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사랑의 딜레마 (5/8)

5장. 사랑의 딜레마

제영은 가만히 있다가도 한기가 들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힘에 의해 제압되어 유린당하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몸과 마음이 상처 입은 상태였으나 최악의 방식으로나마 그와의 관계를 끝냈다는 것만 생각하려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해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제영에게 연락해 오고, 그의 집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용서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제영은 그날 마지막에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가 그렇게 말함으로써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제영은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바닥에만 시선을 주며 주먹을 꽉쥐고 있었다.

"그랬죠. 하지만 용서해 주는 거랑 죗값을 치르는 건 별개 아닌가요? 당신이 한 짓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적어도 저한테는요. 전제영 씨 같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근데 걱정 말아요. 당신은 계속 무심한 채로, 그렇게 비겁하게 굴면 돼요. 바뀌는 건 없어요. 하던 대로, 나랑 밥 먹고 술도 한 잔씩 하고 나랑 자고. 되게 별거 아니죠? 그 여자랑도 똑같이 하세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뭐겠어요? 당신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 봐요.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그가 손가락으로 제영의 가슴을 쿡 찔렀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조금 역겨울 지경이지만"

가슴이 싸늘했다. 다정했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고 그는 빚을 핑계로 몸을 받아 가려는 파렴치한처럼 굴었다.

"벗어요. 시간낭비하기 싫으니까."

그가 스스로 자신의 넥타이를 풀고 상의 서 츠의 단추를 다 열 때까지도 제영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걸 본 해진은 작게 욕을 중얼거리고는 제영의 옷을 벗겨 내려고 손을 뻗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제영은 그의 손을 매섭게 쳐 내고는 제 옷을 꽉 쥐었다.

"해진 씨, 전 싫어요. 난 더 이상 이런 짓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 일들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항상 말하려고 했는데 주저하고 있었어요."

"뭐 때문에 주저했는데?"

“그야."

순간적으로 제영은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짐에 대한 것은 극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왜 주저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상대는 그저 달콤하고 부드럽고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이유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그저 우스웠겠죠. 날 가지고 놀면서 비웃고, 내가 없는 곳에서는 그 여자랑 결혼 생각만 하고 그랬겠죠.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상상도 안되네요.”

해진이 고통의 감정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말로 그러지 않았었나 하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렇게 변명할 기회를 떠나보냈다. 눈을 가리던 손이 치워져 사랑의 감정은 조금도 없이 원망만 남은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이제는 영영 그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그건 당신이 할 말이 아니죠. 내가 하면 또 모를까. 나는요. 더 이상 당신에게 순순히 굴고 싶지 않아요. 아주 치졸해질 거예요. 그 여자 연락처 알아내는 것 정도야 아주 쉽죠. 내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말 안 해 줘도 잘알죠? 물론 아직 그런 더러운 일에 연루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싫다느니, 그러고 싶지 않다느니,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계속 해 대니까 저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네요. 당신이 선택해요. 당신이 시작한 이 역겹고 더러운 일, 어떤 식으로 끝낼지도 당신 몫이에요."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제영은 해진이 하라는 대로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우면서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전자는 애인, 후자는 해진이었다.

입으로는 역겹다고 했으면서도 그는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파랗고 창백한 얼굴의 제영은 그가 하는 것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진이 가볍게 손톱을 세워 고양이처럼 제영의 피부를 긁어 내렸다. 잠깐 고개를 든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제영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때 어땠어요?”

해진이 자신의 성기를 제영의 것에 가볍게 문지르며 물었다. 이미 반쯤 발기한 해진의 것과는 달리, 제영의 것은 잠잠하기만 했다. 제 질문에도 제영이 너머의 벽만을 보며 입술을 다물고만 있자 해진이 제영의 귓바퀴를 할았다. 무심한 척하던 제영의 등허리가 떨릴 즈음에 해진은 제영의 잘못에 대해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세게 깨물어 왔다.

"대답해요."

귀가 아팠다. 몸이 그쪽 방향으로 움츠러들정도로 통증이 강하게 느껴졌다.

"뭘요."

“어땠냐고요. 나랑 했을 때. 아팠어요? 처음 이었죠? 너무 화가 나서 그냥 쑤셔 박았는데 넣고 나니까 확 깨닫게 되더라고요. 처음이구나.

그래, 내가 처음이지. 근데 또 화가 나서 살살해주고 싶지는 않았어.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가 웃으면서 제영에게 입을 맞췄다.

"오늘은 정말 처음처럼 해 줄게요."

해진이 바짝 붙여 대던 몸을 일으켜 제영의 무릎을 접어 세우고 그 사이에 앉았다. 제영은 가슴이 바싹 말라 가는 듯했다. 그에 반해 해진은 소꿉장난을 하는 어린애처럼 굴었다.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영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워만 있는데도 자꾸만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성기 아래의 회음부를 따라 미끄러진 손가락이 입구 주변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건조하고 마른 촉감이 주변의 주름 위를 천천히 오갔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무언가가 아래에 갑자기 파고들었고 제영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그 부분을 꽉 죄었다. 혹여나 괴상한 소리라도 낼까 싶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제영의 손을 해진이 떼어 냈다.

"손으로 입은 막지 말아요. 소리 내는 게 싫으면 입술을 깨물고 참든가 해요. 손은 이리 내요"

해진이 제영의 손을 끌어 내려 아래에 깔려있던 침대 시트를 붙잡게 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입을 막으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묶어 둘 거예요."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이 시간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그래야만 했다. 축축하고 차갑고 미끄덩한 것이 안으로 들어왔다. 로션 같은 게 발린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영은 몸 안에 칼이라도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칼이 되었다가, 날이 나가 몽둥이로밖에 못 쓸 듯한 뭉툭한 칼이 되기도 했다.

"하나 더 넣을게요. 아프면 말해요."

짐짓 예전처럼 다정하게 들리기도 했다. 아프다고 하면 여기서 모든 걸 그만둘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고 있는데, 그가 제영에게 속삭였다.

"하나 더."

뭔가를 쏟은 것처럼 아래가 축축했다. 꽤 많은 양이 발리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고도 느낄수 있었다. 세 개의 손가락들이 내부의 공간을 늘리면 통증과 함께 이완되었다가, 빠져나가자 마자 곧 수축했다. 그럼 또 똑같은 짓을 했다.

세게 쥔 탓에 점점 시트가 말려 올라가고 있었고 제영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입술을 깨물고 참아 보려고 해도 자꾸만 아픔이 커져, 작게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 해진의 손길을 피하려는 몸이 본능적으로 위로 도망쳤다. 하지만 해진은 그런 짓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제영의 허벅지를 당겨 안고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치게 했다. 그가 아래에 손가락을 넣고 뺄 때 마다 걸쳐진 다리가 같이 덜렁댔다. 제영은 그꼴이 추하다고 생각했다.

얄은 곳만을 치대던 손가락들이 갑자기 깊게 파고들었다.

"아파."

집어넣은 손가락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더 안쪽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것처럼 서성거렸다. 제영은 해진이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한번 말했다.

"해진 씨, 아파요."

그러나 그는 듣지 못한 게 아니라,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붙잡고 있던 제영의 허벅지 위에 날카롭게 손톱을 세우고는 제영의 얼굴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가 묘하게 퍼져있었다. 내부의 손가락들이 천천히 후퇴했다.

해진이 제영의 안을 적시고 남은 젤로 대충제 것을 문질렀다. 제영은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그의 물건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것이 연상시키는 당시의 통증과 안쪽이 들쑤셔지던 기억들이 몸을 떨리게 했다.

해진이 더는 안 될 때까지 제영의 다리를 활짝벌렸다. 제영의 틈에 그의 끝이 살짝 닿은 채로 멈췄다.

"세우고 하는 편이 당신한테 좋을 테지만, 더러워서 만지기 싫어요. 그 여자랑 해 댔을 거 아냐."

제영의 늘어진 성기를 손끝으로 살짝 밀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몸을 숙였다. 삽입이 시작되자마자 제영은 일찍이 그를 밀치고 도망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차게 식은 땀이 목덜미를 적셨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침입의 깊이가 깊어질 때마다 제영의 표정도 같이 일그러졌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제영이 해진을 밀어내려고 손발을 버둥댔지만 소용없었다. 배가 닿고 가슴이 닿을 무렵에는 어딘지 가늠하지도 못할 만큼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아파요?”

아팠지만 말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제영은 그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침묵으로만 항의할 뿐이었다.

"안 섰네."

해진의 배에 짓눌린 제영의 물건은 여전히 수축된 상태였다.

"야한 생각이라도 해 봐요. 그 여자 생각이라도 해 보든가.“

해진이 제영의 고개를 돌려 제 쪽을 바라보게 했다. 너무나도 가까워 그가 입술을 달싹일때마다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조여 봐요."

"뭐."

"여기요."

그가 살짝 허리를 움직였다. 안쪽 점막에 무언가가 쿡 찍히고 반사적으로 내부가 조여들었다. 아, 하고 제영이 다시 이를 악물었다.

"힘 풀고, 다시 조여 봐요."

그는 인형사이고 제영은 긴 끈에 조종당하는 인형인 것처럼 그의 말에 따랐다. 조이고 힘을 풀 때마다 해진의 관자놀이가 찡그려졌다.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닐까 하며 다시 필사적으로 아래에 힘을 풀었을 때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해진이 거세게 아래를 짓찧었다.

의식적으로 조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조이고 풀릴 때마다 제 위에서 몸을 떨던 그는 다른 사람인양 거칠게 피스톤질했다. 낯선 아픔과 아래를 벌리는 생소한 감각이 제영의 몸을 덮쳤다. 언감생심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제영의 두 팔을 침대에 눌러 잡고는 그가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예민한 부위의 살들이 맞부딪히며 제영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끝 모를 것처럼 깊게 파고든 해진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몸은 여전히 연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제영에게로 전달되었다. 땀으로 체액으로 둘의 몸이 엉겨 붙어 끈적거렸다. 해진이 제 것을 꺼내자마자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걸 보며 해진이 중얼거렸다.

"미안, 다음에는 콘돔 쓸게요."

제영은 그제야 콘돔조차 쓰지 않고 그가 안에 사정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진맥진한 제영이 헉헉댔다. 그러나 해진은 그런 제영의 사정을 봐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엎드려요."

제영은 해진을 마주하는 것보다 엎드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베개에 얼굴을 묻고,입을 막고 견디다 보면 금방 끝이 나지 않을까. 뒤에 자리 잡은 남자의 행동이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몸이 무너져도 제영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골반을 꽉 붙들어 엉덩이를 들게 만들었다. 통증이 점차 둔해지고 아릿한 감각만 남았다. 누군가는 이런 관계에서 쾌락을 느끼기도 한다지만 제영은 도통 그러질 못했다. 하지만 차라리 이런 게 나았다.

눈가가 젖어 축축한 것은 슬픈 것이 아니라 괴롭기 때문이었다. 이번은 처음 것보다 길었다. 한참 후에나 그가 제영에게서 손을 뗐다. 제영의 몸이 바로 무너졌다. 오늘은 몇 번,그리고 앞으로는 몇 번이나 이런 짓을 해야 되는 걸까.

제영은 그가 얼마나 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쉬이 가늠되지 않았다.

몸이 다시 뒤집어졌다. 해진이 옆에 누운 채로 제영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뾰족한 이가 유두 끝을 도려낼 것처럼 굴다가 다시 혀로 유륜을 부드럽게 감싸 왔다. 차가운 가슴에 온기가 살포시 돌았다. 반대쪽은 기다리라는 것처럼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혼자 해 봐요."

처음에는 그가 뭘 말하는 건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리숙한표정을 지은 제영이 되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무릎으로 제영의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여기 세워 봐요. 이쪽 계속 핥아 줄 테니까."

이번에는 반대쪽이었다. 그가 꽉 꼬집어 붉어진 곳을 혀로 달래 주었다. 오늘 밤에 처음으로 느낀 고통 아닌 쾌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애무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진이 빠져나간 뒤가 아직도 욱신거렸고 몸에 기운이 없었다. 해진이 다시 무릎으로 제영의 살을 세게 눌렀다. 반쯤 몽롱해졌던 정신이 아픔 탓에 억지로 현실로 끌려 나왔다.

"빨리."

제영은 그런 그의 행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물건을 쥐고 세운다고 제 가슴팍을 빨고 있는 남자에게 이로울 만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제영의 엉덩이를 꽉 쥐며 다시 재촉하자 결국 양손으로 자신의 것을 쥐었다. 죽어있던 성기는 가벼운 동통과 함께 느껴지는 유두의 쾌감을 좇아 조금씩 힘을 얻기 시작했다. 완전히 섰을 때는 이미 해진의 것도 같이 발기한 상태였다.

제영은 무엇이 그를 흥분케 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만지며 곧잘 흥분하던 남자 이니 이번에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허겁지겁 다시 제영에게 성기를 삽입했다. 억지로 세워 둔 것이 길게 가지 못하고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제영의 손을 끌어다 계속 만지길 종용했지만 뒤의 감각 탓에 앞쪽은 영 힘을 쓰지 못했다.

해진은 결국 제영을 내버려 두고 자기 할 일만 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삽입할 때마다 안쪽의 질척한 액체들이 밀려 나와 제영의 다리 사이와 시트를 적셨다. 젖은 것에 젖은 것이 마찰되면서 나는 소리가 야하고 끔찍했다. 또다시 절정에 다다른 그가 제영의 안에 체액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그의 숨소리도 거칠어져 있었다.

"나 만나면서 그 여자랑 헤어져야겠다는 생각, 한번이라도 한적 있어?"

해진이 제영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쓰다듬다가 살짝 움켜쥐었다. 어쩐지 초조하면서도 약간의 희망은 남겨 둔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다. 제영은 흐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없구나. 그냥 날 정리할 생각이었구나.”

입술에 닿아 오는 가볍게 쪼는 키스.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으나 물어볼 건 있었다.

"언제까지, 할거예요?"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관계였다.

"글쎄,당신 결혼 전에는 끝나겠지. 난 당신이랑 달라서, 유부남이랑 구질구질하게 놀고 싶진 않거든. 하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말해요. 물론,그렇게 되면 나랑 그 여자랑 당신이 아주 웃기지도 않은 일을 겪게 될 테지만, 뭐난 그런 것도 괜찮아요."

* * *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가.'

제영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해진이 제게 퍼붓는 모든 부당한 짓과 말들에 화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런 분노 따위는 그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생쥐만도 못한 존재의 감정이 되어 버렸다. 픽픽 사람이 상처받을 만한 말만 하고 손찌검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닿아 오는 손길같은 것들이 아프기만 했다.

초라하게 쪼그라든 그의 어깨는 누가 봐도 티가 날 만한 것이라 다들 슬금슬금 제영의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결혼을 앞둔 제영이 여자 친구와 큰 싸움이 한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제영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수군거리는지도 모르고 제 불행에 허덕이느라 바빴다.

