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을 열자 아일라 스칼렛이 거실에 서 있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잘 어울리는 핑크색 코트를 걸치고, 집을 아주 떠나는 사람처럼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있었다.
“집을 나갈 생각이야.”
그녀가 붉은 입술로 생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 않았던 말이라서 나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까, 원하는 대로 살기로 했어. 당신도 그러는 편이 좋아.”
“그 남자랑 같이 사는 건가?”
“그래. 파리로 갈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가 내 뺨에 입을 맞출 수 있도록 했다.
“일이 있으면 연락해. 없어도 가끔은 하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나에게 축복과 행복을 빌어 주곤 현관을 나섰다. 나는 그녀를 공항까지 바래다주려고 했지만, 직후에 바쁜 일이 생겼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석 달이 지났던 날의 일이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아일라를 잡지 않은 것은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만일 내 마음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안다면, 분명히 그것은 아내에게 향하고 있던 것에 가장 가까웠으리라.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친애하는 누이를 아끼듯이, 미술품을 손안에 두고 아끼듯이, 아름다운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발끝으로 춤추는 무희를 바라보듯이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던 방식의 ‘사랑’을 했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내게 있어서 연정과 정욕은 여자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명백하게 여자의 몸에 흥분하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상대로 연정을 품은 일은 없다. 그러나 여자를 품는 것보다 남자의 팔 안에서 다리를 벌리고 신음하는 일에서 훨씬 쾌락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비밀로 해 왔으나, 아일라를 사랑했으므로 결혼하기 전에 그녀에게 그 비밀을 알렸다. 그녀는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알았다고 말했다. 그것뿐이었다. 양쪽 가문에서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한 혼약에 내 성벽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다만 혼자의 비밀이 두 사람의 비밀이 되었을 뿐이다.
필수적인 과정처럼 치러진 몇 번의 담백한 섹스로는 후계자가 생기지 않았고, 그녀는 애인을 만들었으며, 나는 남자와 잤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럭저럭 괜찮은 파트너로서 잉글랜드의 사교계를 함께 헤쳐 나갔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날이 왔을 것이다. 양가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모든 상황이 굳이 결혼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는 날. 물론 정략적인 이유는 여전히 존재했으므로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많은 부부들이 그러하듯이 집과 생활을 나누었을 뿐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내 생활은 거의 이전과 다름없이 돌아갔다. 일을 하고, 집에서 쉬고, 가끔 아일라와 통화를 하고, 섹스가 생각나면 바에 들렀다. 고정된 상대는 만들지 않는다. 개인적인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까. 한 명과 여러 차례 관계를 갖는 일도 드물었다. 원하는 것은 육체적인 욕망을 해소해 줄 쾌락이지, 감정적인 얽힘이 아니니까.
애초부터 나는 타인에게 깊은 감정을 품는 일이 드물었다. 기껏해야 아일라 정도가 내 마음을 움직인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열렬하게 보고 싶다든가, 독점욕이라든가 하는, 보통 사랑이라는 것에 따라온다는 강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 * *
“버번을.”
김준형이 녹색 잔을 꺼냈다.
“재떨이는?”
“필요해.”
나는 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면서 대꾸했다. 준형이 비죽 입가를 올리며 내 앞에 재떨이를 놓았다.
“일전에 만난 애 기억해?”
“글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하던데.”
“글쎄.”
나는 반쯤 부정의 의미를 담아서 대꾸했다.
“언제까지 떠돌이 노릇 할 거야? 파트너십까지야 말 안 하겠지만, 스테디 정도는 만드는 게 어때?”
“글쎄.”
시가에 불이 붙었다.
애초부터 스테디를 만들 작정이었다면 이런 바에 오는 대신에 고급 회원제 클럽에 출입하거나, 좀 더 간단히 돈을 주고 상대를 샀으리라. 그러지 않고 매번 하룻밤의 파트너를 물색하는 것은 가능한 한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분도, 지위도 있고 책임지고 있는 권솔의 숫자도 한둘이 아니다. 이제 붕괴될 가족이나 상처받을 부모는 없지만, 자칫 약점을 잡히거나 언론에 흘러나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바에나 들어가 남자를 낚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상대가 나에 대해 알아내는 것도 염려스럽고, 자칫 쓰레기라도 걸려 사진이라도 찍히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내 정보를 상대에게 알리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상대에 대해서는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내 입장이고 천성이기도 하여, 아무리 이름조차 주고받지 않고 하루 보낼 상대를 구한다고는 해도 아무 곳에나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 위험을 생각한다면, 준형이 운영하는 바는 나에게 몹시도 고마운 장소였다. 중동의 용병 출신이라는 이 남자는, 기억력이 좋고 정보력은 말할 것도 없는 데다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다. 나는 그에게 매달 상당한 액수를 지불한다. 내가 만나는 상대를 기억하고 신상을 파악해 두는 것에 대한 대가였다. 덕분에 이 바에 드나들게 되면서부터는 상대를 가늠하고 신용할 수 있을 만한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느긋하게 잔을 든 채로 주위를 살폈다. 상대를 구할 수 있다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사실 나는 이곳에서 녹색 잔을 든 남자들에게 썩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다. 허탕을 치는 날도 적지 않았다. 키는 크지만, 체격은 빈약하고, 얼굴도 평범하다. 그런 주제에 포지션은 바텀에 한정되었다. 그것도 가능하면 나보다 큰 남자에게.
그것만으로도 이미 범위가 상당히 한정적인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귀염성 없는 성격이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 보고는 자리를 뜨는 남자가 대다수였다. 오히려 치근대는 쪽은 대개 붉은 잔을 든 남녀였다. 딱히 그런 성벽은 없는데, 가학 취미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넌 별로 인기 있는 상이 아니니까 좋다는 사람이 있으면 정착해 버려. 이제 이것저것 신경 쓸 일도 없잖아. 부인도 파리로 갔다며.”
