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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8/8)

외전 2.

외출했다 돌아온 해진이 오자마자 한 짓은 제영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런 적이 여러번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같이 살기 시작할 초기에는 그동안 쌓인 욕구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했지만 이제 보니 그냥 일상적으로 정력이 넘쳐나는 사람인 듯했다.

이번에는 입으로 하는 것에 꽂힌 모양인지 한참이나 아래에서 혀를 놀렸다. 사정 후에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성기를 핥아 왔다. 맛이 그렇게 좋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살덩이의 맛이 유별나 봤자, 고작 사람몸에 달린 일부일 뿐이었다. 저 맛도 없는 것을 저렇게나 좋아하는 상대를 볼 때면 무슨 달콤한 크림이라도 발라서 입가심이라도 하게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해 줄 만큼 제 성기의 맛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더럽지 않아?"

앞을 진정 녹여 낼 모양인지 두 번째 사정까지 이끌어 낸 그에게 제영이 물었다.

"뭐가요?”

그 물음이 사뭇 맹랑하게 들려와 제영은 할 말을 잃었다. 입가에 남겨진 허연 액을 혀로 핥으며 해진이 제영을 쳐다보았다. 저이에게 이런질문을 해서 뭐하리. 제영은 해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 가볍게 기대는 그를 위로 끌어 올려 습관적으로 입을 맞춰 주려다가 정신이 퍼뜩 들어 도로 밀어내었다. 자신의 비위는 해진만큼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말랑말랑해진 얼굴로 키스를 기대하고 눈을 반쯤 감았다가 밀려난 해진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영의 생각을 읽은 건지 조금 떨떠름한 태도로 떨어져 나갔다.

"좀 엎드려 볼래요?”

제영은 해진의 요구대로 몸을 뒤집었다. 익숙하게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엉덩이를 높게 쳐들었다. 수없이 해 본 짓이긴 해도 뒤의 상대에게 수치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진이 마른 손끝으로 엉덩이 골 사이를 더듬어 왔다. 사정한액들이 거기에도 흘러내린 모양인지 그 부위는 이미 젖어 있었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바른 듯 축축한 손가락이 안을 침입했다. 제영은 숨이 억눌린 듯한 소리를 내뱉으며 손으로는 시트를 꽉 쥐었다. 그리고 곧 손가락보다 더 굵고 뜨거운 것이 밀려들어왔다.

시트를 쥔 제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진은 엎드린 이의 꼬리뼈 위에 손을 올려두고 천천히 진입과 후퇴를 반복했다. 반복의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해진을 받아들이고 있는 제영의 안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제영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속도와 힘이 딱 더 견뎌내기 좋았지만 해진은 제영이 익숙해졌다 싶으면 정도를 모르고 거세게 치받았다. 그는 벌써 시작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탁, 탁 하고 해진의 살과 제영의 엉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살살해."

제영이 시트를 쥐고 있던 오른손을 뻗었다.

그래 봤자 해진의 골반만 살짝 간지럽히는 정도 였지만 제 부탁을 해진이 들었으니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귀로 듣기만 했을 뿐 진정으로 들어주지는 않았다. 격해지는 움직임에 자꾸만 내려앉는 제영의 골반을 꽉 붙들어 고정한 다음 짓찧는 강도를 더욱 높여 갔다. 평소보다도 심한 것 같아 제영은 아까 키스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행태가 순전히 고통만으로 다가 오는 건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버겁기에 제 사정을 좀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제영이 고개를 슬쩍 숙여 제 사타구니 사이를 살폈다. 처음만큼은 아니 더라도 반쯤 서서 흔들대고 있었다. 남의 성욕을 과하다며 탓할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도 이 관계에서 얻는 쾌락에 절절히 중독된 상태였다. 제영이 제 물건을 쥐었다.

그 상태에서 한 팔로만 지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얼굴은 거의 베개에 파묻힌 상태였다.

앞과 뒤에서 몰아쳐 오는 감각이 심장을 쥐어짜오는 듯했고 머리는 어질어질했다.

