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ata No.3
그날 이후로, 이원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듯 느닷없이 가게나 집으로 들이닥치진 않았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문자는 꾸준히 보내왔다. 메시지를 바라보던 청아가 그대로 핸드폰을 꺼 버렸다.
오전부터 조금씩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모든 걸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시커먼 하늘을 바라보자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하루 종일 비가 오네.”
보일러를 최대한 높게 올리고 이불로 온몸을 감쌌다. 세인이 근무를 바꿔준 덕에 마음 놓고 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제 막 세탁해 놓은 이불에선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이불 속에 코를 파묻은 채, 천천히 눈만 깜빡였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온몸이 나른했지만, 정신만은 그렇지 못했다.
TV에서 보았던 희재의 소식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청아는 불현듯 밀려오는 불안함에 작게 몸을 떨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창가를 타고 흐르는 빗소리에 집중했다. 일정한 소리가 반복되자 거짓말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감았던 눈이 떠진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난 후였다. 방 안에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향기가 났다.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향이었다. 설마….
어스름한 시야 사이로 낯익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청아는 뒷모습만으로도 단번에 그를 읽어 냈다. 희재였다. 비명을 집어삼킨 청아가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이불을 걷어냈다. 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꼭 저승사자처럼 차가웠다.
“나 안 반가워요? 난 청아 씨 되게 반가운데.”
“…여긴 왜, 어떻게… 왜.”
순진하리만큼 멍청한 질문에 희재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아름답게 눈매가 물결치며 휘었다.
“왜긴. 에스퍼가 가이드 찾아오는데 다른 이유가 있어요?”
가슴을 찌르는 잔인한 대답에 금세 눈물이 핑 돌았다. 희재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였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말로 들으니 더 아팠다.
“…저는 이제 가이딩하기 싫어요. 더, 더는 안 한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이건 청아 씨 결정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
“난 좆같은 소꿉놀이에 장단 맞춰 주려고 계약한 게 아니라, 가이딩 필요하면 그냥 곱게 떡이나 치려고 청아 씨 데려온 거예요.”
모멸감에 몸을 떨던 청아가 손에 잡히는 시트를 세게 그러쥐었다. 삐딱한 눈빛이 내리꽂히자, 숨통이 조여들었다.
“…애초에 제가 원해서 한 계약 아니었어요. 그리고 다, 다른 가이드도 있잖아요. 센터장님이 분명 금방 구해질 거라고….”
“있었으면 내가 여기 왔겠어요?”
센터장이 희재의 새로운 가이드를 찾기 시작한 게 벌써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찾지 못했다니. 악몽 같은 현실에 눈앞이 컴컴해졌다. 희재가 각인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각인은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는 데 있어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천천히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희재를 바라보던 청아가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위압감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긴장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내가 청아 씨를 너무 믿었나 봐. 감쪽같이 나 속이고 튈 줄 몰랐어. 키스까지 하면서 아주 절절하게 고백까지 하더니. 지금 장난해요?”
뚜벅이는 구둣발 소리가 뚝 끊겼다. 희재의 시선이 멈춘 건 벽에 걸린 새하얀 도복이었다. 희재의 눈동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이 새겨진 등판을 확인한 그가 손가락으로 옷깃을 툭툭 쳐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 엿 먹이는 거 잘하네. 청아 씨.”
뒤로 물러나던 몸이 차가운 벽에 턱 가로막혔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난폭한 손이 청아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우악스러운 힘에 깜짝 놀란 청아가 주저앉은 채로 벌벌 떨었다. 머리카락이 모조리 뽑혀 나갈 것만 같았다. 친절하게 눈높이를 맞춘 희재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쟤랑 잤어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얼어붙은 청아가 두피를 바짝 서게 하는 통증마저 잊은 채,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잤냐고 묻잖아.”
자신이 없는 사이, 이 방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상상하자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희재는 청아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전처럼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다. 사랑인지, 소유욕인지 모를 감정이 마음속에서 지저분하게 엉켜 들었다.
감정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하던 희재가 서투른 변명을 지껄이는 순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안…잤어요. 그런 거… 아니고, 이원이가 사이다를 엎질러서, 그… 래서 그거 세탁해 주느라고…. 같이 밥을 먹었는데… 흐으.”
희재가 손을 들어 청아의 파자마 단추를 풀어 내렸다. 직접 확인해 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손짓이었다.
쇄골에 와 닿는 손에 깜짝 놀란 청아가 반사적으로 목을 가리려 들었다. 그러나, 거친 손길이 청아의 머리를 옆으로 젖혔다. 새하얀 목덜미 위에 남아 있는 울혈을 바라보던 희재가 코웃음을 쳤다.
“청아 씨, 다 들킬 거짓말은 대체 왜 하는 거예요?”
몸에 새겨진 흔적을 본 순간, 질투의 탈을 뒤집어쓴 분노가 희재의 눈을 가렸다. 청아를 향한 감정이 가이드를 향한 소유욕이든, 미처 완성되지 못한 어떤 종류의 것이든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점점 격렬하게 날치는 파동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뭐, 잔 건 그렇다 치고. 도망은 왜 갔어.”
“아악! 흐으… 노, 놓아주세요. 이것 좀 …아!”
“누가 멋대로 도망가래. 응?”
“…흐으, 흣.”
“입이 막혔어요? 왜 대답을 안 해.”
사랑에 빠져 몰랐던 희재의 진짜 얼굴이 코앞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목을 죄여 오는 공포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폭력적인 손짓에 청아가 눈물만 뚝뚝 떨궜다. 그에겐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청아가 겁을 집어먹고 입을 다물자, 한숨을 내쉰 희재가 머리카락을 틀어쥔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악! 아파… 아파요. 이것 좀, 흐으… 놔… 놔 주세요.”
청아는 두피가 뜯겨 나갈 것 같은 아픔에 절절매며 희재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가 어서 대답하라는 듯, 머리통을 몇 번 더 흔들었다. 끔찍한 아픔에 절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좋, 좋아해서… 내가 희재 씨 좋아해서, 흐윽….”
“근데 사람을 버리고 가?”
“몰랐어요. 이렇게 빨리… 그리고 금방 구해질 거라고… 한 달도 안, 걸…릴 거라고… 흐윽.”
“다른 가이드 없다니까 자꾸 헛소리를 하네.”
“…….”
“그러니까 우린 하던 거 마저 해야겠죠?”
그가 머리카락을 쥔 채로 몸을 일으켰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청아의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아픔을 견디기 위해, 저절로 무릎을 꿇고 희재의 손에 매달렸다. 그의 손목 위로 울긋불긋한 핏줄이 선연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만큼 억센 힘이었다.
“내가 꽤 오래 참아서 좀 난폭할 건데 참고 견뎌 봐요. 청아 씨, 나 좋아한다며.”
머리채를 틀어쥔 그가 뜨겁게 부풀어 오른 고간 사이로 청아의 얼굴을 비볐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바로 고정시킨 희재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좋아해요… 후윽. 저 희재 씨 좋아해요. 우윽,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요…. 으.”
“내가 정중하게 부탁하잖아요, 지금.”
두툼한 성기가 입술 선을 따라 움직였다. 눈물로 젖은 입술 위로 뜨거운 살덩이가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자, 그가 다물린 턱을 손으로 잡아 눌렀다. 압도적인 힘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번들거리는 귀두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시, 싫어요…. 흐윽, 제발, 으…욱.”
“할 일해요. 가이드답게.”
미끈한 성기가 구멍을 찾는 뱀처럼 쑤욱 밀고 들어왔다. 청아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키자 단번에 목구멍 앞까지 침범해 왔다.
“그딴 얘기 좀 그만하고 입이나 더 벌려 볼래요? 아직 반밖에 안 들어갔어요.”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너무 좋아한다고. 당신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도망친 거라고. 그러나 커다란 성기가 청아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양손으로 청아의 머리를 부여잡은 그가 기구를 쓰듯, 입안을 범했다. 검붉은 성기가 축축한 점막을 쑤시며 쑥쑥 들이박혔다.
혓바닥으로 느껴지는 남자의 것이 불쾌하고 메스꺼웠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희재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밀어내자, 단번에 머리채가 휘어잡혔다. 입안 이곳저곳을 헤집는 살 기둥은 가차 없었다. 뻐업, 뻑. 난잡한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채웠다.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후으…. 예나 지금이나 더럽게 못 빠는 건 여전해. 응?”
“으응… 끕, 후으….”
과거의 일을 되새김질하는 희재의 말에 청아는 발작하듯 몸을 뒤틀었다. 눈을 내리깔고 청아의 얼굴을 살피던 그가 아랑곳 않고 더욱 깊숙이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한계까지 늘어진 입꼬리를 타고 질척한 타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어떻게 된 게 씹질할 때 소리가 나. 후으.”
일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날도 끔찍하고 잔인했지만, 오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인정사정없이 입안을 휘젓던 성기가 목구멍 안쪽까지 쑤시고 들어오자,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많이 봐주고 있다던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닌 듯했다. 잠시, 성기가 빠져나가자 거칠게 숨을 몰아쉰 청아가 애원하듯 빌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요. 저 그냥… 가이딩할게요. 이렇게 말고… 그냥 할… 흐윽.”
“응, 지금 하고 있잖아요.”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성기를 처박은 희재가 머리채를 훅 끌어당겼다. 목구멍을 틀어막은 성기가 좁은 기도 안에 길을 내듯, 꾹꾹 박혀 들기 시작했다. 숨을 쉬는 방법을 모조리 잊어버린 청아가 희재의 손등을 긁어내렸다. 살기 위해 입을 뻐끔대자 그가 눈썹을 구기며 신음했다. 춥, 추웁. 믿을 수 없게도 성기를 빠는 소리가 났다.
목구멍을 잘 조인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던 것 같은데 물속에 빠진 것처럼 먹먹해진 귀는 제대로 된 소리를 담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지옥 같은 행위가 계속되자 결국 청아는 온몸에 힘을 뺐다.
헤벌어진 입 사이로 검붉은 성기가 들락날락거렸다. 부풀어 오른 고환이 사정없이 침으로 범벅이 된 턱을 툭툭 쳐댔다. 끈적한 타액이 청아의 턱을 타고 가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지저분하다고 느낄 틈도 주지 않았다. 뒤통수를 꽉 누르는 손길에 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목구멍을 막은 성기가 아니었다면 모조리 쏟아냈을 게 분명했다.
“청아 씨는 좋아한, 다는 사람 좆을 이렇, 게 맛없게 빨, 아요? 아… 씹.”
“허으… 읍… 커억.”
“난 청아 씨 안 좋아해도 나름 성심성의껏 빨아 줬던 것 같은데. 하아…. 그래서 질질 쌌잖아. 기억하죠?”
청아는 껌뻑껌뻑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도, 정신을 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 내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남자는 연희재가 아니다. 아무리 제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고 해도 이토록 난폭한 손을 가진 게 그일 리가 없다. 바보 같은 희망을 몇 번이고 되뇌이고 되뇌였다. 그러나, 희재는 가녀린 희망을 단번에 무참히 짓밟았다.
“하아, 재미없네…. 가이딩이 뭐 이따위예요? 내가 가르쳐준 거,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성기를 빼낸 희재가 그대로 청아를 바닥에 눕혔다. 목을 부여잡고 우는 모습이 퍽 가련해 보였지만, 인형처럼 축 늘어진 청아는 재미가 없었다. 더 한 자극이 필요했다.
청아가 떠난 이후, 숱한 불면의 밤과 원인 모를 두통을 견뎌내야 했다. 몇 번 주사를 맞기도 했지만, 만족감은 바닥을 쳤다. 상성 좋은 가이딩과의 결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데 그깟 주사로 버티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에스퍼에게 가이드와의 교합만큼 정신적인 안정과 충만감을 주는 행위는 없었다. 청아가 주는 육체적인 만족감도 무시할 순 없었다. B급이라 망설였으나 임청아는 용케도 제 몫을 다 해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며 제 마음을 고백하던 여자가 불현듯 제게서 도망갔다. 같잖은 사랑이라는 핑계를 대며. 용납되지 않을 일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쾌감과 생동감이 희재를 더 난폭하게 몰고 갔다. 바닥을 구르는 몸 위로 올라탄 희재가 파자마를 들어 올리고 손에 걸리는 속옷을 잡아 내렸다. 청아의 모든 에너지를 뺏어 제 몸에 쑤셔 박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미쳐 날뛰는 이 파동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음부 위를 살살 더듬던 희재가 낮게 뇌까렸다.
“약간 젖었네요. 손가락 정도는 그냥 들어가겠는데.”
한쪽 무릎으로 말랑한 허벅지를 누른 뒤, 넓게 다리를 벌리게 했다. 뼈마디가 매끈한 손가락이 발갛게 부어오른 청아의 음핵을 툭툭 건드렸다. 새빨간 구멍이 움찔대자 희재가 피식 웃었다. 저질스러운 희롱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청아가 힉힉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고정된 시선에 청아가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그가 허벅지를 세게 후려쳤다.
“…아악!”
“보기 좋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 청아야.”
희재는 수치심에 발버둥 치는 허벅지를 더 넓게 고정한 뒤 넓은 손바닥으로 음부를 슥슥 비벼 댔다. 축축하게 젖어 있던 애액이 넓게 펴 발리자, 청아가 몸부림을 쳤다. 쑥 들어온 두 개의 손가락이 저항을 막듯, 물기 어린 내벽을 집요하게 눌러 댔다. 오랜만의 손길이었지만, 그는 청아가 느끼는 부위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예민한 부분만 골라 건드리는 손길이 저질스럽기 그지없었다.
클리토리스를 툭툭 희롱하는 엄지손가락에 청아는 자꾸만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가 손가락을 늘려, 가볍게 휙 뒤집었다.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자 자극이 더욱 거세졌다. 내부에 고여 있던 끈적한 애액이 비질비질 밀려 나왔다.
“청아 씨, 지금 좋은가 봐요. 손가락 세 개는 그냥 삼키네.”
"어… 흐읏, 잘못했어요. 도, 망 가서 제가, 흐윽, 잘못, 흐으…."
"소리 들리죠. 질질 흐르는데."
“으… 응, 흐악… 아! 안 돼….”
그는 아주 손쉽게 청아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저급한 말과 자비 없는 손길에 가까스로 유지해 오던 정신은 우르르 무너졌다. 철퍽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더욱 빠르게 손을 놀렸다. 반쯤 넋을 놓은 청아가 울며 신음하자, 희재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힘없이 늘어진 다리 사이로 단단한 허리가 맞춘 듯이 쑥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부풀어 오른 성기가 단번에 끝까지 밀려들어 왔다. 희재는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마구 버둥대던 청아의 두 손목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꼼짝없이 온몸이 묶인 청아가 눈물을 쏟으며 잘못을 빌었다.
“아파…. 흐윽, 아파. 잘못했어요”
“오랜만에 하니까 좋긴 좋네요. 하아…. 열받게.”
“싫어요…. 나 더는 안 할래…. 흐윽, 하지 마요. 희재 씨.”
"기껏 다 길들여 놨더니 왜 도망, 을 가서 이 고생을 해요. 응? 힘 좀 빼요…. 아…. 후윽, 씨발."
쾅쾅 처박는 성기에 아랫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인정사정없이 속살을 쑤시는 귀두에 청아가 마구 헛발질을 쳤다. 그러자 가만히 있으라는 듯, 그가 강하게 허리를 찍어 내렸다. 질벽을 마구 짓이기는 감각에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을 채우던 에너지가 손 쓸 틈도 없이 모조리 강탈당하고 있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억지로 이어지는 가이딩에 몸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빡빡해. 아래에 힘 좀 빼요.”
인정사정없이 들이쑤시는 성기에 청아의 머리가 벽에 쿵쿵 부딪혔다.
“흐으… 읏, 아파… 제발… 아!”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좋게 말했을 때 들었으면 하아… 씹, 아플 일 없잖아요.”
폭주로 인해 모자란 에너지를 채우려는 희재의 욕심이 청아를 지옥으로 몰아갔다. 시커멓게 타 버린 마음 한구석이 못쓸만큼 아팠다. 작게 욕설을 내뱉은 희재가 골반을 잡아 훅 끌어당겼다. 자궁구까지 닿을 듯, 깊게 박혀오는 성기에 청아의 골반이 휙 뒤틀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며 허리를 움직이던 희재가 새하얀 나신을 곧장 뒤집었다. 잠시 성기가 빠져나간 틈을 타, 무릎을 세운 청아가 비틀대며 바닥을 기어기기 시작했다. 번들번들해진 가랑이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나… 나 갈래, 이거 안 할래요… 흐윽….”
그 처량하고도 야릇한 모습을 눈에 담던 희재가 손을 뻗어 발목을 붙잡았다.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꼼짝도 못 하고 주르륵 끌려 온 몸뚱이가 비명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왜 자꾸 어딜 가려고 그래요. 갈 데도 없으면서.”
현실을 일깨우는 잔인한 말에 청아의 반항이 멈췄다. 뒤에서 들어오는 성기는 더욱 깊고, 아프게 내벽을 쑤시기 시작했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청아가 결국 엉엉 눈물을 터트렸다. 지옥 같은 현실을 부정하듯, 눈을 감고 고개를 홰홰 저어 댔다.
그러나, 그는 정신 차리라는 듯 더욱 강하게 성기를 들이쑤실 뿐이었다. 끈적해진 접합부가 철퍽거리며 외설적인 소리를 만들어 냈다. 점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만… 제발 그만해 줬으면. 간절히 기도해 봤지만, 위험할 정도로 크게 일렁이는 파동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의 성기는 더 꼿꼿하게 몸집을 키워 여린 질벽을 욕심껏 탐할 뿐이었다.
구석구석 침범하는 살 기둥이 잔인하게 성감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청아가 질겁하며 몸을 뒤틀자, 희재가 팔을 뒤로 잡아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양팔이 결박당하자, 눈물에 젖은 얼굴과 반쯤 벗겨진 나신이 가릴 것 하나 없이 모두 드러났다. 자세가 바뀌자 뿌리 끝까지 들어온 살 기둥이 틈 하나 없이 내벽을 가득 채웠다.
“아… 흐으, 아, 안 돼. 그만 해요…. 악!”
그가 허리를 탁탁 쳐올릴 때마다 브래지어에 눌린 젖가슴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눈 뜨고 보기 힘든 난잡한 광경이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청아의 눈매를 타고 주륵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흥분과 공포가 섞이자 심장이 쾅쾅 뛰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눅진눅진하게 녹아내린 질벽을 건드리는 귀두에 자꾸만 아래가 옴죽대며 반응했다. 꼼짝도 할 수 없이 결박당한 채, 난폭하게 찍어 올리는 성기를 받아 냈다. 폭력적인 마찰로 한껏 예민해진 음부를 타고 애액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흐으…. 아악, 하지 마요, 싫어….”
느끼지 않으려 발버둥을 칠 때마다, 뒤로 당겨진 팔이 더욱 강하게 조여들어 왔다. 아프고, 끔찍하고, 가렵고, 뜨거웠다. 흥분에 젖어 든 가랑이 사이로 투명한 실이 뚝뚝 떨어지며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바닥까지 다 적셔 놓고 뭐가 싫단 거예요. 저거 다 청아 씨가 좋아서 질질 싼 거잖아.”
“어, 흐윽… 흐으, 읏, 아!”
“전부터 느끼긴 했는데 진짜 잘 느끼네, 후으…. 여긴 나한테만 헤픈 거죠?”
팔을 놓은 희재가 바닥으로 꼬꾸라지는 청아의 몸을 다시 뒤집었다. 지저분한 체액으로 젖어 든 바닥이 등으로 느껴졌다. 그가 추삽질을 시작하자, 젖은 몸이 뻑뻑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가혹한 가이딩에 천장이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한계였다. 작게나마 몸부림치던 청아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작은 기대까지 모조리 짓밟힌 밤, 청아는 원래의 계약대로 제 할 일을 충실하게 수행해야만 했다.
* * *
끔찍했던 시간이 지나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흔들리는 차 안이었다. 곁에 앉은 남자의 옆 모습을 확인한 청아의 심장이 쿵 하고 추락했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희재의 파동이 다시 날뛰고 있었다.
온몸이 정액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가이딩을 했는데도, 그에겐 부족한 모양이었다. 가이딩 부족으로 폭주까지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폭발하는 파동을 감당하기엔 청아의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희재와의 정사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허리를 잡아끄는 손에 휘청이며 그에게 끌어당겨졌다. 어두운 차 안에서 싸늘한 눈매를 마주한 순간, 청아는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그의 속내를 읽어 낼 수 있었다.
희재는 가이딩을 하지 못해 폭주한 것이 아니었다. 제게 커다란 죄책감을 심어 준 뒤, 불안정한 파동을 분풀이하듯 단번에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눈에 서린 분노를 맞닦드리자 온몸이 차게 굳었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좁은 뒷좌석엔 몸을 숨길 곳이라곤 없었다.
“가까이 와요. 아직 가이딩 안 끝났잖아.”
희재의 명령에 숨을 멈췄다. 함부로 숨을 내쉬었다간 그가 혼낼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어쩐지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등 뒤로 차가운 손잡이가 와 닿았다. 청아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시선의 끝엔 새카만 구두코와 신발조차 신지 못한 자신의 맨발이 보였다.
희재를 처음 만났던 그날도 청아는 맨발이었다. 그땐, 기원에게 쫓기고 있었다. 구원자처럼 눈앞에 나타난 희재가 꼭 백마 탄 왕자님처럼 느껴졌다. 그랬던 그가 이젠 자신을 맨발로 벗겨 지옥으로 처절히 몰아넣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을 구원하러 온 왕자가 아니었다. 순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꼭 함부로 해야 말을 듣지.”
“아, 읍….”
억센 손이 이끄는 대로 주르륵 끌려간 청아가 예상치도 못한 입맞춤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차 안엔 희재와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운전기사도 있었다. 놀란 그녀가 빠르게 입을 다물려 하자 턱이 비틀렸다. 입술 위에 와 닿는 감촉에 소름이 끼쳤다. 이를 세운 청아는 희재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짧은 비명과 함께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간 희재가 눈가를 찌푸렸다. 입가에 손을 대자 피가 묻어 나왔다.
“…버릇이 많이 없어졌네요. 내가 아는 청아 씨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소름 끼치는 정적에 청아가 엉덩이를 뒤로 빼려 했다.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탓이었다. 그러나, 허리를 바투 쥔 희재의 손이 밧줄처럼 얽혀 온몸을 아프게 조여 왔다. 피로 물든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뭐, 그래도 괜찮아요. 다시 가르치면 되니까.”
“무… 무슨 말을, 아!”
그가 하는 말이 아주 느리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가… 르친다고? 그게 무슨. 소름 끼치는 말에 청아가 발작하듯 희재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분노로 눈이 돌아간 에스퍼의 앞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비명을 지르기 위해 벌어진 입안으로 뱀같이 미끈하고 축축한 혀가 침범하듯 밀려들어 왔다.
거부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혀가 섞이는 외설적인 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입천장을 훑고 아랫입술을 빨던 희재가 입안에 고여 든 타액을 청아의 목구멍으로 넘겼다. 뒤로 넘어가려는 목을 콱 잡아챈 그가 고개를 꺾어 집요하게 혀를 빨았다. 등허리를 더듬는 손이 데일 듯, 뜨거웠다.
추웁, 춥. 타인이 있는 공간에서 연희재의 무릎 위에 끌려 올라가 지저분하게 입술을 섞고 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넋이 나간 청아가 바보처럼 입만 벌린 채, 그를 받아들였다. 원피스 속으로 파고들어 온 손이 차갑게 식은 속살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린 청아가 뒤늦게 몸을 뒤틀었다.
설마 여기서 하려는 건…. 아무런 소리조차 없이 조용한 뒤가 신경 쓰여 고개를 돌리려 하자, 가볍게 머리채를 틀어쥔 그가 경고하듯 속삭였다.
