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1권) (1/8)

[김솜탕] 구원의 경계 1권.

1장.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

손끝이 시리다. 그 차가움에 손이 곱아들 것만 같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벤치의 달아오른 대리석 판에 손끝을 가만히 대어 보았다.

온기가 스며오는 듯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어제접대 자리에서 새벽까지 술을 퍼부은 탓에 속이 쓰렸다. 제대로 된 해장국 한 그릇으로 속을 달래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점심 식사를 끝낸 이들이 커피를 한 손에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망할 놈들. 지가 밥 안 처먹는다고 다른 사람도안 먹는 줄아나.'

그런 것들은 꼭 점심시간 5분 전에 전화를 하곤 했다. 어쩔 수 없는'을'이라 그딴 전화에도 사근사근 받아 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입에 대충 욱여넣고는 커피로 목을 축였다. 쓰린 속이 더부룩하기까지했다. 그래도 별수 없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성큼성큼 걸었다.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볕은 눈이 부실 정도로 쌩했다. 저도 모르게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그좁은 시야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좀비 떼처럼 흐물흐물거린다. 한숨이 나왔다. 자신도 저 불쌍한 좀비들 중 하나였다.

"김 대리. 점심은 먹었어?”

"예."

제영은 키보드 위에 바쁘게 놀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는 옆에 짝다리로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배진수 차장이었다. 반질반질한 얼굴에 기름이 흘렀고 찢어진 눈은 사람을 야비하게 보이게 했다. 물론 보이는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8년 경력 영업 노하우가 머리가 아니라 전부 배속에 축적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의 배는 불룩했다. 회계팀의 여직원들이 8개월이라고 속닥이는 게 이해가 갈 정도였다.

"오늘 HS 쪽하고 한잔하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이미 예약도 해 뒀고 확인도했습니다.“

HS전자와의 계약 건은 지금 회사에서 가장심혈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HS에서는 다음 해출시 예정인 핸드폰에 들어가는 부품 생산을 도맡을 주 거래처를 찾는 중이었다. 업계에서는 이 HS와의 계약 건을 따내려고 다들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제영의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기만 하면 잭팟이 터지는 건이나 다름없었다.

회사에서는 담당자들에게 인센티브까지 약속한 터였다. 물론 대기업의 성과급만 하지는 않겠지만 쏠쏠할 게 분명했다. 5년간 사귄 여자 친구와의 결혼을 앞두고 돈에 쪼들리는 제영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반드시 따내고 말겠다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간 차장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온 게 헛짓은 아닌 듯 제영은 당당히 TF팀에 입성했다.

접대 자리에 가는 이는 총 넷이었다. 이사와 배 차장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대리급 두 명. 같이 온 대리는 제영보다 후배인 박동혁이었다.

표정이 까칠한 것이 거슬렸지만 무시했다. 자신이 이 팀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꼬운 듯했다. 듣자 하니 자신은 관련 부품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고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고 한다. 곱게 봐주려야 봐 줄 수가 없었다. 제영은 동혁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아이고, 이 상무님. 오는 길은 괜찮으셨습니까."

이 상무라 불린 이는 연신 굽실거리는 이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이로 치면 상무란 이가 몇 살은 어렸지만 그 위계질서에 불쾌감을 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생활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HS전자의 모바일 총괄팀의 상무라면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제영은 이런사람과 인맥을 쌓은 이사가 존경스러웠다.

"이쪽은 김제영 대리입니다. 아주, 일 잘하는 친구입니다."

제영이 꾸벅 인사를 했다. 이 기회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 둬야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고만고만한 부품의 사양 탓에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비딩을 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니 이렇게 내부 인사의 정보가 필수적이었다. 반칙이라면 반칙이지만 상무는 용돈을 벌고 우리는 계약을 따내고, 어차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근데, 여기 이분은 초면이신데......"

배 차장의 말에 한 명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제영은 이미 한참 전부터 그를 보고 있었다. 연갈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제영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눈동자 역시 머리칼처럼 연한 갈색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탓인지 꽤 키가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연약해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제영을 슬쩍 스친다.

"여기는 이해진 팀장님. 기획 2팀 팀장님이시네. 오늘 갑자기 합석한다고 하셔서."

제영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일이 살피진 않았지만 이사와 배 차장, 동혁까지도 같은 표정일 게 분명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기획 2팀은 사실상 1팀에 이은 HS의 메인 부서였다. 그곳의 팀장이 이처럼 새파랗게 어린 애라는 건 보통 인물이 아니란 의미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일개 팀장에게 쩔쩔매는 듯 한 상무의 태도도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설마,경영진 일가인가.'

묘한 침묵이 지나간 뒤, 새로운 인물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해진입니다.“

제영은 입사 이래, 이렇게 요상한 분위기의 접대 자리는 처음이었다. 호탕하기로는, 다시 말하면 더럽게 놀기로 유명한 HS의 상무는 암전하게 술만 홀짝거리는 중이었고 HS의 기획팀장이란 놈은 제대로 된 대꾸도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포크로 과일 안주만 찍어 먹고 있었다. 분위기를 좀 풀어 보고자 여자들을 부르려던 이사는 기겁하는 상무의 태도 탓에 여자의 '여’자도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제영이 나름대로 살갑게 옆자리의 남자에게 술을 권했다. 술에 좀 취하면 이 인간 탓에 꽁꽁얼어붙은 분위기가 좀 풀릴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어색한 건배 이후에도 남자의 술잔은 그대로 였고 분위기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제영은 나댄다고 여기지만 주위에서는 사교성 좋은 편이라는 얘기를 듣는 동혁의 치근거림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제영은 고소해하며 은근히 그를 비웃었다. 동혁이 제영을 노려보았다.

그 고소함과는 별개로 냉랭해져 가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제영은 결국 화장실로 대피할 수 밖에 없었다. 제영은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고급 술집 화장실의 거울은 얼룩 하나 없이 반짝거렸지만 거기에 비친제 얼굴은 가관이었다. 이래 가지곤 곧 새신랑이 될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수 없었다.

"세수라도 할까."

제영은 찬물에 손을 축이다가 괜히 옷을 적시기보다는 찬 바람을 쐬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바로 들어가기도 뭣했다. 제영이 찾은 곳은 주차장으로 연결된 뒷문이었다. 문에는 직원용휴게실이라고 적혀 있긴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주로 출장 온 여자들이 이곳을 통해서 드나들고 뒤가 구린 이들이 몰래 도망 나가는 통로이기도했다. 저번에 여기 카운터에게 담배 하나를 빌려주면서 알게 된 개구멍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찬 기운이 얼굴에 훅 끼쳤다.

술 탓에 열감이 오른 얼굴에 얼음찜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주차장 벽에 기댄 채로 차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외제 차였다. '저 차가 제 것이었으면 좋을 텐데'하며 제영이 윤기 흐르는 것들에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 제영은 외제 차는커녕, 가지고 있는 낡은 차의 유지 비도 버거운 상태였다.

제영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곧 끝이 타들어 가며 익숙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제영은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방해한건 아니죠?”

남자였다. HS전자의 기획 2팀 이해진 팀장.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다행이네요."

'퍽이나 다행이겠다?'

방해받은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해진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기도 하였다. 정말 경영진 일가라면 재벌 2세다. 저쪽 상무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월급쟁이지만 이놈은 진짜였다. 막말로 자신과는 신분이 다른 인물이었다. 제영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쪽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사사건건 저를 앞지를 생각만 하는 동혁보다 먼저 말이다.

"여기 문, 다들 잘 모르는데 예전에 온 적이 있으신가 봐요."

"몰랐습니다. 그냥 따라왔어요.”

"한 대 피우러 나오셨어요?"

중간에 나온 용무는 뻔했다. 급한 용변 해결, 거기에 더불어 갈급한 니코틴을 채워 주는 것.

그러나 해진의 대답은 제영의 예상을 빗나갔다.

"아니요. 전 담배 안 피웁니다.”

가지가지 하는 새끼. 제영이 웃고 해진도 웃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열린 문틈으로 삐져나온 얇은 불빛이 해진의 구두코를 밝혔다.

반짝이는 구두가 '나 비싼 몸이오'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제영이 자기도 모르게 슬쩍 발을뺐다. 자신의 싸구려 구두가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얼른 담배를 비벼 껐다. 한 참이나 남은 게 아까웠지만 안 피운다는 사람앞에서 뻑뻑댈 수는 없었다.

"그러실 필요 없는데."

"아닙니다. 다 피웠습니다."

제영은 손을 휘두르며 담배 연기를 날리는 시늉을 했다. 해진이 또 웃었다. 웃음이 헤픈 사람이었다. 제영은 어쩐지 그 웃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여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커다란 눈 탓인지, 옆에서 쿡 찌르면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물론 재벌가 도련님을 쿡 찌를 놈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재미없네요. 그럴 줄 알고 쫓아오긴 했지만."

"혹시 이런 자리는 처음이십니까?”

"티 나죠? 대충 고개만 끄덕이기도 지겹네요."

그의 어린애 같은 투정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같이 등을 벽에 기댄 채로 잠시 간 침묵의 시간을 견더 냈다. 술 탓에 머리가 굳었나. 나름대로 영업 사원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제영이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봐도 이 온실속 화초 같은 도련님의 마음에 들 만한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제영이 해진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무슨 얘기를 해야 좋아할까를 고민하다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연한 눈동자 위로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그림자들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제영의 애인조차 속눈썹이 저렇게 길지 않았다.

"속눈썹이 굉장히 기시네요.“

제영은 이 말을 내뱉고 아차 싶었다. 아무리생각해 봐도 생뚱맞은 말이었다. 여자한테 작업거는 멘트 치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에 적절한 말이 아니었다. 쪽팔림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직전이었다.

"아아, 그런가요.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 봅니다만....... 하하, 재밌네요."

'차라리 입을 닥치고 있자.'

입을 다문 제영은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도망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게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한 답으로 보였다.

대어를 앞에 둔 영업인다운 자세는 아니지만 제영은 일단 일 보 후퇴를 선택했다. 그러나 말을 건네기도 전에 다른 말소리가 끼어들었다.

"아까, 그 이 팀장님 말이에요."

속닥이는 투로, 하지만 술에 취한 이들의 목소리는 크기 마련이다.

"아, 그 애새끼?”

상무였다. 그의 목소리는 비꼬는 투가 역력했다. 제영은 옆에 있는 이의 눈치를 살폈으나그는 미동도 없었다.

"기획 2팀 팀장이면 보통 인물은 아닐 텐데......“

"회장님 막내아들이랍디다."

"회장님 막내아들이요? 아이고, 상무님. 그럼미리 언질 좀 주시죠."

"갑자기 자기도 간다고 하더니 냉큼 따라오는 걸 어떡해. 어디서 오늘 술자리 이야기를 주워들은 건지. 그 입 나불거린 새끼 잡으면 내 가만 안 둬. 저놈 때문에 아주 내가 고생이야. 뭘알지도 못하는 애새끼가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그런데도 사장이 지 동생이라고 아주 감싸고돌아서 어쩔 도리가 없어."

"어휴, 고생하시네요."

"진짜, 거지 같다니까. 어린 게 눈빛도 더럽게 마음에 안 들어. 아주 무슨 버러지 쳐다보듯이 본단 말이야. 누구는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아등바등 사는데, 그게 우습다 이거겠지. 좆같은새끼."

말소리가 들려오면 들려올수록 제영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그 입을 꿰매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영은 옆에선 남자를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재밌는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이 조심스럽지 못한 뒷담화가 도련님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을까’ '뉴스나 영화에서 보던 재벌 2세난동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을까' '겉보기와는 다르게 속 좁은 이 남자가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고 있었다.

“좆같은 새끼.”

그리고 그 마지막 일격이 제영의 귓가를 쳤을 때 참지 못하고 해진을 쳐다보았다. 의도치않게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제영은 도련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적어도 딱딱하게 굳어 무표정일 거라고 기대했으나.

