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죽이는 마법 (1)
"<엘 드라카> 시즌 개최 45주년을 맞이하며 TFC는 명실상부 세계인이 사랑하는 최고의 스포츠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2127년 TFC 올해의 선수 시상식>에 오신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사람들은 연맹장의 말이 한 문장 끝낼 때마다 박수를 쳤다. 2128년 2월 10일 토요일, 올해도 어김없이 한 해를 넘긴 이 시작되었다.
TFC, Team Fighting Championship은 꽤나 오래된 스포츠를 기원으로 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는 사람은 로마의 검투사 시합까지 치는 경우도 있었다. 강한 남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스포츠로, 마도사, 소드마스터와 같은 초인들이 살육도 불사하며 팀전을 벌이는 경기였다.
하늘이 높을 줄 모르는 샴페인 타워의 잔이 조명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올해의 선수 시상식>을 맞이하여 초대된 클럽의 감독과 선수들, 연맹 및 위원회 회원, 셀레브리티가 파티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취재진의 열기가 뜨거워 스트리퍼들이 대놓고 옷을 벗진 못했지만 반짝이는 가면을 쓴 여자들이 가슴골과 양쪽 다리가 다 드러나는 스팽글이 잔뜩 달린 반짝이는 무대복을 입고 벽에 늘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미 가수들이 몇 번의 화려한 공연을 끝낸 뒤였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흑백의 가면을 쓴 여자와 남자들이 회장 안을 천천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자태가 마음에 든 선수나 사람들이 그들과 하룻밤의 가격을 흥정하곤 했다.
"못 보던 선수인데?"
"아, 저희 클럽 루키입니다. 다음 시즌에 데뷔할 겁니다."
"체격이 아주 좋구만?"
그런 말에 세현이 귀를 쫑긋 세웠다. 돌아보니 키가 훌쩍하게 큰 남자 한 명을 중년 남자가 위원회의 누군가에게 소개를 해주고 있었다.
'루키? 루키가 좋지. 젊다는 거 아냐? 튼튼하고.'
TFC 선수들의 난봉질이야 유명하니 기왕이면 약이나 여자에 덜 찌든 남자가 좋았다. 병도 걱정되고 약에 찌든 정기가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니 말이다.
"어디 출신인가?"
"용병 출신이 아닙니다. 저희 클럽에서 재작년부터 유스팀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는데 거기 출신입니다. 남중국해에 18개월 있다가 이번 달 귀국했습니다."
"오? <서던컵스>?"
위원이 루키라는 젊은 남자를 뚫어져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누구나 루키에게 관심을 보인다. TFC야말로 루키즘이 횡행하는 곳이었다. 언제나 더 강하고 더 젊고 더 아름다운 남자가 나온다. 그게 TFC, 엘 드라카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스팀이라…. 이름이?"
"알렉스 킴이라고 합니다."
남자다운 목소리였다. 청년다운 에너지와 섹시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남자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많은 남자들이 있었지만, 세현은 그쪽에 눈길이 갔다.
"그래. 그래. 다음 시즌에서 활약을 기대함세."
알렉스 킴이라는 루키가 위원과 악수를 하면서 세현 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 생기 있는 탄탄한 피부, 거기에 이목구비까지 아주 번듯한 미남이었다. 반짝이는 청색 눈동자, 입술의 혈색도 좋고 피부도 탱탱했다. 확실히 젊다, 아니, 어리다. 몇 년만 지나면 정말 근사한 남자가 될 것 같다. 거기에 어쩐지 순결해 보이기까지.
'그래…, 기왕이면 깨끗한 놈으로….'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그 루키가 위원에게서도, 감독에게서도 멀어져 혼자가 되자 세현은 그에게 접근했다.
"자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않겠나?"
세현이 그에게 말을 걸자 그는 약간 놀란 얼굴로 세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하얀 가면을 쓴 그녀의 얼굴을 스쳐지나 그녀의 가슴으로 시선을 내렸다. 많은 남자들이 그러듯이 말이다.
"어…, 음…. 그…, 나는 이런 건…."
그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루키니 뭐니 하더니 다른 선수와는 다르게 개념이 아직 남아있는 기색이었다. 오케이. 너로 정했다, 루키. 세현은 더 이상 선수들을 헤집고 다니지 않기로 했다.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조금 곤란하다.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거였는데."
"그… 정도면 뭐…."
그는 세현의 가슴을 힐끔거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돌리곤 했다. 세현은 그에게 잔을 건넸다. 세현이 자신의 잔을 한 모금 마실 때 그가 세현이 준 잔을 벌컥 마시는 게 보였다.
'오케이.'
그리고 세현은 말없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잠시 뒤 약기운이 도는지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서서히 그의 눈이 감겼다. 그 순간 세현은 마법을 써서 그의 몸을 지탱하고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그리곤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조용히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
지독한 향수 냄새. 정신이 드는 순간 알렉스 킴이 느낀 것이었다. 진짜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독한 알콜향이 났다.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뭐…, 뭐야. 씨발…."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팔과 다리가 묶여 있었다. 역시나 움직이지 않았다. 수갑 같은 게 부딪치며 철컹철컹 소리가 났다. 알렉스는 당황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건 그가 마음먹은 순간 순식간에 부서져야 정상이었다. 이상했다.
'옷은 어디 갔어!'
온몸의 피부에 서늘한 공기가 맞닿았다. 실오라기 한 올도 거치지 않은 완벽한 알몸이었다. 그는 분명 방금까지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된 올해의 선수를 뽑기 위한 파티에 참석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온몸의 감각이 비상하게 예민해졌다.
"누구야, 씨발. 죽고 싶어? 풀어!! 개년아, 진짜 죽여 버린다!!"
어떤 정신 나간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가 유스팀 출신으로 용병으로 팔려가 못 볼 꼴을 보며 큰 건 아니라지만 남중국해에서 18개월이나 몬스터를 썰고 다녔던 소드마스터였고 TFC 선수였다. 아니, 오히려 용병짓을 안 했기 때문에 사람 하나 죽지 않을 정도로 병신 만드는 방법은 아주 잘 배워놓은 상태였다.
그가 계속 소리를 지르니 시끄럽다고 생각한 것인지 갑자기 입에 딱딱한 뭐가 물렸다. 그가 반항을 하며 고개를 휘저었으나 결국 머리에 씌워졌다. 이로 씹어도 부서지지가 않았다. 근거리에서 포탄을 쏴도 막는 게 소드마스터였다.
‘마도구인가?’
그의 힘으로도 부서지지 않는다면 이건 다이아몬드 같은 강도가 높은 광물이거나 마법이 들어간 물건이란 소리였다. 얼핏 수업시간에 졸다가 들은 기억이 난다. 하여튼 지금 알렉스의 팔다리는 전부 침대의 끝머리에 묶여 쫙쫙 벌려진 상태였다.
"으읍…!!! 으읍!!"
누군가 그의 다리 사이로 올라왔다. 그쪽이 약간 가라앉는 느낌이 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의 거시기를 잡았다.
"읍!!!"
'씨팔!!! 뭐야!!!'
소름이 쫙 끼쳤다. 다시 말하지만 알렉스 킴은 키 205cm의 거구에 괴력을 가진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자신이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소드마스터 남자라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을 것이다. 웬만한 남자들도!
아직 딱지도 안 뗐는데!
"읍!! 읍읍!!!"
'잠깐만! 싫어, 쌍년아!! 미친년!!'
아무리 속으로 욕을 해봤자 그녀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를 강간하기로 마음먹은 이 미친년은 이제 입으로 그의 것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헉! 하고 허리를 펄떡 띄웠다. 부드러운 것이 닿는다 싶더니 이내 데일 정도로 뜨거운 혀가 닿았다. 그리고 그의 귀두 부분만 겨우 입으로 물고 쭙쭙 빨면서 손으로 기둥을 주물렀다.
"으응...!"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자위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위험 상황이라 인지한 그의 감각은 평소의 수십 배로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빨고 있는 끝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귀두를 전부 삼켜 진공을 만들어서 빨며 혀를 돌렸다. 그러자 알렉스는 동정답게 순식간에 사정했다.
"읏…."
강간범이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꿀꺽. 분명히 삼켰다. 이 변태년!!!! 그리곤 그녀가 중얼거렸다.
"빠르군…."
알렉스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 빨개진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쪽팔렸기 때문이다.
'가, 갑자기 그렇게 빠니까…!! 아니, 처음이라서! 누구든 처음부터 잘하진 못 하니까…! 아니, 씨파알!! 강간범 주제에!! 변태!!!'
알렉스는 마음 속으로나마 변명을 하려고 하다가 다시 욕을 했다. 그녀는 알렉스를 한 번 싸게 만들었다고 관둘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눈을 가려 더욱 예민해진 귀에 질척, 찌걱 이런 소리와 작은 한숨이 들린다. 알렉스는 심장이 폭주기관차처럼 뛰는 걸 느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미, 미친…. 이렇게 하는 거야? 이대로? 진짜? 진짜로?!!'
그의 것은 여전히 피가 몰려서 솟아 있었다. 아랫배가 뻐근하고 거기의 근육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으읍!! 읍읍읍!!"
'제발! 싫어! 싫다고!! 변태년한테 이렇게 따먹히긴 싫다고!!! 분명히 못생겼을 거야!! 분명히 돼지일 거야!!! 싫어! 예쁜 여자랑 하고 싶어!!!'
알렉스는 헉,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 나한테는 하린이가 있다고!! 변태는 싫다고, 씨파아아아아알!!'
그도 여자친구와 나름의 판타지가 있는 만 18세 청년이었던 것이다!
*
인류 멸망이 도래한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일어날 것인가. 어떤 신문사에서 랭킹을 매긴 적이 있었다.
9위, 외계인 침공
8위, 지구 자기장 역전
7위, 환경오염
6위, 대규모 화산폭발
5위, 소행성 충돌
4위, 소빙하기
3위, 핵전쟁 발발
2위, 슈퍼전염병 창궐
그리고 대망의 1위,
세현 퀸 교수의 중력 마법 실험 폭주
일주일 전, 진동 우주론을 입증하고자 한 111차 소형 빅크런치(Big Crunch) 실험은 다행히 세계 멸망 같은 건 일으키지 않고 끝났다. 다만 시현자였던 물리학자이자 마도사, 세현 퀸 교수가 마력 드레이닝이라는 주화입마에 걸리고 말았다는 개인사적인 멸망만을 일으켰을 뿐이다.
[뭐, 뭐야.]
그녀의 몸에 단 마력개측기에서 대규모 마력 시현이 계속 측정되고 있었으나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마법을 구현하고 있지 않았다. 실험을 위하여 항시 정결하게 모아둔 마력이 순식간에 쭉쭉 빨려 나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마도 순환을 통하여 마력을 모아도 흘러 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대로라면 마력이 다 빠져나가고 생명력까지 다 빨려 죽고 말 것이다.
[오호, 앞으로 세계 멸망은 안 일어나겠구만!]
그게 그 세기적 실험 실패를 참관하던 노망나기 일보직전인 할망구 학과장의 감상이었다.
'누가 순순히 죽을 줄 알고…!'
그녀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세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윤활제를 잔뜩 짜서 자신의 몸 안에 스스로 손가락을 넣었다. 각오는 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도 젊고! 튼튼한! 남자의 크기가 아주 대단했다.
멋모르던 아주 어린 시절에 파트너 몇 명과 몇 번 해보고는 흥미를 잃어버렸던지라 안 한 지 10년이 되어간다. 연구에만 매진해서 매일 철야를 하다 보니 자위 같은 것도 별로 하지 없고....
"으읍!! 읍읍!!"
가엽게도 세현의 먹이가 된 젊고! 튼튼한! 남자는 세현의 마도구에 묶여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중력 마법 외에는 그다지 안 쓰니까 좀 불안불안 하네....'
그렇게 남자한테 영 관심 끊고 산 인생이었지만 신이 빚었구나, 싶은 몸매의 남자가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입에 빨간 개구개를 물고 있는 것은 섹시했다. 온몸의 근육이 엄청 크고 단단했다. 숱이 많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 우뚝 솟은 높은 코, 분홍빛에 글래머러스한 입술, 남자답고 아름다운 골격을 가진 그는 객관적으로도 굉장한 미남자였다. 얼굴을 가려놓고 몸만 보니 앳된 티는커녕 너무나 남자답다. 붉어진 얼굴로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반항하고 있었다(시끄러웠다). 목과 팔, 배, 거시기(?)에 전부 울끈불끈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아니, 방금 분명히 입으로 한 번 뺐는데도 이렇게 팔팔하다니….
'진짜 효과가 있네….'
죽기 일보직전인데 뭘 가릴쏘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해본 건데 진짜 효과가 있었다. 그 노친네가 또 노망을 떠나 싶었더니. 손목 아래에 심어놓은 마력측정기의 수치가 확 올라가 있었다. 방금 입으로 섭취한 것 덕분이었다.
'한 번에 4천만 정돈가…. 꽤 많군.'
마도 순환으로 1시간에 모이는 마력은 300만 정도였다. 집중해서 모으면 400만 정도. 근데 지금 드레이닝은 시간당 500만. 그녀는 평소에 수치 3억이 넘는 마력을 모아두었다. 보통 마도사들은 부담스러워서 이 정도로 안 모은다. 하지만 그녀는 실험을 앞두면 10억도 모았다. 한 마도사가 모을 수 있는 한계까지 모은다는 것이다. 마도 순환을 하는 건 정말 지루하고 귀찮은 짓이었다. 근데 이런 젊고! 튼튼한! 소드마스터를 한 번 따먹으면 그녀가 종일 모을 마력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거면 굳이 드레이닝 때문에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소드마스터들을 따먹고 다녔겠다.
'그 노친네…. 이런 꿀팁(?)을 혼자서만 알고 있었다니.'
이런 사실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으니 정말 학과장만의 노하우(?)였던 것 같다. 그걸 제자가 절체절명 기로에 서게 되어서야 털어놓다니. 배신감이 사무친다. 저번 실험 실패 이후 일주일만에 마력 수치가 5천만 이하로 떨어져 단순 계산으로도 48시간 내에 마력이 전부 소진되고, 아마 그후로는 거의 순식간에 생기가 빨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서야 ‘말해주기 싫은데~’ 라는 투로 말해준 할망구였다.
'내가 언젠가 기필코 복수한다, 그 망할 노친네.'
그녀는 이를 갈면서 몸을 풀었다. 안에 들어온 자신의 손가락도 뭔가 불쾌하게 느껴지는데 이 벌건 덩어리를 어떻게 넣나 한숨부터 나왔다. 손으로 크게 디귿(ㄷ)자를 만들어야 하는 크기….
어쨌든 절체절명의 위기에, 그녀의 지푸라기로 선택된 이 루키에게는 그녀도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만.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그의 피부에 닿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의 커다란 기둥 위에 입구를 맞추었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혹여나 들킬 건덕지라도 남기는 건 사양이다.
‘생으로 하는 건 처음인데….’
그녀는 그대로 그의 얼굴 쪽에 등을 보인 채 넣으려고 했다. 그는 여전히 반항을 멈추지 않다가 기겁을 했다.
"허억…. 으읍…!!"
'아, 젠장….'
안 들어간다. 세현은 윤활제를 잔뜩 그의 기둥에다가 발랐다. 그의 허리 양쪽에 발꿈치를 든 자세로 앉아 그의 다리 사이 침대를 한 손으로 짚으며 균형을 잡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거기를 이완하려고 노력했다.
"후… 후… 하…."
라마즈 호흡법까지 써봤다. 진짜 안 들어갔다.
"아, 진짜…. 왜 이렇게 커."
그녀는 작게 신경질을 내며 중얼거렸다. 이것보단 조금 작은 놈으로 골랐어야 했나 보다. 하긴…, 딱 봐도 덩치가 너무 크긴 했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해있어도 기왕이면 제일 싱싱하고 튼튼한 걸로 고른 건데….
"하아…. 으읏…. 아…. 아파…."
그래도 발기가 지속이 되어서 다행이다. 하여튼 젊은 남자란, 쯧. 그래서 그녀도 구사일생한 거겠지만. 그렇게 계속 집어넣으려고 입구를 뻐금거리면서 비비고 돌리고 문지르고 그의 귀두에 물을 바르다 보니 그가 헐떡거리다가 움찔하며 숨을 들이켰다.
"읍…! 헉…!! 으읍…! 으으읍…!!!"
그가 다시 사정하고 만 것이다.
'아깝다….'
남자가 사정을 하는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먹는 건 너무 맛없어서 싫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으로 그의 정기를 훔쳐 입가로 가져가 핥았다. 으음, 이것만으로 몇 백만은 오른 것 같다.
'입구에 묻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군….'
정확하게 흡입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세현은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넣기로 했다. 이런 것도 나이 다 들어서 하려니 기운 빠진다. 빨리 해야겠다.
"아으…."
아주 그냥 뭉개겠다는 기분으로 팍 주저 앉았더니 그의 거시기가 아니라 그녀의 것이 뭉개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끝부분이 전혀 안 들어갈 듯하다가 탱! 하고 튕겨 들어왔다.
"으으윽…!!"
그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도 아픈 것일까. 그녀는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밑이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으…. 젠장, 진짜 아프네.'
제기랄, 방광염은 확정이다. 그냥 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쉬운 건 그녀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 1cm 정도를 왔다갔다하며 겨우 엉덩이를 흔들었다.
"으읏…. 윽…. 읏…."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욱욱 신음을 냈다. 이런 고통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푸라기 루키 군은 또 금세 사정을 해줌으로써 그녀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었다.
"아…!"
입으로 마시는 것은 소화기를 지나기 때문에 그 느낌이 덜했던 것일까. 밑을 통해서 들어오는 그의 정기는 마치 뜨거운 것을 쏟아 붓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배 속이 엄청 화끈거렸다. 그녀는 한손으로 짚고 있던 침대 시트를 꽉 잡으며 왼손목을 다시 확인했다.
'5천 5백만… 정돈가. 와…, 진짜 할 만….'
…하지는 않다. 진짜 찢어진 것 같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현재 그녀의 마력 수치는 1억 4천만 정도. 한 번에 5천 5백만이면….
'이런 기회 언제 올지도 모르고 그냥 최대한 채우자.'
그럼…, 앞으로 15번인가.
*
그렇게 3시간 정도가 지났다.
마력은 채워졌지만 명줄은 역시 짧아진 것 같다. 세현 퀸은 섹스로 다리가 후들후들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 기분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일단 다리 사이가 찢어발겨진 상태였다. 하다 보니까 계속 말라서 윤활제를 탈탈 털어 써야 했다. 다행히도 루키 군이 꽤 조루(?)라서 생각보다는 빨리 끝났다. 그의 정기는 그녀의 안으로 전부 흡수가 되었는지 그렇게 많이 쌌는데도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천하의 소드마스터도 그 정도로 빨리니 아주 지쳐 늘어져 헐떡거리고만 있었다. 그래도 죽진 않았다. 보통 남자였으면 벌써 죽었겠지. 그의 온몸은 정액뿐만이 아니라 체액이란 체액은 전부 뿜어냈다. 땀도 엄청 흘리고 침에 눈물까지 줄줄 흘린 상태였다. 탈수 증세가 보인다. 그녀는 옷을 챙겨 입고 그의 개구개를 벗겼다. 그의 타액으로 잔뜩 젖은 개구개였다. 입을 벌리고 그렇게 오래 있었으니 입을 몇 번이나 뻐끔거리며 겨우 닫았다.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의 안에 있는 양심의 터럭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역시 약간은 미안하다.
"으윽…. 씨발…. 너… , 이 개년아…, 내가 진짜 죽여 버린다…. 으윽…."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그렇게 말했다. 20번 가까이 뽑힌 남자는 그런 말도 겨우 했다. 세현은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녀는 준비해둔 물에 예의 수면제를 타서 그의 입술에 기울였다. 목이 엄청 탔던 모양인지 그녀가 입에 물을 대주자 그는 순간 경계도 하지 못하고 벌컥 마셨다.
'미안한 것과는 별개로 바보로군.'
세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곧 잠들었다. 세현은 그가 완전히 잠이 들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녀는 마도사였지만 공격 마법 같은 것은 그저 이론으로만 알 뿐 해본 적도 없었으며 그를 다치지 않게 하고 멈출 만한 방법도 마땅히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할 생각이었다. 마법으로 무고한 시민을 다치게 하면 이래저래 귀찮아진다. 게다가 마도사를 상대하는 소드마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원샷원킬을 목적으로 덤빈다고 하니까. 그렇게 몇 번이나 확인을 한 끝에 구속구를 풀고 챙긴 뒤 그의 온몸과 침대에서 그녀의 흔적을 마법을 이용해서 증발 및 변성시키고는 머리맡에 돈과 쪽지를 남겼다. 마지막으로 잠이 든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밖으로 나왔다.
*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비행차에 올라탄 알렉스 킴의 지금 컨디션은 아주 최악이었다. <올해의 선수> 시상식으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는 상하이 연고 TFC 클럽 <서던라이온>의 홈구장인 <상해대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올해부터 1군 훈련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훈련은 5월부터였지만 미리 한 번 가서 1군 감독 및 코치진과 인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여자 말하는 거지? 너랑 같이 방에 들어간?"
그의 매니저인 신종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알렉스는 그에게 스위스 취리히의 한 호텔에서 CCTV 영상을 따 달라고 미리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왜? 번호 안 주디?"
"그런 거 아냐, 씨발…. 이 개같은 년, 내가 잡으면 목을 비틀어 버릴 거라고."
"어우, 야. 그런 험한 말을. 애가 남중국해를 한 번 갔다 왔다고 완전 무서워졌어."
신종현이 킬킬거렸다.
"왜? 이 누님이 이상한 플레이라도 시키디? 아니, 하기 싫은 거 억지로 당할 덩치도 아니면서 왜 그래?"
"……."
그걸 하게 만들었다고, 이 '누님'이라는 변태가! CCTV의 영상에 나오는 모습으로 보아 정신이 없는 틈에도 그가 제 발로 방에 걸어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데다가 디바이스는 회로가 전부 타버려 아무것도 저장이 되어 있지 않아 신고도 못할 상황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즉시 경찰에 알렸다면 그녀를 잡는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디바이스 회로가 타버린 것도 이상하고 약을 먹은 것도 바로 검사를 받으면 검출이 될 법도 하니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고…. 그렇게 증명을 하자면 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씨발, 쪽팔린다. 개쪽이다! 이 덩치로 여자한테 강간을 당하다니!!
'처음이었는데…!!'
물론 그는 갓 만 18세가 된 청년으로 남중국해까지 갔다 왔으니 알 거 모를 거 다 안다고 할 순 있었다. 그래도 클럽의 관리하에 몬스터전에 참여한 것이라 약과 여자 문제는 부모의 요청에 의하여 철저하게 금해진 채로 생활해야 했으며(뭐, 까진 애들은 어떻게든 했겠지만…)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큰 불만은 없었다. 그는 남중국해로 떠나 오기 바로 직전부터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고 훈련이 끝나고 돌아가면 성인이니 마음 놓고! 깨끗한 채로! 그녀와 황홀한 밤을 보낼 수 있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드디어 훈련이 끝나고 그는 <올해의 선수> 시상식 전날 남중국해에서 바로 스위스로 날아가 시상식에 참여했고 그 날을 기점으로 만 18세가 되었다. 시상식 날이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여자친구와도 문자를 주고받으며 재회할 기대를 나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순결을 그 변태같은 쌍년이 가로챈 것이다.
'그것도…, 그것도…! 18번이나…. 씨발. 씨발…. 미친…. 씨발, 진짜 좆같다.'
1 8번이라는 숫자가 가능하다는 걸 몸으로 확인했다.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급사했을 숫자다. 그 미친년은 얼마나 섹스에 미쳤으면 그걸 18번이나 아래위로 먹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알렉스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몇 번이나 영상을 반복해서 틀었다. 키가 큰 여자였다. 못해도 170대 후반. 머리를 틀어 올려서 짧은지 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영상에서 보이기로는 갈색 머리였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약을 먹기 바로 직전에 잠깐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 외에는 기억이 흐릿했다. 목소리는 조금 기억이 난다. 여자 치고 약간 허스키하고 야한 목소리….
"……."
펑, 하고 알렉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종현이 놀렸다.
"왜애, 어? 누님과의 뜨거운 밤이 떠오르냐? 어?"
"씨팔…."
"좋겠다? 엉? 저런 누님이 덮쳐주고. 몸매 죽이는데? 캬, 먹을 만했겠다."
"닥쳐, 씨발…."
알렉스는 두 손으로 손날을 세워 이마에 깍지를 끼고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너무 화끈화끈 했다.
'씨발….'
빨아줬을 때는 그냥 너무 빨리 가버려서 좋고 나쁘고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 넣으려고 시도하다가 가버렸을 때도 풀려고 몸부림을 치느라 그냥 찍 싸버렸다. 그리고 삽입이 성공하고 거의 바로 사정했을 땐 사실 너무 조여서 아파 뒤지는 줄 알았다. 그 뒤도 아파 뒤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천국과 홍콩을 왔다갔다했다.
그녀는 아주 성실하게, 기복없이 같은 박자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가 가든지 말든지 말이다. 그게 아주 그를 죽일 뻔했다. 눈이 가려지고 묶이고 강간을 당한다는 위험 상황에 전신의 감각은 유례없이 예민해져 있었고 심지어 싸고 있어서 엄청 민감한데 신경도 안 쓰고 그렇게 조여서 빨기만 하니까 그건…. 다른 곳은 만지지도 않고 닿지도 않고 오로지 그의 남성기와 그녀의 여성기만이 결합하여 교접했다. 그것뿐이었는데. 너무나 충격적이고 강렬했다. 그녀의 느낌이 화상처럼 몸 깊숙이 남아 있었다.
점점 젖어가는 시트. 텅 비어가는 단전. 소리를 질러 따가워진 자신의 목과 상처가 남을 정도로 꽉 조인 손목과 발목의 쓰라림. 누군가의 뜨거운 피부. 숨소리.
섹스는 몸과 마음의 교류라고 아빠한테서 배웠다. 다 개구라였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런 걸 18번이나 했더니 마지막엔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서 죽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강대한 그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활기가 다 소진될 정도로 쥐어 짜인 것이다. 그런데도 황홀했다.
'미친년. 변태년. 진짜 죽여 버릴 거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굴욕적이었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여자한테(물론 개변태강간범년이니 최악의 인간말종이겠지만)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눈이 가려지고 턱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딱딱한 재갈을 물고 짐승 같은 소리만 내면서 강간당했는데 어떻게 기분이 안 나쁠 수가 있겠는가. 씨팔, 그렇게 느낀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력감 앞에서도 뭐가 좋다고 그렇게 느끼다니. 더 했다간 정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는데도 그녀가 하는 대로 막, 계속 막…! 그게 기분이 좋았던 자신의 몸도 싫어졌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문득문득 그때의 느낌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내 동정 돌려내, 개같은 변태년.'
그는 도저히 여자친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남중국해에 가기 직전, 반에서 아이돌이나 다름없었던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받아 주어서 사귀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자주 전화하고 메시지도 주고받아서 장거리였지만 그래도 연애를 했다는 기분을 제법 느낄 수 있었다. 이제야, 이제야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죄책감에 연락도 못 하겠다.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씨파알…."
알렉스는 얼굴을 쥐어짜며 끙끙거렸다. 그는 다시 영상을 보았다.
"이걸로 이년 찾아낼 수는 없을까, 형? 어?"
"글쎄…. 이 여자가 범죄자라서 신고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은… 그럴 수 있을까?"
신종현도 그런 쪽으로는 아는 바가 없는지 그렇게 질문으로 답했다.
*
세현 킴은 당연하다는 듯이 일주일이 넘게 방광염과 열상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조금이라도 흐를까 봐 아까워하며 그 무식하게 큰 것을 몇 시간이나 끼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명상도 되지 않을 정도라 아는 마도의사에게 부탁해서 결국 치료했다. 그녀는 누구랑 했길래 이 정도나 다쳤냐며 놀라워했다. 세현은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후우…."
그날 하루로 10억에 가까운 마력을 모았으나 하루 18시간씩 명상을 해서 마도 순환을 해도 하루 5천만 정도의 마력이 날아갔다. 그날로부터 일주일. 이제 그녀의 목숨은 다시 2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세계적인 과학자였다. 지금도 그 노망나기 일보직전의 할망구를 포함하여 학교와 정부에서 유명한 의학자를 잔뜩 모아 세현의 몸을 검사하고 드레이닝을 막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방법이 요원해 보였다.
'새로 소드마스터를 구해야 한다…. 어디서?'
그때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된 연맹 파티의 티켓을 학과장이 줘서 갈 수 있었지만 일반인이 어떻게 TFC 선수들을 만날 것인가. 그리고 주변에 소드마스터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런 프라이버시는 서로 잘 안 알려주는 법이다. 그렇다고 소드마스터를 따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오픈하고 그들을 모으기에는 좀…, 쪽팔린다. 그녀는 이름이 있는 학자이고 교수였다. 학계나 아래 학생들이 그녀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체면과 위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건 싫었다.
'데이팅 앱에도 올려봤는데 이상한 연락만 잔뜩 오고 신빙성이 없다….'
그냥 죽으라고 염불을 외는구나, 시팔. 세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 남한테 내가 차린 밥상을 넘겨주려고 지금까지 열심히 연구한 게 아니다….'
우주 창조와 멸망의 비밀. 중력과 시간의 법칙. 그리고 그 너머. 그 모든 것을 꿰뚫는 진리를 깨우치고 그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바로 세현 퀸, 자신이었다. 만약에 생각대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어쩌면 그녀는 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근데 그걸 이제와 다른 사람한테…. 이가 갈리는 일이다.
그녀가 링겔을 맞으며 마도 순환을 하다가 밖으로 나갔을 땐 백발이 성성한 학과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몸은 좀 괜찮고?"
"안 괜찮습니다."
"얼마나 남았어?"
그녀는 학과장에게 손목을 보여주었다. 그녀도 계산이 빨랐다.
"최대로 해서 한 2주 남았나. 나는 데는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다더니만, 끌끌!"
그녀가 웃었다. 세현은 열 받았다.
"새파랗게 젊은 제자보다 늦게 가셔서 매우 좋으시겠습니다?"
"당연하지. 말이라고."
세현은 부글부글한 얼굴로 지끈지끈한 미간을 눌렀다.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학과장님은 소드마스터들 어디서 따먹고 다닌 겁니까? 저번 파티 말고는 어디서 만나야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
"엉? 그걸 아직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였어?"
학과장이 쪼글쪼글한 입술로 커피를 마시며 늘어진 눈썹을 들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
"역시 비법 있었던 거죠?"
소드마스터로 마력 모리는 꿀팁도 이제껏 숨겨왔던 그녀가 아니던가. 세현이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현은 새파랗게 젊은 자신의 목숨이 너무너무너무 아까웠다.
"이 미모?"
"…시팔…."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욕을!"
학과장이 분개했다. 세현은 공손한 자세로 다시 말했다.
"저 진짜 죽어요, 교수님."
"진짠데? 그냥 아무 구장이나 가서 가슴 까고 구경하고 있으면 한두 명 찾아와. 그러면 화장실 가서 떡쳤는데?"
"……."
이 할망구가 도대체 얼마나 막 산 거야…. 세현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소문나면 어떡해요. 랩원들이나 학생들이 알게 되면…, 학계 교수들이 알게 되면…. 끔찍하다…."
"곧 죽을 마당에 넌 그런 게 신경이 쓰이냐?"
"노친네가 너무 인생을 막 사셨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게다가 선수들 그거 완전 성병덩어리였을 텐데 안 찝찝하셨어요?"
"아, 주사는 엄청 많이 맞았지. 그래도 어쩌냐? 실험은 해야겠고 마력 모을 시간은 없고."
여자가 잘나니 어쩔 수가 없다. 학과장은 빨대로 커피를 쪽쪽 마셨다.
"아으, 그런 거 싫단 말이에요. 더러워."
"그래도 너 한 놈은 먹었으니까 지금 살아있는 거 아니냐? 그놈은 깨끗했냐?"
"예…. 루키더라구요. 어리고."
세현이 안경 밑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그렇게 대답했다. 학과장이 커피를 쪽 빨며 말했다.
"그럼 그놈 한 놈만 먹으면 되지."
"그건…, 또 나쁘지 않은 방법일지도…."
라고 중얼거리다가 세현이 한숨을 쉬었다.
"안 돼요…. 억지로 덮쳤더니 저 죽이겠다고 이를 갈더라구요."
"응? 왜 선수를 억지로 덮쳐? 걔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막는 놈들일 텐데?"
"아니…, 그냥 얼굴 까기 싫기도 하고 해서 여차 저차…, 약이랑 마법을 좀 써서…."
"니가 더 막 산다, 이년아."
"그럼 예전에 썼던 소드마스터들 연락처는 좀 있는 거 아니에요? 다 늙어도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일 텐데. 좀 돌려씁시다."
"그 새끼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있냐? 거의 다 뒈졌지. 안 뒈진 놈들은 안 돼. 내 밧때리야."
하여튼 대단한 노친네…. 세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정 안되겠으면 정말 가슴 까러 가야겠네요."
"미리 예방주사 좀 맞고."
"아…, 진짜 싫다."
세현은 그렇게 신음을 흘렸다.
*
[으읏…. 으…, 하아….]
들리는 건 최대한 억누른 작은 신음뿐이었다.
[하아…. 으읏…. 아…. 으….]
그는 또 눈이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손과 발은 풀려 있었다. 입도 자유로웠다.
[으읏…. 으…. 으으읏….]
하지만 그는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입이 풀려 있어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플 정도로 좁은 구멍이 그의 것을 느릿하고 무심한 박자로 쪽쪽 빨았다. 말도, 애정도 아무것도 없는, 그저 체액을 나누는 교접. 그런데도 그는 그저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허억…!!"
알렉스 킴은 눈을 번쩍 떴다. 새벽이었다. 속옷이 축축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방금의 꿈 때문에 온몸이 벌게졌다.
"씨발…. 씨발. 씨발."
강간을 당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몽정이라니. 씨발, 죽고 싶다. 진짜 죽고 싶다. 그는 침대를 부술 듯이 마구 몸을 펄떡거리며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날려야만 했다. 씻는 동안 결국 한 번 빼야 했다. 그러고 나니 진짜 죽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이 올라왔다.
<많이 바빠? 오히려 들어오고 나니까 연락 안 돼서 슬퍼ㅜㅜ>
하린이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그녀에게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젠장. 그는 씻고 비행차를 타고 상하이에 있는 서던라이온의 홈구장 <상해대경기장>으로 향했다. 메트로서울에서 비행차로 30분이면 도착하니 차라리 메트로서울 내에서 출퇴근하는 것보다 나았다.
훈련을 다 하고 샤워까지 한 알렉스를 태우러 매니저 신종현이 왔다. 차에 탄 알렉스는 한참 말이 없다가 불쑥 말했다.
“…그때 그 파티 명단이랑 사진 구할 순 없나?”
“응? 그거 아직도 포기 안 했냐?”
매니저 신종현이 약간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구하자면 구할 순 있지만…. 물론 내가 너한테 필요한 일은 이것저것 해줘야 하는 보모 신세긴 해도 그, 니가 여자 꼬시는 문제까지 발 벗고 나서서 해주기엔, 어? 좀 거시기 하다?”
그래도 신종현의 입장에서는 다른 용병 출신 선수보다야 유스팀 출신이 훨씬 낫다. 신종현과는 형동생 하는 알렉스였다. 그러니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꼬시는 거 아냐…. 그 여자가…."
2주일 내내 트라우마(?)에 시달린 알렉스는 결국 솔직하게 신종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어린 알렉스의 입장에서 홀로 견디기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어른이 필요했다.
"나 억지로 덮쳤어…."
"응? 땡큐네."
신종현이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대답했다. 알렉스가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팍팍 쉬었다.
"아니…, 진짜 억지로. 약 먹이고 묶어놓고 덮쳤다니까…!"
말하다 보니 열 받아서 소리쳤다. 그러자 신종현이 눈을 크게 한 번 깜박하더니 말했다.
"왜 신고 안 했대?"
"…쪽팔리잖아…. 씨발…."
신종현은 두 번 눈을 깜박이고는 말했다.
"야…, 그래도 부럽다…. 나도 그런 누님이 한 번 덮쳐줬으면 좋겠다…."
개새끼야, 니가 18번이나 뽑혀 보라고!! 형이라고 욕 안 쓰려고 했는데 욱 나올 뻔했다. 신종현이 그의 얼굴을 보고 경고했다.
"아니, 신고도 못 한 마당에 찾아서 뭐 하시게요? 니가 때렸다간 농담으로 안 끝난다?"
"그래도! 뭔가! 가만히 있기는 너무 빡친다고!! 얼굴도 모르는 년한테…!"
신종현이 헉 소리를 냈다. 약 먹여서 납치해서 묶고 눈 가리고 불타는 밤! 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와…. 너 그 누님 찾으면 나한테 꼭 소개 좀. 취미가 고상하신 거 같다."
"죽어줄래, 형?"
알렉스는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주지 못하는 신종현을 노려보았다. 알렉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감싸 쥐었다.
"그년 찾으면 죽여 버릴 거야."
"어, 야…, 그러면 내가 못 도와주지. 살인공모죈데?"
"찾는 거 도와줄 거야?"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비행차는 이미 자율비행으로 서해에 진입했다. 신종현은 자신의 멀티스크린을 공중에 띄우고 호텔에 메일을 보냈다.
"찾으면 진짜 나한테 소개 좀."
"형은…, 진짜 그러고 싶어?"
지금 서로 구멍동서라도 하자는 건가. 신종현이 연맹에 자료요청을 한 것을 받아 열어보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밤이 외로우신 누님이라면, 어? 서로 밤 외로운 동지끼리 그럴 수도 있지, 알렉스야.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거야."
"…여기서 형 확 던져버리고 싶다."
답장은 금방 왔다. 신종현은 인공지능 비서의 도움을 받아 인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보자…. 여기서 남자들 다 제끼고."
처음 말했을 때부터 쭉 슬렁슬렁 하던 신종현이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지고 알렉스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그걸 보고 있다가 가만히 말했다.
"하얀 가면 쓰고 있었어."
"스트리퍼? 음, 아닐 거 같은데. 너 묶었으면 마도구 같은 거 썼다는 거 아냐."
"응…."
"그런 거 진짜 비싼 데다가 반출도 함부로 못해. 아마 스트리퍼인 척했겠지. 너 스토커 아냐?"
"스토커?"
알렉스가 인상을 썼다.
"너 유스팀 하면서 팬도 약간 생겼잖아. 누가 처음부터 너 노리고 파티 가거나. 아, 근데 그런 경우에 입장권은 어떻게 구하냐."
신종현이 그렇게 의문을 표했지만 이미 알렉스의 머릿속에는 스토커라는 단어가 훅 박힌 상태였다.
'그래! 그러니까…! 기회는 이때다 싶으니까 완전 사람을 그렇게 쥐어짠 거 아냐! 나 좋아하니까!'
아마 알렉스는 그런 변명이라도 그녀에게서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얼굴이 상기된 채로 목록을 쭉 쳐다보았다.
"어? 마도사가 한 명 있다. 여자."
그 여자가 마도사면 약에 취한 알렉스를 마치 스스로 걸어가듯이 꾸미는 것도 마도구를 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알렉스가 눈을 번쩍 떴다.
"캘리 박. 세계물리학회 회장? 이런 사람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력이 몹시 화려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알렉스가 약간 당황했다.
"응? 뭔진 잘 모르겠지만 똑똑한 사람이라는 거지? 그런 사람이 그럴 것 같진…."
"그것보다도 원래 무슨 회장이니 뭐니 하면 나이가…, 못해도 너보다 몇 십 살은 더 나갈 텐데?"
신종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보단 젊은 여자였어. 분명히."
"나이가 몇 살로 보였는데?"
"얼굴도 제대로 못 봐서…. 여자들 나이 잘 모르겠어. 20대?"
그는 알렉스가 말하는 키워드와 연관된 사람들을 검색하여 얼굴을 보여줬지만(대부분 검색엔진에서 이름이 나올 수준의 인물들이다)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도 못 봤다면서?"
"일단…, 아까 영상 보니까 구두 신은 거 감안해도 키가 180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모델이냐. 키 존나 크네."
후보군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전부 보았는데도 알렉스는 영 애매한 얼굴이었다. 신종현도 결국 화면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뻐근한 목을 까딱까딱 구부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무슨 학횐가 뭐신가에서 어제 연맹에다가 선수들 몇 명 좀 빌려 달라고 했다더라."
"왜?"
"수에즈 게이트에서 뭔 실험을 한다는데 거기 아직 몬스터 좀 나오잖아. 소드마스터가 필요하다고."
"용병들 있는데 왜 비싸게 선수를 써? 그거 하려는 놈이 있겠어?"
"용병들 못 미덥다는 거지. 그리고 하려는 곳이 왜 없어? 우리 클럽에서 유스팀 보내서 용돈 벌이나 할까 하는 것 같던데?
그러자 알렉스가 어이가 없어서 투덜거렸다.
"아니, 우리 구단주는 돈도 많으면서 이상한 데서 수전노야."
"그러니까 부자 됐겠지."
"어…, 잠깐만."
매니저 계정으로 공지를 보는데 순간 스쳐 지나간 이름에 알렉스가 화면을 멈췄다.
"왜?"
"캘리 박. 이거 아까 우리 파티 왔다는 마도사 아냐?"
"어. 학과장. 적어도 40대 이상."
"그래도 거기 있던 여자들 중에 마도사인 건 이 여자 하나밖에 없는 거 아냐?"