“자꾸 이따위로 할래요? 집중해야지.”
“…사람 있잖아요. 어, 왜 저… 이거, 안 할, 흐윽.”
“사람 없으면 가이딩 잘할 거예요?”
왜라는 당연한 의문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모든 선택권을 잃은 청아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희재가 버튼을 눌러 앞 좌석에 있던 칸막이를 올렸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운전기사의 뒤통수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원하는 대로 해 줬으니까 이제부터 잘해 봐요. 눈물 좀 닦고.”
마주 보고 있던 몸이 단번에 앞으로 돌려졌다. 그와 같은 자세로 운전석을 바라보게 된 청아가 작게 몸을 떨었다. 곧장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손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가이딩을 받을 생각이었다. 커다랗게 덩치를 키운 불행이 청아를 한입에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뒤에서부터 미끄러지듯 들어온 손이 부드러운 가슴을 그러쥐기 시작했다. 퉁퉁 부은 젖꼭지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에 청아의 몸이 팔짝 뛰었다. 어젯밤과는 다른 몸짓이었다. 그는 빨갛게 부은 유륜을 천천히 비비며 성감을 끌어 올리려 했다. 단단한 팔목을 잡아챈 청아가 유두를 콱 비트는 손길에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한 반대편 손에 청아의 심장이 쾅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잘하기로 했잖아요.”
“제, 제가 손… 손잡아 드릴게요. 가이딩이 필요하신… 흐윽, 거면.”
“손만?”
“어, 흐으. …윽, 그거라도… 할게요. 희재 씨, 네?”
간절한 애원에 희재는 웃음이 터졌다. 손을 잡자니…. 이런 꼴이 되고서도 순진한 소리를 지껄이는 청아가 신기했다. 어젯밤의 정사로 부어 있는 질구를 가볍게 쓸어 보이던 희재가 이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살결 위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원이 남긴 자국이 자신의 흔적으로 덮일 때까지 목덜미를 빨던 희재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버클이 풀리는 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청아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횡설수설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안 할래요. 저, 흐으… 제발, 앞에 사, 사람도 있고… 으흐, 아!”
“괜찮아요. 여기 방음 잘 돼.”
운전기사가 듣기라도 할까 청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커다란 심장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듯 선명했다. 그가 떨지 말라는 듯 소름이 돋은 등덜미 위로 얼굴을 비벼 왔다. 쪽쪽 소리를 내며 여린 살결을 문대는 입술은 다정했지만, 질구를 더듬는 손가락만큼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단단한 손이 빨갛게 자국이 남은 무릎을 잡고 더욱 넓게 벌리게 했다. 방만하게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희재의 성기가 느릿하게 비벼져 왔다. 빡빡하기만 한 구멍을 침범하려는 끄트머리가 흥분과 애욕으로 번들번들 젖어 있었다.
뜨거운 살 기둥이 부어오른 음핵을 문지르자, 청아가 몸을 뒤틀었다. 끊임없이 마찰하는 접합부는 젖지 않아 그저 얼얼하기만 했다. 비명이 터져 나올까 봐 안간힘을 쓰고 아랫입술이 꼭 깨물었다.
“읍, 으…응, 읍.”
“내 말 안 믿어요? 진짜인데.”
“잠시만요, 잠… 시만, 제발요.”
“정 그러면 이거 물고 있어요.”
선심 쓴다는 듯 말을 뱉은 그가 허벅지 위에서 살랑거리던 치마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았다. 얇디얇은 원피스가 청아의 입안으로 잔뜩 밀려들어 왔다. 당황해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갈라진 틈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외음부 주변을 비비다, 음핵 근처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감각이 온몸을 간지럽혔다. 흥분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한 손짓이었다. 목 주변으로 뜨거운 호흡이 번지자, 청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그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질구 근처를 문지르다 내벽을 들이쑤시기 시작했다. 물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음부를 건드려대자, 청아가 비명을 참으며 입안을 가득 채운 천을 꾹 물었다. 두둑하게 발기한 고간이 엉덩이를 툭 건드릴 때마다 청아의 숨소리가 커졌다.
다리를 오므리려 해 봐도, 꽉 붙들린 몸은 그의 손아귀에서 옴싹달싹하지 못했다.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는 몸을 끌어안고 흥분을 삭이던 희재가 새하얀 목덜미를 빨며 가볍게 손을 놀렸다.
“…잘 안 젖네. 귀라도 빨아 줄까요?”
“읏, 우윽….”
생각보다 느린 반응에 희재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만 흥분해 발정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틈만 나면 섞어 댔던 몸이기에, 청아가 좋아하는 곳이 어딘지는 눈 감고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귀와 목덜미가 유독 예민했다. 기억을 되살린 희재가 귓불을 우물우물 씹어댔다. 곧이어, 청아가 달뜬 숨을 내뱉으며 다리를 흔들었다. 성기를 눌러대는 엉덩이가 의도치 않게 희재의 흥분을 부추기고 있었다.
희재의 손가락이 좁아터진 내벽을 둥글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귓구멍 속으로 뜨거운 숨을 흘려보내자, 어느새 비질비질 애액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묻은 애액을 빨갛게 달아오른 음부 위로 치덕치덕 처발랐다.
분홍빛으로 물든 귓바퀴를 끈적하게 핥자 천을 뚫고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흠뻑 젖은 손가락이 어둡고 습한 내벽 안으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우웅, 흐, 우흐… 흐윽! 흡.”
그들먹하게 고여 있던 끈적한 물이 질벽을 건드리는 손가락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돌토톨한 내부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깔짝거리며 몸을 데우기 시작했다. 입안을 메운 치맛자락이 미처 삼키지 못한 침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색색거리며 호흡을 내뱉던 청아가 쿨쩍이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지나치게 생생한 접촉음에 새까만 눈동자가 수치로 물들었다. 들리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들리면…
“진짜 그 새끼랑 안 했나 보네. 아래가 제대로 조이는 게.”
“우웅, 흐, 우흐… 흐윽! 흡.”
짜악! 음부를 때리는 손바닥에 청아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귓구멍에 쑤셔 박힌 혓바닥과 질 낮은 음담이 청아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희재는 본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가끔 지나치게 몰아붙이긴 했어도 더럽고 난잡한 방식으로 사람을 끌어내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탁탁 소리를 내며 음부를 내리치는 손바닥이 꼭 밑바닥 깡패처럼 느껴졌다.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음부를 때리던 그가 꽉 다물린 음부 사이로 단번에 치고 들어왔다.
“맞으니까 더 조이는 거예요?”
“우, 흐으… 읍, 윽!”
아랫배가 더부룩해진 느낌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당황한 청아가 몸을 들썩거리며 골반을 부여잡은 손을 밀어냈다. 그의 무릎 위에 앉은 탓에 무게가 실려 삽입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닿지 말아야 할 곳을 꾹꾹 눌러 대는 귀두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내벽에 틀어박힌 성기는 빠져나갈 줄을 몰랐다. 내벽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에 짓눌린 청아가 몸을 일으키려 팔다리를 마구 휘저어 댔다.
“몇 달 쉬었다고 잘 못 받아먹으면 후으…. 어떡해요. 어제처럼 좆 받아야지.”
제 딴에는 반항이라고 움직였지만, 처량한 꼴이 꼭 섹스를 조르는 백치처럼 보여 희재는 도리어 더 흥분됐다. 짜악! 허벅지 안쪽을 세게 내리치자, 옴죽대는 음부가 더 깊게 성기를 끌어당겼다. 눈물 섞인 신음에 맞물린 접합부가 빠듯하게 조여 왔다.
시트 뒤로 나른하게 등을 기댄 희재가 골반을 바투 쥔 채, 허리를 쿵쿵 짓찧었다. 몸을 뒤틀던 청아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벌어진 다리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얼룩덜룩한 손자국이 남은 허벅지 사이로 검붉은 성기가 쑥쑥 드나드는 꼴이 보였다. 한계까지 늘어난 질구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치마를 빼낸 청아가 다급히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찢… 어질 것 같, 아… 제발, 제발 저 안 할… 래요. 흐읍.”
보들보들한 구멍 사이로 성기를 처박던 희재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시트 위를 맴돌던 청아의 손을 잡아, 확인이라도 시키듯 뻐끔대는 아랫구멍을 만지게 했다.
“어디? 여기가 찢어질 것 같아요?”
“아… 안 돼, 흐윽, 놔… 놔아!”
“다 벌어져서 잘만 삼키고 있는데. 무슨, 하아….”
그의 말대로 헤벌어진 아래가 벌름대며 커다란 성기를 물어 대고 있었다. 맞잡은 손을 아래로 내린 희재가 직접 음핵을 비비게 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땡땡하게 부어오른 음핵을 마구 문질렀다. 커다란 성기를 꽂고 직접 자위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수치심이 뇌를 관통했다. 차마 바라볼 수 없어 눈을 감자 클리토리스를 유린하는 손가락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흥분과 긴장으로 바들바들 떨던 청아가 희재의 바지 위로 뚝뚝 물을 흘려 댔다.
흐, 으응, 아…. 청아의 고개가 앞뒤로 까딱까딱 흔들리다 이내 칸막이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자궁구를 짓쳐 박는 성기에 배 속이 불씨가 피어난 것처럼 달아올랐다.
“하으, 흐윽… 아, 으읏, 아!”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청아가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콱콱 조여드는 아랫배와 벌름대는 구멍이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진득거리는 애액에 손가락에 쩍쩍 달라붙었다. 질벽이 쑤져질 때마다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청아 씨, 후으, 근데… 사실 여기 방음 안 돼요.”
폭력적인 쾌감에 정신을 놓고 흔들리던 청아가 청천벽력 같은 말에 새하얗게 질렸다.
“…어읏. 흐, 뭐, 무슨….”
“내가 물려 줄 때 가만히 있지, 그러니까 왜 뺐어. 이제 우리 떡 치는 거 다 들릴걸요?”
피할 수 없는 지옥에 가로막힌 청아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폭력적인 추삽질에 눈앞이 어질거렸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청아가 발버둥을 치자 그가 다시 손을 끌어 내려 클리토리스를 만지게 했다. 부풀 대로 부푼 음핵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자극이었다. 손끝으로 탁탁 긁어내리기까지 하자, 반쯤 벌어진 청아의 입가를 타고 침이 흘러내렸다.
“어제 하도 박아 대서 그런지, 더 예민해진 것 같네요.”
“…악, 흐윽! 아!”
“보지가 계속 벌름거리는 게…. 후으.”
일부러 상스러운 음담을 내뱉으며, 청아를 몰아갔다. 여과 없이 터져 나오는 간드러지는 신음은 누가 들어도 정사에 미친 사람 같았다. 달큰한 냄새가 나는 등줄기를 혀로 핥던 희재가 더욱 세게 허리를 올려쳤다. 끈적이는 체액이 서로의 음모에 엉겨 붙으며 찔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후….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뭐 하러 도망, 을 가서….”
거친 숨을 뱉어낸 희재가 차지게 달라붙는 내벽을 마구잡이로 침범했다. 날뛰던 파동이 가라앉자, 눈과 피부로 와닿는 모든 것이 흥분으로 느껴졌다. 정제되지 못한 쾌감은 짐승의 발정과 다를 바 없었다. 불거진 핏줄이 한계까지 늘어난 구멍을 긁어내리며 난폭하게 질벽을 짓이겼다. 땀에 젖은 등을 눌러 칸막이에 기대게 하자, 선이 고운 청아의 어깨가 달달 떨렸다.
“…으, 흐윽. 그만, 으흣.”
“우는 거 보니까 꼴리긴 하는, 데… 난 눈물에 약해지는 타입이 아니라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온 얼굴을 가득 적셨다.
“뭣하면 더 울어 보든가.”
쾌감과 공포에 사로잡혀 헐떡이던 청아의 교성을 듣던 희재가 손을 들어 말랑한 아랫배를 감쌌다. 제 것을 품은 작은 배가 박을 때마다 툭툭 튀어 올랐다. 그는 배를 꽈악 짓누르며 자궁구 끝까지 밀고 들어갔다.
느끼는 곳만 귀두로 찍어 대자, 자지러지는 신음이 차 안을 채웠다. 핏줄까지 촘촘히 감싸 오는 내벽이 쫀득했다. 청아가 주는 흥분으로 뇌까지 저릿저릿 들끓었다.
철퍽이는 소리가 거세지는가 싶더니 희재의 사타구니가 끈적한 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지독한 자극에 결국 절정이라도 느낀 건지, 바르르 몸을 떨던 청아가 이내 고개를 처박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몸을 강하게 끌어안은 희재가 다시 한번 성기를 처박았다. 눅진해진 아래가 단번에 뿌리 끝까지 삼켜 냈다. 자꾸만 오므라드는 다리를 더 넓게 벌린 후, 흠뻑 젖은 허벅지 안쪽 살을 강하게 주물러댔다. 그러자, 끈적하고 뜨거운 구멍이 살 기둥을 쪽쪽 빨아당겼다.
희재의 눈이 쾌락으로 물들었다. 계속되는 자극으로 부풀어 오른 자궁구를 꾹 눌러 주자 청아가 발발거리며 몸을 떨었다. 사정이 코 앞이었다.
“놔, 놔아…. 흐윽!”
그러나, 아직도 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청아가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을 쳤다. 죽기 살기로 거부하는 꼴을 보자, 어쩐지 심기가 비틀렸다. 처량하게 반항하는 꼴을 눈에 담던 희재가 등줄기에 이를 박아넣으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청아야. 반항도… 후으, 적당히 해.”
“우윽, 하… 응, 흐으!”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억세게 골반을 틀어쥔 뒤, 내벽 깊숙한 곳에 짙은 씨물을 토해냈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 정액을 칠하듯 허리를 턱 올려치자,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키던 청아가 마침내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 * *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청아가 작은 신음과 함께 힘겹게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과 처음 보는 가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함께 지내던 공간하고 다른 걸 보니, 아마 새로운 오피스텔인 듯했다. 재빨리 이불을 걷어낸 청아가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침실을 벗어났다.
작은 조명등 하나 켜지지 않은 거실은 꼭 당장에 무언가라도 튀어나올 것같이 음산하기만 했다. 간신히 벽을 짚은 청아가 달빛에 의지해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희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잔인했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욱신거렸다. 발걸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어디 가요? 가라고 한 적 없는데.”
시커먼 복도를 가로질러 온 희재가 청아의 앞에 나란히 섰다. 발이 바닥에 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시선을 올리자 싸늘하게 굳어 있는 눈매와 시선이 충돌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가, 갈래요. 저 더는 그런 식으로 가… 이딩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청아 씨 사정이고.”
“센터장님이 그랬어요. 매칭률 낮은 가이드랑 해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고…. 그리고 주사도….”
매끈한 손가락이 청아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겁을 먹은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자 머리 위로 픽 웃음이 터졌다.
“청아 씨를 두고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안 할 거예요. 이젠 싫, 싫어요.”
“이제 나 협박해요?”
협박….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진다 해도 임청아가 연희재를 협박할 일은 없었다. 설사, 그에게 맞는 가이드가 온 지구를 통틀어 자신뿐이라고 할지라도 순순히 협박당할 남자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저, 저 없이도 여태 살았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잖아요.”
“그래서요?”
서늘한 눈매가 말문을 틀어막았다. 입술을 타고 내려온 손가락이 목덜미에 멈춰 섰다. 커다란 손이 한 번에 목을 감쌌다.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쓸모없는 반항을 막기엔 충분했다.
“청아 씨, 잘 들어요. 우리 계약은 내가 끝내자고 할 때 끝나는 거예요.”
웃는 낯으로 사람을 겁박하는 희재의 태도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차가운 현관문이 등에 닿았다. 모든 퇴로를 가로막힌 청아의 눈동자가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고개를 숙인 희재가 싸늘한 얼굴을 지우고선 입술을 포개 왔다.
축축한 혀가 입술 선을 느릿하게 핥아 왔다. 강압적인 상황과는 달리,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목덜미를 틀어잡힌 채, 나눌만한 입맞춤은 아니었다. 공포로 얼어붙은 청아가 더듬더듬 손을 뻗어 문고리를 그러쥐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희재가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
“나가고 싶어요?”
“…….”
“나가면 또 안 잡혀 올 자신은 있고?”
싸늘한 비웃음에 문고리를 잡은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목덜미를 감싼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자, 청아가 허겁지겁 희재의 손등을 붙잡았다. 핏줄이 솟은 손등이 뱀의 껍질처럼 서늘했다. 저항할 힘을 잃은 청아가 눈시울을 붉힌 채 희재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허리를 숙인 희재가 가녀린 목덜미를 틀어쥔 채, 천천히 입을 맞춰 왔다.
“눈은 감지 마요. 안 감는 편이 더 꼴리니까.”
상처받은 눈에서 저를 향한 미련이 느껴졌다. 그 눈동자가 희재를 극렬한 흥분으로 몰고 갔다. 바보 같은 애정이, 올곧도록 미련한 마음이 못내 흡족했다. 풀리지 못한 감정이 두 사람을 헤어날 수 없는 어둠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난폭하리만큼 거친 키스에 넋을 놓은 청아가 희재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다녔다. 비틀대는 몸을 거실로 몰아넣은 희재가 익숙한 손길로 치마를 들춰 내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스치는 서늘한 손길에 정신을 차린 청아가 희재의 어깨를 퍽퍽 때리며 밀어냈다.
아랑곳하지 않고,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어 대는 희재가 두려웠다. 그는 꼭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굴었다. 불안정한 파동이 피부에 와닿자 청아가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발버둥을 쳤다. 그와 이어져 있는 몸이 끔찍했다.
“후으…. 그렇게 싸질렀는데 파동이 가라앉질 않네.”
“각인… 풀어 주세요. 제발… 저 좀, 아! 흐악….”
“청아 씨, 벌써부터 그렇게 울면 끝까지 못 버텨요.”
“제발… 놔 주세요. 희재 씨. 하, 으흑… 흐.”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가녀린 몸을 손쉽게 뒤집은 희재가 곧장 속옷을 끌어 내렸다. 아래가 뻐근할 정도로 당기는 감각은 명백한 정사의 욕구였다. 임청아를 소유하고 싶었다. 아래를 잔뜩 헤집어 제 정액으로 범벅을 해 놓고 싶었다.
그러나, 물결치듯 울렁이는 파동은 가이드의 에너지를 원하고 있었다. 마음이 어긋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희재를 집어삼켰다. 그는 지저분하게 엉켜 드는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더욱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들끓는 욕구가 도착적이고도 파괴적인 행위를 원하고 있었다.
“흐… 싫어, 악!”
차가운 가죽 소파에 간신히 상체만 걸친 채, 엎드린 청아는 틈새를 침범하는 손가락에 비명을 내질렀다. 저릿한 아픔에 발등으로 바닥을 마구 쳤다. 음부 안으로 손가락을 쑤셔 박은 희재가 탁탁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어젯밤의 정사로 안은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밤새 싸질러 놓은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민감해진 질구를 멋대로 희롱하는 손가락에 정액으로 범벅이 된 음부가 벌름댔다. 보이지 않아도 얼마나 난잡하고 지저분할지 상상이 갔다. 시트에 이마를 처박은 청아가 끙끙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읍…. 읏… 아!”
자비 없는 손가락이 빨개진 음핵을 건드릴 때마다, 다물린 잇새 사이로 날카로운 교성이 흘러나왔다. 아릿한 통증에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팔로 청아의 등을 내리눌렀다. 가슴팍을 내리누르는 무게에 억 소리가 튀어나왔다.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나자, 아랫배가 꽉 조여들며 몸이 튀었다. 수치스럽고 아팠다.
“하아…. 자존심 부리지 말고, 소리 좀 내요. 난 같이 즐기는 게 좋다니까.”
“읏, 흐윽…. 아, 그만… 흐.”
“…몰랐는데 꽤 고집이 있네.”
삽입하기 좋게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아래와는 달리, 청아의 입은 고집이라도 피우듯 꾹 다물려 있었다. 꼴사나운 자존심을 비웃던 희재가 쿠퍼액으로 진득하게 젖은 귀두를 밀어 넣었다. 벌어진 다리 덕에 끄트머리는 간신히 들어갔지만, 두꺼운 중간 부분에서 삽입이 막혔다. 억지로 쑤셔 넣으려 하자, 청아의 등덜미가 격하게 들썩였다.
애처로운 몸짓에 마음을 바꾼 희재가 끝까지 밀어 넣지 않고 딱 귀두까지만 삽입한 뒤, 살살 허리를 흔들었다. 시뻘건 속살이 축축하게 젖은 귀두에 붙어 따라 나오기를 반복했다. 찌걱거리는 접합음이 거실을 울렸다.
“아, 으윽… 응, 흐으… 싫어, 아!”
“근데 난 그따위 고집은 꼭 꺾어 놔야 후으…. 직성이 풀려서요.”
청아는 수치심에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제멋대로 다뤄 대는 손길과는 반대로 희재의 삽입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상충하는 쾌감에 바르르 떨던 청아가 손을 뒤로 뻗어 골반을 부여잡은 희재의 손을 마구 긁어 댔다. 단단한 팔뚝에 새빨간 손톱자국이 죽죽 그어졌다. 등 뒤로 비릿한 웃음이 터졌다. 입꼬리를 비틀어 보인 희재가 골반을 잡은 손을 놓은 뒤, 엎드려 있는 여자의 목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마구 꿈틀대던 청아가 목을 휘감는 서늘한 감각에 얼음처럼 굳었다,
“…무… 무슨, 왜… 흐으… 윽.”
“왜. 내가 목이라도 조를까 봐 겁나요?”
그러니까 애초에 쫄릴 짓을 왜 했어. 청아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가볍게 목을 틀어쥔 희재가 뿌리 끝까지 깊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커다란 성기가 질벽을 때리는 데도, 청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긴장으로 굳은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청아 씨가 그렇,게 도망가고 딱, 폭주가 왔는데 이번 건 좀 세더라고. 진짜로 뒤지는 줄 알았어요.”
“희, 희재 씨…. 잠시만요… 흑, 우윽.”
“그러니까 함부로 도망, 가지 말았어야지. 덕분에 나만 엿 먹었잖아.”
“아… 흐윽, 흐으… 아!”
퍽- 퍼억. 인정사정없이 들이쑤시는 성기가 아랫배를 아프게 때렸다. 틈 하나 없이 습하게 달라붙은 아래는 미끈한 액체로 범벅이 된 지 오래였다. 정신을 배반하는 몸이 괴롭고 끔찍했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자, 청아가 겁을 집어먹고 몸을 흔들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두려운 감각이었다.
“좋아서 흔드, 는 거예요? 후으… 너무 조이는데.”
자신도 모르게 아래를 조이자 희재가 웃었다. 수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가 눈을 가렸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청아가 작은 발을 동동 굴렀다. 불규칙하게 뛰어 대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크게 들려왔다. 제 숨통을 손에 쥔 그가 장난처럼 목을 조를 때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자, 잠시만요…. 어, 끄윽… 흑.”
“후으…. 짐승처럼 붙잡혀서 주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나.”
“제발, 흐윽…. 제발요. 이거 싫어…. 후으… 흐읏, 하아.”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죠.”
히익, 흐으…. 자지러지는 숨소리에 한숨을 내쉰 희재가 서서히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가녀리기만 한 목은 이대로 힘만 준다면 톡 분질러질 것만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연약함이 희재의 분노를 해갈시키고 있었다. 가까스로 힘을 풀어낸 희재가 그저 가볍게 뒷목을 내리눌렀다. 금세 고분고분해진 청아가 끅끅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아플까 봐 후으…. 후, 힘도 안 줬는데, 아래를 더 조이면 어떡해요.”
온몸을 뒤덮은 자괴감과 쾌락에 취한 청아가 소파 위에 고개를 묻고 눈물 섞인 호흡을 뱉었다. 몸을 지탱해 주던 에너지가 모조리 그에게 흡수당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벅찰 수가 없을 테니까.