해진은 웃고 있었다. 조금의 당황스러움도 조금의 분노도 없이 제영을 바라보았고 그저 웃었다. 도리어 당황한 것은 제영이었다. 안쪽의 소란스러움이 잠잠해지고 이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다시 조용해진 가운데 제영은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남자에게 들릴까 봐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그가 제영의 네 손가락만을 살짝 당기듯 쥐었다 놓았다. 제영은 닿아 오는 그 뜨거움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는 그게 부끄러워 입술을 깨물었다.

"춥죠? 우리도 그만 들어갈까요."

제영은 그 말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한 채로 얼간이처럼 고개만 주억거렸다.

* * *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제영은 배 차장의 눈치를 살피며 책상 옆에 딸린 장 안에서 얼른 코트를 꺼내 입었다. HS전자 일로 관련 인원이 며칠째 야근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이른 퇴근이 아니꼬운지 동혁이 눈을 흘기는 것이 보였으나 모른 체하는 게 상책이었다.

간만의 한파라는 기상 캐스터의 말을 무시한것이 실수였는지 쌩쌩 부는 찬 바람에 목이 시렸다. '목도리라도 하고 올걸' 하고 후회했다. 코트 깃을 억지로 세워 목을 감쌌지만 그 찬 기운을 막지 못했다. 추위 탓에 데이트고 뭐고 집에 보일러나 뜨뜻하게 올려놓고 이불 속을 파고들고 싶었다.

하지만 거의 3주 만에 희주를 만나는 것이었다. 이쪽이 시간이 된다 싶으면 애인이 야근에 시달리고, 애인이 괜찮다 싶으면 제영의 퇴근이 미뤄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근래에는 HS전자 일 때문에 시간 내기가 더욱 어려웠다. 바쁘다는 핑계로 결혼 준비도 거의 그녀 혼자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시간이 된다며 연락해 온 희주를 거절했다가는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화를 풀어 주기 어려울 게 불 보듯 뻔했다.

약속 장소는 희주가 가고 싶다고 했던 미술관이었다. 이번에 팝 아티스트의 특별전이 열린 다고 했다. 물론 제영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아티스트의 전시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라는 것만이 유일하게 반가웠다.

"제영 씨.”

먼저 도착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제영의 이름을 불렀다. 애인은 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진녹색의 치마는 겨울용 도톰한 소재처럼 보였지만 이 날씨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제영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까만 스타킹이 감싸인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로 향했다.

조금의 비침도 없이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제영의 연심을 자극했다.

만나지 못한 것은 3주였지만 그녀와 관계를 가지지 못한 지는 두 달이 넘었다. 곧 그 달콤하고 따스한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들 생각에 허리가 저릿했다.

“많이 기다렸어?"

"왜 이렇게 늦었어."

나무라는 듯했지만 말투에는 애교가 흘렀다.

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가 퍼졌다.

"들어가자,얼른."

제영은 그녀의 손을 꽉 쥐고서 끌어당겼다.

손이 꽁꽁 얼어 있어 제영이 혀를 찼다.

젊은 층에 인기 있는 작가인 듯했다.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온 여자 관람객이거나 아니면 데이트를 나온 젊은 커플들이 대다수였다. 희주와 제영도 그중에 하나였다. 희주는 연신 ‘귀엽다’를 남발했다. 그러나 제영은 알록달록한 색채에 기괴할 정도로 커다란 눈을 가진 고양이에게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미술관 옆에 있는 레스토랑에서했다. 제영의 월급으로는 조금 과분한 금액이었지만,오랜만에 그녀를 만나는데 이 정도 지출은 아깝지 않았다.

"맛없어?"

"아니, 맛있어."

"왜 이렇게 깨작깨작 먹어. 제영 씨는 나보다도 적게 먹는 것 같아. 집에서는 밥 좀 챙겨 먹는 거야?”

그녀의 애정 섞인 걱정이 사랑스러웠다. 식사 시간은 희주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찼다. 회사 이야기,친구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그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애인의 손가락이 연한 갈색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돈했다. 제영은 그순간 HS의 도련님이 떠올랐다. 그녀의 짙은 밤섁 눈동자와는 다른, 연한 갈색 눈동자의 남자.

처연하게 미소 짓는 그의 눈이 생각났다.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그에 대한 것으로 채워졌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웃음이, 마지막 순간에 손끝에 닿아 왔던 남자의 온기가 천천히 제영을 잠식했다.

"제영 씨, 내 말 듣고 있어?"

"아, 응. 듣고 있어."

"거짓말. 딴생각했지?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지.”

"아니야. 듣고 있었어. 결혼식은 봄이 좋겠지?”

씰룩 나왔던 입은 얌전해졌지만 눈에는 서운한 기운이 가득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사실 제영에게 결혼은 봄이고 여름이고 상관없었다. 너무 비싼 식장만 아니면 됐다. 희주와 함께 호텔 결혼식도 알아보긴 했다. 일반결혼식장 배 넘는 비용에 둘 다 바로 포기하긴했지만 말이다. 꽃값에, 밥값에, 또 추가로 붙는 돈은 어찌나 많은지 그 큰돈을 고작 하루 만에 다 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부디 축의금으로 메꿔지기만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중이었다.

식사가 다 끝나 갈 무렵 제영은 근처의 모텔을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예전에 갔던 곳에 갈까 하다가 반응이 시큰둥했던 것이 기억나 다른 곳은 어디 없나 찾아보고 있던 중이었다.

“뭐 해.”

제영의 몫으로 나온 디저트까지 먹던 희주가 핸드폰 화면을 슬쩍 보며 물었다. 이미 끝까지 간 사이에 이런 걸 숨기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하여튼,남자들은."

그녀의 핀잔에 머쓱해진 제영은 갑자기 목이 타 식어 버린 커피를 홀짝였다. 희주는 여전히 그런 제영을 뱁새눈으로 흘겼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안 돼.“

“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피곤해. 어제까지 야근했어. 내일도 출근이고."

간만의 이벤트를 기대하며 달아오르던 몸은 그녀가 택시를 타고 가 버리자 속수무책으로 식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때 느껴지지 않던 추위가 다시금 몸을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애인의 몸이 아닌 날카로운 냉기만 제영의 곁을 맴돌았다. 희주의 택시를 잡아 준다고 이미 버스를 한 번 보낸 탓에 다음 버스가 오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야, 제영아. 여기다."

매서운 겨울 한파에도 식당은 시끌벅적했다.

이미 도착한 친구들은 벌써 고기 불판을 한 번갈아치운 듯했다. 먹성이 좋은 인간들이라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꽤 큰돈이 깨질 것 같아 불안했다.

"야, 왔냐. 우리 새신랑."

"아직 새신랑 아니라니까. 총각이야, 아직까진."

오늘은 제영의 결혼을 알리기 위해서 모인자리였지만 이미 다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청첩장을 돌리기 전에 욕먹지 않게 입을 고기로 막아 두고자 제영이 먼저 연락을 돌렸다.

"오래 사귀었다. 몇 년이지? 5년? 나는 그렇게까지 오래갈지 몰랐어.”

제영이 지금 여자 친구와 사귀게 된 건 고등학교 동창인 이형식이 소개해 준 덕이었다. 희주는 형식의 대학 동기였다. 제영이 전 여자 친구에게 호구 잡혀 차이고 울적해할 때 형식이 소개팅을 주선했다. 제영과 희주는 서로 잘 맞았다. 보통의 연인들처럼 헤어지네, 마네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결혼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고맙다. 네 덕이지. 네가 소개해 줬잖아. 내가 한턱 크게 쏠 테니까 많이 먹어라."

"야, 김제영. 고작 삼겹살집에서 쏘긴 뭘 쏴.

너 나는 따로 한우로 대접해라.“

형식의 말에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제영도 그러마 하고 약속했다. 테이블 위에 술병이 대여섯 병 쌓이자 술에 한껏 취한 이들이 돌직구를 날리기 시작했다.

"너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집? 아아,부모님이 좀 도와주기로 했어."

그 말에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중 집문제로 결국 장모님 댁에서 얹혀살게 된 재우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희주 부모님도 제영의 부모님도 도움을 주기에는 형편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에는 대출인데 서울에 제대로 된 집 한 칸 마련하려면 한두푼 대출로는 어림없었다. 희주의 월급도 제영의 월급도 쥐꼬리긴 마찬가지라 앞으로의 녹록지 않은 인생을 생각하면 결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동창들 앞에서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대기업에 들어간 뒤로는 철심을 박은 양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는 민우의 앞에서는 특히나 그러했다. 고만고만했던 친구들 사이에 슬슬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영은 잘나갔던 자신이 이제는 겨우 중간이나 할까말까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영을 쓴 속을 달래기 위해 소주를 넘기다우연히 TV를 보았다.

-HS전자의 경영권 승계가 장남인 이해명 HS 전자 사장을 중심으로 견고해지고 있으며.......

금융 계열사 주식을 선점하며 반기를 들던 삼남의.......

여자 아나운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HS전자 사옥을 보여 주며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뭘 보냐?"

형식이었다.

"그냥 뉴스. 근데, 재벌들은 무슨 생각하면서살까?"

문득 그 팀장이 생각났다. 뻔히 자기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웃던 남자. 이곳저곳 영업을 다니며 못 볼 꼴을 많이 본 제영이지만 눈앞에서 자기 욕을 듣고도 웃는 해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형제끼리도 피 튀기며 싸워야 하는 재벌가에서 자랐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딴 나라 이야기야. 뭘 신경 쓰냐?”

형식의 말이 맞았다. 그날 그가 회사 접대 자리에 나온 건 그저 객기일 뿐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만날 일이 영영 없을지도 몰랐다. 딴 나라에 사는 놈이 정신병자든, 미친놈이든, 돈이 산처럼 넘쳐나든 제영과는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제영은 한두 푼에 쩔쩔매는 소시민일 뿐이고 쬐끄만한 회사의 영업 사원일 뿐이었다. 제영은 형식이 따라 준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술이 썼다.

시간이 11시를 넘자,슬슬 자리를 파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젊을 때라면 당연히 새벽까지 달렸겠지만 더 이상 그럴 나이도 아니었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은 10시쯤에 '여우 같은 마누라,토끼 같은 자식'을 핑계로 냉큼 사라졌고 오늘 술자리의 주인공이자 지갑인 제영과 그 외의 몇 명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대리 부를까? 넌 차 가져왔냐?"

“아니, 택시 타고 가야지."

차를 가져온 친구는 핸드폰을 꺼내 대리를 불렀고 제영과 나머지는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시간도 늦은 데다 이 근방은 택시 잡기가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민우 놈한테 굽실거려서라도 요 앞까지만 태워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던 중이었다.

찬 겨울바람이 코트를 뚫고 살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몸이 달달 떨렸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울까싶어 코트를 뒤지는데 옆의 형식이 어깨를 툭툭쳤다.

"왜, 인마."

"야, 저거 봐. 어우, 눈 돌아가게 섹시하네."

형식이 말한 건 새까만 검은색 외제 차였다.

날렵하게 빠진 것이 요란스럽게 반짝거리며 비싼 차라는 티를 내고 있었다. 그 차는 특유의 엠블럼이 '어흥'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할 정도로 가까워지더니 이내 오른쪽 방향지시등을 켠 채로 식당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쪽으로 오는데? 오라는 택시는 안오고."

형식과 제영은 둘 다 의아한 얼굴로 차를 바라보았다. 차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긴 했지만 저 차에 탈 만한 인물이 이런 싸구려 삼겹살집에 밥을 먹으러 오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가 제영과 친구들 앞에 서자 다들 이런 비싼 차 주인은 누군가 하고 슬쩍 차 안을 살폈다.

하지만 짙게 선팅된 차라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차 창문이 내려가고 그 안의 인물이 누군지 확인한 제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남자, 해진이었다.

"김 대리님."

"안녕하세요."

친구들의 시선이 제영에게로 몰렸다. 안 봐도 뻔했다. 저런 비싼 차를 타는 놈과 무슨 사이 냐고 묻는 표정일 것이다.