"그렇지?"
"…엄청 돈 쓰면 엄청 젊어 보이는 사람들도 많잖아."
"야, 그거야 연예인들이고. 학과장이면 평생 공부만 한 여자일 텐데?"
"마도사…, 마도사일 수밖에 없어."
알렉스는 정신이 없던 와중에 문득 부유감을 느낀 기억이 떠올랐다. 그거 마도사가 사람을 공중에 띄울 때 나는 느낌이었다. 유스팀 마도사들이 가끔 소드마스터들에게 장난을 칠 때 그런 마법을 걸고는 했다.
"아닐 거 같은데…."
신종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가 말했다.
"이거 나도 할 수 있어?"
일단 이 캘리 박이라는 여자를 만나 봐야겠다.
*
2128년 2월 19일 토요일, 세현은 수에즈 게이트로 가기 전 캘리 박의 꿀팁을 실천해보기로 했다. 메트로서울 과천구 게헨-세나 구장에 가서 가슴을 까고 있기로 해본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 다 까지는 않았고, 사회의 미풍양속을 위하여 튜브탑을 입고 반 이상을 훤히 내놓고 있기는 했다. 안은 따뜻해서 다행이다. 거대한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 이상 가렸다. 다갈색 머리는 그냥 빗어서 뒤로 싹 넘겨 등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구장엔 생각보다 선수들이 별로 없어서 당황했다. 훈련하는 선수가 꽤 많다고 들었는데 지금 잔디밭 위를 돌아다니는 것들은 거의 동네 축구를 차는 느낌으로 몇몇 없었다. 구경꾼도 세현 하나뿐이었다. 잠깐은 선수들이 훈련하는 걸 구경했는데 역시나 시간 낭비라 그 뒤부터는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띄우고 논문을 정리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석양이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몇몇 없는 거대한 스타디움, 푸른 잔디밭, 그보다 더 푸른 젊음을 빛내는 젊은 남자들. 시간은 그 순간에도 준엄하게 흘러갔다.
"혼자서 이런 데서 뭐해?"
굉장히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부드러웠다. 어조는 쾌활했다. 빨강 머리에 엄청난 근육과 체격을 가진 이름 모를 선수가 미소를 지으며 세현에게 다가왔다.
'진짜네…. 그 노친네 이건 어떻게 알아낸 거냐.'
하지만 세현은 그에게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한 번 더 훑어보았다. 막 운동이 끝나 유니폼을 벗고 허벅지 반까지 오는 타이즈만 입은 반라였다. 단단한 종아리, 근육이 몇 겹이나 쪼개지는 허벅지, 커다랗고 글래머한 엉덩이, 역시나 근육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커다란 복근과 활배근, 가슴, 커다란 삼두와 이두, 팔, 시원하게 뻗은 목과 똑같이 시원한 미소를 띈 얼굴. 얼굴도 썩 잘생겼다. 뭐랄까. 평범한 남자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땀에 젖은 그의 몸은 너무나 훌륭했다.
"……."
"일단, 어디 들어갈까?"
세현이 그의 몸을 체크했듯이 그도 아주 뚫어져라 세현의 가슴을 보고 있었다. 그는 물어보지도 않고 세현의 손목을 잡아 훌쩍 자리에서 일으켰다. 세현은 몇 번이나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왜애. 나 잘해. 끝내준다니까? 가자. 천국 보여줄게."
그는 실실 웃으면서 세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땀으로 끈적했다. 짐승 같은 냄새가 났다.
"하아."
그나마 파티에서는 이런 놈이 그나마 사람 꼴로 빚어졌으니까 고를 수라도 있었다. 그 할망구, 진짜 비위가 일주일 굶은 개보다도 나은 것 같다.
'이 새끼도 딱 봐도 크다….'
그 노친네를 앞으로 진심으로 존경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세현 퀸이었다. 아직 며칠 남아서 그런 걸까. 도저히 그런 마음이 안 들었다.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일단 걸어가고 있긴 했는데…. 머릿속으로 이 새끼랑 하고 나면 걸릴 병명들이 쭈욱 나열되었다.
'그래도 안 하면 죽는다. 9일 남았다. 죽는다. 안 하면 난 9일 뒤에 죽는다. 죽는다.'
세현은 속으로 스스로를 세뇌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화장실을 딱 앞에 두자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래?"
"…못하겠다. 놔라."
그녀가 말했다.
"응?! 갑자기 왜? 나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싶어서 그러고 있었던 거 아냐?"
"응, 아니다. 놔라."
세현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떫은 감을 씹은 얼굴로 돌아섰다. 애당초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여자가 이런 식으로 화장실에서 떡 치고 나오는 게 되겠는가? 하면 아파서 뒤질 것같이 되고 방광염 직행인데? 성병 5개 정도는 확정인데? 말했다시피 그녀는 사회적 위신과 체면이 있는 클래스의 여자였다.
거기다 차라리 저번에 그 루키를 덮치듯 덮치면 모를까. 이런 데서 남자 마음대로 하는 걸 당하다니.
물론 게헨-세나를 나오고 나서는 후회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도 순환을 계속 하고는 있었지만 시간당 3백만이 안 되었다. 명상을 하지 않는 마도 순환이 효율이 떨어지는 건 맞지만 그렇다 쳐도 세현은 3백만이 넘게 모을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평정심을 잃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그냥 했어야 했나.'
세현은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그대로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숫자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시계는 느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심하면 더 빨라지기만 할 뿐이었다.
드레이닝에 걸린 마도사가 살아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대규모 마력 충전과 마법 시현을 반복해온 세현의 몸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이었다.
'유언장부터 준비해둬야겠다….'
드레이닝 따위 남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세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유언장을 작성하여 변호사 세 명의 공증을 받았다.
'억울하다….'
아니, 똑같이 대규모 중력 마법만 써온 그 할망구는 도대체 뭘 처먹고 살았길래 몸에 빵구 한 번 안 나고 멀쩡한가?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나눠 먹지….
'아…, 그 좋은 게 소드마스터였던 건가.'
세현은 역시 이대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순 없었다. 일단 오늘은 가고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차피 잠들면 마도 순환도 못해서 시간당 5백만의 마력이 손실되었으므로 그냥 밤새서 논문을 미친듯이 썼다. 커피를 수혈 받듯이 마시고 병원에 가서 성병에 관련된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는 건 다 맞았다. 그리고 다시 가슴을 까고 게헨-세나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논문을 쳐다봐도 벌써 이틀 밤을 샌 거라 정신이 멍해 손도 머리도 안 움직였다. 습관적으로 마도 순환만 얼추 하고 있을 뿐이었다.
"벌써 죽을 것 같다…."
세현이 한숨을 쉬면서 미간 사이를 주물렀다.
"뭐가?"
낮고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의 빨강 머리다. 세현은 이번엔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세현이 그렇게 앞장섰다. 역시 이대로 뒤지기는 너무나 창창한 인생이었다. 제수스 강은 ‘아싸!’ 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새로운 여자란 언제나 좋은 법이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이내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가슴 쩐다…. 안 무거워?"
"무겁다."
세현은 그렇게 말하며 여자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
그녀는 화장실 제일 끝 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넓은 화장실이었는데도 뒤의 남자가 몸을 우겨 넣듯 들어와 문을 겨우 닫았다. 그녀는 벽을 한 손으로 짚고 트레이닝복 바지를 그냥 팬티째 내렸다.
"오!"
제수스가 감탄사를 냈다.
"엄청 대담해."
"얼마나 할 수 있어?"
"응? 하고 싶은 만큼?"
제수스는 자신의 운동용 타이즈를 내리고 커다란 거물을 꺼냈다. 흉측해 보일 정도로 길고 두껍고 울퉁불퉁한 검붉은 성기였다. 이미 단단하게 섰다. 그녀는 벗은 바지 주머니에서 윤활제를 꺼내 아예 안에다 꽂고 쫙쫙 짜 넣었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면서 흥분 같은 걸 할 리가 있나. 그런 게 세 통은 더 있었다.
"뭐야. 발정 난 여자 치고 물이 별로 없나 보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해."
세현은 라마즈 호흡법을 시작했다. 넓히는 건 저번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제수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그녀의 여성기를 엄지로 쫙 벌려보았다.
'때깔 좋네.'
하얀 피부 사이로 선명한 붉은빛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것만으로 엄청 음란해 보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이다. 제수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질 입구에 자신의 흉측하고 거대한 남성기의 끝을 비볐다. 그리고 한 방에 꽂아 넣으려고 확 허리에 힘을 줬는데 그냥 그대로 위로 미끄러지고 허벅지에 그녀의 엉덩이가 찰싹 부딪쳤다.
"윽."
그녀가 작게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제수스가 인상을 썼다. 그는 다시 그녀의 음순에 귀두를 문질렀다. 그리고 일단 끝만이라도 밀어 넣으려고 힘을 줬다.
'안 들어간다? 진짜? 거짓말.'
제수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힘 좀 풀어. 안 들어가."
"알았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안 되어서 그녀도 욕지거리를 했다. 제수스는 그녀의 안에 손가락부터 넣었다. 그녀가 질색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젠장…, 손도 안 씻고!'
근데 그녀는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수가 없었다. 선글라스를 얼굴이 딱 붙여놓은 채로 이를 꽉 물었다. 손가락 한 개는 좀 뻐근해도 괜찮았는데 두 개부터는 찢어지는 줄 알았다. 세 개째부터는 저도 모르고 욱욱 하는 소리가 났다.
"젤 더 줘봐. 너 진짜 물 없네?"
세현은 그에게 윤활제가 든 통을 하나 넘겼다. 안이 다시 축축해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세현은 다시 라마즈 호흡법을 했다.
"이제…, 되려나…!"
‘아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무식한 새끼가 그냥 한 방에 반이나 처넣은 것이다.
"으윽…."
세현은 벽에 짚은 자신의 팔에 이마를 기대고 팔꿈치를 벽에 댄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동아줄 잡듯 꽉 잡았다.
'그냥 밑에다 마취제라도 맞고 올 걸 그랬다….'
다음부터는 그러는 게 나을 것 같다. 세현은 이를 꽉 물다가 턱이 아파서 팔을 물었다.
"우와…, 윽. 너 진짜…."
제수스가 신음인지 감탄인지를 흘리고는 곧 앞뒤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소리를 안 내고 싶은데도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근데 그는 전의 루키보다 몇 살 더 많다고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것 같았다. 세현은 진짜 죽을 것, 아니, 너무 아파서 죽고 싶었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
"그냥 빨리 싸."
"헉. 윽…. 왜? 완전 좋은데? 하아. 으읏…. 아."
그는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팍팍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세현이 말했다.
"빨리 싸는 게 더 좋아. 몇 번 더 하면 되잖아."
"넌?"
"나 신경 쓰지 말고."
"?"
이상한 여자. 제수스는 고개를 또 갸웃했지만 뭐, 그로서야 손해 볼 일이 없는 제안이었다. 속도를 올렸다. 여자의 조이는 질로 자신의 남성기를 마구 빨리다가 아예 끝까지 박아 넣으며 사정했다.
"아…!"
몸이 아파서 떨리는 건 처음이다. 그녀는 자신이 못 걸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이러고 꼭 살아야겠냐,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살아야지…, 젠장.'
얼굴을 돌려 손목을 확인했다. 올라갔다. 세현은 입이 까끌까끌하게 말랐다.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죽는다 싶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더 해."
"…너 괜찮냐?"
제수스는 그제야 그녀를 약간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세현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괜찮아. 한 번 더 해."
아니…, 이쪽이야 손해볼 건 없는데. 제수스는 그제야 그녀를 좀 제대로 내려다보았다. 물론 자신에게 뒤로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그녀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도 여전히 끼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차가웠다. 식은땀만 잔뜩 나 있을 뿐이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벽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그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왼쪽 팔을 만지는데 그녀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제수스는 그녀의 상의 안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대단한 가슴을 만졌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돌려 입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 마."
그녀는 입술을 피하며 선글라스를 벗기려고 하는 것도 막았다. 제수스가 말했다.
"그럼 좋은 소리라도 좀 내봐."
그러자 그녀가 선글라스의 안으로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냥 하고 빨리 싸."
"아픈 게 좋아?"
"아니."
좋다고 할까 했다가 더 아프게 할까 싶어 얼른 그렇게 말했다.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까 빨리 싸. 빨리, 많이 쌀수록 좋으니까."
"진짜 별 희한한 년을 다 보겠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할 거나 해."
"……."
그제야 제수스는 입을 다물고 허리짓을 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약간 짜증이 났다. 왜일까? 그냥 하게 해주는데.
"악…. 으윽. 하…, 으으윽…."
아파 죽을 것 같다. 아까보다 더 아프다. 세현은 신음을 참는 것도 포기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커다란 육식동물 같은 남자에게 뒤에서 끌어 안겨 마구 밑을 파이는 건 그냥 그 자체로도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정하자 그녀가 말했다.
"한 번 더."
"미친년."
제수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좀 신경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박더니 이번엔 좀 빠르게 한 번 더 사정했다.
'이제 못해. 못해. 그냥 죽고 싶어. 못해. 아파.'
몸이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열상 때문에 하반신이 전부 화끈했다. 불면과 다량의 카페인 등으로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한 번 더?"
제수스가 그녀의 몸을 뒤에서 꽉 끌어안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렇게 물었다. 세현은 그에게 껴안긴 채로 제대로 발에 힘도 주지 못한 채 매달려 있었다.
"아니…, 못 해. 빨리 빼."
제수스가 빼낼 때는 커다란 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우습게도 진짜 무릎이 휘청휘청거렸다.
"어, 야…."
"됐으니까 가."
세현은 겨우 바지와 속옷을 끌어올렸다. 엉덩이를 대고 앉을 수가 없어서 변기 커버를 손으로 짚고 숨을 골랐다. 세 번이면 대충 1억 5천만…. 이러고 겨우 3일 더 번 것일까. 이대로는 결국 얼마 못 버티고 죽고 말 것이다. 더 할 자신이 없었다.
'시발. 왜 나만 이렇게 재수가 없냐고.'
머리가 핑핑 돈다. 그녀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앉는 순간 다리 사이가 갈라지는 것 같았지만 그것마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들 마도의학을 배우라고 했을 때 조금이라도 배워 놨어야 했나. 드레이닝으로 생기를 빼앗겨 죽는 게 빠를지 이 짓을 하다가 고통으로 까무러치는 게 빠를지 모르겠다.
"야, 괜찮아? 왜 이래?"
세현이 변기커버에 팔과 얼굴을 기댄 채 축 늘어지자 제수스가 엄청 당황해서 그녀에게 손도 못 대고 허둥지둥 됐다. 세현이 선글라스 안에서 눈만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좋았어?"
그녀가 물었다. 제수스는 당황하더니 답했다.
"그거야…, 그런데…."
"그럼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 냄새 나니까."
그러자 제수스의 얼굴에 엄청난 당혹감이 스치더니 입을 뗐다.
"너 뭐야…."
"아…,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가라고."
세현은 짜증이 나서 그렇게 말하고는 콜록콜록거렸다. 할 때는 차갑더니 지금은 엄청나게 열이 난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어…, 왜 이래…."
그녀는 약간 당황하나 싶더니 방금의 고역과 이틀 밤을 샌 것으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제수스는 엄청 놀라서 그녀를 마치 종잇장 들어올리듯 휙 들어올렸다. 그녀를 들고 나와서 얼른 클럽의 주치의를 불렀다. 퇴근하기 직전인 듯한 그녀를 잡아 세웠다.
"의사 선생!! 이 여자 기절했어!!"
"너 어디 있다…. 뭐야? 너 설마 여자 팼냐!"
50대 중반의 여자는 기겁을 하며 그렇게 소리쳤다.
"미쳤어! 화장실에서 세 번 했는데…. 그 뒤에 갑자기 기절했다고!"
"뭐? 걸즈야?"
"아니…, 몰라. 할 때 내내 아파한 거 같은데…."
"억지로 했어? 외부인한테? 너 감방 가고 싶냐?"
의사가 황당해서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아니아니. 이 여자가 더 해달라고 했어. 진짜야."
그녀는 일단 제수스를 시켜 그녀를 의료실로 데리고 오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벗기고 확인을 했다.
"진짜 아팠겠네."
의사는 반투명한 유리의 너머에서 그녀에게 응급 처치를 했다. 제수스는 혼난 개처럼 가만히 의료실의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눈만 돌려서 반투명 유리에 비치는 실루엣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다시 정면으로 휙 시선을 고정했다.
"이 여자 이름이 뭐야? 연락할 만한 사람은 있어?"
"몰라…."
"쯧."
의사가 혀를 찼다.
"일단 할 만한 건 다 했다. 일어나면 집에 보내라. 난 퇴근한다."
"이, 이렇게 가게?"
"그럼 뭐? 선수도 아닌데 나 보고 계속 붙어 있으라고?"
"그래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보니까 잠 못 자서 잠든 거 같은데. 병원 데려가도 내가 한 거 이상은 못 해. 모르는 여자면 그냥 쪽지만 두고 가든가. 왜 이렇게 신경을 써?"
한두 번 하고 여자 내버리고 다니는 건 일상일 놈이었다. 의사는 퇴근을 했다. 제수스는 자신이 저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몇 번 생각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와 하나가 되었던 그녀의 몸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키스도 못하게 하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피부가 맑은 미인이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풍성하고 예뻤다. 입술이 정말 붉었다. 코도 오똑하고 턱이 약간 각이 져 귀족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얼굴이 갸름하고 예쁘다.
'뭐야…. 예쁘면서 왜 얼굴은 안 보여주고….'
몸매는 끝내주는데 얼굴은 자신이 없어서 안 보여주는 줄 알았다. 제수스는 침대의 옆에 앉아 꼼짝도 않고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그녀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유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자기랑 했던 여자가 좋아하지도 않고 끙끙 아파하다가 쓰러진 건 처음이다. 그녀는 어제 제수스를 체크할 때 한 번 눈을 마주친 것 외에는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렇게 4시간 정도 기다리니 그녀가 움찔하면서 눈을 떴다. 눈동자색은 동공의 주변만 비취색인 갈색이었다.
"예쁘다~"
제수스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가 뭔지 파악을 못 하는 거 같더니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내 선글라스…!"
"나 벌써 다 봤는데."
"악!"
"밑에 찢어졌대."
그가 크긴 커도 누구의 밑을 찢어지게 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자신의 아래를 잡고 끙끙거리자 제수스가 말했다. 그녀는 핫 하면서 시계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한숨을 쉬었다.
"잠만 자면…."
"왜 그래? 그게 뭔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절뚝거리면서 걸었고 표정은 썩었다. 그녀는 선반에서 자기 선글라스를 챙겨서 꼈다.
"벌써 해 다 졌는데?"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수스가 다시 물었다.
"이름 뭐야?"
세현은 그를 잠깐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툭 쳐내고 말했다.
"디바이스."
그러자 제수스가 그녀의 손에 자기 디바이스를 얹었다. 세현은 그의 디바이스에 수신자 판별이 불가능한 코드를 입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디바이스에 이 디바이스의 번호를 보냈다.
"항상 6시쯤 훈련 끝나는 건가?"
"응."
"그럼 그때 맞춰서 가끔 연락할게. 화장실은 역시 못 쓰겠어. 여기서 가까운 호텔이면 시간 괜찮을까?"
"응…."
까무러칠 정도로 아팠으면서 다시 제수스랑 하고 싶은 것인가. 아픈 걸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세현은 디바이스를 제수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역시 많이 아픈지 몸을 최대한 적게 움직이려고 노력하면서 천천히 의료실을 빠져나갔다. 제수스는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이름이 뭐야?"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라."
"이름 뭐야?"
이상한 여자다. 이름도 안 가르쳐주고. 보통 이런 식으로 선수들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광팬이거나 섹스광이거나 아니면 선수를 유혹해서 걸즈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자뿐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셋 다 아닌 것 같다. 그녀는 끝까지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상한 여자….'
제수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넓고 전망이 끝내주고 멋진 집이었다. 그를 위한 예쁜 여자가 6명이나 있고 말이다.
"아앗…! 아아!"
그리고 그 여자들은 차례로 제수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한 여자.'
그 와중에도 제수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한 여자.'
다음날 훈련을 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계속 관중석을 힐끔거렸다. 어제와 그제 연속으로 왔으니 그 여자가 오늘도 올까 싶었다. 그리고 격투 연습을 하던 상대에게 귀를 엄청 세게 맞았다.
"악!"
"뭔 정신을 그렇게 빼놓고 있냐?"
엄청난 덩치의 흑인, 조나단 훅이 그의 얼굴을 거의 해머로 때리듯이 치고 나선 그렇게 물었다. 아직 정규 훈련 스케줄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해 이번 주부터 게헨-세나에 나오고 있는 선수들이 몇몇 있었다. 귀가 뭉개지는 줄 알았다. 제수스는 자기 귀를 마구 문지르며 대꾸했다.
"아니, 어제 그 여자."
"아, 빨통 죽이던?"
가위바위보 해서 이틀 연속으로 이긴 제수스가 득템한 관중석 빅가슴녀를 말했다. 제수스는 여전히 자신의 귀를 문지르며 이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한 여자더라고."
"어? 왜? 완전 변태든? 난 여자가 변태인 게 그렇게 좋더라.”
그가 설레발을 쳤다. 제수스가 답했다.
"아니…."
"먹기 좀 그럴 정도로 못 생겼어?"
"아니."
격투 연습을 봐주던 코치가 10분 휴식을 외치자 제수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서 그녀가 앉아 있었던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몰라…. 그냥 이상한 여자."
"뭐, 영 이상하면 나한테 넘기고."
"싫어, 새끼야."
제수스가 정색을 하며 조나단을 돌아보았다. 엇, 하면서 조나단이 그의 엉덩이를 툭 찼다.
"좋았구만? 어? 명기냐? 명기야?"
"닥쳐."
"오오. 다음에 나타나면 무조건 내가 먼저다."
조나단은 요즘에 아주 발정이 나서 씨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수스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고는 계속 관중석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여자.'
아, 연락 준다고 했지. 제수스는 매니저를 불러 자신의 디바이스를 받았다. 연락을 하는 건 불가능하고 받기만 할 수 있었다. 제수스는 이런 기능이 디바이스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날 훈련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계속 디바이스를 보다가, 샤워실 안까지 디바이스를 들고 들어가서 보다가, 밖으로 나가서도 계속 보다가, 집에 가서도 계속 보고 있었다. 별로 이유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연락을 준다고 했고 기다려졌다.
그 후 이틀 정도 지났을 때 메시지가 왔다.
<메리 호텔. 1011호>
"왔다!!"
제수스가 샤워를 얼른 끝마치고 디바이스를 다시 확인했을 때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펄쩍 뛰어서 주변 동료들이 다 그를 미친놈 보듯이 보게 만들었다. 그는 얼른 닦고 옷을 갈아입고 주소를 검색했다.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뛰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얼른 호텔로 들어가서 위로 올라갔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머리를 한 번 만지고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뒤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빨리 왔네."
오늘은 선글라스는 안 끼고 있었다. 여전히 화장 같은 건 안 한다. 여자에게서 화장품 냄새가 안 나는 게 오히려 신기한 제수스였다. 그는 씨익 웃었다.
"오늘은 냄새 안 나지? 씻고 왔어."
그러자 방안으로 들어가던 그녀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돌아보았다.
"그때. 냄새 난다고 했잖아."
"그랬나."
그녀는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놓았다. 밑이 살짝 말리는 듯한 반곱슬 머리카락이었다. 염색이나 다른 걸 하지 않아서 매끈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는 속옷을 입고 그 위에 검푸른색 실크 가운을 입고 있었다. 제수스는 양팔을 벌리고 그녀에게 얼른 다가갔다.
"오늘은 기분 좋게 해줄게~"
"아, 그런 건 됐고."
그녀는 들이대는 제수스의 얼굴을 손으로 막았다. 그녀는 제수스를 침대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의 바지 버클을 풀고 속옷을 내렸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런 게 들어 갔었다니….'
너무 크고 흉측하게 생겼다…. 뭔가 매우 적나라한 느낌(?)이라 제대로 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세현이었다. 제수스는 알아서 상의를 벗었다. 신이 내리신 근사한 육체가 드러난다. 하지만 세현은 그런 데 관심이 없었고 일단 그 흉측한 것을 계속 보다가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응?"
뭔지 안다. 제수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남성용 자위기구 중에 하나였다. 일명 <오나홀>이라고, 정말 여자의 거기처럼 전신을 만들어놓은 것도 있었지만 저건 그냥 원기둥 모양으로 생긴 가장 기본형이었다. 하지만 왜 여기서 저게 등장하는지 모르겠다.
세현은 거기의 구멍에 젤을 잔뜩 짜 넣고 제수스의 흉~측한 남성기에도 젤을 짰다. 제수스는 알아서 바지랑 팬티도 발로 끄집어 내려 벗어 알몸이 되었다. 짧게 머리를 자른 그의 남자답고 멋진 목덜미를 봐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지 그녀는 그대로 그 오나홀에 이미 발기한 제수스의 거시기를 집어넣었다. 제수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너 있는데?"
"너무 아파서 안 되겠어."
세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 같은 건 이딴 거나 어울린다. 세현은 자신이 몇 번 오나홀을 흔들어주다가 제수스에게 넘겼다.
"혼자서 해봐."
"?"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섹스하자는 거 아닌가? 제수스는 일단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세현은 제수스의 옆에서 한쪽 발을 침대 위에 올렸다. 그리고 윤활제 통을 잡아 자기 안에 쭉 짜 넣고는 손가락으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제수스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이쪽! 이쪽 보여주면서 해!"
세현은 인상을 쓰면서 그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싫어."
"왜?"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의 쪽으로 누웠다. 그녀의 다리 사이가 보였다. 검은색 팬티는 입은 채로 그 사이로 비집고 손가락을 넣고 있었다. 제수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야하단 말이야….'
거시기의 끝이 찌릿찌릿하다. 그녀는 영 신통치 않은 얼굴로 자기 거기에서 손을 떼고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그리고는 제수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갈 것 같아?"
"응? 뭐…, 좀 있으면?"
혼자 하는 건 재미없다. 그는 다 벗었고 예쁜 여자도 반쯤 벗었는데 왜 혼자 해야 하나. 이거야말로 이해를 못하겠다.
"계속 이렇게 해야 돼? 언제 넣어?"
"너 쌀 거 같으면."
"왜? 그냥 지금 넣고 쌀 때까지 하자. 그게 더 빨리 될 것 같은데."
"안 돼. 밑 빠질 것 같아."
"아…, 맞다. 지금은 괜찮아?"
의사짓 하는 아는 마도사에게 또 공짜로 치료받았다. 세현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뭐랄까….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칼로 인간을 찌를 수 있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여자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던가. 생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자 어쩐지 서서히 될 것 같다. 제수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섹시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으윽, 될 거 같은데…."
제수스가 그렇게 신음을 흘리자 세현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의 거시기에서 오나홀을 빼내고 가운의 아래로 그의 것을 자신의 여성기에 맞추었다. 제수스에게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여자의 거기를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어쩐지 오늘은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제수스의 자지를 느끼고 있었다.
'아…, 제발 이번에는 좀 쉽게 들어가라.'
하지만 안되던 게 갑자기 잘 되고 그런 마법은 안 일어났다. 젤을 한껏 더 짜고 문지르고 해도 안 되어서 결국 또 힘으로 하기로 했다. 세현은 후욱 숨을 내뱉으며 그냥 자신의 여성기의 정중앙에 그의 우뚝 선 남성기를 대고 아예 체중으로 주저 앉았다.
"윽…!"
"와…."
제수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감탄했다. 엄청 조인다. 해본 여자들 중에 이런 조임은 그녀가 처음이다. 정말 쥐어짜는 것 같다. 그녀는 이를 악문 얼굴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를 잡은 제수스의 팔을 찰싹찰싹 쳤다.
"빨리. 빨리빨리. 빨리 싸."
"어? 이대로?"
"쌀 거 같다며?"
"아니…, 그게 그렇다고…."
제수스가 허리를 한 번 들썩 움직이자 그녀가 윽, 하고 제수스의 팔을 손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고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해."
"…그렇게 아파?"
제수스는 허리를 일으켰다. 그녀는 억누른 신음을 흘리며 답했다.
"당연히 아프지. 그러니까 빨리 싸."
"아니…, 나랑 섹스하고 싶은 거 아냐? 그냥 니 안에 사정만 하면 그게 섹스야?"
사실 생각해보면 제수스가 해왔던 섹스들은 죄다 그랬는데도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두르고 꼬옥 끌어안았다. 맞닿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손을 만졌다. 숟가락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좀 느껴야 안 아플 거 아냐. 어디 좋아해?"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별로 이런 짐승 같은 남자랑 어울려서 그런 걸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됐어. 그냥 해. 상관없이잖아."
"……."
정말 이상한 여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아픈 걸 싫어하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해도 거절한다. 그리고 제수스에겐 자꾸 그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서 제수스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냥 해주었다.
"아…! 으윽…."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대로 들썩들썩 빠르게 움직여서 팍 넣어 사정했더니 그녀가 몸을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아픈 모양이었다. 제수스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왜 이렇게 좋은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이 정말 부드럽고 물컹물컹, 탱글탱글 했다. 진짜, 아주, 너무 좋았다.
"윽. 아, 숨 막혀!"
그녀는 제수스의 팔을 떼어내고 얼른 그의 것을 스스로 빼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아래를 잡고 묵념을 하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괜찮아?"
제수스가 물었다. 그녀는 한손으로 다시 그에게 오나홀을 던졌다.
"빨리 다시 되게 해봐. 이번엔 진짜 사정하기 직전에 말해라."
"…나 도대체 이게 무슨 플레인지 알 수가 없다."
"빨리 해."
그다지 여자의 말을 듣는 편이 아닌데, 일단은 그녀가 이상한 여자라서, 그냥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나흘에 한 번씩 만나서 10번씩 이상한 플레이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
"가게?"
노망난 할망구가 실망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세현을 올려다보았다. 세현은 연구실에서 들고가야 할 짐을 챙기며 대답했다.
"제자 연구 좀 가로채려고 하지 마시죠. 대학원생 때 할 거 다 해드렸으면 끝난 겁니다. 사람이 구질구질하게. "
몬스터 게이트는 웜홀이었다. 물리학자라면 누구나 제 집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원하는 꿈의 장소였다. 왜 하필이면 특정 행성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여전히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아니, 몸도 시원찮은 퀸 교수가 굳~~이 안 가도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 이거지."
"아무리 그래도 공동저자로 안 올려드린다니까요!"
"아…, 애가 너무 차가워졌어. 예전엔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배렸어, 배렸어."
"이 노망난 할망구가!!"
요새 관절이 영 안 좋아 마법으로 둥둥 떠다니는 학과장이었다. 무중력을 가하는 게 결과적으론 더 관절과 뼈에 안 좋다는데도 곧잘 저렇게 둥둥 떠다닌다.
"일단 널 위해서 상하이에서 선수들을 좀 뽑아왔다. 용병들 싫다며."
"당연하죠. 선수들도 짐승 같은데 용병들은…."
세현이 한숨을 팍팍 쉬었다.
"원래 TFC가 유스팀 같은 건 안 키우는데 상하이에서 로우-미들 클래스(Low-middle class) 이상 집안 출신으로 이루어진 유소년 훈련팀을 만들었더라고. 보니까 실전 경험도 꽤 있고."
"그래요?"
TFC 같은 건 관심 없어서 전혀 모른다. 세현이 대충 그렇게 반응하자 학과장이 더욱 강력히 생색을 냈다.
"너의 취향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쓰게 만들었는지 듣고 싶지 않은 거니, 제자야?"
"그게 어떻게 학과장님 돈입니까. 학회 돈이죠."
"내가 학회장이니까 내 돈이지."
"횡령이나 하지 마세요. 요즘은 그런 거 걸리면 얄짤 없습니다."
"살기 팍팍한 세상이야. 사람이 잘 나면 그런 것도 좀 건드릴 수 있고 그래야 잘난 맛인데."
학과장이 그러면서 공중에서 팽그르 돌면서 무중력 상태에서 마실 수 있도록 개조된 텀블러로 커피를 빨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가와서 짐을 챙기는 세현의 왼쪽 손목을 잡아서 살폈다.
"아, 젊은 놈들이 확실히 좋네. 니가 모으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거 아니냐?"
"어릴수록 괜찮은 건 맞는 거 같아요. 맨 처음에 덮쳤던 루키가 제일 충전이 잘 됐거든요."
이것도 연구를 해야 하는 분야인 것 같은데. 앞으로 드레이닝에 죽어 나가는 마도사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는 마도의사 중에 연구에 집중하는 친구들을 떠올려보며 세현이 말했다.
"한 번에 얼마?"
"루키는 한 번에 5천 5백에서 6천 정도였고 지금 쓰는 웨스트이글 선수는 4천 정도."
"엥? 수치가 이상하다? 보통 한 번에 3천 정돈데? 내 평균?"
"그래요?"
"내 때랑 애들이 뭐가 바꼈나? 두 세대만에 진화라도 일어난 건가?"
"어…. 아는 애 중에 유전생명 쪽으로 연구하는 친구 있는데 한 번 얘기해 봐야겠네요."
"어, 그래라. 나는 유전생명학회장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다."
웃기게도 세현은 연구노트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인공지능이나 스크린보다 손으로 쓰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밑에 연구원들이 때 되면 전부 전산화하기는 했지만.
세현은 전부 짐을 싸 두고 그걸 대학원생들에게 맡긴 후 시간을 확인했다. 6시 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보충을 하고 싶었다. 막상 갔더니 정말 죽어도 못 먹겠다 싶은 놈들만 있으면 어떡하는가. 시간이 늦어 안 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시간 돼?>
메시지 수신을 허락하고 그렇게 보내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응>
<지금 어디야>
<구장 근처>
<메리 호텔. 도착하는데 30분 정도는 걸려>
<오케이>
세현은 바로 건물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율주행으로 메리 호텔을 찍고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하자 선글라스부터 꼈다. 주차장에서 내려서 입구를 찾아가니 거기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서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오늘 뭔가 예쁘다? 나 보려고?"
오늘은 트레이닝복 같은 걸 안 입고 온 세현이었다. 속옷도 제대로 입었다. 무릎까지 오는 튤립스커트에 위에도 정장 셔츠였다. 머리도 틀어 올리고…. 세현은 그의 턱을 언제나처럼 밀어내며 말했다.
"일."
"뭐해? 아니, 그것보다 이름이 뭐냐니까?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이름도 안 가르쳐줘, 왜."
"일단 방은…."
"내가 잡아 놨어."
제수스와 세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이 방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제일 좋은 방이다. 룸서비스로 와인이랑 과일까지 시켜놓았다.
"마음에 들어?"
제수스는 그녀의 뒤에서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세현은 그냥 한 번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구두를 벗어서 옆에다 던졌다. 제수스가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세현에게 넘겼다.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술 안 해."
"왜?"
그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제수스는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제수스는 의자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친 채 그녀가 벗는 것을 가만히 구경했다. 그녀는 셔츠와 치마를 화병이 있는 테이블에다 걸쳐놓았다. 그리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실크가운을 입었다. 제수스가 말했다.
"그거 안 입으면 안 돼?"
"왜?"
"다 벗어. 몸 제대로 보고 싶어."
"굳이? 꼭? 어떻게 해서라도?"
"…아니…, 싫으면 말고…."
왜 그녀의 말에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걸까. 뭔가 분위기를 좀 잡아보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다. 제수스는 그냥 평소처럼 훌렁훌렁 옷을 벗고 침대에 앉았다. 세현이 오나홀과 젤을 던져주었다.
"그냥 하면 안 돼? 안 아프게 하면 되잖아. 같이 기분 좋아지게."
"안 돼. 바빠."
제수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평소처럼 해보려는데 영 기분이 안 났다. 그러다 그냥 다 싫어져서 다리를 쭉 다 뻗고 두 손으로 침대를 짚어 상체를 받치고 고개를 뒤로 푹 젖혔다.
"나도 안 된다…. 영 기분 안 나."
"왜?"
세현이 약간 당황하더니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그의 흉측한 것에 장착된 오나홀을 직접 흔들어주었다. 제수스가 말했다.
"그냥 니 손으로 해줘."
세현은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가 오나홀을 빼내고 손으로 그의 것을 흔들었다. 제수스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실크 가운 속에 손을 넣었다. 어깨를 좀 드러내게 했다. 그녀의 탱글탱글한 피부를 만졌다. 속옷도 내려서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그녀가 인상을 썼다.
"가슴 별로 안 좋아해?"
제수스가 물었다. 진짜 완전 부드러운 젖꼭지를 엄지로 살살 쓰다듬으니 그녀가 손목을 잡았다.
"그렇게 만지지 마. 기분 나빠."
"알았어…."
제수스는 자신의 것을 만지는 그녀의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점점 몸이 뜨거워진다.
"씨발…, 허억…."
이게 뭐라고 말이다. 가운 사이로 아주 조금 드러난 그녀의 탱탱한 피부에 입술을 문지르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체취를 마시면서 거시기에서 느껴지는 쾌락에 집중했다. 쩐다…. 왜지? 기분이 엄청 좋았다. 그는 눈을 감고 짐승같은 신음을 흘리다가 그녀의 허리를 훅 끌어안으며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 사이에 손가락을 넣자 그녀가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쫙 벌려서 자신의 남성기를 그녀의 것에 맞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찔러 넣기 시작했다. 그녀가 숨을 멈추었다.
"아윽…. 아…!!"
"힘 좀 풀어…. 윽. 나도 아프다고."
그녀가 이를 악 깨물고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넣을 땐 여자의 거기를 보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녀는 항상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얼굴이 하얬다.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
정말이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이 피부를 뜨겁게 달아 올리고 쾌락에 울부짖게 만들고 싶었다. 애원하듯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만들고 싶다. 그녀의 기다란 팔다리가 그를 원해오며 꽉 끌어안는 것이다.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런 걸 상상하니 엄청 불끈불끈 했다. 저항의 끝에 그녀의 여성기 안으로 진입하며 제수스가 그르릉거리듯 신음을 흘렸다.
'나도 이름 부르고 싶어.'
여전히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는 그녀였다. 그렇게 서서히 들어가자 그녀가 진저리를 치다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 그만…, 그만! 빨리 싸. 아윽…! 빨리!"
"그게 그렇게 버튼 누르듯이 되는 줄 아나…."
"아…. 윽. 으윽…."
처음 할 땐 어떻게 가만히 있었나 모르겠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 제수스의 어깨를 꽉 잡았다. 제수스는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천천히, 정말 부드럽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건 오직 지금 품에 있는 그녀와 할 때뿐이다. 미리 해놨기 때문에 집중해서 빨리 끝냈다.
"윽…!!"
"아…."
잠깐이지만 이렇게 그녀의 안에 사정을 할 때면 그녀의 허리 부근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는 그래도 그녀가 얼굴을 붉힌다. 제수스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다가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려고 했는데 역시나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밀어냈다.
"아, 째째하게 굴지 말고 키스 정도는 하자."
제수스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를 몸에서 빼냈다.
"다시 세워."
제수스는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괴고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밑이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제수스가 중얼거렸다.
"이럴 바에는 그냥 뽑아서 주사기로 넣는 게 더 낫겠다."
그러자 세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나…, 바보 아냐…."
제수스는 거기서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걸 깨달았다.
*
2128년 3월 25일 일요일. 세현 퀸과 캘리 박 등 HNU 교수진과 그 대학원생들(시다바리), 전세계 유수의 우주물리학자들, 소수의 기자들이 구 이집트 수에즈 시에 도착했다. 그 외에도 몇 십 명 정도의 TFC 선수, 그리고 용병이 잔뜩 있었다. 선수들보다도 용병이 3배나 더 많았다.
"어, 왜 이래?"
캘리 박이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 둥둥 뜬 상태로 주변을 돌아보다 그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온 백발이 성성한 물리학자 하나가 답했다.
"우리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과학기술국 국장이 펄쩍 뛰면서 붙여줬습니다."
"어, 나 돈 없어. 경호에 쓸 돈은 다 썼어."
"걱정 마세요. 저건 우리 세금으로 내는 겁니다, 회장님."
그러자 HNU 학과장이자 세계물리학회 회장인 캘리 박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아, 역시 미국 아직 안 죽었어. 돈 많다, 야~ 몇 명이야?"
"150명 정도요."
"애들은 괜찮아? 너무 약 빨고 사고 칠 거 같은 놈들 있으면 곤란한데? 우리 쪽엔 젊은 애들도 있고."
"이쪽은 저도 잘 모르는데, 우리 국장이 신경 써서 고른 놈들이라니까 그런 건 없을 겁니다."
"믿는다."
그렇게 캘리 박은 미국 지부장과 이야기를 잠깐 했다.
지글지글 햇빛이 내리쬐는 수에즈, 시나이 반도와 아프리카, 지중해의 길목에 있는 운하는 한 때의 영광을 자랑하듯 높고 커다란 건물과 좌초한 거대한 선박들이 남아 있었다. 빌딩은 대부분 파괴가 되거나 기울어져 있었고 미사일과 폭탄으로 인한 폭심지가 둥그렇게 보인다. 모든 것은 아름다운 홍해의 곁에서 폐허가 되어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직선형을 유지하고 있는 운하의 위에 먹색으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게이트가 있었다. 게이트로부터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베이스 캠프를 세운 세계물리학회 수에즈 운하 게이트 연구팀이었다.
