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엄마가 아닌 할머니 (11/14)

#1. 엄마가 아닌 할머니

아이를 낳고 두 사람이 스물일곱과 스물둘이 되었으나, 곤과 이을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둘은 여전히 서로밖에 몰랐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모을은 아직 어리지만 제 부모를 찰떡같이 알아보고 포르르 날아오는 착한 참새였다. 그리고 모을이야말로 둘 사이의 가장 큰 변화이자 기적이었다.

“어이―, 짹짹이 트레이너 왔는가.”

“안녕하세요, 사장님.”

“삡!”

“오야―, 우리 짹짹 군도 안녕.”

다 허물어가던 헬스장이 곤으로 인해 재기에 성공하자 사장인 육득근은 그가 자기 아이를 데리고 와도 되겠냐는 말에 ‘좀 그런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선 허락해주었다. 당장 급한 건 근방에 다시 없을 체격의 곤을 잡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그런데, 자식이라고 데리고 온 게 아기 참새가 아니겠는가? 육득근은 삡삡거리며 예의 바르게 부리를 바닥에 콕 찍어 인사하는 모을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한 살을 앞둔 곤의 아이는 영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선 참새와 인간으로의 변환이 빨랐다. 유년기에는 저도 모르게 짐승과 인간으로 갑자기 변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육득근의 앞에서 모을은 그런 갑작스러운 변신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거의 매번 제 아빠의 어깨 위, 혹은 머리 위에 앉아 오는 아기 참새를 제 손주라도 되는 양 뿌듯하게 바라보던 득근은 숫제 강아지라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손짓했다.

“모을아―, 추추추추―! 삼촌한테 와보자. 옳지! 어구구, 우리 모을이 오늘도 가슴털 정리 깔끔하게 하고 왔네?”

“삐삡. 삐!”

“어웅, 그랬어? 아빠 옷 갈아입고 올 때까지 삼촌이랑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자? 아이고 이뻐! 곤아, 옷 갈아입고 와라. 어제 받은 회원님 미리 와서 운동하고 계신다.”

“네, 모을이, 잘 보고 있어 주세요.”

“오야―.”

머리칼과 눈동자가 시커먼 곤이 아기 참새의 머리를 검지로 살살 쓰다듬고서 탈의실로 가고 난 후, 득근은 참새에게 말했다.

“느이 아빠 저리 크니까 든든―하지?”

“삐―입!”

“그렇다구? 하기야, 저 체격에 나쁜 일 안 하고 트레이너 일만 군소리 없이 딱! 그런 놈 드물지. 심지어 몸 함부로 막 굴리지도 않고 네 엄마밖에 모르잖아. 짹짹이네 아빠가 참 수더분하니 사람 좋아. 저놈 우리 센터에 오고부터 일도 다 잘 풀리고.”

“삐이.”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모을이도 매일같이 보고, 응? 아이구, 이뻐죽겠네, 이놈의 참새. 느이 부모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회색 가슴털이 뽀실뽀실 일어난 아기 참새가 말을 알아듣고 싶은지 작은 머리통을 갸웃거리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며 득근은 곤이 맡고 있는 회원이 벌써 20명을 달성했다는 것을 상기했다.

처음에 곤이 센터에 왔을 때 그는 사실 ‘저놈도 창놈이겠거니’ 보자마자 어림짐작했다. 아무래도 헬스장이라는 장소가 선입견이 안 생길 수 없는 장소이다 보니. 왕년에 보디빌더로 이름깨나 날렸던 득근의 헬스장이 망하기 시작한 것도 어떻게 회원들 좀 꼬셔서 원나잇이나 해보려던 빤질빤질한 창놈 트레이너들 때문이었기에 그는 곤이 언제 본색을 드러내려나, 생각했다.

우려와는 달리 새로 등록한 회원인 곤은 한 달 내내 운동만 했다. 네가 두 달째엔 본색을 드러내겠지, 세 달째엔, 네 달째엔……. 그렇게 곤이 본색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렸는데 잠잠하니 그저 몸만 갈수록 좋아져서 넌지시 연습생처럼 트레이너 일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그에 떠듬떠듬 그러겠다고 말하던 곤을 득근은 제 아들처럼 아끼게 되었다.

말을 더듬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했더니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발현이 늦어 말을 배운 지가 얼마 안 되었을 뿐. 득근은 매일 말하기 연습을 하고 있으니 양해 부탁한다는 곤에게 운동은 혀로 하는 게 아니고 몸과 성실함으로 하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곤은 금세 센터의 복덩이가 되었다.

“권나래 회원님, 안녕하세요. 미리 와서, 운동하고 계셨다면서요?”

“네! 오늘은 하체만 하는 거 맞죠……?”

“어…… 우, 우선은요.”

“우선이요……?”

“네. 계획은, 상체까지예요.”

“……예.”

득근은 여느 헬창 새끼들이 입는, 유난스럽게 겨드랑이가 훅 파여 옆에서 보면 젖꼭지가 훤히 보이는 후레놈 복장 대신 꼬박꼬박 헬스장에 비치된 기본 운동복을 입고서 피티를 진행하는 곤의 모습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처음 곤이 정식으로 트레이너가 되었을 때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한번 자보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었다. 그걸 곤은 아주 냉담하게 쳐냈다.

거, 건강해지고 싶으신 분만 받아요. 그리고 저는 결혼도 했어요.

듣는 사람 민망할 정도로 딱딱하게 말했지만, 워낙 열심히 하다 보니 곤에게는 운동에 진심인 회원들만 남게 되었다. 득근으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이전에 있던 창놈 새끼들은 어디 껄떡거릴 데 없나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기에 그거 수습하느라 힘들었는데 곤은 알아서 탁탁 잘도 쳐내고 회원 유치도 잘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어악, 어어억, 서, 선생님, 잠시만요, 헉!”

“할 수 있습니다! 나래 회원님 가, 가다가 충분히 들 수 있습니다!”

“흐랴아아―!!”

여자 회원에게 가다가 좋으니 무게 더 칠 수 있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응원하는 곤을 보던 득근은 데스크에서 총총거리며 저 나름대로 체력 단련을 하는 아기 참새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겼다. 까만 초콜릿 같은 눈이 얼른 저를 향했다.

“모을, 아빠랑 회원님한테 가서 응원 좀 해줄 수 있지?”

“삡!”

“오케이, 출발!”

“삐삐―!”

가느다란 발을 뒤로 탁탁 차며 준비 운동을 마친 모을이 가볍게 비상해 제 아빠에게로 나는 모습을 득근은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삡삐!”

“회원님, 모을이가 잘했대요. 어, 엄청 멋있었다고 그러는데요?”

“모을아, 고마워―, 네 아빠 때문에 죽을 뻔했지만 모을이가 응원해주니까 누나 진짜 헬창이 되어볼게.”

“삐―!”

“꼭 헬창이 돼서 너네 아빠한테 복수할게, 모을아……!”

“아이고, 귀여운 것들.”

득근은 땀으로 절어 동공이 텅 빈 여자 회원의 어깨에 앉아 살갑게 머리통을 뺨에 비비는 참새를 먼발치에서 보며 생각했다. 어째 곤 주변에는 회원들까지 발랄하고 정 가는 사람들만 모이는지 모르겠다고.

* * *

그룹 둘, 개인 넷까지 해서 총 여섯 번의 피티 수업을 마친 곤은 데스크에 만든 작은 둥지에서 잠든 아들을 조심조심 들어 올렸다. 갑자기 몸이 들어 올려지자 꼬물거리며 날개를 쭉 펴 기지개를 켠 모을은 제 아빠가 저를 들어 올린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는 마음이 놓였는지 다시 눈을 감았다.

“사장님, 저 들어가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짹짹이 트레이너. 모을이도 조심히 가고.”

“삐이…….”

졸릴 텐데도 대답은 꼬박꼬박하는 아들을 곤은 챙겨온 장갑에 넣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꼬마 중 꼬마 모을은 저나 이을이 일하러 갈 때 꼭 같이 가곤 했다. 인간의 형상으로는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집에 있는 시간이 아니면 모을은 항상 참새 형상으로 있었다. 혹 나를 닮아 인간으로의 발현이 힘든 걸까? 처음에 곤은 걱정이 되어 모을을 병원에 데리고 가기까지 했으나, 의사는 발달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며 오히려 또래보다 인지 능력과 반사신경이 아주 뛰어나다고 칭찬을 해주어 안심할 수 있었다.

