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52)

10.

나는 이중의 의미로 생존자이다.

하나는 아동 납치이다. 그건 5살 때의 일이다.

당시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의 가정교사와 유모, 경호원이 모두 범인에게 협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범인은 14명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고, 먼저 가정교사의 부모와 유모의 친자식을 유괴하고, 경호원을 홀려 세뇌한 뒤에 나를 빼돌리게 했다.

나로서는 그 세 사람 중의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과정이 이루어졌는지도 알지 못한다. 유모의 얼굴 정도는 기억할 법도 하건만, 그 근처의 기억은 지우개로 지운 듯이 깨끗한 검정이다. 다시 보는 일도 없었고, 아마 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신세가 되어 있었으리라. 협박을 당해서였든 어째서였든 헤리퍼드의 후계자를 납치하는 데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자마자 부모님과 에든버러 공은 협상과 구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만, 그들은 나를 일회적으로 돈과 바꾸는 티켓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장차 헤리퍼드 공작이 될 아이의 DNA 샘플과 생체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으리라. 게다가 나는 고작해야 5살이었지만 돈이 될 만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상대였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러했다. 범인 중의 한 명이 A급의 ‘매혹’과 ‘세뇌’를 가진 정신 조작계 GFG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GFG가 인간의 정신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가는 아직 규명된 바가 없습니다. 자기를 타인에게 연결시키는 소위 텔레파시나 엠퍼시 부분에서는 연구에 진척이 있지만, 흔히 정신 조작계라고 불리는 능력은 어떻게 작동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하나뿐입니다. 모든 종류의 정신 조작계 GFG는 상대의 마음의 틈을 파고듭니다.”

“마음의 틈?”

“이성, 판단, 에고. 의식하고 있는 부분은 타인의 침입을 허용치 않습니다. 컨트롤도 가능하지요. 인지 능력을 연결시키는 감각 공유나 언어 중추를 연결시키는 텔레파시 같은 것은 수신자 쪽에서도 GFG 발신자에게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거나 원하는 감각을 공유시켜 주는 등, 최초의 연결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어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정신 조작계는 달라요. 그건 수신자가 알지 못하는 부분으로 들어옵니다. 잠기지 않은 창문에 비유해도 좋습니다. 들어오는 것은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면 좀처럼 허용하지 않지요.”

나는 아버지 무릎에 멍하게 앉은 채 정신과 의사와 GFG 연구소장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납치에서 생환하여 1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시간을 되감은 듯한 플래시백 속에서 무의식 속에 파묻혀 있던 기억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명확하게 재생되었다.

“그러니까 정신 조작계 GFG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약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감정, 통제 불가능한 욕망 같은 것들을 자극함으로써 침투합니다. 아일라 양의 GFG 같은 것이 매우 설명하기 쉬운 경우입니다. 예컨대, 그녀의 GFG는 지금 물을 마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고, 또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도 통하지 않지요. 즉, ‘갈증이 날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갈증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겁니다.”

소장은 말했다.

“일반적으로 감정이 크게 요동칠수록 마음의 틈은 더 심하게 벌어집니다. 이성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이 늘어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약한 수준의 GFG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전에 수신자의 감정을 뒤흔들 필요가 있습니다. 아동에게는 어떤 종류의 GFG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심지어 치료조차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불허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아동은 성인보다 정신 방어가 훨씬 약합니다. 확고한 이성과 인지가 구성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지요. 집에 비유하자면 벽조차도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최하급의 GFG조차도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치명적인 ‘매혹’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잊은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매혹 능력은 상대방에게서 약간의 호감과 주로 성적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5살이었다. 낙인에 가까운 애착은 나를 갈기갈기 찢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합친 것보다도 더 중요한 존재가 갑자기 생겨나, 그때까지 내게 존재하던 세계에서 지켜야 하는 모든 규칙을 어기게 했다.

마음속에서 불길처럼 일어나던 사랑의 감정을 기억한다. 어리던 때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자는 나를 지배하기 위해서 모든 희로애락을 한꺼번에 모조리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잊는 것에는 이틀도 필요하지 않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창고에 갇힌 채로도 그것이 괴로운 줄 몰랐다. 괴로운 것은 오로지 그가 나를 버리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였다.