서던라이온 측 선수들을 감독하고 있는 코치들이 미국에서 조달한 용병단 대장과 만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서던라이온 선수들은 1대 1로 학자들을 마킹해서 따라다녔고 용병들은 레이저 기기를 들고 땅을 향해 쏘며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땅 속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가 있는지 감지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어쓰웜(Earthworm)이 나온 적은 없었지만 눈에 띄는 다른 몬스터와 달리 땅 밑에서 습격해오는 어쓰웜은 아차 하는 사이에 베이스 캠프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했다.
캘리 박은 서던라이온 유스팀 선수들을 주변에 네 명이나 달고 베이스 캠프를 한 바퀴를 쭉 둘러보았다. 비서가 기겁을 하며 따라오며 잔소리를 했다.
"회장님, 위험합니다.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시죠, 네?"
"야, 여기 소드마스터만 200명 있다. 마도사도 8명이나 있는데."
캘리 박은 마법으로 둥둥 떠서는 모래가 풀풀 날리는 베이스 캠프 주변을 사막을 쭈욱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홍해 쪽으로 다가갔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바다 중에 하나라더니…. 정말 그렇구만."
세 가지 색깔로 빛나는 바닷물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더불어 정취가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폐허가 된 도시마저 운치 있다. 그렇게 가까이 더 다가가 해변을 밟아 보려는데 경호로 온 젊은 선수가 말렸다.
"바다는 안 됩니다."
"어? 왜?"
"지상보다 바다에서 튀어나오는 게 더 상대하기 힘듭니다."
"그래?"
캘리 박은 잠깐 바다를 바라보다가 미련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는 멀리서 베이스 캠프를 바라보며 다가가면서 비서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지? 31일 동안."
"베이스 캠프지 탐색할 때부터 몬스터가 게이트에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서던라이온 유스팀이 한 달 동안 여기서 체재할 때도 전혀 문제없었구요."
걱정이 되면 본인부터 베이스에서 나오지 말라구요. 비서는 약간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프리카 쪽이야 조금 정보가 불안하지만 일단 여기는 유럽과 가까운 게이트라 정보관리가 잘 된 편입니다."
"음, 그래…."
캘리 박이 말을 이었다.
"문제 생기면 알지? 마도물리학자가 탈출 1순위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경호팀에 확실하게 전달해 놨습니다."
원래 마도사는 몸값이 높다. 용병 시장이나 TFC 선수 시장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마도사가 의학을 배워 화타에 버금갈 정도의 능력을 가지거나 실험 한 번으로 세계의 명운을 가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건 이미 세계 단위에서 VIP로 취급하게 된다. 러시아 소속의 마도물리학자가 테러 단체에 의해 납치되자 러시아 정부가 그 테러 단체를 박멸해버린 얘기는 아주 유명했다. 인질은 반역 단체에 넘어간 배신자로 취급하는 나라였지만 인질 구출을 최우선으로 몸값도 주고 별별 짓을 다하고 나서는 지상에서 영원히 쓸어버렸다. 마도학자 3명 이상은 같은 비행기에 못 타게 하는 나라도 있다.
캘리 박은 이를 우물거리며 다시금 말했다.
"세현이가 경호 등급 몇 등이냐?"
"학회장님 바로 다음인데요?"
"으음…, 8위로 낮춰. 왕 박사를 2위로 해."
"예? 괜찮으시겠어요? 퀸 교수님이 수에즈 프로젝트 책임자신데요?"
"어. 어차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애고."
캘리 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민유도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 교수님 아시면 노발대발하실 텐데…."
세현 퀸은 자타공인, 명실상부 캘리 박의 후계자였다. HNU 물리학과장, HNU 총장, 한국 과학기술부 장관, 중국 과학기술성 장관, 세계물리학회장 등등 그녀가 세현 퀸에게 씌울 감투가 여럿 있었다. 모두 그녀가 거쳐왔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캘리 박은 현재 연구 자체보다는 후진 양성에 더 힘을 쏟고 있는 노회한 학자에, 학계 내외의 정치에서 승리하여 오랜 시간 동안 군림한 권력자였다. 그리고 누군가 권력자의 속성을 띨수록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을 키우는 것이었다. 뛰어난 천재성, 연구에 대한 열의와 스타성, 그리고 본인의 성격과 성품 등, 세현 퀸은 캘리 박의 제자 중에서 가장 젊었으나 가장 뛰어날 것이란 평을 받는 자였다.
드레이닝에 걸리기 전까지는.
캘리 박은 다시 베이스 캠프로 돌아갔다. 거기엔 학자들을 데리고 실험 세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세현 퀸이 보였다.
"어~ 우리 퀸 교수~ 잘 되어가?"
"네."
세현은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수에즈 게이트 주변에 깔 계측기 100개를 차례대로 체크하며 옮기기 시작했다. 세현의 우주물리학 연구실에 있는 최 박사가 계측기 20개를 실은 포터 20개와 이를 호위한 용병들 40명을 데리고 게이트를 향하여 선두 출발하였다. 세현은 스크린을 6개나 앞에 띄워놓고 체크하며 캘리 박에게 말했다.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마세요. 그러다가 몬스터라도 끌고 오면 제가 평생 저주할 겁니다."
"홀홀홀. 걱정하는 거야?"
"제 실험 걱정하는 겁니다."
"야, 이거 숫자 이상하다."
"…어…, 진짜네. 아~ 최 박사 이건 몇 년 찬데 이것도 똑바로 못해? 오 박사, 최 박사 연구 노트 좀 가져와봐."
세현이 신경질적으로 데이터를 눌러 앞뒤로 숫자를 비교했다.
"이거 내 기억엔 0.4 정도 낮은 수치였던 거 같은데? 제대로 기록한 거 맞아?"
"자, 잠시만요, 교수님."
갑자기 자기 교수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오태연 박사가 허둥지둥 연구 노트를 쓸어와서 마구 뒤져보았다. 캘리 박은 둥둥 떠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잠깐 구경하다가 다시 베이스 캠프를 시찰하러 돌아다녔다. 비서가 하는 설명을 들으며 슬렁슬렁 다녔다. 그러다가 새파랗게 젊은 소드마스터와 눈이 딱 마주쳤다.
분명히 2미터가 넘을 키에 흑발벽안을 가진 깨끗한 피부의 미남이었다. 그런데 이 어린 놈의 새끼가 건방지게 캘리 박을 보면서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캘리 박이 똑같이 표정을 따라 하며 쳐다보자 그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이겼다. 캘리 박은 그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비서에게 물었다.
"쟤 뭐냐?"
"아…, 서던라이온 소속일 것 같은데요…. 잠깐만요, 학회장님."
"알렉스 킴이라고 이번에 1군에 데뷔하는 놈인데요."
비서가 자신의 디바이스를 뒤지기 시작하자 옆에서 따라다니던 어린 선수가 먼저 말했다.
"그래? 1군에 들어갈 정도면 비싼 놈이라는 소리잖아? 너희 구단은 그런 선수를 여기 보내도 괜찮은 거냐? 거, 장사할 생각이 없구만."
캘리 박이야 젊었을 적부터 TFC 선수나 TFC 업계와 연이 있어서 경호로 무려 선수들을 기용해 쓸 수 있었던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1군 선수들을 이런 데 보내주지는 않는 법이다. 괜히 유스팀을 주겠다고 했겠는가. 어차피 돈 주고서라도 보내서 훈련시키는데 이 김에 돈도 벌고 훈련도 시키겠다는 거 아니겠는가.
"자원해서 왔다고 들었어요. 코치들도 말렸는데…."
"자원?"
그건 진짜 이상하네…. 캘리 박은 다시금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
알렉스 킴은 다른 서던라이온 1군 선수와 달리 용병 출신이 아닌 유스팀 출신이라 도시 문명에 익숙하고 시민 의식이나 도시의 생활 방식도 몸에 자연스럽게 배인 청년이었다. 보통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다가 15살에 팔려 가서 19~24살에 돌아와 TFC에서 활동하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17세까지 학교도 착실하게 다니고 부모도 건재하고 또래와의 교류도 평범할 정도로 있던 알렉스였다. 18개월 정도 남중국해에 가서 훈련을 하고 온 것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훠~얼씬 문명인이었다.
하지만 한 달 전부터 더워 뒤질 것 같은 시나이 반도에 와서 베이스 캠프 예정지 반경 30km 이내를 시찰하고 시찰하고 또 시찰하고 베이스 캠프지를 정하고 나서도 뺑뺑이를 돌고 돌고 또 도는 정신 나간 짓을 하다 보니 미칠 것만 같았다. 분명히 무슨 학회니 하는 사람들이 와서 잠깐 실험을 하고 돌아가는 게 다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뭘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차라리 몬스터라도 나왔으면 덜 지루했을 것이다.
"천 코치,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러는 거예요? 한 달 동안 똑같은 짓 하려니까 미칠 것 같은데요."
알렉스가 볼멘소리를 하며 쪼그리고 앉자 천 코치가 발로 그의 엉덩이를 툭툭 차며 일어나라고 했다.
"니가 한다며."
"아니, 제가 한다고는 했는데…. 여기 전부 다 이 잡듯이 다 뒤졌잖아요. 여기 몬스터 이제 안 나오는 거 나도 알고 천 코치도 아는데 왜 이걸 또 하냐구요."
"중요한 사람들이라서 그래."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길래요?"
"야…, 우리 2달 여기 있는 걸로 100억이나 받는다. 돈값은 해야지."
"100억이요?!"
그렇게 많이 받을 줄은 몰랐다. 유스팀은 2군보다도 밑이라 사실상 훈련비와 연봉이 퉁 치는 수준이었으니 100억이면 진짜 큰 돈이었다.
"어. 애들 연봉을 한 명당 10억 정도로 봐주겠다더라. 물론 너는 훨씬 넘지만, 넌 자원이잖아, 임마."
"뭐…, 뭐, 물리학회? 그런 데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요?"
"공부 좀 해라…. 넌 유스팀 출신이면서."
천 코치는 용병으로 8년, 그럭저럭한 TFC 선수로 10년 정도를 지내다 은퇴하고 코치가 된 전형적인 루트를 걸은 소드마스터였지만 본인은 제대로 공부를 못 해본 게 좀 한인지 책도 많이 읽고 혼자서 공부도 좀 하는 괴짜였다.
"그런 데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야.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결정하는 곳 중에 하나라고."
"어…, 정치인들이에요?"
"정치는 도돌이표 같은 거지. 과학이야 말로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엔진이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천 코치는 그냥 한숨을 쉬었다.
"그냥, 이제 몬스터도 안 튀어나오는 게이트 좀 본다고 2달 동안 100억이나 써서 그냥 용병도 아닌 선수들 50명으로 지켜야 하는 사람들 25명이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겠냐. 보통 때라면 우리가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그 돈은 300억으로 늘어나고 그 소드마스터들은 200명이 되었다. 심지어 중국에서 과기성 차관보라는 사람까지 연락을 해와 사람이 모자라지는 않냐고 또 물어보았다. 적극적으로 더 보내겠다는 것을 말렸다(그것도 또 200명이나). 이미 베이스 캠프는 200명이나 되는 소드마스터들로 드글드글 하여 짐승 수컷 냄새가 진동할 지경이었다.
예정에 없이 경호 인원이 증폭하여 미국 쪽과 상의 끝에 서던라이온은 개인 경호로, 150명이나 되는 용병들은 그전에 서던라이온 선수들이 했던 것처럼 있지도 않는 몬스터를 찾으러 레이저 탐지기로 모래바닥을 찌르고 다녀야 했다.
어쨌든 알렉스 킴은 용돈벌이를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한 달만에 드디어 본진이 도착하자 천 코치에게서 명단을 받아 경호 순위 1등부터 끝까지 쭉 살펴보았다.
"어, 캘리 박이란 사람이 1순위네…."
HNU 학과장, 세계물리학회장.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게다가 스위스에도 왔었고…. 드디어 찾은 것일까. 알렉스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뭐라고 하지? 신고한다고? 감방에 처넣을 거라고? 스토커년. 강간범. 변태.'
매일 공부만 하다 보니까 그런 변태 같은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천 코치의 말대로 고작 25명을 지키기 위해서 200명이나 되는 소드마스터를 모아서 300억이나 들여 지키는 집단의 사람들 중 최고인 사람. 한 달 동안이나 이 땡볕에서 더럽게 뺑이를 치고 나니 그 사실이 이상하게 실감 났다.
긴장된다. 목이 타서 물을 계속 마셨다. 전에 그녀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와는 좀 달랐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니, 라는 생각에 선 자리도 앉은 자리도 불편해졌다.
'그래도 변태야. 강간마라고.'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알렉스는 저녁 쉬프트였기 때문에 지금 휴식을 취해 놔야 했지만 도저히 가만히 앉아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지럽게 물건을 옮기고 설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리저리 밀리며 그 사람을 찾아다녔다.
동료 선수들, 용병들…. 그리고 25명밖에 안 되는 학자들은 과연 다른 이들과 생긴 것부터 달랐다. 그들은 소드마스터들에 비해서 현저히 작았고 안경을 많이 끼고 있었으며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표정이 달랐다. 게다가 대부분 여자들이고…. 언제나 시시덕거리며 약이나 여자를 찾아다니는 남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눈에서 보이는 총기, 혹은 피로는 천 코치의 말대로 인류의 미래를 가리키고 서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걸까.
"여기가 미국 지부 박사님들 텐트입니다. 저쪽이 우리 쪽이구요. 저긴 나머지 박사님들 지내실 곳입니다, 학회장님."
"야, 이거 좀 따로따로 둬야 하지 않냐? 한 곳에 모아 놨다가 한꺼번에 일 나면 니가 책임질 거냐?"
"아, 경호 쪽에서 지키기엔 이게 낫다고 해서 모아둔 건데요?"
"으음, 아냐. 아냐. 떼어놔."
"알겠습니다, 학회장님. 다시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학회장님? 누가 학회장님…. 그렇게 고개를 돌리다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할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알렉스는 경악했다.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아니야! 절대! 미친! 저런 할망구…!! 그렇게 경악을 하고 있는데 눈이 마주친 할머니가 알렉스 킴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조롱하자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더워서 그런지 땀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알렉스는 한숨을 쉬었다.
"뭐야…."
괜한 고생을 했다….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디바이스도 다 타버린 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강간범을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경찰이 못 잡는 강간범이 왜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알렉스 본인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신에 차서 이 이역만리 구 이집트까지 왔는데…. 새삼 그런 자신이 바보 같아서 몸서리가 쳐졌다.
'여길 한 달이나 더 있어야 하는 거지….'
그리고 그동안 그 강간범은 어디 있는지 더 찾기 힘들어질 거고…. 알렉스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며 습관적으로 머리를 벅벅 털었다. 개한테 물린 셈 치고 잊어야 하는 것일까.
'…강간당한 게 그런 식으로 싹 잊어지겠냐.'
그럼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알렉스는 우울한 얼굴로 땅바닥을 쳐다보며 모래를 툭툭 차며 정처없이 느릿하게 걸었다. 실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짜증도 났다. 무력감도 들었다. 이런 건 처음이다.
'쌍년. 나쁜 년. 미친년. 강간범. 변태.'
이런 원망이라도 그녀가 들어주길 바라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덩치도 산 만한 남자가 축 쳐져서 그러고 다니니 안 그래도 바쁜 사람들 가운데 길을 제대로 막고 있었다.
"뭐야? 경호? 제대로 사람들한테 안 붙어?"
"아, 전 저녁 교대라……."
젊은 여자였다. 풍성한 갈색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가름한 얼굴이지만 각진 턱에 약간은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가 귀족적인 느낌이 났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알렉스를 책하고는 그의 변명을 채 다 듣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둥둥 떠다니는 늙은 할망구 못 봤냐?"
"저기…."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까 그 할머니를 찾아 그를 스쳐 지나가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 냄새….'
그날의 그녀는 독한 향수로 체취를 가리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아봤다는 뜻이었다. 소드마스터들은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엄청 뛰어났다. 아마 잠깐이었다면 알렉스도 향수 때문에 그녀의 체취를 맡지 못했겠지만 3시간이 넘게 그렇고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결국엔 그녀의 몸에서 나는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목소리….'
게다가 변조를 했던 것도 아니고 억누르기만 했던 목소리는 더 알아차리기 쉬웠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알렉스는 거의 쇄도하다시피 해서 지나쳐간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수에즈에 온 첫날, 책임자인 세현 퀸은 어마어마하게 바빴다. 갑작스럽게 웬 소드마스터 하나가 손목을 잡아채자 그녀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나 기억 안나?"
알렉스가 물었다. 세현은 인상을 약간 더 썼다.
"내가 알아야 하나?"
"나 정말 기억 안나?"
그러자 세현은 더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잡히지 않는 손으로 손가락을 튕겨 딱딱 소리를 내며 누구를 불렀다.
"경호실장!!"
그러자 서던라이온과 용병들을 관리하는 학회 소속 직원이 얼른 달려왔다.
"아, 네! 교수님!"
"이거 뭐야? 나 바쁘다, 어? 일 똑바로 안 해?"
"어, 어어…! 서던라이온 쪽이시죠? 이러시면 안 됩니다. 교수님들 지금 엄청 바쁘시니까 방해하시면 큰일나요."
알렉스는 그녀의 손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세현은 가다가 말고 경호실장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새끼 나한테 반말 쓰는데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해, 알았어? 뭐 하는 거야?"
"아, 네. 죄송합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경호실장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사과하고 그녀를 배웅했다.
"이름이 알렉스 킴이었나요?"
"……."
알렉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날 기억 못해!'
경호실장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알렉스를 보았지만 알렉스는 저쯤에서 둥둥 떠다니는 할머니랑 설전을 벌이고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돌아보기를 원하는 듯이.
'어떻게 기억도 못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을 그렇게…, 그렇게 해놓고…!'
한 번 쳐다보지도 않는다. 알렉스는 무엇보다도 황당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빠드드득.
"알렉스 선수?"
그가 무시무시하게 이를 빠득 갈자 경호실장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에 황금빛 오라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복수할 거야…!'
*
도대체 무엇을 기대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알렉스는 또 상처를 받았다. 왜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시당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했다. 그래서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그때 심지어 얼굴도 볼 수 없었던 알렉스는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분노도, 그녀가 저지른 짓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도, 그날의 기억조차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그녀는, 그녀는 알렉스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강간한 남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 여자…, 뭐 하는 여잡니까?"
이를 갈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노려보면서 알렉스가 물었다. 경호실장이 대답했다.
"어? 모르세요? 매스컴도 많이 타셨는데. 세현 퀸 교수님이세요. 이 프로젝트 기획하고 이 많은 사람들을 여기로 데리고 오신 장본인이십니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 인류사의 중요한 순간에 있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렉스가 더 설명을 바라며 그를 돌아보자 그가 더 설명했다.
"퀸 교수님 주력 분야가 우주물리학, 통일장 이론, 중력파 쪽이신데, 빅크런치 실험이랑 4대 힘 변환 실험을 주로 하시죠. 이번에 빅크런치 실험 겸사겸사 게이트 소멸 실험하러 오신 겁니다. 만약에 게이트 소멸이 성공한다면 수 천 년 동안 전세계 수많은 나라를 몰락시켰던 몬스터 게이트의 영구소멸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대단하지 않아요, 우리 퀸 교수님? 세기의 천재라니깐요. 아니, 오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던데요, 어떤 사람은."
그녀는 학계의 황태자였다. 이게 얼마짜리 프로젝트이던가. 매스컴도 많이 타고 대중을 위한 과학 프로그램도 진행한 적이 있어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편이었다. 캘리 박이 세계물리학회 및 물리학계의 번성을 위하여 천재성과 스타성을 겸비한 그녀를 대대적으로 푸시하여 이 자리까지 올렸다. 그리고 그에 응하듯 그녀도 매년 대단한 연구실적을 내고 있었다. 캘리 박은 대중과 정부 및 재계의 조명을 받은 그녀를 이용해 세계물리학회, HNU 등에 많은 자금을 수혈 받기도 했다. 웜홀 탐사, 빅크런치 실험에 게이트 소멸 실험까지 하는 대대적인 프로젝트까지 실현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알렉스 킴은 사람들이 이 실험이나 그녀에 대해 하는 말의 대부분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물론 학교를 다니면서도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없었지만…, 그런 문제인 걸까?
그냥 날 강간한 강간범이라고 이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알렉스는 씩씩거리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 쉬프트까지 도저히 쉴 마음이 나지 않아서 작게 마련한 단련실에서 온몸에 추를 달고 마실 물과 스포츠 음료가 잔뜩 든 가방을 메고 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허억…."
햇볕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그의 몸무게의 몇 배나 될 법한 짐을 이고 달리니 1시간도 되지 않아 이 지경이다. 흘린 땀만큼 수분을 섭취하고 얼굴과 머리를 감싼 천을 물로 적셨다. 좀 살 것 같았다. 자동으로 체온을 식혀주는 운동복도 바람도 불지 않는 사막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온몸도 물로 적시고 다시 달렸다. 물론 보통 사람은 사막에서 이런 짓을 하면 십 분도 안 되어 죽는다.
베이스 캠프가 손톱만큼 보였다. 베이스 주변을 나선으로 돌며 점점 멀어졌기 때문에 꽤 달렸다. 잠깐 주변을 보니 아까 게이트로 출발한 선발대가 운하 근처로 다가가고 있는 게 멀찍이 보이고 나머지 계측기를 포터에 싣고 움직이는 두 그룹이 간격을 크게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정밀기계를 옮기다 보니 운반용 트레일러나 비행 트레일러를 사용하지 못하고 정밀 부품 공장에서나 쓰는 포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변의 충격을 흡수하고 일정한 속도로만 움직이는 공중부양장치였다. 덕분에 몇 명의 사람만 그 속도에 맞춰 4륜차에 타서 움직이고 용병들은 무기를 든 채 주변을 호위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소드마스터들이니 그 정도 구보에 문제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 순간 알렉스는 목 뒤의 솜털이 바짝 서는 걸 느꼈다.
'온다…!'
알렉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낀 눈으로 주변을 보다가 바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태양을 등에 지고 가고일이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일곱 마리! 소리도 하나 없이 나타난 몬스터가 사람들을 노렸다. 이 사막에 몬스터라고 먹을 게 있겠는가. 사람들의 냄새가 그들을 이끈 것이다. 가고일은 2번째 그룹을 노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들의 낙하 지점을 향해 달려가며 온몸에 진 짐들을 떨구어 냈다. 떨구어 낼수록 그의 속도가 빨라졌다. 당연히 저쪽 용병들도 가고일을 발견하고 민간인을 뒤로 밀어내며 반은 남고 반은 앞으로 달렸다.
알렉스는 남중국해에서 훈련으로 1년 반을 지냈다. 전세계에서 가장 활성화된 게이트가 있는 곳이다 보니 가고일이 하늘을 구름처럼 덮은 끔찍한 광경도 본 적이 있었다. 가고일은 진짜 잡기 어려운 몬스터였다. 피해자가 생겨 그것들이 시체를 뜯어먹는 동안 머리를 자르는 게 가장 빠른 길이고 배가 부른 가고일이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발로 쥐고 날아가버리면 잡을 수도 없을 뿐더러 어디에 사람이 있었는지 기억하고 언젠가 다시 무리를 이끌고 돌아온다.
드디어 온몸에서 추를 다 떼어낸 알렉스는 편대의 가장 왼쪽에 있는 가고일이 지상에서 4m 정도의 높이까지 내려오자 그 등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단박에 오라 검을 2m 정도로 만들어 척추를 찔러 비틀었다. 즉사한 가고일의 몸에서 힘이 사라지며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른 가고일이 부리로 쪼려는 걸 몸을 비틀어 피했다. 죽은 가고일의 몸을 보드처럼 타고 모래 위를 미끄러지다가 바닥에 착지했더니 포터들 엄청 가까이에 도달했다. 차에서 내려 상황을 보고 있는 그 여자가 보였다. 알렉스는 화를 냈다.
"빨리 차에 타!! 뭐 하는 거야! 도망가라고!!"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뒤통수 조심해라."
알렉스는 등골이 오싹하며 바로 몸을 확 낮췄다. 용병들에 의해 상처를 입은 가고일이 알렉스의 머리를 부리로 깨물려고 한 것이다. 알렉스는 가고일의 턱을 주먹으로 올려 치며 곧바로 오라의 검을 생성해 꿰뚫었다. 가고일은 깔끔하게 죽었으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말았다. 가고일의 피와 살은 냄새가 고약했다. 알렉스는 우욱, 하고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훔쳐내고 주변을 살폈다.
"아, 깜짝이야. 잘했다, 꼬맹이."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용병이 알렉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짧게 깎은 금발 머리에 눈에 띄는 흉터가 있었다. 용병이라 하여 거칠 것 같은데도 목소리와 말투가 남자다우면서도 단정했다. 갑자기 가고일이 용병들을 빠져나가 포터로 달려가 큰일날 뻔했다. 이 용병은 가고일을 죽이고도 피를 안 뒤집어썼는지 옷깃 하나 안 버렸다. 그는 얼굴과 머리를 감싼 천을 알렉스에게 넘겼다.
"감사합니다."
그걸로 얼굴과 손 정도만 어떻게 닦아냈다. 용병은 많았고 가고일은 일곱 마리밖에 없었으니 다행히 가고일 유인책을 써서 다 잘 잡은 것 같았다. 다친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알렉스를 아래위로 보다가 말했다.
"너 선수냐?"
"네."
"몇 살인데."
"19살인데요."
"가고일 잡는 법은 어디서 배웠냐? 여기 온 선수들은 그 뭐냐…, 유스팀? 용병 출신 아니라며."
"남중국해에서 1년 반 동안 훈련했거든요."
"그래?"
그는 까끌할 정도로만 머리카락이 남은 두피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지만 아마도 금발에 녹안을 가진 미남이었다. 그는 흉터를 엄지로 긁적거리다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훈련은 어떤 식으로 하냐? 몬스터별로 어떻게 잡는지 그런 거 가르쳐주냐? 첫번째 레이드 때는 어떻게 사망률 조절하냐? 보통 그때 반은 죽잖아. 니들은 용병으로 팔린 거 아니라서 죽으면 큰일나는 거 아니냐? 지금까지 죽은 놈은 없어?"
질문이 너무 많다. 알렉스는 입에 들어간 가고일을 피를 몇 번이나 퉤퉤 뱉으면서 대충 대답했다.
"일단 구단에서 시뮬레이션 훈련 3개월 정도 빡시게 하고 잘하는 애들만 일주일 정도 동해 게이트 쪽에 보냈다가 거기서도 적응 잘한 애들만 남중국해로 보냈어요. 아, 근데 아저씨 나중에 얘기하면 안될까요? 제가 볼일이…."
"아, 그래…. 아니! 야! 형이라고 불러!!"
용병들은 가고일의 시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냄새가 엄청나기 때문에 빨리 처리를 하지 않으면 다른 몬스터들을 부를 것이다. 합성 비닐을 깔고 거대한 가고일을 들어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 다른 비닐을 거기 위에 덮은 후 전기 자극을 주면 진공 포장이 된다. 당연히 실제 몬스터전에서 용병들이 쓸 일은 없는 물건이고 이럴 때에 대비해서 지급된 물품이었다. 그런 식으로 가고일의 시체를 일단 처리하고 가고일의 피와 살점이 벌써 말라붙은 모래도 삽으로 퍼서 진공 처리하고 포장과 전투 지역을 화학약품처리해서 냄새를 제거했다. 벌써 포터들은 미리 출발하여 저쯤까지 가 있었고 그걸 얼른 따라가려고 했던 알렉스는 그 용병들에게 붙잡혀서 홀딱 벗겨지고 벅벅 닦은 후 천조까리 하나만 두른 채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 다시 씻어야만 했다.
"헐! 야! 너 뭐야?"
베이스 캠프에 남아있던 친구가 알렉스가 홀딱 벗고 샤워실에서 나오자 깜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이름은 리천, 18살. 키 190에 미드필더 포지션이었다. 몽골리안의 특색이 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찢어진 눈에 평평한 이목구비와 광대.
"방금 가고일 나왔어. 시체 가지고 용병들 몇 명 이쪽으로 오고 있다."
"아, 진짜? 누구 안 다쳤어?"
"어, 괜찮은 듯."
"넌 거기 왜 있었는데? 저녁 쉬프트잖아."
"운동하다가. 넌 뭐 하는데? 지금 누구 경호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바빠 죽겠는데 졸졸 따라다니는 거 귀찮대. 그래서 다 여기서 죽치고 있다."
리천의 뒤로도 유스팀 대여섯 명이 그냥 시시덕거리면서 간식이나 축 내고 있었다.
"아니, 나도 돈 준대서 좋다고 따라오긴 했는데. 진짜 뻥 안치고 존나 심심하다…. 가고일 잡는 거 재밌었겠다."
리천이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에게도 탄산음료를 하나 던져주었다. 알렉스는 바로 옆 텐트가 숙소라 거기서 속옷이랑 바지만 챙겨 입고는 다시 나왔다.
"맞아. 덥기는 개덥고."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진, 키 187의 유리 라자레프(17세)는 그렇게 불평하다가 아, 하고 말했다.
"근데 우리가 호위하는 여자 쩐다. 진짜 예쁘다?"
"우리? 몇 명이서 하는데?"
알렉스가 콜라를 꿀꺽꿀꺽 마시며 물었다.
"3명. 그 둥둥 떠다니는 할머니 다음으로 제일 많아."
"근데 바쁘다고 제일 먼저 쫓아내더라."
리천이 덧붙여 말했다.
"…혹시 좀 무섭게 생기고 머리 이렇~게 한 여자?"
"어, 맞음."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눈을 휘둥그레 뜬 천 코치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니들 일 안 하고 뭐 하냐?"
"코치~ 아니, 사람들이 저희 호위 받기 싫대요!"
"다들 저희 귀찮아 하고! 우리가 여기 베이스 다 지었는데!"
"따라다니지 말래요!"
그러자 천 코치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더니 애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웠다. 덩치는 산만해도 이것들은 다 어린애들이었다. 용병과는 달랐다.
"야! 방금 가고일 튀어나왔다는 말 못 들었어? 빨리 가서 붙어 있어!"
"어…, 근데 우리 교수님은 벌써 가셨는데."
"어딜?!"
"우리 떼놓고 게이트 쪽으로 갔는데요? 저희 시끄러워서 싫대요."
"야! 이 교수님들 얼마나 중요한 일 하시는 줄 모르냐! 거기서 떠들고 있었어?!"
"심심한데 어떡해요."
"교수님 누구라고?"
천 코치가 얼른 디바이스를 꺼내 명단을 살폈다. 유리가 기억을 해내기 위해 노력하며 리천의 등을 팍팍 쳤다.
"퀴, 퀸? 이름 그랬는데?"
"예쁜 교수님이요."
리천이 대답했다.
"세현 퀸 교수님…. 어? 경호 등급 바뀐 것 같다. 한 명만 가면 되겠다. 빨리 누구 손 들어."
"예~~? 아~~"
이미 쉬는 맛이 들린 애들은 누구 하나 선뜻 손을 들지 않았다. 알렉스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천 코치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너 저녁이잖아?"
"저녁에도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숙소 앞에 죽치고 있는 거잖아요."
"그건 그래도…. 안 졸고 할 수 있겠냐?"
"일주일은 거뜬해요."
"하긴."
남중국해에 1년 넘게 있었는데.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잠 한숨 못 잔 적도 많을 것이다.
"근데 퀸 교수 순위가 왜 떨어졌는지 모르겠네? 완전 스타 교수일텐데."
그는 알렉스의 숙소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잔뜩 달린 군복 비슷한 것을 꺼내서 주었다. 거기에 총기가 든 박스에 지문을 인식시키고 소총이랑 권총도 꺼내서 침대에 두었다. 탄약도 두 개씩 챙겼다.
"총이요?"
알렉스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렇게 반문했다.
"오라 실어서 쏘는 거 연습했지? 사람 지킬 때는 오라 함부로 쓰면 너 때문에 사람이 먼저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아니면 기계 자르던가. 웬만하면 총 써라. 기계 그거 하나 자르면 우리 받은 돈 다 토해내고 더 내야한다."
"네."
"타이탄 나오지 않는 이상 오라검도 몇 미터씩 뽑지 마라. 여긴 사람이 뭉쳐서 다니니까. 민간인도 있고."
"네."
"그리고 교수님들 일 하는데 떠들지 말고! 입 꽉 닫고 있어."
천 코치는 유스팀 소속 코치로 거의 애들 보모나 다름없었다. 그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알지? 오라방출기는 쓰면 안 되는 거?"
"아, 알았어요! 몇 번을 말해, 진짜."
"싸가지없는 새끼. 자, 다 챙겼어? 빠뜨린 거 없고? 인이어 꼈냐?"
"네. 네. 네."
"우리 있을 때는 몬스터 하나도 안 나왔는데 사람 수가 많아지니까 나오는 거 같다. 2백 명 넘잖아."
"그런 거예요?"
"내가 봤을 땐 그런 거 같다. 그래서 애초에 경호 숫자도 50명 정도만 한 거 같은데 용병들이 150명이나 더 오니까…. 씁. 좀 느낌이 안 좋다."
천 코치가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의 군복 매무새를 잡아주었다. 그에게 AR 기능이 탑재된 선글라스를 주고 장갑에 군모까지 씌웠다. 가벼운 차림의 용병들에 비해서 너무 장비가 많았다. 알렉스가 볼멘소리를 냈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너 다치면 내가 모가지다. 이제 빨리 가. 우리 바이크 어디 있는지 알지? 빨리 가라. 이제 교수님…, 거의 게이트 도착하셨네."
"네."
알렉스는 인이어의 수신을 조절하며 바이크를 타고 다시 사막으로 향했다.
*
[야! 한 달 동안 몬스터 같은 거 쥐뿔도 안 나왔다며? 이거 뭐야?!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
"아, 교수님, 저희도 지금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 지대는 안정된 지 오래라 마지막으로 이 근방에서 몬스터 본 게 2년 전이라고…."
[그건 예전이고! 오늘이 수에즈에 온 첫날인데 벌써부터 나왔잖아! 이거 어떡할 거야? 대비책은 있는 거지? 학과장님 어딨어?]
비서가 디바이스에 대고 굽실거리다가 캘리 박을 돌아보았다. 캘리 박은 고개를 저으며 목 근처를 손날로 긋는 시늉을 했다. 그냥 끊으라는 것이다. 비서는 어떻게든 그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얼른 말했다.
"일단은 용병들 24시간 동안 베이스 캠프랑 게이트 주변에 경비 세워 둘 거고…."
[야!! 이 실험 망하면 니가 책임질 수나 있냐?! 어!! 일 똑바로 안 해?! 우리가 놀러 왔어?! 누구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기계라도 하나 망가지면 너 이거 스웨덴에 변상할 수 있냐? 어?!]
"경호실장, 서던라이온 코치, 미국 용병장들과 즉시 대책 수립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괜찮으신 거죠? 누구 다치거나 한 건 아니죠?"
[용병들이나 더 보내!! 베이스보다 기계를 지키라고!]
"네, 알겠습니다…."
[이거 계속 나올 거 같으면 노친네 보고 24시간 여기 지키라고 할 거라고 전해라, 알겠냐?]
"네. 네…, 네. 조심하시고…. 설치 다 되기 전에 증병해드리겠습니다. 네…. 네. 들어가세요. 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세계물리학회 수석비서관 한민유는 한숨을 푹 쉬면서 경호실장과 두 경호팀의 책임자들을 불렀다. 그녀는 실험이 진행되는 31일 동안 몬스터를 만날 확률이 1%도 되지 않는다고 보고를 올렸다. 따라서 퀸 교수에게 이 불호령을 듣게 된 것이다.
"진짜 어쩌죠, 학회장님? 진짜 계속 나올까요, 몬스터?"
그녀가 불안한 티를 버리지 못하며 그렇게 물었다. 캘리 박이 여상하게 대꾸했다.
"그 미국에서 온 놈이랑 먼저 얘기해라. 걔가 여기서 제일 전문가일 거 아니냐. 어딨냐?"
"미국 용병들 책임자가 공동사업자라, 한 분은 퀸 교수님 따라가셨고 한 분은 캠프 내에 계시네요. 오고 계십니다."
그렇게 행정 책임가들이 대책을 수립하는 동안 게이트에 도착한 세현 퀸은 전화에다 화를 쏟아내고는 후우, 하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일을 똑바로 하는 놈들이 없어."
그 뒤 멀티스크린을 보며 작업의 진행상태를 확인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수에즈 게이트를 보았다. 멀리서는 평평하게 보이던 게이트가 가까이에 와서 보니 거대한 구체를 이루고 있었다. 먹물이 잔뜩 풀린 물속을 보는 것처럼 언뜻언뜻 빛 무리가 보이는 곳이 있다가도 없어졌다. 환상이었나,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해서 신묘한 느낌이었다. 공기가 구체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중력계측기 외에 다른 계측기들이 나타내는 수치를 보아도 그랬다. 왜 이런 것일까?
"오…. 다르네요."
30대 중반의 용병, 여기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용병장 중 한 명인 아담이라는 남자였다. 짧게 깎아놓은 갈색이 섞인 금발 머리, 올리브색 눈동자, 남자다운 얼굴에 굉장히 잘생긴 미남자였다.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세현 퀸에게 말을 걸었다. 세현이 물었다.
"뭐가 다르지?"
"보통 다른 게이트들은 밖으로 공기가 나오는 느낌이 듭니다. 가까이 갈 일은 별로 없지만."
"그래?"
"활발한 게이트들은 보통 회전 속도도 빠르고 나오는 공기량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풀 냄새 같은 게 난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세현은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안쪽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서 그런지 그런 냄새는 나지 않았다. 멀티스크린을 보니 50개의 계측기의 설치가 막 완료되었다. 세현이 혀를 내둘렀다.
"소드마스터들은 정말 힘이 세군. 역시 사람 손으로 하니까 설치가 빠르네."
평지화는 이미 한 달 동안 있던 서던라이온 유스팀이 완료해놓았다. 계측기 50개를 지상에, 50개는 공중에 설치하게 될 것이다.
"보통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기계로."
"기계는 왜 안 가져오셨죠?"
"그것까지 다 들고 오려면 비용이 배로 들어."
아담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희가 안 왔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했습니까?"
"마도사가 8명이나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선수들 시켰을 거 같아. 우리가 중력 마법만 쓰다 보니까 다른 마법은 좀 서툴거든."
"그렇습니까?"
그 정도 얘기만 하고 세현은 실험 계획을 다시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틀에 걸쳐 기기설치가 끝나고 나면 바로 웜홀을 방사선으로 조사하여 정보를 얻을 것이다. 적어도 5일 동안은 게이트의 활동을 스캔기로 알아낼 수 있는 만큼 알아낸다. 그 이후부터는 소형 멀티센서 로봇을 웜홀 안으로 진입시켜 웜홀 너머의 정보를 알아볼 것이다. 7일 동안 면밀히 조사를 하고 그 다음에 동물을 태운 최신 우주유영기를 가지고 웜홀 안에 들여보냈다 일정 시간 두었다 귀환시켜 안정성을 테스트하고(5일간) 유인 우주유영기를 진입시킬 것이다. 이미 게이트 안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오갈 수 있다는 증거가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안정성을 다시금 테스트하는 것이다.
생명이 살고 있는 타 행성을 탐사하는 것은 인류 최초다. 그 정보를 7일간 면밀히 수집한 후 2128년 4월 20일 정오에 기해 웜홀 내부에서 소형 빅크런치 실험을 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빅크런치 실험은 몬스터 게이트를 닫는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이론적 모델은 완성한 상태였다. 그리고 남은 닷새 간 게이트 소멸 경과를 지켜보고 프로젝트를 완료하는 것이다.
아담은 세현을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론 모델을 완성하고 실현까지 이끈 대단한 학자. 남극해에서 그 얘기를 처음 듣고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만 해도 아담은 그 학자가 아주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여자라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 그리고 직접 보았을 때는 그녀가 미녀라서 더욱 놀랐다.
[이런 미녀가 그런 대단한 프로젝트를 할 줄이야.]
라고 감탄했더니 그녀가 비웃었다.
[아직도 그런 구닥다리 같은 말을 하는 놈이 있다니. 못 배운 티를 너무 내는데. 아니면 머리가 나쁜 건가? 둘 다겠군.]
[…….]
그 뒤부터는 입조심을 했다. 그는 용병일을 오래했고 독자적인 용병단을 꾸릴 정도로 수완이 있는 남자였지만 역시 사회생활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편견을 드러냈다가 일에서 짤리면 그게 무슨 망신인가.
보통 사람들은 여자나 남자나 할 것없이 그같은 용병을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살생을 밥벌이로 하는 데다가 신체적 차이가 가지는 위압감은 본디 생물의 본능에 각인되어 있다. 그녀는 키가 크고 글래머러스한 여자였지만 2m의 키에 근육질인 그와는 질량 자체를 비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거리낌이 없었다.
'정말 겁이 나지 않는 거겠지….'
이 여자는 마도사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모두가 몬스터에게 뜯겨도 전부다 죽이고 자력 탈출하는 건 우스울 정도일 것이다. 본인은 중력 마법 이외에는 서툴다고 말했지만. 오기 전에 아는 마도사 용병에게 물어봤더니 이 여자 혼자서 지구를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녀는 저번에 그를 한 번 만났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그리 잊기 쉬운 얼굴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야만적인 이 업계에서도 불문율로 내려오는 게 몇 가지 있다면 그 중 하나가 강자를 존중하는 것이다. 아담은 순수하게 그녀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보통 소드마스터랑 마도사랑 붙으면…, 상황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소드마스터가 이기고 마음을 제대로 먹으면 마도사가 무조건 이기지.'
