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52)

11.

션을 찾아가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로부터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뒤질 기세인 의사들에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밀 검진을 받고, 거의 열흘에 걸친 기간 동안 신중하게 인지 검사를 받았다. 검사의 가짓수가 하도 많아서 리는 나를 이용해서 GFG 피해자에 대한 논문이라도 쓰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것에 까다로운 아버지라면 틀림없이 보안 계약까지 걸어서 엄중히 금지했을 텐데도 말이다.

그게 끝난 다음에는 재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태가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후유증으로 전신에 마비 증상과 원인 불명의 통증이 있었다. 상반신은 2주 정도 만에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으나 다리는 좀 더 상태가 심각했다. 이것은 플래시백에 의한 것이고 실제로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안정기에 들어서자 통증부터 눈에 띄게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일단 CE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설령 멀쩡한 것처럼 보여도 리가 걱정하듯이 전혀 판단력에 장애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고, 최소한 몇 달은 더 재활에 전념해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임시 대리인을 두는 것도 고려해 보았으나 아일라는 내가 더 오래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리도 거기에 동의했다. 나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 기회에 몇 년 정도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 CE의 경영을 직접 한다는 것은 원해서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무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 무리해서 자리를 지킬 생각 하지 말고 적임자가 있다면 맡기는 것이 옳다. 고삐를 쥐는 것은 뒤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피로연장에서 쓰러진 것을 숨길 수는 없는 데다가 입원까지 길어졌으므로 언론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쪽에는 급성 심근경색이 왔던 거라고 리가 기자회견을 하는 것 정도로도 충분히 커버 가능했다. 지병으로 인한 심장마비와 그 후유증 때문에 CE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원래부터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편이었으므로 헤리퍼드의 힘을 동원하고 SSB에서까지 여러 방면으로 손을 쓴 것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었다. 새로운 경영진 쪽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게 하고, 나는 병실에 절대 안정 팻말을 걸어서 카메라 렌즈를 피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 입원해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한 달이나 병원에 누워 있었던 것은 언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퇴원한 것은 꼭 한 달 만의 일이다. 그때쯤에 남편이 폭발했기 때문에 아일라는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되돌아갔다가 다시 오겠노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러지 말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정말로 괜찮고, 그녀가 아무리 나를 걱정한다 해도 일평생 옆에 있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말이다. 아일라는 또다시 울면서, 처음부터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결국 공항으로 향하는 차를 탔다.

솔직히 온갖 루머와 사교계의 시선에 혼자 대처하는 것은 막막한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만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당당할 수 있다. 아일라와 별거를 시작한 후로 나는 사생활을 가질 권리를 잃어버렸다. 그나마 남자들 사이에서는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지만, 여자들의 입에는 맞서 변명할 방법조차 없다.

하나씩 해치우다 보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하고 우선 풀러 씨와 피처버트 씨 부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랑 신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결혼식을 망친 것을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 이상의 선물을 준비했다. 그날의 호스티스는 스탠포드 부인에게 부탁했다. 스탠포드 부인은 눈을 빛내면서 내가 어디에서 션 맥케인을 만났으며 무슨 일로 알게 되었고 어떤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캐내려 했다.

내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션과 언쟁 중에 쓰러졌던 것은 벌써 소문이 쫙 돌았고, 그의 신원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댔다. U급의 GFG에 대한 부분은 SSB에서 기밀로 취급하여 숨긴 듯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사생활이고 뭐고 없이 모조리 해부당했다.

나조차도 몰랐던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와 만나던 부분만이 가위질한 것처럼 빠진 것은 준형의 솜씨가 전혀 죽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엾은 션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는지도 알지 못한다.

추문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나이건만, 내 과거의 사건이라든가, GFG 면역 같은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으므로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는 지병이 있고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 정리를 마치고 션에 대해서만 떠들어 댔던 것이다. 나는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야단이었던 것에 비해서 그냥 전부터 좀 알던 사이였다고 얼버무린 변명은 이상할 정도로 잘 통했다. 사실 아무리 해도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낼 수가 없어서 얼렁뚱땅하려던 것인데 말이다. 스탠포드 부인은 묘하게 생글거리는 얼굴로 “알았어요.”라고 말했고, 나중에 흡연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 풀러 씨도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절대 이런 이야기가 제 입에서 나가는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브닝 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잘 설명해 놓을 테니까.”라고 약속했다.

