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ata No.5 in F Major, Op. 24 ‘Spring’
「봄을 알리는 3월의 첫날, 때아닌 세찬 비와 폭설이 쏟아졌습니다. 소방 재난 본부에 따르면 전날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 서울 지역에서 100여 건의 폭설 피해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눈이 아주 쏟아지네, 쏟아져.”
창문 너머로 휘몰아치는 눈을 바라보던 예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겨울은 눈 한번 안 오고 지나가나 했더니 3월의 시작과 함께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테이블 위에 한가득 놓인 스콘과 쿠키를 바라보던 청아가 노릇노릇한 빛깔의 스콘을 하나 골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최근, 베이킹에 빠진 예진은 틈만 나면 과자를 구워 학원으로 퍼다 날랐다. 까눌레, 생크림 스콘, 얼그레이 쿠키. 종류도 다양했다. 덕분에 핼쑥할 만큼 쪽 빠졌던 청아의 볼살도 느릿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오물거리며 빵을 먹던 청아를 바라보던 예진이 작게 웃었다.
“청아 쌤, 남은 건 싸가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
“그래도 돼요?”
“되지, 그럼. 내가 원장인데…. 눈이 와서 학원 차도 운행하기 힘들 거 같아. 애들도 못 온다고 전화 왔고. 참, 스콘은 얼려 놓고 먹어.”
“그럴게요. 그럼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게요. 운전 조심하고요.”
“그래, 내일 봐.”
청아는 꾸벅 인사를 올린 뒤, 학원을 빠져나왔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내리는 눈이 온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학원 창가에서 바라볼 땐 그렇게 예쁘더니. 막상 눈 오는 길거리를 걷자 미끄럽고 춥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펑펑 내리는 눈으로 머리카락 끝이 축축이 젖고 나서야 집에 도착한 청아가 잘게 몸을 떨며 불을 켰다. 깜빡이는 전등을 불안하게 바라보다 욕실로 들어섰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 내자 추위로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보일러를 켰는데도, 날이 워낙 추운 탓에 난방이 잘 먹히지 않는 듯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드라이기를 꺼내 머리를 말렸다.
젖은 머리가 반쯤 말라 갔을 무렵, 두꺼비집이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온 방 안의 불이 꺼졌다. 화들짝 놀란 청아가 냉큼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암흑에 잠긴 방이 낯설고 두려웠다. 이젠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다.
시커먼 어둠 속에 갇힌 청아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문을 열어젖혔다. 두꺼운 패딩과 목도리로 온갖 무장을 한 뒤, 가림막 아래에 놓인 평상에 앉았다. 1층에 사는 집주인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끔찍했던 그날 이후, 청아는 모든 걸 묻어 둔 채 다시 살아나가기로 결심했다. 죽고 싶은 마음보다 불행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윤지영의 손으로 보았던 죽음은 생각보다 더 외롭고 무서웠다.
“춥다….”
그럼에도 과거는 여전히 청아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불 꺼진 방은 여전히 두렵고, 혼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외로웠다. 피할 수 없는 작은 불행들이 어렵게 다잡은 마음을 한순간에 무너트리기도 했다. 꼭 오늘처럼.
청아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꾸곤 했다. 숨이 막히는 공포와 함께 눈을 뜨면 청아는 자신도 모르게 희재의 품을 생각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가 않았다. 쏟아지는 눈처럼 도무지 그치지 않는 마음이 애달팠다.
“흐윽, 흐….”
쉬지 않고 내리던 눈이 어느새 운동화 코에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다. 날은 어둡고 바람은 더 거세지기만 하는데 꺼져 버린 전등은 여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불 꺼진 방에 발 하나 들여놓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얼굴을 적신 눈물에 찬 바람이 닿자 볼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래서 겨울이 싫었다. 마음 놓고 펑펑 울기조차 힘들었다. 그게 서러워서 또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바닥 위로 차곡차곡 쌓이는 눈이 주위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꼭 차가운 세상에 홀려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다면, 줄곧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펑펑 내리는 눈처럼, 소리도 없이 제게 다가온 연희재가 아니었다면….
“…오늘이 올해 가장 추운 날이래.”
따듯한 목소리와 함께 운동화 코에 쌓이던 눈이 뚝 하고 멈췄다.
새카만 장우산으로 신발이 젖지 않게 막아준 희재가 찬 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손을 따듯하게 감싸왔다.