지금 사정한다면, 앞의 쾌감에 사정하는 걸까아니면 뒤를 쑤신 덕에 사정하는 걸까. 제영은 어느 쪽이 더 좋은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뒤로 느끼고 있었다. 전부 뱀처럼 교활하게 해진이 제영을 길들인 탓이었다. 또다시 사정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을 때,제영은 자신의 팔뚝을 깨물고 아래를 적셨다.

사정 후에 괴로워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해진도 제영의 안에 사정했다. 그 후로 다시 정상위로 한 다음, 이리저리 굴려지고 나서 대충 끝이 났다.'대충'을 덧붙이는 것은 아직 해진이 제영의 안을 채운 상태로 등 쪽에 찰싹 달라붙어있어서였다. 제영이 몇 번 불평하고 나서야 그가 허리를 뺐다. 그것으로도 끝은 아니었다. 안쪽에 남아 있던 것들이 새어 나오며 이불을 질척하게 적셨다.

"콘돔 안 썼어요?"

이것도 키스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일지도 모른다고 해진을 의심했지만 그의 대답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다 떨어졌어요. 들어올 때 사려고 했는데, 깜박했어."

제영은 그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사 왔던 콘돔 패키지에 꽤 많은 양의 개수가 들어 있었는데 그걸 전부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해진과 잤다는 의미였다. 해진이 원해 오면 제영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그렇게 한번 고삐를 놓아줬더니 점점 더 빈도와 횟수를 높여 갔다.

이런 사태가 된 것에 제영의 책임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뒤처리부터 해야 할 듯싶었다. 젖어드는 시트야 빨면 그만이지만 제영은 이렇게 줄줄 흘려 대며 있고 싶지는 않았다. 제영이 등 쪽의 해진을 떼어 내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단박에 다시 달라붙어 오며 어딜 가냐고 치근거렸다.

"씻고 올게요. 이 상태로 있을 순 없잖아요."

"그럼 있다가 나랑 같이 가. 내가 해 줄게요.

지금은 좀 더 안고 있자."

그렇게 떼를 써 오자 결국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마주 보는 자세로 둘이 나란히 누웠다. 제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해진 이 이번에는 뒤통수 쪽을 더듬거렸다. 그러고는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어색하게 머리카락이 짧은 곳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금방 자랄 거라고 했죠. 다 내 덕이야.

내가 밤마다 이렇게 야하게 만들어 줘서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 거예요."

야한 생각을 하면 머리가 빨리 자란다는 게 신빙성 있는 얘기였나.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머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제영이 자신의 뒤통수를 더듬었다.

해진의 말대로 이제 거의 채워져 누군가 보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사의 열기가 가신 제영이 몸을 떨자 해진이 바닥으로 내던졌던 이불을 다시 주워 와 덮어 주었다. 노곤한 온기가 다시 몸을 타고 오른다. 피곤한 몸이 눈을 감고 잠들라며 애걸복걸해 왔다.

옆자리의 해진이 자꾸만 토닥여 주는 것도 잠을 부채질했다. 이대로 자면 분명 내일 곤욕스러울게 분명한데 그래도 감겨 오기 시작한 눈을 어쩌질 못했다.

"자요?"

제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눈을 비볐지만 이미반쯤 수면 상태였다.

"내일 몇 시에 나가요?"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제영이 해진에게 물었다.

"내일? 음, 내일은 아침에 회의 잡힌 것도 없으니까 점심 먹고 느긋하게 나갈 생각이에요.

나랑 같이 밥 먹어요."

제영에게는 밥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원래는 자기 전에 말할 생각이었으나 늦게 집을 나선다는 말을 듣자, 내일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해진이 또 한 번 자냐고 물어 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잠이 들었기에 제영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해진은 이불을 들춘 다음에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제영의 아래를 정리해 주었다. 귀찮아하는 듯이 설핏 투정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곧 조용해졌다. 해진은 제영의 옆에 누워이불을 덮었다. 잠든 제영을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에 파고들어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제영의 심장 박동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내 잠들었다.

* * *

아침 식사를 막 마친 참이었다. 둘 다 샤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리가 젖어 있었다. 제영은 여전히 해진의 옷을 입고 지냈다. 지금은 그레이의 두터운 잠옷 위에 연녹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제영에 비하면 해진은 한여름이나 다름없었다. 단조로운 그래픽이 그려진 검은 티에 얇은 바지 하나가 전부였다. 제영은 머리카락까지 젖어 있으면서도 조금도 떨고 있지 않는 해진을 보면서 애인으로서의 적합성은 둘째치고 제 인간 난로로는 아주 적절한 인물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점심때까지는 시간 넉넉한데, 우리 뭐 할까요?"

