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간의 가치 (1) (3/7)

2.인간의 가치 (1)

무려 한 시간이나 각자의 랩장을 잡고 나니 교수님 둘 다 아스피린이 무슨 소용이었나 싶을 정도로 상쾌한 얼굴로 컨디션을 회복하셨다. 물론 최이삭은 비행차 뒤로 돌아가 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고 치엔위는 자신이 만든 쉴드 위에 앉아 뭔가 알 수 없는 중국말을 중얼거리며 멘탈이 나갔다.

"가시면… 되겠습니까?"

중대장의 부관인 상사 하나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렇게 물었다. 세현 퀸이 고개를 저었다.

"일행 하나 더 있어. 가까운 마을에 차 구하러 갔거든."

"이라크로 말입니까?"

"아니, 사우디 아라비아."

"그럼 소대를 보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이렇게 급하게 굴어? 아직 얘기도 안 끝났는데."

아까 전 간략한 회의에서는 탑승객들의 무사 귀환에 대한 의견 일치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끝났다. 1시간 뒤에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으니 몇 분 내로 다시 연락이 올 것이다.

"비행 몬스터가 덮칠지도 모릅니다. 사우디는 남동쪽에 도시가 모여 있어서 사막을 그냥 횡단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자 세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그럼 빨리 그 남자도 찾아봐. 금발에 녹색 눈, 소드마스터야. 키 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대로 돌아가 군인 몇 명을 가져온 바이크에 태워 보냈다. 유리가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그걸 보고 있는데 왕리밍이 불렀다.

"연락 왔다."

"어…."

그녀는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일단 리야드로 같이 가. 공군 비행기 가고 있다. 중국 쪽도 보냈고.]

캘리 박이 말했다. 왕리밍이 살짝 거리끼는 기색으로 말했다.

"저 새끼들 우리 납치하려고 한 거 아닙니까? 별론데요."

[어쩔 수 없어. 그냥 보내면 미사일 쏠 거란다.]

"정신 나간 새끼들. 왜 이렇게 막 나오는 겁니까? 돈도 없는 것도 아니면서."

세현이 물었다.

[그 새끼들이 자기들한테만 돈 쓰지 국민들한테 돈 쓰냐. 아직 사우디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다. 사우디 서북부보다 이스라엘이나 요르단이 인구밀도가 더 높으니까. 근데 사우디 군이 병신이라 서북부 초토화되는 것도 시간 문제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이스라엘은 핵 쏘기 일보직전이다.]

"핵 쏜다고 그게 해결이 되나. 쿠데타라도 일어나겠네."

세현이 빈정거렸다.

[말 잘했다. 안 그래도 니들 잡으러 갔던 작전 자체가 샤리프 사령관 단독 판단이었다고 한다.]

"그럼 지금은요?"

[걔는 체포됐고 사우디 국왕이랑 직접 연결됐다. 지휘권은 합동참모의장이 직접 가져갔다.]

"네…."

[분위기 안 좋으니까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리고 캘리 박은 연락을 끊었다.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중대장을 불렀다. 그는 이미 지휘권이 이양된 것과 변경된 작전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다. 아담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그들은 아담을 픽업하러 가기로 했다. 어차피 수에즈에서 탈출할 때 아무것도 챙겨오지 못했기 때문에 맨몸으로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알렉스와 유리의 무장이 해제되었다. 어차피 총 같은 거 없어도 일반 군인들은 그들을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얌전히 총을 넘겨주었다.

헬기 하나는 아담을 태우러 가고 나머지는 리야드로 향했다. 새카만 밤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리야드 중심가에 위치한 매끈한 유리 건물들이 야경을 빛내고 있었다. 그들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정부 건물 위의 헬기 착륙장에 내렸다.

"괜찮으십니까?"

다른 헬기에서 내린 아담이 얼른 그들에게 다가왔다. 세현은 약간 안도하여 한숨을 쉬었다.

"일단 따라가라고 해서 따라왔어. 3시간 뒤면 수송기 온대."

아담은 굳은 얼굴로 그녀의 왼손목을 주시했다.

"마력은…."

"아직 괜찮아."

그들은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다. 제복을 입고 있는 군인과 사우디 특유의 흰색 천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대거 있었다. 그들은 아주 유창한 영어를 썼다.

"게이트 크기가 남중국해 게이트보다 크다는데 그게 맞소?"

누군지 모를 군인이 그렇게 물었다. 세현은 그쪽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했고 아담이 대답했다.

"게이트 직경 자체는 남중국해보다 약간 큰 정도였습니다. 물량은 훨씬 더 많아 보였습니다. 탈출하기 직전 1시간 동안 타이탄이 5기 나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침음을 흘렸다. 비상 상황실로 보이는 곳 벽에는 홀로그램이 잔뜩 떠서 영상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고 스크린마다 사람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자유 국가인 이스라엘 쪽 정보가 가장 많았다. 영상에서 가고일 플럭이 가자 지구를 덮치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은 가자 지구 한 가운데 가고일을 유인하는 향을 몇 톤이나 들이 붓고 팔레스타인 인들을 뜯어먹고 있는 가고일 떼에게 중기관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동원을 하는 나라로써 이미 5만 예비군이 동원되었고 24시간 내에 45만명, 72시간 내 전군 동원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가자 지구를 몬스터 베이트로 쓰고 지중해에 접해 있는 이스라엘 제 2도시인 텔아비브 방어선 구축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동맹국인 미국이 용병을 잔뜩 실어서 이스라엘로 보내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대미사일 방어 쉴드를 도시 전체에 씌웠다. 타이탄 이외의 모든 몬스터를 막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규모로 24시간 365일 유지하면 아마 국가예산에 맞먹는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이스라엘은 적대관계에 있는 이웃 국가들에게 호소하는 방송을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니들도 다 죽는다.

그 외에도 리비아, 키프러스, 그리스, 레바논, 시리아, 터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영상 정보가 송출되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상태인 곳은 지중해 게이트가 나타난 포트사이드 근해와 가장 가까우면서 지중해 연안에 인구 밀집도가 높은 도시를 가진 이스라엘이었다. 사우디 서북 도시 두어 개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몬스터가 아직 몇 마리 나타나지 않아 인명피해는 극미했다. 하지만 미국 및 영국발 뉴스에 의한 몬스터 확산 예상도를 보니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는 이스라엘, 레바논, 튀니지, 키프러스, 그 다음으로 요르단, 터키,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그리스 등이 있었다.

"수에즈 게이트가 소멸되고 지중해 게이트가 생긴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빅크런치 실험은 성공했고 축배를 들다가 우연히 새로운 게이트가 발생하는 걸 목격했을 뿐입니다. 이미 예전부터 지중해에 새로운 게이트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끊임없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아, 저기 나오네요."

마침 영국발 뉴스에서 이미 15년 전부터 꾸준히 지중해에 새로운 게이트가 나올 것이라는 연구 결과에 대해서 방송하고 있었다. 사우디 측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자기들이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적고 이스라엘과 서구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는 것밖에는 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세현은 의혹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부 부정했으며 아담은 자신이 전해줄 수 있는 한도에서 최대한의 정보를 전해주었다.

"그럼 수송기는 어느 쪽으로 옵니까? 슬슬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세현이 물었다.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초로의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타이탄은 총 24기. 각 6기씩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이스라엘 군은 약 120시간 뒤 텔아비브 근안에 도착할 것으로 보이는 타이탄 1기를 처리하기 위하여 공군 전투기 30대를 출격했습니다. 하지만 타이탄은 알려진 대로 비핵무기를 이용한 처리가 어려워….]

미국발 방송은 여느 때와 같이 본토에서 일어나지 않는 전쟁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 쇼를 설명하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타이탄 24기…."

한 기만 있어도 도시 하나는 거뜬하게 파괴하는 몬스터였다. 몬스터 게이트 근처 가장 가까운 섬 여러 개를 몬스터 베이트로 써 몬스터를 끌어들이고 용병들을 먹이 삼아 죽이는 건 다른 몬스터에 해당하는 얘기였다. 타이탄은 먹지도, 자지도, 생식하지도 않았다. 타이탄의 이명은 '워커(Walker)'였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파리들을 쫓으며 그저 걷기만 할 뿐이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겠소? 전에 일으켰던 지진도 몬스터를 대량으로 죽이기 위한 거라고 하지 않았소. 그대들이라면 분명히, 적어도 타이탄은 처리할 수 있는 거 아니오?"

그는 절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어 세현이 살짝 눈썹을 들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몬스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민간인이구요."

"그, 그 중력 마법이라는 것을 쓰면 스스로의 무게에 눌려 죽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세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제 전문가적 소견에 따르자면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세현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본인들이야 말로 전문가면서 민간인을 잡고 애원을 하고 있는가. 아담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 대응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일단 지금 몬스터가 몰리고 있는 도시를 베이트로 써서 다른 도시로 몬스터가 흘러가는 걸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우디는 넓은 나라요. 베이트로 삼은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군대를 타브크로 소집하려면 적어도 이틀은…."

"그럼 그 지역민이라도 민병으로 소집해서 유지하십시오. 베이트 전략에 실패하면 지상에 상륙한 몬스터를 막기 힘듭니다. 베이트 도시들이 몬스터 레어(Monster Lair)가 되어 몬스터를 재생산하기 시작하면 사우디뿐만 아니라 이라크나 예멘, 오만까지 괴물들이 드글거리게 될 겁니다."

"자네가 여기서 제일 전문가로군."

그의 체념조에 아담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몇 번 더 몬스터를 막기 위한 전략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이 쓸모없는 것들이 나라를 말아먹겠군.'

아담은 곧바로 거기에 있는 고위 지휘관들에게 사우디 군에 대한 정보와 현재 공격당하고 있는 도시에 대한 상황을 전해 듣고 빠르게 대책을 제시했다.

"마그나, 알 바드, 가얄, 샤마는 버려야 합니다. 어차피 작은 타운들이고 이미 몬스터가 드글거릴 겁니다. 당장 소이탄 계열의 폭탄을 투하해서 소각해야 합니다."

"그럼 아직 살아있는 민간인은…!"

"버려야 합니다. 구할 수도 없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새 몬스터를 만들기 위한 양분밖에 안 됩니다."

아담은 공중에 있는 지도 홀로그램의 제어권을 이양 받아 지금까지의 정보를 전부 반영하여 상태를 색깔로 나타냈다.

"군인들 중에 몬스터 처리에 특화된 마도사는 없습니까? 용병이라도?"

"10명 정도 있었는데…."

"있었는데?"

"셋은 보병에 앞서서 마그나에 보냈다가 전사했다고…."

"미쳤습니까? 전투 지역에 미사일 한 대만 보내는 군대가 어디 있습니까? 지켜주는 보병과 공군의 보조가 없으면 마도사병은 금방 죽습니다!"

아담은 그들의 무지함에 입을 딱 벌렸다. 이웃 나라인 이집트가 몬스터 게이트 때문에 망했는데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적대 국가도 많은 나라가 군대 운용을 이따위로밖에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무기력하게 있던 군인들이 어느새 아담의 지휘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현 일행은 입을 다물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나대지 말라고 했는데…, 저건 괜찮으려나.'

세현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누군가 세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 흔들었다. 세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였다.

"교수님~"

"왜."

유리가 가까이 다가와 세현의 귀에 속닥거렸다.

"배고파요."

"……."

세현이 진심이냐는 얼굴로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유리는 텅 빈 자신의 가방을 보여주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세현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가 그냥 피식 웃었다. 그녀는 주변을 보다가 아까의 상사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니, 우리 애가 배가 좀 고프다는데. 먹을 것 좀 없을까?"

사실 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저쪽 윗대가리들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러자 아까 전의 초로의 남성(왕자라도 되는 것일까)이 손짓했다. 아담을 제외하고 그들은 일단 응접실으로 안내되었다. 화려한 실내였다. 음식은 빠르게 차릴 수 있는 걸로 간단히 나왔다.

"아, 이상한 맛 나."

유리는 중동 음식 특유의 향신료 맛에 불평을 토로하면서도 다시 엄청나게 먹기 시작했다. 하우빈도 이것저것 가려가면서도 꾸역꾸역 먹는 것을 보니 다들 배가 고프긴 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탈출 이후로 변변하게 먹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최이삭이 슬그머니 물었다.

"그냥 좀 해주면 안될까요? 사정도 딱한데…."

좀 찔리기도 하고…. 치엔위도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러자 세현이 바로 눈을 부라리며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걸 우리가 왜 해?"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그렇게 쏘고는 따뜻한 해물 스프만 천천히 뜨고 있는 세현이었다.

"비행기 타고 가서 몬스터들이 못 덤비는 위치에서 그 타이탄이라는 것만 처리해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될 거 같은데."

치엔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니가 이거랑 뭔 상관이야. 안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안 해야 하는 거야.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해?"

왕리밍도 그녀를 타박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 뭐? 둘리 된다고. 항상 니가 나보다는 덜 떨어지지만 세상 다른 사람 전부 합친 거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그래도…."

"사람 몇 명 죽는다고 엉덩이 가볍게 들썩거리지 마라. 사람들이 널 걸레짝처럼 쓰려고 들 거다."

