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52)

8.

6월이 되었다.

아일라는 예쁜 딸을 낳았다. 대부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정식으로 이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대부가 된다는 것도 여러모로 난처한 일이 될 듯하여 정중히 사양했다. 실제로도 아일라의 남편은 껄끄러워했던 모양이라서 내가 잘한 일이었다고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요사이에는 간혹 직접 아이 사진을 보내면서 자랑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일라와는 법적인 부부 관계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남매처럼 오래된 소꿉친구라서 이 변화는 나를 조금 기쁘게 했다.

그것 외에 일상은 변한 부분이 조금도 없다. 약간 지루하고, 평이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션을 만나고, 그 만남을 기준으로 일주일이 흘러가 고작 네 번 만나면 한 달이 가던 때와 달리 지금의 한 달은 몹시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요즘에는 외출을 통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윌리엄이 메이드 몇을 데리고 들어왔다. 테이블에 애프터 눈 티 세트가 차려지는 동안 그가 직접 편지 몇 통과 상아 페이퍼 나이프가 올려진 쟁반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손으로 쓴 편지라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통이라 하여 여전히 귀족가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나 초대장은 손글씨로 적고 있다.

간혹 오래된 타이프로 치는 일도 있어서 불같은 성격의 아일라나 유행의 최첨단을 달려가는 리암은 고리타분해서 참을 수 없다고 화를 내곤 했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가끔은 곧바로 응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메일이나 핸드폰보다 편했다.

“그런가? 꽤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인 외출은 한 번도 없으셨지요. 예전에는 한 달에 두세 번은 밖에서 친구분과 약주도 하시곤 했는데. 금요일에는 외박도 하시고. 꽤 종종.”

나는 윌리엄이 정말로 모르는 건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커밍아웃 할 필요까지는 없으므로 굳이 확인하지 않고 그냥 그가 찢어서 건네주는 편지를 펼쳤다. 예상한 대로 심각한 용건은 없었다.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것은 로열 애스콧뿐이고, 그밖에 윔블던이나 헨리 로열 레가타, 여름 연극제의 초청장이 와 있었다. 몇 개는 거절할 수 있겠지만 역시 다 빠지는 것은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아일라가 있는 동안에는 항상 윔블던을 보러 갔었지만, 나는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리암이라면 헨리 레가타에서 헬스장에서 키운 알통을 자랑하며 노를 젓겠지만 사양이다. 대신 초청장에 붙어 있는 연극제의 일람표를 집어 들었다.

“스탠포드 부인이 좋아하실 겁니다. 연극제는 처음 만나는 남녀가 데이트하기에 아주 적절한 축제이죠.”

윌리엄이 조용히 충고해 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인 후에 얌전히 일람표를 내려놓았다. 방계의 친척 대부분이 후계자 문제를 운운하면서 빨리 아일라와 정식으로 이혼하고 자기가 추천하는 여자와 재혼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스탠포드 부인은 그중에서도 매우 각별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쉴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다음 편지를 받아들었다.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게 스탠포드 부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두어 통의 다른 편지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어떤 것은 여자의 사진까지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쯤 되면 체면도 버린 것이다. 이 사람들이 급하긴 급했구나 싶었다.

“윌리엄이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야.”

나는 티 세트에서 스콘을 내려 크림을 바르면서 중얼거렸다. 윌리엄은 다정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잔에 홍차를 따랐다.

“후계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주인님의 행복이 우선이니까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아일라를 원망하지는 마.”

“알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일라가 출산한 이후로는 어딜 가도 재혼 이야기뿐이란 말이지.”

“아예 왕대비 전하께 청을 넣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왕대비께?”

“주인님께서 에스코트하신다면 기꺼워하실 겁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앤드류로부터 요즘 왕실에 너무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는 책망을 돌려 들었다.

“허락을 구해 봐야겠군.”

로열 애스콧부터 그 후까지 내내 여름을 같이할 사람이 생기면 편해지겠다. 내년에는 또 내년대로 고민이 생기겠지만 말이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손을 물수건에 닦고 이번에는 파이를 들었다. 먹는 것에 계절이 없어지긴 했지만, 여름의 블루베리 파이는 늘 만족스러웠다.