아직 유치원에 다닐 나이는 아니지만 부모의 직장에 따라다니며 저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배우는 게 두뇌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까. 곤은 의사가 아주 잘하고 있다며 엄지를 치켜올렸던 걸 떠올리고선 장갑 안에서 곤히 잠든 모을을 장갑째 토닥여주었다.

“이을아!”

“아, 실장님, 남편이랑 애기 와서요. 저 먼저 가볼게요!”

“어어, 그래. 푹 쉬고 다음 주에 봐.”

“네!”

바르게 쓰고 있던 경비모를 벗어 흔들며 뛰어오는 이을을 한 팔로 안아준 곤은 언제 깼는지 장갑 입구로 머리를 빼놓고 지지배배 우는 모을을 이을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삡, 삐빕!”

“서모을, 아빠 따라 잘 다녀왔어? 우리 모을이한테서 겨울 냄새 난다. 배고프지? 얼른 집 가서 저녁 먹자. 곤이 너는 뭐 먹었어?”

“닭가슴살 조금. 이, 이을이 오늘 뭐 먹을래? 내가 해줄게.”

“음, 나는 피자 먹고 싶어. 피자 시켜 먹을까?”

“그래, 그러자.”

회색 가슴털을 부풀리며 기분 좋은 걸 여실히 티 내는 아들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준 곤은 자주 시켜 먹는 피자집에 주문을 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을 나누며 집에 도착한 둘은 손부터 씻었다. 아이를 위한 교육은 몸소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제일 좋다는 게 두 부부의 지론이었다. 손을 씻으면서도 서로의 손을 쥐고서 장난을 치던 둘은 모을이 부리로 정수리를 콕, 콕 찍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을의 말랑말랑한 팔뚝을 만지작거리던 곤은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이을에게서 떨어졌다.

혼인 신고를 하고, 둘이 반지도 나눠 끼우고서 같이 살 때는 제가 이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다.

“아부―, 어아!”

“응, 엄마 여기 있어, 모을아.”

“히이. 어아, 으이!”

“아구, 엄마도 알고 모을이도 할 줄 알아? 모을이 똑똑하네.”

아들한테도 질투를 느낀다고 하면 이을이가 실망하겠지? 곤은 오롯이 아이만을 향해 미소 짓는 이을의 예쁜 옆얼굴을 보며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모을이 태어난 후로 매일 책을 또박또박 읽으며 말더듬증도 많이 고친 곤은 아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걸 스스로 용납하기 힘들었다. 가끔은 모을 없이 둘이서만, 예전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 데이트하고 싶은데 그걸 이을에게 말하자니 너무 쪼잔해 보였다. 이을은 부모가 둘 다 일을 하는 바람에 모을이 사랑이 부족하다고 여길까 봐 걱정하는 착한 부모였기에 더더욱.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곤 역시 모을에게 뭐든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당연히 이을과 모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따뜻함을 느꼈고, 둘을 평생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을과 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간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따끈하고 평화로운 가족끼리의 정도 좋지만, 모을이 없이 이을을 예전처럼 안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하면 사그라드는 걸까?

“사랑해, 우리 모을이.”

“우웅―, 어마.”

피자는 한 조각밖에 먹지 못하고 배고프다 보채는 모을에게 젖을 물린 이을을 뒤에서 끌어안고서 곤은 작게 한숨 쉬었다. 이렇게 모을이를 안고 있는 너를 안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만…….

족히 30분간 젖을 물고 있던 모을은 의미 없는 잼잼을 하다 잠이 들고 나서야 물고 있던 젖꼭지를 놓아줬다. 아이의 입 속에서 한참 잠겨있던 이을의 유두가 짙은 분홍빛으로 퉁퉁 부어있는 것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곤은 이을의 말에 얼른 상을 정리했다.

“막 왔을 때 먹어야 맛있는데…… 내일 데워 먹어야겠다.”

“아, 내, 내가 정리할게. 들어가서 쉬어, 이을아.”

“정리 대충 하고 들어와, 알겠지?”

“응!”

바짝 말라 각질이 일어난 입술이 가볍게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대충 치우고 들어오랬지만 다 치우고 들어가야지. 곤은 재빠르게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낳기 전엔 잔병치레 같은 건 하나도 없던 이을이 부쩍 약해진 걸 육안으로 확인할 때마다 가슴 한편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듯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육아는 함께하는 거라고, 집안일은 되도록 네가 다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기에 곤은 그 말을 착실히 따랐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은 후 이을의 건강이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게 보일 때마다 자신이 자꾸 무력하게 느껴졌다.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다 해주고 싶었지만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만은 제가 할 수 없잖은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곤은 이을이 경비 일을 그만뒀으면 했다. 이을이 나가서 일하는 걸 좋아하기에 그냥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는 식으로 지나가듯 말하긴 했지만, 실은 정말정말 간절히 이을이 일을 그만뒀으면 했다. 아파트 거주민들과 마주칠 때마다 살갑게 인사하는 것도 질투 났고, 심지어는 경비실장이라는 아저씨가 이을을 챙기는 것도 마뜩잖았다. 스스로 이게 굉장히 치졸한 마음인 걸 알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생각하는 대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곤은 매일같이 누군가 이을을 사랑하게 될까 불안해하고, 이을을 스쳐 가는 모든 사람들을 질투했다. 서이을은 내 건데 왜 집에 가둬놓을 수 없는 걸까?

부엌을 깔끔하게 정리하고서 방에 들어가자 아기 침대에 잠든 아이의 가슴팍을 토닥이며 작게 자장가를 부르는 이을이 보였다. 제가 강아지로밖에 존재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들어온 자장가. 원래 나한테만 불러줬었는데…….

곤은 하다하다 제 자식에게까지 질투를 하는 스스로에게 놀라는 동시에 실망하며 이을의 곁으로 가 앉았다. 틈만 나면 아이를 안아주는 착한 엄마인 이을에게서 아기들에게서 나는 부드럽고 고소한 향이 났다. 체취까지 포근하니 누가 서이을을 싫어할까. 품에 이을을 욱여넣듯 안고서도 좀처럼 싱숭생숭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곤이 한숨에 땅 꺼지겠다.”

“으응?”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기분 안 좋아 보여서. 아기 자니까 잠깐 나가서 얘기하자.”

저 나름대로 이제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숨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을에겐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곤은 이을의 새끼손가락을 꼭 쥐고서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이을은 허벅지를 탁탁 쳤다. 거기에 앉으라는 소리인 걸 바로 알아듣고 곤은 조신하게 이을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 앉아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이을은 60킬로그램 조금 넘고 저는 90킬로그램이 넘으니까……. 오래 앉아있다간 이을의 허벅지가 터질지도 몰랐다.

“관장님이랑 싸운 거야? 아니면 회원들이랑 안 좋은 일 있었어?”

“그, 그런 건 아니고…….”

“응, 그런 게 아니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냥…… 그냥.”

뭐 때문에 그러냐는 말에는 차마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결혼한 건 우리 둘인데 부부관계도 하나도 안 하고, 나는 밤마다 너무 외로워. 네가 모을이만 바라보는 게 샘나고 질투 나. 나도 신경 써주면 안 돼? 언제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면서……. 이런 속내를 다 이야기했다간 여전히 덜 컸다고 이을이 혀를 찰지도 몰랐다.

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를 따라 이을이 눈을 곱게 접어 웃는 것을 보고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나겠지’ 생각했는데.

“아아, 모을이한테 나 뺏긴 것 같아서 그냥 좀 속상했어? 둘이서만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뭐, 뭐야! 다 알면서 왜 물어봐!”

이을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제 등허리를 토닥이는 게 아닌가.

서운함을 느낀 지점을 간결하게 정리해 말한 이을은 제 가슴팍에 조그만 머리통을 콕 박고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다음에 한 말이 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닿았다.

“나도…… 나도 너랑 둘이서만 있고 싶어. 딱 하루만이라도 모을이를 맡아줄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이을아…….”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손주 맡아주셨을 텐데. 미안해, 곤.”