왕리밍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또 뭐라고 반박하려고 하자 왕리밍이 그녀를 벌레 보듯 보며 씁, 하고 소리를 냈다. 치엔위도 닥치고 수저만 달그락거렸다. 그는 어느샌가 차림새를 정리한 상태로 우아하게 칼질을 해서 생선살을 깨끗하게 발라냈다. 그러고 있는데 세현의 디바이스로 드디어 연락이 왔다.

[어디냐?]

"밥 먹고 있는데요."

[밥 처먹을 정신이 있냐? 수송기 벌써 도착했다는데.]

"네? 아니, 이 새끼들이 왜 말을 안 해."

세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다른 이들에게 눈짓했다. 다들 일어났다. 유리는 남은 스프를 끝까지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예의 비상상황실로 갔다.

"수송기 도착했대."

그녀는 아담을 불렀다. 아담은 지도를 보며 어디 연락도 하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는 디바이스의 마이크 부분을 막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통화만 마무리하고 가려고 하자 사우디 장성들이 급하게 그를 잡았다.

"자네…! 지금 어디 가려고!"

"지금 저는 세계물리학회에 고용되어 있습니다. 저분들을 안전하게 본국까지 보내드리기 전까지는 다른 계약은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위약금은 얼만가? 얼마든지 주지. 달러, 아니! 금이나 다이아몬드로도 줄 수 있네."

"…곤란합니다. 저분들을 본국에 보내드리고 다시 올 수는 있습니다."

"지금 한시가 급한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담은 세현을 보았다.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양보하지 않을 수 있는 걸 굳이 양보하는 것은 병신짓이라고 생각한다.

"도착하는 대로 제 용병단도 데리고 같이 오겠습니다."

그는 이름 모를 장성 하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한중 양국이 보낸 공군 수송기가 도착한 비행장으로 안내되었다. 비행기의 엔진이 아직 그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활주로로 나가기 전 세현 일행을 납치하려다 구출하게 된 중대장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사우디를 구해주실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우리는 그럴 재량이 없다니까."

"그때 저희 중대를 전멸시킬 뻔한 마법이면 타이탄도 한 번에 처리하실 수 있으신 거 아닙니까?"

"아냐."

"거짓말이시죠?"

"아니라니까."

그녀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활주로로 이어지는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녀는 컨디션도 좋지 않고 걱정거리도 많았다. 그녀는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거짓말이면 어쩔 건데?"

그때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일행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세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교수님…."

"마법 쓸 생각 하지 마! 마법 쓰면 바로 죽는다!"

최이삭이 양손을 공중에 들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아깐 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구가 씌워져 있었다. 언뜻 보기엔 헤일로 같은 것으로 검붉은색에 그 안쪽으로 가느다란 가시 같은 것이 머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턱과 뺨, 등에 온갖 총구가 들이밀어져 있었다.

"앗…!"

그리고 사람들이 당황한 새에 치엔위의 머리에서 똑같은 것이 씌워졌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총구가 잔뜩 향했다. 알렉스는 단박에 세현에게 달려갔다. 유리는 하우빈을 옆구리에 끼고 재빨리 세현과 왕리밍 가까이로 도망갔다. 아담은 그들과 군인들 가운데 서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놔주십시오."

아담이 침착한 목소리로 중대장을 보았다. 중대장은 세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엄포를 놓았다.

"이거! 마도사가 마법을 쓰려고 하면 바로 머리를 꿰뚫는 거야. 아무리 간단한 마법이라도."

그러자 치엔위가 탄식을 내뱉었다. 중대장은 빨간색 버튼이 달린 손잡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걸 눌러도 대가리가 터지지. 참고로 나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빨리 쉴드 쳐서 어떻게 해본다? 불가능해. 보통 인간의 반응속도보다 10배는 빠르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사우디는 수송기를 기다리는 이 잠깐동안 마도사를 무력화시킬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아니, 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실행 도구까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아담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건 아담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는 세현을 돌아보았다.

세현 퀸은 이제껏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왕리밍의 경우에는 급소를 찔린 듯 허옇게 질린 얼굴이었다. 둘은 세상에서 자신 빼고는 전부 무가치하다 여기는 것을 눈빛부터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걔는…, 걔는 놔라.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왕리밍이 입을 열었다. 그가 손을 들어 치우라는 듯이 휘젓자 중대장이 버튼을 위협적으로 들었다.

"지원을 해주겠다고? 용병을 보내겠다고? 헛짓거리! 미국이 하는 말을 듣느니 알라를 부르고 장렬하게 전사하겠다! 해결책은 이렇게 빼앗아가고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햄버거나 처먹으면서 보고 있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조국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샤리프 사령관의 단독 작전이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나? 사우디는 이 비상시국을 불러 일으킨,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피해를 수습할 수 있을 강력한 마도물리학자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니들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

세현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 중대장과, 최이삭을 붙잡고 있는 군인들 뒤로 멀찍이 서 있는 아까 봤던 초로의 남자까지 찔러 죽일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총 안 치워? 너 걔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내가 지구에서 사우디를 뜯어내…!!"

왕리밍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유례없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그녀에게 가까이 붙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마법 쓰지 마라. 애들 다 죽이고 싶어? 어? 최 박사는 몰라도 내 치엔위는 안 돼. 알아들어?"

속삭이는 왕리밍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알렉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눈빛만으로도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 기세였다.

"우리 모두 만족할 만한 방법을 찾아봅시다. 이렇게 서로 얼굴 붉혀서 좋을 일 없지 않습니까."

왕리밍은 세현 퀸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학자였다. 캘리 박의 그런 부분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리이펑 장관과 중공대외연락부장, 캘리 박, 한국 안보수석을 연결했다.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십니까? 지원금, 전문가, 원군까지 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이 마도사들이야! 당장 이 마도사들이 가서 마법 몇 번 부리면 많은 사우디 사람들이 살 수 있잖아!"

[그들은 학자이지 용병이 아닙니다.]

"서방국은 항상 우리를 바보로 알더군. 그 '학자'라는 인간들이 진도 9가 넘는 인공지진을 일으키고 몬스터를 한꺼번에 수천 마리씩 없앨 수 있는 그런 학자들 아닌가! 잠깐만,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아주 잠깐만 힘 좀 써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치엔위는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왕리밍이 아무리 갈궈도 울지는 않는 그녀였다. 반대로 최이삭은 세현의 앞에서는 눈물을 참지 못하면서 지금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각국 수뇌부들은 설전을 벌였다. 왕리밍은 치엔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다가 말했다.

"둘 다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여자는 놔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러자 세현이 시뻘개진 얼굴로 그를 홱 노려보았다.

"죽고 싶어!!"

[맞습니다. 인질을 굳이 두 명이나 데리고 있을 필요 있습니까? 치엔위 박사는 중국 최우선보호인물로 지정되어 있는, 당에 매우 중요한 인재입니다. 지금 이 인질극은 향후 사우디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최이삭 박사는 아닌 줄 압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 뒤통수를 치겠다구요, 리이펑 장관?]

여기서도 결국 개싸움이다.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캘리 박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꼭 인질은 잡아둬야겠다고?]

"마도사들이 괴물들을 처리해주지 않겠다면 더더욱."

초로의 남자가 멀찍이 뒤에서 그렇게 말했다.

[얘들이 몬스터나 잡고 사람이나 죽이러 다니는 군인이나 용병으로 보여? 거기 있는 물리학자들은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교수고 박사들이야. 지금 니가 하는 짓이 수천만 명, 수억 명 중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인재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거라는 걸 알고 있나?]

캘리 박은 그렇게 대화를 시도했다. 물론 그 시도는 성공률이 높지 않았다.

"미래도 인재도 수백만 명의 목숨이 살아있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소."

캘리 박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잠깐 그대로 말없이 상황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왕 교수 말대로 여자애는 풀어주지. 인질은 한 명이면 충분해.]

"교수님!!"

세현이 소리를 질렀다. 초로의 남성은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다가 손짓했다. 알렉스와 유리, 하우빈, 아담을 가리켰다.

"대신으로 나머지는 데리고 있어야겠는데."

[잠깐만! 알렉스 군은 우리나라의 무고한 시민입니다. 그런 식으로 민간인을 인질로 잡았다간 세계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아담은 이미 끌려갔다. 세현은 하우빈을 끌어안았다. 캘리 박도 말했다.

[여자애는 안 돼. 우리 애야.]

알렉스와 유리는 세현을, 그리고 왕리밍과 화상으로 뜬 캘리 박도 번갈아 보았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들 제자뿐이었다. 알렉스와 유리도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그들도 머리에 그 괴상한 헤일로를 썼다. 중대장은 최이삭에게 조용히 말했다.

"니가 마법을 쓰면 네 명 다 같이 머리 날아가는 거야. 알겠어?"

최이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로의 남성이 고개짓을 했다. 군인들은 치엔위에게 헤일로를 씌워 둔 채 앞으로 밀었다. 왕리밍이 얼른 달려가서 넘어지려는 그녀를 안았다.

"교, 교수님…."

"괜찮아. 울지 마. 베이징 가면 금방 떼내줄게. 울지 마. 괜찮아."

왕리밍이 저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들어봤다. 그는 그녀를 부축해서 돌아왔다. 세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들과 최이삭을 번갈아 보더니 캘리 박의 얼굴이 뜬 화상 화면을 돌아보았다.

"교수님, 안 돼요…. 이삭이도 구해주세요, 네?"

그녀가 저런 목소리를 내는 것도 처음 들었다. 그녀는 자기 스승에게 애원했다. 캘리 박은 말을 이어 나갔다.

[언제 풀어줄 거지?]

"몬스터 게이트 베테랑 용병 5만 명. 지원금 당장 십억, 전투기 100대, 소이탄 가능 물량 전부, 미사일, 기타 등등. 그게 다 도착하고 나면 생각해보지."

[…준비되겠습니까?]

[일단 소드마스터 용병 현지시각으로 내일 오전 11시까지 5천명 보낼 수 있습니다. 여유가 되는 기업에서 징발해서 일주일 뒤까지 2만 더 보내드리죠. 지원금 7억, 소이탄 1만 톤, 대공미사일은…, 일단 되는대로 오늘 밤 자정까지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투기는 당장 보내드리죠. 치엔위 박사를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병 1만 이틀 뒤 오전까지, 1만 오천은 일주일 뒤. 지원금 3억은 지금 송금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 최 박사는 언제 풀어줄 겁니까?]

한중이 서로 지원량을 합의한 것이 보인다. 안보수석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보고 결정하지."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현은 캘리 박을 노려보았다.

"…내가 죽어서 이러는 거죠…. 내가 곧 죽으니까 이러는 거죠!!! 이 망할 노친네!!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세현이 분노와 억울함, 절망감에 열화를 터뜨렸다. 나라가 망할 판국에 이 망할 사우디가 최이삭을 풀어주겠는가. 그는 세현의 '유일한' 제자였다. 그녀는 캘리 박에게 쌍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진정해라. 애들 본다.]

캘리 박이 세계물리학회에 자리를 잡으며 물리학회는 다른 학회들과는 성향이 다른 조직으로 차츰차츰 변화해갔다. 그녀가 중력의 비밀을 풀고 중력 마법을 개발하고 재능 있는 마도사를 물리학자로 키우고 자신이 개발한 중력 마법을 가르치면서 세계물리학회는 역사상 유례없이 강력한 힘을 가진 개인들의 집단이 되었다. 그녀는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나 마도물리학자에게 탈종교주의, 탈민족주의, 세속주의를 강하게 심어 넣었다. 그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자신의 제자들과 학자들이 정치나 종교, 국가, 정의라는 이름 하에 휘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주저없이 조직을 권력화했다. 동아시아 국가 및 미국과 깊숙이 유착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연구 실적을 내놓고 유명세를 날려 인재를 더욱 끌어 모았다. 구성원들의 머리가 비상하고 우주와 인류의 미래를 이끌면서도 치외법권이랄까, 영세중립국처럼 독자적인 집단이랄까, 마약이 아닌 우주와 미래와 지식을 팔고 약쟁이들이 아니라 정부의 돈을 받는 좀 마피아스러운 그런 집단이 되었다.

[예전에 러시아에 있던 마도물리학자가 납치된 적이 있었지.]

그녀는 욕하고 소리를 지르는 세현 퀸을 제쳐 두고 말했다. 하우빈이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고 말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분노에 어쩔 줄을 몰라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캅카스 반군인가 뭔가가 러시아 정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자세한 사정은 내가 별 관심이 없어서 지금도 모르겠고.]

캘리 박이 말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러시아 정부가 그 물리학자를 구해내고 반군 조직을 와해시켰다고."

의장이 대꾸했다.

[아, 얘기가 빨리 통하겠네. 그거 정부군이 한 거 아니야. 물론 신문에는 그렇게 났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지.]

캘리 박이 말했다.

[그 교수가 잠깐 내 랩을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던 대가리가 엄청나게 나쁜 년이었는데. 어쨌든, 걔 돌려받고 난 다음에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몸이 코카서스까지 친히 행차해서 체첸에 있는…, 뭐더라? 하여튼 거기 도시 하나랑 카바르…, 아~, 뭐더라, 어쨌든 거기 도시 하나를 이렇게.]

