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요일 저녁, 션 맥케인이 퇴근을 하려는데 회사 1층 로비에서 어떤 여자가 그를 불러 세웠다.
“션 맥케인?”
션은 천천히 돌아섰다. 여자의 얼굴은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는 힐끗 시선을 돌려 로비를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경비를 제외하고는 두어 사람밖에 없었다. 이 정도라면 만약의 일이 생겨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안심하며 여자에게 대답했다.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우리가 구면이었던가요?”
“루번이 떠난 건 너 때문이지?”
낯선 여자가 그를 찾는 것은 제법 자주 있는 일이지만, 좋은 일로 연결된 적은 거의 없다. 사실 한 번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 루번이라는 남자는 몇 달 전에 그만둔 팀 동료였다. 회사에는 건강 문제로 퇴직한다고 밝혔지만, 션은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번은 휴게실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션에게 키스하려고 하다가 들통이 났다.
그 사건은 결코 크지 않았다. 션에게 있어서 그건 매우 흔해 빠진 일 중의 하나였고, 잠든 얼굴에 키스하는 것 정도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어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은 루번의 잘못도 아니다. 보통의 상태라면 고작해야 씨앗조차 되지 못하는 작은 충동이 실제적인 것이 되어 행동으로 나서게 된 것은 아마도 션 자신의 GFG가 문제였으리라.
그는 조금도 루번을 책망하지 않았고, 루번이 지각을 되찾고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루번은 심적 갈등이 심해졌는지 점점 션을 피하다가 마침내 그 다음 달에 퇴사하고 말았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루번 자신이 아무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거나 충동을 자제할 만큼 충분히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없었을 일이기도 했다. 만나지 않는다면 자연히 사라질 감정이니 됐다고 션은 그 일을 정리했다. 워낙 작은 사건이었기에 몇 달이나 지나서 이렇게 다시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션은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떠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증오와 혐오, 썩어 들어가는 애정과 분노의 색은 그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 중 하나였다. 션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무엇을 증폭시켜야 저것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뺨을 한 대 맞아 주는 것으로 끝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만, 이번의 것은 그런 정도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늘 GFG를 차단하고 있지만, 파워와 컨트롤의 밸런스는 미세하게 파워가 우위를 차지한 채로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일정 범위에 항상 영향을 미쳤다. 대체로는 기껏해야 호감을 좀 더 의식적인 호감으로 바꾼다거나 불쾌감을 약간의 적의로 바꾸는 정도의 것이었으나 심적으로 유약하고 예민한 상태인 사람은 좀 더 영향받기 쉬웠다. 그리고 지금 저 여자는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이것도 저것도 생각하기 싫어져서 그냥 도망을 갈까 하는 순간 로비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션!”
그 부르짖음이 기폭제가 되었다. 여자의 증오가 폭발의 연기처럼 부피를 키웠다. 션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지 않았다. 여자가 핸드백에서 가스총을 꺼냈다. 처음부터 공격할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핸드백 속에 가지고 있는 무기가 그것이 전부였으리라.
그렇게 위력이 있는 모델은 아니지만, 이렇게 근거리에서 맞으면 어지간히 단련된 그도 한동안 고생해야 할 것이다. 션은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가방을 바닥에 던지고 달려들어 손목을 꺾어 잡았다. 그리고 정신을 장악했다. 지나쳐서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기운을 잃을 정도로 무기력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스총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그는 주저앉는 여자를 붙들어 바닥에 앉혔다.
“션, 괜찮아?!”
경비실 문이 벌컥 열리고 경비들이 달려왔다. 션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넋을 놓고 있는 여자의 뺨을 가볍게 두드려 깨웠다. 증폭을 끊었지만, 무기력증이 전부 다 빠져나가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는 여자에게 물었다.
“일어설 수 있어요? 누구에게 연락해 줄까요?”
“션, 신고해야지.”
“됐습니다. 다친 사람도 없는데. 단순히 흥분해서 그런 것 같고요.”
“그래도…….”
“그런 것보다 좀 도와주십시오. 일어나세요.”
그가 팔을 잡아끌자 여자가 초점이 흐린 눈동자로 션을 올려다보았다. 션은 약간 GFG를 발현하여 이번에는 동조를 일으켰다. 그리고 심령에 확고하게 새겨지도록 또렷하게 말했다.
“일어설 수 있게 되면 아는 사람에게 연락하든가 혼자서 돌아가도록 하세요.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마십시오. 루번이 당신에게 어느 정도 중요한 남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인생을 망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여자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라고 그는 가볍게 여자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경비의 손에 여자를 맡겼다.