차라리 일이나 하자 하고 모니터를 보고 자료를 정리해도 자꾸만 그가 떠올랐다. 일도 어찌 보면 HS 건을 위해 차출된 사람들이 남겨 두고 간 찌꺼기들이었다. 그 찌꺼기들이 같이 끌고 온 문젯거리들을 처리하고 있다 보면 속이 답답해져 왔다.

해진은 만날 때마다 제영을 비난했다. 결혼을 앞둔 여자 친구까지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며 넙죽 제 사랑을 받아먹은 무신경함과 부정함 같은 것들에서부터, 이 상황을 그저 말 한마디로 끝내려고 하는 무책임 같은 것들을 들먹이며 제영의 마음을 할퀴어 대는 데 집중했다. 그건 효과가 너무나도 좋아서 제영의 온 신경이 해진에게만 가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제영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할 수 있는 만큼은 이 관계를 책임지려고 했다. 자기가 떠맡은 이 잡다한 일거리가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HS전자와의 계약 성사에 자신의 몫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담팀에서 빠지고 거기에 항의 한번 없이 받아들인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해진을 위한 것이기도했다.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책임졌고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했다. 그러나 해진은 그런 제영의 사정은 조금도 알아주지 않았다.

"저, 김대리님.“

살짝 긴장한 티가 나는 목소리의 이선주가 제영을 불렀다. 제영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손가락으로 배 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배 차장님이 부르세요."

배 차장이 그를 부를 만한 일이 없었기에 제영의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별것 없는 실적 보고 정도겠지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 려고 애썼다.

"제가요?”

"그래."

"그거 이사님하고 다 얘기가 된 건가요?"

"그럼 이런 일을 나 혼자 하겠어?"

배 차장이 볼을 씰룩거 리 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HS팀으로 들어가라니,이미 팀원들 다 결정된 거 아니었습니까?"

"뭐 다 결정된 건 아니었어. 이렇게도 해 보고,저렇게도 해 보고 있었으니까. 그것보다 표정이 왜 그래. 자네한테는 기회 아니야? 결혼이 코앞이라 그런가 사람이 많이 변했어. 옛날 같으면 이번에 빠진 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텐데 이상하게 잠잠하더니. 넣어 준다는 얘기에 괜한 소리나 하고."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영은 속이 탔다. 설마 해진이 한 짓은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럴 이유가 없었다. 항상 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제영을 노려보는데,누구 좋으라고. 전담팀에 넣어 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괜히 제게 해코지하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하고 무섭기도 했다.

"혹시 HS 쪽에서 뭔가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그가 무슨 소리냐며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속닥이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마자 잦아들었다. 배 차장이 목을 큼큼거렸다. 그게 오히려 더 시선을 끌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는 듯이 묵례를 주고받고는 갈 길을 갔다. 배 차장만 그들을 의식해 어색하게 옷을 툭툭 털어 내며 별일 아닌 척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눈을 끔벅댔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일단 선진행 된 이야기들은 동혁이한테 전달받아."

배 차장이 제영의 어깨를 툭 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의심 가는 게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짓으로 그가 얻을 만한 게 없었다. 만약 그가 아니라면, 그저 팀을 다시 짜는 와중에 우연히 자신이 걸려 들어간 것에 불과하더라도 싫었다. 해진이 자기가 한 말을 지킨다면 결혼 전에는 그와 자신의 관계가 정리될 것이었다. 그러나 팀에 들어간다면 얘기가 또 달라졌다. 큰 건이라 계약 기간도 길었고 재수가 없다면 결혼 이후에도 그와 마주쳐 계속 엮일지도 몰랐다. 그런 일만은 사절이었다.

제영이 해진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다시 지워내기도 전에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집.]

단 두 단어가 전부였다. 제영은 핸드폰을 움켜쥐고 한숨을 쉬었다. 혼자 고민해 볼 것도 없이 그에게 오늘 바로 물어보면 될 것이었다.

'만약 그가 한 짓이 맞는다면.'

무슨 미련이 남아 그런 짓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혹시나 자신이 손바닥 위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며 복수라도 하려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제영이 이런 참담한 고민에 허덕일 동안 해진은 해진대로 참담한 심정으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런 표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친구 역시 그가 그런 마음인지 몰랐을 것이다.

"오늘도 회사 안 나갔다면서."

해진은 오랜만에 얘기도 없이 제 집으로 쳐들어온 준성이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얌전히 닫혀 있던 장식장의 문을 열고 이것 저것 꺼내서 아침부터 한 잔, 두 잔 하던 것이 저녁이 되자 병째로 들이켜는 수준이 되었다.

독한 술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마나 흰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져서 나중에는 꼭 몇백년이나 햇빛을 보지 못한 시체 같았다.

"뭐하러 가."

"요즘 일하는 재미가 생겼다면서."

"그 재미 다 없어졌어."

"왜? 네 그 소중한 제영 씨 약발이 다 떨어졌어?"

해진이 준성을 흘겨봤다. 정곡이 찔린 것이다. 놀릴 거리를 잡은 준성이 뭐라 더 말을 붙이 려고 했으나 갑자기 거실에 벨이 울렸다. 누군가 현관을 열면 들리는 소리였다.

"누가 오기로 했어?”

준성이 해진에게 물었다. 해진이 답할 필요도 없이 손님이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잿빛 코트를 입고 찬 바람에 살짝 뺨이 붉어진 제영이 곧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제영은 해진 외에 누가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준성을 보고 당황했다. 준성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제영 역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지만 집주인인 해진만은 이 상황을 모른 체했으니 어색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방에 먼저 들어가요. 씻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 짧은 말 속에서 해진이 제영을 어떻게 대하는지 제영이 뭘 위해서 이 시간에 여길 왔는지 다 드러났다. 제영의 뺨이 더 붉어졌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따라오는 준성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해진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제영은 최대한 침착하려고 했지만 팔이 떨려 손에 쥔 가방을 떨어뜨릴 뻔했다.

"너 집 키까지 줬어? 어지간히 해라. 언제 정리할거야?”

"뭘?"

해진이 몸을 일으키며 시계를 확인했다. 15분 정도 뒤면 다 씻고 뺨이 보송보송한 제영이 침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듯했다. 그 전에 쓸데없는 것만 묻는 이 불청객을 내쫓을 생각이었다.

"저 사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려고. 결혼한다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해진이 눈빛이 변했다. 준성이 살짝 눈을 피하며 말했다.

"나한테 와서 말하던데, 너 이제 못 만나겠다고. 자기 곧 결혼할 거니까. 그렇게 좀 말해 달라고.”

"그걸 너한테 와서 말했어? 언제?"

"얼마 안됐어."

해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친구에게 그렇게 말하고 이별만을 기다렸을 제영에게 화가 났다. 자신이 그에게 빠져 허우적댈 동안에 제영은 투하한 폭탄이 터질 때만을 기다리며 다른 여자와 웃고 떠들어 댄 것이다.

개새끼.

"설마 너 큰형한테도 말했어?”

준성이 딴청을 부리다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제영 씨 부탁도 있고 너네 형도 궁금해하시길래 겸사겸사 얘기했지."

해진은 머리가 아파 와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자신도 몰랐던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걱정하시더라.”

"걱정? 그 사람은 내 걱정 안 해. 자기 걱정만하지."

"정말 계속 만날 거야? 저 사람 파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던데. 너 그렇게 꼬이는 거 싫어 하잖아."

해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이를 악물었다. 눈빛이 형형한 게 보는 사람을 께름칙하게 만들었다. 준성이 예상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을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해진이 제영을 매몰차게 버리는 것이 준성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해진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좀 더 질척거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다 남의 일이었다. 한쪽은 아니더라도,다른 한쪽이 이렇게 애틋하니 상황이 그리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슬슬 빠지고 싶었다.

"요즘 저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나."

"네가 부른 거아냐? 그럼 왜 불렀어?”

"내가 안 부든면 그 여자한테 갈 거 아냐."

해진이 손에 쥔 유리잔을 탁자에 던지듯 놓았다. 용케 깨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조심성 없는 짓이었다.

"안 가고 뭐 해?"

그가 준성에게 노골적인 축객령을 내렸다.

준성은 어깨를 으쓱하고 방 쪽을 살짝 보았다.

어차피 둘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었다.

"간다. 회사는 좀 나가. 너네 형이 자꾸 나한 테 전화해서 뭐라고 하잖아."

별 도움도 되지 않고 괜히 마음만 심란하게 만든 준성은 금세 사라졌다. 해진은 잔에 남은것을 한 번에 들이켰다. 머리가 쌩하고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방에 있는 사람에게 나쁜 말만 해 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런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 씻고 나온 제영은 해진이 시킨 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서 있기도 뭐해서 그렇다고 침대에 누워 있을 순 없어서 그저 그 끝에 살짝 걸터앉아 있었다. 준성과 해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으나 그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간에 지금 상황이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곧 방문이 열렸다. 제영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가 있는 방향으로 섰다. 걸음도 조금 휘청거리는 데다 거의 근처까지 다가온 그에게서 심한 술 냄새가났다. 그제야 제영은 들어오면서 보았던 탁자의 술병들을 기억해 냈다. 준성과 같이 마셨더라도 꽤 많은 양이었다. 몇 번의 술자리 경험으로 그의 주량이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렇게 흐트러질 정도라면 많은 양을 마신 게 분명했다. 이전에는 술을 마셨더라도 단 한 번도 주사를 부리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 준 적 없지만, 지금은 그가 제게 가지는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제영은 본능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그는 그렇게 상태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제영의 뺨을 더듬었다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입안을 휘젓고 빠져나가는 그의 혀끝에서는 씁쓸한 술맛이 났다. 서 있는 제영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가 다시 놔주고는 얼굴을 마주했다. 술 탓인지 아니면 자기는 모를 준성과의 일 때문인지 제영은 그가 기분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쩍 용기를 내서 그에게 물었던 것이다.

"회사랑 HS랑 계약 건 때문에, 전담팀이 만들어졌거든요. 혹시 해진 씨가 저를."

그러나 말도 다 끝내기 전에 해진이 제영을 밀쳤다.

"계약 따냈으면 충분하지 않아요? 지금 상황에서도 날 써먹을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저열하고 치졸한 사람이네요"

이마를 감싸 쥐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제영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지만 해진은 손을 내저으며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변명들이 오히려 해진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고 있었다.

"제발, 입 좀 다물어요. 머리 아프니까."

"술 많이 마셨어요?"

“왜요. 술 마시고 부르면 안 돼요?”

"그런 말이 아니라."

"당신도 그런다면서, 술자리에서 여자 불러서 논다고 하지 않았어요?"

제영은 예전에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업무 때문에 어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신에게 해진이 조금 화를 냈던 기억이 있었다.

"그건 다른 거잖아요."

"전혀 다르지 않아요. 그 여자들이 하는 짓이,지금부터 김제영 씨가 내게 해 줄 거랑 똑같거든요. 내 거 빨아 주고 다리 벌리고. 뭐가 달라요?"

제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이 그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표현하기도 전에 해진이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제영을 주물러 댔다. 엉덩이를 쥐는가 싶었던 손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제영은 도망치기도 전에 허리가 꽉 잡혀 저항하지 못했다.

"준비하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해 뒀네."

마른 입구를 그가 톡톡 두드리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삽입했다.

"나 좋으라고 그런 거예요? 이대로 넣어도 된다는 건가요?”

깊게 파고든 것이 안쪽을 세게 눌렀다.

"뻑뻑해. 당신 말이 맞아요. 다르긴 하네요.

젖지 않아서 일일이 적셔 줘야 하니까요.”

안을 휘젓던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해진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젤과 콘돔이었다. 제영은 전에 없이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몸 안을 더듬는 타인의 손가락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손가락으로 하는 짓만큼은 아니었다. 제영은 왠지 모르게 잔뜩 뿔이 난 해진이 강요하는 대로 그에게 올라타 자기 뒤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중이었다.

해진의 허벅지에 걸터앉아서 한 손으로는 그의 어깨에 매달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 짓을하고 있었다. 일말의 흥분도 쾌감도 없이 남의 앞에서 눈요깃거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제영의 이런 괴로운 기분과는 상관없이 해진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남의 곤욕을 즐기는 눈치였다.

"젤, 더 필요해요?"

제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해요.”

"진심이에요? 그러다 찢어져요."

해진이 놀고 있던 두 손으로 제영의 엉덩이를 살짝 잡아 벌렸다. 그 덕에 제 몸 안에 있는 손가락을 조이고 푸는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 손가락 외에 다른 것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해진 씨!"

"손가락 빼지 말아요."

해진의 손가락이 능숙한 움직임으로 좁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제영의 손가락을 같이 밀어 올리며 안쪽을 매만졌다.

"입구에 바르는 게 아니라, 안쪽을 적셔 주는 거예요. 다음에는 안 도와줄 거야."

귓가에서 바로 들려오는 작게 웃는 소리, 엉덩이를 꽉 쥔 손, 몸 안을 더듬는 손가락과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 그 모든 것이 제영을 힘들게 했다.

"이제 손가락 빼도 돼요."

제 몸에, 제가 하는 일에 일일이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됐다. 제영은 언제까지 그의 말에 고분고분히 따라야 할는지 걱정되었다. 해진이 제영의 귓가를 할았다. 그가 할은 귀는 뜨거웠으나 그 외에는 한겨울 얼음물에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예전 같으면 몸의 변화를 예민하게 눈치챈 남자가 안고 쓰다듬어 주기 바빴을 텐데, 지금은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체하는 건지 제영의 몸을 가지고 노는 재미에만 푹 빠져 있었다.

"이제 넣어도 괜찮을 거예요. 앉아요."

속을 헤집던 손가락들로 제영의 고관절을 세게 잡아 누르며 그가 말했다. 그가 한참을 가지고 놀던 곳이 눅진하게 풀어져 빳빳하게 선 것을 조금씩 삼키고 있었다. 제영이 해진의 어깨를 잡고 되도록이면 삽입의 속도를 늦추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보다 누르는 힘이 훨씬 강했다.

"아, 아."

제영이 작게 소리를 터트릴 때면 해진이 입맛을 다셨다. 가장 두꺼운 부분이 첫 진입에 성공하고 그 다음부터는 수월했다. 하지만 그건 해진의 입장에서였지, 제영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당신이 미운데, 미워져서 좋은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아프다.'

제영에 해진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등도 이미 젖어있었다. 벗어날 낌새를 조금만 비쳐도 해진의 손아귀 힘이 더 세졌다.

"당신 사정 같은 건 이제 안 봐줘도 된다는 거, 그거 딱 하나예요."

