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Sehyeon Quinn Superstar (1)
‘피곤해….’
서울에 도착한 세현은 엄청난 피곤함을 느꼈다. 연구에 매진하던 지난 15년을 생각해보자면 육체적 피곤함도 익숙하다면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도 굉장한 피로감을 느꼈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교수님….”
그때 옆에 있던 도강진 준위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헬멧을 벗던 세현은 그걸 보았다가 뭔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느낌에 바닥을 보았다. 검붉은 물감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코 밑을 훔쳤다.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그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지혈했다.
[뭐야? 왜 그래?]
도착하자마자 캘리 박이 홀로그램 화면을 연결했다. 그녀는 세현이 코피를 쏟자 약간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마력부터 보충해야 할 것 같아요.”
세현은 자신의 손목을 확인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바로 병원으로 가라. 나도 출발한다.]
세현은 병원에 있을 알렉스를 떠올렸으나 이틀 전 헤어질 때를 생각하니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아뇨.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입원한 사람들은 이제 다 퇴원시키죠.”
[아니, 그래도 일단 병원부터 가라.]
“진짜 마력 간당간당 한데요….”
[너 날 뭘로 보냐. 준비해 놨다.]
“그래요?”
세현은 무거운 장비를 전부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샤워를 하고 싶었다. 통화는 방탄 차량의 뒷좌석에서 계속했다.
“뭐 안 되는 것처럼 말했잖아요.”
[뭐…. 돈 필요한 용병이 한둘이냐. 보관이 만 하루도 제대로 안 가니까 문제였지. 일단 지금 다들 빼게 하고 있다.]
그녀의 말에 실소가 나왔다.
“진작에 그렇게 안 하고 뭐했어요?”
[아니, 난 준비했다? 니가 선수 쳐서 먼저 알아서 한 거지.]
“난 교수님이 그렇게 했다길래….”
[얘도 참 농담이 안 통해요.]
죽기 일보직전인데 농담이고 자시고…. 이놈의 노친네가 또 그녀를 놀린 것이다. 어이가 없는 얼굴을 하니 캘리 박이 능글능글하게 말했다.
[내가 수에즈에 용병을 뭐 하려고 150이나 더 받았겠냐? 니가 알아서 하길래 재미나 보라고 그랬지.]
“차라리 아방궁을 지어 주지 그랬어요.”
세현은 뒷좌석에 몸을 푹 기댔다. 한숨을 좀 쉬었다. 시간도 없는 마당에 헛짓을 한 모양이다.
[니 친구도 데려다 놨다.]
“누구요? 민 교수요?”
[그래.]
민 교수는 세현이 알렉스나 빨강 머리 때문에 열상을 입었을 때 공짜로 고쳐준 T대의 마도의학 교수였다. 나이는 동갑이다. 세현과 같이 HNU 학부 출신이다. 물리학과로 입학했다가 갑자기 의대로 편입했다. 자주 만날 일은 없지만 동창끼리 마주칠 일이라도 있으면 가끔 배신자라고 놀리기는 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HNU 물리학부를 나와서 끝까지 온 사람은 한 손에 꼽힐 정도이니 그렇게 놀리는 것도 웃기지만.
[일단 병원에서 보자.]
“예….”
세현은 그 뒤 마력 생각도 못하고 차안에서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에 도착하여 빠르게 VVIP 병동으로 올라갔다.
“여~ 퀸 교수~”
쥐가 파먹은 것 같은 지저분한 다갈색 머리에 어울리지도 않는 새파란색 안경, 지저분한 랩코트에 일주일은 입은 것 같은 셔츠를 입은 퉁퉁한 사람이었다. 세현이 아직도 코피가 멈추지 않아 손수건으로 계속 훔치면서 말했다.
“와있었네.”
민 교수도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세현의 앞에 서니 10센치나 작았다. 그녀는 전형적인 괴짜 너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특이점은 겨울에는 후욱 살이 쪘다가 여름이 되면 비쩍 마르는 체질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몇 달 전에 봤을 때보다 덩치가 반으로 줄었다. 그녀는 안색이 파리한 세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보더니 일단 그녀의 코 위에 손가락을 댔다. 잠깐의 진단 후 옅은 녹색빛이 빛나며 지혈이 이루어졌다. 세현은 드디어 코로 숨을 쉬었다. 그리고 민 교수는 안경을 랩코트에 닦고는 세현의 셔츠를 까서 배를 손으로 짚었다.
“야, 일분일초가 그렇게 아깝냐? 빨리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만. 마법 좀 쓰지 마라.”
“이제 쓸 일 없어.”
그녀는 잠깐 번쩍번쩍 치료 마법을 썼다. 그러니 단번에 피로가 날아갔다. 이 맛을 한 번 느끼면 마도의학 말고 다른 치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리고 그녀는 의료 홀로그램을 띄우고 세현을 보다가 주위의 분위기가 약간 흐트러지자 고개를 뺐다. 캘리 박이 왔다. 그러자 민 교수는 얼른 세현을 지나쳐 그녀에게 갔다. 민 교수는 굽실 허리를 숙였다.
“초, 총장님! 요새 고생이 정말 많으십니다.”
“어, 민 교수 왔냐. 쟤 한 번 봤어?”
아까는 별 설명 없이 실험쥐 다루듯 세현을 슥슥 만지던 민 교수는 캘리 박에게는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도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세현밖에 없었다. 세현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심하게 차이 났다.
“드레이닝 걸리고 나서도 중력 마법을 계속 쓰니까 예상보다 몸도 빨리 망가지잖아요. 수에즈에서만 한 번 쓰면 끝난다고 하셨으면서. 마력 포션도 아직 만드는 중인데. 이대로 가면 반년밖에 못 버틴다구요.”
원래 드레이닝에 걸린 마도사는 대부분 한 달 내로 죽는다. 원래 그렇게 죽는 거라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세현이 드레이닝에 걸리니 캘리 박도 부랴부랴 자기가 마력을 모으는 방법을 마도의학계에 공유를 한 것이고(좀 원망 어린 시선을 받긴 했다) 엘리야 민 T대 마도의학부 교수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 중이었다.
“반년이면 미국은 갈 수 있나?”
세현이 중얼거렸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민 교수와 같이 진찰실 하나에 들어갔다. 산부인과 진찰의자에 앉은 세현의 다리 사이에 특대 주사기를 들이밀었다.
“야, 그거 아플 거 같다?”
세현이 말했다.
“좀 참아.”
“악!”
마력이 몇 백만밖에 안 남아 있었다. 민 교수는 세현의 질에 뭉툭한 주사기의 끝을 밀어 넣고는 바로 피스톤을 눌렀다. 손가락 정도의 굵기였는데도 엄청 아팠다. 그간 그 무지막지한 남자들 끼운다고 적응을 좀 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거랑은 영 상관없는 얘기인 모양이다.
“쓰읍.”
민 교수가 탐탁치 않은 목소리를 냈다. 세현은 신음을 흘렸다. 아랫배가 굉장히 화끈거렸다. 아플 정도였다. 소드마스터의 정기가 마력으로 바뀌면서 생기는 열손실이다. 왼쪽 손목을 보니 마력이 단번에 12억까지 찬다. 세현이 감탄사를 냈다. 도대체 몇 명의 남자들을 쥐어짠 것인가.
“사실 이렇게 대량으로 채우는 것도 별로 안 좋아. 갑자기 몇 억씩 중력 마법 쓰는 거랑 똑같지, 뭐.”
“아, 그래?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한꺼번에 채우냐?”
환자복을 갈무리하고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민 교수가 대꾸했다.
“오늘 할 게 많아서. 지금부터 마도 순환하지 마라.”
“응?”
“들어오세요.”
민 교수가 인이어에 대고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새하얀 랩코트를 입은 의사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반은 마도의학 교수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유명한 교수들과 악수를 했다. 그녀가 드레이닝에 막 걸렸을 당시 몇 번 보았던 사람들이다. 캘리 박이 문가에서 멀찍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뭐야? 나 시간 없어.”
“총장님이 너 산 채로 해부해도 되니까 드레이닝 고쳐놓으라고 하시더라.”
민 교수는 입맛을 다시며 세현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뭐?”
“너 죽으면 니 뇌도 내가 가져간다.”
“뭐?!”
참고로 왕리밍 것도다. 엘리야 민은 열의에 찬 얼굴로 의료용 멀티스크린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누르고 있었다. 민 교수의 밑에 있는 의사들이 세현을 의료용 스캔기에 넣었다. 세현은 스캔기 안에서 캘리 박을 보고 소리쳤다.
“교수님!!”
“어, 야. 지금은 움직이지 마라.”
캘리 박은 멀리서 몇 초 세현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디바이스를 들어올려 전화를 하며 돌아섰다.
“저 망할 노친네가…!”
세현은 열이 받아 스캔기의 유리창을 주먹으로 쾅 쳤다. 민 교수가 어허, 하고 다시금 경고음을 냈다.
“야, 총장님도 니가 안 죽었으면 좋겠으니까 저러시는 거 아니냐. 지금 마도 순환 잠깐만 해봐라.”
“누구 마음대로! 반년밖에 안 남았다며! 당장 논문 써도 모자랄 판에! 갑자기 왜 이래…!”
“야, 너도 너 죽는 거 실감이 안 나는 마당에 총장님은 실감 나실 거 같냐?”
“하아. 니가 저 노친네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내가 결국 변환 마법까지 성공시킬 거 같으니까 아까워서 저러는 거지.”
“응? 뭐? 진짜?”
민 교수가 놀라서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외부인들 중에는 손에 꼽힐 정도로 마도물리에 이해가 깊었다. 그러니까 세현과도 조금은 말이 통하는 것이었으니까.
“순환은 이제 멈추고…. 야, 근데 그러면 진짜 너희 학계에서 곧 소우주 같은 거 하나 만들어서 박물관에 전시해도 이상할 게 없겠다. 우리 우주도 설마 그런 거 아냐? 좋은 곳에 전시되어 있는 거면 좋을 텐데.”
“몰라…. 나 얼마나 여기 있어야 하냐?”
“응? 고칠 때까지 쭉?”
“좆같네….”
“후대의 많은 마도사들을 위해서 니가 한 몸 희생한다고 생각해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새끼들 목숨보다 내 반년이 훨씬 중요해.”
“하긴….”
스캔기에서 나오자 다들 세현의 의료 모델을 보고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부분과 다르게 그녀의 단전에 새카만 회오리 모양이 보이고 거기에 대해 홀로그램 주석이 길게 붙어 있었다. 이전 버전과 비교를 하기 위해 여러 개의 모델을 주르륵 나열했다.
여기서는 세현 퀸이 가장 비전문가였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민 교수 밑에 있는 의사가 세현의 팔에서 채혈을 했다. 세현이 말했다.
“야, 그래도 내가 하루 종일 병원에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 랩은 왔다갔다하자. 전처럼.”
민 교수가 세현의 초기 의료 모델링을 보면서 대꾸했다.
“응, 그래. 총장님한테 물어봐.”
“씨발….”
저 권력의 노예 같으니. 세현은 겨우 자신의 디바이스를 돌려 받았다. 전화를 걸었다.
[그래, 검사는 다 했냐?]
“이 망할 노친네야!! 지금 날 병원에 가둬 두면 어쩌겠다고!!”
세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다들 그녀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본인들의 일로 돌아갔다.
[고치면 서로서로 다 좋잖냐.]
“교수님도 알잖아요…! 못 고쳐요, 이거!”
[그래도 일단 두 달만 민 교수가 하자는 대로 얌전히 해보자. 걔도 생각이 있는 거 같더라.]
“노친네답지 않게 왜 이래요, 네? 진짜 노망 났어요? 말이 두 달이지 반년밖에 안 남았는데…. 그냥 내일부터 랩 출근합니다, 네?”
[안 돼.]
“…….”
[…….]
잠깐 디바이스를 사이에 두고 침묵이 흘렀다.
“그럼 제 랩실이라도 여기로 옮겨와요.”
[안 된다. 요양한다고 생각해. 밥도 꼬박꼬박 먹고 잠도 꼬박꼬박 자고.]
“아니, 그러면 논문은 어떻게 쓰고 미국은 어떻게 가라고.”
[야, 니가 계속 그런 식으로 하니까 우리가 니 몸 고치려고 제대로 노력이나 해봤냐? 왜 덮어놓고 안 될 거라고만 해? 될 거라고 믿고 해도 어려울 판에.]
“그 이전에 드레이닝은 불치병이잖아요. 불사의 마법으로도 안 되는데 뭘 어쩌라고?”
[아니야. 이렇게는 아닌 것 같다. 일단 두 달만 해보자. 그리고 그 뒤엔 니 마음대로 해라.]
“교수님.”
[민 교수가 시키는 대로 잘 해라. 끊는다.]
캘리 박은 그러고 전화를 뚝 끊었다. 세현은 손으로 얼굴을 짜증스럽게 문질렀다.
“아오…, 이 미친 할망구가 갑자기 왜 이래. 노망이 났으면 혼자 똥칠하든가.”
세현은 병실로 옮겨졌다. 최신식 휴대용 의료진단기가 왼팔에 달렸다. 홀로그램 팔찌를 누르면 그녀의 온갖 바이탈 수치가 다 떴고 전부 의료진에게 연결되었다. 1시간쯤 흐르니 의료진이 그녀를 수술실로 옮겼다. 뭘 해보겠다더니 정말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수술 전처리를 하더니 마취가스를 그녀의 코 주위에 대려고 했다. 세현이 그걸 손으로 막으며 물었다.
“뭐 하는 건데?”
“일단 니 배 좀 열어보게.”
“뭐?”
민 교수는 그냥 마취과 의사에게 손짓해서 세현이 마취 가스를 마시게 했다.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고 일어났다.
“…….”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그녀의 옆에 붙어 있던 레지던트가 말했다.
“숨 계속 쉬세요, 교수님.”
“나한테 뭐 한 거야….”
“저희 교수님이 전에 체취한 퀸 교수님 세포 조직 가지고 교수님 장기를 길렀거든요. 마력 보존에 영향을 끼치는 장기는 전부 교체했습니다. 참고로 회춘 마법이랑 불사의 마법도 한 번 더 썼구요. 상태는 괜찮으시죠? 상처도 하나 안 남고 다 붙었어요.”
“…….”
이 망할 년이 사람을 실험쥐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자기가 마도의사라고 사람을 마구 다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야, 민 교수 불러. 당장.”
그렇게 레지던트에게 윽박을 지르는데 양반은 못 되는지 당사자가 바로 나타났다.
“퀸 교수~, 기분은 어떻냐?”
자동문이 열리고 그녀가 가까이 오자 세현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너 죽고 싶냐? 어? 마음대로 남의 몸 뒤적거릴래?”
“나한테 이러지 말고 총장님께 말씀드리라니까? 난 총장님한테서 니 건강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몸이에요.”
“이…! 야! 그걸 왜 그 노친네가 줘!”
“그러니까 총장님께 여쭤보라고.”
세현은 쌍욕을 마구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효과는 있는 거야?”
“아니.”
“…….”
*
원래 왕의 가장 최우선 덕목은 장수와 건강일지도 모른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그의 제국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을 떠올려보자. 세현 퀸은 그대로 꼼짝없이 VVIP 병실에 갇히고 말았다. 탈출하려고 시도를 해봤자 소용없었다. 어차피 마법을 쓰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저 극심한 운동부족의 먹물일 뿐이었다.
[속보입니다.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 레어가 된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는 결국 유엔상임이사국에서 메가톤급 수소폭탄으로 소각처리를….]
세현은 TV를 보고 있었다. TV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디바이스도 뺏겼다. 인권유린으로 신고하면 다들 감옥에서 다시는 못 나올 수준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라도 이런 것이 암묵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식구’ 사이는 법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현은 지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노크라니. 지금 세현을 대하는 인간은 누구 하나도 노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누구야.”
문이 스윽 열렸다. 그러자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걸친, 키가 굉장히 크고 몸이 울끈불끈한 미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뒷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시선을 옆으로 멀찍이 돌린 채였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짙은 청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는 고작 그 정도만 걸쳐도 근사했다. 그는 쭈뼛거리며 병실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세현이 물었다. 그는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유리가….”
“뭐라고?”
“…그….”
“나이 다 먹고 말 똑바로 못하는 인간 아주 싫어한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지금 아주 심기가 불편했다. 뭐, 굳이 심기가 안 불편해도 할 말이지만. 알렉스는 울컥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다시금 쭈뼛거리며 일단 안으로 들어왔다. 자동문이 닫혔다. 그는 영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오른쪽 발등으로 왼쪽 발꿈치를 비비고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유리가 교수님 여기 있다고 해서…. 많이 안 좋은 거야?”
그 금발 꼬맹이는 세현이 여기 있는 걸 어디서 안 것인가. 기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세현의 건강 상태에 대한 정보는 언론에 주지 않고 있었다. 알렉스는 긴장한 얼굴로 딴 곳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더 다가갔다. 걱정이 되었다.
“많이 아픈 거야? 갑자기 왜 이래?”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하다가 움찔했다. 알렉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콱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도 하나 잡더니 그녀의 몸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세현이 인상을 썼다.
“뭐 하는 거야.”
알렉스가 그녀의 얼굴을 째릿 노려보았다. 그녀는 심드렁하게 ‘뭐?’ 라는 표정으로 받아 쳤다.
“누구야…. 도대체 몇 놈이랑 한 거야….”
그의 목소리가 확 낮아지며 그렇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에게선 다른 남자들의 고약한 냄새가 잔뜩 나고 있었다. 한두 명 수준이 아니었다. 몇 십 명 수준이었다. 세현은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기가 차서 그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며칠동안 내가 그 많은 남자랑 했겠냐, 어?”
“그러면!”
“드레이닝 때문에 병원에서 준비해준 거다.”
윽…. 알렉스는 뭔가 속에서 솟구치는 걸 간신히 막았다. 그녀의 말은 납득이 갔지만 그래도 화는 났다. 자꾸 그녀에게서 다른 남자의 냄새가 나는 게 싫었다. 알렉스는 곧바로 그녀를 껴안았다.
“아…! 갑자기 뭐 하는 거야?”
그는 세현의 목덜미에 자기 얼굴을 마구 비볐다. 그녀의 뺨과 머리카락과 몸도 마구 만졌다. 자신의 냄새를 묻히기 시작했다.
“아오! 이게 진짜 뭐 하는 거야!”
그녀가 그의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꿈쩍도 안 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몹시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진짜 싫다고…! 내가 해줄게, 응? 내가 다 해줄 테니까 다른 남자 건 받지 마. 제발. 제발요, 교수님.”
그는 울렁거리는 얼굴로 세현의 얼굴을 보다가 그녀의 입술에 마구 입을 맞췄다. 집 나간 주인 맞이하는 개도 아니고. 덩치도 산만한 게 계속 몸을 부대껴 오니 세현은 고개를 계속 피했다.
“알았어. 나와. 그만. 그만! 무거워!”
알렉스는 이미 그녀를 침대에 완전히 깔아뭉갠 상태였다. 그는 얼굴만 약간 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한 번 하면 안 돼? 딴 놈들 냄새 안 나게 하고 싶어요.”
“그렇게 냄새가 나?”
세현은 약간 어이가 없는 얼굴로 자신의 어깨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알렉스는 다시금 그녀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병원복 사이로 손을 넣었다. 다시금 세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밀어내지 않았다. 알렉스는 약간 용기를 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한 거…, 그렇게 싫었어요?”
“좀 귀찮아서.”
“그게 귀찮아?!”
알렉스가 고개를 팍 들었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자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씨이….”
나쁜 어른! 나쁜 여자! 알렉스는 속으로 마구 욕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 가끔 이렇게 미운데도. 끌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아니, 처음 그렇게 만나고 나서부터…, 그는 머릿속에서 한시도 그녀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 어리지만 강한 남자였다. 대체로 소드마스터인 남자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그 중에서도 알렉스는 과히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서던라이온에서도 야심차게 준비한 미드필더 겸 디펜스가 알렉스 킴 아닌가. 그런 남자를 이렇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착취하다니. 그건 그녀가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사람이란 본래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동물적이다. 그것도 상대를 선택할 때면 더더욱.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가, 또는 내가 상대를 가질 수 있는가. 딱 두 가지를 기준으로 상대를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스는 상당히 기준이 전자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도…, 나 책임지기로 했잖아요.”
알렉스는 세현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자꾸 그가 책임지라는 말만 반복하는 게 좀 웃겼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럼 안 질 거야? 진다고 했잖아!”
“알았어. 점점 귀여워 보이니까 그만해라.”
그 말을 들은 알렉스는 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슬슬 옷을 벗었다. 갑자기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나 보고 있다.]
알렉스가 깜짝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기계음이 약간 섞였다. 세현이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감시카메라도 달아놨냐?”
[당연하지.]
“꺼.”
[갑자기 뭐 하는데? 이상한 짓 하지마라.]
“심심해 죽겠는데 이거라도 해야지.”
[넌 아주 정교하게 관리되고 있는 실험쥐다.]
알렉스는 황당해서 그녀와 목소리가 나오는 스피커를(바로 찾아냈다) 번갈아 보았다.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너나 노친네나 Control freak이야.”
[자긴 아닌 줄 아나.]
알렉스는 화악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이거 뭐야! 누구야!”
“아, 내 친군데.”
[안녕.]
세현은 알렉스를 밀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녀를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안 그래도 둘이 있기 힘든데 이런 시간마저 이렇게….
“그렇게 보지 마. 나도 바라던 바는 아니야.”
“그래도…! 며칠만에 보는 건데 다른 사람이 훔쳐보고…!”
알렉스는 투덜거리면서 자기 티셔츠를 다시 끼워 입었다. 역시 좀 귀엽다. 세현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환자복을 의식했다.
“그렇게…, 많이 안 좋은 거야?”
알렉스도 정신이 없었다. 수에즈에 갔다가 사우디에 잡혀 있고 그리고 돌아오고…. 유리에게서 세현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기 전에 잠시 드레이닝이라는 것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마도사만 걸리는 불치의 병. 원인불명, 치료법도 불명. 발병한 모든 마도사는 한 달 안에 사망했다.
‘그래도 세현 교수님은 한 달 넘게 살았잖아. 그러면 괜찮은 거 아냐? 괜찮다고 했는데.’
그런 걱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얼굴로 가만히 세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이번엔 진짜 힘내서 잘 할게.”
“뭘?”
“이거 짜내기….”
알렉스가 자신의 바지 사이를 보면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세현은 결국 소리를 내서 웃었다.
“뭐…, 나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보다는 니가 좋지. 근데 다 할 수 있겠어? 쟤 진짜 또라이다.”
세현이 공중을 휘휘 가리켰다. 아까 나온 목소리를 말하는 모양이다. 알렉스는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귀엽네.’
세현은 다시금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그대로 가만히 그녀의 무릎에 고개를 뉘이고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
“두 달은 있을 거 같아.”
“나 매일 와도 돼?”
“매일 올 수 있어? 너 훈련은?”
“훈련하고 바로 오면 돼. 세 달 후부터는 시즌이니까 힘들겠지만.”
“일단 아까 걔한테 물어봐.”
알렉스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왜 그래? 왜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 해?”
지금까지 본 세현은 그녀가 모든 걸 결정했다. 자신에 대한 것이든 주위에 대한 것이든.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그 망할 노친네가 나 여기 가둔 거라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진짜!? 왜? 그거 범죄 아냐?”
“맞지….”
“신고해! 아니, 내가 신고할게!”
“소용없어. 그냥 내가 푸념한 거야.”
세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좀 어이가 없어서 알렉스의 머리를 막 흐트러트렸다.
“내가 왜 너한테는 이런 말을 할까.”
“으…, 내가 뭐 해줄까? 응? 뭐든지 할게.”
그녀의 눈길이 부드러워지자 알렉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고개를 팍 들고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 뭐든지?”
“응.”
세현은 가까이 있는 알렉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보다가 먼저 입을 맞췄다. 정말 할 것이 없어서 이런 거라도 하고 싶은 것인지. 키스 같은 건 분명 아무것도 아니고 필요도 없는 것인 데도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현은 속삭였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응. 응. 뭔데?”
뭐든지! 그녀가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 너무 좋다. 알렉스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
미워. 하기 싫다. 미워. 밉다. 진짜 밉다. 어른은 다 이런 것일까. 진짜 밉다.
세현은 메트로서울 시립병원 VVIP 병실에 갇혀 있었다. 디바이스, 스크린이나 멀티스크린 등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녀를 연구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함이고, 바로 최이삭과 연락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매일 보다가 며칠만에 보니까 뭐라고 반갑네.”
그는 아주 컨디션이 좋은 얼굴이었다. 살이 좀 올랐다. 이제껏 없을 정도로 안색이 좋아 보였다. 네이비색 바지에 하늘색 셔츠, 하얀색 랩코트를 입은 그는 머리도 정리했는지 깔끔했고 안경도 바꾼 것 같았다. 수에즈에서 해골처럼 푹 삭아서 암흑의 기운을 흩뿌리던 불쌍한 대학원생이 아니라 잘생기고 반듯한 젊은 청년이 하나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시공을 꿰뚫는 이지가 흘렀고 그의 몸은 젊음의 활력이 돌았으며 자세에선 문명의 세례가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가 보기 싫어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상아색 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의 한쪽은 아이비가 둘러싸고 있었다. 잘 손질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가지가 무겁게 늘어지는 꽃나무에는 계절을 나타내는 화려한 꽃이 만개했다.
“뭐 마실래? 커피?”
“됐고.”
알렉스가 그렇게 대꾸하자 최이삭은 손에 든 것 중 커피가 아닌 것을 알렉스의 앞에 내려놓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알렉스에게는 야외 커피숍의 의자와 테이블이 참 작아 보였다.
‘안 어울린다….’
최이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렇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2백명에 가까운 소드마스터들과 함께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니 존재감이 대단했다. 키와 어깨를 봐라.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눈길을 쫙쫙 끌었다. 게다가 알렉스는 잘생기기까지 했고 말이다. 연예인 같다.
“무슨 일이야?”
“세현 교수님이….”
알렉스가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입을 뗐는데 그가 세현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최이삭이 커피를 옆에 풉 뿜었다. 그는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알렉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이 참….
“어? 어…, 말해. 교수님이 뭐, 뭐라고 하셨어?”
알렉스는 그런 그가 매우 못마땅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일 때도 그녀가 그렇게 신경을 써줬지 않는가. 그런데 이 새끼는 뭔데 그녀가 아픈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팔자 좋게 살고 있단 말인가.
