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솜탕] 구원의 경계 2권.
4장. 겨울의 소년
수더분한 형과는 다르게 소심한 제영을 보며 그의 어머니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
'기 센 여자는 만나지 말거라.'
너는 기가 약하니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한평생 괴로울 거라고 한탄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미 양기를 풀풀 풍겨 대는 이에게 한바탕 당한 후였다. 배가 여전히 뜨끈했다. 단지 이불을 덮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밤새 그에게 붙들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만의 오럴 섹스는 상대와 상황 모두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제영은 내내 물이라도 뒤집어쓴 개처럼 낑낑거렸던 것을 기억했다. 그걸떠올리면 쪽팔려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거칠게 만져진 아랫도리는 지금까지도 그여운이 남아 있었다. 제영이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이라도 찔끔거렸던 것인지 눈가도 끈적끈적했다.
집 안 곳곳에는 남자의 흔적이 허물처럼 남아 있었다. 혼자 마셨다고 하기에는 과한 양의 빈 병들과 뜯어져서 부스러기만 남아 있는 과자 봉지들.
겨울인 주제에 꼴에 아침이라고 창을 뚫고 몰려오는 뜨거운 햇살이 침대 위의 제영을 스쳐 지나가 맞은편의 옷장을 가리켰다. 제영이 까무룩 잠들었을 무렵에 결벽증이라도 도졌는지 셔츠 두 개가 옷장 손잡이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앞에 것은 제영의 것이 분명했다. 뒤에 것은 아무리 봐도 제영의 것이 아니었다. 어깨의 품도 크고 소매 길이도 길었다.
"저걸 두고 갔으면 뭘 입고 간 거야."
아침에 급한 전화를 받고 욕을 하며 옷을 챙겨 입고 떠났다. 급한 와중에도 이불 속에 박혀있는 제영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또다시 배 속이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홀로 남은 와중에도 한심한 경험을 선사한 인물을 떠올리고 반응하는 이 멍청함이 싫었다. 제영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뚱이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침투하려는것을 막으려고 목만 내놓고 이불을 둘러싸 맸다.
그와 마셔댄 술이 올라오는지 입이 썼다. 물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고작 세 걸음인 냉장고까지 걷기도 싫었다. 제영은 이불 속에서 꼼지 락거리면서 제 몸에 붙어 있어야 할 것들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몸을 더듬거렸다. 밀쳐 내다 종국에는 그의 어깨를 붙들던 양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족쇄를 채운 것처럼 그에게 잡혀 있던 두 다리도 멀쩡했다. 입이며 손으로 말도 못 할 짓거리를 당한 아랫도리도 겉으로는 무사해 보였다.
제영이 스스로의 가슴팍을 긁으며 고개를 푹숙였다. 온전한 것은 몸뚱어리뿐이었고 머릿속은 한바탕 태풍이라도 몰아닥친 것처럼 어지럽고 복잡했다. 다시 가슴팍을 긁으며 제영이 몸을 웅크렸다. 햇볕에 뒤통수는 뜨거울지라도 가슴 속은 냉수라도 들이켠 것처럼 냉랭했다. 이제는 아예 이불로 머리까지 숨기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여전히 가슴은 차가웠다. 그보다도 더차가운 것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패배감이었다. 제영은 고통을 호소하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 봤자 홀로 나대는 원맨쇼에 불과했다.
* * *
"이건 어때?"
애인이 하얀색에 금테가 둘린 종이를 건넸다. 샘플로 받아 온 청첩장이었다. 그녀가 미리골라 온 것 중에는 알록달록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흰색이 나아 보였다. 그녀도 같은 생각인지 아이보리빛과 흰빛의 청첩장을 가장마음에 드는 걸로 꼽았다. 제영이 그중 하나를 열어 보았다. 샘플인데도 안에는 내용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두 개의 사랑이 일생 하나의 인연을 맺으려합니다.
고루한 문구 아래로 누구의 장녀, 누구의 차남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고작 샘플이지만 곧 자신과 애인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갈 것이다.
"오늘 저녁,시간 안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바쁘다니까. 그래서 점심시간에 겨우 짬 내서 이렇게 당신 회사로 온거잖아."
희주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여상한 목소리였음에도 제영은 자꾸만 서운해졌다.
"이건 어때? 요즘 이런 거 많이 한대.”
그녀가 내민 것은 신랑 신부의 모습이 캐릭터로 그려진 청첩장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잔잔한 꽃무늬가 둘을 둘러싸고 있었다.
"예쁘네."
"그렇지? 이건 일러스트레이터한테 작업을 의뢰해야 해서,그 비용이 추가된대. 근데 괜찮을 것 같아. 나중에 액자에 넣어서 신혼집에 장식해 둬도 좋을 것 같고?"
"이 정도면 그냥 네가 그려도 될 것 같은데?"
제영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희주가 핀잔을 줬다. 귀여운 그림이기는 하지만 디테일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얼굴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칠하고 동그란 눈을 찍으면 그만이었다. 이 얼굴을 보고 그리나 저 얼굴을 보고 그리나 다 비슷해 보일 터였다.
"어머님은 뭐라고 하셔?”
"우리 어머니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래.”
"그게 뭐야.”
"예전에 형 결혼식 때 시어머니 노릇 좀 해 보려다가 형수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거든."
희주가 다시 청첩장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제영은 청첩장보다는 그걸 만지는 그녀의 손가락만 애달프게 쳐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에게 엉켜 올 때의 감촉을 되살려 보려고 애썼다. 이번에는 애인의 붉은 입술을 보았다. 유리알처럼 반짝거리는 게 몇 번이나 키스해도 여전히 젖어 있을 것처럼 보였다. 제영이 다시금 그녀에게 치근덕거렸다.
"오늘, 정말 안 돼?"
"이사람이 왜 이래."
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타박뿐이었다. 제영은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는 애인이 야속하기만했다.
"이번 주말은?"
제영이 손끝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귀찮게 굴며 다시 은근히 물었다.
"이번에 시골집에 내려가기로 했어. 동창들좀 보려고. 몇 번이나 얘기하게 해."
타박에 짜증이 더해져 결국 입을 다물어야했다.
"이게 마음에 든다. 이걸로 하자."
그녀가 제영에게 내민 것은 아까의 그림이 그려진 청첩장이었다. 희주가 남자 쪽을 가리키며 쿡쿡 웃었다.
"이거,당신 닮았어."
제영은 그 말에 그림을 다시 살펴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귀여운 맛이 있는 예쁜 그림이었는데 다시 보니 표정이 명청해 보였다.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생겼어?"
"뭐? 어디가 멍청해? 표정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것보다 봐 봐. 얼굴선이 동글동글한 게 당신이랑 닮았잖아.”
희주가 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떠한 감정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습관적인 것이었다.
제영이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디가 그렇게 동글동글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굴곡진 편은 아니 더라도 저런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 소리 처음들어."
"아니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던걸. 내 친구들도 그랬어."
희주가 손을 뻗어 제영의 얼굴을 더듬었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손톱의 결이나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가락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기분 좋았다. 지금은 그녀의 이런 터치 하나하나가 아쉬울 지경이라 바깥임에도 불구하고 제영은 피하기는커녕 고스란히 자신을 내맡겼다.
"얼굴에 날이 없어서 다정하고 부드러워 보여. 그래서 다들 좋아해. 나도 그랬지."
간지러운 고백이었으나 제영은 장난스럽게 이런 남자를 얻었으니 운 좋을 줄 알라며 말하는 게 다였다.
"들어가 봐. 곧 점심시간 끝나잖아."
희주가 제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근처의 거래처에 들렀다 갈 예정이라고 했다.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가슴이 지끈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붙들고 당장에 어디로든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야 누군가의 흔적들이 조금이라도 희석될 듯싶었다. 그에게서는 간간이 문자와 전화가 오고 있다. 또 만나자고 할까 봐 겁을 집어먹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럴 기미는 없었다. 눈치 빠른 남자는 어색하게 구는 태도를 금방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제영을 대했다. 제영은 해진이 그런 식으로 신경 써 주는 게 더 싫었다.
"김 대리님. 점심 먹고 들어가세요?”
추적추적 걸어가고 있는데 누가 제영을 불렀다. 동혁이었다. 부탁이라도 받았는지 캐리어를 두 개나 들고 커피를 잔뜩 사서 가고 있었다. 희주를 만나고 무르게 풀렸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너 도대체 왜 그딴 자료를 내게 준 거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제영이 노려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맞받아치기만 했다.
"한 번만 또 그러면 나 가만 안 있어. 각오해."
"먼저 시작한 건 김 대리님이시잖아요."
동혁은 굳은 얼굴로 뜻 모를 말을 내뱉고는 제영의 어깨를 치고 가 버렸다. 남겨진 제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언젠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제대로 손봐 줘야 하겠다는 마음뿐이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제영은 분하고 답답해 길바닥의 돌부리를 발로 냅다찼다.
커피의 주인공들은 회계팀의 엣된 여직원들이었다. 개중에 누가 생일이라도 맞은 모양인지 축하 노래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한쪽 구석에서 새어 나왔다. 제영은 그들 사이에 잠깐 끼었다가 바로 자리에 돌아오는 동혁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런 식으로 사람 좋은 척하는 새끼의 진면 모를 까발려 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김 대리, 잠깐와 봐."
월별 실적을 확인하려고 파일을 뒤적거리는데 배 차장이 제영을 불렀다. 최근에는 그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는 제영이었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들려준 이야기는 의외의 것이었다.
"이번 미팅에 저도 간다고요?”
"그래, 인마.”
그가 다 피운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전 제가 아예 뒤로 밀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뭐, 동혁이 새끼한테?"
"꼭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고요. 그냥 뭐, 그렇다는 거죠."
"아유,속 좁은 새끼."
배 차장이 혀를 찼다. 제영은 불쾌했지만 그걸 표현하는 대신 담배만 피웠다.
"이번에 공장 점검 간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제대로 보고 와서 자료 만든 것도 너고. 저번에 추가로 낸 게 꽤 도움이 됐나 봐."
제영은 현황 보고서 외에 추가로 제출했던 자료를 떠올렸다. 해진의 말을 듣고 만든 것이었다. 술 마시기 직전에 슬쩍 흘리던 애기를 당시에는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 난리를 겪고 마음을 추스를 즈음에 혹시나 해서 만들어 두었던 것이었다. 나이스를 날리면서도 그게 전부 해진과 연관된 것이라 속이 조금 서늘했다. 하지만 HS전자 관련 일에 그가 아예 연관되지 않을 순 없으니 그러려니 하려고 노력했다.
"일단 이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너 동혁이한테 좀생이처럼 굴지 좀 마."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아서라. 내가 다 알지. 너 그러다가 진짜 후배한테 밀려서 위아래가 뒤바뀔 수 있어. 그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인지 아냐? 나이 어린 새끼한테 지시받는 게 보통 일 아니다."
제영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도 그것이었다.
당장의 일보다 추후의 결과가 더 걱정됐다. 그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혹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제에 직장을 때려치운다고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제영이 담배를 하나 더 꺼냈다. 그가 불을 붙이기 직전에 제영을 쿡 찔렀다.
"왜 그러십니까?”
"너 요즘도 그 팀장이랑 연락하냐?"
요즘이 아니라 당장 어제만 해도 문자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생각은 없었다. 아주 초반을 제외하고는 회사에서 그와의 접점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자신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굴러갔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배 차장님 말대로, 심심풀이였나 보죠.아예 연락이 안돼요."
"그래? 요즘 그 새끼 때문에 이 상무가 아주 골이 아픈가 봐. 경영수업 받는답시고 회사를 휘젓고 다닌다는데 아주 사사건건 태클이래. 열받은 이 상무 달래 주느라 우리 접대비만 치솟고 있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영은 해진이 이 상무와 관련해 했던 말이 설핏 떠올랐지만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그날 밤의 반갑지 않은 기억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미팅 당일은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다시 방문한 HS전자의 크고 넓은 사옥은 여전히 정신병자가 설계한 것처럼 온통 흰색으로 칠해져 어디가 어딘지 햇갈렸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리 의외의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HS 쪽은 공장 설비에 관심이 컸고 바쁘다는 핑계로 차출된 동혁 대신, 제영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몇몇 개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줬다는 뿌듯함에 목에 힘이 들어갔다.
미팅을 끝내고 잠시 틈을 타서 화장실에 나온 제영이 콧노래를 불렀다. 혹시나 해진과 마주칠까 봐 걱정되긴 했지만 아무리 도련님이 쓴감투에 불과할지라도 HS의 팀장이란 자리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지는 않았다. 근래 들어 일을 배우느라 정신없다고 했으니 돌아다닐 시간도 없겠지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손의 물기를 털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턱 선을 더듬으며 애인의 말대로 '조금 동그란 편인가' 하고 살펴보았다. 그래서 좋다고 했으니 칭찬이겠지 하다가도 단순히 놀리는 것일지도 모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눈 밑이 퀭해 피곤해 보이는 것은 신경이 쓰였다. 이 피곤의 팔 할은 해진의 탓이었다.
"키스하지 말걸."
제영이 물기 하나 없이 깔끔한 대리석 세면 대 턱에 손을 받치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전화 한 통에 미련하게 달려온 그가 불쌍하다고 해서 키스를 해 주면 안 되었다. 새벽녘에 전화를 해서 데리러 오라고 해도 가면 안 되었다. 재벌 2세라고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하며 관심가져서도 안 되었다. 신발도 옷도, 그런 것들을 받아서도 안 되었다. 제영은 뒤늦게 후회하며 자신을 자책했다.
애초에 그런 짓들은 하지 않았다면 남자와의 사고도 없었을 것이다. 괜히 술에 취해 불쌍하다며 감상에 빠졌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제영이 자신의 두 뺨을 세게 때렸다. 정신 차리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남의 회사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웃겼다. 슬슬 돌아가야 했지만 축 처져 있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한 기를 보충하기 위한 보약이라도 한 첩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보약을 먹기도 전에 제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해진 씨. 아니, 아, 그러니까 팀장님."
"그냥 이름 불러요. 오늘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방문객 리스트에 제영 씨 이름이 있어서 와 봤는데, 진짜 왔네요."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도 몰랐다. 제영은 자신과는 다르게 여전히 멀끔한 상대의 얼굴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제집 안방처럼 성큼성큼 들어오는데,생각해 보면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회사이 니 그의 안방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갑자기 결정됐어요."
"갑자기? 언제쯤?”
"어제, 어제요.”
꼬치꼬치 캐묻는 게 이상했지만 대답 못 할것도 없었다.
"그래요? 근데 예약 리스트에는 이미 사나흘전쯤에 제영 씨 이름도 같이 제출됐던데,늦게 전달받은 거예요?”
이제는 그와 반 뼘 정도의 거리였다. 제영은 키 큰 남자를 올려다봐야 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다. 동혁의 경우도 그랬고 해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영이 해진을 올려다보고 해진은 제영을 내려다보았다. 고작높낮이의 차이일 뿐이었으나 제영은 자신이 약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네. 늦게 들었어요."
해진의 눈빛이 한순간 묘하게 변했다. 제영이 의식할 정도였으니 꽤나 노골적인 변화였다.
순간 제영은 자신의 거짓말이 너무 티가 났나하고 초조해졌다. 제영이 해진에게 그만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하기 직전에 근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영은 누군가에게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해진은 문으로 향하는 제영을 붙들고 화장실 안쪽으로 끌고 갔다.
"어디 가요?"
소리를 죽이며 다급하게 물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둘이서 들어와 본 적이라곤 없는 곳에서 덩치 큰 남자 둘이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밖에는 사람들이 있는 터라 말을 하지도 못하고 눈으로 쏘아보며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쏙했다. 제영은 박차고 나가고 싶은 것을 참고 사람들이 떠나길 기다렸다.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제영과는 다르게 해진은 태연했다. 태연하다 못해 대담하기까지했다. 그가 뒤에서 제영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목덜미에 뺨을 갖다 대었다. 어깨를 굳힌 제영이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축축한 숨결이 제영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목뒤에 소름이 돋았다.
여전히 바깥에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느라정신이 없었고 바로 뒤에는 해진이 싱글거리며 떡하니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하지 말아요.'
바깥의 사람들 때문에 소리를 낼 수 없는 제영이 입만 뻐끔거려서 그렇게 말했다. 제영에게는 위기로 느껴지는 이 긴박한 상황이 남자에게는 한날 장난에 지나지 않는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뒤에 몸을 붙인 해진을 팔꿈치로 밀어내며 작게나마 거리를 벌려 두어도 다시 찰싹 붙어왔다. 상대는 스릴 넘치는 사내 연애라도 즐기는 기분이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볼일을 끝낸 무리가 화장실을 떠나는 듯했다. 제영은 다른 사람이 또 오기 전에 냉큼 여길벗어날 생각이었다. 홀로 남은 해진이 어떻게 되든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잠금쇠를 열기도 전에 그가 제영을 잡았다. 또다시 그에게 껴안긴 채로 옴짝달싹못하는 꼴이 되었다.
"뭐하는.”
순간적으로 열이 뻗친 제영이 참지 못하고 역정을 내려고 할 때였다.
"김 대리님. 여기 계세요?”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뒷목의 솜털까지섰다. 그 반응에 연동되듯이 제영을 품고 있던 이의 몸에도 힘이 들어갔다. 내부의 위기감이며 외부적으로 느껴지는 타인의 압박이며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그를 내팽개친 다음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문밖의 상대에게는 절대로 그런 꼴을 보여 줄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동혁에게 말이다.
"어, 있어. 긴장했나 봐. 배가 좀 아파서. 먼저가봐. 곧 갈게."
어깨를 잡고 있던 해진의 손이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 작자가 뭘 하는 건가 싶어제영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는 제영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가볍게 웃어넘겼다. 손이 가슴 아래를 부드럽게 만지며 지나가 배 위에 안착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제영에게 어떤 반응을,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했을지 뺜했다.
스스로의 양손을 교차시켜 배를 문지르는 게 아무래도 아까의 말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팔이 긴 탓인지 자꾸만 그의 손이 미끄러져 내렸다. 제영이 좀 더 버둥거렸다가는 그의 손이 사타구니 위를 스칠 것 같았다.
'좀.'
그의 손이 허튼수작을 못 하도록 붙든 다음에 그렇게 입만 벙긋했다. 말을 좀 알아들었나싶었던 것은 한순간뿐이었고 다시 그 커다란 몸을 굽혀 제영에게 파고들고 싶다는 양 체중을 실어 눌렀다. 그 무게에 제영의 다리가 휘청했다.
좁은 공간 속에서 네 개의 다리가 난리도 아니었다. 주저앉을 뻔한 제영을 도와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누가 들어도 의심스러울 만한 소음이 나서 제영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아직 동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좀 빨리 끝내고 나오시겠어요? HS 담당자가 물어볼 거 있대서 이사님이 찾아요.“
귀찮은 심부름에 짜증이 난다는 말투였다.
동혁이 손으로 문을 쿵쿵 두들겼다.
"어, 알았다니까. 금방 갈게. 먼저 가 있어. 나오래 걸려.”
그렇게 말했는데도 밖은 조용했다. 혹시나눈치챈 건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제영이 다시 해진을 노려봤다. 다 이 화상 탓이었다.
"빨리 와요. 이사님이 찾으시니까."
그제야 발걸음 소리가 났다. 제영은 그가 완전히 떠났다고 확신했을 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다시 찰싹 붙어 오려는 해진을 거칠게 떼어내고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후려쳤다.
"아파요. 제영 씨"
픽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 아플 게 분명했지만 제영의 눈에는 그게 다 엄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렇죠. 말했잖아요. 보고 싶었다고.”
두 번 반가웠다가는 아예 대놓고 회사 로비에서 키스라도 할 셈인가. 제영이 씩씩거렸다.
"불편했어요?”
"당연하죠.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더 퍼부어 줄 생각이었지만 또다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오나 싶어 제영은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여기 있다가는 또 아까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게 분명했다. 해진 역시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잠깐만, 이리 와요."
화장실에서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대로 제 갈 길을 갔다면 더 좋았겠지만 해진은 어딘가로 제영을 끌고 갔다. 어딜 가느냐고 물어도 잠깐이면 된다고 막무가내였다. 그가 잽싸게 제영을 데리고 비상구로 들어가더니 또 그 안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너머의 또 문이라니 제영이 아연실색하기 충분했다. HS전자의 사옥은 던전'이라는 유명세가 거짓이 아니었다.
"얘기 좀 해요. 잠깐이면 돼요.”
그가 도대체 무슨 애기를 하자는 건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비상구도 뭣도 아닌 어두침침한 곳으로 끌려왔다는 사실에 걱정만 앞섰다.
"아까 물어본 거 대답해 줘요."
"뭘요."
"불편했냐고 물었잖아요."
"당연히 불편하죠. 난데없이 남의 회사 회장실로 끌려 들어가면 누구나 불편해해요.”
제영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거 말고요. 그때요. 내가 제영 씨 집에서자고 간 날이요."
해진이 제영의 집에서 자고 간 날은 딱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도,두 번째도 건전하게 잠만 자고 간 날은 없었다. 그 두 날 중에 그가 뭘 말하는 건지는 명백했다. 제영에게는 사고나 다름없었던 두 번째에 대한 것이었다.
"그날 불편했어요?"
그가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제영은 할 말이 많았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다문 제영 대신 해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
"문자도 전화도 전부 쌀쌀맞고. 언제 시간 되냐고 물으면 답도 없고 답답해서 전화하면 또쌀쌀맞게 굴고 거기다가 아까는 여기 오면서도안 온다고, 몰랐다고 거짓말까지 했잖아요."
너무나 단정적인 목소리에 제영은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말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보기 싫었어요?”
해진은 입을 꾹 다문 제영을 가만히 보기만했다. 해진은 둘만 있음이 분명한 공간에서도 뭔가 불안한지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제영의 정수리가 귀엽기만 했다. 해진이 기억하기에 그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아침에 급한 연락을 받는 바람에 잠든 그를 두고 갔던 것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귓가를 간지럽히는 손길도 부드럽고 다정했다. 하지만 뭐가 문제였는지 그는 저렇게 겁을 집어먹고 또다시 애를 태웠다.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요"
제영은 갑작스러운 그의 사과가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의심하기 바빴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평온하면서도 정말로 잘못을 비는 것처럼 미안함이 가득했다.
"우리 만난 지 꽤 됐으니까 나는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게 제영 씨한테 너무 조급했다면 내가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제영은 그런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제영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단순히 마음이 풀려 가는 와중의 동요라고 생각했는지 해진의 태도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는 목소리를 작게 하여 속삭이듯 제영에게 말했다.
"내가 전부 당신한테 맞출게요. 제영 씨가 싫다면 안 할게요."
뭐라 말하기도 어려운 저자세였다.
"됐어요. 이제 됐으니까, 그만해요.”
"그럼 이제 화 풀린 거예요?”
제영은 화가 풀린 건지 아닌 건지 구분도 안되는 상태였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바싹 엎드린 것과 같은 상대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여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축 늘어진 제영의 손을 해진이 잡아 왔다. 딱히 뿌리칠 힘도 없어 그냥 하는 대로 따랐다.