제영은 해진의 얼굴을 보았다. 낯선 얼굴이 쾌감에 젖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얼굴이 예전의 그 남자가 맞는 건지 의문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가만 히 그 손길을 받으면서도 눈을 살짝 감았다 뜨는 모습에서 예전의 익숙한 이가 보일듯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면,익숙한 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토록 뜨거운 몸을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온몸이 추웠다. 몸 안으로 들어온 것 역시 뜨겁기 그지없음에도 배 속에 얼음덩이를 집어넣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 때가 되어서야 해진이 하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제영의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추워요?”

해진이 제영을 눕히고 어깨를 주물렀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내가 당신 몸에 손 못대게 하려고."

한숨을 내쉰 해진이 결국 제영의 몸에서 손을 뗐다. 제영을 침대 위로 눕힌 다음, 자신의 팔을 베개 삼게 했다. 그리고 내팽개쳐 둔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제영을 안아 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은 후에야 제영의 떨림이 멈췄다.

"당신 이거, 무슨 병이야.”

제영은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은 끔찍한 병에 걸린 것이고, 이 남자와 가까이 있으면 병세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그를 떨어뜨릴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해진이 제영의 사타구니 사이의 것을 손에 쥐었다.

"하지 말아요."

또다시 저 좋을 일만 하려는 남자를 제영이 연약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러나 그런 거절의 말은 해진이 부드럽게 제영의 어깨를 깨물어 오자 입안으로 사라졌다. 역겹다고 들은 것이 얼마 전인데, 지금의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겁이 났던 제영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 줄 수 있을 정도의 다정함이었다. 해진이 자신의 뺨을 제영의 뺨에 문질렀다.

제영은 딱딱하게 굳은 살결이 녹는 기분에 몸을 떨었다. 이전의 떨림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리 사이의 섬세한 손이 제영의 것을 쥐었다놓기를 반복했다. 부드럽게 위아래를 오가면서도 사이사이 이마며 뺨과 입술에 입을 맞춰 주었다. 다리 사이에 열기가 뭉쳐 발기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자 그가 제영의 몸에 올라탔다. 또 넣으려는 건가 싶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해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해진은 허리를 낮춰 제 것을 제영의 성기에 문지를 뿐이었다.

낮게 내뱉어진 신음이 제영의 귀를 관통했다.

허리가 움찔하고 그의 혀가 귀 깊숙이 파고든 순간에 제영이 사정했다.

제영의 귀가 보이는 굴곡짐을 따라 뱀처럼 움직이던 그의 혓바닥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잘못했다고 해요. 결혼 같은 거 안 할 거라고해요. 그럼 내가 다 용서해 줄게요"

해진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얕게 풍겨 오는 술 냄새에 제영은 살짝 취하는 기분이들 정도였다. 그의 붉은 두 뺨에 닿기라도 하면 손이 델 것 같았고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전부 진심으로 보였다. 해진은 대답 없는 제영에게 아직 가라앉지 않은 제 성기를 살짝 치대며 앙탈을 부리듯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흥분이 온몸을 내달리는 와중에서도 제영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제 손목을 아프게 잡아 오는 걸로 그의 감정이 어떠한지는 짐작이 갔다. 제영은 그가 화가나, 또다시 제 몸 안에 성기를 넣고 흔들어 대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제영에게서 떨어져 등을 돌리고 누웠다. 다정한 팔베개도, 온기를 나누는 접촉도 없어졌다. 그러고 나니 침대가 너무 넓은 탓에 둘이 같은 침대에 있어도 꼭 혼자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다시 몸이 떨렸지만 제영은 그걸 무시하려고 애쓰며 몸을 웅크렸다. 해진에게서 빼앗은 체온을 최대한 유지해야 볼썽사납게 굴지 않을 수 있을 듯했다.

제영은 아침이 되기만을 기도했다. 아침이 되어야 회사를 핑계 삼아 이 집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어둠이 가득한 채로, 머릿속을 천천히 비워 나갔다. 이것은 한순간의 시련이자 고통일 뿐이었다. 배신감에 허덕이며 제게 화풀이하는 옆자리의 어린애는 곧 이 모든것을 잊어버리고 그저 인생의 나쁜 해프닝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도 너무 좌절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제영은 갑작스레 울컥 울음이 터질 듯한 것을 코끝만 살짝찡긋거리는 걸로 겨우 참아 내고 잠이 들었다.

사실 그보다는 의식을 놓은 것에 가까웠다.

옆자리의 제영이 그렇게 현실 도피에 성공했을 때, 해진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늘씬한 몸이 터벅터벅걷는 듯했지만 발소리는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욕실 옆에 작게 딸려 있는 드레스 룸이었다.

해진이 오른쪽 옷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제영이 입고 온 정장과 그의 서류 가방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제영은 항상여기에다가 옷을 벗어 두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샤워를 하고 넣어 둔 것들을 챙겨 입고 나갔다.

해진이 제영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엉망으로 액정 화면이 깨져 있는 것이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제영이 그러하듯 해진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흔한 잠금 화면조차도 없었다. 제영의 조심성 없음은 그가 자기 집에 여자 친구와 해진 모두 들락거리도록 내버려 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비밀번호도 없이 이렇게 핸드폰을 취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해진이 제영의 핸드폰을 훔쳐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딱히 들킬까 봐 초조해하는 얼굴도 아니었고 그저 하나하나 읽어 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잠깐 입술을 짓씹기도 했으나 정말 잠깐이었다.

다시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옷장 문을 닫기 직전에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해진이 제영에게 사다 바쳤던 옷들이었다. 부들부들한 원단에 라인이 딱 떨어지는 디자인들이라 마른편인 제영에게 잘 어울렸던 것들이었다. 그걸보고 있자니 왠지 짜증이 나 손가락으로 툭툭쳐 대며 애꿎은 옷들을 흩트려 놓았다. 세 번째것에 손을 댔을 때, 갑자기 손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그럴 만한 게 없는 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해진이 그 옷의 재킷 안주머 니를 뒤졌다.

정체는 시시한 것으로 해진이 제영에게 줬던 시계였다. 이제는 제 것이 아니라 제 남자의 것이었다. 손안의 시계에 빛을 비출 때마다 시침과 분침 아래의 보석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시계 판이 연주황의 조명에 따라 오묘하게 일그러지며 아지랑이 같은 빛을 뿜었다. 해진은 예전제 것이었던 것임에도 처음 보는 물건인 것처럼 한참을 넋 놓고 보았다. 그리고 제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남자를 정말로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 겨우 진정되고 나서야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 * *

편의점에 들어간 제영은 500밀리리터 생수몇 개를 꺼내 들었다. 양손에 그걸 쥐고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과자 진열대에서 작은 초콜릿 박스까지 집어 들어서 자칫하면 다 쏟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뭐 더 살 것은 없나 하고 다른 곳도 가 보았다. 생필품 진열대에는 자질구레한 칫솔이며 비누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옆으로 한 발짝만 가면 다들 갈 때마다 민망해하는 그것들이 한군데에 모여 있었다. 콘돔이었다.

생각해 보니 콘돔을 산 지가 한참 되었다. 희주와는 하지 않은 지가 오래됐고 그와 할 때는 침대 서랍에서 꺼내기만 하면 됐으니까 살 필요가 없었다. 딸기 향, 바나나 향, 초콜릿 향. 그런 용도의 물건이 아니라 어디 달콤한추잉 껌이라도 들어 있을 듯한 패키지였다. 진열장 위에는 반짝이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안전하고 행복한 섹스’라며 활짝 웃고 있는 콘돔모양 캐릭터가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제영의 섹스는 그렇질 못했다.

불안하여 몸을 부들부들 떨고 살짝 정신을 놓아야 견딜 수 있는 것이 제영이 지금 하고 있는 섹스였다. 그의 섹스가 딱히 폭력적이거나 거친편은 아니었으나 주도권 경쟁에서 져 버린 수컷의 좌절감이 섹스를 섹스라기보다는 마운팅에 가깝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는 처음과 두 번째를 제외하고는 약속한 대로 꼬박꼬박 콘돔을 사용했다. 하지만 어차피그걸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남자인 자신은 상관이 없었다.

'임신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닌가. 몸 안에서 남은 것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도 비참하니 사용하는 편이 훨씬 나은것 같기도 했다. 아침에 몸을 씻으려고 욕실 샤워기 아래에 섰을 때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남의 정액을 보는 것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경험이었다.

사지도 않을 콘돔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조금 민망해져 계산대로 가려고 하는데 옆에서 누가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뭐 더 사실 거 있으세요?”

동혁이었다.

"아니, 없어. 가자."

"사세요. 어린애들도 아닌데,괜찮아요.”

동혁이 콘돔 진열대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그의 눈빛이 음흉한 것이 불쾌했다.

"필요 없어. 가자니까."

제영은 그 반갑지 않은 배려가 불러일으킨짜증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하나를 참아 내니 더 큰 게 닥쳤다. 차에서 기다리는 줄 알았던 배차장이 제영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낄낄 웃었다.

"야,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김 대리, 내가 사줄게. 요즘 이거 한창 모자를 때 아냐?”

배 차장은 정색하며 거절하는 제영을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에는 배 차장이 딸기 향콘돔을 억지로 제영에게 쥐여 준 후에야 끝이났다. 그리고 차에 타 있는 내내 신혼 시절 자신과 와이프의 열정적인 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아직까지도 쌩쌩한 정력 자랑을 한바탕 떠들어대고 나서야 그 입이 잠잠해졌다. 제영은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운전대를 잡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배 차장 말동무 노릇이 하기 싫어 운전대를 잡겠다고 한 게 이렇게 될 줄이야 몰랐지만 옆자리에서 듣고 있는 동혁보다는 낫다 싶었다.

셋은 HS전자 사옥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미이사의 일행은 다른 차로 출발해 도착해 있을 것이고 우리 셋만 가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담팀으로 일하게 됐지만 찝찝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혁에게 물어봤지만 자신도 갑자기 듣게 된 이야기라고 따로 아는 것은 없다고했다. 배 차장에게 이 얘기를 흘린 HS 쪽 인사가 누구냐고 물어봐도 입을 꾹 닫고 실실 웃기만 했고 그게 기분이 나빠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제영은 이 일에 투입된 게 해진과 관련된 것은 아닌지 아직까지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그의 행태를 보면 회사 일은 다 내팽개친듯했다. 제영이 아침에 나갈 때까지 일어나지도 않았고,어느 날에 가 보면 아침부터 술을 마셨는지 잔뜩 취해 있었다. 또다시 그의 아버지에게 한 대 얻어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제영은 그를 염려해 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제게 튈지도 모르는 불똥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아직도 오른쪽 젖꼭지가 따끔했다. 해진이 삽입하자마자 죽어 버린 제영의 성기에 대한 불만을 죄 없는 젖꼭지를 괴롭히는 걸로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거길 꼬집고 핥을 때마다 제영이 움찔대며 아래를 조였다 푸니 아주 신나 하며 퉁퉁 부을 때까지 가지고 놀았다. 그때를 떠올리던 제영이 살짝 아려 오는 고통을 죽이려고 그 부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사람에 맞춰 준비한 의자는 금방 들어찼지만한자리는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여전히 비어 있었다. 상무의 옆자리였는데 위치를 보아하니 임원급의 인물이 분명했다. HS 쪽 사람들은 시계를 확인하며 그 자리의 주인공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그는 미팅 시작 후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 몇몇이었고 도리어 편해보이는 얼굴이 나머지 반이었다. 그 빈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상무가 같잖게도 안타까운 척하는 얼굴로 그 사람의 이름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아, 원래 기획 2팀 이해진 팀장이 오기로 했는데,뭐라고 했지? 이 대리? 뭐 개인 사정, 허참. 아무튼 미팅 진행합시다."

이 회의실에서 직급이 가장 높은 이 상무의 혀 차는 소리로 미팅은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그 빈자리는 끝까지 비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제영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회사에서까지 그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미팅은 별일 없이 끝났고 이사와 상무가 다음 회식 약속까지 잡은 후 자리를 파했다. HS에서 일성으로 돌아와 퇴근 준비를 할 때까지도 해진으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드는데 배 차장이 슬쩍 다가와 제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늘 한잔하자."

"둘이서요?"

제영이 배 차장에게 물었다. 배 차장은 겨우술 약속 가지고 누가 들으면 큰일 난다는 듯이 제영에게 눈치를 줬다. 저치가 저럴 때면 괜히 귀찮은 일만 생기던 터라 그다지 당기지 않았지만 상사의 술자리 제안을 거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진에게 시달린 몸이 피곤했지만 제영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남자라면 강남이지.”

"예?"

제영은 회사 근처에서 삼겹살에 소주 정도를 예상했다. 하지만 배 차장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노릇인지 강남 쪽으로 차를 몰았다.

"여기를요?"

큰 업체를 접대할 때나 오는 장소였다. 비싼양주를 더 비싼 값으로 치러야 했고 원하면 여자도 불러 주는 그런 곳이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이 초저녁부터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들어가기 싫어하는 제영을 배 차장이 잡아당겼다. 다 수가 있다면서 제영의 등을 두드렸다. 새까만 베스트를 입은 직원들이 둘을 안내했다. 예약까지 해 둔 거냐며 제영이 경악해서 묻자 배 차장이 볼을 씰룩댔다. 안내된 방의 문이 열리자 보이는 얼굴에 제영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늘 오후에 미팅에서 봤던 이 상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서들 와."

제영이 배 차장을 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으나 배 차장은 냉큼 상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빈 양주잔을 채우기 바빴다. 잘못 끌려온 것 같은 예감에 제영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요즘 배 차장은 제영보다 동혁과 더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동혁이 아닌, 자신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아주 콕 집어 제게 볼일이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편히 앉아. 내가 배 차장한테 김 대리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아주 유능한 직원이라며."

정식으로 회식이 잡힌 마당에 이렇게 셋만 모인 게 누가 봐도 이상했다. 하지만 배 차장은 형님, 형님 하며 상무의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언제부터 둘이 그런 사이로 발전했는지 의아했다. 제영도 대충 분위기를 맞추려고 술을 들이 켰지만 도대체 왜 자신이 여기에 불려 온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비워진 술병 대신 새 술들이 탁자 위를 채웠다. 저 돈을 누가 내는 건지 불안해하며 제영은 따라 주는 술을 억지로 마시고 있었다.

"김 대리, 잠깐만."

상무가 제영을 불렀다. 손가락을 까닥거리 며제 옆자리로 오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옆자리는 배 차장이 앉아 있었다. 난처한 얼굴을하고 있는데 배 차장이 얼른 그 커다란 엉덩이를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제영을 가운데 두고 배 차장과 상무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가 자네를 부른건."

상무가 담뱃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다가 코밑을 긁었다. 말을 시작했어도 담배를 피우는게 먼저라는 것처럼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뒷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해진 팀장이랑 친하다며?"

"기획 2팀의 이해진 팀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새끼 말이야."

