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Sehyeon Quinn Superstar (2)(4권) (6/7)

3. Sehyeon Quinn Superstar (2)

잠에서 깼다. 아담은 천천히 빈 옆자리를 더듬었다. 눈을 떴다. 그녀는 방금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실크 가운의 허리를 묶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담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의 어두운 금발 머리는 부스스했고 멋진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글래머러스한 어깨와 가슴, 탄탄한 허리와 복부…. 유난을 떨지 않아도 그대로 아름다웠다. 어른스럽고, 남자답게 섹시했다. 평소와 달리 조금 무방비해 보이는 점이 더더욱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세현은 그의 얼굴과 자태에 살짝 사로잡혀 잠깐 감상하듯 그를 훑어보았다. 세현은 검지를 까딱하며 평했다.

“역시 배우 해.”

“하하.”

이 사람에게 자신은 배우, 아니면 지골로가 어울리는 남자로만 보이는 걸까. 아담은 그대로 한쪽 손으로 얼굴을 괴고 나른하게 침대에 누운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베이지색 실크 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었다. 큰 키에 멋진 어깨, 늘씬한 다리,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당당한 자세. 그녀는 디바이스를 보며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무심한 눈길로 화면을 넘기는 모습이 권태롭다.

그녀는 강철 같은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드레이닝에 걸린 채로도 수에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복수했으며 엘리야 민 교수의 가학의 끝을 달리는 인체실험도 견뎌냈다. 그녀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면 존경심을 넘어 경외감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인간을 뛰어넘은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이리라.

‘신은 정말로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담은 바로 그녀의 와병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잠이 덜 깬 모양이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그랬지만 아담은 꽤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잘생기고 매력 있고 친절하니까. 자신이 알몸으로 누워 이렇게 지그시 쳐다보면, 적어도 그가 만났던 여자들은 단 한 명도 그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못했는데 그녀에게는 안 먹히는 모양이었다.

아담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왜.”

세현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렇게 되물었다. 아담은 그녀의 얼굴을 여전히 바라보며 미소를 살짝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의 저는 당신을 모시기 위해 존재하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흐음, 불만은 노친네나 민 교수한테 말해.”

“불만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사실 전 제법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편이라서요.”

아담이 그녀의 허리끈을 살짝살짝 희롱하듯이 건드렸다.

“당신이랑 하는 것도 기분 좋고.”

세현이 피식 웃으며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보았다.

“너 기분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닌데?”

“당신 많이 해보지도 않았다면서 너무 잘하는 거 아닙니까? 어제는 허리가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불만은 민 교수한테나 말하라니까.”

노크 소리가 났다. 세현은 아담에게서 눈을 떼고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와.”

간호사가 아니었다. 양복을 입은 경호원이 그녀의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들어와 테이블에 식사와 약을 두고 다시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점점 갈수록 탈력감과 피로감은 확실히 문제가 되고 있었다. 강장제만 먹어선 아무런 소용도 없다며 그 미친년과 노친네가 쌍으로 그녀를 들들 볶고 있었다. 이 부분에 있어선 세현도 두 손 두 발 들었다. 그녀는 얌전히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식사를 하며 멀티스크린으로 자신의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온 그녀는 금방 옷을 다 챙겨 입었다.

“학교로 가시나요?”

“아니.”

세현은 가방을 챙기고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8시쯤 돌아올 거야.”

아담은 드디어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섰다. 그는 여전히 알몸이었다. 그는 정장을 입고 머리를 대충 묶은 그녀의 옷깃을 한 번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안경을 살짝 들어올리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세현이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만졌다. 그는 이마를 그대로 맞댄 채 입술을 뗐다.

“다녀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녀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그의 올리브색 눈동자와 눈을 맞춘 채 1초 정도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약간 기분 이상한데. 남편이 생기면 이런 느낌일까?”

그는 아무 말없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세현은 병실을 나갔다. 아담은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그라도 일정은 있었다.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의 VVIP 병동 건물은 전부 세현 퀸을 위해 비워 둔 것이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사람은 아담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식당으로 갔다. 세현도 엘리야 민의 식단에 따라 영양섭취를 해야 했고 그것은 아담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는 식당의 직원에게 그렇게 인사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직원은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그렇게 인사를 받아주며 그에게 배식판을 내밀었다.

“교수님은 출근하셨나요?”

“네.”

그녀와 가볍게 스몰 토크를 하면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엘리야 민 교수의 호출이 있었다.

“어, 왔냐.”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인사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그에게 다양한 기기를 매달고 무언가를 측정해보았다. 오라를 이만큼 내보라든가, 저만큼 내보라든가 혈액을 채취하기도 했고 스캔기에도 넣어서 확인해보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실험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 200명, 그리고 무려 마도사가 300여명이나 있었지만 그래도 가볍게 이것저것 쉽게 실험해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담뿐인 모양이었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적고 임상 실험에 임한 인간들을 대상으로 계약서 내용 외를 곧바로 실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중에 100% 문제 소지가 되기 때문이다. 알렉스나 제수스는 제법 값이 나가는 선수들이고 각기 구단이 뒤에 있었으니 더더욱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다. 한민유가 아담과 <엔트>의 과거를 탈탈 털어서 약점으로 잡고 있었으니 아담은 인체 실험에 대해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는데도 민 교수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의 계급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엘리야 민이라는 마도의사가 얼마나 대단한 마도의사이고 정말로 팔다리 몇 개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사람이더라도, 전혀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실험쥐 취급은 아담의 자긍심을 상당히 위협했다.

“아예 소드마스터의 이 부분을 마도사에게 이식하는 방법은 없을까? 드레이닝 완치까지는 안 되더라도 S인자가 체내에서 계속 생성되면 일단 연명 치료에는 효과적일 것 같은데.”

“면역 반응을 neutralize 하면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소드마스터의 장기는 실험실 재배가 아직 안 된단 말이야. 자꾸 괴사해버린다고.”

“뭐…, 일단 떼어내고 불사의 마법 쓰면 다시 자라지 않을까요?”

“이쪽 장기는 시도 안 해봤는데.”

“죽어도 뭐.”

“음, 죽어도 문제 안 되는 놈….”

지나가다가 엘리야 민 교수와 그녀의 제자인 레이지 선생의 이런 대화를 듣기라도 하면 아무리 강철 같은 정신을 가진 남자라도 심장이 덜컥할 것이다. 아담은 세현에게 지금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은 꽤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가 겪고 있는 고난이 더 클 것이기에 거기에 자신의 짐을 얹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불만은 학회장님이나 민 교수님에게 말하라고 했지.’

배우, 아니면 지골로라. 아담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분명히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그를 유혹했을 때부터. 그가 다른 남자들과 다르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여자였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정말 좋았다. 그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럴 때면 헛된 것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만 같은 허무함을 지울 수 없었다.

‘역시 돈이라도 받는 게 어디냐고…, 그렇게 생각해야 할까?’

그걸로 된 걸까? 아담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는 점심을 먹고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다. 몸이라도 움직여야지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의 무료함을 떨칠 수 있으리라. 트레이닝 룸으로 가는 길에 응접실이 언뜻 보였다. 응접실에는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온 위문품으로 가득했다.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향기로운 꽃향기가 났다.

트레이닝 룸은 소드마스터용 최신 운동 기구들이 제법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거의 아담의 전용이었다. 알렉스와 제수스는 올해 엘 드라카 시즌을 대비하여 정기 훈련에 들어가 굳이 여기서 몸을 단련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알렉스나 제수스가 주말에 한 번씩 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주 사용자는 아담이었다.

[우주는 모든 것이었으며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일 것이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거와 미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주, 그리고 우리는 무엇일까. 기억 나십니까, 여러분. 7년 전, 전세계 동시방영 된 과학교양프로그램 <유니버스>로 유명한 HNU의 물리학 교수이자 캘리 박의 제자, 세현 퀸 교수의 드레이닝 와병 소식으로 전세계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아담은 TV를 틀었다. 틀자마자 덥썩 그녀의 얼굴이 나와 놀랐다.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천재 물리학자의 비극, 드레이닝이란 무엇인가>. 유명한 시사 프로그램 MC와 전문가가 데스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막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담은 원래 보려고 했던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그대로 채널을 고정했다. 그는 추가 달린 조끼와 벨트를 메고 러닝머신 위에 올라갔다.

[지금 젊은이들은 잘 모를 테지만 2100년도에 뛰어난 마도물리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헤더 블레어 교수 또한 드레이닝으로 돌아가신 바가 있지 않습니까? 미시 환경에서의 중력과 4대 상호작용 변환에 대한 연구에 힘쓰던 헤더 블레어 교수는 2100년 9월 11일 드레이닝이 발병하여 동년 9월 27일에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손쓸 새도 없었다고 하지요?]

예전 자료 화면이 나왔다. 장례식이었다. 영정에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짧은 머리를 한 흑인의 사진이 있었고 지금보다 훨씬 젊은, 초로의 캘리 박의 모습도 나와 있었다. 지금의 유들유들한 모습과 달리 화면 속 그녀의 얼굴은 몹시 굳어 있었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2099년 브랜다 카시아키 교수의 중력 연구소 폭발로 인한 사망, 2100년 헤더 블레어 교수의 드레이닝으로 인한 사망, 2101년 세린 세르게이 교수의 과격테러단체 피랍 및 살해…. 그 3년은 현생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 캘리 박 교수와 세계물리학회의 사상 최악의 재앙이 연달아 몰아친 시기였죠.]

드레이닝이나 학회에 대해서는 그 나름대로 많이 찾아보긴 했지만…. 그는 TV의 볼륨을 높였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내용은 그가 찾아본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세계물리학회의 비극에 대해서 말이다.

[세르게이 교수의 피랍 사건 때 국제 정세의 흉흉함은 이번 사우디 아라비아 피랍 사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죠. 이후 세계물리학회의 강경하고 효과적인 대(對)테러 정책이 근 30년간 많은 마도물리학자뿐만 아니라 많은 마도사의 무고한 희생을 막았다는 통계는 확실합니다만, 세린 세르게이 교수의 죽음은 여전히 인류가 메꾸지 못한 크나큰 손실입니다. 블랙홀 실험 및 연구 분야에서 세린 세르게이 교수를 뛰어넘는 학자는 현재까지도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니까요.]

그는 한참 러닝머신을 달리면서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리고 웨이트로 옮겨 가서도 계속 시청했다. 오버 워킹으로 팔이 덜덜 떨리자 아차 하고 웨이트를 놓았다.

[…그리고 캘리 박 교수의 마지막 제자, 최고의 두뇌를 가진 제자로 일컬어지는 세현 퀸 교수가 올해 드레이닝에 걸린 것입니다. 만약 이대로 세현 퀸 교수가 사망한다면 캘리 박 교수는 자식 같은 제자를 8명이나 잃게 되는 것입니다. 3명은 사고, 2명은 살해당하고, 3명은 드레이닝으로 잃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사고도, 피랍도, 드레이닝도 50년간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재(人災)입니다, 인재.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위대한 학자들을 이렇게 무참히 잃어야 하는 겁니까. 그들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자성조차도 늦었습니다. 이제라도 전세계가 힘을 모아 대책을 세워야 한단 말입니다.]

그는 그 프로그램을 전부 다 보고 나서야 트레이닝 룸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응접실을 지나치다 가만히 수많은 위문품과 꽃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위로가 되면 좋을 텐데.

*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두고 나간 디바이스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메트로서울로 옮긴 사무실에서 온 전화였다. 아담이 전화를 걸었다.

[아, 대장, 드디어 받네.]

“왜? 무슨 일 있었냐?”

[의뢰가 들어왔는데요.]

“어떤?”

[개인 경호요.]

“그래? 기간이나 내용에 따라 비용 잘 설명했어?”

[네, 바로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오래도 아니에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오전 3시까지면 된대요. 근데 당장 내일 저녁이고 지명이 있더라구요.]

“그래? 누구? 원래 우리 고객이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 되는 애들이 저나 빌이나 체자레 정도잖아요. 다 어린애들이라고…. 왜 대장은 안 되냐고 물어보더라구요. 값도 더 준대요.]

“여자야?”

[여잔데요.]

“나 그런 일 안 한다고 말했지?”

[당연히 말했죠. 그쪽도 그냥 경호만 원한다고 했어요.]

“음…. 알았어.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아담은 전화를 끊고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마이어 씨. 무슨 일이시죠?]

아담이 전화를 건 상대는 한민유였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녀에게 용건을 말했다.

“저 외출 좀 해도 되겠습니까? 엔트에 일이 들어와서요. 내일 저녁부터 새벽까지만 나가면 되는데요.”

[민 교수님께 여쭤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3분 뒤에 다시 연락이 왔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괜찮다고 하십니다.]

“네, 감사합니다.”

외출조차도 이렇게 몇 사람을 거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게 짜증나는데도 이 정도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서 저도 모르게 감사하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처음에는 아예 절대 못 나가게 했으니까 말이다. 그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는데 그가 사인을 하지 않아도 협조적이라 지금은 시간이 된다면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아담은 잠시 디바이스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여자를 쉽사리 낮춰보는 것은 본인들이 대부분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여자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그들의 앞에 서면 남자들은 언제나 기꺼이 몸을 낮춘다. 하지만 일반화하여 말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눈앞에 있는 여자를 속일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사기는 언제나 사기꾼에게 유리한 게임이다.

하지만 무엇에도 속지 않는 여자는 세상 그 어떤 남자보다도 강하다. 사랑에게도, 남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속지 않는 여자를 꺾을 수 있는 것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세현 퀸, 캘리 박, 엘리야 민, 한민유, 그리고 여기 있는 수많은 여자들….

‘사실 숫사자는 선택받았을지는 몰라도 그리 썩 마음이 편하진 않을 거야.’

어쨌든 아담은 다음날 저녁의 외출이 기대되었다. 그냥 잠깐 일을 하러 나가는 것뿐인 데도 말이다. 바깥 공기를 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다음날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나갔다.

“대장!”

“잘 있었어?”

“대장은요? 괜찮은 거예요? 일은 나와도 돼요?”

“아픈 건 아니라니까.”

아담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로 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사무실을 옮기려고 제법 오랫동안 생각해왔는데 세현과의 일로 많이 알아보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옮기게 되었다. 결국 그는 제대로 체크하지도 못하고 계약한 사무실이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사창가도 아니고. 아담은 지저분하게 널린 옷가지를 손에 들어올리며 말했다.

“야, 새로 차린 사무실인데 좀 치우고 살아라. 이러고 손님 맞았냐?”

“아뇨, 이건 잠깐…. 대장, 대장.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연락도 제대로 안 돼요? 전에 그 일 때문이죠? 그 예쁜 누나 왔던 일이요.”

“뭐…, 괜찮아. 따로 개인일을 받은 거랄까.”

“이상한 일 아니에요?”

“괜찮아.”

그는 빌에게서 주소지를 받았다.

“선불이에요. 현금으로 줬어요.”

“음.”

뭐, 이런 일이 종종 온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일 때 말이다. 의뢰 내용은 전남편이 자꾸 쫓아오니 겁을 줘서 못 오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큰 업체에서 수주 받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금액의 일이었지만 용돈 벌이로는 나쁘지 않았다. 아담은 이런 풋내기들보다 훨씬 더 가격이 세기도 했고 말이다.

아담은 사무실에서 장비를 챙겼다. 방탄복을 입고 라이센스가 나온 총기를 챙겼다. 그리고 그 위에 양복을 입고 인이어를 끼고 사무실과의 연결 상태를 확인한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확실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자유로운 느낌이랄까. 차를 운전하여 제법 막히는 시가지를 지나가는데도 콧노래가 나왔다.

‘결혼한 사람들이 이런 기분으로 바람을 피우는 건가.’

아담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제 아침에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약간 기분 이상한데. 남편이 생기면 이런 느낌일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표정이 약간 뚱해졌다. 그는 핸들에 기대어 앞차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 생각없이 호스티스한테 바람 넣는 남자 같잖아.”

괜한 기대 생기게. 그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한적한 곳에 있는 주택이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확실히 누가 따라온다면 무섭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곧 문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뢰 주신 한나 씨?”

“네.”

그녀는 검은 단발 머리에 키는 160 정도였다.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소드마스터는 첫만남에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심장이 엄청 빨리 뛰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진짜 질 나쁜 남자인가 본데.’

근데 어쩐지 어디서 그녀의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이상하네. 아담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담이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 시각부터 27시까지 같이 있어드리면서 전남편이 찾아오면 막아 달라는 말씀이시죠. 위협해서 쫓아내면 되겠습니까? 그 남자가 주로 현관문을 두드리면서 소란스럽게 한다고 했죠? 신고는 앞으로도 안 하실 생각이십니까? 웬만하면 이런 건 경찰에 신고하는 게 더 낫습니다. 부끄러울 일이 전혀 아닙니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아담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불안한 모양이었다. 아담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신고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점차 안정되었다.

“그럼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대로 계시면 됩니다.”

아담이 말했다. 한나는 거실에 있는 카우치에 앉았고 아담은 창가에 서서 밖을 살펴보았다. 기기를 꺼내서 집을 탐색해보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건가요?”

“전남편이나 전남친들이 몰래 카메라나 도청기를 설치해놓기도 하거든요. 저희 직원이 설명해드리지 않았나요?”

“아…, 네.”

아담은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불법 장치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보았다. 아담이 2층에서 내려오자 한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담은 안심하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멀티스크린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담은 거실에서 현관에 가장 가까운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그렇게 조금 있다가 한나가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아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 기억 안 나십니까?”

“네? 아…. 죄송합니다. 뵌 적이 있었나요?”

아담이 물었다. 한나가 답했다.

“리야드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 있습니다. 한나 홉스 중위입니다. 인질 구출 작전을 맡았던.”

“아. 아! 아, 중위님.”

아담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자리를 당겨 앉았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네요. 기억 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돈 때문에 도로 리야드로 갔다가 죽을 뻔했지만. 아담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중위님께 그런 질 나쁜 남편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혹시 오늘 쫓아내도 돌아오면 다시 연락주십시오.”

아담이 말했다. 홉스 중위가 화제를 돌렸다.

“리야드로 다시 돌아갔다가 죽을 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제가 생각이 짧았죠.”

아담이 씁쓸하게 말했다.

“리야드에 계시지 않으셨던 모양이죠? 작전에 참가하고 계셨습니까?”

“아뇨. 운이 좋게도 리야드를 막 빠져나오던 참이었습니다. 후발대로 따라오던 동료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유감이군요.”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잔과 술병을 하나 가져왔다. 그녀는 그에게 잔을 주었다. 아담이 말했다.

“그래도 의뢰 중에 술은….”

“소드마스터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압니다.”

하긴, 그녀는 소드마스터 군인들을 잔뜩 데리고 임무에 들어가는 특수작전부 소속 장교였다. 아담은 술잔을 받았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한나가 어두운 얼굴로 잔을 살짝 들어올렸다. 아담도 잔을 들어올렸다가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으십니까? 다른 동료나 죽은 동료의 가족들은 괜찮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아담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한나는 아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리야드는 몬스터 레어가 되지 않았는데도 처리되었는데요?”

아담은 술을 마저 마시다가 멈칫하고 그녀를 보았다. 순간 오감이 예민해지며 그녀를 샅샅이 탐색했다. 처음보다 잘 읽어낼 수 없었다.

“동료분이 ‘대장은 지금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마이어 씨가 리야드 멸망을 목격한 사람이기 때문 아닙니까?”

그 질문을 듣자마자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그의 약속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었고 우연히 그가 그녀의 드레이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영향이 있는 건가?’ 라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아담은 자신의 의심에 반발했다.

‘아냐.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아담은 아무 말없이 한나를 쳐다보았다.

“저는 그때 세현 퀸 교수와 함께 리야드 소각 작전을 실행하러 갔습니다. 며칠 전에 다니엘 스톤하츠와 인질구출작전 때까지만 해도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던 도시가 벌써 레어화 되었다니. 안타까워하면서 갔었죠. 하지만 도착했을 당시 리야드는 멀쩡했습니다. 그런데도 퀸 교수는 리야드를 멸망시켰습니다. 천만의 무고한 목숨과 함께.”

“…지금 약간 혼란스럽군요. 이 의뢰는 저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전남편은 있긴 한 겁니까?”

아담의 질문에 한나가 순순히 인정했다.

“속인 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왜요?”

아담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한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는 않았다.

“리야드에서의 작전이 끝나고 저는 상관에게 작전의 불법성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불법은 없다고 말하더군요. 불명예 제대를 할 각오를 하고 의원 한 명도 찾아갔습니다. 의원실을 나오자마자 정보국에서 8시간 동안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작전의 당위성에 대해서 한참 설명했지만…. 도대체 어떤 당위가 천만이나 되는 사람을 죽이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였고 괜찮은 겁니까? 저도 그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신세한탄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의뢰 내용을 바꿔야겠군요.”

아담은 남은 술을 한 번에 다 마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겠습니다. 의뢰비는 전부 환불해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도 제가 아무런 힘도 없는 일개 중위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겁니다. 적어도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지 이 엄청난 악행이 바로 잡힐 일말의 기회라도 생기는 것 아닙니까? 당신의 동료들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은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

“전세계 사람들이 세현 퀸 교수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하니 그 사람을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합니다. 시위대를 학살한 독재자가 죽는다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할까요? 그 사람이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까? 그 사람의 손에는 천만 명의 무고한 인간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도, 노인도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 사람만 그런 줄 압니까? 캘리 박도, 세리나 이예프도…. 그 사람들은 악마입니다.”

