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솜탕] 구원의 경계 3권.
6장. 경계의 안과 밖
제영은 내내 앓아누웠다. 주말이라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속절없이 병가를 내야 할 뻔했다. 머리가 뜨거워질라치면 차가운 물수건을 대주었고 몸이 차가워질라 하면 해진이 제영의 곁을 파고들었다. 제영은 이 순간만큼 병 주고 약준다는 말이 어울리는 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어찌 됐든 지금은 해진이 필요했다. 해진의 두터운 겨울 코트를 빌려 입고서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제영은 여전히 병자에 더 가까운상태였다. 콜록거리는 잔기침이 터졌다. 어제보다는 나았지만 아직도 눈가에 열이 오르던 흔적이 남아 붉었다.
"코트 그냥 입고 들어가요."
주섬주섬 코트 단추를 풀고 있는 제영에게 해진이 말했다. 제영은 코트를 벗다 말고 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제영의 집이 아닌, 그의 집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묻지도 않고 차를 몰았고 도착한 곳은 제영의 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도 했지만 제영은 겁부터 났다. 수조 안에 물고기를 넣어 두고 잡았다놓기를 반복하며 죽기 직전까지 데리고 놀다가, 마지막에는 초라한 몸을 난도질해 어느 일본 장인에게서 공수했다는 유려한 도자기 위에 누인다음에 꿀꺽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제영이 죽음 직전의 물고기가 꼬리를 퍼덕이는 것처럼 격렬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나쁜결말만 떠올랐다. 주둥이만 뻐끔뻐끔하다가 제살들이 타인의 입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결국눈도 감지 못한 채로 죽을 것 같았다.
"윤희주 씨한테는 언제 얘기할 거예요?”
해진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픈 사람한테 계속 다그치기는 싫어서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는데,식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분하고 얘기하고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되도록이면 빨리."
제영이 눈을 돌리며 해진의 시선을 피했다.
잠들었다가 눈을 뜨자마자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저 제가 열이 올라 한 헛소리 정도로 치부해 주기를 바랐으나 전부 소용없는 일이었다.
"겪어 본 바로는, 당신이 당장에 해결 볼 사람이 못 된다는 거 아주 잘 알아요. 근데 괜히 시간 끌면 상대한테 더 상처만 된다는 거 제영 씨도 알잖아요."
"아직 시간 조금 있잖아요. 갑자기 그러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제가 적당한 때 봐서 얘기할게요."
해진은 영 믿음이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영은 빈 주머니 안에서 손을 꿈지 럭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진이 제영의 손이 들어 있는 주머니 속에 자신의 손도 집어넣어 제영의 손을 잡았다. 충분히 커다랗긴 했지만 두 남자의 것이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참을 둘 다 말도 없이 그러고 있다가 헤어졌다. 커다란 코트가 자꾸만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골목을 올라가는 동안 몇 번이고 다시 추켜올려야만 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제영은 난방을 켜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무것도 벗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해진의 말대로라면 사진은 큰 문제 없이 그의 사람들이 처리해 줄 것이다. 그러니 제영을 괴롭혔던 걱정거리 하나는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은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남자에게 파혼을 종용받는 남자의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제영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처지였다.
"그럼 이제 어쩌지."
제영이 아무도 들어 줄 사람 없는 방에서 홀로 이불을 덮고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영이 주먹을 쥐고 침대 위를 두들겼다. 하지만 울분을 다 풀기도 전에 폐병쟁이처럼 기침이 또 터졌다. 추운 날에 식은땀을 흘려 대고 돌아다닌여파였고 호텔에서 당한 짓의 후유증이었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런 곳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해진의 앞에서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희주와 파혼한다 하더라도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되지도 않게 남자 애인으로 삼으려고 하는 건가. 그렇게 말도안 되는 감투를 씌워 놓고 자기 가랑이 사이나 핥게 만들려고 하는 건가. 그러다 싫증이 나면 또다시 이렇게 매섭게 화를 내며 몰아붙이겠지.
제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런 짓은 시작도 하지 말아야 했다. 제영 몸을 웅크렸다. 얼마나 있었다고 몸이 더워져 땀이 났지만 이불밖으로 나가고 싶진 않았다. 제영이 받아들일수 있는 고난의 역치는 고작 이 이불 안 공간 정도뿐이었다. 제영은 눈을 감으면서 이불 안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구멍으로 쑥 빠져 해진도 없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헤매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수족관 안의 물고기 신세였다.
* * *
억지로 회사에 출근을 했으나 실수 연발이었다. 공장 발주량을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안 그래도 신규 계약 때문에 예민하던 공장장이 전화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제영이 몇 번이고 사과했지만 그는 제분이 풀릴 때가 되어서야 전화를 끊었고 이사실로 불려 가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샌드백 노릇을 하느라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너무 힘들어 당분간은 잠잠하기를 바랐으나 아직 가장 센상대가 남아 있었다.
"얘기했어요?”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 왜 그렇게 넓고 기다란 소파가 필요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영이 끄트머리에 앉아 있어도 제영의 무릎을 베고 누운해진의 긴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팔걸이에 걸쳐졌다. 제영이 해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줄때마다 고양이가 가르릉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나른한 표정을 보면 회사 사무실이 아니라 집 소파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얘기 했냐니까요."
해진이 제영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장난스러웠지만 제영은 자기 목줄을 해진이 쥔상황이 연상되어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고 티낼 용기는 없었다.
"했어요."
“정말? 뭐라고 하던가요? 그 여자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제영의 코앞에서 그렇게 질문했다.
"화냈어요."
"그럴 만도 하죠.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당신은 뭐라고 했어요? 결혼 못 한다고 애기하면서 이유는 뭐라고 했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했어요."
해진이 고개를 뒤로 넘기며 이마를 짚었다.
제영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 어떡해요. 꼭 나중에라도 다시 결혼하자는 것 같잖아. 아무튼, 그러니까 그 여자가 뭐래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어요."
해진이 제영의 어깨를 감싸 자기 쪽으로 당겨 안았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말해요. 그사람 사랑해서 결혼은 못 하겠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해요. 뭣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굳이 새로 생긴 사람이 나라는 걸 알려 주고 싶으면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니게 이야기하면서 질질 끌든가."
다시 제대로 말하겠다고 흥분한 그를 겨우가라앉혔다.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제영을 더는 몰아붙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인지, 해진이 표정을 풀고 가만히 제영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어깨를 감싼 손으로는 조용히 리듬을 타며 토닥거렸지만 제영의 굽은 등은 펴질지 몰랐다. 아까의 장난질로 살짝 흐트러진 셔츠 깃을 따라 해진이 입을 맞췄다. 단추 하나만 풀고 하면 될 텐데 굳이 틈을 파헤쳐서 옷차림을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적당히 깊은 곳, 정돈하면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그의 혀가 스치고 곧 딱딱한 이가 닿았다.
"해진 씨, 아파요.”
이로 잘근잘근 살을 씹으면서 손으로는 허벅지 안쪽을 건드려 왔다. 제영이 다리를 오므리며 그 손길을 피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천 너머로 살살 제영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쉽게 끝낼 마음은 없는 듯했다. 해진이 목덜미를 꽉 깨무는 동시에 아래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양쪽에서 통증이 몰아치는 바람에 제영이 몸을 떨었다. 해진이 제영에게 거칠게 키스하고 난 후에 몸을 떨어뜨렸지만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젖은 거 입고 가려면 불편하니까, 밑에만 벗어 봐요."
서로의 성기를 비벼 대고 미끌미끌한 액으로 뒤덮이고 나서야 멈춘 해진이 제영을 눕히고 그위에 엎드렸다. 제영은 해진의 밑에서 사무실의 소파가 왜 그렇게 넓고 길어야 하는가에 대한 두 번째 이유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하기 전에 해진이 대충 풀어 헤쳐 두었던 금속 버클에 제영의 살이 긁혔다. 아팠지만 제영은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해진은 아무 말도 없이 제영의 가슴이 귀를 댄 채로 잠자코 있기만 했다. 끝까지 할까,말까를 고민하는 건가 하고 그를 의심하던 제영은 괜히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움직임을 멈췄다. 이러고 있다가 그가 잠들어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런건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해진이 몸을 일으켰고 제영은 얼른 바닥에 떨어진 속옷과 바지를 챙겨 들었다.
"왜요?"
해진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작게 열린 문의 틈으로 박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영은 쏜살같이 속옷과 바지를 입고 벨트를 채우는 중이었다. 제대로 닦지 않고 속옷을 입은 터라 찜찜했다.
"지금?"
해진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5분 뒤에 내려오실 겁니다. 김 대리님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해진이 옷을 다 추스른 제영을 쳐다보았다.
아무 미련도 없이 잠깐 사이에 이미 갈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제영이 알미워져 해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진 씨, 아니 팀장님 큰형님이시면."
"이해명 사장님이시죠."
제영은 자신이 다급하게 거길 나와야 했던 이유를 박 비서를 통해서 들었다. 그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큰형이 내려온다는데 자신을 계속사무실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영에게는 다행이기도 했다. 나오기 직전에 본 해진의 아래는 아직도 성을 풀지 못하고 부풀어 있었다.
그의 형 덕에 적절할 때 끝이 났다.
제영은 올 때처럼 박 비서의 꽁무니를 졸졸따라가고 있었다. 차분한 발걸음 소리와 그를 뒤따르는 제영의 걸음 소리만 빈 복도에 울렸다. 해진과 그의 큰형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해진이 몸을 치댔던 그 소파에서는 하지 않기를 바랐다. 박 비서를 따라가는 와중에 제영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앞의 남자가 들었나 하고 걱정했지만 계속걷는 걸 보니 듣지 못한 듯싶었다.
제영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오늘은 대충 받아치며 해진을 안심시켰지만 추궁이 계속되면 거짓말이란 것이 들통날지도 몰랐다. 헤어지자고 이야기를 꺼내기는커녕 얼굴도 보러가지 않고 있었다. 간혹 주고받는 전화와 문자로는 결혼을 앞둔 여느 연인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이야기를 나눴고 파혼이니, 헤어지니 마니 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대로 해진을 속이면서 내버려 두고 어떻게든 결혼을 해 버리면 그도 어쩌지 못하지 않을까 하다가도 혹여나 앞뒤 재지 않는 그가 행패를 부리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졌다. 제영이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듣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소리가 컸지만 박 비서는 이번에도 모른 척했다.
"친밀하시네요."
"예?"
가는 내내 별다른 이야기 없이 침묵을 지키던 그가 갑자기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렇게 말했다.
"막내 도련님이 이렇게까지 한 분은 없었거든요. 만나는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회사에까지 불러들이신 경우는 없었습니다. 뭐, 김 대리님이야 일적으로 먼저 만나셨으니 그럴 만하긴 하지만요."
"아, 예."
문 쪽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제영에게 몸을 돌렸다.
"아직 어린 터라 감정을 잘 주체하지 못하셔서 김 대리님이 곤란할 때도 있으시겠지만, 잘해 드리세요. 보상이 박하진 않을 겁니다."
제영이 수치심에 고개를 떨궜다. 이 남자가 자신과 해진이 그 밀실에서 하는 짓거리를 모르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매춘부라도 된 기분이었다.
"사장님께서도 그렇게 나쁘게만 보고 계신건 아닙니다. 도련님이 많이 얌전해지셔서 기분이 좋으시거든요. 다 김 대리님 덕분이죠."
박 비서가 미소를 지으며 제영에게 말했다.
"곧 그만둘 겁니다. 해진 씨랑 그런 거 전부. 결혼할 사람이 있어서요."
그건 나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남자에게 다리나 벌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당당히 제 사람과 가정을 이룰 거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세요? 그럼 그때까지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영이 이를 악물었다.
"여긴 B동 엘리베이터입니다. 내리신 다음에, 왼편으로 쭉 가세요. 찾기 어렵지는 않으실겁니다. 아마 일성 분들 남아 있으실 겁니다. 저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서 오늘은 못 데려다드릴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 니다."
눌러 놓은 층에 가는 그 길면서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제영은 입을 다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 열리자마자 바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발을 밖으로 내딛기도 전에 그에게 붙잡혔다.
"뭡니까?"
제영이 묻자 박 비서는 말 대신, 제영의 목을 슬쩍 가리켰다.
"보이니까 정리하고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영은 순간적으로 아차 싶어 제 목을 가렸다. 해진이 흩뜨려 놓은 곳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나와서 그가 씹어 댄 곳이 보인 것이었다.
"아래도 젖은 얼룩이 있으니까 코트는 제대로 여미고 들어가세요.”
제영의 얼굴이 더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나 박 비서는 제영이 부끄러워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조금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제영을 남겨두고 가 버렸다. 제영은 얼굴에 오른 열기가 진정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지 못할 듯싶어 고개를 푹 숙이고 화장실을 찾았다. 옷도 정리하고 세수라도 할 생각이었다. 걷는 와중에 누가 오는 기척이 들리면 또 고개를 푹 숙였다. C동이 아니라 그런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화장실에는 다행스럽게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의 열을 가라앉히고 넥타이를 바로 정돈해 해진의 흔적을 가린 다음, 코트도 제대로 여였다. 하지만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꼴이 영락없이 물에 빠진 개 같았다. 제영은 거울 속의 자신이 꼴 보기 싫어져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불쑥 거울에 얼굴을 비쳤다.
“오늘은 생각보다 빨리 끝나셨네요.”
동혁이었다. 제영은 보일 리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자락을 꽉 쥐었다. 동혁이 위아래로 제영을 훑어보다가 피식웃었다.
"뭐야."
"아니요. 그냥 그 팀장이란 사람도 참 유난이 다 싶어서요."
그렇게 알다가도 모를 말을 내뱉고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떠났다. 제영은 그의 태도가 뭔가 미심쩍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 그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사진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정도로는 제영과 해진의 관계를 유추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제영은 동혁의 그런 태도가 그저 여느 때와 같은 빈정거림에 불과하다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넌 하는 일마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제영을 보낸 후, 곧 큰형인 해명이 도착했다.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해진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살짝 흔들리는 머리카락이나 몸 이곳저곳에는 여전히 제영의 체취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방에 들어올 때부터 방 안 가득히 남아 있던 것들을 큰형이 모를 리 없었다. 해진은 그게 사뭇 뿌듯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제영으로 채워 둔 방 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침입자가 뿜어내는 탁한 공기로 가득해졌다. 종국에 해진은 조금숨을 참고서 해명이 용건을 끝내고 얼른 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해명은 자꾸만 뜸을 들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할 말 있으세요? 있으면 빨리 하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셋째한테 그런 사진을 보낸 거야?"
"제가 뭘 하고 다니는지,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아주 궁금한 눈치였어요. 동생에게 그렇게 관심이 깊은 사람이니,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그저 가볍게 소개해 드린 거죠."
"좀 어른스럽게 굴어. 사방에서 내 약점 삼으려고 널 주시하고 있는데 넌 조심성이라고는 없구나."
"조심하고 있어요. 조심하고 있으니까 많고 많은 것들 중에 그런 시시한 걸 보여 줬죠. 그리고 어차피 그쪽 시선을 끌 만한 뭔가가 필요하셨잖아요. 형님 하시는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적당한 이야깃거리 던져 준 거 잘했다고 칭찬받아야 마땅하지 않나요? 아니면 너무 약한 거라서 실망하셨어요? 혹시 좀 더 큰 걸 기대하신 건 아니죠? 예를 들면 우리가 형제가 아니라, 부자 지간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요"
"말조심해.”
"조심하고 있어요. 얼마나 조심하고 살고 있는지 알면, 형님은 절 조심성 없다고 혼내지 못하실걸요. 누가 싸질러 놓은 오물 때문에 이십여 년 동안이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입조심하며 살아갈 사람한테요.”
해진의 말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해진을 나무라는 해명의 잔소리는 이내 자조 섞인 한탄으로 끝이 났다.
그가 떠나고 난 후에 바닥을 긁던 해진의 눈동자가 제 애인을 안았던 소파로 향했다. 그를 돌려보내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형이 온다 한들 제영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다소곳이 앉혀 두고 자신은 그 옆에 앉아 타인이 무어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서 그와 노닥거리고 있을 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다. 해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그간의 시간들을 다 내뱉어 버리는 듯하여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 * *
"여보세요. 네? 아니요. 박동혁 대리 말씀이 십니까? 전화 돌려 드리겠습니다."
제영은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옆의 이선주가 살짝 눈치를 보다가 제영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돌렸나 봐요.”
"됐어요. 그럴 수도 있죠.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러나 그런 말투라면 신경이 더 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영은 침울한 기운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간단히 전화 돌리듯이 제가 가지고 있는 폭탄들도 남에게 넘겨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 끝의 불을 대충 꺼 둔 상태긴 하지만, 또 언제 갑자기 타들어갈지 모를 노릇이었다. 쓴 커피를 마셔도 두통은 점점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옆자리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동혁이었다. 목소리를 잔뜩 죽인 채로 전화 상대에게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저놈이 자주 저러진 않는데 아마 진상 거래처에서 또 별일 아닌 걸로 컴플레인을 하는 듯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화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제영은 그걸 들으며 해진이 윗도 아닌, 그저 거래처 진상 중에 하나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동혁이 하는 것처럼 탁,하고 전화기를 내려놓고 욕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제영이 비루한 개의 모습을 하고 무너져 가는 제 삶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도 타인들의 일상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이어져 가고 있었다. 일을 시키고 그 시키는 일을 하고 다들 제 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제영 역시도 그들처럼 달그락거리며 굴러가 야만 하는 삶인데 갑자기 끼어든 이로 인해 비극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비극에는 다들 마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나 제영의 생각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불러들이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었다.
제영 못지않게 비루한 꼴을 한 눈앞의 이 중년 남자도 욕심 때문에 이런 상황인 게 분명했다.
"어, 자네 왔나?”
제영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상무의 연락을 받은 것은 오늘 오후였다. 갑자기 술이나 한잔 하자며 다짜고짜 전화로 약속을 잡자고 했다. 제영은 순간 그가 번호를 잘못 눌렀다고 생각했다. 그가 전화할 만한 사람은 이사나 사장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배 차장급은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영에게 전화했다는 것은 그가 많이 다급하다는 증거였다.
그는 여전히 작달막한 키에 퉁퉁하게 살이 찐 상태였지만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져컨디션이 영 좋지 못했다. 거기다 웬일로 그가 선택한 곳은 어디 골목 구석진 곳의 이자카야였다. 항상 룸이 있는 술집을 선호하고 여자를 불러 대던 그가 선택한 곳치고는 누추했다. 먼저도착해 이미 술을 마시고 있던 그가 제영에게도 술을 따라 주었다. 읽지도 못하는 일본어가 적혀 있는 병의 술을 따라 주는데 제영은 솔직히 마시고 싶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을 때면 알레르기가 더 극성이었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상황에서 또 배를 긁으며 잠을 설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절하지 못하고 술잔을 받아들었다.
"자네 뉴스는 보나?”
"요즘 바빠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정말로 바빴다. 해진의 비위를 맞추며 그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상무가 잔을 꽉 쥐고 술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빈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리고 조금민폐라고 생각될 정도로 크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구석진 골목의 별 인기도 없는 식당 안에 손님이라고는 제영과 상무, 그리고 동네 마실이나 나온 듯한 문 쪽에 앉은 커플뿐이었다.
"요즘 우리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아. 사장 쪽사람들이 나머지를 아예 밀어 버리려는 중이거든."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에서 그가 밀려 나갈나머지 중 하나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장 쪽이 승기를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제영이 알기로는 그 사장이 해진의 큰형이었다.
'그렇게 잘되고 있으면서.'
승승장구하는 편에 서서 앞으로 돈으로 깔린 너른 길밖에 모르고 살아갈 거면서 어째서 자신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이 우습지도 않은 비극을 겪어야 할 정도로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달라고 한 적이 있던가. 그저 준 걸 받았고 거기다 돌려주기까지 했다. 그의 예민한 성정에 상처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기에 헤어지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 잘못된 관계를 정리하고 서로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제영이 원하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해진이 표정을 바꾸는 바람에 시나리오는 아주 비극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영이 욕심을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이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분하고는 썩 가까운사이가 아닙니다. 정말로 술 몇 번 마신 정도고."
"남자끼리 술 한잔 했으면 다 했지. 뭐가 더필요해. 아무튼 지금 사장 새끼가 아주 철저하게 우리 같은 사람들을.”
상무가 이를 갈았다.
"그 사장이 유일하게 보이는 틈이 그 새끼란말이야.”
틈. 하지만 단순히 틈이라고 하기에 해진의 균열은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거기에 발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제영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궁지에 몰린 중년의 남자는 생각보다도 더 추했다.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처럼 술을 퍼붓듯이 마셔 댔고 다 넘어가지 못한 액체들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룸살롱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게걸스럽게 안주를 주워 먹고 사람들을 깔아뭉개기 바빴던 손은 이제 쥔 것도 없이 빈 술잔만 채우기 바빴다.
"응? 우리 같은 서민들이 서로를 도와야지.
안 그런가?”
그가 제영의 빈 술잔에도 가득 술을 부었다.
분명 저번에는 내 자리까진 아니더라도 그 밑구멍 근처까지는 올 수 있도록 너희 같은 잔챙이 들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는데, 갑자기 '우리'가 되어 버렸다. 제영이 격상된 것인지, 아니면 상무가 제영이 있는 곳까지 떨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쓴웃음이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교활함과 노련함으로 대기업 상무 자리까지 오른 이를 이토록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걸 보면 해진의 형이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자비한 인물인가를 얼굴 한번 보지 않고도 알수 있었다. 그런 형을 닮아 해진이 자신한테도 그렇게 모질게 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벽 앞의 상무가 이렇게 추하듯이 해진의 앞에 선 자신도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싶어제영은 괴로웠다.
"이거 본적 있지?”
그가 핸드폰 화면에 사진 하나를 띄우고는 해진에게 내밀었다. 내내 그의 시선을 피하던 제영이 이번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배 차장이 제영에게 보내 줬던 사진이었다. 분명 해진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했는데, 또 다른 무언가가 터진 건가 싶어 제영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배 차장님이 보여 주셨습니 다.”
"아, 그래? 그 새끼가 이런 건 좀 빠르지.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놀고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선수를 쳤단 말이야. 다른 사람이 신임을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어.
그러니 자네와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어?"
제영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런 저열한 짓을 하는 사람이 상무 말고도 또 있다는 소리였다. 얼마간은 잠잠했기에 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억지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는데 또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거기다가 상무의 머릿속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이미 제영과 자신이 한 팀을 이뤘다고 여기는 듯했다. 차라리 배 차장이라도 있었으면 둘이 대화를 주도해 나가고 제영은 그 옆에서 얼추 추임새나 넣으며 시간을 보내며 될 텐데,그럴 수 없는 지금 같은 상황이 아주 곤욕스러웠다.
제영은 상무의 핸드폰을 힐끔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삭제한 후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 버리려고 했던 것을 다시 보게 되자 제영은 아찔하였다. 아무리 흐리더라도 이런 종류의 사진이 타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썩은 동태처럼 흐리멍덩한 상무의 눈이 사진의 인물과 자신이 동일인임을 알아챌 것 같지는 않지만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혹여나 저 기름지고 퉁퉁한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킬까 봐 겁이 났다. 고개를 돌리자 상무는 제영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썼다. 예전 같으면 바짝 엎드려 그의 오해를 풀어 주려고 애썼겠지만 지금은 상무도 저 사진도 그저 외면하고만 싶었다.
"여기 사진 속의 이 남자, 이상하게 낯이 익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놈 근처에서 이런 남자를 본 적 없나?”
흐리면서도 집요한 상무의 시선이 제영의 얼굴 훑었다. 그러고는 특 하니 내뱉는 것이었다.
제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글쎄요. 사진이 흐려서. 이런 건 길 가던 사람 아무나 잡고 찍어도 비슷하게 나올 것 같은데요. 이 사진이 정말로 팀장 사진이 맞긴 한 건가요?"
"그런가. 하기야 우리 회사에 아무나 붙잡고 찍어도 이렇게 나올 거야. 제기랄.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진짜든 뭐든 무슨 상관이겠어. 그새끼들 엿 먹이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아무튼,우리가 제대로 된 한 방을 날려야 한단 말이야. 자네 듣고 있나?”
솔직히 할 수만 있다면 제영 역시도 한 방을 해진에게 날리고 싶기도 했다. 그 한 방을 무기로 그와의 관계를 단박에 그만둘 수만 있다면이 추잡한 짓거리에 동참해 줄 의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제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괜히 허튼짓으로 해진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남자는 항상제영이 가장 힘들어할 만한 방향만을 선택했다.
그러니 제영은 이 시련을 담담히 참아 내다가 끝을 내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이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제영은 듣고 있냐는 상무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는 만족스러운 눈치가 아니었다. 제영은 그가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배 차장만큼은 못하더라도 이 상무를 만날 때면 몸을 숙이고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에게서 떨어질 콩고물이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소한 맛에 홀리기에는 몸도 마음도 성치 못했다.
제영의 떨떠름한 태도에도 이 상무는 포기를 몰랐다.
"뭐 들은 것 없느난 말일세, 매번 보고하러 가면서. 내내 보고만 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정말로 보고만 드리고 다른 이야기는 없습니다. 들어갔을 때 인사를 나누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제영의 등에서 땀이 흘렀다. 만약 이자가 제영과 해진의 사이를 알게 되면 제영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걸로 축포를 터뜨리는 데만 신경쓸 자였다. 그렇게 된다면 제영의 삶은 쉬이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로 풍비박산 날 게 분명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봤는데, 그 새끼 그렇게 일 열심히 하는 놈이 아니야.”
"가면 바로 뵐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사실상대기하다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거고요. 실질적으로 대면하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살기 위한 거짓말이 입 밖으로 술술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무는 쉽게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누굴 쉽게 믿어서는 오르질 못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차라리 기획 2팀 사람 중 하나와 이야기를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일개 거래처 직원인 저보다는요."
"내부 사람을 잘못 썼다가는 이도 저도 안 돼.
괜히 나중에 걸리면 더 좇 될 수 있어. 이런 일에는 김 대리가 아주 적격이야. 그러니까 날 좀도와줘. 일성이 계약 따내는 데,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해 줬는지 알지 않나. 날 돕기만 하면 내가 그만큼 김 대리를 밀어 준다니까."
하지만 제영은 그의 말에 숨겨진 속내를 눈치채자마자 발끝부터 차게 식어 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굳이 외부인인 제영을, 거기다가 그다지 직급도 높지 않은 자신을 끌어들이는건 일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설사 제영이 그의 말에 혹해 해진과 관련된 무언가를 그에게 넘긴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헌신짝처럼 버려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그가 내부인이 아닌 제영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취급이나 받는 신세가 서글펐지만 만약 자신이 상무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
백도 가진 것도 없어 적당히 쓰고 버리기 좋을, 만만한 존재라는 것을 제영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해진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항도 못 하는 자신을 발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느끼는 치졸한 즐거움을 취미 삼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의 앞에서는 벗으라는 대로 벗고 다리를 벌리라면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의 성기를 짓뭉개며 웃었던 남자이니 아예 신빙성 없는 추측도 아니었다.