"친구분들이랑 한잔하고 들어가시는 길인가봐요.“

"네, 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엄동설한에 택시를 잡으려고 생난리를 치던 중에 만나기에는 딱히 반갑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길 가다 차까지 세워 인사할 사이는 아닌 게 분명한데 굳이 이렇게 말을 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차 자랑이라도 하려는 셈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가 건넨 말은 제영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타세요. 문리동 산다고 하셨죠? 태워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타세요. 어차피 가는 길이에요.“

2초는 '왜 날 태워다 주는 거지' 하고 의심하고 3초는 탈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5초가 지났을 때 냉큼 남자의 차에 올라탔다. 자신이 언제 재벌 2세의 차에 올라탈 기회가 있겠나 싶었고 값비싼 차 주인이 굳이 자신을 모셔다드리겠다며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당분간은 젠체하며 친구 놈들의 콧대를 살짝 눌러줄 수 있을 것이다.

"형식아, 미안. 먼저 갈게.”

그렇게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이면 착하고 입 싼 형식이 놈이 외제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진 자신의 이야기로 입방아를 찍어 댈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볼일 보고 들어가시는 길이세요?"

"네. 일이 좀 있었는데,생각보다 늦게 끝났어요"

"회사일이요?"

"아아, 집안일인데. 뭐, 집안일이 회사 일이 

제영이 부러움에 입맛을 다셨다. 제영이 하는 집안일이라고는 설거지, 빨래, 청소, 그따위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이 어린놈의 집안일은 국내 재계 1위 회사의 돈줄을 쥐락펴락하는 일일것이다. 어쩐지 좇같은 새끼라며 욕하던 상무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새파랗게 어린 애가 수십계단은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 다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졌다.

"요즘 많이 바빠요?”

"네,뭐. 연말이고 그래서,이런저런 일이 많으니까요."

꼭 집자면 당신네 회사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계약 건으로 살랑살랑 아부를 떨기에는 술을 너무 많이 들이켰다. 유부남이 되기 전에 한번 죽어 보자며 계속 술잔을 채워 주는 바람에 주량을 훨씬넘겼다. 알딸딸한 기분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술기운과 더불어 재벌 2세의 외제 차를 탔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몸이 떨렸다. 그걸 기민하게 눈치챈 해진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추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실은 추웠다. 하지만 히터를 틀어 달라고 하기는 민망했다. 얻어 타는 '을' 주제에 이것저것 요구가 많다는 인상을 주긴 싫었다. 그러나 이어진 남자의 행동은 담담한 척하고 있던 제영을 허둥지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차가 신호대기로 잠깐 멈춘 틈을 타, 해진이 자신의 코트를 벗어 제영에게 덮어 준 것이다.

"잠깐 덮고 있어요. 히터 틀어 주고 싶긴 한데, 이거 뽑은 지 얼마 안 돼서 냄새가 덜 빠졌어요"

"괜찮습니다."

제영은 해진의 과한 배려가 부담스러워 다시 코트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덮고 있어요."

단호한 말투였다. 짐짓 엄한 척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차는 금방 출발했고 몸을 덮고 있는 질 좋은 코트는 차게 식은 제영의 몸을 데워 주고 있었다. 괜찮다는 말은 제영의 구시렁거림으로 금세 종결되었다. 제영은 입을 열까하다가 도로 다물었다. 이 도련님은 원래 궁핍한 이에게 배려심이 넘치는 성격 같았고 호의를 거절하기에는 피곤이 좀 과한 상태였으며 한파로 바람 역시 너무 매서웠다. 차는 다시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근데 이렇게 막 타도 돼요?”

"네?"

'본인이 타라고 했으면서 역시 그냥 한 말이었나.'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

제영은 젊은 사람치고는 개그 센스가 구린 남자라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재벌 망나니 아들에게 몇 대 맞고는 10억을 합의금으로 받았다는 기사를 떠올렸다.

'댁한테 납치당하면 고소하고 합의금이나 듬뿍 받았으면 좋겠네.'

"하하, 팀장님한테 당하는 납치라면 환영이 

실없는 농담에도 해진은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었다. 제영의 눈이 감기려고 했다.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주와 봤던 눈이 커다란 고양이들이 야옹야옹하는 대신 ‘일어나, 일어나' 하고 귓가에서 속삭였다. 반쯤 감긴 눈으로 옆자리 남자를 보았다. 제영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곧게 앞만 바라보고 있다. 남의 시선에 익숙한 사람일 것이다. 얼굴이 보통잘난 얼굴이 아니다. 친구들이 깜짝 놀란 데에는 차뿐만이 아니라 이 남자의 잘난 외모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근데....... 늦은 시간에 아는 사람 만나도 보통은 그냥 지나칠 텐데,되게 친절하시네요."

취한 건지 말끝에 바보 같은 웃음이 따라붙었다. 그게 민망해 흠흠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친절이요? 그런 소리는 처음인데. 그냥 김대리님 얼굴 보니까 반가워서, 또 날씨도 추웠으니까요."

앞을 향하던 그의 시선이 제영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언뜻 혼혈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한 머리칼이었다. 족보를 타고 오르다 보면 조상 중에 외국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희고 깨끗한 이마를 연갈색 머리칼이 살짝 덮고 그 아래의 콧날은 날렵한 선을 그리고 있었고 입술은 도톰했으나 과하지 않았다.

'예쁘장한 얼굴이네.‘

제영은 코가 시려 와 남자의 코트를 좀 더 끌어 올렸다. 은은한 향이 코에 스몄다. 달콤하던 희주랑은 다른 냄새였다.

'이쪽이 좀 더 내 취향일지도.‘

제영의 몸이 좀 더 의자 아래로 내려갔다. 덩달아 제영의 시선도 내려가 이제는 그의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촉촉해 보여.'

'제영 씨.‘

'아. 아.‘

애인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힌다. 해진의 입술에서 눈을 텔 수가 없었다. 뺨이 달아오르는 것이 코트 덕에 추위가 가신 탓인지 아니면 몸이 달아오른 탓인지 헷갈렸다. 차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는 연갈색 머리칼이 어느덧 그녀의 긴 생머리에 엉겼다.

“아.”

혀가, 말랑거리는 혀가 하얀 이를 살짝 긁으며 밖으로 나와서는 윗입술을 부드럽게 애무하듯이 훑고 지나갔다. 새끼손톱만큼 벌어진 입술사이에 선명히 보이는 흰 이가 무언가를 베어물 듯 도드라졌다가 아랫입술만 가볍게 깨물고는 다시 얌전히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결에도 그게 못내 아쉬워 탄성이 터져 나올 뻔했다. 아랫배가 나른하고 저릿해졌다. 스스로가 위험한 기분임을 알고 있음에도 제어가 잘 되지 않았다. 꼭 이 순간이 꿈같았다. 몽롱한 기운이 새어 나와 전신을 휘감았다. 점점 더 희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꿈결 같은 목소리에 제영이 점점 잠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어느 쪽으로 가는 게더 가까워요?”

희주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짙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덮은 순간 제영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깼다. 그 꼴이 적잖이 우스웠는지 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잠에 취해 얼떨떨한 가운데서도 제영은 자신의 멍청함을 욕했다. 그러다 하반신에서 위화감이 느껴졌고 그것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뒷목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씨발, 섰잖아.'

"죄송합니다."

"뭘요.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어디로 갈까요? 우측? 좌측?”

제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근방에서 5분만 걸어 들어가면 제영의 집이 나온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멀지 않아요? 혹시 부담스럽거나 미안해서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이 근방입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됩니다.”

이 꼴이 들통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떠야 했다. 제영은 덮고 있던 코트를 조심스레 정리했다. 차가 천천히 방향을 틀어 도롯가에 멈췄다.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고 차 문을 여는데 철컥소리만 날뿐 열리지 않았다. 두세 번 해 봐도 열리지 않자 당황한 얼굴로 옆자리를 보았다. 허둥지둥하는 것이 뻔히 보임에도 해진은 아무런말도 행동도 없었다. 연한 눈동자가 어찐지 진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잠긴 것 같습니다."

“아아, 네. 그러네요."

능청스러운 대답 후에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이상한분위기였다.

"팀장님?”

"하하, 죄송해요. 고민 좀 하고 있었거든요.

이대로 김 대리님 납치할까, 그냥 보내 줄까 하고.“

"네?"

"농담이에요."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남자가 만들어 낸 낯선 긴장을 견디기 어려웠다. 제영이 코트를 던지듯이건네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잠깐만요.”

해진의 제지 탓에 필사의 탈출은 발을 반쯤밖으로 내민 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작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제영에게 건넸다.

"제 연락처예요. 혹시나 연락할 일 있으면 그쪽으로 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잘들어가십시오."

혹시나 다시 붙잡힐까 봐 쏜살같이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문을 닫고서도 차를 향해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하고는 종종걸음 쳤다. 거의 뛰다시피 걸은 탓에 찬 공기에도 불구하고 몸이 후끈하고 겨드랑이가 축축했다. 슬쩍 본 아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해져 있었다. 상황 파악 못 하고 오작동을 일으킨 놈이 원망스럽다가도 그간 제대로 풀어 주지도 못한 걸 생각하면 측은해지기도 했다. 결국에는 주인 잘못 만난탓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 둔 사람이 슬쩍 미워지기도 했다.

불을 켜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다가 해진이건네준 명함이 생각나 주머니를 뒤졌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명함을 받자마자 제대로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구겨 넣은 탓에 끝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HS전자 기획 2팀 팀장 이해진.

저번 만남에서 받은 터라 또 줄 필요는 없었다. 그날 자리에서 어딘가 멍해 보이더니 준 것도 잊은 건가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명함 뒷면에 펜으로 휘갈겨 쓴 열한 자리의 번호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웃거렸다.

"뭐야? 개인 번혼가?"

왜 이런 걸 알려 줬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자기 이해를 바라는 위치의 남자도 아니었다.

"이상한 새끼였어."

제영이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명함을 지갑 깊숙이 집어넣었다.

* * *

HS전자의 건물은 총 세 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A, B, C동으로 갈수록 핵심 부서가 위치해 있고 특히 C동의 탑 층에는 최고 경영자의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외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다고는 하지만 미로 같은 구조 탓에 몇 년 근무한 직원조차도 길을 잃는다고 하여 우스갯소리로 '던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경영진 일가의 비밀의 방을 숨겨 놓기 위한 고의 적 설계라고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미팅은 B동에서 이루어졌다. HS전자의 담당자를 따라 A동을 거쳐 B동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긴 하는데 어느방향으로 가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다들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HS전자와의 첫번째 미팅이었다. 구원 투수 노릇을 해 줄 거라고 여긴 상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이사도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모두 그런 속을 숨기고 가지고 온 자료를 펼쳐 보였다. 노트북을 화면에 연결하고 동혁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제영은 그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당연히 자신이 첫 미팅 PT 주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사는 동혁을 지목했다. 제영은 그 사실이 불만스러웠지만 어차피 의견 조율을 하는 첫미팅이고 그저 시범 타자일 뿐이라고 쓰린 속을 달랬다.

"그럼 일성의 제1공장이 어디죠? 부평이라고 하셨죠? 부평 공장 쪽의 생산 설비와 인력은 충분한건가요?”

당연히 동혁에게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가져온 자료를 넘겨보고 있던 제영은 옆자리 이사가 툭툭 치자 그제야 앞을 쳐다봤다. HS전자의 직원이 제영을 뺜히 바라보고 있었다.

"예, 예"

“그럼 Z메모리 생산은 어떤 설비로 진행하십니까? 아, 그리고 Z메모리 생산 설비 대수랑 인력은 어느 정도죠?”

"아, 그게."

제영이 급하게 자료를 뒤지며 동혁을 쳐다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돌릴 뿐이었다.

'저 개새끼가.......'

답을 못하는 제영 대신 이사가 질문에 답했다.