“야, 너 왜 병문안 안 가? 존나 배은망덕한 거 아냐? 스승님이잖아.”
“어? 아니…. 나도 가려고 했는데 학과장님이 절대 가지 말라고 하셔서. 교수님 쉬셔야 한다고….”
“그렇다고 안 가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야지! 교수님 병실에 갇혀 있잖아.”
“갇혀 있는 수준까진….”
“갇혀 있어!”
“…….”
“어쨌든!”
알렉스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디바이스를 들어올렸다. 뭐라고 하는지 잘 외울 수가 없어서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적었다. 아마 몇 개는 빠뜨렸을 것이다. 그녀가 귀에다 막 속삭이는데 귀가 간지러워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교수님이 너한테 말하래.”
알렉스는 그렇게 세현의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첫번째, 수에즈 웜홀 축퇴와 중력 방정식 논문은 내 이름으로 니가 쓴다.”
“…자, 잠깐만. 그래도 어떻게 쓸지 지시는….”
“최대한 나처럼 생각해서 최대한 나처럼 써라.”
알렉스는 적혀져 있는 것을 또박또박 읽었다.
“두번째, 미국 다이아몬드 국립 공원 게이트 관련 논문을 전부 읽고 요약 정리해라. 빠뜨리는 게 있으면 죽는다. 그리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한테 전달해라.”
“…….”
“세번째, 저번에 준 실험 계획서를 완성해라. 그럴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겠지만 한 번 써본 것도 제대로 못 쓰면 니 졸업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없다.”
참고로 여기는 실험 계획서가 생명이었다. 삐끗 잘못하면 블랙홀 생기고 최소 연구소 하나나 도시 한 개와 함께 영영 안녕이었다. 최이삭이 절로 신음을 흘렸다.
알렉스의 말투엔 어떤 높낮이도 없었다. 전달하는 사람은 그가 오랜만에 이너피스를 누리고 있는 어떤 소박한 대학원생을 다시금 지옥으로 처넣고 있는 악마의 전도사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번째, 연구비 출현용 기관에 낼 계획서도 양식에 맞춰서 깔끔하게 적어라. 연구비 충분히 못 따면 그것도 다 니 책임이다.”
“…저…, 나 잠깐만 메모 좀 해도 될까?”
최이삭은 안경 밑으로 잠깐 자신의 양 눈을 꾹 누르고는 랩코트에서 펜과 메모지를 꺼냈다. 알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섯 번째, 근데 너 졸업 논문 계획서는 도대체 언제 들고 오는 거냐. 진짜 졸업 안 할 거냐. 도대체 내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거냐. 저능아냐.”
메모지 위로 최이삭의 필기가 날아다녔다. 알렉스의 눈동자는 자신의 메모한 세현의 말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그 망할 노친네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을 거다. 개소리니까 무시해라. 넌 그 노친네 말이 아니라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누가 니 학위를 주는지 잘 생각해라.”
“네, 교….”
메모를 마구 하던 최이삭은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려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내가 랩실에 있든 없든, 죽었든 살았든, 넌 내 거다. 넌 내 논문을 쓰라고 태어난 인간이다. 자료는 다 있으니까 징징거리지 마라. 제대로 못하면 나 죽을 때 같이 순장시켜 버릴 거다. 똑바로 해라.”
알렉스는 디바이스의 화면을 끄고 다시 주머니에 기계를 넣었다. 최이삭은 빠른 속도로 필기를 마저 했다. 아까까지 그에게서 풍겨 나오던 여유와 품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누군가의 기대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남자의 조급함이 돌아왔다. 그는 필기가 끝나는 대로 벌떡 일어났다가 아차 하고 알렉스를 돌아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그게 끝이야? 더는 없어?”
“좀 까먹었는데….”
“야! 그걸 까먹으면 어떡해! 나 보고 죽으라는 거냐!”
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럴 때의 그는 어쩐지 세현을 떠올리게 했다. 알렉스는 삐딱하게 자리에 앉아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자기가 쓴 메모를 이리저리 고치고 주석을 달았다. 머리를 팽팽 돌리는 것이 보였다.
“이건 우빈이 시키고 이건 오 박사…. 아, 이거 언제까지 하라고 하셔?”
“모르겠는데.”
“그럼 최대한 빨리….”
그가 정신없이 그러고 있으니 알렉스는 못마땅하게 그걸 보고 있다가 틱 쏘았다.
“못한다고 진짜 죽이기야 하겠어?”
순장이라는 단어가 뭔지 몰라서 찾아봤더니 왕이 죽을 때 가족이나 시종을 같이 생매장하는 풍습이라고 했다. 그러자 최이삭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니가 우리 교수님을 몰라서 그런데 진짜 하신다고 하시면 하시는 분이거든? 너 우리 학과장님이 우리 교수님 병원에 가뒀다며. 그건 요즘 세상에 되는 거라서 되는 거 같니?”
“…….”
“안 그래도 요새 갑자기 학과장님이 자기 논문 같이 쓰자고 하셔서 하겠다고 했는데…. 미친놈. 돌은 놈. 내가 돌았다고. 미친 새끼. 사우디 갔다 오고 내가 진짜. 아, 병신.”
알렉스는 처음에 그가 자신을 욕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보니까 스스로를 욕하는 거였다. 그는 깔끔했던 자신의 머리를 왼손으로 쥐어짜며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마구 띄우고 반은 정신을 빼놓고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
참고로 알렉스는 최이삭이 참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언제나 세현의 곁에 있었다. 언제나 세현과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세현에게서 온갖 훈계, 책망, 분노, 비아냥, 화풀이, 괄시를 받았지만 동시에 티끌만한 기대라도 받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온갖 수모에도 그 티끌만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언제나 죽을 힘을 다했다.
알렉스가 불쑥 물었다.
“너도 세현 교수님 좋아해?”
“응…, 뭐라고?”
그는 알렉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교수님 사랑하냐고.”
“뭐?”
최이삭이 세상에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알렉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홀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교수님 앞에서 함부로 그런 소리하지 마라. 내가 교수님께 죽는다.”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그 학위인가 뭔가가 그렇게 중요해?”
“내가 그거 보고 6년이 넘게 개고생 했는데 너 같으면 안 중요하겠니?”
“왜 진작에 다른 데 안 갔는데.”
“우리 교수님이 최고니까.”
“그것뿐이야?”
“저기…, 알렉스? 나 지금 진짜 발등에 불 떨어졌거든? 이제 좀 갈래?”
아까 전에는 점잖게 커피를 마시겠냐고 묻던 남자의 예의가 소멸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그의 디바이스를 덮어버렸다. 홀로그램이 꺼졌다.
“그건 니 사정이고.”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니가 우리 교수님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 교수님은 교수님, 난 학생. 그리고 우리 교수님이 나 같은 거 쳐다보기나 할 거 같아? 우리 교수님 엄청 잘생긴 중동 왕자도 프로포즈 받자마자 찼어.”
“아, 씨. 공부도 잘하는 새끼가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그래서 넌 좋아하냐고.”
너 같은 거라도 수컷이라 이러는 거라는 캘리 박의 말이 머리를 스쳐지나 간다. 최이삭은 이 시국에 이게 무슨 쓸데없는 시간낭비냐, 라고 한탄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최이삭은 짜증이 나서 머리를 벅벅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런 게 도대체 뭐가 중요해? 우리 교수님이 겉으로 보기엔 화만 내는 것 같으셔도 3년에 한 번 정도는 칭찬 비슷한 걸 해주시는데…. 그냥 그게 듣고 싶다고. 그리고 이제 와서 우리 교수님한테서 학위 못 받으면 그냥 나도 죽어버릴 거다. 그러니까 좀 빨리 꺼져라. 일 좀 하자.”
*
민 교수는 세현을 병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했지만 그래도 방문객 몇은 받게 해주었다. 연구를 못하게 하니 오히려 세현이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무기력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결국 일주일만에 책과 필기구는 제공해주기로 합의를 봤다. 매일 스캔기에 들어가고 이틀에 한 번은 괴상한 약물을 주입 받거나 수술을 했다. 마도의사가 가득하다 보니 사람 몸을 봉제인형처럼 뜯었다 붙였다 하고 있었다.
“야, 너 스트레스 수치가 너무 높다.”
민 교수가 세현의 의료 차트를 확인하며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퀭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 같으면 스트레스 안 받겠냐?”
“그냥 두 달 동안 잘래? 코마 유도해줄게.”
“미쳤어?”
그대로 일주일이 더 지나자 세현은 민 교수의 디바이스를 붙잡고 캘리 박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저 좀 나가게 해주세요. 나가서도 민 교수 말 잘 들을게요. 밥도 잘 먹고 과로 안 하고 잘 자면 되는 거죠? 앞으로 교수님한테 욕도 안 할게요. 말도 잘 들을게요. 살려주세요. 죽을 거 같아요.”
[너 이러는 거 참 색다르다?]
캘리 박의 밑에 있을 때도 세현은 그녀에게 애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기가 맞든 틀리든 단 한 번도 자기 스승에게 지려고 하지 않았다. 후려 맞아도, 폭언을 들어도 오히려 찔러 죽일 듯이 캘리 박을 노려보곤 했다. 언급했듯이 캘리 박은 분수 모르고 싸가지없는 젊은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세현의 그런 깡은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런 점 때문에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는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얘 말은 잘 듣냐, 민 교수?]
“안 들으면 지가 어쩌겠어요.”
[흠…, 니 생각은 어떤데.]
“일단 가둬놓으니까 스트레스 수치가 너무 높게 나오네요. 출혈도 심해지고. 하루에 6시간만 랩에 보내주죠.”
[그래. 그래라, 그럼.]
세현이 2주 동안 그렇게 탈출하려고 노력하고 또 그녀에게 시위했던 것은 다 병신 같은 짓이었나 보다. 캘리 박은 담당 의사의 판단을 온전히 수용했다. 세현은 이것이 캘리 박과 엘리야 민이 의사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 그녀를 길들이기 위해서 일부러 처음부터 강경하게 나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세현을 2달이나 가둬 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고로 내일부터는 출근해라. 10시에 가서 4시에 퇴근. 식단은 내가 주는 것만 먹고.”
그녀는 세현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빼곡하게 지켜야 할 수칙들이 적혀 있었다.
“내가 하라는 것만 하고 내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마라. 제대로 못하면 다시 가둔다.”
“…….”
세현은 더 스트레스를 받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여러 사람이 그녀를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놀고 있었다. 실감이 난다. 어느 누가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던가. 그녀는 너무 일찍 몰락하고 말았다. 민 교수가 의료용 멀티스크린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검은 머리. 어려서 확실히 팔팔하더라? 걔 거 두세 발이면 너 하루치 드레이닝 양 맞먹더라. 어디서 그런 걸 골랐냐.”
“잘해? 전에 시켜보니까 금방 못하겠다고 백기 들던데.”
“못하면 다른 놈 쓰지, 뭐.”
엘리야 민은 그렇게 말하며 의료용 멀티스크린의 페이지를 이리저리 바꿨다. 세현은 회의적인 얼굴로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넌 이게 될 거 같냐? 시간낭비야.”
“언젠간 되겠지.”
“그게 지금은 아니잖아.”
“믿음을 좀 가져라.”
“믿음도 믿음 나름이지….”
“우주창조도 하겠다는 사람이 신념이 그렇게 약해서 어디다 써먹겠냐.”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세현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민 교수는 서랍에서 세현의 디바이스를 꺼냈다. 그녀가 곧바로 손을 뻗자 도로 손을 물렸다.
“니가 그 어린애 통해서 최 박사랑 연락한 건 알고 있다. 취침 시간엔 못 쓴다.”
“와…. 너, 만약에라도 나 나으면 그 노친네랑 통째로 뭉개 버린다.”
“낫고 나서 말해라.”
드디어 디바이스를 돌려받은 세현은 그 길로 곧바로 전화를 걸며 병실로 돌아갔다.
[교, 교수님! 괜찮으세요? 병문안 못 가서 죄송합니다. 교수님께서 시킨 걸 하는 게 우선이라고 하실 것 같아서….]
알렉스는 약속대로 매일매일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는 뭐든지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정말 싫어하면서도 세현 퀸과 최이삭 사이의 오작교 역할을 해주었다. 이제는 디바이스가 있으니 됐다.
“잘 생각했다. 잘 되가냐? 실험 계획서랑 비용 집행 계획서는 다 돌렸고?”
[네. 전부 돌렸습니다.]
“그래. 내일부터는 나도 출근한다. 다른 것도 다 했지? 내일 전부 집합시키고 지금까지 한 거 검사 받아라.”
물론 내일은 토요일이었지만 그딴 건 전~혀 상관없었다. 세현의 말에 최이삭은 얼른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끊는다.”
전화를 끊고서야 세현은 그간 온 연락들을 한 번 확인해보았다. 그다지 눈에 띄는 건 없는….
<약속은 아직 기억하십니까?>
세현은 잠깐 그걸 보고 있다가 그 연락처로 통화 버튼을 탭했다. 연결음이 가기 시작했다.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냥 끊을까, 할 때 상대편이 전화를 받았다.
“죽었을 줄 알았는데.”
세현이 그렇게 먼저 입을 떼자 배우같이 근사한 목소리가 대꾸를 해왔다.
[저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운이 좋네.”
[그런 모양입니다.]
“어딘데?”
[방금 메트로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약속은 기억하고 있었다. 죄책감 같은 건 없었지만 묘하게 미안함은 약간 들었다. 동시에 성가시기도 했다. 세현은 디바이스에서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그래서?”
[약속은 기억하시겠죠?]
“응.”
[다행입니다. 지금 뵐 수 있습니까?]
“오늘은 안 되고…. 물어봐야 알겠는데.”
[알겠습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확실히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는 크게 귀찮지는 않은 수준에서 항상 물러나는 것 같다. 세현은 민 교수에게 연락했다.
“야, 나 남자 좀 만나도 되냐?”
[응? 뭐? 누구?]
“수에즈 갔을 때 잠깐 알게 된 남잔데. 빚이 있어서. 밤에 만날 거 같은데. 언제 만나도 되냐?”
[음…. 스케줄 상…, 모레 저녁은 괜찮을 것 같다.]
“알았어.”
[뭐 할 거냐? 섹스할 거냐?]
“그럴 거 같은데.”
[알았다.]
세현은 문자로 날짜를 말했다. 그는 좋다고 했다. 그가 만날 장소와 시간을 보냈다. 5월 27일 일요일 오후 6시, 메트로스퀘어. 세현도 좋다고 했다. 어차피 그와는 그걸로 마지막이다.
세현은 다음날 드디어 몇 개월만에 HNU 물리학과에 있는 자신의 랩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새벽같이 나갔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교수님!”
세현이 랩으로 들어오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하우빈이 벌떡 일어났다. 다들 일찍 나와 있었다. 사우디에서의 일 이후로 제대로 얼굴도 못 본 제자들이 세현의 얼굴을 보자 화색이 되어 일어났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엔 교수가 잘 되어야 밑에 있는 제자들도 다 잘 되는 것이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걱정 많이 했습니다, 교수님.”
하얀 랩코트를 입은 제자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그녀를 걱정했다. 세현은 하우빈의 머리를 팔걸이 삼아 걸치고 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애들 낯빛이 너무 좋았다. 세현은 쓰읍, 하고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니들 놀았지? 공부는 많이 했냐? 어? 다 들고 와봐라.”
그러자 다들 아차, 하고 한없이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을 짓더니 다들 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멀티스크린을 가지고 모였다.
“전 좀 있으면 기말이라…. 천체물리학이랑 상대론적 양자역학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
“범위는? 전체?”
“넵.”
“너 저번에 초전도 A0 나왔지 않냐? 이번엔 다 A+ 받아라. 나중에 확인한다. 초전도는 다음 학기에 재수강하고.”
“네.”
세현은 하우빈의 멀티스크린에 표시된 그녀의 공부량과 기출문제 풀이를 잠깐 훑어보고는 몇 개 문제에 대해서 짧게 훈계하고 다른 석사생은 가볍게 스킵했다. 그리고 오 박사를 비롯한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들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전부 곧바로 눈을 깔았다. 그녀는 오 박사의 사고 실험 논문을 보자마자 화를 냈다.
“이 새끼가 아주 놀고 자빠졌네. 너 이거 취리히에서 작년에 냈던 논문이랑 도대체 뭐가 다르냐? 어? 넌 눈이 없는 거냐, 뇌가 없는 거냐.”
“그, 그래도 여기에 좀 더 부가적으로….”
“부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거 당장 접고 새로 해! 이딴 걸 지금 논문이라고!”
오 박사는 수에즈 프로젝트 이전부터 몇 달 간 쓰던 논문을 귀가 축 처진 눈으로 보며 들고 갔다. 그 뒤로 두 명의 박사 과정 학생들을 짧고 굵게 혼내고는 주변을 휙휙 쳐다보았다. 먹이를 찾는 눈빛이다.
“최 박사 어디 갔어?”
“아까 커피 뽑으러 간다고 잠깐 나가셨는데요.”
하우빈이 대꾸했다. 세현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냥 랩에서 타 먹지 그걸 왜 멀리까지 나가서 처먹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밀린 행정 업무부터 싹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결재 서류에 <네> 버튼만 눌렸다는 것이다. 최이삭이 돌아올 쯤엔 그가 업로드한 실험 계획서를 읽고 있었다. 밖에 약간의 소란이 들린다 싶더니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 오셨습니까, 교수님. 일찍 오셨네요.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모르고….”
그는 커피잔이 든 트레이를 들고 들어와 그녀의 앞에 벤티 아이스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커피를 미리 준비해놓으려고 나갔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수에즈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안색이 거무죽죽한 게 놀지는 않은 모양이다. 세현은 공중에 커다란 홀로그램을 띄웠다.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 게이트 실험을 위한 계획서였다.
“이게 완성본이냐?”
“네? 네, 네….”
그는 긴장한 얼굴로 그렇게 답했다. 세현은 안락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최이삭의 옆에 서서 나란히 글자로 빼곡한 홀로그램을 보았다.
“정말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완성본 맞습니다.”
예전에 그녀의 이런 추궁에 낚인 적이 있었다. 그럴 땐 잘못한 곳 없이 잘 적었는데도 엄청 혼났었다. 최이삭은 이 실험 계획서를 일주일이 넘게 매달려서 20번은 넘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으며 학과장님께 들고 가서 확인도 세 번 받았다.
세현은 홀로그램을 스크롤해서 온갖 그리스 문자로 뒤덮인 수식 하나를 찾아냈다.
“자. 이거 읽어보자, 이삭아.”
“지, 직경 r, ellipticity e, 각속도 w….”
다 읽고 나니 세현이 말했다.
“다시 읽어봐.”
최이삭은 다시 읽었다. 지면에 적혀 있는 수식은 짧아도 그걸 읽으려면 무척이나 길다. 두 번째로 읽을 때까진 허리를 펴고 읽었다. 세 번째는 머리채를 잡혔다. 네 번째 읽을 때는 무릎까지 꿇고 홀로그램이 코앞에 닿을 때까지 끌어당겨져 읽어야 했다. 다섯 번째 읽을 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크기가 횟수를 더할수록 제곱배가 되었다.
여섯 번째 읽을 때가 되어서야 최이삭이 더듬더듬 말했다.
“t0에 대한 진동 위상에서 π/2를 빠뜨렸습니다.”
“쯧.”
그녀는 그제야 최이삭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몇 번이고 수식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니, 병신같이 이걸 어떻게 빠뜨렸지?
“고치겠습니다….”
“빨리 해라.”
그리고 세현은 그가 업로드한 다른 문서들도 하나하나 열어보다가 시뮬레이션 파일이 있길래 하나 공중에 띄웠다. 최이삭은 그 자리에서 문서를 고치고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중에 거대한 웜홀 시뮬레이션이 떴다. 현지에 있는 게이트에 최대한 근접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 구체화한 것이다. 세현이 최이삭을 돌아보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했네?”
“아, 네…. 어차피 하라고 하실 거 같아서요.”
사실 알렉스가 세현 퀸의 명령을 정확하게 기억 못하는 바람에 최이삭이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걸 전부 해버렸다. 그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 닦았다. 이것저것 열어보던 세현이 살짝 탐탁치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 좀 했네.”
2주 동안 병원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좀 갈궈볼까 했더니. 하지만 곧 세현의 논문 두 개의 서문을 적어놓은 걸 보자 세현은 굳이 꼬투리를 일부러 잡을 필요없이 스팀이 올라 그를 영혼부터 탈탈 털기(너 같은 걸 랩장이라고 둔 교수의 비애.shout) 시작했다. 약 한 시간 정도 그러고 나서 최이삭이 세현의 연구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그걸 고스란히 듣고 있던 다른 대학원생들이 움찔하며 그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다다다다 자기 할 일을 하며 그를 외면했다. 최이삭은 잠깐 멘탈이 나간 얼굴로 자기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10분 정도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세현은 가만히 연구노트를 보며 논문에 넣을 내용을 순차적으로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딱 4시 정각이 되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곧바로 연구실로 들이닥쳤다.
“가시죠, 퀸 교수님.”
“아, 스트레스 받아.”
세현은 그들의 얼굴을 보자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사람이 이래서 건강해야 돼. 아, 좆같다. 세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학생들이 졸졸 쫓아 나왔다.
“뭘 나와? 할 일 해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 말고는 전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를 따라잡으며 말을 걸었다.
“교수님….”
“왜?”
“정말 그렇게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학과장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해주셔서….”
“그냥 딱 드레이닝 걸린 사람 같다. 괜찮아. 니가 졸업 논문만 제 시간에 들고 오면 졸업은 시켜줄 수 있다.”
차는 바로 물리학동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최이삭은 뒷좌석 문을 직접 열어주며 물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세현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초조함과 약간의 두려움, 기대 등등이 섞여, 역시나 믿음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니 일이나 잘해.”
“…네….”
경호원이 최이삭을 대신해서 차문을 닫았다. 그는 떠나가는 검은 세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잠깐 서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랩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세현은 랩 출근은 못하고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드레이닝 속도는 점진적으로 빨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했던 민 교수의 끔찍한 실험이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되어 메트로스퀘어로 가게 된 세현은 생애 처음으로 남자와의 데이트가 기대되었다. 적어도 그 미친년 손아귀에 있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것이다.
메트로스퀘어는 말 그대로 사각형의 공원이었는데, 거기서 거대한 빌딩을 마주하고 있는 회백색 분수의 앞에서 주로 사람들이 만났다. 거기로 가니 베이지색 베스트와 바지를 입고 연한 파란색 셔츠를 입은 짙은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겉옷을 손에 쥐고 팔은 걷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녹색 눈동자에 배우같이 근사하게 생긴 남자였다. 금발에 정장을 입혀놓았는데도 어쩐지 야성적인 느낌도 좀 들고. 그는 커다란 검은 차가 자신의 앞에 서고 경호원이 우르르 나와 주위를 경계하는 걸 보고 시선을 들었다. 경호원 하나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자 세현이 내렸다. 세현을 발견하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세현은 잠깐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군복만 입은 것을 보다가 이렇게 차려입은 것을 보니 또 색다르다. 전에도 생각했듯이 이렇게 꾸며 놓으니 배우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멀쩡하네?”
“좀 다치긴 했습니다.”
“그래?”
그는 세현의 손을 잡고 잠깐 그녀의 차림새를 확인했다.
“옷부터 사러 가야겠네요.”
“왜?”
“드레스코드가 있거든요.”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병원에서 바로 나온 세현은 아주 대충 입고 나온 상태였다. 이전 게헨-세나에 선수들을 유혹하러 갈 때도 그냥 트레이닝복이나 입고 가던 세현이었다. 그는 세현의 손을 잡고 바로 앞에 있는 메트로스퀘어 백화점 쪽으로 걸어갔다.
아담은 잠깐 뒤를 의식했다.
“저 남자들은 계속 따라다니는 겁니까?”
“어, 병원에 돌아갈 때까지. 포기해. 나도 포기했으니까.”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돌아오고 병원에서 헤어진 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어쩐지 자연스러웠다. 그는 능숙한 남자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졌고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어제오늘 보던 사이 같다.
백화점으로 들어간 아담은 애초에 이럴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곧바로 한 럭셔리 브랜드 직영점에 들어가더니 드레스를 하나 골랐다. 가슴이 확 파인 레드 드레스였다. 길이도 꽤 짧고 10센치는 족히 되어 보이는 반짝이는 샌들까지 대령했다. 세현은 황당한 얼굴로 아담을 돌아보았다.
“나 보고 지금 이걸 입으라고? 숨이나 쉬겠어?”
“한번쯤 이런 걸 입은 당신도 보고 싶어서요.”
“무슨 콜걸처럼 보이겠네.”
“하하.”
세현의 투덜거림에 아담이 웃었다. 어쨌든 세현은 옷을 갈아입었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넓은 골반과 엉덩이, 쭉 뻗은 다리. 키가 180인 세현이라 힐까지 신으니 키가 2m인 아담과도 키차이가 쑥 줄어들었다. 세현이 질색을 했다.
“나 이거 못 신어.”
거기에 머리와 화장까지 하니 다들 엄청 쳐다보았다. 아담은 그녀의 치장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다 끝나서 그녀가 앞에 서자 그는 세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현은 그의 발을 콱 밟았다.
“인형놀이가 취미인 줄은 몰랐네? 어?”
“윽, 밟혀도 좋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당신 지금 여신 같아요.”
치장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런 시간낭비를 도대체 왜 해야 하는 것인가. 남자고 여자고 그녀를 관음하는 시선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불쾌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을 내밀자 세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담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아, 이런 걸 신고 어떻게 걸으라고.”
“아름다운 여자가 이런 구두를 신을 땐 별로 걷지 않습니다. 굳이 걷지 않아도 되는 신분을 나타내는 거니까요.”
“어쩌라고. 너도 여자는 예쁘면 다라고 말하고 싶어?”
“당신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죠.”
“하, 이래서 남자가 싫어.”
아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차에 먼저 타고 잘 걷지 못하는 세현을 차에 태웠다. 앉아 있을 땐 계속 손을 잡고 있었고 걸을 땐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걸었다. 사람들이 엄청 쳐다보았다. 그들이 세현을 알아보는 것 같진 않았다. 대체로 남자들은 엄~청 육감적인 미녀를 데리고 다니는 아담을 부러워하는 것 같았고 여자들은 엄~청 육감적인 미남을 데리고 다니는 세현을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대체로 시선은 세현이 훨씬 많이 받아야 했다.
