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별을 죽이는 마법 (2)(2권) (2/7)

별을 죽이는 마법 (2)

프로젝트 28일차. 내일이면 대망의 실험날. 예측대로라면 빅크런치 실험을 위한 중력 마법이 웜홀을 축퇴하고 소멸시킬 것이다. 오늘은 동틀 녘부터 공기의 흐름이 불온하다. 자연은 이미 그 대이변을 예측한 것일까.

[게이트 서쪽에서 자이언트 트룹 4천 전진 중입니다. 도착 예정 시간은 11시간 15분 후입니다.]

[대장, 동쪽에서 빅비틀 천 마리 날아옵니다. 2시간 예상입니다.]

[가고일 5백 마리 발견했습니다. 30분이면 도착합니다!]

새벽부터 용병들의 무전 상태가 이상하다 싶더니 아침 8시 30분 경부터 정찰병들이 몬스터 그룹을 세 개나 발견했다. 게다가 전부 게이트 쪽으로 일직선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까지 수에즈 게이트 지역에 잔존해 있던 몬스터들이 전부 나타난 것이라 봐도 무방할 숫자였다.

"보통 자이언트는 이렇게 안 움직이는데. 아…, 혹시 게이트 근처에서 자이언트 잡은 놈 있냐?"

무전은 큐브 위에서 심각하게 상황을 듣고 있던 세현 퀸과 최이삭에게도 공유되고 있었다. 화상을 통해 베이스에 있는 캘리 박과 한민유, 천 코치와 소로킨도 연결되어 있었다.

[보고 안 한 놈 있냐?]

스킨헤드가 그렇게 무전을 돌렸다. 없는 것 같다. 알렉스는 그저 심각하게 듣고 있다가 순간 헉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그거그거!'

까먹고 있었다. 저 여자한테 복수하겠다고 잡아놓은 자이언트…! 수에즈의 폐허 도시에다 묶어뒀으니 무리의 냄새에 민감한 자이언트가 그 흔적을 추적하여 온 것이다. 벌써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을 테니 그 악취가…!

'그럼 저번에 왔던 것도 백 퍼센트….'

아니…, 아니아니. 자이언트야 그렇다 치고 딴 것들은 그럼 설명이 안 되잖아. 아냐. 이건 그게 아냐. 내 탓 아닐 거야. 아니야.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알렉스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뒤로 슬쩍 한 발자국 물러났다.

유리 라자레프는 이제 하우빈을 넘어뜨리지 않았다. 그랑 가끔 편 먹고 그녀를 놀리던 체자레라는 용병도 아주 심각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기합이 들어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만약에 알렉스 때문에 대량의 몬스터들이 출몰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세현 퀸이 알기라도 한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벌거벗겨져 고문이라도 당할지 모른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여기 있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그를 구해주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어제의 왕리밍을 떠올려보자면 당연한 결과다. 그는 입방정을 한 번 잘못 떨었다가 그 수모를 당했다.

[일단 가고일부터.]

"5백 마리…."

이제는 진짜 죽는 놈이 나올 것이다. 가고일의 질긴 근육에서 나오는 힘은 엄청나다. 민간인의 근처에선 오라 사용이 제한된다. 비행 몬스터는 아무리 오라를 실은 총알을 사용해도 총으로는 저지하기 힘들다.

"우리 라이플 20개 있지?"

[저희도 20대 있습니다.]

"벌써 보입니다. 일단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제거해 봅시다."

"그렇게 해서 이게 처리가 돼?"

[그렇게 해서 되겠냐?]

세현 퀸과 캘리 박이 동시에 물었다. 30분만에 5백 마리의 가고일이라면 용병들이 다 달려들어도 그것들이 게이트로 직행할 것이다. 용병이야 그렇다 쳐도 민간인 사상은 프로젝트에 치명적이다.

"교수님, 제가…."

최이삭이 세현의 귀에 속삭였다. 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가 잘못 마력을 축내면 실험 자체가 날아간다. 세현은 하우빈도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이번에도 그녀가 해야 할 것이다.

"너무 가까운데."

게이트까지 안 날릴 자신이 없었다. 캘리 박이 물었다.

[너 설마 저번처럼 할 거냐?]

"그럼 어떡해요."

[아, 멍청한 년. 가끔 보면 넌 진짜 대가리에 똥만 찼나 싶다.]

"뭐라구요?! 노친네 또 치매 도졌습니까?!!"

세현이 발끈했다.

[가까이 있는 용병들 다 치우고 차도 다 비키게 해라. 최 박사는 기기랑 물건들 전부 잡아라.]

"얼마나요?"

[그냥 여기서 0.001E 정도?]

"넌 안 돼. 우빈아!! 계측기랑 물건들 고정시켜라!"

"네! 교수님!"

"교수님들 이리로 오세요. 몇 명이야. 하나, 둘…."

세현은 큐브 밑으로 뛰어내렸다.

[10초 카운트한다.]

"노친네 고글도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려구요?"

[대충.]

그리고 캘리 박이 카운트를 시작했다. 하우빈은 사람들을 비키게 하고 강화 실드를 전개하여 각종 물품들을 감쌌다. 계측기를 공중에 약간 띄운 뒤 공중에 강화 쉴드를 기둥으로 박는 형식으로 고정시켰다. 책상과 다른 기기들도 전부 그런 식으로 고정했다. 만약을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반중력 마법을 걸 준비를 했다.

가고일 떼가 벌써 시야에 들어왔다. 동트는 태양을 등에 지고 게이트로 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아직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지만 엄청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을 것이다. 용병들은 철수했고 비행차들은 최대한의 속도로 가고일에게서 멀어졌다. 오른쪽 멀찍이 베이스가 보였다.

[날아갈 준비해라.]

캘리 박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곧바로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가고일의 근처에 엄청난 중력원이 형성된 것이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다가 단박에 팔 근육이 상했다. 세현이 소리쳤다.

"죽기 싫으면 놔!"

전부다 가고일 쪽으로 날아갔다. 순간이었지만 몇 백 미터나 날아갔다. 그동안 가고일 무리는 중력원에 빠르게 회전하여 빨려 들어가 커다란 공덩어리가 됐다. 그리고 그 공에 쉴드가 씌워졌다. 단 몇 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사막의 한 가운데까지 날아갔다. 중력원이 사라지자 사람들이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이스에 있는 캘리 박과 게이트의 하우빈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게이트에 있던 마도사가 아닌 민간인들은 세현의 근처에서 함께 날아갔기 때문에 그녀가 마법으로 땅에 무사착지시켰다. 소드마스터들은 알아서 땅에 착지했다. 몇 십 미터 정도는 우습다. 최이삭은 마지막까지 공중에 떠서 놓친 사람이 있는가 확인하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모든 사람들에게 반중력 마법을 걸기에는 마력량이 딸려서 이러는 것이었다.

"…깔끔하네요."

[그래, 이 멍청한 년아. 이렇게 가까이에 가고일 피떡 만들었다간 몬스터 더 온다. 넌 연구 말고는 진짜 뇌가 안 돌아가냐? 어?]

"……."

주사기의 문제도 그렇고…. 세현 퀸은 오랜만에 자신의 지능에 대해 한 번 의심을 해보았다. 캘리 박의 밑에 있을 때 그녀가 죽어라 까던 것이 이런 부분이었다. 연구 외에는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 하다 보니 의외로 이상한 곳에서 손해를 본다든가 일을 한 번 더 하게 된다든가….

'뭐.'

그럴 때 쓰라고 랩장, 아랫사람, 시다바리, 종놈들이 있는 거지. 세현은 간단하게 그렇게 생각하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른 몬스터들도 이렇게 해주세요."

[이제 마력 없다.]

"거짓말하지 마시고 좀 해주세요."

[없는 건 없는 거다.]

"아, 노친네 또 짜게 군다."

[너 도대체 언제 죽냐?]

그렇게 캘리 박과 실랑이를 하는데 알렉스와 아담이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어?"

"괜찮으십니까?"

"교수님!"

최이삭도 왔다. 최이삭이 자기 왼쪽 손목을 보며 말했다.

"자이언트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빈이 보고 빅비틀 처리하라고 하죠. 여기서 머니까 학과장님만큼 마력 안 써도 될 겁니다."

"너 마력은?"

"12억 있습니다. 1억 정도는 여유고…. 27시간 정도 남았으니 2억 정도 쓴다고 해도 채울 수 있습니다."

"…너 잘못하면 쟤들 좆 빨아야 한다?"

"……."

최이삭이 움찔하더니 안경을 고쳐 썼다.

"그 안쪽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세현은 세 번 정도 손가락으로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

최이삭은 고글을 챙긴 걸 확인하고 용병들을 따라 게이트로 돌아갔다. 조금 있으니 용병들 중 하나가 비행차를 끌고 돌아왔다. 그걸 보고는 세현이 아담에게 말했다.

"가자."

"교수님도 가실 겁니까? 방금 하 석사님한테 맡긴다고…."

"우빈이까지 마력 더 쓰면 우리 실험은 어떡하라고. 내가 하고 채우는 게 낫지."

[야, 마법 좀 작작 써라. 너 그러다 진짜 명 준다.]

"이미 줄었어요. 아니, 노친네 사실 다른 비법 있는 거죠? 교수님이 나보다 열 배는 더 실험 많이 했을 텐데 왜 이렇게 멀쩡한 겁니까?"

[너랑 나랑은 마도사로서의 기량 자체가 하늘과 땅 차이다. 황새 따라가다 뱁새 가랑이 찢어진 거지.]

"아, 뭔 개소리야. 머리는 제가 더 좋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행차로 향했다. 알렉스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 마."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렸다. 저번에 그녀가 자이언트 트룹을 몰살시켰을 때는 대단하고 신기하고 좀 무섭기나 했는데 그게 그녀의 명을 단축시키는 일인지는 몰랐다.

"미쳤어? 하지 마! 죽는다며? 다른 마도사가 6명이나 더 있잖아. 왜 니가 해!"

"용병들이 쓰는 공격 마법 같은 건 다들 못해."

세현이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차라리 내가 할게."

"뭐? 니가 뭘해?"

알렉스는 세현의 손목을 잡은 채로 아담을 돌아보았다.

"내가 할 수 있어."

그는 아마도, 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끙 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그 잘 넘어지는 애도 데리고 가…주세요."

그러자 세현과 아담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게이트로 돌아가 사람들과 기계를 확인하고 하우빈을 비행차에 태우고 함께 날아갔다.

"그러니까, 날 중간에 떨어뜨리면 대부분은 없앨 수 있는데 나머지는 니가 좀 알아서 하라고."

"쉴드를 치면 될까…."

하우빈이 자신 없는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유리가 거들었다.

"얘가 뭘 한다고 얘한테 시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다. 알렉스가 당부했다.

"알았지?"

하우빈은 한 번 자신의 왼쪽 손목을 보았지만 자기 교수를 보고는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현이 의외로, 살짝, 거리끼는 표정으로 하우빈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겠어?"

"네, 교수님! 최이삭 선배님이랑도 연락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빅비틀이 보인다. 벌떼처럼 우르르 날아오고 있었다. 비행차는 고도를 띄워 빅비틀의 위로 몇 백 미터는 떠오른 상태로 접근했다.

"너 바닥에 떨어질 땐 어쩌려고?"

"낙하산 있어."

"아, 그래? 근데 니네 군복 진짜 좋네."

아담은 낙하산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슬림한 등을 한 번 만져보며 감탄했다. 이런 건 얼마나 하는 걸까.

"너네 쪽에서 이거 해도 된다고 승인 난 거냐? 너 애들 중에서 제일 연봉 비싸다며. 천 코치는?"

"비밀."

알렉스는 그렇게 말했다. 군용 비행차의 뒷문이 열렸다. 통신기와 이것저것이 잔뜩 달린 군복에 소총도 등에 두 개 이고 있었다. 빅비틀이 아래쪽에 바글바글하게 보였다. 헬리콥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비슷한 날갯짓 소리가 굉음을 내고 있었다. 알렉스는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담담하게 당부했다.

"나 맞추면 죽는다."

"알았다."

아담과 다른 용병들도 총을 들고 뒷문에 주르륵 서 있었다. 아담이 물었다.

"근데 너 이거 뭘 어쩌겠다는 거냐."

"비밀이라니까."

비행차가 제 자리에 잡을 동안 용병들과 서던라이온 선수들은 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세현이 다가갔다.

"루키 군."

알렉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뭘 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위험한 거 아냐?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여기는 게이트랑도 꽤 멀고. 알렉스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강렬한 바람에 낮게 뭉쳐서 아무렇게나 묶은 갈색 머리카락에 가운데만 비취색인 밝은 갈색 눈동자, 귀족스러운 얼굴형,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

알렉스는 뭔가 짜증이 나서 뒷목을 주무르며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그렇게 부르지 마. 짜증나니까.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

알렉스는 그리고 훌쩍 뛰어 공중에서 몸을 나선으로 빙그르르 회전하며 머리부터 아래로 낙하했다. 용병들이 웃었다.

"어린애라 그런지 날아다니네."

알렉스는 공기저항을 최대한 없애고 빠르게 빅비틀에게 접근했다. 고글을 써서 눈을 보호했다. 집중을 하자 초감각이 극대화되었다. 이 거리에서도 빅비틀의 등껍질에 있는 무늬마저도 선명하게 보였다. 사방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기척이 전부 느껴졌다.

3

2

1

빅비틀에게 빠르게 다이빙하는 알렉스의 주변으로 황금색 오라가 몇 십 미터고 뻗어 나가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빠르게 수축하여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는가 싶더니 순간 그가 빛으로 번쩍했다. 그가 빅비틀 무리의 정중앙으로 들어가며 황금색 금속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

그걸 본 용병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아담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자기가 본 게 맞나 싶어 다시 아래를 보았다. 보통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기도 힘들 것이다.

"저거…, 저거 그거 아닙니까, 대장? 남중국해에서…, 그 땅꼬마!"

융단처럼 공중을 덮은 검은색 조각들이 가운데부터 추락하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빅비틀의 무리를 돌파하고 곧바로 총질을 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비행차에 타고 있던 소드마스터들도 정신을 차리고 가장자리에 남은 빅비틀을 제거하기 위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하우빈은 빅비틀의 진행방향의 앞에 거대한 쉴드를 쳤다. 90% 정도는 알렉스가 처리하였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쉴드에 머리를 박았다. 그렇게 진행이 느려지는 동안 비행차 두 개에서 쉬지 않고 총을 쏴댔다. 하우빈은 점점 쉴드를 확장하여 구부려 빅비틀이 우회하지 못하도록 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이건 하늘과 땅을 가르는 거대한 벽이었다. 빅비틀이 빠져나가기 위해 사방으로 산개해도 넘을 수가 없었다. 아담은 혀를 내둘렀다.

"저 아가씨도 신이나 다름없네."

마지막 한 놈의 대가리를 다섯 발이나 쏴서 죽였다. 오라를 실어서 쐈는데도 이렇다. 이래서 겉껍질이 단단한 몬스터는 성가시다. 세현이 하우빈을 한 번 보고는 디바이스에 귀를 대고 말했다.

"여긴 처리 끝났다."

[네, 그럼 여기도 카운트다운 들어가겠습니다. 60초면 될까요?]

"게이트, 준비 다 됐습니까?"

[너 이것도 내가 빚으로 친다, 망할 년아.]

"나한테 뜯어간 건 기억도 안 납니까? 도대체 이 노친네가 죽을 때 얼마나 싸들고 갈 생각인 거야."

비행차는 그동안에도 빠르게 낙하하여 알렉스를 회수하러 갔다. 지상으로 가니 그가 아주 빌빌거리고 있었다. 유리랑 리천이 뛰어내려가 그를 낙하산과 분리한 뒤 들쳐업고 돌아왔다. 그리고 차를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개벽하는 굉음이 울리며 천지가 흔들렸다. 비행차에 탄 사람들은 땅이 마치 너울처럼 울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말을 잃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

"…마도사들은 이거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유리가 물었다. 아담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닐 거야."

세현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억 넘게 쓴 거 아냐?"

그 사이 하우빈은 비행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도 순환에 기를 쓰고 있었다. 유리는 깜짝 놀라 알렉스를 버리고 하우빈에게 다가갔다.

"얘 왜 이래요? 교수님이 혼냈어요?"

"마도 순환하는 거야. 건드리지 마. 아! 오라 뿜지 마라."

유리도 마치 전의 알렉스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하우빈의 근처의 공기를 보고 있었다. 뭐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현의 말에 움찔해서 뭔가 멈추었다. 이래서 애들이 애들인지, 역시 자기 친구랑 비슷한 짓을 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현은 아주 혈색이 쑥 빠진 알렉스를 발견했다. 그에게 다가가서 살폈다.

"왜 이래? 괜찮은 거야?"

세현은 리천을 보고 물었다. 리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아마. 뭐 먹이면 돼요. 코치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중에 엄청 혼날 거예요."

"오랜만에 해서 이런 거야. 윽…, 물이나 줘."

용병 체자레가 물을 건네줬다. 세현은 그를 보면서 문득 떠올렸다.

'스위스 연맹 파티 때… 같네.'

그를 묶어놓고 3시간만에 18번이나 뽑아냈을 때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생기와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남자가 아주 쪽 빨려서 지쳐 늘어져 있었다.

뭐, 얌전한 건 좋다.

"고맙다."

세현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머리를 가볍게 한 번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행차를 돌려 게이트로 향했다. 사람들은 멀미가 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다들 멀쩡했다. 이제는 저 정도 오염 물질을 제염할 물자도 인력도 없으니 빨리 실험이 무사히 끝나고 돌아가기만을 빌어야 한다. 이 정도가 여기 있는 몬스터의 끝일 것이다, 아마도.

마도 순환을 위해 명상에 들어간 하우빈은 아예 세현이 마법으로 둥둥 띄워서 천천히 밖으로 옮겨주었다.

"명상실이 있으면 좋은데."

그나마 분주하지 않은 큐브의 위에 그녀를 올려주었다. 유리가 훌쩍 뛰어올라 그녀의 곁에 섰다. 알렉스는 도착하자마자 세현을 아담에게 맡기고 간이 식당 쪽으로 갔다. 스포츠 음료를 엄청 마시고 샌드위치를 열 개 정도 들고 다시 돌아왔다. 뒤에서 엄청 먹기 시작한다.

좀 있으니 최이삭이 돌아왔다. 그의 주변에 있는 용병들은 전과 비슷하게 기가 질린 얼굴로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 하며 걸어왔다. 세현이 어? 어어…? 하다가 화악 하고 화를 냈다.

"너 2억 넘게 썼지!!"

"아니…, 아슬아슬합니다. 채울 수 있습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봐!"

그녀는 거칠게 그의 손목을 잡아 보았다. 세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용병들이 수두룩 눈에 들어왔다.

"당장 얘 덮쳐!"

그들도 당황하고, 최이삭은 기겁을 했다.

"아, 아뇨! 절대 싫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게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거고…! 죽어도 싫습니다!!"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내 앞에서 싫다고!"

"교수님, 죄송합니다. 그, 그래도 싫습니다. 절대 싫어요."

"너 이러다 내일 못 한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할 거 같냐? 너 감당할 수 있겠냐? 어?! 내가 너 진짜 맨손으로 뜯어 죽인다!"

"교수님, 제발…."

최이삭이 도리질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세현에게 또 귀를 잡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 마력 충전을 위해 용병들에게 레이프(?)를 당하는 수모는 피했다.

'역시 무섭다….'

거기 있는 남자들이 최이삭을 대충 외면하며 한 생각이었다.

*

하우빈과 최이삭, 덩달아서 다른 실험 참가자인 교수 하나도 예비를 위하여 집중 마도 순환에 들어갔다. 저대로 저들은 내일 정오까지 잠 한숨 못 자고 명상을 해야 할 것이다.

조금 정리가 되었나. 세현은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7억.

'나도 12억까지 다 채워야겠다. 얼마나 남아 있지?'

루키야 그가 주는 것만 받으라고 했지만 캘리 박이 말했듯이 그녀 같은 사람에겐 마력이란 있어도 있어도 모자란 것이었다. 그 용병의 것도 당연히 받고 있었다. 루키의 것도 주사기를 이용하니 5천이 간당간당 했다. 게다가 보관 시간이 늘어나면 더 떨어졌다. 아무래도 얼마나 신선(?)한지가 중요한 것 같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메트로서울에 있을 때보다 드레이닝 속도가 빨라졌다. 메트로서울에 있을 때는 드레이닝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지 않고 유지되어 의사들도 놀라워했었다. 잠깐의 운이었던 것 같지만. 그때는 마도 순환을 하지 않을 시 시간당 500만으로 유지가 되었는데 지금은 550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빠져나가는 양이 늘어나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운전해."

"돌아가게…요?"

알렉스가 반말을 쓰다가 그녀가 인상을 쓰자 슬쩍 뒤에 '요' 자를 붙였다. 알렉스는 그 사이 그 많은 걸 다 먹고 혈색이 좀 돌아왔다. 세현은 알렉스를 데리고 베이스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 일단 전부 다 몸에 다 집어넣기 시작했다. 누구 것인지 구분은 가지 않았지만 대충 주사기가 6개 정도 있었다. 역시나 넣는 작업은 불쾌하다. 다 채우고 나니 합쳐서 9억 3천만 정도.

'3억을 더 채우려면, 아니, 내일까지 드레이닝으로 빠져나갈 걸 생각하면 4억이나…. 루키로는 8번에, 금발 머리가 14발…. 아, 근데 지금 그 금발은 바쁠 텐데. 몬스터가 갑자기 너무 많이 나와서.'

주사기로 양을 측정해서 하면 이정도로 나올 거 같다. 아무래도 직접 하면 그 남자들을 덜 쥐어짜도 될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런 건 원래 그들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현은 옷을 다시 입고 밖으로 나왔다. 세현의 숙소에서 멀찍이 떨어져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루키가 보였다.

"거기서 뭐해?"

그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벌겠다. 어린 게 좋은 것인지 좀 먹고 나니 그는 금세 회복하여 또 생기가 지나치게 풀풀 넘치는 남자로 돌아왔다. 세현이 손목을 보다가 말했다.

"몸은 괜찮아?"

"어? 어…."

"그러면 좀만 더 줘라."

"뭘…."

"정액. 8발 정도. 더 주면 더 좋고."

"……."

알렉스가 팍 인상을 구기니 그녀가 손목을 보여주었다.

"아까 마법을 좀 써서. 내일 실험하려면 12억까지 채워야 한다."

알렉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머리를 벅벅 쓰다듬더니 아무 말없이 그녀의 숙소로 쌩 들어가버렸다. 세현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 방안에서 간이 의자를 하나 들었다. 밖에 그냥 앉아서 내일 실험할 걸 또 체크할 생각이었다. 이런 건 몇 번을 봐도 부족한 법이다. 알렉스는 세현의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주사기들을 보았다. 세현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멀티스크린을 보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났을까. 알렉스가 아까와 같이 핼쑥한 얼굴로 문밖으로 얼굴만 꺼내고는 세현을 보았다. 세현도 그의 기척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빨리 했네?"

세현이 그렇게 감탄했다. 알렉스는 뭐 때문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약간 망설이다가 결국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못하겠…어요."

세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섰다.

"왜."

"몰라…. 안 돼서…."

알렉스가 어물쩍하게 발음을 흘렸다. 세현은 시계를 보았다. 지금 용병들은 다 바쁠 테고, 밤에는 그 남자가 시간이 나려나. 하룻밤 안에 14발이 될까, 그 남자. 세현은 살짝 짜증이 나서 한숨을 쉬고는 캐물었다.

"왜 안 되는데? 얼마나 했는데?"

"한 번도…."

"진짜? 왜 그런 거야? 아까 빅비틀 때문에 그런 거야? 니 친구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애가 누구야?"

그러자 알렉스가 움찔하더니 화가 난 건지 상처를 받은 건지 모를 얼굴로 화악 분개했다.

"미쳤어?!"

"뭐가."

"걔들은 미성년자라고! 진짜 쇠고랑 찰래?!"

"아, 니가 제일 많아? 몇 살인데?"

"내가 몇 살인지도 몰라? 19살이잖아!"

"…뭐?"

어린 건 알았지만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다. 앳된 느낌은 나도 생긴 거나 덩치나 어엿한 성인 남자였다. 세현은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야 뭐, 닳고 닳은 남자겠지만 이건 19살짜리…. 물론 나이 문제 이전에 이미 처음에 손댈 때 매우 범죄적인 방법으로 손을 댔기 때문에 할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놀랐다. 세현은 헛숨을 쉬고는 허리에 손을 대고 약간 생각을 하다가 알렉스의 가슴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현은 자신의 침대로 가서 털썩 앉았다. 조금 지친다. 그녀는 알렉스를 불렀다.

"이리 와."

"……."

알렉스는 갑자기 확 긴장한 얼굴로 주춤하다가 문을 닫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보기보다 섬세한 모양이네. 영 기분이 안 났나 봐?"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알렉스가 발끈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

"벗어."

알렉스가 움찔했다.

"뭐해? 빨리 벗어."

하지만 이쪽은 섬세함의 시옷자도 없는 사람이다. 알렉스는 다시 울컥 화를 낼 뻔했다. 그런데 또 화끈하고 열이 오른다. 방금까지만 해도 거시기가 까질 정도로 만져도 제대로 안 됐는데. 그게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4발은 해줘야겠어. 해준다며."

