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52)

6.

1년 만에 준형의 바에 발을 들였다. 준형의 얼굴을 본 것도 거의 그쯤 되었다. 의뢰 때문에 통화는 가끔 했지만 굳이 얼굴을 볼 필요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오랜만이다.”

그가 약간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버번. 늘 마시던 대로.”

“새 걸로 따 줄게. 킵 했던 건 이제 안 오는 줄 알고 보관이 곤란해서 팔아 버렸으니까. 잔은?”

“……무색으로.”

나는 잠깐 망설인 후에 대답했다. 준형이 잠시 바를 다른 직원에게 맡기고 창고에 다녀왔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사람이 늘기 시작하는 바 안을 둘러보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녹색의, 어떤 사람은 적색의, 또 어떤 사람은 청색의 잔을 든 채로 하루의 상대를 물색한다. 무색의 잔을 든 사람은 별로 없다. 옷깃을 세우거나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바텐더를 부르는 자들은 십중팔구 준형의 ‘본업’에 용건이 있는 사람이리라.

준형은 곧 새 술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코르크 마개를 따서 얼음을 담은 투명한 잔에 부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오랫동안 오지 않았잖아. 맥케인과 뭐 틀어진 일이라도 있었어?”

“별로.”

애초부터 관계가 얕았으므로 그것을 ‘틀어졌다’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어떤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번 주에 두 번 전화를 걸었지만 션은 받지 않았고, 대신에 금요일에 볼 수 없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구속적인 사이도 아니고, 그가 자기 일정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지난주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가 정말로 순전히 바빠서 그런다고 믿을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나는 대개 남들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화가 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별로 문제가 없는데 여기까지 왔어?”

준형이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시가를 꺼냈다. 준형이 가위를 꺼내 주었다.

바에 찾아온 것은 답답했기 때문이다. 션과 만나는 동안에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거의 매주 하기는 했으나, 사실 한두 달쯤 금욕했다고 해서 야단을 떨 만큼 왕성한 체질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기 온 것도, 망설인 것도 왜인지 알 수 없다.

딱히 섹스 자체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션이 아닌 다른 상대와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를 탐색하여 모텔로 가서 몸을 섞는 과정을 생각하면 조금도 내키지 않았다. 1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상이 아득히 옛날처럼 멀었다.

“단순히 말상대가 필요했던 거라면, 출장 서비스도 갈 수 있었는데.”

“사양하지. 윌리엄에게 들통 나면 골치 아파.”

“내 잠입 솜씨를 얕보지 마.”

“술잔을 뒤처리하는 건 내 일이 되지 않나.”

“10%의 추가금으로 흔적까지 싹 없애 드릴 수 있는데.”

“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준형이 아몬드 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여기 온 걸 맥케인이 알면 화를 낼 거야.”

“션이 왜?”

“그 얼굴을 보니 정말로 모르는 거로군.”

준형이 약간 한숨을 쉬었다.

“스테디를 만들라고 했던 내 책임인가, 이건.”

“그다지.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일세.”

“특별히 상담 정도는 무료로 해 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 건물 절반을 리모델링하다시피 하고 2, 3층까지 사들이라고 말했던 게 지난달 일이야. 뭐가 잘못된 거야?”

나는 말을 잃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션이 왜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고 화를 냈더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무례하게 그와 시간을 보내겠다며 집에 여러 가지를 들였으니까. 그러나 그가 화를 낸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영화를 보고 싶다고 먼저 말한 것은 션 쪽이다.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사정을 대부분 말하고 말았다. 포커페이스인 준형이 웃음과 기막힘이 뒤섞여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맥케인이 불쌍하게 느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무슨 뜻인가?”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너를 책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엘리엇, 맥케인과는 헤어지는 쪽이 좋겠어.”

“헤어지다니?”

그와 내가 특별히 헤어지고 말고 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별로 애인 관계이거나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뜻으로 되묻자, 준형이 나를 가엾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섹파고 뭐고 아예 인연을 끊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쪽이 나을 것 같다는 거야. 어차피 너는 맥케인에게 너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을 거잖아.”

“나에 대해서라면……. 내 신분을 말하는 건가?”

“거기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야. 맥케인이 너를 이해해 주려면, 네가 어째서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지까지도 말해야 한다는 의미야.”

“논외로군.”

