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빛으로 물든 방
[미안, 좀 늦어요. 30분 정도. 최대한 빨리 갈게요. 추우니까 어디 좀 들어가 있어요.]
제영은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고작 10분간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꽁꽁 얼기 직전이었다.
“30분 정도라."
일찍 온다고 했지만 더 기다리는 건 힘들었다. 제영은 근처를 둘러보았다. 번화가까지는 아니지만 역 출구 근처라 이것저것 카페나 가게들이 많았다. 그가 오면 바로 차에 타야 하니까너무 먼 곳은 좋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몸을 녹였다. 뜨끈한 것이 목을 넘어가는 게 좋았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집에 있는 게 최곤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행동은 그러질 못했다. 해진과의 되지도 않는 데이트놀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데이트놀이는 전과 같으면서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것이 산발적인 이벤트 같은 느낌이었다면 요즈음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졌다. 진짜 연인들의 데이 트라고 느낄 만큼. 그와의 관계는 정리되지도 않고 엉켜 가기만 했다. 풀고자 해도 시작이 어딘지 감이 오질 않으니 항상 실패였다. 그나마안심이 되는 것은 이 엉킨 관계의 끝만큼은 자신이 제대로 붙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영이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조금 식은 커피가 딱 마시기 적당한 온도였다. 다시 한 모금 들이켜려는 찰나에 벨이 울렸다. 도드라지는 소음에 주변의 시선이 제영 쪽으로 모였지만 잠깐이었다.
제영이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 누군지 뻔했다.
-다 왔어요. 어디예요?
"근처 카페예요. 나갈게요.“
제영이 한참 남은 커피를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테이크아웃 잔에 달라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지만 카페의 유리창너머로 익숙한 차 번호가 보여 얼른 짐을 챙기고 문을 나섰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잠깐이었어요."
“커피 마셨어요? 제영 씨가 타니까 커피 냄새나요."
해진이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코를 킁킁거렸다. 제영은 그가 운전대를 잡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의 가슴팍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겠지. 해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날 밤 이후로 만날 때마다 같은 상태였다. 분위기로, 눈으로,가끔은 입으로 자신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다. 제영은 문득문득 초능력자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의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귓가에 '좋아해요. 좋아해요.‘ 하는 소리가 맴돌았다.
해진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조차도.
그런 속삭임은 그와 식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에게만 들리는 것이 분명할 텐데도 주변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꾸만 사방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잘난 얼굴이 타인의 시선을 끌었다. 거기다가 이미 그가 HS전자의 도련님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바짝 긴장한 레스토랑 직원들의 태도 역시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제영은 제대로 식사하기가 어려웠다.
식사 후의 티타임은 차에서였다. 불쾌한 포만감에 곧장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해진이 청해오자 거절하지 못했다.
"제영 씨?”
"아,예. 팀장님. 아니, 그, 해진 씨."
소란스러운 마음의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정작 현실의 목소리를 놓쳤다. 하지만 그는 제영이 딴생각을 했다는 것보다 자신을 부른 호칭에 더 신경 썼다.
"이름으로 부르라니까요.“
"네, 해진 씨. 뭐 때문에 불렀어요?"
제영은 눈앞의 어린애가 더 토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살짝 찡그려졌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그는 진작부터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제영역시 간혹 그를 이름으로 부르긴 했지만 그건 정말 가끔의 일로, 술에 왕창 취해 정신이 없을 때나 저번처럼 술에 찌든 해진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열이 받아 있을 때 정도였다.
제영은 해진이 이렇게 작은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는 것처럼 굴 때면 그의 배경에 가려진 본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슬30대 중반으로 가는 자신과는 달리 해진은 이제 고작 20대 후반이었다. 범상치 않은 핏줄 덕에 어린 나이임에도 대기업 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지만 보통이라면 인턴이나 신입 사원으로 고개를 숙이는 법에 익숙해지며 사회에 적응해 나가려고 고군분투해야 할 나이인 것이다.
'다섯 살 차이면, 꽤 많이 나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를 절대로 '해진아'와 같이 동생 친구 부르듯 부르지는 못할 터였다. 시작부터 갑과 을이었고 이제는 괜히 사이를 더 좁혀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거리도 과했다. 곧 있으면 슬슬구슬려서 그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했다.
그가 제영을 부른 이유는 별것 없었다. 현실의 목소리든 가상의 목소리든 간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리는 게 편했다. 만취 상태의 삐끗한 선택으로 이어져 오는 이 상황에는 그게 가장 적절해 보였다. 제영은 그와 노닥거리는 이 시간조차도 지난밤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될 대로 되라는 무책임함이 섞여 혼란스러웠다. 그걸 무심한 얼굴로 가장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제영 씨."
속마음은 어떻든 간에 그 무심함만큼은 눈치챈 모양인지 해진이 다시 제영을 불렀다.
"네."
"혹시 내가 늦어서 화났어요?”
제영은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바람맞힌 것도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크게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기묘한 기분에 발바닥이 근질거렸다.
"아니요. 많이 안기다렸다니까요."
“미안, 요즘 회사일 바빠져서.”
서 있다면 발을 동동 구르기라도 할 것처럼 그가 제영에게 변명했다. 그의 말대로 요즘 그는 회사 일로 바빴다. 제영이 보기에는 여전히 한량처럼 회사원놀음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요즘 들어 회사 일을 제대로 배워 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게 무슨연유로 든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영에게는 그런 행태조차도 있는 놈의 말장난 같았다.
"회사 일이 원래 그래요. 보통은 먹고살려고 꾸역꾸역 참고 다니는 거니까.”
넌 아니겠지만. 제영이 손을 비볐다. 차 안의 단란한 티타임을 밝혀 줄 차는 이미 다 식었다.