"아닙 니 다. 친한 건 아니고, 예전에 잠깐 술자리 몇 번 했던 것뿐입니다. 요즘엔 연락도 안 합니다."

갑자기 상무의 입에서 해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불길했다. 상무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데, 갑자기 배 차장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얘가 그 팀장한테 꽤 잘 보였던 건 분명합니다, 상무님. 비싼 옷이며 신발도 받고, 거기다가 개인 번호까지 받아서 연락한 사이라니까요."

"차장님!"

"왜, 거짓말하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럼 요즘엔 연락을 안 하는 건가?”

"예"

상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생각이든 제영에게 이로울 것 같지는 않았다.

"사장은 이 일에 그놈 이름이 올라가길 원해.

우리한테는 귀찮게 됐지. 오늘은 안 왔지만, 아마 다음에는 올 거야. 그러면 인사하고 다시 연락 좀 하고, 술도 한잔 하고 그러면서 좀 다시 친해져 봐. 남자끼리, 남자답게 좀 놀면서. 그러다보면 불알친구 되는 거지."

업무 전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친분이나 좀 터놓으라는 투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눈치였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어허, 이 사람이. 상무님 말씀하시는데."

배 차장이 무릎으로 제영의 허벅지를 쳤다.

하지만 상무는 손짓만으로 그런 배 차장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우리 내부가 아주 복잡해. 그 복잡한 상황에, 그놈이 끼어들면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게 몇 개 더 있어. 그건 내가 일일이 말 못 하는 거 이해해 주게. 그래서 작은 이야깃거리가 필요해.”

"이야깃거리요?”

"그래, 그 새끼 입을 다물게 할 만한 거. 사장이 더 이상 그놈 편을 못 들게 만들 만한 거. 같이 놀면서 여기저기 따라다니다가 괜찮은 거 있으면 알려 주기만 하면 돼. 추잡할수록 더 좋고 여자랑 엮였으면 최곤데, 뭐 부담 주는 건 아냐.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 줘. 그럼 내가 앞으로 힘 좀 써 줄게. 김 대리처럼 유능한 사람이 고작그런 자리에 있는 게 안타까워서 이런 기회를 주는 거야."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않는 제영에게 배차장이 눈치를 줬지만 상무가 말렸다. 다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제영에게 대답조차 듣지 않고도 당연히 받아들였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제영은 이런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배 차장은 이미 상무에게 완전히 넘어가서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줄줄 흘려 댄 듯했다. 자리가 파하기 직전에 상무가 제영에게 속삭였다.

"그 새끼 남자 좋아한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그것도 한번 알아봐."

제영의 뒷목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2차를 위해 부른 여자와 상무가 같이 차에 올라탔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제영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배 차장님. 이런 자리에 얘기도 없이 데리고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뭐? 내가 너 아끼니까 이런 기회를 준거야.”

술이 오른 얼굴로 호통치듯 그가 말했다.

"전 모릅니다."

"야, 제영아. 너 회사 생활 하면서 라인 잡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언제까지 우리 일성처럼 코딱지 같은 회사에 만족하며 살 거야? 대기업 짬밥 좀 먹어야 하지 않겠어? 저분이 의리가 없는 분이 아니서. 네가 잘하면 떨어지는 게 한두 푼이 아니야. 너 곧 결혼해. 그거 생각해야한다."

"설마 이 상무님 때문에 제가 전담팀에 들어가게 된 겁니까?"

"그렇지. 내가 네 얘기를 얼마나 잘해 줬는데, 너 절대로 상무님 실망시키면 안 된다. 그러면 내 얼굴까지 먹칠하는 거야."

"이런 거 사장님하고 이사님도 아시는 겁니까?“

"당연히 모르지, 몰라야 되는 거고. 상무님,나, 너. 이렇게 세 명이 팀이야. 아주 중요한 계획을 위한, 비밀 요원 같은 거야. 알아?"

더 이상은 그의 궤변을 들어 주고 있기 힘들었다. 하지만 제영이 그의 말을 끊기 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술집에서 배 차장과 같이 있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배 차장을 부르며 팔짱을 끼자,배 차장의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찢어 졌다.

"넌 진짜 안 갈 거냐? 네 여자도 귀여웠는데."

"생각 없습니다."

"어이구, 열녀 났네. 어디 새신랑 아니랄까봐. 난 간다. 아무튼 우리 잘 좀 해 보자."

배 차장이 제영의 어깨를 툭툭 치고, 여자와 함께 모텔촌 방향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전담팀으로 들어간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한숨만 나왔다. 제영이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예전 같으면 솔깃하기도 했겠으나 지금은 이런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해진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 새끼 남자 좋아한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그것도 한번 알아봐.'

상무가 은밀히 속삭이던 얘기를 다시 떠올리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가장 원하는 해진의 추문이 바로 제영과의 관계인 것이다. 누가 알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 관계를,또 다른 누군가는 제 권력 싸움에 이용할 생각을 한다는 게 소름 끼쳤다.

갑자기 저 멀리서 여자와 사라졌던 배 차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꼴 보기 싫은 모습이라그냥 가 버릴까 하다가 손을 흔들며 자기 이름을 불러 대기에 결국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야, 하아,하아,김대리. 그것 좀 줘 봐."

"뭘 말입니까?"

"내가 낮에 사준 거 있잖아."

"생수요?”

"에이,그거 말고 콘돔. 모텔에 있는 건 싸구려잖아."

추잡함이 진저리 날 정도였다. 가방을 뒤져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을 꺼냈다. 그걸 건네받은 배 차장이 히죽 웃더니 절반만 뚝 떼어 내고 나머지는 다시 제영의 서류 가방에 쑥 집어넣었다.

"필요 없어요."

"에이,여친이랑 그렇게 뜨겁다며. 잘 써. 나니까 이렇게 해 준다."

그가 온 길 그대로 다시 헐레벌떡 뛰어갔다.

제영은 그가 쓰다 남은 콘돔을 갖고 있기가 싫어 가방을 뒤졌지만 배 차장이 가방 안을 어질러 놓은 탓에 어디 아래에 깔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배 차장은 그날부터 부쩍 제영에게 친한 척하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러 가자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이 일상적인 일이었으나 자꾸만 해진에 대해서 물었다. 제영이 아무 도움도 못 준다면 자기라도 한번 힘써 보겠다는 마음인 듯싶었다. 같이 술을 마실 때 어디에 가서 마셨는지, 여자 낌새는 안 보였는지 마치 탐정처럼 하나하나조사라도 하려는 듯해 제영은 머리가 아팠다.

이 곤란을 넘기고자 성의 없이 대답하는 제영에게 배 차장이 불만을 터뜨렸다.

"배 차장님 말씀대로, 전 그냥 시다바리였어요. 지금은 연락조차 안 한다고요. 저 먼저 내려가보겠습니다."

뒤통수에다 대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영은 무시했다. 예전 같으면 들어 주는 시늉 정도는 할 텐데 지금은 자기가 처한 상황도 좋지 못해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배 차장을 참아 주기 힘들었다. 제영이 보기에 해진은 결근을 밥먹듯이 했고 회사에서 딱히 하는 일도 없어 보였다. HS에서의 그의 위치가 어떻길래 이 상무가 저렇게 못 잡어먹어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진은 회사라는 곳을 일하는 곳이 아니라, 억지로 시간이나 때우는 장소쯤으로 취급했다. 가끔은 그의 가정 교육의 장이 되기도 했다.

"해진 씨, 저 왔어요."

들어오는 걸 알았을 텐데도 그는 모른 척하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늦었네. 어 디 갔다 왔어요?"

그는 한쪽 뺨을 손으로 가린 채로, 살짝 고갯짓 정도로만 제영의 인사에 답했다.

"바로 온 거예요. 일이 늦게 끝났어요.”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 노년의 나이가 분명할 텐데도 저 젊은 막내아들에게 주먹을 휘두를 만큼 괄괄한 그의 아버지가 그동안의 일들을 참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맞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제영이 오기 전까지 눈물이라도 한 바가지 쏟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간 자신에게 한 짓이 있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불쌍해 보였다. 상무도 배 차장도 다들 바보였다. 이 남자는 딱히 추문 같은 걸로 끌어내릴 필요도 없는, 어리석고 철없는 치였다.

제영이 슬쩍 다가가 그의 뺨과 손바닥 사이에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고 그 틈을 벌려 보려고 했다. 어떤 상태인지 보고 싶었다. 예전처럼 멍이 들었을지 아니면 살짝 긁힌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해진은 그대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정리하고 갈게요. 오늘은 씻지 말고 있어요. 나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으니까."

제영은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고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씻지도 않고 옷만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발끝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의 등은 껐지만 침대 조명을 몇 개더 켜 놓은 터라 평소보다는 밝았다. 제영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눈에는 울적함이 가득하긴 했지만 얼굴에 남은 상처는 없었다.

그래도 제영은 해진이 가없고 불쌍하여 뺨을 쓰다듬다가 키스해 주었다. 그걸 신호로 그가 제영이 입고 있는 것을 벗겨 내었다. 그는 자꾸만 제영의 이름을 불렀다. 가슴에 입을 맞출 때도, 아래를 손가락으로 풀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단지 눈앞의 사람이 제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어린아이들이 불안할 때마다 애착 인형을 찾는 것처럼, 제영은 그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자신을 만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강간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시작된 그날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제영의 벌린 다리 사이로 그가 성기를 집어넣었다. 삽입 이후에는 불편함이나 이물감 대신에, 괴상한 충족감이 제영을 뒤덮었다. 해진이 그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그가 성기로 제영의 안쪽 깊은 곳을 꾹 압박했다. 제영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고통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기, 괜찮아요? 아프진 않아요?"

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숨을 들이 쉬고 내쉴 때마다 거세게 오르내리는 뱃가죽이나, 강하게 오므라들었다가 펴지는 발가락들이 대신 답해 주고 있었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제 손으로 해진의 양팔을 꽉 붙들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제영의 안이 해진의 것을 쥐었다 놓으며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해진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오로지 제영을 만족시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몸짓이 거칠지도 않았고 오직 그 부분만 신경 쓰는 것도 아니었다. 키스하고 뺨을 비비고 손으로는 옆구리틈이나 엉덩이를 스치며 제영의 성감을 높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행동은 항시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예전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 좋아.”

제 몸을 짓누르던,이 두렵기만 하던 무게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것이 강약을 조절하며 안을 들쑤실 때마다 제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또 해진이 제영의 입술을 핥았다. 그게 키스로 이어졌고 혀가 서로의 입안을 오가며 부딪쳤다.

"아, 아.”

신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앞도 뒤도 흥분한 상태로 해진이 움직이는 대로 느꼈다. 젖꼭지를 꼬집으면 꼬집는 대로 엉덩이를 조였고 발기한 성기가 해진의 단단한 배에 눌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액이 터질 듯했다. 제영은 그의 몸이 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기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뽑을 듯이 움켜 쥐었다. 끝을 향해 가는 것이 살끼리 닿았다 떨어지며 나는 찰팍거림에서도 알 수 있었다.

제영은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비명을 질러대고 싶었지만 억, 억 하는 소리만 나왔다. 제영의 허리가 들렸다. 수십만 개의 실들이 몸의 내부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에 허우적거리던 제영이 결국 괴로울 정도로 아찔한 절정을 느꼈다. 해진 역시 제영이 도달한 순간사정했다.

제영은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몸을 뒤틀었다. 제영의 몸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해진이 그런 제영의 몸을 천천히 쓸어내리다가 정액에 젖은 제영의 성기를 장난치듯 건드렸다. 그것만 으로도 제영은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해진이 제영의 몸을 당겨 안고 입을 맞춰 주었다.

"제영 씨.”

그러고는 제영의 이름을 불렀다. 제영 역시 해진의 등으로 손을 뻗어 그의 날개 뼈, 척추 하나하나를 더듬다가 그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둘의 몸이 마치 한 몸처럼 붙어 틈이라고는 없었다. 제영은 해진이 변했다고 여겼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던 것임을 확신했다. 품 안의 남자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였다.

그런 상대를 상처 입혔으니 화를 내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가 그렇게 된 것에는 제 잘못이 컸다. 그러니 이 잘못은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그를 안아 주고 그렇게 정리를 하자. 그러면 그 역시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해 줄 입은 없었으나, 미안하다고 빌 입은 있었다. 제영이 해진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다시금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해진이 제영의 허벅지에 문질렀다. 둘은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했다. 마지막에는 해진 이 젖은 수건으로 제영의 몸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 살짝 손장난을 치고 잠이 들었다. 제영은 눈을 감으면서 어서 아침이 되기를 바랐다. 밝은 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잠에서 깬 것은 해진이었다. 아직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도 해진의 희고 깨끗한 피부에 윤이 반질반질했다. 해진이 아직도 자고 있는 제영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를 챙겨들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욕실의 밝은 조명 아래에 서니 그의 흰 피부가 더욱 도드라졌다. 티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해진 이 입꼬리만 살짝 당겼다. 웃는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표정이었다.

해진은 세면대 근처에 올려 둔 것을 다시 챙겨 들었다. 몇 번 살짝 건드렸더니 이내 액정화면에 불이 들어왔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진의 목소리와 제영의 목소리, 거기에 따라붙는 신음. 몸과 몸이 부딪히는 소리. 그것들이 욕실 안에 울렸다. 해진은 화면 속의 제영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방금 전 사정한 제영은 가슴이 빨릴때마다 도망치려는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해진은 조금은 무심한듯하면서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쾌감에 일그러진 제영의 표정을 살살이 살피다가 이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제영의 신음소리와 헐떡거림이 해진 홀로 있는 욕실 안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고 있었다. 해진이 다시 거울을 보며 제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선명하게,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영상속 제영의 절정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영은 해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 대 어른으로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아침이 되면 그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새벽까지 시달린 제영은 그날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정신없이 씻고 출근하기 바빴다. 해진은 여전히 침대 속이었기에 나올 때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하루,이틀 후면 평소처럼 연락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핸드폰은 잠잠했고 억지로 용기를 내 먼저 전화를 걸어 봤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다시 HS 사옥으로 오는 날이 될 때까지 그의 털끝 하나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저번 술자리에서 상무가 말하기를 다음 번에는 해진이 미팅에 참석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일 때문에 얼굴을 보게 되는 걸까 했지만 이번에도 상무의 옆자리는 미팅이 끝날 때까지 빈자리였다. 제영은 미팅 내내 자꾸만 그 빈자리를 힐끔거렸다. 제영은 해진이 걱정됐다. 이런 큰 계약에 투입될정도면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작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회의 때마다 불참해 버리면 조만간 그의 횐 얼굴이 말 못 할상처로 가득해질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나고 노트북을 챙기며 짐을 정리했다. 상무와 이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배 차장은 그들의 옆에서 눈치 좋게 대화에 끼며 같이 웃고 떠들었다. 배차장이 제영에게도 끼라며 손짓했지만 제영은 못 본 척, 동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시끄러웠던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말쑥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상무에게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살짝 굳어 있던 표정의 상무는 이내 활짝 웃으며 그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 비서, 무슨 일인가."

