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간의 가치 (2)(3권) (4/7)

인간의 가치 (2)

TV엔 온통 인질극과 무사 생환한 인질들, 영웅적인 구출작전,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정부에서 주는 용역비는 물론이고 사우디에서도 현물을 잔뜩 받아온 그는 생긴 것 답지 않게 돈을 매우 밝혔다. 방금 기자회견을 3시간 동안 하고 나오더니 그는 또다른 토크쇼에 참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방송국 중에 가장 출연료를 세게 주는 토크쇼에 출연한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니 저녁 11시였다. 세현은 최고급 방탄 세단의 뒷좌석에 탔다. 그녀는 사우디에서 귀환한 이후로 경호원을 열댓 명이나 달고 다녀야 했다. 앞뒤로 호송차량이 따랐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꺼냈다.

<어디야?>

그러자 그는 디바이스를 만지고 있던 중이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집>

그리고 바로 다시 메시지가 왔다.

<왜?>

<지금 시간 돼?>

<응>

<집 어디야>

<**동 아크로폴리스인데>

<지금 거기로 갈게>

<알았어. 집 치워야겠다>

그대로 세현은 운전석에 앉은 경호원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아날로그 차는 필요했다. 해킹과 테러의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디바이스를 옆에다 던져놓고 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인질극이 벌어지고 난 이후로 세현은 거의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연구 때문에 못 자는 건 안 억울한데 이건 억울했다. 게다가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빨강 머리에게는 전처럼 3일에 한 번씩은 가고 있었다. 그는 그 용병이나 알렉스만큼 섬세한(?) 타입도 아닌 것 같았고 보이고 행동하는 대로 단순했다. 그래서인지 한 번에 열 발 정도는 잘 뽑아줬다. 드레이닝 속도가 빨라져 마력을 보충해야 할 주기가 짧아진 것도 문제였고 내일까지 마력을 최고치로 찍고 싶었다.

'지금 10억 정도…. 열 발 정도 받아가면 4~5억.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차 안에서 20분 정도 조각잠을 잤다. 그리고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꼭대기에 위치한 펜트하우스가 유리성처럼 빛나는 번쩍번쩍한 맨션이었다. 세현은 경호원이 열어주는 문으로 내리며 잠깐 위를 쳐다보았다. 그가 메시지로 보내준 대로 가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디바이스로 보내준 초대권 덕분에 따로 할 게 없었다. 꼭대기 층에서 내리자 곧바로 널따란 거실과 유리로 된 천장과 외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빨강 머리는 소파에 끼인 여자 속옷을 빼내고 있었다. 그는 그걸 등 뒤로 얼른 숨겼다. 세현은 멋진 그의 유리성을 쭈욱 둘러보았다.

"왔어?"

그는 그걸 얼른 쓰레기통에다 넣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경호원들은 밖에다 두었다. 그녀는 현관 앞에 자신의 가방을 털썩 놓았다. 구두를 벗어 던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피곤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제수스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는 방금 샤워를 했는지 상체를 헐벗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밤중에 올 줄은 몰라서…. 치운다고 고생했어."

"같이 사는 여자들 있는 거 아니야?"

세현은 그가 주물러주는 것이 생각보다 시원해 눈을 살짝 감고 그 자리에 섰다. 제수스는 그녀를 멋진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유리벽을 바라보는 방향에 있는 카우치에 앉혔다. 다행히 아까 속옷이 박혀 있던 카우치는 아니었다.

"아니…! 없는데! 다 끊었는데?!"

제수스가 펄쩍 뛰며 그렇게 외쳤다.

"나 지금 너밖에 없어."

그는 언젠가 미르 킹쉴드가 자기 여자한테 하는 걸 들은 대로 읊었다. 세현이 픽 웃었다.

"뭘 또 끊어."

"아니…, 진짜야."

집을 잘 안 치워서 아까 그런 게 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의 걸즈도 지금 거의 공중분해 상태였다. 반은 이미 다른 선수랑 바람이 났고 반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현은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아, 거기."

"여기?"

그는 세현의 어깨와 뒷목, 날개뼈 부근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녀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제수스는 뒤에서 그녀의 귓가에 쪽 입을 맞췄다.

"무슨 일 하길래 사람을 이렇게 잡아?"

"……."

세현은 잠깐 그를 돌아보았다. 제수스가 해맑은 얼굴을 하고 대답을 해달라는 듯 그녀의 얼굴을 계속 보았다. 세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말을 말자….

'차라리 이래서 더 편한 것도 같고.'

세현은 목을 죄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제수스는 그녀의 양팔 밑에 자신의 양팔을 넣어 그녀를 뒤에서 껴안은 자세로 그녀의 정장 상의 단추를 풀어서 옷을 대신 벗겨주었다. 그리고 정장 바지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려 그녀의 바지도 벗겼다. 셔츠 단추도 하나하나 풀면서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빨리 열 발 해서 담아봐."

세현이 피곤에 쩔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럼 또 해주는 거야?"

제수스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그렇게 물었다.

"못 해. 너무 피곤해."

"아~ 무슨 낙으로 하라고 그럼?"

"피곤해."

그가 옷을 다 벗겨주자 세현은 양말도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호리병보다 더 굴곡진 몸매였다. 키가 크고 당당한 어깨와 선이 예쁜 팔, 뒤에서도 살짝 보이는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둥글게 곡선을 그리는 골반…. 그녀는 깔끔하지만 대충 묶어놓은 머리카락도 풀고는 욕실을 찾았다.

"나 씻을 동안에 해. 주사기는 가방에."

그녀는 하품을 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제수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그녀가 짧게 샤워를 하는 그동안 정말로 열 발을 해놓았다. 세현은 바스타월을 몸에 감은 채 밖으로 나와 전부 들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 몸에 집어넣었다. 빨리 넣을 수록 보충량이 많으니 그냥 전부 넣었다. 어차피 곧 잘 생각이니 잘 동안에 손실되는 마력 걱정 없이 오랜만에 오래 잘 수 있을 것이다.

"하아."

세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오늘 할 걸 다 하고 나니 더더욱 피로가 몰려왔다. 여기서 집으로 갔다가 다시 잠실 쪽으로 가야할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미팅을 왜 자꾸 잠실에서 해? 차라리 여의도나 광화문 쪽에서 하지.'

안보수석은 자기가 주로 일하는 곳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세현의 자택은 당연히 한적한 교외였다. 뭐 하려고 공기도 안 좋고 시끄러운 도심에서 살겠는가.

'여기서 자고 갈까.'

어디든 좋았다. 잠만 잘 수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제수스가 쫑긋 귀가 솟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나왔어?"

그가 미소를 지었다. 세현이 물었다.

"나 여기서 자도 돼?"

"어? 어! 당연하지!"

제수스가 벌떡 일어났다. 세현은 이제 정말 기절할 정도로 피곤했다.

"그럼 나 좀 자자. 어디서 자면 돼?"

"여기. 여기여기."

그는 얼른 걸어와서 그녀를 안내했다. 여기는 그녀의 옷도 없었고 옷을 입을 힘도 없었다. 어차피 이 남자와는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고 그녀는 그대로 패밀리 사이즈만한 거대한 침대에 털썩 엎드려 누웠다. 그걸 보고 제수스가 어디론가 가서 한창 부스럭대다가 뭔가를 찾아왔다. 그는 세현의 머리를 수건으로 마저 눌러 닦았다.

"머리 말리고 자."

그가 헤어 드라이기를 켰다. 비싼 건지 별 소음없이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그가 세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며 머리를 말려주었다. 세현은 노곤하게 그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여자한테 엄청 막대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니…! 그건…."

사실 할 말이 없다. 제수스는 자신의 섹시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세현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겨우 말했다.

"왠지…, 너한텐 잘해주고 싶어서…."

"……."

"많이 피곤해?"

"……."

"자?"

자는 것 같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 말리고 가지런히 빗었다. 그리고 침대 밖에 다리를 내놓고 자고 있는 그녀를 들어올려 이불을 들추고 침대 가운데에 바로 눕혔다. 침대의 틀은 검게 칠을 한 마호가니, 매트리스는 최고급에 침구는 세련되고 짙은 회색이었다. 물론 그가 뭘 알고 그걸로 산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불편하겠지….'

그는 일단 그녀의 몸통을 감싼 바스타월을 슬 풀어서 멀찍이 있는 테이블에 던졌다. 그녀의 몸은 바로 이불로 덮어주었다. 이제 그녀는 그의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데 별 거리낌이 없어 보였으니 괜찮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고 있는데 괜히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제수스도 침대로 올라왔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불을 다 끄자 유리벽 너머로 메트로서울의 대낮같이 환한 야경의 빛이 새어 들어와 침실을 파랗게 비췄다. 창문의 차광 기능을 켜기 전에 그는 세현의 곁에 딱 달라붙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하나하나 선을 그리듯 보다가 검지로 그녀의 코끝을 건드렸다. 바로 손을 뗐다가 조심스럽게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누워 그녀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다.

'뭘까…, 이거….'

예쁜 여자랑, 그것도 알몸의 예쁜 여자랑 그의 침대에 단 둘이 누워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은 언제나 왁자지껄 떠들썩한 건 줄만 알았다.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투명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좋았다. 제수스는 좀 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벤 베개에 머리를 눕혔다. 그리고 이불 채로 그녀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제수스는 눈을 살짝 떴다. 그는 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의 피부를 온몸으로 느끼며 쓰다듬었다. 어느샌가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녀가 그의 집, 그의 침실, 그의 품에 있었다. 일어나기 싫었다.

그의 집에서 그의 샤워용품과 화장품을 쓰고 그의 침대에서 자서 그런지 그녀에게선 고유의 향기와 그의 냄새가 동시에 났다. 기분 좋은 조합이었다.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늘씬하고 기다란 다리 한쪽을 자기 허리에 올리며 아침이라 발기한 자신의 것을 그녀의 것에 비볐다. 그대로 꾹 눌러서 넣으려고 했는데 안 들어갔다. 아~ 제수스는 그대로 그녀의 여성기를 애무하듯 자신의 자지를 비볐는데 그녀가 살짝 인상을 쓰더니 눈을 떴다.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했는지 약간 쉰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수스는 그녀의 코를 입술로 물며 웅얼거렸다.

"하자…."

"5분만…. 5분만 더 자자…. 못 일어나겠어…."

그녀가 끙끙거리며 엎드렸다.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다. 제수스도 덜 깼지만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등을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그리고 자꾸 그녀의 여성기를 공략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하자, 응…? 하자아…."

세현은 자신의 다리 사이를 자꾸 문지르는 그의 흉측하고 시커먼 남성기를 손으로 잡아서 밀었다.

"안 해…. 잠 좀 자자. 잠 좀…."

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세현은 같이 자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가 하아, 하고 숨을 뱉으며 침대에 얼굴을 박고 문질렀다. 그리고는 좀 부은 얼굴로 일어났다. 그녀는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당겨 온몸을 감싸고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제수스도 잠이 깨서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괴고 열린 침실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품을 크게 했다.

세현이 펜트하우스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누구야?"

그러자 인공지능이 공동 현관의 인터폰을 연결했다.

[옷 가져왔습니다.]

"알았어. 올라와."

그러자 인공지능은 자동으로 경호원을 아크로폴리스로 들였다. 세현은 카우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옷을 모아서 한 손에 들었다. 그러니 곧 경호원이 올라왔다. 깔끔한 명품 정장이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면서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걸 그에게 주고 새 정장을 받았다. 그리고 종이가방도 주었다. 그녀의 사이즈대로 속옷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수고."

"네.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한 시간만."

"알겠습니다."

그리고 경호원은 다시 내려갔다. 세현은 받은 정장을 걸 만한 곳에다 걸어놓고 다시 침실로 갔다.

"30분 뒤에 깨워줘."

[알겠습니다.]

인공지능에게 그렇게 말하고 세현은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제수스는 또 이상하게 침대에 걸쳐져 있는 그녀를 들고 이불 채로 자기 품에 안고 다시 누웠다. 그녀는 벌써 다시 잠든 것 같았다. 제수스도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짧디짧은 30분이 지나자 인공지능이 알람을 울렸다. 그녀는 컨디션이 안 좋은 얼굴로 다시 일어났다.

"아…."

"그렇게 피곤하면 좀 쉬어."

제수스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일 같은 거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나 돈 많은데."