그녀에게 정액을 제공(?)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억지로 짜냈는데 그 뒤부터는 진짜 한 발 한 발이 고통이었다. 혼자서, 방에서 몰래, 그녀와 했던 섹스를 생각하며 자위를 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이러다 발기부전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까까지 그녀의 방에서 어떻게든 짜내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되지 않으니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는 이걸 무슨 정수기 버튼을 누르면 콸콸 나오는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쉽사리 몇 번 해서 달라는 말을 한다.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화가 난다…. 그만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몇 번이나 억지로 당하고 그도 그녀를 강간하고…. 그런 건 알렉스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살기 위해서 원하지도 않는 잠자리를 해야 하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얘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고 알렉스가 해주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

지금도 분명 알렉스가 싫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금방 다른 남자를 찾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하라고 하고 신경 같은 거 꺼버리면 될 텐데 왜 그게 그렇게 잘 안 되는지 모르겠다. 정말, 진심으로 그만두고 싶은데. 이런 여자랑 계속 연관이 되니까 힘든 것일 텐데.

"…너도 벗어."

알렉스가 말했다. 세현은 살짝 인상을 쓰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되기만 한다면 뭐.

"다는 안 벗는다?"

"일단 벗어."

세현은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그걸 집중해서 보다가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 왜 벗으라고 했지.'

그녀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항상 멀찍이 떨어져 있고 그랬는데. 알렉스는 자기자신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옷을 벗는 그녀에게서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 얼른 자기 옷부터 벗었다. 그녀는 셔츠 안에 받쳐입은 회색 민소매 티셔츠에 파란색 팬티만 입고 있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브래지어 같은 거 잘 안 한다….

세현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나랑 하고 싶었어?"

"아, 아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 싫어! 절대 싫어!"

자신의 것이 약간 선 것을 보고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알렉스가 깜짝 놀라 얼굴이 벌게져서는 손으로 자기 것을 가렸다. 세현은 한숨을 살짝 쉬더니 알렉스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당연히 그녀는 힘 같은 건 전혀 세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주춤주춤 마지못한 척 끌려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어린애는 성가시네."

"누구 보고 어린애래!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안 해!"

"너 엄마 말도 안 듣지?"

"악!! 어린애 취급하지 마! 기분 나빠!"

알렉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게 좀 웃겨서 세현이 하하 하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자 알렉스가 뚝 하고 얌전해졌다.

"왜 그래?"

"아니…."

알렉스는 시선을 멀찍이 돌렸다. 세현은 그의 우람하고 탱탱한 남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알렉스는 곧바로 자기 걸 내려다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것을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가 피시시식 머리에서 증기가 나는 것같이 온몸이 시뻘게졌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그녀랑은 이미 두 번이나 했는데도 엄청 부끄럽다. 그래서인지 첫 발은 빨리 끝났다. 신음소리 한 번 낼 틈도 없었다. 더 빨개졌다. 그는 침대 시트를 양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뭐야? 빨리 되잖아?"

"아니…, 으…. 이건…, 그러니까…."

알렉스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녀는 주사기에 싸게 한 것을 잠깐 보더니 마개를 하고 옆에다 두었다. 그녀는 손에 윤활제를 짜서 그의 것을 손에 쥐고 이번에는 빠르게 흔들기 시작했다.

"우앗! 악! 자, 잠깐만…!! 으윽…! 처, 천천히…! 우와…!"

이번에도 빨리 끝났다. 알렉스는 진짜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온몸에 빨간 물이 나올 정도로 빨개졌다. 이게 우유를 짜는 거랑 뭐가 다를까. 그녀는 주사기를 하나 더 옆에다 두었다. 알렉스는 쪽팔리기도 하고 어쩐지 분하기도 해서 또 그의 것을 잡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하는 짓을 멈추게 했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무엇보다도 지금 뭔가…, 엄청나게….

"왜?"

눈앞이 핑글핑글 돌며 온몸에 열이 올라 땀이 흠뻑 나기 시작했다. 뭐지? 이런 건 처음이다.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체취에 감각이 어지럽다. 알렉스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넣고 싶어.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아. 하고 싶어. 나만 이러기 싫어, 씨발. 하고 싶어. 하고 싶어. 하고 싶어.'

그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그녀도 흠뻑 젖게 해서 느끼게 하고 싶다. 같이 하고 싶다. 전처럼…, 전에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때와는 다르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스의 거친 숨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일순 멈추더니 곧바로 훅 하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면서 그녀를 침대로 쓰러뜨려 덮쳤다.

"읍?! "

그의 혀가 안으로 파고 들어와 마구 핥았다. 세현은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알렉스의 손이 얇은 상의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쥐고 주물렀다. 세현이 그의 팔뚝을 잡았지만, 근육이 단단하게 올라온 그의 팔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한참을 입을 맞추다가 으으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겨우 얼굴을 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벌게진 얼굴로 헐떡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고 싶어…요…!"

"응? 갑자기 왜? 갑자기 왜 이래? 하기 싫다며?"

"그런 게 아니라…."

알렉스는 뭔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뭔가 속에서 뻥 터져서 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알렉스는 괴로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는 좀 참는가 싶더니 자신의 몸으로 눌려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녀의 속옷 위에 자신의 것을 꾸욱 눌렀다. 그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하기는 싫었다. 당하고 싶지도 않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야, 야. 잠깐만."

"하아…. 윽…. 하아…."

알렉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비다가 그녀의 상의 목깃을 쭉 내리다가 결국 완전히 늘어뜨렸다. 그녀의 대단한 가슴이 탱글하고 튀어나왔다.

"야, 너 또 내 옷…."

못 쓰는 옷이 하나 더 생겼다. 알렉스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일단 진정해. 어? 손으로 해주고 있잖아."

"…같이 해줘요."

매일매일 그녀 생각을 하며 빼서 이런 걸까? 물론 이 여자의 생각을 하면서 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빼내려면 그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매일 생각한 거였다. 그녀와 하고 싶다든가, 그녀를 덮친다든가, 그런 생각 같은 건 안 했다. 절대 안 했다고.

"잠깐만. 갑자기 왜 이러는데? 그냥 해."

세현은 약간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의 자지를 다시 손으로 쥐었다. 알렉스가 흠칫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끝내야겠다. 세현은 얼른 그의 부드러운 자지를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하윽…. 아, 젠장. 아윽…. 하…. 으으응…. 윽….”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색기 어린 신음을 흘렸다. 그는 또 금방 쌌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괴로운 건지, 기분이 좋은 건지 헷갈리는 얼굴을 했다. 처음이나 이전에는 그가 가는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귀엽네."

잘생기고 남자다운 얼굴이 상기되어 섹시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매력 있었다. 그 많은 남자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한 눈에 들어오던 남자였다. 세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마개를 막아 옆에다 두었다. 알렉스는 움찔했다. 여전히 덤덤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이유도 모르게 울컥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한 발만 더…."

라고 말하며 그의 자지를 다시 잡았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세현은 또 놀라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또 울려고 그래?"

"울긴 누가…!"

그렇게 말했지만 알렉스의 짙고 어두운 예쁜 벽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알렉스는 눈을 주먹으로 벅벅 비볐다. 그의 입술이 좀 떨리는 게 보인다.

"쪽팔린다고…! 씨발…, 나만 이렇게…. 윽."

"아니…."

니가 해준다며. 세현은 살짝 당황스러워 으음, 하고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19살….'

엄청 성가시다. 세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 울지 마."

"안 운다니까! 니가 자꾸 사람 기분을 안 좋게 한다고!"

"그래. 알았다."

세현은 그의 팔을 내리게 했다. 시선을 내리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나 내일 진짜 중요한 날이라 못 해. 알잖아."

"너랑 지금 꼭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게…."

젠장…. 알렉스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기가 꺾인 얼굴이 되었다. 어린애들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안 이랬는데.

세현은 일단 그를 일어나게 해서 마주 보고 앉았다. 늘어진 티를 바로 했다. 그녀는 알렉스의 뺨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알렉스가 흠칫하며 얼굴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세현은 눈을 감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알렉스는 처음에는 좀 놀랐다가 곧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녀가 먼저 입을 맞춘 건 처음이다.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알렉스의 입술을 빨았다. 이런 키스도 처음이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시금 침대시트를 꽉 쥐었다. 잠깐동안 그의 몸이 심하게 부들부들 떨렸다. 저번에 복수하겠다고 18번이나 해버린 그 남자가 맞나 싶다.

세현은 그의 남성기를 다시금 부드럽게 잡았다. 알렉스는 또 흠칫 했지만,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세현은 그의 입술과 뺨에 부드럽게 쪽쪽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이렇게 하는 건 괜찮아?"

"하아…. 윽…, 몰라."

"뭘 몰라."

세현이 웃었다. 알렉스는 또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침대 시트만 꽉 잡고 있다가 천천히 한 손으로 그녀의 등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만졌다. 부드럽다. 그는 저도 모르게 들썩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가 어느새 자신의 허벅지에 걸쳐 올리게 하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리드에 따라 그녀와 입을 맞추며 눈을 감고 있다가 슬쩍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기분이 진짜 이상하다. 둥둥 떠오르는 것같이 기분이 좋다.

"으…, 하아…. 젠장…. 으…. 으읏…."

그녀가 천천히 뺨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니 피부가 근질근질하고 단전이 당기고 엄청 불끈거렸다. 알렉스는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스스로 입을 맞추었다. 손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러다 곧 움찔하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세현은 그걸 주사기에 담았다. 알렉스는 숨을 헐떡이며 세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

그리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벌겋게 되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도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뭘 해도 되나? 안 해야 하나? 그렇게 알렉스는 푸시식 타올라 쑥스러워했다. 이게 뭘까? 그녀의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쩐지 나른했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떼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녀의 얼굴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가 또 웃었다.

"너 얼굴 진짜 빨갛다."

"너도…! 빨갛거든!"

알렉스가 발끈해서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살짝 인상을 쓰며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딱 튕겼다.

"존댓말. 같이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알렉스는 내심 깜짝 놀랐다가, 주저하고, 갈등하다가,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간질거려서 그녀에게 다시 몸을 슬쩍 붙였다.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부드럽게 허벅지를 잡은 손을 미끄러뜨려 그녀의 속옷 라인으로 살짝 엄지를 넣어 쓰다듬었다.

"……."

"……."

잠깐 아무런 말없이, 마주친 시선이 모든 것을 이끌어갔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천천히 공기를 달군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녀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그 후엔 뭐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아, 깜짝이야…."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는 것이었다. 세현은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 상황이 웃기다는 듯이 웃었다.

"너 나중에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 벌써부터 끼가 상당하네."

그녀는 그렇게 상황을 쏙 빠져나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의 품을 자연스럽게 벗어났다. 알렉스는 거절당했다는 무안함에 또 좀 창피해졌다.

'처음에 자기가 먼저 덮쳐놓고! 오늘도 자기가 먼저 손 대놓고…!!'

그렇게 생각하니 또 화가 났다. 항상 자기 마음대로만 하고!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등허리 옷깃을 꽉 잡았다.

"응?"

그녀는 디바이스에 문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막 메시지를 전송하고는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또. 그는 울컥해서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책임져!"

"뭘?"

"난 니가 처음이었다고! 그러니까 책임지라고!"

세현이 ‘응?!’ 하고 당황하더니 천장을 한 번 보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모르겠다니) 그는 자꾸 세현에게 이렇게 화를 냈다. 어린애라 말도 안 통하고 성가시고 귀찮다. 하지만 이래저래 잘못한 것도 있어 조용히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루키 군…,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일이 있는 거야.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게 좋아."

"뭐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 입으로 저 뻔뻔한 말이 어떻게 나온단 말인가! 알렉스는 이것저것 더 화가 났다.

"너…!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고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

"이미 지난 일인 걸 어떡해?"

"야!!"

"그리고 너도 전에 분 풀릴 때까지 잔뜩 했잖아. 이제 와서 왜 이래?"

"자꾸 화가 나는 걸 어떡해! 그러게 왜 날 건드려! 닥치고 책임지기나 해!"

"뭘 어떻게 책임지라고?"

"몰라! 그냥 책임져!"

"아니, 그러니까 뭘 어떻게…."

"그런 건 니가 알아서 해! 일단 책임지라고!"

"루키 군…."

그녀가 그렇게 알렉스를 부르자 알렉스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았다.

"이름 부르라고 말했잖아! 왜 자꾸 그렇게 불러?"

"…이름이…, 뭐였더라?"

세현이 슬쩍 말꼬리를 흘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알렉스는 경악했다. 그는 입을 뻐끔거리며 형용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또 울컥했다.

"알렉스라고!!"

"아, 그래. 알렉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거짓말하지 마!"

"그래. 그래. 일단 생각해볼 테니까 오늘은 이만 쉬어, 응? 수고했어."

"…!!"

그녀가 자꾸 어린애 취급을 하며 그의 비위만 대충 맞추며, 아니, 이렇게 성의가 없어서야 누구나 그녀가 성가셔서 이러는 걸 알 것이다. 알렉스는 너무 화가 나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지금 그 금발 불렀거든? 너 대신에 경호할 거야. 가서 쉬어. 수고했어, 루…, 아니, 알렉스."

너무 귀찮다. 너무 성가시다. 이런 어린애랑 입씨름을 하느니 그냥 잠이나 자겠다. 그녀는 알렉스의 옷을 챙겨주며 그를 그냥 문으로 밀고 갔다. 알렉스는 결국 그 상태로 밖으로 내쫓겼다.

"……."

어른들이란 다 이런 것일까.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이제 화도 안 나….

'…기는 개뿔!'

알렉스는 닫힌 문을 돌아보며 안에 있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책임 안 지기만 해봐!! 너 내일 실험 끝나면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박아 버릴 거야!!"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어, 고마워~"

듣지도 않는다. 알렉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발을 쿵 굴렀다. 그녀가 저렇게 나오니 정말 오기가 생긴다. 기필코 책임지게 할 거다.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하게 그게 뭔지도 모르고서.

*

"…교수님."

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아담은 아주 칙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현은 그 꼴이 아까 그 루…, 알렉스와 흡사해서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오늘 제가 좀 피곤해서…."

그리고 그의 대답에서 그가 아까 그 루…, 아니, 알렉스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했는데?"

"한 발 정도…."

"7번 해야 한다고 했잖아."

세현의 말에 아담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말했다.

"이게 그렇게 막 되는 게 아닙니다."

"참나…."

오늘따라 이 남자들이 왜 이러는가. 이 남자들은 그냥 쭉쭉 잘 나오는 거 아니었나? 세현은 성가신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더 필요해. 최 박사나 우빈이가 마력 다 못 모을 수도 있으니까. 니가 안 된다면 다른 남자라도 보내줘."

"…그건 싫습니다."

"사사로운 거에 연연할 때야, 지금? 내일이 어떤 날인지 몰라?"

"그럼 좀 도와주십시오."

"아, 귀찮아."

세현은 그의 가슴을 밀고 방으로 들어갔다.

세현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였으니 숙소도 꽤 그럴듯했다. 31일 동안 지내기 위한 조립식 생활공간은 그냥 일반 가정집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침대나 가구 같은 것은 빈약하긴 했지만. 사실 잠 자는 것 빼고는 잘 쓰지도 않아(자러 들어오지 못한 적도 많다) 더 허전한 느낌이다.

고작 한 시간 전에 루…, 알렉스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세현이 만지는 대로 쭉쭉 뽑아내고(?) 갔다. 세현은 침대에 앉았다. 아담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아담은 한숨을 쉬더니 살짝 웃었다.

"당신과는 근사한 호텔에서 멋진 야경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요."

"전에는 얼른 벗더니."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든 좋았으니까요."

아담은 그렇게 속삭이며 세현의 뺨에 입술을 누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풀었다.

"이걸 한 번으로 친다, 그럼?

"그건…, 너무 치사합니다."

아담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표정이 부드러웠다. 까슬까슬할 정도로 밀어놓은 머리카락도 이제 제법 자라 머리에 난 상처도 가려져 인상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번듯하게 입히고 거리에 세워놓으면 배우 같아 보일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배우 같은 거 해도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아. 금발에 이런 눈이면."

"의외로 너무 잘생기면 배우 하기 힘든 거 아십니까? 요즘은 개성파가 유행이거든요."

"그런 거야?"

"요새 나오는 영화들을 보세요."

"영화 안 봐서 몰라."

아담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는 이미 상체는 헐벗어 어깨나 복부, 팔, 등 같은 데 있는 흉터들이 그대로 보였다. 아담은 세현의 셔츠를 천천히 벗겼다. 안이 거의 비치는 얇은 상의 위로 본 거라 하더라도 상처 하나 없는 몸이었다. 아담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손에도 넘칠 정도로 육감적인 그녀의 부푼 가슴에 입술을 눌렀다.

"당신 같은 여자는 어릴 때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밖에서 뛰어놀거나 했던 적은 없나요? 상처가 하나도 없네요."

"어렸을 땐 궁금한 게 많아서 이것저것 하다가 다친 적도 몇 번 있는데. 어머니가 아주 극성이었거든. 여자 몸에 흉 같은 거 지면 안된다고 지랄하곤 했지. 부창부수라고 아버지도 꽤 그랬고. 피곤했어."

아담은 놀라서 고개를 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어머니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돈은 꽤 있는 집이어서 공부하는데 부족함은 없었는데 부모랑은 잘 안 맞았어.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거의 연 끊었지."

"아…."

"그거 알고 노친네가 한 번 그러더라고. 원래 잘난 여자들 앞길 가로막는 건 십중팔구 처음엔 부모, 나중엔 남자, 마지막엔 자식이라고."

아담은 속옷만 남기고 세현의 옷을 다 벗겼다. 자신의 바지와 속옷도 벗어 던지고 그대로 몸을 마주댄 채 세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 같은 여자의 앞길을 어떤 남자가 막을 수 있습니까?"

아담은 세현의 얼굴을 잡고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세현이 웃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대로 세현은 부드럽게 그의 남성기를 잡았다. 아담이 살짝 흠칫하며 인상을 썼다. 확실히 자신할 만한 남자였던 걸까? 섹시하다. 아담이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한 번 눌렀다 뗐다가 다시 키스하며 혀로 부드럽게 그녀의 것을 핥았다.

"으응…."

전에도 느꼈지만 키스 정말 잘한다. 부드럽게 입술을 붙였다가 혀를 간지럽게 핥다가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짓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까 그 루…, 알렉스도 어린데도 참 타고 난 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확연히 농익은 느낌이었다. 그가 이 남자를 따라잡으려면 한 세월일 것이다.

"하아…."

세현도 어쩔 수 없이 분위기를 타서 여기저기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가 세현의 허벅지를 천천히 쓰다듬어 올라갔다. 세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엄지로 은근하게 그녀의 속옷 위를 쓰다듬다가 꾸욱 하고 그녀가 가장 잘 느끼는 곳을 눌렀다.

"아…!"

세현이 움찔하고 허리를 들썩거렸다. 그가 부드럽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계속해서 거기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녀의 얼굴이 확연히 상기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담이 그녀의 입술에 다시 입술을 눌렀다.

"하고 싶으십니까?"

"하아…, 안… 되는데…."

그녀는 열기를 띤 눈빛으로 아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알렉스와 할 때도 은근히 흥분했다가 참았는데 아담이 말려야겠다는 틈도 안 주고 자연스럽게 애무하니 어느샌가 가기 직전까지 흥분했다.

"으응…!"

아담은 그녀의 얇은 상의를 스르륵 걷어 올리고 그녀의 한쪽 가슴을 잡았다. 그녀의 가슴은 아주 풍만했으나 붉은 젖꼭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녀의 붉은 젖꼭지는 유륜까지 부드럽게 글래머러스하게 부풀었지만 그가 엄지로 살짝 쓰다듬으니 바로 수축했다.

"아으…, 잠깐만…."

아담은 바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젖꼭지를 핥았다. 그의 숨이 거칠었다. 가슴에 닿는 그의 숨이 간지럽다. 그는 부드럽게 왼쪽 가슴을 주무르며 부드럽게 핥다가 혀끝을 세워 빠르게 비비자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그는 속옷 위에서 손을 뗐다. 거의 갈 뻔했기 때문에 그녀는 움찔하면서 뜨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 정중앙에서부터 손가락 등으로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피부가 촉촉하다.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계속 허리를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의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현의 여성기 위를 중지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 감촉을 느꼈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엄지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뺨에 입을 쪽쪽 맞추면서 속삭였다.

"부드럽게 부풀고…, 흠뻑 젖어서…, 내 걸 넣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이런 게 본능일까. 굵고 딱딱하고 커다란 게 확 들어왔을 때의 느낌이 여럿 떠오르며 더욱 젖어 들었다. 막상 할 때는 젖지 않던 경우도 허다했는데, 지금은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뱃속을 달군다. 갈등이 되었다. 그의 손가락은 다소 거칠면서 딱딱했다. 그것이 매우 부드럽게 소음순 사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자극적이었다. 아담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이어 속삭였다.

"지금 당신 표정을 예스라고 여기고 잔뜩 해버리면 당신의 앞길을 막은 남자라는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겁니까?"

"하아…, 읏…. 일단 더 해줘."

그녀는 참지 못 하고 아래에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아 다리 사이에 더 꾹 눌렀다. 거기에 아담이 만면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음핵을 손가락으로 탁탁탁 빠르게 두드렸다. 세현이 깜짝 놀라 크게 신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 아앗! 으응…!"

이미 그를 빼겠다고 만지고 있던 것도 관둔 지 오래였다. 세현은 자신의 쾌감에 집중했다. 아담이 그녀의 뺨을 사악 핥으며 속삭였다.

"이거 좋으시죠?”

"아앗. 잠깐만…. 핫…. 아! 아아…!"

저도 모르게 야한 목소리가 나온다. 매우 자극적이었다. 그런 식으로 거기를 두드리니 그의 손가락이 굉장히 차갑게 느껴지며 자극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금 손가락을 붙이고 소음순의 사이와 음핵을 두 손가락으로 넓고 강하게 쓰다듬었다. 너무 자극이 세서 몸이 덜덜 떨린다. 이런 건 처음이다. 세현이 턱을 치켜들며 헐떡거렸다.

"아아…! 어떡해…. 으읏. 으응…. 하아…."

아담이 바로 직전에 손가락을 뗐다. 그녀가 숨을 들이켜며 그의 팔을 꽉 쥐었다. 아담이 허리를 일으켰다.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했다고 이렇게 절절하게 아쉬워 본 적은 진짜 처음이었다. 세현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네."

"제가 잘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는 드디어 세현의 속옷을 벗겼다. 그녀의 기다랗고 늘씬한 다리 하나를 빼내고 천천히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나머지 한 쪽도 천천히 벗겨냈다. 잔뜩 젖어서 축축하게 된 속옷을 침대 밖으로 던졌다. 그는 그녀의 여성기에 자신의 것을 부드럽게 비볐다.

섹스는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아름답고 대단한 여자랑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섹스 같은 건 익숙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마치 처음처럼 긴장되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긴장되는 것 같은데?’

테크니컬 한 애무로 이미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세현은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살살해. 하아…. 그거…, 아플 것 같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건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담은 몸을 낮추어 그녀와 몸을 붙였다. 부드러운 살갗이 배와 허리와 가슴에 닿으니 기분이 아주 좋다. 그는 기대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보이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서 애정 어린 눈길로 내려다보며 코를 맞대고 살짝 비볐다.

"당신과 이러고 있는 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아."

"역시 배우를 해도 잘할 거 같다니까."

그녀가 피식 웃었다.

"왜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짓말이라기 보단…. 너무 능숙한 남자가 하는 말은 아무래도 좀 걸러 듣게 되잖아."

"제가 아무 여자한테나 이런 말을 하는 남자처럼 보입니까?"

"글쎄. 그런 건 내가 알 수 없지."

"당신이 처음입니다."

"하하."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이런 말을 아주 잘 하는 남자일수록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아담은 그녀의 기다란 다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되는 걸까.'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이기까지 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 동공의 주변만 약간 비취색인 갈색 눈동자, 살짝 각진 턱이 귀족적이고 부드럽고 탄력 있는 피부에 육감적인 몸매까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된 여자. 천재. 거기에 그녀의 열정과 투지, 자신 외의 모든 사람을 벌레 보듯이 볼 수 있는 오만함까지.

이런 여자가 세상에 어디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담이 그녀에게 한 말은 진실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여자를 유혹하고, 또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고, 그런 건 본능적인 거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스쳐 지나가면 다시 뒤돌아볼 일도 없는 관계. 마지막으로 함께 잠자리를 했던 여자의 얼굴마저도 흐릿하다. 이름이 기억나는 몇몇 여자들도 그저 가끔 안주거리로 입에 오르내릴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물론…, 거기에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그가 아는 모든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의미없이 여자와의 시간을 소비하며 그렇게 살았다. 가끔 몸을 파는 여자에게 진심이 되어 한때를 보내는 남자들을 보면 남들만큼 비웃지는 않았지만 실소가 나오기는 했다.

'어차피 끼리끼리 노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일까.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세현 퀸이라는 여자와 몸을 맞대고 있는 지금이 등골부터 머리털 끝까지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흥분되었다. 그녀에게는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더라도, 그래도 이 많은 남자들 중에 그를 택해주었다는 게 기쁘다. 마음이 끝없이 부풀고, 그걸 전하고 싶어서 그답지 않게 솔직하게 말해도 그녀는 어쩐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그저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일까.

"하룻밤 약속은 아직 남은 겁니다. 이건 당신에게 필요한 걸 주는 날 당신이 돕는 것뿐이니까."

아담은 상당히 뜸을 들이며 그녀에게 약속을 상기시켰다. 세현은 약간 성가셔서 대충 대답했다.

"알았어."

"약속하신 겁니다?"

"알겠다니까."

아담은 세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그녀의 한쪽 허벅지를 한 팔에 걸치며 그대로, 아주 천천히 밀어 눌렸다. 아담은 미간을 약간 좁히며 섹시한 얼굴을 했다.

“으윽….”

"으응…. 하아앗!"

내일이 그렇게 중요한 실험인데 세현과 같은 사람이 이렇게 분위기를 타서 섹스하게 만들다니. 대단한 남자이긴 하다. 안 그래도 엄청 크고 단단한데 오돌도돌한 진주들이 음핵을 퉁퉁 자극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세현이 깜짝 놀라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의 허리를 허벅지로 꽉 조이면서 세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하으…. 그거…."

