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onata No.1 (2/5)

Sonata No.1

“…저… 저 이 계약 안 할래요.”

“뭐?”

“계약… 안 하고 싶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가이딩을… 아!”

순식간에 날아온 재떨이가 청아의 머리를 강타했다. 머리를 강타하는 아픔에 순간 이마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날카로운 부분에 긁히기라도 한 건지 새빨간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늘 청아를 괴롭히던 어머니였지만, 이토록 심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처음이었다. 선연한 증오심과 분노가 청아의 가슴을 푹푹 찔러 왔다.

“넌 어떻게 된 애가 양심이라는 게 없니? 너같이 쓸모도 없는 애를, 아무 대가도 없이 몇 년을 거둬 키워 줬으면…”

“아휴, 여보. 말로 하지. 뭘 또 물건을 집어 던지고 그래?”

“…….”

“당신은 가만있어 봐요. 청아, 너도 이젠 우리한테 뭔가 갚아야 하지 않겠니?”

거짓말. 애초에 팔아넘기려고 데려온 거면서.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간 머리가 깨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대충 말리는 시늉만 하며 뉴스를 보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역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신경하기만 했다.

“그 사람, 다음 주면 집으로 올 거다. B급인데도 너랑 매칭률이 괜찮다고 하더라. 네 인생에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것 같니?”

“…….”

“내 말 알아들었으면 당장 방으로 들어가. 그리고 쥐어 터진 이마 꼴 보기 싫으니까 좀 가리고.”

청아는 피가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마구 비틀대며 계단을 올랐다. 차라리 입양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행복했을 텐데…. 뒤늦은 후회에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청아가 입양되던 해, 음주 운전과 성매매 사건으로 기업 이미지에 먹칠을 하던 한중원은 반성의 의미로 주말마다 고아원을 방문했다. 사랑의 밥차를 운영하며 하얀 위생모까지 뒤집어쓴 한중원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엉겁결에 끌려온 그의 처, 지영은 반찬을 나르다 반짝이는 눈이 예쁜 여자애 하나를 발견했다.

깨끗하고 청순한 청아의 외모는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사고만 치다 외국으로 쫓겨난 아들보다야 오히려 쓸 만한 구석이 많아 보였다.

몇 날 며칠을 청아를 지켜보던 지영은 마침내 입양을 결심했다. 잘 키워서 자신의 쓸모 있는 패가 되어 준다면 한중원도 저를 쉽게 보진 못하리라. 그녀의 결정은 유기견을 입양하는 것보다 가볍고 쉬웠다.

‘우리 청아가 참 예쁘고 눈에 튀죠. 청아, 청순한 아이. 이름부터 남다르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한 거물임을 확인한 원장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신거렸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작년 검진에서 지금 이 정도 파동만 유지해 준다면, S급으로 발현할 확률이 크다고 하더군요.’

‘어머, 정말요?’

‘뭐, 거의 90프로라고 보시면 됩니다… 허허. 저희도 무슨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싶습니다. 머리도 영특하고 싹싹한 애라 어딜 가도 잘할 겁니다.’

원장은 제가 가진 보석을 뽐내듯, 청아의 자랑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들 앞에서 청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품을 구매하듯 따져 보고 고심하던 그들은 이내 장바구니에 청아를 쏙 담아 갔다.

그러나 호언장담했던 원장의 말과 달리, 청아는 그 흔한 A급도 되지 못했다. 가이드 결과지에 찍힌 글자는 바로 B급이었다. B급 가이드, 에스퍼와 매칭은 가능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매칭률은 바닥을 쳤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청아의 능력을 확인한 지영은 곧장 고아원으로 쳐들어갔다.

분이 풀릴 때까지 원장의 멱살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한밤중의 소동으로 또 한 번 기사가 날 뻔했지만, 기업 이미지에 흠이라도 날까 싶어 지레 겁먹은 한중원은 이리저리 돈을 찔러 대며 모든 기사를 막았다.

제 존재를 부정당한 그날부터 청아는 무던히도 노력했다. A급이 될 수는 없겠지만 착한 딸로 거듭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청아만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딸로 삼고자 데려온 게 아니었으니, 청아의 고분고분한 태도와 말투 역시 답답하고 멍청한 행동으로 보일 뿐이었다.

가이드로서나 잘 팔려 갔으면. 그들이 청아에게 거는 기대는 그것뿐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양부모는 청아와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 탓에 청아는 한 달에도 몇 번이고 피를 뽑아야만 했다. 가끔 자신이 사람이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으… 흐윽, 흑.”

이럴 때면 저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아주 어릴 적, 그래도 행복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시간은 모든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이젠 엄마의 얼굴도, 목소리도 흐릿해져 있었다. 저를 버리고 가던 뒷모습만이 아직도 생생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마구잡이로 흘러내렸다. 심장이 욱신거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슬프게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비통한 슬픔은 또다시 가슴 깊숙한 곳에 선명히 새겨질 것이다. 엄마가 떠났던 날, 어두운 방에 홀로 갇혔던 날, 양부모의 강요로 휴학계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아마,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기회만 된다면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영은 청아의 수많은 가이딩 상대 중 높은 매칭률을 자랑하는 S급 에스퍼가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 순간, 당장 청아를 휴학시켰다. 그녀는 좋은 자리가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청아를 팔아 치워 버리고 싶어 했다. 그게 돈 많고 잘난 집안의 에스퍼라면 더 바랄 게 없었고.

물론, 윤지영이 청아에게 피아노를 시킨 이유도 뻔했다. 보기 좋으니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청아는 피아노를 사랑했다. 제게 주어진 유일한 안식처였다. 새하얀 건반을 두드리다 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가족도, 괴로운 현실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이젠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양어머니의 소원대로 얼굴도 모를 남자와 각인하게 되고 평생을 가이드로 착취당하다가, 쓸모를 다하면 쓰레기처럼 쫓겨날 게 뻔했다. 청아는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혹여 울음소리가 퍼져나갈까 봐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끙끙대며 울음을 삼켰다. 새하얀 베개가 빨간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 * *

청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굴도 모르는 에스퍼와의 계약이 성큼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랬지만, 이번은 특별히 더 끔찍했다.

침대에 올려진 새하얀 원피스를 바라본 청아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이대로 사라져 버린다면 상대방도 자존심이 상해 계약을 취소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망갈 용기 따위는 지영의 살벌한 경고에 기세가 꺾여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창문만 바라보던 청아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야, 임청아. 잘 지냈냐?”

얼음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오빠가 말하는데 싸가지 없이 대답도 안 하네.”

한기원이었다. 호적상으로는 청아의 오빠였지만, 단 한 번도 오빠였던 적은 없었다. 그는 틈만 나면 청아를 건드려 댔다. 가만히 앉아 있는 청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거나 발을 걸어 넘어트리기도 했다. 킬킬대며 웃는 얼굴을 보면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끔찍한 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끔찍한 정욕이 담긴 눈빛에 매번 소름이 끼쳤다.

청아가 기원을 오빠로 생각하지 않듯이, 기원 역시 청아를 동생 따위로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청아가 졸업하던 날, 잠들어 있는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임청아.’

청아는 벌벌 떨면서도 감은 눈을 절대 뜨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제 방에 들어왔는지 모를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날 이후, 청아는 강박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잠이 들었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야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다행히도, 그다음 해 기원이 집을 나갔다. 연기자로 데뷔한 그는 소속사와 가까운 압구정으로 숙소를 옮겼다. 그렇게 끔찍했던 지옥이 끝이 났다고 믿었다. 정말로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다.

“너 아주 팔자 폈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 아주.”

“…….”

“네 주제에 S급 에스퍼랑 가이딩도 다 하고, 고마운 줄 알아.”

“…내 방에서 나가요.”

“얘 봐라? 네 방? 여기 네 방이 어딨는데.”

이기죽대는 기원의 태도에 청아가 눈을 치켜떴다. 처음 보는 태도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작은 머리통을 툭툭 밀어 대기 시작했다.

“얹혀사는 주제에 어딜 감히. 눈 안 깔아? 어?”

“하지 마요.”

“뭘 쳐다보냐고, 어? 쥐뿔도 없는 년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키워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하지 말라고요.”

“넌 진짜 동생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어휴. 내가 아주 아까워 죽겠어요. 고이 모셔 놨더니 다른 새끼가 홀라당 채 가 버리네.”

맑은 눈동자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확인한 기원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다. 성적인 의도가 짐작되는 끔찍한 말에 청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녀린 손목을 붙잡은 그가 휘청대는 여자를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야, 이리 가까이 좀 와 봐.”

“…왜, 왜 이래요?”

“그 새끼랑 붙어먹을 거 생각하니까 갑자기 열 받아서 그런다. 왜.”

바닥으로 자빠질 뻔한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기원이 새하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청아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흥분감이 고조되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몸이 휘감은 손을 거세게 밀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기원의 숨소리만 더욱 거칠어졌다.

“너 존나 좋은 냄새 나는 거 알아? 피부도 씨발, 보들보들해 가지고…”

“무슨…. 하, 하지 마요.”

“안 넣고 비비기만 하면, 그 새끼도 모르지 않을까?”

“…이거 놔요. 놔!”

“가만히 좀 있어 봐. 너 이대로 보내기 아쉬워서 그래.”

습한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커다란 손이 얇은 잠옷 속으로 파고들어 와 맨살을 더듬기 시작했다. 징그러운 감각에 발악하듯 발버둥 치던 청아가 정신을 차리고 그의 발을 콱 내리찍었다.

“악! 아, 이 미친년이…”

“…흐윽, 흑.”

“너 이리 안 와?!”

발등을 제대로 찍어 내린 탓에 기원이 악을 쓰며 떨어져 나갔다. 살벌한 욕설에 겁을 집어먹은 청아가 그대로 방을 튀어 나갔다. 잠옷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맨발로 뛰었다.

축축한 잔디가 발아래서 엉망으로 으깨졌다. 차라리 이대로 도망가서 꽁꽁 숨어 사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가 쫓아올까 뒤를 쳐다보던 청아가 제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무언가에 부딪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

엉덩이가 깨질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흐릿한 시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낯선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청아를 가로막았던 바로 그 무언가였다. 쏟아지는 햇살에 여러 번 눈을 깜빡이자,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나랑 계약하기 싫어서 도망 나온 거예요? 섭섭하네.”

“아….”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하얀 피부, 옅게 진 속쌍꺼풀과 가지런한 속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따듯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누구보다 청순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청아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작게 웃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청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청아 씨 맞죠?“

하얗고 깨끗한 손가락, 그리고 말끔하게 정돈된 손톱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던 청아가 느릿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힘을 주어 청아를 일으킨 남자가 물결치듯 눈매를 휘며 입술을 달싹였다.

“반가워요. 나 연희재예요.”

“저, 그게 도망가려고 한 건 아니고… 흐윽.”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믿기 힘든 말에 청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 갔다. 그는 얼어붙어 있는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흙으로 범벅이 된 청아의 옷을 탈탈 털어 주었다. 고개를 훅 숙인 그에게선 보드랍고 상쾌한 비누 향이 났다.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내든 남자가 흙바닥을 뒹군 손을 천천히 닦아 냈다. 유리구슬을 만지듯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진짜 도망가려고 한 건 아니죠? 그럼 저 상처 받아요.”

“…저, 그게….”

“다 울었으면 이제 들어갈까요?”

부드럽고 나긋한 권유에 말문이 턱 막혔다. 딱히 청아의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여자의 작은 손을 잡은 희재가 걸음을 옮겨 커다란 저택으로 향했다. 커다랗고 넓은 뒷모습에 시선을 뺏긴 채 청아가 엉거주춤 뒤를 따라붙었다.

저택으로 들어서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지영이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청아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희재의 손을 붙잡고 애처롭게 사과를 거듭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휴…. 죄송해요.”

“…….”

“정말 창피해서 원, 우리 청아가 갑작스럽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려 깊은 남자의 어조에 지영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가정부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급히 발을 닦아 내던 청아가 매섭게 꽂히는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멀끔한 차림의 희재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지영은 거실 중앙에 있는 소파로 그를 안내했다. 어색한 포즈로 신문을 펼쳐 보고 있던 한중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맞이했다. 아들뻘 되는 남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가며 인사하는 모습이 이 계약의 갑을관계를 암묵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정말 부끄러워서…. 어휴, 어서 앉으세요. 차 준비해 드릴게요.”

“오셨습니까. 연 전무님.”

“오랜만이네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은 희재가 어서 앉으라는 듯, 청아를 향해 손짓했다. 어색하게 붙어 앉은 청아가 제게 내리꽂히는 시선에 몸을 꼼지락댔다.

“임청아, 너는 도대체가….”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당황스러울 만도 하죠.”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청아를 향해 꾸지람을 퍼부으려던 한중원을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막아섰다.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두의 시선이 희재에게로 쏠렸다. 눈앞에서 퇴짜를 당할 뻔했는데도 그는 얼굴에 걸린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삽시간에 거둬진 시선에 청아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재빠르게 분노를 가라앉힌 한중원이 멀끔한 희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막대한 프로젝트를 넘겨주신다고 하니까…. 너무 감사해서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서로 뜻이 맞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계약을 모자란 자식 하나 앞세워서…. 못난 애비라 면목이 없네요.”

한중원의 고개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이었다. 굽신거리면서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기이했다.

“어떻게 보면 계약이라는 표현이 맞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청아 씨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좀 그렇네요.”

“어휴, 희재 씨는 어쩜 그렇게 말씀도 듣기 좋게 하세요.”

고급스러운 찻잔에 차를 내온 지영이 날름 소파에 앉았다.

“청아 씨는 어때요?”

“…전, 저는.”

줄곧 앞만 바라보고 있던 희재가 청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싫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 굳이 제 의견을 물어보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청아의 태도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한중원이 애써 화제를 돌렸다.

“참, 연 회장님은 잘 지내고 있으신지요? 얼굴을 못 뵌 지 꽤 돼서….”

“아직 병상에 계십니다. 덕분에 많이 고생하고 있죠.”

“연 전무님도 이번 카지노 계약 건으로 꽤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집으로 와 주시고 참 죄송합니다. 누가 되지 않게 이번 사업 잘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 청아도 모자란 자식이지만, 어떻게 잘 좀 부탁드릴게요.”

계약, 그리고 가이딩. 여기서 모든 걸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린다면 이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던 청아가 자신의 앞에 툭 나타난 과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쁘게 잘린 복숭아였다.

“과일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정성스레 준비된 과일은 청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었다. 익숙한 취급이었으며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세심하게 청아를 배려했다. 손이 닿지 않을 그녀를 위해 손수 과일을 찍어 건네주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포크를 쥐자 그가 작게 웃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과육이 청아의 입에서 퍼져 나갔다.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숨긴 지영이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하루라도 빨리 청아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청아의 희생으로 남편의 사업은 더욱 순조로워질 것이다. 청우그룹을 등에 업고 날개를 활활 펼칠 제 모습을 생각하자 언짢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러나 반대로, 청아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파리하게 질려 갔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제 처지에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식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가이딩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청아 씨랑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잠시 나갔다 와도 괜찮을까요?”

“…….”

“아무래도 너무 얘기를 못 나눈 것 같아서요.”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청아 옷 좀 갈아입고 나갈게요.”

청아는 갑작스러운 말에 목구멍에 걸려 있던 복숭아가 튀어나올 뻔했다. 테이블에 놓인 차 키를 들어 올린 희재는 천천히 일어날 준비를 했다.

“눈치도 없이 오래 잡아 뒀네요. 죄송합니다, 연 전무님.”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요. 얘, 청아야. 올라가자.”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난 지영은 청아의 손목을 끌어당겨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사장님, 초대 감사했습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희재가 반듯하게 인사하며 자리를 떠났다.

지영을 따라 들어온 드레스 룸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들도 가득했다. 미친 사람처럼 옷 더미를 뒤지던 지영이 단아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꼬질꼬질한 잠옷을 억지로 벗겨 내는 손길에 새하얀 피부에 빨간 손톱자국이 새겨졌다.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된 청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넌 연희재 아니었으면 오늘 먼지 나게 맞았을 줄 알아. 저 남자가 그나마 너그럽고 착해서 이해해 준 거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어휴.”

“…….”

“가서 잘하고 와. 알겠어? 그래도 하는 기색을 보니 네가 영 싫지는 않나 보다. 모르는 척 눈 딱 감고 하자는 대로 다 해 줘.”

“…네?”

“순진한 척하기는.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니? 벗으라면 벗고, 가이딩 해 달라면 딱 달라붙어서 다 해 주라 이 말이야. 저만한 거물을 잡았으면 너도 뭔가 해야지.”

징그럽고 끔찍한 소리에 청아의 얼굴이 굳었다. 비틀대는 청아의 몸을 휙 뒤집은 지영이 원피스의 지퍼를 끌어 올렸다. 얇은 머리카락이 지퍼에 걸려 작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녀의 손짓은 다급하고 거칠기만 했다.

“…아!”

“중요한 기회야. 절대 놓치지 마.”

번뜩이는 지영의 눈이 집어삼킬 듯 가까이 다가왔다. 기회를 놓쳤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다. 공포에 질린 청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 * *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끌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명 아래, 희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먹어요. 여기 음식 깔끔하고 맛이 좋아요.”

그가 데려온 곳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일식집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자그마한 연못 위로 화려한 빛깔의 금붕어가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넋을 놓고 구경하던 청아가 이내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청아 씨, 새우는 안 먹나 봐요?”

“네. 알레르기가 있어서….”

차분한 태도로 대화를 이어 가는 남자는 시종일관 여유롭고 느긋하기만 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반쯤 혼이 나간 청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요.”

“이렇게까지 급하게 계약을 하셔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아무리 매칭률이 높다고 해도….”

대충 먹는 시늉만 하던 청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계약을 막고 싶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물론, 매칭률 때문에 저 같은 B급 가이드와 가이딩을 하겠다는 남자의 태도도 이해되지 않았다.

“어릴 때, 폭주가 꽤 잦았었는데…. 그때 이후로 늘 파동이 불안정해요. S급 에스퍼한텐 굉장히 치명적인 단점이죠. 불안정한 파동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폭주가 오니까.”

구슬프고 애틋한 샤미센 소리와 나긋나긋한 희재의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폭주…. 일반인들보다 뛰어난 두뇌, 외모, 신체적인 능력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폭주만큼은 그들의 제어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폭주를 멈추는 건 엄연히 가이드의 일이었다. 폭주가 잦아진다면 아무리 잘난 에스퍼라도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였으니, 서로 상생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본질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가이드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게 흠이었다. S급이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가이드가 아니라면, 희재와 같은 에스퍼와 접촉할 일조차 없는 게 보통의 일이었다.

“물론 청아 씨도 잘 알겠지만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가이딩으로 제어가 돼요. 하지만 전 좀 운이 없었죠. 가이드들하고 이상하게 매칭률이 안 나와서 꽤 고생을 했어요.”

“…….”

“뭐, 매칭률이 낮아도 효과는 있어요, 근데 뒷맛이 떨어지죠. 약이나 주사도 자주 쓰는데, 부작용이 심한 편이라서… 더 좋은 가이드가 필요했어요.”

“…몰랐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사람인지라 폭주로 개죽음당하긴 싫거든요. 누구든 그렇지 않겠어요?”

개죽음…. 그가 왜 가이딩에 집착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에스퍼가 폭주로 자멸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가이드의 죽음만 못했다. 에스퍼의 생존 욕구에 짓밟혀 에너지를 착취당하는 가이드가 늘어나자 정부는 가이딩 센터를 세워 에스퍼와 가이드를 직접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국가 전환으로 소속된 에스퍼는 완벽한 능력을 앞세워 강력한 권력과 위치를 점차 선점해 나가기 시작했다. 희재도 그런 케이스였다.

“청아 씨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 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수락해 줘서 고마워요.”

엄밀히 따지자면, 청아는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수락한 적이 없었다. 집안 식구들이 밀어붙인 일에 청아의 의견 따위가 반영될 리 없었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수긍한 것뿐이었다.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나쁘게 대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부드럽고 고운 눈매가 청아를 향해 살포시 휘어졌다. 남자의 미소에 용기를 얻은 청아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기….”

“내 이름, 저기 아닌데. 연희재라고 했잖아요.”

“저… 희재 씨, 정말 염치없다는 거 아는데….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자신도 하나쯤은 가져가고 싶었다. 내색하진 못했지만, 줄곧 기원이 벌였던 행동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지영은 청아의 독립을 막을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집을 오가는 기원이 제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으니, 집을 구할 돈이 없는 건 당연했다. 당황스러운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궁지에 몰린 그녀에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말해요.”

“혹시 근처에 집 좀 구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사… 정이 있어서.”

뜬금없는 부탁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잠시 고민하다 싶더니,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래요. 가이딩만 잘 맞다면 못 해 줄 게 있을까요.”

“…….”

“가까운 오피스텔로 알아봐 줄게요. 그편이 서로 편할 테니까.”

이거면 됐다. 작게 고개를 끄떡여 보인 청아가 테이블에 놓인 스푼을 집어 들었다.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조그마한 손을 바라본 희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몇 살이랬죠? 21살?”

“22살이요.”

“…학교는 안 가요? 피아노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휴학했어요. 사정이 있어서….”

그 사정이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가 미워 보이진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어리네. 진짜 애기다.”

“…저, 그만 먹을까요?”

머쓱해진 청아가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희재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며 사과하며, 테이블에 놓인 숟가락을 다시 청아에게 건네주었다.

“다음 주에 같이 가이딩 센터 좀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거긴 왜요?”

“뭐, 확인 차원이죠. 청아 씨랑 나랑 매칭률이 좋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만약 피 검사로 확인한 매칭률이 정확하지 않다면, 사실은 그와 자신의 매칭률이 바닥이라면. 연희재는 바로 자신을 내칠까? 아마 그렇겠지….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두려워져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굳어진 표정을 확인한 희재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마,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서로 컨디션도 체크하고, 특이 사항도 확인할 겸 가는 거니까 너무 겁먹진 마요.”

“…네.”

“이만 일어날까요?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버스 타고 가도 되는데….”

“아직 겨울 안 지났어요. 추운데 고생하지 말고요.”

다정하게 청아의 손을 잡아끈 그가 야외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국내에 몇 대 없다던 차량의 엠블럼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새하얀 컨버터블 차량은 제 주인과 닮아 선이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베이지색의 시트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다 벌써 어둑해진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피곤하면 자도 되고.”

“아니에요. 조수석에서 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하. 우물쭈물 내뱉은 말에 희재가 낮게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맨발로 집을 뛰쳐나올 때만 해도 악몽과 같은 하루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희재의 등장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길가의 돌멩이 같은 자신을 바라봐 주고 신경 써 주었다. 따듯하고 섬세한 배려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청아는 그의 행동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마냥 끔찍할 것으로 생각했던 계약이 어쩌면 유일한 탈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착했어요. 청아 씨.”

“…감사합니다.”

이렇게 금방 도착할 줄은 몰랐는데…. 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청아의 머리를 이리저리 흩트려 놓았다. 창문을 내린 희재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 주 토요일에 데리러 올게요. 푹 쉬어요.”

예의 바른 신사처럼 집 앞까지 따라와 준 그가 짧은 인사와 함께 곧장 눈앞에서 사라졌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차가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던 청아가 억지로 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 * *

희재의 차를 타고 30분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국립 가이딩 센터였다. 커다란 규모로 지어진 센터는 작은 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결벽적인 청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번쩍번쩍 윤이 나는 대리석 바닥을 밟고 안으로 들어서자 바쁘게 뛰어다니는 연구진들과 수많은 대기 인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건 다름 아닌 희재였다.

에스퍼라는 종족 자체에서 느껴지는 힘과 아우라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규정짓기엔 시선이 남달랐다. 남녀노소 따질 것도 없이 모두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갔다.

“우린 위층으로 갈 거예요. 에스퍼는 층이 아예 다르니까.”

“네.”

부드럽게 떨어지는 이마와 콧대를 훔쳐보던 청아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최상층에 있는 VIP 관리실은 경비부터 삼엄했다. 1층과 다른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 청아의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설핏 웃어 보인 희재가 익숙하게 출입 카드를 찍었다. 투명하고 커다란 유리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복도에 마련된 부드러운 소파에 앉은 청아에게 다가온 간호사가 채혈 준비를 시작했다. 몇 달마다 뽑는 피였지만, 매번 뽑을 때마다 꼭 영화 속에 나오는 실험체가 된 것 같았다. 아프고 무서웠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바늘을 쳐다보자 공포는 더 배가 되었다. 순간, 커다란 손이 다가와 청아의 눈을 가렸다.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요.”

“……아!”

“좀만 참아요. 다 끝났으니까.”

따끔한 감각과 함께 바늘이 빠져나갔다. 시원한 무언가가 피부에 닿자 아릿한 알코올 향이 신경을 자극했다. 네모난 알코올 솜으로 한참 동안 청아의 피부를 문지르던 그가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에 솜을 던져 넣었다. 욱신거리는 감각이 여전히 불편했다.

“미안해요. 아팠을 텐데.”

“…아니에요. 자주 하던 거라서.”

“연희재 님, 임청아 님. 들어오세요.”

자주 했다고. 독특한 대답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희재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연구진이 둘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뵙네요. 센터장님.”

“어서 와요, 희재 씨. 편히 앉으세요.”

하얀 가운을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희재를 보며 밝게 인사했다. 안면이 있는 두 사람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청아는 연구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정체 모를 주사기와 약품을 바라보다 어쩐지 께름칙해져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가이드를 찾으셨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빨리 결정하실 줄은….”

“아시잖아요. 파동 때문에 고생 많이 했던 거. 적임자가 나타났으니 망설일 필요 있나요.”

“그래요. 듣자 하니 매칭률도 꽤 좋다고 들었는데…. 우선 정밀 검사 한번 해 보죠.”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전화기로 간호사를 호출했다. 카트를 끌고 들어온 간호사가 차분한 손놀림으로 검사를 준비했다. 팔목을 걷어붙인 두 사람의 손목에 정체 모를 전극들이 부착되기 시작했다. 끈끈한 스티커가 살갗에 붙자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어 청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겁먹지 마요. 아픈 거 아니니까.”

“…네.”

차갑게 굳어 있는 청아의 표정을 확인한 희재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 임청아 씨라고 했죠? 파동 신호로 기본적인 파동과 컨디션, 매칭률까지 확인하는 기계예요. 간단한 검사니까 걱정할 건 없어요.”

“그냥…. 조금 놀라서요.”

“스티커 뗄 때만 좀 아플 거예요.”

푸근한 인상의 센터장은 청아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가볍게 농을 던졌다. 청아의 강아지 같은 눈매를 보니 센터장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고야 말았다. 아무리 매칭률이 높다고 해도 S급 에스퍼를 감당하기엔 한눈에 봐도 여려 보이는 여자였다. 게다가 B급이었다. 청아의 옆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센터장이 애써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 전에 이전 기록들 좀 잠깐 볼게요. 음, 이건 희재 씨 예전 검사지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희재 씨 같은 경우엔 전체적으로 파동이 불안정하거든요. 폭주에 대한 위험도도 꽤 높았으니까 때때로 약물 치료나 주사가 필요한 사례였죠.”

네모난 화면 위에 떠 있는 검사지엔 희재의 파동 주파수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빨간 선과 파란 선이 엉망으로 뒤얽혀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누가 봐도 좋지 않은 결과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타 병원에서 받아온 청아 씨 기록이에요. B급이지만 대체로 컨디션이나 파동도 좋으세요.”

일정하고 완만한 청아의 그래프를 확인한 희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두 분 매칭률도 확인할게요. 피 검사로 확인해 보긴 했지만, 신체 접촉이 가장 정확하거든요. 두 분, 손 좀 잡아 보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요구에 손가락을 꼼지락대자 희재가 팔을 뻗어 청아의 자그마한 손을 잡아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청아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을 덮는 긴 머리카락에 귀가 가려져 아무도 보지 못한 듯했다.

다행이었다.

“보이시죠? 파동 일정해지는 거.”

“…정말 그렇네요.”

날카롭게 요동치던 희재의 파동이 폭을 줄이며 안정적으로 변해 갔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래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재의 얼굴에 차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작치고 굉장히 좋은 편이네요. 매칭률은 82퍼센트고, 항상 이 정도로 유지하시는 게 좋아요. 물론, 희재 씨가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청아 씨는 몸이 약한 편이니까, 당분간은 컨디션 관리에 특히 유의하시고요.”

“걱정 마세요. 제 가이드니까 당연히 잘 챙겨야죠.”

“청아 씨도 처음엔 꽤 힘들겠지만, 점차 좋아질 거예요.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가이딩은 가이드한테도 꽤 도움이 되거든요. 그건 알고 있죠?”

“…네.”

“각인은 정식 절차대로 센터에서 진행하는 방법도 있고, 아시다시피 직접적인 신체 접촉으로도 가능해요.”

“…….”

“개인적으론 후자를 더 추천해 드릴게요.”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것도 가이딩의 범주에 속하긴 했지만, 강력하고 직접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선 접촉 가이딩, 즉 성관계만큼 확실한 게 없었다. 가이드인 청아 역시 가이딩이 뜻하는 바를 모르진 않았다.

“잘 아시겠지만, 가이드의 경우엔 이중각인도 가능해요. 하지만, 희재 씨는 오로지 청아 씨에게만 가이딩을 받을 수 있게 되고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각인을 해제하고 싶다면, 센터에 오셔서 해지 절차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이 정도예요. 여기 주의사항 한 번씩 쭉 읽어보시고 오늘은 이만 가셔도 될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간 내서 방문해 주시고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희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청아 씨는 다음 주에 한 번 더 와 줄 수 있을까요? 개인 정보 등록이랑 별도로 해야 할 것들이 좀 있어서….”