마치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사람처럼 은근한 얼굴로 말이다. 피처버트 씨가 그 옆에서 진중하게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해해 준다면 나로서야 고마운 일이지만, 화를 열 번 내도 모자랄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웃으며 협력해 주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무례를 당한 당사자인 풀러 씨와 피처버트 씨가 이해심을 가지고 도와주어 이야기는 그럭저럭 쉽게 끝났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래지 않아 소문은 조용히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야, 네가 진지하게 맞대응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감히 계속 떠들어 댈 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

“그렇게까지 무게를 두고 말한 적은 없는데. 사과를 했을 뿐일세.”

“어쨌든 션과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사이’라는 것을 드러낸 거잖아. 풀러 씨도, 피처버트 씨도 대박을 친 기분일 거야.”

“대박이라니?”

문병을 온 리암과 산책하던 중에 문득 의문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가 피식거렸다.

“대박이지, 아무렴.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의 비공식 만찬에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너와의 친분을 과시할 수 있을 텐데, 은밀한 비밀까지 공유하여 그것으로 잠깐이나마 사교계를 압도하게 되었으니 그치들로서는 피로연 하나 망친 걸로는 비교할 수도 없는 보상을 얻은 셈 아닌가.”

“은밀한 비밀?”

더군다나 그것으로 사교계를 압도하다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쳐다보자 리암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네가 게이라는 거 말이야.”

“……그걸……. 알아챘을까?”

어렵게 어렵게 물었는데 리암이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해하는 어조로 대꾸했다.

“남자랑 치정 싸움 중에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는데 그걸 왜 몰라?”

“치정? 아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풀러 씨가 언쟁한 내용을 들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고 저떻게고, 여태까지 여자 소문이라고는 하나 없던 네가 그런 미남 손에 질질 끌려갔는데, 방에서 문 잠그고 언성 높여서 싸우기까지 하고. 네 성격에 그런 사이이기라도 하지 않았으면 남한테 그렇게 끌려갔겠어? 경호원에게 끌어내게 하겠지? 비즈니스라든가, 그런 이유가 있다면, 적어도 풀러 씨하고 이야기 마무리는 짓고 사과까지 하고 갔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게이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물증만 없다 뿐이지 그쯤 되면 확실하잖아? 거기다가 따로 불러서 사과까지 하면서 어떻게 만나서 무슨 사이인지는 말할 수 없다는 투인데 뻔하지. 1+1=2야. 그게 그렇게 연결이 안 되는 건 너뿐일걸.”

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스탠포드 부인도 알아챘겠군. 어쩐지 집요하게 묻더라니…….”

“스탠포드 부인은 괜찮아. 그녀는 로맨스 영화 마니아니까. 미남이 신분 차이 나는 사랑에 앓았다는 코드만으로도 이미 그의 편일걸세. 그리고 사실 그동안 의심한 게 나만은 아니었을걸. 저번에도 이야기했었지만, 네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런가, 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물밑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성적 지향이 남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역시 껄끄러웠다. 그러나 리암은 한술 더 떴다.

“이 기회에 아예 커밍아웃 하지 그래?”

“자네 미쳤는가?”

“왜? 이제 뒷목 잡고 쓰러질 부모님도 안 계시고……. 정치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옛날같이 길 가다 돌을 맞을 것도 아니고. 좋을 대로 살면 되잖아. 사교계의 평판이 문제라면 괜찮아. 상대가 그 남자인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자 리암이 피식 웃었다.