멀리에서 돌아오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환희에 젖어 들었고, 귀찮다고 걷어차는 발길에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무엇이든 유용한 일을 말할 때마다 그가 칭찬해 주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려 알려 주었다. 더비 은행에 있는 가문의 금고를 여는 방법과 어머니 방에 보석함이 어디에 있는지, 열쇠를 보관하고 있는 서랍은 어디인지 같은 일들 말이다.

표층적인 정보를 모두 긁어낸 다음에 그들은 내 정신을 더 짓뭉갰다. 심층으로 들어갈수록 세뇌하기 쉽고, 더 많은 정보가 나왔으니까. 5살이 알고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보고 들은 것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고, 종종 무릎에 앉힌 채로 일을 하시곤 했다. 나는 어려운 말이 쓰인 서류 같은 것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면서 그것을 읽어 보고 칭찬을 받거나 하는 일이 좋았다. 아이라고 생각해서 서재에서 놀고 있는 것을 내버려 두고 사업상의 이야기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 CE의 CEO였던 아일라의 아버지는 거의 매일 저녁을 헤리퍼드 저택에서 먹다시피 했고, 저녁 식사 시간은 국내의 전기 관련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정치를 했다. 간혹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갔던 신사 클럽에서 도는 대화들은 어떠한가. 버킹엄 궁은. 상원은. 아버지의 손님들은. 어머니의 티 파티는. 어른들이 결코 밖으로 유출하지 않고 아이들은 들어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들.

솔직히 그때쯤부터의 기억은 흐리다. 기억의 저장과 인출은 인지적인 능력이지만, 감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들어 있을 정보를 끄집어내기 위해 온 정신을 한꺼번에 뒤흔들었다. 증오와 기쁨과 공포와 사랑과 분노와 애정과 그 모든 것을 오물처럼 뿜어내면서 모든 것을 토했다.

어쩌면 나는 정신을 지배당하는 것 외에, 육체적으로도 심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윌리엄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나 몸에 남아 있는 약간의 흉터를 보면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받았던 훈육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합하께서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셨는지도 아직 해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니까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GFG에서 아동이 자력으로 벗어난 예는 합하 한 분뿐입니다. 의지력이 단단한 성인들조차도 좀처럼 이겨 내지 못하니까요.”

그런데도 나는 살아남았다. 때문에 나는 아동 납치 사건의 생존자이며, 동시에 GFG에 의한 정신 지배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매혹에 완전히 지배되던 의식이 일부 깨어난 것은 해럴드 은행의 은행장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였다. 당시에 아버지는 해럴드 은행에 금괴와 채권 일부를 보관하고 있었다. 은행이 털린 것은 내 탓이다. 아니, 그것을 내 탓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감성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금고가 열린 것은 분명히 내 DNA 샘플과 생체 정보가 더비 은행의 금고를 열고 해럴드 은행의 보안 카드와 금고 열쇠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자들은 금괴와 채권이 가득 든 상자를 창고 한가운데에 벌려 놓고 맥주로 파티를 벌이면서 은행장이 사무실에서 목을 맸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더비와 해럴드 은행은 둘 다 파산했고, 헤리퍼드가 가지고 있던 고액의 무기명 채권과 주식이 도난당했다는 소식에 금융 시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주가는 한 달 사이에 반토막이 나고 연이어 회사들이 도산했다. 수많은 사람이 직업과 돈을 잃었으며 템스강에 날마다 시체가 떠올랐다. CE가 뚫리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던 덕이다.

─────마음을 단단히, 눈을 공정히, 귀를 현명하게, 입을 무겁게, 손을 어질게 해라. 내려다보기 위해 위에 있는 것이며, 떠받치기 위해 힘이 있는 것이란다. 고귀함이란 명예에 뒤따르는 의무를 지킬 때만 존재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하는 ‘명예 선언’이란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종종 말하곤 했던 교훈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 말의 뜻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 그것은 꽤, 아마도, 충격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해럴드 은행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 집에 저녁 모임에 초대됐을 때, 나에게 기차 모형을 사 준 일이 있었다. 그 반들거리는 차체의 감촉이 누더기가 된 정신의 어딘가에서 불쑥 솟아났다.