"딱 좋은 곳에…, 닿죠?"

아담도 상기된 얼굴에 기분 좋은 표정을 하며 세현의 귓가에 낮고 음란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담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깍지를 껴 잡고는 조금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부르르 떨었다.

"하…. 아…! 아앗…. 앗. 아앗. 아앙. 하읏."

섹스하면서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이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데도 그녀가 야한 신음을 잔뜩 흘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이미 손으로 잔뜩 자극해서 여성기가 민감해져 있는 와중에 그런(?) 게 들어와서 움직이니….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집중해서 아담을 느끼고 있었다. 아담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타이밍을 가늠하며 그녀의 안을 정말 느긋~하고 천천~히 문질렀다. 아담은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당연하다 싶기는 하지만…, 섹스 잘 안 하시는군요."

"그런 것도…, 하아…, 알 수 있어?"

"좀 긴장하시는 것 같아서."

"진주를 세 개나 박아놓은 남자랑 하면 다들 그러지 않을까?"

"그런 것 치고는 기분 좋아 보이시는데요? 생각보다 괜찮죠?"

"으응…! 하…. 잠깐만. 읏. 아…. 으으응...!"

그가 깊숙이 박아 넣었다가 천천히 뺐다가 좀 빠르게 꾸욱 박아 넣자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자극이 들면서 엉덩이가 저절로 덜덜덜 떨리며 엄청난 오르가즘에 휩싸였다.

"아읏…. 아…! 아…! 으응…. 아읏. 아앗. 아…!"

아까도 몇 번이나 그렇게 뜸을 들이더니, 그런 것도 이 남자의 스킬이었는지 눈앞이 핑글 돌고 스스로의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정도의 쾌감이 들이닥쳤다. 세현은 그대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윽…."

아담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숨을 들이켜더니 꽉 조이며 경련하는 그녀의 여성기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그녀의 오르가즘을 끝까지 연장했다. 피가 몰려 잔뜩 부푼 그녀의 안은 탄력 있게 그의 것을 조였다 풀었다 했다. 그녀와 자신의 체액으로 미끌거리고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의 자지에도 더욱 피가 몰려 더 크기가 커지고 단단해져 두근거렸다. 타이밍을 맞추어 그녀의 안에 꾸욱 눌러 들어가 사정했다.

"하아…. 윽…. 하아…. 으윽…. 큭."

그는 쾌락에 젖어 섹시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면서 끝까지 사정했다. 저도 모르게 상대가 부담스러울 것을 생각 못하고 끝까지 박아 넣었다.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콘돔을 하지 않고 섹스하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그녀와 더욱 밀착해서…, 정말로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그녀를 이렇게까지 느끼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사실이 뿌듯하다. 아까는 이걸 또 해야 한다니, 하면서 억지로 빼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은커녕 엄청 나온다. 약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쾌락이라니. 아니, 약을 하고 한 것과도 비할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았다.

"으윽…!"

아담은 눈을 감고 헐떡이는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눌렀다. 온몸으로 그녀를 느꼈다. 겹쳐진 몸처럼, 꽉 얽어 마주잡은 손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정말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담은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가슴이 떨렸다.

섹스로 뜨겁게 달아오른 두 성인 남녀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담은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후희를 즐겼다. 세현은 아직도 쾌감의 잔향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더운 숨결이 섞였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아담은 그녀에게 입술을 꾸욱 누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떨어지기 싫었다. 세현은 그의 입술을 피하며 신음을 흘렸다.

"하아…! 잠깐만…."

"조금만 참아 보십시오. 이대로 바로 하면 더 기분 좋아지니까."

그녀가 생각보다 훨씬 잘 느껴서 정말 뿌듯했다. 아담은 열의가 올라 더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아…! 아흑, 으…. 아앗."

오르가즘을 느낀 지 얼마되지 않아 잔뜩 부풀고 예민해진 곳에 남자의 두텁고 단단한 것이 부드럽게 찔러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머리끝까지 화끈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세현은 침대 시트를 잡으며 몸을 뒤틀었다.

"하아…. 미칠 것 같아…! 아! 아아…! 핫…."

아담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침대에 납짝 엎드린 세현에게 꽉 차게 박아 넣은 채로 그녀의 엉덩이에 몸을 붙였다가 뗐다 했다. 그대로 그녀의 엉덩이와 침대가 출렁거렸다. 그는 세현의 오른팔 채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아 그녀에게 몸을 붙였다. 침대 시트를 꽉 잡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가 대신에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으응…! 으응. 하아. 읏. 아아. 앗…. 으으응…."

그녀의 온몸이 잔뜩 촉촉해졌다. 아담은 그녀에게 끝까지 집어넣은 채로 진동을 주어 흔들었다. 굵고 커다란 그의 자지가 아랫배를 근질거리게 하고 그가 자랑하던 진주가 말려 들어간 음핵을 누르며 자극하자 세현은 정말 죽을 거 같아 좀 짜증을 냈다.

"거기도 있었어…!"

"후배위 할 때도 생각해야죠…. 하아."

그는 세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문지르며 황홀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억눌린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얼굴이 상기되고 아름다운 미모가 빛을 발했다. 세현은 그의 테크닉이 혼이 빠져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으응…!! 아우…. 아. 또… 하…! 으응…. 너무…, 하아아…!"

까딱 잘못하면 아프기 짝이 없는 섹스가 되었을 텐데. 이 남자는 자신의 장단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남성기는 야만적이었지만 섹스는 부드러웠다. 온몸이 불타는 듯이 뜨거워지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성적 쾌감이 날뛴다. 끝에는 강렬한 오르가즘이 기절할 정도로 찾아왔다.

평생 섹스를 해본 남자가 손에 꼽을 정도인 세현에게 이 남자와, 이 남자의 테크닉과, 이 남자의 자지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아아아…!"

그녀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다시 오르가즘을 느끼기 시작했다. 원래 처음보다 연달아 한 두 번째 오르가즘이 더 강렬한 법이었다. 그녀의 온몸이 새빨개지며 그를 쥐어짤 듯이 조였다.

"으으윽…!"

아담도 그녀의 손을 꽉 쥐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눌렀다.

"아아! 하앗…! 그만…, 그만…! 아앗. 아아앙…."

그녀가 강렬한 쾌락을 못 견디고 경련을 일으켰다. 아담이 속삭였다.

"끝나고 나면 그만둬주지 않은 걸 고마워하게 될 겁니다…. 하아…. 큭. 조금만 더 하면…."

"아…! 아아…!! 안 돼. 아! 아아. 아아앗…!!"

방금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가 세현의 가슴을 잡고 젖꼭지를 손끝으로 빠르게 돌리며 슥슥슥 그녀의 안을 녹진녹진하게 문질렀다. 세현은 온몸을 빳빳하게 늘이며 괴로워했다. 아담은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누르며 그녀의 뺨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 단계 더 극심한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계속해서 꾹꾹 강하게 누르는 식으로 삽입을 하다가 그녀의 안에 사정했다.

"으윽…. 하아…."

그의 숨소리가 아주 야했다. 세현은 베개에 풀썩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그녀는 아주 넋이 나갈 정도로 느껴 아직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룻밤 취소야…."

"네?"

품에 있는 여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워 보였던 적이 있었던가. 아담은 그녀의 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가 그녀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런 거…, 이런 거 못하겠어…. 하아…, 너무…, 너무 자극적이야. 힘들어. 아. 하으…."

가만히 있는데도 자꾸 오르가즘이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몸이 다 떨린다. 이런 게 진짜였던가. 지금까지 느꼈던 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두 번밖에 안 했는데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지치고 허리에 힘이 빠져 버렸다. 그녀가 전에 알렉스를 덮쳤을 때나 알렉스가 그녀를 덮쳤을 때도 하룻밤에 18번씩이나 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까 알렉스의 괴물 같은 체력과 크기 때문에 그를 단호하게 거절해놓고 어째서 이 남자와는 잠자리를 하고 만 것일까. 스스로가 남자의 유혹에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담은 잠깐 말을 잃었다가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약속은 약속입니다."

"어쨌든 하긴 했잖아…. 하아…. 아…. 아직도 죽을 거 같아. 내일 괜찮겠지…?"

그녀는 금방이라도 훌륭한 섹스의 기분 좋은 나른함에 기절할 것 같아 일단 손목부터 보았다. 아까 루키의 것을 빨리 넣어서 11억 6천만을 찍고 방금 이 남자랑 두 번 해서 마력 상한선을 찍었다. 이 남자가 빼놓은 거 한 발도 일단 있고….

"두 발만 해놓고 가…. 난…, 이제 자야겠어…."

세현은 그대로 스르륵 기절할 뻔했는데 아담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잠깐만요! 아직 얘기 안 끝났습니다. 절대 인정 못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미 말 다 했지 않습니까? 약속 지켜주세요."

"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제 좀 가…."

"알겠다고 한 겁니다?!"

"알았어…."

그리고 그녀는 잠들어 버렸다. 아담은 그녀를 다시 깨울까 하다가 관두었다. 어이가 좀 없었다가,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일어나 옷가지에서 인이어와 디바이스를 찾았다. 2시간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미리 얘기를 해두었다. 잠깐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게이트와 베이스 양쪽과 무전을 주고받다가 그 뒤로 별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그냥 부하에게 맡기고 오프날을 바꿔버렸다. 아직 저녁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현도 그도 잠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는 다시 세현의 침대로 돌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이불을 같이 덮으며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품에 있는 그녀의 존재에 가슴이 다 뿌듯했다. 그도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스킵했던 최이삭과 하우빈도 이제는 배가 고파서 안 되겠는지 식당에 나타났다. 최이삭은 칙칙한 얼굴이었고 하우빈은 엄청나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 못 채우면 어떡하죠, 선배? 잠 안 자면 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내일 컨디션 생각하면 3시간 정도는 자야 하지 않을까요?"

"넌 자세가 글러 먹었어."

최이삭이 샷을 네 개나 넣어서 라떼를 만들며 그렇게 말했다. 의사는 커피를 먹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은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지 않아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실험을 끝낸 뒤에 자겠다, 이틀 정도는 밤을 새어도 당연히 쌩쌩해야 한다, 이런 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야. "

"선배는 어떻게 해요? 전 너무 잠이 와서 잠자는 것만큼은…."

"니가 지금 랩 생활을 매우 우습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그게."

최이삭은 일단 밥을 먹기 전에 미리 레드불을 몇 모금 마셨다. 당연히 이것도 의사가 하지 말라고 했던 짓이다. 그리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덧붙여 말했다.

"너 나 졸업하면 어쩔 거냐? 넌 랩장 안 될 거 같냐? 결국 끝까지 갈 거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가는 자리다. 교수님이 너 랩장 돼도 우리 우빈이, 우빈이 하실 거 같냐?"

"아뇨…. 반성하겠습니다."

하우빈은 기가 팍 죽어서는 그렇게 대답하며 우걱우걱 샌드위치를 먹었다. 교수님은 참으로 존경하고 동경하고 좋아하지만 랩장은 안 하고 싶다…. 그 뒤론 둘 다 말없이 빠른 식사에만 집중했다. 하우빈은 결심했다.

'그래. 나도 각오할 때가 된 거야. 나도 교수님처럼 훌륭한 연구자가 되어야지!'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자! 그렇게 다짐하며 하우빈은 와구와구 음식을 꿀꺽 먹고는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배!"

그렇게 씩씩하게 말하고는 쌩하고 식당을 나갔다. 하우빈이 그렇게 나가자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훈계를 했던 그의 얼굴이 조금 더 흙색이 되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 입가를 감싼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짜 눈 딱 감고 한 번 해?'

지금도 그는 마도 순환을 하고 있었다. 명상을 하지 않을 시의 마도 순환은 명상할 때의 70%의 효율밖에 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명상을 하면 내일 정오까지는 마력을 다 채울 수 있기는 한데, 이게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드레이닝 때문에 하루 18시간, 링겔을 맞으며 마도 순환을 하던 교수님을 봤을 때도 혀를 내둘렀는데 직접 하려니까 엄청 막막하다.

'아냐…, 일단은 해보자. 해보고 생각하자.'

최이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호흡을 했다. 빨리 식사를 끝내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서 정좌하고 앉았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날밤을 새기 시작했다.

세현 퀸은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얼굴을 내밀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을 좀 잔 모양인지 혈색이 좋았다. 그녀는 식사를 하면서 어제 마저 보지 못했던 실험 계획서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실험 과정을 모델링한 영상도 몇 번이고 보았다. 머릿속으로도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했다. 열 몇 시간을 자고 새벽에 일어났을 때는 너무 많이 자서 깜짝 놀랐는데 오랜만에 실컷 자고 일어나니 컨디션이 좋아서 머리가 잘 돌아간다.

물론 아침에 같이 자고 있던 그 남자를 발견한 것은 예기치 못한 일이긴 했다. 그도 확실히 잠이 부족했던지 개운하게 일어났다. 어차피 필요한 거 한 번 더 하자는 남자를 밀어내고 정확하게 두 발 주사기에 받아냈다. 그래서 마력량은 여전히 최대로 유지되고 있어 마음이 퍽 든든한 상황이었다.

"…!"

알렉스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왔다. 세현을 발견하고 평소처럼 외면했다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열 받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식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와 잠깐 눈이 마주쳤던 세현은 뭔가 싶어서 갸웃했다가 다시 신경을 끄고 멀티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그녀가 오랜만에 가뿐한 몸 상태로 천천히 녹차를 마시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밤을 새느라 얼굴이 노래진 최이삭과 하우빈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바로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그들을 보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유령처럼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들은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손목을 내밀었다. 최이삭은 11억 9천만, 하우빈은 11억 2천만이었다.

"최 박사는 2시간만 더 하면 되겠고. 우빈이 너…. 석세스 교수는 얼마나 있다고?"

"12억 풀로 채우시고 자러 가셨습니다."

"아, 다행이네."

세현이 하우빈의 손목을 보고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른 교수가 여분의 마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현도 12억 5천만 정도 있었지만 드레이닝 때문에 최대 10억까지만 쓰라고 권고를 받았기(물론 아예 쓰지 말라고 하긴 했다) 때문에 여분을 쓸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처음에는 11억 5천만 정도의 마력을 모아놓으라고 지시를 했다가 그간 일이 많아 5천만씩 더 모으게 했었다. 그런데 그걸 바로 어제 몬스터 때문에 소요해버렸으니 비상이 걸린 것이다.

"우빈이 너는 최 박사보다 시간당 모으는 속도도 빠르면서 왜 이래? 어제 마력도 덜 썼을 거 아냐?"

세현이 한숨을 쉬며 그렇게 물었다. 하우빈이 움찔하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평소 쓰는 마력 외에 여분을 두지 않아서 이랬다. 마도 순환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귀찮은 짓이었고 예정에 없이 마법을 써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몇 천만 정도는 괜찮겠지. 최이삭 너는 2시간마저 더 하고 우빈이 너는 좀 쉬어라."

"네."

"아뇨…! 저도 최대한 더 하겠습니다, 교수님!"

하우빈이 그렇게 외쳤다. 세현은 잠깐 그녀를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해. 대신에 실험할 때 집중 못하면 죽는다."

"넵!"

그렇게 하우빈은 어제 결심한대로 호기롭게 그렇게 대답하고 씩씩하게 나갔으나 아침 식사 시간이었던 7시부터 1시간이 지나고, 잠이 와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도 없고 혹시나 잠들었다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쪽잠도 잘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리다. 그녀는 뒤에서 계속 디바이스로 게임이나 하고 있던 유리에게 말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어~"

정말 매일 밤새고 논문 2개에 프로젝트까지 책임지면서 드레이닝에 걸려 잠도 제대로 못 자고도 항상 정정하신 교수님이 끝도 없이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화장실을 갔다가 찬물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잠 하나 이기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잠깐 간이 화장실의 뒤로 돌아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얼마간 있었을까. 유리가 나타났다. 그는 한창 빠진 게임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하우빈을 찾아왔다가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울어?"

"아, 아니…."

그녀는 주먹으로 안경 밑을 벅벅 닦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너무 잠이 와…. 흑."

"그럼 그냥 좀 자면 되지 왜 울고 난리야?"

유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디바이스를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손은 대지 못하고 이리저리 그녀를 살폈다.

"교수님이 니가 못 채운 만큼 써주신다며?"

"교수님은 편찮으셔서 마법 함부로 쓰면 안 된단 말이야. 다 못 채워도 최대한 많이 모으려고 했는데…. 흑."

랩 선배들이 시키는 잡무에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항상 씩씩하던 그녀가 입술까지 혈색이 빠져 힘들어하고 있었다. 유리는 약간 곤란하기도 하고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뺨을 한 번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래도 좀만 자. 쉬고 하는 게 더 잘 될 거야."

"못 일어나면 어떡해."

"내가 깨워줄게."

"선배님은 한 번도 안 쉬고 마도 순환하시는데 내가 거기 옆에서 어떻게 자."

유리의 말은 하우빈에게 엄청난 유혹일 것이다. 잠이 와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유리는 주변을 살펴보다가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바위 언덕을 발견했다.

"저기 뒤로 가면 아무도 못 볼 거야. 30분만 자."

하우빈은 울상인 얼굴로 유리를 올려다보았다가 결국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바위 언덕을 돌아갔다. 그녀는 잘 생각에 머리의 혈관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플 지경이었다.

'주, 죽을 거 같아….'

그녀는 자신의 랩코트를 벗어서 바위가 약간 드러난 모래 바닥 위에 깔았다. 누웠다. 그런데 온몸이 배겨서 이쪽저쪽으로 누워 봐도 도저히 편치 않았다. 하우빈은 결국 자는 걸 포기했다. 이렇게 자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우빈은 엉망이 된 랩코트를 보고 또 울컥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또 왜. 그냥 자지."

유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너무 불편해…. 아, 나 바보 같아. 머리 아파. 흑. 나중에 실수하면 큰일나는데. 흐윽."

"아, 진짜~"

유리는 아무 데서나 잘 잤기 때문에 이런 걸 가리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유리는 눈물 콧물을 질질 짜는 그녀를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다가 아, 하면서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는 그나마 평평한 곳에 앉아 바위 언덕에 등을 기대고 말했다.

"이리 와."

하우빈은 소매로 자신의 콧물을 스윽 닦으며 의아한 눈으로 유리를 보았다. 뭘 어쩌자는 것인가. 유리는 아, 하면서 뭐가 잔뜩 달린 방탄, 방화, 방산 조끼를 벗었다. 뭐가 잔뜩 달려 우둘투둘하고 딱딱할 것이다.

"이리 와."

하우빈은 자신의 랩코트를 그냥 손에 들고 힘없이 그에게 걸어왔다. 가까이 온 그녀의 종아리를 무릎으로 살짝 건드렸더니 그녀가 으앗 하고 넘어졌다. 유리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아 자신의 한쪽 허벅지에 앉게 했다. 깜짝 놀란 하우빈의 머리를 감싸 어깨에 기대게 하며 그는 다시 디바이스를 꺼냈다.

"30분 뒤에 깨워 줄게. 자."

그는 게임을 다시 틀었다. 하우빈은 그에게 뭐라고 하려고 했다가 이유 없이 긴장이 풀리며 그냥 기절했다. 바로 ‘크허~’ 하는 소리를 내며 쌔액쌔액 잠든 하우빈의 얼굴을 보았다가 그녀의 안경을 벗겨 손에 들고 유리는 게임에 집중했다. 어차피 이런 조막만한 여자애는 어깨에 얹고 24시간 동안 달려도 멀쩡했다.

이 게임은 요새 여기 용병이랑 서던라이온 선수들이 다 함께 하는 퍼즐 게임이었다. 이상하게 단계가 높은 사람을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여겨 서로 경쟁이 붙은 지 한참이었다. 유리는 여기 있는 소드마스터들 중에서도 최연소에 해당하였지만 게임에 상당한 지력을 보이고 있었다.

한참 빠져서 하다 보니 어느새 30분을 지나쳤다. 유리는 과금 페이지로 들어갔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아예 침까지 흘리며 폭면을 취하고 있었다. 유리는 그걸 보고 풋 하고 웃었다가 그녀의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주고 바지에다 문질렀다. 그리고 그냥 30분만 더 자게 하자고 결정하고 다시 게임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우빈이 잠든 지 1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마력 12억을 다 채운 최이삭이 남은 3시간이라도 자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느낌이 아예 없었다.

"하…."

이 망할 랩에 들어온 뒤로 그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이 수두룩했지만 하다하다 순결까지 잃을 뻔했다. 그리고 그녀의 밑에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걸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요원하다.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자.'

오늘도 그렇게 결심하며 잠깐 주변을 살피는데 어디에도 하우빈이 보이지가 않아 당황했다.

"하 석사 어디 갔는지 봤어?"

"어…, 모르겠는데요, 형. 아까 화장실 간다는 소리는 얼핏 들었는데."

"뭐? 그게 언젠데."

"음…, 30분은 됐나?"

오 박사가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가 인상을 쓰며 미간을 잠깐 주물렀다.

"왜?"

계측기 가까이에서 다른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현이 그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녀는 최이삭에게 다가왔다. 최이삭은 바짝 긴장했다. 어째서 그녀는 최이삭이 실수하는 순간을 이렇게 완벽하게 잡아내는 것일까. 그녀는 주변을 한 번 슥 보더니 물었다.

"우빈이는?"

"그게…."

"어디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세현이 잠깐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하우빈을 찾으러 나섰다.

"아까 화장실 간다고 얘기 들었다고 합니다, 오 박사가."

세현은 간이 화장실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 화장실은 물론이고 남자 화장실까지 들어가 다 문을 열어 보았지만 하우빈은 없었다.

4명의 마도물리학자가 도합 50억에 가까운 마력량을 소모하는 대실험을 하는 것이다. 고작 3시간을 남겨두고 그중 하나가 온다 간다 얘기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무슨 사고가 생긴 거면 몇 천 억짜리 프로젝트가 사실상 날아가는 것이다.

세현이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최이삭에게 성큼성큼 걸어오자 최이삭은 또 어마어마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너 이 쓸모없…."

그렇게 그녀가 최이삭을 혼내려고 하는데 알렉스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아침부터 오만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던 알렉스였다.

"저기 있는 거 같아."

알렉스는 한숨을 섞은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작은 바위 언덕을 가리켰다. 세현은 최이삭을 단단히혼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랫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그를 그대로 좀 더 노려보다가 알렉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응?"

유리는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렇게 반응했다. 하우빈은 정신을 잃고 이 밝은 금발 소년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우빈아!"

세현은 화가 나서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유리는 디바이스에서 눈을 떼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세현의 얼굴을 보자 약간 겁을 먹어 하우빈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야…. 너네 교수님 오셨어. 야."

몇 번 좀 아플 정도로 옆구리를 찌르자 하우빈은 혼미한 얼굴로 고개를 겨우 들었다. 눈이 잘 안 보이는지 눈을 끔벅거렸다. 유리는 얼른 그녀의 눈에 안경을 씌워주었다. 그녀는 자기 교수와 랩장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중심을 잃고 넘어져 유리의 무릎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벌떡 일어났다.

"교, 교, 교수님…!"

"그러게 그냥 쉬라고 했잖아.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면 어떡해!"

"아, 아, 아뇨…! 30분만 쉰다는 게…!"

하우빈이 더듬더듬 변명을 하다가 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잠든 지 1시간 15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세현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하우빈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교수님 화나셨다.

"하겠다고 말한 건 끝까지 똑바로 하든가, 아니면 솔직하게 못 하는 건 못 하겠다고 해야 일이 돌아갈 거 아냐. 너 이런 식으로 하면 내가 니 말을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기겠어? 어?"

"죄, 죄송합니다…."

하우빈이 눈물이 글썽해서는 고개를 숙였다. 세현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와 그녀의 턱을 한 손으로 꽉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울어? 지금 우냐? 내가 최 박사 울면 어떻게 하던? 어?!"

"흑…. 혼내셨어요…."

엄청…. 하우빈은 필사적으로 눈물이 흘러 넘치지 않도록 참았다. 세현은 랩 내에서 누가 눈물을 흘리는 걸 아주 질색했다.

"어린애야? 하 석사 유치원생이야? 내가 니 엄마야? 니가 울면 어르고 달래 줘야 해? 어? 일을 하겠다고 말을 했으면 그걸 끝까지 해내거나 못 하겠으면 미리 못 하겠다고 해야 양식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어른인 거지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면 내가 직접 여기까지 찾으러 와야 하냐? 내가?! 어!"

"잘못했어요, 교수님…."

그래도 랩원들 중에 하우빈은 편애한다는 소리가 나오곤 했으나 중요한 실험날에 그녀가 이렇게 제자리를 못 지키니 교수님도 화가 엄청 나신 것 같다. 유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우빈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제, 제가 자라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 해서…. 깨워 달라고 했는데 그냥 안 깨웠어요."

"니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

세현이 그를 확 노려보면서 윽박을 질렀다. 유리는 움찔하며 깨갱 했다. 최이삭이 그에게 얼른 손짓했다. 나와라. 다친다. 알렉스도 손짓했다. 야, 안 돼. 나와.

그녀가 유리까지 뭐라고 하자 하우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현은 키가 180이나 되었고 하우빈은 고작 150 정도였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어른이 어린애를 핍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는 마음이 다급해져서 생각없이 또 끼어들었다.

"그냥 제가 얘 한 발(?) 도와주면 안 될까요, 교수님?"

"뭐?"

세현이 하우빈을 더 잡으려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알렉스와 최이삭은 헉 하는 얼굴로 유리와 세현, 그리고 하우빈을 번갈아 보았다. 최이삭은 얼른 세현한테 다가갔다. 물론 그녀를 말리기 위해서다.

