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The truth (7/7)

4. The truth

“뭐야, 저 사람들? 또 따라다니는 거야?”

밝은 금발, 큰 키, 녹색 눈에 슬라브 인종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얼굴형을 가진 미소년이 잠깐 주변을 둘러보더니 투덜거렸다. 그 앞에 앉아 있는 키가 짤막하고 보는 사람의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안경을 쓴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애가 음료를 마시며 대꾸했다.

“그래도 이제는 티 안 내고 따라다녀.”

그래도 소드마스터인 슬라브 소년은 그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주시하고 있다고 항상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소드마스터가 지켜보는 건 아무래도 껄끄러운 법이다.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래? 또 무슨 일 있어?”

“잘 모르겠어.”

음식이 나왔다. 금발의 소년, 유리 라자레프는 아직 성장기의 소드마스터였다. 테이블이 가득 차게 음식을 시켰다. 식당에 있는 음식을 메뉴별로 전부 시켰다. 하우빈은 종류별로 한 입씩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다.

[마도사, 특히 마도물리학자 납치가 국제분쟁을 일으킨 사건은 많습니다. 그만큼 마도물리학자는 국가별로 소중한 재원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마도물리학자 납치 이꼴(Equal) 공습이 도식화된 것은 아닌가, 그런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리야드가 설사 몬스터 레어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 정도로 손쓸 도리가 없었습니까? 정말로 단 한 명도 대피시키지 않고 곧바로 그 대도시를 파괴시켜야 할 만큼이었습니까?]

음식점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청문회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마이크에 대고 질문을 하고 있었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잠깐 세현 퀸이 나왔다가 다른 사람이 질문에 대해 반박하며 화면이 다시 전환되었다.

“어, 세현 교수님이다.”

“응?”

유리의 말에 하우빈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질문이 이상하군요. 홉스 중위는 바로 리야드 공습 작전을 직접 실행한 고위 장교였습니다. 전략전술에 대한 이해가 높고 지금까지 다수의 중요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능력 있고 애국심 투철한 훌륭한 장교입니다. 그런 장교가 리야드에는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세현 퀸 교수의 리야드 파괴는 학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결국에는 홉스 중위의 말대로 이는 마도물리학자 납치에 대한 학회의 보복일 뿐이란 말입니다.]

[유엔 상임이사국의 승인도 있는 정당한 공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의원님은 유엔 상임이사국, 열두 국가가 전부 리야드의 상태도 모르고 그런 공습 허가를 내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리야드에 있었을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많은 고위 관료와 왕족까지 전부 탈출하지 못한 겁니까? 리야드에 몬스터가 한 마리라도 나오기 시작했다면 그 사람들부터 튀어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리야드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우연히 해외에 있었거나 아니면 지중해 게이트가 발발하고 바로 리야드를 빠져나온 이들을 제외하곤 전부 죽었습니다. 상임이사국의 공습 승인도 사실상 사후 승인이 아니었나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지중해 게이트가 발생하고도 사우디를 탈출하지 않은 애국자들입니다. 리야드에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했어도 끝까지 싸웠을 겁니다.]

어깨에 별을 단 장성도 있었다. 그가 최대한 무해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의원 하나가 그를 도리어 추궁했다.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지중해 게이트 발생 이후 이스라엘과 달리 초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하여 중부 대도시인 타브크까지 순식간에 잃었습니다. 지중해 게이트의 활동량은 이미 남중국해 게이트를 넘어섰습니다. 우리 정부의 최우선과제는 물론 인질의 무사 구출이었겠지만, 사우디 아라비아가 전선을 유지할 만큼의 전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인질만 구출하고 퇴각한 점, 오히려 그 부분에 대해서 추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군의 최우선목표는 대한민국의 육해공 영토와 우리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으로 적성국가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김 중장, 지금 사우디 아라비아를 적성국가로 칭한 것입니까?]

음식점 안에서 TV를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몇 명은 보고 있었다. 하우빈이 새우를 하나 집어먹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교수님 머리 자르셨다.”

“응, 그러시네. 잘 어울리신다.”

“우리 교수님 짱 멋있어.”

“응. 근데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하우빈은 유리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TV에서 나오고 있는 청문회는 논점이 흐려지고 사건과 관련된 군 장성과 행정부 관료들이 갖가지로 추궁당하고 있었다. 세현 퀸은 <참고인>의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간혹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를 비추곤 했다.

[HNU 물리학과 최이삭 박사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며 약간 긴장한 얼굴의 최이삭이 TV에 나왔다. 그러자 유리가 말했다.

“어, 박사님도 나온다.”

“어, 선배님.”

TV는 유리의 정면에 있었다. 하우빈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TV를 보았다.

“선배님 화면발 안 받는다. 교수님은 TV도 멋진데.”

“좀 그런듯?”

[2128년 4월 24일 화요일부터 2128년 5월 9일 수요일까지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에 의해 억압된 마도물리학자 당사자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세현 퀸 교수는 참고인이었지만 최이삭은 증인 자격으로 출석한 것이었다. 잠깐 하우빈과 유리는 TV를 다시 쳐다보았다.

“재미없다.”

“딴 거 틀지.”

아는 사람이 나오니 보고는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어쨌든 저거 때문에 또 저 아저씨들 따라다니는 건가 봐.”

“응.”

“그때 그건 사우디 사람들이 잘못한 거잖아? 우리 막 잡아가고.”

“응.”

“근데 왜 교수님이랑 저 박사 아저씨한테 저래?”

“그러니까. 다들 우리 교수님 못 살게 군다니까. 제일 싫어. 우리 교수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하우빈이 진심을 담아 유리에게 그렇게 말하곤 ‘맞지?!’ 라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응, 짱 강해.”

“다들 모르니까 저러는 거야. 모르니까.”

하우빈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우리 교수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 사람들은 절대 우리 교수님한테 저렇게 못해. 저런 정치인이나 군인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 교수님 같은 사람이 인류와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그녀는 평소엔 맹한데 자신의 공부와 교수에 대한 일만 되면 확 하고 열기가 돌고 말에 힘이 생겼다. 유리는 ‘그래?’ 하는 눈길로 하우빈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먹자.”

유리의 말에 약간 분개했던 하우빈도 음식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포크를 다시 쥐었다.

“응, 어쨌든 우리 교수님이 제일 짱.”

“알았어. 교수님 짱.”

그들은 음식을 다 먹고 밖으로 나왔다. 메트로스퀘어 근처였다. 메트로스퀘어로 향하니 점점 사람이 많아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키가 땅꼬마만한 하우빈이 슬슬 사람에게 치이기 시작했다.

“꼬맹이, 비켜라.”

하지만 꼬맹이라는 명칭은 하우빈을 향한 것이 아니라 유리 라자레프를 향한 것이었다. 좀 멀찍이서 없는 척 따라오던 경호원 네 명이 유리의 어깨를 밀치며 하우빈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주변의 사람들을 비키게 했다.

“석사님, 메트로스퀘어 쪽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하우빈은 까치발을 들고 메트로스퀘어를 살펴보았다.

“홉스를 석방하라!”

“석방하라! 석방하라!”

피켓을 든 사람들이 메트로스퀘어를 행진하고 있었다. 하우빈과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걸 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홉스의 공개 발언을 허락하라!”

“허락하라! 허락하라!”

하우빈은 헐, 하고 그걸 보고는 중얼거렸다.

“뭐 하는 거야, 저 사람들.”

그동안 경호원들 중 대장인 사람이 잠깐 인이어를 통해 어딘가와 연락을 하더니 갑자기 하우빈을 번쩍 들어올렸다.

“억.”

“실례하겠습니다, 하 석사님.”

그대로 하우빈을 달랑달랑 든 채 네 명의 경호원들이 사람들을 헤치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유리도 얼른 그들을 따라갔다.

“왜 그래요?”

그들은 유리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얼굴이 굳어 있었고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군사 작전 수립 및 결정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민간인을 군사 작전의 책임 주체로 겨냥하다니요. 한나 홉스 중위가 제정신입니까? 민간 전문가에게 군사 작전의 도움을 청한 것은 군일 거 아닙니까? 한나 홉스의 주장이 인간적으로 말이나 됩니까?! 시민 여러분, 자극적인 영상과 찌라시에 호도되지 마십시오! 군사 작전에 대한 루머를 퍼뜨려 우리 군과 정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정국에 파란을 일으킨 홉스 중위는 당연히 군사재판에 회부되어야 하며 체포도 정당합니다. 무작정 석방을 요구하는 저들은 스스로를 정의라 믿으며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고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단전에 힘을 주고 확성기에 대고 크게 외치고 있었다. 한 군데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단체가 같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경호원인 소드마스터의 옆구리에 단단히 끼여 있는 하우빈이 눈을 끔벅거리며 메트로스퀘어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저런 시위는 분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들은 대로를 벗어나자 바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리고 곧바로 쾅!! 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진다 싶더니 다시금 콰광! 하고 더 큰 소리가 들렸다. 메트로스퀘어 쪽이었다. 유리가 헉,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메트로스퀘어로 통하는 대로는 총 5개였고 방금 하우빈 무리는 정남쪽 대로를 빠져나온 참이었다. 시차를 두고 사람들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쾅!! 한 번 더 폭발음이 들렸다. 잠깐 서서 인이어를 통해 누군가의 지시를 듣던 경호대장은 서쪽으로 손짓했다. 그대로 사람들이 더 몰려나오기 전에 장소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요새는 사람 많은 곳엔 가지도 못하겠어.”

유리는 경호대장의 옆구리에 달랑달랑 매달린 하우빈에게 말했다.

“그, 러게. 웁.”

방금 먹고 나왔는데 사람의 옆구리 매달려 복부가 압박되니 토할 것 같았다. 하우빈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소드마스터다 보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몇 킬로미터는 금방 지나갔다. 차가 왔다. 그들은 하우빈을 차에 태웠다.

“일단 교외로 나갑니다.”

“왜요?”

“테러리스트들이 청문회를 노리고 서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테러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와 병원도 위험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유리도 차에 태우고 그들도 탔다. 차는 빠르게 도로를 질주했다. 하우빈은 깜짝 놀라 눈만 크게 뜨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화가 왔다.

[하 석사님, 메트로스퀘어에 계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전 괜찮아요….”

하우빈이 황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물었다.

“우리 교수님은요?!”

[무사하십니다. 의사당을 노리던 테러범들은 테러를 일으키기 전에 제압했습니다. 사상자가 확인되는 건 현재 메트로스퀘어뿐입니다.]

“네….”

로라 맥코이의 대답에 하우빈이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

“의사당은 안전합니다. 와하브입니다.”

한민유가 허리를 숙여 세현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청문회를 두 번 여는 건 안 돼. 계속해.”

세현은 한민유에게 작게 대꾸했다. 학회는 이미 중동 국가 두 개의 멸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바가 있다. 그들은 미국과 학회를 알라의 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선 이상하게 학회가 더 만만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집에서 아내를 패도 되냐, 안 되냐로 설전할 수 있는 나라인데 학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당히 우습게 보는 모양이다. 학회야말로 진정한 강자였음에도 상대가 그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을 자꾸 만들었다. 그곳은 미래를 위하여 점진적으로 더욱 약화시켜야 할 지역이다. 한민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드디어 세현의 차례가 왔다.

“그럼…, 참고인으로 참석하신 HNU 물리학과 교수 세현 퀸 교수님,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세현이 마이크에 대고 대답했다. 세현은 말을 건 사람부터 천천히 자신을 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무심히 관찰했다. 눈이 마주치니 흠칫하며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고 긴장한 상태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세현은 이런 인간들을 만나는 걸 매우 싫어했다. 노친네는 이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만나고 다니나 싶다. 일단 눈빛부터가….

“지금껏 군사작전에 마도물리학자들의 공조를 받을 경우, 알려진 바로는 중력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리야드 공습에서는 중력 마법이 아닌 다른 마법을 사용하셨다고 홉스 중위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작전 계획과 달리 독단으로 다른 마법을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현재 드레이닝에 걸려 있습니다. 마력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로, 대도시인 리야드 전체에 중력 마법을 쓰기엔 마력량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준(準)변환 마법 또한 중력 마법에 비할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실행하였습니다.”

“학회는 마도물리학자의 납치 및 테러와 관련된 군사작전에만 마도물리학자의 공조를 허락하고 있습니다. 마도물리학자의 중력 마법을 이용한 공습이 인도주의적인 이유는 바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반격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준변환 마법 또한 그러하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자 다른 의원이 끼어들었다.

“중력 마법을 이용한 공습이 ‘인도주의적’이라니, 그런 표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민간인과 군인을 구분하지 않는 공습입니다.”

“그럼 공습에서 민간인 피해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까?”

“도시 하나를 눌러버리는 건 재래식 폭격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국가간 분쟁 및 전쟁에서 학회 소속의 마도사가 중력 마법을 쓴 경우는 전무합니다. 이건 몬스터 레어가 된 도시에 중력 마법을 쓴 것입니다. 아니, 정정합니다. 준변환 마법을 쓴 것입니다. 몬스터 레어를 모르십니까? 레어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생존자가 있어도 소이탄 계열의 폭탄으로 도시 전체를 소각합니다. 사람이 산 채로 타 죽는 겁니다. 그것보다 중력 마법이 인도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애초에 인구 천만 단위의 유서 깊은 도시를 이런 식으로 파괴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인도주의? 세현 퀸 교수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만한 사람을 죽인 감상은 어떻습니까? 전 의원의 인도주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논점을 벗어난 질문은 삼가해주십시오.”

다른 의원이 말했다. 그간 세현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잠깐 노력해야 했다. 인상을 찌푸릴 것도 같고 비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뭐가 말이 되고 안 되는지 판단할 능력도 없으면서 뭐가 말이 되고 안 되는지를 입에 담는가? 아니, 뭐가 말이 되고 안 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저런 말로 너무 쉽게 호도되는 것이 문제다.

로마는 2천년 전 카르타고를 벽돌 한 장 남기지 않고 전부 파괴했다. 미국은 이 정치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민간인도 잔뜩 있는 도시에 원폭을 두 개나 떨어뜨렸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해 쳐들어 갔을 때 러시아와 미국은 한쪽이 원폭을 감행하면 다른 쪽도 원폭 보복을 해도 관여하지 않기로 서로 입을 맞췄고 세계 최고의 석유 매장량을 가진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루다가 포퓰리즘을 일삼는 독재 정권의 전횡으로 어제까지 인사를 나누던 옆집 소년도 잡아먹을 정도로 아비귀환에 떨어졌다. 시리아는 자국민끼리 편을 나누어 상대를 재래식 무기, 생화학무기 등을 모조리 써서 몰살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했고 강대국들은 그들에게 무기를 팔았다. 이 땅에서도 동족상잔을 벌어졌을 때 강대국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쓰였던 폭탄량의 3분의 2를 이 작은 나라에 투하하여 전쟁 특수 경제로 돈을 벌지 않았던가.

자신의 호불호가 진실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며 자신이 싫어한다고 존재하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좋아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왜 그것을 분리하지 못하는가. 병신이라는 말 외에는 따로 지칭할 말이 없다. 눈앞에 바로 있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생존에 매우 치명적인 장애다.

세현은 자신에게 따져 물은 의원을 한 번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현을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감정적이다. 약자의 특징이다. 글쎄, 이걸로 청문회 스타라도 되고 싶은 것일까? 딱히 인기 있는 인상은 아니다.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인기 투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불리한 조건이다. 거기에 상대를 세현 퀸으로 정한 걸 보면 안목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왜 하필 비교 열등한 이들이 더더욱 이상주의에 빠져드는가. 이상과 가장 머나먼 자들일수록 이상을 맹신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스스로의 열등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그럴수록 더더욱 꼴불견일 뿐인데도.

‘누가 그랬더라. 자신이 공주라 믿는 서민의 심정이랬나.’

어떤 테러단체가 죄 없는 천재 물리학자의 목을 치는 장면을 전세계에 생중계했다. 사실은 거의 관련도 없던 리비아가 자신이 배후에 있는 척하면서 강대국들과 그 테러단체를 놓고 이권을 챙기려다가 쑥대밭이 되었다. 러시아는 체첸 반군의 근거지를 밀어 버리기 위해 도리어 체첸 반군에게 마도물리학자의 납치를 사주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피도 눈물도 없으며 의리와 정의는 더더욱 없다.

이미 없는 것을 왜 없냐고,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땅은 평평한데 지구가 왜 평평하지 않냐’고 따지는 수준의 질문이다.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당연히 죄다. 그런 멍청함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사람의 완벽하지 않음을 공격하며, 약자인 척하는 비싼 수제 양복을 입은 위선자, 즉, 돼지들의 프로파간다에 힘을 실어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돼지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도 뭣도 아니고 강자를 제거하고 바로 그들을 따랐던, 스스로가 옳고 정의로운 약자라고 생각했던 자들을 철저하게 노예로 부리는 것이다. 진정한 강자가 제거된 세계에서는 그들이 강자이기 때문이다. 멍청한 자들은 언제나 자신을 더 가혹하게 착취할 악마를 선택하는 데 아주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가능했을 자존을 위협할 정도의 무지와 게으름, 분수를 모름이 그것이다.

