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52)

9.

리암이 클럽에 게임기를 가져왔다. 테니스 코트도, 연무장도, 헬스장도 붙어 있는 장소에 굳이 그걸 가져다가 뭘 하려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호평이었다.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젊은 남자들이 편을 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리암은 어릴 때도 간혹 게임기 같은 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지만, 체스류의 보드게임이나 모노폴리 정도는 가끔 해도 저런 것은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아 한 번도 제대로 한 일은 없다.

어쨌거나 나를 부르러 나온 사람도 몇 명이나 있었지만, 실재하는 것도 아닌 화면상에서 리모컨을 쥐고 흔들어 때리거나 맞는 것이 무어 그리 흥분할 거리가 되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손만 내젓고 관심을 껐다. 나이 든 축들은 최근―이라고 해도, 내가 성인이 되어 이 클럽에 들어올 자격이 된 20살 때 이전도 그들에게는 요즘이다.―의 젊은이들은 시끄럽고 예의를 모른다고 흉을 보았다.

시끄럽다는 의견에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당구를 치거나 테이블 게임을 할 때보다 고함을 지르는 간격도 좁고 소리도 월등히 시끄러웠다. 쿵쿵거리고 뛰는 소리도 들린다. 그 정도로 활동이 하고 싶다면 단체로 나가서 노는 방법도 있을 터인데 말이다. 나름대로 신경을 쓴답시고 별실에 들어가 설치한 것 같지만, 그 별실은 본래 모노폴리용 게임실로 쓰이던 공간이므로 여러 명이 질러 대는 외침 소리를 막지 못했다. 애초에 문도 없고 말이다.

전체적으로 방음을 하도록 건의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이 클럽에서 이용하는 것은 이 흡연 휴게실과 큰 지도가 걸린 여행 저널실, 식사 정도였으므로 지금까지 시설에 관해서 뭔가를 요구하거나 건의한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할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어이, 엘리엇.”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상기된 얼굴의 리암이 음료를 가지러 나왔다가 나른하게 앉아 시가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볕을 쬐고 있는 나를 보더니 세상에 천벌 받을 놈을 본 것 같은 얼굴로 다가왔다.

“뭐 해, 엘리엇? 일광욕이라면 옷을 벗고 밖으로 가야지.”

“자외선이 너무 강하면 피부가 익어. 그건 싫군.”

“그렇다고 늙은이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창가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어?”

“실례로군. 연세가 있는 분들이라고 해서 모두 나처럼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렇게 대꾸하면서 주위에 시선을 던지자 미미한 웃음의 물결이 퍼졌다. 젊은 축들이 대부분 게임기 앞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흡연실에서 담배나 시가를 물고 카드를 돌리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었다.

리암이 헛웃음을 웃었다.

“넌 여기 오면 그 의자랑 한 몸이 되어서 일어서질 않는단 말이야?”

“운동이라면 오기 전에 승마장에서 하고 왔으니까. 자네가 폴로라도 한 게임 하자고 한다면 거절하진 않겠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리암은 크리켓이나 폴로 같은 전통적인 스포츠를 아주 싫어한다. 사실 그는 몸을 움직이는 일 대부분을 싫어했다. 꾸미는 것만은 좋아하므로 몸매를 유지하려고 헬스를 하기는 한다. 그리고 젊은 여자들이 많은 운동도 예외이다. 특히 짧은 반바지를 입거나 수영복을 입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지 말고 너도 같이하자고.”

그가 나를 일으키려는 듯이 팔을 잡아끌었다.

“사양하겠네. 화면을 보고 팔을 흔드는 건 허무하니까.”

“다른 건 안 허무하고?”

“세상의 모든 일은 허무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그 발언은 좀 위험한데. 헤리퍼드 공작이 불교로 개종한다면 어마어마한 스캔들이 될 거야.”

이번에는 내가 약간 웃었다.

“형식적인 것이긴 해도 왕위 계승권을 잃는다면 알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걸세.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그거 지금 농담이라고 한 건 아니지?”

“실패였나 보군.”

“재미 요만큼도 없으니까 그만둬. 그나저나 너도 좀 끼어. 꽤 재미있다니까?”