“넌 외모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톡 까놓고 말해서 그 정도 얼굴이면 너무 대단해서 남자랑 사귄다는 것조차도 특별해 보인다고. 흉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 이상으로 트로피가 될 거야. 지금 이게 어마어마한 스캔들이 되는 대신에 그 남자에 대한 궁금증이 더 강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신분이고 뭐고 다 떠나서 그 얼굴 하나로 ‘헤리퍼드 공작의 상대’로서 인정받은 거라고. 그야 정식으로 시민 결합이라도 하겠다면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정부 정도야.”

“그런 말은 션에 대한 모욕이 된다네.”

“지칭이 신경 쓰인다면 한 번 그의 손을 잡고 비공식적인 파티에라도 참석하면 될 일이잖아. 갈 데가 없으면 같이 내 크루즈에라도 참가하든가. 일단 너는 유부남이고, 아일라의 일도 있으니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걸. 드문 일도 아니고. 작년에만 해도 러셀 경이 남자와 결연하지 않았나.”

“러셀 경에게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네.”

나는 즉답했다. 러셀 파이퍼의 스캔들은 거의 반년간 런던 사교계의 안줏거리이자 티 푸드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혈압 때문에 쓰러졌으며 어머니는 신경쇠약에 걸려 요양원으로 갔다. 내가 같은 일을 했다가는 파장이 그 30배는 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듣고 보면, 리암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헤리퍼드 공작가는 어차피 내 대에서 끝날 것이다. 가문 자체에 타격이 된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내가 염려해 왔던 대부분의 일은 가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고, 사실 나 자신에게는 그다지 지장이 되지 않았다. 리암의 말마따나 길에서 돌을 맞을 것도 아니고, 평판이 떨어지고 스캔들이 돌더라도 그런 것에 마음 상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말하자면, 가문의 평판을 유지하는 것은 공작으로서의 업무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와서 가문의 명예니, 긍지 같은 것을 찾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명예 선언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도 않은 간접적인 부분이다. 다소는 내려놓아도, 문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자네는 내가 션과 정식으로 교제하기를 바라는 건가?”

“내가 바란다고 하면 어폐가 있지. 남의 연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네가 사랑을 알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었어. 너무 진지해지지만 말고.”

“남과 인생을 나누는 일일세. 진지하지 않은 것이 더 문제가 아닌가?”

“예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니, 하다 말았었나.”

리암이 쓴웃음을 지었다.

“경박하게 굴라는 게 아니야, 엘리엇. 너는 지나치게 진지해. 네가 생각을 하지 않고 감정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원래 연애라는 건 얼굴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요소가 있으면 데이트 좀 하고, 그러다가 마음이 맞으면 잠도 자고, 깊이 알아 가다가 진지해지기도 하고 더 안 되겠다 싶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라고. 계약서 쓰는 정략결혼도 아닌데 미리부터 먼 미래까지 내다볼 필요는 없어. 처음부터 인생을 걸어야겠다 생각하고 완성된 형태에 밀어 넣을 계획을 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글쎄. 잘 상상이 안 가는군.”

“목표가 있어서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통제하겠다면 모를까, 굳이 그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삶을 억누를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러니까 편하게 생각해. 마음이 가면 만나고, 역시 좋으면 사귀고, 그러다가 안 되겠으면 헤어지고 그래. 남들처럼.”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들처럼’이라는 말은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안심되게 했다.

“아일라는 나를 잡아 죽일 기세로 반대하던데.”

“사실 아일라가 돌아가기 전에, 네가 그를 다시 만나려고 하면 침대에 묶어 놓으라고 하긴 했는데…….”

그가 빙긋 웃었다.

“지금도 반대하는 게 맞겠다 싶긴 해. 하지만 네가 진심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의 인생은 기껏해야 칠팔십 년이야. 우리는 벌써 거의 그 절반까지 왔잖아. 남은 삶이 길지도 않은데, 이것에 벌벌, 저것에 벌벌 떨면서 살얼음판 위에서처럼 살아서 뭐 하겠어? 상대가 좀 이상하면 어때? 또 좀 위험하면 어때? 인생 만사 경험이고, 잘못되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되는 거지. 그러다 죽으면, 그것도 흥미진진한 삶이었던 거고.”