자신의 눈에 완벽하고 이상적인 통치자가 있어야 한다는 환상은 딱 본인이 그 완벽하고 이상적인 존재의 통치를 받을 만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의 나르시즘, 즉,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구성요건을 전부 충족한다. 자기애성 성격장애? 6살 수준에서 자아가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인간들이 정말 사우디 아라비아의 멸망이 아쉬워서 이러는 것 같은가? 홉스야 죄책감을 느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이 입으로 정의를 말한다고 그들의 목적이 정의 실현으로 보이는가? 그들은 단지 누군가를 짓밟고 파괴하는 힘에 도취되고 싶을 뿐이다. 세현의 앞에 있는 남자야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쇼를 하는 것뿐이고 대중에게 리야드는 빌미일 뿐, 그들의 목적은 마녀사냥의 축제, 그 자체인 것이다. 도덕심, 윤리 의식은 물론이고 기초적인 판단력조차 없는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제가 몬스터전과 관련한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리야드만한 레어를 방치하는 것은 사우디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을 넘어서 유럽과 아시아까지 위협할 만한 사안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정부와 군의 판단을 믿습니다.”

다행히도 세현은 대중에 의해 죽고 사는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는 그녀를 슈퍼스타로 보이게 할 만한 속성을 부여했더라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힘은 여기 있는 모두가 가진 가치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논지를 계속 유지했다. 청문회가 끝나고 의사당을 나오니 기자들이 엄청 몰려 들었다.

“교수님.”

경호원들이 기자들의 사이를 가르며 차를 향해 길을 만들었다. 최이삭도 세현의 옆에 붙어서 같이 걸었다. 경호원이 모두 소드마스터라 제법 여유 있게 걸었다. 경호원이 차문을 열어주었다. 세현이 바로 탔다. 최이삭은 차를 빙 돌아서 반대쪽 차문을 열고 탔다. 차에 타고 문이 닫히자 둘 다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수님.”

최이삭이 그렇게 말하며 세현의 안색을 살폈다. 세현의 표정은 당연히 썩어 있었다. 리야드 작전 때 정부의 상황실에서 지시를 내렸던 사람들 중 이 청문회에 유일하게 회부되지 않은 사람은 캘리 박뿐이었다. 세현이 참고인의 자격으로 나온 것도 결국 캘리 박이 여기까지 얼굴을 드러낼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세현이 현재 강건했다면 세현까지도 여기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메트로서울 전역에서 테러가 크게 일어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청문회에서 많이 분산되었으며 처음부터 홉스 중위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던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인 와하브가 배후라는 것이 밝혀지자 홉스 게이트에 대한 여론도 분산되었다. 어쨌든 사우디 아라비아는 아주 먼 나라이고 국회뿐만 아니라 군까지 내분한 홉스 게이트는 정국에 헬 게이트를 열었으니 여기 사는 누구에게도 득이 될 일이 아니다. 애초에 먼 나라가 피해를 입은 일이니 사람들의 집중력도 흩어졌다. 원래 사람들의 위선이란 딱 그 정도인 것이다. 홉스에 대한 군검사의 기소 혐의는 매우 많았다. 중요 군사 작전에 대한 기밀 누수는 국가 안보에 치명적이다. 학회의 데미지 컨트롤은 중반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2128년 8월 12일, 엘 드라카 전야제가 축포를 터뜨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호 클럽을가진 메트로서울은 언제 테러가 일어났냐는 양 새파란 클럽기가 온 도시를 덮었다. 청문회는 7월 초에 있었고 이를 기점으로 관련된 이야기는 점점 적어지고 7월 중순부터 적어도 한국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 국가들이 가진 대부분의 주요 인터넷 포탈은 전부 엘 드라카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스포츠 축체로 떠들썩 할 때,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에서는 현재 유일하게 VVIP 병동에 입원하고 있는 VVIP, 세현 퀸의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체온을 낮춰 생체 활동을 최대한 멈추고 S인자와 오라를 최대한 주입해서 드레이닝 홀을 줄이는 수술을 할 거다. 지금까지 17명의 환자들 중 10명은 홀이 30% 정도 줄었고 7명의 환자는 변동성이 커져서 홀이 10%에서 20%로 정도 늘었다 줄었다 하고 있는 상태다. 2차 수술에서는 아무도 축소 효과를 못 봤고. 홀이 30% 줄어든 환자들의 생체 스펙이 다른 환자 생체 스펙보다는 너와 더 비슷하기 때문에 시도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약간 모험이긴 해. 완치는 아니고 연명 치료지.”

“그래. 한 번 해봐. 더 나빠질 상황도 아니잖아.”

세현의 드레이닝 속도는 시간당 850만 BP를 돌파했다. 1,000만 BP를 돌파하면 딱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태가 된다. 도박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세현은 자신의 몸을 나타낸 홀로그램 도식과 수술에 대한 설명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캘리 박은 엘리야 민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해봐.”

“교수님, 민 교수 체하겠어요.”

세현의 말에 캘리 박이 얼른 손을 뗐다.

“어, 음. 부담 가지지 말고 해. 부담 가지지 말고.”

“네, 총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엘리야 민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현재 학회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에 <세이브 퀸 프로젝트>라는 의학사에 길이 남을 의료 사업을 거행하고 있었다. 세현 퀸은 그녀의 친구였지만 동시에 캘리 박의 가장 유망한 후계자였다. 중압감이 안 들면 사람인가.

‘진짜 학회장님이랑 이예프 소장님 배까지 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아니,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도 역시 그건 못하지.’

아마 세상에서 중력 마법을 가장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써본 사람들일 것이다. 그것도 몇 십 년 동안 말이다. 세현은 고작 십 년 정도 쓰고 몸에 고장이 났다. 중력 마법의 사용과 드레이닝 발병률의 유의미한 연관성이 밝혀진 이상 아마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 강력한 마도사인 두 사람의 케이스를 확인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뭐, 엘리야 민으로서도 그건 입도 벙긋 못할 게재였다.

‘총장님께서 이예프 소장님을 좀 싫어하셔서 그렇지 사실 소장님이야말로 적장녀….’

뭐, 결국 온살로 연구소도 만들어 주셨고…. 어쨌든 그런 제안까지 했다가 실패하면 엘리야 민은 진짜 끝장이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만, 어쨌든 평생 죽은 듯이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세현 퀸과 엘리야 민, 그 외 의료진이 수술실로 들어가고 캘리 박은 밖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 2시간 뒤 수술이 끝났다. 캘리 박은 학회에 남은 한민유와 통화를 하면서 스크린을 보고 있다가 전부 팍 의자에 버려 두고 일어났다.

“어때? 잘 됐어? 괜찮아?”

세현 퀸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민 교수를 잡고 물었다. 엘리야 민이 마스크를 떼며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총장님. 실패했습니다. 한동안 퀸 교수 상태가 좀 불안할 겁니다. 현재 드레이닝 홀이 진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시간당 1,000만 BP를 돌파하지 않도록 집중 관리가 필요합니다.”

“…….”

캘리 박이 잠깐 말을 잃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단 엘리야 민은 세현을 빨리 옮겼다. 앞으로 한동안 소드마스터의 오라를 24시간 동안 계속 미약하게 계속 주입해서 드레이닝 홀의 진동을 최대한 약화해야 했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도 세현의 시간당 드레이닝 양은 850만 BP에 달했고 드레이닝 홀의 진동으로 소진량이 늘어나는 순간 혹여나 임계점을 넘으면 한순간에 사망할 수도 있었다.

사흘 간의 관리 끝에 결국 세현 퀸은 완전히 퇴원했다. 홉스 게이트로 말미암아 7월 중순까지는 병원에서 쭉 숙식했고, 그 뒤로도 병원과 학교를 오갔다. 리야드 작전 이후로 캘리 박의 고집으로 내내 병원에 붙들려 있었는데 드디어 풀려난 것이다. 뒤푸르 박사의 연구도 계속되고 있었지만 시간 내에 실현 가능할지 아직 요원했고 세현은 본래부터 통원 치료도 반대했었다. 그녀는 연명 치료로 마력 포션을 24시간 다는 것만 유지했고 세 명의 남자와의 잠자리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줄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엘리야 민의 레지던트 4명이 6시간 교대로 24시간 세현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세현의 생활은 거의 예전과 비슷해졌다. 랩에 12시간씩 붙어 있는 생활이었다. 엘 드라카 때문에 도시의 분위기도 약간 불안했고 테러 위협도 잔재해 있어서 경호원들은 꽤 있었지만 세현은 이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엘 드라카가 시작된 이상 알렉스와 제수스는 곧장 바빠졌다. 주말 정도나 볼 수 있었고 못 볼 경우도 많았다. 웨스트이글은 메트로서울 연고였기 때문에 가끔 주전인 제수스의 빨강 머리를 광고판이나 TV에서 스쳐 지나가듯 볼 때도 제법 있었다. 아담은 경호원 비슷하게 채용되어 세현의 근처에 종일 머물렀다. 거처도 세현의 자택이었다. 여차할 때 비상용(?)인 모양인데…. 엘 드라카 초창기엔 알렉스와 제수스 둘 다 전화를 꽤 했는데 쓸데없는 일로 전화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지금은 거의 하지 않았다. 메시지는 많이 보냈다.

드디어 일정이 제대로 굴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세현은 수에즈 프로젝트와 관련된 논문을 마무리하는 데 열중했다.

어느 날 동료 교수가 복도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이거 교수님 얘기 아니에요?”

뭔가 싶어서 그녀가 보여주는 걸 보니 알렉스의 인터뷰 영상이었다. 세현은 사실 엘 드라카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자막으로 <2128 엘 드라카 포틴즈 슈퍼루키 랭킹 3위: 알렉스 킴(19)>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던라이온의 올해 우승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해도 주전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게 서던라이온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열심히 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현이야 잘 모르지만 원래 선수들은 인터뷰 같은 걸 잘못한다. 그래도 그는 제법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막 경기를 끝낸 그의 얼굴은 열기로 상기되어 있었고 머리카락도 젖어 흐트러져 있었다. 원체 잘생겨서 평소에도 연예인이나 모델 같아 보이지만 확실히 운동 선수라 자세가 달랐다. 키가 크고 건장해서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기 위해 몸을 좀 숙이는 것이 귀여웠다.

[끝으로 앞으로 세븐즈에 임하는 각오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전 눈앞에 닥친 한 경기만 집중할 겁니다. 교수님을 위해 이길 겁니다. 세현 교수님, 사랑합니다.]

그는 카메라에 시선을 주며 그렇게 말하곤 약간 쑥스러운 듯이 인터뷰어에게 인사하고 휙 가버렸다. 세현은 헐, 하고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은 방송국으로 연결되었다. MC와 패널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킴 선수가 말한 ‘세현 교수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분은 아니시겠죠?]

[설마요.]

[열아홉 살이라고 했나요? 당돌하네요. 하하.]

세현은 동료 교수의 디바이스를 밀어냈다. 그녀는 ‘그래서 이게 너냐’ 라는 얼굴로 세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현이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모르겠네요.”

당연히 알렉스의 인터뷰는 학회에서 열심히 잠잠하게 만들고 있던 세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반짝 많아지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이번에는 학교에 무슨 연예인 파파라치들이 나타났다. 경호원의 제지에 멀찍이서 사진을 찍어가곤 했으나….

“알렉스.”

“잘못했어요, 교수님….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난 그냥 교수님 생각나서, 교수님이 좋아할 줄 알고….”

오랜만에 메트로서울에 온 알렉스는 세현을 만나기 전에 이미 여러 사람한테 혼이 나서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잘못부터 빌었다. 항상 기가 센 그였으나 드물게 이렇게 풀이 죽어 세현의 눈치를 볼 때는 좀 귀엽다. 세현은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그러지 마라.”

“응….”

그녀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세현의 허리를 팍 끌어안았다. 역시 그녀는 알렉스에게 꽤 관대했다. 다른 남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알렉스는 그게 좋았다. 알렉스는 세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기쁜 얼굴을 했다. 세현은 덩치 큰 고양이가 고롱대는 것 같은 알렉스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이 토이, 허….”

그리고 순간 세현은 어느 연예 잡지의 제목을 떠올리며 그렇게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그런 연예 스캔들이 뜰 줄은 예전엔 상상도 못했다.

어쨌든 세현에 대한 그런 작은 스캔들도 뒤를 이어 일어난, 세현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스캔들로 싹 묻혔다. 킬스버그라나 뭐라나 하는 여자와 관련된 스캔들이었다. 무질서한 듯 보이면서도 꽤 대대적인 걸 보니 누군가의 훌륭한 기획력이 보였다. 세현은 지나가듯이 사진만 쭉 보면서 생각했다.

‘한 비서가 월급값은 하네.’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전부 이 이야기뿐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얼굴들 중에 아는 얼굴은 다니엘 스톤하츠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미남이 엮인 스캔들이 그렇게 좋은가 보다. 홉스는 계속해서 상고를 할 모양이라 적절한 타이밍을 맞춰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쨌든 사태 자체는 못해도 내년 말까지는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큰 사건의 심리를 여론에 떠밀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하지 않을 정도의 시스템은 있었기 때문이다.

‘지들이랑 하등 상관도 없는 일에 숟가락 얹어서 정의의 용사인 척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지 인생이나 똑바로 살지….’

본인이랑 관련도 없는 사건에서 말 몇 마디 외치는 것만으로 자기가 착하다고, 아니, 뭔가를 깨달은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그것 그대로, 그 사람은 고작 그것 외에는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낄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150억이나 되는 인구 중에 과연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5%..., 아니, 1%도 안 되겠지.’

뛰어난 사람은 원래 드물다. 생각보다도 훨씬.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남들이 법칙에 따르면 자기도 따르고 남들이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본인도 따르지 않는 딱 그 정도의 수준이다. 자기가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사실 무엇인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오늘은 영 집중이 안 된다. 세현은 아까 전에 한 시간 정도 최이삭을 제법 갈구며 스트레스를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십이나 찾아볼 정도로 집중이 되지 않는 걸 깨닫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학생들 하는 것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바로 퇴근했다. 토요일이었다.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받았다.

[세현아!]

“어디야?”

[나? 게헨-세나. 오늘은 안 바빠? 시간 괜찮아?]

제수스는 그녀가 자신에게 전화를 줬다는 사실에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오늘은 훈련인지 뭔지 안 해?”

[끝났어.]

“아크로폴리스로 간다.”

[엇. 알았어. 나도 여기서 출발할게.]

어쨌든 그는 부담 없고 간편한 디저트 같은 남자였다. 세현은 먼저 도착하여 화려한 시티뷰를 즐길 수 있는 그의 펜트하우스 거실 카우치에 앉아 잠깐 머리를 비우고 있었다. 권태롭다. 10분쯤 지나니 그가 집에 들어왔다.

“왔어?”

그가 오늘도 양손에 뭔가 잔뜩 사 들고 들어왔다. 세현은 카우치 등에 팔을 걸치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부엌에 자신이 사온 짐을 두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세현아.”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싱글벙글 웃었다. 세현은 고개를 까닥하며 물었다.

“뭐 사왔어?”

“배고파?”

여자를 배불리 먹이는 것은 상당히 흡족한 행위다. 그는 백화점에서 사온 음식을 잔뜩 들고 거실로 왔다. 맛있는 걸 배불리 먹고 그의 생각 없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섹스를 하고 나니 오늘은 그가 썩 나쁘지 않았다.

“머리카락 아까워.”

그는 세현의 짧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며 그렇게 말했다.

“그 소리 좀 그만해라.”

그리고 씻고 잠이나 한숨 자려고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했다. 세현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더미에서 제일 위에 있는 걸 들어올렸다. 세현이 저자인 책들이었다. 공동저자인 책까지 다 있었다.

“이걸 읽었어?”

읽은 티가 나는 책이었다. 세현은 그걸 휘리릭 한 번 넘겨보았다. 제수스가 욕실에서 나와 그녀를 찾다가 그걸 보고 헉, 하고 놀랐다. 세현이 그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세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걸 진짜 읽었냐’ 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제수스는 겸연쩍은 얼굴로 자기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아니…, 그냥….”

“다 읽었어?”

“으음…. 일단 글자는 다 읽긴 했는데….”

제수스는 얼굴이 좀 빨개졌다. 짐승 같은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책도 읽으려고 하고 무지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가. 세현은 살짝 실소했다가 결국 제대로 웃었다.

“나쁘진 않은데.”

그녀가 저렇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제수스는 깜짝 놀랐다. 저걸 사 모은 건 그냥…,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녀가 너무나 멀게 느껴지던 시절에 샀다. 그녀가 나온 영상도 다 보고 그녀가 썼다는 책도 다 읽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그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서.

‘물론 무슨 말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제수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직도 피식피식 웃으면서 그의 침대에 앉아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웃더니 제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줄도 그었어.”

“으응…. 잘 모르겠어서.”

세현이 보고 있는 책은 물리학 교재라기보단 우주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철학을 담은 책이었다. 세현은 잠깐 책 속에 빠져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쭉 생각해오던 것들, 그러다가 바뀐 것들, 그동안 그녀가 배운 것들, 캘리 박, 자기 자신, 우주, 그리고 그 너머에 대한 그녀의 가치관과 상상을 담은 책이었다.

제수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빼꼼 그녀가 보는 것을 같이 보았다. 몇 글자 같이 읽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의 얼굴이 진지하면서도 활기가 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는 그대로 제수스의 베개를 안고 엎드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었다. 제수스는 그 곁에 자신의 얼굴을 괴고 옆으로 누워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실내, 가끔 종이를 넘기는 팔랑거리는 소리. 숨죽여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기분이 이상해….’