세현은 또 살짝 정 떨어진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치 없이 응? 하고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침실 욕실로 향했다. 제수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따라갔다. 욕실에 하얀색 목욕가운이 걸려져 있자 이불을 던져놓고 그걸 걸쳤다. 제수스가 그 이불을 뭉쳐서 휙 던졌다. 침대까지 안착시킨 게 신기했다. 세현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물었다.

"여기는 새 칫솔 어디 있어? 머리 묶을 건 있어?"

"어…, 잠시만…."

거실에 붙어 있던 욕실에는 찬장을 여니까 바로 있었는데 여기는 없다. 제수스는 얼른 욕실 밖으로 나갔다가 그녀가 원하는 걸 찾아왔다. 세현은 이를 닦기 시작했다. 제수스도 그녀의 옆에서 이를 닦았다. 그녀는 세수를 하고는 중얼거렸다.

"머리 잘라야지…."

머리를 아예 짧게 잘랐다가 그냥 방치하면 어느샌가 이만큼 자랐다.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간 게 벌써 몇 년 됐으니…. 제수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얼마나? 많이?"

"왜."

"머리 긴 거 예쁜데."

제수스가 살짝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귀찮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세수를 하고는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입었다. 그러니 금방 말끔해졌다. 그녀는 현관으로 가서 벗어 던져놓은 구두를 신었다. 천장까지 닿는 거울을 한 번 보고 옷 매무새를 바로잡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세현은 하품을 한 번 하고 관자놀이를 잠깐 문질렀다. 제수스는 옆에서 그녀의 허리를 슬쩍 끌어안으며 그녀의 광대에 입술을 눌렀다.

"예쁘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칭찬했다.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영 잠이 안 깬 얼굴이었다.

"이틀 뒤엔 또 볼 수 있는 거야?"

근 2주 정도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그녀를 만났다. 두 번에 한 번 정도는 몸을 섞기도 했다. 정말 좋았다. 제수스는 정을 나타내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세현은 잠깐 자신의 디바이스로 날짜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글쎄. 이틀 뒤는 안될 것 같은데."

"그럼 언제?"

"모르겠어. 어디 가야 돼."

"또? 어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지나가듯 말했다.

"당분간 못 볼 거야."

"…뭐?"

제수스가 그녀를 놓아주다가 흠칫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았다.

"왜? 얼마나? 그럼 언제 볼 수 있는데?"

"모르겠다니까. 요새 바쁘다고 했잖아."

세현은 그렇게 말했다.

"놔. 가야 돼."

어째서일까. 정말 왜일까. 제수스는 말을 찾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난… 도대체 너한테 뭐야?"

말하고 깜짝 놀랐다. 이런 대사는 들은 적은 있어도 뱉어본 건 처음이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할 법도 한데, 생각보다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심 또 놀랐다.

세현은 전혀 기대하지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약간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도 그랬지만, 이 빨강 머리도 간혹 귀찮았다.

"너 내 성은 알아?"

"……."

"난 니 이름도 몰라. 그런 사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손 떼."

"…제수스. 내 이름."

제수스 강…. 그가 말했다. 세현이 한숨처럼 대꾸했다.

"알겠어."

제수스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보다가 뭔가 힘들어서 시선을 내렸다. 뭔가…, 괴로웠다. 바쁘다고 했으니까 이제 놔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은 뭐야?"

제수스가 물었다. 세현은 더 이상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짧게 대답했다.

"퀸."

제수스는 엘리베이터를 놓아주었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가 와서 디바이스를 귀에 대며 제수스에게서 시선을 뗐다. 문이 닫혔다.

"으음…."

제수스는 습관적으로 자기 뒷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내가 그렇게 별론가.'

여자들은 보통 그를 좋아했다. 그도 그럴게, 그는 유명인사였고 잘생겼고 돈도 많았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어쨌든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이란 말이다. 같이 있으면 재미있고 돈도 잘 쓰고 참 괜찮은데 왜 세현은, 저 세현 퀸이라는 여자는 그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까?

'몇 살인지 물어봐도 대답 안 해, 뭐 하는지 물어봐도 씹어, 먹여 살려준다는데도 콧방귀도 안 껴….'

요새 입고 다니는 거 보면 다 비싼 거던데. 무슨 이상한 경호원 같은 것도 따라다니고. 돈이 많은 여잔가? 그런 여자가 왜…. 다른 건 몰라도 여자들 입고 다니는 게 비싼 건지, 안 비싼 건지는 잘 알았다. 그런 것 때문에 GAS(Girls and Sisters)를 유지하는데 돈이 엄청 든다.

"아니, 뭘 좀 알아야지 좋아하는 것도 해주고 하지, 참…."

선물도 몇 번 사봤는데 전부 귀찮아 했다. 제수스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한참 그렇게 서 있어도 도저히 수가 안 났다. 그는 끄응, 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다 머릿속에 번뜩 뭔가 떠올랐다.

[돈으로 안 되는 여자들이 있어요. 너도 다 해봤잖아. 해러드도 데리고 가고 사고 싶은 거 다 사주고 좋은 거 먹이고, 어? 물론 그런 거 다 중요해, 중요한데. 그만큼 마음도 중요하다는 거야. 잘난 여자들은 말이야, 하나도 안 빼먹고 다 따진다? 머리 털끝 하나까지 따진다니까. 그리고 그걸 흡족하게 다 채워줄 수 있는 남자야말로 진정한 남자, 잘난 남자. 어? 무슨 말인지 알겠냐?]

주위에 아는 놈 중에 돈 많은 여자 만나는 새끼는 그 새끼밖에 없었다. 그는 다 해보기는커녕 아무것도 못 해봤다. 그녀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따지더라도 자신이 그걸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제수스는 인공지능에게 말했다.

"미르 킹쉴드한테 전화 좀 걸어봐."

아, 이 새끼 또 엄청 잘난 척할 텐데. 제수스는 그렇게 한숨을 쉬었다.

*

세현은 곧바로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으로 향했다. 거기서 만나기로 했다.

"다 했냐?"

최이삭의 병실로 들어가자마자 세현이 물었다. 사우디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좀 살이 올랐던 그는 일주일 동안 병원에 처박혀서 밀린 숙제를 하느라 또 커피를 줄줄 달고 있었다.

"거, 거의 다 썼습니다, 교수님."

그는 커피를 호로록 더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연구비를 펀딩 받기 위해서는 항시 이런 보고서를 쓰는 것이 필요했고 그런 귀찮은 짓은 원래 그 같은 랩장이 책임지고 다 하는 것이었다. 오 박사에게 맡겼다가 그가 받아서 다시 쓰고 있었다.

"그래, 제 시간 맞춰서 보내라."

그리고 그녀는 예고도 없이 최이삭의 턱을 잡더니 개 품종이라도 살피듯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픈 데는 없고?"

"없습니다, 교수님."

이런 식으로 묻는데 아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최이삭은 그녀의 손을 잡아서 얼굴에서 떼어냈다. 곧 캘리 박이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병실에 쉴드를 쳤다. 요새 캘리 박이나 세현 퀸이나 최이삭이나 랩학생들이나 죄다 경호원들이 딸려 다녔다.

"중국 오케이, 미국 오케이, 유럽은 모르는 척할 거고. 책임은 아랍에미레이트, 오만, 예멘, 카타르가 지기로 했고."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최이삭이 굳은 얼굴로 캘리 박을 보았다. 캘리 박은 눈을 끔벅하며 세현을 보았고 세현이 인상을 썼다.

"꼭 그렇게 해야겠는데."

"넵…."

최이삭은 닥쳤다. 캘리 박이 다가와서는 세현에게 말했다.

"안 수석이 밥 한 번 먹자더라. 먹어라. 이것도 안 수석이 빨리 연결시켜준 거니까."

"네."

세현은 자기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띄우며 말했다.

"아칸소 프로젝트도 예정대로 진행할 겁니다. 지중해 게이트 때문에 갑자기 좀 꺼려하는데…. 일단 석세스 교수가 게이트 연결 이론 논문 낸 교수랑 연결시켜준다더군요. 어쨌든 미국은 아칸소 게이트만큼은 꼭 없애고 싶어하니까 예정대로 되겠죠."

연결 이론을 대충 보니 꼭 옆에 생기는 건 아닌 거 같고 미국 입장에서는 본토에 있는 게이트만 없앨 수 있다면 어쨌든 땡큐일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게이트 연결 이론 논문에 대해 언론의 관심이 가지 않도록 함께 열심히 공작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다.

"음…, 우리가 수에즈 성공시키면 거기도 바로 가려고 했지만 거기 몬스터는 어쩌냐. 이번 수에즈는 몬스터 안 나온다고 하고 갔는데도 엄청 나왔잖아. 거긴 더할 텐데. 어떻게 하려고?"

"대형 드론 이용해서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돈은 들겠지만."

"이건 언제 짰냐."

캘리 박은 한 번 그녀의 연구계획서를 슬슬 읽어보았다. 대충 읽어보아도 어떻게 하려는 건지 보였다.

"하여튼 넌 이런 건 잘해. 죽기 직전까지 많이 공부하고 많이 토해 놔라."

"근데 계측기를 어디서 구하죠? 이예프 소장은 내가 전화만 하면 쌍욕부터 하던데."

스웨덴 온살라 중력 연구소 소장 세리나 이예프는 캘리 박의 제자이기도 했고 세현 퀸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이기도 했다. 수에즈 게이트 소멸 실험 때 온살라에 있는 물리량 계측기를 전부 빌려왔는데 그걸 수에즈에다 버리고 와버렸다. 이예프 교수는 세현이나 최이삭이 전화를 걸면 아주 거품을 물고 한국어, 영어, 스웨덴어로 쌍욕을 퍼부었다.

"안 그래도 그거 가지고 올 용병팀도 꾸리고 있다. 몇 명이나 뒈질지 가늠이 안 돼서 얼마나 돈을 써야 할지 모르겠네."

지금의 언론, 여론은 전부 지중해 게이트와 그에 따른 사건사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인질극 등으로 갑론을박이 한참이었다. 원래 인터뷰도 잘 하지 않는다던 다니엘 스톤하츠는 시사 토크쇼나 유명 토크쇼에 두어 번 얼굴을 비추기도 하며 일약 영웅이 되어 이름을 팔고 있었다. 학회의 의도대로 책임론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부정하며 인질극을 적절히 활용하여 대중의 관심을 학회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와중에도 다음 단계를 착실하게 밟아가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놈은 돈 벌겠다고 혈안이던데. 잘 쓰면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위성사진 보니까 그 근처가 몬스터 레어로 꽉 찼더라. 우리가 자이언트랑 빅비틀을 떼거지로 죽여 놨더니만…. 걔는 사우디에서 다이아 잔뜩 받아서 이번엔 영 생각 없는 것 같던데?"

군대의 보조를 받으며 전략용 병기로 뛰는 것과 중대 단위로 짠 용병과 같이 작전에 투입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잠깐의 방심으로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이미 벌 만큼 번 남자가 뭐 하려고 그런 짓까지 하겠는가.

"우리한테도 용역비 받고 사우디에도 그런 거 받았으면 꽤 챙겼겠네요?"

"어."

"그래서 어쩌시게요?"

"어쩌긴. 빨리 수 써서 우리 쪽으로 끌어 들여야지. 그런 애가 무슨 TFC야, TFC가."

게다가 그만한 마도사가 국제정세나 돈 때문에 용역을 뛰는 것은 상당히 안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일이 일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TFC나 엘 드라카 위원회장이랑 연락을 해서 방법은 찾아보고 있는데 존스홉킨스에서 위약금까지 다 물어준다고 했는데도 안 간다고 했다더라고. 일단 이스트드래곤 구단주랑은 밥 한 번 먹기로 했다."

캘리 박이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빛이 영 죽어 가지고…. 빠릿빠릿하겠어요?"

"몰라. 얘기 좀 해봐야지."

그렇게 그들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캘리 박은 최이삭에게 다가가서 그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도 영 고기짝 살펴보는 행태다.

"괜찮냐? 치엔위 걔는 요새 잠도 잘 못 잔다더라."

"언제는 잘 잤다고…."

최이삭이 중얼거렸다. 캘리 박이 그의 안색을 막 살펴보다가 그의 바이탈 신호를 수집하고 있는 스크린도 보았다.