그들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다. 근래 계속 병원식만 먹다가 먹으니 맛은 좋았다. 아담은 세현을 무슨 예술품을 보듯이 감상하고 있었다. 세현은 그런 그가 좀 불쾌하면서도 웃겼다.
“이래서 남자랑은 함부로 약속을 하면 안 돼. 너도 그렇고 알렉스도 그렇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세현을 뽑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봐라. 캘리 박이나 민 교수야 같은 식구고 그녀의 병을 고치겠다는 명분이라도 있다고 치더라도, 모두 그녀가 약해진 틈을 노려 그녀를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그녀가 드레이닝에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 꼬맹이가요?”
“책임지라고 난리네.”
“하하.”
아담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을 좋아해서 그런다는 게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귀찮아.”
“당신에게 귀찮지 않은 남자는 어떤 남자입니까?”
“귀찮지 않은 남자는 없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아담이 넌지시 물었다.
“최 박사는요?”
“걔는 왜? 걔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놈이야.”
지금도 퇴근하지 못하고 랩에 붙어있을 한 불쌍한 박사과정 학생에게도 그녀는 악담을 했다. 아담은 그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와인을 약간 마셨다. 세현도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물었다.
“원망 안 해?”
“무엇을 말입니까?”
“좀 죽었을 거 아냐, 너희 애들.”
“…….”
그녀가 죄책감을 가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렇게 무심하게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아담은 와인잔을 한 번 흔들었다. 그가 지금 이런 거대 도시에서 하늘을 찌르는 유리 건물 속에 앉아 격식 있게 차려입고 아름다운 여자와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고 2주 전에 그가 겪었던 지옥이 사라지진 않았다. 당연했다. 지옥을 그 땅에 내렸던 사람이 바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그녀였다.
그의 용병단의 규모는 약 200명 정도 되었다. 경호나 경비 등을 위해 장기 계약이 되어 있는 놈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그때 세계물리학회에 고용되어 수에즈로 갔었다. 어쨌든 큰 건이 하나 끝나서 다들 휴가를 가지기로 했던 걸 사우디로 불러들인 건 아담이었다. 그때 인질로 잡히기 전 캘리 박의 협박이나 세현의 저주도 들었지만 그냥 들어 넘겼다. 그들이 능히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그랬다. 설마, 라고 생각했다.
타브크의 레어를 유지하기 위해 리야드에서 타브크로 출발한 지 두 시간 뒤, 막 리야드를 빠져나갔다 싶을 때 그는 하늘로 떠오르는 회색 도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도시는 조각조각 붕괴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땅에 떨어졌다.
“열다섯 정도 죽었습니다. 소로킨도 죽었습니다. 리야드에 있었거든요.”
“아, 그 대머리.”
세현은 그렇게 말했다. 웨이터가 와서 다 먹은 접시를 치웠다. 아담은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미리…, 언질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리야드에 가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먼저 폭력을 휘두른 건 저쪽이야.”
“그래도 정도라는 게….”
“그 정도를 왜 다른 사람이 정하지? 그건 피해자가 정하는 거야. 사우디 전체를 안 날린 게 어디야? 게다가 다른 레어들도 정리해줬는데. 다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거야. 우리는 분명히 경고했다.”
세현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며 그의 굳은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뭐야. 복수라도 하려고?”
그녀는 발을 뻗어 그의 무릎 사이를 확 벌렸다. 아담이 인상을 약간 썼다.
“안 그럴 거 같은데.”
식사를 마친 둘은 호텔로 갔다. 아담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세현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그게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원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아 모든 걸 버리는 남자들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대를 만나니 정말로 모든 것을 버려야 하더라도 따라가고 싶어졌다. 후회 같은 건 하지 않는 인생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충분히 긍정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그녀만이 그의 인생에 후회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아담은 현관에서부터 세현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대로 벽에 그녀를 밀어붙였다.
“으응…!”
그녀의 매끈하고 기다란 다리가 그의 허리를 압박했다. 그녀의 뺨에 코를 묻으며 냄새를 맡았다. 그대로 입을 맞췄다. 어른이란 게 굳이 나이로 정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 당사자도 언제 자신이 어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별말이 없었다. 둘 다 오늘밤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으음…. 읍…. 으응….”
“하아…, 세현….”
둘 다 매끈하게 잘 차려입은 옷차림이 흐트러졌다. 아담의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속옷을 옆으로 당겼다. 빨간색 레이스 속옷이었다. 그는 오늘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취향으로 꾸몄다. 솔직히 꽤나 즐거웠다. 아마 그 어떤 남자도 그녀를 이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기가 잘 맞았다. 빚과 사람의 목숨.
아담은 그대로 자신의 것을 세현의 것에 한 번 문지르고 바로 꾸욱 찔러 넣었다. 세현이 턱을 치켜들며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우둘두둘하며 커다란 게 단번에 안을 치고 들어왔다. 입맞춤은 황홀하다 싶을 정도로 좋았는데 삽입은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잘 들어갔으니 괜찮잖아요.”
그녀의 여성기는 체액으로 매끄러웠고 부풀어서 몹시 부드러웠다. 그를 전부 감싸고 있었다. 아담은 그녀의 아름다운 피부에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깐 그의 허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몇 개는 빼라니까…. 하앗….”
안 그래도 큰데 그의 남성기에 박힌 진주 때문에 더욱 버거움을 느끼며 그렇게 신음을 흘렸다. 아담은 한 팔로 그녀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감싸 들고 왼손으로 빨간 드레스 위로 그녀의 육감적인 가슴을 주물렀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묻었다. 너무나 좋은 냄새가 났다.
“하앗…. 앗. 앗…. 아아앗. 읏…!”
그대로 아담은 그녀를 벽에다 밀어붙여놓고 느리고 강하게 퍽퍽 쳐올렸다. 그의 남성기가 음란한 소리를 내며 반쯤 쑥 빠졌다가 또 퍽 박혔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고 몸은 뜨거워졌다. 그녀는 환희에 신음했다. 역시 이런 남자는 처음이다. 이렇게 기분 좋은 것도.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 숨이 섞이고 체액이 섞이는 소리가 적나라하다. 그의 성기가 뱃속을 꽉 채우면서 민감한 곳을 자극적이게 문질렀다. 그와는 오늘까지 포함해서 두 번밖에 몸을 섞지 않았지만 역시나 강렬했다. 그가 세현의 엉덩이를 꽉 잡았다. 세현은 그의 옷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입을 계속 맞추다가 하반신을 경련하며 입술을 확 뗐다.
“으으응…!”
“세현….”
아담은 인상을 썼다. 경련하는 그녀의 여성기를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후볐다. 그녀의 탄력 있는 질은 손가락 하나도 꽉 조이지만 그의 다소 야만적인 남성기도 꿀떡 삼켰다.
처음 그녀와 할 때의 그녀는 섹스의 쾌락에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이제 그녀는 제법 섹스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 사이 아담 외에도 남자 여럿의 흔적이 느껴져 그를 약간 심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걸로 이 사람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가 굉장히 야한 얼굴로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담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는 철퍽철퍽 그녀의 젖은 안쪽을 찔렀다. 누군가의 체액이 흘러 몇 방울 떨어졌다.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도 흘렀다. 곧 아담도 움찔하며 그녀의 안에 사정했다. 거친 숨소리가 달궈졌던 공기와 함께 천천히 차분해졌다.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더워.”
아담도 더웠다. 그는 세현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녀는 앓는 소리를 냈다. 거기나 뱃속이나 고관절이나 허벅지, 엉덩이, 허리까지 굉장히 뻐근했다. 몇 주 전 알렉스와 한 것을 마지막으로 섹스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역시나 이 남자의 테크닉이 수준급이라 허리가 빠진 것인지 오금이 여전히 저릿저릿했다. 세현은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이딴 거 다시는 신나 봐라.”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벗으려고 등 뒤로 손을 둘렀지만 지퍼에 손이 닫지 않았다. 그녀는 아담을 불렀다.
“이것 좀 내려.”
아담은 자신의 베스트를 벗어서 옆에 던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몸을 바짝 붙여 서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앞으로 가지런히 내렸다. 그리고 지퍼를 천천히 내리며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아담은 세현의 어깨에서 드레스의 끈을 양쪽으로 내려 옷을 벗겼다. 옷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세현은 축축하게 젖은 레이스 팬티를 벗어 손가락에 걸쳤다. 그녀는 그걸 든 채 아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이런 게 취향이라고? 그런 표정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할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속옷을 바닥에다 떨어트렸다. 아담은 그녀의 몸을 돌려 마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옷을 마저 벗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청색 셔츠를 벗자 역시나 여기저기 흉이 진 그의 몸이 드러났다. 그렇게 알몸이 되어 알몸인 그녀와 마주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대단히 큰 키에 어울리는 커다란 덩치, 근육질의 몸매, 몸에 남은 흉터들, 그에 비하여 참 예쁘고 화려한 얼굴이다. 금발에 녹색눈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림으로 그려도 멋질 것 같다. 소드마스터인 남자들이란 정말 남자답다. 남신을 구현해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들은 곧 침대로 쓰러져 2차전에 들어갔다. 이리저리 뒹굴다가 그녀가 위에 올라왔다. 그의 리드에 몸을 맡겨 빠른 속도로 찰싹찰싹 몸을 부딪치다가 느려졌다. 그녀는 오르가즘 뒤에 오는 기분 좋은 떨림을 즐기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용병 같은 거 왜 해? 다른 거 해도 먹고 살 거 같은데.”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번 해보고 섹스 같은 것에 관심 끄고 살았던 게 십 수년이었다. 그는 정말 잘했다. 사람들이 왜 섹스에 그렇게 미쳐서 사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알렉스처럼 책임지라는 말이나, 제수스처럼 질문이 많지도 않았다. 귀찮지는 않으면서 능숙하게 여자를 만족시킬 줄 알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남자가 그렇게 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만하면 보기도 꽤 좋고. 세현은 그의 턱을 잡고 잠깐 그의 얼굴을 돌려 살펴보았다.
아담은 조금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웃었다.
“일단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야.”
아담은 다시금 자세를 바꿔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몸을 깊이 겹쳐 그녀의 손에 깍지를 껴서 침대에 눌렀다. 다른 손은 자연스럽게 그의 등에 둘렀다. 그가 세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얘네들은 자꾸 왜 이러는 거야?’
뭔 냄새가 그렇게 나나. 알렉스도, 제수스도 아담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자꾸 비볐다. 냄새를 맡는 건지 냄새를 묻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그는 자신한 만큼 잘했다. 냄새도 좋았고 피부가 맞닿는 것도 기분 좋았다.
그녀는 타인과 이렇게 피부를 맞댈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프고 싫기만 했는데 그나 다른 남자들과 체온을 나누며 어느샌가 익숙해졌다. 아니, 그들에게 익숙해지니 기분이 좋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어떤 인생을 살더라도 인간의 기본 틀은 결국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것에 안도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한계로 느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이른 죽음을 앞둬서 그럴까. 세현은 그것을 후자에 가깝게 느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담은 깊숙이 넣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찬양을 바치듯 얼굴과 몸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표정과 반응을 살피고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느끼며 반응하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뿌듯했다. 이런 충족감은 그녀와 함께 할 때뿐이었다.
“간지러워.”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추다 고개를 들었다. 아담이 위로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속삭였다.
“더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서 하룻밤 타령한 거 아니었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내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며 그가 끝까지 가득 들어오자 그녀가 살짝 움찔하며 숨을 내쉬었다. 아담은 그녀의 체온과 살결을 온몸으로 느꼈다. 단단한 근육에 맞닿는 부드러운 허벅지와 배, 그리고 속살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녀와 같은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아니, 증오하는 남자들은 많을 것 같다. 세상에서 최고의 여자를 가지지 못한 수컷의 자격지심이랄까.
‘어떻게 하면 그녀를 귀찮게 할 수 있는 거지? 졸졸 따라다니라고? 싫어할 거 같은데.’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차라리 좀 더 미루는 것이 좋았을까. 이날 밤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아담은 그녀의 얼굴을 그리듯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대로 몸짓이 좀 더 격렬해졌다.
“아…! 아아…! 좀 천천히…. 읏….”
“조금만 참아보십시오. 금방 가게 해드릴 테니까.”
“아윽. 아! 으으응…!”
정말로 금방 보내버렸다. 그대로 그녀의 젖꼭지를 핥고 안을 휘저어 더 느끼게 했다. 타이밍을 잘 맞추면 그녀는 멀티 오르가즘도 느꼈다. 그녀가 고개를 꺾고 비명을 질렀다.
“아…!!”
그녀의 손톱이 등을 파고 들었다. 그대로 피크에 사정했다. 울컥울컥 쏟아졌다. 아담도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그대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금 뒤 아담이 숨을 깊게 내쉬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시간을 확인했다. 시작한 지 2시간이나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헐떡거리며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운동 같은 걸 잘 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아…. 힘들어….”
“체력을 좀 기르시는 게 좋겠군요. 저는 그렇다 쳐도 그 꼬맹이 상대하려면 상당히 힘드실 텐데요. 잘 하지도 못할 거 같은데.”
“그건 그래….”
세현이 여전히 쾌락의 잔향에 녹아 들어 중얼거렸다. 오르가즘이란 게 그냥 잠깐 왔다 가는 짜릿함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와 하면서 알게 되었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지며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몸에 흐르는 자신의 땀마저도 기분 좋게 느낄 정도로. 그의 야만적인 남성기가 너무나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로. 아찔한 도취감이 들었다.
아담은 천천히 그녀의 몸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몸을 일으킨다 싶더니 금세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의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한 손으로 받쳐들고 욕실문을 여니 약간 정신을 차린 세현이 부스스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가볍지도 않을 텐데 번쩍번쩍 잘 드네.”
그녀의 무심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녀는 관심이 없는 것에는 철저히 무지함으로써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쉽게 드러나곤 했다. 그간 주변에 널리도록 본 것이 소드마스터들일 텐데도 말이다. 수에즈에서 손수 계측기도 설치했었다.
“침대 채로도 들 수 있습니다. 엘 드라카 보신 적 한 번도 없으십니까?”
“없어.”
그는 세면대 앞에 그녀를 내려주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입욕제를 넣으니 금세 보글보글 거품이 피어올랐다. 세현은 커다란 거울의 앞에 서서 자신이 화장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어쩐지 얼굴이 답답하다 싶었다) 준비된 클렌징 크림으로 얼굴을 대충 문지르고 티슈로 벅벅 닦았다. 그걸 보고 아담이 웃더니 세면대에 등을 기다고 그녀의 손에서 티슈를 빼앗았다.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세현의 얼굴에 클렌징 크림을 문지르고 다시 닦아주었다. 그리고 샤워부스에 들어가 같이 샤워를 하고 물이 가득 찬 욕조에 함께 몸을 담갔다. 세현은 그의 품에 기대어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욕조에 몸을 담근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아담은 부드러운 해면을 물에 적셔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이제 당신은 어쩌는 겁니까? 연구만 계속 하시는 건가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우리 노친네가 갑자기 돌았는지 나 낫게 하겠다고 돈지랄 중인 것 같은데. 될 것 같진 않아. 불치병이 괜히 불치병도 아니고. 내가 죽고 난 다음에나 방법이 좀 생길지도 모르지. 시간이 없어.”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싶은 건 학회장님뿐만이 아닙니다.”
“그냥 난 내 일을 하고 싶을 뿐이야. 희망 같은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세현이 한숨을 쉬었다. 아담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라고 자신의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이런 상황들이 짜증날 뿐일까. 아담은 가만히 그녀의 턱을 손등으로 쓰다듬고 어깨와 팔을 가볍게 주물렀다.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세현은 아담의 기색을 느끼고 그를 살짝 돌아보았다. 어쨌든 아담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미소를 지으니 그녀는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또 하려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면서요.”
“그런 말은…, 으응…, 아니었는데.”
그가 쑥 들어오자 세현이 인상을 약간 쓰며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물에 젖어 물의 맛이 났다. 미추가 빠듯한 느낌이다. 그는 허리를 일으켜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몇 번 팡팡 물살을 일으키다가 그녀의 몸을 돌려 마주보았다. 좁은 욕조 안에서 물에 몸을 담그고 서로를 껴안으니 더욱 친밀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으응…. 하아.”
“전보다 더 잘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피부가 물에 젖어 더욱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아담은 자신의 목에 성기게 두른 그녀의 팔에 입술을 문질렀다.
“좀 익숙해진 것 같긴 해, 으응…, 이 크기.”
엄청 크다. 세현이 신음했다. 아담은 웃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진주…, 으읏…, 두 개 정도만 빼면…, 으윽…, 더 좋을 거 같아.”
“…진짜 뺄까요?”
“응…. 핫. 거기….”
한 번 더 하고 나니 그녀는 확실히 지쳤다. 아무리 좋은 오르가즘도 체력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세현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섹스를 전혀 하지 않아도 아무런 미련이 남을 것 같지가 않았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니 현기증이 핑글 돌았다. 아담이 웃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아, 진짜 운동해야 되나….”
때때로 그런 필요성을 느끼곤 했지만 요새 더더욱 느낀다. 그녀의 몸에 실크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머리를 말린 후 그들은 그대로 침대로 돌아가 잠들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꿈도 하나 꾸지 않는 밤을 지나 아침이 되었을 땐 별말 없이 가벼운 입맞춤으로 아침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침대의 양편에서 서로에게 등을 진 채 옷을 입었다.
아담은 시계를 차고 머리를 쓸어 넘긴 후 뒤를 돌아보았다. 세현은 결국 경호원에게 새로 옷을 가져오게 시켜 긴 바지에 민소매 블라우스만 입었다. 신발은 아주 편한 로퍼를 신었다. 하이힐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같이 방을 나서고 호텔 앞으로 가니 어제 보았던 커다란 검은 세단이 서 있었다. 아담은 뒷좌석의 손잡이를 잡았다. 세현은 그 앞에 서서 잠시 하품을 했다. 그는 곧바로 문을 열지 않고 잠깐 그녀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저 좀 봐주십시오.”
“응?”
세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대로 몇 초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가볍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었다. 세현은 차에 탔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
아담은 이루어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어젯밤은 그에게 최고의 밤이었다. 그는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어디선가 타협을 하여 어떤 여자와 여생을 같이 하게 되더라도 잊지 못할 거다. 최고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변명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서울을 곧 떠나야 했지만 발걸음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저렇게 휙 가버렸지만 그는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나이 같은 건 그다지 문제될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알렉스만큼 어렸다면 뭔가 달랐을까. 물정도, 세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라면, 그가 가진 이 티끌만한 것을 기꺼이 걸 수 있을 만큼 무모했을 때라면, 가지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고 달려들 수 있었을까.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말할 수 있었을까. 당신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고 싶다고.
으음…. 아담은 담배를 반도 피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트렸다. 발로 비벼 끄고 그녀가 가버린 방향을 등졌다. 그답지 않게 너무 감상적이 되었다.
*
아담은 인천에 있는 공항으로 가서 당장 상하이로 향했다. 비행 시간 자체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메트로서울도 고층 빌딩들이 늘어선 메가시티였지만 상하이는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20위권 내에 있는 건물이 7개나 여기 있었다. 오늘은 날이 많이 흐렸다. 금방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다. 낮게 깔린 회색 구름 바로 아래로 네온 사인, 전광판, 홀로그램이 빛났다. 그렇게 숨이 턱 막히는 시내를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꺼진 홍등이 이어지는 거리로 들어갔다. 좀 더 들어가니 아직 청소가 덜 되어 지저분하다.
그 사이에 있는 5층 자리 건물에 들어갔다. 1층과 지하는 매춘을 하는 업소였다. 5층이 그의 용병단 사무실이었다. 4층은 지낼 곳이 없는 놈들이 지내는 숙소 비슷한 것이 있었다. 상하이는 세계 최고의 월세를 자랑했다. 수에즈와 리야드에서 어쨌든 돈을 벌었기 때문에 곧 사무실을 옮길 것이다.
“오셨어요?”
리셉션 의자에 늘어지게 누워있던 놈이 아담이 들어오자 눈을 떴다. 리셉션엔 비번인 놈들이 돌아가며 앉아 있었다. 그는 시차가 안 맞는 모양인지 하품을 계속했다. 미국에서 장기 경호를 끝마치고 돌아온 빌이라는 검은 머리에 피부가 짙은 갈색인 청년이었다. 히스패닉 계통의 느낌이 많이 났다. 나이는 이제 갓 스물을 넘겼다. 아담은 사무실의 금고를 한 번 확인하고 앉아서 서류 작업을 잠깐 했다. 소로킨이 죽는 바람에 그의 지분을 처리해야했다. 가족 같은 것도 없어 그의 유언장 집행도 아담이 해야 했다. 아직 보지도 못했다.
사무실엔 그와 빌밖에 없었다. 빌은 리셉션의 의자를 쭉 끌어와 아담의 책상 앞까지 왔다. 그가 슬쩍 아담에게 말을 걸었다.
“대장.”
“왜.”
“우리 이사 언제 해요? 돈도 많이 벌었잖아요.”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다.”
“상하이는 아니죠? 딴 데 갑시다.”
“왜? 상하이 아니면 싫다는 놈들도 많은데?”
“아, 그러니까 형들이 돈 벌어서 전부 사창가에다 다 쓰잖아요.”
“그 돈으로 약하는 거보단 낫다.”
“어차피 가서 약도 하는데, 뭐. 그래도 딴 데 가면 좀 덜 쓸 거 아니에요.”
“상하이가 물이 제일 좋아서 딴 데서는 못 살겠다더라.”
아담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빌이 의자의 등받이를 끌어안고 열심히 그를 설득했다.
“그러니까 딴 데 좀 가자구요. 북경이나 메트로서울이나 도쿄나. 좀 건전한 데 가서 살자구요.”
그렇게 빌이 하는 말을 대충 듣고 있는데 4층에서 누가 올라왔다. 체자레였다.
“어, 대장. 벌써 왔어요?”
그는 수에즈에 이어 사우디 아라비아까지 같이 갔다가 2주 전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동료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여기서 머물고 있었다. 그는 빌보다 한 살 많았다. 그는 유리 파이프에 크리스탈을 넣어 불로 가열하고 입에 물었다. 빌이 그에게 말했다.
“형도 상하이는 싫지? 딴 데 가자고 하자.”
“응? 나 상하이 좋은데?”
“일단 죽은 애들 사망신고서도 안 들어갔다. 좀 기다려라.”
“근데 대장, 메트로서울은 왜 간 거예요?”
“개인적인 일이야.”
“혀엉. 딴 데 가서 살자, 어?”
“아, 예쁜 여자 사무원 하나 뽑으면 어딜 가든 좋슴다.”
“됐다. 엄한 여자 인생 망칠 일 있냐? 그냥 여기서 살자.”
“뭐 어때요. 정 그러면 몸 팔던 여자로 하나 구해서 앉히면 되지.”
그는 연기로 도넛 모양을 만들며 그렇게 말했다. 아담과 소로킨이 함께 만든 용병단 <엔트>는 모든 업무를 서류로 관리하고 있었다. 각 용병들이 어떤 업무에 임하고 있는지는 사무실에 있는 서류에만 기록되어 있었다. 보안이 중요한 일을 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불법적인 일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사무실이 필요했다. 현금 거래가 여전히 유용한 업계가 여기다.
조금 있으니 디바이스로 연락이 왔다. 죽은 이들의 사망신고서가 접수되고 서류가 몇 개 날아온 것이다. 그 중엔 소로킨의 유언장도 있었다. 그는 유언장을 열어보았다. 별말 없이 간단했다. 그의 전재산의 반은 루옌이라는 여자에게 주라고 되어 있었고 나머지 반은 등분하여 엔트 용병들에게 나눠주라고 되어 있었다.
“음? 소로킨이 우리한테도 유산 좀 주겠다고 적어 놨네.”
“진짜요?”
“빚 다 갚는 놈도 생기겠는데.”
“소로킨 대장 그렇게 돈 많았어요?”
“니들보다는 많지.”
수에즈에 갈 때 세계물리학회에서 받았던 200억 중에 50억 정도는 용병단 장비를 맞추는데 쓰였다. 생각보다 무기나 총알 값이 많이 든다. 낡은 군복과 무기를 헐값에 팔고도 인당 2500만원 정도가 들었다. 나머지 150억원은 50억은 용병단의 수익이고 나머지는 그때 파병된 용병들의 몫이다. 커다란 조직에서 집행한 예산으로 지급받은 돈이니 여기서 세금도 착실하게 떼어내야 했다. 용병단에서 인수한 용병들의 빚도 있었기 때문에 원천징수를 하는 부분도 있었다. 결국 이래저래 용병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주는 것도 흥청망청 써버리고.
그는 용병들의 빚이 기록되어 있는 전자 종이를 찾았다. 서른 명 정도는 다 갚을 것 같았다. 인원 변경이 조금 생길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차피 할 줄 아는 건 몸 쓰는 것밖에 없는 놈들이니 많이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서류를 하나하나 더블체크 하고 정리하고 있는데 건물로 비행차량이 다가왔다. 비행차는 건물 앞에 착지했다. 다들 소리를 들어서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이 시간에 이 건물에 용건이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대로 신경을 더 집중하니 여자 한 명과 남자 세 명이 사무실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남자들은 전부 소드마스터다. 체자레와 빌은 슬쩍 서랍에서 총을 꺼냈다.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자 두 명이 불쑥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 민유 누님?”
체자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민유였다. 밝은 갈색의 단발 머리를 단정하게 머리띠로 정리하고 정장을 입은 상큼한 미녀는 웃는 낯으로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체자레.”
“어….”
빌도 입을 헤 벌리고 그녀를 보았다. 남자 하나는 한민유의 곁에 있었고 둘은 그들에게로 곧장 다가갔다.
“아담 마이어 씨, 시간 좀 되실까요?”
체자레와 빌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아담과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아담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시죠?”
“같이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에 좀 가셔야겠습니다.”
한민유도 웃는 얼굴로 답했다.
“갑자기 무슨….”
“사실 마이어 씨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한민유는 아담의 말을 끊고 그렇게 말했다. 다소 미안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른 두 남자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양쪽에서 아담의 팔을 잡았다. 빌이 그중 하나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뭐야!”
“아니, 소란 일으키진 말고. 갔다 올게.”
아담은 곧바로 그를 말렸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잡은 남자들의 팔도 치웠다.
“가겠습니다. 무섭네요.”
아담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속한 단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떠올려보면 그녀는 그녀가 데려온 세 명의 소드마스터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존재였다.
“대장!”