제수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글자에서 시선을 떼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제수스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해.”

이런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마치 지금 이 순간이 그런 순간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녀가 전처럼 바보 취급을 하거나 그를 거절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래도 좋았다. 이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순간에 겨우 ‘안녕’이라고 인사밖에 못하는 건 싫지 않은가.

제수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현은 피식 웃고는 별다른 대꾸없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화 안 내네?’

제수스는 자신의 팔을 펴고 자신의 글래머러스한 이두박근에 얼굴을 완전히 댄 채 그녀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았다.

“사랑해.”

그는 다시 말했다. 그제야 세현이 무심히 대꾸했다.

“알고 있어.”

그녀의 대답에 제수스는 바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알고 있다고 말해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

“…….”

최이삭은 오랜만에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플라스틱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운 나무로 된 책상에 비싼 의자들이 있었고, 거기엔 그보다 연장자들이 주르륵 앉아 있었다.

드디어, 대망의 졸업 논문 평가날이었다. 12월 20일. 제출한 지는 일주일 정도 되었고 방금 논문의 요지에 대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심사청을 통과하여 학회지에는 이미 넣었다. 물론 학회지에 올라가도 졸업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학교, 아니, 다른 과 같으면 지도 교수는 자기 학생의 논문 평가에 위원으로 들어올 수 없었지만 여기는 버젓이 들어왔다. 학과장님도 있었다. ‘공정성’을 위하여 학생의 지도교수, 학과장을 제외한 다른 5인의 교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나란히 최이삭에게 7점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세현 퀸과 캘리 박을 쳐다보았다.

캘리 박 교수가 HNU에서 자신의 첫 박사 졸업생을 낸 이래 이어진 유구~한 역사로 물리학과만은 온전히 지도 교수에게 자기 학생에 대한 모든 재량권을 주었다. 입학은 물론이고 졸업까지도 말이다. 22세기 최고의 엘리트 교육의 산실에서 버젓이 노예를 부릴 수 있도록 지도 교수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도제 제도가 바로 HNU의 물리학과 연구실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졸업 커트는 7점. 캘리 박은 최이삭의 졸업 논문의 마지막 부분을 한 번 더 읽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7점을 주었다.

‘교수님이 7점만 주셔도 졸업이다….’

최이삭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세현은 최이삭의 논문을 몇 번이나 앞뒤로 다시 읽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최이삭은 더더욱 긴장했다. 그녀가 점수를 등록했다.

0점

“…….”

최이삭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세현은 그의 논문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것도 논문이라고.”

그리고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교수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좀 성급한 마무리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동료 교수 하나가 세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성급한 정도가 아니라 지적 성실성이 결여된 겁니다.”

“그래도 0점은 좀 심했다.”

“마이너스는 왜 안 되는 거예요, 교수님? 예?”

“오랜만에 식사나 할까요?”

“랩에서 이틀이나 잤더니 몸이 뻐근하네요. 사우나는 어때요?”

“전 좋습니다.”

교수님들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담을 나누며 심사장을 나갔다.

“…….”

최이삭은 영혼이 탈출한다는 기분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잠깐 거의 기절한 것 같은 기분으로 그 자리 그대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품에 있는 디바이스가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최이삭은 힘없는 동작으로 그걸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 댔다.

[크하하하학! 하하학! 큭큭큭! 야! 너 고작 한 학기 나보다 빨리 졸업한다고 그렇게 자랑질 하더니 꼴 좋다!! 캬학학학학! 꼬시다!!!]

“…….”

원래 위안이란 진심 어린 위로의 말보다도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똑같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도 내가 약~간은 더 낫다는 생각은 모든 조건이 충족된 행복감에 비견될 만큼 기분 좋은 것이다.

최이삭은 결국 졸업이 한 학기 늦어지게 되었다. 물론 부족한 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올해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것을 감안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전부 최이삭의 탓도 아닌데…. 게다가 한 학기?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지? 최이삭은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이것이 한 학기가 지난다고 과연 더 나아지는 걸까?!

“나…, 나 이제 어떡하지? 어떡해? 나 이제 어떡해?”

최이삭은 완전히 멘탈이 나갔다. 그렇게 한 대학원생의 영혼을 파괴시킨 교수님들은 결국 나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교수 휴게실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도 한 1년은 얘가 진짜 졸업할 생각이 없나 싶었는데 그래도 좀 나아졌네, 최 박사."

캘리 박이 그렇게 말했다.

"나아지긴 뭐가 나아져요? 주제 정하는 것부터 논리 전개, 결론까지 남의 눈치만 보면서 하는 티가 팍팍 났는데. 그리고 아무리 좋은 논문도 결론이 이상하면 다 일그러지는 건데 얘는 도대체 스웨덴까지 갔다 와놓고 지금 뭐 하는 거래요? 아, 저걸 진짜 다리를 부러뜨려서 책상 앞에만 앉혀 놔야 하나."

세현이 혹평했다.

"그래도 확실히 좀 나아지긴 했어요. 솔직히 최 박사 석사 들어올 때부터 다들 석사 정도만 하고 나갈 감이라고 얘기하고 그랬잖아요."

"그랬죠. 딱 봐도 멘탈 약해 보이고."

"용케 벼텼다 싶었는데 올해는 상태가 영 안 좋은 게 곧 그만두겠다는 얘기 나오겠구나 했거든요."

다른 교수들도 휙휙 최이삭의 졸업 논문을 아래위로 한 번 더 보며 말했다. 원래 용케 버텨도 졸업 직전에 나가는 것들이 엄청 많다. 그러다가 다른 얘기도 나왔다.

"치엔 박사 졸업 논문 준비하는 거 얼핏 봤는데 괜찮던데요? 중성자별 축퇴압 공식을 이용한 중력 마법 안정화 연구."

“난 처음에 걔가 그거 한다 그랬을 때 엄청 쓸데없는 거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거 해봤자 어차피 인공지능 또 써야 할 거 아냐?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 아니, 꽤 괜찮던데? 시뮬레이션 돌려보니까 중력 연구소 사고 확률이 잘하면 90%나 준대.”

“오.”

캘리 박의 설명에 다른 교수들도 감탄사를 냈다. 캘리 박이 이어 말했다.

"민 교수가 하는 말이 중력 마법이 불안정해서 마도물리학자들이 다른 마도사들에 비해서 드레이닝 발병률이 높은 거라던데. 그거면 꽤 해결이 되는 거 아니냐?"

"그러면 치엔 박사가 정말 큰일하는 건데요. 생각해보면 재작년에 죽은 김 교수도 중력 마법 시현을 너무 많이 했었죠…."

"민 교수팀이 조만간에 우리 학회원 전수 조사 갈 거야. 연락 오면 제깍 받고. 공문도 보낼 테니까."

"음, 네. 아, 이거…. 이거 때문에 0점 주셨어요?”

최이삭의 논문을 한 번 더 보던 교수 하나가 세현에게 페이지 하나를 보여주며 묻자 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박사, 평소엔 꼼꼼한데 이상한 데서 가끔 이런단 말이야…. 말해줘야겠다."

“말해주지 마세요. 이것도 지가 하나 못 찾는데 무슨 교수를 하겠다고.”

그 사이 다른 교수가 캘리 박에게 물었다.

"왕 교수가 이번에 받았다는 그 석사생은 뭡니까? 학교도 안 나왔는데 독학으로 중력 마법 쓴다면서요? 학과장님 요새 북경대 정말 많이 밀어 주시네요. 진짜 퀸 교수 병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아, 이놈의 병 때문에 다들 나 너무 핫바지로 보는 거 아닙니까?"

세현이 발끈했다. 캘리 박은 여상하게 말했다.

"그런 문제라기 보단 성격 문제야. 그 새끼 좀 또라이거든. 지금 와서 보니까 지도 교수랑 학생의 합도 무시 못하는 거더라. 머리는 제법 돌아가는 것 같긴 한데, 퀸 교수가 하는 것처럼 방치하기에는 좀 쎄하다."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대요?”

"뭐 이것저것 한 것 같은데. 독학으로 고질량점 중력 마법이랑 중력 증폭까지는 할 줄 알고, 응용법도 다양하게 터득하고, 마도의사 자격증에다가 마도사병으로 용병짓까지 했던 놈이다."

"예? 뭐 하는 놈입니까, 그거?"

"TFC에서 구르고 있던 거 건져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좀 의문이긴 한데 그래도 내버려둘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리밍이한테 맡긴 거야."

이건 그냥 짐을 맡긴 것인가? 진짜 학회장님은 퀸 교수만 미시네. 하긴 퀸 교수가 보통 천재도 아니고. 왕 교수가 콤플렉스 느낄 만하다. 자식 중에 제일 잘난 자식만 밀고 짐덩이는 제일 정 안 가는 자식한테 주는 것이다.

“그나저나 최 박사 어쩐대요?”

그래도 드레이닝 때문에 오늘내일 하니 줄 거면 그냥 지금 주는 게 깔끔하긴 할 텐데, 이대로 가면 최 박사는 완전히 이쪽에서 인생 꼬이게 되는 것이다. 세현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게 걔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그냥 공부 접는 게 맞아요. 지금 그걸로는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걔한테 내 졸업장 못 줘요.”

“디아나는 그냥 줬잖아요?”

“뭐, 엄청 마음에 들진 않았어도 걔 논문 봤을 땐 이렇게 짜증나지는 않았거든요?”

“맞아요. 나쁘진 않았죠. 그 짜증나는 마음 뭔지는 압니다.”

다른 교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 최이삭이 할 수 있는 건 세현의 보다 긴 장수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는 누구도 구해줄 수 없는 남자가 아니라 바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해야 하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날도 저물고 멘탈이 완전히 나간 최이삭은 종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나 보다. 세현은 그 꼴을 보고 한 번 픽 웃고는 퇴근했다.

세현의 자택은 메트로서울에서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집의 남쪽으로 넓은 강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저택의 뒤에는 산이 위치하고 있었다. 아침에 강 위로 해가 뜨고 산 너머로 지는 것을 아무런 방해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정원의 끝은 강으로 이어지는 절벽이었고 거기엔 덱과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경치를 즐기기엔 그만이었다. 가끔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12월도 막판이다. 살을 에이는 듯 추운 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세현은 부엌으로 갔다가 아담이 뭔가를 하고 있자 그렇게 물었다. 경호원이나 기타 등등은 다들 정해진 위치가 있었다. 어차피 태반이 소드마스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도 크게 문제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현은 강제로 병원에 갇혀 온갖 사람들이 그녀를 마구 다뤘던 것에 진력이 났다. 드디어 되찾은 개인적인 시간에 타인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집에서 말이다.

“항상 도시락만 드셔서…. 직접 한 음식을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아담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참고로 그 도시락이라는 것도 학회에서 시작한 회원들 건강 관리 프로그램 중 하나로 그걸 먹기 전에는 식생활이 더 안 좋았다. 세현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부엌에 연결된 아일랜드 식탁에 일단 앉았다. 아담은 따뜻하게 데운 접시에 겹겹이 쌓인 스테이크와 그 옆에 있는 바닷가재, 가니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상큼한 샐러드와 빵, 약한 도수의 와인도 있었다.

“넌?”

세현은 식기를 들며 물었다. 아담이 약간 놀랐지만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같이 먹어도 되나요?”

그는 세현의 반대편에 자신의 음식도 접시에 담아놓고 앉았다. 잠깐 음식을 먹다가 아담은 18도짜리 레드 와인을 마시면서 상당히 밍밍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이랑 이런 식사를 하는 건 두 번째네요.”

아담이 말했다. 세현이 대꾸했다.

“그런가.”

세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담은 그녀가 그날 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담이 물었다.

“음식은 입맛에 맞나요?”

“응, 맛있어.”

“요즘 잠을 잘못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전 여기서도 당신의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느껴지거든요. 15미터쯤은 문제없습니다.”

“그래? 신기하네.”

세현은 그렇게 말하고 와인을 한 잔 마셨다. 사실 이렇게 길게 대화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간 그녀와는 거의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아담은 거의 24시간 그녀의 가까이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거나 생각하거나 읽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의 자신의 학생이나 동료 교수뿐이었다. 그녀와 모든 언어가 통하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게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상인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그녀의 곁에서 항상 그녀를 바라보는데도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는 그 어린애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그들은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도 절대 닿을 수 없는, 이 막막함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얼마 안 가서 내내 누워 있을 텐데. 뭐 어때.”

세현은 그렇게 말했다. 아담은 미소를 띈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래도 매일 밤 잠들지 못하는 건 괴롭죠. 어떠십니까? 오늘밤은 저를 한 잔 마시고 주무시는 게?”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추파를 던지자 세현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웃어서 아담도 더 웃었다.

“쌓였어?”

“한 여자를 이렇게 오래 만난 건 처음입니다만 그래도 곁에 있으면서 절 수절하게 만든 여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당신은 그러게 만드네요.”

“인기 많을 거 같은데.”

“인기는 많죠. 그래도 저는 당신에게 더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래도 가끔 하잖아.”

“마지못해 한다는 식은 아무리 저라도 좀…. 조금은 분위기 잡을 수 있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이거야?”

“싫으신가요?”

“나쁘지 않아.”

아담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항상 까다로워서 좋습니다. 그게 가끔 우월감이 들게 해주거든요.”

“우월감을 잘 느끼는 사람들은 열등감도 잘 느끼는데.”

맞는 말일지도. 아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끔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인간다운 거죠.”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방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집은 모던 클래식 인테리어의 정석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그녀다우면서도 그녀가 전혀 집안 인테리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걸 이렇게 꼼꼼하게 따질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프진 않나요?”

아담은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배를 만졌다. 세현이 대답했다.

“아프진 않아. 피로감이 좀 심하긴 했는데 그것도 민 교수가 만들어준 패치 덕분에 훨씬 나은 상태야.”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로 서서히 그녀의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배에 쪽 입을 맞췄다. 약간 간지러워서 세현이 웃었다.

“간지러워.”

아담은 그녀의 웃음에 약간 가슴이 찌릿한 걸 느꼈다. 입가의 미소가 약간 가시고 그녀에게 뭔가 위로가 될 말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결국 그녀의 마음에 닿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빨리 저를 한 잔 마시고 주무시는 게 좋겠군요.”

“가끔 말하는 게 너무 야하다니까.”

“그래서 좋은 거 아닙니까?”

그녀와의 관계가 씁쓸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건 그녀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분명히 지금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이고 그는 누구보다도 그녀의 가까이에 있는데도, 그때 그 생각을 했을 때보다 더 씁쓸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왜일까….’

그때의 자신이 틀렸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이? 아담은 잘 알 수 없었다. 우습다. 서른이 됐을 즈음부턴 스스로가 제법 어른이 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여움도 부끄러움도 없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고 되는 데까지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전혀 충분하지 않아….’

전혀.

*

새해가 밝았다.

“…….”

“…….”

“…….”

세현 퀸, 캘리 박, 엘리야 민이 세현의 자택에 모여 있었다. 엘리야 민이 휴대용 간이 스캔기로 세현의 드레이닝 홀을 다시 스캔해보았다. 아까의 결과와 비슷했다. 드디어 마력 소진량이 시간당 1,000만 BP를 돌파했다. 홀의 진동도 심했다. 이러다 균형이 깨지면 끝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삽시간에 마력이 빠져나가는 양이 늘어날 것이고 시간당 1억 BP를 돌파하면 사실상 현행 의학 수준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빠져나가는 것만큼 마력을 보충할 수 없다. 즉,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뒤푸르 박사의 연구는 아직 진행중입니다. 분명히 홀을 닫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뒈지니까 문제지.”

캘리 박이 소파에 앉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얼마나 남은 거야?”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1,000만에서 1,100만 사이에서 보통 홀의 균형이 깨집니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시간당 1억 BP를 돌파해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 민이 말했다. 원래라면 겨울이 되면서 상당히 살이 쪄야 할 엘리야 민이 아직도 마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모양이었다. 세현 퀸이 말했다.

“그래도 오래 버텼네요. 발병하고 1년….”

결국 아칸소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엘리야 민은 차후 계획에 대하여 말했다.

“퀸 교수의 마력이 전부 빠져나가면 한 번 뒤푸르 박사의 연구 결과를 실험해볼 생각입니다. 실패 원인은 몸에 남아 있는 마력의 양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망하고 실험해본 케이스는?”

“아직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원한 마도사는 전부 사망해서 실험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새로 발병한 환자는?”

“아직까지는….”

드레이닝이 발병하고 나면 원래 한 달 안에 사망한다. 전세계 마도사 수와 드레이닝 발병률을 고려할 때 <세이브 퀸 프로젝트>는 전세계 모든 드레이닝 환자들을 다 이용하여 치료법을 찾아내는 데 매진했다. 몇 개월 동안 200명에 가까운 환자가 오고 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드레이닝 환자가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엘리야 민이 그렇게 캘리 박에게 고개를 숙이자 캘리 박이 잠깐 아무 말없이 세현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아니야. 벌써부터 그런 기운 빠지는 소리하지 마. 생각 있는 거잖아, 민 교수? 끝까지 해봐.”

캘리 박은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잠깐 친구인 민 교수의 얼굴을 봤다가 한숨을 작게 쉬었다. 그녀는 뭔가를 캘리 박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거요.”

“뭔데?”

종이 봉투였다. 열어봤더니 사직서였다.