캘리 박이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살짝 내렸다.

[눌러버렸지.]

"……."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흥미로운 일을 약간 연극조로 말하던 다 늙은 할머니가 화면으로 좀 더 다가와 조용히 사실을 적시했다.

[거기 있는 그 지랄하는 년이랑 짱깨놈은 내가 8년이나 키웠고 니들이 감히 머리에다 그거 끼운 애들은 걔들이 6년씩 키운 애들이야.]

세현도 소리를 지르다가 벌건 눈으로 그녀의 얼굴이 뜬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씨발, 그럼 지금 당장 와서 여기도 눌러버리라고!!"

[우리 애 털 라기라도 잘못 건드리면 그 미친년 아니면 내가 가서 사우디 아라비아를 지도에서 스티커 떼 듯이 벗겨버릴 거거든?]

캘리 박이 쪼글쪼글한 손가락으로 스티커를 떼어내는 시늉을 했다.

[신문에는 또 뭐라고 나려나. 운석 충돌? 뭐 사실대로 나도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몬스터 걱정은 더 이상 안 해도 될 거야.]

"…지금 협박하는 거요?"

[그래, 이 개새끼야.]

"……."

지금 위기에 처했다고는 하나 무려 중동의 부국 하나를 상대로(그것도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 캘리 박이 싸움을 받아 치고 있었다. 수송기에서 군인들이 나오더니 왕리밍과 치엔위는 중국 비행기로, 세현 퀸과 하우빈을 한국 쪽 수송기로 데리고 가려 했다.

"알았어! 놔! 갈 테니까."

세현이 군인들을 뿌리쳤다. 그녀는 최이삭에게 곧장 다가갔다.

[어, 어어! 야, 저거 잡아.]

캘리 박이 당황해서 그렇게 말했다. 세현 퀸은 그들을 쉴드로 막아내고 최이삭에게 갔다. 몇몇 군인들이 당황해서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교, 교, 교수님…."

그는 꼼짝 못하고 잡혀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앞에 다가오자 드디어 눈물을 흘렸다.

"빨리 구해줄게. 알았지? 걱정하지 마. 밥 잘 먹고 있어. 울지 마, 병신같이."

그녀는 최이삭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 잡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최이삭을 끌어안고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아직도 버튼을 위협적으로 들고 있는 중대장을 보았다.

"연락은…, 계속할 수 있게 해줘. 설마 때리고 그러지는 않겠지? 진짜 그러면 가만히 안 있는다, 어?"

"…공손하게 말해 보시지."

세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연락은 계속할 수 있게…, 해줘요, 제발. 때리지도 말고…,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눈이 벌게져서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최이삭과 몸을 떼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몇 번이고 당부했다.

"깡따구 있게 있어. 알았지? 대답해."

"네, 흑, 네."

"아, 울지 말라니까. 내 성격 알지? 어?"

"네…."

"갔다가 바로 올게. 바로 구하러 올게. 알았지?"

"네. 너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몸 조심하셔야 돼요, 교수님."

세현이 얼굴을 왕창 일그러뜨렸다.

"노친네가 하는 말 들을 걸…. 내가 더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누가 감히 우리 못 건드리게…, 아…."

그녀는 후회하고 있었다. 왕리밍을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차도 최이삭은 그녀의 제자였다. 그를 건드린다는 것은, 그리고 이 순간에 그가 가장 먼저 배제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그녀를 우습게 본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이삭의 어깨에 잠깐 이마를 대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조심하고 있어라."

"네. 교수님, 빨리 가세요. 빨리요."

최이삭은 마음을 다잡고 그렇게 말했다. 하우빈이 군인들에게 들쳐메여 먼저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유리야! 넌 내가 구해 줄게!"

하우빈은 아직 뭔가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유리를 보고 있었다. 유리가 대답했다.

"알았어!"

그리고 그제야 세현은 알렉스와 아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몹시 지친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얘 좀 잘 지켜줘. 사례는 얼마든지 할 테니까."

"……."

그리고 그녀는 사우디 군과 눈싸움을 하고 있던 한국 군인에 의해 수송기로 에스코트 되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최이삭을 돌아보았다. 잠시 뒤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하지만 제수스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가 기대하는 그 메시지가 아닐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알아도 바로 확인하고는 했지만, 이제는 하기 싫었다. 실망할 때마다 이유도 모르게 더 힘들어졌다.

그는 얼굴 여기저기에 아직 상처가 남아 밴드와 테이프를 붙여놓은 상태였다. 그는 경기장 잔디밭에 누워 그냥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신가 싶어서 디바이스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6시 반. 메리 호텔 1113호>

"!!"

그는 벌떡 일어나서 그 메시지를 눌렀다. 믿기지가 않아서 그랬다. 이미 6시 반이 넘었다. 제수스는 경기장 바로 근처에 있는 메리 호텔로 바로 달려갔다. 방문 앞에 도착해서 바로 노크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호텔 방문 앞에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복도에도 서 있었다. 아래층에서도 봤다. 이상한 표정으로 그들을 한 번 봤다가 다시 노크를 하려고 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기뻤다. 그런데도 뭔가 화가 나고….

제수스가 노크를 하기 전에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인지 먼저 문이 열렸다. 꿈에서도 나오던 그녀가 나타났다. 샤워를 한 것인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고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 가운데만 녹색인 갈색 눈동자, 언제나 별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귀족적인 얼굴….

'밉다.'

제수스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왔어?"

그녀는 문을 열어주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제수스는 약간 굼뜬 속도로 따라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마저 닦다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안 벗고 뭐해?"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세현이 말하지 않아도 훌훌 잘 벗던 그였다. 몇 주만에 만나는 것이지만 그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왜 연락 안 했어?"

제수스가 물었다. 세현은 사흘만에 제대로 샤워를 한 것이었다. 그녀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일 때문에."

"……."

"내가 좀 바빠서. 거기다 좀 빼놔."

세현은 피부가 건조한지 비치되어 있는 로션을 얼굴과 온몸에 발랐다. 침대 위에는 바늘이 없는 주사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가 걱정했던 대로다. 한 달 하고도 일주일 전에.

"이름… 뭐야?"

제수스가 물었다. 세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이 시국에 아직도 그녀가 누군지 몰랐단 말인가. TV만 틀면 나온다.

"이름 말 안 해주면 앞으로 안 할 거야."

제수스는 그렇게 말했다가 스스로도 좀 놀랐다. 꼴사나웠기 때문이다. 세현은 그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왜 이래? 성가시게.'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은 건 별 다른 건 아니었다. 그 당시 살기 위해서 그런 걸 해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짐승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세현이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남자다.

"갑자기 왜?"

세현이 물었다. 그러자 제수스가 고개를 퍼뜩 들어 그녀를 보았다. 사뭇 원망스러운 얼굴이었다.

"갑자기가 아니잖아…! 항상…! 항상 물어봤잖아…. 왜 이름도 안 말해줘? 이름 정도는 괜찮잖아."

밉다. 원망스럽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냥 밉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싫다고 하면 그냥…, 안녕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한 달 넘게 사흘마다 만나던 여자가 갑자기 연락을 안 하면 걱정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

세현이 뭐라고 하려고 하자 제수스가 손을 들어 막으며 스스로 자신의 말에 반박했다.

"그래, 알아…! 나 같은 놈한테 그런 인사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겠지."

"……."

"그러니까 연락도 못하게 한 거고…, 젠장."

그게 제수스의 결론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름도, 인사도 없었던 것이라고. 제수스는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꼴사납다. 진짜 꼴사나웠다. 제수스는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다가 숨을 잠깐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 어쨌든…, 싫…다는 거지…."

그는 세현의 얼굴을 보았다. 어찌되었든 다행히도, 원하는 바를 하나는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알았어."

미소를 짓고 싶었는데 잘 안 되었다.

헤어지면서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은 상대에게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안녕이라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모든 게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고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인사를 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그럴 틈도 없이 앞에서 죽어버리거나 그가 없는 곳에서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를 외면했다. 그는 그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입이 안 떨어졌다. 그가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데 세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만 먼저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앉아."

"……."

제수스는 움찔했다가 마지못해 한다는 듯 천천히 침대로 가서 앉았다. 세현은 피곤한지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중얼거렸다.

"밉다…."

"빨리 해."

그는 팍 기분이 상한 얼굴로 티셔츠를 끌어올려 훌쩍 벗었다. 깔끔하게 바싹 깎아서 위쪽은 멋있게 모양을 낸 그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바지랑 속옷도 성의없이 발로 내려서 벗고는 등 뒤로 침대를 양손으로 짚고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턱 앉아 있었다. 경찰서에 끌려온 불량청소년 같은 자세다.

"뭐해. 빨리 하라니까?"

그녀는 제수스에게 오나홀과 젤을 던졌다. 그의 다리 사이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제수스는 아예 침대에 털썩 누워 버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세현이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다. 제수스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툭 말했다.

"이름."

"이름 뭐."

"이름 가르쳐줘. 안 가르쳐주면 안 해."

자기가 연예인이야 뭐야. 왜 이름을 안 가르쳐줘? 제수스가 구시렁거렸다. 세현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마당에 이름 가르쳐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르쳐주기 싫었다.

'무식해….'

이 시국에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도대체 뭔가. 세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 이름을 왜 몰라?"

"…응?! 가르쳐줬었나?"

아니, 그런 적 없다. 제수스가 벌떡 일어났다.

"진짜 연예인이었어?!"

"하…."

세현은 잠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빨리 하기나 해."

"아니…, 아니…! 잠깐만…."

그는 세현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확 하고 놀랐다가 다시 꼬옥 잡았다. 그는 세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빨강 머리카락, 호박색에 가까운 헤이즐색 눈동자, 남자다운 턱과 섹시한 목덜미, 신이 내린 몸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초조한 얼굴로 그녀에게 졸랐다.

"그래도 니 목소리로 듣고 싶어."

"세현."

이런 입씨름을 하는 게 오히려 바보 같아서 그냥 툭 말했다. 세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멍청함이 옮는 느낌이다.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본 채로 가만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세현…. 세현."

그는 그대로 세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에 눕혀 순식간에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그는 세현의 몸에 자신의 온몸을 붙이며 그녀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세현…."

그리고 그는 전처럼 바보같이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세현."

"그래, 그러니까 이제 빨리 해."

제수스는 그녀를 깔아뭉갠 채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았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내 정액이 왜 필요한 거야? 애라도 가지려고 그러는 거야?"

"다 필요해서 하는 거니까…, 윽, 무거워!"

그는 아주 살짝 팔다리에 힘을 줘서 약간 몸을 띄워주었다. 피부를 맞댄 것은 그대로였다.

"그동안 어디 간 거였어? 무슨 일 해? 이제 키스해도 돼? 성은 뭔데? 또 어디 가는 건 아니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뭐야? 진짜 연예인이야?"

그는 항상 질문이 많았다. 게다가 끈질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좀 더 골랐을 텐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그가 말은 많아도 세현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난 것이었다.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말했다시피 내가 요새 바빠. 빨리 못 해줄 거면 난…."

"대답 좀 해주면 어디 덧나나."

그러면서 제수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당장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사흘 만에 침대에 제대로 눕는 거라 몸이 안 떨어졌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포기했다. 그녀는 베개를 끌어와 베고는 그를 보았다. 그는 오나홀 안에 젤을 잔뜩 짜넣고 그녀의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발기를 시키고 자극하다가 전처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허리끈을 풀려고 하자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응? 왜?"

그는 전처럼 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그때도 세현은 가운을 벗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시도했었다. 그는 세현의 무릎에 쪽 입을 맞췄다.

"주사기 저런 게 더 기분 나빠. 그냥 하자~ 응?"

그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쪽쪽 입을 맞춰 내려갔다. 세현은 침대에 누운 순간부터 노곤함과 피로감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빨강 머리카락을 잡았다.

"아…, 나 진짜 피곤하거든.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이번엔 진짜 기분 좋게 해줄게, 응? 나한테 맡겨, 세현아."

"야, 너 몇 살이야."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그녀의 살에 코와 입술을 문지르며 그가 점점 깊은 곳으로 입술을 옮겨갔다. 전과 다르게 그녀의 말이 단호하지가 않았다. 그는 세현의 가운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새빨간 그녀의 여성기가 보였다.

'보고 싶었다.'

처음에 할 때 빼고는 거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제수스는 좀 신이 났다.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가 자신의 양 뺨을 감싸는 걸 기분 좋게 느끼며 그녀의 아래에 얼굴을 묻었다.

"으응…!"

엄지로 붉은 소음순을 벌리며 입구와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핥았다. 그녀의 살을 벗기며 음핵을 쪽쪽 빨며 자극하자 점점 그녀가 젖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제수스가 벌겋게 흥분한 얼굴로 가운 밑에서 얼굴을 빼고 그녀를 살폈다.

"별로…."

별로야?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느끼는 얼굴도 아니었다. 어느샌가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

내가 그렇게 별로였다고? 하는 도중에 잠들 정도로? 제수스는 자존심이 상했다.