제영은 저항하고 싶었다. 그를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모두에게 자신의 이 더러운 속사정을 들키고 말거라는 두려움이 제영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그러니까 이러는 거지. 김 대리가 그 뭣도 모르는 새끼한테 살살 알랑방귀를 뀌어 가면서 이것저것 물어봐. 그러면 술술까지는 아니 더라도 뭔가 건덕지는 건질 수 있을 거 아니야. 그걸 나한테 알려 주면 돼."
"상무님, 죄송하지만."
"아니면 내가 생각해 둔 계획인데 이런 건 어때. 그 호모 새끼를, 그런 데가 있다며. 여자 대신 남자들이 옷을 벗고 빨아 주는 그런 곳. 자네가 스리슬쩍 그 새끼한테 이야기를 흘리고 데려간 다음에 사진을, 아니 겨우 사진이 뭔가. 요즘기계가 얼마나 좋은데. 동영상이라도 찍어 오면 그거야말로 아주 그놈들한테 제대로 된 한 방이 란 말이야."
그가 점차 목소리를 높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제 바닥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바닥을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끝없이 쏟아 낼 것만 같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불쾌한 눈빛이 따라붙었다. 술기운에 덜덜떨리는 상무의 손가락이 더듬더듬 앞을 가르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고 따져 묻기도 전에 그의 질척한 손가락이 제영의 뺨을 긁었다.
"아까 그 사진 속 남자가 뭔가 낯이 익다더 니.
자네, 낯짝이 그 새끼랑 닮았어. 자세히 보니 남자랑 붙어먹게 생겼어."
그러고는 음흉하게 입을 씰룩거렸다. 제영은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거세게 쳐 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맹렬한 저항이었다. 비워진 병만큼이나 상무의 이성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제영은 여기서 도망가고 싶었다.
"상무님, 이제 그만."
그러나 제영이 그를 부르자마자, 상무는 분에 못 이긴 듯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쾅 하는 소리에 훤히 밖이 보이는 주방 안의 주방장도,문 쪽에서 서로 장난을 치던 커플도 모두 제영과 상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제영에게 흑다가왔다.
"야, 이 시발 놈아. 내가 이러는 게 우스워?
응?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고작 그런 놈한테 당할 것 같아."
피할 사이도 없이 그가 제영의 멱살을 잡았다.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온갖 음식물과 뒤섞인 술 냄새가 났다. 명백히 역겹고 더러운 냄새였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쏟아 내는 상무를 떼어 놓으려 했지만 술에 진탕 취한 남자의 손아귀 힘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목을 조여 왔다. 제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놀란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정작 제영을 돕기 위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소란스럽고 흥미진진한 술자리 해프닝에 불과한듯했다.
"이거 놓으세요.”
제영이 겨우 몸을 비틀어 상무의 손을 뿌리쳤다. 그 탓에 상무가 휘청거리며 테이블 위의 술병들을 건드리는 바람에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커플 중 여자 쪽의 놀란비명 소리가 작게 터졌다. 구경만 하던 주방장이 그제야 달려 나왔다. 의자에 주저앉은 상무가 이 새끼, 저 새끼를 연발하며 욕을 계속했다.
제영은 제 짐을 챙겨 도망치듯이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곳에서 한참 걸어 멀리 떨어진 곳에 와서야 제영이 멈춰 섰다. 목 안이 까슬하니 아파 와제영이 침을 뱉었다. 술과 피와 침이 섞인 연분홍의 액체가 바닥을 더럽혔다. 제영은 자꾸만 목을 큼큼거리고 계속 걸었다. 지나가는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셔츠는 흐트러졌고 술기운이 올라 얼굴도 불그스름했다.
다행히 먹살 잡혔던 곳은 넥타이에 쓸린 부분만 제외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엉망인 게 분명한 자신의 모습에 제영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남자가 옷을 벗고 빨아 주는 곳이라."
제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랬던 자신이 병신 같아서 또 웃음이 나왔다.
"그 새끼는 그런 데 갈 필요도 없어."
자신이 다 그 짓을 해결해 주고 있었다. 여전히 목이 따가워 제영이 다시 한번 목을 큼큼댔다. 입안에서는 피 맛이 났고 봉변을 당한 목덜미가 따가워 눈물이 찔끔 났다.
택시를 잡아탄 제영은 제 집 주소를 이야기 하다 이내 고쳐 다른 주소를 불렀다. 부러 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간 것이었다.
막다른 길에서 찾은 유일한 도피처였다. 술 취한 승객에게도 넉살 좋게 말을 거는 택시 운전사의 농담에 대충 웃어 주고는 창밖을 보았다.
늦은 밤, 어두운 강물과 거기에 비친 별과 같은 빛들이 제영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검은 물결이 느릿하게 넘실거리는 걸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속이 울렁거렸다.
"손님,속이 안 좋으세요? 여기서 토하시면 안됩니다."
조용히 있다가 입을 막는 제영을 보고 운적석의 기사가 기겁하며 말했다. 제영은 손을 내저었다. 그저 졸린 것뿐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나 주정뱅이의 말을 의심스러워하던 기사는 속력을 높였다. 이 손님이 진상을 부리기 전에 얼른 목적지에 내려 줘야겠다고 마음먹은 듯했다. 그 덕에 생각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곧장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불 꺼진 창을 보아하니 집에 아직도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제영은 건물 앞에 작게 꾸려진 운동 시설 옆의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했다. 그런데 어쩐지 스토커라도 된 기분이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늦은 밤에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제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혹여나 정말 변태라고 오해라도 할까 봐 제영이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여자 구두 소리라도 들리면 희주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짓도 몇 번하다가 그만두었다. 제영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을 보니 이러다가 신고라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영이 구두 속에서 꽁꽁 얼어 가는 제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손도, 발도 시렸지만 다시 돌아가거나 안에 들어가 기다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더 있어야 하나, 애는 도대체 어디를 가서 들어오지 않는 건가 하고 아직도 불이 꺼져 어두컴컴한 창을 올려다보았다. 전화라도 해 볼까 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려는데 점점 멀어지던 발걸음 소리 하나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제영 씨?”
목도리로 입까지 둘둘 싸맨 희주가 제영을 불렀다.
"뭐야, 연락도 안하고 갑자기."
전화라도 하지 그랬냐며 제영을 나무랐다.
하지만 그녀의 잔소리도 제영이 술 냄새를 풀풀풍기며 추워, 하고 중얼거리자 더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제영은 코트만 벗어 던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그녀의 침대로 기어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옷이라도 갈아입으라고 말하는 것도 무시했다. 술주정뱅이에게 어떤 말을 해도 다 무익하다고 판단한 그녀가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들어가기 직전 쯧쯧거리는 것은 빼먹지 않았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나쁘지 않아 제영은 자기도 모르게 집중했다. 중간중간 애인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섞여 들어 자장가 같기도 했다. 희주의 냄새가 밴 이불은 포근했고 따뜻했다. 짙은 네이비색의 두툼한 이불은 이사 선물로 제영이 준 것이었다.
'이것보다 꽃무늬 있는 저게 더 낫지 않아?
여자들은 이걸 더 좋아할 거 같은데.'
'여자라고 다 꽃무늬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제영이 마트의 이불 코너에서 희주가 고른것 대신, 저 멀리의 화사한 꽃무늬 이불을 가리키자 애인이 그렇게 말했다. 제영은 그때가 그렇게 옛날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된 추억같이 느껴졌다. 이불을 코까지 덮고 눈을 감는데 웅웅대는 보일러 소리가 들렸다.
아마 추위를 많이 타는 제영을 위해서 보일러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제영이 다시 눈을 뜨고는 여기저기를 훔쳐보았다. 저런 게 있었나, 새로 산 건가 하고 눈만 굴리며 살펴봤다.
이곳저곳 애인의 취향대로 꾸며진 집은 조금 짐이 많다고 느껴지는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창문은 넓으나 야경을 영 광이라 애인은 항상 블라인드를 내리고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영이 몸을 웅크린 채로 목을 더듬다가 손을 내려 배를 문질렀다. 이제 목은 괜찮았다. 아직도 붉게 부은 자국이 남아 있지만 그리 거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게 문제였다. 배꼽 아래의 살갗들이 간질간질한 것이 알레르기가 번지고 있는 듯했다.
끝까지 최악인 술자리였다. 처음에는 상무에게 화가 났고 그 다음에는 울적해졌으나 이제는 짜증이 났다. 혼자 난리를 치며 자신까지 끌어들이려다가 못 참고 분풀이를 해 댄 것에 역정이 나는 것도 잠시,거기에 제대로 받아쳐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불만이 더 커졌다. 어차피 앞으로 상무의 눈 밖에 날 것이 분명한데 한 번은 뻗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도 해진에게 당하다 보니, 이제는 이 태도가 버릇이 되어 버린 건가 하고 스스로에게 한탄했다. 물소리가 그쳤나 싶더니 희주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야, 옷 좀 입고 나와라."
하늘색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나온 희주에게 제영이 말했다.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몸이 제영의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질러 갔다.
"뭐야,갑자기 내외하는 거야. 그럼 빤히 쳐다보지 말고 눈 좀 감고 있든가.”
도리어 장난스럽게 타박을 당했지만 제영은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해진 역시도,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벗은 어깨나 떨어지는 허리선이 부드럽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여자의 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날개 뼈의 선을 따라서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살결들이 제영의 눈을 사로 잡았다.
열어 둔 욕실에서 나온 따뜻한 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여름이라면 불쾌하다고 여길 만했으나 겨울에는 실내의 건조함을 몰아내 주고 있었다.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입과 코안의 점막이 젖어 가 숨 쉬는 게 편해졌다. 그렇게 아무 움직임도 없이 숨만 쉬어 가며 희주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는 좌식 화장대 앞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젖은 머리카락을 빗고 있었는데 젖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검고 짙었다. 움푹 들어갔다가 나오는 올록볼록한 선을 따라 그림자 진 애인의몸. 살색, 아니 요즘에는 살색이라고 하지 않는 다던데. 하지만 저건 다른 색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희주의, 그러니까 희주만의 살색이었다.
그것을 애인의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보고 있자니 제영은 눈도 머릿속도,온갖 괴상한 일로 얼룩진 마음마저도 마비되는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거리라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으로 콕찍어 볼 법도 했지만 제영은 잠자코만 있었다.
이번에는 거울에 비친 애인의 부푼 가슴이 제영이 눈에 들어왔다. 저 가슴에 매달렸던 때가 기억나 아래가 지끈했다. 거울 너머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웃었다. 제영은 문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은 여자고 자신은 남자였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성애의 형태였다. 아프지도 않게 다정하게 안아 주고 싶었다. 얼굴을 찡그릴 때는 오직 기쁨을 느꼈을 때이기를 바랐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자신을 등지고 있는 게 싫었다.
“오늘 괜찮아?"
용감하게 묻기는 하였으나 덜컥 겁이 났다.
온화한 얼굴로 머리를 빗던 그녀가 갑자기 싫다고 자길 밀쳐 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글생글 웃던 표정이 돌변해 자길 버려두고 남자와 붙어먹은 것을 탓할지도 몰랐다. 해진이 제게 했던 것처럼.
'아니야, 희주는 아무것도 모르는걸.'
아무 대답 없이 일어난 그녀가 걸어와 침대에 앉았다. 제영이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내고서는 목덜미를 더듬었다. 그게 승낙의 의미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의 손길이 간지럽고도 두려워져 제영이 몸을 사렸다. 희주가 그런 제영을 보고 웃더니 목젖 아래를 매만지다가 옷 안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애인은 그대로였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제영이 경계를 풀고 안심했다.
이대로 그녀를 안고서 오늘 일은 전부 잊어버리자 하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가 순간 아차, 싶어제영이 몸을 피했다. 애인이 조금 의아한 눈을했다. 먼저 하자고 한 사람이 이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터였다.
"불 끄고 하자."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쪽팔렸다. 희주는 그런 제영을 보고 황당한 눈치였다.
"나 되게 뭣도 모르는 신입생 꼬시는 복학생이라도 된 기분인 거 알아? 거기다 갑자기 그런 얼굴 하고."
희주가 한 손으로 제영의 뺨을 감싸며 입을 맞추려고 했다. 제 얼굴이 딱히 어떤 얼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녀의 앞에서 맨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해진의 흔적이 희미해지 기는 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 뭐가 남아 있을지 몰랐다. 입술이 닿자마자 제영이 뒤로 피해서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른 불을 껐다.
블라인드도 닫힌 상태라 방 안은 새어 들어오는 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해졌다. 어두워 희주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아까와 비숫하게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제영은 혹시나 희주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얼른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속옷 한 장 남기지 않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제영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남자답게 그녀의 몸을 만졌다.
"부끄럼 타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되게 박력있어."
희주가 제영의 목을 감싸 안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대로 예전처럼만 하면 되었다. 그녀를 기분 좋게 해 주고 입을 맞추고 자신도 기분좋아지고 그렇게만 하면 둘 다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했다. 분명 좋은 느낌에 흥분감이 오르고 있는 데도 제영의 성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억지로 문지르며 세우려고 노력해 봐도 살짝 힘이 들어갔나 싶으면 다시 쪼그라들었다.
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희주가 제영을 불렸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제영이 다시 눕혔다. 초조한 나머지 몸에 힘이 들어간 모양인지 희주가 제영의 손길을 피했다. 거기에 자극받아 손에 쥔 그녀의 살을 놓지 않으려 더 세게 쥐어 버렸다.
"아파."
그 말에 제영이 놀라 손에 떼어 냈다.
"제영 씨. 왜 그래?"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하는 제영을 희주가 끌어당겨 안았다. 몸이 가볍게 떨렸다. 감추려했지만 감추질 못하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제영은 어두운 덕에 그녀의 얼굴도 자신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영은 두려웠다. 병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너무 끔찍한 병이라 다들 손가락질하고 제영조차도 자신을 두둔하지 못할 그런 병. 배가 간지 러웠다. 목도 다시 아프기 시작하는 것 같고 이렇게 몸을 찰싹 붙이고 있는데도 거세라도 당한 것처럼 반응하지 못하는 제 하반신이 미웠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한 가지만 일어났어도 졸도하고 넘어갈 듯한데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와 제영에게 무너져라, 무너져라 고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끝은 좋지 못했다. 제영은 상대가 뭐라고 하든 기가 팍 죽어 얼굴을 들지 못했지만 그녀는 딱히 실망한 것 같지 않았다. 그저 가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그래도 계속 제영이 침울해하자 이번에는 놀리는 걸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발기 부전도 이혼 사유인 거 알지? 이혼감이야, 김제영 씨."
“ 미안.”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웃으며 그렇게 말한 희주가 제영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다가 갈비뼈가 있는 부분을 더듬었다.
"당신 말랐구나. 밥은 먹어?”
"그냥저냥.”
"일이 많아서 그래?”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아."
희주가 등 뒤에서 손을 밀어 넣어 제영의 배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래도 많이 말랐네. 꼭 결혼 앞둔 신부처럼 말랐어. 나는 자꾸 살만 찌고 있는데, 당신이 내드레스 대신 입어야겠어."
희주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귀에 닿는 여자의 목소리가 제영을 안심시켰다. 힘을 풀고 부드럽게 배에 닿은 손길도 좋았다. 가볍게 닿아와 가볍게 사라지는 감촉들이 기죽은 제영을 토닥였다. 여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아주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곁에 있는 사람의 기척을 살폈지만 그녀 역시 잠이 오는 건지 조용했다. 그녀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 눈을 감을 찰나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크게 방 안에 울렸다.
"네 거 아냐?"
희주가 물었다.
"스팸이겠지."
"이 시간이면, 급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확인은 해 봐. 저번에도 회사에 일 생겨서 연락 왔었잖아."
그녀의 말에 제영은 슬그머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결국 침대 아래로 내려가 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모티콘으로 요란하게 장식된 대출 문자였다.
"우리 대출 필요한 건 어찌 알았는지 이 시간에 문자가 다오네."
제영은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려고 했다. 간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단어로만 된 아주 간결한 문자였다.
[집, 지금.]
제영은 자기가 잘못 본 것이길 바라며 눈을 깜박이고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이번에는 뭔데, 또 스팸이야?"
"그냥, 뭐 그렇지."
이번만큼은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핸드폰을 꺼 둘 용기는 없었다. 후일이 두려워서였다. 일찍 잠에 들어 보지 못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무음으로 전환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워서 다시 잘 준비를 하던 희주가 몸을 일으켰다. 시끄러운 벨소리를 따라화면이 번쩍거렸다. 희주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제영은 받지도,그렇다고 끊어 버리지도 못하고 희주를 보다가 다시 핸드폰을 보기를 반복했다.
"누구 전화야? 이시간에."
애인이 물어 왔지만 이번에는 얼버무리는 대답조차 못하고 제영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지금 그에게 갈 수 없다. 사실 가고 싶지 않다'에 더 가까운 '갈 수 없다'였지만 어쨌든 지금은 갈 수 없다.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한 아랫도리가 부끄러워서라도 희주를 두고 갈 수 없었고,괴로운 하루에 괴로운 일을 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갈 수 없었다. 그렇게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핸드폰은 도통 조용해질 줄을 몰랐다. 선을 모르고 제게 달려들어 끝끝내 고통에 찬 신음을 듣고 난 후에야 떨어지는 그와 같은 행태였다. 통화 거절을 누른 다음 바로 답장을 보냈다.
[오늘 못 갑니다. 회사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끝말을 붙일까말까 하다가 붙였다. 그가 화내지 않고 이 거절을 수긍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것이었으나 제영을 비참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한 자, 한 자 눌러 답장을 보냈다.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 성기를 늘어뜨리고 쪼그려 앉아 몸을 섞은 남자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 꼴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같잖고 한숨이 나왔다. 제영이 희주가 있는 침대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이 상황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할거야? 지금가야 돼?"
그녀가 물었다.
"아니,가긴 뭘가. 별일아니야."
제영이 그렇게 답하고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핸드폰이 또 요란하게 울었다. 이럴 때면 제영은 해진이 재벌 2세인지는 모르겠으나 막내아들인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 상무가 뭣도 모르는 도련님,도련님하며 비꼬던 게 생각났다.
만약 어린아이였다면 천사 같은 얼굴로 하는 찡찡거림이 조금 귀찮으면서도 귀엽다고 여길 만했지만 그는 어리지 않았고 난폭하기까지 했다.
"별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전화라도 받아봐."
포기를 모르는 집요한 남자가 이런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문자를 보냈으면, 그냥 알았다 하고 끝내면 될 텐데.'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남자였다면 제영이 여기까지 끌려오지 않아도 됐다. 그렇지 않았기에 상황이 이렇게나 더러워졌다. 일단 전화로 얘기하자고 마음을 바꿨지만 희주 앞에서 받을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좁은 오피스텔에는 어디숨어 들어갈 방도 없었다. 결국 제영이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옷을 다 입고 나자 희주가 침대에서 나와 불을 켰다.
"왜 불 켜. 금방 통화하고 올 테니까, 먼저자."
제영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 시간에 복도에서 통화를 하는 것도 분명 민폐라, 저 끝의 비상구로 향했다. 제영이 들어서자마자 마치 폭죽이라도 터뜨리는 것처럼 비상등이 짠하고 켜졌다. 계단에 앉아 핸드폰을 확인해 봤더 니 그 짧은 시간 동안 부재중 통화만 7건이었다. 그래 놓고는 문자는 처음 것 외에는 없었다.
도대체 전화로 뭘 말하려는 건지 살짝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고 이내 연결되었지만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통화가 연결된것에 감격해 말을 잃기라도 한 건 아닐 터였다.
비상등이 꺼지고 핸드폰의 밝고 푸른 빛이 제영의 뺨에 닿았지만 이미 사람의 인영은 어둠속으로 깊게 가라앉은 후였다.
"여보세요."
-어디예요?
"일 때문에 서울에 없어요. 지방에 내려와 있어요."
문자를 못 본 건가. 제영이 말하며 생각했다.
그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니까 오늘은 못가요. 미안해요.”
제영이 계단에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꺼졌던 비상등이 다시 켜졌다.
-그렇게 내가 보기 싫어?
다시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가 더 진하게 들려왔다.
-그런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가 싫어졌어?
이 새끼가 또 왜 이래. 제영은 당황하고 말았다. 화를 내고 있는 건가 싶으면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고 있으나 말의 내용보다도 그의 목소리나 떨림 같은 것들이 더신경 쓰였다. 그가 또 한숨을 쉬고는 말을 멈췄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진즉에 했으나 말하는 당사자인 제영이 듣기에도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한 게 뻔히 티가 났다.
제영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해진이 보여 주던 그 강압적인 난폭함이 진짜인지,아니면 이같은 연약함이 진짜인지. 속으면 안 된다. 그가 했던 짓을 떠올려 보면 정답이 나온다. 그가 자신을 하등 대접할 가치도 없는 존재로 취급한 것처럼 자신도 똑같이 매몰차게 대해 주면 된다. 이렇게 그가 약해졌을 때 세게 나가야지 있던 정도 다 떨어져 나갈 게 분명했다. 제영이 침을 꿀꺽 삼키고 다음 말을 준비했으나, 해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정말 못 와?
"가는 거야?”
다시 들어와 보니 희주는 옷을 입고 있었다.
"미안,많이 급한 일인가 봐."
“그래?”
제영이 코트를 꺼내 입고 현관 앞에서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희주는 뒤에서 벽에 기대어있었다. 제영은 무심하니 팔짱을 끼고 있는 애인의 얼굴을 보았다. 술기운이 가라앉자 좀 더그녀의 얼굴이 명확하게 들어왔다. 늦은 시간이라 조금 초췌한가 싶었지만 눈빛은 단호하게 반질거렸다. 그 눈동자가 제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할 정도였다.
"오늘 이것저것, 미안해."
이것저것에는 침대 속사정부터 시작해 정말로 여러 가지가 담겨 있었다. 아직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긴 희주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애인을 내버려 두고 간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제영이 입을 떼려고 하는 순간,또 벨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참을성 없는 남자가 보낸 문자 때문이었다.
"가. 기다리고 있나 보네."
희주는 웃으면서 제영을 배웅했다. 감정의 파편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그저 습관적인 웃음일뿐이었다.
제영을 보내고 곧바로 자려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작은 소란만 남겨 두고 가 버린 그의 탓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조금 복잡한 까닭이었다. 결혼 준비는 거의 막바지였다. 날짜는 확정되었고 식장도 드레스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왜 마음이 이다지도 심란하기만 한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손이 차갑게 얼고 그러면서도 땀이 찼다. 애인이 괴로을 때 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그럼 저 역시 제영과 같아져 괴로운 것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희주는 결국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었다. 야경이라고 할 것도 없는 엉망인 풍경이었다. 아직도 아침은 멀어 세상은 죽은 듯이 시커멓기만했다. 언뜻언뜻 검푸른 빛이 보이는 것은 새벽이 밝아 와서가 아니라 온전치 못한 사람의 눈에나 보이는 도깨비불 탓일지도 모른다. 어깨너머로 한기가 느껴졌다. 그 집요한 추위가 소름 끼칠 무렵 갑자기 문자 수신음이 들려왔다.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예의 그 연락처로 무언가가 도착해 있었다.
처음은 멀리서 찍은 사진이었다. 점점 더 선명해지고 가까워져 사진의 인물이 누구라는 것쯤은 예전에 알았다. 이유가 뭘까. 희주는 사진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 송신처로 연락을 해 보거나, 아니면 제영에게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것은 이것이 자신의 심란함을 종결시켜 줄 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희주는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말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또다시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사진이 아니었다. 영상이었다. 희주는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재생 버튼을 눌렀다. 검은 화면에 보이는 것은 없고 그저 낯선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음성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의 끝에 달라붙은 웃음소리가 달콤하게만 느껴져 희주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밖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추워 제영의 몸이 빠르게 식어 갔다. 택시를 잡아타려고 큰길로 나가는 내내,놓고 온 이에 대한 찜찜함과 만나러 갈 이에 대한 꺼림칙함이 뒤섞여 제영의 발길을 잡았다. 묘한 촉이 가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오는 거냐는 해진의 문자에는 곧 가겠다고 보내고 두고 온 희주에게는 '잘 자'라고 보내는 것으로 날 선 촉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어째서 자신의 몸은 하나인 걸까. 차라리 둘이라면 하나는 저택에 사는 횐 얼굴의 남자에게, 나머지는 저 자그마한 집의 여자에게 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그러면 둘 중 하나의 몸이 남자와 무슨 짓거리를 하든 세상 괄시를 받는 호모가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온전한 나머지의 몸으로 애인과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제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직도 술이 덜 깨었나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대로변이더라도 가게들이 거의 문을 닫아 길거리는 음침했다. 다행히 택시 정류장만큼은 가로등 아래에 위치해 있어 환한 빛으로 여기 기다리는 손님이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곧 빈택시가 저 멀리서 보였고 제영이 손을 흔들자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다가왔다.
이번에 잡아탄 택시의 운전사는 조용했으나해진의 집이 있는 주택가 골목으로 진입하자 갑자기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예전에 어디 큰 병원 원장을 태운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여기에 산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댁에 들어가시는 겁니까?"
혹시나 또 돈 많은 부잣집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 물어보는 듯했다. 하지만 제영이 거래처 상사를 만나러 간다고 말하자 김샌다는 것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뭔 사람을 이 시간에 오라 한답니까. 그거 요즘 TV에 나오는 갑질 아닙 니까.”
기사는 제영 대신 욕 한 바가지 해 주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차창 너머로 높은 담장들이 하나씩 색을 바꾸며 지나가기 시작했다. 저 안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어떤 기업의 사장과 그 사장의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이 호사스러운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집 가운데에 있는 길에서 제영은 묘하게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다른 세상이긴 했다. 저 집안의 사람들하고는 영원히 엮일 일이 없었다. 유일하게 해진만이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양옆으로 깔린 높다란 담장들이 제영이 해진을 만나러 가는 길을 재촉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다 망상이었다. 현실인 것은 초저녁부터 먹살잡이를 당하고 잠자리에서는 발기도 안 되는 주제에 애인을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초라한 회사원이라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좀 괜찮겠지.'
일단 그는 자신과 희주가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전처럼 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뭐라 물어보면 애인이 바빠서 만나지 못했다고 대충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핑계와 변명과 거짓말이 작금의 사태를 불러왔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것을 제외하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차가 멈췄고 기사의 말로는 대궐 같은 집의 현관 앞에서 제영이 잠시 쭈뼛거리다가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영이 들어가자마자 틱 하고 정원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반갑지 않은 환영인사였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고 같잖게 자라난 잡초를 제외하고는 정원은 여전히 폐허에 가까웠다. 이미 다 왔음에도 제영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어느 남자가 새초롬한 얼굴로 한참이나 자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새초롬함에,티끌만 한 다정함이라도 보여 준다면 이 새벽을 그와 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듯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제영이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조명이 꺼진 현관과 복도는 어두웠고 끄트머리의 거실에서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린 이름 모를 작가의 사진과 그림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인기척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사뿐사뿐 걷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그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되었다. 해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빛뿐인데도 그의 얼굴이 제영의 눈에 박혀 들었다.
이상한 얼굴. 선명한 듯하면 희미하고, 푸든게 창백한 듯하다가도 옅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제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의 얼굴이 예쁘다고.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해진을 만나기 전만 해도 남자의 얼굴을 예쁘다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다른 누군가가 남자 연예인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적에도 제영의 눈에는 그저 시커먼 남자 놈일 뿐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해진은 달랐다. 작은 꽃봉오리였다가 이제는 완연히 개화하여 짙은 향기를 풍겨 대는 꽃 같았다.
