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제영은 지금이 무슨 요일이고 며칠인지, 심지 어는 몇 월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스스로도 심하다고 여긴 얼마 전부터는 그래도 낮인지, 밤인지 정도는 인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설핏 잠이 들었을 때보다 춥고 어둡다. 손을 들어,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손등에 비추어 보면 푸르스름한 기운이 돌고 거기에는 온기라고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은 밤이었다.
제영이 있는 방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었다. 이 방은 제영이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손님용 방인지, 아니면 그저 안 쓰는 침대를 놓은 곳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잘 만한 곳이었다. 그때부터 제영은 침실이 아닌 여기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해진은 몇 번이나 왜 그 좁은 곳에서자냐고 타박하고 살살 달래어 본래의 침실로 데려오곤 했지만 제영은 여기가 제일 마음이 편해자꾸만 이곳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다 보니 제영을 따라 해진도 여기서 자기 시작했고 이 공간이 제영의 방이자 둘의 침실이 되었다.
거기다 해진은 이곳이 좁다 하지만 그렇게 좁은 편도 아니었다. 제영이 살던 원룸의 배는 되는 공간이었다. 얼추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도록 작은 테이블과 서랍장을 두어 방의 구색은 다 갖춰 놓았다. 좁기는커녕 아늑하기만 하여 제영의 처지에도 조금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루 종일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책을 핑계로 담배를 챙겨 나가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기도 하고 미로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방, 저 방을 돌아다녀 보기도 했다. 그러다 피곤해지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오늘도 그렇게 잠을 자다가 깬 상태였다. 제영은 옆자리를 더듬거려 보았다. 항상 돌아오면 제 옆을 파고드는 남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인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바람이 부는 건지 창문이 작게 흔들렸다. 창문 쪽에는 예전에 봤던, 그 산발 같은 나무가 바짝 붙어 자라고 있었다. 봄을 맞이한 그 나무는 잔가지를 더욱늘려 이제는 거의 창문을 톡톡 두드릴 지경이 되었다.
'저걸 어떻게 해야겠어요.'
잠결에 소리를 들은 해진이 그렇게 말했지만 아직도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또 톡톡 하는 소리가 났다. 제영이 몸을 일으키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짙은 나무 냄새가 틈새로 들어와 제영의 코끝을 찔렀다. 제영은 천천히 숨을 들이 쉬다 내쉬며 그 씁쓸한 향을 맡아 보았다. 약하게 꽃 냄새가 났다. 꽃나무로 보이지 않았으니 봄을 맞이하여 짧은 순간이나마 꽃을 피우려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 부스럭대는 그 잔잔함의 와중에 갑자기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길의 끄트머리까지 온 사람의 정체는 쉽게 짐작이 갔다. 차고가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제영은 얼른 침대로 기어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숨고만 싶었다.
그렇게 숨죽이며 있으니 잠시 후에 집 안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제영은 어쩐지 긴장이 되어 몸을 더 웅크렸다. 이윽고 제영의 방문이 열리고 아직도 몸의 풋내를 다 없애지 못한 제 남자가 바깥의 공기를 몰고 걸어 들어왔다.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마음은 없는 건지 아무 말도 없이 사뿐사뿐 걸어와 침대맡에 잠자코서 제영을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제영은 그 순간이 괴상하게도 긴장되어 막 잠이 깬 척을 할까말까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해진이 방을 나갔고 곧 근처의 욕실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영은 해진의 부재를 틈타, 제 상의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가슴팍을 더듬어 보았다. 뭐가 그리 긴장된 건지 피부가 축축이 젖어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해진은 금세 샤워를 끝냈다. 그가 다시 제영의 방으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이불을 들추고 들어와 가슴을 제영의 등에 바싹 붙이고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제영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장이 바짝 쪼여 오고 거칠어진 숨때문에 코 밑이 간질간질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렇게 꼼짝 않고 있다 보면 다시 잠에 들겠지하고 억지로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집으로 돌아온 해진의 일과를 생각하면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얌전히 허리에 닿아 있던 해진의 손이 슬그머니옷 안쪽을 더듬어 오기 시작했다. 제영은 마치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살짝 허리를 틀어 그의 손을 떼어 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더 대담하게 굴었다. 한 손은 제영의 가슴을 더듬고, 다른 손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사타구니사이를 파고들어 제영의 것을 움켜쥐었다. 제영은 더 이상 자는 척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를 말리기 위해 몸을 아예 뒤집었다. 그의 손들이 자연스럽게 떨어졌고 제영은 해진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앳되어 소년인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씨익 웃는 게 퍽이나 애교스러웠다. 제영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비단 자신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누가 봐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할 만했다.
"자는 척할 거면, 계속 자는 척하지 그랬어요"
해진이 손가락을 세워 옷 위로 살짝 제영의 배를 간지럽혔다.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다. 싫을 리가 없지. 제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나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서운해."
제영은 해진이 원하는 대로 마중을 나갈 용기는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 하면 긴 그의 부재를 겪은 자신이, 그를 마주했을 때 자칫 속마음을 숨기지 못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었다. 뭐사실은 이미 다 들통나 버린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도 제영은 어쭙잖게 자존심을 챙기는 예전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했다.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려 오는 남자의 뺨을 제영이 살살 만져 주었다. 눈을 깜박깜박 감았다 뜨며 살살 웃음을 흘리는 게 요부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일이 많았어요?”
“왜요? 나 피곤해 보여요?"
"아니,그냥. 좀 늦은 것같아서."
"날 기다렸어요?"
해진이 좀 더 바짝 붙어 와 제영에게 속삭였다. 기대하고 있는 눈이었다. 반짝이는 제 남자의 눈. 제영은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서글퍼져 왔다. 그와 동시에 상대를 기쁘게 해 줘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를 기쁘게하는 일이 지금의 제영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제영이 해진에게 입을 맞추며 뿌리쳤던 손을 다시금 제게로 끌어당겼다. 허락의 의미를 알아들은 남자가 입안으로 가볍게 웃는 소리가 키스의 와중에 제영에게도 깊숙이 전달되었다.
수도 없이 해 온 관계였다.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 이 집에 도착한 날에도 해진은 기어코제영의 옷을 벗겨 내어 안았다. 저항할 힘도 그렇다고 관계를 버텨 낼 힘도 없었기에 제영은 사나흘 앓아눕고 난 뒤에야 손 까닥할 사정이 되었다.
둘 다 금방 알몸이 되어서는 서로의 몸에 엉켜들었다. 제영은 다른 것보다도 손바닥으로 그의 몸을 느끼고 싶었다. 단단한 허벅지, 엉덩이 와 매끈한 허리선, 팔을 움직일 때마다 퍼덕이는 날개 뼈와 가느다란 목선, 그 전부를 하나하나 되새기듯 어루만졌다. 제영의 손이 다시금내려와 해진의 골반을 감싸 쥐었다. 둔탁하고 각이 진 뼈의 감촉이 적나라했다. 거기에 멈춰있던 손은 해진이 몸을 일으키자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애처로이 이불 위를 서성거려야 했다.
