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개를 되찾는 완벽한 방법
병원에 다녀온 후 곤은 한동안 소파에 앉아 내 배를 끌어안고 가만히 귀를 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직 점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임신 3주 차이시네요. 아무래도 남성분이시다 보니 아기집이 여성분들보다는 불안불안하거든요. 가벼운 운동은 괜찮지만 신경 써서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스트레스는 최대한 받지 않으셔야 하고요. 아이가 어떤 동물을 기반으로 한 수인인지는 생후 3개월쯤 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니 우선은 안정에 신경 써주시고, 무슨 일 있으면 꼭 병원으로 오세요.
적당한 활기와 적당한 거리감을 모두 갖춘 의사는 진료실에서 내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곤과 내게 조심해야 할 것들을 설명했다. 곤은 병원에서 준 아빠 수첩에 또박또박 의사가 일러준 것들을 적어 내려가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그런 곤에게 ‘좋은 아빠가 되실 테니 미리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라고 차분한 격려를 건넸다.
병원을 나선 후에 곤은 우선 근처 죽집에 가 특전복죽을 시켰다. 그러고는 내가 그걸 다 비울 때까지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그래서 아기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더니만 막상 아빠가 되니 좀 부담스러운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펑펑 울어서 그냥 긴장했던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곤, 나 배 다 젖었다.”
“흐끅, 응……. 우리 빨리 호, 혼인신고 하러 가자!”
“내일 가자. 오늘은 나 일도 해야 하고, 곤이 너도 회사 가봐야 되지 않아?”
“안 가도 돼.”
“……아까부터 전화 계속 오던데. 누구한테 전화 온 건지 한번 보자.”
“아, 안 돼애! 보지 마. 안 된다니까!”
“아저씨, 아저씨, 이지오 선생님, 아저씨…….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안 가. 이을이, 지켜줘야 돼.”
지켜주긴 뭘 지켜줘…….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으면서.
나도 얼른 곤을 회사로 보내고 오후 근무는 해야 했다. 경비원 업무는 잘한 건 티가 나지 않지만 소홀히 하면 확 부족한 게 티가 나서 경비실장과 매일매일 소소하게 처리할 일이 많았다.
“우선 나는 일을 가야 돼.”
“안 돼…… 힘들잖아.”
“아니…… 뭐가 힘들어, 아기 생긴 지 이제 3주 차잖아. 나 입덧도 안 하고 운동 너무 안 하면 축 처져서 안 돼. 일해서 돈도 벌어야 되고.”
“그래도, 그래도……!”
“나 금방 올 테니까 집안일 좀 하고 있어. 그리고 오늘 저녁에 곤이네 집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자. 아이 가졌고, 결혼도 하겠다고 말하게.”
“응…… 그럼 나, 집 깨끗하게 치우고 있을게. 조, 조심히 일해, 이을아!”
경비실까지 나를 데려다주고서도 한참 밖에서 손을 흔들며 가지 못하는 곤을 보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좀 이따 볼 건데도 곤은 집으로 향하는 내내 몇 번이고 경비실을 돌아봤다.
“아주 애―틋하구먼?”
“저…… 실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경비실 주변에서 서성이다 추위에 코가 빨긋해져서야 돌아간 곤을 계속 지켜본 이연우 경비실장이 능글맞게 내 팔뚝을 때렸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둘밖에 없는데 큰 소리로 지금 이때를 즐기라고 껄껄 웃던 실장은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하자 표정을 굳혔다.
“일…… 그만두는 건 아니지? 신입 경비 한 명 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휴게소 짬밥 20년의 서이을 씨를 온전히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냐. 난 이을 씨 못 놔!”
“아뇨, 아뇨. 근데 실장님이 저를 자르실지도 몰라요.”
“전과 생겼어?”
“예? 아뇨…… 전과가 아니고 아이가 생겼어요.”
“어엇―? 아이?!”
실장은 그런 경사가 생겼는데 왜 일을 그만둘 생각을 했냐고, 경비원 구하기도 작살나게 힘든데 계속 다녀주면 안 되겠냐고 외려 사정을 했다. 나는 약간 머쓱한 기분이 되어 폐지나 정리했다. 오늘은 할머니와 만나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내가 폐지를 꿍쳐놓고 있다가 낑낑대며 이고 지고 아파트 정문까지 나가도 모르쇠로 일관하던 경비실장이었으나 임산부를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는지 폐지를 단단히 묶어 구루마에 올려줬다.
“앞으로는 폐지 할머니한테 갈 때 저거 써. 남편 괴롭힌다고 이을 씨 남편이 나를 찾아오면…… 늙고 쇠약한 내가 대거리를 뭐 어떻게 하겠어?”