제영은 처음 해진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가만히 눈을 내리깔 때면,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신기해서 이불 속에서 허튼 장난질을 시작한 초기에는 자꾸그의 눈가를 만지작댔다. 제영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선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영이 멈췄다고 하더라도 해진이 계속 다가오고 있었기에 둘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거의 가까이 다가와 이제는 어떤 표정인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러나 조금은 무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제영은 안심이 되었다.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걸 보고 그가 살짝 웃은 것 같았다.
"미안해요. 많이기다렸어요?”
그러나 지척으로 다가올수록 그의 표정은 뭔가 이상해졌다. 풀어져 있던 표정이 제영의 곁으로 가까이 오면 올수록 차갑게 굳어 갔다. 제영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쳤지만 해진이 다가 오는 속도가 훨씬 빨라 금방 그를 코앞에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더니 그가 갑자기 제영의 팔뚝을 꽉 쥐었다. 해진의 손힘이 점차 세지고 있었고 둘 사이의 이상한 침묵이 제영을 겁먹게 만들었다.
"왜, 왜 이래요."
제영이 팔을 비틀어 빼내려다가 손에 쥔 가방을 놓쳤다. 넘어진 가방 안에서 서류들이 쏟아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요?”
"회사 일 때문에 술 한잔 했어요. 이것 좀 놔요. 아파요."
"그럼, 지금까지 누구랑 있었어요?"
제영이 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숙인 남자가 제영의 목덜미 쪽에 코를 댔다. 그가 이런 적이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코를 킁킁거리고 제게 뭐라고 했었지만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잡힌 팔이 아팠고 점차 일그러지는 해진의 표정이 무서웠다. 벗어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커다란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제영을 놓아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어두컴컴한데도 그의 두 눈동자만 반질반질해 왜 그런가 하니 눈물이 차올라 그런 것이었다. 제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을 높게 쳐드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설마하니 저게 날 내려치려고 저기까지 오른 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제영은 짧은 순간에서조차도 해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발버둥 치는 것조차도 잊고 그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일이 벌어진 후에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에게 폭력을 당한 적이 없지는 않으나 이런 종류는 처음이었다. 차가웠다가 순식간에 뜨거워진 자신의 뺨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제영은 고개가 돌아간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해진이 제영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상종 못할 사람이라느니, 자길 또 속였다며. 그러나 제영은 귀가 먹먹하여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야 하는가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답을 내리기도 전에 해진이 제영을 끌고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던 해진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아까 봤던 눈물은 그새 다 말라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독기 같은 매서움만 남아 있었다. 종국에 해진이 제영을 밀쳐 낸 곳은 욕실이었다. 항상 오면 여기서 샤워를 했기에 익숙한 곳이었다.
정사각의 횐 타일이 윤이 나던 욕실. 처음에는 거기에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오물처럼 느껴질 정도의 인테리어라 제영은 이곳에 들어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런 마음은 해진에게 온갖 괴롭힘 직전에 몸을 씻는 곳이 되면서 공포로 변모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자꾸만 휘청이는 제영을 해진이 샤워기 아래에 세웠다. 눈을 한번 깜박하는 순간에 위에서 벼락처럼 찬물이 쏟아졌다. 뒤는 벽으로 막혀 있고 앞에는 해진 이 있었기에 어디 도망갈 곳도 없었다. 옷을 입은 채로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물을 그대로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코트도 대충 매고 온 넥타이도 구겨진 셔츠와 양말까지 전부 젖어 들어갔다.
"더러워."
입을 꾹 다물고 제영이 비 맞은 생쥐 꼴로 변해 가는 걸 지켜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하룻밤에 두 명이라니 난잡한 게 창녀 못지 않네요. 이제 새 손님 받아야죠, 그러니까 씻고와요. 제대로."
그러고는 제영을 내버려 두고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거기에 벗어나지 못하고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이가 달달 부딪힐 정도가 되어서야 물을 껐다. 샤워부스 안에서 걸어 나오는데 철픽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꼭 진흙탕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제영은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보았다.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잿빛 코트가 제영의 어깨를 더욱 끌어 내려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맞은 뺨은 붉어진 채로 살짝 부어올라 있었고 젖은 머리칼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영은 문을 닫고 사라진 해진의 궤적을 따라가 그에게 따져묻고 싶었다. 이런 일을 당할 정도로 자신이 욕심낸 것이 있는지.
제영이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더이상 거울 속의 모습을 바라보기에는 마음이 너무나 참담했다. 입 밖으로 울음 같은 소리가 터졌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없었고 그러기에는 억울했다. 자신은 견딜 수 있을 만큼견뎠고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 주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씻고 오라고 한 의도가 빤하다. 분명 그 짓거리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영은 싫었다. 이대로 돌아가 버릴생각이었다. 돌아가더라도 그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게 분명했다. 자신을 매춘부 취급 했으니, 그넘쳐나는 돈으로 진짜 매춘부를 부르는 될 터였다. 제영이 문을 열었다. 밖에 나가 동사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대로 여기서 나가 다시는 해진을 만나지 않아도 될 만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제영이 문을 열자마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해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썹을 살짝찌푸렸다. 아마 제영이 그 꼴 그대로 나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제영이 그를 외면해 버리고 곧장 현관 복도로 가자, 해진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쉽게 보내 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뒤따라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공포스러웠다. 그로부터 몇 걸음떼지도 않았는데 옷째로 뒷덜미가 잡혔다. 지금만큼은 쉽사리 당할 생각이 없던 제영이 그의 손을 거세게 쳐 냈다.
"내가 잘못했다고 쳐.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근데, 난 충분히 했어. 당신이 그 역겨운 짓거리다 참아 줬단 말이야."
"역겨웠어? 내가?”
"그래, 남자와 그런 짓. 억지로 참아 내느라내가 얼마나.”
제영이 눈을 치켜뜨고 해진을 노려봤다. 그러나 해진은 도리어 아주 침착해 보였다.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이성을 잃은 건 제영혼자뿐인 것처럼 보였다. 당사자인 제영조차도 그의 그런 태도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정도였다.
"더러워? 내가? 웃기지 마. 너야말로, 남자끼리 그런 더러운 짓이나 하면서. 역겨운새끼. 너야말로 더럽고 역겨워."
이번에는 그의 손이 올라가는 걸 발견할 틈도 없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둘 사이를 가로지 르고 제영은 이내 뺨에 통증을 느꼈다. 더듬더듬 차가울 대로 차가운 손으로 제 뺨을 만지며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자초한 거야."
분명히 저항했으나 그건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같은 남자라도 체격 자체가 달랐다. 사이가 좋을 무렵에도 가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가 힘을 주면 제영은 별수를 쓰지 못하고 당하곤했다. 지금 그는 온 힘을 다해 제영을 억압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는 자신이 아니라 해진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매도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다시 뺨을 맞고 숨을 끊을 듯이 명치를 억눌러 와 졸도 직전이 되었을 때는 저항이고 뭐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헉헉대기 바빴다. 그 후로는 전부 해진이 원하는 대로였다.
제가 한 짓인 주제에 제영의 젖은 옷이 잘 벗겨지지 않자 욕을 했다. 거의 반쯤 찢어 내 옷을 벗기고는,흐리멍덩하게 눈을 뜨고 있던 제영이 갑작스레 아래가 파헤쳐지는 고통에 발버둥치기 시작했어도 그는 이 화풀이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프게 키스하고, 아프게 몸을 만지고, 성기를 삽입해 아프게 안을 들쑤셨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해진이 만지는 모든 살갗이 찢어발겨지는 것 같았다. 계속 '어째서'라는 말만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어째서 하필이면 자신이, 어째서 해진을 만나게 되어서.
제영이 손을 흔들며 다시금 해진을 밀어내려했다. 그러나 그대로 손이 눌려 잡혀 더욱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제영이 절망했다. 그는 자신을 보내 주지 않을 셈이었다. 망가뜨리고 부서뜨려서 어디 걷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어 안 그래도 비참한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려고했다. 목 근처를 더듬을 때는 아예 자기를 죽여버릴 것만 같아 제영이 더욱 떨었다. 한 번 제영의 안에 사정을 끝내고 났을 때는 조금 진정이 된 건지 손길이 그나마 부드러워졌다. 혀로는 젖꼭지를 애무하고는 손으로는 제영의 성기를 주물러 댔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발기할 기미가 없자, 아예 입 안 깊숙이 삼켜 버렸다. 뜨겁고 부드러운 구강으로 휩싸이자 제영이 허리를 들썩였다.
"그만해."
그가 제 말을 제대로 들어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애걸복걸하고 말았다. 아픔과 쾌락이 뒤섞여 온전치 못한 제영을 더욱 몰아붙였다. 고통스러웠으나 그러면서도 해진의 이가 성기 끝을 긁을 때면 참을성 없는 허리가 떴다.
결국 그의 입안에 사정하고 제영이 몸을 부들거렸다. 이제는 고통을 앞선 쾌감을 감내하기 위해 몸을 뒤틀다 결국 탁한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해진은 오늘 제영이 한 짓 중에 이게 가장 마음에 든다는 듯이 번들거 리는 입술을 혀로 할으며 웃었다. 제영은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 건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저 또다시 아래에 무언가가 들어차고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와중에 자신이 어디 깊고 깊은 곳으로 침몰하는 있음을 알아챘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로 완전히 침몰하고 있었다. 저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영원히 떠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언제 어떻게 끝이 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해진이 부풀어 오른 물건을 제영의 입가에 들이밀고 빨기를 종용했다. 이미 포기한 상태였던 제영이 입을 열어 벌리자 천장과 혓바닥을 긁으며 그의 것이 들어왔다. 제대로 빨아 보라고 타박하는 소리도 들었지만 더 이상 뭘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결국 해진이 제영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고 성기를 직접 애무했다. 쇄골 근처에 무언가 진득한 액체가 쏟아졌다. 얼마는 입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해진의 정액이었다.
제영이 눈을 감았다. 잠들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러면 또다시 출근을 핑계로 여길 나갈 수 있었다. 다 엉망이 되어 버린 옷 대신, 예전에 두고 간 옷을 입고 택시를 잡아타고 그렇게 가 버리면 된다. 그러니까 일단 잠을 자야 했다. 설핏 잠이 들어가는 도중에 따뜻한 물수건으로 몸을 훔쳐 내는 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이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싶었지만 꽁꽁 얼어붙은 몸에 닿은 그 따스함에 눈물이 찔끔 났고 이제 다 끝이 났구나 하며 잠이 들었다.
깊게 잠들지 못한 게 당연했다. 그저 정신을 놓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라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잠이 깨 버렸다. 제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다행히도 해진은 없었다. 온몸이 아팠다. 얼굴도 배도, 아랫도리도 욱신거렸다.
그런데 사방이 이상하게 밝았다. 창문으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는데 이미 오전은 한참 지난 것처럼 보였다. 놀란 제영이 몸을 벌떡 일으켰고 동시에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일단좀 진정이 된 다음에,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다리를 당겼지만 무언가에 덜컥 걸려 옴짝달싹할수가 없었다. 이불을 걷어 보니 가관이었다. 발목이 한데로 모아져 제영이 하고 왔던 넥타이에 칭칭 묶인 채였다. 왜 다리를 당길 수 없는지도 알 수 있었다. 붙은 발목 가운데에 연결된 또 다른 것이 침대 다리에 묶여 제영을 속박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뻔했다. 하지만 왜 그랬는 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직전의 일로 이미 충분히 성낼 만큼 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싶어제영은 두려웠다. 여기서 뭘 더하든 간에 버틸자신이 없었다. 제영이 풀어내려고 손으로 더듬으며 어디에 매듭이 묶인 건가 찾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해진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아, 일어나셨네요."
준성이었다. 제영은 갑작스러운 준성의 등장에 놀라 다시 이불로 몸을 숨겼다. 준성의 뒤를 따라, 이미 깔끔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은 해진 이 들어왔다. 준성도 해진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상태였다. 특히나 해진은 어젯밤의 그 모습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방에서 새벽녘의 일을 겪은 사람은 오직 나체로 남겨진 제영뿐인 것 같았다. 제영의 곁으로 성큼성큼다가온 해진이 갑자기 제영이 덮고 있던 이불을 빼앗았다. 제영이 당황할 틈도 없이 해진이 배위로 올라탔다. 그 탓에 준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 자신의 하반신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사실에 제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왜이래요. 해진 씨.”
제영이 몸을 들썩였지만 다리 끝이 묶여 있고 상체는 해진에게 눌린 채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준성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그 기척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건 소름 끼치게 노골적이었다.
"일단 상황을 보아하니, 합의된 건 아니구나."
해진의 등 너머에서 찰캉대는 소리가 들렸다. 준성이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나도 이런 건 싫은데, 범죄 같잖아. 아니, 범죄네."
준성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해진은 제영의 부은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지르고는 뭔가를 가슴팍 위에 던졌다.
"이건 당신 잘못이야. 명백하게."
제영은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하지만 진하게 느껴지는 싸구려 딸기 향을 맡자, 무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배 차장이 억지로 가방에 쑤셔 넣어 주었던 콘돔이었다.
"이런게 그여자 취향이에요?”
해진이 제영의 목을 쥐었다.
"만약 어제 당신 자지에서 이 향이 났으면 입에 넣었을 때 물어뜯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은 걸 아주 다행으로 여겨요.”
그러고는 제영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아주 찝찝하단말이에요. 목에는 이런 것도 남겨 오고.”
그건 오해였다. 희주와는 아무 짓도 못 했다.
제대로 발기하지 않아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예방책을 준비했죠."
해진이 제영의 부르튼 입술을 만지면서 말했다. 그러나 거기보다는 아래를 만지는 손길이 더 선명했다. 해진의 양손은 머리맡에서 제영의 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래에 닿은 손은 준성의 것이었다. 만지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해진도, 준성도 듣지 않았다.
"주변이랑 안쪽까지 부었는데 설마 여길 때렸어?”
"아니. 이 사람 술 몸에 안 받는 거 마시면 알레르기 반응으로 자주 그래. 아마, 어제 그 여자 친구랑 오붓하게 한잔하셨겠지.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그것도 오해였다. 하지만 혀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갑자기 성기 끝에 뭔가 차가운 게 닿았다. 제영이 놀라 몸을 들썩였다.
"제대로 잡고 있어 봐. 아니다,내가 무릎 위로 올라타는 게 낫겠다. 꽉 잡아."
준성이 불평하며 말했고 이내 무릎 위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해진 씨, 뭘 하려는 거예요."
움직이지 않는 혀를 겨우 움직여 그런 걸 묻는 게 고작이었다. 차가우면서도 축축한 감촉이 성기 끝을 맴돌다가 사라지자 제영이 몸을 떨었다.
"예방책이라니까요. 당신이 당신 자지를 함부로 못 놀리도록 작은 장치 같은 걸 해 두는 거예요. 끝에만 살짝 구멍을 뚫어서 예쁜 걸 달아놓을 거예요. 희주 씨가 보면 기겁할 만한 걸로요"
무얼 한다는 걸까. 제영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제영은 두렵고 두려워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몸부림은 그저 몸부림으로 끝이 났다. 두 장정이 제 몸을 이렇게 누르고 앉아 있는데 벗어날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제영을 내버려 두고 해진과 준성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빨리 하라는 해진에게 준성이 재촉하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
무언가에 제 성기의 겉껍질이 당겨지는 듯했으나 보이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준성이 다시 한번 해진에게 꽉 잡으란 이야기를했다. 그리고 기어코 일이 터졌다.
예민한 부위로 쏟아지는 아찔한 통증에 제영이 비명을 지르고는 숨을 삼켰다. 아프다. 아프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껍질을 관통해 후벼 파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누구든지 좋으니까. 제영이 빌고 또 빌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얼굴 주변의 침대 시트는 이미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했어?”
"이제 거의,꼽기만 하면 돼. 계속 잡고 있어.
아, 됐다."
해진이 제영을 그대로 잡은 상태로,상체만 조금 돌려 그것을 보았다. 성기 끄트머리에 작은 반원의 링 하나가 달려 있었고 그 끝에는 동그란 볼로 링이 빠지지 않도록 잠긴 상태였다.
준성이 상처 주변을 다시 한번 소독했다. 그러나 이전의 통증 탓에 제영은 따끔함도 느끼지 못했다. 해진과 준성이 몸에서 내려오자마자 아픔을 누르려고 제영이 몸을 웅크렸다. 다리 사이를 감싸 쥔 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덜덜 떨렸다. 손바닥에 닿은 차갑고 낯선 것이 성기에 매달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같이 흔들렸다. 그때까지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제영이 이를 악물었다. 이게 정말로 내 잘못에 대한 벌인가. 도대체 뭐 때문에,도대체 왜 자신이. 답이 없는 그런 의문들이 제영을 좀먹어갔다. 눈물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몸 안에서 용암이라도 끓어 넘치는 것만 같았다. 눈가도 아랫도리도 뜨거워 미칠 지경이었다. 다 거짓말이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것도, 전부 다거짓이었다. 거기에 먼지만큼이라도 진심이 있었다면 제게 이럴 리가 없었다. 제영은 울음을 참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참을 수도 없었다. 흘러넘치는 눈물과는 다르게 파삭파삭하게 메마른 삶이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해진은 알몸의 제영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준성이 흐느껴 우는 제영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해진이 고갯짓으로 준성에게 신호를 보내자, 둘은 제영을 방에 내버려 둔 채로 거실로 나왔다.
"약은 일단 일주일 치 진통제 강한 거랑 소염제 들었으니까 꼬박꼬박 먹이고. 소독은 하루에 두 번. 사나흘 지난 다음에 주변이 가렵다거나 계속 부어 있으면 연락해."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제영의 저런 모습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충동적인 거야? 아니면 계획적인 거야?"
준성이 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바뀌는 건 없잖아.”
해진이 무심하게 답했다.
"어쩌려고 그래?”
"뭘?"
"저사람, 저렇게까지 해야겠어?"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 일 다 끝났으면 가봐."
준성은 익숙해졌나 싶었던 제 친구의 성격에 혀를 찼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준성은 그들의 일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해진과의 온건한 관계만 유지할 정도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 족했다.
"저 상태로, 아물기 전에 발기하면 아프겠지?”
가방을 챙겨 들고 갈 준비를 하던 준성이 그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너 같으면 생자지를 뚫어 놨는데 안 아프겠냐? 괜히 건드리지 말고, 혹시나 아침에 발기하면 옆에서 애국가나 불러 줘. 저 사람 아예 돌아버리기 전에."
준성이 이마를 짚고는 바로 등을 돌렸다. 딱히 배웅 받을 생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향했다. 하나는 현관으로, 하나는 제영에게로. 준성이 나가는 길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가방 하나와 서류들을 보고는 혀를찼다. 하지만 저와는 상관이 없었고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해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도 이불을 덮은 채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 슬그머니 누워 이불 위를 대충 토닥거렸다. 그 둥그런 이불 더미는 해진을 밀어낼 힘도 없는지 가만히 눈물을 짜고 있었다. 잠시 있다 다 쏟아낸 건지 소리가 잠잠해졌다. 해진이 이불을 끌어 내리고 퉁퉁 부어 있는 제영의 눈가를 더듬었다. 아프기는 아팠는지 눈가에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이러니 또 안쓰러운 마음이 샘솟아 이때껏 느낀 배신감을 조금 옆으로 치워 두고 그를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해진이 제영의 입 틈바구니에 손을 넣어 벌리고는 준성이 주고 간 약과 예의 그 캡슐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제 입에 머금은 물로 제영이 약을 삼키게 하였다. 잠깐이 반항이 있었지만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몽롱한 표정으로 뻐끔거리는 입을 보아하니 오ㅐ, 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것도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해진이 제영이 덮고 있던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 그를 끌어안았다. 몸에 열이 있는 듯 뜨거웠지만 원체 차가운 사람이라 이편이 더 나아보였다. 그를 더 가까이 당겨 안고 해진이 제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감겼던 제영의 눈이 한 번 떠졌다가 다시 감겼다. 해진은 그가 제대로 들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그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겨울날에 함박눈이 내려 쌓이는 것처럼 가슴 안쪽에 무언가 충만함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해진은 웃고 제영은 울었다. 그게 전부였다.
* * *
걷는 걸음 하나하나가 가벼워 제영은 기분이 좋았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첫 발자국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눈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얇은 가죽 너머의 제 발의 온기로 녹여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이 차갑지는 않았다.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제영 씨."
순간 아차 싶은 제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기분에 취해 그만 일행을 뒤처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영이 잠깐 멈춰 있는 동안, 애인이 걸 음을 빨리하여 제영의 곁에 섰다. 여자의 마음은 이런 것도 서운해할 만하기에 제영이 애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화난 기색은 전혀 없이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 주었다. 제영이 안심하여 같이 웃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살짝흐트러져 있었다. 제영이 애인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 하나를 떼어 주기 전, 놀라지 않도록 이름을 부르려다가 혀를 깨물었다. 옛 사람의 이름을 부를 뻔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굳어 있자 애인이 제영을 올려다보았다. 제영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산스럽게 정돈해 주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여자는 묘한 눈빛으로 제영을 추궁했다. 제영이 혀를 깨물기 전에 슬며시 내뱉어낸 그 작은 소리를 들은 듯했다.
토라진 걸까. 토라진 걸지도 몰라. 제영이 애인의 눈치를 살폈다. 횐 이마의 가운데가 살짝찌푸려져 있어서 조마조마한 마음 가운데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해진 씨.”
고개를 돌리고 있던 자그마한 여자가 그제야 제영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틈을 타, 제영이 냉큼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다행히도 뿌리치진 않았다. 길을 걷는 동안 그녀의 툴툴거림에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화낼 만도 하였다. 반대의 상황이라면 제영 역시 서운해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화내는 게 당연하였다.
그래도 손잡는 것을 허락해 주고 있는 걸 보면 크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제영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희주와 헤어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며 눈물짓던 희주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좋은 여자였다.
결혼까지 준비할 만큼 가까웠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전부 제영의 탓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이유로 파혼과 동시에 이별을 고했으니 욕을 먹어도 쌌다. 나쁜 짓을 했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도 좋지 못한 이야기가 돌고 있었지만 그것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에 우울해지기도 전에 제 앞의 애인을 보면 살그머니 기쁨과 사랑이 솟아오른다. 닿아 있는 손바닥을 타고서 그녀의 온기가 심장 가까이까지 전해졌다.
'사랑하고 있구나.'
동시에 사랑받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제영이 발걸음을 멈추자 애인도 멈춰 섰다.
몸을 숙이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애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부끄러워하다가 눈을 감았다. 이마에 닿는 애인의 잔머리가 간지러웠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속삭여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바보 같아 보일 듯해 겨우 참았다. 그러나 둘만의 공간에 도착한 후에는 참지 못하고 울컥 쏟아내고 말았다. 부드러운 몸, 손아귀에 꽉 들어차는 살덩이들. 제영은 애인의 몸 위에서 헐떡였다. 사정 후에 노곤해져 그대로 그녀를 깔아뭉갠 채로 털썩 엎드렸다. 물컹한 성기가 배를 짓누르는 게 불쾌할 법도 한데 그녀는 가만히 제영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쓰다듬어 주었다.
행복하다. 제영은 붕 뜬 정신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오밀조밀하니 예쁘장하게 생긴 미인이 이렇듯 제 곁을 지켜서고 있으니 어디 불행의 티끌이 들어올 구멍조차 없다. 결혼이 엎어졌다는 사실에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조금 소원해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남녀 사이에 으레일어날 만한 일이니 잠깐의 수군거림만 참으면 다시 예전과 같아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괴로 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이 이 사람과의 앞날만생각하면 됐다.
'결혼까지 가게 될까.'
오랜 기간 사귀어 온 여자와의 결혼이 얼마전에 파투가 난 마당에 새 애인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인이 결혼하자고 말하면 제영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제영이 눈을 감고 가만히 애인의 가슴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깊게 울리는 소리가 제영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더니 이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흘러넘쳤다. 놀란 애인이 일어나 제영의 눈물을 훔쳐 내었다. 애인이 계속 제영의 이름을 부르며 달래 주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어린애처럼 엉엉대지 않는게 용할 정도로 제영은 계속 울었다. 애인의 땀에 젖은 긴 머리칼을 손으로 움켜쥐고 꽉 끌어안은 채로 눈물이 바닥까지 흘러 내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울어 댔다.
하도 울어 대서 눈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제영이 그 따가움을 잊기 위해 눈을 깜박대며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깜박대면 댈수록 횐여자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제영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깜박거렸다. 품 안의 애인이 점점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져 갔다. 순간 아래가 지끈했다. 아픔이었다. 착각이 아닌진짜 고통이었다. 제영이 제 다리 사이를 움켜 쥐었다. 꿈에서 조차 두려워질 정도의 통증이었다. 몸이 벌벌 떨렸다.
"아파요?”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꿈처럼 아득했으나 현실의 목소리였다. 제영은 눈가를 찡그렸다. 해진이 아픔을 달래 주려는 것처럼 제영의 손 위로 살짝 제 손을 겹쳐 왔지만 도리어 겁먹게 할 뿐이었다. 통증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현실의 목소리에 끌려나와 제영은 잠에서 깼다.
"약 기운이 떨어졌나 봐요. 약이랑 소독할 거가져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곁의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도 같이 딸려 갔다. 그 잠깐 동안 이불 밖 공기에 노출된피부에 얇게 소름이 돋은 걸 본 해진이 얼른 다시 제영을 싸매 놓았다. 그러고는 대충 걸쳐 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해진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제영이 몸을 일으켜 이불을 벗겨 내었다. 코가 꽉 막힌 것처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입을 벌리고 개처럼 헥헥거렸고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온몸이 축축해 물에 젖은 종이 같았다.
사타구니를 더듬다가 아픔 속에서도 느껴지는 괴상한 감촉에 제영이 몸을 떨었다. 침대맡의 조명등을 켜자 방 안의 어둠이 밀려났다. 그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제영은 자신의 다리 사이를 살폈다. 제 몸에 달려 있는 살덩이가 아닌 것 같았다. 살짝 들어 올려도 감각이 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욱신대는 통증은 여전했고 그게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젖은 몸과는 다르게 버석하니 마른 혀로 중얼 거렸다.
"너무하잖아."
소리라도 지르며 통곡을 하고 싶었지만 제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려 다보이는 온몸이 울긋불긋했다.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흡사 곱사등이처럼 몸을 잔뜩 굽히고 제영은 제 성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거기에 달린 것을.
여기에다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을까. 끝에서부터 서서히 썩어 들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뚝 하고 떨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 먹은 것처럼 살 속에 그것이 쏙 파묻혀 있었다. 아픔을 참고 제영은 성기에 달린 것을 살짝 당겨 보았으나 자신의 살 껍질이 같이 딸려 오는 걸 보고 더 절망했다. 보기 싫으면서도 이게 정녕 현실인가 싶어서 자꾸만 살피게 되었다. 차라리 아까의 꿈이 더 현실 같고 지금이 꿈같았다. 아주 지독한 악몽이었다.