“나에게 근본적으로 승부욕 같은 건 없네. 나와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진짜 테니스를 치자고 전해 주게나. 폴로라든가.”

“폴로에서 좀 떠나. 좁은 골방에서 나란히 서서 낄낄대는 게 더 빨리 친해지는 게 당연하지.”

“그런 교우 관계가 지금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리암이 일단 내려놓았던 콜라 세 병을 도로 들었다. 그리고 뭔가 불편한 얼굴이 되어서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나는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음,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해?”

“사람?”

그가 말하는 뜻이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이라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나는 당혹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려는 사람은 결코 적지 않고, 꼭 결혼 목적이 아니라도 그렇게 친구 소개로 사람을 만나 보는 게 적은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리암에게 커밍아웃 한 적은 없지만, 그는 내가 게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고, 제 나름대로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리암이 약간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이 미끄러지듯 내 앞자리에 앉았다.

“전에 만나던 사람하고는 헤어졌잖아. 그 뒤로 따로 만나는 사람은 없는 것 같고……. 마음의 정리도 이쯤 하면 됐을 법하고.”

“내가 그렇게 보이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에스코트 서비스의 회원이 될 생각이 아니라면, 제대로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럴듯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는 건가?”

“찾아봐야지. 내 인맥 풀은 그렇게 좁지 않아. 정말 괜찮다 싶은 놈도 몇 명 알고 있다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두게. 자네 주변 사람이라면 나에 대해 모를 리 없는 사람들뿐이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신뢰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넌 너무 진지해. 그렇게까지 염려해 가면서 만날 필요 없잖아. 일단 가볍게 데이트라도 해 보다가 괜찮다 싶으면 진지해지고 다들 그러는 거지.”

“데이트를 하고 싶은 욕구 같은 건 없네. 일생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그런가아.”

리암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정이 많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션과 헤어지고 넉 달을 넘어 이제 다섯 달, 슬슬 반년이 가까워져 간다. 금욕 생활이 계속되어 성욕은 쌓였지만, 아직 새로 낯선 상대를 만날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게다가 고작해야 성욕의 해소를 위해서 데이트이니 저녁 식사이니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너무 번거롭다. 션을 상대로조차도 그런 것은 대부분 잉여분에 불과했으니까. 리암의 소개라면 그를 생각해서 더욱 상대에게 신경을 써 줘야 할 텐데, 그럴 자신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괜한 소리를 해서 미안. 이렇게 성급하게 지나가는 말로 꺼낼 게 아니었는데.”

“진지하게 붙들어 앉혀 놓고 말하지 않아 줘서 고맙네.”

“못된 녀석.”

그가 주먹을 흔들어 보이고 콜라병을 들고 사라졌다. 나는 약간 웃고 한 차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뭐라도 읽을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서실에 가서 새로 나온 의학 저널의 목록을 뒤적여 봤지만, 썩 그럴듯한 것이 없다. 생산성의 향상에 도움이 된다니까 선룸에 가서 명상이라도 해 볼까 하고 입문서를 찾았다.

풀러 씨와 마주친 것은 도서실에서 나오던 참의 일이다.

“오, 헤리퍼드 합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풀러 씨. 지난주에 나오지 않으셨으니 이게 얼마 만이지요? 3주 만인가요?”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그와는 같은 골프 모임에 가입되어 있다. 이전에 탈퇴했던 주말 골프 모임에 재가입했기 때문이다. 풀러 씨는 내가 그만둔 사이에 입회한 멤버였다.

“격주로 뵐 때는 그리 간격이 긴 줄 몰랐는데, 3주가 되니까 정말 오래된 것 같군요.”

“풀러 씨는 그사이에 클럽에도 도통 나오지 않으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나는 약간 웃었다. 그야 바쁠 것이다. 오브라이언 보안 회사는 몇 달 전에 사업을 확장했다. 한창 정신이 없을 때였다. 게다가 규모가 큰 자동차 회사와 제휴를 맺었으니 당분간은 도약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드님의 결혼도 준비하고 있으시다지요?”