"흠, 흠. Z메모리 생산은 주로 최신 설비인 제노스사의 K160을 사용하고 있습니 다. 생산 설비 대수와 인력은 자료로 준비한 게 있을 겁니다. 박 대리, 그거 자료 챙겨 온 거 있지?"

제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있으면 있다고 할 것이지.'

한판 붙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팅을 끝낸 후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이사실로 호출당했다. 몇 십 분 동안이나 깨지고 나서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한판 붙을 의지도 체력도 다 바닥난 상태였다.

"김 대리님."

"뭐야."

사원인 이선주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지만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나갔다.

"이거, Z메모리 관련 자론데 이사님이 정리하고 퇴근하라고."

산더미 같은 서류 더미가 제영의 책상 위에 쌓였다. 머리가 아팠다. 거기다가 먼저 퇴근하겠다며 상큼하게 인사하고 나가는 동혁의 뒤통수를 볼 때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료를 들추며 2차 미팅 때만큼은 이 굴욕을 만회하겠다고 이를 갈았지만 며칠 뒤에 받은 연락에 그것 조차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유가 뭐랍니까?”

아침부터 급하게 회의가 소집되었다. 올해의 마지막을 이 프로젝트로 불태울 생각이었던 팀원들은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중 제영의 얼굴이 제일 어두웠다. 돈 나갈 일이 많은데 이렇게 돈 들어올 구멍이 막힐 기미를 보이자 기분이 착잡했다.

"그쪽으로부터 피드백이 왔는데,설비 쪽이 랑 생산 인력 숙련도 면에서 자기네 쪽 기준에 모자란다고."

"말도 안 됩니다. MH전자는 우리 쪽보다 설비도 노후화된 상태인데, 계약 참여에 아무 문제도 없지 않습니까?”

이사의 말을 끊고 동혁이 끼어들었다.

'저 버릇없는 새끼.‘

제영이 속으로 욕했지만 이사는 딱히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사는 사장에게 보고하러 들어갔고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에 괜찮은 건수를 놓쳐 열이 뻗친 사장의 고함 소리가 열린 문을 통해 온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우중충한 사무실 분위기에 다들 얼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제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전 내내 눈치 보고 있던 제영은 오후 늦게야 겨우 담배 피우러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옥상에는 먼저 온 배 차장이 난간에 기대 담배를 뻐끔대고 있었다.

"어, 자네 왔어?"

"네, 차장님."

옥상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 세게 부는 것 같았다. 손을 비비고 코트라도 입고 올 걸 후회하며 품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옆자리 차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요번 HS전자 계약 건 말인데요. 그....... 이상무님은 연락이....... 없답니까?”

"그 양반? 이사님 저러는 거 보면 별 소득이 없겠지. 그렇게 처먹어 놓고는 이럴 때 배신 때리냐. 그 개새끼."

제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영은 접대를 받는 건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브 앤 테이크만 확실하다면 나름의 윈-윈 전략이다. 하지만 이렇게 받아먹고도 모른 척하는 건 쓰레기 중에 쓰레기였다. 이제껏 자잘한 정보를 미끼삼아 술이며 돈이며 받아먹던 놈이 정작 중요할때 와서 입을 씻을 줄은 이사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제영에게 배 차장이 바짝 다가왔다.

"뭐, 뭡니까.”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탓에 그의 뱃가죽이 제영의 팔뚝을 쳤다. 그 물컹거림이 소름 끼쳐 제영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 팀장 기억나? 왜, 그 저번에 이 상무랑 같이 왔던, 그 뺀질뺀질하게 생겼던 팀장.”

“아, 예.“

"이거 그놈 짓인 것같아."

"네?.“

“난 사장실이랑 가까워서 이사님이 말하는 거 들었는데, 그 HS전자 이 상무가 위쪽에서 태클이 들어와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고.

우리 같은 업체랑 HS 위쪽이랑 뭐가 있어. 그리고 HS 모바일 총괄 담당 하는 상무 위쪽이 면 어디겠어? 그놈밖에 더 있어?"

"그, 그런가요?”

"그렇지, 뭐.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린놈이 얼굴딱 굳히고 입 다물고 있을 때부터 찜찜하더니.

도대체 그 자리에는 왜 나왔나 했더니 이렇게 엿 먹이려고 그 지랄을 했겠지. 돈도 많은 새끼가 우리 같은 서민들 돈 좀 벌어 보겠다는데 초를 쳐."

배 차장은 다 피운 담배를 난간에 비벼 끄고 먼저 들어가 보겠다며 제영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사라졌다. 제영은 그런 차장을 대충 배웅하고는 담배 하나를 다시 꺼내 들었다.

'제 연락처예요. 혹시나 연락할 일 있으면 그쪽으로 하세요.'

이건 분명 기회였다. 이번 비딩 참여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저번 미팅 실수를 만회할 뿐만 아니라 플러스 점수까지 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제영이 가슴팍 안주머니를 더듬어 명함 지갑을 꺼냈다. 끝만 조금 구겨졌을 뿐 새것처럼 반질반질한 명함을 뒤집었다. 날려 쓴 번호가 보였다. 고민은 잠시였다. 영업 경력 5년의 처세술을 발휘할 때라는 생각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영은 마음이 초조해져 운전대를 두드렸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일찍 길을 나서긴 했지만 퇴근 시간이라 도로의 차들이 거북이 걸음이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었지만 그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제영은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저녁약속이 괜찮으냐고 넌지시 의사를 물었다. 혹여나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순순히 만남을 약속받았다.

수월하게 나가나 싶던 차는 다시 신호에 걸려 옴짝달싹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영이 다시 시간을 확인하고는 욕을 내뱉었다.

"늦으면 안되는데."

괜찮은 곳을 물색해 뒀었다. 거기라면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음식도 나쁘지 않았다. 적당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이 얼큰하게 올랐을 무렵에 슬쩍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해진은 다른 곳이 어떠냐고 물었다. 식당 주소와 이름을 전해 듣고 전화가 끝나자마자 검색을 해 보았다. 어디 호텔에 근무했던 일본인 세프가 운영한다는 일식집이었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재벌 2세 아니랄까 봐 입도 보통 고급이 아니었다. 이사에게만 살짝 귀띔해 주고 나가는 자리라 업무용으로 올릴 수도 없는 비용이었다. 제영은 요 근래 자꾸만 돈 나갈 일만 생기는 것 같아 기분이 우울해졌다. 거기다가 혹시나 헛돈 들인 게 될까 봐 걱정되기도 하였다.

점수 딸 목적으로 용감하게 그에게 연락해 보겠다는 제영의 말에도 이사는 미적지근한 표정이었다. 그랬던 이사에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보고하기는 싫었다.

"여기 예약....... 예약, 해 뒀다고......“

헉헉대는 제영을 보고 카운터의 매니저는 난 감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서비스직 특유의 생글거리는 미소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김제영이요."

"아, 이해진 님하고 목란방에 두 분으로 예약하셨네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매니저는 이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제영은 숨을 고르고는 그를 따라가며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에서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조금 늦을 거라고 미리 연락하긴 했지만 이런 실례가 없었다. 재수 없게 근처에서 사고라도 났는지 꽉 막힌 도로 정체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에는 근처 골목에 주차하고 식당까지 전력 질주했다. 오랜만의 뜀박질로 숨이 달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문이 열리고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제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연신 사과하는 제영에게 해진은 웃으며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다행히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원체 잘웃던 남자라 속은 어떤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제영이 차가운 물로 목을 축였을 무렵에는 음식이 상 위에 차려지기 시작했다.

일식답게 접시 위에 작고 섬세하게 장식된음식들이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었지만 가격은 그렇지 않을 게 분명했다. 윤기가 흐르는 회가 나왔을 때는 제영이 제 지갑의 안위를 걱정할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배 속으로 넣어야 카드를 긁을 때 덜 억울할 것 같아 열심히 뒤적여 보긴 했지만 영 입맛이 없었다. 뜀박질 탓도 있었지만 눈앞의 해진 때문에 긴장한 탓이 더 컸다.

"맛없어요?"

"네?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제영은 놀고 있던 젓가락을 들어 절인 채소를 하나 먹고는 반쯤 남아 있던 술잔을 비웠다.

비워지자마자 해진이 다시 술잔을 채워 주었다.

가진 자답지 않게 손이 부지런했다.

"이 술 괜찮죠?"

그의 물음에 제영은 술맛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첫맛은 달콤한데 끝에는 쓴맛이 흑 올라왔다. 목구멍에서부터 혀뿌리까지 씁쓸한 맛이 계속 맴돌았다. 그걸 첫맛의 달콤함으로 지우려고 자꾸만 먹게 되는 묘한 술이었다.

"네,괜찮네요.”

말끝이 흐려지는 게 조금 취한 느낌도 들었다. 제영은 술기운에 달아오르는 뺨을 쓸어내리며 슬슬 애기를 꺼내야겠다고 마음먹는 중이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해진의 표정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제영은 그 표정이 야하게 느껴져 넋을 놓고 보다가고개를 저었다.

'정신 좀 차리자.‘

그런 속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손이 술잔을 향했다. 룸을 예약했다는 걸 알았을 때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밀실해서 해진과 단둘만이 있게 되자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빈 술잔이 그에 의해서 다시 채 워졌다. 제영이 두 손으로 받쳐 든 하안 술잔에 투명한 액체가 졸졸 흘러내렸다.

"나, 술 따르게 하려고 부른 거 아니죠?”

"아, 죄송합니다. 그게......“

"농담이에요. 근데,갑자기 연락 와서 조금 놀라긴 했어요. 그날은 집에 잘 들어갔어요? 많이 취해서 좀 걱정했거든요."

제영은 다정스레 속삭이는 해진의 말에 귀가 간지러워졌다. 꼭 자신이 희주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눈빛도 목소리도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적당히 풀어진 분위기, 본론을 꺼내기 위한 적기라고 느껴졌다. 제영은 술잔 대신 차가운 물을 한잔 들이켰다. 앞자리의 남자는 물컹한 계란찜을 장난감처럼 쿡쿡 찌르는 중이었다.

“팀장님. 제가 오늘 연락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이번 메모리 양산 비딩 관련해서......“

곱게 손질된 자그마한 새우가 젓가락 끝에 꽂힌 채로, 그의 젓가락 놀음이 멈췄다.

"업무 이야기인가요?”

"이번 비딩에서 저희 업체가 자격 요건 불충분으로 제외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쪽 Z메모리 생산 설비나 인력에 아무 문제가 없고.“

"일 이야기네요."

제영 쪽으로 바짝 다가와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있던 해진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커다란 어깨가 벽에 닿아 죽 미끄러져 내렸다.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갑작스럽게 그늘진 얼굴에 피곤한 기가 보였다.

“티, 팀장님."

"몰라요."

투정 부리는 어린애같이 간지러운 말투였다.

"네?"

"일 얘기는 몰라요. 형이 억지로 앉혀 둔 자리고.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앉아서 다른 사람들 일하는 거 구경하는 거밖에 없어요. 김 대리님이 말하는 계약 건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목에 반쯤 걸려 있던 넥타이를 풀어서 탁자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도 목이 답답한지 주변을 주물렀다. 눈에 띄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제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감이 들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저희 쪽에 중요한 계약이다 보니 이렇게 실례를.“

"중요? 중요한 일이요? 이거 김 대리님한테도 중요해요?"

벽에 흘러내릴 듯 기대 있던 그가 다시 제영쪽으로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그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져 제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회사 매출하고 직격으로 연관된 계약 건이고."

"회사 말고, 김 대리님한테는요?"

"저한테도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 여기 계약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만 된다면."

제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된다면?”

날름 나온 혀가 그의 입술을 한 번 훑고는 다시 사라졌다. 제영은 목이 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어떤 식으로든?”

제영의 대답에 해진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회사 차원에서 협의가 된 상태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확답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그의 눈이 제영을 재촉했다.

"예. 팀장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 말에 해진이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좋아요. 한번 알아볼게요.”

"감사합니다!”