“무작정 다음 학기 등록되는 것도 좀 그렇고. 교수님도 애들도 괜히 일 두세 번 할 거고.”

캘리 박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세현 퀸과 엘리야 민을 번갈아 쳐다보며 호통쳤다.

“이것들은 아직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어? 죽을 것만 생각하면 진짜 죽는 거야, 이 멍청이들아.”

“죄송합니다, 총장님.”

“그러니까 좋은 거 있으면 미리미리 나눠 먹읍시다.”

캘리 박은 탐탁치 못한 얼굴로 그녀의 사직서를 한 번 더 보고는 반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단 받는다. 너 나으면 언젠가 유용할 때가 있을 거 같다.”

“하하.”

그녀의 말에 세현이 웃었다.

“아니, 민 교수가 다 생각이 있다는데. 이래서 비전문가들은 닥치고 있어야 돼, 어? 니가 의사냐? 돌팔이 짓을 하려고 그래? 의사가 다 생각이 있다는데.”

캘리 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세현이 물었다.

“그리고 전에 말했던 건요?”

“그건 다음주로 잡아 두긴 했는데…. 야, 근데 그런 거 했다가 진짜로 너 나으면 전부 스쿱(Scoop) 당한다?”

“미리 내 생각이라고 말해뒀으니까 스쿱이라고 하기도 그렇죠? 다 내 아이디언데. 선배들이 해도 다 내 업적이 되는 겁니다. 영상도 찍을 거잖아요. 빼도 박도 못하는 거죠.”

캘리 박이 한심하게 세현을 쳐다보다가 잠깐 갸웃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데?”

생각해보니까 캘리 박도 다 하던 짓이었다. 세현은 카우치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캘리 박은 안 그러는 척 엘리야 민을 압박하는 걸 구경했다. 세현의 사후 조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 것이다.

드레이닝이 발병했을 때는 앞으로 남은 시간이 너무나 없다는 생각에, 캘리 박의 말에 휘둘려 소드마스터나 꼬시러 다녔다. 처음엔 부정도 했고 분노도 했다. 그래도 이제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을 만한 건 다 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천천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묘하게 처음보다는 마음이 차분했다. 그래도 불안하긴 한지 밤마다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세현은 일주일 동안 전자화 한 자신의 연구 노트를 한참 검색하며 캘리 박과 다른 교수들과 나눌 이야기거리를 정리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 예상하는 것, 상상하는 것, 그 모두를 그들과 나눌 생각이었다.

연구노트뿐만 아니라 예전에 썼던 책들, 읽었던 책들까지 찾으며 보내니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진작에 한 번 해볼 걸 그랬다 싶을 정도로 제법 즐거운 작업이었다. 언제나 주변이 시끄러웠다. 드레이닝에 걸리고 나서부턴, 아니, 그녀가 본격적으로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걸 때부터. 거의 10년, 아니, 20년만이다. 이렇게 조용히, 스스로를 느끼며,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색에 잠긴 것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읽었을 법한 우주에 대한 그림책을 찾아냈다. 어릴 적 방에 두었던 태양계 모형도 있었다. 보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책 더미 사이에 누워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다. 우주에 대한 그림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물론 그때와 다르게, 이제는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상세하고 또렷한 그림을 그리며 이럴까, 저럴까 궁금함을 표시해보았다. 급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캘리 박과 선배들과 영상 통화를 하며 녹화를 진행했다. 제법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캘리 박이나 선배들의 아이디어에 ‘어랏?’ 하고 제법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도 있어 좋았다. 동시에 혼자서 사색하던 것과 다르게 조금 분함도 들었다. 그들의 시간이 부러웠다.

[가끔 이런 것도 좋은데요? 서로 너무 숨기려고 하지 말고 간간히 모여서 이야기 좀 해보죠.]

필리페가 캘리 박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 중복되는 것도 피하고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이 분배되는 것 같은 느낌도 조금 들었기 때문이다. 이예프가 말했다.

[그것까진 모르겠고 죽을 즈음에 이런 거 다 터놓고 가는 건 좋은 것 같다. 나도 나중에 하지.]

세현만 보면 개년이 어쩌고 저쩌고 욕만 하던 이예프였으나 그래도 그녀가 죽을 때가 되니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의 물리 계측기는 수에즈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뭐, 돈 주고도 못 살 세현 퀸의 통찰력을 얻어 갔지 않은가. 그들은 제각각 전부 뛰어났고 전부 훌륭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누구도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으니.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사는 시간대도 전부 다른 교수 13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을 끝내고 나니 뭔가 할 걸 다 끝내긴 한 기분이라 후련섭섭했다. 그녀의 진정한 유산은 이것이었다.

‘집이나 재산은 학회에 기부하기로 했고….’

세현은 자신의 유언장을 떠올렸다. 집행자는 캘리 박이었다. 캘리 박은 세현과 함께 화상 통화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앉아 있던 게 제법 허리가 아픈지 기지개를 펴더니 거실의 커다란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저 노친네는 80이 돼도 나보다 건강하다니까.”

춥지도 않나 보다. 세현은 별로 뭘 걸치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는 캘리 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세현은 출출함을 느껴 부엌으로 갔다.

“노친네 뭐 안 드실래요?”

“너나 많이 먹어라.”

캘리 박은 그렇게 대답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눈 덮인 정원과 산과 강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숨을 쉬었다.

“춥지 않으십니까?”

아담이었다. 그는 캘리 박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세현은 마지막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했다. 결국 항상 주변을 머물던 레지던트와 경호원들도 전부 세현의 생활권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정원에 있는 임시 거처에 머물렀다. 경호원들은 돌아가며 세현의 눈에 띄지 않게 순찰을 돌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지만 아담은 세현을 만날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게 그녀의 선택이라면….’

당연히 존중해야 마땅할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날 건 알고 있었지 않은가. 아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캘리 박은 눈 덮인 세상을 보며 입을 열었다.

“퀸 교수가 내 자리를 물려받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

“네?”

아담은 캘리 박의 뜬금없는 말에 그렇게 되물었다. 캘리 박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내 제자들 중엔 전반적으로 퀸 교수가 뛰어나고 머리도 좋고 생각도 기발한 편이고 어려서 가능성이 가장 많다고 생각하지만, 내 자리는 뛰어난 학자에게 허락되는 자리가 아니야. 미래를 보면서 동시에 사람도 볼 수 있는 사람이 앉아야 해.”

“…….”

아담은 이게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지만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람을 보는 건 필리페나 뭐, 왕 교수도 괜찮지만 필리페는 모질지 못하고 왕 교수는 한치 앞 밖에 못 보지. 이예프 소장은 강한 만큼 독단적이고 루소는 인망을 얻기 힘든 캐릭터고. 세현이는 사람도 세상도 볼 줄 알지만 그래도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라…. 그래서 그나마 제일 낫다고 생각했는데.”

아담은 최이삭이나 치엔위가 인질이 되었을 때 보인 세현 퀸과 왕리밍의 반응을 기억했다. 헤더 블레어 교수가 드레이닝으로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 영상에서 캘리 박이 지금의 그녀와는 전혀 달라 보일 정도로 어둡고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도 기억났다.

세현 퀸은 캘리 박이 평생 이룬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언젠가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후계자, 언젠가 자신의 모든 걸 물려줄 수 있는 딸. 세현의 비극은 그녀의 비극이기도 했다. 캘리 박에게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가장 뛰어난 제자를 잃는 상실감은 가장 뛰어난 자식을 잃는 상실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학회일도 전혀 관심 없이 살더니 사우디 일로 느낀 바가 많은지 좀 더 내가 하는 일을 배우려고도 했고, 이미 내가 일궈놓은 것이 있으니 이대로만 가면 충분하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는데…. 드레이닝만 아니라면.”

어쩌면 세현보다 그녀의 죽음에 여전히 실감이 들지 않는 것은 캘리 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현이야말로 오히려 처음부터 자신의 드레이닝은 딱 잘라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려고 했다.

“내 꿈…, 우리의 꿈은 이로써 몇 십 년 더 늦춰질지도 모르겠군.”

캘리 박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곧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마, 그녀도 그에게 무언가 답을 바란 것이 아닐 것이다.

*

다음날 세현은 잠깐 부모님에게 연락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보았다. 뭐, 이미 알긴 다 알 텐데. 관두기로 했다. 시간 아깝다.

“교수님!”

“응?”

세현은 부엌에서 고개를 빼고 현관 쪽을 보았다. 목소리는 익숙했다. 다만 이 목소리의 주인이 여기에 왜 있나 싶었을 뿐이다.

“너 여긴 어쩐 일이냐?”

최이삭이었다. 밖이 꽤 추운 모양이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차 타고 안 왔어? 세현은 기어코 마지막까지 최이삭에게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세현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최이삭의 전에 세현이 가장 오래 데리고 있었던 디아나 리라는 학생은 세현이 논문 심사에 불참한 채로 졸업하자 그 뒤로 단 한 번도 세현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최이삭은 결국 졸업장을 받지도 못하고, 아니, 앞으로도 영영 세현에게서 졸업장을 받을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 아마 세현이라면 지도 교수를 찾아오기는커녕 우연이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교수님이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교수님의 곁에 마지막까지 있고 싶습니다. 졸업장은 못 받더라도 전…, 전….”

최이삭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굉장히 추워 보였다. 그의 속눈썹에 서리가 껴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전 교수님 제자잖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흑, 너무해요, 교수님. 맞아도 안 갈 거예요. 아무리 혼내셔도 안 갈 거예요.”

“…….”

잠깐 얼이 빠져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하, 참, 하고 기가 막히다는 소리를 내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니 겁이 나긴 하는지 그가 움찔했다. 눈물을 재빨리 닦으며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줄줄 나왔다.

“교수님….”

“야…, 내가 아무리 널 많이 혼냈어도 이 상황에 널 때리겠냐.”

손을 들어올리니 그가 심하게 움찔하자 세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세현이 양손으로 최이삭의 뺨을 감싸고 눈물을 닦았다. 뺨이 엄청 차가웠다.

“아니, 밖에 뭐가 있다고 밖에 서 있었어? 그냥 들어오지.”

세현이 그렇게 말하자 최이삭의 눈에 급속도로 눈물이 차오르더니 눈물을 마구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안 된다고 하실 줄 알고….”

“애들은 잘 있어?”

“네…. 흑, 다들 교수님 뵙고 싶어 하는데…. 흑. 흐엉. 흡. 흑….”

“너 설마 애들 앞에서도 이렇게 우냐….”

“아, 아뇨…! 흑, 아니요. 저 절대 다른 사람들 앞에선 안 우는데요. 교수님 앞에서만 자꾸…. 흑. 흡…. 죄송합니다.”

최이삭은 자신의 뺨을 감싼 세현의 양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이 혼란과 슬픔으로 일렁거렸다.

“교수님이…, 교수님이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전 제 일만 잘하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다 된다고 하셨잖아요. 학과장님이나 민 교수님이 다 방법 찾아낸 거 아니었어요? 교수님 저번 주까지도 저 보고 공부나 하라고 하셨잖아요.”

세현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니들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좀….”

그녀가 그렇게 약간 망설이듯 말하자 최이삭은 더 펑펑 울기 시작했다.

“흑. 흐윽. 교수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저 다음 학기에 졸업장 주셔야죠. 저 포닥도 할 건데….”

최이삭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소리도 잘 내지 못하며 울었다. 세현은 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음…. 울지 마라. 너, 그, 우는 거 문제다. 어? 울지 마.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교수님…. 흐엉…. 흐어엉.”

그는 이 눈물이 다 어디서 나오나 싶을 정도로 울었다. 그는 세현을 껴안았다. 세현은 한숨을 쉬더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어? 울지 말라니까.”

“교수님….”

가장 실감이 안 나는 것은 바로 최이삭이었다. 세현 퀸, 캘리 박이나 엘리야 민은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그들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최이삭이었으나, 그의 전부나 다름없는 세현 퀸이 그에게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넌 지금까지처럼 시키는 거 잘하고 니 할 일만 잘하면 된다는 말에, 그녀가 드레이닝에 걸린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아니, 그때부터도 막연히 모든 게 다 잘 풀릴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현 퀸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도 항상 최이삭에게 그렇게 말하니 최이삭은 어느샌가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녀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졸업 논문을 다시 어떻게 써야 하나 이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연구실을 나오지 않고 학과장님의 책상 위에는 교수님의 사직서가 놓여 있었다.

“야…. 적당히 해라, 어?”

세현은 그가 너무 울자 그렇게 을렀지만 그는 살짝 휘청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우는지 벌써 탈수 증상이 온 것이다.

“뭐 하냐?”

마침 캘리 박이 세현의 집으로 들어왔다. 최이삭이 너무 울어서 벌겋게 튼 얼굴로 캘리 박을 돌아보며 더 울었다.

“학과장님, 너무해요. 우리 교수님 어떡해요. 우리 교수님 살려내요, 흑. 우리 교수님 살려내요!!”

그는 캘리 박에게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세현도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가 캘리 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최이삭을 쳐다보았다. 최이삭은 세현을 더 꽉 끌어안고 다시 엉엉 울었다. 세현은 그의 머리에 꿀밤을 하나 먹이고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 멍청아, 너 나중에 어쩌려고…. 그리고 나 아직 안 죽었어.”

“…….”

캘리 박은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가지고 왔다. 세현은 결국 큰소리를 내어 그를 떼어냈다.

“보자 보자 하니까!!”

“흑. 히끅. 죄송합니다….”

그는 딸꾹질을 하며 그녀에게 사죄했다. 캘리 박이 물을 한 잔 내밀자 그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학과장님….”

캘리 박은 평소처럼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녀의 주름진 손이 거칠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눌렀다.

“앉아라.”

그는 거실 카우치에 앉더니 물을 한 모금 정도 마시고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누르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계속 울었다. 충격이 꽤 심한 모양이었다.

“아, 화 안 내려고 했는데. 하여튼 간에.”

세현이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캘리 박이 피식 웃었다. 진정될 때까지 저건 그대로 좀 둬야겠다. 세현의 옷에 그의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 세현은 부엌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으로 다시 와 먹던 걸 깨작깨작 다시 먹기 시작했다. 캘리 박은 물을 한 잔 따라왔다.

“너도 알다시피 이예프는 내 첫번째 제자였지.”

“그렇죠?”

세현이 토마토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물론 내 학생이라고 왔다갔다한 년들은 그때도 수두룩했지만 제대로 내 졸업장 받고, 내 밑에서 포스트 닥터까지 다 밟고 교수 단 건 걔가 제일 처음이었어.”

“그렇겠죠?”

갑자기 이 할망구가 왜 옛날 얘기를 꺼내나, 죽을 때가 된 건 난데…, 라는 눈빛으로 세현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캘리 박은 물을 마셨다.

“이예프를 졸업시킬 때 난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그간 멍청하다, 싶은 애들이랑은 분명히 다르다 싶었지만 그래도 정말 못마땅했지. 마음에 안 찼어. 진짜 그렇게까지 마음에 안 찰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전에 멍청해서 그냥 마구 잘라버렸던 애들보다 심적으로는 더 마음에 안 들었어. 왜 그런지는 지금도 모르겠다만.”

“그랬어요? 아니, 그 정돈데 왜 졸업장을 줬대요?”

“걔가 내 졸업 조건을 그래도 다 채우긴 했거든. 내가 시키는 일도 어쨌든 다 해내긴 했고. 그런데도 진짜, 엄청 떨어뜨리고 싶었단 말이야? 그냥 너무 마음에 안 들었어. 내 제자랍시고 앞으로 내 이름 대고 살아갈 년인데 내가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고 내 졸업장을 줘야 하냐는 거지.”

캘리 박은 그때의 그 못마땅했던 기분이 생생하게 기억나서 딱 그런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캘리 박을 약간 괴팍하고 유쾌한 할머니 정도로 아는 모양이지만 그녀는 세계 각지에 HNU 물리학과의 무시무시한 학풍을 전파하고 몇 십 년 동안 내노라 하는 수많은 영재들을 좌절시킨 사람이었다. 나라 두 개 정도 멸망시킨 것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보다는, 이것보다 조금만 더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것보다 정말 조금만 더 잘했으면 이렇게까지 주기 싫단 생각은 안 했을 텐데, 라고 걔 얼굴을 볼 때마다 항상 생각했다. 진짜 졸업 직전까지 그냥 졸업장 안 주고 다 엎어버릴까도 했거든? 졸업장 주기 직전이라도 마음을 확실하게 먹으면 바로 졸업 취소해버릴 수 있게 내가 그때 HNU 학칙까지 바꿔버렸다니까.”

“뭘 그렇게까지…. 참, 노친네 성격 지랄맞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선배들이라고 전부 세현이 다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캘리 박의 졸업장을 받았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하는 것이라는 말이지만. 그래도 세리나 이예프는 세현도 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력 마법을 그 정도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캘리 박을 제외하곤 그 사람뿐일 것이다.

“아, 이예프 선배 성격 개같은 것도 다 노친네 때문이었네. 그 정도 했으면 그냥 줘도 되지. 그래도 이예프 선배는….”