*

"아…."

노곤했다. 머리가 멍했다. 오랜만에 푹 자고 나면 꼭 이런 느낌이 들었다. 푹 자도 잔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약간 배가 고프고 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녀는 뒤척이려고 했지만 뒤척이기 힘들었다. 뭔가 그녀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보니 그 뭔가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쿨쿨 자고 있었다.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가 팔만 허리에 얹어놓은 것뿐인데도 무거웠다. 허벅지에 뭔가 툭 얹어져 있었다. 그의 흉측하게 생긴 커다란 남성기일 것이다. 그녀의 가운은 어느새 풀어져 한쪽 팔에만 간당간당 하게 걸쳐져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손목을 확인했다. 마력이 쑥 깎여 있었다. 이제 진짜 좀 급할 지경이었다.

"일어나."

그녀가 한쪽 팔꿈치로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며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냥 같이 자면 어떡해. 일어나. 빨리 해. 전처럼 10발은 하라고."

"으음…."

이래봬도 그는 운동선수라 주중엔 매일 9시간씩 착실하게 몸을 굴렸다. 그는 그녀보다도 훨씬 깊이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는 세현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아주 그냥 자기 자리다. 몇 번 더 흔들었더니 세현의 허리에 얹었던 팔을 움찔하며 움직였다. 피부가 드러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끌어당겨서 다시 그녀의 육감적이고 푹신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자연산 진짜 쩔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등을 만지던 손으로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주물렀다. 세현은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퍽 쳤다.

"일어나!"

그리고 그녀는 그를 겨우 떨궈내고 일어나 가운을 껴입었다. 제수스는 부스스한 얼굴로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얼굴을 비비다가 씨익 웃었다.

"잘 잤어? 우리 처음으로 같이 잤다."

그녀는 그런 그의 얼굴을 잠깐 보았다가 불빛이 반짝이는 자신의 디바이스를 보고는 어디로 전화를 걸었다.

"네…, 좀 쉬었어요. 지금 어떻게…. 그때까지 갈게요. 네. 준비는…, 알겠습니다. 2시간 뒤에 출발할게요."

"또 어디가?!"

그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쉿 하면서 입 앞에 검지를 세웠다. 그녀가 문으로 다가갔다. 똑똑 하고 노크를 하고 간단하게 지시했다.

"옷."

그리고 그녀는 욕실 쪽으로 가면서 한숨을 섞어 말했다.

"네…, 알아요. 네…. 노, 교수님이 말씀 안 하셔도 그 정도는 압니다. 네. 예."

세현은 그에게 주사기 쪽을 가리키며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그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그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보통 남자가 그랬으면 꼴사나웠을 거 같은데 덩치가 산만한 근육질 남자가 그러니 모양이 난다. 절로 그를 보고 있다가 세현은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다. 그녀는 가운을 벗고 물을 틀었다가 욕실문을 다시 열고 말했다.

"룸서비스 좀 시켜. 배고프니까."

"네, 마님~"

제수스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심기일전하여 그녀가 가지고 온 주사기를 일곱 개 정도 금방(!) 채웠다. 그는 ‘하…’ 하고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부스의 문을 여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 먼저 씻고 있잖아."

제수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서 촉촉한 물 냄새와 비누 냄새가 났다. 그녀는 제수스에게 몸을 보여주기 꺼려했지만 그래도 그가 이렇게 불쑥 들어왔다고 ‘어머나!’ 하면서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양손으로 잡으며 끌어당겼다.

"안 되겠어. 혼자 계속 하려니까 꼴사나워. 한 번은 하게 해줘."

"…룸서비스는 아직 안 왔어?"

"응."

세현의 시간당 드레이닝 속도는 이제 600만을 돌파했다. 그녀가 아무리 마도 순환을 해도 시간당 200만은 빠져나간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약간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해놓은 건 바로 흡수하는 게 이득이다. 주사기로 빼놓으면 시간에 따라 보충량이 점점 떨어진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사우디가 1차로 요구한 것을 다 주었으나 그들은 재차 세현을 비롯한 마도물리학자들이 와서 몬스터, 특히 타이탄을 해결해주기를 요구했다. 사우디에 타이탄 1기가 상륙하기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캘리 박이 보낼 만한 다른 마도사를 찾고 있었다. 학회 소속 마도사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보낼 만한 사람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세현은 다른 선수나 소드마스터를 찾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이 빨강 머리에게 연락했다. 이런 마당에 새로운 선수를 찾고 설득하고 정액만 달라고 하는 것도 성가시고 사든 뭘 하든 전부 시간이 든다. 시간이야말로 금쪽이나 다름없었다. 캘리 박이나 정부 쪽은 사우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비상이다.

"알았어. 젤 좀 가져와."

세현은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사안이 해결될 때까지는 이 빨강 머리를 잘 이용해야 했다. 지금도 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진짜!?"

안 한다고 할 줄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제수스는 깜짝 놀랐다가 아주 기뻐하며 곧바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뭐야. 젤 가져오라니까."

"이렇게 할래~"

그는 세현의 붉은 살갗에 코끝을 비볐다. 그리고 덥썩 입술로 물었다.

"아…!"

그가 곧바로 쪽쪽 빨아대기 시작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나 이럴 시간 없…어!"

"2시간이나 있잖아. 음~ 기분 전환도 할 겸."

드레이닝에 걸리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섹스하는 빈도가 폭증한 것이 원인일까. 수에즈에 가기 전에 그와 할 때는 그가 아무리 건드리고 꼬셔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하지만 거기 가서 알렉스나, 특히 아담과 하고 난 이후엔 섹스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고 말았다. 기분이 정말 좋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몸이 기억을 하고 있었다.

'음…, 뭔가 다른데?'

제수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그녀는 손가락 하나만 넣어도 질색을 하고 두 개를 넣으면 아파했는데 지금은 느리긴 했지만 그녀의 몸이 스무스하게 풀리고 있었다. 만지는 걸 싫어해서 예전엔 별로 만지지도 못해봤지만 지금은 좀 잘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충분히 젖자 제수스가 일어났다. 그녀의 풍만하고 탱탱한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길쭉한 다리 한 쪽이 근육이 단단히 올라온 그의 허리에 걸쳐졌다.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툭 물었다.

"그동안 다른 남자랑 했어?"

"그런데?"

세현이 대답했다.

"……."

제수스는 그녀의 여성기에 자신의 검붉은 남성기를 한 번 비비고는 푸욱 찔러 넣기 시작했다.

"아…. 하…. 하으…!"

들어간다. 원래 몇 번이고 다시 젤을 바르고 넓히고 그녀가 이를 꽉 깨물고 힘을 주어 넣어야 들어갔는데.

"참지 말고 그냥 빨리 싸. 알았어? 차라리 두 번 해."

제수스는 그대로 그녀의 엉덩이를 꽉 잡고는 빠르게 피스톤질을 하기 시작했다. 세현이 깜짝 놀라 허리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아…!! 천천히 해…! 윽! 뭐 하는 거야!"

"빨리 하라며."

"아파! 아파!! 살살해!"

그녀가 제수스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

그가 멈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끝까지 그녀의 깊숙이 밀어 넣었다가 빼는 것을 반복하며 능숙하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 아으…, 아…."

그녀가 살짝 버거워 그의 양팔을 잡고 신음을 흘렸다. 그의 울퉁불퉁한 자지가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마다 찌걱찌걱 소리가 크게 났다. 그녀의 가슴이 천천히 흔들리면서 그의 단단하고 빵빵한 가슴팍에 닿아왔다.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그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랑?"

"뭐가?"

"어떤 놈이랑 했냐고."

제수스가 물었다. 꿈에도 그리던 그녀와 재회하고, 이렇게 다시 몸을 겹치고 있는데도, 진짜 뻥 안 까고 기분이 뭐 같았다. 세현이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고는 신음을 흘렸다.

"으응…. 하…, 넌 모르는 놈들이야."

"들?!"

"아…,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 닥치고 그냥 해."

세현이 짜증을 냈다. 제수스는 화가 났다. 그가 뭐라고 하려고 하니 세현이 먼저 막았다.

"넌 걸즈니 뭐니 주렁주렁 있을 거 아냐? 왜 이래? 그냥 빨리 해."

"……."

이전 그녀와 만날 때 제수스는 항상 즐겁게 상상을 하곤 했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신음을 흘리고 어떤 식으로 자신을 즐길지 말이다. 그녀가 자신과의 섹스에서 자지러지며 쾌락을 느끼길 원했다. 그의 이름을 애원하듯이 부르며 절정에 이르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해본 적 없었다.

'다른 놈이랑 했다고?'

왠지 그녀가 다시 미워졌다. 그가 그렇게 애타게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다른 남자랑 놀아났단 말인가. 제수스는 그녀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다시 빠르게 퍽퍽 박기 시작했다. 세현은 숨이 막혀서 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쳤다.

"하…! 아으…, 천천히 하라니까…!"

"윽…."

세현이 그를 밀어냈다. 그는 소드마스터니 힘이 넘쳐나겠지만 그녀는 좀 불편한 자세였다. 가운데가 몹시 굵직한 그의 흉측~한 자지가 빠져나가는 것이 불기둥이 빠져나가는 듯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발로 바닥을 딛고 두 손으로 벽을 짚었다.

"이게 나을 것 같아."

"얼굴…, 보고 싶은데."

"그냥 해."

제수스는 그녀를 등뒤에서 끌어안으면서 다시금 푹신하게 부푼 그녀의 여성기 안으로 자신을 찔러 넣었다.

"아, 아파."

"힘 좀 빼."

약간 거칠게 했더니 아픈 모양이었다. 제수스는 후회하며 천천히 삽입했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벽을 짚은 그녀의 한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여자의 손을 이런 식으로 잡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디 영화에선가 남자 배우가 이런 식으로 여자 배우의 손을 잡는 걸 보았다. 그는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면서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가 깊이 들어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응…. 응…. 아…."

그녀의 육감적이고 글래머한 몸매가 그의 남성적인 근육질 몸에 딱 달라붙어 왔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서 기뻤다. 그녀와 다시금 이렇게 껴안고 있는 것이 기분 좋았다. 그녀라서 좋았다.

"나…, 걸즈 만나지 말까? 너도 그런 거 싫어해?"

"뭐? 하아…, 무슨 말이야?"

제수스는 그녀의 음모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녀가 살짝 긴장하며 그를 조였다. 제수스는 낮은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아니…, 우리 클럽 선수 중에 하나도 외부인을 만나는데 여자가 싫어해서 걸즈도 다 끊고 병원도 가서 무슨 병도 싹 치료했거든. 너도 그런 거 신경 쓰나 싶어서."

"아…. 나도 병원 가야지, 참."

그녀는 그렇게 딴 소리를 했다.

"만나지 말까?"

"왜?"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냐는 투였다. 제수스는 역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는 다시금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그녀를 돌려 세우고 번쩍 안아 들었다.

"하…, 떨어질 거 같아."

"안 떨어져."

그녀의 기다란 다리가 자연히 그의 허리를 감쌌다.

"니가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안 만날게."

눈을 감고 있던 세현이 눈을 떴다. 빨강 머리는 상기되었지만 약간 초조한 얼굴로 세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세현이 피식 웃었다.

"만나지 말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너도 다른 남자랑 자지 마."

"하하하."

그의 말에 그녀가 웃었다. 제수스가 인상을 약간 썼다.

"왜 웃어?"

"너 몇 살이랬지?"

"…스물셋."

"아, 어리다. 어려서 이런가."

알렉스도 자기랑만 하자며 자주 졸랐다. 세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는 지금 인질로 사우디 아라비아에 잡혀 있었다.

"마음대로 해."

세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넌?"

"나도 내 마음대로 해야지."

"……."

그렇게 욕실에서 한 번 하고 자리를 옮겨 침대 위에서 한 번 더 했다. 네 발로 엎드린 그녀를 등 뒤에서 덮쳐 짐승처럼 몸을 섞었다. 그는 점점 더 그녀에게 집중하고 점점 더 빠져들었다.

"헉…. 하아. 윽…. 세현…, 세현아…."

부드럽게 피부가 부딪치면서 물기어린 찰싹찰싹 소리가 났다. 그게 오늘따라 되게 야하게 느껴졌다. 탱탱한 피부도, 미끈하고 힘 있게 그를 물고 있는 그녀의 속살도 너무 좋았다. 자신이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느껴지는 그녀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만졌다. 정말 너무나 좋았다.

그녀는 이상한 여자였다.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닌 건 거의 분명한데도. 그녀가 좋았다. 왜인지 모르겠다. 아랫배가 활활 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기분 좋은 여자는 없었다.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즐기고 싶다고 생각한 여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녀도 자신을 즐기길 원했다.

"아…! 거기 만지지 마."

그녀가 제수스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애무를 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제수스는 깍지를 껴 잡고 있던 손을 풀고 그녀의 뒷목을 쓸어 올려 머리카락을 전부 앞으로 넘긴 후 그녀의 목덜미를 빨고 물었다.