매끈한 손가락이 번들거리는 음핵을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계속되는 마찰로 한껏 예민해진 안쪽이 바르르 경련하기 시작했다.
쾅, 쾅 들이박는 성기에 청아의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는가 싶더니 섬뜩한 쾌감이 머리를 관통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흥분을 끌어내려는 희재가 미웠다. 고통스러운 몸과 달리, 차지게 붙어오는 아래는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고 자극적이었다. 집요하게 극점만 찍어 대는 성기에 자꾸만 질벽이 근질근질했다. 시트를 긁어 대는 조그마한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런 게 쾌감일 리가 없었다. 이건 폭력이었….
생각을 가다듬기도 전에 강한 힘에 밀려 벽으로 몰아세워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희재에게 끌려가다시피 했다.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청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희재가 축축이 젖은 허벅지를 제 팔뚝 위로 가볍게 걸쳤다.
“가이딩해, 줬잖아…. 흐… 이제 그만해, 요. 어제, 도 했잖아…. 흐윽.”
“3개월을 참았는데 고작 이걸로 되겠어요?”
무어라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그대로 성기가 처박혔다. 몸이 반으로 뚫리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리던 청아가 순간 크게 휘청였다. 바닥으로 내리꽂힐 뻔한 청아의 몸을 붙잡아 벽에 붙인 희재가 더 깊게 맞물려 왔다.
“하…윽! 더 못해요. 제발, 더 못해… 넘어… 넘어져요. 우읏… 흑.”
“넘어지기 싫으면 매달려 봐요. 나만 매달리는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하잖아.”
“안 돼…. 안 돼요. 저, 넘어질 것 같아서…. 흐윽, 아… 아!”
바닥을 짚고 있는 왼쪽 발끝이 엉망으로 춤을 췄다. 오래도록 쌓인 폭주를 풀어내는 희재는 난폭했고 청아는 더는 그를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다리가 엉망으로 후들거렸다. 그를 놓는다면, 삽시간에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퍽퍽 들이박는 힘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하악…!”
절박해진 청아가 급히 희재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가 잘했다는 듯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서로의 가슴이 더 가깝게 맞붙었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로 청아의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왜 꼭 이렇게 해야 말을 들어.”
품에 안긴 여자의 향기가 꽤 오랜만이라 순간 희재의 숨이 멈췄다. 흐트러지는 정신을 단번에 부여잡은 뒤, 말랑한 허벅지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가슴팍 위로 눈물에 젖은 청아의 호흡이 번져 나갔다.
빳빳하게 선 젖꼭지가 희재의 가슴팍에 밀려 나갈 때마다 잇새로 튀어나오는 신음을 참아야만 했다. 자꾸만 소리를 삼켜 내는 게 아니꼽기라도 했는지, 한쪽 손을 내린 그가 젖은 음핵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음모 속에 숨어든 음핵을 찾아 비비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아래가 벌어진 틈을 타 단단한 살 기둥이 더욱 깊게 박혀왔다.
“으, 흐윽…. 싫어, 흐으…. 싫어어.”
“후으, 청아 씨가 싫다고 해도, 내가 또 억지로 못할 건 없거든요. 이쪽도 생각보다 꼴리기도 하고….”
“흐윽…. 아… 아! 응, 으읍…. 흐.”
정사의 여운이 남아 있는 음핵이 커다란 손에 엉망으로 뭉개졌다. 희재의 팔에 걸린 한쪽 다리가 아릿한 통증에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음욕을 자극하는 손길에 청아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바닥으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감각에 더욱 세게 목덜미를 끌어안자 희재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골반을 억세게 부여잡은 손과 내벽을 헤집는 폭력적인 쾌감을 견디던 청아의 몸이 발발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꼬꾸라질 것 같은 기분에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나만 좋은 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힘 좀 빼요. 내 좆 터지겠어, 하아….”
한껏 긴장한 몸은 도통 힘을 빼질 못했다. 뻑뻑하게 조여 오는 아래에 미간을 구긴 희재가 지독한 쾌감을 참아 내며 삽입을 이어 나갔다. 바짝 붙어 허리를 흔들자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허벅지를 틀어잡은 악력에 청아의 하얀 피부가 온통 벌겋게 얼룩덜룩했다. 미끌거리는 허벅지 사이는 서로의 체액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미쳐 날뛰던 희재의 파동은 어느새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몸을 타고 전해져 오는 생생한 진동이 청아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매칭률이 바닥이었다면, 처음부터 그와 엮이지 않았을 텐데….
상념도 잠시, 내벽을 거침없이 드나드는 성기에 발끝과 종아리가 바르르 경련했다. 계속되는 자극으로 팽팽하게 부어오른 음핵이 희재의 샅과 마찰할 때마다 자꾸만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점점 어슴푸레해지는 정신과는 달리, 몸을 일깨우는 감각은 한없이 선명하기만 했다. 하얀 셔츠 안에 가려진 어깨를 부여잡은 청아가 희재의 목덜미 위로 줄곧 참아 왔던 교성을 뱉어냈다.
“…이건 뭐, 청아 씨가 더 느끼네?”
“…아, 흐윽…. 아!”
귓가를 울리는 신음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극렬하게 아래를 짓쳐 올리던 희재가 낮은 숨과 함께 파정했다. 끔찍한 여운에 몸을 떨며 눈물만 흘려 대던 청아가 순간 휘청였다. 어질한 시야가 고장 난 전등처럼 껌뻑껌뻑거리는가 싶더니 탁 소리와 함께 퓨즈가 끊겼다.
* * *
꼼짝없이 희재에게 붙잡혀 에너지를 강탈당하고 눈을 떴을 땐, 벌써 오후가 지나 있었다. 욱신거리는 허벅지는 물론, 함부로 짓씹어 놓은 뒷덜미도 아팠다. 청아는 잇자국으로 가득할 피부를 손으로 쓸어 보다 아릿한 통증에 결국 손을 떼어 냈다. 머리까지 핑핑 도는 걸 보니 오랜만의 가이딩이 꽤 무리가 된 것 같았다.
힘겹게 몸을 씻어 내고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는 희재와 마주해야만 했다. 지난밤의 난폭한 기운을 모조리 씻어 낸 희재는 마치 처음 만났던 날과 같은 모습이었다. 청아를 반하게 만들었던 예의 그 단정한 얼굴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본색을 드러낸 싸늘한 얼굴에 청아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자신을 쥐락펴락하는 남자의 행동에 탈력감마저 느껴졌다.
“일어나요. 갈 곳이 있으니까.“
희재가 한발 다가오자 시끄러운 소음처럼 미쳐 날뛰는 그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렇게 가이딩을 했는데도 저 정도라니…. 무언가에 막혀 있는 듯한 파동의 흐름이 몸으로 느껴지자 가슴이 훅 내려앉았다. 가이딩을 향한 체증과 선연한 분노를 감당하는 게 지나치게 버거웠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온몸의 피가 말라 죽을지도 몰랐다. 끔찍한 상상에 청아의 몸이 떨렸다.
희재의 차가 멈춰 선 곳은 한 호텔의 앞이었다. 청아는 의아한 마음에 그를 바라보았다. 유달리 예민해 보이는 옆 모습에 잠시 눈치를 보다 안전띠를 풀어냈다. 금세 따라붙은 직원에게 차 키를 맡긴 희재가 부드러운 손길로 청아의 손목을 잡았다.
“…여긴 왜 왔어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청아 씨도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걱정할 건 없고.”
잘 아는 사람들. 의아한 말이었다. 청아에겐 이렇다 할 친구나 친척도 없었다. 그나마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도 제 발로 연을 끊고 도망쳐 나온 지 오래였다. 아리송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청아가 자신을 이끄는 힘에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눈부신 샹들리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희재는 익숙한 태도로 엘리베이터를 잡은 뒤, 눈에 보이는 버튼을 꾹 눌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레스토랑이 눈앞에 보였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분위기 있게 흐르고 있었다. 어두운 빨간 색의 카펫은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쓸데없는 고민에 청아의 발자국이 느려지자 희재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복도 끝에 마련된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앉은 사람을 확인한 순간, 청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절한 태도로 의자를 빼 주기까지 했다. 가볍게 어깨를 누르는 손길에 청아는 의자 위로 폭삭 주저앉았다.
집을 도망쳐 나온 뒤, 처음으로 만나게 된 양부모였다. 한중원과 지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가 곁에 선 희재를 보고 급히 표정을 감췄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얼이 빠진 청아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꼭, 첫 계약을 떠오르게 하는 만남이었다. 불편한 기분에 질식할 것 같은 건 청아뿐만이 아닌지 연신 차가운 물을 들이켜던 한중원이 절박한 목소리로 희재를 불렀다.
“저, 전무님….”
“식사 좀 할까요?”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잘라 냈다. 룸으로 돌아온 서버가 주문을 받고, 음식을 세팅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희재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는 게 더 적합했다.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무감하게 바라보던 희재가 천천히 말을 골랐다.
“뭐, 사실 식사는 구색이나 맞춰 본 거고…. 본론부터 말씀드릴까 하는데.”
“죄, 죄송합니다. 전무님…. 저희도 설계설명서가 그런 식으로 쉽게 유출될 거라고는…. 지금 내부 조사 중입니다. 다시는 이럴 일 없게….”
“그렇게 투자를 해 줬는데도 못 받아 드시다니… 여러모로 실망이 크네요.”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유출자를 색출해서 어떻게든….”
신랄한 비판에 한중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남편의 비굴한 모습을 눈에 담은 지영이 포크를 쥔 손을 부들대며 떨어 댔다. 기원의 말이 맞다면, 순조롭게 운항 중이던 중원의 사업을 바닥을 끌어내린 건 다름 아닌 연희재일 게 분명했다. 그는 눈물겨운 애원을 지루하게 바라보며 한중원을 궁지로 몰고 갔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확인한 청아가 이 모든 게 희재의 짓이라는 걸 단번에 확신했다. 분풀이가 아니라 본보기였음을 깨닫자 숨이 콱 막혔다.
헬쓱해진 한중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청아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야 말았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자신의 도망으로 애꿎은 피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통쾌하지도 못했다.
“뭐, 그런데 상도라는 것도 있고 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드리려고 해요.”
“…….”
“일전에 청아 씨 명의로 받아 가신 투자금은 따로 상환받지 않겠습니다. 청아 씨가 저한텐 그 정도 가치는 있으니까 새로 계약하는 셈 치죠.”
“…투자금이라니 그게 무슨.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희재가 불고 온 역풍이 자신을 덮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당황스러운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청아를 힐끗 바라본 희재가 턱을 괸 채, 결말이 뻔한 신파극을 감상했다.
“…제 명의로 빌렸다니, 그게 무슨.”
“청아야… 미안하다. 그게 어쩔 수가 없었어. 희재 씨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해서 도움 좀 받은 거야.”
“무슨, 왜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어떻게… 도대체 언제….”
“원래 사업하는 사람들은 큰돈 만지다 보면 자식 이름으로 돈거래도 하고 그러는 거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희재는 이내 시계까지 들여다봤다.
“너 그렇게 책임감 없이 도망가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어. 어? 청아야,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니.”
“…….”
“10년을 넘게 사랑으로 키웠어. 너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너 부모와 자식 간의 은혜라는 게….”
사랑으로 키웠다고. 때리고, 괴롭혀 놓고 그게 사랑이라고. 은혜라니, 청아에겐 이들에게 갚을 은혜라곤 없었다. 차갑게 굳은 청아의 표정에 한중원이 절절매며 손을 부여잡았다. 자존심이 센 지영만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이 끔찍한 지옥을 똑똑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올 모든 고역을 견뎌 낼 사람은 이 눈앞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청아였다. 벌써 두 번째였다. 제 의지라고는 없이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신세가 끔찍했다. 심지어 채무도 자신의 이름으로 했다니. 아마 자신이 도망가고 난 이후, 그가 먼저 덫을 놓았겠지만, 그딴 제안을 건넨 희재보다 그걸 수락한 양부모가 더 원망스러웠다.
“계약은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 유효한 걸로 하고.”
“…….”
“앞으로 잘해 보자고요.”
말을 마친 희재가 청아를 바라보았다. 잘 들으라는 것처럼.
희재의 말을 듣던 청아가 그대로 룸 밖으로 달아났다. 더 참고 들어주기 힘든 말이었다. 대가를 지불하고 이리저리 팔리고, 가이딩을 하고, 감정을 기만당했다. 그게 지긋지긋하도록 괴로워서 희재의 곁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는 잔인하게도 다시 계약을 요구했고, 자신을 또다시 주워 쓰려고 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없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청아의 고백 따위는 희재가 쌓아놓은 모래 탑에 작은 바람 한 점조차 될 수 없었다. 그가 그러도록 두지 않았으니까. 그 사실이 너무 비참했다. 어두운 복도를 달리다 지나가던 종업원과 어깨가 부딪혔다. 아픈 줄도 모르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도망가는 게 취미예요?”
“갈 거예요…. 이거 놔요! 놔!”
미친 사람처럼 달아나는 청아의 팔목을 잡아챈 건 희재였다.
“가긴 어딜 간다 그래. 청아 씨 내 가이드잖아.”
“나 이제 이런 식으로 하는 거 그만할래요…. 왜 나한테, 흐윽…. 나한테 왜 이래요.”
“그러니까 계약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서늘한 눈빛을 바라본 순간, 그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달려온 기색조차 없었다. 고른 숨소리와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카락이 몹시도 차분하고 깔끔했다. 그게 너무 연희재다웠다. 온 얼굴을 눈물로 적시고 헐떡이는 자신과 달리 그는 이 상황이 그저 흥미로운 듯, 작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미처 몰랐던.
“난 갚을 의무 없어요. 안 할 거예요. 싫어요. 이딴 계약 더는 안… 아!”
그가 힘을 줘 팔목을 부여잡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그럼 안되지.”
사랑으로 키운 적 없어요. 저를 학대했어요. 윤지영은 저를 때리고, 한중원은 그걸 내버려 뒀어요. 그리고, 그리고 한기원은 저를….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이 서늘한 눈빛에 꾹 삼켜 들어갔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연희재가 자신을 이해해 줄까. 설령 학대당했다고 한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면 정말로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먹히지도 않을 말을 꺼내 다시 한번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청아가 입을 꾹 다물자 희재가 나긋하게 웃었다.
“내가 빌린 거 아니에요. 부, 부모님이 멋대로….”
“그럼 법대로 할까요? 어차피 청아 씨 이름으로 돈은 나갔으니, 뭐…. 갚기 싫다고 해도 어쩌겠어요. 상환 날짜를 당기는 건 내 마음이고 거기에 질질 끌려다니는 건 청아 씨가 되겠죠.”
“……뭐라고요?”
“빚쟁이한테 평생을 쫓길 건지, 아니면 내가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할 때 곱게 숙이고 들어올 건지…. 그건 청아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말도 안 되는 빚을 뒤집어쓴 청아가 가슴을 때리는 참담함에 눈물을 터트렸다. 즐겁다는 듯, 모든 상황을 조종하는 그가 같은 감정을 지닌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흐윽,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흐…. 잔인해요?”
“대신 약속할게요.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나면 그땐 이 계약 바로 깨 줄게. 청아 씨도 그편이 좋지 않겠어요?”
정중한 협박이었다. 늘 그랬듯이, 청아에겐 거부할 명분 따윈 없었다. 자신을 나락까지 몰아붙이고 나서야 손을 내민 희재가 자꾸만 흐릿하게 보였다. 미치도록 겁이 났다. 제 감정을 빌미로 목덜미를 틀어쥐는 그에게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자 희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목을 조여오는 위기감에 발을 뒤로 빼려 하자, 단번에 거리를 좁힌 희재가 앞을 가로막았다. 등에 와 닿은 벽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눈이 마주치자 불꽃 같은 파동이 크게 일렁였다. 곧장 허리를 숙인 희재가 청아의 턱을 부여잡고 입술을 겹쳐 왔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감빠는 힘에 절로 입이 열렸다.
“아… 으읍, 흐….”
짧은 고통에 청아가 비명을 터트리자 뜨거운 혓바닥이 곧장 밀려 들어왔다. 청아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별실로 운영되는 레스토랑이라고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누군가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공간이었다. 끔찍한 상상에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젓자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빠르게 따라붙은 희재가 청아의 뒷목을 끌어당겨 더 가까이 입술을 붙여왔다. 키 차이로 한껏 들린 목구멍이 괴로워 윽윽거리는 괴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작은 소리 하나까지 모조리 집어삼킨 희재가 계속해서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불안함에 눈도 감지 못한 청아가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키스를 견뎌내기 위해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으…. 흣, 하지 마요. 누가 나오면 어떡, 어떡해….”
“청아 씨가 지금 다른 사람 후으…. 걱정할 때예요?”
“흐우… 읍.”
“나오라 그래요. 보면 좋은 구경 하는 거고.”
끔찍했던 재회 이래로 처음 나누는 입맞춤이었다. 아니, 이건 입맞춤이 아니었다.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한 일방적인 가이딩이고 동의 없는 폭력이었다. 반쯤 벌어진 입술을 타고 끈적한 타액이 주룩 흘러내렸다.
불현듯 그와 나눴던 마지막 키스가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머리카락을 헤집던 부드러운 손가락, 오고 가던 숨결…. 모든 걸 포기하고 그의 곁에 주저앉고 싶을 만큼 간절했던 입맞춤. 폭력적으로 몰아붙이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희재의 가슴팍을 퍽퍽 밀어내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는 발작이라도 하듯 움직여 대는 청아의 어깨를 잡아 벽으로 밀어붙인 뒤, 목구멍까지 혀를 집어넣었다. 청아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내키는 대로 점막을 핥고 입술을 빨아 삼켰다.
오로지 청아만이 눈도 감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봤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춥춥거리며 혀가 빨리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청아의 반항이 잦아들자, 희재가 목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한참을 캑캑 대던 청아가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신 같은 인간을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걸…. 흐윽… 후회해요.”
그가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청아가 특히 좋아했던 웃음이었다. 왜 몰랐을까…. 왜, 이런 사람이라는 걸 여태 모르고 있었을까. 그는 웃는 낯으로 단번에 거리를 허물고, 다정한 행동으로 청아의 마음을 무너트렸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더 말해 봐요.”
“바보같이 속아, 서 흐윽…. 좋아했던 걸 후회해…. 당신은 인간, 도 아니… 아!”
“분위기 잘 못 읽죠? 보통 이만하면 입 다물던데 청아 씨는 눈치도 없네.”
팔목을 잡아끈 희재가 뒤편에 있는 화장실로 청아를 밀어 넣었다. 둘밖에 없는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오자 몸이 떨렸다.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그의 파동이 청아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청아는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싫었다. 이런 공간에서, 이런 식으로 가이딩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원망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희재가 차게 웃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나랑 한두 번 해 봐요?”
냉정한 말과 함께 새하얀 세면대 위로 등이 떠밀렸다. 휘청이던 몸이 차가운 대리석 위로 나자빠졌다. 등 뒤로 바짝 몸을 붙인 희재가 바스대는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단단하게 고정된 몸이 몇 번이고 뒤틀렸다. 작은 수조에 가득 담긴 물처럼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파동이 폭발하듯 쏟아져 내리자, 청아의 어깨가 다가올 불행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사랑한다며, 곁에 있기 괴로울 정도로 사랑한다며. 희재는 자꾸만 제 곁을 벗어나려는 청아가 괘씸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몸이 달아올랐다. 이젠 희재 자신조차도, 청아와 하고 싶은 게 가이딩인지 섹스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물론, 가이딩을 빙자한 섹스라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청아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은 똑같았고, 그 수단이 조금 더 자극적인 것뿐이니까. 그러나, 가이딩을 들먹거릴 때마다 청아는 번번이 상처를 받았다. 희재는 그런 식으로 청아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이 꽤 즐거웠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순정한 마음이 기꺼웠다.
청아의 두 팔을 뒤로 잡아 한 손으로 결박한 희재가 작은 움직임마저 모조리 통제했다. 허리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와 간당간당하게 발목에 걸쳐진 속옷에 곧장 아래가 곧추섰다. 세면대 위로 반쯤 몸을 걸친 채, 울먹이던 청아가 얼굴 옆으로 놓인 손바닥에 낀 반지를 발견하고는 숨을 멈췄다.
“어…. 흐윽, 흐. 바… 반지.”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잠시 얼굴을 숙인 희재가 청아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부드러운 비누 향기와 날뛰는 파동이 더 가깝게 느껴져 청아는 잠시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가 약혼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반지가 끔찍한 현실을 바로 마주하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요. 약혼했잖아요. 안 돼요….”
“이게 그렇게 신경 쓰여요? 근데 청아 씨도 다른 새끼랑 붙어먹었잖아.”
“아니… 에요, 아니라고. 흐, 흐윽.”
이원과의 사이를 빌미로 잡은 그가 청아를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짓궃게 놀리는 말투가 마음을 긁어내렸다.
“그렇게 서럽,게 울면 내가 미안해지는데…. 후으, 지금이라도 무르고 올까요?”
장난스러운 대답에 청아의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형식적인 약혼이라는 것도, 그가 원했던 약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괴로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허둥대다 하이힐 한쪽이 벗겨졌다. 발 높이가 맞지 않아 몸은 더욱 불편해졌다.
우는 소리를 내자, 그가 커다란 몸으로 청아의 등을 덮어 왔다. 묵직한 무게에 차가운 대리석 위로 말랑한 가슴이 꾸욱 뭉개졌다.
불편함을 호소하려 몸을 흔들어 보았지만, 허벅지 사이를 스치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청아는 바보처럼 굳어 버렸다.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음부로 와 닿은 손가락엔 여전히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도 난 청아 씨랑 가이딩하는 게 제일 좋은데 어쩌겠어요. 받아들여야지.”
반지, 약혼, 가이딩. 그 모든 걸 단번에 상기시키는 서늘한 기운에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몸을 낮춘 희재가 긴장이라도 풀어 주려는 모양인지 머리카락에 파묻힌 귓가를 느릿하게 핥았다.
“싫어…. 아, 흐윽… 귀, 귀… 하, 지 마요.”
습한 숨결이 귓가로 퍼지자 등덜미를 타고 소름이 번져 나갔다. 촉, 촉 소리까지 내며 귓바퀴를 빨던 희재가 부드러운 손길로 청아의 음순을 쓸어내렸다. 기특하게도 금세 물기가 배어 나왔다. 순진한 몸뚱이는 난잡하게 더듬어 대는 손가락에도 쉽게 열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자 고개를 푹 숙인 청아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간 착실하게 가르쳐 놓은 쾌락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희재는 자신에게만큼은 쉽게 열리는 몸이 기꺼웠다. 고개를 쳐든 성기를 좁은 틈 사이로 욱여넣었다. 별다른 전희도 없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아래에 억지로 삽입하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고역이었다. 지나치게 조여오는 압력에 성기가 끊어질 것 같았다. 청아 역시 불편한 자세에 평소보다 더 힘겨워하고 있었다.
몹시 고통스러운지, 청아의 입에선 신음이 아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간을 찌푸린 희재가 청아의 고개를 뒤로 돌려, 입술을 맞췄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고 정중한 키스였다. 그러나, 아래는 그렇지 못했다. 빠듯하게 늘어난 구멍이 바들대며 희재의 것을 물어 댔다. 뻑뻑한 안쪽으로 성기를 밀어 넣던 희재가 청아의 한쪽 다리를 세면대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완전히 넓게 벌어진 질구가 조금 더 수월하게 살 기둥을 삼켰다. 푹푹 쑤셔 박히는 성기가 질 안을 때리며 더 깊은 곳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눈물에 젖은 뜨거운 숨결을 받아마시던 희재가 가볍게 허리를 털었다. 잔인한 감각에 청아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근래의 가이딩으로 민감해진 내벽이 수치도 모르고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턱을 부여잡고 있던 희재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청아의 혓바닥을 문질렀다. 축축한 혀와 뜨거운 손가락이 입안을 번갈아 침범하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아프고 괴로운 데도 잔인한 쾌감이 기어이 아래를 데웠다.