욕 먹으면 장수한다는 말이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는 말이라면 세현은 올해 이예프한테 먹은 욕 덕분에 그나마 드레이닝에 걸리고도 이만큼이나 살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 캘리 박의 철저한 성과주의 교육 신조에 본인의 결벽증적일 정도의 엄격한 규율이 합쳐진 세리나 이예프의 연구실, 그리고 이제는 거대한 온살라 연구소까지 이어진 학풍은 캘리 박도 엄지를 들어줬을 정도였다. 거기 출신들은 책상 배치부터 글씨 모양, 걸음걸이까지 전부 똑같았다. 어떤 학회지는 <온살라 연구소>가 아니라 <온살라 절대왕국>이라고 오기한(아마도 의도적이었겠지) 적도 있었다.

“그래, 그렇지. 35년이나 지나서 보니 그렇더라고. 근데 아냐? 내가 내밀었던 그 최소한의 졸업조건이 가장 높았던 때가 바로 그때였어. 이예프만이 그걸 통과했다. 이예프가 통과해야 했던 허들을 들이밀었으면 너도 절대 시간 내에 충족 못했을 걸? 아니, 그때의 나였으면 너도 그냥 잘라버렸겠지, 한 박사 2년차나, 3년차 때. 넌 말도 안 들었으니까 더 빨리 잘랐을 것도 같다.”

“아니, 이 노친네가 왜 갑자기 시비야?”

세현이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캘리 박이 픽 웃었다.

“이예프, 카시마, 금성위, 세르게이, 필리페, 블레어, 카시아키, 보위….”

그녀는 자신의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았다.

“…루소, 리밍이, 너. 갈수록 허들은 낮아져 갔다. 이렇게 돌아보니 잘 모르겠더라. 허들이 높았던 게 좋았던 건지, 아닌 게 좋았던 건지. 중간에 떨어져 나간 애들 중에 너나 리밍이가 졸업할 즈음의 졸업 기준이라면 충분히 졸업할 수 있었던 애들도 5~6명 정도는 있었어. 그럼 걔들도 내 졸업장을 받고 계속 연구를 했다면, 그래도 죽은 애들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약한 소리는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캘리 박이었다. 그녀도 나이가 들어 약해진 것일까?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 비슷한 걸 하는 게? 아니면 반성일까, 앞으로 더 잘하기 위해? 세현은 캘리 박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교수님은 그냥 끝까지 자기 연구했어야 했어요. 정치고 나발이고 손대지 말고 교수님이 진짜 추구했던 걸 했어야 했다구요. 멈추지 말았어야 했어요. 지금이라도….”

세현은 그녀의 눈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연구실 차려요. 생각하세요. 상상하세요. 우리가, 우리 우주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힘은 무엇인지. 그 힘을 우리가 가질 방법은 무엇인지. 죽어 나자빠진 선배들이나 나에 대해 회한 같은 거 느낄 시간에 원래대로 진리를 추구하세요. 도대체 뭐가 이렇게 교수님을 겁쟁이로 만든 거죠? 왜 직접 해야 할 일을 제자들에게 미루고, 교수님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

“교수님이 해야 할 일은 언제나 하나뿐이었어요.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수많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은 건 그 선배들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교수님이었어요.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진 건 여전히 당신이라구요. 왜 그걸 교수님이 잊어버리고 있는 거죠? 10년이나!”

세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며 말을 이었다.

“전 그게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노친네가 자꾸 자신의 일을 미루고 뒷짐만 지고 서 있는 게.”

캘리 박은 새파랗게 어린 자신의 마지막 제자, 그리고 죽음을 앞둔 그녀의 말에 잠깐 몸이 굳었다. 그대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18년간 그녀가 걸어왔던 길, 그녀와의 대화가 ‘전부’ 머리 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캘리 박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더니 눈을 감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자신이 했던 일들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캘리 박 자신도 말이다. 기반을 다지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20개의 입자 물리연구소, 20개의 중력 연구소. 그런 것들이 캘리 박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이루어질 수 있는 역사였을까. 하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현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캘리 박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세현의 뺨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아마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현 퀸의 말에 캘리 박이 자신의 틀림을 인정하고 그녀의 옳음을 순순히 인정한 일이었다.

- 공금 by Jira

*

최이삭은 멀리서 캘리 박과 세현 퀸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었다. 캘리 박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거실로 나오다 최이삭과 눈이 딱 마주쳤다. 최이삭은 다시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캘리 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왜 날 보고 더 울어? 니 교수는 저기 있다.”

“…….”

세현은 무심하게 음식을 먹으며 자신의 스승과 제자를 돌아보았다. 최이삭은 세현의 존재를 끊임없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볼 면목이 없었다. 그는 카우치에 엎드려 눈을 크게 뜬 채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그는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었어.’

언젠가, 언젠가 그녀와 대등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아니, 언제까지고 대등한 존재는 결코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마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말에 가끔은 그녀가 귀를 기울일 정도는 되고 싶었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캘리 박에게 세현 퀸이 그렇듯, 세현 퀸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기대를 걸어도 좋을 만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아직은 부족하고 모자랄 지라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교수님 돌아가시면 나도 죽어버릴 거야. 나도 죽어버릴 거야.’

이제는 그럴 길이 영영 사라진 것이다. 이상을 보자마자, 자신은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절망과 좌절이 온몸을 삼켰다. 그는 종일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두 교수님 다 결국 짜증을 엄청 냈는데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현 퀸이 죽는 날 그도 죽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아, 꼴 보기 싫어. 귀찮아.”

세현이 수북이 쌓인 눈물 젖은 티슈와 아직도 울고 있는 최이삭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캘리 박은 일치감치 가버렸다. 세현 퀸이 드레이닝에 걸렸을 때도 농담이나 던지던 캘리 박이었다. 끊임없이 눈물 콧물 흘려대는 최이삭의 감성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통곡했다.

“눈물이 안 멈춰요…. 흑. 가슴이 너무 아파요, 교수님….”

최이삭이 세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두 눈이 완전 붕어같이 부풀어 있었다. 더 꼴 보기 싫었다. 세현은 자신이 다가가자 바로 엉겨 붙는 그를 보며 짜증이 팍 나서 그의 머리를 한 대 때리려고 하다가 관두었다.

“야…, 너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어? 뚝 안 그쳐? 어?”

최이삭은 당장이라도 세현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 그녀의 배에 옆얼굴을 댄 채 눈을 크게 뜬 채 숨이 꺾여 쌕쌕거리면서 대꾸했다.

“교수님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교수님이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드레이닝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했잖아.”

“민 교수님도 계속 뭔가 될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학과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잖아요. 전 제 할 일만 하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니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세현이 그렇게 말하자 최이삭은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눈을 감으며 눈물을 흘렸다.

“흑….”

세현은 최이삭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말했다.

“넌 이게 문제야.”

“…네…?”

최이삭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어 세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현은 아주 못마땅하고 탐탁치 않은 얼굴로 붕어가 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혹시나 어디 예쁜 구석이라도 없을까 새빨갛게 튼 그의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넌 뭘 하나를 해도 내 마음에 들까, 안 들까만 너무 생각하다가 일을 그르친다고. 아니, 내 눈치를 보면 뭐 하냐? 눈치는 엄청 보면서 도리어 거꾸로 가. 도대체 넌 왜 그러는 거냐? 어? 왜 눈치는 그렇게 보면서 제일 혼날 짓만 골라서 해. 진짜 바보라서 그런 거냐, 아니면 그냥 혼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좀만 혼내도 울고 짜고, 좀만 칭찬해도 금방 들떠서 실수하고. 너 같으면 너 같은 학생을 어떻게 하겠냐? 어?”

세현의 말에 최이삭이 멍청함과 억울함을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현재로선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세현은 한숨을 쉬며 그의 뜨거운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을 내려다보며 세현이 말을 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어. 혼자서 해나가야 돼. 공부 열심히 해. 포기만 안 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지금 니 얼굴을 보니까 다시 생각해보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되니까 나도 너 데리고 있었던 거야.”

최이삭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그녀의 배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싫어요….”

“뭐라고?”

세현이 ‘이 새끼가?’ 라는 눈으로 그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이게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나…. 최이삭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 의미 없어요….”

“…….”

세현은 잠깐 말을 잃었다가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결국 세현은 그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쾅 내리찍었다.

“야 이 멍청아, 그럼 따라 죽기라도 하게? 어?”

“…….”

최이삭은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세현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떼어냈다. 세현은 그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눈을 피하니 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정신 안 차려? 눈 똑바로 안 떠?”

최이삭은 겨우 그녀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너 따라 죽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냐? 노친네가 뭐라고 하겠냐? 어?”

“…….”

“명운도 없는 년이 제자운도 없다고 하겠지! 너 돌았냐? 니가 뭔데 내 이름에 먹칠할 생각을 해?”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진짜 똑바로 할 자신 없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누가 나처럼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하면 앞으로 제대로 못할 거 같아? 그럼 나 죽고 따라 죽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당장 죽어.”

“…….”

“지금 당장 자살해.”

“흑….”

“너 앞으로 똑바로 못할 거 같으면 그냥 지금 죽어. 씨발,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도 안 될 것 같은데 이 정도 정신머리로 니가 뭘 하겠다고…. 그런 게 내 이름 앞에 대면서 살게 놔둘 거 같아? 아니, 내 이름 대면서 따라 죽는 거라도 허락할 거 같아? 넌 자의식 과잉이야. 니가 나한테 뭐라도 되는 것 같아? 고작 그 정도나 하면서? 어?”

최이삭은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세현은 그의 턱을 강하게 흔들며 다시 똑바로 자신을 보게 했다. 그녀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 그에게 퍼부었다.

“널 내 연구실에 받은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다. 고작 이런 걸 내가 6년 넘게 거둬 먹이고 가르쳤다고?! 시간 낭비도 이런 시간 낭비가 없다. 고작 남들 흉내나 조금 낼 줄 아는 걸로 지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 걸, 멍청해 빠져가지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이제 와서 뭐? 니가 제정신이 박힌 새끼면 죽을 병 걸린 스승 앞에서 앞으로 더 똑바로 공부하고 열심히 연구해서 교수님의 이름을 영원히 영광되게 만들겠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최이삭은 뺨을 한 대 더 맞았다. 그의 뺨이 퉁퉁 부었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맹세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님의 이름에 누가 안 되도록 평생 최선을 다해서…. 제 모든 걸 바쳐서….”

“왜 맞아야 말귀를 알아들어.”

세현은 그를 떼어냈다. 최이삭은 숨을 가다듬으며 두 손으로 눈을 마구 닦아냈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제 정신 차렸습니다.”

“쯧.”

세현은 혀를 한 번 찼다. 그녀는 또 그의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옷을 보며 침실로 걸어갔다. 그러며 최이삭에게 말했다.

“아무 데서나 자.”

“…….”

최이삭은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연신 닦으며 계속해서 세현의 말을 되뇌었다.

‘교수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녀가 아무리 그를 못마땅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실수에 오점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쓸모없고 멍청하고 꼭 혼날 짓만 골라서 하는 버러지더라도, 고작 남들 따라할 줄 아는 걸로 뭐라도 되는 줄 아는 자의식 과잉이더라도, 시간낭비에, 눈치는 엄청 보면서 오히려 더 그녀가 화날 짓만 골라 하는 바보에, 겁은 많고 소심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에,

‘졸업장도 결국 못 받고, 결국 평생 교수님한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는 영영 놓치고 말았지만….’

그는 이미 세현 퀸의 이름을 받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행실은 모두 그가 책임지는 일이 아니라 세현 퀸의 이름이 책임지는 일이 되었다. 최이삭이 세현 퀸의 랩장이 되어 이미 몇 년이나 버틴 이상 그의 모든 것은 이미 그 이름을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이미 최이삭이라는 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세현 퀸의 제자였고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남자였다.

“교수님….”

그는 세현 퀸의 연구실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인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인정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곧장 따라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인정은커녕 힐책만 받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서야, 지금이 되어서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일지라도, 그녀조차 부정할지라도, 평가받고 힐책 받을 수 있는 것조차도 결국 그녀의 인정이었던 것이다.

최이삭은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침실로 뛰어들어갔다.

“교수님!”

그녀는 곧 잘 생각이었는지 실크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뛰어들어온 최이삭을 보며 약간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 윽.”

그는 그대로 달려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저…! 정말로 최선을 다 할게요. 목숨 바쳐서 할게요. 최고가 되겠습니다. 교수님을 위해서…!”

“난 니가 싫어. 윽, 안 떨어져?!”

“존경합니다, 교수님. 사랑합니다, 교수님!”

그는 얼굴을 떼고 세현의 얼굴을 열렬히 바라보며 그렇게 외쳤다. 아까까지는 세상 끝난 듯이 울던 놈이 지금은 눈이 반짝반짝 했다. 얘는 참 질리는 구석이 있다…. 세현은 하, 하고 한숨을 쉬더니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붕어 얼굴이 된 최이삭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 뭐든 열심히 해라.”

“네, 교수님! 사랑합니다, 교수님!”

“그래, 그래. 이제 나가.”

“교수님!!”

“윽! 나가!!”

*

마력 소진량은 시간당 1,100만 BP까지 점차 치솟고 있었다. 그간 했던 조치들이 영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닌지 진작에 무너졌어야 할 드레이닝 홀의 안정성이 아직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없는데 아직 며칠 남은 모양이다. 기묘한 평온과 지루함이 흘렀다.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건 이런 느낌인 것이다. 집 거실에는 온갖 꽃과 선물, 편지 같은 게 가득했다. 이놈의 위문품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분명히 집까지 들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집까지 온 것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낸 것이 아니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보낸 것이었다.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란 대체로 어떤 큰 단체의 대표라든가, 연구 기관의 장이기도 했고 라이벌이거나 동지이기도 한 사람들이었다. 세현은 그 중에 눈에 띄는 화려한 꽃다발에 꽂힌 메모 하나를 꺼내 읽어보았다. 수려한 필기체로 쓴 글씨가 아름다웠다.

<언젠간 또 만날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러면 당신에게 다시 내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G. J. Romanov>

“응?”

10년…? 전인가 잠깐 만났던 남자였다. 별것도 없었다. 어디선가 처음 만나서 그가 줄창 쫓아다녔다. 아니, 한 번 하긴 했던가…. 이름은 가명이다. 처음 만날 때 그가 내밀었던 이름이었다. 나중에 보니 무슨 왕자였지…. 엄청 잘생긴 남자라 학교에서까지 화제가 되었다. 하여튼, 엄청 뜬금없는 이름이다.

“참나, 죽을 때가 되니 별별 인간이 다 튀어나오네.”

세현은 그의 쪽지를 멀찍이서 한 번 더 보고는 그냥 테이블 위에 툭 놓았다. 다른 쪽지를 잠깐 보니 그건 그래도 좀 뜬금이 있었다.

<네가 나보다 먼저 가버린 후배들 중에 여덟 번째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유감이다.>

세리나 이예프가 보낸 쪽지가 있었다.

“이런 걸 보내는 성격이었나….”

세리나 이예프 걸 발견하니 다른 선배들도 보냈을까 싶어서 약간 더 뒤져보았다. 세실 필리페 것도 있었다.

<후배가 먼저 가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구나. 교수님도 그러시겠지. 네가 걸어갈 길을 언제나 기대했다. 너는 훌륭한 학자였다. 우리는 네 유지를 이어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알라나 루소의 것은 어차피 없을 줄 알았고 좀 더 쪽지를 찾아보니 심지어 왕리밍의 것도 있었다.

<너한테 지기만 하진 않을 거다>

그의 쪽지를 보고 세현은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자빠졌네.

“꼴에.”

세현은 그 쪽지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후회는 없었다. 아쉬움만이 있을 뿐. 그녀의 인생은 인간이 걸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여정이었다. 생과 사, 창조와 멸망을, 그 힘을 쫓는 길 위에서, 수많은 그녀의 전임자처럼 그녀도 이렇게 바톤을 넘겨주고 잠드는 것이다. 가슴 속에 오로지 한 가지 믿음만을 간직한 채.

‘우리는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 그 진리에. 우리는 우주의 증거이고, 언젠가 우주는 우리의 증거가 될 것이다.’

세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저녁이 되자 의료진들이 대거 집으로 찾아왔다.

“이건 여기다 설치하고…. 이건 왜 아직도 여기서 굴러다녀? 어?!”

엘리야 민은 레지던트 하나에게 화를 냈다. 그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현은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최이삭도 가만히 그녀의 옆에 앉아 같이 그걸 구경했다.

“잘 될까요?”

“모르지.”

“뭔가…, 학과장님이 요즘 이상하세요.”

“왜.”

“이게 잘 될 거라고 완전히 확신하는 것 같으신데….”

“그거 민 교수 쪼려고 그러는 거야.”

“그런 거겠죠? 그래도 좀…, 뭔가 무서워서….”

최이삭이 민 교수에게 시선을 두면서 세현에게 아주 작게 속닥거렸다. 세현도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 민을 보면서 대꾸했다.

“솔직히 나도 민 교수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하겠다…. 니가 노친네 무서운 걸 아직 잘 모르는데, 그 할망구 오늘 오냐오냐 해도 내일 자기 손으로 그 새끼 죽여도 눈 하나 깜빡 안 하시는 양반이다. 민 교수는 그래도 잠깐 노친네 연구실에서 나랑 같이 공부했으니까 망정이지…. 넌 어떨 거 같냐, 어? 너 완전 끈 떨어진 연이야, 이제.”

“그래도 열심히 할 겁니다. 전 교수님 제자니까요!”

최이삭이 진지한 목소리로 세현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뭔가 세현이 생각한 것과는 약간 다르긴 한데…. 뭐, 이렇게라도 더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면 된 것이겠지. 세현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똑바로 해라.”

