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아직은 아니야, 비밀이야 (5/14)

5. 아직은 아니야, 비밀이야

인근 세탁소에서 몸에 맞게 줄인 경비원 복장을 받았다. 며칠 전 경비복을 처음 받아와 입었을 때 곤이 얼마나 웃던지.

이, 이을아, 이거 할아버지 옷 아냐?

아니거든! 줄이면 되니까 웃지 마!

귀여워서 그러지―, 우리 애기―.

소매도 바지 기장도 너무 길었다. 품이 큰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도 일할 때는 품이 좀 낙낙한 게 좋으니까 괜찮았는데, 소매랑 바짓단을 내 팔다리에 맞게 둘둘 말고 보니 이건…… 이렇게 입고는 일을 못 할 지경이어서 수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와, 왔어, 이을아? 나 깨워서 같이 가지.”

“금방 다녀오는데 뭘. 잘 잤어?”

“응…… 이을이네 집에서 계, 계―속 살고 싶다.”

처음 이사 올 때 45평은 혼자 살기에 너무 넓어서 외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건 기우에 그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제집 드나들듯 내 집에 오는 곤 덕분에.

곤의 부모는 내가 곤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걸 경계했다. 아무래도 내가 곤을 구슬려 돈을 갈취할까 봐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니면 아주 불온한 사상을 주입할 거라고 생각하든가.

하지만 내게는 누군가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할 정도의 집요함과 신념 같은 게 없었고, 곤에게는 내게 따로 빼서 줄 돈이 없었다. 설령 곤에게 돈이 있더라도 나는 내 하나뿐인 가족인 곤의 돈은 받기 싫었다. 곤과 나는 과자 한 봉지도 나눠 먹는 사이인데. 돈을 뺏을 거면 여자나 남자에게 따로 연락하는 편이 더 나을 터였다.

“짠! 이제 잘 맞지? 나 잘 어울려?”

“최고야. 자, 잘 어울리고, 귀여워. 이뻐!”

곤의 부모가 곤을 돈으로만 보는 것과는 별개로 곤은 그들의 재력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동화책 읽는 정도야 이제 껌이었고, 가끔은 내게 책 추천을 해주기도 했다. 다양한 콘텐츠를 두루 섭렵하는 곤은 가끔 나 보란 듯이 안경을 쓰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주 멋있다고, 꼭 드라마에 나오는 본부장님 같다고 해줬다. 물론 드라마의 본부장님은 칭찬 한 번에 강아지 귀와 꼬리를 내놓지 않지만.

내일이 내가 경비로 첫 출근 하는 날이라는 이유로 곤은 오늘도 내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이유 없이 와도 괜찮다고 했지만, 곤은 언제나 이유를 붙였다. 혼자서 자면 무서우니까, 식사를 혼자 하면 맛없으니까, 산책은 언제나 둘이 해야 되니까. 수많은 이유들을 붙이는 이유가 내게 필요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싶어서인 걸 알아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복을 입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곤은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몇 번 말했지만 안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말하라는 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두었다. 그리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해 엉덩이에 불뚝 선 곤의 것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얼른 자자. 나 피곤해.”

“응, 가, 같이 자자 이을아.”

기특하게도 곤은 지난번 휴게소에서 마운팅을 하고,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자위를 한 일을 빼곤 나를 곤란하게 만든 적 없었다. 곤은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발기한 채 색색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든 곤을 뒤에 두고서 잠들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

* * *

보호자로서 첫 출근을 함께 하겠다고 우기는 곤을 회사로 보내고서 경비실로 향했다. 함께 일하게 된 아저씨의 이름은 구마적 같은 얼굴과 안 어울리게 부드럽고 달콤한 발음의 이연우였다. 정말 매치가 안 되어서 한 번에 외워지긴 했다.

“우선 오늘은 첫 출근이니까, 아이참, 또 이게 여기 이을 씨가 살다 보니까 내가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여기에 안 살아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라고 말하려다가, 지금껏 봐온 50대 아저씨들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소귀에 경 읽기가 될 게 뻔해서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남자는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오늘은 그냥 아파트 단지를 구석구석 살펴만 보라고 했다. 이 단지가 꽤 넓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노동이 될 거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뭔 놈의 쓰레기가 이렇게 많아?”

워낙에 아파트 단지가 넓어서 볼 게 없진 않았다. 그런데 웬 놈의 쓰레기가 이렇게 많은지, 자잘한 쓰레기는 이 아저씨가 나 치우라고 아예 안 주운 건가, 싶었다.