“네. 그렇게 하죠.”

멍하니 앉아 있는 여자를 대신해 대답한 희재가 작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S급인 희재에게 불안정한 파동은 불규칙한 폭주와 끔찍한 두통을 안겨 주곤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정신을 붙들고 사는 건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그 모든 불안을 이 B급 가이드가 해소해 줄 수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대단한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자 청아의 존재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제 어깨에도 못 미치는 조그마한 여자를 내려다본 그가 픽 웃었다.

미끈한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까딱거리는 희재의 옆모습을 훔쳐본 청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딩 센터를 나온 이후부터 그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혹시 매칭률이 높지 않아 저를 버릴까 봐 내심 불안했는데 다행이었다. 이대로 계약이 깨졌다간, 지영에게 죽어라 얻어터질지도 몰랐다. 한시름 덜어 낸 청아가 느릿하게 저물어 가는 노을을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주황빛으로 물든 도로를 지나 희재의 차가 멈춰 선 곳은 한남동의 한정식 레스토랑이었다. 홀의 가운데에 자리한 무대 위엔 고운 한복을 입은 연주가가 열정적으로 가야금을 켜고 있었다. 한국적인 인테리어와 경쾌한 가야금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자 꼭 과거 여행이라도 온 것 같았다.

“연희재 님, 귀빈실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기라도 한 건지 재빠르게 튀어나온 직원이 희재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식사는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코스 메뉴로 준비해 주시겠어요? 술은 됐어요.”

“네. 알겠습니다.”

방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다. 당연하다는 듯, 청아의 의자를 빼 준 희재가 이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랫동안 몸에 익혀 온 듯 익숙한 태도였다.

“오늘 검사받느라 수고했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뭘 했다고요.”

“안색이 안 좋은데. 많이 먹고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도록 해요.”

그 정도로 티가 났나. 청아는 머쓱해진 기분에 붉어진 제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색색의 음식들이 테이블에 놓였다. 고급스러운 유기그릇에 담긴 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곱게 갈아진 노란빛의 단호박죽을 자연스레 청아의 앞에 놓아준 희재가 리모컨을 들어 한층 더 밝게 조명을 조절했다.

어색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식사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희재는 종종 빈 컵에 물을 따라 주거나, 반찬들을 밀어다 주며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

“되게 다정하신 것 같아요.”

“그런가요? 난 잘 모르겠는데.”

그가 건네준 수정과를 들이켜자 은은하고 부드러운 계피 향이 입안에 퍼져 나갔다. 한참을 머금고 있던 청아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희재 씨는 가이딩 해 보신 적 있으세요?”

“청아 씨,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에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건넨 질문에 희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렇게 생겨서 꽤 맹랑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그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복도를 타고 흩어졌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그 뜻이 아니라….”

“알아요, 하하.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희재가 청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는 가까스로 웃음을 갈무리했다.

“웃어서 미안해요. 뭐, 손잡고 포옹하는 것도 가이딩이니까 당연히 해 본 적 있죠.”

“…….”

“물론 그것보다 더한 것도.”

상상을 자극하는 함축적인 대답이었다. 제게로 내리꽂히는 시선에 당황한 청아가 잽싸게 그의 눈을 피했다.

“매칭률이 낮아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어요. 근데 불특정 다수랑 단순히 파동 때문에 몸을 섞는다는 게 싫었거든요. 지저분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아.”

“청아 씨는 저한테 불특정 다수가 아니니까…. 아무래도 더 믿음이 가죠.”

불특정 다수가 아닌 존재. 희재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돈만 축내는 버러지, 눈치도 없는 기생충. 양부모가 청아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 자신을 유일하게 애틋한 눈으로 바라봐 준 건 희재뿐이었다.

청아가 본 그는 다정하고 따듯한 사람이었다. 나쁘고 못된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억지로 착취하거나 가둬 놓고 에너지만 쭉쭉 뽑아 간다는데, 희재는 전혀 그럴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안심이었다.

“잠깐 손 줘 볼래요?”

“…네?”

“손이요.”

갑작스러운 남자의 요구에 청아는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단둘뿐인 방 안엔 적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새하얀 손이 잘게 떨렸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요.”

가느다란 손가락을 어루만지던 희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순하게 휘어진 눈매가 왜 그러냐는 듯이 저를 바라보았다.

“무슨 느낌이요?”

“손잡는 것도 기본 가이딩 중 하나잖아요. 전해져 오는 느낌이 달라요.”

“전 잘 모르겠는데….”

“청아 씨도 곧 알게 될 거예요. 아까 들었죠?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가이딩은 가이드한테도 도움이 된다는 거.”

쑥스러워 손을 빼려 했지만, 부드럽고 강한 힘이 청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서로의 손가락이 틈 하나 없이 겹쳤다. 희재의 서늘한 체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내 오피스텔로 들어올래요? 따로 오피스텔을 구하는 것보다 이편이 나을 것 같은데.”

“…갑자기 왜요?”

“가이딩 결과가 생각보다 좋아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

“청아 씨가 꽤 필요해질 것 같거든요.”

필요.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필요에 의한 관계였으니 그의 대답이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단 조금 더 따스한 단어로 말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마음 한구석에 퍼져 나갔다. 섭섭한 기분을 애써 감춘 청아가 고개를 들어 작게나마 웃어 보였다.

*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희재와 있는 내내 한껏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무거운 발걸음으로 잔디밭을 걷던 청아가 지영의 거친 손길에 붙들렸다.

“어떻게 됐어?”

“…….”

“어떻게 됐냐고! 매칭률이랑 뭐 다 괜찮대? 별문제 없는 거야?”

아프게 붙들린 팔목에 인상을 찌푸린 청아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매섭던 지영의 눈매가 사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매칭률도 잘 나왔고, 큰 문제 없을 거래요.”

“네가 드디어 데려온 몫을 하는구나. 10년 묵은 체증이 아주 싹 내려가네.”

“…저, 그리고 잠깐 나가서 지내기로 했어요. 그분이 가이딩이 급하다고 해서….”

“뭐?”

누구보다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영의 표정은 심각하기만 했다. 청아가 의아한 마음에 그녀의 눈치를 살피자, 귓가를 의심하게 하는 천박한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청아, 너 너무 싸게 굴고 온 거 아니야? 줄 듯 말 듯 여우처럼 굴어야 남자가 애 좀 타지. 어휴, 멍청한 게 물러 터져서.”

“…….”

“큰 소리 내지 말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 중원 씨 손님들 와 있으니까.”

날카로운 손이 청아의 등을 짝 후려치고 지나갔다. 청아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더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축축 처지는 다리를 이끌고 정원을 가로질러 계단에 올라섰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서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더럽게 늦게도 왔네. 그 새끼랑 가이딩이라도 했어?”

“…….”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남의 방에서 뻔뻔하게 담배를 태우던 기원이 다리를 까딱이며 청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단둘이 방 안에 있다는 게 끔찍하게 소름 끼쳤지만, 한중원의 손님들이 아래층에 있는 이상, 기원도 제게 손을 대진 못할 것이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했지? 걔 잘하냐?”

“나가요.”

“순진하게 생겨서 할 건 다 하네. 하긴, 연희재가 얼굴 하난 잘 빠졌어. 그렇지?”

“…….”

“내가 오빠로서 경고 하나 해 줄게. 지금은 그렇게 다정하게 굴어도 결국엔 걔도 에스퍼야.”

“제가 알아서 해요.”

“에스퍼라고 몸이고 마음이고 다 주다가 호구같이 에너지 다 뺏기고 버림받는 애들, 많이 봤어. 너도 그 새끼 조심해.”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꾹 눌러 참으며 제 머리카락을 만져 대는 끈적한 손길을 밀어냈다. 조그마한 머리통을 힘으로 꾹 누른 기원이 테이블에 놓인 컵에 담배를 집어 던졌다. 청아의 볼을 타고 참았던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지독히도 길고 힘든 하루였다. 비참하고 초라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억지로 울음을 삼켜낸 청아가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뿌옇게 흐려진 눈을 슥슥 비벼 대며 테이블에 놓인 컵을 치우려는 순간, 가방 속에 있는 핸드폰이 윙윙 울리기 시작했다. 의아한 마음에 핸드폰을 집어 들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잘 들어갔죠? 아까 얼굴이 너무 안 좋길래 걱정돼서 전화해 봤어요.

“…괜찮아요. 아까 너무 긴장해서 그랬어요.”

- 목소리가 안 좋은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좀 피곤해서.”

- 일찍 자요. 다음 주에 데리러 갈 테니까.

“…네, 그럴게요.”

다정한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오늘 처음 본 희재의 목소리에 위로받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힘겹게 통화를 마무리한 청아가 따듯한 온기가 남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쥐어 보았다. 별 뜻 없이 건 전화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아에겐 그가 건넨 다정함 한 조각도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했다.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슬픔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 * *

새하얀 대리석이 깔린 희재의 오피스텔은 잘 꾸며진 모델 하우스 같았다. 그는 정말로 가이딩이 급했던 모양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이사를 진행했다.

“혼자 사는 집이라 좀 허전하긴 한데….”

훈훈한 열기가 느껴지는 대리석을 밟자, 거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통유리로 된 창가엔 드높은 건물과 물결치며 흐르는 강가가 하나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걸려 있었다. 어둠에 잠긴 도시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주인을 닮은 아름다운 액자들과 곳곳에 놓인 LP판이 청아의 눈길을 끌었다.

“이쪽은 서재고, 건너편에 있는 방은 드레스 룸이에요. 청아 씨 방은 이쪽인데 천천히 둘러봐요.”

“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간단한 건 이걸로 주문하면 하고.”

슬리퍼를 신으며 뒤따라온 희재가 자연스럽게 청아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태블릿 PC를 멀뚱히 들고 서 있던 청아가 다정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참, 그리고 혹시나 식사 준비나 청소 같은 건 하지 말아요. 여사님도 가끔 오시고, 전 밖에서 먹는 게 더 편하거든요.”

“…아, 저녁은 안 드세요?”

“네. 대부분은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볼게요. 미안해요.”

혼자 먹어야 하는구나.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한중원의 저택에서도 식사는 늘 홀로 했다. 익숙했지만, 유쾌하진 않았다. 무거운 적막 속에서 홀로 먹는 음식은 대부분 외로움을 안겨다 주었다.

물론, 청아도 희재가 바쁜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해 주기 위해 함께 식사한다거나, 곁에서 시간을 보내 줄 만큼 한가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겐 그럴 의무도 없었고,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니 이 정도의 친절도 감사해야 했다. 청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 안에 간단한 재료는 다 있으니까 편히 먹어요. 다녀올게요.”

“…네에.”

경쾌한 도어 록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혼자가 된 거실은 금세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무거운 적막과 시커먼 어둠이 자신을 잠식해 올 것 같았다. 두려움에 눈이 시렸다. 청아가 급히 TV를 켜고 거실의 조명을 더욱 밝게 올렸다.

어릴 적, 지영에 의해 어두운 방 안에 갇힌 뒤로 청아는 작은 불빛이라도 꼭 켜 놓고 잠이 들곤 했다. 어두운 건 딱 질색이었다. 성인 남성 몇 명이 앉아도 널찍할 것 같은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대자 가녀린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피로에 잠긴 눈꺼풀이 어느새 가물가물했다.

“……아.”

잠깐 누워 있겠다는 게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뜬 청아가 금세 어두워진 밤하늘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새벽 1시, 꽤 늦은 시간이었다.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으나 어떤 연락도 찍혀 있진 않았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늦게 들어오려나?”

아무 사이도 아니니 딱히 연락을 해 줄 필요는 없는 거지만, 시간이 늦다 보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먼저 연락해 볼까 했지만 부담스러워할 게 분명했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고민하던 청아가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희재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중간중간 전화를 걸어 온 그는 일이 바빠 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혼자서라도 꼭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 혼자가 된 청아는 언제부턴가 문 너머로 들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가까워질 때쯤이면, 혹시 희재일까 기대하기도 했다. 물론 소리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지만.

이젠 혼자인 것도 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마음을 좀먹고 자라나기 시작한 외로움이 청아를 엉망으로 뒤흔들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봤던 예능 프로 재방송을 또다시 틀어 놓은 청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소파에 구겨진 채 잠이 든 청아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희재가 황당한 눈으로 청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아 씨.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네?”

“날도 추운데 왜 거실에서 자고 있냐고요. 들어가서 자야지.”

“아, 그게 TV 보다가 잠이 들어서….”

희재를 기다리다 거실에서 잠들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잠에서 깬 청아가 부스스해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선 희미한 술 냄새가 났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소파 위로 툭 던진 희재가 입을 열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일이 터져서 해결하느라 정신없었어요. 부산까지 다녀왔다니까요.”

“그… 렇구나.”

소파에 등을 기댄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가린 희재에게선 불안정한 파동이 느껴졌다. 상대방의 파동을 감지하는 건 난생처음 느껴보는 일이었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피곤하세요? 파동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술을 마셔서 그런가 봐요. 그나저나 청아 씨, 가이드는 가이드인가 봐요.”

“…….”

“대단하네, 아직 각인도 안 했는데 내 파동을 느끼는 거 보면.”

자연스럽게 청아의 허벅지 위로 머리를 눕힌 그가 피곤한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쓰러운 모습에 청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 했다. 화들짝 놀라 손을 치운 청아가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왜 멈춰요? 쓰다듬어도 되는데.”

“…아, 네에.”

작은 손을 잡아챈 희재가 제 머리 위로 여자의 손을 올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약으로 조절해 오던 파동은 약을 끊어 내기가 무섭게 미친 듯이 물결을 쳤다. 일렁이는 파동을 감지한 희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아 씨, 키스할래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익숙지 않았다. 불안정한 기운을 느낀 청아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마주친 남자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게, 저….”

“그냥 가이딩이잖아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키스만큼 간단하고 쉬운 가이딩이 어딨다고.”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고 따듯한 말투였다. 언어가 품고 있는 온도만큼은 달랐지만 말이다.

“저 아직 준비가…. 읍.”

청아의 무릎을 베고 있던 희재가 하얀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희재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조심스레 빨아 올리자 청아의 몸이 움찔했다. 목덜미를 더 아래로 끌어 내린 뒤, 부드럽게 혀를 섞었다. 입술이 닿자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희재의 몸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와의 가이딩은 에스퍼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일정하게 흐르는 파동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선명한 감각에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돌며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짜릿하게 생동하는 육체에 조금 더 강하게 입술을 맞췄다. 여린 내벽을 혀로 핥으며 몸을 일으키자 청아의 등이 소파에 닿았다.

“하아….”

“흐읏…. 응.”

“입술 좀 더 벌려 볼래요? 안쪽까지 빨고 싶은데.”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이 답답해 턱을 내리누르자 수월하게 입술이 벌어졌다. 추웁, 츱. 질척한 타액까지 모조리 삼킨 그가 말랑한 혓바닥을 빨아 당겼다. 꽤 아픈 모양인지 청아가 끙끙거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희재의 날뛰던 감각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잠시만… 흐읍, 잠시만요.”

“가만히 좀…. 응?”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당황해 움찔거리던 청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으나, 애절한 애원마저 희재의 입안으로 모조리 흘러 들어갔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겁을 먹은 청아가 손을 들어 거부했지만, 단단한 가슴팍은 밀려나지 않았다. 포개진 입술이 더욱 찐득하게 맞붙었다.

“흐윽…. 끅, 읍.”

희재는 단단한 가슴팍에 말랑한 몸이 비벼지자 흥분감이 솟아올랐다. 첫 키스인데도 놓아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갈급하게 바닥난 에너지를 채우던 희재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여자의 숨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내자 투명한 실이 툭 늘어졌다 끊어졌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키스를 아쉽다는 듯 갈무리한 그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며 빛나는 청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새빨간 입술이 미세하게 부어 있었다.

“청아 씨, 싫었어요?”

“…….”

“응? 싫었냐니까.”

“…아… 니요.”

끈덕지게 몰아붙이자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통통한 입술을 느릿하게 문질러 주자 청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제게로 내리꽂히는 시선을 피하려 이리저리 굴려대는 눈동자가 마냥 순진해 보였다. 처음이었지만, 제법 만족스러운 가이딩이었다.

“앞으로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건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요?”

격렬하게 물결치던 파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재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홀로 방문한 가이딩 센터는 여전히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청아는 희재와 함께 갔던 기억을 떠올려 VIP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센터장이 청아의 얼굴을 보고 환히 인사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하필 비도 와서 힘들었을 텐데.”

“…아니에요. 금방 왔어요.”

희재가 차를 보내 준 덕분에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편히 올 수 있었다. 센터장의 뒤를 따라 들어온 VIP실엔 익숙한 모양의 기계가 청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문 등록기였다.

“가이드 등록하는데 시간은 30분 정도 걸려요. 지문 등록 먼저 하고, 간단한 인적 사항이랑 건강설문지 작성하실 거예요.”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거예요. 이쪽으로 손가락 올리시고, 가볍게 눌러 주시겠어요?”

청아는 괜스레 심장이 떨려 왔다. 하얗게 질린 손바닥을 청바지 위로 문질러 닦은 후, 조그만 화면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빨간 불빛이 번쩍이며 청아의 지문을 읽어 냈다.

- 임청아 님, 가이드 등록 완료되었습니다.

“들으셨죠? 이제 국립 가이딩 센터 소속 가이드로 등록 완료된 거예요. 건강검진은 1년에 2번 무료로 진행하실 수 있고, 입원비나 수술비 역시 50% 감면받을 수 있어요.”

“…네.”

책상 위에 놓인 검사지를 집어 든 센터장이 청아의 결과를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청아 씨는 B급인데도 컨디션이나 파동이 좋은 편이에요. 이대로 쭉 유지할 수 있도록, 함께 맞춰 나가면 될 것 같고….”

“…….”

“그나저나 각인은 아직인가 봐요?”

“아, 그게….”

어젯밤, 희재와 나누던 키스를 떠올린 청아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건 키스를 빙자한 가이딩이었다. 물론 각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눈 키스였으므로 효과는 덜 했겠지만.

“각인을 해야 더 강력한 가이딩 효과를 볼 수 있어요. 이른 시일 내에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희재 씨가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거든.”

“…아, 네.”

“참, 그리고 희재 씨가 있어서 말 못 했었는데…. 사실, 가이딩은 보통 같은 급끼리 하는 게 맞아요. S급은 S급끼리, B급은 B급끼리. 서로 받쳐 주는 힘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청아 씨 같은 경우는 희재 씨를 감당하기엔 사실 좀 약하죠.”

“…….”

“희재 씨가 급한 상황이라 이런 식으로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말끝을 흐린 센터장이 설문지를 내밀었다. 볼펜을 받아서 든 청아가 질문 사항을 읽어 가며 신중하게 답변을 기재했다. 간단한 문항이라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제 말은 청아 씨도 몸 관리 잘하시라는 뜻이에요.”

“그럴게요. 말씀하신 대로 밥도 잘 챙겨 먹고 최대한 신경 쓰려고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한 달 후엔 희재 씨랑 같이 오면 돼요.”

안경을 추켜올린 센터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청아를 바라보았다. S급 에스퍼 관리가 먼저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작고 어린 여자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흐리게 웃어 보인 청아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모든 검사가 끝날 때까지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희재의 비서가 곧장 달려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청아는 처음 겪어 보는 대접에 절로 몸이 굳었다.

“전무님도 집으로 출발하셨습니다.”

희재의 비서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후한 남자였는데,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말씨는 부드러운 편이었다. 묵직하고 커다란 차가 부드럽게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안정적인 승차감에 감탄하던 청아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새카만 눈동자가 활기로 가득 찬 거리를 좇으며 반짝였다.

뜨거운 물로 피곤함에 잠긴 몸을 씻어 내렸다. 크게 한 것도 없는데 긴장했던 탓인지 유독 몸이 피곤했다. 머리를 말리고 거실로 나가자 언제 돌아온 건지 모를 희재가 새카만 배스 가운을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앉아요. 청아 씨. 가이드 등록은 잘하고 왔어요?”

“네. 생각보다 간단하고…. 센터장님이 잘 도와주셔서 금방 끝났어요.”

“다행이네.”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의아하게 바라본 청아가 희재의 손짓에 조르르 걸어가 그의 곁에 앉았다.

“술 좀 마셔요?”

“아니요. 잘 못 마셔요.”

잘 마실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박이나 늦은 귀가를 질색하는 한중원 탓에, 해가 지면 무조건 귀가해야만 했다. 대학교 친구들의 권유로 낮술을 마셔 본 적도 있었지만, 청아 홀로 금세 취해 끙끙거리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가기 전, 술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홀로 그네를 탔던 기억이 떠올라 청아는 픽 웃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작게 웃고 있는 청아의 옆모습을 바라본 희재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마셔요. 나 오늘 청아 씨랑 각인할 거거든요.”

적나라한 말에 당황한 청아가 저도 모르게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친 희재가 새빨간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이리저리 눈치만 보던 청아가 아무런 생각 없이 잔에 담긴 와인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야 말았다.

두 번째 잔도, 세 번째 잔도 마찬가지였다.

청아는 제대로 술을 즐기는 법도 몰랐고, 지금 마시고 있는 와인의 도수가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 역시 모르고 있었다. 희재가 이제 막 한 잔을 끝냈을 무렵, 청아는 네 번째 잔을 받아 들었다.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청아의 귓불을 본 희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잔을 빼앗았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볼 것 같은데.”

“아, 그럴게요. 그래도 이거까지만….”

“그만 마셔요. 누구랑 하는지는 알아야 하잖아.”

청아의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진즉 말렸어야 했는데 넋을 놓고 구경하느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희재, 연희재.”

“반말하네?”

“…씨.”

오물오물 움직이는 작은 입을 바라본 희재가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취한 여자와 가이딩 한다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희재에겐 언제나 가이딩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도 당장 청아가 필요했다. 잠자리에서까지 예의를 차리거나 미안해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가이딩이 꽤 급해서…. 이해하죠? 후으….”

“으읍…!”

가녀린 어깨를 부여잡은 희재가 와인 향이 나는 새빨간 입술을 베어 물었다. 움찔움찔 튀는 몸을 끌어안고 혀를 밀어 넣자, 청아가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새하얀 목덜미를 손으로 잡자 작은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희재는 고개를 틀어 여린 내벽을 부드럽게 탐했다. 향긋하고 쌉싸름한 포도주 냄새가 서로의 입안에서 뒤섞였다.

달콤한 살냄새를 풍기는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하얗고 말랑한 몸은 어딜 만져도 신음을 터트렸다. 푹신한 소파 위로 눕히자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져 춤을 췄다. 익숙한 샴푸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으읏…. 응.”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은 청아가 목덜미로 쏟아져 내리는 입맞춤을 견뎌 냈다. 미끈거리고 축축한 혓바닥이 부드러운 살갗을 핥았다가 빨았다. 그리곤 깨물기까지 했다. 아릿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아픔이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뽀얀 목덜미를 욕심껏 빨아 대던 희재가 새하얀 가운 끈을 잡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청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옷깃을 부여잡았다.

“이대로 고개만 끄덕이면 될 것 같은데.”

“…….”

“싫은 건 아니잖아. 그쵸?”

열기를 가득 담은 채 일렁이는 눈빛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청아의 손등 위로 손을 겹친 희재가 새하얀 가운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어깨너머로 완전히 넘어간 가운 탓에 화들짝 놀란 청아가 뒤늦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희재의 부드러운 입술이 뽀얀 가슴 위로 먼저 내려앉았다.

기묘한 감각에 바둥대며 그의 어깨를 잡아 보았지만, 말랑한 살덩이가 쭉쭉 빨리는 걸 막아 낼 순 없었다. 살결을 맛보던 그가 꼿꼿하게 선 유두 위로 느릿하게 입을 맞췄다. 추웁, 춥. 민망한 소리에 청아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아이처럼 젖꼭지를 빨던 그가 이를 세워 젖꽃판 주변을 갉작였다.

“여기 빨아 주니까 어때요?”

“흐으…. 응, 읏,”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간지럽고 아찔했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청아는 뒤늦게 올라온 술기운에 숨이 벅차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힘겹게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희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희재의 손바닥이 청아의 음부를 가볍게 쓸었다.

“약간 젖었네.”

미끈하게 잘 빠진 손가락이 젖은 틈을 더듬었다. 비질비질 흘러내린 애액으로 살짝 촉촉하긴 했지만, 제 것을 받아 내기엔 충분하진 않아 보였다. 여자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린 채였다. 음부 위로 흘러내리는 미지근한 액체에 깜짝 놀란 청아가 비명을 터트렸다.

얼굴을 가린 손을 떼자 희재가 피식 웃었다. 액체의 정체는 젤이었다. 투명한 색을 가진 튜브를 쭉 짜내자 말캉한 액체가 배와 다리 사이로 줄줄 쏟아졌다.

“이게…. 무슨. 흐으, 뭐예요.”

“이대로 들어가면 청아 씨 힘들 것 같아서요.”

“아…. 잠시만, 잠시만요. 히익.”

대답을 끝낸 희재가 끈적한 러브젤을 손에 묻혔다. 점성을 가진 액체가 그의 손안에서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커다란 손바닥이 느릿하게 음부를 비빈 뒤,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쿨쩍이는 소리와 함께 청아가 몸을 뒤틀었다. 한껏 오므라든 속살은 두 개의 손가락도 터트릴 듯 조여 왔다. 힘을 주어 꾹 밀어 넣자 여자의 음부가 옴칠대며 손가락을 물었다. 러브젤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한 희재가 가볍게 손가락을 털었다.

“나는 그냥 하면 오히려 더 좋지만, 청아 씨는 아니니까, 후으….”

“아, 흐윽. 응!”

“안은 흠뻑 젖었네요.”

음란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박힌 손가락이 끝까지 밀려 들어왔다. 부드러운 손길로 음핵을 건드리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뭉근하게 비비며 손을 흔들자 꽉 다물린 내벽 사이로 애액이 주룩 흘러내렸다. 자극에 약한 몸이 부끄러운지 청아는 줄곧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

“나 억지로 하는 건 취향이 아닌데…. 다리 좀만 더 벌려 봐요.”

“이상해요…. 이거, 흐윽. 손 빼, 줘요. 나, 흐윽….”

“하아… 앞으로 나랑 이 짓 수백 번, 은 더 해야 되는데 그, 때마다 울 거예요?”

“아니요. 흐윽…. 아!”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손길이 다정한 듯 거칠었다. 새빨갛게 벌름대는 구멍을 푹푹 쑤시며 손가락을 흔들자 청아가 야릇한 신음을 내뱉으며 다리를 떨었다. 끈적한 애액이 말랑한 허벅지 위로 난잡하게 튀었다. 희재는 자신의 아래에서 엉망으로 무너져 내린 여자가 가여웠다. 그리고, 딱 그만큼 꼴렸다.

“흐윽…. 아니, 잠깐, 윽.”

“어차피 나랑 해야 돼. 덜 아프게 할게요. 응?“

어느덧,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희재가 눅진하게 젖어 든 음부 위로 성기를 비비기 시작했다.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를 부어오른 음핵 위로 마찰하듯 비볐다. 서로의 성기가 마찰하는 음탕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삽입할 듯 말 듯, 주변부를 건드리는 자극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완전히 정신을 놓은 청아가 결국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를 동반한 쾌감은 그만큼 자극적이고 괴로웠다.

“…네, 네에. 흐윽.”

술에 취해 흐물거리는 몸은 희재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휙휙 넘어갔다. 다루기 편했지만 억지로 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워 내기가 힘들었다. 뭉툭한 귀두가 여린 내벽을 파고들자 가냘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둔중하게 배를 울리는 아픔에 청아가 몸부림을 쳤다. 발버둥 치는 머리를 세게 끌어안은 희재가 잠시 삽입을 중단했다. 아픔에 적응할 시간을 주자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입구에서 턱 걸린 성기를 느릿하게 밀어 넣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으… 흐읏. 거기까지만… 흐, 넣으면 안 돼요?”

“그럼 내가 안 괜찮은데.”

순진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웃음을 삼킨 희재가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내리며 겁에 질린 청아를 어르고 달랬다. 이렇게 애를 먹일 줄은 몰랐는데…. 귀두까지 모조리 삼킨 내벽이 움찔거리며 성기를 조여 물었다.

조금 더 깊게 성기를 밀어 넣자 보잘것없는 힘이 희재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바르작대는 양손을 잡아챈 그가 청아의 입술을 빨며 뿌리 끝까지 훅 치고 들어갔다.

“그만…. 읍! 그만, 제발… 흐윽.”

“힘 좀 빼요. 응? 더 들어갈 거야.”

더 들어간다니.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다가올 아픔에 겁에 질린 청아가 고개를 휘휘 저어 대며 울었다. 손을 뻗은 희재가 말랑한 허벅지를 반으로 접어 제 쪽으로 가깝게 끌어당겼다. 긴장으로 꼭 맞붙은 양 무릎 때문에 삽입감이 대단했다.

“으… 흐읍! 어… 윽.”

“들어갔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나 이거…. 못 해… 으, 아파아… 흐읍.”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격통에 청아는 눈앞이 어질했다. 굵은 성기가 여린 내벽을 찢어 버릴 듯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성기를 빼내려 허벅지를 이리저리 뒤틀어 보았지만 커다란 손에 터질 듯 쥐어 잡힐 뿐이었다.

“다리 좀 더 벌려 봐요.”