"키스해 줘요."
바닥만 보고 있던 제영을 재촉하려는 듯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여기서?”
제영은 싫은 티를 내며 물었다. 아까의 화장실 사건도 그렇고 이 남자는 여기가 어딘지 자꾸만 잊어버 리는 것 같았다.
"여기 회사예요"
"알아요. 근데 지금은 둘만 있으니까."
"해진 씨. 이런 데도 다 보안 때문에 카메라같은 거 있을 거예요."
"없어요."
"예?"
"여긴 없어요. C동으로 넘어가는 곳이라 설치가 안 되어 있거든요. 당신 말대로 보안 때문에요. 그러니까 키스해줘요"
그가 눈을 감고 슬쩍 입술을 내밀었다. 꼴에 제영을 배려한다고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하던 제영이 결국 더 이상 시간 끌기를 포기하고 살짝 입술을 대었다 바로 몸을 물렸다. 고작 그 정도의 입맞춤에도 무슨마법에 걸린 공주님처럼 눈을 뜨며 그가 기뻐했다.
"이제 슬슬 가야겠네요. 제영 씨 회사 사람들이 기다리겠다. 그죠?”
제영은 그걸 지금이라도 신경 써 주니 픽이나 고맙다며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아, 근데. 나 저번에 옷 두고 갔죠? 그거 언제 가지러 가면 돼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아뇨, 그냥 다음에 갈 때 가져갈게요. 그냥옷장에 넣어 둬요."
다음의 방문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대답이었다.
* * *
"요즘, 일성 많이 바쁘다면서. 그래서 이렇게 오는 것도 뜸하고.”
오랜만에 방문한 업체의 사장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지만 동남아나 중국 쪽 클라이언트를 빵빵하게 가지고 있는 터라 발주량이 적지 않은 업체였다. 요즘 HS전자 때문에 바빠서 거래처관리가 소홀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을인 제영이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에이, 몇 년 동안 거래해 주신 게 있는데, 저희가 소홀히 할 수 있나요. 근래에는 정말 좀 바빠서 그런 것뿐입니다. 양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사업 하니 이해는 가. 큰 기업이랑 대박계약 건 한번 따내고 나면 들어오는 돈이 다른데 어떻게 다 똑같이 대우해 줄 수 있겠어. 근데,이렇게 나가리 하는 건 섭섭하지. HS 때문에 설비도 새로 사고 정신없다며? 이거 이러다가 너무 커져서 우리 같은 업체랑 거래 안 하는 거 아냐?"
선물이랍시고 사 온 도라지정과를 받고서도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컴플레인을 빙자한 이런 영업 사원 길들이기는 영 반갑지 않았다. 제영은 자꾸 힘에 부쳐 표정이 풀리려는 것을 참고 그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애썼다.
"우리 쪽에서 추가 주문 들어갈 수도 있어.”
"언제쯤 말이십니까? 공장이랑 확인을 해야 해서요."
"그게 사실 가주문 상태라, 확정된 건 아니야.
근데 주문만 되면 한 달 내로 출고하기로 되어있어.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파. 돈 때문에 무턱대고 잡아 두긴 했지만 시간이 촉박하거든."
그게 본론이었다. 발주량이 넘어가 공장 가동 스케줄이 확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급하게 추가 발주를 해 버리면 공장으로부터의 원성이 어마어마했다. 그걸 오케이한 영업 사원이 덤터기를 쓰고 온갖 욕은 다 얻어먹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제영에게 사장이 눈치를 주었다. 제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HS 건은 HS 건이었고 여전히 제영이 올려야 할 기본 실적이 있었다. 후배가 군말않고 차곡차곡 실적을 쌓아 가는 마당에 자신이 펑크를 낼 수는 없었다.
제영이 사 왔음에도 마치 자기가 마련한 것처럼 선심 쓰듯 내놓은 정과를 얻어먹고 그곳을 나왔다. 텁텁함에 목이 막히기 시작했다. 제영은 머리도 식힐 겸 1층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여러 회사가 몰려 있는 오피스 타운의 카페이긴 했지만 점심시간이 아니라 사람은 적었다.
여기서 적당히 쉬다가 회사로 돌아가면 될 듯싶었다.
"아메리카노요. 네. 따뜻한 걸로 주세요."
주문을 마친 제영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기 직전이었다. 뒤에서 누가 어깨를 잡으며 알은체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해진의 친구인 준성이었다.
"아메리카노 주세요. 샷 추가해서, 아이스로요. 이분 거랑 같이 계산해 주세요.”
말릴 틈도 없었다. 설마 테이블까지 따라올까 했던 예상은 적중했다. 커피가 나오자마자 제영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통에 결국 마주 앉고 말았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요 앞이 병원이라 자주 오거든요. 우연이네요. 여기 일 때문에 온 거예요?”
제영은 어색하게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가 병원이란 말에 그제야 그가 입고 있는 게 흰 의사 가운이라는 걸 알아챘다. 밤에 만났을 때는 또 어디 돈 많은 집 망나니 아들이겠지 했는데 의사라니 조금 놀라웠다. 얼룩 하나 없는 흰 가운이 그의 인상을 좀 더 신뢰감 있게 만들었다.
가운의 가슴에 달린 오른쪽 주머니에는 짙은 초록색으로'강준성'이라는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이름에 제영은 지나쳐 온 커다란 병원건물을 떠올렸다. 그 병원 이름이 바로 '강병원’이었다. 설마 저 병원의 '강'이 저 이름의 ‘강'일까 싶었지만 재벌 2세를 친구로 둔 몸이니아예 신빙성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영은 그 사실을 확인해 볼 마음은 없었다. 그게 만약 진짜라면 괜히 자신만 더 초라해질 것 같아서 였다.
이 남자와 나눌 얘기는 없었다. 괜히 쉬지도 못하고 커피 맛만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슬쩍핸드폰을 확인하고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한다는 핑계로 일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준성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요즘 잘 만나고 있다면서요?”
"예?"
"해진이 말이에요. 회사 일이다 뭐다 전 얼굴도 잘 못 보는데,그 쪽은 꼬박꼬박 얼굴도장 찍는다고 들었어요. 아닌가요?"
그가 웃었다.
"가끔 뵙긴 합니다만, 일 때문이고."
최근에는 일 얘기도 하고 있으니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준성의 표정은 적나라했다. 다 알고 있으니 개소리 말라는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난 두 사람 만나는 거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 해진이 많이 안정됐고 형 말도 잘 듣고 회사 일도 열심이고 뭐 그쪽 덕이죠."
그가 다리를 꼬고 등을 소파에 기댔다. 그다지 푹신하지 않은 소파임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저 멀리 병원 건물을 바라보며 퍽이나 지루한 얼굴을 했다.
"걘 말이에요. 자기가 되게 불쌍한 줄 알아요.
웃기지 않아요? 우리 병원만 봐도 돈 때문에 퇴원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줄줄인데 돈방석 위에서 태어난 새끼가. 아무튼 반항이다 뭐다 해서 속 많이 썩이고 형한테도 얻어맞고 그래도 정신 못 차렸는데, 정말 의외의 곳에서 제짝이라도 만난 것같이 굴고 있어요. 그 애를 그렇게 만든 당신의 능력이 아주 존경스러울 정도예요."
목소리는 공손했다. 하지만 사람 기분을 뒤틀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제영은 커피 잔을 꼭 쥐고만 있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했다.
카페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노랫소리가 멈췄다. 컴퓨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카운터에 직원 몇 명이 모였고 작게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했다. 눈앞의 준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 그는 노래가 멈췄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언제까지 만날 거예요?”
"무슨 말씀이시죠?"
"궁금해서 그래요. 생각보다 오래가니까. 걘주변에 비슷비슷한 애들하고만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고 그랬거든요. 근데 제영 씨는 딱히 그런 타입도 아닌데 해진이가 저렇게 안달복달하고 있고. 그래서 궁금해요.”
"해진 씨가 사람 가볍게 만나고 했습니까?”
제영은 예전에 해진이 자신을 힐난하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싫어요. 그런 식으로 가볍게 즐기고 놀고 그러는 건.'
그게 다 거짓말이었나.
"왜요? 그쪽한테는 반대로 얘기했어요? 설마그걸 믿었어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가 크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명백히 자신을 비웃는 것이었다. 제영은 기분이 불쾌했다.
"진짜, 왜 이래요? 사람 처음 만나는 어린애처럼. 그런 건 다 끼 부리는 거잖아요.”
준성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해진 못지않은 다정한 말투였다. 마치 아픈 환자를 보듬는 의사처럼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나 내용은 영 딴판이었다.
"그 새끼가 그렇게 내숭 떨면서 만난다는 게 충격적이긴 한데, 설마 다 믿고 그러는 거 아니죠? 제발 좀 그러지 말아요. 그럴 나이 아니잖아요. 그냥 적당히 받을 거 받고 즐기다가 헤어지면 돼요."
그거야말로 제영이 바라던 일이었다.
"옷도 받고, 시계도 받고. 좀 졸라 봐요. 그쪽정도면 차 한 대쯤은 해 줄 것 같은데. 이용해먹을 대로 이용해 먹어요. 걔 그렇게 속 좁은 애는아니에요."
그의 말처럼 제영에게 해진은 열매가 주령주렁 달린 달콤한 과실수였다. 제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그가 건네준 것들은 모두 달콤했다. 옷도 시계도 제영에게는 비싸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최근에는 제영의 일에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제영의 회사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고 조언을 했다. 그 덕에 제영은 답안지를 들고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 내에서 알게 모르게 업무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들려오고 있었다. 그게 기분이 좋아 매번 해진의 도움을 외면하지 못했다. 슬쩍 걱정이 되서 해진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런 식의 일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고.
'걱정돼요? 그럴 일은 없어요. 어차피 제가 전면으로 나서고 있는 일도 아니고 이 정도면 스무스하게 처리될 거예요. 걱정 말아요. 제영씨한데 중요한 계약이라고 했잖아요. 일성이 문제 있는 업체도 아니고 계약 진행되면 서로에게 좋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이용해 먹는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에는 작은 스킨십조차 조심스러웠다. 타인으로부터 이토록 섬세한 애정을 느낀적이 없었다. 그게 더 제영을 콕콕 찔러 댔다.
그와 자신은 끝이 있으니까.
제영보다 준성이 먼저 자리를 떴다. 콜이 왔다며 인상을 쓰고는 남은 커피를 바로 들이켰다. 인사는 했으나 정중함이라고는 없었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제영은 생각에 빠져 그런지도 몰랐다.
제영의 머릿속은 해진에 대한 것으로 뒤엉켰다. 해진의 일, 회사 일, 희주와의 결혼, 거기다방금 전의 준성이 했던 말까지 전부 한데 섞여제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얼마 전의 만남에서 해진이 뺨에 생채기를 달고 왔다. 그걸 제영이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뺨을 가리며 말했다.
'이건 제영 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살짝 긁혔어요. 정말이에요.'
제영은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요즘 말도 잘 듣고 착한 짓만 하고 있거든요.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고 고분고분하게.‘
그와 같은 위치의 사람도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하는 대상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특히나 당신에게.’
거기서 말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영에게 입을 맞추고는 잠깐 기다렸다. 제영이 밀어내지 않자 그가 계속 키스를 이어 나갔다. 적당한, 받아 줄 만한 정도였기에 제영은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
제영은 컵을 내려놓았다. 텁텁함을 없애려고 마신 커피였는데 더 심해지기만 했다. 준성이 근무한다던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바짝 올려들어야 할 정도로 높은 건물이었다.
원래는 그게 해진을 대해야 할 제영의 태도였지만 지금 상황은 그 반대였다.
답은 하나인데,그 하나의 답을 제영은 감히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답보에 답보인 상태였다.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해진의 앞에만 서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따뜻하고 다정하다고 느낀 손길도 참지 못하고 밀어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대로 착하게, 아주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제영은 해진이 그럴 때면 죄책감에 혼란스러워했다. 어째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애인에게 매달리다 공연히 그녀의 짜증만 돋우고 마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김 대리님. 나가시죠."
"아, 어.”
큰 문제가 없다면 HS전자의 계약과 관련하여 축포를 터뜨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실제생산이 들어가면 당장 가동되어야 할 공장의 설비들이 가장 중요했다. 저번처럼 혼자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번에는 동혁도 함께였다. 그는 이제 대놓고 제영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이면서도 타인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정도라서 꼬투리를 잡기가 어려웠다.
역정을 냈다간 제영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그게 뭡니까."
그가 제영이 가져온 종이 꾸러미를 보면서 물었다.
"공장장님 뇌물."
제영은 그걸 뒷좌석에 던져두면서 그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방문한 거래처의 사장으로부터 추가 주문 연락을 받았다. 일단 승낙은 했지만 제발 취소되기를 바라고 있던 제영에게는 비보나 다름없었다. 바로 공장에 연락해서 겨우 출고를 약속받긴 했지만 얼굴을 보게 되는 오늘 같은 날 빈손으로 간다면 다음에는 그런 부탁을 꺼내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간에 저것도 다 제영의 사비였다. 회사 돈 벌어 주는 데자기 돈을 쓰는 게 영 못마땅했다.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럴 때만큼은 한두 푼에 연연하지 않고 선물 공세를 펼치던 해진이 부럽기도 했다.
갈 때는 동혁이 운전을 하고 올 때는 제영이 하기로 했다. 제영은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으로 뉴스나 넘겨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운전대를 쥔 동혁에게 싸움을 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만 저러니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제영이 결국 따져 물었다.
"뭐가요?”
하지만 상대는 모르는 척했다.
"할 말 있으면 해.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들지말고."
"할 말 없습니다."
그 말에 제영은 열이 흑 나서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쐴 수밖에 없었다.
제영이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이는 신입 직원들이었다.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앳된학생의 흔적은 사라지고 찌든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반질반질 윤이 나던 얼굴들이 피곤 때문인지 조금 상해 있었다.
최근에는 2교대 작업에다가 야간작업까지 더해져 쉴 틈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본사까지 전해지 기도 했다. 그 상태에 추가 발주까지 끼얹혔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을 것이다.
동혁은 설비 담당자를 찾으러 갔다. 제영은 공장장을 만나 가져온 것을 잽싸게 넘길 생각에 공장장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방금 봤던 직원하나가 제영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멀리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풋풋한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공장장님 찾으시는 거세요?”
"네."
"지금 2차 공정 작업장에 계세요.”
"아, 그래요?"
"저 지금 가는데,같이 가실래요?”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여자애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 귀여웠다.
"일이 힘들지는 않아요?”
그녀는 웃으면서 힘들지만 아직도 취업하지 못한 친구들이 많다며 일찍 직장을 잡아서 좋다고 말했다. 대견스럽긴 했으나 어린 나이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안쓰럽기도 했다. 2차 공정 작업장은 부품을 절단하고 용접하는 곳이라 소음이 컸다. 그녀가 안정 장비를 착용하길 권했지만 제영은 어차피 공장장만 만나고 바로 자리를 떠야 했기에 거절했다. 저 구석에서 덩치 큰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제영이 그에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변 직원만 보고 있었다. 그 직원 역시 앳된 얼굴로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2차 공정 작업장은 숙련공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적어도 2년 차 이상들만 작업에 배정되는게 규칙이었다. 그런데 아까의 여직원도 그렇고 저 직원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음에도 여기에 있었다. 의아했지만 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여전히 제영이 온지도 모르고 있는 공장장에게 다시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소리는 공장 소음에 다 묻혀 버려서 별 소용없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라서 밖에서 기다릴까 하던 중이었다. 기계 쪽으로 몸을 깊이 숙이고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제영도 얼떨결에 같이 손을 흔들었다. 공장장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저렇게 반갑게 맞이해 준 적이 없어서 손을 흔드는 게 아니라, 혹시 욕을 하며 주먹을 흔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뭔가 이상하긴 이상했다. 점차 다가오며 보이는 그의 얼굴이 시뼐겋고 퍼랬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큰 소음을 뚫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작업장의 모든 사람들이 한곳으로 달려갔다. 제영이 가장 먼저 달려가 쓰러진 그녀를 끌어안았다. 반쯤 기절한 그녀도 제영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기계며 팔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피의 양만 보면 이 작은 몸에 든 모든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흘러내리는 피가 경사진 바닥을 따라 긴 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조르르 흘러내리던 줄기는 몰려온 사람들에 의해 금방 엉망이 되었다. 검붉은 발자국이 제영과 여자아이의 주변에 그득 들어찼다.
그 뒤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구급차가 왔고 작은 몸이 들려 나갔다. 익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항상 조심하는 일이었으나 순식간에 일어나 버렸고 연약한 몸을 상처입혔다. 병원까지 같이 온 제영은 피에 전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넋이 나가 상황 파악은커 녕,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선배,재킷이랑 코트는 벗는 게 좋겠어요."
동혁이 제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의 말에 제영은 팔을 들어 보았다. 아까부터 얼어 버릴것처럼 차갑다 했더니 다 이 꼴인 탓이었다. 피에 전 옷은 어디에 가져다주고는 대신 공장 작업복을 얻어 왔다. 그 여자애의 옷이 생각나 제영은 입기가 싫었으나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자 별수가 없었다.
"우린 올라가요. 그 아가씨 부모님이 오셔서 공장 담당자랑 얘기 중이에요. 우리가 여기서 할 건 없어요. 일단 본사로 올라가서 보고하고.
선배? 내말 듣고 있어요?”
"어? 어. 그래, 그러자."
올라갈 때도 운전은 동혁의 몫이었다.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그 밤 속에서 제영은 자꾸만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아직까지도 양팔이 피에 전 느낌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제영이 바로 가방에서 꺼내 받았다.
"응, 나야. 왜 전화를 안 받아."
핸드폰을 든 제영의 손이 떨렸다.
"왜? 어딘데. 지방이야? 오늘 못 오는 거야?”
무엇이라 설명하기도 기분 나쁜 감촉이 양팔을 휘감고 있었다. 제영은 이런 날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전화한 사람이 희주였다. 이럴 때 가장 곁에 두고 싶은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제영의 곁에 와주기에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내일? 모레 오는 거야?”
제영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했다. 동혁이 제영을 힐끗 보았다가 아무 말 없이 운전만 계속했다. 퇴근했다가 다시 급히 연락을 받고 온 이사에게 동혁이 보고할 동안에도 제영은 그저 옆 구석에 서 있기만 했다. 이사는 셔츠에 묻은 핏자국을 본 터라 제영에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담이 약한 놈이라고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사장은 보이지도 않았고 이사는 이 문제에 대해 함구할 것을 지시했다. 사고가 난 설비는 HS전자와의 2차 공정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새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계약도 전에 작업자 부주의로 그런 사고가 났다면 반응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의 말이 옳았다.
제영도 동혁도 그러겠다고 답했다.
동혁은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제영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이 심약한 남자는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았다.
"야, 내가."
제영은 토기가 치솟는지 입을 막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 술 한잔만 같이하자."
진력이 빠진 제영이 상체를 반쯤 굽힌 채로 동혁의 팔뚝을 붙잡고 그렇게 청했다. 동혁이 애처롭게 떨고 있는 제영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멀리 오지도 않았다. 근처의 술집에서자리를 잡고 앉아 동혁이 술을 따르면 제영이 그걸 마셨다.
제영은 안주는 건드리지도 않고 술만 들이켰다. 자꾸만 그 시꺼먼 광경들이 잔상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의 피 냄새가 갑자기 콧속깊숙이 파고들었다. 눈앞의 고기 냄새 따위는 상대가 되질 않았다. 결국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기 바빴다. 동혁이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제 빈 술잔을 채우고는 그걸 마셨다.
동혁이 사고 장소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거의 정리가 된 상태였다. 바닥은 이미 대충 대걸레로 훔쳐진 상태여서 검붉은 얼룩만 조금 남아 있었다. 그 덕에 머리는 조금 아플지라도 제영처럼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종류의 사고는 쉬이 넘기긴 어려웠다. 당분간 보상 문제로 시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직원의 부주의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이번에는 작업 미숙으로 매뉴얼을 따르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HS전자의 계약 때 괜히 마이 너스 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더 어영부영 덮일 가능성이 높았다.
제영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동혁 혼자 세잔째 잔을 비울 때였다. 제영의 가방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핸드폰 벨소리였다. 뛰쳐나간 제영은 아직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동혁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조각조각 깨진 액정 화면 위로 이름 대신 다른 것이 떴다. 하지만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여자겠지. 결혼하기로 했다던.
"여보세요."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숨을 죽이고 있는 걸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동혁은 자기가 누군지 밝히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 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듯싶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제영 씨 전화아닌가요?
어디서 들어 봤더라. 동혁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으나 기억나는 사람이 없었다.
"맞는데, 김 대리님은 잠시 자리 비웠습니다."
동혁은 문득 이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낮고 짙은 목소리의 남자가 욕심만 부릴 줄아는 제 선배와 무슨 사이인지도 궁금했다.
"저, 선배 많이 취하셨는데, 괜찮으시다면 데리러 와줄수 있으신가요?”
-지금 있는 곳이어딥니까.
동혁의 예상대로 남자는 거절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고 난 후에야 제영이 돌아왔다. 세수라도 한 건지 얼굴과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토하고 왔어요?"
"나오는게 없어. 속만 메슥거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제영의 얼굴은 점점더 창백해졌다. 동혁이 말릴 즈음에는 취한 건지 탈진한 건지 축 늘어져 뼈라고는 없는 연체동물 같았다. 그 상태로 낡은 작업복을 다시금추켜올리고 술잔을 찾았다. 동혁은 이 겁에 질린 남자가 한심했다. 한순간이나마 이 남자가 제 안위에 무슨 해를 끼칠까 싶어 겁을 먹었던 자신 역시도.
다시금 제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혁은 핸드폰을 확인하며 살짝 찡그리는 제영의 표정에서 아까의 남자가 재차 전화를 걸어온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제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재중통화가 남겨진 핸드폰의 버튼이 붉은 불을 반짝였다.
"누구예요?”
"좀 아는 사람."
제영은 오늘 같은 날조차 연락을 해 오는 해진이 귀찮았다. 보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찌개의 표면이 찢겨 나간 살결 같았다. 역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영이 빈 술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고는 앞자리의 동혁을 쳐다보았다. 마땅한 상대가 없어 동혁을 데려오긴 했으나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만 가자."
계산을 끝내고 제영은 가게 앞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한 대 피우고 갈 생각이었다. 숨과 섞인 탁한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제영은 작업복 지퍼를 올리려고 낑낑거렸지만 고장이 난 건지 잘 되지 않았다. 추위에 곱은 손만 더 붉어지고 말았다. 손으로 대충 여미고 몸을 웅크리는 와중에 멀뚱히 서 있는 커다란 덩치가 눈에 밟혔다.
"먼저 가. 난 택시 타고 갈게."
제영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던져 버렸다. 다 꺼지지도 않은 붉은 불꽃이 여전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영이 그 끄트머리를 멍한 눈으로 좇았다.