제영이 고개를 깊숙이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취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일을 하다 보면 타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자존심 상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간절함과 진심이 통했다는 생각에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기쁘기만 했다. 다시 비딩에 참여해 계약을 따내고 그 성과로 인센티브에 승진에, 자신의 앞에 꽃길만 펼쳐진 기분이 들었다. 웃음이 나오려 하는 걸 참으며 아무래도 많이 취한 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어느 덧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꽤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집처럼 보였지만 제영은 버틸 기운이 없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해진의 기색을 살폈다. 얼굴은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밑으로 내려가는 게 토라진 계집애처럼 울적해보이기도 했다. 제영의 몸이 순간 휘청했다.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제영은 스스로 뺨을 툭툭 쳤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만 자리를 파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예의상 해진의 의사를 물었다. 다른 자리로 옮기겠느냐고 묻는 제영의 질문에 그는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저었다. 계산하겠다는 제영을 말리고 그가 카드를 꺼냈다. 그 본새나 말투가 단호해 제영은 쭈뼛거리며 그 옆을 지켰다.

"다음에 사 주세요."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받은 그가 몸을 틀어제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커다란 덩치가 자신을 향해 몸을 숙이자 그 위압감에 제영이 몸을 움츠렸다. 바로 몸을 세우긴 했지만 그가 이미 눈치챈 후였다.

"미안,놀랐어요?"

"아닙니다."

놀리는 투는 아니었으나 놀림받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못 데려다줘요. 들를 데가있거든요."

그 말에 놀란 제영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다니 자신이 해진에게 들을 말이 아니었다. 호출한 대리 기사가 도착해 해진의 차가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제영은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그가 난색을 표할 때는 일을 다 그르친 줄 알았다. 하지만 확답은 아닐지라도 긍정적인 답은 들었다. 80%는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제영은 자신의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찬 바람에 뺨이 얼얼할 법도 한데 두 뺨에 난로라도 켠 것처럼 뜨끈뜨끈하기만 했다. 발걸음이 자꾸만 흐트러졌고 속도 메슥거렸다. 결국에는 골목구석에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 사이 드 미러를 붙들고 게워 내고 말았다.

'어떤 식으로든?'

꼭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말꼬리를 올리던 해진의 말투가 떠올랐다. 제영은 더러운 입가를 훔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제영은 배를 벅벅 긁었다. 참으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손이 이미 배에 가 있었다. 제영은 간혹 받지 않는 술을 마실 때면 이렇게 배에 두드러기가 나곤 했다. 항상 마시던 술만 먹어서 근래에는 이런 일이 드물었는데 해진과 마셨던 일본주가 문제였다. 옷 위가 아니라 손을 집어넣고 벅벅 긁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상황만 더악화될 뿐이고 대낮의 사무실에서 미친놈으로 몰릴 게 분명하니 온갖 인내심을 발휘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알레르기 약 하나를 더 먹기 위해물을 뜨러 정수기 쪽으로 향했다. 머그컵을 들고 가는 길에 슬쩍 이사실 분위기를 살폈다. 딱히 별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술자리가 있고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바로 이사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이야기를 듣던 이사는 크게 기대한 눈치는 아닌 듯 손을 저으며 나가 보라고 말했다.

제영의 고개가 절로 바닥을 향했다. 술기운에 희희낙락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알아보겠다는 약속 이외에는 딱히 건진 게 없었다. 그 약속조차도 무시해 버리면 제영으로선 별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 개인 번호로 재촉 아닌 재촉을 해 볼 수는 있겠지만 말이 다.

뜨거운 물 조금과 차가운 물을 섞어 미지근한 온도로 만들고 냅다 약과 함께 삼키면서 근질근질한 배를 다시 긁었다.

"두드러기예요? 술 마셨어요?"

"켁, 컥.컥.아,씨발. 너 뭐야, 갑자기."

동혁의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목구멍이 물을 삼키려다 말고 수축했는지 제대로 사례들렸다. 제영이 컥컥거리면서 연신 기침을 했다.

중간중간 그 불청객을 노려보며 욕을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제영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기 그지없었다. 어디가나 키 큰 새끼들이 즐비했다. 제대로 된 사이즈를 만들기도 전에 닫혀 버린 자신의 성장판이 원망스러워졌다.

“어디서 마셨어요?”

"거래처.”

"어디 거래처요? 미팅 약속 없었잖아요."

"너는 모르는 데야. 그리고 네가 내 미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알아."

"제가 모르는 데가 어디 있어요? 설마 무슨사고 치고 다니는 거 아니죠?”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참지 못한 제영이 한 소리를 하려는 순간 방에서 튀어나온 이사가 제영을 불렀다. 눈이 휘둥그레져 바라보는 게 보통 일은 아닌 듯 싶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바로 팀이 소집되었다. 이사 바로 옆자리에선 제영은 아닌 척하려고 했지만 이미 코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그렇게 돼서 우리 팀원들이 다시 천재일우와 같은 기회를 얻게 됐다는 겁니다.”

말이 끝나기 직전 이사가 제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김 대리 덕분에 말입니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서도 제영의 어깨는 으쓱거렸다. 이사는 사장이 돌아오자마자 보고하러갔고 거기서 자신의 이름을 언급할 게 분명했다. 벌써부터 다음 연봉 협상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혼자 설친 거냐는 배 차장의 은근한 핀잔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더 높은 라인을 잡았으니 말이다. 동혁은 힐끗힐끗 자신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같이 쳐다봐 주자 이내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손 위에서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제영이 속으로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사에게 듣기로는 이해진 팀장으로부터 직접 연락이 있었다고 했다. 그가 말하길 김제영 대리의 간곡한 부탁으로 재검토를 하여 다시 비딩 참여 기회를 드리는 거라고 했다. 그 애기가 있은 후에 실무팀과 통화했고 다시 미팅을 잡기로 단단히 확답까지 받았다.

'김제영 대리의 간곡한 부탁으로.‘

제영은 그 문장에 무릎을 탁 쳤다. 해진이 그렇게까지 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눈앞에 있다면 포옹이라도 진하게 해 주고 싶었다. 울렁거리던 눈이 계집애 같다고 한 건 전부 취소였다. 일하는 게 남자 중에 남자였다. 속으로 숨기던 콧노래가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터져 나갔다. 제영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목을 큼큼거렸다.

그리고 아직 감사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바로 핸드폰을 들어 그의 개인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받을 거라는 생각에 인사말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는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버렸다.

'업무 중인가.'

일단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오후 늦게 다시 건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고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해진과 약속 한번 잡으라는 이사의 성화에 사무실로도 연락해 봤으나 부재중이라는 소리만 들었다. 이사는 불안한 눈초리였지만 실무팀과의 진행에는 문제가 없었으니 강하게 푸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와 연락이 된 건 난데없는 새벽녘이었다.

조용하던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잠결에 일어나서 화면을 확인하기 직전까지는 당연히 알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반짝이는 액정 화면 위에는 제영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이의 이름 석자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김제영 씨?

번호는 맞았으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모르는 것이었다. 용건은 별것 없었다. 해진을 데리러오라는 것. 새벽 2시경에 들어줄 부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절하기도 전에 전화는 뚝 끊겼고 곧 이어 위치가 문자로 도착했다. 거길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거리가 꽤 먼 곳이었다.

"저 기사님, 멀었나요?"

야간 할증까지 더해져 멈출 줄을 모르고 올라가는 택시비에 제영이 궁상스럽게 물었다.

"곧 도착합니다. 저기 사거리 보이시죠? 저기서 우회전하면 금방이에요. 어디 좋은 데라도 가나 봐?”

능글맞게 입가를 씰룩거리는 게 불쾌했지만 제영은 대충 웃어넘겼다. 좋은 데는커녕 술 취한 거래처 상사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늦은 시간 문자를 받고 무시해 버릴까 고민했지만 신세진 것도 있는 데다가 상대가 보통 갑이 아니기에 제영은 눈곱을 떼어 내고 옷을 챙겨 입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회식이 잡혀 회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퇴근한 터라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택시비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한숨이 푹 나왔다. 회사 비용으로 영수증 처리를 해 볼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잠시 했었다.

기사의 말대로 목적지는 금방이었다. 도착한 곳은 딱히 유흥가 느낌이 나는 곳도 아니었다.

새벽녘까지 재벌 2세가 놀기에는 생뚱맞은 곳 이었다. 근처에 와서 연락하라기에 핸드폰을 꺼내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새벽이라 사람이 없고 조용해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나 전화를 받기도 전에 소리는 뚝 끊겼다. 뭔가 싶어서 화면을 쳐다보는데 옆자리에 시커먼 그림자가 제영을 덮쳤다. 제영이 화들짝놀라 몸을 물렸다.

"김제영 씨?”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그 이해진 팀장님 번호로 연락하신."

"네, 맞아요. 따라오세요. 저기 있어요."

그러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친구인가.'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하는 남자의 등을 보며 따라 걸었다. 이 남자도 동혁 못지않은 키였다. 팀장도 이 남자도 동혁도 도대체 뭘 먹고 저렇게 컸는지 제영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그 해진의 친구 아니랄까 봐 어두운데도 반반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끼리끼리 노는 건가. 그럼 이 남자도 어디 아들인가?‘

HS급의 회사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그중에 저만한 아들이나 손자가 있다는 곳이 어디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중에 남자는 계속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방이 점점 어두침침해졌다. 제영은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팀장님, 멀리 있으신가 봐요?”

나름대로 살갑게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답은커녕 질문이 날아왔다.

"만난 지 얼마나 됐어요?"

"두 달 정도 됐습니다."

"얼마 안됐네요."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제영은 다 도착했나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디 식당이나 술집이라고 할 만한 곳도 없었다. 엉거주춤 남자의 곁에 서서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어느 한곳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끝에 시커먼인영이 대충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뒤따라나오는 말도 가관이었다.

"가져가세요."

"예?"

무슨 물건 챙기라는 듯한 말투였다. 당황한 제영의 반문을 무시하고 그는 왔던 길로 혼자가 버렸다. '저기요’ 하는 제영의 부름도 무시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설마 저게 정말로 이해진 팀장인가 싶어 슬슬 다가가 확인하니 희고 새초롬한 얼굴이 그 이해진이 맞았다.

"팀장님."

술에 거나하게 취한 건지‘으으'거릴 뿐 미동도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는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었다. 이 덩치를 옮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씨발, 차도 안 가져왔는데."

제영의 목소리가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셔츠 안쪽 등을 따라 땀이 주룩 흘러 내렸다.

제영은 침대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참아 내고는 조심조심 그를 눕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셔츠 자락을 펄럭이며 열을 식혔다. 저번 저녁 약속 때도 그렇고 그와 엮이면 한겨울에 난데없이 땀을 뺀다. 물론 저번일은 딱히 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 친구라는 작자가 사라진 후에 주택 담벼락에 기댄 채 주저앉은 이의 상태를 살폈다. 완전히 맛이 간 상태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순 없었다. 업으려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에는 팔 한쪽을 제게 걸친 채로 질질 끌고 데려왔다. 5분 정도 그렇게 걸었을까, 작은 골목 샛길에서 구세주처럼 낡은 모텔 간판이 반짝였다. 귀한 집 도련님을 너무 누추한 곳으로 모시는 건 아닌가 하는 망설임도 잠시, 뒷목이 뻐근해 오고 허리가 욱신거 려 왔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끌려오는 내내 시체처럼 너부러져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던 해진은 여기가 족히 수백 명은 떡을 친 역사 깊은 침대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담배가 고팠다. 딱히 실내 금연인 곳이 아닌 듯 유리 재떨이 하나가 침대 머리맡 서랍장에 놓여 있었다. 이곳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듯이 한쪽 귀퉁이의 이가 나가 있었고 측면에는 반쯤은 지워진 '물방울 다방'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어지간히 싸구려네.'