청아의 양 무릎을 잡아 넓게 벌리자 조금이나마 삽입이 수월해졌다.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희재의 허리가 들어찼다.

울먹이는 신음마저 모조리 집어삼킨 뒤, 느린 속도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맨살이 닿자 철퍽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바르작대는 몸통을 끌어안고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이렇게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와의 섹스는 처음이었다. 머리가 확 돌아 버릴 만큼 좋았다. 불안정한 파동으로 팽팽하게 곤두선 신경 줄이 그를 더 내달리게 했다.

“아! 흐윽, 아파…. 제발요. 희재 씨이…. 흑.”

“하아…. 좋아.”

“어흑…. 아… 아파요.”

청아의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래가 맞닿을 때마다 체액이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너무 아프고 괴로운데도 아랫배가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기묘한 감각에 겁을 집어먹은 청아가 희재의 단단한 팔뚝을 박박 긁어내렸다.

“아파?”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자, 미친 사람처럼 허리를 털던 희재를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을 억눌렀다. 가이딩이 처음인 청아가 받아 내기엔 힘들 만한 행위였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확인한 희재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덜덜거리며 몸을 떠는 청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봉긋한 이마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러나 멈춰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계까지 벌어져 부들부들 떨리는 내벽을 내려다본 희재가 손을 뻗어 청아의 음핵을 느릿하게 비볐다.

“그럼 청아 씨도 기분 좋게 해 줄게요.”

“흐으…. 응, 으읏, 그만.”

부어오른 음핵을 손에 끼고 흔들자 넓게 벌어진 다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지독한 통증 속에서 옅은 쾌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을 숙인 희재가 말랑한 귓불을 혀로 핥으며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귓바퀴를 느릿하게 핥아 주자 조그마한 음부가 벌름대며 그의 것을 조금 더 깊게 씹어 삼켰다. 그는 다정한 얼굴을 한 채 축축이 젖어 든 아래를 쉴 새 없이 희롱했다.

“여기 만져 주니까 어때요? 아까 보니까 자지러지던데.”

“후으. 아!”

“이것 봐. 줄줄 흐르잖아, 응?“

“으윽, 이상해…. 흑.”

귓가로 흘러들어 오는 음란한 말에 끈적한 애액이 시트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엔 뜨거운 열기만이 남아 청아를 혼몽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살 기둥은 여전히 아랫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계속되는 마찰에 흥분한 내벽이 팽팽하게 부풀어 단단한 성기 위로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아, 천천히…. 흐응! 제발….”

죽여 주는 조임이었다. 추삽질이 이어질 때마다 새빨간 살이 희재의 것을 꼭 붙잡고 따라 나왔다. 한계점을 넘어서는 수치와 쾌락을 견디지 못한 청아가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푹푹 쑤셔 박히는 추삽질에 엉덩이를 타고 애액이 조르륵 흘러내렸다.

“청아 씨도 볼래요? 지금 청아 씨 보지가 내 걸 얼마나 맛있게 삼키는지.”

“안 볼래요…. 싫어… 흐윽, 싫어요.”

흥분으로 눈이 돌아 버린 에스퍼에게 거부의 말이 통할 리 만무했다. 청아의 양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키자 조그마한 머리통이 휙휙 넘어갔다. 굴러다니는 베개를 여자의 허리에 받쳐 준 뒤, 땀에 젖은 등을 비스듬히 침대 헤드에 기대 주었다.

아래가 훤히 보이는 적나라한 자세였다. 흠뻑 젖은 음모와 검붉은 성기를 꽂은 채 움찔거리는 제 음부를 확인한 청아의 눈가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찢어지면 어떡, 흐윽…. 해요… 흑.”

“안 찢어져. 그러지 말라고 내가 실컷 만져 줬잖아요.”

“흐윽… 이상해. 찢… 어질 것 같아요. 안 돼… 히익!”

“아래가 다 녹아서, 후윽…. 이렇게 잘 물어 삼키는데 찢어지긴…. 하.”

울먹거리는 말과는 달리 가지 말라는 듯 자신의 성기를 부여잡는 여자의 속살에 희재의 허리 짓이 무자비하게 돌변했다.

허리를 숙여 여자의 작은 몸을 완전히 끌어안은 후, 날치듯 허리를 움직였다. 땀에 젖은 말랑한 젖가슴이 희재의 상체와 딱 붙어 엉망으로 뭉그러졌다. 턱턱 찍어 누르는 성기에 아랫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반신이 맞닿을 때마다 쩍쩍 달라붙는 난잡한 소리가 귀를 농락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공포를 견디지 못한 청아가 눈앞에서 흔들리는 단단한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다. 비록 자신의 에너지만을 요구하는 남자라고 할지라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여태껏 늘 그래왔듯이, 추락하는 청아에겐 붙잡을 곳이 없었으니까. 궁지에 몰린 청아가 눈을 꼭 감은 채 핏줄이 솟아오른 팔뚝을 부여잡고 고개를 젖혔다.

격하게 허리를 움직이던 희재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는 청아를 시트 위로 끌어 눕혔다. 끈적하게 이어진 아래만큼 눈이 가는 건 청아의 가슴이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잇자국과 침으로 번들거리는 살갗이 시선을 끌었다. 허리를 숙인 희재가 뾰족하게 솟아 있는 젖꼭지를 한입에 담았다.

“젖꼭지가 이렇게 서 있는데… 후으.”

“아… 히익, 윽.”

“맛있네요. 입에 넣기 좋게 크기도 귀엽고.”

새빨간 과실 같은 유두를 입에 넣고 쭉쭉 빨았다. 그럴 때마다 여자의 음부가 벌름대며 경련했다. 솔직하고 민감한 반응이 남자를 동하게 했다. 쭈웁, 춥. 촉촉한 혓바닥이 척 달라붙어 젖꼭지를 마음껏 희롱했다.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어 주자 희재의 성기를 타고 왈칵 애액이 쏟아져 내렸다.

“청아 씨도 좋은가 봐. 자꾸 움찔거리는데.”

“응, 흐응… 읏.”

희재의 말이 맞았다. 아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청아는 젖가슴에 딱 달라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단단한 허리 사이에 끼인 허벅지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픔이 한 꺼풀 벗겨지자 선명하고 선뜩한 쾌락이 청아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이리저리 뒤틀리는 골반을 양손으로 부여잡은 희재가 단번에 훅 끌어 내렸다. 청아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속도를 올려 청아의 음부를 짓이기듯 처박았다. 액으로 번들거리는 음부가 거세게 부닥쳐 오는 힘에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난폭한 허리 짓에 서로의 접합부에 새하얀 거품이 일었다. 감당하기 힘든 쾌감에 청아의 몸이 휙 하고 뒤로 넘어갔다. 순간, 지옥 같은 절정에 눈앞이 시커멓게 변했다. 사정을 예고하는 격렬한 추삽질에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청아의 배 위로 뿌연 정액이 질펀하게 쏟아져 내렸다.

“우… 흐윽, 으… 이제 그만…. 그만할래요.”

한 차례 사정에도 불구하고 빳빳하게 서 있는 성기는 꼭 단단한 돌기둥 같았다. 인형같이 축 늘어진 청아의 몸을 가볍게 뒤집은 희재가 가녀린 허리를 잡아 세웠다.

“청아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새하얀 시트 위에 고개를 처박은 여자는 엉덩이만 치켜든 채,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무슨 일이 닥칠지 상상조차 못 하는 순진한 뒷모습을 바라보자 희재의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간헐적으로 뱉어지는 호흡에 따라 발름거리는 음부가 몹시 야릇해 보였다.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가까이 끌어당기자 청아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흐윽, 다 끝난 거 아니에요? 갑자기 왜…. 흑.”

“뒤로 안 했잖아.”

“오늘은 그, 그만하면 안 돼요? 너무, 힘든데… 흣.”

경악스러운 말이었다. 그는 쉽게 말했지만, 청아는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다정했던 희재는 어디로 간 건지 순 제멋대로였다. 그의 페이스를 맞추기가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풀린 청아는 자신이 어떤 꼴로 누워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희재가 엉덩이를 붙잡고 성기를 갖다 대고 나서야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다. 아래를 훤히 드러낸 채, 엉덩이만 추켜올린 자세는 처음인 청아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난잡하고 가혹했다.

“금방 끝낼 거니까 그냥 가만히 누워 있어요.”

겁을 집어먹은 청아가 허리를 붙잡은 희재의 손을 바동거리며 밀어냈다. 그러나, 빠듯한 음부를 비집고 들어온 귀두에 결국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새하얀 시트 위에 처박혔다. 우둘투둘한 핏줄이 느껴질 정도로 느리고 진득한 삽입이었다. 저도 모르게 시트를 끌어당기며 허리를 흔들었다.

“웅, 우윽…. 흑.”

단단한 살 기둥이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지, 내벽의 어느 부분까지 닿고 있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더욱 고역이었다. 기묘한 감각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청아가 아랫배를 부여잡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잔인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짜르르 번져 나갔다.

“많이 아파요?”

“아, 흐윽… 아니요. 배가 이상해…. 이상해요.”

“아픈 건 아니라는 거네.”

“속도 울렁거리고…. 흐읏, 배가… 터질 것처럼…. 아!”

아프다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멍청한 대답을 후회하기도 전에 그의 것이 사정없이 아래를 찔러 왔다. 까슬한 음모가 청아의 엉덩이 위를 고스란히 긁어내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음부가 간지럽고 아플 지경이었다. 철썩 달라붙은 접합부를 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끈적한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외설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만…. 그만할래요. 흑.”

“왜, 너무 느, 껴서… 하아, 더 못 하겠어요? 안 되는데… 후으, 우리 아직 각인 안 했잖아.”

끝이 아니라는 말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설움이 들이찼다. 청아가 하얀 시트 위로 얼굴을 비비며 우는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모습이 더러운 음심을 자극했다. 잘록한 허리와 좌우로 흔들리는 뽀얀 엉덩이가 희재의 시선을 빼앗았다. 미치도록 만족스러운 가이딩이었다.

“혹시 아픈 거 잘 참아요?”

“흐윽…. 네? 아…. 잠시만, 저 아직… 흐윽.”

허리를 꾹 누르자, 여자의 몸이 침대 위로 무너졌다. 일자로 꼭 다물어진 다리 사이를 파고들자, 좆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엎드린 청아의 등 위로 단단한 가슴팍이 달라붙었다. 하반신 역시 틈 하나 없이 곧게 맞붙어 있는 자세였다. 습하게 달라붙은 성기가 철퍽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무게와 열기에 짓눌린 청아가 신음을 터트렸다.

머리카락에 파묻힌 여자의 귀를 씹으며 추삽질의 속도를 올렸다. 울먹이는 신음이 침대 위로 파스스 흩어졌다. 두 번째 사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랑한 목덜미로 고개를 파묻은 희재가 끓어오르는 호흡을 훅 내뱉으며 날카롭게 이를 세웠다.

“아파요… 흐윽, 아파….”

“못 참아도 오늘은 견뎌요. 우리 각인해야지.”

“아… 히익, 흐… 아! 싫어… 아파아.”

제대로 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벌벌 떠는 뒷모습을 눈에 담은 희재가 좆을 때려 박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투둑. 여린 살점 사이를 뚫고 마침내 피가 배어 나왔다. 각인이었다. 시트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히익, 힉…. 청아는 까슬한 천에 얼굴을 박은 채로 가쁜 호흡을 뱉어 냈다. 크게 부풀어 오른 성기 탓에 잔뜩 벌어진 아래가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하…. 너무 좋은데.”

여자의 피를 강하게 빨아올리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강하게 박동하는 혈관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피를 먹고 자라난 에스퍼로서의 본능이 강렬하게 날뛰며 청아를 사지로 몰고 갔다.

끝을 모르고 내달리는 자극과 감당하기 힘든 아픔에 청아가 몸부림을 치며 자지러졌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흥분감에 온몸의 감각이 젖어 들었다. 두툼해진 희재의 성기가 여린 내벽을 무자비하게 침범하며 끝없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따듯한 물수건으로 청아의 아래를 꼼꼼히 닦아 준 그가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정사가 끝나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래의 제 모습을 되찾았다. 나른하고 다정한 시선이 청아의 얼굴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미안해요. 오랜만이라 좀 거칠었어요.”

거친 수준이 아니었다. 모든 게 처음인 청아에겐 강압적이고 무자비하며 이기적인 가이딩이었다. 중간중간 그가 달래 주지 않았다면, 아픔에 졸도했을 게 분명했다. 이마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귀에 꽂아 준 그가 불현듯 인상을 구겼다.

새하얀 이마 위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상처가 죽 그어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상흔이었지만, 생각보다 눈에 띄었다. 깨끗한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처였다. 희재는 저도 모르게 상처에 손을 올렸다.

“여긴 왜 다쳤어요?”

“…아.”

“꽤 아팠겠는데.”

이미 다 아문 상처였기에 만져도 아플 리 없겠지만,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청아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갑작스러운 계약을 거부하다 양어머니에게 재떨이로 맞은 상처였다. 사실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라 그럴싸한 이유를 떠올린 청아가 서둘러 입을 뗐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몰아붙인 정사로 인해 팍 쉬어 버린 목은 말할 때마다 끝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샤워하다가 미끄러져서 샤워 콕에 머리를 박았어요. 되게 아팠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

“바보 같죠. 바닥에 거품이 남아 있었는데 그걸 못 봐서….”

청아는 자신이 거짓말을 꽤 잘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아 꾸며 낸 말인데도, 정말 있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희재가 다시 한번 상처를 쓸어 보였다.

“…정말요?”

“네….”

누가 보아도 뭉툭한 곳에 찍힌 상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제 눈을 피했다. 아마 깊게 알려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의 상처를 억지로 캐낼 마음은 없었다.

“청아 씨, 거짓말 잘 못하는구나?”

“…….”

“더 안 물어볼 테니까 오늘은 이만 자요.”

희재는 제법 눈치가 빨랐다. 자연스럽게 그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온전히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긴 머리를 가볍게 쓸어 준 희재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조명등을 껐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던 방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실은 그가 한 번 더 물어봐 주길 바랐다. 정말 딱 한 번만 더 물어봐 준다면 끔찍한 상처에 대해 솔직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할 기회를 잃은 청아가 인어공주처럼 입만 벙긋거리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청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폭신한 구스 이불을 힘겹게 젖히자, 새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희재가 정리해 둔 탓에 몸은 씻은 듯이 보송보송했다. 지난밤을 기억해 낸 청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가렸다. 상상만으로도 부끄럽고 민망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

빨간 울혈과 울긋불긋한 잇자국이 잔뜩 남은 몸은 꼭 짐승에게 습격당한 듯 보였다. 폭풍 같던 어젯밤을 기억해 낸 청아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침대맡에 놓인 잠옷을 걸쳐 입었다. 바닥으로 발을 내딛자 혹사당한 아래가 욱신거리며 콱 조여들었다. 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간 청아가 야릇한 감각을 지워 내기 위해 한참이나 몸을 씻어 내렸다.

“일어났어요? 와서 앉아요.”

“네….”

밝은색의 니트를 입은 희재의 얼굴은 꽃처럼 화사했다. 반쯤 죽어 가는 청아와 달리, 그는 몹시 개운해 보였다. 꼭 어젯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지는 다정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테이블 위엔 그가 준비한 듯한 갓 구운 토스트와 싱싱한 과일들이 놓여 있었다.

“출근 안 하세요?”

“오늘 주말이에요, 청아 씨.”

“…깜빡했어요.”

머쓱해진 청아가 조용히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빵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먼저 먹어요. 난 커피 좀 내릴 테니까…. 청아 씨도 한잔 내려 줄까요?”

“아니요. 전 괜찮아요.”

고소한 커피 향이 온 거실로 퍼져 나갔다. 따듯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희재가 만들어 낸 백색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청아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청아 씨. 설마 자요?”

커피 잔을 들고 식탁으로 다가간 희재는 잠이 든 청아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리저리 휘청이는 고개가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엔 제가 남긴 흔적들이 엉망으로 찍혀 있었다.

“진짜 애기네.”

“…….”

“더 못 먹겠으면 들어가서 잘래요? 억지로 먹지 말고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청아가 힘없이 끄덕거렸다. 축축 처지는 몸을 일으켜 준 희재가 커다란 침대 위로 청아를 눕혔다. 조그마한 몸이 꼭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뜬 청아가 희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회장님 호출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요. 올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편히 자요.”

“…네에.”

“푹 자고 좀 이따 봐요.”

피식 웃던 희재가 어느새 말똥해진 여자의 눈매를 손으로 덮었다. 촘촘한 속눈썹이 희재의 손바닥 안을 몇 번이고 간지럽히다 이내 잠잠해졌다.

* * *

“이것보다 한 치수 작은 건 없나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 괜찮은데….”

늦은 밤, 희재가 불러내 도착한 곳은 아무도 없는 백화점이었다. 영업시간이 끝난 지 오래였지만 곳곳에 대기한 직원들은 희재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신발이 불편해 보여서요. 이왕이면 편한 거 신으라고 사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

“아, 이쪽으로 주세요. 제가 할 거니까.”

점원이 가지고 온 신발을 받아서 든 희재가 자연스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몸에 밴 듯한 매너였다. 앞코가 둥근 플랫 슈즈는 맞춘 듯이 딱 들어맞았다. 한중원의 저택에서 도망치듯 짐을 싸 나온 탓에 청아는 신고 있던 신발을 제외하곤 미처 챙기지 못했다. 그가 선물해 준 신발은 디자인도 고급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발이 편했다.

“몰랐는데 발이 되게 작네요.”

새하얀 발목을 손에 잡아 본 희재가 무릎을 펴 몸을 일으켰다. 희재가 손짓하자 대기하던 매니저가 부리나케 달려와 신발을 집어 들었다. 수북이 쌓인 상품들을 봉투에 담아내는 직원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받는 선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가이딩 상대에겐 과분한 대접이라는 걸 알았다. 가이드를 함부로 대하는 에스퍼에 비하면 희재는 양반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빙긋 웃고 있는 옆모습을 훔쳐본 청아가 이내 고개를 숙여 신발을 매만졌다.

“그거 알아요? 여기 내 흔적 남아 있는 거.”

“…아.”

“긴 머리라 다행이네요.”

허리를 숙이자, 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감춰져 있던 하얀 목덜미 뒤엔 희재가 남겨놓은 자국들이 가득했다. 선명하게 새겨진 잇자국.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부위라 다행이었다. 서늘한 손이 그녀의 목을 덮었다. 목에 와 닿는 갑작스러운 체온에 깜짝 놀란 청아가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희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시간이 늦어서 바로 집으로 갈게요. 식사는 다음에 해요.”

늦은 시간이라 식사도 여의찮고, 술을 먹자니 운전대를 잡기도 애매했다. 백화점을 빠져나와 운전대를 잡은 희재가 결국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인적이 끊겨 어두운 주차장은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오싹했다. 안전띠를 풀던 청아가 자신을 부르는 희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각인하고 나니까 어때요. 지금도 제 파동 느껴져요?”

“…네. 엄청 많이.”

사실은 줄곧 그의 파동이 신경 쓰였다. 각인 이후로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의 파동은, 처음과 달리 물결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이딩의 효과가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많이?”

“안정적으로 느껴져요. 처음하고는 달리….”

“나도 놀랐어요. 이 정도일 줄은….”

“…….”

“내가 청아 씨한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 알죠?”

그가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라간 청아의 손을 그러쥐었다.

“난 우리가 아무리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도 청아 씨가 나랑 하는 걸 즐겼으면 좋겠어요. 어제처럼.”

“…….”

“나만 재미있으면 그건 너무 별로잖아.”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소유욕이 선명하게 그 정체를 드러냈다. 다정한 남자의 탈을 쓴 희재가 청아를 살살 구슬렸다. 자신에겐 가이딩이 필요했고, 청아는 그걸 단번에 해소해 줄 여자였다. 진심으로 나쁘게 대할 마음은 없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온순한 성격도 제 마음에 쏙 들었다. 어렵게 구한 가이드인 만큼, 소중히 아끼고 보살펴서 오래도록 사용하고 싶었다.

“…으음.”

조그마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뱀 같은 혓바닥이 청아의 입안을 제멋대로 헤집었다. 좁은 공간에서 나누는 키스는 더 자극적이고 은밀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입맞춤이었다.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혀 사이로 서로의 타액이 끈적하게 엉켜들었다. 차분하게 제 몸을 정복해 나가는 희재가 두려워졌다. 쉽게 달아오른 제 몸도 야속하기만 했다.

“응…. 읍.”

“입안이 되게 작네요. 이래선 내 걸 다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를….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침을 기꺼이 받아 마신 그가 이내 상처가 남은 목덜미를 위로하듯 핥아 주었다. 끔찍한 아픔을 떠올린 청아가 몸을 움츠렸다. 커다란 손이 말랑한 가슴을 터트릴 듯 주무르자, 속옷 위로 투명한 애액이 배어 나왔다. 청아는 저도 모르게 희재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못 끝낼 것 같은데….”

“…….”

“내 위로 올라올래요? 우리 가이딩해야지.”

“…여, 여기서요?”

적나라한 요구에 당황해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다.

“차에서 많이들 해요. 지금처럼 이렇게 몸이 달아서 미칠 것 같을 땐,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여긴….”

몸이 달아서 미칠 것 같을 때. 청아의 두근거림과는 결이 다른 말이었다. 그건 명백한 색욕이었다. 얼이 빠진 몸을 끄집어 당긴 그가 단숨에 청아를 제 몸 위로 올렸다. 희재의 손이 막아 주지 않았다면 룸 미러에 이마를 부딪칠 뻔했다.

“아! 안 돼요. 어떻게 차에서… 흐윽….”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를 내릴 틈도 없었다.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로 커다란 손이 기어들어 왔다. 그의 손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는 듯했다. 얇은 스타킹을 투둑 찢어 낸 그가 동그랗게 젖어 든 속옷 위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속옷 위로 배어 나올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많이 젖은 거예요?”

“…흐윽, 누가 보면 어떡해요. 차라리 안에서… 흐.”

“이렇게 아래를 다 적시고 집에 가려고 했어요?”

“흐윽…. 응, 윽.”

“누가 보면 어떡해요. 차라리 여기서 처리하고 가는 게 낫지.”

청아의 말을 그대로 받아친 희재가 속옷을 옆으로 젖힌 뒤, 미끈한 손가락을 쑥 밀어 넣었다.

“아, 히익… 윽.”

긴장으로 확 오므라진 내부는 손가락만으로도 힘겨워했다. 움직이기도 빠듯할 정도였다. 작게 인상을 구긴 희재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음핵을 짧은 손톱으로 갉작였다. 이전의 정사로 예민해진 음핵이 움찔대며 물을 쏟아 냈다. 끈적한 애액을 윤활유 삼아 손가락을 휘젓자, 끙끙대던 청아가 희재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었다. 할딱이는 호흡이 셔츠 위로 퍼져 나갔다.

“아까 차에서 하는 거 싫다고 하지 않았어요?”

“흐으, 읏…. 아!”

“근데 여긴 줄줄 흐르는데.”

오줌이라도 싼 듯 축축하게 젖은 음부를 느릿하게 쓸자, 여자가 끅끅대며 숨을 참았다.

“젤 없어서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 없었네요. 만져 주기만 해도 이렇게 잘 젖어서…. 후.”

“…응, 흐으.”

“소리 들으니까 되게 꼴려. 그렇죠?”

한계까지 틀어박힌 세 개의 손가락이 젖은 틈 사이로 푹푹 쑤셔 박혔다. 철벅대는 소리가 마치 물장난이라도 치는 듯했다. 희재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청아가 도리질을 쳐 대며 우는 소리를 냈다. 이 음란한 소리가 제 몸에서 나고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다리 좀 더 벌리고.”

눅진하게 녹아내린 아래로 한껏 발기한 성기를 느릿하게 비볐다. 제법 크기를 키운 귀두가 여린 속살을 밀어 헤치며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핏줄이 청아의 내벽을 득득 긁어내리며 꾹 들어박혔다.

“하아…. 내 거 끊어지겠는데…. 힘 좀 빼요.”

몸이 남자를 받아들인 지 이제 겨우 두 번째였다. 청아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힘에 겨운 자세였다. 게다가 공간이 주는 압박감은 더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모습을 보게 될까 봐, 지나가던 사람이 난잡하게 달라붙은 꼴을 보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고 두려웠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아래는 힘을 빼라는 말에도 바보처럼 움찔대며 그의 것을 물어 댔다. 이대로 아랫배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흐윽… 윽, 움직이지 마세요…. 제발.”

“청아 씨, 그럼 밤새 내 좆 꼽고 있을 거예요? 응? 그러긴 싫잖아.”

“흐… 안 할래요…. 그냥, 빼 주면 안 돼요? 집에 가서…. 흑.”

“내가 움직이면 청아 씨 많이 아플 거예요. 직접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후으….”

희재가 짓궂은 말과 함께 곧장 허리를 쳐올렸다. 자릿한 감각이 내벽을 징징 울려 댔다. 구렁이처럼 굵다란 성기가 내벽을 찢을 듯이 기어들어 올 때마다 호흡이 턱 틀어막혔다. 아무리 애원해도 그는 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어제처럼 들이박았다간 정말 아래가 찢어질지도 몰랐다.

“…제가, 제가 할게요. 그냥…. 헉.”

“잘 생각했어요.”

겁에 질린 청아가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움직였다.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조심스러운 요분질이었지만, 청아가 직접 허리를 흔든다는 점에서 색다른 맛이 있었다. 감질나는 감각에 이를 악다문 희재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샴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살랑살랑 앞뒤로 흔들리는 몸을 즐겼다. 터질 듯 비좁은 아래가 용케도 커다란 좆을 삼켜 냈다.

뾰족한 성기가 쾌락 점을 치받을 때마다 눈앞이 깜빡이며 점멸했다. 차곡차곡 크기를 키운 쾌감이 청아의 몸을 집어삼켰다. 하반신이 눅진하게 비벼질 때마다 서로의 살갗이 차지게 붙으며 괴이한 소리를 냈다. 옴칠대는 내벽이 그의 것을 뿌리 끝까지 짓뭉갰다.

“천천히 하니까 더 좋죠? 잘 느껴지고.”

“…네, 흐윽…. 응. 좋아요.”

“내가 좋을 거라고 했잖아요.”

뾰족하게 일어선 유두가 그의 까슬한 셔츠를 스치는 것마저도 자극적이었다. 널따란 어깨에 딱 달라붙은 청아는 맨정신으로 참기 힘든 쾌감에 엉엉 울어 댔다.

“하…. 흐응…. 억.”

탄탄한 가슴 위로 말랑한 젖가슴이 터질 듯이 짓눌렸다. 달아오르는 흥분감을 참지 못한 희재가 청아의 뽀얀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가녀린 몸이 작게 들썩였다. 혀를 내어 진득하게 핥아 주자 음부가 수축을 반복하며 성기를 빨아 당겼다.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은 청아의 손을 억지로 떼어 낸 희재가 얇은 블라우스에 입을 가져다 댔다. 이를 세워 조그마한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가자 브래지어 안에 감춰진 뽀얀 살덩이가 시선을 끌어당겼다.

속옷을 끌어 내린 그는 말캉한 가슴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성기는 여전히 들락날락하며 청아의 흥분을 돋구었다. 작은 어깨를 뒤로 밀자 운전대 위로 청아의 등이 살포시 닿았다. 혹시나 클랙슨을 누를까 봐 당황한 청아가 허리에 힘을 빳빳이 준 채, 희재의 손을 부여잡았다.

빠르게 고개를 숙인 희재가 청아의 가슴을 한입에 머금었다. 차갑게 식어 있는 살결 위로 습한 숨결이 와 닿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에 힘이 풀렸다. 청아의 등이 클랙슨을 팍 내리눌렀다.

빵---! 귀를 찢을 듯한 커다란 경적음이 어두운 주차장을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다.

“어… 흐윽…. 아, 어떡해.”

청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청아 씨, 이제 큰일 났다.”

“…흐윽. 너무 놀라서, 실수로…흑.”

“누구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잔뜩 겁을 먹은 여자가 어쩔 줄을 모르고 울먹였다. 허리를 세운 희재가 청아의 어깨를 더 강하게 운전대 위로 내리눌렀다.

“흐윽, 여기 눕히지 마요. 안, 돼… 안 돼요.”

“잘 참아 봐요. 그럼 되잖아.”

추웁, 쭙. 소리 내어 유두를 빨자 청아의 몸이 잔뜩 경직되어 얼어붙었다. 혹시라도 클랙슨을 누를까 봐 잔뜩 긴장한 몸이 덩달아 희재의 것을 쫀득하게 쥐어 잡았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유두를 뻑뻑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아 올리자 좁아터진 아래가 좆을 터트릴 듯 콱 조여 왔다. 공포와 긴장으로 지배당한 몸이 먹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발요….”

“허리에 힘줘요. 안 그러면 또 소리 나잖아.”

“아! 흐읏… 못 해… 못 하겠어.”

세찬 흡입으로 유두 끝이 간지럽고 쓰라렸다. 젖꽃판을 부드럽게 희롱하던 희재가 날카롭게 이를 세워 젖꼭지를 깨물었다. 장난스러운 놀림에 아픔은 덜했지만 아릿한 느낌만큼은 확실했다. 청아의 눈앞으로 번쩍이는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정신을 지배하는 쾌감과 불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빵-----! 운전대 위로 널브러진 청아가 결국 한 번 더 경적을 울렸다.