그러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키는 일을 거부할 수도 없었지만, 지배자에게 느끼는 애착을 없앨 수 없었다. 증오심조차도 지배를 공고하게 하는 방편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발버둥 치지 않았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라고 배운 기억이 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길을 잃었을 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그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나는 길을 잃었으니,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 않으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석 달 만에 구출되었을 때 나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고, 울지도, 먹지도, 잠자지도 않았다고 한다.

“합하께서 지금까지 정상적인 정신으로 살아 계신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일라일 것이다. 오감을 닫은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인 나를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S급 치료사를 부르고 명망이 있다는 의사는 모조리 동원했다. 나는 돌처럼 가만히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지만, 눈은 뜨고 있었고 청각 역시 살아 있었다. 다만 내가 보고 듣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일라가 저택의 내 방문을 왈칵 열고 오도카니 앉아 뭔가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를 불렀다.

‘엘리엇. 여기에서 뭐 해?’

구출된 뒤에 어른들은 나에게 치료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은 되도록 접촉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보안을 지키고 내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러나 아직 어렸던 그녀는 소꿉친구가 돌아왔다는데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살그머니 2층으로 올라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나 잊어버렸어?’

나는 안심했었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였으니까.

아버지의 얼굴도,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위에는 나를 지배하던 자의 얼굴이 덧칠되어 있었다. 어른은 믿을 수 없다. 그게 진짜 아버지인지, 진짜 어머니인지, 진짜로 내가 부모님을 향해 가졌던 애정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나와 같은 아이니까,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감정은 다른 누구를 향한 것과도 달랐다. 믿음과도, 신뢰와도, 애정과도 달랐다. 맹목적인 매달림이나 두려움도,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기억해 냈다.

‘아일라.’

‘안 잊어버렸잖아! 근데 왜 말을 안 해?’

‘위험하니까 도망가.’

‘너 스파이 놀이 하니? 그러지 말고 블루베리 파이 먹으러 가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다가 일어서지 못하는 내게 ‘괜찮아.’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까 너 주려고 나랑 아줌마랑 같이 만들었단 말이야. 가자, 응?’

나는 다시 한번 어둑한 방에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새어 드는 것을 본다. 어린 아일라 스칼렛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른인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어둠과 침묵에 잠긴 방 안은 완전한 평온에 잠겨 있다. 아일라의 도움이 없이도 이제는 밖으로 통하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만,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영원히 나가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문밖에 션이 서 있었다.

내 손을 잡아끌던 아일라는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나는 숨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션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서 홀쭉해진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러나 그와 나의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가로막고 있다. 유리 벽처럼 투명하여 보이지 않지만, 션은 그 너머에 있어서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나는 대신 손가락으로 벽 위에 그의 얼굴선을 덧그렸다.

션이 가만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진짜 션이 아니다.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일 뿐이다.

“좋은 꿈이로군.”

오래전의 꿈을 꾸고 났더니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텅 빈 집에 나 홀로, 그리고 떠나 버린 아일라의 그림자가 하나. 그런 쓸쓸한 풍경에 비하면, 여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형상이 보이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 머릿속에는 껍질이 하나 있다네.”

꿈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의사나 GFG 치료사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서, 한 번도 특별한 이상을 일으키지 않고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낼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네. 내 여기 깊은 곳에는 껍질이 있어. 꼭 호두처럼 생긴 것이지.”

나는 머리를 톡톡 쳤다. 그 단단한 방어벽은 내가 5살 때 찢어진 정신을 모아서 스스로 구축한 것이다. 모든 감각은 그 껍질 너머로밖에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감정으로부터 차단된다. 또한, 모든 종류의 GFG에 영향받지 않는다.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필요 없는 부분으로 취급하여 잘라내 버리면 마음의 틈은 없어진다.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면 약점은 사라진다. 준형은 내가 방어계의 GFG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내 트라우마이고, 생존 본능이다.