훌쩍이는 소리도 안 났는데 이을이 얼굴을 떼고 난 자리엔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부끄럽다며 아기방으로 쏜살같이 들어간 이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곤은 연하인 티를 적당히 좀 내자고 스스로를 타박했다.

연애 기간이랄 것도 없이 아이부터 가진 데에 자신보다도 이을이 속상했을 거라고, 곤은 뒤늦게 후회했다. 이을의 성격이 무던하고 워낙에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티를 안 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각하고 느끼는 건 비슷할 텐데 왜 그런 걸 못 읽어낼까?

곤은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혼자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는 이을을 달래주기 전, 한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이에게 거실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곤?

“애 좀 봐줘. 나, 나랑 이을이랑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이을이가 아기 보는 거 많이 힘들어서, 방금 전에 울었는데…….”

-…….

“연락할 데가…… 아줌마밖에 없어.”

곤에게 세상에서 가장 연락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고민도 않고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부모였다. 그나마 어머니인 여자는 저와 이을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았기에 좀 나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정을 줄 수 있을 만한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마주쳐도 인사를 안 한 게 거의 2년이 다 되어갔다. 곤도 여자에게 전화를 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을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기분을 환기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들인 모을을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맡길 곳이 필요했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바로 저를 낳아준 여자였다.

-……언제? 이을 씨랑 너랑 둘이 날이라도 맞춘 다음에 전화를 줘. 그러면 나도 일정을 맞춰볼 테니까.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던 여자는 둘이서 먼저 일정을 맞춘 후 다시 연락을 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끊었다. 곤은 약간 어안이 벙벙했으나 어쨌든 아이를 맡길 수 있을 만한 곳이 생겨 다행이었다.

“이을아―, 나 들어갈게.”

“응, 들어와 곤.”

여자와의 통화를 마친 후 곤은 이을이 있는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아기와 이을에게서 나는 포근한 냄새로 가득한 공간은 아늑했다. 무드등 하나만 켜놓아 잘 보이지 않던 이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확인하니 눈이 약간 부어있었다. 곤은 잠든 아이를 부드럽게 토닥이는 이을에게 무언가 해줄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그를 안아주기로 했다.

아이가 깨면 안 되니 무릎걸음으로 이을의 옆으로 간 곤은 이을을 답삭 안아주었다. 자기가 작은 게 아니라 네가 큰 거라고 이을은 말했지만, 어찌 되었든 곤이 보기에 이을은 너무 작았다. 작아서 더 소중한 내 남편.

조금의 반항과 머뭇거림도 없이 제 품에 안착한 이을은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이내 아이를 토닥이던 손을 제 허리로 옮겨 가볍게 끌어당겨 안았다. 그게 전혀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 않음에도 곤은 몸이 달아 속으로 참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아까 울어서 미안…… 요즘 모을이가 자꾸 잠투정 부리고 그래서 힘들었나 봐. 근데 오늘은 또 잘 자네, 우리 아들 효자야.”

“모, 모을이는 효자지만, 그치만 애기잖아. 이을이 네가 힘들지, 당연히. 그래서 그런데…….”

“응?”

“우리 둘이 놀러 갈까? 조용한 데 둘이서만 놀러 가자. 아, 아까 아줌마한테 전화했어. 나 낳아준 여자.”

“아, 진짜?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어?”

“애 봐줄 테니까 나랑 이을이 날짜 정해서 알려달라고. 하루 이틀은 괜찮대. 모을이는 얌전하니까 어쩌면 일주일까지도 괜찮을지 몰라.”

일주일은커녕 며칠간 봐주겠다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는데 곤은 아무렇게나 말을 지어 했다.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을을 설득하려면 우선 크게 구라를 치는 게 효율적이라는 걸 곤은 20년 넘게 이을을 봐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곤이 너는 언제 시간 돼? 우리 둘이 호캉스 가자.”

“호캉스?”

“호텔에서 며칠 놀고먹고 하는 거.”

“좋아! 어, 언제가 좋아, 이을아?”

“나는 아무 때나 괜찮아.”

다행히 이을은 여자에게 아이를 맡기고 며칠간 둘만의 시간을 갖는 데에 긍정적인 듯했다. 곤은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이을과 섹스할 생각을 하는 자신이 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마음껏 소리 내며 하는 섹스가 그리웠기에 그런 생각을 도통 멈출 수가 없었다.

놀러 갈 생각에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한 곤은 스물일곱 살이나 됐으면서 여전히 말랑말랑 귀엽기 짝이 없는 이을의 볼을 조몰락댔다. 호텔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조만간 여자에게 모을을 인사시키며 좀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이을이 제 귓불을 쪽 빨고 떨어졌다. 노곤한 기운에 어버버하며 귀를 만졌지만 이을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뺨을 감싸고 입술도 쪽, 빨고 떨어졌다. 가볍지만 농밀하고 확실한 스킨십이었다.

“하루 종일 그 짓만 해도 행복할 것 같아.”

“아, 나, 나도, 아, 콘돔…… 코, 콘돔 시켜야겠다.”

“많이 시켜, 곤.”

“응, 응……!”

남들은 이을에게 섹시한 구석이 없는 줄 알지만 곤에게는 서이을이라는 인간 자체가 그냥 섹스 어필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곤은 먼저 유혹해놓고 부끄러워하는 이을을 끌어안고서 생각했다. 내일 헬스장에 가면 당장 사흘 정도 휴일을 요청해야겠다고.

* * *

“아―부!”

“응, 모을아. 아빠랑 오늘 할머니 뵈러 가자.”

“하어? 하무?”

“할, 머, 니. 따라 해봐, 할머니.”

“하머이. 하미!”

“말을 진짜 잘하네……. 나 안 닮고 엄마 닮았나 보다, 모을이는.”

오후 수업만 있는 날, 곤은 아이를 데리고 한 카페로 향했다. 헬스장에 가는 줄 알고 참새로 변했던 아이는 헬스장 말고, 다른 데 가는 거야, 라고 말하자 얼른 인간 형상으로 변할 정도로 말도 잘 알아듣는 데다 짐승에서 인간으로의 형상 변환도 빨랐다. 곤은 말도 잘하고 참새와 인간으로의 변화도 자유자재인 모을이 자기보다 이을을 닮아 성장이 빠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저를 닮았으면 참새로밖에 있지 못했을 테니까.

유모차에 아기 띠로 단단히 모을을 고정하고서 집을 나선 곤은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모을에게 이것저것 만져보게 하고 냄새를 맡게 해주었다. 이을과 함께 육아에 대한 공부를 하며 알게 된 건데, 아기였을 때 촉각과 후각 놀이를 많이 해줘야 두뇌 발달에 좋다고 했다. 똘망똘망 귀여운 모을은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이 빨라서 곤은 아기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게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모을아, 이건 벚꽃이야. 벚꽃.”

“벅―꼬!”

“와아, 모을이 너 진짜 똑똑하다. 아빠 말고, 어, 엄마 닮아서.”

자기 가방끈이 짧은 데 대해 곤은 딱히 자격지심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을 더듬는 건 고치고 싶었다. 이을은 그건 그것대로 귀엽다고 했지만 말을 더듬는 아빠로 인해 아이도 말을 더듬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섰기에.

모을이는 나와 다르게 학교도 다닐 텐데 말을 더듬으면 안 되지. 아이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일념하에 매일 밤 이을과 입가에 경련이 올 정도로 책을 읽었다. 그 덕에 말더듬증을 거의 다 고친 곤은 뿌듯하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아들이 크기 전에 한 뼘 정도는 성숙한 부모로 성장한 것만 같아서였다.

원체 이을과 싸울 일이 없는 데다 임신 기간에는 평소보다도 더 납작 엎드려 기었던 덕분인지 아이의 성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곤은 꽃을 만지작거리고 향을 맡으며 꺄르르, 웃는 아이의 배를 토닥이며 카페로 들어갔다. 처음 가는 카페인지라 알바생이 낯설 만도 한데 아이는 카페 알바생에게 팔을 뻗어 주먹을 쥐었다 펴며 반가워했다. 거의 매일 헬스장과 경비실을 오가다 보니 아이는 새끼 강아지처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좋아했다.

“꺄아!”