“에이, 곤이 그런 애 아니에요.”
“애는 무슨. 덩치가 그렇게 좋은데.”
“스무 살이니까 애죠.”
“뭐?! 스무 살?! 이을 씨가 스물다섯이지? 이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능력자네.”
경비실장은 곤의 나이를 듣고 정말 놀랐는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하도 유난스럽게 굴어서 나는 곤만큼 어려 보이는 애도 없는데, 생각하며 탈탈탈 구루마를 끌고 아파트 정문으로 향했다. 단 한 번도 늦게 온 적 없는 할머니는 오늘도 나보다 일찍 아파트 정문에 와계셨다.
“할머니―, 이을이 왔어요.”
“안녕, 이을 씨―.”
가벼운 포옹을 한 후에 할머니는 목욕탕 의자 두 개를 바닥에 놓으셨다. 아예 나도 앉아서 쉬고 가라고 판을 깔아주시는데 그냥 갈 수는 없어서 묵례를 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날이 추우니 음료를 바꿔봤다며 따끈한 쌍화탕 한 병을 건넸다.
“이번 한 주도 잘 보냈어?”
“네. 아, 그리고 저 사귀게 된 애 있잖아요.”
“응, 그 친구가 왜? 속 썩여? 내가 뭐라고 혼내줄까?”
“아이, 아니에요. 걔 되게 착해요. 다른 게 아니고 제가 임신을 해서요.”
“이, 임신……? 아이고, 이런 경사가 어디 있어, 파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장하다, 장해!”
친손주가 아이를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에게 안겨 조금 울었다. 우리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이을이 네가 언제 커서 애를 다 가지고’ 이랬을 텐데. 물론 키우던 강아지의 새끼를 밴 건 놀랄 노 자지만…….
하지만 내 조부모도 하늘나라에서 어디에서 굴러먹다 온 시시껄렁한 새끼들보다야 착실하고 나밖에 모르는 곤이 100배는 낫다고 생각할 터였다. 두 분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으니까.
싱숭생숭한 마음에 나답지 않게 할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할머니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말했다.
“아무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나만 해도 우리 이을이한테 받은 게 얼마인데. 이렇게 마음씨가 고운데 아이랑 이을이, 이을이 남편까지 다 잘될 거야.”
“안 그래도 오늘 남자친구네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려고 했는데. 저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뭐 어쩌겠어요? 이미 애까지 생겼는데.”
“얼씨구, 누가 우리 이을이를 싫어해? 사람 볼 줄도 모른다, 참. 걱정 마. 무시하고 직진해, 직진.”
쪼글쪼글한 손등 주름이 쫙 펴질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서 하늘을 향해 휘두르는 할머니의 앞에서 어떤 상념에도 젖지 않고서 활짝 웃었다. 나와 곤의 편이 아닌 사람은 그 부모…… 부모 중에서도 곤의 아버지뿐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할머니와 헤어진 후 잔무를 마치고서 곧장 집으로 갔다. 아니, 집으로 가기도 전에 곤이 경비실 근처의 정자에서 단솔이와 놀고 있는 게 보여서 그리로 발걸음을 조심히 옮겼다.
“앗땅! 우리 형아 개롭히지 마!”
“뭐가 악당인데. 서, 설마 나?”
“그예, 이 앗땅아!”
“악당은…… 악당은 너야, 네가 이을이한테, 뽀, 뽀뽀만 안 했어도! 난 그렇게 안 했어!”
둘이 하는 대화가 너무도 유치찬란해 차마 길게 들어줄 수가 없었다. 키즈폰을 흔들며(단솔아, 그게 무슨 무기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진심으로?) 언제든 이을 형아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하는 단솔의 앞에서, 곤은 똑같이 자기도 핸드폰을 흔들며(제발 그만!) 누구는 전화 못 하는 줄 아느냐고 소리쳤다.
기어이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서 누구의 전화를 먼저 받는지 보자고 씩씩대는 둘의 사이에 후다닥 합석했다. 곤은 세 살 아기라고 봐주는 어른이 아니라 내가 중재를 해야 했다.
“왜들 싸우고 그러냐……. 아파트 시끄러우면 경비원으로서 아주 피곤해지거든?”
“형아!”
“이을아!”
“그래, 그만들 싸우고……. 단솔아, 형아가 내일부터 다음 주까지 내내 일을 안 나오거든. 그러니까 경비실에서 형아 찾으면 안 된다고 말해주려고 했어.”
“우웅…… 왜?”
