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onata No.4 (4/5)

Sonata No.4

팔뚝 위로 제법 두꺼운 바늘이 푹 박혀 들었다. 오랜만에 맞는 주사는 여전히 불쾌했다. 아무리 가이딩을 위해 청아를 병실에 처박아 뒀다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좆을 세울 만큼 바닥은 아니었다.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부모의 욕심에 팔려 온 청아는 불공평한 계약에도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멍청할 정도로 착한 딸을 뒀네, 단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임청아와 한기원, 두 사람 역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기에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눈앞에 닥친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숨도 쉬지 못한 채, 테이블 아래에서 비 맞은 개처럼 발발 떨던 청아의 모습을 생각하던 희재가 피로에 잠긴 눈을 꾹꾹 눌렀다.

“정기적으로 가이딩을 해 둬서 그런지, 아직 폭주 가능성은 낮네요. 그래도 희재 씨 같은 경우엔, 억제 주사라도 미리미리 맞아 두는 게 좋아요.”

“…….”

“투약량을 좀 늘린 거라서 일시적인 두통이 올 수도 있어요. 바쁜 건 알지만 그럴 땐 푹 쉬시는 게 최선이고요.”

접촉이나 점막 가이딩과 같이, 자연스럽게 폭주를 해소하는 방식이 아닌 인위적으로 폭주를 틀어막는 치료였다. 희재가 그토록 약물과 주사를 꺼렸던 이유는 가이딩에 비해 지저분한 뒷맛도 있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문제였다. 날이 선 신경과 머리가 욱신거리는 두통, 그리고 불면까지. 참아 주기 힘든 역겨운 감각이었다. 팔에 걸린 셔츠를 풀어 내리던 희재가 피로에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때, 임청아가 처음 쓰러졌던 날…. 심리적인 문제가 원인이라고 하셨었죠.”

“…그날도 갑자기 불이 꺼져서 많이 놀랐다고 얘기했었어요. 그리곤 기억이 없대요. 아마 오늘하고 비슷했겠죠. 한기원은 이미 그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청아 씨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거죠.”

센터장의 대답을 듣던 희재의 눈매가 차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두운 걸 싫어한다고 했어요. 상담은 꺼리셔서 이유는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작은 불이라도 켜고 자야 마음이 편하다고….”

트라우마의 기억을 불러온 건 자신이었다. 청아를 방에 가두라 지시했다. 문을 열어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는 목소리를 짓밟고 다시 방으로 들여보냈다. 이유 모를 정전이 났던 그날, 청아는 오늘과 같이 홀로 발작하다 기절했을 게 분명했다. 주사기를 정리하던 센터장이 냉랭하게 굳어 있는 희재의 눈동자를 보며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청아 씨 상태는 여전히 안 좋지만, 아직 가이딩은 가능해요. 그걸 받쳐 줄 정신력이 없어서 문제인 거죠.”

희재에겐 다행이었고, 청아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반쯤 넋을 놓은 청아였지만, 여전히 가이딩은 가능했다. 희재가 굳이 청아와의 가이딩을 자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쉽사리 손을 댈 수 없는 건 청아의 상태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잔인하게 여자를 심연으로 내몰았던 희재였지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임청아에게 또다시 무언가를 강제할 순 없었다.

두 눈으로 목도한 청아의 고통은 생각보다 더욱 크고 어두웠다. 시커먼 불행이 당장이라도 저 여린 몸뚱이를 짓뭉개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이딩을 멈췄다. 이제 와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희재가 느낀 건 공포였다. 그날의 청아는 제대로 된 소리도 한번 내보지 못하고 그대로 콱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딱히 떠올리고 싶은 기억도 아닌데 자꾸만 여자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마 앞으로 더 안 좋아지겠죠. 영양실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

“이제 그만하시는 게 어때요. 말씀하셨던 새로운 가이드는….”

“당분간은 약도 같이 처방받도록 하죠. 그리고 임청아는….”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청아에게도, 저에게도. 그런데도 멈추기가 싫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희재가 의자에 걸어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무어라 더 말을 붙이려던 센터장은 희재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우선 그냥 그대로 둬요.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게.”

죽어 버린 청아의 눈동자를 떠올리던 희재가 침묵에 잠긴 복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눈 감고도 찾아올 수 있을 만큼 자주 찾아온 병실의 앞에 서자, 환한 불빛이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 청아는 주체할 수 없이 잠이 늘고 이따금 우울에 잠겼다. 잠에서 깨도 꼭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종종 멍해지곤 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는 청아는 희재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옷 입고 나와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자, 그제야 시선을 돌아왔다. 가녀린 몸뚱이는 손만 대도 파스스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느닷없는 명령에 눈을 깜빡이던 청아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몸을 일으켰다. 옷장을 열자 희재가 먼저 병실을 나갔다. 제법 헐렁해진 병원복을 벗고, 처음 센터에 끌려올 때 입었던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드라이클리닝이라도 맡긴 건지 깨끗했다. 좋은 향도 풍겼다.

근 한 달 만의 외출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웬일인지 희재의 비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어 청아를 차로 들여보냈다. 희재가 직접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건 꽤 오랜만이라 낯설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어두운 도로엔 가로등 불빛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건물들을 눈에 담던 청아가 금세 흥미를 잃고 눈을 감아 버렸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제법 차가 막혔다. 잠시 시선을 돌린 희재가 차분하게 눈을 감고 있는 청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이 든 것 같기도 했고,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가로등 조명으로 인해 길게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약혼식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청아는 곧잘 방긋방긋 웃고는 했다. 눈을 접어 웃을 때마다 뽀얀 앞 광대가 봉긋하게 올라오는 게 신기하고 귀여웠다. 지금 제 눈앞에 눈을 감은 채 숨을 죽이고 있는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음울하고 처연한 분위기부터가 그랬다. 낮게 한숨을 쉬던 희재가 뒤차가 울리는 경적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부드럽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차가 멈춰 선 곳은 호텔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빛나는 희재의 눈매가 자신을 서늘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바라보던 청아는 그가 왜 이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희재는 그날 이후로 잠시 가이딩을 멈췄다. 자신을 위한 일종의 배려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상태가 좋지 않아 더는 쓸모 없다고 판단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끔찍한 건 똑같았다.

“저녁 안 먹었다면서. 먹어요.”

아마 후자인 듯싶었다. 가이딩을 위해 먹이를 받아먹는 짐승이라도 된 기분이 비참했다. 코끝을 맴도는 음식 냄새마저 역하게 느껴졌다. 접시를 가져간 희재가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스테이크를 썰어 주었다. 청아가 기계처럼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희재의 명령에 순응하듯, 잘게 썰려진 스테이크를 찍었다. 보기만 해도 연해 보이는 살점은 적당한 굽기와 신선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속이 뒤틀리듯 크게 울렁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기를 입에 넣은 청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이를 억지로 삼켜 냈다. 희재가 끓어오르는 화를 참듯, 한숨을 내뱉었다.

“고기가 먹기 힘든 거면 말을 해요. 다른 거 시켜 줄 테니까.”

“됐어요. 먹을 수 있어요.”

“먹기 싫은 음식, 억지로 먹이는 취미 없으니까 얘기하라고요.”

“그냥 이거 먹을게요. 먹으라고 데려오신 거잖아요.”

청아는 희재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이어 나갔다. 이 자리가 불쾌하다는 듯, 빨리 먹고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꺼져 가는 마음과 식어 가는 애정을 눈으로 확인하자 희재의 속이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렸다. 화를 내려고, 괴롭히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다. 그냥 밥이나 한 끼 먹이려고 데려온 거였다. 그런데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계처럼 고기를 씹던 청아가 좀처럼 잘 넘어가지 않아 답답했는지,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켜 내기 시작했다.

“그만 해.”

오기였다. 희재가 쓸모없고 약해빠진 자신이 싫어 이곳에 데려온 거라면 순순히 그에 뜻에 따라주고 싶었다. 먹으라는 대로 먹고, 그토록 그가 원하는 가이딩이나 실컷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꽉 막힌 듯한 목구멍은 부드러운 고기 한 점 제대로 삼켜 내지 못했다. 테이블 위로 손을 뻗은 청아가 붉은 와인을 들어 억지로 들이키기까지 했다. 마침내, 기도를 꽉 채우고 있던 고기가 내려갔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지켜보던 희재가 괴롭다는 듯 눈을 구겼다.

“그만하라고 했어. 임청아.”

한참 동안 미련한 짓을 이어 나가던 청아가 결국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는가 싶더니 의자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테이블에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 냈다.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화장을 고치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으나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구역감에 속이 다 뒤집어졌다. 변기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힘겹게 넘긴 음식을 모조리 토해냈다.

“우윽…. 욱.”

얼마 먹지도 않은 고깃덩어리가 전부 쏟아져 내렸다. 끔찍하고 역겨웠다.

“우욱, 욱. 흐… 윽.”

변기를 부여잡고 욱욱 대던 청아가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울렁거리는 속과 뜨거운 술기운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차가운 벽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로 다가가 차가운 물에 몇 번이고 입을 헹궜다. 거울 속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목이라도 졸린 것처럼 시뻘겋게 충혈된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밀려오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일어나요.”

등 뒤로 익숙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연희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따위 고집 한 번만 더 부려. 차라리 못 먹겠으면 못 먹겠다고 말을 해요.”

“자, 잡지 마요. 내가 알아서 갈….”

“가만히 좀 있어요. 안 그래도 충분히 거슬리니까.”

냉정하게 청아의 말을 자른 희재가 휘청이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원피스 앞섶이 모두 젖어 있는 걸 확인한 희재가 핸드폰을 꺼내 비서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지독한 술기운과 탈력감에 젖어 든 몸이 자꾸만 덜덜 떨렸다. 재킷을 벗어 든 희재가 청아의 어깨 위로 옷을 덮었다.

희재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퓨즈라도 나간 듯, 시야가 뚝뚝 끊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청아의 눈에 들어온 건 은은한 조명 등이 켜진 호텔 객실이었다. 거실로 발을 들인 희재가 가지런히 정돈된 시트 위로 청아를 앉혔다. 픽픽 웃음을 터트리는 하얀 얼굴에 신경질적인 손길로 재킷을 벗어 던진 희재가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가이딩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게 우습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희재가 가이딩을 멈춘 지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몸을 섞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니 그가 이토록 급하게 구는 것도 이해가 갔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구경하던 청아가 자신을 이끄는 손에 비틀대며 일어났다. 울렁거리는 속은 가라앉았지만, 술기운에 잠식당한 몸이 축축 늘어졌다. 새하얀 셔츠를 팔목까지 걷은 희재가 축축이 젖은 원피스를 벗겨 냈다. 본능적으로 단추를 푸는 손을 막으려던 청아가 조용히 손을 내렸다. 가이딩을 빌미로 별짓을 다 했는데 고작 옷 좀 벗는다고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의 손을 따라 들어선 곳은 욕실이었다. 적당한 온도로 맞춰진 물에 몸을 담그자 술기운이 그나마 가시는 듯했다.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엔 찰랑거리는 물소리만이 가득했다.

“뜨겁진 않죠?”

희재의 물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청아가 고개를 숙인 채, 잔잔히 고여 있는 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함께 있었던 내내, 청아는 단 한 번도 희재의 눈을 바로 보지 않았다. 그 미세한 변화에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꺾어 보인 희재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다시 내 오피스텔로 들어와요. 병원에 있을수록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으니까.”

“…네.”

반쯤 넋을 놓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답은 쓸데없이 곧 잘했다. 딱히, 망설이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투였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거짓을 뒤집어쓴 평온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먹이고, 씻기고…. 지루한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침대로 돌아온 청아가 익숙한 손길로 샤워 가운의 끈을 풀어냈다. 조명등의 불을 낮추기 위해 등을 돌리고 있던 희재가 새하얗게 드러난 어깨를 확인하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금 뭐 해요?”

“…가이딩하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

“앞으로 이런 곳까지 올 필요 없어요. 굳이 비싼 밥 먹이고, 씻겨 주지 않아도… 제 역할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는 건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은 여전했다. 발음은 정확했지만, 눈은 꼭 다른 곳을 바라보듯 멍하기만 했다. 툭 소리와 함께 몸을 감싸고 있던 가운이 떨어져 내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희재 앞에 발가벗고 섰는데도 딱히 수치스럽지 않았다.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이젠 정말 모든 감정이 바닥나 버려서인지 청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누가 지금 가이딩하자고 했어요?”

“…….”

“밥이나 한 끼 제대로 먹으라는 게…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이게 그냥 밥이 맞아요?”

날카로운 말에 희재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단지, 어젯밤 눈에 담았던 조그마한 등이 줄곧 아른거려서 데려온 것뿐이었다. 청아의 입에서 가이딩이라는 말을 듣자, 찬물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청아와 할 일은 가이딩일 뿐이지, 예전처럼 사이좋게 마주 보고 밥이나 먹을 게 아니었다. 더는 그럴 사이도 못 되었다.

그러나, 텅 비어 버린 눈빛으로 모든 걸 포기한 듯이 구는 청아는 낯설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자신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으면 했다. 마구 흔들리길 바랐다. 평정을 잃어 가는 자신처럼 청아도 그러길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이, 통제를 벗어나 날뛰는 심장이 엉망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제가 가이딩 못 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세요? 저 가이딩 할 수 있어요. 하셔도 돼요.”

청아의 수락에도 그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불쌍해서 그래요?”

“조용히 하고 잠이나 자요.”

“그러지 마세요. 그게 더 비참하니까…. 그냥 내 쓰임에 맞게 써줘요. 여태 그렇게 썼잖아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설움을 억지로 삼켜 낸 청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너무 불쌍해서 가이딩할 맛도 안 나요? 가족한테 두들겨 맞고 컸다니까, 오빠한테 그딴 일이나 당할 뻔하니까 이제야 내가 좀 불쌍해 보여요?”

아무리 그에 대한 감정이 모조리 바닥났다고 한들, 동정까지 얻고 싶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자신을 괴롭힐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불쌍한 제 꼴을 동정하고 애처롭게 바라보는 희재가 싫었다.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든 희재가 청아의 팔을 끌어당겨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럼 입으로 해 드릴게요. 저 그 정돈 할 수 있어요. 제가 입으로 하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

“희재 씨 말대로 섹스라고 생각하니까 저도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해요, 우리.”

청아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텅 빈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산산이 조각날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모든 기력을 다한 청아였지만, 가슴을 차고 오르는 분노에 도저히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뭐라고?”

청아의 화가 가슴에 와닿자, 희재의 파동이 크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두통에 이를 악문 뒤 한 자 한 자 천천히 씹어 뱉었다.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요? 아, 희재 씨는 한기원하고는 다르구나… 뭐 그렇게라도 생각할 줄 알았어요?“

“그래. 나 한기원하고 똑같은 새끼야. 나도 잘 아니까 사람 긁지 말고 잠이나 자.”