“어, 흑… 못 흐윽, 한다고 했잖아요. 왜… 못 한다고 했는데. 흐으.”

귓가를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청아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엉엉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우는 모습에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은 희재가 청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빨갛게 물든 몸이 울음을 뱉어 내느라 달달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이제 안 할게요. 응?”

“누가 보면… 어떡해요. 아읏, 누구 오면….”

“아무도 안 와요. 괜찮아… 하아.”

혹시라도 다시 눕게 될까 두려웠던 청아는 저도 모르게 희재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가깝게 몸을 붙이자, 깊어진 삽입에 청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울먹이는 모습이 꽤 자극적이어서, 밖에선 보이지 않게 강하게 선팅이 되어 있다는 말은 굳이 해 주지 않았다.

“아윽… 응, 하아….”

목덜미를 껴안은 청아가 희재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저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었다. 또다시 경적을 울려 민망한 꼴을 들킬까 겁이 나고 두려웠다. 그러자, 희재의 입 밖으로 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윽. 나 나가지 말라고 이렇게 조이는 거예요? 기특하네.”

“흐으… 응, 아!”

“근데 힘 좀 빼자. 이럼 내가 후으… 못 움, 직이잖아요.”

몸을 죄이던 긴장감이 모조리 풀어지자, 음핵으로 모였던 피가 쑥 빠져나가며 강렬한 절정이 찾아들었다. 청아가 야릇한 신음을 내뱉으며 움찔움찔 허리를 떨어 댔다.

“청아 씨, 방금 갔어요?”

“…안… 아니요. 그런 거 아닌데, 흣.”

“왜 숨기고 그래. 좋아서 내 거 확 조였잖아요.”

허공에서 부딪힌 시선이 데일 듯 뜨거웠다. 정염으로 일렁이는 희재의 눈빛을 마주하기 힘들어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추삽질은 거칠기만 했다. 청아의 젖가슴이 위아래로 통통 튀어 올랐다. 빠른 속도로 허리를 털자 크기를 키운 성기가 수직으로 푸욱 내리꽂혔다.

“여기, 배 볼록 튀어나온 거 보여요? 이게 내 좆이에요.”

커다란 손바닥이 청아의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징그러웠다. 기다란 것이 배 속을 쿡쿡 쑤시며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뭉근하게 배를 문질러 오는 손길에 새하얀 등줄기에 위로 짜릿한 전율이 퍼져 나갔다.

“지금 하아… 여기까지 들어왔단, 후… 윽. 얘기예요.”

“아…. 흐윽, 이상해… 이거.”

“청아 씨 좋으라고 하는 거야.”

납작한 손바닥 위로 희재의 성기가 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여린 뱃가죽을 뚫을 듯 대가리를 들이미는 성기가 흉측하기만 했다.

“응… 흐으, 이상해요, 아!”

말랑한 뱃가죽을 부드럽게 눌러 주며 삽입을 이어 나갔다. 기묘한 감각에 청아의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중간중간 아랫배를 꾹 누르며 성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복근 위로 톡 튀어나온 클리토리스가 뭉개지며 부딪혔다. 묵직하게 박아 대는 성기는 계속해서 민감한 성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진 것만 같았다. 청아는 백치처럼 울부짖으며 희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또다시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청아의 절정을 감지한 희재가 속도를 맞추기 위해 더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턱을 악다물며 고개를 뒤로 젖힌 희재가 말랑한 엉덩이를 부여잡았다. 위아래로 강하게 허리를 털어 대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사정의 전조였다.

희재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도착한 청아는 곧장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너무 힘들어서 몸을 씻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침실로 들어온 희재가 따듯한 물수건을 들고 청아의 곁에 앉았다.

끈적한 체액으로 엉망이 된 다리 사이를 닦아 낼 때마다, 움찔거리는 몸이 귀여워 희재는 다시금 성욕이 들끓었다. 그러나 눈도 못 뜨고 끙끙대는 여자가 측은해 그만두기로 했다.

B급 가이드라는 얘기에 큰 기대도 품지 않았던 지난날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청아와의 가이딩 이후로 희재의 파동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그는 가이드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청아가 꽤 마음에 들었다.

곤히 잠이 든 얼굴이 마냥 앳돼 보였다. 정신을 놓고 나쁜 짓을 저지른 게 양심에 찔릴 만큼.

쓸데없는 생각을 빠르게 갈무리한 희재가 이내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가 흔들리자, 청아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신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인 희재가 조심스레 조명등의 불을 낮췄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아.”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청아가 몽롱한 정신에 눈동자를 굴렸다. 제 팔의 살갗을 뚫은 바늘을 확인한 여자가 눈을 회동그랗게 떴다. 뚝뚝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흘러내리는 수액을 바라본 청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돌았다.

“일어났네요.”

때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온 희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던 청아가 몸을 움직여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몸은 어때요?”

“…좀 어지러워요.”

“나 구하러 온 사람이 이렇게 아프면 어떡해요?”

“죄송해요.”

“죄송할 일은 아니죠. 내가 지나쳤으니까.”

의아한 말에 고개를 들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사가 다녀갔어요. 안 하던 가이딩을 갑자기 해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아.”

“오늘은 집에서 푹 쉬어요. 이모님이 죽은 해 뒀어요, 뭐, 그게 별로면 음식 같은 건 시켜 먹어도 되고.”

끔뻑이는 눈매를 바라보던 희재가 청아의 몸을 받친 채, 침대 위로 눕혀 주었다. 새하얀 이불에 파묻힌 청아가 몰려오는 졸음을 애써 참으며 희재를 올려다봤다. 손을 뻗은 그가 땀에 젖은 청아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면, 따로 먹고 싶은 음식 있어요? 퇴근길에 사다 줄게요.”

“먹고 싶은 거요?”

반나절을 꼬박 잠을 잤더니 꽤 배가 고팠다. 테이블에 놓인 흰죽 말고 더 달콤하고 따듯한 게 먹고 싶었다. 먹고 싶은 거. 곰곰이 생각하던 청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붕어빵 먹고 싶어요.”

어느덧 겨울의 끝 무렵이었다. 아마, 이번 달이 지나면 더는 못 먹게 될 게 분명했다. 외출도 잦지 않은 데다가, 한중원이 사는 저택 근처에 붕어빵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먹을 기회가 만무했다.

“알겠어요. 사 올 테니까….”

생뚱맞은 대답에 희재는 청아가 잠꼬대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발음이 명확한 걸 보니 진심인 듯싶었다. 특별히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라 흔쾌히 수락했다.

“푹 자고 있어요. 얼른 다녀올게요.”

“네. 그럴게요.”

습관처럼 손을 든 희재가 몽롱하게 풀려 있는 청아의 눈을 가렸다. 아무 생각 말고 깊게 자라는 뜻이었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몇 번이고 희재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깊은 잠에 빠진 청아를 깨운 건 달갑지 않은 진동 소리였다. 발신자를 확인한 청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기원이었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몇 번 전화를 거부했다 호되게 욕을 먹은 기억이 떠올라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여보세요.”

- 임청아, 팔자 좋다. 씨발, 오빠는 좆 빠지게 일하는데 잠이 오냐?

공격적인 목소리가 청아의 귀를 파고들었다. 기원의 데뷔 이후, 청아는 자주 보던 드라마를 모두 끊었다. 혹시라도 채널을 돌리다 그를 마주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우연히라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왜 전화했어요?”

- 너한테 부탁할 거 있어서.

부탁이라고. 불길한 예감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 나 이번에 영화 개봉한 거 알지? 조만간 뒤풀이 파티가 있어. 네가 연희재 좀 데려와 줬으면 하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저랑 그 사람이 무슨 사이라고. 제가 어떻게 그 사람을 데려가요?”

- 온갖 VIP들부터 외국 감독님들까지 다 오는 자리야. 운 좋으면 투자도 받을 수 있고. 걔가 청우그룹 전무인데 이곳저곳 쓸 곳이 많지 않겠어? 나도 연희재 덕 좀 보자고.

“그 사람 바쁜 거 알잖아요. 그리고 제가 뭘 부탁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 아직 안 했어?

열심히 항변하던 청아의 입이 꾹 다물렸다. 대체 기원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희재에게 팔려 왔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되새겨졌다. 다정한 그의 태도에 새카맣게 잊고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자신은 희재에게 팔려 온 것이었다.

- 너도 참 답답하다. 가이드라는 게 에스퍼 하나 휘두르지도 못해, 그깟 화대도 제대로 못 챙겨 먹어. 대체 거긴 왜 갔냐? 그냥 내 말이나 잘 듣지.

“…….”

- 하여튼 난 말 했어. 너 안 오기만 해 봐. 찾아가서 다 뒤집어엎어 버릴 거니까.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 비참했다. 침대 위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청아가 새하얀 베개 위로 고개를 푹 묻어 버렸다.

잠이 달아난 청아는 축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 벌써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다 허망하게 소파에 앉았다. 길게 뻗은 한강대로 위엔 빽빽한 차들이 가득했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가지고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청아의 인생에 그런 선택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울한 상념에 잠긴 청아가 하염없이 흐르는 강가에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경쾌한 키패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밝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희재가 새하얀 종이봉투를 들고 거실로 들어섰다. 터질 듯이 빵빵한 봉투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자, 청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이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고소한 붕어빵 냄새가 청아의 코끝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20개가 많은 건가요? 크기가 이렇게 작은데.”

“네, 엄청 많은 건데…. 저 이거 혼자 다 못 먹어요.”

“그럼 얼려 놓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먹어요. 알았죠?”

희재는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식탁 위에 가득 쌓인 붕어빵을 바라본 청아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이건 슈크림, 이건 단팥이에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누군가 제게 먹을 걸 사다 준 건 처음이었다. 늘 혼자였던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준 건 희재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비록 차게 식은 붕어빵이었지만, 고소한 반죽과 다디단 팥의 조화가 잘 어울렸다.

“맛있어요. 사다 주셔서 감사해요.”

“나 때문에 아픈데 두고 볼 수가 있어야 말이죠.”

“희재 씨는 안 드세요?”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서.”

청아가 눈을 휘며 미소 짓자 희재가 따라 웃었다.

“바쁘셨어요?”

테이블 위로 나른하게 엎드린 희재와 눈을 마주하자 습관처럼 심장이 뛰었다. 지난밤처럼, 부드럽게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어 손이 움찔거렸다. 물론 그래선 안 되겠지만. 희재가 이토록 모자란 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바로 단 하나, 가이딩이었다. 그러니, 이건 제 몫이 아니었다.

“정신없었죠. 아버지가 호출하셔서 이리저리 끌려다녔거든요.”

“…많이 피곤하신 거면 그냥 가이딩 해도 되는데.”

“청아 씨, 안 그렇게 생겨서 가끔 되게 당돌한 거 알아요?”

“그런 뜻… 은 아닌데.”

“아픈 사람 붙잡고 가이딩 하는 취미 없어요. 빨리 낫기나 해요.”

“그… 럴게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킨 희재가 건너편에 앉은 청아에게로 쭉 손을 내밀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손 정도는 괜찮죠?”

“…네.”

그의 말에 청아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커다랗고 서늘한 희재의 손이 조그마한 손을 폭 감싸 안았다. 그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가이딩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익숙지 않은 청아가 희재가 보지 못하게 제 가슴을 빠르게 쓸어내렸다.

* * *

“팔에 힘주지 마세요. 그럼 더 아파요.”

“…아야.”

“문지르지 마시고 꽉 눌러 주세요.”

청아는 좀처럼 몸살 기운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가이딩 센터를 방문했다. 보기만 해도 저릿한 주삿바늘이 청아의 살을 뚫고 파고들었다.

“음, 가이딩 초기엔 너무 과하게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청아 씨랑 희재 씨는 급이 달라서 더 힘들었을 수도 있어요. 시간 지나면 적응되시겠지만….”

간호사의 말에 청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당분간 너무 격렬한 관계는 피하시고요. 가이딩도 가이딩이지만 청아 씨 몸도 신경 쓰셔야 해요.”

“…네.”

“에스퍼들이 간혹 힘 조절 못 하고, 가이드 에너지를 거의 다 뽑아 가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다 정말 큰일 나요.”

“그럴 일 없어요. 저한테 함부로 대하시는 분은 아니라서….”

해사한 미소에 간호사의 표정이 굳어 갔다. 세상에 악질인 에스퍼들이 얼마나 많은데 대체 뭘 믿고…. 간호사는 이렇게 어리숙하게 굴다간 에너지고 뭐고 몽땅 뽑힐 거라고 말해 주려다 지나친 참견인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가이딩이 처음이라 꽤 벅찼을 텐데도 여자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순진한 눈매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온 청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내려놓은 희재가 곧장 시동을 걸었다. 새하얀 코트를 입은 청아는 옷을 입고 있는 건지, 파묻혀 있는 건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아담했다. 희재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주사까지 맞는 꼴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져 결국 병원까지 동행하고야 말았다.

“…뭐예요?”

“먹어요. 근처에 팔길래 사 왔어요.”

희재가 내민 건 새하얀 봉투에 담긴 붕어빵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차 안으로 가득 퍼져 나갔다.

“올해 마지막 붕어빵이래요. 이제 더는 안 나온다고 하던데요.”

“…집에도 아직 많이 쌓여 있는데.”

“그건 나중에 먹고.”

붕어빵을 받아 든 청아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살포시 웃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봉투로 전해지는 열기가 뜨근뜨근했다. 고작 붕어빵이 뭐라고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센터에서 뭐래요?”

“그, 당분간은 너무 격한 가이딩은 주의하라고 하셨어요. 적응될 때까지는….”

“격하게 하지 말래요? 하하.”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는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희재의 눈빛에 말꼬리가 숨고 말았다. 운전대에 고개를 박고 웃는 희재를 바라보다 부끄러워진 청아가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나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이내 허리를 세웠다.

“미안해서 어쩌지? 뭐, 혹시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봐요. 사과의 의미로 다 들어줄 거니까.”

“…딱히 없는데.”

“가방이나 시계도 괜찮고.”

줄곧 웃고 있던 청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가방이나 시계…. 희재와 자신은 그저 계약 관계일 뿐이니 어쩌면 당연한 취급인데도 쉽사리 적응되질 않았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인 청아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춘 채, 말을 꺼냈다.

“…다음에 생각나면, 그때 말할게요.”

“그래요. 언제든지 말해요.”

부드럽게 웃어 보인 희재가 핸들을 돌려 어두운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침실에 누워 있던 청아가 시계를 확인하고 거실로 나섰다. 어느덧, 희재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와 가이딩을 하지 않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몸살이 난 자신을 배려해 준 희재 덕분에, 몸 상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자신에게 팔려 온 가이드에게도 상냥한 남자였다. 희재는 그저 가끔 청아의 손을 잡았다. 효과는 미약했지만, 각인으로 이어진 덕분에 가이딩이 되긴 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청아가 냉동고에 꽁꽁 얼려진 붕어빵을 꺼내 들었다. 전자레인지에 해동한 뒤,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앙금이 혀끝을 맴돌았다. 문득, 그가 붕어빵을 사다 줬던 날이 떠올랐다. 가만히 제 손을 잡고 있던 희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청아는 이 두근거림의 정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평생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탓에 어떤 것에 욕심을 가져 본 적이 드물었다. 결국엔 상처받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욕심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바라는 건 고작 그게 전부였다.

“아, 오셨어요?”

희재가 집으로 돌아온 건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TV를 보고 있던 청아가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안 자고 있었네요. 시간이 꽤 늦었는데….”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외투를 벗은 희재가 다이닝 룸으로 발길을 옮겼다. 늘어지는 업무 탓에 피로가 제대로 쌓였다. 그다지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피로로 잔뜩 굳어 있는 몸을 풀기엔 이만한 특효약이 없었다. 익숙한 손길로 와인 잔을 꺼낸 뒤, 납작한 접시 위로 과일 치즈를 올렸다.

“괜찮으면 와서 말동무나 해 줄래요? 와인 한잔 마시고 잘까 하는데.”

소파에 앉은 청아의 곁으로 다가온 희재에게선 날뛰는 파동이 느껴졌다. 미세한 기운을 감지한 청아가 날카로운 기색을 숨긴 옆모습을 힐끔 눈에 담았다.

“청아 씨는 안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파동도 컨디션도 전부 정상이래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그때처럼 급하게 마시진 말아요.”

“네…. 한 잔만 마실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청아의 눈매가 유독 붉어 보였다. 의아함을 느낀 희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울었어요? 눈 밑이 빨간데.”

“아, 오늘 너무 많이 자서… 그래서 그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청아가 대충 둘러대곤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뜨거워지는 눈가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급히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댄 순간, 그가 손을 뻗어 가녀린 팔목을 잡았다. 부드럽지만 강한 힘이었다.

“천천히 마시기로 했잖아요. 그때처럼 취해서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저, 그냥 안 마실게요.”

“농담이에요.”

조그마한 치즈 조각을 건네던 희재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와인으로 가볍게 목을 축이던 그는 소파 위로 등을 기댔다.

“저, 그때…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혹시 다음 주 토요일에 바쁘세요? 제가 가야 할 곳이 있는데….”

나른하게 풀려 있는 희재의 눈매를 확인한 청아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그, 혹시… 한기원이라고 아세요? 제 이복 오빠인데…. 그, 영화 시사회 파티에 초대장을 줬거든요. 희재 씨도 꼭 와 주셨으면 한대요. 너무 감사해서 인사도 드리고 싶고, 그렇다고 해서….”

“…….”

“어, 어려운 부탁인 거 저도 아는데…”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부탁을 빠르게 눈치챈 희재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청아의 뒷조사를 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인물 중 하나였던 이복 오빠, 한기원. 얼굴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개적인 자리에 자신을 불러내는 속셈이 뻔했다. 에스퍼와의 인맥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져 나가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공격적인 눈빛을 기억해 낸 희재가 잠시 고민했다.

“일이 있어서 조금 늦을 수도 있어요. 행사가 8시랬죠?”

생각보다 쉽게 떨어진 수락에 청아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거절당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려운 부탁임을 알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흔쾌히 허락해 준 희재가 고마웠다.

“같이 가긴 힘들 거 같고, 집으로 차 보낼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 오랜만에 바깥도 구경하고 싶고요.”

“그럴래요? 뭐,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얘기하고요.”

뭐라고 핑계를 대야 기원에게 혼나지 않을 수 있을까 종일 고민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작게 미소 지은 청아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달콤한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제법 도수가 높은 술인지 금세 얼굴 위로 뜨듯한 열이 올라왔다.

“잠깐 나 좀 볼래요?”

“…네? 왜요?”

“아무리 봐도 울었던 눈 같아서.”

서늘한 남자의 손이 볼에 와 닿았다. 부드러운 손이 눈가를 쓸자 청아의 눈꺼풀이 움츠러들었다.

“봐. 여기가 빨갛잖아.”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당황해 빠르게 눈을 깜빡인 순간, 희재의 입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청아가 머금었던 부드러운 향기가 희재에게서도 전해져 왔다. 서로의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였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청아의 목을 졸랐다.

그건 단순한 설렘과 두려움과는 달랐다. 이 익숙지 않은 감정의 정체가 살갗이 닿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가이딩 할 거예요?”

“나 많이 참은 것 같은데… 오늘은 해도 되지 않나?”

순수한 질문에 희재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나쁜 마음을 먹게 하기엔 충분했다. 희재는 청아의 목덜미를 잡은 채, 가녀린 몸을 뒤로 넘겼다. 시커먼 가죽 소파 위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와인이 묻어 있는 청아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올렸다. 붉게 젖어 든 입안을 진득하게 뒤섞자 서로의 혓바닥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흐… 으응. 읍.”

오고 가는 타액이 술에 젖어 달콤하기만 했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입안을 타고 전해졌다. 가까스로 입을 떼어 내자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타고 투명한 실타래가 길게 늘어났다.

“혀 좀 내밀어 봐요.”

“…흐으, 네? 왜…요?”

“그럼 혀도 안 빨고 키스할 거예요?”

청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거부의 말을 꺼내려는 찰나 혓바닥 위로 축축한 입술이 달라붙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여린 점막을 살라 먹듯 파고들어 왔다. 숨이 막혀 입을 벌리자, 입가를 타고 침이 주룩 흘러내렸다.

“티는 안 냈지만 나 많이 급했거든요.”

“…….”

“그냥 섹스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더 편할 거야.”

자신의 아래에 깔려 간신히 호흡만 내뱉고 있는 청아를 눈에 담던 희재가 얇은 잠옷 바지를 벗겨 냈다. 눈처럼 새하얀 허벅지와 손바닥만 한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지만, 제겐 지금 당장 청아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자, 잠시만… 거긴 왜, 흐윽… 아!”

허리를 숙인 그가 곧장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빨아 주려고요. 청아 씨 여기 너무 좁아서 내가 좀 힘들어요.”

노골적인 말에 화들짝 놀란 청아가 마구 발버둥을 쳤다. 몸을 부여잡는 거센 힘에 하얀 허벅지 위로 새빨간 손자국이 남았다. 부드러운 천 위로 입을 가져다 대자 야릇한 향기가 풍겨왔다. 곧게 뻗은 콧대가 조그마한 음핵을 쿡 눌렀다.

희재가 고개를 비틀 때마다 자극은 더욱 거세졌다. 넓적한 혓바닥이 속옷 위를 사악 핥아 올리자 허리가 휙휙 뒤틀렸다. 좁게 다물어진 허벅지를 느릿하게 벌린 그가 그대로 입술을 파묻었다. 한껏 벌어진 다리를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날을 세운 혓바닥이 좁은 틈을 쿡쿡 쑤셔 왔다.

“여기 빨아 주는 거 되게 좋아하는구나. 내가 미처 몰랐네요.”

미끈한 혓바닥이 음부 속으로 기어들어 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온몸이 긴장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끈적한 타액이 분홍빛 속옷 위를 야릇하게 물들여 나갔다. 속옷 채로 쭉쭉 빨아 당기는 힘에 내벽에 고여 있던 물이 질금질금 흘러나와 속옷을 적셨다. 진득한 타액과 애액이 뒤섞이자 아래가 못 견디게 간지러워졌다.

“속옷이 다 젖어서 불편할 것 같은데 직접 벗어 볼래요?”

“…흐읏, 응. 네? 저… 못, 못 해요. 그냥… 희재 씨가….”

“그럼 입고 할래요? 옆으로 젖히면 될 것도 같거든.”

짓궂은 요구였다. 축축하게 젖어 든 아래가 불편해 다리를 움찔대던 청아가 돌처럼 굳었다. 문득 좁은 차 안에서 속옷을 옆으로 젖힌 채 몸을 섞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흥분되고 자극적이었으나, 꽉 조여진 아래는 아프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 그냥 제가 벗을게요.”

“잘했어요. 우리 서로 좋자고 하는 거니까.”

손을 뻗은 청아가 조심스럽게 속옷을 끌어 내렸다. 음부 위로 철썩 달라붙어 있던 속옷이 끈끈한 액체를 만들어 내며 떨어져 나갔다. 가녀린 발목 위에 달랑이던 속옷을 속으로 빼낸 희재가 청아의 허벅지를 끌어당겨 팔에 걸쳤다.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번들번들하게 젖어 뻐끔대는 음부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작네요. 손가락도 안 들어가겠다.”

제 아래를 빤히 들여다보는 시선에 청아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바스대기 시작했다.

“여기가 이렇게 좁은데 어떻게 내 걸 받았어요?”

“으흑…. 보, 지 마세요. 싫어요. 흑… 싫어….”

투명하게 젖어 든 음부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마구 움찔거렸다.

“내가 쳐다볼 때마다 여기가 움직이네. 몇 번 먹어 보니까 좋았어요?”

“아… 흐으, 윽… 불 꺼 주세요. 제발… 불 좀. 보지 마세요.”

“귀엽네.”

그가 청아의 음부 위로 장난스럽게 바람을 불었다. 뜨거운 음부 위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기묘한 감각에 기겁한 청아가 단단한 팔뚝을 거세게 밀어냈다. 꼼짝도 하지 않는 팔을 몇 번이고 긁어내리다 허벅지 사이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조붓하게 벌어진 틈새 위로 희재의 혓바닥이 스치듯 지나갔다. 가벼운 자극에도 미끈한 애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끈거리는 음부를 느릿하게 핥아 올리자 청아의 엉덩이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끈적한 체액이 혓바닥에 척척 감겨 왔다. 그는 달큼한 향기가 나는 아래에 코를 처박고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되게 야한 냄새 나는 거 알아요? 코 박고 있으면 되게 흥분돼.”

뜨거운 호흡이 음부 위로 퍼져 나가자 비좁게 다물린 구멍 사이로 쉼 없이 물이 쏟아져 나왔다. 희재가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쭉쭉 빨아 먹자 청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애절한 소리에도 딱히 멈춰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뚝한 콧대로 음핵을 짓누르며 여린 살갗을 빨고 핥았다. 끈적한 애액이 잇새에 쩍 달라붙었다.

계속되는 자극에 청아의 눈이 빛을 잃고 흐려졌다가, 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야릇한 신음이 앞다투어 터져 나왔다. 지저분하고 난잡한 행위였다. 그래서 더 자극적이었다. 청아는 저도 모르게 아래를 수축하며 희재의 혓바닥을 느꼈다. 축축한 혓바닥이 음부를 쓸어 줄 때마다 눈앞이 흐려졌다 밝아졌다.

순간, 날카로운 이가 음핵을 스쳤다. 찌릿한 감각과 함께 찾아온 갑작스러운 요의에 당황한 청아가 그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개처럼 달라붙은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 잠, 잠시만요. 히익… 흣, 이거 이상해… 흐으.”

“…하아. 실컷 좋아해요. 그래야, 후으… 내가 마음 놓고 가이딩을 하죠.”

“…아! 흐으… 아!”

물기 어린 속살에 혓바닥이 진득하게 달라붙자 청아가 몸을 비틀며 오열했다. 투명한 물이 조르륵 소리와 함께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옴죽대는 구멍을 삼킨 채, 힘을 주어 쪽쪽 빨아 당기자 분수처럼 물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집어삼키는 음란한 혀 놀림에 허벅지가 경련하며 부들거렸다. 하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엉덩이 아래가 차갑기까지 했다. 잔인한 열락은 청아의 이성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오줌까지 싸라고 한 적은 없는데.”

“흐윽…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 윽. 왜… 흐응, 아!”

“못 들었어요. 좀 크게 말하지 그랬어.”

“흐읏…. 흐.”

얼굴을 가리고 우는 여자를 일으켜 세운 희재가 단번에 자세를 뒤집었다. 가녀린 몸이 이리저리 휘청이다 희재의 배 위로 안착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복근 위로 축축하게 젖은 음부가 차지게 들러붙었다. 가까스로 희재의 가슴팍 위로 손을 올린 청아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오늘은 청아 씨가 넣고 움직여 봐요. 내가 움직이면 감당 못 할 거잖아.”

“…왜… 왜 이렇게, 흐윽… 이런 자세로 어떻게 해요.”

“그럼 내가 할까?”

희재의 손이 부드러운 엉덩이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손안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는 살이 머리를 들끓게 만들었다. 가이딩을 위한 본능적인 생존 욕구와 개처럼 흘레붙고 싶은 난잡한 성욕이 뜨겁게 충돌했다. 어느 쪽이든 청아를 집어삼킨다는 점에서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처올리자 배꼽까지 달라붙은 성기 위로 부드러운 음부가 딱 맞춰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몸을 지탱한 청아가 아래를 움찔댔다. 습하게 달라붙은 접합부가 찔꺽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둥그렇게 모인 젖가슴을 손으로 주무르자 작은 손이 희재의 팔목을 잡았다. 그만두라는 의미인지, 더 세게 주물러 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저 내키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아응… 흐, 윽. 아파요. 너무 세게 하면….”

엉망으로 뭉그러진 가슴이 아릿했다. 간절한 애원에도 솟아오른 젖꼭지를 비비는 손가락이 짓궂었다. 옴폭 패인 홈을 손톱으로 죽죽 긁어내리다 가볍게 비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랫배가 징징 울리며 음부가 뜨거워졌다.

유두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청아가 가슴을 내밀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핏줄이 돋아난 성기가 흥분으로 커져 버린 음핵을 툭툭 건드리며 지나갔다. 꽉 다문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질끈 감자 커다랗게 몸집을 불린 흥분이 단숨에 청아를 먹어 삼켰다.

“거기서 계속 비비고만 있을 거예요? 그것도 좋긴 한데….”

“…아!”

“아무래도 넣는 편이… 하아, 좋은 거 같죠?”

애처롭게 붙잡은 손을 떼어 낸 희재가 청아의 골반을 끌어안고 그대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한껏 흥분해 졸아붙은 아래로 단단한 살 기둥이 수월하게 진입했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구멍을 인정사정없이 찍어 올리는 성기에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늘따라 엄청 뜨겁네요. 안이 막 달라붙어… 흐으.”

“희재 씨… 흐윽.”

선명한 색채를 지닌 쾌감이 온 머리를 하얗게 물들였다. 청아의 허리가 살랑살랑 물결을 치며 절정으로 헤엄쳐 갔다. 수치도, 부끄러움도 씻겨 내려간 지 오래였다.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쾌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허리를 흔들어 댔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춤을 추며 흔들렸다.

“아… 씨발.”