흐윽, 흐… 응. 열병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청아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색색 대는 신음도 함께 새어 나왔다. 야릇한 흥분이 희재의 눈에도 훤히 읽힐 정도였다. 눈이 풀린 채로 희재의 손가락을 빨던 청아가 세면대 위로 뚝뚝 떨어지는 타액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청아야, 내가 그렇게 좋아?”
잔인한 말에 청아가 이를 세워 그의 손을 깨물려 하자, 미끈한 손가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쑤욱 빠져나갔다. 쾅쾅 쑤셔 박힌 성기가 내벽을 마구 휘저었다. 보들보들한 속살이 애액으로 흠뻑 젖은 기둥을 진득하게 쓸어내렸다. 머리를 뒤흔드는 쾌감에 희재의 잇새로 느릿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격한 허리 짓에 맞춰 한참 동안 이리저리 흔들리던 청아의 고개가 결국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체념이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청아 씨는 좀 종알거리는 게 귀여운데.”
여리여리한 몸뚱이는 여전히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모든 걸 포기한 듯 힘없이 흔들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갛게 부어 있을 애처로운 눈매를 상상하며 허리를 털던 희재가 청아의 팔을 당겨 일으켜 세웠다. 괜한 심술이었다. 가볍게 들어 올려진 몸이 비틀대며 희재의 가슴팍으로 몸을 기댔다.
등 뒤에서 짐승을 포획하듯 옭아매고 있는 희재와 그 아래 갇혀 엉엉 우는 제 모습이 거울에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다. 청아는 치밀어 오르는 거부감을 이기지 못해 발을 구르며 서럽게 울먹였다. 커다란 손이 새하얀 젖가슴을 터트리기라도 할 듯, 강하게 주물렀다.
“…흐윽, 흐, 아, 아!”
“밖에서 다 듣겠어요. 후으…. 청아 씨 느끼, 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아….”
“하윽, 하지 마…. 하지 마요. 우흐, 으.”
“보면서 하니까 더 느끼, 는 거 같은데 내 기분 탓이에요?”
뭉근하게 음핵을 비벼 대는 손길에 잠시 잦아들었던 절정이 또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해일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질구를 비집고 새어 나온 애액이 둘의 교접을 더 깊게 만들었다. 물에 젖어 찌걱대는 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지자, 결국 아래를 조이며 몸을 떨어야만 했다. 이리저리 휘둘리던 청아가 양팔을 뻗어 세면대를 짚었다. 작달막한 키에 맞춰 무릎을 살짝 굽힌 희재가 위로 올려치듯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싫어요, 흐윽…. 다 싫어, 너무… 싫어, 흐윽….”
“이제 나 싫어요? 무슨 마음이 이렇, 게 빨리 변해. 사람, 후으… 속상하게.”
“놔, 싫어…! 아! 하윽… 윽.”
싫다고 할 때마다 벌을 주듯, 귀두 끝부분이 내벽을 쿵쿵 찧었다. 아릿한 통증과 흥분에 팔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희재의 잘 닦인 구두코가 제가 흘린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싫어도 참, 아 봐요. 난 지금 좋아서 후윽… 돌아 버, 릴 것 같으니까.”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땀으로 젖은 새하얀 등을 눈에 담던 희재가 안쪽 깊숙이 성기를 꼽은 채로 흠뻑 사정했다. 부풀어 오른 내벽에 정액을 덧칠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모든 기운을 빨려 기절이라도 한 것 마냥 세면대 위로 늘어진 청아를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폭력적인 정사로 가까스로 파동이 가라앉자 날치던 분노 또한 사그라졌다.
청아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원망을 하고 싶다면 자신이 아니라 가이드로 태어난 제 운명을 탓하는 게 옳았다.
희재는 격렬한 흥분이 잦아들길 기다리며 식은땀으로 젖은 등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기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희재가 맞은편의 거울과 시선을 마주했다. 거울 속엔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 눈물을 쏟는 청아가 보였다. 가이딩을 통해 안정감과 충만감을 느끼는 자신과 달리, 청아는 한없이 괴롭고 비참해 보였다. 덜덜 떨리는 어깨가 지독히도 눈에 거슬렸다. 서늘한 표정으로 청아를 바라보던 희재가 이내 재킷을 벗어 슬픔에 젖은 등을 가려 버렸다.
* * *
“들어가세요.”
“…나가게 해 주세요. 이건 너무 하잖아요.”
“들어가세요.”
“희재 씨한테 전화라도 할 수 있게 해 줘요. 저 아르바이트도 가야 하고….”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경호원이 청아를 막아섰다. 간절한 애원에도 싸늘하게 고개를 저어 보인 남자가 차갑게 문을 닫았다. 꼼짝없이 오피스텔에 갇힌 청아는 3일간 코빼기 한번 비치지 않는 희재를 원망하다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대체 언제쯤 나갈 수 있게 해줄 건지…. 답답함에 숨이 막혀왔다.
꼭, 지영의 손에 의해 깜깜한 창고에 갇힌 어린 날이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방이 어둡지 않아 불안감은 덜했다. 먹통이 되어 버린 핸드폰을 바라보던 청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없이 결근한 아르바이트도 걱정이고, 홀로 마감하고 있을 세인에게도 미안했다. 무엇보다 대회가 끝나면 찾아오겠다던 이원 역시 신경 쓰였다. 한참이나 전원 버튼을 어루만지던 청아가 베개 위로 고개를 묻었다.
희재가 집으로 돌아온 건 아주 늦은 밤이었다. 희재의 폭주를 알게 된 연 회장은 길길이 날뛰며 분개했다. 그날 이후로, 작정하고 굴리기도 마음이라도 먹은 건지 연달아 잡힌 미팅부터 지방 출장까지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연 회장이 제게 준 기회라는 걸 알고 있다. 연 회장은 일찍이 희재의 결단력과 유능함을 읽어 냈고, 사업적 감각이 부족한 첫째보단 둘째인 희재에게 제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잠깐의 소란을 덮기 위한 쇼라는 걸, 내부 관계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에 희재 역시 군말 없이 따를 뿐이었다.
피곤함이 묻은 얼굴을 짧게 쓸어 보인 희재가 가벼운 손짓으로 경호원을 모두 물렸다. 굳게 닫혀 있는 방 틈 사이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침대 위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쪼그려 잠이 든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스럭대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청아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던 며칠 전과 달리, 그를 둘러싸고 있는 파동이 몹시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몸으로 와 닿는 그의 변화에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짐 찾아왔어요. 필요할 것 같아서….”
“…….”
“그나저나 밥은 왜 자꾸 거르는 거예요?”
“…나가게 해 주세요.”
깔끔한 정장 차림의 희재가 침대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가볍게 청아의 애원을 묵살했다. 희재의 발치 아래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청아의 눈에 익은 물건들이었다. 이전에 지내던 원룸에서 사람을 시켜 가져온 듯했다. 통장이나 신분증 먼저 확인해야겠지만, 그것보단 당장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는 그만둔다고 말해 뒀고, 집 계약도 모조리 정리했어요.”
“…….”
“간단하게 말해서 이제 청아 씨가 갈 곳은 없다는 얘기죠. 뭐… 한중원 집에 기어들어 가는 건 상관없는데 그건 서로 불편할 테니까.”
청아는 태연하게 다리를 꼰 채,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는 희재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계… 약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나가게 해 주세요.”
“내가 왜요?”
“…이런 게 어딨어요? 전부 당신 마음대로잖아. 왜 나가는 것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이런 식으로….”
“내가 뭘 믿고 보내 주는데? 그때도 안 간다고 해 놓고 갔잖아.”
희재가 발밑의 상자를 가볍게 걷어찼다. 비서에게 챙겨 오도록 지시했던 청아의 짐이었다. 우수수 쏟아진 짐들 사이에서 희재의 눈길을 뺏은 건 새하얀 도복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등판 위로 새겨진 이름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리던 희재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믿음을 좀 주지 그랬어요. 마음만 주지 말고.”
“…그런 게 아니라, 그건.”
목 끝까지 들이찼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청아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과 함께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아 냈다. 잠시 핸드폰을 들어 올린 희재는 짧은 명령으로 비서를 호출했다.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오랜만에 보는 그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네모난 도시락이었다. 가벼운 묵례와 함께 도시락을 건넨 비서가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침대맡에 놓인 테이블에 차분하게 도시락을 펼친 희재가 청아를 불렀다.
“다른 건 다 됐고…. 와서 밥이나 먹어요.”
“…싫어요.”
“먹으라니까.”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어 내린 희재가 꼬리잡기처럼 늘어지는 대화에 반듯하고 잘생긴 이마를 구겼다.
“억지로 입에 넣기 전에 얌전히 먹는 게 좋을 거예요.”
“…가이딩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내,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여기서 나가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전부….”
“내 말을 한 번에 들어주는 법이 없네.”
싸늘하게 읊조린 희재가 침대에 앉은 청아를 일으켜 세웠다. 희재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청아가 이리저리 비틀대다 침대에서 끌려 내려왔다. 꼭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손짓이었다.
“놔… 놔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 했잖아요. 흐윽, 흐… 어흑.”
억지로 앉혀진 청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다정한 척, 자신을 휘두르려 하는 남자의 강압적인 행동에 기가 팍 질렸다. 유리 테이블 위로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도 역하게만 느껴졌다. 나무젓가락을 뜯은 희재가 청아의 손에 억지로 젓가락을 쥐게 했다.
그대로 젓가락을 내던지자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던 희재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청아의 턱을 부여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청아가 다급하게 단단한 팔목을 부여잡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메탈 시계가 손바닥에 와 닿았다.
“청아 씨, 내가 말로만 지껄이는 거 같아서 이러는 거예요?”
“놔요. 놔아….”
“먹으랄 때 먹었으면 이럴 일 없잖아요.”
그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처먹일듯한 기세였다. 턱을 타고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이 희재의 커프스를 축축하게 적셨다.
“이제 먹을 거야?”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희재의 연갈색 눈동자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로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는 불같은 분노를 차분한 태도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아가 감당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 말도 잘 들을 거고?”
다정한 협박에 제압당한 청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흠뻑 젖어 든 속눈썹을 바라보던 희재가 마침내 턱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냈다.
“이따위로 말 안 듣는 건 오늘까지만 해요. 두 번은 안 봐줄 거니까.”
싸늘하게 일갈한 희재가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쾅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을 바라본 청아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묻은 채, 눈물을 쏟아 냈다. 그의 모든 것을 다 알기도 전에 성급히 제 마음을 줘 버린 게 미치도록 후회됐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버린 청아의 주변엔 온통 자신을 갉아먹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랬기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방법 따위 알 리가 없었다. 다정하게 웃어 주기만 해도 쉽사리 마음이 허물어졌다. 그래서 희재만큼은 좋은 사람일 거라고, 그만큼은 어쩌면 다를지도 모를 거라고 믿고 말았다. 함부로 마음을 준 대가가 너무도 가혹했다.
* * *
그날 이후로, 청아는 모든 고집을 관두고 식사를 챙겼다. 억지로 씹다 토해내는 게 절반이었지만, 먹는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 다분히 노력했다. 쓸모없이 희재의 신경을 긁어 지옥 같은 승강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청아는 온종일 TV를 보다 테라스로 나가 창밖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방이 넓어 답답함은 덜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갇혔다는 것만으로도 이따금 가슴이 조여들곤 했다.
하필이면 가장 필요한 조명등마저 없었다. 어두운 방을 극도로 싫어해 늘 환한 불을 켜고 잠이 들어야만 했는데, 잠을 자도 제대로 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기력해진 몸은 까무룩 정신을 잃곤 했다. 반수면 상태에 빠져 있던 청아를 깨운 건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였다.
새카만 배스 가운을 걸치고 나온 희재에게선 부드러운 샤워 코오롱 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옅은 술 냄새가 났다. 그러나 이 모든 향기를 압도하는 건 다름 아닌 파동이었다. 누군가가 잔잔한 호숫가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의 파동이 얕게 출렁이고 있었다.
침대에 발을 뺀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청아의 앞으로 희재가 거리를 좁혀 왔다. 훅 끼쳐 들어오는 강렬한 파동에 청아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일주일 동안 차곡차곡 쌓였을 파동이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턱을 부여잡았다. 이제 막 씻고 나와 냉기를 담은 반지가 턱에 와 닿자 청아가 고개를 움츠렸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반지 싫어?”
차가운 금속이 몇 번이고 아랫입술을 스쳐 지나갔다. 곧은 뼈대를 가진 손가락이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를 밀고 들어왔다.
“그럼 빼 봐요.“
축축한 혓바닥 위로 중지와 약지가 느릿하게 비벼졌다.
“…흐, 손… 흐윽… 빼요, 으.”
“끼고 해도 난 상관없는데 청아 씬 아니잖아.”
“흐으, 읍…. 그만… 흐읏.”
당황스러운 행동에 질겁하며 청아가 희재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협박으로 저당 잡힌 제게 거부라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안을 파고든 손가락이 여린 점막을 꾹꾹 눌러대며 거부의 말을 틀어막았다.
“그럼 끼고 해요?”
힉힉거리며 호흡을 삼켜 내다 몇 번이고 손가락을 핥았다. 말캉한 혓바닥이 손가락에 감기자 희재의 눈매가 저급한 흥분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조금 더 깊게 밀려들자 단번에 호흡이 막혔다. 숨을 틀어막는 압박감에 눈시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청아는 희재의 손목을 긁어내리며 저항했다. 커다란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만큼 강하게 몸을 흔들었지만, 자비 없는 손은 빠져나갈 줄 몰랐다. 억지로 벌려진 입꼬리를 타고 투명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에 다급하게 이를 세운 청아가 잇새에 걸리는 반지를 끌어 내렸다. 그제야 목에 걸려 있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허리를 숙인 희재가 곧장 입술을 포개 왔다. 청아의 혓바닥 위에 얹어져 있던 반지가 희재의 혀와 얽혀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두 사람의 입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몇 번이고 몸을 떨어야 했다.
서 있는 희재 탓에 한참이나 목이 뒤로 꺾여 있었다. 혹시라도 반지를 삼키기라도 할까 봐 긴장한 청아가 목구멍을 조이며 침을 삼켰다. 흐으, 끅… 읍. 엉망으로 섞인 서로의 타액이 목을 타고 꿀꺽 넘어갔다.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혀로 반지를 밀어내기가 무섭게 희재가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겁을 집어먹은 청아가 배스 가운의 옷깃을 부여잡은 채,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러자 희재가 잠시 입을 떼고 웃었다. 침으로 젖은 반지를 입안으로 굴리던 희재가 고개를 돌려 바닥으로 반지를 내뱉었다.
“오늘은 아프게 안 할게요. 말 잘 들었으니까.“
툭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는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던 청아가 어깨를 미는 힘에 그대로 침대에 파묻혔다.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제멋대로 자신을 안고, 가이딩을 착취해 갈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목덜미로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이건 가이딩이라고, 그를 좋아해서 기쁘게 받아들였던 그 밤과는 전혀 다르다고 몇 번이고 되뇐 청아가 새하얀 시트를 부여잡았다.
목덜미 위로 축축한 입술이 닿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밀치고 벗어나고 싶었다. 가이딩을 빌미로 자신을 통제하고 멋대로 다루는 희재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이런 식으로 하지 마요. 그냥 가이딩만 해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 잖아요.”
새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핥던 희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삽시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청아가 희재와 두 눈을 마주했다. 온기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싸늘한 눈동자였다.
“그럼 퇴근 시간 맞춰서 다리 벌리고 기다릴래요? 바로 넣고 쌀 수 있게.”
“…….”
“아래도 적셔 놓으면 더 좋고. 나야 시간 낭비할 거 없고 좋죠.”
자신을 상처 주기 위해 일부러 저급한 말만 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 데도 온전히 상처받고야 마는 자신이 싫었다. 아직도 희재에게 일말의 미련이 있다는 걸 이런 식으로 깨달을 때마다 괴롭고 비참했다.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톡 흘렀다. 가련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본 희재가 애처로운 눈매에 짧게 입을 맞췄다.
“봐, 그건 싫으면서.”
목덜미를 지분대던 입술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자마의 단추를 열어젖힌 희재가 느릿한 손길로 속옷을 끌어 내렸다. 끈에 조인 가슴이 엉망으로 뭉개졌다. 출렁이며 튀어나온 하얀 가슴과 조그마한 젖꼭지가 시선을 잡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은은한 비누 향이 가까워졌다. 차갑게 식어 있는 가슴 위로 말캉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서늘한 온도를 가진 입술이었다.
미처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청아가 고개를 돌린 뒤, 새하얀 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 버리길 기도했다. 그러나 미련한 몸은 그가 가르쳐 놓은 쾌락을 생생하게 기억해 내고 있었다. 초옥, 촉. 유륜 위로 가볍게 내려앉는 입술에 자꾸만 움찔움찔 몸이 떨렸다.
희재는 평소보다 더 짓궂고 집요하게 애무를 이어 나갔다. 가이딩만 하라는 청아의 건방진 말이 묘하게 심기를 거슬렸다. 인제 와서 섹스와 가이딩의 차이를 운운하기엔 함께 몸을 맞댄 게 몇 밤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임청아와 몸을 섞고 나면 자연히 파동이 가라앉았다. 중독적이고 묘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더 가이딩에 집착하게 됐다.
본래 희재는 함께 즐기는 가이딩을 더 선호하긴 했다. 매칭률이 낮다고 하더라도 에너지를 주는 상대에게 굳이 거칠게 굴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임청아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일깨웠다. 주기 싫다고 울고불고 떼를 쓰니 뺏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온몸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벌이라도 받듯 흥분을 견뎌내는 게 자꾸만 신경을 자극했다. 미련과 후회가 엉망으로 뒤섞인 눈동자도 함께였다. 저걸 깨부숴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흐으… 읏.”
말랑한 가슴 위로 촉촉한 혓바닥이 내려앉자 이질적인 감각에 청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편이 차라리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는 꼭 이전의 밤으로 돌아간 것처럼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이것 또한 자신을 꾀어내려는 얄팍한 놀림인 걸 알았다. 딱딱해진 유두 끝에 부드러운 혀가 몇 번이고 스쳐 지나갔다. 요동치는 희재의 파동이 자꾸만 온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하으…. 하, 지 마요. 이런 건 안 해도 되잖아, 으… 흑.”
“난 우리가 예전처럼 아주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청아 씨.”
“……으응, 읏.”
“내 욕심이긴 한데…. 어쩌겠어. 청아 씨는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와요.”
그는 거칠게 굴다가도 또 다정하게 청아를 달랬다. 꼭 깊은 물 속에 오랫동안 빠트렸다 다시 건져 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습한 숨결이 닿는가 싶더니 이내 쪽쪽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거세게 빨아당기는 힘에 가슴이 아릿할 정도였다. 신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청아는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반대편 가슴을 아릿하게 비트는 손가락에 새하얀 시트가 발바닥에 마구잡이로 밀려 나갔다. 잇새로 유두를 끼운 그가 잘근잘근 짓씹기 시작하자, 젖꽃판이 가렵고 아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픔과 쾌락이 엉망으로 부딪히며 청아를 몰살시켰다.
끝끝내 참았던 교성을 터트린 청아가 고개를 홰홰 저으며 희재의 머리와 어깨를 밀어냈다. 극렬한 반항에 잠시 이를 숨긴 희재가 빨갛게 부어오른 젖꼭지를 달래듯 천천히 핥아 주었다. 밑가슴을 주무르는 힘에 목구멍까지 신음이 벅차올랐다.
“여긴 여전하네요. 조금만 빨아 줘도 이렇게 발딱 일어나선….”
“…그만, 하고…히익, 그냥 해요. 제발… 제발요. 하읏, 아!”
“느끼기도 참 잘 느껴. 그렇죠?”
미적지근한 타액을 유두 위로 흘려보내자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둥근 젖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타액을 쪽쪽 빨던 희재가 다시 한번 붉고 도톰한 젖꼭지를 물었다. 온 가슴이 침으로 범벅이 되었을 무렵, 희재의 혓바닥이 떨어져 나갔다.
눈물에 젖어 붉게 달아오른 청아의 눈매를 확인한 희재가 청아의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의아한 행동에 몸을 뒤척이기도 전에 단단한 무릎이 음부 주변을 꾹꾹 눌러 대기 시작했다. 억지로 흥분을 이끌어 내는 몸짓이 무자비했다. 뭉툭한 뼈가 여린 살을 뭉개기라도 할 듯, 다소 거칠게 비벼져 왔다. 청아가 손등을 깨물며 신음을 집어삼켰다.
“고집 피우는 거, 후으….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또 까먹었나 보네.”
흠뻑 젖은 아래를 희롱하듯 건드리는 감각에 결국 눈앞이 새하얗게 번져 갔다. 축축한 무언가가 퍼지는가 싶더니 온몸에 힘이 풀렸다. 폭력적인 절정에 입을 막은 손등이 달달 떨렸다. 선명한 잇자국이 새겨진 청아의 손등을 확인한 희재가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느긋하지만 부드러운 힘으로 청아를 제압한 그가 얇은 바지와 속옷을 벗겨 내렸다.
새하얀 허벅지를 틀어쥔 희재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청아의 몸을 반으로 접었다. 양 무릎에 젖가슴이 꾹 짓눌리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완벽한 통제였다. 가릴 것 하나 없이 훤히 드러난 아래가 청아를 더 벼랑으로 몰아붙였다. 심리적인 압박감과 수치감이 눈앞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아! 싫어…. 흐윽.”
“가이딩만 하자던 사람 맞아요? 밑구멍은 질질 싸는데.”
“흡, 으…. 쓰레기. 어떻게 사람을 이런 식… 흐윽, 으로.”
“내가 쓰레기인 거 청아 씨만 몰랐지, 뭐.”
실처럼 길게 늘어난 애액이 음부를 타고 시트 위로 늘어나 있었다. 몸을 세운 희재가 눅진하게 녹아내린 아래에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를 가져다 댔다. 벌름대는 구멍이 선액으로 젖은 살 기둥 위로 철썩 붙어 왔다. 길을 트듯이 한 번에 꾸욱 눌러 넣었다. 핏줄이 선 팔뚝으로 여자의 손톱이 깊게 박혀 들었다. 날뛰던 파동은 진즉 가라앉았지만, 끓어오르는 열기만큼은 여전했다. 희재는 그저 이 지독한 열기를 조금 더 이어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여린 내벽에 귀두를 비비듯이 허리를 움직이자, 야들야들한 속살이 통제를 잃고 바르르 경련했다. 틈 없이 붙은 아래로 찔꺽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새어 나왔다. 수치와 자극이 번갈아 가며 주어지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자제력을 잃은 청아가 참고 참았던 신음을 내질렀다.
사랑해서 하는 섹스가 아닌 단순히 필요에 의한 가이딩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몸은 그가 가르친 쾌락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안겼던 그 밤들이 자꾸만 되살아나 청아를 괴롭혔다.
“후으…. 잘 받아먹으니까 예쁘잖아요.”
“읏, 흐… 응! 나 어떡… 흐윽, 으. 안 돼요…. 제발.”
“후으…. 어떡하긴. 내가 청아 씨 놔줄 때까지 같이 뒹구는, 거죠.”
“……흐악, 아, 우응… 아!”
희재가 빨갛게 물든 무릎을 꾹 누른 뒤, 푹푹 방아를 찧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내벽에 고여 있던 투명한 물이 거센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반쯤 넋이 나간 청아는 희재의 파동이 잦아들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잔인한 쾌감에 발끝이 마구 뒤틀렸다.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마구 발버둥 쳤다. 격렬한 반항에 잠시 희재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황급히 몸을 돌린 청아가 지독한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대 위를 기기 시작했다. 하얀 시트가 손안에서 어그러졌다. 제게 남은 모든 에너지를 희재에게 뺏길 것만 같았다. 눈앞이 섬멸되는 감각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희재가 온몸 구석구석에 새겨 놓은 쾌락이었다. 이러다간 그에게 모두 뺏기고서도 좋아죽겠다며 다리를 벌리게 될 것 같았다. 일방적인 관계의 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흘렀다.