해진이 튜브의 캡 뚜껑을 열고서는 손가락위에 젤을 짜내었다. 그는 제영의 왼쪽 허벅다리를 세워 붙잡고 나머지 한쪽은 옆으로 슬쩍밀어 벌렸다. 제영의 성기와 그 아래의 틈이 다드러난 와중에 무엇보다도 도드라지는 것은 성기 끝의 피어스였다. 누워 있던 제영은 고개를 들고 그걸 슬쩍 보며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해진에게 물었다.
“그건 아직이에요?"
순간, 손가락 하나가 제영의 아래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안쪽 점막을 누르며 괴롭혀 오기 시작했다.
"그거? 뭘 말하는 거예요?”
"준성 씨가 주문했다고 하는 거요.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니까 지금쯤은 물건이 도착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준성이 얘기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요?”
손가락 하나가 더해져, 순식간에 깊이가 깊어졌다. 그러고는 두 손가락을 교차시키며 뭉근하게 안쪽을 휘저었다. 아, 하고 제영이 소리를 터뜨렸다.
"그야 준성 씨가 주문해 뒀다고 말했으니까."
제영이 상체를 반쯤 일으켜 해진에게 말했다. 그 탓에 안을 파고든 손가락들이 조금 밀려나왔다. 해진이 다시 제영을 고쳐 잡고는 안을 들쑤셨다. 이번에는 움직임이 조금 공격적이었다. 제영이 살짝 허리를 들썩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해진의 방해 공작에도 제영은 끝끝내 그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다.
"준성 씨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요?”
"물건 받았다는 소리는 없었어요”
그러면서는 뒤를 쑤시던 것을 빼내어 앞에 달린 것을 톡, 건드렸다. 제영은 순간적으로 엉덩이가 간질거렸다.
"이거 불편해?"
해진이 그렇게 물으며 제영의 사타구니 사이에 고개를 바짝 숙여서는 혀끝으로만 그것이 달린 피부 주변을 핥았다.
"불편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당연히 그런 거 달고 있는 게 거북하니까. 아!"
기습적으로 해진이 제영의 성기를 삼켰다.
제영의 두 허벅다리를 팔로 꽉 붙들어서는 뿌리끝까지 어떻게 할 모양으로 깊게 삼켜 버렸다.
제영은 말을 하다 말고 쏟아져 내리는 감각에 뱃가죽을 부들부들 떨며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로 기둥을 긁어 올리며 추임새라도 가볍게 넣는 것처럼 피어스 주변을 잘근거리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이미 흐느적거리는 뒤를 움찔거렸다.
해진이 제영의 사정 직전에 입을 떼고는 자신의 성기를 아래에 맞췄다. 장난처럼 제 성기를 잡고 주변을 더듬던 해진이 이내 제영의 내부를 침범해 오기 시작했다. 제영은 첫 삽입에 볼썽사납게 반응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다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거칠게 들쑤셔 오자, 어디 매달릴 곳을 찾아 팔을 휘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해진이 몸을 숙여 제영이 제 목에 팔을 두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애처로운구원 요청에 대한 답이라고 봐 줄 만도 했지만 그대로 제영을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혀 버리니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 바로 드러났다.
내밀한 곳을 짓눌린 제영이 해진의 쇄골 근처에 고개를 묻었다. 옥, 윽 하는 제영의 소리가 해진 에게는 달콤하게만 들려왔다. 해진이 제영의 목덜미를 세게 깨물었다. 제영이 몸을 빼내며 그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해진은 제영의 엉덩이를 꽉 쥔 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입을 뗐을 때는 제영의 목덜미에 잇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내일 아침만 되어도 푸른 멍이 올라올것 같아 해진은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해진이 한 손으로 제영의 성기를 애무했다.
엄지로 조금은 성의 없이 끝을 긁었다. 제영이 좀 더 심하게 몸을 버둥거렸다. 그래 봤자 해진의 손아귀였다. 엄히 나무라는 듯이 제영의 허리에 두른 나머지 한 손에 더 힘을 주어 상대를 안았다. 그리고 제영의 것을 계속 만져 주었다.
아래는 아래대로 치대고 앞의 것은 앞의 것대로 손끝으로 놀려 주었더니 이내 몸을 떨며 사정했다. 해진이 제영을 도로 눕혔다. 쾌락에 젖은 눈빛이 해진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동안 방치해 뒀던 가슴을 건드려 줬더니 또다시 제영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손을 밀쳐 내는 게 아직은 힘든 모양이었다.
해진은 기다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받아들일 만하게 허리를 돌리며 제영의 안이 질척하게 달라붙어 오는 것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제영의 숨소리가 살살 제 마음속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변한 순간에 해진이 그의 안을 거세게 짓찧었다. 제영의 몸이 좀 더 시간을 달라는 것처럼 앙탈을 부려 왔지만 이제는 명백히 해진의 차례였으니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해진이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제영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이면서도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얻는 괴상한 쾌감. 돌출된 곳이 아니라, 은밀한 곳이 파헤쳐짐으로써얻는 온당치 못한 충족감. 제영은 고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곧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만 같아해진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해진이 사정했다.
체위 그대로 쓰러져 제영의 몸 위로 엎어진 해진은 그저 그 상태로 제가 짓누르고 있는 상대의 바르작거림을 기껍게 즐기고 있었다. 제영이 해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빗어 주었다. 자그마한 뒤통수의 굴곡을 따라 제영이 몇 번이고 손을 미끄러뜨렸다. 또다시 부는 바람에 잔가지가 흔들리며 창문을 두드리는지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이 창문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제영을 쳐다보았다.
제영은 여전히 창 쪽을 보고 있었다. 해진이 제영의 시야를 팔로 가리고 저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해진이 제영에게 키스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과 나뭇가지의 소음을 자장가처럼 듣다가 제영은 잠들었다.
정사 후의 피곤함과 옆자리를 지킨 이의 다독거림에 잠이 들긴 했으나 새벽녘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눈을 떴더니 정말로 코앞에 해진의 얼굴이 있었다. 제영은 눈앞의 얼굴을 자기도 모르게 더듬으려다가 정신을 차려서는 도로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추운 것도 아니면서 몸을 떨었다.
허리에 둘린 타인의 팔을 떨어뜨리고 제영이 몸을 일으켰다. 대충이라도 옷을 꿰어 입을 생각으로 침대맡의 작은 탁자위에 개켜져 있는 옷들에 손을 뻗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제영의 허리를 낚아챘다. 제영의 상체가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고 하다가 겨우 팔로 지탱하였다.
"어디 가요?”
팔의 주인이 아직 잠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화장실 갈 거예요."
제영이 답하며 손을 다시 떼어 냈다. 화장실에 간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요의를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좀 전보다 정신이 훨씬 더 말똥말똥해졌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다시 방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밤새 뜬눈으로 곁에서 뒤척거리면 피곤한 해진이 덩달아깰지도 몰랐다.
제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다시 잠이 올 때까지 시간이나 때우기로 했다. 어차피, 내내 밤을 새운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아침이라고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낮이고 새벽이고 이렇게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낼 때면 꼭 스스로가 미취학 아동 같았다. 학교도 가지 않고 내내누군가의 보살핌이 나 받다가, 그가 사라지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존재. 예전에는 해진의 하는 양을 보고 어린애라고 혀를 찼지만 지금 와서는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해진은 회사일로 바빠져 아침 일찍 나가기 일쑤였고 제영은 내내 잠을 잤다 깨었다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소파는 새것이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랐으나 아무튼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좀 더 푹신하고 포근한 디자인이고 무늬도 들어가 있었다.