커다란 눈망울을 깜작거리며 카운터로 계속 손을 뻗는 아이를 만지고 싶은지 알바생의 입꼬리와 손끝이 움찔거렸다. 곤은 그게 꼭 모을이 막 태어났을 때 저와 이을이 신생아실에 딱 붙어있던 순간과 비슷해 선뜻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해주셔도 돼요. 손도 잡아주셔도 되고요. 아이가 사람을 좋아해서요.”

“정말요? 안녕―. 애기 몇 살이야?”

“한 살이에요―, 해야지 모을아.”

“모으이!”

“아아, 진짜 귀엽다…….”

누가 봐도 귀여운 아이는 하는 짓도 귀여웠다. 곤은 처음 본 알바생이 모을의 손을 살며시 쥐고서 흔드는 걸 보며 음료를 주문했다. 짧고 통통한 다리를 바동거리며 모을은 음료가 나올 때까지 알바생의 손을 잡고 꺄르르 웃길 반복했다. 상대가 자신을 해할 리 없다는 걸 충분히 아는 아이에게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사랑스러움이었다. 모을의 볼도 손등으로 살살 쓸어준 알바생은 서비스라며 쿠키 하나를 주었다. 곤은 그걸 아들이 입고 있는 옷의 앞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여자는 아직 안 온 건가? 카페를 둘러보던 곤은 시선이 느껴지는 곳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자기를 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불쌍한 표정을 짓고서 앉아있는 건지. 내게 불쌍해 보이고 싶은 건가? 저런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곤은 여자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자는 일찍부터 와있었는지 다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잘 지냈니?”

“응. 모을아, 인사해. 할머니야.”

“하머이.”

“얘가 아들이구나. ……예쁘게 생겼다.”

자신이 자리에 앉고 나서도 쭈뼛거리던 여자는 저를 향해 손을 뻗는 아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곤은 여자가 어색하게 아이를 안고 있다가 이내 바투 안으며 아기 냄새를 맡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을이 손자보다는 아들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로 여자는 아직 젊었다. 그래서 곤은 여자가 아이를 안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지금도 이렇게 젊은 여자가 도대체 얼마나 더 젊었을 때 자신을 낳았을지 궁금해졌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아기를 안는 모습이 더 어색했겠지?

“이렇게 어린 아기는…… 너무 오랜만에 안아봐서.”

“키히히―.”

목덜미와 귓가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아기는 간지러운지 바동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할 말이 많은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는 다시 한번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곤은 그걸 저지하지 않았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기였을 적, 어쩌면 자신을 여자가 저렇게 다정하게 안아줬을 것도 같아서.

설령 그렇다고 해서 여자와의 관계가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여자가 자신을 유기한 데에 오롯이 그의 의지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사실 여자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면 이을은 아예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 버림받은 건 곤의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일이기도 했다.

“아이가 너무 순해서 자주 봐줘도 하나도 싫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아무 때나, 이을 씨랑 놀러 가고 싶으면 나한테 모을이를 맡겨도 돼.”

“……고마워.”

“우으. 우.”

“내가…… 내가 더 고맙지.”

여자보다는 역시 남자가 더 별로니까. 게다가 애도 봐준다고 하니 잘된 일이지.

아이를 봐주겠다고 도움의 손길을 뻗은 여자를 두고 바로 자리를 뜨기가 뭣해서 곤은 모을의 이름 뜻까지 말해주고 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주 월요일과 화요일까지 아이를 맡아달라고 한 곤은 가벼운 마음으로 경비실로 향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이와 긴 시간 떨어져있게 되었지만 모을이 워낙에 성격이 좋은 아기이다 보니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여자도 모을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형아! 어? 모을이도 있네!”

“단솔이 안녕. 너 또 이, 이을이 보러 가냐?!”

“웅―! 이을이 형아가 놀러 오래써!”

“하아…… 진짜 너도, 너도 이을이 너무 좋아해. 하지만 이을이는 내 거야. 알겠어?”

“안니거든?! 형아는, 이을이 형아는 이을이 형아 꺼야!!”

“애배배! 우웅!”

나간 김에 초밥을 사서 이을과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이게 웬 불청객인지. 곤은 이을이 형아는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바른말을 하는 다섯 살배기 이단솔을 노려보았다. 이을은 도대체 미취학 아동과 신경전을 벌이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만, 곤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 꼬맹이가 이을이랑 나중에 결혼하겠다고 지랄 염병을 떨 것 같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을이가 저 꼬맹이와 결혼을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투닥거리며 경비실로 간 세 사람은 인사만큼은 바르게 했다. 곤은 저를 보고는 눈웃음을 한 번 치고, 단솔을 보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이을에게 앞으로는 자기 머리도 쓰다듬어달라고 하겠다고 마음먹고서 경비실장 몫의 초밥 도시락을 건넸다. 이을밖에 모르는 곤이지만 이제는 이을의 주변인들에게도 환심을 사고 싶어서 자신이 챙길 만한 건 챙기는 편이었다.

“실장님, 식사 아직 안 하셨을 것 같아서, 실장님 것도 샀어요.”

“하이고―! 내가 오늘 이럴 줄 알고 식사를 안 했나 보네, 잘 먹을게요!”

“네에. 저 이을이랑 잠깐 벤치에서 식사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그럼요. 아예 그냥 집 들렀다가 와도 되는데? 이을 씨, 집에 들렀다가 와. 오늘은 택배도 별거 없으니까.”

“네, 금방 올게요, 실장님!”

“천천히 와도 돼, 난 초밥만 있으면 된다구. 모을이도 조심히 가라―.”

“애애.”

“단솔이는 형아랑 손잡고 가자. 단솔이도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이, 이을아아……!”

집에서 편하게 식사하고 오라는 경비실장의 말에 화색을 띠었던 곤의 얼굴은 이을이 하는 말에 죽상이 되었다. 이을아, 이단솔도 데리고 가겠다고? 도대체 이단솔이 뭔데……! 네 아들도 아닌데!

이을에게 이단솔은 놔두고 가자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곤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이번 한 번만 봐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섯 살배기 이단솔이 다음 달부터는 유치원에 다닌다고 했으니. 물론 곤이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단솔은 이을의 손을 잡고 방방 뛰기 바빴다.

“나두 갈래! 가서, 어어, 모을이랑 놀아조야지―.”

“꺄! 혀아, 혀아!”

“진정해, 서모을.”

“꺄하하하―!!”

아기 띠와 자기 몸통 사이에서 버둥버둥 신나 하는 아이의 배를 토닥이다가 곤은 내친김에 단솔의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단솔은 제 머리를 누가 헝클어뜨리는데도 이을에게만 딱 달라붙어있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서도 이을에게 조잘조잘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단솔이 곤도 영 밉지만은 않았다.

“집이 좋긴 좋다.”

“이을아, 아― 해.”

“아―.”

“우리 애기…… 힘드니까 입만 벌려.”

잠깐 쉬다가 가긴 할 거지만 쉬는 동안은 이을이 손 하나 까딱 안 했으면 싶어 곤은 초밥을 하나씩 이을의 입에 넣어주었다. 단솔에게도 따로 산 유부초밥을 주었는데, 단솔은 얼마 되지도 않는 유부초밥의 밥을 조그맣게 뭉쳐 모을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주 조금씩 먹여주며 ‘맛있지, 모을아?’라고 묻는 얼굴이 무구하게 밝았다. 곤은 얄밉긴 해도 단솔이 역시 나쁜 애는 아니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흐뭇하게 단솔을 보는 곤의 볼이 불시에 살짝 당겨졌다. 돌아본 곳에는 당연하게도 이을이 있었다. 저를 귀엽다는 듯이 보면서. 곤은 어쩌면 영원히 저를 보호해줄 존재라고 생각할 이을의 시선이 간지럽고도 버거워 조금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이을이 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볼 때면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이건 말 더듬는 것처럼 연습한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딱히 나아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방금 전에, 아줌마 만나고 왔어. 다음 주 월요일이랑 화요일에 모을이 맡아줄 수 있대.”

“정말? 이따 어머님께 전화 드려야겠다. 잘 부탁드린다고.”

“뭘 저, 전화까지……. 귀찮은데 하지 마.”

“그래도. 예의가 아니지.”

이따 저녁쯤 연락해야겠다며 이을은 핸드폰을 톡톡 두들겼다.

“모을이 어디 가아?”