"그냥 쉬어요. 그리고 혹시 오늘 좀 일찍 나서서 나 어디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어디 가려고요?"

"집에 좀 다녀오려고요."

"집? 문리동 집 말하는 거예요?”

"네, 이전에살던 거기요."

"거긴 뭐하러?"

"한참 비워 뒀잖아요. 가서 좀 봐야죠. 그리고 원래는 올 초에 집도 빼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거 문제로 집주인하고 얘기도 해야 하는데, 핸드폰도 거기 두고 왔고. 아무튼 정리할 건 정리하고 필요한 짐 챙겨서 올게요. 데려다주기 번거로우면,차비만 좀 챙겨 줘도 괜찮아요. 나 그때 해진 씨랑 올 때 지갑도 못 가져와서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

왠지 말을 하면 할수록 구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아무리 정신이 없었더라도 지갑이나 핸드폰 정도는 챙겨 왔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게다가 해진이 미심쩍은 얼굴로 쳐다보니 괜스레 죄지은 마음이 되어 살짝 움츠러들고 말았다.

"당신 짐 거기 없어요."

"왜요?"

제영은 혹시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주인과 무슨 트러블이 생겼을까 봐 심각한 얼굴을했다. 그러나 해진이 덧붙이는 말은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외의의 것이었다.

"당신 짐 전부 여기에 있어요.”

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진이 제영을 데리고 간 곳은 작은 창고였다. 어차피 옵션인것들을 제외하면 문리동 원룸에 있는 제영의 물건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 작은 공간으로도 충분히 보관 가능 했다. 제영은 조금 얼떨떨하여 자신의 가방이며 노트북, 잡다한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집주인한테 연락이 왔어요. 결혼 때문에 집뺀다고 했다면서요. 그거 어떻게 되는지,이사날짜랑 보증금 입금 계좌 좀 확정해 달라고. 그래서 뭐 결혼은 아니지만, 이제 이 집에서 살 거니까 그쪽 정리하고 짐은 다 빼 왔어요. 다 챙겨온 건 아니에요. 내가 적당히 보고 필요 없는 건 버렸어요. 뭐 옷 같은 것들도 다시 사면 될 것 같아서 버렸고, 사진이나 하등 쓸모없는 파투난 결혼식 청첩장도 전부 버렸어요.”

속이 착잡한 제영과는 다르게 해진의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다. 특히 청첩장을 버렸다고 할 때에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말이라도 좀 하지 그랬어요. 남의 물건 정리하는데, 번거로웠겠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제멋대로인 남자였다.

제영은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가 봐요. 전 제 물건 좀 찾아볼게요."

“뭐가 불만이에요?"

문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해진이 제영에게 물었다.

"상의는 좀 할 수 있었잖아요. 아니면 최소한 얘기라도 하든가. 너무 해진 씨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참지 못하고 말이 거칠게 나갔다.

"저번이랑 같은 말을 하네.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나도 정말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어떤 건지 보여 주고 싶잖아."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을 협박해 온다. 제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에 해진의 품에서 허우적거렸으면서도 정작 이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순한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거짓 모습을 꾸며 내 그걸 믿게 만들고는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그런 존재였다.

"됐어요. 구경할 생각이라면 거기 있든가 해요. 난 내짐이나 정리할게요."

제영이 해진에게서 몸을 돌렸다. 곧 해진이 걸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완전히 잠잠해져 멀리 가 버렸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제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빈 곳에 그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영이 다시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짐을 들쑤시자 쌓인 먼지들이 날리기 시작한 것인지 자꾸 기침이 났다.

해진의 집에서 가장 누추한 꼴로 처박혀 있는 짐을 보자, 제영은 어쩐지 그 신세가 제 신세같았다. 쓰레기통에 버려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지금 제 모습도 그리 비참할까.