나도 션의 입장에서 위험하고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일 거라며 그가 키들거렸다. 나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자네가 자네의 방탕한 인생에 그럴듯한 논리까지 붙여 놨을 줄은 몰랐네.”

“설득력 없었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네. 그리고 어차피 다시 만날 작정이었다네.”

“뭐야,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가?”

리암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충고했다.

“아일라는 신경 쓰지 마. 그녀가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제는 결국 남이야. 네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사실이 그래. 아무리 예전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려 해도 남편과 자식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지.”

“그것도, 알고 있다네.”

아일라를 잃고 안타까운 기분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뭔가 하나를 잃은 듯한 공허감이나 애틋함은 남아 있지만, 션이 내게 쏟아부은 고열의 홍수 같은 감정의 파도는 그것을 모두 채우고도 아직 남아서 온 마음을 적시고 넘쳐흘렀다.

나는 매일같이 그를 떠올린다. 그리고 매번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그 맹목적인 열정에 응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설령 션이 또다시 GFG를 이용하거나, 혹은 그로 인해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격렬한 감정이 트리거가 되어 죽는다 해도 그게 나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특별한 행복도 불행도 없이, 남의 삶을 지켜보듯이 지금처럼 줄곧 살아 있기만 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내가 처음으로, 그리고 틀림없이 마지막으로 맛보게 될 완전한 사랑이었다.

* * *

애초에 나의 계획은 적어도 혼자 걸을 수 있게 되고 나서 션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빨랐던 회복세는 정체기에 이르렀고, 나는 두 달이 되도록 휠체어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서두르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이러다가는 언제가 되어야 찾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마음의 짐을 더해 주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냥 만나러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준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국 가기로 한 거야?」

준형은 한숨을 쉬었지만, 순순히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션은 지금은 네덜란드에 있다고 했다. 예상외였다. 나는 그가 조건이 좋은 스웨덴으로 갔거나 튀니지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인 것은 나쁘지 않다.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준형이 기다리라고 외쳤다. 나는 놀라며 말했다.

“그간의 소식이라면 전해 주지 않아도 괜찮네. 지난번에야 상황이 상황이라서 자네에게 물었지만, 이렇게 뒷조사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자네가 그간 살펴 준 것으로 충분해.”

「아니, 그런 이야기는 아니야. 나도 따라간다.」

“응?”

「널 따라가야겠다고. 설마하니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곳에 혼자 갈 작정은 아니겠지?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면서?」

“설마. 집사가 함께 갈 걸세.”

「그 영감님이 유사시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휠체어 미는 것밖에 못 할 텐데. 아니면, 등빨 좋은 보디가드 10명쯤 데리고 갈 거야?」

“그럴 리 있겠는가.”

「다시 생각해. 맥케인 상대라면 보디가드 10명이 아니라 100명이라도 무용지물이니까.」

“자네가 같이 간다면야 든든하긴 하겠지. 하지만 정해진 일정도 아니고, 이삼일 걸릴지도 모르네만.”

「가게는 닫아 두면 돼. 장기 계약한 금맥의 목숨을 붙여 놓는 것보다 급한 일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아니면, 차라리 맥케인을 부르는 게 어때? 전화번호 줄 테니까 오라고 전화해. 입국 금지 같은 건 이리저리 전화나 몇 통 돌리면 해결될 거 아냐.」

“그것도 생각해 봤다네. 하지만 앉은 채로 버튼 몇 개 눌러서 불러들이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그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간절히 찾아 헤맸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준형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출발은 언제?」

“저녁 즈음에 느긋하게 출발할 작정이었네. 션도 퇴근을 해야 할 테고. 집으로 오겠나?”

「그건 너무 눈에 띄고, 공항으로 갈게. 시티 공항 전용기 터미널로 가면 되지?」

“그래.”

나는 전화를 끊고 윌리엄에게 경호원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했다. 윌리엄은 반발했지만, 따로 사람이 하나 따라올 거라고 했더니 별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져서 당황했을 정도였다.