"교, 교수님, 그런 걸 강요하는 건 범죄입니다. 아시죠? 하 석사는 아직 앱니다, 교수님."

알렉스도 유리에게 다가와서 그의 옆구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안 보이게 퍽 쳤다.

"병신아, 이 여자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당하고 싶냐?"

그가 유리의 귀에다 읊조리듯 경고했다. 유리는 자신의 옆구리를 잡고 앓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세현이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긴장해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세현은 하우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

할 수 있겠어? 기어코 그걸 물어보려고 한 세현이었으나, 지금 이게 무슨 얘기인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하우빈이 몇 번을 주변 사람을 돌아보며 갸웃하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이마까지 새빨개져서는 유리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해야 해!"

"아…, 그렇지. 미안."

유리도 아차 해서는 얼굴을 좀 붉히며 쑥쓰러워했다. 하우빈도 눈물을 훔치고 정신을 차렸다. 그런 어린애(?)들의 순수함을 보고 있는 어린애(?) 한 명과 어른 둘의 감상은 제각각이었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렇게 해야 하는 건데! 왜…! 왜 난…!! 다른 남자 냄새나 풀풀 풍기는 저런 나쁜 여자랑…!'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반성해야겠다…. 마력 모으겠다고 인간의 존엄을 저버리는 일까지 생각한 거구나, 내가…. 나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여기까지가 남자들의 생각이었고 교수님은 직접 입을 여셨다.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할 거 아니면 빨리 마도 순환이나 다시 해."

"아…! 네, 네! 교수님!"

*

'냄새 나….'

알렉스는 여전히 부글부글한 얼굴로 세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가 아직 욱신거렸다. 짜증이 난다. 너무 난다. 그녀는 큐브에서 내려와 다른 교수들과 이야기를 하며 웜홀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곧 빅크런치 실험을 실행할 것이다.

"석세스 교수, 컨디션은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애들은 괜찮나요?"

세계물리학회 미국지부장 칼 석세스 교수가 대꾸했다. 세현과 하우빈, 최이삭을 제외하고 이번 실험에 참여하는 외부 마도물리학자였다. 세현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확인해보며 한숨을 쉬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간밤에 잠을 잘 자서 얼굴이 좋았다. 최이삭이랑 하우빈은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력 마법 시현자들은 컨디션을 위해서 휴식에 들어갔다. 세현은 다시 큐브로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잠깐 머리를 비웠다.

"냄새 나…."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응?"

세현이 설핏 그렇게 반응했다. 알렉스는 더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보았다.

"책임지기나 하라고."

"참나…."

그렇게 시간이 다 되어가자 사람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만약을 위해서 마도사나 소드마스터가 아닌 민간인은 전부 베이스까지 철수시켰다. 연구 노트와 자료는 여러 개의 컴퓨터와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여 보존했다. 캘리 박을 제외한 마도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각종 기기를 지키기 위하여 게이트로 집결했다. 한동안 전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던 왕리밍이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은 엉망인 얼굴로 서 있었다. 스웨덴에서 빌려온 계측기들은 대당 2백억이 넘는 데다가 무서운 사람(?)에게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했다.

그리고 세현 퀸과 세계물리학회 미국 지부장인 할아버지 교수 하나, 최이삭과 하우빈이 실험자로 동서남북에 맞추어 섰다. 중력 마법을 정밀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각종 컴퓨터와 운전기기의 역할이 중요했다. 실험용 AR고글을 썼다. 그 고글은 스웨덴과 중국, 한국에 있는 슈퍼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약 500미터까지 떠올랐다.

[HNU 및 세계물리학회 빅크런치 제 112차 실험 및 게이트 소멸 실험. 주관 슈퍼컴퓨터 인공지능 HNU 물리학과 소속 <퀸비>입니다. 보조 슈퍼컴퓨터 스웨덴 온살라 우주관측소 소속 , 보조 슈퍼컴퓨터 중국 북경대 소속 <천문> 참여합니다. 실험책임자 및 주연구자 세현 퀸, 주연구자 칼 석세스, 보조시현자 최이삭, 보조시현자 하우빈 대기 중.]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크게 울렸다.

[실험내용. 2128년 4월 21일 12시 02분 00초, 구 이집트 수에즈 시에 위치한 게이트 중앙에 19,999.999E 무질량점 구현. 주연구자 및 시현자는 각 5,000E를 동시 구현합니다. 시현 시간은 2.05초. 카운트다운 15부터 시작합니다. 15. 14….]

게이트를 멀찍이 빙 둘러싼 용병 중 몇몇은 기자들이 신신당부하고 맡긴 카메라를 들고 실험 과정을 녹화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실험 목적으로 촬영을 하고 있는 장비들도 눈에 띄었다. 강대한 마도사들이 유례없이 강한 마법을 구현하려고 하고 있는 데다가 다른 3명의 마도사도 강력한 쉴드를 치고 있어 피부가 따끔따끔 했다.

'오라를 느끼는 거야 쉽지만….'

마도사의 마력이 전개되는 걸 느끼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여기 있는 모든 소드마스터들은 그들의 마력이 강력한 자기장처럼 펼쳐져 있는 걸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2, 1.]

스윽. 느낌을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 의태어가 맞을 것이다. 자이언트를 몰살시킬 때는 너무나 강력한 이적에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으나 인공지능의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2.05초가 지나가는 동안에 느낀 느낌이란 그게 다였다. 그리고 강력한 마법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스스스스.

중력 마법을 시현한 마도물리학자들이 서서히 공중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게이트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작아지고 있었다. 지금은 미약한 속도였지만, 분명 그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온 세현 퀸과 칼 석세스는 악수했다.

"수고했습니다, 석세스 교수."

"아닙니다, 퀸 교수님."

그 둘은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애들은 빨리 자러 보내야겠네요."

석세스 교수가 말했다. 불쌍한 HNU 애들…. 그런 측은한 눈빛으로 최이삭과 하우빈을 보았다. 세현은 ‘뭐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신경을 쓰냐?’ 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애들을 돌아보면서 툭 말했다.

"니들 이제 가서 자라."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남겠습니다."

"저, 저도…."

"우빈이 넌 빨리 가라."

일단 그들은 계측기에 측정되고 있는 결과를 확인하러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다른 마도물리학자들도 커다란 홀로그램 스크린 앞에 붙어있었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상 시간보다 21분 빠른 사흘 뒤 18시 22분이면 완전 소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세현 퀸은 홀로그램 앞에 서 있던 다른 교수들과도 악수하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들은 웃는 얼굴로 서로를 껴안고 기뻐했다.

"세계 평화도 꿈 같은 일이 아니었구만!"

석세스 교수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교수가 말했다.

"세계 평화보다도 결국 빅크런치 이론이 맞았다는 겁니다, 이건! 우주는 결국 줄어들어 플랑크 길이 이하로 줄어든다는 거 아닙니까. 먼 미래에, 아주 천천히."

그녀는 감동이 가시지 않는지 얼굴이 상기되어서는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사흘 뒤가 되어 봐야지 알겠죠. 근데 이 21분 차이는 왜 나는 거지? 우리 시뮬레이션이 틀렸나?"

"구현시간이 0.0012초 길었습니다. 그것 때문 아닐까요?"

"그건 오차 범위 안인데."

세현 퀸과 최이삭이 빠르게 대화를 나누었다.

"성공한다면 결국 남은 건 빅뱅 실험입니다. 일정 공간을 플랑크 길이 안으로 줄이고 그후에 다시 우주를 만드는 겁니다."

세현이 기뻐하는 교수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긴장과 전율이 교차하는 얼굴로 세현을 보았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퀸 교수님? 빅크런치 실험이야 캘리 박 교수님 시절부터 안전장비도 운전기기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팽창하는 우주를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요? 아니, 애초에 우리는 어떻게 빅뱅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걸 위한 머리 아닙니까. 게다가 빅크런치가 증명되는 이상 다른 이론에 목 매달고 있던 다른 교수들도 전부 같이 머리를 굴려줄 겁니다."

"우리는…, 정말로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

"될 수만 있다면."

웜홀의 소멸은 아주 순조로웠다. 베이스에서 게이트로 사람들이 우르르 돌아와서 함께 샴페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마도사는 대체로 음주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샴페인은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한 달 넘게 예상치 못한 몬스터의 출현으로 고생했던 용병에게도 술이 돌아갔다.

"안 돼."

"아, 코치!"

"니들 미성년자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든가."

물론 서던라이온 유스팀은 천 코치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바람에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 용병들과 어울려 사막에서 밤을 지샐 때 이미 술도 한 잔 하고 뭐(?)도 얻어 피워보고 했는데 말이다.

서너 시간 정도 추이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밤이 되어 베이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베큐를 하기 시작했다. 보통 때는 칙칙한 얼굴로 샌드위치만 먹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으니 표정이 폈다.

최이삭 또한 오랜만에 빵 쪼가리가 아닌 고기를 먹자 아주 행복해졌다. 방금 잠도 4시간 정도 자고 왔다. 평소에 그가 세현 퀸에게 죽어라 갈굼 당해도 모르는 척하던 많은 교수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제일 수고했다며 치켜세워줬다.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거에 위로라도 받지 않으면 못 견딘다.

"어, 최 박사."

"응? 치엔 박사?"

여기 없던 얼굴이 보이자 최이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북경대 물리학과에서 왕리밍의 랩에 있는 대학원생인데, 그러니까 왕리밍 교수의 랩장이었다. 전에 학회에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유례없이 얼굴이 핀 그녀였다. 못 알아봤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고작 한 달, 교수가 랩에 안 나온 것만으로도 환골탈태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웬일이야?"

"아니…, 학회장님이 갑자기 부르시더라고. 우리 교수님 사고 쳤다며?"

"아…, 어…."

그래서 우리 교수님한테 발렸지…. 그녀는 최이삭의 옆에 서서 접시에 음식을 덜어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거기 랩엔 자리 없어? 그래도 퀸 교수님은 우리 교수님보다 바쁘시니까 랩 생활은 할 만하지 않을까? 어차피 연구하는 것도 비슷하겠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맨날 같은 생각을 하나 보다. 저쪽이 그래도 이쪽보단 괜찮겠지, 라고. 그녀에게 공감이 되어 최이삭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난 항상 왕 교수님 랩이 우리 랩보다는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지 마. 그 인간 히스테리가 얼마나 쉬운 줄 알아? 거품 문다니까?"

"우리 교수님도 거품 무신다. 가끔 손도 드신다…."

"아, 그건…."

그렇게 랩장들이 한숨을 푹 쉬니 오 박사가 인사를 하며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치엔 박사님. 이건 우리 학과장님 때문이라니까요. 거기나 여기나 답 없는 건 똑같아요. 스윗칭 코스트에다가 두 교수님 서로 사이 안 좋은 거 생각해보면 바꾸면 더 갈굼 받는다니까."

"그래…, 그건 오 박사 말이 맞는 말이지…. 학회장님이 우리 학계를 아주 버려 놨지…."

처음 봤을 땐 얼굴이 아주 폈던 치엔 박사는 급속도로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교수님이 돌아오실 날도 얼마 안 남았다. 게다가 다시 태어나도 만나기 싫은 그 인간 좀 챙기라고 학회장이 직접 부르기까지 했다. 최이삭은 슬쩍 덧붙였다.

"내가 너보다 한 학기 일찍 졸업한다?"

"씨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최이삭은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고통이란 다른 이가 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걸 볼 때 가장 큰 위안을 얻는 법이다. 그래도 쟤보다는 내가 사정이 좋구나, 라고 생각할 때의 쾌감이란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춰졌을 때 느끼는 행복과 비견될 만큼 기분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세현 퀸의 랩에 들어오기 전의 그는 학구열이 넘치는 순수한 청년이었으나 지금은 마력을 모으는 것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버릴 생각도 하는 타락한 남자였다.

치엔 박사는 머리카락을 뜯었다.

"이건 전적으로 학회장님 책임이야. 우리 교수님이나 퀸 교수님이나 원래부터 그렇게 성격이 개판은 아니었을 거 아냐. 아, 이런 학회장님을 천재라고 다 봐주는 게 문제라고."

"그냥 천재도 아니고 세계 최고의 천잰데…. 천재니까 성격이 무슨 상관이겠어. 사람 죽인 것도 아닌데. 허허. 솔직히 하나쯤 죽여도 뭐. 허허."

최이삭이 해탈한 목소리를 냈다. 치엔 박사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근데 어이없는 건 우리 교수님은 항상 내가 자기 때보단 낫다고 말한다? 미친 거 아냐? 사람을 이 이상으로 어떻게 갈굴 수가 있어?"

"우리 교수님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셔. 학과장님 밑에 있을 때가 자기 인생에서 제일 최악이었다고. 난 양반이라고. 허허허…. 넌 학회장님이랑 같이 오래 안 있어봐서 모를지도 모르겠는데, 가끔 학과장님이 우리 교수님한테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그래도 비슷하긴 했겠구나, 싶긴 해."

"그래? 그 정도야?"

"어. 우리 교수님한테 아주 이년 저년 쌍년 소리를 막 하실 때가 가끔 있다니까? 아니, 우리 교수님을 천하의 바보멍청이 취급하신다니까?"

"헐…. 퀸 교수님한테?"

그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천재였다. 캘리 박을 넘어선다는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었고 그 이미지에 제일 많이 일조한 게 캘리 박이기도 했다.

"눈빛이 막, 막 이렇다니까? 난 따라하지도 못하겠다."

"아…. 벌레 보듯이…. 우리 교수님 그거 잘 하시는데."

"어…. 잘하시더라. 우리 교수님도 잘해."

"응…. 그럴 거 같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자기 교수한테 참 잘 배운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나누면 나눌수록 어쩐지, 더 침울해져 갔다.

"우리도 나중에 그렇게 될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오 박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전 그렇게 안 될 거예요. 진짜로. 이번에 왕 교수님이랑 우리 교수님 싸우시는 거 보면서 완전 결심했음."

너한텐 그런 거 기대도 안 한다…. 치엔 박사와 최 박사가 그런 눈빛으로 오 박사를 보았다. 이 라인은, 물론 교수님들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지랄하시지만, 한 놈을 아주 죽자고 패는 그런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 '한 놈'은 제일 쓸 만한 '한 놈'이었다. 캘리 박도 무수히 많은 학생을 랩에서 쫓아냈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시간만 채우면 졸업을 시켜주는 게 HNU의 관행이었다지만 자격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진짜 쫓아냈던 학생 반, 자기 발로 나간 학생이 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캘리 박의 제자들은 그걸 똑같이 재현했다. 그러다 간택을 받을 수 있었던 인물 중 두 명이 지금의 최이삭과 치엔위였다.

어떤 학생이라도 기계적으로 평등하게 대하는 스승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학생보다 학생의 재능과 노력, 결과를 알아주는 스승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훨씬 많으며 그쪽이 훨씬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이 큰 법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것이 몸이 떨릴 정도로 영광이었다가 절망으로 추락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자신 없다."

최이삭과 치엔위가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그리자 둘 다 울컥해서는 눈물을 글썽했다. 사실 주변에 그 누구도 정확하게 그들의 고생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

그리고 둘은 두 손을 꼭 맞붙잡고 폭풍같이 그간의 고통을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5차 중력방정식 계산하다가 잘못해서 4차 방정식 하나 썼더니 오차가 0.7이나 나와서 우리 교수님이 나 목 졸랐다? 진짜 진심으로? 다 죽을 뻔했다고?"

"난 이번에 우리 교수님이 갑자기 논문 2개나 앞당겨 쓰는 바람에 이 멀리 와서 한 달 동안 잠도 한숨 못 자고 데이터 정리하고 시뮬레이션 돌리고 계측기 자료 확인하고…. 진짜 그냥 자살하고 싶더라."

"자살만 하고 싶냐? 난 우리 교수님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허허허허."

"맞아…. 교수님 죽이고 나도 죽고 싶었어…. 너 우리 교수님 화나면 내 귀 뜯어버리려고 하는 거 알지?"

"아, 그거 존나 아픈데…."

"왕 교수님도 그러시냐? 이것도 전통이냐고…. 그리고 이번엔 교수님이 귀 뜯으면서 다른 남자들 좆까지 빨라고…."

"아, 그거…. 나도 들었다. 근데 나 그 방법 듣고 처음에 뭐라고 생각했는지 아냐? 아, 빨리 안 가르쳐주고 혼자만 알고 있었냐, 이 할망구! 그렇게 생각했다가 바로 현타가…."

"허허허…. 그치? 나도 어제 또 밤 새는데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할까…."

"허허허허…."

"허허허허…."

두 랩장은 갑자기 해탈한 듯 허탈한 웃음을 계속 지으며 술잔을 부딪치고 마실 때까지 계속 허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치엔위를 발견한 왕리밍의 눈이 번뜩이더니 그녀를 폭풍같이 갈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 여기 왜 있어? 일 안 해? 뭐 하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데 너까지 자리 비우면 지금 애들 노냐? 어?"

"아뇨…! 지금 다들 할 일 잘 하고 있습니다."

"야, 누가 말대꾸 하래? 이게 지금 내가 자리 좀 비웠다고 정신이 빠져 가지고 이게 미쳤나?!"

아마 캘리 박이 그녀를 부른 이유도 다른 게 아니라 왕리밍의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흉흉한 모습으로 죽은 듯이 지내던 그의 눈에 빛이 번뜩거렸다. 최이삭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어, 최 박사."

그런데 세현 퀸의 목소리가 들리자 걷던 중에 등골에 소름이 돋아 우뚝 멈추어 섰다. 잘못한 것도 없이 긴장해서 고개를 돌리니 다른 교수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녀가 최이삭을 불렀다.

"어우, 그래, 최 박사 와서 앉아."

"이번에 수에즈 와서 제일 고생했지."

"최 박사 볼 때마다 잘생겨지네."

최이삭은 잔을 하나 받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이제 졸업 2학기 남았나? 어때? 미국 올 생각은 없나, 최 박사?"

칼 석세스가 그렇게 물었다. 최이삭은 깜짝 놀라 조금 콜록거렸다.

"네?"

"아니, 퀸 교수 밑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 포닥이 뭐가 필요 있어? 우리 학교 오면 좋을 텐데. 우리 학교도 좋아."

그는 세계물리학회 미국지부장이자 하버드 물리학과장이기도 했다. 졸업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제일 큰 문제이지만 졸업만 한다면…. 최이삭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긴장했다. 아니, 설렘을 느꼈다.

'드디어 지옥 탈출…!'

그게 실현되는 것인가. 정말로? 그런 꿈 같은 일이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진짜? 정말? 아까까지만 해도 치엔 박사랑 그 한을 토로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최이삭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자리는 세현 퀸과 캘리 박은 물론이고 나름 유명한 칼 석세스나 다른 석학들도 있었다. 다들 역시나 나름 대단한 대학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이들 중에는 모든 사람이 아무런 생각없이 외우는, 그런 대단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캘리 박, 세현 퀸….

'나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최이삭은 긴장했다. 한때는 그렇게 꼭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망했고 체념했다. 타성에 젖어 살다가 교수님이 그렇게 되고는…, 전부 모르게 되었다.

[역시 하면 그래도 좀 하잖아. 다 내 가르침이 훌륭한 덕분이다.]

최이삭은 세현 퀸을 보았다. 저절로 숨이 멈추었다.

"…아직 교수님께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1년 정도는 더 교수님 밑에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가 헉 했다. 아무리 인사치레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지금 이 말은…! 게다가 졸업이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건가? 건방진 말이었다. 최이삭은 등골로 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세현 퀸이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긴. 니가 교수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 1년 가지고 되겠냐? 포닥은 보통 2년이지."

"……."

"하하하. 최 박사 표정 봐라."

"웃을 일이 아닙니다, 학회장님. 이 학교, 저 학교 원성이 아주 자자합니다. 루소 교수 있는 취리히도 그렇고 자살한 사람이 안 나오는 게 용하답니다."

"에이, 우리는 자살할 만한 애는 처음부터 안 뽑아. 큰일날라고."

캘리 박은 아주 확신범적인 말을 했다. 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애정으로 가르치니까 그런 거지. 기대 안 하면 그렇게 갈구지도 않아. 최 박사 봐라. 퀸 교수 밑에 더 남고 싶다고 하지 않냐."

아니, 이게 힘들지 않아서 나온 말이 아니라 뭔가 반사적으로…. 최이삭은 속으로 변명했다. 캘리 박이 세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난 너희 애정으로 키웠다? 알지? 너도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제가 교수님의 애정을 느껴본 적은 없는데요."

"에이. 또 섭섭하게 왜 그러냐, 넌."

"그래도 최 박사는…."

최이삭은 또 긴장해서는 신경 안 쓰는 척 술을 마셨다. 마도사들이 많아서 약한 샴페인이었다. 그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우리 교수님께서 사람 많다고 말씀을 가려서 하실 분은 아니지. 개쪽 팔아도 웃자, 웃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해서 뽑아놓은 건데 가끔 진짜 어이없는 실수할 때마다 그냥 한강에다 빠뜨려버리고 싶고 처음부터 잘 쓰면 될 걸 피곤하게 꼭 쪼아야 쓸 만한 거 들고 오고 어째 시간 갈수록 머리가 더 안 돌아가는 것 같고…."

역시나. 최이삭은 귀까지 빨개질 것 같았다. 웃을 수도 없었다. 사실 윗사람이 얘기를 하는데 함부로 이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다 할 만하겠다 해서 시키는 건데 그걸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로 할 때마다 빠져 가지고 못 쓰겠다 싶긴 한데. 그래도 애가 착해요. 착하더라고. 아마 얘가 교수 되면 우리 전통도 끊어지겠지."

[그리고 나 죽으면 애들 좀 잘 챙겨줘. 그거야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하겠지만. 너 머리는 나빠도 착하니까.]

최이삭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주와 미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별빛과 이지가 반짝였다. 최이삭을 죽고 싶게도 만들고 세상 다 가진 듯이 들뜨게도 만드는 그 입술도, 손속이 맵게 그의 귀를 잡아당기는 그녀의 손도, 그의 정강이를 가끔 차는 그녀의 발도…, 그녀는 언제나처럼 강인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처럼.

한동안 그와 함께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안색으로 철야를 하며 연구에 매진해 논문도 다 쓰고 이제 수에즈 프로젝트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그녀가 올해 하려고 했던, 적어도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었다. 그를 졸업시키는 걸 빼고는.

그는 그녀에게 곧바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뭐든지 말이다.

"에이. 전통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얘가 안 하려고 하면 내가 쪼아서 시킬 거다."

"하하하."

캘리 박이 그렇게 말하자 세현이 웃었다.

"아~ 정말 그러지 마시죠, 학회장님."

"야, 물리학계에서 왜 하버드가 점점 내려가는 줄 아냐? 너네가 파이팅이 없어서야, 파이팅이."

"그걸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캘리 박과 칼 석세스가 대화를 이어갔다. 최이삭이 조용히 세현에게 말을 걸었다.

"교수님 이번 실험 성공하셨으니까 이것도 논문 쓰셔야 해요. 아시죠?"

"어? 알지. 갑자기 왜?"

갑자기 왜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그녀가 반응했다.

"재현 실험도 몇 번 더 해보려면 또 연구비 따러 다녀야 돼요."

"그렇지."

"교수님 밑에서 진짜 포닥 2년 할게요."

"그래라?"

굳이 고생을 더 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세현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최이삭은 자신이 어떤 기로에 섰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세현에게 물었다.

"저도…, 저도 교수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뭘?"

"천…재가 될 수 있을까요?"

말을 입밖으로 내고 나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괜히 몸이 떨렸다. 당연히 그녀가 부정의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의 대비를 했다. 그는 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같이는 못 되겠지."

최이삭이 움찔했다. 그는 더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래도 천재는 될 수 있어."

최이삭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 했잖아."

그러자…, 최이삭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깜짝 놀라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두 주먹으로 두 눈을 닦았다. 그래도 눈물이 계속 나왔다. 세현이 피식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눌렀다.

"야, 너 그 우는 것 좀 어떻게 안 되냐? 어? 니가 그러니까 밑에 애들이 배우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윽…. 흑…."

오열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마구 나왔다. 교수님은 황당한 목소리를 내셨다.

"야…,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사람이다, 어? 뚝 그쳐. 뚝."

교수님이 나쁜 사람 맞는데요. 최이삭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혼날 것 같아서 닥쳤다. 세현이 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잡고 엄지로 눈가를 쓸었다. 그녀는 퍽 당황한 얼굴이었다. 다른 교수들도 다 있는 곳에서 밑에 있는 애가 질질 짜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애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역시 그는 부족할지라도 그녀에게 선택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다. 그때 그 기분을 떠올리니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빨리 뚝 안 그쳐? 얘 왜 이래, 진짜."

'교수님, 죽지 마세요.'

그는 이것도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혼날 것 같아서 닥쳤다.

*

"아, 진짜 쟤는 컨디션 안 좋으면 잠이나 자지…."

최이삭을 보내고 세현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캘리 박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불렀다.

"어! 리밍이! 이리 와. 이리 와. 혼자 뭐해?"

"왕 교수님, 여기 앉으세요."

한민유도 거들어서 왕리밍에게 자리를 권했다.

"치엔 박사 왔다며? 어딨어? 야, 너 나한테 인사 안 하냐?"

"아, 학회장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치엔위는 약간 오바한다 싶을 정도로 깍듯하게 각을 잡아 허리를 숙이며 캘리 박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이런 것을 좋아했다. 캘리 박이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아, 내가 리밍이한테 너 좀 빌려 달라고 했는데 끝까지 안 빌려주더라. 우리 까딱했으면 마력 부족해서 실험 못할 뻔했다."

"저희도 실험한다고…."

"야, 니 졸업 논문 하나 쓰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안 드냐?"

"하하하…."