맑은 눈망울에 서서히 차오르는 서운함이 선하게 보였다. 나는 무릎에 단솔이를 앉히고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건 굳이 숨기려고 한 게 아니었으나 곤으로서는 심통이 나는 일이었나 보다.
“왜냐면, 이을이는 나랑, 단둘이서만! 여행 가거든.”
“……흐애애앵―!! 나도, 나도 데꾸 가―!!”
“너네 정말 쌍으로 사람 돌게 할래……?”
꺼이꺼이 우는 단솔이를 달래느라 나는 곤의 부모가 우리를 본 줄도 몰랐다.
종국에는 딸꾹질까지 하는 아이를 열과 성을 다해 달랜 후 집으로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곤을 살필 수 있었는데, 곤은 삐진 게 역력한 얼굴을 하고서도 내 어깨를 안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좋은 아빠가 되겠다더니 표정 관리는 아직 힘든 모양이었다.
“단솔이는 아직 세 살밖에 안 됐잖아, 곤. 그리고 애기 때는 원래 소유욕이 엄청 강해서 그래. 이해해줄 수 있지?”
“……나도 인간 된 지 이, 일 년도 안 됐어. 이을이밖에, 없다고.”
“응, 나도 곤이밖에 없지.”
“아냐, 너는 악마 꼬맹이도 있고, 폐, 폐지 할머니도 있고, 경비 아저씨도 있어.”
“그래도 섹스하는 건 곤이뿐이잖아.”
싫은 티를 팍팍 내던 곤은 섹스하는 사이라는 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이 속되고 삿된 강아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몰래 속으로 한숨짓고서 곤을 따라 그 애의 집으로 향했다. 미리 여자에게 언질을 줄까도 싶었지만, 곤을 버린 여자에게 시시콜콜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가 좀 넓은 게 아니라 10분이 넘게 걷고서야 곤의 집에 도착했다. 곤은 중간에 자기가 업거나 안고 가겠다고 칭얼거렸지만 그 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임신 3주 차에 이렇게 유난인데 이걸 다 받아주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경비복을 입고서…… 아파트 주민들이 오가는 단지 안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 서이을입니다.”
“음? 이을 씨가 어쩐 일로…… 우선 들어오시죠.”
이미 여러 번 마주했던 사이이고 집을 오가며 식사도 했기에 그냥 들어가자는 곤을 만류하고 굳이 벨을 눌렀다. 곤에게는 나중에 이게 예의라고 설명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벨을 누르며 그나마 좀 편한 여자가 맞아주길 바랐는데 애석하게도 곤의 애비 같지도 않은 놈이 문을 열어줬다. 첫 스타트가 영 좋지 않았다.
곤은 나를 아래위로 빠르게 훑는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나를 제 뒤로 보내 숨겼다. 멋있고 기특해서 허리를 안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 애의 옷깃만 살짝 쥐었다. 남자는 그런 나와 곤을 번갈아 보며 ‘아주 놀고들 있네’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비웃었으나 나나 곤이나 ‘어쩌라고?’의 마인드로 임하는 게 오늘의 콘셉트였기에 타격은 없었다.
남자와 우리 둘이 사이좋게 노려보는 중에 여자가 나왔다. 그는 곤의 뒤에 서서 꾸벅 인사하는 내게 가볍게 손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부인이 그러는 것에도 배알이 뒤틀렸는지 입매를 보기 싫게 일그러뜨렸다.
“아주…… 친해졌나 봐?”
“자주 보는 사이잖아요. 이을 씨가 경비원 된 후로는 겸사겸사 차도 한 잔씩 하고.”
“서이을 씨랑 당신이 친하게 지낼 사이던가?”
저 새끼는 비아냥이 아주 몸에 뱄네, 뱄어. 곤의 뒤에서 혀를 끌끌 차며 여자에게 좆같이도 구는 남자를 노려보는데, 여자도 성질이 장난 아니었다.
“어쩌면 당신보다 이을 씨랑 더 친할지도요.”
남자의 성질을 긁는 말에 솔직히 깜짝 놀랐다. 여자와 남자는 언제나 사이가 좋아 보였으니까. 그래서 자식 버리고서 금슬 좋으면 뭐 하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대화는 거의 한판 붙어보자는 수준 아닌가.
살벌한 분위기에 현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나를 돌아본 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이을이는 나랑만 친한데’ 같은 말이나 했다.
“뭐? ……당신은 이따 얘기하고. 서이을 씨는 오늘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보통 곤을 본인 집으로 끌어내시더니만.”
“제가 언제 곤을 끌어냈다고…… 그냥 예행연습 같은 겁니다.”
“무슨 예행연습 말씀하시는 거죠?”