“예. 합하의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부끄럽습니다. 그 준비로도 이래저래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다 큰 아들놈 장가보내는 일인데 뭐 이리 신경 쓸 일이 많은지.”

“피처버트 양과의 결혼은 아드님만큼이나 풀러 씨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까? 당연히 하나하나 신경 쓰셔야지요.”

풀러 씨가 잠깐 말이 없어서 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당연한 것처럼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귀족의 결혼과 달리 작위가 없는 집안에서는 정략결혼을 일반적으로 좋게 여기지 않는다. 풀러 씨가 오브라이언 보안 회사의 경영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대주주인 피처버트가의 상속녀와 아들을 결혼시키려 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지만, 본인의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치부였다.

“실례했습니다.”

정식으로 사과하는 것 쪽이 더 그를 난처하게 할 것 같아서 나는 약간 헛기침을 하고 그렇게만 말했다. 풀러 씨는 약간 붉어진 얼굴에 난처한 미소를 띠었다.

“아닙니다. 하하, 이것 참. 합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제가 체면 같은 걸 챙겨서 무엇 하겠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그것 때문에 들렀습니다.”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풀러 씨가 들고 있던 서류 봉투에서 금색의 리본으로 묶어진 새하얀 카드 봉투를 꺼냈다. 청첩장이었다.

“꼭 왕림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런던의 블랙아웃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거리나 관계로 생각하자면 반드시 참석할 필요는 없는 사이이다. 윌리엄을 시켜서 적당한 축하 선물을 보내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직접 받은 이상 그냥은 거절하기 어렵다. 하물며 말실수까지 했으니.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이것 때문에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합하.”

그가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이고 한 차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적극적인 사람이다. 고용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직접 청첩장을 주러 다니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참석자가 많아질수록 클럽의 멤버로서 인정받는 것은 빨라질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청첩장을 펴 보았다. 그런 적극성은 나로서는 좀처럼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 * *

청첩장을 받기는 했지만, 식 자체에 참가할 정도의 친분은 없기 때문에 이브닝 파티에만 참석하겠다고 답변해 두었다. 나는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약간 지각하는 것을 택했다. 댄스가 시작되고 난 뒤라면 인사할 사람이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풀러 씨는 원하지 않겠지만.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니지만 내가 홀로 들어선 것은 마침 신랑 신부의 왈츠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조용한 속에서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합주는 프로의 것이 아닌데도 꽤나 훌륭했다. 춤추는 신부의 드레스가 눈꽃처럼 펼쳐졌다.

사실상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 아니라 아버지들의 결합이 주역이 되고 말았으니 신부가 서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환하게 미소하며 신랑의 팔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싫지 않은 것 같다.

하긴, 아일라도 그랬다. 결혼 생활 자체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었지만, 결혼식은 몹시 좋아했었다. 특히 다이아몬드를 세 줄로 빙 둘러 장식한 웨딩드레스를 말이다.

“미인이지?”

샴페인 잔을 든 리암이 옆에 와서 섰다. 나는 놀랐다.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웬일이냐니. 초대받은 손님이니까 있지.”

“풀러 씨와 친분이 있는 줄 몰랐는데?”

“초대는 받았지만, 여기까지 참석할 정도는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피처버트 양 쪽의 하객이고.”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새삼스럽게 신부를 다시 보았다.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미인인 것 같다. 여자의 얼굴은 잘 판단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신랑 쪽이 눈에 더 들어왔다. 풀러 씨의 후덕한 풍모를 조금도 물려받지 않은 신랑은 키가 크고 매력적이었다. 잘 맞는 바지에 감싸인 긴 다리와 늘씬한 허리가 경쾌하게 움직이는 것을 즐겁게 감상하면서 나는 리암에게 대꾸했다.

“런던의 모든 미녀는 자네의 친구라고 말할 작정은 아니겠지?”

“음. 비슷한데 어쩌지? 몇 년 전에 크루즈 파티에서 만났었어.”

리암이 킬킬 웃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군. 피처버트 양은 미녀이니까, 풀러 씨를 닮은 토실토실한 아들이 옆에 나란히 서면 내가 억울해서 어쩌나 했는데.”