가벼운 애프터 눈 티를 끝내고 나서는 침실로 돌아갔다. 밤에 카드놀이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잠깐 눈을 붙일 작정이었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열었다가 흠칫 놀랐다. 침실의 테이블에 앉은 준형이 마치 제집이나 되는 양 평화로운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잠깐 당황했다. 윌리엄이 뒤따라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불청객의 앞으로 갔다.

“출장 대화 서비스는 신청한 적이 없는데?”

“배달.”

준형이 웃으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 가게에서 제일 비싼 술을 시켜서 따기만 하고 올 줄을 모르니, 이걸 팔아 치울 수도 없고, 보관이 걱정도 되고 말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로 그것이 용건일 리 없다. 어디서 잔까지 찾아다가 자기가 마시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준형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술은 됐어. 아직 해도 지지 않았네.”

“딱딱하시긴. 토요일이잖아.”

“자네야말로 토요일인데 낮부터 술인가? 이제 곧 오픈 시간 아니야?”

“이거 약간 정도에 취할 정도로 약한 정신이라면 얼마나 좋겠어.”

그가 가볍게 말하면서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열어 내 앞에 두툼한 파일 하나를 밀어 주었다. 펼쳐 보자 안에는 4년 전부터 CE에서 투자를 하고 있는 모 연구소의 조사 결과가 있었다. 예산과 연구자, 결과물까지 총체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준형에게 조사를 부탁했었다. 분명히 3월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늦었군.”

“SSB 2)가 개입하고 있는 일이더라고. 아무리 나라도 알버트 왕자 앞에서 얼쩡댈 마음은 쉽게 들지 않는단 말이지. 그리고 변명을 하자면, 네가 오면 주려고 했는데 오질 않더라고? 밖에서 공공연히 만날 수도 없고, 클라이언트의 집을 심심풀이 삼아 깨고 들어오기도 좀.”

“전화로 부르지 그랬나.”

“곤란한 일이 있어.”

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나는 서류를 쭉 훑어 내리다가 흘끔 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바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내 바에 문제가 있을 리 없지. 문제는 네 쪽이야. 맥케인이 죽치고 있다고. 날마다 오픈 시각 전부터.”

무심결에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눈썹을 치켜들었다. 준형의 바는 그 기능이 기능인 만큼 제법 비싸다. 일반인인 션으로서 날마다 죽치고 있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준형이 눈썹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안에 있는 건 아니고, 잠복. 나한테 피해가 오는 건 아니지만 신경이 쓰여서.”

“그런가.”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내 책임일까? 생각하는데, 준형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당연히 네 책임이지.”

“내가 말했나?”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다고. 맥케인에 관한 일이라면 표정도 제법 나오게 되었잖아, 너?”

“그런가.”

그것은 조금 스스로도 알 것 같았다.

준형이 비어 있던 잔에 술을 따라 내밀었다. 마시라는 건가, 하고 나는 그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마시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줄 게 있어.”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준형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말할 일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가 바인더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겉표지에 ‘션 맥케인’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이제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짧게 말했다. 그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준형에게 그간 모아들였던 정보를 파기하라고 말했었다. 일회적인 관계가 아니게 된 이상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네 신변 보호도 겸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 자의적인 판단은 해야겠어. 어쨌든 받아 둬. 그리고 한 번 훑어라도 봐.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까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지만,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걸 잊지 말고.”

준형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내키지 않는 손짓으로 바인더를 받아 두자 그가 약간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헤어진 게 확실하다면 굳이 보지 않아도 돼. 맥케인이 네가 누구인지 알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 네가 대대적으로 매스컴에 얼굴이라도 팔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야. 하지만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봐 두는 게 좋아.”

“감정의 유무와 이별의 여부는 전혀 인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네.”

“표현을 잘못했군. 다시 만나기를 바랄 정도의 호감을 말하는 거야.”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군.”

“그런 것 같지만, 모를 일이지. 내 고향에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거든.”

나에게는 들어맞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이었으나 표현 자체에는 공감이 갔다.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기억해 두고, 나는 연구소 보고서를 다시 폈다.

“내 사생활은 됐어. 당분간 바에 갈 예정은 없네.”