"리밍이가 짜증 엄청 내더라. 한 대 쥐어박았더니 하던 것도 때려치우고 조퇴했대."

최이삭이 헉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걔 간덩이가 언제 그렇게 컸대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돌아오면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뛰던대, 리밍이. 니가 치엔 박사한테 전화 좀 해봐라."

"네…."

캘리 박은 최이삭의 건강상태, 대체적으로 빈혈, 피로로 인한 간 및 신장 기능의 약화 등등을 확인하며 당부했다.

"안 좋은 거 있으면 이김에 다 고쳐라, 어? 괜히 퀸 교수 속 썩이지 말고."

"네, 학과장님…."

최이삭이 세현에게 힐끗 시선을 주며 그렇게 답했다. 확실히 세현 퀸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캘리 박처럼 정치질을 하는 것에 항상 염증을 내던 그녀였다. 연구비는 따야 하니 최소한의 것은 했지만 이번 일은 학회나 그녀의 입장에서도 아주 큰일이었다. 할 게 많았다.

[노친네가 하는 말 들을 걸…. 내가 더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누가 감히 우리 못 건드리게…. 아….]

교수님은 지금 건강 걱정하기도 바쁘신데…. 최이삭은 자신이 그녀에게 짐을 얹은 것 같아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하지만 아직 그는 학회에서나 어디서나 아직 한 사람의 몫을 하는 남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보고서를 쓰는 척 교수님을 몰래 힐끗힐끗 보았지만 세현은 자신의 디바이스를 보며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여보세요. 아, 천 회장. 어, 어. 괜찮아. 괜찮아."

캘리 박은 누군가에게 전화가 와서 통화를 받기 시작했다. 세현은 이 바쁜 와중에 짠 재현 실험 계획을 디바이스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곧 최이삭의 옆에 앉았다. 그가 쓰고 있던 수에즈 실험 보고서를 옆으로 밀고 자신의 것을 띄웠다.

"이거 기반으로 쭉 써봐. 알았지?"

최이삭은 세현의 새로운 실험 계획서를 보았다. 그리고는 감탄하여 탄성을 냈다.

"이러면 전처럼 나오는 몬스터들 신경 쓸 필요가 없겠네요?"

"응."

"계측기도 적게 해도 되겠고…. 이번엔 회전 축퇴…."

최이삭은 정신없이 그녀의 언어로 적힌 실험 계획서를 읽었다. 이거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세상에 몇 명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잘 마무리해서 보내. 그리고 너 졸업 논문은 준비하고 있냐? 띄워봐."

"아, 그게…."

그러니까 변명을 하자면, 최이삭은 사우디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메트로서울에 돌아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그 일주일 동안 연구비 출현 기관용 실험 보고서, 연관된 나사 프로젝트 보고서, 학회에 올릴 사고 경위 보고서 등을 전부 쓰고 있었다. 이 길고 긴 보고서의 대장정을 홀로 힘겹게 써내려 가고 있는데 여기에 방금 세현 퀸이 새 실험 계획서를 마무리 지으라고 숙제를 하나 더 얹었다. 이 상황에 그가 자기 논문을 준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졸업 논문 기한은 12월 말…. 사실 지금쯤 제대로 된 계획은 나오긴 해야 했다.

세현은 인상을 팍 쓰더니만 그를 쳐다보았다.

"너 진짜 졸업 안 할 거냐? 그냥 내가 박사 이수 찍어줄까? 어?"

"아, 아뇨. 당장 하겠습니다. 퇴원하면 저번에 썼던 계획서대로 일단 시뮬레이션 실험부터 돌리고…."

최이삭이 줄줄 변명했다. 세현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팍 쉬고는 더 뭐라고 하기 시작했다.

"정신머리가 빠져 가지고. 야, 사우디에 2주 있다 온 게 뭐라고 지금 티 내냐? 어? 시간을 2주나 버렸으면 더 열심히 할 생각을 해야지. 까딱하다간 비명횡사해서 이때까지 한 거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도 있겠구나, 박사 이수도 못 달고 하늘나라 가면 얼마나 억울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미친듯이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진짜 확 이수 찍어버릴까 보다.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인데 니가 제대로 일을 안 하면, 어? 내가, 이걸, 그냥…!"

세현이 최이삭의 이마를 검지로 세게 콕콕콕 찔렀다.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얼른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녀는 요새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었다. 최이삭은 쭈글 하고 평소대로 그녀의 화를 받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

캘리 박이 당장 날아서 창문으로 갔다. 이미 병실 전체는 아까부터 쉴드로 감싸놓았다. 창밖을 보니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건물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캘리 박은 당장 디바이스를 들었다. 그녀가 전화를 걸기 전에 전화가 왔다. 경호팀이었다. 그는 곧바로 보고했다.

[테러인 것 같습니다.]

"사우디랑 관련된 거야? 우리 학교는 아니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판명될 때까지 거기 가만히 있으십시오.]

캘리 박은 자신의 손목에 찬 아주 비싼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한 시간 뒤에 출발한다. 3분 내로 메트로서울에 있는 우리 애들 위치 파악해서 보내고."

[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캘리 박은 니미, 하고 욕설을 내뱉고는 애들을 돌아보았다. 세현 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캘리 박을 보고 있었고 최이삭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캘리 박은 세현에게로 둥둥 날아오더니 그녀의 팔을 한 대 때렸다.

"쫄고 지랄이야, 이년이."

"아, 아니…, 쫀 게 아니라."

세현이 머쓱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캘리 박은 경호팀을 직접 만날 생각인지 병실밖으로 나갔다. 쉴드는 계속 유지되었다.

"참…."

세현이 알 수 없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최이삭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제 떨어져라."

"……."

최이삭은 눈을 크게 뜬 채 세현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안경이 비틀어졌다. 그녀의 등과 허리를 꽉 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사우디에 잡혀 있을 때 최이삭은 적대적인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협박을 받았다. 잠을 못 자게 하거나 독방에 가둬 두거나 음식을 주지 않는 것 같은 고문을 받았다. 나중에는 뺨을 맞기도 했다.

그는 그 상황을 이용하여 그들 모두를 죽여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제약이 되는 것이 그의 무기력을 심화시켰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지금까지 해온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는 허무함이 그의 마음을 좀먹었다.

[빨리 구해 줄게. 알았지? 걱정하지 마. 밥 잘 먹고 있어. 울지 마, 병신같이.]

다만 구하러 와준다는 그녀의 말만 믿고 있을 뿐이었다. 겨우 탈출해 와서도 그는 병원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탈출 과정에서 눈 뜨고 보지 못할 비정한 살생의 현장을 봐야만 했던 건 옵션에 불과했다. 비공식적으로 메트로서울의 테러발생위험도가 2단계가 상승했고 캘리 박과 세현 퀸을 비롯한 주요 인물에게는 엄중한 경호가 붙었다. 최이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가 가끔 와줄 때만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진짜 손 많이 가."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최이삭의 등을 안고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때 디바이스의 인공지능이 알림 소리를 냈다.

[교수님, 방문자가 있습니다.]

"누구야?"

세현이 물었다.

[알렉스 킴 군입니다.]

"들어오라고 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저기…."

알렉스가 쭈뼛거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녀가 최이삭을 끌어안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할 말을 까먹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가가서 세현의 손목을 잡았다.

*

"방금 그거 뭐냐?"

"테런가 보지."

알렉스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메트로서울도 안전 도시가 아니게 된 지 오래되었다.

"어휴, 무서워서 살겠냐."

알렉스의 매니저 신종현이 창밖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심드렁했다. 그리고 신종현이 헉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야, 니들 사우디에다 크게 엿 먹이고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냐? 괜히 서울만 피 보는 거 아냐?"

"몰라…. 나라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알렉스 킴이나 유리 라자레프도 나름대로 아주 큰일을 겪었다. 알렉스의 부모는 병실에서 좀처럼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남중국해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도 않은 아들이 수에즈까지 가서 무슨 중동 국가에 인질이 되지 않나, 무사히 돌아오고도 안전 문제로 병원에서 나오질 못하질 않나.

"아휴, 어떡해. 종현 씨, 상하이는 좀 낫겠지? 응?"

알렉스의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어떤 놈이 겁도 없이 TFC 선수를 건드리겠는가. 근거리에서 폭탄이 터져도 안 죽는다는데. 부모 노파심에 설마 아들이 폭탄을 맞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나 강하고 튼튼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신문도 뉴스도, 주변 사람도 부산을 떨어 대니 괜히 마음이 불안해서 알렉스의 부모는 병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내일 되면 퇴원할 겁니다. 여기서 경호 붙여준다는데 거절했어요. 사장님이 그냥 다시 기숙사로 들어오라고 하셨거든요."

신종현이 대답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알렉스."

알렉스의 부모님도 창에 붙어 연기가 나는 것을 디바이스로 찍다가 그렇게 대꾸했다. 신종현은 알렉스를 보았다.

"2주 전에 벌써 1군 훈련이 시작됐거든? 일주일 동안 진도 따라잡고 4주차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가서 형들한테 깍듯하게 잘하고."

"…아버님, 스케줄표 다시 드릴까요?"

"아뇨, 아뇨. 잘 가지고 있습니다."

매니저인 신종현이 말할 때마다 계속 아빠가 추임새를 넣었다. 알렉스는 누나와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는데 그들은 처음에 왔다가 알렉스가 무사한 걸 보고는 그 뒤로는 오지 않았다. 메시지나 보내며 시시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빠랑 엄마 이제 집에 좀 가라? 어?"

"아니…, 걱정되니까 그러지…."

부모님은 온몸을 비싼 물건로 둘둘 감싸고 있었다. 올해부터 아들이 연에 버는 돈이 억 소리가 나다 보니 자연히 그들도 두르고 다니는 게 달라진 것이다. 알렉스는 성질을 냈다.

"좀 가라고!"

"알았어. 알았다. 밖에 나가 있을게."

"그냥 집에 가라니까!"

알렉스의 아빠와 엄마는 신종현과 서던라이온 매니지먼트 사장의 손을 한 번씩 잡고는 VVIP 병동 응접실로 나갔다. 그리고 곧 부모님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퀸 교수님…! 또 뵙네요. 악수 한 번만…."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알렉스는 깜짝 놀라서 침대에서 내려가 문으로 다가갔다. 미닫이문을 아주 조금 열어놓은 상태로 밖을 살폈다. 그녀가 전화를 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갔지만 경호원의 제지를 받았다.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걸어 또 경호원이 서서 지키고 있는 최이삭의 병실로 갔다.

"……."

그녀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알렉스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알렉스의 부모님은 약간 황망한 얼굴로 알렉스의 병실을 돌아보았다가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알렉스는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알렉스는 그대로 집중해서 그녀의 기척을 따라갔다. 잠깐 최이삭과 이야기를 하는 게 들리더니 캘리 박이 들어가며 뚝 끊어졌다. 이 할머니가 또 쉴드를 친 것 같았다. 그리고는 에휴, 한숨을 쉬고 침대에 다시 드러누웠다.

"애들 괜히 그런 데 보내 가지고…."

신종현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유스팀 그런 데 안 보내겠죠?"

"글쎄요. 회장님이 워낙에 푼돈도 아까워하시는 분이라."

서던라이온 매니지먼트 사장이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녀는 우아하게 차를 들며 스크린에 뜬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지중해 게이트에 의한 각국 피해상황을 자세하게 써놓은 페이지였다.

"우리 회사 용병들도 보내실 생각이세요?"

신종현이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신문을 넘겼다.

"게이트가 너무 커서 좀 그래요. 회장님은 보내라고 하시는데."

"아, 역시…."

우리 회장님은 중국인 치고 너무 수전노야…. 신종현이 알렉스 킴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가 떠있는 자신의 디바이스 스케줄러를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얘 들어가면 또 한바탕 할 텐데, 괜찮겠죠?"

"그러니까요. 예정대로 2주 전에는 들어갔어야 했는데."

사장이 여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적당히 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럼 알렉스 군은 더 쉬고 난 유리 군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알렉스도 침대에서 허리를 일으켰다. 그도 매니지먼트 사장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마 구단주의 딸이라고 했던가 그랬다.

"안녕히 가세요."

"예, 사장님."

신종현이 허리를 꾸벅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비서가 열어주는 문 밖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신종현이 몸서리를 쳤다.