“자네가 억울할 게 뭐 있나?”

“미녀가 열렬한 사랑도 없이 남의 것이 되는데 억울하지 않을 리 있나. 넌 그런 생각 안 해?”

“전혀. 신랑도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쩐지 진담같이 들리는데.”

“진담일세. 저렇게 섹시한 남자는 흔치 않지.”

리암이 침묵했다. 나는 유부남을 유혹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일차적으로 내 신분을 아는 사람과 잔다는 것은 논외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말해 둬야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리암이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닌 듯했다.

“좀…….”

“좀?”

“좀 경박하게 생기지 않았어?”

어렵사리 꺼낸 말이 그런 것이었다. 일단 입을 열자마자 그가 봇물 터지듯이 말을 쏟아 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게 사납게 보이잖아. 금방 남한테 시비를 걸 것 같고. 어떻게 봐도 점잖은 신사는 아닌데. 머리도 그래. 아무리 그래도 결혼식인데 단정하게 자르기는커녕 꽁지머리라니. 괜찮게 생긴 편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아주 잘생긴 것도 아니잖아?”

그야 잘생겼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션의 용모에 아득히 미치지 못하지만 말이다. 취향으로 따지자면 저런 타입이 좋긴 하지, 라고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웃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마는 신랑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션까지 끌어다 비교하는 것은 아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스타일링에 대해서라면 딱히 할 말은 없네만.”

“좀 더 나은 게 얼마든지 있잖아. 저렇게 얌전하게 생겼다거나.”

리암이 가리키는 쪽에 있는 것은 키가 작고 날씬한 남자였다. 나는 잠시 그쪽을 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차별적인 편견을 어떻게 교정해 줘야 할지 생각하게 되는군. 내버려 두는 건 친구로서 도리가 아닐 테고.”

“그렇게까지 말할 건…….”

리암이 볼멘소리를 하는 동안 신랑 신부의 댄스가 끝났다. 보라색으로 색을 맞추어 입은 신부의 친구들이 일제히 플로어로 쏟아져 들어갔다. 꽃송이가 빙글빙글 돌며 물결을 일으킨다.

“풀러 씨는 내내 널 기다리는 것 같던데. 오늘의 게스트 중에서는 하이라이트이니까.”

“너무 눈에 띄는 게 싫어서 일부러 느지막이 온 걸세. 자네가 있는 줄 알았다면 제시간에 와도 됐을걸.”

“무슨 소리. 나는 그렇게까지 특별한 손님은 아니야. 여기저기 기회만 있으면 잘 나타나는 데다가 우선 백수라고. 여름 크루즈에 초대받고 싶은 숙녀라면 모를까, 사업하는 유부남과는 인연이 없지.”

“부정할 수 없군.”

“오늘 하객 중에서도 널 노리고 온 사람이 많을걸?”

“얼굴만 보이고 갈 걸세.”

“그것만으로도 풀러 씨는 톡톡하게 이익을 보지 않겠어? 그나저나 의외야. 아무 데나 참석하지 않잖아?”

“그렇게 되었네.”

구구절절 풀러 씨에게 실례를 저지른 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으므로 짧게만 대답했다.

곧 신부 친구들이 흩어져서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춤을 추는 남녀가 플로어 가운데로 미끄러져 간다. 신부 친구 중의 한 사람이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곧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올해 2월에 리암에게 결국 해로드 백화점의 초콜릿을 사게 만든 여자였다. 그때는 머리를 올리고 정장을 입어서 똑 부러져 보였는데, 이렇게 곱게 화장하고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자 인상이 완전히 달랐다.

그녀가 리암의 팔짱을 끼었다. 리암이 즐거운 듯이 그녀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아,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지? 에린, 이쪽은 엘리엇. 헤리퍼드 공작인 그 소문만 무성한 엘리엇 맞아. 이쪽은 에린. 내 애인.”

지금의, 라는 태클은 걸지 않는 게 현명할 것이다. 6개월이면 리암으로서는 놀랄 만큼 그녀에게 빠져 있는 것이 맞다. 나는 정중하게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리암에게는 과분한 미인이로군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합하.”