투덜거리며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돌면서 쓰레기를 줍고 돌아가자 두 시간이 지났고, 나의 상사인 이연우 아저씨는 경비실 앞에서 어떤 할머니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아니, 할머님! 자꾸 이렇게 폐지를 달라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저희 쓰레기 처리하는 업체가 온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나 같은 노인네한테 폐지 조금 준다고 그 업체가 망합니까? 그런 것두 아닌데…….”

“아이, 이거 여기 사람들이 보면 또 뭐라고 한 소리 듣는 건 나예요. 나가세요, 가시라고요!”

아주 작고 마른 할머니였다. 꼭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처럼.

주제넘은 행동 하지 말자, 그냥 내 할 일이나 똑바로 하다가 퇴근해서 곤이랑 맛있는 거나 시켜 먹고, 그러고 자야 되는데…….

“실장님, 할머니께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아, 주둥이, 주둥이!!

이연우 경비실장 아저씨는 내가 대뜸 끼어들자 벙쪄서는 허, 짧게 자신의 어이없음을 숨소리로 표현했다. 이 신입 경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전부 드러나는 숨소리였다.

대뜸 왜 그러냐는 식으로 따지고 들었으나 나도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첫날부터 잘리는 건 아니야? 어떻게 보자면 이 경비 일이 내 본격적인 사회생활 첫걸음인데 이렇게 OT날부터 상사에게 대들어도 되는 걸까?

제발 자르지만 말아 주세요……. 저 여기 사는 것도 집 매매한 거 아니고 전세라서 2년밖에 못 살 게 분명하거든요……? 사정사정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가오가 그 말을 막았다. 그리고 아저씨는 나와 내 뒤에 선 할머니를 번갈아 보더니 에휴,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만 이랬다.

“안 그래도 그 할머니 귀찮았는데, 이을 씨가 그럼 전담마크 해줘요. 그럼 나야 편하지.”

“예? 전담마크요? 전담마크……?”

“폐지 모아서 근근이 생계 유지하는 할머니인데, 이을 씨가 모아주시든가 하라고.”

전담마크 하면서 폐지 줍는 거나 도우란 건가? 여기 아파트에는 싹바가지 제로수가 흐르나, 일하는 사람도 저렇게 예의가 없네.

그냥 나오지 말라고 안 한 건 다행이었다. 안 잘렸으니까 몰래몰래 할머니한테 폐지도 좀 챙겨드릴 수 있을 거고, 그렇게 나쁜 전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할머니를 돌아봤다.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던 할머니는 나를 올려다보며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나는 휴게소에서 뭇 사람에게 두루두루 사과하며 살다 떠나가신 우리 할머니가 떠올라 주먹을 쥐었다.

“나 때문에…… 미안해요. 이거라도 먹어요.”

“네, 감사합니다!”

입사 첫날, 이름 모를 할머니께 박카스 한 병을 받았다.

* * *

내가 첫 출근을 하는데 왜 곤도 조기 퇴근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도어 록 비밀번호를 한 글자 눌렀을 뿐인데 벌컥 열리는 문에 깜짝 놀란 나를 안아서 실내로 옮긴 곤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오, 오늘 어땠어, 이을아? 나쁜 일 없었어? 좋은 일만 있었지?”

“음…… 우선 곤이 이거 마시고 있어.”

“이게 무슨…… 박……카, 스. 바, 박카스? 이거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먹던 거네!”

“기억해? 곤이 기억력도 좋다. 그래서 공부도 그렇게 잘하나 봐.”

“나, 나는 이을이밖에 모르는데?”

“……나 씻고 올게. 잠깐만 이거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

“응!”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빠뜨리지 않고 이마에 입 맞춰준 곤의 볼을 톡톡 치고서 샤워를 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경비실장은 내게 할머니를 도와 폐지라도 주우라고 하루 업무를 마칠 때까지 비꼬았고, 할머니는 내게 잘 부탁드린다고 하며 박카스를 한 병 주셨다. 사이에 낀 나는 힘이 없는 동시에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내 처지에 누군가를 위해준다는 게 얼토당토않은 말이기는 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3-4평 되는 공간에서 눕기만 하면 자기 바빴는데. 나는 도움을 받는 게 더 어울리는 사회 구성원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할머니에게까지 각박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주제넘은 생각을 하며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곤이 화장실 문 앞에 딱 붙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강아지 시절과 똑같아서 하던 생각이 전부 지워졌다. 곤은 웃는 나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오늘은 일 많이 안 했어. 그리고 재미는 무슨…… 일은 다 재미없지, 뭐. 곤도 회사 가는 거 재미없잖아.”