변변한 직업조차도 없이,하루에 하는 일이라고는 다리 사이에 남자를 끼고 헐떡거리는 것뿐이다. 그를 사랑한다고 하여도, 또한 사랑받고 있다고 하여도 지금의 모습이 덜 비참한 것은 아니었다. 제영이 다시 폐병쟁이처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해진이 또 미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순간이면 또 사랑으로 변모하고 마는 그런 미움들은,하루에도 몇 번이고 표정을 바꾸며 제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게 서러워져 제영은 또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영이 노트북과 몇 가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진은 집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정보다 일찍 집은 나선 모양이었다. 그 원인이 명백히 제영 자신인 걸로 보여 가슴이 답답했다. 어쩐지 초조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해진에 대한 생각은 살짝 접고 다시 옛 일상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먼지를 대충 걷어 낸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노트북 바탕 화면에는 여전히 이전 회사의 보고서가 있었고 귀퉁이에는 이력서 파일이 떠 있었다. 사진 과 이름만 들어가 있고 나머지 부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지금은 빈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채 워 넣어야 했다.

실상 타의와 상황에 대한 굴복이었지마는 어깼거나 제영은 해진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기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직장을 구하고 최소한 사람 구실을 하면서 곁에 있고 싶었다. 이대로 사는 건 단순히 욕구나 풀어 주는 섹스 인형이라고 해도 반박조차 못 할 행태였다. 그러나 이전 업계에서 직장을 구하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계약 파기 건으로 해고당할 무렵에도 거래처에 솔솔 소문이 퍼지고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상무의 난동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 뒤로 결말이 어떠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었다. 솔직히 제영은 알고 싶지 않았다.

형식이 같은 동창들에게 연락을 해 보는 것도 겁이 났다. 희주와 제영의 동창들은 이리저리 엮인 사이였다. 희주가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궁지에 몰린 여자가 배신감에 무슨 짓을 저질렀을 지도 몰랐다. 아니 무슨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지라도 친구에게 그 억울한 심경을 토로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새고 전달되기 시작하면 희주가 원치 않았더라도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제영은 거의 가시고 있던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전부 해진의 탓이었다.

계약 파기는 일단 그의 짓이었고 상무의 난동까지는 계획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희주에게 사진과 영상을 보낸 건 명백하게 그였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건 이미 충분히 나락에 떨어진 사람을 다시 한번 죽이는 짓이었다. 제영은 정말로 반쯤 빈사 상태였고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그런 짓을 했으면서 아직도 피어스는 풀어 주지 않았고 자기 마음대로 제영의 집을 정리해서 짐은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그러나 그를 계속해서 원망하고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괴로운 선택이었다. 최소한 그의 품에서만큼은 마음 놓고 쉬고 싶었다. 그런데 해진은 자꾸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쳤다. 힘든 생각이 깊어지려는 것을 막으려고 제영은 직장 문제에 대한 해결책부터 생각해보았다. 경력직으로도, 친구의 소개도 안 된다.

그러면 떠오르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형의 친구 중에 하나가 작은 사무실을 차렸다는 게 기억났다. 직원을 구한다고 혹시나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제영에게 소개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직원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도 드려야 했다.

갑자기 결혼하지 않겠다는 아들의 전화에 당장 에라도 달려오실 것 같던 부모님께 시간을 좀달라 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아주 제대로 불효였다. 제영은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말처럼 지금 바로 형에게 전화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창고에서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해진이 챙겨 왔다면 분명 있을 텐데 하고 다시 찾아봐도 없었다. 결국 할 수 없이 해진의 귀가 시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기다리면서도 두려운 마음이었다. 이런 애기를 꺼내면 또 싫어할 듯했다. 화내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다정한 해진만 보고 싶었다.

"저녁은요?”

"먹었어요."

생각만큼 늦지 않은 해진이 돌아오자마자 챙긴 것은 제영의 식사였다.

"정말, 먹었어?”

코트를 벗다 말고 다시 자신을 응시하며 묻는 해진에게 제영은 처음처럼 거짓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별로 입맛이 없었어요."

"점심은?”

제영이 아무 말도 없자 해진이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요? 굶는 걸로 나한테 항의라도 하는 거예요?”