“…아니, 연희재 당신이 더 나빠…. 당신이 더 최악이야! 사람을 그따위로 함부로 대해 놓고…. 흐윽, 놔!”

감정을 제어하는 법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청아가 희재의 손에 어깨를 부여잡혔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순간, 등 뒤로 벽이 닿았다.

“가만히 좀 있어… 제발!”

압도적인 기세에 꺾인 청아가 결국 발버둥을 멈췄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건 청아만이 아니었다. 자꾸만 자신을 흔드는 여자로 인해, 희재 역시 걷잡을 수 없이 통제를 잃어 가고 있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매를 바라보던 희재가 어깨를 부여잡던 손에 천천히 힘을 뺐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청아의 머리 위로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자꾸 이럴 거면 그냥 예전처럼 해. 차라리 그렇게….”

“…예… 전처럼이요, 무슨 예전처럼이요?”

모든 환상이 깨어진 자리에서 힘없이 나뒹굴던 청아가 지독한 환멸감에 질린다는 듯이 웃었다. 모든 게 지겨워졌다는 얼굴에 희재의 말문이 콱 막혔다. 저런 표정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희재 씨 말이면 그저 좋아서 다 따르고, 받아들이던 예전처럼… 흐윽,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

“…어떻게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

그가 주는 아픔에 완전히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희재는 너무도 쉽게 예전을 말하며 아직 아물지 않은 제 상처를 잔인하게 헤집어 댔다. 이토록 아플 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처음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가이딩이나 제대로 하라고, 흐윽… 다리나 벌리라고 그랬, 잖아요. 흐….”

찢어지는 마음을 억지로 추스른 청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주었던 상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애써 힘겹게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흉터와도 같은 말이 기다렸다는 듯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너, 넣고 싸게 엎드리라고 했던 것도 당신이야. 나를 그렇게 비참하게…. 해 놓고. 흐….”

새하얗게 굳어 있는 희재는 손만 대면 그대로 깨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산산조각이나 부서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전처럼… 어떻게 예전처럼 당신을 좋아해. 흐으… 윽.”

“…….”

“대체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으흑, 만들 거예요… 도대체… 흐.”

끝끝내 눈물을 참아오던 청아가 결국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가만히 서 울음소리를 듣던 희재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진맥진한 청아는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휘청였다.

더는 희재를 이길 자신도, 밀어낼 기운도 없었다. 바라건대, 부디 하루빨리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나 그가 자신을 버려 주길. 오로지 그것 하나만 바랄 뿐이었다. 희재의 손에 의해 침대 위로 눕혀진 청아가 밀려드는 오한에 잘게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자는 거예요. 알겠어요?”

“……흐윽, 으.”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여요.”

완전히 탈진한 청아는 더는 입을 열 기운도 없었다.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새하얀 이불을 끌어 몸 위로 덮어 주었다. 가여운 수긍을 바라보던 희재가 손을 뻗어 조명등의 불을 낮췄다.

* * *

희재는 상태가 좋지 않은 청아를 고려해 호텔에 며칠 더 묵기로 마음먹었다. 안 좋은 기억만 남아 있을 병원에 갇혀 있는 것보다 이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청아는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아니, 그저 눈만 감고 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듯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곤 했다.

“밤늦게 올 거예요. 그때까지 더 쉬고 있어요.”

“…….”

“음식은 룸서비스로 시켜요.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확인해 볼 거니까 꼭 먹고.”

반수면 상태에 빠져 있던 청아가 희재의 목소리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가 왜 병원이 아닌 호텔에 자신을 두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갇혀 있다는 점에서 딱히 다른 점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병실이 더 나았다. 공간이 바뀌니 잠도 쉬이 오질 않았다.

밝은 햇살을 밀어낸 어둠이 호텔 방을 뒤덮을 때까지, 청아는 창가를 서성였다. 개미처럼 떼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기도 하고, 접촉사고가 난 도로를 구경하기도 했다. 졸음이 몰려와, 침대에 누우면 쏜살같이 잠이 달아났다.

한참을 누워 있던 청아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곧 있으면 희재가 올 시간이었다. 쓸데없는 화를 입고 싶지 않으면 뭐라도 먹는 시늉을 해야 했다. 경호원도 없으니 먹지 않고 모두 버린대도 모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트를 밀고 온 직원이 테이블 위에 주문한 메뉴들을 셋팅하기 시작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친절한 미소를 가진 직원이 인사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청아는 테이블에 앉아 습관처럼 포크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아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샐러드만 몇 번 뒤적거리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잠이 들려고 하면 장난이라도 치듯 사라지는 졸음이 청아를 안달 나게 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벼랑에 내몰린 몸은 잠조차 편히 자지 못했다. 너무 피곤해서 되레 잠이 오지 않는 듯했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방안을 맴돌던 청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은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마셔요. 나 오늘 청아 씨랑 각인할 거거든요.’

이젠 흐릿해질 법도 한데, 과거의 기억은 또다시 선명하게 나타나 청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날, 연희재와 각인을 하지 않았더라면….

유리컵에 와인을 부은 청아가 숨도 쉬지 않고 쭉 들이켰다. 그 짓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미로처럼 어지럽게 반복된 천장을 바라보던 청아가 복도를 울리는 익숙한 발소리에 감은 눈을 떴다. 연희재였다.

객실로 들어선 희재가 코끝을 스치는 와인 냄새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술기운에 잠긴 청아가 침대 위에 앉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빠르게 재킷을 벗은 희재가 침대 앞에 섰다.

“난 술 마시라고는 안 했는데.”

“자… 고 싶은데 잠이 안 와서요.”

“…….”

“더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서… 마셨어요.”

술에 취한 청아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희재를 올려다봤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금방이라도 감길 듯 느리게 깜빡거렸다. 창백한 얼굴 위엔 졸음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왜 잠이 안 오는데.”

화를 낼 의지조차 잊게 하는 얼굴이었다. 한 병이 텅 비어 있는 걸 보니, 꽤 많이 마신 듯했다. 붉게 달아오른 귓가와 고르지 못한 숨결이 누가 봐도 만취한 사람 같았다.

“말해 봐요.”

“자던 곳이 바뀌어서… 그냥 다시 병원으로 가면 안 돼요?”

“…….”

“…희재 씨도 그게 더 편하잖아요.”

그럼에도 말은 곧잘 했다. 그 모습이 꼭 예전의 청아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의 청아를 누군가 데려와 앉혀 놓은 듯했다. 자신을 향한 미움과 원망을 깨끗이 지운 얼굴이 반갑기까지 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지금 반쯤 눈이 감겼어요. 그러니까 일단 눈 감고 누워요.”

“그래도 잠이 안 와요. 계속 눈을 감고 있어도….”

상념에 잠긴 희재와 달리, 청아는 두렵기만 했다. 종일 잠이 오지 않자 이제 불안까지 몰려왔다. 이러다 정말 평생 잠들지 못할까 봐 무서워졌다. 차라리 흠씬 두들겨 맞고 아픔에 취해 뻗어 버리고 싶었다.

술과 피로에 취한 몸이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하게 만들었다. 편히 잘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힘없이 비틀거리던 머리통이 희재의 허리춤에 툭 하니 부딪혔다.

“…하고 싶어요.”

혼몽한 정신 사이로 문득, 희재와의 가이딩이 떠올랐다. 작은 손이 빳빳하게 다려진 커프스를 부여잡았다. 그건 청아의 모든 에너지를 빼앗는 행위였으나, 본질로만 따지자면 섹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이딩이 끝나면,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게 까무룩 잠이 들곤 했었다.

“나 좀, 아프게 해 주세요…. 그래서 잠 좀 자게, 그냥… 지쳐서라도 자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흐으.”

희재는 그 간절한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지금 청아가 원하는 건 가이딩이 아니라, 그저 수마와도 같은 감각. 그뿐이었다. 안타깝게도, 희재는 여자가 조금 망가졌다고 해서 지난 과오를 미안해하고 싶진 않았다. 딱히 놓아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에 가슴이 조여 오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억지로 감정을 접어 둔 희재가 작은 고개를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아래가 선다는 게 신기했다.

“나 지금 가이딩 아니고 섹스할 건데….”

“…….”

“싫으면 말해요.”

싫다고 말할 수 없게 그대로 입을 막아 버렸다. 와인 향이 나는 입술이 작게 벌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함께 혀를 섞어 왔다. 아마, 청아는 제대로 된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희재는 자신의 저열한 밑바닥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온전치 못한 정신이지만, 이토록 자신을 원하고 갈구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어쩌면, 줄곧 이런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청아가 부디 이 밤을 까맣게 잊어 주길 바랐다. 새삼스레 더 숨길 것도 없지만, 음침하고 지저분한 밑바닥까지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흐읍, 으, 웅.”

혓바닥을 겹쳐 부드럽게 문대다 여린 살점 사이에 고인 타액을 달게 삼켰다. 서로의 침이 섞이는 난잡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힘없이 쓰러지는 하얀 몸뚱이 위로 올라탄 희재가 고개를 숙여 목덜미를 빨았다. 부드러운 살결을 욕심껏 맛보다 혀로 쓸어 주자 간지러운지 청아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에 희재가 움직임을 멈췄다. 청아가 맑게 웃고 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웃음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웃어 봐. 임청아.”

“……”

“예전처럼 그렇게, 다시….”

한 박자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청아가 눈을 휘며 웃었다. 모든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 듯한 미소였다. 우울과 슬픔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하는 천진함이 희재의 눈을 사로잡았다. 홀린 듯이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입술을 감춰 물었다.

알콜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야릇하게 비벼져 오자 꽉 다문 잇새를 뚫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가느다란 종아리가 단단한 허리 위로 얽히듯이 조여 왔다.

“하아, 씹….”

와인으로 물든 입술을 힘주어 빨아당기자, 제법 아픈지 청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달래듯이 혀로 핥자 또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눈을 떼고 싶지 않아 시선을 맞춘 채 혀를 섞었다. 입안에서 맴돌던 진득한 침이 청아의 목구멍을 타고 꼴딱꼴딱 넘어갔다.

몸을 내린 희재가 가운 안에 가려진 다리를 넓게 벌렸다. 번들거리는 분홍빛 음부가 먹기 좋게 익어 있었다. M자로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뒤, 말랑하고 따듯한 살점 위로 입술을 문댔다. 애액이 묻은 주름 사이사이까지 소리 내 빨아 주자, 끙끙대는 신음이 객실 안을 가득 울렸다. 바르르 떨리는 허벅지를 눌러 완전히 벌어지게 했다. 달라붙은 음순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야릇한 감각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청아가 춤추듯 일렁이는 천장 무늬를 바라보았다. 정교하게 새겨진 무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이내 빙빙 돌기까지 했다. 어지러워 눈을 감자 아래에 닿아 오는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흐응, 응… 읏.”

“무릎 안 내려오게 잡고 버텨요.”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쾌감이 청아의 눈을 가렸다. 희재의 명령대로 양 무릎을 잡고 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고개를 낮춘 그가 통통하게 부푼 음핵을 느긋하게 혀로 굴려 댔다. 자꾸만 힘이 쭉쭉 풀려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 무릎을 잡은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힘을 주고 견뎠다. 그러자, 칭찬이라도 하듯 벌어진 틈새로 혀가 들어왔다.

매끈한 콧대로 음핵을 문지르고, 혀로는 맑은 애액을 샅샅이 퍼냈다. 계속해서 혓바닥을 들이쑤시자 완전히 끈적해진 액체가 혓바닥에 척척 감겨들었다. 달짝지근했다. 여자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맛이었다. 참을 수 없는 흥분감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나, 아흑…… 응, 거기… 읏, 좋아. 흐….”

음순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에 청아가 우는 소리를 냈다. 키스라도 나누듯, 젖은 살점을 끈덕지게 핥았다. 질구에 혀를 박고 질금질금 흘러나오는 애액을 모조리 받아 삼켰다.

혀를 세워 클리토리스를 툭툭 건드릴 때마다 달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껏 예민해진 부분을 자근자근 씹어 주자 투명한 물이 뻐끔대는 구멍 사이로 조르르 흘러내렸다. 무릎을 쥔 손이 탁 소리와 함께 풀어졌다. 부드러운 허벅지를 주무르던 희재가 물기로 젖은 살점을 빨고 핥으며, 울긋불긋한 흔적을 하나씩 새겨나갔다.

“아…. 우응, 좋아, 흐… 읏.”

“청아 씨…. 그냥, 아… 백치처럼 평생 이렇게 있을래요? 하으….”

“…응, 하윽… 읏!”

“나랑 맨날 이렇게 떡이나 치, 면서.”

허벅지 안쪽과 시트까지 흠뻑 적신 액체가 멎어 들자 희재가 허리를 세웠다. 홍조 띤 얼굴로 헐떡이는 청아를 보니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버클을 풀어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벌어진 다리를 오므리지도 못한 청아는 아직 흥분이 끝나지 않은 듯, 자꾸만 몸을 움찔댔다. 말랑한 허벅지 사이에 몸을 맞춘 뒤, 한 손으로 자위를 시작했다.

다른 손은 청아의 음핵을 꾸욱 누른 채였다. 한 손으로 다잡기엔 버거운 성기가 자꾸만 미끄러져 결국, 귀두 끝만 비비듯 문질렀다. 솟아오른 쿠퍼액이 금세 온 손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조그마한 음핵을 으깨듯, 엄지손가락을 놀리자 청아의 종아리가 경련하듯 움찔댔다. 이리저리 다리를 비트는가 싶더니 이내 시트를 쥐어뜯으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직접적이고 선명한 자극이었다.

“아…. 씨발.”

한참 동안 찌걱거리는 성기를 부여잡고 자극을 즐겼다. 정말 백치라도 된 것처럼 몸을 비비 꼬는 청아를 보자 빳빳한 성기가 마침내 꺼떡이며 사정을 알렸다. 좁게 다물어진 음부를 넓게 벌린 뒤, 질구 안에 조준하듯 정액을 토해냈다.

새하얀 정액으로 범벅이 된 음부를 부드럽게 쓸어 준 뒤, 허벅지를 잡아채 쭈욱 끌어당겼다. 가녀린 몸이 미끄러지듯 휙 끌려왔다.

한쪽 다리를 잡아 어깨 위로 올린 뒤, 흥건히 젖은 아래에 성기를 꾸욱 밀어 넣었다. 아래를 충분히 풀어 줬는데도 몇 주 만의 삽입이라 압박감이 대단했다. 청아에게도 꽤 생경한 감각이었는지, 단단한 어깨에 눌린 종아리가 경련하듯 흔들렸다.