보통 서로 붙을 일이 없다. 같은 편 먹고 싸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간 전쟁 같은 경우는 아주 가끔 대적할 때도 있다. 그럴 경우 군법에 크게 안 묶이는 용병 같은 경우 대부분 줄행랑 치고 기량이 꽤 있는 놈은 미친 듯이 적군 사이로 파고 들어 상대편 마도사가 아군을 죽이는 걸 꺼려하는 사이에 마도사의 목을 따버린다. 그걸 잘 아는 노련한 마도사는 미련없이 아군이랑 그 소드마스터를 같이 날려버린다. 더 기량이 있는 마도사는 죽지 않을 정도로 다 같이 날린 뒤 소드마스터만 일점 타격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진짜 대단한 놈일 경우다. 사로잡는 경우도 봤는데 그때는 아담도 미련없이 도망쳤다.
'진짜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데.'
물론 소드마스터가 소드마스터가 아닌 사람을 칠 때는 툭이 아니라 틱 쳐도 죽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몸을 가진 미녀는 절대 치면 안 된다. 아깝다 못해 그 사실을 안 다른 동료들이 그를 죽이려 들 정도로 안될 짓이다. 안 그래도 전쟁터만 도는 150명이나 되는 용병들이 오랜만에 민간인을 만나게 되니 이 교수와, 학회장과 같이 다니는 비서가 그들 사이에서 엄청난 아이돌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휘파람 부는 건 당연히 처음부터 금지했다. 도촬하는 새끼들은 잡히는 대로 족치고 있었다. 걸렸다간 모가지다. 물론 소드마스터들이니 같은 소드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담은 한참 그렇게 세현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 가고일을 두 마리 죽인 어린애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저 멀리서 바이크를 타고 오고 있었다. 용병들은 다들 잠깐 무기를 들며 긴장했다가 누군지 확인하고 다시 일로 돌아갔다. 그는 바이크를 대고 이쪽으로 바로 왔다. 아담은 수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 그러자 그는 용병들의 수신호를 아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호위. 세현은 계측기가 들어있던 큐브를 쌓아놓은 곳 위에 올라가 전체를 관망하고 있었다. 아담도 그녀의 뒤에 있었다. 가고일이 나온 이상 그녀에게 근접 호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린애는 펄쩍 뛰어서 조용히 아담의 옆에 올라왔다. 아무리 봐도 힘 조절 센스가 정말 좋다.
'이게 선수인가….'
보통 사람들은 소드마스터의 나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같은 소드마스터끼리는 대충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10대 후반 정도일 것이다. 오라의 상태를 봐도 그렇고.
아담도 20대 땐 선수 제의를 받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 이미 용병단을 꾸리고 있을 시절이라 거절했었다.
'훈련을 받으면 이런 느낌이 나는 건가? 딱히 오라를 쓰는 것 같지도 않는데 많이 느껴지네. 아까 가고일 죽이는 거 보니까 뭐, 우리 애들 중에서도 5~6년차는 되는 놈같이 죽이던데. 선수끼리 붙는 훈련만 하는 줄 알았는데 레이드도 연습시킨다고? 왜? 훈련 프로그램 좀 입수할 수 없나? 서던라이온 다른 애들도 얘만큼 할 수 있는 건가….'
아담은 알렉스를 계속 관찰했다. 가만히 있던 알렉스가 갑자기 인상을 확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기분 나쁘게 왜 계속 쳐다봐? 남자 관심 없다고, 씨발."
아까 전엔 존댓말 쓰더니 기분이 나빴는지 바로 반말에 욕이다. 존댓말 쓰는 거 보고 얘는 문명인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아담은 생각을 약간 바꿔 먹었다. 반만 문명인이군.
"아, 미안."
그러자 일을 하고 있던 세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알렉스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뭐야? 얘 언제 왔어?"
"아, 방금 왔습니다. 호위라네요."
"원래 얘 아니었는데. 그리고 세 명이었고."
"한 명만 오면 된다고 해서 내가 왔어…습니다."
알렉스는 반말을 할 뻔하다가 존댓말로 얼른 바꾸었다. 세현이 인상을 썼다.
"왜 한 명이야? 가고일 나왔다고 얘기 안 했어? 내 경호인원이 그 노친네 다음일 텐데."
"경호등급이 바뀌었다는데요."
알렉스가 대답했다.
"뭐?"
"그렇네요."
아담이 바로 확인을 해주었다. 세현이 다가와서 명단을 보았다. 8위. 2위는 왕 박사. 물론 옛날 옛적에 밟아버린 놈이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계 내에서 세현 퀸의 라이벌이라 일컬어지던 물리학자였다. 세현은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이를 갈았다.
"망할 노친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안 세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냥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채 일로 돌아갔다. 비서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에게 전화해서 노발대발하지는 않는 것이다. 잠시 그렇게 침묵이 흐르고 아담은 인이어로 보고를 받았다.
[나머지 50개 무사 도착.]
"계측기 전량 도착했다고 합니다."
"봤어."
30분에 걸쳐 용병들이 50개를 다른 50개의 바로 뒤에 붙여서 두었다. 그러자 게이트까지 온 마도물리학자 교수 세 명이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나머지는 아직 안전 문제로 베이스 캠프에 남아 있었다.
"자원 없습니까?"
[퀸 교수님이 책임자시니 퀸 교수님을 추천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아, 제가 할 게 많아서 참 바쁩니다. 일을 똑바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저 아닙니다.]
[저도 아닙니다.]
"누가 교수님들이 일 안 한답니까? 찔립니까?"
세현은 손을 모아 잡아 하늘로 치켜들어 그 가운데를 보며 점을 쳤다. 다른 마도물리학자들도 비슷한 짓을 했다. 뒤에서 이 마도사들이 뭐 하는지 지켜보고 있던 알렉스와 아담은 그들이 곧 힘차게 가위바위보를 하자 실소를 하고 말았다.
"아싸!"
세현은 주먹, 나머지 둘은 가위를 냈다. 그 뒤 교수 둘이 비장한 표정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더벅머리에 팽글팽글 한 안경을 쓴 젊은 교수가 졌다. 세현이 히죽히죽 웃었다.
"일 똑바로 합시다. 1cm라도 틀어지면 욕할 겁니다."
[사실 좀 틀어져도 상관없잖아요.]
"뭐라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는 정확하게 지상에 설치된 계측기의 위, 상공 1km의 지점에 계측기를 설치해야 했다. 영구부양마법을 하나하나 걸어야 했다. 중력 관련 마법이야 뭐든 잘하니 부양 마법 자체는 상관이 없는데 '영구' 부분이 문제였다. 물론 진짜 영구적으로 띄워놓을 필요는 없지만 중간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신경 써서 걸어야 했다. 소드마스터들이 금방 척척 계측기를 위치에 놓은 것과 다르게 그 교수가 계측기 하나를 설치하는데 10분씩 걸리기 시작했다. 5개쯤 설치를 했을 때 또 무전이 들려왔다.
"교수님, 식사하시라고 합니다."
"하고 와. 오면서 커피 한 잔 가져오고."
세현은 멀티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렇게 말했다. 아담이 다시 말했다.
"아까 점심도 안 드셨지 않습니까?"
"저 먼저 갔다 올게요."
알렉스는 심통이 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세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담은 알렉스가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다가 알렉스가 돌아가니 식사를 하러 갔다 간이 의자에 앉아 끊임없이 멀티스크린을 이용해 모델을 돌리고 종이에다가 계산을 하고 있는 세현이었다. 돌아온 아담이 세현에게 커피와 뜨거운 스프가 든 종이컵도 건넸다. 좀 있으니 그녀가 배가 고프긴 한지 식은 스프를 원샷 했다. 알렉스는 그런 그녀를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복수하지? 씨발, 진짜 어디 묻어버릴까?'
경호를 하려고 온 놈이 뒤에서 그딴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세현 퀸은 프로젝트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이가 갈렸다.
'어떻게 이래도 몰라? 지금 내가 몇 시간째 뒤에 서 있는데도 몰라? 똑똑한 여자라면서 바보 아니야? 얼굴도 못 본 나도 이렇게 알아보는데!'
알렉스는 이를 박박 갈았다. 그렇게 자신이 강간한 남자를 잊어버린 여자와 그런 여자에게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은 남자가 경호 대상과 경호라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한 채 일주일이 흘러갔다.
*
복수하겠다, 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알렉스는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계획을 구상했다.
정말 모래에다 목까지만 묻어버리고 잘못했다는 소리 나올 때까지 기다려? 아냐, 아냐. 기억도 못하는데 잘못했다는 소리가 나오겠어? 그리고 나인 거 알면 내가 감방가게 생겼는데. 어…, 잠깐만. 그 여자 마도사지. 난 경기 연습할 때만 마도사랑 붙어봤는데. 사실 걔들 규칙 없이 마법 쓰면 나 그냥 죽잖아?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제대로 될 만한 게 안 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간단히 소드마스터인 알렉스를 묶어놓고 억지로 해버렸는데 알렉스는 마도사인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도사는 죽일 거 아니면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가 안 나왔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응? 마도사를 상대하는 법?"
"어."
남중국해에서 훈련을 할 때도 알렉스는 현지 용병들과 금방 친해졌다. 아담이라는 용병장이랑도 그럭저럭 교류가 생겼다. 그는 서던라이온의 훈련방식에 아주 흥미를 보이며 알렉스와 유스팀에게 자주 말을 걸곤 했다. 그는 냄새만 맡아봐도 강하다는 것이 티가 났기 때문에 알렉스도 자연히 좀 따르게 되었다. 그는 자주 먹을 걸 들고 왔다. 유스팀에겐 금지되어 있는 술이나 적당한 강도의 약물도 있었다.
"그냥 죽여야 하는 거 아냐? 실전이면?"
유리 라자레프가 그렇게 말하며 아담이 가져온 빅맥 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대꾸했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해오는 건지 모르겠다. 같은 금발녹안으로 자신과 좀 닮은 유리의 머리를 아담이 쓰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면 확실하게 원샷으로 죽이고 아니면 도망가야지."
"아니, 죽이는 거 말고…. 좀 엿 먹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겁만 좀 주고 싶어."
겁나서 오줌 쌀 정도로. 알렉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가 버거 세트에 손도 안 대고 있으니 유리가 금세 그걸 뺏아갔다. 리천은 프렌치 프라이를 건졌다.
"응? 누구? 새미가 너한테 언제 그렇게 크게 엿 먹인 적 있냐?"
리천이 서던라이온 유스팀 소속의 마도사 이름을 들먹였다.
"새미 말고."
"글쎄…. 그런 거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마도사한테 발릴 가능성이 훨씬 큰데?"
그냥 간단하게 공중부양마법 걸어서 쉴드 안에 가둬 버리기만 해도 게임 끝이란다, 얘들아. 아담이 자기 분의 버거를 먹어 치우며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가 얼른 다시 말했다.
"마도사도 인지 능력은 보통 사람이랑 다를 거 없잖아요. 빠르게 움직이기만 해도 제대로 마법 못 걸 텐데."
"그건 그런데…. 그런 경우에 마도사가 그냥 자기 빼고 전방향으로 마법 난사하면 너 말고도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단다."
"어차피 그쪽도 저 죽이지는 못할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문제야. 우리는 저쪽을 죽일 기세로 안 덤비면 답이 없는데 저쪽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고 가지고 놀 수도 있고 옵션이 참 많다니까? 마도사랑은 척 지는 게 아니에요. 형 말을 믿어요."
"……."
알렉스는 뚱한 얼굴로 콜라만 쪽쪽 빨았다. 열 받는다….
"마도구는요? 마도구 중에 마도사가 마법 못 쓰게 하는 것도 있지 않아요?"
"그런 거 되게 비싸다, 알렉스야? 그리고 그거 마도사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야. 어떤 놈은 그런 거 채워도 단박에 풀어. 그리고 난 뒈지는 거야."
아담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유리가 관심을 보이면서 물었다.
"진짜요? 새미는 그냥 병신인데. 마도사들이 그렇게 대단해요?"
"마도사도 마도사 나름이긴 한데. 마도사 용병이 적군에 있으면 그냥 죽어라 도망가는 게 신상에 이롭다. 니들 다니엘 스톤하츠 알지 않냐?"
"어?! 네!"
아는 이름이 나오자 애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담을 바라보았다.
"나 3차 중러전쟁 때 러시아 용병으로 뛰었는데 하인델토크 전에서 처음으로 죽을 뻔했다. 그 새끼가 진짜 또라이로 유명하긴 했는데, 거기서 11만명을 한 방에 죽이더라고. 아, 괴물새끼. 그때 다친 거."
아담이 자신의 머리에 난 흉터를 가리켰다. 애들이 ‘오오~’ 하면서 감탄사를 냈다. 참 귀여운 애들이다. 같은 나이의 용병들도 엄청 많은데 확실히 다르다.
"그때 우리 애들 안 데려가서 다행이지. 나 전 재산 다 날릴 뻔했다."
"와."
유리는 수에즈에 오기 전까지 용병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았고 이번에 수에즈로 온 것이 몬스터 게이트 첫 경험이었다. 용병단 대장의 인생은 파란만장하고 히로익 했다. 유리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TFC 랭킹 1위에요."
리천이 말했다.
"그런 새끼가 무슨 선수질이야."
아담은 픽 웃었다.
"어쨌든 마도사 잡는 건 관둬라."
"……."
알렉스는 부글부글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리천이 한 달 만에 맛보는 패스트푸드에 손가락까지 쪽쪽 빨고는 아, 하고 말했다.
"새미가 전에 그러던데 마도사들은 잘 때랑 무의식중에 마법 못 쓰도록 꼭 훈련한다고 하더라구요. 시야가 제대로 확보 안 되었을 때도 그렇고."
"응? 진짜?"
아담이 반문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유리도 반쯤 드러누워 프렌치 프라이를 잔뜩 먹으며 대답했다. 그는 맥도날드를 엄청 좋아했다.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위험하다고."
"오…, 일리 있네. 좋은 정보다. 맞아. 보통은 잡을 때 뒷치기 하지…. 눈을 가리고 묶어놓고 거꾸로 매달아놓으면 효과 있겠는데?"
아담이 중얼거렸다. 사막의 밤은 서늘했다. 모닥불을 피워 두고 빙 둘러 앉아 패스트푸드를 다 먹은 소드마스터들이 배부른 짐승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 뒤통수를 치자. 기절시키고 눈 가리고 팔다리 묶고… 그래! 나한테 한 거랑 똑같이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놓고 생각하자. 그러면 일단 마법은 못 쓴다는 거지? 그렇지?’
알렉스는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혼자 마구 흥분해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어떻게 괴롭히고 후회하게 하고 사과하게 만들지!
아담은 담배를 말아 피우기 시작했다. 유리가 물었다.
"근데 대장은 왜 선수 안 됐어요?"
"어? 뭐…."
아담이 대답하려는데 순간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또 나왔다."
그 자리에 있는 소드마스터들은 조용히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아담이 부정의 소리를 내며 손짓했다.
"총 내려놔라. 사람들 다 잔다."
가고일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나타났다. 2백 명이나 되는 소드마스터들은 3일에 하루 모아 쉬는 식으로 일이 빡세졌다. 지켜야 하는 인원은 경호 인원에 비하여 소수였지만 베이스와 게이트까지 지켜야했기 때문에 인원이 간당간당 했다.
"어…, 오늘은 좀 많네."
"20마리 정도 되네."
"아, 누가 한 마리 놓친 거 아니야?"
"그랬으면 한꺼번에 백 마리는 왔다."
이미 사람들 냄새에 이끌려 몬스터가 나타나기 시작한지라 이제 와서 사람의 숫자를 줄일 수는 없었다. 어쓰웜이나 타이탄 같은 거대 몬스터가 나오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가고일을 처리하다가 그 피냄새가 빅비틀이나 자이언트, 슬라임 같은 중소형 몬스터를 끌고 오면 더 골치가 아프다. 어쓰웜이나 타이탄은 무리를 짓지 않지만 빅비틀이나 자이언트는 수십 마리에서 수천 마리까지 무리를 짓고 다녔기 때문에 인명을 지키는데 엄청난 애로 사항이 꽃 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캠프를 파괴할지도 모를 어쓰웜만 죽어라 찾던 용병들은 그룹을 지어 혹여나 나타날지 모르는 중소형 몬스터 무리를 찾기 위해 비행차를 타고 수에즈 근처를 빙글빙글 시찰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사막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짓는 몬스터들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밤이었기 때문에 베이스의 불을 전부 꺼놓고 몇몇의 용병과 서던라이온 선수들이 무리를 지어 멀찍이서 모닥불을 켜놓은 채 시시덕거리며 미끼가 되고 있었다. 아담이 가고일을 유인하는 냄새가 나는 향을 꺼내서 흔들었다. 달 주변으로 조용히 선회하던 가고일들이 곧바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아담이 이를 유도하여 앞으로 달렸다. 다들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갔다. 유리는 콜라를 마지막까지 빨다가 마지막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짝 땅으로 깔리기 시작한 가고일 중 마지막에 있는 걸 몇 미터나 되는 오라검을 뽑아 반으로 싹뚝 잘라버렸다.
"악!! 미친놈아! 나도 썰릴 뻔 했잖아!"
리천이 오라검으로 그의 검을 막으며 그렇게 욕을 했다.
"쉿! 조용히."
다른 용병이 그렇게 주의를 줬다. 1시간 정도 해서 전부 처리했다. 알렉스도 둘을 처리했다. 그렇게 이틀동안 한숨 못 자고 가고일을 경계하다가 내리 10시간 정도를 잠들었다.
알렉스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아…! 아…!! 아앗…!]
그녀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예쁜 눈을 쇠로 된 안대로 가리고 손발을 침대에 묶었다. 이번엔 알렉스가 그녀를 강간하고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온몸을 마주댔다. 조였다. 아플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기뻐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아…! 알렉스…!]
절정의 순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알렉스는 그녀의 안에 깊숙이 박아….
"헉!!!"
알렉스는 숙소의 작은 침대에서 떨어져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짐을 이고 사막을 반나절 동안 달린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아~~!"
짜증나. 열 받는다…. 그런 여자랑 절대로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절대. 절대절대!! 알렉스는 씻고 칙칙한 얼굴로 식사를 하러 갔다.
"알렉스, 오늘도 기분 안 좋아 보이네."
세계물리학회의 수석비서관이자 학회장인 캘리 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 한민유가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의 앞에 앉았다. 가고일이 나타나면서 수에즈 프로젝트팀 경호 방식이 많이 바뀌어 이래저래 얼굴 볼 일이 있었다. 그래서 왜인지 좀 친해졌다. 밝은 갈색 머리에 검은색 머리띠를 한 밝은 미소를 가진 미녀였다. 용병들이 제발 한 번만 데려와 달라고 난리를 치는 여자였다.
"아,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요."
"또?"
"네."
"이상하네."
한민유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며 알렉스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러자 식기가 마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찌를 듯한 시선들이 뒤통수에 꽂혀왔다. 아니, 이건 살기에 가까웠다.
"아, 누나. 좀 떨어져주세요. 저 아저씨들이 겁나 노려봐요."
"응? 왜?"
그녀가 돌아보니 그들은 언제 쳐다봤냐는 듯이 다시 식판에 코를 박았다. 아담만이 웃는 얼굴로 고고하게 살기어린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대장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박사 몇 명과 캘리 박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다."
"커피나 한 잔 하자, 최 박사."
"좋죠, 학과장님."
들어온 사람의 눈치를 보며 슬슬 빠져나간 것이다. 들어온 사람은 머리를 뭉쳐서 아무렇게나 묶어놓고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로 식당에 들어섰다. 그녀는 샷을 세 잔이나 넣은 라떼를 들고 아침 뷔페의 음식을 열량 중심으로 엄청 집어서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한민유는 알렉스를 귀여워하다가 세현 퀸이 온 것을 못 알아차렸다. 그녀가 어느새 들어와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기겁해서 일어났다.
"나 갈게, 알렉스. 나중에 봐."
"아, 네…."
그녀가 그렇게 속삭이고는 얼른 나갔다. 세현 퀸은 내일이 오지 않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깎아내 듯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올해 말까지 마무리하기로 한 논문 2개를 이미 거의 다 썼다고 한다. 거기에 수에즈 프로젝트로 책임자로 있으며 하루하루 나오는 데이터도 전부 검토하고 있었다. 우려하던 몬스터까지 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첫 3일 동안 게이트에서 밤을 세웠다. 한 마리라도 게이트에서 무언가 밖으로 나오거나 밖에서 무언가 들어가면 물건들이 망가질 것이다. 그녀가 직접 게이트와 계측기에 쉴드를 씌운 채 밤을 샌 것이다. 그리고 실험을 진행하고 있을 때 가고일이 나오거나 하면 직접 대규모 쉴드를 전개하곤 했다. 덕분에 용병들이 빠르게 가고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컨디션은 하루하루 바닥을 치는 것이 바로 보였다.
그런 그녀를 알렉스는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식사를 으적으적 하면서 그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는 바짝 몸을 낮추고 있는 육식동물 같은 분위기가 났다. 상대는 알아차리지 못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커다랗고 강한 먹이가 더더욱 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무섭다."
식사를 다 한 아담이 알렉스의 등을 툭 치면서 그렇게 말하곤 지나갔다. 세현 퀸의 낮 호위를 하고 밤에는 가고일의 미끼가 되어 사막에서 밤을 지새는 걸 반복하면서 게이트 쪽 경비를 책임지는 아담과는 자주 동선이 겹쳤다. 알렉스가 이를 갈면서 세현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언제부터 눈치 챘는지 가끔씩 장난스럽게 경고를 하곤 했다. 뭘 알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실험이고 나발이고 나랑은 상관없는 거고…. 진짜 언제 덮치지?'
아, 그런 덮치는 게 아니다. 알렉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침의 꿈이 기억났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헤어나올 길이 없었다. 복수. 복수만이 답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꽤 그럴싸한 계획이 잡힌 상태였다.
일단 실험이 끝나고 식사를 건너 뛰고 자러 가는 그 여자를 기절 시킨 후 납치해서 수에즈의 폐허 도시로 데려가서 눈을 가리고 전부 묶는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상대가 누군지 모르게 한 후 그녀에게 겁을 줄 것이다. 눈물 쏙 빼게 무섭게 해줄 것이다.
'몬스터 한 마리 잡아서 주변에 풀어 둬야겠다. 잡아 먹힐까 봐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거 아냐?'
그는 아주 진지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나. 오늘 비번은 몬스터 잡는 데 써야할 거 같다. 알렉스는 음료와 먹을 걸 잔뜩 짊어지고 선글라스를 끼고 베이스를 빠져나갔다. 순찰을 다니는 용병들의 눈치를 보아 시나이 반도 쪽에는 몬스터가 안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알렉스는 조금 멀리 있는 삼각주 지역을 뒤지기로 했다. 거기는 초목도 좀 남아 있으니 분명히 좀 있을 것이다. 빅비틀이나 자이언트 한 마리 정도면 딱 좋다. 알렉스는 바이크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려 삼각주 지역에 도착한 후 약 30분 동안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몬스터의 흔적을 찾다가 자이언트의 발자국을 찾고 추적을 시작했다.
"그어어어…."
4시간의 탐색 끝에 무리에서 이탈한 자이언트 하나를 찾았다.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늘어지고 구부정한 자세로 느릿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크기는 3m 정도. 적당하다. 일단 나무의 뒤에 숨어서 서서히 가까이 다가간 후 자이언트의 두 다리를 썰었다.
"어어어억!"
자이언트가 쓰러졌다.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그것의 팔도 하나 잘랐다. 쿵쿵쿵. 남은 주먹으로 바닥을 쿵쿵 쳤다. 그는 자이언트에게 다가갔다. 그가 팔을 휘두르자 훌쩍 피하고는 주먹에 소드오라를 실어 관자놀이를 세게 쳤다. 자이언트가 침을 질질 흘리며 기절했다. 팔다리를 자른 건, 팔다리가 있으면 아무리 알렉스가 곁에 있어도 진짜 위험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옮기기 겁나 무겁다.
알렉스는 그것의 머리를 발로 툭툭 치면서 정신을 잃은 것을 재차 확인하고 커다란 합성 비닐을 꺼내 안에 페트병을 잔뜩 넣고 감싼 후 자이언트의 입안에 물리고 탄소나노튜브로 된 케이블로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부엌에서 살짝 훔쳐온 가스 토치로 자이언트의 출혈부위를 지졌다. 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케이블로 팔과 몸통을 꽁꽁 묶은 후 바이크 위에 싣고 다시 케이블로 묶었다. 2미터 전후로 줄어든 자이언트는 겨우 바이크가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구 수에즈 시의 한 곳을 지도에 찍고 자율주행을 입력하고 알렉스는 달렸다.
'사람 잘못 건드린 거라고, 교수님아.'
1시간 반쯤 달려 수에즈의 폐허에 도착하여 적당한 건물을 찾았다. 건축하던 도중에 그만두었는지 필러만 잔뜩 세워진 철근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었다. 4층 정도에 기절한 자이언트를 놔두고 제염천으로 몸과 옷가지 바이크를 정말 열심히 닦고(소드마스터는 대체로 코가 개코다) 베이스로 돌아왔다. 그러자 아주 기분이 좋아진 알렉스였다. 다음날 아침 식사 때 또 칙칙한 얼굴로 식사를 하러 온 그녀를 보자 히죽히죽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가 어떤 목소리로 비명을 지를지 궁금했다. 알렉스가 아무리 몸부림 쳐도 안 풀어줬으니까 알렉스도 안 풀어줄 생각이었다. 울고 불면서 그녀가 지금까지의 인생 동안 저질렀던 잘못을 모두 그에게 자백하고 용서를 빌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몇 시간이고 암흑 속에 묶어 둘 것이다. 그렇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알렉스는 그녀처럼 허술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디바이스를 이용해서 미리 녹음한 기계음을 사용할 것이고 알렉스는 평소의 비번 때처럼 짐을 지고 마라톤을 달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녀의 모습은 전부 녹화해서 실시간으로 감상할 것이다.
그리고 알렉스는 낮에 세현 퀸의 경호를 서고 밤에는 모닥불과 용병들의 이야기로 지루함을 떨치며 가고일을 경계했다. 또 가고일이 튀어나와 신나게 썰었다. 그는 오랜만에 컨디션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그녀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많이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누구냐, 어?"
"죄송. 저요."
리천이 그렇게 대답했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몇 명이 입에 들어온 가고일의 피를 퉤퉤 뱉었다. 리천이 마지막 가고일의 심장을 정통으로 벤 것이다. 대량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근처에서 정리를 하고 있던 4명 정도가 아주 폭삭 젖었다. 아담과 알렉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죽고 싶냐, 어? 개새끼야?"
토악질을 하던 알렉스가 리천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리천이 기겁을 했다.
"악! 더러워! 저리 가, 새끼야!"
"누구 때문인데!!"
리천은 훌쩍 알렉스를 피했다. 피를 뒤집어쓴 네 명은 옷가지를 전부 벗고 제염천으로 온몸을 닦았다. 그리고 오염물을 전부 진공 포장하고 다들 하나씩 들었다. 몇 명은 남았다.
"아, 무겁다."
"나랑 바꾸자."
"싫어, 병신아."
서던라이온 유스팀이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어느새 누가 더 빨리 달려가나 시합을 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천천히 걸어가던 용병들이 피식 웃었다.
"진짜 어린애들이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새삼 우리 애들이 얼마나 찌들었나 싶습니다. 애들 약 좀 끊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장."
"그러려면 일단 너부터 끊어야 하지 않을까."
"아, 그런 겁니까?"
가고일의 시체들을 저장창고에다 넣어두었다. 한밤중이었다. 몸을 씻으러 간 네 명을 제외하고는 다시 아까의 장소로 돌아갔다. 용병인 세 사람은 금방 씻고 나갔지만 알렉스는 가고일의 냄새가 아직도 나는 것 같아서 세 번이나 비누칠을 더 해서 온몸을 씻고 나왔다. 오염물을 제거하기 위한 거라 옷가지를 챙기지 못했다. 알몸으로 숙소로 돌아 가야했다. 뭐, 딱히 누가 봐도. 어차피 한밤중이라 일어나 있는 사람은 용병이나 서던라이온 선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으면서 가는데 뭔가 눈에 띄었다.
"?"
저 뒷모습은 아담이었는데, 누구랑 같이 있었다.
'저런 꼴로?'
그는 아직 숙소를 들리지 않았는지 알몸이었다. 그리고 저기는 HNU에서 온 교수들의 숙소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문이 열려 안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왔다.
"실력이 좋은 줄 알았는데."
"좋습니다. 어린애 하나가 실수를 좀 해서요."
"잠깐 시간 어때?"
"음…. 잠깐이 아니라 하룻밤 내내라면 괜찮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웃었다. 갑자기 알렉스의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머리로 스팀이 확 올라왔다. 그는 단박에 거기로 달려가 아담의 턱을 잡아 보고 있는 여자의 손목을 확 잡았다. 손목 아래에 초록색 전자 시계 같은 것이 빛나고 있는 손목이었다.
"아…!! 이 여자가!!"
진짜 남자면 다 좋은 거냐!!! 그런 거냐고!!! 알렉스는 화를 내며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안으며 아담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알렉스를 보았다. 이건 뭐야, 갑자기.
"이 여자는 내가 먼저니까 아저씨는 일이나 하러 가."
"뭐?"
아담도 세현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허리를 더 끌어당기려고 하다가 알렉스가 움찔했다.
"놔! 다친다고!"
"조용히…!"
세현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알렉스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아담도 노려보면서 쉿 소리를 냈다.
"뭐야, 넌."
세현이 작게 목소리를 내며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알렉스는 관자놀이 핏줄이 잔뜩 서서는 눈까지 벌게져 윽박을 질렀다.
"진짜 나 아직도 기억 못 하는 거야!"
"뭐라는 거야…."
세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아담이 알렉스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이제 어린애는 자러 가라. 여긴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내 거에 함부로 손대지 마."
복수할 때까진 누구도 손 못 댄다. 알렉스는 세현의 손목을 잡은 그의 팔을 부러뜨릴 기세로 꽉 잡았다. 세현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밖에서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긴 그녀의 학계 동료들이 잔뜩 있었다. 알몸의 남자 둘이 그녀를 붙잡고 꼴사나운 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단 왼쪽 손목을 확인했다. 진짜 간당간당 했다. 그녀는 남자 둘을 포함하여 자신의 숙소를 전부 감싸 쉴드를 쳤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녀의 생명의 시계는 속도를 더하여 흘러가기 시작했다. 남자 둘은 그러거나 말거나 입씨름에 여념이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꼬맹아. 교수님께서 볼일 있는 건 나라고."
"나는 이 여자한테 볼일이 있다고. 아, 손 떼!"
"아! 조용히 해! 머리 아프니까!"
세현이 크게 짜증을 냈다. 그녀는 왼쪽 손목 안쪽을 보면서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난 둘 다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
"…!!!"
아담은 깜짝 놀라 말을 잃었고 알렉스는 꼭지가 완전 돈 얼굴이 되었다.
*
"나!! 스위스 연맹 파티!! 기억 안 나! 사람을 죽을 만큼 강간해놓고!!"
알렉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강간마! 진짜 남자면 아무나 상관없는 거였어?!! 이 변태!!"
그러자 세현이 그제야 입을 딱 벌리고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눈치 챘더라면 여기서 완전히 모르쇠 해버렸을 것이다. 세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 그…, 너…. 어떻게…."
"씨발…."
뭐? 퀸 교수가 이 꼬맹이를 강간했다고?! 아담은 깜짝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둘 다라도 상관없다는 엄청난 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알렉스는 굴욕적이고 상처받은 얼굴로 아담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 여자한테 볼일이 있다고. 그러니까 좀 꺼져."
"…교수님?"
세현은 뭔가 꼬인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아담에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봐."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화를 냈다.
"뭘 다시 봐!!"
"아, 알았어. 조금만 진정해. 잠깐만…."
"신고할 거라고!! 너 같은 여자는 진짜 감방 가야 한다고!!"
"그래. 그래."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알렉스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쉴드를 풀면서 쉿쉿 하면서 알렉스에게 몇 번이고 당부하듯 소리를 냈다. 그녀는 아담에게 눈짓을 했다. 아담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아깝다….'
그가 살아생전 이런 여자를 언제 안아본단 말인가. 아담은 아까워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지만 그녀가 '다음'이라고 말했으니까 일단은 발을 떼기로 했다.
"정말로 다음에 불러 주셔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의 뺨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알렉스가 그의 머리를 퍽 밀어내려고 했다. 그는 예상을 하고 미리 휙 피했다.
'왜 그렇게 살기등등하게 퀸 교수를 노려보나 했더니만….'
정말 사정이 있었다. 세현은 씩씩거리는 알렉스를 일단 안으로 데리고 오고 다시 쉴드를 쳤다. 진짜 새어 나가면 안 될 소리였다.
"아, 루키 군…. 기억 못한 건 미안한데 그게 내가 다 사정이…."
"사정 같은 소리하고 지랄하네!! 무슨 사정이 있으면 사람을 강간해도 돼?! 변태 같은 년이 그걸 말이라고!!!"
알렉스는 그녀에게 화를 내면 낼수록 쌓인 응어리가 더욱 폭발했다. 세현은 초조하게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쉴드를 치고 있으니 시간이 동나는 속도가 빨랐다. 죽음까지의 시간은 곧 5시간 안쪽으로 진입한다.
"그래, 루키 군.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돈이든 뭐든 말해. 달라는 대로 줄게."
그녀의 성의 없는 말투에 알렉스는 더 분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야…, 나 그냥 여기서 너 묻어버릴 수도 있어, 어? 못할 거 같아?"
"알아. 알지. 미안하다니까. 내가 그럼 어떻게 할까? 그냥…,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말해."
그녀는 피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가 윽박을 질렀다.
"무릎 꿇어.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해!"
그러자 세현이 인상을 팍 썼다.
"그냥 돈을 불러. 쓸데없이 그런 게 왜 필요해?"
"왜? 못해? 그러면 내가 여기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봐? 어?"
"그건…."
쉴드…. 세현은 계속 왼쪽 손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또 마법을 쓰고 말았다.
"윽…?!"
알렉스는 갑자기 휘청거리며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자, 잠깐만…. 으윽!"
갑자기 어깨를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들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대로 엄청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등을 대고 눕게 되었다. 머리가 너무나 무거웠다.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아으…. 으…."
"아."
다행히 그녀도 그걸 알아차리고 머리 쪽에 가해지는 중력을 풀었다. 가까스로 알렉스의 눈알과 시력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점진적으로 가슴과 복부, 허벅지 순으로 중력을 정상으로 돌렸다. 하지만 등을 바닥에서 뗄 수는 없었다. 팔과 다리가 바닥과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그녀의 왼쪽 손목의 시계는 미친 듯한 속도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 진짜 급해. 나 죽어."
"씨…이발…! 죽는 게 누군데! 빨리 안 풀어?!"
"가만히 있어."
세현은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의 알몸을 만졌다. 알렉스의 뒷머리가 삐죽 서며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알렉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 거짓말이지…."
"눈 감아."
세현은 그의 눈을 한 손으로 가리며 알렉스의 남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그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 마…! 윽!! 미친년아, 하지 말라고!!"
알렉스는 몸부림을 치고 싶었지만 이번엔 저번보다도 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상태를 보고는 덥썩 그의 것을 입으로 물었다. 그가 아래를 볼 수 없도록 고개를 못 들게 만들었다. 그럴 것도 없이 알렉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크게 신음을 흘렸다.
"으으윽…!!"
잔뜩 쌌다. 그날 이후로는 그날 밤밖에 생각이 안 나서 자위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이런 순간에…. 진한 걸로 끊임없이 나왔다.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몸이 스스로를 배신한 것이다. 그것만큼 무력감을 느낄 일이 따로 있겠는가.
‘내 몸인데…!’
세현은 역한 얼굴이었지만 전부다 삼켰다. 그리고 곧바로 손목을 확인했다. 24시간 이상이 추가되었다.
"휴…."
세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벌건 얼굴로 수치스러움을 겨우 참고 있었다. 세현은 혀를 찼다.
"그러게 왜 끼어들어."
그러면 그냥 아담이라는 용병과 마력 보충을 했을 것 아닌가. 그랬다면 지금처럼 또 그를 억누르고 강제로 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니 주제 파악을 못 하면 몸이 고생하는 것이다.
세현은 수에즈 프로젝트와 지금까지 진행해오던 연구들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곧 죽고 만다면, 그녀가 끝까지 추구하고 싶은 것은 결국 진리였다. 이 우주의 시작과 끝. 그것의 원리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면. 예상외로 점차로 나오기 시작하는 몬스터와 촉박하게 흐르는 죽음의 시계는 안 그래도 과중한 스트레스에 무게를 더하기만 했다.
거기에 귀찮기 짝이 없게도 소드마스터 같은 것들의 체액까지 받아내야 했으니. 말이라도 좀 통하면 모르겠는데 지금 이 시국이 어떤 시국인지 알 턱이 없는 그들에게 말로 설명하고 동의를 얻고 체액을 받는 일은, 그냥 생각만으로도 몹시 피곤했다. 차라리 처음처럼 누구 하나 납치해서 눈이고 뭐고 다 가리고 또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던 참이었다. 왜 못 하겠는가. 이미 한 번 성공했는데. 두 번 세 번은 오히려 더 쉬울 것이다.
“하아.”
세현은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루키 군, 이거 보여?"
그녀는 그의 눈앞에 자신의 왼쪽 손목을 보여주었다. 30시간 정도 남은 시계였다. 보통의 시계보다 훨씬 빠른 속도 줄어들고 있었다.
"이거 나 남은 목숨. 나 드레이닝 걸렸거든."
알렉스가 눈을 떴다. 드레이닝?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녀의 손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거 다 달면 죽어. 근데 소드마스터의 정기가 마력 보충이 많이 된다. 나 방금 5시간밖에 안 남았었거든."
알렉스는 당연히 그녀에게 성욕 외의 목적이 있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알렉스를 마음대로 쓰고 책임지지도 않고 버렸고 그녀를 찾아 여기까지 온 그를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러면 차라리… 그렇게 설명을 하라고…. 왜…."
그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울컥하고 눈물을 흘렸다. 세현은 한숨을 쉬며 그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마법을 풀었다. 잊어버리고 있기는 했지만 당사자가 눈앞에서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계속 그를 강간하거나 속박하는 것은 역시 껄끄러웠다.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데도 바로 일어나지 않고 일단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세현이 그런 그를 그저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서 팔을 뗐다.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확 끌어당겼다.
"나한테 다시는 마법 걸지 마. 알았어?"
"그래…."
세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알렉스의 화는 풀리지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그녀의 팔을 잡고는 침대에 던졌다.
"뭐…."
알렉스는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셔츠를 잡고 찢었다.
"응?!"
"나도 너 강간할 거야."
그의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래, 눈에는 눈이다. 그는 그녀의 바지와 속옷을 통째로 벗겼다. 그녀는 알렉스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했다.
"아니, 잠깐만…! 차라리 입으로 해줄게."
"싫어. 닥쳐."
"아니, 진짜, 진짜 잠깐만! 너 진짜 크다고…! 찢어진다고! 아…! 잠깐만!"
그녀는 결국 마법을 썼다. 알렉스의 몸이 휙 날아가서 중간에 생성한 쉴드의 벽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다. 알렉스가 화를 냈다.
"마법 쓰지 말라고 했지!!"
그가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세현은 당황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그의 손에 의해 눈이 가려졌다. 아까와는 반대 상황이 온 것이다. 그의 몸이 세현의 몸을 눌렀다.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발꿈치로 그의 등을 쳤다.
"아, 안 돼! 내 실험!! 나 쉴드 없애고 소리 지른다!"
"해봐. 그럼 니가 나 강간했다고 말하고 바로 신고할 거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악! 그냥 넣지 마. 안 들어가. 아파. 아파!!"
"힘 풀어…! 윽!"
알렉스도 아파서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녀가 알렉스를 달래듯 말했다.
"알았어. 손 좀 치워봐."
"싫어. 또 마법 걸려고 그러는 거잖아."
"안 걸어. 안 건다니까."
알렉스는 그녀의 눈을 가린 손을 더 꽉 짓눌렀다. 그녀가 그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안 믿어, 이 개년아."
"아…, 이 개새끼가…."
그녀도 욕지거리를 했다.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여성기를 벌려서 계속 억지로 찔러 넣으려고 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도 아프지만 앞으로 더 아플 것이다. 세현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치며 그의 주의를 끌며 입을 열었다.
"침대 옆 선반 열어봐. 윤활제 있어. 그거 좀 짜 넣고 해. 진짜 아프다고."
"……."
그는 잠시 경계하듯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다가 온몸으로 그녀를 짓누른 채로 손을 뻗어 그녀의 말대로 선반을 열었다. 윤활제와 주사기 같은 게 잔뜩 들어있었다. 남성용 자위기구도 있었다. 알렉스는 인상을 팍 구기며 윤활제를 꺼내며 물었다.
"여기서 다른 놈들도 따먹었어? 진짜 소드마스터면 누구든 상관없는 거였어?"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닥쳐, 씨발. 다른 새끼한테는 말해도 나한테는 그 말 하지 마라. 더 열 받으면 니 머리통 뭉개진다."
알렉스는 그녀의 눈을 단단히 가린 채로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누르고 그녀의 벌린 다리 사이를 보았다. 새빨간 그녀의 여성기가 보였다. 이런 걸로 날 강간했다고…. 알렉스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그녀의 것 위에 투명한 윤활제를 잔뜩 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번 쓰다듬고 안에 집어넣었다.
"아…!"