나는 안락한 집 안에 앉아 모든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그고 살고 있다. 바깥 날씨는 다채로워서 맑고 청명한 날도 있고, 비바람과 폭풍우가 치는 날도 있다. 천둥 번개가 우르릉거리며 지붕을 울리기도 하고 천사의 노래라도 들릴 것처럼 환하여 닫아 놓은 방 안쪽 깊은 곳까지 기분 좋게 해가 드는 날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바깥의 일일 뿐이다. 그것이 누군가가 영사하고 있는 필름이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마치 영화를 보듯이 그 변화들을 바라본다. 가끔은 그것에 영향을 받아 슬퍼지기도 하고, 기뻐지기도 하고, 홀린 듯 열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결국에는 남 일이라, 돌아서면 이내 잊고 마는 것이다.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집 안에 있는 진짜 내 생활은 단조로워 변화가 없다. 온도 변화가 없는 내 미래는 밍밍하고 미지근한 물과 같아 소화하기 쉬웠다.

“나는 그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으로 하기로 했다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라네.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지만, 대신 타인과 공감할 수 없게 되었네. 남들만큼 진심이라든가, 절박감을 느껴 본 일도 없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도 없거든. 나는 가능한 한 남들과 비슷하게 살고자 했지만, 기쁨을 느껴도, 슬픔을 느껴도, 고통을 느껴도, 행복을 느껴도 그것을 내 것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네. 또, 남이 내게 무엇을 느낀다고 말해도 그가 그것을 느낀다고 믿을 수가 없다네.”

무심결에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이제 자네는 예외로군.”

션이 내게 행한 것은 엄연히 폭력이다. 내가 설령 재조립된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발작을 일으키는 대신에 완전한 갈망에 사로잡혀 그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하더라도 강제로 정신을 비틀어 열고 감정을 뒤바꾸어 지배하고자 한 행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 행위는 나에게 그가, 내가 그에게 느끼는 것을 정확히 가르쳐 주었다. 정신의 방어벽을 션의 GFG가 때려 부수려고 할 때, 나는 그의 감정이 거기에 있고 껍질 안에 내 감정이 있음을, 우리 둘의 감정이 서로 다른 곳에 각자 위치하며 그것이 정말로 각자의 것임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내가 션에게 느끼는 사랑이 진실로 내 것이고, 그가 나에게 퍼붓는 미친 듯한 열정이 실체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거리는 벽 너머에 그가 서 있고 바로 여기에 내가 서 있는 것처럼, 닿지는 않지만, 몹시도 가까웠다.

“엘리엇.”

그때까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션이 입을 열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안색이 엉망이로군요…….”

그가 손을 뻗어서 내 눈꺼풀을 만졌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접촉에 긴장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리암 경이 배려해 준 덕분에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먼발치에서도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는데요.”

긴 한숨 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왔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왜인지 잘되지 않았다.

“당신의 과거에 관해서 들었습니다. 당신이……. 아뇨.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와서 소용도 없는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으니까요. 제가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도 잘 압니다.”

그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벽 너머의 그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인데, 내 이마와 눈꺼풀 위로 따뜻한 것이 떨어졌다.

“당신을 잘못되게 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치게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정말로, 당신을…….”

막막한 듯한 목소리가 끊어졌다. 부드러운 손길이 뺨을 어루만져 와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꿈속의 그보다 더 생생한 모습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두 군데쯤 반창고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일라의 손은 맵다.

“용서를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고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수단을 써서라도 당신을 원했던 마음은 진짜였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면 지금쯤 내 숨도 멎어 있을 겁니다. 빨리 눈을 뜨십시오. 모두들 당신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조그마한 속삭임이 귓속에 스며들었다.

“신의 은총이 당신에게 함께하기를. 안녕히 계십시오, 엘리엇.”

나는 흠칫 놀랐다. 그 말이 몇 달 전에 내가 했던 작별 인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가지 말라고 손을 뻗었지만, 거기에 션은 없었다.

나는 놀라서 한 번 더 눈을 떴다. 세 번 더 눈을 뜬 후에야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눈부심에 몰려오는 두통을 참고 눈을 가늘게 뜬다. 연갈색의 벽지와 온화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실내가 보였다.