동혁은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제영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이대로 알지 못한 채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이 아쉬워서였다. 그런 동혁을 제영이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때 제영이 기침을 콜록거렸다.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눅진 해진 연기들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제영이 입을 막고 몇 번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기침이 멈췄다.
동혁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로 그런 제영의 꼴을 보고 있었다.
"제영 씨."
순간 어떤 목소리가 동혁의 등을 두드렸다.
동혁은 자기도 모르게 등을 움찔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째서 그 목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알게 되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는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영처럼 아파서가 아니라 본디 저리 태어난 사람이었다.
남자는 제영의 곁에 서 있는 동혁을 보고 뭔가 찜찜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위아래로 훑었다. 서늘한 눈빛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긴 경계심을 동혁은 놓치지 않았다. 저 눈빛, 저런 눈빛은 동혁 같은 사람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동혁은 설마설마하며 제영을 쳐다보았다. 제영은 남자와 동혁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치 꼭꼭 숨겨 둬야 할 것을 들킨 사람처럼.
"데리러 왔어요."
해진이 제영에게 말했다. 제영은 난데없는 해진의 등장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혁의 눈치만 보았다. 의연하게 굴어야 괜한 의심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남자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온 것일까.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었지만 동혁이 걸렸다. 제영이 또 슬쩍 동혁을 쳐 다보았다.
"이해진 팀장님이시죠? HS의. 예전에 상무님과 같이 계실 때 한번 뵀는데 오랜만입니다."
가만히 서 있던 동혁은 해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인사를 건넸다.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해진의 손이 향한 곳은 다른 곳이었다. 제영이 동혁의 곁에 있는 것이 퍽이나 싫다는 것처럼 제영의 팔을 붙들고 제게로 당겼다. 품이 큰 작업복 안에 숨어 있던 팔이 해진의 손아귀에 붙잡혀 가느다란 실체를 드러냈다.
이런 식의 스킨십이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이지만, 또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건 아닌 터라 제영이 제 팔을 붙든 해진에게 놓으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해진은 제영의 말은 듣지도 않고 살짝 얼굴만 찌푸렸다. 제영으로서는 갑자기 달려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 이렇게 투정을 부려 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놓으라니까요."
제영이 다시 소곤거렸다. 횐 입김이 해진의 코트에 부딪히고는 녹아 사라졌다. 여전히 공장에서의 일이 핑핑 돌게 만드는 상황에서 해진까지 이러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제영은 심해지는 두통과 울렁거림에 이마를 잡고 이를 악물었다. 대치하고 있는 두 덩치 사이에서 움츠려든 몸이 자그마한 난쟁이처럼 보였다.
"해진 씨,일단 좀 가요. 박 대리도 늦었으니까 그만 들어가. 내일 따로 좀 보고."
제영이 해진을 밀었다. 제영의 좋지 못한 표정과 달달 떨고 있는 입술을 보고는 해진도 이제 슬슬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점퍼 아래에 점점이 얼룩진 것이 해진의 눈에 띄었다. 놀라서 점퍼를 젖히며 제영에게 물었다.
"다쳤어요?"
“이건, 하아.”
제영은 이 길바닥에서 그간의 사정을 일일이 그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는 아파 왔고 낡은 작업복을 뚫고 찬 바람이 파고들어 와제영의 속살을 잔뜩 할퀴어 대고 있었다. 제영이 다시 해진을 밀었다. 해진의 너머로 검은 차가 번쩍이고 있었다. 일단은 저 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가는 길에 애기해요. 가는 길에."
제영은 해진의 차를 타기 직전에 동혁에게 눈짓했다. 입단속을 잘하라는 의미였지만 시선을 슬쩍 피하는 게 불안하기만 했다. 괜한 이야 깃거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절이었으니 내일 출근하면 다시 한번 단단히 일러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동혁은 제영을 태운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별일이다싶었다. 몇 년을 제영과 함께 일해 왔지만 그런 낌새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근래에 와서야 게이를 본 적이 있니,없니 하며 괴상한 소리를 하길래 어디서 저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라도 주워듣고 온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동류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이때까지 꼭꼭숨겨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동혁은 제영이 그렇게 철저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결혼을 앞두고 늦바람이라도 난 건가.'
평생 이성애자로 살아왔다가 억눌린 욕구를 참지 못하고 갑자기 남자를 만나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흔해 빠진 것이었다.
'그 팀장이란 새끼가 그러진 않을 것 같으니, 선배가.'
다리를 벌리겠지. 그러나 동혁은 제영이 아까 그 남자와 뒹구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늘고 흰 손가락들이 저 마른 몸을 주무를 때마다 신음을 토해 내려나. 동혁은 매라도 맞은 강아지처럼 푸르게 죽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아까 전의 제영을 떠올려 보았다. 그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남자에게 매달리는 꼴 같은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거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제영이 짜증을 섞어서 따져 물었다.
"제영 씨 번호로 전화하니까 다른 사람이 받았어요. 아마 아까 그분이겠죠. 당신 몸이 좋지 않으니까 올 수 있으면 와 달라고 했어요."
동혁이나 해진이나 어찌나 친절하고 착한지 제영이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제영은 더 이상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아예 눈치가 없는 남자는 아니었기에 그는 침묵을 지키고 조용히 제영의 상태를 살필 뿐이었다. 제영은 해진의 코트를 덮고 몸의 한기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고 배 속 깊숙한 곳이 서늘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코트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를 자꾸만 킁킁거렸다. 눈을 꽉 감고 자신을 괴롭히는 불온한 기척들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한껏 나약해진 몸이 결국 포기 선언을 했다.
제영이 거의 반기절 하듯 잠들었다. 잠든 와중에도 찌푸려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몸의 나약함과 정신의 가날픔이 엎치락뒤치락하였다. 몸이 힘들어 잠에 들었다가도 기억나지도 않는 괴상한 꿈에 다시 깨었다. 제영은 잠깐 꾸었던 악몽의 순간, 온몸이 부식되는 착각에 휩싸여 파드닥거리며 잠에서 깨었다. 두 뺨이며 목덜미며 어디 차갑지 않은 곳이 없었다. 끝없이 차가운 액체를 내뿜는 무언가가 몸속 깊숙이 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시끄러운 기계음과 함께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꿈속의 것이 아니라 현실의 소리였다. 시야가 시커멓게 변하자 제영은 순간적으로 깊고 어두운 아가리로 빠져드는 줄 알고 놀라 의자에서 볼썽사납게 미끄러졌다. 전부 심약해진 탓이었다.
"다 왔어요.”
"여기 어디예요?”
"제 집이에요."
제영은 거울을 보지도 않고도 자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덤으로 지친 표정도 간간이 섞여 있어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거니 예상할 만한 얼굴일 게 분명했다. 너무나도 지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해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들어가요. 피곤하잖아요."
상황을 더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 게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그가 미웠다. 이럴 때 간절히 곁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리를 비우고 반갑지 않은 상대는 이렇게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따져 대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제영은 너무나도 피곤한 상태였다.
예전에 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계단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를 따라 올라가면 갈수록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단 한 번도 더러워진 적이 없을 것만 같은 그의 공간에서 이상하게 악취가 났다. 제영은 그에게 코트를 돌려준 걸 후회했다. 그걸로라도 자신의 코를 막아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영 씨, 괜찮아요?"
해진이 몸을 웅크린 제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제영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누가 봐도 그렇게 봐 줄 수 없는 상태였다. 희다 못해파랗게 보일 정도의 얼굴로는 무어라 말을 해도마찬가지였다. 해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말로 어디 다친 거 아니야?”
그가 다시금 물어 왔다. 제영은 갑작스레 사고의 흔적이 남은 셔츠며 바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까의 악취가 자신의 옷에서 나는게 아닐까. 얼룩진 횐 셔츠, 바지는 검은색이라보이진 않아도 흔적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축축하게 젖은 재킷과 코트를 벗을 때 묻었던 검붉은 것을 지워 내려고 몇 번이나 손을 씻었다. 제영이 손을 킁킁거렸다. 여기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제영 씨?”
해진이 다시 제영을 불렀다.
"해진 씨. 미안한데, 나 좀 씻고 싶어요."
쏟아지는 뜨거운 물 덕에 제영은 좀 살 것 같았다. 몸에 꼼꼼히 비누칠을 하면서 문을 보았다. 혹시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문단속은 제대로 해 둔 상태였다. 미리 갈아입을 옷도 받아 왔다. 결려 오던 어깨를 주무르며 거품을 씻어 내었다.
'왜 이러지.'
제영은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 자리에 있긴 했지만 자기 잘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는 것은 그 잠깐 동안의 대화로부터 이어진 하찮은 동정과 참상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충격 때문이라고 여겼다. 여기에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신 차리자. 어차피 오늘은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구라도 곁에 두는 게 나아.'
애인의 부재로 최선의 답은 아니었지만 차선책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고분고분하게 구는 개 한 마리를 곁에 둔다고 생각하면 될 터였다. 크기가 좀 크고 자꾸만 치대는 품종이 긴 했지만 말이다. 욕실에서 나오자 해진의 모습이 보였다. 제영이 씻을 동안 다른 곳에서 씻은 건지 아니면 그저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만한 건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청결하기 그지없었다.
제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파고들어 숨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으니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제 좀 진정이 돼요?''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렇게 물었다. 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곧이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줄 만큼 상태가 좋다고 느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여기에 데려온 거예요."
그가 주먹을 살짝 쥐고 제영에게 내밀었다.
무슨 장난인가 싶어 제영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처럼 가닥가닥의 손가락들이 천천히 펼쳐졌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캡슐이 하나 있었다. 코팅된 경질 캡슐로 한쪽은 주황색이고 나머지는 초록색이었다. 제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언론에 오르내리던 부잣집 자제들의 마약 사건이 생각났다.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가 제영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
"안정제예요. 전 가끔 먹어요. 최근에는 아니지만. 예전에 처방받은 것들이 남아 있어요. 오늘은 당신한테 이게 필요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좀 나아 보이네요. 아까는 조금 아슬아슬해 보였어요."
해진이 손을 내밀어 제영의 왼쪽 가슴 부근을 더듬었다. 불안하게 쿵쾅대던 소음이 바깥까지 들렸던 건가. 또다시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팠다. 거세게 돌아가는 기계소음이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먹을래요.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술마시고 먹어도 괜찮아요?”
"의사는 그러지 말라고 하겠지만 전 자주 그랬어요. 잠만 잘 잤어요."
해진이 제영에게 건넨 캡슐은 약간의 물과 함께 삼켜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핏자국은 뭐예요?"
"내일 얘기해요. 내일.”
약의 효과인지 아니면 그저 잊었던 것들이 몰려와서 그런 것인지 또다시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제영은 정말로 눕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혼자 자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개 한 마리가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개는 이미 선례가 있었다. 제영의 말에 개의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이내 수긍했다. 제영이 소파에서 자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그가 그렇게 둘 리 없었다.
제영은 예전의 그 방으로 안내받았다.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경악에 차서 눈을 뜻 그곳이었다. 여전히 호텔 침구처럼 푹신한 이불 속으로 어기적거리며 기어들었다. 온수에 데워진 몸이 다시 차가워지기 전에 남은 온기라도 붙잡고 싶어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잠깐 전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잠이 오기 시작했다. 약이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잠을 불러오되 악몽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기괴한 소음과 함께 양팔이 으스러진 여자가 제영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애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제영이 또다시 꿈밖으로 끌려 나왔다.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 커다랗고 사치스러운 저택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차게 식은 제영의 팔을 누군가 감쌌다. 헉, 하고 소리를 지른 제영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멈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름 아닌 해진 이었다.
"약이 효과가 없나 봐요."
그가 그렇게 말하고 제영의 이마를 짚었다.
어깨도 뒷덜미도 천천히 매만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그가 제영에게 키스하고 몸을 끌어안아 왔다. 거기까지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진이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내밀한 안쪽 피부를 더듬어 오자 제영은 그를 밀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태가 상태인지라 제영의 저항은 거칠었다.
'퍽' 하는 소리에 생각보다 그를 세게 때려 버렸다는 걸 알았어도 제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반항에도 그가 막무가내로 제영의 옷을 벗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진이 제영을 제압하여 눌러 버리고 배 위에 올라탔을 때는 꿈에서 끌려 나올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공포로 몸을 떨었다.
"제영 씨, 진정해요."
"이 상황에서?”
"아무 짓도 안 해요."
해진이 옴짝달싹못하게 압박하고 있던 제영의 양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자신의 상의를 벗었다. 제영은 해진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으나 원체 체격 차가 나서인지 그럴수가 없었다. 해진이 아,하고 소리를 냈다. 제영이 그의 배를 할퀸 탓이었다. 마지막 일격치고는 허약한 것이었다.
소강상태로 접어든 제영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자 해진이 분주해졌다. 제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착하고 고분고분하게 굴겠다는 말은 다거짓이냐고 그를 힐난했다. 그러나 막상 해진이 몸을 숙이고 그의 맨살을 피부에 맞닥뜨리게 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겁먹지 말아요."
가슴과 가슴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해진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제영의 손으로 자신을 감싸게 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제영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마치 목을 가누지 못하는 신생아를 다루는 듯했다. 그러나 제영에게 그것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타인의 온기였다.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그와 닿은 부분들이 화끈거렸다.
"당신 몸이, 체온이 엄청."
차가워요. 해진이 중얼거렸다. 제영은 맞닿은 열기와 상반되는 자신의 냉랭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겨울에 알몸으로 바깥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약 때문인가. 왜 이러지.”
해진이 얼마나 제영을 염려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영은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고 도리어 꽉 붙들었다. 그게 유일하게 살길인 것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빨판이라도 붙어있는 것처럼 그를 양팔로 감싸 안고 두 다리를 얽었다.
그가 물었다. 왜 이러냐고. 제영은 울컥 눈물이 치솟는 걸 억지로 참고 구구절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고? 공장에서? 아까 핏자국은 그거 때문이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약품 처리 아니야? 거기서 그런 식의 사고가 일어날 일이 있어?”
몽롱했다. 질문이 뭐든 대답을 다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제영은 대답을 하는 중간중간에도 그의 손길이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조마조마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잘못은 조금도 없다. 그 끔찍한 일이 하필 자신 앞에서 일어났을까. 해진이 가슴에 매달린 제영을 끌어 올렸다.
꼭꼭 숨겨져 있던 얼굴이 해진을 마주했다.
"왜 이렇게 약해 빠졌어. 당신.”
해진이 제영의 젖은 뺨을 혀로 닦아 내었다.
"아니면 약 때문인가. 이런 부작용도 있었나."
제영은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몽롱하면서도 우울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너무나도 추워서 상대가 없으면 얼어죽을 것만 같았다.
'일단은 살고 보자.'
제영이 해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어차피 이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애인은 저 멀리 있고 눈앞의 개는 크고 따뜻하고 다정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 익숙한 목소리가 제영의 이름을 불렀다. 깨우는 게 아니라 재우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영이 끔뻑끔뻑 졸다가 잠들기 시작했다.
* * *
제영은 발이 뜨거워 발가락 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래 봤자 작은 발가락들이 한 마디도 되지 않은 구두의 딱딱한 공간 속에서 발버둥 치는것에 불과했다. 그 작은 발버둥이 어떻든 간에 여전히 온기가 남은 그의 끄트머리들은 제영에게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겨울에는 항상, 때 때로 더운 여름에조차 차가운 손발 때문에 덜덜떨고는 했으니까. 이건 누구랄 것도 없이 다 해진의 덕이었다.
그날 그렇게 몸을 포개고 잠들었다가 오후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무단 결근이 된 셈이었지만 제영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해진은 의사라도 된 것처럼 제영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발을 붙잡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불을 덮고 고개만 내민 제영이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제영은 남이 그런 곳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간지럽고 신경 쓰였다.
자신의 발을 다시 가지고 와도 도로 그의 손에 붙잡혔다. 부드러운 감각에 익숙해지자 저항은 그만두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발바닥이 푸딩처럼 말랑거렸다.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오늘은 못 가요. 몇 주 동안 안 나간 적도 있는데,하루쯤은 괜찮잖아요."
몇 주 동안 자체 휴가라니, 부럽기가 그지없었다. 해진이 전화 통화하는 소리를 듣던 제영은 이내 다시 잠들었고 저녁이 되어서야 깼다.
눈앞에는 해진이 쌔액쌔액하며 잠을 자고 있었다. 문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얼핏얼핏비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제영은 자기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잠든 해진의 팔뚝에 이마를댔다. 신기하게도 두통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 배웅에, 저녁마중까지 약속받고 다음 날 출근을 했다.
이미 본사의 사람들도 공장의 사고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되는 것인지 다들 수군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적당한 병원비와 얼마의 보상금정도만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영은 그런 소리가 오갈 때면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희주의 얼굴이나 아니면 뺨을 쓰다듬던 해진의 손길 같은 것들으
"박대리, 잠깐 얘기 좀 하자.”
제영이 동혁을 불렀다.
"아까 그 자료 때문에 그러세요? 그거 아직한참 남았어요. 오후에 드릴게요."
제영의 용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동혁은 살짝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렇게 모른 체했다. 지금 해결 보겠다는 마음인 건지 제영은 자리를 지켜 서고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혁이 제영을 힐끗 올려다보다 일어섰다. 어차피 자신도 궁금한 게 많았다.
막상 그렇게 사람을 불러냈지만 제영은 담배만 피울 뿐 얘기를 시작하지는 않고 와중에 슬쩍슬쩍 흔들리는 눈동자로 동혁을 쳐다보기만 했다.
"불렀으면 애기를 하셔야죠. 저 바쁩니다. 대리님한테 드릴 자료도 정리해야 하고 배 차장님한테 보고도 해야 돼요."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동혁이 제영을 재촉했다. 제영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담배를 비벼 끄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봤던 사람."
"예, 예. HS의 이해진 팀장님이요."
"목소리 좀 낮춰."
제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동혁에게 주의를 줬다. 동혁은 그게 같잖게만 보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날 이야기 하지 마. 특히 그 사람이야기."
동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티가 나도 너무 났다. 늦바람이 톡톡히 난 게 틀림없었다. 남은 독수공방하는 동안 돈 많은 남자 친구 품에서 살뜰하게 챙김 받은 것인지 두 뺨이 부들부들해져있었다.
"무슨 사이길래 그러는 건데요.”
"사이랄 것도 없어. 그냥 가끔 밥 먹고. 그 정도야. 내가 다른 일 때문에 숨기려는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우리 회사가 HS전자 일로 얼마나고심 중인지. 괜히 거기에 같이 엮여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일 얘기는 안 해. 그냥 정말로 밥이나 먹는 사이야.”
말을 끝낸 제영이 구두로 바닥을 긁었다. 내팽개쳐진 담배들이 으스러져 거친 시멘트 바닥위를 더럽혔다. 제영이 핑계와 변명을 하면 할 수록 동혁의 확신만 짙어졌다. 결혼을 앞둔 이요령 없는 남자가 무슨 수로 그런 대어를 낚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남의 일이였다. 조금신기하고 우습기도 한, 타인의 사생활이었다.
업무적으로 부딪히는 것만 해도 피곤했다. 제영이 괜히 엮여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한 것처럼 동혁도 마찬가지로 괜히 제영과 해진의 일에 엮여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혼기가 꽉 찬 남자의 연애사는 쉽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괜한 소문이 퍼졌다간 사회생활은 끝장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인생을 망친 사람을 여러 번 봐 왔다. 동혁은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괜찮다니까. 천천히 와."
-정말어디 다친 데는 없어?
"아무 문제없어. 일 끝내고 천천히 올라와."
-집에서 혼자 잔거야?
"응. 혼자 잤지, 뭐.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냥많이 놀라서 그랬나 봐. 알잖아, 공포 영화 같은 거 못 보는 거. 눈앞에서 그러니까 너무 임팩트가 컸나 봐.”
-그런 소리 마. 다친 사람도 있는데, 무슨 영화이야기야.
"그렇지, 그러네."
-아무튼 괜찮다니까 다행이다. 나 좀 일이 꼬여서 늦게 올라가. 가면 바로 당신 집으로 갈게.
그때 얘기하자.
별것도 아닌 통화임에도 오래된 연인의 목소리에 제영은 힘이 났다. 하지만 당장은 그녀의 부재를 대체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며 그가 올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타요."
그는 적당한 곳에서 제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그렇게 멀지 않으면서도 눈에 띄지는 않을 만한 곳이었다. 제영이 잽싸게 그의 차에 올라탔다.
"괜찮아요?"
사방에서 괜찮으냐고 자신에게 물어 댔다.
아침에 마주친 이사도, 동혁도, 얼굴만 아는 직원들도. 하지만 딱히 진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뒤에서는 그저 담이 약한 놈이라고 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다르다고 여겼다. 다정한 진심이 포근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점심은?”
"간단히 먹었어요."
"저녁은 먹을 수 있겠어요?"
"어디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돼요. 근데 난 곧장 집으로 갔으면 해요.”
제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자리의 미세한 움직임을 좇으며 어린애를 태운 것처럼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차를 드라이브하듯이 즐겼다.
오는 길에 도시락을 사 왔다. 해진이 제영의 몫으로 죽을 사 왔지만 그다지 상태가 나쁘지 않았기에 죽을 먹을 필요까진 없었다. 값비싼도시락을 만찬처럼 즐긴 제영이 포만감에 소파위로 늘어졌다.
'어디 갔지.'
정작 중요한 해진이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술 한잔 하겠냐는 걸 거절하고 부엌으로 사라진 걸 본 이후로 잠잠했다. 슬슬 피곤했다. 제영은 그를 껴안고 싶었다. 선심 쓰듯 입맞춤 정도를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안달 난 제영의 속마음을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해진이 나타났다.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손을 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팔꿈치가 닿자마자 그런 것이다. 제영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손을 이렇게 기쁘게 잡게 될 줄이야 상상조차 못 했다. 제영이 해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의 팔뚝에 이마를 가만히 댔다.
"약을 줄까요?"
제영은 고개만 젓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말이라도 내뱉으려고 입을 달싹였다가도 그만 두었다.
“또 머 리 아파요?"
해진이 제영의 턱을 감싸며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제영은 그 눈빛을 피하고는 잡은 손만 만지작거 렸다.
이번에는 해진이 제영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샤워한 지 얼마 안 된 그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제영도 같은 샴푸를 썼지만 그의 냄새는 남달랐다. 아마 살 냄새와 섞여서 그런 향이 나는 거겠지. 주르륵 흘러내리듯 해진 이 제영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머리카락이 닿은 허벅지가 간지러웠다. 그가 제영을 올려다보았다.
"계속이러고 있고 싶어요."
그가 말한 계속이 언제까지일까. 그의 말대로 계속은 불가능하더 라도 어느 지점까지는 이러고 있을 수 있었다. 제영은 해진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물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머리카락은 걸리는 것 하나없이 부드럽게 빗겼다.
둘 다 한없이 안락한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어디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진의 핸드폰소리였다.
"안 받아 봐도 돼요?"
저렇게 요란스럽게 전화하는 걸 보면 회사나비슷한 쪽에서의 급한 일인 걸로 보였다. 제영은 자꾸만 신경 쓰여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어디서 오는지 뻔해요. 받을 필요 없어요.”