희재는 새하얀 발목을 짓씹으며 삽입을 지속했다. 아킬레스건을 씹어 주자, 질벽이 요동치며 성기를 조여 왔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맹렬하게 허리를 올려치자 청아가 골반을 뒤틀며 자지러졌다. 덜덜 떨리는 발목을 물고 빨며 추삽질을 반복했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고 있었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내벽을 가득 채우자, 청아가 고개를 홰홰 저어 대며 신음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태도였다.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주며 아래를 꿰뚫자, 물기 어린 점막이 살 기둥 위에 눌어붙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차지게 붙은 질벽이 희재의 머리를 돌게 했다.

“이렇게 박아 주면 좋, 아했었죠? 그때도, 후….”

“하읏, 앙… 으흐, 아!”

술기운에 완전히 잠식당한 몸이 축축 늘어졌다. 그런데도 아직 놓지 못한 정신이 자꾸만 청아를 깨우려 했다. 그러나 아래를 쾅 들이박는 성기에 모든 생각이 휘발되듯 날아갔다.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길 포기하고, 그가 치받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청아는 더는 무언갈 간절하게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편히 잠들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아래를 박아 대는 성기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술에 취한 몸은 본능적으로 자극을 좇았다. 희재만이 채워 줄 수 있는 쾌락이었다.

두툼한 살 기둥이 내벽을 쿵쿵 찧을 때마다 속살이 발발거리며 움츠러들었다. 서로의 체액으로 뒤엉킨 접합부에선 찌득찌득한 소리가 났다. 꼭, 어린아이가 진흙을 가지고 놀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참을 수 없는 흥분에 급작스레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단단한 팔뚝을 부여잡은 청아가 발가락을 오그라트리며 짜릿한 격통을 견뎌 냈다.

눈물에 짓누른 속눈썹을 핥던 희재는 멈추지 않고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뇌를 관통하는 쾌감과 온몸을 데우는 열기. 이건 가이딩이 아니라 섹스였다. 희재는 지금 술에 취한 청아를 상대로 발정하고 있었다. 에너지, 파동. 그딴 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발정제를 맞은 수말처럼 허리를 흔들고, 여린 구석구석을 모조리 빨아 삼켰다.

술에서 깨고 맨정신이 돌아온 청아가 이 모든 걸 알게 된다면, 경멸 어린 눈길로 자신을 바라볼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것마저 실없는 바람일지도 몰랐다. 이젠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다 포기했다는 듯한 얼굴로 창문만 바라볼 것 같았다.

약혼을 하겠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던 청아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의 어느 날 죽어 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이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아니, 눈앞에서 섹스를 한 대도 무감하게 반응할 게 뻔했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비열하고 더러운 짓을 저질러서라도 예전과 같은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듣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더럽고 저급한 말을 시켜서 마구 울리고 싶었다. 천박하게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청아 씨. 후으, 아직 나 좋아해요?”

임청아의 마음을 듣고 싶었다. 욕심인 걸 알지만, 아직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대답해 주길 바랐다. 다 끝나 버린 마음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은 희재가 청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색색거리며 숨을 고르던 청아의 눈동자가 흐리멍덩했다. 청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아니라는 뜻이었다. 청아의 웃음에, 차가운 거절에 심장이 내려앉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나 아니에요?”

“아흑, 윽, 으웅… 읏.”

“좋아한다며, 왜 이젠 아닌데. 응? 좋아, 한다고 해야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입을 맞춰 가며, 순정한 사랑 고백을 강요했다. 계속된 정사로 인해 음란하게 달아오른 청아의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듣고 싶었다. 귀두 끝까지 쭉 빼낸 성기를 단번에 콱 처박았다.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몸을 바르르 떨던 청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 좋아… 흐으. 좋아요. 응, 읏!”

“그렇게 말하면 섹스가 좋, 은건지… 후으, 내가 좋다는 건지 모, 르잖아.”

“우윽, 앙… 아아, 좋아….”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한 눈빛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얼굴이 희재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이대로 청아의 모든 걸 무너트려 망가트리고 싶었다, 그러나, 얼핏 스쳤던 맑은 미소가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양가감정이 마구 소용돌이쳤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희재의 등허리를 힘없이 긁어내렸다. 애처로운 손짓에 작은 어깨를 끌어안고 더 깊게 성기를 쑤셔 박았다. 어두운 구멍 안을 찾아 기어들어 가는 뱀과 같은 몸짓이었다.

“다시 제대로 말해.”

머리를 숙인 희재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 가려진 귀를 찾아 입에 물었다. 뜨거운 호흡을 내뱉으며 귓바퀴를 핥아 주자 청아의 아래가 꽉 조여들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솟아오른 성기로 자궁구 주변을 꾹꾹 눌러 주며 귓바퀴를 빨았다.

“…히익, 좋아, 으…흣. 좋아해요.”

입안에 고인 고백을 모조리 핥아먹듯 혀를 섞었다. 구석구석 질척하게 빨아 대는 입맞춤에 숨까지 벅찼다. 잠시 고개를 피한 청아가 할딱할딱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틀어진 얼굴을 따라 고개를 비튼 희재가 침으로 젖은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촉, 초옥. 느릿하게 움직이는 허리 짓에 자꾸만 몸이 달았다. 헤벌어진 입을 타고 흘러내린 타액이 볼 주변을 적실 즈음, 마침내 그가 사정했다. 내벽 안에 정액을 고루 칠하듯 움직이는 허리 짓이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아, 흐으… 흐.”

지나친 쾌감과 제어하기 힘든 자극이 청아를 점점 더 극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고역과도 같은 섹스였다. 그러나 되레 그편이 좋았다. 정신을 압박하던 긴장과 움츠러들어 있던 근육이 녹아내린 지금에서야 비로소 잠이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때는 희재와 가이딩이 괴롭고 슬펐던 밤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꼭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 모든 순간이 그저 까마득하고 흐릿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숨을 고르던 청아가 밀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몽롱한 정신 속을 헤매던 청아가 낮게 가라앉은 희재의 한숨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를 악문 얼굴이 꼭 답답함에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청아는 희재의 한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제게서 원하는 모든 걸 강탈해 갔다. 몸과 마음, 그리고 가이딩까지. 그러나, 보잘것없는 제 마음은 도무지 쓸모가 없어서 내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그는 예전처럼 자신을 다시 좋아하라고 말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마음을 다 써 버려서 더는 줄 게 없었다. 쓸모없는 상념을 깨트린 건 낮게 가라앉은 희재의 목소리였다.

“날 왜 좋아했어요?”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청아는 아주 잠깐 자신이 깊은 물 속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희재의 목소리가 이토록 멀리서 들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가 이제 와서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안다고 한들, 이제 더는 달라질 건 없을 텐데….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청아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결국 입을 열었다.

“…처음이었어요. 나… 한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은.”

청아는 그저 과거의 진심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더는 달라질 게 없으니 제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탈진에 잠긴 몸이 점점 깊은 늪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줘서… 그래서, 그게 좋아서….”

희재는 손에 들린 지포 라이터를 몇 번이고 켰다 켰다. 의미 없는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며 그저 가만히 청아의 진심을 들었다. 나긋한 어조로 몇 번 더 중얼거리던 청아가 서서히 수마에 잠겨 들었다. 기절하듯 잠이 든 얼굴이 가여웠다.

여자의 고백은 모조리 과거형이었다. 희재의 얼굴이 미술관의 오래된 조각상처럼 차갑게 굳었다. 줄곧 과거형으로 이어진 고백보다 더 거슬리는 게 있었다. 다정했다고… 내가.

“…그게 이유라고.”

희재는 지나간 시간을 느릿하게 반추하기 시작했다. 첫 만남부터 모든 게 틀어져 버린 오늘날까지. 시커먼 어둠에 삼킨 밤하늘에 서늘한 퍼런 빛이 떠오를 때까지 청아와의 모든 순간을 되새겨 보았다. 다정했던 순간 같은 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청아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안고 에너지를 착취했다. 기분이 내키면 잘해 줬고, 그렇지 않으면 자고 있는 몸을 깨워서라도 가이딩을 했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데려온 거였으니까. 그럼에도 맑고 깨끗한 청아의 눈동자는 늘 자신을 향해 있었다.

불행하게도 청아는 타인보다 다정함을 느끼는 역치가 낮았을 뿐이다. 따듯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학대를 일삼는 양부모와 정신 나간 이복 오빠까지. 아마, 사방이 지옥 같았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계약에 팔려 오면서도 선뜻 제 손을 잡고 웃었던 청아가 떠올랐다. 어떤 심정이었을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 같은 새끼를 다정하다고 착각해, 사랑에 빠졌을 여자가 불쌍했다.

잠이 든 청아는 꼭 모든 기억을 지운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눈을 뜨면 모든 순간이 지옥 같을 테니, 자꾸만 잠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니, 부디 잠이 든 순간이라도 청아가 편안하길 바랐다. 선반 위로 손을 뻗은 희재가 조명등의 불을 얕게 껐다.

* * *

탁. 정신이 돌아왔을 땐, 어느새 익숙해진 병실의 조명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청아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모조리 지워졌으면 좋으련만, 희재와 보냈던 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의 아래로 기어들어 가 자진해서 다리를 벌리고 입술을 빨았다. 머리가 돌 만큼 좋아서 희재의 등을 긁어내리며 울기도 했다. 끔찍하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로 괴롭진 않아 다행이었다. 눈을 감자 거짓말처럼 또 잠이 몰려왔다.

반복, 반복이었다. 밤늦게 찾아온 희재가 몸을 흔들어 깨우면 간신히 밥을 먹고 또다시 잠이 들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한 가지 의아했던 건 희재가 가이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호텔에서의 딱 하룻밤을 제외하면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파동을 잠재우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끔 팔목 근처에서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로 주사를 맞았겠거니, 대충 추측할 뿐이었다.

덕분에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호화스러운 병실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니, 꼭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가 아무렇지 않게 가이딩을 하던 예전이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가이딩으로 제 쓸모를 증명하는 게 비참하긴 했지만, 무력하게 누워 있는 것보다야 나을 것 같았다.

웅- 우웅,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청아가 서랍 속에서 들리는 진동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전화.”

희재가 없는 틈을 타, 아주 가끔 켜 두고는 했다. 누군가가 볼세라 꼭꼭 숨겨 놓는 건 필수였다. 전화기로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두 번 다시 희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도망갈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차마 핸드폰을 돌려주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도망. 그에게서 도망가는 상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원이 도움을 받아서라도 자유를 찾을 수만 있다면,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 홀로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의 고리를 끊어 낸 건 우울한 비 냄새였다.

창밖을 때리는 빗소리는 청아의 생각을 잘라 낸 뒤, 아주 자연스럽게 과거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자취방으로 들이닥쳐 머리채를 휘어잡던 손길을 기억해 내자 모든 의지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또다시 그런 가혹한 일을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떨리는 손은 결코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청아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하도 전화 안 받아서 죽은 줄 알았어요.

“…이원아.”

- 아직도 마음 안 바뀌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누나. 혹시… 그 일 때문에 내가 불편해서, 그래서 싫은 거라면….

“…….”

- 앞으로 조심할게. 누나한테 손 하나 안 댈게요. 정말로, 집도 따로 구해서….

이뤄지지 않을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원의 목소리가 마냥 어렸다.

“이원아, 나 이제 더는 안 가. 그냥 그러기로 했어.”

- 왜 안 가는데…?

“이건 계약이잖아. 내가 좋다고, 싫다고 함부로 깨트리고 도망가는 거 더는 안 할래.”

청아는 더 아프고 싶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으로 몇 번이고 일을 그르쳤는지 손에 꼽기조차 힘들었다. 어쩌면 양부모의 손을 잡고 고아원에서 나왔던 것부터가 지독한 불운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가 무서워서, 가족이 그리워서 인간 같지도 않은 양부모의 곁에 머물러선 안 됐다. 희재가 가이딩을 빌미로 제가 다정하게 굴었을 때, 그렇게 쉽게 모든 걸 다 주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상처받지 않을 마음 한쪽은 남겨 뒀어야 했는데…

“새로운 가이드 나타나면, 그땐… 정말로 놓아주겠다고 약속했어.”

- …아직도 연희재를 믿어요?

“나만 참으면 곧 끝날 일이야.”

그럼에도 청아는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모든 걸 다 잃은 청아의 손에 남은 건 희재가 남긴 약속, 단 하나였다. 그 기대마저 없었다면 필시 이 지옥을 견뎌 내지 못했으리라.

- 그렇게 당해 놓고도 그 새끼가 하는 말을 믿어요? 왜… 대체 왜 그래.

“…무슨.”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원의 목소리가 헛된 기대에 갇힌 청아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 아직도 가이드가 안 구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그 말을 믿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 누나, 그 새끼한테 속은 거야.

이어지는 말에 청아의 손에 들린 전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다시 불행이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나보다 매칭률 높은 가이드… 있었어요. 한 달 전에 이모가 찾았거든. 나도 전혀 몰랐어. 연희재가 작정하고 숨겼으니 알 수가 있었겠어요?’

‘…….’

‘그 새끼가 그냥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해 달라고 했대. 이모가 몇 번이나 부탁해도 듣지를 않아서….’

귀신에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청아가 벽을 부여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더는 흘릴 눈물은 없다고 믿었는데, 금세 온 얼굴이 흠뻑 젖어 들었다.

희재는 예나 지금이나, 고작 단 한 번의 손길로 자신을 지옥에 처박았다. 그는 새로운 가이드를 찾았음에도 뻔뻔하게 자신을 속이고 기만했다. 이 커다란 센터 하나가 모두 희재의 거짓말을 돕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을 생각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센터장도 결국 희재의 편에 섰다. 청아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발길이 멈춰 선 곳은 연구실 앞이었다. 새하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센터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왜 숨기셨어요?”

청아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든 동요가 가라앉은 눈은 꼭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센터장은 문득 처음 청아를 만났던 날을 기억해 냈다. 이름처럼 청아하고 예뻤다. 물기를 가득 담은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무슨 연유로 희재와 엮이게 됐는지 그 깊은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부디 처음 모습 그대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청아는 꼭 생을 유지하기 위한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병원복 소매로 드러난 가녀린 팔목이,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여자의 표정이 결국 센터장의 입을 열게 하였다.

“…찾게 된 건 얼마 안 됐어요. 우리 측에서도 바로 희재 씨한테 연락드렸어요. 청아 씨랑은 너무 안 좋았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새로 가이딩 받는 게 서로 좋지 않겠냐고….”

“…….”

“그런데 그냥 두라고 했어요.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그렇게 두라고요. 몇 번이나 청아 씨한테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시잖아요. 저도 어쩔 수 없….”