“그만하십시오, 중위님. 그렇다면 더더욱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째서입니까? 저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된 겁니다. 학살을 돕기 위해 군인이 된 게 아닙니다. 누군가는 알려야 한다면 우리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언론에 가서 알리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아담이 묻자 한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학창시절 동창 중에 큰 언론사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 연락을 해봤습니다.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도 않았고 그게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신은 기사를 쓰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왜냐고 물어보니 학회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기나 했냐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회는 학문을 연구하는 곳 아닙니까? 그런 곳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게 문제이니 그걸 공론화하자는 건데 지금 한국 같은 나라에서 그런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자유민주주의 국가 아닙니까? 친구는 지난 50년간 태평양 국가들의 역사에 등장한 캘리 박의 행보를 찾아보라고 하더군요.”

한나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아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무지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면 좋은 건 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욕하면 그릇된 거라고 판단하면서, 그저 유행에 휩쓸리는 중학생이나 다름없이 살아왔습니다. 이미 언론이나 역사나, 아니, 검색만 잠깐 해봐도 그 사람이 뭘 했는지 나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르는 겁니다. 그냥…, 모르는 겁니다.”

“…그래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담은 애써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무엇으로부터 설득하려고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아담은 동료들을 잃었다. 동료를 잃은 것이 처음도 아니었고 아마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몬스터에게 죽은 이도 있고 사람에게 죽은 이도 있었다. 더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팔고 팔리는 삶이었다. 서로 정을 그렇게 붙이지도, 그렇다고 원한을 심하게 가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부터 오늘까지의 그 모든 것들은 분명히…, 아담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요.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는요? 지금까지 누구의 제재도 없이 자신들을 건드린 도시나 나라를 박살내버리는데 앞으로는 안 그럴 것 같습니까? 그들은 앞으로 더욱더 강해질 겁니다. 도대체 그런 힘을…, 누가 견제할 수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적어도 앞으로 그런 학살이 벌어지지 않도록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단 말입니다. 아닙니까?”

“…….”

누군가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가 마도물리학자 하나를 납치한 것이 리야드 천만의 목숨과 맞바꾸어야 할 일이었냐고 물어본다면 아담은 도대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캘리 박은 수백만명이 나고 죽어도 나지 못할 인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 하나는 수백만명의 목숨값을 지닌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듯 말할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사람의 가치는 분명히 다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격렬하게 부정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담은 살아오면서 인간 말종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아담이 본 인간 중에는 열 살도 되지 않은 자기 자식을 강간하고 어린아이를 팔면서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자신은 사회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피해자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늙은 남자도 있었다. 그런 인간과 죄짓지 않고 사는 인간의 가치가 같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인간 말종 백만 명보다 그냥 평범하게 죄와 멀리 살아가는 인간이 훨씬 가치 있다고,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단언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냥 무고한 시민 천만 명의 목숨값을 하는 무언가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담은 그들이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담이 죽을 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으로 내가 그 사람을 재단할 자격이 되지도 못하는데….’

그가 옳고 그름 앞에 떳떳한 인생을 살았다면 한민유가 아담에 대해 그렇게 많은 약점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몇 백 명 정도를 죽이는 건 괜찮고 천만 명을 죽이는 것은 안 괜찮다고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적어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그 천만 명을 보상하고도 남을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했던 일은 분명 아담 하나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자식을 강간하던 그 인간 말종과도 아담은 기꺼이 거래했었다. 사람들 앞에서 정의를 운운할 수 있는 것도, 적어도 그만큼 생존에 절박하지 않았던 인간들이나 가능한 것이다. 아마 이런 선진국에서 적당한 부모를 만나 군사사관학교까지 나와 장교가 된 그녀는 그런 절박과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죄짓지 않고도 살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듯이 ‘그냥 모르는’ 것이다.

“도와주십시오, 아담.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앞으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립시다. 누군가는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있으면 당신도 영원히 그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의 생존과 자유를 위해서 살아왔다. 적어도 손이 닿는 범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그 사람이 세현 퀸이 아니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 명의 목숨 때문이 아니라, 정의 때문이 아니라…, 이번에도 아담은 자신의 생존과 자유 때문에 한나 홉스의 말에 흔들렸다.

*

최이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태연이 물었다.

“이거 큰일난 거 맞죠? 무슨 일이에요? 이거 진짜예요?”

최이삭은 오태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디바이스를 찾았다. 그는 얼른 자신의 자료를 정리했다.

“너 저장할 거 다 저장했냐?”

“네? 네.”

“연구실 네트워크 전부 끊는다.”

“네?! 애들 실험하는 시뮬레이션 날아갈 텐데요? 제 것도!”

학교의 보안도 나쁘진 않지만 인트라넷으로 침투하는 것에는 취약할 가능성이 있었다. 최이삭은 당장 지하로 달려가 물리학과동 전체의 네트워크를 물리적으로 단선했다. 그리고 디바이스를 보았다.

‘학회에서 준 거니까 괜찮겠지만….’

그는 다시 연구실로 올라와 자신의 멀티스크린으로 연구실 모든 전자 기기의 무선 연결을 강제 비활성화 하고 전원을 껐다. 그리고 자신의 것만 다시 켜서 디바이스에서 저장이 필요한 것만 옮겨서 저장시킨 뒤 다시 스크린의 전원을 껐다.

“너도 디바이스에서 필요한 건 스크린에 저장시키고 디바이스 초기화해라. 전원은 다시 끄고.”

“네? 이건 학회에서 준 거라 괜찮지 않아요?”

대충 비상상황이라는 것은 알겠다. 오태연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최이삭은 시계를 보았다. 디바이스로 교수님과 학과장님께 동시에 전화를 걸었다.

“3급, 아니, 2급 테러 상황이야. 뭐 해야 하는지 알지?”

“아, 그거 책자가….”

오태연은 자신의 서랍을 뒤졌다. 학회에서 매년 안전 및 보안 관련 연수를 개최했다. 그는 책자를 보았다. 해킹 대비책, 납치 및 물리적 테러 대응책…. 최이삭이 말했다.

“내가 애들 기숙사에서 다 데려올 테니까 넌 다른 랩 교수님들한테 물리학과동 단선은 내가 한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전달해. 그리고 나나 교수님이나 학과장님 지시 있을 때까지 대기해. 돌발상황 생기면 대응책에 따라 자체적으로 판단해.”

“넵.”

원래 연수 가면 다 잔다. 오태연은 책자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최이삭은 얼른 물리학과동을 빠져나갔다. 캘리 박이 먼저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홀로그램이 떴다. 그녀는 다른 화면을 보며 이야기 중이었다. 그는 최이삭에게 검지 하나를 들며 말했다.

[잠깐만.]

“2급 테러 상황 대응책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이삭은 간결하게 보고했다.

[어, 잘했다. 애들 물리학과동에 데려다놓고 대테러 쉴드 켜놔. 애들 문제 생기면 전화하고. 끊는다.]

“전 교수님께 갈까요? 쉴드 정도는 저도 칠 수 있습니다.”

[음…, 그래라. 병원 전체 커버 가능하냐?]

“네.”

[마도사 용병도 세 명 가는 중이다. 니가 가는 게 더 빠르겠지. 올 때까지만 잠깐 해라. 세현이는 마법 못 쓰게 하고.]

“네.”

[끊는다.]

캘리 박은 전화를 끊었다. 세현 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직 사태에 대한 보고를 못 받았거나 학과장님과 이야기 중이라 그럴 것이다. 그는 기숙사로 달려가서 자기 연구실 학생들 전부와 다른 연구실 소속의, 특히 마도사는 전부 데리고 물리학과동으로 돌아왔다.

“쉴드 키고 대기해라. 디바이스는 초기화한 후에는 켜놔도 되고. 일단은 그냥 휴게실 가서 자도 된다. 난 교수님한테 가볼 테니까.”

“무슨 일이에요, 선배님?”

하우빈이 눈을 비비며 그렇게 말했다. 사우디 아라비아 피랍 사건 때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물론 그때도 딱히 별일은 없었지만….

“절차에 따르는 것뿐이야. 너희들까지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지만.”

최이삭은 오태연에게 다른 걸 다 맡기고 물리학과동을 나왔다. 경계선을 넘어가자 곧 지잉 소리가 나며 물리학과동 건물 주위로 벌집 문양의 황금빛 돔이 희미하게 드러났다가 빛이 약해졌다. 최이삭은 그걸 보고 얼른 차를 타고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으로 향했다. 세현 퀸의 병동 초입부터 검은 양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제법 돌아다니는 걸 발견했다.

“맥코이 씨!”

최이삭은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로라 맥코이, 최이삭만한 장신에 나른한 눈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제가 쉴드 칩니다. 병원 전체에요.”

“연락 받았습니다. 인원 정리는 어떻게 할까요?”

로라 맥코이가 허스키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다들 건물 최대한 가까이로 배치해주세요. 인도를 따라서 칠 겁니다.”

최이삭은 AR 고글을 꼈다. 인공지능이 위성사진을 분석하여 정확하게 쉴드를 칠 수 있도록 공감각 유도를 시행했다. 로라는 무전을 보내 사람들을 쉴드 안이나 밖에 있도록 정리했다. 로라의 사인을 받은 최이삭은 곧바로 쉴드를 전개했다. 대미사일방어 쉴드를 따라 하여 벌집 문양이 들어가도록 했다.

“응급 환자는 전부 다른 병원으로 갑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됩니다. 박사님도 웬만하면 나가지 마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학과장님은 언제 오시나요?”

로라는 시계를 보았다.

“30분쯤 뒤에 도착하실 겁니다. 마도사병은 15분 뒤에 도착합니다. 바로 교대하시겠습니까?”

“그게 더 관리하기 나으시겠죠?”

“네. 무전기 드릴 테니 들고 가십시오. 연락하면 쉴드 해제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우리 교수님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최이삭은 그 말까지 듣고 얼른 병동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통해 성큼성큼 세현의 병동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켜주었다. 응접실이었다. 세현이 있었다.

“교수님.”

“어, 왔냐.”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TV를 보고 있었다. TV에는 홉스 중위의 두 번째 폭로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리야드는 공중으로 떠올라 산산조각이 나서 분해되었습니다. 인질구출작전 당시 다니엘 스톤하츠가 레어 시티를 처리하기 위해 쓴 마법과는 다른 마법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캐러 접근한 한 도굴꾼의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중력 마법으로 인해 생기는 단층은 찾아볼 수 없고 암석 변성도 전혀 다릅니다. 수소폭탄으로 인한 피해와도 확실히 다릅니다. ‘고작’ 수소폭탄으로는 절대로 이렇게, 거대한 도시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수 없습니다.]

화면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홉스 중위와 자료 화면이 같이 나오고 있었다. 도굴꾼이 찍은 구 리야드가 있던 위치의 영상이었다. 콘크리트로 추정되는 흩어진 조각들이 가루처럼 쌓여 있었고 가운데는 괴이한 폭심지가 있었다. 중력 마법을 쓸 때 흔히 발견되는 암석 변성 자국이나 단층, 혹은 탄소화합물이 많을 때 간혹 발견되는 다이아몬드 암괴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바로 세현 퀸 교수가 인구 천만의 리야드를 지상으로부터 뜯어내는 장면을 말입니다.]

홉스 중위가 화면에 크게 기자 회견 중인 세현의 얼굴을 띄웠다. 세현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전세계에서 그녀의 와병 소식에 보낸 위문품과 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녀의 와병 소식이 매스컴을 탄 이후로 세계물리학회와 HNU, 그리고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의 경호 인원 80%가 그녀를 위한 위문품의 안전성을 확인하는 일만 하고 지냈을 정도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위문품의 양은 전체의 2%도 채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교수님….”

최이삭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정말로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오는 것이다. 홉스 중위가 자신이 임한 작전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소식이 학회에 들어왔을 땐 이미 군도 정부도 홉스에 대한 컨트롤을 잃은 상태였다. 군 장교가 국가 기밀을 누설하는 것은 극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였는데도, 그녀는 언론사도 아닌 일반 대중이 바로 접할 수 있는 매체에 폭로를 감행한 것이다. 아마 언론사에 이야기를 가져가봤자 묵살당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리라. 학회도 여러 수단을 이용해 중재하려고 했고 적어도 이런 폭로만큼은 나오지 않게 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모양이다.

감히

최이삭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분명히 리야드 보복 작전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이었지만, 그래도 곧바로 현 사태에 대해 반감과 괘씸함에 가까운 기분을 느꼈다. 스스로도 다소 놀랄 정도였다.

[우리 군도, 우리 정부도 모두 한 패였습니다. 머나먼 나라의,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무려…, 무려 천만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되어 이런 불의를 보고 지나갈 수 있단 말입니까. 적어도 저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진실을 밝히는 것에 제 목숨을 걸었습니다. 세계물리학회의 만행에 대한 폭로 동영상은 총 5개입니다. 세번째 동영상 또한 30분 뒤에 업로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리야드 멸망 당시의 상황과 세현의 행동을 더 설명하고 이렇게 두 번째 동영상을 마무리 지었다. 화면이 전환되고 앵커가 나왔다. 세현이 잠자코 그것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넌 쟤가 왜 저 지랄을 한다고 생각하냐?”

“네?”

“아니, 그때 사우디를 망하게 한 게 나라는 걸 아는 사람이 쟤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쟤만 유난을 떠냐는 거야.”

최이삭은 머리를 엄청 굴렸다. 그리고 대답했다.

“유난히 도덕심이 높은 사람이라서 그럴까요?”

세현이 픽 웃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최이삭의 얼굴을 보았다. 최이삭은 자신이 완전 틀린 답을 말했구나 싶어 당황했다. 다른 답을 얼른 내놓으려고 했다. 그때 응접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주제파악 할 능력도 없어서 열등감만 심해 도덕이라는 판타지로 상대우위를 노리는 위선자, 아니면 정신병자라서 그렇지. 솔직히 난 두 개가 똑같은 말이라고 본다만.”

캘리 박이었다. 한민유도 뒤에서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한민유의 표정이 안 좋았다.

“헌병이 5분 전 한나 홉스 중위를 자택에서 체포했습니다.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홉스 중위를 심문 중입니다만 시간 내에 찾아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좀 더 빨리 손을 썼어야 했습니다.”

한민유가 세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응접실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캘리 박이 TV 화면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뒤에 누가 있는 거겠지.”

다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민유가 말했다.

“현재로선 배후에 누가 있는지까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는 독단으로 보이는데….”

“곧 어디든 낌새를 드러낼 거다. 여기에 숟가락 얹으려는 놈도 나올 거고.”

그리고 캘리 박은 그들 네 명을 둘러싼 차음 쉴드를 쳤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이 김에 유럽연합을 눌러버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새끼들 원래도 나 졸라 싫어했는데 수에즈 프로젝트 이후부터는 노골적이야. 홉스를 부추겼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도 않고 설사 먼저 바람 안 넣었다고 해도 분명히 이거 이용해서 우릴 공격하려고 들 거다. 홉스 배후에 독일이 있다고 터트려버려. 세계물리학회를 와해하여 유럽의 마도물리학자들을 연합에 복속하고 신(新)아리아 우월주의를 부활시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새로운 추축국을 이루어 세계를 다시금 유럽의 식민지로 만들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그녀의 말은 실제로 홉스의 뒤에 유럽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최이삭은 완전히 입을 딱 벌리고 캘리 박을 쳐다보았고 세현도 눈을 크게 한 번 깜박이더니 물었다.

“노친네 유럽이랑 전쟁이라도 일으키게요?”

“나랑 붙으면 지들이 질 테니까 총칼 들고 여기까지 오진 못하겠지. 근데 이 기회에 여론몰이 해서 나나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너무 실추시켜버리면 곤란해. 혹여라도 태평양에 있는 우리 기반에 타격이 오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하고. 공격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지.”

“알겠습니다. 플랜C까지 짜서 24시간 내에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일단 2시간 내에 제대로 된 거 하나만 가져와. 동영상도 무조건 막는 것보단 내용을 미리 보고 약점을 찾고 싶은데 말이야. 동영상을 다 공개할지 말지도 그때 결정하고.”

“네, 알겠습니다.”

“어디 질 나쁜 테러단체가 자기들이 홉스를 지지한다는 성명이라도 내면 좋겠는데. 그런 건 가만히 있어도 나올 것 같긴 하다만. 뭐, 코카서스 쪽이라든가, 중동 쪽이라든가.”

“나오는 대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오케이. 이럴 땐 원한 사놓은 것도 좋네. 아, 그리고 이 기회에 한국 정치인 중에서 우리 예산 깎으려고 지랄했던 새끼들도 같이 좀 치자. 한국에서부터 유럽까지 이렇게 파바박 고구마 줄기처럼 뜯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방법 좀 생각해 봐.”

한민유는 잠시 캘리 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빈틈이 없는 분이다. 여전히 배울 게 너무나 많구나. 한민유는 그렇게 속으로 경탄하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학회장님."

*

폭로자는 둘로 나뉜다. 대가를 원하는 자와 위선자다. 99%는 전자다. 폭로로 라이벌을 실각시키고 권력을 잡거나, 자신이 당한 불합리함을 토로하여 보상을 얻기 위해서다. 그들이 입으로 어떤 도덕과 윤리와 정의를 읊든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상당히 실리적인 것이다. 물론 후자도 어떤 형태의 대가나 보상을 원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착하다’라거나 ‘옳다’고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이 악하다 생각하는 상대편에 주저없이 총을 쏜다. 상대가 진짜 나쁜 놈일 때도 있고, 가장 억울한 피해자인 경우도 있다.

처음부터 한민유가 문제를 파악하고 홉스를 다루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손에 문제가 왔을 때는 이미 한나 홉스는 자신의 의심을 광신의 형태까지 발전시킨 단계였다. 학회는 악(惡)이고 스스로는 선(善)이라는 이분법에 빠져들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혹은 중증의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녀는 돈, 아니, 스스로의 안녕과 평안을 저버리고 정의(正義)라는, 아마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개념에 자신의 삶도, 커리어도, 심지어 목숨마저도 버리고 있었다. 캘리 박의 말이 맞았다. 이건 정신병이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면 고작 얼굴도 모르는 남들의 관심과 인정을 쫓아 이런 위험한 짓을 벌인단 말인가.

한민유가 제일 싫어하는 사고 방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소속이 있는 장교를 그냥 죽여버릴 수도 없고.’

한국 정부나 군이 학회에 아무리 우호적이더라도, 그들 스스로는 그런 장교 하나를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더라도, 학회 쪽이 직접 그녀에게 손을 대는 것은 지금까지의 공생 관계를 해치게 되는 것은 자명했다. 차라리 중국 같은 독재 국가였다면 정부 측에서 알아서 깔끔하게 처리해줬을 것이다. 한민유는 한숨을 쉬었다.

세현은 약간 질린다는 얼굴로 캘리 박을 바라보았다.

“노친네는 머리를 괜한 데 쓴단 말이야.”

“아, 어쩌겠냐. 덤비는 놈들이 아직도 이렇게 많은데. 살아야 우리 일도 할 거 아니냐.”

한민유는 캘리 박의 지시대로 다른 참모진과 연락하여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캘리 박은 세현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연스럽게 거기에 끼여 들었다. 캘리 박의 천재성이 사실상 그 어떤 분야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경외감이 드는지는 적어도 그 천재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네? 아.”

한민유가 인이어로 들어온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바로 올려 보내십시오.”

캘리 박이 물었다.

“뭔데. 누군데?”

“나머지 동영상 입수했습니다.”

“음? 그래? 다행이네. 근데 너무 빠른데? 홉스 년이 쉽게 잡힌 건 동영상 올라오는 동안 시간 끌려고 그런 거 아니냐? 가짜 아냐?”

“가짜는 아닐 겁니다.”

한민유가 더 설명을 하기도 전에 경호원이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아담 마이어가 들어왔다. 그는 다들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약간 긴장한 얼굴을 했다가 바로 걸어왔다. 그는 멀티스크린 하나를 곧바로 한민유에게 넘겼다. 세현과 최이삭은 의아한 얼굴을 했으며 캘리 박은 오, 하고 바로 윤곽을 알아차렸다. 캘리 박은 아담에게 손짓을 해서 뒤로 물러나게 하고 다시 차음 쉴드를 쳤다. 캘리 박이 한민유에게 말했다.

“홉스가 이놈한테 먼저 접근했구만.”

“네. 마이어를 이용해서 약점이라도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홉스가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였습니다.”

뭐 하려고 관리하기 귀찮게 아담 마이어를 간간히 밖에 풀어줬겠는가. 동조하는 인간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이 그렇게 과격해지지는 않는다. 아담을 이용해서 홉스를 컨트롤할 방법이 생기기를 바랐다. 어느 쪽으로든(그는 제법 미남이지 않은가). 현재로선 최선의 방향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거라도 건졌다. 한민유는 멀티스크린을 조작하여 남은 세 개의 폭로 동영상을 차례로 재생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14년 전 체첸 반군의 러시아 물리학자 납치 사건 이후 러시아군에 의해 반군이 와해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10년 전 미국 기밀 문건 유출로 세계물리학회의 관여가 이미 밝혀진 바 있습니다. 30년 전 세린 세르게이 교수의 효수 사건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학회는 유엔 회원국의 리비아 침공을 주도했습니다. 리비아는 쑥대밭이 되었고 종전 직후 발생한 수에즈 게이트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습니다. 세계물리학회는 이미 두 개의 나라를 멸망시킨 겁니다. 도대체 이들에게 이런 힘이 어떻게 허용되고 있는 겁니까.]