“그래. 그러니까 이걸 기회로 인연을 끊는 쪽이 차라리 서로를 위한 길이겠지. 아니면, 정말로 만나서 섹스만 하는 사이로 돌아가든가. 남이니까 냉정하게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거야.”

준형이 딱 잘라 끊었다.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애초부터 생각했던 것은 그 정도의 관계였고 지금도 거기에서 끝내는 것이 옳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반추하면, 건물 안에 영화관이니 오락실이니 하는 것을 설치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우스운 일 같았다. 머리가 식고 나서 생각해 보자 조금 들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들뜨다니. 신선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실수를 하는 거로군.”

“실수라고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마.”

“판단을 그릇되게 해서 실수한 적은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경험은……. 글쎄.”

“여유 부리긴.”

준형이 눈을 흘겼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오지 마. 오려면 맥케인을 완전히 정리하고 오라고. 그게 예의니까.”

“그런가. 그게 예의인가.”

그 말은 아일라가 내게 이해 못 하는 일을 시킬 때 늘 쓰는 표현이었다.

나는 시가의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독한 위스키와 시가로도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래도 대부분은 이내 없어지는, 일시적인 감정이었다.

* * *

정리라고는 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와 있는 시간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가 내게 속해 있다거나 그 반대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션은 좀처럼 나와 만나는 것을 거절한 적이 없지만, 만일 그가 오늘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어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역시 션에게, 앞으로는 섹스 하러 만나자는 제안을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야 한다는 것일까.

어쨌거나 그것이 예의의 영역이라면,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션은 만나자는 말에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짧게 답변을 돌려주었다.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늘 곧바로 답이 오든가 아니면 전화를 했고, 문자로 대답하더라도 근황과 안부를 섞어서 말하곤 했기 때문에 그 짧은 문자는 몹시도 낯설었다.

정말로 바쁜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나와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준형에게 묻는다면 근황을 알 수 있을 터이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답문 이후로 한 번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뒤집어 덮어 두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계속 만나지 않는다면 관계는 그것만으로도 소멸하는 걸까. 그러면 그것은 준형이 말하는 ‘정리’에 속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주인님, 리암 경께서 오셨습니다.”

윌리엄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암이 성큼성큼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왔다. 나는 핸드폰을 끌어당겨 손에 닿는 서랍 아무 데나 집어넣었다.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인가.”

토요일 오후다. 리암이 지금 경마장이 아니라 내 집에 와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놀러 가자고.”

“어디로?”

“쇼핑은 어때?”

필요한 게 있으면 시키라고 나는 윌리엄을 가리켜 보였다. 리암이 “그게 아냐!”라고 언성을 높였다.

“물건은 직접 손으로 만져 보고 사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지!”

“필요한 걸 가져오게 하게.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됐어. 아무튼 나갈 거니까 옷 입어.”

그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내키지 않았으나 실랑이하는 것도 귀찮아서 나는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션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서 비워 놓았던 시간이 허공에 붕 떴으니 어차피 할 일 없는 오후이다. 저녁까지 느긋하게 책이라도 읽을 작정이었으나 영 손에 잡히지 않던 참이기도 했다.

“어딜 가자는 건가?”

“해로드 백화점.”

“백화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런 곳에 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리암과 함께 갈 이유는 더더욱 없다. 리암이 백화점 같은 곳에서 뭔가를 살 필요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 그런 데를 가야 하는지 100마디 이내로 서술해 봐.”

“밸런타인 데이 선물을 사러.”

“조금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군. 첫째, 자네는 지금 선물을 교환할 상대가 없고, 둘째, 그 선물을 굳이 해로드에서 사야 할 이유가 없어.”

“있어. 왜냐하면, 가면 신나기 때문이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유였으나 리암이 우기기 시작하면 이길 재간이 없다. 별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그를 따라나서자, 윌리엄이 기뻐하면서 차를 불러 주었다.

“해로드 백화점에 새로 만나는 여자라도 있는 건가?”

내 얄팍한 생각으로는 그 정도밖에는 이유 같은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리암은 “그것도 그렇고.”라고 대꾸했다. 남의 마음을 짚어 내는 능력이 제로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그런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지 말라고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 보면 즐거울 거야. 런던의 모든 아리따운 여성이 로맨틱한 꿈을 가지고 모여든다니, 그만큼 멋진 일이 따로 또 있을 리 없잖아.”