"어우, 난 우리 사장님 너무 불편해."

"왜?"

"몰라. 그냥."

알렉스는 여전히 정신을 집중해서 그녀의 기척을 느껴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알렉스는 잠깐 침대 위에서 마구 몸부림을 치며 짜증을 냈다.

"아오!"

"아, 깜짝이야."

신종현이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하린이랑 헤어졌다며? 야, 넌 어떻게 1년 넘게 기다려준 여자애를 그렇게 차냐."

"뭐가 사귄 거야…. 그냥 문자나 몇 번 한 것뿐인데."

"야, 그렇게 하린이, 하린이 하더니 마음 식는 거 금방이다? 그래서 수에즈에서 그 여자는 찾았냐? 캘리 박인가 하는 그 할머니는 아니었지?"

신종현이 물었다.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그 할머니 비서라는 그 여자는 진짜 예쁘더라…."

정장을 입고 다니며 기자회견을 하고 자기 보스를 보좌하는 모습을 보니 정장을 입은 여자에 대한 페티쉬가 확 끌어오른다. 눈도 크고 얼굴도 쌍큼하게 예쁜데도 아주 단정했다. 신종현이 쩝 하는 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여자는 어떤 놈이 만나나. 돈 많은 놈이 만나려나…. 어? 혹시 아냐? 수에즈에서 같이 있었을 거 아냐."

"그 누나는 잘생긴 남자 좋아해. 그리고 연하."

알렉스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

둘 다 해당사항이 아니다. 신종현이 약간 발끈했다.

"아니…! 남자는 마음이지, 마음! 마음이라고! 얼굴 뜯어먹고 살 거야? 나이? 남자는 서른부터야!"

"뭐래…. 자기도 얼굴 존나 보면서."

"아니, 그건…! 아무튼!"

알렉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옆방 갔다 올게."

"어? 유리한테?"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알렉스는 문을 열고 경호원들을 빼꼼 살펴보았다.

"교수님 만나러."

"누구? 그 할머니? 진짜 그 할머니냐? 어?"

알렉스는 그를 무시하고 일단 방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경호원들 앞에 섰다. 하나는 소드마스터고 하나는 일반인이었다.

"저…, 세현 퀸 교수님 좀 뵈려고 하는데요."

경호원은 알렉스를 잠시 이리저리 보다가 인이어로 허락을 구했다.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들어갔더니 세현과 그 안경잡이가 서로 껴안고 있었다.

"!"

알렉스는 당장에 다가가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최이삭이 안경을 다시 쓰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설명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좀…."

알렉스는 말없이 그냥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에서 내려 세웠다. 세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이삭이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나가자. 나가."

세현은 알렉스의 등을 밀었다. 알렉스는 씩씩거리며 최이삭을 노려보았다. 최이삭은 오른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웠다."

세현과 알렉스를 지나쳐 캘리 박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대요?"

"어. 우리 애들은 제 자리에 다 있다."

"네."

캘리 박이 최이삭을 보았다. 알렉스는 아직도 최이삭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세현에게 밀려 방을 나갔다. 최이삭은 어깨를 또 으쓱했다.

"쟤들은 아무리 같이 있어도 적응 안되네요. 진짜 짐승 같아요."

"원래 저렇다. 나이 들면 그래도 좀 괜찮아져."

"아, 그 용병은 좀 괜찮았죠. 왜 저러는 거예요?"

"영역 싸움 비슷한 거지. 너도 나름 수컷이라 저러는 거다."

"나름입니까…."

알렉스를 데리고 나간 세현은 그의 병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의 병실도 아주 널찍하고 인테리어가 고급스럽다.

"넌 애가… 자꾸 무식하게 굴래?"

"뭐라고?!"

알렉스가 씩씩거리면서 문을 보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현은 그의 코앞에 검지를 들어올렸다. 그가 깜짝 놀라 그걸 보았다.

"허락없이 내 몸에 손대지 말고 끌고 가지도 마라. 난 신고 같은 거 안 한다. 진짜 복날에 개 맞듯이 처맞는 수가 있다, 어? 이게 귀엽다고 보자보자 하니까!"

"아,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게! 진짜 죽고 싶냐!"

그녀는 열이 받아 알렉스를 퍽퍽 때렸다. 알렉스는 몸을 움츠리며 그녀의 주먹을 피했다. 아니, 경고만 하는 거 아니었냐고! 오라로 막지 않는 이상 맷집이 좋아서 그렇지 안 아픈 건 아니다. 세현은 성에 차게 그를 퍽퍽 때리고는 휴 하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알렉스는 기가 죽었다.

"잘못했어요…."

세현은 그의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래서 뭐?"

"…뭐가요?"

"뭐 할 말이 있으니까 온 거 아냐? 뭐?"

알렉스는 우물쭈물하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의자를 끌고 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전에 봤던 걔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나 남중국해 가기 전에 사귀자고 했는데 그냥 문자만…."

세현이 픽 웃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미안. 솔직히…, 걔 까먹고 있었어요."

알렉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양 허벅지를 잡아 모으며 거기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가 엇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만져도 돼?"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야…, 그냥 비슷한 또래랑 사귀어. 왜 자꾸 나한테 이러냐, 어? 솔직히 좀 귀찮다."

귀찮다는 말에 알렉스가 발끈했다.

"책임진다고 해놓고 또 이래!"

"그때는 심신미약 상태였달까…. 이제 나랑 니가 더 만날 일이 뭐가 더 있어?"

"드레이닝인가 뭔가 때문에 나 필요한 거 아냐? 어?"

"너 아니어도…, 어휴."

뭘 또 설명을 하냐. 세현은 그냥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가 울렁거리는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 좀 하지 마…."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눈빛과 가까이 마주했다. 그는 그리고 세현을 와락 껴안았다.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자신이 침대에 앉았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 짜증이 벤 표정. 그를 귀찮아 하고, 심지어 그를 이역만리 사우디에다 버리고 온 그녀였지만…. 어째서일까. 알렉스는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의 양 눈동자를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교수님 미워요. 나 버리고 갔잖아. 사과도 안 하고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래도 사…."

사랑한단 말이야….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을 고백하려던 알렉스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뭐야?"

세현이 미간을 좁히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알렉스는 킁킁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냄새와 섬유 냄새, 그리고 아까 그 망할 안경잡이 냄새, 그리고 또 다른 놈 냄새가 났다. 희미하게 그 새끼의 정액 냄새도 났다!!

"누구야?"

알렉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누가?"

"누구냐고! 또 누구 있냐고! 이거 그 용병 냄새도 아니잖아! 또 누구랑 잤냐고!"

"야…, 그러면 나 보고 죽으라는 거냐? 어?"

"내가 해준다고 했잖아! 나한테 오면 되잖아! 굳이 딴 놈이랑 안 자도 되는데 왜 자는데! 잔 거잖아! 냄새가…! 껴안았잖아!"

얘 진짜 개코네. 세현이 한숨을 쉬었다.

"섹스는 안 했어."

알렉스가 아예 냄새로 확인할 생각인지 킁킁거리면서 그녀의 배와 아래까지 냄새를 맡으려고 하다가 정수리를 주먹으로 쾅 맞았다. 알렉스는 반항적인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씩씩거렸다.

"그 아저씨도 죽여버릴 거야! 그 새끼도 죽여버릴 거야!"

세현은 다시 그의 정수리를 쾅 내리쳤다.

"이게 진짜! 완전 지가 무법지대에 사는 줄 아네! 그럼 너 바로 철창행이다, 어?!"

"아악!! 열 받아!!"

그가 발을 굴렀다. 소드마스터들은 형질이 발현되는 15살부터 20살 근방까지는 보통 애들 사춘기보다 약간 더 심하게 겪는 경향이 있다는 논문을 스쳐가듯 본 적이 있다. 캘리 박이 처음으로 소드마스터를 따먹으라고 얘기했을 때 좀 찾다가 봤다. 보통 사람보다 몇 십, 몇 백 배나 힘이 강하고 웬만해선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으니 제대로 교육받지 않으면 사회규범을 습득하기가 조금 힘들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경향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있다는 말이었다. 일반화할 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가 씩씩거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며 벌게졌다. 세현은 그의 양 뺨을 잡고 두드렸다.

"그만. 그만. 그만해."

"교수님이 나쁘다고…!"

"그래. 알았다. 그만. 그만해라."

그제야 알렉스의 씩씩거림이 좀 멎었다. 그는 울렁거리는 얼굴로 세현의 허리를 안았다.

"흑…, 짜증나아. 나 책임진다면서. 다른 놈 좀 만나지 마. 나랑만 하자니까. 책임지라니까!"

"어휴…, 내가 이래서 너랑 연애 못하겠다는 거다. 어린애."

그러자 알렉스가 고개를 팍 들고 그녀를 보았다.

"그럼…, 나 보고 참으라고?"

그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그럼 어떡하냐? 지금 내 상황에 너 하나 가지고 뭘 어떻게 해? 보이냐, 이거? 어?"

세현이 자신의 왼손목을 보여주었다. 모드를 바꾸니 시간당 드레이닝 속도가 나왔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백만은 올랐다. 알렉스는 코를 한 번 훌쩍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왜 이래…? 왜 더 빨라졌어?"

"원래 이런 거야."

세현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뺐다. 원래 그런 거라고? 알렉스는 손등으로 눈을 벅벅 비볐다. 세현은 그를 밀어내고 바로 섰다. 옷 매무새를 바로 했다. 알렉스는 벌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현은 시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그래, 나 너 마음에 든다. 나도 몰랐는데 너 같은 스타일이 취향인가 봐. 귀여워."

알렉스가 흠칫했다.

"그러면…."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세현은 그가 자신의 손을 못 잡게 했다.

"근데 귀찮아, 어? 너무 귀찮아. 귀찮게 좀 하지 마. 나 바쁜 거 안 보이냐? 좀 고분고분하게, 어? 이삭이 봐라. 내 말이면 죽는 시늉도 하잖아. 내 밑에 있으려면 그 정도는 하란 말이야."

알렉스는 그녀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가 발끈했다.

"싫어!"

"그러니까 안된다는 거야."

*

"그냥 빨리 해. 시간 없어."

"아, 싫어!"

"이게 자꾸 내가 하는 말마다 싫다, 싫다 이러네, 어? 또 맞고 싶냐?"

"아파! 폭력 반대!!"

"아~! 어차피 너 못한다니까!"

"씨!! 그러니까 연습하게 해줘야 늘 거 아냐!"

"그걸 왜 나한테 해? 딴 데 가서 연습하고 와, 그럼."

"딴 데 어디! 싫어! 이씨…."

"이게 또, 또."

알렉스는 또 세현의 속옷을 찢어 먹고 그녀를 자기 병실 침대 위에 눕히고 덮쳤다. 그녀의 비싼 정장 치마를 엉덩이까지 끌어올리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핥았다. 그녀가 못한다고 타박을 할 때마다 발끈발끈 하며 화를 냈다. 세현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녀는 그를 침대에 눕히며 그의 얼굴 위에 올라탔다. 알렉스가 살짝 놀라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뭘 또 놀래. 계속 해."

알렉스는 그녀의 음모에 코를 박은 채로 얼굴을 붉혔다. 어른들은 다 이런가? 진짜 야하다. 킁킁 냄새를 맡으니 그녀의 음모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그녀의 여성기를 혀로 막 핥다가 음핵을 쪽쪽 빨았다.

"윽…."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코가 자신의 음모에 묻혀 있었다. 그의 얼굴이 벌겠다. 이마도 예쁘다. 세현은 알렉스의 얼굴을 감싸며 이마를 엄지로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한쪽 엉덩이와 한쪽 허벅지를 잡고 쓰다듬었다. 그는 급격히 흥분해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의 콧김이 엄청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윽…. 아…. 으으윽…!!"

그는 그대로 강하게 계속 그녀를 빨아들였다. 빠는 힘이 굉장했다.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빨개지며 순식간에 절정에 올라섰다.

"아아아…! 으윽…, 아…. 알렉스…."

그녀가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알렉스는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여전히 쪽쪽 빨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야했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만…, 그만! 아파."

그가 그제야 입술을 뗐다.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바로 앉았다. 그녀가 알렉스의 커다랗고 길쭉한 허벅지 위에 앉았다. 알렉스는 쾌감에 떠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기분 좋았어?"