그녀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엄청 부드럽다…. 손가락을 꽉 조여왔다. 알렉스는 어느샌가 온몸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몸이 엄청 뜨거웠다. 그는 찢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대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가 그 뒤 역시나 붉은색이 강한 그녀의 젖꼭지를 이로 물었다.
"아파! 잠깐만! 젠장…. 윽…!"
그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젖꼭지를 잘근잘근 물다 보니 콧김이 훅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속으로 손가락을 더욱 깊게 찔러 넣으며 그녀의 젖꼭지를 혀로 굴리고 핥았다. 그녀가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아, 아…! 하지 마. 거기 하지 마. 아읏…."
가슴을 잘 느끼는 걸까. 어쩐지 안이 젖는 것 같다. 알렉스는 더욱 빠르게 그녀의 젖꼭지를 핥았다. 처음엔 손가락 두 개가 안 들어갔는데 계속 애무를 하며 여러 번 시도하니 빠듯하게 들어갔다. 그녀가 질색을 했다.
"아, 차라리 그냥 해! 싫어!!"
"기분 나쁘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움직이지도 못하게 짓눌려서 느끼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지 그녀에게도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다른 쪽 가슴도 잔뜩 핥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 더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엄지의 마디가 어딘가 닿자 그녀가 크게 움찔했다.
"아, 씨발. 진짜 싫다…."
그녀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댄 채 물었다.
"어디? 어디야? 여기?"
"아, 하지 마!"
안에 찔러 넣은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하자 그녀가 화를 냈다. 그리고 다시금 앞부분에 엄지가 닿자 허리를 꼬았다.
"아…."
"아, 여기…."
알렉스가 아차, 하고 엄지로 그녀의 음핵을 강하게 눌렀다. 그녀가 허벅지로 그의 팔을 확 죄었다.
"아으…."
알렉스는 짓누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뜨거운 걸 느꼈다. 전에 그를 덮치던 그녀의 피부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오로지 알렉스만이 잔뜩 달아올라 볼썽사납게 그녀가 하는 대로 싸기만 했다. 그는 손가락을 빼고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다리를 다시 벌리고 그 위에 제대로 올라탔다.
"나 건드린 거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해줄 거라고."
"벌써 후회하고 있다…."
딴 놈으로 찍을 걸…. 그녀가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빨갛고 야하고 질척질척하게 흘리는 여성기에 자신의 거물을 대고는 한 방에 찔러 넣었다. 쥐어짜는 듯한 압박감으로 심장까지 조여지는 것 같았다.
"하아…!"
"으윽!"
‘어때, 쌍년아?’ 하고 을러줄 생각이었는데 그의 입에서도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턱을 치켜들며 안타까운 숨을 내뱉었다. 전처럼 엄청 조였지만 전과는 다르게 뜨거웠다. 그녀의 안도, 피부도. 알렉스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눌렀다.
"으음…!"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어 마구 휘저으며 그녀의 아래도 제멋대로 쑤셨다. 자꾸 마르기만 했던 전과는 달랐다. 잔뜩 젖고 부풀어 있었다. 등골로 소름이 마구 달렸다. 그녀가 그의 등을 할퀴었다. 다른 손으로 그의 코를 짓누르며 마구 밀어냈다. 그가 약간 고개를 떼어주자 그녀가 푸하 하고 숨을 쉬었다.
"어때? 어? 좋아? 억지로 당하는데도 좋아? 이 변태! 너 같은 게 무슨 교수야! 이 강간범!"
"윽…! 적당히 해! 너 진짜 죽고 싶냐?!"
그녀가 협박했다.
"너 같은 거 죽이는 거 나한테 일도 아니야. 니 머리카락 하나도 안 걸리게 할 수 있어."
그녀의 말이 진짜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소름이 돋았다. 알렉스는 웃었다. 그녀의 눈을 가린 채로 머리통을 꽉 쥐었다.
"이미 늦은 거 모르겠냐, 이 변태 교수님아? 우리가 마도사 상대할 때는 무조건 죽일 각오로 덤빈다고. 넌 나한테 당하고 죽는 거야."
"아으, 씨팔…."
그대로 알렉스는 그녀의 가슴을 쥐고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꼬집어 문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다리 사이에 있는 붉은 속살에 자신의 것을 넣었다 뺐다 하는 속도를 확 올렸다. 지금까지 경험이라고 해봤자 그때 그녀에게 당한 것밖에 없는데도 그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마구 흘렸다.
"아! 안 돼! 아! 아앗…! 아아앗! 아읏! 하으…. 아!"
"큭. 씨발. 아! 윽. 으윽, 씨팔. 변태 같은 년. 아윽…!"
간이 침대가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끼익끼익 수준이 아니라 침대의 대가 비명을 지르듯이 깡깡 소리를 냈다. 분명히 부서질 것이다. 살을 섞는 소리가 주먹질을 하는 소리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퍽퍽퍽퍽 하고 그가 박을 때마다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 살이 빠르고 세게 진동을 했다.
"하앗! 아, 진짜 안 돼...! 앗! 지, 진짜 안 된다니까! 앗앗! 아앗!"
알렉스의 온몸에서 땀이 비오 듯이 떨어졌다. 온몸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거친 숨이 폐부를 달궜다. 고작 이 정도 움직임에 이렇게까지 열기가 오르다니. 세현은 근육이 단단하게 오른 알렉스의 팔을 꽉 잡으며 다른 손으론 그의 허리를 퍽퍽 때렸다. 그러다가 땀이 잔뜩 벤 손으로 그의 허리에 손톱을 박았다. 알렉스는 인상을 구기며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으으응……!"
그녀의 온몸이 경련하며 음부가 강한 수축을 반복했다. 알렉스는 헉! 하고 숨을 삼키며 그녀의 골반을 꽉 잡고 끝까지 밀어 넣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침대가 가라앉을 정도로 꾹꾹 힘을 주어서 눌렀다.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전부 지렸다.
"하아…. 하아…. 으…, 하…."
"아…. 큭. 씨발…. 아…. 으윽…."
알렉스는 헐떡거리면서 그녀의 위에 쓰러졌다. 오금이 저렸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래는 구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합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도 아프게 조이던 그녀의 것이 지금은 녹아나듯 완전히 흐물흐물해져서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상한 충족감과 만족감이 들었다. 힘껏 긴장했던 근육이 일순 이완되면서 탈력감이 극심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정신 잃었다간 진짜 이 여자 손에 죽는다….'
알렉스는 겨우 그녀의 눈을 가린 채로 그녀의 왼손을 찾았다. 진짜 그녀의 말대로 숫자가 아까보다 늘어나 있었다. 스물 몇 시간 정도가 추가된 것 같았다.
'이거 진짠가….'
알렉스는 그녀의 팔을 놓고 턱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그녀가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이제 그만해. 나 연구만 해서 별로 체력도 없어…."
"이제 17번 남았다."
"야…."
*
"교수님? 교수님? 아직 주무세요?"
알렉스는 유례없이 폭면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신을 새카만 먹물 속에 오랫동안 깊이 재워 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의식이 수면의 근처로 올라왔지만 다시 가라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교수님?"
알렉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위에 엎드려 누워 똑같이 폭면을 취하고 있는 여자의 몸을 흔들었다.
"너 부르잖아…."
"으으응…."
그녀도 짜증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녀는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돌려 누우며 말했다.
"오늘은 최 박사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
"교수님?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아…! 오늘은 최 박사 보고 좀 하라고 해!"
"아, 네…!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동안 많이 피곤하셨죠. 괜찮으세요?"
"시끄러우니까 빨리 가라…."
그대로 주변에서 나는 생활소음들은 무시한 채 둘 다 다시 잠들었다. 해가 중천을 지나 몇 시간 동안 기울고 나서야 세현 퀸이 갑자기 움찔하며 눈을 떴다.
'몇 시야….'
잠은 깼는데 몸은 안 깬 것 같다. 온몸이 축축 늘어지듯 나른하고 무거웠다. 디바이스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몇 시야…."
[15시 17분입니다.]
어딘가에 있을 디바이스가 그렇게 대답했다.
"뭐…."
세현은 아직도 정신이 없어서 아침에 소리를 질렀던 게 꿈인지 현실인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채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이 맨 피부에 닿는 게 느껴졌다. 세현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시야를 확보했다. 그러자 그녀의 침대에 꽉 차고도 한참 넘치는 남자가 아직도 쿨쿨 자고 있는 게 보인다.
"아…."
맞다…. 세현은 왼쪽 손목 안쪽을 확인했다. 그녀의 마력 저장량이 최고치를 찍은 상태였다. 몇 주 분의 목숨이었다. 그리고 걱정했던 것만큼 아래는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보단 이물감에 가까웠고 아픈 건 오히려 허벅지와 허리였다. 다리를 계속 벌리고 있어서 그랬다. 가슴도 좀 아팠고….
일단 나른하고 피곤한 게 제일 문제였다. 근육통도 올 거 같다. 그녀는 드레이닝에 걸리고 난 후 단 하루도 제대로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 생각해보니까 걸리기 전에도 그랬다. 이렇게까지 오래 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세현은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그의 위로 쓰러져 누웠다.
'아, 이 새끼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 죽여버릴까….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잠들었다. 몇 시간 뒤에 깼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저물어 있었다. 배가 파먹을 듯이 고파서 잠에서 깼다. 그러자 정말 세현을 18번이나 가게 만드느라 본인도 그 이상을 했던 남자가 움찔하면서 눈을 떴다. 그는 눈을 손으로 비비며 중얼거렸다.
"배고파…."
그리고 그는 앉아 있는 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순간 눈을 번쩍 뜨더니 번개같이 손을 뻗어 세현의 얼굴을 다시 움켜쥐었다. 눈을 가린 것이다.
"와…, 죽을 뻔했다."
"…야, 안 죽일 테니까 놔라."
"거짓말."
"조금 위험하긴 해도 이 정도로 가까이에 있으면 눈 안 보여도 너 죽일 수 있어."
"……."
그건…, 그럴 거 같다. 알렉스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는 걸 느끼며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손을 뗐다. 잠도 엄청 잤겠다, 몸에는 마력이 넘쳐나겠다, 나른하고 피곤하고 뻐근했지만 컨디션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세현은 침대에서 내려와서 기지개를 폈다. 팬티를 찾아서 입고 헐렁한 검은 민소매 티셔츠 하나를 꿰어 입었다. 그녀는 500ml 생수를 따서 거의 반 정도를 마셨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걸 보니 알렉스는 자신도 목이 엄청 탄다는 걸 느꼈다. 마른침을 삼키자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줄까?”
그녀는 생수를 하나 더 꺼내 알렉스에게 던졌다. 알렉스는 그걸 받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세현이 싱긋 웃었다.
"전에는 약 탄 것도 잘만 마시더니만."
"……."
"이제 기분은 좀 풀렸어?"
…왜 이렇게 괜찮은 거지, 저 여자는. 그녀는 어제 알렉스에게 강제로 당했다. 물론 그전에 그녀가 먼저 그를 건드리긴 했지만, 어쨌든 알렉스는 정확하게 18번을 맞춰서 그녀에게 똑같은 굴욕을 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째서? 그녀가 알렉스보다 나이가 많아서? 아니면 그녀에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서?
'많이 해봤으니까?'
알렉스는 다시 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생수를 따서 한 번에 다 마셨다. 그리고는 그녀의 침대 아래에 구겨져 떨어져 있는 이불을 들어서 허리 아래를 감쌌다. 그리고는 바로 그녀의 텐트를 나갔다.
'젠장….'
18번이나 당했는데 왜 저렇게 괜찮아? 미친 거 아냐? 화 안 나? 막 부글부글 안 하냐고.
'아, 아니다. 한 번 더 했어야 했다….'
어제 당한 걸 까먹었다. 알렉스는 이래저래 찝찝한 마음에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숙소로 빠르게 돌아갔다. 옷을 챙겨 들고 씻으러 갔다.
"…!"
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주르륵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샤워실의 간이벽에 이마를 쿵 박았다. 구겨졌다. 알렉스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그걸 손으로 잠깐 만지며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억지로 당했다고 자신도 억지로 해버리겠단 생각은 없었다.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방식대로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부 준비까지 해놨으면서 어제 그렇게 충동적으로 그녀를…, 그렇게 할 줄은 알렉스 본인도 몰랐다.
둘 다 엄청 느끼니까 그냥 짐승같이 했다. 알렉스의 경험이라고 해봤자 그녀와 한 것밖에 없었는데도 본능이 그를 이끌었다. 그녀에게 야한 말을 하고 시키고 욕을 하고 듣고 동물같이 피스톤질만 잔뜩 하면서 비명 같은 신음을 함께 내며…. 알렉스는 차가운 물을 틀어 맞고 있는데도 얼굴이 뜨끈뜨끈한 걸 느꼈다.
'게다가 그 여자한테 목이라도 따일지 모르는데 거기서 태평하게 지금까지 같이 잤다….'
처음에 당하고 나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녀는 색녀나 변태도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소드마스터와 자지 않으면 죽었다. 물론 그런 것이 알렉스를 억지로 덮친 정당한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 그를 덮쳤던 그녀는 아마도 아파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녀도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갚아주겠다고 똑같이 해버렸고….'
알렉스는 다시 머리를 박았다.
'나는 울기까지 했다….'
또 박았다.
알렉스는 한참 샤워를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냥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게 침대에 앉아 있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나갈 쯤이었다.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알렉스는 잔뜩 음식을 접시에 담고는 자리에 앉았다. 반쯤 먹어 치우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샴푸 냄새를 확확 풍기며 세현 퀸이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나른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색기가 아주 흉흉(?)하게 돌았다. 아직 남아 있던 용병들이 그녀가 지나가자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면서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했다. 알렉스는 신경질적으로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색녀. 변태. 질질 흘리고 다녀라, 그래.'
그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일까.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되갚은 건 분명한데 여전히 그녀를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분노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수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때, 금발 머리에 녹색눈을 가진 미남자이자 용병단 <엔트>의 대장인 아담이 웃는 얼굴로 커피를 한 잔 들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알렉스는 수저를 부러뜨렸다. 세현 퀸은 여전히 졸린 얼굴로 대답했다.
"어."
"어제는 좋으셨습니까."
"아니."
"다행이네요. 어차피 어린 건 어린 것뿐이죠."
아담이 씨익 웃으면서 턱을 괴며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다음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지금까지는 딱히 그녀에게 그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니 그녀가 한 번 그런 식으로 유혹하자 아담도 가면을 벗은 듯 곧바로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이를 갈았다. 이유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약만 잔뜩 오른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다음?"
그녀는 기억을 못하고 그렇게 되묻다가 기억이 났는지 아아, 하고 대답했다.
"15일 뒤에."
그 말을 듣자 알렉스는 눈앞에 새빨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는 아담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고 싶은 충동에 반쯤 일어나기까지 했다.
"15일이요?"
구체적인 숫자에 아담이 의아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세현이 커피를 마시면서 답했다.
"그래."
빅크런치 바로 전날에 마력 보충을 하면 될 것이다. 어제 채운 것으로 그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아담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닙니까?"
"싫으면 관둬. 그쪽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어."
"당신 같은 여자는 남자를 보는 눈이 많이 까다로울 줄 알았습니다."
"남자 같은 건 딱히. 인생에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말에 아담은 피식 웃었다.
"즐거운 섹스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그것도 딱히."
그런 식으로 둘은 함께할 밤을 약속했다. 알렉스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분노로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갈았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씨발, 근데 왜 계속 남자를 바꾸냐고!!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어제 나한테 당했잖아! 진짜 아무나 상관없는 거야? 씨발!!'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그녀를 따라가기 전에 그는 아담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는 다짜고짜 아담의 멱살을 잡았다.
"저 여자한테 신경 꺼."
"응?"
아담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는 알렉스의 손을 잡아 비틀어 떼어냈다.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완력이 굉장하다. 소드마스터끼리도 엄연히 차이는 있긴 하지만…. 그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싫은데?"
"저 여자가 어떤 여잔지 못 들었어?"
남자를 강간하는 인간이라고!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아담은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너야말로 굳이 너 귀찮아 하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질척거려?"
질척…. 알렉스는 그의 표현에 좀 충격 받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런 여자는 어른스러운 남자가 좋은 거야. 너 같은 어린애가 징징거리는 소리 들을 시간이 그 사람한테 있겠어?"
"내가 언제…!"
"이런 게 징징거리는 거야, 꼬맹아. 우유나 더 먹고 와라."
그는 그렇게 말하곤 알렉스를 떨쳐내고 밖으로 나갔다. 알렉스는 그를 붙잡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꼴사나웠기 때문이다.
'내가…, 내가 질척거린다고? 징징거린다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피해잔데…! 그 여자가 다 잘못한 거라고!! 알렉스는 울렁거리는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은 게 너무 억울해서 그 여자에게 가 당장 따지고 싶었다. 내가 지금 질척거리는 거냐고. 내가 너한테 징징거린 거냐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비번날이었지만 밤새 달렸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침에 어쩔 수 없이! 일이니까! 호위를 하러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숙소에 없었다.
"퀸 교수님? 게이트에 계시는데?"
지나가다가 보이는 한민유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런 답을 들었다. 아니, 호위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자꾸 혼자서 멋대로 행동한다. 마도사라서 그런가. 그는 얼른 게이트로 갔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큐브의 위의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가끔 멀티스크린을 보며 공책에 무언가 서걱서걱 쓰고 있었다. 밤을 샌 것인지 그녀의 책상 위에 커피를 마시고 남은 컵이 잔뜩 쌓여 있었다. 조용히 그녀의 뒤에 섰다. 아담은 게이트 주변을 돌면서 경비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멀리 있는 그를 노려보고는 또 세현을 노려보았다.
'내가 이 여자한테 질척거렸다고? 줘도 싫어! 아니, 벌써 줬어도 싫었어!!'
그녀는 알렉스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통 사람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문자를 쓰다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역시 답은 주사기다…."
그녀는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안경 밑으로 손을 넣어 눈을 문질렀다. 그녀는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도 꼼짝 않고 앉아 그 이상한 문자만 계속해서 쓰고 지우고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알렉스가 온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벗어서 책상 위에 두고 큐브의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큐브가 2개나 쌓여 3m가 넘는 높이였지만 가볍게 지상에 발을 디뎠다. 그녀는 마도사다. 알렉스도 뛰어내렸다. 모래가 좀 날렸다.
"교수님! 식사하세요!"
사람들이 다 같이 샌드위치와 도시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짧은 단발에 보고 있는 사람의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높은 도수의 안경을 낀 키가 작은 여자애가 세현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동경심이 가득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래. 너도 많이 먹어라, 우빈아."
"네!"
그녀는 앞을 지나쳐가는 세현의 얼굴을 하느님 보듯이 올려다보며 기뻐했다. 그녀는 세현의 뒤를 따라가다가 아무것도 없는 데서 퍽 하고 넘어졌다. 그녀는 아야야, 하면서 일어나다가 랩코트에 잔뜩 넣어둔 필기구를 와르르 쏟았다.
"앗."
"넌…, 참 보면 볼수록 병신 같아."
유리 라자레프가 필기구를 주우려고 할수록 더 많이 떨어뜨리는 그녀를 보다 못해 그녀의 팔을 잡고 훌쩍 일으켜 세우고 자신이 필기구를 주워서 그녀의 랩코트에 대신 넣어주었다.
"거, 배운 것도 없는 놈이 박사님께 그런 말 하면 쓰냐?"
총을 등 뒤에 메고 실실 웃으며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이름이 체자레라는 용병이었다. 게이트 담당이라 자주 얼굴을 봤다. 짧게 자른 다갈색 머리에 눈도 갈색이었다. 그의 말에 조막만한 여자애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아직 석사생이에요."
"배우면 뭐해. 걸음마도 못하는데."
유리가 그녀의 등을 검지로 툭 찌르자 그녀는 또 넘어졌다.
"앗."
일어나려고 하다가 또 필기구를 쏟았다. 유리는 다시 그녀의 팔을 잡고 훌쩍 세워주고 필기구도 또 주워줬다. 그녀가 샌드위치를 받으러 가는 동안 두 번이나 더 그랬다. 유리도 뭔가 생각을 하고 하는 짓이 아니었다. 그는 자꾸 그녀를 괴롭혔다. 그랬더니 순한 인상의 그녀가 약간 화가 난 얼굴로 유리를 보았다.
"그만해…."
"니가 이상한 거야. 봐. 이런다고 얘가 넘어지냐? 어? 봐. 봐."
유리는 알렉스의 등을 아주 퍽퍽 쳤다. 알렉스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의 등을 주먹으로 세게 퍽 쳤다. 유리가 말했다.
"봐! 나도 안 넘어지잖아."
"모래가 너무…."
그녀가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체자레도 웃으면서 유리를 말렸다. 여자를 놀리는 건 언제나 재밌는 일이지만 그래도 더 하면 울겠다.
"곱게 자라셔서 그렇다는데 니가 좀 봐줘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도 곱게 자랐어!"
그리고 유리가 또 그녀의 등을 찌르려고 하자 갑자기 누가 유리의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내 학생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교수님!"
도시락과 커피를 들고 왔던 길을 돌아가던 세현이었다. 물론 그녀는 보통 인간이랑 별반 다른 거 없는 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드마스터인 유리의 머리통을 짓눌러봤자 눌려질 리가 없었지만 유리는 ‘어어어…’ 하면서 허리까지 숙여야 했다. 마법이다. 알렉스도 그녀의 마법에 쪽도 못 쓰고 당했었다.
'저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
뱅글뱅글 안경을 쓴 석사생은 그녀의 뒤에 숨더니 메롱 하고 유리한테 혀를 내밀었다. 그녀는 유리의 머리를 놓고는 그 석사생에게 자기 도시락까지 들게 하고 자신은 커피만 들고 마시면서 천천히 식탁까지 걸어갔다. 그동안 그 쪼그만 여자애는 자기 교수에게 재잘재잘 계속 말을 걸었다. 세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 여자 너무 무서워…."
유리는 자기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도사라서?"
알렉스가 도시락과 샌드위치를 각각 네 개씩 챙기며 되물었다. 물과 음료도 잔뜩 챙겼다.
"아니…, 그것도 그런데. 그냥…, 보통 여자들이랑 좀 많이 다르지 않아?"
그렇게 말을 하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교수님."
유리와 알렉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230명가량의 사람들을 통틀어 가장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현 퀸 교수 우주물리학 연구실의 랩장, 최이삭 박사다. 분명히 미남일 텐데…, 암흑의 기운이 너무 강했다. 그는 샷을 네 개나 넣은 라떼를 만들면서 덧붙여 말했다.
"우리 교수님한테 건방지게 이 여자, 저 여자 하다가 사람들한테 맞는다. 니들 몇 살이야?"
그는 자신의 랩코트에 안경알을 닦고는 다시 꼈다. 그리고는 칙칙한 얼굴로 라떼와 샌드위치를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알렉스와 유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현에게 제일 많이 깨지는 남자가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신기했다.
"딱 봐도 저…, 아니, 교수님이 저 여자애는 편애하고 저 형은 죽어라 갈구는데 저 형은 왜 저렇게 쉴드 치는 거지?"
"내가 아냐."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원래 랩장 정도 되면 안에선 자기 교수 죽어라 까도 밖에선 쉴드 쳐야 훌륭한 랩장이지."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멋들어지게 머리를 뒤로 넘기고 비싼 셔츠와 바지, 벨트를 하고 새하얀 랩코트까지 반듯하게 다려 입은 남자였다. 이름은 왕리밍. 중국 무슨 대학의 교수라고 들었다. 그는 전용컵에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경험담이냐?"
그렇게 말하며 소리소문 없이 캘리 박이 나타나자 그가 움찔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절대 아닙니다, 교수님. 그럴리가요. 하하하…."
"까도 걸리면 좆 되는 거야, 어?"
"아, 퀸 교수는 대놓고 앞에서 까도 그냥 두셨으면서. 이런 게 편애입니다."
"응? 내가 언제? 내가 맨날 쟤한테 이년저년 하는 거 못 들었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건방진 애들이다."
"아, 또 봐. 편애하신다."
"뭐라는 거야. 나 쟤 제일 싫어해. 지금 생각해보면 왕 박사가 내 밑에 있을 때가 내가 교수하기 제일 편했지."
"이제 와서 알아주셔도 떨어지는 거 없습니다."
"아, 왜 그러냐. 우리 사이에."
유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 끼어들었다.
"아저씨도 마도사에요?"
"아…저씨…."
그는 웃는 얼굴로 빠직 핏줄을 세웠다. 캘리 박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마법으로 수저질을 하면서 대답했다.
"마도사긴 한데 그쪽은 시원찮아. 머리는 좋고."
"흐응. 그럼 퀸 교수님은 마법도 잘하고 머리도 좋으니까 더 잘난 거네요?"
유리는 아~무런 사심없이 그렇게 말했다. 왕리밍은 더욱 빠직 하며 핏줄을 세웠다. 캘리 박이 대꾸했다.
"퀸 교수 머리가 더 좋아. 성적도 더 좋았어."
그러자 왕리밍이 홱 캘리 박을 보았다가 부글부글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연구는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 뭐…, 그거야 사람 따라서지. 실적도 퀸 교수가 더 좋잖아?"
"…어차피…."
그렇게 왕리밍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는 삐진 얼굴로 식사를 퍽퍽 했다. 캘리 박이 키득키득 웃었다. 원래 교수의 재미란 자기 학생들을 놀리는 것이다. 다 큰 옛 제자를 놀리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세현이는 놀려봤자 머리 위로 기어오르지만 리밍이야 놀리면 놀리는 대로 반응해서 재밌다.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저렇게 힘들게 살고 싶나."
유리는 어리광쟁이였다. 캘리 박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대로 가만히 대고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어째 여기에 있는 교수니 박사니 하는 사람들은 주로 세현 퀸을 중심으로 서로 고성이 오고 가는 인물이 많았다.
"그래도 저렇게 커야 최고가 될 수 있는 거다."
왕리밍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최고?"
"그래."
"세계 최고요?"
"그래."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들인 거예요?"
"아마도."
캘리 박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 다 저렇게 고생하면서 교수 되는 거야. 저렇게 다 배우는 거라고."
보다 못한 알렉스가 흥, 하면서 말했다.
"결국 교수님들도 자기 제자들 골수까지 빼먹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요."
"그럼 학위를 공짜로 주냐?"
캘리 박과 왕리밍이 동시에 말했다.
그렇게 유리는 간간히 그 석사생을 괴롭히고 세현 퀸과 최이삭은 밤샘 논문 작업으로 다크서클이 발끝까지 내려올 기세였으며 캘리 박과 왕리밍은 이것저것 참견하고 잔소리하고 평가를 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속을 뒤집곤 했다. NASA에서 지원해준 패스파인더 300대는 오늘도 게이트 안에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이후로 그녀에게 말 한 마디 안 걸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걸 때까지 절대 먼저 말을 안 걸 생각이었다.
아담은 15일 뒤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인지, 아니면 본인이 말하는 '어른스러운 남자'라는 것인 지 뭔지를 보여줄 생각인지, 가끔 눈치 좋게 그녀의 커피가 떨어지기 전에 커피를 가져다 준다든가, 바쁠 때는 식사를 건너뛰지 않도록 스프나 샌드위치를 가져다 주곤 했다. 가끔 그가 말을 걸면 그녀가 웃을 때가 있었다. 그 꼴을 볼 때마다 짜증났다.
'씨발, 빨리 다 끝나고 집이나 갔으면 좋겠다….'
아직 3주나 남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원인이었을까. 문제가 터졌다.
*
2128년 4월 7일 토요일, 수에즈 프로젝트 16일차였다.
"얼마나?"
[7천 마리는 되는 것 같습니다.]
삼각주 지역을 시찰하던 비행차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여기 먹을 게 뭐가 있다고 아직도 그 정도 무리가 남아 있단 말인가. 아담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적어도 5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최소 경비로 서던라이온 애들만 남겨두고 가서 처리한다 해도 그 시간이면 절대 처리 못한다. 애초에 별로 몬스터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왔던 지라 삼각주 안의 숲속까지 시찰하지는 않았는데 그게 문제였을까. 아니, 한 달의 시찰 기간 동안 여기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비행차가 영상을 보내주었다. 우글우글했다. 자이언트 트룹(Giant Troop)이었다. 게이트 쪽으로 바로 전진하고 있었다.
아담은 베이스에 있는 파트너에게 연락했다.
"자이언트 나왔다."
[얼마나?]
그는 아담보다 10살 정도 많은 남자로 스킨헤드에 애꾸였다. 이름은 소로킨. 아담이 조용히 대답했다.
"7천. 철수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스킨헤드와 영상을 공유했다. 소로킨도 아담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욕설을 내뱉더니 곧 한민유와 경호실장, 천 코치와 화상전화를 연결했다.
[이 정도는 박격포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가 50대는 있어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무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소로킨이 그렇게 설명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사실 중화기가 있어도 문제이긴 했다. 자이언트나 빅비틀은 도망가는 놈들이 또 다른 무리를 끌고 온다. 민간인이 있는 이상 가고일처럼 다 처리하거나 아니면 철수해야 한다.
한민유가 한숨을 팍팍 쉬며 해당 영상과 예상경과를 보고 있었다. 5시간 내에 게이트에 도착하며 인공지능 비서도 그전에 최대한 물건을 챙겨서 철수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었다. 용병이고 서던라이온이고 다 덤벼도 화기 부족에 물량 부족으로 다 죽기만 할 것이다.
'이래서 처음부터 경호 숫자를 적게 한 건데.'
이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관료가(그것도 힘 있는) 하나 끼어들면 일이 어그러진다. 한민유는 분명히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도 엔트 용병단을 멋대로 파견한 미국의 모 차관을 저주했다. 머리가 아팠다. 이 책임은 전부 그녀가 뒤집어쓸 가능성이 농후했다. 애초에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어도 위에서는 기필코 적게 나오는 걸로 보고서 쓰게 했을 거면서…. 그녀가 물었다.
[계측기는 다 챙겨갈 수 있을까요?]
"포터 속도를 생각해보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거 하나에 200억짜리입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한민유는 잠깐 얼굴을 쥐어짰다. 그리고는 세현 퀸을 연결했다.
[교수님, 몬스터 나왔습니다.]
[어? 어…. 알아서 처리해.]
그녀는 관심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 몬스터가 나왔을 때는 길길이 화를 냈지만 용병들이 잘 처리하니 다시 별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한민유가 침을 꿀꺽 삼키곤 설명했다.
[아뇨…. 7천 마리나 나왔습니다. 지금 게이트 쪽으로 다가오고 있고 5시간 후면 도착한답니다. 계측기를 옮길 시간도 없고 전원 탈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뭐라고?]
세현은 그제야 영상통화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영상 자료와 예상경과 자료가 있었다. 그녀는 그걸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쉴드 치면 안 돼?]
[그러면 실험 끝날 때까지 18일 동안 게이트랑 베이스에 전부 치고 있어야 할 텐데요…. 누가 해요, 그거.]
마도사가 8명이나 있었지만 전부 학자들이고 그중 4명은 빅크런치 및 게이트 소멸 실험 당일 써야 하는 마력을 모아 놨기 때문에 대규모 마법을 쓰면 안 됐다. 나머지 4명 중 한 명은 관절염 때문에 골골거리는 캘리 박이었고 왕리밍은 마법을 그다지 잘 쓰지 못했다. 2명이 돌아가면서 보름 넘게 그런 대규모 쉴드를 쳤다간 과로사 할 것이다.
[쉴드 잠깐 치고 있는 동안에 다 죽이면 안 돼?]
[자이언트는 서로 냄새를 찾아 모이는 본능이 있어서 죽여도 계속 모여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피 냄새가 퍼지면 가고일도 몰려올 거구요. 지금 인원으로 그렇게 처리하기엔 인명피해가 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애초에 쉴드 그렇게 크게 못 치시잖아요. 피셔 박사님이랑 김 교수님….]
[그럼 일단 내가 치고….]
[안 됩니다.]
한민유가 딱 잘라 말했다. 세현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영상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일단 저거 5시간 거리에 있는 거라는 거지?]
[네.]
[우빈아!]
세현은 영상통화를 내버려두고 자기 학생을 불렀다. 하우빈이 곧 영상 안에 살짝 등장했다. 도수가 높은 안경에 랩코트를 입은 게 어린애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원생이었다. 퀸 교수는 키가 180이나 됐기 때문에 그 앞에 서면 더 꼬맹이처럼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 둘이 서로 뭐라고 잠깐 얘기를 하더니 세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간다.]
한민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괜찮으시겠어요?]
[어. 다시 채우면 되니까.]
[아…. 지금 마력량은 얼마나 되시는데요? 컨디션은요?]
[괜찮아. 빨리 가자.]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용병대장들이나 천 코치는 알아듣지 못하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마도사라지만 저 정도 규모를 어떻게 하기에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걸 해결책이랍시고 최고책임자는 무책임하게 영상통화를 뚝 꺼버렸다. 아담은 얼른 큐브로 올라가 세현을 찾았다.
"어떻게 하시…."
"빨리 가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큐브를 내려갔다. 아담은 황당했지만 일단 그녀를 비행차로 안내했다. 그녀가 강력한 마도사라는 건 알지만 그녀는 학자였다. 공격 마법을 써본 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도사 용병들이 미사일 대신에 쏘아대는 마법은 강력했지만 그건 그걸 오래도록 연습하고 훈련받은 마도사병이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 마도사가 연습도 없이 그런 위험한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강력함의 방향이 다른 것이다.
'사람 한두 명 상대하는 거야 방법이 많겠지만 저런 규모는 마도사병도 한 번에 처리하기 어렵다. 도망이라도 가는 놈이 생기면 더 큰 무리를 끌고 올 수도 있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지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따르는 것 외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담은 그녀를 비행차로 안내했다. 그리고 혹여나 다가오는 다른 몬스터가 없는지 찾을 수 있게 좀 더 넓게 시찰을 다니도록 밖에 있는 비행차들의 전체적인 경로를 바꿨다. 게이트에 있는 용병들에게는 다시금 어쓰웜 탐사를 지시하며 비행차에 올라탔다. 자이언트가 7천 마리나 있는 곳으로 최고책임자를 데리고 가다 보니 알렉스는 물론이고 하우빈을 경호해야 하는 유리 라자레프와 체자레 등 여러 명과 비행차에 탔다. 호위기도 여럿 데리고 비행에 올랐다.
"어디 가는 거예요?"
유리가 물었다.
"자이언트 나왔다."
"오! 저 자이언트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리고 30분 정도 날아가니 유리도 입을 떡 벌렸다. 7천 마리가 넘는 자이언트들이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우리 다 덤벼도 못 멈추겠는데…."
아담도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마도사라도 이걸…. 쉴드로 싸서 다 들어올려 옮겨도 그걸 얼마나 유지할 수 있겠어? 이 많은 수를…. 대규모 공격 마법도 써본 사람이나 쓸 수 있는 거지….'
그녀는 게이트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최 박사, 지상 계측기들 공중으로 띄우고 쉴드 씌웠어?"
[네, 교수님.]
"60초 뒤에 한다."
[네.]
그리고 그녀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온 AR기능이 장착된 안경을 썼다.
"아, 실험실 밖에서는 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 비행차는 저쪽으로 확 물러나라고 해."
그녀가 자이언트를 따라가며 감시하고 있는 비행차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네…."
아담은 그녀의 말대로 했다.
"음…, 우리 차도 좀 더 떨어지자."
그리고 그녀는 시각을 확인했다. 그녀는 비행사에게 지시했다.
"비행차 모드는 초속 60m 이상 태풍 속이라고 가정하고."
"네."
그리고 그녀는 게이트의 최 박사와 연결된 디바이스에 귀를 댄 채 카운트를 했다.
"5. 4. 3. 2. 1."
순간 두 개의 비행차가 엄청난 힘을 받아 짓눌려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추락했다. 비행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꼴사납게 휘청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쿵. 콰광!!
약간의 시차를 두고 천지가 개벽하는가 싶을 정도로 큰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힘이 사라지고 비행차가 경고음을 내다가 겨우 수평을 맞추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그들은 아래의 광경을 경악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7천 마리의 자이언트 트룹이 피떡이 되어 뭉개져 지상 위의 둥그런 반점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대도 가라앉아 거대한 단층이 생겼다. 직경 10km 정도의 지대가 100m 정도는 가라앉았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기적이었다.
"으음."
세현은 왼쪽 손목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실험실이 아니면 가늠을 잘 못 하겠단 말이야…. 거기는 괜찮아?"
[기계는 멀쩡합니다. 왕 교수님이 넘어지신 거 빼면 다친 사람도 없습니다.]
"오케이. 계측기 영점 조절 다시 해놔라."
[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안 겪어본 게 없는 아담마저도 여전히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절로 신음이 나왔다. 이건 하인델토크에서 11만이 넘는 사람을 죽였던 다니엘 스톤하츠의 마법이 아닌가.
아담은 그 이전과 이후 만나고 보았던 그 어떤 마도사도 그와 같은 마법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심지어 그때의 다니엘 스톤하츠보다 더 규모가 크고 강력한 이적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용병들마저도 말을 잃고 세현을 돌아보았다. 세현이 인상을 썼다.
"운전 안 하고 뭐해? 돌아가자."
유리가 창문을 뚫고 뛰어내릴 것같이 등을 밀며 그녀에게서 슬슬 멀어졌다.
"지, 지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뭐야?"
"중력 마법."
세현이 짧게 답했다. 그녀는 안경을 벗었다. 죽은 7천마리의 자이언트에게는 아무런 유감도 없어 보였다. 아담은 몇 년 전 멀리서 보았던 다니엘 스톤하츠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도 이런 얼굴이었다. 거기 있는 게 살아 움직이는 게 벌레든 사람이든 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왼쪽 손목을 보았다. 마력이 2억이나 날아갔다. 너무 세게 했다…. 게다가 피곤하기도 했다. 갑자기 이 정도의 마력을 쑥 써버리면 자연스레 탈력감이 들었다.
아담은 조종사에게 지시를 하면서 다른 비행차들과 통신을 했다.
"파파 이글은 돌아간다. E11은 남는다. 오염제거장비 가지고 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도록."
유리는 여전히 그녀를 처음 보는 생명체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스도 바짝 긴장한 채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만큼 오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신이나 뭔가, 그런 건가? 저런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세현은 그대로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도 순환에 집중했다. 그녀의 주변을 떠도는 공기가 이상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햇빛에 그녀의 앞을 떠도는 먼지들이 반짝거렸다. 알렉스는 그 현상을 인지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깊게 호흡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의 긴장도 천천히 해소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도 모르게 오라를 살짝 내보았다. 정말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린 듯이 했다. 이렇게 하면 뭔가 일어날 거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러자 보통 소드마스터가 의도하지 않는다면 주인의 주변에만 맴돌아야 하는 오라가 스륵 세현의 마도 순환에 동참하여 그녀의 몸 주위를 돌며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신기하다….'
자신의 기운이 그녀의 곁을 감도는 건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그녀와 또 하나가 되는 것일까
"뭐야…."
갑자기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지만 마도 순환이 잘 되지 않았다.
"어…? 어?"
그녀는 당황하더니 몇 번이고 다시 집중해보았지만 마력이 모이지 않았다. 마치 체한 것처럼 마력이 들어오는 구멍들이 막혀버렸다. 그녀의 왼손에 있는 시계가 마도 순환을 할 때보다 5배나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6일 뒤면 빅크런치 실험이었다. 빅크런치 실험에는 아주 많은 마력이 필요했다. 알렉스 덕분에(?) 평소대로 마도 순환을 하고 지낸다면 그날까지 마력이 전부 달아서 죽는 일은 없기 때문에 바로 그 전날 아담과 밤을 보내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도 순환을 하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날로부터 나흘이 지났고 방금 2억이나 되는 마력을 쓰는 바람에 지금 남은 마력은 8억. 근데 마도 순환을 하지 못하면 8억이나 되는 마력도 세현이 일주일밖에 버티지 못하는 양이 되고 만다. 원래는 17일은 버텨야 하는 마력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마도 순환을 하려고 시도했다.
‘나 때문인가?’
그녀가 전에 없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보고 또 보며 초조해하자 알렉스는 설마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반말 쓰지 마. 마도 순환이 안 돼."
"왜…."
"막혔어…. 방금 뭔가 확 들어오면서 막혔어. 뭔가 보통 때보다 큰 게…."
"…그거…, 방금 내가…."
알렉스가 다시 소드오라를 내보았다. 계속 마도 순환을 시도하던 세현이 그나마도 멀쩡하던 마공마저 훅 막히는 걸 느끼고 경악해서 눈을 크게 뜨더니 알렉스의 어깨를 퍽퍽 주먹으로 때렸다.
"이 새끼가! 나 죽이려고 작정했냐?! 죽고 싶어?!!"
"아, 아니…!"
알렉스와 세현이 그러고 있자 아담이 다시 뒤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대로 세현은 알렉스를 이글이글 노려보았다. 알렉스가 아무 생각없이 했던 짓이 아무래도 그녀의 드레이닝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복수를 하고도 찝찝하고 화가 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는데도 막상 그녀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나니 엄청나게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인상을 확 찌푸린 채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내가 책임질게. 어떻게 하면 돼?"
"반말 쓰지 말라고 했다. 어디서 건방지게."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그녀는 인상을 확 찌푸린 채 마도 순환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었다. 게이트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렸다. 그녀가 누군가의 팔을 잡았다.
"베이스로 가자."
팔을 잡힌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 잡힌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담은 비행차의 문을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
"씨발…."
멋대로 강간하고 쓰다 버린 휴지처럼 내버리고 필요할 땐 또 강제로 덮치는 그런 끔찍한 사람이었다. 그가 똑같이 앙갚음을 해도 그녀는 알렉스처럼 상처받지 않았다. 책임져주겠다고 했는데도 보란듯이 다른 남자를 선택하는 그녀였다. 그녀 같은 건 치가 떨리게 싫은 건 분명한데도, 어째서인지 또 상처받았다.