이런 것은 해진의 취향이 아닐 텐데. 아니, 취향이 바뀐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영은 그 낯선소파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면 집 안의 장면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산책 나갈 때 보니 조명도 다른 걸로 교체되어 있었고 사진이나 그림들도 없어져 있었다. 전부 버린 걸까. 아니, 비싼 물건일 테니 창고에 넣어 뒀을 듯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지 아니면 봄맞이 집 단장인지 모를 노릇이지만 이전의 물건들도 새로운물건들도 값비싸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제영은 소파에 거의 눕듯이 기댔다. 푹신한 감촉이 제영의 몸을 감싸 온다. 그 안온한 것이 해진의 품을 떠올리게 했다. 제영은 그를 만나면 말하고 싶은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어쩐지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아까처럼 겨우 피어스 이야기를 꺼내도 흐지부지되어 버리니 말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괜히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제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쥐고 말도 안 되는 흐름을 타는 머릿속을 탓했다. 자신이 그의 부하직원도, 노예도 아닌데 무슨 신경을 거스르니 마니하는 것은 지나친 저자세이고 비참한 태도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제영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제영이 제 사타구니를 힐끗 쳐다보았다. 몸이 불편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내려다보고 있거나, 그런 것이 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우울해졌다. 마음이 불편한 것이었다. 제영은 해진에게 내일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채근하면 뭐라고 답이라도해 주겠지. 어차피.
'어차피.'
매일 볼 얼굴이니까. 제영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낯설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모든 일을 따져 묻고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게 응당 상식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이제 무엇도 없는 자신이 그의 품마저도 잃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때도, 지금도 하루종일 해진을 생각하고 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차 나아지겠지 하면서도 다 나았을 즈음에 또버려지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도 했다.
도대체 그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무엇일까.
해진은 항상, 그러니까 예전부터 지금까지 제영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왔지만 제영은 자신이 해진에게 가지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호하기만 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모호함을 수반하기 마련이라헷갈리는 것도 당연하다. 사랑 외에는 이 질척한 감정을 부를 마땅한 이름도 없다. 그러나 또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자신은 그저 겁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누구라도 좋으니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해서, 그의 곁에 있고 싶은 게 아닐까.
아니,그건 틀리다. '누구라도 좋으니가 아니라 꼭' 해진'이어야만 했다. 반드시 그여야만 했다. 곁에 그가 없으면 실로 죽을 것만 같아, 곁에 있고만 싶었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할 만한 생각이지만 자신은 어리석음 그 자체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랑도 어찌 보면 어리석음의 축에 끼어 있으니 자신은 해진을 사랑하는 게 맞다.
그런 것 같다. 제영은 종국에 저의 사랑을 인정하였음에도 기쁨은커녕 슬퍼지기만 하였다. 내일이면 또 이 사랑의 진정성에 관해 오락가락할듯싶었다.
제영이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추워서였다.
잠옷 상의에 팬티만 입고 나온 터라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내버려 두었다. 그때 갑자기 복도 안쪽에서 서 벅서벅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제영이 순간적으로 놀라 등줄기를 긴장시켰다. 그런데 나타난 이라고는 태연한 얼굴을 한 해진이었다.
제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탓했다. 도대체 뭐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던걸까.
"여기서 뭐 해요?”
그는 제영과 비슷한 꼴이긴 하나 상의 단추도 채우지 않은 상태로 더 노골적이었다. 가슴팍이며 배며 이미 볼 만큼 본 사이인데도 제영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걸 해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는 짓 마다 귀엽지 않은 게 없어 해진은 제영을 꼭 안고 내내 놓아주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실상 기분만 내는 게 아니라, 실천하고 있으니 더없이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제영이 자길 외면하는 듯한 모습은 싫어 그의 턱을 간지럽히며 제 쪽을 보게 만들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해진에게로 향했다.
"화장실 다녀온다면서, 내내 기다려도 오지도 않고. 잠이 안 와요?"
"슬슬 들어갈까 하던 중이었어요. 해진 씨도 들어가요. 내일 또 일찍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영이 움직이자 턱에 닿은 해진의 손이 떨어졌다. 그래도 제영의 턱에는 여전히 그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었다. 해진의 손길만큼이나 그의 눈빛도 부드러웠다. 제영이 해진을 조용히 올려 다보자 그가 살짝 웃으며 제영을 껴안아 왔다. 억세게 안아 오는 것이 아니라 몸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정도의 포옹이었다.
"있잖아요. 해진 씨."
"응?"
되물어 오는 말투가 샘이 날 정도로 다정스러웠다.
"자꾸 얘기해서 미안한데, 아까 말했던 거. 좀빨리 해결해 줄 수 있어요? 그런 거 몸에 달고 있다는 거 자체가 너무 신경 쓰이고 거북하니까. 혹시 싫어서 그래?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지? 예전에 당신이 얘기한 것처럼 아직도 예방책이니 뭐니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이제는 그런 거 필요도 없잖아. 나는,난 그 사람이랑은.
희주랑은 완전히 끝나 버렸어.”
제 인생에서 끝나 버린 것은 희주만이 아니었다. 파묻어 두었던 묵직한 고통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혀도 입도 전부 얼어 버려 함부로 나불대는 말들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은 제영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치솟은 것은 멈춰지지가 않았다. 제영이 해진의 옷을 움켜쥐었다. 움켜 쥐고 흔들며 잠자코 있는 그가 야속하여 뭐라고 말이라도 하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그러나 입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은 고작 울음뿐이라 제영은 이를 악물고 추하게 흐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신 때문에 모든 게 끝났다고.”
희주의 일,회사에서의 일. 말도 못 할 재앙들이 제영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돌아온 해진이 살살 달래 주며 어찌어찌 형체는 다시 만들어 두긴 했으나 상처가 축적된 몸은 쉬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뺨이 뜨겁고 눈가가 따끔거렸다. 차오른 눈물이 끝끝내 터져 나오고만 것이었다. 흑흑대는 흐느낌이 제영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런 거야."
원망의 말을 마지막으로 제영은 입을 다물고 울기만 했다. 해진은 그런 제영을 제 품으로 안아 주었다. 해진의 얼굴에 선연한 미소가 나타났지만 제영은 그의 가슴팍에서 우느라 그런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해진은 제영이 이다지도 상처받은 모습을 보일 때면 안쓰럽기도 하였으나 사랑스러운 감정이 더 앞섰다. 더 울리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솟는다.
그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절절하게 제 사랑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좀 더 몰아붙이면 될 듯 싶지만, 그러나 더 사랑하는 이가 사랑의 약자라, 해진은 이 남자에게 쉴 틈을 주고 싶었다. 우는 것만치는 못하나, 웃는 것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이렇게 꼭 안아줄 수밖에.