제영은 그 주변을 더듬거리며 제 살에 붙은 걸 떼어 내려고 했다. 동그랗게 달린 것을 살살돌리면 풀릴 듯한데,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진이 오기 전에 얼른 풀어내고 여기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상처가 따끔거리기만 할 뿐 풀릴 기미가 없었다.
"만지지 말아요. 덧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그가 횐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거기에는 물컵과 약봉지,소독용 솜과 같은 잡다한 것이 담겨 있었다. 제영은 해진이 오자마자 이불을 덮어 제 몸을 숨겼다. 해진이 가져온 것을 내려두고는 잔뜩 쫄아서 구석으로 도망간 제영을 한 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이불을 꼭 붙들고 시선을 피하던 제영이 해진을 쳐다보았다. 달려들어 따져야 하는 게 맞고 그러고 싶은 마음뿐인데, 낯선 이에게 잔뜩얻어맞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덜덜 떨어 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제영은 눈앞의 남자가 무서웠다. 작게나마 남아 있던 애틋한 마음 따위는 공포와 분노에 섞여 들어 다 사라졌다. 제영이 몸을 좀 더 웅크리고는 고개를 이불에 파묻었다. 또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대로 해진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는 흑 다가와 제영을 이불째로 잡아 당겼다. '어,어,'하는 사이에 또다시 침대 가운데로 끌려오게 되었다. 해진은 제영의 등을 침대 헤드에 바짝 붙여 앉혔다.
"추우면 이불은 어깨에 덮고 있어요. 다리 벌리고 밑에만 들춰 봐요."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했다. 사람이 수치스러워할 만한 말을 하면서도 눈빛 한번 흔들리는 법 없이 일상 대화하듯 말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몸이 아플지언정 정신은 멀쩡하여 똑같이 대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영이 생명줄을 움켜쥐듯이 이불을 꼭 쥐고서 그 속에서 다리 사이를 숨기듯 무릎을 당겼다. 가져온 것들로 소독할 준비를 하던 해진이 제영의 꼴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쳐다보는 것이 꼭 제영을 몰아붙일 때 같았다. 제영이 어깨를 움츠렸다.
가만히 보고 있던 해진이 제영의 턱을 들어올려 뺨을 가볍게 때렸다. 소리도 없는 가벼운접촉일 뿐이었지만 이전 밤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바람에 해진이 이불을 거칠게 뒤로 젖혀 넘기고 무릎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동안 변변찮은 저항조차 못했다. 커다란 손이 불쑥 제영의것을 낚아챘다. 긴장한 나머지 허리 줄기가 빳빳하게 섰다. 상처 입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닌지 더듬어 오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손길의 주인이 이 일의 원흉이니 그렇게 좋게 볼 수만도 없었다. 거기다가 손길은 조심스럽긴 하나, 표정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던 손이 기어코 검지 끝으로 반원 형태의 금속을 살짝 건드렸다. 사색이 된 제영이 해진의 손을 다급하게 떼어 냈다.
"아, 미안. 아팠어?"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 해진이 젖은 솜으로 꼼꼼히 소독하기 시작했다. 상처 안쪽까지 스며 들도록 누를 때마다 제영이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투명한 연고를 발라 주는 게 처치의 끝이었다. 자기가 한 짓이면서도 정성스럽기 그지없었다. 연고로 반들거 리는 손가락으로 은근히 회음부를 긁고는 해진이 물수건으로 제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약 봉지를 뜯었다.
"이거 빼 줘요."
제영이 해진의 팔을 붙들고 애원했다. 하지만 해진은 싫어,하고 얄밉게 대꾸할 뿐이었다.
"헤어질게요. 정말로 다시는 안 만날게요. 그러니까 이거 풀어 줘요."
알량한 거짓말이 예전과 같은 효과를 발휘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성난마음을 조금은 풀어 줄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구걸하듯 빌다 보면 불쌍해서라도 그가 그만 두지 않을까했다. 비상식적인 짓거리였다. 동의도 없이 남의 몸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준성의 말대로 범죄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얻어맞아 팔다리라도 하나 부러졌으면 경찰에 신고라도 할 테지만 이런 일은 어디 말할 수도 없었다. 해진 이 제 팔을 제영의 품에서 빼내려고 하자, 제영이 더욱 매달렸다. 냉랭한 태도와는 다르게 피부 거죽만큼은 따사한 느낌을 주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제영은 이순간 그 당연한 것에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만신창이였다.
해진이 제 팔을 붙든 제영의 손을 겹쳐 잡았다. 이대로 매섭게 뿌리쳐질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제영의 손과 손목, 그리고 팔뚝과 어깨를 손바닥으로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붙잡고 제 품으로 꽉 안아 주었다. 제영은 해진이 제간절한 부탁을 들어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이토록 처참하게 다룰 만한 이가 아니라 연민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면 다행이었다. 등에 닿는 해진의 손가락들이 등뼈의 올록볼록한 길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다가 허리에 닿자 다시 끌어 안아 왔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그냥 그 여자 계속 만나요."
"뭐?"
가슴팍에 푹 파묻혀 있던 제영이 고개를 들었다.
"뭐하러 헤어져요. 이렇게 당신이 좋아한다는데, 그냥 계속 그 여자도 만나고 나도 만나고,결혼하고 나서도 나 만나고. 그렇게 해요. 지금까지 계속 해 오던 것처럼.”
"무슨 말이에요?"
아둔한 표정으로 제영이 해진을 쳐다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해진이 살갑게 웃으며 말을이었다.
"허락해 줄게요. 이 구질구질한 짓거리를 계속 원하는 당신 의사를 존중해서."
그는 존중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거 나, 아니면 제영을 조롱하려고 그런 단어를 쓰는 게 분명했다.
“허락?"
해진이 제 이마를 제영의 이마에 살포시 갖다 대었다. 이마가 닿고 코끝이 스쳤다.
"제영 씨는 내 거잖아요. 내 사람 하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내 허락 받고 만나야죠.”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이, 장난기 가득한 가벼운 말소리가 제영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그 여자랑 섹스해도 돼요. 물론 그 전에 내허락을 받아야 하겠지만.”
제영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해진을 밀어내고 품에서 벗어났다. 뒤늦은 저항에 해진은 너스레를 떨며 놓아주는 척하다가 그대로 제 몸으로 제영을 깔아뭉갰고 한쪽 무릎으로는 제영의 허리를 찍어 눌렀다. 버둥거리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또다시 개처럼 헥헥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제영을 보고서도 놓아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뒤에서 제영의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해진이 성기를 잡아챘다. 이번에는 자기가 붙여 둔 그걸 뜯어낼 것처럼 세게 잡아당겼다. 제영이 아프다고 몸을 비틀어 댔지만 그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여자랑 하고 싶으면 미리 내게 얘기해요.
당신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내가 허락해 줄지 말지를 결정할 거니까. 뭐 나중이야 어떻든 간에, 당분간은 이걸 함부로 놀리지 못하겠지만요"
또다시 땀범벅이 된 제영의 온몸에 진한 피로감이 덮쳐 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듯한 상황 속에서도 몸뚱이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헉헉대는 통에 숨소리만 더 커져 갔다.
이제 약을 먹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는 소리 다음에는 약봉지가 부스럭 대는 게 파도 소리처럼 고막에 닿아 왔다. 제영은 눈을 감았다. 자면 안된다고 타이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도 눈을 뜨지는 않았다. 제영은 눈은 꽉 감고 다시 잠들어 꿈을 꾸고 싶었다. 아까와 같은 괴상한 꿈이라도 현실보다는 나을 듯싶었다.
'괴로워.'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너무 울어 눈물은 나오지 않고 비루한 흐느낌만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남자의 흐느낌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은 단하나도 없었다.
제영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등을 토닥거려 주던 해진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제영을 집에 돌려보냈다. 그 궁궐 같은 저택 어디 구석에 가둬 놓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던 제영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무슨 꿍꿍이속인지 의심스러워 더 불안해졌다. 잔뜩 창백해진 얼굴로는 그런 불안조차 숨길 수가 없었기에 눈치 빠른 남자가 차분히 답해 주었다.
"전 당신을 사육하려는 게 아니라, 사랑하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제영을 가볍게 포옹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또다시 빌려 입게 된 커다란 코트와 목이 시려 보인다며 둘러 준 목도리를 허물 벗듯이 바닥에 남겨 두고 제영은 요란스러운 무늬의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며칠 동안 주인없이 비워져 있던 집은 보일러를 틀어도 따뜻해질 기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가 나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육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장난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해진은 충분히 제 삶을 뒤흔들고 있었다. 집에 데려다 둔 것은 그저 시한부의 가석방이 아닐까. 내버려 뒀다가 또 이리저리 트집을 잡아서 엄한 재판관노릇을 하며 괴롭힐지도 몰랐다. 제영이 옷 너머로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자그마한 것이라 옷너머로는 있는지 없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생경한 감각만큼은 확연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랑 같은 것을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 사랑하여 괴롭혔다는 것은 일곱 살배기 어린애들이 제 감정을 혼동할 때나 하는 말이었다. 그의 미숙함이 정도가 심하여 자신을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착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화가 나서 집어 던지고 밟고 딱 그짝이었다.
그러다가 부서지면 새것을 사겠지.
후일에 해진은 새것과 희희낙락하며 놀아나겠지만 부서진 제영의 삶은 아주 처참한 꼴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더 무서웠다. 더 이상참는 것은 해결 방법이 되지 못했다. 인내로 버터 가는 것의 결과가 이 꼴이었다. 더 버텼다가는 몸도 정신도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너무나도 안하무인으로 제영이 그러든 말든 상관치 않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어둡고 차가운 방에 있으니 빛도 없는 깊고 깊은 숲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가려고 애를 써 봐도 힘겹기만 하고 사방의 맹수 무리는 침을 흘리며 제영이 나동그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잔뜩이었지만 결근을 한 날부터 회사에서 계속연락이 왔다. 동혁의 것도 있었고 배 차장이나 다른 사람의 것도 있었다. 많이 아프냐는 문자가 이상하여 보니 보낸 문자함에는 제영이 보내지도 않은 것이 남아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출근이 어렵습니다.]
개새끼. 제영이 이를 갈았다. 보낸 시간이나 날짜를 보면 누가 보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보낼 거라면 좀 제대로 보낼 것이지 달랑 이 문장을 보낸 게 누구 엿 먹으라고 보낸 듯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보에 이를 갈고 있던 이들조차도 출근한 제영을 맞닥뜨린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제영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이사에게 구구절절 거짓 사정을 설명한 후에는 기운이 쏙 빠져 의자에서 골골대기만 했다.
이사는 아프다는 사람에게 별말은 없었으나 젊은 사람이 그렇게 건강 관리를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혀를 찼다. 자신이 죽을상을 하든 어떻든 간에 다 남의 일이었다. 그런 것이었다. 회사에 오면 해진 생각이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점점 심해지는 두통과 함께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웅웅댔다.
도대체 그가 뭘 원하는 것인지 제영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희주와 헤어지라더니, 이제는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만둔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결혼하고서도 만나자고 하고 있었다. 변덕스럽기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이제 앞으로의 삶은 어찌 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봤자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제영이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안쓰러운 시선은 오전으로 끝이 났다. 다들 제 일을 하느라 바빴고 사이 사이 우스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다.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부러웠다. 저게 바로 제영이 이제껏 누려 오던 일상이었다. 그게 무참히 깨져 버렸다. 희주는 뭘 하고 있을까.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 한 자신을 위로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장난질을 치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앞으로 관계는커녕, 제 물건도 그 앞에 꺼내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일생을 괴롭게 할 만한 재앙이 닥쳐올 것만 같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닥쳐온 상태이기도 했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갓 들어온 신입 사원처럼 바짝 긴장한 상태로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기나 하고 일 처리는 아주 더뎠다. 아픈 사람이니 크게 불만을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계속되는 실수에 짜증을 숨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제영은 화가 났다.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역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자신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순간 아래가 따끔했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절망의 감정을 벗어나려고 애쓰며 가방 안에서 약봉지 하나를 꺼냈다. 오늘 먹어야 할 마지막분량이었다. 남이 보면 그저 약일 뿐인데도 누가 볼까 봐 얼른 입안에 넣고 삼켜 버렸다. 쓴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약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제영은 몸의 고통뿐만 아니라, 가슴의 쓰라림조차 잊을 수 있을 만큼 약효가 좋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약보다는 담배가 더고파지기 시작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서 제영이 향한 곳은 옥상이었다. 그러나 옥상에는 이미누가 와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타인과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다. 제영은 먼저 온 이에게 보이지 않도록 구석 아래에서 조용히 담뱃불을 붙였다.
"제발 좀 이러지 마세요."
조용히 담배나 피우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영 상황이 도와주지를 않았다. 누군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화를 잔뜩 냈고 내용으로 보아연인과 싸우는 모양이었다. 제영은 귀를 막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이니 뭐니 하는 관계는 진저리가 났다.
"제 이야기 시시콜콜하게 다 한 건 아니죠? 그 나이에 할 말,못 할 말은 좀 가려 주세요."
상대와 한참 실랑이를 하던 이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가려진 벽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김 대리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동혁이었다.
"설마 엿듣고 계셨어요?”
"뭐?"
제영은 시끄럽게 방해받은 마당에 그런 소리를 듣자 어이가 없었다.
"오랜만에 나오셔서, 남의 통화 엿 듣는 것 좀아니지 않아요? 누구는 남의 일 대신 하느라 죽어났는데. 아무리 애인 백이 든든하셔도 저 같은 사람 사정도 좀 이해해 주세요."
표정도 말투도 명백한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럼에도 제영이 쉬이 되받아쳐 주지 못한 것은 내용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야. 애인 백이라니.”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가 알 리 없었다. 제영의 동요가 그대로 반영된 듯이 아래의 지끈거림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순진한 척하지 마세요. 다 티가 나니까."
"누구한테 들었어?"
"듣기는요. 김 대리님이 질질 흘리고 다니셨잖아요."
동혁은 해진이 제영을 데리러 왔을 때부터 둘의 사이를 짐작했다. 제영이야 둘째 치더라도 해진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미팅을 가면 매번제영을 따로 부르고, 돌아온 제영에게서는 은근하게 비린 향이 났다. 동류라면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그런 냄새였다. 그래도 계속 모른 체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영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걸 본 동혁은 자기도 모르게 가학심이 발동했다. 근래 일어나는 짜증 나는 모든 일들을 눈앞의 병든 남자에게라도 풀고 싶었다.
건드렸던 남자가 임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몸뿐인 가벼운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구질구질하게 나오자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부인이 모든 걸 알게 되고 그녀는 비난의 화살을 제게로 돌렸다. 그놈은 이혼하겠다 뭐다 하며 아직도 연락질이고 부인은 가족이며 회사에 알리겠다고개지랄을 떠는 중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 제영에게 분통이 터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도 자신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아직결혼이야 안했지만, 멀쩡히 여자 친구를 두고 돈 많은 남자 친구와 희희낙락하며 놀고 있는 꼴이 아니꼬웠다. 떠도는 사진 속에 희미하게 잡힌 인물이 제영이라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딱히 아웃팅할 생각까지야 없었지만 이정도 화풀이는 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그 다정한 애인이 전부 해결해주지 않겠는가.
"적당히 하세요. 결혼 앞두고 무슨 짓입니까.
지금이야 저만 알지만, 그렇게 티 내고 다니면 모두 알게 되지 않겠어요?"
동혁은 떨고 있는 제영을 등지고 먼저 옥상을 내려왔다. 은근히 통쾌하여 저녁까지는 기분이 좋을듯했다.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서는 동혁이 했던 말이 자꾸만 반복되고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는 건 아닐까. 그렇게 동혁과의 만남 이후에 제영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은 전부 해진의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순간이 많았다. 재벌 2세인 그와 자신이 붙어 다닌다는것 자체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으니. 제영은 몸을 웅크리고 이불 속에서 떨고 있었다.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어디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모든 것들이 절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생각해야만 했다.
제영은 지겨울 정도로 같은 생각을 하면서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일단은 그걸 먼저 떼어 내자.
이불 속의 제영이 벌떡 일어나 아랫도리에 입은것을 전부 벗었다. 금세 이상한 꼴이 되었다. 낡은 횐 셔츠를 입고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변태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위로 올려 제영의 헛헛한 낯을 보면 이런 우스운 행태에도 무슨 사정이 있음을 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제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리 사이를 보았다. 그날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거기에 있었다.
최대한 살살, 이렇게 해 보고 저렇게 해 봤다.
그래도 풀리지 않자 조금 세게 잡아당겨 보기도했다. 다 실패였다. 자극받은 예민한 부위만 불쌍하게 붉게 부어올랐다. 그러자 또 겁이 덜컥났다. 얼른 소독을 하고 도로 속옷을 챙겨 입었다. 해진에게 좀 더 절절하게 부탁해 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접었다. 이제 제영에게 그는 반미치광이였다. 그에게 일반인의 상식으로 다가가 기가 꺼려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미치광이에게는 공범이 있었다. 미치광이의 친구라는 점에서 그 역시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해진보다는 나았다.
제영이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고 잠깐 잠이 들면 꿈을 꿨다. 모르는 얼굴의 여자가 나오기도 하고 희주가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 해진은 꿈까지 침범하지 못했다.
제영은 출근을 했으나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떠넘기고 점심시간이 지나자 배차장에게 오후에는 병원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연히 알겠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인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제영을 힐끔거렸다. 제영은 왜 그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몰라 짜증이 났다. 늦으면 준성이 도망이라도 가 버릴 것 같아 초조했다.
"너 나랑 애기 좀 하자."
"예? 지금요? 죄송한데,급한 일 아니면 병원부터 다녀오면 안 될까요. 예약해 둬서 늦으면 안 돼서요."
"야, 씨, 너는 선배가 말하는데 무슨 말대꾸야. 따라와."
주변 사람이 제영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배 차장이 별것 아닌 일로 아랫사람을 탓하는 것은 항상 있던 일이었다. 재수 없게 걸 리면 괜히 뒤집어쓰고 배 차장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제영은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앞에서는 설설 기는 척을했다. 근데 오늘만큼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그에게 붙잡혀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는 것에 역정이 났다. 이대로 그를 무시해 버리고 가던 길을 가 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어차피 준성은 오후 진료 시간 내내 거기에 있을 게 분명했다. 몇십 분 늦는다고 못 만나고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설마이 새끼도.'
제영은 불안한 마음을 삼키고서 동혁의 자리를 힐끗 보았다. 혹시나 동혁이 가볍게 입을 털었을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배 차장은 다른 애기를 했다. 걱정했던 내용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다행이라고 말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너 작업 들어간 거지?"
"예?"
"모르는 척하지 마. 나 다 알고 있으니까,그도련님한테 작업 들어간 거 아냐? 나 빼놓고 상무님하고."
그가 언급하는 두 인물 모두 제영에게 최악의 경험을 선사한 사람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기가 이 꼴이 된 것에는 이 상무 탓도 있었다.
그의 술주정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다면 울적한 마음에 갑자기 희주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 고,그러면 해진에게 그런 모욕을 당할 일도 없었다. 정말이지 그날은 악운이 악운을 불러와 제영을 휩쓴 날이었다.
"못 한다, 못 한다 내숭 떨더니 나만 쏙 빼놓고 둘이 한잔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상무님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그 일 이후에 그가 자신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 차장은 마치 제영과 상무가 제대로 의기투합이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맞지? 맞지? 새끼 찔려서는. 상무님이 아니라, 아주 믿을 만한 정보통한테 들은 이야기야.”
"정보통이요?”
"그래, 우리 미영이가,아니 아는 사람이 우연히 봤더라고."
배 차장에게 이야기한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챘다. 몇 번 들어 본 이름이었다. 배 차장이 상무를 만나러 제영을 끌고 갔던 술집에서 본여자였다. 술자리가 파할 때는 상무가 옆에 끼고 사라졌던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배 차장 역시 그 여자를 따로 만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제영은 속이 역해졌다. 굳이 해진과 관련된 작당이 아니 더라도 배 차장과 상무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더럽다. 더러워. 제영은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자신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이런곤경에 처해야만 하는지 너무나도 억울했다.
"너 나 뒤통수 치고 너만 좋은 일 하려는 거지? 이 배신자야, 네가 어떻게 그러냐. 내가 이때까지 널 도와준 걸로 치면 아주 죽을 때까지 은혜를 갚아도 모자라, 제영아."
"뒤통수고 배신이고 저는 배 차장님이 말씀하시는 거 하나도 이해 못 하겠습니다. 그날, 갑자기 연락이 와서 술을 마신 건 맞습니다. 근데 이야기도 좋지 않게 끝났고 좋은 일은커녕, 온통 나쁜 일만."
더러워.
제영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말을 하는 도중에 순간적으로 겹쳐 오는 소리에 흠칫한 것이었다. 배 차장이 한 말은 아니었다. 이미 말을하고 있던 이가 동시에 내뱉은 것도 아닐 터이니 제영이 한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영은 똑똑히 들었다. 더럽다는 소리를. 그건 제영이 들을 소리가 아니었다. 눈앞의 이 뒤룩뒤룩 살찐남자가 들어야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각에서는 자신 역시 그렇게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을 앞둔 여자를 두고 남자와 놀아났으니. 해진과의 정사가 머릿속으로 휙 지나갔다. 제영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토기가 올라와 속이 좋지 않았다.
말을 멈추더니 이제는 당황하는 제영을 배차장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찔리냐? 야, 이 새끼야. 내가 이 상무님하고 일 잘되면 너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 잘 좀 해 보자."
배 차장이 제영의 어깨를 거의 치듯이 두드렸다. 경고였다. 돈과 권력에 눈이 먼 개가, 자기 몫을 빼앗길까 봐 지껄이는 저속한 경고였다.
배 차장은 먼저 훌쩍 옥상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는 아주 자비로운 사람인 것처럼 병원에 다녀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제영은 준성을 만나러가야 한다는 조급함도 잠시 잊어버 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도미노가 쓰러지듯이 차례로 사람들이 제영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신력과 체력도 거의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정말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제영을 미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것을 겨우 붙들어세웠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준성을 만나러 가야 했다.
평일 낮의 병원은 환자와 그 보호자들로 북적였다. 곧장 준성의 진료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진료실은 비어 있었다. 분명 오늘 이 시간의 담당 의사는 준성이었다. 접수대에는 저번의 간호사 대신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 접수증을 달라는 말에, 환자가 아니라 준성을 만나러 왔다고 이야기를 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가셨나요? 원래 오늘 오후 진료인 걸로 알고 있거든요."
"무슨 일이시죠?”
그녀는 제영의 미심쩍게 쳐다보며 물었다.
"좀 개인적인 일로 오늘 꼭 만나야 해서요. 오늘은 출근 안 하셨나요?”
"그건 아닌데."
제영은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온 것을 조금후회했다. 급한 일이긴 했지만 환자도 아니라며 의사를 찾는 모습은 제영 생각에도 조금 이상해보였다. 괜히 간호사에게 의심만 받고 쫓겨나는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이전의 사람이 있다면 제영과 준성이 안면이 있다는 걸 알고 조금은 경계를 풀었을 텐데, 이 사람은 처음 보는 제영이 자꾸만 준성을 찾자 진상 환자는 아닌지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었다.
"어, 제영 씨?”
그 목소리에 제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가운을 입은 준성이 누군가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제영과는 다르게 잘 먹고 잘 자며 지내는 것인지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건네는 미소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면 천성이 가벼운 남자라남의 슬프고 괴로운 일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그날도 그랬다. 범죄니뭐니 하면서도, 몸부림치는 제영을 속박하고 해진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무슨 일인지는 그쪽이 잘 알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분노 때문이었다.
"선생님. 사람을 부를까요?"
간호사가 준성에게 물었다. 준성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아는 분 맞아. 나 30분 정도만, 휴식. 내 예약 환자들은 박 선생한테 좀 부탁한다고 전해 줘. 자, 그럼 가실까요? 제가 생각하는 그 일 때문에 온 게 맞는다면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준성이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섰다. 제영은 그를 따라갔다. 아이보리색의 복도와 소독약 냄새, 병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제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준성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2층 침대두 개가 양옆으로 나란히 있는 걸 보아하니 휴식하며 잠을 자기 위한 공간 같았다. 문이 닫히 자 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준성이 다가오더니, 제영의 바지 벨트에 손을 댔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제영이 놀라 그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거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직접 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어떻게 빼야 하는지 방법만 알려 주면 됩니다.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봐야 돼요. 어떻게 아물었는지 봐야지, 어떻게 빼는지 알려 드릴 수 있어요. 예민한 부위잖아요. 그렇게 쉽게 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거짓말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똑같은 얼굴로 한 짓이 있으니 쉽게 믿기 어려웠다.
준성은 억지로 바지를 벗겨 내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저 시계를 확인하며 벌어 둔 30분 중에 이제 어느 정도가 남았는가를 계산하는 듯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전혀 급할것이 없었다. 당사자인 제영의 속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쩔 거예요? 나곧가 봐야 돼요.”
해진도 그의 친구인 준성도 하나같이 개새끼들이었다.
"여기 아무도 안 오는 거 확실해요?”
제영이 문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문 잠가 뒀어요. 저도 직장에서 남의 가랑이 살피다가 들키는 경험 같은 건 사절이니까요.
빨리 좀 해 줄래요? 그냥 비뇨기과 진료 받으러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 시간 없어요."
제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 봤자 얻을 것은 없었다. 차라리 그를 잘구슬려 이것을 떼어 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영이 바지를 내렸다. 그의 말대로 해진의 친구가 아니라, 의사를 만나러 왔다고 생각할 참이었다. 쪽팔리긴 하지만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쾌락과 배출의 기관이었다가 이제는 고난의 상징이 된 것이 드러났다. 조금 떨어져 있던 준성이 천천히 다가왔다.
"잠깐 만질게요."
거슬거슬하고 마른 손의 감촉이 성기에서 느껴졌고 제영은 몸을 떨었다. 해진의 손길처럼 무슨 욕망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두렵기는 피차일반이었다.
"건드렸어요? 좀 붉어진 것 같은 데."
"빼려고 아무리 해 봐도 안 돼요. 안쪽에 뭔가 걸린 것같이."
"아물기는 제대로 아물었네요."
"어떻게 빼는 겁니까."
"글쎄요."
제영이 참지 못하고 결국 화를 냈다. 준성의 멱살을 잡아채 밀쳤다. 밀쳐진 그의 등에 부딪힌 가는 뼈대의 철제 침대가 덜컹거렸다. 준성은 놀라거나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흥미진진한 것을 기대하는 표정이었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 도가 튼 인물이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제영의 삶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아주 드문 편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아니에요? 당신이 이렇게 화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해진이잖아요"
"웃기지마. 너도 똑같은 새끼야. 사람을 우습게 보고, 이딴 짓이나 하고."
"무슨 소리에요, 제영 씨. 사람 우습게 본 건 나나 해진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멀쩡히 결혼할 여자 두고 해진이랑 붙어먹은 게 누구죠? 그쪽 아니에요? 그래 놓고는 누구 탓을 하는 겁니까."