- 공금 by Jira
*
"그 꼬맹이, 무슨 사고를 쳤습니까?"
아담은 다른 사람들을 다 내려주고 다시 비행차를 띄우며 물었다. 세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마도 순환을 계속 시도하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몰라."
베이스에 도착하자 세현은 빠른 걸음으로 자기 숙소로 걸어갔다. 마력이 떨어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몬스터는 죽일수록 다른 몬스터를 끌어 들인다고 하지 않는가. 하우빈에게 마력을 더 모으도록 지시를 하긴 했지만 혹시 또 모른다. 그녀도 미리 마력을 채워놓은 게 좋을 것 같다. 마도 순환도 제대로 되지 않는 마당에….
'설마 앞으로 계속 안 되는 건 아니겠지?'
그런 느낌은 아니긴 했지만…. 굳이 말하자면 정말 체한 것과 느낌이 비슷하다.
'아니, 거기서 오라를 뿜을 생각을 왜 하냐고? 일부러 집어넣은 거야? 그런 것도 돼?'
그녀는 소드마스터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들의 체액이 마도사에게 마력이 되어준다는 것밖에. 세현은 짜증스럽게 침대 옆의 선반을 뒤졌다.
"아까 같은 일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유혹이라니…. 좀 뜬금없긴 하네요."
"유혹이 아니라…."
지금은 시간이 없다. 중력장 논문과 4대 힘 변환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 현재는 세현 퀸의 수에즈 프로젝트를 가장 많이 지원해준 미국 NASA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교수 입장에서는 연구비를 어디서 지원받느냐도 중요하기 때문에 안정성 테스트를 좀 빡시게 한다는 느낌으로 NASA의 외계 행성 탐사를 책임져주고 있었다. 탐사야 물론 패스파인더와 과제를 담당한 칼 석세스 교수의 대학원생 몇몇이 알아서 하고 있었다. 물론 이쪽 학생들이 위험한 외계 행성으로 직접 탐사를 갈 리는 없고 4월 13일부터는 용병을 투입하여 원격 지시를 통해 과제를 수행할 것이다.
NASA는 태양계 내의 행성을 탐사할 때 쓰는 패스파인더 로봇을 300대나 수에즈에 파견했다. 지금 열심히 게이트 너머의 행성 HC-131을 탐사하고 있었다. 예전에 자체적으로 미국 본토 내 아칸소 주에 있는 게이트를 통해 HC-131의 탐사를 시도하다가 수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적이 있는 NASA라 직접 인원을 투입해주지는 못했지만 로봇은 잔뜩 주었다. 대신에 패스파인더가 채취한 샘플은 전부 NASA에 소유권이 있었다. 세현 퀸이 이끄는 수에즈 프로젝트 팀은 어차피 우주물리학 실험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세현 퀸이 300대나 되는 패스파인더로 7일, 동물 테스트 5일, 유인 탐사 7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하여 먼저 게이트 너머를 탐사하는 건 순전히 본인을 포함한 연구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오버했다…. 드레이닝에 걸릴 줄 알았나.'
지금은 안정성 테스트를 하는 동안에 마력을 채우는 게 더 문제가 되어버렸다. 선반 안에는 멸균진공포장 된 바늘이 없는 주사기들과 오나홀, 윤활제가 들어있었다. 세현은 손에 들어오는 대로 쥐어서 침대에다가 던지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빨리 하셔야 하죠? 바쁘시니까."
그는 벌써 다 벗었다. 항상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의 미남인데다가 다른 용병이나 어린아이뿐인 서던라이온 유스팀에 비하여 제법 말하는 본새는 어디서 배운 듯한 남자라서 마초적이긴 해도 야만스럽다는 느낌은 많이 나지 않았는데….
"그거…."
"아, 마음에 안 드십니까? 어렸을 때 멋모르고 했던 거라…. 하하."
그가 멋쩍게 웃었다.
"……."
그의 탄탄하고 거대한 허벅지 사이에 위용을 자랑하는 그의 것은 아직 발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한 뼘은 족히 넘어 보였다. 굵기도 과연 덩치 값을 한다. 절대 쉽게 안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거기 위에는 세 개의 굵직한 진주가 일렬로 들어가 있었다.
저거 세 개로 저 남자가 아주 야만스러워 보인다…. 그걸 아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세현에게 아담이 웃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세현의 목을 감싸 잡으며 엄지로 자신의 거기만 보고 있는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받쳐 올렸다.
"걱정 마십시오. 부드럽게 핥아서 흐물흐물하게 만든 다음에 넣어서 비비면 딱 기분 좋은 곳에 문질러질 겁니다."
그가 섹시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메트로서울에서 구했던 그 빨강 머리는 정말 흉측한 남성기를 가지고 있었다. 검붉은색에 거대하고 가운데가 이상할 정도로 확 두껍고 오른쪽으로 많이 휜 데다가 핏줄이 지나칠 정도로 울끈불끈 올라와 자주 봐도 항상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왔을 때 느낌도 많이 좀 그렇다. 너무 울퉁불퉁하고 굵기도 일정하지 않아 넣고 흔들면 막 느낌이 이상하고 아프기는 겁나게 아프고….
루키는 탱글탱글하고 커다랗고 매끈한 소세지처럼 생겼다. 좀 짙은 분홍색에 색도 고르고 귀두가 매끈하게 잘생기고 고환까지 아주 탱탱하게 탄력이 있었다. 만지면 단단하고 부드러워서 느낌이 좋았다. 어려서 그런지 발기 각도가 거의 배에 붙을 정도인 데다가 체력 하나는 끝내줬다. 18번, 그거 말이야 쉽지 실제로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게다가 얘도 아프긴 겁나 아프다.
그리고 이 남자….
"역시 주사기밖에 답이 없군."
그녀는 다시금 그의 것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에게 왼쪽 손목 안을 보여주었다.
"이거 뭔지 알지?"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마력…, 아닙니까?"
"맞아."
가끔 시간 단위로도 전환이 되는 그것은 현재 마력량의 단위인 BP로 표현되어 있었다. 8억 219만 BP. 그때 루키와의 밤으로 무려 12억 4332만 BP라는 역대 수치를 찍은 그녀의 마력은 마도 순환을 한다고 가정해도 하루에 5천에서 6천만이 드레이닝으로 빠져나가고 오늘 자이언트 트룹을 처리하느라 2억 정도를 써 8억이 남았다. 그런데 아까 루키의 오라 때문에 마도 순환이 불가능하여 시간당 500만의 마력이 날아가 하루 1억 2천만의 마력이 날아가게 생긴 지금 그녀의 목숨은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게 되는 것이다. 당장 또 뭔가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는다고 할 때 미리미리 마력을 채워놓아야 했다. 다른 실험자들의 마력을 썼다가 실험 자체를 말아먹으면 어떡할 것인가.
'그 인간들이야 다음이 있겠지만 나는….'
그러니까 웬만하면 유사시엔 세현이 마법을 쓰는 게 오히려 맞다. 다만 아까 루키 때문에 시급히 보충을 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드레이닝이 뭔지 알아?"
"네…. 마도사들이 마력이 빠져나가 죽는 병 아닙니까?"
"응, 맞아. 나 걸렸어."
"…네?"
아담은 당황했다. 그거…, 그 병은 마도사가 걸리면 100% 죽는 병이다. 이르든 빠르든 상관없이 전부 죽는다.
"소드마스터의 정액을 몸에 넣으면 그게 마도사에게 마력이 되더라고. 왜인지는 우리도 알아보고 있는데 어쨌든, 그렇다."
아담은 약간 헛웃고 말았다. 그 꼬맹이와의 일이나, 이것저것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내내 용병짓만 하고 먹고 산 남자였고 그걸로 이렇게 큰 용병단을 이룰 정도로 나름 업계에서는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남자였지만, 스스로의 위치는 잘 아는 편이었다. 창녀를 사는 건 좋아하지 않아 현지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유혹하거나 그를 유혹하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 다른 용병들보다는 여자를 좀 더 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값어치를 잘 아는 여자들은 절대 용병짓을 하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지 않는다. 그런데 세현 퀸이, 그녀와 같은 여자가 그를 유혹해와서 놀랐다.
'기뻤다….'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넘볼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세현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물건을 가리켰다.
"저거 다섯 개 정도만 채워주면 좋겠는데."
"그걸로 끝입니까? 저 정말 잘합니다. 생각보다도. 당신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기분 좋게."
아담이 강조해서 말했다. 세현은 급속도로 떨어지는 마력 시계에서 눈을 못 떼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 없어."
"…못 한다고 하면요?"
세현은 아담을 올려다보았다.
"어…, 다른 놈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아담은 그답지 않게 인상을 조금 쓰며 한숨을 쉬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듯 흉터를 쓸어 넘기고는 그녀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라는 건 아시죠?"
"시간 없다니까."
"그 시간은 도대체 언제 생깁니까?"
"글…쎄?"
"종마도 이런 취급은 안 받습니다."
"받을 걸…."
걔네야말로 주사기에다 쫙쫙 빨려서 암말의 질에다 주입한다. 아담은 더 표정을 구기고 따졌다.
"그 꼬맹이한테도 이랬습니까? 적어도 그 꼬맹이와는 직접 몸을 섞은 거 아닙니까?"
"그때는 이 생각을 못해서…."
연구 주제와 관련된 거 말고야 딱히 관심 없어서 창의력 같은 건 샘솟지 않는다. 세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못 들었어? 걔는 눈 가리고 묶어서 강간했는데. 처음에 걔는 내가 누군지도 몰랐어. 세 시간만에 18번이나 뽑아내서 솔직히 걔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취향이야?"
살겠다고 멀쩡한 애 하나를 잡으려고 한 것이다…. 알렉스가 그렇게 펄쩍펄쩍 뛰는 이유가 있었다. 아담은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고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했다. 종마처럼 뽑히는 게 낫냐, 강간당하는 게 낫냐는 주제로 설전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뭔가 잘 전해지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도 필요하다는 거 아닙니까? 이놈 저놈 누구 거든 당신 안에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이렇게 시간 잡아먹는 게 싫어서 주사기라는 걸 쓰는 거였다. 세현은 그를 설득시키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루키보다는 말이 통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를 선택한 것이었다.
"별로 그렇지도 않아. 내가 그렇게 비위가 강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중에 그쪽이 제일 낫다고 생각한 거야. 좀…, 다른 소드마스터들이랑 다른 것 같았고."
세현은 성가시다는 태도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아담은 그녀의 말에 약간 움찔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뭘까, 이 기분. 그는 그녀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움찔움찔하다가 그녀의 양 어깨에 팔을 올리며 살짝 몸을 구부려 키를 낮추며 한숨을 쉬었다.
"해드리긴 하겠습니다만…, 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뭔데?"
일단 빨리 시작해주면 좋겠는데. 세현이 그렇게 되물었다.
"지금 키스하게 해주십시오."
"그래…?"
아담은 세현의 입술에 바로 입술을 눌렀다. 그녀의 목과 뺨을 부드럽게 감싸 잡아 고개를 들게 하여 입을 맞추었다. 피부는 굉장히 탱글하고 부드러운데 입술을 보기보다 거칠다. 목덜미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다.
‘이런 여자에게….’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이 들뜨고 흥분했다는 것을 능숙하게 숨겼다.
"빼서 주사기에 넣는 건 꼴사나우니까 혼자 하겠습니다만 당신에게 넣는 건 제가 하게 해주세요."
"그럼 여분으로 5개만 더. 그건 냉장고에 넣어두게."
아담은 침음을 내고는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단시간에 그만큼 빼면 보통 남자들은 진짜 죽습니다."
"뭐, 그건 걔들 사정이고."
"앞으로도 교수님이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만큼…."
"진짜? 그럼 난 땡큐지."
"대신에…."
기브 앤 테이크라서일까, 아니면 시간을 절약하고 싶어서일까. 그녀는 아담이 그녀의 입 안쪽까지 야릇하고 깊숙이 핥아도 놔두었다. 무던한 반응이었다. 뭐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좀 아쉽다.
"하룻밤."
입술이 떨어졌다. 그녀가 아담의 눈을 보았다. 얼굴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의 올리브색 눈동자의 줄무늬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대신에 하룻밤은 제 마음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언제든 좋습니다."
"꼭 여기서?"
"이번 실험이 끝나고 나서라도 좋습니다. 제가 메트로서울로 가도 되구요."
"음…. 그래, 뭐."
"약속하신 겁니다? 나중에 없었던 일로 하시는 건 아니죠?"
"그래."
세현은 그렇게 선선히 대답하고는 아차, 하고 고민이 되는 표정으로 밑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전에 진주는 빼지?"
"그건…, 일단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
세현은 베이스에 남아 그를 기다리며 멀티스크린으로 논문을 쓰고 있었다. 아까 그 루키가 사고를 친 이후로 벌써 천만이 넘는 마력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날아갔다. 아담과 해결은 본 셈이지만 그래도 좀 신경질이 났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한 시간이 좀 넘게 지나니 그가 숙소 문을 열고 나왔다.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적은 시간 동안 열 번이나 뺐더니 과연 그와 같은 남자도 혈색이 확 사라졌다.
"그 꼬맹이 대단한데요…."
아담은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대답했다.
"어려서일까."
"우리는 그런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위해서라도 잘 먹겠습니다."
"하하."
그녀가 웃었다. 아담은 어쩐지 이 숙소에 처음으로 들어오기 전과 그녀를 보는 표정이 달라졌다. 어째서일까. 그대로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손을 잡고 그녀를 숙소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지럽혀 있을 줄 알았는데 깔끔했다. 그는 세현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시트에서 당신 냄새가 나더군요."
"누가 일주일에 한 번은 갈아주긴 하는데."
"싫었다는 게 아닙니다. 좋았어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미소를 지었다.
"잘은 모르는데, 여자 잘 꼬실 거 같아."
"못 꼬시진 않습니다."
볼 때마다 바락바락 화를 내는 그 루키나 언제나 실이 빠진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어린애처럼 조르던 그 빨강 머리와는 달리 확실히 어른스러운 남자였다. 그래서 편한 건지 더 귀찮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는 세현의 바지에서 셔츠 자락을 천천히 빼면서 그녀의 배꼽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벌써 2시간이나 자리 비웠어. 나 진짜 바쁘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젖어야 안 아프지 않겠습니까?"
"저 정도는 괜찮아."
"그럴까요…."
침대 옆 선반의 위에 10개의 주사기가 줄을 지어 나란히 놓여 있었다. 50ml짜리 열 개인데…. 소드마스터는 보통 남자보다 사정량이 많았다. 30~50ml까지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빨강 머리도 루키도 너무 커서 이제 이 정도는….'
그는 자신의 뜨거워진 뺨을 세현의 뺨에 비비며 세현의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세현은 침대에 앉았다. 아담이 그녀의 양 허벅지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상체를 약간 뒤로 기울이고 그의 손길에 따라 다리를 벌렸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보다가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약간 자란 그의 짙은 금발을 손으로 쥐었다.
"아! 시간 없다니까."
"…냄새 정도는 맡아도 되잖아요."
"안 돼."
그녀는 입술도 굉장히 붉더니 아래도 붉었다. 예쁘다. 냄새도 어쩐지 엄청 흥분된다.
'빨리 하고 싶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란 대롱을 먼저 천천히 세현의 안에 밀어 넣었다.
"윽…."
느낌이 불쾌하다. 안이 긁히는 느낌에 상처라도 날까 싶었다. 좀 아프다. 세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올라와서 세현의 입술에 입을 쪽 맞추었다.
"원래 작고 가느다란 게 더 불쾌하고 아픈 겁니다."
"그런 거야?"
"여자라면 당연히 크고 굵은 게 좋은 겁니다. 본능이라구요."
"그것도 아팠는데."
"똑같이 아픈 거라면 더더욱 크고 굵은 거죠."
아픈 보람이라도 있지. 아담은 그렇게 확답하며 대롱의 끝에 바늘이 없는 주사기의 끝을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피스톤을 누르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세현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인상을 썼다. 그들의 정기는 항상 뜨거운 것이 단전에 확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래 내부에 들어온 열원이 밖에서 가하는 열원보다 몸을 더 쉽게 덥히는 법이다.
"그 꼬맹이가 어지간히 못 했나 봅니다."
"그런 건가?"
"여자의 여기가 얼마나 부드럽고 탄력 있는데요. 못 하니까 아픈 겁니다."
"어지간히 자신 있나 보군."
"그런 어린애한테는 안 집니다."
세현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남자다. 하나를 다 넣고 두 개째를 넣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시술이라도 받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런 남자가 산부인과 의사였다간…. 아담은 시선을 내려 그녀의 여성기를 가만히 보면서 물었다.
"임신은 안 하나요? 약을 드시고 계신 겁니까?"
"처음엔 그랬는데. 보니까 내 것도 안 나오고 다 흡수되는 거 같아. 그쪽 기관들이 생명을 만드는 기능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어."
"하면 좋을 텐데."
아담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랬다가 자신도 놀랐다. 평생 아이 같은 건 원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담은 입을 다물고 세 개째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세현이 되물었다.
"무섭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드레이닝?"
"네."
"무섭지."
그녀가 말했다.
"기껏 내가 다 한 연구 남이 낼름 할 거 생각하면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아."
그런 거 말고…. 하지만 아담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다른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다섯 개를 다 넣고 나머지 다섯은 냉장고에다 넣어두었다. 그녀는 손목을 확인했다. 수치는 1억 5천만 정도가 올랐다.
"음…, 주사기를 써서 그런가…. 아니면 니가 제일 시원찮은 건가…."
한 발에 3천만. 이건 캘리 박이 말한 평균이 아닌가? 빨강 머리도 4천만은 나왔다. 그 루키는 6천만에 가깝게 나올 때도 있었고…. 아담이 움찔하면서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라구요?"
"아무것도 아니야."
"……."
그렇게 게이트에서 자리를 비운 지 두 시간 반 정도 후 세현은 다시 게이트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오늘 밤에 그거 다 넣어도 겨우 이틀 떼우는 건가.'
세현은 힐끗 뒤에 선 아담을 보았다. 저…, 금발 머리. 이틀에 한 번씩 그렇게 많이 빼도 괜찮으려나. 30대 중반 정도라고 했던가. 역시 버거울 거 같은데. 그리고 조금 간격을 두고 그의 옆에 서 있는 루키를 보았다. 그는 완전 이글이글한 눈으로 세현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그녀가 그에게 시선을 두니 대놓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하룻밤에 18발이나 할 수 있었다. 역시 어린 게 최곤가….
어차피 마도 순환도 안 되겠다, 어깨의 힘을 좀 푼 세현은 눈을 돌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보. 바보."
"아니야!"
뒤의 금발 머리보다는 밝은 색의 금발을 가진 슬라브계 소년이 보였다. 물론 키 187에 근육질의 남자라 소년이라고 말하기 뭐 하긴 했지만 연령상으로 소년은 소년이다.
"쟤 몇 살이라고 했지?"
세현이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로 그렇게 물었다. 아담은 알렉스를 보았다. 알렉스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17살…이요."
슬라브 소년은 하우빈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하는 짓이 꼭 친구를 괴롭히는 유치원생이다. 총을 들고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주변 용병들도 키득거렸다.
'어린 게 좋다, 좋다 해도 저건 너무 어리다….'
그리고 저 햇병아리 같은 게 감히 내 말을 씹네? 간덩이가 부은 건가. 세현은 슬라브 소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랩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텔라파시라도 느낀 것인지 곧 세현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눈짓했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하우빈과 유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유리에게 다짜고짜 버럭 성질을 냈다. 유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약간 움츠리더니 하우빈에게서 떨어졌다. 세현은 자신의 의자에 좀 더 깊숙이 등을 기댔다.
'좀 더 어른스러운 편이 낫지….'
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다시 루키를 돌아보았다. 2미터가 넘는 키에, 보통 남자라면 분명히 우락부락했을 근육도 조각같이 아름답다. 군복 비슷한 걸 입고 있으니 더 어른스러워 보인다. 어디 갖다 세워놔도 될 정도다. 깨끗한 피부에 예쁜 입술. 찌푸린 눈썹. 훤칠한 청년 같은데 살짝 앳된 티가 나면서도 남자답다. 필사적으로 어른스럽게 굴려고 하는 것 같아 좀 귀엽기도 하고….
'책임지겠다는데 지게 할까?'
하도 싫어하길래 안 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세현은 마도 순환을 다시 시도했다.
'아…, 좀 되긴 한다.'
뻑뻑하긴 한데 조금씩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엄청 미미한 수준이라 시간당 십만도 되지 않는 속도이긴 했다. 그냥 멈췄다. 답답하기만 하고. 세현은 그 정도에서 그쪽 생각은 멈추고 온전히 논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멍청이~"
"하지 말라고!"
하우빈은 이제 화도 냈지만 그녀가 유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세현에게도, 최이삭에게도 혼이 난 유리였지만 반성은 안 되는 모양이다. 보다 못한 캘리 박이 유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렸다.
"우리 우빈이가 걸음마를 못 배워서 저런 게 아니라 마도 순환하면서 다른 것도 동시에 하는 게 아직 안 익숙해서 이런 거란다."
베이스를 지키는 용병들이 거진 죽은 자이언트의 시체를 처리하는 쪽으로 가서 베이스에서 빈둥거리던 사람들이 거의 게이트로 와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캘리 박도 별로 쓸모도 없는 지팡이로 하우빈의 허리를 툭 찔렀다. 그녀는 필기구를 마구 줍고 일어나다가 다시 넘어졌다.
그때 무서운 얼굴을 한 최이삭이 나타났다.
"야, 하 석사. 너 미쳤어?"
"네?"
하우빈이 부리나케 벌떡 일어났다. 교수한테는 편애를 받는 축이라지만 원래 랩을 관리하는 건 교수가 아니라 랩장이다.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요새 왜 이래? 이거 줄 통째로 바뀌었잖아!!"
"네? 네?! 진짜요?!"
"너 지금 교수님한테 나 죽여 달라고 염불 외냐? 어? 텔레파시 보내? 사인 보내는 거야? 최이삭 좀 죽여주세요~ 어?"
"아, 아뇨! 아뇨! 절대 아니에요!!"
"숫자 제대로 기록됐는지 검사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냥 놔두기만 했어도 이렇지는 않겠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해!"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갔다. 기가 죽은 토끼처럼 축 쳐진 하우빈이 최 박사에게 받은 공학용 디바이스를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뭔가 심하게 찔린 유리가 슬금슬금 허리를 낮추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아?"
"아니…, 나 진짜 바본가 봐."
그녀는 숫자를 확인하며 그렇게 말했다. 유리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약간 안절부절못하더니 그를 흉보았다.
"저 아저씨 왜 저래? 저러니까 꼭 퀸 교수님 같아."
그는 이제 꼬박꼬박 세현에게 교수님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은 이렇듯 길길이 날뛰며 하우빈 외에도 자기 아랫사람들을 쥐 잡듯이 잡고 다니며 단단히 단속을 했지만 결국 본인이 계산을 실수해서 자기 교수한테 불려갔다.
"야, 너 몇 년찬데 아직도 이런 실수를 해? 어? 내가 너 때는 교수 실수를 잡아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수에즈 프로젝트 15일차. 잠을 일주일 내내 한숨도 못 잤다. 마도 순환은 여전히 뻑뻑하다. 세현 퀸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얼굴이었다. 안색이 무지막지하게 나빴다. 최이삭은 2주 동안 한숨도 못 잤다. 일찌감치 관을 짜고 들어앉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얼굴색이다.
"최 박사, 이제 학위 생각 없어?"
"아, 아닙니다."
"그럼 랩 바꿀 거야? 다른 교수 찾게?"
"아닙니다."
"너 이딴 식으로 하는데 내가 너 다른 데 가도 잘 되라고 ‘어머~ 우리 이삭이 잘 부탁드려요~’ 이러고 다닐 거 같냐? 어? 너 교수 자리 내가 다 막을 수 있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몇 년을 공부했는데 아직도 똑바로 일하는 게 안 되냐, 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원래 갈굼이란 내리갈굼인 것이다. 다 위에서 갈굼이 흐르고 흘러 말단까지 오는 것이라 최이삭 본인은 모든 랩원들이 그에게서 받는 갈굼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너 논문은 좀 썼어?"
"생각해둔 건 있는데…."
"와…. 야, 너 졸업하려면 올해도 논문 써야 돼. 졸업 안 할 거야? 어? 너 내 랩에 뼈를 묻을 생각이야? 영원히 내 밑에 있을래? 어?"
교수짓이란 본디 자기 밑에 있는 랩장을 학대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에너지를 얻어 연구비 따오고 연구주제를 정하는 것이라는 캘리 박의 지론에 따라, 몸소 가르침을 받은 대로 세현 퀸도 어느샌가 훌륭하게 자기 랩장을 잡고 있었다.
"내가 너 때는 학과장 일 다 하면서, 그 노친네 시다바리 짓까지 다 하고도 매년 논문 3편씩 썼다! 연구할 생각 없으면 다 때려쳐!! 취직이나 해!!"
"……."
사실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에서 최고책임자와 중간관리자가 둘 다 나가떨어질 정도로 과중한 업무가 배당될 리가 없었다. 이는 순~전~~히 세현 퀸의 책임으로, 원래는 올해 연말까지 쓸 예정이었던 그녀의 논문 두 개를 지금 다 쓰려고 하는 바람에 그 데이터까지 전부 준비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하게 된 최이삭이 수에즈 프로젝트 일까지 겹쳐 아주 갈려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 연구를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걸까….'
자기 교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랩장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냐만 취직이나 하라는 그녀의 말에는 정말 욱 했다. 얼마나 욱 했냐면 순간 마법을 쓸 뻔할 정도로 욱했다. 원래 마도사는 욱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교육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진짜로 욱할 뻔한 것이다. 대사단이 날 뻔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다시 확인하고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됐다. 교수인 내가 한다, 내가 해. 바~쁘~~신 우리 최 박사 하실 일 하셔야지. 가!"
그렇게 갈구고 결국 자기가 한단다…. 최 박사는 그녀의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아…’ 하고 탄식을 내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녀의 밑에서 무려 6년…. 올해만 지나면 졸업이니 곧이다, 곧 끝난다고 생각하고 견디고 있었지만 원래 끝으로 갈수록 지옥이 되는 것이 대학원 생활인 걸까. 군인도 말년이면 편해진다는데 어째서 그는 갈수록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그렇게 탈탈 털리고서 멘탈이 나간 최이삭은 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내가 왜 이 랩을 들어왔을까….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병신이야.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존나 좋아했던 내가 최고 병신이다. 병신새끼. 차라리 기름통 메고 불 난 곳이나 뛰어들지, 왜 여기까지 왔냐고. 아, 진심으로 박사는 다른 데서 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옮겨볼까. 왕 교수님 랩은 좀 나을까? 시발…. 거기도 학회장 라인이라 막장일 건 뻔하다…. 내가 처음에 왜 교수가 되려고 했더라? 물리학은 왜 전공했지? 아, 그냥 죽을까? 죽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난 왜 사는 걸까? 랩장이란 건 도대체 왜 사는 걸까.'
그러고 있자 하우빈과 유리가 쭈뼛쭈뼛하며 주변을 맴돌다가 그에게 커피와 단 걸 건넸다.
"괜찮으세요, 선배님? 이거 드세요. 단 거 먹으면 좀 기분 좋아진다잖아요."
"교수님, 완전 무서워…."
그녀가 그렇게 위로를 하러 들자 최이삭은 아까 전에 그녀에게 화를 냈던 게 미안해졌다. 본인도 점점 갈수록 세현을 닮아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니, 교수님은 절대 이런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을 걸….'
내가 교수가 되면 꼭 학생들에게 연구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옛날이다. 최이삭은 그녀에게서 커피를 받아 마셨다. 하우빈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다 뜻이 있는 시련일 거예요. 이유 없는 시련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최이삭의 이름에서 예전에 그의 신앙을 읽어낸 하우빈이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이 칙칙한 얼굴로 미소 비슷한 걸 지었다.
"신 같은 건 없다, 우빈아."
"어? 그래도…, 믿으시는 거 아니셨어요?"
"아니거든…."
애초에 빅크런치 이론을 믿고 실험까지 하는 사람이 신앙 같은 걸 가지는 게 웃기다. 사람이 신이 되려고 하는 마당에. 차라리 교수님이 신이라면 신이시다. 최이삭은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세현 퀸의 중력장 논문과 4대 힘 변환 논문을 위한 시뮬레이션이었다.
오늘로 수에즈 프로젝트 팀이 게이트에 온 지 15일 차, 오늘부터 패스파인더와 함께 훈련받은 원숭이가 우주복을 입고 게이트 너머의 행성 HC-131을 탐사한다. 세현 퀸의 연구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고 둘은 원래 준비하던 논문의 초고를 완성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수에즈 프로젝트 16일차. 최이삭은 이유없이 코피가 멈추지 않아서 의사의 조처에 따라 지혈제를 코 안에 계속 뿌렸지만 부작용으로 눈물까지 줄줄 흐르는 상태로 또 밤을 샜다.
17일차. 세현 퀸이 아~무런 이유없이 와서 그를 1시간 동안 털고 갔다. 주로 니가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교수인 내가 고생을 한다는 주제였다.
18일차. 세현 퀸도 최이삭도 베이스로 돌아가지 않고 논문을 쓰기 시작한지 나흘째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잠들고 보니 그가 세현 퀸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세현 퀸은 간이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19일차. 체력의 한계에 달했다. 자고 싶다. 씻고 싶다. 죽고 싶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교수님을 죽이고 싶다. 그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번은 정말, 진짜로, 온 마음을 다한 진심이었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며칠내로 분명히 사고를 칠 거다. 확신할 수 있었다.
20일차. 교수님, 차라리 절 죽여주세요. 안 그러면 제가 교수님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21일차. 초고가 완성되었다.
"이제 빅크런치 실험만 하면…."
최이삭은 정말 말로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감동…, 따위는 없었고 드디어 한숨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다 날 뻔했다. 사실 말이 초고이지 세현 퀸의 성격상 완성본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세현마저도 좀 감격한 얼굴로 두 개의 논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최이삭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수고했다."
주저자, 1저자, 책임저자는 세현 퀸, 2저자는 최이삭이었다. 높은 산 하나를 넘었다.
"이건 틈틈이 다듬고 실험 성공하고 방정식이랑 빅크런치 논문 두 개만 연말까지 쓰자. 그리고 그전에 일단…."
세현은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다가 갑자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로 섰다. 그녀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깜짝…."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몸이 무너져 내렸다. 최이삭이 깜짝 놀라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교수님!!"
큐브 위에 서 있던 두 명의 남자도 급하게 다가왔다. 아담은 그녀의 맥을 짚어보며 의사를 불렀다.
"교수님 쓰러지셨습니다. 만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상태는요?]
알렉스가 그녀의 동공 반사를 확인하며 문제가 없다고 신호했다. 최이삭은 그녀의 뺨을 살짝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꿈쩍 하지도 않았다.
"과로 때문일 거 같은데…. 맥은 뛰고 동공반사도 합니다."
[알겠습니다. 만 박사님이랑 바로 게이트로 가겠습니다.]
최이삭은 그녀의 왼손을 잡아서 상태를 확인했다. 6억. 5일.
"교수님은 만 선생님 오시는 대로 상태보고 베이스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네. 깨우지 마시고 푹 자게 해주십시오."
세현 퀸이 쓰러진 이상 여기 책임자는 최이삭이다. 최이삭은 안경 밑으로 자신의 미간을 강하게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쓰러진 적은 있어도…."
그는 자신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쓰러지는 순간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졸업은 시켜주고 돌아가셔야 하는데.
이제 그도 갈 데까지 갔나 보다. 약간 자괴감이 들면서도 여전히 그 걱정이 되었다. 최이삭은 자꾸 안경 밑으로 자신의 눈을 문질렀다. 눈이 침침했다.
"아…, 내 안약 어딨지?"
자신의 랩코트를 뒤지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그도 기절하여 세현 퀸의 위로 쓰러졌다. 졸업을 하려면 일단 본인부터 과로사하지 않는 걸 목표로 해야 할 것 같다.
*
안도감이 들자마자 그녀의 정신을 잡고 있던 가닥이 딱 끊어졌다. 쓰러진 세현은 몇 개월 동안의 수면부족, 과로, 스트레스로 인하여 면역력이 급감하여 감기, 몸살 및 지역 풍토병까지 걸리고 말았다. 아주 골골거리며 드러눕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하동문으로 최이삭의 침대도 바로 세현 퀸의 옆이다. 원래 교수의 연구실은 교수와 운명공동체 같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지 않도록 격리되어 의사 만의 관리하에 치료를 받고 있었다.
책임자가 쓰러지고 곧바로 중간관리자인 최이삭까지 쓰러지니 사람들은 걱정하…기보다는 기뻐했다.
"잔소리하는 사람 둘 없다고 세상이 다 평화롭다."
캘리 박이 박수를 짝 치며 그렇게 말했다. 한민유가 한숨을 쉬었다.
"퀸 교수님도 마음이 급하시니까 그러신 거죠…."
"그래도 애를 그렇게 잡으면 쓰나. 난 애들 저렇게 쓰러지게 한 적은 없다."
거짓말…. 한민유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세현과 함께 격리된 최이삭은 링겔을 맞은 채로 무려 24시간을 내리자고 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
"네, 교수님…!!"
그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만 의사를 기겁하게 했다.
"최 박사?"
그는 주위를 마구 돌아보다가 만 의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세현을 발견했다. 최이삭은 ‘아…’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설마 연구실에서 존 건가 싶어서 온몸에 오한이 들고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까지 쓰러지다니. 교수님한테 죽었다. 그가 만에게 물었다.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이제 하루 지났어. 지금 오후 5시."
"아…, 데이터는 잘 나오고 있나? 내 디바이스…."
최이삭은 아직 정신이 덜 들어 자기 몸을 더듬거리며 디바이스를 찾았다. 만 의사가 보관하고 있는 것을 건넸다.
"일단 좀 더 쉬고…."
"어, 오 박사. 응. 응. 어. 아니, 그건 됐고. 다 잘 나오고 있어?"
그는 그녀의 만류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단 연락부터 했다. 괜찮다고 한다. 계산도 순조롭다고 하고 시뮬레이션도 잘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최이삭이 한 번 더 확인하고 올리지 않으면 꼭 문제가 생겼다. 그는 당장 게이트 쪽으로 출발하려고 옷을 찾는데 만이 말렸다.
"일단 호스부터 빼야지."
"아."
기절해서 24시간이나 누워 있었으니 당연히 소변 호스를 달고 있어야 했다. 최이삭은 그녀가 장갑을 끼고 그걸 제거해주는 동안 약간 얼굴이 홧홧 해졌다. 젠장…. 그리고 만은 그의 체열을 재고 키트를 따서 채혈을 하여 바이러스와 병균의 농도를 체크했다.
"그래도 최 박사는 젊어서 금방 낫네. 열도 다 내리고."
"교수님은요?"
"어제보단 나은데 아직 좀."
그녀는 열이 올라 안 그래도 붉은 입술이 더 붉어지고 얼굴 전체가 발갰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얼굴에 붙어 있었다. 만은 겸사겸사 그녀의 체온도 확인했다. 37.2도.
"잠은 좀 자야 할 거 아냐. 안 그래도 몸도 안 좋은데."
"과로보단 드레이닝으로 돌아가시는 게 더 빠르니까 그러시겠죠."
최이삭은 여전한 탈력감에 그녀가 주는 물을 마시며 일단 앉아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밥 먹고 쉬어. 피곤하잖아. 더 자."
"교수님은 언제 일어나실까요?"
최이삭은 이불 속에서 그녀의 왼손을 꺼내보았다. 4억 7천만…. 확실히 드레이닝 속도가 조금 빨라진 것 같다.
"지금도 깨울 수는 있는데. 깨울까?"
"아뇨…. 일단 내일까지는 이대로 두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결국 다시 자리에 엎드려 누웠다. 침대에 누워 보는 게 얼마만인가. 숙소로 돌아갈 힘도 없었다.
"커피랑 레드불 좀 그만 마셔. 진짜 죽는다."
"그럼 어떻게 밤새요…."
"차라리 차를 마셔. 둘 다 커피랑 강장제는 금지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그의 환자복 등을 뜯어서 목과 등에 침을 놓고 전기 자극을 넣었다. 침이 들어갈 때마다 근육이 펄쩍펄쩍 뛰었다. 침몸살이 오더라도 상관없이 그냥 뒤통수부터 엉덩이 다리까지 전부다 놓았다. 자극이 강해서 고통스러웠지만 그냥 참았다. 그대로 전기자극을 엄청 받고 나니 온몸이 다 욱신거렸지만 이마와 눈주위가 시원하게 풀려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대로 그녀는 다시 그의 등과 엉덩이, 다리에 부항을 뜨고는 다시 전기자극을 잔뜩 주었다. 온몸의 근육이 저절로 마구 움직이면서 뭉친 근육이 풀렸다. 그리고 그녀는 최이삭의 온몸을 스트레칭 시키고 주물렀다. 그러니 그대로 침몸살과 함께 몸이 너무나 노곤해서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
12시간이 지나 최이삭은 엎드려 잠들어 있다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과중한 스트레스에 눌려 사는지 바로 보일 정도의 행동이었다. 그는 그대로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멍하게 자리에 앉았다.
'배고프다. 밥 먹자. 바로 게이트로 가서 36시간 동안 데이터랑 시뮬레이션 보자. 모델이 나오고 있으니까…. 유럽 어디든 슈퍼컴 좀 하나 더 빌려 달라고 하면 안 되나? 계산 부하 때문에 컴퓨터 연산 미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3분만 이렇게 더 있자…. 샤워는 해야겠다. 진심으로 오늘은 해야겠다. 그는 동이 터오는 어스름한 새벽빛을 느끼며 기지개를 폈다. 그래도 잠을 36시간이나 잤더니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사라졌다. 살 만하다.
'아, 10분만 달리자.'
운동을 안 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물론 달리기 시작하니 현기증부터 빡 돌았지만 참고 천천히 달리기를 시작하여 체온을 덥혔다. 컨디션이 더 좋아졌다. 식당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타다가 버리고 박하차를 선택했다. 입안이 개운해졌다. 그리고 직접 스크램블 에그를 해서 과일과 함께 먹었다. 따뜻한 호박 스프도 천천히 먹었다. 지긋지긋한 샌드위치에서 벗어나서 따뜻한 걸 먹으니 기분이 또 좋아졌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오랜만에 숙소로 돌아가서 갈아입을 속옷과 깨끗한 옷, 신발까지 챙겨서 간이 샤워실로 향했다. 아주 위아래를 싹싹 씻고 스크럽까지 싹 해서 비누향이 퐁퐁 나게 나오자 기분이 둥둥 떠올랐다. 전신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사실 행복이란 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제 시간에 자고 매일 제 시간에 씻고 제 시간에 먹을 수 있는 게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는 게이트로 가는 차를 직접 운전해서 갔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게이트에는 용병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연구자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인물은 있었다.
"오 박사."
그러자 그가 고개를 홱 돌리며 최이삭을 보았다. 그는 최이삭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먹거렸다.
"형! 괜찮아요?"
세상에 물리학과는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메인이 되는 우주물리학이나 대통합 이론에 관련한 교수들의 연구실은, 그러니까 마도물리학자를 배출하는 연구실은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많았다. 마도사 자체가 여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현 퀸의 연구실은 석박사생을 통틀어 18명 중 남자가 2명(최이삭, 오태연)이나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괜찮아.”
"교수님은요? 괜찮으세요?"
"괜찮으셔. 못 주무셔서 그런 거야. 데이터는 어때?"
"데이터는 좋은데…. 아, 진짜 왕 교수님이랑 학과장님이 자꾸 잔소리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왜 또."
원래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 노릇을 하는 법이다. 오 박사가 징징거리는 걸 다 들으며 그동안 어떻게 돌아갔는지 들었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살펴보았다. 어떤 상태에서 생성되는 천체든 그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를 모델화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실제 웜홀을 관찰하여 생성된 데이터로 오차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에서 나오는 수치를 대입하여 특수 웜홀-중력방정식을 도출해내는 게 수에즈 게이트 프로젝트의 1차 목표였다. 컴퓨터고 사람이고 머리를 엄청 굴리고 있었다. 그럴듯한 수식이 나왔다가 다음날의 수치에 의해서 망가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학계에서 이론적으로 도출한 수식은 이미 맞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다들 더 열성이었다.
"아, 원래 교수님 형은 쪼아도 본인은 잘 드시고 잘 주무셨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까지 하신대요?"
세현 퀸이 이 말을 들었다면 하루에 6시간밖에 못 자고 살았는데 내가 뭘 편하게 살아! 라고 반박했겠지만 대학원생의 눈에야 교수는 아주아주 상팔자다. 세계물리학회 수뇌부, HNU 교수 몇과 총장, 마도의학계 몇몇만 세현의 상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다. 랩에도 아직은 비밀이었다.
"형 졸업하면 전 어쩌죠? 저 진지하게 랩 옮길까 고민 중인데요."
"옮겨라…. 너라도 빨리 발 빼라. 난 이미 늦었다…."
"아, 역시. 아니, 형 졸업은 시켜준대요? 아니, 졸업하고 나서도 남으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포닥까지 하라고?"
어차피 이쪽에서 우리 랩보다 더 대단한 랩은 없으니까 그럴 가능성도 아주 농후…. 오 박사가 그렇게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몰라…."