"그럼 차라리 꺼 두는 게 낫지 않아요?"
"아니지."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면 안 되죠. 내가그사람들을 엿 먹이고 있다는 걸 실시간으로 알 수가 없잖아요."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지간히 싫어하는 사람인 듯싶었다. 해진이 눈을 감았다. 제영은 그의 눈꺼풀이 반도 감기기 전에 그가 뭘 원하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상대가 키스를 원하니까, 키스를 해야 했다. 최대한 섹슈얼한 느낌은 배제한 채로. 이 순간이 질척거림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런 방법이 있던가. 제영은 고민했다. 자신과 애인에게 있어서 은밀한 곳에서의 키스는 항상 섹스의 전초전이었다. 그녀가 그걸 받아 준다는 것은 승낙의 의미였다. 혹여나 그가 착각하지 않도록제영은 가볍게 입만 대었다가 떼어 냈다. 자신의 거절을 남자가 눈치챘다. 감겼던 눈이 떠지고 그가 제영을 보았다. 의문스러운 얼굴로 제영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피곤해요."
제영의 말에 해진은 실망한 얼굴로 아아, 하며 알아들었다는 몸짓을 했다. 제영은 혹여나토라진 그가 따로 방을 쓸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제영을 전의 그 방으로 데려 갔다.
침대에 나란히 누웠지만 정신없던 전날 밤과는 다르게 이번은 남자와 한 침대를 쓴다는 게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어제 느꼈던 그 편안함과 위안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의 착각이 아닐까. 제영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면 자신은 여기에 올 이유가 없었다.
"약은 정말 괜찮아요?"
그가 그렇게 묻기에 괜찮다고,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내가 필요한 건 너일지도 몰라. 제영은 속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어두운 방. 제영은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제 곁의 남자를 보기만 했다. 손을 내밀어 살짝 만지기만 해 볼까.
하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순간 침대맡의 작은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제영이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감았다. 거기서 뭐가 웃겼는지 해진의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안 와요?”
제영이 제대로 눈을 뜨자마자 그의 선명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진이 제영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면 왜 피곤하다고 했어요. 사람 실망하게."
이번에는 제영의 얼굴을 쓱 건드려왔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가 그렇게 물어 왔다. 제영이 해진에게 바라는 건 명확했다. 하지만 그 명확하고 간단한것을 상대방에게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제영이 그의 시선을 피하고 이불 속 손만 꼼지 락거렸다.
해진이 몸을 나른하게 늘어뜨렸다. 맹수에게 목이라도 내놓은 것처럼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 덕에 제영의 속에 작은 치기와도 같은 감정이 울컥 솟았다. 손을 뻗어 옷 위로 그의 배를 건드렸다. 이 정도면 눈치채고 알아서 해 주기를, 전날 밤과 같이 해진이 자신의 품에 파고들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영의 손길에 간지러움조차 못 느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뭘 하자는 거예요?”
그가 다시 물어 왔다.
해진이 제영의 손을 잡아당겼다. 답답한 그가 결국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 힘을 못 이기는 척, 제영은 그렇게나 기다리던 타인의 손길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해진을 껴안기도 전에 돌연 밀어내졌다. 그대로 내쳐진 건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해진이 제영의 옆구리를 감싸안았다. 에스코트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왼손이 제영의 오른손을 잡고 나머지는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허리를 감쌌다. 그렇게 해서 제영은 해진이 이끄는 대로 그의 배 위에 안착했다.
당황한 제영은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버틸 수는 없었다.
해진이 제영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앉을 것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내려가려고 해도 그러질 못했다. 붙잡은 손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조심스레,혹여나 해진의 물건을 깔고 앉지 않으려 뒤를 힐끔힐끔 보며 엉덩이를 내렸다.
관계를 맺을 때면 애인을 아래에 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깔고 앉은 적은 없다. 살아 있음이 분명한 몸이 제영의 하반신 아래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건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살아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색함에 몇 번 들썩이던 엉덩이는 해진 이 아예 골반을 잡아 누르자 잠잠해졌다. 그 탓에 제영은 자신이 해진을 깔고 앉았다는 걸 더적 나라하게 느꼈다.
"빨리 말해 줘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놀리고 있다. 아주 노골적으로. 제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아까 술이라도 마셨다면 미친 척하고 그를 얼싸안을 텐데 지금은 그런 짓을 저지5기에는 정신이 너무나 말짱했다. 그말짱한 정신 덕에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그의 얼굴부터 허벅지를 간질이는 작은 손톱 하나까지도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제영 씨. 뭐든 말해 봐요. 내가 당신에게 맹목적으로 군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왜?"
한참 동안이나 가져온 궁금증 중에 하나였다. 베풀어지듯 쏟아지는 것들을 야금야금 탐닉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내 묻고 싶었으나묻지 못했던 것이었다. 제영은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가 궁금하기도 겁이 나기도 하였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무슨 질문이 그래요. 그야,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심장이 더 세게 뛰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제영은 아래에 깔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처연한 남자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이 그의 애정에 대한 조금의 성의라도 보여 주는 것이라고여겼다.
제영이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피부가 반짝거려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제영은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시한부의 책임감이긴 했지만 그건 어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영이 해진의 반질반질한 뺨을 만지려고 몸을 숙였다. 손에 닿는 감촉이 금속처럼 미끄러웠고 값비싼 동물의 털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그건 제영이 그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야한 짓이었다.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팔로 그의 양옆을 짚고서 첫사랑에게 키스하듯 신중하게 다가갔다. 채 다 열리지 않은 해진의 입술 사이로 제영이 성급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앞니와 아랫니에 예민한 부위를 긁히면서도 주저함은 없었다. 모든 행위에는 음습한 소유욕이 동반되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과 용기가 치밀어 올랐는지는 모른다. 제영은 해진의 목줄을 손에 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내 것이다. 내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올라 핑핑 돌 지경이었다.
제영은 어지러웠다. 이 순간의 감정도, 이곳의 공기도 모든 게 제영을 들뜨게 만들었다. 피어싱의 흔적이 남은 그의 귀를 보고 싶었다. 귓바퀴를 혀로 핥고 가지런한 그의 귓불을 깨물었다. 아래에서 그가 신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해진을 겁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꼼짝 않고 제영이 뭘 하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여운사람처럼 굴었다. 제영은 거기에 더 흥분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벌어진 잠옷 사이에도 입을 맞췄다. 단추를 풀고 그의 옷을 벗겨야 하는 건가 하고 고민할 때였다. 침대 위에 얌전히 늘어져 있던 그의 손이 제영의 몸을 더듬었다.
고개를 그의 가슴에 묻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그의 손에 가 있었다. 끽해야 옷 아래 손을 넣어허리춤이나 더듬을 거라고 여겼던 손은 생각지도 못하게 제영의 뒤로 향했다. 해진이 제영의 엉덩이의 살을 손으로 꽉 쥐었다. 양 손아귀의 힘에 그 부분이 벌어지는 기분은 아찔하면서도 끔찍했다.
화들짝 놀란 제영이 '아'와 '악'의 중간에 있을 법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해진의 양 손목을 잡고 침대 위에 고정시켰다. 별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제영은 헉헉대기 바빴다. 그와 상반되게 제영에게 깔린 해진은 입술만 조금 번들거릴 뿐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그대로 쪼그라들었다. 제영이 다시금 그의 위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제영도 남자였기에 이런 관계가 단순히 키스하고 몸을 매만지는 것에서 끝날 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영은 그저 예전처럼 희생하듯 그에게 자신의 아래, 정확히는 앞부분을 내주면 될 것이라고 여겼지 뒤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설마, 내게 그 짓이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열이 오르던 몸이 점차 식고 있었다. 불안감이 그걸 더 부추겼다. 해진이 만약 손으로 수음해 주길 원한다면 백번 양보해, 해 줄 생각이 아예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영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이 분위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자고 할 수도 없었다.
"제영 씨."
“응?"
"애태우는 건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겠는데."
해진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숨이라기보다는 뭔가를 참아 내는 것에 더 가까웠다. 제영은 일단그의 배 위에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꽉 쥐고 있던 해진의 손목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켜 애먼 곳은 건드리지 않고 조심스레 내려올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해진이 제영의 허리를 붙잡았다. 몸이 휘청했고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이제는 해진이 제영을 올라탄자세였다. 제영의 심장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방금 전이 쥐를 잡은 고양이의 심정이었다면 지금은 잡힌 쥐의 신세였다.
해진이 잽싸게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온 터라 제영은 다리를 오므리지도 못했다. 어찌해보려고 해도 제영의 허벅지가 해진의 옆구리만 치대는 정도였다. 당황한 제영이 허우적거리고 있자 해진이 제영의 위로 바짝 엎드려 왔다. 밀착된 그의 하반신이 제영의 회음부를 긁고 올라와 아래를 꾸욱 눌렀다. 단단하게 발기한 그의것이 제영을 압박해 왔다. 해진이 허리를 놀릴때마다 서로의 것이 엉키듯이 비벼졌다. 제영역시 이전부터 반쯤 서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직접적인 자극에 살덩이가 자꾸만 부피를 늘려 갔다. 하지만 아래의 상황과는 다르게 위는 두렵기만 했다.
해진은 제영이 했던 것처럼 팔을 붙들어 제압하려 들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제영은 그 말에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손에 닿는 두 뺨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신 되게 겁먹은 표정이에요."
"잠깐만, 일어나 봐요."
제영이 그를 밀어내었다. 서로의 거리를 벌리는 편이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해진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대로 제영의 다리 사이를 압박하면서 싫다고 칭얼거렸다.
해진이 제영을 쳐 올리면 올릴수록 다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다리가 제영의 눈에도 들어왔다.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해진이 잠깐 몸을 일으킬 때가 기회였다. 제영은 잽싸게 다리를 오므리고 팔로 엉금엉금 뒷걸음쳤다. 정수리에 침대 헤드가 닿았다. 더 이상 갈 곳은 없었다. 해진은 도망친 제영을 잡아당기거나 하는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단지 제영의 바로 옆자리에 털썩하고 몸을 누일 뿐이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욕구 때문인지 그가 엎드린 채로 발을 굴렀다. 침대가 진동하며 제영의 몸까지 같이 출렁거렸다.
"하아."
해진이 엎드린 채로 고개만 돌려 제영을 보았다. 붉게 부은 눈꼬리가 그가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 보여 주는 듯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겁나요?”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로 제영에게 물었다. 제영에게 그런 것들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겁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가 같은 남자라는 것, 그같은 성별의 사람이 자기에게 그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 외에도 여러 가지였다.
"내가 당신한테 거칠게 군 적 있어요?"
이번에는 따져대는 말투였다.
"없잖아."
해진이 몸을 가볍게 굴려 제영의 가슴팍 위로 기어 올라왔다. 묵직한 무게감이 제영의 명치를 짓눌렀다.
"약속할게. 당신이 싫어하는 건 안 할 테니까."
해진이 제영의 귀를 할으면서 말했다. 제영이 해 주던 애무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제영이 입술을 깨물고 허리를 들썩였다. 쥐새끼처럼 다시금 제영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온 해진은 아까 하던 짓을 계속하려고 했다. 그가 아래의 틈을 손으로 꾹 눌러 오자 제영이 퍼드덕거렸다. 인상을 잔뜩 쓰며 해진의 팔뚝을 꽉 잡고 더 이상 못 하게 했다.
"아아,여기.”
해진이 웃었다.
"여기가 싫구나. 좋아요. 여기까지는 욕심 안낼게요."
해진이 누워 있던 제영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앉은 채로 뒤로 바짝 밀쳐져 침대 헤드가 제영의 등과 맞붙었다. 제영은 해진의 허벅지에 반쯤 걸터앉은 상태로 상대가 하는 짓을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벗겨 줘요.”
코앞까지 다가온 해진이 제영의 손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당기며 속삭였다.
손바닥에 오돌토돌한 단추들이 느껴졌다. 이걸 푸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저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두렵기 때문이었다. 제영이 용기 내서 해진을 똑바로 보았다.
"내가 멈추라면 그만둬야 해요. 알았죠?"
대답은 없었다. 해진이 제영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가 살며시 떼어 냈을 뿐이었다.
제영이 해진의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상대의 맨살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손이 더 떨려왔다. 이미 해진 역시 제영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젖혔고 제영이 해진을 꽉 끌어안았다. 아까의 두려움은 다 거짓인 것처럼 스치는 모든 것이 아찔했다.
해진이 제영의 목덜미를 핥아 왔다. 턱 아래부터 목선을 따라 어깨까지 빼놓는 부분도 없이 살뜰했다. 그가 척추 마디마디를 만질 때마다 허리가 떨렸다. 제영은 참지 못하고 해진의 입술을 찾았다. 그에게 매달려 입술을 빨아 댔다.
그게 더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덜렁거리던 다리가 해진의 허리를 옭아맸다. 이미 서로의 것이 발기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영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살만 만져 대도 기분이 좋았다. 헉헉대며 매달려 있는 게 최선이었다.
해진의 손이 제영의 바지춤에 파고들어 왔다. 벌벌 떨리던 달뜬 몸이 놀라서 헉, 하며 숨을 들이켰다. 제영은 그가 약속을 어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해진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해진이 그런 제영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듯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 되겠으면 당장 말해 줘요. 그만둘 테니까."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성기의 끝을 꽉 눌렸다. 제영의 입에서 탄성과도 같은 신음이 터졌다. 성기의 끝은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 젖어 있었다. 해진이 그걸 윤활유 삼아 입구 주변을 살짝 긁어 대며 제영을 가지고 놀았다. 제영은 손에 힘이 빠져서 그를 붙들고 있지 못했다.
허리 역시 마찬가지라 결국 늘어져 버렸고, 침대 헤드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뒤로 넘어갈 태세였다. 엄지와 검지로는 귀두의 경계를 더듬고 나머지로는 기둥 부분을 훑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액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제영의 허벅지가 곧 다가올 그 순간을 대비하는 것처럼 바짝 긴장한 상태로 움찔거렸다.
하지만 해진은 그런 제영의 마음도 모르는 것처럼 절정의 직전에 손을 뗐다.
제영은 못마땅한 표정을 꾸며 낸 다음 해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반쯤은 쾌락에 취한 얼굴이라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해진은 제영이 자신의 것을 만져 주길 원했다. 끌어 내린 바지와 속옷 위로 해진의 것이 드러났다. 난데 없는 등장에 제영이 고개를 돌렸다. 남의 물건을 본 적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발기해 액을 흘려 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진 이 제영의 손을 잡아당겨서 자신의 것에 대었다.
"만져 줘요.”
그건 무슨 마법의 주문이나 최면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제영은 그의 것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해진의 손은 뿌리치지 못했다.
손에 쥔 것은 뜨겁고 단단했다. 우둘투둘한 핏줄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거슬렸다.
자꾸만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 아예 눈을 감아 버렸어도, 마치 바로 눈앞에 둔 것처럼 형태가 그려졌다.
해진이 그 커다랗고 섬세한 손으로 제영과 자신의 것을 한 번에 쥐었다. 예민한 것이 예민한 것에 맞부딪쳤다. 흐르는 액이 서로의 것에 묻어 질척거림이 더 심해졌다. 젖은 손과 살의 표면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벼지고 있었다.
아까 빼앗겼던 절정의 순간이 다시금 몰아치고 있었다. 해진의 손아귀 힘이 강해지고 제영의 손이며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악,악 하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온몸을 팽팽하게 당기던 실이 툭, 하고 끊긴 순간 뱃가 죽이 서로의 정액으로 젖어 들었다.
귀가 멍했다. 절정에 다다르기 직전 해진이 토해 낸 소리가 아직까지도 제영에 귓가에 울렸다. 아마 이 순간이라면 해진이 제영의 뒤에 다시금 발기한 것을 쑤셔 박는다고 해도 저항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해진은 약속대로 선을 지켰다. 가랑비처럼 부드럽게 쏟아지는 키스가 여운에 휩싸인 제영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제영은 좀 더 그를 만지고 또한 그에게 만져지고 싶었다. 그건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도 없는 열망이었다.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해진이 제영의 유두를 입술로 건드려 왔다. 아린 고통과 쾌감이 배 속을 뒤집어 대고 있었다.
아, 아, 하는 길지도 않은 소리를 터뜨리던 제영은 해진이 유두를 손가락으로 간질이자 엉덩이를 들썩였다. 다시 아래로 질질 끌려 내려와 무방비하게 다리를 벌린 상태로 겁도 없이, 제게 순종하는 남자를 즐겼다.
"아파."
날카로운 이가 제영의 유두를 할퀴었다. 고개를 허우적거리던 제영이 해진을 살짝 밀어냈다. 반성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 대신에 혀로 부드럽게 유두를 핥아 올렸다. 유두의 끝 부분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 부위를 그런 식으로 애무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영의 애인은 딱히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제영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게 게이들의 방식인가.'
제영은 해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이들과 하는 것보다 더 밀도가 높았다. 해진은 기분이 좋을 만한 곳에 일일이 문을 두드리고 제영의 반응을 살폈다. 착실하게 기록하고 메모라도 할 것처럼 구는 터라 웃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건 생각뿐이고 실제로는 그저 헐떡대고만 있었다. 해진이 다시 제영의 아래에 손을 댔을 무렵에는 이미 두 번째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진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윽."
해진의 성기가 제영의 살을 거칠게 비벼 대다가 젖은 끝으로 성기 아래를 긁었다. 그때마다 제영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제영이 뭐라고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바로 다른 짓을 해 댔기 때문에 그에게 주의를 줄 기회는 없었다. 땀에 젖은 몸뚱어리들이 점점 더 찰팍대는 소리를 높여 갔다. 제영은 자신의 위에 있는 남자를 꽉 끌어안았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이미 액을 토해내고 힘을 잃은 것들이 여전히 엉겨 붙어 있었다. 그것조차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제영은 쾌락에 허덕이고 있었다.
콧속 깊숙이 해진이 냄새가 스며들어 왔다.
체력만 있다면 그의 살에 대고 헉헉대고 싶었지만 제영이 할 수 있는 건 늘어져 있는 게 전부였다. 거기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해진이 부지런히 몸을 치대며 곁에 붙어 왔기 때문이었다.
"사랑해요."
제영은 그 얘기에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지는 못했지만, 그에게 웃어주는 것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해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의 고백이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노래라도 부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해진이 제영의 몸을 끌어안았다. 저항도 없이 부드럽게 끌려와 해진의 품에 안겼다.
"사랑해요."
그가 다시 속삭인다. 그 소리가 제영의 정수리부터 시작해, 목구멍, 배 속의 내장을 지나서 하반신의 쾌락의 중추를 아찔하게 만들고 발끝까지 간지럽혔다. 제영은 또 웃고 말았다.
* * *
다들 이미 한물간 곳이라고 떠들어 대긴 했지만 삼청동의 평일 저녁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그 틈바구니에 제영과 희주가 있었다. 둘은 어디 갈지 정하지 못하다가 결국 희주가 좋아하는 즉석 떡볶이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당신 매운 거 잘 못 먹으니까 양념은 순한 맛으로 하자."
양념은 순한 맛,튀김 몇 개, 제영의 속을 달래기 위한 우동까지 예전과 똑같은 구성으로 메뉴를 주문했다. 점원이 주문서를 받아 갔고 이내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음식이 나왔다. 바로 앞에서 부글부글 끓어 대는 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늘 되게 기분 좋아 보여.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애인의 말이 맞았다. 최근에 제영은 발바닥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기분이었다. 둥둥 뜨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 봐도 오랜연인에게까지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일 없어. 회사에서 진행한다는 큰 건 있잖아? 그게 요즘 좋은 소리가 들려오거든. 아마 그래서 기분이 좋아 보였나 봐."
그녀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어때? 저번에도 일 있어서 계속 지방에 내려가 있었잖아.”
"좀 복잡해졌기는 한데,곧 끝날 거야."
하지만 곧 끝날 거라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원체 야근이 많은 직종이라 그녀는 입사 초기부터 힘들어했다. 이렇게 저렇게 버텨 오긴 했지만 여전히 힘들 게 분명했다.
"정말로 괜찮아?”
"응. 괜찮아. 원래이 일이 그렇잖아."
제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게 뭐하는 거야. 떡볶이집에서."
말을 그렇게 해도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힘이 나네,하고 중얼거리며 제영을 보았다. 힘이 난다고는 말했지만 애인은 집에 가는 차 안에서도 별말이 없었다. 간간이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바깥을 쳐다보고,그러다가 제영을 보았다. 제영은 그녀가 무슨 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해서 그럴 때마다 같이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 자고 갈까?"
"뭐? 됐어. 그냥 가. 어차피 곧 만나야 하잖아. 이것저것 정할 것도 산더미고. 오늘은 그냥가."
그녀를 오피스텔 앞에 내려 주고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친구들도, 먼저 결혼한 형도 이때가 여자들이 가장 생각이 많아질 때라고 했다. 제영은 되도록 그녀에게 맞춰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가도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알쏭달쏭한 반응에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녀에 대한 생각은 접고 다른 것에 집중해야 했다.
[언제 와요?]
재벌이긴 해도 양반은 못 되는 것인지 딱 당사자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지금 퇴근했어요. 갈게요.]
제영이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골목길을 타고 올라가니 이제는 익숙한 생김새의 주택이 눈에 보였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2층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해진이 제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담장 아래에 차를 대고서 바로 벨을 눌렀다. 현관문이 열렸고 2층에서 그림자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해진이 제영을 반갑게 맞았다. 막 씻은 해진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고 그에 곁에 서니 좋은 냄새가 났다. 제영은 그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먼저 도착해 자신을 기다리는 해진을 볼 때면 제영은 주제에 맞지도 않게 세컨드라도 둔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부자들이 이런 식으로 바람피운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 반대로 그 부자를 애인 삼고 있었다.
반가운 표정이긴 하지만 방금 헤어지고 온희주처럼 뭔가 다른 생각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그건 제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도 여전했다.
제영은 또다시 예의 그 스파이 같은 짓을 해진에게 시키고 있었다. 흔쾌히 오케이를 했으면서도 해진은 전혀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제영도 그의 눈치를 보게 돼서 마찬가지로 서류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영은 자꾸만 정원 테라스쪽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창의 커튼은 반쯤 걷혀 정원이 드러나 있었다.
깜깜한 밤이라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예전 언뜻 본 정원은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잔디도 없는 흙 밭의 벌거숭이였고, 나무라고 있는 것은 살면서 제 주인 손길 한번 받지 못한것을 항의하는 것처럼 엉망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래도 들어오기 직전에 본 정원의 채 녹지 않은 눈은 운치가 있었다. 해진이 서류를 모아 탁자에 툭툭 두드렸다.
"오늘은 그만할까요."
그렇게 말한 그는 서류를 정리해 도로 제영의 가방에 넣었다. 그걸로 탁자에는 서류 대신술병으로 채워졌다. 술과 단출한 레토르트 식품안주가 전부였지만 둘 다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제영이 해진을 보았다. 익히 아는 잘생긴 얼굴이 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얼굴에 창백한 빛이 있긴 했어도 전체적으로 피부가 좋아서 부드러워 보였다. 건드리면 저 밖의 눈을 쥘 때 처럼 녹아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그가 곁으로 와 몸을 붙여 왔을 때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어요?"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별일 없어요."