치엔위라고 안 오고 싶었겠는가. 퀸 교수님 실험에 자기 제자 빌려주기 싫은 교수님의 쪼잔함 때문이지. 세현은 치엔위를 아래위로 보더니 캘리 박에게 물었다.

"아, 얘가 왕리밍 랩장이에요?"

"그래. 왜? 꼽냐?"

왕리밍이 틱틱거렸다. 캘리 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먼저 자랑을 했다.

"얘 마력통이 최대 25억이나 된단다."

"진짜요? 교수님도 18억 정도잖아요."

"그러니까. 우빈이가 20억이나 된다고 했을 때도 깜짝 놀랐는데 25억. 이야, 역시 중국땅 크기에 우리가 비할 수는 없겠다."

그러자 세현이 곧바로 물었다.

"너 머리는 좀 돌아가냐? 학부 때 성적은 얼마나 나왔냐? 석박 하면서 수업은 몇 개나 들었어? 과목 뭐뭐 들었고?"

"아, 성적은 4.3 만점으로 졸업했는데…."

"야, 넌 얘가 말하는데 왜 다 대꾸하고 있어?"

"좀 물어볼 수도 있지."

"니 랩장한테 말 좀 걸었다고 지랄한 건 너다."

"지랄 같은 소리 하고 지랄하네."

그러자 캘리 박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난 니들이 사이가 왜 안 좋은지 이해가 안 된다. 나 같은 훌륭한 스승 밑에서 나왔으면 서로 도와서 더 큰일 할 생각을 해야지. 왜 죽자고 맨날 싸우냐, 어?"

그러자 세현 퀸도 왕리밍도 짜증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적당히 갈구면서 일 시키셨어야죠. 너무 갈구면 애들끼리 사이가 좋겠습니까? 예?"

"애들 앞에서 갈궈도 뒤에서는 좀 달래도 줬다고 또 갈구고 그렇게 해야지 일도 잘하고 자기 아래 애들한테도 잘하는 거지. 말 그대로 24시간 갈구는데 어떻게 일을 하고 다른 애들한테 잘 합니까?"

"야…, 니들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냐? 내가 갈구면 얼마나 갈궜다고."

"와, 노친네 또 치매 도지는 거 봐라."

"친 사람은 발 뻗고 자지. 맞은 사람만 억울한 거야."

왕리밍은 말 그대로 대단히 억울한지 일화를 꺼냈다.

"저한테 일주일 동안 하라고 시킨 일 제가 못 하니까 저 랩장 자르기도 귀찮다고 그냥 목 매달고 죽으라고 했잖아요. 그때 제가 교수님 논문 쓴다고 두 달이나 잠도 못 잔 상태였는데."

"아니…, 안 죽었으면 됐지."

"막상 얘한테도 시켰는데 얘도 못 했잖아요! 저 진짜 죽을까 했는데 그걸 귀찮다고 얘 시켜서 말리게 했을 때 제가 진짜…."

"내가 그랬냐?"

캘리 박이 세현 퀸을 보았다. 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도 비슷한 짓 했는데 저는 얘처럼 죽으려고 안 하고 교수님 죽이려고 했다가 건물 날릴 뻔 했잖아요."

"그건 니가 싸가지가 없는 거고."

그러다 보니 저번 일 이후로 말도 한 번 안 하던 두 사람이 합심해서 캘리 박의 악행을 까기 시작했다. 말이 터져 나오다 보니 그 내용이 상상 초월이라 다른 교수들이 입을 딱 벌렸고 캘리 박은 기억 안 나세, 모르쇠 모드가 되었다. 그렇게 다들 드물게 술자리를 밤늦게까지 가졌다. 숙소에 돌아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잠들어도 서늘한 게 잠을 잘만 했다. 세현은 담요를 덮고 자고 있다가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일어났다.

해가 곧 뜰 것 같았다. 세현은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베이스에서도 멀어져 가만히 동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서늘한 것 같아 팔짱을 끼고 가만히 기다리니 하늘이 주홍빛으로 바뀌며 곧 해가 뜨기 시작했다.

'아름답다.'

이런 걸 보지 않고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세현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리를 탐구하는 것에만 온인생을 바쳐 살았다. 후회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끝까지 할 수 없다는 것만이 유감일 뿐이다. 하지만 동이 트는 사막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죽기 전까지 다시 이런 걸 볼 일은 없겠지. 지금 잘 봐두는 게 좋을 것이다.

"뭐 하십니까."

그렇게 물으면서 아담이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냥."

그리고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담이 말했다.

"당신이 그런 걸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못 했습니다."

"뭘?"

"왕 교수님 말입니다. 화해하신 거 아닙니까?"

"아아, 그거."

세현이 담요를 좀 더 단단히 온몸이 두르며 답했다.

"안 하지."

"그럼 어째서 화해하신 겁니까?"

"곧 죽으니까."

같이 태양을 보다가 아담이 그녀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학회장님 입장에선 이대로 나랑 왕리밍이 어그러진 채로 끝나는 게 부담스러울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앞으론 걔가 학회장님 돌아가실 때까지 기저귀 갈아드려야 하니까. 피차 빚진 건 없어도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스승님이니까 먼저 죽기 전에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지."

"당신이 왜 죽어요. 저도 있고 그 꼬맹이도 있는데."

그 덩치 큰 남자를 계속 꼬맹이라고 부르니까 웃기다. 하긴 세현도 줄기차게 그를 루키라고 불렀었다. 세현이 피식 웃었다.

"드레이닝은 점점 마력이 빠져나가는 구멍이 커지는 저주야. 마도의사들 데리고 불사의 마법도 써보고 회춘 마법도 써보고 별별 짓을 다했는데 안 돼. 아무리 보충해도 결국 죽을 거야."

보통 사람은 근처에 가보지도 못할 마도의사를 몇 명이나 불러서 억만금을 줘도 못 받는다는, 죽은 사람도 일으킨다는 불사의 마법을 받고도 소용이 없었단 말인가.

그녀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 하나만의 죽음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나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빨리…. 아담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누군가의 죽음에 이런 마음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의연하게 있는 것이 더…. 아담은 일출을 감상하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으려고 했다.

"몇 초 더 살려고 니들이랑 알몸으로 껴안은 채 죽을 생각 없다. 죽을 때 깔끔하게 죽어야 남는 이름이 깨끗한 거라고."

"……."

보통 사람이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남을지를 그렇게 생각할까. 그녀를 포옹하려고 한 게 어쩐지 같잖게 느껴졌다. 이렇게 그릇이 큰 사람에게 졸렬하게 산 자신 같은 남자가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다….'

자학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쨌든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살아오고 있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너무나 작은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아담이 물었다. 세현은 그 질문이 의외인지 그런 표정을 지으며 그를 살짝 돌아보았다.

"글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이 아파 태양에서 눈을 돌리고 숙소를 향해 돌아갔다. 아담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

세현은 숙소로 돌아가서 푹 자고 일어났다. 씻고 나니 알렉스뿐만이 아니라 천 코치까지 숙소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

"무슨 일이지?"

"아, 얘가 지금 좀 다쳤는데 고집을 부려가지고 말입니다."

"응? 다쳤다고?"

"아니, 별거 아니야."

"어깨를 좀…."

세현은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의 오른쪽 어깨를 쿡 찔렀더니만 그가 펄쩍 뛰었다. 그의 반응에 천 코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에게 핀잔을 줬다.

"야…, 아픈 거 그렇게 못 참아서 경기는 어떻게 할래?"

"경기할 땐 괜찮잖아요."

알렉스가 좀 민망하여 그렇게 투덜거렸다.

"약간 근육 늘어난 거야…에요."

천 코치가 등을 퍽 치자 존댓말로 바꾸었다. 세현이 대꾸했다.

"조심해. 쉬어."

"아니…, 괜찮은데요."

"아픈데 왜 그래? 이제 몬스터 나올 일도 없다는데."

그때 가고일을 5백 마리나 처리하고 나니 이삼일에 한 번 꼴로 나왔던 가고일도 종적을 감추었다. 이 지역 몬스터는 이제 씨가 말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더 괜찮잖아…요."

알렉스는 정말 고집을 부렸다. 세현이 천 코치를 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답했다.

"마음대로 해."

천 코치는 어깨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고 갔다. 그녀는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녀가 음식을 접시에 적당히 덜어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찾아 앉았다. 알렉스는 잔뜩 먹을 걸 접시에 올려서 마실 것도 옆구리에 몇 개나 끼고 거기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세현은 얘가 왜 이러나, 이런 표정을 한 번 지으며 그를 보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 아저씨…, 좋아해?"

알렉스는 스크램블 에그의 산을 포크로 으깨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응?"

"아담 말이야."

알렉스가 말했다. 세현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게 누군데?"

"아니, 아담……."

그러다 알렉스는 고개를 팟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이 여자가 또…!! 또!!

'아니!! 교수씩이나 되면서 자꾸 이름도 기억 못하는 남자랑…! 계속…!!'

"그 용병장 말이야…! 금발 머리!"

"아…. 근데 질문이 뭐였지?"

"……."

알렉스는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아저씨랑도…, 마력 필요해서 그런 거야? 내가…, 내가 그날 다 못 해줘서? 근데 난…, 난 거절했잖아. 근데 왜 그 아저씨랑은 한 건데…."

좋아해서 한 거 아니냐고…. 알렉스는 우울한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점점 갈수록 이 여자의 앞에만 서면 기분이 요동을 쳤다. 게다가 그녀가 변명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건가? 마력이 필요해서 그랬다고?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원하고 이런 질문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책임지라고 했잖아. 나 책임지라고. 나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 책임 져야 하잖아. 근데 왜 그 아저씨랑도 한 거냐고.'

"마력 필요한 것도 있었는데 그 남자도 좀 힘들어 하더라고. 좀 돕다 보니까 휩쓸려서…."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자 알렉스가 발끈해서 고개를 들었다.

"저질! 어른들은 다 그래? 휩쓸리고 분위기 타면 막! 막 아무나랑 해?!"

"야…, 아침부터…. 조용히 해."

그리고는 세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너랑 휩쓸려서 하는 건 되는데 다른 남자랑은 그렇게 하면 안 돼? 왜? 니가 뭔데."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 말이 너무나 가슴이 꽂혀서, 알렉스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뒤로는 그냥 식사만 이어졌다. 알렉스는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많이 가져온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못했고 세현은 느긋하고 천천히 아침 식사를 계속하다가 일어났다. 알렉스도 일어나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녀를 따라 나갔다.

"운전해."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알렉스도 운전석에 탔다. 차를 출발시켰다. 한참 모래 사막을 달리다가 알렉스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응? 뭐야? 뭐 나왔어?"

세현은 창밖을 보고 있다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그가 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

"그래서 나 책임 안 질 거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뭐? 갑자기 왜 이래?"

"그냥 또 그때처럼 쓰고 버리는 거야? 스위스 때처럼?"

알렉스가 세현을 돌아보았다.

"너는 말을…."

"그런 거면 그냥 그렇게 말해. 젠장…."

알렉스는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그렇게 말하라고."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데? 뭘 어떻게 책임지라는 건데?"

"…몰라서 물어?"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세현은 답답하고 이해도 안되고, 하여튼 그런 얼굴이었다. 알렉스는 그런 세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나는…!"

알렉스는 어떻게든 말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설명해보려고 했다. 그녀는 ‘그래서 뭔데?’ 라는 표정으로 알렉스를 재촉하고 있었다.

"날…, 날… 제대로 봐."

"자. 보고 있다."

세현은 시트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살짝 괴며 몸을 틀어서 그를 보았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몸을 더 기울였다. 뭔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 날…! 날…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그렇게 자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날… 좀 보라고. 나 너 도와주고 싶어. 그런데 니가 하는 말이나 태도를 보면 자꾸 화가 나. 그럴 때마다 전에 니가 했던 짓도 자꾸 생각나. 화가 나. 나…, 내가 그렇게 너한테 뭐 잘못했어? 왜 나한테 그랬어? 그냥 말로 부탁했으면 해줬을 텐데…."

"……. "

세현은 약간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는 급격히 기분이 안 좋아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씨발….'

알렉스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씨발, 좆같다. 안 울 거다. 씨발. 씨이발. 그때 세현이 손을 뻗었다. 알렉스의 머리에 닿았다. 그리고 그의 뒤통수를 감싸더니 끌어당겼다.

"그때 그건 미안하다. 나도 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니가 이렇게 마음에 담아둘 줄 몰랐어. 선수들은 다들 그런 데 가볍다고 들었거든."

"……전에 니 방에서도."

"그래. 그것도 미안하다. 근데 그때는 진짜 몇 시간 안 남아서 너무 마음이 급했다. 너 때문에 그 금발도 쫓아냈잖아."

"그냥 미안하다고 해. 뭘 덧붙이니까 더 짜증나."

알렉스는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볼멘소리를 냈다. 이제 실험도 끝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인지 그녀가 한숨을 약간 쉬고는 수긍했다.

"그래. 니 말이 맞다. 미안하다."

"내가 도와주는 건?"

알렉스는 듣고 싶은 말은 전부다 듣겠다는 건지 그렇게 하나하나 들고 나왔다. 세현은 ‘그래, 옛따’, 하면서 대답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알렉스. 덕분에 살았다."

문자 그대로. 세현은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제대로 불러주자 또 기분이 울렁거려서 그녀의 품에 얼굴을 좀 눌렀다가 그녀의 허리에 천천히 팔을 둘렀다.

"하아…."

아, 돌았다. 알렉스는 얼굴이 상기되어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양쪽 눈을 번갈아서 보았다. 세현이 어쩐지 웃더니 물었다.

"너 자꾸 왜 이래?"

"뭐…가?"

"너 나한테 마음 있어?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봐?"

그런 눈이 뭐지…. 하지만 기분이 울렁거렸다. 마음이 좀 풀렸다. 그녀가 또 예뻐 보인다. 알렉스는 그녀의 왼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들어보았다.

"얼마 안 남았잖아."

"그렇지. 어제 그렇게 마법 썼으니까."

알렉스는 그녀의 오른쪽 뺨 근처에서 그녀의 살냄새를 계속 맡다가 결국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야…."

"그럼 또 그 아저씨랑 할 거야?"

"그건…, 읍…."

알렉스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의 입술에 돌진했다. 그녀를 조수석으로 밀며 자연스럽게 자신도 조수석으로 옮겨오며 의자를 뒤로 확 낮추었다.

"하지 마…."

알렉스가 조르듯 말했다. 그는 그녀와 가까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나랑만 해줘. 다른 남자랑 자지 마. 나랑만 해."

"야…, 하하. 너 진짜."

세현은 그런 그를 보고 좀 웃고 말았다. 알렉스가 발끈했다.

"웃지 마!"

"그래서…, 뭐. 연애라도 하자고? 나랑 너랑? 그렇게 책임지라는 거야, 지금?"

"그래! 그런데 그렇게 말하지 마…!"

"아, 진짜 어린애. 이걸 나 보고 어쩌라는 거야."

"뭐라고!"

세현은 곤란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잠깐 말이 없었다. 알렉스는 온몸의 혈관이 어떻게 박동하는지 느껴질 정도로 긴장해서는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역시…, 그건 안 되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퍽 하고 명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말을 찾지 못하다가 곧 그녀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 추궁했다.

"왜? 왜? 내가 어려서? 나 별로야? 나 싫어?"

"하하하."

그녀는 또 웃었다.

"그런 건 아니야. 처음에 너로 정했던 것도 니가 마음에 드니까 그랬던 거고."

일단 거기서는. 그녀의 설명에 알렉스가 더 몸을 붙여 다가오며 그녀에게 더 대답을 원했다.

"근데 왜? 왜?"

"그것보단 내가 그냥 연애를 안 해. 하고 싶지도 않고. 시간 낭비야."

"남자 사귄 적 없어?"

"사귀었다기보단 데이트 몇 번은 해봤는데. 다 재미없었어. 시간 낭비였어."

"왜?"

"글쎄. 그냥 그렇던데?"

"난 달라."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자 세현은 또 웃었다. 이번엔 그녀가 물었다.

"왜?"

"난 다르니까."

"하하하."

"좀! 웃지 말라니까!"

뭔데 좀 귀엽다. 세현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너 이렇게 평범한 애였구나. 진짜 좀 미안하네."

"미안하면 나랑 연애해."

"하하하."

"웃지 좀 말고!"

"야, 내가 이 상황에서 지금 웃음밖에 더 나오겠냐? 어?"

"내가 책임 안 지면 너 울 때까지 한다고 했다? 어?"

"너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세현은 또 웃었다. 알렉스는 마음이 동동거렸다.

"왜? 왜 안 돼? 왜? 왜? 왜?"

"아, 진짜. 연애를 안 한다니까. 어? 연애 싫어. 시시해."

"그럼 난? 난?"

"딴 거 말해. 어떻게 해줄까?"

"딴 거 필요 없어."

"하하하."

세현은 또 웃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연애? 평생 그런 건 필요 없었고 재미도 없었고 시시했다. 그녀를 원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종종 있었다. 성 같은 집을 가진 남자도 있었고 유망한 사업가도 있었고 사회에서 큰 힘을 가진 권력자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나라의 왕자도 있었다(그 나라에 왕자가 좀 많긴 했지만).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들은 그녀가 하고 있는 일보다도, 그녀 자신보다도 너무나 하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작해야 티끌만한 이 땅에 붙어서 한치 앞도 못 보고 사는 놈들일 뿐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하자면 너무나 미약해서 우스울 지경이다. 결정적으로 할 말도 없고 말도 안 통한다.

'얘도 말이 통할 리가 없지.'

하지만 뭐랄까…. 오늘 아침에 해가 뜨는 걸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또 50억 년, 그 태양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그녀보다 훨씬 거대하고 위대한 것만 쫓아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알아간다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어쩌면 창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협력하고 경쟁하고 머리를 맞대어 위대한 여정을 함께 하고, 물려받고 물려줄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의 세계는 거대하고도 협소했다. 그녀는 그녀와 함께 걸을 수 있는 인간 외에 그 어떤 인간도 주변에 두지 않았다. 수많은 금붕어들 속에서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존재했다.

[안 죽는 거지?]

그는 그때 우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뒤엔 그렇게도 말했지. 이 어린애는 도대체 무엇을 안타까워하는 걸까? 뭘 안다고. 어리면서.

"진짜. 그거 말고."

세현이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유례없이 눈빛이 부드러워서일까.

"그거 말고 말해봐. 이번엔 들어줄게."

알렉스는 인상을 좀 쓰고 그녀의 코에 코를 댔다. 눈은 그대로 마주치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도, 눈빛이 모든 걸 이끌어갔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

윗입술이 먼저 닿았다가 알렉스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음…!"

그녀가 살짝 흠칫했다가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들의 몸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며 최대한의 면적을 맞댔다. 본능이란 무엇일까. 인류에게(아마 대부분의 인류는 관심도, 관심이 있다 해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태초부터 우주의 멸망까지 그려주는 그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도 그저 인간이었다.

"하아…, 윽. 하."

알렉스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세현의 허리를 안아들어 서로의 하반신을 꽉 붙였다. 단단한 복부에 부드럽게 닿는 그녀의 배가 그의 온몸을 근질거리게 했다. 허리를 감싼 그녀의 기다린 다리가 너무 늘씬하다. 그는 세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꽉 누르며 숨을 헐떡거리다가 그녀의 셔츠를 마구 끌어올리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으윽…, 나 미칠 것 같아."

그는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문지르다가 그녀의 가슴을 물었다.

"아…! 그걸 왜 물어."

"하아…. 아니…, 으으음…."

"아…! 야, 좀…. 하하하."

그가 그녀의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며 소리를 내니 온몸에 진동이 다 전해졌다. 간지러웠다. 세현이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이 어린애와 같이 있을 때는 생각이 사라진다. 그와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세현이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그런, 무지하고 순수한 존재.

"야, 이건 어떻게 벗기는 거야?"

세현도 그의 옷을 벗기려고 했는데 어떻게 벗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알렉스는 몸을 조금 떼고 자기 상의를 얼른 다 벗어버리더니 바지랑 속옷도 쑥 벗어버렸다.

"하하하. 자신 있으니까 이렇게 잘 벗는 건가, 얘들은."

"또 누구!"

세현에게 다시 달라붙다가 알렉스가 버럭했다. 그녀는 또 웃었다.

"아, 간지러워…!"

"좋아?"

그는 세현의 온몸에 입술을 비비면서 그렇게 물었다. 그는 세현의 바지를 내렸다. 속옷을 벗기다가 찢어버렸다.

"아…, 너 내가 혼낸다, 어? 내 옷 자꾸 해먹을래?"

"사줄게…."

"하하. 야, 너 자꾸 웃긴다. 니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왜! 나 많이 벌어!"

"애들 코 묻은 돈은 안 받는다."

"너 내 연봉이 얼만지…!"

세현은 그의 뺨을 감싸며 입을 맞추었다. 알렉스는 그녀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릴 때마다 발끈하면서도 그녀가 끌어당기면 바보같이 빠져들었다. 그렇게 키스에 몰두하면서 그녀의 배를 쓰다듬어 아래로 내려갔다.

"으음…!"

세현이 미간을 좁히며 몸을 움찔했다. 그가 애액을 손가락에 묻혀 부드럽게 애무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육감적인 가슴에 얼굴을 비비다가 올라와 그녀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그의 피부가 어깨까지 벌게졌다.

"책임지기 싫다면서 이번엔 왜 하게 해줘?"

"글쎄…, 니가 요즘 나한테 좀 위로가 되어서."

마력도 딸리고. 세현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무슨 위로?"

세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응?"

알렉스는 그녀와 턱을 마주대고 조르듯 되물었다. 세현은 또 웃었다.

"너 진짜 귀엽네."

"내가 귀엽다고?"

알렉스는 자존심이 또 상한 듯 설핏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좀 더 벌렸다. 자신의 남성기를 그녀의 붉은 여성기에 꾹 눌렀다. 천천히 밀고 들어갔다.

"아…! 하윽…."

세현은 살짝 아랫배를 움츠렸다. 알렉스는 압박감에 신음을 흘리며 더 힘을 주어 부드럽게 진입했다.

"으으윽…."

조여도 젖어서 미끄러져 들어가긴 했다. 그대로 알렉스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르릉거렸다.

"큭…. 음…, 하아…. 으윽…. 하아, 윽."

"하아…. 응…. 으음."

사막 한 가운데 사륜구동 지프차에서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프차가 일정한 박자로 흔들리고 있었다.

몸에 열이 올랐다. 다리 사이에 뜨거운 링이 생겼다. 제일 뜨거운 곳이 문질러질 때마다 아찔해서 끙끙 앓는 것 같은 신음이 나왔다. 그의 것이 뿌리까지 들어와 음핵을 문지르고 눌렀다. 아랫배가 근질거렸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리도 좁고 위에 올라탄 남자의 덩치는 평균보다 훨씬, 엄청 상회하는 남자였다. 힘들다.

알렉스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피스톤질을 계속하며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죽을 것 같다. 온몸에서 땀이 막 났다. 누구랑 해도 이렇게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절대,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좋아.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아. 좋아.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알렉스는 그녀를 더 꽉 끌어안고 온몸을 비볐다. 그녀를 미워하며 원망했던 적이 있기나 한 것처럼 좋아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밀어붙이기만 했다. 그녀가 예뻤다. 그녀가 좋았다.

"하아…. 음…. 아…, 불편해."

"응…?"

세현이 그렇게 말하자 알렉스가 뿅 간 얼굴로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뭐라는지 못 들었다. 모르겠다. 너무 좋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몸을 계속 문질렀다.

"무겁다고…! 하아. 답답해."

"응…? 어? 어떡해, 그럼?"

알렉스가 팟 몸을 일으켰다가 지붕에 머리를 쿵 박았다. 그것만으로도 약간 숨통이 트여 세현이 한숨을 쉬었다. 아래를 보았더니 그의 크고 두꺼운 거물이 다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긴장이 되자 저도 모르게 힘이 확 들어갔다. 알렉스가 귀까지 빨개져서 신음을 흘렸다.

"너무…! 윽."

알렉스는 몸을 부들 떨었다. 세현은 그의 어깨를 밀며 자세를 바꿨다. 그를 조수석에다 앉히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녀의 엉덩이가 아랫도리에 푹신하게 닿는 게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알렉스는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위에 올라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아…! 으응…. 하."

세현은 그대로 알렉스의 위를 타기 시작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엉덩이를 앞뒤로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녀가 야한 얼굴로 눈을 감으며 턱을 들었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당연했다. 그녀만큼 강한 사람을 알렉스는 따로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알렉스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아으…. 자, 잠깐만…! 너, 너무 야해…. 야해요…. 으윽!"

정신을 못 차리고 그녀에게 박다가 어느새 깔려서는…. 전에는 억지로 하거나 당하거나 그랬는데, 지금은 그가 바랐던 것처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도 그녀를 원하고 그녀도…, 그를 원했다.

"아니…! 진짜 잠깐…. 헉! 세…현…! 으으윽!!"

그가 펄쩍 뛰었다. 지붕에 머리를 박을 뻔해서 세현은 지붕을 손으로 잡았다. 세현도 얼굴을 붉혔다. 뜨거운 게 잔뜩 들어온다. 단전으로 화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의 정기가 단전에서 마력으로 바뀌어 강렬한 열감과 함께 빠르게 회전하여 모였다. 알렉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빠르게 퍽퍽 올려치기 시작했다.

"아…! 아앗! 천천…히 해…! 으윽. 하…, 아아…!"

"으윽…!"

그녀의 표정이 바뀌며 못 견디겠단 얼굴로 알렉스의 오른쪽 어깨를 퍽 짚자 그는 고통에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쾌락과 고통….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렉스를 엄청 짜냈다. 그는 제법 섹시한 얼굴로 헐떡거렸다. 그녀는 그의 팔을 꽉 잡고 짜증을 냈다.