“어쩔 수 없었다고요.”

힘없이 껌뻑이던 청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엔 모두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으세요…. 흐으… 제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다, 다 아시면서….”

“…….”

“흐윽. 절 도와준다고 하셨잖아요. 센터장님은 절 도와주시겠다고. 꼭 찾아 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흐.”

그의 손에 이끌려 레스토랑에 끌려갔던 날, 희재가 걸었던 새 계약 조건의 유효기간은 새로운 가이드가 구해지기 전까지였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계약은 이미 끝나 있었다. 청아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은 없었다.

“…청아 씨!”

연희재도, 센터장도, 간호사도…. 이곳을 둘러싼 모두가 자신을 우습게 여겼다. 말도 안 되는 협박으로 머물러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연구실을 나온 청아가 어둠에 잠긴 복도를 미친 사람처럼 내달렸다. 갈 곳 잃은 걸음이 대리석 바닥을 한참이나 헤맸다.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지…. 대체 어디로.

벅차오르는 호흡이 목구멍까지 들이찼을 무렵, 익숙한 병실 문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결국, 여기였다. 아무리 내달려도 이 병실 한 칸을 벗어나질 못했다.

청아는 한참 동안 차가운 문에 기대 문고리만 부여잡고 서 있었다.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문고리를 돌리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오는 창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희재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매서운 손이 희재의 매끈한 뺨 위로 쏟아졌다.

“…재밌어요? 속이니까 좋았어요?”

짝, 짜악! 분노로 이성을 잃은 청아가 손이 가는 대로 남자의 얼굴을 내려쳤다. 혓바닥으로 안쪽 볼을 쓸어 보인 희재가 바닥으로 새빨간 침을 뱉어냈다. 한쪽 볼이 꽤 얼얼했다. 태어나 사람 한번 때려 본 적 없을 손이 빨갛게 부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애처로울 만큼 작은 손을 바라보던 희재가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찾으면 놔준다고 했잖아요…. 놔줄 거라고 했잖아.”

“…….”

“난… 그거 하나 믿고 시키는 거, 하라는 거 다 했어…. 근데 왜, 왜!”

흐릿한 시야 너머의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지도 않았다. 막무가내로 뺨을 내리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실컷 손을 휘두르던 청아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팔을 뻗은 희재가 팔을 부여잡았다. 매섭게 팔을 쳐낸 청아가 경멸과 분노가 담긴 눈으로 희재를 노려보았다.

“손대지 마요. 역겨우니까… 흐으… 윽, 손대지 마.”

싸늘한 시선에 묶인 듯 굳어 버린 희재가 문 가까이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

“청아 씨…. 진정하시고 일단 저랑 얘기를….”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하얗게 질린 표정의 센터장이었다. 어떻게든 청아를 달래 보려고 왔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되레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불만 지르는 격이었다.

“얘기… 무슨 얘기요? 가이드 구했으면서 못 구한 척, 거짓말한 거 말하는 거예요?”

“…….”

“왜 다들 나 속여요? 내,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여기 갇혀 있으니까…. 내가 그렇게… 만만… 흐으.”

“잠깐 나가 계세요.”

청아는 좀처럼 울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쓸어 보이던 희재가 문밖에 서 있는 센터장에게 짧게 명령했다. 입가가 제대로 터졌는지 계속 피 맛이 느껴졌다. 잠시 주춤하던 센터장은 불안정한 청아의 상태를 걱정스레 바라보다, 결국 병실의 문을 닫았다.

“이유를 말해 봐요. 희재 씨.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왜 속였는지 말해요.”

삐이---. 귓가로 소름 끼치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청아는 지금 자신이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커다란 화염이 마음 한구석을 모조리 불태워 버린 듯했다. 불에 덴 것처럼 아프고 괴로워서 자꾸만 발을 구르며 울어야만 했다.

“…그 사람이 나만큼…. 흐윽, 가이딩 못 할까 봐 그랬어요? 그럼 가르치면 되잖아. 나, 나한테는 다 가르쳐 놨잖아. 어떻게 하는지, 다 알려 줬잖아요. 네?”

“…….”

“근데… 왜, 나한테 이러는데…… 난 할 만큼 다 했는데… 왜. 내가… 흐윽, 내가 뭘 잘못했어, 도대체……”

청아는 벙어리라도 된 것 마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희재가 미웠다. 자꾸만 숨이 막혀 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

“…네가 아니면 싫었어. 그게 다야.”

말도 안 되는 대답에 비틀대던 청아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희재는 그렇게 대답해선 안 됐다. 그는 그렇게 대답할 자격이 없었다. 깊은 물 속에 빠진 사람처럼 귓가가 먹먹해지는가 싶더니 호흡이 턱턱 틀어막혔다.

“고작… 흐으… 그게 이유라고, 요?”

순간, 머리가 핑 도는가 싶더니 목구멍이 콱 조여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희재가 거리를 좁혀 다가오자 청아가 바닥을 기어 구석으로 들어갔다. 희재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꼼짝없이 발이 묶인 희재가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호흡을 뱉어내는 방법을 잊은 청아는 가슴팍을 쥐어 잡은 채, 그대로 꼬꾸라졌다. 흐으, 으… 흐.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발에 챈 링거대가 냉장고에 부딪히며 요란스레 넘어졌다. 어항에서 건져 낸 금붕어처럼 몇 번이고 입을 뻐끔거려 봤지만, 누군가가 목을 조이는 것처럼 숨이 토해지질 않았다.

요란한 소리에 복도에 대기하던 센터장이 빠르게 병실로 뛰어들었다. 꺽꺽대며 바닥을 구르던 청아의 주위로 간호사들이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임청아 씨, 괜찮으니까 숨 쉬어요. 여기 보세요!”

“으… 후으, 으흐… 흑.”

“누가 팔 좀 잡아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만들어 낸 지옥 속에 우두커니 선 희재가 허탈함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병실로 들어선 건 센터장이 아닌 의사 가운을 입은 한 남자였다. 의사는 침대에 앉은 청아의 옆모습을 훔쳐보다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금세 시선을 거둬들였다. 새하얀 종이를 뒤적이며 한참을 뜸을 들이던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당분간 가이딩은 중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물론… 임청아 씨 몸 상태가 회복되면, 언제든 가이딩은 가능하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상황이 안 좋네요. 컨디션이나 파동도 그렇고….”

의사의 입에서 나온 청아의 몸 상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희재의 표정과는 달리, 청아는 도리어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과호흡으로 괴로워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기억을 지운 듯 태연해 보였다. 어쩌면 끝이라는 걸 직감한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청아 스스로 끝을 정한 듯했다.

“우선, 두 분 다 약물로 조절하면서 상황 지켜볼게요.”

말을 마친 의사가 희재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창밖으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 정말 모든 쓸모를 다 했네요.”

“…….”

“희재 씨한테 줄 수 있는 건 다 줬어요.”

차라리 예전처럼 울길 바랐다. 아예 정신이라도 놓아서 제 옆에 주저앉길 바랐다. 그런데 지금의 청아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정한 얼굴로 마음을 빼앗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고, 착취하고…. 질리도록 반복했던 일들이었다. 그 끝도 없는 되풀이 속에서 청아는 몇 번이고 마음을 죽여야 했다.

“다시 시작해.”

“…….”

“오피스텔로 가서 치료받으면서 처음처럼….”

“제가 왜요?“

왜, 왜. 물음이되 물음이 아닌 말이었다. 희재는 그 단호한 대답에 이젠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해도 청아를 붙잡을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빚으로 협박하고 싶으면 하셔도 돼요. 억지로 끌고 가서 오피스텔에 가둬 두셔도 상관없어요.”

“…….”

“…그런데 이제 희재 씨가 저한테서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임청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청아는 모든 마음을 다 주지 않고 사랑하는 법 따위 몰랐다.

“난 약속 지켰어요. 이번엔 희재 씨 차례예요.”

한평생 마음 둘 곳이 없었던 탓에, 늘 외롭고 쓸쓸했다. 그래서 희재가 제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그저 다정함이라고 믿었다. 저택에서 처음 그를 만났던 날도 그랬다. 늘 청아의 손에 멀리 떨어져 있던 과일을 챙겨준 건 태어나 희재가 처음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그게 뭐 별거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지만, 청아에겐 그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사소함이 시작이었다. 잠이 든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 퇴근길에 사다 주었던 붕어빵, 부드러웠던 입맞춤. 작고도 다정한 순간들을 하나하나 모아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한순간에 깨져 버릴 짙은 꿈이라고 누군가 미리 말해 주었다면 그렇게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다 끝났어요.”

“임청아."

“빚으로 협박하실 거예요? 또 억지로 끌고 가서 오피스텔에 가둬 둘 거예요? 하고 싶으면 하세요.”

“…….”

“이제 희재 씨가 저한테서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아무것도 없다고…. 차라리 청아가 더는 가이딩을 해 줄 수 없으니 놓아 달라고 울고 빌길 바랐다. 고작 가이딩일 뿐이라면, 이렇게 가슴이 차게 식지 않을 것 같았다. 청아가 더는 제게 줄 수 없는 건, 다름 아닌 바로 마음이었다.

“임청아, 처음부터 내 가이드는 너 하나였어.”

“…….”

“네가 쓸모없어졌다고 해서 놓아줄 일 같은 건 없어. 애초에 난 한 번도 널 버린 적 없었으니까.”

“…차라리 버리지 그랬어요. 날 가지고 놀고, 울리고, 바닥까지 끌어내릴 거면 그냥 버리지. 왜… 왜.”

싸늘하게 가라앉은 청아의 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더는 당신에게 줄 마음 같은 건 없다고. 이제 남은 건 원망과 증오뿐이라고.

“희재 씨가 날 버리지 않는다고 하면, 난 그냥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예요?”

“원해.”

희재가 쉬이 긍정하며 청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믿을 수 없게도, 희재가 자신의 마음을 원하고 있었다. 청아는 그가 만들어 낸 불행 속에서 다시 한번 제 마음을 죽였다. 끝도 없는 희재의 이기심이 청아를 모조리 불태우고 있었다. 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손을 놓지 않겠다면, 이젠 제 손목을 잘라 낼 차례였다.

청아는 경호원의 감시가 사라진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도망을 시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청아는 그저 얌전히 병실에 박혀 있기를 선택한 듯싶었다. 길었던 싸움 끝에 모든 의욕이 꺾여 버린 건지, 아니면 정말 제 옆에 남기로 마음을 먹은 건지…. 무표정한 얼굴에서 희재는 그 무엇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청아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아직 가이딩은 무리였다. 애초에 가이딩을 시도할 마음도 없었지만, 행여 시도하게 된다면, 큰 부작용이 올 수 있다던 센터장의 말을 기억해 낸 희재가 스탠드의 조명을 낮췄다.

아무 쓸모가 없어진 청아는 그저 숨을 죽이고 잠을 자길 택했다. 우울에 잠식된 얼굴이 예뻤다. 그 차분한 옆모습을 볼 때마다 희재는 문득 심장이 콱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청아가 천천히 등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얼굴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일은 몇 시에 오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갑작스레 그런 게 왜 궁금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청아가 먼저 말을 걸어온 건 꽤 오랜만이라 내심 놀랐다. 희재는 최대한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자정쯤에 올 거야.”

“…….”

“오피스텔로 돌아가서 치료받을 거니까 짐 챙겨 둬.”

등을 돌리고 작은 숨을 색색 몰아쉬던 청아가 이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작은 등을 바라보던 희재가 등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 * *

늦은 밤, 혼자 남은 병실에 이원을 불러낸 건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희재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챈 이래로부터 청아는 매 순간 고민하고 고민했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그에게 작은 상처 하나쯤은 남기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치졸하고 더러운 방식으로, 희재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말로 희재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이 방법만큼 상처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상처의 깊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청아였으니까.

그러나 복수라기엔 달랐다. 청아는 희재의 마음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이 모든 걸 끝내 버리고 싶기도 했다. 비록 그게 옳지 못한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병실로 들어온 이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하고 편안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호출에 놀란 듯 보였지만, 싫지는 않은 듯 표정이 밝아 보였다. 씩 올라간 입꼬리에선 설렘마저 느껴졌다.

“웬일로 경호원이 없네요? 갑자기 불러서 깜짝 놀랐어요.”

의자를 끌어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앉은 이원이 청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야위어 보이긴 했지만, 특유의 청순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등허리에서 나풀대는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원이 자신을 부르는 청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원아…. 나 좀 데리고 나가 줄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원이 눈이 커졌다. 희재가 새로운 가이드를 찾았다는 소식을 청아에게 알린 이후, 이모에게 된통 깨졌다. 한동안 센터에 오는 것도 금지당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누나, 정말 나한테 올 거….”

비로소 모든 마음을 정리한 듯한 청아의 얼굴을 보자 바보처럼 가슴이 뛰었다. 고개를 든 이원이 새하얀 얼굴을 응시했다. 희재의 곁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 이원을 행복하게 했다. 지금 당장은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대신 나랑 자자. 이원아."

"무슨, 갑… 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지만, 풍선처럼 부풀었던 기대는 청아의 말 한마디에 펑 터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급히 일어난 이원이 청아를 내려다봤다. 콰당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여기서 나갈 수 있게….”

“…….”

“나 좀 도와줘.”

이원은 청아의 시선이 자꾸만 문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모든 말들의 의미를 깨달은 이원이 차갑게 웃었다.

“이러려고 나 부른 거예요? 나 이용하려고?”

침대에서 일어난 청아가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원의 소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 요요한 행동이 이원의 마음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소유욕에 불을 지피게 했다. 최근 파동이 좋지 않았던 탓에 감정이 더 격하게 일렁였다.

“누나, 나한테 진짜 잔인하네요.”

“…….”

“…그래요, 그럼 나도 누나 실컷 이용 좀 할게요.”

허리를 숙인 이원이 청아의 얼굴을 부여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고작 전화 한 통에 호구처럼 달려온 자신이 초라했다. 자존심이 구겨졌다. 이원은 덜덜 떨리는 청아의 몸을 침대 위로 밀어 눕혔다.

눈물에 젖은 애틋한 눈매를 바라보며 이원은 제 마음의 정체를 인정하기로 했다. 상처받은 청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보다 자신을 이용하는 청아의 몸을 멋대로 탐하고 싶었다.

지금 청아를 가진다면, 영원히 제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럽고 비열한 방식을 써서라도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연희재, 그 새끼가 도대체 뭐길래….

“흐, 으읏… 읍.”

두 사람의 무게가 한 번에 실리자,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키스는 거칠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도통 열리지 않는 청아의 입술을 마구 짓씹었다. 비명이 새어 나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불타오르는 욕구를 풀기에 급급했다. 거세게 부딪쳐 오는 입술을 허겁지겁 받아들이던 청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뱉었다.