철썩 달라붙은 속살은 희재의 성기에서 떨어져 나갈 줄을 몰랐다. 착실하게 쾌감을 쌓아 올린 덕분인지, 조여 오는 압력이 대단했다. 반쯤 넋이 나간 청아는 희재가 내뱉는 상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을 내뱉던 희재가 더 밀착하며 성기를 들이쑤셨다. 탱탱하게 올라붙은 고환이 청아의 엉덩이를 몇 번이고 쳐 댔다. 절절 끓어오르는 쾌감은 뜨겁고 강렬했다. 더는 품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고양되는 성감에 맞춰 성기를 푹푹 쑤셨다.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손바닥이 힘을 잃고 미끄러졌다. 희재의 품 안으로 추락한 청아가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흔들렸다. 자궁구를 강하게 때려 박는 그의 것에 좁게 다물린 구멍이 풀어졌다가 콱 조여들었다.

순간, 찰랑대는 내벽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어느새 익숙해진 당황스러운 감각에 청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희재의 상체를 더듬으며 몸을 일으키려 몸을 바르작거렸다.

“아… 흐, 나… 이상해요. 또, 흐윽! 배가… 잠시만, 희재 씨… 히익.”

그러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은 억센 밧줄처럼 청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놓아주기는커녕, 망가뜨릴 듯 더욱 강하게 아래를 쳐 댔다. 어깨를 짚은 손이 불쌍할 정도로 발발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내 거 꼽고 가서 쌀래요? 가서 잠, 깐 빼 줄게요.”

“아니요… 저 혼자, 흐윽… 제… 발요. 제발, 앗… 흐읍… 아!”

“안 되죠. 청아 씨 가면 난 어떡하라고… 후으. 아, 조여….”

아랫배가 욱신거리는가 싶더니 찌르르한 감각이 내벽을 징징 울렸다. 지나친 쾌락에 통제를 잃은 음부가 제멋대로 움찔대며 물을 뿜었다. 흡사 소변과도 같은 투명한 액체가 줄줄 쏟아져 내렸다. 이성을 잃고 무너져 내린 청아의 몸이 기꺼웠다. 여자를 꼭 닮은 부드럽고 잔잔한 에너지가 제 몸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정신이 맑아질수록 에스퍼의 본능이 극렬하게 날뛰었다.

“가이딩 실력이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몰랐는데… 하아.”

싸 대는 양이 어찌나 많은지 희재의 성기가 흠뻑 젖어 들 정도였다. 그는 맑은 액체를 쏟아 내는 내벽 안으로 제 성기를 턱턱 쑤셔 발겼다. 청아의 발가락이 지독한 흥분을 감당하지 못해 제멋대로 오그라들었다. 사방으로 튀어 대는 액체가 서로의 허벅지를 흠뻑 적셨다.

근 한 달 만의 가이딩이었다. 미쳐 날뛰던 희재의 파동이 잔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던 청아가 쉼 없이 들썩이며 희재의 가슴 위로 고개를 묻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꼬리를 타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 * *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 전화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머리를 말리던 드라이기를 내려놓은 청아가 액정 위로 뜬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보세요.”

- 너는 무슨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니?

“…죄송해요. 씻고 나오느라.”

수화기 너머로 날카롭게 날이 선 지영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작게 인상을 쓴 청아가 이내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 그나저나 청아, 너 연희재한테 뭐 얘기 들은 거 없니?

“얘기요? 딱히 들은 거 없는데.”

- 모르면 됐다. 이상한 소문이 났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무슨 소문….”

의아한 말이었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르더니 짧게 혀를 차 낸 지영이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너 잘하고 있는 거야?

“…….”

- 다신 없을 기회다.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마. 요즘 중원 씨 사업도 얼마나 잘돼 가고 있는지….

통화가 길어질 것을 예감한 청아가 새하얀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온통 계약과 사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마치, 존재의 이유를 잊지 말라는 듯이 날아드는 이야기에 가슴이 쿡쿡 아려 왔다.

- 하여튼 네 본분 잊지 말고 잘하란 얘기야. 듣자 하니, 오늘 기원이 시사회 다녀온다며?

“…네.”

- 가서 우리 기원이 기 좀 팍팍 살려 주고 와. 살다 보니 네가 쓸모도 다 있고…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끊을게요.”

길었던 통화를 가까스로 끊어 낸 뒤, 구석에 처박힌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가방 안에서 기원이 보낸 초대장을 집어 든 청아가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한참이나 고민하다 옷장 속에서 찾아낸 건 트위드 형식의 투피스였다. 대충 입고 갔다간 기원에게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몰랐다. 평소에 입지 않던 치마와 하이힐까지 차려입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몹시도 어색했다.

홀로 집 밖에 나오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얼굴을 스치는 쌀쌀한 바람이 성큼 다가온 꽃샘추위를 실감케 했다. 추위에 몸을 떨던 청아가 급히 택시를 잡았다.

“여기서 세워 드리면 될까요?”

“아… 네. 카드로 계산할게요.”

퇴근 시간이 지난 지 한참이라 다행히 늦지 않고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과 고급 차량이 정신없이 섞여 붐비고 있었다.

초대장을 내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호텔의 화려한 내부가 청아의 눈길을 끌었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샹들리에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영화 흥행을 축하하는 뒤풀이 겸 디너파티라고 했다. 포스터 위에 박힌 기원과 눈이 마주친 청아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초대장 확인하겠습니다.”

“아… 여기요.”

“왼쪽 입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낸 청아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회장엔 온통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투성이였다. 쿵쿵대는 음악 소리와 반짝이는 불빛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혼자보단 희재와 함께 들어가는 게 낫겠거니 싶어, 아무도 없는 테라스로 발길을 옮겼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늦는다고 했으니 여유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어서 빨리 기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희재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춥다.”

어둠에 잠긴 서울의 밤하늘은 도시의 불빛으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제 발아래, 개미처럼 작아진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늦은 밤인데도, 도로 위엔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생… 각보다 늦으시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싸늘한 추위에 몸이 떨려 왔다. 시계는 벌써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재가 걱정되어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기계적인 신호음만 계속될 뿐이었다. 일이 많이 밀린 건가, 아니면 차가 많이 막히기라도 하는 걸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난 것인지 감도 오질 않았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 휴대 전화를 손에 꼭 쥐어 보인 청아가 고개를 떨군 채, 몸을 수그렸다. 이렇게 하면 차가운 바람이 저를 빗겨 가길 바랐다. 그렇게 오지 않을 희재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바쁘신가 보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에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었을 무렵에야 희재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보같이 괜히 기대했네.”

그는 자신과는 달리 바쁜 사람이었다. 이런 사소한 행사 따위 못 올 수도 있는 게 당연한 건데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초라한 기대가 짓밟히자 심장 한구석이 콱 조여 왔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린다는 게 이렇게 외롭고 괴로운 일이라는 걸, 청아는 난생처음으로 깨달았다.

계약으로 팔려 온 주제에 감히 기대하고, 바보같이 실망하고…. 초라한 신세에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라 애써 고개를 치켜들었다. 순간, 손에 쥔 핸드폰 윙윙 울려 대기 시작했다. 혹시 희재일까 싶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 야. 약속한 게 몇 신데 아직도 안 와! 너 미쳤어?

“…….”

- 임청아. 대답 안 해? 군기가 빠졌네, 아주.

수화기 너머로 기원의 손이 튀어나와 제 머리채를 잡아당길 것만 같았다. 잔뜩 화가 난 것인지 격양된 목소리가 청아에게 욕을 퍼부었다.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통화를 이어 나갔다. 추위에 얼어붙은 목소리가 엉망으로 새어 나왔다.

“그게… 희재 씨가 못 온다고 해서.”

- 씨발, 이게 미쳤나. 그럼 진작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나도 몰랐어. 그래도 와 줄 거라고 믿었어. 초라한 대답을 억지로 삼켜 낸 청아가 다시 한번 수화기를 부여잡았다. 새빨갛게 얼어붙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베이듯 아렸다.

- 너 지금 어디야.

“여기… 테라스 있는 곳인데….”

- 아, 얘가 사람 존나 열받게 하네. 너 거기서 딱 기다려.

사나운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귓가로 때려 박히는 날카로운 말보다 멍이라도 든 것처럼 욱신거리는 가슴이 더 아팠다. 한 손으로 가슴께를 쓸어 보인 청아가 가까스로 숨을 내뱉었다. 무거운 한숨이 공중을 떠돌다 새하얗게 스러졌다.

공격적인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억센 손길이 청아의 팔목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파티장에서 뛰어나온 기원이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었다. 부여 잡힌 팔목이 아파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프다고, 놓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기원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억지로 비명을 삼켜 냈다.

“야, 임청아! 장난해? 행사 다 끝나 가잖아.”

“아….”

“내가 연희재 데리고 오라고 했지. 감독님이 인사 좀 하고 싶대서 씨발, 입 다 털어놨더니… 사람을 엿 먹이고 말이야. 네가 이제 군기가 빠졌지?”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언이 막을 새도 없이 퍼부어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청아의 머리통을 툭툭 밀었다. 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라는 듯 머리를 밀쳐 대는 손길이 매서웠다.

“이제 나가서 사니까 나 같은 건 좆으로 보이나 봐? 오빠가 만만해?”

“그게… 아니라, 그게.”

“내가 그때 너 못 건드렸다고 안심하지 마.”

저급한 말에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큰소리 하나 낼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청아를 좀먹어 온 지옥 같은 과거가 입 하나 뻥긋할 수 없게 만들었다. 건드리는 족족 머리가 흔들려 어지럽기까지 했다.

“우리 잘나신 임청아가 연희재한테 빨대 좀 꼽았다고 안심했나 본데… 수틀리면 너 같은 거 벗겨 먹는 거 일도 아니야. 한 번만 더 이래 봐.”

“흐… 윽… 미, 리 연락하려고 했는데…… 흐.”

아무리 짓궂게 괴롭혀도 소리 내서 운 적이 없던 청아가 서럽게 오열했다. 꼴같잖은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모진 괴롭힘도 올곧게 견뎌 내던 청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이한 광경에 말문이 막힌 기원이 눈물에 젖은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혹시나 누가 볼까 불안해진 기원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 너 질질 짜지 말고 그냥 가라. 누가 볼까 무섭다.”

“…….”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멍청한 게….”

사나운 발소리와 함께 기원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얼굴을 흠뻑 적신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낸 청아가 한참을 서 있다 비틀거리며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머리 몇 대 맞은 걸로 끝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기원이 크게 화를 내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고작 이런 걸 운이 좋다고 여겨야만 하는 자신이 불쌍하고 초라했다.

모든 불이 꺼진 복도를 홀로 걷자 시커먼 어둠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막연한 두려움에 고개를 푹 숙인 청아가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정처 없이 걸었다. 택시라도 타고 가야 하나, 아니면…. 금세 얼굴을 가득 적신 눈물이 바닥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비틀대며 벽에 몸을 기댄 청아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땡- 정적을 깨우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청아 씨.”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토록 기다렸던 희재가 보였다. 따듯한 목소리에 목 끝까지 차오른 설움이 터져 나왔다. 자신과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은 그가 미웠다. 기원에게 온갖 치욕이란 치욕은 다 당했는데…. 다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온 그가 야속했다.

그런데도 결국 잊지 않고 와 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내렸다. 함부로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게 만드는 남자가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흐윽…. 흑.”

“미안해서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청아 씨가 울고 그래요. 마음 아프게.”

다정한 온도를 가진 손이 눈물로 젖어 든 청아의 볼을 감쌌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청아의 눈물을 그가 부드럽게 닦아 냈다. 유리구슬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희재의 행동에 바보처럼 가슴이 뛰었다. 청아는 이 불행한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자신이 가져선 안 되는 이 마음을.

“깜빡 잊고 있었어.”

“윽… 흑, 으흑.”

“뒤늦게 생각이 나서…. 하아,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요.”

나는 연희재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새 그렇게…. 처음으로 느껴 본 따스한 다정함은 청아의 가슴을 끝도 없이 두드려 댔다. 제게 먼저 말을 걸어 주고, 웃어 주고, 챙겨 준 건 태어나 희재가 처음이었다.

단순히 가이딩이 필요해서 자신을 찾는다는 걸 알면서도 좋았다. 꼭 자신이 아니어도 그에겐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펑펑 쏟아져 나온 눈물이 희재의 가슴팍을 가득 적셨다.

“차라리 한 대 때릴래요? 내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

“…흐윽, 네?”

“뺨 정도는 맞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저…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

억지로 눈물을 그친 청아가 희재를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더는 욕심내선 안 되었다. 제겐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제넘은 욕심은, 결국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게 뻔했다.

“하아….”

청아의 손을 잡아끈 희재가 지하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울음이 묻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던 희재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정적이 가득한 차 안은 그저 숨소리만 나지막하게 들릴 뿐이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그친 청아가 부은 눈을 비비며 안전띠를 맸다.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차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의아한 행동에 청아가 희재를 올려다보았다. 예의 해사한 미소를 건 그가 가볍게 말을 던졌다.

“잠깐 내려요.”

“…여긴 왜요?”

“청아 씨 기분 좀 풀어 주려고요. 너무 미안해서 이대로는 집에 못 갈 거 같기도 하고.”

아직 눈가에 눈물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청아는 이런 순간마다 자신이 어떤 위치로 이곳에 와 있는지를 새삼스레 느끼곤 했다. 희재는 꼭 철없는 정부의 기분을 달래듯이 때때로 고가의 물건을 사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이딩을 빌미로 몸을 팔고 있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져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과를 구하는 그의 방식을 비난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한중원이 청아를 희재에게 넘긴 이유부터가 돈 때문이었다. 입양아라고 할지라도 그 집에서 나고 자랐으니 청아도 어련히 그렇게 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다.

사이가 썩 좋지 않을 거라 으레 짐작은 해도, 입에 담지 못할 폭력과 괴롭힘을 당했다는 건 희재가 모르는 게 당연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희재를 따라 백화점으로 들어서자 말쑥한 차림의 퍼스널 쇼퍼가 그를 반겼다.

“연희재 전무님,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이쪽. 잘 좀 부탁해요. 내가 죽을죄를 지었거든.”

“…아, 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남자가 재빠르게 두 사람의 곁으로 붙었다. 출입이 통제된 명품관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희재가 직원이 건넨 음료도 마다하고 팸플릿부터 들여다보았다.

깔끔한 슈트 차림과 부드러운 이미지의 희재는 꼭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브랜드의 앰배서더처럼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오로지 청아만이 동떨어진 기분으로 그의 곁에 인형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방금까지 펑펑 울다 온 사람을 백화점으로 끌고 와 기분을 풀어 주겠다는 그의 심리를 이해해 보려 해도 자꾸만 표정이 굳었다.

“투피스보단 원피스가 더 잘 어울리시겠네요. 이번 신상인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트위드 소재인데 무겁지도 않고 활동성도….”

“…….”

“이 디자인은 구두랑 플랫, 두 가지 버전으로 나온 건데 한번 신어보시겠어요?”

평생 만져 볼 일도 없을 거라고 여겼던 사치품들이 청아의 몸에 이리저리 걸쳐졌다 벗겨지기를 반복했다. 직원들의 입에 발린 칭찬에도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길었던 쇼핑이 끝나자 청아는 반쯤 녹초가 되었다. 주차장까지 따라붙은 2명의 직원이 희재의 차에 수십 개의 쇼핑백을 차곡차곡 실어 주었다. 물건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태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청아가 희재의 손짓에 조수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기분이 좀 풀려요?”

“앞으로는 이런 거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저번에도 많이 사 주셨고요.”

“오늘 일, 정말 미안해서 그래요. 가이딩도 보답할 겸 사 주는 거니까 편하게 생각해요.”

청아가 희재에게 바란 건 이런 식의 보답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눈물의 정체는 감정에 대한 자각이었을 뿐이지, 관계에 대한 실망이나 더 나은 처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희재에게 무언가를 조를 마음도, 투정 부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희재는 부드럽고 고아한 방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도착하면 깨워 줄게요. 한숨 자요.”

임청아, 도대체 뭘 바란 거야? 소리 없는 외침이 귓가를 맴돌았다. 이 순간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한 희재의 눈빛이 자꾸만 가슴 깊숙이 맺혀 들었다.

실컷 울어서 그런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상태였다. 비틀대며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 청아를 붙잡은 건 희재였다.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닥으로 내려놓은 희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청아를 달랬다.

“많이 화난 건 아니죠?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괜찮아요. 화낼 일도 아니고…. 결국 와 줬잖아요.”

퉁퉁 부은 눈매에 입을 맞추던 희재가 연신 사과를 거듭했다. 속눈썹을 간지럽히는 입술에 청아가 살포시 눈을 감자 희재가 작게 웃었다. 뺨을 맴돌던 입술이 작게 벌어진 아랫입술을 천천히 삼켰다.

“나 청아 씨 없으면 큰일 나는 거 알죠? 앞으로는 내가 더 잘할게요.”

갑작스럽게 야릇해진 분위기에 당황한 청아가 희재의 어깨를 조심스레 밀어냈지만, 어째서인지 입맞춤은 더욱 끈적해지기만 했다. 입고 있던 코트가 발밑으로 툭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거실을 비추던 신발장 불이 꺼지자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어두운 걸 극도로 싫어하는 청아였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제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축축한 혀가 여린 점막을 끈덕지게 핥아 올리며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부드럽게 밀어붙이는 힘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코트가 발아래 마구 짓밟혔다.

“그래도, 워낙 바쁘다 보니까… 후으.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해 좀 해 줘요.”

“흐…. 잠시만, 흐읍.”

“늦게라도 안 갔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응?”

쪽 소리와 함께 포개져 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모질 정도로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희재가 등 뒤에 자리한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청아의 손을 잡아 제 허벅지 사이로 휙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고 비틀대던 몸이 하얀 셔츠에 가려진 희재의 어깨를 짚었다. 가녀린 몸이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결박당했다. 동시에 부드러운 손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금이라도 거절하기 위해 단단한 어깨를 잡았지만, 쉽사리 밀어낼 수가 없었다. 청아는 애초에 희재를 거부할 권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가녀린 손이 넓은 어깨를 타고 툭 떨어졌다.

커다란 손이 원피스 속으로 들어와 차게 식은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분홍빛 속옷이 종아리를 타고 힘없이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청아가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자꾸만 눈을 피하는 청아를 알면서도 그는 손을 멈추진 않았다.

“하아…. 읏.”

희재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애써 외면한 채, 봉긋한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청아의 안정적인 에너지가 미친 것처럼 날뛰던 파동을 잠재우고 있었다. 미치도록 찾아 헤매던 감각이었다. 체념을 수락으로 읽은 희재가 들끓는 호흡을 내뱉었다.

사그라드는 파동과 반대로 끓어오르는 남자의 흥분이 가슴 위로 번져 나가자 긴장감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툭, 툭. 간지러운 감각에 청아가 고개를 내리자 잇새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내는 희재와 눈이 마주쳤다.

온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이가 가슴을 스치는 감각과 함께 가슴을 감싼 브래지어가 단번에 벗겨졌다. 속옷에 꽉 눌린 살덩이와 반쯤 튀어나온 유두를 확인한 희재가 혀를 굴려 새빨간 젖꼭지를 입에 담았다.

어깨를 틀어쥔 자그마한 손에서 잔 떨림이 느껴졌다. 위아래로 쓸어내리는 혀 놀림에 청아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날을 세운 혓바닥이 유두의 미세한 홈을 갉작이기 시작하자 기다렸던 것처럼, 아래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응… 윽… 흐으, 읏.”

상처받은 마음을 배반하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비질비질 스며 나온 애액이 속옷을 적시자 참기 어려운 자괴감이 청아의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끈적한 타액을 모은 희재가 둥근 젖가슴 위로 침을 흘려보냈다. 난잡한 행동에 청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번들번들해진 젖꼭지를 잡아 비트는 손길에 단번에 무릎이 꺾였다. 비틀대는 허리를 끌어안은 희재가 반대쪽 유두를 입에 문 뒤, 흡입하듯 강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 희재 씨, 아파요. 흐윽… 계속하면.”

“오늘따라 되게 예민하네요. 부어서 그런가?”

“그만, 읏…. 너무 그렇게 하지… 아!”

쭈웁, 춥. 적나라한 소리에 넓은 어깨를 몇 번이고 밀어냈지만, 힘이라고는 들어가지 않는 손은 되려 흥분만 자극할 뿐이었다. 분명히 자리에 서서 희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자신인데도 그는 꼭 자신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모든 감정과 감각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것만 같았다.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듯한 기분이 기묘했다.

“여기도 좀 부은 것 같은데…. 너무 자주 해서 그런가 봐요.”

“으흐… 응, 으흣.”

“안 아프게 잘 풀어 줄게요. 많이 젖어야 들어갈 때 좋잖아.”

미끈하게 뻗은 손가락이 애액으로 미끈거리는 외음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희재의 어깨를 부여잡은 청아가 몸을 움직이며 신음을 터트렸다. 그는 안으로 숨어든 클리토리스를 기어이 찾아내 부드럽게 문질렀다.

굳은살이 베인 손가락이 연약한 살을 뭉개듯 비벼 왔다. 미끈한 손등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부끄러워 허벅지를 오므려 보아도 끈덕지게 따라붙는 손짓이 집요했다. 질구를 타고 흐른 액체가 커프스를 적실 정도로 흥건해지고 나서야 희재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흐으… 읏. 어깨 위로 퍼지는 청아의 숨소리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바라보며 젖을 빨던 희재가 소파 위로 등을 기댔다.

여자의 다리를 넓게 벌린 뒤, 곧장 제 무릎 위로 올렸다. 가벼운 몸이 허벅지 위로 단번에 주저앉았다. 쾌락과 자괴감으로 물든 얼굴을 바라보자 흥분이 끓어올랐다.

이토록 매칭률이 높은 가이딩과의 가이드는 처음이라, 답지 않게 몸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희재는 지금 이 감정이 에스퍼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에서 기인한 성욕뿐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유 모를 청아의 눈물보단 늘 그렇듯, 자신의 욕구가 먼저였다.

“오늘은 비비기만 할까요? 넣지는 말고?”

“흐…흑, 네, 네에… 흐읏.”

옷도 벗지 않고 지퍼만 끌어 내린 희재가 갈라진 틈새 사이로 선액으로 젖은 귀두를 딱 끼워 맞췄다. 조붓하게 벌어진 음순이 살 기둥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부드러운 감촉에 잠시 이를 악물었다.

여린 살이 촉촉하게 성기를 감싸 오자 고개를 뒤로 젖힌 희재가 낮은 숨을 내뱉었다. 만족스러운 가이딩에 피가 끓어올랐다. 폭주에 대한 감각이 치밀어 오를 때면 개중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와 하룻밤을 보내거나 직접 팔에 주사를 놓곤 했다.

말이 좋아 에스퍼지, 어떻게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삶을 이어 나가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폭주하는 에스퍼를 잠재울 수 있는 건 오로지 가이딩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가이드였지만, 대체재가 널릴 대로 널릴 만큼 가치는 바닥을 쳤다.

희재처럼 일정 가이드에게만 매칭률이 반응하는 특수한 사례도 더러 있긴 했다. 불운한 케이스였으나, 그는 그 모든 걸 깨부숴 버릴 만큼 타고난 운을 가진 남자였고 바로 그 결과가 제 눈앞에 있었다.

반쯤 벗겨진 원피스를 간신히 걸친 채, 이리저리 휘청이는 여자는 꼭 가이딩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자주 손이 갔다. 박으면 박는 대로 만지면 만지는 대로, 젖어 드는 몸이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희재의 턱을 간지럽혔다.

“청아 씨, 눈 풀렸어요. 정신 차려야죠.”

찐득거리는 소리가 거실을 울리자 청아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린 귓구멍 안으로 혀를 쑤셔 박자 온몸으로 소름이 번졌다. 새하얗게 질린 발끝이 달달 떨렸다.

애액으로 흠뻑 적셔진 성기가 빨갛게 달아오른 음부 사이를 슥 비벼 댔다. 혈관이 선 살 기둥이 부풀어 오른 음핵을 툭툭 건드리며 음욕을 자극시켰다. 게게 풀린 눈으로 호흡을 가다듬던 청아가 흐릿해진 시야를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긴장으로 차게 식은 등을 쓸어내리는 뜨거운 손바닥에 작은 몸이 연신 바스댔다.

보드라운 음순 사이로 제 것을 더 깊게 교합시킨 희재가 아주 느릿한 속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두툼한 귀두가 내벽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금세 빠져나갔다. 금방이라도 아래를 헤집고 들어올 것만 같은 장난질에 청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 안 넣는다고… 흐윽, 했잖아요.”

“내가 그랬어요?”

“네…. 오늘은 안 넣고… 으흣… 비, 비기만…! 아!”

순간, 미끄러지는 느낌과 함께 희재의 성기가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밀려 들어왔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말을 잃은 청아가 끅끅대며 눈물을 삼켰다.

“아… 아, 끄흑. 억.”

“어떡하지? 보지가 너무 젖어, 서 들어가 버렸네…. 후으….”

배를 부여잡고 헐떡거리는 청아와 달리, 희재의 낯짝은 태연하기만 했다. 두꺼운 성기로 가득 찬 배가 거북할 정도로 힘겨웠다. 당장 빼내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이자, 강한 힘이 골반을 틀어잡았다. 꿈틀거리는 성기가 여린 구멍을 쿡쿡 쑤시며 멋대로 침범해 오기 시작했다. 은근하게 이어지던 쾌감이 극렬한 자극으로 뒤바뀌자 청아가 몸을 뒤틀며 우는 소리를 냈다.

“흐윽… 흐, 조금만 빼 줘요. 네? 끝까지 넣지 마세요…. 흐.”

“하아… 진짜 조인다.”

아래에서 올려 치는 허리 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성기 모양대로 벌어진 구멍이 바들거리며 수축을 반복했다. 그는 마치 청아의 음부에 길이라도 새기는 것처럼 꾹꾹 제 것을 눌러 박았다. 농밀한 추삽질에 내벽 깊은 곳이 짓눌리는 감각이 생경했다. 온몸을 관통하는 빠듯한 압박감에 눈앞이 순간 새하얘졌다. 겁에 질린 청아가 희재의 어깨에 고개를 박은 채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 흐윽, 안 넣는다고 했,으면서 왜…. 으읏, 거짓말…아!”

“여기가 하도 뻐끔거려서 흐으… 넣어도 되는 줄 알았죠.”

“…흐으, 윽, 아파요. 아파.”

“그럼 청아 씨가 일어나 봐요.”

짓궂은 요구였지만 이대로는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내벽을 징징 울리는 아픔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청아가 희재의 팔뚝을 짚고 반쯤 접혀 있던 무릎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두툼한 끄트머리는 여전히 들어박힌 채였다. 접합부 사이로 끈적한 액이 엉겨 붙었다 떨어져 나갔다.

“…히익, 빼, 줘요. 싫어… 이제 뺄, 래요.… 아!”

눈으로 보이는 흉흉한 크기에 호흡이 턱 하고 먹혀들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에 눈물만 뚝뚝 흘리자 밭은 숨을 내뱉은 희재가 청아의 몸을 옆으로 밀어 눕혔다. 잠시 성기가 빠져나간 아래가 헛헛하게 벌어진 느낌에 청아는 저도 모르게 아래를 조여야만 했다.

모로 눕힌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한쪽 다리가 높게 올라갔다. 깊게 들어오는 자세인 건 변함 없었지만, 청아가 느끼는 수치심은 배로 더 커졌다. 꼭 오줌이라도 싸는 짐승이 된 것 같은 자세였다. 활짝 벌어진 음부 사이로 꽂혀 든 성기가 아까와는 달리, 제법 빠른 속도로 푹푹 쑤셔 박히기 시작했다.

“할 때마다 울면 어떡해. 이만큼, 박아 댔으면 청아 씨도 적응해야지.”

“으흑, 응… 흐으. 거기 누르지… 마세요, 아… 흐윽. 그만, 거기, 아!”

“그렇게 울면 남자들은 더 꼴려요. 청아 씨… 아!”

가장 예민한 지점만 눌러 대는 귀두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청아는 애꿎은 시트만 긁어 대며 음부를 움칠거렸다. 온 에너지를 희재가 흡수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순간, 울렁이는 기분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절박한 심정에 다리를 발발 떨며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틀어박힌 성기는 끝 간 데를 모르고 극점만을 찍어 대고 있었다. 접합부를 타고 졸졸 흐르는 애액이 찐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커먼 가죽 소파를 흥건하게 적셨다. 청아의 몸이 가죽에 짓눌리며 뻑뻑거리는 소리를 냈다.

전원이 꺼져 있는 커다란 TV 안에 제대로 옷도 걸치지 못한 채 엉망으로 흔들리는 자신의 몸뚱이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차가운 모습으로 제 아래를 범하고 있는 희재가 보였다. 발밑에 놓인 수많은 쇼핑백도 함께였다.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모습을 마주하자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청아의 울음소리에 허리 짓이 더욱 빨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울긋불긋한 허벅지 위로 새하얀 정액을 쏟아졌다.

목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뱉어 내려는 찰나, 인형처럼 홱 뒤집은 몸 위로 올라탄 희재가 벌름대는 구멍 안으로 다시 한 번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자꾸만 마음이 욱신거렸다.

* * *

이른 아침부터 가이딩 센터를 방문한 청아는 익숙한 손길에 몸을 맡긴 채, 피를 뽑아냈다. 최근 들어 몸이 이상했다. 희재와의 가이딩 역시 최대한 조절하고 있음에도 순간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머리가 핑 돌고는 했다.

“파동이 조금 불안정한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잔잔하게 흐르던 처음의 결과와는 달리, 물결처럼 요동치는 청아의 파동을 확인한 센터장이 작게 인상을 구겼다. 무슨 일…. 곰곰이 생각하던 청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요. 딱히 없었는데.”