제영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해진의 손에 이끌려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울음은 멈췄지만 코의 훌쩍거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해진은 제영에게 제 팔을 베도록 했다. 그러고는 그 팔을 둥글게 굽혀 제영의 한쪽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제영은 잠들면서 이토록 다정한 남자가 어떻게 제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못 가요."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제영은 깼다. 말소리 때문이었다. 배려하는 듯 조심스럽게 소곤거리고 있긴 하지만 제영은 이미 반쯤 잠이 달아난 상태였다. 습관적으로 곁의 사람을 찾아 팔을 더듬거렸다. 바짝 몸을 붙이고 있어야 좋은데. 해진은 제영에게서 살짝 몸을 떼고는 전화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래 봤자 한 뼘 반 정도의 거리라 조금만 몸을 굴리면 금방 닿을 수 있었다. 제영이 슬금슬금 기어 해진을 껴안았다.
말소리가 멈췄지만 잠깐뿐이었다. 제영은 뺨에 닿는 감촉으로 해진이 등을 돌리고 있고 제 얼굴이 닿은 것은 그의 등이라는 걸 알아챘다.
"안 돼요. 그 사람 몸이 안 좋아서 옆에 있어줘야 돼요."
해진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등도 같이 울렸다. 제영은 해진의 등에 귀를 대고서 응웅대며 피부를 통해서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프다는 그 사람을 누구를 말하는 걸 까, 자신을 의미하는 걸까. 제영의 손이 해진의 옆구리를 타고 넘어가 상대를 끌어안았다. 전화하던 남자가 자유로운 한 손으로 제영의 손을 덮듯이 감싸 주었다. 제영은 해진의 그 행동이 '그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당돌하게 대답하며 상대의 말을 잘라 버린 해진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잽싸게 몸을 돌린 남자가 아직 졸린 기가 남아 있는 제영을 마주 보았다. 큰 저택에 살고 있지만 지금 둘이 있는 공간은 방 한 칸이었다. 제영은 유치하게도 이 온 세상에 딱 둘만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유치한 생각이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해진에게는 모르겠으나 제영의 세계에 남은 것은 둘뿐이었다.
"나 때문에 출근 안 하는 거예요?”
해진은 대답하지 않고 부은 제영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쓸어 주었다.
"나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말아요. 어제 일,아니 오늘 새벽에 일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정말로 괜찮아요.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런 것뿐이고 지금은 괜찮아요."
"이런 얼굴로 그런 말 하면 누가 믿어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죽을상 아니면 눈앞의 이를 원망한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영은 해진의 말에 애써 표정을 밝게 지어 보려고 해 보았으나 잘 되진 않았다.
"꼭 당신 때문은 아니에요. 나도 좀 컨디션 안좋고,며칠간 무리했으니까 쉬고 싶기도 해요.
당신하고."
"어디 아파요?”
"아픈 건 아닌데, 당신이 그렇게 물어 오니까정말로 아팠으면 좋겠네요. 그럼 제영 씨가 날간호하고,난 제영 씨 간호하고. 그러고 놀면 재미있겠어요.”
"장난치지 말고. 정말로 안 나가 봐도 돼요?”
"나갈 필요 없어요. 내 몫은 다 해냈고 다음 일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할 일이에요. 지금 가봤자 얼굴 좀 비치는 것 정도인데, 이미 충분히 얼굴마담 노릇은 했어요. 당분간은 제영 씨랑내내 붙어 있을래요"
못내 즐겁다는 듯이 실실거리던 남자가 제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재잘거렸다.
"그러고 보니, 배는 안 고파요? 어제 저녁도안 먹고, 아침이랑 점심은 대충 깨작대다가 말았다면서요. 좋아하는 거나, 먹고 싶은 거 물어보고 만들어 주라고 했는데 없다고 했다면서.
그분 요리 솜씨가 별로예요?"
해진이 그분이라 부르는 이는 일주일에 몇번 이곳에 찾아와 음식과 청소를 해 주는 사람이었다. 해진이 살 때는 혼자 잘 알아서하였다고 했으니, 갑자기 그런 가정부가 오기 시작한것은 다 제영을 위해서였다. 이 나이에 어디 일하러 가지도 않고 연하의 남자에게 의탁해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워 제영은 그 사람이 올 때면 항상 방에 들어가 있었다. 가정부는 제영을 귀찮게 하는 법도 없이 음식만 차려두고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방문에 노크를 하며 '무슨 음식이 드시고 싶으냐' 물어 와 침대 위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제영이 화들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질 뻔도 하였다. 그게 다 해진이 일러두고 간 탓이었다.
"그냥 먹는 양이 줄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분한테도 그렇게 얘기해 줘요."
“그래서 지금 배고파요? 안 고파요?"
그의 말대로 어제는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비단 어제만이 아니었다. 아예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면 마른 몸이 더 말라 가, 이 남자의 죄책감이라도 자극할 수 있을 텐데 살고자하는 몸은 조금의 음식이라도 계속 공급해 달라아우성이었다. 허기가 졌다. 그래 봤자 한두 술뜨고 말 정도의 허기겠지만 일단은 배가 고팠다. 제영이 배가 고프다고 말했더니 해진이 어제 늦은 이유가 있었다고 제영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주문해 포장해 왔다고 했다. 제영은 딱히 무슨 음식인지 기대가 되지는 않았고 그저적당히 넘길 만한 부드러운 것들이었으면 했다.
제영이 가볍게 샤워를 끝낸 뒤 옷을 입고 나왔을 때는 동작이 빠른 남자가 벌써 주방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제영은 으레 그래야 할 것만 같아 '도와줄까요?’ 하고 물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해진은 당황스럽게도 흔쾌히 그래 달라고 말했다. 할 건 없었다. 요리에 취미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완성된 음식들을 접시에 옮겨 데우는 것이 전부였다. 넓은 주방이라 복작거릴 필요도 없었지만 해진은 제영의 옆에 꼭 붙어서 이 접시를 꺼내 달라, 저 컵을 닦아달라 귀찮게 굴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더니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이러니까 신혼부부 같다. 그죠?”
제영은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신혼부부 타령이라니. 결혼을 앞둔 남의 멀쩡한 커플을 어찌했는지는 다 잊은 모양이었다. 제영이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해진은 기분 좋게 접시를 식탁으로 옮겼다. 밥과 국, 반찬 몇 가지였는데 전부 심심하게 간이 되어 있고 맛도 좋아서 제영은 예상보다 더 많이 먹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이 조금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해진은 자기가 사 온 음식을 제영이 비운 게 기분 좋은 듯했다.
"디저트도 기대해요."
하지만 제영은 이미 배가 불렀다. 조금 이따가 먹자고 하는 말에도 해진은 이따 먹을 건 따로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내온 것은 연하게 내린 커피와 케이크였다. 그나마 자그마한 케이크라서 다행이었다. 케이크가 담긴 작은 접시에 포크가 두 개이니, 둘이 먹으면 정말로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을 양이었다.
맨 위의 흰 크림 위에는 사각의 조려진 사과로 장식되어 있고 그 조려진 사과 위에는 금박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횐색과 연노랑의 부드러운 크림 층층을 내려가면 빵 사이사이에 또 사과가 있었고 그 사과들은 맨 위의 장식과 달리 시나몬 가루에 버무려져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모양새에 맛은 달콤하고 식감은 부드럽다. 눈앞의 상대처럼 누군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제영이 제 몫을 다 먹고서 해진을 바라보았다. 해진은 포크는 들지 않고 그저 먹고 있는 제영을 보기만 하고 있었다. 제영은 해진에게 먹으라는 의미로 접시를 옆으로 살짝 밀었다.