“응…… 재미없어. 근데, 그래도 가끔 어, 가―끔 재미도 있어.”

“그래? 어떤 재미?”

하루 종일 쓰레기만 줍다가 왔는데 재미는 무슨. 그나마 할머니가 오셨을 때는 좀 박진감 넘치기는 했지. 잘리는 줄 알았으니까. 그래도 나와 달리 곤은 오전 회사 생활이 재미있던 것 같아 다행이었다.

곤은 내 배를 조물조물 만지며 귀에 바짝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 이을이 생각하면, 그러면 갑자기 재미있어.”

“그래?”

“응……. 이을이 너도 나 생각해? 그, 그럼 좀 재밌어?”

나는 네 생각은 많이 하는데 조금 심란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인간이 된 너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기에.

* * *

경비 업무는 내가 이전에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소와 분리수거는 이미 휴게소에서 신물 날 정도로 했기에 익숙하게 척척 해냈는데, 경비실장은 그 점에서 크게 나를 칭찬했다.

“이을 씨는 손이 진짜 빠르네, 확실히 젊은 사람은 달라.”

“예전에 하던 일도 이런 일이었어서요. 익숙해요, 청소하고 정리하는 건.”

“아주 든든―하다니까.”

폐지를 줍는 할머니 편을 들었다고 경비실장이 내게 냉대나 홀대를 할까 걱정했으나 기우에 그쳤다. 그냥…… 이연우 경비실장은 여타 아저씨랑 똑같았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르륵 화를 내면서도 뒤돌아서면 ‘젊은 놈들 싸가지 없는 거 내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하는 아저씨들과 똑같아서 나도 그냥 무던히 근무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경비원 업무 중 가장 힘들고 고된 일에 속하는 청소와 분리수거야 그럭저럭 해낼 수 있으니 괜찮았지만, 문제는 택배였다. 하루에 택배가 도대체 몇 상자씩 오는지 쌓여있는 박스를 보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사실 아파트 문 앞에 택배 기사가 직접 가져다주면 될 일이었으나, 아파트 입주자들이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아파트에 들이는 게 조금 그렇다며(그럴 거면 택배를 시키질 말지)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경비실에서 택배를 관리해야 했다.

“P동 1001호요.”

“잠시만요, 혹시 이거 시키신 거 맞으세요?”

“네.”

“……제가 옮겨드릴게요. 이걸 혼자 옮기시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P동 앞까지 가져다드릴게요.”

아파트 주민들은 대체로 개념이 없었다. 쌀이며 감자, 양파 같은 식료품을 왕창 사놓고서 핸드폰만 덜렁 들고 오는 건 경비원에게 자기 짐을 들라고 시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택배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노인이면 또 말을 안 하겠는데 사지 멀쩡해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 덕에 경비실에 자리하고 있는 구루마는 덜덜거리며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경비실장에게 이건 좀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하니 그는 편한 소리 말라고 했다. 관리비 사용 내역을 분기마다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기재해서 각 동 게시판에 게시해야 하는데, 거기다 구루마 구매 비용을 적으면 아파트 거주민들이 분명히 들고일어날 거라고.

덜덜거리며 당장이라도 ‘이을아, 나 골로 간다―!’라고 소리치며 퍼질 것 같은 구루마로 족히 20킬로그램은 될 듯한 택배 상자를 옮기고 난 후 아파트 단지 순찰을 돌았다.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인 만큼 경비도 삼엄하게 해야 한다는 게 경비실장의 지론이었다. 안 그러면 지랄들을 한다는 말에서 그가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한 건가, 싶어졌다. 나도 휴게소에서 별별 일 다 겪었지만 이 정도로 인간 불신이 심하지는 않은데.

경비실장은 순찰을 귀찮아했지만 나로서는 그게 산책의 일환으로 생각되어 좋기만 했다.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챙겨 순찰을 돌면서 쓰레기를 주우면 일할 거리도 줄어드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순찰 돌고 오겠습니다, 급한 일 있으시면 전화 부탁드릴게요.”

“어어, 다녀와요. 별일 없을 거야. 오늘 택배도 얼추 다 정리됐고.”

“네―.”

경비 모자를 쓰고서 경비실을 나섰다. 틈틈이 마주치는 입주자들에게 묵례하며 쓰레기도 줍는 동안 폐지를 꽤 모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도.