"하윽…, 공부 좀 더 해라. 아프다."

"왜?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아봤는데?"

"하아…, 그게 그렇게 힘으로만 빨면…."

순식간에 가버리긴 하는데 진짜 좀 아팠다.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못한다. 세현은 현기증을 느끼며 자신의 이마를 붙잡았다. 알렉스는 긴장해서는 바지와 속옷을 조금 내리고 자신의 탱탱하고 우람한 남성기를 꺼냈다. 상의도 벗어 던졌다. 그녀의 여성기 가운데 자신의 것을 문질렀다. 한 번 가게 했더니 잔뜩 젖어 있었다.

"교수님, 키스…."

알렉스는 그녀의 양 엉덩이를 잡아 끌어당기며 그렇게 졸랐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짙은 벽안이 예쁘다. 세현이 피식 웃고는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다시 눈이 마주치니 알렉스가 그녀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대로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으며 깊게 입술을 겹쳤다. 알렉스는 엄청 흥분해서 그녀의 여성기에 자신의 남성기를 몇 번이나 비비고는 진입했다.

"하아…!"

그대로 앞부분이 쑥 들어오자 세현이 입술을 떼며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팠어요?"

"조금. 윽…."

일단, 얘는 엄청 컸다. 미끌미끌해서 두꺼운 부분이 쑥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그대로 천천히 주우욱~ 밀고 들어왔다.

"와…. 아…! 으읏…."

세현은 탄성인지 고통의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배 안이 아주 꽉 차는 느낌이었다. 정말 어디까지 들어올 작정인지…. 그대로 밀고 들어와 경부의 뒷부분을 꾹 눌렀다. 배 한 가운데를 너머 허리까지 누르는 느낌이다. 엄청 뻐근했다. 기분 별로 안 좋다. 압박감이 심했다.

"으윽. 헉…. 하아…. 교수님…."

그가 잠깐 부들부들 떨며 엄청 참았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귀엽다. 서로의 얼굴을 기대고 잠깐 그대로 숨을 헐떡이고 있다가 그가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확 끌어안아 배를 꽉 맞댔다. 그대로 더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에 세현이 턱을 들며 숨을 뱉었다.

"아…!"

"으윽…. 교수님…. 조, 좀만 힘 풀어줘요. 아윽."

그는 참기가 영 힘든 모양이었다. 세현은 픽 웃고 말았다.

"그냥 싸."

그녀가 말했다. 알렉스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펄쩍 뛰며 진짜 싸기 시작했다.

"으윽…!! 젠장!"

그녀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로 부들부들 떨며 안에 사정하자 그의 정기가 마력으로 변하며 화끈화끈한 열감이 들었다. 세현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웃었다.

"하하하, 진짜…. 너 진짜 내가 처음이긴 하구나?"

알렉스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인상을 팍 썼다. 그녀의 품에 짜증스럽게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거기서 그냥 싸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씨이…."

"니가 못하는 걸 내 탓을 하면 어쩌자고. 하하."

"웃지 마!"

그가 고개를 팍 들고 화를 냈다. 그녀가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쯧. 큰소리 낸다, 또."

그렇게 말하고 세현은 또 피식 웃고는 자신의 손목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간도 확인했다. 그가 살살 들어왔다 나왔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도 거기에 맞추어 엉덩이를 흔들었다.

"하아…, 윽…. 10분만에 끝내."

세현이 말했다. 그녀는 인상을 살짝 쓰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여성기가 커다란 남성기에 맞물려 크게 벌어져 있었다. 움직이기까지 하니 아릿아릿한 느낌이 고통과 쾌락 사이를 얕게 진동했다. 깊숙하게 받아들일 때마다 신음이 흘렀다. 음핵이 문질러지니 다리 사이가 화끈거렸다.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확실히 얘는 못한다…. 아담은 물론이고 그 빨강 머리랑 비교해도 말이다.

‘뭐, 귀엽긴 하지만.’

세현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세현의 얼굴을 열렬히 바라보았다.

"교수님…. 세현…. 세현…. 하아…. 기분 좋아. 기분 너무 좋아요."

그는 귀까지 얼굴이 벌게져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늘씬하게 쭉 뻗은 남자다운 목으로 땀이 주륵 흘렀다. 이크. 세현은 그에게서 몸을 조금 뗐다. 상의를 벗은 그의 몸은 그리스 조각상이 뭐냐는 듯했다. 세현은 그의 어깨와 가슴을 만져보았다. 힘이 들어가 굉장히 단단하고 매끄러웠다. 이목구비가 크면서도 단정한 그의 얼굴은 역시나 아직 앳된 티가 조금 났다. 그는 객관적으로도 굉장히 아름다운 남자였다. 못하긴 하는데, 이렇게 껴안고 있으면 확실히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피부가 좋아서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교수님…. 하아…."

그는 눈을 뜨고 세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세현과 입술도 맞추고 눈도 마주친 채 그녀의 옷을 마저 벗기려고 했다. 정장 상의만 벗어서 의자에 걸쳐놓은 세현은 그의 손을 잡았다.

"아, 금방 나가야 해. 그만. 구겨져."

"교수님…."

알렉스는 애가 타서 앓는 소리를 끙끙 냈다. 그는 세현을 그대로 끌어안고 그녀의 얼굴을 마구 핥고 입을 맞췄다. 깊게 몸을 겹친 채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온몸을 비볐다. 그대로 세현도 눈을 감고 그와의 섹스에 집중했다. 점점 기분이 고양되어갔다. 그는 세현의 몸을 한 팔로 꽉 끌어안은 채 세현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다른 손으로 침대를 짚고 두 사람의 몸을 지탱하며 세현에게 푹푹 박으며 들러붙었다. 절정에 이르러 가니 그의 숨소리가 굉장히 거칠어졌다.

"헉…. 으윽…. 교수님…. 세현…. 사랑해. 사랑해요."

"하아…. 윽…. 알렉스…."

"큭. 으으윽…! 아윽!!"

그의 것이 더 쑥 커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고환까지 꽉 다리 사이에 맞물릴 정도로 들어왔다. 세현이 숨을 헉 삼키며 그를 꽉 조였다. 그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알렉스는 앞으로 천천히 쓰러지며 세현의 어깨가 침대에 닿았다. 하반신은 그와 꽉 맞물려 하늘을 향해 올라가 아주 불편한 자세였다. 그는 세현의 귓가에 얼굴을 꾸욱 누르고는 섹시한 목소리를 내며 헐떡거렸다. 세현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인상을 좀 찌푸리고 있다가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일어나. 하아…, 힘들어."

"윽…."

그가 그대로 천천히 빙글 몸을 돌려 세현을 위에 올리고 드러누웠다. 그의 빵빵한 가슴이 아래위로 계속 들썩거렸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못 일어나겠어요…."

그가 그렇게 신음처럼 말했다. 세현은 그의 가슴을 짚고 주르륵 그의 것을 뽑아냈다. 다리 사이가 화끈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아."

다리를 벌리고 있었더니 허벅지가 아프다. 세현은 휴지로 다리 사이를 닦고 치마를 내렸다. 셔츠를 펴서 다시 치마 안으로 잘 집어넣고 상의를 걸쳤다. 팬티는 아까 쟤가 해먹었고…. 그리고 시계를 보니 출발할 시간을 1분 정도 남기고 있었다. 똑똑. 보란듯이 노크 소리가 났다.

'뭐, 갈아입을 거 주겠지.'

옷이 잔뜩 구겨졌다. 그녀는 구두를 신었다.

"나 간다."

그녀는 머리를 풀고 다시 묶으며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벌써 가게?"

"가야지. 늦었다."

"언제 또 와?"

알렉스가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키가 2m가 넘는 그가 옆에 서니 구두를 신었는데도 올려다봐야 했다. 그가 초조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왜? 얼마나? 그럼 언제 볼 수 있는데?]

세현은 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귀찮아.

"몰라. 바빠."

그러자 그는 좀 상처받은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랬듯 울컥 화가 난 얼굴을 했다는 거다. 그리고는 진짜 마음이 상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병실문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가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문 손잡이를 잡은 그녀가 그를 돌아보니 그가 세현의 귓가에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

세현은 말없이 그의 눈을 한 번 보았다. 알렉스는 좀 우스울 정도로 간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현은 그대로 말없이 병실을 나왔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한숨을 쉬었다. 응접실 쪽에서 그런 세현을 본 캘리 박이 손짓을 했다.

"가자."

밑에서 방탄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원들을 줄줄이 매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캘리 박은 자신과 세현 퀸을 감싼 쉴드를 전개한 채 디바이스에 띄운 문서를 보며 골몰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에 탔다. 이 차 또한 해킹의 위험에 대비하여 차는 재래식 운전 조작을 해야 하는 기름 차였다. 차는 성남으로 향했다.

"…교수님."

"왜."

"교수님 빳데리들은 귀찮게 군 적 없어요?"

세현이 물었다. 캘리 박은 여전히 디바이스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평이하게 대꾸했다.

"응? 왜? 사랑한다냐?"

"…네."

벌써 말로 하는 놈도 있고 아닌 놈도 있고. 세현이 다시 물었다.

"교수님 빳데리들도 그랬어요?"

"간혹 그런 놈이 있기는 했지."

"그러면 어떻게 하셨는데요?"

"딴 놈으로 갈았지."

스승은 여전히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그거 빳데리 다 된 거야. 귀찮아."

"아~, 그냥 하던 놈이 편한데. 새로운 놈 구해서 언제 또 해요. 아니, 여자들도 많은 놈들이 왜 이래. 구질구질하게…."

세현이 불평했다. 캘리 박은 한민유가 보낸 요약 보고서를 읽고 짤막하게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며 말했다.

"그것들이 아무리 문명화가 덜 되고 짐승 같은 놈들이라도…. 아니, 그래서 더 잘 알더라고."

"뭘요?"

세현이 물었다. 캘리 박이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너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라는 거. 물론, 내가 너보다 더 잘났지."

"아…. 그건."

세현이 차시트에 등을 기대며 인상을 썼다. 잘난 내가 죄구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무려 22세기다, 22세기. 과학기술의 보편화, 인공지능, 자본주의의 정비, 사람이 마음먹고 잘 살려고 하면 적어도 손해보고 살지는 않을 수 있다(아, 물론 제 1세계 출신이라면).

하지만 태어난 나라의 문명도가 아무리 높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쓰는 놈이 바보면 그 손에 요술봉을 쥐어 놔도 무소용인 법이다.

"……."

그래서 제수스는 여전히 세현 퀸이 뭘 하는 사람인지 영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제수스~ 오랜만~"

"어…."

그의 걸즈인 빨강 머리가 아닌 금발의 앤이었다. 아니, '였던'이라고 해야 할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는 샤샤 부퍼의 팔짱을 끼고 들어왔다. '였다'가 맞는 모양이다.

"너 요새 뭐 하냐?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샤샤 부퍼가 물었다. 제수스는 습관적으로 뒷목을 쓰다듬으며 말을 흐렸다.

"아니, 좀…."

"제수스 요새 완전 홀딱 빠진 여자 있거든."

앤이 말했다.

"뭐? 누구?"

"몰라. 보여주지도 않아."

"아, 아아. 그거, 수요일마다 달려갔던 거?"

"어? 샤샤도 알고 있었어?"

"다 알아."

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미하엘 로드리게스의 집이었다.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금년 초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실형을 받은 후 모범수로 1개월 감형을 받아 2개월만에 가석방되었다. 축하 파티 겸해서 그의 집에 모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걸즈 넷(2달 간 인원 변동이 좀 있었다)을 양팔에 끼고 있었다. 술잔은 걸즈 중 하나가 들고 그가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크리스탈로 만든 테이블 위에는 일렬로 쭉 정렬한 가루가 놓여있었다. 그는 100만원짜리 지폐를 말아 5줄의 가루를 연속으로 쭉쭉 코로 들이켰다. 현금은 이럴 때 쓰라고 들고 다니는 것이다.

"와…!!"

빵에 들어가는 바람에 약을 끊은 지 몇 개월만에 그 정도를 흡입하니 머리가 번쩍하는 기분이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아, 끝내준다."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곤 동료에게 권했다.

"너도 해라?"

"아니…, 난 좀…."

제수스는 공짜 약을 사양했다. 미하엘은 빵에 가 있는 사이에 다갈색에 가까운 자신의 금발 머리를 까까머리로 바싹 깎았다.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제수스를 보다가 샤샤에게 물었다.