빌이 아담을 보고 소리쳤다. 체자레는 살짝 눈치를 봤다. 그도 잘 몰랐지만 눈치는 있었다. 그는 빌의 팔을 잡았다. 아담은 서류를 다시 금고에 넣고 옷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차에 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두 명의 어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얌전히 있어라.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고.”
소로킨도 죽었으니 용병단에 제대로 된 어른이라곤 아담을 포함해도 몇 명 없었다. 체자레와 빌은 약간 불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빌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는 한민유를 따라 나섰다. 차에 타자 차는 곧바로 날아올랐다.
“저 메트로서울에서 돌아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요.”
“어젯밤에 저희 퀸 교수님이랑 같이 계셨죠?”
“…그렇습니다만.”
여기는 사생활도 없는가. 아담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한민유는 시계를 보고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전화가 와서 곧바로 전화부터 받았다.
“네, 민 교수님. 데려갑니다. 네. 음…, 25분 후면 병원에 바로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캘리 박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보고했다.
“네, 학회장님. 네. 그랬나 봅니다. 네.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담은 그녀의 통화내용을 훔쳐 들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드레이닝이 나아진 겁니까?”
한민유가 전화를 끊자마자 아담이 물었다. 아담이 놀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랑 섹스를 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가서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앞으로 스케줄이 있다면 전부 취소하십시오. 퀸 교수님의 드레이닝이 낫거나 돌아가실 때까지 메트로서울을 벗어나지 못하실 겁니다.”
아담은 약간 얼이 빠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바쁜지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띄워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류를 작성했다. 헛웃음이 잠깐 나왔다. 그도 꽤나 야만적인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들이 하는 것을 보면 가끔 기가 질릴 정도다. 그들이 가진 물리적인 힘도 물론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들이 가진 사회적 힘이야말로 더더욱 무섭다. 그들은 몇 백만의 사람을 사적보복으로 죽여도 어떤 국가와 사회에서도 범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국가 수준의 독립성과 자치권, 자위권을 가진 조직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에 사인해주십시오.”
그녀는 빳빳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전자 기능이 있는 종이인지 아담의 디바이스가 곧바로 진동 알림을 보냈다. 그는 디바이스를 꺼내며 건네받은 서류를 읽었다.
“…….”
[인공지능비서 동행제도에 의거하여 본 서류는 계약자에게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독소조항을 17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계약자에게 불리할 수 있는 조항이 47개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전문가는 변호사를 동행하여 필히 모든 조항을 상세 검토할 것을 권고합니다.]
디바이스에 내장된 인공지능이 그렇게 끼어들었다. 종이는 약 20장에 달했고 인공지능비서가 굳이 지적해주지 않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내용이 아무렇지도 않게 적혀 있었다. 사람을 사고 파는 것도 당연한 시대이니 놀라울 게 뭐가 있겠냐고 묻겠지만 이건 고강도의 인체실험에 동의하느냐는 문제였다.
의약계에서는 간혹 실험자를 모집하곤 했다. 임상시험이 그것이다. 상대의 동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여러 단계의 동물 실험을 거쳐 안정성을 테스트한 뒤에 인간에게도 예상 범위 내의 부작용만이 기대될 때 사람을 상대로 한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하지만 신체를 변형하거나 교체하거나 손실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고강도의 인체실험은 인간 시장에서도 상당한 비용 및 도덕 문제를 야기했다. 몬스터 게이트에 가서 몬스터한테 죽는 건 단번에 죽기라도 하지 돈 좀 벌겠다고 이런 실험에 사인을 했다간 평생 사람 구실도 하지 못하고 바닥을 기는 벌레만큼도 못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담은 곧바로 말했다.
“이런 건 안 할 겁니다.”
“실험 전후로 드리는 금액은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그래도 안 할 겁니다.”
그와 같은 남자에게는 팔자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고개를 저었다.
“주실험자이신 엘리야 민 교수님은 세계 최고의 마도의사이십니다. 설사 팔다리 한 두 개, 아니, 전부 잘려도 말끔하게 되살려 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계약서 상에는 영구적 신체손상에 대한 조항을 적어야만 했지만 실제로 그런 장애가 남을 확률은 0.1%도 채 되지 않습니다.”
“안 할 겁니다.”
“퀸 교수님을 낫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민유가 말했다. 아담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안 합니다.”
그의 대답에 한민유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본인이라면 할 건가? 아담은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쩐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겠다고 말할 것 같다는 기이한 예감도 들었다. 그들은 면면이 서로 달랐지만 모두가 묘한 비인간성과 맹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도 서울엔 계셔야 합니다.”
“그것도 싫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면 그녀가 입을 다물 줄 알았으나 한민유는 곧바로 대꾸했다.
“반년 전 카스트로 반미정권 테러 단체에 고용되어 민간인 사상자를 87명 낸 적이 있으시죠? 3년 전 3차 중러전쟁에서 엔트의 용병들이 러시아군과 함께 아러타이 지구에서 약탈, 방화, 강간 등 전쟁범죄를 다수 저질렀구요. 그 외에도 탈세와 불법인신매매, 요인암살 등 다양하게 있으시네요. 더 파면 더 있을 것 같은데 이 정도도 충분할 것 같아서 관뒀습니다. 식구들 생각도 하셔야죠.”
“…….”
“좋은 말로 할 때 사인하시는 게 좋겠죠?”
그녀가 상큼하게 웃으며 협박했다.
*
“야, 인간적으로 말은 하고 좀 해라.”
스캔기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배도 한 번 갈라봤다가 또 스캔기에 들어가기를 수 시간. 세현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실험쥐처럼 다루는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다. 오늘 실험실 출근은 금지되었다. 엘리야 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너한테 무슨 말을 들어봤자 선입견만 생길 뿐이야.”
“하아.”
세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본인이 마도의사이니 민 교수는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걸 할 이유도 전혀 없을 것이다. 세현도 본인의 신체적 한계를 굳이 유념하고 살 필요가 없는 인생이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물리적, 사회적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신체적으로 강하게 통제된 이런 상황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는지 처음 알았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생소한 무력감이란 것을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니 진정제 겸 놀이감을 주는 느낌으로 병실로 알렉스 킴과 함께 점심을 넣어주었다. 세현은 지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오늘은 학교 안 갔어요?”
“어….”
“많이 힘들어요?”
그는 세현의 침대에 앉아 그녀의 칙칙한 얼굴을 보고는 식판을 옆에 내려 두고 그녀를 꼬옥 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밖에 잠깐 나가자.”
“귀찮아.”
“여기 앞에만. 밥 먹고 나가자.”
알렉스는 세현의 병수발이라도 들겠다고 마음먹은 것인지 착실하게 그녀의 식사를 도왔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받아 밥도 먹기 싫어했다. 그리고 병실 밖에 있는 공원에서 노닥거렸다. 좀 걸어 다니다가 벤치에 앉았다. 그가 훈련을 받으며 겪었던 시시껄렁하면서도 웃긴 얘기를 들으며 그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었다. 그는 세현의 머리카락을 손에 계속 감았다. 그리고 호출을 받아 병실로 돌아갔더니 예상치 못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
아담이었다. 게다가 그는 병원복을 입고 있었다. 아프면 그럴 수야 있다고 치지만 여기는 세현의 병실이었고 VVIP 병동이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뭐라고 하려고 하는데 딱 민 교수가 들어왔다.
“뭐야?”
그녀는 집중하여 자신의 멀티스크린을 뚫어져라 보면서 힐끗힐끗 세현과 아담을 보더니 대꾸했다.
“너 이 남자랑 섹스 좀 해라.”
누가 들으면 배드민턴이라도 치라는 줄 알겠다. 그 소리를 들은 당사자 둘은 이미 엘리야 민이라는 인간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부외자 하나는 털을 곤두세웠다.
“뭐라고?!”
“소드마스터랑 실제로 하는 거랑 그냥 체액만 넣는 거랑 다른 건 확실한 거 같다. 도대체 뭐가 다른 건지는 더 확인해봐야 된다. 일단 해라. 그리고 둘 다 스캔 뜨고 그 다음엔 스캔기 안에서도 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냥 배드민턴을 치라는 거나 어조가 크게 다르지가 않았다. 알렉스가 울컥해서 민 교수의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텅 하고 쉴드에 막혔다.
“꼬맹이, 너 너무 다혈질이야.”
몇 번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알렉스의 성격을 파악했는지 그녀가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내가 하면 되잖아!”
“넌 이 다음에.”
“싫어!”
“요.”
민 교수가 지적했다. 알렉스는 부글부글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세현을 돌아보았다.
“하지 마. 응?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알렉스는 울렁울렁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러는 것이 무색하게도 이미 그녀와 아담은 어젯밤을 함께 보냈다. 세현은 민 교수를 보았다.
“자세히 설명 좀 해봐.”
“이리 와.”
세현이 그녀의 쪽으로 가까이 가자 민 교수는 음성이 차단되는 쉴드를 쳤다. 그렇게 남자들을 배제하고 둘이서만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민 교수가 쉴드를 해제했다. 세현은 알렉스를 보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라.”
알렉스는 충격을 먹은 얼굴로 세현을 보았다.
“거짓말….”
“어쩔 수 없잖아.”
세현은 그의 뺨을 만져주려고 했지만 그는 홱 얼굴을 피했다. 그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또 민 교수를 노려보고 마지막엔 아담까지 노려보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린애는….’
세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린애는 피곤하네.”
민 교수는 입으로 내뱉었다.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카메라는 꺼라.”
“오케이.”
그러자 민 교수는 밖으로 나가고 병실에는 세현과 아담만이 남았다. 그의 얼굴은 유례없이 굳어 있었다. 오늘 아침에 헤어질 때만 해도 미련이 철철 남아 보였는데. 그를 여기까지 데려오는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눈에 훤했다. 와서도 민 교수가 그를 어떻게 취급했을지도 눈에 훤했다.
“변명부터 하자면, 나도 여기에 내 재량이 별로 없어.”
세현이 한숨을 쉬었다. 아담은 세현의 침대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말했잖아. 우리 노친네가 지금 노망이 한창이라고.”
“저 사람들이 어디에 사인을 하라고 날 협박했는지 아십니까?”
“먼저 당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약속대로 사지는 멀쩡해. 정신적 데미지가 커서 그렇지.”
아담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구요? 그런 데 사인을 했다구요?”
“저 미친년이 사람을 봉제인형처럼 뜯었다 붙였다 하긴 하는데. 아마 나만 그렇게 할 거야. 마력 순환과 관련된 장기의 DNA를 변형해서 자꾸 교체해보는데 사람이 미치겠어.”
“…….”
아담이 말을 잃었다. 그녀는 천천히 병원복의 단추를 풀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알몸이었다.
“빨리 하자. 오늘은 하루 종일 피곤해.”
“당신은…,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요?”
그는 세현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빠르게 물었다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다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아담의 심경을 눈치챌 리가 없는 세현은 한숨처럼 말했다.
“당연히 안 괜찮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민 교수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
아담은 입을 다문 채 그녀의 몸을 잠깐 보았다. 여전히 상처 하나도 없었다. 마도의사라는 것들 것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의 말이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몸은 깨끗했다. 아담이 굼뜨게 굴자 세현이 먼저 그의 환자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인은 했어?”
세현이 질문했다. 아담은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막지도 못했다.
“…아뇨. 되는 대로 협조는 하겠다고는 했지만….”
“잘했어. 한동안 계속 귀찮게는 할 거야. 나 죽으면 입막음은 해야 하니까 돈도 줄 거고. 몇 개월만 참아.”
세현은 그의 상의를 벗기고 그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그의 말 같은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그의 바지를 살짝 내렸다. 그의 커다란 남성기가 노출되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발기하거나 하진 않은 상태다. 세현은 손을 뻗어 가방을 집어왔다. 안을 뒤적거리다가 윤활제를 찾아냈다. 그의 것에 잔뜩 뿌리고 손으로 만졌다. 잘 안 선다. 알렉스나 제수스는 무슨 상황에서든 그냥 발딱발딱 잘 세우던데. 세현이 의뭉스럽게 중얼거렸다.
“나이 탓인가….”
“그런 게 아닙니다…!”
심경이 복잡하기 그지없던 아담은 그녀의 말에 울컥해서 허리를 일으켰다. 그게 뭐라고 말이다. 아까부터 해가 진다 싶더니 방 안이 어둑했다. 세현은 그가 그렇게 발끈하자 그게 웃겼는지 하하, 하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하하하. 화내는 거 처음 봐.”
아담은 잠깐 숨을 멈추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농담처럼 넘어가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몸에 얼굴을 가까이해서 표정을 가렸다.
“당신 생각은 이렇게 해도 안될 거라는 말씀이시죠?”
“일단 내 직감은. 그런데 민 교수가 전문가니까.”
“당신은 이걸 어떻게 견디는 겁니까?”
“높이 올라가면 그만큼 추락도 무서운 법이야. 내가 비정했던 만큼 내 말로가 비정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정말 초연한 존재라서 초연한 것인지, 그럴 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의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는 것뿐인지.
“빨리 하자.”
“…어쨌든, 내게 섹스를 조르는 당신은 굉장히 좋네요.”
아담은 드디어 그녀의 피부에 얼굴을 댔다. 아주 부드러웠다. 어젯밤과 같았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어 한 켠에는 기뻐하는 자신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담은 그녀의 여성기를 부드럽게 손으로 만지며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앞으로 당신과 토끼처럼 계속 하면 될까요? 그런 거라면 백 번이라도 사인할 수 있는데.”
“그럼 나 죽어.”
“너무 좋아서요?”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는 세현에게 입을 맞췄다. 이마, 눈썹, 코, 뺨, 입술, 턱 끝, 목덜미. 세현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갔다. 그녀는 아담의 멋진 등근육의 갈라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냥 윤활제 써. 하아.”
“싫습니다.”
“분명히 카메라 안 껐을 걸.”
“그럼 보여주죠. 우리가 얼마나 좋은지….”
“으응…!”
그는 그대로 세현의 온몸을 샅샅이 핥았다.
*
세상 어디든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으레 폭력과 불합리, 잔인함이 깃든다. 분명히 그들은 거기에 있어서 최초도 아니고 최고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고작 19살이 된 알렉스 킴에게도 아담에게 내민 것과 같은 계약서를 내미는 것을 보고 놀랐고 읽지도 않고 바로 사인을 하려는 알렉스를 보고 두 번 놀랐다.
“이런 거에 함부로 사인하는 거 아니야. 미쳤어?”
“왜 이래, 아저씨? 세현 교수님 고칠 수도 있다는 말 못 들었어? 난 할 거야.”
무지와 만용에는 약도 없는 것이다. 알렉스는 사인을 해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아담을 협박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버티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사인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들이 아담에게 강요하는 것도 이미 법적 적정 수준을 훨씬 넘었다. 그럼에도 아담은 거기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세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현은 그 협박을 거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말리지도 않았다. 하는 말이라고는 이 정도도 아는 얼굴이라 많이 봐주는 거니 피곤하게 저항하지 말고 얌전히 순응하고 돈이나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의도치 않게 당근과 채찍같이 느껴지면서 교묘하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남자를 잘못 만나 화류계에 팔리는 여자가 된 기분이군.’
그런데도 결국 아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래도 세현을 믿는 것뿐이었다. 수가 틀리면 역시 버림을 받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면서도.
세현은 이 와중에도 랩에 출근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얼핏 듣기로는 미국에 가서 또다른 웜홀을 없애는 실험을 할 것이라고 한다. 수에즈에서의 일로 결과적으론 한 나라가 벌써 멸망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실험은 이미 연구비를 모두 모았다고 한다. 세상 어디에나 사람이 있는 곳엔 폭력과 불합리와 잔인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누구 하나의 탓이 아니라는 게 가장 잔혹한 점일지도 모른다.
4시가 되어 병원으로 퇴근한 세현은 여전히 종이를 붙잡고 계산을 하며 수에즈에서의 실험을 바탕으로 두 개의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민 교수가 호출하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아담은 병원으로 적을 옮기고 처음은 그녀와 토끼처럼 섹스하라는 의료진의 지시에 생각보다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은 철회되었다. 그들은 스캔기에 들어가서 사실상 중인환시 속에서 그녀의 안에 사정했어야(이건 정말 섹스가 아니다) 한 적도 있었고 시간제한이 생기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항상 무드를 지키기란 몹시나 어려웠고 그들은 아담에게 강제로 발기를 시키는 약을 먹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담은 그나마 낫지, 사흘에 한 번씩 마도 수술을 받는 그녀를 상대로 기계 같은 섹스를 하라는 건…. 발기부전에 걸릴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구한다는 명목하의 폭력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담도 병원에 있는 동안에 원격으로 지시하여 엔트의 용병들을 관리하고 결국 메트로서울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다. 가끔 병문안을 오는 그들은 그가 어디가 아픈 줄로만 알았다. 소드마스터는 늙어 쇠약해지지 않는 이상 병 같은 것에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것도 잘 몰랐다.
그리고 6월 중순이었다. 그간 연예계에 스캔들이 여러 개 빵빵 터지면서 지중해 게이트나 사우디 아라비아와 관련된 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급격히 시들었다. 머나먼 이역만리의 땅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죽음에 대하여 자신의 일처럼 분개하던 자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 평가하며 아는 척을 하던 인간들도 모두 자신이 위선자인지도 모르는 위선자인 것이다.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고 싶다고 바랐던 아담은 벽을 한 장 두고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결국엔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느낌이었다. 알렉스는 구단을 오가기라도 했지 아담은 봐주는 것 없이 감금 생활이었다. 병원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평상시 잘 보지도 않던 뉴스 기사를 찾아보고 있는데 한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연초부터 건강이상설이 돌던 세현 퀸 교수, 결국 드레이닝에 걸린 것으로 밝혀져>
아담은 깜짝 놀라 기사를 눌렀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인질극 이후 쭉 메트로서울 시립병원 VVIP 병동에 입원 중으로 밝혀진 세현 퀸 교수의 건강 상태에 대해 많은 이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던 와중에 결국 그가 드레이닝에 걸린 것으로 밝혀져 많은 이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세현 퀸 교수는 메트로서울 태생의 마도물리학자로 유명하다. 2121년 수상한….>
아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그리고 바로 옆 병실에 노크를 했다.
“교수님.”
“들어와.”
세현은 병원 침대 위 식판을 세워 멀티스크린을 띄우고 타자를 치고 있었고 그 옆에 알렉스가 세현의 허벅지에 팔을 얹고 쿨쿨 자고 있었다. 훈련도 고된 데다가 병원에 오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쫙쫙 뽑히는 알렉스는 먹고 자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이거 보셨습니까? 기사.”
“아니.”
세현은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아담은 당혹스러운 기분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앉았다.
“당신이 드레이닝에 걸렸다고 기사가 났습니다. 괜찮은 겁니까?”
“응.”
세현은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지 그렇게 대충 대답하고 자신의 디바이스를 잡더니 문자 화면을 띄워 그에게 주었다. 아담은 얼떨떨하게 그걸 잡고 문자를 보았다.
<니 드레이닝 기사 낸다>
캘리 박에게서 온 문자였다. 이틀 전에 온 것이다. 세계물리학회에서 먼저 정보를 흘렸단 말인가? 왜? 아담은 걱정이 되어 그녀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세계 최고의 천재이자 인류를 가장 진일보시키는 인물 중 하나인 그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기사가 뜨자 그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었다. 몇몇 단체는 그녀의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하고 어떤 단체는 기부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의학 및 관련 학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그녀의 스러짐을 안타까워했다. 전세계가 손에 들고 다니는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세상이라도 아주 급진적인 흐름이었다.
VVIP 병동으로 각종 위문품과 꽃이 가득 찼다. 그녀의 병세에 대한 정보는 점차적으로 더 흘러나왔다. 아담은 그녀의 시간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녀에게서 이 정보를 흘리는 것이 세계물리학회라는 것을 언질 받았기 때문일까? 6개월이란 시간에 충격을 받는 것과 동시에 미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실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담과 알렉스뿐이었다. 이런 정보를 흘릴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연고가 있는 알렉스와 아담 말고 다른 소드마스터에게는 그런 계약서를 내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진짜 이상하네….’
쓸데없는 짓을 할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뭐 때문이지? 어쨌든 생전 그녀를 직접 보지도 못했을 사람들이 보낸 다양한 언어로 적힌 팬레터와 선물을 보며 아담은 기가 약간 질렸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시금 실감이 들기도 했다.
“밥은 먹었냐?”
“아니, 배고파.”
그리고 알렉스와는 묘하게 친해졌다. 동병상련이랄까. 아담이 세현과 섹스를 해야 할 때는 언제 친했냐는 듯 아직도 노려보긴 했다. 하지만 세현은 필요할 때 외에는 거의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고 자연히 둘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훈련을 마치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온 알렉스는 하품을 했다. 그는 의료진에게 그녀의 마력 보충을 혼자서 담당하겠다고 한 상태라 아담이나 알렉스와 섹스를 하고도 부족한 분은 고스란히 그가 빼서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에즈에서는 못하겠다고 백기를 들기도 했다는데 확실히 어린 게 좋은 것인지 그는 식욕과 수면욕이 조금 강해진 것 외에는 쌩쌩했다.
“밖에도 좀 나가고 해. 세현 교수님도 대장도 병원에만 있다간 없는 병도 걸리겠다.”
알렉스가 VVIP 병동의 휴게실에서 식판을 세 개나 받아먹기 시작하며 그렇게 말했다. 아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니가 민 교수님한테 그렇게 좀 말해줄래?”
“으…, 싫어. 난 세상에 무서운 교수님은 세현 교수님밖에 없는 줄 알았어.”
“퀸 교수님은 무서워도 좋은데…. 민 교수님은 진짜….”
두 남자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확 졌다. 그간 그녀에게 당했던 수많은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제를 돌렸다. 아담은 알렉스가 엄청 먹는 것을 보고 그도 먹는 양을 늘렸다. 먹기라도 해야지 버티지. 그리고 둘이서 시시덕거리며 VVIP 병동에 있는 체력단련실로 가는데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그는 VVIP 병실 중 하나의 유리문 앞에서 머리와 옷 매무새를 몇 번이고 만지고 있었고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까지 들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를 멋지게 손질하고, 헤이즐색 눈동자에 얼굴도 썩 잘생긴, 키도 크고 몸도 좋은 남자였다. 게다가 딱 봐도 소드마스터다.
“…….”
“…….”
아담과 알렉스는 그 자리에 딱 멈춰 서서, 본능적으로 경계의 빛을 띄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화려한 빨강 머리의 남자는 자신을 보고 있는 둘을 발견하고 멋쩍게 옷 매무새를 잡던 걸 멈췄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세현 퀸이라는 여자, 어느 병실에 있죠?”
*
변명을 하자면, 마음을 접겠다고 결심한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게 홀딱 빠져 있던 기간도 길었으니 쉽게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겁쟁이 같았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왜인지 뒤통수가 따갑다. 너무 긴장한 걸까. 제수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리고 멈추었다.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했다.
"누구야."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방안에 있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거리감이 오히려 그녀가 이 얇은 문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감을 느끼게 해줬다. 스크린이나 홀로그램 같은 게 아니라.
"저기…. 그러니까…, 난데…."
그가 대답을 병신같이 머뭇거렸다.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팍 나더니 그녀가 척척 문으로 걸어왔다. 그녀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이 거리에서도 그녀의 심장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다.
“뭐 좀 하려고 하면….”
그녀가 짜증스럽게 문을 팍 열었다. 그러자 마음을 준비할 새도 없이 자동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러자 이미 그녀와 그의 사이가 무지 가까웠단 걸 알 수 있었다. 대비를 못한 제수스는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눈에 힘이 들어가 그녀의 얼굴에 있는 솜털까지 다 보인다. 그녀는 제수스를 발견하자 약간 인상을 썼다. 제수스는 살짝 울컥했다.
“세현아!”
그는 그대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꽃잎이 몇 개 바닥에 떨어졌다. 세현은 그의 등을 잡아당겼다.
“숨 막혀…!”
“미안….”
그는 살짝 몸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까지 딱 그대로였다. 세현은 기대하지 않은 손님에 몇 초 아무런 말없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제수스는 울렁거리는 눈동자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물었다.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깜짝 놀랐잖아. 왜 말 안 했어? 어떡해야 해? 내가 도와줄 건 없어?”
“하나만 해라, 하나만.”
세현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다 그의 태평양같이 큰 덩치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알렉스와 아담이 멀찍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아담이 알렉스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달려들려는 그를 아담이 막고 있었다. 입도 틀어 막혔다. 잘하고 있군. 세현은 제수스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약간의 향수 냄새까지 그대로다. 살이 좀 빠졌나.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세현은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바닥에 제대로 섰다. 병실로 다시 들어오자 그가 그녀를 따라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기사 봤어.”
드디어 세현이 누군지 안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빨리도 알아냈다.”
그렇게 그를 타박하는데 그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서는 또 세현을 꼭 끌어안았다. 꽃은 그냥 그녀의 침대에 떨어뜨렸다.
“…….”
“왜 이래?”
“아프긴 도대체 왜 아파…. 그렇게 가버렸으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누가 보면 신파의 남자 주인공이다. 세현은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만해.”
세현은 침대에 어지럽혀져 있는 책과 종이를 대충 치웠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제수스는 그녀를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뉴스 보고 알았어…. 유니버스도 다 봤어.”
“그걸 다 봤어? 길 텐데.”
알아 듣긴 했냐…. 세현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수스는 좀 억울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좀 말해주지….”
“말하면 니가 아냐. 왜 왔어?”
“…오면 안 돼?”
제수스는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매일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남자였다. 살아생전 만났던 남자 중에 제일 오래 만나고 섹스도 제일 많이 한 남자다. 세현은 한숨을 크게 한 번 쉬었다.
“그렇게 된 거니까. 나 할 일 많다. 너 여자도 많잖아. 그만해.”
“이게 그런 문제야? 넌 어떻게 사람이 맨날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해? 그래도…! 그래도 난…, 난…!”
그녀의 말에 울컥한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선뜻 말하지 못했다. 세현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사랑한다고?”
“그래…!”
그렇게 반사적으로 대답하고는 그는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잠깐 투덜거렸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걸 모르는 게 바보지.”
“…….”
제수스는 인상을 쓰며 잠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가 돌아왔을 즈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거짓말이지?”
“뭐가.”
“정말…, 반 년밖에 안 남았어? 거짓말이지? 응? 거짓말이라고 해줘.”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무심한 눈동자가 그의 헤이즐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수스.”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그는 그녀와 마주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와 그는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알고 서로가 누구인지도 알고서 마주하는 것이었다.