“사실이기는 하지만,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로군.”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저어.”라고 말을 걸었다.
방해받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눈썹을 치켜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는 예상외로 붉은 잔이 아니라 녹색 잔을 든 청년이었다.
나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청년을 훑어보았다. 나이는 스물다섯 전후일까. 키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것 같고, 운동을 했는지 좋은 몸을 하고 있었다. 어깨 폭이 넓고 허리는 잘록하다. 다리는 놀랄 만큼 길고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는 작았다.
그러나 그 훌륭한 몸매보다도 놀라운 것은 얼굴이었다. 짙은 피부색이 아니었다면 대리석으로 조각한 고전 작품이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 한 번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이곳이 준형의 바가 아니라 다른 장소였다면 틀림없이 후원을 청하려는 햇병아리 모델이나 배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쁘지 않다. 취향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흠 없이 화려한 얼굴보다는 좀 더 가벼운, 경박하고 못된 남자가 타입이지만, 일단 매우 취향인 몸이고 얼굴도 아름다워서 나쁠 것은 없다. 이러나저러나 하룻밤의 상대일 뿐이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일도,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앉겠나?”
옆자리를 눈짓하자 청년이 얼굴을 붉히면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준형이 흐음, 하고 청년에게 물었다.
“이런 남자가 취향? 제법 안 좋은 취향인데, 그거.”
“아, 저어.”
청년이 또다시 당황했다. 그렇지 않아도 처진 편인 눈매가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이런 곳은 별로 온 적이 없어서.”
그쯤은 잔을 들고 있는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준형이 웃었다.
“안 좋은 취향이라는 건 그쪽을 걱정해서 한 이야기야. 엘리엇은 성격이 나쁘거든. 뭐어, 입 다물고 앉아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일 때도 전혀 없지는 않지만.”
“흠.”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청년이 입매에 연한 미소를 띠었다.
“엘리엇 씨라고 하시는군요. 아, 저는 션입니다. 션 맥케인.”
그가 성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비즈니스도 아닌데 굳이 악수까지,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대충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충고했다.
“이름은 그렇다 치지만, 이런 곳에서 본명을 전부 밝히는 것은 좋지 않아.”
“아……. 그렇다면 혹시 엘리엇 씨도……?”
“아니, 일단 이름은 본명이긴 해.”
그 이상은 알려 줄 뜻이 없다는 의도를 담아서 말했지만,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청년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시군요.”
“나갈까?”
나는 시가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년이 깜짝 놀라 “네?”라고 반문했다. 시간 끌 것도 없지 않나, 하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당황하며 얼른 잔을 마저 비우고는 준형에게 술값을 계산했다.
내 등 뒤에 대고 준형이 “좋은 시간.” 하고 농담처럼 던졌다. 나는 계산은 달아 두라고 신호하고 청년을 동반해서 바를 등졌다.
* * *
첫인상에서도 서투르다 싶었지만, 확실히 션은 동성과의 섹스에 익숙하다고 할 수 없었다. 두 번째나 세 번째쯤 될까. 그러나 배려는 이제까지 만나 본 그 누구보다도 좋았다. 욕실에서 따뜻한 타월을 가져다가 지쳐서 엎드려 누운 내 등과 엉덩이를 닦아 주는 다정함은 매너라기보다는 정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 본 게 오랜만의 일이라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서투르긴 했어도 섹스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속궁합도 썩 잘 맞았다. 힘껏 매달려도 부담 없는 근육질의 몸과 상냥한 말을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는 좋은 목소리도 높은 점수를 매길 만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나는 섹스 하는 도중에는 어리광을 부리려 드는 편이라서 이왕이면 다정한 쪽이 좋다.
나른한 몸을 돌려 천천히 일어선다. 조금 전까지 큰 것을 물고 있던 뒤가 약한 둔통을 품었다. 근육통이 있고 여운은 나쁘지 않아서 나는 샤워하지 않고 이대로 집으로 가기로 했다. 모텔의 좁고 허름한 욕실에서 비누로 씻느니 집에 가서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자기가 해 주겠다는 션에게서 젖은 수건을 빼앗듯이 하여 다리 사이를 닦고 나는 속옷을 주워 입었다. 그는 약간 한심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가실 겁니까?”
“할 일은 끝났잖나.”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이 남자는, 저 얼굴을 하고서도 원나잇에는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예. 하지만……. 아쉬워서요. 아직 엘리엇 씨가 어떤 분인지도 잘 모르는데.”
“잘 모르는데 더 같이 있을 필요라도 있나. 섹스에는 위생과 취향과 합의만 있으면 돼. 그 밖에는…… 파트너의 건강에 문제가 될 만한 일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아뇨, 절대 그런 일은.”
“그럼 됐네.”
나는 셔츠 단추를 잠그고 커프스를 채우면서 대꾸했다. 션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연락처를 여쭤도…….”
“섹스 상대를 일상에 끼워 넣을 생각은 없어.”
“섹스만이라도 괜찮습니다! 혹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놀랄 만큼 큰 목소리가 결의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바지 벨트를 매다 말고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라면 나 정도 상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저는…….”
“오늘은 좋았어. 또 바에서 보게 된다면, 그때 만나세.”
“예!”
션이 힘 있게 대답했다. 오늘은 확실히 좋았다. 이런 섹스를 한 번만으로 끝낸다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상대도 좋았다면, 좋은 일이다.
나는 그에게 쉴 만큼 쉬고 가라고 말하고 먼저 모텔 방을 나섰다. 계산은 전액을 마쳤다.
밖으로 나오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열이 오른 몸에는 딱 좋은 온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