“그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계약을 해제할 생각도 없으니 자네가 상관할 바는 아닐세.”

“말 참 정 없이 하네. 뭐, 그렇긴 하지만. 당분간 안 올 거라면, 여기에 누구 하나 보내도 돼?”

“안 돼. 윌리엄은 자네 생각보다 훨씬 눈치가 빠를 걸세. 용건이 있으면 전화로 하든가.”

“아니면 매번 이렇게 공작가의 철통같은 경비를 뚫으라 이거군.”

준형의 과장된 한숨에 나는 약간 웃었다. 그리고 일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 파일은 단시간에 검토하기는 어렵겠군. 내 쪽에서 보고 폐기하도록 하겠네.”

“그래.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단순히 보고서 때문에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준형이 하는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매우 바쁘고 틈이 없을 것만은 확실하다. 얼굴을 보자고 찾아왔을 리도 없다. 말해 보라고 눈짓하자 그가 또다시 얇은 파일을 하나 꺼냈다. 나는 그 파일을 펼쳤다. 안에 있는 것은 레바논에서 데려온 어느 9살짜리 소녀의 인적 사항과 간략한 소개서였다.

“아주 머리가 좋은 아이야. 후원을 해 주고 싶은데, 정상적인 루트를 밟았으면 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는 온갖 비합법적인 일로 돈을 쓸어 모아 난민 고아를 돌보고 있다. 시작은 동료들의 가족과 자식을 돌보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외로 확장되어 재단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규모도 제법 크다. 준형이 나에게 헌신하는 것은 간혹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분에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장학 재단이나 자선 법인 같은 것을 몇 개나 가지고 있다.

“말해 두지. 따로 추천서를 쓰지는 않겠어.”

“고마워.”

준형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계약에 의한 일인 데다가 내게 해가 되기는커녕 이익이 되고, 게다가 고아와 과부, 노인을 돌보는 것은 귀족의 당연한 의무인데도 그는 늘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하곤 했다.

“그럼, 이야기는 끝인가? 잔은 직접 치워 가.”

“냉정하시긴.”

그가 짧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술병의 뚜껑을 닫아 선반에 올려놓았다. 설마 두고 갈 생각인가 하고 그것을 쳐다보았는데 준형이 첨언했다.

“도움이 될 테니까 이대로 놔둬.”

“윌리엄이 알아챌 텐데.”

“취해서 가져온 척이라도 해.”

나는 인상을 썼다. 내가 그러는 일이 없다는 건 윌리엄이 알고 준형도 알았다. 술에 취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센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취한 적은 드물뿐더러 취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좀처럼 없다.

“이 방에는 너무 방비가 없어. 그냥 내 말대로 해.”

“뭔가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노파심에서.”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를 신뢰하기로 하고 일을 맡기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 전이다. 그가 내게 위해를 가할 마음을 품었다면 벌써 내 머리는 목과 분리되어 있을 터이고, 나름 신뢰 관계도 구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냥 얌전히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저기에 카메라라도 설치되어 있으면 참 신경 쓰일 것 같았다.

“어차피 사생활도 없잖아, 너?”

“프라이빗 룸에 CCTV 하나 없는 게 사생활이 있어서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책 읽고 잠자고 일도 좀 하고, 그게 사생활이냐. 남이 봐도 별로 신경도 안 쓰이면서.”

“나름대로는 신경 쓰고 있다네.”

나는 쓴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준형이 알았다고 대강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가방을 챙겨서 어깨에 멨다. 그리고 평범하게 침실 문 밖으로 나섰다. 어떻게 드나드는지 궁금한 마음이 조금 있었는데, 저래서야 짐작할 방법도 없었다.

션의 파일은 그 후로 며칠간 침실의 서랍 속에 쓰지 않게 된 핸드폰과 함께 들어 있었다. 들춰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준형의 걱정처럼 마음이 움직여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질까 봐 그런 것은 아니다. 헤어지겠다고 말한 이상 이런 식으로 뒷조사하듯이 그를 살피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러한 규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제멋대로인 감정은 내게 독인 것만큼이나 타인에게도 독이 된다.