내 방이 아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타는 벽난로의 영상이 벽에 비쳤다.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이마며 가슴에 센서가 이것저것 붙었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윌리엄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들고 있던 책이 손에서 툭 떨어졌다.

“주인님…….”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말하지 않은 탓에 목이 막혀서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윌리엄이 침착하게 호출 벨을 누르고 천천히 내 곁으로 왔다. 침착한 동작에서 나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묻어나왔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도.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찬찬히 내 얼굴을 뜯어보고 옷깃을 어루만진다. 주름진 눈가가 젖어 들었다.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걱정을, 끼쳤군.”

목이 탔다. 그것을 눈치채고 윌리엄이 얼른 물병을 가져와 입에 대주었다. 미지근한 물이 몇 모금 들어가고 나자 살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가?”

“23일째입니다.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윌리엄이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나는 좀 놀랐다. 쓰러지는 순간의 격렬한 쇼크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도 같지만, 마치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머리가 맑아서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의사들이 몰려왔다. 검사다 뭐다 난리를 쳤지만, 뇌파도, 심전도도 정상이었고 실제로 뇌진탕을 제외하면 육체적인 문제는 매우 적었으므로 금세 끝났다. 다음으로 돌진한 것은 아일라였다.

“엘리엇!”

그녀는 침대 위로 뛰어오를 기세였으나 윌리엄이 가로막자 움찔하고 뒤로 물러섰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십시오.”

우리는 둘 다 어린 시절에 그에게 훈육된 바 있으므로 이런 지적을 당하면 반사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아일라는 얼굴을 구기고 어쩔 수 없이 행동거지를 바꾸었다. 그리고 사뿐사뿐 곁으로 다가와 침대 가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 두통은 어때? 기분은?”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군. 머리는 오히려 맑은데.”

“리 선생님이 도착하시면 정밀 검진을 시작할 겁니다. 지금 준비 중입니다.”

병실에 남은 레지던트가 정중하게 말했다. 리는 내 주치의의 이름이다.

“GFG 치료사도 곧 도착할 거야. 정말 괜찮아, 엘리엇?”

“그렇게 나쁜 상태는 아니야. 그보다도, 션은?”

“그 남자는 왜?”

아일라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마음이 앞서서 순서를 틀린 것을 후회하며 나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어야 했는데. 와 줘서 고마워. 남편과 아기도 있는데 나 때문에 어려운 걸음을 하게 했군.”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아일라가 소리를 지르며 침대 매트를 후려쳤다.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레지던트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 남자를 왜 찾느냔 말이야! 당신 지금 무슨 짓을 당했는지 몰라? 이해가 안 돼? 혹시 쇼크 때문에 기억이 날아갔어?”

“아일라.”

“단순히 감정이 격해지거나 트리거가 당겨진 것도 아니고, GFG 공격에 당한 거야! 당신 죽을 뻔했어, 알아?!”

“알고 있어.”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일라가 벌떡 일어서서 병실을 거친 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다.

“션의 GFG는 공격형이 아니야, 아일라. 그는 내가 GFG에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나를 해치려고 그런 것도 아니야.”

“답답한 소리 하지 마. U급이야. 컨트롤이 가능한 U급의 능력자가 자기 힘의 영향력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완전히 미쳐서 그자의 노예가 되었을 거야. 그게 어떻게 해치는 게 아냐?”

“아일라.”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일라는 반대로 나를 진정시키기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로 침대에 다가앉으며 내 손을 쥐었다.

“당신, 착각하고 있어. 첫사랑이라서 마음이 어지러운 건 알아. 하지만 이건 아냐, 엘리엇. 무사했으니까 됐다거나, 그 남자가 노린 것이 공작가의 재산이나 권력이 아니니까 괜찮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그 남자가 당신에게 한 짓을 잊어서는 안 돼! 이번에는 무사했지만, 다음에는 어떨지 몰라. GFG가 통하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물리적 폭력을 동원할 거야. 한 번 사람을 해친 사람은 두 번도 할 수 있고, 사랑이라는 핑계로 소유욕이나 정복욕을 합리화하는 남자는 절대로 변하지 않아. 다시 만날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그녀는 내 마음을 너무 빨리 꿰뚫어 본다. 난처한 기분이 되어서 바라보자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마음은 이번에 목숨을 살려 준 걸로 충분히 표시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아일라.”