슬슬 그가 운전대를 잡고 자신을 집 근처로 데려 다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당신이랑 같은 회사 다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제영은 난데없는 스카우트 제의에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해진의 눈에 진심이 뚝뚝 묻어 나왔다. 단지 그 진심의 방향이 회사 일이 싫어서 인지,아니면 제영이 좋아서 그런 건지 애매하긴 했지만 말이다. 제영은 그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나쁘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대기업 중에서도 연봉이 높기로 소문이 자자한 HS전자의 대리급이라면 이 새파랗게 어린 놈에게 '팀장님, 팀장님' 하는 것 정도야 참아 줄 의향이 있었다. 물론 사내 연애의 기미는 초장에 잡아야겠지만 말이다.
"제영 씨는 어때요? 회사 일?”
"똑같죠."
"우리 회사랑 계약 건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제영은 살짝 피곤해졌다.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더니 이제는 자신에게까지 보고를 받으려는 건가. 게다가 HS전자와의 계약 건은 지금 제영에게 아픈 부분이었다. 아예 제외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거의 동혁의 서브 수준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승진에서 밀릴 게 뻔했다. 하지만 그걸 해진에게 시시콜콜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선은 넘었으나 이 선은 지키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괜히 그와의 마지막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잘되어 가고 있어요. 상부 쪽에서 이 상무님하고 계속 컨택 중이고.“
"이 상무?"
"예. 그, 아시죠? 예전에 술자리에서 같이 봤던 분이요.“
제영은 그가 설마 하니 이 상무를 잊었을까싶었다. 누구도 아닌, 그의 뒤통수에 대고 쌍욕을 날린 이가 아닌가. 물론 해진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겨 자신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긴했지만 말이다.
“그 사람은 별론데."
제영은 해진의 얼굴이 갑작스레 깊고 어둡게 가라앉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예전에 언뜻 주워들은 HS 내부의 파벌에 대한 것이 기억났다. 그많고 많은 돈줄을 따라 사람들이 이리 붙었다저리 붙었다 한다고 했다. 작은 중소기업인 자신의 회사조차 그러니 천문학적인 돈이 움직이는 굴지의 대기업은 훨씬 더 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보다도 같은 남자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생각 없는 애처럼 구는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 낯설었다. 동시에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게 굴면서도 그의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될 것 없는 자신 같은 이의 애정을 갈구하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왜요. 그래도 그분한테 도움 많이 받았어요.
술자리에서도 재미있는 분이고."
"술자리에서 재미있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예? 뭐, 그냥 빼지 않고 술잘 마시고.”
제영은 그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몰라 그저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이것 역시 회사 일에 막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어린애나 할 법한 질문이라고 여겼다.
"여자 불러서 노는,그런 거 말하는 건가요?”
그러나 제영의 심드렁한 말투와는 정반대의 날 선 목소리가 상대에게서 튀어나오자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처음 만난 날도 여자 부르려고 했죠? 평소에 그렇게 놀아요?”
"뭐, 가끔.“
해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건 뻔히 보고 있는 제영도 덩달아 입술이 말랐다. 노곤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냉랭해졌다.
"가끔이에요. 자주는 아니고.”
왜 자신이 이렇게 변명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입술을 꾹 깨물고 표정을 굳힌 상대를 보자 주절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은 회사에 다녀도 괜찮겠다는 것은 전부 취소였다. 사무실에서 한참이나 연하인 팀장에게 깨지는 건 생각보다 꽤 곤혹스러운 일인 듯싶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일이고. 남자끼리 모이다 보면 다 그렇게 돼요. 해진 씨도 일하다 보면."
"난 싫어요. 아무리 일 때문이더라도 제영 씨가 그런 식으로 가볍게 즐기고 놀고 그러는 건.“
또다시 초능력이 발휘된 건지 제영에게는 이말이 다르게 들려왔다. 마치 '나는 당신을 진지 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는 것처럼. 제영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여기서 뭘 더 덧붙이든 간에,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다시 해진이 제영을 바라보았다. 그게 꼭 제영의 절조 없음을 탓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영은 억울했다. 자신이 아무리 여자와 요란스러운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성벽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것을 피력하기도 전에 제영은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하고 무심하게 내민 것은 하나의 부탁이자 마음이 까슬하니 위로해 달라는 수신호였다. 자신의 손을 잡아 달라는. 제영은 마지못해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 손을 잡을 때마다 같은 마음이었다. 거북스러움과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속마음이 손끝을 타고 넘어갈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제영을 난감하게 만드는건 별다를 바 없었다.
한참 만에 연락이 닿아 겨우 애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사과를 받긴 했다. 물론 제영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것도, 자신이 한 것도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몰랐다.
'나는 네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말을 내뱉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저 고맙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타인에게 쥐어진 손이 뜨거웠다. 원체 몸이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가 꽉 쥔 손을 슬며시 당겼다. 앞을 바라보던 제영이 그를 쳐다봤다. 해진은 입도 벙긋거리지 않고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하나의 거짓도 없이 원하는 걸 말하고 있었다.
'키스해 줘요.‘
제영이 주변을 살폈다. 한적한 곳이기는 하나 누가 볼까 걱정되었다. 해진은 그런 제영의 마음을 모른 체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다시 손을 당겨 오며 재촉했다. 손과 똑같이 열기를 띤 곳에 입술을 맞붙이며 애인에게 고마운일은 뭔지 모르더라도 미안한 일은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영은 따로 여자를 만든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치부했다.
촉, 하고 짧았던 키스는 금방 끝이 났다. 아무래도 밖이니 쉬이 입을 열기가 조마조마했다. 제영이 몸을 물렸다. 해진이 싫은 기색으로 따라붙으려고 하자 제영이 그를 밀어 내었다.
"왜요?"
더 이상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밖이잖아요. 밖은 좀 그래요.“
"아무도 없어요.”