캘리 박과 한민유는 어떻게 이 동영상을 활용할지에 대해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현도 몇 가지 말을 추가했다. 최이삭은 동영상의 내용이 일반 대중에게는 너무나 자극적이고 선동적일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곧바로 성난 코끼리처럼 앞에 있는 건 무엇이든 짓밟으려고 들 것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약간 패닉에 빠졌다.

‘이건….’

최이삭은 차음 쉴드 너머에서 이쪽을 굳을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아담 마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이건 그녀의 업적에 사람들이 돌을 던지게 만들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갈 지도 모른다.

“그럼 원본 그대로 가자.”

“아, 또 학교 시끄럽겠네.”

“당분간 연구실 나갈 생각은 접어야지. 병원에 있어라. 나중에 인권 지랄하는 새끼들이 취재한다고 환자 인권도 존중해주지 않는다고 까야지.”

“학회장님, 2분 전에 와하브 분파에서 홉스에 대한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아, 좋아. 빠른데? 걔들도 노는 건 아니야, 그치? 이게 직업정신이야, 직업정신. 지금부터 언론에서 홉스의 폭로 동영상 언급할 때 이 부분을 크게 걸어서 내라고. 걔들이 최근에 테러 일으킨 적 있나?”

한민유는 캘리 박의 말에 피식 웃었다가 세현에 최이삭까지 쳐다보자 입술을 말며 표정을 숨겼다. 웃어? 세현의 눈빛이 무서웠다. 학회장님은 이럴 때 꼭 농담을 하는 버릇이 있으시단 말이다. 거기다 진짜 재밌어서 곤란하다. 캘리 박은 한민유의 표정을 신경 쓸 새 없이 홀로그램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한민유는 다시금 꼿꼿한 자세와 표정을 유지하며 빠르게 설명했다.

“정확하게 이 계열은 아니지만 와하브 전체로 보면 최근 2년 동안 크게 한국에서 2건, 미국 4건, 유럽에서 9건 있었습니다. 저번 백화점 폭발 사건도 와하브 계열의 짓이었습니다.”

“병신 새끼들. 오케이, 그걸로 가.”

“알겠습니다.”

최이삭의 초조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어른들은 차분했다. 동영상에서도 나온 것처럼 그들에게 이것이 처음 겪는 일이 아니더라도 충격이 적은 것은 분명 아닐 텐데. 세현 퀸은 현재 드레이닝에까지 걸려 있었다.

‘보통 어른도 아니시지.’

최이삭은 자신이 여기서 여전히 한 사람의 몫을 다 하지 못하는 남자라는 걸 실감했다. 그는 캘리 박과 세현 퀸, 한민유의 얼굴을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한민유는 그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았다. 그가 도시 한두 개 정도는 가뿐히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있더라도 어떤 도시를 어떻게 날려야 그들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 판단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학업적인 부분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부족한 것이다. 학과장님은 교수님께 정치질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누차 말했고 교수님은 그 말을 항상 무시했는데도 여전히 교수님은 여기서 많은 것을 책임지고 결정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관심이 없고 싫어한다고 해서 인간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얼추 대책의 윤곽이 잡히자 세현은 소파에 앉았다. 캘리 박이 쉴드를 없애기 전에 한민유가 세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이어한테 입맞춤이라도 한 번 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세현이 황당하다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야, 너 진짜 일 똑바로 안 할래? 내가 그런 짓까지 해야 하냐?”

한민유가 빌 듯이 두 손을 모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남자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리야드도 다시 돌아갔잖아요. 어떻게 믿어요.”

“그럼 이제는 믿을 만한 거고?”

“글쎄요….”

“알아서 해라. 그러라고 월급 받는 거다.”

세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한민유가 살짝 샐쭉한 태도로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저 남자 꽤 마음에 드시면서….”

“안 가냐? 노냐?”

“아닙니다. 갑니다.”

세현이 역정을 내자 한민유는 얼른 태도를 바로했다. 캘리 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쉴드를 없앴다. 한민유는 마도사 하나와 아담을 데리고 응접실을 나갔다. 캘리 박은 TV를 껐다. 묘한 정적이 실내를 잠깐 적셨다. 그간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던 최이삭의 초조는 극에 달했다.

“그걸로 괜찮을까요? 우리 교수님 괜찮으실까요?”

최이삭은 캘리 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캘리 박은 디바이스에 저장된 연락처를 훑어보고 있었다. 10분 뒤면 그녀는 병원을 떠나 사태 수습과 이용을 위해 필요한 금붕어들을 만나야 했다. 그녀는 성의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다.”

“사우디가 먼저 우릴 납치한 거잖아요. 분명히 국제법 위반이고 제재 수단으로 공습도 합법이잖아요? 유엔 승인도 난 거구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그냥 잔인한 일로만 보이겠지만…. 중러 전쟁 세 번 터질 동안 5천만이나 죽을 땐 아무 말도 안 하던 사람들이….”

한나 홉스를 표현할 때 도덕심이니 뭐니로 표현하던 최이삭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상황에 일말의 불합리함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억울했다. 세현이 씁, 하면서 최이삭을 보았다. 최이삭은 세현을 보며 입을 딱 다물었다.

“노친네 일 하시는데 얼쩡거릴래? 여기 와서 앉아.”

“그래도….”

캘리 박도 한 마디 했다.

“너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냐? 왜 이렇게 말대꾸가 많아?”

“그러니까요. 안 와?”

최이삭은 굳은 얼굴로 상석에 앉은 세현의 오른쪽 카우치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왼쪽 손목 안의 마력측정기에 눈을 뒀다가 슬그머니 카우치에서 엉덩이를 떼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현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게 왜 이러나, 하고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전부 제 탓입니다. 제가 그때 기회가 왔을 때 자력 탈출을…, 아니, 애초에 그때 잡히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한국으로 바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저만 잡히지 않았어도 치엔 박사도 안 잡혔을 거고…. 다 제 탓입니다.”

최이삭이 그렇게 자책하며 말했다. 세현은 눈을 잠깐 동그랗게 떴다가 최이삭을 내려다보았다.

“아, 맞아. 그랬지.”

세현은 대꾸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최이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뺨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라. 니가 할 일을 똑바로 못 하면 내가 피 보고 내가 피 보면 노친네까지 피 보고 노친네가 피 보면 우리 전부 피 보는 거야. 너 공부는커녕 테러 단체 같은 데서 시키는 대로 사람이나 죽이면서 남은 여생 보내고 싶냐?”

세현이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아뇨….”

최이삭은 흡, 하고 숨을 멈췄다가 대꾸했다. 그때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가 그를 설득하고 회유하기 위해서 그를 감금하고 굶기고 때리고 협박한 것을 어찌 잊겠는가. 그들의 힘은 많은 이익 단체들이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다면 없애 버리겠다는 의도로 접근하는, 모두가 눈이 벌게져 탐내는 자원이었다. 그도 몇 시간 전 후배들에게 교수님의 가혹한 처사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강론하지 않았던가. 마치 쇠라도 담금질하듯 제자들을 혹독하게 굴리는 건 외부의 위험 요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생 그 모든 것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근데 너 말이야. 자꾸 요새 하는 식으로 하면 졸업도 못하고 그런 데 취직하게 된다? 어? 어디 연구소에 갇혀서 시키는 대로 마법이나 쓰면서 기계처럼 살아야 한다고.”

“네, 넵…. 죄송합니다, 교수님.”

“내가 아무리 오늘내일 한다지만 니가 수준도 안 되는데 졸업시켜 줄 것 같냐? 어? 내가 그렇게 물렁해 보여? 그래서 말도 안 듣고 말대꾸도 하고 일도 똑바로 못하는 거냐? 응?”

“아, 아뇨…! 아뇨, 교수님! 오, 오늘도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교수님. 아칸소 게이트 시뮬레이션도 거의 다 만들었고…! 말대꾸한 게 아니라 저는 걱정이 돼서…!”

“그게 말대꾸잖아, 멍청아. 랩장이 일을 똑바로 못하는데 랩이 잘 굴러갈 줄 아냐? 안 봐도 비디오다. 요새 내가 자리 많이 비운다고 오 박사나 진 박사는 빠져 가지고 랩도 늦게 나오고 그럴 거 아냐. 그게 다 니가 똑바로 일을 못해서 그런 거라고. 가끔 보면 넌 그냥 착하고 쓸모없는 놈이 되고 싶은 건가 싶다. 내가 도대체 널 왜 계속 데리고 있는 건가, 그런 회의감이 자꾸 들게 한달까?”

교수님은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가. 안 그래도 딱 어제 애들이 한 번 지각했다. 최이삭은 헉, 하고 고개를 막 저었다.

“애, 애들이 그러진 않습니다. 그 정도로 정신 빠진 애들이 아닙니다. 제가 잘 단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교수님.”

세현은 아주 가볍게(?) 최이삭을 갈구면서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캘리 박이 디바이스에서 시선을 떼고 세현을 돌아보았다.

“간다.”

“아픈 척 많이 하고 있을게요.”

“오냐.”

“다, 다녀오십시오, 학과장님.”

“오냐.”

캘리 박이 문으로 다가가자 경호원이 문을 열었다. 한민유가 밖에 있었다. 캘리 박과 한민유가 함께 복도를 걸어가 사라졌다. 아담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응접실 내부를 바라보았다. 상석에 앉아 있는 세현이 무릎을 꿇고 앉은 최이삭의 귀를 당기며 괴롭히고 있었다. 최이삭은 눈이 약간 벌게진 채로 울 듯 말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담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가 잠깐 아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세현에게 기어코 꿀밤을 한 대 맞았다.

“집중.”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한눈 판 게 아닙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항상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도 제대로 시정이 안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정말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더욱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현이 없을 때의 최이삭이란 남자는 저 정도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느낌은 아니다. 굳이 세현이 아니더라도 제법 가학심을 느낄 모습이었다. 아담은 그가 세현에게 야단 맞기 위해서 그녀의 앞에서만 저런 태도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래, 이런 시국에 내가 너 대신에 말 안 듣는 박사 1, 2년차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냐? 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시정하겠습니다, 교수님.”

테이블에 둔 무전기에서 알림이 왔다. 최이삭은 세현에게 무언의 허락을 구한 후 귀가 잡힌 채로 겨우 손을 뻗어 무전기를 잡았다.

“네, 맥코이 씨.”

[쉴드 해제하셔도 좋습니다.]

“네.”

[근데 마도사병이 대미사일 방어 쉴드 흉내는 어떻게 낸 거냐고 물어보는데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 네. 네…. 바꿔주십시오.”

최이삭은 그대로 세현의 눈치를 보며 다시금 무언의 허락을 구하고 그녀가 눈짓하니 그대로 귀를 잡힌 채 무전 건너편 마도사에게 빠르게 마도식과 마력 분배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무전을 잡고 최대한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도록 굽신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세현은 여전히 미덥지 못한 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짧게 차고 아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약간 재밌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이런 것까지 우리를 위해 해주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

아담은 잠깐 미간을 움찔했다. 그는 무언가를 그녀에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모르는 것인가? 한민유의 독단? 아니, 그녀가 안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지?’

그는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오랜만에 그에게 큰 무력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

한나의 이야기에 흔들린 아담은 일단 그녀와 더 대화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군도, 정부도 모두 한 패라고 말했다. 벌써 폭로 동영상이 준비되어 있으며 아담의 증언도 추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분명히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적어도 여러가지 견제 조치가 있는 국가가 마피아나 다름없는 학회보다는 나을 것이라 말했다.

그게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생각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몰려 있었던 모양이다. 자리를 옮기고 준비된 카메라 앞에 앉을 때까지 홀린 듯했다. 안전을 위해서 한나 홉스는 자택에 남고 영상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아담을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자신의 말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녀가 끝까지 아담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그 말들은 아주 달콤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던가. 그녀의 조력자가 카메라를 조작하고 준비된 문서를 받을 때까지 어떤 기대에 차 있었다. 무슨 기대였는지 나중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한나와의 영상 통화에서 아주 작게 첫번째 폭로 동영상의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들었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못 하겠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중동의 부국도 멸망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작 이런 동영상 몇 개로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가. 힘도 뭐도 없는 인간들이 그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다 말하는 것은, 설사 그것이 진심이라 하더라도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이 힘들 때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짓을 하겠다고?

아담은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처음으로 사랑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끌리는 마음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리야드에서 죽은 동료의 얼굴들도 떠올랐다. 갓 열다섯 살이 된 어린애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래도 제 목숨은 챙길 수 있을 때까지만 도와주자고 생각했다. 어릴 적 부모의 빚에 팔려 갔을 때도 이렇게 갇혀 있진 않았던 지금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져서 비참했다.

그는 정말로 감정적인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순간 감정의 흔들림이 극에 달해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영상 통화로 연결된 한나 홉스의 집에 누군가 들이닥쳤고 아담은 반사적으로 이름도 듣지 못한 다른 인간이 보고 있던 스크린을 빼앗았다. 그대로 한민유에게 전화를 걸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통화연결음만 이어지는 디바이스를 든 채 어두운 밤거리를 빠르게 걸어가며 아담은 오싹함을 느꼈다. 그 누구도 저런 식으로 아담에게 도와주겠다든가, 함께 하자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최선이라던가…. 마치 아담이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그런 대우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말해준 적은 없었다. 그들의 태도나 말의 열기는 그를 흔들었다. 어째서? 어떻게?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 건 처음이다.’

섬뜩했다.

앞장서서 도와주겠다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일 때가 있다. 스스로가 그런 것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안전한가? 이대로 있어도 좋은가? 무언가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 초조함, 불안감, 그리고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그가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한민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거대한 쉴드에 둘러싸인 병원을 보면서 이유도 없이 절망감에 휩싸였다. 마치, 마치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처럼.

내가 배신하려고 했다는 걸 이미 그들이 알아챈 것일까? 누군가 홉스 중위를 잡아갔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걸로 끝인 걸까? 아니,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애초에 거기 따라갈 때도 반쯤은 어떤지 살펴보려고 한 것도 있으니까. 반대로 설득하려고 한 것도 있으니까.

‘그 사람이 알게 되면….’

아담은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젠장, 아니라고.’

제기랄,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어? 그녀는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고! 그녀에 대한 마음 때문에 상황을 과대해석 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답지 않았다.

‘괜찮아. 갑작스러운 상황이니까 이쪽도 당황했을 거야. 일단 나머지 동영상은 챙겼으니까. 원본은 아니더라도 미리 본다면 대책은 세울 수 있겠지. 차라리 공과에 가깝다. 왜 꼴사납게 자꾸 불안해하는 거냐. 하인델토크에서 죽을 뻔했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리야드에서도. 그제서야 아담은 좀 진정할 수 있었다. 이게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그때보다 더 심각할 상황일 리는 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마이어 씨?]

그때 타이밍 좋게 한민유가 전화를 받았다. 아담은 빠르게 용건을 전했다.

“스페이스에 올라온 동영상은 확인하셨습니까? 홉스가 제게 접촉해왔습니다. 원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동영상을 확보했습니다.”

[네? 아.]

그리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말했다.

[바로 올려 보내십시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키가 큰 사람이 아담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옆으로 쉴드가 일부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응접실로 올라갔다.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를 돌아보았다. 캘리 박, 한민유, 최이삭, 그리고 세현 퀸이 있었다. 아담은 그들 전부와 눈이 한 번씩 마주쳤다. 그리고 곧바로 한민유에게 스크린을 넘겼다. 그들은 곧바로 쉴드를 치고 자기들끼리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언가 말을 나누었지만 아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담은 굳은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캘리 박이 한민유와 한참 얘기를 했다. 세현 퀸도 종종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쉴드가 없어지고 한민유가 아담에게 곧장 다가왔다.

“갑시다. 얘기 좀 자세히 들어보죠.”

아담은 세현을 한 번 보았다가 그녀를 따라 나갔다. 아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홉스 중위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저는 그냥 바깥 바람이나 쐴 겸 의뢰가 들어와 나간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홉스 중위가 뭐라고 하던가요?”

“…리야드 일에 대해서 증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생존자로서….”

“그래서요?”

“중위를 설득하고 싶어서 일단 얘기를 했습니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 아닙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카메라를 준비해두고 제게 대본까지 줬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스크린이랑 대본을 가지고 바로 나왔습니다.”

“잘했습니다. 동영상을 업로드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죽였나요? 위치는 어디입니까? 원본인지 아닌지는 모른다고 하셨죠?”

“…죽이진 않았습니다. 위치는 여기입니다. 도망갔을 겁니다.”

“아, 제 질문이 너무 성급했네요. 혹시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 있으면 바로 치료를 받으시죠.”

“아뇨….”

아담은 한민유의 멀끔한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로 그녀는 아담보다 6살이나 어렸다. 한민유는 홀로그램으로 아담이 받은 대본을 확인하면서 물었다.

“그때 했던 대화 내용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홉스 중위나 다른 사람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아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설명했다. 그리고 한민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쉬시겠습니까? 학회장님도 나오실 겁니다. 퀸 교수님과 계시고 싶으시다면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홉스 중위가 제게 접근할 걸 아시고 계셨습니까?”

“아뇨…. 저도 거기까진. 오늘 일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한민유는 한숨을 푹푹 쉬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심전도나 숨소리도 살폈다.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복도에는 아담도 지금까지 못 봤던 얼굴들이 많이 있었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캘리 박이 나왔다. 캘리 박이 한민유에게 말했다.

“가자.”

“네, 안 수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 나 그 년 일 잘하는 줄 알았거든?”

“티는 안 내실 거죠?”

“아오, 끝나고 봐야지.”

“안 수석 잘못이라기 보단 군에서 넘어올 때부터 총체적 난국이었어요. 물론 안 수석도 안이하긴 했지만….”

“누가 이걸 이 지경까지 만든 거야? 어? 내가 기필코 그 새끼부터 자른다.”

캘리 박은 성질을 내며 복도를 걸어갔다. 아담은 응접실 밖에서 세현이 최이삭을 갈구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긴가민가하다가 결국 확신했다.

‘배신할지 시험한 거야.’

왜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담의 직감이 그랬다. 지금에 와서 믿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뿐이다. 홉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리야드 멸망의 목격자인 그를 단속하고자 한 학회의 입장이 설명된다. 그는 리야드 멸망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 없는 살생까지 구태여 할 정도로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게 인구 천만의 도시라도 뭉개버려 위엄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그 앞에서 아담 마이어라는 남자가 도대체 뭐라고 그들이 존중씩이나 해주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아담이 홉스의 말 앞에서 흔들림으로써 그들의 의심에 사인이라도 해준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러웠다.

“네가 이런 것까지 우리를 위해 해주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그때 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담은 살짝 울컥했다.

‘당신이 뭐라고….’

이런 기분까지 들게 한단 말인가.

‘왜. 어째서. 당신 같은 거 사실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은 죽을 거고 난 돈만 받으면 끝이라고.’

아담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세현은 아담에게서 시선을 떼고 최이삭의 뺨을 툭툭 쳤다.

“이제 일어나. 가봐.”

“알겠습니다, 교수님. 편히 쉬십시오.”

최이삭은 일어나서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아담의 옆을 빠르게 지나 밖으로 나갔다. 세현에게 잡혔던 그의 왼쪽 귀만 벌겠다. 아담은 그 자리에 선 채 세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겪었던 수모, 자괴감, 불안이 모두 그녀가 없었다면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녀야말로 아담의 족쇄였다.

“오늘 수고했어. 너도 쉬어.”

세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병실로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담은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알고 있었나요?”

세현이 ‘응?’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홉스 중위가 제게 접근하려고 했다는 걸….”

아담은 그제야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세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세현은 내가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 쓰겠냐고 툭 던지려다가 한숨을 쉬었다.

‘약간 귀찮군….’

세현은 그에게 잡힌 손을 풀어 자신이 그의 손을 다시 잡아 힘을 주어 당겼다. 그리고 말했다.

“나 이런 거 귀찮아. 떠보려고 하지 마.”

귀찮다는 말에 아담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는 잠깐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뭐라고 대꾸하려고 하자 세현이 씁, 하고 소리를 내서 다시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노친네나 한 비서야 속에 구렁이가 백 마리는 들어있겠지만 내가 널 상대로 그런 걸 일일이 따지려고 할 것 같아?”

세현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담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을 스르륵 맞잡았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그녀와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그건 절 믿는다는 말씀이신가요?”

“믿긴 뭘 믿어. 내가 믿는 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어. 넌 그냥 침대에서나 좀 쓸모 있는 남자일 뿐이야.”

웃을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담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그녀의 말에 마음이 또 흔들렸다. 그리고 그건 역시나 불안했다. 표정이 다시금 굳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에게는…, 기대해버리고 맙니다. 그런 건 이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뭘?”

세현이 물었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맞잡은 손에 더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몸을 마주댔다. 아담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현은 인상을 약간 썼다.

“지금 시국이 이런 걸 할….”

아담은 그녀가 뭐라고 하든 그녀와 코를 잠깐 마주치고 바로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세현이 인상을 좀 더 쓰며 그의 허리를 잡았다. 아담이 속삭였다.

“저는 조금 귀찮지만…, 침대에선 쓸모가 있는 남자이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에게 제 쓸모를 다할 수 있으면 조금은 자신감이 생길 것 같은데요.”

“진짜 귀찮아.”

세현은 그와 눈을 마주친 채로, 하지만 탐탁치 못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잘 아는 남자였다. 이렇게 그가 은근히 유혹해오면 시선을 떨어뜨리기 힘들 때가 있었다.