싸가지 없는 새끼. 아무리 내가 우스워 보여도 우선 집에는 들어오라고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어른들께는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이 남자와는 굳이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고 대충 통보만 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노선을 변경했다. 상대방이 예의가 없다면 나도 예의 없이 굴 수 있었다.
“결혼해서 살림 합치면 매일같이 붙어있을 텐데, 제가 아무래도 혼자 지내던 시간이 길다 보니 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봤어요. 그게 답니다.”
“이을 씨, 결혼이 둘만 좋아서 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특히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집안끼리 연을 맺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별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자기 할 말만 줄줄 늘어놓는 남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기회는 없었다.
“그, 그렇게 좋으면 아저씨나, 또 결혼해.”
“……곤, 아버지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을이 임신했고, 나, 나는 이을이 없으면 죽어.”
“뭐?”
“내가 결혼하고 싶은 건, 이을이뿐이라고.”
기특한 내 강아지가 속 탈 틈도 없이 다다다 쏘아붙이기 시작했으니까.
그 순간 남자의 턱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성질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게 훤히 보이는데도 곤은 ‘그래서 어쩌라고’의 태도를 유지하며 자기 할 말만 다다다다 내뱉었다. 슈트 한번 입으면 사람들이 어깨 좀 보라고 수군거리는 곤 못지않게, 그 아버지라고 덩치가 좀 좋은 게 아닌 남자의 앞에서 주눅이 들 만도 한데.
“임신했으니까 빨리 결혼, 하고 싶어. 아니, 할 거야.”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이,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마. 우리 애기가 들어. 그리고 돈은 한 200억 정도 줘.”
“허! 200억? 200억이 뉘 집 개 이름이야?”
“내 이름은 곤인데?”
“그게 아니라,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못 알아들어?!”
“200억이나 줘. 20년 전에 나를 버렸으면, 그 정도는 줘야지. 그리고 가, 감옥에나 가버려.”
곤은 열받은 남자의 앞에서 자기 할 말만 빠르게 쏟아내더니, 한술 더 떠 비꼬는 말은 알아듣지 못하고 별안간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그런 곤의 뒤에서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내 이름은 곤인데? 부터 다짜고짜 200억을 내놓으라고 맡겨 놓은 것처럼 구는데 밉살스럽지 않은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뒤에서 부들부들 떨며 웃음을 참는 나를 힐끔 돌아본 곤은 어디 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남자는 그 작은 모션에도 화들짝 놀라며(때리는 줄 안 모양이다) 불같이 화를 냈는데, 곤이 시끄럽다고 귀를 막자 뒷목을 잡았다. 곤은 그러거나 말거나 뒤를 돌아 내 귀까지 막아줬다.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더니 이렇게 무대뽀로 나간다면 내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긴 했다.
살벌한 분위기가 될 줄 알았으나 독야청청 자기 갈 길만 가는 곤의 무뢰배 화법 덕분에 남자는 어이가 없어졌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사이를 여자가 치고 들어왔다. 아주 냉소적인 말투로.
“200억은 못 줘도 결혼은 제 뜻대로 하게 두는 게 어때요?”
“당신까지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곤까지 죽는 꼴 보느니 차라리 유산 포기하는 게 나아요.”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뱉어낸 여자는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릴 정도로 숨을 부자연스럽게 쉬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토사물을 쏟아낼 것 같아서 나는 반사적으로 곤의 손을 잡았다. 그 애는 내 불안함을 읽었는지 단단히 힘주어 깍지를 꼈다.
제 말을 가로막은 여자에게 무어라 할 줄 알았으나, 남자는 마른세수만 벅벅 해대고서 당장 다 꺼지라고 했다. 곤은 자기 짐은 나중에 챙기러 다시 오겠다고 한 후에 내 손을 잡고 그대로 집을 다시 나갔다. 고작 1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이러려고 찾아온 건 아닌데, 그런데 곤까지 죽는 꼴을 보느니 유산을 포기하겠단 건 뭔 소리지, 이대로 결혼해도 되겠지, 같은 생각이 혼재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에 비해 곤은 아주 후련한 얼굴로 산책을 하자는 말이나 했다.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곤을 보자 또 깊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해서 그러자고 했다.
“우리 인사, 성공적이었다. 그, 그치?”
“성공적으로 한바탕하고 나왔지. 근데 200억은…… 200억은 무슨 소리야, 곤……. 나 거기서 웃을 뻔했어.”
“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야.”
“200억이나?”
“200억, 밖에야. 이, 이을이 너 20억밖에 못 받았지? 어이가 없어. 그거, 고작 그거 주고서 결혼도 못 하게 하려고 했어. 감옥 가야 돼.”