“엘리엇이라고 부르십시오. 리암의 소중한 사람이라면, 저의 친구이지요.”

그러자 에린 양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사실 에린이 피처버트 양에게서 초대를 받았다기에 나도 부랴부랴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했던 거지. 초대장은 양쪽 모두에게서 받았으니까.”

“피처버트 양은 저희 백화점의 VVIP이시니까요. 친구로 여겨서 초대장을 주신 것은 무척 기쁜 일이었지만, 저는 아무래도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리암을 써먹을 만한 곳은 파티라든가 피크닉처럼 놀 때밖에 없으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써먹으셔야 본전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어이.”

그가 짐짓 화를 내는 척했다. 에린 양이 사이가 좋으시군요, 하고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춤을 추러 나갔다. 파트너도 없고 춤을 출 생각도 없는 나는 풀러 씨에게 인사를 하고 신랑 신부에게 축복의 말이라도 건네고 돌아갈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미처 풀러 씨를 찾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찾아왔다.

“합하!”

풀러 씨는 온 얼굴에 싱글싱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누가 얼핏 보면 결혼하는 것이 아들이 아니라 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얼굴이다.

“오시지 않는 줄 알고 놀랐습니다.”

“좀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와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과장된 표현으로 인사하는 그에게 몇 마디 축하의 말을 더 건넸다.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클럽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고 골프 모임 회원도 있다. 예상보다 아는 얼굴이 더 많아서 놀라고, 그것보다 더 많은 얼굴과 새로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일찍 돌아갈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우선 신랑 신부를 소개해 달라고 풀러 씨에게 말하는데, 뒤에서 팔을 잡혔다.

“당신……!”

헐떡이는 숨통 사이에서 간신히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울림에도 쇳소리가 섞여 있어서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뿌리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션?”

그 얼굴을 못 알아보는 일은 아마 결코 없을 것이다.

당혹감은 컸다. 이런 곳에서 션과 마주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러 씨는 오브라이언 보안 회사의 경영자이지만, 아들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풀러 씨의 아들과 션이 아는 사이일 리는 없고, 풀러 씨가 일개 사원에 불과한 션을 초대했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드디어……!”

션이 맥락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부르짖듯이 외쳤다. 술렁임이 퍼졌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들어 올린 팔은 오히려 다시 붙잡혔을 뿐이다. 팔뼈에 금이 가게 할 정도로 세찬 손아귀 힘이 나를 부여잡았다. 아픔에 약간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풀러 씨가 나와 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어서 놓게! 아, 합하, 정말 죄송합니다. 수상한 인물은 아닙니다. 저희 회사 직원인데, 오늘 보안 책임을 맡은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뭘 착각했나 봅니다. 자네! 썩 그 손을 놓고 헤리퍼드 공작 합하께 사죄를 드리지 못하겠나!”

그러나 션은 전혀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으려는 풀러 씨를 다짜고짜 밀쳐 내고 내 팔목을 움켜쥔 채 성큼성큼 밖으로 향한다. 풀러 씨가 당황하여 션을 외쳐 불렀지만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끌려가는 바람에 나는 걸음이 뛰는 것처럼 되었다.

웅성거리는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이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을 팽개쳤다. 지금은 평판보다도 션 쪽이 신경 쓰였다.

뒤에서 리암이 “어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내 경호원들도 홀을 가로질러 왔지만 나는 됐다고 자유로운 손 쪽을 내저었다. 홀 구석 여기저기에 서 있는 경비원들이 이쪽으로 와야 하는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 당황한 듯이 움직였지만, 그것은 션이 몇 마디 말로 제지했다. 그러고 보니 헤드셋을 끼고 있었다.

“션, 이야기를 들을 테니 서두를, 윽.”

션이 나를 빈방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잠갔다. 피로한 듯한 얼굴에는 시커멓게 그늘이 져 있었고, 항상 맑던 눈동자는 혼탁한 색깔이다. 눈자위가 새빨갰다. 그 얼굴은 여전히 숨 막히게 아름다웠으나 어쩐지 안쓰러웠다.