“약속해.”

아무리 그녀가 말하는 것이라도 약속할 수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일라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남자가 감히 당신에게 손을 올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안 그래. 단둘이 있는 순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 이번에 겪어 봐서 알잖아. 당신은 혼자서는 대처할 수 없잖아. 헤리퍼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문제가 되면 그게 참아야 할 일인지 아닌지조차도 판단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내가 안 된다고 하는 거라고.”

“아일라.”

나는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려고 생각했으나 팔은 생각보다 편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서 힘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내가 어디까지 감당해 낼 수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엘리엇!”

“걱정해 줘서 고마워. 대처할 수 없게 되면, 당신에게 의논할 테니까.”

“20일도 넘게 혼수상태였다고!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이번에는 괜찮았지만, 다음번에도 무사할 거라는 장담은 없어. GFG만이 문제가 아니야. 무엇이 트리거인지조차도 모르는데, 그렇게 불안한 상대랑 놔둘 수는 없단 말이야! 당신, 이런 판단은 항상 나한테 맡겨 왔잖아. 그러니까 제발 내 말 들어.”

“아일라 스칼렛.”

나는 그녀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일라가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르는 것을 멈췄다. 나는 그녀에게 평온하게 웃어 보였다.

“보다시피, 나는 살아 있어. 그리고 망가지지도 않았어.”

“엘리엇…….”

“괜찮아.”

아니,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 플래시백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내부에서부터 트리거가 당겨진 것은 아니다. 쇼크가 심했던 것은 션의 GFG가 워낙 막강해서 외부에서부터 통째로 방어벽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내 정신은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망가진 상태인지 확실하게 분별할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아직 내 정신 방어가 건재하고, 그런 이상 이성적인 판단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과 달라질 것은 없다.

“당신의 괜찮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 스스로도 모르잖아!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기어이 아일라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힘들게 팔을 뻗어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기대 왔다. 얇은 환자복이 금세 눈물로 젖었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 죄책감 같은 건 갖지 않아도 돼. 내 정신의 문제는 30년간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어. 당신이 떠난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야.”

“혼자 놔두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그래도 당신을 혼자 놔두지 않았어야 했는데.”

“션이 U급의 GFG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만난 건 내 선택이었어. 내 말 믿어, 아일라. 내가 단순히 위로하려고 이런 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거 알잖아. 당신은 잘못한 게 없어. 이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닫혔다. 윌리엄이 문을 열러 갔다.

한 손에 꽃다발을 든 리암이 윌리엄을 보고, 내가 한 팔에 아일라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레지던트를 쳐다보고는 미심쩍은 태도로 물었다.

“내가 재결합의 현장을 방해한 게 아닌 거 맞지?”

“터무니없는 소리 말게.”

“토마가 오해하면 죽여 버릴 거야.”

아일라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리암이 “무서워서 어디 살겠나.” 하고 어깨를 으쓱하고 병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거침없이 꽃다발로 내 배를 후려쳤다. 레지던트와 아일라가 또 쓰러지면 어쩔 거냐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주먹으로 때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라며 을렀다.

아일라는 자기도 나에게 주먹질을 할 뻔한 주제에 리암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나는 남 일처럼 그가 아일라에게 혼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지쳐서 어느 틈엔가 잠이 들었다.

* * *

준형이 찾아온 것은 그날 밤의 일이다. 내내 자다가 문득 눈이 떠졌는데, 준형이 소파에 앉아 스탠드를 켜 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안녕.”

“준.”

“무사한 걸 보니 기쁘다.”

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형이 책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부인에게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라고 부탁했어. 지금은 알랑 씨와 통화를 하고 있을 거야. 네가 내 보고를 듣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사실이 그랬다. 나는 졸음에 잠긴 목을 몇 번 흠흠 풀었다. 그리고 눈도 깜박여 정신을 또렷하게 차렸다.