“…이상하네.”

“왜요?”

“이게 가이딩으로 인한 변화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컨디션 때문인 건지… 좀 애매해서요.”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 단순한 감정의 변화였다. 그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게 된 이후로, 청아는 남몰래 끙끙대며 속앓이를 해야 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때론 불길이라도 치솟는 듯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희재를 바라볼 때면, 더 심했다. 모든 게 처음인 청아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낯설고 지독한 감정이었다.

“…청아 씨, 혹시 밖에서 희재 씨 기다리고 있나?”

“아니요. 오늘은 바빠서 저 혼자 왔는데… 왜요?”

“…그게 청아 씨만 괜찮다면, 간단하게 테스트 하나 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센터장의 간절한 애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가이딩실이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긴장할 건 없고, 단순하게 손만 잡는 거예요. 곧 있으면 도착할 건데, 걔는 A급 에스퍼예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희재 씨처럼 가끔 파동이 불안해서….”

“…네.”

“어차피 각인 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대단한 효과를 기대하고 하는 테스트는 아니에요. 단순히 비슷한 상황에서 청아 씨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거니까, 겁먹진 말고요.”

청아의 각인 상대는 희재였다. 각인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 이상,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줄 수 있는 에너지는 어차피 한정되어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영화 속에 나오는 취조실 같은 공간이 청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책상과 두 개의 의자를 바라보던 청아가 이내 자리에 앉았다. 그때와 같이, 조그마한 전극을 가진 스티커가 청아의 팔뚝에 달라붙었다.

“밖에서 이 카메라로 다 보고 있으니까, 혹시 몸에 이상 반응이 느껴지면 바로 손들어요.”

“…네.”

당부의 말을 전한 센터장이 빠르게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왼편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확인한 청아가 긴장으로 하얗게 질린 주먹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문 건너편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쾅 소리와 함께 가이딩실의 문이 열렸다.

“씨발. 이런 걸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라고요.”

“이원아. 어쩌면 너한테도 B급이 잘 맞을지도 모르잖아. 단순히 확인해 보는 거야.”

“효과 없기만 해요.”

“들어가. 빨리.”

짝 소리와 함께 등을 두들겨 맞은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는 한눈에 보아도 자신보다 어려 보였다. 새하얀 피부와 얇은 속쌍꺼풀이 꼭 요즘 TV에 나오는 아이돌 같았다. 말할 때마다 폭폭 패는 보조개 역시 남자를 더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까칠하기 그지없었다. 하얀 반팔 티 위에 걸친 교복이 아니었다면 저절로 눈을 내리깔 뻔했다.

난처한 듯,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인 센터장이 남자의 팔뚝에 청아와 같은 스티커를 붙였다. 그는 가이딩실까지 끌려온 게 못마땅한지 센터장이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뭐해요. 가이딩 안 하고.”

“…네?”

“손 줘요.”

커다란 손을 뻗은 남자가 청아의 손을 덥석 잡아 왔다.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처음이에요?”

“…아니요.”

“근데 왜 이렇게 놀라, 처음도 아니면서.”

“갑… 자기 잡으니까 그렇죠.”

희재가 아닌 다른 남자와 손을 잡은 건 처음이었다. 따듯한 온기를 가진 손이 부드럽게 얽히자 그가 가진 파동이 미세하게 전해져 왔다. 불안정하긴 했지만 희재만큼은 아니었다. 단순히 손만 잡고 있는 접촉 가이딩이라 그런지 몸에 큰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말 놔요. 나 누나보다 어려요.”

그것보단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더 불편했다.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청아가 시선을 피한 찰나, 남자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이름이 뭐예요?”

“…임청아.”

잘 어울리네. 가볍게 대꾸한 남자가 조금 더 깊게 손을 맞잡아 왔다.

“내 이름은 안 물어봐요?”

“…정이원, 명찰에 적혀 있어.”

“아…. 쪽팔리게, 학교 끝나고 급하게 오느라 입고 있는 거거든요?”

보이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그는 길길이 날뛰며 반응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볼 위로 보조개가 콕콕 찍혔다.

“뭐야, 왜 웃어요?”

“…그냥, 고등학생은 오랜만에 봐서 신기했어.”

“저 이래 봬도 20살이에요. 그렇게 애처럼 보지 마요.”

누가 봐도 애처럼 보이는 말을 내뱉은 이원이 청아의 검지를 꼭 눌렀다. 마치, 조그만 강아지의 발바닥을 괴롭히는 듯한 손길이었다. 20살이라더니, 정신연령은 꼭 고등학생 같았다. 무언의 압박에 당황한 청아가 결국 손을 맡긴 채,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자신보다 한 마디는 커 보이는 손은 몹시 뜨겁고 부드러웠다. 긴장으로 차갑게 굳어 있던 손이 남자의 체온으로 따듯하게 녹아내렸다.

“손 되게 작네. 내가 세게 쥐면 부러지겠다.”

“…….”

“…그런데 하필 반지는 없네요?”

“그게 왜?”

「띠- 가이딩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방안을 가득 울리는 기계음과 함께 우측에 놓인 그래프가 세차게 움직이며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안내음이 울렸음에도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이원은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청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손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음…. 매칭률은 희재 씨보다 낮지만 아주 나쁜 편은 아니네요. 파동도 아까랑 비슷한 걸 보면, 가이딩으로 나빠진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심리적인 영향이나 스트레스가 요인일 가능성이 커요.”

“…네.”

“우선, 당분간은 몸 관리에 신경 쓰시고요. 한 달 후엔 희재 씨랑 같이 방문하세요. 함께 오셔야 정확도도 더 올라가….”

“…아, 짜증 나. 좋다 말았네.”

센터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원이 인상을 팍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제의자가 사납게 덜컹대며 큰 소리를 냈다. 피부에 달라붙은 전극 스티커를 마구잡이로 떼어낸 그가 책상 위로 툭 집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이원에게로 쏠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가이딩실을 걸어 나갔다.

“야, 정이원! 이모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가?”

“안 해. 이모 때문에 김 팍 샜어.”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센터장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게 진짜… 아휴, 청아 씨, 미안해요. 가이딩 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크게 불편한 곳은 없었죠?”

“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다행이네요. 혹시 모르니까 링거 한 대 맞을게요. 쟤가 저래 봬도 A급이라 청아 씨한텐 벅찼을 수도 있어요.”

걱정 어린 말투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 청아가 팔목까지 감싼 니트를 걷어붙였다.

“알겠어요.”

“이번 달 안으로 한 번 더 방문하시고요.”

투명한 피부 위로 보기만 해도 아찔한 주삿바늘이 푹 박혀 들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 * *

생각보다 출장이 꽤 길어졌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온 희재는 익숙하게 방문을 열었다. 밝은 스탠드 조명 아래, 하얀 이불로 감싸인 제 가이드가 잠들어 있었다. 딱 일주일만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청아를 깨운 건 머리를 쓰다듬는 희재의 손길이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눈빛만은 그렇지 못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청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희재와 눈을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번에 알게 했다. 희재의 파동이 또다시 날뛰고 있었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위압적인 분위기에 당황한 청아가 소동물처럼 그의 눈치를 살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셨어요.”

“깨워서 미안해요. 왜 깨웠는지는 말 안 해도 알죠?”

부탁이되 부탁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튀어 오르는 파동을 억눌러 대는 희재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일주일을 약 없이 버텼으니 괴로울 법도 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반강제와 다름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고통스러워 보이는 희재의 얼굴이, 그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 청아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인 관계라는 걸 침대 위에 앉은 둘만이 몰랐다.

“저… 그게….”

“참, 센터장님이 청아 씨 파동 얘기를 하던데…. 걱정할 문제는 아니죠?”

“…그냥 일시적인 거라고 하셨어요. 금방… 좋아질 거라고.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진 없어요. 그래도 청아 씨가 아프면 내가 불편해지니까.”

냉정한 대답에 청아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불편…. 쓰임을 다하지 못하는 저를 나무라는 것만 같은 말투에 버릇처럼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무거운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지금처럼만 잘 좀 해 줘요. 나 실망 안 하게…. 우리 좋았잖아.”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려는 찰나, 희재의 입술이 맞물렸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입맞춤이었다. 그와 나눴던 이전의 키스들은 청아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일종의 전희와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입맞춤은 오로지 가이딩,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한 외설적인 성애와 같았다.

입 벌려요. 거칠게 밀려들어 오는 혓바닥을 받아 내는 가녀린 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고개를 뒤로 빼 보아도 잽싸게 따라붙은 입술이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단단한 어깨를 밀어내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음험한 분위기와 날뛰는 파동이 청아의 저항을 죽였다. 그는 꼭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들짐승 같았다.

잠깐 입술을 떼어 낸 희재가 목덜미로 입술을 옮겼다. 따끈하게 데워진 살결이 부드러웠다. 근 일주일만의 가이딩이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를 세워 하얀 피부를 마구 짓씹어 버리고 싶다가도 영문도 모른 채 휘둘리는 여자가 불쌍해 그저 조용히 말을 골랐다.

“파동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후으…. 청아 씨를 부를까 하다가 그건 또 모양새가 좀 그래서….”

“…흐윽, 네?”

“꽤 오래 참았거든요. 후으…. 지은 죄가 있어서 좀 참아 볼까 했, 는데 잘 안되더라고.”

머리를 돌게 하는 냄새에 순간 희재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거친 손길에 휙 끌어당겨진 청아의 몸이 침대 위로 밀려 자빠졌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엉망으로 나부꼈다. 얇은 파자마 속으로 뜨거운 온도를 가진 손바닥이 스윽 밀려들어 왔다. 갑작스러운 감각에 청아가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말랑한 허벅지를 콱 쥐어 잡은 손이 한쪽 허벅지를 넓게 밀어 벌렸다.

방만하게 벌어진 한쪽 다리가 수치스러워 청아는 몸부림을 쳤다. 빠르게 내려간 속옷이 얇은 발목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꽉 다물린 틈을 비집고 단숨에 들어왔다. 고작 두 손가락일 뿐인데도 아래가 빠듯했다. 자고 일어난 탓에 한껏 수축한 음부가 손가락을 쪽 빨아 당겼다.

숨어 있는 음핵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자 청아의 몸이 펄쩍 뛰었다. 지나치게 서늘하고 차가운 손가락에 아래가 콱 조였다. 손가락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긴장으로 굳어 있는 아래를 비집고 들어 온 손가락은 음부에 길이라도 내듯 움직여 댔다. 내벽을 꾹꾹 눌렀다가 가볍게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쓸 만한 도구에 기름칠을 하는 듯한 행동에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식은 싫었다.

“…싫, 으흑… 싫어요. 그렇게 만지는 거. 흐….”

“일, 주일 만에 넣는 거잖아요. 아프다고 울 거 뻔한데…. 후으, 풀어 줘야죠.”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은 여린 구멍을 난잡하게 쑤시기 시작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조그마한 음핵을 톡톡 건드리자 뜨거운 속살에 끈적한 애액이 고여 들었고, 가볍게 손가락을 돌려 주자 투명한 실 한 가닥이 주룩 흘러내렸다. 가이딩에 용이한 몸은 반응도 빠르고 감도도 좋았다. 희재의 머리 위로 신음을 삼켜 대느라 끅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서도 완강히 거절하지 않는 순종적인 태도가 제 존재를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아 어여뻤다.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손가락을 받아 내던 청아는 아래를 가득 채운 이질감과 억압적인 분위기에 숨이 막혀 자꾸만 바르작댔다.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희재가 자꾸만 좁아지는 허벅지를 세게 억누른 뒤, 아래를 헤집던 손바닥을 홱 돌렸다. 좁은 내벽에 들어찬 세 개의 손가락이 음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다리를 오므리고, 허리를 비틀어 보아도 잔인한 손은 빠져나가지 않았다.

“물이 진짜 많네요. 이런 건 체질이겠죠?”

“흐… 응, 아니에요. 흐윽, 그런 거… 흐으.”

“지금 허벅지 안쪽까지 물이 튀었어요. 엉덩이 아래도 축축하게 젖은 지 오래고….”

“아응… 흐으… 응. 잠, 시만… 흐윽, 아! 거기 누르면 안, 흐으… 아… 으.”

“털까지 흠뻑 젖었네요. 진짜 좋은가 봐.”

커다란 손이 음부를 덮은 채 쓸어내렸다. 강압적인 쾌락에 청아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여러 개로 보여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희재의 팔뚝을 밀어내며 정신을 차리려 해 보았지만, 아래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에 결국 얼굴을 가리고 울어 버렸다. 은밀한 곳을 파고드는 혓바닥이 사막을 기어 다니는 미끈한 뱀처럼 온 구석을 헤집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은 청아가 조명등의 불을 꺼 버렸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왜 불을 끄고 그래요. 좋은 구경 하고 있었는데.”

“……흐으, 응. 읏. 불 켜지 마세요. 그냥 켜지 말고… 아!”

“이미 다 봤는데, 뭘 새삼스레 그래요.”

시커먼 어둠에 집어삼킨 사방이 두려웠다. 청아는 몰려오는 두려움에 희재의 팔뚝을 부여잡은 채, 아래를 헤집는 무자비한 혓바닥을 견뎌 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호흡이 내벽을 가득 채웠다. 스며 나오는 애액을 혓바닥으로 넓게 펴 바른 그가 흥분으로 솟아오른 음핵을 꾹 눌러 주었다.

짓궂은 혀 놀림에 천장이 뱅글뱅글 돌았다. 날을 세운 혀가 촉촉하게 오므라든 내벽을 쑤시며 제 공간을 넓혀 나갔다. 삽입이라도 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움직이는 혓바닥에 견디지 못한 음부가 조르륵 물을 쏟아 냈다. 끈적한 애액을 받아 마신 희재가 크게 입을 벌려 청아의 음부를 한입에 물었다.

강한 힘으로 빨아 삼키자 청아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머리를 밀어냈다. 지옥 같은 쾌감은 공포와 다를 바 없었다. 엉엉 울어 대는 청아의 허벅지를 제 어깨 위로 올린 뒤, 미끈한 콧대로 음핵을 뭉근하게 비볐다. 체액으로 흠뻑 젖은 내벽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나 청아 씨 걱정 많이 했거든요. 오랜만이라고 못 받아 내면 어쩌나….”

“응, 으응…. 힉.”

“근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다정한 말로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희재가 무섭게 느껴졌다. 지옥 같은 쾌감이 청아를 절벽으로 밀어붙였다. 한참 동안 내벽을 눌러 대던 혓바닥 옆으로 그의 손가락이 밀고 들어왔다. 아래가 벌어지는 감각에 호흡이 턱 틀어막혔다.

줄기차게 구멍을 누비는 두 개의 손가락과 음핵을 쪽쪽 빨아 올리는 입술에 결국 저항이 잦아들었다. 힘없이 널브러진 청아의 다리를 제 허리춤에 끼운 희재가 눅진하게 젖은 구멍 안으로 뭉툭한 살 기둥을 단번에 삽입했다. 쫀득한 내벽이 성기를 따라 크기를 늘리며 뻐끔뻐끔 입을 열었다. 배를 누르는 이물감이 불편해 자꾸만 허리를 뒤틀자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끌어당겼다.

“더 깊게 넣어도 돼요? 나 더 들어가고 싶은데.”

“…아니, 안… 지금도 너무… 깊어요. 안에, 닿… 닿을 거 같아서.”

“아직 안 닿았잖아.”

축축하게 달라붙은 속살에 허리를 쳐올리던 희재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더욱 깊게 접합부를 가져다 댔다. 실컷 참았다 터트리는 가이딩은 또 다른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날카롭게 서 있던 파동이 잔잔해질수록 몸에 닿는 쾌락은 배가 되었다. 칼날처럼 서늘한 파동이 지나간 자리에 불처럼 뜨거운 쾌락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처음 보는 희재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은 극렬한 쾌락에 불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청아는 입이 헤벌어진 채, 막무가내로 아래를 치받는 희재를 힘겹게 감내했다. 아니, 감내가 아니었다. 청아 또한 쏟아지는 쾌감을 허겁지겁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단한 허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조그마한 발이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오그라들었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바스대는 몸을 단번에 뒤집은 그가 뒤에서부터 성기를 밀고 들어왔다. 갑자기 바뀐 자세에 놀라기라도 한 건지 아래가 꽉 수축했다.

“하아… 이제 좀 끝까지 닿는, 거 같죠? 안쪽이 다 녹아서…. 아… 진짜 좋네.”

축축하게 젖은 시트에 닿은 배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처음의 정사와는 완연히 달랐다. 희재의 얼굴 따윈 볼 수도 없게 침대에 낮게 엎드린 자세였다. 모든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인영이 단번에 사라지자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뒤에서 몸을 부딪쳐 오는 게 꼭 희재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골반에 닿아 오는 서늘한 손과 익숙한 향기는 그가 맞다며 타일러 주었다. 엉덩이를 추켜올린 채, 시트를 부여잡은 청아가 손끝까지 덜덜 떨어 댔다. 가여운 모습이었지만, 가이딩에 대한 열망과 이름 모를 정욕이 희재의 눈을 가렸다.

조붓하게 다물어진 틈새로 커다란 살 기둥이 수월하게 진입하기 시작했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내벽이 뜨끈했다. 벌써부터 자신의 에스퍼를 알아보듯 오물대는 음부가 기특했다. 머리를 돌게 하는 흡족한 가이딩에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희재가 끓어오르는 호흡을 뱉어 내며 입을 열었다.

이리저리 뒤틀리는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희재가 한껏 발기한 성기를 푹푹 쑤셔 박았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폭풍 같은 쾌감에 청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음부에 꽉 들어찬 질량감이 자꾸만 아랫배를 꾹 눌러 댔다. 머리를 돌게 하는 흥분감에 새하얗고 가녀린 등 위로 입을 맞췄다. 쪽, 쪽. 척추를 타고 내려갈 때마다 청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허리를 세워 목덜미를 파고든 희재가 뽀얀 목덜미에 제 흔적을 새기며 깊게 파고들었다.

“배가… 이상, 해…. 흐윽, 꽉 차서… 그만… 그만, 아!”

“후으…. 뿌리 끝까지 다 들어가서 그래요. 조금만 참아.”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여 오는 삽입을 멈추려 청아가 시트를 부여잡고 침대를 기어갔다.

후윽, 흐…. 안 돼, 더는 안 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헤드를 부여잡기도 전에 뒤에서 훅 끌어당기는 강한 힘에 청아의 고개가 단번에 베개에 처박혔다. 결국,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청아가 눈물을 쏟으며 희재를 받아 냈다.

어쩐지 그를 위한 도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청아의 존재는 도구였다. 그토록 부정하고 있던 제 쓰임을 인정하자, 희재를 견뎌 내는 게 너무도 버거워졌다. 닿지 않는 마음이 자꾸만 바닥으로 추락했다.

* * *

그날 밤은 꼭 끔찍한 악몽 같았다. 격렬했던 정사 이후, 희재의 파동은 안정적인 흐름을 되찾았고,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다시 다정하게 웃었다. 파동의 영향을 받은 그가 잠시 난폭해졌던 것뿐이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인 청아는 하루하루 지독했던 밤을 지워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침대에 누워 홀로 마음을 다독이던 청아를 깨운 건 희재의 전화였다.

연락을 받고 도착한 곳은 압구정에 있는 한 레스토랑이었다. 그와 바깥에서 식사하는 건 꽤 오랜만이라 괜스레 긴장됐다. 엘리베이터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던 청아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입구 앞에 서 있던 매니저가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희재가 미리 언질이라도 해 둔 모양이었다. 익숙지 않은 환대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A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희재가 작게 손짓했다. 출장을 다녀왔다더니 평소완 다른 옷차림에 눈이 갔다. 어두운 정장이 아닌, 부드러운 니트와 아래로 자연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머리가 한층 더 그를 돋보이게 했다. 매끈한 피부와 가지런히 내려앉은 희재의 속눈썹을 바라보던 청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부르셨어요?”

“그냥. 청아 씨 밥도 먹일 겸.”

“…저 밥은 잘 챙겨 먹는데….”

“보통 시리얼은 밥이라고 안 해요, 청아 씨.”

바쁜 희재 탓에 늘 저녁은 혼자 해결해야 했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신선한 재료와 손쉬운 밀키트를 들여다봐도 그다지 식욕이 돌진 않았다.

“여긴 간도 세지 않고, 재료들이 싱싱해서 청아 씨도 좋아할 거예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디저트도 유명한 곳이니까 기대해요.”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먹는 저녁은 즐겁고 따듯했다. 희재가 특별히 신경 써서 골라 준 음식들은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 조그만 볼이 빵빵하게 터질 만큼 음식을 밀어 넣는 청아를 본 희재가 눈을 해죽이며 웃었다.

“잘 먹으니까 좋네요.”

깨끗이 비워진 접시를 바라본 희재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식사를 자주 거른다는 이모님의 말이 못내 신경 쓰여 청아를 불러냈다. 다행히도 예전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시종일관 눈을 접으며 웃어 댔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도 곧잘 했다. 접시들이 치워진 자리에는 보기만 해도 달콤해 보이는 디저트가 자리했다.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 희재는 제 몫의 디저트까지 청아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사실, 오늘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할 말이요?”

디저트를 떠먹는 청아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던 희재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이 다가올 불안을 감지하듯, 덜덜 떨려 왔다.

“아무래도 청아 씨한텐 직접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건 새하얀 봉투였다. 안에 든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섬세하게 감싸져 있음에도, 어쩐지 그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든 청아가 아주 느릿하게 봉투를 열었다. 청첩장이었다. 반듯하게 적어진 그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여자의 이름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었다.

“조만간 약혼식이 있을 거예요.”

“…….”

“형식적인 거죠. 서로 좋아서 하는 약혼은 아니에요. 뭐, 이 바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청아 씨도 이해해 줄 거라 믿어요. 이번 대표이사 취임 건 저한텐 정말 중요하거든요.”

청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테이블 아래로 내려 감췄다.

숨을 곳을 찾지 못한 투명한 눈동자만 하염없이 테이블 위를 방황하는 중이었다. 희재와의 짧았던 인연을 뒤로한 채, 다시 한중원의 저택으로 들어가게 될 자신을 상상하자 잠시 머리가 핑 돌았다. 그건 청아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가정이었다.

“…축하드려요. 저, 정말로….”

“…….”

“아… 그럼 저는 언제쯤 집에서 나가면 되나요? 약혼하시게 되면 아무래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희재가 매끈하게 뻗은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마치, 청아가 지금 이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전 앞으로도 청아 씨가 필요해요. 말했잖아요? 약혼은 형식적인 거라고.”

“…네?”

“나한텐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가이딩이 필요해요.”

“…….”

“그건 제가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요. 우리 관계는 지금이랑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보다 배로 더 끔찍하고 커다란 불행이 아가리를 벌린 채, 청아를 잡아먹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잔인한 말을 내뱉는 얼굴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흔한 케이스는 아니었지만, 가이딩과 혼약 상대를 별도로 두는 사람들도 종종 있긴 했다. 하지만, 희재만큼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그를 이해하려 해 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에 청아는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도려낸 제 심장을 발로 짓밟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피스텔에 갇혀,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희재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눈앞이 아득해져 왔다. 계약에 묶인 몸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쉽게 쓰다 버리는 휴지 같은 존재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청아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희재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상처받지 않았을 거라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약혼을 얘기하는 희재에겐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는 그저 원하는 걸 가질 뿐이었으니까. 알고 있었다. 욕심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 제 마음이 문제였다.

“청아 씨는 지금처럼만 계속 제 옆에 있으면 돼요. 그래 줄 거죠?”

애틋하도록 아름다운 희재의 눈매가 청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손쉽게 청아의 존재를 가깝고도 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가이딩을 위한 가이드라는 걸 또 한 번 공고히 새기는 듯한 태도였다. 습관처럼 내뱉곤 했던 괜찮다는 말도 목구멍에 턱 걸린 듯, 튀어나오지 않았다.

청아에겐 희재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희재에게 몸을 부딪치고 살을 섞는 행위란 그저 가이딩에 불과하였다. 청아가 품어 온 마음과는 명백하게 다른 의미였다. 계약의 시작부터가 그러했으니 누구를 탓할 것도 못 되었다. 두 사람 사이로 또렷하게 그어진 선이 청아를 점점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뒤로 더 걸어간다면,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게 분명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집으로 돌아온 희재는 익숙하게 청아의 옷을 벗겨 냈다. 반쯤 넋이 나간 청아는 제 옷이 벗겨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주춤거렸다. 작은 몸을 돌려세운 희재가 가녀린 등을 꾹 눌러 벽에 붙였다. 드러난 이마가 차가운 대리석에 툭 하고 닿았다. 약혼, 약혼…. 도무지 잊히지 않는 그 단어가 자꾸만 떠올라 일순 거부감이 치밀었다.

등 뒤에서 청아의 몸을 모조리 덮은 희재가 치마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잔뜩 오므라든 질구 안으로 쭉 뻗은 손가락 두 개가 파고들어 왔다. 아릿하게 밀려오는 고통에 벽에 기댄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끔찍한 아픔도 잠시, 툭 튀어나오는 음핵을 끊임없이 어루만지는 손길에 결국 아래가 젖었다.

“금방 젖으니까 서로 편하네요.”

“아, 잠시… 흑, 잠시만요.”

차갑게 굳어 버린 마음과 달리, 가이딩에 익숙해진 몸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희재의 손가락이 벌름대는 음부 위로 끈적한 애액을 고루 칠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청아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신음을 참아 냈다. 억지로 불을 댕기는 손길에 활활 타오르는 제 몸이 야속하기만 했다.

지나친 흥분에 무릎이 툭툭 무너져 내렸다. 휘청이는 몸을 부여잡고 있던 희재가 곧장 청아의 몸을 돌려세웠다. 벽에 등을 기대자 한결 편해졌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지난밤과 같이 식지 않는 정염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자꾸만 눈을 피하는 청아를 유심히 바라보던 희재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약혼하는 거 신경 쓰여요?”

“…….”

“딱히 청아 씨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에요. 그냥 형식적인 거니까.”

억지로 눈을 맞춘 희재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청아가 다급히 너른 어깨를 부여잡았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공격적인 빛을 숨기지 못한 채, 청아를 올려다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황급히 몸을 피하려는 찰나, 삽시간에 자세를 낮춘 그가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지금처럼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돼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차지게 달라붙은 속살을 잡아 벌린 희재가 번들거리는 외음부 위로 입술을 비벼 왔다. 키스라도 하듯, 문대져 오는 입술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다른 여자랑 약혼하겠다는 말을 내뱉던 바로 그 입술이었다. 끔찍했다. 이건,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러나 그의 혓바닥 위로 물을 질질 뱉어 내는 자신이 배는 더 끔찍했다.

“여기서 좋은 향기 나는 거 알아요? 후으….”

“잠시만요. 희재 씨. 히익, 저 이거 시, 싫어요…. 흐읍.”

아래를 빨아 대는 입술이 싫은 것인지, 그가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 게 싫다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비틀대던 한쪽 다리가 희재의 어깨에 올라간 채로 벌어졌다. 오로지 한쪽 다리로 버텨대던 청아가 결국 모든 힘을 풀고 희재의 상체에 하반신을 기댔다. 매끈한 입술 위로 축축이 젖은 음부가 척 달라붙었다. 등에 벽을 딱 붙인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대며 저항했지만, 꼭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하아, 근데 좋아하게 될 거예요. 내가 이젠 청아 씨 몸을 잘 알 것 같거든.”

“흐으…. 아! 흐으, 읍.”

“거봐, 내가 좋아할 거라 했잖아.”

흥분을 끌어내는 자극적인 말들이 청아에게 아프게 박혀 들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과 마음의 괴리가 고통스러웠다. 맹렬한 감각에 참았던 숨을 뱉어내기도 전에 습한 숨결이 음부에 와 닿았다. 조그마한 음핵이 그의 입안에서 멋대로 굴려졌다. 흡입하듯 쭉쭉 빨아 당기자 청아가 저도 모르게 허벅지로 희재의 머리를 조였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이대로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날을 세운 이빨이 음핵을 슥 긁고 지나갈 때마다 청아는 허리를 비틀며 울어야 했다. 초옥, 촉. 소리를 내며 음부에서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청아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청아를 밀어 눕힌 희재가 말랑한 허벅지를 잡아 반으로 눌렀다. 시야에 드러난 구멍이 벌름거리고 있었다. 선액으로 젖은 귀두를 촉촉한 틈 사이로 끼워 맞춘 후, 위아래로 가볍게 치댔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음부가 숨을 할딱거릴 때마다 움찔거리기를 반복했다. 꼿꼿하게 일어선 성기를 맞추고 단번에 밀어 넣자 커다란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아래를 꿰뚫는 감각에 손으로 바닥을 긁던 청아가 습관처럼 아랫배를 부여잡았다. 반으로 완전히 접어진 하체 탓에 유달리 더 깊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벽을 꽉 채운 질량감에서 벗어나고자 마구잡이로 다리를 버둥댔다. 그러자 억센 손이 양 무릎을 더 강하게 내리눌렀다.

“후으…. 끝까지 다 들어갔어요.”

“아흑…. 아, 안 돼…. 너무 깊…. 아!”

