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타인의 결
제영은 이미 깼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따끔거렸다.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는지 눈이 부셨다. 손에 닿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들썩여진 이불에서 좋은 향기가 나 무의식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청결하고 깨끗한 향이 두통을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그대로 다시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이 정도 소음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밤새 감겨 있던 눈동자 위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제영이 인상을 잔뜩 쓰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잠시 후, 주변을 살폈다. 방이었다. 제영의 관점에서 보면 거실보다도 넓은 방이었다. 모노톤의 차분한 인테리어. 부들부들하고 폭신한 이불은 호텔 침대 같았다. 침대 오른쪽에는 넓게 창이 나 있어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제영 씨.‘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기억에 잔상처럼 남은 목소리가 제영의 귀를 간지럽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옷을 확인했다. 잔뜩구겨지고 셔츠의 단추가 하나 풀린 것 말고는 멀쩡했다. 키스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남자와 말도 안 되는 짓이라도 저질렀을까 봐 걱정하는 자신의 신세가 우습기도 했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방 밖을 살펴도 해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가기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넓은 집이니 어디 콕 처박혀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도둑인 양 제영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재킷과 가방을 찾아서 몰래 집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노련한 도둑 못지않게 굴어야 했다.
"일어났어요?”
그러나 계획은 세운 지 5분도 되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해진은 샤워라도 마친 건지 수건으로 젖은 머리의 물기를 훔치며 여상한 표정으로 제영에게 걸어왔다. 그와는 다르게 제영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몸이 쭈뼛거렸다. 그런 제영의 모습에도 해진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해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난데없이 맞기라도 하는 건가 싶은 제영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둔탁한 소리는 없었다.
"미안, 놀랐어요? 머리가 좀.”
눌려서 엉망이 된 제영의 머리칼을 정돈해주려는 듯 부드러운 손길을 이리저리 놀렸다.
그러나 딱히 효과는 없었다. 제영은 극악의 반곱슬인 자신의 머리가 아침이 되면 수수밭처럼 엉망진창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옷가지 정도였으니 그외는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제영이 해진의 손을 밀어내고 자기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 넘겼다. 이미 깨끗이 샤워를 마치고 좋은 냄새마저 나는 해진의 앞에서 이런 꼬락서니로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계획이 빠른 귀가에서 욕실에서의 샤워로 변경된 것은.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욕실 안이었다. 제영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퀭한 얼굴을 더듬었다. 눈 밑의 검은 그림자가 턱 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욕실까지 들어온 마당에 다시 나가는것도 뭐해서 제영은 결국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찬물을 끼얹으며 한 방에 술기운을 날려 보낼 용기는 없었다. 피부를 타고 내리는 따뜻한 물 덕에 몸이 조금씩 노곤노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자꾸만 어젯밤 생각이 났다.
제영은 벽에 머리를 쿵 박았다.
"미쳤어. 미친 새끼."
자신은 미친 게 분명했다. 술 먹고 저지른 일중에 최악이었다.
'남자와의 키스라니.'
어디 가서 말도 못 할 일이었고 절대 말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영은 차라리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면 이런 상태는 아니었을 거라고 한 탄했다. 벽에 기댄 채로 쏟아지는 물을 받던 제영이 비쩍 마른 몸을 더듬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키스만인가."
해진과의 키스를 떠올린 순간 등줄기가 움찔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반응이었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춘 기억이 선명했다. 조금 깊어지려고하면 제영이 혀를 물렸고 그게 불만스러운지 해진이 제영을 나무랐다. 그러나 작은 투정일 뿐 이었다. 또 몇 번의 입맞춤. 그리고 제영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등과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이 귀찮게 느껴졌다. 제영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푹 숙인 순간에 옷 위를 오가던 손이 속살을 파고드는 것까지도 기억이 났다. 아마 깨어있었다면 어디까지 일을 저질렀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해진의 매너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병신, 별게 다 고마워.'
제영이 한숨을 쉬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보디 워시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해진의 살 냄새처럼 느껴져 몇 번이고 씻어 내던 중이었다. 물줄기 소리를 뚫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씻고 있어요.”
제영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많이 지체됐나 싶어 남은 거품을 빨리 씻어 내려고 수압을 올렸다. 하지만 제영의 외침에도 문밖의 인물은 계속 문을 두드렸다. 이놈의 집은 방음이 너무좋아 욕실 안의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지 않는 건가 하고 제영이 다시금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직."
하지만 손잡이가 덜컥덜컥 돌아가자 말이 뚝끊겼다. 달칵 소리가 나더니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영이 화들짝 놀라 샤워 커튼 뒤에 몸을 숨겼다.
"아직 씻고 있다니까요."
제영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샤워를 하는 건 섹스의 전초전 아닌가. 생각해 보니 욕실에 곰팡이 하나 보이지 않고 집 안에도 먼지 한 톨 없었다. 이 집 안의 더러운 구석이라고는 어제 자신이 와인을 쏟은 카펫과 숙취에 시달리고 일어난 자신뿐이었다. 결벽증이라도 있는 그가 술에 떡이 돼 자버려 한껏 불결한 상태인 자신을 씻기고 잡아먹으려는 걸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커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영 씨?"
"네,네."
"미안, 옷 챙겨 주는 걸 깜박했어요. 잠깐 들어갈게요."
제영은 커튼 뒤에 숨어 머리만 삐죽 내민 상태로 해진을 살폈다. 제영의 실루엣이 불투명한 샤워 커튼 너머로 비쳤다. 옷가지를 가지고 들어온 이의 시선이 슬쩍 제영 쪽을 향했다가 곧등을 돌렸다. 흰 손이 욕실 상부 장을 열고 그안에 옷을 집어넣은 후,제영이 세면대에 대충개켜 놓은 옷을 챙겨 들었다.
"여기다 둘게요. 천천히 씻고 나와요."
문이 닫히고 나니 긴장이 풀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같은 남자에게 알몸을 보일까봐 초조했던 적은 없었다. 그게 보통이고 제영의 상식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어긋나 있었다.
제영이 다시 물을 틀었다. 차가워진 몸이 뜨뜻해지기는 하지만 기운이 쏙 빠져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제영이 다시 몸을 데우는 동안 해진은 문에 등을 댄 채로 손에는 제영의 셔츠와 바지를 쥐고 있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셔츠에 코를 대고 살짝 뺨을 문질렀다. 옷에 스민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이내 가라앉았다. 한숨을 폭 쉰 이가 느릿느릿 몸을 옮기는데 무언가 미련이 걸음걸음마다 질척였다.
욕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던 제영을 해진이 불렀다. 밥을 챙겨 주겠다는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렸지만 결국에는 식탁 의자에 앉고 말았다. 해진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동안 제영은 그의 피부만큼이나 흰 대리석식탁에 두 팔을 올려 두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술 약속도, 샤워도, 식사도 거기다 키스까지 해진이 하자는 대로 하고 있는 게 불안했다.
그가 차려 준 것은 포장된 죽을 데운 것이었다. 제영과 눈이 마주친 해진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뭔가 기대했다면, 좀 미안하네. 딱히 먹을 것도 없고 아까부터 자꾸 배 문지르는 거 보면 속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식탁 위의 손이 어느새 배 쪽에 있었다. 제영이 손을 떼어 냈다. 속이 좋지 않은 것도 맞았지만 배가 간지러웠다.
'또 알레르긴가.'
어제 마신 술 중에 맞지 않는 것이 있는 듯했다.
"들어요."
둘의 수저질에도 포장용 플라스틱 그릇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제영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뜨거운 죽만 호호 불고 먹었다. 제영도 해진도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다. 영업 사원인 제영이 일을 할 때는 불가항력으로 상대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붙이지만지금은 일 관계라 칭하기에도 사적인 관계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제영의 눈에 해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로지 자신만이 어색하고 낯간지럽고 불편해했다.
'익숙한가. 남자를 그렇게 끌어들이는 게.'
해진의 사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려고 하자 제영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가 문란한 편이라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것도 그저 해진의 일상일 테니까. 자신은 개에 물린 셈 치면 되었다.
식사를 끝낸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밝은 조명과 밖에서 들어온 햇빛에 해진의 얼굴 상처가 또렷이 보였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그는 연한 홍조를 띤 두 뺨으로 제영을 보고 있었다.
제영은 왜인지 모르게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게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다 먹었어요? 차 마실래요?"
먼저 가 있으라는 말에 제영은 혼자 거실로 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거실은 말끔했다. 어제의 술자리 흔적도 없고 얼룩진 횐 카펫도 어디로 치워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성격이 어지간히 깔끔스러운 사람이었다. 제영은 해진이 없는 틈을 타 염탐하듯 찬찬히 거실을 둘러보았다. 눈길을 끄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장에 있는 술병들뿐이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 그냥 장식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술 창고였다.
익숙한 브랜드의 양주부터 와인에 청주까지 없는 게 없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기괴한 뱀술 같은 것은 없었다. 고개를 들이밀고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어떤 것은 반쯤 비워져 있기도했다.
'비싸 보이네.'
거래처 중에 술을 모으는 것이 취미인 사장님이 있었다. 사장실 한쪽 벽에 뱀술부터 온갖약초 술까지 컬렉션처럼 모셔 두고 있었다. 중요한 손님이 올 때면 사무실에서 한 잔씩 한다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 물론 제영은 중요한 손님이 아니었기에 이제껏 한 모금도 얻어 마시지 못했다.
술이야 소주 아니면 맥주 정도에서 끝내 버리는 제영에게 이런 취미는 그저 돈 낭비일 뿐 이었다. 하지만 있는 놈의 돈 낭비까지 자신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한참 동안이나 술병을 노려보던 제영이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골라 봐요."
소파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고 제영에게 다가온 해진이 말했다. 고르면 선물로 주기라도 할 텐가. 그런 쪼잔한 생각도 어느새 뒤에 바짝밀착해 오는 이로 인해 먼지처럼 사라졌다.
너무나도 가까웠다. 자칫하다가 엉덩이로 해진의 사타구니를 문질러 버릴 정도로.
"하하,글쎄요."
바로 코앞이 장식장이라 앞으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몸을 틀었더니 왼쪽 어깨 너머로 해진 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장식장 유리를 톡톡 쳤다.
"이거, 이거, 이거. 어제 마신 거예요. 어땠어요?."
제영에게 술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술은 그저 쓰고 조금 달고 차갑다.
"괜찮았습니다."
"이 와인은? 이 와인도 괜찮았어요?"
해진이 팔을 제영의 허리에 두르고는 살짝잡아당겼다. 슬그머니 서로의 몸이 밀착되었다.
그의 입술이 말을 할 때마다 속삭이는 것처럼 제영의 귓가를 자극했다. 제영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벗어나고자 허리를 살짝 비틀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근데,다음에는 이거 말고 다른 거 마셔요.”
다음이 있나. 제영이 속으로 물었다.
"다음에는 술 먹고 자 버리면 안 돼요."
해진의 입술이 제영의 것에 닿았다.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제영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해진을 바라보기가 힘들어 제영은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아차, 싶은 순간에 혀가 입안을 열고 들어왔다. 그 물컹한 덩어리가 매끈한 이를 더듬다 입천장을 긁었다. 뒤틀린 허리 탓에 제영은 해진의 팔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간지러워.'
노골적으로 희롱당하는 입안은 둘째 치고 슬슬 뱃가죽이 근질근질했다. 알레르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배꼽 주위의 근질거림은 이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제영의 감긴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간지러움을 참기가 고역스러웠다.
* * *
목이 뻐근하고 눈도 침침했다. 여느 때와 같이 피곤을 탓하려다가 이제는 더 이상 젊지도 않기에 노화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도 아직은 나름대로 팔팔하다고 생각을 고쳐먹으며 우울해지려는 자신을 다독였다. 거기다 이 피곤함은 요 근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이 컸다. 제영이 모니터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엑셀 데이터와 겹치는 자신의 퀭한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무의식적으로 허리 벨트에 손이 갔다. 찰칵거리는 미미한 소음이 제영의 귀에만 들려왔다.
그리곤 목이 답답해져 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장식장 앞에서 해진과의 얼떨떨한 키스가 끝난 후에도 제영은 여전히 그의 품속에서 쌕쌕 숨만 내쉬고 있었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심장이 살갗을 뚫고 튀어 나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때의 기억이 제영의 집중력을 흩뜨리고 있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흐려졌다.
해진의 모든 부탁에 예스였던 제영은 조금더 있다 가라는 것만큼은 한사코 거절했다. '조금 더'가 ‘하룻밤 더'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었다. 친절하게도 제영의 집 근처까지 차로 데려다준 그는 내리기 전에 작은 종이 백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제영의 셔츠와 바지, 그리고 벨트와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 셔츠와 바지야 씻을 때 가져간 것일 테고 문제는 후자의 두 개였다. 제영은 자신의 벨트와 넥타이를 푼기억이 없었다.
'잘 때, 답답할까 봐 제가 풀었어요.'
그 말에 떨떠름하게 수긍한 제영이 인사를하고 냉큼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벨트를 풀면서 슬쩍 아래를 스쳤던 것 같기도 했고 넥타이를 풀 때는 목젖에 해진의 손끝이 닿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사실 전부 꿈같기도 했다. 그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기억의 파편들이 제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게 환장할 노릇이었다.
집에서 그를 떠올리다가 결국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명백하게 발기했고 곧 자위했다. 정확히 무엇에 동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사정하고 그 액에 축축하게 젖어버린 팬티를 느끼며 아차 싶었다. 속옷은 해진에게 빌린 것이었다. 재벌가 아들이 이 팬티 한 장을 돌려받으려 하진 않겠지만 그의 것을 적셨다는 게 꺼림칙했다. 며칠이 지났어도 그날 밤한 짓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여파가 회사에 출근을 한 후에도 여전해서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응 하고 진동했다. 넋을 놓고 있던 제영은 저도 모르게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가 곧바로 자세를 바로하고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희주였다.
[언제 끝나?]
제영이 시계를 확인했다. 곧 6시고,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6시 30분 정도에 회사를 나설생각이었다. 그러면 약속 장소까지 7시면 충분했다.
[곧. 7시에 보자.]
[알았어.]
제영은 다시 잠잠해진 핸드폰을 손에 꽉 쥐었다. 애인을 떠올리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심이 되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제영이 다시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느릿하게 한 칸,한 칸 옮겨 가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둘만 있을 수 있는 장소로 옮긴것은 당연지사였다. 난데없이 손을 잡아끄는 제영에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영은 같잖은 애교를 부리며 희주를 꼬드겼다. 익숙한 몸, 익숙한 향기. 부드러운 가슴이 손안에 꽉 찼다.
안이 파헤쳐질 때마다 희주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이게 맞다.'
그럼 틀린 것은 무언인가. 제영이 사정했다.
몸에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명해졌다. 뺨에 닿은 살덩이가 폭신했다. 아래의 몸이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제영 씨, 무슨 일 있었어?”
샤워를 마친 희주가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며 말했다. 제영은 속으로 뜨끔했다. 일이 있었다. 제대로 있었다. 하지만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할 일이었다. 제영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왜, 좀 거칠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뭔가 좀 달라서."
"오랜만이라서 그렇겠지. 요즘 너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바빴던 건 제영 씨도 마찬가지였잖아."
"그러네. 미안."
"미안할 것까진 없어. 그 일은 잘 돼가? 그 중 요한 계약이라는 거."
"응, 지금까진 괜찮은데 또 모르지. 그거 성사되어 보너스라도 타면,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김칫국 마시는 건지는 몰라도 생각은 해둬.”
제영은 한 겹, 한 겹 가려지기 시작하는 희주의 몸을 의식적으로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 자꾸 불청객이 제영과 희주의 사이를 끼어들었다.
그걸 떨쳐 내야 했다.
"그래? 그렇게 되면 드레스 좀 비싼 걸로 할까?"
“드레스?”
"응, 경미 알지? 곧 결혼한다는 애. 경미랑 웨딩드레스 보러 갔는데,어디 디자이너 거래. 비싸긴 한데 확실히 예쁘더라."
"그래. 근데 넌 뭘 입어도 예쁠 거야."
제영이 희주의 곁에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얄팍한 여체가 두 팔에 쏙 들어왔다.
"뭐야. 영혼 없네. 사람 서운하게 말에 진심이 없어."
희주가 쿡쿡 웃었다.
"됐어. 드레스는 무슨, 어차피 몇 시간 입고 말 건데. 보너스 타면 그냥 저축해 두자. 그게 나을 것 같아."
제영이 희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녀가 뭘 하자고 해도 다 예스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코끝에 닿아 축축했다. 가슴이 천천히 뛰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희주가 고개를 틀어 제영을 올려 다보았다.
"뭐야. 오늘 역시 이상해. 아무 일 없지?"
"없다니까. 자꾸 그래."
"곧 결혼한다니까 싱숭생숭해?”
“아니라니까.”
“그래? 난 좀 그런데. 나만 그런가."
희주가 살짝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신의 허리를 껴안아 오는 제영의 팔에 손을 감았다. 제영은 기분이 좋지 않은가 하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메리지 블루 같은 건가.'