준성이 제영의 손을 거칠게 떼어 내고는 거울이 있는 벽 쪽으로 걸어가 목을 살폈다. 심하진 않았지만 목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 이게 뭐예요. 짜증 나게. 전 해진이나 당신처럼 막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걸로 남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거든요. 도대체 둘 문제에 왜 절 자꾸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겁니까. 아무튼 김제영, 당신은 이런 사태를 불평할 자격도 없어. 그쪽이 왜 이 꼴이 됐는지 알아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쿡쿡 찌르고 다니니까 그러는 거야. 어느 쪽에 진득하게 붙어 있지도 못하고 이게 맛있어 보인다고 젓가락으로 쿡 찌르고, 저게 맛있어 보인다고 휘젓고. 아주 자업자득이 네요."
"어느 정도는 나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해진 씨랑 헤어지려고 한 거야."
제영이 항변했다.
"헤어지려고 뭘 했는데요? 설마 나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전달해 달라고 말한 거? 고작 그걸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아주 답 없는 사람이네. 해진이가 빡치는 이유가 뭔지 알겠네요 "
준성이 다시 제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걸 빼고 싶어요? 그럼 저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해진이한테 갔어야죠. 잘 구슬려 봐요.
키스도 하고 입으로 해진이 것도 좀 빨아 주면,그 새끼가 후회하면서 '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자지를 아프게 했구나.'하고 빼 줄 수도 있죠.
예전처럼 잘 지내 보려고 노력해요. 분위기 좋았잖아요. 아, 그리고 바지 좀 정리하세요. 전 해진이랑 달라서 제영 씨 물건을 그렇게 오랫동안 관찰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제영이 붉어진 얼굴로 제 바지춤을 잡고 옷을 정리했다. 춥지도 않은데, 손이 떨렸다. 아니손이 차가운 걸 보면 추운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어. 그 사람이 왜 이러는지."
준성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사랑해서라고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잖아.
사랑하면 이럴 리가 없잖아.”
제영이 울분에 차 내뱉었지만 소리는 크지 않았다. 내지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몰라요. 그게 그 새끼 방식인가 보죠."
"저번에는 헤어지라더니, 이제는 결혼하래.
결혼하고도 자길 만나자고."
"아주 대단한 합의에 도달하셨네요. 축하드려요. 오락가락하시더 니 어쨌거나 양쪽을 쟁취하셨군요. 신혼여행 갈 때는 좀 풀어 달라고 부탁해 봐요. 초야에 신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아, 아니다. 의외로 새로운 섹스에 눈을 떠서 더 해 달라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네요. 제영씨도 남자랑 하는 거 이렇게 적성에 잘 맞을 줄몰랐잖아요. 안 그런가요?”
제영의 눈에는 준성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모르겠으나 조롱을 멈추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게 분명했다. 불행한 얼굴의 남자가 더욱 불행한 얼굴로 변모하는 걸 즐거워하는 건지도 몰랐다. 제영은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는 상처를 더 깊게 할 뿐 도움은 되지 못할 게 자명해 보였다. 그러니 시간낭비였다.
"정말 이거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러나 포기할 수 없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바닥을 보고 있던 준성이 고개를 들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약간 특수하게 제작된 거라 그냥은 못빼내요, 뜯어내지 않는 이상. 얇고 작은 바 같은게 있어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거."
준성이 엄지와 검지로 그 길이를 가늠해 보여 주었다.
"볼트랑 너트처럼, 그 바에 있는 홈을 끝에 달린 볼에 맞추면 볼이 돌아가서 풀려요. 그리고 나머지는 일반 피어스이죠. 빼내면 돼요.”
"그 바가 어디 있는데?"
"저한테 있겠어요?”
준성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제영에게 되물었다.
"키까지 받았다면서요. 해진이 집에 가서 뒤져 봐요."
그나마 희망찬 이야기였지만 제영은 여전히 침울했다. 준성은 눈앞의 애처로운 남자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쩌려고 그래? 사람다 죽겠어.'
'약간의 타격만 주려는 것뿐이야.'
준성이 보기에 약간은 벌써 한참 전에 지나친 듯했다. 눈 밑이 검고 뺨이 살짝 팬 걸 보면 아마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말랐는지는 매번벗겨 보는 해진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아직도 '약간의 타격'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제 친구지만 정상은 아닌 인간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준성이 제영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부드러운 인형처럼 포근해 보이는 인상이긴 했으나,제취향은 아니었다. 해진의 취향도 이런 쪽은 아니었는데 뭐에 홀린 건지 아주 푹 빠져 있었다.
'뭐, 취향이야 변할 수도 있는 거지.'
준성은 그만 생각을 접었다.
"이제 정말 좀 가 주시겠어요? 자꾸 아래층에서 콜이 오네요."
준성의 말에 불쌍한 남자의 눈망울이 울렁거렸다. 그걸 보고는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다.
* * *
제영은 나약해지고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속으로는 오로지 벗어나고 지켜 낼 궁리만을 하였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헷갈리기만 했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무엇을 지켜 내야 하는 것인지, 모든 것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자기를 선택하라고 비명을 질러 댔다. 혼란스러웠던 제영은 이 고난을 단순화했다. 단순화된 머릿속은 해진으로 귀결되었다. 그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일단은 피어스를 풀기 위한 그 '바'를 찾아야 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은 것이면 들고 다닐 수도 있을 터였다. 정장 안쪽이나 코트의 포켓에 넣어 두고 있는지조차 잊었다가 가끔 다른 물건을 꺼내려 집어넣은 손가락에 걸 릴 때면 실실 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집 안 어디,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 뒀을 수도 있다.
열쇠까지 있는 마당에 그의 집으로 들어가 뒤지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괜히 부르지도 않았는데 갔다가 의심을 사 버리면 이후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게 뻔했다. 집 안 내부에는 무슨 카메라가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정원이나 담장에 설치되어 있는 것들이 제영의 잠입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의 옷을 뒤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가 어디다 옷을 벗어 두는지 신경 쓴 적도 없었고 제영이 두는 곳에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을 뒤지든, 그의 옷을 뒤지든 시간이 많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들키는 일 같은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몰라야 했다. 희주의 존재를 모르고 제영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을 때처럼, 아무것도 몰라야만했다.
추운 계절이니 당연히 밖의 공기는 차가웠다. 입을 벌리고 숨을 내뱉으면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제영은 그렇게 횐 숨을 내쉴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기력마저 같이 소진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집 근처 대로변에는 5층짜리 병원 빌딩이 있었다. 1층은 약국이고 그 위에서부터 층층이 정형외과, 치과,안과 그리고 신경 정신과가 있었다. 누구보다 가장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 제영이었으나 제영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다.
“잠을 자기 어려우시다고요?”
의사가 물었다.
"원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있습니까?”
제영은 의사 앞에 놓인 노트를 슬쩍 보았다.
그가 연필로 끄적거리던 것은 제영의 특별할 것없는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가족의 도표. 제영본인은 별표로, 어머니는 동그라미, 아버지는 네모로 그려졌다. 그리고 형제들은 다시 네모.
직장의 상사들은 세모, 부하 직원은 뒤집어진 세모로 표현되었다. 쓸모없는 것이었다. 지우개로 싹싹 지워 내고 별표 옆에 똬리를 튼 뱀 같은 걸 그려 두면 완성이었다. 꼭 뱀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무섭고 두려운 것이면 충분했다.
"회사 일 때문에 동료들과 마찰이 심해져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병원에 가 보라고 조언해 주더군요.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아주 푹 잘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영은 값을 치르고 수면제를 처방받아 가져왔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주머니 안에 든 봉투 속 약의 형태를 더듬다가 꾹 눌러 보았다. 가운데의 선을 따라 한쪽은 새빨갛고 나머지 한쪽은 횐색인 캡슐은 단단하지 않아 누르는 대로 구겨졌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제영처럼 혼자인사람도 있고 무리를 지어 가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다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수면제로 끔찍한 일을 단행하려는 자신의 심정 같은 건 영영 모르겠지 하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역시 주머니에 뭔가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제영만 해도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오늘 회사에서 여직원의 가벼운 농담에 웃었다.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제영은 일어나 병원에서 받아 온 봉투를 뒤져 하루 치의 약을 떼어 냈다. 한 알 정도는 사용해도 괜찮겠지. 아직 남은 게 많았다. 손바닥에 올려 두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게 마른 모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약과 전혀 관련 없는 인생이었는데, 하고 제영이 중얼거렸다. 한 컵의 미지근한 물줄기에 휩쓸려 혓바닥 위에 올라가 있던 것은 금방 넘어가 버렸다. 의사의 말로는 여섯 시간 정도는 푹 잘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진정으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영이 다시 누웠다. 모래 알갱이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에 별이 뜬 듯 어지럽게 일렁거렸다.
제영이 넋이 나간 듯이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아니 눈을 감고 있으니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쏴아, 쏴아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 모래알갱이들이 제영의 주변에 쌓이고 그것에 뒤덮여 피부 한 조각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잠이 들었고 꿈을 꿨다. 다정한 사람이 제영의 곁에 있었다. 희주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다정하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해진이 빨리 불러 주기를 기다렸으나 연락이 없었다. 큰일이었다. 보름 치를 처방 받아 왔지만 약의 절반은 이미 제영이 삼켜 버렸다. 나머지가 전부 제영의 내장에서 녹아 버리기 전에 그를 만나야 했다. 약을 먹기 전에는 항상, 가랑이 사이의 그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슬퍼하고 그 슬픔에 잠이 오지 않고 약을 먹는다. 그것은 규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슬픔의 도미노. 쓰러지고, 쓰러지고 그 도미노의 마지막 조각은 제영이었다. 아, 하는 순간 몸이 뒤로 넘어가고 그 어디에도 제영의 삶을 지탱해 줄 것들은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무너진 후다. 악몽이었다.
[집, 오늘 8시.]
기다리던 것이 도착했다. 정신만큼이나 흐물흐물해져 있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제영은 비장한 마음으로 모래 냄새가 나는 캡슐들을 챙겨 들었다. 회사 사람들은 퇴근 시간이 되자 마자 벌떡 일어나는 제영을 보고 들떠 보인다며 데이트냐고 물었지만 제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살짝 미소만 지었다.
그가 말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그의 집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물으면 외근 나갔다가 바로 퇴근해서 그렇다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그는 묻지도 않을 것 같았다.
제영은 장식장에서 와인을 꺼내고 주방에서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캡슐을 비틀어 부수자 안에서 곱게 갈린 가루들이 쏟아져 술과 섞였다.
제영이 그것을 아주 조금만 마셔 보았다. 세 개나 털어 넣었지만 딱히 거슬리는 것은 없었다.
이상한 맛이 날지라도 해진은 설마 제영이 이런짓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제영자신조차도 이런 짓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물건을 훔쳐 내기 위해 술에 수면제를 타다니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나 다름없었다. 진짜 영화라면 지루해 빠졌다고 욕하며 꺼 버렸겠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제영의 괴로움도 현실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먹이느냐'였다. 예전처럼 분위기가 좋다면 술을 권하는 것도 쉬울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영이 다시 술이 담긴 잔을 살펴보았다. 빛에 비춰 보니 침전물이 보였다. 와인에 침전물이 생기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시자마자 쿵 하고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조금 피곤하다고 말하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등을 두드리며 그를 재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빨리 와라. 아니 오지 마라.
두 개의 마음이 충돌했다. 하지만 해결을 봐야 했으니 전자가 옳았다. 제영은 소파에 앉아테이블에 놓인 잔 두 개를 멍하니 보았다. 예전일이 떠올랐다. 이렇게 소파에 앉아 있으면 해진이 살갑게 장난을 걸다가 입을 맞춰 주었다.
입술과 목덜미를 혀로 할고 간지러워 고개를 돌리면 셔츠 안에 손을 넣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다가 손이 엉덩이를 주무르고 벨트를 풀고 속옷을 내리고 나면 그가 기쁜 얼굴을 하고 입으로 제영의 것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사정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방 몸을 들썩이고 제영이 붉어진 얼굴로 해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일은 영영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제영이 해진의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처박고 허덕거렸다.
해진이 도착했을 때는 제영이 그 한 잔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마셔 버린 상태였다. 너무많이 마셔 해진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가 찬 바람을 묻히고 들어와 제영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온 걸 알았다. 제영은 당황하여 엉거주춤 일어나다가 탁자를 무릎으로 치는 바람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덜컹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잔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해진이 걸어와 빈 와인병을 들고 흔들었다.
빈 병은 물 한 방울 찰랑거리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이걸 다 마셨어요?”
"그냥 기다리다 보니까 지루해서. 오늘 외근하고 바로 왔거든요. 일찍 와서,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까 다 마셨어요."
취한 제영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주절거리고 말았다. 제영은 해진의 눈치를 보며 그를 살폈다. 해진은 무릎까지 오는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가죽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전부 제영이 뒤져 봐야 할 것들이었다.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 그를 위아래로 훑게 되었다. 하지만 해진은 제영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을 그저 술주정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준성이한테는 왜 갔어요?"
비뚜름하게 고개를 돌린 해진이 제영에게 물었다.
"아파서 갔어요.”
제영이 자신의 다리를 슬쩍 봤다가 해진의 시선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아프면 의사한테 가야죠. 뭐래요?
준성이가?"
제영은 그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지 아니면 이미 다 듣고 왔으면서 괜히 트집 잡을 일을 만들려고 하는 건지 헷갈렸다. 더군다나 제영은 취해 있었다. 그의 얼굴과 말투만으로 진실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좀 더 가까이에서 그를 봐야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영이 그의 곁으로 가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또 탁자를 신경 쓰지 못했다.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 바깥으로 와인이 흘러 넘쳤다. 가라앉았던 침전물들이 요동치며 검은 액체에 섞여 들었다. 포자처럼 일렁이는 것들이 제영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문득 복용량을 꼭 지키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에 딱 한 알만 드셔야 합니다.'
가끔 뉴스나 신문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왔다.
도박을 끊지 못하는 남편과 다투다가 홧김에 먹었다던 아주머니,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유로 수십 알을 삼켰다는 남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제영의 경우처럼 고작 세 알 정도는 뉴스거리를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조금더 깊고 길게 잠드는 정도가 아닐까.
제영은 해진이 저 마지막 한 잔을 마시게 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계획을 바꿔 자신이 저것을 마시고 내내 잠이 들어 있는 동안,해진이 원하는 짓들을 모두 끝마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을 잡아당겨도 뒤를 쑤셔도 잠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다만, 꿈자리만 좀 뒤숭숭하겠지. 예전의 다정다감함을 발휘해 몸에 남은 오물들을 닦아 준다면 금상첨화였다. 제영이 탁자 위의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걸 잡기도 전에 불쑥 다가온 해진이 먼저 잔을 낚아챘다.
"그만 마셔요. 난 주정뱅이랑은 키스하기 싫으니까."
제영은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잔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해진이 입술에 묻어 흐르는것을 손등으로 닦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예민한 혀가 이상을 감지한 듯싶었다.
제영이 다급하게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그의 혀에 남은 약의 찌꺼기를 제 혀로 훔쳐 내었다. 평소답지 않은 짓을 하자 조금 놀란 눈을 하던 해진은 그저 즐기기로 마음먹었는지 가만 히 눈을 감고 제영이 하는 키스를 받아 내고 있었다.
“웬일이에요? 이런 짓도 다 하고?”
해진이 젖은 입술로 제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가 떨어졌다.
“그나저나 준성이가뭐래요? 이건?"
그가 옷 너머로 제영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제영이 몸을 떨며 답했다.
"잘 아물었대요.”
"그래요? 그럼 침대에서 확인해 볼래."
해진이 제영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뒤엉킨 몸이 침대 위로 엎어졌다. 해진이 제영을 온몸으로 누르며 아랫도리를 치댔다. 제영의 두 뺨을 붙들고 키스하던 입술은 이제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해진이 살 위로 이를 잘근대자 제영이 고개를 돌렸다. 제영의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해진이 그걸 보고 살며시 미소지었다.
"좋아요? 쌓여서 그런가. 더 잘 느끼는 것 같네. 혼자서 하지도 못했죠? 이 꼴로 그 여자랑했을 리도 없고."
제영의 몸을 올라타 앉은 해진이 양손으로 가슴팍을 세게 누르며 느릿하게 문질렀다. 도드라지는 부분이 해진의 손가락에 짓눌릴 때마다 제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해진이 제 넥타이를 끄르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제영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려고 팔을 들었다. 하지만 그 팔은 도로 잡혀 눌렸다.
"내가 벗길 거야. 당신은 내거니까."
흥얼거리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말소리가 가벼웠다. 해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영이 아는 선에서는 그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었다. 상무가 거래처의 대리 나부랭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HS 내의 그의 무리가 승기를 잡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속을 썩이던 장난감에게 족쇄를 채웠고 그치가 품에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것도 좋은 일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좋은 일이 제영에게는 좋지 못한 일이 되었다. 이런 게 악연이 아닐까 하고 제영은 생각했다. 용하다는 무당에게 해진의 사주를 들고 가서 궁합을 봐 달라고 하면 그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았다.
모조리 벗어 내던진 남자가 이제는 제영의 옷을 노렸다. 제영은 해진이 자신의 옷을 벗기기 쉽도록 상체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손짓이 굼떠지지는 않았는지 눈꺼풀이 내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조금 멈칫하길래 슬슬 약효가 도는가 했는데 갑자기 젖꼭지를 꽉꼬집어 왔다. 놀란 제영이 몸을 헐떡이자 해진 이 웃었다.
'아직인가.'
그 후에는 또다시 기쁜 얼굴로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바닥에 내던져졌던 해진의 옷 위에 제영의 옷이 차곡차곡 쌓였다. 속옷 한 장만 남을 때까지도 해진의 눈에는 졸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진이 제영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고는 침대 위에 눌러 고정시켰다. 그에게 속박당한 제영의 모습이 영락없이 실험실 개구리였다. 몸을 숙이는가 싶더니 다시 키스했다.
제 혀로 제영의 혀에 엉켜들던 해진이 불만을 터뜨렸다.
"아까처럼 해 줘요. 가만히 있지 말고."
주정뱅이라고 타박하며 제영의 입술을 살짝깨물고 재촉했다. 제영은 입을 벌리고 제 혀를 내밀었다. 붙잡혀 있으니 그에게 다가가려면 고개를 쳐드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고개를 들기 전에 해진이 먼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참을성 없는 사람처럼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 태도가 제영에게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물컹대면서도 어딘가 단단한 살들이 비벼지는 감촉이 적나라했다. 제영은 해진과 키스를 할 때면 상대가 남자라는 걸 여실히 깨닫곤 했다. 수줍음도 없이 거칠고, 자기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으면 조심성도 없이 이를 세웠다. 지금처럼.
"아."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팠다.
"성의 없어. 대충 때우려고만 하는 이런 키스로는 만족 못 해요."
틀린 말이었다. 제영은 최대한 그의 마음에들 만한 키스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늘 이 시간만큼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해진은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은 더 격정적이고 열렬한 것인 듯하나, 제영이 나약해지기 전에도 그 정도까지는 해 주지 못했다. 감각의 역치가 너무높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기준에서는 자신의 괴로움마저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건지도 몰랐다.
만족할 만한 키스는 포기한 듯이 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가 가는지는 빤했다.
해진이 제영의 젖꼭지에 바짝 입술을 대고서 빨아들였다.
"윽."
제영의 허리가 들썩였다. 해진은 오늘따라집요하게 굴었다. 원치 않는 곳에서 높아지는 성감에 제영이 괴로워 그를 떼어 내려고 몸을 비틀어도 그는 끈질겼다.
"여기 예전보다 도톰해진 거 알아요?”
해진이 단단해지고 부푼 것을 손가락으로 꾹누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영이 몸을 뒤틀었다.
"처음부터 잘 느끼긴 했는데, 갈수록 더 그래.
밑에 넣고 여길 빨았더니 당신이 엄청 조이는 바람에 사람 미칠 뻔한 거 모르죠? 여기는 그 여자가 절대로 못 건드리게 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당신 자지러지는 거 보면 분명 의심할 테니까."
그의 눈빛이 조금 몽롱해 보이기는 했지만 단순히 관계 중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제영은 초조해졌다. 남은 약을 다 털어 넣었어야 했나. 겨우 잡은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입 안이 썼다. 해진이 위에서 즐길 것은 다 즐긴 모양인지 제영의 남은 속옷 하나를 벗겼다. 볼 때마다 제영을 침울하게 만들었던 것이 사라지지도 않고 달려 있었다. 그걸보고 해진이 웃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제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반쯤 발기한 물건의 끝에 달랑거리는 것을 해진이 슬쩍슬쩍 건드릴 때마다 제영은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도 해진은 손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눈꼬리가 살짝 접힌 것을 보면 일부러 하는 게 분명했다.
약을 먹여 재우려는 계획은 실패인 것이 확실해보였다.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취된 개구리가 산 채로 내장까지 훤히 드러내야만 하는 것처럼 제영은 다리를 벌리며 그사이에 앉은 해진에게 제 치부를 숨김없이 보여줘야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아 무것도 보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제영이 눈을 감고 제 팔로 얼굴을 덮었다. 후회스러웠다. 아까 그 약은 해진에게 먹일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먹었어야만했다.
"손 치워. 같이 봐야지. 내가 당신 몸에 달아준거잖아."
그러나 유일한 도피처마저도 그렇게 산산조각 내는 게 눈앞의 남자였다. 그가 제영의 팔을 잡아 내렸다. 자신의 몸에 달린 것 중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술도, 팔도, 시선의 방향이나 가장 민감한 부위조차도 타인이 결정했다. 해진이 피어스의 끝을 힘주어누르자 매끈한 금속이 관통한 부위 안에서 미끄러졌다. 제영이 가쁘게 숨을 들이켜고 온몸을 긴장시켰다. 뱃가죽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겁먹어요? 설마 내가 뜯어내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긴장 풀어요."
해진이 손톱 끝으로 제영의 배를 부드럽게 간질이며 말했다. 하지만 제영의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위험 신호가 울려 대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에 닿은 해진의 성기는 이미 빳빳하게 서 있었고 평소보다 훨씬 거칠어진 숨소리는 그가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에 해진이 제영의 것을 삼켰다.
해진은 뿌리 끝까지 삼킨 다음에 천천히 후진하며 입술과 이로 표면을 긁어 올렸다. 그것이 이에 걸려 껍질이 살짝 땅겼다. 제영이 침대시트를 꽉 쥐며 해진을 보자 그가 웃으며 성기의 끝에 혀를 날름거렸다. 제영은 그가 이런 걸 달아 놓은 게 화풀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을 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가 혀로 피어스 주변을 꾹꾹눌러 대다가 중간중간 입술로 물어 당겼다. 섬뜩한 가운데에서도 분명 쾌감이 있었다. 공포로 땀에 젖은 등허리가 차게 식어 갔지만 성기에는 열이 몰려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부풀수록 피어스의 이물감이 더 심해졌다. 발기하지 않았을 때는 껍질 사이에 늘어져 있던 것이 이제는 잡아당긴 활처럼 팽팽해져 몸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해진은 이제 노골적으로 끝부분만을 공략했다. 빨기 편하도록 한 손으로는 제영의 것을 잡아 세우면서도 나머지 손으로는 그 밑을 오가며 착실하게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영의 숨소리는 이제 해진보다 훨씬 더 거칠어져 있었다.
몸이 이 꼴인데 느끼고 있다는 걸 부인하지는 못했다. 해진이 끝에서부터 기둥을 따라 천천히 혀로 훑어 내렸다. 제영이 허리를 크게 들썩거렸다. 해진의 타액에 흠뻑 젖은 성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번들거렸다. 제영은 사정하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한번 토해 낸 사람처럼 몸이 풀려흐느적댔다.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
해진이 갑자기 손가락 하나를 제영의 몸 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오늘은 풀어 줄 필요도 없겠는데요."
해진이 제영에게 삽입한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안쪽을 밀어 벌렸다. 제영의 몸이 반응하며 엉덩이를 움찔댔다. 해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젤로 손가락을 듬뿍 적시고는 두 번째 손가락을 넣으며 안을 이완시키 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제 성기를 붙잡아제영의 아래에 맞추고 조급하게 삽입하기 시작했다. 제영이 순간적인 고통에 고개를 젖히고 해진의 팔을 잡으며 아픔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몸에 힘 빼요."
해진이 제영의 엉덩이를 꽉 주무르며 보챘다. 그러나 제영이 힘을 풀기도 전에 해진이 결국 일을 쳤다.
"으, 윽."
제영이 괴로워했지만 해진은 그저 도망가지 못하도록 상대의 골반을 잡고 꾹꾹 밀어 넣고 있었다. 조금씩 진입할 때마다 해진의 얼굴이 쾌락으로 일그러졌다. 뿌리 끝까지 삽입하고 나니 젖은 음모가 제영의 엉덩이에 닿아 질픽거리고 있었다. 해진은 그 부위를 쳐다보다가 제영의 표정을 살폈다. 익숙해지기 위해 버둥거리던 몸이 슬슬 잠잠해지고 얼굴도 풀려 가고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벌어진 제영의 입안에서는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혓바닥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리기가 버거웠다. 해진이 거세게 아래를 치대기 시작했다.
"제발 좀 살살”
제영이 애원했다. 아래가 들쑤셔지는 게 처음도 아니었지만 너무 거칠었다. 제영이 몇 번몸을 물리려고 했더니 아예 양 발목을 잡아당긴채로 박아 대기 시작했다. 고통은 잠잠해졌어도 해진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해진은 허리를 흔들어 대다가 제영의 젖꼭지를 세게 깨물었다. 단단한 것을 품은 제영의 안이 급격하게 수축했다.
몸 안에 침입한 것의 형태대로 내부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부 깊숙한 곳이 짓찧어지자, 제영이 사정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을 때 유백색의 액체가 배 위로 쏟아졌다. 피어스에 맺힌 정액이 방울방울 떨어져내렸다. 해진이 그걸 쳐다보다가 성기의 끝을 더듬었다. 그 작은 자극조차도 제영은 괴로워했다. 격렬한 절정 이후에 숨 고를 시간조차도 없이 해진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진은 이상하게 오늘따라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리멍덩하고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래의 제영이 사정 후 밀려오는 쾌감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괴로워하는 것을 뺜히 내려다보고 있으면서도 봐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진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줬을 텐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 안에 상처를 낼 것만 같았다.
아까 분명 제영의 안에 한바탕 쏟아 냈는데,또 하고 싶었다. 갈증이 나서 입이 마르면 엎드린 그를 억지로 세워 입을 맞췄다. 이번에 몇 번째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박아 넣을 때마다 성기와 맞물린 틈에서 무언가가 밀려 나왔다. 그흰 점액질 액체가 뭔지는 해진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새어 나온 그 액체는 뚝뚝 떨어져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좀, 그만해요."
제영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애원하자 해진이 동작을 멈췄다. 제영은 이제야 숨을 돌리나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해진이 엎드려 있던 제영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남의 형편 따윈 생각해 주지도 않는 그의 거친 동작에 제영은 안쪽의 살들이 해진의 성기에 뒤엉키는 듯한 감각에 시달렸다. 안에 들어찼던 해진의 정액이 제영의 허벅지를 타고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허리가 꽉 잡혀 있는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해진이 자꾸만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람을 부서뜨릴것처럼 양팔로 몸을 꽉 조여 오더니 몸을 억지로 틀어 제영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해진의 움직임이 점차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고 이내 그가 제영을 깔고 엎어졌다. 커다란 남자의 무게며, 쿵쾅거리는 타인의 심장 박동이 제영을 짓눌렀다. 압사당할 것만 같아 제영이 겨우 그를 밀쳐 내며 옆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옆에 누운 남자의 표정을 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나른하게 풀린 채로 그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거리고 있었다. 제영은 그가 먹은 것은 흥분제가 아니라 수면제라고 쏴 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해, 기분이."