"맛있죠? 당신은 이런 거 좋아하니까, 이것도 좋아할 줄 알았어. 다 먹어요. 저녁에는 다른 걸 내올게요. 그것도 좋아할 거야."
"원래 단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아닌데, 좋아해. 내 애인 입맛은 내가 제일잘알지.”
그 애인이라는 단어에 제영은 순간 가슴이 지끈거렸다. 자신은 정말로 애인일까. 보통은 사랑하는 이를 애인이라고 하기는 한다만, 개나고양이를 이런 식으로 보살피며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쩔 때 보면 해진은 제영을 사람 취급 하기보다는 자그마한 동물처럼 다루고 있었다. 쉬는 날이면 굳은 어깨나 팔다리를 주물러 오고 입을 맞추고 그러면서 먹이나 간식 챙기듯 달콤한 것들은 눈앞에 대령한다.
제영은 웬만해서는 싫다는 말 없이 강아지처럼 그러한 것들을 받아먹었다.
불평해야 했다. 사랑이고 뭐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에 화를 내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고 네가 한 짓만 아니었다면 떳떳하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그러나 이 남자가, 이 얼굴로 방긋방긋 웃고 있으면 덩달아 웃고 만다.
"이런 걸 먹으면 제영 씨 입가가 쓰윽 풀리는걸. 기분도 금세 좋아지고. 그래서 데이트할 때 마다 내가 얼마나 디저트에 신경 썼는데.”
디저트 때문이 아니라, 네가 내 곁에 있어서그래. 아마 예전에도 그랬겠지. 그러나 제영은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없다. 제영이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가 먹지 않을 거라면 자신이 먹어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입 조금 안 되는 아슬아슬한 양이 남았을 무렵에 해진이 포크를 들어나머지를 먹었다. 꿀꺽 삼킨 다음에 입술만 달싹거리고 제영을 쳐다보길래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고 기다렸더니 금방 서운한 얼굴이 되어 제영의 눈치 없음을 탓해 온다.
"내가 당신 디저트에 신경 쓴 이유가 하나 더있는데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힌트라도 주는 것처럼, 미끼라도 던지는 것처럼 굴었다.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이 어린애가 토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제영은 궁금하다고 말하였다.
"제영 씨 디저트 먹고 기분 좋아지면 내게 곧잘 키스해 주곤 했으니까."
그가 손에 쥔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황동빛의 포크와 횐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카랑카랑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해진은 제 패를 전부 보여 주며 얼른정답을 말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는 마주 앉더니 갑자기 옆자리에 붙어 앉은것은 다 이런 꿍꿍이속이어서 그런 듯했다. 해진의 입술이 움찔움찔하는 것이 제영의 눈에도 보였다. 제영은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춰 주었다. 자신은 이 상황의 약자이니 하는 수가 없었다. 여전히 서로에게 케이크의 맛이 남아 있었다. 사각거리는 사과 조각들이 미뢰 사이를 아직 떠나지 못하여 혀를 얽을 때마다 달콤한 맛이 났다. 한참을 키스해 주었다. 제영답지 않게 긴 입맞춤이었다. 이런 것까지 기대한 것은 아닌 듯 키스가 끝나고 해진의 눈가가 발그레해져있었다.
해진이 여운을 즐기는 것처럼 제영의 입가와 턱, 목선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남겨 둔 목덜미의 멍 자국에 키스했다. 거기에는 해진이 기대한 대로 푸른 멍이 올라와 있었다. 해진은 제영의 목선 가까이 옷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어깨를 주물렀다. 멍이든 부분을 세게 매만지는 바람에 통증을 느낀제영이 어깨를 으쏙하며 해진의 손을 떨어뜨렸다.
"아파."
그렇게 중얼거리며 해진을 밀어내었다. 고작그게 뭐라고 해진은 아래가 욱신거렸다. 제영이 작정하고 자신을 유혹해 오면 정신을 못 차릴거라고, 몇 날 며칠 침대 밖으로 못 나가게 만들어 버릴 거라고 해진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에게 넘어간 자신이 성급하게 삽입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때도 저렇게 '아파' 하고 중얼거릴것만 같았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이 차려 준 음식을 먹고 자신의 옷을 입고서 생활하면서, 우울하고 골똘한 표정을 짓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당황한 듯하다 이내 숨기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내고 마는 저 남자가 해진은 사랑스러워 미칠지경이었다.
제영이 입고 있는 것은 해진의 하늘색 니트였다. 원래 주인인 해진에게는 적당한 목둘레지만 체구 차이가 나는 제영이 입었더니 조금 넓게 파인 옷이 되었다. 그 탓에 멍 자국이 자꾸만 모습을 드러내 해진의 은밀한 마음을 간지럽혔다. 실상 제영은 작정하여 해진을 유혹할 필요도 없었다.
"옷, 내 거라 그런지 당신한테는 좀 크네."
해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영이 입고 있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소매도 조금 긴 편이라몇 번 접어 올린 것이 해진의 눈에는 귀엽기만했다.
"옷 사러 갈까?"
해진은 제영만 괜찮다면 오랜만의 바깥나들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잔뜩 겁에 질린 남자가 어디 나가려 하지는 않을 듯했다. 데려오던 날, 의지가 없는 것처럼 넋을 놓고 있던 제영은 차가 사람이 많은 대로에 들어서자 깜짝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잠시 후 제영의 선택은 덜덜 떠는 몸으로 해진의 품에 파고드는 것이었다.
"다음에 가요."
예상한 대로의 답이었다. 해진은 지금으로선 제영이 자신만을 보아 주고 자신에게만 의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이 답도 싫지는 않았다.
* * *
"그러고 보니 제영 씨 머리가 많이 길었네."
산책이라며 잡초투성이 정원을 같이 돌고 제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 키스할 때 담배냄새 나는 건 질색이라며 하도 옆에서 치근거리기에 결국 도로 집어넣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부드러운 모포 같은 걸 가져와서는 같이 덮고 소파 위에서 정말 말 그대로 노닥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머리 이야기를 꺼냈다. 말만 꺼낸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귀찮게 굴었다.
"곱슬곱슬하네."
다 가지고 논 것인지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해진이 큰 몸을 숙여서 어깨에 기댔다.
“우리 머리 손질 할까요?”
그러다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이런말을 했다.
"다음에 해요. 밖에 나가는 건 좀 그래요."
당연히 미용실에 가자는 줄 알고 제영이 거절했지만 해진은 밖에 나갈 필요가 뭐가 있냐고했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 고개를 갸웃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잘라 줄게요."
싫다는 제영을 어르고 달래다가 종국에는 억지로 욕실까지 끌고 왔다. 의자에 앉히고는 상의를 벗기고 커다란 스카프 같은 것을 가져와 꼭 미용실에서 하는 것처럼 목에 둘러 주었다.
"처음이긴 한데,살짝살짝 잘라가면서 길이만 얼추 맞추면 크게 어렵진 않을 거예요."