그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끝과 끝에 있던 터라 그들이 목소리를 낮추자 제영이 있는 곳까지는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제영은 HS 내부의 일이겠거니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류와 짐을 다 정리하고 코트까지 챙겨 입었다. 동혁 역시 이미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박 비서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상무가 제영을 불렀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하지만,이해진 팀장님이 다른 일 때문에 회의에 참석 못 하셔서 따로 보고받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한 분 정도만 간단하게 브리핑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김 대리, 자네한테 좀 부탁함세."

상무가 제영에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부탁은 단순한 보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제영에게 신호를 주고 있었다.

배 차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영은 해진과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상무의 앞에서는 그와의 작은 연결 고리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예,알겠습니다."

하지만 일개 회사원인 주제에 이렇듯 공적인 업무와 관계된 것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다 챙겨 뒀으니 바로 그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었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이 복도가 아까그 복도 같았다. 그러나 박 비서는 뇌 속에 내비게이션이라도 깔린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보고가 끝나면 이 남자가 예전 담당자처럼 로비까지 데려다주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한나절이 지나도록 이 미로 같은 건물 속을 헤매야 할듯싶었다.

엘리베이터에 내려 다시 걷다가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가 카드를 꺼내 버튼 옆의 패드 위에 찍자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층 버튼을 누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층을 누르기 전에 먼저 카드로 버튼 옆의 패드를 찍었다. 그걸 신기한 눈으로 보는 제영에게 박비서가 말했다.

"C동이라 보안이 좀 심합니다."

"예, 그렇군요. 그럼 기획 2팀은 C동에 있나요?"

"아뇨, 팀은 B동에 있고 팀장실만 따로 C동에 있습니다.”

이상했다. 보통은 팀원들과 같은 공간을 쓰거나 따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더라도 바로 옆에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팀원들하고 소통은커녕 보고 한번 받기도 어려울 터였다.

고요하게,그러면서도 아주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가 상승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해도 무슨 고산 지대처럼 산소가 희박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제영은 어쩐지 숨 쉬는 게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또다시 흰 복도였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횐복도는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라기보다는 도달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미로 같았다.

장애물이라고는 없었지만 가시덤불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 가시덤불을 지나고 나면 탑꼭대기에 저주에 걸려 잠이 든 공주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웃기지도 않은 감상이었지만 제영은 용사가 공주를 만나길 원하는 것처럼 해진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업무 시간이라도 화장실 가는 직원쯤은 복도에서 마주칠 법도 한데 걷는 내내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박 비서와 제영의 발걸음소리만 사박거렸다. 이 층에 사람이라고는 제영과 박 비서, 해진, 딱 셋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박 비서가 걸음을 멈추고 제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김 대리님. 저는 이쪽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팀장님과 용건 끝나시면 제가 다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박 비서가 문을 두드렸고 제영이 왔음을 알렸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자 박 비서가 문을 열고 제영에게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그제야 제영은 자신만 들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제영이 팀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생각보다 넓은 곳이었다. 전면창 너머로는 서울 도심의 풍경이 내려다보였고 문 근처에는 응접을 위한 소파와 탁자가 있었다. 벽 쪽에 위치한 커다란 원목 책상에는 기획 2팀 팀장 이해진'이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해진은 제영이 들어왔는데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팀장님.”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제영이 그를 부르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그가 의자에 앉았다. 책상만큼이나 비싸 보이는 의자였다.

"거기 계속 서 있을 거예요? 이쪽으로 와요."

제영은 그의 곁으로 가는 와중에도 자꾸만 주눅 드는 자신을 느꼈다. 누구라도 그럴 만했다. 압도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제영의 회사에서는 이사급은 되어야지 개인실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장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넓고 안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너무나도 평온하고 익숙하게, 자신이 가진 것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평범한 소시민인 제영과는 다른 위치의 사람인것이다. 하지만 제영은 저 견고해 보이는 얼굴너머로 얼마나 연약한 속내가 숨겨져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제 품에 매달려 오던 남자라는 걸 알기에 조금은 의연한 척할 수 있었다.

"미안해요. 번거롭게 해서. 그 자리에는 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싫은 사람이 있어서요."

제영은 그가 싫다는 사람이 누구일지 짐작이갔다.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노트북의자료도 보여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다. 일성의 인력과 HS와의 업무 프로세스는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지,생산을 위한 부품 조달 업체 선정은 어디로 되었는 지를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해진은 서류를 넘겨보며 제영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고 어찌 보면 건성으로 넘기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대략적인 이야기가 끝났고 제영이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말해 달라고 했다.

"없어요."

그가 책상 위로 서류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의 무게에 의자가 뒤로 가볍게 넘어갔다. 업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인듯했다. 그가 제영에게 나가라고 하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저,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술이라도 한잔,하실래요?”

"좋아요."

그가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은 것이다. 승낙을 얻어 내고 제영은 낯선 곳에서,낯선 모습의 해진을 만나며 느꼈던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옅은 미소는, 그가 자신에게 가졌던 앙금 같은 것들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제영은 그에게 인사하고 나갈 참이었다. 회사에서는 공적인 예의를 지키고 잠시 후 저녁에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일어나 제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소파 앞의 테이블을 발로 밀었다. 끼익거리며 철제 다리가 바닥을 긁었고 테이블은 옆으로 치워졌다. 너른 소파에 털썩주저앉고서는 그가 다리를 꼬았다. 자신의 품안을 뒤진 그가 꺼낸 것은 담배였다. 라이터가 찰칵거렸고 곧 담배 끝이 붉게 타들어 갔다. 그의 입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영은 조금 당황했다.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처음 본것은 아니지만,제영이 알기로 그는 흡연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가방 거기 놓고 이리 와요.”

분위기가 이상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의 말을 따랐다.

"거기,서요. 아니다, 옆으로 한 발자국만 더가 봐요."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얼떨떨하게 서 있는 제영을 해진이 마치 품평하듯이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아까와 같이 웃었다.

"벗어 봐요. 전부."

제영은 귀가 먹먹했다. 응웅대는 소리와 그의 가지런한 말소리가 섞여 들어 무슨 이야기를하는 건지 단박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쳐다봤다. 해진이 등지고 있을 때는 한 폭의 그림처럼 그와 어우러졌던 창밖의 풍광이 이제는 낭떠러지처럼 보였다. 앞에는 그가 있고 뒤는 투명한 유리 벽, 그리고 그너머의 낭떠러지. 그 하나하나가 제영에게 위협적이었다. 제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해진을 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벗으라고요."

"해진 씨, 농담이죠?”

딱딱해진 제영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전 날의 다정함은 전부 거짓인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제영은 저 얼굴이야말로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그는 절대로 저런 말을 하면 안되었다.

아니, 애초에 쓸데없는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고 지금이 오히려 본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제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손에 힘을 풀었다. 전날부터 회의 준비다 뭐다 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주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따로 더 질문하실 거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회사 동료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제영이 가방을 챙겨 들고 곧장 문으로 향했다. 해진이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차라리 동혁을 보낼 걸 하고 후회했다. 그러면 이런 어이없는 일 따위는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무리 제가 잘못을 했다고 해도, 그로 인해 그가 상처 입었다고 해도 받아 줄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한계치 너머는 낭떠러지였다. 제영은 자기 잘못이 그 정도로 크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박비서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다 끝나셨습니까.”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제영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요. 아직 시작도안했어요."

해진이 제영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뒤통수의 거센 통증에 항의할 시간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끌려 들어갔다. 문이 다시 닫히기 직전, 당황한 박 비서의 표정을 보면서 제영은 이 남자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손에서 놓친 가방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안에 있는 서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와 벽으로 밀쳐졌다. 정신이 없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그가 제영의 팔을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놔요!

"싫어."

"미쳤습니까?”

"왜요?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 왜 난 그러면 안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행동도 눈빛도 제영이 보기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울 듯했다. 무거운 바위처럼 한 치도 밀리지 않던 남자가 잠깐 틈을 보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를 세게 밀쳐, 제 몸에서 떼어 냈다. 그대로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쏟아져 나온 짐들은 가방에 쑤셔 넣었다.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던 노트북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걱정이 되는 건 또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해진이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알았어요. 마음대로 해요"

포기한 걸까. 제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옷 안을 뒤지는 폼에 또 담배를 꺼내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가 꺼낸 것은 핸드폰이었다. 마치 제영이 보란 듯이, 번호를 눌렀다.

그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뭘 하려는 거야.'

제영이 불안한 얼굴로 그가 하는 짓을 눈으로 좇았다. 해진이 핸드폰을 들어 제영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익숙한 번호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통화 연결음. 제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손안에 쥔 것을 내팽개치고 해진에게 달려들어 핸드폰을 빼앗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제영이 해진을 탓하는 듯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끝내자는 거 아니었어요? 난 또 그러자는 줄 알았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해진 씨, 이런 사람아니잖아요."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면,어떤 사람이에요?

말해 봐요.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했길래 그렇게 대했는지 궁금하네요. 설마, 내가 당신 결혼한다는 애기 들으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헤어질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제영은 그의 태도에 입도 벙끗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손에 쥔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까의 번호가 이번에는 이쪽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부재중 통화가 남은 것을 보고 다시 연락한 듯했다. 해진이 핸드폰을 다시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자 제영이 뒷걸음쳤다. 그다지 요란스럽지 않은 벨소리였음에도 제영은 귀 바로 옆에 커다란 스피커가 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영 씨, 우리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선택지는 두 개예요. 여기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든가, 아니면 그대로 짐을 챙겨서 나가든가. 어느 쪽을 택하든 간에 당신 마음이에요. 하지만 이전 처럼 이도 저도 아닌 것 못 참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더 이상은 이런 짓 안 할 겁니다.”

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고 제영은 작게나마통쾌함을 느꼈다.

"희주한테는 제가 직접 이야기할 겁니다. 어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지금은 아니라고. 그러면 이해해 줄 겁니다. 몇 년을 만나 온 여자예요.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잘 압니다. 충격은 받겠지만우린 같이 이겨 낼 겁니다."

해진이 차갑게 비웃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다가오자 제영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해진이 손을 들었고 제영은 그가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한 대쯤은 맞아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영을 때리는 대신손등으로 뺨을 살짝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뺨과 목젖을 살짝 스치면서 내려온 그의 손가락 끝이 제영의 어깨를 꾸욱 찔렀다.

"윤희주 씨라는 분은 아주 좋은 사람인가 봐요. 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다음은 제영의 왼쪽 가슴 위를.

"당신 회사 동료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 줄 만한 좋은 사람들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아요?”

"회사 사람들이 여기서 무슨 상관이에요?”

제영이 따져 물었다. 해진은 그런 제영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그의 뱃가죽 위를 찔렀다.

"왜 상관이 없어요? HS랑 일성이랑 진행하고 있는 계약을 파기하려면 뭔가 이유를 설명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당신이랑 이런저런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실수했다고."

"계약은 일성이 정정당당하게 따낸 거예요.

당신이 데이터까지 보여 줬잖아요. 일성이 가장타당한 조건이었다고."

"웃기지 말아요. 디테일한 것들 다 내가 짚어주지 않았어요? 내부자 정보를 이런 식으로 빼내서 이용하는 거 사소하게 넘길 수 없다는 거잘 알잖아요."

"하지만 내가 당신한테 물었을 때는."

"그래요. 그때는 괜찮았죠. 왜냐면 내가 당신을 믿고,당신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정도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해 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안면몰수하고 나를 배신하니 나라고 어쩔 수 있겠어요?

억울해서라도 준 걸 다시 가져올 수밖에."

"회사는 회사고, 이건 당신과 내 문제잖아요."

"하, 몰랐어요? 내가 공과 사 구분 못 하는 사람이란 거. 서류 하나둘 가져와서 내가 아는 것들 빼먹을 때부터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희주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이야기를 잘라 내어 해진이 억지로 매달린 것뿐이라고 말하면 이해해 줄 듯싶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입이 가벼운 직원들부터, 동혁과 배 차장. 거기다가 해진의 스캔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무라면 이 건을 쉬이 넘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워 잘 굴러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바닥이 어그러져 제영의 몸이 휘청했다.

"얘기 끝났으니까 이만 나가 줄래요? 다음에 미팅 때 봐요. 가기 싫지만 안 갈수가 없겠네요"

해진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앉은 채로 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제영은 서 있고 그가 앉아 있으니 반대로 되어야 하는게 맞았다. 하지만 제영은 그가 분명히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 높고도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목줄을 쥐고 좌우로 흔들어 대고 있었다. 제영의 목이 졸리든 말든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잠잠해졌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손안에 꽉 쥔 핸드폰은 화면이 보이지 않아 그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제영을 궁지로 몰기에 충분했다. 제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단순한 말을 내뱉는 것조차도 힘에 겨워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뭐라고요?"

해진이 되물었다.

"할게요.”

제영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그에게 말했다.

코트를 시작으로 제영이 하나하나 옷을 벗었다. 손이 떨려 셔츠 단추를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버 벅거렸다. 이쯤하면 그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을까 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고 그건 전부 헛된 것임을 깨닫고는 다시 바닥만 쳐다보았다. 그는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고 흥분한 얼굴도 아니었다. 단지 화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코앞에 있는 구경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아바닥만 보고 옷을 벗었다. 속옷 한 장 남겨뒀을 때도 이만하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제영의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몸이 달달 떨렸다. 추워서 그런 것도 있고 긴장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앞사람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언제까지 이런 꼴로 두려는 건지 몰라 제영은 그렇게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진이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 사이를 구두 바닥으로 두드렸다.

"여기, 무릎 꿇고 앉아."

알몸으로 남의 회사에서, 남의 성기를 삼키고 있는 건 비참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비참한 일인 줄 알기에 시키는 것이었다. 딱딱한 바닥에 닿은 무릎이 아팠다. 그의 양 허벅지를 붙들던 손은 그가 시키는 대로 제 다리 사이를 주물렀다. 하지만 입안의 단단한 물건과는 다르게 제영의 것은 여전히 힘이라고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물컹한 상태였다.

"안서요? 제대로 해 봐요."

이 상황에서 흥분될 리가 없었다. 제 몸에 달린 것임에도 마치 찰흙 덩어리를 주물러 대는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거기다 제영은 목 깊숙이 파고든 해진의 물건이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기에 스스로의 것을 매만지는 것에는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진은 더 원했다. 제영의 목덜미를 눌러 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괴로웠다.

눈물이 차올라 붉어진 눈동자의 제영이 해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해진은 여전히 차갑고 흐린 표정으로 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영이 눈물을 찔끔 흘리기 직전에야 해진이 성기를 입 밖으로 빼냈다. 제가 삼킨 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검붉고 두꺼운 성기가 코앞에서 꺼떡거렸다. 겨우 막혀 있던 숨길이 뚫린 제영이 호흡을 몰아쉬었다.