제영은 해진의 횐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걱정하고 있는 건지 구분해 내지 못했다. 제영은 겁을 먹었다. 그리고 이럴 줄 알았다며 속으로 한탄했다. 차라리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짐이니 예전 집이니 하는 것들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오늘 저녁도 어제와 같이 평온했을까.

돌아온 그와 저녁을 먹고 씻고 섹스를 하고 그를 껴안고 잠들고 그편이 더 나았을까. 외면하고 머뭇거리는 것의 아픔이나 직면하는 고통이나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화를 내지 말아 줘.

안아 줘. 나는 더 이상 네가 없으면 안 돼.

"씻고 올게요. 방으로 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제영은 등을 돌리는 해진을 붙잡지 못했다. 고작 이런 일에서조차도 그를 붙들지 못하는데, 정말로 버림받는다면 제영의 운명은 불 보듯 뻔했다. 제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바닥으로 눈 위를 꾹 눌렀다.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또 볼썽사납게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제영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일 뿐이라고,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가 방으로 온다고 했으니 일단 거기에 가있어야 했다. 언제까지 거실에서 서성거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영은 안쪽 방이 아닌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에 시선이 갔다. 불쑥 이대로 도망가 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나가 버리면 욕실 안의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신을 놓칠 것이다. 그대로 어디에 가 숨어 있어도 좋을듯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배신을 알게 된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애정마저도 전부 잃어버리게 되어 영영 저를 찾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걸까. 그가 없이도 괜찮을 수 있을까. 제영은 자신이 없었다. 머리를 흔들며 그릇된 생각을 몰아냈다. 일단은 방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이야기를 해봐야 했다.

제영은 방문을 열어 두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방 가까운 욕실에서 해진이 씻고 있어 물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렇게 가만히 그를 기다리다 보니,꼭 예전에 해진이 못된 짓을 할 때로 되돌아 간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닌가. 차라리 그때와 비슷하다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 옷을 벗고 기다리고 그의 것을 입으로 애무해 주고 다리를 벌리고 섹스를 하고 그 다음에 저를 좀 도와 달라고 하면 더 수월할수도 있었다.

'그 끔찍했던 예전처럼?'

아니다. 그런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제영은 천천히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오늘 밤그와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는 별게 없었다. 핸드폰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끝날 일이었다. 해진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하면 알려 달라고 해서 찾아오면 될 일이고,모른다고 하면 없어졌나 보다 하고 새로 사든지 하면 된다.

제영이 제 팔뚝을 문지르다가 주물렀다. 긴장한 몸이 딱딱해져 있었다. 이상하게 몸에 기운이 없었다. 아침만 조금 먹고 두 끼를 연속해서 건너뛴 탓인 듯했다. 뭐라도 먹고 기다렸으면 해진에게 항의니 뭐니 하는 소리도 듣지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이렇게 자꾸만 제 탓을 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지만 사고의 방향이 한쪽으로만 고정된 것처럼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탓해야지 해진이 자신을 용서 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용서를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무엇에 대한 용서인지는 모른다. 다만, 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구해 주길 바랄뿐이었다.

물소리가 멈췄고 발걸음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다급하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고 평상시와 같은 속도로 제영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진이 문가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는 문턱을 넘어와 제영의 앞에 있었다. 어디서 또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웃자란 나뭇가지가 창문을 긁는 소리인 동시에 해진이 제영의 턱을 매만지는 소리기도 했다. 사람의 몸이 나무 조각도 아닐진 대 사각거리는 소리가 날 리도 없건만 제영의 귀에는 그렇게 들려왔다. 해진에 제영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꼭 연약한 새싹을 어루만지는 듯 부드러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테이블위에 놓인 노트북 따위의 잡다한 제영의 짐을 보았다.

"꺼낼 건 저게 전부였어요?"

말하는 투가 꼭 하잘것없는 물건이나 가져왔다고 비꼬는 듯했다. 아니면 그저 제영의 상태가 좋지 못하여 그렇게 들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해진 씨."

“응?"

"혹시 짐 챙기면서 내 핸드폰은 못 봤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당신 오면 물어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핸드폰?"

"네. 핸드폰 말이에요.”

"그 집에서 핸드폰도 가져왔어요. 따로 챙겨뒀는데, 제영 씨가 찾는 게 정확히 뭐예요? 내가 찾은 건 두 개거든요. 그냥 액정만 조각난 거랑, 아예 박살 나서 켜지지도 않던 거."