* * *

션이 있는 로테르담시까지는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꽤 느긋하게 출발했지만,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 들어섰을 때도 아직 7시밖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일단 예약해 놓은 호텔에 체크인했다. 숙박하게 될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요즘의 내 건강 상태를 생각해 보면 어디든 쉴 곳이 마련되어 있는 편이 좋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준형만 동반하여 밖으로 나섰다.

“긴장하고 있어?”

“그렇게 보이나?”

“정장을 입었으니까. 마음의 준비 같은 것처럼 보여서 말이지.”

“글쎄. 딱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네. 그냥 예의를 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긴장이라는 감정은 평생 한 번도 자각해 보지 못했으나 준형의 말을 듣고 나자 지금 상태가 그러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이 조금 차갑고 손바닥 안이 축축하다. 설레는 것처럼 심장도 뛰었다.

“만나면 실망할지도 몰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상대방에게 자기가 알지 못하던 면이 있는 것을 알면 누구든 그러니까.”

“설마 내가 이번에 겪은 것보다 심하려고.”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나쁜 것보다도 초라해 보이는 것이 더 실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것을 아는 것도 나쁘지 않지.”

준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미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금요일 저녁의 인파 속을 지나간다. 많은 사람들 속을 지나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것이 이렇게도 이상한 기분이 되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호텔 앞의 광장을 지나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준형이 길목을 꺾었다. 윌리엄이 차를 부르겠다는 것을 거절했으니 가까운 곳일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도 더 가까웠다. 골목을 돌자마자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두워지고, 금세 인적도 끊겼다. 건물 너머로 사람 소리는 들려오는데 이곳은 완전히 소외되어, 이런 골목이라면 사람이 죽어도 모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준형이 휠체어를 멈춘 것은 낡은 레지던스 앞이었다. 건물 자체는 예전에는 괜찮았을 것 같지만, 지금은 위치도 밀리고 관리도 썩 잘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당혹했다. 조잡한 레지던스에 들어간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션은 꽤 벌이가 좋고 건실한 전문직이다. 작년에 보았던 재무 상태는 젊은 남자의 것으로는 놀랄 만큼 훌륭했고, 런던의 입지 좋은 곳에 아파트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주거를 확실히 하지 못하고 임시 주거에 머무르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런 곳에 숙박을 정했을 줄은 몰랐다.

“말했잖아. 늙은 집사가 도움이 될 곳은 아니라고.”

“션이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다는 건가?”

“터미널에서 얻어걸린 호객꾼을 따라와서 그냥 짐을 풀었어. 그리고 사실 그 뒤로 집 밖으로 나온 것도 손에 꼽을 만큼밖에 없지.”

로비의 수위는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녹슨 문을 밀어젖혀 열고 준형이 나를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엘리베이터는 제법 큼직했지만, 워낙 오래되어 불안한 소리를 냈다. 관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중정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물었다.

“집 밖으로 나온 적이 별로 없다니 무슨 말인가?”

“네가 굳이 맥케인이 퇴근할 시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젠장, 이 엘리베이터를 내려갈 때 또 타야 한단 말이지?”

준형이 약간 욕설을 뱉으며 다시 손으로 문을 밀어 열고 휠체어를 내려 주었다. 때가 탄 카펫 위에서 헤엄치는 기분으로 나는 바퀴를 돌렸다. 준형은 엘리베이터 문 닫는 것을 포기하고 내 휠체어를 밀어 주었다.

벨을 눌렀지만, 안에 들렸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두어 번 더 눌러 보았지만 안에서는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벨이 고장 났는가 싶어서 나는 대신 문을 두드렸다.

“필요한 게 없다고 몇 번을…….”

신경질적인 대꾸와 함께 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보다 약간 빨리 준형이 휠체어를 뒤로 뺐기 때문에 다행히 부딪치지는 않았다.