아직 놓이지 못한 손이 뜨거웠다. 제영이 손을 당겨도 상대방은 막무가내였다.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또다시 짧게 허락하고 나서야 그가 손을 놓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불만스러운 표정은여전했다.
아아, 또 소리가 들려와 제영은 혀를 찼다. 서 운하다고 징징대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건 무시했다. 차가 그제야 천천히 인적 드문 곳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가기 시작했다. 옆자리의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키를 쥐고 컨트롤해야 순탄한 피날레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게 자신에게도 자신의 '해진 씨’에게도 이로울 터였다.
제영은 차 안의 적막이 싫어 라디오를 켰다.
수다스러운 디제이들의 주파수를 피해 겨우 잔잔한 채널을 찾았다. 특유의 또박또박하면서도 굵은 목소리의 기자가 오늘의 날씨를 보도하면서 마지막은 뚜뚜 소리와 함께 오후 2시 정각임을 알렸다.
'지금 오후 2시니까 다녀오면 저녁이겠네.'
다행스럽게도 공장으로 가는 외곽 고속 도로는 한산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들 사이에서 제 차가 느림보 같아 제영은 액셀을 밟아 속도를 올렸다.
제영은 새로 도입되는 장비의 현황을 체크하러 가는 길이었다. 원래 동혁도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사의 호출로 결국 제영이 홀로 공장에 내려가게 되었다. 그는 짐짓 난처한 얼굴로 제영에게 다가와 그 소식을 알렸다. 윗선에 의해 차출된 것이라 딱히 그의 잘못도 아니기에 죄송할 거리조차 못 됐지만 퍽이나 예의 바른 그는 사과부터 하였다. 제영은 그게 자길속 좁게 만들기 위한 수작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한참을 달린 차가 이제 국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멀리' 일성’이라고 크게 적힌 벽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영은 도착의 기쁨도 없이,괄괄한 공장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 걱정했다. 근본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본사에서 나온 인사들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현장 돌아가는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매번 자료 요청에 꼬치꼬치 태클을 건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우락부락한 공장직원들 사이의 제영은 영락없는 도시 샌님 꼴이라 은근한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다. 제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순간만큼은 체대 출신이라는 동혁의 덩치가 부러워졌다.
"어, 김 대리 왔어?”
"예. 자주 뵙네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공장장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자 제영이 허리를 숙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제영의 등을 후려치듯 했다. 윽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제영이 예의 영업 사원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자꾸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본사윗분들이 새로 구입한 설비가 어떤지 궁금해하셔서요. 공장장님도 아시다시피 이번 계약, 우리 일성에 무척 중요한 일 아닙니까."
"중요는 무슨. 일 늘어나면 우리 공장 직원들만 죽어나고 돈은 다 본사에서 닦는 거 아냐? 우리가 한두 번 당해?”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번에는 사장님이 정말 제대로 약속하셨다니까요.“
제영이 살살 구슬려 보려고 해도 아니꼬운표정은 여전했다. 공장장과 인사를 나눈 후에 본격적으로 신사업 설비 담당자와 만나 점검을 시작했다. 그는 제영의 진땀을 빼던 공장장보다는 훨씬 더 협조적이라 일이 수월했다.
"근데 박 대리님은 안 오십니까."
"아, 예. 본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저만 내려오게 됐습니다.“
"곧 결혼하신다면서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축하드려요. 결혼식 날짜는 잡으셨어요?”
"아니, 아직입니다. 준비할 게 많아서 날짜 잡기가 어렵네요."
3년 전에 늦장가를 간 그는 얼마 전 아이가 태어나 그 재롱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아직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아이가 엄마 품에서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생판 남인제영에게조차도 무척 귀여워 보였으니 늦둥이를 본 부모에게는 얼마나 귀여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가 오고갈 때부터 아이에 대한 생각을 몇 번 하였다. 희주와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설레기도 하였지만 책임감에 어깨가 묵직해졌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 부담감을 느낄 필요까지야 있나 싶으면서도 도무지 자신이 부모가 된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구도에 표정만 미세하게 다른 백여 장의 사진이 끝을 보이고 나서야 아이 자랑이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장을 둘러봐야 할 때였다.
저번과 큰 변동이 있지는 않았다. 직원들은 이미 설비 작동법에 익숙해져 있었고 불량률도 적었다. 이 정도라면 HS의 기준을 통과하는 데큰 문제가 없을 듯했다. 본사에서도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보고서에 올릴 사진 몇 장을 찍고 담당자와 다음 설비를 보러 가려고 할 때였다. 중장년의 직원들 사이에서 앳된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새로 입사한 직원들입니다. 근처 고등학교졸업반 친구들인데, 얼마 전에 면접 보고 뽑았죠.“
제영은 그제야 그 앳된 이들이 사내 인트라넷에 올라온 신입 사원 소개에서 본 얼굴들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저 나이 때의 자신은 대학에 들어가 술 마시고 클럽에서 여자를 꼬실 생각으로 한창 들떠 있었다.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이 결정되어 저렇게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라리 저렇게 일찍 일을 시작해 돈이나 버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자신은 부모님 돈이며 학자금 대출로 겨우 4년제 대학을 졸업했더니 고작 이런 중소기 업 대리 노릇밖에 못 하는 실정이었으니까.
"김 대리님. 가시죠."
그들을 뺜히 바라보던 제영을 담당자가 재촉했다. 제영이 얼른 그를 따라갔다. 쓸데없이 게 으름 피울 시간이 없었다. 내려오던 것도 한참 이었으니 올라가는 것도 한참일 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회사에 아침 일찍 출근해 전날 밤 작성해 둔보고서를 체크한 후 바로 제출했다. 별 문제 사항이 없었기에 상부에서도 만족스러워했다. 제영은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자리로 돌아갔다.