자기 아버지에게서 200억을 갈취한 다음 감옥까지 보낼 생각을 하는 곤이 너무 웃겨서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곤은 내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하다가 어찌 돼도 좋다는 듯 나를 안아주었다. 우리는 백허그를 한 채 뒤뚱뒤뚱 산책로를 걸었다.
“다, 다 잘될 거야, 이을아.”
“응! 당연하지, 다 잘될 거야. 곤이 네가 있으니까.”
뒤에서 내 귀를 앙앙 물며 돈을 반드시 받아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곤과 200억 안 주겠다고 하면 50억이라도 뜯어내자고 작당 모의를 하다가 또 웃고 말았다.
* * *
곤의 부모에게 깽판에 가까운 결혼 통보를 하고 난 후 크게 변한 게 있다면 곤의 거주지였다. 곤은 정말 그날 이후 새벽녘에 자기 짐만 약소하게 챙겨서 내가 사는 집으로 온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런 속담을 말하며 짐을 차근차근 푸는 곤이 귀여워 볼이 뚫릴 정도로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뽀뽀는 그 애가 보일 때마다 해도 질리지 않았다.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스무 살답지 않게 살이 없는 볼은 조금 속상했지만, 곤은 자기가 열심히 몸을 가꿔야 내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말하며 운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곤, 그런 말은 누가 해줬어?”
“유, 육득근 트레이너님이.”
“육득근……? 트레이너분 이름이 되게…… 운동 엄청 잘할 것 같은 이름이시다.”
곤이 다니는 헬스장의 트레이너는 본 적 없지만 뭔가 단단한 짱돌 같은 사람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회사에도 나가지 않고 매일같이 운동을 하는 곤은 헬스장이며 복싱장에서 마사지하는 법도 배워 아침저녁으로 내가 일을 다녀오면 지극정성 주물러주었다.
“이을아, 이리 와서 앉아.”
회사에도 나가지 않고 헬스장과 복싱장, 집만 오가게 된 곤은 자기가 이제 같이 사니 많이 챙겨줄 거라고 하더니 정말 거의 모든 집안일을 다 해냈다. 음식은 아직 잘하지 못해서 주로 청소나 빨래 위주로 열일하는 곤은 자기 전용 앞치마까지 입고서 하루 내 집을 쓸고 닦았다.
결혼식은 생략했지만 신혼이나 다름없기에 우리 둘은 넓은 집에서 하루 온종일 붙어 다녔다. 심지어는 식사를 할 때도 내가 곤의 무릎에 앉아 곤에게 밥을 먹여주고, 곤은 내게 먹여주는 식이었다. 누가 보면 ‘저 사람들 정말 생애 첫 연애인가 보다. 유난도 저런 유난이 없네’ 하겠지만, 그게 사실이니 달리 반박할 말도 없었다.
“아, 시원하다―.”
“시, 시원하지? 트레이너 선생님한테 배웠어. 조, 좋은 남편 되려면 마사지도 잘해야 된대.”
“마사지 못해도 나는 너 좋아하는데?”
“아, 그, 그치! 나도, 나도……. 많이 좋아해, 이을아.”
임신 전에는 눈만 마주치면 붙어먹었으나 곤은 남성 수인의 경우 임신 기간 동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지켰다. 섹스를 못 하는 건 좀 아쉬웠으나,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길어진 건 더없이 좋았다.
“우리 예전에 휴게소에서 살 때 있잖아, 집이 좁긴 했어도 좀 재밌었어.”
“맞아. 할아버지랑, 하, 할머니랑 넷이서 놀러도 가고.”
“냇가 놀러 갔던 거 기억해?”
“그, 그럼! 우리 또 가자, 거기. 다음에는 우리…… 애기랑 같이.”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미래 계획을 세우는 건 우리가 침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이 되었다.
경비실에 말했던 대로 연말에는 일주일간 휴가를 쓸 수 있었다. 그동안 곤과 나는 한 번 더 그 애의 집에 인사를 하러 갔고, 문전 박대를 당했다. 남자는 200억 염불을 외는 곤에게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돈을 밝히느냐고 소리쳤고, 내가 너 닮아서 그런 거라고 반박하자 우리 둘을 쫓아버렸다. 못 할 말 한 것도 아니구먼.
이번에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는 거였다.
“누구…… 어? 안녕하세요!”
“왜, 왜 왔어?”
“둘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와봤어요. 내가 방해한 건 아니죠?”
“방해한 거 마, 맞아. 가.”
“곤, 왜 말을 그렇게 해. 잠시만요, 금방 차 내올게요.”