“아, 흐윽…. 아!”

“고작 이게 아파요?”

청아의 몸 상태는 지금 당장 쓰러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이딩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원과 각인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져 오는 에스퍼의 파동을 견뎌 내기엔 버거웠다. 사실을 알 리 없는 이원이 청아의 입속으로 혀를 쑤셔 넣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쾌락보다 고통이 더 컸다.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고 몸에 힘이 자꾸만 풀려나갔다. 이래서 가이딩을 하지 말라고 했구나…. 정상이 아닌 제 몸 상태를 직접 느끼자 문득 겁이 났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다시는 손 쓸 수 없게 모든 걸 망쳐 버리고 싶었다.

다급하게 단추를 풀어 내리는 이원의 손이 가슴께를 스쳤다. 거칠고 뜨거운 손이 병원복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어느새 가슴께로 고개를 파묻은 이원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씨발…. 나 돌아 버리겠어. 누나.”

“으읏, 아! 흐으, 흐….”

간지러운 감각에 몸을 피하려 하자, 꼼짝도 할 수 없이 팔목이 붙들렸다. 몸이 묶인 청아가 잠시 바르작대다 결국 순응하듯 눈을 감았다. 목덜미 위로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살갗을 핥는 혓바닥이, 허리를 더듬는 손이 희재와 같은 듯 또 달랐다.

정신없이 부딪히는 입술에 청아의 팔다리에 힘이 쭉쭉 풀렸다. 이원이 목덜미를 짓씹을수록,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이딩 부작용인 듯싶었다. 이러다 정말 정신을 놓고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자꾸만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청아는 그토록 기다리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아직도 그의 소리를 기억하는 자신이 끔찍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다, 이원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더 해 주길 바란다는 것처럼 목을 끌어당기자, 미친 사람처럼 입을 맞추던 이원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병실의 문이 열렸다.

병실로 들어온 희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미쳐 날뛰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침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엉켜 있는 두 사람을 응시하던 희재의 얼굴이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떨리는 손가락 끝이 청아의 눈에 들어왔다.

아, 연희재는 나를 좋아하는구나. 진심으로 모든 마음을 다해 다행이었다. 그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 다행이 아니라, 이젠 정말 미련 한 점 없이 그를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아에겐 더 이상 희재의 마음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과거의 그가 그랬듯이.

침대에서 일어난 이원이 머리를 쓸어올리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들었다. 가라앉지 않은 열기와 분노가 이원의 주위를 가득 맴돌고 있었다. 충격으로 굳어 있는 희재의 표정을 구경이라도 하듯, 바라보던 이원이 이내 낮게 읊조렸다.

“비켜요. 눈앞에서 거슬리지 말고.”

“…….”

“진짜 최악이네, 씨발.”

차가운 욕설과 함께 희재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이원이 거칠게 문을 닫았다. 병실을 울리는 굉음에도 두 사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임청아, 이거 보여 주려고 나 기다렸어?”

“네.”

청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난 이제 희재 씨만을 위한 가이드 아니에요. 내가 원하면 다른 사람하고도 얼마든지 가이딩할 수 있어.”

제 몸을 앞세워 협박하는 청아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궁지에 몰려 악을 쓰고 버티는 게 눈에 보였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은 지금 당장 바닥으로 꼬꾸라진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 처량한 얼굴이 한 발자국도 더 가까이 내딛지 못하게 만들었다.

“난 이제 당신 뜻대로… 절대 그렇게 안 해.”

다 뜯어져 버린 병원복을 끌어당겨 얼룩덜룩한 목덜미를 가린 청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눈앞이 어지럽게 빙글 돌았다. 비틀대던 청아가 견디기 힘든 고통에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바닥난 체력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린 정신이 더는 이 모든 상황을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청아도 알고 있었다. 이건 쓸모없는 오기고 고집이라는걸. 그러나, 희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의자 위에 올려진 카디건을 집어 든 청아가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꼼짝없이 얼어붙은 희재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그가 팔목을 부여잡아 왔다.

“…가지 마, 임청아.”

“…….”

“가이딩, 그딴 거 전부 다 상관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가지 마.”

태어나 단 한 번도 비참해 본 적 없었을 사람이 누구보다 비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로 갈기갈기 찢긴 희재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지옥 같던 고통이 잠시 멈췄다. 마치, 그에게로 모두 흘러간 것처럼.

“…내가 매 순간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웠는지, 이제 좀 알… 겠어요?”

“…….”

“몇 번이고 더 할 수 있… 어요. 이원이가 아닌 다른 누구랑도 난 상관없어. 당신이 내 손 놓을 때까지, 몇 번이고 그렇게….”

임청아가 울고 있었다. 제 앞에선 매번 우는 얼굴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깊이부터가 달랐다. 슬픔 속에 잠긴 청아는 금방이라도 익사할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넋을 놓고 비틀거리던 청아가 결국 제 가슴팍으로 쓰러졌다.

희재의 심장이 바닥으로 뚝 낙하했다.

* * *

지나친 가이딩이 불러온 후유증은 생각보다 지독했다. 청아는 일주일을 꼬박 앓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심각한 고열과 오한으로 밤새 끙끙 앓았다. 지켜보는 사람조차 괴로울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희재는 청아가 앓는 내내, 병실을 지켰다. 참회나 반성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청아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게 다였다.

글자가 빽빽이 채워진 서류를 바라보던 희재가 끙끙 앓는 소리에 급히 몸을 일으켜 침실로 다가갔다. 이불 속에 머리까지 파묻은 청아가 온몸을 덜덜 떨며 아파하고 있었다. 주사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힘든 모양이었다.

“어, 엄마. 흐으… 엄마.”

끙끙거리던 청아가 또다시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길 잃은 아이라도 된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그러다, 열이 가라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곤히 잠들었다. 반복의 반복이었다.

청아가 찾는 엄마가 지영이 아닐 거란 건 희재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찾는 건 아주 오래전 청아를 버리고 사라졌다던 그 엄마일 것이다.

아프고, 슬퍼도 찾을 사람이 없는 청아는 자신을 버린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한참을 앓았다. 희재는 그 괴로운 순간들을 아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자신의 죄를 생생하게 목도하는 기분이란 몹시도 처참했다. 죄책감이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했다. 희재가 청아에게 느끼는 건 의무나 책임이 아니었다.

몇 번을 무너트려도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청아의 마음이,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순정이 좋았다. 그러나, 청아의 상처를 먹고 자라난 희재의 악심은 서서히 그 빛을 잃어 갔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던 마음이, 더러운 애정이 이제 희재를 좀먹기 시작했다.

“…임청아.”

습관처럼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주려던 희재의 손이 뚝 멈췄다. 가이딩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더 이상의 접촉은 위험했다. 자신은 이제 청아를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었다. 청아가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만질 수 없다는 건 똑같을 것이다. 청아가 원하지 않을 테니.

물론, 전처럼 억지로 가진다고 한들 안 될 건 없었다. 어두운 방에 처박아 두고 오로지 자신만 알게 만들고 싶기도 했다. 다시는 저를 버리고 갈 생각 따위 하지 못하게.

하지만, 눈물로 젖은 청아의 눈매가 더는 버텨 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걸 보는 자신도 똑같이 괴로워질 것이었다. 바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처럼.

청아의 고통과 눈물을 마주하며 제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늦어 버린 자각이 희재의 가슴을 처참하게 후려치며 지나갔다. 차라리 평생 모르는 편이 더 나았을 뻔했다. 그랬다면, 같잖은 죄책감 따윈 모른 채로 청아를 제 곁에 평생 주저앉힐 수 있을 테니까.

가까스로 잠이든 청아의 하얀 얼굴엔 자신의 손으로는 닦아 주지 못할 슬픔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미련한 생각이지만, 희재는 청아가 이대로 눈을 뜨지 않길 바랐다. 차라리, 그냥 지금처럼, 계속 제 곁에 머무르길 바랐다. 이뤄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며칠을 더 앓고 깨어난 청아는 아무런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병실을 떠났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희재는 청아를 붙잡지 못했다. 손 하나 댈 수 없는 몸은 무력으로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청아를 잡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제 마음뿐인데, 모든 표정을 지워 낸 새하얀 얼굴은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와 솔직한 마음을 모두 얘기한다 해도, 청아가 차갑게 비웃을 것만 같았다. 정말 질린다는 눈으로 바라볼 것 같아 두려워졌다. 매섭게 날아오는 손바닥도, 서툴게 쏟아지는 발길질도 모두 다 참아 낼 수 있었지만, 그것만큼은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텅 비어 버린 병실엔 청아의 작은 흔적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비 내리는 창가에도, 새하얀 침대 위에도 더는 청아를 찾을 수 없었다. 쓸쓸한 부재를 눈에 담자, 미처 알지 못했던 공허함이 희재의 가슴에 번지듯이 퍼져나갔다.

쓰던 컵, 신던 신발, 입던 옷. 모두 그대로 놓여 있는데 임청아만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흔적을 좇던 희재가 홀린 듯이 서랍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랍 구석에 떨어진 단추와 눈이 마주쳤다. 흔하디흔한 검은색 단추일 뿐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데가 있었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던 희재가 밀려오는 과거에 그대로 침몰당했다.

‘가만히 있어요. 이거 잘라야 되겠는데.’

‘…어, 저 머, 머리카락은 안 돼요. 정말 안 돼요….’

‘어이가 없네. 내가 청아 씨 머리카락을 자를 사람으로 보여요?’

도대체 왜, 왜 이런 걸 계속 가지고 있었는지…. 그런데 왜 마지막엔 가져가지 않았는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청아가 두고 간 건 고작 단추 하나가 아니었다. 청아가 버린 건 자신에 의해 수백 번이고 짓밟혔던, 결국엔 그 쓰임을 다하고 구석으로 내쳐진 바로 그 마음이었다.

버려진 마음이 희재에게 물었다. 함께 보냈던 모든 밤이 그저 가이딩에 지나지 않았었냐고. 밤새 나누던 키스와 체온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냐고. 뒤늦게나마 단추를 손에 꼭 쥐어보았지만,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 * *

“다시 말해 봐라.”

“파혼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박 의원하고는 제가 얘기해서 정리하겠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정원을 구경하던 연 회장이 천천히 바퀴를 돌렸다. 파혼을 말하는 희재의 태도가 지나치게 당당하고 태연했다. 얼핏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예민하게 날이 선 얼굴과 눈가에 묻어난 피로까지 감출 순 없었다.

어릴 적부터 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잘 굴러가는 놈이었다. 이득이 되면 취하고, 그게 아니라면 냉정하게 내쳤다. 형만 한 아우 없다지만, 이 집안에서만큼은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런 희재가 답지 않게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예리한 눈매로 희재를 훑던 연 회장이 천천히 운을 띄웠다.

“희성이도 아닌 너한테 대표이사 자리 넘기겠다는 거, 나한테도 쉬운 결정 아니었다. 카지노 자리 잡을 때까지, 약혼 유지하는 게 우선 조건이었다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

“큰일 아니면 천천히 진행해라. 몰래 만나는 여자 하나 있다고 해서….”

“파혼하겠습니다.”

단호한 희재의 태도에 연 회장이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왜, 그 여자가 첩으로 사는 건 싫다고 하냐?”

“…제가 싫습니다. 더는 그렇게 두고 싶지도 않고요.”

“고작 여자 하나 못 다루는 놈이 회사는 어떻게 다루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하는 꼴을 보니, 이번 카지노 대표이사 자리는 네가 아니라 희성이가 맡는 편이 좋겠어.”

치졸한 협박이었다.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번 카지노 대표이사는 자동으로 희성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 아무리 잘난 연희재라도 한번 뱉은 말을 거둬들일 순 없었다. 지분 비율 또한 불합리하게 조정될 것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그렇게 둘 거냐?”

“………”

“희재야. 지금이라도 마음 바꾸라고 하는 얘기다. 좋은 기회 뺏기지 말고……”

끓어오르는 화를 참은 연 회장이 부드러운 어투로 희재를 설득하려 했다. 그럼에도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다. 고작 파혼 하나로 자리를 뺏기기엔 너무도 아까운 놈이었다.

“잠시 뺏겨도 상관없습니다.”

“…….”

“제가 다시 찾아오면 그만이니까.”

“이번 일, 크게 후회하게 될 거다.”

예상치도 못했던 답변에 연 회장이 입매를 굳혔다. 갑작스레 폭주가 터졌던 날부터 어째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일을 치는구나 싶었다.

“건방진 놈, 나가 봐.”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젓자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희재가 방을 빠져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지나친 희재가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러 차고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콘솔박스를 뒤진 희재가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셔츠를 걷어 낸 뒤, 익숙한 손길로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임청아가 떠난 지 벌써 2주째였다. 약물이 들어가자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던 파동이 꿀렁이며 가라앉았다. 역겨운 감각과 함께 머리를 찌르는 두통이 찾아왔다.

“우선 회사로 가죠.”

“출발하겠습니다.”

주사기를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진 희재가 알코올 솜으로 팔을 문질렀다. 투약량을 배로 늘린 덕분에 효과는 좋았지만, 불면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칼날처럼 날이 선 신경과 가슴을 내리누르는 답답함에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던 희재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을 조심스레 훔쳐보던 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무님, 가이딩 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얘기해요.”

“우선, 요청하신 대로 임청아 님과 각인 해제 완료되었습니다.”

“…….”

“다른 가이드와 가이딩은 안 받겠다고 말씀 전했습니다. 급한 대로 센터 측에서 자택으로 약물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요.”

“참, 박 의원님과는 통화 완료했습니다. 날짜는 다음 주 토요일로 잡아 두었고, 장소는….”

일방적인 통보가 될 예정이었다. 카지노 사업의 뒤를 봐주던 박 의원의 손을 자르고 선택한 일이었다. 대표이사, 지분, 유산…. 수많은 단어가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어째서인지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 자신의 선택을 조소하던 희재가 약혼반지를 빼기 위해 네 번째 손가락을 훑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은커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잠시 멈칫하고야 말았다. 손가락은 아주 오래전부터 텅 비어 있었다.

가이딩을 하려 들 때마다, 청아는 반지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아니, 감촉이 아니라 도덕심을 저버리는 행위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럴 때마다 단순한 유희거리로 더욱 짓궂게 희롱하고 몰아갔다.