제영은 이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잠든 이의 얼굴을 살폈다. 너무나도 천박해 보이는 오렌지빛 조명 아래에서도 그의 얼굴이 청순하게 빛났다. 이 모텔, 아니 차라리 여인숙이라고 불러야 할 초라한 장소에서조차도 '나 어디 귀한 집 아들이오'

하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제영은 입에 문 담배를 이로 씹었다. 어찐지 취한 여자에게 나쁜 장난을 치려고 모텔에 데려온 파렴치범이 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얼굴이었다.

제영은 찬찬히 해진의 얼굴을 감상했다. 이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노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례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도 모든게 해진의 몸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의 이마를 간질이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조심스레 넘겨 보았다. 손가락에 엉겨오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러다 제영의 손길이 순간 우뚝 멈췄다.

오른쪽 관자놀이 윗부분이 거뭇한 게 무언가 얼룩진 것처럼 보였다. 분명 예전 기억에 그의 이마는 희고 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자신이 조심성 없이 그를 다뤘나 하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처를 입힐 만한 순간은 없었다.

'멍인가.‘

근처에는 살짝 긁힌 듯한 생채기가 있었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건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나이에 치고받는 이는 드물었고 거기다 이 남자는 재벌 2세였다.

돈 있는 놈을 잘못 건드리면 성치 못한다는 것쯤은 사회인의 상식이었다. 다시 보니 입술도 약간 긁히고 터져 있었다. 거기까지는 건드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상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도련님도 어디서 이렇게 두들겨 맞고 다니는 속사정이 있는 건가 하는 어쭙잖은 동정심이 물씬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당연히 감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몰랐다.

제영은 깜짝 놀라 그를 더듬던 손을 퍼뜩 치웠다. 그 순간 무언가가 해진의 얼굴 맡에 툭 하고 떨어졌다. 제영이 이제껏 물고 있던 담배였다.

"깨셨네요. 새벽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나갔데니. 아니, 그, 친구분이 연락을 하셔서."

느지막이 몸을 일으킨 해진이 뺨을 거칠게 문지른 뒤에 주변을 살폈다. 머리가 아픈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사방을 둘러보던 눈이 다시 제영을 향했다.

"물 좀 줄래요?"

제영은 반쯤 명령조인 그의 말투가 은근히 언짢았으나 얼른 카운터에서 받은 생수병을 그에게 건넸다. 곧 비워진 물병이 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그가 조심성 없이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은 탓이었다.

"구질구질한 곳이네요."

"죄송합니다. 여기가 제일 가까워서 딱히 다른곳도 안 보이고."

해진이 툭 던진 말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 그의 탓이었다. 친구를 시켜 거절도 못 하는 자신을 불러내 그 진상을 부린 것이 해진이었으니까 말이다.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제영의 그런 속내가 말끝에 드러났고 말을 마치자마자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혼내는 거예요?”

일어났을 때 찡그러졌던 그의 얼굴은 완연히 풀어져 있어 조금 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건 아닙니다."

좁고 더러운 모텔 안에 해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영의 생각에는 이제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누추한 곳 이지만 일단 얼어 죽지 않을 만한 곳에 뒀고 상대는 이미 눈을 뜬 상태이니 자신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고 여겼다.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제영이 옷을 대충 툭툭 털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제영을 향했다. 가겠다고 말하기 전 제영은 문득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그의 눈꺼풀이 껌벅하고 닫혔다가 다시 떠졌다.

"뭐가요? 아, 일 이야긴가요?"

그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이마를 감싸쥐고 몸을 웅크리는 모습에 제영이 깜짝 놀라침대맡으로 다가갔다. 그의 이마에 났던 상처가 떠올라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저 숙취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이내 원래 표정을 되찾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침대에 걸터앉아 그에게 생수병을 내밀었다. 속좀 진정시키라는 제영의 호의였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몸을 좀 더 웅크렸을 뿐이었다.

그 탓에 머리가 제영의 허벅지에 닿았다. 몸을 물릴 타이밍을 잡지 못해 그 뭉근한 감촉이 자신의 다리에 닿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앞머리가 흐트러져 또 다시 이마의 멍이 눈에 띄었다.

"이마 왜 이런 거예요?"

제영의 주둥아리가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묻지 않았을 테지만 이 평범치 않은 상대와 상황이 제영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제영은 찌라시를 보내 주는 친구에게 한심하다고 혀를 차면서도 꼭 챙겨 보았다. 재벌 2세의 추문 가능성이 제영의 저열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해진이 손을 들어 이마를 더듬었다. 관자놀이 부분에 멍을 더듬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익숙하다는 듯이 딱히 감흥이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두운 가운데서도 확연히 낯빛이 죽었다.

"맞았어요. 아버지한테."

제영은 이 나이에 부모에게 맞는 사람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적어도 제영은 아니었고 주변에도 없었다. 하지만 재벌가라면 또 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디서 듣기로는 돈 많은 집은 골프채로 사람을 때린다고도 했다. 이게 그 유명한 4번 아이언의 자국인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이어지자 제영은 진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해진이 불쑥 제영에게 중얼거렸다.

"일은 잘됐어요?”

"예?"

"계약건이요.”

"네, 네. 연락도 받았고 실무팀과도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어디 제대로 된 곳에서 식사 대접을 하면서 감사 인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현실은 언제부터 영업을 시작한지도 모를 낡은 모텔 침대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보답은?"

제영은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노골적인 요구는 이 상무와 같은 추잡한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청순한 껍데기의 이런언사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원래있는 것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제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식사 약속을 잡으려고 했더니, 연락이 안 되셔서요."

장소는 아니더라도 몸이라도 제대로 일으킨후에 얘기를 나눴으면 했지만 해진은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몸을 물리려는 제영을 말리듯 무릎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의 손이 닿은 무릎이 뜨거웠다. 어디 갈고리에 잡아당겨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식사?”

"네. 식사하고 술도 대접해 드리면서."

그게 제영이 알고 있는 코스의 정석이었다.

이 남자에게는 좀 더 고급스러운 것을 대접해야 겠지만 말이다.

“원하시면 다른 것도.”

"다른 것?"

순간 해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제영은 해진에게 2차까지 대접할 필요가 있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이런 남자는 술집에서 여자를 찾을 게 아니라 유명한 연예인도 술집 여자처럼 다룰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 하지만 꼭 그런 여자만 찾는 이들도 있었다. 해진 역시 그런 부류 중에 하나일지도 몰랐다. 이런 얼굴을 하고는 노는 것은 상무 버금갈지도 모른다. 고개를 살짝 내리니 해진의 입술이 오물조물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거기에 정신이 팔렸다가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키스해 달라고 하면 해 줄 거예요?”

아니, 듣기에는 제대로 들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 것이다.

“키스요?"

'키스 페티시라도 있는 남자였나.'

"잘, 잘하는 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제영이 말을 더듬었다. 당황스러웠다. 이제껏 타인의 2차 취향까지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자길 포주 취급이라도 하는 건가 하고 불쾌해질 지경이었지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을 뿐 이었다. 그게 제영의 최선이었다.

"찾아볼 필요가 있어? 당신이랑 내가 하는 건데."

하지만 때때로 그 최선의 노력이 무용지물인경우도 있었다.

"네? 하하, 취하셨죠? 저도 남자고 팀장님도 남자잖아요. 누가 남자끼리 그런 짓을 합니까."

"전 남자하고만 키스해요."

뒷덜미에서 땀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해진이 손바닥으로 제영의 허벅지를 꾹누르며 자신의 팔을 지지대 삼아 몸을 느릿느릿하게 일으켰다. 무게가 실린 허벅지가 아팠다.

제영은 그가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와의 거리가 무척이나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몸이 바짝움츠러들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겁먹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농담과 진담의 사이에서 뭐가 진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해진의 얼굴에는 예의 그 습관 같은 웃음조차 없었다. 제영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제영의 손을 꽉 잡아 왔다.

축축해진 제영의 손이 뜨거운 온도에 후끈거렸다. 놀란 제영이 손을 잡아 빼냈다. 그 행동이 거칠어 '탁' 하고 해진의 손이 내쳐지는 소리가 순간적으로 큰 소음처럼 느껴졌다.

제영에게 내쳐진 손이 허공에 어색하게 떠있었다. 해진은 자신의 손을 보고는 다시 제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꺼풀이 열은 동공을 숨겼다가 다시 드러냈다. 제영은 흰 얼굴에 도드라진 그의 멍을 보고 부은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의 하얀 이가 피를 터뜨릴 것처럼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영은 제 입술이 아님에도 통증이 느껴져 입술을 떨었다.

제영이 몸을 움찔댔다.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인 것이었다. 분명 남자로부터 무언가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간에. 하지만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이마를 찌푸리는 것이 전부였다. 표정 하나 없이 지긋이 자신을 응시하던 눈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고는 침대 위로 엎어져 버렸다.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처럼 보였다.

"가셔도 돼요."

몸을 모로 돌린 채로 보이는 거라고는 그의 뒤통수와 목선, 구겨진 셔츠 자락뿐이었지만 제영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해진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그걸 깨닫자마자 뱃속깊숙한 곳에서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됐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별개로 그의 괴상한 언행은 제영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제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진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게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가보겠습니다."

이미 잠들었는지 어쨌는지 제영의 인사에도 답은 없었다. 모텔 밖으로 나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열은 어둠이 골목을 채웠다. 제영은 여전히 사람 하나보이지 않는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몸을 떨었다. 차게 식은 몸이 찬 새벽 공기에 더욱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제영이 떠난 후에도 해진은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떠난 이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이 손으로 침대 위를 더듬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생각지도 않게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잡힌 것은 끝이 씹힌 담배 한 개비였다. 해진이 그걸 보다가 제 입으로 가져갔다. 불도 붙이지 않은 채로, 남겨진 잇자국을 제 자국으로 덧씌우면서 사라져 버린 이를 뒤쫓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동자가 불투명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 * *

제영은 슬그머니 나오려는 하품을 꾸욱 참았다. 지각한 터에 하품이나 해 대기는 눈치가 보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서 허둥지둥 출근준비를 마쳤을 때는 이미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늦게 나온 제영을 비웃기라도 하듯 출근길러시아워가 발목을 잡았다. 결국 회사 정문을 거쳐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제대로 늦은 시간이었다.

슬금슬금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데 이사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당연히 호출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에 그는 그저 들어가라고 손만 휘젓고 말았다. 배 차장이 그걸 힐끗 보고는 뇌까렸다.

“어휴, 어디 백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 노골적이 비꼼이 불쾌했지만 제영은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사무실 자리에서도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해진이 했던 말과 행동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키보드를 두들겨 대긴 해도 머리에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제영은 재킷 속주머니를 더듬으며 남은 담배를 확인했다. 신문을 손에 쥔배 차장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자마자 옥상으로 향했다.

제영의 회사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적은 편이라 주변 전경이 나쁘지 않았다. 그 탁 트인 전경을 보며 가지는 담배 타임은 이 구질구질한 회사 생활을 이어 가게 해 주는 원동력이었다.

끼익거리며 녹슨 철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불청객이 있었다. 동혁이 제영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상대와 말을 섞고 싶진 않아서 제영은 거리를 확보한 후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뱉을 무렵에는 동혁의 그림자가 제영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지각하고 이렇게 땡땡이치러 나와도 돼요?"

"뭐가 땡땡이야. 그냥 좀 쉬러 나온 거지."

한 번만 더 시비조로 말을 걸면 버럭 화를 낼생각이었지만 동혁은 다른 말 없이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제영도 곧 상대를 향한 투지를 사그라뜨리고 담배 연기만 뿜었다. 깔끔하게 머리를 비우려고 해도 자꾸만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져 갔다. 해진은 평범치 않은 존재였다. 특히 그 평범치 않음이 그의 성벽에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꾸만 의심스러워졌다.

"도대체 그 팀장이랑은 어떻게 다리를 놓은 겁니까?”

동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뭐?"

"갑자기 엎어졌던 게 도로 원상 복구 되다니 뭔가 이상하잖아요. 뭘 하신 거예요?”

무슨 취조라도 하는 듯한 말투가 가소로웠다.