그러나 역시 준형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준형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나에게 “봐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렇게 보지 않는 쪽이야말로 내가 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을 기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며칠이나 망설였다. 션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냉정하게 말해서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헤어진 지금에 와서 내가 일일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알면 막을 수 있는 불상사가 션에게 일어나고 있는데, 괜한 고민 같은 것으로 막지 못한다면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고도 시간은 조금 더 필요했다.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본 적이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스스로가 조금 우스워질 정도였다.

나는 시가를 가져다 놓고 한 대를 다 태우면서 생각을 거듭한 후에야 그 파일을 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준형의 판단을 믿는다. 나는 천천히 바인더의 표지를 넘겼다.

맨 앞에는 으레 있는 신상 명세들이었다. 이미 준형에게 들었던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것들을 대강 넘겨 버리고 지난 몇 달간의 일을 훑었다. 션은 그사이에 승진을 한 모양이었다. 직책이 올라갔고, 보안 설계부의 팀장을 맡았다.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꽤 빠른 승진이었다. 그 사이에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다. 다른 여자나 남자를 만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밀리라는 이름이 서류 중에 얼핏 보였다. 나는 예전에 마주쳤던 여자의 얼굴을 잠깐 떠올렸다. 밀리 베일리. 션의 팀원 중 하나이다. 작년에는 그녀 쪽이 상사였다. 호흡을 맞춘 지는 3년이 좀 넘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션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던데, 그녀와는 잘되지 않은 걸까. 션이 게이라면 여자와 사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이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의 사적인 생활은 그 뒤에 있었다. 준형의 말마따나 션은 그 바에 종종 들르는 듯했다. 금요일에는 아예 바에 들러 술을 마시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근처의 모텔에서 바로 향하는 길목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한다.

평일 중에는 아무래도 직장이 있는 만큼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그래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4일 중에 많으면 3일, 적어도 하루 이상을 그 근방에서 맴돈다. 지도에 표시된 지점은 네 곳을 넘지 않았고, 모두 바의 입구를 바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준형의 말이다. 틀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거기에 더하여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었다. 션은 내 핸드폰 번호와 아파트 명의에 대해서 뒷조사를 하려 한 듯했다. 이미 세 곳의 흥신소에 의뢰를 했고, 두 곳이 추가적으로 의뢰를 받았다. 이런 흥신소로는 준형에게까지도 닿을 수 없다. 그는 내가 결제한 식당이나 카페의 영수증까지 손에 넣어 알아내려 한 것 같지만, 섹스를 하러 외출하는 날에는 쓰는 신용카드조차도 비자금용이니까 명의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그런 식으로 결과도 없는 일에 쏟아 부은 금전이 적지 않았다. 이런 액수는 나에게는 푼돈이지만, 션에게는 거의 1년 치 연봉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준형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범주의 일은 아니다. 알게 된 기간이 길어진 만큼 준형은 이따금 내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일이 있는데, 그런 맥락일까?

나는 가만히 그 항목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션이 아직까지도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조금은 기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러했다. 이것이 션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그에게 금전적인 부담을 지운다거나 사적인 시간의 대부분을 허공에 흘려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를 찾고자 할 만큼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나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생기는 온갖 감정의 기회비용 역시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준형은 어째서 이 파일을 내게 주었을까? 그의 일은 내가 특별히 의뢰했을 때가 아니라면 대부분 내 사생활을 보호하는 일에 속한다. 션과 다시 만나고 만나지 않고에 대해 조언하는 것은 준형의 ‘일’이 아니다. 션이 어딘가의 정보기관에서 보내진 요원이기라도 하지 않다면 말이다. 친구로서 하는 말이었다면, 좀 더 심플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나는 몇 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에 시간을 들여 본 적이 거의 없다. 긍정과 부정, 옳고 그름, 만남과 헤어짐 같은 양자택일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망설이고 있었다. 준형은 내가 션과 다시 만나기를 원해서 이 파일을 보여 준 것일까, 혹은 그 반대일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헤어지겠다고 결정한 것은 그가 나를 이렇게까지 간절히 바라리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결정한 일이다. 그러나 오로지 감정 문제만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다.

준형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도 넘은 후의 일이다. 그는 내가 이제 와서 션의 파일에 관해서 물을 줄 몰랐다면서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볼 줄 알았는데.」

“보라고 주고 간 게 아닌가?”