“네!”

그는 크게 대답했다. 그래도 약간은 믿음직스러워진 건가? 예전처럼 바들거리진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사람들의 분주함을 권태롭게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분주함과는 다른 소란이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게….”

경호 팀장이 난처한 얼굴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세현은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온전히 보내고 싶었다.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그것을 설명하기도 싫었다. 나의 죽음을 왜 다른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끝내야 하는가? 그래서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껄끄러운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끝냈다.

<앞으로 보기 힘들 거다. 지금까지 수고했다.>

제수스는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별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그녀의 병이 완전히 나은 거라면 분명히 누구라도 말해줬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대뜸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더라도 분명히 그녀가 나았다는 것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 검색이라도 하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그녀의 병은 죽을 병이라고 했다. 그럼 이 말은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뜻일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제수스라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고 있다고 말했으면서.’

제수스는 그녀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어찌할 수도 없는 슬픔이 심장으로 닥쳐 그렇게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다가 흠칫했다.

‘설마 벌써….’

순간 오금이 저렸다. 제수스는 얼른 디바이스로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야, 넌 세현이 집 어디 있는지 알지? 어디야? 빨리 말해! 세현이 아직 괜찮은 거지? 그렇지?”

[제수스 씨…. 교수님께서 별 말씀 없으셨나요?]

“방금 메시지 하나 왔어! 귀찮게…, 윽, 귀찮게 하려는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제수스는 말을 더듬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수스는 이미 세현이 자신을 만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줄 생각이라면 메시지가 아니라, 적어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해줬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녀석한테 전화했다. 마음은 다급한데도 도저히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그를 설득할 만한 언변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제수스가 애끓는 숨을 내뱉으며 한 마디 말했다.

“제발….”

[…주소 보내드릴게요. 조금이라면 아마 괜찮을 거예요.]

최이삭은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짜?!”

[네. 지금 보냈어요.]

그는 화면에서 귀를 떼고 얼른 주소를 확인했다. 그는 얼른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엘 드라카가 막 끝난 참이었다. 새해까지 떠들썩했다. 그가 만나고 싶다고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필요할 때면 그를 불렀다. 그녀는 언제나 괜찮아 보였다. 그러면 어쨌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는 주차장이 있는 층에 내리자마자 얼른 뛰었다. 그리고 주소대로 전속력을 다해 차를 몰았다. 차는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미 새카만 한밤중이다. 제수스는 과속을 하기 위해서 자율주행을 끄고 운전하고 있었다. 운전석의 창문을 열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려서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왼쪽 팔꿈치를 창틀에 올린 채 어느새 손톱을 잘근잘근 물고 있었다.

커다란 강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 약간 좁아진 도로를 달리니 어떤 커다란 저택 앞에 차가 섰다. 긴장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기척이 하나하나 다 느껴졌다. 예민해져 있었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둘이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여기로 오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뒤의 한 명은 인이어로 안에 보고를 하고 있었다. 제수스는 아차, 하고는 말했다.

“아니, 저기…. 세현…, 세현 퀸 교수 좀 만나려고….”

“지금 교수님은 뵐 수 없으십니다. 사전에 연락을 하시고 다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자, 잠깐만.”

제수스는 자신의 디바이스를 보았다. 그리고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만 계속 갈 뿐 받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살살 밀어내기 시작했다.

“연락하시고 다시 오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잠깐만….”

제수스는 돌아가는 척하다가 그들 사이를 빠르게 돌파하여 훌쩍 대문을 넘어버렸다.

“잡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 누가 그녀인지 찾기 힘들었다. 지금은 너무 과민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호원들이 죄다 소드마스터였다. 금방 잡혔다. 그녀의 집에서 마구잡이로 날뛸 수도 없었을 뿐더러, 누차 말했듯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다.

“아니, 윽! 그냥 잠깐 만나서…! 인사만 하면 갈 거라고!”

제수스는 땅에 처박혀 등 뒤로 양손이 결박당하고 발도 묶이고 있었다.

“인사만 한다니까…!”

제수스는 몸부림 쳤다. 그러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도 큰 소리가 났다. 응? 제수스는 겨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켜! 나 갈 거야! 씨발, 안 비키면 다 죽여 버릴 거라고!”

알렉스가 정문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인질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골프공만한 황금색 공이 둥둥 떠 있었다. 저건 쉴드로도 못 막는 거다. 인질로 잡힌 놈은 머리 주변으로 세 개나 떠 있었다. 알렉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억울하고 서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

제수스는 웃기게도 그 순간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그 무심하고 잔인한 메시지를 받은 게 자기뿐인 건 아닌가 보다. 그때 아는 얼굴이 왔다. 아담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잠깐, 잠깐만. 총은 좀 내리고….”

그는 다른 경호원의 총신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제수스는 고개를 간신히 더 돌려 아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알렉스도 연신 눈물을 닦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

“흑….”

“…일단 그 남자는 놔라, 어?”

알렉스는 천천히 오라를 사라지게 하고 인질을 풀어주었다. 아담은 둘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말을 약간 골랐다가 인이어의 버튼을 눌렀다.

“저…, 알렉스랑 제수스가 왔는데…. 그, 저랑 같이 퀸 교수님… 모셨던….”

알렉스는 아담에게 걸어왔다. 아담은 한 손으로 그에게 멈추라고 사인했다. 아담은 제수스를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손짓했다. 그들은 제수스를 풀어주었다.

“그냥 잠깐 인사 정도만이라도….”

저쪽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드마스터 대비용 인이어라 상대쪽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담이 살짝 둘의 눈치를 봤다. 제수스는 고개를 숙였다.

“귀찮게 할 생각 없는데…. 그냥 마지막으로… 인사 정도만….”

알렉스는 바로 아담의 인이어를 뺐었다.

“야…!”

“교수님! 교수님! 교수님 바꿔!! 썅! 교수님 못 만나게 해주면 이 새끼들 다 죽이고 나도 여기서 죽어버릴 거야! 그냥 지금 여기서 죽어버릴 거라고! 교수님! 흑! 교수님…!!!”

그는 저택을 향해 소리쳤다. 그는 완전히 눈물 콧물 쏟으며 엉엉 울었다.

“나 진짜 여기서 죽어버릴 거야!! 그딴 메시지를 왜 보내!!! 짜증나!! 나 책임지기로 해놓고!! 책임질 만한 짓을 했으면 책임져야 할 거 아냐!!! 거짓말쟁이!!!”

그는 인이어를 귀에서 빼고 상대편이 괴로울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그때 인이어가 작게 진동했다. 아담은 그에게서 인이어를 다시 빼앗아 귀에 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잠깐 들어오래.”

그는 인이어 너머의 경호 팀장에게 간단하게 대답한 후 알렉스와 제수스에게 말했다. 제수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흑…. 흐엉. 흑. 으윽.”

아담과 제수스는 잠깐 말없이 여전히 눈물 콧물 다 쏟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도 그들의 눈빛을 느꼈는지 까칠하게 소리쳤다.

“뭐! 왜!! 뭘 봐, 씨발…! 난 어떻게든 세현 교수님 만날 거야!!”

“…….”

“…….”

집으로 들어가니 세현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의사들도 많았고…. 그들은 전부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긴 방금 알렉스가 그 난리를 쳤으니 다 들었을 것이다. 알렉스와 제수스는 초조하게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그녀가 걸어오자 제각각 반응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녀에게 치근대던 제수스는 망설였고 알렉스는 평소처럼 얼른 달려갔다. 밖에선 죽어버리겠다, 배째겠다 난리를 치더니 지금은 그런 것 없이 바로 다시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껴안았다.

“교수님…, 흑. 아니죠? 아니죠?”

“아…. 내가 그 문자 안 보낼까 했는데.”

세현은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의 등을 마지못해 껴안았다.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떼고 세현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러면 마치 그녀가 낫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거짓말이라고 해요, 네? 거짓말이죠?”

“일단…, 민 교수가 생각이 있긴 한데…. 어쨌든 지금까지 계속 실패했던 방법이라 몰라. 이런 설명하기 귀찮아서 안 부른 거라고.”

“흑…. 그럼…, 그럼 언제 불렀을 건데? 그럼 언제 불렀을 건데! 그러다 나도 없는 데서 교수님 죽으면…! 흐윽. 죽지 마요. 교수님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하아.”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최이삭이 이런 애 수준이었단 말인가. 그래도 이것보단 수준이 나와야지…. 최이삭은 세현과 눈이 마주치곤 약간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일단 이리 와.”

세현은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제수스를 보더니 약간 탐탁치는 않은 태도였지만, 고개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제수스는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나 진짜 교수님 죽으면 따라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죽지 마요. 흐엉.”

세현의 침실로 가면서 알렉스는 계속 울었다. 세현은 그를 자신의 침대에 앉히며 쓰읍, 하고 소리를 냈다.

“그만 울어. 너 니 입으로 애 취급 말라면서 몇 번이나 말해놓고 이거냐, 지금? 어?”

“그치만….”

알렉스는 그녀의 말에 울음을 멈춰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두 손으로 일단 눈을 닦아 시야를 확보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라고 해줘요.”

세현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흐…, 흐윽….”

그는 세현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제수스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와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하아, 아직은 괜찮아. 얘 때문에 좀 성가시지만.”

알렉스는 전처럼 그녀에게 불평을 말하는 대신 그녀의 허리를 더 꽉 껴안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양쪽 눈을 번갈아 보다가, 잠깐 말을 고르다가 시선을 그녀의 뺨 쪽으로 내렸다.

“난… 성가시게…, 귀찮게 하려고 온 거 아냐. 그냥…, 언젠가 이런 날이 오면 꼭… 안녕이라고 인사만큼은… 하고 싶어서….”

“그랬어?”

그녀가 그렇게 되물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습관적인 반문이었겠지만, 제수스는 그게 정말로, 정말로 고작 안녕이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자신이 온 건지, 그걸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거 알아. 그래도…, 사랑해. 평생 못 잊을 거야.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평생 기억할 거야.”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녀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면서 제수스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주 살짝,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키스했다. 세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그가 입술을 떼니 다시 눈을 떴다. 제수스가 얼굴을 가까이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있어도 돼? 귀찮게 안 할게. 그냥…, 옆에 있고 싶어.”

제수스는 다시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간절하게 말했다. 조금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현은 뭔가, 역시나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제수스는 기뻤다. 정말이었다.

“고마워.”

이런 말도 처음 해봤다. 제수스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알렉스가 불쑥 말했다.

“나도 있을 거야.”

“하하.”

세현이 결국 웃었다. 이것들이 신파를 찍네.

‘정말로 죽는 거구나.’

세현은 문득 실감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도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오늘 하루 종일 사람들이 오가서 아주 산만했다. 막판에 쓸데없는 것들까지 튀어나오고. 세현은 일단 둘을 방에 두고 나왔다. 알렉스가 징징거리는 소리에 귀가 다 따가웠다. 밖으로 나오니 아담이 서 있었다. 그는 세현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앞을 비켜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깜짝 놀랐네요. 연락하셨나 보죠?”

“아니, 그래도 문자 정도는 해야지 싶어서 했는데…. 아, 저것들 역시 귀찮아.”

세현은 자신의 침실을 잠깐 돌아보며 그렇게 푸념했다. 아담은 그녀의 말에 잠깐 흠칫했다가 웃었다.

“귀찮다구요….”

그녀는 최이삭이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남자라고 했었다. 그러면 자신은 그나마 편리한 남자 정도는 될까? 그러면 좋은 것일까?

모든 것에 회의를 느꼈을 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조금 귀찮은 남자라 표현한 것만으로도 어쩐지 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도 전혀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지난 수 주를 돌이켜 보면, 이 몇 주만큼 아담 마이어란 남자가 자기 자신을 한심하고 바보같이 여겼던 적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이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쇠사슬에 묶이지도 않았는데도 여전히 묶여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가가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싫었다. 현재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싫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제일 싫어지게 되었다. 이런 감정이 싫었다. 그리고 이런 꼴사나운 자신을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은 더욱 싫었다. 어린애들처럼 저렇게 그녀를 귀찮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최이삭을 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최이삭이 다른 남자들보다 월등히 중요한 존재라고 해서 그녀에게 최이삭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그녀가 부담스럽지 않게, 언제나처럼 그녀가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럴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을 다쳤는데도.

“메시지라도 받지 못했으면 제수스는 몰라도 알렉스는 정말 따라 죽겠다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여튼 저 어린애.”

세현은 웃었다.

“원망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되는 거잖아? 쟤는 진짜 끼가 장난 아니라서 여자들이 가만 안 둘 거야. 그럼 괜찮겠지.”

“하하.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알면 분명히 더 난리를 치겠네요.”

“뭐 어떡해. 사실인데.”

세현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말했다.

“너도 그간 수고 많았어. 이제 조금만 있으면 자유의 몸이야.”

세현은 유감없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걸어가려고 했다. 아담은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담은 눈을 크게 뜬 채 의미 모를 소리를 냈다.

“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다시 놓아주려고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소란스러운 오늘이 지나 내일이 되고 이 소위 천재라는 많은 사람들이 뭔가 해보려고 하지만 또 실패하고 나면, 다시 한 번 얘기를 나눌 틈도 없이, 곁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곁에 있을 수 없이 그렇게 끝나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오늘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이다.

어쩌면 실감하지 못하는 건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에게 그녀의 의미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이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끝나버리면 그걸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일까? 그만큼 괜찮은 것일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곁에 맴돌기만 하다가 끝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녀의 곁에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어린애들처럼 바보 노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척, 쉽게 웃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면서 바보 노름을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무슨 말로 변명하면 괜찮을까? 이 손을 놓으면 정말로 끝이었다. 그럴 것이다.

“왜 그래?”

세현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표정, 향기,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끝나버리면….’

바보같이 밤마다 그녀를 떠올리며 그때 사랑한다고 한 마디라도 했다면…, 하고 평생 후회하게 되는 것일까.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할 새도 없었다. 지금은 그런 순간이었다. 아담은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고 그녀의 눈동자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할 겁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살아난다면…, 당신을 위해 제 모든 걸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당신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

세현은 약간 놀란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말을 끝내고 그녀의 얼굴을 조금 더 바라본 뒤 아담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던 거 압니다. 전…, 당신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는군요.”

어린애들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인생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어쩔 수 없는 게 있고, 아무리 원해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순간이 생각보다 너무 많단 말이다. 아담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담은 세현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며 진심을 전했다.

“그래도 당신이 가장 힘든 순간에, 내가 당신의 곁에 있고 그것이 당신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오래도록 바라왔습니다.”

후회가 그녀를 더 잊지 못하게 할까, 이런 고백이 그녀를 더욱 잊지 못하게 할까.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작 인간이기에, 그는 자신에 대한 일마저 한치 앞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어느 쪽도 결국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고 후회는 그를 괴롭힐 것이다. 자기 자신을 겁쟁이로 여기게 만들 것이고 스스로를 혐오하게 될 것이다. 세현 퀸과 같은 여자를 사랑했다고 감히 말하기도 부끄러울 남자가 되고 말 것이다.

세현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난감한 얼굴을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니들이 귀찮은 게 이런 점이야.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단어를 말하게 만든단 말이야.”

“무슨 단어입니까?”

아담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코를 대며 애정을 나타냈다. 세현은 으음, 하고 약간 더 고민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이런 걸 로맨틱하다고 해야 하는 상황인 건가?”

“하하. 영광이네요.”

아담은 그간 차마 그녀를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마음이 넘쳐나 그녀의 얼굴을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조금 더 빨리 이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간 당신의 곁에 있는 게 허무하게 느껴졌던 건…, 당신을 위해서 제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전혀 아니었네요.”

“난 네가 갑갑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의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에 대한 내 사랑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는데…. 항상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습니다.”

세현이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분명히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처럼. 아담은 그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역시 배우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실 생각인가요?”

“으음….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한 것뿐이야.”

정말로 좀 더 빨리 이 마음을, 제대로 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담은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모든 게 다…, 잘 될 겁니다. 그러면 제게도 다시 기회가 생기겠죠? 그때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에게 힘든 순간이 또 온다면 내가 가장 먼저 생각날 수 있도록….”

둘은 가만히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농밀해졌다. 마치 세상에 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이란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마치 이럴 것처럼. 아담은 세현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세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은 입을 맞췄다.

*

“교수님!”

“아, 내 집이 이렇게 시끄러운 건 처음이야.”

세현 퀸의 학생들까지 전부 왔다. 높은 확률로,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세현의 집은 엄청 넓었는데도 꽉 들어차고 말았다.

“그냥 이대로 초상을 치뤄라. 다시 부를 필요도 없고 얼마나 좋냐.”

세현은 최이삭을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건 전부 그가 부른 것이다. 최이삭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민 교수님의 수술이 끝나고 교수님이 완쾌하시면 그때 혼나겠습니다, 교수님.”

“아, 건방져….”

그에게 약간 대가 생기기를 바라왔으나 막상 저러니 몹시 짜증난다. 세현은 그를 잡아먹을 듯이 잠시 노려보았다. 학생들이 하나씩 그녀를 껴안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보통 박사 2년차 이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세현이랑 하루에 말 한 마디 섞은 적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다들 오버를 하는가.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슬퍼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학생이니 세현도 약간 받아주게 되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흑흑, 교수님. 다 잘 되실 거예요. 제가 요새 불공을 다 드린다니까요.”