결혼을 앞두고 심란한 게 분명했다. 난데없는 히스테리라고 여긴 저번의 다툼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눈앞의 중요한 상대에 더 정성을 쏟을 때였다. 제영은 희주에게 웃어 주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눈앞의 상대가 옳은 것임을 가슴 깊이 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보듬고 지켜 줘야 할 이는 이쪽이었다.
해진과 거리를 두겠다는 결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를 만나면 해 줄 말들을 고르고 그걸 머릿속으로 연습하느라 바짝 긴장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이상스레 조금 겁이 날 때면 희주에게 전화를 걸어 시답지 않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진과 연락이 없는 채로 하루, 이틀, 결국 일주일을 넘기고 근 2주를 조용히 보내고 나니 이제는 긴장은커녕 도리어 물렁물렁해져 버렸다. 그날 밤의 기억도 키스의 느낌도 다 꿈처럼 희미했다. 이렇게 그저 하나의 별스러운 경험으로 끝나는 건가 하고 여길 무렵이었다.
[오늘 시간 괜찮아요?]
시간은 괜찮았다. 다른 것이 괜찮지 않은 게 문제였지. 그간의 평온함이 다 거짓인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시물레이 션도 해진의 짧은 문자 한 통에 다 엉클어졌다.
만나지 말자. 제영은 만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어렵습니다.]
그걸로 끝이라고 여겼다. 이대로 이리저리회피하면 될 일이었다. 괜히 면 대 면으로 마주할 필요는 없었다. 혹여나 회사에서 만나더 라도 철저히 일적으로 상대해 줄 것이다. 벌써 사회생활 수년 차였다. 제영은 스스로가 그럴 깜냥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깜냥은 시험해 볼 겨를도 없이 사그라졌고 몇 시간 후에는 집이 아닌 해진의 차안에서 두 손으로 무릎을 꽉 쥐고 앉아 있었다.
제영은 사이드 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자세를 풀려고 노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면접을 앞둔 신입처럼 보였다. 꼴사나웠다. 그러나 무릎 위의 손을 둘 만한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결국 잡은 것은 문손잡이였다.
손잡이 부근에는 못 보던 로고가 찍혀 있었다. 그제야 제영은 그의 차가 이전 것과는 다른 것임을 눈치챘다. 이것도 로고만큼은 익숙한 외제 차였다. 재벌 2세니 차가 한 대만 있는 것도 이상했다. 제영은 손끝으로 음각된 로고를 더듬었다.
거절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이 온다면 무시할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영이 무시하겠다고 여긴범위는 문자였지 전화가 아니었다.
부재중 통화 2건.
숫자 2가 3이 되고 또다시 핸드폰 액정 화면에 해진의 번호가 뜨자 제영이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기뻐 보여 제영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 바빠요?
'조금 바쁩니다.'
-잠깐 얼굴만 보면 안 돼요? 정말 잠깐이라도 괜찮아요.
결국 제영이 졌다. 차에 타기 전 해진에게 다시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한다는 거짓말을 덧붙였다. 조금 얼굴을 찡그리던 해진은 알겠다며 친절하게도 다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차를 몬 탓에 제영은 행선지가 어딘지도 몰랐다.
제영이 해진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횐 얼굴에 열은 얼룩이 있었지만 그건 그냥 그림자일뿐이었다. 상처는 많이 희미해져 거의 눈에 띄지도 않았다. 제영은 그 사실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그게 왜 자신에게 다행인 거지’ 하고 의문을 가졌다가 그저 타인에 대한 얄팍한 걱정과 동정심일 테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제, 좀 괜찮아졌죠?"
제영의 시선을 느낀 그가 오른손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깊어져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제영이 잽싸게 고개를 돌렸지만 그게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더 노골적으로 티 낸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빨리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죠? 카페에서 커피랑 빵 사서 근처 한강 변에 차 대고 먹어요.
사실 천천히 같이 식사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
죠
해진의 말끝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한강이요?“
그러나 제영은 아쉬움보다도 그와 단둘이 향하고 있는 곳이 ‘한강 변'이라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전형적인 데이트 장소였다. 거기다 밤 시간 한강 주차장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제영은 순간적으로 차를 둘러봤다. 이전 차보다공간이 더 넓고 천장이 높았다. 남자 둘이 부대껴도 별문제 없을 넉넉한 공간이었다. 제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팀장님."
제영이 해진을 다급하게 불렀다.
"네,제영 씨."
"식사, 식사 정도는 할 시간 있습니다."
차가 강변도로로 빠지기 직전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해진이 곧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어디 갈까요? 뭐 먹고 싶은 거있어요?”
음표가 달린 것처럼 말끝이 위로 솟았다. 그의 물음에 제영은 전형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무거나요. 팀장님 드시고 싶은 걸로요."
제영은 한숨을 내쉬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톤이 음울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해진의 언어 체계에서 '근처의 적당한'이란것은 자신에게 '고급스럽고 비싼’으로 해석되어 져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깨작깨작 포크질을 하는 중이었다. 카섹스의 위험에서는 벗어났지만 핑크색 하트를 뿜어 대는 눈빛은 피하지 못했다.
디저트로 나온 것은 잘게 부서진 견과류가 뿌려진 산딸기 셔벗이었다. 작은 스푼으로 타원형의 모양을 낸 것은 한입 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걸 스푼으로 살살 파먹었다. 혀 위에서 새콤한 맛과 달콤한 맛이 뒤엉켰다. 간간이 이 사이에서 씹히는 것들에서는 호두 맛이 났다.
"서운했어요. 연락 한번 안 하고. 게다가 얼굴보니까 나만 안달 난 것 같네."
시시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바쁘다는 이야기를 했고 물 잔을 건네주는데 손이 스쳤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제영은 해야 할 말을 떠올렸지만 그건 이 잔잔한 분위기에서 너무나도 생뚱맞은 주제처럼 느껴져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많이 바빴어요?”
"네, 조금."
"그래도 연락 한 번은 할 줄 알았는데, 뭐 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감감무소식이긴 했지만."
데자뷔. 당연한 것이었다. 제영은 비슷한 대화를 희주와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얼마 전의 감촉을 상기시키며 다 녹아 버린 셔벗을 삼켰다. 그때와는 달랐다. 해진에게는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없었다.
"미안해요."
그러나 습관처럼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제영은 실수를 감추고 의연해지려고 희주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희주의 감촉을. 적당한 온도의 살결이 손에 휘감기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진의 목소리가 제영의 의식을 이 테이블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제영은 해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텅 빈 디저트 접시만 스푼으로 긁었다. 이미 남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스푼을 입으로 가져갔다.
"단거 좋아해요?"
그가 자신의 디저트 접시를 제영에게 내밀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되는 연인의 첫 데이트 같은 분위기였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제영은 해진과는 다른 의미로 눈치를 보았지만 해진의 것이 훨씬 압도적이었다. 제영은 몸이 간질간질했다.
밥을 다 먹고는 그가 주변을 좀 걷자고 했다.
번화가와 조금 떨어진 식당의 주변은 어둑어둑했다. 둘이 걷다가는 손이라도 잡아야만 할 것 같았다. 제영이 머리를 굴렸다.
"추워요."
단것을 먹어선지 머리가 잘 굴러간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게다가 거짓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밖은 추웠다. 제영은 코트를 여며 목을 감췄다. 둘은 차로 향했다. 하지만 운전석의 해진은 차를 출발시킬 기미가 없었다. 또다시 영양가 없는 대화의 시작이었다. 오늘따라 그는 약간 푼수처럼 굴었다. 별것 아닌 것에도 소리 내웃었다. 제영 역시 따라 웃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다 부스럭거려해진의 시선을 끌고 싶진 않았다. 대화에 귀 기울이는 척하며 그의 손목시계를 살폈다. 시계판에는 숫자 대신 작은 보석들이 알알이 박혀있었다. 세 개는 푸른색이었고 중앙 위는 투명한 게 꼭 다이아처럼 보였다.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게 몇 천만 원은 할 것 같았다. 아니, 소박하게 겨우 몇 백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9시를 넘겼다. 시간을 확인하니 졸음이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히터 덕에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제영의 졸음을 부추겼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는 거지.'
제영이 다시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있었다.
"내 시계가 마음에 들어요? 자꾸 시계만 보네."
해진이 코트 자락으로 자신의 시계를 가리며 제영에게 물었다.
"예? 아, 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더라, 그 무슨 연예인이 광고하는 그거."
속을 들킨 제영이 허둥지둥 답했지만 바보같은 말만 쏟아졌다.
"피곤해요?''
그는 운전대에 몸을 기댄 채로 고개만 돌려제영에게 물었다.
"네,조금. 그러니까 이만, 슬슬."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무언가 따뜻한것이 제영의 손을 감쌌다. 잠이 확 깼다.
"그럼, 슬슬 갈까요.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요. 꼭 가야 해요? 피곤한데 그냥 집에 들어가서 쉬어요."
해진의 동작은 너무나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그 탓인지 제영이 하는 행동이 더욱 도드라졌다. 제영은 손을 탁 쳐 내지도,뭐라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손만 코트 주머니 속에 숨겼다. 어린애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때만큼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병신, 뭐하는 짓이냐.'
이미 제영 쪽으로 건너온 해진의 손이 뻘쭘하게 공중에 떠 있다가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 잡기 싫어요?"
"하하,그게 아니라. 갑자기 이러는 건 좀."
난처하여 이마에서는 진땀이 삐질삐질 났다.
제영이 마른 목을 침으로 적셨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지금 이 순간이 거사를 위한 적당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은 취해서 실수를 했습니다.'
'결혼할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여기다가 '죄송합니다'를 덧붙이자,그게 제영이 생각해 낸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소품도 준비되어 있었다. 제영과 희주가 함께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같이 활짝 웃고 있으니 누가 봐도 사이좋은 연인의 모습이었다.
"많이 늦었다. 가죠. 벨트 매세요.”
그러나 제영이 입을 뻥끗하기도 전에 차가 출발했다.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운전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상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승승장구하며 살아왔을 재벌 2세이니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일지도 모른다. 제영은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였다. 핸드폰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대화는 해진이 주도했으니 그가 입을 다물자 차 안은 적막 그 자체였다. 그림자 진 얼굴이 화난 것처럼 보여서 제영은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그가 HS전자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차였다고 괜히 행패 부리진 않겠지?'
그래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사람이란 게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키스는 한사코거절하더라도 '손 정도는 잡아 줬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고 제영은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고개를 저었다. 남자끼리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다. 괜한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슬며시 손을 꺼내서 코트에 땀을 닦아 내었다. 제영의 몸은 처음 차를 탔을 때처럼 움츠러들어 있었다. 본능적인 것이라 어찌하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멀리 오지 않아서 곧 제영의 회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해진의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회사의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팀장님, 여기 앞에서 내려 주시면 됩니다."
차가 천천히 길가에 멈춰 섰다.
"오늘 식사 감사합니다. 다음엔 꼭 제가 대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제영이 문을 열고자 문손잡이를 달칵였지만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몇 번시도하다가 제영이 해진에게 말했다.
"문이 잠겼어요.”
이게 두 번째였다. 그의 차에서 우스운 꼴을 보이는 것이.
그는 문을 열어 주기는커녕 갑자기 시곗줄을 풀었다. 제영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주먹이라도 날릴 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싼 시계에 혹여나 생길지 모든는 흠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저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제영이 조수석의 구석으로 바짝 몸을 물리며 마지막 시도로 다시 한 번 문손잡이를 눌렀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해진의 커다란 손이 제영에게 불쑥 다가왔다. 제영이 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제영이 느낀 것은 통증 대신 손목을 감싸 쥔 남자의 뜨거운 손이었다.
"시계 마음에 들어 했잖아요. 줄게요."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었습니다."
"줄게요. 이제 이거 제영 씨 거예요. 앞으로 시간 확인할 때는 내가 눈치 채지 않게 슬쩍 보고 확인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자꾸 시계만 보니까 섭섭해요."
해진은 한 손으로 제영을 잡은 채로 나머지 손으로는 시곗줄을 쥐고 어려움도 없이 제영의 손목에 시계를 채우기 시작했다. 전 주인의 손목에서 이미 길이 든 가죽이 제영의 손목에 부드럽게 감겼다. 당황한 제영이 부산스럽게 거절했지만 이미 시계는 넘어온 상태였다. 시계판위의 보석들이 더욱 빛을 발했다.
시계를 핑계로 제영을 잡아챈 해진의 손은 여전히 제영에게 있었다. 해진은 노골적으로 손을 맞잡고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것이었던 시계를 보았다.
"손, 잡기 싫어요?"
해진이 아까 전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제영은 난데없는 선물의 의도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손의 열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가 무슨생각으로 이런 걸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키스도? 싫어?"
그의 손아귀 힘이 강해져 제영은 살짝 아픔을 느꼈다.
"와인 한잔이라도 먹일 걸 그랬어."
그가 힘없이 웃었다.
"디저트에 든 브랜디로는 어림도 없네. 내 것까지 먹였는데도."
제영은 자신에게 디저트를 양보한 것이 그런 속셈이었던가 하고 해진을 쳐다보았다. 브랜디가 들어 있었다니 배가 간지러웠던 것은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제영이 손을 잡아 빼도 그는 놔주지 않았다.
길을 가던 누가 이런 모습을 보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아까 전 얼핏 봤던 회사 건물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출출해서 뭔가를 사러나온 동료가 근처에 있을까 봐 신경 쓰였다.
"팀장님, 이거 좀."
제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해진의 손을 매섭게 내치지는 못하고 살짝 비틀어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손잡는 것도 싫고,키스도 싫고."
"이해진 팀장님."
제영은 놓아 달라고 애원하는 대신 그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힘주어 불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럼? 난? 나도 싫어요? 제영 씨?”
해진이 제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아무 소리조차 없는 깜박임이었지만 그것만 으로도 충분히 제영의 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팀장님이 싫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요. 잘됐네요. 나는 제영 씨가 좋아요."
"예?"
"그러니까 제영 씨도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제영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시계는 뇌물."
제영이 몇 번을 해도 열리지 않던 문은 해진의 손이 닿자마자 열렸다. 제영은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내렸다. 아니 한 것 같기도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거의 뛰다시피 회사 정문으로 향했다. 내리는 자신에게 해진이 뭐라고 말했던것 같기도 했지만 제대로 듣지 못했다.
늦은 밤에도 미처 퇴근하지 못한 경비원이 아까 퇴근한 제영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봤지만 제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회사 공터 안쪽에 들어선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미친."
헉헉거리면서도 말이 튀어 나갔다. 자신의 손목을 움켜진 남자의 손, 그날 밤 품에 안겼던것, 그리고 키스까지. 그 모든 일들이 방금 전에 있었던 것처럼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제영이 머 리를 헝클어트렸다.
"미친 새끼."
제영에겐 둘 다 미친 새끼였다. 남자인 주제에 남자인 자신이 좋다고 하는 그나, 어영부영술 마시고 입술을 비빈 자신이나.
'다음엔 전화도 받지 말자.'
계약이건 뭐건, 무슨 상관이야.'
'그 남자한테 몸 로비라도 해 줄 건 아니잖아.'
"김 대리님?"
"우왁!"
주저앉아 있다시피 했던 제영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자빠질 뻔했다.
"아씨,뭐야. 너 퇴근 안 했어?”
"그러는 대리님이야말로, 퇴근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다시 왔어요?”
동혁이 도리어 제영에게 물었다. 제영은 손목의 시계가 보일 리가 없는데도 혹시나 싶어코트 소매를 끌어 내렸다.
"놓고 간 게 있어서. 그래서 왔다. 왜?”
"뭘 놓고 갔길래, 한밤중에 뜀박질인 겁니까."
알밉게도 커피나 홀짝거리면서 말하는 투가 제영에게는 꼭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순간 동혁이 해진의 차에서 내리는 자신을 본걸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들고 있는 컵은 회사에서 조금 나가야 살 수 있는 카페의 것이었다.
“커피 사러 나왔어?”
"아뇨. 아까 저녁 먹고 사 둔 거예요. 담배 피우려고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
"회사에 저밖에 없어요. 저도 곧 퇴근할 겁니다. 뭐 놔두고 간 거면 빨리 가져가세요."
제영은 어슬렁어슬렁 담배에 불을 붙이고 구석으로 가는 동혁을 살폈다. 그리고 회사 로비에 들어갔다가 그가 보이지 않는 틈을 타, 곧장 다시 나왔다. 또다시 마주친 경비원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제영은 아까 전과 똑같이 고개만 숙이고 나왔다. 흘린 땀이 식어 추웠다.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버스를 탈까,택시를 탈까 고민하던 제영은 결국 택시를 잡아탔다. 피곤해도 너무 피곤했다.
* * *
"어머, 대리님. 혹시 그거 예물이에요?"
탕비실에서 만난 이선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잘 손질된 손톱 끝으로 제영의 손목을 가리켰다. 믹스 커피를 타고 있던 제영은 옷으로 시계를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누가 줬어."
"네? 그런 걸 그냥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제영이 탕비실을 떴지만 뒤통수가 따가운 게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 자리에 앉은 제영은 시계를 풀어 둘까 하다가 그냥 소맷자락으로 안 보이게 다시 한번 갈무리했다.