숙제라도 끝낸 기분이라서 가뿐한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제영을 우울하게 만드는 게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거 박 대리님이."
제영이 그걸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선주가 작게 속삭였다.
"알아."
그가 제영과 같이 공장에 가지 못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HS 쪽에서 급히 추가 자료를 요청해 동혁이 그걸 맡았다. 급히 만든 자료치고는 꼼꼼하고 가독성이 좋았다. 요즘 체대에서는 이런 것까지 가르치나 싶다가도 명색이 경영학전공인데 체대 출신보다 보고서 작성 능력이 떨어지는 듯해서 위기감이 들었다. 이번 자료에도 저번 것처럼 형광펜으로 살짝살짝 표시가 되어 있었다. 제영이 신경 써서 봐야 할 것을 따로 표시해 준 것이었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속셈인지 모를 후배의 친절이 제영의 속을 더 뒤집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선배님이라 깍듯이 대우하며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어느새 이렇게 전세가 뒤집어진 건지 암만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울적해지니 술이 고팠다. 이럴 때 가장 적당한 인물은 하나였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름을 부르고 연락을 하는 예의 그 상대에게 짧게 문자를 날렸다. 길게 기다릴 것도 없이 예상했던 답장이 도착했다.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성북구 쪽의 바였다.
낮에는 카페였지만 밤이 되면 가볍게 술을 즐길수 있는 곳이었다. 이전에 한번 가 본 곳이기도했다. 가파른 언덕바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로 밤이 되면 아래로 도시나 고궁의 야경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희주와 서울 안의 그럴싸한 데이트 장소란 장소는 다다녀 봤다고 생각했던 제영이라 여길 와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겨울이라 테라스에는 잠깐 동안 밖에 있지 않았지만 여름에 바깥에서 술 한잔하면 분위기가 꽤 좋을 터였다.
'여름에 한번 더 와요.'
그런 제영의 마음을 읽은 듯이 해진이 말했다. 하지만 여름이 되기도 전에, 꽃향기 풍겨 올봄만 되어도 그와는 안녕을 고할 것이다. 그러니 제영은 오늘 같은 날이 여길 다시 오기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주택가의 골목길을 타고 올라와 가게 앞에 도착했다. 제영은 저번에 맛보았던 술을 떠올렸다. 향도 맛도 마음에 들었고 결정적으로 배가 간지럽지 않았다. 해진이 시킨안주와도 잘 어울렸다. 같이 먹으러 가는 곳마다 제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점만큼은 아주 고맙게 여겼다.
근데 가게의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달랐다. 안쪽에서 뭔가 번쩍번쩍하는 게 파티라도 열린 것처럼 소란스러워 보였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봐요."
해진이 확인해 보겠다며 제영을 두고 내렸다. 제영은 같이 가도 상관없었지만 따뜻한 차안에서 기다리는 편이 좋았다. 차가운 술을 마시기 전에 몸을 데워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꽤 오랫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는데도 그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제영이 결국 차에서 내려 해진을 찾아 나섰다.
가게 앞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커다란 패널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들어 보지도 못한 곳의 몇 주년 행사라고 적혀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부의 소란과는 다른 톤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들이 오늘 예약 손님과 착각해 안내를 잘못 해 드린 것 같습니다."
깊게 고개를 숙인 직원 앞에 해진이 있었다.
“어차피 2층까지만 오픈된 상태면 저와 제일행은 3층을 이용하면 되지 않나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보다도 오만한 느낌이 들었다. 제영은 자신 앞에서 한없이 가볍게 굴던 그의 태도를 떠올리고는 낯설어져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 모습을 엿보기만 하였다.
"점장한테 연락해서 제 이름 말하세요. 그럼될 겁니다."
대충 듣기로는 오늘은 가게 전체가 통으로 예약된 상태였다. 무슨 착오인지 해진이 확인했을 때는 직원이 예약한 인원이라고 생각하고 안내한 듯했다. 점장을 제외하고 아마 제일 높은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해진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이고 다닌 단골이라고 했으니 해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점장님이 연락이."
"도대체 저랑 제 일행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엿듣던 제영조차 움찔할 정도로 매서운 투였다. 더 있다가는 분위기가 거칠어질 것 같았다.
"해진 씨."
결국 제영이 인기척을 내고 해진을 불렀다.
해진이 제영을 보자마자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제영 씨. 기다리라니까 왜 나왔어요."
그의 앞에서 바짝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직원이 해진의 곁에 선 제영에게도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그게 과하게 느껴져 제영이 민망할 정도였으나 해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늘 무슨 행사 같은 게 있나 봐요."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곧 해결 볼거니까.”
해진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고개를 숙였던 남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양손을 맞잡고 제영과 해진을 바라보는 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듯했다.
"해진 씨. 오늘은 그냥 가요. 우리가 예약하고 온 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미리 저렇게 잡아뒀으니까 어쩔 수 없죠.”
해진이 뭐라 덧붙이기 전에 제영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그가 순순히 굴었다. 차에 타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사과와 인사를 받으며 거길 떠났다. 제영은 울적함을 날리기 위해 왔다가 우울함만 더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그 직원의 모습이 자신과 겹쳤다. 고개를 조아린 모습이 사뭇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자신 역시 그 같은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특수한 상황이라지만 그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만 해도 그 못지않게 자신 역시 굽실거렸다.
새삼 그와의 자신 사이에 '격의 차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직원에게 그런 항의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문전박대나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무슨 조화인지 해진에게 대접받으며 귀한 취급을 받고 있지만 실상은 그네 집 화장실보다도 못한 원룸에 세들어 살면서 오래된 애인과의 결혼 비용조차 대기 버거워 허덕거리고 있었다.