“네가 혼자 추워할까 봐….”
“…….”
“또 혼자 울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왔어.”
귓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늘 가장 비참한 순간에 나타나 자신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그 손을 더 놓지 못하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널 보내고 하루도 빠짐없이 네 꿈을 꿨거든? 근데… 다 웃는 모습이었어.”
“…으, 흐윽… 흐.”
“웃기지, 지금도 울리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빨갛게 얼어붙은 손끝을 천천히 어루만져 주었다. 청아의 기억 속, 연희재의 손은 늘 서늘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놓고 싶지 않을 만큼 따듯하고 포근했다. 날이 너무 추워서,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맞잡은 손을 쉬이 놓지 못할 것 같았다.
“넌 웃을 때, 여기가 물결치는 것처럼 휘고….”
따듯한 손가락이 눈물에 젖은 눈가를 쓸다, 추위로 빨개진 볼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볼은 볼록하게 올라오거든? 그게 진짜 예뻐.”
“…….”
“근데… 단 한 번도 그 말을 못 해 줘서… 널 바로 보지 못해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어.”
말을 마친 희재가 손에 들린 우산을 청아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우산을 잡게 된 청아가 시선을 내렸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희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줄곧 청아의 운동화 끝에 눈이 갔다. 눈으로 젖어 든 발끝이 행여 시렵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
모든 눈을 털어 내고 나서야 비로소 청아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을.
“청아야. 내가 옆에 있어도 괴롭고, 없어도 괴로운 거라면….”
“……흐, 흐윽.”
“그냥 내 옆에 있자.”
여느 때와는 다른, 간절한 부탁이었다. 손을 끌어 따듯하게 맞잡은 그가 차가운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그러나 입맞춤이라기보다는 그저 온기를 전하려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희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위로 새하얀 눈이 톡톡 소리를 내며 쌓이기 시작했다.
“많이 아팠던 거, 울었던 거 내가 다 갚을 수 있게…. 부디 그렇게 해 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눈물 나도록 반가운 걸 보니, 줄곧 그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희재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그러자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 * *
“차단기가 잠깐 내려간 것 같은데. 조만간 사람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
현관 안쪽에 자리한 두꺼비집을 둘러보던 희재가 차단기의 버튼을 올렸다. 깜깜했던 방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밝아졌다. 조그마한 거실엔 침대로 사용하는 듯한 소파와 좌식 책상에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도, 청아가 사는 공간에 와본 적은 있었다. 방 안을 채우던 물건, 침대, 커튼…. 그런 사소한 것 따윈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끔찍하리만큼 치졸했던 질투의 감정만은 선연했다. 소유욕에 눈이 돌아 무슨 짓을 했는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마, 청아에게도 쉽게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 분명했다.
신발장에 가만히 선 희재를 두고, 방안으로 들어선 청아는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고 익숙한 손길로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새카만 바지 밑단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옷걸이에 걸린 외투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청아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씻을래요? 옷… 마를 동안.”
애써 태연한 척하는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잊지 못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훨씬 더 비참했다. 축축하게 젖어 든 바지보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청아를 바라보는 게 더 힘들었다. 그러나, 청아는 자신보다 배는 더 괴로웠을 게 분명했다.
“…보일러 켜 놓으면 금방 마를 거예요.”
“다 벗고 있긴 좀 그래서. 갈게.”
가볍게 거절한 희재가 현관문을 열었다.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방에서 달려 나온 청아가 코트를 부여잡았다.
“…그대로 가면 춥잖아요.”
임청아는 여전히 착하고 순수했다. 자신한테 몹쓸 짓이란 몹쓸 짓은 다한 새끼가 뭐가 그리 걱정된다고, 행여 춥기라도 할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끝은 숨기지 못한 채였다. 작은 손을 잡아 내린 희재가 참담한 기분을 숨긴 채, 청아를 타일렀다.
“억지로 그러지 마, 청아야. 너 아직 나 무섭잖아.”
“…….”
“없던 일로 하자고 안 해. 다 잊으라고도 안 할 거야.”
정곡을 찔린 청아가 잠시 멈칫했다. 사실은 무서웠다. 그런 끔찍한 기억을 새까맣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보는 희재의 얼굴이 반가웠다. 반가운 만큼 밉고, 미운 만큼 무섭기도 했다. 엉망으로 뒤섞인 감정이 아직은 혼란스러웠다.