"하아. 너무 좋아. 너무 좋아. 헉. 윽…! 세현아. 세현아…, 아윽…. 내 이름…, 내 이름 불러줘."

"하으. 하아…! 앗. 앗. 아앗. 아으으…."

이 남자는 자지가 흉기 수준이었다. 그가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마다 그의 자지에 살이 찰싹 붙어 들락날락거렸다. 가장 민감한 클리토리스가 핏줄이 울퉁불퉁한 그의 자지에 비벼지며 온몸이 화끈화끈하고 거기에서 막 성감이 올라왔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절로 났다.

전에는 전혀 젖지도 않고 아프기만 해서 그에게 빨리 싸라고 재촉만 했는데 본의 아니게 알렉스나 아담과 섹스를 몇 번 하면서 섹스의 쾌락을 알고 나니 몸이 기대를 해서 젖었다.

"하아…, 세현아…. 갈 거 같아? 기분 좋아?"

"대충 해, 빨리…. 으윽…. 벌써 몇 분 째야."

제수스는 세현의 가슴을 잡고 주무르고 그녀의 젖꼭지를 검지와 엄지로 살살 주물렀다. 약간 아픈 듯 자극적이었다.

"아아…. 아…! 아읏…."

세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상체를 납작 침대에 엎드렸다. 갈 것 같았다. 그의 피스톤질이 빨라졌다. 침대 시트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이 방울져 늘어졌다. 미끈미끈하게 젖은 그녀의 여성기에 그의 남성기가 주륵주륵 소리를 내며 박혔다. 제수스가 그녀의 귀를 빨았다.

"윽. 아…! 하아…. 윽. 이제 싼다…?"

그가 섹시한 목소리를 내며 그렇게 속삭였다. 세현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허벅지에 손톱을 세웠다.

"하아…. 읏…. 빨리…. 으…. 으아…. 으으응…!!"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가버렸다. 세현은 숨을 멈추며 짜릿하게 욱신거리는 오르가즘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윽….”

그녀가 자신과 하며 절정을 맞이한 건 처음이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허리짓을 빨리했다. 그녀가 더 느끼기를 바랐다. 자신을 좀 더, 더 많이. 그가 줄줄 흘리며 느끼는 그녀의 음부에 빠르게 퍽퍽퍽 박아댔다.

"하앗. 앗. 아아…! 그만…. 하…. 으으응…. 아아. 아아아…!"

그녀는 허리와 엉덩이를 움찔움찔 빠르게 떨며 신음을 흘렸다. 밑이 뜨끈뜨끈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가 세현의 팔을 잡고 빠르게 허리를 흔들다가 퍽! 하고 깊게 들어왔다.

"하…!"

"으윽…. 윽…! 아윽…. 세현…. 아…!"

그는 앞으로 무너지는 그녀에게 딱 달라붙었다. 그는 세현의 어깨와 목덜미, 뺨을 핥고 빨았다.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다 그 꼭지점에서 그녀의 깊숙이 자신의 흔적을 질펀하게 지리며 숨을 끊어 쉬었다.

"아…."

전부 사정하고 나자 그가 세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느릿하게 비볐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이마를 댄 채 헐떡거렸다. 이 빨강 머리는 그 용병만큼 테크니션은 아니었지만 알렉스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용병은 섹스를 할 때 세현이 쾌락을 느끼게 하는 것에 훨씬 더 집중했다. 알렉스는 잘 하려고 해도 경험치가 딸려서 이리저리 튀었다. 그에 비하여 이 빨강 머리는 자연스러웠다. 제일 많이 한 남자라서 그럴까.

'하긴…, 지금까지 해봤던 남자 중에 제일 많이 했지.'

세현은 좀 더 그러고 숨을 잠재우다가 그의 엉덩이를 때렸다.

"나와. 무거워."

"하아…. 좀만 더…."

그는 정말 좋은 모양인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침대로 그녀를 짓눌렀다. 어어, 하면서 아예 납짝 엎드리게 되었다.

"배고프다고. 그리고 나 나가야 돼. 나와. 나와. 나와."

겨우 그를 밀어냈다. 그녀는 허리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고는 바닥을 딛고 섰다. 제수스가 아직도 벌건 얼굴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얼굴 못 봤다…."

겨우 그녀가 그와 섹스를 하면서 절정을 느꼈는데 얼굴을 못 봤다. 그녀는 제수스의 손을 자연스럽게 놓았다. 그녀는 실크 가운을 입고 의자에 앉아 손을 닦고 룸서비스로 나온 브런치를 먹기 시작했다. 제수스는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언제 볼 수 있어?"

"글쎄."

"나도 연락할 수 있게 해줘."

"안 돼."

"왜?"

"요새 중요한 전화가 많아서."

"또 일 때문에?"

"응."

그녀는 이미 식어버린 빵을 손으로 찢어 올리브유에 찍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욕실로 다시 들어가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밖에 서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져온 정장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금세 멀끔해졌다.

"……."

제수스는 가방을 챙기는 그녀를 보며 기다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음 약속에 대한 말이 없었다. 그건 예전에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럼…, 그럼 이번이 마지막인 건가? 또 못 보는 거야?'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는 언제 봐?"

"모르겠다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야?"

"몰라."

"다시 보긴 볼 거야?"

"아~, 귀찮게 왜 이래? 마지막이면 어쩔 거고 아니면 어쩔 건데."

세현은 정장에 맞춘 구두를 신고 머리를 낮게 대충 뭉쳐 묶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제수스는 일어나서 팬티만 껴입고는 그녀의 앞에 섰다. 그는 약간 풀이 죽어서는 말했다.

"아니면 기다리고 마지막이면…, 인사해야지. 작별… 인사……."

세현은 디바이스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왼손목을 보았다. 그리고 챙긴 주사기도 보았다. 일곱 개, 1억 2천만….

"내일 6시 반. 여기서 봐."

"!"

제수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짜지?!"

"그래."

그리고 세현은 문으로 향했다. 제수스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얼른 따라가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 나 씻었어!"

"미안…. 기뻐서."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참나…. 세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짧게 쓰다듬었다.

"간다. 내일 봐."

"응…."

제수스는 상기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핑글 돌아서 아싸! 하고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털썩 엎드려 누었다.

'…잠깐만. 지금 몇 시지?'

제수스는 침대를 더듬거리다가 자신의 디바이스를 찾아냈다. 부재중 전화가 엄청 와있었다. 벌써 10시 반이었다. 대지각이다.

*

"연락은요?"

"오늘은 안된다더군."

"……."

세현이 인상을 썼다. 밖으로는 깔끔하게 정리된 공원과 한강이 반짝이는 미팅룸에는 사람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캘리 박, 세현 퀸, 한민유, 한국 안보수석, 중국 대외부부장, 러시아 대사, 서던라이온 매니지먼트 사장, 군장성 몇 명, 모르는 얼굴들….

"2128년 4월 28일 금일, 한국 시각 오후 12시, 현지 시각 오전 6시에 2차 원조 물품 조달완료 했습니다. 소이탄 계열 폭탄 1천톤, 미군 협조 받아 S-13 35대, S-15 5대 현지 시각 오전 6시 10분부터 작전 수행 중에 있습니다. 언론은 현재까지 적절히 통제되고 있지만 지중해 게이트에 대한 대중의 정보요구가 심해 오래 가긴 힘들 겁니다."

안보 수석이 그렇게 말했다.

"현 시각 우리 정부의 최우선 목표는 최이삭 박사가 무사 생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목표가 알렉스 킴 군과 유리 라자레프 군의 생환입니다."

중국 대외부부장, 러시아 대사, 서던라이온 관계자들이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일으킨 이 촌극에서 인질 생환의 키를 잡은 건 가장 중요한 인질인 최이삭 박사를 보호하고 있는 한국 정부였다. 중국은 인질극 초기부터 중국 주요 인사들의 안전을 모두 확보했고 러시아도 마도물리학자인 한국 인질에 비해 순위가 밀리지만 자국민 인질이 있는 이해당사국이었다. 서던라이온은 당연히 각국 정부 인사들에 비해 발언권이 한참 약했지만 그들로서도 많은 투자가 들어간 선수를 잃는 것은 큰 손실이었다.

안보수석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그다지 심기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이런 짜증나고 귀찮고 현 정부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 어떤 구출극은 영웅담이 되고 정부 선전에 도움이 되지만 마도물리학자는 아니었다, 마도물리학자는. 실패시 손실이 막대하다. 그녀는 캘리 박의 존재를 의식했다.

안보수석은 상석에 앉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앞으로 쭉 뻗은 2열의 책상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고 가운데 홀로그램 맵이 떴다.

"최이삭 박사의 소재는 현재 리야드 사우디 왕궁으로 동관에 위치한 국빈실 중 하나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인질에 대한 대우는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군요."

캘리 박이 그런 식으로 협박을 했으니. 그녀는 홀로그램을 변화시켰다.

"인질들에게 자폭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이상 인질구출작전은 리스크가 커서 각하하기로 했습니다."

세현 퀸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안보수석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무슨 불만사항 있으십니까?"

"많습니다."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다들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안보수석은 캘리 박을 보았다. 캘리 박이 대꾸했다.

"일단 브리핑 계속하지."

"그러게 왜 하필이면 사우디에 추락하셨어요. 어쨌든, 사우디는 타이탄을 처리할 수 있는 마도사를 사흘 안에 보내 달라고 하더군요. 박 교수님이 마도물리학자는 절대 안된다고 해서 참…."

안보수석은 곤란하다는 티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몬스터 게이트에 핵을 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나오고 있는 게이트에는 핵미사일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터졌다. 중력이상 때문이었다. 웜홀을 통해 이쪽으로 나온 몬스터는 일부 처리할 수 있지만 낙진은 대부분 비가 오면 쓸려 나간다. 새로 나오는 몬스터에게는 거의 영향이 없다는 소리다. 게다가 몬스터가 도시 근처까지 오면 핵은 당연히 쓰지 못한다. 몬스터가 아니라 핵 때문에 피해가 더 커진다. 수에즈 프로젝트로 이제 웜홀 내부의 중력을 계산할 수 있는 웜홀-중력방정식이 나왔지만 그걸 핵무기의 내구성 업그레이드에 적용하고 실전에 사용하려면 앞으로도 꽤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소드마스터 용병이 몬스터를 막는 최전선이 되는 이유가 있었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소드마스터와 비슷한 오라를 지니고 있어 일반 군인이 가진 화기가 잘 안 먹혔다. 웬만한 소드마스터는 지근거리에서 총을 쏴도 오라로 만든 쉴드로 막을 수 있었다. 강력한 소드마스터는 근거리에서 바주카를 쏴도 티끌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형급 이상의 타이탄은 핵이 근거리에서 터져도 막아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대형급 타이탄이 적어도 10기 이상 출현했다. 기존의 방식으로 처치를 하자면 소드마스터가 대거 타이탄을 '등반'하며 타이탄의 오라를 침식하고 MOAB과 같은 재래식 폭탄과 미사일의 보조를 받아 여럿이서 목을 자르는 수밖에 없는데 용병들은 지원하는 폭탄에 맞아 죽거나 아니면 타이탄의 손에 압사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현재 지중해 게이트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나라들은 재래식 폭탄도 소이탄도 용병도 현저히 부족했다.

"그건 됐어. 배우는 내가 구했으니까."

캘리 박이 말했다. 안보수석이 그녀를 보았다.

"누구요?"

"제법 큰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도사가 하나 있더군. 우리 쪽 애는 아닌데 아르바이트는 하겠다고 해서."

캘리 박이 한민유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그러자 그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이 한차례 술렁거렸다. 서던라이온 측이 특히 그랬다. 안보수석도 그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는 TFC에나 뛰는 선수가 아니던가.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범국가적인 사건에 그가 끼어들 여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자 안보수석의 귀에 보좌관이 뭐라고 속삭였다. 대략의 진상을 파악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회장 밑에 있는 마도사도 아니니 죽어도 부담 없다는 거군. 그나저나 경기력 괜찮고 얼굴만 좀 반반한 놈인 줄 알았더니….'

그녀는 모델 같은 자태를 하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미남자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중력 마법까지 쓸 수 있는 마도사가 왜 TFC에서 썩고 있던 거지?'

저 사람은 도대체 저런 인재를 어디서 알고 이렇게 데리고 오는 것인가. 역시 무서운 할망구….

"그쪽은 이것만 준비하지."

그녀는 안보수석에게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말했다. 안보수석은 한숨을 쉬었다. 야전사령관이 말했다.

"작전용 공군 수송기가 대기중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타이탄전 원조 계획안은 6시간 내에 수정해서 24시간 내에 실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대사가 첨언했다.

"한국 정부는 지금 최이삭 박사를 구출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다른 인질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 러시아의 유리 라자레프 군은 고작해야 17살입니다, 17살."

자국민이 인질로 잡히면 인질이랑 같이 날리는 주제에 뭘 따지는가. 우리 작전에 숟가락이나 얻으려는 주제에. 안보수석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최 박사를 구하는 게 나머지를 구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알렉스 킴 군도 이제 19살이 된 한국의 젊은 청년입니다. 우리 정부와 우리 군은 그들 모두를 구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볼펜으로 데스크를 치면서 어르듯 그렇게 말했다. 서던라이온 측도 첨언했다.