오태연이 눈물 콧물을 다 짜며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넌 그전에 공부부터 해야 할 텐데?”

“교수님…! 흑흑!”

이미 몇 번이나 실패했던 방법이라 분위기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드레이닝 홀의 안정성이 깨져 아예 컨트롤 할 수 없게 되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마력 패치를 떼고 마력을 완전 제거한 후 마지막으로 회생을 시도해볼 것이다.

“교수님 분명히 잘 되실 거예요!”

하우빈이 세현을 껴안고 손을 잡더니 크게 말했다. 그녀는 코를 한 번 훌쩍하고는 다짐했다.

“설사 그러지 못 하시더라도…! 흑, 제가 열심히 해서 꼭 교수님처럼 훌륭한 학자가 될게요!”

그녀는 어렸다. 씩씩했다. 그래, 그렇게 믿어야지 그녀가 말한 대로 될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이다. 세현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

그녀는 눈물이 더 글썽글썽해졌지만 안 울고 더 씩씩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귀여웠다. 세현은 한 번 더 피식 웃었다.

최이삭은 울지 않았다. 며칠 전에 기겁해서 달려와서는 울고 불고 난리를 쳤던 그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최대한 믿음직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세현의 앞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교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평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제 모든 영광을 교수님의 영광으로 돌리겠습니다.”

세현은 잠깐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역시 뭐라 한 마디 할까 하다가 말았다.

‘이삭이는 애가 전체적으로 덜 떨어져 가지고 아직도 전체적으로 엄~청 부족하고 저래 가지고 도시 한두 개 날리는 건 아닌가 싶고, 아니, 도시 한두 개는 괜찮은데 그러다 지보다 똑똑한 사람이라도 해칠까 걱정되고. 하여튼 전반적으로, 전체적으로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그녀는 최이삭의 뺨을 툭툭 부드럽게 두드렸다.

“잘 생각했다. 똑바로 해라.”

‘그래도 포닥까지 잘 키우면 그래도 교수 달 정도는 될 수 있겠지? 아직은 한참 멀었지만. 교수님도 계시고, 만약에 노친네 랩에 들어가면…, 진짜 졸업 못할지도 모르겠네.’

누누이 말했지만, 캘리 박의 연구실 생활이 세현 퀸의 연구실 생활보다 딱 두 배는 더 힘들 것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인사를 하고 있는데 의외의 얼굴이 하나 앞으로 나왔다. 세현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

“교수님….”

파리한 얼굴을 한 갓 30대가 되었을까 싶은 여자였다. 그녀는 무거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세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교수님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평생 한국도 절대 안 오려고 했는데….”

디아나 리였다. 세현 퀸의 랩에서 처음으로 졸업장을 받아간 사람으로, 이대로라면 아마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근데 이대로 교수님 돌아가시면 다시는 못 따질 것 같아서….”

“뭘 따지게?”

그녀의 등장에 놀라 세현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디아나가 째릿 세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왜 그때 안 왔어요, 교수님? 제가…, 제가 그렇게 자격이 없었어요? 제가 그 정도로 형편없었어요? 쟤 졸업 논문 심사할 때는 가셨다면서요…!”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그녀는 바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똑바로 최이삭을 가리키고 있었다.

“염원하던 졸업장도 받고 교수도 됐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았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뻤던 날이 없었어요. 내가 그렇게, 그렇게…, 똥멍청이에 형편없는 버러지라서 빵점도 줄 성의가 안 나셨어요?!”

“야….”

세현은 머쓱한 얼굴을 했다. 사실 심사날 안 간 건 심술이나 다름없었다. 캘리 박도 그러지 않았나. 세리나 이예프의 졸업장을 그렇게 주기 싫었다고.

“니가 좀 모자라긴 했지만…, 진짜 그 정도였으면 내가 가서 뺏아왔지…. 그, 바빴잖아, 내가. 그때, 그…, 전반적으로. 그래서 그냥 다른 교수들한테 맡긴…, 뭐, 그런 거야, 그런 거.”

거짓말…. 다들 그렇게 세현을 쳐다보았다. 디아나는 울먹울먹거리며 세현에게 되물었다.

“진짜요?”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야, 내가 영 줄 마음이 없었으면 그냥 3년차 때 널 짤랐지, 뭐 하려고 그때까지 데리고 있었겠냐.”

세현이 한숨처럼 그렇게 말했다. 디아나는 세현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있더니 결국 펑펑 울면서 세현에게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

“흐어엉! 돌아가시지 마세요, 교수님. 그대로 연구실 떠난 거 계속 후회했어요. 포닥도 할 걸…. 흐어어엉.”

이것도 완전 눈물 바다다. 세현은 이제 정말 성가셔서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야, 아니, 리 교수. 그만해라. 어? 떨어져.”

“흐어어엉! 교수님~!!”

그걸 보고 있던 캘리 박이 평소와 달리 심각한 얼굴을 한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쟤는 무슨 애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 놨냐, 어? 이삭이도 그렇고 디아나도 그렇고 보자마자 완전 수도꼭지를 트네, 틀어.”

“…….”

그 원조가 총장님이신데요….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엘리야 민이 그런 눈빛으로 캘리 박을 잠깐 바라보았다. 학생들과 인사를 끝내고 세현은 한민유와도 악수를 했다.

“노친네 잘 모셔라.”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수술 잘 될 겁니다.”

“그래.”

그리고 벌써 훌쩍거리면서 울고 있는 알렉스를 발견했다.

“죽지 마….”

알렉스가 겨우 말했다. 세현은 아무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옆에 있는 제수스는 조금 긴장하고 약간 창백해 보였다.

“괜찮을 거야. 잘 될 거야.”

“그래.”

제수스는 세현의 손을 꼭 잡았다. 제수스는 지금까지 많은 죽음을 겪었고 그래서 나중에는 꽤 무덤덤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심장이 벌써부터 뻥 뚫린 것같이 이상했다. 어째서 다른지, 왜 다른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괜찮을 거야.”

그는 세현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는 세현의 눈을 여지껏 없을 정도로 감정을 담아 바라보았다. 세현은 그의 헤이즐색 눈동자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음으로 넘어갔다.

“분명히 다 잘 될 겁니다.”

아담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위로했다. 세현은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전부 뒤로 물리고 세현은 침대에 누웠다. 의료진과 캘리 박을 제외하곤 전부 밖으로 쫓겨났다.

의료진들은 그녀의 팔에 수액을 달고 마력 패치의 상태를 확인했다. 뒤푸르 박사도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뒤푸르 박사.”

“예, 퀸 교수님.”

다른 의료진은 전부 이 일에 사활이 걸려서 긴장도가 높았으나 저 멀리 온살라 연구소에서 온 뒤푸르 박사는 무덤덤했다. 어깨를 펴고 선 뒤푸르 박사는 특유의 사각 안경을 쓰고 자신의 연구진과 함께 스크린을 보았다. 엘리야 민도 약간 긴장한 얼굴로 세현의 생체 정보를 나타낸 수치를 확인했다.

“처음엔 단순히 오라랑 S인자를 많이 주입하면 드레이닝 홀을 아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애초부터 오라나 S인자는 보충제일 뿐이지 마력소의 장벽을 이룰 수 있는 물질은 아니었어. 구멍을 실로 깁고 난 다음에 밴드를 붙여야 하는데 그냥 살이 터진 데다가 밴드만 붙이는 꼴이었지. 남아 있는 마력이 없으면 변인이 줄어 들어. 뒤푸르 박사도 그건 확신하는 부분이니까. 드레이닝 홀에 변형 중력 마법을 걸어서 홀을 축소하고 오라를 주입해서 밴드를 붙이는 거지. 그리고 다시 마력을 보충할 거야.”

그녀가 다시 한 번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잘못하면 육신이 전부 압축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럼 나도 네 뇌는 못 건져.”

“와…, 노친네가 널 많이 갈구긴 했나 보다. 말하는 것도 이제 비슷하네.”

이런 순간에 농담을 던지는 게 말이다. 엘리야 민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현은 캘리 박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제법 평소답지 않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캘리 박이 세현의 얼굴을 보았다. 세현이 말했다.

“내가 한 말 기억해요.”

세현 퀸의 위대한 스승인 그녀는 앞으로 지금까지 세현이 살아온 날보다 더 살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한 듯 보여도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력 마법이라는 희대의 발명을 한 천재로서, 어쩌면 결국 가장 마지막에 진리를 밝힐 사람도 캘리 박 본인일지 모르는 일이다. 제자 같은 걸 길렀던 것도 전부 할 필요 없던, 스스로에 대한 쓸데없는 의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제자도, 같이 걸을 인간들도, 이 위대한 제국도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캘리 박이야말로 여전히 신이자, 유일한 신이 될 가능성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인간이다.

그녀는 광대한 어둠 속을 헤매는 한 줌도 되지 않는 그들을 이끌 지식과 지혜의 횃불을 들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사람이었다. 무지와 나약함에서 비롯된 광기로 가득찬 세상으로부터 지성인을 보호하고 가시밭길을 헤치며 그 손을 얼마든지 더럽혀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유사 이래 있었던 그 어떤 인간을 망라하더라도 이 사람만이 세현의 유일무이한 스승이자 존경하고 흠모하는 위인이었다.

그녀를 뛰어넘기 위해 한 평생을 바쳤으나 과연…. 호사꾼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이 행성에 살았던 이들 중 자신만큼 캘리 박의 위대함을 이해하는 사람은 몇몇 없을 것이다. 무지몽매한 금붕어가 드글거리는 이 세상에 늙은 스승을 두고 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캘리 박이 드디어 입을 연다.

“넌 오늘 안 죽는다. 내가 진리에 도달할 때 너도 분명히 내 옆에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내가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이 세상에 언젠가 날 뛰어넘는 누군가 등장한다면…, 그게 너일 거라고 믿었다.”

세현이 하, 하고 피식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웃음이 나오냐. 죽지 마라.”

“산다면 노친네 덕에 살 겁니다. 아니라도 노친네 때문은 아니니까 너무 이상한 얼굴 하지 마세요. 소름 돋은 거 안 보여요?”

세현이 말했다. 그리고 뒤푸르 박사와 필요한 의료진이 자리를 잡았다. 엘리야 민은 의료용 쉴드를 전개하고 그 안을 전부 완벽하게 멸균했다. 다들 멸균 모자와 글러브를 착용했다. 엘리야 민은 그녀의 마력 패치에 손을 댔다.

“시작한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패치를 떼냈다. 그러자 세현의 손목에 있는 마력측정기에 나오는 수치가 곧바로 모두 제로가 되었다. 그리고 세현은 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곧바로 숨이 멈춰버렸다. 마력량이 소진되는 속도로 생기가 소진되어 버리니 죽음은 순식간이었다.

이지와 총명이 빛나던 세현 퀸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엘리야 민은 곧바로 개복하고 뒤푸르 박사는 인공지능의 공감각 유도에 따라 정확한 위치에 변형 중력 마법을 발현했다. 의료진은 끔찍한 장면에 대비하여 약간 움찔했다. 캘리 박도 몇 번이나 봤기 때문에 절로 긴장하여 굳어 있었다.

“아, 됐어. 다음.”

세현의 몸이 일그러지지 않았다. 엘리야 민이 준비하고 있던 소드마스터에게 눈짓했다. 그는 바로 다가와서 개복한 세현의 단전에 오라를 적정량 뿜어냈다. 그리고 엘리야 민은 회복 마법을 걸고 개복 부위를 깨끗하게 닫았다. 그리고 인공투석기 비슷한 것으로 그녀의 피를 뽑아내어 마력 포션과 섞어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혈액이 다시 돌기 시작하니 삽시간에 창백해졌던 그녀의 피부에 붉은 빛이 다시 돌았으나, 그녀의 생체 바이탈 수치는 전부 제로였다.

“…….”

엘리야 민의 얼굴이 굳어지자 다들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5초 정도 그대로 가만히 온갖 경우의 수와 대책을 떠올리다가 결국 전부 소용이 없을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의료용 쉴드를 제거하고 마스크를 벗었다.

“다들 들어오라고 해.”

레이지가 착잡한 얼굴로 자신의 마스크를 벗으며 문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비명이 들리더니 다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최이삭이 가장 먼저 들어왔는데, 세현의 얼굴과 민 교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엘리야 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교, 교수님…. 흑. 교수님. 아윽. 으흑…. 교수님, 제발….”

그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현에게 달려가 그녀의 얼굴 곁에 엎드려 비명을 질렀다. 디아나도 굳은 얼굴로 세현의 옆으로 달려왔다. 세상이 무너진 듯 절망한 얼굴로 숨을 가쁘게 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현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가 덥썩 잡았다.

“교수님…, 교수님…!”

그녀는 세현의 몸을 흔들다가 결국 그녀의 손에 이마를 박고 울었다. 둘 다 엄마를 잃은 어린애처럼 울었다. 다른 제자들도 둘을 뒤에서 껴안으며 같이 울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잖아. 아, 진짜…. 흑. 아, 아니라고. 나도 죽을 거야. 나도 죽어버릴 거야!”

알렉스가 울면서 비틀거리자 제수스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알렉스는 그대로 그에게 기대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제수스는 더욱 어쩔 줄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귀가 왱왱 울렸다. 누군가 죽는 것은 그에게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막막했다. 이건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담은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

엘리야 민은 모두의 비통한 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캘리 박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죽은 세현 퀸을 바라보고 있다가 얕게 숨을 한 번 뱉었다.

“이 일을 누군가는 기뻐하겠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벌레 같은 것들은 오늘,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겠지…!!”

그녀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깜짝 놀라 캘리 박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모든 것에 가장 감정적이지 않았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엘리야 민이 그녀를 부축하려고 하자 바로 뿌리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캘리 박은 엘리야 민의 멱살을 잡고 검지를 똑바로 눈앞에 들이대며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네가 언젠가 이 병의 완치법을 찾더라도 넌 이미 늦은 거다. 넌 세현 퀸을 살리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총장님.”

“앞으로 내 눈앞에 얼쩡거리기만 해라. 내가 이 손으로! 산 채로 니 피부를 다 뜯어버릴 테니까!”

“…….”

“학과장님….”

박사 하나가 그녀를 부축하러 왔다. 엘리야 민이 뒤로 물러났다. 캘리 박은 다가온 학생을 밀쳤다. 그녀는 격노를 견디지 못하며 죽은 세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왔다갔다하며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어지지도 못했다.

“말도 안 돼. 네가…, 너마저도 내…. 아니야. 윽. 다시 어떻게든 해봐. 해보라고!”

그녀는 알렉스 수준으로 현실을 부정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엘리야 민은 안경 밑으로 자신의 미간을 강하게 주물렀다.

“아.”

난세는 영웅이 나타날 기회다. 하지만 도전했다가 성공하지 못한 자 또한 죽는 것이 난세다. 이제 우리 교수님도 끝장이구나,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현실적인 걱정이 마구 밀려들 때 레이지가 헉, 하고 다시 세현을 보았다. 그녀가 눈물 콧물에 침까지 다 흘리며 세현을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울고 있는 디아나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냈다.

“아, 왜! 놔! 우리 교수님이야! 교수님! 교수님!”

“아오, 좀 비켜요!”

그리고 그녀는 세현에게 들러붙어 있는 인간들을 다 떨쳐내고 세현의 이마와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곧바로 불사의 마법을 시전했다.

“…!!”

세현이 곧바로 숨을 들이쉬며 벌떡 일어났다.

*

“…….”

“…….”

“…….”

세 명의 남자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담 마이어마저도 아닌 척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건물이었다. 메트로서울도 현대적 도시였지만 이런 건물은 없었다. 분명히 후대에 길이 남을 역사(役事)였다.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상아빛 아고라 위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천으로 가려진 채 조명을 받고 있었고 그 앞으로 연단이 놓여 있었다. 또한 그 앞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뒤 잔디밭에는 수 만에 가까운 인파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라고 묻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담은 동요였다. 거대한 홀로그램과 스크린이 연단을 비추고 있었다.

현실적이지, 아니, 뭔가 그걸 뛰어넘은 광경이었다. 현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더욱 굉장했다. 이런 건물도, 이런 국제 행사도 처음이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단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렉스와 제수스는 제법 이름을 알린 남자들이었는데도 여기서는 특별 취급은커녕 짐짝 비스무리한 취급을 받았다. 세 명의 남자는 나란히 목에 명찰을 매고 있었는데, 셋 다 똑같이 <세현 퀸 교수 전용 의료 스탭>이었다. 그들이 원래 뭘 하던 남자이건 상관없이 대놓고 그녀의 휴대용 마력배터리라고 써 붙인 것이다. 진짜 의료진은 무슨 교수니, 선생이니 제대로 적혀 있었다.

제수스는 긴장한 얼굴로 아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남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는 연단의 제일 앞자리에서 세현 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키 큰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담은 거기를 안 보는 척하면서 대꾸했다.

“러시아 대통령. 손가락질하지 마. 총 맞아.”

아담은 제3차 중러전쟁에서 러시아 쪽 용병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었다. 물론 대통령까지 만날 일은 전혀 없었지만 적어도 최고통수권자는 알아 둘 필요가 있는 법이다.

“헐, 그런 사람도 여기 오는 거야?”