“대신 천천히 가. 힘들면 힘들다, 싫으면 싫다 실컷 투정 부려도 돼.”
“…….”
“그거 받아주고 싶어서 온 거야, 나.”
남들 다 하는 투정이나, 응석 따위 제대로 부려본 적 없는 청아였다. 눈칫밥을 먹고 크다 보니 또래들보다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철이 들고 나선 감히 응석을 부려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해도 된다고 했으니 이젠 마음 놓고 부려도 될 것 같았다. 따듯한 목소리에 망설이던 청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애기네.”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희재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다, 등을 돌려 현관을 빠져나갔다.
‘진짜 애기네.’
‘…….’
‘더 못 먹겠으면 들어가서 잘래요? 억지로 먹지 말고요.’
아픈 기억들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좋았던 순간들도 있었다. 가로등의 주황빛을 등에 진 희재가 조그마한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던 청아가 천천히 뛰기 시작하는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부디 아픔은 흐릿해지고, 좋은 기억은 더욱 선명해지길 바랐다.
* * *
모든 수업이 끝난 교실은 아이들이 마구잡이로 던져 놓은 책들로 엉망진창이었다. 창고 문을 열어 빗자루를 꺼내든 청아가 허리를 굽혀 바닥을 쓸었다.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와 색연필을 연필꽂이에 정리하던 청아가 딸랑이는 종소리에 급히 허리를 세웠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베이지색 롱코트에 머플러를 걸친 연희재였다. 딱 일주일 만이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피아노 좀 배워 볼까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전과 달라졌다고 해서, 무언가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희재는 여전히 회사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도리어, 이전보다 더 바빠진 듯했다.
뉴스에선 그의 파혼 소식과 연희성의 대표이사 취임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그는 모든 걸 다 뺏겼음에도, 다 가진 사람처럼 느긋했다.
경기도에 있는 조그마한 학원까지 내려와 굳이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걸 보면, 지나치게 태만해 보이기도 했다.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정리한 희재가 외투와 머플러를 벗어 연필 모양의 아동용 옷걸이에 툭 하니 걸쳤다. 그는 코트의 밑단이 바닥에 쓸리는 데도 딱히 개의치 않아 보였다.
“시간 외 수당 좀 벌어 보는 건 어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했잖아. 갑자기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졌다고. 회사에서 일만 하는 것도 지겹기도 하고, 취미나 하나 만들 겸.”
“굳이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배울 필요….”
청아는 조금 더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학기가 시작하려면 몇 개월 더 남기도 했고, 등록금도 아직 부족했다. 아직은 서울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굳이 올 필요 있어서 온 거야.”
애당초 피아노가 목적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하니 어쩐지 더욱 민망해졌다. 한 걸음 다가선 희재가 청아의 손에 들린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치워 창고로 밀어 넣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선 늘 맡았던 비누 향기가 느껴졌다.
각인이 끊어진 탓에 희재의 파동을 선명히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부작용을 감수하고 주사로 버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걱정되긴 했지만 청아는 굳이 입 밖으로 뱉진 않았다. 가이딩도, 각인도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연희재도 같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급하게 악보를 프린터 해 온 청아가 피아노실의 문을 열었다. 갈색 피아노 앞에 앉은 희재의 폼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옆에 앉자, 두 사람의 허벅지가 꼭 붙었다. 의자가 지나치게 작은 탓인 듯했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이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낯설어 아무렇지 않게 악보를 정리했다.
“수업료는 한 시간에 20만 원, 어때?”
“…네? 무슨…. 아무도 그 정도로 안 받아요.”
하루 시급을 모조리 합쳐도 부족한 돈이었다. 심지어 청아는 학생이었다. 그것도 휴학한….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당황한 청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재를 쳐다보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으쓱였다.
“좋아하는 선생님 모시는 건데 그 정도는 해야지.”
좋아하는, 이라는 말에 강세를 실은 희재가 하얀 건반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감당하기 힘든 말을 뱉어 놓고도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청아의 귀 끝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느 정도 기본기는 있다고 했죠?”
“뭐, 조금?”
“이 악보로 배울 거고, 수업은 지금처럼 금요일마다 하는 걸로 해요. 하루 두 시간.”