"인질을 구출하는데 드는 비용은 저희 쪽도 분담할 수 있으니 필히 킴 선수와 라자레프 선수를 무사히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인질은 현재 아주 무사하게 잘 있습니다. 우리 정부에 이러기 전에 사우디한테 더 강경하게 불평하십시오."

짧은 미팅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캘리 박, 세현 퀸, 다니엘 스톤하츠가 잠깐 얘기를 나눴다. 세현은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키가 크고 쓸데없이 엄청 잘생긴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독학? 웃기고 있네."

"…세현 퀸 교수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수님과 박 교수님 논문은 어렸을 때부터 종이가 닳도록 읽었습니다."

"뭐뭐 할 수 있는데?"

"중력 증폭 마법과 고질량점 중력 마법은 가능한데 무질량점은 아직…."

"진짜 그걸 독학했다고?"

세현이 영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자꾸 그를 보자 캘리 박이 말렸다.

"그래. 확인했다, 내가."

그러자 세현이 그를 한 번 더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그래서 지금 뭐 한다고? 학교는 안 들어오고 뭐해?"

"그래, 우리 학교 들어와. 좋아."

캘리 박도 거들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연구보다도…, 돈을 벌고 싶습니다."

캘리 박이 고개를 저었다.

"그릇 작은 소리. 못 배워서 그런 건가. 사람이 큰 걸 봐야지, 큰 걸. 돈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너 우리 쪽에 들어와봐. 매년 연구비 몇 천 억은 우습게 쓸 수 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쓸 돈이 필요합니다."

"아, 요새는 그게 좀 어려운 게 흠이긴 하지…. 그럼 너도 얼굴 반반한데 TV 같은데 출연도 시켜주고 할게."

"제 연봉보다 많이 나올까요?"

"얼마나 버는데?"

"천 정도는 됩니다."

그러자 세현과 캘리 박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에 천…은 좀 무리지 않을까요, 교수님?"

"그건 그렇겠다…. 아니, 니가 부양할 노모와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 돈이 그렇게 필요하냐. 빚 있냐?"

캘리 박이 물었다. 다니엘이 답했다.

"제 주…, 제 애인이 빚이 좀 있습니다."

그렇게 세현 퀸과 캘리 박은 다니엘 스톤하츠의 호구 조사를 계속했다. 미남을 아주 좋아하는 한민유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피어서 그의 자태를 열심히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스와 유리도 보자마자 아주 좋아하며 잘 챙겨줬다. 역시 미남은 뭐니뭐니 해도….

'뉴페지!'

호구 조사를 끝내고 한민유가 보내준 그의 프로필까지 읽고 나자 그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한민유에게 맡기고 미팅룸 밖으로 나갔다.

"…쟤 진짜 천잰데요?"

세현 퀸이 미팅룸을 돌아보았다. 캘리 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뭐냐, 저거? 저렇게 뭐든 다 할 수 있는 마도사가 세상에 있는 거냐? 머리도 꽤 돌아가는 거 같은데?"

중력 마법은 물론이고 마도사 용병들이 쓰는 온갖 종류의 공격 마법을 쓸 수 있었고 심지어 마도의사 자격증까지 있다고 한다. 마도-과학에도 학식이 깊어 산업 및 연구소에서 용역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니, 돈을 벌고 싶으면 마도의사를 하지 무슨 TFC야?"

"이것저것 다 하다 보니까 능력이 분산 됐어. 마도의사를 전업으로 하기엔 숙련도가 얕은 거지.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물리학만 쭉 파게 하면 몇 년 안에 이삭이 정도 되는 건 문제없겠다."

"아, 노친네 또 이삭이 무시한다.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세현이 살짝 역정을 냈다. 깔 때 까더라도 내가 까지 자기 새끼를 다른 사람이 까는 건 못 본다. 세현이 칙칙한 얼굴로 창밖을 보다가 물었다.

"준비하는 건요?"

"하고 있어."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가르쳐주세요."

그러자 캘리 박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인상을 팍 쓰고 타박했다.

"이년아, 진작에 좀 그러지."

"그러게요."

세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캘리 박이 디바이스를 꺼내며 말했다.

"결국 인맥이야. 니가 제일 귀찮아 하는 짓 해야 한다. 사람 만나는 거."

"아."

"귀찮을수록 똑똑하게 굴어. 멍청한 놈들의 심리를 파악하라고."

"아~"

제일 싫다. 그렇게 오랜만에 스승으로서 이년 저년(...)하며 세현 퀸을 가르치고 있는 캘리 박이었다. 1시간쯤 지나자 안에서 군 장성들과 이야기를 좀 더 나누던 안보수석이 전화를 하면서 나왔다.

"예, 각하. 1시간 내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결재 내리시면 바로. 네."

그녀는 짧게 전화를 끝내고 그들을 보았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응접실로 갔다. 캘리 박과 세현 퀸도 말을 멈추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보좌관만 뒤에 세워 두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 두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가 보좌관에게 손을 내밀자 보좌관은 안주머니에서 실버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 담배를 한 개피 꺼내 안보수석에게 주었다.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자 보좌관에 라이터를 곧바로 대령했다.

"괜찮으시죠?"

그녀는 이미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렇게 물었다. 캘리 박이 손짓으로 그녀의 양해를 받아들였다.

"박 교수님께서는 직접 만나셨으니 더욱 잘 아시겠지만, 각하께서 이번 일에 굉장히 걱정이 많으십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세현을 보며 덧붙였다.

"이번에 퀸 교수님이 드레이닝에 걸리신 것도 각하께서 특별히 이름있는 마도의사만 초빙해서 교수님을 전담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아끼지 말라고 지시를 내리시기도 했구요. 이 마당에 우리나라가 뛰어난 마도물리학자를 둘이나 잃을 수 있다는 건 국가적으로도 너무나 큰 손실인 건 자명합니다. 특히, 혹여나 이번 일로 세계물리학회와 우리 정부 사이가 틀어질 수 있는 사태만큼은 막고 싶은 것이 각하의 바람이십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세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안보수석이 재떨이에 재를 떨구며 답했다.

"아시겠지만 이런 식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의 요구를 들어줘봤자, 그렇기 때문에 사우디는 최 박사를 풀어주지 않을 겁니다. 캅카스 반군 때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쪽은 이판사판이니까요."

"그래서 포기하라고?"

세현이 그녀를 노려보며 그렇게 물었다. 안보수석이 깊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대답했다.

"구출작전이 진행될 겁니다."

"뭐? 자폭장치는…."

"베이징에서 치엔위 박사의 머리에 붙어있던 헤일로를 분석한 정보를 우리에게 보냈습니다. 원본도 보내줬죠. 우리가 예전 한국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멍청한 광신도들…."

실무자는 현실주의자여야 한다. 캘리 박은 그녀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았다. 안보수석이 된 지 1년 반 정도 됐다고 했나?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데 약간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캘리 박이나 세현 퀸이 나라 몇 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도 사안별로 쓸 만한 실무자는 있어도 있어도 모자란 법이었다. 안보수석은 필터까지 빨아들인 담배꽁초를 버리고 새 걸 물었다.

"보니까 다니엘 스톤하츠 그 친구 쓸 만하더군요. 국적도 우리나라고 돈도 벌고 싶다고 하니 언론 모아서 영웅으로 만들어주죠. 떼돈 벌 겁니다. 우리 정부 선전도 하고."

6시간은 걸려야 수정안이 나온다더니 이미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게 최종본인 것 같았다.

*

"……."

"……."

디바이스는 전부 뺏겼다. 자유롭게 연락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하긴, 인질이 본국과 자유롭게 연락을 하게 해주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리야드에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 왕궁의 국빈실은 황금을 처바른 듯 휘황찬란했다. 지금 같은 시국에 어떤 나라의 고위 간부도 사우디를 방문하지 않았다. 원래 있던 각국 대사들도 짐 싸서 탈출하는 마당이었다. 당분간 그들이 쓴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는 4명을 각기 다른 곳에다 가둬뒀지만 감시 인원도 아깝다 생각했는지 며칠 뒤부터는 한 방에다 몰아넣고 있었다. 네 명 다 머리에다 그 괴상한 기구를 하고 있는 채였다.

아담은 거의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인질인 주제에 여기서 가장 몬스터전에 대한 경험이 많은 남자였기 때문에 밤샘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이삭도 아침이면 끌려 나갔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면 녹초가 되어 돌아오고는 했다. 사우디는 전력을 다해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타이탄과 기타 몬스터, 이미 몬스터가 드글드글한 레어 시티를 처리해달라고 말이다. 본토로 핵을 쏘는 건 부담스러우니. 세뇌, 협박, 회유 등등 안 쓰는 것이 없었다. 첫날에는 약까지 주입하려고 했으나 마도사에게 마약류를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었기 때문에 아담이 필사로 고위 간부들을 설득했다고 들었다.

알렉스와 유리는 내내 방에 갇혀 있기만 해야 했다. 유리 라자레프는 게임 금단 현상을 한창 겪다가 이제 좀 나아졌다. 어쨌든 그들은 소용면에서도, 인질로서의 가치도 애매했기 때문에 안 건드리는 것 같았다.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여차하면 죽여도 부담 없다.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둘 다 무기력하게 대궐 같은 문짝을 보았다. 그러자 최이삭이 돌아왔다. 그는 드디어 좀 맞았는지 얼굴 한쪽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걸 보고 알렉스가 툭 말했다.

"그냥 해줘. 그게 낫겠다. 그럼 머리에 그것도 풀어줄 거 아냐."

"……."

최이삭은 아무 말없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사우디가 마도사 운용에 영 지식이 없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지금 그를 협박해서 타이탄을 처리하는 것에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일부 마도사의 가치는 보통 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마도사 용병, 마도의사, 마도물리학자…. 어떤 마도사는 전술핵 이상의 군사적 가치가 있었고 어떤 마도사는 죽은 사람도 일으킬 수 있는 의술을 지녔으며 어떤 마도사는 인류의 미개척지인 우주, 그 자체를 인류에게 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많은 나라들이 자기 나라에 속한 마도사 인재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것이다. 캘리 박 또한 자기 자신과 자기 밑에 있는 학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세계물리학회에서 매년 개최하는 연수가 하나 있었는데, 마도물리학자가 인질로 잡혔을 때의 행동요령이 있었다. 매년 들을 때마다 졸아서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이거다.

'무사 자력 탈출의 기회가 오면 인질로 잡혀 있던 단체를 소멸시키고 탈출하라….'

꽤나 건실하게 법적 효력까지 있는 행동 강령이었다. 보통 이런 인질극을 벌이는 단체는 극단적인 테러리스트들이었고 많은 나라가 괴멸에 힘을 쓰고 있는 단체들이다 보니 정당방위로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마도사를 인질로 잡은 단체는 절대 마도사가 마법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해주지 않는다. 저번에 납치되었던 러시아 물리학자의 경우 약물로 코마를 유도해 내내 잠들어 있어야 했다.

만약에 지금 최이삭이 몬스터를 처리해준다고 말하고 머리에 쓴 이걸 풀어준다면, 아니, 풀어주지 않고 적어도 그가 쓰는 마법에 반응하여 머리를 꿰뚫지 않도록 해준다면 그는 자력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인질극에 관여한 사람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왕궁을 통째로 소멸시켜버리고 동시에 헤일로를 파괴하면 되었다. 그리고 어디로든 줄행랑 치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와 함께 인질로 잡혀 있는 이 어린애들과 아담이라는 용병도 희생당할 것이다. 기타 등등의 다른 무고한 사람들도 함께.

'어떻게 그러냐고.'

최이삭은 욱신거리는 뺨을 느끼며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좀 있으니 식사와 함께 아담이 돌아왔다.

"어? 대장, 머리에…."

그의 머리에서 헤일로가 사라졌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협조하고 돈 받기로 하고 우리 애들도 불렀다. 떼 주더라."

"쳇, 뭐야. 왜 아저씨만 떼 줘? 우리는?"

알렉스가 투덜거렸다. 유리가 헉 하고 말했다.

"배신?!"

그러자 아담이 하하, 하고 웃었다.

"배신할 것도 없어. 나 같은 용병은 신경 써주는 나라도 뭐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디바이스를 꺼냈다.

"최이삭 박사님."

그가 침대에 아직 엎드려 있는 최이삭을 불렀다. 그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가 디바이스를 내미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디바이스를 받았다. 국빈실 내에는 대놓고 감시카메라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최이삭은 목을 좀 가다듬고 전화를 걸었다. 전에 없이 상대가 빨리 받았다.

[이삭아?]

"네, 교수님."

[왜 영상통화로 안 걸어?]

"아뇨…."

그녀는 곧바로 영상통화로 돌렸다. 최이삭은 얼른 디바이스를 알렉스에게 줘버렸다.

"어…."

[알렉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도 이제 이름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응…."