“흥미 없네.”

“넌 어차피 아직도 아무것도 준비 안 했을 거 아냐.”

“준비? 작년부터 아일라에게는 아무것도 안 보내고 있어. 그것이 새 남편에 대한 예의이니까.”

“하. 이렇다니까.”

리암이 한숨을 쉬었다.

“아일라야 알아서 하겠지. 자기 것이든, 자기 애인 것이든. 너야말로 애인 것을 챙겨야 할 게 아니야. 요새 트러블 있잖아? 이럴 때라도 기회를 잡아서 화해를 해야지.”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랬더니 리암이 신나서 떠들어 댔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걸 사면 뭐 하겠어. 최소한 초콜릿이나 와인 정도는 직접 가서 골라 줘야지. 북적북적하는 데에서 남들이 어떻게 연애를 하는지 구경도 좀 하고 그러란 말이야. 네 주위에는 도통 샘플이 될 만한 인간이 없으니까, 그래야 흉내라도 내지.”

“리암.”

“물론 해로드 백화점인 건 내 취미이지만.”

“리암, 나에게는 애인이 없어.”

건조한 목소리로 그것부터 지적했다. 딱히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목구멍 안쪽에서 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불편해서 몇 번 헛기침을 하자 훨씬 나아졌다.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리암이 내 허벅지를 세차게 두드렸다.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트러블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안 건가?”

그러나 결국 침묵을 깬 것도 나였다. 션이 내 애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트러블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사람의 감정에 예민한 리암이지만, 별로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생활은 빤한 패턴인데 왜 그걸 몰라? 금요일 저녁에서부터 토요일까지의 시간을 매주 비워 놓고 일요일에도 잘 안 보이다가 갑자기 여기저기 참석하기 시작했잖아. 골프 모임에, 살롱에, 파티까지. 그게 갑자기 시간이 비어서 남는 시간 동안에 그간 못했던 일을 몰아서 하려고 그러는 걸 텐데, 대체 왜 갑자기 주말 시간이 비었을까? 왜 그동안에는 주말마다 용건이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일 아냐? 그동안 주말을 가능한 한 비웠던 걸 생각하면 저쪽도 평일에 만날 형편은 아닐 테고, 그럼 몇 주나 만나지 않고 있다는 소린데, 그건 대체 왜일까?”

“자네 말고 다른 사람도 눈치챘을까?”

“나만큼 너한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그런 사람이 흔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동안 얼마나 긴장이 풀어져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거르지도 않고 늘 션을 만나러 가면서 내 일상에서 그만큼의 시간이 정기적으로 빠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 도착했군. 자네, 굳이 주차장으로 들어갈 필요 없어. 우리는 여기서 내릴 테니까. 핸드폰 번호는 엘리엇이 알고 있겠지?”

기사에게 말하고 리암이 차 문을 열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에 차는 해로드 백화점 앞에 도착해 있었다.

리암의 뒤를 따라 일단 차에서 내리기는 했으나 북적거리는 1층을 보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식었다. 들어간다 해도, 무얼 사야 한단 말인가. 션과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끌어당기며 리암이 경쾌하게 말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해야지.”

“자네가 생각하는 것 같은 관계는 아닐세. 그런 문제도 아니고.”

“아닌 게 어딨어? 연애는 다 똑같은 거야. 정답은, 우선 멋진 선물과 샴페인을 사고 로맨틱한 양초에 불을 밝힌 다음 애절한 목소리로 다시 시작하자고 조르는 거지.”

“셋 다 상상도 안 가는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리암의 뒤를 따랐다. 리암의 말처럼 백화점에는 초콜릿과 로맨틱한 양초, 꽃과 샴페인이 넘쳐흘렀고, 즐거운 표정의 여자들이나 어색한 얼굴의 남자들이 가득 있었다.

선물을 산다 해도 백화점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직접 고른다 해도 사람을 시켜서 집까지 가져오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선물을 고를 작정이 되어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준형의 조언이 백번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리암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다가 실소했다. 양초에 불을 붙이고, 선물을 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것만으로 처음과 똑같은 관계가 된다면 실패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설령 다시 시작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모르므로 더 나은 관계 같은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아니면, 하다못해 신분만이라도 밝히면 나아질까? 션은 그 정도로 이해심 없는 성격이 아니다. 약간의 노출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자신이 몹시도 이상했다. 션이 아니라도 상대는 찾을 수 있다. 그만큼 괜찮은 상대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아니,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신분을 노출할 거라면 차라리 돈을 주고 사는 쪽이 더 명쾌하고 편리한 선택이 될 것이 확실하다.