'그런 걸 그냥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제영은 얼렁뚱땅 해진에게 고백받은 날을 떠올렸다. 타인에게 좋아한 다고 고백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건 꽤나 충격이 컸다. 어쩌면 육체적 접촉인 키스보다도. 아니다. 고백이나, 키스나 충격은 비등했다. 제영은 천 너머로 가려진 시계를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딱딱한 본체와 부드러운 시곗줄이 고스란히 손바닥에 느껴졌다.
해진과의 헤어짐 이후 연락은 단 한 번뿐이었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제영은
"네, 팀장님도 잘 들어가셨습니까?' 하고 답을 보냈다. 그걸 시작으로 냉정하게 대해 줄 셈이었다. '싫습니다.'라는 노골적인 거절 대신에 은근하지만 명백하게 그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락은 그걸로 끝이었다. 답장도 오지 않았고 전화도 없었다. 신경 쓴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은 해진인데 이런 상황을 겪으니 꼭자신이 먼저 고백한 것만 같았다.
건네받은 시계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서랍장 안에 처박혀 있었다. 실상 비싼 시계에 흠이라도 날까 봐 손수건으로 둘둘 싸서 모셔 둔 것에 가깝긴 했지만 말이다. 이걸 꺼낸 것은 친구들과의 모임 때문이었다. 저번 제영의 결혼식축하 모임 술자리에 왔던 민우가 갑작스럽게 애들을 모았다. 결혼 때문이었다. 들려오는 풍문으로는 속도위반이 라고 했다.
'건물주 딸이라지.'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가 봐야 알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결혼식을 올리는 제영이 도마 위에 올라 비교당할 것은 뻔했다. 나름의 공격과 방어로 준비한 무기가 이 시계였다. 제영이 시계를 툭툭 쳤다. 비싼 놈이라 초침 소리가 다른 것보다 더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것 같아 귀가 간질간질했다.
해진이 고백해 온 날 받은 물건을 차고 나가는 데에 찜찜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 쓰고 다시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꼭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딱 한 번 차고 나가는 것 정도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여겼다.
"제영아, 여기다!"
한쪽 구석 테이블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민우가 손을 흔들었다. 약속 장소는 꽤 고급스러운 일식집이었다. 제영은 얼마 전에 삼겹살집에서 약속을 잡은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민우의 목에 박힌 철심은 전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아, 딱 봤는데 눈이 번쩍하더라. 이 여자는 절대 놓치면 안 되겠다, 꼭 결혼해야지 이런 마음이 들더라니까. 제영아, 너는 이 느낌 알지?"
민우가 제영에게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정말로 건물주 딸이냐고 묻는 친구들의 짓궂은 질문에 그는 그냥 조그만 건물이라고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서울 끝자락의 작은 건물일지라도 억, 억 하는 소리가 날 게 뻔했다. 주변 친구들은 '이 새끼, 로또 터졌구나.' 하며 왁자지껄 웃어 젖혔다. 자신도 희주도 못 먹고 산 집 자식은 아니지만 이럴 때만큼은 부모님이 슬그머니 원망스러워졌다. 기름기 흐르는 회들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아 제영은 술만 마시고 있었다.
"야, 제영아. 이 좋은 날에 왜 그렇게 홀짝홀짝 마셔. 표정도 좀 펴라. 너 민우 샘나서 그러는구나.”
이미 술이 얼큰하게 올랐는지 벌게진 얼굴의 형식이 제영에게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야, 맞아. 표정도 풀고 팍팍 마셔라. 오늘은 내가 쏜다니까. 거기다가 희주 씨도 좋은 여자잖아. 너도 나도 복 받은 새끼들이다."
"그런 거 아냐. 요즘 접대한다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 배에 알레르기 오른 게 아직도 근질근질해."
"아, 맞아. 이새끼. 술 알레르기 있어."
형식이 제영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웃었다. 제영의 하지 말라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진짜? 처음들어 보는 얘긴데."
"그렇다니까. 나 대학 다닐 때, 둘이 진탕 마시고 자취방에서 팬티 바람으로 잤거든. 근데 자다 일어나서 이 새끼 뱃가죽을 보니까, 어우.
전염병인 줄 알고 기겁했다."
"요즘엔 그렇게 심한 것도 아냐."
다들 제영의 뱃가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 배를 까 보라고 할 듯해, 제영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 너 시계."
팔을 들어 올린 탓에 시계가 눈에 띄었다. 제영은 준비해 왔다가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던 제 필살의 무기를 떠올리며 슬쩍 소매를 걷었다.
"응? 왜?”
제영이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주변 친구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느라 민우와 제영의 대화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대어가 미끼를 물었으니 말이다.
"야, 김제영, 이 새끼. 로또 터진 건 너네. 시계예물로 받은 거야?”
"그런 거 아냐. 이번에 보너스 받아서 질렀어.
아는 분이 싸게 준다고 해서. 괜찮냐? 좀 썼는데."
시계를 바라보는 민우의 오른쪽 눈썹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제영이 씨익 웃었다. 어쨌든 오늘의 계획은 성공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회와 술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2차로 고깃집에서 또 한껏 마시며 먹어 댔고, 술자리는 새벽 1시가 넘을 무렵에야 끝이 났다.
다들 제 갈 길을 가고 제영은 택시 잡기 쉬운 곳을 찾아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민우의 얼굴이 또다시 떠올라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키스고 고백이고 해진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연락일 게 분명했다. 희주아니면 방금 헤어진 애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화면에는 해진의 연락처가 떠 있었다. 순간적으로 술이 확 깼다.
발걸음을 멈춘 채로 제영은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였다.
'받지 말자.'
핸드폰은 끈질기게 울려 댔다. 문자 수신음도 가끔 들렸지만 지금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실실 웃음이 또 새어 나왔다. 그 대단하신놈을 자신이 바람맞히고 있었다.
"넌 차였어. 새끼야."
제영이 손가락으로 핸드폰 고리를 쾌활하게 돌리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그 부주의한 손동작이 결국에는 사달을 내고 말았다. 손끝을 벗어난 핸드폰이 구석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픽, 하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 씨발. 액정 나갔잖아."
박살이 난 것은 왼쪽 구석뿐이라 화면을 아예 못 보는 것은 아니지만 난데없는 날벼락이었다. 궁상맞게 쪼그려 앉아 손바닥으로 액정 화면을 닦아 보았다. 그렇다고 깨진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올 리 없었다. 화면을 살피고 있는데 밤이라 그런가 아니면 액정 화면이 나가면서 어두워진 건가,주변이 침침했다. 화면 밝기를 최대한으로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로등 불이라도 나간 건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드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김제영 씨? 여기서 뭐 합니까. 전화도 안 받고."
왼쪽 겨드랑이에는 가방을 끼우고 오른손으로는 깨진 핸드폰을 든 채 주저앉아 있던 제영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상대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새벽녘에 만났던 해진의 친구였다.
"아,안녕하세요. 이해진 팀장님 친구분이죠?”
"백준성입니다."
"예, 백준성 씨. 하하. 오랜만이네요."
제영이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전화, 계속 했는데 왜 안 받으셨어요? 해진 이 전화로 계속했는데."
고작 두 번 만난 게 다인 준성의 날 선 말투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전화 이야기가 나오자 깨갱이었다.
"아,그게 온지 몰랐는데. 전화하셨습니까?
무슨 일로?"
그렇게 대충 답하고 나서야 그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영은 아까까지만 해도 준성의 발치에서 액정 화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는 왜, 아니 됐습니다. 해진이 기다려요.
따라오세요."
"저기 죄송한데, 시간도 늦었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해서.”
제영이 다시 한번 머리를 긁적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방금 못 들으셨어요? 해진이가 기다린다고요."
"그러니까 이 늦은 시간에 팀장님하고 만날약속을 잡은 일은 없었습니다만."
돈 많은 놈들은 뻔히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사람에게도 이렇게 예의가 없는 건가 하고 제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 탓에 밖으로 터져 나오는 말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해진이랑 그런 사이면,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부르면 오던데. 그러면 다른 사람 부를까요? 당신 대신에? 그럼 당신이 손해 아니에요?”
제영은 준성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이 그의 밤 상대들 중 하나로 분류된다는 사실이 심히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이봐요. 이해진 팀장님과 저는 그냥 거래처상사와 직원 사이일 뿐입니다. 그분이 아무리HS전자 같은 곳의 팀장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무례한 일 아닙니까? 무슨 사람을, 개인 운전기사 부르듯이 새벽에 불러 대면 아주 곤란합니다. 이것도 갑질입니다. 뉴스에 제보라도 하면 크게 기삿거리가 될 일입니다.”
제영은 자신에게 백 점 만점에 적어도 구십점은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에 취했어도 말이 딱딱 떨어지는 게 무슨 토론 대회라도 나온것 같았다. 그러나 준성은 아무 말도 없이 제영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볼 뿐이었다. 눈빛이 누구를 추행이라도 하는 것 같아 제영은 기분이 더러웠다. 이놈도 해진과 동류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인 주제에, 남자한테 엉겨 붙는 것들.'
슬슬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해진의 연락을 피할 생각이었으니 그와 관련된 인물 역시도 사절이었다. 그러나 발을 반쯤 떼기도 전에 준성이 제영을 붙들었다. 강한 손아귀에 팔이 붙들려 제영은 옴짝달싹하지도 못했다. 바짝 끌어당겨져 코앞에 놓인 준성의 얼굴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해진이한테 이런 거 받을 정도면 그냥 거래처 상사, 직원 사이는 아니지 않아요? 김제영씨?"
준성의 내리깐 눈이 제영의 손목을 주시했다. 제영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해진에게 받은 시계가 밤임에도 불구하고 반짝거렸다. 당황한 제영은 혀가 굳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성이 제영을 놓아주었다. 사실상 내쳤다는 게 맞아서 제영이 살짝 휘청거릴 정도였다.
"따라와요. 금방이에요. 저도 피곤하니까, 더이상 그쪽이랑 실랑이하고 싶진 않네요.”
결국 제영은 앞장선 준성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잡혔던 팔이 욱신거렸고 어찐지 시계를 찬 왼손이 묵직했다.
구석진 골목길,좁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준성을 따라가며 제영은 인상을 썼다.
돈 좀 있다는 것들이 왜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제영의 취향은 아니었다.
실내는 어두웠다. 조명과 촛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영은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다. 자신과 친구들은 항상 왁자지껄한 곳을 즐겼다. 여자 친구인 희주와 잔잔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을 찾기도 했으나 이런 식의 적막과 음침함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이런 곳을 즐기는 이는 없었다.
제영은 혹시나 여기가 바로 그렇고 그런 장소인가 하고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간혹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이들의 눈빛이 끈적거려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곧 청순한 얼굴의 긴 머리여자가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제영의 곁을 스쳤다. 스치는 순간 작게 눈웃음치는 게 천생여자였다. 제영은 자신의 추측이 빗나간 것에 안심했다가 그녀의 붉고 자그마한 입술에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오자 흑 몰려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뭐 해요? 이쪽이에요."
잠시 충격에 발걸음이 멈췄던 제영을 준성이불렀다. 제영은 지금이라도 가겠다고 말할까 고민했다. 거기다가 바의 카운터에 진탕 취해 엎드려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뻔해 보이자 그런 마음이 더 강해졌다. 준성이 머뭇거리는 제영에게 손짓했다. 왜 오지 않느냐고 묻는 듯 눈썹 한쪽을 찡그리고 있었다. 제영은 또다시 해진의 뒤치다꺼리에 불려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불만 스러웠다.
"야, 이해진. 일어나. 그 사람 불렀으니까, 같이 들어가."
제영은 그러겠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용도로 끌려온 것이니 딱히 뭐라말하기도 어려웠다. 몇 번이고 등을 두드려도 엎드린 남자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진의 옆자리에 엉거주춤 선 제영은 목이 타기 시작했다. 그때 바텐더가 잔을 하나 내밀었다.
"한잔 드세요. 저 친구 최근에는 안 그랬는데,오늘 좀 심하네."
“아, 예.“
제영은 술잔을 노려보며 마실까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잔에 담긴 술이 목구멍을 넘자마자 바텐더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해진 씨 취향 많이 바뀌었네?“
"예?"
제영이 되묻자 검은색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고 수건으로 컵을 닦던 바텐더가 상체를 제영쪽으로 깊숙이 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쪽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시죠?"
제영의 질문에도 바텐더는 자신의 일만 계속했다. 제영은 술잔을 도로 밀어내었다. 해진이 길바닥에서 동사하든 말든 정말로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그가 뭉그적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왼편에 있던 제영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것을 본 양 해진이 눈을 크게떴다.
"제영 씨?"
제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몸을 훽 돌려 준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여기에 이 사람을 부르면 어떡해?”
작은 소리였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던 제영은 그가 말미에 중얼거리는 상스러운 욕까지 똑똑히 들었다.
"그럼 누굴 불러? 너희 형한테 전화해서 사람이라도 보내 달라고 해?”
제영 생각에는 자신을 부르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았지만 해진 생각에는 아닌 듯 싶었다. 해진은 준성과 싸워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예 제영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제영 씨.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나 때문에 집에 있다가 나온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근처에 친구들하고 있다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
순간 그의 상체가 푹 고꾸라졌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알아서 갈 수 있어요. 가셔도돼요. 오늘 미안했어요.”
욕지기가 치미는 건지 그저 피곤함 때문인지 그가 입을 막으며 말했다. 살짝 젖은 눈이 제영을 보았다가 다시 웅크리듯 몸을 숙였다. 제영은 정말로 가도 괜찮은 건지 고민되었다. 만약 데려가야 한다면 준성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이 덩치를 끌고 아까의 계단을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준성은 어디 갔는지 눈썹 한 터럭도 보이지 않았다. 바텐더는 한참 전에 가 버렸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해줄뿐이었다.
"팀장님. 팀장님."
제영이 해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응, 응 하며 고개를 젓기는 하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또다시 극기에 가까운 짓거리를 해야 하나 싶어 한 숨이 나왔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냥 두고 가고 싶었다. 바텐더가 단골인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곤란하면 좀 도와드려요?"
난데없는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 바의 손님 중 하나인 듯했다. 짙은 눈썹과 능글맞은 표정에 제영은 '뭐야, 이 새끼는.'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올 뻔했다. 화보 촬영 하는 연예인처럼 턱수염을 잘 손질해 두었지만 제영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양아치의 몰골이었다.
"곤란하시면 제가 이분 데려다 드릴게요. 저번에 술 한잔 같이한 적도 있는데,이봐요. 일어나 보세요.”
그가 해진의 등을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다.
아니 사실상 어루만지고 있었다. 눈빛도 음흉한게 옆에서 보고 있는 제영이 불쾌해질 정도였다. 제 것도 아니지만 타인이 그런 눈빛과 손길로 해진을 희롱하는 것은 싫었다.
"괜찮습니다. 제 일행이니,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반쯤 제정신인, 도리어 말하자면 절반은 제정신이 아닌 해진을 어찌어찌해서 끌고 계단을 올라왔다. 혹시나 그 음흉한 놈이 따라올지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그나마이번에는 저번보다 상황이 나았다. 제 발로 걷기는 하니 말이다. 해진의 손을 잡고 질질 끌며 제영은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에게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술을 마셨냐고, 젊은 나이라고 그러면 훅 간다고,걱정의 탈을 쓴불평을 잔뜩 쏟아 내는 중이었다.
골목을 벗어나 겨우 택시를 붙잡아 세우고는 이제야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소를 묻는 제영에게 그는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딱 한 번 그의 차를 타고 갔을 뿐이라제영도 집 주소는 몰랐다.
"거기가 어디냐면요. 부촌인데 주택이 많고 담장도 되게 높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택시 기사가 역정을 냈다.
"죄송합니다.”
결국 욕을 왕창 먹고 도로 택시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또다시 이전과 같은 시련이 닥쳤다.
"결국 또 이런 건가."
핸드폰으로 찾은 가장 가까운 모텔의 간판을 보면서 제영은 중얼거렸다. 새로 지은 건물인지 번쩍번쩍한 게 비싸 보였지만 해진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제영의 타들어 가는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물에 대충 기대 놓은 해진이 제영을 멍한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이리 와."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라 제영이 손을 내밀고 저도 모르게 반말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연하인 해진이 먼저 드문드문 말을 놓았으니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여겼다.
"네."
해진은 제영의 반말에 별 불만은 없는지 암전히 대답하고 내민 제영의 손을 맞잡을 뿐이었다. 아니,입꼬리가 히죽거린 것 같기도 했다. 방에 도착한 제영은 해진을 침대에 밀어 넣고는 품 안에서 담배를 찾았다. 안주머 니를 뒤지는데 손이 축축했다. 한참이나 손을 잡고 있던 탓이었다.
해진은 누운 채로 자신의 손을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몸을 돌려 제영 쪽을 보았다.
"제영 씨. 이리 와 봐요."
제영은 안주머니에서 겨우 담뱃갑을 꺼내는 중이었다. 주정 비슷해 보여 제영은 해진의 말을 흘러 넘겼다.
"팀장님. 푹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그냥 나가 시면 돼요. 계산은 제가 전부 했고.”