제영이 해진을 힐끗 봤다. 얼굴에 귀티가 흘렸다. 돈과 권력의 냄새가 풀풀 풍겨 댔고 실제로도 없지 않았다. 저런 놈이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자신에게 목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영은 이때까지의 시나리오들이 항상 실패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었다. 왜 좋아하는지를 모르니 어떻게 단념시켜야 하는지도 애매해서가 아닐까.
"미안해요. 일 번거롭게 만들어서."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오늘 갑자기 가자고 했었으니까."
말끝이 축축 처졌다. 해진은 이 일이 자신의 큰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영에게 신경 썼다. 다른 곳에 가 보자며 위로하려고 들었다. 고작 거기서 밥을 못 먹었다고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로서의 패배감 때문에 기분이 울적해지고 있었다. 제영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깊게 파인 감정이었다.
올라갔던 언덕길을 고스란히 내려와 다시 차들 사이로 진입했다.
"해진 씨. 오늘은 그냥 갈까요."
제영은 그에게 변덕스럽다고 타박받더라도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해진이 제영을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예전에 갔던 일식집에 갈래요?
거기 괜찮다고 했잖아요."
물론 거기도, 그가 데려가는 어느 곳이든 괜찮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제영의 기분이 영 괜찮지 않았다. 제영이 대답이 없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제영의 소맷부리 사이를 파고들며 손을 잡아 왔다. 위험스레 한 손으로 운전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제영 역시 일단 그를 귀찮게 만든 것은 미안했기에 손을 빼내려고 하지 않았다.
익숙한 골목이 보였다. 항상 여기서 그가 차를 멈추고 제영을 내려 주었다. 이번에는 좀 더안쪽까지 들어갔다. 여기나 거기나 끽해야 몇분 더 걷고 말고의 차이라 제영은 왜 그가 나오기 힘들게 거기에 들어가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길게 가지도 않았다. 내리는 제영따라 그가 같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요?"
제영이 차 문을 닫고 그를 쳐다봤다. 여기서 키스라도 할 셈인가 하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차 안도 아니고 제대로 밖이었다. 밤이 늦었긴 해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다.
"저도 갈래요.”
“어디를요?"
"제영 씨 집으로요. 가서 가볍게 한잔이라도해요. 나 오늘 기대 많이 하고 나왔단 말이에요"
말끝이 교태라도 부리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아까의 고압적인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아까의 그 모습이 진짜인지, 아니면 지금의 것이 진짜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따위 것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해진 씨, 미안한데."
"가죠."
해진은 제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부드럽게 등을 밀었다. 언뜻 아까전과 같은 모습이 보인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린애가 떼쓰는 느낌이 강했다. 제영이 뭐라 말을 꺼내려 하자 '싫어요.'하고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까보다 더 강한 힘으로 제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영은 누가 볼까 싶어 어깨의 그 무게를 밀치고 결국 그와 함께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먼저 연락해 한잔하자고 했으니 모두 제 탓이었다.
제영보다 해진의 발걸음이 더 가볍고 날랬다. 제영의 눈에는 곧 그가 휘파람을 부르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고작 한 번 와 봤으면서도 그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양손에는 편의점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가득한 봉지를 들고 제영의 느린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문 앞에서 딱 멈췄다. 경보음을 낸 뒤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해진이 멈칫했다. 그가 번호를 다시 눌렀다. 결과는 같았다. 그런 모습에 해진보다 제영이 훨씬 더 당황했다.
"제가 열게요."
제영이 누르고 나서야 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제영은 순간적으로 등에 땀이 주룩 흐르는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비밀번호 바꿨어요? 저번이랑 다르네.”
제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좁은 현관에 우뚝 서 있는 그에게서 술과 과자 따위의 안주가 담긴 봉지를 뺏어 들고 먼저 신발을 벗었다.
"가끔 바꿔요. 이런 곳은 보안이 안 좋아서,주기적으로 바꿔 줘야 해요.”
그러니까 당신 때문이 아니란 말을 해야 했지만 그게 꼭 집어 너 때문에 바꾼 거라는 말 같아 입을 다물고 술상을 준비하는 척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술병들이 달그락거리며 상 위에 놓였다. 그가 금세 자신보다 더 울적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아서 서둘러 술병을 땄다. 왠지 모르게 이 시간이 피곤하게 굴러갈 것처럼 느껴졌다.
"아, 잔 가져올게요.”
제영이 일어나 부엌 쪽으로 갔다. 먼지가 앉은 잔을 대충 씻어 내며 언제쯤 그를 돌려보내야 할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제영 씨, 이거 봐도 돼요?"
잔의 물기를 털어 내고 있을 때였다. 그가 무슨 종이 뭉치를 흔들며 제영에게 물었다. 제영의 서류 가방에 삐죽 끝이 튀어나와 있던 것들이었다. HS전자 관련 자료들이었다. 아마, 익숙한 이름을 보고 꺼낸 듯싶었다.
제영은 상 위에 잔을 내려 두고 손의 물기를 대충 셔츠에 닦았다.
"봐도 돼요. 근데, 어차피 그쪽으로 제출된 자료들이에요."
그들과의 회의 때문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해진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었으나어쨌든 HS 내부적으로도 공유되고 있는 자료이니 봐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꼭매번 땡땡이치던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열심히 일을 배운다고 하더니 진심이었나. 하지만 제영은 그의 선생님도 아니었기에 대견스럽다기보다는 귀찮았다.
"이거 좀 이상한데."
"뭐가요?”
“Z메모리랑 관련 데이터가 안 맞아요. 이건 다른 부품 자료인데. 우리 쪽에 제출된 자료는 이런 내용 아니었는데, 수정 전 자료인가요?”