"하아…! 이제 그만! 그만! 아앗…! 나…, 나 갈 거 같아. 아…! 아아! 천천히! 아…! 으으응…!"

그녀는 어느새 엎드려 그와 가슴을 맞댄 채 흔들리다가 그를 꽉 조이면서 절정에 올라섰다. 너무 뜨거워서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꽉 차서 버겁다. 이제 멈췄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약간 아쉬울 것도 같다. 이 에너지 넘치는 놈은 얼마나 쌀 생각인지 줄줄 싸면서 계속 몸을 부딪쳐왔다.

"하아…."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그를 느끼고 있었다. 결합한 성기가 함께 맥동치고 있었다. 알렉스의 뜨거운 숨이 얼굴에 끼쳤다. 세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힘이 빠져 그에게 온몸을 기댔다.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댄 채 힘겹게 헐떡거렸다.

"아픈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어…. 아으…."

"으…."

알렉스는 위에 있는 그녀를 끌어안아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얼굴이 빨간 그녀는 좀 지쳐 보였다.

"미안…. 이번엔 더 잘 할게."

"또 하려고?"

"응…. 싫어?"

그는 그녀의 왼쪽 손목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손목에 얼굴을 문지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깔끔하게 정리한 새카만 머리카락에 예쁜 청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덩치 큰 맹수가 애교를 부리면 이런 느낌이려나. 세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너 진짜…,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니까."

"그 말 싫다고."

"요."

"…요."

"왜."

"왜 남일처럼 말하냐고…요! 나 마음에 들면 그냥 그렇게 말하지! 요!"

"아…, 이걸 도대체 나 보고 어쩌라는 거냐…."

세현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일단…, 진짜 천천히, 살살해라."

"알았어…요."

알렉스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앉은 자세로 서로의 몸을 착 겹친 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렇게는? 좋아? 좋아요?"

알렉스는 열심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방금은 정신이 없어서 그녀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다. 전에는 계속 이쪽이 눈이 가려졌거나 저쪽을 가리거나 해서…. 느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진짜로 기분이 좋은 건지 아픈 건지 약간 헷갈리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전부 어깨 뒤로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고 그녀의 뺨과 목, 어깨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얼굴을 보았다.

'진짜 예쁘다….'

그래서 좀 화가 난다. 그런데도 매료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강하고 아름답고 오만하고…. 그녀에게 끌리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절대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려 그렇게 노력했지만 결국…, 그는 그녀에게 빠지고 만 것이다.

게다가 나쁜 여자는 좋아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녀의 안을 이리저리 문질러 반응을 살폈다.

"괜찮아요? 아파? 안 아파? 좋아요?"

"흐읏…. 아…."

세현은 살짝 긴장한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지만 너무 커서 아플 것만 같은 느낌이다. 배가 따뜻했다. 살을 붙이고 있는 건 기분 좋았다.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같이 부드럽게 슥슥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사이가 아릿아릿 했다.

"아윽. 하…. 좋긴…, 좋은데…."

그녀가 엄청 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가 녹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심장에 박힌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알렉스는 ‘우아악!’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큭…! 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타이밍도 뭐도 없이 싸버렸다. 세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보다가 풋 하고 웃었다. 약간 깨긴 깬다. 웃기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애는 애다…."

"…!!"

알렉스는 엄청나게 빨개져서 쪽팔린 건지 화가 난 건지 모를 얼굴로 세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픽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밀었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이제 가자."

그리고 엉덩이를 들려고 하는데 알렉스가 그녀를 확 앞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와 이마를 부딪쳤다.

"아…! 야! 잠…! 아…! 아앗. 앗! 아!! 가자니까!"

"아악! 기분 나빠! 왜 자꾸 어린애 취급해?! 어? 그럼 어린애랑 이런 짓 하는 넌? 넌?! 넌요!! 씨…!!"

"하…! 아! 응. 으응. 아. 앗. 앗. 니 거 크다고…!! 아앗. 좀만 살살…! 아…!"

"빨리 좋다고 해. 좋다고…, 윽…! 책임지라고, 진짜!"

"아으, 하…! 죽을 거 같아…! 응…! 아! 아아앗…!"

"책임진다고 말해. 말해. 빨리 말해. 열 받아. 책임져!"

"하으… 아…! 알았어…. 아으…. 알겠다고. 그만…!"

"어…, 말했다. 어? 말한 거야? 책임진다고 한 거다? 어? 어?"

"하아…. 또…. 아으. 아아아…!"

"말한 거야? 응? 맞지?"

"아으…!! 닥치고 그냥 해!!"

그녀가 화를 냈다. 그녀가 드디어 책임진다고 했다. 알렉스는 온몸이 벌게져서는 겨우 ‘으, 네…!!’ 라고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는 그대로 다시 그녀에게 더욱 열중했다.

*

"어? 늦으셨네요, 교수님?"

하우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매끈한 세현을 보며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부는 매끈하고, 약간 나른한 얼굴의 그녀는 나른하게 대꾸했다.

"그래…. 넌 잘 잤니?"

"네! 오랜만에 푹 잤어요!"

하우빈은 쌩쌩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잠깐 게이트 주변을 돌며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데이터를 확인하고는 허리를 스트레칭 하며 큐브 위로 돌아갔다.

"허리…, 많이 아파요? 주물러 줄까요?"

알렉스는 그녀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그렇게 물었다. 논문도 다 쓰고 실험도 웜홀이 줄어드는 것만 남아 할 건 많이 없다. 오차 때문에 웜홀 중력방정식만 끄적거리고 있는 세현이었다. 그는 간이 의자를 들고 와 세현의 옆에 앉았다.

"……."

세현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팔을 걷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보이냐? 어? 멍 든 거?"

"아니…! 그건…, 내가…."

알렉스는 아까부터 쭈욱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그녀가 그렇게 책하자 확 하고 찔려 화가 난 건지 억울한 건지 모를 얼굴로 꿍얼거렸다.

다섯 번이나 했다. 세현도 마력이 거의 바닥을 쳤기 때문에 좀 더 어울렸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그것도 팔팔 날아다니는 어린 놈이었다. 힘이 좀 좋은가. 게다가 침대도 아니고 좁은 차 안에서 그러고 있었더니만 전에 세현의 숙소에서 했던 것보다도 훨씬 몸이 축 나는 느낌이었다. 허리도 진짜 아프고 여기저기 부딪쳐서 멍이 잔뜩 들었다.

"너랑 다시는 못 하겠다."

"!"

그때 그 용병이랑 했을 때는 일어나고 그냥 개운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어린애랑 계속 했다간 진짜 죽겠다. 스킬의 차이가 너무나 확연했다. 알렉스는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했다.

"아, 아니…! 아까 그건 차안이라…! 그리고 너도 좋아하긴 했잖아."

세현은 그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교수님."

"교수님도 좋아했잖아요!"

"좋은 건지 아픈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냥 아파."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알렉스는 그 손가락을 깨무려는 시늉을 했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한 번 더 맞았다.

아래가 따가웠다. 세현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웜홀이 작아져 가는 시뮬레이션을 보고 있었다. 그때 영상 통화가 들어오는 신호가 스크린에 작게 떴다. 한민유였다. 세현은 쫑알거리는 알렉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통화를 연결했다.

[교수님, 철수 계획서 수정한 거 보셨어요?]

"아니. 왜."

[많이 달라진 건 없는데 스웨덴 쪽에서 자기들이 와서 확인을 좀 하겠답니다. 몬스터 때문에 게이트에 지진도 많이 일어나고 해서 화물 드론에 싣기 전에 확인 좀 해야겠다네요.]

"시간 맞춰서 와서 알아서 하고 가라고 해라. 원래 일정대로 철수하게."

[네.]

그리고 한민유는 몇 가지 사항을 더 알렸다.

[저번에 교수님이 자이언트 트룹 제거하셨을 때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클레임 들어왔었는데 이번 최이삭 박사가 일으킨 지진 때문에 좀 피해가 생긴 모양입니다. 남유럽 쪽도 기왓장 몇 개는 떨어졌다더라구요.]

세현이 시뮬레이션의 오차를 수정하기 위해 고심하며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했다.

"어쩌라고."

[일단은 알고 계시는 게 나중에 언론 대응할 때 좋으실 거 같아서요.]

"그런 거 알아서 하라고 니가 월급 받는 거다."

그런 거 외에도 의례적인 보고를 몇 개 받고 세현은 영상 통화를 끊었다. 알렉스는 전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나랑 안 할 거야?"

"아, 시끄럽다. 나 일하는 거 안 보이냐? 어?"

"으…."

알렉스는 뭔가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발을 굴렀다. 큐브가 덜커덩했다. 세현은 깜짝 놀라서 책상을 잡았다. 알렉스는 아차, 하고 바로 앉았다.

"미…,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을게요."

"이걸 확."

알렉스는 ‘아으’, 하고 세현의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고개를 슬 돌려서 스크린을 보고 있는 세현을 훔쳐보았다. 안경을 쓰고 심드렁한 얼굴로 스크린을 보고 있는 그녀였지만…. 알렉스의 눈에는 그녀에게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쁘다….'

완전 예쁘다. 화장 같은 거 하는 거 본 적도 없고 언젠가 논문 쓴다고 밤을 샐 때는 매일 같은 옷에 씻지 않기도 밥 먹듯이 하던 그녀였으나,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다. 붉은 기가 많이 도는 그녀의 피부는 하얗고 예뻤고 코도 오똑하고 눈 색깔도 예쁘고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눈썹도 마음에 들고 앞으로 도톰한 광대와 약간 각진 턱도 정말 귀티가 좔좔 난다. 게다가 아무리 막 입고 다녀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는 뭇 남자들의 간을 떨리게 할 만했다.

'멋있다….'

게다가 새삼 대단하다. 그녀는 이 많은 사람을 사람도 한 명 못 살고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곳에 데려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이런 실험을 실행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성공했다.

알렉스도 훈련으로 1년 넘게 남중국해에 있었지만 거기는 정말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하는 일의 목적은 몬스터 게이트를 닫아 세계평화에 기여하자는 것이 아니었지만 부수적으로 그런 결과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실험이 성공한 이상 그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언젠가는 오게 될 거란 말이었다. 말 그대로 역사를 바꿨다.

'대단해….'

알렉스는 자기 자신이 꽤 대단한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소드마스터로서의 재능이 나오기 시작하는 십대 중반 때 곧바로 서던라이온 유스팀에 발탁되어 훈련을 받기 시작했고 올해부터 정식으로 1군에 소속되어 엘 드라카에 출전하게 된다. 그의 비공개 연봉은 세계 랭킹 1위인 다니엘 스톤하츠의 두 배에 달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엘 드라카 최대의 화제인 <이스트드래곤> 클럽의 신태호는 강력하나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데다가 살인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토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신체와 오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심지어 신태호보다 신체 조건도 훨씬 우수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아닌 것 같다. 세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녀보다 대단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뭘 좋아할까? 뭘 해주면 좋아할까? 나 안 싫어한다고 했잖아. 나 책임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가만히 세현의 얼굴을 보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누군가 큐브 위로 올라왔다. 알렉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담이었다. 알렉스는 세현의 의자를 확 끌어서 자신에게 바짝 붙였다. 집중하고 있던 세현은 몸이 쏠려 의자의 팔걸이를 얼른 잡았다.

"뭐 하는 거야?"

"……."

알렉스는 세현의 팔에 반쯤 얼굴을 묻은 채로 경계심을 바짝 세운 표정으로 가만히 아담을 관찰했다.

"철수 계획서 바뀐 거 보셨습니까?"

"아까 한 비서랑 통화했어."

"계측기에 건 마법 풀 때도 설치 때만큼 시간이 걸릴까요? 계측기 싣는데 걸릴 시간을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스웨덴에서 사람 오기로 했어. 자기들이 알아서 할 거야."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한민유랑 얘기해."

"네."

자기 디바이스에 스케줄을 조정하고 난 아담은 그제야 알렉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세현은 알렉스에게서 팔을 빼고 아담에게 말했다.

"얘 좀 데려가. 너무 귀찮게 해."

"뭐?! 왜!?"

알렉스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팍 들었다.

"요. 요. 요."

세현이 그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귀찮게 안 할게요."

"진짜지?"

"네."

"뒤에 가만히 있어, 그럼."

"네…."

알렉스는 의자를 질질 끌고 뒤로 갔다. 아담도 자리를 잡고 앉더니 알렉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뭐?"

알렉스가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아담은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로 알렉스는 이틀 내내 세현을 귀찮게 했다. 운전하다가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나, 같이 자고 싶다며 숙소에 따라 들어오려고 하지 않나. 너무 성가셔서 별생각 없이 몇 마디 했더니 또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삐져서 보이지 않았다. 세현은 차라리 잘 됐다 싶어서 가만히 놔뒀다.

거대했던 웜홀은 점점 작아져 이제는 거의 땅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계측기를 통해 측정되는 물리량으로 아직 웜홀이 작게나마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보여?"

"네."

아담은 그렇게 대답했다. 소드마스터들은 다들 보이는 모양인지 한 지점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게이트에 모여 있었다. 기자 둘도 열심히 역사적인 순간을 촬영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간이 식당에서 도시락을 챙겨 가기 시작했다.

"아, 이제 좀 있으면 드디어 집에 간다~ 목욕하고 싶어."

하우빈이 의자에 기대며 꿈꾸듯 말했다. 유리는 맛없는 도시락을 먹으며 그녀의 책상에 턱을 올리고 숫자와 이상한 기호만 잔뜩 나열된 그녀의 스크린을 보았다.

"서울 구경시켜 준다며."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하우빈이 물었다. 유리가 손가락을 꼽았다.

"코리안 비비큐, 치킨, 갈비, 길거리 디저트, 또 맛있는 거."

"그래…. 먹는 거밖에 없지…. 맛있는 거…, 어디 있지?"

하우빈은 고민했다. 소고기, 삼겹살, 갈비, 불고기…. 그렇게 머리 속으로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햄버거 먹고 싶어."

"맛있는 햄버거…는 어디서 팔지?"

하우빈은 고민을 계속했다. 유리는 영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너 도대체 뭐 먹고 사냐?"

"나? 학식."

그녀는 디바이스로 검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걸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오 선배, 수제 햄버거 맛있는 데 어디 있어요?"

"버거? 압구정에 몇 개 있지.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곳이다."

"오오, 가르쳐 줘요."

유리도 고개를 팍 들었다. 하우빈은 노트를 들어 직접 필기를 했다.

"소고기는 한남동에 있는 XXXXX, 수제 버거는 압구정에 @@@, 삼겹살은 TTT, 갈비는 BBBB…."

오 박사는 맛집 DB처럼 유명한 음식점 이름을 줄줄줄 읊었다. ‘오오오!’ 하면서 애들이 열심히 메모했다. 오 박사는 그렇게 맛집 DB로써 기능하다가 문득 그들을 보았다.

"뭐부터 먹을까?"

"아침은 소고기, 점심은 버거, 저녁은 삼겹살. 다음날 아침은 불고기, 점심은 등갈비, 저녁은 치킨."

유리는 이틀 내내 식단을 고기로 짰다. 하우빈이 또 고민했다.

"그럼 동선을 이렇게 짜야 하나? 숙소는 어디로 해야 하지? 으음…."

"어? 여기 좋다.

그러고 둘이서 작은 디바이스 홀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하며 쑥덕거리고 있었다. 오 박사가 물었다.

"너 몇 살이랬지?"

"17살이요."

유리가 소세지를 으적으적 먹으며 대답했다. 오 박사는 하우빈에게도 물었다.

"너 몇 살이더라."

"21살이요."

"참, 너 조졸이었지."

유리는 187센치에 소드마스터다 보니까 근육질에 덩치도 한 덩치를 하는데 하우빈은 평균치를 훨씬 하회하는 키와 덩치였다(물론 그녀도 지구를 땅콩만한 블랙홀로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마도사 중 하나였다). 이상한 조합이다. 오 박사는 유리를 아래위로 보면서 신기해했다.

"와…. 몸 이렇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러자 유리가 ‘응?’ 하고 관심 없는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

"이렇게 태어나면 돼요."

"……."

오 박사는 잠깐 말을 잃었다가 허허 하고 대꾸했다.

"너 여자애들한테 인기 없지?"

"많은데요?"

"그으래?"

"여자들은 금발을 좋아하거든요."

유리가 하우빈에게 이거 먹고 싶다, 저거 먹고 싶다 주문을 막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우빈은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었다. 오 박사가 약간 골이 나서는 고개를 돌렸다.

"얘 그렇게 잘생겼어요?"

그러자 마침 도시락을 가지러 온 세현 퀸과 캘리 박, 한민유, 그리고 다른 교수 두 명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유리가 디바이스에서 고개를 떼고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반짝 한 번 웃었다.

밝은 금발 머리, 전세계 1~2%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녹색 눈동자, 깊은 눈매와 우뚝한 콧날에 새하얀 피부. 슬라브계 특유의 특성으로 얼굴이 보통 백인 남성에 비해 짧아 나이에 맞게 좀 어려 보였다. 역시나 슬라브계 종특으로 우월한 비율의 체형을 자랑했다.

세현 퀸부터 순서대로 감상을 말했다.

"귀엽네."

"잘생겼네."

"어머…, 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

말없이 웃는 다른 교수 두 분도 보는 것만으로 흡족하신 모양이었다. 유리가 오 박사를 돌아보며 혀를 튕겨 딱 하고 소리를 냈다. 봤냐, 이런 표정이다. 본인이 평균 이상이라는 자신이 있는 오 박사는 약간 발끈해서 물었다.

"그럼 저는요?"

그랬더니 세현 퀸과 캘리 박은 인상을 썼고 나머지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얘 공부는 열심히 하냐?"

"아뇨."

"머리 나쁜 거 같은데 큰일이네."

"그러네요."

그러면서 캘리 박과 세현 퀸이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저도 몸만 만들면…!"

나머지 교수들은 그저 서구 문화 특유의 눈을 동그랗게 뜬 웃는 표정으로 피해 갔고 한민유는 하우빈과 유리의 대화에 동참했다.

"서울에 언제 오는데? 내가 밥 사줄까?"

"오, 네!"

"알렉스는 같이 오니?"

"알렉스는 서울 사는데요?"

"어머, 그래? 같이 만나면 좋겠네."

그렇게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다 되어갔다. 웜홀을 이루는 물리량은 갈수록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홀로그램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제로.

사라졌다.

"퀸 교수, 수고 많았다."

캘리 박이 세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세현 퀸은 웜홀이 사라져 깨끗한 수에즈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다들 수고했습니다, 여러분. 자료 필요하신 분들은 클라우드에서 다운 받아 가시고 아날로그 자료들은 얼른 백업합시다. 스웨덴 온살라에서 사람 보낸다고 했으니까 계측기는 이제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슬슬 짐 정리하고 집에 갈 준비합시다."

세현이 마이크를 잡고 그렇게 짧게 말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용병과 서던라이온 선수들이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세현은 자기 책상을 정리하여 베이스로 들고 가기 위해 랩 학생들을 부르는데 아담과 알렉스가 동시에 양쪽에서 세현의 팔을 잡았다.

"뭔가 이상합니다."

"잠깐만."

세현은 안경을 벗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가?"

그렇게 물으며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세현이 다시 묻자 알렉스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뭐가 있는 것 같아."

"뭐가? 아무것도 없는데?"

세현이 그렇게 말했다. 지잉. 그때 강한 전자기파의 떨림이 퍼져 나갔다. 응? 북서쪽, 그러니까 지중해 쪽에 검은 점이 생기더니 순식간에 거대하게 팽창했다. 뭐지, 저게? 그리고 시차를 두고 게이트로 돌풍이 불어왔다.

"으아악!!"

"아아악!"

사람들이 말 그대로 날아갔다. 알렉스는 세현을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본인도 휘청했다. 아담이 그의 뒷덜미를 잡고 큐브로 납짝 몸을 낮추었다.

"젠장…! 뭐야, 저거!"

바람이 너무 강했다.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알렉스는 세현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단단히 묻게 한 후 큐브의 겉면에 손가락을 박아 넣어 몸을 고정했다. 계측기를 보호하기 위해 큐브의 무게가 꽤 나가서 다행이지 큐브 채로 날아갈 뻔했다. 그리고 몇 초 뒤 돌풍이 전부 지나갔다. 아담이 먼저 일어나 알렉스를 번쩍 들어 세웠다. 그리고 둘은 세현을 살폈다.

"괜찮아?"

"괜찮습니까?"

세현은 엄청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뭐야, 갑자기…."

막 정리하려고 했던 책상이 아예 날아가버렸다. 세현은 알렉스를 밀어내고 큐브 밑을 살폈다.

"최이삭!! 하우빈!!!"

그녀는 자기 애들을 먼저 찾았다. 아담도 북서쪽에 눈을 고정한 채로 무전으로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알렉스에게도 연락이 들어왔다.

[야!! 니들 어디 안 다쳤지?!]

천 코치였다.

"코치…."

[깜짝이야. 베이스 숙소 다 날아갔다. 뭐냐? 토네이도냐, 이거?]

알렉스도 북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베이스는 게이트와 거리가 좀 있어서 저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느낌이 이상하게 쎄한데? 여기 있는 애들도 그러는데? 넌 괜찮냐? 게이트에 무슨 일 생긴 거야? 누가 마법 썼냐?]

"코치, 큰일났어…."

알렉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게이트 생긴 거 같은데."

[어? 뭔 말이야? 수에즈 게이트 안 없어졌어?]

"아니, 새 게이트 생겼어. 씨발, 저거 존나 큰데? 잠깐만."

수에즈 게이트를 소멸시키자마자 구 수에즈 폐허로부터 북서쪽 약 20km, 지중해 상공에 새로운 몬스터 게이트가 발생한 것이다.

*

크기는 수에즈 게이트보다 훨씬 커 보였다. 벌써 몬스터들이 떼로 뭉쳐서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이탄만 벌써 세 마리 나온다. 게이트야 2km가 훨씬 넘어 보이니 보인다 치더라도 거리가 20km인데 어떻게 보이냐고? 몇 백 미터나 되는 타이탄이 막 튀어나오고 있어서 그랬다.

"씨발…. 씨발. 씨발."

저거 남중국해 거보다 크다. 분명히 크다. 알렉스는 무전을 끄고 세현의 팔을 잡았다.

"빨리 도망가야 돼. 안 그러면 다 죽어."

"뭐?"

세현이 일단 식구들을 챙겨서 큐브 위로 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담도 다가왔다.

"당장 전원 탈출해야 합니다."

"뭐라고? 왜? 지금 뭐가…."

그리고 세현은 북서쪽을 보았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저거…, 저거 웜홀 아니지?"

갑자기 지중해 상공에 나타난 검은 구체를 발견하고 입을 딱 벌렸다. 캘리 박이 날아왔다. 둘은 입을 딱 벌리고 새로 생성된 게이트를 보다가 서로를 보았다.

"좆됐다…."

세현 퀸이 한 손으로 두 눈을 덮으면서 침음을 흘렸다. 캘리 박은 새로 생긴 게이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디바이스를 꺼냈다.

"민유야, 당장 EU랑 사우디 아라비아랑 아프리카 북쪽 나라 전부에 컨택해라. 지중해에 새 게이트가 생겼다."

[네?! 뭐라구요?! 규모는요?]

캘리 박이 아담을 보았다. 아담은 다른 용병들이랑 무전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알렉스가 말했다.

"남중국해보다 큽니다, 누나. 지금 몬스터가 쏟아집니다."

[…….]

"……."

"……."

[…이거 우리 때문인가요?]

"아니…, 아니야."

세현이 말했다.

"게이트 생성 패턴이 있어. 지중해와 유럽 쪽에 활성화된 게이트 안 나온 지 수십 년이다. 생길 때가 된 거야."

[…진짜요?]

"일단 그렇게 말해."

캘리 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부터 우리 책임 아니라고 못 박고 시작해야 한다. 당장 관련 논문이랑 자료 찾아라."

[네, 알겠습니다.]

알렉스는 황당해서 입을 딱 벌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죽는다니까? 다 도망가야 한다니까요?"

캘리 박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보니까 꽤 먼 것 같은데 당장 몬스터가 덮치는 건 아닐 거 아냐. 야, 이거 우리 어떡하냐? 이거 선제 대응해도 백 프로 책임 소재 문제될 거 같은데."

"노친네가 책임지고 깔끔하게 물러나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창창한 제자 앞길 막지 마시죠."

"언제 뒈질지도 모르는 니 년보다는 날 살리는 게 더 낫지 않겠냐?"

"노친네가 내릴 감투가 많잖아요. 그게 남들 보기에 더 책임지는 것처럼 보인다구요."

그리고 세현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지구랑 연결된 게이트들은 서로 연관이 있는 모양이네요."

"우리가 이걸 생각 못 했구나…."

기본적으로 여기 게이트를 없앤 것이 새 게이트를 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맞아 보인다. 감이 그랬다. 우주물리학에 통달한 그들의 감이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 맞을 것이다.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없다.

"일단 모르쇠로 갑시다."

"오케이."

그렇게 세현 퀸과 캘리 박이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짤막하게 방향을 잡는 동안 아담도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얼굴로 다가오더니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탈출해야 합니다. 1시간 내로 가고일 떼가 덮쳐올 겁니다. 저번 자이언트 시체들도 처리 못 했고 몬스터들이 전부 여기부터 올 겁니다."

"계측기만 어떻게 챙길 수 없을까?"

아담은 고개를 저었다.

"버리고 가야 합니다. 챙기더라도 곱게 못 챙깁니다."

정밀기계라 전용 포터도 써야 하는 마당이다. 세현은 골이 지끈지끈한 얼굴로 잠깐 주변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1시간이라고? 버리고 가더라도 계측기 넣을 수 있는 만큼 큐브 안에 넣고 가야겠어."