"제영 씨.”
“왜요, 물이라도 드려요?"
제영은 담배를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가 벽면에 붙어 있는 '실내 절대 금연’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낭패다 싶었다. 다시 담배를 담뱃갑에 넣어 두고는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해진에게 생수나 건넨 다음 대충 인사하고 갈 생각이었다.
손에 쥐어진 생수병은 아까의 술잔보다 더차가웠다. 내용물도 차가울 게 분명했다. 이 정도 냉수라면 이제까지의 그가 보여 준 추태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깨닫는 데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너무 번쩍 든 나머지, 남자인 주제에 같은 성별의 자신에게 했던 키스나 고백 같은 것들의 부끄러움까지 깨닫게 될지도 몰랐다.
해진을 등지고 있던 제영이 몸을 돌렸다. 바로 앉은 그는 목이 답답한지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은근하게 머리를 넘기는 게 제영은 저도 모르게 섹시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같은 성별인자신에게는 무의미한 섹스어필이었다. 해진이 손을 내밀었다. 제영이 물을 건넸다.
"물 말고요, 손이요."
해진이 생수병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 두고는 다시 제영의 손을 찾았다. 제영은 '손은 또 왜?'
하며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저번 만남에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으려고 안달하던 게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을 못 가누는 남자를 끌고 오기 위해 손을 붙들고 다녔었다. 혹시나그게 전부 연기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리 오라는 말에 얌전히 손을 내밀고 따라왔지만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고 더욱이 손을 붙들고 싶을 만큼 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
"가 보겠습니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늦었습니다."
"출근? 내일 주말인데?”
"주말이라도 출근하라면 해야죠. 저는 누구처럼 취미로 회사 다니는 재벌집 자식이 아니라서요."
내용도 말투도 냉랭했다. 이런 식으로 말할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내일 출근을 핑계로 그만 가 봐야겠다고,그 정도로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다 내뱉은 후였다.
해진의 눈치를 살피던 제영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취했으니까, 제대로 못 들었겠지. 별말 아니었잖아?
"좋아요. 손은 됐어요. 아까 한참이나 잡고 있었으니까. 이쪽으로 와서 잠깐만 얘기해요. 잠깐은 괜찮잖아요."
또 저런 눈이었다. 사람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눈. 제영이 주춤주춤 해진의 곁, 그러니까 침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진은 벌쓰는 중학생처럼 쭈뼛거리며 서 있는 제영에게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제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전 모텔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그와 키스까지 한 상태였다.
"앉아요. 그렇게는 이야기하기 불편하잖아요"
그래도 제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해진 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아 쥐었다. 기다란 끈, 그가 내민 것은 그의 넥타이였다.
"못 믿겠으면 날 묶어도 좋아요."
고급 브랜드일 게 분명한 실크 넥타이가 해진의 손에서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제영이 결국 졌다.
"앉을게요. 얘기 길게 못 해요. 내일 출근하니까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말 출근 핑계를 댈 수 있는 일개 회사원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렇게 말했다. 제영은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해진이 툭 치면 바로 바닥으로 발라당 넘어질 정도였지만 한 뼘만 더 다가가면 또 그의 코앞이라 도리가 없었다.
"내가 한 말, 생각해 봤어요?”
"무슨 말이요?"
제영은 초조함 탓인지 평소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손톱 옆의 거스러미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해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어떤 것이었던가. 딱히 많은 말을 나눈 사이는 아니었다. 그짧은 대화 속에서 임팩트가 강한 것은 손에 꼽혔다.
"생각할 시간 많이 줬잖아요. 일부러 연락 안하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해서 밥 먹으려고 했는데."
제영은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런 상황은 좀 예상 밖이네요. 고기 냄새 풀풀 나는 제영 씨랑 손잡고 모텔행이라니."
본인은 술 냄새가 진동하는 주제에 그런 지적을 하는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쪽팔린 것과는 별개였다. 제영은 그렇게 심한가 하고 옷자락을 들어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이미 코가 익숙해져 버린 건지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았다.
해진은 그런 제영이 귀여웠다. 따라 냄새를 맡아 볼 요량으로 몸을 숙이고 제영의 가슴팍에 코끝을 대었다. '이제는 별로 안 나요.'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어,어' 하던 제영이 뒤로 휘청했다.
꼴사납게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날래게 움직인 해진이 제영을 도로 침대에 앉혔다. 원래 힘이 센 건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힘 조절을 못 한 건지 잡혔던 제영의 팔뚝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당황스러움은 둘째 치더라도 팔이 너무 아파 와 제영은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제 팔을 살살 주물렀다.
"괜찮아요?"
"예, 예. 괜찮습니다."
"제영 씨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에요? 술먹고 그렇게 넘어지면 크게 다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아니었으면 길바닥에서 동사할 위기였던 남자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소리는 팀장님한테 듣고 싶지 않네요."
나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대답이었다.
"하하,그렇긴 하네."
뜻밖의 사고 덕인지 제영의 초조함은 한풀꺾였다. 그러나 그게 한풀 꺾였다고 문제가 다해결된 것은 아니었다.‘게이인가' 하던 의문은 한참 전에 게이로 답이 내려졌고 '설마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에 대한 답 역시 마찬가 지였다.
이미 답이 내려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진의 고백에 대한 제영의 답 역시 처음부터 확고했다. 자신은 남자고 거기다가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까지 했던 답들은 어디 뇌한구석의 처박혀 봉인된 건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해진을 잊게 만들어 주었던 애인의 감촉도 다시 가물가물해졌다. 대신 아까까지 잡고 있었던 해진의 뜨겁고 끈적한 손바닥만 떠올랐다. 제영이 땀도 나지 않은 손바닥을 다시금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넌 차였어, 새끼야.'
해진의 전화를, 정확히 말하자면 그 친구인준성의 전화를 무시하며 낄낄거리고 내뱉었던말. 그때는 술술 내뱉어졌던 말들이 당사자를 앞에 둔 이 순간에는 금기처럼 느껴졌다.
"제영 씨? 잠 와요?"
해진의 얼굴이,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했다. 취한 탓일지도 몰랐으나. 제영이, 아니면 해진이. 여하튼 그의 얼굴은 다정해 보였다.
제영은 옛 기억을 거슬러 올라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이들과의 모든 대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음에 들었고 제영 역시 좋아했기에 사귀었던 이들이 있었고 딱히 나쁘지는 않았지만 좋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거절한 이들도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후자의 기억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에게 뭐라고 했더라.'
뻔했다. 미안하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거야. 그런 유의 뻔한 이야기들. 그게 지금 이순간에 어울리나. 제영은 그것보다 더 하잘것없는 것들을 택했다.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지만, 가끔 밥 같이 먹어요. 제가사 드릴게요. 이때까지 얻어먹었으니까. 힘든 일 있으면 술도 사 드릴게요. 하지만 다른 것들은.
"안 돼요."
해진은 입을 꾹 다물고 정신이 다른 데 팔린 것처럼 보이는 제영의 주의를 돌리고자 그의 손등을 톡, 건드렸다. 그의 그런 행동에 제영은 무슨 버튼 눌린 자동인형처럼 그 말을 내뱉고 만것이다.
"그게 아니라."
제영이 목부터 시뼐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텔 방에서 '안 돼요'라니 한물간 국산 포르노에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
"제영 씨, 진정해요."
해진이 허둥지둥하는 제영의 한 손을 잡고 토닥였다. 또 손이 잡혔다. 오늘 그와 손을 잡은것이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영이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놔주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은 온기가, 손등을 덮은 뜨거움이 제영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놔주세요. 팀장님."
얼굴에 뜨겁고 머리가 멍했다. 다 가라앉았다고 생각한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해진이 상체를 숙이고 제영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숨이 닿아 두 번째 손가락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면, 제영 씨도 괜찮을 거예요."
그가 슬쩍 제영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다정한 얼굴이었다. 그의 손끝이 제영의 손목을 타고 오르려다가, 제영이 차고 온 시곗줄에 막혔다. 제영은 들켰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선물한 시계를 왜 차고 나왔는지, 갖은 변명과 핑곗거리를 떠올렸지만 입술이 푸석해말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가끔 밥 먹는 건 어때요? 그냥 친구처럼 ”
"예?"
"제영 씨나 나한테 힘든 일 있으면 술도 한 잔씩 하고요.”
제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그가 선수를 쳐 버렸다. 혹여나 해진이 남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게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잠시 했다. 타고난 것은 아니고, 재벌이니어디 러시아의 비밀 기관 같은 곳에서 비싸게 사 왔을 것이다.
'미쳤구나. 김제영.'
제영이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죠?”
"가끔이면.......그 정도는......"
"제가 살게요. 누구 말대로 취미로 회사 다니는 재벌집 자식이니까요."
얼굴은 여전히 다정하니 비꼬는 것은 아닌게 분명했다. 그래도 제영은 혼자 지레 뜨끔하고 말았다.
가끔, 정말 가끔 만나 밥을 먹고 술 한잔 할 생각은 있었다. 해진이 말한 것 그대로를 제영이 말할 생각이었다. 제영은 그렇게 말한 후 점점 거리를 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해진의 의도는 정반대였다. 제영은 어디 사막의 모래 지옥 속으로 발이 쑤욱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있죠, 제영 씨. 나, 제영 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
해진이 제영의 손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숨결의 눅눅한 습기가 제영의 손바닥을 적셨고 손가락 마디에 그의 치아가 스쳤다. 그 감촉에 제영은 저도 모르게 겁먹고 몸을 움츠렸다. 입술을 깨물고 참아 보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탄식과도 같은 한 숨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상대방도 그리고 제영도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점점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에 제영은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해진의 샐쭉한 표정으로 끝이 났다. 마치 오늘은 여기에서 만족하겠다는 의미 같았다.
"몇 시죠? 3시 넘었네. 제영 씨 출근 생각하면 몇 시간 정도밖에 못 자겠네요. 그냥 여기서 잠깐 눈 붙였다가 아침 먹고 회사 근처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러는 게 낫겠죠?”
방금 전과는 다르게 말끝이 가벼웠다.
"아닙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제영 씨는 내일 일해야 하니까, 내가 소파에게 잘게요. 그러면 괜찮겠죠?”
"팀장님.“
제영이 다시 해진을 불렀다. 이대로는 제대로 말릴 것 같았다.
"왜요? 불안해요? 그럼 묶어도 좋아요."
그가 또 양손을 모아 내밀었다. 정말로 무언가에 묶인 양 손목을 마주 붙인 채로. 제영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해진이 먼저 소파에 털썩 몸을 눕혔다. 체구가 큰 몸이 작은 소파에 넘쳐흘렀다. 누가 봐도 불편해 보였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제영은 결국 포기하고 넥타이를 살짝 끄르고 재킷을 벗었다. 해진의 말대로 시간이 많이 늦었다. 한두 시간 정도만 참으면 될 터였다.
당연하게도 잠은 잘 수 없었다. 소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몸이 먼저깨었다. 손에 이불을 꽉 쥐고 바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다시 잠잠해지면 이번에는 머릿속이 난 리였다. 그렇게 뜬눈으로 고스란히 밤을 보냈다.
아침은 근처의 콩나물국밥이었다. 제영은 입맛이 없어 국물만 떠먹었다. 숟가락에 싫어하는 콩나물 대가리라도 걸리면 다시 숟가락을 엎기 일쑤였다. 도리어 귀한 집 아들의 숟가락질이 더 씩씩했다. 싸구려 국밥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속이 좋지 않습니다."
제영은 반도 비워지지 않은 제 그릇을 의아한 얼굴로 보는 해진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의 차는 근처의 주차 타워에 세워져 있었다. 또 다른 차인 듯싶었지만 제영은 그런 것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해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슬며시 콧노래가 들려왔다. 제영은 자신을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든 상대가 저다지도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라는 게 억울했다. 하지만 따져 댈 말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그가 뭐라고 했던 간에 자신은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다. 밥 약속도,술 약속도 다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대답이 뭔지 알아챌 것이다. 새벽 내내 긴장해 있던 몸이 결국 몰려오는 피곤을 이겨 내지 못했다. 콧노래 소리가 들리든 말든 눈이 감기기 시작했고 몸이 차 문 쪽으로 기울어졌다.
'아, 시계.'
제영이 손목 안의 시계를 더듬었다. 내릴 때 이걸 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해 보면 이게 원흉이었다. 이것만 차고 오지 않았으면 괜히 찔려 그 준성이라는 친구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었다. 해진이 제영에게 뭐라 말을 걸었다.
희미한 목소리가 웅얼거림으로 들려왔다. 제영은 대답조차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렇게 그가 뭐라고 하든 무시하면 다 될 것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일어나요. 거의 다 왔어요. 많이 피곤하니까집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여기서 어디로 들어가
야 해요,
집 앞이란 말에 제영이 창밖을 살폈다. 회사근처가 아니라 집 근처의 대로변이었다.
“왜 여기로?”
분명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을 회사 근처까지 데려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출근 안 하잖아요."
"예?"
"맞죠?”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수긍해 버리면 거짓말한 것을 이실직고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나머지 입이 붙어 버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따지는 거 아니에요. 일단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려 줄래요? 많이 피곤하니까, 빨리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괜찮습니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제영의 목소리가 단호해 보였는지 더 이상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거짓말을 들켰다는 것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우스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푹 쉬세요.' 하는 말투가 같이 밤을 보낸 애인에게 하는 것처럼 달콤했다. '곧 연락할게요.'라는 말도 그에 못지않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내린 제영이 티 나지 않게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집 현관 앞에 다 왔을 무렵에야 손목의 묵직함을 인식했다. 시계를 돌려주는 것을 깜빡했다. 제영이 인상을 쓴 채로 현관 번호 키를 눌렀다. 경쾌하면서도 단조로운 여섯 자리의 음이 울려 퍼지고 제영이 익숙한 자신만의 장소에 들어섰다.
서 있기는 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해진 과 함께 있던 시간은 고작 몇 시간이었지만 체감상 며칠을 함께 보낸 것처럼 기가 쭉 빨렸다.
제영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몸을 날렸다. 주머니 안의 핸드폰이 위임거리며 진동했다. 그리고 또다시 진동음이 울렸다.
'그 놈이겠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몇 번이고 내치려고 했지만 해진과의 관계는 끈덕지게 이어졌다. 제영이 모질지 못해서 그런것도 있지만 그가 연결 고리를 이어 가며 놔주지 않으려고 한 탓도 컸다. 제영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몇 개의'거절’ 시나리오는 번번이 실패였다. 이게 계속 이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껏 제영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또 다시 진동이 울렸다.
'끈질기네.'
엎드린 채로 주섬주섬 손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볼썽사납게 깨진 액정 화면의 금을 피해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W 웨딩홀의 플래너입니다. 현재 저희 웨딩홀에서 할인 프로모션 진행 중입니다. 상담만 진행하셔도 전문 사진사가 촬영을 진행하는 커플 앨범 촬영권을 무료로 증정해 드립니다]
"W 웨딩홀?”
제영은 들어 보지도 못한 곳이었다. 가 본 곳 중에 한 곳이라면 이런 문자를 보냈을 리가 없다. 방문한 곳마다 희주가 한 시간은 넘게 식장이곳저곳 둘러보며 상담을 했으니까 말이다. 어디에 개인 정보라도 풀린 걸까. 얼굴도 모르는 사람조차 자신이 곧 결혼할 예비 신랑이라는 걸 알고 이런 문자를 보내온다. 모르는 것은 해진 뿐이었다.
제영은 해진이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군다고 생각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화려한 날개를 뽐내는 대상이 암컷이 아니라 같은 수컷이라는 점이었다. 거기다 그 수컷은 자신의 암컷에게 열심히 날개를 흔드는 중이었다.
"바보 같은 놈."
제영이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고개를 묻었다. 손목의 시계가 이마에 걸리적거렸다. 제영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또다시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놈."
* * *
해진과의 만남은 생각보다 이른 시일 안에 이루어졌다. 그가 보낸 문자는 너무나도 평범해서 내용만 봤을 때는 그저 아는 지인이 보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발신자가 평범치 않았다. 어디에 맛있는 곳을 알아 두었다고 나흘 뒤 저녁시간은 괜찮겠냐고 물어 왔다.
[죄송합니다. 요 근래에 갑자기 바빠져서 그날은 조금 어렵습니 다.]
[그럼 언제 괜찮아요? 예약해 둘게요.]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몰라요? 그럼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죠? 김이사님? 아니면 배 차장?]
만약 그 뒤에 이모티콘이라도 붙였으면 제영은 '개새끼'라고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물음표로 딱 끝난 문장을 보니 살벌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제영은 그제야 해진과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얽히고설킨 관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만나기로 해요.]
그러고 만났다. 무얼 했냐면 밥을 먹었다. 정말로 밥만 먹었다. 손을 잡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도 잠시 했으나 금방 눈 녹듯 사라졌다.
왜냐면 정말로 밥만 먹었으니까. 해진이 차려준 것은 항상 진수성찬이었고 달콤한 디저트로 끝이 났다. 제영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차로 데려다주었고 거절하는 날에는 지하철역에 내려 주었다. 종국에는 해진의 편리함을 깨닫고 거절조차 하지 않았다.