알면서도 나는 리암이 매대 너머로 마케팅 매니저에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옆에서 초콜릿을 골랐다. 샴페인이나 와인은 집의 셀러에서 꺼내는 쪽이 나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품목을 대강 넘겨보며 6살 아이만 한 사이즈의 빅벤 미니어처를 보는데, 점원이 난처하게 말을 걸었다.

“이건 파는 물건이 아니랍니다.”

“그런가.”

어차피 사 갈 작정이 아니라 비슷한 물건을 만들게 할까 하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혹은 장미 꽃다발처럼 만든 것도 나쁘지 않다. 꽃잎을 뜯어 먹는 것은 운치가 있을까?

션을 본 것은 그때였다. 사로잡히듯이 끌려간 시선이 닿은 끝에서 나는 숨마저 멈췄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둑어둑한 바에서도 아름다웠지만, 사람이 많고 환한 곳에서 더욱 빛이 나는 용모였다. 사방이 조용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가 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다. 그에게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서부터 홀린 듯한 매혹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지다가 미묘한 불편함에 밀려서 사라졌다.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람들의 시선이 분분히 흐트러지더니 금세 소리를 질러야 대화가 될 듯한 소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를 접객하고 있던 점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리암이 어느 틈에 내 곁으로 다가와 열렬하게 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한 미남이로군.”

“그렇군. 그런데 리암, 그렇게 쳐다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아차.”

리암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옷매무새를 무심코 가다듬었다. 나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한 번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것이 션이 지닌 U급의 GFG가 가진 영향력인 듯하다. 그러나 나 말고는 아무도 그 현상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아주 묘해. 방금 진짜 오싹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자네, 바이였나?”

“일단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리암이 나라도 농담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전혀 농담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리암을 제쳐 놓고 션에게 다가간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밖에서 그를 아는 척할 작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날아가고 없었다. 모처럼의 우연이다.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함께 외출을 하는 것이라면 약간 정도는 양보할 용의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션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키가 조그마한 여자가 그의 팔에 달라붙어 종알거렸다.

“이쪽으로 와, 션.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렇게 싫은 티를 내서야 되겠어? 네가 부탁해서 나온 건데 나한테 감사하면 그래도 웃는 척은 해야지.”

“밀리, 하아. 비싸도 좋으니까 차라리 디자이너 숍으로 가자고……. 밀리!”

션이 한숨을 내쉬며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끝끝내 그를 부르지 못하고 나는 뒤에 남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법도 한데,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알아보고도 무시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가슴 안쪽에서 부싯돌에 튀는 불꽃처럼 뜨거운 감각이 있었다. 그것이 혈관을 타고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엘리엇? 어이, 엘리엇, 왜 그래?”

“아니. 아무 일 없어.”

머리가 아팠다. 나는 당황하며 이마를 짚고 엄지와 새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별일 아닐세. 선물은 역시 그만두겠어. 리암, 나 먼저 돌아가겠네.”

“엘리엇!”

나는 그를 밀어 놓고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두통은 여전히 머리를 깨뜨리려는 듯이 안쪽에서부터 두개골을 두드렸고 화기가 빠져나간 가슴팍은 이상하게 욱신거렸다. 그것을 참고 나는 아무렇게나 택시를 잡아 올라탔다. 이전에 느낀 적 없는 감정을 겪게 될 때마다 늘 그렇듯이 아일라를 떠올린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내가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언제나 실마리가 되곤 했으니까.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결국 아일라에게 전화는 하지 못했다.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남과 이야기하다가 아일라가 언급되었을 때를 제외하고, 나 혼자서 이렇게 그녀를 떠올리거나 하지 않았었다고 말이다. 벌써 몇 달이나. 그녀를 보내고 나서 뚫려 있던 뱃속의 공허한 구멍조차도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것이 입을 빠끔히 벌리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마치 남 일처럼 그 고독을 들여다보았다. 고독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또 지금의 이 가슴 저림과 고독을 연결 짓고 나서 알게 된다.

나는 아무래도 션을 사랑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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