“어떤 일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견디고 지나가야 할 뿐이라는 걸 알지 않습니까. 당신도 나도…, 기분 좋게 함께 견뎌보는 건 어떻습니까? 섹스에 지치면 아픈 척하는 것도 쉽지 않을까요?”

“그건….”

그는 세현의 뺨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그녀가 눈을 감으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에서 눈을 한 번 더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으며 함께 입을 맞췄다.

*

2128년 6월 23일 토요일, 아침 8시 55분. 제수스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른 뛰었다. 늦었다.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의 VVIP 병동은 상아빛 벽에 유리로 둘러싸인 멋진 건물이었다. 지름길로 가려다가 퍽 하고 어디에 머리를 박았다. ‘악!’ 하고 잠깐 이마를 붙잡고 쪼그려 앉아 고통에 끙끙거리던 제수스가 손으로 투명한 벽을 만져보았다.

“이거 뭐야?”

정확하게는 희미하게 벌집 모양의 문양이 보였다. 대미사일 방어 쉴드였다. 제수스는 그걸 주먹으로 쿵쿵 쳐보았다. 원래 이러면 빛이 나야 하는데? 좀 이상하다. 제수스는 건물 근처에 돌아다니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을 하나 발견하고 일어나 그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제수스를 보며 손가락으로 정문 쪽을 가리켰다.

“아, 존나 아프네.”

제수스는 혹이라도 날 것 같은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정문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문으로 가니 평소와는 달리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쉴드를 똑똑 두드려 시선을 끌었다. 안쪽에 있던 사람이 다가왔다.

“방문객이신가요? 현재 VVIP 병동은 출입이 폐쇄되어 있습니다.”

“응?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나 지금 빨리 안 들어가면 의사 선생님한테 죽어.”

“급한 일이 있으시면 본원으로 가셔서 말씀하십시오. 불편함을 끼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인간들의 기색이 느껴졌다. 파파라치? 제수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많았다. 제수스는 다시 돌아가려는 그 양복 입은 사람을 다시 불렀다.

“아니, 난 여기 세현이…, 아니, 세현 퀸 교수 때문에 온 건데?”

제수스가 조금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돌아가던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이 제법 제수스를 돌아보았다. 그건 쉴드 안쪽에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갑자기 제수스의 근처로 다가왔다.

“웨스트이글의 제수스 강 선수 아닙니까? 여기는 어쩐 일이시죠? 세현 퀸 교수와는 무슨 사이입니까?”

“응?”

제수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디바이스의 마이크 부분을 들이대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곧 주변에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TFC 선수라구요? 현재 VVIP 병동의 환자는 세현 퀸 교수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현 퀸 교수와는 무슨 사이인가요? 홉스 중위의 폭로 동영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폭로 동영상에 대한 퀸 교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당시 리야드에는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게 사실입니까?”

“퀸 교수는 작전 당시 리야드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나요?”

“세현 퀸 교수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드레이닝을 고칠 방법은 나오지 않은 겁니까?”

어어…. 제수스는 당황하여 쉴드에 등을 붙이고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제수스는 고개를 돌려 쉴드 안쪽을 쳐다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키가 엄청 큰 여자 하나가 제수스를 보면서 무전기로 뭐라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전을 듣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몇 명의 사람들이 제수스가 있는 쪽으로 왔다.

“물러나십시오.”

제수스가 있는 쪽만 쉴드가 조금 열렸다. 제수스는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쉴드가 닫혔다. 제수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대장으로 보이는 나른한 눈매의 여자가 말했다.

“앞으론 지각하지 마십시오. 빨리 들어가십시오.”

날 아나? 제수스는 자신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 여자와 등 뒤의 기자들을 한 번 더 본 뒤 떨떠름한 태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주중에는 알렉스와 제수스 둘 다 훈련을 받아야 해서 병원에 하루 종일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둘 다 정말 죽지만 않는다면 뭐든 다 해도 되는 수준의 무시무시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엘리야 민은 주말 이틀,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을 실험체로 빡세게 굴렸다. 한 번은 알렉스와 제수스 둘 다 혈액의 반 정도를 인공혈액으로 대체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토기가 올라와 두 시간 동안 속을 비워내야 했었다. 뭐, 그 정도로 힘든 날은 사실 그때가 유일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레이지 선생이 복도에 서 있었다. 사각 안경을 쓰고 삐쩍 마른 그녀는 제수스를 발견하자 탈의실을 눈짓했고 그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알렉스가 먼저 와 있었다. 아담은 없었다. 꼴등은 아닌 모양이다.

“밖에 뭐야? 무슨 일 있어?”

제수스는 알렉스와 좀 떨어진 곳에 서서 락커를 열었다. 알렉스는 티셔츠를 벗으며 대꾸했다.

“몰라. 테러 훈련 같은 거 아냐?”

“기자도 있던데. 너한텐 뭐 안 물어봤냐?”

“몰라. 난 차 타고 안으로 들어와서.”

“아, 난 뭔 안내원이 다른 주차장으로 보내길래 딴 데다 주차하고 뛰어왔는데.”

제수스가 투덜거리면서 입고 온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그의 어깨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픽 비웃었다.

“웨스트이글에선 일대일 격투에서 할퀴는 법도 가르쳐주냐?”

“엉?”

제수스는 ‘뭔 소리야?’ 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왼쪽 어깨 뒤를 보았다. 그의 견갑골 위에 손톱자국이 3~4cm가량으로 두 줄 나 있었다. 아. 제수스는 알렉스의 깨끗한 등짝을 한 번 보고는 씨익 웃었다.

“아, 이거~”

제수스가 알렉스의 등을 팡팡 치며 호쾌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인상을 썼다.

“뭐야, 이거? 기분 나쁘게 왜 또 친한 척?”

“니가 애새끼긴 애새끼구나. 이게 뭐겠냐, 어? 다 이 형이 우리 세현이를 뿅~ 가게 해줬다는 훈장 아니겠니? 하하.”

“!”

알렉스는 헉 하고 눈을 크게 떴다가 순간 거울에 자신의 등을 비춰보았다. 아주 깨~끗했다. 제수스는 알렉스의 등을 더 팡팡 치며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알렉스는 자존심이 팍 상해서 그의 팔을 바로 쳐냈다.

“거짓말하지 마. 아프게 해서 그런 거 아냐?”

“너 할 때 세현이가 아프다고 하냐?”

“아, 아니거든!”

“야, 너 얼마나 못하는 거냐? 잘못하면 여자들 금방 다쳐.”

처음 했을 때는 제수스도 세현을 꽤나 아프게 했지만 지금은 기억도 안 났다. 제수스는 ‘내가 이겼다~’ 라는 생각에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니가 어린 맛에 세현이가 아주 쪼~오끔 귀여워해준다고 그게 좋은 건 줄 아냐? 어? 그거 그냥 애새끼 같다는 거지 남자도 뭐도 아니라는 거라고.”

제수스가 킥킥거리며 그를 놀렸다.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알렉스는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신경질을 냈다.

“뭐라고?! 아니거든!! 교수님은 나 제일 좋아하거든?!!”

알렉스가 그렇게 소리쳤지만 제수스는 만면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검지로 툭툭 가리키고는 마저 옷을 벗었다. 알렉스는 그게 매우 기분이 나빴다. 이마에 핏줄이 빠직 섰다.

“싸우자는 거냐, 이 걸레 새꺄.”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자 제수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뭐라고? 씨발,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냐, 좆만한 새끼가.”

“걸레 새끼한테 걸레 새끼라고 했는데 뭔 문제냐, 이 걸레 새꺄?”

알렉스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도 알렉스의 말에 욱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대로 서로 찌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딱 마침 누군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부터 왜 또 싸우고 그래….”

아담이었다. 그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탈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알렉스와 제수스의 사이로 들어와 딱 가운데 있는 락커문을 열었다. 제수스는 빡친 얼굴로 아담의 너머로 알렉스를 여전히 노려보며 말했다.

“말리지 마, 늙다리. 저 좆만이 내가 오늘 싸가지를 가르쳐준다.”

“지~랄.”

“또 왜 싸우는데. 나 오늘은 말리기도 피곤하다.”

아담은 반쯤 감은 눈으로 하암, 하고 크게 하품을 했다. 제수스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눈을 찌르는 흉내를 냈다. 알렉스는 가운뎃손가락을 들며 혀를 내밀었다. 아담은 자신의 티셔츠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사이 좋게 지내, 사이 좋게….”

알렉스와 제수스는 누가 더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는지 시험하듯이 서로를 가장 모욕하는 표정과 손짓과 말을 하면서 상대가 먼저 덤벼들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제수스에게 아주 과장된 입모양으로 한 마디 날렸다.

“걸.레.”

제수스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부글부글한 얼굴로 알렉스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하,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다. 그리고 알렉스의 눈을 가만히, 똑바로 쳐다보며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래서 뭐, 이 조루 새끼야.”

“뭐라고!?”

알렉스가 울컥해서 자기 락커를 쾅 하고 닫았다. 제수스가 헹, 하고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니거든!!”

“싸우지 마라….”

아담은 알렉스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귀가 따가워 인상을 찌푸리며 훌쩍 티셔츠를 벗었다. 싸우겠다고 락커를 쾅 닫고 둘 다 전라로 아담이 있는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오다가 깜짝 놀라 아담을 쳐다보았다.

“!!!”

정확하게는 아담의 등짝에 시선이 꽂힌 채로 둘 다 말을 잃었다. 그가 진짜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하며 바지랑 팬티까지 벗자 시선이 그 아래까지 내려갔다.

아담의 등은 목부터 엉덩이까지 아주 엉망이었다.

그의 뒷목, 승모, 어깨, 팔뚝, 엉덩이, 허벅지까지 손톱 자국이 세 줄이나 네 줄로 아주 길게 나 있었고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그의 왼쪽 견갑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길게 죽 그어진 깊고 기다란 상처였다. 갓 생긴 상처처럼 아직도 핏기가 가시지 않았다.

“…….”

“…….”

아담은 옷을 다 챙겨 넣다가 문득 주위가 잠잠해서 둘을 돌아보았다.

“이제 안 싸워?”

둘은 황급히 아담의 등에서 눈을 떼고 아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알렉스가 빽 하고 짜증을 냈다.

“늙은 거 티 내는 거야, 뭐야! 하품 쩍쩍 하고 다니지 마!”

“어, 내가 그랬나.”

아담은 너무 피곤한 티를 냈나 싶어 머쓱했다가 정말로 하품이 나와서 크게 하품을 했다.

“아, 미안.”

눈도 뻑뻑했다. 아담은 눈을 손등으로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어제 좀 일이 있어서 잠을 못 잤더니…. 진짜 나이 들어서 이런가. 예전 같지가 않네. 좋은 것 좀 먹어야겠다.”

“먹긴 뭘 먹어! 먹는다고 다시 회춘이라도 할 줄 알아?! 하품하다가 주름이나 팍 생겨버려라! 짜증나!!!”

알렉스는 있는 대로 성질을 내더니 먼저 세척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은 약간 어이가 없는 얼굴로 알렉스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쟤 오늘따라 더 신경질이네.”

그리고 동의를 구하듯 제수스를 쳐다보았다. 제수스는 다시금 아담의 등짝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담의 얼굴을 보며 약간 기가 죽은 얼굴을 했다.

“왜 그래?”

그러자 제수스는 움찔하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아담은 고개를 잠깐 갸웃했다가 피곤한 기색을 떨치지 못하며 세척실로 들어갔다.

“에이씨….”

제수스는 쿵 하고 락커에 기대며 머리를 박았다. 이건 진짜 자존심 상한다.

‘나랑 하는 것도 이제 제법…, 좋아하는데? 아직 아닌 건가? 별론가? 저 아저씨보다 내가 못한다고? 저 새끼는 뭘 어떻게 하는데?’

전처럼 그녀가 아파하는 것도 아니고 하면서 제법 느끼기도 해서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아직도 할 때 내 이름 같은 건 안 부르고….’

느낀다고 해서 전부 다 좋은 건 아니…지? 아닌가? 그냥 느끼기만 하고 가기만 하지 사실 아직 나랑 하는 거…, 그렇게 기분은 안 좋은가? 싫은가? 제수스는 그녀와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꼽아 보기 시작했다.

‘그제 했을 때도 한 번…. 음, 그전에 했을 때도 한 번 하고…. 어…, 그전에 했을 때는….’

아니, 그러면 저 새끼는 한 번 하면서도 세현이를 몇 번이나 뿅 가게 하는 건가? 아니면 저 아저씨는 몇 번이나 하게 해주는 거야?

“아씨….”

진짜 자존심 상했다. 그녀에게 정말로 저 새끼가 자신보다 더 잘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다가 제수스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그렇다고 그녀가 답하면 못 견딜 것 같다. 저 금발놈한테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뭘 그렇게 좋아하는지….

‘뭐 좀 하려고 해도 그냥 빨리하고 끝내란 말만 하는데…. 그래서 그냥 그렇게 했는데. 아, 씨. 그래, 그렇다고 그냥 그렇게만 하면 어쩌냐. 아.’

그냥 그녀는 그 정도만 느끼는 줄 알았다. 그래도 좋았는데. 그녀가 이제 자신이랑 하면서 느껴줘서 정말 좋았는데. 그가 아는 여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렇게 많이 느끼는 여자가 아닌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걔들은 연기도 있을 거 아냐? 에이씨….’

애초에 딱히 섹스하는 거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그냥, 그냥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여자였단 말이지 않은가. 그럼 지금까지 여전히 제수스만 좋았고 그녀는 별로 안 좋았다는 말일까?

‘저 새끼랑 할 때는 그럼 이름도 불러주고 그러는 건가? 막 더해달라고 한다든가…, 세현이가 먼저 하자고 한다든가! 기분 좋다고…, 에이씨, 진짜 그런 말도 해주는 건 아니겠지?! 그런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더…!!’

제수스는 억울했다.

*

세척실에 들어가 과정에 따라 온몸을 씻고 약품 처리까지 한 후 그들은 특수 스캔기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야 민이 밖에서 다른 의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멸균실 안에 위치한 특수 스캔기 안에 그들이 자리잡자 마이크에 대고 그들에게 말했다.

[빨랑 빨랑 안 움직여? 지~각~?]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담이 말했다. 엘리야 민은 탐탁치 못하다는 듯이 그들 셋을 빤히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15차 실험 3체 기본 검사 들어갑니다.]

그리고 알렉스는 시키는 대로 오라를 내며 부글부글한 감정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 아니야! 아니라고!’

저 걸레 같은 빨강 머리의 말이 머리를 댕댕 울리고 있었다. 남자도 뭐도 아닌 애새끼라든가, 조루라든가! 아주 모욕적이기 짝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누가 그를 보고 그딴 개같은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감히…!

하지만 간혹 세현이 그에게 귀엽다든가, 역시 애라는 말을 하거나, 가, 간혹! 어쩌다가 한 번 정도! 타이밍을 못 맞출 때가 기억나니까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저 망할 걸레 새끼나 저 아저씨보다도 못한다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당장 이걸 때려부수고 나가 그녀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교수님이 나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 책임진다고 했는데!’

저것들이 그걸 몰라서 저러는 것이다. 그녀도 저 빨강 머리한테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그녀는 그를 책임 안 질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아담에게는 아예 그런 말도 없었고 그는 여기 갇혀 있기까지 했다. 그게 뭐겠는가. 다 세현이 자신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저것들은 다 드레이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하는 것뿐이다. 드레이닝이 낫고 나면 둘 다 안녕이라는 것이다. 왜? 그녀는 그들은 책임지지 않고 유일하게 바로 이 몸만을 책임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저 새끼들한테는 안 웃어줘도 나한테는 웃어준다고!’

알렉스는 씩씩거리면서 스캔기의 유리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분노는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저 둘을 그냥 때려눕혀 버리고 싶었다. 못할 게 뭔가!

‘그리고! 저 아저씨는 그거…! 그딴 거나 그런 데 박아놓고!! 그거 사기 아냐?! 그런 거 잘하는 것도 뭐도 아니고 그냥 꼼수 부린 거잖아! 성형 같은 거, 어? 그런 거 다 거짓말인 거잖아! 다 구라라고! 사기치는 거잖아!’

알렉스는 분개했다. 그딴 거 박아서 다들 잘한다 소리 들을 거 같으면 그게 뭐가 잘하는 것인가? 원래는 뭣도 아무것도 아닌 새끼란 말밖에 더 되는가! 남자가 말이다! 태어난 그대로 완벽해야지! 바로 나처럼!!

[야, 검은 머리. 오라 일부러 내지 말라니까? 말 안 듣냐?]

엘리야 민이 알렉스에게 경고했다.

“아뇨...!”

알렉스는 부글부글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난 그냥 좀 어린 거고 그 아저씨는 벌써 상해서 맛 가기 일보직전에 그 걸레 새끼처럼 안 굴렀다 치더라도 그딴 거나 박고 다니는 남자가 정조니 뭐니 있을 것 같은가? 그 새끼나 그 새끼나 더럽기는 매한가지일 거란 말이다. 그런 놈들보다 내가 못하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젠장….’

근데, 그런 게 진짜 있어야 하는 건가? 알렉스는 자신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그녀가 정말로 기분이 좋으면 저렇게 등에 상처를 내는 건가? 왜?

‘그게…, 그게 그렇게 차이가 있는 건가? 그걸 잘…하고 못하는 게?’

하지만 세현은 곧잘 알렉스에게 못한다면서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못하니까 그냥 빨리 하라고…. 그녀랑 할 때 알렉스는 항상 좋았다.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어른이고 자신은 어리니까 조금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유가 있었고 그는 항상 여유가 없었다.

‘설마…, 설마 나랑 하는 것보다 저 망할 아저씨랑 하는 걸 더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런 건 절대 안 돼!!!’

눈앞이 벌게지는 느낌이었다. 질투와 분노로 피가 활활 끓었다. 최대한 오라를 내라는 말에 전신의 오라를 최대한 방출했다.

[오? 검은 머리, 뭐 좋은 거 먹었냐?]

엘리야 민이 안경을 다시 올리며 수치를 확인했다. 자체 최고치를 갱신했다. 대략 4시간 정도 그렇게 이것저것 당하다가 바닥까지 방전된 셋은 식당으로 가서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 치워야 했다. 영양제를 IV로 맞으면서 동시에 밥도 엄청 먹었다. 알렉스는 거의 10인분에 가까운 음식을 엄청난 속도로 먹어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이거 빼줘.”

IV도 거의 다 맞았다.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빼주었다. 오라를 돌려 피가 멎게 하고 그는 얼른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온몸을 빡빡 씻었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면서 디바이스로 무언가를 검색해서 보다가 시간이 얼추 되자 바로 세현의 병실로 갔다.

“잠깐만. 나 이것 좀 보고.”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세현이 그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병실에 마련된 그녀의 책상 위로 다이빙했다.

“교수님!”

“야, 잠깐만이라니까.”

그가 책상 위에 있는 걸 다 어지르고 자신의 목을 껴안자 세현이 짜증을 냈다. 책상 위에 커다란 맹수가 한 마리 뛰어올라온 것 같았다. 그는 세현의 등을 껴안고 그녀의 목덜미와 뺨에 얼굴을 한 번 비비고는 고개를 떼고 얼굴을 마주했다.

“교수님….”

알렉스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세현은 안경을 벗으면서 물었다.

“왜.”

묻고 싶은 건 참 많았다.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못하는지, 그냥 자신을 놀리려고 그런 말을 한 거 아니었는지, 정말로 그 팍 꺾인 아저씨나 걸레놈보다 자신이 못하는지, 그래서 결국 누가 제일 좋은지, 기타 등등 정말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녀의 진실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알렉스는 이런 질문까지 구태여 해야 한다는 게 약간 자존심 상했지만 그래도 물었다.

“교수님 나 좋아하죠?”

“응? 갑자기 그건 왜?”

“나 좋아하죠? 맞죠?”

알렉스가 얼굴을 더 들이대며 그렇게 캐물었다. 세현이 소리를 내어 잠깐 웃었다.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알렉스는 투정을 부리듯 말미를 살짝 끌었다. 그는 세현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췄다.

“빨리 나 좋아한다고 말해요. 내가 제일 좋다고.”

“하하하. 어유.”

“어? 빨리~”

“그래.”

“’그래’라고 했다? 한 거예요?!”

알렉스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렇게 물었다. 아까까지 기분이 엄청 안 좋았는데 갑자기 좋아졌다. 그는 세현을 일으켜 세웠다.

“이리 와봐요. 빨리.”

“야, 근데 너무 일찍 온 거 아냐? 해도 아직 안 졌는데?”

세현이 시계를 보려고 하자 그 손을 잡았다. 알렉스는 책상에서 내려와 그녀를 마주보고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오늘따라 왜 이래.”

“난 교수님 항상 보고 싶은데.”

참나. 세현은 오늘따라 애교가 절찬인 알렉스를 보고 피식피식 웃음이 나와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쳤다.

“참, 넌…. 하여튼 미래가 기대된다.”

“지금은 별로라는 말이야?!”

“아니, 하하. 벌써부터 이런데 나중엔 얼마나 끼가 넘칠까 싶은 거지.”

“지금은 싫다고?!”

“아니, 좋다고.”

흥…. 알렉스는 약간 삐진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는 세현을 껴안은 채 그녀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뭐 하려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좋다고 말했다. 다른 놈들한테는 절~대 그런 말을 안 하면서. 우월감이 팍팍 들었다.