“기사는 사실이야. 그래서 내가 이럴 시간이 없어. 할 말 끝이면 이제 가.”
“…….”
가슴이 아팠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울렁거리고 누가 심장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귀찮아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꼬시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나중엔 그녀가 그렇게 해도 절대 꼬셔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여자라는 걸 알고 포기했다. 그런데도 미련이 철철 넘쳐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그럼…, 나한테 왜 그랬어? 그때 나 왜 꼬셨어? 나 만나러 왜 왔어? 이럴 거면서….”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제수스는 그렇게 원망을 털어놓고 말았다. 세현은 이 상황이 매우 귀찮았다.
“그냥 너도 하고 즐겼으면 됐잖아. 왜 이래? 성가시게.”
그녀가 하는 말이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박힌다. 왜일까? 별말이 아닌 것 같은데도 그랬다. 심지어 자신도 언젠가 해본 것 같은 대사였다. 그는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전혀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오늘 내가 안 왔으면 앞으로도 쭉 안 만날 생각이었어?”
“그랬겠지.”
“이거 혹시…, 지금 아프다고 미안해서 나 밀어내는 건 아니지?”
제수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가 이렇게 질척질척한 놈이었던가. 세현이 인상을 팍 썼다.
“드라마 찍냐?”
“…알았어.”
작별을 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기하기로 했잖아. 포기해야 된다. 싫다잖아. 안녕이라고 하자.’
“그럼….”
제수스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한 걸음 뒷걸음질을 치고 그녀를 등졌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는 그녀의 병실을 나왔다. 제수스는 욕지거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병신 같았다.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도 그렇다고 그녀에게 제대로 사랑도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꼴사나운 실연의 고통을 겨우 삼키고 있는데 양 어깨에 손이 하나씩 턱턱 올라왔다. 제수스는 그들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누가 지금 그에게 시비의 물고를 트는지는 모르겠지만 간덩이가 몹시 부은 게 분명했다.
“뭐야….”
그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아까는 경계 어린 눈동자로 제수스를 노려보던 검은 머리와 금발 머리의 남자 둘이었다.
“저 여자가 저런다니까!”
“원래 저러시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렇게 생판 모르는 남자 둘이 갑자기 제수스를 위로하고 들었다.
*
회진을 나선 엘리야 민 교수는 실험쥐, 아니, 환자들을 살피러 VVIP 병동을 돌고 있었다. 본인은 원래 동경 T대의 교수라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할 때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강의는 대충했다. 본디 공부라는 건 혼자 하는 것이고 똑똑한 놈들은 다 알아서 한다. 그리고 나머지 날에는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의 교수실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워낙 유명하고 대단한 교수다 보니 HNU의 대학병원인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에서도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누구의 줄을 타고 온 것을 알면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동문이기도 하니 재직하고 있는 교수 중에 아는 사람도 많아 화기애애하게 잘 지냈다.
그녀의 팀은 오로지 세현 퀸 교수의 마력 드레이닝 치료를 위해 밤낮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주로 엘리야 민 교수의 연구 분야인 유전체 변형으로 인한 DNA 불안정성을 마법으로 안정시키고 면역 반응까지 제거하는 이상적인 장기 이식(종양 제거 및 안정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주로 마도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DNA 복구 혹은 변형, 세포 분열 촉진, 혹은 저해 마법은 적절한 텔로미어 관리의 실패로 장기의 수명을 줄이기도 한다. 하지만 엘리야 민 교수의 연구실은 환자의 각 장기 모세포의 염색체 23쌍의 텔로미어를 적절하게 설계하여 미리 저장해두고 응급시 마도의사의 시술을 통해 빠르게 손상 장기를 교체하여 마도의학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도의학의 대중화도 노려볼 수 있는 획기적인 의술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계 최고의 마도의사인 엘리야 민 교수가 현재 환자의 동의와 여러 사법 및 윤리 기관의 눈감음으로 마도의사 및 연구자로서의 최대의 효용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
세현 퀸의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민 교수는 그녀가 아직도 골아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툭툭 건드려 깨웠다. 밑에 있는 레지던트가 그녀의 팔에 있는 의료 팔찌를 활성화시켰다. 민 교수는 세현의 스트레스 관리를 위하여 병실에서도 논문을 쓸 수 있게 해준 상태였다. 건장한 남자 간호사가 식판을 들고 왔고 다른 남자 간호사가 간이 식탁 위를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세현은 일어나서 수술 부위와 점막 상태 등을 확인했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마도 수술을 받은 사람은 관리가 안 된 상처 부위나 점막 등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현생에 불사의 마법과 회춘 마법을 두 번씩이나 받은 그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모를 일이었다.
“컨디션은?”
“좋을 것 같냐.”
눈도 제대로 못 뜬 세현이 투덜거리며 억지로 식사를 위에 구겨 넣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잤겠지만 수술을 위하여 갑자기 금식을 할 때도 있어 그 외에는 억지로라도 먹일 기세라 그냥 잠자코 먹고 있었다.
그녀는 식사와 검사가 끝나자 다시 침대에 누웠다. 민 교수는 뒤를 따르는 제자와 다른 교수들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다. 멀티스크린 위에 뜬 모형을 조작하며 다음 수술을 설계하고 있던 엘리야 민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뭐 하냐? 팔찌 켜라.”
“아….”
그들이 어서 가서 의료 팔찌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곧바로 민 교수의 멀티스크린으로 정보가 들어왔다. 한 번에 두 사람 분의 정보가 떴다. 그제야 고개를 든 민 교수가 인상을 팍 썼다.
“뭐야? 이것들 술 마셨어? 술이 어디서 나서?”
바닥에 온갖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곧 있을 교수님의 호통에 긴장한 레지던트들이 그들을 얼른 깨웠다. 침대와 카우치에 늘어져 자던 남자들이 꿈틀거렸다. 흑발, 금발, 적발. 종류별로 있었다.
“이거 뭐야? 관리 안 해? 장난하냐?”
그녀는 옆에 서 있는 가장 고참 레지던트의 등짝을 의료 멀티스크린으로 퍽 쳤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녀는 쭈글 하고 몸을 낮추며 용서를 빌었다.
“마이어 씨는 사인을 안 하셔서 감시카메라 설치를 못해서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리고 저건 뭐야?”
“병문안…, 온 거 아닐까요?”
민 교수는 안면이 없는 빨강 머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카우치에 앉았다. 숙취가 심한지 그는 바로 술을 다시 마시려고 했다. 민 교수가 말했다.
“잠깐만. 마시지 마라.”
그러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얼굴이 좀 부은 빨강 머리가 민 교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민 교수는 척척 다가오더니 제수스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야, 얘도 소드마스터 맞지?”
“맞는 거 같은데요, 교수님.”
술을 이렇게 먹었는데도 살아있는 거 보면…. 민 교수가 그를 보고 있자 그가 누군지 알아본 레지던트 하나가 속닥거렸다.
“웨스트이글 주전인데요?”
“그래?”
그럼 꽤 쓸 만한 소드마스터라는 거 아닌가?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니가 퀸 교수 서울에 있을 동안 계속 상대했던 그 놈이지?”
그는 아직 술이 안 깨서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고 랩코트를 입은 군단을 휙휙 돌아보았다. 멍청해 보이는 게 더 멍청해 보인다. 민 교수는 손짓을 했다.
“잠깐만 일어나시죠. 검사 좀 할 수 있으실까요?”
간호사와 인턴들이 그를 부축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제수스가 그들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아담이 아차, 하고 말리려고 했다.
“잠깐만요. 그래도 쟤는….”
“혹시 모르니까 쟤한테도 서류 줘봐라.”
“아니, 그건…!”
아담이 기겁을 했다. 어젯밤에 얘기를 나눠보니 저건 알렉스보다 한 수 더 뜨는 놈이었다. 무지와 야만이라는 쪽에서 말이다. 어렸을 적에 팔려간 소드마스터가 으레 그렇듯이. 민 교수는 자신의 차트를 새로 생성하며 그들을 칭찬했다.
“잘했어. 안 그래도 요새 니들 점점 잘 안 돼서 한 놈 더 찾아보고 있었다.”
“…….”
원래 이쪽 인간들이 사람 알기를 돌보다도 못하게 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정말 모래보다도 못하게 보는 건 아닌가 싶다. ‘혹시 모르니까’가 뭔가. 그런 서류에 사인을 할 만큼 멍청할지도 모른다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뭔데….”
알렉스는 그제야 잠에서 깼다. 민 교수는 자신의 차트를 확인하며 동시에 그의 눈을 까뒤집어 보았다.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술 마시지 마라. 니가 죽고 못 사는 우리 퀸 교수한테 악영향 있으면, 어? 니가 책임질 거냐? 니가 관리 못해서 혹여나 잘못 생기면, 어? 어쩔 거냐고. 우리 총장님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잘 없으신데 너 때문에 나 총장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니가 책임질 거냐? 질 수나 있냐? 어?”
“아, 아뇨….”
알렉스는 약간 쫄아서 그렇게 답했다. 민 교수의 어조는 느릿하게 별달리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다소 다혈질인 세현이야 차라리 인간적인 편이다. 그녀가 간혹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면 자연히 쫄기는 했지만 민 교수보다야 나았다. 그들을 대하는데 그 어떠한 감정적(경멸이든 뭐든) 표현도 없는 민 교수의 눈빛은 그들이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컵이나 다름없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알렉스가 죽고 살고는 그런 그녀의 손끝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안 무서우면 그게 사람인가.
“논문을 찾아보니까 소드마스터는 생각보다 연구가 덜 되어 있던데. 왜 그렇지? 연구할 법도 한데. 일반인한테도 이 정도 회복력이나 힘이 있으면 좋잖아?”
나한테 한 말인가? 알렉스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데 그녀의 옆에 있는 최고참 레지던트가 대답했다.
“이상하게 소드마스터 사이에서는 의료 연구 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심리가 만연하게 퍼져 있더라구요. 일반인보다도 사인하는 경우가 훨씬 적습니다.”
“아, 그래?”
“신체적으로 강인하니까 더 싫은 걸까요? 요즘 의료 연구는 거의 마도의학 중심이니 마도의학이랑 궁합이 잘 안 맞는 소드마스터 연구가 좀 도외시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 이상하네. 사실 보통 사람들이 소드마스터 정도만 돼도 웬만한 병은 다 문제가 안 되는데. 얘들은 암도 잘 안 걸리잖아? 왜 안 하지? 프로젝트 하나 하자. 자료 좀 찾아봐.”
“…네, 교수님.”
그러자 민 교수의 옆에 서 있던 최고참 레지던트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저 ‘자료 좀 찾아봐’는 현존하는 소드마스터에 대한 공식, 비공식 자료를 다 찾아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의료진은 알렉스와 아담에게 그날의 할당량을 알려주고 플라스틱 컵을 여러 개 준 뒤 우르르 나갔다.
“…….”
“그 빨강 머리 어디 갔어?”
알렉스가 그제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담은 한숨을 쉬었다. 소드마스터의 강함, 튼튼함, 그리고 멍청함과 나이브함이 익숙하다면 익숙했지만 또한 씁쓸하기도 했다.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혐오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잠시 뒤 민 교수의 실험실에서 환자복을 입은 그 빨강 머리를 보게 되었을 때, 아담은 한숨이 나오지도 않았다.
“진짜 그냥 섹스하려고 나랑 한 게 아니었네. 그런 게 마도사한테 좋은 거였어?”
제수스는 다소 어리둥절해 보이지만 별생각 없는 얼굴로 말했다. 세 남자는 다 같이 스캔기에 들어가서 오늘의 상태를 보고 함께 세현의 병실로 향했다. 그러다 누구와 마주쳤다.
“어, 민 교수.”
“엇, 총장님.”
민 교수는 깍듯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캘리 박은 손짓을 하며 그녀의 허리를 들게 했다.
“어때? 좀 차도가 있냐?”
그녀가 민 교수에게 물었다. 그녀는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을 수도 없는 의료용 차트를 넘기며 대답했다.
“직접 하는 것과 주사기로 넣는 거 차이는 오라 때문이었습니다. 직접 할 때는 주사기와 다르게 오라도 몸에 들어갑니다. 근데 오라나 마력은 사람이 아닌 그릇에 담을 수가 없어서 일단은 마력측정기처럼 오라측정기도 만들어서 얘들 몸에 내장하고 점진적으로 실험해보려고 합니다.”
“오, 그래? 역시 민 교수야. 뭐가 나오네.”
“과찬이십니다, 총장님.”
엘리야 민 교수는 다른 사람이 물어볼 때는 엄청 심드렁하더니 캘리 박에게는 대답이 아주 재깍이었다. 그걸 듣고 아담과 알렉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보았다.
‘오라 때문이었다고?’
할 때 그녀의 몸속에 오라도 넣으면 되는 걸까? 잠깐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제수스는 바짝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다른 사람들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왜 다시 왔냐고 하면 어떡하지?”
어제 그렇게 의기투합한 세 남자는 세현에 대해서 제각각으로 불만인 점을 마구 토로했지만 결국 셋 다 그 모든 불만과 홀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제수스는 그녀가 또 자신을 매몰차게 거절할까 봐 몹시 불안해졌다.
세현의 병실에 도착하여 민 교수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퀸 교….”
그리고 다들 문가에 우뚝 멈춰 섰다.
“최이삭, 그냥 내 랩 나가라. 너 도대체 졸업을 왜 하려고 하냐? 이래 가지고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병실 한 가운데 세현 퀸 교수와 최이삭 박사가 있었다. 세현은 서 있었고 최이삭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귀를 꽉 붙잡고 있던 세현은 폭력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니가 공부를 하면서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있냐, 아니면 연구를 똑바로 하냐. 너 치매냐? 어? 너 이런 거 자꾸 깜박깜박 한다고 하는데 내가 니 그 변명을 도대체 언제까지 받아줘야 하냐? 이제 나도 포기할란다. 그냥 나가라. 당장 나가.”
“교, 교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교수님, 제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더 잘하겠습니다, 교수님. 한 번만 더 용서해주세요. 흑….”
“야, 안 그쳐? 또 울어? 이게 또 질질 짜! 야! 당장 뚝 안 그치냐? 이걸 확!”
차분하게 말하던 세현은 그가 또 눈물을 보이자 또 뚜껑이 열려 고함을 질렀다. 이미 그의 뺨은 벌겠다. 맞은 것이다. 그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세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내가 너한테 시간을 얼마나 많이 줬냐? 나 때는 이런 거 상상도 못했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게 자꾸 내 시간을 갉아먹어!! 나 화병 나서 드레이닝 더 심해지면 니가 책임질 거냐? 어? 너 이런 거 자꾸 내가 하나하나 가르치게 할래?? 니가 걸음마하는 애냐? 옹알이하는 갓난애냐?? 니 엄마아빠는 니가 이렇게 대가리 안 돌아가는 건 알고 너 낳았냐?! 넌 도대체 무슨 염치로 내 졸업장을 받겠다고 이딴 걸 내 앞에 자꾸 들이밀어!? 어!!!”
“교수님…, 흑….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정말 많이 부족한 것 압니다. 제가 교수님 밑에 있는 것도 다시는 오지 못할 행운이라는 것도 압니다. 흑, 교수님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 차리고 다시, 다시 진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제, 제가…. 흑, 저도 잘하고 싶은데 자꾸, 자꾸, 그럴수록 제가 이상하게 계속….”
“아악!! 이 멍청한 게 또 옹알이를 하고 지랄이야!!!!”
세현이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자 그제야 민 교수가 ‘크흠!’ 하고 크게 헛기침을 했다.
“퀸 교수, 그만해라.”
그러자 그들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흉흉한 눈으로 민 교수를 쏘아보았다.
“닥치고 꺼져!”
그리고 그녀는 다시 최이삭의 귀를 마구 잡아당기며 협박, 비아냥, 분노를 마저 쏟아냈다. 캘리 박이 민 교수에게 말했다.
“이럴 때는 끼어드는 거 아냐. 퀸 교수 엄청 열 받았네. 최 박사 또 한 건 했나 보다.”
그러자 민 교수는 ‘쩝…’ 하며 그걸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줄줄이 따라온 밑에 있는 인턴, 레지던트들이 보였다.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야, 니들 저거 보이냐? 니들은 편하게 사는 거야, 어? 내가 니들한테 손을 올렸냐, 무릎을 꿇렸냐. 난 니들 참 인간답게 잘 대해주는 거다, 어?”
“넵….”
“나 때는 우리도 저랬지. 역시 내가 양반이다. 감사합니다, 안 하냐?”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들 그렇게 합창했다. 최이삭은 두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고 잘못했다고 손이 닳도록 빌고 자아비판을 미친듯이 하고서야 세현의 꾸짖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많은 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구석으로 가서 머리를 박고 눈물을 마저 흘렸고 세현은 반은 후련하고 반은 짜증이 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또 뭐.”
그는 짜증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어, 아니. 앞으로 스케줄이랑 실험내용이 좀 변해서.”
“그래, 역시 민 교수야. 진척이 있다니까.”
그러면서 세현과 캘리 박, 민 교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렉스와 아담은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울고 있는 최이삭을 의식하며 세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한 남자의 모든 것을 말 몇 마디로 끝장낼 수 있는 잔인하고 무섭고 가차없는 사람이다. 제수스도 당황한 얼굴로 세현과 최이삭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까지 그녀가 자신을 또 거절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 왜 왔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소 냉정한 것 같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민 교수의 설명과 캘리 박의 맞장구를 들은 세현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는 짜증을 냈다.
“그냥 주사기가 편한데 자꾸…, 하아.”
“오라측정기 다는 대로 수치 측정해서 점진적으로 늘려보려고 한다. 일단 드레이닝 더 가속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만 해도 지금으로선 진짜 큰 진척이지. 너도 이렇게까지 촉박하게 안 해도 될 거 아냐. 마음을 좀 편하고, 긍정적으로, 어? 그렇게 먹어야지 될 것도 되지.”
“노친네 요새 사이비 믿어요? 뭔 개소리야.”
그녀는 짜증을 냈다. 민 교수는 스케줄표를 그녀의 디바이스에 보냈다.
“일초라도 더 살아. 더 버텨야 방법이 생긴다.”
“야, 나 이때 학회….”
“어, 그러네. 이때 우리 아칸소 가기 전에 다 한 번 모이는 날이다.”
“빠지면 안되요?”
민 교수가 캘리 박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깐 그걸 보더니 세현을 보았다.
“날짜를 바꿀까?”
“이걸 어떻게 당장 날짜를 바꿔요. 하고 가든가, 갔다 와서 하든가.”
“그럼 이건 날짜 조정해볼게.”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나서 세현은 드디어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커다란 남자 셋을 발견했다. 제수스를 발견한 세현은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뭐야.”
“어, 아니. 굴러다니길래 내가 주웠다.”
민 교수는 그렇게 대꾸했다. 제수스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주고 싶어…. 싫어? 여자가 아플 땐 남자가 뭐든 하는 거잖아. 맞지…?”
그녀는 상당히 성가신 얼굴로 잠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난 책임 못 져.”
“책임은 내가 져.”
제수스는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 슬쩍 잡았다. 민 교수가 말했다.
“어쨌든 얘들은 괜찮지? 둘로는 좀 모자라. 모르는 놈보다야 너도 낫겠지.”
세현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제수스는 그녀가 어디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 어디로 사라져버렸던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자꾸 그녀를 바라보며 가까이서 그녀를 만지고 있자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질투 나…. 죽여버리고 싶어….”
그녀가 메트로서울에 있는 동안 만났던 놈이 저놈이라는 건 어젯밤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녀와 둘이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을 들은 아담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그러지 마. 사이 좋게 지내야지.”
그리고 곧 민 교수의 밑에 있던 레지던트가 메시지를 하나 받더니 민 교수에게 보고했다.
“오라측정기 왔답니다.”
“그래? 가자. 연구실 갈 거지?”
“어.”
그리고 민 교수는 캘리 박과 최이삭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캘리 박이 세현의 병실에 쉴드를 치기 직전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 기사 나올 거다.”
“아, 젠장. 올해 진짜 마가 꼈나.”
“너도 사이비 믿냐? 어쨌든 미리….”
아담은 닫히는 문 사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
“…….”
“아, 피곤~하다.”
뿌리 쪽이 약간 어두운 금발 머리, 올리브색 눈동자, 배우처럼 근사한 얼굴, 크고 훤칠한 키에 육감적인 몸매의 남자와, 깔끔하게 자른 검은 머리, 검청색 눈동자, 약간 앳된 티가 나면서도 역시나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과 화려한 빨강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호박색에 가까운 헤이즐 눈동자에 섹시한 목덜미, 쭉쭉빵빵한 몸매를 가진 남자가 나란히 사우나 안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손목 안쪽이 파랗게 깜빡였다.
메트로서울 시립병원 VVIP 병동에 있는 작은 히노키 사우나다.
아담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가만히 눈 위에 차가운 수건을 올린 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알렉스는 허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짜증을 삭히고 있었다. 제수스는 평소랑 다를 것 없이 별생각 없는 얼굴을 하고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어 자기 머리에 씌웠다.
어제 손목에 오라측정기를 심은 그들은 그대로 탈탈 털릴 때까지 오라를 방출하고 정액도 짜내야 했다. 확실히 마도사의 마력과는 원리가 많이 다른 모양인지 똑같은 걸 몇 번이나 반복하며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테스트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가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한 인간들이라지만 아담은 실험쥐 취급에 진력을 내고 있었고 알렉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나마 민 교수를 만난 지 얼마되지 않은 제수스만이 멀쩡했다.
제수스는 잠깐 다른 놈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결국 세현이랑….’
알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뭔가 처지가 비슷해서 이렇게 같이 행동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그는 잠깐 두 남자를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뭔가, 이상하게도 세현이 제수스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딴 놈들도 똑같이 거절한다는 것은 어쩐지 안도가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비리비리한 안경잡이를 대할 때만큼 매몰차게 대하거나 잔인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그래도 그만큼 그녀가 그를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일까.
그녀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음 놓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맛있는 걸 먹고, 함께 좋은 걸 보고, 함께 있어서 좋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녀는 뭘 좋아할까? 그녀도 제수스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셋 다 한계까지 오라를 짜내 걸신 들린 것처럼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사우나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들은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몸을 덥히는 고양이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사우나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거무죽죽한 얼굴색을 하고 있는 그는 안경에 김이 서리자 안경을 벗어 가져온 수건에 대충 닦았다. 제수스는 붙임성 좋게 물었다.
“넌 왜?”
“학과장님이 조금 쉬고 오라고 해서요. 밥도 먹고 좀 씻으라고….”
그는 제수스의 옆에 좀 떨어져 앉았다. 그는 잠깐 크게 한숨을 쉬었다. 머리에 차가운 수건을 감싸고 약간 허리를 숙인 상태로 땅을 보고 있더니 어느샌가 뭔가를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보, 멍청이, 병신, 그것도 못해서 뭘 하려고. 그러니까 교수님이 싫어하시지. 맞아도 싸다, 병신새끼….”
제수스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고 잠깐 고개를 들어 누가 왔는지 확인한 아담이 제수스에게 눈짓했다. 그냥 두라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세현이는 이렇게 해서 낫는 거야? 차도가 있는 거야? 진짜 6개월밖에 안 남은 건 아니지?”
제수스는 한동안 그냥 가만히 있다가 문득 최이삭에게 물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자세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여기 있는 모두를 알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요령껏, 눈치껏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최이삭은 안경을 다시 닦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여러분이 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명상 안 하셔도 마력 모으기도 쉽고 드레이닝도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빠르게 악화되는데 진행 속도도 느리구요. 감사합니다.”
세현도 안 하는 감사인사를 그가 했다.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지금 교수님께서 마음이 많이 급해 너무 과로를 하셔서 문제입니다. 주변에서 자꾸 말려도 말씀도 안 들으시고…. 이러다 또 쓰러지실까 봐 걱정입니다. 좀 쉬셔야 하는데….”
다른 사람과 다르게 최이삭은 툭 건드리는 대로 줄줄 말했다. 아무래도 세현을 도와주는 이들이 남같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담도 자세를 바로 했다.
“그것도 그거고, 제발 민 교수님이 퀸 교수님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은 안 하셔도 스트레스 많이 받으실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만은 제발….”
아담이 말하자 잠깐 최이삭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과장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가만히 그걸 보고 있던 알렉스는 버럭 짜증을 냈다.
“니 일이나 똑바로 해. 세현 교수님한테 제일 스트레스 주는 건 너라고.”
알렉스는 정확하게 최이삭의 급소를 찔렀다. 그러자 최이삭은 움찔했다가 대꾸했다.
“맞아….”
그리고 그는 얼굴이 흙색이 되어 다시 자아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난 버러지야…. 천하의 쓰레기, 쓸모없는 새끼. 젠장…. 죽어야 돼.”
그러자 아담이 알렉스를 돌아보며 ‘꼭 그렇게 해야 했냐’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알렉스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잠깐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아, 진짜! 야, 아무리 그래도 좀 씻고 살아라.”
“아오, 이게 이제는 내가 씻고 안 씻고까지 지랄이네. 너, 시발, 목숨이 열 개는 되냐?”
“나? 한 백 개쯤 되지 않을까? 내가 바로 세계 최고의 마도의사다.”
“넌 언젠가 내가 죽인다.”
“씻기나 해라. 좀 쉬어라. 오늘은 논문도 그만 쓰고.”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응?! 세 남자는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 속에서도 그 소리를 다 듣고 허리를 일으켜 앉아 문을 바라보았다. 최이삭만이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자아비판 중이다. 물소리가 몇 번 들리고 씻는 소리가 나더니 사우나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응?”
커다란 바스타월로 성기게 몸을 감싼 그녀는 기다란 머리카락에 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우나 안에 남자가 넷이나 있었다. 그녀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여기 남탕이었어?”
아담, 알렉스, 제수스는 자연히 자세를 꼿꼿이 세우며 온몸의 근육에 빡 힘을 주었다. 조각상처럼 근사하고 글래머러스한 그들의 멋진 근육이 증기 속에서 빛났다. 눈이 호강하는, 심미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세현은 한 번 슥 둘러보는 것으로 감상이 끝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최이삭이 그녀를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교, 교, 교, 교수님…!!”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하반신을 감싸고 있던 수건이 훌렁 떨어졌다. 다들 그를 보았다. 그는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 앉아 수건을 찾아 다시 하반신을 감쌌다. 그의 얼굴은 사우나 안이라고 쳐도 엄청나게 빨개져 있었다. 어깨까지 벌겠다. 그의 꼴사나운 모습을 본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 지금 팔자 좋게 여기서 뭐 하냐?”