지난주 폐지 줍는 할머니를 돕는 역할까지 맡게 된 후 몰래몰래 폐지를 꿍쳐놨다. 할머니께서는 아무래도 자기가 입주자가 아니다 보니 아파트 안까지 들어가는 건 안 되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래서 할머니와는 매주 금요일 오후 세 시에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할머니께서는 선뜻 약속을 잡는 내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셨다.

“오늘 구루마 과로한다, 과로해.”

순찰을 돌고 오니 경비실장 아저씨는 자느라 정신없었다. 그 틈에 얼른 모아놓은 폐지를 구루마에 실은 나는 아파트 입구로 달려갔다. 약속 시간까지는 5분 정도가 더 남아있었는데 지난주에 봤던 할머니의 좁은 등이 벌써부터 보여서 마음이 안 좋았다. 좀 늦게 오셔도 상관없는데. 아저씨가 툴툴거리긴 해도 이제는 나한테나 그러니 할머니가 이 이상 눈치 볼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

“아이고, 뛰지 마요! 넘어질라.”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천천히 오셔도 괜찮은데. 이번 주는 제가 근무 첫 주여서 눈치 보느라 조금밖에 못 모았어요. 다음 주엔 더 많이 모아서 드릴게요. 구루마 주세요, 이거 올려드릴게요.”

달달달, 요란스럽게 할머니에게로 달려가 할머니가 갖고 온 조그마한 구루마에 단단히 폐지를 쌓아 고정했다.

이 정도면 딱 됐겠다, 싶었을 때 익숙한 인영이 내게로 달려왔다.

“서―이―을―!”

“곤!”

달리기 선수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오는 곤의 뒤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곤의 부모는 이내 시선을 나와 내 옆에 있는 할머니에게로 옮겼다. 할머니는 그 둘을 보고는 내게 박카스 한 병을 주고서 자리를 떴다. 꼭 곤의 부모와 아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할머니가 탈탈거리며 작은 구루마를 끌고 가는 걸 쳐다도 안 본 곤은 내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박았다. 그러고는 코끝도 살짝 비벼 오기에 나도 할머니에 대한 생각은 더 이어갈 수가 없었다.

“퇴근했어? 오늘 바빠서 핸드폰도 못 봤다. 문자 답장 못 해서 미안해, 곤.”

“괜찮아, 이을이 시, 신입 사원이잖아. 이해할게.”

“그래주면 고맙고.”

“곤은 정말 서이을 씨를 좋아하네. 우리도 아들한테 점수 좀 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을 씨?”

저녁쯤에 근처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 가자고 도란도란 얘기하는 중간에 눈치도 없이 곤의 애비가 끼어들었다. 정말 눈치라고는 뭐에 쓰려고 해도 없는 사람이었다. 저번에도 곤과 김치볶음밥을 먹기 전에 오더니만 무슨 먹는 얘기만 하면 기가 막히게 초를 치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대꾸할 방법이 없었다. 그를 대하는 데 특별히 힘을 쏟고 싶지도 않았고, 부자에 드럽게 재수 없는 아저씨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까. 다만 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편이라 대뜸 짜증을 냈다.

“방법 없어요. 나, 나는 이을이만 좋아하니까.”

“허, 내가 너를 낳아준 아버지인데 말버릇이 그게 무슨.”

“아저씨 임신, 했었어요? 그, 그런 것도 아니면서.”

“…….”

사람 말문 막히게 하는 재주가 아주 으뜸인 곤은 내가 아랫입술을 꽉 물고서 웃음을 참자 저도 나를 따라 앞니로 입술을 꾹 물었다가 풀었다. 뭐라고 더 훈계하거나 비꼬는 말을 할 의지가 사라진 듯한 남자의 뒤에 꼿꼿하게 서있던 여자는 내 손을 쥐고 있는 곤을 한 번 보고는 이내 남편에게 팔짱을 꼈다.

“우린 가요. 애들 방해해서 뭐 해요.”

“그거야……. 하, 곤. 오늘 말했던 거 서이을 씨에게 꼭 말해야 한다. 알겠지?”

“……가!”

뭘 말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곤은 남자의 말에 대번 싫은 기색을 비치며 등을 돌렸다. 나는 어중간하게 사이에 껴서 곤의 부모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딱히 친하지는 않지만 나는 경비원이고 그들은 내가 일하는 아파트 단지의 거주민 중 하나였다. 인사는 기본이었다.