"그게 영업 사원의 능력이라는 거야. 좀 본받아라, 그렇게 아니꼬워하지만 말고."

제영이 입을 삐죽이며 의기양양하게 답하는것을 보고 동혁은 뭐 씹은 얼굴이 되었다. 제영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랜만의 흑이 제대로 들어갔다. 제영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다시 해진 생각을 했다.

'게이인가?'

'설마, 날 좋아하나?'

제영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해진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남자한테는 커녕, 사실 여자에게도 그렇게 인기 있는 편이 아니라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평가였다. 아무리생각해도 해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영은 자신의 턱을 쓸었다. 바빠서 면도를 생략했더니 까슬한 촉감이 손바닥을 긁었다.

제영은 옆에 선 동혁을 보았다. 분명 동혁도 남자고 자신도 남자였다. 저런 놈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은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남자가 남자의 손을 잡는 것은 불쾌하고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새벽녘해진이 쥐었던 손이 저릿했다. 아직까지 그 감촉이 남아 있을 리는 없으므로 이 저릿함은 착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끝에 그의 온기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너 게이 본 적 있냐?"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거기다 상대를 제대로 고른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다 피운 담배 끝을 옥상 난간에 비벼 끄고 있던 이가 멈칫하고 제영을 보았다.

“무슨 질문이 그래요?"

"없으면 됐어.”

"갑자기 그런 애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뭐? 그런 거 물어볼 수도 있지 왜 과민 반응이야?"

제영은 괜한 이야깃거리만 던져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상대의 얼굴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제영이 의문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어디 아는 사람 중에 진짜 게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어차피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영이 신경 쓰고 싶은 게이는 하나뿐이었다. 정확히는 게이일지도 모르는 사람이긴 했지만 말이다.

"야, 너는 결혼 늦게 해라. 돈 들어갈 때도 많고 준비할 것도 더럽게 많더라."

그다지 영양가 없는 대화 주제를 바꾸고자 결혼 이야기를 구시렁댔지만 효과는 없었다. 우중충한 얼굴로 변한 동혁은 처음 왔을 때처럼 고개만 까닥하고는 말도 없이 나가 버렸다. 제영은 그런 동혁을 욕하려다 말았다.

'속 시끄러운데, 괜히 저 새끼 일로 열 받을 필요까지는 없지.'

제영은 해진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이 난다는 말처럼 자꾸만 그에 대한것이 떠올랐다.

주변까지 제영의 사정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사는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하다고 자꾸만 제영에게 자리를 주선할 것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번 일 이후 또 연락 두절이었다.

해진과의 관계가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 이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다가 동혁까지 이상했다. 뭐냐 따져 물어도 고개를 홱 돌려 다시 내 갈 길 간다는 제스처만 취할 뿐이었다. 같은 배를 탄 팀원이면서도 격려는 못 해 줄망정 저런 태도란 것이 마땅찮았다. 저 높은 콧대를 자근자근 밟아 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동아줄은 영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저번의 찜찜한 만남 이후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아, 희주나 보고 싶다.'

이런 사정을 해결해 주진 못하더라도 말랑말랑한 가슴에 고개를 묻고 안정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침대 위에서 그녀와 뒹굴며 잡생각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분명 만났을 때는 기분이 좋아 보이던 그녀가 식장 투어가 끝났을 무렵에는 냉랭한 기운을 뿜어 대고 있었다.

'비싼 가격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나?'

'좀 더 싼 식사는 없냐고 했던 게 좀생이처럼 보였나?’

'도대체 뭐지?’

그리고 그대로 안녕이었다. 나중에야 그녀로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며 미안하다는 문자가 도착했지만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주변인과의 관계가 영 좋지 않았다.

제영은 다들 자길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구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이 불만은 다른 불만을 타고 올라 자기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한 해진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한 캔, 두 캔 맥주를 마시다가 결국에는 더러운 게이 새끼 운운하며 남자를 욕하는 주정으로 단출한 술상을 마무리 짓곤 했다. 하지만 취한 채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눈을 감으면 모텔 침대에서 처량하게 누워 있던 그의 뒷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어느새 다음 미팅이 잡혔고 다들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닦달하던 이사마저도 이 공장, 저 공장 돌아다니며 현황점검을 다니는 제영을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다. 일단은 눈앞의 일을 해치우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내 디데이가 되었다. 또다시 미로 같은 건물 안을 안내받으며 따라갔다. 제영은 마중 나온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주변을 살폈다. 어딘가에 그 남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털끝하나 보이지 않았다.

HS 쪽도, 우리 쪽도 이전보다 인원이 두 배가 되었다. 인원에 맞춰 미팅 룸도 넓은 곳으로 바뀌었다. 제영은 가져온 자료를 슬쩍 들췄다가 앞을 보았다. 프레젠터는 동혁이었다. 이번만큼은 제영이 하고 싶었지만 이사는 동혁을 지목했다. 괜히 바꿔서 혼동을 주지 말자는 이유에서였다. 제영으로선 수긍할 수 없었지만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배 차장이 맞장구를 쳤다. 제영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미팅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자신의 덕인데 왠지 다들 그 사실은 잊어버린 듯해 보여 억울했다.

질의응답 시간과 HS 쪽의 짧은 피드백을 끝으로 미팅은 종료되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잔뜩긴장한 상태였던 제영은 미팅이 일단락되자마자 화장실을 이유로 자리를 떴다. 목이 타 자꾸만 물을 마시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길을 잃어버렸다.

"아씨, 도대체 어디야."

어디 물어볼 사람을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흰 벽만 줄줄 이어져 있고 사람은커녕,개미 새끼 한 마리 뵈지 않았다. 미팅 룸이 있던 층의 화장실은 수리 중이었다. 수리를 하고 있던 관리실 직원이 알려 준 대로 다른 화장실을 찾았고 시원하게 볼일 보고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근데 다시 길을 찾아가 보니 영 생뚱맞은 곳 이었다.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는 사이 결국에는 제대로 길을 잃고 말았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핸드폰으로 연락하려는 찰나 보안상의 이유로 건물에 들어오기 전에 핸드폰을 다 제출한 사실이 떠올랐다. 욕이 절로 터져 나왔다.

"건물 디자인을 이딴 식으로 하냐? 미친 새끼아냐?”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나 이걸 오케이한 HS전자 사장이나 정신 감정부터 받아 봐야 할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저 멀리정방향에 있는 사무실 문의 불투명한 창 너머로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다.'

얼핏 봤지만 사람이 분명했다. 냅다 뛰어들어 문을 벌컥 열었다. 사무실 안은 불 하나 켜지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그곳은 빽빽한 장 사이 사이에 서류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자료창고였다. 무슨 기밀 보관 장소에 잘못 들어온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지만 일단은 길을 찾는게 먼저였다.

안쪽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맡아지는 탁한 담배 냄새는 제영을 의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분명 건물 내 금연인데.'

"저, 실례합니다. 길을 잃었는데요."

어디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도 제영을 알아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어두워서 잘보이지 않았다.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뱃불을 들고 있는 것만 보였다. 그 인영이 바로 앞의 블라인드를 올렸고 햇볕이 새어 들어왔다.

그제야 상대의 얼굴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김 대리님?”

얼굴이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목소리로 상대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 남자였다. 어둠속에서 짙게 그림자 져 보이지 않던 얼굴이 이제는 불이라도 환하게 밝힌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아아, 그 계약 건? 그 일때문에 왔어요?"

제영은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던 해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잔상처럼 눈에 어른거렸다. 붉은 뺨과 터진 입가. 저번의 상처는 없어질 때가 한참이나 지났으니 저 울긋불긋한 얼룩들은 새로 생긴 것이 분명했다.

"네. 이번에 미팅이 잡혀서요. 팀장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

제영의 질문에 해진이 손에 든 담배를 흔들었다.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기분이 좇같을 때는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한 해진이 웃었다. 웃음이 벌겋게 부은 그의 한쪽 얼굴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모른 체하기에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얼굴이었다. 결국 제영이 그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도 모르죠."

말끝에 기운이 없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상처를 가리려는 것처럼 얼굴 한쪽을 덮었다. 횐손과 붉게 부은 나머지 부분이 적나라하게 대비되었다. 눈두덩도 붉었고 눈동자도 충혈되어 있었지만 제영은 차마 울었냐고 묻지 못했다. 그가그 얼굴로 웃어 버릴 것 같았다.

'누구한테 맞은 거지? 또 아빠한테 맞았나?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언감생심 그에게 손을 올릴 직원은 없을 것이다. 제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장성한 아들을 회사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저렇게 때릴 수 있나. 저런 얼굴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거기다가 재벌 2세가 저런 꼴이라는 것은 가십에 불을 댕기는 짓이었다. 해진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웃음이 헤픈 그라도 이런 순간만큼은 웃기 힘들 터였다.

제영도 해진도 말이 없었다. 제영은 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그에게 길을 알려 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나갈 타이밍도 잡지 못했다. 슬쩍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조용한 가운데 밀실과도 같은 공간에 담배 연기만 차오르고 있었다. 톡, 톡 하고 무심하게 타 버린 담배가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영은 이제 다른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붉게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이 거의 해진의 손가락에 다다르고 있었다. 분명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게 분명한데도 그는 무덤덤했다. 해진은 넋이 나가 있었다. 초조해하던 제영이 결국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버렸다. 이런 사무실 바닥에 버려도 되는가 하고 고민하기도 했지만 들고 있다가는 제영의 손도 델 것 같아서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담배를 뺏긴 해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었어요?"

늦었나 싶었던 제영이 급히 해진의 손을 당겨 확인해 보았다. 제영은 눈에는 괜찮은 듯하지만 열기에 살짝 덴 것일 수도 있었다.

"괜찮으세요?”

다시 한번 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해진은 제영의 손을 맞잡을 뿐이었다. 순간 그동안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그의 행동들이 물밀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영이 손을 내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팀장님?”

커다란 몸이 빛을 등지고 제영 쪽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 억겁의 세월 같았다.

천천히 슬로 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가 움직이는 실루엣이 또렷하게 보였다.

'당한다.'

머릿속에서는 해진이 했던 말이 빙빙 돌았다.

'전 남자하고만 키스해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밀쳐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특유의 향이 콧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제영의 입술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제영이 예상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해진은 그저 가만히 제영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을 뿐이었다. 제영보다 훨씬 더 건장한 남자임에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제영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어깨에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가 울고 있었다. 제영은 숨 쉬는 것마저도 멈추고 그 작은 흐느낌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품속에서 그 커다란 몸이 마치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보이지도 않는 그의 눈물을 느끼며 제영은 온몸이 푸르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쓰라림과 안타까움이 이 남자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주저하던 제영의 손이 해진의 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 순간 해진이 작게 몸을 떨었지만 제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제영의 어깨가 결려올 즈음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등에 닿아있던 제영의 손이 미끄러져 그의 허리를 살짝스치고는 떨어졌다. 제영과 눈이 마주친 그는 또 웃었다. 하지만 퉁퉁 부은 눈이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길을 잃었어요?”

그가 제영의 위로는 가당치도 않다는 것처럼 그렇게 물어왔다. 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팅 룸 어디예요? 데려다줄게요.“

손으로 대충 눈물을 훔친 해진이 앞장섰다.

저런 꼴의 남자를 누가 볼까 싶었지만 다행히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제영은 흰 복도를 걷고 있는 해진의 뒤통수를 보면서 따라 걸었다. 처음 나왔던 비상계단은 금방이었다.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가던 해진이 먼저 문을 열고는 제영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비상등이 꺼져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밖에서 들어온 빛이 문에 반쯤 몸을 걸친 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돼요.“

"감사합니다.”

제영이 문밖으로 발을 내밀려고 할 때였다.

해진이 제영의 팔을 붙들었다.

"오늘 퇴근 언제해요?"

"네?"

"늦어요?”

"그렇게 늦지는 않을 것 같은데, 미팅 끝나고 회사 들어가서 평소보다는 좀......“

"그럼 나랑 술 한잔 할래요? 난 늦어도 상관없어요."