“아, 아, 아니…, 아, 아니요, 교수님. 저, 저, 저는, 저는, 저는…! 하, 하, 학과장님이…!!”
“이 새끼가 또 병신같이 말을 더듬어!”
최이삭은 근래 세현 퀸의 집요하고, 끈질기고, 멘탈이 너덜너덜해지는 갈굼에 매일같이 시달리고 있었다. 지도 교수가 랩장을 갈구는 빈도와 강도는 그 교수가 받는 스트레스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겠다. 그녀가 드레이닝에 걸린 이래로 오늘날까지 나날이 열 받는 일뿐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혼자 오롯이 감내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애초에 이럴 때 갈구라고 뽑는 게 이런 놈 아니던가.
그녀는 진정한 평등주의자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끓는점이 낮았지만 최이삭은 항시 그녀의 역린을 건드리는 존재였다. 현재로선 그가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가 똑바로 처신 못하는 것을 보면 그냥 뚜껑이 열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저 빌빌거리는 자신감 없고 강단 없는 꼬라지를 보면 속이 다 답답했다. 저런 게 자신의 이름을 이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어찌 화가 안 나겠는가. 안 그래도 이런 시국에 저 멍청한 얼굴이며 표정이며, 숨 쉬는 것 하나도 마음에 안 들고 한심하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오며 벼락같이 소리치자 최이삭은 털썩 무릎부터 꿇었다.
“아, 아, 아니, 이건, 제, 제가 너, 너, 너무 다, 당황….”
“이 새끼가 진짜 덜 떨어진 거 티 내도 유분수지! 니가 이러면 내 얼굴에 먹칠밖에 더 되냐!! 병신같이 고개 처박지 말고 얼굴 똑바로 들어!! 눈은 왜 감아! 반항하냐!! 이런 시국일수록 말을 더 잘 듣고 똑바로 처신해야지 여기서 처놀고 자빠졌냐?!”
“교, 교, 교수님…!”
그녀가 턱을 꽉 움켜잡고 고개를 홱 들게 하자 최이삭이 당황해서 더 말을 더듬었다. 그는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 이런 교수님은 6년 동안 처음이었다. 이, 이렇게, 이렇게 허, 헐벗고…! 그냥 대놓고 트집을 잡고 화풀이를 하는데도 최이삭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의 머리채라도 잡으려는데 갑자기 슬쩍 누군가 끼어들었다.
“세현아~ 왜 예쁜 얼굴로 자꾸 화를 내? 응? 웃어야지.”
제수스는 여기서 이렇게라도 의사들 없이 세현과 보는 게 좋아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그의 말이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멍청한 그의 얼굴을 말없이 돌아보았다. 그걸 본 알렉스는 발끈해서 벌떡 일어났다.
“교수님!”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 추궁했다.
“나 책임지기로 해놓고 이 새끼는 뭔데 자꾸 교수님한테 친한 척인데? 어? 나야, 이 새끼야? 말해요!”
아담은 멍청한 다른 놈 둘을 산뜻하게 무시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너무 놀라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최이삭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최이삭은 코를 한 번 훌쩍 하고는 안경을 다시 끼며 바로 섰다. 그리고 그 새를 못 견디고 큰소리가 나왔다.
“나와!! 안 떨어져?! 이 새끼들이 어디라고 끼어들어!”
그녀가 화를 내자 제수스는 얼른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알렉스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제수스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세현은 알렉스의 손도 떨쳐낸 후 눈에서 빔이 나올 기세로 최이삭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대로 사우나를 나가려고 하자 알렉스와 제수스가 곧바로 바디블록에 가깝게 문을 사삭 막았다.
“가지 마요, 교수님.”
“어디 가?”
“뭐. 왜.”
세현은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같이 씻어요.”
“같이 있자.”
거의 동시에 비슷한 말을 하는 두 남자를 세현이 잠깐 번갈아 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안색에서 짜증이 좀 빠졌다. 그녀는 다소 성가셔 하는 투로 말했다.
“같이 씻긴 뭘 같이 씻어? 여기 남탕 아니야? 잘못 들어왔으니까 나가겠다는데.”
“우리밖에 없는데 뭐 어때? 보고 싶었어요, 교수님.”
알렉스가 먼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제수스가 몹시나 억울한 얼굴로 그걸 보더니 물었다.
“어제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솔직히 나 찼어도 설명은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이것들은 다 뭐야? 어?”
“시끄러워. 짜증나니까 말 걸지 마. 앉아.”
세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제수스는 뭔가 더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현이 앉고 양쪽으로 알렉스와 제수스가 바짝 붙어 앉았다. 그 맞은편엔 최이삭과 아담이 있었다. 최이삭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쉬십시오. 전 연구실 돌아가보겠습니다, 교수님.”
세현은 평소와 다르게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바스타월 하나만 걸친 채 잔뜩 젖어서 앉아 있었다. 그녀가 객관적으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라는 건 그녀를 본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었지만 최이삭에게 그게 크게 중요했던 적은 그다지 없었다.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거나 입었거나 벗었거나,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지도 교수였고 어렸을 때부터 가장 동경하던 사람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제일 중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녀의 앞에 벌거벗고 있는 것이 어쩐지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귀가 다 화끈거렸다. 그에 대해서 그녀가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항상 그녀의 앞에 벌거벗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도 항상 긴장되고 초조했다. 그녀는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그라는 남자의, 연구자의 명과 암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두 팔로 최대한 가리고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세현은 마지막까지도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그녀는 최이삭의 미덥지 못한 꼬라지를 짜증을 가득 담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혀를 찼다. 아담은 내천자가 강하게 잡힌 그녀의 미간을 보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최이삭의 높은 맥박, 빈맥이 살짝 잡히는 심전도, 약간의 과호흡 증상도 알아차렸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또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충 바보, 병신, 쓰레기 등등으로 자학하는 말이었다.
‘저게 그나마 그녀에게 일말의 기대라도 받는 남자….’
그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것이라도 되기 위해서, 그녀의 이름을 앞에 댈 수 있는 남자가 되려면 저렇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자신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인정과 애정을 원하며 서릿발 같은 매서움과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잔혹함, 사정없는 학대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와 같은 사람의 수준에 맞을 수 있도록 일신을 깎아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과실은 기약이 없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밑에서 6년…. 최 박사도 좀 존경스러워지는군.’
그녀는 저런 덜 떨어진 놈을 6년이나 데리고 있던 내가 존경받아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아담은 저도 모르게 혼자서 피식 웃었다.
그간 그녀의 양쪽에 들러붙은 남자 둘은 세현의 냄새를 맡고 은근히 만지고 난리였다. 알렉스는 눈을 감은 채 좋은 향기가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며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뺨에 입을 맞췄다. 세현이 인상을 팍 쓰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야?”
“응? 응…. 어어…. 좋아서….”
그녀의 짜증에 화들짝 놀란 것은 제수스였다. 그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슬쩍 손을 뗐다. 알렉스는 계속해서 골골거리는 고양이처럼 그녀에게 몸을 부볐다. 찌끄레기들이 딸리긴 했지만 의사도 없고 이런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공간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오늘은 쉬는 거야, 교수님? 어디 놀러 가요. 맨날 병원에만 있고. 없는 병도 걸리겠어요.”
알렉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부터도 생각했지만 이건 어린 게 벌써부터 끼가 상당하다. 좋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살거리니 귓속이 다 간지럽다. 세현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가긴 어딜 가. 연구실 가야지.”
“사람이 쉬어야지 일도 잘 되는 거잖아요, 네? 나도 훈련할 때 잘 쉬어 줘야 근육도 오히려 더 잘 만들어진다니까? 머리도 쉬게 해줘야지 새로운 생각도 떠오르고 하는 거잖아요. 맛있는 거 먹고 같이 쉬어요. 응? 네?”
“생각해보자.”
세현이 그렇게 대답하자 알렉스는 엄청 기뻐했다.
“아싸~”
그러자 제수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런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저 애매한 반응이 승낙이었단 말인가? 그는 빽 소리를 질렀다.
“왜?! 나도 항상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같이 있자고 했는데 나는 항상 안된다고 했잖아!”
“아~ 조용히 안 해?”
그녀가 제수스를 째릿 노려보면서 신경질을 냈다. 그러자 제수스는 입을 합 다물면서 그녀의 눈치를 다시 보았다.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기합이 들어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무서웠다. 제수스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세현의 기색을 힐끔거렸다. 세현은 온몸에 열이 돌자 물을 찾았다. 알렉스는 얼른 그녀에게 물병을 주었다. 그리고 세현은 그의 손목 피부 아래로 파랗게 불빛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 이게 그거야?”
“응.”
세현은 알렉스의 손목에 심어놓은 오라측정기에 관심을 보였다. 세현은 몇 번 화면의 모드를 바꿔보았다.
“확실히 마력이랑은 다르네. 마력처럼 저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생성이 되는 거란 말이지? 지금처럼 가만히 있어도 오라가 계속 나오고 있는 거고?”
“응, 일부러 더 강하게 낼 수도 있어.”
알렉스는 그렇게 답하며 자신의 오른손 위에 일렁일 정도로 오라를 내뿜었다. 그러자 오라측정기의 수치가 파바박 변했다. 세현은 감탄사를 냈다. 제수스가 말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는 아예 쉴드를 만들어보았다. 타원형에 불꽃같이 보이는 무늬가 있었다. 세현은 거기에 손을 대보았다. 잘게 진동이 느껴지고 매우 딱딱했다.
“흠, 우리는 마도 순환을 해서 마력을 모아야 하는데 니들은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거란 말이지? 신기하네. 어떤 느낌이야? 오라를 낼 땐? 어디서 나오는 것 같아?”
“엉? 그냥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건데?”
“음, 기본적으로 밖으로 방출될 땐 온몸에서 나가는 느낌이 드는데 강하게 낼 땐 확실히 단전에 힘이 들어가.”
제수스가 잘 설명하지 못하는 사이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다시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울끈불끈한 에잇팩의 아래쪽을 만졌다.
“여기?”
“응, 거기….”
알렉스가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현이 눈동자만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뭘 갑자기 세워?”
“아, 아니!! 교수님이 나쁜 거야!”
“뭐래.”
알렉스는 두 손으로 수건을 덮은 자신의 다리 사이를 꾹 누르며 얼굴을 붉혔다. 제수스는 티 나게 픽 비웃었다.
“너 몇 살이냐? 존나 애새끼 티 팍팍 내네.”
알렉스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오라측정기에 대한 흥미는 가셨는지 세현은 곧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뜨거운 벽에 등을 기대며 피로를 푸고 있는 세현을 힐끗힐끗 보다가 제수스가 슬쩍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많이 피곤해? 일이 많이 바빠? 쉬엄쉬엄 해.”
아까 한 알렉스의 말에 대충 그녀의 상황을 유추하며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세현이 대꾸했다.
“거기 시원하다.”
“여기?”
제수스는 열심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알렉스가 인상을 팍 쓰더니 얼른 그녀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내가 해줄게.”
그가 급하게 그녀의 팔을 주무르는데 그녀가 그의 허벅지를 찰싹 쳤다.
“아프다. 살살.”
“네….”
두 남자는 말 그대로 열심히 세현을 주물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담은 질투가 나는 걸 넘어서서 역시나 실소가 나왔다.
‘정말 대단한 여자야.’
이런 상황만 아니면 정말로 영광스럽다 생각했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다. 저도 모르게 남들에게 자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런 사람과 함께 있어봤다고. 하지만 역시나 씁쓸하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 같은 건 아무런 가치도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왜? 뭐 할 말 있어?”
그녀는 눈을 감고도 보이는 것처럼 말했다. 아담은 너무 애타게 그녀를 보고 있었나 싶어 좀 머쓱하였다. 말을 돌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제 학회장님도 오셨지 않습니까.”
“아, 뭐. 좀.”
“뭔가 문제가 생긴 겁니까?”
“그렇지. 사우디 건.”
“그게 아직도 문제가 됩니까? 거긴 이미….”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가 하루아침에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이 공중분해 되었다. 사회지도층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죽었고 중동의 부국은 사실상 멸망을 맞이했다. 지중해 게이트로 인한 몬스터 침공을 막지 못하고 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사우디에서 인질을 구출하고 나올 때는 학회 쪽이 바짝 긴장해서 테러의 위협에 몸을 사렸다. 보복전 이후로는 학회를 노린 테러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우환을 남기지 않는다. 우환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갓난아이 하나도 남김 없이 죽인다. 어정쩡하게 손을 댔다가 오히려 혼란만 불러온 알량한 위선을 선전하는 열강들과 다르게 진정한 강자는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철저하게 처리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우선인지, 심지어 자신에게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지금의 문명 사회라는 게 지성보다 멍청함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외에는 거기에 없었다. 아담이 물었다.
“그럼 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안 괜찮아도 괜찮게 만들어야지.”
그녀는 한숨을 섞어 그렇게 대꾸했다.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근심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어린애들처럼 그녀의 앞에서 바보를 연기할 순 없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알렉스의 말대로 쉬시죠. 하고 싶은 거나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십니까?”
“아저씨도 은근히 숟가락 얹으려고 하지 마. 교수님은 나랑 있을 거야.”
알렉스가 째릿 그를 노려보았다.
“글쎄. 병원식도 맛이 없진 않지만….”
세현도 덮어놓고 싫다고 하진 않을 모양인지 그렇게 말했다. 원래 연구실과 집만 왔다갔다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병원과 연구실만 왔다갔다하는 게 그렇게 좋진 않을 것이다.
‘알렉스의 말도 일리가 있지.’
내가 이런 상황에도 너무 연구, 연구거렸구나. 머리도 쉬게 해야지 뭐가 나온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럴 땐 비싼 걸 먹어야 돼. 랍스타나 킹크랩이나 그런 거 먹으러 갈까?”
제수스도 숟가락을 얹을 생각인지 그렇게 끼어들었다. 세현이 그의 헤이즐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맛있는 데 알아?”
그녀가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봐주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제수스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한 놈 알아. 잠깐만.”
제수스는 얼른 일어나서 자신의 디바이스를 찾으러 갔다. 알렉스는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그는 세현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투정을 부렸다.
“나랑만 있자니까.”
세현은 그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왜 귀엽지?”
원래도 그녀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알렉스였지만 이번에도 발끈했다.
“귀여우면 그냥 귀엽다고 해요. 그건 뭐야?”
알렉스는 그녀를 품에 가두듯이 그녀를 중심으로 자신의 반대편을 손으로 짚으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대로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물었다.
“뽀뽀해도 돼요?”
마구 껴안거나 투정을 부리거나 징징거릴 때는 언제고 이럴 땐 또 이렇게 긴장해서 물어본다. 귀여운 짓을 하니까 귀여운 거였다. 세현은 아까 여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막 대하는 민 교수에게 열 받고 여기 들어오고 보니 제자라는 놈이 팔자 좋게 처놀고 있는 걸 보고 열 받았는데 슬슬 기분이 풀리더니 꽤 좋아졌다. 세현은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때 제수스가 디바이스에 귀를 댄 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기….”
제수스가 말을 멈췄다. 세현은 알렉스의 예쁜 입술에서 입을 떼고 그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덥다. 먼저 나간다.”
그리고 그녀가 사우나를 나갔다. 그걸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던 제수스가 억울한 얼굴로 안에 들어있는 남자 둘을 번갈아 보다가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왜 너한테만 해주는 거야!”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가 헹, 하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는 제수스와 아담을 차례로 보면서 정답을 말했다.
“내가 제일 어리고 탱탱하니까!”
*
몇 년이나 밑에서 키우는 열댓 명이 되는 학생들 중에서도 편애하는 학생과 갈구는 학생이 확실히 나뉘는 세현 퀸이 남자라고 그 티를 안 낼 리는 만무했다. 그녀는 알렉스를 확실히 귀여워했으며 그건 제수스의 질투심을 활활 불태웠다. 하지만 제수스는 그에 굴하지 않으며 그녀에게 끊임없이 들이댔으며 그녀의 무심한 거절과 홀대(?)에도 방어력이 꽤 높은 데다가 말도 제법 잘 들어서 그녀의 옆에 있는 걸 무언으로 허락받고 가만히 싱글벙글 웃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귀찮다고 거절당할 때마다 화를 내서 세현에게 자주 혼나는 알렉스의 입장에서는 울화가 터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수스가 그녀에게 대차게 차였을 때라 같이 술을 마시며 위로를 해줬던 알렉스였으나 그가 차인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또 들이대고 있는 것에 빡쳤고 제수스는 어린 놈의 새끼가 나이 하나만 믿고 깝치는 게 짜증났다. 그들은 사우나에서의 일 이후로 마주칠 때마다 으르렁댔다.
그에 비하여 아담은 두 어린 놈의 싸움에 끼지 않고 품위를 지키고 있었는데…. 아담은 식사를 막 시작하려다가 누군가 식당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왔냐?”
“어.”
오후 6시 30분. 훈련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불타는 빨강 머리, 호박색에 가까운 헤이즐색 눈동자, 섹시한 목덜미, 잘생긴 얼굴. 제수스였다. VVIP 병동의 식당이었다. 개원한 이래 막상 만들어 둬도 쓰는 사람이 없는 수준이었다는데 소드마스터 3명이서 주중 저녁 식사만으로도 20인분은 족히 먹으니 드디어 소용을 다 하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용으로 철저하게 맞춘 식단을 제공하고 있으며 육고기, 물고기 등 고기란 고기는 전부 나왔다.
“세현이는?”
“민 교수님이랑 같이 계시는데.”
제수스가 자리에 앉자 곧 식사를 준비해둔 직원이 다가와 그의 앞에 커다란 식판을 내려놓았다. 이번 주부터는 세 명의 소드마스터 각각에 맞춘 식단으로 제공되며 뷔페식이 아니라 배식으로 바뀌었다. 준 걸 다 먹어 치워야지 그 다음 식판을 줬다. 한 번에 3~4인분씩 2번 배식 했다. 알렉스나 제수스의 말로는 구단의 식단보다 더 맛있고 좋다고 한다. 둘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아담과는 약간씩 이야기를 나눴다.
그나마 구단이나 집이라도 오갈 수 있는 알렉스나 제수스와는 다르게 아담은 꼼짝없이 감금 생활이었다. 세계물리학회는 아담뿐만 아니라 아담의 사업체인 용병단 <엔트>를 전부 말아먹을 수 있을 만한 약점을 쥐고 있었다. 거기에 세현 퀸에 대한 그의 마음까지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아무도 그에게 족쇄 같은 건 채워 두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아담은 커다란 스테이크를 4등분해서 한 입에 하나씩 먹고 있는 제수스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너 근데 교수님께 계속 이름으로 그렇게 부를 거냐?”
“엉?”
제수스는 시선을 들어 아담의 얼굴을 보았다. 아담은 천천히 음식을 씹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세현이를 세현이라고 부르지, 그럼 이름이 왜 필요해? 이름도 예쁜데.”
“너 그러다 혼난다.”
“엉? 왜?”
제수스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제수스는 얼른 두 번째 식판까지 다 해치우고 자신의 병실(병에 걸린 게 아니니 그렇게 부르기도 애매하지만)로 달려가 이를 열심히 닦고 뭔가를 들고 세현의 병실로 달려갔다.
“세현아~!”
“야, 너 진짜 죽고 싶냐?”
“아. 아아. 아, 맞다. 미, 미안. 조용히 할게.”
반가움에 생각없이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벌컥 열었다가 그녀의 서릿발 같은 눈빛을 받고 제수스는 깜짝 놀라 깨갱 했다. 그는 잠시 안절부절못하며 문가에 서 있다가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갔다.
“세현아, 저녁 아직도 안 먹었어? 먹고 해.”
제수스는 그녀의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그녀의 식판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식판을 한 손에 들고 포크에 음식을 찍어 그녀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그녀는 안경을 낀 채 타자를 치고 있다가 아무 대꾸 없이 그것을 먹었다. 그녀는 타자를 치는 손을 멈추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타자를 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온갖 종이와 책을 늘어놓고 살더니 머릿속이 정리되었는지 최근은 스크린 하나와 타자기 하나 가지고만 씨름 중이었다. 논문을 쓰고 있다고 한다.
제수스는 세현의 입에 조용히 음식을 넣어주며 가만히 그녀가 쓰고 있는 것을 훔쳐보고 있었다. 아담은 열린 문가에서 그걸 잠깐 지켜보고 있었다.
“뭐해?”
누가 그의 등을 툭 건드렸다. 알렉스가 그의 옆에 섰다. 아무래도 서던라이온의 <상해대경기장>은 상하이에 있기 때문에 그가 오는 시간이 제일 늦었다. 아담은 대답이 없었고 알렉스는 직접 병실 안을 보았다.
“니가 보면 아냐.”
제수스가 자꾸 논문을 훔쳐보자 약간 신경에 거슬렸는지 세현이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제수스는 움찔하며 대꾸했다.
“내, 내가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중력은 알아.”
그가 그렇게 말하자 세현이 논문에서 눈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 라는 얼굴이었다.
“그래? 뭔데?”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거잖아. 뉴턴이라는 아저씨가 어,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그게 중력이구나, 한 거잖아.”
“너 <유니버스> 봤다며?”
“그, 그거 너무 어려워….”
“사과 얘기는 유니버스에 안 넣었는데. 그건 어디서 알았어?”
“으음…. 음…. <5살도 알기 쉬운 과학이야기>에서….”
“뭐? 하하하.”
세현이 웃었다. 그녀가 웃으니 제수스도 웃었다. 그녀는 식사를 제대로 할 생각이 들었는지 스크린을 끄고 안경을 벗었다. 제수스는 은근슬쩍 침대로 올라와 식판을 탁상 위에 놓았다. 그녀의 허벅지에 자신의 허벅지를 붙이고 몸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자연스럽게 음식을 하나 더 넣어주며 손을 잡았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아.”
“피곤해?”
“조금.”
“어깨 주물러 줄까?”
“어.”
그는 위치를 옮겨 세현의 뒤에 앉았다. 세현은 포크를 잡고 음식을 하나 찍었다. 제수스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그녀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오늘도 완전 예뻐.”
“그래.”
제수스는 상기된 얼굴에 정말 좋아 죽겠다고 얼굴에 써붙인 것처럼 싱글벙글거렸다. 그걸 지켜보던 알렉스가 부글부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투 나…! 죽여 버릴 거야!”
“또 그런다. 사이 좋게 지내야지.”
아담은 알렉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를 말렸다. 알렉스는 제수스를 찔러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토라진 얼굴로 식당에 가버렸다. 그 발소리에 세현이 고개를 돌렸다. 아담과 눈이 마주쳤다. 아담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은 알렉스가 먼저 병원에 도착했다. 시간 문제로 제수스에게 항상 선수를 뺏기는 게 짜증났기 때문이다.
“교수님~ 나 왔어요!”
딴 놈들 없지? 아싸! VVIP 병동의 응접실에서 엘리야 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현을 발견한 알렉스는 얼른 다가가서 그녀를 껴안았다.
“교수님~”
“왔어?”
“응. 바로 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알렉스가 고개를 떼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피식 웃었다. 귀엽다. 세현도 자연스럽게 알렉스를 허리를 감쌌다. 민 교수가 약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좋냐?”
“뭐, 귀엽잖아.”
세현이 알렉스의 뺨을 만지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게? 민 교수는 알렉스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이건 민 교수에게 그냥 튼튼하고 좋은 실험체일 뿐이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너 오늘 할당량도 빨리 해야 한다.”
“넵….”
민 교수의 말에 알렉스가 약간 움찔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세현을 꼭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우리 교수님이랑 직접 하면 안 돼요? 그런 거면 하루 종일 할 수 있는데.”
그가 약간 징징거렸다. 그녀는 오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늘 11시에는 그 금발 머린데. 확실히 니가 어려서 그런지 약발이 좋지만.”
“그러니까!”
“뭐, 일단은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적절히 돌려가며 써야지.”
민 교수가 말했다. 세현이 물었다.
“소드마스터도 잔뜩 구했잖아.”
“뭐, 구하려면 그런 거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통칭 <세이브 퀸 프로젝트(Save Quinn Project)>에서 모든 전권을 쥐고 있는 엘리야 민 교수가 세현 퀸의 드레이닝을 해결하기 위해 접근하는 방법은 이제 점점 소드마스터의 체액과 오라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갈피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본인의 주력 분야인 장기 이식을 통해 활로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연이어 실패했고 이후 드레이닝과 소드마스터 신체와 오라에 대한 연구 권위자들을 모두 찾아내 초청하고 전세계 마도물리학자의 관련 데이터를 전수 조사하여(캘리 박도 포함이었다) 수집했다.
각 2백 명에 달하는 건강한 마도사와 소드마스터를 구하여 소드마스터의 체액, 오라와 마도사의 마력 간의 상호 변환 역학을 추적하는 동시에 순차적으로 드레이닝 해결법을 위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드레이닝이 발병했다 하는 마도사는 전부 메트로서울행이었다. 그들은 연구 목적으로 죽음을 목전에 앞둔 자신의 신체를 대여하는 대신 실낱 같은 삶의 희망을 찾아왔다. 그중 몇몇은 세현 퀸의 드레이닝 발병 소식에 자원하여 도움이 되기 위하여 오기도 했다.
전세계 200억 인구 중 마도사의 비율은 대략 0.1%로 추정되고 있고 마도사의 드레이닝 평생 발병률은 1%로 적지 않았다. 연 2000명가량의 마도사가 드레이닝이 발병했고 전부 한 달 내에 죽었다. 현재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에서 확보한 드레이닝에 걸린 마도사는 100여명으로 아직 완치된 케이스는 없었다. 이들 또한 전부 변인을 통제하여 실험에 참여하고 있었다.
일단 매체에 드러난 규모만 해도 이 정도였다. 실험의 내용은 비공개였다.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 움직이고 있었다. 200억 인구 중 0.1%, 발병률 1%면 전체 발병률은 0.0001%인 병이었다. 엘리야 민 교수는 자신의 주력 분야를 곧 장기 이식 등을 비롯한 외과 수술 쪽에서 드레이닝 쪽으로 바꿔야 할 지경이다.
“근데?”
“아, 근데 확실히 얘들이 선수라고 가려 뽑아서 그런지 그냥 용병 시장에서 구한 것보다 수치 차이가 꽤 많이 나. 얘는 그냥 이렇게 놔둬도 시간당 오라 생산량이 천만 정도 된다니까?”
“그래? 봐봐.”