헤드셋 너머로 누군가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션이 그것을 벗어서 바닥에 팽개치고는 밟아서 부쉈다. 나는 흐트러진 옷깃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보고 섰다.

“헤리퍼드 공작이시라고요?”

그가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그가 그런 싸늘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다. 그 말투도, 목소리도 낯설었다.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지만, 왜인지 그의 분노가 마땅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참았다.

“맞네. 헤리퍼드와 콘월의 공작이며 우스터와 웨스터모어랜드, 더비, 콘월과 데본, 멘느의 백작인 엘리엇 위체가 내 이름일세.”

“찾아도, 찾아도, 찾아도, 찾아도 나오지 않은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거지. 어마어마한 보안 요원들을 수백 명은 거느리고 계실 테니!”

그가 내 팔을 다시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가 말하는 보안 요원은 한 명이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수백 명과 다를 바 없을 것이므로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자네가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럼 어째서!”

체취까지 들이마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끌어안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거리에서 남과 이야기만 하는 것도 이상하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서 귀를 기울이고 션의 말을 듣고 있기가 어려웠다. 나를 향해 분노를 토해 내는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째서 연락을 주지 않았습니까! 당신 쪽에서 나를 찾는 건 간단했잖아요.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까지 알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가?”

집중하지 못한 채로 나는 그의 아랫입술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대답했다. 그가 “하.” 하고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내 턱을 쥐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왜인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가 나를 내던지듯이 다시 밀쳐내고 방 안을 사나운 걸음걸이로 서성거렸다. 나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을 텐데,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쾌하게 여길 가치도 없었어요? 어차피 아무리 해도 당신을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네.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부정하지는 않겠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 생각도 못 했네. 우연이 대단하군.”

무심결에 나는 약간 웃었다. 우연히 그를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있다. 아니, 그 생각은 준형과 션에 대해 이야기했던 날로부터 줄곧 내 마음속 한구석에 눌러앉아 떠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때는 이름 전부를 말할 작정이었다. 지금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나를 원한다면, 다시 한번 시작하자고 말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심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고, 아마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테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다시 한번 만나 보지 않겠느냐고.

션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우연이 아닙니다.”

“응?”

“우연 같은 것일 리 없잖습니까? 혹시 당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회사로 들어오는 상류층의 집이나 파티, 대규모 회사의 리셉션의 보안 의뢰 같은 것은 가능한 한 많이 참여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가까이에 있었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션……?”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당신 이름을 몇 번이나 들었던 줄 압니까? 거의 매일이었어요. 사장님이 얼굴을 알리기 싫어하는 귀빈이 있으니까 보안에 특별히 만전을 기해야 한다면서 당신 이름을 수없이 말했다고요. 보고서도 받았죠. 목록의 맨 윗줄에 당신 이름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게 진짜 당신 이름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엘리엇이라고 적힌 이름에 설레고, 설레고. 그 누구신지 모르는 언론에 노출되기 싫어하는 고귀한 분을 위해서 손님을 따로 고르고 좌석을 배치하고. 하다못해 사진 한 장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몇 번이나 후려쳤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군. 나는 지옥 같았는데. 당신이 없으니까 공기가 아니라 진흙을 마시고 사는 것 같았어, 정말로 찾지 못하게 되면 그냥 죽어 버리자고도 생각했는데, 당신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가 충혈된 눈으로 나를 다시 노려보았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말하는 것처럼 간절히 나를 만나고 싶었던 거라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할 텐데 말이다.

“자네는 나와 재회한 것이 기쁘지 않은가?”

“기쁘냐고요?”

그가 되묻고는 목이 막힌 듯이 몇 번 울리더니 이번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기뻤을 겁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러 왔더라면, 그 자리에 엎드려서 당신 발등에 키스라도 했을 거예요! 정말로 우연히, 어느 길목에서 마주쳤더라면 울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당신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이렇게 확인해서, 기쁠 리 있겠습니까!”

“왜 자네가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네. 자네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서 그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션이 경련을 일으켰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얼굴로 그가 내 손등 위에 손을 겹쳤다.

“당신의 그 말이 나한테 얼마나 비웃음처럼 들리는 줄 압니까?”