세현은 고글을 썼다. 모드를 바꾸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

"최 박사! 계측기 큐브에다 집어넣자! 마도사들은 전부 협력하십시오!"

그리고 자기가 서 있던 큐브 세 개도 띄웠다. 아담과 알렉스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대로 주변에 쌓여 있던 큐브들이 무슨 컴퓨터 블럭 게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현이 큐브를 정렬해서 뚜껑을 열고 다른 마도사들이 계측기를 천천히 큐브 안에다 집어넣었다. 아담은 베이스에 연락을 했다.

"비행차에다 사람들만 태워서 당장 출발해. 정원 이상으로 넣고 나머지 비행차는 게이트로 전부 보내라."

[오케이. 베이스는 20분 내 탈출 완료 계획이다. 게이트도 적어도 40분 내로 완료해라.]

"라저."

그동안 캘리 박도 아래로 내려가 계측기를 넣는 걸 진두지휘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답답했다.

"아니! 한 개 200억짜리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사람 목숨이 먼저 아냐?"

"200억짜리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걸 100개나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문제다."

세현은 딱딱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게 뭔 말이야. 알렉스는 황당했다. 그녀는 모든 마도물리학자들과 통화를 연결하고 빠르게 물었다.

"쉴드에 영구 마법 걸 수 있나? 그런 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영구는 안 되고 1년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공중 부양 1년 이상 걸 수 있는 사람. 모르는 사람한텐 대충 가르쳐줘."

[자신은 없는데요….]

"오케이. 뒷일은 뒤에 생각합시다."

마도사가 8명이나 움직이니 1시간 만에 계측기를 전부 큐브에 넣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100개를 공터 한 가운데 모아놓고 1년짜리 쉴드를 걸었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서 마도사 8명이 계측기 각각에 영구 공중 부양 마법을 마구 걸고 있었다. 스크린을 공중에 띄우는 마법과 동일한 마법이었다.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 새로 마력 보충을 하지 않으면 떨어진다.

용병들도 정원 이상 비행차에 꽉꽉 넣어 탈출시키고 있었다. 아담은 비행차에 실어 보내는 인원을 체크하고 있었다.

"아, 온다. 온다고. 오고 있잖아."

알렉스가 세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알렉스는 북서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이 알람을 울렸다. 죽는다. 진짜 죽는다. 가고일 떼가 구름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타이탄도 특대급으로 한 마리가 벌써 지상에 상륙했다. 그것은 수에즈 폐허 도시를 왕창 부수며 걸어오고 있다. 수에즈 폐허 도시가 게이트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나마 도시의 원형이 남은 건 수에즈 게이트가 타이탄이 몇 마리 나오지 않은 게이트여서 그런 건데…. 새 게이트에서는 타이탄이 부서진 자판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다 끝났어. 교수님들 얼른 타세요!”

세현은 빠른 걸음으로 아담에게 다가갔다. 그녀도 하얗게 불타는 눈과 붉은 거신을 가진 타이탄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실감이 나지는 않는데 뱃속이 쿵쾅거릴 정도로 긴장되었다.

수에즈 게이트 때문에 인류의 시작부터 몇 십년 전까지 최강국에서 지역 강국으로 수많은 외침에도 명맥을 이어오던 이집트가 멸망했다. 당시 겨우 생존했던 북아프리카의 남은 나라들이 이제 모두 멸망할 것이다. 남유럽도 아슬아슬하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무수한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 눈에 선하다.

"인원은? 아까 돌풍으로 날아간 사람 중에 못 찾은 사람은?"

"저희 애들이 다 잡았습니다. 인원은 전원 파악됐습니다."

소드마스터들은 새 웜홀이 생성되기 전부터 북서쪽을 보고 있었으니 대비가 가능했을 것이다. 세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최 박사! 애들 챙겨!"

최이삭은 이미 하우빈과 오 박사의 팔을 잡고 비행차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꽉 찬 비행차를 비집고 오 박사를 밀어 넣고 다른 차에 하우빈을 태웠다. 그가 세현에게 소리쳤다.

"교수님도 빨리 오세요!"

"노친네도 챙겨. 먼저 타. 가!"

그는 캘리 박도 오 박사와 함께 만원이 넘은 비행차에 태웠다. 그 차를 먼저 출발시켰다. 민간인과 용병들이 한 대 뭉쳐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저 만한 숫자의 몬스터가 닥쳐왔을 때 대비할 방법이 없었고 캘리 박은 원래부터 탈출 최우선자였다. 그리고 최이삭은 세현에게 달려왔다.

"교수님!"

그녀는 마지막까지 계측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법을 걸었다. 그는 기겁을 했다.

"교수님!! 마법 그만 쓰세요!"

그는 세현의 왼손을 확인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알렉스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헉!’ 하고 그녀의 왼쪽 손목을 보았다. 3천만밖에 안 남았다. 최이삭은 그녀의 손을 잡고 차로 달렸다. 알렉스는 오라의 검을 뽑았다.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마구 휘둘렀다. 빠르게 하강하는 가고일의 머리를 여럿 베었다. 아담은 마지막까지 혹시나 빠뜨린 인원이 없나 확인했다. 알렉스가 차에 발 한쪽을 올린 채 그를 불렀다.

"빨리 와!"

아담은 순식간에 차로 달려왔다. 세현 퀸, 하우빈, 치엔위, 최이삭, 알렉스 킴, 유리 라자레프, 왕리밍, 그리고 아담까지. 계측기 때문에 가장 먼저 탈출했어야 할 마도물리학자들이 마지막까지 남고 말았다. 가고일은 개체의 얼굴까지 식별 가능할 정도로 가까이 날아왔다. 비행차가 날아올랐다. 속도가 붙지 않은 비행차에 가고일이 따라붙자 최이삭이 비행차 주변으로 쉴드를 쳤다.

"교수님, 마도 순환…."

"하고 있어."

세현은 눈은 감은 채로 그렇게 말했다. 가고일들이 쉴드에 머리를 박으며 ‘끼에에엑!’ 하는 울음을 냈다. 쿠궁. 파슥. 쿠웅. 타이탄의 발자국 소리가 느릿하게 들렸다. 하지만 손을 뻗으면 비행차를 잡을 수 있을 것만같이 비정상적으로 컸다. 비행차의 속도가 나기 시작하자 가고일이 따라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긴장한 채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직도 타이탄이 거대하게 보였다.

'동해 게이트 생겼을 때랑 비슷해지겠네….'

최이삭은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나라들이 밀집한 가운데 대형 게이트가 생겼으니 그만큼 비상이 걸릴 것이다.

'돈 벌겠군.'

아담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렇게 타이탄이 쏟아지는 걸 보니 진짜 돈 많이 주는데 아니면 안 가야겠다 싶다. 저건 몸을 사려야 할 수준이다.

'저렇게 큰 게이트는 처음 봤다.'

알렉스는 치를 떨었다. 그는 몬스터 게이트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리밍은 화를 냈다. 치엔위가 오고 난 이후로 그녀를 갈구면서 약간의 자존감을 회복했는지 오늘은 예전처럼 멀끔한 모습이었다. 그는 대량의 몬스터를 보고 얼굴이 하얘져서는 세현에게 소리를 쳤다.

"야, 이거 어쩔 거야? 미친. 너 때문에 앞으로 연구비 따기 글렀다. 게이트 발생 주기 논문 안 읽었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는 추측 있었잖아. 근데 마구잡이로 없애니까 이 사단 난 거 아냐?"

"젠장, 그 소리는 프로젝트 전에 말하지 그랬냐? 어?"

"니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넌 어째 사람이 하나만 볼 줄 알고 두 개는 못 보냐? 학회장님이 항상 너한테 오래 연구하려면 다른 세상 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랬잖아."

"씨팔, 그래서 넌 중국 과기성 장관 꽁무니를 그렇게 빠냐, 돌대가리야?"

"뭐라고, 쌍년아?"

그대로 세현 퀸과 왕리밍의 싸움이 붙자 최이삭과 치엔위가 얼른 말렸다.

"교수님, 교수님."

"지금 잘잘못 따질 때예요?"

그러자 왕리밍이 버럭했다.

"그럼 지금이 잘잘못 따질 때지, 언제 따질 때냐!"

"해보자고?"

결국 두 사람은 비행차 내에서 가장 멀찍이 떨어뜨려 앉혀놓았다. 세현의 디바이스로 전화가 왔다. 한민유였다.

"어, 우리도 출발했다."

그러자 한민유가 앞으로의 언론 대응에 대해 캘리 박과 3자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세현의 얼굴이 썩어갔다.

"아…, 머리야."

일단 한민유와 통화를 끊고 세현이 끙끙 앓았다. 연구를 할 때도 안 그러는데 언론이나 정부를 상대하는 건 골치가 아팠다. 최이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작게 물었다.

"많이 문제되겠죠?"

"당연하지…. 아, 벌써 짜증난다."

"온살라 쪽에는 뭐라고 하실 거예요? 저거 저렇게 내버려두고 가는데…."

"그거야 그쪽이 이해해야지 어쩔 거야."

"이예프 교수님 성격에 이해는 좀…. 한국 들어가면 기자들 엄청 나와 있을 텐데…."

"니가 좀 어떻게 해봐라."

"제가요?!"

"노친네는 걷지도 못하고 나도 오늘내일 하는데 니가 해야지."

"뭐, 뭐라고 해야 하죠?"

"한민유랑 얘기해라."

하여튼 이쪽은 앞으로의 대응에 계속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세현은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눈을 감고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노력했다. 피곤하다….

유리는 혈색이 쫙 빠져서 긴장해 있었다. 그는 간혹 몸을 움찔거렸다. 소드마스터는 대부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곤 했지만 소드마스터로서의 형질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사춘기 무렵부터 10대가 끝날 때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감각이 예민한 동물보다도 더 심한 수준으로 느끼곤 했다. 그는 타이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없을까, 도망갈 수 있을까, 없을까 이런 걸 마구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화로운 문명 사회에서 이걸 단련할 방법이 협소하다 보니 어린 유스팀 선수들을 몬스터 게이트로 보내 소드마스터의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과 그에 따라 이끌어져 나오는 재능을 연마하고 단련시키는 게 원정 훈련의 핵심이었다. 이번 유스팀은 대부분 타이탄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하우빈이 유리의 어깨를 잡고 뒤에 앉아 있는 세현과 최이삭에게 속닥거렸다.

"그냥 돌아가서 다시 저 게이트만 닫으면 안 될까요? 새로 게이트 생겨도 지중해보다는 나을 거 아니에요."

세현 퀸은 아주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고 하우빈은 엇, 하고 뭔가 실수했나 싶어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최이삭이 설명했다.

"저렇게 몬스터 쏟아져 나오는데 계측기 설치는 어떻게 하냐. 제대로 마법 못 쓰면 블랙홀 생긴다. 그럼 한순간에 다 같이 죽는 거야."

"아…. 그건…, 그렇네요. 멍청한 말 해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하우빈이 꾸벅 세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세현은 골이 아프다는 얼굴로 눈을 감고 머리맡에 뒤통수를 대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잘 돌아가면 모든 게 리더의 공이고

뭐가 잘못 돌아가면 모든 게 또 리더의 책임이다.

책임자란 책임을 지라고 있는 자리라고 하지 않는가. 이건 세계물리학회니 캘리 박이니 여기저기 아무리 나눠져도 책임지려면 엄청나게 머리가 빠개질 것이다.

'아, 어차피 종종 생기는 거잖아? 젠장, 올해 삼재냐.'

덜컹.

"응…?"

갑자기 비행차가 덜컹했다. 삐삐삐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담이 운전석으로 갔다. 자율비행모드로 잘 날아가고 있던 비행차였다. 알렉스는 안전벨트도 안 한 세현에게 안전벨트를 메어주었다.

"뭐야?"

"가고일 하나가 엔진에 빨려 들어간 것 같습니다."

쉴드를 간발의 차이로 늦게 친 것이다. 가고일의 머리가 어딘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가 쉴드를 해제하자 엔진으로 직행한 것이다. 마도사에게 소드마스터만큼의 순발력은 없으니 확인하지 못했다. 운전석의 화면에는 비행차의 한쪽 엔진이 망가졌다는 표시가 나고 있었다. 아직 얼마 가지도 않았다. 사우디 아라비아 상공이었다.

"곧 추락합니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야, 너 이거 어쩔 거야! 진짜!"

왕리밍은 곧바로 또 세현을 비난했다. 세현은 열 받은 표정을 지었다가 오, 하고 뭔가 번뜩인 얼굴을 했다.

"이거 기사 크게 내자. 나 개고생 했다고."

그녀는 여전히 대응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최이삭은 자신이 차분해지기로 결정했다. 그런 게 원래 위기에 처한 조직의 중간관리자가 해야 할 역할이다. 그는 아담에게 물었다.

"비행차가 지금 당장 폭발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최이삭은 이미 마법을 써 비행차의 추락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세현 퀸은 앞으로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왕리밍은 마도사로서의 기량은 별로라고 들었다. 하우빈과 치엔위는 현존하는 마도사 중에 가장 뛰어난 마도사들이다. 게다가 잘은 모르지만 여기 있는 소드마스터들도 능력이 상당할 것이다. 비행차가 떨어진다고 죽을 일은 없을 거다.

"지상에 부딪치면 폭발하겠지만 이 경우에 그럴 일은 없겠군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 타고 있기도 위험합니다."

알렉스는 창을 통해 밖을 보았다.

"당장 뭐가 따라오는 것 같진 않네."

비행차는 최고 속도가 시속 천 킬로미터가 넘었다. 비행 몬스터 중에 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없다. 비행차는 전진 속도를 유지한 채 지상으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물었다.

"그냥 이대로 서울까지 가도 되는 거 아냐?"

"위험해. 새 차 구하자."

"난 이제 마력 끝인데. 우빈이도 별로 없을 것 같고. 치엔 박사 너 마력 좀 있어?"

최이삭이 물었다.

"어…, 나 이거 내 실험할 때 써야 하는데…."

"야, 이런 비상시국에 좀 나눠 쓰자."

아담은 비행차 내에 구비된 비상시에 대비한 물품이 구비된 백팩을 찾아냈다. 비행차의 정원만큼 4개가 구비되어 있었다. 알렉스와 유리에게 하나씩 주고 나머지 하나는 왕리밍에게 주었다. 왕리밍은 그걸 치엔위에게 넘겼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지, 군용 비행차라 무장이 좀 있었다. 소총 네 개와 권총 네 자루를 찾아냈다. 그는 소총은 알렉스와 유리에게 하나씩, 자기는 두 개를 들고 권총은 민간인들에게 내밀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총 같은 거 필요 없어. 가지고 있는 게 더 위험해."

그들은 마도사였다. 아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총 못 쏘는 사람들 자기 다리부터 쏘더군요."

무전도 네 개 더 나와 그건 세현 퀸과 왕리밍, 최이삭과 치엔위에게 주었다.

"디바이스 있는데?"

"안 터질 수도 있습니다."

"응? 세상에 그런 데도 있어?"

"그런 데 많습니다."

아담은 그렇게 말하고는 비행차가 위성신호를 받아주는 덕분에 아직 인터넷이 될 때 근처의 지도와 정보를 빠르게 받았다. 최이삭도 그걸 눈치채고 마법 관련 정보를 받았다. 세현이 그의 디바이스를 슥 같이 보면서 물었다.

"생활 마법? 뭐 이딴 걸 보냐?"

마도사 커뮤니티에서 꿀팁으로 도는 생활 및 생존용 마법 마도식을 왕창 다운받기 시작한 것이다. 최이삭이 대답했다.

"지금 우리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질 것 같은데 저 가방 네 개로 되겠어요? 적어도 물은 구할 수 있어야죠."

"그렇지…. 니가 잘 봐놔라."

옛날 옛적과 다르게 현대 문명 사회에서 사는 마도사들은 굉장히 협소한 분야의 마법만을 배웠다. 마도물리학자는 물리학과 관련된 마법 외에는 거의 할 줄 몰랐다. 마도의사도 의학과 관련된 마법만 쓸 줄 알았다. 마도사 용병은 전술 무기 수준의 공격 마법만을 배운다. 굳이 다른 분야의 마법을 배우겠다면 배울 수는 있지만 귀찮았다. 생활에 필요한 마법이라고 해봤자 요즘은 과학 기술 덕분에 마법을 배워 어떻게 하는 것보다 편하게 살 수 있었다. 어떤 마법이든 익히고 쓰는 데 시간이 걸린다. 모든 마도사가 공통적으로 쓰는 마법이라고 하면 공중 부양이나 쉴드 마법 정도다.

아담이 아차, 하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 현찰 들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러자 다들(알렉스와 유리 포함)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이라는 얼굴을 했다. 아담은 혹시나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이 비행차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비행차가 불시착한 곳은 이집트와는 달라 붉은 모래를 가진 사막 한 가운데였다. 비행차에서 나오자마자 세현은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더운데?"

수에즈에 있을 때는 야외에서도 냉풍기 돌려가며 시원하게 있었다. 아직 여름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기는 했지만 정수리 위에 떠있는 태양의 힘은 장난 아니었다. 게다가 이 기도가 타는 것 같은 열기.

"여기 어디야?"

"사우디랑 이라크 국경 근처 같은데."

알렉스와 아담,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인지 군용 고글을 쓰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세현은 다른 사람을 보았다. 민간인들은 다들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햇빛 때문에 눈이 아프다. 그들은 품을 뒤져 실험용 고글을 찾아냈다. 모드를 바꾸어 시력을 보호하였다. 왕리밍은 선글라스를 꼈다.

"아, 벌써 땀 나."

세현이 괴로워하며 물을 찾았다. 아담은 가방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물을 적셔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물은 천천히 드십시요."

"방향은 어디로 가야 돼?"

알렉스가 물었다. 아담은 디바이스에 뜬 지도와 나침반을 확인했다.

"서쪽으로 가면 작은 마을이 있을 것 같다. 이라크 마을이 더 가까울 것 같은데 거기론 가지 말자. 지금 이라크 상황 안 좋으니까."

"얼마나 가야 해?"

"차로 가면 직선 거리로 3시간. 아마."

"오케이."

뛰면 된다. 알렉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반응했고 세현은 치엔위를 보았다.

"부탁한다."

"네."

뭐 이 정도는…. 일행이 마도사와 소드마스터만 있으니 가능한 속도였다. 치엔위는 비행차에다가 몇 달 가는 쉴드를 걸어놓고(야매로 배운 거라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마도식이 가물가물 하다) 마도사들을 공중에다 띄우고 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상을 하지 않아도 마도 순환을 하면 마력을 시간당 400만 정도는 모을 수 있었다. 비행차처럼 무겁고 큰 것도 아니고, 사람들 정도야 같이 데리고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아담과 알렉스, 유리는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다가 위에서 속도를 맞춰 날아오던 그들이 얼마 안 가 갑자기 속도가 느려지며 지상으로 내려오자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리를 슬슬 늦추었다.

"물…."

그들은 햇빛과 더위 때문에 거의 죽으려고 했다.

아담은 소드마스터로만 이루어진 용병단의 용병장이었고 알렉스와 유리도 기본적으로 소드마스터와 지내고 평소에는 도시에서만 살았다. 알렉스는 사막 한 가운데서 자기 무게보다 몇 배는 나가는 추와 물을 지고 마라톤을 하곤 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유사시에 민간인을 데리고 다니는 데 이런 문제점이 있을 줄이야.

알렉스는 품과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뭐에 쓰는 건지 모를 알루미늄 판자 세 개가 연결된 걸 꺼내 분리해서 한 개씩 손에 들었다. 그는 드러난 모든 피부가 벌겋게 터서 탈수와 열사에 시달리는 세현의 머리 위를 그림자 지게 하고 다른 하나로 부채질을 빠르게 했다. 유리는 하우빈과 치엔위를 맡았다.

"이러다 교수님 죽겠어."

그는 세현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아담은 물에 적신 수건을 최이삭에게도 주었다. 그는 얼른 머리와 얼굴을 그걸로 감쌌다. 15분도 못 갔다. 주변에는 햇빛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도 없다.

"물 만드는 마법 지금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이 최이삭에게 물었다. 그는 물을 한 통 다 해치우고 디바이스를 꺼내서 켰다. 그리고 마도식을 뚫어져라 보면서 중얼중얼 그 마도식을 머리에 넣으려고 하며 시도했다. 마도식이 그의 주변으로 떠올랐다. 최이삭은 공중에 띄운 마도식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흐느적거리고 문양이 바뀌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잉 구형으로 퍼졌다가 스으윽 줄어들었다. 안 써본 마법은 여러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이 더 더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의 페트병 안에 3분의 1 정도의 물이 천천히 생겼다.

"몇 번 더 하다 보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물을 다 마셔버렸다. 아담은 그와 왕리밍을 양손에 잡고 번쩍 일으켜 세웠다.

"일단 여기 이렇게 있으면 안됩니다. 죽습니다."

아담은 가방 안에서 노숙을 할 때 쓰는 방온천을 꺼냈다.

"이걸로 햇빛을 가리면 좀 나을까요?"

아담은 그걸 머리 위로 넓게 뒤집어썼다.

"조금은 낫네요."

알렉스도 자기 가방에서 그런 걸 꺼내서 세현에게 주었다. 마도사들은 그걸 뒤집어쓰고 좀 더 날다가 15분 만에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

"……."

"……."

소드마스터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알렉스는 다시 가서 맹렬하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최이삭도 얼굴이 벌겋게 터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왕리밍은 멀끔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우빈과 치엔위는 얕게 헐떡거리며 어지러워했다. 다들 햇빛은 볼 일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담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다. 너희들은 사람들 데리고 비행차로 다시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어. 내가 가서 사륜차라도 구해서 올 테니까."

"오케이."

"라저."

아담은 지도를 확인하고는 원래 가던 방향으로 살살 뛰어가다가 모래 바람이 일행에게 끼치지 않을 정도부터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왔던 방향을 살펴보며 일어났다.

"다시 날아갈 수 있겠어?"

치엔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사들은 이미 일사병을 겪고 있었다. 물이 부족했다. 한 10분쯤 날아가다가 다시 떨어졌고 알렉스가 여자들을 어떻게 다 들고 유리가 남자 둘을 어깨에다 들쳐메고 그 뒤 10분을 더 달려서 추락한 비행차로 돌아갔다. 쉴드를 해제했다.

"괜찮아요?"

비행차로 들어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알렉스는 세현을 자리에 다시 앉혔다. 1시간 정도 밖에 나갔다 온 것뿐인데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었다.

엔진이 하나 망가진 것뿐이라 비행차 내의 기능은 아직 돌아갔다. 지구 반대편까지도 갈 수 있는 연료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이 정도만 기능을 사용한다면 며칠 더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이 사람들은 놔두고 갔어야 했다….'

보통 사람은 이 정도의 환경에서도 까딱하면 죽을 수 있다는 걸 까먹었다. 신체 능력 자체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문을 닫고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 뜨거운 바람부터 훅 나왔다. 이미 물은 다 축냈다. 그는 눈을 감고 얕고 빠르게 헐떡거리는 최이삭을 흔들었다.

"빨리 물 만들어. 교수님이랑 너 물 마셔야 돼."

"그것도…, 그건데…. 교수님 마력 좀 확인해봐."

"아! 맞다!!"

알렉스가 식겁해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확실히 집중이 안 되는지 마도 순환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았다. 마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2천만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야, 치엔위…, 너도 좀 해봐. 우빈아, 너도 마력 있냐?"

그는 자신의 디바이스에 다운 받아놓은 마도식을 그들에게 돌렸다. 그는 비행차의 문을 살짝 열고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쓰는 마법이라 마력이 뭉텅이로 들어갔다. 빈 페트병이 4개가 있었다. 세 명의 마도사가 몇 번의 시도 끝에 그 4병을 다 채울 수 있었다.

"전 이제 마력 다 썼어요…."

하우빈이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이 나도, 라고 헐떡거리면서 대답했다.

"물 너무 많이 마시면 쇼크 온다. 조금씩 마셔."

최이삭은 입을 조금 축였다. 알렉스도 끙끙 앓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축였다. 최이삭은 그녀의 머리를 두른 수건을 물에 적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전에 같이 쓰러졌을 때도 그랬지만, 확실히 그가 더 어려서 상태가 나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왕리밍을 살폈다. 그도 세현 퀸이랑 같은 연배라 상태가 안 좋았다.

"교수님, 마도 순환하고 계시죠? 야, 너도 좀 닦아."

"아, 어."

세현은 체온이 꽤 오른 상태였다. 이대로 열사병으로 진행되면 답이 없었다. 그는 세현의 셔츠 단추를 풀고 옷을 벗겼다. 그리고 그녀의 민소매만 남긴 후 그녀의 가슴과 배, 팔, 겨드랑이를 물로 적신 수건으로 닦아 체온을 내렸다. 바지도 벗겨 다리도 닦아내고 나니 에어컨이 강하게 돌아 실내가 서늘해졌다. 세현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약간 차렸다.

"물 좀 더 줘봐."

알렉스가 남은 페트병을 최이삭에게 넘겼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구를 댔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아…."

"물 조금씩 계속 마시면 괜찮으실 거예요."

최이삭은 그녀의 입술에 조금씩 조금씩 물을 흘려 보내며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이런 말 좀 미안한데…. 어디 가서 좀 빼와라."

"어, 뭘?"

알렉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그렇게 되물었다. 최이삭도 컨디션이 엄청 안 좋은 얼굴이었다. 그는 알렉스의 하반신의 그 부분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거."

알렉스는 움찔했다. 그는 세현의 왼손목을 잡아보면서 심각하게 말했다.