결국, 이 정도의 의미에 지나지 않을 일이었다. 고작 그걸 위해, 임청아를 버리고 울렸다. 약혼 따위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니 곁에 있으라고 협박해선 안 되었다. 그 순간, 약혼을 깼어야 했다. 선택권이라고는 주어지지 않았던 청아와는 달리, 자신에겐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매번 같은 선택으로 임청아를 울렸다. 그래선 안 됐다. 텅 빈 손가락을 어루만지던 희재가 습관처럼 청아를 떠올렸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깨끗한 웃음이 잘 어울렸던 얼굴엔 어느샌가 울음과 슬픔만이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처럼 늘 위태롭고 불안해했다. 모두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 하얀 얼굴을 떠올리던 희재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 * *

상처에 무뎌진 마음은 이제 제법 단단해지나 싶다가도, 이따금씩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쿵쿵 내려앉고는 했다. 청아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무력감과 우울함을 이겨 내기 위해, 집을 구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동네 상가에 위치한 피아노 학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섬세하고 꼼꼼한 원장의 가르침 덕에 제법 원생이 많았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이라 청아에게도 큰 무리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학기쯤엔 복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학자금 대출도 받고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긴 해야겠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청아는 여전히 악몽을 꿨고, 이유 없이 몸이 아파 밤새 끙끙 앓기도 했다. 악몽의 주체는 윤지영이었다가, 한기원이었다가, 때때로 연희재가 나오기도 했다. 괴로운 일이었다.

“청아 씨, 3번 테이블에 이것 좀 들고 가줘.”

과거의 상처들은 흉측하고 못난 자국이 되어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방금 나간 테이블 정리하고 퇴근하면 돼. 고생했어.”

“네, 알겠어요.”

일부러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늘린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평일엔 피아노 학원에서 일하고, 주말이 되면 고깃집에서 불판을 날랐다. 태어나 처음 해 본 일이었다. 청아는 자신을 학대라도 하듯, 과하게 몰아붙여 일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다른 생각 할 틈도 없이 그저 푹 잠들 수 있었다. 그거 하나만큼은 좋았다.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벽에 걸린 코트와 머플러를 집어 들었다. 가게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딱 10분이 걸렸는데, 비나 눈이 오지 않는다면 꽤 걸을 만한 거리였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뒤로한 채 천천히 걸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즈음, 골목길에 주차된 익숙한 차량을 발견하곤 걸음이 멈췄다. 딱 보름만의 연희재였다.

“얘기 좀 해.”

“…더 할 얘기가 남았어요?”

그는 여전했다. 다소 지쳐 보이는 기색이 있긴 했지만, 마지막 날 보았던 얼굴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구둣발을 바라보다 왼쪽으로 발을 틀었다. 비켜 주질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희재가 왼쪽으로 한 발 더 따라붙었다.

“비켜요,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거 불편하고 싫어요.”

귀찮고 성가셨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이런 행동이 무섭고 두려웠을 텐데 이젠 아무런 감흥조차 없었다. 겪을 대로 다 겪어 적응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청아가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새로운 사람이 그렇게 가이딩을 못해요?”

“새로운 가이드 같은 거 없어.”

“…아니면, 아직도 내가 해 주는 가이딩이 필요해요? 근데 희재 씨도 아시잖아요. 저 가이딩도 못 하는 처지인 거.”

몸 상태가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 가이딩은 무리였다. 만약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의 협박대로 평생 에너지를 착취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니어도 희재의 불안정한 파동과 폭주를 해소해 줄 가이드가 있었다. 약이나 주사가 주는 부작용에 시달릴 일도 없으니, 희재에겐 잘된 일이다.

“가이딩 때문에 온 거 아니야. 너랑 나 각인 끊겼어.”

“…….”

“네 가이딩, 이제 나한테 아무 소용없다는 얘기야.”

“그럼 더 잘됐네요. 희재 씨가 날 찾는 이유는 가이딩 하나였잖아. 이젠 그 짓도 못 하는데 뭐 하러 날 찾아와요.”

이렇게 평생 고된 일만 하다가 몸 상태가 아예 망가져 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연희재가 이런 식으로 저를 찾아올 일도 없을 테니.

“희재 씨는 그냥… 잘 쓰던 가이드가 없어져서 잠깐 허전하고, 불편한 것 뿐이에요.”

“그런 거 아니야.”

단호한 부정에도 청아의 표정은 무감하기만 했다.

“우리 계약은 그날 끝났어요.”

“…난 아직 안 끝났어.”

“새로운 사람 구해질 때까지. 그게 희재 씨가 내민 계약 조건이었잖아요.”

‘대신 약속할게요.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나면 그땐 이 계약 바로 깨줄게. 청아 씨도 그편이 좋지 않겠어요?’

“당신은 몰랐겠지만…나, 그때도 희재 씨 좋아하고 있었어요.”

차갑게 식어 버린 얼굴을 바라보던 희재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다. 모질었던 순간에도 오직 저 하나만 바라봤던 임청아였다. 그런 마음을 짓밟고 화장실에서 관계를 맺었다. 그 어떤 하급 가이드도 그런 식으로 막돼먹은 취급을 당하진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단추 하나 버리지 못했던 임청아의 마음을 짓밟아 내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내가 신경 쓰인다고… 날 좋아한다고,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

“제발, 제발 아니길 바라세요. 그래야 희재 씨가 나한테 했던 짓들이 납득이 되잖아요.”

오래전 자신이 쳐둔 덫에 스스로 갇힌 희재는 청아가 점점 멀어져가는데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점처럼 조그마해진 뒷모습은 제 흔적도 좇지 말라는 듯, 금세 골목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 *

단체 손님들이 휩쓸고 간 테이블은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들을 정리하고 의자 틈 사이, 바닥 구석구석까지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야 앞치마를 벗을 수 있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가게를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이원이었다. 전과 같이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퇴근했죠? 앉아요.”

모든 일은 잊은 사람처럼 태연해 보이는 이원과 달리, 청아는 그렇지 못했다. 지난날의 과오가 생각나 이원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이용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밥 먹었어요?”

“…아직 못 먹었어. 집에 가서 먹으려고.”

“씨발, 뭐 밥도 안 먹이고 일하나… 사장님, 여기 주문!”

가게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이원의 목소리에 사장이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왜소한 체격의 사장은 자신보다 한참은 커다란 이원 앞에 서서, 부르는 메뉴들을 하나하나 받아적기 시작했다. 포장 메뉴까지 싹 다 주문받은 사장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사라졌다.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원의 눈길엔 불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누나, 사대 보험은 넣었죠? 안 넣은 거면 저 새끼 내가 노동청에 찔러 줄게.”

“넣었어.”

이원도 청아도 억지로 웃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입을 연다면 와장창 깨져 버릴 평온이었다. 지난날의 끔찍한 기억을 두 사람 모두 쉽게 잊을 리가 없었다. 연신 헛기침을 뱉던 이원은 먼저 나온 계란찜을 바라보다 투박한 손길로 청아의 손에 숟가락을 쥐게 했다. 억지로 웃어 보인 청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수촌 들어갈 준비하느라 바쁜 거 아니었어?”

“몸만 가면 되는데 바쁠 게 뭐 있어. 오늘 여기 온 건….”

“…….”

“그날 일, 사과하러 온 거예요. 끝날 땐 끝내더라도 그런 식으로 끝내는 건 싫어서.”

청아는 그저 가만히 이원의 말을 들었다.

“후회했어. 그런 식으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

“그러다 깨달았어. 생각해 보면 난 누나 마음보다 내 마음이 더 중요했던 것 같아. 미안해요.”

이원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아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다시 돌린다면, 그런 식의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 이원의 마음을 이용함으로써 청아도 같은 상처를 입었다.

“이원아, 그날 일은 내가 잘못한….”

“사과는 나만 할게요. 누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들으면 나 진짜 비참해질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은 좋은 사람이었다. 먼저 용기 내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몹시 고마웠다.

“밥 먹어요.”

어느새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을 바라보던 이원이 낮게 말했다.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청아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입맛이 없는지 먹는 모습이 영 시원찮았다.

“팍팍 좀 먹어. 누나가 엄지공주도 아니고 밥알 한 톨만 먹고살 거예요?”

억지로 분위기를 띄운 이원이 김이 폴폴 나는 제육볶음을 청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작게 웃은 청아가 흰 쌀밥을 가득 퍼 입에 담아 넣었다. 한층 야윈 얼굴을 보니 이원은 마음이 좋지 못했다. 옆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이것마저 제 욕심인 걸 알았다.

“잘 살고 싶어서 내려온 거잖아. 그럼 씩씩하게 잘 지내요, 누나. 자꾸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고마워, 나 잘 지낼게.”

그럼에도 하나 더 욕심 내보자면, 청아가 부디 잘 지내길 바랐다. 이것만큼은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진심이었다.

“나, 이제 못 올 거예요. 남들은 차여도 누나 동생하고 잘 지낸다는데 데 난 그 짓은 못하겠어.”

굳이 선수촌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 역시, 청아 때문이었다. 자꾸만 발걸음이 임청아를 찾았다. 보고 있으면 안고 싶고, 안고 있으면 입 맞추고 싶었다. 더는 곁에 있기 힘들 정도로.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첫눈에 반한 사람이랑 어떻게 누나 동생을 해.”

“미안해, 이원아.”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라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이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갈게요, 누나.”

힘들어하는 청아를 보는 것도 괴로웠지만,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도망가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도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다. 미련 따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는데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럼에도 쉬이 번호를 바꾸진 못할 것 같았다. 초라한 미련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이원이 느릿한 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 * *

주말 밤의 고깃집은 왁자지껄한 소리와 붐비는 사람들도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잠시 숨 고를 새도 없이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3번 테이블 김치찌개 나왔어!”

정신없이 테이블을 닦던 청아가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서빙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주문이 들어왔다. 발바닥은 터질 듯이 아프고, 등은 땀으로 젖은 지 오래였다. 가이딩도 못할 정도로 바닥난 체력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얼마 못 가 픽 꼬꾸라질 게 뻔했다.

그런데도 작은 발은 바쁘게 홀을 뛰어다녔다. 무리하고 있다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홀로 침대에 누워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것보단 이편이 나았다.

“청아야, 잠깐 주방으로!”

더러워진 테이블을 허겁지겁 정리하던 청아가 다급한 목소리에 곧장 몸을 돌렸다.

“…아!”

“언니, 괜찮으세요?”

순간, 팔에 닿는 뜨거운 감각에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그대로 놓치고야 말았다.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당황한 청아가 급히 주저앉아 바닥에 떨어진 접시를 주워들었다.

“언니, 제가 치울 테니까 팔 좀 봐요. 아… 진짜, 난 언니가 갑자기 돌 줄 모르고.”

“괜찮아. 살짝 닿기만 한 거야.”

“살짝 닿기는. 벌써 빨갛게 올라오잖아요!”

“물로 씻고 올게.”

점점 더 빨갛게 부어오르는 청아의 팔을 확인한 윤정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 청아 언니 약국 좀 다녀올게요. 홀 마감은 제가 할게요!”

쟁반을 뺏어 든 윤정이 청아의 등을 세게 떠밀었다. 손에 쥐고 있던 행주까지 뺏긴 청아가 윤정의 호들갑에 머쓱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많이 다친 것 같진 않은데….

“진짜 괜찮은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안 다쳤어.”

“그래도 흉 지면 안 되잖아요. 얼른 다녀와요. 손님 많이 빠져서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대신, 쓰레기는 내가 비우고 갈게.”

“어휴… 진짜 제가 언니를 어떻게 말려요? 시급도 똑같은데 너무 그렇게 열심히 하지 마요.”

“다녀올게.”

청아는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쥐고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깃집 마크가 박힌 검정 패딩은 지나치게 크긴 했지만, 따듯하긴 했다. 가게 뒤편, 골목길에 위치한 쓰레기차에 검은색 봉투를 하나하나 휙 던져 넣었다. 팔을 움직이니 상처 입은 부분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살짝 데인 건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손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되… 게 아프네.”

마지막 하나 남은 쓰레기봉투를 위로 던지다, 살갗을 쑤시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봉투를 놓치고 말았다. 봉투의 매듭이 풀린 탓에 꾹꾹 눌러 담은 쓰레기가 터져 나왔다. 청아는 한숨을 내쉰 뒤, 바닥에 주저앉아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한참을 주워 담고 있을 무렵,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너저분하게 널린 쓰레기 옆으로 뚝 멈춰 섰다. 새카만 구두코와 잘 다려진 바짓단. 올려다보기엔 모든 게 힘들고 피곤하기만 했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쓰레기를 담던 청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희재가 커다란 손으로 쓰레기를 주웠다.

“…이제 와서 왕자님 놀이라도 하고 싶어요?”

청아가 헛웃음을 쳤다. 그는 비웃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임청아, 진짜 불쌍하구나. 내가 또 도와줘야겠네. 뭐 그런 생각이라도 들어요?”

“왜 굳이 이렇게까지 힘든 일을 하는 거야? 네 몸 상태, 너도 잘 알잖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몰라서 물어요?”

쓰레기를 모조리 주워 담은 희재가 봉투의 매듭을 강하게 묶었다. 청아의 등 뒤에 자리한 쓰레기 차로 까만 봉투를 던져 넣은 그가 손을 털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온 거야. 나 때문인 거 알아서.”

“…….”

“다른 일도 많은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네 몸을 혹사 시키는 건지….”

연희재는 뻔뻔해지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프고 싶어서요. 그래야 가이딩 못할 거 아니에요.”

“…뭐?”

“내가 쓸모없어져야 날 안 찾아올 거잖아요. 조금이라도 건강해지면 또 무슨 짓을 할지 알고요? 차라리 아픈 게 나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희재의 표정이 굳었다. 몸 상태가 좋아지면, 또 가이딩을 강요당할까 봐, 그게 싫어서 억지로 제 몸을 혹사 시키고 있는 거였다. 희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위태로운 얼굴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당신도 아파 보라고 칼을 들고 달려드는 편이 나았다. 제 몸을 학대하는 청아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짓눌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내가 미운 거면 차라리 나한테 화풀이를 해. 너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부탁인데 이제 나 좀 그만 귀찮게 하면 안 돼요? 당신이랑 이러는 거 정말 지겹거든요.”

정말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청아는 이제 화를 내지도, 울지도 않았다. 꼭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사람처럼, 어떠한 생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은 얼굴이 더없이 두렵게 느껴졌다.

“죽고 싶을 만큼 지겨워요. 지긋지긋하고… 끔찍하게 싫어요.”

차갑게 굳어 버린 희재를 바라보던 청아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엔 일말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톡, 토독.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교재를 정리하던 청아가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창가를 적시던 비가 갑자기 기세를 바꿔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뚫리기라도 한 듯, 막무가내로 퍼붓는 폭우였다. 잽싸게 일어나 모든 교실의 창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정적에 잠긴 교실에 놀랍도록 고요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우산이 있을 만한 장소를 이곳저곳 뒤지기 시작했다. 깔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격의 예진이 아무 곳에나 우산을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 아무래도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청아가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아이들이 쓰는 책상이라, 무릎이 툭툭 걸리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곧 그치겠지.”