유명 세프가 새로 개업했다는 강남 일식당에서는 장어덮밥을 먹었고 동부 이촌동에서는 만듯국을, 연희동에서는 프랑스 요리를 먹었다.
제영은 포만감 가득한 자신의 배를 슬쩍 두드리며 분명 살이 더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의 촬영용 턱시도 피팅 때는 희주가 조금 놀랄정도였다.
'난 살 빼느라 정신없는데, 아주 팔자가 좋구나.‘
제영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뺨이 통통한 것이 살이 더 오른 것 같기도했다.
'몇 번 만났더라.'
제영은 해진과 자신의 만남을 세어 보았다.
횟수가 제법 많다. 왜 이 남자와 만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단 3초면 이 착각에 빠진 남자에게 현실을 일깨워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영은 입을 다물고 있다. 여자 친구보다 더 자주 만나고 있는 것 같아서 양심이 찔렸지만 '먼저 연락한 적은 없잖아’ 하고 합리화하는 중이었다.
밥 사이사이에 가끔씩 술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때로는 두드러기가 올라와 배가 간지러운것을 참았고 때로는 괜찮은 술을 발견하고 이름을 외워 두기도 했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걸까.'
제영은 드문드문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낯짝을 몇 번이고 살펴봐도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희주나 이전의 여자 친구들은 다정하고 성실해서 좋아하게 됐다고 했다. 차일 때는 그게 '빛 좋은 개살구'였느니가식 덩어리하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니 희주는 왜 자신과 결혼하려고 할까.
그녀에게 자신은 진국 같은 남자인 걸까.
가슴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잘게 진동했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되는 리듬이었다. 제영이 금이 간 액정 화면의 사이에 뜬 이름 석 자를 보고는 주변을 살폈다.
-예전에 갔던 거기,와인이 새로 들어왔대요.
시간 괜찮아요?
“오늘은 좀, 안 돼요. 진짜예요."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가 두 개나되었다. 거기다가 오늘 저녁에는 회의까지 잡혀있었다.
-알았어요.
아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제영은 꺼진 핸드폰을 손에 쥐고 벽에 가만히 기대었다. 그러던 중에 반갑지 않은 상대들이 눈에 띄었다. 배 차장과 동혁이었다. 둘이 나란히 담배라도 피우러 갈 생각이었던 건지, 손에는 구겨진 담뱃갑을 쥐고 있었다.
"여자 친구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배차장이 말을 붙여 왔다.
"예, 뭐."
"결혼준비 하느라 바쁘냐?”
"그렇죠. 준비할게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나도 정신없었다니까. 애가 먼저 들어서는 바람에. 준비할 것도 많은데 와이프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만 보면 짜증이고. 나도 모르게 결혼 엎자고 했다가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니까."
배 차장은 그때의 고통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과장스럽게 몸을 떨었다.
"하하,그러셨습니까. 처음이니 뭐든 쉬운 게 없네요. 돈도 많이 들고."
"그래,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지.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근데, 그런 거 보면 김 대리지금 너무 과소비하는 거 아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제영이 배 차장을 쳐다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제영의 셔츠를 가리켰다.
"옷 말이야”
"옷이요?"
제영이 기댄 몸을 제대로 세우고는 셔츠 깃을 정돈했다. 제영의 몸짓이 어색한 것을 본 배차장이 제대로 잡았다는 얼굴로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거 비싼 건데. 것도 엄청. 내가 딱 안다, 이거야. 그 어디냐, 예전에 거래처 사장 아들이 그 브랜드를 좋아하더라고. 옷이 몇 십만 원이 넘었어. 내 눈은 못 속이지. 김대리.”
"아웃렛에서 싸게 샀어요. 비싼 거 아닙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셔츠는 해진이 사 준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하나, 두 개씩 제영에게 뭔가를 주기 시작했다. 이 셔츠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신고 있는 윤이 반질반질한 신발도 그에게 받은 것이었다.
제영은 그 신발마저 들킬까 싶어 발 한 짝을 살짝 뒤로 숨겼다. 그렇다고 가려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더 길어져 봤자 제영에게 좋을 것은 없어 보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동혁도 신경에 거슬렸고 슬슬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하지만 배 차장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니면,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예?"
"에이, 순진한 척하지 마. 내가 영업 경력이 몇 년인데, 척 하면 척이라고. HS 계약 건 말이야. 그거 보너스 탈 생각에 벌써부터 그러는 거아냐?”
"그거 아직 결과도 모르지 않습니까.”
"초반에 그 팀장이랑 뭔가 커넥션 있는 것처럼 사장님 다 설레게 해 놨으면서. 아무것도 없어? 혹시나 깜짝 선물로 그러려는 거면 나한테만 귀띔해 줘. 내가 결혼 전에 아주 제대로 쏠게. 1차, 2차, 3차까지 제대로 한번 놀아 봐야 결혼하고 딴 짓 안 하지."
그러면서 배 차장은 벨트를 추켜올렸지만 뱃살에 눌려 제대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런 거 없습니다."
"차장님. 저녁 회의 때문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합니다. 담배 피우실 거면 빨리 가시죠."
그 덕에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배 차장은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제영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더 기분 나쁜것은 자신을 힐끗 보고 고개를 돌리는 동혁의 태도였다. 꼭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 제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술이 고파 왔다. 해진이 말한 식당의 새로운 와인을 한 모금마시면 나아질 것 같았지만 갈 수 없었다. '일이나 해야지' 하며 제영이 터덜터덜 사무실로 몸을 돌렸다.
저녁 회의 주 안건은 다름 아닌 HS전자의 일이었다. 해진을 만나지 않았음에도 관련된 일로 골머리가 아파 왔다. 공장 점검 내용을 살펴보고 앞으로 있을 미팅에 쓰일 자료도 확인했다.
사장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영업팀원들을 식은땀 흘리게 만들었다. 제영 역시 마찬가 지였다.
하지만 제영을 가장 긴장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회의가 다 끝난 후에 주섬주섬 자료를 정리하던 제영을 사장이 불렀다. 입사 이래로 사장실과는 영 인연이 없던 터라 이 호출이 불길하기만 했다. 사장실로 향하는 제영의 뒤통수에 다른 직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가장 따가운것은 누가 뭐래도 동혁의 시선이었다.
"자네, 이번 계약이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나?”
이야기는 조금 길게 이어졌다. 사장은 무슨일이 있어도 이번 계약을 성사시킬 생각이라고했다. 그래서 HS전자 쪽 인사에게 계속 청탁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 인사는 다름 아닌 이전번의 이 상무였다. 받은 만큼 확실했기에 이제까지는 믿음직한 존재였다. 하지만 돈 냄새에 환장하던 이 상무가 왠지 떨떠름한 상태라고 했다.
"그게 이해진 팀장님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제영에게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과 이사의 추측으로는 이해진 팀장이 힘을 써 준 저번 일 탓에 심사가 뒤틀린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을 제치고 다른 쪽으로 컨택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부회장 측 사람인 이 상무와는 다르게 이해진 팀장은 HS전자 사장 쪽 사람이라는 풍문이 들려왔다. 이해진 팀장이 더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면 이전의 패를 버리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으로 이 상무까지 놓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자네, 이해진 팀장하고 계속 연락하고 있나."
사장 옆자리에 있는 이사가 제영에게 눈짓했다. 어서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제영은 고민했다. 자신에게 절박하게 구는 해진을 가장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앞으로의 보너스, 연봉이며 승진이 다 탄탄대로처럼 펼쳐질지도 몰랐다. 동시에 옛 기억이 다리를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다음 날 숙취며 키스에 정신이 없어 거의 잊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래예요.'
‘계약 따게 해 줄게요.’
제영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해진이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그때의 대화가 들려왔다. 제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의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영은 덮고 있던 코트를 좀 더 끌어당겼다.
히터를 틀지 않아 추운 차 안에서 제영은 해진의 코트를 이불처럼 덮었다. 점차 몸이 따듯해져 잔기침이 잦아들었다. 제영은 감기 기운이 있으면 항상 목에 먼저 탈이 났다. 건조해지면 기침이 더 심해졌다. 그 연유로 해진에게 히터를 꺼 달라고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지만,그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재빠르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해진이 괜찮으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또 잘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가 또다시 제영을 바라보았다. 제영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 안이 간질 거렸다. 차에 타기 전, 살짝 비에 젖은 탓에 감기 기운이 더 심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미안해요. 몸이 이렇게 안 좋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창을 때릴 때마다 짙게 선팅된 유리 위로 주룩주룩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제영은 그 자잘한 검은 물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
제영이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다. 양심이 있으면 얌전히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큰 기대였는지 차는 제영의 집과는 전혀다른 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가 더욱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일거라고 생각했다고. 제영은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눈치가 빠른 건지, 감이 예민한 것인지.‘
사실 처음 것은 거짓말이긴 했었다. 해진과 약속은 잡고 사나흘 후에, 희주로부터 연락이왔다. 맛있는 밥집이 있다고 가 보자는 것이었다. 진짜 목적은 밥 한 끼가 아니었다. 이전 만남에서 사소한 이유로 사소하게 싸웠다. 그게 지금까지 질질 이어지고 있었다. 결혼 준비하다가 결혼을 엎을 뻔했다는 배 차장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톡톡히 경험으로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통화가 사서함으로 넘어갔고 제영은 반쯤 포기한 상태로 그녀를 내버려 두던 상태였다.
이제야 화가 조금 풀렸는지 밥 한 끼 먹자고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녀의 화해 신청을 이유로 해진에게는 몸이 좋지 않아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은 없었지만 '어련히 확인했겠지’했다. 그때만 해도 감기는커녕뛰어다닐 것처럼 팔팔한 상태였다. 하지만 약속당일에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지더니 기침이 시작되었다. 희주에게는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하고 약속을 취소했다.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하려던 찰나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기 기운으로 인한 귀찮음과 짜증으로 다시 한번 약속을 취소한다는 문자의 내용을 읊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싫다고 했다.
당황한 나머지 회사 복도에서 핸드폰을 들고 잠시 동안 말을 잃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말에도 꼭 만나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통에 곧장 집에 가서 뜨거운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겠다는 계획은 다 틀어져 버렸다.
"열나는 건 아니죠?”
해진이 제영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속셈이 눈에 훤했다. 제영은 손을 들어 쳐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냉랭한 거절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또다시 제영에게 사과했다. 제영이 해진을 힐끔 훔쳐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인데도 기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세계에서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걸까. 자신이 뭐라고 저렇게 구는 걸까. 제영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벌벌 길 줄 알았으면 사장과 이사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넌지시 물어 왔지만 그들의 제안은 노골적이었다. 더 굵은 동아줄을 끌고 오는데 제영이 힘을 써 준다면 이 회사에서만큼은 제영의 앞날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제영은 고민했지만 의외로 금방 답이 내려졌다.
해진과의 관계에 다른 것들을 더 엮어 봤자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며 옷이며 그런 것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회사 일과 관련된 몇 십 억짜리 계약은 또 다른 일이었다. 그저일 욕심으로 그에게 청탁하던 때와는 달랐다.
지금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애정을 듬뿍 받고있다. 괜히 일이 잘못됐다가는 웃기지도 않는 스캔들이 생길지도 몰랐다. 스캔들 중에 최악이라고 볼 수 있는 치정 문제로 비화되지 않겠는가.
'치정이라니.‘
게이 재벌과 하청 업체 직원과의 치정이라니.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막장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을 이야기였다. 제영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웃었다. 참느라고 참았지만 소리가 밖으로 나갔는지 해진이 제영을 쳐다보았다.
"뭐예요. 왜 혼자 웃어요? 재밌는 거면 나도 알려 줘요.“
"그냥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요.“
제영은 끝끝내 뭔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도 딱히 답을 듣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 듯했다.
다만 한참이나 뚱해 보였던 제영의 기분이 풀린것에 안심하는 듯했다. 제영은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사나 사장이나 다들 헛발질을 할 뻔했다. 아무리 재벌가의 막내아들이라고 해도 이 남자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였다.
값비싼 차만 몰고 다닐 줄 알지, 굴지의 대기업팀장 간판을 달고 있으면 뭐하나. 아빠에게 얻어맞는 신세에 게이였다. 덧붙이자면 곧 차일게이.
결혼은 드문드문 소음을 내긴 했지만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곧 결혼합니다. 오래 만난 여자 친구와요.'
말을 해야 한다. 그럼 해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실망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이 여린 남자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옆자리의 남자 같은 상대를 위로해 본적은 없었으니까.
‘이마에 뽀뽀라도 해 줘야 하나.'
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셔츠를 여몄다. 천이 살갗을 스쳤다. 이 셔츠도 해진이 준것이었다. 어디 브랜드인지는 모르나 실크 셔츠라고 했다. 부드러웠다. 이 남자처럼 부드러웠다.
차가 천천히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해진이 곧 차를 멈추고 말했다.
"다 왔어요."
제영이 대답 대신 기침을 콜록했다.
"예약했으니까 다 준비해 뒀을 거예요. 들어가요.“
점원에게 안내받은 방에는 벌써 한 상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바빠서 점심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다. 제영이 수저로 뜨뜻한 국물을 떠먹고는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맛이 좋았다.
"괜찮죠? 여기 술이 맛있는데, 제영 씨는 안먹는 게 좋겠죠? 사실 이것 때문에 여기 온 거거든요. 향이라도 맡아볼래요?”
해진이 비어 있던 제영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연노랑의 투명한 액체가 횐 잔에 채워졌다. 향이 진했다. 알코올 냄새만 없었다면 차라고 착각할 만했다. 방금 전의 매콤한 무침 덕에 술이 당기던 차였다. 하지만 이 술에서 느껴지는 향이 제영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저번에 해진과 같이 갔던 일식당에서도 비슷한 향이 나는 걸 마신 적이 있었다. 그날 배가 간지러워 새벽내내 고생했다.
"한 잔만 할래요?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다른 거 시켜도 돼요?”
"술 말이에요?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 건 아닌데,그냥 소주 같은 게 좋겠어요"
순순히 대령해 줄 것이라는 제영의 예상과는 다르게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알레르기가 있다는 이야기에 그간의 고생담까지 곁들여 고백하고 말았다.
"몰랐어요. 말을 하지 그랬어요. 이제까지는 괜찮았던 거예요?”
"몇 번 정도는 두드러기가 난 적도 있는데,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에요. 간지러울 뿐이고 하루, 이틀이면 없어지니까요."
비싼 술 대신에 소주가 상에 올랐다. 씁쓸하고 익숙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코끝이 찡해졌다가 이내 배 속이 뜨끈해졌다. 해진은 제영의 술 알레르기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다. 어떤 증상인지, 뭘 마시면 그러는 건지 진지 하게 물어봐 의사에게 진찰이라도 받는 기분이들 정도였다.
“양주는?"
"양주는 랜덤이에요. 두드러기 날 때도 있고 안 날 때도 있는데 전자가 훨씬 더 많아요.”
"나랑 마신 건 어땠어요?"
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양주 마신 적 없잖아요."
"그날이요."
"그날?”
"우리 집에서 자고 간 날에 마신 거요.”
제영은 그제야 그날 밤의 것을 떠올렸다. 목부분이 다른 것보다 가늘고 푸른 라벨이 붙어있던 양주병. 그 양주병의 이미지에 굴비 엮이 듯,그날 밤의 기억도 줄줄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제영이 잔을 비웠다. 쓸데없는 생각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눈앞의 남자 역시도 더 이상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차 새로 산거 예요?”
제영은 적당한 주제를 택했다고 여겼다. 남자끼리의 대화에 차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주제가 없었다.
"차? 우리가 타고 온 거 말이에요?"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있던 거예요."
"도대체 차가 몇 대 있는 겁니까?"
순간 자신의 말투가 너무 날 서 있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외제차 정도는 차고에 넘친다는 말투가 거슬렸다. 상대방의 경제적 여유로움에 대한 질투를 숨기기 어려웠다.
"세 대예요. 주로 타는 건 검은색 차이고, 속도 내고 싶을 때는 스포츠카도 타지만 차고에 넣어 둘 때가 많죠. 무난하게 가고 싶은 때는 흰색 차를 타요. 기억나죠? 저번에 봤던 하얀 차."
제영이 기억하는 그 횐 차는 조금도 무난하지 않았다. 입 안이 썼다. 제영은 희주와의 다툼이 돈 문제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돈 걱정도 없이 자신에게 퍼붓는 해진이 어리석어 보이는 동시에 부러웠다.
"차를 사 달라고 졸라 볼까.'
제영이 턱을 괴고 그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냥은 너무 심하니까. 손이라도 잡아 주고.
그래 물물 교환처럼'
‘아니다. 그럼 너무 기울어지는 거랜가. 내 손에 금박을 입힌 것도 아니고.'
제영이 탁자에 둔 자신의 손을 힐끗 보았다.
'키스라도 해 줘야겠지. 그러고 차를 받고, 그걸 웨딩카로 쓰고.'
촌스러운 풍선 장식이 차에 달려 있고 그 차의 주인이 제영임을 알게 된 친구들의 놀란 얼굴이 선했다. 특히나 민우가 많이 배 아파할 게 분명했다.