"일사병으로 돌아가시는 것보다 이걸로 먼저 돌아가신다. 입으로 섭취하는 것도 가능한 거지?"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알렉스는 얼굴이 벌게졌다. 최이삭은 들고 있는 페트병에 남은 물을 다 마시고 그걸 알렉스에게 넘겼다.

"최대한 많이."

"……."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 봐. 평소와 달리 여유가 없으니 그도 사람을 마력충전기 그 이상도 이하로도 안 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상태가 안 좋아진 세현에게 온 신경이 집중된 상태였다. 알렉스는 화가 났지만 그걸 받고 밖으로 나갔다.

'씨팔….'

이 상황에 이걸 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알렉스는 머리를 벅벅 털며 한숨을 푹 쉬었다.

*

두 시간쯤 있자 아주 핼쑥해진 얼굴로 알렉스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최이삭은 꺼려하는 기색도 없이 알렉스의 손에서 병을 받아왔다. 그리고 정신을 거의 잃은 세현의 턱을 들게 했다. 손으로 뺨을 눌려 입을 벌리고 그녀의 입안을 보며 마법을 이용해서 입안에 닿지 않게 스르륵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녀의 위로 넣어버렸다. 알렉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사기니 뭐니 하는 것보다 저게 더 낫네.'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녀가 주사기로 자기 걸 집어넣을 때마다 멀찍이 떨어져서 귀를 두드리고 있었던 알렉스였다. 최이삭은 세현의 손목을 확인했다. 1,400만까지 떨어졌던 그녀의 마력량이 2억 가까이 올라갔다. 이 사막 한 가운데서 알렉스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훌륭한 마력보충기였다.

최이삭은 세현의 어깨를 안고 계속해서 물을 조금씩 그녀에게 먹였다. 가방을 뒤져보니 아스피린도 몇 알 나와 세현 퀸과 왕리밍이 한 알씩 먹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부채질을 계속했다.

"우리 운동 좀 해야겠다…."

최이삭이 중얼거렸다. 치엔위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10년만 연구실 생활 더 하면 이렇게 된다는 거지?"

그녀도 자신에게 기댄 채 반쯤 정신을 잃은 왕리밍의 얼굴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 둘 다 겉모습이야 모델처럼 번드르르 해도 알맹이는 누가 툭 치면 바로 어디 부러질 정도다.

유리 라자레프가 제일 멀쩡했고 방금 잠깐 정기를 아주 많이 빼고 온 알렉스가 그 다음으로 괜찮았고 하우빈은 이제 막 다 회복이 된 것 같았다. 치엔위와 최이삭이 그나마 정신은 있었고 세현 퀸과 왕리밍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정확하게 나이순으로 사막성 기후에 대한 내성을 보이고 있었다.

제일 가까운 마을까지 차로 3시간이면 달려서도 비슷하게 걸릴 것이다. 적어도 왕복 6시간은 걸린다고 볼 때 아직 4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먹을 것도 사오겠지? 배고파."

유리가 말했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건조 식량이 나온다. 그는 하우빈에게 말했다.

"물 좀 만들어봐."

"으음~"

하우빈은 금방 좀 모은 마력으로 차문을 살짝 열고 다시금 집중했다. 아까보다는 적은 마력으로 페트병 두 개를 채웠다. 살짝 정신이 든 왕리밍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니들 그거 계속하다가 여기 가뭄 온다…."

"여기 사막인데 여기서 어떻게 또 가뭄이 와요?"

"온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페트병 하나를 빼앗아갔다. 말리는 치엔위를 뿌리치고 벌컥 마셨다가 속이 안 좋다며 다시 누웠다. 하우빈은 다시금 페트병을 채웠다.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마법의 권역으로 썼더니 피부도 바짝 말랐다. 영 좋을 것 같지 않아 비행차 바깥 쪽만 했더니 마력을 또 탈탈 끌어 써야 했다. 하우빈은 이제는 그래도 좀 자연스럽게 명상없이 마도 순환을 하며 유리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좌석은 교수님과 랩장들 차지였다.

"뭐해?"

유리는 군용 반합을 꺼내고 물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또 하우빈을 보았다.

"물 끓여줘."

"어? 물 끓이는 거? 버너 없어?"

"없어. 마법으로 끓일 수 있잖아."

그는 서던라이온 유스팀 소속의 마도사 새미가 간혹 몰래 라면을 끊여주곤 했기 때문에 마도사들이 물을 끓일 줄 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우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이삭이 자기 디바이스를 하우빈에게 넘겼다.

"거기 보다 보면 있다."

"으음~"

하우빈은 잠시 끙 하는 소리를 냈다. 하우빈은 최이삭이 다운로드 받은 <생존용 꿀팁 마법!> 목록을 쭉 살펴보다가 물을 끓이는 마도식을 발견하고는 중얼중얼 외웠다. 그리고 그녀는 군용 반합을 가만히 보았다. 그 주변으로 마도식이 파바박 떴다가 가운데로 수렴했다. 최이삭이 그걸 보며 경고했다.

"처음 쓰는 마법 그렇게 급하게…."

푸학! 갑자기 비행차 안에 증기가 가득 차며 온도가 뚝 떨어졌다. 어느 정도냐면 눈썹에 서리가 낄 정도였다. 최이삭은 깜짝 놀라 세현을 꽉 끌어안았고 알렉스는 당장 차문을 열었다. 찬 기운이 빠져나가고 비행차 내부의 온도가 확 올라갔다. 냉동창고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죄송합니다…."

하우빈이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사과했다. 치엔위가 보다 못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자. 나가서 하자."

유리와 하우빈, 치엔위는 비행차 밖으로 나가서 몇 번의 실패 끝에(건조한 대기중의 수증기를 박박 긁어 모아 군용 반합을 채웠다가 끓이는데 실패해서 다시 날리는) 겨우 물을 끓였다. 곧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던 알렉스가 문을 열고 그들을 보았다.

"니들만 먹냐?"

그들은 군용 반합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있다가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그 뒤 한 시간이 더 흐르니 교수님들도 정신을 차리셨지만 컨디션이 급강하하여 아주 기분 나빠 하셨다.

"이래서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여기까지 데리고 나온 게 누구냐."

"나다, 젠장. 어쩌라고."

그들은 머리를 붙잡고 그렇게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세계에서 한 손 두 손에 꼽히는 천재들이라서 뇌가 그만큼 섬세한 것일까. 둘은 계속해서 두통을 호소했다. 투덜이 스머프가 따로 없었다. 솔직히 엄청 성가셨다.

"체온 내려갔는데도 왜 이러지?"

알렉스는 계속 세현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대고 비교해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배낭을 뒤져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건조식량을 하나 꺼내 까서 그녀에게 주었다.

"조금이라도 먹어요, 응?"

그녀는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껍다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세현이 앉은 자리 앞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그녀의 무릎을 잡고 올려다보며 계속 그녀를 걱정했다. 최이삭은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안도하고 밖으로 나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 싫다니까."

세현은 그녀의 입 앞에 들이미는 걸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왕리밍이 픽 비웃었다.

"너 뭐 하냐? 애랑 연애라도 하냐?"

알렉스는 '애'라는 단어에 발끈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세현은 피곤하고 짜증나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어쩔래?"

"일하러 와서 영계도 따먹고 다니고 말년에 팔자 좋다, 너?"

"내 팔자야 니 팔자랑 비교도 할 수 없이 잘난 팔자지."

"뭐라고?!"

그러자 밖에서 라면을 먹고 있던 치엔위와 잠깐 주변을 둘러보던 최이삭이 동시에 소리쳤다.

"싸우지 좀 마세요!"

그리고 치엔위가 덧붙였다.

"애들도 있는데!"

그러자 교수님들이 입을 닫았다. 꼴사나운 건 아는 모양이셨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세현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차안은 이제 추웠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간혹 마른 풀만이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모르게 피어 있을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교수님?"

최이삭과 하우빈이 일어나서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세현은 그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어. 이제 살 것 같다."

"교수님, 운동 좀 하세요. 밥도 좀 제때제때 드시구요."

최이삭이 그렇게 잔소리를 했다.

"이게 나이 탓이지, 운동 탓이냐? 지도 골골거려 놓고."

"진짜 괜찮으세요?"

최이삭은 그녀의 안색을 계속 살폈다.

"간단한 의료 마법 정도는 배워놓을 걸 그랬나 봐요."

"그런 식으로 하다가 골로 간다, 그거. 야매는 안 돼, 야매는."

"하긴."

애초에 대규모 중력 마법만 잔뜩 쓰는 그들과 마도의사는 성질이 달랐다. 드럼통을 들어 때려 붓는 것과 스포이트로 섬세하게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의 차이랄까. 라면 하나 끓이는 데도 이 지역 수분을 다 끌어다 썼다가 한 방에 펑 수증기 폭발을 계속 일으켰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마력을 백만 단위 이하로는 잘 못 쓴다.

"그나저나 더운 곳은 마도 순환을 하니까 더 덥네."

세현이 애들이 만든 라면 국물을 한 입 뺏아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하우빈도 어린아이처럼 땀을 계속 흘리고 있어 머리카락이 좀 뺨에 붙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운 곳에서 하면 더 춥잖아요. 아, 좋겠다. 넌 안 더워?"

"응? 더워. 덥지."

유리는 고래처럼 군용 식량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까는 갓 사로잡힌 맹수마냥 바짝 긴장해서 타이탄만 노려보고 있더니 그게 꽤 배가 고파질 만한 일이었나 보다. 보기에는 참~ 예쁜데 뭔가…, 연비가 안 좋다.

알렉스나 유리나 더위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신체의 항상성이 무지하게 잘 유지되고 있었다.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와서는 유리의 등을 무릎으로 툭 쳤다.

"그만 좀 처먹어라. 그 용병 아저씨 늦으면 어쩌려고."

"뭐, 대장이 알아서 먹을 거 가져오겠지."

비상용 생존 가방에는 방온천, 부싯돌, 불씨를 지키기 위한 바람막이 겸사 반사판, 붕대나 비상약품, 전염병을 검사하는 키트, 나침반, 지도, 종이, 작은 연필, 그런 것들이 구석구석 들어가 있었고 2L짜리 생수병 2개와 나머지 공간은 전부 건식 식량이 꽉 차있었다.

"보통 물이 더 중요한데…."

"소드마스터 용병용이라 이래요. 무인도 같은 곳만 아니면 일단 달려서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사실 망망대해만 아니라면 바다도 어디든 갈 수 있는 범위 안에 속한다. 알렉스가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세현은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아니, 며칠 전, 그러니까 그날부터 세현의 관심을 끌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보자 느낌표가 딱 뜬 얼굴이 되더니 가방 위에 앉은 세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기 무릎에 양 팔꿈치를 대고 자기 양 뺨을 괴고는 세현과 눈높이를 맞추며 약간 뚱한 표정을 지었다.

"책임진다면서."

"…이 판국엔 니가 날 책임져야 할 상황이다."

세현이 드넓은 사막을 눈짓했다.

"그 용병은 언제쯤 오는 거냐?"

"왜?"

알렉스가 약간 발끈하며 그렇게 물었다. 세현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럼 여기서 평생 살 거야? 집에 가야 할 거 아냐."

"…두세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돼. 여기가 한국인 줄 알아?"

"하긴."

세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붉게 물든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 인터넷 되지?"

비행차가 아직 돌아가고 있으니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네…, 전화도 엄청 오고 있구요. 진짜 받지 말까요?"

최이삭의 디바이스만 켜놓은 상태였다. 잠깐 최이삭의 디바이스를 가만히 보았다. 포털 사이트에는 온통 지중해에 새로 생긴 게이트와 그로 인한 각국의 비상사태에 대한 기사가 마구 올라오고 있었다. 귀국한 캘리 박 일행의 경우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한민유는 곧바로 정부 관계자와 만나 비상대책회의에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책임자인 세현 퀸과 세계 유수의 마도물리학자들이 탄 비행차가 사우디 아라비아 상공에서 추락되었다는 기사도 떴다.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가 무슨 생각인지 실종자 수색에 협조하지 않아….

가만히 세현과 함께 기사를 보고 있던 알렉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유리도 여전히 식충이처럼 가방 하나치의 식량을 다 축내고 있다가 총을 잡으며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뭐지? 온다. 헬리콥터?"

"어. 여섯…, 아니, 일곱 대."

"몬스터는 아니지? 구조댄가?"

"구조대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알렉스도 등에 찬 소총을 앞으로 돌려 안전핀을 해제했다. 느낌이 별로다. 그리고 그럴 때 감은 또 쪽집게같이 맞는다. 세현이 물었다.

"누가 온 거야?"

"응. 군인들인 거 같은데."

"뭐…, 사우디 아라비아는 그렇다고 듣긴 했지."

일반적으로 관광객이 드나들 수 없는 나라고 여의치 않은 사고이긴 했지만 불법 입국이라고 본다면 불법 입국이니 말이다. 세현이 겨우 건식 식량 하나를 씹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같은 시국에 내 얼굴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잡혀 가서 갇히고 그럴 일은 없어. 지금이 무슨 21세기도 아니고."

10분쯤 지나자 정말로 헬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화줄이 내려오며 군인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빠르게 낙하했다. 총을 들고 그들을 겨냥하며 다가왔다.

"Don't move! Hands up!"

그들은 아랍 악센트가 강한 영어를 외치며 그렇게 다가왔다. 분위기가 거칠다. 환대 인사까지는 못 받더라도 정중한 대접은 기대했던 세현은 약간 놀란 얼굴로 일어났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애들을 한 손에 하나씩 잡고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그중에서 제일 상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년이 그 쌍년이라고?"

그는 세현에게 다가가며 곧바로 손을 치켜들었다. 엥?! 세현도 그게 무슨 제스처인지는 알았지만 살아생전 캘리 박 외에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한 사람이 없어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냥 서 있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알렉스가 번개같이 그의 팔을 잡았고 최이삭이 기겁한 얼굴로 쉴드를 치며 세현을 끌어안았다.

"교수님!"

"이 개새끼가 어디다 손을 드는 거야!!"

저쪽 부하 중 둘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중대장님!"

그는 눈이 벌게져서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안 놔?! 벌써 마그나 시가 쑥대밭이 됐어!! 높은 데 앉은 개같은 인간들은 사람 죽어 나가는 걸 우습게 보지! 항상!"

세현이 피식 웃었다.

"나도 사람들 죽어 나가는 거 상당히 우습게 보기는 한데."

그녀가 그렇게 그 중대장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니 나라 높은 자리에 있는 남자들 뺨은 무서워서 손가락도 못 대면서 외국에서 온 여자 뺨은 아주 쉽게 때릴 수 있나 보군. 내가 누군지도 몰라? 니 나라가 왜 개판인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는 최이삭을 밀어내고 알렉스도 옆으로 치우며 그에게 똑바로 다가갔다.

"뭐…."

"아니면 내 앞에서는 앞으로 무서워서 눈도 못 들도록 확실하게 해야 하나? 어? 한 번 사막 위의 작은 붉은 점이 되어볼까, 다 같이? 니 아빠도 아들도 니가 그중에 어느 부분인지 못 찾을 거다."

그녀는 그 중대장과 거의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세현의 얼굴을 보았다.

"이 개년이…!"

그는 총을 장전하며 그녀의 뺨에 눌렀다. 그녀가 말했다.

"아직도 눈 안 깔아?"

그 순간 하늘에 떠있는 헬리콥터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추락할 것 같았다.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이 당황해서 하늘을 보았다. 중대장을 말리던 부관이 속삭였다.

"마도사입니다, 중대장님! 진짜 다 죽습니다. 총은 소용없습니다."

"중대장이 뭐야, 씨발. 책임자 내놔. 사령관이든 뭐든 있을 거 아냐?"

진짜 추락한다…! 중대장은 권총을 손가락이 끼워 빙글 총구를 아래로 향하며 양손을 들었다.

"그만해."

"공손하게."

"…그만하십시오."

그러자 세현이 중력 마법을 멈췄다. 헬기가 거의 땅에 처박힐 뻔하다가 다시금 날아올랐다.

"……."

다들 말을 잃었다. 비행차에서 이제 슬 기어 나오던 왕리밍만이 혀를 찼다.

"아, 저 성질머리…. 너 그러다 감옥 간다."

"그럼 민간인한테 총구 들이민 이 새끼들부터 가야지. 정당방위다."

세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중대장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그 중대장은 눈을 깔았다. 그대로 그를 계속 쳐다보면서 세현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뺨을 토닥토닥 쳤다.

"나대지 마, 쫄병새끼가. 나갈 때 들어갈 때 구분이 그렇게 안 돼서 군대 생활은 어떻게 하냐, 어? 너 이거 감당할 수 있냐? 내가 니 대가리한테 뭐라고 할 거 같냐? 어? 내가 누구로 보여? 어? 말해봐. 누구로 보이냐고, 어? 아, 씨발. 눈 그만 깔고 나 봐봐. 대답해라. 어?"

중대장은 눈을 깔아야 할지 들어야 할지 영 감을 못 잡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보다 키도 더 컸다. 그의 턱을 붙잡고 그를 갈구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전부 당황하기 시작했다. 최이삭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꼬투리 잡혔으면 저기 있는 건 99% 그였을 것이다. 왕리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관으로 보이는 남자를 툭 쳤다.

"설명해, 이 상황."

"그, 금일 15시 30분경 수에즈 게이트가 소멸하고 새 게이트, 통칭 지중해 게이트가 생기면서 본국 서부 지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 중국 정부에서 추락한 비행차 탑승객을 인도해 달라는 접촉이 있었고 본국은 그 탑승객들이 본 상황을 일으킨 주범이라 판단하고 본군이 신속히 신병을 구속하기 위하여 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짝 긴장을 하여 그렇게 보고하였다.

"이래서 후진국은. 야, 디바이스 내놔."

왕리밍은 치엔위의 디바이스를 뺐었다. 자기 건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중국 과기성 장관에게 연락을 했다. 상대는 바로 받았다. 중국어로 얘기가 오고 가자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중간부터는 치엔위가 다가가서 살짝 말리는 기색이 있었다.

"니네 부모는 너 낳고 축하를 했다냐? 어? 너 같은 놈이 군인이라고 세금 처먹으니까 여기가 이런 거야, 병신아. 이렇게 대가리 멍청한…, 야! 너 뭐해!"

그 중대장이 울거나 오줌을 쌀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인지 그의 귀를 잡고 마구 갈구다가 왕리밍이 한창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펄쩍 뛴 세현이었다. 그녀는 일단 언론전에 대비하여 동정을 끌기 위하여 추락, 실종 사태를 하루이틀 정도 더 유지할 생각이었다. 근데 지금 왕리밍이 연락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아, 시끄러. 전화하는 거 안 보이냐? 양식 없게."

"뭐야, 누구야."

"리이펑 장관."

"야, 이 씨…. 아무리 나랑 니가 사이가 나빠도 이런 시국에 팀킬은 하지 말자."

"잠수 타는 건 별로 안 좋은 방법인 거 같다. 빨리 와, 멍청아."

"제일 머리 나쁜 새끼가 누구 보고 멍청이라고 하는 거 되게 우습다? 어?"

"누가 너보다 머리가 나빠!"

세현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곧 어른들의 대화로 들어갔다. 곧 통화를 하는 인원이 죽 늘었다. 와병 중이라는 캘리 박, 한민유, 석세스 교수, 미국 CIA 중동지부장, 한국 안보수석 등이 나왔다. 그들은 잠깐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현과 왕리밍이 고개를 돌려서 그 중대장이라는 젊은 군인을 보았다. 세현이 고개를 까딱했다.

"이리 와. 샤리프 사령관 연결해."

난데없이 이 작전의 책임자 이름이 툭 나오자 그가 당황하더니 부관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일단 어딘가 연락을 걸더니 뭔가를 보고하고 사령관과 연결된 군용 디바이스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통화를 서로 연결하여 화상회의가 전개되었다. 행정가는 행정에 대한 것을, 학회 쪽은 앞으로의 책임 문제와 해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15분 대화가 오고 가더니 미국, 중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우 더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 한두 명 더 튀어나오더니 30분쯤 뒤 비공식 미팅이 끝났다. 각국에서는 각국 나름의 대책을 고심한 뒤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한중미 정부는 공식적으로 지중해 게이트 발생은 자연 현상에 따른 사고이며 거기에 대한 각국 및 물리학회의 책임을 부인할 것이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금 및 구호 물품을 보내고, 대(對)몬스터 방어전에 필요한 전문가를 파견해주기로 했다.

수에즈 게이트는 타이탄도 한 손 안에 꼽힐 정도로 나온 작은 게이트였기 때문에 이집트가 거의 모든 피해를 입고 물량이 동난 게이트였다. 지중해의 많은 나라들은 몬스터 게이트에 대한 경험이 적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A급 몬스터 게이트인 동해 게이트를 25년 간 관리한 경험이 있었고 중국은 지금도 세계 최대 규모의 남중국해 게이트를 관리하고 있었다. 미국은 심지어 본토 내에 활성화된 아칸소 다이아몬드 국립공원 게이트를 관리하고 있다. 도움이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 외로도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많은 말이 오고 갔다. 몬스터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자연재해였다. 거기에 나라 하나의 흥망성쇠가 오고 가는 문제였기 때문에 하나만 새로 생겨도 세계를 굴리는 역학 관계가 틀어지며 조정에 들어갔다. 대체로 자국 근처가 아닌 곳에서 게이트나 전쟁이 발발하면 증시는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어쨌든 연락이 끝나자 세현 퀸은 골이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고 왕리밍도 표정이 썩었다. 그리고 둘이 눈이 딱 마주치자,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야 이 망할 년아, 너 때문에 나까지…!"

"아오, 이 개새끼가 어디서 계속 이년 저년이야! 죽고 싶어서 지랄하냐, 이 돌대가리야!"

서로 이미 멱살 잡으셨다. 그러자 최이삭과 치엔위가 으아악, 하고 달려가서 그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교수님! 진정하시고…! 싸우신다고 아무것도 안 나와요!"

"그래요! 우리끼리 이러지 말자구요! 식구끼리는 서로 지켜야죠!"

다양한 이혼 케이스를 소개하는 모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가족 저리 가라 하는 모양새였다(물론 참고로 그 프로그램은 현실의 매~우 순화된 연출이다). 그래도 자기 애들(?)이 말리니 이윽고 씩씩거리면서 떨어졌다. 최이삭이 휴, 하고 한숨을 쉬고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교수님…, 왕 교수님 같은 분은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싸움을 건다고 왜 항상 받으세요…."

"뭐라고?"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최이삭은 아차 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기보다 키가 큰 최이삭의 정수리를 꽉 잡았다. 그는 자동적으로 무릎과 허리를 굽혀야 했다.

"다시 말해봐."

"아, 아니…! 아니, 교수님, 그, 그게, 그게 아니라…."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지금 나한테 훈계하냐? 훈계? 어? 후운계에~?! 건방지게...!"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저는…! 저는 교수님이 쓸데없이 히, 힘 빼시는 것 같아서…."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야, 이 멍청아. 피하는 건 상책이 아니야. 기어오르는 놈은 작신작신 밟아줘야 한다고. 피하면 뭐라고 생각하는 줄 아냐? 저것들은 지들이 이겼다고 생각해. 그러면 더 피곤해. 계속 쭉 피곤해진다고. 알겠냐?"

"네, 네…. 교,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네…."

"하, 피하는 게 상책? 어이가 없네. 그런 건 루저들이 자기합리화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 버러지야. 너 루저냐? 어? 너 루저야?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냐? 루저같이 생각하고 루저같이 행동하면 그게 루저야, 이 멍청아!! 니가 그러니까 그릇이 간장 종지 같아서 별거 아닌 거에도 맨날 질질 짜고! 큰일을 못 하는 거 아냐!!"

"자, 잘못했습니다, 교수님. 제가 실언을…."

"세상에 실수가 어디 있어!! 너는! 어떻게!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이렇게…!! 아, 또 열 받네. 야, 너 이래 가지고 나 없으면 어쩔 건데? 어? 어쩔 거냐고. 너 나 죽으면 노친네가 너 얼마나 밀어줄 거 같아? 그 노친네가 보통 노친네냐, 어? 너 대가리 그렇게 안 돌아가고 처신 그렇게 못하면 노친네 금방 너 버린다? 알아?!!"

최이삭은 그대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그녀가 얼굴에 불 같은 노기를 띄고 벼락같이 화를 내니 그는 반사적으로 덜덜 떨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근래에는 이런 적이 전혀 없었는데….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던 그때로.

"이 버러지만도 못한 쓰레기 같은 게 어디서 교수 말에 토를 달고…!"

"교수님, 그게 그게 아니라…!"

"닥쳐! 말대꾸? 너 지금 나한테 말대꾸했냐? 감히!"

게다가 왕리밍 쪽도 마찬가지로 치엔위의 말꼬투리를 잡아서 쥐 잡는 듯이 잡고 있었다. 어른들 둘 다 지금 서로에 대한 분이 안 풀리는 것이다. 그나마 저쪽보다는 이쪽이 양반인지 덜(?) 폭력적이게 보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

"…안 말려?"

"어?"

유리가 하우빈을 보았다. 하우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말리냐고."

하우빈도 야금야금 유리의 옆에서 같이 식량을 축내고 있었다. 다시금 건조 식량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에이, 그래도 다 교수님이 선배님 좋아하셔서 저러시는 거야. 걱정하는 마음 없으면 왜 저러시겠어? 우리 교수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폭력 가정에서 자라는 유난히 해맑은, 그런 막내….

그렇게 추락 비행차 탑승객들은 끊임없이 고성이 오고 갔…, 아니, 기본적으로 큰소리를 내는 건 세현 퀸과 왕리밍뿐이었고 유리는 하우빈을 따라 곧 현실을 외면(?)했으며 알렉스는 그녀의 시선을 끌려고 말려보다가 같이 머리채를 잡힐 뻔했다. 군인들만이 이제 하릴없이 그것을 멀찍이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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