“경비실에서 잠시 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습니까?”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도 맡아 주십시오. 돌아갈 때 돌려주세요.”
그는 가스총을 경비에게 건네주고 내던졌던 가방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구겨진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정말로 신고하는 게 좋지 않겠어?”
“별일 없었잖습니까. 게다가 매번 이런 일로 경찰에 신고해 봐야 저만 난처하니까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 이게 처음도 아니고……. 잘생긴 것도 고생이라니까.”
“아무래도 연애 운이 최악인 것 같습니다.”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기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이 알아챌 만한 간격으로 한 번씩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GFG의 컨트롤 능력이 완성되면서부터 이런 일은 크게 줄어들었고, 션 자신도 대처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단순히 재수가 없고, 얼굴이 문제인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아마 회사 사람들은 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이 이런 사건을 겪었는지를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U급의 정신 조작계 GFG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비밀이었다.
카이루완의 알 아시리 가문을 파멸시킬 뻔했을 때 가주인 미란 알 아시리가 그를 살려 주는 대신 억제 처리를 조건으로 세웠다. 그때 그는 자신의 GFG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스스로의 힘에 잠식되어 있었다. 알 아시리의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욕망과 고통, 죄책감 뒤섞인 환희가 완전히 이성을 갉아먹어, 그는 타인의 욕망을 처리하는 도구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힘을 잃기를 가장 바란 것은 션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힘에는 억제 처리조차 제대로 듣지 않았다. U급의 힘이라도 모두 같은 파워인 것이 아니다. U급의 GFG를 억제한 경험이 몇 번이나 있다는 최상급의 봉인 능력자조차도 그의 GFG는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능력을 억제하는 힘이 있는 방에서 억제용 수갑을 착용한 채로도 그의 GFG는 계측 장치를 터뜨렸다.
“알라께서 참으로 네게 가혹한 시련을 내리셨구나. 에미르 미란께서 자비를 베풀어 널 살려 주셨지만, 컨트롤을 익히지 못한다면 이번 같은 일이 계속될 게다. 이번 일 같은 것만이 아니야. 네 능력은 영향력이 너무 광범위해. S급을 넘어서는 정신계인 나조차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애정과 연민의 홍수가 네가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나 자신의 것인지 분별할 수 없어.”
그는 션을 동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타기팅을 하지 않는다면,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억누를 만큼은 되는구나. 그러니 너 자신이 동조하지 않는 이상에는 아주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수 있겠지. 긴장을 풀지 마라, 션. 일이 생기면 이성적으로 대처해. 한 사람과 전면적인 공유가 일어날 만큼 오래 함께 지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에 거리를 두고 타인에게 관심을 끊어라. 너의 컨트롤 능력은 파워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통제 불가능한 정도도 아니란다.”
션은 멍하게 앉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에 기둥을 세우듯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그러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걸 믿을 수 없다면, 죽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선행을 하고 동정심을 가지려무나. 너 이상으로 네게 홀리는 이를 불쌍히 여겨라. 그것이 알라의 보살핌을 구할 것이다.”
그는 미란 알 아시리에게 완벽한 억제 처리에 성공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 션을 놓아주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심은 약간의 억제력은 션이 완전히 자신의 힘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큰 도움이 되었다.
몇 곳의 연구소와 그보다 더 많은 조직이 미란 알 아시리에게 션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란은 강제로 이끌어진 증오와 애정에 시달리면서도 그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고, 억제 처리에 관한 보고서는 그를 공식적으로 일반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힘은 갈수록 강대해졌다. 컨트롤 능력은 그것보다는 완만하지만 놀랄 만한 수준까지 성장했다. 그는 가장 먼저 동조 능력을 차단하고, 그다음 공유 능력을 억제했다. 증폭 능력은 그것보다 좀 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그의 주위에서 모든 사람은 정상적인 상태보다 훨씬 격렬하게 굴었다. 억제 처리를 받아 능력의 상당 부분을 억눌렀는데도 어지간히 냉정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본능을 아무것도 참지 않으려 들었다.