“션.”

“당신이 지금까지 스쳐 보낸 자위 도구 중에서 고작해야 조금 나은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는 신세라는 게 얼마나 비참한 줄 아느냐고요. 당신의 ‘좋아함’에는 ‘다음에 만나자’라는 뜻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이렇게, 미친 것처럼 환희하는 내가 어디까지 끔찍하게 느껴지는지 짐작이나 합니까?”

“……그런 적 없네.”

대답은 약간 나오는 타이밍이 늦었다. 션을 만났던 처음에는 분명히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거짓말이다.

션은 그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초점이 흐려지면서 건조한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소리는 무의미하게 허공에 흩어져 공기를 팽팽하게 당겨지게 했다.

“알고야 있었습니다만.”

그가 다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탄성을 내지르면서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나 같은 건 사람으로 보지도 않죠, 공작님. 아니, 값싼 소유욕을 부리는 자들에 비하면 당신이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은 고마운 일이기까지 해.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일 줄이야.”

“왜 그렇게 말하는가? 나는 자네를 다시 만나서 기쁘다네. 그건 진심일세.”

“당신의 진심이라는 건 기껏해야 1페니짜리 동전만도 못한 거잖아. 하긴, 그런 동정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이로군요.”

“동정 같은 건 한 적 없네.”

션이 나를 잡아당기며 비어 있는 손으로 부드럽게 뺨을 감쌌다. 입 맞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숨결이 조금 흐트러졌다. 하지만 션은 내게 키스하지 않았다. 단지 입술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숨 막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가질 수 있지?”

“션…….”

“찾으면 다리를 자를까 하고 생각했었어. 정말로 그럴 작정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나를 버리고 간 몇 달 동안 계속 그 생각만 했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고, 달아나지 못하게 다리를 잘라서 침대에 묶어 놓는 거야. 내가 없으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고, TV조차 없으면 온종일 심심해서라도 나를 기다리지 않을까? 식사를 할 때마다 모두 다 내가 먹여 주고, 화장실에 갈 때까지도 나에게 안겨 가고,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내 것을 품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만큼 쾌락에 절이고 미치게 만들면, 이 머릿속에, 숨결 속에, 눈동자 속에 나 외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게 될까?”

그가 느릿한 손길로 내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동자가 짐승처럼 청광을 띠고 번들거렸다. 나는 그것을 보고, 비로소 준형이 말했던 ‘이상하다’라는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이상하다.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그것을 이해했지만, 여전히 그것은 내게 혐오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닌가. 심장이 맥박 치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몸을 떨었다.

“자네는 이상하군.”

“압니다.”

“여기에서 이러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야. 우선 돌아가세.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 연락처를 주겠네. 오늘 밤에 일이 끝나면, 아파트로 오도록 해. 거기에서.”

코로, 눈가로, 어루만지며 움직이는 손짓이 전희 같아서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졌다. 나는 신음처럼 중얼거리면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몸이 달아올라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해야 할 말이 있으나 션의 손이 입술을 벌리고 엄지를 미끄러뜨려 윗입술과 잇몸 사이를 어루만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무심결에 혀를 내밀어 그 손가락을 안타깝게 핥는다.

“당신은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션……?”

“나는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놓칠 수 없어.”

션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다. 물리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거대한 힘, 아니, 감정의 분류가 노도처럼 내 머리로 직접 쏟아져 들어왔다. 이것은 GFG이다. 거의 순간적으로 나는 깨달았다. 션은 억제 처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고, 지금 그 능력을 완전한 상태로 나에게 쏟아부은 것이다.

나는 곧바로 힘껏 션의 따귀를 후려치고 주먹으로 턱을 갈겼다. 이성을 나른하게 만들던 황홀한 감정이 빠져나가면서 냉정함이 돌아왔지만, 구멍 난 그릇으로 물을 받은 것처럼 주르륵 빠져나갔다.

대부분의 GFG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아일라의 GFG는 졸졸졸 가늘게 따르는 주전자 물처럼 내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A급 능력자의 GFG조차도 내 두개골까지 통과하지 못하고 표피를 미끄러져 갈 뿐이다.