제영이 상을 차리다 말고 그 서류들을 보았다. 그건 동혁에게 받은 것들이었다. 해진의 말대로 교묘하게 데이터들이 어긋나 있었다. 제영이 해진에게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이를 갈았다. 틀린 자료라는 것도 모르고 회의에 들어가 개망신을 당할 뻔했다.
"이전 자료를 잘못 가져왔나 봐요?'
"이 자료도 봐도 괜찮아요?"
제영이 공장에 다녀온 뒤 만든 자료였다.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설비 괜찮아요? 다른 업체에서 먼저 도입했다고 들었는데, 조작법 같은 게 어려워서 불량률이 오르고 있다던데.”
"어떤 거요? 아, 그거 이전 버전을 이미 사용중이었어요. 크게 문제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얘기 나오면 같은 제작사에서 만든 설비 사용 중이었다고 말해요. 그거 현황같은 거 자료로 만들면 더 좋을 거예요.”
"네, 팀장님."
제영이 그렇게 말하고 잔에 술을 따르려고 하자 해진이 뺏어 직접 제영의 것을 채웠다.
"너무 일 애기했죠."
"아니에요."
예전에는 제영이 일 얘기를 꺼내고 그걸 해진이 불편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제영이 술을 들이켰다. 자꾸만 그 직원 모습이 자신과 오버랩됐다. 사실 어찌 보면 그런 관계가 훨씬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 순간의 장소가 자신의 집이 아니라 회의실이어야 했고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어디 좋은 장소에 가서 양주나 마셔야 할 사이였다.
'도대체 내 어디가 좋을걸까.'
궁금증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하지만 그런 낯간지러운 질문은 입이 찢어져도 묻지 못할 터였다.
"TV 켜도 되죠?"
제영이 다시 한잔 하고 TV를 켰다. 보고 싶은것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소음이 필요했다.
그가 열심히 풍겨 대고 있는 케미스트리와 자신사이를 방해할 만한 잡음들이. 그는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봤던 프로그램이 나왔지만 처음 본 것처럼 웃었고 그에게도 시시덕거렸다.
한 잔, 두 잔, 서로 주고받으며 마시는 와중에도 제영은 언제쯤 그를 돌려보내야 할까 하고 시계를 힐끔거렸다. 자정이 넘기 전이 적당할것 같았다. 물론 그가 신데렐라라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긴 것은 왕자 정도는 쉽게 꼬실얼굴이었다.
시침이 점점 12시를 향해 가면서 해진도 제영과의 거리를 야금야금 좁혀 왔다. 어느새 옆자리에 찰싹 붙어 있는 남자를 보고는 제영이 흠칫 놀랐다. 저번 비 오던 날 밤과 같았다. 다른 것은 저번에는 그가 왼쪽, 제영이 오른쪽이었고 이번에는 제영이 왼쪽, 그가 오른쪽이라는 것이었다. 별것도 아닌 차이점이긴 했다.
해진의 호흡마저 느껴질 지경이 되자 제영은 목이 답답해져 넥타이를 풀었다. 맨 윗단추만 좀 열어 둘까 하는데 기분이 싸해져 결국 풀던 단추를 도로 원위치시켰다. 옆은 바라보지도 못하고 앞만 응시했다. TV를 켜 둔 게 신의 한 수였다. 밍밍한 내용이더라도 지금만큼은 무척 재미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집중했다.
이제 그를 살살 구슬릴 때였다. 손을 잡아 주고 입에 살짝 키스한 다음에 등을 토닥이며 집에 갈 시간이라도 말해 줄까. 가기 싫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다시 키스해 주고 토닥이는 대신 등을 밀며 그를 쫓아 보내야지. 아니 손잡는것도, 키스도 다 해 주었으니 만족하며 상큼한 얼굴로 다음을 기약할지도 몰랐다.
"제영 씨.”
"예?"
그가 어깨를 바짝 붙여 왔다. 셔츠 너머임에도 마치 맨살에 닿는 것처럼 단단한 감촉이 피부를 압박했다.
"더워요? 땀 흘리네."
잔을 내려 둔 손이 제영의 목을 향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제영의 단추를 끌러 내렸다.
그건 제영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채워 두면 답답하지 않아요?”
물론 답답했다. 그 답답함을 참아야 했던 것이 누구 때문인데, 원인 제공자가 저러니 제영은 억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억울함보다는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음을 잠재우는 게 더 급했다. 제영이 여전히 목덜미 근처를 서성거리는 해진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하지만 멀리가지 못했다. 바닥에서 침대 위로의 소심한 피신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제영을 그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집에 가셔야죠. 그러나 제영은 말을 다 하는 대신 시계를 쳐다보았다. 제영 따라 해진 역시 시계를 보았다.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제영은 그에게 유리 구두를 챙겨 주진 못해도 배웅은 살뜰히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두고 나발이고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퍽이나 공손한 무릎걸음으로 그가 제영에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 새인가 제영의 무릎 아래는 해진의 손아귀였다. 제영은 어째서 그가 자기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억에 공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그런 것뿐이었다. 제영의 안쪽 허벅지에 고개를 베고 그가 히죽거렸다. 제영이 상 위의 술병을 쳐다보았다. 빈 술병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취했구나.'
제영은 그를 돌려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취한게 낫지 않을까.'
커다란 덩치가 어린애처럼 행동했다. 사타구니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굴고 있긴 했어도 그게 전부였다. 술기운에 뺨이 붉었다. 제영은 처음으로 그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창백한 얼굴에 두 뺨만 붉힌 여자가 이렇게 매달려 오면 거절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손에 닿은 그의 뺨이 뜨거웠다. 그러자 제영의 무릎을 움켜쥔 해진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잠에 든 듯 감겼던 눈이 떠졌다.