자신만만한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해 봤다면서요?"
"내가 언제 그랬어요. 지금 해 볼 거라고 했죠."
일어나려는 제영을 해진이 꾹 눌러 앉혔다.
그러고는 냉큼 가위를 머리카락에 대고서 움직이지 말라고 망치면 어쩔 거냐고 도리어 성화였다. 제영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해진이 하는 양을 거울로 보고 있었다. 잔뜩 집중하는 표정을 짓고서 첫 가위질을 시작했다. 사각하고 머리가 잘려 가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리자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조금만 잘라야 해요."
아침에 해진이 출근하지 않는다고 조금 좋아했던 것이 후회됐다. 그저 내내 곁에 붙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 이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자르고 오는 게 더낫지 않았나 했지만 이미 바닥에는 머리카락들이 쌓이는 중이었다. 서툰 동작에 차가운 가위가 뒷목에 닿아올 때마다 제영의 불안은 커지기만 했다. 그러나 정작 일을 저지르고 있는 당사자의 표정은 온화하기만 해서 뒤통수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다 됐어요. 생각보다 쉬운데. 나 여기에 재능 있나 보h 앞으로 계속 당신 머리는 내가 책임져도 괜찮겠어요."
그런 말에도 불안해져 제영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거울에 뒤통수를 좀 비춰 보려고 한 일이었으나 앗, 하고 황급히 가위를 떼어 내는 해진의 행동에 뭔가 일이 터졌다는 걸 알았다. 조금 많은 양의 머리카락 뭉치가 스카프를 타고 앞쪽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이건다 제영 씨 때문이에요."
징징대는 해진의 말에 제영이 손으로 뒤를 더듬어 보았다. 어느 부위에서 짧게 잘린 머리카락의 오돌토돌함이 느껴졌다. 해진이 기어코일을 친 것이었다. 제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거울로 제 머리를 살폈다. 그러나 아예 후방쪽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거울은 없어요?”
해진이 주저하다가 작은 거울을 가져왔다.
거기에 비추어 살펴본 상황은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작은 동전만 한 크기로 흰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가리면 보이지 않을 거라는 태평한 소리가 미웠지만 잘려 나간 머 리카락을 도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래서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제영의 얼굴이 침울해져가기 시작하자, 해진 이 뺨이며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내고 얼른 데리고 나왔다. 제영이 그 부분을 자꾸만 만지며 신경 쓰자 해진도 조금은 미안한지 옆머리로 대충 가려 주며 그다지 티 나지 않는 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해진의 미용실놀이가 끝나자 제영은 피곤이 몰려왔다. 남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한 반성도 없이 또 치대 오는 해진이 미워져 제영은 간만에 너무 많이 먹어 속이 좋지 않다며 방으로 들어가 누워 버렸다. 당연히 해진이 졸졸 뒤를 따라와 제영의 옆에 누웠다.
"귀여워. 제영 씨 머리에 땜빵도 귀여워.”
그리고 하는 말이 고작 저런 것이었다. 이 나이에 연하의 남자에게 저런 말을 듣는 것은 몇개월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하던 일이었으나, 굳이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근래에 제영에게 일어난 웬만한 일 중에 과거에 예상할 수 있는 수 준인 것은 별로 없었다.
나 잘 거니까, 좀 조용히 해요. 성가신 남자의 입을 그렇게 다물리고는 제영은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도 곁에는 있었으면 해서 그의 허리께에 가만히 손을 대고 있었다. 제영만큼 피곤해보이진 않던 해진의 눈이 먼저 감겼다. 이번에는 아침과 다르게 좀 더 용기를 내어 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해진은 순식간에 깊이 잠든 모양인지 눈꺼풀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며칠간무리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제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잠들었다.
먼저 잠이 든 것이 해진이라 그런지 먼저 잠에서 깬 것도 해진이었다. 잠들기 전 제영이 했던 것과 같이 상대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가 혼자 이렇게 애달프게 구는 것이 억울하여 제영을 깨웠다. 그리 깊게 잠든 것이 아니었던 제영은 금방 눈을 떴다. 느리게 끔벅대던 눈이 이내 초점을 맞춘 듯 해진을 보았다.
"우리 한참 잤어요.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에요"
"배가 안고픈데."
"그래도 먹어야 돼. 당신 지금 너무 말랐으니까, 꼬박꼬박 챙겨 먹을 필요가 있어요."
이번에는 해진 혼자 식탁을 차렸다. 제영은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움직이는 해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아침에 먹었던 것보다 좀 더 기름진 것들이었다. 식었던 것을 데운 것임에도 고기는 부드럽게 썰렸고 입안에서 순식간에 흩어졌다. 샐러드와 으깬감자를 제영에게 건네준 후에는 해진도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나이프질이 꼭 귀족처럼 우아했고 오물거리는 입마저도 단정해 보였다.
"아, 와인도 한잔 할까?"
제영의 의견을 묻는 것은 아닌 듯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잔과 와인을 한 병 꺼냈다. 알레르기가 걱정되어 제영이 입에 대기를 주저하자 이 와인은 괜찮았다고,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영도 모르는 새에 생체 실험이라도 단행해 왔던 것인지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제영이 코를 킁킁대며 향을 맡았다.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인 알코올의 목 넘김이 꽤 산뜻하기까지 했다.
해진이 기대하라던 저녁 디저트는 차가운 과일 셔벗이었다. 무슨 과일이냐고 물었더니 해진도 모른다고 했다. 색이 붉은 것이 딸기나 그 비숫한 베리 종류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와인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한 잔 더 마시려고 제영이 병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목줄기를 쥐기도 전에 해진이 먼저 낚아챘다. 따라 주려나싶어 기다렸지만 해진은 마개를 닫아 버리고는 제영의 잔도 치웠다.
"왜요?”
작게 항의하자 해진은 몸도 좋지 않으니 술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딱 끊어 버렸다.
"한 잔도 안마셨어요."
기분만 살짝 들뜰 뿐 취한 기미도 없었다.
"목욕이나 하는게 어때요?"
제영은 해진의 난데없는 목욕 타령에 혹시제게서 무슨 냄새라도 나는 건가 싶어 상의를 조금 당겨 킁킁거렸다. 오늘은 땀 한번 흘린 적없었으니 별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예민한 해진에게는 뭔가 거슬리는 게 있나 싶었다.
"나한테서 냄새나요?”
그 말에 해진은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냥 뜨거운 물에 몸이나 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너나 하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해진에게서 와인병을 빼앗아 올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옆에서 해진이 계속 제영의 마음을 살랑살랑 긁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뜨끈뜨끈하게 몸을 지지면 딱이라고 중년의 아저씨 같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무시했으나 자꾸만 들으니 뭔가 솔깃한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큰 욕조를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매번 간단하게 샤워나 하고 나왔지 어찌 써 볼 엄두를 내 보지 못했다. 한 번쯤은 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살짝 기운 마음을 해진이 금세 눈치챘다. 또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물을 채워 놓고 오겠다고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제영은 해진이 하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숨을 내쉬면서 타이밍을 잘못 잡고 웃는 바람에 푸푸,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술 때문에 조금 기운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해서 식탁에 엎드렸다. 멀리 욕조 수도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무슨 노천온천도 아닐 텐데 따끈따끈한 증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천천히 차오르는 뜨거운 물. 거기에 푹 몸을 담그고 즐거웠던 장면들만 떠올리고 싶었다.