알렉스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오랜만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알렉스는 귀가 축 처진 강아지처럼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는데, 그녀가 보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지낼 만해?]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얘들 제대로 안 먹이는 거 아냐? 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는 한민유를 구박했다. 한민유가 ‘그런 건 아닐 거예요’ 하고 속삭였다.

[최 박사는? 왜 너한테 갑자기 디바이스를 줘? 걔 좀 비춰봐.]

"……."

알렉스는 물끄러미 최이삭을 보았다. 최이삭이 마구 손을 가로저었다. 심술이 나서 그가 피하기도 전에 바로 그를 비췄다.

[이…! 개새끼들이!]

화면을 보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펄쩍 뛰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화를 냈다.

[넌 거기서 맞고만 있냐, 병신아! 왜 널 때려!!]

"그게…."

최이삭은 설명하지 못하고 카메라를 피하려고 했다. 알렉스는 끈질기게 그를 비췄다.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자 유리 라자레프는 저녁을 흡입하다 말고 인사를 했다. 게임도 못 하고 운동도 못 하니 먹는 시간만이 유리의 낙이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하아, 그래. 우빈이가 걱정하더라.]

세현이 한숨을 푹 쉬며 그렇게 말했다.

"구해준다면서요. 왜 이렇게 빨리 안 와요?"

그가 해맑게 물었다. 세현이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다들 괜찮아? 그 남자는?]

알렉스는 아담을 비춰줬다. 그의 머리에 헤일로가 없는 걸 보고 잠깐 말이 없더니 물었다.

[…왜?]

"몬스터전 전략 회의에 참여하다 보니…, 고용되기로 했습니다."

잠시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짧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입을 열었다.

[최 박사 바꿔.]

알렉스가 최이삭에게 디바이스를 내밀었다. 최이삭이 디바이스를 받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소리를 낮췄지만 그 방안에 있는 다른 남자들은 전부 소드마스터였다. 다 들렸다.

[괜찮아?]

"네."

[몬스터 처리할 수 있는 마도사 구해서 보내. 조금만 참아.]

"네? 학계 사람이요?"

[아니, 노친네가 용케 하나 구해왔다.]

"다행이네요…."

[그래. 7시간 뒤에 출발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네…."

[곧 보자.]

"네."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최이삭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을 묘한 눈길로 보고 있는 세 남자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죠?"

아담이나 유리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틱틱거렸다.

"다른 교수들도 원래 자기 제자한테는 다들 그렇게 애걸복걸하는 거야?"

그 번들번들한 남자 교수도 그렇고…. 알렉스가 최이삭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비리비리(?)한 게 영 미덥지 못했다.

"애걸복걸은 무슨. 우리 교수님이 나 갈구는 거 못 봤어? 맞은 건 난데 나한테 뭐라고 하시는 거 봐."

최이삭이 황당하다는 듯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래도."

알렉스는 뭐라고 더 설명하진 못했지만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이삭이 한숨을 쉬었다.

"식구니까 그렇지."

"……."

피도 한 방울 안 섞였으면서 서로 식구, 식구…. 알렉스는 그게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그때 세현 퀸은 맨날 구박만 하던 최이삭밖에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섞었던 그나 아담은 마지막이나 되어야 최이삭을 부탁하며 한 번 봤을 뿐이다.

'책임진다고 해놓고서….'

알렉스는 상처입은 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울했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자고 새벽이 되었다. 4시쯤. 해도 뜨지 않았다. 주변의 기척에 민감해져 잘 잘 수도 없어 알렉스는 곧잘 밤에 깨곤 했다. 오늘따라 주변에 기척이 많아져 유리도 잠에서 깨서 돌아다녔다. 그는 골아 떨어진 최이삭도 깨웠다. 아담은 새벽같이 회의실로 갔다가 돌아왔다.

"한국에서 지원 온다."

"어! 그럼 우리 이제 갈 수 있는 거예요, 대장?"

유리가 벌떡 일어났다. 아담의 뒤로 사람들이 더 들어왔다. 몇 번 면식이 있는 그의 용병단 사람들이었다. 체자레를 보고 유리가 어! 하고 또 소리를 냈다.

"다들 온 거예요?"

"아니, 다섯 명 정도만."

아담은 그렇게 말했다. 체자레와 다른 용병 하나가 유리를, 나머지가 알렉스에게로 다가갔다.

"뭐야?"

알렉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담이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분리해서 감시하기로 했다. 미안하다."

"와…! 진짜 우리 배신한 거예요?"

유리가 그렇게 말했다. 아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알렉스와 유리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감되어야 했다. 최이삭도 굳은 얼굴로 아담을 보았다. 다른 남자들이 또 줄줄이 오더니 최이삭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

아담은 작전회의실로 복귀했다. 거기엔 항상 보던 사우디 장성뿐만 아니라 복장이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보였다. 사막전에 맞도록 베이지색 군복을 입은 사람 중 장교 두 명은 여자였고 나머지는 전부 남자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담이 아는 얼굴도 있었다.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 무심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 아름다운 남자.

'다니엘 스톤하츠….'

그를 중심으로 그를 지키기 위한 소드마스터 군인이 열 명, 일반 전투병이 열 명 정도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아담을 알지도 못하겠지만 아담은 그를 알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흉터가 욱신하고 긴장되었다. 한국 정부에서 그를 캐스팅해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저 남자만큼 적격인 인물도 없겠군.'

누차, 피차 얘기를 해왔지만 마도물리학자는 전사가 아니라 학자였다. 폭력과 멀리 살아온 그들에게 몬스터도 사람도 죽이라고 하면 힘든 것이 당연했다. 물론 캘리 박은 이미 적어도 십 만 단위 이상의 인명을 학살했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전투에 적합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 스톤하츠, 그는 달랐다. 아담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TFC 선수가 된 지금의 그는 모르겠지만 전장에서의 그는 죽음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아담은 먼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아담 마이어, 맞습니까?"

"네."

인질인 그가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지만. 그는 잠시 말없이 아담의 얼굴을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모두는 타이탄과 레어 시티를 처리하기 위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2128년 4월 30일 오전 4시 01분에 확인된 MES-1의 위치가 여기, MSS-1의 위치가 여기입니다. 그리고 현재 오전 4시 33분 추정 위치가 이곳과 이곳입니다. 대략 17시간 정도면 두 기 모두 사우디 북부 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보입니다. MES-1은 A급, MSS-1은 BB급입니다."

사우디 쪽으로 오고 있는 것으로 확실시되는 타이탄은 총 9기. 그것들이 걷는 경로에 있는 모든 도시가 파괴될 것이다. 타이탄은 뭔가 밟는 것을 좋아했다. 콘크리트 건물이 그득한 도시는 그들에게 좋은 유희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군용 비행차로 이동할 겁니다. 고도는 8,000m 이상을 유지하여 가고일과 마주치지 않고 안전하게 타이탄에게 접근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작전사령관이 말하자 아담이 손가락을 하나 들며 끼어들었다.

"중력 마법을 사용하면 비행차의 고도가 많이 낮아집니다. 그때 몬스터가 덮치면 위험할 텐데요."

그러자 다니엘 스톤하츠가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뭔가 수가 있는 것일까. 이미 한국군에서 작전을 입안해온 상태였고 아담과 사우디 특전사 소속 중대장과 부하 몇 명이 한국군과 함께 다니엘 스톤하츠가 탄 비행차에 동승했다. 군용 비행차로 20인승은 되었다. 1시간 정도 날아가는 동안 파괴된 도시와 날아다니는 가고일 떼, 빅비틀이 점령한 도시를 볼 수 있었다. 사우디 측 군인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 바다가 보이고 물 밖으로 상체를 내놓은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시뻘건 타이탄이 보였다. 물이 증발하여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고글을 착용했다. 마도물리학자들이 쓰는 고글과 동일한 것이었다. 여러 자동차의 가능 데이터량을 집중하여 한국에 있는 슈퍼컴퓨터 인공지능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니엘은 한참 자기 고글에 떠오르는 정보를 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도 이걸 사용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흥미로웠다.

'대학…이라.'

그리고 상념을 떠내려 보냈다. 그는 창밖으로 타이탄 MES-1을 내려다보았다. 고글이 필요한 마법량과 거리, 공감각 유도까지 해주고 있었다. 다니엘은 집중을 하다가 고개를 젓고 고글을 벗었다. 안 쓰던 걸 쓰려니 좋은 것도 못 쓰겠다.

"가까이 접근해주십시오. 고도 2천까지."

"위험합니다. 비행 몬스터 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쉴드를 치면 됩니다. 일단 내려가 주십시오."

다니엘과 아담 등이 타고 있는 비행차와 이를 호위한 열 대 정도의 비행차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가고일 떼가 나타나서 다니엘은 모든 비행차를 감싸는 거대한 쉴드를 쳐야 했다.

불타는 하얀 눈동자, 증기가 피어오르는 새빨간 피부. 거대한 타이탄이 이쪽에서 보기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육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다니엘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타이탄의 정수리에 투명한 지팡이가 내리 꽂힌 것처럼 원형으로 구멍이 났다. 잠시 우뚝 선 타이탄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처얼썩.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았다. 아담은 더 놀랐다. 이것도 중력 마법인가? 그 마법의 대가들만 잔뜩 모였던 수에즈 게이트에서도 이런 것을 본 적은 없었다.

"MSS-1을 찾으러 가지."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고도를 올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비행차가 고도를 올렸다. 그리고 좀 더 북진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MSS-1은 MES-1보다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찾기가 힘들었다. 원래 근해까지 오기 전에는 바다에 가라앉아 걷고 있는 타이탄을 찾기 힘들었다. 잠수함을 가동하고 있긴 했지만 역시 시야 안에 들어오기 전에 처리하긴 힘들다. 비행기를 돌려 본토로 향하며 이미 레어가 되어버린 타브크의 상공에 들렸다. 고도를 낮추니 파괴된 도시의 참상이 그대로 보였다.

"주민 피난은 완료된 상태입니까?"

한국군 작전 책임자가 물었다. 아담이 고개를 저었다.

"도시민의 30% 정도…. 이젠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무사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겠죠."

건물의 벽에는 거대하고 끈적한 알이 군집을 이루어 매달려 있었다. 빅비틀의 알이었다. 가고일의 회백색 알들도 철근을 가지삼은 둥지 안에 놓여 있었다. 아직 자이언트나 어스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다시 고글을 쓰고 집중했다. 그는 이번에는 경고를 했다.

"조금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엄청난 힘이 비행차를 내리누르나 싶었더니 곧바로 정상화되었다. 아래를 보니 지상은 아직도 중력의 힘을 받고 있는 지상이 쿵! 쿠웅! 쩍! 하는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큰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며 가라앉고 있었다. 광경과 소리는 시차가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중력 마법을 쓰는 동시에 반중력 마법을 써서 비행차를 보호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서북부에 위치한 제법 큰 도시였던 타브크는 그대로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수많은 몬스터와 함께 그 운명을 다한 것이다.

특전사 중대장이 아랍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담은 아랍어를 몰라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괴물 새끼.'

아담도 비슷한 말을 할 뻔했기 때문이다.

*

어쨌든 다니엘 스톤하츠가 오고 나서부터 사우디 아라비아의 고위 관료들은 벌써 몬스터전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은 것처럼 기뻐했다.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겠군!"

그렇게 기뻐하는 의장이 다니엘과 악수를 하려고 했지만 그를 둘러싼 소드마스터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자리는 따로 마련되었고 물과 음식도 전부 한국에서 공수해온 걸로만 먹었다.

"타브크를 해결했으니 서북부는 한시름 놓았습니다만 이스라엘은 건너뛰고 요르단으로 넘어온 몬스터들이 꽤 있습니다. 만약 요르단이 그걸 제대로 못 막는다면 사카카도 위험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담은 다니엘의 기척을 잠시 살피고 있었다. 호흡, 심박수, 눈을 깜박이는 속도, 심전도까지(소드마스터는 육감도 가지고 있었다) 일정했다.

그대로 한 일주일 정도 다니엘 스톤하츠가 파죽지세로 레어 시티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결국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MSS-1과 MES-2 등 타이탄 3기도 처리했다. 무슨 기계처럼 군말없이 일만 하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타브크 외에 큰 도시는 모두 수성할 수 있을 것 같자 합참의장은 아주 기뻐했다. 처음에는 악수도 하지 않던 다니엘 스톤하츠도 하루하루가 갈수록 약간씩 틈을 보여주었다. 합참의장은 그를 사우디에 남게 하기 위해서 온갖 회유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를 원하나? 돈은 얼마든지 주겠네. 달러나 금이나, 다이아몬드로도 줄 수 있네!"

그러자 다니엘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나 주실 수 있습니까? 저, 돈 필요합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합참의장은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다니엘 스톤하츠의 등에 팔을 둘러 끼고 다녔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가는 다니엘에게 금은보화와 감투까지 전부 줄 수 있다며 돈다발을 흔들었고 다니엘은 얼마 정도를 현물로 받기도 했다. 저런 캐릭터였던가? 분명 용병으로 활동하긴 했지만 다니엘 스톤하츠가 이렇게 돈에 연연하는 인물인지는 몰랐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바닷물 위로 고개를 내민 나머지 4기의 타이탄까지 마저 처리하자 합참의장은 그를 알라의 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기 시작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사우디에 온지 9일째, 그가 물었다.