버스에서 부딪힌 것만으로도 뺨을 때리고 주먹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갑을 주워 주었을 뿐인데 키스하려는 사람도 있다. 루번처럼 약혼자나 배우자가 있는데도 고백해 오는 사람의 수는 셀 수가 없었고, 하숙집의 주인은 월세를 받지 않는 대신 몸을 원했으며, 옆방 사람이 반쯤 미쳐서 밤마다 벽을 망치로 두드린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 그를 사이에 두고 다투다가 상대를 찔러 죽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컨트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일단 동조만이라도 사라진다면, 어떻게든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일부러 남자가 많은 학과를 전공하고 남자가 많은 회사를 골라서 취직했다.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일정 부분을 만족시키고 나면 끝이 나는 욕구나 우정과 호의 같은 감정은 넘쳐흘러도 좀처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의나 증오에서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적었다. 공격해 오더라도 자신이 받아 내면 그만이었고.
그에 비해 성욕과 사랑은 통제하기도 어렵고 끝도 없었다. 합리화도 쉬웠다. 남자들 중에서도 그에게 그런 의미의 욕망을 품는 사람은 적지 않았으나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그런지 내적인 갈등으로만 끝나는 일이 많았다. 설령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상대적으로 대처하기 쉬웠다. 어쨌거나 남자라면 육탄 공격으로 나오는 순간 두들겨 패서 내쫓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컨트롤이 완성된 뒤에도 그의 GFG는 불쑥 고개를 드는 욕망처럼 쉽사리 바깥으로 흘러나가곤 했다. 졸고 있다든가 술에 취했을 때는 특히나 말이다. 루번의 경우처럼.
언제나 긴장감을 가지고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션은 이따금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생각해 보곤 했다. 처음 U급의 GFG가 발현되었다는 게 알려졌을 때 제안을 받았던 것처럼 어딘가의 조직에 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SSB나 군 정보부에서 그의 능력은 매우 유용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나름의 대비책들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런 결정은 내릴 수 없었다. 그는 극적인 삶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힘이 가지고 있는 파급력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고 해서 남의 삶을 부숴 버릴 수는 없다. 미란 알 아시리가 자비를 베풀어 그를 살려 준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억제 처리가 되어 있는 것으로 해 두는 것이 가장 좋다. 그는 신중하게, 오로지 자기 능력이 발생시킨 사고를 처리하는 데에만 GFG를 사용했다. U급의 능력은 억제 처리가 되더라도 미세하게 계속 발현 상태인 경우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의심은 사지 않았다. 그는 이따금 누군가가 주시하는 눈길을 느끼기도 했지만, 모르는 체했다.
션은 무감각해지려고 애썼다. 그의 GFG는 그 자신도 잠식한다. 감정에 휩쓸리면 다른 사람이 다친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의 태반은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미쳐 날뛰었고, 미워하여 서슴없이 칼을 드는 상대조차 그는 책망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두 그들의 탓이 아니었으니까.
* * *
GFG가 ‘Gift from God’이라고 명명된 이유가 치유력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 등급을 표시하는 세계 표준은 치유계 GFG에 기준하여 전적으로 그 파워의 양에 따르고 있다. 이것은 치유계의 GFG가 대개의 경우 질적 차이나 컨트롤 능력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
연구자들 중 다수가 GFG의 활용에 있어서 컨트롤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혹은 그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질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힘인가를 참조하여 새로운 표준 등급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GFG를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육성되는 분야는 치유계와 봉인계, 텔레파시스트뿐이다. 이 세 종류가 아닌 GFG가 인위적으로 계발되는 경우는 매우 소수이며, 자연 발현자를 포함하더라도 치유계를 표준으로 삼고 있는 현재 상황을 뒤집을 만큼의 영향력은 없다.
더군다나 GFG는 선천적인 능력이다. 힘의 양, 질, 수준은 물론이고 컨트롤 능력까지도 훈련이나 노력에 의해 최대치를 증가시킬 수 없다. 잠재력의 한계는 매우 명확하며, 모든 발현자가 첫 발현 시점으로부터 1년을 전후하여 그 능력의 성장을 마친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충분히 유용할 만큼의 파워를 가지고 있어도 컨트롤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치유계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컨트롤 하지 않아도 해를 미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억제 처리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파워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 등급은 충분히 그 유용성을 다하고 있다.
션은 그 표준 등급에 관한 논쟁이 매우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의 컨트롤 능력이 모두 성장하는 것에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1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파워의 양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능력을 실제로 쓸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컨트롤 문제도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자신처럼.
공식적으로 감정의 증폭, 동조, 공유로 기록된 그의 GFG는 다수의 하위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정신 조작계 GFG가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그는 할 수 있었다. 매혹, 세뇌, 감정전이, 뇌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나 생리적 욕구의 통제 같은, 첩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GFG는 그의 능력에 비한다면 매우 유치한 수준이라고 해도 좋다.