곤은 이을에게 계속 초밥을 먹여주는 한편,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솔에게 답해주었다.

“어디 안 가고, 여기 아파트에 있을 거야. 내…… 엄마네 집에.”

“아아! 모을이 할머니네 가? 재밌겠다!”

여자를 한 번도 진정한 엄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내 엄마, 라고 말하는 게 어색했다. 그러나 단솔에게 어떻게 설명하는 게 가장 와닿을지 생각하다가 말이 먼저 나갔다. 곤은 ‘그냥 모을이네 할머니라고 말할걸’이라고 약간 후회하며 이을이의 입에 초밥을 또 넣어주었다. 그리고 이을은 그런 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해서 곤은 괜히 센티해졌다.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는 건 남편인 서이을뿐이었다.

* * *

아직 한 살도 채 되지 않은 모을을 곤과 이을은 한 번도 곁에서 떨어트려놓은 적이 없었다. 남들은 자기 부모님이나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한다던데 둘은 그럴 여건이 안 되어 어쩌다 보니 아이를 아주 끼고도는 극성맞은 부모가 되어있었다. 이을은 예약해놓은 호텔로 가기 전 여자에게 줄 선물과 아이 기저귀, 젖병, 애착 담요와 인형 등을 바리바리 쌌다.

“가방 터지겠다. 그리고 그 여자 선물은 안 사도 되는데.”

“어머님께서 봐주신다고 하는데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하고 싶어서. 왜? 너 설마 질투해?”

“아, 아아, 아니거든?!”

맞네.

이을은 화과자와 와인 두 병을 내도록 만지작거리던 곤이 팩하니 토라져 등을 돌리는 걸 보고서 몰래 웃었다. 저놈의 강아지는 어째 질투심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냐.

결혼식을 따로 올리지는 않았으나 혼인 신고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저와 곤은 누가 뭐래도 부부였다. 그러나 이을에게 곤은 의지하고 싶은 배우자라기보다는 감싸주고, 보호해주고 싶은 배우자였다. 맹목적으로 저를 향하는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버겁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더 저를 사랑해주길 바랄 때도 있었다.

제 옆에 딱 달라붙어 그런 사람에게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며 다 들리게 투덜거리는 곤에게 틈틈이 뽀뽀를 해주며 짐을 모두 쌌다. 둘이 함께 갈 호텔도 여자가 예약해주어서 선물을 안 챙길 수는 없었다. 이을은 지난 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고 저와 곤에게 뜬금없는 호의를 베푸는 여자가 이제 싫지만은 않았다. 그저 그런 사람도 있지, 할 뿐.

늦겨울처럼 대놓고 춥지는 않지만 4월의 꽃샘추위는 이제 10개월밖에 살지 않은 모을 같은 아기에게는 충분히 추운 날씨였다. 이을은 쪽쪽이를 빨며 제 아빠의 손가락을 쥐고서 노는 모을에게 목도리를 매주고 수면양말도 신긴 후 마지막으로 장갑을 끼워줬다. 불편한지 손과 발을 연신 꼼질거리면서도 벗어서 패대기치지는 않는 모을을 번쩍 안아 든 이을은 아기 가방과 작은 캐리어를 달달 끌고 나오는 곤을 돌아보며 웃었다.

“얼른 가자, 곤. 나 많이 놀고 싶어.”

“응! 모을이는…… 이틀만 참자, 아빠랑 엄마랑 매일 전화할게.”

“으우?”

“응, 이뻐, 모을이.”

아이의 통통한 볼에 입술을 꾹 누르는가 싶더니 제게도 뽀뽀하는 곤이 귀여워 이을은 현관 앞에서 크게 웃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잘 지냈어요?”

“그럼요. 맨날 경비실에 있으니까 자주 놀러 오세요. 어제도 경비실에서 어머님이랑 아버님 가시는 거 봤는데.”

“종종 연락할게요. 모을아 안녕? 어…… 할머니야. 이리 오자, 모을아.”

집 밖으로 나와서 뽀뽀에 환장한 사람들처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쪽쪽거리다 보니 벌써 여자가 사는 아파트 동이었다. 이을은 여자가 저와 곤을 보고 헛웃음 짓는 걸 보고 애정행각을 아파트 단지에서는 좀 자제하자고 다짐했으나, 뒤돌아서면 또 쪽쪽거릴 걸 알았다.

스스로를 할머니라고 지칭하며 아이에게로 팔을 뻗은 여자에게 모을은 선뜻 안겼다. 부모의 일터를 고루 쫓아다니며 아주 확실하게 사회성을 길러놓은 터라 제게 호감을 갖고 있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가려낼 줄 알게 된 아이다웠다.

“모을아,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아빠랑 엄마랑 잠깐 어디 일 좀 하고 올게. 모을이 빼고 노는 거 아니고, 둘이서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매일매일 전화할게, 우리 모을이.”

“으우, 어마아…….”

“응응, 엄마 내일모레 올게?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그래요. 잘 놀다 오고, 별일 없겠지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요.”

“네! 곤, 가자.”

“응…… 애기 잘 보고 있어, 아줌마!”

“알겠으니까 얼른 이을 씨나 따라가.”

이을은 귀마개를 해놓아 볼이 터질 것처럼 눌린 아이가 울기 전에 호텔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마음먹고 제대로 놀겠다고 결심했는데 아이가 울면 호텔은커녕 동네 산책도 곤과 둘이서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짧고 통통한 팔을 뻗어 옹알이를 하는 아이를 뒤로하고 이을과 곤은 여자가 준비한 차에 몸을 실었다.

“모을아―, 잘 놀구 있어―!”

“흐애애앵―!!”

“아이구…… 그래도 엄마랑 아빠는 놀러 가야 된다, 모을아, 울지 말아라.”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이을은 냉정하게 창문을 올렸다. 내일모레 볼 테고 믿고 맡길 만한 사람에게 모을을 부탁했으니 곤과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푸흐흐…… 이을이 못됐어.”

“그럼 다시 모을이한테 갈까?”

“그, 그런 얘긴 아니구…… 나 콘돔도 두 박스나 샀는데…….”

이을은 왜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하느냐며 가슴팍에 코를 박고 잉잉거리는 곤을 토닥였다. 아들에겐 미안하지만 다시 돌아갈 일은 없었다.

“이을이는 맨날 나 갖고 놀고. 미워.”

너무 오랜만에 갖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 * *

참새로 변한 모을은 시무룩하게 찰현미 튀밥 한 알을 콕콕 쪼아댔다. 엄마와 아빠는 이틀 정도 할머니와 함께 있어야 한다며 처음 보는 여자에게 저를 맡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틀은 어느 정도의 기간일까? 모을은 인간의 형상으로 있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이틀 내내 참새로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자는 제집으로 온 내내 창밖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는 손자의 자그마한…… 자그마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콩알만 한 아기 참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작 10개월밖에 안 산 손자는 울지도 않고 아주 얌전했다. 튀밥을 좋아한다기에 평소엔 먹지도 않는 걸 종류별로 열 개나 산 걸 알까.

“모을아.”

“삐.”

“네 이름을 아빠가 지어줬다던데…… 모든 노을이라고. 이름이 정말 예쁘네. 특이하고 예뻐.”

“삐―이.”

여자는 칭찬을 전혀 안 해본 사람답게 모을에게 아주 어색한 투로 말했다. 책을 달달 외워 하는 듯한 말에 아기 참새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뜻 모를 새소리를 냈다. 곤은 자기 아이가 내는 소리를 모두 알아듣나, 여자는 튀밥을 먹다가 제게로 포르르 날아오는 아이에게 손가락을 가로로 들어 보였다. 그러자 참새가 안정적으로 손가락 위에 착지했다. 뽀실뽀실 일어난 회색빛 가슴털. 곤이 새끼였던 시절을 연상케 하는 색에 그는 아기 참새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영영 친해지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엄마랑 아빠랑 잠깐 놀다 오는 거니까 불안해하지 마. ……할머니랑 산책 나갈까?”

“삐! 삡삡!”

“아직 아기여서 짹짹 소리도 못 내네. 귀여워라…….”

산책 소리에 신이 났는지 손가락에 앉아 몸을 양옆으로 기우뚱거리며 방방 뛰는 아기 참새에게 여자는 준비한 선물을 줬다. 목도리와 털모자. ‘참새 방앗간’이라는 사이트에서 산 아기 참새 용품이었다.