그가 세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평소처럼 한 번 킁킁 냄새를 맡으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문득 팍 고개를 들고 다시 따져 물었다.

“나 애 같다고 좋아하는 거 아니지?”

“어? 그건 또 뭔 소리야.”

“아니죠?”

“야, 누가 애 같은 남자를 좋아하냐?”

“그니까. 내가 애 같아요?”

그의 질문에 세현이 대수롭지 않게 금방 대답했다.

“애 같지는 않지. 누가 널 보고 애 같다고 하겠냐? 이렇게 큰데.”

“그러니까!”

알렉스 킴, 19세는 2미터 5센치미터에 몸무게 120킬로그램이 넘는 훤칠한 근육질의 미남자였다. 나이가 어린 거지 애 같다고 말하기에는 사이즈가 너무 크다.

‘그러니까! 내가 내일 그 걸레 새끼랑 상하기 일보직전인 그 아저씨한테 직접 말한다! 세현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알렉스는 의기양양하게 생각했다. 여자라고 뭐가 다를 거 같은가! 어리고 탱탱한 게 좋은 것이다! 백날이 지나봐라. 그 두 남자가 알렉스보다 어려질 일은 절대 없다. 그리고 그가 어리기만 한가?! 이렇게 잘생기고! 이렇게 큰데!

알렉스가 침대에 앉아 자신의 위에 앉아 있는 세현의 엉덩이와 허리를 안고 있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티셔츠를 훌쩍 벗었다. 자랑스럽게 자신하는 탱탱한 몸매가 드러났다. 넓고 큰 어깨와 쭉 뻗은 목, 글래머러스한 팔과 가슴, 단단하게 나눠진 복근이 훌륭했다. 거기에 특유의 당당하고 콧대 높은 표정을 한 잘생긴 얼굴까지.

그의 표정이 웃기면서 귀여웠다.

“아, 진짜 이해가 안 되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그가 세현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커다랗고 강한 맹수가 그녀에게만 애교를 부리는 것 같다. 참 신기하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다. 왜일까? 이렇게 예뻐서 그런가?

그는 자신의 바지와 속옷도 훌렁 다 벗었다. 엉덩이를 살짝 들어주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그러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가끔 정말 귀찮긴 하지만 이럴 땐 그의 넘치는 에너지가 그녀에게도 전달되는 것만 같아 굳이 마력이 아니더라도 에너지가 충족되는 느낌이었다. 하여튼 얘는 물건은 물건이다.

세현은 그의 냄새를 맡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알몸의 그는 껴안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약간 긴장했다. 자기 옷을 벗는 건 별로 안 부끄러운데 세현의 옷을 벗기는 건 어쩐지 항상 긴장되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세현은 약간 간지럽고 기분이 좋아 웃었다.

“하하.”

“교수님 나랑 하는 것도 좋아하잖아요. 그쵸?”

“뭐, 나쁘진 않아.”

“왜 맨날 그렇게 애매하게 대답하는데! 기분 안 좋아요?”

알렉스가 따졌다. 세현은 팔을 들어올리며 옷을 다 벗었다. 그녀도 금방 알몸이 되었다. 그의 시선이 절로 그녀의 몸을 싹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면서 왠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은 진짜….”

그가 꿍얼거리듯 말했다. 세현이 ‘왜?’ 하고 물었다.

“너무 예뻐.”

그는 세현을 꽉 끌어안았다. 그는 세현의 가슴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얘 왜 이렇게 웃기냐. 세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좋냐?”

“응~”

세현은 세계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자타공인의 천재였지만 그녀의 큰 키와 우월한 육체 또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이 느껴지게 하는데 일조했다. 알렉스는 행복한 얼굴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양껏 비비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가 세현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진짜 우리 교수님 뿅 가게 해줄 거예요.”

“응?”

그가 세현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세현은 쓰읍 하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경고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쓸데없는 짓 아니거든요?”

“그런 거 별로 너한테 기대 안 하는데.”

“왜요! 내가 못해?!”

알렉스가 바락 한 번 화를 내자 세현은 그의 이마를 딱 때렸다.

“말버릇.”

“씨이….”

하지만 알렉스는 더 이상 바락바락 대들지 않고 세현과의 입맞춤에 집중했다. 입술을 꾹 누르고 비볐다. 서로의 타액으로 약간 미끄러웠다. 그의 입술은 아주 부드러웠고 세현의 입술을 약간 거칠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입술을 핥아 부드럽게 만들었다. 아직 입맞춤밖에 하지 않았는데 그의 온몸이 뜨거워졌다. 알렉스는 그녀의 등과 허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으응…. 윽…, 하. 교수님….”

그녀도 알렉스의 허리를 부드럽게 한 번 만지자 그가 부르르 떨며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자신을 만지니 등골이 오싹오싹 했다. 벌써 배에 닿을 정도로 썼다. 혀가 서로 맞닿을 때마다 기분이 짜릿했다. 알렉스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쥐었다.

‘엄청 기분 좋다….’

뭘까, 이거. 그녀의 가슴도 다른 손으로 쥐어 보았다. 두 손 가득히 그녀의 살이 들어왔다. 그는 세현을 뿅 가게 하겠다고 호언했으면서 금세 평소처럼 그녀에게 홀려서 입맞춤하며 그녀의 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핫, 하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세현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오늘은 진짜 기분 좋게 해줄게요.”

알렉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세현의 목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세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아니….”

별로 기대 안 한다니까. 그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젖꼭지를 핥았다. 그녀의 유두에 혀가 닿자 그녀가 움찔했다. 알렉스는 콧김을 훅 내며 그녀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핥는 것에 집중했다.

‘가슴은 확실히 기분 좋은 거지?’

알렉스는 그녀의 가슴을 열심히 핥았다.

“으…, 하. 알렉스….”

“읏….”

그녀가 자신의 귀를 만지며 이름을 부르자 알렉스가 도리어 움찔하며 한 번 부들 떨었다. 자지가 아팠다. 그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팍 뗐다.

“귀 만지지 마요!”

“응? 왜?”

세현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약간 심통한 얼굴로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음모에 코를 문질렀다가 숨을 들이키고 심기 일전하여 그녀의 것에 혀를 댔다.

“아…. 아읏…. 하아….”

세현은 눈을 감으며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의 혀가 뜨거웠다. 그가 세현의 살을 엄지로 들어올리며 음핵 전체에 입술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아프다 싶을 정도로 짜릿했다.

“좀 살살…. 아. 아앗…. 하…!”

그는 아직 정도를 모른다. 그는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세현을 빨았다. 그가 순간 너무 힘을 줘서 이가 닿자 세현이 펄쩍 뛰었다.

“아…! 알렉스…!”

세현은 그의 목덜미를 손으로 꽉 잡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스는 깜짝 놀라 그녀의 여성기에 얼굴을 박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씨이….”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세현은 그가 너무 세게 빨아 아래가 아릿아릿한 걸 느끼며 엉덩이를 물려 그의 얼굴을 떼어냈다.

“응? 뭐야?”

그가 자신의 자지를 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세현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만지지 말라니까.”

“왜?”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터 있었다. 그리고 아래를 보니…. 방금 세현의 것을 빨면서 싸버린 모양이었다. 세현이 웃었다.

“귀엽….”

“악! 귀엽다고 좀 하지 마!!”

알렉스가 화를 냈다. 그는 창피하고 화가 났다. 스스로에게 말이다. 그는 세현을 확 덮쳤다.

“아니, 내가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교수님이 만져서….”

“니가 너무 세게 빨아서 아픈 걸 어쩌냐.”

“아, 아팠어요? 오늘도?”

알렉스가 깜짝 놀라 그렇게 물었다. 그의 낭패한 얼굴이 웃기고 귀여웠다. 세현은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들어오려나?”

세현은 그의 크고 우람하고 탱탱한 분홍빛 자지를 손으로 만졌다. 피가 쏠려서 뜨끈뜨끈했다. 그녀가 자신의 것을 만지자 알렉스는 더욱 긴장했다.

‘아, 세현 교수님이 내 거 만지고 있어. 참자. 참자. 싸면 안 돼. 지금 싸면….’

그는 귀까지 빨개졌다. 절로 콧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알렉스는 자신의 것을 만지는 세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해도 돼요?”

조르는 그의 얼굴이 자못 애처롭게까지 보였다. 아니, 뭐 뿅 가게 해준다더니…. 세현은 피식 웃고는 그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우앗.”

그녀가 자신의 것을 잡아당기자 그가 깜짝 놀라 몸을 확 낮췄다. 그녀는 그의 것을 잡은 채 그대로 자신의 것에 살짝 문질렀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그에게 말했다.

“천천히….”

“응….”

알렉스는 짙어진 눈길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에 힘을 주었다. 약간 저항감이 있었다. 그녀가 약간 몸을 움직여 자세를 다시 잡았다. 그녀의 허벅지와 그의 허벅지가 착 서로 붙었다.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 니 건 진짜 크단 말이야.”

“그래서 싫어요?”

알렉스가 그녀와 가까이 얼굴을 마주대고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세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허리를 다시 끌어당겼다.

“뭐…, 싫은 건 아닌데.”

“좋다고 말해달라니까.”

“그래, 좋은데…. 아…, 설명하기 어렵다. 아, 으으읏….”

그의 귀두의 가장 넓은 부분이 겨우 입구에 들어왔다. 아직 약간 덜 젖은 것인지 몸이 덜 풀린 것인지 서로 압박감이 심했다. 전처럼 들어가지 않는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그는 크고 또한 다소 미성숙했다. 이럴 때 뻣뻣해지니 부드럽게 될 리가 있겠는가.

“으으응….”

알렉스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엄청 참고 있는 모양이다. 세현은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나오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야, 너 뭐 나 엄청 기분 좋게 해준다며?”

“아, 아니…. 으으…. 교수님, 잠깐만…. 헉.”

그는 잠깐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참는다고 잠깐 이를 악 물고 난 후에 겨우 세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세현을 보았다.

“아직 포기 안 했거든요?”

“그랬어?”

세현이 놀리니 그가 다시 팍 기분 상한 얼굴을 하더니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으읏. 하…. 앗.”

그가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마다 압박감이 들었다. 그가 뜨거웠다. 그는 세현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아파요?”

“아프기보다는….”

아플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압박감이 심했다. 그의 자지가 아주 뜨거웠다. 그게 강렬한 감각을 선사했다. 원래 어떤 감각이든 역치를 넘어가면 고통이 되는데 바로 딱 그 직전에 있달까. 맞닿는 그의 몸이 전부 단단했다. 그녀의 체액보다는 그의 체액이 훨씬 많이 나와 결합부를 적시고 있었다. 확실히 아직은 생살을 후비는 느낌이 다소 든다.

알렉스가 그녀의 얼굴에 살살 입을 맞추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세현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건 기분이 좋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떼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때요?”

그녀의 피부는 적당히 따뜻했다. 얼굴은 살짝 찌푸리고 있었고 젖기는 좀 젖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무언가를 견디는 것에 더 가까웠다. 알렉스는 겨우 좀 더 천천히, 매우 천천히 엉덩이를 뺐다가 다시금 천천히, 전부 넣어보았다. 알렉스는 그녀의 표정과 반응을 살폈다.

“이렇게는? 하아, 이렇게는 좋아?”

“으응…. 좋기는 한데….”

그녀가 알렉스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아무런 의미가 없을 그녀의 몸짓이나 표정, 목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알렉스는 그녀의 허벅지를 끌어안아 그녀를 침대에 더 눌렀다. 더 깊게 들어가고 싶었다.

“교수님…. 세현 교수님….”

“아…! 으읍…! 음…!”

알렉스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찌걱거리고 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VVIP 병실용 고급 침대가 출렁거렸다.

“아, 교수님…. 교수님 너무 예뻐요. 너무 좋아요. 기분 좋아요. 하아…. 교수님. 교수님…!”

그가 세현의 얼굴을 거의 먹으려고 들었다. 그가 마구 입을 맞추면서 그렇게 열중하자 세현이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푸하,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야, 너 또…! 좀 떨어져! 덩치도 큰 게…!”

“으윽….”

알렉스는 그녀의 옆에 자신의 팔꿈치를 대고 몸을 좀 더 지탱했다. 그녀와 떨어지는 게 싫었다. 그는 얼굴을 낮춰 그녀의 코와 자신의 코를 부비며 졸랐다.

“나 좀 더 꽉 껴안아 주면 안 돼요?”

“아, 그냥 하지. 오늘 진짜 귀찮네.”

세현이 기어코 짜증을 냈다. 알렉스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싫으면 말든가. 쳇.”

“안 되겠어. 누워.”

세현은 알렉스의 어깨를 밀며 몸을 일으켰다. 세현은 커다란 남자를 밑에다 깔고 그 위로 올라왔다. 그의 단단한 배 위에 앉았다.

“아, 좀 살 거 같다.”

그에게 깔려서 숨 쉬기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산소가 폐부로 들어가며 머리가 살짝 상쾌해졌다. 세현은 그의 것을 잡아 자신의 여성기에 맞추어 다시금 천천히 안에 들어오게 했다. 알렉스는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그녀가 직접 자신의 것을 넣자 슬그머니 그것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자신의 위로 올라오면 그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너무나 예뻤다. 그녀가 너무나 예뻐 보였다.

그의 거물을 다 넣고 세현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삐친 거 아니었어?”

“아니거든!”

알렉스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아랫배 전부가 뜨끈뜨끈할 정도로 꽉 차 있는 그의 남성기를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빨리 다시 해. 징징거리지 좀 말고.”

“내가 언제 징징거렸다고…!”

“심장 엄청 뛰네.”

세현은 눈을 감으며 그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의 빵빵하고 큰 가슴에 손을 짚으니 그의 가슴이 엄청나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부들 떨었다. 그가 세현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현도 그의 박자에 맞추어 엉덩이를 얼추 흔들면서 그를 조였다.

“아…! 아윽. 교수님. 교수님…! 헉. 아, 교수니임…!”

그가 헐떡거리면서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고개를 뒤로 젖히며 교성을 냈다. 그의 목선이 예뻤다. 남자답고 탄탄했다. 세현은 무심히 그걸 내려다보다가 쪽 하고 그의 목에 입을 맞췄다. 그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낮춰 세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가 약간 울먹이듯 말했다.

“아, 씨이…. 나 지금 싸면 또 놀릴 거죠?”

“으음, 어쩔까?”

“놀리지 말라고. 교수님 때문인데!”

그의 허리짓은 이미 그의 컨트롤을 벗어난 모양이다. 마구 움직이고 있었다. 퍽퍽 소리가 났다. 서로의 부푼 살이 맞닿아 찌걱거리는 소리가 나며 살이 부딪쳐 흔들렸다. 알렉스는 허리짓에 박차를 가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이런 거 싫다고…! 아아…! 헉. 아읏…. 난 오늘...! 교수님부터!! 하윽…. 아…!”

“아니, 기분 나쁘진, 윽, 않다니까….”

세현은 알렉스의 얼굴 옆에 팔꿈치를 대고 엎드려 가까이에서 알렉스의 귀여운 얼굴을 감상했다. 얼굴은 빨개져서 땀도 흠뻑 나고 어쩔 줄 몰라서 신음하는 그의 모습이 남자답고 섹시한데도 역시 귀여웠다.

서로의 체액이 질척하게 흘렀다. 세현도 온몸에 열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움찔거렸다. 아래가 오싹오싹했다. 세현은 눈을 감은 채 그의 피부와 열기를 느꼈다. 말했다시피, 정말로 나쁘진 않았다. 그의 커다란 살덩이가 들어오면 언제나 아픈 듯이 저릿저릿했고 그의 열이 온몸을 덥혔다.

“알렉스….”

“세현… 교수님…. 헉…. 나 안 돼…. 아윽…. 나…, 나 갈 것 같아요…. 하앗…. 교수님…. 교수님…!”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정말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그게 너무 웃겨서 세현이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냥 해도 돼. 안 놀릴게.”

“진짜지…? 헉, 진짜 진짜지?”

“뭐, 오늘 여기까지 참은 것도 용하지.”

“하아…, 그렇게 말하지 마요…. 아으…. 교수님, 키스…, 키스해줘요.”

처음 만났을 때의 그가 얼마나 날뛰었는지 생각해보면 지금의 얌전함이 참 웃기고 귀엽다. 그는 자신을 강제로 덮친 그녀에게 복수하겠다고 똑같이 덮쳤고 책임지라면서 화를 내고 좋아서 졸졸 따라다니는 주제에 조금만 자존심이 상하면 홱 토라졌다.

“웃긴다니까.”

세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맞닿자 알렉스가 헉, 하고 영혼이라도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부비자 그의 부들거림이 더 심해졌고 세현이 그의 입안으로 혀를 넣자 결국 펄떡거리면서 사정하기 시작했다. 세현도 덩달아 찌릿하고 짧게 쾌락이 치솟았다.

“으응…!”

그가 세현의 온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하반신이 부르르 떨리며 세현의 엉덩이에 딱 붙어 있었다. 그의 정기가 마력으로 바뀌며 열기가 화하게 퍼졌다. 세현은 얼굴을 붉히며 윽, 하고 신음을 냈다.

“아으…. 아으으…. 헉. 아….”

알렉스는 긴 사정에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견디듯 신음했다. 세현도 그의 팔을 꽉 잡으며 그 순간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있다 둘 다 몸에 힘이 풀려 늘어졌다. 세현은 천천히 호흡을 하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아래가 결국 질척질척하게 젖고 부풀어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것을 감싸 물고 나른한 음미를 계속하고 있었다.

역시 그는 피부가 좋았다. 맞닿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그의 어깨에 코를 묻고 좀 쉬고 있는데 알렉스가 정신을 차렸는지 잠시 한숨을 쉬더니 세현과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짜증나….”

그가 남자답고 섹시한 목소리로 작게 투덜거렸다. 세현이 약간 나른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상기된 얼굴, 약간 거친 숨소리. 눈코입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여전히 빨갰다. 세현이 그의 뺨을 손으로 찔렀다.

“뭐가.”

“하지 마.”

“우냐?”

“아니거든!”

“요.”

“요!!!”

- 공금 by Jira

*

“흡.”

제수스는 거울을 보며 잔뜩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옷깃을 이랬다 저랬다 하다가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짧게 내뱉었다. 그의 왼손에는 새빨갛고 농염한 장미 꽃다발이, 오른손에는 작은 선물 상자와 분홍색 샴페인이 들려 있었다. 전부 비싼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여자는 선물이지.’

제수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항상 가슴이 두근거리며 긴장되었다. 오늘은 좋아할까? 그가 그러고 있으니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제수스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제법 인기가 많단 말이야?’

근데 세현은 왜 그걸 몰라줄까. 물론 대단한 여자라서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예전에 만나봤을 샌님들이 제수스만큼 쭉쭉빵빵하고 잘생겼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 오히려 세현이 정도로 잘난 여자일수록 젊고 잘생긴 남자가 딱 좋은 거였어.’

그녀와 같은 여자는 자신과 같은 남자를 만나지 않을 거라고 굉장히 우울해했던 적도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항상 차가웠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뉴스에도 잔뜩 나오는 대단한 여자라는 걸 알게 되자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차가웠던 거구나, 라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해졌다. 애초부터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구나, 그럴 거면 처음에 꼬시긴 왜 꼬신 것인가, 하고 그녀에게 원망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그녀는 원래 모든 사람들에게 차가웠다.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그 금발 머리는 팍 꺾이기 일보직전이고 그 싸가지야 조루에 병아리 삑삑대는 수준인데.’

밤일이야 자신 있었다. 안 해서 못한 거지 못하진 않았다. 적어도 그 애새끼보단 훨씬 나을 자신 있었다.

‘귀여운 건 그때 잠깐이지.’

그는 스물세 살이었다. 남자의 전성기에 막 진입했다 볼 수 있었다. 그는 몇 번 더 자신의 차림새와 상태를 확인하고 건물로 들어갔다.

“이게 다냐?”

“네, 이게 답니다.”

“그래? 생각보다 별로 안 되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VVIP 병동 로비에 세현과 그녀의 제자라는 비실이가 보였다. 못 보던 키가 땅꼬마만한 여자애도 하나 있었다. 그들은 무슨 박스를 잔뜩 들고 있었다. 비실이는 4개를 들고 있어 앞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고 땅꼬마도 세 개를 들고 있었고 세현은 딱 하나를 들었다. 제수스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무거운 거 드는 거 아니야.”

그는 세현의 품에서 박스를 뺏아 자신이 들었다. 세현이 어이가 없단 얼굴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수스는 ‘응? 왜?’ 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생각이 없는 얼굴이다.

“자, 이거나 들어.”

그가 아름다운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는 병원에 올 때마다 이런 걸 가져왔다. 세현은 고개를 한 번 젓더니 그것을 받고 앞장섰다. 그의 뒤를 이어 땅꼬마와 비실이가 앞을 겨우 가늠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제수스는 얼른 그녀의 옆으로 가 나란히 걸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뭐가.”

“꽃.”

세현은 그제야 한 번 더 꽃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장미꽃. 100송이 정도는 되려나? 향기가 물씬 풍겼다. 탐스럽고 큰 꽃송이였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섹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글래머했다. 세현은 꽃에서 눈을 떼고 옆에 있는 빨강 머리를 돌아보았다.

‘뭐랄까…. 꽃 같은 남자였군.’

세현의 병실에 도착하자 최이삭과 하우빈이 학교에 있는 그녀의 책상과 똑같은 구조로 물건을 비치하기 시작했다. 위치를 전부 아는 건 최이삭이었고 하우빈이 열심히 돕고 있었다. 제수스는 박스를 최이삭에게 떠넘기고, 가만히 학생들이 일하는 걸 보며 커피를 홀짝거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짠.”