몇 개의 악보를 추려 온 청아가 희재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진지한 표정으로 악보를 훑어보던 희재가 그중 가장 어려운 곡을 선택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곡인데 괜찮겠냐고 물어보려던 청아는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려운 곡일수록 더 오래오래, 같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 * *
강습이 시작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희재는 말 그대로 좋은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 10분 전에 도착하는 건 기본이었으며, 예습과 복습도 성실히 해 왔다. 다만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가 문제였다. 처음 보는 악보 앞에서도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잠시, 희재를 떠올리던 청아가 눈앞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쳐다봤다.
희재가 오지 않는 목요일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수강생이 늘어난 탓에 예진의 귀가 입꼬리에 걸려 있었다. 한턱내겠다는 예진을 따라온 곳은 피아노 학원 근처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불판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연신 손부채질을 하던 청아가 접시 위로 올려진 고기에 작게 웃었다. 고기는 구울 줄 아는 사람이 구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예진은 빠르게 고기를 뒤집어가며, 열중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먹어. 그나저나 청아 씨, 학교 입학하면 엄청 바빠지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졸업하고 일할 곳 없으면, 우리 학원 와. 나 같은 원장 또 없어.”
“저도 그러고 싶어요.”
애교스러운 청아의 대답에 예진이 밝게 웃었다. 수심이 가득하던 하얀 얼굴이 점점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전 잘 모르겠는데.”
“모르기는, 얼굴에 윤기가 반질반질하니 얼마나 예뻐. 깐 달걀처럼.”
손으로 볼을 쓸어 보인 청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땐, 정말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다. 되지도 않는 체력으로 서빙까지 해가며, 아픈 몸을 혹사시켰다. 물론, 몸보다 더 힘들었던 건 마음이었다.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듯한 마음이 뻥 뚫린 듯 공허하고 외로웠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테이블에 올려진 맥주잔을 들여 가볍게 목을 축였다.
“저번에 학원 앞에 왔던 남자는 애인이야?”
“아, 애인은 아니고….”
“아주 훤칠하더라. 무슨 모델인 줄 알았어, 키도 크고…. 근데, 애인이 아니라고?”
학원 근처를 오고 가다 우연히 희재를 본 모양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애인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젠 가이딩을 하지 않으니 서로의 에스퍼와 가이드라고 설명하기도 애매했다. 고민하던 청아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앞으로 잘 되고 싶은 사람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애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성급했고,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영 내키질 않았다. 붉어진 청아의 얼굴을 확인한 예진이 좋을 때라며 호들갑을 떨며 웃어 댔다. 비록 시작은 계약에 의한 관계였지만, 끝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많이 돌아왔지만, 이젠 좀 행복해지고 싶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자 간신히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가게 앞에 앉아 화장실에 간 예진을 기다리던 청아가 길 건너편에 자리한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희재였다.
금세, 가게 밖으로 걸어 나온 예진이 청아의 팔을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렸다.
“조만간 잘 될 것 같은데? 어휴, 그나저나 살벌하게 잘생겼다.”
“…네?”
“나 먼저 갈게. 청아 쌤! 조심해서 들어가.”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인 예진이 두 사람을 힐끔대며 골목길로 사라졌다. 잠시 주춤하던 청아가 걸음을 옮겨 희재의 앞에 섰다. 일이 막 끝나고 온 건지, 깔끔한 수트 위로 어두운색의 코트를 걸친 희재는 예진의 말대로 훤칠했다. 깨끗한 이마 위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확실히 부드럽고 선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수업 날도 아닌데.”
“학원비 내러 왔지.”
“계좌 이체해도 되는데…. 서울에서 꽤 걸리지 않아요?”
“청아야, 이럴 땐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안 돼?”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는 청아를 바라보던 희재가 픽 웃었다. 술을 마신 모습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느릿하게 흔들리는 몸이 귀여웠다. 가슴께를 덮은 긴 머리카락이 살랑이는 몸짓을 따라 춤을 췄다.
새로 바뀐 듯한 희재의 차 안은 그를 닮아 깔끔하고 세련돼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좋은 향기가 차 안에 가득 퍼져 있었다. 시트 위로 몸을 기댄 청아가 눈을 깜빡이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은 늘 그렇듯 아름답고 싱그러웠다. 밝은 가로등 아래, 갓 튀긴 팝콘 같은 벚꽃들이 뭉게뭉게 모여 있었다. 어느덧 찾아온 5월의 봄이 따사롭고 예뻤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갈수록 청아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지고 있었다. 몇 주 전, 무심코 소매를 걷은 희재의 팔에서 얼룩덜룩한 주사 자국을 발견했다. 시선을 느낀 희재는 빠르게 소매를 내렸고,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희재가 자신과의 가이딩을 중단한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약과 주사로 불안정한 파동을 견디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스치듯이 본 상처는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청아였다.