간신히 무릎을 세워 시트를 부여잡은 순간, 그대로 발목이 붙들렸다. 강한 악력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옆으로 쓰러진 청아가 비좁은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하는 성기에 어쩔 줄을 모르고 버둥댔다. 위로 기어갈 수도, 등을 돌릴 수도 없게 고정된 자세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극으로 한껏 오그라든 질벽을 뚫고 체액으로 젖은 성기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삽입이 지속되었다. 사타구니를 흠뻑 적시는 끈적한 액체가 늘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모로 누운 채, 힘겹게 그의 성기를 받아 내던 청아의 눈앞이 까맣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넋을 놓으려는 청아를 눈에 담은 희재가 한쪽 다리를 높게 들어 올려 어깨 위로 올렸다. 아래가 훤히 드러나는 자세였다. 검붉은 성기가 젖은 질구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지금 안까지 다 젖어서… 엄청 뜨거워요.”
“아, 흐으…. 아니에요. 그만, 할래… 제발. 아! 흐윽.”
“…하아, 내가 박을 때마다 아, 래가 좆을 꽉 물어. 응?”
“제발, 히익…. 그만, 읏… 아!”
직각으로 벌어진 다리가 벌벌 떨렸다. 폭력적인 흥분에 뻣뻣하게 굳은 발가락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쥐라도 난 듯,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반항할 의지를 모조리 꺾인 청아가 시트를 부여잡으며 희재를 견뎌내려 했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 위로 버석한 시트가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허벅지를 붙잡은 커다란 손이 여린 피부 위로 얼룩덜룩한 손자국을 남겼다.
“아…아! 너무… 세, 흐윽… 그만… 흐, 으응… 그만!”
“싫다면서 좋, 아 죽어. 응?”
베개 끄트머리를 부여잡은 청아가 끝도 없는 쾌락을 부정하듯 마구 도리질을 쳐댔다. 좆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낮은 신음을 토해낸 희재가 더욱 거칠게 허리를 털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젖가슴과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퍽 가련했다. 연결된 부위에선 새하얗게 거품이 일고 있었다.
청아의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희재의 곁에 있으려면 마음 따윈 죽여야만 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그걸 깨닫게 한 남자가 바로 제 위에 있었다. 눈물을 닦아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구멍 난 마음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괴로워지고 싶지 않으면, 하루라도 빨리 이 마음을 버리라고 누군가가 제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 * *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방에 들어온 경호원은 힘없이 엎드려 있는 작은 등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테이블 위로 도시락을 놓았다.
“저 문 좀 열어 주세요. 제발… 제발요.”
“…안 됩니다.”
잡혀 온 여자는 며칠은 꽤 시끄러웠다. 문도 쾅쾅 두드리고 식사도 거절하며 고집을 부리더니, 연 전무가 몇 번 다녀간 이후로는 꼼짝없이 얌전해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조용히 숨죽인 채, 시간을 보내던 여자가 어제부터 급작스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자꾸만 문을 열어 달라고 조르고,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두드려 댔다. 저 정도면 꽤 오래 참은 편이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 건지, 옷 소매를 부여잡은 여자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나가려는 게 아니라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전무님 지시라서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거실에 있을게요. 밖으로 나간다는 게 아니라……”
여자의 간절한 애원에 잠시 고민하던 경호원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럼 희재 씨한테 전화라도 하게 해 줘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제발요…. 네? 제가 얘기해 볼게요.”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굳이 전화를 걸지 말라는 선임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여동생뻘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이 몹시도 처량해 보였다. 끽해야 20대 초반이었다. 나쁜 짓에 가담하는 것만 같아 줄곧 마음이 찜찜했던 경호원이 결국 전화기를 내밀었다.
문틈 사이로 전화기를 건네받은 청아가 급히 귀를 가져다 댔다. 통화음이 제법 길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낮게 가라앉은 희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말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안 나갈게요. 그냥 거실에만….”
- 하아…. 이런 걸로 전화할래요? 전화기는 또 어떻게….
“…….”
- 말 진짜 안 듣네.
낮은 한숨 소리가 귓가를 타고 전해져 왔다. 그는 꼭 강아지를 훈육하는 듯한 목소리로 청아를 다그쳤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계약도 받아들였고 가이딩도 하… 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 …….
“어디 안 가요. 정말이에요.”
- 경호원한테 전화기 돌려주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요.
“싫어요. 보내 주세요. 아니면 전화기라도….”
- 앞에 있는 애, 자를까?
지나치게 집이 조용한 탓에 희재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뚫고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는 경호원이 표정이 흠칫 굳었다. 부드러운 물음이었지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청아도 알았다. 할 말을 잃은 청아가 조용히 전화기만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왜 또 거기서 시시덕거리고 있어.
“…….”
- 집에 가서 얘기해요. 끊어요.
냉정한 말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새카매진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아가 경호원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받아든 경호원이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저녁 식사는 7시에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청아는 냉정하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 조용히 침대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계약을 하고 협박에 못 이겨 가이딩까지 수락했다. 얼마나 비참한 마음인지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새하얀 시트가 금세 눈물로 젖어 들었다. 몽롱하던 정신이 순간 흐려졌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악몽은 단번에 청아를 지옥으로 떨어트렸다. 울다 지쳐 잠이 든 청아가 눈을 뜬 곳은 어두운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바로 그 창고였다. 시커먼 어둠에 갇힌 청아는 끊임없이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으…. 흐, 잘못… 했어요.’
갇히게 된 이유는 사소했다. 밥을 많이 남겨서, 운동화 한쪽을 잃어버려서, 지영을 엄마라고 불러서…. 여자의 기분대로 내려지는 처벌엔 정당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분풀이와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여태 키워 줬더니, 뭐? 한기원이 너무 미워서 하루빨리 독립을 하고 싶어?’
‘잘못했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다시는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할게요. 흐윽…. 흐.’
눈앞에서 펼쳐지는 선명한 악몽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기원이 청아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모두에게 일러바쳤던 날이었다.
‘거기 박혀서 반성 좀 해라. 어떻게 된 애가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지 오빠를 그따위로 말하고 말이야.’
‘잘못했어요. 다신 흐윽…. 안 그럴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문, 문 열어 주세요. 여기 너무 어두워서… 흐윽, 제발요.’
‘내가 진짜 분통이 터져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쓰지 않는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엔 창문 하나 없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창고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퀴퀴한 냄새는 물론이거니와, 벽에 붙은 커다란 기계에선 불규칙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문을 두드리는 손이 엉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공포에 잠식당한 청아가 마구 오열하며 제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벌은 끔찍할 정도로 길었고 가혹했다. 어둠에 익숙해져 사물이 분간이 가기 시작했을 무렵이 되어서야, 정신을 놓은 청아가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등줄기를 타고 번지는 싸늘한 예감에 번뜩 눈을 떴다. 꿈의 끝은 곧 현실의 시작이었다. 어둠에 잠긴 방 안을 확인한 청아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침대를 벗어났다. 전등을 켜기 위해 다급히 스위치를 눌러 보았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달칵, 달칵. 뭔가 이상하다 싶어 몇 번이고 버튼을 눌렀지만, 방 안은 여전히 깜깜했다. 정전이었다.
“거, 거기 아무도 없어요? 문… 열어 주세요. 잠시만 문 좀 열어 주세요. 불이 안 켜져서… 흐윽.”
밖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경호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황한 청아가 문고리를 잡고 마구 돌려 보았지만 열릴 리가 없었다. 꿈과 현실이 하나로 겹쳐지는 기분은 공포하고 기괴스러웠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테라스로 나가면 된다는 이성적인 판단조차 서질 않았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가 싶더니, 호흡이 턱 틀어막혔다. 숨을 쉬고 뱉는 것조차 제 맘대로 되질 않았다.
“…왜, 왜 안 켜지는 거야. 왜… 허윽.”
지옥 같은 꿈을 벗어나 눈을 떴는데도 악몽이 시작되고 있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청아가 문고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불 좀 켜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흐, 윽…. 제발요.”
그리고 습관처럼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몸에 밴 듯한 행동이었다.
“연습 열심히 할게요…. 기, 기원 오빠한테도 잘할게. 제발… 불 좀 켜 주세요. 흐으… 제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걸 머리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마음이 청아를 사지로 내몰았다.
몇 번이고 문고리를 뒤흔들던 청아가 그대로 기절했다.
* * *
연 회장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차를 돌린 희재가 한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연 회장이 특별히 좋아하는 이곳은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되는 덕분에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차분한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희재는 소나기로 축축하게 젖은 바닥을 무감하게 바라보다 별관에 마련된 귀빈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임청아와의 통화로 예민해진 신경을 가까스로 다스린 채, 자리에 앉았다. 폭주 사건으로 한참 항간을 떠들썩하게 했으니 당분간은 연 회장의 비위를 맞추는 편이 좋았다.
“오셨어요.”
따듯한 차로 목을 축이던 희재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 온 연 회장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 악화로 잠시 경영권에 물러나 있더니, 결국 휠체어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됐다. 씁쓸한 모습이었으나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번에 맡긴 프로젝트는 잘 되어가고 있고?”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런데 기계도 이렇게 돌리면 고장 나요. 회장님.”
“그래서 못 했냐? 해냈잖아. 난 그걸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야.”
“뭐, 저야 회장님이 까라면 까야죠.”
원치 않는 소동으로 한동안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예민해진 연 회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깟 폭주 때문에 우리 기업에 흠집 나는 건 내가 못 본다. 너 때문에 기사 내리느라고 내가 얼마나….”
“저 충분히 혼났어요. 그만하셔도 돼요.”
눈을 휘며 웃는 희재의 모습에 연 회장이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혼외 자식인 희재에게 전무 자리를 맡긴 건 누가 봐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연 회장은 희재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에스퍼로서의 능력을 떠나서도 첫째 놈보단 저와 닮은 구석이 꽤 많았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마음만 앞서는 첫째와 달리, 희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구석이 단점이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사업에선 이점으로 작용했다.
표면적으로 첫째 연희성과 희재의 지분은 딱 0.5% 차가 났다. 그래서 문제였다. 그 조그마한 차이가 연 회장의 사망 이후, 진정한 후계자를 당락 짓게 될 거니까. 그래서 더 강하게 희재를 몰아붙여야만 했다. 실제로 그는 좋은 성과를 만들어 냈으며, 최근 유치하는 카지노 사업에도 큰 기여를 쏟아붓고 있었다. 더 능력 있는 놈이 경영을 끌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식사 끝나고 현장 좀 가 봐야겠어. 마무리 단계인데 속도가 영 안 나는 것 같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휠체어라도 끌고 가시겠다는 겁니까? 됐습니다. 식사 끝나고 제가 현장 관리자 대동해서 전체적으로 검토할게요.”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연 회장이 마침내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박 의원 딸하고 연락은 좀 하고 있나?”
“약혼식 이후로 본 적 없습니다.”
“한 번씩 밥도 먹고 그래. 네 말대로 약혼 아니고 비즈니스야. 나도 결혼까지는 밀어붙일 생각 없으니까 할 만큼은 해 봐.”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기분을 좀 알 것도 같군요.”
뻔뻔한 대답에 연 회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취임 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약혼을 수락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표이사 취임 건에 욕심을 내는 건 희재뿐만이 아니었다. 연 회장의 건강이 악화함에 따라 연희성 역시 막판 스퍼트라도 올리듯, 열렬히 달려들고 있었다. 연 회장이 꾸며 놓은 싸움판에 올라간 개가 된 것 같았지만, 우선 압도적인 차로 서로를 제치는 게 먼저였다. 두 사람 다 마음 편히 있을 처지는 아니란 뜻이었다.
“그나저나 반지는?”
날카로운 지적에 잔을 내려놓던 희재의 손이 멈췄다. 반지의 부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약지를 확인한 희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가이딩이 필요해 급히 여자의 방을 찾았다. 침대 위에 앉아 저를 받아들이던 청아는 차가운 금속이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몸을 떨었다. 거부감인지, 죄책감인지 알 수는 없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게 어쩐지 불편했다.
입으로 반지를 빼내던 모습을 떠올리자 약지 위로 스쳐 지나가던 뜨거운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정사가 끝난 후, 눈물로 축축이 젖어 있는 베개를 볼 때마다 자신을 향한 청아의 미련이 느껴졌다. 후회를 가득 담은 애틋한 눈매가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결국엔 야릇한 신음을 흘려 댔다. 그 참담한 격차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거슬려서요. 자꾸 눈에 띄는 게… 신경도 쓰이고.”
가만히 손가락을 쓸어 보이던 희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다 말 나온다. 기사 나면 또 시끄러워질 텐데 처신 잘해라.”
“제가 아무리 시끄럽게 군다고 한들, 이혼만 두 번째인 아버지만 하겠어요?”
“애비한테 말하는 거 하고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의 희재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기업 간의 결합을 위한 약혼이니 딱히 만남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보여 주기식 행태도 하지 않으려는 희재의 태도는 좀 싸한 구석이 있었다.
연 회장 역시 첫째 부인과 쇼윈도로 시작했지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둘째 부인을 만나 희재를 낳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 조용한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진동 소리였다. 애써 무시한 희재가 눈앞에 놓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국화꽃 향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뚝 끊어졌던 진동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받아 봐라.”
“…잠시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온 희재가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커다란 소나무에 아래에 기댄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장님이랑 식사 약속 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얘기 못 들었습니까?”
- 죄송합니다. 이, 임청아 님이 쓰러졌습니다…. 지금 급하게 가이딩 센터로 옮겼는데….
“……제대로 신경 쓰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차가운 목소리에 주춤하던 경호원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 …그게 오전까지만 해도 큰 이상이 없으셨습니다. 식사도 전부 하셨고… 갑자기 오피스텔 전체가 정전이 돼서 확인하고 돌아와 보니까….
“지금 갈 거니까 끊어요. 그리고….”
- …….
“난 임청아랑 시시덕거려도 된다고 말 한 적 없어요. 모가지 날아가기 싫으면, 걔가 조른다고 다 받아 주고 있지 마. 그러라고 데려다 놓은 거 아니니까.”
싸늘하게 일갈한 희재가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강압으로 계약을 받아들인 청아는 하기 싫다고 떼를 쓰던 초반과는 달리, 제법 고분고분해졌다. 자신의 주제를 아는 듯한 순종적인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제 좀 얌전해졌나 싶더니 또다시 제 신경을 살살 건드려 대고 있었다. 정말이지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 * *
“매칭률은 다시 올랐네요. 아마, 청아 씨 상태가 좀 안 좋았던 것 같네요. 몇 개월간 가이딩을 쉬다 갑자기 무리하게 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근심 어린 목소리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청아를 깨웠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전등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가이딩 센터였다.
“혹시 요즘, 청아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센터장님께서 깊게 관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임청아는 당분간 센터에 두는 게 좋겠어요.”
“…컨디션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실신하는 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에요. 심리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커요. 갑작스러운 가이딩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부스럭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센터장이 반쯤 몸을 일으킨 청아에게 급히 다가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검사 결과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는 상황인 건 분명했다.
뒤에 서 있는 희재만 아니었다면, 당장 이것저것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희재가 최상급의 에스퍼라는 점도 그랬지만, 이 커다란 센터를 굴리는 돈줄엔 그의 집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리 난다긴다하는 자신도 함부로 하기엔 확실히 힘든 존재였다.
“청아 씨, 일어났어요? 몸은 괜찮아요? 울렁거리진 않고요?”
“……네, 괜찮아요.”
침대맡으로 걸어온 센터장은 여린 손목에 꽂힌 링거를 조심스레 확인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청아를 바라보던 희재가 잠시 미간을 구겼다.
“우선 청아 씨 파동엔 큰 문제는 없었어요. 희재 씨랑 매칭률도 그렇고요.”
“…네.”
“링거 다 맞으면 호출해요. 그때, 다시 올게요.”
말을 마친 센터장이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싸늘한 희재의 눈빛을 마주한 청아가 곧장 눈을 피했다. 냉랭한 분위기에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희재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잘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말 좀 해 봐요. 이게 잘하는 건지.”
“그게 갑자기 어두워져서… 정신 차려보니까….”
차가운 시선에 두서없이 변명을 꺼내던 청아가 뒤이어 쏟아지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당분간은 여기 있어요. 아프다고 골골대는 꼴 못 봐 주겠으니까.”
“…….”
“아니, 그냥 앞으로 여기서 살아요. 내키는 대로 가이딩이나 하게.”
가슴에 한발 한발 박히는 비수가 제법 아팠다.
“내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 댔으니 청아 씨한텐 어쩌면 여기가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쓰러지는 순간, 생각했다. 다시 눈을 뜬다면 그에게 화를 내고 말 거라고. 왜 자신을 멋대로 가두고 휘두르는 건지, 왜 아픈 기억을 들춰서 사람을 힘들게 만드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싸늘하게 식어 있는 눈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정말로….”
“그렇게 겁이 많은데 도망은 어떻게 갔어요?”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싸늘하게 내리꽂히는 말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병실 안엔 싸늘한 정적만이 흘렀다.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청아의 얼굴을 확인한 희재가 낮은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언제나처럼 냉정하고 차가운 뒷모습이었다.
* * *
희재와의 가이딩은 대부분 고통과 쾌락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최근 들어 심기가 비틀리기라도 한 건지, 더 짓궂고 집요하게 가이딩을 요구하곤 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를 않았다. 새하얀 병실은 본래의 목적을 잃고 희재와의 가이딩만을 위한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전, 축축한 귀두가 입술 위로 비벼져 왔다. 계약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와 몇 번이고 가이딩을 했지만, 입으로 하는 것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못, 못 하겠어요.”
점막과 점막이 직접적으로 닿는 구강성교는 정사만큼 빠른 효과를 가져다줬다. 본래 희재가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쉽고 간편했으니까. 예쁘게 쭉 뻗은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릿하게 남은 이마의 상흔을 느릿하게 쓰다듬던 희재는, 불현듯 임청아와의 첫 만남을 기억해 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살 구슬리면 금세 저를 졸졸 따라다니던 시선과 제 말이면 뭐든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들이 귀여웠다.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다.
그게 자신을 사랑해서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멋대로 마음을 주고, 함부로 계약을 깨트린 건 청아였다. 그러니 그에 따른 책임도 본인이 지는 게 맞았다.
버클 사이로 튀어나온 성기는 완전히 발기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묵직하기만 했다. 아름다운 외형을 가진 희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였다. 청아는 비가 내리던 자취방에서 강압적으로 그의 성기를 빨았던 기억이 떠올라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두려움에 주저하는 손을 부여잡은 희재가 성기를 쥐게 하였다. 뜨거운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손을 엉켜 잡은 희재가, 커다란 살 기둥을 위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게 했다. 청아의 눈 밑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청아 씨가 잘하면 금방 끝나요.”
금세 단단한 형태를 갖춘 성기가 입술을 꾹꾹 누르다 입안으로 쑤욱 밀려 들어왔다. 꼭,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리려 하자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빼지 말고 하란 뜻이었다. 저항의 의지가 꺾인 청아가 천천히 입을 열어 귀두를 머금었다.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거라면, 덜 아프게 하는 편이 나았다. 조그마한 혓바닥을 내밀어 천천히 선단을 핥았다. 덜덜 떨리는 혀가 희재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계속 핥고만 있을 거예요?”
“으…. 억, 잠, 시만… 후윽.”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성기를 적시던 청아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희재가 뒷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동그란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껏 발기한 성기는 반만 넣었을 뿐인데도 입꼬리가 찢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엉겁결에 희재의 허벅지를 부여잡은 청아가 절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못 넣는다고, 무리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간절한 눈빛에 희재가 예쁘게 웃었다.
“여길 내 좆 모양대로 뚫어 줄 건데… 후으.”
“하… 흐윽, 끄… 숨…읍, 막혀.”
“그렇게 되면, 청아 씨도 편할 거예요. 할 때마다 후, 이렇게 안 울, 어도 되니까… 후으.”
“히익, 흐….”
한쪽 다리를 침대 위로 올린 희재가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앞뒤로 가볍게 허리를 흔들었다. 크기를 키운 성기가 제멋대로 점막을 쑤시며 돌아다녔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내려는 순간, 목젖 근처로 두툼한 귀두가 닿았다. 가까스로 구역질을 참아 낸 청아가 더욱 크게 입을 벌렸다. 숨을 쉬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끈적한 타액으로 젖은 성기가 혓바닥 위를 부드럽게 문질러 댔다. 아래라도 후비듯, 쿨쩍이는 소리가 지저분한 흥분을 돋구었다. 툭툭 불거진 핏줄이 혓바닥 위로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혓바닥에 힘을 주었다. 긴장과 불안이 만들어 낸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혀에 힘 빼고.”
그러나 경직된 몸은 좀처럼 힘을 풀지 못했다. 지나치게 강압적인 구음이 버거운 듯, 벌어진 입꼬리를 타고 침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아의 가슴께가 정체 모를 액체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허벅지를 긁어 대는 손이 몹시도 절박했다. 방금 씻고 나오기라도 한 건지, 얇은 티셔츠 위로 조그마한 유두가 튀어나와 있었다. 희재가 솟아오른 젖꼭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침대 위에 앉은 청아의 몸이 펄쩍 뛰었다.
번들거리는 살 기둥은 여전히 입안에 들어차 있었다. 푹푹 쑤셔 박히는 성기에 맞춰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정신없이 휘둘리던 청아가 젖꼭지를 비트는 손길에 몸을 뒤틀었다. 침으로 젖어 있는 얇은 천이 유두를 감싸자 꽉 막힌 기도를 타고 신음이 터졌다.
“거의 다 끝났어요.”
“흐억, 흐…. 그만, 우응, 읍.”
“확실히 하다 보, 니까 늘긴 느네.”
젖꼭지를 어루만지는 손길과 목구멍을 꽉 막은 성기에 눈앞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더 깊이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누르는 힘에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차가운 벨트가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꾹 눌렸다.
기도에 박힌 성기가 잠시 요동치는가 싶더니, 이내 미적지근한 액체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빗소리, 어둠에 잠긴 자취방, 희미한 담배 냄새. 끔찍했던 그날을 되새기게 하는 맛이었다. 꿀럭이는 소리와 함께 끈적한 정액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느적느적 기어가는 감각이 끔찍하고 역겨웠다.
사정의 여운을 즐기듯, 한참 동안 혓바닥 위에 성기를 문지르던 희재가 억세게 틀어쥔 머리통을 놓아주었다. 민망한 접촉음과 함께 입안을 가득 채우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재빨리 고개를 숙인 청아가 욱욱 소리를 내며 입에 남은 것을 토해냈다. 턱 주변이 뿌연 액체로 온통 엉망이었다. 지저분해진 입가를 닦아 내기도 전에 등 뒤로 자리한 침대로 몸이 휙 넘어갔다.
“그렇게 싫어하면 나 상처받아요.”
“히윽, 흐, 이, 이제 그만 해요…. 으흐. 파동도 거의 다 가라앉, 았으니까….”
이렇게 에너지만 착취당하다 모든 쓸모를 다 하게 될 것 같아 문득 겁이 났다. 청아는 자신의 위로 올라탄 희재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명백한 거부였으나, 희재에겐 먹힐 리 만무했다.
희재가 임청아에게 원한 건 이런 식의 가이딩이 아니었다. 누누이 말했듯이, 함께 즐겼으면 했다. 어차피 강탈하는 주제에 뭘 따지나 싶겠지만 억지로 뺏는 건 제 취향이 아니었다. 우는 얼굴이 꼴리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와의 가이딩이 좋다고 느끼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흐, 내…가 해 줬잖아요. 가이딩했는데… 근데 왜, 또… 흐윽.”