만약 다른 사람이 저런 멘트를 날렸다면 제영은 분명 비웃어 줬을 것이다. 진부한 멘트였다. 더욱이 재벌 2세의 작업 멘트라기에는 너무촌스러웠다. 하지만 저런 얼굴로 또다시 반쯤울상인 표정으로 묻는 걸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해진이 했던 말이나 행동이 비상경보를 울려 댔지만 제영은 지금 상황의 그를 거절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그럼, 연락해요. 데리러 갈게요."

그렇게 말한 해진이 제영을 놔주었다.

난 제영은 그가 알려 준 대로 곧장 오른쪽으로 향했다. 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늦은 탓도 있지만 뒤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HS 쪽 담당자와 이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팅 룸에 걸 린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제영이 본래의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의 동혁은 자료 화면을 켜 놓은 채로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제영은 앞에 놓인 인쇄물에 눈길을 줬지만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해진에게 잡혔던 팔이 욱신거렸다. 평소보다 가슴이 더 세게 뛰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때 동혁이 제영의 어깨를 툭 쳤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제영을 동혁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수라도 했어요?"

"뭐?"

"어깨요. 다 젖었어요."

그가 노트북을 닫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제영은 그 말에 자신의 어깨를 더듬었다. 해진의 눈물 탓에 어깨가 젖어 있었다. 제영이 손으로 어깨를 가렸지만 축축한 감촉에 마음만 심란해질뿐이었다.

제영은 손에 찬 땀을 셔츠에 대충 닦아 내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우는 남자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줄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더욱이 그 울던 남자의 집에 술을 마시러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목이 탔지만 뭔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그에게 물 한잔달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회사에 복귀한 후의 회의는 금방 끝이 났다.

준비하느라 수고했으니 일단은 쉬고 추후에 경과를 확인한 후 다시금 이야기해 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 야근에 시달리던 이들이 이제야 제시간에 집에 들어간다고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평소의 제영이라면 희주나 친구를 불러 한잔하자고 했을 테지만 엉겁결에 잡힌 선약이 제영을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

'연락하지 말까.'

제영은 해진이 자신에게 술 한잔 청한 의도가 뭔지 곰곰이 고민해 보았다. 해진이 만약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면 이 술 약속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당연히 거절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꺼림칙한 대전제를 세우기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해진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 거기다가 정녕 그가 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라면 얼굴만 보여 줘도 주변에서 줄을 설 게 분명했다. 사실 돈만 보여 줘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말이다.

'그냥 너무 힘든데,우연잖게 걸린 놈이 나일뿐인가.‘

제영은 핸드폰 끝으로 책상을 톡톡 치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승낙’이었다. 어차피 저번 계약 건으로 신세 진 일도 있었다. 제영의 생각에 대충 고맙다고 인사만 하고 끝내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혹여나 정말 만에 하나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한다고 해도 정중하게 거절하면 될 일이었다. 해진이 딱히 질척거릴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덮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경우에는 자신이 여자도 아니고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 아무 문제없었다. 저번 모텔에서는 쫀 게 아니라 당황해서 그런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민이 제영에게는 허무맹랑한 것들이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게이는 본적도 없었고 시간이 지나 보니 저번 모텔에서 들었던 것은 해진의 취중 헛소리가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맞았다.

그렇다면 해진의 의도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대한 하소연 정도일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재벌가에서 부자 간에 갈등이 있었고 딱히 그걸 들어 줄 만한 상대가 없는 와중에 자신이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다. 그걸로 제영의 모든 고민은 해결이었다.

하지만 그런 결론에 대한 상쾌함을 만끽하는 도중에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연락을 받자마자 친절하게도 제영을 데리러온 해진의 외제 차가 향한 곳은 그의 집이었다.

"집에서요?"

적당히 한적한 고급 바에서 한잔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이 얼굴로 어떻게 나가요.”

그러는 그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집은 높은 담장과 나무들에 둘러싸인 주택이 즐비한 곳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다. 집 내부는 넓고 깔끔했다. 차분한 톤의 벽지가 안정적인 무드를 조성했다.

'넓긴 한데,완전히 궁전 같은 곳은 아니네.’

집에 대한 제영의 감상은 그 정도였다. 물론 제영의 초라한 원룸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곳 이었다. 하지만 그간 영화에서 본 재벌 집보다는 못해 김이 샜다. 사실 그렇게 생각해야 난데 없이 해진의 집에 방문하게 된 자신을 조금이나 마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쫄지 말자.‘

또 손에 땀이 찼다. 제영은 평소에도 그렇게 땀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호기롭게 승낙했으면서도 이렇게 긴장해 버린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해진은 제영을 거실에 두고 주방으로 갔다.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는 계속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짙푸른 색의 가죽 소파 위에 불편하게 앉아 있던 제영이 결국 일어나 창 쪽으로 다가갔다. 전면 창을 덮고 있던 커튼을 살짝 치워 보니 밖이 보였다. 그냥 창문인 줄 알았는데 테라스였다. 테라스 아래로 정원이 보였지만 밤이라 어두컴컴해서 어떻게 생겼는지 식별할 수는 없었다. 온갖 값비싼 정원수로 꾸며져 있겠지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미안, 늦었죠.”

제영이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해진 이 술병과 안줏거리를 주섬주섬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와인, 양주, 청주까지 다양한 종류가 성의 없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제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제대로 골로 보내려는 건지, 제대로 골로 가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술을 왕창 들이켜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안주는 과일 몇 종류와 데운 레토르트 식품이 전부였다. 벌써부터 다음 날의 숙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영이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어색한 술자리 분위기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두 번째 만남의 일식집에서도 대화는 뚝뚝 끊기기 일쑤였고 그때도 긴장한 제영은 술만 퍼부었다. 자신과 그는 술자리 궁합이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해진이 술잔으로 가져온 것은 투명한 크리스털 잔이었는데 그건 와인 잔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양주잔이 라기에는 크기가 컸다. 제영은 이미 그 잔으로 와인 한 잔과 양주 반 잔을 비운 상태였다. 기분이 알딸딸했다. 멈춰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잔에 손이 갔다. 딱히 이 분위기를 타개할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와 자신이 술자리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진은 제영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인용소파에 따로 앉아 자신의 술잔을 홀짝거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턱을 괴고는 지긋이 제영을 바라보았다.

‘아무 애기나 해 볼까.’

'일 이야기를 해 볼까. 아니,딱히 좋아하지 않을 거 같고.'

'왜 맞았냐고 물어볼까. 아니다. 그건 먼저 말꺼내기 전에는 실례 같고.'

제영이 슬쩍 해진의 기색을 살피고자 고개를 드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제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민망해져 또 손이 잔으로 향했다. 차가운 양주가 목을 넘자마자 배 속이 뜨거워졌다. 제영의 잔이 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진이 이번에는 청주를 제영의 술잔에 채웠다. 졸졸 흐르는 투명한 액체에서 묘하게 쌉싸름한 향이 퍼졌다. 제영의 것을 채운 술병이 이번에는 해진의 잔으로 향했다. 그의 잔 역시 비워진 상태였다.

"아, 제가."

해진이 괜찮다고 도로 제영을 앉혔다. 제영은 그가 따라 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쓴맛이 가득한데 끝은 달았다. 저번 일식집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했다.

"보고 싶어서 데리고 왔는데, 딱히 할 말은 없네. 제영 씨도 그래요?”

앗,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해진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제영은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어느새 그와 제영이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근데, 사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정말로하고 싶은 말을 해 버리면 제영 씨가 싫어할 것같고. 제영 씨라고 불러도 되죠? 여기서 '김 대리, 김 대리' 하기에는 이상하고 우리가 일 때문에 지금 같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해진이 갑작스레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제영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제영이 고개를 돌리며 해진의 장난을 말렸다.

"하지 마세요."

"뭘요? 제영 씨라고 부르는 거?”

"아니요. 이거."

또다시 다가오는 손을 가볍게 툭 쳐 냈다. 순간 휘청한 제영의 몸이 뒤로 넘어가 등에 소파가 닿았다. 제영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스스로도 과하게 마셨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걸어 집에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취한 것같아서.”

어린애 같은 장난질을 멈춘 그는 재밌는 구경거리처럼 제영을 보고 있었다. 그게 기분이 나빠 제영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다음에 그가 내뱉은 말은 제영을 더 인상 쓰게 만들었다.

"키스하고 싶어요."

해진이 제영의 손을 잡았다.

"제영 씨랑 하고 싶어요."

술에 뜨거워진 뺨이 차게 식었다. 오기 전에 깔끔해졌던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요. 저는 그런 거 안 돼요."

단호한 말투와 정중한 거절은 술 탓에 혀가 꼬여 어린애 투정처럼 되어 버렸다. 낭패였다.

"그런 게 뭔데요? 제영 씨가 안 된다는 그런게."

"남자랑, 그런 거요."

정확한 단어를 내뱉기 껄끄러웠다. 제영이 마른 혀를 다시 침으로 축이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해진을 보았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고는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남자인 제영이 보기에도 해진은 잘난 얼굴이었고 거기다가 오늘은 저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다.

"내가 이렇게 부탁해도 안돼?"

"그런 걸 부탁한다고 들어줄 수는 없어요."

"내가 애걸하고 빌면?”

"그것도 안 돼요. 손 놔주세요. 가야 돼요. 갈게요."

제영이 몸을 일으켰다. 도망갈 셈이었다. 하지만 부주의한 동작 탓에 제영의 무릎이 앞에 놓인 테이블과 부딪쳤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병에 담겨 있던 와인이 쏟아져 카펫에 스며들었다. 횐 카펫이 얼룩져 지저분하게 변했다. 제영이 당황해 눈치를 살폈지만 해진은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반쯤 서 있는 제영의 손을 잡아당겨 도로 앉히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 안 돼요?”

"절대로 안됩니다."

제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를 칭찬했다.

이번에는 말도 꼬이지 않았고 말투는 매서웠다.

생각 외로 끈질긴 그를 물리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제 신경 쓰이는 것은 더러워진 카펫뿐이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요. 거래? 그래, 좋다.

거래라고 생각해요."

“거래요?”

"네. 거래요. 이건 어때요? 이번에 진행하는 계약 중요한 거 라고 했죠?"

해진은 제영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거, 계약 따게 해 줄게요. 어때요? 내가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찾아 줬죠? 그냥 수긍해 버리면 돼요. 그럼,되는 거예요.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계약 따 내는 거에다가 내가 이렇게 당신한테 애걸하고 매달리고 있다는것도 참고해줘요. 그럼 받아들이는 데 충분할거예요."

술이 문제였다. 분명 제정신이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진즉에 끝내 버렸을 것이다.

불쾌한 수작질에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의 말도 안 되는 궤변이 타당한 것처럼 들렸다.

그것은 단순히 거래를 미끼 삼은 덕택이 아니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우위를 점한 남자가 자신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그것은 묘하게 제영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저속한 감정이었지만 제영은 이미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 좀 위로해 줘요.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해진의 흰 얼굴은 자신의 괴로움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온 입술이 겹쳐지고 매끈한 턱이 제영의 턱을 스쳤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제영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키스는 살짝 쪼는 정도일 뿐이라 제영은 닿은 건지조차 헷갈렸다.

"한 번 더 해도 돼요?"

그제야 해 버린 건가 여겼다. 머리가 몽롱했다. 제영은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다음 번의 것은 좀 달랐다. 하지만 여전히 솜털 같은 키스였다. 문제라고는 해진의 혀가 제영의 것을 살짝 스친 것뿐이었다. 그 감촉이 소름 끼쳤음에도 제영은 이미 단단히 붙들려 밀어내지 못했다.

분명 여기에 오기 전에만 해도 그가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면 주먹을 날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제영이 착각한 것이 있었다.

해진은 조금의 폭력도 휘두르지 않았다. 단지 내장이 살살 녹아 버릴 것 같은 달콤함 뿐이었다. 제영은 그걸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른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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