살짝 몸을 포개 오는 해진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두 눈에 담긴 그의 내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제영이 해진의 얼굴을 살폈다. 또 어디 맞고 오기라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오늘따라 이상하게 희주도 해진도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곁의 해진을 고쳐 안고 제영이 키스했다.
"뭐예요, 갑자기."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리가 없었다. 술을 반병쯤 비웠을 무렵 해진이 왜 그렇게 울적해 보였는지 대충 이해하게 되었다. 큰형과 셋째 형 사이의 복잡다단한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얼핏 비숫한 이야기를 뉴스에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TV나 신문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제 앞에 이렇게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땀이 나서 젖은 그의 앞머리를 제영이 정돈해 주었다. 그런 별 의미 없는 짓에도 해진은 즐거워했다.
"해진 씨는 어느 쪽이에요?"
"뭐가요?”
"형들이 싸운다면서요. 그중에 어느 쪽인데요"
"아, 큰형이죠. 전 큰형한테는 자식 같은 동생이거든요. 다들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한다고들해요. 근데 딱히 어느 편이라고 말하는 건 애매해요. 어차피 전 쭉정이거든요. 그냥 싸움 구경하는 옆 동네 돌멩이 같은 거죠. 그게 궁금했어요?"
제영은 첫째와 셋째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모르겠지만 제 품 안의 남자가 더 센 편이었으면 했다. 떨어지는 콩고물 때문이 아니라, 쉽게 들떴다가 풀이 죽곤 하는 남자의 예민함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사람을 걱정할 신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샤워할 때 뭐 썼어요? 파란 통에 든 거 썼어요?”
해진이 제영의 목덜미에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글쎄, 뭐였더라. 왜, 이상한 냄새 나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충 손에 잡히는 걸로 샴푸를 하고, 그 옆에 있는 걸로 몸을 씻었다.
"아니, 그냥. 좋아서."
그가 목덜미를 빨았다. 빨아들이는 힘이 강했다. 해진은 자꾸만 제영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얼마 전에 세수하며 발견한 키스마크가 아직도 연하게 남아 있었다. 보이지도 않던 뒷덜미에도 있었는지 희주가 물어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난 리가 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 애인은 알레르기라며 얼버무리는 제영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철렁하는 경험이었다.
"살살해요."
제영이 말했다.
"왜, 싫어."
이번에는 이를 세워 깨물었다. 따끔한 감각이 쇄골 부위에 퍼졌다. 해진의 손이 잠옷 아래로 파고들어 왔다. 그의 몸이 제영의 다리 사이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제영이 소파에 몸을 묻고 다리를 벌렸다. 부스럭대는 소리 후에는 따끈하고 물컹거리는 것이 제영의 성기를 감쌌다.
이건 또한 익숙한 행위였다. 능숙하게 자신의 쾌감을 이끌어내고 중간중간 야하게 올려다보는 것도 곁들여졌다. 아주 훌륭한 애피타이저였다. 부끄러운 정도로 빨리 토정했다. 제영도, 해진도 얼굴이 붉었지만 제영이 훨씬 더 심했다. 입가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해진이 술로 입을 헹궈 내었다. 그리고 남은 술을 제영의 잔에 부었다. 식전주치고는 씁쓸했지만 제영은 냉큼삼켜 버렸다. 더 기대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봉사라고 불러도 문제없을 정도의 애무를 받으면서 제영이 신음을 참아 보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건 나름대로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도였지만 누구 하나 알아줄 일은 없어 보였다. 자신조차 그랬다.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리고 있기만 하면 키스해 주고 절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편했다. 편한 와중에도 즐거움은 모자람이 없었다.
그와 육체적으로 부딪칠수록 제영은 이 쾌락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네가 원했잖아. 그러니까 난 책임지지 않을거야.
이런 마음이기도 했다. 이성적으로 그게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처리한다면 눈앞의 기쁨을 놓칠 수도 있었다. 제영은 그럴 수 있을 만한사람이 아니었다.
엎드린 채로 조금 기다리다 보면 해진이 사정하고 허벅지 안쪽이 젖어 온다. 불편한 자세고 팔이 아파 왔지만 제영이 가장 불안한 건 그부분을 해진에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불은 모조리 끈 채였지만 어둠에 익숙해지면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꺼려지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짓을 저지를까싶어 안절부절못했지만 이제는 '이 정도는 참아줄 수 있지' 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잠자코 그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꺼림칙한 마음이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다.
제영이 몸을 완전히 늘어뜨리고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자요. 내가 닦아줄 테니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편리한 상대였다.
뜨뜻미지근한 수건이 몸을 훑고 다리 사이를 훔쳐 내었다. 잠이 들락 말락 한 상태였다. 해진 이 바로 앞에서 제영을 응시했다. 제영은 시선에서조차도 온기를 느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잠이 안 와요?”
여전히 말똥말똥해 보이는 해진에게 제영이 물었다.
"내일 출근하죠?"
"네. 왜요, 해진 씨는 안 가요?"
"짜증 나서 안 가려고 했는데 어차피 그래 봤자 당신이 출근해 버리면 소용없잖아. 안 가면 안 돼?"
"안 돼요."
제영은 회사에서의 자신이 말도 없이 결근한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금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어리광쟁이 도련님 같은 취급은 기대할수조차 없었다. 해진의 팔이 불쑥 제영의 어깨를 끌어안아 왔다.
"내일도 와."
"내일 되어 봐야 알아요."
말끝이 흐려진다. 정말로 곧 잠에 들 것만 같았다.
“우리 그냥 같이 살아요."
같이 살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제영의 대답은 하나였다. 하지만 제영은 대답 대신 이불 속으로 숨어 해진의 가슴에 들러붙었다. 이불 속이라 답답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상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리듬의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눈을 감고 들으면 꼭 애인의 것 같기도 했다. 뭐라 이야기가 들렸지만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만큼은 그의 애정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겼다. 타인으로부터 쏟아지는 맹목적인 애정은 무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한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거기다가 해진은 제영에게 상상의 포만감과 현실의 만족까지 같이 주고 있었다. 아이를 재울 때처럼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해진은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잠든 제영에겐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
곤히 잠들어 있던 제영이 눈을 떴다. 배에 둘린 해진의 팔을 풀고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어보았다. 화끈거리는 게 아주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서조차도 배와 아래를 긁고 있었다. 평소보다 간지러움이 더 심한 느낌도 들었다. 이미 들뜬 부위를 해진과 함께 문질러 댄 탓이 컸다. 자신의 집이 아니었기에 바르는 약도 먹는 약도 없었다. 제영은 참고 자 보려고 했지만 몸이 괴로워 들썩대는 것은 참지 못했다. 결국 옆자리의 사람을 깨우고 말았다.
"제영 씨?”
해진이 제영을 불렀다.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이라 안 그래도 조용한데 옆에서 부스럭거렸으니 깨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래요?”
"그냥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해진이 제영에게 해 줄 수 있을 만한 것은 딱히 없었다. 일단 지금은 참았다가 출근한 다음에 잠깐 병원에 다녀와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잠자코 있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손으로 긁지도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삑,하고 소리가 났고 침대 주변이 살짝 밝아졌다. 해진이 침대맡 조명을 켠 것이었다. 눈이 부셔서 제영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영 씨, 배가 왜이래요?”
정사 후에 그대로 잠이 들었으니 제영은 속옷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배를 숨기지 못했다.
"알레르기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
"아까 술 때문에 그래요?”
씁쓸한 향이 뭔가 목에 걸린다 싶었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났다. 이런 사고가 익숙한 제영과는 달리 해진은 좀 심각한 얼굴이었다. 해진이 두 번째 조명을 켰고 제영이 누운 침대가 더 밝아졌다. 해진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제영의 배에 살짝 손을 대었다. 그것조차도 민감해진 피부에는 부담스러웠다.
"혹시 로션 같은 거 있어요? 향이 강하지 않은 걸로요."
이대로라면 출근해서 제대로 앉아 있기도 어려을 것 같았다. 이미 배뿐만이 아니라 아래에까지 제대로 퍼진 상태였다. 해진이 제영을 뺜히 보며 살피려고 들었다. 제영은 그런 시선이 민망해 이불로 몸을 가렸다. 잠깐 자리를 비운해진이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욕실에서 본 통중에 하나였지만 사용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이런 것도 괜찮아요?"
향이 은은했고 통 너머로 출렁거리는 액체를 보니 약간 물에 가까운 로션이었다. 이거라도 발라야겠다 싶어 손으로 꾹 눌렀지만 이상하게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은 내용물이 훤히 보이니 다쓴 것은 분명 아니었다.
"이리 줘 봐요."
그가 뚜껑 부분을 살짝 돌렸다. 달칵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해진의 손바닥 위로 묽은 액체가 쏟아졌다. 넘친 것들이 이불에 뚝뚝 떨어졌다.
"이불 치워 봐요."
말릴 순간도 없이 그가 제영의 배를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것들이 배에 발렸다.
"제가 할게요."
제영은 민망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딱히 마다하지 않았다. 제영의 말대로 그는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거의 마찰 없이 제영의 피부에 로션을 발라 주었다.
"이제 됐으니까 그만해요."
해진이 하는 양을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기도 뭣했다. 제영이 그의 손을 살짝 떼어 내고 다시 이불을 끌어당겼다.
"뭐 해요!"
하지만 이불은 냉큼 빼앗기고 이제는 한 장입은 팬티마저도 빼앗길 위기였다.
"밑에도 발라 줄게요. 가만있어 봐요."
제영이 나름대로 서툰 저항이라도 했건만 속옷은 지켜 내지 못했다. 허벅지를 지나 무릎 직전까지 부은 것을 보고 해진의 표정이 점점 더심각해지고 있었다. 당사자인 제영이 못내 민망할정도였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혹시 쇼크 같은 거 오는 거 아니에요?"
"그런 적은 없어요.”
이미 반은 포기한 상태로 그에게 아래를 내주고는 제영이 말했다. 이미 익숙해져 제게는 그저 귀찮고 짜증 날 뿐인 일인데 처음 본 사람들은 징그럽다며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아래를 훤히 보이는 상대는 소수의 애인 정도였고 그들은 그저 몇 번 긁으며 잠을 설치는 것으로 끝나는 걸 알았기에 곧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해진은 처음이라 그런지 무척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보습제 덕분인지 후끈함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 그만 됐다 싶었는데, 이상한 부위까지 해진이 손을 대었다.
"거긴 됐어요.”
하지만 해진은 못 들은 것처럼 제영의 다리를 더욱 활짝 벌렸다. 침대 조명등만이 유일한 불빛이라고 해도 꽤 밝은 편이었다. 그런 식으로 다리를 벌리면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곳까지 훤히 보일 게 분명했다. 제영이 다리를 오므리려고 해 봤지만 그 전에 해진이 제영의 한쪽 무릎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부위에 뭐라도 있나 싶었지만 달려야 할 것들만 있을 뿐, 딱히 다른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알레르기 얘기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두드러기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건 좀......"
해진으로부터 알레르기에 대한 감상이나 듣기에는 자세며 상황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질척한 게 아래에 닿았다. 로션이 듬뿍 묻은 해진의 손가락이었다. 설마 했다. 설마 그런 짓을 할 까 해서 긴장을 풀고 있었다.
"당신 그거 알아요? 여기 안쪽까지 새빨갛게 부어 있어."
당연히 몰랐다. 거기까지 볼 필요성을 느낀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해진은 다른 모양이었다. 슬슬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팬티를 벗기기 전에 그만두게 했어야 했다. 제영이 슬쩍몸을 빼냈지만 해진의 손이 더 빨랐다. 불쑥 무언가가 닫힌 살을 밀어내며 안으로 미끄러졌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란 아래가 꽉 수축했다.
그와 동시에 제영이 해진을 밀치고 도망갔으니 더 이상의 진입은 없었다.
"미안해요. 놀랐어요?”
제영이 화를 내기도 전에 해진이 사과를 했다. 제게 정성스레 로션을 발라 줄 때와 같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고 얼핏 본 그의 하반신이 살짝 서 있는것 같기도 했다. 그걸 제대로 확인할 마음도,그럴 겨를도 없었다. 제영이 이불을 손에 쥐고 몸을 둘둘 싸매서 침대 끝으로 피신을 했다. 아직까지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옷 입어요. 난 손 좀 씻고 올게요."
제영은 해진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팬티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잠옷도 챙겨 입었다. 일단 경계 태세를 취하기는 했지만 그가 다시 돌아오면 어찌해야 할지 걱정됐다. 지금이라도 집에 갈까 하고 힐끔힐끔 방문을 계속 보았다.
하지만 한참 만에 돌아온 그는 제영의 상태를 걱정해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누워잠을 청했다. 겨울밤에 맨몸으로 잘 수는 없어서 결국 한 이불을 덮긴 했는데 여전히 가슴이불안으로 콩닥거렸다. 아예 등을 돌린 그는 잠잠했지만 제영은 여전히 아까의 일이 신경 쓰였다. 괴상스레 초조해져 잠도 오지 않았고 로션때문에 다리 사이가 미끄덩거려 마음이 더 착잡해지기만 했다.
* * *
"아마 큰 문제가 없다면 다들 일성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 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담당자가 그렇게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아직 김칫국마시기에는 이르지만 담당자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거기다가 이사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상무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미팅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몇 번 본 얼굴들이 친밀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미팅은 끝이 났다. 곧 있을 최종 계약을 기대하며 다들끈끈한 사이처럼 악수를 나눴다.
로비까지 제영의 일행을 안내해 주기 위해담당자가 앞장섰다. 횐 타일 바닥 위로 검은 힐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높은 구두를 신고도 런 웨이의 모델처럼 발걸음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제영은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시끄럽다기보다는 리듬을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시간이면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아서요. 계단으로 내려가시죠."
어차피 고작 4층이라 괜히 오래 기다려 사람들 사이에 끼여 타는 것보다는 그냥 널찍하게 계단으로 내려가는 편이 편했다.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시원시원한 발걸음처럼 제영의 발걸음 역시 가벼웠다.
자신의 배들이 천천히 순항하고 있다. 희주와의 결혼 준비도 회사 일도 별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계약을 따내고 결혼을하고 정해진 루트를 죽 따라갈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인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해진에 관한 것만큼은 여전히 문제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하는 이 관계에 관해 제영이 아는 것이라고는 딱 하나뿐이었다. 이걸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침몰할 배였다. 게 다가 항상 주기만 하는 그가 언제까지 그런 봉사를 감내할지 모를 일이었다. 해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느리지만 천천히 하나씩 요구를 늘려 가고 있었다. 몸을 움츠릴 때마다 해진이 즐거워하며 간지럽히던 제영의 가슴팍이 지끈거렸다.
"어머."
앞장선 사람들과 내려가던 그녀가 갑자기 멈춰 섰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아예 중앙으로 연결되어 있어 1층 로비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난처한 표정의 HS 쪽 사람들을 보니 로비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 말고 동편 계단 쪽으로 가야 하겠는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에도 발길을 돌리지 않고 슬쩍 난간에 기대 1층의 상황을 살폈다.
다들 다른 곳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아래의 상황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 호기심은 일성 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영 역시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세상 제일 재미있는 것이 남의 싸움 구경이라고 했다. 두 남자가 마주 서 있었는데 어쩐지 모르게 다들 말리지를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경비들조차 비슷했다. 제영은 저러면 인사 고과에 불이익이 있을 건데 혈기를 주체 못 한 신입들인가 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키가 작은 남자가 선공을 날리려나 싶었다.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웅성댔다. 그러나 그 공격은 몸을 슬쩍 피한 상대 탓에 먹살잡이에 그쳤다. 그게 분했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큰 키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 넓은 어깨, 허리를 흩고 내리는 날렵한 선,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한 뒤통수. 제영은 보이지 않았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놀라 뒷걸음치는 통에 뒤에 있던 동혁의 발을 밟았지만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왜 안말리는 거야.‘
제영은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자신이 냉큼 내려가 저기에 낄 수는 없었다.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상대에게 악이 받쳤는지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해진은 살짝 밀렸을 뿐 얼굴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이 살짝 방향을 돌려 2층을 올려다본 순간, 그의 심드렁한 표정은 금세 무너졌다.
'봤다.'
날 봤어. 제영은 놀라 몸을 확 물렸다. 해진의 시야에 더 이상 자신이 잡히지 않도록.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넥타이를 한 목이 까슬했고 파일을 쥔 손에는 땀이 찼다.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던 해진의 표정이나 셔츠에 쓸려 붉어진 목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갈까요?"
다들 더 구경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녀의 말에 딱히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 상황을 뒤로하고 동편 계단으로 향하는 중에 뒤에서 더 큰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또 무슨 재미난 상황인가 하고 귀를 쫑긋했지만 제영은 귀를 막고 싶었다. 무거운 마음에 발걸음마저 축축 처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배 차장이 신기한 구경을 했다며 입을 털었다. 운전 중인 동혁은 입을 다물고 있어 제영이 맞장구쳐 줄 수밖에 없었다.
"그거 알아? 그 팀장이 회장 본처 자식이 아니라, 세컨드 아들이래. 근데 그렇게 그 여자를 좋아해서 결국 본처랑 자기 아들로 올렸다고 하더라.”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제영이 묻자 배 차장은 뭔가 은밀한 것을 보여 준다는 식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의 핸드폰에는 아직도 카메라를 가리는 HS의 보안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내가 보내 줄게."
한창 핫하다는 소식에 뒤처진 제영에게 큰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배 차장이 말했다. 제영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배 차장의 것과 마찬가지로 보안 스티커를 떼어 내지 않은 상태였고 정신이 없어 전원을 켜지도 않았다.
"이거 수리 안 할 거야?”
액정 화면이 박살 난 제영의 핸드폰을 보며 배 차장이 물어 왔다.
"나중에요. 지금은 시간 없어요."
핸드폰이 켜지자마자 수신 확인이 되지 않은 문자가 떴다. 상단에 뜬 보낸 사람 이름을 보자 마자 제영이 숨을 멈췄다.
[오늘 얼굴 좀 봐요.]
"봤어?”
"예? 아, 나중에 볼게요."
그러나 꺼려지는 마음에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배 차장이 보내 준 그 재미나다는 찌라시도 해진의 문자도 일단은 뒤로 미뤄 두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뤄 결국 퇴근하고 집에 온 후에도 쉬이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 벨소리를 진동으로 바꾸고 다시 무음으로 설정해 둔 채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TV 채널만 이리저리 돌려댔다.
하지만 뭘 틀어 두어도 다 소음이었다. 핸드폰만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남의 핸드폰을 훔치는 것처럼 슬금슬금 자신의 것에 손을 뻗었다.
배 차장이 보내 준 것은 시시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세컨드, 막내아들,불만.'
말인즉슨 회장 세컨드의 자식이 경영 일선에 등장한 것에 아주 불만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회장을 등에 업고 형들의 몫을 욕심내고 있어아주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삼류 막장 드라마에나나올 법한 내용이 전부였다.
"진짠가.”
제영이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렇다해도 출처도 불분명한 것들의 진위를 자신이 판단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직접 물어보는 것이 제일 명확하겠지만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미 침몰한 걸지도."
자신이 침몰시키고 어쩌고 할 상대가 아니었다. MSG가 듬뿍 들어간 통속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이미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며 가라앉은 상태일지도 몰랐다.
'드라마에 이런 여주인공이 나오면 사람들이 어떻게 했더라.‘
보통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주인공을 괴롭히던 무리를 내쫓고 여자를 위로해 주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났다. 하지만 해진은 그런 드라마에 나올 법한 가난하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영 역시 왕자라고 봐 주기는 어려웠고 거기다가 괴롭히던 무리를 내쫓아 주기는커녕 도리어 뒷걸음치고 도망쳤다.
새 메시지가 도착하자 전면 버튼의 LED가 번쩍였다.
[오늘 못 와요?]
제영은 답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몇 줄 적었지만 보내지는 않았다. 오늘 밤 그를 위로해주며 곁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떠날 몸이었다. 핸드폰을 엎어 두고 제영이 침대 위로 올라가 뒤척거렸다. 머리가 아파 왔다. 그를 만나러 갈까, 말까 선택을 뒤집을 때마다 몸도 같이 좌우로 굴렀다.
몸이 오른쪽을 향했을 때 뒤집어진 핸드폰밑바닥에서 또다시 불이 반짝였다. 제영이 몸을 일으켜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제영의 생각에 해진은 이미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배였다.
자신의 존재가 그를 더 밑바닥으로 이끌 만큼의 존재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까이런 순간만큼은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 볼 일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헛짓을 해 댄 터라셔츠와 바지는 잔뜩 구겨진 채였다. 그걸 대충코트로 가리고는 가방과 핸드폰을 챙겼다. 해진 에게는 퇴근하자마자 튀어 왔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현관에서 구겨진 구두에 발을 쑤셔 넣고 머리를 대충 빗어 넘겼다. 가기로 결정했지만 망설이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때, 문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전자 키를 열고 번호를 누르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제영은 결국 기다리다 지친 해진이 여길 찾아온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 열리는 소리 대신, 경보음이 났다. 제영은 그새 해진이 번호를 잊은 건가 했다.
"잠깐만요."
얼른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밀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희주였다.
"문이 안열리던데, 비밀번호 바꿨어?"
"응, 얼마 전에 바꿨어."
"그래? 근데, 지금어디 가?"
"아니. 그냥 편의점 좀 가려고 했는데,안 가도 돼.”
애인은 너저분한 방 안을 보며 인상을 살짝찌푸렸다. 그러고는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서랍장에 올려 두었다.
"어쩐 일이야? 갑자기."
"근처에 왔다가, 또 집까지 가기 그래서 그냥왔어. 밥은 먹었어?”
제영의 집이긴 하나 그녀가 수십 번도 더 와본 곳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조금도 헤매는 것없이 익숙하게 필요한 물건을 찾아 꺼냈다.
"뭐 해? 계속 그렇게 서있을 거야?”
애인과는 오랜만이었다. 속옷을 벗겨 내는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불 위에 퍼진 기다란 머리카락과 몸 아래에 닿은 볼륨감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런 건 티 낼 수 없었다. 동그랗고 작은 어깨가 품 안에 다 들어왔다. 절정을 앞에 둔 상대의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끝이 나자마자 제영은 얌전히 내려와 그녀의 옆에 몸을 뉘었다.
"여기 계약이 내년 초까지였던가? 집주인한 테 말은 했어?”
"응, 결혼할 거니까 계약 연장 안 할 거라고."
"이 집 보증금하고 내 거랑 해서, 대출 좀 받고 하면 작은 전세라도 구할 수 있을까."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리고 셈을 하고 있었다. 제영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대답하긴 했지만 자꾸만 자기도 모르게 현관을 보았다. 현관 옆에 둔 가방에는 자신의 다 부서진 핸드폰이 있고 그 안에는 자꾸만 신경 쓰이게 만드는 남자가 보낸 메시지가 잔뜩이었다.