그는 그녀의 눈앞에 무언가를 떨어뜨리듯 보여주었다. 다이아몬드가 주르륵 박힌 목걸이였다. 세현이 미간을 움찔하며 그걸 보았다. 제수스는 자연스럽게 그걸 세현의 목에 걸어주려고 했다.

“야…, 나 이런 거 하지도 않는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이미 팔찌, 반지, 귀걸이, 머리장식 등등 온갖 걸 다 받았다. 세현이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다이아몬드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목걸이는 할지도 모르잖아.”

“야….”

이놈이 왜 이렇게 돈지랄을 하는가. 세현도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사치는 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고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제수스는 기어코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해주고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과 목걸이를 같이 보았다.

“역시 잘 어울린다.”

그는 평소보다 더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세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목걸이가 걸려져 있는 그녀의 목에 쪽 입을 맞췄다. 세현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문득 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보고 있자 인상을 팍 썼다.

“뭘 봐? 일 안 해? 놀아?”

“아, 아닙니다, 교수님!”

그들은 고개를 홱 돌리고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세현이 쯧쯧 혀를 찼다. 저것들이 진짜 졸업장이 받기가 싫나?

“빠져 가지고.”

“화내지 마, 응? 이렇게 예쁜데.”

세현은 다시금 약간 정 떨어진 얼굴로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넌…, 아니다. 하. 말을 말아야지.”

고양이한테 사람 말을 가르치겠다고 ABCD를 읊고 있으면 못 알아먹는 고양이가 이상한 것이겠는가, 그 앞에서 그 지랄을 떨고 있는 그 인간이 이상한 것이겠는가. 제수스는 ‘응?’ 하고 아주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교수님.”

“그래.”

책상을 다 정리한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세현은 한숨을 쉬며 허리를 껴안고 있는 그의 손을 풀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9시에 맞춰서 오라고.”

“보고 싶어서.”

제수스는 아직까지는 싱글벙글했다. 그는 그녀가 좋았다.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사랑을 나누게 되어 너무나 좋았다. 그렇다. 섹스는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다.

‘물론 나 한 번은 찼지만…, 그래도 다른 놈들도 엄청 많은데 나도 받아주는 건, 역시 나한테 조금은 마음이 있다는 소리잖아?’

원래 제수스는 매우 긍정적인 남자였다. 많은 소드마스터가 그렇듯이 말이다. 긍정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긍정적인 것이다.

며칠 전에 그녀가 그 금발놈의 등을 왕창 할퀴어놓은 걸 발견했을 때는 제법 기가 죽었으나, 다시 회복했다. 그라고 그걸 못할 게 뭔가! 오늘을 기다렸다. 주변의 여자들에게도 온갖 비법을 다 듣고 왔다.

‘아, 스트레스 받아….’

그가 그렇게 심기일전하는 동안 세현은 다시금 책상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학교는 당분간 못 가게 되었다. 처음에 2주 동안 여기 갇혀 있을 때도 정말 죽겠다 싶었는데 그 지랄을 또 떨어야 하는 것인가. 그녀는 지끈지끈한 미간을 손으로 잠시 주물렀다.

이미 언론에서는 한나 홉스 중위의 폭로 동영상으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을 <홉스 게이트>로 명명하고 절찬리에 기사를 내놓고 있었다. 루머도 우후죽순 나오고 있었다. 현재로선 그런 것을 전부 다 제어할 순 없었다. 곧 학회에 대한 청문회도 열릴 것이다. 청문회를 진행해야 하는 국회도 난감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검찰도 일단은 기소 여부를 결정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이야 우방이니 어찌 풀린다고 치더라도 아마 유럽이나 중동 쪽에 있는 지부는 철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음모론에 환장하는 대중들은 삽시간에 이 불꽃놀이에 동참했다. 다들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이 어떤 음모 때문이었으면 하는 모양이다. 바로 며칠 전까지는 그녀의 와병 소식에 눈물을 흘리던 자들도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그 인간들이 평소에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해 그렇게 극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위문품과 꽃다발이 잔뜩 오던 학회의 주소로 이제 저주의 편지와 테러 의심 물품들도 잔뜩 오고 있었다. 보안팀은 선물과 테러 의심 품목을 구분하느라 이중고에 처했다.

‘누가 그랬더라…. 멍청함이 할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했지….’

대중은 언제나 슈퍼스타를 원하고 또한 언제나 그 슈퍼스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매장하고 싶어한다. 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얄팍하고 보잘 것 없다. 단 몇 명만 모여도 간단히 이성과 식견을 잃어버리고 맹목적이게 되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숫자가 많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끔 눈먼 황소가 되어 책임지지도, 돌이키지도 못할 것을 파괴하고 흩어진다.

적은 일부 강경 테러리스트나 그들과 반목하는 정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몰지각한 군중과 그들의 반지성주의, 그 자체였다.

청문회와 검찰 조사 등으로 그녀의 남은 시간 전부가 소진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청문회도 검찰 조사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시간이다. 세현은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꽤 노력해야 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흔적도 남지 않은 리야드를 보고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는가. 성난 황소를 꾸미고 있는 버러지 같은 벌레들 모두, 바로 이 순간에도 이 세현 퀸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다는 걸.

‘예전 파시즘 국가들은 외국어로 불러서 돌아보는 인간들을 지식인이라고 전부 총으로 쏴 죽였지. 반대로 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문명에 도움이 되는 짓일 텐데 말이야.’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쓰레기들.

경멸은 인간 본연의 감정이다. 분수를 모른다는 건 죄다. 드레이닝에 걸리고 난 후, 수에즈 프로젝트 이후로 세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데없는 곳에 빼앗겼는가. 결국 연구실까지 병원으로 옮겨오고 세현의 분노는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볼펜을 달칵거리며 종이로 뽑은 웜홀-중력 특수방정식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보았다.

제수스는 얌전히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창가에 있는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괸 채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는 어쩐지 섹시했다. 제수스로서는 어째서인지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어가자 제수스는 나가서 미리 부탁해놓았던 음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9시가 딱 되자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시간 됐는데.”

“뭐? 아.”

세현은 고개를 들었다. 해가 다 지고 하늘이 새카맸다. 제수스가 부드럽게 그녀의 목과 어깨를 잇는 지점을 주무르자 세현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식사 시간도 들쑥날쑥이었지만 지금은 병원에서 주는 대로 꼬박꼬박 식사 시간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이미 저녁은 6시 정각에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나 이 시각엔 약간 출출했다.

“오늘은 뭔데.”

“음, 고기?”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수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끌었다. 그녀의 병실은 아주 넓었고 창가에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는 병원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야경과 함께 간단히 분위기를 잡기에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안주 겸 야식에 로제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술의 도수는 3%로 아주 약했다. 그는 샴페인을 따서 잔에 따랐다.

세현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한 번 쭉 훑어보았다. 불타는 빨강 머리, 반짝거리는 헤이즐색 눈동자, 언제나 웃고 있는 입술, 쭉 뻗은 섹시한 목덜미와 건장한 어깨, 탄탄한 등과 크고 각이 팍팍 잡힌 엉덩이…. 젊고 건강한 남자. 세현은 그가 따라준 샴페인을 바로 마셨다. 아주 달아서 순간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괜찮아?”

“뭐.”

제수스는 샴페인을 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고 반대편에 앉았다. 세현은 샴페인을 조금 더 마시며 그의 얼굴을 잠깐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는 항상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것도 재능이다.’

세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크로 육고기, 해산물, 야채, 과일이 종류별로 있는 접시들을 보다가 먹기 편하게 되어 있는 고기를 하나 찔러 바로 입으로 넣었다. 맛있었다.

“좀 쉬엄쉬엄 하라니까.”

제수스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리오’ 라는 태도로 대꾸했다.

“본의 아니게 이미 쉬엄쉬엄 살고 있다.”

“맛있어?”

“응, 어디 거야?”

“음, 아는 데.”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다니네.”

“뭐, 인생 먹는 낙 아니겠어?”

세현은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피식 웃었다. 바보도 하루에 두 번 정도는 맞는 말을 한다더니. 제수스는 세현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단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안 먹어?”

“아.”

제수스는 입을 벌렸다. 세현은 포크로는 자신의 것을 하나 찍어 먹으며 그에게 손으로 하나를 집어 먹였다. 그가 세현의 손을 잡고 음식을 받아먹고 그녀의 손가락까지 느리게 쪽쪽 빨아먹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세현은 잠깐 먹던 것도 멈추고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다시 음식을 먹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그대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역시나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왜?”

“…….”

그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뭔가 이 남자는 괜히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왜지?’

머리로는 이거나(?) 저거나(?) 별반 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미묘하게 다르다. 어쨌든 그는 세현이 지금껏 제일 많이 잠자리를 같이 한 상대였는데도.

저 멍청한 웃음이 마음에 안 들었다.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들러붙어 있는 것도 묘하게 짜증날 때가 있고 말도 심하게 안 통하고 눈치도 없다. 나름 잘해보겠다고 선물이니 뭐니 들고 오는 것도 영 맥락이 없다. 다른 놈이랑 똑같은 짓을 한다 하더라도 묘하게 더 심드렁해진단 말이다.

‘말은 잘 듣긴 하는데 말이야….’

민 교수가 멋대로 이 빨강 머리도 프로젝트에 끼워 넣어 실험을 계속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딱히 반대를 한 건 아니지만…. 세현은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디 트집이라도 잡을 게 없나 다시금 한 번 쭉 훑어보았다.

“입이 커.”

세현이 말했다. 그녀의 뜬금없는 말에 제수스는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만져보면서 물었다.

“응? 그런가?”

그의 미소가 시원시원하다고 좋아하던 여자들도 있었다. 그 말인가? 세현은 그 뒤로 다른 부연 설명은 없었다. 제수스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자신이 준 목걸이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단지 오늘밤뿐이더라도. 제수스가 말했다.

“오늘 머리 묶은 것도 예뻐.”

“머리 자를 거야.”

“왜? 자르지 마. 예쁜데.”

“귀찮아.”

“잠깐.”

제수스는 그녀의 입술에 소스가 살짝 묻자 그녀가 그걸 핥아 먹기도 전에 그걸 자신의 엄지로 훔쳐 자신이 먹었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보기는 아주 좋은 남자인데…. 세현은 인상을 살짝 썼다. 음식과 샴페인은 맛있었다. 묘하게 유쾌와 불쾌가 공존했다. 음식을 다 먹고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수스는 그녀를 껴안으려고 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씻고.”

그가 웃으면서 그녀를 껴안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매정하게 그를 거절하며 욕실로 갔다. 제수스는 약간 머쓱해졌다. 그리고 잠깐 거기에 서서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자 한숨을 쉬며 자신의 뒷목을 문질렀다.

“아….”

진짜 어렵네…. 그녀는 어떨 땐 그가 어떻게 하든 그냥 두었고 어떨 땐 매정하게 밀어냈다. 아까는 목걸이도 받아주고 사람들 앞에서 껴안아도 밀어내지 않더니 지금은 좋게 샴페인과 음식을 같이 해도 밀어낸단 말이다. 가끔 저렇게 눈빛이 차갑다.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 눈빛과 태도에서 확 다가올 때가 있었다.

‘물론 그 비실이한테 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제수스는 그녀가 최이삭에게 하는 말과 태도와 눈빛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쳐다볼 거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경멸하고 혐오한다는 얼굴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며 한 번씩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리는 그녀는 정말 무서웠다. 그의 멱살을 잡고 그의 코앞에 검지를 들이 밀며 온갖 심한 말을 하며 그를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힐난하는 그녀의 모습이 자신을 향할 것이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마음이 불안해졌다.

결국 제수스는 기분이 약간 가라앉고 말았다. 미소를 짓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방금 자신의 포옹을 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꽤 좋았는데 말이다. 그는 욕실로 다가가 문을 열고 문가에 어깨를 기대고 비스듬히 섰다. 팔짱을 살짝 낀 채 가만히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씻는다더니 샤워도 아니고 아예 길게 목욕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다.

드레이닝인가 뭔가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게 아니라 단박에 꺼지라고 했을 것 같다. 제수스는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냥 나 같은 건 싫으니까 다른 놈으로 바꿔 달라고 하든가….’

잘은 모르지만 민 교수나 그 할머니나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해줄 것 같은데…. 아닌가? 물론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난 욕조에서는 마사지를 위한 물줄기가 나오며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녀는 머리맡에 머리를 편히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제수스는 조금 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가가서 수건을 깔고 욕조 테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는 아무 말없이 물속에서 그녀의 손을 꺼내 부드러운 해면으로 문질렀다. 그녀가 눈을 뜨고 말없이 그를 잠깐 쳐다보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눈빛에 약간 긴장했지만 티 내지 않고 하던 걸 계속 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제수스는 자신이 왜 진작 그녀를 까무러치게 기분 좋게 만들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빨리 끝내라든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가 아까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면 찍 소리도 못하고 그녀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좋았다. 사랑이라 말해도 좋았다.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웃을까, 오늘은 그가 주는 걸 좋아할까,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동시에 그녀가 무서웠다. 아까처럼 그녀의 앞에서 가끔 얼어붙어 버릴 정도였다.

‘이런 여자는 처음이야….’

그리고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그래서 포기가 안 되는 것일까. 제수스는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낮춰 그녀의 머리맡을 손으로 잡고 가까이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좀 더 얼굴을 낮추니 그녀가 눈을 떴다.

“…….”

“…….”

눈이 마주쳤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수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천천히 더 얼굴을 낮췄다. 그녀가 마주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긴장되어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이 눈빛은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걸까?’

물에 젖은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다시금 입술을 떼고 눈을 떠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제수스의 손이 그녀의 뺨을 매만지다가 목으로 자연스럽게 내려가고 가슴과 옆구리를 스르륵 쓰다듬었다. 이번엔 그녀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왠지 짜릿했다. 제수스의 숨이 살짝 거칠어지며 얼굴을 붉히며 그녀와의 입맞춤에 열중했다.

“으음….”

그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와 엄지로 클리토리스의 약간 윗부분을 꾸욱 누르자 세현이 인상을 쓰며 신음을 냈다. 제수스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받치며 더욱 입맞춤에 열중했다.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고 혀끝부터 뿌리까지 핥으며 문질렀다.

‘기분 좋아….’

그녀와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분이 좋았다. 종일 그녀의 입술을 빨고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제수스는 엄지로 꾹꾹 그녀의 대음순과 소음순 사이를 누르며 자극했다. 그리고 음핵을 직접 건드리자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여성기를 자극하면서 새끼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을 걸어 잡았다. 제수스는 입술을 약간 떼며 혀만 내밀어 그녀의 혀끝을 핥았다. 그리고 눈을 떠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희미하게 눈을 떠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음…. 그래, 말을 하지 말자.’

좋아. 오늘밤은 그녀의 입술을 잔뜩 빨아야겠다. 제수스는 그녀의 뒷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뗐다. 그녀가 다른 손으로 그의 섹시한 목덜미를 붙잡아 입맞춤을 이어갔다. 그는 한손으로 자신의 티셔츠를 끌어올려 잠깐 입술을 떼고 금방 벗었다. 그리고 다시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벨트를 풀고 바지와 속옷도 벗었다. 신발을 벗고 양말도 발로 얼추 벗고는 물에 들어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입맞춤을 계속했다. 그녀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몸이 그의 단단한 피부에 잔뜩 닿아왔다.

“으음….”

목덜미에 소름이 쫙쫙 끼쳤다. 그녀의 손길도 더해서 매우 오싹오싹했다. 제수스는 인상을 썼다. 물속에서 그의 검붉은 남성기가 그녀의 여성기 위에 딱 붙어 있었다. 벌써 두근두근거렸다. 그녀의 두근거림인지 자신의 두근거림인지 알 수 없었다. 제수스는 세현의 가슴을 주물렀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새파랗게 떠올랐다. 그의 엄지가 그녀의 젖꼭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유두가 정말로 부드러웠다. 그 끝을 엄지의 끝으로 빙글빙글 돌리자 뾰족하게 서며 단단해졌다. 그녀가 몸을 꿈틀거렸다. 제수스는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고 그녀의 뺨과 귓가, 목덜미까지 부드럽게 입술을 비볐다.

이런 식으로 섹스를 하는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도취된 듯이 내려다보았다. 이런 섹스는 처음이다.

‘너무 좋아….’

그는 손으로 자신의 두껍고 울퉁불퉁한 자지를 잡아 그녀의 여성기에 비볐다. 물속인데도 그녀의 소음순 사이에 미끄러운 액체가 스며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제수스는 그 사이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듯 천천히 눌러 들어갔다.

“아…, 니 거 싫단 말이야.”

“응…?”

세현이 작게 중얼거리자 제수스가 홀린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귀두까지는 전보단 확실히 잘 들어갔지만 중간이 문제다. 그의 남성기는 중간이 확 굵은 데다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휘어 있었다. 핏줄도 이상할 정도로 굵게 솟아 있다. 그게 몸속으로 들어오며 꾸물텅하고 한 번 질 입구가 요동을 쳤다. 그 순간엔 불쾌감이 확 솟으며 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두꺼운 부분이 더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오는 느낌에 미추가 절로 빠듯해졌다. 척추까지 눌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물까지 약간 들어오며 이질감이 극심해졌다.

“내 게 왜…?”

“몰라서…. 으응….”

몰라서 묻냐고 받아 치려는데 그가 다시 입을 맞췄다. 굵은 공이라도 들어와서 안을 드글드글 긁는 것같이 자극적이었다. 그가 세현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아서 서로가 더욱 깊게 결합되도록 했다. 그리고 한 번, 두 번 찹찹 뭔가 가늠하듯이 움직여 보더니 깊게 눌러 들어가 그대로 꾹꾹 눌렀다. 그녀의 여성기가 그의 흉물스러운 남성기를 꿀떡 삼킨 채 그대로 유지되었다. 서로의 하반신이 최대로 결합한 채 그가 더 들어오려는 듯이 쿡쿡 더 깊게 눌렀다. 서로의 성기가 맞물린 채로 두근두근 맥동했다.

“으음…. 음….”

세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의 입맞춤을 받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 말도 없이 이런 짐승 같은 남자와 섹스를 하는 게 오늘따라 영 불쾌하다.

‘처음부터 싫었지.’

첫 만남,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꼴에 자신을 사랑한답시고 뭔가 해보려는 것도 같잖다. 세현은 그의 얼굴을 떼고 그냥 평소대로 빨리 하고 끝내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가 평소처럼 얼빠진 얼굴을 하고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콱 잡고 떼어냈다.

“윽…. 키스 좀 그만해.”

“하아…. 세현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야시시한 목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가 천천히, 하지만 아주 섹시하고 관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의 안을 자극했다. 그녀도 어느새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으…. 아…. 하아…. 하….”

“좋아…?”

그가 세현의 귀에 속삭였다. 세현은 그의 말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좋을 리가 있냐, 멍청아.

‘…라고 말하고 싶은데….’

몸이 엄청 뜨거워졌다.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천천히 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는 딱 봐도 자기 만족을 위해서만 여자와 섹스하는 남자였고 무슨 짐승처럼 교접했다. 그게 굉장히 불쾌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또한 가장 많이 했기 때문인지 묘하게 이 몸이 익숙하다. 그녀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이 흉물스러운 것도.

“아…. 이거 진짜…. 윽…. 아아….”

이거 어떤 남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다른 거였다. 알렉스는 저릿저릿하고 아픈 듯 기분 좋은 듯 나른한 기분마저 든다면 아담은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자극적이고 강렬한 쾌락에 빠져 상대가 누군지도 잊을 정도다. 그와 할 때는 곧바로 클리토리스가 엄청 자극되어 오르가즘에 확 빠져버렸다. 하지만 이 빨강 머리와의 섹스는 언제나 하기 싫은 걸 견디듯이 했고, 그가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며 기분 좋아할 때면 쾌락이 느껴지든 안 느껴지든 상관없이 기분이 엄청 나빠지곤 했다. 알렉스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리짓이 빨라질 때면 귀엽다고까지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제수스는 아니었다. 뭔 차인지는 모르겠는데….

피랍 사건 당시 그와 다시 섹스를 하기 시작할 때 그와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끼고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그 다음부터 할 때는 그냥 빨리빨리 하고 끝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어쨌든 그는 말은 잘 들으니 그렇게 쭉 해왔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이랬고, 약간 분위기에 휩쓸린 세현도 그냥 이대로 해버리고 말았는데….

“아…! 으응…. 으으응…! 아…! 아아…!”

세현은 제수스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뒤로 고개를 젖히고 크게 신음을 흘렸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하지 말라는 말이 안 나왔는데 동시에 기분 좋다는 게 아주 짜증났다. 그의 자지는 매우 흉물스럽게 생겨 다른 남자들이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자극이 크게 갔는데(중간이 매우 두껍고 오른쪽으로 아주 많이 휘었다) 아예 다 집어넣은 채로 관능적으로 꾹꾹 누르기만 하자 질의 입구 쪽에는 뜨거운 열의 고리라도 생긴 것처럼 엄청 화끈화끈했고 안쪽은 살을 긁는 것처럼 자극적이며 그의 무게도 목소리로 숨소리도 매우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금방 갈 것 같은 건 아니었는데 기분이 엄청 좋았다. 빵빵하게 부푼 음순이 그의 치골과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무게가 그곳을 압박하며 음핵이 간질간질하게 자극되었다.