“이왕이면 좋게 가자는 거죠. 그리고 아직 덜 가라앉았어요. 이제 내 파동도 못 읽어요?”
툭툭 젖꼭지를 건드리는 손길에 숨을 몰아쉬던 청아가 희재의 손을 부여잡았다. 흐으, 흐. 그만… 그만. 어느덧 잔잔해진 희재의 파동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만하면 충분한 거 같은데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청아도 한계였다. 바닥난 에너지에 숨이 턱턱 치밀어 올랐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아 올린 희재가 새하얀 살덩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억세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자극은 충분했다.
생리 전이라 그런지 땡땡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 유독 아프고 가려웠다. 눈앞을 흐리게 만드는 수치심에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다리 사이가 축축이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그가 가슴골 사이를 부드럽게 핥았다. 뜨거운 숨이 번지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강압적이고 일방적이었던 가이딩은 어느새 끈적하고 야릇한 애무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는 처음과 달리, 자꾸만 청아에게서 쾌감을 이끌어 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편리한 가이딩을 위한 습관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몸은 착실하게 그가 주는 쾌감에 반응했다. 괴로웠다.
끊임없이 유두를 문지르던 희재가 축축이 젖어 있는 천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쾌감에 당황한 청아가 발가락을 오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마구 발을 휘저어 댔지만, 침대에 가로로 누운 탓에 발바닥이 땅에 닿질 않았다. 꼭 어디론가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청아는 당장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희재의 머리를 마구 밀어냈다. 그러자 더 강하게 흡착하듯 달라붙은 입술이 통통하게 부은 젖꼭지를 쪽쪽 빨아 당겼다. 참을 새도 없이 교성이 튀어나왔다. 배란기라 그런지 몸에 와닿는 감각이 배로 예민하게 느껴졌다.
“아… 흐읍, 웅. 아… 안 돼요. 그만….”
“지금 청아 씨 우는 소리 되게 고양이 같은 거 알아요?”
“…히윽, 흐… 응, 읏.”
“꼭 발정 난 애들처럼 우네.”
히윽, 흐으…. 평소보다 빠르고 격렬한 반응이 눈에 띄었다. 야릇하게 달아오른 나신을 눈에 담던 희재가 평소보다 부풀어 있는 젖가슴을 확인하곤 잠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빨아댔는지 유륜 주위가 침으로 번질번질했다.
“…혹시 곧 생리해요?”
“놔… 놔요! 그만해. 흐으, 이제 그만…. 읏.”
가슴을 빨리며 몸을 뒤틀던 청아가 수치스러운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짓궂은 질문에 당황해 마구 몸부림을 치자 희재가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끓어오르는 열기를 단번에 알아차린 희재가 붉은 젖꼭지를 느릿하게 혀로 튕겨 대기 시작했다. 허리가 툭툭 튀어 올랐다. 결이 고운 머리카락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제 몸 위로 딱 달라붙은 몸통을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찰나, 벌름거리는 음부 안으로 흉흉하게 발기한 살 기둥이 가득 들어찼다. 평소보다 지나치게 빠른 삽입이었다. 그러나 욱신거리던 아래가 꽉꽉 눌러지는 느낌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청아의 음욕을 자극했다. 아랫배가 불러오는 듯한 기묘한 감각과 함께 속살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하아, 여기가 축축하게 달라붙는, 게…평소랑 확실히 다른 거 같기도 하고.”
“……아! 하악… 하. 싫어, 빼요! 빼 줘요.”
“어때요? 내가 봤을 땐 청아 씨, 도 더 느끼는 거 같은데… 후윽.”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강하게 허리를 쳐올린 희재가 물기를 가득 머금은 촉촉한 속살에 잠시 인상을 구겼다. 파동 따윈 진즉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그저 지금은 당장 이 타오르는 불길을 끄고 싶었다. 바르르 경련하는 내벽이 옴죽대며 성기를 물어 왔다.
“얼마나 젖었으면 보지에서 물소리가 나. 아… 씹.”
“깊게… 흐응, 넣지 마…흐윽, 싫어요…싫어.”
“진짜 싫어?”
싫지 않아서 더 괴로웠다. 거부하는 말과 달리, 흥분으로 부풀어 오른 내벽은 희재의 성기에 딱 달라붙어 가지 말라는 듯 그를 부여잡고 있었다. 극렬한 흥분은 고통스러울 만큼 자극적이었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계에 내몰린 청아가 울음이 뒤섞인 신음성을 뱉어냈다. 더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온몸을 불사 지르는 흥분이 지나치게 뜨거워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을 타고 흐르는 달콤한 타액을 모조리 핥아 마신 희재가 성기를 쾅쾅 들이박았다.
“싫은 거 아니잖아. 잘 생, 각하고 말해야지, 청아야. 후으….”
결국 희재가 주는 쾌락에 압살당한 청아가 백치처럼 입을 벌린 채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흐으…. 조, 좋아…. 거기, 좋아요. 하윽, 아!”
“아, 여기가 좋았구나?”
“읏, 응… 으, 좋아…. 히윽, 흐.”
희재를 향한 마음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갈수록, 몸은 그만큼 더욱 솔직해졌다. 그 괴리감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파도처럼 온 정신을 휩쓸어가는 쾌락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청아가 아래를 조이며 엉엉 울었다. 미간을 찌푸린 희재가 침대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질구를 가득 메우던 커다란 살 기둥이 마침내 꿈틀거리더니 내벽 깊숙한 곳에 정액을 뿌려 댔다. 벌써 몇 번째 사정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결합된 부위 사이를 타고 지저분한 체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축축해진 볼 위로 희재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입맞춤에 문득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가이딩도 가이딩이지만, 난 내 나름대로 청아 씨 많이 아끼고 있어요.’
‘…….’
‘그러니 지금처럼 계속 내 옆에 있어요’
어쩌면 이 모든 불행의 시초는 제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짓된 다정함에 마음을 뺏겨, 멋대로 기대하고, 주제도 모른 채 마음을 키워나갔다. 희재는 단지 그 멍청했던 마음을 제 방식대로 산산조각 내 부숴 준 것뿐이었는데.
그러다 문득, 다시는 예전처럼 그를 사랑하게 될 순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에겐 상관없는 일이리라.
“…아직도 날 아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희재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눈물에 젖어 반짝거리는 청아의 눈동자 안에 흥분에 잠긴 제 모습이 비쳐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던 눈이었다. 이름처럼 청아한 눈동자가 상처받아 갈기갈기 찢긴 채로, 자신을 담고 있었다.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는데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절로 입술이 달싹거렸다.
“네.”
청아의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톡 떨어지기 무섭게 희재의 입술이 포개졌다.
한참 동안 이어진 입맞춤이 끝나고 옷을 갖춰 입은 희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찬 병실의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가벼운 바람이 흐트러진 희재의 앞머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새카만 어둠에 잠긴 도시를 바라보던 희재가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문득 등 뒤에 있을 청아를 떠올렸다.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해 놓고 고작 담배 연기를 걱정하는 자신의 모순이 우스웠다. 아낀다고…. 내가 임청아를 아낀다고.
* * *
우울하게 가라앉은 기분과는 달리, 청아의 몸 상태는 금방 회복되었다. 애초에 몸이 아파 쓰러진 게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문 한번 열 수 없었던 오피스텔과 달리, 가이딩 센터의 입원실은 조금 더 자유롭고 편안했다. 회진을 핑계로 오고 가는 간호사들도 모두 친절했고, 경호원만 대동한다면 공원 산책 정도야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고작 이런 걸 자유라고 표현하기엔 민망했지만 간만에 만끽하는 자유였다.
“청아 씨, 식사는 잘하고 있어요?”
채혈 검사 결과지를 들고 온 센터장이 청아에게로 다가왔다. 특유의 말간 얼굴이 조금은 우울해 보였다. 가이딩을 위해 병실에 틀어박힌 셈이니 다름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센터장은 청아를 병원에 가둔 희재의 속내를 이해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매칭률 역시 아직은 정상이었고, 청아의 건강 상태 역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아마, 가둬 놓고 편히 감시하려는 마음이 컸으리라 대충 짐작할 뿐이었다.
에스퍼가 가이딩에 집착하는 건 타고난 본능과도 같았다. 그러나 대부분 가이딩이란 행위 자체에 집착하는 거지,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희재의 경우엔 가이딩으로 최대 효과를 뽑아낼 수 있는 가이드가 청아뿐이니 이토록 집착하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청아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병원에 멋대로 가둬 두는 건 센터장의 기준에서 꽤 많이 비상식적이긴 했다. 물론, 희재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센터의 대표로서 할 말은 아니었다.
“결과는 전부 괜찮아요.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이건 좀 신경 쓰는 게 좋겠어요. 식사는 영양소 맞춰서 골고루, 아시죠?”
“…….”
“새로운 가이드 찾는 게 좀 늦어지고 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요. 꼭 찾아 줄게요.”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따듯하고 사려 깊은 말투에 청아가 작게 웃어 보였다.
“참, 청아 씨, 이원이한테 연락 한번 해 줘요. 아주 틈만 나면 청아 씨 어딨는지 아냐고 노래를 부르는데. 피곤해서….”
“아…. 제가 핸드폰이 고장 나서요.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고 말 좀 전해 주세요.”
“그럴게요. 하여간 어린 게 눈만 높아 가지고….”
“…그런 게 아니라.”
가벼운 타박에 청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원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이모인 센터장까지 알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뜨거워진 귀를 만지작거리던 청아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내일 올게요. 당분간은 편하게 쉰다 생각하고 있어요. 스트레스받지 말고요.”
센터장이 떠난 뒤, 홀로 병실에 남은 청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탓에 바람이 꽤 선선했다. 작은 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사원증을 목에 매고 걸어가는 직장인들과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학생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재는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나면 자신을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가이드로서 가치가 떨어진 자신을 희재가 놓아준다면,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학교도 가고 싶었고, 막무가내로 그만둔 아르바이트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홀로 희재를 좋아했을 땐 하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청아의 고백으로 관계는 완벽하게 무너졌고 희재는 감정과 돈을 빌미로 자신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가이딩만을 위한 밤이 늘어갈수록 마음 한구석이 뚝뚝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괴롭지만, 이렇게 시간이 가다 보면 희재를 향한 마음도 깨끗이 정리될 것이 분명했다. 희재를 마주해도 더는 아프지 않은 날이 오길, 하루빨리 그날이 오길…. 그 기약 없는 상실을 기대하는 것만이 청아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창문에 매달려 바깥을 구경하던 청아가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스포츠 백을 둘러맨 이원이 씩씩거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희재에게 끌려오던 날 이후로 처음 얼굴을 보는 거였으니 근 한 달 만이었다. 머리가 조금 자란 거 빼곤 그때와 똑같았다. 눈썹을 살짝 가리는 새카만 머리도, 새하얀 얼굴도 여전했다. 재빠르게 달려온 이원이 청아를 세게 끌어안았다.
“…이원… 아!”
“어딜 갈 거면 간다고 말을 해 줘야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놓고 말해. 이원아, 이거 놓고… 빨리.”
“그날, 내가 아무리 누나한테 잘못했어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몸이 굳은 청아가 이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급하게 달려오기라도 한 건지 단단한 가슴팍이 미세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한참을 바동거려보았으나, 도통 떨어져 나갈 줄을 몰랐다. 그러나 갑자기 사라진 자신 때문에 많이 당황했을 이원을 생각하니 금세 미안해졌다. 센터장님을 통해서라도 미리 연락을 줬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 진짜 섭섭했어요. 내가 누나 찾으려고 그 카페를 몇 번이나 갔는지 알아요?”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미안하면 앞으로 그러지 마. 아무리 나한테 아무런… 뭐, 그런 게 없다 그래도….”
“…….”
“이건 너무 하잖아…. 사람 피 말려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 잠도 못 잤어. 정말이에요.”
새하얀 병원복을 입은 청아가 유독 예뻐 보여서 크게 화를 내기도 힘들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가라앉힌 이원이 조그마한 이목구비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살이 조금 빠진 것 빼고는 그대로였다. 그날, 그런 식으로 성급하게 굴어선 안 됐는데…. 이원은 수백 번을 후회하고 자책했다. 이 말간 얼굴이 훈련 내내 아른거려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코치한테 뒤지게 혼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맞은 곳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괴로웠던 건, 청아가 놓아 버리면 언제든 끊길 인연이라는 걸 매 순간 체감하는 일이었다.
“…미안해. 연락하려고 했는데 사정이….”
“살은 또 왜 이렇게 빠졌어? 밥도 못 얻어먹고 다녀요?“
품에서 청아를 놓아준 이원이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손이 아직도 뜨거웠다. 서늘하고 차가운 희재의 손하고는 달랐다. 청아는 자신을 걱정해 달려온 이원의 앞에서도 희재만 생각하는 스스로가 끔찍했다.
* * *
고급스러운 자동차 바퀴가 새카만 아스팔트 위로 부드럽게 멈춰 섰다. 자정이 다 돼서야 도착한 센터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주차장을 비추는 새하얀 전등이 피곤함에 잠긴 희재의 얼굴을 비췄다.
가지런한 속눈썹과 매끈한 콧대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얇은 속쌍꺼풀이 진 부드러운 눈매와 달리, 꾹 다물린 입매는 차갑게만 보였다. 청아와의 잦은 가이딩 덕분인지 이유 모를 불면과 두통은 모두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오래도록 준비해 온 인사 건도, 청아와의 계약도 희재의 통제 아래 모두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일이었다.
“차에서 대기하세요. 한 시간 정도는 걸릴 겁니다.”
“네, 전무님.”
묵직한 구두 소리만이 어둠에 잠긴 복도를 울렸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복도를 걷던 희재가 하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병실 앞에 멈춰 섰다. 아마도 청아가 잠들어 있을…. 굳이 자는 사람을 깨워서 가이딩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문을 열기까지는 분명 그랬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청아의 앞엔 웬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린 지도 모르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퍽 애절했다. 남자라고 하기엔 어리고, 소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성숙한 구석이 있는 외양이었다. 정이원이었던가. 좁아터진 자취방에서 발견했던 도복이 떠올랐다.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이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오감이 좋은 제 탓인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질질 흘리고 다녀 자꾸만 거슬리게 하는 청아 탓인지 알 수는 없었다.
“손 떼.”
싸늘한 명령에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멈칫했다.
“…누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잠시 손을 내려놓은 이원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청아의 얼굴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희재는 그게 몹시도 아니꼬웠다. 저 직선적인 눈빛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제 가이드를 다른 에스퍼에게 뺏겼다는 사실보다, 두 사람이 좁은 집 안에서 뒹굴었을 게 더 열받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는 청아를 상상하자, 일순 머리가 핑 돌아 버릴 정도로 분이 치밀어 올랐다. 저열한 질투였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자각에 매끈한 미간이 구겨졌다. 애써 평정을 되찾은 희재가 이원의 말을 되받아쳤다.
“내가 임청아랑 뭐 했으면 네가 뭐 어쩌게.”
“…그쪽, 약혼했잖아요. 임청아 마음 다 알면서, 어떻게 누나한테 이따위로….”
“그래서.”
“…….”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이원의 말문이 턱 막혔다. 매끈하게 잘빠진 얼굴을 바라보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연희재의 짓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센터에 가둬 놓았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으니까. 갑자기 사라졌던 청아를 생각하면 또다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너랑 왜 이따위 대화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한테 따지고 싶으면 임청아랑 뭐라도 더 하고 와.”
“…….”
“아무 사이도 아닌데 혼자 열 올리는 거 웃기거든.”
명백한 비웃음이 남자의 입꼬리에 걸려 있었다. 임청아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을 바로 그 미소였다. 연갈색이 도드라지는 희재의 눈동자엔 자신과 꼭 닮은 정복욕과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원이 희재의 앞에 멈춰 섰다. 새하얀 운동화와 검은 구둣발이 한참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싸늘한 정적을 깬 건 이원이었다.
“누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마요.”
“넌 모르겠지만, 내가 너 여러 번 봐줬거든.”
싸늘하게 읊조린 희재가 픽 웃었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청아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이원으로부터 빗겨 간 희재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내리박혔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이원은 보지 못했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꽤 볼만했다.
“그러니까 작작 거슬려.”
어렵게 되찾아온 자신의 가이드였다. 쉽게 보내 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거센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이내 이원이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소란에 엉겁결에 깨어난 청아만이 희재의 눈치를 보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머리맡에 자리한 주황빛 조명등만이 다소 가라앉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곱고 부드러운 인상의 희재였지만, 웃지 않을 때만큼은 누구보다 서늘하고 냉정해 보였다. 가로로 곧게 뻗은 눈매와 차분하게 내려앉은 희재의 속눈썹을 바라보던 청아가 제게로 내리꽂히는 싸늘한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정적에 잠긴 병실에 한참을 서 있던 희재가 익숙한 손길로 재킷을 벗은 뒤, 청아의 앞에 앉았다. 순간 확 풍겨 오는 향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아야만 했다. 익숙한 향이 또다시 과거의 기억을 데려와, 제 마음을 뒤흔들 것만 같았다.
“쟤랑 또, 뭐 했어요? 나 없는 사이에 각인이라도 한 건 아니지?”
“안… 했어요. 아무것도.”
침대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괸 희재가 뻔뻔한 태도로 청아를 추궁했다. 나른하게 풀린 눈매와 올라간 입꼬리는 꼭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는 소년같이 보였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없어요. 진짜로… 각인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아, 다른 건 했는데 그건 안 했어? 그게 더 열받는데.”
“…….”
“그럼 보여 줄래요? 내가 믿을 수 있게.”
각인은 보통 보이지 않는 곳에 남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오래전, 희재가 제 뒷덜미에 흔적을 남겼듯이. 집요한 추궁에 말문이 막힌 청아가 애꿎은 시트를 그러쥐었다.
“청아야, 내가 못 믿겠다잖아.”
자신이 거절한대도 순순히 물러나 줄 사람이 아니었다. 목덜미를 틀어쥐던 손길을 기억해 낸 청아가 결국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꼭 협박당하는 포로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등허리까지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청아가 새하얀 목덜미를 내보였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행동이었다. 그 순종적인 행동이 희재의 흥분을 부추겼다. 이 꼴을 정이원한테 보여 줬어야 했는데…. 추접한 소유욕이 가슴을 일렁이게 했다.
“이제 됐죠. 정말 없어… 흐윽!”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려는 순간,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을 놓친 청아가 짧게 신음을 내질렀다.
“다시 남길까? 불안해서 내버려 둘 수가 있어야 말이지.”
“시, 싫어요…. 흐으, 그런 거 없어도 가이딩은 되잖아요…. 하지… 아!”
각인도 결국 사람이 남긴 상흔에 불과했다. 지속되는 효능과는 별개로 시간이 지나면 흔적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해진 목덜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끈한 혓바닥이 여린 살결을 느릿하게 훑고 지나갔다. 등덜미로 번지는 소름에 청아가 몸을 웅크렸다. 어느샌가 몸을 일으켜 청아의 등을 덮은 희재가 끈덕지게 목덜미를 빨았다. 꼼짝도 하지 못하게 결박당한 청아가 베개를 끌어당기며 신음을 참았다.
“억울해서 그래요. 난 청아 씨 덕분에 죽을 뻔했었잖아.”
“…….”
“그러니까 다른 새끼들 못 붙게 내 가이드라고 티라도 내고 다니라고요.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지.”
그는 죽을 뻔했다는 말을 꼭 가벼운 농담처럼 던졌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한 번의 폭주를 겪었던 희재였기 때문에 마냥 흘려들을 순 없었다. 꼭꼭 숨겨 두었던 죄책감을 들쑤시는 희재의 말에 청아는 잠시 숨을 멈춰야만 했다. 목덜미에 내려앉은 입술이 축축한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언제 이를 세울지 몰라 잔뜩 긴장한 청아가 결국 우는 소리를 냈다.
흐윽, 흐…으.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공포로 움츠러든 몸은 일전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각인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 두려웠다. 양손으로 침대를 짚은 청아가 목덜미 위에 달라붙은 입술을 떼어 내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커다란 손에 꽉 붙잡힌 어깨가 욱신거렸다. 청아의 발버둥에도 마침내 여린 살결을 뚫어낸 이빨이 시뻘건 피를 내더니, 곧 끔찍한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짐승에게 목덜미를 물린 듯한 기분이었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아릿한 아픔에 참았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흐윽, 아파요…. 아… 놔주세요. 아파요…. 흐윽.”
“후으…. 알았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요.”
“각인 안 했어요. 이원이랑… 하지 마, 흐윽…. 제발.”
“청아 씨 믿어 주려고 이러는 거잖아.”
“…으흑, 이원이랑은 정말 그런 게….”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또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멋대로 주물러 댔다. 힘에 밀려 침대에 엎드린 청아가 악착같이 눈물을 참아 냈다.
여린 살점을 마구 짓씹어 놓고 나서야 분이 풀린 희재가 드디어 입술을 떼어 냈다. 타액으로 젖은 목덜미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억지로라도 제 것이라고 새겨 놓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마요. 흐윽, 차라리 그냥 가이딩만 해요.”
“화났어요? 근데 화는 내가 내야지.”
발발 떨던 청아가 간신히 베개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분노와 수치로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이런 건 불공평했다. 그는 감정 한 톨 내어주지 않으면서, 자신은 밑바닥까지 모조리 까발라대고 있었다. 샅샅이 벗겨, 종내엔 바닥까지 끌어내리고야 마는 희재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금세 다른 새끼랑 붙어먹어 놓고는 뭘 잘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저급한 말에 몸을 떨던 청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순순히 맞아줄 남자가 아니었다. 가녀린 손목을 거세게 휘어잡은 희재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움찔한 청아가 뒤로 물러날수록, 그는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혀올 뿐이었다. 커다란 짐승이 자그마한 토끼 한 마리를 잡아먹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오는 꼴과 다를 바 없었다.
뒷걸음질 치던 발이 침대 기둥에 툭 하고 부딪혔을 무렵, 부드러운 힘이 청아를 침대 위로 밀어 앉혔다. 궁지에 몰린 청아가 악을 쓰며 희재를 밀어냈다.
“내가 이원이랑 뭘 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마요! 흐윽, 하던 대로 해요.”
“…….”
“…그냥 가이딩만 하고 나가요. 흐윽, 그럼 되잖아!”
“그래요. 그럼 벗어요.“
당돌한 말에 희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분하게 침묵을 지키던 그는 잘 벼린 칼날과 같은 말을 골라 청아의 가슴을 푹 찔렀다. 깨끗한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동정심이 일만큼, 애절한 얼굴이었지만 희재에게만은 그렇지 못했다. 이따위 말을 듣기 싫으면, 이원과 함께 있는 꼴을 제게 보여 주지 않았으면 됐다.
“…뭐라고요?”
“가이딩만 하자면서요. 넣고, 싸게 벗으라고.”
“…….”
“안 들려요? 벗어.”
꼭 싸구려 창부라도 대하는 듯한 말투에 청아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에게 받을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청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병원복의 단추를 끌어 내렸다.
“…약속 하나만 해 주세요.”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시선에 자꾸만 손이 헛돌았다. 정신을 압박해 오는 위압적인 분위기에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헐렁한 병원복이 마침내 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나신이 희재의 눈을 잡아끌었다. 이원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열받는데, 붙잡혀 온 이후로 부러질 것처럼 마른 몸뚱이를 확인하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희재 씨한테 맞는 가이드가 나오면, 그때… 그때는 저 꼭 놔주세요.”
발에 걸리는 병원복을 툭 걷어찬 희재가 듣기 싫은 말만 지껄이는 입술을 집어삼켰다. 숨도 못 쉴 만큼 거세게 입술을 비벼 오는 희재 탓에 할딱거리는 목구멍이 간신히 호흡을 내뱉었다. 농밀하고 짙은 입맞춤에 당황한 청아가 희재의 팔뚝을 더듬으며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아, 흐으… 읍.”