애인은 금방 잠이 들었다. 제영은 오늘은 포기하고 내일 그에게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눈을 감았다. 애인이 숨을 내쉬고 들이 쉴 때마다 얼굴이 간지러웠다. 유독 오늘따라그게 의식되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제영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몰래 침대에서 내려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통화가 6통이나 와 있었다. 오늘 오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것과 전화라도 해 달라는 문자도 있었다.
알몸으로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눈부신 것도 참고 실눈을 뜬 채로 한참을 바라보던 제영이 결국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뭐 해? 어 디 가?”
잠에 들었다 깬 애인이 물었다.
"미안, 갑자기 회사에서 연락이 왔네. 공장에서 또 일이 터졌나 봐.”
"지금 꼭 가야 돼?”
"응, 급한가 봐. 미안."
그녀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제영은 얼른 신발을 신고 차 키와 가방을 챙겼다. 내려가면서 해진에게 전화를 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잠이 든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대한 빨리 가 봐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영하의 겨울 날씨도 지금만큼은 전혀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막상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벨을 눌러도 굳게 잠긴대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전화는 받지도 않았고 내부에서 새어 나오는 빛도 없어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제영은 이리저리 해진의 그림자라도 보려고 껑충댔지만 꼴만 우스웠다. 남의 집담장을 기웃거리는 모습은 도둑이라고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담을 넘어 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 경비 시스템이 작동되기라도 하면 그건 그거대로 바보 같은 일이었고, 이 나이에 할 짓도 아니었다.
'이제는 좀춥네. 그냥 갈까.'
제영은 핸드폰을 꺼냈다. 설상가상으로 배터리도 거의 없었다. 마지막 시도라도 하는 셈 치고 다시 한번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희주와 있다가 아침에 다시 연락을 해 보는 게 좀 더 나았을 듯했다. 그렇게 했다면 연락을 받든 말든 이 새벽에 남의 집 앞에서 스토커처럼 얼쩡대지 않아도 됐었다. 이미 흥분은 완전히 가라앉아 찬 바람이 살을 에어 낼 듯했다. 제영이 손을 비비며 다시 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하며 대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무슨일인가 싶어 집 안을 살펴봐도 처음과 다를 게 없었다. 정원을 지나 현관에 도착했다. 이게 두번째 관문이었다. 여긴 대문보다 더 쉬웠고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안의 온기에 금세 제영의 몸이 녹았다.
"해진 씨?"
불 꺼진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주변 가구에 부딪히기 않기 위해 더듬더듬 걸으면서 이름을 불러 봐도 대답은 없었다. 거실에 가방을 내려 두고 그를 찾아 헤맸다. 혹시나 경비 시스템 오류로 우연찮게 문이 열린 것이고 자신은 주인도 없는 빈집에 들어온 건 아닐까.
제영은 제 앞에서는 순진한 척,지고지순한 척하는 그가 사실은 준성이 한 말대로의 인물이고 이참에 다른 남자를 찾아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의 방문 앞에 도착해서도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정말로 그가 없다면 자신의 의심을 사실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확인은 해 보고 싶었다.
"해진 씨, 여기 있어요?"
제영이 방문을 열고 그가 있는지 살폈다. 방역시 어두웠고 침대는 문에서 멀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없는 건가하고 실망하는 순간,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있다.'
제영이 침대맡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이불끝에 머리카락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해진 씨, 저 왔어요."
제영이 손을 뻗기도 전에, 이불 속에 숨겨져있던 얼굴이 보였다.
"지금이 몇 시예요?”
당연히 '술이라도 했겠지' 하고 예상했으나그가 뱉는 숨은 청결하기만 했다. 제영은 해진 이 정말로 시간이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란것쯤은 알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나 회사에서 그 꼴인거 봤으면 그 자리에서 쫓아오지는 못해도, 당연히 퇴근하자마자 나한테 달려올 줄 알았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갑자기 아는 분이 상을 당하셨다고 해서 거기 갔다가 오느라."
"아아, 그러시겠죠."
그가 다시 이불을 덮어 버렸다. 뼐쭘하고 어색한 순간이었다. 담장 너머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불쌍해 문을 열어 주긴 했어도 그게 전부였던 건가 했다.
옆을 서성이며 해진의 이름을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상대에게 무시당하는 건 똑같았다. 애인을 홀로 두고 달려왔어도 고작 이런 신세인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돌아가야 되는 건가 하고 한숨을 푹내쉴 때였다. 갑자기 해진이 제영을 잡아당겼다. 방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영은 그대로 끌려가 침대에 눕혀졌다.
키스에도 감정이 있다면 이건 분명 화난 키스였다. 입술을 깨물고, 날이라도 있는 것처럼 혀를 세워 입 안 여기저기를 긁어 댔다. 입술이 따가울 정도가 되어서야 그 행위는 끝났다. 하지만 그건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잠깐만, 잠깐만."
제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런 전개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몸이라도 씻고 애인의 흔적을 지우고 왔을 것이다. 아직도 몇 시간 전 정사의 진득함이 몸에 남아 있는데 이 상태로 해진과 뒹군다는 것이 꺼려졌다. 제영이 몇 번이고 말려도 해진은 자기 할 일에만 충실했다. 제영이 해진의 어깨를 잡고 민 순간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제영은 해진 이 그제야 제 말을 들을 생각인가 싶어 가슴을 쓸어내 렸다.
그러나 해진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제영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그건 화난 얼굴도 아니었고 다음에 이어질 쾌락을 탐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제영은 덜컥 겁이 났다. 그는 남을 위협하는 중이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얼굴로도 충분히 제영을 겁먹게 하고 있었다.
"왜, 왜 그래요?”
해진이 몸을 숙이자 제영의 목덜미에 그의 숨이 닿았다. 뭘 하려는 것인지 몰라 제영이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향수 뿌렸어요?”
"아니요."
"뭔가 평소랑은 다른 냄새가 나요."
그가 다시 한번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들이켰다.
"상갓집 향냄새가 배었나 봐요. 땀 흘린 것도 있을 거고. 샤워라도 하고 올게요."
해진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제영을 보았지만 지금 이걸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냥 해요.”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제영을 다시 침대로 밀쳤다. 해진이 제영의 목덜미를 입술로 누르고 옷을 하나씩 벗겨 내기 시작했다. 제일 두꺼운코트부터 바닥에 던져졌다. 그 다음은 벗겨 내기도 귀찮은 마음인지, 아니면 이건도 하나의 감정 표현인지 거칠게 셔츠를 밀어 올리고 바지에 손을 대었다.
해진이 제영의 배꼽 주변 피부 위로 혀를 움직였다. 제영은 저 입과 혀가 주는 쾌락이 얼마나 뜨겁고 몸을 떨리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해진이 이미 벨트를 풀고 속옷 위로 제영의 것을 꾹꾹눌러 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속옷마저 벗겨 내고 그걸 할 기세였다.
궁지에 몰린 제영이 해진을 세게 밀쳤다. 얼마나 세게 밀어냈는지는 해진의 얼굴을 보면 충분이 가늠할 수 있었다. 아차, 싶은 제영이 그를 당겨 안고 말했다. 딱히 생각을 하고 내뱉은 건 아니었다.
"오늘은,오늘은 내가 할게요."
말을 하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바닥에 무릎 꿇은 채로 그의 다리 사이를 눈앞에 마주했을 때 더 확고해졌다. 제영은 지금 반쯤 벗겨지다 만 상태였다. 셔츠는 다 나와 있고 벨트는 풀린 채 내려간 지퍼사이로 속옷이 보였다. 본의 아니게 침대 이불에 머리를 문질러 댔으니 머리가 꼭 방금 자다일어난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올려다본 해진은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차 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대 조명등을 두 개나 켜서 그의 눈동자가 더 확실하게 보였다.
"불 좀 끄고 하는게 어때요?"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해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접었지만 제영은 이렇게 밝은 상태에서 남의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해진이 조명등 불을 하나 껐다. 아까보다 나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해진이 제영의 어깨를 잡고 살짝 끌어당겨왔다. 빨리 해 달라는 재촉이었다. 제영은 마른입안을 침으로 적셨다. 몇 시간 전 애인의 몸을 오간 것을 해진의 입으로 하게 하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은 건지는 애매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제영이 해진의 것에 손을 댔다.
헐렁한 잠옷 위로 이미 반쯤 단단해진 것의 노골적인 감촉이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그 작은 손길만으로도 해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다시 한번 제영을 재촉했다. 제영이 해진의 바지와 속옷을 잡아 내렸다. 몸으로는 익숙했지만 눈으로는 낯선 해진의 성기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제영이 손끝으로만 살짝 성기를 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같은 남자의 물건을 한 번에 삼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차 단단함의 정도를 높여 가며 입안에서 부푸는 게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적나라했다. 혀끝에 씁쓸한 맛이 나자 마자 제영이 해진의 것을 뱉어 냈다. 제영이 눈을 뜨고 해진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제영 자신이라면 이렇게 서툰 행위를 더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해진 역시 마찬가지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진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열등생에게 따로 개인 교습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영에게 말했다.
"바로 삼키려면 힘들어요. 그러지 말고 옆면부터 해 봐요."
해진이 제영의 넥타이를 끄르고 단추도 두어개 풀었다. 벌린 셔츠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갈고리처럼 손으로 제영의 목덜미를 감아당겼다. 어서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제영은 해진의 말대로 성기의 옆 부분부터 시도해 보았다. 이번에는 눈을 뜨고 했다. 하지만 검고 무성한 타인의 음모를 눈앞에서 관찰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들이 뺨을 긁을 때마다 제영은 다시 눈을 꽉 감았다. 왼쪽도, 오른쪽도 이미 다 훑은 후였다. 별것 하지 않았음에도 해진의 것은 끝까지 발기한 상태였다. 곧사정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다시 입 벌리고 끝만 집어넣어 봐요.”
어서요. 이번에도 제영이 주춤하자 해진이 가볍게 제영을 다그치며 말했다.
매끈하면서도 뭉툭한 그 부분이 예민한 입안의 점막들을 자극했다. 좋은 의미로의 자극은 아니었다. 해진이 말한 대로 혀로 끝을 꾹 눌렀다. 뭔가 울컥 쏟아질까 걱정되었다.
"나올 것 같으면 말해 줘요"
해진의 것을 다시 뱉고 제영이 말했다. 해진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상태를 보니 신뢰가 가지 않았다. 두 손을 해진의 양 허벅지에 올리고 몸을 지탱하던 제영은 해진이 자신의 왼손을 잡아당기자 휘청했다.
"욱."
순간적으로 깊이가 깊어져 입천장을 찔렸다.
바로 빼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해진이 제영의 목덜미를 잡아채 누르고 있었다.
"하아.”
만족스러운지 위에서는 해진이 간드러지게 숨을 내쉬었다. 제영이 자유로운 한 손으로 해진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놓아 달라는 의미였지만 무시당했다.
"나 오늘 되게 서운했어요."
어디까지 들어가는 건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제영이 계속 윽,윽 하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날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게 어디 있어요.”
생리적인 고통과 반사 작용 탓에 제영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하지만 감정적인 것이 아예없는 것은 아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데, 당신이 이러니까 화를 못 내겠잖아요"
뒷덜미를 누르던 힘이 없어지자마자 제영이 고개를 들었다. 안쪽 깊숙이 압박하던 것이 없어지자 기침이 계속 터져 나왔다.
“미안,힘들었어? 여기까지만 할까?”
해진이 바닥의 제영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때까지도 제영은 잔기침을 멈출 수 없었다.
"다음엔 더 잘해 줘요."
해진이 제영의 뺨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제영은 그렇게 말하는 해진에게 항의하듯 어깨를 세게 때렸다. 하지만 해진은 아파요, 하며 애교를 부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귀엽지 않은 애교였다. 제영은 입안이 얼얼했다. 이렇게 진력이 빠지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를 한 번 더 때려 줄까 하던 중에 해진의 목아랫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긁힌 것처럼 겉부분의 살만 얇게 일어난 채로 살짝 부어 있었다. 마음이 약해진 제영은 때리는 대신 해진의 목을 더듬었다.
"아, 이거? 괜찮아요. 이 정도야 일도 아니죠."
해진이 제영을 안은 채로 침대 위를 굴렀다.
"다행이다. 당신이 와서. 안 왔으면 큰일 날뻔했어."
누구에게 큰일인 것인지 불명확했다. 해진은 아까와는 달리 생글거리고 있었다. 제영은 그얼굴을 보면서 목의 따가움을 애써 잊으려 했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경험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입안이 아직도 썼다. 해진이 제영의 옷을 마저 벗기고 자신의 옷도 내던졌다. 무슨 짓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잠들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품 안의 제영을 무척이나 소중한 것처럼 끌어안아 왔다.
"정말로 다행이야. 당신이와 줘서."
누가 들어도 행복에 겨운 게 분명하다고 말할 만한 목소리였다. 제영은 속으로 역시 오길잘했다고 중얼거렸다.
잠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때가 늦었고 생소한 경험이 준 충격에 각성제라도 들이 켠 것처럼 정신이 또렷했다. 하지만 해진이 계속 제영의 맨등을 어루만지며 뺨을 쓸어 주었다. 각성의 효과를 무마시키려는 듯한 그 행동들이 달콤하게 제영을 재웠다.
"해진 씨는 출근 안 해요?"
"그 난리가 있었으니까 한 일주일 정도는 잠수 타도 별말 없을 거예요."
해진은 제영의 차 앞까지 마중 나왔다. 얇은 카디건만 걸치고 안에는 여전히 연한 푸른색의 잠옷을 입은 상태였다. 차를 타고 출발하려는데, 그가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창문을 내리자 그가 몸을 숙여 제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나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제영이 긴장했다. 밖에서의 접촉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퇴근하고 바로 와요."
해진이 제영의 입가를 매만졌다.
"오늘은 당신이 싫어하는 일 말고, 좋아하는 것만해 줄게요?'
제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싫어하는 일이 뭘말하는 건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피할 순간도 없이 해진이 제영에게 입을 맞췄다.
"밖에선 이러지 말아요."
제영이 곤란한 얼굴로 해진을 나무랐다.
"뭐어때요. 아무도 없어요."
웃고 있는 그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가 이내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제영은 차를 출발시켰다. 거울에 비친 그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영이 거울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건지 손을 흔들었다. 가슴이 지끈했다. 그를 사랑하여 그런 것은아니었다.
새벽녘에 헐레벌떡 뛰어와 그의 웃는 얼굴을 본 것은 기뼜다. 하지만 자신이 왜 기뻐해야 하는지, 그게 맞는 것인지는 햇갈렸다. 자신이 그에게 가지는 의미오ㅏ, 그가 자신에게 가지는 의미를 저울에 달아보면 한쪽으로 쏟아질 듯 기울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쪽이 아예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제영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애정을 발판 삼아 말도 안 되는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결혼한 후에도 몰래몰래 만나는 한심한 상상 같은 것들 말이다. 본처에 이어 남자를 세컨드 삼아 둘이 노닥거리는 것은 막장드라마에서조차 다루지 않을 이야기였다.
해진이 제영과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명확했다. 만나고 싶어 했고 같이 밥을 먹고 싶어 했고 키스하고 밤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영은 자신이 그와 무얼 하고 싶은 건지는 몰랐다.
해진에게 받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주말까지는 그의 집에서 같이 지내기로 약속했다. 쉬는 일주일 내내 함께 있자는 걸 줄이고 줄인 것이었다. 대충 옷가지와 속옷을 챙기려고 집에 들어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희주는 없었다. 그러나 마치 방금 전까지 있었던 것처럼 집안 곳곳에 그녀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널려 있던 옷도 한구석에 개켜져 있고 싱크대도 깨끗한것이 애인이 정리해 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내버려 두고 간 뒤에도 해진에게 정신이 팔려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의 통화와 문자내역은 전부 해진의 것이었다. 정작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는 소홀했었다. 제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어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아직 회사야?”
희주는 피곤한 목소리로 제영에게 어제 일은 잘 해결됐느냐고 물었다. 제영은 그렇다고 했다. 그녀가 걱정하는 대로 공장의 사고는 아니었지만 해진과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다행이네. 큰일이아니어서.
가슴이 아팠다. 애인이 해진과 똑같이 '다행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영은 지레 찔려 말을 더듬으며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점심은 먹었냐고, 누구와 먹었고 맛은 어땠냐고. 겁이났다. 왠지 희주가 자신에게 어제 자길 두고 어디에 간 것이며 누구와 밤을 보냈냐고 추궁할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거 봤어?
"뭘?"
-서랍장 위에 두고 간거.
제영은 그녀가 뭘 잊고 간 걸까 하고 고개를 돌려 서랍장을 보았다. 그녀의 목도리가 있던 서랍장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희주가 제영에게 가서 보라고 말했다. 전화하는 중에 해진에게 문자가 왔다. 해진의 문자는 저녁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그 집에는 먹을 만한 게 없을 테니 뭐라도 사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며 서랍장 쪽으로 가 보았다.
"아."
제영의 소리에 전화기 너머 희주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였어?”
-응. 어때. 괜찮지. 난 그대로 했으면 좋겠어.
재질은 마음에 드는데 색은 아이보리랑 화이트중에서 고르려고. 둘 다 괜찮지.
서랍 위에는 한 뼘만 한 작은 카드가 두 개 있었다. 그 위에는 예전에 얘기했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신부와 신랑이 귀엽게 그려져 있었는데, 남자 쪽은 어딜 봐도 자신을 닮은 것 같지 않았지만 신부는 애인과 웃는 게 비슷했다.
손에 닿는 감촉이 이상했다. 이상해 봤자 종이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종이임에도 묵직한 것 같았고 매끈하게 코팅된표면이 거칠거칠한 듯한 착각도 들었다. 제영은 해진이 자신에게 뭘 의미하는지 고민했던 것조차 한심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희주와 결혼하고 나서 남자를 만나는 바보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샘플이라는 애인의 말처럼 장소는 빈칸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그녀와 자신이 고민하던 곳 중에 한 곳으로 채워질 것이다. 누구의 딸에는 희주의 이름이, 누구의 아들에는 자신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기 어디에도 해진이 이름이 들어갈 곳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희주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려왔다. 해진이었다.
-언제 와요?
"금방 갈게요."
-챙길 게 많아요? 그냥 와도 되는데. 뭘 챙겨오는 거예요?
"출근할 때 입을 거랑 속옷 같은 거요."
-빨리 와요. 보고 싶어.
알겠다고 전화를 끊은 제영이 다시 짐을 꾸렸다.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정장 몇 벌과 셔츠를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속 서랍 안에 보관해 두었던 해진의 시계를 꺼내 들었다.
* * *
이미 여러 친구의 결혼식을 두루 가 봤지만 민우의 결혼식은 좀 더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티 내기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 반영된 탓도 있겠지만 그런 민우를 받쳐 줄 만한 신부 쪽의 재력 덕이기도 했다. 제영은 뺀질대며 남 깔보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 거슬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저 축하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긴장한 얼굴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머지않아 있을 자신의 모습과 겹쳐졌다.
"와 줘서 고맙다. 희주 씨도 고마워요.”
하객석에 앉자 친구들이 하나하나 인사해 왔다.
"어우,저 새끼 고르고 고르더니 장가는 잘 갔네. 이렇게 돈 냄새 나는 결혼식은 처음이다.”
형식이 제영에게 속닥이며 주변을 슬쩍 훌어보았다. 신부가 꽃을 좋아한 건지 다른 결혼식보다 꽃의 숫자나 종류가 많았다. 저게 다 돈이었다.
"너네는 청첩장 안나왔어?"
"응, 아직. 샘플만 받았어. 나오면 줄게."
신랑 다음에 신부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흰 면사포에 수줍은 듯한 얼굴을 하고 아래를 보면서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옆자리의 희주가 제영의 손을 꽉 잡아 왔다. 제영은 결혼을 앞 둔 그녀가 민우와 신부의 모습에서 자신의 결혼식 모습을 유추해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영도 그 둘의 얼굴을 자신과 희주의 얼굴로 바꿔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민우는 제영이라 하기에는 너무 야비한 얼굴이었고 그의 신부는 희주라고 하기에는 통통한 편이었다.
결혼식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희주와 함께 예약해 둔 식장에 가 보았다. 민우의 결혼식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주말이라 그곳에서 몇 개의 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희주와 제영이 예약한 곳도 다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둘은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슬쩍 보기만 했다. 이미 몇번이고 와 본 곳이었지만 식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괜찮았지?"
"응, 잘 고른 것같더라."
"날짜도 딱 맞춰서 예약할 수 있고 시설도 깔끔해 보이더라. 가격도 다른 곳보다 저렴한 편이고. 당신 말대로 적당한 곳 찾은 것 같아."
희주가 제영을 보았지만 제영은 운전하느라그녀를 같이 바라보지 못했다.
"당신은 나랑 결혼하고 싶어?”
"무슨 소리야. 결혼 안 하고 싶은데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고 나서야 제영이 희주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대화를 나눌 때의 표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조용한 차 안에 제영의 벨이 울렸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제영 대신에 희주가 폰을 꺼내 주었다.
"누구야?”
"이름은 없는데. 'HJ'가 누구야."
"아, 그러면 받을 필요 없어. 얼마 전에 알게 된 거래처 영업 사원인데 자꾸 술 한잔 하자고 전화하더 라고. 그냥 끊으면 돼."
제영이 희주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안주머니에 넣었다. 무음으로 설정해 두니 시끄러운 핸드폰은 금세 조용해졌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가 없을지라도 제영은 자기 가슴팍 안에서 여전히 핸드폰이 울려 대고 있을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거.”
그녀의 오피스텔 앞에 내려 주기 직전에 작은 종이 백을 건넸다.
"뭐야”
"뭐겠어."
제영이 종이 백을 열어 보았다. 일정한 개수씩 묶여 있는 종이 뭉치였다. 측면의 둘린 금테에 꺼내지 않아도 뭔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주지 그랬어. 형식이랑 애들한테 돌리게."
"남의 결혼식에서 그러는 거 꼴불견이야. 나중에 밥 먹으면서 정식으로 줘. 그게 나을 거야.
아버님이랑 어머님한테도 드려야 하니까 날 잡고. 난 엄마랑 상의해 보고 알려 줄게. 뭐,이미드리긴 했지만."
희주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제영은 청첩장을 꺼내보았다. 제 몫으로 넉넉잡아 200장정도 필요하다고 말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양이 꽤 많아 묵직했다. 이전의 빈칸은 말끔히 채워져 있었다.
제영이 품 안의 폰을 꺼냈다. 딱 맞춰 다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네, 오늘 친구 결혼식이라고 했잖아요. 거기 갔다 오는 길이에요."
"오늘은 말고, 다음에 갈게요."
제영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이내 펴졌다.
"알았어요. 갈게요."