세현은 민 교수의 의료용 멀티스크린을 같이 보았다. 알렉스, 제수스, 아담뿐만 아니라 소드마스터 200여명의 상태를 나타낸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시간당 오라 생산량을 보니 평소의 방출량이나 최대 방출량이나 알렉스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평소에는 천만, 최대 방출량은 1억을 넘겼다. 제수스는 7백만/6천 5백만, 아담은 6백만/6천만으로 둘 다 바로 그의 뒤를 이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제일 중요한 숫잔가 봐?”
“어, 이거랑 이거.”
“이건 뭔데?”
“이건 S인자라고 오라로 분화되기 전의 물질이랄까. 이게 마도사의 몸에 들어가면 마력이 되는 거더라고. 소드마스터의 체액에는 전부 포함되어 있어.”
“그래? 뭐야. 그러면 피도 되는 거네?”
“어, 그렇지.”
“와, 나 괜히 고생했구나.”
“뭐, 그렇지도 않아. 확실히 그게 농축도가 제일.”
민 교수가 엄지 손가락을 들었다.
“게다가 소화기관이나 혈관계를 한 번 거치면 전환량이 뚝 떨어져. 단전 근처에서 받아들이는 게 가장 효과가 좋지.”
“그런 거였군….”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해 들어가면 원리가 나오고 따라서 해결 방법도 모색할 수 있다. 민 교수가 신기하다는 듯이 세현을 보았다.
“그러니까 될 사람은 되는 거야. 이런 걸 어디서 낚았냐? 제일 좋은 거.”
“그러게.”
알렉스는 세현을 꼭 끌어안은 채 같이 멀티스크린을 보며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알렉스의 얼굴을 보았다. 알렉스는 흥, 하면서 대꾸했다.
“내가 연봉 제일 많이 받는다고 했잖아.”
“그래?”
세현은 다시금 알렉스의 얼굴을 보았다. 알렉스는 약간 어깨가 으쓱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현이야 소드마스터에 대해서 여전히 잘 몰랐지만 그래도 어떤 가치가 확실한 숫자로 표현되어 나오니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다른 좋다 하는 것은 세현과 관련이 없는 것도 많았지만 이건 세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 않던가. 그럼 정말 좋은 것이다. 세현은 턱 하고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좋아했다.
“그래서 말인데.”
민 교수가 멀티스크린을 조작해서 어떤 홀로그램을 띄웠다.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너 신태호라고 알지? 레이지 선생이 그러던데 얘가 전세계 소드마스터 중에 제일 이거일 거라던데, 맞냐?”
“뭐야, 얘. 완전 어린애네?”
세현이 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평했다. 알렉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발끈했다.
“아니거든요!”
“어, 그래? 레이지 선생이 전세계 소드마스터 자료는 다 털어봤다? 너 니 말에 목숨 걸 수 있냐?”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알렉스는 꿀릴 게 없었다.
“이거 우리 구단에서도 완전 비밀이라서 절대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지만! 내가 신태호보다 훨씬 쩔거든요?! 신태호는 키도 좆만 하고 오라도 제대로 제어 못 하고!”
“그으래? 그럼 레이지 선생이 목숨 내놔야 하는데.”
“응? 네? 왜요?”
“제대로 조사 못했으니까.”
“그, 그건…. 그, 그래도 신태호가 아직 다 큰 게 아니라서 다 크고 나면 어떨지는 봐야 안다고 어른들이 그러기는 했는데….”
“그래?”
음, TFC 전문가도 좀 데리고 와야겠는데? 총장님이 괜히 TFC 쪽이랑 연이 있는 게 아니구만? 총장님은 진짜 천재시다. 이런 것까지 내다보신 건가. 참 대단하시단 말이야. 민 교수는 그렇게 감탄하며 잠깐 뭔가를 멀티스크린에 입력했다.
“일단 나 간다. 넌 시간 맞춰서 오고.”
“네….”
알렉스는 민 교수의 뒷모습을 보다가 세현을 더 꽉 끌어안았다.
“교수님~”
“숨 막혀. 왜?”
“그래도 내가 더 좋죠?”
그의 질문에 세현이 웃었다.
“아, 웃지만 말고. 내가 더 좋잖아요.”
“야, 나 신태혼가 뭔가 오늘 처음 봤다.”
“그러니까~”
“하하. 아, 진짜. 알았다.”
“응? 진짜? 내가 더 좋은 거지?”
“그래.”
“아싸.”
병원의 정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VVIP 병동의 응접실 창문에 알렉스가 등을 기댄 채 세현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었다. 둘이 무슨 말이 통할까 싶은데도 대화는 얼추 잘 이어졌다. 세현을 찾아온 제수스와 아담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아, 열 받아. 아, 짜증나. 저거 뭐야? 저 애새끼 뭔데 저렇게 나대?”
제수스가 분개했다. 아담이 피식 웃었다. 알렉스도 꼭 이러더니 얘도 똑같네. 아담이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너무 그러지 마.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 11시가 되자 세현과 함께 있던 알렉스와 제수스는 세현의 병실에서 쫓겨나야 했다. 세현이 오늘의 일을 접기로 마음먹고 그들이 방에 들어올 수 있게 허락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퀸 교수님.”
아담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세현도 피식 웃었다. 둘은 별 말이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그렇고 그런 게….
“아오…!”
문이 닫혔다.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던 알렉스와 제수스는 동시에 분개했다.
“아! 저 아저씨도 존나 짜증나!”
“아, 저 늙다리는 또 뭔데!”
그리고 둘은 눈이 딱 마주쳤다. 둘은 일주일 동안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견제했다. 제수스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더니 알렉스의 어깨에 팔을 딱 올렸다.
“야, 형이 하나 가르쳐줄까?”
“뭐야, 씨. 친한 척하지 마.”
알렉스는 신경질을 빡 냈다. 제수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짓을 해가며 설명했다.
“우리 둘만 해도 서로 짜증나는데 굳이 저런 아저씨까지 있을 필요가 있을까? 우리 있다고 질투도 별로 안 하는 거 보면 세현이도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냐?”
“뭔 말이야?”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이런 건 원래 한 놈 제끼고 시작하는 거란 말이지.”
“어떻게?”
“우리 세현이는 시끄러운 거 싫어하니까 안 보이는 곳에서….”
제수스가 쑥덕쑥덕 계획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질색하던 알렉스도 그의 말에 솔깃하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그의 눈을 보았다. 제수스가 천연덕한 얼굴로 물었다.
“콜?”
“…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실력이나 힘이 아니라 공격성(Aggressive)과 배타성(Exclusiveness)인 것이다. 아담이 꼴에 아무리 품위를 지키려고 해봤자 둘의 협공에 배제되어 그녀의 눈앞에서 치워지면 그걸로 아웃인 것이다. 그렇게 어린 알렉스는 나쁜 형의 솔깃한 꾀임에 넘어갔다.
*
세현과 아담은 세현의 병실로 들어왔다. VVIP 병실은 최고급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가구는 물론이고 이름 있는 예술가의 명화까지 걸려 있었다. 그는 세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오늘은 하루는 어떠셨습니까?”
“평소랑 별로 다를 건 없어.”
“그래도 특별히 기억 남는 것이 없습니까?”
“글쎄…. 요즘은 논문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세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담은 그녀의 허리를 양팔로 안은 채 부드럽게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최이삭 박사님이 또 교수님의 신경을 건드렸다든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아담은 그녀의 하루를 짐작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세현이 곧바로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아, 걔는 진짜 내 밑에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어.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지? 하루에 한 번은 꼭 소리 지르게 만든다니까. 왜?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나 엿 먹으라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니 무덤덤하던 세현이 곧바로 화가 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담이 웃었다.
“당신이 캘리 박 교수님 밑에서 공부할 때 그런 적이 있으시죠?”
“응? 어…. 그…렇지? 다들 한 번씩 그러지 않을까? 그리고 그 노친네가 내가 랩장 할 때 얼마나 악마 같았는지 알아? 나는 양반이라니까.”
“당신이 그랬다고 최 박사님도 그럴 거라는 생각으로 혼내는 건 최 박사님이 너무 불쌍한데요. 일부러 당신의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으로는 안 보입니다.”
아담이 그렇게 말하자 세현이 ‘응?’ 하고 약간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더 문젠데…. 진짜 모르고 그런 거면 걔는 지금 당장 잘라야 할 수준인데? 학부 1학년생만도 못하단 말인데. 자를까?”
세현이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담은 약간 당황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자르란 말은…. 6년이나 고생했는데….”
“6년이나 내 밑에서 공부했는데도 그 정도밖에 못한다는 건 그냥 그 정도인 거지. 그 말이잖아?”
맞는 말인데…. 세현이 꽤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이 사람은 공감이나 동정심이라는 게 없는 것일까? 그가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그를 두고 올 수밖에 없을 때 분노했던 그녀의 모습에 아무리 그를 괴롭혀도 사실 마음 속에는 그를 향한 스승의 정이 있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분명히 최 박사님이 잘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시키는 것도 똑바로 못하는 수준에서 다른 걸 얼마나 잘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최 박사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정말 노력하는 것은 알고 계시죠?”
“결과가 안 나오는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6년이나 당신 밑에서 열심히 공부했지 않습니까? 분명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박사 학위를 언제 제일 많이 포기하는지 알아? 박사 1년차일 때랑 박사 말년이야. 박사 과정 들어오자마자 ‘아, 나는 공부로 먹고 살면 안 되겠구나’ 하고 나가는 거랑 말년에 ‘아, 나는 끝까지 해도 안 되는구나’ 싶을 때라고.”
“…….”
죄송합니다, 최 박사님. 저는 노력했습니다. 아담이 아직 이쪽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다른 학생을 대하는 것과 최이삭을 대하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에 대한 것만 유독 기준이 높았다. 오래 데리고 있었으면 정이라도 좀 들 법한데 아닌 것일까? 분명히 간혹 보면 그에게 마음을 쓰는 건 확실한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녀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고자,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무덤덤하기 때문에 구태여 신경 쓰이는 부분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에 공감하고자 했으나 애꿎은 남자의 밥줄만 끊게 생겼다. 아담이 어떻게 말한들 최이삭이 넘어야 하는 기준은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담은 좀 미안하지만 최이삭을 버리기로 했다. 그는 세현을 침대에 앉히고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최 박사님이 나쁘군요.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다니.”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니 세현이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니까? 최 박사에 대한 내 기대가 그렇게 높지가 않다고. 그것조차도 못하는 건 걔 문제야, 걔 문제. 졸업장을 날로 먹을 생각을 하고 있어. 도둑놈이 따로 없다니까? 요즘 노친네도 노망이 끝물인지 그것 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는데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녀는 그렇게 아담에게 푸념했다. 아담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며 맞장구를 쳤다.
“최 박사님을 평가하는 것은 오로지 퀸 교수님의 재량 아니십니까?”
“내 말이!”
그녀는 한참 똑바로 일을 못하는 최이삭에 대한 불평불만을 말했다. 그리고는 약간 개운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최 박사가 너만큼 눈치라도 빠르면 좋을 텐데.”
“하하.”
그가 웃으면서 세현의 무릎에 코를 비볐다. 그녀의 살갗에서 나는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졌다. 그는 알렉스나 제수스처럼 시간만 나면 그녀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의 주의를 끄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드레이닝에 걸린 지금은 더더욱 일분일초가 아까울 사람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이기심으로 방해할 순 없었다. 그럴 자격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어린애들은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눈이 마주칠 땐 미소를 짓고, 잠깐 대화를 할 땐 그녀를 웃게 하고 싶고, 이럴 때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리고 강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었다. 모든 걸 견딜 수 있다고 해서 고단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저는 당신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은 또 뭘 해주려고?”
아담의 말주변에 그녀는 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음….”
아담은 잠깐 고심하듯 그런 소리를 내며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점점 입술을 옮겼다.
“오늘도 당신의 평안하고 깊은 잠자리를 위해서 힘써볼까 하는데요. 아주 기분 좋게…,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도록….”
“으응….”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속옷 위에 입술을 누르자 세현이 움찔하면서 신음을 흘렸다. 완치법을 찾기 전 최대한 드레이닝 홀(Hole)이 커지는 속도를 완화하기 위하여 세 명의 남자가 매일 밤 돌아가면서 세현과 동침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하루에 한 번 알렉스의 체액을 가공한 주사액을 주입 받긴 했지만 직접 오라와 접촉하는 것만이 드레이닝 홀이 커지는 속도를 완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현의 입장에서도 매일 밤 새로운 남자와 동침하는 것보다는 아는 얼굴이 훨씬 부담이 적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가 세현의 마지노선이었다.
아담은 세현의 속옷에 얼굴을 묻고 정확하게 그녀의 음핵을 찾아 입술로 눌렀다. 그의 손이 엉덩이 부근을 간지럽게 쓰다듬다가 허벅지와 무릎을 거쳐 종아리로 내려갔다. 그는 세현의 발가락과 발등, 발목을 감각적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복숭아뼈 뒤쪽과 아킬레스 건을 쓰다듬으니 묘하게 이완감이 들면서 기분이 좋았다. 오싹오싹한 느낌이었다. 그는 속옷 위로 그녀의 음핵을 핥았다. 혀에 힘을 줘서 꾹 누르고 음핵을 덮은 살을 벗기며 그 윗부분도 꾹꾹 눌러 자극했다. 그리고 음핵의 주변을 돌아가며 속옷 위로 살살 쓰다듬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
얇은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의 혀가 뱀같이 움직여 가장 민감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자극했다. 환자복 밑에서 그의 머리가 천천히 움직이는 게 야하게 느껴진다. 이게 왜 기분이 좋은 것일까? 연구 외의 일에 그다지 집중하는 일이 없는 그녀였다. 지금은 다른 생각은 접고 그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그가 섹시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뗐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간지럽히면서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속옷 위를 계속 자극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에 입맞춤을 했다. 그녀의 속옷이 젖었다. 그녀의 얼굴에 열기가 돌았다. 그가 속삭였다.
“저는 기분이 복잡합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이런 즐거움을 잘 모르고 살았다는 게 약간 좋거든요.”
“왜?”
“제가 당신에게 특별해진 것 같아서요.”
“하하.”
아담의 말에 그녀가 바로 웃었다. 아담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세현이 말했다.
“확실히…, 섹스 같은 거 뭐가 좋은지 모르고 살았는데 너랑 하고 나서부턴 조금…, 좋은 것 같아.”
“조금?”
그가 그녀를 침대로 눕히며 섹시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아랫배가 맞닿았다. 그는 세현과 최대한 몸을 붙였다. 자신의 얼굴을 약간 기울인 채 세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예뻤다. 짙은 눈썹과 움푹 패인 눈매가 남자다웠다. 세현은 그의 상의 안으로 손을 넣어 그의 멋진 근육을 더듬었다.
“조금 많이?”
세현이 웃으며 말하니 아담도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그는 세현의 환자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환자복은 등 뒤의 끈만 풀면 되었기 때문에 금세 벗길 수 있었다.
“우쭐해질 것 같은데요?”
“조금 우쭐해져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정도로 잘하는 남자가 그렇게 흔치는 않은 거잖아? 안 그래?”
병원복을 벗기자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아담은 상기된 얼굴로 그대로 그녀의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기쁩니다.”
세현도 그의 상의를 벗겼다. 아담은 자신의 나머지 옷도 전부 벗었다. 서로의 사이를 가로막는 건 그녀의 팬티밖에 없었다. 배도 허벅지도 전부 맨 피부로 맞닿았다. 세현이 기분 좋은 얼굴로 아담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점점 갈수록 아담을 제대로 즐겼다. 그 남자가 주는 기쁨을.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고 그녀의 음핵을 엄지로 꾸욱 누르며 다시 자극했다. 세현이 눈을 감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담은 세현의 몸을 들어 침대에 제대로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뺨과 목, 가슴, 배에 천천히 입술을 눌러 내려가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정말 능숙했다.
여자의 옷을 벗겼다고 여자의 몸만 쳐다보며 정신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단 한 번도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기분을 살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현에게 열중했다. 그는 드디어 그녀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팬티가 그녀의 다리를 따라 내려갔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으로 미소를 보내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입술을 묻고 혀끝에 힘을 주어 짧고 강렬한 테크닉을 선사했다.
“아…! 아아…!”
그의 혀가 음핵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가 음핵을 꾸욱 누르며 천천히 하지만 세게 비비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음핵뿐만 아니라 여성기 전체가 뜨겁게 맥박 쳤다. 그곳에 있는 혈관이 전부 느껴질 정도로. 그는 입술을 떼고 손가락으로 소음순과 대음순 사이를 쓰다듬었다. 미끌미끌한 체액이 나와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그녀는 움찔움찔하며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약간 허리를 뒤틀었다.
“아으으…. 진짜…. 하….”
그녀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담은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물었다.
“어쩔까요?”
“하아…, 이제 뜸은 그만 들이고….”
그녀는 아담의 남성기를 한 손으로 턱 하고 잡았다. 아주 묵직했다. 그녀의 손길에 아담이 움찔했다. 그녀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것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담은 약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낮췄다.
“윽….”
하지만 그의 것은 도리어 더 단단해졌다. 그녀가 웃었다.
“아픈 게 좋은가 봐?”
“그런 게 아니라…. 으윽.”
그녀는 검지와 중지를 굽히고 그 사이에 그의 커다란 자지를 끼워 스르륵 손을 당겼다. 아직 건조하고 핏줄이 약간 선 그의 기둥을 따라 손가락이 미끄러지다가 그의 귀두에 걸렸다. 그가 헉, 하고 숨을 뱉으며 침대 시트를 쥐었다. 입술을 말아 핥는 그의 얼굴이 굉장히 섹시했다. 재미있다.
“여기다 진주를 네 개나 박은 남자가 아픈 게 싫다고?”
“이건 정말 어릴 때 멋모르고…, 으음.”
그녀가 경험이 적다고 해서 절대 숫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면에서도 어수룩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녀가 이 모든 역경과 시련을 얼마나 훌륭하게 견뎌 나가는지를 봐라. 그녀는 강자로 태어나 강자로 죽을 사람이었다. 그런 여자가 고작 섹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겠는가.
서로의 입술이 스쳤다. 아담은 고통과 쾌락에 인상을 살짝 썼다가 자신의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심장이 두근두근한 것을 느꼈다.
‘진짜 아픈 게 좋은 건 아닌데….’
당신이라서 좋은 건데.
그걸 그녀가 알아줄지는 모르겠다. 아담은 마치 항복하듯이 먼저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누르며 드디어 입을 맞췄다. 그와 같은 남자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적절한 태도는 정말로 ‘항복’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 단단해진 귀두의 끝이 물기를 어려 약간 차가운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소음순에 닿았다. 그녀는 그의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것을 끼운 양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귀두가 자신의 소음순 사이를 가르도록 했다.
“하아…, 크단 말이야.”
“그건…,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데요.”
“두 개는 빼라니까.”
“좋아하시면서.”
“미묘하다고. 으으응….”
그대로 그가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긁으면서 그의 것이 천천히, 잔뜩 젖고 부푼 그녀의 여성기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세현은 그의 팔을 잡으며 신음을 길게 흘렸다. 뜨겁고 자극적이었다.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아픈 것 같았지만 아프지는 않았고 아래가 굉장히 묵직하고 팽만감이 느껴졌다.
“커…. 뜨거워….”
그녀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아담이 그녀의 귓가에 코를 비비며 나지막하고 섹시한 신음을 흘렸다.
“당신도 뜨겁습니다….”
기분이 복잡한 것은 그녀가 남자 경험이 별로 없다고 좋아하는 소인배 같은 자신의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하룻밤을 마지막으로, 짙은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헤어짐을 받아들였던 것은 그녀와 자신은 원래라면 영영 교차점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절대적인 수준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하룻밤마저도 일생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행운이었다는 것을 아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 같은 것에 홀리는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 자신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를 만나고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것도 처음이야….’
아담은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가슴이 떨렸다. 어째서일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이 마음을 그녀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그는 그 마음만을 담아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반쯤 들어간 상태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뜨겁고 촉촉한 안쪽이 푹신하면서도 탄력 있었다.
“으음…. 으응…. 하아…. 음.”
“세현….”
그의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귓속을 핥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목덜미가 근질거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마치 그 목소리가 가장 느끼는 곳을 간지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만으로….’
이게 뭘까? 모르겠다. 본능인가? 그런 걸 그렇게 신경 쓰고 살아본 적 없는데 말이다. 그는 크고 강한 남자였다. 그렇게 어리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았다. 눈치가 빠르고 능숙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천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그의 것이 매우 크고 단단했다. 자신의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마다 강하게 맞물려 비벼져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음핵이 말려 들어가 압박되었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살이 맞닿는 게 기분 좋았다. 그의 몸이 뜨겁고 단단했다. 이것만으로 기분이 좋다는 게 신기하다.
‘남자가 크고 단단하고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고 잘 웃으면…, 그냥 이런 느낌이 드는 건가?’
알렉스도 귀엽다. 끌어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제수스도 자주 바보 같아 어이가 없지만 끌어안고 있으면 뭔가 자연스럽다는 느낌이다. 결국 그녀도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게 기분 좋다는 것이 말이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것을 계속 바라보면 스스로도 그만큼 커지기도 한다. 처음 섹스를 해볼 때 그 시시함이 기억 났다. 남자는 다 똑같은 게 아니던가?
‘머리 비우기엔 나쁘지 않단 말이야.’
그녀는 꽤 자라 깔끔하게 다듬어진 그의 금발을 손으로 만졌다. 부드러웠다.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의 체취가 향기로웠다.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귀를 울려서 기분 좋았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한 손에 쥐고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로 부드럽게 번갈아가며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듯 자극적이고 도리어 아래가 움찔거렸다. 세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꾸욱 눌러 끝까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
이게 기분 좋은 거란 말이지…. 신경이 온통 그와 맞닿은 곳으로 쏠렸다. 그의 올리브색 눈동자, 숨소리, 목소리, 가슴을 만지는 그의 뜨겁고 크고 조금 거친 손, 딱딱한 복부, 그의 허벅지, 크고 단단하고 진주를 네 개나 박은 자지.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자극적이고 중독적이다. 온몸이 엄청나게 뜨거워졌다. 세현이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세현의 광대에 입술을 누르며 웃었다.
“저를 음미하고 계신가요?”
그녀의 손이 신기하다는 듯이, 만지기 좋다는 듯이 그의 멋진 허리와 커다랗고 단단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는 애가 탈 정도로 천천히,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가 낮고 섹시한 신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으음…, 나쁘지 않아. 하아…. 운동하는 기분이고….”
그녀의 이마로 땀이 흘렀다. 그녀의 피부는 안팎으로 매우 촉촉하게 젖었다. 그가 웃었다. 그녀가 움찔했다.
“운동이요? 너무 건조한 대답인데요.”
“하아…! 앗… 아앗! 아. 아. 아아! 아, 진짜…!”
그가 허리짓을 빨리 하기 시작하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쉴 새 없이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몸이 많이 풀리고 엄청 젖어 있었고 굉장히 잘 느끼고 있었다. 부풀어 올라 푹신푹신한 그녀의 질이 그의 커다랗고 다소 야만적인 남성기를 구석구석 빨아먹고 있었다. 그녀의 쇄골이 땀에 젖어 빛났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야한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운동이 또 있습니까?”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가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부딪쳤다. 그녀가 손톱을 세워 그의 허벅지를 잡았다. 서로 굉장히 느끼던 와중에 눈이 딱 마주쳤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하고 크게 뛰는 걸 느끼며 아담은 더 이상 여유를 가장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끌어안아 들어올렸다.
“아으.”
그녀가 저절로 그의 목과 등을 감싸고 매달렸다. 그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엉덩이를 꽉 끌어안고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그녀의 안에 끝까지 들어가 잘게 흔들었다.
“하아, 윽. 교수님…. 퀸 교수님…. 으읏. 하.”
그는 세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열중하여 몸을 움직였다. 참기 힘들었다. 누가 손톱으로 자지를 긁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온몸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움푹 파진 등골로 땀이 연달아 주르륵 흘렀다. 그것까지도 전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안이 너무나 기분 좋았다. 미끌미끌하고 푹신거리고…. 자지가 너무 단단해져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이 온몸에 물컹하게 맞닿았다. 그녀도 자신만큼 기분이 좋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아. 하으. 아아…! 읏….”
세현도 열중하여 그 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것이 활활 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의 몸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뜨거워질 수 있는 거란 말인가. 애액이 끊임없이 흘러 다리 사이를 흠뻑 적시고 그의 것도 흠뻑 적셨다. 찰싹거리며 살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뱃속까지 뜨끈뜨끈했다. 그의 태평양같이 넓은 등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더 기분이 좋아졌다. 뿌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으읏…. 나 이제…, 하…, 갈 것 같아…. 하으….”
오고 있었다. 정말로 큰 게. 세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온몸의 피부가 엄청나게 근질거렸다. 특히나 그를 먹고 있는 그녀의 여성기는 뭐가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최대치로 부풀어 있었다. 그는 세현의 허리를 꽉 껴안고 허벅지를 손으로 쥐었다. 그가 숨을 헐떡거렸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자극적이었다. 그가 웃었다.
“저는…, 하아. 윽…. 지금 너무 조이시면 당신을 끝까지…, 아윽…. 하…. 세현….”
그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끝맺지 못하고 아찔한 목소리를 내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허리짓은 빨랐고 그의 고환이 부드럽게 그녀의 몸에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야한 소리를 냈다. 세현이 그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아…! 이제…! 으응…! 아아아아…!”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등을 세게 드드득 긁었다. 아담은 인상을 세게 찌푸리며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그녀의 안을 꾹꾹 누르며 억눌린 신음을 냈다. 그녀의 것이 경련하며 그의 것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서 등의 상처에 신경도 안 쓰일 지경이었다.
“하아…! 아으! 아아앗! 아앗!”
세현은 도저히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르가즘이란 건 원래 그냥 잠깐 움찔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와 할 때는 절대 금방 끝나지 않았고 그가 움직일수록 더더욱 절정의 강도가 강해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자신의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이며 그의 것을 농밀하게 탐하는 것을 느꼈다. 그와 온몸이 딱 붙어버린 것만 같았다. 세현은 그의 목과 등을 꽉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그 센세이션을 온몸으로 느끼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신음처럼 말했다.
“이제 그만…. 하으. 이제 싸. 그만. 아앗. 못 견디겠어…!”
“으윽…, 날 놓지 않는 건 당신입니다...!”