그가 중얼거렸다. 얇은 눈꺼풀이 아래로 깊게 내려갔다가 천천히 열렸다.
"제영 씨."
해진이 제영에게 손을 뻗으며 더 가까이 오려고 버둥거렸다. 겨우 다가온 그가 제영에게 몸을 반쯤 겹치고 제영의 몸 위에 턱하니 다리를 올렸다.
"무거워."
제영이 불평했지만 해진은 더 몸을 붙여 왔다. 다시 그의 눈이 감기고, 이제는 살랑거리는 긴 속눈썹이 만들어 낸 눈 아래의 그림자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눈꺼풀은 잠잠했고 제영이 그의 뺨을 더듬어도 고른 숨소리만 들릴 뿐 깨어나지 않았다. 드디어 약이 효과를 발휘한 듯 싶었다.
제영이 해진을 똑바로 눕히고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귀를 댔다. 언제나와 같이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코끝에 손을 대고 호흡도 확인했다. 부드러운 숨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그는 잠들었다. 그것도 아주 깊이.
"제발 아침까지는 눈뜨지 말아 줘."
제영은 그에게 이불을 덮어 준 후에, 소중한 사람 대하듯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기도하
듯중얼거렸다
해진을 버려두고 침대에서 내려온 제영은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 전부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옷에 엉켜 있던 해진의 옷들을 골라내 뒤지기 시작했다. 코트의 정장 가슴 쪽의 포켓, 양쪽의 주머니, 바지 주머니까지 탈탈 뒤졌으나 찾은 거라고는 만년필과 지갑,차 키뿐이었다. 혹시나 지갑에 넣어 뒀나싶어 거기도 뒤졌지만 카드와 현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다시 한번 하나하나 뒤져 보는데,침실 안쪽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영의 이마와 뒷덜미에 땀이 솟았다. 일어나침실 문을 살짝 열고 안쪽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이 자고 있었다.
잘못 들은 듯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환청을 듣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제영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뭔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 씨.”
다리 사이를 타고 흐르는 것들을 보며 제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콘돔을 썼다 안 썼다아주 제 마음대로였다. 싸지르는 새끼는 좋을지 몰라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더럽기만 했다. 쓰지 않을 때는 뒤처리다 뭐다 하면서 다시 한번 안쪽을 휘적거렸다. 뒤처리가 아니라 마지막을 즐기려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안을 들쑤셨다.
그런 짓을 하던 이가 먼저 꿈나라로 떠났으니 처리되지 못한 것들이 이렇듯 흘러 내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리 남의 집이라도 몸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타인의 정액들을 줄줄흘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욕실로 가서 씻는 것도 불안했다. 괜히 물소리가 나면 해진이 잠에서 깰 것 같아 불안했다. 제영은 옆에 치워 둔 제 옷 중에 셔츠 안에 받쳐 입는 흰티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걸로 대충 아래를 훔쳐 내 닦았다.
다시는 입고 싶지 않은 그것을 바닥에 던져두고 속옷과 셔츠만 챙겼다. 침실은 따뜻하더라도 복도는 추웠다. 그에게 시달리며 한껏 흘려댄 땀이 식어 체감 온도는 더 낮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가는 며칠 안에 이불에 들어앉아 감기 몸살로 빌빌거릴 게 분명했다. 옷을 입고 다시 해진의 것들을 뒤지기 시작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제영이 복도를 둘러보았다. 여러 개의 문, 어디부터 뒤져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도둑처럼 살금살금 그의 온 집 안을 걸어 다녔다. 어떤 문은 열리고 어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리는 곳들 중에 찾는 물건이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지만 비슷한 것조차도 보지 못했다.
그의 서재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서재는 이름이 무색하게 책은커녕 물건도 없고 언제 들어갔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먼지만 쌓여 있었다.
집은 너무 넓고 복잡했으며 절반은 잠겨 있었다. 그 탓에 찾는 것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제영은 커다란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열쇠는 있으나 그건 거짓 열쇠다. 들어가는 문은 열었으나 나오는 문에는 맞지 않았다.
어지러움이 머리를 강타했다. 제영이 머리를 쥐어 잡고서 겨우 몸을 추슬렀다. 그러다 번개처럼 해진의 가방이 떠올랐다. 해진이 약이 든와인을 마신 후에는 바로 키스했고 엎치락뒤치락 걸으며 침실로 갔다. 그 탓에 신경 쓰지 못한 가방이 거실 소파 앞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여기가 진짜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제영이 찾는 것은 없었다. 서류 뭉치와 차 키가 하나 더들어 있을 뿐. 제영이 쪼그려 앉은 채로 몸을 응크렸다. 질질 짜는 것은 예전에 졸업했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제영은 이 고난이 힘겹기만 했고 도무지 이겨 낼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잘살고 있었는데."
제영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은 잘 살고 있었다. 어려움이 전무한 삶은 아니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할 여자를 만났다. 이제 그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순간임에도 난데없이 끼어든 시련이 정상적인 삶의 경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벽에 온몸이 부서져라 부딪히고 어쩔 때는 달래기도 해 봤지만 점점 더 범위를 좁혀 오기만 했다. 뒤에도 벽이 있었다. 그 벽과 벽이 맞부딪히면 제영이 망가질 것이라는 건 불보듯 뻔했다.
눈물이 뚝뚝 흘러 거친 서류 봉투의 표면 위를 적셨다. 제영은 그런 곳에 눈물 자국을 남기는 것이 더 서글퍼져 가방 안에 도로 집어넣어두려고 했다. 그러나 봉해지지 않은 입구에서 갑자기 종이들이 쏟아졌다. 순서가 섞일까 싶어허둥지둥 종이들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서였다. 서명과 도장까지 찍힌 걸 보면 이미 체결된 계약의 원본 서류인 듯싶었다. HS 전자와 그 계열사 중 하나, 그리고 납품처가 적혀 있었다. 동일한 내용의 서류가 두 장씩 있었는데 이상한 점은 적혀 있는 금액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본이면 이렇게 다를 리가 없었다.
무엇인지는 뻔했다. 이런 종류의 작당이 드문것은 아니었으나 HS전자도 납품처도 규모가 남다른 곳이 라 액수가 상당했다.
이 계약은 빙산의 일각임이 틀림없었다. 원래 풍족했던 이는 이런 속임수를 말미암아 더풍족해지고 행복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 지경으로 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 신기하고 향이 좋으며 값비싼 것들. 그래도 욕심내지 않았다. 분수에 맞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으니까. 자기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인내와 노력이 무의미해지려하고 있었다. 제영이 쌓아 온 모래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큰 파도 몇 번이면 부서질 것인데, 해진은 손수 짓밟고 있었다. 제영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많은 것을 가진 남자임에도 그는 가지지 못한 이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었다.
그 남자가 비운 와인 잔이 외따로이 탁자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한 모금 정도 남은 액체안에는 채 녹지 않은 알갱이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수면제를 왕창 받아 와서 시위라도 하듯이 삼켜 버리면 그가 이 짓을 그만둘까. 제영은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 어디서 또 덜커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라고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놀란 나머지 다리 간수를 못 하고 탁자를 밀치고 말았다. 탁자와 같이 잔이 흔들렸다. 안 도ㅐ, 하고 뒤늦게 입을 벙끗거렸지만 제영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었고 몸도 그렇게 날쌔지 못했다. 대리석 바닥 위로 와장창하며 유리잔이 깨져 산산조각 나 버렸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당장 해진이 쫓아 나와 이 광경을 보고 말 것이다. 자기를 속이고 기만한 벌로 목이라도 조를 것만 같았다. 제영이 잔뜩 겁에 질렸다.
하지만 부서지는 소음 이후에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제영은 나쁜 쪽으로만 굴러가고 있던 머리를 정지시키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혹여나 그가 뛰쳐나온다고 해도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나왔다고 하면 된다. 그러다가 잔을 잘못건드려 깨뜨렸다고 말하면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못할 터였다. 옷은 왜 복도에 널려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추워서 옷을 챙겨 입으려는데 뒤엉켜 있어서 다 끄집어냈다고 말하면 된다.
괜히 여기서 도망치니 어쩌니 했다가는 다음 기회마저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제영이 일어나 침실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곁에 누워 있자. 송장처럼 누워 있다가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의 집을 나설 생각이었다.
다리가 떨렸다. 겁이 나서 그런 것도 있지마는 과음과 해진과의 거친 섹스도 이 증상에 한 몫 거들고 있었다. 끼익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낡은 집이나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었고 여기는 고급 주택이었다. 두루 기름칠이 되어 있는 경첩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아까의 소리도 착각이었나.'
스스로의 노파심이 불러온 환청일 뿐이었나.
제영이 살금살금 도둑 걸음으로 해진이 누워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누웠다. 몸이 닿지 않아도 해진이 품고 있던 온기가 차갑게 얼어 있던 제영의 몸에 스며들었다. 이마부터 턱 끝까지 부드럽게 이어진 선을 제영이 눈길로만 따라가 훑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제영이 속아 넘어간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숨소리가 눈을 밟을 때 들려오는 사각거리는 소리처럼 가지런했다. 저주에 걸린 여자처럼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기를 소망했으나 그는 사랑하는 이의 키스도 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제영 씨?"
갑자기 해진이 제영의 이름을 불렀다. 녹초가 된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제영에게는 볼륨을 최대로 올려 놓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순식간에 제영의 눈동자 위로 불안한 빛이 퍼졌다.
"어 디 갔다 와요?"
그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미안해요. 깼어요? 목이 말라서, 물 마시고 왔어요."
"이리 와요."
옆자리를 툭툭 내려치며 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명령했다. 제영이 냉큼 그의 곁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해진이 제영에게로 몸을 포겠다. 본능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해진이 제영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당겨 안았다. 이것 역시 물 흐르는 듯했다.
"몸이 차가워. 밖에 오래 있었어요?”
"아니요. 찬물을 마셔서 그런가 봐요.”
제영과 해진은 엎드린 채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해진이 어둠 속에서 연거푸 눈을 껌벅거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꿈나라로 떠날 듯이 보였다.
"나른해, 왜 이렇게 나른하지. 온몸에 힘이 없어."
그가 눈을 감았다.
"다 당신 때문이야."
다시 눈을 뜬 그가 그렇게 말했다. 순진무구한 말소리였지만 제영은 혹시나 그가 제 계략을 눈치챈 게 아닌가 싶어 심장이 철렁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허리에 두른 손가락으로 피부를 간질이는 것이 제영과의 섹스를 탓하는 말인 듯싶었다.
어두운 침대 조명등 하나가 전부여도 제영은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일렁이는 갈색이라는것을 안다. 애써 잠을 참으려는 듯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부드럽게 호를 그리는 속 쌍꺼풀이 접혔다펴지기를 반복했다. 다정한 생김새의 사람에게서 다정한 향이 났고 그건 다정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속삭이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제영이 해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해진이 웃었다.
"이상해요. 오늘 왜 이렇게 행복하지. 꼭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 같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 그 사랑 타령 이었다.
"날 사랑하면, 이걸 풀어 줘."
제영이 그에게 말했다.
"싫어요. 나는 당신을 안 믿어. 당신은 거짓말쟁이니까. 날 사랑해 주기 전까지는 안 돼."
그가 깨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그는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꿈도 아니었다. 현실과 뒤섞여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그런 환상에 파묻혀 있었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응? 그러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해줘."
답이 없다. 눈이 다시 감겨 이제는 진정 잠에 들려는 듯했다. 제영이 다급하게 일어나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허리에 둘려 있던 해진의 팔이 툭, 하고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가 다시 눈을 떴으나 작은 틈만이 겨우 그의 눈동자를 드러 내고 있었다.
"당신 친구, 그 준성이란 사람이 이걸 풀 수 있는 도구가 있대. 그게 어디 있어?”
그의 정신이 너무나도 희미하고 아득한 나머지, 오로지 진실만을 대답하기를 바라며 제영이 물었다.
"어디 있냐니까, 응?"
제영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해진의 감긴 눈은 다시 떠질지를 몰랐다. 제영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사방이 고요했다. 스스로의 숨소리만 소름 끼치게 이 넓은 침실을 채우고 있었다. 제영은 눈물이 흐르기 전에 얼른 셔츠소매로 찍어 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해진의 어깨를 흔들어 댔다. 잠을 방해받은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눈을 떴다.
"해진 씨, 그게 어디 있는지 알려 줘요."
엎드려 있기만 하던 그가 팔로 몸을 지탱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지러워."
좀 더 정신이 들었는지 방금 전보다는 선명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댔다. 그러다 갑자기 해진이 몸을 웅크렸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어디에"
그때 제영의 혀가 딱딱하게 굳었다. 해진이 제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쳐다봐서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몽롱했던 시선이 이제는 무언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또렷하게 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아 적을 살피듯이 제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해, 해진 씨?"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해진이 제영의 팔을 꽉 붙잡고서 그렇게 물었다. 침착하고 능수능란하게 핑계를 댔어야 했다. 하지만 제영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와의 사이가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터였다.
생각을 배반하고 몸은 반대로 행동했다. 제영이 해진을 거세게 뿌리쳤다. 컨디션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 터라 해진은 제영을 놓치고 말았다.
살기 위해 버둥거리던 제영이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지듯이 내려왔다. 해진이 제영을 잡으려고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다리가 녹아내린 것처럼 제대로 걷지 못하고 휘청댔다. 제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나왔다. 복도에서자기 옷을 챙기고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예전처럼 해진이 뒤에서 머리카락을 낚아챌 것만 같았다. 거실에서 얼른 바지를 입었다. 뒤를 살폈으나 해진은 보이지 않았다.
셔츠 단추는 잠글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달아나려고 했다. 현관문을 열고, 대문으로 벗어나 담장 아래에 세워 둔 차를 몰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발끝의 고통이 날카롭게 제영을 뒤흔들었다. 정신이 없는 나머지 깨진 유리 조각을 발견하지 못하고 밟고만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제영이 뒷걸음쳤다. 발을 땔때마다 횐 바닥에 핏자국이 도장처럼 찍혔다.
하지만 상처를 살펴볼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순간 제영의 눈에 서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와인 잔을 깨뜨리는 바람에 가방에 도로 넣어 둘 생각조차 못하고 잊고 있었다. 갈색 봉투위에는 잔이 깨지면서 튄 와인의 흔적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그걸 가져가야 되겠다는 결정도 실행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제영이 그걸 움켜쥐고서는 현관을 향해 뛰었다.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제영은 이제 앞만 보았다. 뒤는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이 계속 떨렸고 몸도마찬가지였지만 제영은 무시하고 이를 악물었다. 물기가 다 말라 버린 눈이 뻑뻑해져 가고 눈앞이 자꾸만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제영이 눈을 비비며 억지로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다.
유리가 박힌 발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구두가 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고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지만 제영은 끝끝내 외면했다.
* * *
"오늘도 출근 안 해?"
희주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출근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 거울로 마지막 점검을 하다가 거기에 비친 제영을 쳐다보며 슬쩍 물어왔다.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겠다며 다짜고짜 캐리어부터 건넸던 남자는 있는 내내 이불 속에서 찡찡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프다고 말했어."
이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사회생활 몇 년 차가 되면 갑자기 사춘기가 다시 시작된 것처럼 질풍노도의 시기가 오기도 하니 이런 행동이 완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희주가 아예 몸을 돌려 제영 쪽을 바라보았다. 제영은 몸한구석이라도 보여 주기 싫다고 시위를 하는 것처럼 이불 속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조금 작은 이불이 발끝까지는 덮어 주지 못했고 그의 발가락 상처에 붙은 밴드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깨진 유리컵을 치우려다가 조각을 못 보고 밟았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조심성 없다고 나무라는 정도에서 끝냈겠지만 저 상태로, 저런 상처를 달고 오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나 간다."
하지만 희주는 별말 덧붙이지 않았고 그렇게 끝냈다. 제영이 손만 내밀고 흔들며 그녀를 배응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난 후에 제영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가 도로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오후의 강한 햇볕이 더 이상의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순간이 되고 나서야 제영이 일어났다.
희주가 아침잠을 몰아내겠다고 열어 둔 블라인드 때문에 방 안이 지나치게 밝았다. 제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적응하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더 이상 눈이 부시지 않게 되자 천천히 눈을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애인의 집이었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어제 저녁에도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밥을 건너뛰었다. 그러고 아침이 되니 허기 때문에 배에서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제영이 뭐라도 좀 먹으려고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대는 순간, 엄지발가락이 욱신거렸다. 발을 들어 살펴보니 상처에 붙여 둔 밴드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뭔가를 먹기 전에 이것부터 해결해야 할 듯싶었다.
소독하고 약 바르고 새 밴드를 붙이고는 부엌 찬장에서 찾은 인스턴트 국과 밥을 데워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그리고 또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하는 것만 보면 돈 많고 시간 많은 백수나 할 법한 일이었지만 제영의 사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여윈 뺨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해진에게서 도망쳐 집에 도착했지만 안심할수가 없었다. 바로 발바닥의 유리 조각을 빼내고 몸을 씻었다. 그리고 짐을 챙겨 희주의 집으로 왔다. 거기에 있으면 해진이 당장이라도 찾아와 문을 거세게 두드릴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집이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건물 입구에 비밀번호를 찍고 들어와야 했고 곳곳에 CCTV도 설치되어 있었다.
자신의 집보다는 보안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영을 가장 안심시켜 줄 만한 사람이 있었다.
일단 해진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왔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그는 집과 옷을 뒤진 일이며, 서류를 훔쳐 간 것까지 모든 걸 알고 있을 터였다. 희주의 집에 왔어도 불안해 안절부절못했다. 당연히 핸드폰에 불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그는 문자조차 없었다. 그게 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회사로 찾아간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거기다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동혁과 배 차장이 작당하여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을까 봐 무서웠다.
이렇게 계속 회사를 빠질 수는 없었다. 그만 둘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만약 해진 이 작정을 했다면 회사를 옮겨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설마 제정신에 남의 회사에 쫓아와서 그러겠어.' 했겠지만 지금은 그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제영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러니까 제대로 결론지어야 했다. 이 모든것은 안이한 생각으로 일을 미룬 탓이었다. 진즉에 끝냈다면,그와의 관계를 정리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불행따위는 영원히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저 이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제영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야만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낯선것에 현혹되어 이어지던 일탈과 도락은 이제 고난과시련이 되었고 이미 오래전에 제영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그러니 모든 걸 끝내야 했다.
제영이 일어나 캐리어 깊숙이 숨겨 뒀던 것을 꺼내 들었다. 와인의 흔적이며 제영의 눈물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데다가 옷 사이에 넣어 둔터라 서류 봉투는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래도 이게 제영이 가진 것 중에서는 해진에게 가장큰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무기였다. 이게 유출된다면 문제가 커질 것이었다. 단순히 해진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전체가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앞뒤 생각하지 않는 그 안하무인한 사람조차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제영은 그날 밤 이후부터 계속 제대로 잠들수가 없었다. 내내 이불 속에만 있는 제영을 보고 희주는 겨울잠이라도 자는 거냐고 타박했지만 자는 게 아니었다. 눈을 억지로 감고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만 쉬고 싶었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영이 다시 서류를 캐리어 속에 넣어 뒀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개인 번호를 받고 육체관계가 시작된후에도 제영은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자 자기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소리가 끊기고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제영도 상대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상대편이었다.
-뭐예요. 전화해 놓고는 아무 말도 없고.
욕부터 듣지 않을까 했던 예상이 빗나갔다.
차분한 말투에 분노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영을 궁지로 몰아가기 위한 수작인지 아니면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얼마나 평온한지를 보여주려는 허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미 핸드폰을 쥔 제영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용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났으면 합니다."
- 언제쯤?
"이번 주 주말이나 아니면 다음 주 초에 만났으면."
-뭐하러 그래요. 오늘 만나요. 저녁에.
너무 일렀다. 아직 제영은 그 정도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영이 대답이 없자, 너머에서 조소와도 비슷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리가 순식간에 제영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하죠. 오늘 저녁에 만나요.”
강하게 나가야 했다. 무른 저항이 초래한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는 그를 위협할 수단도 있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영이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간단하게 용건을 전달하고 다시 여기로 돌아와 푹 자고 싶었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그 다음 날 밤도 제영은 더이상 잠을 뒤척이고 싶지 않았다. 깊이 잠들어꿈을 꾸고 싶었다. 이 괴로운 기억들을 희석시켜 줄 만한 다정한 꿈들로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약속 장소는 예전에 가 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사람이 많지도 않았지만 적지도 않았다. 구석에 차를 세워 두고 연인과 속삭이다가 저 멀리 사람이 지나가면 순진한 척하며 슬쩍 서로의 시선을 피하기 좋은 장소였다. 평범한사람에게는 지나가는 이들이 그저 데이트의 불청객이겠지만 제영에게는 혹여나 불상사가 발생했을 때 도움을 청할 대상이었다. 그래도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랐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가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져서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것이 제영이 원하는 이상적인 만남의 형태이 자 결과였다.
약속 장소로 잡은 주차장에는 제영의 것을 제외하고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근방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나았다. 누가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제영은 차 안에 있다가 약속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에 차에서 내렸다. 주황빛 가로 등이 결전의 장소를 비추는 것처럼 빈 공터를 밝히고 있었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아직 승리가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긴장과 추위로 무릎 아래가 얼어 감각이 둔탁해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기가 힘들었다.
찬 바람이 세차게 불자 공터 옆의 수풀이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그 소리에 늦은 겨울밤 왜사람이 여기를 찾지 않는지 알 만할 정도로 으스스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래도 몇 분 간격으로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적당한 거 리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제영이 그들을 눈으로 좇으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인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못 할 사람들이었다. 제영은 덜컥 겁이 났다. 제영과 해진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도 그들은 말릴 생각조차 않고 구경만 할 것 같았다. 개중에 어느선량한사람이 도움을 주더라도 이미 모두 늦어버린 때일 것 같았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만나는 게 나았나. 지금이라도 돌아갔다가 다시 약속 장소를 정하자고 할까. 제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그가 오기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졌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온몸에 구석구석 피가 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단에서부터 천천히 신경이 마비되어 가는 것 같았다. 제영이 자신의 손을 쥐었다폈다 하며 감각을 되돌리 려고 애썼다.
제영은 차 문을 열었다. 일단 다시 들어가 있을 생각이었다. 추위도 견디기 힘들었고 해진은 늦어지는 듯했다. 단순히 사정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는 건지 아니면 바람맞힐 생각인지는 알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속에서는 슬그머니이 장소에서 도망치자며 제영을 충동질했다. 차라리 그냥 전화로 용건을 전달하고 끝내는 편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파국이었다. 얼굴을 보고 하나 그렇지 않으나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을 열고 타기 전, 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영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검은 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운전석에는 기다리던 그 흰 얼굴의 남자가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비되어 있던 곳 중에 유독 엄지발가락의 감각만이 또렷해졌다. 그럴 리 없음에도 미처 빼내지 못한 유리조각의 파편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통증이라기에는 간지러움에 가까운 감각.
발끝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존재를 알아챈 후에도 그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제영은 문을 닫지 않고 열어 둔 채로, 운전석 가까이에 서 있었다.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이었다. 제영의 차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차가 멈췄고 그가 내렸다. 해진이 제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이쪽으로 올래요? 아니면 내가 그쪽으로 갈까요?"
"그냥 거기 있어요. 거기서 얘기해요."
제영은 그가 제게 다가와 허튼짓을 못 하도록, 혹여나 나쁜 생각을 먹으면 바로 달아날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죠, 그렇게 해요. 말해요. 용건이 있다면서요. 뭔지 정말 궁금하네요."
해진이 차에 기댄 채로,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접근하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당신 협박은 이제 안 통해. 희주한테 전부 애기했어. 다 이해해 준다고 했어, 그 사람은, 그러니까 우리한테 당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해."
고작 이런 말을 했을 뿐인데 말라 가는 입술과 굳어 가는 혀가 원망스러웠다.
"그게 전부에요? 다른 건 없나요?”
"나한테 한 거, 나한테 달아 둔 거 풀어 줘. 아니, 풀 수 있는 그 도구를 내게 줘."
"내가 싫다고 하면?”
"내가 가져온 서류,당신 가방에서 꺼내 온 것들. 그게 유출되면 문제가 되지 않아?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나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어디올리든, 기자한테 제보하든, 당신의 약점을 찾으려고 안달 난 상무한테 넘기든 하겠지.”
협박이었지만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이제까지 그가 제게 했던 짓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그의 협박은 모든 걸 망치려는 것이었지만 자신은 달랐다. 잘못된 것을 되돌려 놓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제영은 말을 끝내고 해진의 표정을 살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고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놀란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제영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고 제영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어떤 불안도, 놀라움도 보이지 않았다. 제영은 잡고 있던 자신의 차 문 프레임을 더 세게 쥐었다. 땀이 너무 많이 나 손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그거 아주 큰 일이네요. 안 그래도 내가 그서류 잃어버린 것 때문에 형이 크게 화를 냈어요. 솔직히 돌아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근데 그 서류가 단순히 잃어버린 게 아니라, 제 애인이 훔쳐갔다는 걸 알게 되면 절 가만두지 않겠죠. 거기다가 다른 사람이나 언론에 알려지게 되면 당신 말대로 문제가 될 거예요.
정말 겁이 나서 당신 말이면 모든지 복종해야만 할 것같네요. 진심으로."
"장난치지 마. 내가 못할줄알아?"
"왜 화를 내요? 당신 말을 들어주겠다고 하잖아요. 겁이 나서."
해진이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고는 제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남자에게 검은 장막이라도 쳐진 것처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심정으로 저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자신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는 제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떨리는 손부터 시작하여 가슴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불안한 심정까지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당신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잠깐의 침묵 속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해진 이 살짝 웃으면서 제영에게 물었다. 제영은 이런 상황에서도 웃는 저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때는 저이가 계속 웃기만을 바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저 그때의 어리석음을 탓할뿐이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요."
"후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이런 일도 없었을 테고, 난 훨씬 더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거야. 여기서 그만둬요. 모두 끝내도록 해요. 진즉에 그랬어야 했는데. 이때까지 일들은 없던 일로 하고 그 푸는 도구만 내게 줘요. 직접 줄 필요도 없어요.
박 비서를 시키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키든가 해요. 그러면 서류는 바로 돌려 드리죠. 그리고 연락도 말고. 앞으로 마주칠 일은 당연히 없을 테고. 당신이랑 내가 원래도 그리 마주칠 인연이 있던 사람들도 아니니까. 그렇게 끝내요.
그렇게 끝나면, 나는 잊을 거예요. 없던 일로 할 거예요."
말을 끝내자마자 모자랐던 숨을 채우기 위해제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춥고 땀이 나고 귀는 먹먹했다. 제영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타인과의 대립에 이토록 직접적이고 격렬하게 응한 적은 없었다. 항상 최대한 자신이 다치지 않도록외면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고 그러지 말아야 했다. 이제 전부 끝이었다.
제영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저항을 했다.