제영은 결국 '못 가요'를 '가요'로 바꾸고 나서 한숨을 푹 쉬었다. 하루에 두 탕은 정말 원치 않은 일이었으나 해진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면 알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차를 그의 집 방향으로 돌리기 전에 제영이 종이 백을 조수석서랍 안쪽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건 숨기려는게 아니라 그저 잠깐 보관하려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희주에 대한 미안함을 지웠다. 제영의 차가 속도를 높여 제게 목매고 있는 불쌍한 남자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제영은 내리기 전에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오늘은 희주와 아무것도 한 게 없었지만 어딘가에 애인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봐 신경 쓰였다. 대충 한번 툭툭 털고 대문 앞의 벨을 눌렀다. 사실 벨을 누를 필요도 없었다. 이미 해진에게 현관까지 다이렉트로 열 수 있는 키까지 받은 상태였다. 추운 새벽에 자신을 담장 밖에 세워 둔 것이 괘씸해 살짝 툴툴거린 후에 받은 것이었다. 당연히 받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나올 때는 제영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의 집에서 잔 후 출근하면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선물 받은 것들을 그의 옷장으로 되돌려 놓고 그 정장 중 하나의 안주머니에는 값비싼 명품 시계도 숨겨 뒀다. 하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처럼 더 부담스러운것을 손에 쥐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의 원룸 비밀번호도 그가 알고 있으니 이거나 그거나 같은 걸로 칠 수도 있겠지만 시세 차이가 확연했다.
제영 쪽은 건물은 오래됐지만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조금 넓다는 이유로 들어가 살고 있는 낡은 원룸이었고 해진의 집은 땅값 비싼 부촌의 주택인지 저택인지 애매한, 아무튼 간에 비싸고 비싼 곳이었다.
방금 씻고 나온 것인지 해진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키를 줬는데도 자꾸 문 열어 달라고 벨을 누르는 이유가 뭐예요?"
그가 소파에 앉아서 불만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해요. 앉아요.”
해진이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제영은 막 샤워하고 나온 그가 품고 있는 습기에 옷이 젖어 드는 기분이 들었다. 해진이 소파에 기댄채로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봐요."
엑셀 데이터 시트였다. 제영이 익히 들어 본업체들마다 여러 항목으로 점수가 매겨져 있었다.
"이건.”
제영의 회사도 있었다. 여러 업체들 중에 상위 점수가 매겨진 것들이 진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일성이 1등은 아니었다.
"안 된 거군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계약이 체결된다면 HS 전담팀이 만들어질 거고 그러다 보면 해진과 회사에서 마주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 얼마 후면 결혼이었다. 결혼을 하면 어찌 됐든 그와는 끝이었다. 그 끝 이후에는 그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만나서도 안 되었다. 이렇게 공적인 일에서부터 하나씩 그와의 접점이 사라지는 쪽이 제영은 마음 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야 이 업체 쪽이 점수가 더 높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근데,이 업체는 이번에 불량률이 조작된 보고서를 제출해서 아웃이에요.”
그래도 여전히 다음 업체가 있었다. 그건 또그 나름의 이유로 제쳐졌다. 하나둘씩 일성의 경쟁자들이 사라졌다. 제영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해진을 바라보았다. 해진은 그게 그저제영이 긴장한 탓이라고 여겼다.
"축하해요. 아마 HS 내부에서만 결정된 사항이라 그쪽에는 통보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뭐 다음 주면 알게 되겠죠. 우리 같이 미리 축하해요."
해진은 제영보다 더 기뻐 보였다. 떨떠름한 표정의 제영이 서류를 다시 보며 물었다.
"변동 사항 같은 건 없을까요."
"없어요. 최종 보고라고 들었고 문제없이 진행될 거예요. 걱정 말아요."
제영이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앞에 두고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제 제영 씨 더 바빠질까."
"아마, 그렇겠죠."
"그래도 내가 연락하면 꼬박꼬박 받고, 부르면 달려와야 해요. 그리고 회사에서 자주 만나게 될 수도 있어요."
"왜요?”
"이 일에 나도 투입될지도 몰라요. 일단 그러고 싶다고 언질을 해 뒀는데, 모르죠. 큰형 마음이니까."
나쁜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에, 나쁜 소식이 더해졌다. 활짝 웃고 있는 해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드러낼 때마다 제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차 안 서랍에는 수백 장의 청첩장이 있었고 방금 전에 만나고 온 희주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해진이 제영의 손을 잡아 왔다.
"추워요? 손이 차가워."
"아니요. 그냥, 그냥 원래 이래요."
해진이 제영의 두 손을 포갠 다음 제 손으로 감쌌다. 손등에 해진의 손바닥이 닿자 얼음장같던 제영의 손이 점차 녹아내렸다.
그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기를, 다른 업체처럼 문제가 될 만한 것이 발견되기를 바랐으나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장이 영업팀을 불러 모았다. 그날따라 부리부리한 눈빛이 유독더 매서워 보였다. 사장이 말을 마치자 팀원들이 박수를 치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들그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큰 계약이 체결될 거라는 이야기가 회사 전체에 퍼졌다. 사람들은 정식으로 회식이 잡히기 전에 삼삼오오 모여 술한 잔씩 기울일 약속을 하고 있었다. 사이사이에 임원진이 약속한 보너스가 과연 얼마 정도일지 서로 소곤거렸다. 그 와중에 제영만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박대리, 잠깐옥상에서 나 좀 봐."
동혁은 한참 뜸을 들이는 제영을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담배를 꺼내고 나서야 제영이 얘기를 시작했다.
"계약은 거의 확정된 상태니까, 아마 HS 전담팀이 만들어질 거잖아. 그렇지?"
"그렇겠죠. 물량이 많아질 테니까요. 혹시,그팀에 못 들어갈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 내 말은, 그 팀에 내가 좀 안 들어가게 네가 입 좀 털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제영은 동혁의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갔다. 이런 큰 기업의 일을 맡게 되면 승진이나 연봉 협상 때도 좋을 것이다. 혹여나 이직이라도 하게 되면 꽤 높은 평가를 받는 경력 사항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런 일에서 빼 달라고 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 만도 했다.
"별 이유는 없고. 나 곧 결혼하잖아. 신혼인데, 바빠지면 좀 그래. 아니면, 다른 핑계 대도 상관없어. 그냥 넘어가줄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동혁이 제영에게 물었다.
"혹시 그 사람 때문이에요?”
“그 사람이라니?"
“HS의 이해진 팀장이요."
'더럽게 눈치 빠른 새끼.'
제영은 이대로 딱 잡아땔까말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동혁에게 댈 만한 다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동혁이 제영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출셋길을 제 손으로 막는 게 잘하는 짓일까. 차라리 마이 웨이로 걸어 나가며 모른 체해도 괜찮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해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은 결혼할 거고 그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 좋았다.
"그래. 좀 사이가, 껄끄럽게 되어서. 전담팀에 들어가면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넌 배 차장님이 랑 잘 붙어 다니니까 혹시나 물어보면 살짝 얘기 좀 해 줘. 그, 해진 씨,아니 이해진 팀장님 이야기는 하지 말고. 아무튼 알겠지? 나도 따로 얘기할 테니까."
"알았어요. 근데 뭐 때문에 사이가 껄끄러워진 겁니까.”
“넌 알 거 없어."
절대 아무도 알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남자와 놀아난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자신 말고는 주변 사람 그 누구도 몰라야했다. 제영이 말을 끊자 동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해도 답해 줄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태도가 안심이 되었다. 한 대 더 피우겠다는 동혁을 두고 제영이 먼저 자리를 떴다.
동혁은 안 보는 척하다가 사라지는 제영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차였나. 하기야 그런 놈이 뭐가 부족해서 저런 새끼를 계속 만나겠어.”
동혁이 말을 잘해 둔 것인지 아니면 회사에서는 처음부터 제영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지 전담팀에서 제영이 제외되었다. 배 차장이 제영의 뒤를 지나가다 어깨를 툭 치며 위로하는 척했다.
"원래 인생이 다 그래."
제영은 표정 관리를 하며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전담팀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거래처 일부가 남겨진 사람들에게로 분배되었다. 제영 역시 그 거래처들을 인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HS 때문은 아니더라도 바빠지긴 한 것이다.
[미안, 오늘도 야근이에요.]
그러니까 해진에게 보내는 문자가 순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제영은 해진과의 관계를 이제까지의 상대와 비슷한 것으로 여기려고 노력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좋아서 만났다가 처음의 감정이 마치 거짓처럼 없어져 결국 헤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보통의 연인관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축에 속해 있으니 해진 역시도 자신이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면 납득하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만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결혼할 거라고 말해야하나.‘
벌써 그 이야기를 하기라도 한 것처럼 제영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게 해진의 앞에서 그런 말은 절대로 못 할것 같았다. 두려움과 상대에 대한 얄팍한 애정이 뒤섞여 미안함이 제영의 안에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이 과하게 자라나 머리 밖으로까지 넘치려고 하자 제영이 다시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영이 보기에 그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고작 자신에게 거절당했다고 크게 좌절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가 항상 제게 말하던 대로 사랑을 한 것이라면 이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은 일어나는 보잘것없는 실연이며 이별일 뿐이었다. 제영 역시도 사랑이 전부인것처럼 굴던 시절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두달 지나면 전부 잊혔다. 가끔 생각이 나 눈물을 찔끔거렸을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지나간 인연이었고 지금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일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닌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적당한 날,적당한 시간에 그에게 전화를 하고 모든 걸 정리하면 깔끔해질 것이다. 혹시나잔부스러기 같은 게 남을지라도 결혼 후에는 싹청소되고 없을 게 분명했다. 이제야 해진을 마주할 용기가 생겨나 숨통이 트였다. 따지고 보면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해진을 이때까지 거절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너무나 애절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여자와 그러니까 오래된 애인과 곧 결혼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정리는 말끔히 끝냈는데도 가슴이 자꾸만 불안하게 두근거 렸다.
주변이 조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퇴근한 상태였다. 남은 몇몇의 키보드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영은 거래처별로 나눈 서류를 책상 한쪽에 끼워 넣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듯싶었다.
회사에서 나와 지하철까지 걷는 길이 그렇게 길지도 않았음에도 제영은 한참이나 걸려서야 출구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와중에 해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집이에요?
"아뇨, 방금 퇴근해서 지하철 타려고 하고 있어요."
해진은 제영 회사 근처를 지나다가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말했다. 제영이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그는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퇴근 시간도 한 참 지났고 날이 추운 터라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제영은 텅 빈 거리에서 몸을 달달 떨며 해진을 기다렸다. 근처에 있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듯 금방 그의 차가 나타났다.
"왜 차를 안 가지고 나왔어요? 오늘같이 추운날에."
"새벽에 비가 내려서 골목길이 빙판길이었거든요."
제영이 해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이 그를 보는 마지막 날같이 느껴졌다.
"해진 씨도 지금 퇴근했어요?”
"아뇨, 잠깐 휴식. 다시 들어가 봐야 돼요. 아마 오늘은 퇴근 못 할 거예요. 오늘도 몇 시간안 남긴 했지만. 당신도 바쁘고,나도 바쁘고. 아주최악이에요."
해진이 얼굴을 찡그리며 하소연했다. 그러고는 제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 되게, 뭔가 이상한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거 알아요?"
제영은 자신이 생각에 잠겨 그를 너무 쳐다보고 있었던가 싶었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저 수작질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다.
"나한테 키스하고 싶다는 얼굴."
해진이 생글거렸다. 제영은 이상하게도 그말을 듣자마자 정말로 그에게 키스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잠깐,차좀 어디세울 수 있어요?"
그에게 입은 맞출지언정 같이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눈치 빠른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웠다. 사람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높다란 벽 아래였다. 살인 아니면 섹스를 하려는 사람이나 찾을 만한 인적이 드문 곳 이었다. 제영의 목적은 후자에 속했다. 섹스는 아니지만 그보다 덜한 것을 해진과 하려고 했다.
제영이 안전벨트를 풀고 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제영 역시 운전석 쪽으로 바짝 몸을 갖다댄 상태였다. 그도 다가와 주겠지 했는데 정반대의 행동을 취했다. 해진이 좌석을 뒤로 밀었고 그러자 그와 핸들 사이에 넉넉하게 공간이 생겼다. 사람 하나쯤은 더 들어가도 될 만한 크기였다. 해진이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이리 올라와요."
가볍게 입맞춤 정도로 끝내려고 했던 제영의 생각과는 달리 해진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은커녕 불빛도 드물어 멀리 보이는 가로등하나가 전부였다. 그래도 제영은 해진을 올라탈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해요."
"싫어."
해진이 제영의 코트 안 재킷을 꽉 잡고 끌어당겼다. 하지 말라고 서툴게 저항했지만 그는 제대로 마음먹었는지 제영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결국 그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소파나의자의 푹신함과는 달랐다. 아래에 닿는 그의 허벅다리가 단단한 듯하면서도 말랑거렸다. 제영은 그 위에 걸쳐져 있기는 했으나 어떻게 앉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꼴이 적잖게 우스웠는지 해진이 웃었다. 기분이 나빠진 제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움직였다.
해진이 제영의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영의 몸이 자연스럽게 해진에게 밀착되었다. 배가 맞붙어 서로의 심장소리까지 느껴지지 않을까 할 정도였다. 해진이 자신의 뺨을 제영의 것에 대었다. 방금 전까지의 차가운 바깥 공기에 꽁꽁 얼어 있던 피부가,그와 닿은 부분만 따뜻해졌다. 생소한 감각에 제영은 자신의 뺨을 문질러 보았다.
"뭐해요. 빨리 해 줘요."
그렇게 말하는 해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좁은 차 안에서 불편한 자세로 부대끼고 있음에도 두 눈은 기쁨과 앞으로의 일에 대한 기대뿐이었다. 제영이 그의 눈가를 더듬었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거친 손톱이 동공 아래를 살짝 긁자 해진이 눈을 깜박였다. 그때 제영이 눈을 감고 해진에게 키스했다. 구식 영사기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긴 눈꺼풀 안에서 앞으로의 일들이 덜덜대는 소리와 함께 차르르 나열되었다. 그가 화를 내고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영이 해진의 목에 매달리듯그를 끌어안았다.
"오늘 좀이상하네."
"뭐가 이상해요?"
"왠지 내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 것 같아요."
명백한 착각이었다. 그걸 일깨워 주기라도 할 것처럼 제영이 해진의 귓불을 깨물었다. 해진이 아,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이나 집에 갈 걸 그랬어요."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요."
"아씨, 그렇긴 한데."
해진이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헤어지기 싫어."
그가 딴에는 귀엽게 칭얼거리며 제영에게 키스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리고 서로의 것을 치댔다. 당황한 제영이 그의 허벅지 위에서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해진의 품에 안겨 헉헉대다가 힘이 풀려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소리가 높아질까 봐 이를 악물고 해진의 팔을 꽉 잡았다. 절정 직전에 해진이 제영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맨살갗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의 손이 등뼈를 스칠 때마다 제영은 몸이 후들거렸다.
아래가 젖었다. 사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행위가 끝난 후에도 제영은 눈이 풀린 채로 여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해진이 제영을 여전히 만져 대고 있었지만 그게 딱히 싫지 않았다. 열기에 솟던 땀들이 이미 식어 몸이 차가워지고 있는 와중에 그의 손만이 여전히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려 댔다. 제영의 것이 아니라 해진의 것이었다. 해진은 슬쩍 보곤꺼 버렸다.
"회사 전화아니에요?"
"안 받아도 돼요. 그것보다, 우리 크리스마스때 뭐 할까요? 우리 집에서 술 한잔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난 제영 씨 집도 좋아요."
해진이 그렇게 말하며 제영의 등을 간지럽혔다.
"그날은 안 돼요."
그날은 연인들의 날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과 그를 위한 날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제영은 희주를 떠올렸다.
"왜?"
"집에 내려가요. 조카생일이 마침 그때라, 형네 가족이랑 다들 모여서 생일 축하해 주기로 했어요."
거짓말이 술술 잘도 흘러 나왔다.
"꼭 가야 돼?"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기에 사실 문지르는 것에 가까웠다. 제영은 창밖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실 그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동안 누가 지나갔어도 몰랐을 것 같았다. 머리 위에서는 그가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영은 며칠째 이어지던 야근 때문에 쌓인 피곤이 몰려오는듯했다. 자꾸만 졸렸다.
"자요? 일어나요."
제영이 대답 대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위에서 혀를 찼지만 일어나라는 말 대신 등을 만져 주기만 했다. 제영은 눈을 끔뻑거리면서 코앞에 보이는 그의 셔츠 모양을 하나하나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개수가 늘어나면서 자꾸만 그 앞에서는 절대로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할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와 자신의 마지막 시나리오를 떠올려 보았다. 무슨 일만 나면 울상인 이 남자에게 해도 괜찮을 만한 말을 이것저것 골라 보았다. 하지만 전부 그 앞에서는 말하지 못할 듯싶었다. 제영이 입술을 깨물고 눈을 꽉 감았다.
제 손에 닿아 있는 해진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와의 만남과 함께 한 모든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으나 나쁜짓이라고 여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만큼은 나쁜 짓 같았다. 품 안에 있는 남자의 형태가 생경하면서도 동시에 익숙했다. 제영이 고개를 들어 해진을 올려다보았다. 해진은 처음 봤을 때처럼 흰 얼굴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제영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내 것. 내 사람. 제영은 이 사람을 상처 입히는 이가 미워질 듯싶었다. 자기 자신조차 미워질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선택이 응당 옳은 일이었다.
제영은 높다란 건물을 올려다보며 들어가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잡았고 그가 바쁘다며 그 시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겨우겨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병원은 굉장히 오래된 병원이라고들 했지만 재작년에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지 건물 내부 자체는 말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보기 좋다고 하더라도 병원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가 제영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3층이었다.
접수대의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자 차트를 확인하며 예약 환자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고, 강준성 선생님하고 약속을 했는데요. 진료 예약은 아니고요."
다행히도 미리 언질을 받은 듯했다. 전화기 너머로 제영의 방문을 알리고 5번 진료실로 들어가 보라고 얘기했다. 문을 열자 준성이 보였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로 인사도 하지 않고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들렸고 그는 일하느라 누가 들어오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것처럼 굴었다.
"거기 앉으세요."
그는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가는 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영락없는 인텔리의 외양이었다. 제영은 그의 횐 가운이나 어쩐지 고압적인 것 같은 태도에 살짝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 뭐예요? 저 길게 얘기 못하니까빨리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제영 씨."
그가 진료실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해진 씨랑 백 선생님이 친하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네."
"그러니까 해진 씨랑 더 이상 안 만났으면 해서요."
그가 제영을 보았다. 제영은 그때까지도 양손을 포개 꽉 쥐고 있었다. 그래도 초조한 마음에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누구랑요? 그쪽이랑요?”
"예."
"이건 또 의외네. 해진이가 안 만나 준다고 나찾아온 줄 알았더 니 그 반대네요."
그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그걸 왜 저한테 얘기하세요?”
제영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해진에게 직접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간접적인 방식으로 해결을 보는 편이 서로에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준성에게 연락하고 만나러 온 것이었다.
"해진 씨는 저 같은 사람 아니라도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랑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하, 사람 앞에 두고는 못 하겠으니까 저보고 전해 달라는 건가요? 뭐, 되게 신선하긴 하네요. 항상 못 헤어지겠다고 매달리는 사람들만 봤지, 헤어지겠다고 절 찾아오기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저도 이런 말씀드리는 게 무척 어려운......"
"됐어요."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다며 예약 시간을 조금씩 조정해 달라고 했다.
"매달리는 것들도 찌질해서 속이 답답했는데 이건 이거 나름대로 병신 같은 거 알아요? 나 웃긴 거 참고 있어요. 그래도 일단은 이유라도 들어 보고 싶네요. 뭐 때문에 그래요? 받아 낼 거다 받아 내서 그래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요. 전 그런 거 일일이 해진이한테 일러바치는 사람 아니에요."
준성이 의자에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흥미진진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대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영은 그에게 사실대로 결혼할 거라고 말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핑계를 댈지 고민했다. 그러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이 준성으로부터 전달받더라도 헤어짐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고 납득할만한 것이어야 했다.
"결혼해요."
"결혼? 갑자기요? 무슨 정략결혼은 아닐 거고 길 가다가 운명의 상대라도 만났어요? 아니면 사고라도 쳤어요? 누굴 임신시켰다든가, 그런 거요."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꽤 오래 만났고 그래서 곧 결혼할 생각입 니 다."
"그럼 해진이 처음 만날 때부터, 이미."
"예,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영은 재판정으로 끌려와 증언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앞사람의 태도가 너무 가벼웠다.
"생긴 거랑 좀 다르게 노시네요. 뭐 저랑은 상관없지만요. 해진이랑 얼마나 만났죠? 꽤 오래됐죠? 좀 과해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니까 슬슬 정리할 때가 되긴 했네요. 결혼, 그래 결혼. 하셔야 죠
"그러면 해진 씨에게 전해 주시는 겁니까."
"해 보긴 할게요. 저도 확인해 봐야 할 것도있고. 표정이 왜 그래요? 걱정 말아요. 해진이가 평소랑 좀 다르게 굴고 있긴 한데, 걔가 어른들 말씀은 또 잘 듣거든요.”
"도와주시는 건가요?”
"슬슬 정리하죠. 근데, 나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그가 몸을 숙이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해진이가 처음이에요? 남자는?”
그런 걸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제영은 표정 관리 하는 것조차 잊고 얼굴을 붉혔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듣지 않고도 대답을 유추해 낸 준성이 킥킥거렸다.
"원래 사내새끼들이 헤어질 때 더 치졸하게 구는 거 알죠? 그건 그쪽이 감내해야 되는 거예요"
"뭘 말하는 겁니까."
"저야 모르죠. 해진이는 제가 아니라 그쪽 남친이잖아요. 어쨌든 결혼 축하드려요."
건조한 축하를 끝으로 준성이 제영에게 나가 달라고 말했다. 제영은 건물에서 나온 후에도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겨우 생각해 낸 해결책이 긴 했지만 잘한 짓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영은 준성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달받은 해진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가슴이 아팠다. 그저 실망한 해진이 그대로 영영 발길을 끊었으면 했다.
* * *
해진은 지루한 와중에 혀끝으로 이를 더듬었다. 간밤에 무슨 조화인지, 송곳니 옆에 있는 치아의 끝부분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떨어졌는지 조차 몰랐다. 유심히 거울을 보고 나서야 날카롭게 벼린 것처럼 뾰족해진 끝을 발견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티 나지 않았고 혀로 더듬어 봤자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게 자꾸만 신경 쓰여 아까부터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해진이 자리에 앉은 채로 의자를 돌렸다. 빙그르르 돌아간 의자의 방향대로 보이는 풍광도 변했다. 유리창 너머로 건물이 빽빽한 빌딩 숲이 눈에 꽉 찼다. 다시 방향을 바꿨다. 이번에는 문이었다. 고작 팀장임에도 넓고 쾌적한 개인사무실을 가지고 있었고 해진이 부르기 전까지는 누구도 저 문을 넘지 못했다. 아니,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조차도 방문이 뜸했다. 아마 자신의 달라진 태도 때문일 것이다.