"뭔데?"

"몰라. 요새 유행인가 봐."

"뭐가?"

미하엘이 그렇게 묻자 샤샤는 어깨를 으쓱하고 가람 리한이 자기 GAS의 시중을 받으며 말했다.

"일반인 후리는 거."

"어, 미르 킹쉴드 왔다."

대궐짝 같은 문에서부터 번쩍번쩍한 대가리가 보이더니 미르 킹쉴드가 언제나처럼 컨디션이 아주 좋은 낯짝으로 들어왔다.

"야~, 깜빵은 지낼 만했냐?"

그는 유감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이 씹새꺄, 뭐 하러 왔냐."

"놀리려고 왔다, 빙신아."

"미르~"

주변에 있는 GAS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의 어깨에 매달려서 뺨에 입을 맞추며 환영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미르도 잘 지냈어? 보기 좋다."

"응. 요새 완전 좋아."

그는 남은 카우치 자리에 궁뎅이를 대자마자 자랑부터 시작했다.

"야, 나 용돈 받는다."

"뭐?"

"짠."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봉투를 딱 들어올렸다. 계속 손에 쥐고 온 모양이었다. 두껍고 빳빳한 고급스러운 아이보리색 봉투에는 은은하게 잔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고급스럽고 우아~하고. 들고 있는 사람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 섬세한 물건이다. 그리고 딱 봉투를 열자 광이 번쩍번쩍 한 골드 카드가 하나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엔 양각으로 라고 당당히 찍혀 있었다. 뒤엔 세련된 글씨체로 사인도 되어 있다.

"이거 뭐야?"

"골드 카드. 우리 도현이가 나 필요할 때 쓰래."

"이거 발급받는 거 엄청 까다로운데."

걸즈 하나가 그게 뭔지 아는지 그렇게 말했다. 미하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거야?"

"그럴 걸? VVIP 카드잖아."

"아니…, 그 여자는 빚도 많다면서 그런 건 어떻게 받았대?"

"원래 자기 거래. 빚 다 갚으면서 다시 살아난 거지. 흐흥."

미하엘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니가 그 빚 갚아주고 용돈 좀 받았다고 좋아하는 거냐, 지금?"

"어."

"요즘에 누가 카드 들고 다니냐? 디바이스로 그냥 찍지."

"예쁘지 않냐, 이거? 어?"

"예쁘다~ 만져봐도 돼?"

"안 돼."

미르는 그새 다른 여자들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헹 하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니들이 평생 용돈이란 걸 어디서 받아본 적이 있냐? 어?"

"……."

다들 그런 건 받아본 적이 없는 남자들이다. 쩝…. 그들은 입맛을 다시며 미르 킹쉴드의 손에 있는 카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솥뚜껑만한 두 손으로 카드의 양 테두리를 고이 받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빔을 쏘듯 보여주었다. 다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패배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부러워할 게 전혀 아닌 거 같고 저 새끼는 그냥 호구병신 같은데도 묘하게 기분이 이상하다.

"아오, 씨발. 꺼져. 어? 꺼지라고. 애초에 이 새끼 때문에 나 빵 갔다 온 거 아냐."

"뭔 개소리야, 씹새꺄. 누가 우리 도현이 건들래? 우리 도현이 얼~마나 무서운지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너 이 정도도 조용히 잘 끝난 거야, 병신아."

그렇게 미르와 미하엘이 신경전을 벌이는데 가만히 앉아 있던 제수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부럽다…."

그가 이 자리에 미르 킹쉴드를 부른 거였다. 그러자 다들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미르가 이가 다 드러나게 활짝 웃었다.

"그치?!"

"……."

제수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실언했다. 샤샤 부퍼가 여자들을 치우고 제수스의 오른편에 턱 앉았다. 가람 리한이 또 여자들을 치우고 그의 왼편에 앉았다. 그들은 제수스의 뒷덜미를 콱 쥐면서 말했다.

"야, 너 그 여자 감당 안 되면 그냥 넘겨라, 어?"

"그래, 뭐 하려고 마음 고생을 해. 즐겁게 살아, 즐겁게. 다른 여자 소개해줄 테니까. 넘겨, 넘겨."

그러자 미하엘이 ‘뭔데? 뭐야?’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았고 조나단 훅이 설명했다.

"가슴이 이만하다. 와. 처음 봤다, 그런 거. 날씬한데 엉덩이도 빵빵하고, 좋더라."

그가 호쾌하게 양 엄지를 치켜들었다. 미하엘이 호오, 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 그 여자. 얼굴은?"

"못 봤어. 선글라스 끼고 있는 것만 봤어."

"자연산이냐?"

미하엘이 제수스에게 물었다. 늘 그랬듯이 그들은 새로운 여자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 뭐니 뭐니 해도 뉴페라는 건 동서고금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똑같은 모양이다. 제수스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동료들을 손을 쳐냈다. 그는 미하엘 로드리게스를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꺼져. 눈독 들이지 마."

"뭔데? 뭔데 그러는데? 입 좀 털어보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다들 호기심을 보였다. 미르 킹쉴드만이 주변 사람들에게 애인(이 준 카드)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수스도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몰라…. 내가 싫은가 싶기도 하고…."

"당연히 싫겠지. 내가 여자라도 너 같은 찌질이 새끼는 사양이다."

"뭐라고?!"

샤샤 부퍼가 푹 찌르자 제수스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미하엘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야, 야. 싸우지 마라. 나가서 싸워라. 한 달 안에 또 사고치면 나 마저 들어가야 한다."

"사진은? 사진은 없어?"

가람이 물었다.

"없어…."

"야, 그 병신 새끼 그 여자 이름도 모른다더라."

미르 킹쉴드가 저 멀리서 그렇게 첨언했다. 그러자 다른 놈들이 아주 괄시하여 제수스를 보았다.

"이 새끼…. 병신인 건 알았지만 진짜 어마어마한 병신이네?"

"아, 찌질이 새끼. 그 여자 팬티는 벗겨봤냐? 어?"

제수스가 또 발끈했다.

"할 거 다 했어!! 그리고 이제 이름도 알 거든!"

"뭔데."

"안 가르쳐줘!"

"모르네."

"그리고 말해주면 니들이 아냐? 어?"

"모르네. 모르네."

다른 동료들이 계속 그를 약 올려도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히도 뺏기기 싫은 모양이었다. 대체로 괜찮은 뉴걸이 데뷔하면 선수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는 일도 종종 있으니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꽁꽁 숨겨놓기 마련이다.

"니가 그런다고 우리가 못 뺏는 게 아니에요."

조나단이 하품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가 정색을 하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미하엘도 거들었다.

"원래 GAS라는 건 다 돌려쓰는 거야. 모르냐?"

"닥쳐라."

제수스가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박 터지는 싸움이 일어나면, 기본적으로 그 여자를 가지고 있던 놈부터 배제되기 마련이다. 다구리에는 누구든 장사가 없다. 무조건 뺏긴다. 다들 그렇게 뺏고 뺏겼던 적이 있는 놈들이라 결국엔 크게 유감은 안 남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진짜 싫었다. 죽어도 싫었다.

"그래봤자 어차피 저 새끼 여자는 못 건드리잖아."

제수스가 말했다. 그러자 다들 서로의 얼굴을 봤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뉴걸은 특이 케이스잖아."

"뉴걸 아니거든!"

미르가 버럭 했다. 미하엘의 걸즈 하나가 잠깐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걔는 뭐랄까, 귀족 출신이잖아."

"귀족?"

미하엘이 별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이 그렇게 대꾸했다.

"걔 말투랑 하는 거 보면 애초에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난 거 딱 보이던데?"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귀신같이 알아차릴 수 있는 걸즈다. 미하엘에게 안주를 먹여주는 다른 걸즈도 덧붙였다.

"배운 티 나. 파티할 때도 거기 걸려 있는 미술품 보면서 뭔지 미르한테 설명하고 있더라니까. 난 금괴밖에 안 보이던데."

사실 도현도 금괴에 눈이 돌아가긴 했지만. 역시 여자들이 보는 눈은 더 낫다. 좋은 건 원래 말로 안 해도 티가 다 나는 법이다. 미르는 의기양양하게 턱턱 카우치에 넓게 양팔을 걸치고 다리를 딱 벌리고 앉았다.

"그렇다."

"쳇."

미하엘이 대놓고 혀를 찼다. 제수스는 그걸 보고 어떻게 하면 세현도 그런 포지션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내…, 우, 우리 세…."

아차. 이름은…. 제수스는 생각을 좀 더 하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마님도 그렇다고."

"뭐가 그런데?"

"그렇다고! 그리고 어차피 우리 마님 눈엔 니들 다 안 차."

"너 만나는 수준이면 나 정도면 양에 넘치지 않겠냐, 그 여자?"

조나단 훅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예로부터 흑인 남자에게 갔던 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말도 있다 이건지. 제수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걸즈 중에 조나단을 한 번 맛본(?) 애들은 흑인 선수만 만나곤 했다….

"어쨌든 일반인이잖아?"

앤이 물었다. 제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 한 번 선수 만났으면 GAS 된 거지."

"아니거든!"

"아, 그래. 그 여자 빼고."

미하엘이 그렇게 말했다. 샤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사줄 거 다 사주고 했을 거 아냐? 돈도 주고. 저 새끼 보니까 일반 여자가 GAS보다 돈도 더 들어가더라."

샤샤는 얼마 전에 미르한테 꽤 큰 돈을 빌려주었다. 자기 여자한테 써야 한단다. 빌려주긴 했는데 빚 때문에 크게 데여본 적 있는 놈이 여자한테 돈을 쓴다고 돈까지 빌리는 게 퍽 이상했다.

"아니…. 우리 마님은 그런 거 싫어 하나 봐…."

제수스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러자 미르도 괴이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야, 명품 안 좋아하는 여자는, 그거 진짜 이상한 여자다."

"……."

"보석도 싫어 하냐?"

"…줘도 하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어…."

"싼 거 준 거 아냐?"

"손 떨리게 비싼 거 사서 줬어!"

그러자 좀 더 많은 남자들이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건 진짜 이상하다."

"…그치…?"

제수스가 슬쩍 그렇게 물었다. 그는 바닥에 있는 호랑이 가죽 카페트를 보며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엄청 비싼 레스토랑 예약해 놨는데 거기 맛없어서 싫대. 내가 데려간 여자들은 다 좋아했는데! 가방 사줘도 싫어해. 옷 사줘도 싫어해. 꽃도 보석도 다 줘도 신경도 안 써. 요새 일 힘든 거 같아서 일 그만두면 먹여 살려준다고 했는데도 콧방귀도 안 뀐다니까?"

"……."

"이상하지?!"

제수스가 고개를 번쩍 들어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대꾸했다.

"많이 이상하네…."

관심이 없던 미르 킹쉴드도 그건 이상한지 덧붙여 물었다.

"뭐 하는 여잔데?"

"몰라…."

그러자 짜증스러운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넌 도대체 뭐 하는 병신이냐? 어? 지금까지 그런 것도 안 물어보고 뭐 했냐고."

"아니…. 물어볼 때마다 이렇…, 이렇게? 이런…, 하여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봐…."

제수스는 눈을 내리뜨며 이래저래 내려다보는 눈빛을 연기해보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처음엔 연예인인가 싶었다니까. 얼굴도 안 보여주려고 하고 이름도 안 가르쳐주고…."

"야, 알 만한 연예인이면 얼굴 보자마자 알지."

"그러니까…. 그렇지?"

"이름이 뭐라고?"

"세현 퀸…."

누가 훅 하고 묻자 제수스가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대꾸했다가 헉 하고 입을 막았다.

"개새끼야!!"

"그런 이름 들어본 적 없는데?"

조나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샤샤나 가람이나 미하엘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미르만 인상을 삭 쓰더니 손을 허우적거리며 기억을 해내려고 노력했다.

"아, 어디서 들어본 거 같아. 으음, 도현이가 말했던 거 같은데. 어디선가…."

"어? 진짜 연예인?"

걸즈가 연예인이 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연예인이 걸즈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선수들은 연예인들에게 침을 질질 흘리지만 말이다. 미르가 디바이스를 꺼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도현아~"

웩. 동시에 모든 남자들이 토 하는 시늉을 했다.