제 부모가 가는데도 눈길 한 번 안 준 곤은 일이 끝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내 말에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아까 전 네 부모가 내게 말하라고 했던 게 뭐였는지는 이따 들으면 될 것 같아서 나도 그러라고 했고.

빠뜨리지 않고 양쪽 볼에 쪽쪽 입 맞추는 곤을 집으로 보낸 후 경비실로 돌아왔을 때, 경비실장 이연우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나도 연차가 차면 저렇게 편하게 있을 수 있을까? 그 전에 이 아파트에서 나가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바지런히 잔업을 한 후 퇴근했다.

“이을아!”

“왜 나와있었어, 뺨이 다 땡땡 얼었네. 에구, 춥지?”

“하, 하나도 안 추운데? 엣치!”

곤과 햄버거를 먹기로 해서 쌩하니 경비실을 나왔는데 문 앞에 바로 곤이 있었다. 코랑 얼굴이 발개져서는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으로 나는 겨울은 처음이라 추울 게 분명해서 목에 하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줬다. 곤은 한사코 되었다고, 내 걸 뺏을 생각이 없다고 했으나 나는 곤이 감기에 걸리는 게 싫어 깨금발을 하고서 꿋꿋이 목도리를 둘러줬다.

“이을이도 애기라 추운데 진짜…….”

“그러니까 앞으로는 목도리 잘하고 단단히 입고 다녀, 알겠지?”

“응. 내가 어깨 아, 안아줄게. 이리 와.”

하루라도 내 보호자인 양 굴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곤이어서 나는 편안하게 그 애의 품에 기대어 걸었다. 곤은 그게 기꺼웠는지 제 오른팔로 안고 있는 내 팔을 살살 주물거리며 연신 웃었다.

“새우 버거 세트 두 개요. 아, 소프트콘도 두 개 주세요.”

“고, 고마워, 이을아.”

햄버거 가게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연말이 곧이어서 그런가, 거리에는 전에 없이 활기가 돌았다. 곤과 나는 겨우겨우 바에 자리를 잡고서 햄버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 구경을 했다. 아니, 나만 사람 구경을 하고 곤은 사람들을 보는 내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게 영 간지러워 나는 화제를 돌렸다.

“곤, 아까 곤이네 엄마랑 아빠가 나한테 무슨 말 하라고 했잖아. 무슨 말이었어?”

“어, 어?”

“아까 ‘이을 씨한테 말해라’ 이랬잖아. 궁금해서.”

“어, 언제? 기억이 안 난다, 나…….”

“기억 안 나?”

말 그대로 스몰 토크를 하기 위한 화제 전환이었다. 그런데 곤이 대놓고 회피하자 나는 정말 궁금해져서 꼬치꼬치 캐묻게 되었다.

기억 안 나는 거야, 아니면 말해주기 싫은 거야? 나 그러면 곤이네 부모님한테 여쭤봐도 돼? 왜 나한테 말 안 해줘?

유치하고 집요하게 물어보자 곤은 얼굴을 붉힌 채 옆자리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크게 말했다.

“비, 비밀이야! 몰라도 돼.”

“어, 어…….”

“……햄버거 받아 올게.”

자리를 뜬 곤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 애가 햄버거 세트를 받아 오기 위해 카운터로 향할 때에 얼른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햄버거도 맛있고, 소프트콘도 맛있었는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려왔다.

우리는 햄버거와 소프트콘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런 후에는 언제나와 같이 동네를 산책했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손을 꼭 잡았다. 평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말 안 해주지?”

곤이 내게 처음으로 비밀을 만들었다.

* * *

그날 이후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곤과 나는 거의 매일같이 만났고, 곤은 제 부모의 ‘서이을 씨네 집에 작작 좀 가라’라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종종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게 일상적이었다. 특별할 것 없이.

“곤, 오늘도 집에 올 거야?”

“어? 어, 오늘 일이 마, 많을 것 같아.”

하지만, 실은 일방적으로 묘하게 벽을 치는 곤을 내가 모른 척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곤이 그날 말해주지 않은 것, 곤이 내게 만든 첫 비밀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 곤은 그런 내 앞에서 눈치를 본다든가 손가락 거스러미를 부산스럽게 갉작거리는 등의 태도로 ‘여전히 네게 비밀이 있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오히려 말하지 않아서 더욱 명징하게 와닿는 태도였다.

“일 열심히 하고, 연락해 곤. 내일 보자.”

“……왜, 왜냐고 안 물어봐, 이을아?”

“바쁘다며. 바쁜가 보지, 그럼.”