“이을이는 가만히 있어, 내가 갖고 올게.”
며칠 뒤 우리는 여행을 가기로 한 상태였다. 해외로 나가는 건 좀 부담스럽고, 간단히 국내 기차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듣자 여자는 신혼여행이나 다름없는 거네요, 라고 말한 후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딱히 우리가 같이 사는 걸 반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아서 나나 곤이나 서로에게 기대어 여자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기다렸다.
여자는 그답지 않게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임신한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이 아니면 말을 할 용기가 없다면서 운을 뗐다.
“며칠 전에 이을 씨랑 곤이 인사하고 간 후에 남편이 악에 받쳐서 자식들이 다 자기 뜻대로 안 따라준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커 왔는데 자기 자식들은 왜 이러는 거냐고. 그 말을 들으니까 이해가 갔어요. 지금이야 시아버지가 늙고 병들어 힘이 없지만 젊었을 때는 자기 아들 학대하면서 키웠겠구나, 싶더라고요.”
여자는 사고로 죽었다던 곤의 형은 사실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고 말했다. 자기가 장기말처럼 쓰일 게 보이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얼굴도 모르지만 자기 동생에겐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굴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다고도 말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여자는 눈물을 보였다. 그가 자기가 낳은 자식인 곤보다 죽은 곤의 형을 더 자식처럼 아꼈다는 게 와닿았다.
한동안 훌쩍이던 여자는 곤의 아버지가 돈, 돈 거리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자기도, 남편도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곤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곤은 우려했던 것과 달리 하나도 충격받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할아버지한테…… 가, 가봐야겠어.”
“할아버지?”
“응, 이을이 너도 가, 같이 가자. 200억도 받아야 되구.”
여자는 여전히 200억에 사로잡혀있는 곤을 보며 울다가 웃었다. 나는 그게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곤 나름의 농담인 걸 알아서 같이 웃었다. 사려 깊고 다정한 곤은 누구보다도 내가 웃길 바랄 테니까.
* * *
“곤…… 나 이렇게 입고 인사 드리러 가라고?”
“귀, 귀엽기만 한데?”
“…….”
크리스마스 선물이랍시고 방울이 달린 털모자에 크리스마스트리 자수가 놓아진 장갑, 빨간색 어그 부츠까지 내게 씌우고, 신긴 곤은 연방 사진을 찍더니 자기도 내 옆으로 와 셀카를 찍어 곧장 핸드폰 배경 화면을 바꿨다. 그렇게 한참 사진 한 방에 뽀뽀 한 번을 반복하더니만 하는 말이 저거였다. 귀엽기만 하니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이 착장 그대로 가자고.
이게 귀여운가……? 스물다섯이나 먹고서 이렇게 유난스럽게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것도 처음인데 이 차림새 그대로 결혼할 사람의 조부모를 뵈러 가는 게 맞나……. 좀 아닌 듯해서 고개를 저었지만, 나를 따라 고개를 저으며 금세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서 서운해하는 곤을 보니 그냥 가도 될 것 같았다. 내 새끼 불쌍한 척도 이제 이렇게나 잘하는구나.
“만약에 할아버지가 내 옷차림 보고 뭐라고 하시면 곤이 편들어주기!”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다, 다신 안 볼 거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뭐든 극단적이구나, 우리 강아지.
곤의 할아버지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곤을 무척 아낀다고 했다. 곤은 할아버지가 자기를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를 좋아하니 저가 데리고 가는 나도 좋아할 거라고 신나 했다.
잔뜩 긴장한 나를 안심시켜주며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는 곤에게 힘입어 내 나름대로 선물로 과일 바구니를 산 나는 택시가 멈춘 곳을 보고서 아연해졌다.
“할아버지가 여기에 사셔?”
“응!”
“나 이런 데 처음 봐.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못 봤어, 이런 집은…….”
이게…… 한국에 이런 집이 있다고? 벨도 없는 육중한 대문은 곤이 발을 내딛자마자 드드드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유난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곤의 손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꼭 쥐고서 그 애 곁에 바짝 붙어 걸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식사는 하셨나요?”
“아, 아직요. 할아버지랑 같이 먹을게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방에 식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냄새 너무 심한 건 안 돼요, 우, 우리 남편이 임신을 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입덧도 안 하는데 곤은 메이드로 보이는 사람에게 구태여 식사를 신경 써 준비해달라고 하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파트도 아니고 그냥 주택인데 엘리베이터가 있다니. 심플과는 거리가 먼, 잔뜩 꾸며진 공간에 주눅이 들었다. 어쩐지 난 곤과 잘 안 어울리는 사람인 것만 같고 역시 나보다는 선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부잣집 여자들이 곤에게 더 걸맞은 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곤의 옆에 가상의 다른 여자를 세워두기까지 했던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려 뺨을 가볍게 때렸다. 임신하고 난 후에 호르몬 때문인지 기분이 오락가락해서 이렇게 가끔 정신 차리자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아직 혼인신고도 안 했는데 벌써 기죽으면 안 되지.