이 정도 거래라면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제영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영이 해진을 보았다. 이 불쌍한 남자에게 입을 맞춰 주고 자신이 얻게 될지도 모르는 것들을 떠올렸다. 제영이 결국 이번에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또 혼자 웃네. 나 좀 알려줘요.“
"안 돼요. 그냥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번에는 차 안에서보다 더 끈덕지게 굴었지만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제영은 절대로 알려 줄생각이 없었다.
해진의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제영은 요리를 집어 먹고 간간이 잔을 비웠다. 술기운 탓에 몸은 이미 전기장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뜨끈뜨끈해져 있었다. 다시금 채워진 것을 비우려고 잔을 드는데, 해진이 그만 마시라고 말렸다. 벌써 병의 절반이 비어 있었다. 이건 온전히 제영만 마셨으니 혼자 소주 반병이나 비운셈이었다.
제영은 그의 말대로 잔을 내려 두고 얼굴을 더듬었다. 두 뺨도 이마도 뜨끈뜨끈했는데 감기 때문에 열이 나는 건지, 단순히 술기운 탓인지 햇갈렸다. 해진은 자신의 잔을 비운 뒤에 제영을 바라보았다. 수다쟁이 같던 남자가 침묵을 지킨 채 제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영은 갑자기 진지해져 버린 분위기 때문인지 엉덩이가 간지러웠다. 어색한 것은 최악이었고 특히나 해진과 함께하는 어색한 분위기는 더더욱 최악이었다. 다행히도 그러한 기류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만 일어설까요? 오늘 제영 씨 몸도 안 좋으니까요."
제영은 뒤늦게 퍽이나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척하는 해진이 아니꼬웠다. 진정으로 걱정했다면 진즉에 약속은 취소되었을 것이고 자신은 뜨뜻한 이불 속에서 몸이나 녹이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시시콜콜 그런 불만을 떠벌리기 귀찮았다. 값 비싼 음식들로 배는 불렀고 술 덕에 몸은 뜨끈뜨끈했으니 이제 정말로 집에 돌아가서 쉬면 될 터였다.
"가죠."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면서 해진에게 말했다. 감기 기운 탓에 집에 가서 푹 쉬고 싶다고. 혹여나 수작을 부릴것이 걱정되어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는 순순히 제영을 집 근처에 내려 주었다. 덮고 있던 코트를 돌려주고 대충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는 몇 번이고 괜찮으냐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겠냐고 제영에게 물었다. 제영이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는
"음흉한 놈’이라고 욕했다. 제영은 냉큼 발걸음을 돌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기에 해진이 자신이 덮고 있던 코트를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다 품에 껴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감기 탓에 머리는 띵해도 술 덕분인지 발은 가벼웠다. 내일 몸살이 날 것 같기도 했고 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일단은 대충 손발만 씻고 이불에 기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어? 아침에 깜박했나."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부엌 쪽 형광등이 켜져 있는 듯했다. 종종 그러기도 했으니 개의치 않고 번호 키를 눌렀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공간의 냄새가 맡아졌다. 씻는 건 제치고 이불 속에나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깜짝 놀라 몸이 펄쩍뛰었다.
"뭘 그리 놀라?”
희주였다.
"늦었네. 술 냄새. 아주 재밌게 놀았나 봐."
"그게, 갑자기 술자리가 있어서, 몸이 안 좋다고 말을 했는데 그게 안 통해서....... 그러니까 중요한 접대 자리라서.“
제영은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로 제영을 응시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막무가내로 만나자고 떼를 쓰던 해진이 더 미워지기 시작했다.
"됐어. 목소리 보니 감기는 맞네.“
"그렇다니까. 내가 아무리 말해도 영 이해해주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어.“
제영은 횡설수설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놀란 가슴이,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희주가 그런 제영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 쉬어. 내일도 출근이잖아."
벌써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던 희주가 먼저 누웠다. 이제까지 제영을 기다린 듯 그녀의 목소리에 피곤이 묻어 있었다. 제영은 이 정도에 끝난 것에 안심하며 얼른 옷을 갈아입고 씻었다. 느릿느릿 침대 이불 안으로 기어가 자신의 애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다행히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가 제영의 등을 슬쩍 토닥여 주었다.
"미안해."
제영이 중얼거렸다.
"자. 자고 나서 내일 아침은 죽 사 온 거 있으니까 그거 먹고 약 먹고 출근해."
다정한 말투에 제영의 몸이 풀렸다. 희주의 품은 포근하고 안락했다. 이런 품이 있다는 걸 해진이 진즉에 알았다면 절대로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텐데. 지친 제영의 눈꺼풀이 자석처럼 붙어 버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제영은 한없는 안락함을 느끼며 이내 잠이 들었다.
* * *
"대리님, HS 미팅 자료 저번처럼 다섯 부만 뽑아 드리면 될까요?”
살짝 졸고 있던 제영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어머,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업무 시간에 졸고 있던 주제에 그런 소리까지 들으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머쓱해하는 제영의 모습에 이선주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미안, 뭐라고 했지?"
제영은 괜스레 머리를 정돈하며 되물었다.
"이번 주 HS미팅 자료 말이에요. 그거 다섯부 뽑아 드리면 되는 건가 해서요.“
제영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번 미팅이 끝난 이후로 아직 아무런 일정도 전달받은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계약 건에 자신을 빼고 미팅을 진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슨 소리야? 미팅? 다음 미팅 아직 안 잡혔잖아.”
"네? 어,아닌데, 이상하다. 박 대리님이 다음 일정 잡혔다고 이번 주라고 하셨는데."
제영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이선주가 슬슬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동혁을 힐끗거렸다가 다시 제영을 보았다. 동혁을 노려보는 제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그녀는 괜한 불똥이 튈까 싶어 박대리님과 확인해 보라며 몸을 뺐다. 지원 부서가 영업 사원끼리의 실적을 둘러싼 기 싸움에 괜히 끼었다 좋은 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그간의 짧은 경험 속에서도 익히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도 전에 제영이 벌떡 일어나 동혁에게로 걸어갔다.
"박 대리.”
제영이 팔짱을 끼고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영의 화난 말투에도 불구하고 동혁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영은 그런 그가 괘씸했다. 2년 후배에, 나이도 어린 주제에 사사건건 태클에 어디 선배에 대한 공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하나하나를 지적할 때가 아니었다.
"HS전자랑 다음 미팅 일정 나왔어?"
“예.”
"근데,왜 나한테는 얘기안했어?"
단답형의 대답에 제영은 열이 확 치솟아 올랐다. 목소리가 커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주변의 시선이 그 둘에게로 모였다.
"이번 미팅에는 이사님, 배 차장님, 저 그리고 부평 공장 쪽 관계자분이 참석한다고 들었습니다. 김 대리님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김 대리님. 저도 그냥 전달받은 것뿐입니다.
저한테 따져 대셔도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배차장님이나 이사님께 여쭤보세요."
귀찮은 것을 보는 것처럼 제영을 쳐다보던 동혁이 정문으로 턱짓했다.
"아, 배 차장님이 딱 맞춰서 들어오시네요. 가서 물어보세요. 그게 애꿎은 저 잡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방법일 테니까요."
제영은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이 나이 먹고 사무실에서 사건을 일으켜 봤자 자신만 손해란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내 마음을 다 잡았다. 외근을 다녀오는 길에 찬 바람을 맞기라도 하였는지 두 뺨이 벌건 배 차장이 눈에 보였다. 추위에 손을 비비다가 그제야 바깥 온도만큼 착 가라앉은 사무실 분위기를 알아채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동혁의 옆에서 얼굴을 굳히고 서 있는 제영을 발견하자마자 뭔지 알겠다는 얼굴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제영에게 손짓했다.
"어우,추워."
배 차장이 입에 담배를 물고는 몸을 떨었다.
어디 바람 한 군데 막아 줄 곳조차 없는 옥상의 추위는 대단했다. 잔뜩 열이 오른 제영 역시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뭐가 그리 불만이야?"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아, 알지. 아는데, 도대체 그게 그렇게 열 낼일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번 계약 건 메인 멤버는 저인데, 저는 쏙 빼놓고 저놈만 데리고 가는게 어디 있습니까. 이때까지 공장 현황 점검이 다 뭐다,발바닥 닳도록 쫓아다녔는데 이러시면 정말로 섭섭합니다."
제영의 토로에도 불구하고 배 차장은 어깨만 으쓱거리며 담배 연기를 흑 내뿜었다. 불그죽죽하고 살찐 두 뺨이 담배 연기에 흐려졌다가 곧다시 선명해졌다.
"아니, 김 대리는 결혼 준비다 뭐다 해서 바쁘니까 위에서 사정 좀 봐 준 거겠지. 그러면 좋은 일 아니야?”
제영은 딴소리만 하는 배 차장이 불만스러웠다. 제영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그가 혀를 찼다.
"이러다가 저 새끼가 저보다 먼저 과장 달면 저 가만 안 있습니다."
배 차장이 픽 웃었다. 그리고 이미 다 피운 담배를 옥상 난간에 비벼 끈 다음에 다시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럼 어쩔 건데? 그만두게? 왜 이래. 곧 결혼해서 가정 경제를 책임질 사람이, 장인어른이건물 하나 준다고 하는 거 아니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김 대리. 아니면 돈 많은 친구랑 다니더니 무슨 뽕 좀 맞은 거야?"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제영은 가슴이 덜컹했다. 제영과 배 차장이 아는 공통적인 '돈 많은 친구'는 단 하나였다. 당황한 제영이 찬 바람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러나 입술 위의 거스러미들만 더 자극될 뿐이었다.
"에이, 내 눈은 못 속인다고 했잖아. 비싼 물건 두르고 다니는 거 보니, 요즘 그 팀장인가 뭔가랑 둘이 재미나게 노는가 본데 그래 봤자 한 철이야. 뭐 어쩌다가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또래끼리 서로 하소연도 하다 보니 친해졌겠지.
그럼 뭐해. 김 대리는 그거 잘 알아야해."
"뭘 말입니까."
"친구니 뭐니, 혹시나 둘이 어울려 다니면서 착각할까 봐 그러는데, 김 대리 그냥 시다바리노릇 하는 거야. 괜히 재벌 2세 친구 하나 생겼다고 으쓱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런 건 일에도 도움 못 돼. 이번 일만 봐도 그래. 저번에 슬쩍 도움 주는 척하더니, 정작 중요한 일에는 손을 딱 떼잖아. 그런 것들이 영악하지. 나중에 자네가 좀 도와 달라고 하면 안면몰수하면서 ‘아, 이래서 구질구질한 것들이랑 놀기 싫어' 하면서 뒤통수를 탁 칠걸. 그러니까 자네도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신혼집 대출이나 잘 알아보고 다녀."
조언을 빙자한 골려 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의 두 번째 담배도 이미 짧아질 대로 짧아져 있었다. 배 차장은 담배를 퉤, 하고 바닥에 뱉어 버리고는 또다시 손을 비볐다. 그러고는 제영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옥상을 나섰다.
"열이나 식히고 와. 동혁이 새끼한테 자꾸 시비 걸지 말고. 그 새끼 체대 나왔는데,김 대리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거 알지?”
배 차장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좌우로 꺼떡거렸다. 그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제영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옥상벽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가 풀리기 는커녕 발만 아파 왔다. 후배에게 기회를 뺏긴스스로에게도, 애꿎은 해진에게도 화가 났다.
픽픽 하는 소리는 커졌지만 여전히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없었다. 한번 기세에 밀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었다. 제영이 우려하는 대로 동혁이 먼저과장 직급을 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영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고 이 계약에 얼마나 중요한 인재인지를 보여 줄 기회를. 개별로 이루어지는 월말보고 시간이 가장 적절한 때로 보였다. 이사는 보고가 끝난 후에도 제영이 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자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제영이 입을 떼기 시작하자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제영이 말을 하는 동안 이사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제영의 목소리에 점차 자신감이 붙었다.
"김 대리."
"예, 이사님."
"나는 김 대리가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그건 그 정도 경력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예?"
"딱히 눈에 띌 만한 성과가 없단 말일세.”
이사가 제영이 제출한 실적 보고서를 책상에 툭 던지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껏 거래처 관리도 잘해 왔고 장기주문 실적도."
"알지. 그건 알지. 근데 큰 게 없잖아. 다들 자잘한 것들이라 임팩트가 없단 말이야. 그 정도는 누구나 해. 그에 반해, 박 대리는 어떤가. 저번 태성 계약 건이며 중국 업체 주문 건까지 굵직굵직한 놈들로 실적을 꽉꽉 채워 왔어."
제영은 억울했다. 동혁이 몇 번 큰 건을 따내온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도 매출 면에서 보면 그렇게 뒤지는 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번HS 계약 건에 다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도 다자신의 덕이었다. 제영은 자신에 대한 저평가가 억울해 이사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거. 도리어 내가 가장 아쉬운 게 바로 그걸세. 잘만 하면 사장님께도 좋은 인상 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자리 한번 못 마련했지. 사장님이 특별히 불렀는데도 저번 면담에서 결국 꼬리를 내리지 않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이해진 팀장의 변덕이 아니었나 싶어. 그게 아니라면 자네의 거래처 관리 능력 부족이겠지. 지금 계속 컨택하고는 있나?"
"가끔, 가끔은 식사도 하고 있습니다. 업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지만.”
이사가 혀를 차며 충고를 이어 갔다.
"그게 문제야. 영업 사원에게 인맥, 참 중요하지. 첫째도 인맥, 둘째도 인맥. 근데 더 중요한게 뭔지 알아? 그게 실적이랑 이어지는거야. 그게 아니라면 그저 노닥거린 것밖에 되지 않아.
형, 동생 하면서 밥 몇 끼, 술 몇 잔 같이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은 이렇지만 본격적으로 이 팀장님이 경영에 참여하게 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래서? 진짜 친하긴 하단 말인가?"
제영이 지금 걸치고 있는 옷의 절반이 그로부터 온 것이었다. 술이며 밥이며 몇 번을 만났는지도 몰랐다. 단순히 친하다고 하기에는 넘치는 애정을 받고 있었고 거기에는 남사스러운
'고백’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여하튼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관계였다.
"예, 친합니다. 개인 연락처도 받았고 그걸로 주로 연락하고 있습니다."
제영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해진과의 관계를 일단은 업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포장해야 했다. 그러나 이사의 제안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럼, 전화해서 계약 건에 대해 물어보게. 확답을 받을 필요 없어. 그냥 통화나 한번 해 봐.
여기서 말일세. 그렇게 친하면 업무 중이라도 전화 한 통은 받겠지."
해진의 고백 이후에 제영이 먼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의사 표시였다. 픽이나 수동적이긴 했지만. 이 관계가 해진이 매달려서 어쩔 수 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제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부서진 액정 화면 이었다. 불편하긴 했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는 귀찮아져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번 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지? 난 불확실한 건 싫네. 확실히 하고 싶단 말일세. 지금당장 통화가 가능한가, 아닌가. 그것만 알려 주게.“
제영은 고개를 들어 이사를 보았다. 이사가 제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저하던 제영이 결국그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요 근래누구보다도 자신을 곤란스럽게 만드는 인물의 이름 석 자가 부서진 화면 위로 떴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통화 연결음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내에 잔잔하게 울렸다.
제영의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확인할 마음도 없어서 제영은 그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누구의 문자인지는 뻔히 보였다.
[미안해요. 어제 전화 못 받았어요. 무슨 일이에요.]
[문자 확인하면 바로 전화해 줘요.]
[아직도 일하는 중이에요?]
중간중간 전화가 오고 이내 부재중 통화가 하나둘씩 쌓였지만 제영은 여전히 모니터만 바라보고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표정 변화는 없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나고 있었다.
'다 늦었어.'
제영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길게 울렸다가 잠잠해지는 핸드폰을 기어코 가방 속에 쑤셔 박았다. 거래처에서 전화가 올지도 몰랐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사 앞에서 결국 통화는 연결되지 못했다.
목석처럼 굳어 있는 제영을 향해 이사는 나가 보라는 한마디뿐이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연락을 늦게 받으면 토라져 찡찡거리는 주제에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 해진에게 화가 났다.
화가 나는 이유는 또 있었다. 항상 먼저 굽히고 매달리던 쪽은 해진이었던 터라 이런 식으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낭패를 봤다는 사실이 제영을 더욱 열 받게 했다. 마치 주도권을 그 남자에게 빼앗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가 자신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인것은 아니었지만 이 분통 나는 상황 속에서 화풀이를 할 만한 상대는 해진뿐이었다.
사무실 자리의 코앞에는 동혁이, 저 건너편에는 히죽거리는 배 차장이, 좀 멀리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제영을 보는 이사가 있었다. 사람열 뻗치게 하는 원인이 사방에 산재해 있어 답답함이 며칠째 사그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제영은 짜증만 늘어갔다. 괜히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이선주만 벌벌 떨고 있는 실정이었다.
"업무 중이라 바쁩니다."
아무 죄 없는 부하 직원에게까지 말이 엇나가는 지금 해진에게 고운 말이 나갈 리 없었다.