폭이 하도 좁아 거의 실에 가까운 목도리, 동그랗고 조그만 머리통에 고정할 수 있게끔 끈이 달린 털모자를 단단히 씌워주자 손자는 지지배배 신나게 노래했다. 여자는 제 어깨 위로 앉는 참새를 살며시 쓸어준 후 현관 밖으로 나섰다.

아직 어린 아기인 모을과의 산책은 즐거웠다. 이 아파트에서 몇 년째 살고 있지만 그간 산책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여자는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때마다 어깨 위에서 가볍게 날아오르며 길을 안내하는 손자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을이 안내해준 길은 모두 여자의 마음에 들었다. 아주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양 쫑쫑 걷는 모을을 쫓아가다가 꽤 큰 놀이터를 발견하기도 했다.

“삐, 삐삡!”

“모을이가 좋아하는 곳이니?”

“삐―.”

“자주 놀러 오면 할머니도 여기 종종 와봐야겠다. 그래야 우리 모을이도 보지.”

털모자와 목도리를 한 채,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날던 모을은 여자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금세 오목한 손바닥 안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여자는 자신의 아들인 곤을 생각했다. 아주 어릴 적, 인간으로 변하지 못하던 아들은 제게 가까이 오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가면 자신을 해하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름도 없던 시절에도 아들은 제가 울 때만은 바닥에 바짝 붙다시피 해서 곁에 오곤 했다. 저가 웅크려 울면 낑낑거리며 핥아주던 아들.

여자는 손바닥에서 까불거리다가 날개를 활짝 펴 신났다는 티를 여실히 내는 손자의 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엄마랑 아빠를 닮아서 모을이는 참 다정하구나.”

마음에 한 톨의 여유도 없던 시절, 아들에게 못 해준 것을 손자에게는 부족함 없이 모두 해주고 싶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여자는 새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미소 지었다. 이제는 정말 한 가족처럼 느껴지는 이을에게서 ‘잘 놀게요’ 하는 살가운 메시지가 와있었다. 이따 전화해도 되냐는 메시지에 여자는 언제든 그러라고 한 후 남편을 맞았다.

“왔어요?”

“응, 오늘 좀 늦었지? 내가 일하는 거 못 미덥다고 노인네가 어찌나 닦달을 하는지…… 그 노인네 비위 맞춰주다가 아주 죽겠어.”

남편과의 사이는 쭉 괜찮았다. 남편은 빈말로도 좋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고,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지만 좋은 배우자의 역할은 어느 정도 해내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오자마자 가볍게 포옹하는 남편을 마주 안아주다가 남편의 머리 위로 올라앉은 참새, 그리고 ‘이게 뭐지?’란 표정을 짓는 남편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삐!”

“집에 웬 참새가…… 설마 곤이 녀석 아들내미?”

“모을이요. 곤이 내외가 아직 젊은데 아이가 있어서 둘이 놀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하루만 내가 애 봐주기로 했거든요. 왔을 때는 인간 형상으로 울기만 하더니 참새로 변해서 산책도 하고, 식사도 다 했어요. 모을아, 이리 오자.”

“삐이―.”

“당신한테 가기 싫은 모양인데? 요 녀석,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반겨, 어?”

남편의 정수리 위를 자근자근 밟더니 자기가 웅크려 있을 공간을 다진 모을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남편이 손자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뜻밖에 그는 퍽 재미있어하는 눈치여서 다시금 웃었다.

“삡. 삡삐?”

“뭐라는 거냐, 할아버지 씻어야 되는데. 내려와.”

“삐비빕, 삡.”

“허, 제 아빠 닮았는지 말은 지지리도 안 듣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참새와 투닥거리는 남편의 얼굴이 살짝 들뜬 듯해서 여자는 울고 싶어졌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할 사람이지만, 그래도 제게는 하나뿐인 남편이었다.

손바닥에 손자를 올려놓고서 머리가 너무 동그란 거 아니냐며 괜한 시비를 거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종종 아들 내외의 자식을 맡아줄 용의가 더욱 커졌다.

* * *

여자가 잡아준 호텔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으리으리했다. 곤과 이을 둘 다 그런 호텔은 처음으로 와봐서 프런트에서 카드키를 받는 것도 어색해했으나 직원들은 시종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카드키를 받은 후 두 사람은 호텔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높은 층일수록 비싼 방이라고 들었는데. 이을은 여자가 안 하던 짓을 하는 이유가 순전히 곤에 대한 죄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손자인 모을을 종종 보고 싶은 마음도 어느 정도는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와―!”

“진짜 좋다, 이을아, 진짜 짱이야!”

“그러니까! 완전 개짱인데?!”

그런 생각도 호텔 룸에 들어가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당장 닥친 상황이 아주 분에 넘치게 좋아서. 이을은 냅다 침대에 몸을 날려 아방하게 웃는 곤을 따라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새하얀 침구는 잘 말라 보송하다 못해 바삭바삭했다. 호텔에 오기 전에는 ‘그 여자 도움 없이 내가 예약하고 싶었다’라며 약간 부루퉁해 있던 곤도 막상 와 보니 흠잡을 데 없이 좋은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잘 보여주지 않던 귀와 꼬리도 내놓은 걸 보니.

며칠 전 단정하게 깎아준 머리를 배에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는 곤을 쓱쓱 쓰다듬어준 이을은 차르르 떨어지는 얇은 천으로 만든 커튼을 걷었다. 고층의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아주 작아서 이을은 갑자기 참새로 변해 날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우리 옷부터 갈아입자. 샤워가운 갖고 올게.”

“아아, 같이 가, 같이.”

“샤워가운 바로 앞에 있는데 뭘 같이 가쟤. 그냥 누워있지.”

“싫어!”

“해준대도 그러네……. 맘대로 해라.”

이부자리 위에서 입고 온 옷차림 그대로 뭉개고 있는 게 싫어 자리에서 일어난 이을은 저를 따라 벌떡 일어나는 곤에게 안겨 걸음을 옮겼다. 도톰한 샤워가운을 보니 그냥 씻고 아예 갈아입는 게 낫겠다고 생각이 바뀌었고, 둘은 쪽쪽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서로의 옷을 벗기는 손이 조금 다급했다. 곤도, 이을도 육아에 지친 건 마찬가지였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 사이사이 마음껏 서로를 향한 애정을 발산하지 못해 힘든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으악! 곤, 잠깐만, 나 넘어질 뻔했어.”

“안 넘어뜨려. 내, 내가 안아줄게, 이을아. 걱정 마.”

스물두 살의 곤은 스무 살 때보다도 힘이 좋아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을을 번쩍번쩍 들어 옮기곤 했다. 이을은 어김없이 공주님 안듯 저를 안아 들고서 욕실로 향하는 곤의 목에 팔을 둘렀다. 1박 2일간 둘이 할 거라고는 오로지 그 짓뿐이었다.

이을의 옷을 벗겨주고 저도 대충 옷을 벗어 욕실 밖으로 집어 던진 곤은 무릎을 꿇고서 욕조에 걸터앉은 이을의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을은 씻고 하자고 아주 조그맣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곤이 그렇게 들이대는 게 싫지 않았기에.

“흣, 으, 고, 곤, 곤아, 냄새나, 으윽…….”

“쉬하고 싶어, 이을아?”

“아니, 그, 흑! 그건 아닌데, 더럽잖아. 씻지도 않, 앗, 아!”

“그, 그럼 괜찮아. 쉬하고 싶으면, 그때 놔줄게.”

뒤로 넘어갈 것 같은지 작게 발버둥 치는 이을의 하체를 팔에 가두고서 곤은 만족감을 느꼈다. 이을의 고추가 저로 인해 반듯하게 일어나고 그 아래의 음낭까지 땅땅하게 여문 것이 자못 뿌듯했다. 곤이는 섹스를 참 잘해, 섹스왕이야! 언젠가 이을이 그렇게 추켜세워줬던 게 기억나서 곤은 더욱 열정적으로 이을의 좆을 우물거렸다. 합, 소리가 나게 삼켰다가 쭈쭈바를 빨아 먹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기둥을 혀로 핥아 올리자 이마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슬쩍 올려다보자 이을이 바들바들 떨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곤이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볼품없이 갈라졌다. 타일 바닥을 발가락으로 밀어내며 어떻게든 사정을 지연시키려는 안쓰럽고도 가련한 몸부림에 곤은 목구멍 깊숙이 이을의 것을 삼켰다.