"손 치워 봐요."

그가 구둣발로 제영의 사타구니를 덮고 있던 손을 살짝 쳤다. 손이 치워지자마자, 늘어진 성기가 보였다. 해진이 제영의 두 손목을 잡아 올렸다. 제영은 어린아이가 벌을 받는 것처럼 그에게 붙들려 양손을 높이 든 채로, 다리 사이를 오가는 해진의 구두코를 피하려고 몸을 들썩였다.

"가만있어. 혼자 못 하니까 도와주는 거잖아요"

제영은 그런 도움 따위는 사절이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애원해도 그는 손을 놓아주지도 그렇다고 발놀림을 멈추지도 않았다. 항문과 성기 사이의 회음을 구두 끝으로 밀어 올리다가 성기를 가지고 놀듯이 밟았다. 제영은 그가 제것을 짓이길 것만 같았다. 착각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이 성기를 누르는 구두에 힘이 들어갔다.

"나랑 그 여자랑 같이 만나면서 나랑도 자고,그여자랑도 잤어요? 이걸로?"

"아파요, 해진 씨."

제영이 고통스러워 몸을 들썩였다.

"나도 바보 같죠. 어떻게 몰랐을까. 당신이 이순진한 얼굴로, 날 가지고 노는데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어떻게 하면 당신 마음에 들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단 말이지."

다시 살며시 그의 발끝에 힘이 풀렸다. 제영의 몸은 땀범벅이었다.

"근데 어쩔 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날 기억나요? 한참 연락도 안 되다가 갑자기 와서는 빨아 주겠다고 했던 날이요. 이 사람 향수 같은 거 안 쓰는데, 뭔가 달콤한 냄새가 나서 물어볼까 하다가 당신이 먼저 선수 쳐서 입을 다물어 버렸죠."

그가 다시 발에 힘을 주었다. 이상한 조화였다. 고통스럽고 아프기만 한데도 제영의 것이 점차 발기하기 시작했다. 아픔 속에서도 부풀어오르는 것을 보며 제영은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위에서는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영의 얼굴이 시뼐겋게 달아올랐다.

"섰네. 이런 거 좋아해요? 앞으로 참고할게요"

제영의 몸이 심하게 들썩였고 곧 그의 검은 구두 위에 흰 액체가 쏟아졌다. 제영이 내보낸정액이었다. 이미 진력이 다 빠진 상태의 제영을 해진이 위로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무언가로 질척해진 손가락들이 제영의 뒤를 오가기 시작했다. 해진이 소파 옆으로 집어 던진 작은 튜브를 보고서야 그 무언가가 고작 핸드크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그의것이 제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알몸의 제영과는 다르게 해진은 옷에 덮이지 않은 목 주변만 맨살이었다. 제영은 그 가느다란 목의 온기에 매달려 이 순간을 견뎌내려고 애썼다.

"저번에는 여기도 익숙해진 것 같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뼛뼛하게 굴어요?”

해진이 그렇게 말하며 제영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그것마저도 아파 제영이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이 몸부림이 해진에게는 쾌락의 신호탄이 된 듯싶었다. 자신의 위에 타고 있는 제영의 허리를 꽉 붙들고 위아래로 거세게 흔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영의 안에 액을 토해냈다. 그는 제영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욕심을 채울 만큼 채우고 나서야 제영을 놓아주었다.

희뿌옇게 낯이 죽은 제영이 해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천장을 명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해진 역시 흰 얼굴이긴 하나,두 뺨에 홍조가 돌아 오히려 생기가 있어 보였다. 해진이 제영의 맨피부를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다가 젖꼭지를 살짝 꼬집었다. 시체처럼 누워있던 제영이 몸을 움찔거리자, 해진이 킥킥댔다. 제영이 눈을 꽉 감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영이 벌떡 일어나 해진을 불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기는 했으나 여기는 회사였다. 다른 누군가가 올지도 몰랐다. 소파에서 내려가 제 옷을 챙겨 입으려는 제영을 해진이 붙잡고 내려가지 못하게 했다. 그가 재킷으로 제영의 몸을 덮어 주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제영은 오로지 해진의 재킷에만 의지해 소파 너머로 자신이 보이지 않도록 몸을 웅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만큼 큰잘못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너무나도 지독한 형벌이었다. 갑자기 서러워 울음이 터져나올 듯한 것을 겨우 참아 내었다.

"뭡니까?"

"저, 김 대리님 동료분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처리해 줘요. 저 사람은 이제 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오붓하게 술 한잔 할 거라서요"

해진의 말끝에 즐거움이 넘쳐흘렀고 제영은 옴짝달싹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로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몸이 삭아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단순히 아프다거나 피로하다는 걸로는 표현할수 없는 기분이었다. 몸통 어디 깊숙한 곳에 핀곰팡이들이 이곳저곳 포자를 퍼뜨려 온몸을,특히 가슴팍을 시커멓게 만들어 갔다. 훤히 뚫린 공간에서 제 손으로 옷을 벗고 해진의 다리 사이에서 장난감처럼 다뤄진 경험은 특히나 제영을 힘들게 했다.

그게 마지막이길 바랐으나 불행히도 그러질 못했다. 해진은 회사에서 몇 번이고 제영을 불렸다. 물론 콕 집어 제영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

처음처럼 따로 보고받고 싶다는 핑계로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상무와 배 차장이 제영의 등을 밀었다. 건수를 잡아 오라고.

그러나 제영은 건수를 잡아 오는 대신, 해진에게 붙잡혀 곤란한 짓거리들을 당했다. 두 번째, 세 번째를 지나도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요청을하며 자신을 데리러 오는 박 비서의 무표정한 얼굴도, 그를 따라가 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느 때는 웃고 어느 때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해진도 전부 싫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넌지시 그의 기색을 살피며 이 짓거리들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피력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코웃음 치며 당신은 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할 뿐이었다. 억울해,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제영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해진에게 나쁘게 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슬퍼하면 달래 주었고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반대로 행동했다. 분노와 조롱을 숨기지 않았고 화가 날때마다 입을 맞추고 제영의 몸을 요구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제영에게 한 줄기 빛이 있었다. 해진이 분명이 말했었다. 구질 구질하게 유부남과 만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결혼하고 나면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이었다. 이 관계는 끝이 있다는 것. 이전에는 제영이 해진과의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한 변명거리였지만 이제는 해진을 견더 내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제영은 지금을 참아내고 있었다.

‘결혼만 하면.'

결혼만 하게 되면 모든 게 전부 해결되는 것이다. 제영은 그 후의 미래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희주와 결혼하고 신혼집으로 이사하고 그리고 아이를 낳고. 그녀와 자신의 아이. 그것만큼가슴이 벅차오르는 것도 없다. 희주를 닮은 딸도 괜찮을 것이고 자신을 닮은 아들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순하게 제게 웃어 줄,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나서야 제영의 가슴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자꾸만 잘 벼린 칼로 살갗을 한 겹씩 저미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고 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따금씩 그가 제영의 마른 피부 위에 손톱을 세워 긁었다. 그 정도는 참을 만하여 잠자코있으면 이번에는 이로 세게 물었다. 악, 하고 제영이 소리를 지를 정도로. 살짝 피가 배어 나올정도로 제영을 괴롭혔다. 그 탓에 제영의 이곳저곳은 명과 긁힌 상처, 잇자국들이 심심잖게 들어차 있었다. 특히나 사타구니 사이가 심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심한 곳이 남의 눈에 보일 필요 없는 은밀한 부위였고, 소소하게 상처가 있는 곳은 겨울이라 긴 셔츠에 가려진다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상처는 가려졌으나 얼굴은 가릴 수가 없었다. 조금은 쌜쭉하니 부드러운 선을 그리던 뺨은 이제는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모두 벗겨 내 보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마른 몸이 걱정을 사기에 충분했지만,근래에 그의 벗은 몸을 보는 사람은 하나뿐이었고 그는 제영을 그렇게 만든 원인이었다.

눈을 감고 외면하자. 그게 몸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상관없었다. 지나게 되면 다 잊힐 일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이 좌절감에 침몰될 필요는 없다고 자신을 세뇌했다. 그럼에도 제영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어두워져 갔다.

주변을 한번 휙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일을하는 와중에도 옆자리 이들과 시시덕거 렸다. 제영만 빼고는 다들 살 만해 보였다. 이 세상에서 불행의 정도로 줄을 세운다면 자신이 맨 앞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 와중에, 외근 갔다 돌아오는 배 차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제영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바로 고개를 숙였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육중하면서도 출싹맞은 발걸음 소리가 제영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너 소식 들었어?"

제영에게 다가온 그가 몸을 바짝 숙이고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귀에 속삭였다. 담배냄새 섞인 축축한 습기가 귓가에 닿자 제영이 몸서리치며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졌다.

"무슨 소식이요?”

"네가 한 거 아니야?”

"갑자기 와서 그런 말씀 하시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영은 안 그래도 싫었던 배 차장이 요즘 더싫었다. 꼴에 맞지 않게 상무에게 알랑거리며 계속 제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게 소름 끼쳤다. 그에게 끌려가 무슨 짓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다음 날 회사에 오기만 하면 뭔가 상무에게 일러바칠 만한 것이 없느냐며 제영을 괴롭혀 댔다. 배 차장이 주변을 의식하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고는 위쪽으로 살짝 고갯짓했다. 옥상으로 올라가자는 신호였다.

"정말네가아니야?”

"아까부터 무슨 얘기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제영은 지금 스스로를 추스르기에도 벅찼다. 그런 와중에 자꾸만 자신을 귀찮게 하는 배 차장이 짜증났다. 배 차장이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뭔가 싶어서 슬쩍 보던 제영이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 새끼 남자 만난다더니, 진짜인가 봐. 년진짜 뭐 찾은 거 없어. 이럴 때가 상무님한테 점수 딸 좋은 기회라고. 매번 미팅 갈 때마다 불려가더니 도움 되는 게 없냐. 도대체 가서 뭘 하는거야? 정말 보고만 딱 하고 나오는 거야?"

키스, 오럴 섹스, 어쩔 때는 세워 두고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소파에 앉혀 내버려 둘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저도 제영은 안절부절못하고 그의 눈치를 봤다. 수틀리면 그가 내뱉은 말들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토라져, 길 가던 개구리에게 냅다 돌을 던져 버리면 그 개구리는 죽은 목숨이었다. 제영은 자기가 어떤 신세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몸을 사렸다.

"이거, 누가 보내준 거예요?"

"응? 증권사 다니는 친구. 그 친구가 요즘 HS 난리도 아니래. 그 집 회장이 오늘내일하잖아?

첫째랑 셋째가 더 많이 먹으려고 엎치락뒤치락중이래.”

"이거 저도 좀 보내 주세요"

제영은 배 차장이 뭐라고 얘기하는 건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순식간에 입안이 마르고 혀가 굳었다. 차가운 독이라도 들이켠것만 같았다. 담배라도 한 대 같이 피우자는 배차장을 내버려 두고 제영이 먼저 옥상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자꾸만 다리에 힘이 빠져 몇 번이고 굴러떨어질 뻔했다. 겨우다 내려왔을 무렵에는,결국 주저앉아 벽이 기댈 수밖에 없었다. 문자 도착음이 울렸고, 화면에는 배 차장의 이름이 떴다. 아까 보내 달라는 사진과 글이 도착해 있었다. 제영은 그걸 누가 볼까 싶어 두 손으로 가렸다. 자신 역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이름 하나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해진 씨.

핸드폰으로 연락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바로 문자를 남겼다. 급한 일이라고, 바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자리로 돌아와서도 제영은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주변을 살폈다. 이런 가십거리는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이 사무실에 배차장과 자신 외에도 이미 이걸 본 사람이 있을지 몰랐다. 자리에 앉아 하는 거라고는 숨 쉬는 것밖에 없는데도 자꾸만 땀이 흘렀다. 그 와중에 정작 해진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째서, 아직 모르나.'

이런 찌라시는 자신보다도, 그에게 더 빨리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또 형에게 혼나고 있는 걸 아닐까. 그래서 연락을 받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영이 또다시 그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물컵을 한 번 쏟고 복사기에 발을 찧었다. 여직원 중에 하나가 다가와 오늘따라 넋이 나간 것 같다고 농담을 건넸지만 제영은 창백한 얼굴로 바보같이 웃고 말았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퇴근까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시동을 걸기 전에 사진을 한 번 더 보았다. 키가 큰 남자는 연한 하늘색 니트에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그 품에 안겨 있는 이는 재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장소는 어딘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한두 번 그와 껴안은 적이 있었지만 제영이 바로 그를 밀어냈기에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직접 보면 친구끼리가볍게 투탁거리는 정도라고 생각할 그런 스킨십마저도 사진 속에서는 진한 포옹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막히는 거야."

제영이 운전대를 두들겼다. 퇴근길이라 당연하겠지만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숨까지 막혀 올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제영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냉수마찰처럼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제자리로 돌려놓기를 바랐지만 그보다도 매캐한 냄새가 제영의 코끝을 질렀다.

동시에 애앵거리는 사이렌 소리와 눈이라도 멀게 만들 것처럼 붉고 번쩍이는 빛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가를 반복했다. 근처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기어가듯이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가던 차는 신호에 걸려 다시 멈춰야만 했다. 제영은 점점심해지는 매캐한 냄새와 검은 연기,그리고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바로 저 식당이 불이 난 곳이라는 걸 알았다. 제영도 몇 번 가 봤던 곳이었다. 최근에는 내부 수리 중이라며 문이 닫혀있던 집이었다. 불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틈이 있는 환풍구 쪽에서는 쉴 새 없이 검은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호기심 어린 사람들이 구경하다가 이내 질려 제 갈 길을 가곤 했다. 안에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얼마나 심한 건지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방대원들이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환호성 같은 것이 터졌다.

제영 역시 자기도 모르게 그 검은 광경과 사람들에 정신이 팔렸다가 이를 악물었다. 여차하면 자기가 저 꼴이 될 것 같았다. 추잡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뭐가 진실이든 상관없이 다들 돌려 읽고 비웃기 바쁠 것이었다. 제영은 그런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기 역시 그랬으니까. 몰린 인파 사이에서 다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탄식 같은 것이었다. 소방대원의 등에 누군가 업혀 나오고 있었다. 그가 죽은 건지, 아니면 잠시 의식을 잃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제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순간,뒤에서 빵 하는 소리가 났다. 이미 신호가 바뀌었고 다들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제영은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고 차를 출발시켰다.