「시간이 며칠이 지난 줄 알아? 네가 보고서를 이렇게 오래 팽개쳐 두고 있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만큼 안 봤으면, 안 보는 줄 알았지.」

준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그의 의견을 묻는 데에 일주일 이상이 걸린 것은 그만큼 갈등했기 때문이다. 6살이 넘은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일라에게 내가 게이라는 것을 밝힐지 말지조차도 나는 하루도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던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게 전부는 아닐 것 같은데. 자네 견해를 듣고 싶네.”

「음……. 객관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는 건 거기에 있는 게 전부라는 건 일단 알아 둬. 이건 개인적인 느낌이야. 맥케인이 여기에 왔던 첫날에 말이야, 그 녀석,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어.」

그게 문제가 되는가 하고 미간을 좁힌 채 기다렸다. 준형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 가게에는 간판도 없고 보통 소개로 알음알음으로 오는 곳인데, 맥케인에게 소개해 준 게 누군지 알아낼 수가 없었어. 커뮤니티 같은 데에서 글을 읽고 왔다 해도 그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맥케인은 애초부터 인터넷 같은 것을 잘 하지 않지만, 그가 돌아다닌 곳은 보안 프로그램 연구 관련 커뮤니티가 아니면 매우 개방적이고 광범위한 포탈이 대부분이야. 게이 커뮤니티도 가입은 되어 있지만, 내 가게에 대한 소식이 올라올 만한 곳은 아니지. 실제로 넷 상에 존재하는 추천 글이니 소개 글 같은 건 전부 체크하고 있지만, 맥케인이 읽었다는 흔적은 없어. 그럼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

「그리고 왜 오자마자 너에게 말을 걸었고, 다른 사람과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을까? 그 얼굴인데, 관심 있는 사람이 없었을 리 없잖아. 게다가 너와 스테디가 되기 전에도, 그렇게 자주 오면서 무색 잔이었고, 혹시나 하고 말을 거는 사람 대부분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든가, 자기 잔만 흔들어 보여 줬었다고. 애초부터 너 이외의 다른 사람과 잘 생각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

“그것이, 문제인가?”

「당연히 문제지. 맥케인과 네가 서로 바뀌었다면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말이야. 까놓고 말해서 넌 그렇게 게이들에게 인기 있는 타입이 아니라고. 주인님을 찾는 슬레이브가 그랬다면 또 모르겠는데.」

준형이 약간 웃음조로 말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션이 나를 목적으로 준형의 바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식했다. 그것은 조금 내 심장 어딘가를 아리게 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션이 누군가의 명령으로 나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션이 의도를 가지고 내게 접근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준형은 결국 개인이다. 게다가 그는 본질적으로 암살자이고, 저격수이다. 단단한 방어를 뚫고 들어가 정보를 캐내 오는 것에는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스페셜리스트이지만, 반대로 혼자 힘으로 방어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 되느냐 하는 문제가 되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국가 기관과 연결되어 있다면, 혹은 국제적 연합 조직에서 후원하고 있다면 준형으로서는 알아낼 수 없을 수도 있다. 그쪽이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비록 정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거나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 규모의 전기 산업과 정책 전반이 CE를 통해 이루어진다. 헤리퍼드와 콘월의 권리는 어떤가. 명예 선언 3)에 의해 여전히 내가 보유하고 있는 권한들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션에 대한 기억들이 꽃밭을 흐트러뜨리듯이 온갖 색채로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 웃음, 목소리, 손짓, 그런 것이 전부 연극이었을 수도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내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감정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정말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엘리엇. 네가 그러는 건 처음 보는데.」

“내가 무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가능성이라면, 제로야. 맥케인이 정말로 스파이라면 구차하게 흥신소 같은 걸 이용할 리 없잖아.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치겠지. 기가 막히게 로맨틱한 걸로. 애초부터 내 가게 같은 데에서 원나잇 하자고 하지도 않을걸.」

“아.”

「내가 있다는 것까지 계산하고 감안했다 치더라도 말이야, 동시에 SSB까지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신변 보호를 받고 있지는 않아도 알버트 왕자가 정말로 네게 사람을 하나도 붙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렇군…….”