“…가이딩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졌어?”
“부작용 때문에 싫어하셨으니까….”
“잘 관리하고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장이라도 봐 줄까?”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 희재가 좌측 신호를 넣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도 피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럼 폭주는….”
“청아야.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 때 이후로, 아직 큰 문제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때. 약혼식 날을 떠올린 청아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잠시 고민하던 희재가 비상등을 켜고 갓길로 차를 세웠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를 다니는 차가 드물었다. 축 처진 청아의 입매를 확인한 희재가 살살 눈치를 보며 달래기 시작했다.
“그땐, 내가 관리 안 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네 탓 아니야. 내 잘못인 거 알잖아, 청아야.”
고작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끼는 청아가 신기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자신이 한 짓은 모조리 잊어버린 듯한 순수한 얼굴이 마음을 쿡쿡 찔렀다. 차라리 좀 약고 나빠서 더 화를 내고, 욕이라도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청아의 선함이 사랑스러우면서도 괴로웠다.
“설령 네 탓이면 어때. 난 그것보다 더한 짓도 더 했는데. 너 두고 약혼까지 한 새끼잖아, 나.”
청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울한 생각에 잠긴 옆 모습을 바라보자 덜컥 겁이 났다. 금방이라도 생각을 바꿔 자신의 곁을 떠나겠다고 할 것 같았다. 희재는 앞으로도 이런 순간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할 자신을 알았다.
“저,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혹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
“…그냥 괜찮다가도 가끔씩 불안해져요. 또 찾아올 것만 같고….”
과거의 불안과 오늘의 행복은 기름과 물처럼 쉬이 섞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청아를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청아가 우울에 빠지지 않게 다독이고 감싸야 할 건 오로지 상처를 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윤지영은 그날 바로 정신병원에 가뒀어. 한중원은 뭐, 부도난 거 막느라 죽어나고 있겠지.”
미지근하게 몸을 데우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청아의 몸이 습관처럼 굳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재가 잠시 눈을 감았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한기원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안심하고 자도 돼.”
“…….”
“정말 괜찮아. 아무도 못 오게… 다신 너한테 못 오게, 내가 그렇게 할게.”
“…손잡을래요?”
용기 내 꺼낸 말에 자신의 옆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문득문득 꾸는 악몽 속엔 희재의 얼굴도 있었다. 냉정하고 차갑던 모습. 아마 깨끗이 잊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청아는 아픈 상처를 평생 끌어안은 채로 살고 싶진 않았다. 괴로운 기억 위에 몇 번이고 좋은 순간들을 덧그리며 살아야 한다고 해도, 비록 예쁘지 않은 그림일지라도 상관없었다. 희재의 곁에 있고 싶었다.
“…네가 이렇게 착하니까 나 같은 새끼를 만난 거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 위로 희재의 손이 닿았다. 처음 그와 만났던 날, 가이딩 테스트를 위해 두 손을 잡았다.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다정하게 서로의 손을 맞잡아보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욱 떨리고 긴장되었다. 새카만 보닛 위로 눈송이 같은 벚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쿵쿵 뛰는 심장이 익숙했다.
“예쁘네.”
희재의 말에 긍정하듯, 청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 한번 깜빡이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꽃을 바라보는 희재의 눈빛이 후회로 물들었다. 몇 번이고 함께 할 수 있었음에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놓쳐 버렸던 행복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제게 주어진 손이 고마웠다. 손에 잡힌 작은 온기를 살며시 쥐어 보았다. 세게 잡으면 아파할 것 같고, 그렇다고 약하게 잡자니 이대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이었다.
* * *
기본기가 있다는 희재의 말은 거짓말인 듯했다. 새로운 곡으로 바꾸기가 무섭게 실수가 터졌다. 느린 템포의 곡으로 바뀐 뒤, 그는 자주 박자를 놓쳤고 초보도 안 할 실수들을 종종 저지르곤 했다. 잘난 연희재도 못하는 게 있다니….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에 신기했던 것도 잠시,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 희재 때문에 청아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박자 맞춰야죠. 지금, 박자가 안 맞잖아요….”