옆에서 부산스럽게 구는 내게 곤은 걱정 말라고 다정히 말했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니 당연히 너를 좋아해줄 것이라고 하는 그 애에게 알겠다고 한 후 할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곤이 왔어요.”
“안녕하세요, 할아버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서이을이라고 합니다.”
“……앉아요.”
곤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할아버지는 시종 냉랭한 표정과 말투로 사람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던 곤도 나중에는 곤란한 기색을 띠며 할아버지께 어디 아프냐고 넌지시 묻기까지 할 정도였다.
아주 고개까지 팩 돌리고서 나와 곤을 쳐다도 안 보던 할아버지는 ‘네가 싫어죽겠다’라는 눈을 하고서 곤에게 이르듯 말했다. 내게 하는 삿대질은 덤이었다.
“저치가 너를 빌미로 20억이나 받은 걸, 곤 너도 알고 있는 거냐? 돈 때문에 순진한 너를 꼬드겨서 임신부터 해 왔는데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불같이 화를 내고서도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할아버지를 내려다본 곤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화가 난 노인을 뒤로하고 그 집에서 벗어났다. 너무 빨리 일어난 일이라 내가 상황 파악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 집과 꽤 먼 곳에 닿아있었다.
“고, 곤아. 그래도 간다고 인사는 드리고 왔어야…….”
“이을이 너는, 그,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돼.”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조바심을 내던 나는 곤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아, 진짜 울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우리 아기까지 불청객 취급을 받으니 솔직히…… 너무 슬펐다.
눈물이 맺혔을 게 분명한 눈을 팔로 가리자 곤은 그런 나를 한 품에 가두고선 토닥거렸다.
“나한테 가족은 이을이랑, 우리 애기뿐이야.”
“응, 흐으…… 나도.”
“세,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이을이 하나.”
끝없는 사랑을 담아 하는 위로에 나는 곧 괜찮아졌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네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면 족하니까.
* * *
아무도 우리 사이를 반기지 않았지만 곤이나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만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곤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아서 우리는 계획대로 여행을 떠났다.
“아―.”
“아―!”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이, 이을이도 아아―.”
기대를 많이 할수록 기대와 어긋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혹여 그럴까 걱정했는데, 곤과 함께 여행하는 내내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둘 다 처음 가는 여행인 데다 오붓하게 휴식을 취하는 데 목적을 둬서 빡빡하게 일정을 짜지는 않았다. 그냥 발 닿는 곳마다 길 찾기 어플로 맛집을 검색해서 매 끼니를 해결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다니.
포크에 파스타를 돌돌 말아 한입 가득 넣어준 곤은 내가 엄지를 치켜들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왼손을 쥐고서 쉴 새 없이 쪽쪽거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곤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게 지극히 그 애다워서 나도 시원스레 뻗은 입매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기만 하고 저지하지는 않았다. 실은 곤이 나를 예뻐해주는 게 좋아서 그런 거였다.
임산부이니 무리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을 철석같이 따르기 위해 곤과 나는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보다는 숙소에 오래오래 머물며 한량처럼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는 새벽같이 일어나지만 여행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곤의 품에서 오래오래 그 애 가슴팍에 코를 묻고 있다가 새벽 기운이 모두 물러난 하늘이 보일 때쯤 천천히 일어나곤 했다.
“오늘은, 사진 찍으러 갈 거야.”
“어디로?”
“바, 바다! 바다에 가줘야, 그게 진짜 여행이랬어.”
“그런 건 또 누구한테 들었어.”
“육득근 트레이너님한테―.”
이지오 가고 육득근 왔구나.
인간이 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곤의 인간관계는 아주 좁았다. 나, 부모, 할아버지, 이지오. 이제 거기에 육득근 트레이너가 더해졌으니 손가락 다섯 개는 넘기게 되었구나. 한창 이지오, 이지오, 노래를 불러서 나를 좀 불안하게 만들던 곤은 이제 육득근 타령을 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헬스장에서 근로계약서는 언제 작성한대?”
“여행 다녀오면. 내가 잘 모, 모른다고 했더니, 마누라한테 물어보랬어.”
“하하! 갖고 오면 마누라가 봐줄게, 곤―.”