"일 하고 있었어? 어, 아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 다른 게 아니라. 그…, 야, 뭐라고?"

"…세현 퀸."

"세현 퀸이라는 이름 언제 얘기한 적 있잖아. 맞지?"

미르는 그렇게 물었다. 제수스는 아닌 척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미르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요즘에 뉴스에 많이 나오시는 교수님이잖아요. 세현 퀸 교수님.]

다들 귀가 좋아서 다 들렸다. 교수??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미르 킹쉴드의 디바이스를 쳐다보았다가 제수스를 돌아보았다.

*

잠시 그들은 침묵을 가졌다.

"……."

"…교수…가 뭐 하는 사람이더라?"

누군가 용기 있게 무지를 인정하고 나섰다. 그리고 다들 미르 킹쉴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왜 날 쳐다보냐는 얼굴로 빽 소리 질렀다.

"나 보지 마! 몰라!"

"야, 그럼 걔한테 다시 전화 걸어서 물어봐."

"싫어!"

그가 질색을 했다.

"도현이가 나 무식하다고 싫어하면 어떡해!"

"저 좆같은 새끼…."

누가 아주 배알이 뒤틀리는 듯 진심을 담아 짓씹어 욕했다. 미하엘의 걸즈가 해답을 내놓았다.

"검색해봐."

그러자 다들 디바이스에 코를 박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단 <교수>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다.

<교수(敎授, 영어: professor)는 고등교육기관인 대학교나 대학원 등에서 강의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일반적인 교사는 고등학교까지의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하지만, 교수는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 외에 학문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론과 주장을 가지고 논문을 발표하는 위치에 있다는 면에서 구별된다. 교수는 학자로서 학문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하며,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발전적인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소명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누가 말했다.

"어, TV에 나온다. 이거 말이지?"

"나도 이거 지나가다가 본 것 같은데? 매니저가 보고 있었어."

제수스가 그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퀸 교수님, 이번 인질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직접 사우디로 가시려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요!]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기자들이 수십 개의 마이크를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마구 들이밀었다.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우디 인질극은 22세기 현대 국가가 벌인 짓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개한….]

"진짜 맞잖아!"

제수스가 경악하여 외쳤다. 그는 샤샤 부퍼의 손에서 디바이스를 뺏아 뚫어져라 화면 속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앤이 제수스의 팔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말했다.

"이 정도면 이름 쳐도 나오겠다."

그러자 제수스는 디바이스를 샤샤 부퍼에게 던지고 자기 디바이스로 세현 퀸이라는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바로 뜬다….

<세현 퀸 (2091년 4월 7일~)은 대한민국 메트로서울 태생으로 한국과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그의 유명한 빅크런치 이론은 2127년 실험적 근거까지 얻어 우주 멸망 시나리오로 가장 유력하다. 그 외에 중력장 이론, 실험 중력파 검출, 4대 상호작용 변환 등 현대 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4대 상호작용 변환에 대한 기여로 2121년……>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어….'

그 백과사전 페이지에는 그녀의 업적에 대한 설명이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제수스는 그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먹을 길이 없었다.

"…무슨 말이냐, 이거?"

"아, 몰라. 뭔 말이야."

"머리 아파~"

다른 동료들은 금세 포기했다. 제수스는 전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누르면서 찾아보다가 영상을 여러 개 발견했다.

[Universe is all that is, or ever was, or ever will be….]

그녀가 갑자기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수스는 옵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한국어로 바꿨다. 그러자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수스는 어쩐지 거기에 안도감이 약간 들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 곧 이게 같은 언어로 말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참고로 이 프로그램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하여 고퀄리티의 그래픽 효과를 넣어 지금까지 밝혀진 관측 가능한 우주에 대하여 아주 쉽게 설명한 교양 과학 프로그램이다).

"……."

그래서 그냥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밤하늘 같은 게 나와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다시 그녀의 얼굴이 나오면 또 그냥 바라보았다.

"비슷한 여자로 착각한 거 아냐?"

가람 리한이 잠시 영상을 같이 옆에서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편에 앉아 있던 샤샤 부퍼도 첨언했다.

"이런 것도 찍고 엄청 똑똑한가 보네."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이런 여자가 널 왜 만나냐?"

"……."

그러게…. 삽시간에 기가 확 죽었다. 뭔가 착착 맞아들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 밝히는 것을 꺼려했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금 교수라니 뭐니…. 정장만 빼입고 잘난 척하고 다니는 TV 속 정치인이니 기업가이니 하는 사람들처럼 그런…, 그런 세상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뉴스나 기사를 찾아보니 지금까지 그녀를 몰랐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할 정도로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요새 그녀를 따라다니던 경호원들도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날…, 이제 만나러 오지 않을 거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분간 못 본다고 말했지만 그게 얼마 동안인지, 언제 다시 볼 수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떠나기 전 그녀는 자신과 그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못 박았다.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제수스 같은 남자 같은 건 어디서든, 아니, 제수스보다도 훨씬 좋은 남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가 뭘 해주는 게 우습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 안녕이라고 했어야 했구나….'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랬다. 그녀가 다시 만나러 오기 전처럼 가슴이 지끈거리고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샤샤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이런 여자는 절대 제수스 같은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

일단 영상을 껐다. 술도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수스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 간다."

"벌써 가게?"

앤이 팔짱을 꼈다. 제수스는 그대로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곧 닫혔다. 미르 킹쉴드는 그걸 돌아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지 수준에 맞게 살아야지."

"넌, 병신아. 넌?"

"우리 예쁜 도현이는 내가 최고라신다. 그럼 됐지."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제수스는 미하엘 로드리게스의 집을 나오자마자 자기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다 같은 동네에 살았다. 자기 펜트하우스로 올라가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늘 아침까지 그녀와 같이 누웠던 침대였다. 그녀는 입고 왔던 옷가지를 전부 놔두고 갔다. 그걸 가지러 오기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잠깐 해봤다.

'걸어 놔야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서 카우치에 걸려있는 그녀의 옷가지를 옷장에다 걸어놓았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퍽 엎어져 누워있었다.

"…어…, 인공지능아, 세현 퀸이랑 관련된 것 좀 정리해봐."

이렇게 쓰는 거 맞나? 제수스는 어색한 티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알기 쉽게 정리해줘…."

[알겠습니다.]

알긴 진짜 아는 건가…. 미심쩍은 기분이었다. 인공지능은 곧바로 자료를 정리해서 침실 스크린에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띄웠다. 인공지능은 세현 퀸이라는 사람의 간단한 프로필과 지금까지의 생애, 이력, 업적과 그 업적에 대한 설명, 출판한 도서 및 미디어, 최근 이슈 등에 대해 아주 보기 좋게, 큰 글씨로 써서 정리해주었다. 사람보다 훨씬 낫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지…."

제수스가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세현 퀸 교수님은 자타공인 22세기 최고의 천재시니까요.]

"……."

아!! 제수스는 다시 뒤로 털썩 누웠다. 역시 나 같아도 나 같은 건 안 만날 거야!

'처음에 왜 나 꼬신 걸까?'

지금까지는 한 번도 안 궁금해했는데 이제서야 궁금해졌다. 한참을 그 질문에 대한 궁리를 했다.

'…나한테 반했다던가?'

그건 아니겠지…. 곧바로 부정할 수 있었다. 제수스는 옆으로 누워 공중에 떠있는 스크린을 보았다.

"세현이가 찍은 거 있잖아. TV 나온 거. 무슨 우주 나오는 거."

[<유니버스> 말씀이신가요?]

"응…. 그거 1편부터 쭉 틀어봐."

그러자 홀로그램 화면이 바뀌었다. 아까 잠시 보다만 TV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침실의 밝기는 자동으로 영상을 보기에 알맞도록 어두워졌다.

[우주는 모든….]

아까처럼 시끌벅적한 곳이 아니라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가만히 그녀의 단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그녀는 수다스러운 편이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가만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니. 제수스는 푹신한 베개를 끌어안고 그대로 화면에 나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TV에 나와도 한 번 웃지를 않네…."

웃으면 더 예쁠 텐데. 제수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수스는 다음날 그녀가 썼다는 책을 모두 샀고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그녀가 나오는 영상도 다 모았다.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는 도착한 책을 한 번 펴봤는데 1분도 안 돼서 덮었다.

"이걸 돈 주고 읽는 사람들이 있다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상이 제일 나았다. 게다가 요즘은 지중해 게이트니 사우디니 뭐니 하는 일 때문에 그녀가 뉴스를 자주 탔다. 뭔가 엄청 큰 사건 같았고 이 나라, 저 나라 높은 사람들도 잔뜩 나오고….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TV에 나오는데 제수스가 이름을 계속 물어봤으니. 질린다는 표정도 약간 이해는 되었다. 물론 뉴스에 나오는 영상은 사우디에서 인질들이 구출되었을 때 잠깐 인터뷰한 것과 짧은 기자회견이 전부였다. 그 뒤는 어디 나왔던 영상이 계속 반복해서 사용되었다. 전부 다 보고는 그냥 다시 <유니버스>를 보았다. 이게 제일 좋았다. 며칠이고 반복해서 보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 계속 보고 있으면 세현이가 기분 나빠 할까?’

제수스는 퍼뜩 그런 걱정이 되어 영상을 껐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그 여자에게 목을 맨다는 걸 안 순간부터 그를 바보 취급했다. 게다가 미르 킹쉴드는 지금 어렸을 때 일 때문에 스캔들이 터져 잠적 중이다. 제수스는 한숨을 푹 쉬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진짜 이상한 여자였단 말이야.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유혹하니까 당연히 이상하지….'

그러니까 자꾸 신경 쓰이고 그랬다. GAS가 되고 싶은 거라든가, 팬이라든가, 아니면 섹스광이라든가. 그런, 제수스에게 접근하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뭔가 제수스가 흔히 아는 것과는 다르고. 전혀 웃지도 않고. 뭔가 요상하게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잠깐 가만히 또 생각을 했다. 뭘까. 이게 뭘까. 시간은 잘 흘렀다. 그리고 문득 침실에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가 천장을 보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사랑이라는 건 말로만 들었지…, 그의 인생에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사랑이라는 거 자체가 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는데 그런 걸 가지고 살 거라 상상은 어떻게 하겠는가. 돈, 술, 약, 섹스…. 그런 게 그가 아는 좋은 것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매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처음부터 고분고분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눈치를 보고 마음에 들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관두자.'

이건 아니다. 항상 마지막에 안녕이라고 인사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욕심을 부려봤자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끊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운이 좋았다. 아주 좋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남았고 부자가 되었고 더 이상 배고프지도, 더 이상 돈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게 많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욕심보다도 적절한 포기가 더 유용하다. 그녀를 기다리는 한 달 동안 괴로웠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포기해야 할 걸 포기하지 못해서였다. 아무것도 모를 땐 여지라도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고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는 제수스를 귀찮아 하는 걸 숨기지 않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가 거짓을 말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 데다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니…. 결국 욕심도 기대도 그를 괴롭게만 만들 것이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은 거다. 빨리 할수록 이득이다~~'

그래서 제수스는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

차가 성남에 도착했다.

“홉스 중위라고 합니다. 세현 퀸 교수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여기로.”

다니엘 스톤하츠가 사우디 아라비아로 날아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인원이 준비되어 있었다. 수송기도 위장을 포함하여 4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호위를 위한 전투기와 비행차들도 잔뜩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다.

“도강진 준위라고 합니다.”

세현은 중위 홉스의 옆에 서 있는 커다랗고 새카만 남자가 소드마스터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런 느낌은 좀 이질적이다. 그녀가 아는 소드마스터는 수에즈에서 봤던 하루살이 같던 용병들, 아니면 알렉스 같은 어린애들이었다. 뭐, 그 빨강 머리도 있지만. 그는 그 두 집단의 교집합이었다.

도강진 준위가 그녀를 안내했다. 세현은 예전 알렉스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최신형 군복을 입었다.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착용을 도와주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현존하는 모든 방탄, 방화, 방산 기능이 다 들어가 있는 군복이었다. 머리를 전부 감싸고 전신에도 대미사일 쉴드 기능이 적용되는 헬멧을 썼다. 거기에 그녀의 보조를 위한 AR 프로그램이 다운로드 되어 있었다.

“니가 꼭 가야겠냐?”