일부러 하는 짓이 분명했다. 부서져 버린 것에 무엇이 담겨 있던 줄 알면서 저렇게 무심하게 말하고 있었다. 제영이 어떤 심정으로 그것을 박살 냈을지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잔인하게 굴고 있었다. 제영이 손을 들어 해진의 뺨을 내려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고 가슴속 고통과 절망을 발판 삼아 그걸 표출한 것이었다. 겨울 눈처럼 횐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제법 큰 소리가 났음에도 해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때린 제영이 자기가 한 짓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뺨을 때렸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덜덜 떨었다.

"당신은 너무했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제영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결국 참아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탓이었다.

"어떻게 보면 회사 계약은 내가 당신을 이용해서 따낸 거나 다름없으니까. 계약이 파기되고 거기서 내가 감내해야 할 불이익은 어쩌면 당연한 거지. 근데, 희주에게 왜 그런 걸 보낸 거야?

도대체 왜? 기회를 준다 뭐다 하면서 헤어지라고 한 건 전부 거짓말이었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만약 내가 보내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당신이 그 여자 정리했을 것 같아? 계속 정신 못 차리면서 사람 여럿 우습게 만들고 있었겠지. 제영 씨, 난 이 부분만큼은 당신에 대한 신뢰도가 제로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기분만 더러워지니까.”

해진은 하는 말마다 전부 거짓뿐이었다. 울어도 울어도 달래 주겠다고 한 것 역시도 거짓이었다. 그게 진실이라면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내버려 둘 리 없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속삭임마저도 거짓일지 모른다. 그저 사로잡은 상대가 다시 쓸데없는 생각을 못 하도록 단속하는 데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그 와중에 또 거짓 사랑을 핑계로 상처 입힐지도 몰랐다. 제영은 허리를 굽힌 채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몸 안에는 해소되지 못한 것들이 소용돌이쳤다.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에 아예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영 씨."

나지막한 상대의 목소리. 제영은 자신의 흐느낌을 뚫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해진의 목소리에 답하듯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 때문인지 상대의 모습이 흐릿했다. 제영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해진을 쳐다보았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해진이 제영을 안아 주었다. 이런 행동조차도 거짓이 아닐까. 제영 생각에 해진은 신뢰를 운운할 자격도 없었다.

"화났어?”

해진이 묻자 제영이 고개를 저었다. 화는커녕 어떠한 감정을 표출할 힘도 없었다. 피곤했다. 옛 짐이든, 옛 기억이든싹 밀어내 버리고눕고만 싶었다. 몸도 정신도 흐느적흐느적 기운이 없다. 괴로운 것은 잊고 잠이나 자 버리고 싶었다. 제영이 해진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이 제멋대로인 남자는 두 팔에 힘을 주고 제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좀, 놔."

제영은 해진이 자신을 놓아줬으면 했다. 이제 다 놓아 버리고 돌아가고 싶었다. 사각의 작고 청결한 통 같은 자신의 공간에 누워 눈물이나 그치길 기다렸다가 잠이 들면 꿈이나 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해진은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계속 제영은 붙잡고만 있었다. 제영은 더 이상놓아 달라고 말하기도 힘에 겨웠다.

제영은 해진을 올려다보았다. 상대가 비스듬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구경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놓아 달라고 해도 놓아주지를 않는 건가 하고 의심할 때였다. 해진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젖은 뺨에, 그가 뺨을 맞대어 온다. 제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예언자처럼 해진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사랑해요."

이 순간 자신이 해진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으나,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해진이 한없이 사랑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하여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해진이 한껏 부서뜨리고 조롱한 제영의 삶이 원상 복구 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영은 그 사랑의 말들은 원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상황 속에서 자꾸만 달콤한 말을 해오는 게 이상하여도 제영은 귓가를 간질이는 그말들에 구명줄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키스해 오고 다시 속삭여 온다. 그 반복되는 행동 속에서 제영은 뭔가를 읽었다. 이번에도 예언자처럼.