“맥케인은 살아 있어. 일단은.”

나는 얼굴을 굳혔다. 일단은, 이라는 것은 상당히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까. 그러나 준형이 웃었다.

“네가 걱정하는 것 같은 일은 없어. 공작 부인은 명예 선언의 권리를 이용해서라도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어떻게든 되긴 했지. 쓰러지면서도 다치게 하지 말라고 했다며. 리암 경은 네가 만약 죽는다면 그게 유언이 될 거라고 하더라.”

“……그랬었지.”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다시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면 그가 크게 난처해질 것 같아서 애써서 말한 것인데, 그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알버트는 가만히 있던가?”

“네 애인은 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이용 가능한 수준이었다면 벌써 어렸을 때 미란 알 아시리가 손에 넣었을 거야. 알버트 왕자가 종신 계약을 제안했다가 혼쭐만 났지. 이번 일로 겁 좀 먹었을걸. 솔직히 속 시원하던데.”

“그런가.”

“어쨌거나 맥케인은 죽지 않았고 리암 경의 주선으로 큰 벌도 피했어. 직장을 잃은 것 정도는 어쩔 수 없지. 국외 추방령도 내려졌지만, 처사와 이유 둘 다 비밀에 부쳐졌고. 두 번 다시 영국 땅을 밟지 않고 네 눈앞에도 나타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지만 말이야.”

“추방이라니…….”

“네가 걱정할 정도의 일은 아니야. 해고당하자마자 헤드 헌팅 업체에서 제안이 있었거든. 해외에서 제안받은 건만 다섯 곳이 넘어. 원한다면 오브라이언보다 조건이 못하지 않은 곳으로 얼마든지 골라 갈 수 있을걸.”

“다행이군.”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가 말을 흐렸다.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준형이 고개를 저었다. 말할 생각 없는 일이라면 되었다.

“어쨌든 션의 위치를 확보해 두게.”

“만나러 갈 건가?”

“마음이 정리되면.”

나직한 소리로 답한다. 결심은 이미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션에게 무엇이라고 말할지, 어떻게 용서할지, 앞으로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쌓아 올려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일은 많이 있다. 일단은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일부러 초라한 채로 만나러 가서 그의 죄책감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에게도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을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러 일을 겪었으니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갑자기 불러낸다 해도 억지로 뒤흔드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내 신분과 지위가 사람들에게 좀처럼 본심을 털어놓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션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쓰리고 달콤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잠시 입을 다문 채로 그 감각을 향수하고 있자니, 준형이 경색된 목소리로 말했다.

“꼭, 만나야 되겠냐?”

“자네도 반대인가?”

“내가 찬반을 표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침대 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나는 책임감을 느껴, 엘리엇. 결정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정보만을 주고 네 판단을 기다리는 게 맞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야. 이번 일은 내 실수였어.”

“자네의 실수?”

“그래. 나는 맥케인이 GFG를 컨트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네게 경고했어야 했어.”

“자네도 모르고 있지 않았는가? 그건 실수가 아닐세.”

“그래……. 실수가 아니로군. 무능력이지.”

“준.”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한 정보라는 것은 없어.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션이 19살에 억제 처리를 받았으니 현재 GFG 능력자라고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합리적인 결론이었고, 그러고도 자네는 내게 그를 만나지 말라고 충고까지 했었지.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내 선택이었다네.”

“나는 네 정신 방어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구축된 것이라는 걸 짐작도 하지 못했어. 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갖추어져 있었는데도.”

“그것은 내가 스스로의 행동을 판단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이지, 자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일세.”

“알아. 나도 알아. 하지만, 깊게 생각하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일이었잖아. 알았다면 절대로 맥케인과 만나도록 하지 않았을 거야. 바보같이. 몇 번이나 그는 좋지 않다고 경고했으면서도 이 꼴이 되게 놔두다니.”

준형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자네의 역할이 아닐세. 그리고 나는 이미 션과 만나 버렸다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낸 후에야 “그렇지.”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이마를 한 번 쓰다듬었다. 준형에게 동정을 받다니 아무래도 나는 진짜 불쌍한 신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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