그러자, 커다란 손이 여린 뒷덜미를 훅 끌어당겼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혓바닥이 난잡한 소리를 내며 입 안쪽의 여린 살점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떠돌던 신음이 거센 입맞춤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목구멍까지 파고들어 온 혀가 여린 점막을 헤집으며 미끈거리는 타액을 빨았다.
모두 벌거벗은 자신의 꼴과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 한 점도 흐트러지지 않은 희재의 모습은 꼭 이 관계의 우위를 명확히 알려 주려는 의도 같아 마음이 욱신거렸다. 뜨거운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귓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거세게 날뛰는 파동이 그가 잡은 손바닥 위로 전해져 왔다. 억지로 분노를 눌러 담은 희재의 얼굴 위엔 미처 숨기지 못한 저열한 빛이 엿보였다. 침대 위로 쓰러진 청아의 위로 올라탄 희재가 헐거운 병원복 바지를 벗겨 냈다.
“왜 또 울고 그래요. 나 마음 약해지게, 가이딩이나 하자던 건 청아 씨잖아.”
꽉 오므라든 다리를 넓게 벌린 희재가 젖지 않은 아래를 대충 쓰다듬었다. 냉정한 시선과 마주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청아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뻣뻣하게 일어난 성기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안쪽을 쑤시며 무자비하게 침범했다. 뻑뻑할 정도로 조여 오는 아래에 희재가 짧게 신음했다.
길고 두툼한 성기가 여린 속살을 가르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새하얀 손등에 이를 박은 청아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아 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희재의 파동이 온몸을 덮치는 듯했다.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구역질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난폭하게 속을 휘젓는 성기에 배를 부여잡은 청아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에게 끌려온 이후로 몇 번이고 몸을 섞어 댔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고 아픈 건 처음이었다. 물기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내벽을 쿵쿵 찧어 대는 허리 짓에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침대 시트를 발로 두드리며 고통을 참던 청아가 결국 애원하듯, 희재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천천히, 하으…. 아파. 흐, 제발요.”
팔뚝 근처를 긁어 대는 손을 잡아챈 희재가 잇자국과 타액으로 엉망이 된 청아의 손등을 바라보다 인상을 구겼다. 울긋불긋한 자국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희재가 청아의 콧등에 코를 비비며 잘게 허리를 털었다.
“그러니까 왜 그 새끼랑 같이 있어. 후으… 난 잘해 주려고 했는데, 응?”
“윽, 흐으…. 아윽, 흐, 아파요… 아파.”
“살살 할까? 이제 말 잘 들을래요?”
아래를 쑤셔 발기는 섬뜩한 아픔에 넋이 나간 청아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굴복하는 것도 싫었지만, 당장 아래를 꿰뚫을 것처럼 움직이는 성기가 더 두려웠다. 애처로운 애원에 추삽질을 멈춘 희재가 달래듯 빨갛게 물든 청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럼 키스하게 입 벌려요. 혀도 내밀고.”
얼른. 부드럽게 재촉한 희재가 홧홧한 손등 위를 부드럽게 핥았다. 당황한 청아가 손을 빼내려 해냈지만, 작은 손가락 틈 사이로 깍지를 낀 희재가 아픔으로 물든 눈을 바라보며 여린 살결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뜨겁고 간지러웠다. 생경한 자극에 몸을 비틀던 청아가 아릿한 신음을 터트렸다.
“…흐, 나쁜… 흑, 새끼….”
“욕도 할 줄 알았네요? 근데… 하아, 그 나쁜 새끼 좋다고 한 건 청아 씨야.”
내민 혓바닥 위로 뜨거운 혀가 문지르듯 겹쳐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든 희재가 고른 치열을 샅샅이 훑으며, 놀랍도록 부드러운 볼 안쪽을 음미했다. 끈적한 구강 안을 헤집는 혓바닥에 서로의 타액이 끈끈하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혀 아래까지 밀려들어 온 혓바닥이 구석구석을 파먹으며 질척하게 입술을 문댔다.
끔찍했던 아픔이 불태우고 간 자리엔 은근한 미열만이 남아 청아의 몸을 달구고 있었다. 앓는 듯한 신음이 모조리 그의 입안으로 먹혀들었다. 아랫입술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할 때쯤, 한계까지 벌어진 질구 사이로 애액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귀두를 적시는 끈적한 액체에 열기로 달아오른 숨을 훅 내뱉은 희재가 잠시 멈췄던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제법 느릿한 속도였다. 불끈거리는 핏줄 위로 애액이 축축하게 덧발라져 번들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 고개를 숙인 그가 말랑한 젖가슴 위로 입술을 묻었다. 꾹 다문 입술 새로 신음이 튀어나올까 봐 아랫입술을 사리물어보았지만,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자꾸만 몸이 달아올랐다. 공기 중에 드러나 차갑기만 한 살결 위로 뜨거운 혀가 와 닿자 절로 허리가 비틀렸다.
“후으, 그래도 우리 꽤 좋았었, 던 거 같은데… 나만 그랬어요?”
말캉한 살점을 빨아들이는 힘에 신음하던 청아가 바스락거리는 시트 위로 머리카락을 비볐다.
“아, 응…. 흐읏, 아!”
“어땠냐니까.”
“아, 흐읏, 시, 싫었어…. 나는 전부 다 싫, 었어요, 우응… 흑.”
“또 거짓말. 좋아서 질질 쌌었잖아요.”
수월하게 삽입된 성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점막을 푹푹 쑤시자 안쪽이 바르르 떨리며 경련했다. 묵직한 무게로 애액을 칠하듯 짓누르며 이리저리 문질러 대는 성기에 밑이 꽈악 조여들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몸을 눈에 담은 희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건방지게 구는 임청아를 혼낼 겸, 정말로 넣고 싸려고만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잘 느끼는 모습을 보니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악의가 피어올랐다. 지금만큼은 청아가 원하는 가이딩이 아닌 섹스를 하고 싶었다. 제 밑에서 백치처럼 자지러지는 꼴이 보고 싶었다.
“아래가 다 젖었는데 싫기는. 후으… 거짓말을 할 거면 윗입이랑 아, 랫입을 좀 맞춰 봐요. 응? 그래야 내가 믿어, 줄 맛이 나죠.”
마음을 바꾼 희재가 연분홍빛의 유륜 위를 문대는 혓바닥이 끈질길 정도로 침질을 해댔다. 꼿꼿하게 일어선 젖꼭지를 이를 세워 가볍게 깨물었다.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신음에 입을 틀어막던 청아가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빨딱 일어선 유두를 혀로 튕기며 희롱하던 희재가 틈 하나 없이 아래를 막고 있던 성기를 잠시 빼냈다. 그들먹하게 고여 있던 물이 하얀 시트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일으킨 희재가 손쉽게 자세를 바꿨다. 상체가 휙 돌아가는 감각에 순간 어지러움이 치밀었다.
“그렇게 싫으면 청아 씨가 한번 해 봐요.”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희재의 단단한 복근 위에 올라타져 있었다. 넓게 벌어진 다리에 당황한 청아가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가녀린 손목을 부드럽게 휘어잡은 희재의 손길에 꼼짝없이 몸이 묶이고 말았다.
“…흐, 못 해요. 그렇게… 흐윽, 아!”
“차 안에서 가르쳐 줬었잖아요.”
청아는 자꾸만 과거를 들춰대는 그가 미웠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었다. 주차장의 한구석에서 그와 몸을 섞었다. 온 시야를 가리는 극렬한 흥분에 반쯤 정신을 놓고 허리를 흔들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희재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똑같이 해 볼래요? 허리도 흔들면서…. 그때처럼 좋을 수도 있잖아.”
“싫었다, 고요. 죽을 만큼… 후윽, 싫었어! 그러니까 우윽, 아… 흐읏!”
“아래에 힘, 이나 빼고 말해요.”
자꾸만 제 감정을 속이려 드는 임청아를 꺾어 놓고 싶었다. 눈썹을 구긴 희재가 이리저리 뒤틀리는 골반을 잡아 그대로 제 것을 꽂아 넣었다. 비좁은 틈새를 가르고 온 난폭한 살 기둥이 단번에 자궁구까지 박혀 들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저릿한 쾌락에 청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더는 바르작대지 못하게 양손을 깍지 껴 맞잡은 희재가 허리를 푹푹 올려 찍었다.
“…하윽, 응…흐, 으윽, 빼 줘요. 아… 싫어.“
흥분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허리 짓에 맞춰 출렁거렸다. 음란한 광경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청아가 마구 발버둥을 쳤다. 그렇게 버둥댈수록 아래만 더 조인다는 걸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차지게 달라붙은 접합부에선 미끈한 액체가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거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진득한 애액으로 엉망이 된 속살을 마구잡이로 휘젓는 성기에 야릇한 교성이 터졌다. 아래를 막무가내로 들이박는 성기에 청아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몇 번이고 절정을 느낀 탓에 아픔보다는 쾌락이 더 컸다. 그 사실이 너무 비참했다.
“…흐으, 싫어. 당신 같은 사람…. 차라, 리… 죽어 버려. 아!”
“후으… 윽.”
아래를 쾅쾅 올려치는 추삽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끔찍한 쾌감에 음부를 조이던 청아가 입술을 꼭 깨물며 눈물만 흘렸다. 단단한 살 위로 음핵이 콱콱 부딪힐 때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싫어, 너무 싫어… 흐윽, 죽어 버려.”
“이제 내가 하는 건 다 싫은가 보네.”
계속되는 청아의 거부에 희재의 표정이 싸늘해져 갔다. 솔직한 몸과 달리, 제 주인을 따라오지 않으려 하는 저 마음을 짓밟아 부서트리고 싶었다.
말캉한 젖가슴을 강하게 주무르자 청아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다음 빳빳하게 일어난 젖꼭지를 가볍게 비틀어 주자 아래가 씹을 듯이 조여 왔다. 그 선연한 감각에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젖꼭지를 몇 번이고 문지르고 비벼 대며 괴롭혔다. 쭉 펴진 발가락이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뻣뻣하게 퍼졌다 오므라들었다. 헤벌어진 입을 타고 침이 흘러내렸다. 모든 건 결국 희재의 뜻대로였다. 발가벗겨진 마음이 손 쓸 틈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근데 여긴 아닌 것 같은데, 하아… 너 지금 좋잖아, 청아야….”
유륜 주변까지 새빨갛게 일어났을 무렵, 한계에 다다른 청아가 판판한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무너졌다. 울음에 젖은 숨결이 가슴 위로 퍼지자,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를 악문 희재가 땀에 젖은 청아의 등을 끌어안았다.
“좋다고 해 봐요. 얼른….”
“그냥 해. 제발… 으흣, 빨리 싸고 끝내요…. 흑, 하악!”
빨리 싸라니. 자신이 뱉어 놓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청아의 귓가가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작 이런 말이나 지껄이는 제 현실이 참혹했다. 한때는 좋아했던 남자에게 가이딩을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면서, 이젠 그의 사정을 종용하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기 위해 머리채를 휘어잡은 희재가 눈물에 젖은 입술을 쭉쭉 빨았다. 오늘따라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 청아가 거슬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거칠게 들어온 손가락에 청아의 입술이 더 크게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혓바닥을 쑤셔 넣자, 청아가 할딱거리며 밀려 들어오는 혀를 받아 삼켰다. 좁아터진 아래를 꽉 채운 성기는 여전히 틀어박힌 채였다.
지저분할 정도로 깊게 혀를 옭아매던 희재가 입꼬리를 타고 흐르는 타액마저 달게 삼켜 냈다. 예민한 지점만 골라 콱콱 때려 박자 투명한 액이 사방으로 튀어 댔다. 청아의 내벽이 더 뜨거워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더욱 강하게 희재의 것을 조여 물었다.
“…안에다 싸 달란 거죠?”
“우응, 흑…. 싫어, 흐으… 아!”
잘게 떨리는 하얀 등을 세게 끌어안은 희재가 안쪽 깊은 곳에 짙은 씨물을 뿌렸다. 강렬한 쾌락에 호흡이 뚝뚝 끊어졌다. 몰아치는 성감에 정신을 놓은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몸에 닿아 있는 가느다란 팔다리가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단단한 가슴팍 위에 한참이나 꼬꾸라져 있던 청아가 목구멍까지 들이찬 숨을 내뱉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희재가 침대 헤드 뒤로 등을 기댔다. 잠시 빠져나갔던 성기가 들어갈 구멍을 찾듯, 다시 박혀 들었다.
“우웅, 읏! 그만 해요…. 제발… 히익, 나, 나한테 왜 이래… 왜.”
“좋다고 안 했잖아.”
“…가, 이딩만 하기로 했잖아요. 그냥 가이딩만… 아, 흐윽! 아, 아!”
“내가 듣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제대로 좀 해 봐요.”
좁은 내벽 안에 들이찬 정액이 뭉툭한 성기에 밀려 나와 허벅지 안쪽을 마구잡이로 더럽혔다. 온몸에 힘이 풀린 청아가 퍼런 핏줄이 튀어나온 팔뚝을 긁어내리며 몸을 지탱하려 했다. 그러나 가볍게 어깨를 밀어젖히는 손에 몸이 뒤로 홱 넘어갔다. 청아는 간신히 두 손을 뒤로 뻗어 시트를 짚었다. 덜덜 떨리는 손목을 잡아 지탱시킨 희재가 조금 더 가까이 청아와 몸을 붙였다. 파동 따윈, 첫 번째 사정과 함께 가라앉은지 오래였는데도 자꾸만 몸을 섞고 싶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고개가 퍽 들이차는 성기에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이보다 최악은 더 없을 거로 생각한 순간, 눈앞에 드러난 광경이 청아를 단번에 나락으로 추락시켰다. 음부가 훤히 보이도록 좌우로 넓게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쑥쑥 드나드는 검붉은 성기가 보였다.
“…아, 안 돼, 히익… 흐, 흐으.”
핏줄이 솟아난 표면이 한계까지 늘어난 내벽을 툭툭 건드리며 성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지독한 광경에 손을 비틀며 벗어나려 하자, 희재가 깔끔하게 정돈된 손톱으로 통통하게 부어오른 음핵을 까득까득 긁어내렸다. 가녀린 몸이 툭툭 튀어 올랐다. 꽉 붙잡힌 팔목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자지러졌을 만큼 거센 자극이었다.
두툼한 살 기둥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속살이 질펀한 소리를 내며 접합을 반복했다. 지저분한 쾌감이 몸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흥분을 끌어올렸다. 쾅 때려 박는 성기에 몸이 마구 경련하기 시작했다. 기어이 깊은 안쪽까지 침범해 온 그의 성기가 내벽을 집요하게 문질러 댔다. 납작한 아랫배로 길고 뭉툭한 귀두가 툭툭 튀어 올랐다. 기괴한 모습에 눈을 떼려 하자, 그가 다정하게 명령했다.
“청아 씨 눈으로 봐요. 얼마나 좋, 아하는지…. 윽.”
이젠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희재의 세뇌가 눈 하나 깜빡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청아는 길이 잘 든 동물처럼 아래를 바라보았다. 꼭 자신의 배가 부푼 것처럼 보였다. 겁에 질린 청아가 고개를 홰홰 휘저으며 울먹이자 아랫배를 꾹 누른 희재가 청아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두툼한 살 기둥이 작은 틈 하나 주지 않고 내벽에 척척 달라붙었다.
“좋다고 해야죠. 응? 후으… 내 말 잘 듣겠다며.”
“웅, 우윽…. 하으, 흣…. 아!”
“하아…. 아님 뒤로 한 번 더 할, 래요? 뒤로 하면 청아 씨 보지, 엄청 조이, 거든.”
넓은 손바닥이 대답을 요구하며 아랫배를 꾸욱 눌러왔다. 생경한 자극에 불똥이라도 튄 사람처럼 몸을 뒤틀던 청아가 결국 오열하듯 눈물을 터트렸다. 잔뜩 조이는 내벽을 뚫고 투명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희재와 나눴던 모든 밤은 사랑과 섹스, 그 어떤 것에도 정의되지 못했다. 그저 계약에 의한, 협박에 의한 가이딩이었을 뿐이었다. 청아의 마음이 손 쓸 틈도 없이 아스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를 쑤셔 발기는 성기가 끔찍하리만치 좋아서 더 괴로웠다.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비로소 모든 마음을 버린 청아가 너른 품에 쓰러지듯 안겨들었다. 오로지 선명한 쾌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헤벌어진 입안에선 온전한 문장이 아닌 백치 같은 신음만 터져 나왔다. 시트가 이리저리 쓸리며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아, 아응, 흐… 흐읏, 거기… 아!”
“눈이 다 풀렸네.”
“우으, 응, 윽… 하악, 조, 좋아. 읏.”
땀에 젖은 청아의 등을 끌어안은 희재가 예민해진 속살 사이로 살 기둥을 욱여넣었다. 소변과도 같은 물이 줄줄 터져 나오며 서로의 하부를 엉망으로 더럽히기 시작했다. 찰박이는 소리에도 희재는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집요하게 극점만을 박아 대는 성기에 여린 몸이 격하게 들썩였다. 더는 들어올 곳이 없을 정도로 내벽을 꽉 메운 살 기둥에 시야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청아의 고개가 들이닥치는 힘에 중심을 잃고 픽픽 대며 뒤로 넘어갔다.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눈썹을 구긴 희재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부여잡고 곧장 입술을 집어삼켰다. 조그마한 혓바닥이 순종적으로 감겨들었다. 질투에 타오르던 분노와 충족되지 못한 소유욕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가볍게 허리를 움직이자 피가 가득 몰린 성기가 강하게 꿀렁였다. 퉁퉁 부은 청아의 아랫입술을 짓씹던 희재가 마침내 질구 안에 한가득 정액을 쏟아 냈다.
“한 번만 더 정이원하고 같이 있는 꼴 보이면, 후으… 그땐, 그 새끼 앞에서 나랑 하게 될 거예요.”
희재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먹먹해진 귓가로 완전한 소리가 되어 와 닿진 못했다.
홀로 빛을 내던 마음이 무력하게 짓밟혀 완전히 그 흔적을 감췄다.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청아가 의식을 잃고 툭 떨어졌다. 커다란 손이 잘게 떨리는 등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다루듯, 다정하게 토닥이기까지 했다.
새하얀 벽면 위엔 마치 하나인 것처럼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 모습을 응시하던 희재의 손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약속 하나만 해 주세요.’
‘……’
‘희재 씨한테 맞는 가이드가 나오면, 그때… 그때는 저 꼭 놔주세요.’
자신을 놔 달라는 눈물 섞인 애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품에 안긴 여자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한참을 끙끙거렸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청아에겐 모든 순간이 악몽일 게 분명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와 땀에 젖은 얼굴, 그리고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은 하얀 몸이 바라보던 희재가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었다. 하얀 필터를 입에 물고 청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였다.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청아를 억지로 주저앉히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좆같은 기분은 끝 간 데를 모르고 가라앉고 있었다.
* * *
센터장과 마주 보고 앉은 희재가 눈앞에 내밀어진 결과지를 건네받았다.
“저번 달 검사 결과지예요. 파동도, 컨디션도 모두 안정적이세요. 폭주 위험도도 크게 줄었고요.“
비정상적이었던 몇 달 전의 결과와 달리, 정상 범위 안에 들어간 그래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청아의 도망 이후, 날뛰던 선들이 차츰차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기를 쓰고 옆에 묶어 둔 보람이 있었다.
“그나저나 웬일로 호출까지 다 하시고… 별일이시네요. 센터장님.”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희재가 던지듯, 종이를 내려놓았다.
“단순히 검사 결과나 말하자고 부르신 건 아닐 테고… 용건을 말해요.”
냉정한 말투에 센터장 또한 잠시 망설였다.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마우스를 몇 번 까닥이더니 모니터 화면 위로 새로운 화면을 띄었다.
“……아무래도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청아 씨가 영양실조예요. 저도 결과를 보고 너무 놀라서….”
차갑게 굳은 희재의 시선이 스크린 위에 뜬 청아의 결과지 위로 머물렀다.
“계속 이 상태라면 가이딩도 힘들어질 거예요. 희재 씨도 알고 있었겠지만, B급이 S급을 받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기본적인 영양 상태도 안 지켜지는데 에너지까지….”
“…제대로 검사한 거 맞아요? 식사는 우리 쪽에서 별도로 확인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경호원님이 따로 챙기시니까…. 그런데 저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체중도 줄었고 영양 상태, 컨디션, 파동…. 전부 다 전보다 안 좋아졌고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식사를 거부하는 청아를 보고 곧장 식사를 바꿀 것을 지시했다. 식사 때마다 경호원을 시켜 잔반을 확인하게 했고, 늘 깨끗하게 비웠다는 답변을 보고받았다. 그 짓거리만 한 달째였다.
“그런데 그것보단…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정해 보였어요. 물론, 주제넘은 참견인 거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식사를 제대로 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까?”
고개를 가로젓는 센터장을 확인한 희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식사를 잘하고 있느냐는 자신의 질문에 청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 역시 청아가 식사를 거르지 않고 제때 잘 챙기고 있다고 줄곧 보고해 왔다. 검사 결과가 틀릴 리 없다면, 둘 중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날이 선 신경 줄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엊그제였나…. 청아 씨가 물어보더라고요. 새로운 가이드는 언제쯤 구해지는 거냐고.”
“…….”
“오로지, 그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재차 물었어요.”
센터장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잔잔했다.
“희재 씨랑 매칭률 맞는 새로운 가이드들, 꽤 추려지고 있어요. 아마, 이제 곧….”
가만히 센터장의 말을 듣던 희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자 구겨진 미간이 잠시 드러났다 부드러운 머리칼에 덮였다. 이유도 없이 마음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올라 더는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런 말이나 듣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언제부터라고 확실히 기억해 낼 수 없었지만, 어떠한 순간을 기점으로 청아가 변해 가고 있었다. 사랑을 담고 있던 눈이 생기를 잃어 갔다.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그란 눈에 더 이상 원망도, 슬픔도 담기지 않았다. 마치, 아무 감정 없는 인형 같았다.
청아가 자신에게 원한 건 오로지 마음 하나였다. 굳이 마음 한켠 내어주지 않아도 제 곁에 있을 거라 믿었다. 맹목적인 애정을 품은 눈동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자신을 믿게 만들었으니까.
결국, 모든 믿음을 깨부수고 도망간 건 청아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억지로 잡혀 온 뒤, 처음 몇 번은 반항하나 싶더니 이젠 곧잘 제 말을 따랐다. 비로소 모든 게 완벽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모든 게 착각이었음을 말해 주듯 그가 억지로 쌓아 올린 모래성은 청아의 얕은 숨 한번에도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청아가 또 제게서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왜.
* * *
「배우 한기원 씨가 마약 소지 혐의로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병실에 누워 가만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청아가 소름 끼치도록 낭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씨는 필로폰을 구매한 혐의를 받고 이날 아침 서울 자택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경찰 측은 한기원을 상대로 정확한 필로폰 구입 경위와 공범이 있는지를 추가로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청아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희재에게 핸드폰을 뺏긴 지 오래라, 기원과 저택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약, 마약이라고…. 고등학교 때부터 문란하게 놀아났던 기원이지만, 마약까지 손을 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청아는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기원을 바라보자 순식간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처음부터 하나로 묶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연을 끊어 냈지만, 늘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불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청아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 버렸다.
새로운 가이드가 언제쯤 구해질 것 같냐는 자신의 질문에 센터장은 그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대답할 뿐이었다. 기약 없는 답변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청아는 제게 주어진 이 모든 게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책임한 자신의 선택으로 희재는 끔찍한 폭주를 견뎌 내야만 했고, 목숨까지 위험해질 뻔했다.
그러니, 함부로 도망친 벌을 받고 있는 것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새로운 가이드만 생긴다면, 그때는….