가지고 있던 독기마저도 전부 고갈되어 고개를들 힘도 없었다. 제영이 고개를 떨궜다. 아까 보았던 검은 바닥과 똑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인가서 타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산책을 하는 사람이 근처를 지나가는 건가하고 제영이 앞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해진의 소리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제영이 두려움에 가득 차 소리쳤지만 해진은 멈추지 않았다. 제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을 제외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도망쳐야겠다고,아니 이제 전부 끝냈으니 그저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여기며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는 바로 잠가 버릴 생각이었다. 마지막 인사는 작게 열린 문 틈으로 하는 게 가장 적절할 듯싶었다. 그러나 문은 잠그지도 못했고 마지막 인사도 할 수 없었다. 아예 애초에 문이 닫히지 않았으니까.
뚝뚝 떨어진 것이 이마에서 얼굴의 굴곡을 따라 제영의 관자놀이와 눈가로 흘러내렸다. 제영이 손으로 그걸 손으로 더듬거렸다. 옅게 번져 오는 붉은 것은 분명 피였다.
"당신 미쳤어요?”
순식간에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은 남자가 제정신일 리가 없지만 제영은 그렇게 묻고 말았다. 다가오는 해진 때문에 겁이 난 제영이 있는 힘껏 닫았던 터라, 그 사이에 끼었다면 아무리튼튼한 손이라도 멀쩡할 수 없었다. 해진이 다친 손으로 제영의 손을 붙들었다. 질척한 감촉은 땀이 아니었다. 어두워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다친 것은 확실했다. 뿌리치고자 한다면 손쉽게 뿌리칠 수 있었으나 제영은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결국 제영은 그를 마주하고 설 수밖에 없었다.
"제영 씨, 엄청 아파요."
해진이 제영의 손 대신에,다른 곳의 온기를 찾아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댔다. 제영의 연푸른색의 셔츠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돌아가 버린 날에도, 나 토하고 아팠는데. 왜 날 두고 갔어요?”
이건 전부 거짓말이었다. 알량한 연극으로 또 자신을 속이려고 하고 있었다. 제영은 손에도 발에도 힘이 없어져 맥이 풀린 채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등을 차체에 기대 겨우 버티고 있었다.
"이러지 좀 말아요, 제발."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 말 좀 그만해. 설사 네가 날 사랑하더라도, 나는 아니야. 그래, 조금의 애정도 없었다고하면 거짓말이겠지. 좀 더 붙여서 내가 널 사랑한다고 쳐도, 결국엔 난 널 선택하지 않을 거야."
제영이 해진의 코트 깃에 매달려 소리쳤다.
속이 너무나도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피냄새가 계속 났다.
"나는 있잖아,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냥평범하다고,나는. 나는 너랑 엮여서 그런 일들, 말도 안 되는 것들은 겪고 싶지 않아. 나는 희주랑 결혼하고 애 낳고, 그렇게 살고 싶어.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 해진 씨,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가? 내가 만약 당신을 사랑하더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랑에 응해 줄 순 없어. 그런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남자랑, 당신이랑. 그런 걸 계속하고 싶지 않아.”
희고 부드러우나 차가운 뺨, 제영이 그 뺨에 손을 댔다.
"이렇게 생각하자.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당신을 사랑했는데 그냥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서로, 아니 내가 먼저, 이 관계가 힘들어진 거야. 그럴 만하잖아. 당신이 어디 보통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힘들어서 그만두자고 하는거야. 이 정도면 당신이 수긍할 만하지 않아? 그렇지?"
마지막으로 키스를 해 주자,제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 오던 날 가졌던 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최대한 그의 마음에 들게 입을 맞춰 주려고 했다. 하지만 해진은 제영의 목덜미로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망가진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아 왔다.
'위로해 줘요.'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환청이었다. 미치광이에 시달리다 보니,자신마저도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회사에서 울고 있는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도, 그의 집에 처음 갔던 날에도 제영은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지금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나 아무 짓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다. 제영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온기가 떨어져 나가 그가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린 듯 했을 때야 눈을 떴다. 남은 사람은 제영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인위적인 소리 하나가 제영의 정신을 깨웠다.
희주의 전화였다. 피곤에 지친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어디야? 오니까 없던데.
"응, 친구 좀 만나고 술 마셨더니 시간이 이렇게 됐어."
-언제올 거야?
"이제 들어갈 건데, 나 그냥 내 원룸에 가려고. 거기가 더 가깝고 너무 오래 비워 뒀어."
-내일 출근은 해?
"응, 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짐은 내가 나중에 찾으러 갈게. 그냥 구석에 놔둬. 피곤할 테니까 빨리 자."
전화가 끊기고 지금 이 순간 스산하게 부스럭거리는 풀숲의 소리조차도 제영에게는 아득하게만 들려왔다. 더 이상 비린 피 냄새 따위는 없었으나 어쩐지 짠 내가 났다. 눈물의 냄새,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데 그런 냄새가 났다. 제영은 자신이 정말로 미친 게 분명하다고 여기며 고개를 늘어뜨렸다.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이 녹아내려 자신을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삐빅.
그 소리를 세 번째 듣고 나서야 제영은 자신이 현관 비밀번호를 계속 잘못 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네 번째마저도 실패로 끝이 나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그러고 보니 내가 무슨 번호를 눌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뇌 속에 싹싹 비누칠을 해 놓은 것 같았다. 햇갈린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뚝 잘려 버렸다. 한참을 그러고 난 후에야 제영은 예전 번호를 누르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해진이 이 집에 오기 전의 비밀번호가 아닌 그가 온 후의 것을 누르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집 안은 며칠 비워 둔 터라 밖보다 훨씬 더 냉기가 돌고 있어서 제영은 팔을 감싸 안고 몸을 떨었다. 급하게 들어와 짐을 챙기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기에 옷장은 열려 있었고 그날 엉망진창이 되어 벗어 둔 옷들로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집 안 꼴이 지금 제영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형광등이 켜지자 상황은 더 적나라해졌다.
그날 유리 조각이 박힌 발로 무심하게 뜀박질을 쳤던 터라 피가 꽤 많이 샜다. 양말의 절반이 푹 젖을 정도였는데 바닥에는 그걸 신고 절뚝절뚝 걸었던 흔적들이 검붉게 남아 있었다.
제영은 그것들을 밟지 않도록 피해서 걸었다.
욕실 앞에는 당시에 벗어 던져 둔 양말과 옷가지가 그대로 있었다. 욕실은 또 어떠하냐면, 쏟아져 내리던 물줄기가 미처 휩쓸고 가지 못한 붉은 오물들이 바짝 말라 굳어 있었다. 제영은 거길 쳐다보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욕실 거울 속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자길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응시한 후에야 괴상한 얼굴을 한 남자가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얼굴에서는 마른 피가 가루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가슴은 강도에게 칼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누가 봤다면 분명 수상한 사람이라고 신고가 들어갔을 텐데, 아무도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일단은 씻을 생각으로 옷을 벗었다. 더러워진 것들을 예전 옷들 위에 툭툭떨어뜨렸다. 나중에 다른 쓰레기들과 같이 버릴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옷을 벗고 났더니 저 더러운 욕실 바닥 위에 맨발바닥을 대고 싶지 않았다. 가장 뜨거운 온도로, 가장 세게 틀어 놓고서 제영은 욕실에서 나왔다. 저렇게 두면 저절로 청소가 되겠지, 하고. 싱크대로 가서 세수를 했다. 녹아내린 것들에서 녹슨 냄새가 났다. 제영은 그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고 침대에 누웠다. 슬프다든가 괴롭다든가, 아니면 우울하다든가 하는 단순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슬프면서도 괴롭고, 괴로우면서도 우울하고,우울하면서도 역겨움과 기쁨이 가슴에 스민다. 제영은 아직도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살아야지.
어디 불구가 된 것도 아니었다. 조금 힘든 일을 겪은 것뿐이었다. 그냥 아주 잠깐 동안만 삶이 망가졌을 뿐이었다. 제영이 다시 일어났다. 숨이 눅눅하여 보니 욕실에서 물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따뜻한 습기에 제영은 애틋한 마음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갑자기, 씻기에는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게으름뱅이가 되는 걸 선택했다. 욕실의 물을 잠그고 누워버렸다. 눈을 감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의 물줄기 소리가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 제영의 귓가를 두들겼다. 빗소리 같기도 하고 모래가 쏟아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환청이 점점 작아져 희미하게 이어지다가 제영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리고 분명 무슨 꿈을 꾸었는데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영영 기억나지 않을 꿈이기도했다.
제영은 희주에게 말한 대로 출근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까지 내팽개쳐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사에게 한 소리 들었지만 그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이렇게 길게 결근한 경우에는 해고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자네 정말 무슨 일 없나?"
"예, 갑자기 컨디션이 너무 나빠져서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괜찮아졌으니 저 때문에 지체된일들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영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일어나며 이사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것도 이해가 갔다. 이사 정도의 세대는 아파 죽을 것 같아도 일단 출근은 해야 한다고 배웠을 테니 젊은 사람의 불성실함이 좋게 보이진 않을 게 분명했다. 제영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고 이사는 그만 나가서 일을 보라며 손을 내저었다.
탕비실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회계팀 직원중 하나가 병가 처리를 하라고 지시받았으니 병원 진단서를 제출해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죠? 그게 있어야만 처리가 됩니까?"
"원래 안 되는데, 제가 팀장님하고 한번 얘기 해 볼게요."
그걸로 그녀의 용건은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물쭈물하는 게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할 말 있어요?"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로 파혼하신 거예요?”
의외의 질문이었다. 의아했지만 단순히 생각해 보면 결혼을 앞둔 남자가 며칠씩 결근하고 이 얼굴로 출근했으니 그런 생각을 할 만했다.
"아니요. 정말로 몸이 안 좋았어요. 파혼 같은 거 아니에요. 아직도 잘 만나고 있습니다."
"아, 죄송해요. 그냥 그런 말이 있어서. 다들좀 걱정하고 있기도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상하게 생각한다고요?"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파혼 같은 건 다 헛소문이라고 제가 애들한테 말해 둘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여자 친구분도 걱정 많이 하셨겠네요. 몸조리 잘하세요. 가 볼게요."
제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출근한 이후로 주변의 반응이 싸한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랜만에 회사에 와서 분위기 적응을 못 한 건가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좀 많이 이상하긴 했다. 처음에는 동혁을 의심했으나 그게 아니라 저 파혼 소문이 원인이었다. 사람들은 남 이야기 하는 걸 좋아했다. 남녀문제를 속닥이는 것에 특히나 사족을 못 쓰곤했다. 파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좋은 안줏거리가 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혼하게 되면 다 헛소문으로 판별이 나고 다시 조용해질 것이었다. 제영은 크게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다고 여겼다.
그날 밤 이후에 해진의 연락은 없었으나 준성으로부터의 전화 한 통이 있었다. 물건은 주문해 뒀으니 받으면 자기가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 말뿐이었지만 충분했다. 모든 것은 끝이났다. 해진이 자신을 놓아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불 속에 있던 제영은 속옷 안에 손을 넣고 제 성기 끝을 더듬었다. 여전히 어색한 감촉이 손끝을 맴돌았다. 살을 뚫었으니 빼낸다고 하더라도 흔적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제 성기만 쳐다볼 사람도 없고 남은 흔적들을 누가 우연히 본다고 해도 피어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터였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피어스도, 해진과의 관계도 전부 비상식의 극단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비밀로 남겨 둘 생각이었다. 아니 남겨 두지도 않고 잊어버려야했다. 사랑한다고 소곤대던 목소리와 괴롭힐 목적으로 차갑게 굴던 태도들도 전부 잊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겪은 것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기억들과 거기서 파생된 굴욕의 시간들은 제영의 삶에서 어느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사라질 운명이었다. 제영은 어깨가 시려 와몸을 더욱 웅크리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쨌거나 제영은 자신의 세계를 지켜 냈다. 그게 가장 중요한사실이었다.
영원히 해진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회사 일이 문제였다. HS 담당 팀에서 갑자기 빼 달라고는 말할수 없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대충 핑계는 댈 수는 있겠지만 상부에서 납득하지 못하고 안된다고 하면 방법이 없었다. 제영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빨리 이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막무가내로 그만둘 수는 없으니 어서 이직 준비를 해야 할 듯싶었다. 일단은 옮기는 방향으로 결정했지만 몇 년 동안 같은 일을 하면서 익숙해진 업무며 그리 큰 기업은 아니긴 하나 이 업계에서는 그렇게 박한 대우가 아니라는 것들이 아쉽긴 했다. 그렇다고 해진과 맞부딪칠지도 모르는 이자리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급한 마당에 이것저것 재지 말고 돈은 조금적어도, 그만큼 업무도 여유 있고 근무시간도 짧은 곳에 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 조금 쪼들리긴 하겠지만 혹시나 희주와 허니문 베이비라도 생기면 아이와 함께 있을 시간도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상상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아무리 애써 봐도 희주와 자신 사이의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애 아빠가 될 준비는 되지 않았나 하고 그만 생각을 접었다. 떠오르지 않아도 현실로 닥쳐오면 실물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깊이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섹스는 할 수 있겠지?”
제영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탕비실에는 제영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애인과의 관계를 하려는데 발기가 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몸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아직 젊었다. 걸리는 게 있다면 정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다 끝났으니까 트라우마는 곧사라질 것이었다.
그래도 불안이 제영의 가슴 속에서 슬그머니고개를 들었다. 욕구가 생기지도 않고 아직 달려 있는 것이 신경 쓰여 혼자 할 마음도 나지 않았다. 피어스를 떼어 내고 나면 한번 혼자 해 봐야 할 듯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위한 시뮬레이션으로 여체를 떠올려 봤으나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제영은 해진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아랫배가 욱신거렸고 아픔과 버무려진 저속한 쾌락이 하반신을 스쳤다. 제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김 대리님, 지금 출발한다니까 이만 나오셔야할것같은데요."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이는 동혁이었다.
"아, 그래."
제영은 무슨 오해라도 받을까 싶어 얼른 얼굴을 식히려고 손부채질을 했다. 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으로 머리도 빗어 넘겼다. 그렇게 해도 불쾌한 기억으로 열이 오른 몸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아프다더니 혈색이 좋으시네요. 애인 만나러 갈 생각에 그런 건가요."
"너 저번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제영이라는 것조차도 짐작하기 어려운 사진 이 전부였다. 그 외에 증거는 없었다. 술자리에 해진이 데리러 온 것은 그저 작은 해프닝일 뿐 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동혁과 제영,해진뿐이니 없었던 일이라고 해 버리면 없는 일이된다. 그리고 이제 다 끝난 일이었다. 제영은 어깨를 폈다. 이런 놈에게까지 굽실거리고 싶지 않았다. 제영의 태도에 동혁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렇게 남의 일에 신경 쓸 시간에, 네 일이나 알아서 하지 그래. 저번 전화 통화한 사람이랑일은 정리됐어? 표정을 보아하니 안 그런 모양인데, 그래서 그런 거야? 같은 남자인 이해진 팀장 가지고 애인이니 뭐니 하는 거 보면 너 아주 이상해. 네 쪽이 의심스럽다고. 정말 무슨 남자라도 만나는 거야?"
동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보면서 제영은 생각만 해 오던 것들이 진짜였음을 확인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주변에 제대로 된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동혁을 내버려 두고 제영은 짐을 챙기려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필요한 서류를 챙기면서 슬쩍 주변을 살펴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한 번씩은 제영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파혼 소문 때문으로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소름 끼쳤다. 눈알만 천천히 굴려 제영을 보았다가 바로 다른 쪽을 쳐다본다. 그 시선의 궤적아래에는 제영을 제외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암묵적인 확신이 깔려 있었다. 제영은 그게 무엇인지 짚이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딱한 가지가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동혁의 것조차도 어쭙잖은 추측일 뿐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차가 보였다. 먼저 탄 배차장이 손을 흔들었다. 동혁이 정신을 추스르고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제영은 배차장에게 한 대만 피우고 오겠다고 얘기하고는 정문 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경비원역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제영이 가볍게 묵례를 하며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담배를 쥔 경비원의 손이 시뻘겠다.
"어디 다치셨어요?”
깊게 주름이 팬 얼굴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바깥쪽 벽을 가리켰다. 그 벽 너머로 붉은 흙들이 뒤엉켜 있었고 채 닦이지 못한 것들이 흐르고 있었다. 제영은 홀린 듯이 그 흘러내린 자국을 따라 걸었다. 마치 전염병이라도 돈 것처럼 횐 벽돌 틈 사이사이에 붉은 액체가 끼여 있었다.
"어느 미친 여자 짓이야."
경비원이 혀를 찼다.
"다짜고짜 와서는 이 지랄을 해 놨어. 갑자기 시뼐건 페인트를 여기다 쏟아붓고는 씩씩거리지 뭐야.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런 말을 하지 뭐야."
차 안은 조용했다. 동혁도, 배 차장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나 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적의가 가득했고 둘 다 뭔가 불안해 보였다. 제영은 이 모든 상황이 불길했다.
미신 같은 것은 믿지도 않고 감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이상했다. 제영은 괜한 노파심이라고 여기며 결혼이라든가 아이라든가 하는 것들로, 그러니까 스스로를 안심시킬만한 생각들로만 머리를 채워 넣으려고 허덕거렸다.
그런데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고 자꾸아래가 따끔했다. 그 추한 물건 때문에 결국 무슨 염증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확인해 볼 방법이 없었다. 제영은 그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일뿐이고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아랫도리 문제도 사람들의 반응도 아무 일도 아닐 것이라고 여러 번 입 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모양뿐인소리는 진실로 소리가 되지 못하고, 그저 제영의 속만 타들어 가게 만들고 있었다.
'자기 남편이 여기 직원이랑 바람이 났대. 그런데 이름을 모른다지 뭐야. 내가 하도 궁금해서 인상착의라도 모르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키가 크고 눈썹이 짙은 남자래. 그래서 내가 속으로 이 여편네가 돌아도 제대로 돌아 버렸구나했지. 아니, 남편이 어떻게 남자랑 바람이 나냐고 그랬더니. 사람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이를 바락바락 갈면서 홱 가 버리지 뭔가.'
제영은 그 이야기를 듣고 누구 하나를 떠올렸다. 전부 왜 이리 더럽고 구질구질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들 그렇게 제 더러운 치부를 숨기고 즐겨 오면서 혹여나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더러운 짓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해진의 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이려나. 이런 생각을 이어 가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저새로 알게 된 남의 추문이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덮어 버리길 바랄 뿐이었다.
건물로 들어서자 제영은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로 끝낼 생각인 게 맞나. 그때의 눈빛이 어떠하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의 비참함만이 기억날 뿐, 울부짖은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가 거기에 답은 했었나.
제영은 횐 건물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긴 했지만 실상 끌려 들어가는 심경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제영이 동혁의 얼굴을 쳐다보고 이어 배 차장의 얼굴도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평온했다.
그 평온한 스스로의 모습이 스러져 가는 정신을 붙들도록 도와주었다. 제영이 말린 어깨를 폈다. 여기 어느 하나, 깨끗한 사람은 없다.
제영은 떨리는 손을 다른 사람이 볼까 싶어주머니에 넣고 숨겼다. 미팅 장소에서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상무에게도 인사했지만 그는 노골적으로 제영에게 싫은 티를 냈고 배 차장은 그 모습을 보고 히죽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제영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뒤로 물러서서 상무의 시선에 잡히지 않을 만한 구석에 박혀 있을 뿐이었다.
상무를 만나고서 정작 그와의 다툼보다도 해진과의 일이 굴비 엮이듯이 줄줄 떠올랐다. 뺨을 맞고 옷이 벗겨진 채로 당했던 치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영은 그런 기억들을 날려 버리려고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젖은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제영이 소매 끝으로 문질러 닦아 냈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가, 피부에 남아 있는 상흔들이 마치 제영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해진이 속삭이던 사랑을 떠올리라고 부추겼다. 제영이 넥타이를 조금 헐겁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손으로 꾹눌렀다.
제영은 가벼운 패닉 상태였지만 오히려 그탓으로 가라앉은 표정은 진중하기만 해서 다른 사람은 제영의 상태가 어떠한지 눈치채지 못했다. 제영은 시계를 자꾸만 확인하며 빨리 여기를 벗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초조해졌다가도 갑자기 가슴이 차분해져 오기도 했다. 조울증 환자처럼 감정이 높은 곳으로 올랐다가 다시 바닥으로 처박히고 다시 그걸 동력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러던 와중에 감정의 추가 중간쯤 오는 순간 숨을 고르며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고가 있었고 그 사고는 큰 사고였으니 후유증을 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부 해결된 것이었고 더 이상 여기에 시달릴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 일일이 과민하게 타인의 반응에 의미를 두는 것도 사고 후유증 중의 하나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평소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회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을 살필 여유는 생겼다.
다들 그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구석의 제영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제영은 현재의 혼란이 아닌, 조금 이후의 일상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는 자신도 그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구석에 뭐가 있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것을 떠올리니 맹렬했던 가슴의 두근거림이 쥐 죽은 듯이 가라앉았다.
남자가 주었던 고문 같던 애정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듯이 제영이 지금 겪고 있는 것들도 없어질 것들이었다. 제영이 다시 무릎에 손을 올려 자기 다리를 더듬어 보았다. 떨림도 아픔도 남아 있지 않았다.
회의는 끝이 났다. 제영은 짐을 정리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길다고 느꼈던 회의 시간은 오히려 평소보다 짧았다. 퇴근하는 길에 차가운맥주라도 하나 사 들고 가서 집에서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TV 프로그램을 안주 삼아 유유자 적하게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한잔하는 중간중간 어디 회사에 사람을 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연락을 돌려 볼 생각이었다. 잠들기 전 애인과의 전화도 빼먹지 않을 것이다. 분명 늦은 시간에 전화했다고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면 조금은 서 운해하는 척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HS 쪽의 사람이 핸드폰으로 통화하며 당황한 얼굴로 상무를 바라보았다. 제영은 그들만의 문제일 거라고 여기며 다시 제 짐을 정리했으나, 어딘가에 못 박히듯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되자 따라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영은 거기서 괴로움의 실체를 마주쳤다.
그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제영 혼자만 그를 바라보고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었다. 해진은 혼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박 비서 와 다른 사람 몇몇이 그의 곁에 섰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상무는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고 우리 쪽 사람들은 당황을 넘어 경악한 상태였다. 이미 이루어진 계약에 대한 전면 재검토, 이유가 뭐냐고 묻는 우리 쪽 사람들에게 해진은 제영조차도 잊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일성의 자체 공장에서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HS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 라면 우리 회사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전에 다른 계열사에서 비슷한 일로 큰손해가 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특히나 신경썼기에 사고와 산재 건에 대한 보고서를 따로 요청드렸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상당히 큰 상해를 입었고, 보고서 제출 이전에 발생한 일임에도 자료에는 누락이 됐더군요. 계약 재검토로 당연히 제품 출시는 연기될 예정이고,때문에 이쪽의 손해가 적지 않습니다. 고의성 여부에 따라 상당히 많은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사가 탄식과도 같은 침음을 내뱉었지만 해진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HS는 전신인 혜성기전 설립자의 유지에 따라 비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모든 행위에 대해 협력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경영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재검토라고 말씀드렸기는 하나, 좋은 결과는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가 말을 끝냈지만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내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기습이었다. HS 쪽의 담당자조차 몰랐던 일이였다. 자기가 주도했던 계약의 처지가 이렇게 되자 상무는 주먹을 꽉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이 일이 해진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진은 그런 상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심한 시선으로 보고는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가기 직전 철저하게 외면하기만 했던 제영에게 잠깐 동안만 눈길을 주었다.
상무를 바라볼 때와 그다지 온도 차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뭔가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제영은 그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가고 나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사고는 함구하기로 하지 않았어? 도대체 누가 보고를 했지?"
배 차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의심 가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상무도, 이사마저도 오래전부터 의심해 왔던 한 사람의 배신자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희생양을 찾지 못한 이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제영은 해진이 나간 뒤,바로 뒷문으로 그를 쫓았다. 그러나 곧장 복도로 꺾어 들어간 그의 무리를 놓쳤고 겨우 뜀박질을 친 후에야 잡을 수 있었다. 제영이 해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가 멈춰 서고 나머지들도 같이 정지했다. 제영이 점차 해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해진은 주변의 사람에게 그만 가 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흰 복도 속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어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이러는 겁니까."
"제영 씨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해진이 고개를 가웃 기울이며 물어왔다.
"끝내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다 끝내기로 하고. 혹시 서류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미안해요. 나는 조금 불안해서, 물론 당신을 믿지 않은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물건을 먼저 받고 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아직 주지 않은 거예요.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았어요. 오늘이라도 당장줄게요.”
해진은 잠잠히 제영이 폭포수처럼 쏟아 내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이러지 말아요. 우리 둘의 개인적인 일이었잖아요. 갑자기 그걸 이런 식으로 끌고 와 버리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해진 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공장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하는 불쌍한 애들도 있고 본사에도 집 대출금 갚느라 야근에 주말근무에 끽소리조차 못 내고 일하는 가장들도 많아요. 이런 식으로 계약을 뒤집어 버리면 한두사람만 괴로워지는 게 아니에요.”
"그중에 당신도 포함되어 있나요?”
"뭐?"
"제영 씨는 말하는 거 보면 안 좋은 버릇이 있어요. 꼭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남을 위해 주는 척 말하면서 깊이 들어가 보면 순 이기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고 있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봐요.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이 계약이 파기되면 당신도 피해를 보게 되는 건가요?”
"날 의심하고 비난하겠지! 따로 보고한 것도 나고 몇몇 사람은 당신이랑 친분이 있는걸 아니까! 정리하자고 했잖아. 전부 잊기로 하고, 당신도 그러기로 한 거 아니야?”
"당신 말이 맞아요. 난 그러기로 했고 정리하는 중이에요. 기억나요? 이거?”
해진이 자신의 셔츠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제영도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당신이 내가 준 시계를 다시 내게 돌려줬죠?
이번 일도 그거랑 다 같은 맥락이에요. 내 애정을 발판 삼아 당신이 얻은 것들. 이 시계,옷 그리고 이번 계약까지. 나는 꽤 많은 걸 당신한테 줬고 지금 그것들을 돌려받고 있는 것뿐이에요.
제영 씨에게 피해를 줘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것까지 상관하고 싶진 않아요."
제영이 핏기가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해진을 쳐다보았다.
"설마 날 원망하는 거예요? 그러지 말아요.
그것들은 원래 당신 게 아니었어요. 그게 없어 져서 당신이 무너진다고 해도 내 탓은 아니죠.
그냥 당신이 나약한 거야.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봐요. 내가 이때까지 당신한테 뭘 줬는지.
그러면 앞으로 내가 뭘 가져갈지,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대충이라도 감이 오지 않겠어요?"
"날 사랑한게 아니지."
해진은 여전히 차분한 눈동자로 제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제영이 무슨 말을 하려길래 사랑 타령을 시작하는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자 실망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랑한다고 말한 거,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지? 날 이용한 거야. 상무를, 당신이랑 척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 나는 네가 한 짓을 전부 용서하려고 했어, 전부 잊으려고 했어. 근데 당신은 마지막까지."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웃어요.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된 거 아닌가요? 모든 건 정리되어 가고 있잖아요. 물론 이런 방식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있겠지만."