애걸복걸하기에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목소리조차 듣기 싫어서 길게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화났어요? 그런 거면 뭐 때문에 화난 건지 말해 줘요. 나 많이 답답해요.
화가 나긴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대든 상관없이 자신이 찌질해 보일 거라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저 일 때문에 바쁘다는 말만 반복했다. 제영은 이렇게라도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해진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하고 싶었다. 그 대단하다는 남자가 자신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여 통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해진의 한숨 소리로 전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몇 분 후에 긴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회사까지 찾아가고 싶지만 참는다고, 괜찮아지면 연락해 달라며 기다리겠다는 구구절절한 내용이었다. 제영은 그 문자를 보면서 배 차장이나 이사와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한 번도 해진에게 절절맨 적이 없고 도리어 반대의 상황이라고 그들에게 쏘아붙여 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기도 했다.
배 차장이나 이사에게 해야 할 복수 대신 해진의 애정이나 조롱하며 속을 푸는 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는지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먼저 전화할 마음은 한 톨도 없었기에 해진이 애가 타든 말든 제영은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 *
"표정이 안 좋네."
카페에 앉아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희주가 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영은 이 추운날에 차가운 음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시려 와 창밖을 보고 있다가 그제야 애인과 눈을 맞췄다.
"회사에서 영, 아니야."
그녀에게는 딱히 포장해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시시콜콜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저 이 가라앉은 감정을 솔직히 말하고 위로받고 싶을 뿐이다. 그게 몸의 위로였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제영의 구두코가 애인의 매끈한 에나멜 구두를 슬쩍 건드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우리 결혼할 식장알아보고 다니는데,계속 그런 표정이면, 아니다.“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빨대로 유리잔을 뒤적였다.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제영은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추위를 쫓아내기 위해 스스로 팔을 주물렀지만 손도 차가 웠던 터라 그리 큰 효험은 없었다.
"춥지 않아? 어디에 따듯한 곳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제영이 결국 먼저 말을 꺼내며 희주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도 따뜻한데."
그러나 시도는 실패였다. 애인이 눈치채지 못한 건가 싶었지만 눈꼬리만 살짝 찡그려지는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거절당한 것뿐이었다. 실망한 제영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럴 기분도 아냐. 아직 식장도 못 정했잖아.
저번에 거기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하필 엄마가 받아 온 그 날짜에 예약이 돼 있을 게 뭐야.“
길일에 맞춰 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제영은 그런 것은 다 미신이라 생각했지만 애인의 어머니가 유난스럽게 구는 터라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이 많은 어르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창 젊은 나이인 애인까지 저러는 게 한심스러웠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다른 일로도 싸울 것이 천지였으니 괜히 갈등을 조장할 이유가 없었다. 희주는 받아 온 팸플릿을 꺼내 꼼꼼히 살피고 핸드폰으로 찍어 온 사진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제영이 보기에는 이 예식장이나 저 예식장이나 비슷해 보였다. 예식장 관계자는 둘을 데리고 다니며 괴상한 이름이 붙은 홀의 차이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지만 제영이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구별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격뿐이었다.
"그냥 적당한 곳으로 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제영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미 다 식은 커피는 미지근할 뿐이라서 추위를 쫓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적당한 곳이 어떤 곳인데?"
희주가 제영에게 물었다. 제영은 몇몇 곳을 떠올렸다. 천장에 커다란 상들리에가 달려 있던곳. 빨간 카펫이 인상적이었던 곳. 하지만 정확히 어디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생각나지는 않았다. 여기의 특징적인 것과 저기의 특징적인 것들이 섞여서 결국은 엉망진창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그냥 적당한 곳."
제영이 컵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거 남 결혼할 식장 고르는 게 아니라, 당신결혼할 곳 고르는 중인데 너무 무성의한 거 아니야."
차가웠다. 제영은 정신이 번쩍 들어 변명을 해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회사 일이 너무 피곤해서 그래. 말실수를 했어. 미안해. 미안해. 실수였어.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차라리 희주가 소리치며 화를 냈으면 더 싹싹 빌어 어떻게든 화를 풀어 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팸플릿을 꾹 쥐고 아무 말도 없었다.
“됐어. 나도 피곤해.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들어가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그녀가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쌩하니 가 버린 후에 홀로 남은 제영은 그저 추적추적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또 지리멸렬한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희주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다음다음 날에도 연락을 주기는커녕 받지도 않았다. 몇 번의 전화와 문자 끝에 결국 제영이 포기를 선언했다.
[화 풀리면 연락해줘.]
제영은 그렇게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지워버렸다. 전부 짜증스러웠다. 자신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이런 식으로 나오는 애인이 이기적으로만 보였다. 주변의 것들이 차곡차곡 등을 돌리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목적인 듯 맹렬하게 굴었다. 이러니 이 추운 날조차도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었다. 제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자신의 담배 메이트들은 전부 부재중이었다.
'오늘인가. HS랑 미팅이.'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입에는 담배를 물고 손으로는 핸드폰을 두드렸다. 어제 혹여나하며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이리 소외되고 저리 외면당하고 어디 평탄한 하루가 없었다. 제영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술이 고픈나날들이 계속되자 가슴속까지 시려 왔다. 결혼을 앞두고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온갖 사건이 터지고 있었다. 제영은 담배를 비벼 끄면서 한숨을 쉬었다. 속이 허해서 그런지 내뿜는 숨조차도 차갑게 느껴졌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옥상을 나서는 찰나에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나 송신자는 영 반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액정 화면 위로 ‘HS전자 이해진 팀장님‘이라는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이걸등록할 때만 해도 재벌 2세의 연락처라며 벌벌떨며 공손하게 저장했더랬다. 그때는 해진과 이런 꼴이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제영이 핸드폰에 저장된 그의 이름을 ‘HJ'로 바꾸었다.
적당히 무시하기 좋고 적당히 잊기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제영이 옥상에서 돌아오자 사무실은 어수선해져 있었다. 미팅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제영은 코트를 정리하고 있던 동혁과 눈이 마주쳤지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누군가는 쪼잔하다고 욕할지도 몰랐으나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다.
"이거 선주 씨가 가져다 놓은 거야?”
제영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자료 한 부를 보며 물었다.
"아니요. 그거 박 대리님이."
제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료를 확인했다.
이번 미팅에 쓰였던 자료였다. 중간중간 회의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다. 제영은 동혁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책상으로 던져 주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참을 인 자를 세 번 쓴 제영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메신저 창을 켰다.
[가져가.]
목적어도 필요 없었다. 무얼 말하는지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미팅 자료입니다. 읽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주간 회의 때 다시 다룰 거잖아. 거기 나도 들어갈 건데, 굳이 이렇게 줄 필요 없어.]
[새로 이야기가 오고 간 것 중에 K6 부품 관련 내용도 있습니다. 그건 취급한 적 없으시잖아요. 미리 읽어 보시는 게 도움될 겁니다.]
제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분명히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렇게 자신에게 결정타를 날리고 어디로 가 버렸는지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제영이 코트를 꺼내 들었다. 더 이상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퇴근 시간도 전에 짐을 챙기는 자신을 이선주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외근. 거래처 한 번 돌고 바로 퇴근할게."
제영은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물론 그 전에 동혁의 빈 책상위에 그의 자료를 돌려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막상 나와 운전대를 잡았지만 딱히 갈 만한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외근 핑계를 대고 나왔지만 이 애매한 시간대의 방문을 반겨 줄 거래처는 없었다. 제영은 길가에 차를 대고는 핸드폰의 연락처 목록을 뒤졌다. 친구란 것들은 거짓인지 진짜인지도 모를 같잖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너만은'이라고 생각하며 연락했던 형식조차 짐짓 침울한 목소리로 오늘 회식이 잡혔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희주에게 전화를 했다. 아예 자신을 차단해 버린 건지 몇 번 연결음이 울리기도 전에 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렸다.
결국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 몇 병과 과자 몇 개를 사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울적해져 TV를 켰다.
볼만한 것이 없었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대다가 결국 예능 재방송을 틀어 두고 소주를깠다.
제대로 된 안주도 없이 몇 잔째인지 모를 술을 마셨다. 금세 취해 몸이 늘어진 것은 당연지 사였다. 머리통만 대충 침대 가장자리에 걸친채였고 축 늘어뜨린 목 밑은 뚝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제영은 흐느적거리면서도 술잔만큼은 놓지 않았다. 아까의 예능은 이미 끝이 났고 이제는 처음 들어 본 이름의 시사 프로가 나오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지만 전부 벌이 앵앵대는 소음처럼 들렸다.
결국 TV를 껐다. TV를 껐어도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제영은 그제야 바깥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도 하늘이 회색빛이었는데 기어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겨울비인주제에 여름 장마 못지않게 소리가 우렁찼다.
빗소리에 취해 술을 홀짝이던 제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윤희주."
연인 사이에 술 먹고 전화하는 것이 얼마나구질구질한 짓인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이렇게 냉대받을 만큼 큰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서로 피곤한 와중에 나온 말실수였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거기다가 결혼을 결심하고 나서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살짝 그녀의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연락 두절에 잠수였다. 이전에는 일단 만나서 터놓고 해결하자는 주의였던 그녀의 변모에 제영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결혼 전 잠시간의 변덕으로 치부하기에는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다.
"제발 전화 좀 받아라.”
제영이 중얼거렸다. 벌써 몇 번째 사서함으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서 다들 자신을 더 힘들게 했다. 회사의 후배조차도 자신을 우습게 알았다. 친구란 것들은 다바쁘다 핑계고 회사 상사들은 온갖 지랄이었다.
애인인 희주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주저앉아 있던 제영이 몸을 일으켰다. 몇 걸 음 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몸을 휘청거리는 게 아슬아슬해 보였다. 제영의 도착지는 서랍장 앞이었다. 서랍장 위에는 작은 액자 하나가 있었다.
희주와 여름휴가를 갔던 때의 사진이었다.
유독 잘 나온 사진이라며 그녀가 인화해 액자에 넣어서 준 것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살갑고 사랑스럽게 굴던 여자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영은 웃고 있는 자신과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장에는 별별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엉켜 있었다. 그 물건 더미 위에 액자를 쑤셔 박았다.
자길 보기 싫다는 사람, 자신도 보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제영이 다시 핸드폰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누가 왔으면 좋겠는데 연락처의 이름이 다 고만고만했다. 그중에는 HJ도 있었지만 당연히 패스였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제영은 자신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부질없는 것이었나 하고 실망했다. 핸드폰을 내려 두고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안줏거리도 이제 없었다. 술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지경이었다. 고개가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제영은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갈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기댄 채로 반쯤 잠이 들었다. 타닥거리는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제영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지저분하고 초라한 방, 쌓인 설거지 거 리들과 세탁하지 못한 옷가지들. 마음은 괴로 워 죽겠는데 주변 풍경은 그저 일상의 저녁이었다. 제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벌써 아침이 되어 알람이 울린 건가 싶었다. 바닥에 누운 채로 팔만 들어 올려 상을 더듬었다. 턱, 하고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가 나고 어깨가 축축해졌다. 술병을 엎은 것이었다. 상의가 술에 완전히 절었다. 상 위의 술을 수건으로 대충 훔칠 때까지도 핸드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제영은 수건을 싱크대에 던져두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욕을 했다.
제영은 잠시간 고민했다. 이 핸드폰을 집어던져 버릴까.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던져야 할 것은 반쯤 병신이 된 자신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딱 5초를 세고는 제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침묵이었다. 제영은 이 남자가 자신과 무슨 장난질인가 싶었다. 더 거칠게 물었다.
"여보세요."
- 받네요.
"받으라고 전화하신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제영 씨 연락, 계속 기다렸는데.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또다시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 있으셔서 계속 이렇게 귀찮게 구신 거아니에요?"
제영은 뒷목이 당겨 왔다. 고개를 완전히 젖혀 침대에 걸친 채로 그에게 지껄였다. 술 덕인지 용기가 마구 샘솟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뭐든지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가 상처받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서.
-취했어요?
"네, 취했습니다. 안 취했으면 팀장님 전화 받을리가없죠."
아차, 혀가 살짝 꼬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봐줄 만했다. 제영은 자신의 배를 툭툭 건드리며 다음 말을 골랐다. 하지만 고르는 대로 나오는것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순서도 없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었다. 동혁의 이야기를 했다가, 회사 욕을 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어 해진에게 퍼부었다. 싫다고도 분명히 애기했다. 정확히 무엇이 싫은지가 빠진 것 같아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그러다가 다시 동혁 욕을했다. 또다시 아차 싶어서 해진이 왜 싫은지를, 그 친구인 준성이 얼마나 무례한 놈이었는지, 그러다가 다시 회사 욕을 했다.
"다들 제멋대로야. 사람 고생하는 건 생각도안하고. 당신도 마찬가지야."
쉴 새 없이 말하는 중간중간에 해진이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머릿속의 것들을 다 쏟아 내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었다 싶었을 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웃음이 나왔다. 괴상하게 낄낄거리며 웃긴했지만 통쾌했다. 미련이 남은 상대 탓에 핸드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젠 다 끝난 일이었다. 화끈하게 퍼부어 줬다.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제영이 병째로 술을 들이켜면서 나머지 손으로는 핸드폰 배터리를 거칠게 분리했다.
"씨발,이제 다 끝이야. 내가 다 끝내 버렸다고."
제영이 몸을 일으켰고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비는 여전히 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시끄럽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 이 순간만큼은 달콤하게 들려왔다. 제영이 이불을 코끝까지 덮으며 씨익 웃었다.
그 기분 좋음은 꿈에서까지 계속되었다. 따듯하고 말랑한 무언가가 제영의 몸에 엉겨 붙었다. 당황하던 것도 잠시였다. 머리카락에 가려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누군지 분명했다. 자신의 애인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제영은 간지럽혔다. 평소와 다르게 얌전치 못했다. 제영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마지막 만남에서 화난 얼굴은 어 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제영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잘못했다고도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제영을 자신의 부드러운 가슴에 기대도록 해 주었다. 제영은 숨 쉬는 것도 잊고 쿵쾅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하면서도 박력 있고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소리였다.
"미안해.”
제영이 또 미안하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전부 자기가 잘못한 것 같았다. 다음엔 더 잘해야지. 그런 말도 했다. 상대가 킥킥대며 웃었다.
쾅.
'아, 이번엔 좀 크다.'
제영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쾅.
이번에는 아예 몸을 일으켰다. 사람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같지 않았다. 쾅쾅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제영은 의아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다시 쾅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와중에 누군가 제영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했다.
"시끄러워.”
제영이 머리를 움켜쥐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전 소리는 빗소리라기에는 너무 요란스러웠다.
광, 하는 소리가 다시 들리자 제영이 놀라 몸을 퍼뜩 일으켰다. 문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씨발,뭐야."
어두워 시계도 보이지 않았다. 던져두었던 핸드폰 역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 감으로 느끼기에 새벽이 분명했다. 제영은 짜증이 확 났다. 누군가 술을 마시고 집을 잘못찾은 거라고 생각했다. 베개로 귀를 막고 저 미친놈이 가기를 기다렸으나 문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제영이 참지 못하고 결국 일어나문 쪽으로 향했다.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며 인상을 잔뜩 썼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욕을 해 줄 생각이었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모양인지 무언가가 덜커덩하고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넘어져 버리라고 저주 비슷한 것을 빌었지만 상대방은 운동 신경이 좋은 모양인지 조금 휘청하다가 곧 몸을 바로 했다.
현관 센서가 작동해 불이 켜졌다. 주황빛 조명 덕에 상대방의 얼굴이 보였고 순간, 제영은 말을 잊었다. 그 사람이었다.
"제영 씨.”
그가 제영의 이름을 불렀다.
둘 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 현관 등은 소임을 다하고 꺼졌다. 이제는 건물 바깥의 가로등 불빛이 전부였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빗줄기의 흐름과 역광을 받아 검게 보이는 그의 얼굴이 제영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제영 씨. 나 추운데,들어가도 돼요?"
해진이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같이 쏟아졌다. 이런 날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그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그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들어와요. 빨리, 들어와요."
그가 남긴 발자국마다 물기가 어려 있었다.
마지막 발자국은 욕실 앞이었다. 그는 대충 몸을 닦아 내고 끝낼 상태가 아니었다. 제영은 그가 자신을 스쳐 지나갈 때 얼음덩이가 지나가는 것처럼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에 깜짝 놀랐다. 결국 뜨거운 물로 몸을 데우라고 욕실로 밀어 넣었다. 욕실 문 앞에는 물기 흥건한 남자의 옷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 것인지 엉망이 된 옷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제영이 그걸 집어 들어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제영은 해진이 입을 만한 옷을 찾아보았다.