제수스는 얼른 손가락을 굽혔다. 그도 세현 퀸이 아름답고 똑똑하고 부자에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걸 제대로 실감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이 정도로 실감한 적은 없었다. 이런 건물도, 이런 행사도 처음 겪어보았다. 잘은 모르지만 이런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저 사람들을 봐라. 이게 스포츠 경기도 아닐 텐데 사람들이 엄청 몰려와 있었다. 그런 건 대단한 거란 말이다.

연단에는 거대한 별과 그 주위를 도는 혜성들을 도식화한 마크가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고 그 아래로 20개 정도의 국기가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국기들이 그 마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빈 좌석은 양쪽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격식 있게 차려입은 각국 정상들과 그들의 배우자들, 관련 부처 장관들과 실무자들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정장이 어색해 보이는 학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앞뒤로 취재진들이 정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세현은 자신의 이름이 붙어 있는 간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바로 세 남자가 있는 곳이다.

“교수님.”

그러자 그녀의 PR 담당이 와서 식의 순서와 내용에 대해서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 남자는 그녀가 들어오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지워. 내가 이딴 말까지 구구절절 해야 돼?”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펜으로 연설문 내용 중 몇 문단을 아예 통째로 지워버렸다.

“그러면 너무 발표 시간이 짧으실 텐데요?”

“말하는 거야 노친네 전문이니까 노친네 보고 하라고 해.”

“네.”

세현 퀸은 곧 HNU 물리학과 학과장이 될 것이다. 캘리 박은 미국 서부 해안에 지은 최신 중력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연구 일선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한다. 엘리야 민 교수는 올해 중순이 넘으면 T대의 총장이 될 것이다(T대 역사상 최연소 총장이다).

곧 세현의 대기실로 캘리 박과 다른 사람들이 몇 명 더 들어왔다. 희끗희끗한 회색 머리를 가진 인상 좋은 사람이 세현을 보더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퀸 교수, 오랜만이야.”

"반갑습니다, 선배님."

“논문 잘 봤어. 좋던데? 그런 걸 상반기에 두 개씩이나 내면 어떡해? 쉬엄쉬엄 해.

영국 OC 대학교 물리학과의 세실 필리페였다. 그녀는 세현의 팔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잘 될 사람은 잘 되는 거야. 쾌차해서 정말 다행이야, 퀸 교수. 이제 몸은 괜찮은 거지?”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 그래.”

둘은 손을 맞잡은 채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리고 그게 그 화기애애함의 끝이었다. 현생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 캘리 박의 제자 중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13명이 있었고 그중에 세실 필리페 딱 한 명만 제한 모두는 뛰어난 천재성, 빛나는 연구실적, 그리고 개같은 성격이라는 훌륭한 삼박자를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윤도 나지 않는 새카만 머리카락에 키가 세현만큼 크고 매우 무섭게 생긴 사람이 나타났다. 정장 주머니에 작은 사각 안경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필리페가 아는 척을 했다.

“선배, 오랜만입니다.”

“넌 나중에.”

그녀는 손으로 필리페를 슥 밀어냈다. 그리고 그녀는 세현의 손을 꽉 잡았다. 세현은 먼저 인사말을 했다.

“반갑습니다, 이예프 선배님.”

“이제 다 나았다고? 죽을 병 걸렸을 땐 죽을 병 걸렸다고 발 빼려고 하더니 이제는 나았다고 발 빼냐, 이 개년아?”

그녀는 세현의 얼굴을 보며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렇게 쌍욕부터 했다. 이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아, 거참. 볼 때마다 개년, 개년 하시네, 이 선배님이. 듣는 개년이 몹시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그거 놔두고 오고 싶어서 놔두고 왔습니까? 사람이 큰일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세현이 인상을 팍 쓰며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큰일은 좆도 큰일이다, 망할 년아.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해서 1년 내내 이 난리가 나게 해놓고! 내 장비나 빨리 원상복구 해놔. 당장."

세리나 이예프의 외견은 엄숙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딱딱한 인상이었는데 입이 거칠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투나 말의 내용이 묘하게 캘리 박을 연상하게 했다. 세현이 발끈했다.

"아니!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그게 왜 선배 겁니까? 학회랑 미국에서 같이 출자해서 만든 건데!"

"말 잘 했다. 거기 니 지분이 있긴 하냐? 어?"

"아! 그거 갖다 준다니까 자꾸 이러네! 내가 떼먹는대요? 어? 기다려보라니까! 해결해준다고!"

이예프는 욱한 얼굴로 손을 번쩍 들었다. 그제야 캘리 박과 세실 필리페가 둘을 말렸다.

“이예프 소장아, 카메라, 카메라.”

"때려봐, 씨발!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어허, 퀸 교수. 그래도 선배잖아.”

양쪽에서 어깨를 밀며 그 둘을 멀찍이 떼어놓았다.

"이예프 소장, 참아. 참아. 어? 쟤 리밍이 바지도 벗겼다?"

캘리 박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세현을 노려보고 있는 이예프에게 그렇게 말했다. 정장을 반듯하게 갖춰 입고 머리 한 톨 흐트러진 곳이 없는 세리나 이예프 온살라 연구소 소장은 무뚝뚝하고 근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세현의 껍질이라도 벗길 듯한 눈빛을 쏘았다. 세현은 멀리서 가운데손가락을 들어 날렸다.

"내가 욕을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아? 선배라고 봐주니까 자꾸 사람 성질을 건드려?!"

"퀸 교수, 그래도 그 일은 이예프 선배한테 자네가 잘못한 거지."

필리페 교수가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세현이 투덜거렸다.

"내가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어?!"

또 개싸움이다…. 알렉스와 아담은 숨을 죽이고 쳐다보고 있었다. 중간에 제수스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하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둘한테 동시에 붙잡혔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질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디바이스로 문자를 한참 하면서 왕리밍이 들어왔다. 비싼 수제 양복에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메이크업까지 받은 얼굴이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안 나오세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세실 필리페가 아주 반가운 얼굴로 양팔을 활짝 벌렸다.

“리밍이~”

그녀는 왕리밍을 껴안았다… 라기 보단 그의 몸을 완전히 더듬었다. 왕리밍은 흠칫하며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기서 청일점이자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다.

“리밍이 점점 얼굴 좋아지네. 뭐 했어?”

“아, 선배님, 저 좀 그만 놀리세요.”

“아, 왜. 잘생겨서 그러는데.”

“아.”

필리페가 그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놀렸다.

“그런데 수에즈에서 퀸 교수가 너 바지 벗겼다면서?”

“아니…! 그건!”

그러자 서로 잡아먹을 듯한 분위기가 풀리며 다들 실소를 지었다(물론 이예프 소장은 안 웃었다). 캘리 박이 시계를 보더니 제자들의 등을 두드렸다.

“자자, 이제 나가자.”

이제 슬슬 올라갈 시간이 되었다. 세현을 제외한 교수들이 밖으로 나갔다. 오늘의 행사는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 웜홀 연구 프로젝트>의 발족식으로 세현이 최고책임연구자였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에 입장했다. 세현은 발표해야 할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었다. 제수스는 눈치를 보다가 슬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까 그 아줌마랑은 사이 안 좋은 거야?”

세현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얼굴로 제수스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한 번 고개를 젓고 무시하려다가 그냥 한 마디 했다.

“니가 아줌마라고 한 그 인간, 아니, 그 인간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지금 들었으면 너 죽을지도 몰라.”

“헉, 왜?”

“저 아줌마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앞에선 절대…, 아니, 그냥 입 닥치고 있어.”

“왜?!”

제수스가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세현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거긴 진짜 법이 안 먹히는 곳이거든. 아,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그리고 세현은 나갈 준비를 했다. 세 명의 남자도 조르르 따라서 무대 뒤로 갔다. 진행 요원들이 타이밍을 맞춰 세현을 모셨다.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 게이트 빅크런치 프로젝트의 최고책임연구자이신 세현 퀸 교수님 입장하십니다.”

그러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 위에서도 노학자와 세리나 이예프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현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큰 키, 당당한 걸음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저 무심함. 그녀는 권력을 잡기 위해 그 누구의 환심도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애초에 왕자(王者)로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단상에 서자 세계물리학회의 마크가 그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눈짓하자 모두 자리에 다시 앉았다.

“세현 퀸입니다. 학회까지 먼 길 오느라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통칭 아칸소 프로젝트 연구팀은 2129년 4월 30일 05시 13분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에 위치한 웜홀을 부작용 없이 영구 소멸시킬 겁니다.”

그러자 다들 환성을 내며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 뒤로 그녀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고 참여자를 소개했다. 그 뒤로 캘리 박이 스피치를 시작했다. 그녀는 좀 더 청중에게 살갑게 이야기를 했다. 중간에 캘리 박은 세현의 드레이닝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년, 퀸 교수가 드레이닝에 걸리고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던 세현 퀸 교수를 일제히 카메라로 잡고 퀸 교수도 캘리 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려움이라니. 내가. 이 내가. 이 캘리 박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내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제자를 이렇게 앞서 보내야 한다니.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더군요. 퀸 교수의 죽음이 어쩌면 나의 가장 큰 실패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 이 내가 말입니다.”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나는 올해 80살이 되었습니다. 이제 인류의 수명은 160살을 넘어 200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오래 살아 많은 것을 이룰 겁니다. 내 생애 진리를 이루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걸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제자들이 나를 앞설 가능성도 있지요. 나는 제자들에게 항상 나보다 뛰어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지금도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지금쯤 되니 그래도 이 스승의 뒤를, 보폭을 맞춰 잘 따라오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럼 분명히, 혹여나 내가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도 내 제자들은 계속해서 나를 넘어 앞으로 갈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캘리 박이 뒤를 돌아보자 세계물리학회 건물 앞에 커다란 천으로 가려놓은 오벨리스크가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드러났다.

“실패와 희생에 굴하지 않고 고난과 장애에 쓰러지지 않고 사람들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모든 것을 이끌어온 것은 바로 나와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위험에도 앞장섰던 내 제자들…. 진 카시마 교수, 금성위 교수, 브랜다 카시아키 교수, 세린 세르게이 교수, 헤더 블레어 교수, 크리스탈 요한 교수, 미란다 보위 교수.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연구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장렬하게 산화한 이 아깝기 짝이 없는 위대한 인재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천이 스르륵 뒤로 떨어지며 위대한 이름이 새겨진 아름다운 오벨리스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여기엔 언젠가 내 이름이 새겨질 것이고, 언젠가 이예프 소장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고 필리페 교수와 루소 교수, 그리고 우리 세현 퀸 교수의 이름도 적힐 테지요. 그렇게 우리는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도 그에 따라 번성하겠지요. 그걸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에 되새기는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그 어떤 고난도, 역경도, 슬픔도 우리가 오늘날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캘리 박이 마지막 말을 끝맺었다.

“앞으로 그 어떤 고난과 역경과 슬픔도 우리가 미래로 향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그렇게 행사는 3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교수들이 퇴장하고 인파를 돌려보내고 주요 참석자들은 잠깐 휴식 시간을 가졌다. 몇 시간 뒤에 비공개 연회를 가질 것이다.

이렇게 큰 무리의 사람들이 해산되니 묘한 정적감이 느껴졌다. 무대의 뒤에만 있었던 알렉스나 제수스, 아담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교수님.”

최이삭이었다. 그도 오늘은 제법 멋을 냈다. 그는 세현을 따라 같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캘리 박과 한민유도 따라 들어왔다.

“야, 넌 아무리 그래도 개최사를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

“이런 건 짧은 게 좋은 거예요. 쇼는 노친네가 다 했으니 됐지.”

“맞아요. 더 멋지지 않았어요, 우리 교수님?”

최이삭이 흥분한 어조로 캘리 박에게 그렇게 말했다. 캘리 박은 잠깐 정 떨어진 표정으로 최이삭을 쳐다보다가 매우 성가시단 얼굴로 세현에게 말했다.

“요새 최 박사가 너무 짜증난다, 세현아. 어? 어떻게 좀 해봐라.”

“노친네는 곧 미국 갈 거잖아요. 요새 얘 이상한 거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중이예요.”

“교수님~”

최이삭은 요새 영 텐션이 높았다. 세현은 피곤한 얼굴로 대기실의 카우치에 털썩 앉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담은 웃는 얼굴로 세현에게 시원한 마실 걸 따서 주었다. 세현은 그걸 받아 반쯤 마셨다.

“아, 한숨 자야겠어.”

“1시간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래? 아.”

세현은 카우치에 바로 드러누웠다. 알렉스의 무릎을 벴다. 그리고 피곤에 골골거리며 이마에 팔을 얹고 눈을 감았다가 여전히 피곤한 기색도 없이 한민유와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캘리 박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교수님, 진짜 좋은 건 나눠 먹고 삽시다.”

한민유가 세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드레이닝도 거의 완치되신 것 같고…, 교수님도 좀 본격적으로 체력 관리를 받으시는 게 어떠세요? 필리페 교수님은 만족하시던데요.”

“그럴까?”

“쟤는 지 일 할 땐 팔팔한데 이럴 때만 저런다니까.”

캘리 박이 말했다. 아담은 문득 그들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그녀의 드레이닝이 나았으니 사실 이제…, 우리는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세현은 곧바로 자신의 실험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엘리야 민은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며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눈치를 봐서는 정말 많이 좋아진 모양이고 완치가 된 것이라면 지금까지처럼 소드마스터들이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마력 패치도 개발된 마당에….

“…….”

아담은 세현에게 애교를 떠는 알렉스와 자연스럽게 치근거리는 제수스를 보았다. 최이삭마저도 그녀의 곁에 딱 달라붙어 그녀를 무슨 하느님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들의 새파란 젊음이 빛났다. 그는 약간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담배 끊자….’

그렇게 약간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세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알렉스와 제수스, 아담의 옷을 전부 갈아 입혔다.

세현이 눈을 한 번 깜박하며 세 명을 쳐다보았다.

“옷이 날개네.”

셋 다 평소에도 매우 잘생긴 남자들이었으나 그래도 전문가의 손길을 받으니 확실히 또 달랐다. 세현이 살짝 놀랐단 얼굴로 아담에게 손가락을 까닥하며 말했다.

“역시 배우 해.”

“하하.”

“교수님! 난!”

알렉스가 바로 발끈하며 세현의 허리를 안았다.

“넌 벌써 연예인 비슷한 거 아냐?”

“나 이번에 엘 드라카 슈퍼 루키 1위 한 거 몰라?”

“그게 뭔데?”

제수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뭐 하냐, 조루 주제에.”

“이제 아니거든!!!”

한민유는 검은색, 빨간색, 금색 머리를 가진 다채로운 미남들을 흡족한 얼굴로 감상하다가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퀸 교수님.”

“왜?”

“솔직히…, 이 중에서 누가 제일 마음에 드세요?”

한민유가 물었다. 그러자 알렉스, 제수스, 아담은 물론이고 최이삭까지 고개를 번쩍 들며 세현을 바라보았다. 세현은 ‘넌 왜?’ 라는 얼굴로 최이삭을 한 번 보고는 바로 답했다.

“얘.”

“아싸!”

알렉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다른 남자들을 돌아봤다.

“들었냐? 어? 똑똑히 들었지?”

제수스는 팍 하고 억울한 얼굴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진짜 얘가 어려서 그런 거야? 나 얘랑 4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죽었다 깨어나 봐라. 그 나이 차이가 줄어드나!”

알렉스가 헹, 하고 웃으며 외쳤다. 제수스는 윽, 하고 알렉스를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세현에게 간절한 눈빛을 마구 쏘았다.

“어린 게 그렇게 좋아? 남자가 어리다고 다 좋은 줄 알아? 남자는 밸런스야, 밸런스~”

“이제 시간된 거 아냐?”

세현은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담은 그냥 피식 웃었다가 역시 결심했다. 담배를 끊자. 최이삭은 몰래 자신의 양 뺨을 한 번 때리며 정신을 차렸다.

“가자, 퀸 교수.”

캘리 박이 시각을 확인하고 말했다. 세현 퀸은 그녀의 옆으로 갔다.

“근데 그거 진짜 들고 올 수 있어요? 우리가 버리고 온 계측기? 저번에 간 건 실패했다면서요?”

“2차로 팀 꾸리고 있다. 아, 뭔 몬스터가 그렇게 나오냐. 겨우 쉴드 마법만 다시 걸어놓고 탈출했다는데?”

“아칸소에서 쓸 계측기 모자라잖아요.”

“이번엔 로라가 직접 간다. 가져올 거야.”

“아, 이예프 선배한테 큰소리 쳤는데.”

“일단 큰소리는 쳐놓고 보는 거지.”

“그렇죠?”

“근데 못 가져오면 책임은 니가 지는 거다. 이예프 소장이 때리면 한 대, 아니, 두 대는 그냥 맞아. 걔는 요즘 나도 무서워.”

“아, 싫은데. 다들 너무 폭력적이야.”

세현은 자신이 밑에 애들을 때린 건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하늘이 찌를 듯한 거대한 건물, 세계물리학회 본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들 그들의 뒤를 따랐다. 캘리 박이 말했다.

“지금까지 그런 거 몇 개 없다고 뭐 엎어진 적 있냐. 결국 다 될 거야.”

“그건 그렇죠. 되게 만들면 다~ 되는 거니까.”

세현이 기지개를 한 번 펴며 그렇게 대꾸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믿는 것이다.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기어코 해내는 것이다. 그들은 차례로 세계물리학회 본부로 들어갔다.

그래비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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