캘리 박은 그녀의 헬멧을 벗겨 자기가 써서 기능을 휘리릭 한 번 점검해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귀찮아 하던 마도 수술을 받아 드디어 바닥에 발을 딛고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한동안 편하게 사시던 양반이 요새는 인간들을 많이 만나야 해서 그랬다.

“그럼 노친네가 가시던가요.”

“다니엘 스톤하츠 더 설득해보자니까.”

“언제는 일 생기면 내가 직접 해야 한다면서요.”

“그때는 니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

“선배들이나 석세스 교수도 자기네 사람만 지키고.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하는데 왕리밍은 능력이 안되고, 애들은 어리고.”

“왜 애들이 점점 갈수록 멍청해지냐…. 아무리 세상에 멍청한 애들이 쎄고 쎘다지만, 니 밑도 그렇고 리밍이 밑에도 그렇고 애들 눈에 총기가 없다, 총기가. 멍청하고 물정도 모르고 기도 약하고. 세상의 미래가 암울하다, 암울해.”

참고로 캘리 박은 본인의 제자들에게 악랄, 그 자체였지만 제자의 제자들에게는 그래도 유하신 편이었다. 세현 퀸이 종종(자주) 자기 랩을 뒤집어놓으면 가끔 가서 ‘그래, 니들이 고생이 많지~’ 이런 걸 해주곤 하셨단 말이다. 그녀는 세현의 머리에 다시 헬멧을 씌워줬다.

“왕리밍은 오래 살겠죠.”

“그렇겠지? 내가 요새 안 하던 노후 걱정을 다 한다.”

그녀는 세현의 왼쪽 손목을 잡아 화면을 전환하며 마력량과 드레이닝 수치를 확인했다.

“야, 끝나자마자 지체 말고 바로 비행기 돌려라. 너. 넌 제대로 빠뜨리지 말고 쉴드 잘 치고. 최대로 쳐라. 스텔스 기능은 제대로 되는 거 맞지? 너무 많이 보내서 감지되고 그러는 거 아냐?”

이번에는 마도사병도 둘 실어서 같이 보냈다. 캘리 박은 홉스 중위와 옆에 있는 마도사병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들은 열중쉬어 자세로 뻣뻣하게 대기하고 있었고 홉스 중위가 열심히 대답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 이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닙니까?”

장비를 전부 착용한 세현은 몸집이 거의 두 배로 불어난 것 같아 보였다. 캘리 박은 요래조래 세현을 앞뒤로 살펴보면서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노파심이 좀 든다. 너 수에즈 논문도 쓰고 미국도 가야 하는데.”

“교수님도 요새 쓰시는 거 있잖아요.”

“어, 그냥 끄적끄적. 어차피 실험은 못하는 거라. 이삭이 좀 빌려줘라. 이 나이에 혼자 쓰려고 하니까 되다.”

“그렇다고 내 애를…. 알아서 써요.”

“아주 많이 치사하구나.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알아서 컸습니다, 알아서.”

그렇게 준비를 시킨 세현을 비행기에 태우고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여러 대의 비행기에 나눠 탔다. 그걸 보고 캘리 박은 다른 장성 몇몇과 잠실로 돌아갔다. 다 같이 모니터를 할 것이다.

수많은 군인들과 함께 수송기에 올라탄 세현은 안전벨트를 하고는 바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절대적인 수면이 부족했다. 빨강 머리나, 마지막엔 혹시나 해서 알렉스까지 해서 마력을 Max 이상으로 채웠다. 그렇게 2시간쯤 지나니 홉스 중위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웠다.

“10분 후 작전 장소에 도착합니다, 교수님.”

“아, 그래….”

세현은 미간을 주무르려고 하다가 헬멧에 손을 부딪쳤다. AR 기능을 켰다. HNU 물리학과 슈퍼컴퓨터 인공지능 <퀸비>가 메인, 북경대의 <천문>이 보조로 붙어있었다. 잠실 상황실과도 연결되었다.

“현재 리야드 수성은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초창기 다량의 몬스터 레어가 생기는 걸 막지 못하는 바람에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절대적 물량 부족으로 결국 리야드가 몬스터 레어가 될 거라는 예측이 다수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츄에이션 I-03 작전 주관 슈퍼컴퓨터 인공지능 HNU 물리학과 소속 <퀸비>입니다. 보조 슈퍼컴퓨터 중국 북경대 <천문> 참여합니다. 본 상황은 ‘뇌에 똥물만 들어찬 돌대가리 벌레새끼들을 미리미리 처리하지 못한 병신 같은 금붕어 똥을 시간, 돈, 몇 억이 나고 죽고 나고 죽어도 안 나올 천재 한 명을 위험에 빠뜨려서 해결하는 좆밥 같은 상황’으로….]

홉스 중위와 인공지능 브리핑이 동시에 나왔다. 세현은 황당한 얼굴로 AR 화면을 보았다가 모니터를 하고 있을 상황실에 물었다.

“이거 교수님이 넣은 겁니까?”

[아, 저번에 코카서스 갈 때 너무 빡쳐서. 한 번 말하면 알아 처먹어야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게 한 번 말해서 못 알아먹는 사람이다. 세현은 그냥 피식 웃었다.

[이번이 제발 마지막이길 빈다. 지긋지긋하다.]

“그러게요.”

세현은 자리로 안내되었다. 고도는 아주 높았다. 날씨는 예측대로 쾌청했다. 이렇게 넓은 면적을 대상으로 마법을 시전해본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좋은 기회이기도 하군. 미리 장치를 해둔 비행기의 바닥이 열리며 깨끗한 강화유리를 통해 까마득한 지상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헬멧의 AR이 그녀의 공감각을 유도했다. 거리, 넓이, 수치, 마력량, 증폭량…. 수많은 수치들이 눈앞을 오고 가며 귀에는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세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와 멈출 수는 없다. 그녀는 타이머가 제로에 달하자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거대 도시가 아주 천천히, 지구의 표면에서 뜯어지기 시작했다.

쿠, 콰직, 쿠궁. 쿠구궁. 우우우웅.

보이는 장면보다 들리는 소리가 몇 초 늦다. 몇 천 미터의 상공에서는 어떤 인간의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 신이 있어 지상에 재앙을 내린다면 아마도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다. 거리감, 그리고 강력함.

리야드는 동에서부터 서까지 천천히, 싸구려 스티커처럼 지저분하게 뜯어졌다. 공중에 있는 강력한 중력원을 향하여 천천히 구부러지며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회전에 속도가 붙으며 도시가 산산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

얼마전 다니엘 스톤하츠를 호위하여 사우디에 왔다 갔던 이들도 다수 포함된 작전대였다. 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조각나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타이탄도 도시도 전부 납작하게 눌러버리기만 했다. 그것도 볼때마다 섬뜩했는데 이것은 도저히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장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 중력원을 중심으로 토성의 고리와 같은 원반으로 늘어졌다가 갑자기 중심을 기준으로 여러 층의 링으로 바뀌더니 잠시 깜박깜박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빛이 번쩍번쩍 했다. 원자의 전자구름 모형처럼 바뀌었다. 마지막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는 파스스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장소로 갑시다.”

이번에는 슈퍼컴퓨터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에 마력의 손실 없이 비행차들에게도 반중력 마법을 걸면서 깔끔하게 시전할 수 있었다. 리야드가 끝나자 세현이 그렇게 말했다. 하늘에서 본 리야드는 원형을 알아볼 수도 없는 회색 밀가루 더미처럼 보였다.

[…너 방금 뭐 한 거냐?]

고요한 상황실 쪽에서 캘리 박이 입을 열었다.

“무중력 공간에 고질량점을 하나 만들고 나머지도 같이 대전해서 미시 상황에서 나오는 성질을 적용시켜봤어요. 변환이 약간 되긴 하네요. 역시 퀘이사같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상황실까지 포함해서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캘리 박이 말했다.

[야…, 다시 해봐. 다시 해봐라. 마도식은 이렇게 가는 거 맞냐?]

“아, 지금 보내지 말라고.”

AR로 잔뜩 꼬불꼬불한 문자들이 넘어오기 시작하자 세현이 헬멧의 기능을 조정하며 말했다. 세현은 화면 너머로 군인들을 보았다.

“뭐 합니까? 빨리빨리 갑시다.”

홉스 중위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조종사에게 신호했다. 그들은 곧 북쪽으로 향했다.

‘도대체….’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데리고 이미 사우디를 왔다 갔기 때문에 이 마도사들이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다. 무심하게 몬스터에 뒤덮인 도시를 찌그러트리는 것이 신의 손바닥으로 지상을 누르는 것 같았다. 왕궁을 탈출할 때 그가 얼마나 손쉽게 사람을 죽이는지 보고 기가 질리기도 했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비인간적일 정도로 모든 것에 무심한 그 모습은 그를 더더욱 인간과는 머나먼 존재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명분이 있었다. 타이탄이나 몬스터 레어가 된 도시를 으깬 것은 약간의 인명손실이 있더라도 더 많은 인명을 위해서, 사우디 왕궁을 파괴한 것은 인질구출이라는.

하지만 이들은 분명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몰살당한 이 현장에서, 마치 이것조차 낭비라는 듯 본인들이 하는 연구인지 뭔지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상황실과의 기밀 통신으로 원자니 분자니 중력이니 하는 얘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들만이 아는 언어를 쓰고 중간중간에 농담도 오고 간 것 같다. 수백 년이 된 어느 도시가 방금 멸망한 것만 잊어버린다면 위트 있는 노학자와 시니컬한 제자가 자신들의 연구에 매진한 것처럼 들리는 통화 내용이었다.

‘이게…, 수백만이 넘는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거라고…?’

군인은 상명하복.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런 의문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그 가치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대로 북진하면서 몬스터 레어가 된 도시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납작하게 눌렀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변국과의 약속대로 사우디 전체가 몬스터 레어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대신에 리야드 건의 책임은 주변국이 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공동(空洞)이 된 사우디는 바로 미국이 들어와 군정을 펼칠 것이다. 이스라엘 쪽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오만이나 예멘도 거부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몬스터 게이트 관리에는 미국만한 나라도 몇 없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게이트 관리에 미국 이상의 능력을 보이지만 식민통치에 자국주의가 너무 노골적이고 이런 먼 국가까지는 손이 안 뻗친다. 문화도 익숙하고 신(新)키신저 식 미국주의도 정권이 바뀌며 조금 가라앉은 상태인 데다 영국이나 유럽, 이스라엘 같은 우방국이 근거리에 위치한 미국이 훨씬 나을 것이다.

북쪽까지 쭉 올라오면서 잠깐 이스라엘의 상공을 스쳐 지나갔다. 가자 지구엔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나머지 도시들은 건재해 보였다. 다들 지구 멸망이라도 다가온 듯 난리였지만 결국엔 이것도 견디고 지나고 나면 끝날 천재지변인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후우.”

편대가 기수를 돌려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것이다. 세현은 다시 안전벨트를 메고 자리에 앉았다. Max까지 채운 마력을 거의 다 쓰고 말았다. 인공지능의 보조를 받았기에 자이언트를 없앨 때만큼 마력 낭비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어쨌든 탈력감이 심했다.

‘이제 다 퇴원시켜도 되겠지. 우리도 우리대로 미국 갈 준비 시작하고….’

만약에 세현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캘리 박의 자리를 물려받아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운영하는 것이 단일 연구실이나 단일 프로젝트가 아니라 전세계의 우주물리학자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연구하게끔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만큼 책임질 것이 무거운 자리다. 벌레들은 방해가 되고 금붕어들은 멍청한 얼굴로 이해를 못하겠다는 말만 뻐끔뻐끔 반복한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이 하는 짓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우주의 시작과 끝, 멸망과 창조. 캘리 박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회를 구성하여 접근했다. 많은 이들이 모이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노라 하는 천재들을 아무리 모아봤자, 여전히 캘리 박을 뛰어넘는 천재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캘리 박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쏟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런 스승을 보았기 때문에 세현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했다.

내가 아니면 이 진리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조직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역량을 희생하는 길을 걸은 스승의 뒤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세현이 드레이닝에 걸려 이렇게 촉박한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현은 여기에 왔다. 조직을 지키는 일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미래를 위해서. 남겨진 사람들, 그들이 그녀의 뒤를 이어 계속하여 진리의 길을 개척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군….’

세현은 좌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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