해진은 이 순간을 무위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낚시하듯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제영은 그의 물고기였다. 이미 미끼는 목구멍 깊숙이 삼켜 버린 상태였다. 그대로 줄을 당기면 끝인 상황인데도, 해진은 제 발로 물 밖으로 걸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제영은 그 모든 것을 모른 체하고 싶었다. 그러나 몹시 흔들려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말았다.

조그맣게 속살거리는 소리가 하찮다. 하지만 해진은 귀를 쫑긋거리 며 그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제영은 자신이 입 밖으로 내는 사랑한다는 말이, 이처럼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없었다. 그래도 그 구질구질한 짓거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건 진정으로 구제받지 못할 중병이었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너를 사랑해. 네곁에 있고 싶어. 그 끔찍한 일을 겪고서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난 매일매일 당신만 기다렸는데, 매일매일 당신 생각만 했는데. 버림받았다고 생각해서 포기해야 되는 걸 알면서도 널 원했는데.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넌 내 사정같은 건 하나도 생각해 주질 않고 있잖아.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조금도 알아주질 않아."

온전한 상태가 아닌 제영은 그저 입술만 깨물고 눈물만 주룩주룩 흘려 댔다. 이마를 잔뜩찌푸리고 독이라도 게워 내는 것 같은 얼굴로 사랑을 토해 내고 있었다. 제영이 다시 해진을 거세게 밀쳤다. 이번에는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제영은 제 흉한 꼴을 영영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얼굴을 움켜쥐듯가리는 것뿐이었다. 이 고백의 순간 또한 그저악몽이고 절망이었다. 아직도 제영은 알지 못한다. 이 일이 제게 일어나게 된 이유를. 자신이 왜 해진을 사랑해야만 하는가를.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상대를 원할 수밖에 없는 불치의 나날이 이어질 뿐이었다.

제영은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아니 눈물범벅일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인기척에 제영이 손을 내리고 해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잔상을 남기며 저를 잡으러 오고 있음에도 제영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명한 손등의 흉터. 그것은 제영이 만든 것이었다.

이미 다 아물고 흉만 남은 그것들에게서 이상하게 피 냄새가 났다. 그 가상의 핏방울들이 그의 긴 손가락들을 넝쿨처럼 감고 있었다. 그 넝쿨은 이내 제영의 몸마저도 옭아맬 것이다.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몸뚱이의 사정은 뒤로하고 입은 아직도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끝끝내 붙잡혀 다시 그의 품에 매몰되었을 때는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얼굴만 잔뜩 찌푸린 채로,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고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귓가에 노래하는 듯한 음성으로 해진이 사랑한다고 속삭여 왔다.

제영은 한없이 이어져 오는 사랑의 속삭임에 둘러싸인 채로 침대에 눕혀졌다. 이마와 뺨과 입술에 키스를 받고서 마치 초야처럼 경건하게 어루만져졌다. 제영은 손으로 제 남자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눈빛이 간지럽고 사랑스럽다.

눈가를 어루만지면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게 손끝이 닿아 일부러 간지러움을 태워오는 듯했다.

사람이 울든 말든 해진은 그저 웃었다. 그의 말간 두 눈의 밑바닥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 무딘 제영에게조차 보였다.

제영은 그걸 보니 더 울고 싶기도 하고 그를 따라 같이 웃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저 그대로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고 해진의 입맞춤을 받았다. 몸이 간지러웠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해진은 그저 곁에 누워 제영을 토닥이고만 있으니 간지럼을 느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생각하기에,해진이 제 속에 쑤셔 박아 놓은 열이 이제야 꽃을 피워 온몸에 불이 번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였다.

제영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사락거리는 치맛자락 소리 같은 것을 들은 것 같은데,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잠이 깨었을 때는,당연하게도 해진이 눈앞에 있었다. 둘다 어제 한바탕을 겪고서 늦게까지 잠을 잔 모양인지 이미 날이 밝았다. 아예 오후가 된 것은 아니었다만 창백한 기는 전부 날아가고 연하고 따뜻한 노랑의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제영은 드물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해진을 보았다. 자는 데도 씨익씨익 웃는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제영은 제 앞의 놓인 이가 상인가 아니면 벌인가, 잠시 그런 고민을 해 보았다.