상의도 걸치지 않고 나온 션이 나를 보고 얼어붙었다. 나도 그랬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수염을 깎지 않아 지저분하고 머리도 덥수룩하게 헝클어진 데다가 눈은 시뻘겋고 안색은 하얗게 떠 있었다. 뺨은 홀쭉하게 들어가 있고 턱선도 날카로워졌다. 입술도 말라붙어서 찢어졌는지 핏자국이 비쳤다.

션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놀랐다. 그러나 준형의 말처럼 초라해 보여서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면서 가슴이 가득 찼다.

“엘리엇 씨, 어떻게…….”

“오랜만일세.”

미소하며 말하자 그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관자놀이를 압박하듯이 꽉 눌렀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이런 곳까지……. 아니, 그건 물을 필요도 없군요.”

그가 준형을 쳐다보고, 다시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얼굴을 문지르고 그가 나를 외면한 채로 말했다.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옳은 일인 줄 알았는데요.”

“리암과 아일라가 자네에게 각서를 쓰게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그건 내가 만나러 오는 것에는 해당이 없을 게 아닌가. 들어가게 해 주지 않을 텐가?”

션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들어오실 만한 곳이 못 됩니다. 그리고 당신과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죄가 필요한 거라면…….”

“션.”

달래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그가 흠칫 몸을 굳혔다.

“나는 그날 하려던 이야기의 절반도 하지 못했다네.”

“제발, 엘리엇.”

션이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에게 돌아가라거나 떠나 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들어가도 되겠나?”

결국 션은 천천히 물러서서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부터 작은 거실과 주방까지 온통 어지럽혀져 있었다. 빈 병과 일회용 도시락 껍질, 신문 같은 것은 물론이고 아무렇게나 내던진 여행 가방에서 끌어내다 만 옷과 신발까지 바닥을 굴러다녔다.

들어가면서 션이 여기저기 치우려고 애를 썼지만, 그런 정도로 수습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준형이 휠체어를 밀려다 말고 혀를 차면서 앞길을 치워야 했다. 테이블에도 산더미처럼 신문과 잡지가 쌓여 있었고, 그 옆의 바닥에는 맥주병이 가득했다. 실내에도 술 냄새가 찌들어 있었다.

션답지 않다. 항상 정갈한 모습만 보아 와서 그런지 참으로 낯설었다. 그가 이렇게 생활을 엉망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준형에게 보고받았던 그의 일과는 규칙적이었으며, 종종 나에게 저녁거리로 만들었다는 요리 사진을 보내 줄 정도로 성실한 생활을 했으니까. 그의 집에 방문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의 집이 분명히 커피 향이 감도는 따뜻하고 깔끔한 공간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방에 들어간 션이 구겨진 셔츠에 팔을 꿰어 입고 나왔다. 세수를 했는지 수염이 젖어 있었다. 그가 빵 봉지와 담요 사이에서 리모컨을 찾아 치직거리는 TV를 껐다. 그러자 잠깐 침묵이 찾아오나 싶더니, 멀리서 어느 집에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레한 것은 참아 주십시오. 당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요.”

“아닐세.”

나는 짧게 대답했다. 션이 소파에 앉으며 힐끗 준형을 쳐다보았다. 준형은 특별한 감정 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약간 헛기침을 했다.

“준, 자리를 비켜 주게나.”

“안 돼.”

“준.”

“내가 뭣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기척 죽이고 있을 테니까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이야기해.”

“준, 물러가 있어.”

“바로 밖에 있을 거야.”

준형이 약간 노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하게.”

그가 거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단둘이 되었다. 나는 약간 초조감을 느꼈다. 이야기하려고 생각해 둔 것이 있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애초부터 남과 깊은 이야기를 한 경험이 적다. 그리고 션의 태도도 내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나는 그가 재회를 기뻐해 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럴 때 설득할 말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시는가 보군.”

“예에, 뭐. 요즘에 늘었습니다.”

“무리한 게 아닌가? 안색이 좋지 않은데.”

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엘리엇 씨야말로…….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네.”

“하지만…….”

그가 내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미소했다. 걱정하는 션은 비로소 내가 아는 그 같았다.