청아의 비명에 몸을 숙인 희재가 눈물로 짓무른 눈가를 다정하게 핥아 대기 시작했다. 연인처럼 다정한 행동에 자꾸만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인정사정없이 쑤셔 발기는 성기는 포학한 짐승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박을 때마다 착착 달라붙는 속살에 희재가 낮은 숨을 내뱉었다. 터질 듯이 좆을 조여 오는 쫀득한 아래가 빠듯했다.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양 무릎을 잡아 좌우로 넓게 벌린 뒤, 다시 삽입을 반복했다. 희재의 성기 모양에 맞게 착실하게 오므렸다 벌어지는 질구가 단단한 살 기둥 위로 쩍쩍 들러붙었다.

골반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퍽 당기자 청아가 발버둥을 쳤다.

“청아 씨, 랑 가이딩 하는 거… 후으, 진짜 잘 맞는 거 같아요.”

“응, 읏…. 흐윽, 아!”

“느낌 진짜 좋다. 할 때마다 씹을 듯이 조, 이는 게…. 하아.”

희재는 아픔이 아닌 쾌감이란 걸 알려 주기 위해 더 집요하게 제 것을 넣었다.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본능적인 소유욕이 마음 깊은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푹푹 짓이길 때마다 어느새 제 몸에 딱 맞춰진 듯한 음부가 아래를 축축하게 빨아 왔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여자의 에너지가 제게로 생동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울리는 짜릿한 감각이 온 신경을 자극하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땀으로 젖은 목덜미에 얼굴을 박은 희재가 희미하게 각인이 남아 있는 살결을 쪽쪽 빨아 당겼다.

“후으…. 아래는 완전 젖, 었는데…. 그렇게 아파요?”

“흐으, 아파…. 응, 하윽…. 아파요, 희재 씨이… 흐.”

“그럼 다, 음엔 더 빨아 줘야겠, 네. 아직 제대로 길이 안, 들어서… 그런가 본데…. 하아. 다리 좀 더 벌려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희롱하듯 던져지는 말과 따듯하게 내려앉는 입술의 괴리가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자극적인 성교에 길든 몸은 눈치도 없이 애액을 줄줄 뱉어 냈다. 투명하고 끈적한 실이 늘어났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희재의 이중성이 청아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차라리 가이드로 막 대해 주었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일말의 기대도 품지 못하게, 그렇게…. 그러나, 희재는 변함없이 다정할 뿐이었다. 이 관계에서 마음이 변한 건 오로지 청아뿐이었다.

“으흑… 아! 응, 읏… 응!”

“앞으로도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요. 청아 씨, 후으…. 나한테 가, 이드는 청아 씨뿐인 거 알잖아.”

대답을 요구하는 허리 짓이 제법 흉악했다. 청아는 사정없이 치받아 오는 성기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래로는 줄줄 물을 쏟으며 그를 받아 내는 자신이 불쌍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며 느껴야 할 감정은 아니었다.

“제대로 대답해야죠. 응?”

“흐…윽, 네. 그… 럴게요. 흐읏.”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산산이 조각나는 애정이 아프게 가슴을 찔러 왔다. 끈적한 액체가 허벅다리를 흠뻑 적심과 동시에, 청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겨들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점멸하는 시야가 순식간에 청아를 집어삼켰다.

욱신거리는 몸에 인상을 찌푸린 청아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넥타이를 매고 있던 거울 속의 희재와 두 눈이 마주쳤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안정적인 파동이 느껴졌다. 산뜻한 미소로 다가온 희재가 손을 뻗어 청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요.”

한순간에 나락으로 처박힌 청아와는 달리, 그는 몹시 좋아 보였다. 어제의 일로 상처받은 건 오로지 청아 하나뿐임을 다시 한번 되새겨 주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함부로 찢겨 나간 마음이 아파, 희재의 눈을 더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청아 씨, 예약 있다고 센터장한테 연락 왔었어요. 12시에 차 보낼 테니까 그거 타고 다녀와요.”

“…네.”

“컨디션 관리 잘하고. 혹시 무슨 일 있거든 바로 말해요.”

미소 짓는 얼굴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다시 심장이 뛰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희재의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괴로운 마음을 품은 채, 그와의 가이딩을 이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청아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 * *

VIP실의 문을 열자 커다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센터장의 취향과는 제법 거리가 멀어 보이는 록 음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자리인 것처럼 자리를 잡은 이원이 양다리를 테이블에 올린 채, 까딱거리고 있었다.

“센터장님은?”

“회의 때문에 잠깐 나갔어요. 끝나면 바로 온댔으니까 기다려요.”

“그래. 그럼 복도에 나가 있을게.”

“여기 앉아요. 30분 정도 걸린댔으니까.”

청아는 굳이 자리를 피할 이유도 없어, 가운데 자리한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이리저리 큐브를 돌리던 이원이 청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누나, 유부녀예요?”

“…나? 유부녀 아닌데.”

“가이딩하는 에스퍼 있잖아요. 아, 그럼 애인인가?”

저번 가이딩 테스트 때, 센터장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묻는 듯했다. 유부녀, 애인. 청아는 희재에게 그 어떤 존재도 되지 못했다. 필요에 의해 사용하는 가이드. 그 정도의 의미가 딱 적당했다.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이자 이원이 의아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유부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데…. 뭐야, 그럼.”

“…그냥 매칭률이 높아서 그렇게 됐어. 내가 돕는 거야.”

“퍽이나.”

돕는다는 말에 이원이 코웃음을 쳐보았다. 한참이나 큐브를 달각거리던 그가 책상에 올린 발을 내렸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너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다고 하지 않았어?”

“아, 나이 얘긴 지겨우니까 됐고, 잠깐 손 좀 줘 봐요. 가이딩 한 번만 더 해 보게.”

“…내가 왜?”

“아니, 나 B급이랑 매칭 해 본 건 처음이거든. 궁금하잖아요. 매칭률도 뭐 생각보다 나쁘지도 않고.”

“싫은데…. 나 에스퍼 있어.”

“누가 뭐래요? 나 지금 파동 불안정한 거 안 느껴져요? 잠깐만 도와 달라는 거잖아.”

빨리요. 맡겨 놓은 돈이라도 요구하듯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눈을 흘겼다. 청아의 매정한 반응에 혼자 발을 구르던 이원이 계속해서 볼멘소리를 했다. 가이딩은 희재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그게 단순한 접촉 가이딩이라 할지라도, 희재에게 줄 에너지를 타인에게 나눠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것마저 앞으로는 못 하게 되겠지만.

“아, 이 누나 진짜 매정하네.”

“…….”

“누나, 그 남자 좋아하죠.”

“뭐?”

“그렇잖아. 말 들어 보니까 단순한 아르바이트도 아닌 것 같던데, 각인까지 해 가면서 목숨 같은 에너지를 퍼 준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와의 가이딩은 엄연히 계약 사항이었을 뿐이다. 굳이 깊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민감한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맞네. 좋아하는 거.”

정곡을 찔린 청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짓궂은 질문에 입을 꾹 다물고는 대답을 회피하자 이원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한참이나 웃던 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청아의 손을 휙 끌어당겼다. 당황해 손을 빼내려 하자 깍지까지 껴 더 강하게 힘을 줬다.

“…뭐 하는 거야?”

“나 가이딩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요? 지금 좀 어지러운데….”

“싫어. 내가 왜? 빨리 손 놔.”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요? 딱 5분만. 어?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손 놓으라고.”

“나 오늘 급히 주사 맞으러 온 거라고요. 이모 오려면 한참이나 멀었는데 진짜 아파서 그래요.”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매사 막무가내였다. 덩치도 큰 주제에 어찌나 징징거리는지 청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로 각인이 되어 있질 않으니, 이원의 파동을 정확히 감지해 낼 순 없었다. 딱히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았지만 하도 조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지럽다고요. 갑자기 속도 답답하고 머리도 지끈거려. 어?”

단순한 접촉 가이딩일 뿐이었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이 없었던 걸 생각해 보면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찝찝하긴 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을 눈앞에 두고 별다른 수도 없었다. 수락이 떨어질 때까지 졸라 댈 기세에 지친 청아가 결국 손을 내밀고야 말았다.

“딱 5분이면 돼요.”

마지못해 떨어진 수락에 이원이 밝게 웃으며 스톱워치를 켰다. 새하얀 볼에 폭 패인 보조개를 보자 그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이 다시금 실감 났다. 손을 마주 잡자 불안정한 파동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의 말처럼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이딩 하는데 왜 자꾸 움직이는 거야?”

“…뭐, 난 움직이는 것도 안 돼요?”

자꾸만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몹시 거슬렸다. 손이 되게 작다는 둥, 이 손가락으로 젓가락질은 어떻게 하느냐는 둥,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던 이원이 순간 맞잡은 손에 작게 힘을 주었다.

“…누나 에스퍼라던 사람, 연희재 맞죠. 청우그룹 전무. 저번에 지나가다 본 적 있어요.”

“…어?”

“안 그렇게 생겨서 누나도 얼굴 존나 보는구나. 뭐, 그건 나도 그러니까….”

“…….”

“근데 나 정도면 연희재한테 안 꿀리지 않아요?”

당황해 말문이 막힌 청아와 달리, 이원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며 웃기만 했다. 청아가 손을 빼내려는 찰나, 스톱워치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약속대로 손을 놓아준 이원이 마주 앉은 청아의 얼굴을 천천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내려앉은 속눈썹과 처연한 눈매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연 있어 보이는 이 허연 얼굴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그 사람이랑 다른 가이딩도 했어요?”

당돌한 말이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청아가 팍 인상을 구겼다.

“정이원.”

“아, 농담. 알았어. 미안해요.”

청아는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능청스레 웃어 대는 이원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꾸 장난치지 말라고 한마디 해 주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청아 씨,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갑자기 회의가 잡혀서….”

“괜찮아요.”

“이원이 넌 왜 여깄어? 약은 받았어? 주사 싫대서 약으로 새로 처방해 줬잖아.”

새하얀 서류를 한가득 들고 책상으로 다가온 센터장이 이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약은 이미 받았지.”

“받았으면 얼른 집에나 들어가. 청아 씨 주사 맞아야 하니까.”

대화를 듣던 청아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원을 노려보았다. 옅은 속쌍꺼풀이 진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테이블에 널브러진 가방을 집어 든 이원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줄곧 청아의 얼굴에 꽂힌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래요. 우리 청아 누나 안 아프게 잘 좀 부탁할게요.”

“쟤가 진짜…. 이원이가 뭐 괴롭힌 건 아니죠? 나쁜 애는 아닌데 장난기가 많아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흘겨보던 센터장이 미안하다는 듯 청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오늘은 주사만 맞으면 되죠?”

“네. 아 참, 저번에 가이딩 하고 나서 잠깐 어지러웠다고 했었죠?”

“…갑자기 확 어지러워져서 좀 놀랐어요. 그런 적은 처음이라….”

“일반적인 가이딩 부작용이에요. 지나치게 에너지를 흡수당하면 간혹가다 그럴 수 있어요.”

어둡게 가라앉은 청아의 얼굴을 확인한 센터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센터장님, 저… 각인 해제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청아의 물음에 주사기를 들어 올리던 센터장의 손이 턱 멈췄다. 초라하고 비겁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몹시도 부끄러워졌다.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희재와의 가이딩은 늘 벅차고 힘들었다. 좋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때때로 가혹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짧게나마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희재의 다정함이 좋아 그 모든 걸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제 것이 될 수 없는 다정함은 그저 달콤한 독에 불과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는 희재의 곁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 * *

어두운 표정을 애써 숨긴 채, 거실로 발을 들여놓자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희재가 말을 건네 왔다.

“좀 늦었네요?”

“아…. 예약이 조금 밀려서요.”

“뭐라고 하던가요? 요즘 안 좋았잖아.”

“아, 저번에 가이딩 테스트로 확인해 보니까 다행히 가이딩 때문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지나치게 가이딩 하다 보면 한 번씩 그럴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가이딩 테스트요? 난 처음 듣는 얘기인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던진 희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냥 손만 잡고 파동 체크하는 건데, 생각보다 결과가….”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건만, 몸을 감싸 오는 희재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청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눈치를 보던 청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희재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계약에 길 가던 아무나 붙잡고 가이딩 해도 된다고 적혀 있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요?”

“아, 그게 아니라… 센터장님이 잠깐 도와 달라고 하셔서요. 그냥 잠깐 손, 손만 잡고….”

“난 내가 원할 때 가이딩 받으려고 청아 씨 데려온 거예요.”

“…….”

“그런 건 좀 알아서 끊어 낼 수 없어요? 해 달라고 다 해 주지 말고요.”

어둡게 가라앉은 희재의 눈빛을 보자 청아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원체 가이딩에 예민한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모습은 처음이라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게다가 오늘은 희재의 허락도 없이 이원을 도와줬다. 그가 알면 싫어할 게 분명했다. 어쩐지 미안해져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 송해요. 앞으론 조심할게요.”

“사과받자고 한 얘기 아니에요. 조심하란 거지.”

발걸음을 옮겨 스쳐 지나가려는 희재에게서 불안정한 파동이 느껴졌다. 그의 손을 잡아 뭐라도 해야 하는데 좀처럼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희재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게 제 가이딩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딩으로 자신의 쓸모를 다시금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던 청아가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갈수록 파동이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해요? 컨디션도 바닥이고…. 이러면 가이딩 할 때, 청아 씨도 힘들어져요.”

새하얗게 질린 청아의 얼굴을 확인한 센터장은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눕혔다. 팔뚝을 뚫고 들어오는 굵은 바늘이 고통스러웠다.

“…앞으론 더 신경 쓸게요.”

“희재 씨랑은 얘기해 봤어요?”

“아직이요. 제가 잘 얘기할 테니까…. 당분간은 비밀로 해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센터장이 방 안의 커튼을 쳤다.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이라 그리 어둡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링거 한 대 맞고 푹 자요. 주말 지나고 한 번 더 내원하시고요.”

“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아가 힘없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희재의 약혼식이 벌써 코앞으로도 다가와 있었다. 과연 그와 예전처럼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이 괴로운 마음으로 그게 가당키나 할까.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수액을 멍하니 바라보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방안은 깜깜한 어둠에 잠긴 지 오래였다. 발작하듯 몸을 일으킨 청아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혼자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호흡이 턱 막혀 왔다. 서둘러 침대에서 빠져나오려는 순간, 구석에 앉아 있는 흐릿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에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하자, 긴장이 탁 풀렸다.

“누나, 악몽이라도 꿨어요?“

어둑해진 병실의 불을 켜고 돌아온 이원이 침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이원은 언제나처럼 껄렁껄렁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누나 오늘 생일이에요? 여기 적혀 있다.”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자고 있는데 왜 멋대로 방에 들어와서….”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사 줄게요.”

이원이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실실대며 웃는 꼴을 휙 째려본 청아가 팔 위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창고를 뜯어내곤 몸을 일으켰다. 5시간을 내리 잔 탓에 머리가 몽롱했다.

“…나보다 어린 사람한테 밥 얻어먹을 마음 없어. 그러니까 나와.”

몸이 휘청했지만, 간신히 침대 헤드를 부여잡고 널브러진 구두를 신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누나보다 돈은 더 많을 거 같은데.”

“…비켜.”

“그 정도 보답은 하게 해 주지? 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요. 응?”

“…나한테 관심 있어?”

결국 불편함을 참지 못한 청아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길길이 날뛰며 아니라고 할 게 뻔해 던져 본 건데 예상과 달리, 이원은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다. 청아를 따라 냉큼 의자에서 일어난 이원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맹하게 생겼는데 눈치는 빠르네. 맞아요, 앞으로 더 생길 거 같기도 하고.”

“…너랑 나, 만난 지 얼마 안 됐거든?”

“알아요, 근데 그게 뭐. 내가 뭐 누나 없으면 죽겠다고 매달린 거 아니잖아요. 아직은 호감이라니까.”

“…….”

“가자, 누나. 응?”

떡 벌어진 어깨로 히죽대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자 이원이 성공했다는 듯, 눈웃음을 치며 청아의 옷 소매를 잡아끌었다.

희재가 아닌 다른 사람과 바깥에 나온 건 몇 달만이었다. 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골목에 위치한 조그마한 이자카야였다. 이제 막 퇴근이라도 하고 온 듯,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얼큰하게 취해 있는 모습들이 꽤 즐거워 보였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면 어쩌면 자신도 저 왁자지껄한 틈바구니에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부러움에 눈을 떼지 못하던 청아를 힐끗 바라본 이원이 장난스레 하얀 볼을 쿡 찔렀다.

“뭘 그렇게 봐요?”

“…아냐.”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청아가 물처럼 술을 들이켜는 이원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째서 1년을 꿇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누나, 가이딩 센터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죠.”

“…응, 어떻게 알았어?”

“그럼 내가 못 봤을 리가 없을 테니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어 대는 이원의 시선을 피해 청아가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나저나… 대체 연희재랑 무슨 사이예요? 애인도 아니라며.”

술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무슨 사이냐고……. 사실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가이딩을 목적으로 팔려 온 계약 관계,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남들은 비록 그렇게 얘기할지라도 자신만큼은 그런 식으로 희재와의 관계를 규정짓고 싶진 않았다.

“…그냥 나 혼자서 좋아해. 그게 다야.”

분에 넘치는 욕심인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포장하고 싶었다. 그래도 이편이 더 보기 좋았다. 반쪽뿐인 마음일지라도 덜 비참했으니까.

“무슨 씨발, 그딴…. 연희재는 알아요?”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 그냥 나 혼자… 나 혼자 그러는 거야.”

분홍빛으로 물든 볼을 아니꼽게 바라보던 이원이 작게 욕설을 지껄였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과 부드러운 머리카락, 그리고 약간은 부푼 듯한 아랫입술까지. 지독하게도 제 취향이었다. 청아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보던 이원이 뜨거워진 귀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뭐, 내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박살 나겠는데?”

“…뭐?”

“나랑 종종 놀자고요. 혹시 알아? 그러다 나한테 홀랑 넘어올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이원이 다시 한 번 청아의 볼을 콕 찔렀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어차피 애인도 아니잖아요.”

“…정이원.”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아, 맞다…. 뭐, 원하는 거 있음 말해 봐요.”

이원의 말에 청아는 자신조차 깜빡 잊고 있던 생일을 기억해 냈다.

“가이딩 해 준 보답으로 얼마든지 내가….”

생일…. 청아에겐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허울뿐인 가족도, 같이 지내는 희재도 모르고 있는 생일이었다. 익숙한 일이라서 그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이원에게 생일을 축하받고 있다는 처지가 사무치게 서러워졌다. 갑자기 가슴이 멍이라도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어? 뭐야. 왜… 울어요. 갑자기 왜 이래, 이 누나.”

“흐으… 윽.”

“아… 왜 그래, 미치겠네, 진짜.”

갑작스러운 청아의 눈물에 당황한 이원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지둥 댔다. 작게 떨리는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막막한 마음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낮은 한숨만 내뱉었다.

흘끔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청아가 재빨리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 내도 눈물이 도통 잦아들지 않았다. 사실은, 너무도 간절히 희재의 곁에 있고 싶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약혼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생일 따위 챙겨 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옆에만 있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욕심이 청아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이리저리 휘청이는 몸을 부축해 일으킨 이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혹시라도 넘어지기라도 할까,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충 만 원짜리 몇 장을 집어 던지고 택시에서 내린 뒤, 아파트 입구에 있는 벤치에 청아를 앉혔다.

“아, 괜히 술 사줬어.”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한숨을 내쉬던 이원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청아가 제법 정신이 돌아온 듯,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이원이 애써 헛기침을 뱉으며 청아를 일으켜 세웠다.

“들어가요, 누나. 술 깨면 나한테 사과할 준비 단단히 하고. 알겠지?”

이원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제 가. 나도 들어갈 거야.”

“가는 거 보고. 나 그 정도 매너는 있거든요?”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청아를 이원이 폭 껴안았다.

“생일 축하해요. 아까부터 이 말 해 주고 싶었어.”

갑작스러운 행동에 청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손을 들어 이원의 가슴팍을 몇 번이나 밀어냈지만, 그는 떨어져 나갈 줄을 몰랐다.

“…놔.”

“지금은 다른 뜻으로 안는 거 아니에요. 그냥 축하해 주고 싶어서…. 진짜 그게 다예요.”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쓱쓱 쓸어내리자, 바르작대던 청아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위로가 너무 오랜만이라 가슴이 콱 조여들었다. 한 번도 가져 본 적은 없었지만, 남동생이 있다면 꼭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따듯하고 아늑한 품이었다.

“…이제 진짜 놔.”

“나 벌써 누나 보내기 싫은데 어떡하지?”

그러나, 좀처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 이원의 태도에 작게 한숨을 내쉰 청아가 운동화를 발로 살짝 내리밟았다. 곧, 머리 위로 앓는 소리가 났다.

“아… 너무하네. 위로해 준 거잖아.”

청아는 엘리베이터까지 함께 타겠다는 이원을 억지로 돌려보내고 힘겹게 버튼을 눌렀다. 차가운 거울에 이마를 맞대자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는 듯했다.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서자, 싸늘한 정적이 청아를 반겼다. 어둠에 잠긴 거실은 늘 그렇듯, 적막하고 외로웠다. 그는 또 늦을 모양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방 앞으로 다가가자 문틈 사이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불은 안 끄고 나갔었나…. 의아한 마음에 문고리를 돌리며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대체 뭐하고 돌아다니길래 이렇게 늦게 와요. 집에 오자마자 찾았는데.”

커다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희재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 가이딩 때문이죠. 오늘 꽤 힘들었거든요.”

희재가 자신을 찾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였다. 가이딩. 뻔히 알면서도 이유를 물은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앞으로 다가온 희재가 여린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하고 밀었다.

“참. 다른 새끼랑 시시덕거리면서 노는 건 좋은데, 가이딩 할 에너지는 남겨 놔요. 안 그럼 내가 못 하잖아.”

“…네?”

“돈까지 내고 데려온 건데 순번 뺏기면 짜증 나니까.”

거리를 좁힌 희재가 성큼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막 씻고 나온 그에게선 늘 상쾌한 비누 향기가 났다. 차가운 말투와 눈빛에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이유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그가 딱 그만큼 한 걸음 더 좁혀 왔다. 벽으로 몰아붙여 세워진 청아가 눈을 굴리며 희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오해예요. 그런 게 아니라….”

“왜 이렇게 갈수록 말을 안 듣지?”

처음부터 동등한 위치에 놓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희재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하대한 건 처음이라 청아의 기분이 확 젖어 갔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저도 모르게 다가오는 입술을 확 피해 버렸다. 명백한 거부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청아 씨 돈 받고 팔려 온 거예요. 난 가이딩이 필요해서 당신을 선택한 거고.”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여기 왜 와 있는 건지 잊었어요? 가이딩 하러 왔잖아.”

“……아, 안 할래요…. 오늘은… 하기 싫어요.”

계속되는 청아의 거부에 허리를 일으켜 세운 희재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피곤하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술에 취해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복받쳐 올랐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흐윽, 못 해요. 더 못 하겠어.”

“하란 대로 말 잘 듣다가 왜 갑자기 이러냐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뜨거움이 온 가슴을 아프게 불태우고 있었다. 마음을 고백해선 안 됐다.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더는 말릴 새도, 막을 수도 없었다.

“좋…. 아해요. 내가 희재 씨를… 좋아해서… 흐윽, 그래서 더는 할 수가 없어요.”

“……뭐라고요?”

마음을 자각하게 된 이후로, 늘 목에 걸려 있던 고백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정말 좋아해서. 그,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어요. 계약 관계인 것도 알아요. 아는데….”

“술 처먹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예요? 날 좋아한다고? 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뭘 바라서가 아니라, 그게…. 다른 뜻이 아니고… 흐으.”

“청아 씨. 정신 좀 차려요.”

방금 고백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태도였다. 겁을 집어먹고 횡설수설하는 청아를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희재가 현실을 일깨울 겸,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려 했다.

“악! 하지, 마… 세요. 싫어요… 흐, 저 오늘은 정, 말… 안 하고 싶어요…. 아!”

억센 힘에 어깨가 잡히자 청아의 몸이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 마음을 다한 고백을 가볍게 짓밟고 가이딩만 탐하려 드는 희재가 미웠다. 애초에 무언가를 바라고 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의 대답은 생각도 해 본 적 없었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말 진짜 안 듣네. 내가 지금 강간이라도 해요?”

철썩. 순간적으로 휘두른 손에 희재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삽시간에 표정을 굳힌 그가 혀로 볼 안쪽을 쓸며 제 뺨을 쓸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희재가 청아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강한 악력에 눈을 찌푸리자 차가운 눈동자가 경고하듯, 그가 시선을 맞춰 왔다.

“청아 씨가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줄게요. 난 내 통제 아래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싫어해요.”

“…….”

“나랑 계약한 순간, 청아 씨도 내 통제 아래로 들어왔거든요.”

다른 날도 아닌 생일이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가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생일을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다정히 곁에 있어 주기만을 원했다. 대답을 바란 고백도 아니었다. 그냥 알아서 잘 정리하라고, 미안하다고만 해 줬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말 좀 들어요. 자꾸 거슬리게 하지 말고.”

그러나, 청아에게 내려진 건 온 마음을 짓밟아 죽이는 사형 선고였다. 흐릿해진 시야로 순식간에 눈물이 그득히 차올랐다.

“으읏, 윽, 싫어… 싫어요.”

거부의 말과 달리, 그간의 쾌락을 기억하는 몸은 솔직하기만 했다. 손으로 가볍게 아래를 쓸어 주자 금세 끈적한 애액이 솟았다. 술기운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음부 안으로 손가락을 들이쑤시자 벽에 이마를 박은 청아가 마구 몸부림을 쳤다.

“아… 으, 희, 희재 씨…! 흐읏…. 하지 마요. 제발… 흐.”

“난 지금 당장 가이딩이 필요하다니까요.”

술기운에 잠식당한 청아의 몸은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무자비한 손길에도 작은 어깨가 벌벌 떨렸다. 꽉 오므라든 허벅지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자 말랑한 살결이 부드럽게 살 기둥을 감쌌다. 짧게 호흡을 뱉던 희재가 비좁은 틈새로 제 성기를 맞춰 끼웠다. 벽을 부여잡고 있는 작은 손을 겹쳐 잡은 뒤, 잘록한 골반을 잡아 더 가깝게 몸을 붙이자 귀두의 밑 선이 축축하게 젖은 음핵을 툭툭 건드려 댔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넣을 듯 말 듯, 서로의 접합부를 비비는 행위에 뜨거운 속살이 부풀어 오른 성기 위로 쫀득하게 달라붙었다. 찌걱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릴 때마다 청아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꽉 붙잡힌 손을 몇 번이고 흔들어 보았지만, 등에 달라붙은 희재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체온에, 귓가로 내뱉어지는 습한 숨결에 자꾸만 몸이 달았다. 희재가 착실히 길들여 놓은 몸은 이런 상황에서도 쾌감을 주워 담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손쉽게 자신을 다루는 손짓이 청아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그러나 그것보단 눈앞에서 외면당한 마음이 몇 배로 더 아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청아가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 내며 마음을 고백했다.

“…좋아… 흐으, 좋아해요. 희재 씨.”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듣기는 좋은데…. 난 아니라, 미안해서… 후으, 어쩌지?”

비웃는 듯한 희재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웃는 낯으로 칼을 꽂는 그가 꼭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미끌미끌하게 젖어 있는 아래가 뭉툭한 성기와 부대끼며 투명한 실을 만들어 냈다. 난잡한 접촉 음과 순정한 고백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우으, 후읍… 읏. 좋아… 좋아해요. 정말로… 흐윽.”

“실컷 좋아해요. 그래야 덜 아프지.”

“아… 우윽, …흐읏, 응… 아!”

근래의 섹스로 통통하게 부어 있는 유두를 꼬집자 청아가 우는 소리를 내며 벽을 긁어 댔다. 하얗게 질린 손톱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가학적인 성정을 자극하는 몸짓에 빳빳하게 일어선 성기가 뜨거운 음부 사이를 빠르게 드나들었다. 매끈한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고 살살 당겨 주자, 투명한 액체가 터져 나와 서로의 접합부를 흠뻑 적셨다.

다리에 힘이 풀린 청아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허리를 껴안은 희재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차가운 벽 위로 얼굴이 쓸릴 뻔했다. 무릎을 굽힌 채, 뒤에서 등을 붙여 온 희재가 여운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틈 하나 없이 다물린 청아의 무릎 사이를 넓게 벌려 두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왜, 이게… 무슨… 흐으, 으… 아! 아파…. 아파요… 흑.”

무릎을 꿇은 채, 차가운 벽과 희재의 몸통 사이에 끼인 청아가 겁을 집어먹고 온몸을 바르작대기 시작했다. 등 뒤로 와 닿는 희재의 체온이 데일 듯 뜨거웠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자세에 벽을 밀며 바닥에 닿은 무릎을 오므리려 해 봤지만, 단단한 허벅지가 행동을 저지했다.

온몸을 억압하는 듯한 체위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완전히 벌어진 다리 사이로 희재의 성기가 쑤욱 밀고 들어왔다.

“아, 그만… 흐으… 읏, 저 안 할래요… 싫… 우응, 아파아… 흑.”

“이제 반 들어갔는데 벌써 이, 러면… 하아…. 윽, 어떡해요.”

아픔과 충격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그럴수록 삽입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청아가 그의 통제 아래 움직일 수 있는 건 고작 손가락과 발가락, 딱 그 정도였다. 말랑한 가슴이 벽에 짓뭉기며 온전한 형태를 잃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희재가 느릿하게 허리를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온몸의 힘이 다 풀린 덕분에 삽입은 수월했다.