해진의 집은 비어 있었다. 제영이 그가 가 있을 만한 곳을 알 리가 없었다. 회사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갑자기 거래처 직원이 방문 예약도 없이 찾아가 그를 만나자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주인도 없는 집, 소파에서 그를 기다렸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다리다가 거실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다시 그에게 전화해 보고, 메시지를 넣고 갑자기 울적함을 참지 못하여 침실로가 베개에 고개를 묻고서 또 한참을 기다렸다.

추우면서도 덥고 그러면서도 식은땀이 계속났다. 제영은 차가운 제 목덜미를 손으로 짚었다 말다를 반복했다. 잠에 든지도 몰랐다. 요란스러운 알람 소리에 퍼뜩 깨어 눈이 떠졌다. 방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옆을 더듬어 봐도 사람은 커녕 남겨진 온기조차 없었다. 빈 거실에서 어렴풋하게 밝아 오는 푸른빛을 명하니 쳐다보다가 제영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간이 지나 완연한 아침이 되었을 때 제영은 출근했다.

어제 옷을 그대로 입은 후줄근한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은 희게 질린 제영의 얼굴을 보고 혈색이 좋다며 여자 친구와 좋은 밤을 보낸 거냐고 농을 던졌다.

점차 해진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자신을 엿 먹이려 한 짓이고 전전긍긍하며 보낸전화와 메시지가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을 보고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영이 책상에 올린 양손을 맞잡고 몸을 웅크렸다.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영을 불안하게 했다.

싸구려 식기와 테이블들이 타들어 가는 도중에 뿜어져 나오는 유독하고 매캐한 연기, 그게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만 같아 속이 메슥거렸다.

"김 대리님,왜 그러세요?"

양치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던 이선주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제영이 손을 저었다.

그러나 아침과 다르게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제영을 보고 놀라며 병원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아니라도 곧 그 수준이 될 것 같았다. 결혼식장보다도 응급실에 먼저 가게 생긴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군 제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립스틱을 바르려던 이선주가 화들짝 놀라 제영을 쳐다보았다.

“아, 저기. 나 역시 병원 좀 가 봐야겠어. 박대리, 애기 좀 해 줘. 남은 것 좀 처리해 주고."

난데없이 이름이 불려 일을 떠맡게 된 동혁이 제영을 불렀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얼른 코트와 가방을 챙겼다. 이 상태로 운전했다가는 사고라도 낼 듯하여 택시를 잡았다. 어디에 쫓기는 것처럼 다급하게 문을 열고 탄 제영을 택시 기사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꽤 거리가 나오는 행선지를 듣고는 쾌활하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강병원이요. 강병원으로 가 주세요."

해진의 친구 중에 제영이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 강준성뿐이었다. 그라면 지금 해진이 어디에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모르더라도 최소한 연락은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었다.

갑자기 찾아와 강준성을 만나려 하는 제영을 보고 간호사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예약하지 않았으면 접수부터 하라고 말했다. 그런 일때문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예약 환자가 밀려 있다는 얘기만 했다.

짜증이 나는 건 제영도 마찬가지였다. 말리는 그녀를 무시하고 무작정 그의 진료실로 걸어갔다. 그의 이름이 적힌 걸 보자마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꼭 다른 세상 같았다. 진료를 받으러 온 나이든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안경을 쓴, 누가 봐도 엘리트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흰 벽의 공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제영이 들이닥치자 놀란얼굴을 했다.

"정말, 환자분! 이러시면 곤란해요."

금방 뒤따라온 간호사가 제영을 끌어내려고했다. 준성이 그 모습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간호사가 환자를 데리고 나가자, 방 안에는 둘뿐이었다. 방금까지 나이 든 여자가 앉아 있던 의자에 이제는 제영이 앉아 있었다. 얼핏 보면 아까의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준성은 작게나마 남아 있던 가식적인 친절도 제영에게 베풀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귀찮고 따분해하는 얼굴이었다.

"오늘은 뭐예요? 또 해진이 일이겠지만. 아직도 못 헤어지겠대요? 그 새끼가? 제영 씨도 참안됐네요. 어쩌다가 그런 새끼한데 걸려서."

준성이 혀를 찼다.

"해진 씨 어디 있어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요즘 저보다 그쪽이 더 자주 만나고 있잖아요.”

"연락이 안 돼요."

"잘된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뜸해지고, 아예끊기면 그쪽은 그쪽 여자 친구랑 결혼하면 되고."

"문제가 좀 생겼어요. 해진 씨랑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해요."

"그 문제가 뭔데요?"

제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 못할 문제라......"

준성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몰라요? 해진 씨 어디 있는지."

제영의 절박한 물음에 준성이 한숨을 쉬고는 핸드폰을 뒤적였다.

“몇 번으로 전화했어요? 1387로 끝나는 번호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도 그건데, 그거 안받으면 정말 잠수 타겠다는 거나 다름없는데."

준성이 몸을 돌리고 전화를 했다. 해진에게 한 것인가 싶었더니 다른 사람인 듯했다. 하잘것없는 안부 인사를 주고받다가 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제영은 손을 꼭 쥐고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일단 얘기는 했어요. 이쪽으로 연락 달라고.

해진이한테 연락 오면 말해 줄게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여긴 제 직장이니까. 저도 일을 해야 돼서요."

제영은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 사이에 앉아 기다렸다. 장소만 달라졌을 뿐,해진의 집에서 하던 짓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혹시나 자신에게 연락이 왔을까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지람 넓은 할머 니는 제영에게 젊은 사람이 왜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이러고 있냐며 어디가 아픈 것이냐고 물었다.

제영은 회사에서 하던 것처럼 그저 힘없이 웃어넘겼다.

"김제영 씨."

준성이 제영을 불러 호텔 이름과 호수가 적힌 메모를 건넸다.

"K호텔, 2105호예요. 프런트에 말해 뒀다니 까 키 받아서 올라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좋게 좋게 해결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단정한 뒤통수가 얄미웠지만 제영은 그저 종이만 손에 꾹 쥐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서야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오후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제영은 그를 만나면 제대로 서 있을 자신조차 없었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렸고 온몸이 곤죽이 된 듯했다. 준성의 말대로 프런트에 얘기하자 바로 키를 내줬다. 처음 와 보는 호텔, 번쩍이는 금빛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영은 점차 높아지는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부터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사람을 이제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가서 뭐라고 입을 땔지부터가 걱정이었다. 일단을 사진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상무로부터 들은 제안을 이야기하면 이 찌라시 역시 그의 무리가 획책한 거라는 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게 분명했다. 그러면 심각한 얼굴로 어떻게든 대처 방법을 알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제영이야 일개 소시민인 회사원이라지만 그는 굴지의 대기업 막내아들이지 않은가. 이런 일을 처리해 줄 만한 사람들이 분명있을 것이었다.

제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해진이 욕실 안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나왔다. 샤워 가운을 대충 여며 입고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제영을 쳐다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그에게 좋은 냄새가났다. 호텔에 비치된 물품을 사용한 건지 항상맡아 오던 것과는 다른 향기였다. 순간적으로 제영은 그의 살에 코를 박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그의 가슴팍에 매달려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의 얼굴에는 다정함의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에게 밀쳐졌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을 맛볼 것 같았다.

"뭐예요?"

"연락 계속했는데, 못 받았어요?”

"빨리 용건이나 말해요. 나 피곤해요."

"사진이랑 보냈어요. 해진 씨 핸드폰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핸드폰 꺼 놨어요. 다시 켜면 다른 것도 같이 확인해야 되니까,그냥 말로 해요."

제영은 말 대신 사진이 띄워진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가 그걸 건네받고 천천히 살폈다.

"고작 이런 거 때문이에요?"

"고작? 고작이 아니에요."

"어디서 찍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 사람얼굴이 희미해서 웬만해서는 못 알아보겠는데요. 우리야 당사자니, 옷 같은 거 보면 단박에 알겠다만. 아, 가까운 사람 같으면 알아볼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랑 결혼한다는 그 여자 정도면 알아보겠죠. 왜요? 왜 그런 얼굴을 해요. 당신말대로라면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라면서요. 그럼 걱정할 거 없지 않나요?"

제영은 조금 얼이 빠져 있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은 불안한 얼굴의 그와 함께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일은 그저 그런 해프닝에 불과 해 보였다. 제영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죠.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했던 짓들을 다 알 수도 있다고요.”

"글쎄요. 전 담이 그렇게 약한 편이 아니라서요. 그런 거 신경안 써요"

"그럼 이대로 지켜보기만 할 거예요? 당신과 내 사진이 퍼지든 말든, 아무 상관도 안 하고?

이런 건 당신한테도 문제가 되는 거 아니에요?

해진 씨는 언젠가 회사를 물려받을지도 모르는데,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겠어요? 다들 뒤에서 수군대고 손가락질할 건데."

"앞에선 못 하겠죠. 제영 씨랑은 좀 다르니까.

제영 씨가 말했잖아요. 내가 못 가진 게 뭐가 있냐고, 그러니까 다른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이것도 비슷한 거예요. 내가 너무 많이 가져서,내 앞에서는 다들 입조심할 거거든요. 뒤통수는 좀 가렵겠죠. 하지만 상관 안 해요. 그런건 익숙해서요. 근데 당신은."

해진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가볍게 털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주 재미난 일이 많아지겠죠. 이런 식으로 셋째 형이 작업 들어간 거면 이건 겨우 시작일거예요. 우리 둘이 밖에서 했던 짓 중에 제일 큰사건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떠올려 보면서 그 사진만큼은 그들에게 없길 기도나 해요. 여자 친구한테는 남자랑 붙어먹었다고 미리 귀띔이라도 하든가요. 회사 사람들은 나도 몰라요."

제영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그저 정신이 혼미해지는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앞의 매정한 태도가 제영을 구석으로 몰았다. 모든 것이 다 후회스러웠다. 이런 관계 따위는 애초에 시작조차도 말았어야 했다. 해진이 희게 뜬 얼굴로 땀이나 삐질삐질 흘리며 서 있는 제영을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널따란 침대 위로 몸을 던지듯이 누웠다. 조심성 없는 몸가짐에 성기게 묶인 허리끈이 풀어져 그의 가슴팍과 허벅지까지 훤히 드러났다. 조금만 움직이면 다리살이 다 드러날것만 같았다. 제영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달갑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도와줘요."

제영은 살려 달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해요,

"나 그렇게 되면 얼굴도 못 들고 다녀요. 제발요, 해진 씨."

영영 숨겨져 삶에서 사라질 예정이었던 것들이 끔찍한 얼굴을 쳐들고 제영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다.

"웃기지 말아요. 그동안 날 속이면서 뻔뻔하게 얼굴 쳐들고 다녔으면서. 나한테 하던 것처럼 해요."

제영은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토록 그를 찾아 헤맨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지금으로서는 다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이전에 그가 보여 줬던 애정의 조각들이 이번에도 자신을 위해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똑같이 불안하고 걱정하고 있을 그를 오히려 자신이 위로해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덜덜 떨고 있는 것은 제영, 하나뿐이었다. 제영은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침대에 누운채로 미동조차 없는 그를 쳐다보았다. 싸구려모텔에서 제 무릎을 베고 누웠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더 이상 애정이 없듯이, 희망도 없었다. 갈게요, 라고 말을 해야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발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거예요?"

제영은 해진이 나가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뒤로 돌아 자신이 들어왔던 문을 찾았지만 이미 너무 깊이 들어온 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희주가 가 본 그 어느 호텔보다도 넓을 이 방 안에서 제영은 길을 잃을 것만 같아 자신이 들어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방금 전에 지나쳐 온 곳인데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해진이 불안한 얼굴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제영을 보고 티가 나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마저도 제영에게는 비바람이 거센날의 천둥소리처럼 들려와 몸을 움찔했다.

"이리 와."

그가 나가라는 말 대신, 반대의 말을 내뱉었다. 제영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해진이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분명히 이리 오라는 말이었다.

"내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게 뭘 해 줄 건데? 내가 당신을 위해서 이 귀찮은 일을 처리해 주면 당신은 내게 뭘해줄수 있는데."

그와 자신이 모두 찍힌 사진을 처리하는 일이, 왜 저를 위한 귀찮은 일일 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제영은 이 곤경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그에게도 누누이 말해 왔듯이 제영이 보기에 그는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고, 제영은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해진이 발을 놀려 제영과 자신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왼발로는 제영의 발등을 누르고 나머지 발로는 바짓단 아래의 맨살을 더듬었다. 얼어 있던 맨살 위로 날카로운 온기가 파고 들었다. 제영은 그가 뭘 원하는지 눈치챘다.

더러워. 제영은 그 말이 밖으로 튀어 나가 버릴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것만을 바라는 해진이 더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영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할게요.”

제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런 짓은 몇 번이고 했으니 이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 횟수가 조금 추가되더라도 괜찮을 듯싶었다.

"씻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그냥 해요."

"하지만 어제부터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그냥 하라니까요."

해진이 다시 침대 위로 털썩 누웠다. 침대맡에 서 있던 제영이 금세 알몸이 되어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영 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죠."

나머지 한쪽 발이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 해진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나머지 팔은 녹아내린 것처럼 흰 침대 시트 위에 늘어뜨렸다. 제영이 이미 반쯤은 풀려 있는 가운의 허리끈을 완전히 풀어내고 양옆으로 열어젖혔다.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처럼, 그의 것은 조금의 흥분의 기색도 없이 얌전했다.

제영이 좀 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한쪽 뺨에 닿은 음모의 거칠함을 억지로 무시하면서 입안의 것에 집중했다. 메말라 있던 겉껍질이 제영의 타액에 젖어 점차 힘을 얻고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팔과 마찬가지로 늘어져 있던 해진의 무릎이 살짝 접혀 다리가 들렸다. 발끝에 힘이 들어간 것이 제영의 눈에도 보였다. 입 안에 자리 잡은 것이 이내 완연히 단단해져 품고 있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제영이 해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의 두 뺨이 살짝붉었다.

제영은 그런 해진의 모습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 아래에는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디면 엎어질 것만 같은 검고 질척거리는 것들이 있었기에 제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그의 몸에 닿고 싶기도 하였고 닿기 겁나기도 하였다. 몸을 만지면 그가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여전히 해진은 제영을 쳐다보지 않고 먼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영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가 자신과의 섹스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거래의 조건으로 잠깐의 욕구를 풀고자하는 것임을 알았다.

"가운 주머니 안에 있는 거, 써요.”

가운 안에는 작은 로션 통이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해진의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향기가 흑 풍겨 왔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은근한 꽃향기가 났다. 제영은 이 향기 좋은 걸 어디에 써야 할지 알고 있었다. 손바닥에 조금덜어 사용하려고 했던 것인데 실수로 해진의 배위로 쏟고 말았다. 그의 배 위로 액체들이 옆으로 흘러내려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미안해요."

당황한 제영의 사과의 말에도 그는 대꾸가 없었다. 제영은 입을 다물고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채 담지 못한 묽은 로션액이, 발기한 해진의 성기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게 마치 해진이 흘리는 정액 같이 보이기도 했다.