목소리에 억양이 섞일 만큼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목이 약간 울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물 잔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갈증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전화기를 든 채로 침실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말이야, 션 맥케인이 스토커라는 거야.」

“뭐?”

「이전에는 이런 징후를 보인 일이 없으니까 100% 확실하다고는 말 못 하겠어. 그렇지만 그가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해.」

“흥신소를 이용하여 상대의 뒷조사를 한다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매우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일이며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진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네.”

「네가 아는 것보다 10배 정도는 이상해. 2월에 헤어졌는데 지금 6월 말이야. 그는 4개월 동안 한순간도 안 쉬고 너를 찾고 있어. 절대로 정상이 아니야. 하긴, 살아온 내력을 보면 정상인 쪽이 이상하긴 하군.」

“나라도 누구를 찾을 필요가 있다면 그 정도는 할 걸세.”

「맥케인을 두둔하려고 애쓰지 마. 너랑은 경우가 다르지. 넌 돈이 있으니까.」

“……그런 문제인가?”

「그런 문제야. 너야 나한테든 누구한테든, 사람을 찾으라고 돈다발을 쌓아 놓고 기간 따위는 상관없이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 잊어버리고 있으면 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생계가 달린 문제이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장기간 지속적으로 찾아다니는 건 몸이 힘들어서라도 할 수 없어. 자식이나 가족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솔직하게 말해서 섹파로 시작해서 고작 1년 된 상대한테 할 일이 아니지.」

나는 리암이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마치 계절마다 옷을 바꾸듯이 애인을 갈아 치우는 리암은 참고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애인들도 별로 참고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신 아일라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애인과 헤어진다면, 친구들과 몇 날 밤을 새워 가며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지껄일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상대를 찾으려 하거나 찾아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문제였을까? 헤어질 때 그를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채로 일방적으로 통보만 하고 나와 버렸으니까.”

그날의 일을 찬찬히 떠올려 본다. 술에 취해서 다소 감정이 흔들리고 있기는 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거나 해야 할 말을 빼먹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션은 납득하지 못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행방을 감춘 것이 문제였을까?

애초부터 그에게 알려 준 핸드폰이나 아파트는 모두 션과의 관계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으므로, 필요가 없어진 시점에서 처분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완전히 내버리지 못하고 회선만 해지하고 아직도 연락처와 문자가 남아 있는 기계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나 아파트를 처리하라고 하지 않은 것이 아마 내 미련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그랬기 때문에 션은 깔끔하게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핸드폰을 켜 놓은 채로 그를 더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설득했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만나자고 설득하는 또 모를까, 헤어지자고 시간을 들여 설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잘잘못을 가리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심하게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했을 것 같진 않은데.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 이상한 짓을 해 버리면 확실히 저쪽이 비정상인 거지.」

“그렇군.”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은 아니지만, 네가 장기적으로 만나거나 마음을 주기에 적절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내 견해야. 이런 상대와 잘못 얽히면 아주 더러워져. 그러니까 어차피 다시 만나지 않을 거라면 보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거고. 맥케인이 어떻게 하더라도 나를 뚫고 널 스토킹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우리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통화를 중단했다. 준형의 충고는 소극적이었으나 확실했다. 아마도 그의 말대로 지금 내가 션을 다시 한번 만난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선택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준형이 말하는 ‘비정상’ 때문은 아니다. 나는 타인의 정상적인 감정도 잘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 비정상적인 것 역시 마찬가지로 껍질을 뚫고 안쪽까지 충격을 주거나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쪽이 지금까지 어렵게 추측하는 감정들보다 원하는 바를 매우 직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정말로 나에게 닿게 된다면.

침대에 누워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런 가정을 무심히 해 본다. 그런 일이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말이다. 준형이 말하는 로맨틱한 우연이라도 생긴다면, 그래서 헤리퍼드의 이름을 말하고, 그래도 그가 여전히 나를 원한다면, 하고 말이다.

추억이라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의 일을 반추하며 스스로 원하여 헤어진 남자와 있었던 일을 되새긴다는 것은 어리석다. 있을 법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부질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씩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새로 깨닫는 것도 있고 느끼는 것도 있어, 그 행복감은 쉽사리 포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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