“으, 으읍, 안, 돼…… 힉! 아, 아읏!”

생긴 건 귀엽게 생겨서 이을의 좆은 꽤 길고 힘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곤은 이을의 좆을 빠는 게 좋았다. 아무래도 쪼그매서는 빠는 맛도 없는 좆보다야 누가 봐도 남자다운 좆을 빠는 게 훨씬 애무할 맛이 나지. 찹찹 소리 내며 요도를 후벼파듯 혀로 쪼아가며 사정을 유도하던 곤은 아예 제 뒤통수를 잡고서 살금살금 허리를 움직이는 이을이 기꺼워 그의 아랫배에 코가 닿을 정도로 입 안에 깊이 좆을 머금었다.

억, 억, 소리밖에 못 내며 떠는 이을이 곤의 입 안에서만은 사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등을 때리고 할퀴며 벗어나려 하자 곤은 말 안 듣는 어린아이 다그치듯 엉덩이를 가볍게 내리쳤다. 으응, 하며 떼를 쓰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곤도 물러설 수 없었다. 제가 뒤를 내주지 않으니 이을은 입이라도 마음대로 써야만 한다는 게 곤의 생각이었다.

후장을 내줄 수는 없으니 내 입에 싸란 건데 그게 싫은가? 이을이는 정액도 맛있는데, 나 참. 곤은 끅끅대며 우는 이을의 등허리를 다정하게 쓸며 귀두 끝을 머금고 있는 목구멍을 조였다 풀길 반복했다.

“아윽, 곤, 나 더는…… 흣, 아으응!”

“후우. 괜찮대도, 왜 맨날 싫대. 이을아, 괜찮아. 너는 좆물도 맛있어.”

“그런 말 좀 하지 마…….”

인상을 찌푸리다가 제가 한 말에 살짝 미소 짓는 이을을 올려다본 곤은 애액이 흐르는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서 가위질을 하듯 움직였다. 찔꺽이는 소리가 입 안과 구멍에서 동시에 흘렀고, 이을이 제 머리채를 좀 더 세게 잡아왔다.

“미안, 아, 곤, 미안해. 읏, 윽!”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궁금해할 새도 주지 않고 허리를 움칠거리던 이을이 사정했다. 곤은 사정 후 눈물이 맺힌 채 멍하니 허공을 보는 이을을 구경했다. 누구와도 섹스를 해보지 않았고, 다들 한 번쯤은 본다는 야한 동영상도 본 적 없었다. 그러나 곤은 사정 후의 이을이 세상에서 가장 야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곤은 한 발 빼고는 지쳤는지 축 늘어진 이을을 욕조에 앉혔다. 평소에는 공주님 안듯 안아 올리는 걸 꺼려 하는 이을은 사정 후에는 고분고분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곤은 그런 순간을 즐겨야 하는 걸 알았다. 고작 다섯 살 더 많은 것뿐이면서 한참 어른처럼 구는 이을이 부리는 어리광은 귀하디귀했다.

“기, 기분 좋았어, 이을아?”

“응…… 기분 좋았어. 최고였어.”

“이제 나 좀, 잘 빨지?”

“아하하! 완―전 잘 빨던데? 너한테 배워야겠어.”

실없는 대화를 하며 이을을 꼼꼼히 씻겨준 곤은 커다란 샤워 타월로 이을을 감싸주었다. 나가있어도 괜찮다고 했으나 애처럼 고개를 젓고서 계속 같이 있을 거라고 하는 이을을 내보내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샤워부스 안에서 샤워를 하는 내내 이을과 눈을 맞췄다. 키득거리며 웃는 이을을 침대에서 제대로 안을 생각을 하니 1분 안에 샤워를 끝내버리고 싶었으나, 이을을 더러운 몸으로 안을 수는 없어 곤은 평소보다 공들여 온몸을 박박 씻었다.

“다 씻었다!”

“안아줘.”

“응, 이리 와, 이을아. 아냐! 바닥 미끄러워. 내가 갈게.”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대롱대롱 안긴 이을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곤은 침대로 가는 내내 쉬지 않고 남편에게 입 맞췄다. 그리고 침대에서 어떻게 이을을 안으면 좋을지 오만 가지 체위를 떠올렸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한지 숨소리가 잘 때처럼 노곤하게 변한 이을의 엉덩이를 톡톡 치던 곤은 이내 이을을 침대에 눕히고서 보들보들한 뺨을 가볍게 감쌌다. 이을의 얼굴에서 참새 같은 부분을 찾으라고 한다면 부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 정도뿐인데도 곤의 눈에는 한없이 귀여워 보였다.

아까 보니 정액 맛이 꽤 진하던데, 모르긴 몰라도 아주 오랜만의 사정이었는지 이을은 제가 들어 올리는 대로 달랑 매달려서는 군소리 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왔다. 힘이 다 빠져서는 까무룩 잠들 것 같은 눈을 하고도 조용히 입을 맞추는 이을이 오늘따라 유독 저보다 동생처럼 느껴져 곤의 마음은 절로 빠듯해졌다.

“애, 애기 같애, 이을아.”

“스물일곱이다…….”

“일곱 살 아니구?”

“야, 무슨…… 이렇게 큰 일곱 살이 어디에 있어.”

“근데 일곱 살보다 귀엽잖아. 내 애기.”

“애기 말고 형이라고 해.”

“응, 애기 형.”

“……네 마음대로 불러라.”

폭신한 침구 안에 쏙 들어간 이을은 오늘따라 더 귀여워 보였다. 곤은 씻고 나와 뽀득한 이을의 볼을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슬그머니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체로 있는 이을이 오랜만인 데다 사정 후의 나른함은 더 오랜만이어서 지금 이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을아아.”

“응, 왜애.”

“콘돔 갖고 올까?”

“음…… 응, 한 번 하고 나면 푹 잘 것 같아.”

“아, 알겠어! 기다려봐, 얼른 갖고 올게.”

피곤하다고 하면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이을이가 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곤은 주책맞게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잽싸게 협탁에서 콘돔 상자를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꺼내는 모습에 어이가 없는지 이을이 헛웃음을 뱉어서 곤은 잠깐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중요한 건 섹스였다. 모을이가 없으니 둘 다 소리를 참을 필요도 없고, 불알이 텅 빌 때까지 서로의 것을 만져도 상관없는 섹스.

몇 달 전, 모을이 잠들었을 때 겨우 한 번 섹스를 하고도 만족감에 떨던 게 생각났다. 그때 이을이 나른하게 풀어져 한 번 더 하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던 걸 상기한 곤은 베개 위에 엎어져 감기는 눈을 애써 치켜뜨는 이을의 목덜미를 왕, 깨물었다.

“자, 자면 안 돼. 이을아아.”

“응…… 안 자.”

“자잖아!”

“안 잔대두……. 진짜 안 자.”

담당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잘만 양해를 구하면 하루 이틀은 쉽게 시간을 낼 수 있는 저와 달리, 이을은 호캉스에 오겠답시고 경비실장과 나눠 할 일을 혼자서 해냈다. 그래서 곤은 자꾸 가물가물 눈이 감기는 이을을 귀찮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응, 곤…….”

“가만히 있어, 이을아.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이을에게 애무를 받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이을이 피곤해 보이니 자기가 여기저기 마사지를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욕실에서부터 오래 빨고 있어 표면이 탱탱하게 부은 좆을 선단부터 집어삼키자 이을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 그만, 하는 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곤은 괜찮다는 뜻으로 그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헬스장에서 배운 대로 마사지하듯 주무르자 앓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실금하듯 애액이 새는 걸 확인한 후 곤은 발목을 주무르던 손을 구멍으로 가지고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좁았다. 한창 섹스밖에 모르던 연인 시절에도 제 좆을 넣기에 구멍은 항상 너무 좁게 느껴졌으니 오늘은 삽입하기 전에 배로 풀어줘야 그나마 이을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거기 빨, 지…… 윽! 아읏!”