그는 정신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치유계의 능력도 일부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우울증이나 감정 조절 장애 같은 것이라면 증상을 현저히 완화시킬 수 있다. 이 정도가 되면 파워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 수준과 컨트롤 능력 역시 측정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다.
높이 서 있는 자는 멀리까지 보인다. 이제까지 존재해 온 어떤 GFG보다도 강력하고 광범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의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워의 양도, 질도, 종류도, 컨트롤도 아니라 관찰 능력이었다.
결국 능력을 사용하느냐 마느냐,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판단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판단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를 아는 것이다.
공식 기록상 그의 GFG 발현 시기는 6세와 15세로 추정되고 있다. 감정의 증폭이 6세. 동조가 15세라고 한다. 그 두 가지가 그가 가진 능력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긴 하지만, 사실 최초에 그가 발현한 GFG는 증폭도, 동조와 공유도 아니라 감정 지각 능력이었다.
그 힘이 처음 발현된 것이 언제인지는 션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6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외할머니에게 맡겨졌을 때는 이미 발현되어 있었다. 션은 외할머니의 주위에 구운 마시멜로처럼 부풀어 있는 연분홍색의 달콤한 향기를 보면서 그처럼 따뜻하고 안심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어릴 적의 기억은 부분 부분밖에 없지만,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도 색으로 기억한다.
그가 숨 쉬는 공기는 단 한 번도 투명했던 적이 없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사람은 감정을 내뿜고 있다. 그 색들은 상대의 얼굴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짙은 것은 아니지만 공기 중을 물들이고 있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없을 때뿐이었다. 애정이 가득했던 외할머니의 집에서조차도 다디단 색에 오감을 침범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힘은 그의 GFG가 완성되는 것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는 수신자의 틈이나 약점을 찾아 시행착오를 거치며 들어가야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눈으로 전부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볼 수 있으므로 누구라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능력 중에 오로지 ‘억제’만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상대가 느끼는 것에서 반대의 감정을 증폭시킨다면 상대적으로 현재의 감정은 억제되므로 그것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의 세상은 오색의 물감이 엎질러진 늪과 같다. 아름다운 것도 있었지만, 모든 색이 뒤섞이면 그것은 검은색조차 아니다.
* * *
그가 엘리엇 위체를 처음 본 것은 1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어느 금요일 점심에 샌드위치를 물고 컴퓨터 앞에 앉아 무료하게 지뢰 찾기를 하고 있는데, 밀리 베일리가 그에게 생크림이 산처럼 쌓아 올려진 종이컵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따 저녁에 맥주나 한잔하러 갈래?”
“음…….”
션은 거절할까 말까 고민했다. 불과 얼마 전에 루번의 약혼녀에게 습격당한 사건을 겪은 덕에 긴장감이 올라갔지만, 그렇다고 사람 만나는 일을 아예 거절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단둘이 만나기에는 껄끄러웠다.
그는 밀리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션을 볼 때의 감정 상태는 항상 약간 들뜬 흥분 상태였고, 성욕을 표시하는 보라색이 반짝거렸다. 그런데도 그가 미리 밀리를 쳐 내지 않은 것은 그녀가 친구의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인다고 해서 상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설레발을 치며 밀어내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밀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갔다. 그녀는 가장 가깝고 믿을 만한 이성 친구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역시 션의 입장에서 미리부터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팀장인 그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너 어차피 집에 가 봐야 할 일도 없잖아?”
“축구 봐야지.”
“그러면 시어스로 가면 되겠네. 거기 스크린 기가 막힌 걸 달았던데.”
팀 동료인 올리버가 뒤에서부터 척 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불청객이 끼어들자 밀리가 얼굴을 찡그렸다. 션은 씩 웃었다. 그런 거라면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예약도 안 했는데 괜찮은 자리가 있을까?”
“조슈아가 오늘 비번이었잖아. 지금부터 자리 잡아 놓으라고 하지, 뭐.”
“그거 좋군.”
션이 내민 주먹에 올리버가 주먹을 툭 치고 다른 사람을 꾀러 갔다. 밀리의 주위에는 노기가 퍼뜨려졌지만, 션은 그것도 모르는 체했다.
원래 단합이 잘 되는 팀이었으므로 저녁의 술자리는 규모가 금세 커졌다. 십여 명의 남자가 밀리 하나를 끼고 단골 펍으로 향했다. 올리버가 조슈아에게 전화를 하고, 몇 명이 소란을 떨면서 길을 걷는다.
그러다가 도로 한곳에 차가 엉망으로 뒤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교통사고가 난 것 같은데.”