홀로 중얼거린 청아가 책상에 놓인 빨간 펜을 들었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노트를 모조리 체크했음에도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거세게 퍼붓기 시작했다. 무릎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청아가 구석에 놓인 외투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책장 선반에 놓인 오래된 책 교재 한 권도 챙겼다. 일단 급한 대로 머리라도 가리고 급히 집으로 뛰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상가 계단을 내려온 청아가 세찬 비바람에 잠시 몸을 웅크렸다. 겨울비라 그런지 날씨가 제법 추웠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뛰어들려던 찰나, 빗소리가 뚝 끊겼다. 아니, 새카만 우산에 부딪힌 빗방울이 툭툭 소리를 내며 귓가를 울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코끝에 와 닿는 향기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희재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비켜요.”

“우산 쓰고 가.”

“필요 없으니까 비키라고요.”

그는 선명하다 못해 끈질기기까지 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그림자에도 굳이 시선을 올리지 않은 청아가 왼쪽으로 걸음을 피했다. 그러자, 비에 젖은 구둣발이 청아의 신발을 따라 한 걸음 더 옆으로 옮겨 섰다.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거 불편하고 소름 끼쳐요.”

“…알아.”

“알면 찾아오지 마요. 이럴수록 더 싫어지기만 하니까.”

“더 싫어할 마음이 남아 있긴 해?”

희재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비꼬거나 빈정대는 태도가 아니라, 그저 감정의 잔여를 묻는 순수한 물음이었다. 가볍게 웃어 보인 그가 손에 들린 다른 우산을 건넸다. 우산을 주려고 줄곧 기다린 모양이었다.

“알았으니까 우산은 써. 집까지 꽤 걸리잖아.”

“싫어요.”

“그냥 우산이야. 받아도 돼.”

가만히 바라보던 청아가 손에 들린 우산을 팍 쳐냈다. 희재의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바닥을 굴렀다. 물웅덩이에 잠긴 우산을 빤히 바라보던 청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말을 이해 못 하셨나 본데…. 당신이 주는 건 그냥 다 싫다는 뜻이에요. 그게 당신 마음이든, 고작 이깟 우산이든 전부 다 싫다고요.”

“…….”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이사 갈 거예요.”

단호하게 말을 마친 청아가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멍청하고 미련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깟 우산, 차라리 받고 꺼지라고 해도 됐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싫었다. 고작 우산조차도 언짢았다. 이제 연희재가 주는 건 그게 무엇이든 받고 싶지 않았다. 또 상처받고, 싸우고… 그런 건 신물이 나도록 지긋지긋했다.

흠뻑 젖은 옷으로 집으로 들어온 청아가 온몸을 떨었다. 한겨울에 빗속으로 뛰어들었으니 가히 미친 짓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으로 보일러를 켜고 온수가 가동되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냉기가 가득한 바닥에 발이 닿자 이빨까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좁은 욕실로 들어가 급히 들어간 청아가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 냈다. 온수가 닿자 그제야 몸이 녹아내리는 듯 노곤해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으로 나오자 군데군데 열기가 올라오는 바닥이 느껴졌다. 가장 따듯한 중간으로 다가간 청아가 폭신한 이불로 몸을 감쌌다.

그런데도 몸이 으슬으슬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가장 높게 올린 청아가 머리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 차가운 공기에 코까지 시려웠다. 이불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은 청아가 억지로 눈을 감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차라리 우산이라도 받았어야 했는데 이 겨울에 괜한 오기를 부리느라 더 고생만 하고 있었다.

“추워….”

차가운 물웅덩이에 빠진 우산을 바라보던 희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홀로 남겨진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런 것 따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더는….

세찬 비는 그다음 날도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깊은 잠에 들었던 청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일러를 켰는데도 몸이 추웠다. 하루 내내 꼬박 쉬었는데도 상태는 더 안 좋아지기만 했다. 이제 구역질까지 쏟아질 지경이었다. 이불을 덮고 한참이나 앓던 청아가 결국 울렁이는 속을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열이 펄펄 끓어 귀까지 아파 오고 있었다. 쉽게 지나갈 감기는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그날, 우산을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한 청아가 입을 틀어막고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꺼내 들었다. 급한 대로 응급실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대문을 열자, 밤새 내린 비에 젖어 있던 칼바람이 살점을 도려낼 듯 거세게 불었다.

옷을 단단히 여미고 어두운 골목을 걸어 나왔다. 중간중간 머리가 핑 돌아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지만, 달리 멈출 순 없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간신히 몸을 일으켜 큰 도로까지 걸어 나오자 팔다리가 두드려 맞은 듯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자정이 된 도로엔 간간히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트럭이 전부였다.

어떻게든 택시를 잡아보려 해도 좀처럼 잡히지 않아 애가 탔다. 30분을 기다렸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았다. 급한 대로 불이 켜진 약국으로 들어간 청아가 증상을 설명하고 약을 챙긴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차라리 약을 먹고 푹 잔 다음,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에 가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벽을 부여잡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던 청아의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서늘한 겨울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자 줄곧 고여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러웠다. 별일도 아닌데 몸이 아프자 덩달아 마음까지 약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울음이 터져 버린다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입술까지 깨물어 가며 꾹 참아 냈다. 청아는 이리저리 비틀대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둠에 잠긴 골목길, 그리고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에 희재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자 습관처럼 가슴이 욱신거려 왔다. 그렇게 제게 오길 바랐을 땐 와 준 적도 없으면서,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등을 떠밀자 이젠 가지 않겠다고 버텨 댔다. 지긋지긋헀다. 모든 게 다 제멋대로였다.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눈물을 닦아 낸 청아가 발소리를 죽인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새하얀 봉투를 발견한 희재가 곧장 청아를 불러세웠다.

“어디 아파?”

“…비켜요.”

등을 돌린 채, 차갑게 말을 뱉은 청아가 대문 가까이 다가섰다. 열이 끓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눈물에 푹 젖은 눈가도 그에게만큼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잠금장치를 부여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까지 숨기진 못했다. 청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희재가 거리를 좁혀 휘청이는 몸을 돌려세웠다.

“너….”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눈물에 푹 젖어 있었다. 손에 들린 약 봉투와 시퍼렇게 질려 덜덜 떨리는 입술을 확인한 희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병원 가. 임청아.”

“안 가요. 이거 놔요.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이런 걸로 고집부리지 마.”

“…손대지 마요!”

휘청이는 몸을 잡아 차로 이끌자 청아가 발작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거센 고함에 희재조차 잠시 멈춰 서야 했다. 아픈 몸으로도 고집을 부리니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청아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도, 더는 인연을 이어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와 임청아를 들쑤셔 괴롭게 하는 것도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안 보고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 예전처럼 내키는 대로 안고 싶기도 했다. 병원에 가둬 두고 저만 받아 내게 만들었던 그 밤처럼, 다시 그렇게…. 그러나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덜덜 떨리는 두 손이 희재의 악심을 억누르게 만들었다.

“너 지금 제대로 서 있지도 못 해. 이대로 죽고 싶어서 이래?”

“당신한테 도움받는 게 아파 죽는 것보다 더 싫어요. 알겠어요? 내가 말했잖아. 당신이 주는 건 그게 뭐든 싫다고! 그러니까 가.”

“…….”

“…자꾸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거 싫으니까 제발 좀 가라고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청아가 결국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불덩이로 달군 듯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나 내일부터 안 온다고 하면 너 병원 갈래?”

청아를 따라 한쪽 무릎을 굽힌 희재가 허옇게 질린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원래도 작았지만, 청아는 날이 갈수록 더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 손에 쥐지도 못하게 모래처럼 바스러져 버릴까 봐 문득 겁이 났다.

“그럼 안 올게. 그러니까 병원 가자. 청아야.”

“…….”

“고개만 끄덕이면 돼. 어려운 거 아니잖아.”

안간힘을 쓰던 청아가 결국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아파… 너무 아파. 흐윽, 아파.”

한없이 약해진 마음은 외로움에 사무쳐, 아픔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펑펑 우느라 들썩거리는 어깨 위로 따듯한 코트가 걸쳐졌다. 몸을 감싸는 온기에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몸을 받쳐 드는 희재의 팔 안에서 까무룩 눈이 감겼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남자의 품이 너무도 따듯했다.

자정을 다 넘겨 도착한 응급실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열에 취한 청아는 한참 동안 앓는 소리를 냈다. 희재는 그 처량한 모습을 아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잠이 든 얼굴을 이렇게 오래도록 바라보는 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앳되고 예쁜 얼굴이었다. 특히 웃으면 더욱 빛났다. 그러나, 새하얀 얼굴에서 더는 미소를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희재는 좀처럼 청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픔에 끙끙대는 모습일지라도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 좋았다. 끝까지 이기적인 자신이 우스웠다. 다 끝난 마음을 부여잡고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아가 싫어할 만한 짓만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였다.

죽은 듯이 잠을 자던 청아가 눈을 뜬 건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온몸을 덜덜 떨게 만들던 추위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몸이 좋지 않았다.

“요즘 독감은 고열하고 오한이 일반적인 증상이에요. 구역감도 있다고 하셨죠? 열이 이렇게 높으니 그럴 수밖에 없죠. 이럴 땐 그냥 병원 바로 오셔야 해요.”

“…….”

“일단 링거 하나 더 맞을게요. 다 맞으시면 간호사 부르시고요.”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다가온 의사가 짧게 쓴소리를 했다. 의사의 말에 청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를 바라보던 희재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시선을 느낀 청아가 새하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등을 돌렸다.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역력한 행동이었다.

“가세요.”

“…….”

“다신 나타나지 않겠다는 약속, 이번엔 꼭 지켜요.”

다 쉬어빠진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다. 희재는 곧장 자신의 과오를 후회했다. 다신 나타나지 않겠다는 말 따위 해서는 안 됐는데…. 그러나, 아파 죽어가는 청아를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다. 나타나지 않겠다는 자신의 말에 기어이 고개를 끄덕이는 청아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이렇게라도 병원에 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이미 굳게 닫혀 버린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후회란 무슨 수를 써도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이토록 잔인했다. 청아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이 아니었다. 그냥 없었던 사람처럼 눈앞에서 사라져주는 것, 오로지 그 하나뿐이었다.

예전처럼 끌고 가서 협박하고, 가둬 두고 싶었다. 당장 이불을 걷어 입을 맞추고, 몸을 섞고 싶었다. 강제해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불 속에 파묻힌 어깨가 너무 작았다. 평생을 기댈 곳 하나 없이 외로이 버텨온 몸이었다. 끌어안아 주지 못할망정, 제 입맛대로 굴리고 괴롭혔다.

청아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제 마음을 죽어 가는 동안, 자신은 뒤늦게 감정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엇갈린 마음이라도 보듬고 싶었지만, 청아가 원치 않는 일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증오로 가득한 눈을 바라보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임청아.”

“…….”

“…청아야.”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희재 역시 무언가를 바라고 청아의 이름을 입에 담은 건 아니었다. 그저 제 입에 담기는 동그란 이름이 그저 좋았다. 가녀린 뒷모습을 눈에 담던 희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 속에서 눈을 깜빡이던 청아가 천천히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한때는 저 발걸음이 제게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하염없이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청아는 이제 그 무엇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오늘이 정말 연희재와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토록 바랐던 순간인데도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으, 흐윽… 흐. 흐읍.”

소중히 품어 왔던 첫사랑의 상실은 청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배로 더 혹독하고 괴로웠다. 하얀 이불이 몇 번이고 힘없이 들썩거렸다.

* * *

희재는 정말 약속을 지킬 모양이었다. 그가 찾아오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를 마주하는 일도, 거절하는 일도, 모든 게 다 귀찮고 지겨웠다. 침대맡에 앉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던 청아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일주일 내내 일을 하다 보니, 쓰레기 한번 버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현관에 한가득 놓인 쓰레기를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대충 봉투에 구겨 담고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청아야.”

익숙한 목소리에 숨이 멈췄다. 문 앞에 선 낯익은 인영을 확인한 청아가 찬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몸이 굳기라도 한 듯,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청아의 기억 속, 윤지영은 언제나 화려하고 우아했다. 시커먼 패딩을 대충 주워 입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빛나던 피부와 윤기 나던 머리칼 역시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예요?”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들어가서 얘기하자.”

“가세요. 저는 더 이상 할 얘기….”

“청아야, 나 많이 미웠니? 나도 너 그렇게 보내고 나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

거리를 좁혀 다가온 지영이 냉큼 청아의 손을 부여잡았다.

“내가 아무리 너한테 모질게 굴었다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태연할 수 있었겠니…. 너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늘 부드럽고 고왔던 지영의 손은 추운 겨울바람에 군데군데 까지고 잔뜩 부르터 있었다. 낯선 기분에 청아가 표정을 굳히고 손을 밀어내려 했다.

“…잘살고 있으니까 이렇게 찾아오지 않으셔도 돼요.”

“왜 이렇게 매정해, 응? 잠깐 얘기 좀 하자는 거야. 나도 길게 얘기 못 해. 너 손 차가운 거 봐. 들어가자, 얼른. 엄마 금방 나갈게.”

엄마. 칼바람에 어깨를 덜덜 떨던 윤지영이 어느새 울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정말 미안하기라도 한 듯, 자꾸만 청아의 손을 쓰다듬었다. 아주 오래전, 지영의 손을 잡았다가 차갑게 뿌리쳐진 적이 있는 청아에겐 기이할 정도로 낯설었다. 한 공간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께름직할 만큼 싫었지만 이대로는 쓸모없는 실갱이만 계속될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청아가 문고리를 잡았다.

방으로 들어온 지영은 바닥에 앉아 한참이나 눈물을 닦아 냈다. 연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슬프고 비통해 보였다. 경계의 끈을 놓지 못하던 청아가 잠시 고민하다 지영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정말로 사과하러 온 거야. 네가 용서만 해 준다면 나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 응?”

“…사과는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두 번 다신 안 보고 사는 것, 그거 하나예요.”

한참을 망설이던 지영이 갑자기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었다. 당황스러운 행동에 커다랗게 눈을 뜬 청아가 지영을 일으키려 애썼다.

“왜…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뭐 하시는 거예요!”

“…나 정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너 찾아온 거야. 청아야.”

“…그게 무슨.”

“우리 기원이 실형은 피해야 되지 않겠니? 부탁이다. 내가 이렇게 빌게.”

두 손을 모아 사과하던 지영이 이마가 땅에 닿도록 빌기 시작했다. 실형…?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지영은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냈다. 종이의 정체를 확인한 청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청아, 네가 탄원서 좀 써 줘… 응? 가족들이 써준 탄원서가 있을수록 기원이한테 유리하대.”