“플래시백 때문이라네. 한때 사지가 마비되었던 적이 있으니까. 실제로 다리 근육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곧 회복될 걸세.”

“…….”

그가 침묵한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낮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제 탓이로군요.”

“객관적으로 봐서 그렇긴 하지.”

“……정말로, 변하신 데가 없군요.”

션이 눈시울이 붉어진 눈을 나에게 돌렸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는 도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무슨 말씀을 하러 오셨는지 몰라도……. 빨리 끝내 주십시오. 엘리엇 씨는 아무렇지도 않으시겠지만, 이게 제게 얼마나……. 고문 같은 기분인지 헤아리신다면.”

“자네는 나와 다시 만난 것이 괴로운가?”

“괴롭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네가, 마음이 변했다면 그것으로 됐네만…….”

“확인 사살을 하러 오셨습니까? 제가 당신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당신에게 결코 전달되지 않을 환상에 잠겨 있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어서요? 하긴, 당신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제가 그리워할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좁은 거실에서 몇 걸음을 거칠게 서성거렸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 가만히 생각을 고르며 션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가 잠시 후에 다시 내 앞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마치 제가 원망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군요. 주제넘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사과를 받으러 온 게 아니라네. 자네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왔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무얼 더 말씀드리기를 원합니까? 당신이 갖고 싶어서 미칠 거 같다는 거? 돌아 버렸다는 거?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당신이 제 것이 될 것도 아닌데.”

그가 마치 나를 붙잡으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손은 허공을 움켜쥔 채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과 함께 고개도 떨구어졌다.

“그러니까 절 내버려 두십시오.”

“……자네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농담이시죠?”

건조한 웃음이 퀴퀴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틀립니다, 엘리엇.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 같은 건 이미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당신을 알게 된 뒤로 완전히 삶이 변해 버렸어요. 당신을 알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고 살 만했던 세상이었는데, 당신을 알고 나서는, 당신이 없는 곳에서는 숨조차도 제대로 쉴 수가 없게 됐습니다.”

션이 잠시 말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목을 울렸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나 혼자뿐이죠. 눈을 뜨고부터 잠들 때까지 하루 종일 당신만 생각하고, 당신이 조금은 나를 생각해 줄까 애를 태우고, 그게 얼마나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인 줄 아십니까? 당신의 마음속에는 내가 한 조각도 없는데. 당신이 내 말에 응해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 줬던 것처럼 다른 사람과 끌어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과거에 다른 사람들이 언젠가 당신의 입술을 맛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일 푼이라도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남자를 다 죽여 버리고 싶어집니다. 혹시 거기 있는 여자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내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들을 모두 홀려서 당신에게서 떼어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션.”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니, 누구라도 나보다 당신을 잘 알 거라는 생각이 매시간 매분 절 미치게 합니다, 엘리엇 씨. 당신에게 그런 대상이 되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심지어 저는 다른 사람이 당신의 시야에 들어가 있다는 것조차도, 당신과 같은 공기를 들이켜고, 말을 나누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만으로도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란 말입니다.”

“알고 있네.”

나도 알고 있다. 그가 전력을 다해서 내 안에 때려 부었던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아뇨.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오히려 이해하고 있는 건 당신의 아내 쪽인 것 같군요. 저는 당신을 해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후회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심지어 지금, 당신이 저 때문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션…….”

“잊혀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말했다.

“당신의 아내가 저더러 미쳤다고 하더군요. 저도 압니다. 이런 마음이 당신에게 폐가 된다는 것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요. 전 지금도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참으려고 애쓰고 있는 겁니다. 당신을 죽게 하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당신이 아예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당신을 불행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없는 사람처럼 내버려 두세요. 그럼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죽어 없어질 테니까.”

나는 휠체어를 움직여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서 가볍게 머리칼을 쓰다듬자 션이 빠르게 쏟아 내던 말을 멈추고 흠칫 몸을 굳혔다.

“션, 이제 그런 말은 그만하게.”

“…….”