두 손을 포개어 자고 있는 게 귀엽다. 사랑스럽다. 그러나 자신이 남긴 손등의 흉은 가슴 아프고, 어제 때린 뺨도 슬프다. 제영은 잠든 남자의 뺨을 더듬었다. 눈가가 움찔거렸다. 곧 깨어날 듯이. 그리고 이내 눈을 뜬다.

제영이 몸을 좀 더 바짝 일으켜 해진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뺨을 살폈다. 살짝 붉은데, 그 붉은 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긁힌 자국이었다. 제영은 제 손을 살폈다. 내버려 두었던 손톱이 꽤 많이 자라 있었다. 이게 해진의 뺨을 긁은 듯했다.

잠에서 깬 해진은 제영이 자신의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더니 머리를 다듬어 줄까 하고 물어 왔던 때처럼, 손톱도 그리 해 줄까 물었다. 제영은 대답 않고 잠자코 있었다. 저런 것은 제영의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고 싶으니 할 거라는 통보나 다름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갔다 돌아온 해진은 손톱깎이와 흰 수건을 가져왔다. 해진이 이불을 빼앗고 왜저 혼자 덮나 그대로 제영을 끌어안아왔다. 제영은 이불을 덮은 해진을 덮고 있고 있었다. 등이 따뜻했다. 까치집이 되어 버린 제영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던 해진은, 이제 제할 일을 시작했다. 왼쪽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양손은 제영의 옆구리를 스쳐서 손을 잡아온다.

왼손이 먼저였다. 또깍거리며 희게 자라난부분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살 가까이까지 바짝 붙여 잘라 왔다. 손톱 하나를 끝내면 마무리 짓듯 살살 문지른다. 보이지 않는 뒤에서는 소곤소곤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다.”

마지막 오른편 새끼손가락에서 톡톡 하는 걸 끝으로 손톱 손질을 다 마쳤다. 제영은 제 손을 이리저리 보았다. 다음번에는 그의 뺨을 때려도 손톱자국을 남기진 않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제영은 고개를 돌려 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제영 못지않게 해진의 머리도 엉망이었다.

손을 들어 그걸 정리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해진이 양팔로 제영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아 팔을 들 수가 없었다.

제영은 그저 고개만 돌려 해진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개선장군 같았다. 폐허로 만들고 잔뜩 약탈해 온 파렴치한 주제에 화려한 외양이 화사하기만 하다. 전부 빼앗긴 제영조차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눈이 부시다. 들끓는 마음을 숨기고 상대를 몽롱하게 쳐다보았다. 제영은 이순간 어느 면에서는 사지가 잘린 듯한 무력감을, 어느 면에서는 온몸이 알알이 채워진 듯한 완전함을 느꼈다.

이제껏 살아온 방식은 모두 허물어져 버렸다. 제영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몰랐다. 눈으로만 해진을 더듬어 갔다. 제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도 모르는 남자는 가만히 제영과 시선을 맞춰 온다. 제영은 해진이 해 온 일들이, 그리고 저지르고 있는 일들이 토할 정도로 역겨웠고 순진한 척하는 꼴은 가소롭기만 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였다. 그게 이 모든 일의 패착이었다.

그와 함께 살아가며 느껴야 할 괴로움이 더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한 일이 닥쳐오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예전의 어느 날처럼 해진의 앞에서 또 처절하게 울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 눈앞의 상대 외에 제영이 아는것은 없다.

제영은 자신이 망가졌다고 여겼다. 아주 제대로 망가져 버려 사랑하는 이도 자신을 고치지 못할 터이다. 이대로 살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아직도 제 몸에 남아 있는 속박의 증거는 여전한 괴로움으로 남게 될 터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어깼거나 사랑은 이루어져 그를 품에 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것 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다. 해진이 귀에 사랑한다고 속삭여 왔다. 제영은 그 간지러운 소리를 가만히 듣기만 하지 않고 똑같이 말해 주었다.

"이리 와."

그렇게 말하자 이미 곁에 있는 남자가 좀 더 살을 치대 온다. 제영은 그의 뺨을 핥고서 이내 입을 맞췄다. 제영을 안고 있는 해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쏟아지는 햇볕이 연한 갈색의 눈에 보드랍게 비쳤다. 반짝이는 이마와 부드러운 콧날과 입을 맞추고 있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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