목이 늘어난 것 중에 그나마 양호한 흰 티와 바지를 꺼내고 속옷 칸을 열었다. 제영은 한 손에는 그에게서 빌려 입은 팬티와 나머지 한 손에는 자신의 팬티를 잡고 잠시 고민했다. 뭘 주든 찜찜하긴 매한가지였다. 전자의 것에는 타인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민망한 기억이 있었기에 결국 후자를 택했다. 그에게 빌려주고 버릴 생각이었다. 제영은 같은 성별의 알몸 구경은 원치 않았기에 옷가지를 욕실 앞에 얌전히 내려두고는 싱크대로 향했다.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으면 알몸의 남자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멀뚱히 서 있을 수는 없어서 찻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였다. 따듯한 차로 속을 데우라고 할 생각이었다. 샤워기 소리가 멈췄고 그와 동시에 물이 끓기 시작해주전자를 불에서 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있지 않아도 상대방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가 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두리번거 리며 자신을 잠깐보았다. 제영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바짝 섰다. 그는 이내 욕실 앞의 놓인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제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찬장을 열었다. 녹차 티백을 하나 꺼내서 머그잔에 담고 뜨거운물을 부었다. 후각까지 예민해진 건지 진한 녹차 향이 코를 찔렀다. 다 입었나, 아니면 아직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해진이 그런 고민을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저 이제 옷 다 입었어요. 제영 씨."
제영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머그잔을 들고 그의 앞으로 갔다. 좁은 원룸에는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고독한 술자리를 벌였던 작은 상을 앞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해진은 제영이 건네준 녹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제영은 그모습을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아직까지도 난데 없는 방문이 얼떨떨했다.
해진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추운지 팔을 쓰다듬으며 몸을 떨었다. 얼마나 비를 맞고 다닌 건지 온수 샤워로도 몸속 깊이 파고든 냉기를 쫓아내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아직도 추워요?"
"차 마시니까 괜찮아졌어요.”
거짓말이었다. 그는 머그잔의 온기에 매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백지장처럼 희었던 얼굴이 조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영은 열이라도 오를까 싶어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결국 침대의 시트를 주섬주섬 끌어 내려 그에게 둘둘 말아 주었다.
인터넷으로 대충 골라 구입했던 요란스러운 무늬의 싸구려 이불이었다. 그래도 그 잘난 얼굴이 삐죽하니 튀어나와 있으니 비싼 물건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스운 꼴임에도 해진은 퍽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괜찮죠? 난방도 올리긴 했는데 이렇게 하면 더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해진이 이불에 코를 킁킁거렸다.
"왜요? 냄새나요?”
희주가 타박하곤 했던 홀아비 냄새가 이불에까지 스며들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호텔 침구처럼 깨끗했던 그의 시트와 비교하면 지저분하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영 다른 방향이었다.
"제영 씨 냄새 나요. 제영 씨 집에서, 제영 씨옷 입고,제영 씨 이불 덮고 있으니까 되게 뭔가."
뒷말을 속으로 삼켜 버린 것처럼 그가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제영 씨, 있잖아. 미안한테 나 손 좀 잡아 줄수 있어요? 차도 식어 버렸고 아직 손이 너무 차가워요."
뻔한 수작질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받아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영이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쁨의 포자가 부옇게 피어오르는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불 틈 사이에서 나온손이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상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제영이 그 위로 손을 포겠다. 뻔한 수작질이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항상 뜨겁게만 느껴졌던 손이 찼다.
해진이 제영을 바라보았다. 공기가 가라앉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빨리 다른 화제를 꺼내지 않으면 그가 자신에게 절절한 사랑 고백이라도할 것만 같았다.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
제영은 한 번도 주소를 알려 준 적이 없었다.
항상 차로 데려다줄 때는 대로변의 골목에서 헤어졌다. 혹시나 탐정이라도 고용해 뒷조사를 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진실은 좀 더 우둔하고 어리석은 방식이었다.
"일단 오기는 왔는데,집이 어딘지 모르겠는 거예요. 근데,예전에 그랬잖아요. 가끔 바로 앞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혼자 마시기도 한다고.
일단 항상 제영 씨가 가던 골목을 올라가서 편의점을 찾고."
그 근처의 몇 개의 건물을 헤매고 그러다가 번호판을 보고 제영의 차를 찾고 우편물을 뒤져서 제영의 이름을 찾아서.
"금방 찾을 줄 알았어요. 이렇게 될 때까지 헤맬 줄은 몰랐어."
제영은 자신이 멋모르던 새내기 시절 한창쫓아다니던 여자를 떠올렸다. 해진처럼 흰 얼굴에, 작은 체구의 귀여운 여자였다. 처음 본 이후로 동기들에게 상사병에 걸린 것이냐고 놀림받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했었어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술 많이 마셨어요?"
해진이 구석에 몰아 둔 술병을 보고 물었다.
"조금, 좀 많이 마셨어요."
술이 웬수였다.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요?”
정말로 술이 웬수였다. 도대체 뭐라 했길래이런 날 비 맞은 생쥐 꼴로 한달음에 달려오게 만든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한테 오라고 했어요. 변명이든 뭐든 일단와서 이야기해 보라고. 그래서 왔어요. 조금 헤매느라 늦긴 했지만요. 그러니까 얘기해 줄래요? 내가 제영 씨한테 잘못한 게 뭔지."
모든 것이 희미하고 어렴풋했다. 한껏 연약해져 버린 눈앞의 존재마저도. 그에게 도대체 뭐라고 지껄였던 걸까.
"해진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요즘 상황이 많이 안 좋아서,힘든 일도 많고 그래서. 죄송해요.
제가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를.”
핑계를, 변명을 대야 했다. 무언가를 위한 핑계이며 변명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필요했다. 자신의 잘못을 포장하고 이 남자를 위로할 만한 것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술에 절어 버린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해진은 차분히 제영을 보기만 했다. 고요한 가운데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결국 사달을 냈다.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이 번쩍하더니 불이 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영의 눈에 해진의 표정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제영은 그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로 결정했다. 여러모로 아주 불쌍한 남자였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그에게 조그만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제영이 잡고 있던 손을 빼내었다. 해진 이 다급하게 말려 왔다.
"손, 놓지 말아요.”
그의 손이 다시 제영을 쫓았다. 그러나 두 손이 만나기도 전에 제영이 선수를 쳤다. 한순간의 접촉이었다. 입술이 닿고 뺨이 스쳤다. 처음것은 차갑고 두 번째는 뜨거웠다. 제영이 몸을뗐다. 그때까지도 해진은 미동이 없었다. 제영은 자신이 먼저 시작하면 예전처럼 그가 애걸하듯 달라붙을 거라고 예상했다.
"싫었어?"
그렇게 묻고 있는 자신이 더 싫었다. 슬슬 해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싫어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불안했다. 큰맘 먹고 저지른 이행동이 거절당한다면 그거 나름대로 상처였다.
“왜 키스한 거예요?”
해진이 제영에게 물었다. 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이유를 묻는다고 해도 대답할 거리는 마땅치 않았다."불쌍해서’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때 기억나요? 우리 집에 와서 키스했던 거요. 나는 제영 씨가 좋아서 했어요. 같이 있고 싶어서. 좋으니까.”
좋아서, 좋으니까. 그 말들이 제영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해진이 내뱉은 말의 깊이가 점점더 깊어지고 있었다.
"아무 이유라도 좋아요. '내가 좋다’든가. '내가 좋아졌다’든가. 아니면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라도."
좋다. 좋아졌다.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슷비슷한 세 개의 답안지 중에 맞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미안해서."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미안하면 키스해 줘요? 이상한 사람이야,당신은. 상관은 없지만.
어차피 좋아하니까. 있잖아, 다른 것도 하고 싶으면 당신을 얼마나 더 미안하게 만들어야 해요?”
해진이 몸을 움직였다. 이불을 벗겨 내려고하는 것처럼. 그걸 제영이 붙들었다. 포개진 이불 속 양손이 자유롭게 되면 일어날 일들은 받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해진은 제영의 속박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제영의 양팔이 해진의 위 팔뚝과 어깨 사이의 어슴푸레한 그 부분을 감쌌다. 해진은 제영에게 안겨 얌전히 기대어 있었다. 제영이 보기에 전혀 남자답지 못한 기다란 속눈썹이 사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해진이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의 저돌적으로 돌진해 오던 이는 딴 사람인 양 굴었다. 마치 의지가 없는 인형처럼 수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입맞춤은,제영이 해진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제영을 몹시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미 미안함과 호의의 표현은 끝이 났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핑계와 변명이 필요했다. 두번째 키스를 합리화할 만한 이유들이 뭐가 있을까. 제영은 그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셈하기 시작했다. 옷이나 시계와 같은 금전적인 것들, 그가 주는 편리함과 편안함. 그것만 으로는 부족했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진과 자신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어차피 결혼하면 끝인 관계, 어떻게든 끝나 버릴 관계. 그러니까 이런 짓 정도는 괜찮을 거야.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듯 끝과 지금 행위의 연관성을 되뇌었다.
제영이 팔에 좀 더 힘을 줘 해진을 꽉 껴안았다. 그가 끈 풀린 인형처럼 힘없이 딸려 왔다.
이번에는 뺨이 먼저고 다음이 입술이었다. 여전히 뜨겁고 차가웠다. 제영은 자신의 품 안에 말캉거리는 형체를 느꼈다. 뭔가 불안하고 두려웠고 그러면서도 편안했다. 목석처럼 가만히 있던 해진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입술이 마주했다다시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순간, 해진이 제영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지만 제영은 못 들은 체하며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차가운 입술에 자신의 온기를 나눠 줄 수 있을까, 만을 생각하였다.
* * *
어린 시절 제영의 시골 할머니 집에는 커다란 개가 있었다. 바깥 생활을 하는 시골 개답지 않게 횐 털에는 윤기가 흘렀다. 성격이 어찌나좋은지 설이나 추석에야 얼굴을 비치는 아이에게 조금의 낯가림도 없이 애교를 피우곤 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찬 바람 때문인지 북슬북슬한 털이 더 부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에 묶여 있는 그 개가 안쓰러워 제영은 몰래 방 안에 들이곤 했다. 목줄을 살살 풀어 주면 눈치 빠른 개는 한번 짖지도 않고 제영을 따라 들어왔다. 이불을 같이 덮고 그 부드러운 털을 빗어 주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끓아떨어졌다.
제영은 저려 오는 팔과 손에 엉긴 타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좁은 침대에서 자신의 가슴팍으로 바짝 파고든 이를 이제 어찌해야 하는 걸까 하며 잠이 들었다깨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어젯밤 이불에 둘둘말려 얌전히 입술을 내놓았던 남자는 밤새 뒤척거리는 와중에 풀려난 양팔로 자신을 옭아매 오고 있었다. 답답함에 몸을 뒤틀어도 다시금 찰싹 붙어 왔다.
눈이 감기며 다시 잠에 들려고 하는데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품 안의 개가 잠에서 깨기 시작한 걸까 싶어서 슬쩍 이불을 끌어 내려확인했다. 하지만 잠결의 기침일 뿐이었는지 암전히 감긴 눈은 뜨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게 조금은 안심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항상 해진과의 만남 뒤에는 이런 의문이 뒤따랐다. 예전에는 답이 뻔했다. 답은 항상
"모른척하고 무시한다.'였지 ‘껴안고 키스한다.'가 아니었다. 보통의 관계처럼 다음 단계를 찬찬히 밟아 가 연인이 될 수도 없었다. 제영은 숙취로 띵한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이리 생각해 봐도 저리 생각해 봐도 답이 없었다.
주변이 슬슬 밝아져 오기 시작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영은 해진이 베개 삼고 있는 자신의 팔을 살살 빼내고 아예 머리끝까지 이불로 덮어 주었다. 이렇게라도 그의 존재를 지워 버리고 싶었다.
제영이 몸을 씻고 나오니 잠에서 깬 해진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제영은 일부러 눈을 피하며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자 해진이 먼저 입을 떼었다.
"어디 가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차가운 겨울비를 맞고 다녔으니 자업자득이었다.
"출근해야죠."
제영이 뭐 그런 걸 묻느냐는 투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휴가라도 내지 않은 이상 평일의 아침 시간이면 출근 준비를 하는 게 당연했다.
"팀장님도 출근 준비하셔야죠."
그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늘은 생각 없어요."
제영은 순간 자신이 아침을 먹자고 한 것인지, 아니면 출근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은 것인지 햇갈렸다. 그러나 이내 저 다 죽어 가는 흰얼굴의 남자가 취미로 회사를 다니는 재벌 2세라는 걸 깨달았다.
짧은 머리는 금세 다 말랐다. 넥타이도 흠 없이 깔끔하게 매었다. 제영은 구석에 나가떨어져있는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으며 출근 준비를 끝마쳤다. 제영이 살짝 고개를 돌려 해진을 보았다. 마치 주인을 바라보는 개처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방 안을 옮겨 다닐 때 마다 계속 해진의 두 눈동자가 제영을 따라붙었다. 그게 민망해 더 부산스러운 척을 하였다.
"가볼게요"
자신의 집에서 이런 인사말을 하는 게 어색했다. 마중이라도 할 생각인지 해진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그걸 본 제영이 다급하게 뒷말을 이었다.
"옷은 옷장에 아무거나 입으셔도 돼요. 나올때,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니까 그냥 가시면 됩니다. 그럼 전가 보겠습니다."
해진이 엉거주춤 서 있던 순간에 제영이 문을 열었고 아픈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불릴즈음 문을 닫아 버렸다. '삐빅’ 하며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제영은 혹시나 그가 나올까 싶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며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서나마 작금의 사태를 정리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것조차 수월치 않았다. 아침부터 뭔회의인지 이리 불려 갔다 저리 불려 갔다 하며 정신이 없었다. 바쁜 업무 탓에 점심시간에 콩나물국밥으로 해장하려던 계획은 취소하고 편의점 샌드위치로 대충 때울 수밖에 없었다.
숙취며 회사 일이며 시달리는 통에 제영은 죽을 맛이었다. 전날 동혁의 책상에 던져둔 서 류가 다시금 자신의 책상에 올라와 있는 걸 발견한 순간에도 투지는커녕, 그저 책상 위 서류철에 꽂아 두는 것에 그칠 정도였다. 몰렸던 일을 대충 해치웠을 무렵에 다시 해진의 일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깊이 고민해 보기도 전에 당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제영 씨? 전화 괜찮아요?
"네. 말씀하세요."
누가 들을까 싶어 복도 구석에 나와 소곤소곤 말했다.
-집 비밀번호 뭐예요?
해진은 그렇게 물으며 추임새처럼 콜록거리는 소리를 덧붙였다. 당황해하는 제영에게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목이 아파서 약이라도 살겸 나왔는데 문이 잠기는 바람에 들어가질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제영은 그 대답이 더 당황스러웠다. 나왔으면 본인 집에 가면 될 일이 아닌가.
-제영 씨?
그가 또다시 기침을 했다. 제영은 결국 집 비밀번호를 불러 줄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당연히 그가 돌아갔을 거라고 예상했다. 뭔가 불안해 근처를 잠시간 어슬렁거리기는 했지만 제영 역시 상태가 좋지 못했기에 집에서 쉬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불안감은 적중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불룩한 이불 덩어리에 제영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도 저 덩어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니 앓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금살금 침대맡으로 향했다. 식탁에 약과 물컵이 하나 놓여 있을 뿐 아침의 상태와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곤혹스러운 애정에 처하게 되었을까. 제영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슬쩍 손끝으로 해진의 이마를 짚었다. 손의 다 닦이지 않은 물방울 하나가 그의 이마를 지나 가지런한 눈썹 사이로 흘러 내렸다. 그것이 눈가를 두드리기 전에 제영은 얼른 훔쳐 내었다.
손끝에 닿은 이마가 뜨거웠다. 방금 밖에서 들어온 자신의 손이 차가워서 그의 이마가 뜨겁다고 느끼는 것인지,아니면 그가 정말로 열이나 뜨거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톡톡 건드려대는 바람에 잠에서 깬 그가 눈을 뜨고 제영을 보았다.
"왔어요?"
회사에서 돌아온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 줄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이 남자가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밥은? 밥은 먹고 약 먹었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안 되는데, 뭐라도 사 올까요? 아니면 시킬까요?"
자신이 그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서도 안되었다.
"됐으니까. 그냥 이리와요."
열을 식힐 셈인지 자꾸만 제영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꽁꽁 얼어 있던 손부터 녹기 시작해몸의 긴장도 차차 풀려 갔다. 제영은 너무나 피로했다. 고민을 길게 하기에도, 침대를 눈앞에 두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기에도. 해진이 몸을 옆으로 비키며 자리를 내주었다. 제영은 잠깐 주저하다가 결국 거기에 몸을 뉘었다.
아침때처럼 그가 제영 쪽으로 파고들었다.
손으로 제영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가슴팍에 머리를 바싹 붙였다. 제영 역시 별 도리 없이 아침과 같이 굴었다. 손끝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엉겨 왔다. 또다시 품 안의 개를 토닥거리며 시골집 개를 떠올렸다. 조모는 제영이 방에 개를 들인 것을 확인하고는 크게 화를 내었다. 더러운 개 때문에 이불도, 옷도 다 버렸다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콜록대긴 해도 희고 깨끗한 것이었다. 이 희고 깨끗한 것이 강아지처럼 굴었으니 받아 줄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다가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어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은 춥고 품에 끌어안은 이것은 따뜻하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제영이 더 세게 끌어안았더니 해진이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다가 제영의 턱 끝에 입을 맞추고 등을 매만져 왔다. 밖에서 한창 피곤했던 제영이 금세 잠들어 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