 흰 피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파르르 떨면서 흐느끼는 모습은 그를 거의 미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으로 엘리엇의 다른 얼굴들을 동경했다. 항상 침착하고 우아한 음성을 조금 더 듣고 싶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혹한 채로 흐트러지는 목소리도 듣고 싶다. 수줍어하는 것도 보고 싶다. 슬퍼하여 눈물 흘리는 것도, 기뻐하여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보고 싶다.

조금 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섹스만이 아니라 좀 더 여러 가지 일을 함께하고 싶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싶다.

금요일에 시작된 투명한 환희는 조금씩 번져 가 일주일 전부를 물들인다. 그는 길들여진 여우처럼 수요일 저녁부터 이미 기뻐지기 시작했고, 목요일 밤에는 행복한 기대로 가득 찬 꿈을 꾸었다.

자신이 온기에도, 관계에도 굶주려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사람에게는 질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외할머니의 집에서 떠난 이후로 한 번도 이렇게 안심한 채 타인과 서로 몸을 맞댄 일이 없었으니까.

션은 자신이 이미 사랑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그 감정은 그를 행복하게 했고, 또 막막하게 하기도 했다. 엘리엇이 자기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이시킬 수 없는 감정 대신 그는 말을 했다. 엘리엇의 입술에 키스하면서, 어루만지면서, 깊게 연결한 채로, 포옹하고서, 몸을 닦아 주면서, 수없이 말했다. 당신은 사랑스러워요. 아름답습니다. 향기가 좋아요. 내가 성급하게 굴었다면 당신에게 키스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이렇게도 예쁘지요. 좋아요. 당신보다 멋진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에게 퍼부은 찬사 중에 진심 아닌 것은 하나도 없건만, 엘리엇은 마치 예의상 하는 형식적인 칭찬을 들은 것처럼 차분하고 온화한 얼굴로 “고맙네.”라고 말할 뿐이었다. “자네는 상냥하군.”이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조금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션은 어쩌면 그가 알면서도 관심이 없어서 내버려 두는 건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자네의 애인은 행복하겠군.”

심지어 엘리엇은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션이 먼저 샤워를 마치고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나와 그의 몸을 닦아 주려던 때였다. 나른하게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엘리엇의 약간 마른 등은 희었고, 자신이 세차게 붙들 때 남은 손자국이 허리께에 조금 붉게 남아 있었다. 다듬어진 육체의 굴곡이 숨 쉴 때마다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것에 경이마저 느끼면서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션은 “예?” 하고 무심코 되물었다. 엘리엇이 희미하게 웃으며 돌아누웠다.

“나한테도 이렇게까지 하는데, 애인이 생긴다면 얼마나 다정할지 상상도 할 수 없는걸. 내가 원래 상상력이 부족하기는 하네만.”

기뻐해야 좋을지, 당황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게 엘리엇이 하는 최상급의 찬사라는 것은 이해했다. 그러나 엘리엇 자신을 션의 ‘애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의 범주에서 아예 빼 놓고 있기도 하다. 그는 엘리엇을 기쁘게 했다는 사실에 행복한 동시에 절망감도 느꼈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분은 구름 위로 치솟았다가 땅속 깊이 처박힌다. 마치 술을 마시고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그가 좀 더 웃어 준다면 세상이라도 뜯어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기회가 오지조차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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