“…저보고 이걸 쓰라고요?”

“부탁할게. 청아야…. 어려운 부탁인 거 알아. 과거에 있었던 일, 다 잊진 못하겠지만 내가 살면서 하나하나 갚을게. 응?”

청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모든 자존심을 버린 윤지영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누가 보더라도 동정심이 들 만한 모습이었겠지만, 청아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저 징그럽고 소름 끼쳤다.

“아, 아니면 연희재한테 부탁 좀 해 봐. 너 그 사람 연락처 알지? 다시 한번만 도와 달라고….”

“…저한테 어떻게 이러세요?”

지영의 손이 청아의 외투를 거칠게 뒤적거렸다. 이리저리 떠밀린 청아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핸드폰이 잡히지 않자, 이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이기 시작했다.

“하지 마요. 하… 지 말란 말이야!”

“아들 새끼가 당장 감옥에 들어가게 생겼는데 세상천지에 체면 차릴 부모가 어딨어! 뭐라도 해야지!”

참을 수 없는 화가 청아의 가슴을 태웠다. 싸늘하게 손을 뿌리친 청아가 지영을 바라보았다.

“…당신들, 정말 쓰레기야. 인간도 아니야.”

“뭐?”

“차… 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당신도, 한중원도, 그 잘난 당신 아들도….”

“…….”

“제발 좀…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윤지영의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적은 처음이었다. 창고에 갇혔을 때도, 뺨을 맞았을 때도, 얼굴에 재떨이가 날아들었을 때도 그저 눈물만 삼켰다. 무섭고 두려웠으니까. 오래도록 학습되어 온 두려움은 청아를 모조리 꽁꽁 묶어 두었다. 그러나, 이젠 켜켜이 쌓여 눌어붙은 분노의 힘이 더 거셌다.

경악으로 구겨진 윤지영의 표정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청아는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늘 상처를 받는 입장이었으니, 그들이 심정 따위 알 리 만무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됐다. 상처를 주는 건 생각보다 더 짜릿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거 아세요? 오빠가 밤마다 제 방에 들어오려고 했던 거.”

“이 미, 미친년이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거야.”

“…….”

“어디 우리 기원이를 그딴 식으로 몰아가! 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도리어, 더 아프고 괴롭길 바랐다. 그 아픔이 오래 지속되기까지 한다면 더없이 흡족할 것 같았다. 청아가 미친 사람처럼 웃자, 지영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눈 동그랗게 뜨고 헛소리 찍찍하는 거 봐… 이 정신 나간 게!”

“때리세요. 때리고 싶은 만큼 실컷 때려요. 저는 죽어도 용서 안 할 테니까….”

짝, 짜악! 짝! 매섭게 쏟아지는 뺨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청아가 이를 악물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입안이 터진 건지 벌써부터 피 맛이 났다. 빗맞은 귓가가 웅웅 울리기까지 했다. 뺨 몇 대로 온 얼굴이 너덜너덜해졌는데 아픔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윤지영의 발이 부위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

“오빠 저번 달에 병원에 입원한 거, 그거 연희재한테 맞은 거예요. 으윽, 그… 것도 모르셨죠.”

“뭐? 너 지금 그게 무슨….”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지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연희재한테 다 일러바쳤어. 꼴도 보기 싫… 으니까 죽을 때까지 패 달라고 부탁했어요.”

“…뭐?”

“한기원 좀 죽여 버리라고 시켰어…. 됐어요?”

“이 미친년이…. 네가 처맞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보자. 어디 한번 보자고!”

이토록 분노에 차 달려드는 윤지영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뺨이나 한두 대 때리고, 방에 가뒀던 수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과되지 못한 폭력이 그대로 꽂혀 들었다. 이렇게 맞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맞아 죽는다니, 이렇게 비참한 끝이라니…. 배를 잘못 맞은 모양인지, 쉽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으, 흐…… 끅, 윽.”

“그때, 너 같은 년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

예전이었다면,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펑펑 쏟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정말 한계에 다다르니 오히려 눈물이 나질 않았다. 청아는 꼭 우는 법을 잃어 버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폭력을 받아 냈다. 바닥으로 넘어진 청아의 위로 올라탄 지영이 마구 뺨을 갈겼다. 빨갛게 터져 오른 볼에선 아픔보다 뜨거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절대 용, 서 안 할 거야…. 흐. 절대, 용서 안 해.”

“네까짓 게 용서 안 하면 어쩔 건데!”

목을 조여 오는 날카로운 손에 청아의 호흡이 틀어막혔다. 이성을 잃은 윤지영이 가녀린 목을 터트리기라도 할 듯, 강하게 졸랐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불길한 감각에 차가운 손을 몇 번이고 손톱으로 긁어내려 봤지만, 놓아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으. 끄윽… 흐.”

청아는 이 모든 비극의 기원이 연희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희재를 떠나도, 희재를 떠나지 않아도 청아는 늘 여전히 불행했다. 더는 이 기나긴 어둠을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결국 윤지영의 손등을 긁어내리던 손에 힘을 풀었다. 강한 압력에 온몸이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죽는다면 억울하긴 하겠지만, 달리 나아질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지금 이 순간, 지영이 이 손을 놓고 돌아간대도 언젠간 같은 일이 또 반복될 것이다. 한기원은 형이 끝나는 대로 자신을 찾아와, 또다시 위험한 짓을 벌이려 할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건방진 게 어딜 감히….”

고통을 느끼는 것 대신, 자신이 죽는다면 몇 명이나 슬퍼해 줄지 천천히 세어 보기로 했다. 카페 사장님, 세인이, 이원이…. 꼴랑 3명이었다. 손에 꼽는다는 표현을 쓰기 민망할 정도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청아가 안간힘을 써 손가락 하나를 더 구부렸다. 그리고… 연희재.

그가 과연 슬퍼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그러길 바랐다. 당치도 않은 욕심일지 몰라도, 연희재가 아주 많이 슬퍼해 주길 바랐다. 죄책감에 괴로워하길 바랐다. 자신이 아팠던 만큼.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참아 왔던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왔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미치도록 밉고 원망스러웠던 연희재가 떠오르다니….

하지만,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그냥 원 없이 그를 떠올리고 싶었다. 다 헤져 버린 기억들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것만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얘졌다 시커메졌다, 깜빡깜빡 점멸하기 시작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공포에 손이 덜덜 떨렸다. 손톱으로 바닥을 벅벅 긁어 가며 살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고통스러웠다.

“끄… 윽, 으….”

정신이 까무룩 넘어가기 직전,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지영이 퍽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공기에 헛구역질이 쏟아져 나왔다. 바닥으로 나자빠진 몸을 커다란 품이 단번에 끌어안았다.

시야가 흐릿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재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익숙한 향기 앞에 코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의 공포가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평온을 잃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심장 위로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끄윽, 흐…. 우윽.”

실핏줄이 다 터진 청아의 얼굴을 바라보는 희재의 눈 위로 청아의 것과 꼭 닮은 크기의 통증이 번져 나갔다. 꽃처럼 피어오른 붉은 반점 위로 덜덜 떨리는 희재의 손이 닿았다.

“…너 왜, 왜 가만히 있어…. 임청아. 너 얼굴에 이게… 무슨.”

그는 죽음의 흔적을 지워 내려는 듯 몇 번이고 상처 난 얼굴을 어루만졌다.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우으, 흐….”

“이 지경이 되도록 왜 가만히 있어. 어? 청아야, 너 왜 살려고도 안, 해…. 임청아… 왜 그래, 너 왜….”

윤지영의 아래에 깔려 있던 청아는 반항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가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전부 빨려 나간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있잖아요. 희재 씨, 나… 그냥….”

“…….”

“저 멀리에 버려 주면 안 돼요? 아무도 못 찾게… 흐윽, 그냥 그렇게. 제발 좀….”

간절한 부탁이었다. 희재의 심장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신을 버려 달라는 청아의 말에 한순간 귀가 멍해졌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상실의 공포가 희재의 가슴을 콱콱 내리눌렀다. 무서웠다. 미친 사람처럼 떨리는 손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임청아를 잃을까 봐…. 안고 있는데도 이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품에 안긴 작은 몸을 놓칠세라 강하게 껴안고 있던 희재가 결국 떠밀려 오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마…. 윽, 흐으, 임청아.”

결국엔 나를 무너트리고야 마는 너의 연약함, 실낱같은 다정함에 매달려야만 했던 너의 외로움.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네 마음. 올곧게도 나만을 바라보던…. 하지만, 미처 알아주지 못했던.

전부 제 잘못이었다. 평생을 외로움 속에 살아왔을 청아에게 그런 식으로 대해선 안 됐다. 뒤늦은 후회가 칼날이 되어 가슴을 마구 난도질했다. 품에 안긴 청아는 크게 소리 내 울지도 않았다. 모든 걸 놓아 버린 하얀 얼굴이 처량했다. 희재는 그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놓쳐 버린 모든 것들을 간절히 염원하고, 후회하며…. 그렇게 한참이나 청아를 어루만졌다.

“잘못했어…. 으윽, 청아야. 내가 다 잘못했어. 으, 흐윽…. 그러니까 제발 이… 러지 마.”

“어, 흐으, 흑….”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프게 해서….”

등을 어루만지는 따듯한 손길에 눈물을 참던 청아가 결국 오열하듯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가 우는 것처럼 서글프고 애처로운 울음소리였다. 오래도록 쌓여 온 서러움이 모조리 터져 나와 희재의 가슴팍을 흠뻑 적셨다.

지나온 날을 후회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미련한 짓일지라도 임청아의 마음에 깊게 박힌 상처를 지워낼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많이 외로웠지, 미안해…. 미안해.”

안길 품이 없는 사람은 소리 내 우는 법보다 숨죽이고 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했다. 상처로 얼룩진 청아의 과거를 끝내 지워 낼 수 없다면, 펑펑 소리 내 울 수 있는 따듯한 품이라도 되어 주고 싶었다. 몇 번이라도, 기꺼이.

* * *

청아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빨갛게 부어오른 목덜미를 몇 번이고 쓸어내리던 청아가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맞아서 퉁퉁 부운 눈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볼가에 붙은 반창고를 어루만지던 청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튼으로 빛이 가려진 방안은 완벽한 밀실이었다. 어둠을 인지한 몸이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 미친 사람처럼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아 왔다.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혹시 또… 사람 붙였어요?”

날을 세운 청아가 어깨를 끌어안은 손을 거칠게 풀어냈다.

“당신이 뭔데… 왜 나한테 사람을 붙여…. 대체 왜! 나 좀 콱 죽어 버리게 냅두지…. 왜, 왜… 흐윽.”

다 쉬어빠진 목소리 끝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애꿎은 이불을 쥐어뜯던 청아가 분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터트렸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비참한 모습을 그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나 좀… 흐윽, 그냥 죽게 두지.”

“…….”

“흐윽… 이제 그만 좀 해요. 제발 좀. 다들 나한테 왜, 흐윽. 왜 이래….”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청아 자신도 몰랐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느꼈던 공포를 떠올리자, 또다시 눈앞이 흐려졌다.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누르려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가며 버텼다. 희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죽음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고 두려웠다. 살고 싶다고, 나 좀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치고 싶을 만큼 무서웠다.

“다친 곳 치료받아. 너 여기 있는 동안, 나 안 올 거야. 싫어하는 짓 더는 안 시켜. 그냥… 치료만 받아.”

밀려오는 고통을 참으려 고개를 숙인 청아가 이를 악다물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무 아파서 5분도 더 버티기 힘들었다. 말을 꺼낼 때마다 찢어진 얼굴이 욱신거렸다. 배에 힘이라도 조금 들어가면 발길질로 맞은 배가 멍이라도 든 듯 욱신거렸다.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 그러니까 치료만 받아.”

“…….”

“그냥 그것만 해 줘. 제발, 제발….”

상처로도 가려지지 않는 청아의 깨끗한 눈망울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한때는 아픔을 주고, 괴로움을 견디게 하며 마음을 증명하라 몰아붙이기도 했었다. 새카만 눈동자에 담긴 원망과 사랑을 볼 때마다 흡족하고 뿌듯했다.

그러나, 이젠 빛을 잃은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목숨을 버리려고 했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자 숨구멍이 틀어막혔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적인 광경이었다.

“아까 무슨 생각을 했냐면….”

“…….”

“내가 이대로 죽으면… 희재 씨가 나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 내가 울었던 것만큼…. 그렇게 울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죽는 순간에도 그 생각만 떠올랐어.”

생생한 증오가 가슴에 내리꽂혔다. 희재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태어나서 누군가를 이렇게 미워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당신이라는 게, 너무 싫고… 끔찍해요.”

“…….”

“그러니까 가. 이제 그만 해요, 제발….”

그럼에도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을 감싸 안은 희재는 눈물에 젖은 눈두덩이 위로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지금이 아니면 정말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 한없이 두려워하면서.

생을 놓으려 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다정한 온기였다. 아주 오래도록 이런 품을 찾아 헤맸던 것 같았다. 모든 아픔과 슬픔을 막아 줄 수 있는 단단하고 따듯한 품. 오랜만에 안겨 본 희재의 품은 너무 따듯했다. 켜켜이 쌓여 온 원망도, 더는 흐르지 않는 슬픔도 단번에 녹여 버릴 만큼.

“죽지 마…. 죽지 마.”

어깨를 적시는 눈물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희재의 눈이 슬픔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울고 괴로워하며 자책하는 희재의 얼굴. 그런데, 막상 마주하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또다시 그에게 흔들리려는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은 청아가 단단한 어깨를 밀어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를 용서하기엔 그가 남긴 상처가 너무도 크고 잔인했다. 잊히지 않는 날카로운 순간들이 아직도 청아의 가슴을 사정없이 헤집고 있었다.

“가, 제발…. 연희재, 흐윽, 이제 제발 좀 가, 가라구….”

한없이 작아 보이는 몸을 꽉 안아 주고 싶었지만, 온몸이 멍투성이라 껴안을 수도 없었다. 손과 발이 묶인 희재는 참담한 기분에 질식당했다. 눈물 섞인 거부에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망설이는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멀어질 때마다 청아의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사실은 가지 말라고,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아파도 좋으니, 함께 있어 달라고 붙잡고 싶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는데… 왜 어째서, 아직도 왜….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참고 버텨 냈다. 자신을 속이는 가여운 외로움에 두 번 다시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병실 문이 닫히고 그가 완전히 멀어져 갔다. 혼자임을 깨닫자 텅 빈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쓸쓸해졌다. 그러나, 묵묵히 삼켜 내야 할 제 몫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