아래를 풀고 미끄러지지 않게 살짝 그의 성기를 잡고서 그 위로 몸을 내렸다. 무성의하게 몇 번 쑤신 정도로 준비를 마쳤던 아래는 생각보다 통증이 적었다. 사실 거기뿐만 아니라 온몸의 감각이 둔한 상태였다. 그러나 절반쯤 삼켰을 무렵에는 발기한 성기를 품고서 이완되고 수축하는 감각이 정수리 끝까지 강타했다. 제영이 허리를 흔들며 아,아, 하고 소리를 터뜨렸다.

그건 쾌락의 신음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처절하고 비명에 가까웠다. 내지 않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둔중한 흉기가 내장 점막부터 시작하여 심장 바로 근처까지 찢어 올리는 느낌이었다.

이상했다. 섹스를 하고 있는데 섹스가 아닌것 같았다. 제 인생에서 이 행위는 조금은 부끄러우면서도 거기에 숨겨진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픔이 더앞섰다. 이렇게 아픈 것을 섹스라고 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영은 자신이 해진의 청결한 몸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같았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창부를 데리고 나쁜 장난을 치는 변태 같기도 했고 반대로 자신이 시체 같기도 했다. 그와 이어진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그균열이 제영이 가진 소박한 세계를 점차 무너뜨리고 있었다.

안에 품고 있는 것은 뜨거웠지만 제영의 몸은 얼음덩어리 같았다. 몸도 점차 떨리기 시작해 그걸 숨기고자 더 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언제가 되어야 그가 사정할지를 가늠해 보면서 제영이 몸을 깊숙이 내렸다. 괴로울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대로라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몸도 무거워져 마치 쇠로 된 갑옷이라도 입고 있는 기분이었다. 또다시 처음 이 호텔 방에 들어올 때 느꼈던 충동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살을 맞대고 싶었다. 이런 더럽고 저열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살만 맞댄 채로 그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면 그가 가지고 있는 온기와 부드러움이 피부의 표면에서 내부의 세포하나하나에게까지 전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손끝 하나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로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부딪치고 있으면서도 다른 보통의 부분에는 닿으면 그가 싫어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간절해지고 마는 것이다. 제영의 눈에 그의 횐 손이 보였다. 가닥가닥이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제영이 허리를 깊게 내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성기를 제 몸 안에 집어넣었다. 아래의 몸이 들썩이는 게 전해질 정도였다. 해진이 인상을 쓰고 눈을 감은 순간에, 제영이 해진의 손을 낚아채듯이 꽉 잡았다. 그때 해진이 제 얼굴을 가리던 팔을 내렸다. 해진의 시야 가득히 제영이 들어찼다. 그의 눈빛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제영은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더 러운 짓도 그만두고 싶었다.

"못 하겠어."

제영이 해진의 손을 잡은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무 움직임도 없이 해진의 손만 붙들고 있었다. 그가 이 손을 놓고 자신을 밀어낼까 봐 두려웠다. 차가운 몸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 해진의 배 위로 떨어졌다. 제영이 또다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지칠 대로 지친 몸과 정신이 모래 지옥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못하겠어."

해진이 잡히지 않은 쪽의 손을 제영의 허리에 뻗어 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제영을 안은 채로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 내부는 여전히 연결된 상태로 그 움직임 동안 반쯤 빠져나왔다가 다시 안쪽 가득히 들어찼다. 처음과 위아래가 반전된 상태로 이제는 해진이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였다. 사이사이 가볍게 입을 맞추고 제영의 이름을 불렀다.

뺨과 붉어진 눈가에 닿는 짧은 입맞춤과 몸을 가볍게 쓰다듬는 애무가 지속되는 동안 제영의 눈꼬리를 따라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울어."

아래에는 지속적으로 아릿한 동통이, 눈가에는 따뜻한 숨결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제영이 울음을 그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아주 쌍으로 사람을 부려 먹어. 누구는 남의 직장에 와서 사람을 찾아내라 마라 하고 또 누구는 제 애인이랑 있는 호텔까지 오라 마라 하질 않나.”

준성이 해진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사람이 와도 이불 속에서 눈만 굴리던 해진이 준성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다. 준성은 괜히 시간 낭비 하기보다는 제 할 일이나 하고 빨리 여길 뜨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 내놔."

해진이 이불 속에서 팔 하나를 내밀었는데 그건 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희지도 않고 조금 가는 느낌이었다. 준성은 그 팔을 붙잡아 살폈다. 푸른 핏줄이 얇은 살가죽 너머로 확연히 도드라졌다.

"작작 좀 해라. 사람을 죽이려고 그래?"

"이 정도로 사람이 죽었으면 난 골백번은 죽었어."

"너 같은 새끼랑 이 사람이랑 같냐?"

소독된 표면 위를 날카로운 바늘이 찔렀다.

잠결에도 아픔을 느꼈는지 팔이 살짝 움찔했다.

준성이 바늘이 빠지지 않도록 고정해 둔 다음, 링거 줄과 팩을 정리했다.

"열나고 토하고 딱 봐도 스트레스 때문에 몸에 무리 간 거니까. 수액 다 들어가면 네가 바늘뽑고 처치해 줘. 할 줄알지?"

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삐져나온 팔을 도로 이불속으로 집어넣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거야?"

"셋째 형네가 사진을 풀었거든."

"사진?"

"별건 없어. 그냥 이 사람이랑 내가 시시덕거리는 정도야. 셋째 형도 참 바보 같지. 내게 연락이라도 했으면 더 좋은 걸 줬을 텐데. 고작 이런 걸로 애꿎은 사람 하나만 잡았어. 뭐, 그 덕에 내가 좀 즐겁긴 했지."

준성은 해진이 어디서 이렇게 주물러 대기 쉬운 남자를 골라잡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심약한 주제에 결혼을 앞두고 저놈과 양다리를 걸치는 대담함은 또 어디서 솟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 발로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갔을지라도, 이 불쌍한 남자에게 작은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 정도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할 만하다고 여겼다.

"결혼 앞두고 게이 새끼 잘못 건드렸다가 전국적으로 아웃팅당할 뻔했으니, 겁이 날 만도 했겠네. 불쌍한 제영 씨. 이때까지 조신하게 여자만 만나 오다가 걸려도 이딴 새끼한테 걸렸을까."

준성이 이불 위로 살짝 튀어나온 제영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기도 전에 해진이 그의 머리통을 숨겼다.

"일끝났으면 가봐."

준성이 애매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제 가방을 챙겨들었다.

"넌 친구가 이렇게 달려와 줬으면 나와서 배룰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못 나가. 이러고 계속 있어야 돼."

이불에 덮인 상태로도 그가 몸을 살짝 치대는 움직임이 보였다. 잠들어 있던 제영의 입에서 약한신음이 터졌다.

"설마 너, 그러고 있는 이유가.”

준성이 경악하여 물었지만 해진은 쓸데없는걸 묻는다는 듯이 인상만 살짝 찌푸리고는 몸을 더 깊숙이 웅크렸다. 제영의 입에서 또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준성은 성인 남자 두 명이 만들어 낸 저 이불 무덤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제영은 아직도 몸이 무거웠다. 몸이 으슬으슬 추워 몸살이라도 오려는 건가, 아니면 이미 온 건가 하는 중이었다. 일어나려는데 뭔가 팔에 턱 걸렸다. 그제야 제 손등을 타고 오르던 줄과 그 줄 끝의 수액 팩이 눈에 보였다.

"일어났어요? 더 누워 있어요. 아직도 열 조금 있어요."

"이건 뭐예요?"

제영이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해진에게 물었다.

"준성이 왔다 갔어요. 예전에 봤던 내 친구,알죠?"

"언제요?"

"당신 자고 있을 때."

제영이 이불 아래의 제 몸을 더듬어 보았다.

관계 직후와 같은 꿉꿉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 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제영이 왜 몸을 움츠리는지 단박에 알아챈 해진이 말을 덧붙였다.

"이불 속에서 팔만 꺼내서 링거만 처치해 주고 끝났어요. 내가 계속 옆에 있었고요."

제영은 안심했지만 뭐 때문에 안심한 건지 헷갈렸다. 이불 아래가 들추어지지 않고 그저단순한 처치로 끝났다는 것에 안심할 걸까, 아니면 해진이 계속 제 옆에 있었다는 얘기에 안심한 걸까. 연푸른 셔츠를 가볍게 걸치고 있던 해진은 그걸 벗고서 다시 속옷 한 장 입지 않은 몸으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미끄러지듯 기어올라오는 모습이 마치 껍질이 탈색된 뱀 같아제영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제영을 옭아매듯 타고 오르고 있었다.

제영은 종국에는 코앞까지 다가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해진이 제게 쏟아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형태도 없이, 손으로 움켜쥐기도 힘든 투명하고 무른 액체가 제 삶의 주변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제영이 천천히 숨을 들이 쉬었다. 해진에게는 좋은 냄새가 났지만, 어딘가 모S게 물비린내 같은 향이 맡아지기도 했다.

"아, 해요."

해진이 작은 캡슐을 내밀었다. 예전에 봤던 것이었다. 몸에 힘이 빠지고 불온한 감정까지도 탈수되는 듯하게 만들었던 그 약이었다. 제영은 먹고 싶지 않았기에 그대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해진이 제영의 턱을 붙잡고 입술 사이에 억지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벌렸다.

"먹어요. 질질 짜지 말고."

제영이 눈을 찡그리자,그 틈을 따라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제영은 그제야 아까의 물비린 내가 자신한테서 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벌려진 틈으로 알약이 들어오고, 해진이 제영의 입에 키스하며 제 입에 머금고 있던 물도 같이 넘겨주었다. 그 흐름을 따라 약도 슬그머니 목구멍너머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제영은 제 곁의 남자가 허상 같았다. 솜사탕처럼 달콤했던 이 남자는 이제는 제 삶을 어지러뜨리는 허깨비가 되어 버렸다. 제영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동자 위로 차오르던 눈물이 또 주룩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내렸다.

해진이 제영의 옆에 누워 다리를 얽고 허리를 잡아당겨 서로의 배를 맞댔다. 제영의 귀가 입술에라도 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호흡으로 입술 주변을 간지럽히면서 해진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진은 일단 말해 둘게요. 그런 일을 아주 잘하는, 교활한 사람들 알거든요. 우리 일도 그렇게 처리해 달라고 할게요. 아, 근데 조금 걱정이 되긴 해요. 셋째 형이 고작 그 흐린 사진 한 장만 가지고 있을까. 이번에는 경고나 할 셈으로 그걸 푼 건 아닐까요. 우리가 밖에서 했던 짓 중에 가장 짙었던 것들이 뭐가 있을까. 기억나요?

우리 차에서 키스했던 거. 그거 멀리서 봤다면 거의 섹스에 가까워 보였을 거예요.”

꿈결처럼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투는 부드러웠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뿌연 의식속에서도 제영은 겁이 나 눈물을 흘렸다. 해진 이 제영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할아 주었으나눈물은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제영 씨,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 잘들어야 해요."

최악의 몸 상태와 약 기운에 몽롱한 와중에도 해진의 목소리가 진중해지자, 제영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난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다고 생각해요. 당신한테도, 그여자한테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 여자랑 헤어져요."

그제야 그가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안 돼요."

제영이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어지러이 흔들리는 느낌이 선명했으니 자신이 제대로 고개를 저은 건 분명했다. 이혼보다 파혼이 낫다니.

제영이 이혼할 게 분명하다는 전제가 깔린 말이었다. 제영은 이혼은커녕 희주와 애를 낳고 알콩달콩 살 생각이었다. 이 봉변과도 같은 치욕도 다 잊고, 예쁜 얼굴로 나쁜 말만 하는 이 남자도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안 돼요. 이미 식장도,청첩장도, 그리고 부모님한테도 다 말씀드렸어요. 몇 년이나 만나온 사람한테 어떻게 갑자기 헤어지자고 해요."

"그럼 난? 몇 개월 만난사람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지자고 할 생각이었어요?”

제영이 해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을 피하려고 하는 짓이, 고작 그 당사자의 가슴팍에 매달리는 것이라는 게 우스운일이었으나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해진이 제영의 어깨를 붙들고 밀어내 버렸다. 제영은 또다시 눈물이 치솟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줄줄흘려 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내가 참고 또 참아서, 당신한테 기회를 주고 있잖아요. 응? 겁주려는 게 아니라.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제영이 고개를 저었다. 해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아예 털끝이라고 닿기 싫은 것처럼 제영의 가슴을 거세게 밀치고는 몸을 돌려 누워 버렸다.

"앞으로는 알아서 해요. 사진이 터지든, 무슨다른 일이 터지든. 난 옛날 남자 신경 써 줄 만큼 한가한 사람 못 되니까.“

제영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밀쳐 진 것에 대한 반사 작용처럼 그의 곁으로 기어가 등에 바짝 몸을 붙였지만 이내 또 밀쳐졌다.

이건 분명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영은 자기가 하는 짓을 멈추지 못했다. 이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이에게서 떨어지면 자신은 죽을 거라는 공포가 제영을 엄습했다.

"놓으라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흔들어댄 팔에 링거 줄이 엉켜 팩이 걸려 있는 가는 대가 같이 덜컹댔다.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언이 터지듯이 뭐라 말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그에게 구걸했다. 그러다 갑자기 제영을 밀어내던 해진이 거절의 몸짓을 멈췄다. 그 덕에 제영이 해진의 허리를 껴안을 수 있었다.

"뭐라고? 뭐라고 했어."

대답 없이 그에게 붙어만 있는 제영에게 해진이 다시금 물어 왔다.

"아까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미안해요."

분명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기대하던 정답이 아닌 듯했다.

"그거 말고. 그전에 했던 거."

제영의 심장이 덜그럭대며 곧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거세게 뛰어 댔다. 제영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오줌이라도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난감한 일을 맞닥뜨린 어린애같은 얼굴을 하기도 했다. 해진이 다시 한번 재촉하다가 입을 꾹 다문 제영에게 화를 냈다. 더이상 제영과 같은 침대에 있지 않을 것처럼 그가 몸을 일으켜 박차고 나가기 직전이었다.

"헤, 헤어질게요."

"진심이야?"

제영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리면서 그렇다고 답했다.

"어영부영 지금만 넘기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제영의 곁으로 돌아온 해진이 차갑고 또렷한 말투로 제영에게 물었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결국에 해진이 제영에게 품을 허락했고 두 손으로 악인의 죄라도 용서해 주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난도질 당한 제영의 몸과 정신을 보듬듯이 해진이 입을 맞춰 주었다. 제영은 머리가 너무아팠다. 그 약의 부작용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내장 깊숙한 곳에서 녹아내린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시간이 지나가길, 이약효가 어서 떨어지기를 그리고 눈을 떠도 이남자가 제 곁에 있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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