그러나 션의 힘은 달랐다. U급의 GFG는 압도적인 파워로 정신 방어를 때려 부수고 들어와 해일처럼 정신을 휩쓸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산이 분화하는 것처럼 두통이 솟구쳤다. 현기증으로 눈앞이 빙 돌았다. 나는 그대로 비틀거리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플래시백을 일으킨다―――!

“아아!”

“엘리엇? 엘리엇? 왜 그래요? 엘리엇!”

나가떨어졌던 션이 달려와 당혹한 듯이 나를 외쳐 불렀다. 힘의 흐름은 끊겼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GFG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

웅크린 채로 양복 안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비상벨을 누르려고 했지만, 손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끝에 간신히 벨이 닿았나 싶었는데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구르는 벨을 시각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대신 핸드폰, 핸드폰이다. 그것은 아직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면서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이럴 때를 대비한 시뮬레이션은 수도 없이 했다. 할 수 있어. 뇌 속으로 파고든 열 덩어리가 눈알을 빙글빙글 휘감아 도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그러나 현기증과 어지러움은 사라지지 않고 두통 때문에 구토감만 더해졌다.

“우욱!”

구역질하며 입을 틀어막는다. 볼 안쪽을 깨물고 말아 피와 살점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지. 아일라, 아일라. 그녀는 파리에 있다. 그녀를 보내서는 안 되었었는데. 준형은, 내가 잘못되어 있다고는 알아도 그게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모르니까. 리암이 준비성 좋게 치료사를 확보해 두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 믿을 수 있는 건 아일라뿐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제 없으니까.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다. 다행히도 그 세찬 감정의 흐름은 머릿속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지 못하고 다시 한번 막혔다. 몇 분이나마 더 버틴 것은 틀림없이 그 덕분이리라.

“아일라──! 도와줘, GFG에──!”

「엘리엇? 엘리엇?!」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외쳤다. 혀가 제대로 굴러간 것은 거기까지였다.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실수로 밟혔다. 삐이이잉! 언제 밟았는지 비상벨도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 냈다.

“엘리엇!”

나는 션을 밀쳐 내려고 손을 휘저었다.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사지가 온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오감은 엉망진창이 되고 모든 것이 기능을 잃어 간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고 귀에는 이명이 울린다. 다리가 제멋대로 동시에 허공에 떠서 나는 션 쪽으로 마구 밀려가다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와그작. 머릿속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은 의자가 부서지는 소리였거나, 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허우적대는 팔에 누군가가 걸려서야 나는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리암이 나를 끌어안았다.

“정신 차려, 엘리엇! 엘리엇! 맙소사! 구급차를 불러! 뭣들 하고 있어!”

“하아, 하아, 하아.”

“헤리퍼드가에 연락해! 벌써 출발했어? 정신을 놓으면 안 돼. 엘리엇, 내 목소리 들려? 10분만 버텨. 아일라가 S급 치유계 능력자를 부른다고 했어. 그때까지 버텨야 해. 정신을 놓으면 뇌가 녹아 버려!”

나는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 말은 틀리다.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틀어박혀 있는 조그만 호두 껍질은 건재하다. 션이 쏟아부은 폭력적인 감정은 그 껍질에 부딪혀 튕겨 나간다. 뇌 여기저기를 뒤흔들고 되돌아오지만, 그래도 그것을 뚫지 못했다. 내 뇌는 녹지 않는다. 부서질 것이다. 아니, 벌써 부서졌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폭음은 그 때문인 게 틀림없다.

“저 남자를 확보해!”

“엘리엇! 엘리엇!”

션이 절박하게 외쳤다. 나는 조금이라도 앞을 보려고 애썼다. 시야가 좁다. 천장을 보고 있는지 바닥을 보고 있는지도 분간할 수가 없다. 이유도 없이 일어서려고 발버둥질했지만, 되지 않았다. 간신히 눈에 들어온 션은 무수한 손에 의해 뒤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 손들이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처럼 보인 것은 환각이다. 알면서도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은 리암의 손에 붙들렸다.

“다치게 하지 마…….”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의식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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