"최이삭 박사와 다른 인질들을 한 번 만나볼 수 있습니까?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은데요. 본국이랑 연락도 안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니엘이 도착한 이래로 혹여나 양동작전에 걸릴까 싶어 인질들이 한국과 통화를 할 수 있게 해주던 것도 금지하고 분리하여 감금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건…."

"제가 중력 마법을 독학으로 공부했던 지라…. 최이삭 박사님을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눠보면 좀 더 도움이 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잠시 자기들끼리 자기 나라 언어로 대화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며 홀로 무쌍을 찍고 있었고 금은보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우디를 배신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중무장을 한 많은 이들이 인질을 감시하고 있는 형태로 다니엘 스톤하츠가 인질의 무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인질들은 뒤에 멀찍이, 그리고 최이삭 박사는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데리고 왔다. 소드마스터인 알렉스와 유리는 아담의 용병단인 <엔트> 소속 용병들에 의해 잡혀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이삭 박사님. 영광입니다."

"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유감이네요. 팬인데…."

최이삭이 그렇게 대답했다. 최이삭은 다니엘이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약간 살이 찐 것 같았다. 저쪽에서 준 사진 속의 그는 다크서클이 짙고 세상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여기 와서 잘 먹고 잘 자니 얼굴이 핀 것일까.

"악수 정도는 괜찮겠습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합참의장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그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머리에 씌워진 헤일로가 하늘로 솟구쳤다.

“…!”

최이삭도 대비를 하지 못해 깜짝 놀라 뒤늦게 공중에 뜬 헤일로를 바라보았다. 헤일로의 가시가 가운데로 서걱 뻗었다. 그리고 동시에 최이삭 주변에 있던 사우디 군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최이삭은 당황하여 입을 떡 벌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소드마스터들이 그들을 감쌌다.

"이…!"

처음 그들을 납치한 특전사 중대장이 욕지거리를 하며 붉은 버튼을 눌렀다.

'씨팔…!!'

알렉스와 유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두두두두!! 탕탕탕!!

그대로 왕궁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니엘과 최이삭의 주변을 둘러싼 군인들이 사방을 향해 총질을 하기 시작했고 사우디 군도 응전했다. 엄폐도 없는 한국군이었으나 다니엘의 쉴드에 의해 이쪽에는 조금의 상처를 입힐 수도 없었다.

"…?"

알렉스와 유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쩍 떴다.

"뭐야…."

알렉스가 휘거나 부러진 헤일로의 막대를 만져보다가 훌쩍 벗었다. 유리도 새하얀 얼굴이 시퍼래졌다가 의아한 얼굴로 모자를 벗듯 쉽게 헤일로를 벗겼다. 본능적으로 오라를 최대로 해서 몸을 보호했더니 그냥 헤일로가 부서졌다. 소드마스터의 반응 속도야 일반인의 수십 배는 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거 별거 아니었잖아?"

알렉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다음에야 화가 났다.

"우리는 죽어도 상관없다 이거야?!"

아담이 그의 입을 막았다.

"쉿."

아담과 그의 용병단이 조용히 그들을 보호하며 끌고 나갔다. 모두의 관심사는 오로지 마도물리학자인 최이삭이었다. 그를 무사히 확보하기 위해 양쪽 다 눈이 벌게져 있어 오히려 그들은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다.

아담은 언젠가 기억이 있는 길을 따라 왕궁의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전에는 차를 타고 갔던 길을 그냥 뛰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리를 좀 벌리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진짜 우린 죽어도 상관없어서 그런 거야?"

알렉스가 아담의 팔을 거칠게 잡고 그렇게 물었다. 아담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실력발휘를 하면 여기는….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피부에 소름이 바짝 돋았다. 우웅 하고 공기의 진동이 느껴진다 싶더니 갑자기 거대한 사우디 왕궁이 반쯤 폭삭 내려앉았다. 그리고 공중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둥둥 떠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엄청난 속도로 동쪽을 향했다. 이미 아담 일행이 향하고 있던 공항 쪽이었다.

"달리자."

그는 일행에게 그렇게 말하고 먼저 뛰기 시작했다.

'진짜 버릴 생각이었군….'

애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지만 아담은 알 수 있었다. 아담이야 적도 없이 사지를 구르던 용병이니 그렇다 치지만 이 애들은 무슨 죄로…. 최이삭. 알렉스와 유리. 아담. 그들은 같은 성별에 같은 말을 쓰고 우연히 같은 장소에도 있었지만, 절대 같은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치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 가치란 무엇일까.

공항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아직 수송기가 출발하지 않았다. 아담도 느낌이 좋지 않아 용병단 식구를 몇 명 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일행이 수송기의 조종사를 향해 두 팔을 들어 흔들었다. 처음에는 총구가 마구 향해오는 걸 느끼다가 곧 수송기의 문이 열리고 군인 중 둘이 나와 손짓을 했다.

"빨리 타십시오!"

그들은 수송기 안으로 들어갔다.

"무사히 탈출하셔서 다행입니다."

군인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알렉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씨발, 지금 장난해? 우리 버리고 간 거잖아!"

"아, 아닙니다. 그 빨간 장치는 소드마스터에게 효과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작전을 실행한 겁니다. 왕궁을 무너뜨린 것도 여러분이 탈출하는 걸 확인하고 한 거구요. 도청 때문에 정확한 작전을 미리 알려드릴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공항으로 오실 거라는 걸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분 정도….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엔 중함이 치우친 것은 바로 눈에 보였다. 알렉스는 부글부글한 얼굴로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를 드잡이질 할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굴러야 하는 군인일 뿐이었다. 이걸 정한 높은 사람은….

"……."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알렉스는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담이 말했다.

"벨트 해. 일단 살아남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여차하면 배신하려고 한 새끼가 잘난 척하지 마."

"……."

그리고 수송기 전체에 다니엘 스톤하츠가 마법으로 쉴드를 씌우고 바로 날아올랐다. 관제탑은 무시하고 총기를 들고 나오는 사우디 군은 역시나 다니엘이 마법으로 죽여버렸다. 군인들이 그 자리에서 곤죽이 되었다. 날파리를 엄지로 눌러 죽이는 것보다도 쉬워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군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거기 있는 많은 남자들이 살생을 업으로 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인델토크의 학살자…."

다니엘 스톤하츠의 용병 시절 그에게는 수많은 별명이 있었지만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이것일 것이다. 하인델토크 전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기도 했고. 다니엘은 아담의 중얼거림을 듣고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담이 어깨를 약간 으쓱하며 특유의 친근함을 나타내며 말했다.

"거기 있었습니다. 여기 이렇게 흉터도 있고."

그러자 다니엘이 눈을 한 번 깜박하더니 대꾸했다.

"안 죽었군."

"운이 좋았죠."

아담이 미소를 지었다.

"하인델토크 전 이후로 은퇴했다고 들어서 살인에는 진력이 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별로."

대화는 그 정도에서 끝났다. 사우디 국경을 넘어설쯤엔 미사일까지 날아왔다. 처음엔 군용 비행차에 내장된 플레어를 날리고 회피기동을 하려고 했으나 그걸 미리 예상한 듯 유도 미사일이 대량으로 날아와 다니엘 스톤하츠는 쉴드 마법을 응용하여 비행차에 아무런 타격 없이 미사일을 전부 격추했다.

수송기는 꼬박 3시간을 날았다. 그리고 메트로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은 새카만 새벽이었다. 2주만에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땅을 밟으니 멘탈도 몸만큼이나 튼튼하다는 소드마스터들도 감회가 새로웠다. 최이삭은 다리가 풀려 주저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고글과 인이어를 벗었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서 사람들이 내려서 그를 맞이했다. 멀었지만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다니엘의 어깨를 두드리는 캘리 박이 있었고 한민유와 세현 퀸도 잠시 그와 대화했다. 헬기 몇 대의 프로펠러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기자도 엄청나게 많았다. 군인들이 수송기로 우르르 달려왔다. 그 뒤를 따라 기자들도 우르르 따라왔다.

"최 박사님! 한 말씀만 해주시죠!"

"홉스 중위님! 이번 작전이 성공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걸로 알고 있는데…!"

다니엘 스톤하츠와 한민유는 그곳에서 기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세현 퀸과 캘리 박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군인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있던 최이삭은 세현의 얼굴을 보자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교, 교수님…."

세현은 오른손을 움찔했다. 병신같이 울고 있는 그의 뺨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들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일어나."

세현이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은 땅을 짚고 겨우 혼자서 일어났다. 군인들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그들은 생환한 인질들을 데리고 차로 향했다.

"퀸 교수님, 이번 인질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직접 사우디로 가시려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요!"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기자들이 마이크를 마구 들이밀었다.

"이번 사우디 인질극은 22세기 현대 국가가 벌인 짓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개한 협잡질이었습니다. 학회장님의 선구안과 우리 정부와 우리 군의 발 빠른 협조로 인질들을 비교적 빨리 구할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기자회견은 인질들의 심신이 안정된 후에 하도록 합시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 덩치하는 군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들을 쭉 밀어냈다. 빠르게 차로 돌아가 문을 닫자 소음이 차단되며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대로, 의외로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차는 그대로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으로 향했다. 휘황찬란한 병원 건물의 VIP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의료진이 잔뜩 나와 그들을 안내했다. 각기 VVIP 병동 병실을 하나씩 잡고 입원을 시켰다. 세현 퀸과 캘리 박은 잠깐 최이삭의 방에 있다가 나왔다. 그에게는 쉬는 김에 연구비를 지원해준 여러 단체에 낼 수에즈 프로젝트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시켰다.

"뭐해?"

환자복도 거부하고 복도에서 동료 용병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담을 발견하고 세현이 말했다.

"전 결국 인질도 아니었으니 돌아가겠습니다."

"미국으로?"

그리고 덧붙여 물었다.

"아니면 사우디?"

"…그건 봐야지 알 것 같습니다."

사우디가 그에게 약속한 금액은 그의 인생 자체를 바꿀 만한 금액이었다.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세현은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가더라도 리야드엔 있지 마."

아담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서울로 돌아오기나 해."

세현은 다른 병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환자복을 입은 알렉스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

알렉스는 세현의 얼굴을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답답하겠지만 좀 참아. 원래 이런 건 쇼맨십이 중요한 거라. 서던라이온 쪽에서는 훈련에 차질없이 너희 데리고 가고 싶어하니까 며칠 정도만 있으면 될 거야."

"…정말 나 죽어도 상관없었던 거야?"

알렉스가 물었다. 세현이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럼…! 그럼 왜 그런 건데…! 그 중국인 박사 대신에 나 인질로 잡힐 때도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냥 저 비리비리한 안경잡이만 신경 썼잖아!!"

알렉스는 차분한 그녀의 반응을 보고 도리어 폭발하고 말았다. 알렉스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어내려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왔다.

"나 책임지기로 한 건 너잖아!!"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조차 치지 않고 인상을 좀 썼다. 알렉스는 그녀의 앞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나 정말…! 교수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잖아! 그거 안 보였어? 나 조금은 좋아한 거 아니었어요?"

"……."

"그 안경잡이만 무사하게 탈출시키려고 한 거잖아요! 우리가 알아서 탈출해서 올 거 기다리게 했다는 것도 뻥이지?!"

"거짓말은 아니야. 헤일로가 소드마스터에게 소용없다는 건 알았고 그것만 없으면 너나 니 친구나 그 용병이나 알아서 탈출할 만한 실력은 되니까. 그래서…."

"못했으면? 못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나 걱정하기는 했어? 내 생각은 했어?!"

"알렉스…."

그녀가 또 한숨을 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소리쳤다.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러는데 갑자기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맨 앞에 있는 사람은 가녀린 체구에 예쁜 얼굴을 한 여자애였다.

"알렉스…!"

그녀는 세현 앞에 서서 그녀를 다그치고 있던 알렉스의 품에 안겼다.

"남중국해에서 돌아오자마자 수에즈 가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걱정했잖아!!"

알렉스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자신의 품에 안긴 여자애와 그녀를 따라온 가족들을 보았다가 다시 품에 안긴 그녀를 보았다.

"하린아…."

남중국해에 전지 훈련을 가기 바로 전날 고백하여 사귀게 된, 당시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였다. 전지 훈련을 갔을 때도 자주 연락을 했고 돌아와 그녀를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다만 그녀와 재회하기 전에 세현 퀸이라는 여자에게 대차게 낚였다. 알렉스는 세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편하게 쉬어."

그리고 세현은 알렉스의 부모님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깐만…."

그는 그제야 하린의 양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어내며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다.

"알렉스! 엄마가 진짜 십년감수해서…!"

그렇게 엄마는 울면서 알렉스의 팔을 철썩철썩 때렸다. 아빠도 눈물 콧물 흘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자, 잠깐만…. 엄마…! 아빠! 좀 놔봐!"

"내 새끼 어디 안 다쳤어? 어?"

엄마가 알렉스의 양 뺨을 잡고 요리조리 보았다. 알렉스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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