해진은 차가운 제영의 손이 기분이 좋은지 자신의 손을 포개서 뺨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했다. 뺨과 손바닥 사이에 손 하나만 붙들린 것임에도 제영은 벽에 몸이 끼인 것처럼 속박당한 기분이었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보았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민에 대한 답보다는 엉뚱한게 눈에 띄었다.
귓불에 작게 콕 파인 자국이었다. 흉인가 하다가 그저 평범하게 귀를 뚫은 흔적이라는 걸 알아챘다.
"귀 뚫었어요?"
아는 친구 중에서도 귀를 뚫은 사람이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해골 모양 귀걸이를하고 왔는데 귀걸이 같은 건 여자나 하는 거라생각했던 제영이 보기에는 여간 꼴사나운 게 아니었다. 어디 스타일이니 뭐니 항변하며 제영을 꼰대 취급 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패션이고 뭐고 그냥 흉한 양아치 같았다.
"아, 피어싱이요. 여기도 있어요."
해진이 고개를 돌려 반대편도 보여 주었다.
"이쪽은 여기도 뚫었어요."
그가 귓바퀴를 톡톡 쳤다. 그의 말대로 윗부분에 구멍이 두 개나 더 있었다. 그가 여기다 뭘달고 다녔을지 궁금해졌다. 아프지는 않았을까.
무엇 때문에 몸에 이렇게 구멍을 냈을까. 호기 심 어린 제영의 손끝이 직접 확인을 나섰다. 귓바퀴의 작은 구멍들은 별다른 감촉이 없었으나귓불은 달랐다. 말캉거리는 살 속에 단단한 멍울이 잡혀 있었다.
제영의 무례한 손길에도 잠자코 있던 해진이 '으음' 하고 억눌린 소리를 냈다. 반응에 놀란 제영이 황급히 손을 뗐다. 아파서 낸 소리가 아니란 것쯤은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나까지 취했나.'
제영은 자신의 실수를 반성했다. 정말로 그를 되돌려 보내야 할 때가 왔다.
"해진 씨,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는 편이 좋겠어요."
제 딴에는 분위기에 한껏 취한 얼굴을 한 해진을 가장 잘 달랠 만한 단어를 골라 말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싫어요.'라는 샐쭉한 한마디에 무용지물로 변했다. 해진은 도리어제영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처럼 달려들어 제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층 노골적인 광경이었다. 그의 가슴팍이 제영의 사타구니를 문지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영이 엉덩이 걸음으로 어설프게 도망쳤다. 그를 밀어내자 저항 없이 몸을 떼긴 했지만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제영은 겁이 나는 마음을 숨기고 상대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늦었다니까요."
"그런가요."
해진이 시계조차 보지 않고 답했다.
"키스해 줘요.”
당돌한 얼굴로 앙탈을 부려 왔다. 다시 들썩이려는 해진의 어깨를 눌러 고정시켰다.
"얌전히 있어요. 얌전히."
침대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그를 붙들어 두고는 어찌할까를 고민했다. 이대로 돌려보내는 편이 제일 좋았으나 상태로 봐서는 쉬이 그러지 않을 듯했다.
"키스해 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정리해요.”
내용도 상황도 비웃음당하기 딱 좋았다. 타인과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은 적도 이런 정황을 겪은 적도 없었다. 애인과 관계를 맺을 때는 항상 제영이 애달고 흥분하는 쪽이었지 그런 상대를 진정시키는 쪽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요. 가만히, 가만히."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뜨거운 두 뺨을 쥐고 입술을 마주하기 직전까지도. 다리 사이에서 요동치던 이는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제영의 말을 따랐다. 제영이 해진에게 입을 맞췄다. 작은 접촉이 점차 입가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제영이 해진의 젖은 입술을 깨물고 할았다. 제영의 혀가 해진의 혀끝을 스치고 나올때면 그가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큰 움직임은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갈 용기는 없기에 끝을 살짝 휘젓는 게 마지막이었다.
"더 성의 있게 해 줘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한 키스였지만 해진을 만족시키지는 못한 듯했다. 해진이 제영의 무릎을 잡고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제영은 성의 있는 키스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키스에 성의가 있고 없음을 어떻게 판단할수 있단 말인가.
"한 번 더."
그가 말한 성의 있는 키스는 어려울지라도 한 번 더 정도는 흔쾌히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그와 키스하고 싶다거나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취해서 이지를 일부 상실한 덕이었다.
닿아 오는 감촉이 부드럽다. 그는 성의 없다타박했으면서도 아까의 키스로 녹아내린 듯 굴었다. 제영의 키스를 맞이하는 입술도 혀 놀림도 더 미끈미끈했다. 뺨에 대고 있던 두 손 중하나를 해진이 잡아 내렸다. 또다시 그의 손 페티시라도 발동된 게 아닐까. 제영이 순순히 내준 손은 그의 목 왼편에 안착했다.
이번에는 뜨거웠다. 떼어 낼 수 없도록 붙들려 그의 피부 아래에서 거칠게 박동하는 맥박을 고스란히 손바닥으로 느끼고 있었다. 목덜미에 닿은 손끝은 도드라진 목뼈에 하나하나 걸쳐졌다. 엄지손가락이 그의 귓불을 스친 것은 반쯤부러 한 것이었다. 효과는 꽤 좋아 그가 입안으로 신음을 삼킬 때마다 제영 역시 속으로 웃었다.
제영은 혹시나 그가 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둔 이유가 다른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디가 성감대인지 알려 주려는 수작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자 해진이 살짝 뒤틀어 대는 통에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여전히 한 손은 뺨에 나머지 한 손은 갈고리처럼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제영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더 당겨 와 옭아맸다. 접촉의 깊이가 깊어지고 제영은 이런 게 그가 말한 성의 있는 키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제 충분해 보였다.
"코트 꺼내 줄게요."