톡, 토톡.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창가 쪽으로 다가간 청아가 방충망을 통해 들어오는 빗방울을 맞으며 창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다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퇴근을 하고 온 듯한 희재가 비서를 물리고 병실로 들어왔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도 옷자락 하나 젖지 않은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젖은 땅을 밟아본 적이 없을 남자이니,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웃지 않는 희재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워 보였다.
“밥 먹었어요?”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나긋하고 상냥했다. 마치,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청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두운 분위기에 눅눅히 잠겨 있던 병실의 공기를 바꾸는 듯한 깨끗한 울림이었다. 서늘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에 망설이던 청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거짓말이었다. 희재의 겁박 이후로, 며칠 간은 억지로 밥을 먹긴 했지만 좀처럼 잘 넘어가질 않았다. 희재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은 식사가 끝나면 다 비운 밥그릇까지 일일이 검사하기 시작했다. 노예도 이런 취급을 받진 않을 것 같았다. 거부감은 더해지고 날이 갈수록 식욕은 바닥을 쳤다. 모조리 휴지통으로 버린 후, 다 먹은 척 검사를 받았다. 속이 답답해 하루에 한 끼나 대충 때우는 게 고작이었다. 그의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인 통제에 청아도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정신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조용히 가라앉은 희재의 눈동자가 청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또 거짓말을 하네.”
“…무슨.”
의아한 말에 의문을 품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온 희재가 구석에 있는 휴지통을 발로 걷어찼다. 화들짝 놀란 청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희재의 팔을 부여잡았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쓰레기통이 바닥을 나 뒹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돌변했다. 말리려고 갖은 수를 써 봐도 소용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왜 그래요. 하지 마요!”
“밥을 제대로 안 처먹어서 영양실조라는데, 내가 들은 바로는, 식사를 거른 적이 없다고 들었거든.”
“…머, 먹었다고 했잖아요! 내가 먹었다고… 했는데, 왜!”
청아의 만류에도, 그는 방 안의 온갖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벽 쪽에 자리한 하나 남은 쓰레기통이 구둣발에 차여 쓰러지자 저녁으로 제공되었던 반찬과 하얀 밥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희재의 팔에 매달려 있던 청아가 금세 들통난 거짓말에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엉망이 된 바닥을 바라보는 눈이 침울하게 잠겨 있었다. 놀라울 만큼 고요한 태도로 분노를 갈무리한 희재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밖에 있죠. 방금 사 온 도시락 그대로 사서 다시 가져와요.”
통화를 끊은 희재가 서늘한 눈빛으로 청아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청아 씨 떼쓰는 거 받아 줄 만큼 한가해 보여요?”
“자, 잠깐 속이 안 좋아서 그런 거예요. 고작 밥 몇 끼 거른다고 가이딩에 문… 제없잖아요.”
애초에 가이딩만을 위해서 한 계약이면서, 고작 밥 한 끼에 이토록 날뛰는 그가 이해되질 않았다. 식사 몇 번 거른다고 해서 가이딩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영양실조는 예상치 못한 일이긴 했지만, 앞으로 잘 챙겨 먹는다면 금세 좋아질 문제였다. 굳이 이렇게 화내지 않아도, 예전처럼 가이드답게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혼을 냈어도 잘 알아들었을 일이었다.
“아. 가이딩에 아무 문제 없으니까 영양실조에 걸리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아라?”
“……가이딩만 잘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요, 그럼… 뭐 청아 씬 아무 잘못 없는 거네. 그렇죠?”
싸늘하게 일갈하던 희재가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더 불길했다.
똑똑. 무거운 침묵을 깬 건 일정한 박자의 노크 소리였다.
“잠깐 들어와요.”
곧장 떨어지는 명령에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경호원이 잽싸게 병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테이블 위로 새하얀 봉투를 놓은 경호원이 자세를 바로 해 희재의 앞에 섰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경호원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임청아가 밥 안 먹고 뻐기는데 뭐 했어요? 보고 제대로 안 합니까?”
“죄송합니다. 전달만 해 드리고 바로 나오느라….”
짜악. 매서운 파찰음이 병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청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겁을 집어먹은 청아는 희재의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왜, 왜….”
누가 봐도 죄 없는 사람을 잡아 분풀이라도 하듯 갈구어 대는 희재에 숨이 막혔다. 잠시 휘청이던 경호원이 곧장 다시 자세를 잡았다. 짜악! 그는 같은 곳을 한 번 더 후려치고 나서야 가볍게 손을 털었다. 놀라우리만치 익숙한 태도였다.
불행하게도, 청아는 대부분의 폭력에 익숙했다. 한중원의 저택에서 안 맞아 본 부위가 없으니 당연했다. 그들은 늘 길길이 날뛰고 분노하며 청아에게 손을 휘둘렀다. 지금의 희재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는 분노했음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더 청아를 두렵게 만들었다.
“내가 분명히 제대로 챙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이렇게 일 처리를 왜 좆같이 해.”
“왜 죄 없는 사람한테 그래요? 흐윽….”
“청아 씬 아무 잘못 없다며. 그럼 제대로 감시 안 한 얘 잘못이잖아. 아니에요?”
경호원에게 박혀 있던 시선이 제게로 박혀 들자,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의 진짜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쾅쾅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런 뜻이 아니라….”
희재가 경호원을 때린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을 때릴 수 없으니, 저쪽으로 불똥이 튄 것이었다. 죄책감을 이용해 반성하게 하고,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으려는 그의 의도가 보였다. 눈살을 찌푸릴 만큼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이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흐윽…. 안 거, 르고 먹을게요. 흐. 왜 아무런 죄 없는 사람한, 테 흐으… 윽. 저분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냉정한 태도에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청아의 울먹거림에 깊은 한숨을 내뱉은 희재가 손을 들어 경호원을 내보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남자가 곧장 병실을 빠져나갔다.
“…알아들었으면 먹어요. 내가 말로만 지껄이는 사람 아니라는 거 청아 씨가 제일 잘 알잖아.”
“흐으, 흐…. 윽.”
“자꾸 안 먹는 버릇 들이지 마요. 억지로라도 먹고 씹어서 삼켜.”
서러운 울음에 화를 누그러뜨린 희재가 천천히 테이블로 가 앉았다. 뒤따라온 청아가 병원복으로 눈물을 닦아 내곤 건너편에 앉았다. 새하얀 얼굴 위로 눈물 줄기가 죽죽 그어졌다. 얼마 부려보지도 못한 성질이 금세 꺾여 울고 있는 게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과거를 회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언제였더라. 회의에 참석하느라 청아와의 약속을 깜빡 잊었던 날,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자신을 기다리던 청아는 저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펑펑 울어 놓고선 애써 태연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참 애처로워 보였다. 답지 않게 백화점에 데려가 실컷 돈을 쓰게 하고, 능숙하게 달래도 보았지만 물기 어린 눈가는 여전했다. 몸을 섞으면서도 뭐가 그리 서러운지 끅끅대며 울었다.
왜 갑자기 그 얼굴이 떠올랐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억지로 생각을 정리한 희재가 젓가락의 포장을 뜯어 청아에게 건넸다. 움찔대는 어깨가 눈에 거슬렸다.
“울지 말고 밥 먹어요.”
“가이딩 신경 안, 쓰이게… 흐윽… 잘 먹으면 되잖아요.”
“알았으니까 먹으라고.”
서럽게도 울던 청아가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좀처럼 그치지 않은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희재가 홀린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축축하게 젖은 볼을 어루만지려던 찰나,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에 젓가락을 떨어트린 청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우욱…. 흐윽, 욱.”
“…임청아.”
변기를 부여잡은 가냘픈 등이 몇 번이고 힘없이 들썩거렸다. 어둠에 가려진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재가 순간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한밤의 소동 이후, 병실을 박차고 나간 희재는 며칠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불안하진 않았다. 가이딩이 필요해지면 언제든, 내키는 대로 저를 찾아올 걸 알았으니까. 경호원의 감시 아래, 점심을 깨끗이 비운 청아가 밀려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아 냈다. 침대에 앉아 애꿎은 가슴만 두드리고 있을 무렵,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제법 얼굴이 익은 간호사가 반쯤 문을 열고 낭랑한 목소리를 냈다.
“임청아 님, 센터장님 호출이요.”
“…아, 네.”
갑작스러운 센터장의 호출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난번에 했던 검사 결과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새로운 가이드를 찾기라도 한 걸까. 무수한 경우의 수를 상상하던 청아가 텅 빈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에 뒤를 돌았다. 몇 발자국 뒤에 떨어져 따라오던 경호원이 뚝 걸음을 멈췄다.
“복도에 앉아 계세요. 저 어디 안 가요.”
“전무님께서 어딜 가든지 동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연구실까지 따라 들어오실 거예요? 센터장님도 불편해하실 거예요.”
“…….”
“문 앞에서 기다리시면 되잖아요. 어차피 어디로도 도망 못 가요. 문 앞에 있는데 제가 무슨 수로….”
“…앞에 있겠습니다.”
이러다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 올 기세였다. 개인적인 검사 기록까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청아가 평소와 다르게 날을 세웠다. 가만히 듣던 경호원이 짧은 대답과 함께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경호원을 뒤로한 채, 연구실의 문을 열자 익숙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이원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경호원들이 막고 있으니 누나를 보러 갈 수가 있나. 보고 싶어서 불렀어요.”
앉아요. 갑작스러운 이원의 등장에 놀란 청아가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자신을 불렀다던 센터장은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원의 거짓말인 듯했다. 당장 방을 나가는 게 맞았지만, 희재나 경호원이 아닌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게 오랜만이라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소파에 앉은 청아가 이원을 바라보았다.
“아팠다면서요.”
“이제 괜찮아. 센터장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그게 괜찮은 거야? 지금 누나 꼴을 봐. 괜찮다는 말이 나와요? 나 태어나서 영양실조 걸린 사람 처음 봐요.”
“요즘 속이 안 좋아서 그랬어. 별거 아니야.”
“그 새끼…. 그렇게 안 생겼는데 진짜 개또라이였네.”
적나라한 욕설을 내뱉은 이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이 빠진 건지, 전보다 더 날렵해진 턱선과 다소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이 눈에 띄었다.
“나갈래요? 여기 있는 거 싫잖아요.”
“…뭐?”
“나랑 나가자고. 누나 정도는 내가 숨겨 줄 수 있으….”
“나… 나 안 나가. 여기 있을 거야.”
청아는 단호했다. 여기서 더 희재의 원망을 얻는 건 지독히도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원과의 일로 희재에게 오해를 샀는데 또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진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숨죽이고 있다가 벗어나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모두 끝날 일이었다. 지독한 세뇌가 청아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이런 식으로 가이딩 착취하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그 새끼가 죽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 누나 아프다며. 그건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게 아니라.”
“그 새낀 누나가 죽든 말든 상관도 없으니까 이따위로 대한 거라고요. 그런 새끼가 뭐가 예쁘다고 가이딩을 해 줘요?”
“…그렇게 쉽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가족끼리 일도 얽혀 있고, 그 사람한테 진 빚도 있어.”
지긋지긋한 한중원네 집안도, 억지로 빚을 뒤집어씌워 자신을 협박해오는 연희재도 조금만 참으면 정말 끝이었다. 가이드만 새로 구해진다면, 그땐 정말로…. 오로지 그 희망만이 청아를 살아 움직이게 했다.
“저번엔 다 버리고 도망쳤잖아요. 그럼 그땐 왜 그랬는데.”
“…그땐, 내가 희재 씨를 좋아했으니까 옆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있을 만해요? 그럼 더는 연희재 안 좋아한다는 거네.”
“…….”
“누나도 결국 감정보다 계약이 더 중요해진 거잖아. 아니에요?“
정곡을 찌르는 이원의 말에 청아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을 멈췄다.
“누나가 원하면 내가 도와줄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이원이 소파에 앉은 청아에게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병원복 주머니로 핸드폰을 밀어 넣은 이원이 가녀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필요 없다고, 가져가라고 밀어내야 하는데 지칠 대로 지친 마음이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
“연락해요.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
“더 있다간 오해받아요. 가 봐요.”
청아의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따듯한 온도를 가진 손이 청아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연구실을 빠져나온 청아가 자리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과 눈을 마주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넋을 놓고 주머니 속에 담긴 핸드폰을 어루만지던 청아가 어깨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병실을 지나칠 뻔했다.
“전무님은 일정 끝나는 대로 오실 겁니다. 편히 쉬십시오.”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경호원이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아마,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을 교대 근무자를 호출하는 듯했다. 이원과 손을 잡고 도망갈 생각도 없었지만, 틈조차 주지 않는 감시에 몸서리가 쳐졌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청아는 이원에게 받은 휴대폰을 서랍 안에 숨긴 뒤, 침대에 앉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심란한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청아가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뭐, 뭐예요? 여긴 왜… 어떻게.”
생각지도 못한 기원의 등장에 잠깐 숨이 멎었다. 누가 보아도 초조한 표정의 기원이 성큼성큼 다가와 청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지난밤 귓가를 울리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임, 임청아…. 부탁 좀 하자. 너 뉴스 봤지.”
“…지금 무슨.”
“연희재한테 가서 기사 좀 덮어 달라고 부탁 좀 해 봐. 어?”
그는 검찰 조사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반쯤 정신이 나간 듯했다. 미친 사람처럼 덜덜 떨리는 기원의 손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제발…. 이번엔 나 진짜 좆 돼. 청아야. 너 그 새끼랑 가이딩했잖아. 어? 연희재가 다시 계약까지 하자고 했다며. 그럼 그 정도 부탁은 해 볼 수 있는 거잖아.”
“…….”
“눈 딱 감고 그냥…”
끔찍한 부탁이었다. 청아는 이제 이 모든 일에 진절머리가 났다. 가이드로 팔아넘기기 위해 자신을 입양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견디지 못해 도망가자 제 명의로 돈까지 빌려, 다시 연희재의 협박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이젠, 그것도 모자라 범죄를 덮어 줄 것을 운운하며 저를 또 괴롭히려 들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청아가 기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그런 말이 나와요?”
“네 꼴이 어떤데. 네 주제에 지금 존나 황송한 거 아니야?”
어이가 없다는 듯, 비열하게 웃어 보인 기원이 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 트인 통유리창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까지…. 웬만한 호텔보다 더 넓고 화려한 VIP실이었다.
“씨발, 떡 하나 치려고 돈을 처발랐네. 아주.”
“…사람이 어떻게 이래…. 이건 해도 해도 너… 무 하잖아요.”
정적을 뚫고 나온 청아의 힘 없는 목소리에 인상을 구긴 기원이 어깨를 팍 밀어트렸다. 새하얀 벽에 내동댕이쳐진 청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딱딱한 벽에 부딪힌 등이 멍이라도 든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아픔보다 환멸감이 더 컸다.
도대체 언제까지… 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사람이 어떻게 이러냐고? 기껏 좋은 계약 물어다 줬더니 도망이나 가서 남의 집안 사업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무릎을 굽히고 앉은 기원이 청아의 머리통을 툭툭 쳐댔다.
“…….”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우리 집안 엿 먹이려고 도망간 거지? 짐승 새끼들도 요샌 머리가 똑똑해서 키워 준 은혜는 안다는데….”
“나가요. 안 나가면 소리 지를 거예요.”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희재를 떠나오던 날, 지영에게 들었던 말이 기원의 목소리와 겹쳐져 들려왔다.
“나가요…. 나가라고!”
“이거 왜 이렇게 군기가 빠졌어. 이제 오빠 안 무서워?”
어깨를 거세게 부여잡는 힘에 팔목까지 지잉 울렸다. 억센 손길에 청아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너 나 무서워서 맨날 문 잠그고 잤었지.”
“…….”
“내가 그거 몰랐을 거 같아?”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기원의 팔을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청아가 그대로 굳었다.
“이 씨발, 그래…. 어차피 이따위로 빵에 처박힐 거면, 죄 한 번 더 짓지, 뭐…. 난 무서울 게 없어.”
“…놔… 놔요! 싫어… 으읍.”
비명을 지르려 하자, 커다란 손이 청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원의 무릎이 청아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찍어눌렀다. 코와 입을 모조리 덮은 손바닥에 숨구멍이 턱 틀어막혔다. 공포감에 짓눌린 청아가 손을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을 쳤다.
반항이 거세지자 욕설을 내뱉은 기원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겁에 질린 얼굴 위로 훅 덮었다. 발버둥 치던 청아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뚝 하고 멈춰 섰다.
기원은 그 누구보다 청아를 잘 알고 있었다. 지영은 훈육을 핑계로 어린 청아를 새카만 방에 가두곤 했다. 끔찍했던 악몽 이래로 청아는 단 한 번도 불을 끄고 잠든 적이 없었다. 희재의 집에서도 그랬다. 조그마한 스탠드라도 켜 둬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허, 윽…. 흐으.”
“여전하네?”
그건 아주 어릴 때부터 뇌리에 새겨진 공포였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은 어둠은 순식간에 청아를 어린 시절로 끌고 갔다. 폭풍처럼 들이닥친 공포가 흐릿해진 정신을 지배했다. 상체를 더듬는 거친 손길에도 손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끝도 없는 지옥이 자꾸만 청아의 목을 졸랐다.
힉힉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흡을 뱉어 보려 했지만 새카만 천에 가로막힌 시야에 겁에 질린 기도가 꽉 조여들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강한 타격음과 함께 기원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떨어져 나갔다. 구둣발 소리와 함께 얼굴을 덮은 천이 떨어져 나갔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억, 흐윽….”
비극에 잠긴 청아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희재의 숨이 멈췄다. 그는 잔인하고 교활한 성정의 소유자였지만,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할 정도로 무뢰한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광경에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청아는 기원의 동생이었다. 아무리 입양아라고 할지라도 가족이라는 틀에 묶인 관계였다.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 대강 짐작했지만, 이런 식의 관계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희재는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 기원을 철저히 무시한 뒤, 구둣발로 턱을 걷어찼다. 빠각, 잔인한 소리와 함께 기원이 병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자비한 폭행의 시작이었다. 눈 뜨고는 못 봐줄 끔찍한 광경이었다.
피가 터지고 살이 으깨지는 폭력의 현장에서 도망치듯,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간 청아가 귀를 틀어막았다. 늘 잔인했던 희재였지만, 오늘만큼은 그 강도부터가 달랐다. 피 묻은 이빨이 바닥을 굴러 청아의 앞으로 툭 떨어졌다. 흐윽… 흐으. 더 뒤로 갈 곳도 없는데 자꾸만 발을 구르던 청아가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희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는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부류들과는 달랐다. 온전한 정신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걷어차고 기원의 손가락을 밟아 부수고 있었다. 살이 터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새하얀 벽에 빨간 피가 튀었다. 벌레처럼 꿈틀대던 기원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지 가이드 간수도 못 해서, 크윽…. 도망이나 가게 한 새끼가, 왜… 나한테 화풀이… 아악, 씨발!”
“더 해 봐요.”
“지금 존, 나게 열 받지? 내가 임청아 건드려서… 흐.”
“더 해 보라니까?”
“쟤가, 흐… 욱. 얼마나 처맞고 살, 았는지… 큭, 네가 봤어야 하는데. 내가 밤마다… 쟤 한번 건드려 보려고. 우욱.”
바닥을 구르는 돌이라도 걷어차는 사람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발길질이었다. 기원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희재의 바짓단을 부여잡았다.
“크흐… 저 년, 저거 몇 번 갇혀 봐서 정신머, 리가 아예 나갔어. 너 모르지? 쟤 불도… 끄으, 못 끄고 자.”
순간, 가혹하게 쏟아지던 구둣발이 뚝 멈췄다. 발길질이 멈춘 사이, 피투성이가 된 기원은 배를 부여잡고 병실을 기어나갔다. 건전지가 다 한 인형처럼 병실 한가운데에 멈춰 서 있던 희재가 급히 과거의 기억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불이 꺼져 있던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늦은 밤에 찾아와도 늘 은은한 조명등이 켜져 있었다. 그 조명 아래에서 청아와 몸을 섞었다. 목적은 가이딩이었지만, 가끔은 살이 닿는 섹스에 더 심취하곤 했다. 파동이 모두 가라앉았는데도 몸을 떼어 내기 힘들었다. 제 흔적으로 물든 하얀 나신이 몹시도 흡족했다. 세어보기도 힘든 만큼 무수한 밤이었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혀 몰랐다.
한참을 굳어 있던 희재가 귓가를 파고드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 못 했어요. 잘못했어요. 불 켜 줘, 흐으… 윽.”
“임… 청아.”
“허억…. 끄윽… 흐, 불 켜 줘… 숨을 못, 흐으. 불 좀 켜 줘요.”
청아의 호흡이 이상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희재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청아에게 다가갔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피가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훤한 병실에서 자꾸만 불을 켜 달라고 헛소리를 내뱉던 청아가 이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급히 한쪽 무릎을 굽혀 어깨를 부여잡아 보았지만, 청아는 좀처럼 숨을 쉬지 못했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까지 마구 긁어 대기까지 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희재는 발작하듯 떨리는 작은 몸을 바닥으로 눕혔다.
“임청아, 정신 차려. 임청아!”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한 호흡엔 한 시의 여유도 없었다. 차게 식은 두 손으로 청아의 입 위를 덮었다. 급히 양손으로 동굴을 만들어 주자, 할딱이는 호흡이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겁에 질린 청아가 누구의 손인지도 모르면서 다급히 손등을 부여잡아 왔다. 달달 떨리는 작은 손이 호흡을 갈구하듯, 희재의 손등을 긁어내렸다.
“괜찮으니까 숨 쉬어.”
“후으, 후… 흐으.”
“천천히, 천… 천히 숨 쉬어.”
지금의 청아는 꼭, 죽기 직전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았다. 그만큼 절박한 숨이었다. 새하얗게 비워진 희재의 머릿속은 청아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눈동자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평정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희재는 그 모습을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아야만 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조그마한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갈 무렵, 자신을 비추던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그 빛을 잃고, 툭 감겼다.
* * *
지독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벗어났지만, 꿈이라고 별다를 건 없었다. 청아는 꿈속에서조차 불행했다.
‘너 나 무서워서 맨날 문 잠그고 잤었지.’
‘…….’
‘내가 그거 몰랐을 거 같아?’
기원의 목소리가 끈적한 타르처럼 온몸을 뒤덮었다. 익숙하리만치 괴로운 감각이었다. 이제는 좀 놓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끔찍한 악몽은 청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으, 흐으… 허억.”
악몽 속을 헤매던 청아는 이마에 닿는 서늘한 온기에 번뜩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다소 지친 듯한 표정의 희재가 보였다. 초점을 잃은 그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 이내 제게로 박혀 들었다.
“하나만 물을게요.”
“…….”
“…왜 나한테 한 번도 말 안 했어요?”
“…….”
“지금 말고, 적어도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을 때,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나한테 한 번이라도 도와 달라고 할 수 있었잖아.”
그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건 자신이 아니라 꼭 희재 같았다.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외로운 일은 없었다. 그건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홀로 부르는 일과 같았다. 외로움에 익숙한 청아라고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싫었다.
“나에 대… 해서 궁금했던 적이 있긴 했어요? 없었잖아요. 그래서 말 안 했을 뿐이에요.”
결국, 희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빛을 잃은 청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어쩐지 숨이 막혀 그대로 눈을 가려 버렸다. 깜빡이는 속눈썹이 차가운 손바닥을 힘없이 긁어내리다 이내 눈물로 푹 젖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식탁에서 붕어빵을 먹다 꾸벅꾸벅 졸던 청아를 방으로 데려가 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졸음을 이겨 내지 못하고 눈가를 마구 간지럽히는 속눈썹이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때와 달리, 희재의 손바닥은 자꾸만 축축이 젖어 들기만 했다. 제대로 된 소리도 못 내고 우는 청아를 눈에 담자 끝도 보이지 않은 지옥에 빠진 듯 암담해졌다.
희재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