“응…… 근데 나, 나는 마누라 말고, 여보가 더 좋아, 이을아.”
“알겠어, 여보.”
이제 막 인간이 되었을 때처럼 말을 심하게 더듬지는 않지만, 사회초년생에 인간초년생인 건 변함없기에 곤의 첫 사회생활이나 다름없는 헬스장에서의 일이 궁금했다. 육득근…… 이름에서부터 오는 압박감이 상당하지만 곤을 괴롭힌다면 살려두지 않으리, 부리로 쪼아서 생살을 찢어버리리……!
혼자서 언제라도 그를 해할 심신의 준비를 마친 나는 곤이 무탈히 헬스장과 복싱장을 오가며 건강해지기만 하는 걸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냥 계약서의 내용만 잘 봐주기로.
여보 소리에 볼을 발갛게 붉힌 곤은 내 혀를 쪽쪽 빨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제 캐리어에서 무언가를 꺼내 크로스 백에 넣었다. 뭘 넣나 궁금해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급히 내용물을 가리며 가방을 챙기는 게 뭐가 있어도 있는 게 확실했다.
“곤, 그거 뭐야?”
“모, 몰라도 되, 되는데?”
“뭔데에―. 왜 말 안 해줘? 부부끼리는 숨기는 거 없어야 돼.”
“아, 아아, 아무것도 아냐.”
아까까지만 해도 천천히 말하며 별로 말을 더듬지도 않던 곤이 사정없이 말을 저는 걸 보니 곤의 부모나 조부에게서 무슨 연락이 온 것일지도 몰랐다.
가방끈을 목숨줄처럼 쥐고 있는 곤이 조금 짠해서 아무렇지 않게 얼른 나가자고 말했다. 자기가 먼저 숨겨놓고도 곤은 그날 하루 종일 내 눈치를 보며 가방을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진을 찍을 때도 신줏단지처럼 꼭 안고 있기에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모른 척할 거면 끝까지 모른 척하자. 자꾸 가방으로 향하는 시선을 갈무리하다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 이을아, 별로 안 춥다, 오늘. 그치?”
“손 시린데…….”
“아, 손? 손 이리 줘.”
여행 기간 내내 내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얼른 숙소로 가자고 자기가 먼저 설레발치던 곤은 웬일로 자꾸 밖에 있자고 했다. 내일이 여행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싶으면서도 손과 발이 시려 얼른 숙소로 가 쉬고 싶었던 나는 철없이 보일 걸 알면서도 불퉁하게 발을 구르고 입술을 내밀며 삐진 티를 냈다. 전부 네가 나한테 삐졌을 때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하늘 한 번, 손발이 시리다고 투정 부리는 나를 한 번 본 곤은 결심했다는 듯 가방을 꽉 쥐고서는 나를 끌고 인적이 드문 백사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공간에는 역시나 이유가 있어서 백사장에는 모래보다 쓰레기가 더 많아 보였다. 흉흉한 분위기에 뭐 이런 데를 데리고 왔나 싶었는데, 곤은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백사장에 파묻고는 얼른 내 곁으로 달려왔다.
“와아…….”
혼자서 쪼그려 앉아 연신 꼼지락거리더니만, 아침부터 가방에 몰래 챙겨 온 게 폭죽이었구나.
이제야 새카매진 밤하늘에 곤의 싸구려 폭죽이 난잡한 밝음을 뽐내며 분분히 흩어졌다. 불꽃놀이라고는 해본 적 없지만 이게 아주 망한 불꽃놀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악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을아.”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이틀이나 지난 시점, 주황빛과 노란빛으로 점점이 타오르는 불꽃은 왜 이다지도 낭만적인지.
우리는 그 밤 내내 가방에 한가득 들어있는 싸구려 폭죽을 터뜨리며 놀았다. 나중에는 불꽃보다도 우리 둘의 코끝, 손끝이 더 빨개서 킥킥 웃다가 아주 거창한 키스를 했다. 쓰레기가 가득한 백사장에서 꼭 우리 둘만 딴 세상에 와있는 기분은, 최고였다.
* * *
임신했다는 것을 안 후로 경비실장은 되도록 내게 힘든 일을 하지 않게끔 배려해줬다. 정말 이렇게 착한 사람인 줄 몰랐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나가면 이 아파트에서 따로 경비원을 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나온 배려이긴 했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그래도 매주 금요일 폐지 업무만은 계속 내가 했다. 폐지를 틈틈이 모아 구루마에 싣고서 아파트 정문까지만 가면 되는 일인 데다 경비실장은 그 일만큼은 자기가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할머니와 떠드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 일은 내가 계속하고 싶었다.
여보야 모행-3-? 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