장면마다 제 남자의 모습이 하나씩 끼어들겠지.
표정 좋고 부드러운 얼굴들로만 골라 하나씩 되짚어 보면 헛헛함에 괴로운 마음도 좀 나아질것 같았다.
"제영 씨, 자는 거예요?"
"아니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물 다 받았으니까 이리 와요."
그 말에 얼른 일어나 해진을 따라갔다. 온천만큼은 아니더라도 널찍한 욕조에 뜨거운 물이 채워져 있었다. 빨리 들어갈 생각에 니트를 벗으려는데 나가지 않고 문가를 지키고 선 해진이 신경 쓰였다.
"나가서 해진 씨 일 봐요.”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망부석처럼 서 있는 해진은 도무지 나갈 생각을 않았다. 또 못된 옛 버릇을 떠올리며 자신의 스트립쇼라도 즐길 생각은 아닌지 의심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그제야 제영이 안심해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손으로 물을 쓸면서 온도를 확인해 보았다. 딱 적당한 온도였다.
몸을 완전히 담그자 물이 살짝 넘쳐흘렀다.
물들이 파도가 칠 때같이 철썩하는 소리를 내고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제영은 욕조 턱에 팔을 걸치고 누워 눈을 감았다. 너무나 평온하다못해 잠이 올 지경이었다. 이대로 빠져 버리면 욕조의 익사체라는 세상 웃긴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죽기 전에는 해진이 건져 올려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몸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입술은 이미 잠겼고, 곧 코마저도 물 아래로 잠길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끝장이었다. 숨이 막히고 산소가 부족하다는 필사의 외침도 모르고 잠이 들어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해진이 그 전에 건져 내 줄까.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쫓아낸 주제에 갑자기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졌다.
정말로 죽을 생각은 없었기에 가까스로 발을 굴려 몸을 다시 물 위로 밀어내었다. 그러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데 무언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깜박거리며 시야를 깨끗이 할수록 의외의 것이 눈앞에서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알몸의 해진이 제영의 앞에 서 있었다. 제영은 퍼뜩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진짜였다. 뭐하러 돌아왔냐고 묻기도 전에 해진이 냉큼 욕조로 들어와 버렸다. 아까보다훨씬 더 많은 물이 바닥으로 넘쳐흘렀다. 홍수나 다름없었다. 쏟아지는 소리가 제영의 귓가를 때린다.
"뭐 해요?"
"뜨거운 물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럼 다른 욕실에 가서 해요. 다른 데도 욕조있잖아요."
"혼자 할 거면 뭐하러 제영 씨한테 말했겠어요. 당연히 둘이 하고 싶으니까 애기를 꺼낸 거죠. 근데, 잠 와요? 아까 보니까 반쯤 졸고 있던데, 내 위에 누워서 기대요. 괜히 빠져서 물 먹지 말고요."
"됐어요. 저는 충분히 했으니까 나갈게요. 해진 씨 마저 하고 나와요."
나가겠다, 있어라 그렇게 남자 둘이 욕조 안에서 실랑이를 벌일 때마다 물이 출렁출렁 쏟아져 내렸다. 마지막에는 반쯤 억지를 부리는 남자가 제영을 꽉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해진이 수도를 틀자 욕실 안이 물 쏟아지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낮아진 수위가 올라갔다. 옆구리 근처에서 날개 뼈까지 다시 천천히 몸이 잠기기 시작했다. 제영은 둘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상태로 그 밝은 조명 아래에서 몸을 다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놀리려 들어온 거라면 이제 충분하지 않나싶었지만 해진은 제영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자꾸만 싱글거 렸다.
제영은 아까 조금 마신 와인 탓에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뺨이 뜨거웠다. 해진 역시도 열기가 오르는 듯 그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쩌면 해진은 술기운이 아니라,또 욕구가 치솟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영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해진을 힐끗거렸다. 그러나 그는 간지러운 눈빛을 마주쳐 올 뿐이었다.
젖은 어깨가 상대의 어깨와 맞부딪치는 감촉이 생경했다. 제영은 몸을 움츠리고 아까 식탁에서 했던 것처럼 욕조 턱에 엎드려 얼굴을 숨겼다. 조잘조잘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있던 해진이 제영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지러워요?”
그러고는 자신이 잘라 준 머리카락을 물기에 젖은 손으로 쓸어 넘겨 주었다. 제영이 고개를 들었다가 옆의 해진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숙여버렸다.
"괜찮아?"
해진이 다시금 물어 왔다.
"괜찮아요. 그냥 좀."
"그냥 좀?"
"너무 밝아서 창피해서 그래요."
전부 보이겠지. 저의 좁은 어깨나, 바보 같은 땜빵이나 흐느적거리는 육체며 망가진 정신마저도.
"있잖아, 제영 씨.”
“응?”
"아까 디저트는 어땠어?"
해진이 식어 버린 제영의 어깨에 물을 끼얹어 주며 물었다. 제영은 갑자기 또 무슨 디저트타령인가 싶었다. 대답 않고 있자 자꾸 귓가에 키스를 하며 귀찮게 굴었다.
"맛있었어요."
대답을 해 줘도 치근덕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무슨 미식가가 음식을 평하는 것처럼 일일이 감상을 나열해 주길 원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자 웃으며 혀로 입술을 적시는 걸 보니 정말로 감상을 듣고자 물은 것은 아니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입 모양만으로 '키스'하고 속삭여 온다. 버릇을 잘못 들였다. 제영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키스를 받고 싶을 때마다 케이크며 초콜릿 같은 것을 먹이며 제영은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 맛없었어요?”
불안한 눈빛을 꾸며 내고 물어 오는 게 같잖다. 이런 그의 연기에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가 낭패를 보았다. 그러나 제영은 스스로가 어 리석은 구제 불능의 종자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의 입술을 가볍게 핥다가 살짝 깨물어 주었다. 당연히 더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 건지 해진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느껴지는게 없자 실망한 얼굴로 눈을 떴다. 제영은 그런 그를 모른 척했다. 셔벗은 맛있었지만 입에서 한순간에 녹아 없어졌다. 그 달콤한 것이 제 혀위에 머문 시간보다는 길게 보답해 줬다고 생각했다.
"설마이게 전부야?”
제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어도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부끄러워서 그래? 조명을 좀 낮출까."
분주하게 욕조 옆의 스위치 같은 걸 누르자 순식간에 욕실 안이 어둑어둑해졌다. 연주황색의 약한 조명만 켜져서 단박에 이상한 무드가 조성되었다. 해진은 이제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믿는 듯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다시 제영을 쳐다보았다. 제영은 그런 그가 어린애 같았다.
이 어린애가 어떻게 자신에게 그토록 잔인한 일을 저질렀을까 의문스러웠다. 또다시 마음이 괴로워졌다. 모든 일의 원흉인 사람과 이런 야한 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면 뭘하고 있어야 맞는 걸까. 거기에 대한 답도 몰랐다. 제영은 해진이 부추기든 말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로 욕조 턱에 기대고 있었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뿔이 난 목소리였다. 이 남자는 다 잊어버린걸까. 제영 혼자만 잊지 못해서 이렇게 서글퍼하고 있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억울하고 슬픈일이었다. 이제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인지 해진 이 제영의 팔뚝을 잡아서 자기 쪽으로 당겼다.