“나한테 과, 관심도 없고…… 알겠어!”

문제는 그 비밀을 알기 무섭다는 것과, 곤에게 내가 같지도 않은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는 거였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곤은 어린 것도 어린 거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강아지였던 애였다. 그 애와 20년간 살아오며 내 딴에는 잘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곤이 더 빨리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무지함으로 인해 놓치고 만 사람이기도 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곤에게 평생 죄인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가족처럼 생각해왔고 지금도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라고는 곤뿐이긴 하지만 나 때문에 곤은 한창 배울 시기를 놓쳐버렸다. 곤이 말을 빠르게 배울수록 제때 공부했다면 대학도 가고 더 똑똑한 사람이 되어 그 애 집안에 걸맞은 지성인이 되었으리란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곤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줘야 하는데 왜 나는 곤이 만든 비밀 하나에도 이렇게 속 좁게 굴까.

“하아.”

“형아, 무슨 고민 이쪄?”

“고민? 음…… 있긴 해.”

가을은 다 갔다고 생각해도 여전히 나뭇가지에 자신의 흔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 덕에 매일 바삐 낙엽을 쓸고 다니는 게 내 일과 중 꽤 긴 시간을 차지했다.

“그염 내가 들어주께. 내가 척척박사자나.”

경비원으로 일하기 전 알게 된 세 살 꼬맹이 이단솔. 꼬맹이의 집에서는 당시 길 잃은 아이를 경비실에 인계해준 나를 아주 좋게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베이비시터와의 시간이 지겨우면 경비실을 강아지처럼 찾아오곤 했다. 단솔이를 볼 때마다 아주 어릴 적 곤이 떠올라서 요즘은 더 마음이 복잡했다.

쓰레기봉투에 못생기고 찢어진 낙엽은 주워서 넣어주고 색이 고운 은행잎이나 손가락처럼 다섯 갈래로 뻗은 이파리가 망가지지 않은 붉은 단풍잎은 매일 갖고 다니는 투명 크로스백에 쏙쏙 넣은 단솔이 내 손가락을 쥐어왔다. 그걸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나는 아이에게 막대사탕 하나를 물리고서 벤치에 앉았다. 레몬 맛 사탕을 빨며 동당동당 구르는 짧은 다리가 깜찍했다.

“단솔아, 너 그때 그 형아 기억해?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있던 형.”

“아! 앗땅 형!”

“악당……?”

“그 형아가 단솔이 밀어써!”

“그건 그렇지만…… 악당은 아니야. 그 형아 강아지로 변하면 엄청 귀여워. 늠름하게 잘생겼는데. 하여튼 간에, 그 형이랑 나랑 가족 같은 사이거든.”

“웅, 긍데?”

“원래 서로 비밀이 없었거든? 근데 요즘에 그 형이 나한테 비밀이 생겼어. 그게…… 좀 서운해.”

내가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한번 입을 여니 서운하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솔이는 내 말을 꽤 주의 깊게 듣는 눈치였다.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박이지도 않고 집중하느라 레몬 맛 사탕을 물고 있는 입이 헤― 하고 벌어져 침이 흐른 걸 내가 닦아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걸 보면.

주먹 쥔 손으로 벤치를 몇 번 통통 친 단솔은 사탕을 손에 쥐고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비밀이가, 어어, 형아! 원래가 그러차나.”

“뭐가 원래가 그래?”

“나 엄마한테 비밀잉데, 형아 만나러 오는 거!”

“진짜? 비밀이었어?”

“웅! 긍데 이단솔 세 살이야. 앗땅 형아가 이단솔보다 형아니까, 비밀이가 많지.”

“아아……. 그런가?”

“웅웅!”

말인즉, 자기는 세 살인데도 엄마에게 비밀이 있는데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그 형아는 당연히 비밀이 더 많을 거란 거였다. 간단하지만 일리가 있는 답이었다.

나는 단솔에게 그래도 비밀이 알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계속 모른 척하는 게 답이 아닌 것 같아서. 단솔은 이번에도 냉큼 답해줬다.

“그염 물어보자! 비밀이가 모야? 비밀이 알려주라―, 내가 너무너무 궁금하다―! 코― 못 잔다구.”

“단솔이 말대로 해야겠다. 고마워, 단솔아.”

보들보들한 볼에 입술을 꾹 누르자 킹킹 소리 내며 웃은 아이는 자신을 데리러 온 베이비시터를 따라 집으로 갔다. 혼자 벤치에 남은 나는 고민하다 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곤, 이따 통화 가능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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