조금 더 가자 상당히 큰 사고 현장이 있었다. 절반쯤 부서진 승용차의 엔진에서 불꽃이 튄다. 옆면이 찌그러진 트럭과 후면을 들이받힌 버스가 있고, 오토바이가 남긴 스키드 마크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신고는 했나?”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초조해하는 것 같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머리를 다친 트럭 운전사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고, 버스 기사는 승객을 부축해서 내리게 하고 있다. 밀리가 자리를 뜨자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션은 알았다고 그녀를 따라나서려 했다.
군중 속에서 웬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키가 훤칠하고 보기 드문 옅은 금발을 가진 그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고 현장으로 들어서더니 버스 기사에게 혼잡하게 뒤엉킨 차량을 정리하라고 말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소화기를 가지고 내렸다.
“거기 갈색 머리, 여기 좀 도와주겠나?”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가 호명했다. 남자가 깜짝 놀라더니 다급하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소화기를 갈색 머리 남자에게 맡기고 오토바이 운전자의 곁으로 다가가 맥을 짚었다. 불이 붙기 시작한 엔진에 늦기 전에 소화 분말이 뿌려졌다. 갈색 머리 남자는 새파랗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누구 심폐 소생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군중 속에 있던 여자 하나가 외쳤다. 남자는 “부탁하네.”라고 말하고 이번에는 휘청거리며 주저앉아 있는 트럭 운전사에게 물었다.
“자네, 신고는 했나?”
“해, 했습니다!”
“다급한 순간인데 잘했네. 그 옆의 키 큰 친구, 바쁘지 않다면 버스 기사를 도와 이 근처의 차량을 통제하도록 도와주게. 이래서는 구급차가 오지도 못하겠군.”
기묘할 정도로 공기가 차분해졌다. 시간이 있다는 몇 사람이 길을 열기 위해서 급하게 차도로 내려가 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올리버와 다른 몇 사람의 동료도 승용차의 차 문을 여는 것을 돕기 위해 달려갔다. 몇 사람이 힘을 합쳐서 뒷문을 열었다. 남자가 평연한 태도로 기절한 아이를 차에서 안아서 내렸다.
활짝 뚫린 길로 곧 구급차가 당도했다. 션은 멍한 채로 남자가 구급대원들과 사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완전한 무색이었다. 동요를 침착함으로 가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션에게는 정말로 이상한 체험이었다. 션은 그때까지 한 번도 사람을 그렇게 명확한 선으로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주변은 무색의 유리구슬로 둘러싸인 것처럼 청명한 색을 띠고 있었고, 그 안에 서 있는 남자는 마치 맑은 하늘 속에 서 있는 것처럼 선연했다. 그의 담담함이 전파되는 것처럼 온통 불타오르는 것처럼 동요와 경악, 충격과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던 현장 주위의 감정들마저도 어느 틈에 일상적인 수준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션? 션?”
그는 밀리가 마구 흔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응?” 하고 돌아보면서도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그래? 이제 가야지.”
“아, 응. 그렇지.”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 다시 돌아보는데,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현장에서 떠난 건지 구급차를 같이 타고 떠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
안타까운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갔다. 션은 심장이 미친 듯이 맥동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이건 착각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땀범벅이 된 동료들이 그의 옆으로 돌아왔다. 기분 좋은 흥분이 그들을 휘감고 있었다.
“아, 이거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한 것 같은데.”
“문 딴 거밖에 더 했냐?”
“경호 팀도 아니고 시스템 설계부인 우리가 언제 이런 일을 해 보겠어? 돈 안 받고는 더더군다나. 아, 어쨌든 좋은 일을 하니까 기분 좋은데. 칭찬받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 줄 몰랐다.”
“구급대원이 다행이라고 하더라고. 애 아빠 쪽은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라며.”
“아, 조슈아한테 전화 왔다. 빨리 가자고.”
무리 전체가 소란을 떨었다. 션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끼인 채로 펍으로 향했다. 그러나 술은 넘어가지 않았고 첼시와 리버풀의 빅 매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날 밤에 뉴스를 시간마다 전부 챙겨 보았다. 꽤 큰 사고였던 데다가 특이한 일이 생겼으니까 보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아나운서는 사고에 대해 언급했지만, 시민들이 힘을 합쳐 구조를 도왔다고만 했을 뿐이지 누가 그 일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한 것은 심폐 소생술을 행했던 여자와 트럭 운전사뿐이었다. 그는 신문에서 기사 한 줄이라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 이야기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