해진은 잔뜩 쌓인 서류를 옆으로 밀어 두고 엎드렸다. 문득 제영이 보고 싶어졌다. 요즘 들어 귀여운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해진이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러나 아까 보낸 문자에는 아직 답이 없었다.
[바빠요?]
그렇게 다시 한번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이번에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전화를 해 볼 참이었다. 제영도 자신도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자신은 이때다 싶어 잔뜩 일을 맡기는 큰형 탓이었고 제영은 이번에 새로 따낸 HS의 계약 때문이었다. 항상 노닥거리는 한량 같은 애인을 뒀던 탓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출근해도 그만, 출근하지 않아도 그만인 자신과 달리 제영은 그러질 못했다.
아침이면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부러운 눈으로 해진을 쳐다보았다. 차라리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집에 콕 처박혀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영을 만날 때마다 살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은 조금 쓸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진은 제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할 것처럼 왼쪽 가슴에 손을 대었다.
해진이 다시 핸드폰을 뒤집었다. 여전히 잠잠했다. 결국 제영의 번호를 눌렀다. 길게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이 짜증 났지만 참았다. 그 끝에 제 애인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대하던 것 대신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엉뚱한 소리만 들렸다. 해진은 침착하게 문자를 한 번 더 보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간 제영과 주고받은 걸 보고 있자니 화만 더 났다. 바쁘냐고 보고 싶다고하는 제 문자가 대다수였고 바쁘다고 미안하다고 하는 제영의 문자가 먼지만큼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때때로 이런 순간이면 그가 제게 너무 냉정하게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를 낼까 하다가도 막상 그를 보면 그러질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제영을 위하고 바라고 있다는 걸 그는 알까. 아니,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을 리가 없다. 해진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제영이 보고 싶었다. 그의 부드러운 두 뺨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떠올리면 뒷덜미가 간지 러웠다. 복수라도 하는 셈 치고 그의 목을 꽉 깨물고 싶었다. 어떤 반응일지 눈에 선했다. 깜짝놀라다가 이리저리 몸을 피할 것이다. 그러면 그걸 잡아채 와 멍든 곳을 핥아 줘야지. 해진이 작게 웃었다.
핸드폰이 웅웅댔다. 제영의 답이 도착한 것이다.
[미안해요. 바빠서 전화 못 받았어요.]
뭘 하길래 이렇게 바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큰형이 이번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다는 해진의 말에 솔깃한 눈치였다. 이 일에 투입되고 그가 자신을 만나러 여기에 오면,물론 정확히는 일을 하러 오는 것이겠지마는, 같은 공간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은근하게 손등을 간지럽히면서 밤 약속에 대한 확답을 받아 내겠노라고 결심했다.
보고 싶어요. 해진은 그렇게 다시 문자를 보내려다가 지워 버렸다. 직접 볼 생각이니까. 그의 집에 먼저 가 얌전히 기다리면 이내 제영이 피곤에 절어 꾀죄죄한 몰골로 문을 열고 들어올게 분명했다. 그러면 자신이 차가워진 이마며 뺨, 마지막에는 입술에 키스해 주며 그를 위한 작은 환영식을 열어 줄 생각이었다. 해진이 짐을 챙겨 들었다. 짐이라고는 별것 없었다. 재킷과 코트, 그리고 제영의 집에 갈 때 타고 갈 차의 키 정도였다.
퇴근 시간이 살짝 지났음에도 도로는 여전히 차로 빽빽했다. 이러다가 먼저 도착한 제영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 속도를 높여도 자꾸만 신호에 걸리고 다른 차에 막히니 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먼저 도착하고 말고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싶을 뿐이니 만나면 되었다.
익히 알고 있는 번호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꽉 차 있는 체취에 제영이 없는데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트와 재킷을 벗고 침대 위에 누웠다. 해진 혼자 눕기만 해도 침대가 꽉 찼다. 제영과 같이 자려면 한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그를 품에 안고 자야 가능했다. 그래서 더 좋기도 했다. 킁킁대며 개처럼 이불 냄새를 맡다가 그게 그라도 되는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흐물대는 게 뭉쳐져 얼추 사람 크기와 비슷했다.
이불의 감촉이 좋아 자꾸만 쓰다듬어 보았다. 실상 해진의 집에 있는 게 더 질이 좋은 것이지만 제영이 덮고 자는 것이라 별다르게 느껴졌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그러는 게 바보 같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진짜 그와 몸이 닿고 나서야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손장난은 금방 중지되었다. 무언가 해진의 손가락에 엉겨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주욱 늘어진 게 네 번째손가락에 걸려 올라왔다. 긴 머리카락이었다.
해진이 다시금 그 머리카락을 꼼꼼히 살폈다.
제영의 온몸에 난 털을 아무리 헤집는다고 해도 나올 수 없는, 그런 긴 머리카락이었다. 불쾌하고 불길했다.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명백한 것은 욕이라도 뱉고 싶은 정도로 불쾌하고 불길하다는 것뿐이었다. 가만히 그걸 보는 중에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도 이어졌다. 해진이 예상했던 대로 피곤에 전 얼굴로 그가 현관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떴다.
"해진 씨?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해진이 침대에서 내려가 그의 앞에 섰다.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요."
"연락 좀 하고 와요. 깜짝 놀랐잖아요.”
그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넥타이를 풀려는 듯 목에 손을 갖다 대었다. 해진은 제영이 그러기 전에 얼른 그의 넥타이를 풀었다.
"제가 할게요."
제영이 그렇게 말했지만 넥타이를 해치운 해진의 손은 이미 다음 순서인 셔츠 단추를 노리고 있었다.
"해진 씨, 제가한다니까요."
제영이 인상을 쓰며 피했다. 해진은 피하는 제영도, 제영이 하는 말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추를 풀다 말고 제영을 끌어안았다. 품안의 작은 몸이 차가웠다. 해진은 아까의 불길함을 곱씹고 있었다. 입안에서 갑자기 와그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진이 움직임을 딱 멈추고 혀로 입안을 더듬었다. 부서진 치아의 조각들이 모래 알갱이처럼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왜 그래요? 혀라도 깨물었어요?"
해진은 대답 없이 그저 제영의 목에 매달렸다.
"입이라도 벌려 봐요. 한번 봐 줄게요."
해진은 자꾸 불안했다. 아직도 제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입을 벌리는 대신 상대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물컹대는 혀가 제 혀를 조금 귀찮은 듯이 밀어내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해진이 눈을 감자 제영이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를 찬찬히 살폈다. 어떤 표정인지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희고 여린 얼굴일 뿐이었다. 해진의 부드러운 콧날이 아슬아슬하게 제영의 코를 스쳤다. 동시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고 그때마다 길고 긴속눈썹이 제영에게 닿아올 듯했다.
'아직인가.'
제영은 아직 준성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소식이라도 듣고 쳐들어온 건 아닐까 했지만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전혀 아닌 듯싶었다. 안심이 되면서도 불안했다. 나중에 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릴 때가 되면 무척 서운할 것 같았다. 제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러 해진과의 입맞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전부 잠시간의 착각에 불과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겨울, 눈이 내렸고 내린 눈 위로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희고 차가운 눈들은 금세 더러워졌다. 그 더러운 눈 위로 다시 횐 눈이 내려도 검은 도시의 때와 뒤섞여 금방 엉망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방에 날려 대는 그 희뿌연 존재는 사람을 기쁘게 했다. 다들 걷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들은 추위에 두 뺨과 코끝이 발갛게 변해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뛰어다니기 바빴다. 어른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었다. 제영 역시 쏟아져 내리는 눈에 조금 설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른인 탓에 그 설렘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제영이 녹아내린 눈에 젖은 가죽 구두를 보면서 인상을썼다. 잠깐 걸었는데도 이렇게 돼 버렸다. 번화가의 사람들을 피해 커다란 쇼핑몰 건물 안쪽에서 물기를 대충 털어 내었다.
건물 밖에도 안에도 놀러 나온 인파로 빽빽했다. 이런 종류의 날에는 집에 콕 처박혀 있는 편이 이롭다고 여겼지만 제 애인은 거기에 동의 하지 않았다. 바로 옆 가게의 스피커에서 틀어놓은 캐럴이 성탄절 분위기를 돋우었지만 또 그옆의 스피커에서는 여자 아이돌의 댄스 음악이 나오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정신이 없었다. 얼른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저 멀리서 애인의 실루엣이 보이자 제영의 얼굴이 펴졌다.
레스토랑은 커플들로 꽉 차 있었다.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아 코스요리 하나만 값비싸게 팔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조차 감지덕지였다. 게 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예약조차 어려울 뻔했기 때문이었다. 희주는 바깥의 풍경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영이 보기에는 그렇게 인상적인 것 같지도 않은데 여자의 눈에는 또 다르게 보이는 건가 했다.
"희주야."
그녀가 제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 뭐라도 있어?"
"아니, 아무것도 없어. 그냥 눈 내리는 게 신기해서. 올 겨울 들어서 이렇게 많이 온 건 처음 이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눈이 아예 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렸다가 다음 날이면 녹아 버렸다.
이렇게 쌓일 정도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제영도 희주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른 커플들은 소곤소곤 사랑을 속삭이느라 정신이 없는데 정작 결혼을 앞둔 제영과 희주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제영은 그게 싫지 않았다. 익숙해져 버린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 같은 것들이 제영은 마음에 들었다. 애인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새삼 그녀에 대한 사랑이 샘솟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앞의 여자는 곧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고마워."
"뭐가?"
"나랑 결혼해줘서."
너무 뻔한 말이었지만 이 순간에 이것보다더 어울리는 건 없다고 여겼다. 제영은 스스로가 한 말에 스스로 감격했다.
"이게 잘하는 걸까?”
"무슨소리야?”
"우리 결혼 말이야."
제영은 그녀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약간 힘이 없어 보이지만 표정은 평소와 같았고 방금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달콤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런 말을 했다.
"난 우리가 그렇게 나쁜 결혼 상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근데 그런 것만으로 평생, 아니 적어도 몇십 년 같이 살 사람을 고르는 건 아니잖아."
그녀는 목이 타는지 와인을 한 모금 마셨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당신은 나를 적당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지?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하게 생기고, 적당한 성격에, 적당히 벌고, 그러니까 결혼하기에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적당한 여자."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텅 빈 접시 위를 스치고 다음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를, 곧이어 눈이 내리는 창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제영을 바로 보았다. 제영은 그녀가 그런 걸 묻는 의도는 몰랐으나 답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면서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도록 제영이 살짝 웃고는 말했다.
"이해해. 결혼 앞두고 불안하니까 그런 생각할 수도 있어. 근데 난 절대로 당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함께 있고 싶으니까 결혼하는 거야.
당신에 비하면 나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노력할게. 좋은 남편이 되도록. 좀 이른 얘기지만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당신 많이 도와주고 애랑도 많이 놀아 줄게. 당신 힘들 때는, 내가 당신 곁에서 힘이 되어 줄게.”
결혼을 앞둔 애인의 작은 테스트라고 생각했기에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건 사랑의 고백이자, 나름의 처절한 자기반성이었다.
바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종의 나쁜 장난을 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녀만을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바치는 것으로 이 모든것을 속 시원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이 세레나데의 마지막은 침대에서 이루어져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아니었다. 제영은 김이 샜지만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애인은 저녁 선약이 있었다. 절친들과의 결혼 전 마지막 송년회라고 했다. 이런 날 호텔을 예약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냉큼 오케이 했지만 후회가 됐다.
둘은 식사를 다 하고 나와 거리를 조금 걸었다. 하지만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날씨였다.
거기다가 애인과 친구들의 약속 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찍 끝나면 당신 집에 갈까?"
"당신 친구들이 어지간히 보내 주겠다."
그녀의 술고래 친구들은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라도 예외가 없을 게 분명했다. 희주를 보내고 제영도 제 갈 길을 갔다. 날이 어두워질수록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집에 가서 샤워하고 혹시나 그녀가 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서 TV나 볼 생각이었다.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을 겨우 탈출하여 집앞 골목까지 걸었다. 그 다음도 난관이었다. 녹은 눈의 일부가 얼어 가파른 길이 잘 닦인 미끄럼틀 같았다. 하지만 제영은 구두를 신고도 딱한 번 휘청거리기만 했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
건물 바로 앞의 응달에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거기서 제영은 해진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던 그 남자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아무 연락도 없었다. 해진의 성격이라면 몇 번 귀찮게 구는 연락이 있을 법도 한데 잠잠한 핸드폰이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제영은 혀를 차며 별시답잖은 것에 아쉬워하는 자신을 나무랐다.
제영은 자기 집 현관문을 열기 전에 잠시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섬뜩한 위화감 같은 것이 제영을 압도했다. 집 안에 무언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영의 집은 작고 작은 곳이라 어디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가장 알은 곳에서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눈에 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니까 강도라도 있다면 얼른 뒷걸음쳐 나오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멍청한 강도가 이런 집을 털 생각을 할까. 제영은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문이나 열어야지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젖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밥 먹는 동안 대충 말랐었는데 오는 길에 또 젖은 모양이었다. 스며든 대로 그려진 선이 두 개나 되었다. 하나는 희주를 만나기 전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집에 오면서 생긴 것이었다. 사실 이 구두는 해진에게 받은 것이었다. 분명 비싼 물건일 게 분명한데 이렇게 얼룩이 져엉망이 되어 버리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왔어요?”
문을 열고 신발을 벗다 말고 들린 목소리에 제영은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강도는 아니었지만 누가 제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을 곳 하나 없다고 여긴 곳이지만 이불 속은 간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침대 가운데 둥글게 솟은 모습이 숨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해진 씨?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그에게는 분명 가족과 약속이 있다고 말을 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집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이불을 그대로 덮은 채로 그는 고개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제영은 만약 아직도 준성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해진에게 말해야겠다고, 희주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결심했었다. 다시 만나면 쌀쌀맞게 대하며 그를 끊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고 제영은 어이가 없어져 그런건 잠시 잊고 말았다.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가 말했다.
"크리스마슨데, 조카 선물은 챙겨 줬어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웬만하면 연락 좀 하고올수 없어요?"
제영의 짜증에도 그는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나는요.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몰랐겠지만, 아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좋아한다기보다는 사랑하는 거겠죠.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거짓말만 했어."
이불을 덮고 말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중간중간 그의 목소리가 거칠게 끓었다. 거의 횡설수설에 가까운 해진의 말에 짜증이 났으나 혹여나 그가 손찌검이라도 당하고 온 것인가 하고 염려가 되어 거세게 나가지는 못하였다. 제영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슬쩍 이불을 잡아당겼다. 헤어질 때는 헤어지더라도, 어디가 어떤 꼴인지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건 사랑이니 뭐니 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저 엉엉 울고 있는 어린애에 대한 동정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진은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제영은 해진이 보고 싶었다. 얼마 후면 저 바깥의 눈처럼 자신의 인생에서 녹아 없어질 희고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잊을 거라고 세뇌하는 중이기는 하나, 헤어진 후에도 제영은 어쩐지 해진을 자꾸만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희주에게 말하는 문장 사이사이마다 해진을 떠올리고 말았던 것처럼.
"해진 씨.”
제영이 그의 이름을 보드랍게 불렀다. 말하는 자신조차도 퍽이나 다정스럽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정도 수로는 이 상처 입은 어린애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제영은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어 이불 아래로 손만 쑥 집어넣었다. 잡히는 것이 뭐라도 상관없으나 이왕이면 부들부들한손이 걸리기를 바랐다. 그러면 날랜동작으로 그를 밖으로 끌어낼 생각이었다. 낚시라도 하는 듯했다. 속을 더듬거 리며 딱딱하면서도 부드럽고 가느다라면서도 굴곡이 있는 것을 잡아채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목표하던 것이 근처에 왔을 때 덥석 붙잡아 버렸다.
그런데 그는 손을 잡아올 생각도 않고,그저 주먹을 꽉 쥔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이상하여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의 손안에 뭔가가 있었다.
주먹을 쥐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무엇을 쥐고 있었다.
"뭘 쥐고 있어요?"
그의 손힘이 스르르 풀렸다. 제영은 쥐고 있던 것이 무얼까 궁금하여 그가 도로 쥐기 전에 얼른 이불 밖으로 잡아 빼었다. 다 구겨진 종이였다. 단순한 종이가 아닌, 제영이 숨겨 뒀던 것이었다. 반들반들했을 코팅지는 한껏 우그러져자잘하게 붙어 있던 반짝이들이 하강하는 별처럼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부서진 별들을 뒤집어쓰고 해진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청첩장을 꽉 쥔 제영의 손이 떨렸다.
해진은 제영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얼굴을하고 있었다. 흰 얼굴이 검게 팬 것처럼 새까맣게 보였다. 그러나 딱히 슬퍼 보이지도 않았고 제영을 원망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예전의 생글거림만 지워 버리고 농담이라도 하듯이 제영에게 말했다.
"아무거나 좋으니까,뭐라도 말해 봐요."
해진이 제영을 살짝 밀었다. 제영은 몇 번이고 그와 몸을 마주했고 언제인가부터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익숙해진 상대의 패는 항상 제영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너무 가까운 상태였다. 일단은 조금 떨어져 애기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죄인을 포박하는 것처럼 제영의 양어깨를 꽉 잡고 있었다. 해진은 제영을 노려보는것 같기도 했고 그저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후자라도 위압감이 들었다.
아래로 꽂히는 날카롭고 매서운 시선이 익숙한 상대를 생판 처음 보는 타인 같아 보이게 했다.
"미안해요. 해진 씨, 미안해요."
제영이 미안함을 이유로 그에게 입을 맞췄던 것처럼, 이번에는 미안함을 이유로 그를 버리려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더 태연하게 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고 어쩐지 그에게 애걸하듯 말하고 있었다. 제영은 눈앞의 남자를 잊고 희주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에게 잡힌 어깨가 너무 아파 그럴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흑, 하는 소리가 났다. 제영은 그가 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지 이를 악무는 소리였을 뿐 표정이나 행동에서 슬픔은 전혀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제영에게 키스했고 두 손으로는 제영의 옷을 벗겨 내려 했다. 해진은 제영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제영은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지금만큼은 제대로 그를 거절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사람이었다. 이처럼 성난 남자를 애인에게 하듯 보듬어 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제영이 저항했으나 해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제영의 옆구리 맨살을 세게 움켜 쥐었다. 애무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이었고 화풀이에 가까웠다. 단단히 붙잡힌 제영이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너무 기쁜 사람이 웃지 못하듯이,너무 화가 난 터라 화난 얼굴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쥐고 싶은 것은 제영의 볼품없는 살가죽이 아니라, 목이 아닐까.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지막은 거의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영이 겁먹지 않도록 보여 줬던 다정한 배려대신 오히려 겁주려는 듯 행동했다. 말라 있던 피부 표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니 입지 못한 제영이 해진의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제영에게 몰아치는 고통은 사실적이기는 하나 현실감은 없었다. 벌려진 다리사이로 무언가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밀쳐 올려질 때마다 제영의 허리가 바닥에서 띄워졌다.
제영은 눈가가 뜨거웠다. 울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감고 있어서였다. 혹시나 해진이 또다시 고통스러운 짓을 할까 봐 제영이 다리를 오므리며 사이를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누운 제영의 몸 위로 자신을 포개고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한쪽의 모든 움직임이, 다른 쪽 한 겹의 피부 너머로 전달되었다. 맞붙은 가슴이 함께 두근대며 뜨거워지고 있었다.
"최악이다. 정말."
그가 말했다. 제영 역시 동의하는 바였으나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다.
제영은 머지않아 다가올 그와의 파국을 기다리기는 했으나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상상 속에서 상처 입는 것은 그뿐이었지 자신이 아니었다. 억울했다. 자신은 그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 주고 싶기도 하였고 그를 내쫓아버리고 다 없던 일로 하고 싶기도 했다.
깊은 물 아래 수장된 시체처럼 눈을 감고 있던 해진이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보았다. 시끄럽게 들리는 소리가 뭔가를 예감케 했다. 해진 이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제영의 몸 위로 기었다.
제영의 핸드폰이 바닥에서 진동했다. 이번에는 제영이 눈을 떴다. 진동하는 소음이 먼저, 또각대는 소리가 두 번째로 고막에 꽂혔다. 병든 몸과 정신의 제영을 현실로 끌고 오는 소리들이었다. 해진이 혀로 가슴팍의 가운데를 가를 것처럼 천천히 핥아 내리고 있었다.
"하지 마."
해진이 제영의 다리를 다시 벌렸다. 벌려진 곳이 따가웠고 그의 뭉툭한 물건이 금방이라도 뚫고 들어올 것처럼 주변을 서성거렸다.
"쉿. 조용히 해요."
그렇게 속삭이는 해진은 기뻐 보였다. 그가 제영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단정하게 넘겨 주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의 일부분까지 선명하게 제영의 눈에 들어왔다. 멈춘 소리와 반대로, 쉴 새 없이 몸 위를 오가는 간지럽고 부드러운 손길에 아래가 흥분되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았다.
"해진 씨, 제발. 하지 마요."
누군가 제영의 현관문을 두드리자 이번에는 해진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이미 석고상처럼 단단해진 그것이 끼익하는 쇳소리를 내며 으스러진 제영의 내부로 다시금 파고든 후였다.
제영의 입이 작게 벌어졌지만 비명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 제영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해진이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해서도 안 되었고, 애인이 이걸 봐서도 안 되었다. 삐빅대는 소리가 났다. 제영은 현관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해진은 제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망 그 자체였다. 제영의 집은 너무 작았다.
얕은 곳부터 깊은 곳까지 어디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니 저 문이 열린다면, 애인의 경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해진은 여전히 제영의 안을 어그러뜨리는 데만 집중했다. 한 번, 두 번 쳐올릴 때마다 둘의 몸이 같이 흔들렸다.
여섯 번의 전자음이 끝나고 문손잡이가 철컥거리며 돌아갔다. 제영은 해진의 팔이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쥐었다. 그러나 문을 열리지 않았다. 애인이 다시금 번호를 누르고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희주에게 바뀐 번호를 알려 줬었나.'
알려 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제 위의 남자에게 알려 준 건 기억났다. 그때의 얼굴이 희주로 변했다가 다시 남자가 되며 제영을 헷갈리게 했다.
애인이 여러 번 다시 시도했지만 결국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손잡이가 돌아갈 때마다 제영은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거기다 그때마다 해진의 몸짓이 격해졌다. 핸드폰도, 현관앞도 조용해질 무렵 그가 제영 위에서 몸을 떨었다가 다시 그 위로 엎어졌다. 좁은 방 안은 해진의 거친 숨소리 외에는 모든 게 죽어 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아쉽네요. 재미있을 뻔했는데."
해진이 제영을 내려 다보다가 꼭 얼굴도 보기 싫다는 것처럼 제영의 몸을 뒤집었다. 제영의 등을 베개 삼아 깔아뭉개고 해진이 뭐라 중얼댔다.
낮은 음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영의 등에다가 계속 같은 말을 속삭였다. 공중에 다리가 묶여 매달린 죄인이 양손을 바닥으로 놓아 버린 것처럼, 제영 역시 제 손을 침대 위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해진이 그 손위로 제 손을 겹쳐 옭아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