“세현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귀를 빨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과 뒷목을 넓게 잡고 쓰다듬었다. 아찔했다. 세현은 눈을 감고 다리를 더 벌리고 그가 더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와의 섹스에 도취되어 신음을 잔뜩 흘리다가 이윽고 점점 더 크게 헐떡거렸다.

“으응…. 아아…. 흐읏…. 아…. 으…. 으으응…!!”

그녀는 몸을 뻣뻣하게 늘이며 오르가즘에 도달했다. 등골이 활활 타는 것만 같았다. 그의 등허리에 깊게 손톱을 박고 견디듯이 몸을 몇 번이나 떨었다. 그녀가 끌어당기자 제수스는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섹시하게 인상을 썼다. 그는 오랜만에,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겨우 두 번째로 자신에 의해 절정에 이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머리맡의 벽을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황급히 짚고 그녀의 안에 최대한 깊게 쑤욱 들어가서 사정하기 시작했다.

“으윽…!”

그는 벽을 짚은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며 버텼다. 이런 오르가즘은 제수스도 처음이었다. 엄청 나왔다. 엄청 기분 좋았다. 그는 뜨거운 숨을 느리게 내쉬며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 쳐다보며 더 꾹꾹, 그녀의 안을 누르며 잔뜩 지렸다. 미칠 것 같다…. 그가 사정이 끝날 때쯤엔 그녀도 욕조의 머리맡에 고개를 그대로 늘어뜨린 채 빠르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제수스는 온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근질근질해졌다. 안 되겠다. 못 참겠다. 그는 그대로 세현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곧바로 두번째를 시작했다. 잔뜩 민감해진 그녀의 여성기에 파묻힌 자신의 남성기를 팍팍 뺐다 넣었다 하며 피스톤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로 물 밖으로 그녀의 몸을 들어올려 퍽퍽퍽, 찹찹찹 하고 상스러운 소리가 잔뜩 날 정도로 난잡한 섹스를 하기 시작했다. 세현은 눈앞이 번쩍번쩍 하는 느낌에 깜짝 놀랐다.

“아! 아아! 아으…! 아!!”

“내 이름 불러. 하윽. 기분 좋다고 말해.”

“잠…깐! 하아!!”

방금 끝났는데도, 그가 예전처럼 하는 것만으로도 처음으로 느끼는 엄청나게 강렬한 자극과 쾌락이 그녀를 덮쳤다. 세현은 곧바로 그의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

소드마스터는 힘도 세고 맷집도 좋고 오라도 있었다. 하지만 오라로 쉴드를 만들거나 신체를 강화하지 않고 맞으면 아프긴 아프다.

게다가 눈은 급소고, 발뒤꿈치로 정통으로 맞았다.

"......."

거울을 보고 제수스는 말을 잃었다. 여자한테 맞아서 눈탱이밤탱이가 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 한창 할 때는 좋았는데. 세현이도 분명히 좋아했는데. 아.'

오늘도 꽃과 선물과 먹을 걸 사왔다. 어젯밤에 결국 그녀의 기분이 상한 거라면 만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신이 지금 이렇게 기스가 났으니. 얼굴이 못나니 뭘 입어도 마음에 안 들어서 오는 길에 옷도 새로 샀다.

"아, 짜증…."

제수스는 자신에게 배정된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입고 있던 회색 티셔츠를 벗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금발 늙다리와 검은 머리의 싸가지였다.

"설마…."

아담은 제수스의 눈과 등을 번갈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알렉스는 캬아아아! 하고 털을 세웠다. 아담이 중얼거렸다.

"퀸 교수님이 섹스할 때도 은근히(?) 폭력적(?)인 걸 좋아하시는 건가…."

제수스는 자신의 등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등은 보이지 않고 옆구리 뒤쪽만 살짝 보였는데 어제 그녀가 할퀸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척추부터 옆구리 양쪽으로 크게 쫙쫙 그어져 있었다.

제수스는 방금까지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알렉스를 보곤 곧 헹 하고 웃었다.

"야, 좆만이, 넌 이런 고통이 뭔 느낌인지나 아냐? 짐작도 안 되지?"

"악!! 그냥 싸우자!!"

알렉스가 결국 달려와서 그를 들이박았다. 진짜 말 그대로 어깨로 바디 블로우를 날렸다. 제수스가 억 하고 뒤로 퍽 날아갈 뻔했다.

"와씨. 야, 죽고 싶냐?"

제수스가 눈짓으로 페이크를 날리고 알렉스의 목을 확 낚아채 헤드락을 걸었다. 알렉스는 한 손을 끼워 넣어 목이 졸리는 걸 막으며 몸부림 쳤다.

"눈탱이! 밤탱이나! 된 주제에!"

알렉스가 그의 목 조르기에서 벗어나려고 허리를 튕겨 그를 떼어내려고 하다가 벽에 쾅 하고 제수스의 등이 부딪치게 했다.

"얘들아, 그쯤하고 그만 싸워."

아담이 말렸다. 아직 제정신은 있는지 관절기만 쓰는 것 같긴 한데…. 제수스가 팔을 더 조여 힘을 주며 말했다.

"어제 세현이가 너~무 좋아서 몸부림 치다가 맞은 거야! 이런 게 영광의 훈장이지…!"

"지랄 똥 싸지 마, 이 걸레 새꺄! 싫으니까! 걷어 찬 거지!!"

"아니거든! 세현 교수님이 좋아서 그런 거거든?!"

제수스는 알렉스의 말투를 따라 하며 그를 조롱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뒤로 팍 제껴 제수스의 눈가를 가격했다. 제수스의 팔에 순간 힘이 빠지자 알렉스가 그의 팔을 팍 꺾어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며 그를 바닥에 눌러 등 뒤에서 올라탔다. 오른팔을 심하게 뒤로 꺾인 제수스는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눈을 감싸며 욕했다.

"야 이 씨…! 개새끼야! 맞은 데를 또 쳐?"

"그러게 누가 맞고 다니랬냐?!"

"이건 맞아준 거에 가깝지! 윽!"

알렉스가 자신의 팔과 손목을 더 강하게 꺾자 제수스가 신음을 흘렸다. 제수스는 한 번 숨을 들이마시며 잡히지 않은 팔로 땅을 강하게 밀어냈다. 그의 등 위에 올라탄 알렉스까지 붕 떠올랐고 그는 중심을 잃었다. 소드마스터는 힘이 아주 세지만 그렇다고 몸이 들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아직 이 애새끼가 소드마스터끼리의 싸움에는 실전이 적다는 얘기다.

"으윽!"

"억…!"

그리고 제수스와 알렉스는 서로의 팔다리를 꺾으며 뒤엉켜 있었다. 최대한 뭘 부수지 않으면서 승부를 내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인데…. 따라서 보기에는 아주 꼴사납다.

"뭐 하냐? 싸우냐?"

알렉스와 제수스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세현이었다. 둘 다 헉 하고 놀랐다.

"아뇨!"

"아, 아니! 이건…!"

그 둘은 얼른 서로 얽힌 몸을 풀려고 했다. 동시에 그러니 손발이 안 맞아 일어나다가 서로 엉덩이가 부딪쳐 휘청거렸다. 세현이 말했다.

"왜 그만둬? 계속 한해봐. 누가 이기나 한 번 보자."

세현은 놀란 것도 하나 없이 평이하게 말했다. 제수스는 웃통까지 벗고 있었다. 그는 엄청나게 난처한 기색으로 세현의 눈치를 봤다.

"화났어…?"

"화 안 났다. 계속 해보라니까?"

"……."

제수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안절부절못했다. 알렉스는 팔짱을 낀 채로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자기 잘못 아니라 이거다. 세현이 잠깐 빤히 그런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내심 철렁했지만 그래도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세현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갔다.

'진짜 화난 건 아니겠지?'

알렉스는 슬쩍 옆을 지나가는 세현의 기색을 살폈다. 제수스는 얼른 옷과 선물을 챙겨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세현아, 밤에 잘 잤어? 몸은 괜찮아? 어젠 내가 약간 오버했지…. 어제 니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서….”

그녀는 제수스를 무시하고 있다가 싸움 구경을 하던 경호원이나 간호사, 의사가 제수스의 말에 그녀를 쳐다보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뭘 봐? 눈 안 깔아?”

그들은 전부 화들짝 놀라더니 눈을 깔고 해산했다. 요즘 그녀는 심기가 아주 사나웠다. 제수스도 지레 놀라 쫄았다. 그는 자신이 사온 꽃다발에 얼굴을 반쯤 숨기며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다 가지고 있었다. 꽃, 보석, 먹을 거, 약간 상하긴 했지만 몸 좋고 잘생긴 남자.

‘이거 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건데….’

제수스는 초조해졌다. 어제는 진짜 그의 인생에서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 좋은 섹스를 했는데, 동시에 상대 여자에게 얼굴을 걷어차인 최초의 날이었다. 제수스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를 숨기지 못하며 그녀의 안색과 표정을 살피며 따라갔다.

“어깨 주물러 줄까? 피곤해? 이거 먹을까? 맛있는데.”

그때까지도 세현이 자신을 부르지나 않을까 약간 기다리던 알렉스는 그녀가 그냥 자기 병실로 들어가버리자 캭! 하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아갔다.

“왜! 난 아는 척도 안 해!”

세현은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거기에 있는 고급 리클라이너에 털썩 드러누웠다. 편두통이 온다. 제수스는 슬그머니 선물을 테이블 위에 놓고 조용히 먹을 걸 꺼냈다. 고급 용기가 세 개 있었다. 하나는 엄~청 유명한 일식집에서 사온 스시와 하나는 한정수량의 엄~청 유명한 셰프가 만든 만두와 마지막으로 엄~청나게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사온 것이다. 음료도 오늘은 약간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으로 사왔는데…. 매니저가 지인까지 이용하여 줄을 두세 시간씩 섰다.

‘여자가 기분 나쁠 땐 역시 맛있는 거지….’

세현은 요새 수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세 끼를 다 챙겨 먹는 조건으로 조금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제수스는 테이블 채 들고 그녀가 누워 있는 리클라이너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적당한 높이의 스툴에 앉아 말없이 그녀의 손에 잔을 쥐어 주고 술을 따랐다. 그녀의 손은 미지근한데 자신의 손은 뜨거운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술을 삼가 했으나 오늘은 반이나 쭉 마셨다.

“교수님!! 왜 난…!”

“너 오늘 그거 이상으로 소리 지르면 내 손에 죽는다.”

알렉스가 병실로 뛰어 들어오며 그녀에게 따지려고 들다가 그녀의 서슬 퍼런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입을 합 다물었다. 제수스가 알렉스를 보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오늘은 진짜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나도 화나는데…! 교수님, 진짜로 어제 저 새끼랑 하는 거 좋았냐고!’

알렉스는 속으로라도 부글부글 외쳤다. 아담도 알렉스의 뒤를 따라오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약간 놀랐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건가….’

그는 그때 홉스가 동영상을 폭로할 그 당시에 바로 그녀와 함께 있었고 학회가 어떤 식을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와병 사실을 미리 풀어서 동정론을 몇 달 동안 조성한 것도 홉스 게이트에 대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멸망했는데도 그녀는 사우디에서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말을 미리 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상황이 좋을 리가 없지…. 드레이닝은 급작스럽게 악화될 수도 있다.’

아담은 잠깐 알렉스의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제수스는 그녀의 기분이 자신 때문에 좋지 않은가 싶어 불안해하며 그녀의 기분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이거 먹어. 진짜 맛있대.”

“뭐?”

그녀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제수스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냥 그녀의 입에 음식을 넣었다. 그냥 대충 씹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꿀떡 음식을 삼키곤 검지를 까딱하며 더 달라는 의사표현을 했다. 제수스는 느낌표가 딱 뜬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아싸. 진짜 맛있나 보다. 제수스는 그녀의 입안에 음식을 하나 더 넣어주고 그렇게 맛있나, 싶어 자신도 하나 먹어보았다.

‘열 박스는 살 걸 그랬다….’

진짜 맛있네…. 그녀의 잔에 술을 더 채워주고 자동 수저가 되어 그녀에게 음식을 바쳤다. 아담도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욕실로 가서 뭔가를 가져오더니 손가락에 적당히 발랐다. 그리고 그 병을 휙 알렉스에게 던졌다.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그걸 잡았다. 아담은 그녀의 머리맡으로 가서 그녀의 양쪽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눌렀다.

“음악이라도 틀까요?”

희미하게 편백나무 향이 났다. 그가 그녀의 눈썹과 미간도 부드럽게 마사지하니 지끈거리던 두통이 살짝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대꾸했다.

“틀어봐.”

아담은 두통에 좋은 클래식을 검색하여 병실에 설치된 음향기기에 재생했다. 생상스의 음악이 그리 크지 않게, 느릿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 그런 데 가서 이런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직접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사운드였다.

“쳇.”

알렉스는 그렇게 작게 소리를 내더니 아담이 던져준 오일을 들고 스툴을 끌고 와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놓고 신발을 벗기고 가만히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발의 가운데를 좀 강하게 누르니 그녀가 움찔했다.

“아팠어요?”

그녀가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만큼 그녀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처음 보았다.

‘무슨 일 있나? 저 걸레 새끼 때문 아냐?’

알렉스는 잠깐 제수스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제수스의 말은 맞긴 맞았다. 꽃, 선물, 맛있는 음식, 미남들. 여자가 가까이하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이다. 세현이야 지금껏 쓸데없다고 다 멀리하고 지낸 것뿐이지만…. 거기에 편백나무의 향기, 부드러운 지압, 느릿한 아다지오의 음악이 더 하니 스트레스와 편두통이 서서히 완화되며 세현의 기분이 약간 나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기분 괜찮아졌어?”

제수스가 그녀에게 작게 속삭여 물었다. 세현은 그냥 손짓을 하며 음식이나 마저 달라는 표시를 했다. 그녀의 손짓에 좀 더 성의가 생겼다. 제수스는 그것이 그녀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대답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웃으며 ‘아~’ 하고 그녀의 입에 모양마저 예쁘게 생긴 음식을 넣어주는데 마침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났다. 남자 세 명은 전부 그쪽을 돌아보았다.

“들어와.”

세현은 눈을 감고 그대로 마사지를 충분히 느끼면서 대꾸했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그를 본 남자 세 명은 헉 하고 곧바로 고개를 젓거나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절대 있으면 안 되는 남자였다.

“교수님, 연구실 못 나오실 동안 스케줄 변경된 거 확인이….”

최이삭은 멀티스크린을 보다가 덩치 큰 남자 세 명이 자신의 지도 교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당황했고 그들이 최이삭에게 ‘아~’ 하면서 뭔가 부정적 사인을 보내는 것에 놀랐으며 리클라이너에 누워 있던 세현이 허리를 일으키며 그를 쳐다보자 소름이 끼쳐 팍 하고 긴장했다.

“…….”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최이삭은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닫고 나가고 싶어졌다.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언제는 뭐 따뜻했겠냐만 지금 저건 완벽한 데스 글레어(Death glare)였다. 지금 뭘 잘못했다간 최이삭은 죽을 것이다.

“뭐해? 안 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발을 바닥에 내리고 최이삭 쪽으로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최이삭은 흡, 하고 마음을 다잡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최이삭은 그녀에게 떨리는 손으로 멀티스크린을 내밀었다. 남자 세 명은 최이삭의 핏기 가신 얼굴을 확인하고 세현의 안색을 살폈다.

“이거 뭐야?”

“학회 보안 관련 연수날입니다.”

“이걸 이 상황에 한대?”

“네, 한다고 합니다. 학과장님께도 확인받았습니다.”

그는 절로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빠르게 대답했다. 세현은 연수 일정을 삭제해버렸다.

“빼. 가지 마. 올해만 몇 번을 보안 관련으로 애들 집합시켰는데 이걸 또 해?”

졸업하려면 필참해야 하는 석사들도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한 마디라도 언급했겠지만 최이삭은 곧바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가을학기 졸업할 석사들 논문 아직 등록 안 된 건 뭐냐? 포기한다냐?”

“아닙니다. 데이비스는 오늘 자정까지 올린다고 했고 전 석사도 내일 오정까지는 올린다고 했습니다.”

“니가 보기엔 어때?”

“데이비스나 전 석사 거는 석사 졸업 기준은 넘어간다고 봅니다. 미리 제출한 렌 석사 거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 학기 더 하면 괜찮아질 거 같아, 아니면 그냥 잘라?”

“한 학기 더 하면 분명 더 나아질 겁니다.”

“너 그 말 책임져라.”

세현은 그대로 스케줄을 컨펌했다. 그리고 세현은 멀티스크린을 최이삭에게 넘기고 다시 드러누웠다. 네 남자 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 명의 남자들은 빨리 가, 빨리 가, 이런 눈빛을 최이삭에게 쏘았다. 하지만 최이삭이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그는 그녀가 왜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은지 알고 있었다. 세현이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인상을 팍 쓰며 그를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빨리 꺼져, 이 병신아!’

그가 속으로 외쳤다.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최이삭은 세현의 성질을 긁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청문회 일정이 생각보다 빨리 잡힌 건 오히려 잘된 거일 수도 있잖아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분명히 비서실에서 전략 잘 짜올 거예요. 그러니까….”

“야.”

세현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를 불렀다. 최이삭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다시 바로 앉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니가 나한테 훈계질 할 군번이 아니라는 걸 도대체 몇 번이나 얘기해야 하는 거냐?”

“헉. 아, 아, 아니…, 후, 후, 훈계질이, 이라뇨…. 아, 아뇨….”

그냥 나갔어야 했다. 그냥 닥치고 나갔어야 했다. 그녀가 트집 잡지 않고 보내줄 때 그냥 잽싸게 튀어 나갔어야 했다. 최이삭은 벼락이라도 내리칠 듯한 그녀의 기세에 몸이 딱 얼어버렸다. 세현은 그의 정강이를 팍 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이삭은 억 하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당연히 그대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교, 교수님, 잘못했습니다. 교수님, 잘못했어요. 교수님….”

그는 곧바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세현은 그의 입안에 엄지를 넣어 그의 뺨을 세게 잡고 흔들었다.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살면 되는 거야!! 어디서 자꾸 주제를 넘어?! 어?!!”

“교우임, 알모햇어여….”

그녀의 얼굴이 너무 무서웠다. 최이삭은 바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세현의 뚜껑을 더 열리게 했다. 나머지 세 명의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굳은 채 그들을 잠깐 보다가 결국 거의 동시에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차 말했듯 그는 누구도 구해줄 수 없는 남자였다.

*

청문회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검찰 기소 등으로 엘리야 민의 실험 스케줄이 약간 꼬여버렸다. 엘리야 민은 몇 달 전보다도 훨씬 마른 모습으로 어두운 세미나실의 앞에 서서 레이저 빔으로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현재 세현 퀸 교수의 드레이닝 홀은 약 5.5mm 크기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3개월에 시간당 50만 BP씩 마력 소진 속도로 늘어나 10개월 후면 시간당 1,000만 BP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전 연구 결과와 다른 드레이닝 환자들을 관찰한 결과 시간당 1,000만에서 1,100만 BP를 돌파할 경우 홀의 안정성이 무너지며 드레이닝 홀의 크기와 마력 소진 속도 모두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모든 환자가 사망하는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 교수는 레이저 빔을 쏘는 장치의 버튼을 눌러 홀로그램을 변환시켰다.

“드레이닝 홀을 몇 개월 간 장기추적한 경우는 세현 퀸 교수의 케이스가 최초로, 현재 본원에 모인 다른 드레이닝 환자들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세현 퀸 교수의 드레이닝 홀을 몇 달간 살펴본 결과 홀의 성질, 기능, 상태 모두 웜홀과 유사성을 보여(이 순간 캘리 박과 세현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스웨덴 온살라 연구소의 뒤푸르 박사를 초청하여 2128년 6월 18일 월요일 오전 9시, 드레이닝 말기 드레이닝 환자를 상대로 해당 환자의 홀의 크기와 성질을 웜홀 방정식에 대입하여 축퇴시키는 실험을 시행하자 일시적으로 홀이 닫히는 결과를 확인했으나 환자의 신체를 심각하게 손상하여 불사의 마법으로도 회생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민 교수는 해당 실험체의 간단한 모형을 나타냈다. 사람의 가슴부터 허벅지까지가 납작하게 찌그러져 뭉쳐져 있었다. 엘리야 민이 무심하게 홀로그램을 다시 변환하며 설명했다.

“어떤 부분에서 잘못되었는지 뒤푸르 박사와 레이지 레지던트가 함께 원인 파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웜홀과 드레이닝 홀의 차이점을 마도로 아직 적절히 해석해내지 못했고 체내에 남아있는 마력 또한 간섭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직은 정확한 원인이 파악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세현 퀸, 캘리 박, 한민유와 새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이름 쟁쟁한 의사들이 한데 모여서 <세이브 퀸 프로젝트> 미팅을 진행하고 있었다. 2128년 6월 25일 월요일. 평소대로라면 세현은 몇 시간이나마 연구실에 갈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병원에 있어야 했고 보통은 캘리 박과 한민유, 의사들만 참여하던 정례미팅에 그녀도 참석하게 되었다.