"근데 전 어떡해요? 왕 교수님 랩 갈까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교수님보다는 낫겠죠?"
"일단…, 거기도 학회장 라인이라는 것만 기억해라."
"아…, 학과장님이 진짜 만악의 근원이야, 근원. 형, 우리는 나중에 교수 돼도 그렇게 살지는 맙시다."
"그래."
살짝 자신은 없다. 최이삭은 그렇게 말하며 박하차를 마시며 그대로 게이트에서 그간의 일을 정리했다. 세현 퀸이 없으니 오히려 눈치가 안 보여서 일이 더 잘되는 것 같았다. 아니, 잠을 좀 자서일까? 깔끔하게 보고서까지 만들고는 세현 퀸의 계정 앞으로 보내놓고 그녀의 말마따나 본인의 연구 주제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논문 두 개를 마무리 짓고 나니 확실하게 살 만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수에즈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제 시간에 베이스에서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최이삭은 감격하여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야 세현에게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료실로 향했다. 거기엔 세현이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한 번 깼어요?"
"아니."
만이 그렇게 대답했다. 최이삭은 약간 당황했다가 얼른 다가가서 그녀의 손목을 들어보았다. 3억. 보통 마도사들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이틀 반 정도의 목숨밖에 되지 않았다. 최이삭은 그녀를 흔들기 시작했다.
"교수님, 교수님!"
만이 각성제를 가지고 그녀의 코에 살짝 들이댔다. 그러자 움찔하며 그녀가 눈을 떴다.
"교수님, 마도 순환하세요. 영원히 못 일어나십니다."
그녀는 멍하게 공중을 쳐다보고 있다가 최이삭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뻑뻑한 눈을 손등으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야…, 너 연구실에 안 있고 뭐 하는 거야? 미쳤냐?"
"교수님, 지금 수에즈입니다."
"어? 어…. 아. 어."
열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마도 순환하세요."
그녀의 손목에 밑에 심어진 전자 시계의 숫자가 변하는 속도가 변했다. 그제야 최이삭은 한숨을 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피곤함을 참을 수가 없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만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호스를 빼고(최이삭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엎드려 눕게 했다. 최이삭에게 했던 것처럼 옷을 벗기고 침을 잔뜩 꽂고는 전신의 근육을 풀었다. 교수에게 학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는 최이삭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오늘 며칠이야…."
"4월 16일입니다. 프로젝트 23일차입니다. 지금은 오후 9시 3분이구요. 데이터는 잘 모이고 있고 시뮬레이션도 잘 수정되고 있습니다. 다른 교수님이랑 박사들도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구요."
"그래…."
이렇게 기운 없는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최이삭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식사라도 가져올까요?"
"됐어. 물이나 줘."
최이삭은 그녀의 입술에 빨대를 꽂은 물컵을 대주었다. 그녀는 두 모금 정도 마시고는 다시 축 늘어졌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마도의사 하나 데리고 올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보내 달라고 하면 보내주지 않을까요?"
"그럴까? 그러자."
세현 퀸도 2일이나 링거를 맞으면서 잤더니 회복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약한 소리를 한 것도 잠시고 부항을 뜨고 마사지까지 받고 밥 먹고 샤워하고 옷까지 갈아입는, 최이삭이 밟았던 순서 그대로 밟고 나자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날 밤은 쉬고 다음날에는 게이트로 돌아갔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하우빈이 세현 퀸을 보자마자 마구 달려오다가 넘어지고 다시 달려왔다. 세현이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요새 좀 무리했더니."
"무리하지 마세요, 교수님.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교수님, 건강하십쇼. 교수님 잘못되시면 저흰 어떡해요. 저 랩 옮길 데도 없어요."
"랩 옮기기만 해봐라. 니 앞날은 내가 책임지고 막는다, 오 박사."
그렇게 걱정하는 제자들을 좀 살펴보고는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같이 연구를 하는 다른 교수들과 만나 그간의 진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로 칠판 앞에 서서 이것저것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확실히 그녀도 눈문을 두 개 마무리하고 나니 그전만큼 피 토하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세현은 두 개의 논문을 잘 다듬어서 심사청에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웜홀-중력방정식 도출도 이제 좀 가닥이 잡히는 아이디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리 풀고 저리 풀면서 방정식을 만들고 있었다.
프로젝트 24일차. 게이트 너머로 넘어갔던 NASA 용병들이 샘플을 가지고 하나씩 귀환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해서 조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병에서 회복한 지도 얼마되지 않았고 이제 확실히 나이가 나이라 그런지 회복력이….
'아, 그 노친네 랩장할 때만큼도 아닌데, 참.'
그리고 손목을 보았다. 1억 정도 남았다. 40시간 좀 덜 남았다. 마도 순환은 정상적으로 돌아와 다시 예전만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전처럼 너무 빠듯하게 보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금발한테 말해서 미리 빼놓으라고 해야겠다.
프로젝트 28일차엔 빅크런치 실험이다. 세현 퀸이 직접 참여하여 최이삭, 하우빈과 함께 게이트를 중력 마법으로 축소,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10억 이상의 마력이 필요했다.
'10억…. 금발 쓰면 30발…. 나흘밖에 안 남았으니까 그냥 매일 12발씩….'
의사가 커피와 카페인 음료를 금지해 세현은 녹차, 최이삭은 박하차를 커피 대신 마시고 있었다. 카페인을 제 2의 혈액처럼 느끼는 신체를 가졌다 보니 둘 다 간혹 졸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 같다.
간혹 희미하게 일렁이는 웜홀에서 용병들이 하나씩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단조로운 광경이었다.
'커피 마시고 싶다….'
그러면서 세현은 스르륵 수마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시거리에 있는 전세상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
"무슨…."
태어나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소드마스터의 초감각은 집중하면 주변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춘기 이후부터 너무나 당연한 거라 딱히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 감각이 일순 작아진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일점 중심으로 모였다.
거기에 모든 질량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일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그 자신도 심지어 공간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암흑처럼 느껴졌지만 암흑이 아니었다. 이 생각을 하는 스스로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곳에 존재하는 아무인 나. 유일. 유일.
그리고 모든 질량이 플랑크 길이 이하로 줄어든 일점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굉장한 열과 함께 폭발하였다. 질량은 팽창하는 공간과 함께 퍼져갔다. 질량은 다채로운 1차 항성과 행성을 만들었다. 자전과 공전. 강력한 중력은 새로운 원소들을 만들어내며 강렬한 빛을 냈다.
수십억 년이 흐르자 그 아름답고 거대한 세계들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붕괴했다. 성운이 생기고 블랙홀이 생기고 그 먼지 속에서 다시 빛나는 별이 생기고 은하가 휘몰아치고 퀘이사가 머나먼 우주의 지평에서 영원에 가까운 암흑의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빛난다.
한 행성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름다운 푸른 빛에 하얀 구름, 녹색의 대지를 가지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은 이윽고 식어….
모든 사람들이 이 엄청난 천변만화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우주의 한 가운데 자신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도 이를 보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아름다움에 전율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광경…. 심지어 초감각, 초인지 능력을 가진 소드마스터조차도 전율에 떨며 그 환상에 취해 있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137.98억년의 시간을 그렇게 피부로 느끼며. 그 순간 무언가 게이트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일어나, 이 미친년아! 죽고 싶냐!"
그녀는 환상의 일부를 깨고 베이스에서 여기까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세현 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세현은 졸고 있던 의자에서 떨어졌다. 갑자기 모든 환상이 사라지며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람을 다시 인지했다. 침묵이 흐르다가 곧 웅성거림이 생겼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세현의 멱살을 잡고 캘리 박이 한 번 더 뺨을 때렸다.
"마도 순환!!"
"!"
세현은 깜짝 놀라서 곧바로 마도 순환을 하기 시작했다.
마도라는 것은 결국 뇌가 팔다리에 전기신호를 보내어 움직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팔다리가 일으키는 것보다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도사들은 청소년기에 잠을 자거나 무의식중에 마법을 쓰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받기 전 어린 마도사의 무의식 마법 양상은 각기 달랐다. 주변의 사물을 전부 띄우는 경우가 가장 많고 불을 일으키거나 전격을 내는 위험한 케이스도 있었다.
세현은 생생한 환상을 구현했다. 아니, 진짜 실재(實在)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력이 강대해질수록 환상의 실체는 더더욱 커져 우주 그 자체가 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마력 소모가 극심했다. 사춘기 이후엔 캘리 박의 랩장 시절에 딱 한 번 너무 피곤해서 졸다가 일으킨 적이 있는 마법이었다.
"죽고 싶으면 그냥 대가리에 총을 쏴라, 이 멍청한 년아!"
그녀는 마치 세현이 그녀의 밑에 학생으로 있을 때처럼 말했다. 캘리 박이 그녀의 왼손을 잡아 그 손목 안쪽을 확인했다 15분…! 세현도 보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당황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뒤에 있는 남자 둘을 보았다. 그녀는 그 중 한 명의 손목을 잡았다.
"나 데리고 차로 빨리 뛰어가. 당장."
그는 굳은 얼굴로 세현의 얼굴을 잠깐 보다가 곧 그녀를 안아 들고는 훌쩍 큐브의 밑으로 뛰어내렸다. 곧 차에 타서 시동을 걸었다. 차는 베이스를 향해 출발했다.
"벗어."
세현은 자신의 왼쪽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가 주춤하자 그녀가 그를 돌아보며 화를 냈다.
"빨리!!"
차는 자율주행으로 베이스를 찾아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벌게진 얼굴로 인상을 쓰며 바지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세워. 빨리 세워. 빨리."
그녀는 알렉스의 미적지근한 손을 보고는 자신이 손을 뻗어 그의 자지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윽! 잠깐만…!! 아프다고!"
"빨리. 빨리…."
그녀는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쥐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키스를 하자 그의 것이 좀 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키스를 멈추고 그의 것을 빨았다. 타액도 쿠퍼액도 어느 정도 마력이 보충된다. 알렉스는 인상을 왕창 찌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 가닥으로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져 펼쳐졌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내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에게 또 당하고 있었다. 정말 싫었다. 이런 거…, 이런 거 잘못된 것이지 않은가. 그녀와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그녀는 그날 이후로 그를 본체만체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알렉스는 불쾌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또한 의무감과 부채감도 느꼈다. 억울했다. 초조했다. 그래도 빨리 해야 했다. 안 그러면 그녀가 죽었다.
“으응…. 윽…. 하아…. 으윽…!”
그런데 왜 이렇게 쪽팔리는지 모르겠다. 정말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상상의 여지는 그 수치스러움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겨우 사정했다. 그녀가 역하다는 얼굴로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입에 머금었다가 겨우 삼켰다. 알렉스는 그녀의 표정에 심장이 덜컹했다. 기분 나빴던 걸까? 싫었던 걸까? 그럼에도 그녀는 쪼옥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자지를 빨고는 고개를 들고 바로 자신의 왼손을 확인했다. 죽음까지의 유예가 27시간 늘었다. 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윽…."
그녀가 왼손목을 잡은 채 이마에 눌렸다. 괴로운 표정이었다. 이윽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눈물을 보자마자 작게 신음을 흘리고는 엄청 주저하다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제기랄…. 당한 건 난데 왜 니가 울고 지랄이야."
그는 세현의 딱딱한 어깨와 목덜미를 살살 주무르며 달랬다.
"울지 마…."
그녀의 눈물이 잦아들고도 알렉스는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차가 베이스에 도착하고 둘은 곧바로 세현의 숙소로 향했다. 알렉스는 다시, 그리고 정말 엄청나게 긴장했다.
'또….'
그런 걸 하는 것일까.
[으응…! 하…, 그만…. 그만…! 못 해…. 아…! 또…, 또 갈 거 같아…. 으으응…!!]
그녀와…, 그녀와 또 섹스를 하게 되는 것일까?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긴장되었다. 하기 싫었다. 하지만 흥분되었다. 그렇지만 저렇게 낙담한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을까? 눈 안 가려도 되는 거잖아….'
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걸까? 횟수로 따지자면 엄청 많이 했는데도, 단 한 번도 할 때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다. 절대 궁금하지 않았다. 저 여자는 강간범일 뿐이다. 지금도 알렉스의 의사 따윈 완전히 무시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 아닌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뿐이야! 어, 어쩔 수 없으니까! 난 절대 하기 싫어! 저런 강간마! 저런 성격파탄자…!'
세현은 아직도 죽을 뻔한 무서움이 사라지지 않는지 마력측정기가 달린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바늘이 달리지 않은 커다란 주사기 열 개 정도와 자위 기구를 꺼냈다.
"빨리 싸서 넣어."
"……."
"나가 있는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알렉스는 나가는 그녀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몇 초 굳어 있다가 다시 침대를 돌아보았다.
"이런 개…!"
알렉스는 바로 밖으로 튀어나갔다.
"내가 무슨 짐승이야!! 장난해?! 당장 이리 와!!"
"……."
식당 쪽으로 향하던 세현은 아주 성가시다는 표정을 얼굴에 써 붙인 채 그를 돌아보았다.
'아…. 역시 그 금발 머리를 데리고 왔어야 했나.'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또 제일 좋은 걸 선택하고 말았다. 캘리 박이 말했듯이 젊고! 튼튼한! 소드마스터. 그게 얼마나 쓰기 성가신지 떠올리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확 끌어당겼다. 그는 화를 냈다.
"아예 나한테 짜는 기계라도 달지 그래? 어?! 사람이 사람같이 안 보여? 빨리 싸서 넣어?!!"
"아, 나도 깜짝 놀라서. 마음이 급해. 죽을 뻔 했잖아."
"아악! 또 대충 떼우려고!!"
"그럼 어떡하냐."
"뭘 어떡하긴 어떡해! 안 해!!"
"알았어."
그녀는 선선히 그렇게 대답했다. 알렉스는 당황했다.
"그 금발 머리나 불러줘, 그럼."
"뭐…, 누구?"
"그 용병."
"그 새끼는 니가 해달라는 대로 짜서 줄 거 같아?"
"응? 벌써 주고 있는데."
"뭐?!"
알렉스가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언제부터? 냄새 같은 건 안 났는데…!"
"뭐?"
알렉스는 입을 확 다물었다. 세현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웃었다.
"너 내 냄새 맡아?"
그녀가 알렉스의 말에 미소를 지은 건 처음이다. 알렉스는 갑자기 기분이 울렁거려서 말을 더듬었다.
"마, 맡은 게 아니라 나, 나는 거야! 우, 우리는 코가 예민하다고! 나랑 했던 날 너…, 내 냄새 어, 엄청 났으니까."
"그랬어? 잘 씻었는데."
어째 용병들이 유달리 좀 쳐다본다 싶더라니. 그녀는 또 피식 웃었다.
"다 흡수 안 될 만큼 들어오면 그런가 보네. 그때 너 대단했지."
대단…. 알렉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또 버럭 했다.
"우리가 무슨 정액 싸는 기계야? 그렇게 막! 막…!"
"알았어. 앞으로 너한테 안 이럴게. 사실 나도 마음이 많이 급해. 불안하기도 하고. 아까 봤겠지만."
세현은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손목에서 떼어냈다. 알렉스는 또 기분이 울렁거렸다. 그녀의 눈물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안 하면 죽잖아. 그래서…,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하고 있는 거잖아.'
그녀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강자로 살아온 날에 익숙해서 그런 것이다. 항상 여유롭고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다 보니까 자꾸 까먹었다. 그리고 그걸 떠올리면 너무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알렉스를 강간했다. 그도 그녀를 강간했다. 그녀는 둘 다 원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두 번 다 결국…, 빠져들었다.
"…해줄게!!"
세현은 아담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두고 나가려는데 그가 소리쳤다. 알렉스는 세현의 손목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그때 나 때문에…, 그 아저씨랑도 한 거니까! 싫은데도…!"
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녀에게, 혹은 자신에게. 세현은 살짝 한숨을 쉬더니 대꾸했다.
"아, 그때 하진 않았어. 나 그때 많이 바빴잖아."
"안 했어?"
알렉스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세현은 또 피식 웃었다.
"안 했어. 그냥 이틀에 열 개씩 저거에다 담아서 줘."
물론 나중에 하룻밤 같이 보내기로 하긴 했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알렉스의 얼굴이 또 펑펑 빨개지더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앞으론 내 것만 받아."
"응? 하루에 6발씩 괜찮겠어?"
니 건 확실히 약발이(?) 세니까. 세현은 바로 계산을 하여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 실험… 끝나고도……."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인상을 확 썼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세현은 몇 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잠시간 올려다보았다. 그는 부끄러움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러고 있다가 세현을 보았다.
"그럼 너 괜찮은 거지?"
"응? 실험이야…."
"안 죽는 거지?"
알렉스가 물었다.
"그래.”
세현은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루키 군."
*
어째서 더 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해놨어."
알렉스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도통 감을 못 잡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식당에 있었다. 시간 난 김에 다른 쪽 고픔도 해결하려고 엄청 먹고 있었다. 공학용 멀티스크린을 보고 있던 세현이 그를 돌아보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오래 걸렸잖아."
"……."
할 말이 없다. 6발 빼는데 2시간 걸렸다. 하지만 그녀가 저런 식으로 말하니 좀(많이) 짜증이 나서 울컥했는데도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해줘도 뭐래…."
그렇게 구시렁거리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알렉스는 컨디션이 아주 안 좋아져서 심하게 피곤해하고 있었다.
'억지로 빼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제대로 흥분이 되지 않았다. 뭘 보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의무적으로, 그것도 6발이나 싸야 한다는 건 처음부터 막막하기만 했다. 혼자 남겨지고 침대 위에 잔뜩 있는 주사기를 보는데 기분이 정말…. 아무리 그가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10대다. 그 정도 감수성은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쭉 해준다고 호언장담 했는데 살짝 자신이 없어졌다. 주사기라니. 허무한 데다가 엄청 기운 빠지는 게….
그나마 겨우 할 수 있었던 게, 지금도 꿈으로 나와 그를 괴롭히는 기억인 예전 스위스 연맹 파티 때의 일이나 저번에 그녀를 엄청 범했던 기억을 어쩔 수 없이! 자위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자괴감도 심했다
'10발이라니….'
새삼 아담이 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게 그가 말하는 어른의 스킬일까.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앞으로도 계속 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들어오게?"
숙소의 앞에 도달하여 세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그게 그의 일이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같이 들어가려고 하긴 했다. 알렉스는 내심 약간 놀라서 주춤했다.
"아니…, 내 일이 너 따라다니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버럭 했더니 세현이 살짝 인상을 쓰며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존댓말."
"…거예요."
"자꾸 건방져."
그렇게 경고하고 그녀는 혼자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 낮시간이라 알렉스는 그녀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알렉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도 않고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 그녀의 숙소 앞에 불량하게 다리를 벌리고 쪼그리고 앉았다.
이틀 낮은 세현을 따라다니고 밤은 가고일을 경계했다. 그가 쉴 때는 리천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어차피 게이트를 지키는 용병들에게 수두룩하게 있고 그녀는 게이트에 살다시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도 꼭 그렇게 해야 했다(그렇게 치면 네 명이나 따라다니는 그 둥둥 떠다니는 학회장이라는 할머니부터가…). 게이트를 책임지는 아담이 종종 같이 그녀의 가까이에서 경계를 했다. 경호 순위가 급감하여 그녀에게 딸린 경호가 확 줄었기 때문에 그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그렇게 중요한 여자라는 거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지….'
그녀가 일으킨 기적도 기적이고,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들은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대우했다. 알렉스는 서던라이온의 구단주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에게 굽실거리던 사람들과 느낌이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다. 사람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고 바짝 긴장해서 그를 대우했으며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여기 사람들도 그랬다. 그녀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그녀를 거역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여기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녀를, 그리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알렉스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지는 힘을 잘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나쁜 여자였다. 스위스 연맹 파티 때부터 한시도 빠짐없이 그의 안에 강제로 자리를 틀고 있는 무법자였다. 아마 그의 정신이 몸보다도 훨씬 그녀에게 범해져 왔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곁에 서 있으면 무력감이 들고 화가 나고 억울해지고 이유도 없이 흥분하고 자괴감이 들고 원망이 들었다. 그녀가 의미없이 내뱉는 말이나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를 따져보거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끊임없이 신경 쓰였다. 그러기 싫은데도 자꾸 그랬다. 그녀가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면 무엇보다도 분노했다. 그녀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도와주고 싶다.
알렉스 킴, 19세, 그는 한숨을 푹푹 쉬며 괴로워했다. 그는 ‘아우~’ 하고 소리를 내며 복잡한 심정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벅벅 비볐다. 원래 인생이란 게 이렇게 복잡한 거였던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째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답이 안 나온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 터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다.
또 그렇게 급격하게 침울해져서 가만히 있는데 귀에 무언가 들렸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소드마스터란 집중하면 정말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아…. 으응…."
"!"
들린다! 아니! 엄청 크게 들린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더더욱! 집중을 했다.
"아…, 진짜 작아서 아픈 건가…."
그녀의 중얼거림까지 들렸다. 그녀가 뭐가(?) 작아서 아프다고 한다…. 알렉스는 그 자세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저도 모르게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숙소의 문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원위치 시켰다. 집중을 분산시키자. 듣지 말자, 듣지 말자….
"으응…."
찌걱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들어가며 주사기의 피스톤이 눌러지는 소리가 천천히 들린다. 그녀가 자신의 정액을 거, 거기 안에다 넣고 있었다. 새빨개서 보기만 해도 확 열이 오를 정도로 야한….
알렉스의 얼굴이 벌게지고 땀이 뻘뻘 나기 시작했다.
'더워서 그래. 더워서….'
아까 혼자서 하려고 할 때는 더럽게 안 되더니 지금은 아랫배가 절로 근질거려서 알렉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숙소에서 몇 발자국 멀어졌다. 들린다. 더 멀어졌다. 아직도 들린다. 더 떨어졌다. 알렉스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곤란함을 이기지 못하고 벌게져서는 땅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아직도 들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양 귀를 두드리며 ‘아.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듣지 않으려고 한참 노력했다.
"아~ 듣지 마. 듣지 마. 저런 변태 같은 여자…."
"뭐라고?"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세현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알렉스는 너무 심하게 정신을 분산하는 바람에 그녀가 뒤에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알렉스는 입을 합 다물었다.
"돌아가자. 운전해."
"……."
4륜 구동차에 그녀를 태우고 게이트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오감(육감까지)은 전부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걸 막을 수가 없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냄새 안 나….'
확실히…, 지금 그녀에게선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 수용량을 넘기 전까지는 넣자마자 바로 그녀의 마력으로 치환되어버리는 모양이다.
모든 감각이란 너무 예민하면 쉽게 피로해지기 때문에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소드마스터의 감각도 일반인보다 약간 더 좋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다들 금세 알아차렸다. 예를 들자면 여자 냄새라든가, 그 여자에게서 다른 남자의 냄새가 난다든가.
그날은 정말 몇 시간 동안 그의 냄새가 풀풀 났다. 정말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게 알렉스의 냄새라는 것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통은 가지런히 묶어놓은 머리카락도 풀어놓은 채 나른한 얼굴을 하고 돌아다녀 용병이고 서던라이온 유스팀이고 전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 싫었다.
정말 싫었는데…. 지금 그녀에게서 그의 냄새가 나지 않는 건 또 유쾌하지 않았다. 기껏 힘들게 짜내서 줬는데… 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 엄청 이상하다. 에비. 머리가 어디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근 몇 달 동안 평생 했던 고민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서 그런 것 같다.
게이트에 돌아가니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냄새가 나서 그런 건 아닌 건 분명했다. 캘리 박이 세현의 책상 위에 앉아 있다가 그녀가 오자 왼쪽 손목을 힐끗 보면서 물어보았다.
"살아났냐?"
"네."
"인사."
"…감사합니다."
"너 이거 나한테 빚진 거다?"
"…네."
세현은 아주 탐탁치 않은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최이삭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교수님?"
"그래."
내 졸업…. 그런 얼굴로 세현을 보고 있는 최 박사였다. 그도 세현의 왼쪽 손목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교수님 무의식 마법도 굉장하시네요. 역시 우리 교수님! 사람들한테 대규모 시현해도 되겠어요. 예전에 <유니버스>처럼 대중 과학 교육 일신에 아주 좋을 거 같은데요?"
하우빈이 감탄하며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하려고 하면 오히려 어려워. 자다가 깜박하고 펼치면 내가 일어나거나 마력이 동날 때까지는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고. 거대 공포증이나 환 공포증 있는 사람한테는 완전 쥐약이고."
하우빈이 말했던 걸 이미 한 번 해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캘리 박도 말했다.
"그래. 나 정도나 되어야 깨지."
"한 번 겪어 보셨으니까 그런 거죠. 우빈이 너도 깰 수 있어."
"진짜요? 아…, 저도 그냥 완전 홀려 있었는데. 멋있었어요.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하우빈이 계속해서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세현을 보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베이스로 돌아가신 거예요?"
그리고 학과장님이 우리 교수님 때렸어…. 하우빈이 캘리 박을 살짝 흘겨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현은 하우빈의 머리를 눌러서 쓰다듬었다.
"너 내가 하라는 건 다 했냐? 보고서 쓰라고 한 거."
"아, 아니, 그거…! 모레까지 쓰라고 하셔서…!"
"그런 건 이틀 전에 짠 하고 가져와서 교수를 놀라게 하는 게 훌륭한 대학원생의 자세다, 우빈아."
"네, 네…!"
하우빈은 얼른 큐브 아래로 내려갔다. 한 번 넘어지고는 자기 자리로 빨리 돌아갔다. 그러자 큐브의 위에는 세현 퀸, 캘리 박, 최이삭, 알렉스, 아담이 남았다. 캘리 박이 세현의 손목을 쥐고 들어올리다가 알렉스와 아담을 보았다. 그녀가 눈짓했다.
"니들 좀 내려가라."
아담은 곧바로 내려갔다. 알렉스는 잠깐 세현을 돌아보았다가 내려갔다. 밑에서 둘 다 귀를 쫑긋 세웠으나 캘리 박이 쉴드를 쳤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할머니는 묘하게 소드마스터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 인상이 든다.
"셋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렉스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쿠션을 깔아놓은 전용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태도로 연구노트에 뭔가를 쓰고 있던 왕리밍이 대꾸했다.
"식구끼리 할 말이 있나 보지."
"식구?"
알렉스가 되물었다.
"상왕, 왕, 왕세자…는 아니고 왕자나 대군. 자기 핏줄끼리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지."
그가 말했다.
"그렇게 치면 교수님도 같은 핏줄 아닙니까?"
아담이 되물었다. 왕리밍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독립한 지가 언젠데. 내가 라인 같은 거에 연연하는 줄타기 족인 줄 알아?"
왜 짜증이야, 이 아저씨. 알렉스는 계속 큐브 위를 힐끔거렸다. 아담은 웃는 얼굴로 그를 대응했다.
"그러셨군요. 대단하네요."
"흥."
그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최 박사는 자기 할 일을 하러 내려왔다.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딱히 뭔가 읽어낼 수는 없었다. 아담도 잠깐 최이삭을 지켜보았다. 그는 뭔가 알아차릴 수 있는 걸까.
좀 더 있고서야 얘기가 끝났는지 캘리 박이 천천히 큐브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알렉스에게 눈짓을 했다. 알렉스는 다시 큐브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평소대로 자신의 연구노트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아까 죽을 뻔한 사람이 맞나 싶다.
'무슨 얘기를 한 걸까.'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자신이 싫었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까부터 기분이 자꾸 울렁거린다.
'죽을 뻔했으니까. 내가 도와줘야 하니까. 안 그러면 죽으니까. 안 그러면 자꾸 딴 남자한테 집적거리니까. 그러기 싫으면서.'
알렉스는 그렇게 하나하나 스스로에게 계속 변명했다.
*
"그러니까 내가 자꾸 입맛이 없고 기분도 안 좋고 여기가 막 답답하고 그렇다니까?"
빨강 머리, 호박색에 가까운 헤이즐색 눈동자, 2m가 넘는 키, 엄청난 근육을 가졌는데도 훤칠한 남자였다. 짧게 다듬은 머리카락에 남자답게 쭉 뻗은 목이 섹시한 느낌으로 얼굴도 잘생긴 호쾌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영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잔뜩 쓰고 덩치에도 맞지 않는 동그랗고 작은 의자에 앉아 의사와 면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죽을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니냐는 듯이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니! 진짜 아무런 이상도 없다니까?"
50대 중반의 의사는 답답하다는 어투로 그렇게 대꾸했다. 2주일 전부터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기 오피스를 들락날락거리는 선수가 생기니 그녀도 짜증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메트로서울 과천구에 위치한 TFC 클럽 <웨스트이글>의 홈, 게헨-세나의 의무실이었다.
"자, 봐. 니가 봐라, 봐."
그녀는 아예 자신의 의료용 멀티스크린을 돌려서 그의 의료기록을 상세히 정리해놓은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신체를 3D 모델로 하여 갖가지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런 걸 다 읽을 성격도 아니고, 결국 결론부터 살펴보니 그가 아주 건강하다는 판정만이 떠있을 뿐이었다.
의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녀는 6살짜리 사고뭉치를 설득하듯이 천천히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니들은 병에 안 걸려요."
"아니, 우리라고 아예 안 걸리는 것도 아니고 체하기도 하고 술병도 나고 그러는데."
제수스는 아주 심각하게 말했다. 의사는 답답해서 죽으려고 했다.
"체했냐? 술 먹었어? 방금 약 빨고 왔냐?"
"아니…."
"그래. 아니라니까! 어?! 아니라고!"
"아, 왜 화를 내. 환자 앞에서."
"아니! 넌! 환자가! 아니라니까! 아픈 데가 한 곳도 없다니까?! 어?! 너 훈련하기 싫어서 이러냐? 어? 그런 거야? 위에다 확 찌른다? 어?!"
"아! 진짜 이상하다니까! 막 속이 답답해! 소화도 안 되는 거 같고 입맛도 없고! 나 살 빠진 거 안 보여?!"
그도 답답해서 그렇게 소리쳤다. 의사는 말이 안 통하는 그를 앞에 두고 아주 진저리가 나는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아니, 살이야 니가 술 처먹고 약을 많이 빨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어? 요즘에 많이 했다며? 약이랑 술을 끊어. 그러면 된다고!"
"아니!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 끊었는데도 자꾸 그런다고!"
"아!! 그래서 나 보고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의사잖아! 일 해! 나 아파!"
그가 계속 뻗대자 그녀는 결국 자기는 모르겠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냥 다시 술 먹고 약 빨아라. 아, 귀찮아."
"…나 위암이나 그런 거 아닐까? 그런 건 말기쯤 돼야 티 난다던데?"
"아악!! 아니라고!! 니 몸에 암세포 같은 건 하나도 없어!"
그냥 니가 암 덩어리일 뿐이야! 그녀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2주일 동안 이 빨강 머리의 레퍼토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울 정도로 들었다. 게다가 덩치 크고 거시기 큰 놈들의 종특인지,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이제는 노이로제에 걸릴 거 같았다.
"몇 주나 됐다니까. 자꾸 여기가 답답해. 가끔 배까지 울렁거려. 기분이 안 좋아. 하기도 싫고."
"그래. 그래."
의사는 매우 성의없이 대꾸했다. 그녀는 짜증이 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다가 ‘어?!’ 하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우울증인가?!"
"어?!"
제수스도 깜짝 놀라서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뭔가, 듣기 너무 어색한 단어다. 그녀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분 나빠."
그녀의 눈빛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니들이 그런 거 걸리는 애들이었나…."
몸도 무식하게 크고 정신도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게 얘들 아닌가. 그녀는 한 번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멀티스크린에다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음…, 혹시 훈련이나 경기를 할 때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큰 편이냐?"
"딱히?"
"혹시 용병 생활 할 때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요새 많이 떠올라?"
"그것도 딱히?"
"약물을 하는 것도 평소의 불안이나 우울을 잊기 위해서 한다든가…."
"그거야 그냥 하면 기분 좋으니까."
"…그럼 뭐? 뭐?! 뭐 어쩌라고!"
잠깐 이것들도 사람이지, 라고 생각했던 게 바보 같다. 의사가 다시 성질을 참지 못 하고 언성을 높였다.
"원인이 있을 거 아니야! 원인이! 니 대가리 속에서 나오는 쓸모없는 신경전달물질들도 아주 잘 돌아다니는데 뭐 어쩌라고! 뭐 병에 걸릴 만한 짓을 했냐? 어?"
원인? 제수스는 한 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무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의사는 처음부터 그냥 그에게 병은커녕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만 말할 뿐,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어본 건 2주만에 처음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하지만 역시나 딱히 걸릴 만한 게 없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의사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기억을 더듬다가 의무실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잘 관리된 잔디밭이 보였다. 그리고 텅 빈 관중석도 보인다.
문득 말했다.
"…그 여자 기억나?"
"여자? 무슨 여자?"
"전에 내가 여기 데리고 왔던…."
"아, 그 가슴 빵빵하던. 걔 왜? 니 걸즈 안 들어갔냐."
제수스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또 기분이 안 좋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제수스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거지…."
"그래."
제수스는 자신의 멋진 목덜미를 손으로 주무르듯 몇 번 문지르더니 의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거 언제쯤 괜찮아질까?"
"응? 이상이 없다니까?"
그녀는 그렇게 답했다. 제수스는 한숨을 쉬며 의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 지금 구장. 어? 여기 왔어?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이쪽에 걸어오고 있었다. 그놈은 탈의실에서 나와 디바이스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급하게 옷 매무새를 바로잡고 있었다.
플래티넘 블론드. 아이스블루 아이. 미르 킹쉴드였다.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제수스의 옆을 스쳐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의무실 옆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다시 비추어 보며 이리저리 다듬었다.
"빨리 갈게. 응. 응~ 빨리 보고 싶어. 사랑해~"
저 새끼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저런 말투로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처음 들었다. 제수스는 저도 모르게 웩, 하고 썩은 표정을 지었고 전화를 끊은 미르 킹쉴드는 길을 가다가 말고 그를 노려보았다.
"뭐, 씨발. 시비 트냐, 지금?"
"아니, 갈 길 가세요. 너야말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 트고 지랄이야?"
"눈깔 삐었냐? 난 니가 안중에도 없어요. 조용히 지나가던 사람한테 개같은 표정 지은 게 누군데?"
"야, 뉴걸은 니가 그때 그렇게 처발렸는데도 널 만나주냐?"
"처발리긴 누가 처발려. 씨발, 그때 감독이 막아서 니들 다 못 죽인 거야. 감독님한테 감사의 편지 썼냐? 어?"
미르는 화를 냈다.
"그리고 뉴걸이라고 부르지 마!"
GAS(Girls and Sisters)는 TFC 선수를 만나는 여자의 총칭이었다. 킹쉴즈 걸즈니 루카스 시스터즈니 유명한 걸즈는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생활비 지급이나 빚 변제를 약속 받고 선수와 만났다. 뉴걸은 GAS에 처음으로 데뷔한 여자를 뜻했다.
미르 킹쉴드가 그 유명한 킹쉴즈 걸즈를 다 버리고 한 여자한테 정착한 사실은 이제 꽤 유명해졌다. 구장에서 그 여자 자랑을 엄청 하다가 대판 싸움도 났다. 얼마되지도 않았다. 그거 때문에 차인 줄 알았더니 다시 만나는 모양이다.
"좆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지금 여기서 1대 1로 해도 발릴 새끼가. 해볼래?"
제수스가 완전히 그에게 들이대며 싸움을 걸었다. 미르도 완전히 열 받은 표정을 지으며 거는 싸움 그대로 받으려고 하다가 아차 했다. 그는 헹 하고 웃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야, 내가 너랑 같은 줄 아냐?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게."
특유의 오만한 미소였다. 그는 아주 콧대를 높이 들며 그를 비웃었다.
"수요일만 되면 부리나케 메리 호텔에 달려가더니. 어쩌냐. 맨날 그 여자한테 언제 연락 올까 디바이스만 끼고 살던 놈이."
"…뭐?"
제수스가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승부를 낸(가위바위보) 이후에는 그녀도 더 이상 구장에 나타나지 않아 다른 이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으리라 생각했다.
"니가 그 빅가슴녀한테 차였다고 애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다."
미르는 다시 그에게 다가와서 그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내가 선배로서 하나 가르쳐줄까? 어?"
그는 자기가 가는 방향으로 제수스를 끌고 갔다. 제수스는 어쩔 수 없는 척 끌려가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GAS가 아닌 외부인을 만나고 있었다. TFC 선수로서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GAS도 아니고 그 여자도 그 정도 가슴인데 콧대는 엄청 높겠지."
물론 그 여자가 우리 도현이보다 잘난 여자일리는 없지만. 미르는 아주 거들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돈으로 안 되는 여자들이 있어요. 너도 다 해봤잖아. 해러드도 데리고 가고 사고 싶은 거 다 사주고 좋은 거 먹이고, 어? 물론 그런 거 다 중요해, 중요한데, 그만큼 마음도 중요하다는 거야. 잘난 여자들은 말이야, 하나도 안 빼먹고 다 따진다? 머리털끝 하나까지 따진다니까. 그리고 그걸 흡족하게 다 채워줄 수 있는 남자야말로 진정한 남자, 잘난 남자, 어? 무슨 말인지 알겠냐?"
이 새끼가 잘난 척하는 건 예전부터도 짜증났지만 지금은 더 짜증났다. 결국 또 지 여자 자랑 아닌가. 죽어도 도움은 안될 새끼다. 제수스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뭉개듯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이름도 모르는데 어쩌라고…."
"엥? 그래? 뭐야. 만나서 진짜 떡밖에 안 쳤나 보네. 근데 왜 그래?"
"뭘?"
"훅 새끼가 명기일 거라더니만 역시 그건가…. 뭐, 그거야 니 걸즈가 힘내면 되겠네."
미르는 혼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활짝 미소를 짓더니 제수스의 등을 한 번 팡 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차분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 나는 여자였다. 세련된 머리스타일, 고급스러운 차림새, 비싼 주얼리. TV에서도 안 나올 것 같은 스타일이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미르 킹쉴드에게 뭐라고 얘기했다. 미르 킹쉴드는 그런 그녀를 정말 이상한 눈빛으로 보며 대꾸하고 있었다. 표정이 부드러웠다. 밝고 상기된 얼굴에, 그녀가 좋아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예쁘긴 예쁘네….’
제수스는 습관적으로 그 여자를 훑어보며 체크아웃 했다. 그들은 금방 갔다. 제수스는 벤치에 앉아서 물끄러미 관중석 쪽을 보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있었다. 별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있고 싶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이 흘렀을 때야 비로소 궁금증이 들었다. 아니,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든 의문이었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기 시작한 지 한 달.
한 달 전까지 제수스는 오로지 그녀가 정말 주사기를 쓰려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매일매일 걱정했다. 그는 그냥 그녀가 이상한 여자라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뿐이었다. 안 그래도 제대로 못하는 것도 불만스럽고, 그녀가 아프다고 불평하면서도 안 아프게 해주려고 해도 싫어하는 것도 짜증났고, 몇 번이나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는 것도 거절하고, 술을 먹자고 하는 것도 싫다고 하고, 백화점에 가서 사고 싶은 걸 다 사주겠다고 하는 것도 코웃음을 쳐 답답했는데 거기에 주사기라니. 주사기라니!
좀 제대로 못 해도 그녀랑 그저 껴안고 있는 게 정말 기분 좋았다. 잠시라도 몸을 겹치는 게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아파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일 수 있는 게 좋았다. 평소에는 심드렁한 말투여도 몸을 겹치고 있을 때의 그녀는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신음도 흘렸다. 가끔은 짧은 대화도 오고 가곤 했다. 그런 날은 더 좋았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몇 시간뿐이었는데.
그런데 분명히 주사기니 뭐니 쓰면 그녀는 앞에서 빨리 채워 넣으라고 독촉만 하거나, 아니면 미리 해놓고 자기는 받아가겠다고만 할 게 뻔했다.
'그거 넣기만 하면 뭐가 좋나….'
일주일에 두 번, 몇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 아마도 몇 분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제수스에게 속살도 보여주기 싫어하니 더 이상 피부도 맞대지 않을 거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 생각만 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좀 더 껴안고 있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뭘 해줘야 할까. 어떤 걸 좋아할까.
그녀는 이상한 여자였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는 먹을 것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옷도 좋아하고 보석도 좋아하는데 그녀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그런 여자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깊어 처음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그냥 일이 있나 보다 했다. 일을 한다고 했으니까. 차라리 잘 되었다고도 생각했다. 아직 그의 고민은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연락이 올까 봐 항상 기다렸다.
일주일이 흐른 뒤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고라도 난 걸까.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일주일이 더 흐르고 나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만나러 오지 않을 거라는 걸. 그도 그럴게, 그녀는 키스도 못 하게 하고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한 여자였다. 갑자기 나타났으니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여자.
그걸로 끝이었다. 남녀가 잠시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 같은 선수가 이름도 모르는 여자 만나서 몇 번 섹스를 하다가 끝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정말 흔했다.
근데 그냥 이번에는 이상하게…, 좀 이상했다. 이상하다. 몸도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았다. 그 여자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그녀는 역시 이상한 여자다. 왜 이름을 안 가르쳐줬을까. 이름 정도는 가르쳐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은 여자라서 이런 걸까. 이름 같은 거 듣고도 잊어버린 적이 더 많은데. 나는 그녀를 뭐라고 기억하면 되는 걸까. 이름 정도는 가르쳐주지. 이름만이라도.
'기분이 안 좋아….'
그런 이상한 여자가 고작 이름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기분이 이렇게 안 좋은 건가? 그럴 수가 있나? 좀 이상하게 하긴 했지만 돈도 안 받고 하게 해주던 여자였는데. 내 걸즈에 넣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다른 놈들한테는 말하기 싫었다.