해진이 안쓰럽다는 듯이 제영의 어깨를 만져왔다. 그 느낌이 더러워 제영이 그 손을 뿌리쳤다. 해진은 뿌리쳐져 허공에서 잠시 갈 곳을 자신의 잃은 손을 살펴보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좀 더 낮고 저열한 목소리로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리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 여자가, 그러니까 당신이 방금 전에 말했던,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서 일한다는 그 불쌍한 애들 중에 한 명이 우리 쪽을 찾아왔어요. 당신이 피를 뒤집어쓰고 내 품에서 질질 짜고 잊어버렸던 그 사고 때문에 손의 3분의 2이상이 뜯겨 나간 그 여자애는 영구적인 손상을 입어서 의수를 차지 않고서는 어디 가지도 못한 다고 했어요."
귀가 웅웅거렸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어디서 들렸다. 동시에 모래가 쏟아지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그 요란스러움 속인데도 해진의 목소리는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 여자애가 도움을 청하려고 당신에게 몇번이고 연락을 했다던데,안 받아 줬다면서요.
왜 그랬어요? 당신한테 피해가 올까 봐?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니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회사에서 알아서 처리한다고 해서. 어차피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입 다물어요. 이제 억울하다고는 말 못 하겠네요."
해진이 제영을 보고 살짝 웃었다. 그가 키스라도 할 것처럼 제영의 목덜미 옆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비난받을 만하잖아. 이 쓰레기."
제영의 눈가 주변이 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해진을 마주 보지 못하는 눈동자는 바닥을 향했다. 눈동자 표면이 젖어 왔으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다만 타인이 보면 꺼림칙하게 느낄 만큼 얼굴이 희게 뜨고 호흡에는 쌕쌕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해진이 손으로 제영의 사타구니 사이를 훑었다. 제영이 움찔거렸지만 해진은 놓고 온 제 물건을 확인하는 것처럼 거리낌 없는 손길로 그곳을 더듬었다.
"이거 말이에요. 당신이 알아서 해 봐요. 내가 그렇게 싫었다면서요. 그 정도로 싫었으면 내가 달아 둔 거 잡아 뜯든지 잘라 내든지, 그 여자애반 정도의 독기라도 발휘해 보세요. 아, 그리고 이 사고 건은 피해자한테 직접 들었다고 얘기할게요. 절대로 당신이랑 알몸으로 부대끼면서 들었다고는 하지 않을게요. 그러면 당신한테 갈피해가 조금 줄어들까."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입술위로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저 야멸찬 입맞춤일 뿐이었다.
"잘 지내고, 후회는 하지 말아요. 그러지 않더라도 당신 지금 충분히 비참할 테니까."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 갈 길을 갔다. 텅빈 복도에서 제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해진을 제외하고는 횐 벽뿐이던 공간에서,이제는 해진마저도 없이 거기에 홀로 남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절망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좋지 못한 방향으로, 제영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더 깊은 구렁텅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모래가 머 리끝까지 차올라 숨이 막혀 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있었다. 제영의 삶이란거기에 휩쓸리며 때론 손을 내밀고 허우적거리기도 하는 소시민의 삶이었다. 그저 급류나, 소용돌이만은 만나지 않기를 바라왔으나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영이 겪고 있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해진과의 만남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인연이었듯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내리고 제영을 쓸어 갔다. 날카로운 것들에는 몸이 할퀴어졌고 부드러운 것들조차도 따가워 몸서리를 쳤다. 괴로운 하루에, 괴로운 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해진 측에서는 서류로 재차 모든 걸 통보한 상태였고 거기에는 그가 말해 준 대로 피해자의 직접 진술이 담겨 있었다. 어느 시점,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회사의 대처는 어떠하였는지도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어린아이의 처절한 심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제영은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그저 외면한 것밖에 없다고 여겼음에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도 일단은 항변하려고 했다. 배신자라고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제영은 항변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들은 그날 해진이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으로 돌아온 제영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작당의 무리에 속한 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용당한 후 버려진 자의 어리석은 얼굴이었다. 모두 제영의 아둔함에 혀를찼다. 그들은 제영을 배신자라고 의심하고 있었지만 실상 드러난 바로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아랫급의 처지였다. 사람들은 제영을 동정하기 보다는 깔보기 시작했다. 딴에는 은연중이라고 여겼으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제영은 더는 회사에 있을 수 없었다. 그건 상부의 결정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 일이 제영개인의 실수라기보다는 회사 차원에서 은폐하고자 했던 사고가 문제가 되어 발생한 것이었지만 눈에 거슬리는 것은 치우고 봐야 했다. 이사는 사직서를 요구했고 제영은 그걸 받아들였다.
'일신상의 사유'라는 모호하고 애매한 것으로도 서류는 수리되었다. 회사는 제영에게 유예 기간도 없이 당장에 나가 달라고 말했다. 회사에 끼친 손해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덮어 주는 것을 고마워하라며.
사장과 이사는 정신이 없었다. 계약은 거의 파기되는 걸로 결정된 듯했고 그들은 변호사에게 자문하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고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면 어느 정도 액수인지를 알아보려고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일이 지나고 그 다음 날이 되고 몇 개월이 지나면 다들 제 일을 하느라바빠서 제영의 존재 같은 것 잊어버릴 것이다.
제영 자신 역시도 이 모든 일들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되뇌고 있었다.
당연히 송별회 같은 건 없었다. 제영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몇몇이 인사치레라도 약속을 잡자고 말해 왔지만 제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들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인사팀장이 건네는 서류에 서명하고 나온 제영은 코트를 꺼내고 가방을 챙겼다. 제영의 이른 퇴근 준비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가야겠다 싶어 가방을 들려는데 갑자기사무실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제영은 소란이든 뭐든, 이제 회사와 상관없는 사람이니 그냥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란의 주범을 보고 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상무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술에 취한게 분명한 듯 몸짓이 거칠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영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시커먼 눈알을 굴리고 있던 상무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싸늘해졌다. 그가 제영을 얼굴을 확인하고는 사람들을 밀치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제영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얼떨떨해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입안이 터진 듯 비린 맛이 혀에 확 풍겼다. 다리가 풀린 제영이 주저앉아 상무를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금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그전에 사람들이 그를 붙들었다. 여직원들은 소리를 지르고 제영 주변의 사람들이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답할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제영은 피 냄새에 섞인 무언가 불길하고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 무언가 타는 듯한 악취였다. 그게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상무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달려온 이사가 붙잡혀 있는 상무에게 물었다. 상무가 버둥거리 면서 제영을 손가락질했다.
"이 새끼가 함정을 팠어. 그놈이랑 함정을 파서 날 이 꼴로 만들었어. 횡령죄? 뇌물죄? 씨발.
다 네놈이 한 짓이지? 이 짓하고 뭘 받기로 했어? 어디 한자리라도 준다고 하던?”
제영은 상무가 왜 저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왔는가를 눈치챘다. 그는 회사에서 버려졌을 것이다. 궁지에 몰린 생쥐 꼴로 갈 곳을 못 찾은 저 더러운 남자는 고양이 대신 같은 생쥐를 물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제영이 쭈뼛대며 일어나바닥에 떨어진 제 가방을 주워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상무가 더욱 버둥거렸다.
"이거 안 놔? 저 새끼 내가 반 죽여 버릴 거야. 저 더러운 놈. 더러운호모 새끼."
순간 제영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영의 반응을 보고 상무가 이죽거 렸다.
"너지? 그 새끼랑 붙어먹은 놈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 새끼가, 그놈이 너 같은 거랑 같이 다닌다는 게. 왜? 내가 틀린 말했어? 뭘 그렇게 쳐다봐? 남자 좇 빨아 먹고 다니더니 보이는게 없어? 어?”
제영은 그대로 뛰쳐나왔다. 뒤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들렸다. 늙고 비루한 남자의 괴성이었다. 추잡해질 대로 추잡해진 이에 대한 경악에 찬 사람들의 탄식도 따라붙었다. 제영이 귀를 막았음에도 모든 것이 귀에 선명한 소리로 꽂혔다.
차에 바로 시동을 걸었다. 정문이 열리기도 전에 범퍼를 들이미는 바람에 경비원이 당황했지만 제영은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차가 아슬아슬하게 철문을 긁고 밖으로 빠져 나갔다. 제영은 속도를 내며 어딘가로 향했다. 그러다가 몸이 너무 떨려 운전대를 제대로 잡기가 어려울지경이 되자 길가에 차를 세웠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홀로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누구에게라도 가야만 했지만 제영은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아 울음을 그친 후에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길게 빵,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운전석으로 온 사람이 차창을 두드리며 손짓으로 얼른 차를 빼라고 재촉했다. 그제야 제영이 고개를 서성거리는 짓거리를 그만두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동혁은 일을 하다말고 그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 소수자라는 게이로 살아오면서 별별 일은 다 겪었고 이제는 무더졌다고 여겼는데, 그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넋이 나가 널브러져 있던 제영의 얼굴도 떠올려 보았다. 제영이 그렇게 뛰쳐나가고 난 뒤에도,상무는 계속 날뛰었다. 술에 취한 남자가 절제를 모르고 외치는 모든 것들이 제영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일찍이 도망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동안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HS 쪽에 포섭됐다는 소문으로 이미 시끄러웠던 그에 대한 이야기는 파혼 소문과 상무 사건을 거치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이쪽업계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할 터였다. 게이로서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아웃팅은 근래에 들어온 것 중에 최악이었다. 동혁은 속이 답답해져차가운 커피라도 한잔 마실 생각으로 탕비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먼저 자리를 잡은 배 차장과 회계팀의 직원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의심이 가긴 했어. 그 새끼가 뭐가 있어서 그 팀장이랑 엮일 수 있었겠어. 어이구,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결혼할여자 친구까지 있다는 새끼가 그럴 줄은 몰랐지."
배 차장이 말하자 주변 직원들이 '어머, 어머.'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제영에게 딱히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불쌍해진 남자를 더 불쌍하게 만드는 듯해 동혁은 얼른볼일만 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이건 따끈따끈한 소식이야. 내가 저 경비 아저씨한테 들었는데, 저번에 어느 미친 여자가 정문 벽에다가 새빨간 페인트를 붓고 간 적이 있었잖아. 근데 그 여자가 뭐라고 하고 갔냐면, 제 남편이랑 여기 직원이 바람을 피웠대. 더 충격적인 건 뭔지 알아? 여직원이 아니라, 어떤 남자 새끼라고 했대.”
동혁의 컵 안에, 사각 얼음이 우수수 떨어지며 찰카당거렸다. 컵의 차가움이 손바닥을 관통해 머리까지 후려친 것처럼 동혁의 표정이 굳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동혁이 들어온지도 몰랐던 배 차장이 동혁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배차장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동혁은 생각을 고쳐먹고 대화에 끼었다. 혹여나 생길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이기적인 예방책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이에게 몇 개의 추문이 더 붙는다고 해도 어차피 그치는 모를 터였다.
* * *
제영은 하루에 꼬박꼬박 수면 시간 열 시간은 가뿐히 넘기고 있었다. 지나친 잠으로 점점더 나약해지고 있었지만 잠을 못 자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졸리는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이것을 어찌해야 할까 살짝 만지작거리다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그래도 성기에 달린 것이라고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어찌 뜯어내 버리든 잘라 내버 리든 간에, 당분간은 무시하기로 했다.
정신을 차려야 돼.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던 제영이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수면제를 타기 위해 들렀던 곳. 의사는 제영을 알아보았다. 그는 제영의 도형이 그려진 노트를 펼치고 물었다.
"아직도 힘드신가요?"
"예."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원인이었다. 제영은 다른 거짓말로 핑계를 대 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머리가 깨끗이 비워진 것처럼 하얗게 돼 버렸다. 의사는 제영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영은 고개를 숙여 무릎에 얌전히 올려 둔 제 손을 보았다가 다시 의사의 얼굴을 보며 예전처럼 그저 일이 힘들다고 답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강한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말했고, 제영은 그 약을 받아 왔다.
집에 돌아온 제영은 바로 약을 먹었다. 그리고 이불 속에서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꿈을 꾸기를 기다렸다. 계속 꿈만 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꿈을 기다리는 건지는 확실치않았다.
"다른 일을 찾아보고 있습니 다.”
"그러세요? 때론 문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꽤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죠.”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이직'이라고 적었다. 제영이 그것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의사의 얼굴을 보았다.
"저번의 약은 좀,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잠은 잘 오는데, 계속 피곤하고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냥 처음 먹었던 약을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제영은 새로 2주 치의 약을 처방 받고는 병원에서 나왔다. 신경 정신과를 이렇게 드나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약은 생각보다효과가 좋아서 제영의 숨통을 틔워 주고 있었다. 아직도 가슴이 답답하긴 하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고향에 내려가는 건 어떨까 싶었다. 결혼 얘기가 오가던 아들이 돌연 귀향을 하면 부모님은 좀 놀라시겠지만 그래도 아들이니 어디 내쫓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희주에게 먼저 회사 그만 둔 이야기를 하고 잠시 결혼을 미루자고 양해를 구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녀가 받아들여 줄까.'
제영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울해졌다.
그녀마저 없으면 정말로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것 같았다. 제영은 힘들어지면 스스로에게 '정신 차리자'고 다독였다. 문득문득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약을 먹고 잠들었다. 그러면 꿈을 꿨다. 내용이 어렴풋해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서운꿈은 아니었다.
[제영 씨, 바빠? 있잖아, 당신이 두고 간짐 어떻게 할까? 가지러 올래? 아니면 내가 갖다줘?]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하고 있던 제영에게 희주가 먼저 연락을 해 왔다.
[미안, 깜박했다. 가지러 갈게.]
언제까지 미룰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결국 제영은 애인을 만나기로 했다. 만나면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까. 당사자인 제영조차도 지금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타인인그녀를 무슨 수로 납득시킬지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설명을 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희주와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 그녀가 제영에게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지만 제영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고 근처에 예전에 가 봤던 레스토랑이 있어 거기로 갔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녀는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핸드폰만을 응시하고 있어서 무슨게임이라도 하는 건가하고 제영이 힐끗 그녀의것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호 필름에 반사되어 화면은 그저 검게 보일 뿐이었다. 계산을 끝내고 왔을 때는 아예 이어폰까지 끼고서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영은 드라마라도 보는 건가 싶어 그녀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물었다.
"도대체 뭘 하길래 그래?”
"그냥 별거 아니야. 확인할 게 있어서."
제영이 계속 바라보자,시선을 의식한 희주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캐리어는 차 안에 있어. 너도 그 공원 주차장에 차 댔지?"
"응, 그럼. 일단 짐부터 실어 두고 소화도 할 겸 공원 좀 걸을까."
희주가 차 트렁크를 열자, 제영의 캐리어가 보였다. 제영은 그 아무것도 아닌 물건을 보자 마자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런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마음을 다독였다.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심정이긴 했지만 모두 끝이 났다. 두려워할 것은 더 이상 없었다. 해진은 자기가 준 것들만 다시 가져가겠다고 했다. 눈앞의 이 여자는 원래 제 곁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뺏어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제영은 희주가 가져온 캐리어를 질질 끌고 걸었다. 고르지 못한 바닥 벽돌에 자꾸만 캐리어 바퀴가 걸려 제영이 뒤처졌다.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이 시리고 아팠다. 손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캐리어를 잠시 세웠다. 반대편 손으로 잡고 앞을 보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희주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영은 희주를 보면서 꿈속의 여자를 떠올렸다. 근래에 자꾸만 그 여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매번 얼굴이 바뀌었어도 항상 그 여자임을 제영은 알았다. 다정한 태도와 부드러운 목소리, 깊이 잠들지 못하는 제영을 수마의 늪에 빠트려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희주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제영은 캐리어가 덜커덩거려도 거칠게 끌었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제영이 다시 멈춰 허공에 시선을 주었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뿌연것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것들이었다. 제영은 그 사이로 보이는 희주가 꿈속의 여자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려 그녀에게 꿈과 같은 온기와 다정함을 기대하고 만다. 희주의 뺨을 더듬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오랜만에 적의 없는 타인의 온기를 느껴 보고 싶었다. 제영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시야에 애인의 얼굴이 꽉 찼고 제영은 그녀에게 웃어 주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아프진 않아요?
그런데 애인이 갑자기 그렇게 중얼거렸다.
말을 한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듯했다. 또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넣어 두었던 이어폰도 그녀의 귀에 꽂혀 있었다.
제영 씨.
제영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저런 톤으로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익숙하면서 낯선 억양. 나쁜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흉측한 것이었다. 희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파랗게 식어 있었다. 뺨에도 혈색이 없고 시선이 거세게 흔들렸다.
"희주야."
제영은 캐리어도 내팽개치고 그녀에게로 갔다. 그녀에게 전부 거짓이라고 말해 주어야 했다. 자신 역시도 속은 것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렸다.
희주가 자신의 핸드폰을 제영에게 내밀었다.
핸드폰에 연결된 이어폰이 달각거리며 바닥으로 주욱 늘어졌다. 처음 사진을 받은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제영 역시도 익숙한 사진이었다.
찌라시로 돌고 있던 흐린 것이었다. 다음 것은 좀 더 선명했다. 그 다음은 좀더, 좀더. 그리고 이제는 제영의 얼굴이 확실하게 보였다. 해진의 품에서 가만히 안겨 있는 모습이나, 손을 잡은 장면도 있었다. 차에서 키스하는 모습은 제영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적나라했다.
어째서. 어째서. 제영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것만큼은 빼앗기면 안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착오가 있었다. 애인은 제 애인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만나 온 사람이었다.
"희주야."
제영이 다시 애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희주는 대답 대신, 늘어진 이어폰의 가닥을 세게 잡아당겼다. 재생된 영상의 소리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더러운 신음과 작게 소곤대는 웃음소리들. 해진이 제영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수십 번을 만나 온 제영조차도 속아 넘어갔던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희주는 그럴 기회조차 주질 않을 생각인 듯했다. 손에 쥔 이어폰 선을 그대로 제영에게 집어 던졌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아플 리가 없었지만 충격만큼은 심하여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이 뒤집히는지 여러 번 구역질을했다. 방금 먹은 것들이 게워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그대로 사라져 버릴 때까지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제영은 희주가 영영 떠나가는 것임을 알고서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저이를 놓치면 이제정말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영상은 길지 않아 소리는 잠잠해졌다. 제영은 손안의 것을 보았다가 다시 허공을 응시했다.
추워서 발이 꽁꽁 얼어 버린 걸까 하고 제영이 제 발가락을 꿈지럭거려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추워’하고 중얼거렸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춥다고 해도 와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문득 지금이라도 희주를 쫓아가 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영은 캐리어도 버려두고 걸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희주야, 희주야 하고 부르는 와중에 이름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떠나간사람들이 비슷한 이름이라는 걸 깨닫자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애인의 이름과 남자의 이름이 섞여, 이제는 그녀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헷갈렸다. 제영이 입만 달싹였다. 그 어느 이름 하나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입만 달싹이고 있었다.
공포, 두려움, 슬픔, 그 수천 가지의 불행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며 이윽고 하나로 귀결되는 이름에 제영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떠올려 봤자 소용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이용만 당하고 버려 졌다.
아까의 잔눈발이 조금은 짙어지긴 했어도 아직도 흐린 먼지나 다름없었다. 희게 날리는 그자그마한 알갱이들은 제영이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그걸 잡아 보려고 해 봐도 두 손에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제영이 손으로 얼굴을 덮고 주저앉았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내팽개쳐둔 캐리어는 바람에 밀려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제영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영이 입술을 깨물었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시끄러운 소리와 도로의 차들이 달리는 소리,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섞여들어 먹먹한 이명이 가득 들어찼다. 제영이 숨을 헐떡였다.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죽어 가는 기분이었다. 제영이 또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고요한데,제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것들마저도 잘게 파쇄되는 와중에 제영은 곁에 있지도 않는 이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 * *
일은 잘 끝났다. 공적인 일도, 사적인 일도 다순리대로 이루어져 마땅한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을 가지게 되었다. 해진의 일도 모두 문제없이 끝이 났다. 해진은 어쩌면 제영이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하였으나 자기 잘못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열렬히 사랑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제영을 처음 만났을 때 웃어 준 것도, 그를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한 것도, 찌라시로 사진을 퍼뜨리고 피어스를 한 것도, 그 희주란 여자에게 사진을 보내기 시작해 종국에는 영상까지 보낸 것과 뻔히 상무가 쫓아온 걸 알면서도 제영에게 입을 맞춘 것도 다 그저 사랑하기에 한 것들이었다. 그 사이사이의 작은 일들의 이유조차도 전부 사랑뿐이었다. 타인들이 행한 소소한 것들은 그저 하늘이 제 사랑에 탄복해서 일어난일이 아닐까 여기고 있었다. 정말로 우린 맺어질 운명이었나 봐. 해진이 웃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해진이 짐을 챙겼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기다리고 있던 박 비서에게 목적지가 어디라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알아서 차를 출발시켰다. 해진은 뒷좌석에서 창밖과 시계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 펑평내리고 있는 걸 보니 꽤 쌓일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쌀쌀한 날씨인데 눈 때문에 더 기온이 내려갈 것 같아서 걱정되었다. 물론 원래 몸에 열이 많아서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진은 못 본 지 꽤 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지막 모습도 꽤 마른 편이었으니 그때보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좀 더 수척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일단은 꼭 안아 주며 온기가 그에게 옮을 때까지 입을 맞춰 주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을 사람에게 묽은 죽이라도 먹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죽조차 넘기지 못하고 게워 내면 어쩌나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해진 이 박 비서를 재촉했다. 눈길에 속도를 내면 위험하지만 그를 만나러 가는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재촉을 한 덕인지 아니면 훤히 뚫린 도로 덕인지 차는 이미 몇 번 오갔던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해진의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뺨에도 홍조가 떴다. 안쓰러운 모습일 그를 떠올리면서 해진은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렸다.
그 시계는 그가 제게 준 것이었다.
"여기서 기다려요. 데리고 내려올 테니까."
그리고 해진이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살고 있는 층수는 금방이었다. 다 똑같은 모양인데도 유독 문 하나만 해진의 눈에 쏙박혀 들었다. 아마 저 문이 해진이 열고 싶은 유일한 문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번호를 바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해진의 추측은 틀리지 않아서 달콤한 소리후에 손잡이에 손을 대자 부드럽게 돌아갔다.
철컥거리며 문 안쪽에서 익숙한 향이 뿜어져 나왔다. 이곳에는 자신의 남자가 있었다.
이불 아래에 있던 이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방문자를 확인하고서는 놀라서 뒷걸음쳤다. 그래 봤자 얼마 못 가고 벽에 턱 막혀 등을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 왜 왔어요?”
제영이 탁해진 목소리로 침입자에게 물었다.
해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기 집에라도 들어오는 것처럼 어깨에 묻은 눈을 탁탁 털어 낸다음,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돈되지 않은 집 안은 엉망이었다. 탁자 위에는 약봉지들이 널려 있었고 여기저기 위험스레 술병이 쓰러져 있었다.
"나가, 나가라니까."
제영이 소리쳤지만 해진은 듣지 않았다. 원래 그런 남자였다.
"짐은 따로 챙길 거 없죠? 그냥 옷만 입어요.
코트 어디 있어요? 밖에 눈 와서 추우니까 좀 든든하게 입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영이 그에게 베개를 집어 던졌다. 좀 더 치명적인 것을 던졌으면 좋았을 뻔했으나, 그냥손에 잡히는 걸 던지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해진의 다리만 툭 건드리고 떨어진 것은 애초에 아무 위협도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고 있는 해진을 보던 제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붙잡았다. 이대로 밖으로 밀어낼 생각이었지만 밀릴사람이 아니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에서 두문불출했던 제영의 체력은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서 있는 다리가 후들거려 해진을 붙잡는 게 아니라, 도리어 기대는 쪽에 가까웠다. 해진은 제영이 주저앉으려고 하자, 얼른 허리를 껴안아 왔다. 제영은 제 인생을 망친 남자에게서 나는 익숙한 냄새에 온몸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제영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
제영이 해진에게 따져 물었으나, 힘이 다 빠져 그저 웅얼대는 수준이었다. 해진은 대답하지 않고 자꾸만 쓰러지려는 제영을 한 번 더 추켜 올리며 안아 줄 뿐이었다.
해진은 품 안의 사람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으면 오만해져서 소중한 것이 앞에 있어도 소중한지를 모든게 된다. 그러니 곁의 존재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해진에게 그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고 조금 가슴이 따끔거릴 뿐이었다. 제영은 사람의 몸이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무게감이 없었다. 해진은 이게 전부 쓸데없는 것들이 사라진 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이 몸은 온전히 제 사랑만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뒤틀던 제영은 이내 잠잠해져 해진의 가슴에 코를 박고 있었다. 몸에 힘이 없어서 고개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해진에게서 나는 향이 자꾸만 제영을 뒤흔들었다. 잊고 있었고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게 바로 눈앞에 있었다. 왜 이 남자가 다시 나타난 건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타인의 온기가, 그의 온기가 제영에게는 간절하게 다가왔다. 밀어내려던 손이 어느새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잡고 있긴 하지만 언제라도 그가 다시 자신을 밀쳐 낼 것만 같았다. 그는 이미여러 번 그런 전적이 있었다.
해진이 품 안의 제영을 내려다보았다. 제영은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그가 살며시 웃자 눈을 피해 버렸다. 괴로운 동통이 가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자신은 구제 불능이었다.
제영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해진은 기분이 좋기만 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제 허리에 둘린 제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해진이 제영을 더욱 꽉안아 주었다. 매일 밤 홀로 침대에 누우며 해진은 제영을 떠올렸다. 그리고 신앙도 없이 기도했다.
그가 산산조각이 나기를. 다시 붙이지도 못할 정도로 조각나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기를.
그러면 오롯이 주워 사랑해 줄 생각이었다. 이제 그가 가진 것은 자신뿐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제 품으로 나동그라져 앞으로 가질 수 있는것도 하나뿐이었다.
제영이 잠자코 있는 해진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제영의 눈가가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해진은 그 모습조차 좋아 뺨을 그의 정수리에 비비다가 첫 만남을 떠올렸다. 자꾸만 저를 힐끗대다가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얼굴의 부드러운 선에 마음이 설레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고 말았다. 그때를 떠올리는 해진의 입가가 풀렸다. 이제 이 남자는 제게로 침몰하여 영원히 물으로 오르지 못한 운명이었다. 해진이 한없이 사랑하여 할 수 있는 바를 다 해서 얻어 낸 것이었다.
해진이 제영에게 옷을 입혔다. 셔츠와 바지를 입히고, 양말을 신기고 코트와 목도리도 챙겼다. 그리고 손을 붙잡고 그를 끌어냈다. 제영은 그가 당기는 대로 걸었다. 문이 열리고 눈이 펑펑 내린 탓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 때문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식별되지도 않아제영은 해진이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제영이 해진을 따라 휘청휘청 걸어가면서 그를 사랑스럽다고 여겨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사랑해서 사랑스럽다고 여긴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그만두었다. 이제는 오직그밖에 없었다.
너는 유일한 것. 너는 내 가슴으로 부서져 들어와 나의 숨을 끊어 놓고 오로지 사랑만을 남겨 두었다. 그러니 나는 오로지 너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