“지금 가장 가시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소드마스터의 오라와 S인자를 활용한 드레이닝 홀의 확장 저지와 마력 충전 효과입니다. 기본적으로 소드마스터의 체액에는 전부 포함되어 있는 S인자는 오라로 변환되기 직전의 물질인데 평시 시간당 1,000만 SP 정도의 오라를 방출하는 S인자의 양은 마도사의 체내에서 최대 700만에서 800만 BP까지 전환됩니다. S인자 자체는 마력을 충전하는 효용만 다하고 사라지지만 오라는 드레이닝 홀에 일종의 글루(Glue) 역할을 하여 마력이 빠져나가는 홀이 커지는 것을 막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오라를 주입하면 드레이닝 홀을 막을 수 있다는 건가?”

캘리 박이 그녀의 말을 끊고 바로 물었다. 민 교수가 홀로그램을 바꾸며 대답했다.

“저희도 그런 효과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여 이틀 전 말기 드레이닝 환자의 외부에서 오라를 발생해보았을 때는 전혀 체내로 들어가지 못했고 질을 통하여 안쪽으로 주입하였을 때는 홀 자체의 활동성을 약간 저해하는 효과를 보였으며 개복하여 단전에 주입했을 땐 쉴드 효과가 나타나며 장기를 훼손하였습니다. 물론 치료 마법을 통하여 훼손된 장기는 곧바로 회복하였으나 홀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

“2주 뒤 세현 퀸 교수가 직접 국회로 소환되어 청문회가 열리는 관계로 앞뒤로 포함하여 10일 정도 청문회 대응에 주력하는 동안 드레이닝 홀의 웜홀 성질을 응용한 소멸과 소드마스터의 S인자 및 오라를 이용한 드레이닝 홀 확장 저지 및 축퇴, 두 가지 경로로 접근해볼 생각입니다. 이상입니다.”

캘리 박은 엘리야 민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세미나실 안에 불이 켜졌다. 의사끼리 잠시 뭐라고 메모를 하며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리야 민은 몇몇 의사들에게 피드백을 받고 있었다.

“이게 웜홀의 성질을 띄고 있다고?”

세현 퀸은 퍽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홀로그램 자료를 받아 재생해보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캘리 박도 가까이 와서 살펴보았다.

“하수구 보고도 웜홀 같다고 하겠네.”

세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캘리 박은 자세히 앞뒤로 드레이닝 홀이 나타내는 물리량을 보면서 대꾸했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고….”

“쟤는 물리를 야매로 배워서 그렇잖아요.”

“수식이 조금 비슷하긴 하다. 야, 근데 쟤는 그렇다고 블랙홀도 만드는 마법을 잘도 사람한테 썼네.”

“그, 교수님이 쟤한테 너무 푸시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쟤가 도축업자도 아니고 지금 사람을 몇 명이나 잡고 있는지 아세요?”

“그러게…. 쟤는 아무리 의사라지만 징그럽지도 않나.”

“그러니까요.”

저 멀리 하늘 꼭대기에서 도시를 눌러버리는 것과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을 난자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두 사람은 무슨 야만인이라도 보듯이 엘리야 민을 잠깐 쳐다보았다.

“중동 쪽에서 일어나는 시위에 대한 자극적인 이미지는 최대한 차단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뉴스 플랫폼에서는 정재계 유착 비리나 연예인 가십 노출을 30% 정도 증가시켰고 스페이스 등의 SNS에서는 키워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8월부터는 올해 엘 드라카가 시작되고 7월부터는 주요 클럽 선수들의 가십이나 스포츠 도박, 승률 분석에 관한 프로그램을 적절히 편성하고 노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청문회에서 별다른 일만 더 없다면 대중의 관심은 청문회를 정점으로 떨어질 겁니다.”

의사들이 드레이닝을 치료하기 위한 의견을 서로 자유롭게 나누고 있을 때 비의료인 셋은 조직에 닥친 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민유의 말에 캘리 박이 물었다.

“테러 위험은?”

“세 단계 정도 상승한 걸로 보고 있습니다. 리비아 잔존 세력이 이를 기회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인지 점 조직 사이의 통신량이 116%가량 상승했습니다. 와하브 쪽도 몇몇 계열은 300% 넘게 증가한 곳도 있습니다.”

“만약에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한테 득이야, 실이야?”

“어디에서 일어나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언론 쪽은 홉스와 와하브 분파의 연관을 묻는 기사가 대거 나오고 있으므로 한국에서 와하브 계열이 테러를 일으키면 여론은 반(半)홉스로 전환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하지만 리비아 잔존 세력이나 코카서스, 이번 사우디 쪽이, 만약 태평양 연안 국가에 테러를 일으키면 친(親)홉스 성향이 강화될 가능성이 다소 있습니다.”

“나는 청문회에서 어떤 논지로 가야 하지?”

세현 퀸이 물었다.

“리야드가 몬스터 레어였다는 논지를 끝까지 주장해야 합니다. 현재로선 리야드 접근도 어려울 뿐더러 확인 결과 중력 마법과 달리 준(準)변환 마법은 암석 변성이 아예 다르므로 다른 레어 시티나 수에즈에서 일으킨 중력 마법으로 처리한 몬스터 흔적과는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리야드는 몇 천 미터 상공에서도 몬스터가 보일 정도로 레어화된 상태였다, 리야드가 레어화되면 주변 국가로 대량의 몬스터가 급속도로 퍼지고 중동 지역 전체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기존의 중력 마법과 다른 마법을 쓴 것은 리야드가 다른 도시에 비해서 5배에서 10배 이상 큰 도시였기 때문이며 이미 몇 달 동안 드레이닝에 걸려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마력 상태로는 준(準)변환 마법을 쓰는 것이 불가피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음…, 오케이.”

“홉스 중위에 대해서는 일체의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럼 도대체 홉스 중위가 왜 그런 주장을 한 것이냐는 질문에는 모르겠다고 하십시오. 같이 작전에 참여했던 도강준 준위를 내보내 리야드가 몬스터 레어였다는 증언을 직접 할 것이며 같이 작전에 나갔던 다른 군인들의 증언도 자필로 전부 받아서 제출할 겁니다.”

“그래? 괜찮은 거야, 그거?”

“홉스 중위와 도 준위 외에는 전부 리야드가 몬스터 레어였다고 지시받고 작전에 임했고 도 준위는 어떤 길이 살아남는 길인지 아는 남자입니다. 뭐, 소드마스터는 항상 그렇잖아요. 사는 게 중요한 거죠.”

한민유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캘리 박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사는 건 누구한테나 제일 중요해.”

“진리를 찾는 게 아니라요?”

세현이 물었다. 캘리 박이 커피를 마시면서 심심하게 대꾸했다.

“그것도 살아야 하는 거야.”

그것을 끝으로 세현은 병실로 돌아갔다. 캘리 박은 엘리야 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민유가 세현의 옆에 붙었다. 청문회 예상 질문과 답변에 대해 조금 더 세세하게 코칭에 들어갔다.

“일주일 뒤에 좀 더 본격적으로 할 거예요. 주로 질문할 의원들에 대한 것도 가르쳐드릴 거고 각 의원마다 어떤 식으로, 어떤 단어를 써야하는지도 가르쳐드릴 거고. 물론 그 의원들의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카메라 너머에서 보고 있는 대중을 설득하는 게 중요한 거죠. 사람들은 교수님을 좋아합니다. 다들 TV 앞에서 <유니버스>를 봤던 인간들이라 TV에서 나오는 교수님의 모습에 익숙합니다. 그 점을 이용해야 해요. 그때처럼, 확고부동한 진리를 얘기하는 것처럼 설득력 있는 어조로 천천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유니버스 나왔을 때처럼 머리를 자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아, 머리는 안 그래도 자르려고.”

“사람 바로 불러 드릴까요?”

“그래.”

“오늘 자르고 청문회 가기 전에 한 번 더 손질하고 가죠.”

“오케이.”

세현은 심드렁하게 이라고 페이지마다 도장이 벌겋게 찍혀 있는 종이들을 넘겨보고 있었다. 한민유가 캘리 박에게 돌아가고 세현은 디바이스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한 번도 채 울리기 전에 곧바로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찾으셨습니까.]

“어, 연구실이냐.”

[네.]

“뭐 하는데.”

[졸업 논문 계획서를 다 썼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병원에 뒤푸르 박사가 왔다고 해서 실험 관련하여 상담 좀 하려고 가려고 했습니다.]

“어, 그렇더라. 와서 뒤푸르 박사랑 온살라 갈 얘기하고 바로 내 병실로 와서 졸업 논문 계획서 주고.”

[…학과장님한테 한 번만 확인받고 드리면 안 될까요?]

“야…, 너 노친네 없으면 나한테 종이 한 장도 못 가져오겠다, 어? 노친네가 내 랩장이냐, 니가 내 랩장이냐? 너 일 그렇게 할래? 얼마나 똑바로 일을 안 하길래 그렇게 자신이 없어?”

[아, 아닙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쯧.”

세현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20분 뒤에 누군가 병실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세현이 대꾸했다.

“들어와.”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세현은 들고 있는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약간 더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세현에게 곧바로 걸어와서 졸업 논문 계획서를 제출했다. 세현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노려본 채 가만히 있다가 탁 하고 그의 손에서 계획서를 빼앗았다.

“이걸 이렇게 촉박하게 가져와? 언제 스웨덴 가서 언제 할래?”

“죄송합니다.”

“뒤푸르 박사가 뭐래?”

“미리 얘기한대로 9월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20번 정도 실험할 수 있을 거라고…. 마력 포션 좀 얻어가면 매시간 연속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아냐. 그건 원래대로 해.”

“아,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수에즈 때 이미 뭐 할 건지는 봐놓았기 때문에 익숙한 내용이었다. 다만 뭔가 하나 빠뜨려서 멀쩡한 연구소 하나 날릴까 이렇게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다.

“연습은?”

“시간 날 때마다 대전에 가서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합니다.”

“그래.”

세현은 세 번 정도 그의 계획서를 더 읽었다. 중력 실험 5개 수칙이나 20개 수칙을 전부 다 따져서 중력 붕괴나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을 체크했다.

“시뮬레이션은?”

“무사 실험 가능합니다. 폭발도 없고 붕괴도 없었습니다.”

“하아, 그래.”

세현은 자신의 서명란에 사인했다. 그리고 최이삭에게 내밀었다.

“노친네 사인 받아라.”

“네!”

최이삭은 순간 활짝 펴진 얼굴로 자신의 계획서를 받았다.

“좋냐?”

세현이 약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면박을 주니 최이삭이 합, 하고 입술을 말았다가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최이삭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진짜 기분이 좋았다. 그녀에게 계획서를 들고 갈 때마다 혼났는데 드디어 혼나지 않고 컨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된다’는 이 한 순간인 것이다. 그전의 수많은 실패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뻤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졸업 논문이지 않은가!

‘이대로 잘하기만 하면 교수님이 졸업장을 주신다는 거겠지?’

물론 이 시국에 졸업 논문 ‘계획서’를 통과 받고 기뻐하는 것은 조금 그렇긴 했다. 교수님도 학과장님도 학회도 지금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최이삭은 자신의 졸업 논문 계획서를 소중하게 들고 세현에게 물었다.

“교수님…, 괜찮으신 건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요?”

“너도 청문회 나가야 하잖아.”

“네…, 피랍일에 관해서 증언하라고 해서….”

최이삭은 그게 뭐 별거냐 싶어 그렇게 대꾸했으나 교수님은 아니었다.

“하, 진짜 짜증난다. 너나 나나 둘 중에 하나는 랩에 붙어 있어야 할 거 아냐!”

세현은 폭발해서 들고 있던 펜과 종이를 집어 던졌다. 최이삭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얼른 이라고 찍혀 있는 두꺼운 종이 뭉치와 그녀의 펜을 다시 그녀의 책상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고정하십시오, 교수님…. 금방 지나갈 거예요.”

“젠장….”

세현은 양쪽 관자놀이를 오른손 엄지와 중지로 꾹꾹 누르며 화를 삭혔다. 잠시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최이삭에게 그만 나가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가 없었다. 책상 끝에 그의 머리카락만이 보였다. 몸을 내밀어 책상 앞을 보니 그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 하냐?”

“교수님 마음이라도 풀릴까 싶어서….”

그는 책상을 쳐다보면서 자신감 없지만 어쩐지 뭔가 기대감이 서린 말투로 대답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의 믿음직하지 못한 태도는 안 그래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세현의 신경을 팍 긁었다.

“야…, 너 그냥 이제 무릎 꿇는 게 자동이다? 어? 니가 잘못해도 무릎 꿇고 잘못 안 해도 무릎 꿇고, 니 무릎은 뭐, 그냥 언제든 꿇는 거냐? 어? 언제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자동이야?”

“아, 아,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 앞에서만….”

“야!!! 누가 지금 말대꾸 하래?!”

최이삭은 합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깔고 있었다. 세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로 걸어갔다. 세현은 그의 허벅지를 퍽 밟았다. 최이삭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 움찔했다.

“넌 진짜 바보냐? 어? 교수가 열이 받아 있으면 쥐 죽은 듯이 닥치고 시키는 대로만 해야지! 뭐, 니가 뭐라고 무릎 좀 꿇는다고 내 기분이 뭘 나아져?!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왜 이 대가리에서 자꾸 나오는 건데? 어?!!”

세현이 그의 이마를 검지로 콱콱 찍었다. 최이삭은 눈을 질끈 감고 견뎠다. 그의 이마가 벌게졌다.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앞으로 다시는 안 이러겠습니다.”

“니가! 앞으로! 안 하겠다고! 하고! 또!! 저지르는 게! 한두 개야?! 어?!!”

“윽. 죄송합니다, 교수님. 시정하겠습니다, 교수님.”

날 잡았다. 최이삭은 그 뒤로 자신이 얼마나 랩을 거지같이 굴리며 시키는 것도 똑바로 못 해오고 머리도 안 돌아가며 공부할 소양이 전혀 없다는 그녀의 폭언을 들으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졌지만 그래도 그녀의 꾸짖음을 받아들이며 싹싹 빌고 있는데 문이 드륵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어, 퀸 교수야. 뭐 하….”

캘리 박이었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보면서 노크도 없이 세현의 병실로 들어왔다. 세현과 최이삭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캘리 박도 디바이스에서 시선을 떼고 그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인상을 팍 쓰더니 창문을 보고 얼른 다가가서 커튼을 팍 쳤다.

“아, 씨. 선팅된 거 맞지? 야, 이런 시국에 너는 애를 때리면 어떡하냐. 누가 보면 어쩌게.”

세현은 캘리 박의 말에 콧방귀도 안 뀌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을 내려다보듯이 쳐다보았다. 최이삭은 약간 주저하다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믿음직하지 못했으나…. 세현은 그의 허벅지에서 발을 뗐다. 세현이 다시금 자기 의자로 돌아가서 털썩 앉았다. 최이삭은 처연하게 캘리 박에게 대신 변명했다.

“아닙니다, 학과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 그거야 그렇겠지만….”

캘리 박이 아직도 약간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캘리 박이 그의 엉덩이를 툭툭 찼다.

“일어나. 일어나.”

최이삭은 세현의 눈치를 보았다. 세현은 탐탁치 않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고개짓 했다. 최이삭은 코를 한 번 훌쩍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거 니 거다.”

캘리 박이 최이삭에게 세현의 것과 비슷한 기밀 문서를 하나 넘겨주었다. 역시나 세현의 것과 비슷하게 청문회 질의응답에 관련된 문건이었다. 최이삭은 안경 밑으로 자신의 눈을 한 번 문지르곤 재빨리 빠르게 문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캘리 박은 그런 최이삭을 한 번 훑어본 뒤 지나가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넌 리밍이 스타일이라…. 리밍이나…, 아니면 필리페 밑에 갔으면 좀 더 괜찮았을까?”

그 말에는 세현도 ‘뭐?’ 하고 인상을 팍 찌푸리며 캘리 박을 쳐다보았는데 최이삭은 그야말로 펄쩍 뛰더니 소리쳤다.

“전 우리 교수님이 좋습니다! 우리 교수님이 세계 최고라구요! 저한텐 우리 교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교수님은 싫습니다! 절대! 절대 싫습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

“…….”

최이삭의 반응에 두 교수님 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최이삭을 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최이삭도 두 교수님 앞에서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라 헉, 하고 저도 놀라서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가, 감히 크, 큰 소리 내서 죄송합니다…. 그, 그게….”

캘리 박이 최이삭을 빤히 보면서 세현에게 말했다.

“야…, 애를 얼마나 팬 거냐? 어? 적당히 패라. 얘가, 쓰읍, 얘가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

“그…렇게까지 많이 때리진 않았는데?”

세현도 의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참.”

캘리 박은 헛, 하고 한 번 웃더니 최이삭의 뺨을 툭툭 두드리고는 세현에게로 걸어갔다. 최이삭은 극도로 긴장했다가 ‘괜찮나?’ 하고 두 분의 눈치를 잠깐 보았다. 그들의 관심은 최이삭에게 멀어졌다. 괜찮은가 보다.

‘아, 난 진짜 병신인가….’

최이삭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6년이나 곁에 있었는데도 지도 교수의 마음도 가늠하지 못하다니. 방금 그냥 지나간 것도 왜 안 혼나고 넘어간 건지도 모르겠다. 아까 무릎을 꿇은 것도 그렇게까지 교수님의 신경을 긁을 만한 일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뭔가 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혼나는 것은 상당히 피상적이지만 그 가운데 분명히 뭐가 있는 것 같다. 뭔가…, 뭔가 핵심적인 무언가가….

‘교수님께서…, 교수님께서 나한테 마음에 안 드시는 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란 생각이 들긴 하는데…. 뭔가, 뭔가…. 내 어떤… 근본적인….’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것도 매우 사소한, 하지만 틀리면 안 되는 그런 실수들을 했다. 수식도 어려운 걸 틀리는 게 아니다. 쉬운 걸 틀렸다. 그냥 혼나겠다고 작정하고 잘못해도 이 정도로는 못할 것이다.

최이삭은 원래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똑바로 일을 하지 못했다면 애초에 랩장을 하겠다고 먼저 손을 들지도 못했을 것이고 공부를 못했다면 아예 학교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끝까지 해봤는데도 안 되는 거라서? 아니다. 그렇다면 수에즈 프로젝트 근처에도 못 갔을 것이며 3년차 때 짤렸다.

‘교수님이 일부러 이러는 거냐고 화내시는 게…, 요즘은 약간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되었다. 어째서일까. 최이삭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제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직도 헤매고 있었다. 그도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다가 분위기를 살피고 캘리 박에게 다가갔다.

“학과장님…, 사인 좀….”

“뒤푸르 박사 말로는 진짜 뭐가 될 거 같나 봐. 하수구 수준은 아닌가 보더라. 오늘부터 매일 두 명씩 수술해볼 거라는데? 방금도 하나 해서 들어가서 보고 왔다.”

캘리 박은 최이삭의 졸업 논문 계획서 제목조차도 쳐다보지 않고 한 번 힐끗 세현의 사인을 확인하더니 자신의 칸에 사인했다. 세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쓰읍, 하는 소리를 하더니 물었다.

“근데 그거 괜찮아요? 그냥 죽던데? 뭔 사인을 해야 그래도 문제가 없는 거예요?”

“너 전엔 드레이닝이 뭔 가망이 있었냐. 걔들은 어차피 뭘 어째도 죽을 거야. 말기 환자들은 민유가 큰일하시는 겁니다, 하면서 이미 사체 기증 수준으로 받았다.”

“그럼 뭐, 문제는 없겠네. 근데 뒤푸르 박사는 뭐…, 괜찮대요? 난 징그러워서 못할 거 같은데.”

“몰라. 우리 이예프 소장이 애들 정신교육 하나는 이거 아니냐. 눈 하나 깜박 안 하던데?”

“와, 노친네는 그걸 또 봤습니까?”

“아니, 웜홀이랑 비슷하다길래 한 번 직접 보자 싶었지. 미묘해. 마도물리학자들이 드레이닝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도 좀 관련이 있는 걸까? 사실 중력 마법이 인공지능 없으면 마력 분배도 잘 안 되고, 중력 붕괴도 잘 일어나고, 씁. 그런 마법을 쓰니까 드레이닝 발병도 뭔가….”

캘리 박이 자신의 생각을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세현은 용케 그걸 다 알아듣고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으려나, 한 번 생각해보았다.

“뒤푸르 박사가 같이 연구하는 다른 박사들도 초청했어. 방금 도착했다. 한동안 드레이닝 홀 연구에만 매진해보겠대. 인사하러 올 거다. 잘 받아줘라.”

“그, 온살라가 별별 연구를 다 하긴 하지만 듣고 참 이 박사는 애매한 연구를 하는 구나 싶었는데 이런 데 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요….”

“물론 나나 너나 참 이름 난 천재이기는 하지만, 이 학문이라는 게 어떤 게 어디서 어떻게 도움이 될 건지는 모르는 거야. 일단 다 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 기초과학, 응용과학 가리지 말고 다 잘 다져놔야 하는 거지.”

“미시도 거시도 아닌 참 애매한 분야구나 했는데.”

“그게 근데 딱 의료 쪽으로 뭔가 할 만한 사이즈였단 말이지. 하여튼 민 교수가 그래도 우리 쪽 짬이 약간 있다고 그런 생각을 다 한다.”

“그러네요. 진짜 배워서 쓸모없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구나.”

“그렇지. 못 배운 거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거야.”

교수님들은 그렇게 잠깐 사담을 나누다가 순간 동시에 최이삭을 쳐다보았다. 최이삭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앞으로 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교수님!”

“그래, 넌 그래야 할 거야.”

세현이 검지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키며 경고하듯이 말했다. 최이삭은 식은땀을 흘리며 넵,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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