아담도 못 견디겠다는 섹시한 얼굴로 눈을 마주쳐왔다. 둘 다 심장이 엄청 뛰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혀를 넣었다. 그녀도 그에 응해 움직여왔다. 아래위로 츄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다가 그가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떼고 신음을 흘렸다.
“으으윽…!”
세현은 가느다랗게 눈을 뜬 채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아래가 그의 정기로 인한 열기로 뜨거운 것인지 오르가즘 때문에 뜨거운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직도 아래가 경련하고 있었다. 눈앞에 별이 번쩍거렸다. 그가 강하게 그녀의 온몸을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얼굴을 계속 볼 수 없었다. 그대로 그는 세현의 쪽으로 넘어졌다. 그의 무게가 묵직했다. 여유를 부리던 그도 가면 갈수록 그녀와의 섹스에서 굉장히 느끼는 것 같았다.
“세현 퀸….”
그가 부드럽게 세현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둘 다 흐물흐물해져서 여전히 합쳐져 있었다. 세현은 나른하고 황홀한 후희를 느끼고 있었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도 그의 무게도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는 않아….’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새카맣고 평안한 수마가 밀려왔다. 세현은 그대로 잠들었다.
*
오전 5시 30분, 최이삭은 알람을 끄며 일어났다. 5시 40분, 샤워를 마치고 정신을 차렸다. 5시 50분, 머리를 다 말리고 정리한 후 옷을 챙겨 입고 기숙사에서 나왔다. 5시 53분, 물리학과동에 도착하여 디바이스를 찍고 안으로 들어왔다. 5시 55분, 세현 퀸의 이름이 박힌 입자물리 및 우주론 연구실에 도착했다. 랩에는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바로 책상 위에 앉아 오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2128년 6월 22일 금요일. 교수님은 무회전 웜홀 중력방정식 논문 집필이 한창이시다. 최이삭은 필요한 각종 논문을 요약하고 레퍼런스 목록을 만들었다. 교수님께서 미리 만들어놓으신 목차와 그 아래에 적힌 필요한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표현할 양식에 따라 도표와 그래프를 만들었다. 실험 계획서를 참고하여 적다 보니 얼추 그럴듯하게 문서 하나가 나왔다.
7시 30분,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HNU 물리학과동 이스트윙에 있던 휴게실을 대거 리모델링 하여 식생활이 건전하지 못한 대학원생들을 위한 카페테리아 겸 휴식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투명한 음식 보관함에는 각 학생의 건강 상태에 맞는 푸드 박스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준비되어 있었다. 최이삭은 그중 아침 식사를 꺼냈다. 스프와 빵, 샐러드, 계란, 과일 등이 보였다. 최이삭은 시키는 대로 스프는 전자레인지, 빵은 토스트기에 넣고 시간을 맞춘 뒤 나머지를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편하고 맛은 있는데….’
이런 것까지 준비해주니 아침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할 때까지 물리학과동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오렌지 과즙 주스를 마시자 입맛이 돌며 상쾌해졌다. 스프와 토스트를 접시 위에 올릴 때쯤 다른 박사생들이 바로 카페테리아로 들어왔다.
“최 박사님.”
다 세현 퀸의 박사생들이었다. 그들은 종종걸음으로 얼른 들어왔다. 3년차인 오태연 박사와 2년차 하나, 1년차 하나였다. 그들은 쪼르륵 최이삭의 앞에 섰다. 최이삭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니들….”
원래 대부분 연구실 출근 시간은 9시고, 세현 퀸의 연구실에도 9시에 출근하는 학생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학부생인 랩 인턴이나 가능한 시간이고 박사생은 무조건 7시 출근, 석사생도 8시 출근하여 할 거 하고 9시 수업을 가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어제….”
최이삭은 그들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남은 오렌지 주스를 전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다. 이건 한 소리 해야 겠다.
“얘들아, 나 이런 거 싫어해. 알잖아.”
“죄송합니다….”
“나 되게 인간적으로 니들 대하고 싶거든? 교수님께서 나한테 그러시는 것처럼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니들한테 막 소리 지르고 그럴까? 맞으면 좀 잘 할 거 같아? 그러면 내가 눈물을 머금고 손 들고. 그럴까?”
언젠가 치엔 박사와 두 손을 맞잡고 우리도 결국 나중에 저렇게 되는 것이냐며 싫다고 눈물로 푸념했지만, 진짜 아랫사람들 똑바로 일 시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곧잘 착각하는데 차라리 이렇게 큰 소리가 나오는 건 그래도 똑바로 하면 자르지는 않겠다는 일종의 의사표현이다. 미국 같은 데서는 아침에 출근하면 그냥 자리가 비워져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하려고 인트라넷에 접속하니 계정이 지워져 있는 걸로 해고해버린다.
“교수님 편찮으시고 하니까 니들이 아무리 해봤자 교수님 졸업장은 못 받을 거 같아서 이래? 나갈래? 랩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내가 교수님께 바로 말씀드려줄 테니까.”
“아닙니다.”
“근데 니들 우리 교수님 밑에서도 이 정도밖에 못하는데 다른 교수님이 받아주기나 할까? 어? 출근 시간도 못 지키는 애들한테 월급도 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교수님들이 자원봉사자야? 어? 얘들아, 나 진짜 잔소리하기 싫어. 어? 나 진짜 잔소리하는 거 너무너무 싫어해. 알면서 왜 이래? 어?”
최이삭은 목소리도 전혀 높이지 않았고 화도 내지 않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난 교수님이 전화하면 그게 새벽 두 시든, 세 시든 바로 달려나가. 교수님이 기라고 하면 기고 짖으라고 하면 짖는다니까? 내가 왜 그럴 거 같아? 어? 내가 왜 그럴 거 같냐고.”
“조, 졸업장 바, 받으려…고?”
오 박사가 슬쩍 대답했다. 최이삭이 눈을 부라렸다.
“교수님이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으시니까! 내가 아직은 이해를 못하더라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라고.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게 필요한 일이라고. 나도 이거 이해하는 데 자그마치 6년이나 걸렸다. 니들도 그걸 꼭 6년이나 지나고 나서 깨닫고 싶어? 그래?”
“아니요….”
“우리 교수님은 백 년, 아니, 5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신 천재셔. 세계 최초로 웜홀도 없애시고! 비공식이지만 4대 상호작용 변환도 최초로 시도하시고! 거의 성공하시고! 그리고 지금 그렇게 편찮으셔도 진리를 찾고자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솔직히 말해보자. 얘들아, 그럼 나는 지금까지 뭘 이뤘냐?”
“…….”
“넌? 너는?”
“…….”
“니들은 믿음도 부족하고 겸손함도 부족한 거야. 교수님 같은 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그냥 죽자. 어? 우리 이럴 거면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자. 우리 도대체 왜 사냐? 우리 이렇게 공부해 가지곤 죽을 때까지 교수님 발끝에도 못 미쳐. 그럴 거면 도대체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 거냐? 여기 왜 있어? 왜 태어났어? 그냥 죽자, 어? 약 먹고 죽어버리자. 다 그냥 죽자고. 태연아, 우리 그냥 죽어버리자. 우리 그냥 옥상 가서 다 같이 뛰어내리자. 어? 어? 태연아, 형이 이렇게 빌게. 우리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자. 나 진짜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응? 얘들아. 그래, 힘들지? 힘들 거야. 공부하는 거 원래 힘든 거야. 그런데 힘들다고 이렇게밖에 못 할 거면 그냥 죽어야지. 어? 태연아, 형 말이 맞지?”
“최 박사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안 늦겠습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오 박사,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고. 그래, 깔끔하게 나만 죽는다. 나 죽으러 간다, 어? 나 뛰어내리러 가?”
“아, 형…. 진짜 진짜 앞으로 다시는 안 이럴게요. 잘못했어요, 형? 네?”
이 형이 진짜 사람이 엄청 변했다. 오 박사를 비롯해 다른 박사 둘도 최이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고 빌자 그제서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 최이삭은 계속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면서 아침을 먹었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그의 눈치를 봤다.
수에즈 프로젝트 전부터 묘하게 이상해진다 싶었지만(그전의 그는 교수님이 갈구면 자기 밑도 좀 갈구곤 했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으레 말년이 되면 그만두는 사람들이 급격히 많아지는 이쪽 연구실 특성상 그냥 저 사람도 그런 건가 보다, 하고 있었다. 수에즈 프로젝트 때는 바쁘기도 엄청 바쁘고, 지금에 와서 보니 그는 처음부터 교수님이 드레이닝에 걸리신 걸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어쨌든 멘탈이 완전 나가 있었다.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피랍까지 당했다가 돌아오더니 사람이 약간….
최이삭이 식사를 다 하고 먼저 연구실로 돌아가자 박사 1년차가 슬쩍 오태연에게 물었다.
“오 선배, 최 박사님 왜 저래요? 안 저런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오 박사에게 속닥거렸다. 오 박사가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원래도 우리 일 제대로 못하면 화도 내고 그랬잖아. 교수님처럼.”
“그러니까요. 예전에는 교수님처럼 차라리 화내고 갈구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와선 괜히 미안하다고 그러고…. 뭐 하나 실수하면 교수님 보고 자기 죽이라고 시그널 보내냐면서 막 화내고 그랬는데. 결국 저 자리에 있으면 교수님이랑 똑같아지는 거구나 했거든요. 근데 요새는 뭔가 레퍼토리가 다르네요.”
그러자 2년차 박사생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아, 하면서 그들을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아니, 그거 있잖아. 기억 안 나? 최 박사 석사 때만 해도 그랬잖아. 나 랩 인턴 때, 오 박사 석사 1년차 때. 최 박사 석사 2년차였잖아. 그때 다 같이 술 먹었을 때 기억 안 나? 최 박사 막 울면서 교수님 랩에 들어온 게 자기 인생 최고의 영광이라면서 막.”
“아. 아아. 아아아. 맞아. 맞아. 저 형 옛날엔 그랬지, 참.”
“막 그만두고 나가는 박사생들 욕하고 그랬잖아. 이해가 안 된다고. 어떻게 우리 교수님 랩을 그만둘 수가 있냐고.”
“교수님이 자른 박사들도 욕했지. 조금만 제대로 하면 그래도 자르지는 않는 관대한 분이신데 그걸 못해서 잘리냐고, 막. 다른 교수님이었으면 박사도 못 올라오고 잘렸을 수준이라면서.”
“그래…, 그때만 해도 저 형이 참 순진하고 열정적이었지….”
그러자 박사 1년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원래 최 박사님이 저런 사람이었다구요?”
2년차가 ‘그렇네?’ 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 올라가기 전만 해도, 누가 뭐라 해도 교수님 열성팬이었어. 그때 박사 선배들이 니가 박사 올라오면 다를 거 같냐고 엄청 갈궜는데도 자기는 다르다고, 교수님도 깜짝 놀라게 할 논문 낼 거라면서 막.”
“솔직히 이삭이 형이 지금까지 우리 랩 들어온 사람들 중에선 제일 잘하긴 했잖아.”
“어? 전에 졸업한 선배 하나 있잖아요. 그 선배는요?”
1년차가 물었다. 2년차가 약간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 그 선배…. 그 선배도 잘했는데…. 사실 그 선배 졸업논문심사 때는 아예 교수님 안 가셔 가지고….”
“네? 그럼 어떻게 졸업했어요? 우리는 완전히 지도 교수가 합불 결정하잖아요?”
“그러니까. 졸업 기준이 7점이잖아. 다른 교수님들은 원래 다들 그냥 7점 주는 거고…. 교수님은 심사에 안 오셨으니까 절차상 교수님 평가는 점수 집계에서 누락됐고 그냥 평균 7점 맞아서 졸업한 거지.”
“헐…, 그래도 돼요?”
“뭐…, 왕리밍 교수님이었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졸업장 뺏아 오겠지? 필리페 교수님이나 루소 교수님은 애초에 논문심사에 안 오시는 일도 없을 거고. 우리 교수님 성격에 귀찮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시겠어. 허허.”
“학과장님은….”
“학과장님은 그래도 전화는 해, 전화는.”
그리고 박사생 셋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좀…, 불쌍하네요, 그 선배.”
“…그치? 그 사람도 6년 넘게 교수님 필사적으로 모셨을 텐데….”
“교수님은 그 선배 이름이나 제대로 기억하실까?”
어떤 교수님은 자기 랩장 이름을 아직도 기억 못하신다는 소문이…. 1년차 박사생이 중얼거렸다.
“그 선배 한국 안 오는 수준이 아니라 근처에도 안 와. 나 같아도 평생 트라우마 생길 것 같다.”
2년차가 자기 머리를 감싸 잡으며 신음했다. 박사 세 명은 다 같이 잠시 이 비정한 실력의 세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짐작해보았다. 실로 티끌만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아침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합시다. 열심히 해요.”
“흑흑, 어. 우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는 되지 말자.”
“아, 군인도 말년이면 발 좀 뻗고 잔다는데 난 벌써 3년차라고.”
“오 박사, 내가 봤을 때 연차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 교수님 박사 2년차까진 별로 관심도 없으셔. 제일 많이 잘릴 때가 3년차야. 제일 많이 그만두는 게 1년차랑 랩장이고.”
“아…, 하긴…. 랩장하고 4년차까지 간 것도 졸업한 선배랑 이삭이 형밖에 없지…. 얘들아, 나 올해 잘릴 것 같지? 그치?”
“힘내요….”
“파이팅….”
하, 어려운 거 알고 들어왔으니까. 이쪽은 졸업 난이도가 헬이라는 건 세계적으로 소문이 쫙 나 있지…. 그래도 루소 교수님 연구실만큼 빡센 건 아니니까…. 다들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며 연구실로 돌아갔다.
- 공금 by J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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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59분, 하우빈을 비롯한 석사생들이 우르르 출근했다. 그들은 오늘 있을 수업을 예습하고 9시 수업을 들으러 갔다. 물리학과 석사생들은 학기 별로 2개에서 4개의 과목을 들었으며 모두 월수, 화목을 짝지어 9시에 하나 10시 30분에 하나를 들었다. 전공 선택 따윈 없었다. 13개 모든 수업이 전공 필수였으며 수업 한 과목당 3학점, 학기 당 랩 생활을 4학점, 세미나 수업 등등을 하여 수료 요건으로 60학점을 채워야 했다. 학기 초에는 석사과목 선이수제를 통해 학점을 딸 수도 있어 이를 이용하여 널널한 석사 생활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어쨌든 여기에 석사 논문까지 통과해야지 석사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석사생들이 수업을 들으러 간 오전 시간 동안 박사생들은 교수님의 논문에 들어갈 내용을 정리하고 수에즈 프로젝트에서 나온 데이터를 보며 통찰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2시 10분. 다 같이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식사를 하며 랩장인 최이삭에게 하고 있는 일을 전부 체크 받았다.
13시부터 16시까지는 다들 자기 논문에 매달렸다. 교수님에게 처음부터 다시 쓰라는 말을 들은 오태연 박사는 열심히 타자를 치다가 이내 멘탈이 나간 얼굴을 했다. 박사들은 언제나 아이디어 부족에 허덕거리는 법이다.
16시부터 19시까지는 각자 따로 해야 할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어느 랩이든 연구비를 따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세현 퀸의 연구실에서도 여러 기관의 과제를 수주했다. 생물물리 연구실과 협업하여 여러 가지 중력 상태에서의 바이오팜의 생산성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고 중력 연구소와 입자물리 연구소와 협력 과제를 수행했다. 기본적으로 마도물리학자가 가서 그들이 원하는 중력 상태를 구현해주며 같이 필요한 결과를 내기 위해 실험하는 것이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기본적으로 연구소나 기관의 목적과 목표가 있고 그들은 이미 박사를 졸업한 연구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다일 때가 많았다. 외출을 해야 하는 이들은 외출을 했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프로젝트가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일을 해나갔다.
19시 10분 최이삭은 저녁을 먹고 수면실에서 30분만 자기로 결정했다. 피곤했다. 개인실로 나눠져 있는 수면실은 들어가기 전에 디바이스를 밖에 두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수면실에서 누워 노닥거리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다. 짧지만 양질의 잠을 잘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수면에 좋은 무슨 파장도 나온다고 하던가. 최이삭은 디바이스를 바구니에 넣고 안에 들어가 랩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쳐 둔 뒤 침대에 누웠다. 약간 몸을 스트레칭 한 뒤 정자세로 누웠다. 명상실에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교수님은 정말 괜찮으신가?’
자려고 자세를 잡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피로감에 눕자마자 죽은 듯이 잠들었을 것이다.
나쁜 것은 왜 한꺼번에 오는 것일까. 교수님이 드레이닝에 걸린 것이 올해 초, 수에즈 프로젝트에선 예상치 못한 몬스터 출현으로 난항, 지중해 게이트 발생, 사우디 아라비아 피랍, 메트로서울 테러 위협, 리야드 멸망, 그리고…. 교수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힘드실 것이다. 교수님의 드레이닝은 당사자도 아닌 최이삭의 멘탈을 몇 달 간 날아가게 만들고 무기력함에 빠지게 만들었다. 당사자인 교수님께서 힘드시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이 홀로 불안에 괴로워하거나 눈물 짓는 건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지만….
학과장님은 분명 교수님의 가장 큰 뒷배지만, 최이삭을 비롯한 학계 많은 대학원생들의 고혈을 짜내는 대부분의 악습은 학과장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았다 할지라도 자기가 부려먹던 제자의 마음을 살뜰하게 살펴줄 섬세한 성격이 아니신 게 분명했다. 교수님이 드레이닝에 걸렸을 때 곧바로 ‘세계 멸망은 안 일어나겠네!’ 하면서 농담을 던진 학과장님의 말씀이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교수님의 부모님은 그래도 많이 위로를 해주실까…?’
교수님 부모님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교수님한테도 부모님이 계시긴 할 텐데…. 최이삭은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려 보았다. 연락이야 일년에 한두 번 하나…? 자신이 만약에 드레이닝에 걸린다면 과연 부모님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될까?
‘아닐 거 같다….’
애초에 내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는데…. 말도 안 통하고…. 할 얘기도 없고…. 교수님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도 않고….
불안했다.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드레이닝에 관련된 기사가 나왔을 때 길어야 6개월일 거라고 했다. 엘리야 민 교수님은 드레이닝 속도가 지금 수준으로 관리 가능하다면 1년 정도도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장 내일 그녀의 드레이닝 홀이 엄청나게 커져 바로 위급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기사로부터도 한 달이 지났다.
교수님은 정말로 불안하지 않으신 것일까. 괜찮으신 것일까. 힘드시지 않을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교수님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교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최이삭은 그녀의 입장을 가늠해보려고 했다. 그녀와 같은 천재의 비범한 사고를 능히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그래도 끝까지 내 일을 해나갈까? 교수님처럼?’
그럴 것 같다.
최이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이 번쩍 깨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말씀대로 역시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는 게, 그녀가 하고 싶은 걸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게 그의 일을 다 하는 것만이 그녀를 위한 것이다.
‘나도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다시 정신 차린다고 차렸는데 오히려 실수는 훨씬 늘었다…. 교수님 말씀대로 학부생도 안 할 실수나 하고…. 아, 병신, 등신. 내가 일만 똑바로 하면 교수님이라고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 시점에 나한테 힘 빼면서 호통치고 싶으시겠어. 아, 내가 등신이다. 내가 그냥 세계 최고 머저리야. 지금 자겠다고 수면실 들어올 군번이나 되냐고.’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수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그녀의 논문에 들어갈 자료를 검토하고 내일 하려고 생각했던 아칸소 프로젝트 용 회전 웜홀 시뮬레이션 수정에 들어갔다. NASA에서는 매일매일 아칸소 게이트에서 나오는 물리량을 여기로 보내주고 있었다. 최대한 오차를 수정하여 아칸소 게이트에 가장 근접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거의 회전하지 않던 수에즈 게이트에 비하여 아칸소 게이트는 활동이 활발한 게이트였기 때문에 오가는 몬스터의 물리량으로 인해 데이터 산출이 어렵기도 했다.
그렇게 대략 22시까지 교수님의 논문에 더 매달렸다. 중간에 오 박사가 자기 논문을 포기하고 최이삭이 시켰던 데이터 정리를 해와 그걸 그래프화 하여 깔끔하게 교수님의 논문에 넣었다. 뿌듯했다. 그녀가 시킨 것보다 더 많은 걸 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대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해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일지도 모르, 아니, 분명히 착각이겠지만.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석사 때만 해도, 아니, 박사 2년차까지만 해도 매우 적극적으로 교수님이나 당시 랩장이 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해내서 들고가곤 했다. 칭찬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줬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박사 2년차까지는 정말 별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기초과학이라는 것이 박사 2년차까지는 책을 열심히 파서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과학이론을 전부 독파하고 시키는 걸 하는 게 다였다. 판가름이 나는 건 3년차부터였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그녀에게 얼른 자신을 증명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아니, 지금 돌아보면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분명 그렇게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 그전 랩장이었던 선배가 얼떨결에 졸업장을 받고 나가고 남은 선배들 중 가장 연차가 높은 선배가 랩장을 맡았는데, 그 선배는 랩장이 되자마자 급격히 높아진 교수님의 기대와 채찍질에 매우 힘들어했다. 그는 박사 2년차에 들어서자마자 나서서 랩장의 일을 분담해서 하기 시작했다. 꼭 언젠가 교수님이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선배가 결국 6개월만에 연구실을 그만두고 나가게 되자 남은 4년차는 없었고 3년차 선배들마저 전부 랩장을 고사하는 바람에 교수님은 3년차들을 대거 자르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남은 선배가 울며 겨자 먹기로 랩장을 맡게 되자 최이삭은 선배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수님께 직접 자신이 해보겠다고 나섰다.
그때 교수님이 잠깐 아무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보았던 것을 잊지 못했다. 분명 그때가 교수님이 처음으로, 제대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랩 인턴 시절까지 합치면 무려 5년만이었다.
최이삭은 타자를 치던 손을 멈췄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치 그때처럼 온몸이 오싹오싹했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감으며 잠시 자신의 상기된 양 뺨을 두 손으로 살짝 툭툭툭 쳤다. 정신 차리자.
22시부터 최이삭은 다시 자신의 졸업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틈틈이 대전에 있는 중력 연구소에 가서 필요한 중력 마법 구현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수에즈 프로젝트 때 교수님께 그렇게 나쁘진 않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공 중성자 쌍성을 만들어 중력파를 검출하여 학계 이론 중 하나를 검증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실험은 스웨덴까지 가서 해야겠지만 생성 단계까지는 한국에서도 연습할 수 있었다. 연습이 좀 많이 필요했다. 따로 또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중력 증폭 마법은 최이삭이 개량한 것이었고 평소에 쓰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졸업 논문이라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두 개가 함께 진행되는 것이라 결국 두 개를 같이 쓰고 있었다. 예정대로 진행되면 겨우 12월 졸업 논문 제출일까지는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한참 몰입해서 스웨덴에 가서 할 실험 내용을 상세히 기획하고 졸업 논문의 초입을 적고 있었다. 누가 불러도 못 들을 정도였다. 최이삭 본인은 아직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세현 퀸이 드레이닝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연구실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니 안절부절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집중력을 해치지 않아 생산성이 좋아졌다.
23시 50분경이 되자 약간 나른한 기분이 들며 문득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또다시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으슥한 기분이랄까.
‘오늘 왜 이러지.’
머릿속에 교수님이 자신을 칭찬하는 이미지가 아주 구체적으로 강렬하게 떠올랐다가 짧은 시간 동안 그것을 수없이 반복했다. 강한 몰입 후 느껴지는 고양감이었다. 이런 건 정말 오랜만이다. 예전엔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는 상상을 항상 하면서 들뜬 기분으로 살았다. 그때는 정말, 진심으로 대학원 생활이 좋았다. 다들 왜 그렇게 죽는 얼굴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대로만 하면 제때 졸업할 수 있는 거 아냐?’
졸업논문심사에서 그녀가 그의 논문을 읽고 있었다. 물론 졸업논문심사라면 이미 심사날 전에 다들 그의 논문을 다 읽었겠지만 말이다. 다른 교수들은 의례적으로 7점을 이미 매긴 후 다들 세현 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최이삭은 너무나 긴장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히 좋은, 아니, 괜찮은 걸 써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역시 하찮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제출했다고 화를 낼까.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며 그를 버러지처럼 쳐다볼까?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이날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그 이상을 바쳤다. 그의 논문을 한 번 더 천천히 읽은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치 그때처럼, 진지하게, 그라는 남자가 어느 정도 되는 남자인지 가늠해보던 그날처럼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순간은 마치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니, 세상에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점수를 매긴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을 것이다. 그의 신경줄이 다 타버릴 것처럼 긴장되어 입안은 마르고 앉은 자리가 너무 불편해서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을 때 그녀가 무심하게 말하는 것이다.
졸업 축하한다, 최이삭.
흐으. 최이삭은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거렸다. 정말로 죽어도 좋을 정도로 기쁠 것이다.
‘아아, 교수님…. 물론 포닥도 해야겠지만…. 2년은 더 갈리겠지만…!’
열심히 하자. 더 열심히. 솔직히 이것보다는 더 열심히 할 수 있다. 맞아. 조금은 더 잘할 수 있잖아. 최이삭은 고개를 번쩍 들고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이미 한참 늦은 시각이었다. 피곤할 법도 한데 자꾸 입꼬리가 히죽히죽 올라갔다.
“형! 형! 형, 잠깐만요.”
24시 42분. 갑자기 오태연 박사가 큰 소리를 냈다. 석사들은 다 퇴근하고 1, 2년차들도 다 퇴근하고 최이삭과 오태연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최이삭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왜? 뭔데?”
오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디바이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최이삭에게 다가왔다.
“형, 이거 큰일난 거 아니에요? 맞죠?”
“뭔데? 왜?”
최이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최이삭도 볼 수 있도록 디바이스 화면을 내밀었다.
<속보: 사우디 아라비아의 멸망은 세계물리학회의 실험으로 인한 것. 당시 리야드는 레어화 되지 않은 상태였음.>
화면이 전환되었다. 앵커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속보입니다. 한국 시각 2128년 6월 23일 00시 19분, 스페이스, 데일리튜브 등의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 사우디 아라비아 멸망이 세계물리학회 주도의 실험 때문이라는 폭로 영상이 올라와 15분만에 총 3억뷰를 달성했습니다. 폭로 영상의 주인공은 사우디 아라비아 인질 구출 작전을 맡았던 육군 특수작전부 소속 한나 홉스 중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추정 인물은 영상 말미에 30분 뒤 또다른 폭로 영상을 예고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