두 달을 꼬박 채운 마지막 수업이었다. 이왕 가르치기로 한 거,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희재가 좀처럼 따라주지 않으니 속이 상했다. 혹여 자신이 선생님으로서 자질이 없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자, 청아는 의욕이 확 떨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쉰 청아가 이내 의자에서 일어났다.
“좀 쉬었다 할까요?”
“너 화내니까 되게 무섭다. 청아야.”
“…저 물 좀 마시고 올게요.”
분명히 처음엔 좀 잘 따라왔던 것 같은데, 뒤로 갈수록 연주가 어수선해졌다. 자꾸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면, 따끔하게 혼내지 못하는 자신의 태도도 문제였다. 아무래도 단호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청아가 물잔을 정리한 뒤, 복도로 걸어 나섰다.
그런 청아의 발길을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였다. 분명히 학원엔 희재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곧은 자세로 건반 위에 손을 올린 희재가 자유롭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감정과 폭넓은 셈여림 표현을 가진 연주는 가히 수준급이었다. 고작 한 달 배운 걸로는 나올 수 없는 실력이었다. 어딜 짚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손가락도,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던 박자 따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꼭 자신의 분위기와 꼭 빼닮도록 애틋하고 부드럽게 곡을 연주했다.
곡이 끝났음에도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아하고 신중한 손길은 손끝으로 전달되는 에너지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풀어낼 줄 알았다. 그는 한 음 한 음까지 섬세하게 연주해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을 최고조로 이끌어 냈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능숙하게 오가는 완벽한 연주였다.
“박수 안 쳐?”
“…피아노 칠 줄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꾸준히 배웠으니까.”
“…….”
“같이 있고 싶어서 거짓말한 거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나 네 옆에 못 있잖아.”
피아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청아의 가슴을 울렸다.
“더 못하는 척했다간 진짜 혼날 것 같더라, 나 이제 너한테 혼나는 거 무섭거든.”
잠시 뜸을 들이다,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청아가 조심스레 입을 달싹였다
“…팔목 보여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희재가 단호한 눈빛에 결국 천천히 커프스를 풀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숨기고 싶었지만, 청아가 용납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얀 셔츠를 걷어 올리자 매끈한 팔뚝 위로 수십 개의 주사 자국과 시퍼런 멍이 보였다.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처음엔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잔인한 흔적에 할 말을 잃은 청아가 꾹꾹 눈물을 참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누가 나한테 나쁘게 굴래요? 못된 말이나 하고, 흐윽, 맨날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으니 벌받은 거라고, 앞으로 잘하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프기나 하지. 뭐야, 이게. 흐… 윽.”
원망하는 말과 달리, 주삿바늘이 가득한 팔을 문지르는 손길은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조그마한 양손을 잡아끈 희재가 비스듬히 고개를 올렸다.
“청아야, 키스할래?”
첫 키스를 기억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날도 꼭 이렇게 심장이 뛰었다. 손을 들어 눈물에 젖은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준 희재가 천천히 제 손을 끌어당겼다. 입술 위로 와 닿는 입맞춤이 처음과 같이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모조리 다 죽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메마른 마음 안에서 새로운 싹이 움트는 게 느껴졌다. 질기기도 질겼다. 그렇게 아팠는데, 그렇게 울었는데 또다시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싫지가 않았다. 그 질긴 생명력이, 끝내 꺼지지 않는 사랑이 기꺼웠다.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핥아 대던 희재가 조그맣게 벌어진 입안으로 느긋이 혀를 섞어 왔다. 청아는 망설이지 않고 희재의 목덜미 위로 손을 둘렀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입맞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두운 밤은 아직도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가 남긴 상처 또한 쉬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꼭 행복해지고 싶었다. 오늘이 안 된다면 내일, 내일이 아니라면 그다음 날이라도 괜찮았다.
희재의 등 뒤로 하얀 눈과 닮은 벚꽃 잎이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찰나에 그칠 아름다움이었지만, 봄은 언제나 그렇듯 다시 돌아와, 안온한 품을 제게 내어줄 것이다.
그러니 부디…. 몇 번의 계절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해도 반드시 행복해지고 싶었다. 비극의 끝에서 내 손을 잡은 당신과 함께.
<가이드의 비극,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