‘정말 내가 뭘 잘못해서 만나러 오지 않는 걸까. 싫증이 난 걸까. 말해주면 다 고칠 텐데.’
그래도 싫다면 단 몇 분이라도 좋다. 역시 이름 정도는 알고 싶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만날 것처럼. 매번 그랬던 것처럼. 그냥 그러고 싶다.
"만나고 싶다."
그는 문득 그렇게 입 밖에 내어 혼잣말을 했다.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후회했다.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가슴이 괴로워졌다.
'뭘까, 이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왜? 고작 이름 때문에. 고작 인사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역시 병에 걸린 걸까.
*
'돌아가신다, 가신다 하는데 그래서 교수님은 도대체 언제 돌아가실 생각일까…. 지금이라면 당장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데.'
아, 아니다. 아냐. 후. 정신을 바짝 차리자. 졸업은 하자, 졸업은. 억울해서라도 기필코 박사는 받아야겠다. 심호흡을 하자, 최이삭. 심호흡~!
그는 갑작스럽게 졸업 논문을 써야 되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가면 알아서 시작하려고 했던 거였다. 근데 그걸 갑자기 지금부터 쓰라면서 교수님이 못 살게 쪼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나흘 뒤면 빅크런치 및 게이트 소멸 실험인데 컨디션 관리 좀 하면 안 되나?
이틀 내내 그녀의 호통, 잔소리, 비아냥(가끔은 경멸스럽다는 시선도 본 것 같다...)을 듣다 보니 그녀의 논문을 쓰며 쪼임을 당한 것보다 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그에게서 원하는 게 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연구 주제를 가져가면 만족할 것인가!
교수님의 논문을 두 개나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는 좀 편해지겠구나, 라고 안도할 수 있었던 건 그냥 그녀가 쓰러져 있던 이틀 정도였다. 최이삭은 다시금 살인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졸업하기 전에 적어도 3개 논문지 중에 2개에는 이름 싣고 졸업해야 할 거 아냐. 하나는 전에 겨우 올렸으니까 이번엔 나머지 두 개에 올려야지."
"그럼 하나만 더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너 그런 마인드로 계속 연구할 거냐? 어? 교수가 그렇게 말하면 넌 세 개 다 올려야겠다고 대답해야 할 거 아냐. 너 내 랩 나왔다고 이름 팔고 살 생각이면 당연히 세 개 다 올려야지! 다른 랩이랑 우리가 같냐? 같아? 정신 좀 차려라, 어? 아직도 모르겠냐."
그럼 애초부터 그렇게 말을 하지 말던가. 졸업 요건은 애저녁에 채웠다. 그래도 몇 달 전까지는 빠듯하게나마 자기 연구 생활할 만한 시간은 있었고 워낙에 큰 프로젝트만 하는 랩이다 보니 알아서 시간 잘 쪼개서 틈틈이 할 건 다 했다. 교수님의 성에 찰 정도는 분명히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 본인이 5백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고 그걸 제자한테 강요하면 안 되지.'
보통 때는 최이삭이 어떻게 논문을 쓰던 신경도 안 쓰고 자기 일에만 바쁘던 그녀였다. 결과만 보고 형편없다며 혼내기만 하더니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구 계획서부터 절찬리에 잔소리였다.
"이 주제로 니가 뭘 할 건데? 어? 남이 했던 얘기 그대로 반복하는 거밖에 더 되겠어? 신분야니까 리뷰해야 할 논문도 적겠지만 그만큼 어렵다고."
큐브 위에 있는 그녀의 앞에서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최이삭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교수님 논문이나 여기 와서 떠오른 아이디어도 많고…. 리뷰도 예전부터 철저히 했습니다. 원래부터 관심 많았던 분야라서…."
최이삭이 그렇게 말했다. 세현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의자의 등받이에 푹 눌러 앉았다. 그녀는 안경을 벗으며 그에게 물었다.
"너 말이야. 제대로 연구하려면 제일 중요한 게 뭔 거 같아?"
"…최신 연구를 잘 리뷰하는 걸까요?"
세현이 고개를 저으며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답했다.
"상상력이야, 상상력."
최이삭은 맞잡은 손에 힘을 더 주며 시선을 내렸다.
"너 공부 열심히 하고 책 열심히 파고 성실한 거 좋거든? 좋지. 그게 왜 안 좋은 거야. 근데 이제 자기 랩 이끌 만한, 그것도 정말 뛰어난 연구를 하고 싶다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지금까지 밝혀진 진실과 추정 너머에 정말로 뭐가 있을까. 그걸 알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현은 그렇게 말하며 혹평했다.
"너 그대로 하면 누가 너한테 뭘 할지 시켜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 대단한 학자 밑에서 필요한 거나 하는 그냥 그저 그런 학자로 끝나는 거라고."
"……."
그게 그렇게 나쁜 건가. 최이삭은 이제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전처럼 자괴감이 들었다. 앞서도 말했듯 모두가 캘리 박이나 세현 퀸 같은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녀가 말하는 그 범위에 자신이 포함되지 못한다는 것에는 실망이 든다. 스스로에 대해.
"지식만 있어도 안 돼. 상상력만 있어도 안 돼. 둘 다 있어야 한다고."
"네…."
"그리고 또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녀는 그에게 보통 사람은 도저히 해내지 못할 만큼의 과중한 업무를 맡기고 그것을 기대한 만큼 해내지 못할 때의 실망감을 격렬히 토로하거나 아니면 그냥 와서 화풀이를 하고 가거나 했다. 그녀에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녀의 밑으로 들어왔지만 주로 배운 것은 자괴감과 좌절감이었다. 그의 앞에 벽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단순히 머리가 좋다, 나쁘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뭔데요?"
최이삭이 물었다.
"믿음이야."
믿음?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그에게 연구 계획서를 다시 써오라고 했다. 그녀의 눈에는 그의 연구의 방향과 결과가 전부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게 실패에 가까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듯이.
'믿음….'
믿음이라니. 우주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법칙. 그걸 찾기 위한 연구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거기에서 비롯된 과학적 추론을 계속해나간다. 이성과 합리야말로 목표를 향한 길잡이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맹목성이 용납된단 말인가. 그런 비합리적인 맹신이야말로 모든 걸 그르칠 수도 있는 독이 아닌가.
그녀는 최이삭에게 일을 똑바로 하고 자기가 편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살을 바치고 뼈를 깎으라고는 해도 연구에 대한 철학을 강론한 적은 그다지 없었다. 그녀의 말이 계속 머리에 왱왱 맴돌아서 계획서를 쓰는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긴, 그건 항상 그랬다. 그녀의 언행은 그에게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녀의 밑에 들어오며 신앙을 버렸고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신을 깎아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실망한 그녀의 벼락 같은 화를 맞다가도 1년에 한 번 정도 수고했다든가, 3년에 한 번 정도 잘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게 뭐라고….
하여튼.
'그것도 옛날일이다….'
그녀는 곧 죽을 것이다.
그냥 졸업이나 시켜주시면 더 바랄 게 없다.
밤새 쓴 연구 계획서를 다음날 들고 갔다. 프로젝트 26일차, 교수님은 대노하셨다.
"야!! 도대체 이게 어제 거랑 뭐가 다른데?! 어?!! 나랑 지금 장난하냐? 어?!!"
"죄송합니다."
"너 6년 동안 내 밑에서 도대체 뭘 배웠냐?! 어?!! 자꾸 이런, 어디서 쳐봤을 거 같은 것만 들고 올래?!! 어?! 너 내가 우습냐?? 학부생이 써와도 이거보다는 쓸만 하겠다! 너 대가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그녀는 연구 계획서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아주 게이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태도였다.
"너 진짜 바본 거는 알았지만 진짜 이 정도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애였어? 어? 이 정도였냐고. 실망스럽다. 실망스러워!! 너 이대로면 실험대행 해주는 마도사밖에 안 돼. 그건 알고 이러는 거지? 어?"
"다시 해오겠습니다."
"다시 또 해오면? 뭐가 달라지냐? 너 지금 일부러 이러지? 나 엿 먹으라고??"
"아닙니다, 교수님."
"내가 지금 초등학생 작문을 보는 건지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인 이 세현 퀸 밑에서 6년 동안이나! 내가 제일 오래 데리고 있었던 놈이 쓴 걸 보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예전에는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면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무덤덤해진 것인지 가만히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종이를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귀를 거칠게 잡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그를 을렀다.
"난 니가 이거보다는 나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어? 이거보다는 더 하는 놈이라고 생각했다고. 너 요즘 왜 이래? 이것보단 더 할 수 있는 놈이었잖아!"
"……."
"대답 안 해?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냐?!"
"아닙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너 태도가 이게 뭐야?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어? 너 진짜 씨발,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거, 퀸 교수. 그만해라. 사람들도 보는데."
캘리 박이 슬쩍 끼어들었다. 최이삭의 귀를 뜯을 듯이 잡아당겨 그를 혼내고 있던 세현 퀸이 그녀를 확 노려보았다.
"노친네는 신경 꺼요! 내 제자 내가 가르치는데!!"
그리고 그녀는 코가 닿을 듯이 최이삭의 얼굴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이게 가르치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모를 태도로 그의 얼굴까지 꽉 쥐었다. 말마따나 사람들이 없었다면 뺨이라도 쳤을 것 같다.
"다음 거는 제대로 가져와라, 어? 내 일분일초가 니 같잖은 하루이틀이랑 같은 줄 알아? 더 이상 감히 내 시간 낭비할 생각하지 말고 볼만한 걸 가져와."
그리고 그녀는 최이삭을 거칠게 밀어냈다.
"가!"
최이삭은 굳은 얼굴로 내려갔다. 요즘 게이트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다.
'…그냥 죽자.'
곧 그녀가 죽을 거니까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최이삭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자살의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 여기까지 온 건 다 이유가 있겠지. 서울은 싫다.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죽자.'
최이삭은 계획서를 다시 쓰는 척하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귀가 욱신거렸다. 뺨도 아프다.
"선배님…."
"형…."
하우빈과 유리가 움찔움찔하며 다가오더니 그의 책상에 조심스럽게 박하차와 단 걸 두었다. 최이삭은 어쩐지 웃음이 피식 나와 안경을 벗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고맙다."
하우빈은 우물쭈물하다가 속삭였다.
"교수님 정말 존경하고 너무 좋아하지만…. 선배님한테는 항상 너무하신 거 같아요."
그러자 최이삭의 옆에 앉아 있던 오 박사도 슬쩍 끼어들었다.
"맞아. 교수님은 다른 사람들한테도 전부 평등하게 갑질(그는 아주 작게 말했다)하시지만 진짜 형한테는 살벌하다니까."
우빈이한테는 조금 너그러우시지. 오 박사가 심각하게 자기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하우빈이 속닥거렸다.
"선배님, 교수님한테 뭐 죄 지은 거 있죠?"
다들 교수님의 눈치가 보여 일을 하는 척하며 최이삭을 위로하려고 들었다. 최이삭은 쓴 입으로 박하차를 한 모금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어? 진짜요? 형이 언제 교수님한테 잘못한 적 있었어요?"
최이삭은 다시 안경을 끼며 스크린을 보았다.
"천재가 아닌 죄."
그리고 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계획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 졸업은 하자. 죽기는 무슨. 학위는 받아야지.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얼마 안 남았잖아.'
그는 그렇게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새기며 또 철야를 하기 시작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게이트를 지키는 용병들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최이삭은 게이트에 위치한 자신의 책상에 붙어 앉아 열심히 연구 계획서를 쓰고 있었다.
"그건 좀 괜찮네."
그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최이삭은 깜짝 놀라 박하차를 바닥에 쏟았다.
"야, 뭐 하냐."
세현 퀸이 차가 자신에게 튀지 않도록 얼른 발을 물리며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은 안경을 고쳐 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 앉아."
최이삭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여 그의 스크린을 같이 보았다.
"그래…. 이렇게 무질량 중력원 두 개를 공전시키면서 궤도가 축소되는 중성자 쌍성을 실험실 내에서 구현하겠다는 거지? 중력파 검출 실험?"
"네."
그는 약간 긴장한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세현이 그의 스크린을 아래위로 돌려보며 말했다.
"우리 실험실에서 하기도 좀 무리겠다. 스웨덴 가야겠어. 근데 예전에 고질량 중력원 2개로 실험하다가 사고 난 건 알지?"
"네. 근데 이렇게 하면 무질량점이라 사고 위험도 적고 전 교수님 실험 보조하면서 무질량 중력원 생성 경험도 많으니까 실현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이거 하려면 마력량이 500억은 필요하겠다."
"아뇨. 무질량 중력원에다가 중력 증폭 마법을 걸어서 해보게요."
"그거 괜찮을까? 고질량점이 없으면 증폭 마법은 불안불안 한데…."
"그거 때문인데…. 중력 증폭 마법 11.2.3 마도식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증폭량은 줄더라도 안정화는 될 거 같은데…. 마력량은 대폭 줄이구요."
"어…. 이게 더 논문감이다. 이 생각을 왜 못 했지? 너 이런 건 좀 한단 말이야. 마도 응용 쪽에 센스가 있어."
그녀는 몇 번 더 그의 계획서를 보다가 주석을 달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최이삭의 머리카락을 한 번 거칠게 쓰다듬었다.
"역시 하면 그래도 좀 하잖아. 다 내 가르침이 훌륭한 덕분이다."
"네…."
최이삭은 고개를 좀 숙였다. 1년만인가.
"그리고 너 논문 쓸 때 좀 장황해. 알지? 왕리밍이 꼭 그랬다고. 없어 보이니까 핵심만 적어. 논문은 짧으면서도 내용이 전부 깔끔하게 들어가는 게 좋은 거야."
"네."
"그리고 졸업하고 교수 되면 5년은 확실하게 니가 내 라인이라는 걸 얘기하고 다니라고. 그래야 니가 죽을 때까지 한 일이 내가 한 일처럼 되는 거지. 너 그 노친네가 내 이름 팔아서 얼마나 득 보고 사는지 알지? 니가 나 정도는 못해도 간간히 스승의 은혜는 그렇게 갚아야 하는 거라고. 너 그렇게 안 할 거면 내가 이걸 왜 해주냐?"
"네…."
"그리고 5년 동안은 니가 쓴 논문에 꼭 나 공동저자로 넣고. 지금 니 대가리에 들어간 게 다 내 논문 도와주면서 들어간 건데 미필적 고의에 의한 표절이다. 제대로 된 거 써라."
"네……."
그러면 그렇지. 최이삭은 세현 퀸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그러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이게 캘리 박부터 내려오는 HNU 물리학부의 대대적 전통이라는 게 기함할 일이었다. 세현은 최이삭이 앉은 의자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터앉아 그의 계획서에 주석을 엄청나게 달면서 당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나 죽으면 애들 좀 잘 챙겨줘. 그거야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하겠지만. 너 머리는 나빠도 착하니까."
"……."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몇 달 전, HNU 우주물리학 연구실에서 한 제 111차 빅크런치 실험.
[뭐…, 뭐야.]
시험자였던 마도물리학자 세현 퀸은 당황해서 자신의 손목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실험 기기를 운전하고 있던 최이삭은 한 발자국 늦게 그녀에게 갈 수 있었다.
[오호, 앞으로 세계 멸망은 안 일어나겠구만!]
HNU 전 총장이자 명예교수로서 학과장이란 타이틀로 다시 돌아온 캘리 박이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교수님 이거….]
뭐라고 더 말할 새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얼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가 평소처럼 학교에 출근했다. 한숨도 못 자고 연구실에서 밤을 지샌 최이삭이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갔다.
[아니죠? 아니죠, 교수님?]
[맞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발밑이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세현의 왼쪽 손목을 덥석 잡고 뚫어져라 보았다. 평소 같으면 그녀가 겁나서 절대 그런 짓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당장은 안 죽어. 애들한테는 당분간 비밀이다.]
[말도 안 돼요. 이 속도면…! 빨리 명상실 준비시켜서 당장…! 바, 방법이 있겠죠? 그렇겠죠? 그래도 교수님은…, 교수님인데! 다들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맞죠? 정부든 뭐든…!]
최이삭이 패닉에 빠져서 엄청나게 빠르게 말했다.
[이삭아.]
그녀가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그의 팔을 부드럽게 두드리고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녀는 피곤한지 기지개를 한 번 펴고는 자신의 오피스에 들어갔다. 최이삭이 얼른 따라갔다.
[당장 안 죽는다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은 시간 내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서 이것저것 챙기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말했다.
[그런 문제가….]
[다른 애들이야 다른 데 가도 안 늦었지만 너는 그래도 내가 책임져야지.]
[…….]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고작 몇 주를 앞에 둔 시한부였다.
[그 노친네가 방법이 있다고는 했으니까 그래도 내년에 너 졸업시킬 때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녀가 피식 웃으며 최이삭을 보며 말했다.
[통과 못하면 그걸로 끝이고.]
그녀는 자신의 천재성을 뽐내며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꺼리길 것 없이 자신의 길을 달려갔다. 그녀가 너무나 원망스럽고 미워도,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라는 걸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밝게 빛나는 별은 언제나 수명이 짧다. 그도 하우빈처럼 당연히 그녀를 동경하고 있었다. 동경하고 존경하고 따르고 싶어서 그녀의 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하찮게 취급을 해도, 그래서 그녀가 너무나 미워져도 그 동경심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대단한 그녀가 결국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별처럼 그렇게 죽어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슈퍼노바처럼 마지막의 모든 것을 쏟아내어 더 빠르게 달리고 더욱더 밝게 빛났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결국 이 저주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릴 거라는 걸. 그렇기에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내려고 했다. 과연 그가 그녀와 똑같은 입장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힘들지 않을까. 무섭지는 않을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있을 때는 마력을 확인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만 물끄러미 자신의 손목을 보고 있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대로…,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그녀가 정말 죽는 것일까. 실감이 들지 않았다.
"…괜찮으실 거예요."
"응?"
그녀는 심각하게 최이삭의 연구 계획서를 보며 구체적으로 실험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실험처럼 말이다.
"교수님, 안 돌아가실 거예요. 교수님 돌아가시는 거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응, 나도."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아."
그녀는 최이삭의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었다. 역시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이런 실험과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평생 다시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밑에서 고문에 가까운 연구실 생활도 이겨낼 수 있었다. 세상을 이루는 단 하나의 진실을 위해.
나간다, 나간다, 자살하겠다, 그녀를 죽이겠다 마음을 수만 번 먹어도, 결국 최이삭은 여기서 포스트 닥터까지 2년은 더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버린 몸…. 그렇게 졸업을 하고 포닥을 남아 2년 정도 더 배우면 어엿한 교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현 퀸의 연구실보다 잘 나가는 랩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전임 랩장들은 대부분 6개월, 1년 정도를 하다가 나가 떨어졌다. 그래도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던 한 명은 그걸로도 다른 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연구비를 받아 자기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밑에서 버티고 졸업을 해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이삭은 그나마 그들보다 좀 더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2년이나 랩장을 하고 있었다. 이전 랩장이 6개월 만에 울면서 학위를 포기했을 때부터 이미 그의 일을 도맡아 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그가 캘리 박, 세현 퀸의 뒤를 잇는 천재일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한 때는 자학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그 천재의 반열에 오르기엔 현저히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얼마 안 가 알아차렸다.
데카르트, 갈릴레이, 뉴턴, 패러데이, 맥스웰, 플랑크, 밀레바 마리치, 슈뢰딩거, 캘리 박, 세현 퀸…. 그들은 우주를 수놓은 중력의 법칙을 꿰뚫고 우주 창조와 멸망, 그 원리를 하나씩 알아내왔다. 캘리 박 시대부터는 심지어 재현까지 시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이 얼마나 대단하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천재들.
처음에는 그녀에게 선택받은 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쁘고 몸이 떨릴 정도로 영광이었고 후에는 절망, 마지막엔 체념이 되었다.
'도대체 교수님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걸까….'
최이삭은 교수님의 분노를 일으키기만 했던 자신의 연구계획서를 다시금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그는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쓴 것이었다. 뭔가 문제였던 걸까. 그녀가 보는 걸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넌 이걸 연구 계획서라고 썼냐."
최이삭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프로젝트 27일차. 이틀 뒤면 웜홀을 축퇴시키는 빅크런치 실험을 시현할 것이다. 연구소 외의 환경에서 실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왕리밍은 전용잔에 커피를 담아가다가 그렇게 말했다. 최이삭은 저도 모르게 팍 인상을 찌푸렸다.
"네?"
"넌 도대체 걔한테 배운 게 있냐? 겨우 이런 걸…."
"……."
왕리밍이 오다 가다 시비를 거는 것이야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묘하게 기분이 더 나쁘다. 비싼 옷에 포마드를 발라 멋들어지게 넘긴 머리, 각이 빡 잡힌 랩코트, 왕리밍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번쩍번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이삭은 기분이 팍 상해서 평소와는 다르게 곱게 넘어가지 않고 대꾸를 하고 말았다.
"제가 많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가르쳐 줄 게 있으시면 부디 개의치 말고 말씀해주시죠."
사실상 들이댔다. 알다시피 그도 캘리 박의 밑에서 살아남아 세계적인 석학이 된 몇 안 되는 사람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학회장 라인이었다. 그리고 이쪽 학계에서 학회장 라인이 의미하는 것은 뛰어난 천재성, 빛나는 연구 실적, 그리고 개같은 성격이었다.
왕리밍이 눈에서 벼락이 떨어질 기세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어? 이 새끼가 지 교수 닮아서 아주 싸가지가…. 너 이게 뭐가 잘못된 지도 모르겠다고? 야 이 병신 새끼야, 이거 해봤자 어차피 안 돼. 왜 안 되냐고? 니가 대가리가 돌아가면 그런 질문이 안 나오지! 마법으로 만든 무질량 중력원이 자전 안 한다고 천체들도 그렇냐? 어? 자전 안 하는 천체가 있냐? 너 이거 아무 생각 없이 고질량점 하나 넣었다가 이거 자전하면 어떻게 되냐? 어? 다 같이 죽자는 실험 아니냐, 이거? 어?"
아. 최이삭은 드디어 뭘 잘못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어찌 보면 정말 초보적인 실수였다. 세현 퀸이 핏대를 세우고 화를 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요인을 고려해서 계획서를 썼더라면 적어도 그 정도로 화를 낼 만한 주제는 아니었던 것은 맞는 거 같다. 최이삭은 그녀에게 혼이 났을 때보다도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는 왜 이렇게 좁게만 볼까. 왜 전체를 다 고려하지 못할까. 꼭 하나를 빼먹을까. 우리 실험은 작은 거 하나만 실수해도 도시가 날아가는데. 내가 이런 걸 못 보면 나중에 내 랩은 어떻게 돌려. 아, 나 진짜 병신이다. 교수님이 혼내셨을 때라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 왜 이걸 못 알아차렸지? 아, 병신. 병신. 병신.'
여기까지도 멘탈이 크게 흔들리는데 왕리밍이 기름을 콸콸 들이붓기 시작했다.
"랩장이라는 새끼가 이 정도밖에 못 하는데 HNU 물리학도 이제 끝이네. 니네 교수 죽으면 너 교수로 만들어서 젊은 라이징 스타 만들겠다는 게 회장님 생각이신 거 같은데. 니 수준으로 뭘 하겠냐."
그는 혀를 크게 쯧쯧 찼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그들을 보고 있었다. 최이삭은 진짜 욱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다시피 마도사들은 욱 하면 안 된다(물론 자주 욱하시는 안 좋은 예들이 그의 주변에 많긴 했다).
"뭐? 해보자고? 어?"
오 박사가 말했듯이 이건 만악의 근원, 캘리 박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갈굼의 역사 중 하나일 뿐이다. 왕리밍만 이러는 게 아니라 세현 퀸 또한 부모형제 욕부터 시작하는 인신공격에도 엄청난 천재성을 보이곤 했다. 자기 스승에게 노친네, 곧 죽을 할망구, 노망난 치매환자 등등으로 들이받는 세현 퀸이나 밖에서는 퀸 교수, 우리 퀸 교수 하면서도 가끔 그런 세현 퀸을 벌레 보듯이 보는 캘리 박이나 다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좀 심하신 거 같습니다. 우리 교수님도 아니신데."
근데 같은 갈굼도 남의 엄마(?)한테 받는 거랑 우리 엄마(?)한테 받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법이다. 최이삭은 항상 세현 퀸한테만 극도의 갈굼을 받아서 잘 몰랐는데(의외로 캘리 박은 세현 퀸의 랩 학생들에게 많이 유한 편이시다)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그에게 뭐라고 하면 이상하게 심기가 뒤틀렸다. 점점 그녀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못할 말했냐? 그러면 좀 제대로 쓰지, 어? 초등학생도 안 쓸 수준으로 계획서 써놓고 그럼 칭찬이라도 하라고? 학부생이 해도 이것보단 나을 거다!"
"…그 말씀, 우리 교수님 앞에서도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뭐라고, 이 개새끼야?!"
세현 퀸이 했던 말이나 왕리밍이 하는 말이나 피장파장인데도 최이삭은 이제 '니가 우리 교수님도 아닌데 왜 지랄이야, 씨발.' 이라고 들이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교수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만년 2인자 주제에 씨발,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그의 부모형제부터 시작해서 그의 멘탈까지 속속들이 다 털어도 되는 건 세현 퀸뿐이었다.
"이 돌대가리야, 우리 애는 내가 잡아. 니가 왜 지랄이야."
잠깐 게이트에서 안 보인다 싶더니 세현 퀸이 나타났다. 최이삭은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교수님, 제가,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왕리밍은 세현 퀸과 함께 캘리 박의 밑에 있었던 그녀의 선배이자 학계 동료였다. 최이삭이 그를 들이받는 것은 사실 하극상이다. 물론 매순간 그런 게 일어나는 이상한 라인이 이 라인이긴 했지만….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짓이고 최이삭이 사고를 치는 것이었다. 세현 퀸은 최이삭의 어깨를 밀어내고 왕리밍의 앞에 섰다. 그녀는 키가 180이나 되었고 왕리밍은 181이라 거의 키가 같아서 눈높이가 바로였다.
"야, 너 한동안 잠잠하다가 요새 왜 이렇게 나대냐? 어? 너 애초에 학회장 바짓가랑이 붙잡고 질질 울면서 학위 빌어먹어서 지금까지 교수짓 하고 있는 거면 이제는 좀 덜 나대야 하는 거 아니냐? 어?"
"뭐라고?! 이 쌍년이 무슨 개소리야!"
왕리밍이 눈까지 벌게져서 소리쳤다. 왕리밍이 아무리 중력 마법까지 구현할 정도의 마도사는 아니라지만 사람 죽이는 데는 그 정도도 필요 없다. 최이삭이 식겁을 해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교수님 좀만…."
게다가 이쪽도 성질머리가 천하제일이다. 어느 한쪽만 핀트 나가도 여긴 전부다 죽는 거다. 그리고 먼저 꼭지 도는 게 꼭 왕리밍일 거라는 생각은 절대 안 든다.
'우리 교수님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최이삭이 그녀의 팔을 마구 잡고 말렸지만 이미 그가 말릴 수 있는 수준은 예전에 지났다. 그녀도 이마에 핏대가 서서는 왕리밍의 멱살을 잡았다.
"개소리? 야, 니가 대가리가 너무 안 돌아가니까 너 랩장 되고 1년도 안 돼서 학회장이 너 짤랐잖아, 병신아. 너 치매냐? 그게 기억이 안 나? 나 같으면 너무 굴욕적이라 죽을 때까지 못 잊을 사건인데?"
여기서 최이삭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건드는 것은 결국 세현을 건드는 것이다. 세현은 그의 흑역사를 폭로하기 시작했다. 아주 개쪽을 줘서 밟아버릴 작정인 것 같다.
"그리고 너보다 2년 후배인 내가 2년이 넘게 그 노친네한테 부려 먹혔다. 야, 니가 선배로서 좀만 더 제대로 자리를 지켰으면 내가 좀 편하게 학위를 땄을 거 아냐, 어? 해보니까 죄다 시다바리 짓밖에 없던데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허덕거리고 울고 병신짓이란 병신짓은 다 하더니!"
"헛소리하지 마! 유, 유언비어 퍼뜨리는 것도 감방 간다, 어?!"
"좆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야, 최 박사가 나보다는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맞는데 너보다는 팽팽 돌아가거든? 어? 돌대가리 새끼가 이제는 들이댈 데 안 댈 데 구분도 못하네. 지금 니 자리에 얘 앉혀 두면 북경대가 HNU 급이 될 거다!"
"씨발, 이 개년이…."
왕리밍도 세현의 멱살을 잡았다. 최이삭이 깜짝 놀라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왕 교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건 놓고 일단 말로…."
최이삭은 누구 말려줄 사람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캘리 박을 발견했다. 살려주세요, 학과장님! 캘리 박이 그에게 손짓했다. 나와라. 다친다.
열이 받아 마구 소리를 지르던 왕리밍이 하, 하고 헛숨을 쉬더니 그녀를 비웃었다.
"야, 너 드레이닝 걸려서 곧 뒈지나 했더니 저런 짐승 새끼들한테 보지 팔아서 연명한다며?"
그가 멀찍이 있는 용병들을 힐끗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최이삭은 말리다 말고 그를 노려보았다. 방금 그는 선을 넘었다. 지금 여기에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교수들이나 세현의 랩 학생들까지 다 있었다. 최이삭이 그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다가 세현에게 밀려서 뒤로 밀쳐졌다.
"맨날 의자에만 비비고 있던 눌러 터진 걸로 남자들 만족이나 시킬 수 있겠냐? 그렇게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만 니 꼬라지를 봐라, 지금. 고작 더 살겠다고 저런 새끼들 좆이나 빨고. 야, 나 같으면 그냥 깔끔하게 죽었다, 어? 너랑 한솥밥 먹고 살았다는 게 쪽팔린다."
세현도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다가 흥분이 삭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왕리밍의 얼굴을 보면서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세현은 곧바로 왕리밍의 다리 사이를 꽉 잡았다.
"으윽!"
"아, 씨발. 뭐야…. 존나 작잖아."
"놔! 아악!"
그가 세현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더욱 손에 힘을 주면서 그와 아예 가슴과 가슴이 맞닿도록 그에게 들어가며 손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내 보지 얘기하길래 지 자지는 얼마나 크나 싶었네. 땅콩만 하잖아."
왕리밍은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를 힘으로 밀어내지도 못했다. 애초에 키는 거의 같았고 둘 다 연구 생활로 비리비리한 건 비슷하다면 깡의 차이가 싸움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다.
"뭐…! 너!"
그녀가 비웃음을 만면에 띄우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내 보지는 인기가 많아요, 응? 나한테 따먹히고 싶어서 엉덩이 흔드는 새끼들이 줄을 섰어요."
그는 당황해서 그녀에게 자지가 잡힌 채 뒷걸음질을 치며 밀리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떨어져 나갈 듯이 짜부라뜨리고 잡아당겨 오금까지 저릴 정도로 아팠다. 거기서 그녀는 멈추지 않고 그의 가슴을 발로 퍽 밟았다.
"헉…!"
그는 잠깐 숨을 쉬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너야말로 그 번데기로 어떤 여자가 널 따먹어주겠냐? 아니, 여자가 널 먹어준 적은 있냐? 상하이 가서 돈 주고 부탁하면서 한 번 따먹어주세요~ 이래야지 겨우 껍질 한 번 벗어보는 거 아냐?"
왕리밍이 일어나려고 하다가 다시 그녀에게 밟혔다. 그가 악을 썼다.
"니, 니가 내 자지 본 적이 언제 있다고…! 여, 여자가 입에 걸레를 물었나!"
"아니, 지가 먼저 시작한 놈들이 꼭 지 입에 먼저 걸레 물었던 생각은 못해요. 그리고 그걸 꼭 봐야 알아?"
"하지 마…!!"
세현은 반항하는 그의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그가 끙끙거리는 사이 그의 바지와 속옷을 억지로 벗겼다.
"아, 봐라. 봐. 에게, 번데기도 안 되겠네. 졸라 새카맣고 졸라 더럽게 생겼다. 어떤 보지가 이런 걸 먹고 싶겠냐? 어? 이러면서 남의 보지는 본 적도 없으면서 왜 지랄이야? 양심도 없다. 아, 더러워. 못생겼어. 작아."
"하지 마…. 흐윽, 하지 말라고!"
왕리밍은 손목이 세현에게 밟혀 한 손으로 겨우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며 웅크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키도 좆만 하고 대가리는 분명히 벗겨질 거고 자지는 손톱만한 게 번데기도 안 벗겨져 있고…. 야, 너 진짜 생각보다 더 답이 없는 놈이었구나? 능력이 있기를 하나, 성격이 좋기를 하나, 자지가 크기를 하나. 너 같은 남자는 도대체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 나 같으면 자살했다, 자살했어."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그의 학계 동료들이 잔뜩 있었다. 심지어 졸업한 대학의 후배들도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이런 굴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덜덜 떨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녀는 왕리밍의 어깨를 발로 밟으며 다시 바로 눕게 했다. 멋지게 차려입고 있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얼굴은 새파래진 채 바지는 벗겨져 바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벌게지자 그녀가 비웃었다.
"눈물이 나냐? 그 나이 처먹고? 울지 마, 병신아. 그 나이 돼서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고 지랄하면 너랑 한솥밥 먹은 내가 뭐가 되냐? 쪽팔리잖아."
세현은 그런 그를 벌레 보듯이 깔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밟은 채 그의 뺨을 발로 툭툭 쳤다.
"니가 내 보지 얘기를 안 했으면 나도 니 자지 얘기를 안 할 거 아냐."
그는 자신의 성기를 두 손으로 가리며 몸을 웅크리며 울면서 세현을 올려다보았다. 화가 나고 굴욕적이면서 두려운 표정으로.
"넌 나한테 안 돼. 처음부터도 그랬고 앞으로도 안 돼. 니가 중국 과기성 장관한테 후장을 대도 안 되고 내가 캘리 박이랑 연을 끊어도 안 되고 내가 드레이닝에 걸려 당장 내일 죽어도 넌 나한테 못 이겨."
그녀는 그의 어깨를 밟은 발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죽고 넌 사니까 니가 이길 거 같아? 인류사에 남는 건 내 이름 석자야. 너 같은 건 2인자도 못 돼서 그저 그런 학자로 캘리 박이랑 내 이름 덕분에 이 시대에만 잠깐 잘난 척하다가 뒤지는 거야. 넌 살아서 50년이고 100년이고 먼저 죽은 내 이름 한~참~ 뒤에 선 니 자리만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다가 뒈지는 거야."
"흐윽…."
"사람들은 내가 죽어도 너한테 기대 안 하고 죽은 날 그리워할 거다."
"그만…, 그만해…."
"그리고 시팔, 내가 드레이닝 걸려서 오늘내일 하는데도 논문 2개에 여기까지 와서 웜홀도 없애고 관심도 없는 세계평화에도 기여하는데 넌 씨발, 여기 와서 도대체 뭐 하는 거냐? 너 왜 내 연구비로 공짜로 처먹으면서 내 학생 갈구는 건데? 너 연구 안 하냐? 너 영 이제 놨어? 포기했냐? 그래서 보지 얘기나 하면서 덤비는 거냐? 이 자지로?"
세현 퀸은 그의 뺨을 발로 다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할 일 없으면 공부나 해. 니 랩에 있는 학생들은 뭔 죄로 연구도 안 하는 대가리 나쁜 교수를 위에 앉혀 두고 있어야 하냐? 그냥 교수 때려치우고 딴 거 해라. 교수짓보단 훨씬 잘할 거 같은데. 교수님도 항상 너한테 말씀하셨잖아. 딴 거 해, 딴 거."
그리고 세현은 그를 짓밟은 발을 뗐다. 주위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세현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하, 하고 크게 숨을 뱉었다. 그녀는 최이삭을 보고는 아~ 하면서 짜증을 냈다.
"너 때문에 힘만 뺐잖아. 마무리 다 했어? 멍청아, 넌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이 병신한테 갈굼을 당하냐? 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리고 멀티스크린을 보고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야, 이 초등학생 작문 좀 치워라. 이것만 보면 내가 암에 걸릴 거 같다. 넌 진짜 쪽팔린 걸 모르는 애구나? 나 같으면 이런 거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다시 보지도 못하겠다. 이거 들고 어디 가서 박사라고 하고 다닐 생각 꿈도 꾸지 마라, 어? 이런 걸로 내 얼굴에 먹칠 했다간 정말 넌 내 손에 죽는다."
그녀는 아까 왕리밍이 한 거랑 사실 별 다를 거 없는 소리를 하면서 최이삭도 깠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래도 내 밑에 있으니까 너도 점점 나아지는 거지. 저 새끼는 이런 주제도 못 덤비니까 까기만 하는 거야."
"아, 역시."
"저 새끼 랩에서 얼마나 재미없는 것만 하는 줄 아냐?"
"왕 교수님 랩 같은 건 관심 없어서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 사실 나도. 세상에 누가 쟤가 뭐 하는지 관심 가지고 사냐. 병신 새끼."
그녀는 목을 스트레칭 하며 몸을 돌렸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최이삭은 그녀가 어젯밤에 놔두고 간 랩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하우빈에게 손가락을 딱딱 튕겨서 커피 머신을 가리켰다. 그는 그녀에게 세현 퀸과 캘리 박을 가리키며 두 잔을 만들라는 지시를 빠르게 내렸다. 하우빈은 겁에 질려서 혈색이 쑥 빠져 있다가 허둥지둥 지시에 따랐다. 커피에 과일과 간식까지 챙겨서 허겁지겁 들고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기지를 발휘하여 마법으로 본인까지 포함하여 아예 전부 둥둥 띄워서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 사실 왕 교수님이 계속 저 갈구니까 컨디션이 안 좋아서 계획서도 잘 못 썼던 겁니다. 계속 교수님 들먹이면서 방해하시더라구요."
"뭐? 그랬어? 왜 말 안 했어?"
"교수님께서 혹시나 신경 쓰실까 봐 그랬습니다. 교수님 큰일 하시는데 왕 교수님 같은 게 방해되면 큰일이잖아요."
"앞으로 그냥 말해. 저 새끼 나한테 쨉도 안 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몰랐냐?"
최이삭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며 그녀를 따라갔다. 하우빈도 눈치 있게 거들었다.
"왕 교수님 자꾸 저 발 걸어서 넘어뜨리고 그랬어요. 나쁜 교수님!"
"아, 저 새끼는 나한테 깝치지도 못하면서 왜 죄 없는 애들을 괴롭히냐. 굳이, 꼭 저렇게 살아야 되나, 저 새끼는. 아, 이해가 안 된다."
그녀는 혀를 차며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니들은 내 밑에 있는 거 감사해라. 저런 대가리 나쁜 데다가 성격까지 나쁜 교수 밑에 있으면 랩 들어가는 순간부터 인생이 탄소나노코일처럼 꼬이게 되는 거야. 알겠어?"
"네, 교수님! 너무 좋아요! 교수님 최고!"
"존경합니다, 교수님. 사랑합니다, 교수님."
캘리 박은 흐음, 하면서 용병들에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왕리밍 교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그를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캘리 박도 세현을 따라가며 한 마디 거들었다.
"와. 보지 얘기하면서 덤비는 새끼는 자지 얘기하면서 제껴야 하는 거구나. 퀸 교수, 내가 오늘 너한테 하나 배웠다, 야~"
상왕은 원래 강력한 후계자, 승리할 후계자를 잘 밀어줘야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리는 법.
세계 같은 건 한 대여섯 번쯤 간단하게 멸망시킬 수 있는 사람들 네 명이 그렇게 가운데 있는 승자를 칭송하며 함께 그녀의 왕좌로 향했다. 그들은 마치 고대 신화 속의 신처럼 천천히 떠올라 큐브 위로 올라갔다. 세현 퀸은 자기 자리에 털썩 앉아 책상위에 다리를 턱턱 올려 꼬았다. 그리고 손을 내미니 하우빈이 얼른 일반 텀블러와 무중력용 텀블러를 건넸다. 그녀는 그걸 받아서 무중력용은 캘리 박에게 주었다.
"알지? 난 영원히 니 편이다. 니가 다 이렇게 잘 클 수 있었던 것도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너를 잘 가르쳐서 그런 거다. 물론! 니가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는 것도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만. 내 가르침이 지금의 너를 만든 거라고."
"아, 다른 건 모르겠는데 교수님 덕분에 세상에 무서울 거 없는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인생에 교수님 랩장 시절보다 끔찍한 건 없더라구요. 드레이닝 걸린 것보다 그게 더 끔찍하니까 말 다 한 거 아닙니까?"
"그래, 퀸 교수. 그거야! 내가 우리 퀸 교수 다 좋지만 그 깡따구가 제일 좋다."
"역시 우리 교수님! 너무 좋아요! 교수님 최고!"
"존경합니다, 교수님. 사랑합니다, 교수님."
최이삭은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고 하우빈은 간식 쟁반을 들고 서툰 손으로도 열심히 그녀에게 간식을 까서 드리고 있었다. 나름 승리의 축배다.
"……."
배운 사람들이 이런 개싸움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이 개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여러 나라 국가 예산을 매년 수조 원 단위로 쓰고 심지어 실수 한 번 하면 콰광! 하고 전부다 다 날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좀… 많이… 무섭다…….
"무서워. 무서워."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본능적으로 알렉스와 리천의 뒤에 숨었다. 그 앞에 있는 알렉스도 침을 꿀꺽 삼키며 세현과 멀찍이 왕리밍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면서 그를 챙기고 있는 아담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필이면 이럴 때 이심전심이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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