“괜찮아, 여, 여기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이을은 잠자리에서 빼는 법이 없는데도 항상 구멍과 겨드랑이를 빠는 것만큼은 울먹이며 싫어했다. 처음에 곤은 ‘이을이가 괜히 좋으면서 그러네’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벌써 3년째였다. 곤은 졸음과 흥분, 그리고 다량의 수치심으로 힘없이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벗어나려 하는 이을을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서 구멍에 혀를 들이밀었다.

“흑, 윽, 하아……!”

조글조글한 주름을 혀로 펴듯 핥다가 입 안이 애액으로 가득 찰 정도가 되어서야 곤은 혀를 뾰족하게 세워 구멍을 쑤셨다. 어렵사리 구멍에 들어가 혀를 억지로 납작하게 펼쳐 내벽을 핥아주자 이을은 금세 사정했다. 욕실에서 좆을 직접적으로 빨아줬을 때보다도 반응이 빠르니 곤으로서는 이을이 괜히 저를 자극하려 도발한다고밖에는 생각지 못했다.

“하여간…… 좋아하면서 우리 애기는 항상 튕긴다니까!”

발뒤꿈치로 이불을 북―, 하고 밀어내던 이을은 사정 후 눈을 몇 번 깜빡여 시야를 확보했다. 굵지 않은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지고 나자 보이는 것은 콘돔 껍질을 이로 까는 곤이었다.

꼭 포르노 잡지 모델 같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곤에게 미안하지만 그냥 자자고 할까, 생각하던 이을은 마음을 고쳐먹고 곤의 좆에 콘돔을 씌웠다. 꺼떡이며 얼른 들어가고 싶다고 성화를 부리는 좆을 보자 차마 그냥 자겠다고 할 수도 없었거니와, 이을도 잠보다는 섹스가 더 고팠던 탓이었다.

“여보는 가만히 있어. 내, 내가 다― 풀어놨으니까 금방 쑥 하고……. 윽.”

“아, 잠…… 깐, 흐읍, 천천히, 곤, 나 주, 죽어……!”

“왜 아직도…… 그렇게나 빨아줬는데……!”

반쯤 들어갔으려나. 아래를 보자 여전히 좆 기둥이 보였다. 저게 안 보일 때까지 안에 넣어야 되는데 가능할까?

이을은 아파도 참겠다는 의지를 담아 곤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리고 당연히 제 안을 치고 들어올 줄 알았던 곤은 엉뚱하게도 귓바퀴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으응! 싫어, 흐응, 앗…… 힉! 가, 간지러워, 왜 그래애!”

“너 여기, 빨아주면, 하아…… 금방 열리잖아. 맞지, 이을아?”

아래로는 꾹, 꾹 힘을 줘 진입하면서 혀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이을은 싫다는 말 대신 곤의 허리를 다리로 감쌌다. 온전히 다 들어찬 곤의 좆은 버거웠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 *

“삡―, 삡삐―!”

“모을이는 노래를 참 잘하는구나.”

“삐삐. 삡―삐!”

“할머니가 잘 못 알아들어서 어떡하지? 그래도 모을이가 노래 부르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아.”

아기 참새 모을은 산책을 좋아했다. 보통은 아빠나 엄마의 일터에 참새로 변해서 가거나, 아니면 온 가족이 인간 형상으로 변해서 자신은 유모차에 타 산책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많은 산책 중에서도 모을이 가장 좋아하는 산책은 아빠 개와 엄마 참새, 그리고 아기 참새가 함께하는 산책이었다.

방금 전에 지저귄 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자기가 산책을 매우 좋아한다는 환호에 가까운 소리였다. 모을은 할머니라는 사람이 제 뜻을 잘 몰라주었으나 개의치 않고 지지배배 신나게 지저귀었다. 새로 받은 털모자와 목도리도 마음에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색하게 아무 말이나 하는 할머니도 싫지 않았다.

한편 여자는 손자와 몇 바퀴나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어쩌다 알게 된 사이이나 자신이 낳은 아들보다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을의 꼬마 친구, 경비실장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이을의 꼬마 친구는 자신을 이단솔이라고 소개하며 주머니에서 불린 쌀 두 알을 모을에게 주었다. 꼬마는 주고, 아기 참새는 받아먹는 모습이 일상적이어서 그는 자기도 앞으로는 쌀을 불려서 갖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곤이 알면 주제넘은 생각이라 여길 게 분명하나 여자는 손자인 모을을 자주 보고 싶었다. 항상 그랬다.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인 곤을 버린 게 미안해서 그런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여자는 손자를 마음껏 귀여워해주고 싶었다. 이제 와 모성애가 생겼다기보다는, 부담 없이 사랑만 주어도 괜찮을 존재가 생긴 게 기꺼웠다.

안 그래도 모난 성격에 불륜으로 재취 자리에 들어가고 난 후 여자에게는 친구가 몇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남은 친구들이야말로 언제든 여자의 편에 서줄 친구들이었다. 속내를 다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넌지시 ‘아들 내외에게 손자 좀 보여달라고 하면 불편해하려나?’라는 말에 먼저 용기를 내서 다가가도 모자랄 판에 뭘 고민하느냐고 따끔하게 조언한 것도 바로 그 친구들이었다.

“우리 모을이 추우면 할머니가 안아줄까?”

“삐삐― 삐!”

일방적으로 자신이 죄를 지은 아들에게 네 아이를 자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영 면구스럽고 미안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말했다 싶었다.

“아이구, 몸이 이렇게 찬데 할머니가 눈치를 못 챘네. 얼른 들어가자. 가서 모을이가 좋아하는 튀밥도 먹고, 우유도 먹자.”

“삐―이.”

이렇게 귀여운 손자가 생겼는데 말을 안 했으면 억울할 뻔했다.

* * *

“거유.”

“자, 자극하지 마, 서이을.”

“거유를 거유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왕가슴이라고 불러줄까?”

“진짜아―! 하지 말라고!”

“알겠어. 싫으면 안 해. ……말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안 돼?”

“안 돼!”

자기 전에 한 판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둘 다 세 번이나 사정한 후에 침대 위에서 늘어졌다. 이을은 간만에 운동 제대로 한 것 같다고 느끼며 샤워가운 안에서도 위용을 자랑하는 곤의 가슴을 꾹꾹 눌렀다.

“하지 말라니까 참……. 내 가슴이 그,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진짜 변태구나, 이을아…….”

“좋은 걸 좋다고 하지 그럼 어떡해. 너도 좋으면서 괜히 빼지 마.”

“나도, 나도 이을이 네 가슴 좋아해. 쪼그매서 좋아.”

“커진 거거든?”

“……그렇다고 치자!”

이을은 제 말에 토를 다는 대신 낮게 웃으며 목을 가볍게 쓰다듬는 곤을 올려다봤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섹스 후엔 이렇게 서로를 씻겨준 후 말끔해진 몸을 잠들기 전까지 매만지곤 했다. 곤도 그렇겠지만, 이을 역시 몇 달 만에 생긴 이런 여유가 아주아주 좋았다.

샤워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탄탄하고 폭신폭신한 곤의 가슴을 양껏 주물럭거리던 이을은 그의 배 위로 올라가 납작하게 엎어졌다. 그렇게 했는데도 또 발기한 게 느껴졌으나 이을은 더 이상 섹스할 마음이 들지 않았고, 보아하니 곤도 더 저를 괴롭힐 마음은 없는 듯했다.

“모을이한텐 미안하지만 곤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둘이서 시간 보내는 게 너무 오랜만이잖아.”

“모을이도 이해해줄 거야. 내일 보잖아.”

“연락 온 거 없으려나……. 잠깐만, 핸드폰 좀 갖고 올게.”

“누워있어, 내가 갖고 올게.”

느슨하게 샤워가운을 걸치고서 가방을 챙기러 가는 걸음걸이가 단정해서 이을은 만족스러웠다.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남편 자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을은 언제나 곤을 자랑스러워했다. 키가 큰 것, 얼굴이 잘생긴 것, 저밖에 모르는 것, 가정에 충실한 것. 하다못해 그의 건강함까지 자랑스러웠다.

곤의 손에 들려있으니 유독 작아 보이는 핸드폰을 받아 든 이을은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약간 뭉클한 마음이 되었다.

곤이맘:

(사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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