어디 잡을 만한 구조도 아닌 욕조였기에 제영의 몸이 미끄러져 끌려갔다. 수면 아래에서 해진이 손을 뻗어 제영의 허리를 안았다. 닿아 오는 감촉이 꼭 물고기 꼬리가 스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해진이 나머지 노는 손으로 고개 숙인 제영의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손길 못지않게 눈빛도 간질간질했다. 제영이 했던 것을 되돌려 주는 것처럼 입술을 핥고 깨물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혀로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갔다. 제영의 혀에 제 혀를 얽으며 한 참을 서성대다가 뒷목을 붙든 손을 내려 사타구니 사이의 물건을 잡아 쥐었다. 제영이 몸을 빼려고 하면 허리를 바싹 당겨 안고,물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러지 말라는 걸 몸으로 얘기해주었다.
손가락으로 성기 끝을 깔짝거리며 피어스를 자극하고 기둥을 위아래로 거칠게 오르내렸다.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와 욕조 안이 잠시간 탁해졌다. 키스는 계속 이어지고 제영은 해진에게 의지해 차근차근 절정에 다가가고 있었다. 해진의 어깨를 쥔 제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 하는 괴로운 소리가 터지고 이내 사정했다.
물고기도 아니니 물속에서 사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고기들도 이런 비슷한 느낌일까. 부드럽게 몸을 둘러싸고 있는 물결이 자꾸만 살결을 어루만지며 절정에서 느꼈던 쾌락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완전히 녹아내려 물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제영을 해진이 구제해 주었다. 제영은 해진의 몸 위에 엎드려 아직도 잔잔하게 몰려오는 쾌감을 견뎌 내고 있었다. 그러다 감각들이 사그라지기 시작하자 해진의 상태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의 것 역시도 빳빳하게 발기한 상태였고 뭐가 하고 싶은 모양인지 자꾸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 틈의 사이를 벌렸다.
"여기서 넣을 거예요?"
아무리 살을 맞대는 사이라고 해도 너무 노골적으로 묻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로해진 탓에 의식은 거의 제 역할을 못 했고 몽롱하기만 했다. 몸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액을 쏟아 내면서 남은 기력도 다 소진한 모양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해진의 가슴에 뺨을 대고 엎드린 채로 정신도 몸도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해진이 손가락을 넣지는 않고 그저 주름 주변을 살살 문질렀다.
"하고 싶긴 해. 당신은 어때? 괜찮겠어요?”
괜찮지 못한 것을 뻔히 알면서 묻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 이제까지."
가시가 돋은 것처럼 날카롭게 말이 나갔다.
말하는 당사자도 무슨 조화인지 모른다. 정말로 갑자기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뭐?"
거기다 상대방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당신이 착각한 게 있는데, 난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았어요. 적당히 선을 지키면서 했어요."
해진이 제영의 젖꼭지를 꽉 꼬집어 왔다.
"난 그때, 준성이한테 피어스를 세 개 가지고 오라고 했거든요. 양쪽에 둘,밑에 하나. 그래서 총 세 개. 근데, 나 많이 자제했잖아요."
궤변이었다. 이런 놈과 대화를 하려 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멀끔한 껍데기와 다정한 거짓말들에 속은 자신이 한심한 놈이었다. 제영은 가슴에 닿아 있는 해진의 손을 쳐 냈다. 이대로 일어나 나가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해진은 또 거머리처럼 붙어 와 옭아매고는 제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시 그의 품이었다.
해진은 제영의 얼굴을 살피려고 들었다. 하지만 제영은 요리조리 피하여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 했다. 또 눈물이 났다. 울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울어 봤자 사람 우습기만 하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눈물이 났다. 예고조차도 없이 가슴이 울렁거리면 꼭 이렇게 질질 짰다. 그러고 싶지 않는데.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혹여나 염치도 없이 '울지 마'라고 하면 화를 내려고 했다. 너는 그럴 자격도 없잖아.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제는 해진의 잘못이 훨씬 더 크다. 그러나 해진은 제영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영이 작게 흐느낄 때마다 마른 몸에 삐쭉 솟아오른 날개 뼈가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해진은 가만히 제 손으로 제영의 뼈 위를 덮었다. 부드럽고 연약하여 세게 쥐기만 해도 으스러질것 같았다.
진력이 빠진 제영과 더 이상 이런 상태로 있는 것은 위험해 보여 해진은 제영을 데리고 나와서 원래의 방으로 들어갔다. 제영에게 잠깐만 앉아 있으라 한 뒤, 해진이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꼼꼼히 닦고서 그걸로 제 몸의 물기도 같이 훔쳐 내고 침대에 누웠다.
제영은 잠들지 못한 머리로 생각했다. 도대체 왜 지금 이 남자와 알몸으로 한 침대에 누워있는 걸까. 벌거벗은 제영의 배 위로 해진이 손을 올렸다. 제영은 멍하니 검은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제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둠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기분이 좋지 못해서 그런 건지 표정이 가라앉아 있어 무서웠다.
"화났어요?”
해진이 물어 왔다.
"아니요."
제영의 답은 그게 전부였다. 해진이 제영에게 다가와 속삭이기 시작했다.
"화를 내도 좋고, 울어도 좋아요. 어제처럼 오늘도,내일도 당신은 여기 있을 거고 항상 내가 같이 있을 거니까 뭐가 문제겠어요. 울고 싶으면 매일매일 울어도 좋아요. 내가 매일매일 달래 주고 매일매일 사랑해 줄게요. 영원히."
그가 사랑을 말하고 거기에 영원을 덧붙인다. 해진보다 훨씬 어른인 제영은 그 말이 헛된이야기라는 걸 안다. 영원한 사랑 따위는 정말로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해진의 눈빛은 반짝거리기만 하고 거짓이 없다. 이 말을 믿어도 되는지는 확신하지 못했으나, 믿고만 싶었다. 폭력적으로 사로잡힌것에 대한 슬픔과 원망이 사라지게 되면 온전히 여기에 기대고 살아도 좋을까. 그러고만 싶었다. 너는 내게 유일한 것. 너 외에는 모두 의미를 잃었지.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너의 사랑뿐.
절망 속에서 해진은 홀로 빛이나 반짝이고서 사랑을 속삭여 온다.
지금 조금의 체력이라도 남아 있다면 해진을 부둥켜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해진의 말처럼 제영 역시도 영원히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욕조에서 시달린 탓에 제영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대의 팔을 붙잡고 좀 더다가오라고 애걸하는 일뿐이었다. 소리도 없는 그 애걸을 해진이 알아듣고 살을 겹친다. 닿은 부분을 통해 오고 가는 열기가 두 몸을 마치 하나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제영은 달콤한 상대의 숨과 살결, 그 어떠한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진의 말처럼 그의 사랑이 영원하진 않을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제영의 소유였다. 제영은 곁의 남자를 애틋하게 바라보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