몸을 떼자마자 날름거리는 혀가 부족하다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제영 역시 기분이 알딸딸했다. 타인과의 키스 후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제영은 만취한 상태라서 그런 게 분명하다고 탓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무시하는 게 옳다. 제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가요"
"오늘은 자고 갈래."
"안 돼요."
이번에는 앙탈이 아니라 애처롭게 빌었다.
제영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못 움직이게 꽉붙들었다. 제영이 해진을 내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있었다. 직접 무릎을 꿇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를 그런 꼴로 만든 데는 제 역할이 컸다. 제영은 그가 이렇게 자신의 눈치를 살필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누군가 발바닥 사이의 움푹 파인 곳을 깃털로 살살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자신의 삶을 통틀어 누군가를 무릎 꿇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부족할 것 없는 건장한 남자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양감이 뇌리에 꽂힌다. 제영은 그것이 키스로 인한 성적 흥분인지 아니면 그저 치졸한 승리감으로 인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제영이 또다시 장난치듯 해진의 귀를 건드렸다. 해진이 이번에는 참아 주지 못하겠다는 듯 이 제영의 손가락을 물었다. 명백한 항의 표시였다. 그러나 제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상체를 바짝 세운 해진이 제영의 목덜미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제영은 그것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몸을 타고 내려오던 손가락들이 알게 모르게 예민한 부위를 스쳤다. 조금 대담해진 제영이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어디까지 이 남자가 곤두박질칠지 궁금해졌다. 발끝이 움찔했다. 그에게 발을 내밀면 기쁘게 핥기라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해진의 선택이 한 수 위였다. 제영이 갑자기 버둥거렸다.
"해진 씨!"
잔잔함을 뚫고 제영이 소리쳤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성거리던 해진의 손이 기어코 제영의 것을 더듬거렸다.
"그만둬요."
덜컥 겁에 질린 제영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덜덜 떨리는 고함이라도 효과가 있는지 그가 손을 내렸다. 하지만 침대 위로 도망가려는 제영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이것 좀 놔요."
한쪽 다리는 그에게 발목이 붙들렸고 나머지는 허벅지가 꽉 눌렸다. 상체만 조금 들썩이고 하반신은 꼼작도 하지 않았다. 놓으라고 말해도 그는 듣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제대로 숨을 고르지 못해 헉헉대는 게 제영 자신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힘이 빠질 무렵에야 해진의 손아귀 힘도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이미 제영은 기진맥진했다.
해진이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손으로 움켜쥐었던 하얀 목덜미가 제영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그런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뭉툭하면서도 날카로운 압박감이 아래를 눌러 왔다. 옷 너머로 이가 닿을 때마다 뿌득뿌득하는 소리가 났다. 혀가 뭉근하게 눌러 올 때면 아까의 장난질로 반쯤 서 있던 물건이 제 주인의 마음도 모른다는 듯이 요동쳤다. 제영이 해진의 어깨를 움켜쥐려다 놓치고 대신 그의 셔츠만 꼭 붙들었다. 제영이 다시 헉헉댔지만 아까와의 다른 의미였다.
달칵대며 벨트 버클이 열리고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제영은 스스로가 벌벌 떠는지도 몰랐다. 제영의 맨살을 더듬는 해진이 더 잘알고 있었다. 허리로 올라왔던 손은 제영의 하의를 대충 끌러 내리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영은 아킬레스건 주변을 주무르는 해진의 뜨거운 손이 두려웠다.
"제영 씨. 나 봐요. 응?"
제영은 해진의 목소리보다도 어느새 올라와 종아리를 주무르는 손이 더 신경 쓰였다.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이 힘주어 불린 뒤에야 그를 쳐다보았다.
"더는 안 해요.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할 테니까."
뒷말은 없었다. 제영은 해진이 말한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겁에 질렸다. 그가 한 뼘가량 드러난 배꼽 아래부분에 마치 키스할 때처럼 입을 맞췄다. 피부에 축축한 감촉이 천천히 흔적을 남기며 미끄러져 내렸다. 슬쩍 이를 세워 속옷의 고무를 당기 자 제영의 마음도 모르고 착실하게 발기한 것이 끝을 적시고 있었다. 옷 너머로 대충 형태만 더듬던 것이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이 속을 드러내며 제영의 것을 삼켰다.
"아, 아. 그만, 잠깐만요."
키스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가 힘을 주어 빨아올릴 때마다 신음을 참기 어려웠다.
질척이는 소리와 감촉이 애를 태웠다. 하지만 여전히 하반신을 달싹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종아리를 타고 오르던 손은 무릎뒤를 간지럽혔고 나머지 손으로는 허벅다리 안쪽을 밀어 다리를 더 넓게 벌리도록 했다. 제영은 상체가 뒤로 넘어갈 것만 같은 걸 억지로 붙드는 중이었다. 부끄러움도 수치도, 아까와 같은 두려움도 다 잊었다. 다만 그의 저급한 혀 놀림에 허덕거리고만 있었다. 높아져만 가는 성감을 참지 못하고 제영이 해진의 등을 두드렸다.
"가만히, 가만히 있으면 돼요."
해진이 제영이 했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하지만 제영은 그가 했던 모양처럼 얌전히 굴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입 밖으로 소리가 터져나왔다. 해진이 측면에 이를 세웠다가 다시 끝을 거세게 빨았다. 제영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내부에서 폭죽이라도 터뜨린 것 같았다. 한 계였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감도가 높아져 순간적으로 숨이 멈출 지경이었다. 뒤로 넘어가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덜덜 떨리며 겨우 상체를 지탱하던 팔이 금세 꺾일 듯했다.
거세게 숨을 몰아쉬며 제영은 눈앞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영이 방출한 것을 그대로 맞은 모양인지 반쯤은 입안으로 반쯤은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허연 액체를 손으로 훔치고 있었다. 제영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려 왔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