“그게 자네의 진심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네. 자네가 가르쳐 주지 않았나.”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게 퍼부은 감정에는 그런 어두운 것만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보다 더 순수하고 반짝이는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제 그가 나에게 보냈던 다정한 시선, 부드러운 손길, 애태우며 걸어 오던 전화와 상냥한 말씨가 묻어나는 문장들의 이유를 안다. 그는 나를 별처럼 바라보았고, 거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경탄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지배하고 싶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나 그 이상으로 나를 숭배하고 있다.

문을 잠가 두어도 온 집 안에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막을 수는 없다. 아무리 나라 해도 그런 마음을 알면서 어떻게 기쁨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전에 말일세. 내가 자네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때.”

“엘리엇 씨, 이제 제발 그만해요.”

“끝까지 듣게.”

나는 고개를 들고 손을 내젓는 그에게 그만 말하라고 손짓했다.

“그때 나는 내가 자네를 좋아한다든가, 자네가 나를 사랑한다든가 하는 것을 떠나서 그렇게 하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했네. 왜냐하면, 아무리 해도 자네와 행복해지는 미래를 그릴 수 없었고, 자네는 행복해져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지.”

“…….”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엘리엇 씨.”

“나는 행복을 공리적으로 계산한다네. 나 자신은 행복 같은 감정을 깊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밖에 남을 배려하지 못해. 그러니 그날 자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안 될 일이었네. 설령 나와 자네 사이에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그건 아마 자네의 끝없는 인내심 위에 세워진 것일 터이고, 그렇게 해서 느낀다는 내 행복이라는 것은 너무 얄팍해서 그리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네. 반면,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평생의 행복을 쌓아 올린다면 그 가치는 매우 큰 것일 테고, 그건 아마 내가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했던 일 중에 가장 기쁜 일이 되었을 거라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자네는 비정상이지.”

“엘리엇 씨…….”

“그래서, 어차피 다른 사람과는 행복해질 수 없다면……. 그렇다면.”

션이 멍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헤어지던 날과 비슷하구나, 생각하고 나는 웃었다. 그가 내게 무릎을 꿇고 앉은 것보다 이렇게 같은 높이에 마주 앉아서 서로 본얼굴을 모두 내놓고 있는 쪽이 훨씬 좋았다.

“내가, 자네를 가져도 될까?”

그는 내 무신경함에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내가 열 수 있을 때까지 끝없이 문을 두드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해도, 공감도 바라지 않지만,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나를 원할 것이다. 목적이 함께 있는 것이라면, 어차피 그것밖에 할 수 없다면, 그냥 나는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가 주는 사랑을 기꺼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졌다.

거절당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션이 두 팔로 얼굴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약간 불안해졌다. 침묵이 감돌았다.

“후회, 하실 겁니다.”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언젠가 또 당신에게 똑같은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압니다. 아마 틀림없이 참아 내지 못할 겁니다.”

“그때는, 실패하지 말도록 하게나.”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션의 팔을 잡아당겨 가린 얼굴을 보았다. 그가 젖어 든 속눈썹을 내리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 눈물을 검지 끝으로 만져 보았다. 그 눈물의 온도는 뜨거워서, 마치 그가 나에게 강제로라도 주고 싶어 하는 감정이 형태가 되어서 흘러나온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사로잡아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어. 나를 갖고, 자네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게. 그리고 그 행복을 나에게도 동조시키면 돼. 그러면 나 역시 행복하지 않겠는가?”

“엘리엇……!”

그가 내 팔을 부여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풀게 하고 대신 끌어안으려 했다. 힘없이 당겨져 온 션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조그만 흐느낌이 다리를 적셨다. 나는 부드럽게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는 처음부터 자네를 용서하고 있었다네.”

그 머리칼에 키스를 떨어뜨린다. 션이 “예……. 예…….” 하고 고장 난 녹음기처럼 끝없이 말했다. 그 대답은 용서에 대한 것인지, 그를 가져도 되느냐에 대한 긍정인지 불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멋대로 그것을 후자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품에 껴안고 그가 진정될 때까지 토닥여 주었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알 수 있는 행복의 형태 중 하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