그러나, 평소보다 훨씬 더 안쪽을 파고드는 살 기둥에 청아는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뒤에서 밀고 들어온 성기가 아래를 빠듯하게 채웠다. 질벽을 가득 채우는 압박감에 호흡조차 편히 내쉴 수 없었다. 자비 없는 가이딩에 어지러움이 훅 밀려왔다.

“하아…. 좁아터졌네…. 대체 언제쯤 제대로 받, 아 낼래요?”

“…으읏, 안 돼요. 흐아…. 제발.”

몸을 홧홧하게 데우는 술기운도 덩달아 정신을 흐리게 만들기 시작했다.

“맨날 뭐가 그렇게 아프고 안 된대. 응? 후…읏, 좋아 죽으면서.”

“우응… 아…싫어, 거기… 희재 씨. 저 못 해요…. 더 못 하겠, 아아!”

“하아… 가만 보면 내가 봉사하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간절한 애원에도 희재는 딱히 멈춰 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청아의 에너지에 일렁이던 파동이 가라앉자 생생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내렸다. 안정을 되찾아 가는 자신의 파동을 느끼는 듯, 작은 몸이 움찔거렸다. 성기를 끊어 먹을 듯, 조여 오는 속살이 뜨끈뜨끈해서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발발 떨리는 몸은 애틋한 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자꾸만 물을 질질 흘렸다.

“…그 새끼랑 뭐라, 도 했어요? 후으, 그래서 가이딩 실력이 이따위로 형편없어진 건가?”

“…흐, 무슨… 아! 싫어… 으흑, 아… 읏!”

“한 명도 제대로 못 받아 내는 주, 제에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 아… 씹.”

쫀쫀한 질벽이 난폭한 추삽질에 제멋대로 이완과 수축을 반복했다. 희재의 손길에 빨갛게 달아오른 유두가 인정사정없이 벽에 비벼지자 청아가 벽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이빨이 목덜미에 박혀 들 때마다 끔찍한 쾌감에 아래를 조여야만 했다. 꼭, 사람이 아니라 포획당한 짐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한계치를 벗어난 쾌락과 끝없는 절정이 청아를 어두운 늪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눈물에 젖어 든 조그마한 얼굴이 벽에 쓸리며 빨갛게 달아올랐다.

“청아 씨, 지금 좋죠. 후으….”

술기운 탓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았지만, 아래를 비비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하고 짜릿했다. 뿌리 끝까지 박힌 성기가 구석구석 침범하며 성감을 고조시켰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빛이 번쩍번쩍 터졌다. 감당하기 힘든 쾌감에 청아가 빨개진 무릎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몸부림을 쳤다.

퍽하고 찍어 올리는 성기에 내벽이 한껏 오그라들며 파르르 경련했다. 청아는 어느덧 반항할 생각조차 잊은 채, 희재의 추삽질에 맞춰 정신없이 흔들렸다. 반쯤 정신을 놓아 버리자, 아래를 쑤셔 박는 성기와 벽에 뭉개지는 가슴이 주는 아릿한 통증이 쾌감이라는 이름의 역풍이 되어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다리가 중심을 잃고 벌어질 때마다 그가 더욱 깊게 무릎을 밀어 넣었다. 이대로 허벅지 안쪽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까지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꿎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습하게 달라붙은 하부에선 찌걱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마구 엉겨 붙은 체액이 거미줄처럼 늘어났다 끊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입을 헤벌린 채, 간간이 호흡을 이어 나가던 청아가 머리를 관통하는 찌릿함에 가까스로 정신을 찾았다.

“어… 흐윽… 이상, 아!”

술을 마신 탓에 잔뜩 졸아든 방광이 거친 자극에 휩쓸려 찰랑대기 시작했다. 아래를 쿡 쑤시는 끔찍한 요의에 벽에 달라붙은 몸을 뒤틀자 커다란 손이 팔목을 꾹 내리눌렀다. 갑작스레 강탈당한 에너지에 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내벽에 가득 고이기 시작한 물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출렁이며 위험 신호를 알려 댔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감각이었다.

“희재, 히익… 잠시만요… 배가… 어, 흐읏.”

“왜?”

“…나, 흐윽… 거기 그만… 안 돼… 아!”

“싸고 싶어요?”

“아니야… 히익, 안 돼. 아… 니에요. 흐으, 제발… 악!”

자궁구를 자극하는 강렬한 쾌감과 통증에 고개를 마구 저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온몸의 힘이 쭉쭉 빠져나갔다.

“아…. 아… 흐으.”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과 함께 아래의 힘이 쫙 풀렸다. 막을 새도 없이 줄줄 쏟아져 내리는 미지근한 액체가 희재의 허벅지를 흠뻑 적셨다. 청아의 눈꺼풀이 충격으로 바르르 떨렸다. 아무런 냄새나, 색도 없었지만, 다리 사이를 축축이 적신 액체의 정체는 소변이 맞았다.

“대체 얼마나 좋으면 오줌을 싸지, 르는 거예요. 응? 나이가 몇, 인데…. 후.”

“아니에요…. 흐윽, 아니야…. 흐윽, 그만…. 읏…아!”

“아니긴, 그거 오줌 맞아요. 청아 씨.”

그는 물이 첨벙이는 음부를 거세게 치받으며 새하얗게 질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싫어…. 흐으, 이제…. 그만해요… 흐, 싫어어.”

쪽쪽 소리를 내며 어깨에 내려앉은 입맞춤이 잔인하고 다정했다. 청아의 에너지를 모조리 앗아 간 희재는 가라앉은 파동에 흡족해하며 마침내, 내벽 깊숙이 사정했다. 끊임없는 마찰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구멍 사이로 뿌연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팔을 놓아주기가 무섭게 바닥으로 쓰러진 청아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호흡을 고르며 눈물을 참았다. 문득 기원이 저주하듯 내뱉었던 말이 시커메진 머릿속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에스퍼라고 몸이고 마음이고 다 주다가 호구같이 에너지 다 뺏기고 버림받는 애들, 많이 봤어. 너도 그 새끼 조심해.’

이대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그의 곁에 머무른다면 정말로 가이딩만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모든 쓸모를 다 하면 쓰레기처럼 휙 버려질 터였다.

엄습하는 두려움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발목을 잡아당기는 부드러운 힘에 몸이 돌아갔다. 은은한 조명이 희재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자신과 달리, 그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했다. 부드러운 연갈색 눈동자와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했… 잖아요. 가이딩… 했는데… 왜. 왜 그래요…. 흐윽.”

“횟수라도 정해 놓고 해야 해요? 우리 안 그랬었잖아.”

청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연했다. 희재를 좋아하니까 그와의 가이딩에 별다른 제재를 두지 않았다. 물론 제재를 허락할 남자도 아니었지만, 그것보단 청아의 마음이 더 컸기에 문제 될 게 없었다.

때때로 벅차기도 했지만, 희재를 위해서라면 가이딩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익숙한 태도로 발목을 잡아 벌리는 손길에 청아는 순진했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했다.

흠뻑 싸질러 놓은 정액으로 끈적해진 질구를 뚫고 기다란 성기가 푹 들이박혔다. 지나친 자극으로 한껏 달아오른 속살이 벌름거리며 희재의 것을 용케 받아먹었다. 질벽에 고여 있던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엉덩이를 간지럽혔다.

“아아… 싫어! 흐윽, 그만해…. 그, 만하라고요. 아… 흐윽!”

“술 먹어서 그런가? 안이 더… 후으, 조이네요…. 뜨겁고.”

“윽, 흐응, 아… 으흐…. 안 돼.”

청아가 희재의 어깨를 밀어내며 발버둥 쳤지만,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몸을 반으로 가를 기세로 깊게 박힌 성기가 질벽을 쿵쿵 때려 박았다.

눈물 섞인 애원이 그에겐 전혀 와닿지 않는 듯했다. 울고 빌어도 봐주지 않는 태도가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홀로 키워 온 마음이 희재의 정욕으로 형체도 없이 문드러지고 있었다. 더 비참한 건,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자꾸만 허리가 턱턱 꺾였다. 허리까지 올라간 치마를 부여잡은 청아가 해일처럼 몰려오는 쾌락에 휩쓸려가지 않게 마구 머리를 흔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대리석 바닥을 엉망으로 쓸었다.

“하아…. 이제 아픈 것도 모, 르겠죠. 끝까지 박아도 좋다, 고 우네?”

“아…. 으응, 응… 읏!”

축축하게 맞물린 접합부 사이로 끈적한 물이 탁탁 튀어 올랐다. 느끼는 지점만 골라 콱 처박는 성기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쾌락에 약해진 몸뚱이는 그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줄줄 녹아내렸다.

툭 불거진 클리토리스를 비비는 엄지손가락이 집요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는 삽입을 지속하면서 음핵을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흔들기도 하고, 침을 묻혀 문지르기까지 했다. 긴 손가락 위로 끈적한 애액과 타액이 마찰하며 쩍, 쩌억 소리를 냈다.

찌릿찌릿한 감각에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결국, 온몸에 힘을 뺀 청아가 참아 오던 교성을 터트렸다. 아래를 꽉 채운 살 기둥이 주는 자극에 습관처럼 아래를 조이자 희재가 피식 웃었다.

깜빡이며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흔들리던 청아를 깨운 건 느닷없는 진동 소리였다. 바닥으로 떨어진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청아의 핸드폰이 번쩍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희재가 한 발 더 빨랐다.

“전화 대신 받아 줄까요?“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손을 뻗어 청아의 가방을 뒤졌다. 툭 떨어져 나온 핸드폰을 집어 든 그가 빤히 액정을 바라보았다.

“아, 흐읏…. 안 돼요! 바, 받… 지 마세요.”

“왜?”

태연한 표정에 청아의 말문이 턱 막혔다. 발신자의 여부를 떠나서 이런 상황에서 전화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가벼운 장난처럼 웃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통화 버튼을 누를 것만 같은 기다란 손가락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더욱 깊게 허리를 맞춘 희재가 질벽을 꾹꾹 눌러 대기 시작했다.

끔찍한 쾌락에 아랫배가 징징 울리자 호흡이 턱 막혔다.

“받지 마요…. 흐윽, 하악…. 아, 우응!”

“그러니까 왜 안 되냐고요.”

“누, 누가… 히익, 듣잖아요. 제발, 제발요…. 흐.”

“아까 그 새끼예요?”

가이딩을 방해하는 진동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집어 들었을 뿐인데, 청아가 울며불며 사정하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희재의 팔을 부여잡은 청아가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애원했다.

“아, 아니에요…. 희재 씨, 저 진짜 번호도 몰라요. 안 돼요. 받지, 마… 흐윽.”

“못 믿겠는데.”

“저, 그냥 가이딩 할게요. 더, 더 해도 돼요…. 그러니까… 흐윽, 읏.”

“그럼 먼저 키스라도 해 볼래요?”

“흐…. 왜, 왜…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잖…. 흐윽.”

“나 그냥 받을까?”

커다란 손에 들어간 핸드폰은 여전히 웅웅 대고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아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희재의 얼굴을 잡았다. 질 낮은 협박을 가하는 얼굴이 믿을 수 없도록 아름답고 우아했다.

입술이 포개지자 빨갛게 부어오른 눈매를 타고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혀가 엉켜돌자 끈끈한 타액이 입안에서 점성을 띄며 늘어났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침이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려 하자, 고개를 꺾은 희재가 입 주변을 모조리 빨아 삼켰다.

“으읍, 흐… 응, 흐.”

몇 번이고 울리던 진동이 마침내 뚝 끊겼다. 입술을 떼어 내자, 길게 늘어지던 투명한 실이 툭 끊어졌다. 희재는 입가로 번지는 달아오른 숨결이 달가웠다. 흥분으로 게게 풀린 청아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다시 한번 강렬한 사정감이 몰려왔다. 내벽 가장 안쪽까지 성기를 박아 넣은 희재가 조그마한 혀를 빨며, 아주 오래도록 사정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은 더 몸을 섞었다. 소파에서, 침대에서, 또 바닥에서. 모든 에너지가 바닥나자 순간 발밑이 훅 꺼지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켜켜이 쌓여 있던 파동을 깔끔하게 해소한 희재와는 달리, 청아는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이대로 배를 꾸욱 누른다면 내벽을 가든 채운 정액이 질질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새하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청아의 곁에 앉은 희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사의 여운으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만 자요.”

그는 달리 고백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더 강력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청아의 위치를 확인시킬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희재가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굳게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청아가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마음이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문득, 지영에게 재떨이를 맞은 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펑펑 울던 날이 생각났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아무리 도망쳐 봐도, 자신의 처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새하얀 베개가 금세 눈물로 흠뻑 젖어 들었다.

* * *

눈을 뜨자마자 희재의 손에 끌려 도착한 곳은 가이딩 센터였다. 차 안을 가득 메운 적막함에 김 비서는 조용히 라디오의 음량을 올렸다.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희재의 옆얼굴은 꼭 누군가가 건드리면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아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30분 정도 걸릴 테니까 여기서 대기해요.”

“네. 알겠습니다.”

희재의 명령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김 비서가 곧장 대답해 왔다.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창가만 바라보고 있던 청아가 아스팔트 위로 발을 디뎠다. 새하얀 건물을 바라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이 VIP실의 문을 열자 묵직한 종이 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센터장이 고개를 들었다.

“전무님. 오랜만에 뵙네요. 청아 씨는 요즘 자주 봐서 이젠 익숙하죠?”

너스레를 떠는 여자의 말에 억지로나마 웃어 보인 청아가 희재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가이딩 테스트 이후, 그와 함께 이곳에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차가운 전극들이 몸에 붙자, 자연스럽게 희재가 손을 뻗어 잡아 왔다. 서늘하고 차가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그때도 그랬었나…. 다가올 일을 모르고 귀 끝까지 붉혀 가며 설레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행복했던 순간을 남몰래 되새기던 청아가 센터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매칭률이 좀 떨어졌네요. 일시적인 증상으로 보이는데 큰일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

“그래프 보시면 아시겠지만, 희재 씨 파동은 전보다 더 안정적으로 변하고 있고요. 그래도, 아직 안심할 수준은 아니에요.”

결과를 통보하는 센터장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줄곧 청아를 힐끔거리다 두 사람에게 붙은 전극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싸늘한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은 희재 역시 청아의 숨구멍을 틀어막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서로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가이딩 하시는 게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새겨듣도록 하죠.”

“참, 희재 씨. 먼저 내려가 있으시겠어요? 청아 씨 채혈하고 주사 한 대 맞혀서 내려보낼게요.”

“그러세요.”

짧은 한마디와 함께 그가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 뒷모습을 확인한 센터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청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발갛게 부어 있는 눈매와 기력 없어 보이는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로 처연했다.

“약혼 이야기 들었어요.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

“…….”

“청아 씨, 옆에 희재 씨가 있어서 말 못 했지만, 가이딩에서 제일 중요한 건 본인 의지예요. 결국엔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싫다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요.”

센터장의 말을 귀담아듣던 청아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칭률이 좀 낮다고 해서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거든요. 약물까지 병행하면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네.”

“가이딩을 안 받는 것보다야 그렇게라도 폭주를 막는 게 희재 씨한테도 좋은 선택이고….”

“희재 씨가 그렇게 해 줄까요?”

“…청아 씨가 더는 가이딩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린 강요할 수 없어요. 아무리 에스퍼가 우선이라지만, 가이드가 못 하겠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센터장은 진심으로 자신을 동정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센터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희재 씨 가이드를 찾아볼게요.”

B급 가이드인 자신이 혹여 마음이라도 상할까,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B급하고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청아 씨와 비슷한 조건들로 골라내다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거예요. 장담해요.”

희재와 높은 매칭률을 가지고 있는 가이드는 현재까지 청아가 유일했지만, 앞으로도 줄곧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자신이 사라진다면 그는 필사적으로 다른 가이드를 찾게 될 것이다.

매칭률이 낮다고 해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니 대체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야 가이딩을 빌미로 자신의 발목을 잡아도, 그도 결국엔 가이딩을 갈구하는 에스퍼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꼭 찾아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부탁할게요.”

“우선 다음 주로 예약 잡아 줄 테니까 그때 다시 얘기하죠. 스트레스 조심하고 몸 관리 잘하도록 해요.”

“…네.”

“각인 해지 신청서도 우선 준비는 해 둘게요. 아무쪼록 희재 씨랑 잘 얘기해 봐요.”

각인 해지 신청서라는 말에 펜을 잡고 있던 청아의 손끝이 떨렸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공식적인 결합 기록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센터에선 두 사람의 기록을 하나하나 지워 나갈 거고, 에스퍼는 새로운 가이드와의 가이딩을 위해, 기존의 각인을 지우는 주사를 맞게 된다. 이로써 둘을 이어 주던 각인은 완벽하게 종료된다. 이토록 허무한 끝이라니….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센터장에게 청아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점심시간이 겹친 탓에 엘리베이터 앞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아마 한참을 기다려야 할 모양이었다.

결국, 발길을 돌려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싸늘한 냉기가 도는 손잡이를 잡고 한층 내려서자 낯익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발길을 돌릴까 하다 걸음을 멈추자 창가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던 이원이 발소리에 입에 문 담배를 빼냈다.

“그 사람, 약혼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흩어진 청아의 머리카락과 애틋한 눈매를 홀린 듯이 바라보던 이원이 뜻밖의 대답에 인상을 구겼다.

“응.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좋아요? 누나 두고 약혼한다는 그 새끼가 좋냐고요.”

“…….”

“아무리 가이딩이라지만, 자길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누나도 그래. 아무리 그 사람을 좋아해도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고 싶어요? 그래도 상관없어?”

가까스로 유지해 오던 평정이 깨진 건 한순간이었다. 이원이 굳은 표정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청아는 이 순간을 외면하고 싶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마치 제 일처럼 화내 주는 이원이 고맙긴 했지만, 더는 어떤 에스퍼와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난 진짜 모르겠다. 그딴 거 이해도 안 되고 누나도 마음에 안 들어.”

이용, 난 연희재한테 이용당하고 있었구나. 다른 사람 눈엔 고작 그 정도 사이로밖에 비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습관처럼 가슴이 아려 왔다.

“네가 화낼 일 아니야. 나랑 그 사람 일이고….”

“누나랑 그 사람 일이라고? 아니지. 그 새낀 신경도 안 쓰잖아. 혼자 좋아하는 건데 어떻게 그게 두 사람 일이겠어요.”

“…그래, 나 혼자만의 일이야. 네 말 다 맞으니까 쓸데없이 화내지 말고 비켜.”

이원이 내뱉은 한마디가 날카로운 화살이라도 된 것처럼 심장을 깊숙이 찔러 왔다.

“누나 혼자만의 일이니까 내가 쓸데없이 신경 쓰는 거잖아요. 차라리 둘이 뭐라도 있어서 나한테 꺼지라고 하면 이해라도 하겠다.”

“…….”

“하아…. 진짜 미치겠네.”

싸늘한 눈빛을 억지로 숨긴 이원이 거칠게 한숨을 내뱉은 뒤 비상계단을 빠져나갔다. 쿡쿡 쑤셔 오는 가슴께를 몇 번이고 쓰다듬던 청아가 차가운 계단 위로 주저앉았다. 희미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다 사라졌다. 홀로 준비하는 마지막이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희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연기가 아스라이 맴돌다 이내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집어 던진 뒤,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약혼식이 코앞이었다. 희재는 약혼식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정해진 날짜에 호텔로 가서 형식적인 약혼식을 올리면 됐다. 당일, 약혼 상대가 바뀐다 해도 딱히 상관없을 정도로 무신경했다. 그래서 더 청아가 이해 가지 않았다. 고작 약혼에 울고불고, 떼를 쓰며 가이딩을 거부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이딩, 임청아….”

사람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청아의 역할은 가이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몫을 하길 바라, 자격부터 미달인 한중원에게 거액의 프로젝트를 맡겼다.

다행히 여자는 기대 이상으로 제 몫을 훌륭히 해냈다. 자신의 모자란 점을 성심성의껏 채워 주는 청아의 가이딩이 희재는 몹시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제 통제를 어긋나 멋대로 행동하는 것까지 이해해 줄 만큼 아량이 넓진 못했다.

그렇게 해 댔는데도, 가이딩이 부족했던 탓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순간순간 화가 훅 치밀어 올랐다. 차가운 물로 몸을 식히고 들어선 침실엔 청아가 홀로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실컷 운 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발갛게 부은 눈매와 힘없이 축 내려앉은 어깨를 바라본 희재가 배스 가운의 끈을 여몄다. 바닥에 놓인 짐 가방을 본 그가 싸늘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망이라도 가려고요?”

“…가이딩 그만하겠다는 말 하려고 기다렸어요.”

“…….”

“저 이… 제 그만두고 싶어요.”

“아주 청아 씨 맘대로네.”

싸늘한 말투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새카만 가운을 입은 채, 차갑게 표정을 굳힌 희재가 꼭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센터장님께서 저랑 비슷한 B급 가이드 찾아보시겠다고 했어요. 아마 이번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

“내가 청아 씨 같이 좋은 가이드를 두고 왜 그런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

“한 사장님이 딸 팔아서 돈 좀 만지더니 배가 불렀네. 할 만큼 해 처먹었으니 그만하고 와도 될 것 같대요?”

신랄한 말투에 청아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완벽하게 자신을 낮잡아보는 그의 행동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돈을 만진 건 자신이 아니라, 한중원이었다.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의 이익을 봤는지 관심도 없을뿐더러 자세한 내막도 알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청아의 입매를 확인한 희재가 가볍게 발을 들어 짐 가방을 툭 찼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짐 가방이 꼭 희재에게 멋대로 다뤄지는 자신과 같아 보였다.

“근데 이게 불공정 계약이라… 내가 원할 때 끝나기로 되어 있거든.”

“…….”

“청아 씨가 어려서 뭘 모르는 것 같은데… 계약은 함부로 어기면 큰일 나요.”

가까스로 눌러 놓았던 희재의 파동이 언제 그랬냐는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심장을 베일 듯, 파고들어 왔다.

“아직 빨아 본 적 없죠?”

“…그게 무슨.”

“계약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내가 친절히 알려 줄게요.”

불길한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서 있는 희재 탓에 목이 뒤로 꺾일 것만 같았다. 폭신한 침구가 꼭 자신을 무저갱으로 빨아 당기는 것만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청아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축축한 입안을 휘젓는 손가락이 희롱하듯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청아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노려보자 그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고여 있던 타액이 넘어가며 저도 모르게 입안에 힘을 주자, 혓바닥 위로 자리한 두 개의 손가락이 혓바닥을 꾹 내리눌렀다. 마치 길을 들이는 듯한 동작에 몸서리가 쳐졌다.

“으읍. 이런 식으로 가이딩 하기… 하윽, 싫어요.”

“싫어도 배워요. 청아 씨가 할 수 있는 가이딩 중 하나니까.”

턱을 타고 끈적한 침이 주룩 흘러내렸다. 희재가 가이드로서 역할을 다시 한번 되새겨 주자, 청아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그가 청아를 찍어 누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 쉬웠다. 눈앞에 드리워진 바지춤에 몸이 움찔했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쉽사리 입을 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질척해진 손가락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눈앞에 드리워진 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샅이었다.

“되게 간단해요. 넣고 빨면 되거든.”

부드럽게 풀어진 배스 가운 너머로 우아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굵직한 성기가 배 위로 딱 달라붙어 꺼덕이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청아의 턱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더니 이내 아래턱을 살짝 내리눌렀다. 굳게 다문 치아를 비집고 두꺼운 귀두가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귀두부터 빨다가 천천히 삼키면 돼요.”

“…안 할래요. 으웁.”

“침도 흘려 주면 좋고. 그래야 더 깊게 들어가니까.”

“우흡… 윽, 읍.”

마치 좋은 것을 알려 준다는 듯한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고작 귀두 부분만 입에 물었을 뿐인데 혓바닥 아래가 아릿해졌다. 치솟는 구역감에 절로 침이 흘러내렸다. 쿠퍼액과 타액으로 끈적하게 젖어 든 성기가 혓바닥을 누비며 부드러운 점막을 쿡 눌러 댔다. 그는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청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폭력적인 행위와는 달리, 말투는 다정했고 행동은 부드러웠다. 그는 어떻게 해야 제 마음을 바닥으로 끌어 내릴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부드럽게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꼭 연인처럼 다정했다.

“위도, 아래도 안 작은 곳이 없네요.”

“우응, 윽……흐, 잠시, 우윽.”

커다란 성기가 극악무도하게 입안을 헤집었다. 여린 점막을 꾹꾹 눌러 대던 성기가 뜨거운 혓바닥 위를 비비며 멋대로 움직여 댔다. 끔찍하고 처참한 감각이었다. 한계까지 늘어난 턱 부분이 이대로 툭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눈물과 침이 범벅되어 청아의 가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디까지 삼킬 수 있나 확인하듯, 성기가 목젖을 툭툭 건드렸다. 발작하듯 몸을 뒤틀자 커다란 손이 머리를 꾹 눌렀다.

가만있지 않으면 찢어발기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듯, 목젖 앞에서 멈춘 성기에 청아가 숨을 참았다. 도무지 더 깊게 삼킬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힘에 겨워 우는 소리를 내자, 그가 머리통을 쥔 손에 힘을 뺐다. 멋대로 움직였다간 목구멍이 뚫릴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잔뜩 긴장한 청아가 숨을 들이켜자, 입안에 고여 있던 타액이 꼴깍 소리를 내며 기도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자 머리 위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희재의 눈빛이 너무도 괴로워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순종적인 태도가 몹시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패닉에 빠진 청아의 눈동자가 힘없이 껌뻑이며 눈물만 쏟아 냈다.

“힘들어요? 우는 거 보니까 마음이 안 좋네. 하아….”

“우욱, 읍… 컥, 끄으….”

“내가 다정하게 굴 때 서로 잘, 했으면 좋았잖아요, 왜 말을… 후, 안 들어서.”

그는 기분이 풀린 건지 다행히 목구멍 끝까지 성기를 쑤시진 않았다. 청아는 이런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제 처지가 비참했지만, 그만큼 행위가 주는 두려움이 컸다. 언제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더욱 괴로웠다. 한참을 빨았던 것 같은데, 딱딱한 성기는 조그마한 미동도 보이질 않았다. 그가 가볍게 머리를 쥐고 흔들 때마다, 툭 튀어나온 핏줄이 혓바닥을 간지럽히며 기어 다녔다. 앞뒤로 흔들리는 머리에 정신까지 몽롱해졌다.

“눈 뜨긴 싫어?”

“허윽, 우, 우응… 읍.”

“하긴, 감고 하나 뜨고 하나 별 상관은 없지. 청아 씨 편한 대로 해요.”

질끈 감은 두 눈을 바라보던 희재가 비릿하게 웃었다. 목구멍까지 헤집어 버리고 싶은 걸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여기서 더 함부로 대했다간 저 빌어먹을 짐가방을 들고 정말 도망가 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축축한 입안이 오물거릴 때마다 부드러운 점막이 빨판처럼 성기에 척 달라붙었다. 폭주하듯, 치밀어오르던 화가 쾌락으로 치환되어 희재를 극으로 몰고 갔다. 그토록 갈구했던 가이딩이었다. 난잡한 행위를 견뎌 내는 여자의 얼굴이 지옥 같은 쾌락을 선사했다.

입안에서 더욱 크기를 키운 성기가 세차게 꿀렁이더니 마침내 정액을 토해 냈다. 입안으로 쏟아진 액체에 당황한 청아가 급하게 머리를 떼어 내려 했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뒤통수를 눌러 움직임을 막았다.

“목구멍도 안 써 놓고 이것도 안 삼키면 어떡해요. 못 하면 성의라도 보여야지.”

“아, 후윽… 싫어, 응, 끄읍….”

한참이나 희재의 손등을 긁어내리며 고집을 부리던 청아가 결국 정액을 삼켜 냈다. 기도를 타고 느릿하게 기어가는 액체가 역겨웠다. 마침내 푹 소리와 함께 입안을 가득 메운 성기가 빠져나갔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청아가 잔기침을 내뱉으며 한참을 괴로워했다. 조그마한 머리통을 바라보던 희재가 테이블로 손을 뻗어 타액으로 흠뻑 젖은 성기를 닦아 냈다.

“흐윽….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대체 내가 뭘….”

“자기 에스퍼도 내팽개치고 도망가려던 사람이 할 말인가요?”

나를 내팽개친 건 당신이면서. 청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한 그가 정체 모를 액체로 엉망이 된 턱과 목덜미를 닦아 냈다. 목선을 따라 내려간 손이 닿은 곳은 가슴이었다. 아직 끝이 아닌 듯했다.

불길한 예감에 몸이 떨렸다. 카디건의 단추를 풀어낸 희재가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반쯤 흘러내린 속옷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조그마한 유두를 가볍게 스쳤다.

“가이딩 결과도 개판이야, 그만두겠다고 떼까지 써. 뭘 어떻게 해야 말 좀 들을래요?”

“…제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흐윽, 제발 저 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난 불특정 다수랑 몸 섞는 취미 없어요.”

“…하, 흐읏.”

유두를 꼬집는 손가락에 우는 소리를 내며 그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손가락에 묻어 있던 정액이 젖꼭지 위로 칠하듯이 문질러졌다. 미끌미끌한 정액을 뒤집어쓴 유두를 가볍게 비틀자 청아가 발버둥을 쳤다.

“…흐으, 하지 마요. 하지 마… 읏.”

“가이딩 안 하면 나랑 뭘 하게. 응? 후으….”

꽉 다문 잇새 사이로 야릇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핏줄이 선 팔뚝을 힘을 줘 내리쳐 봤지만, 잔인한 손가락은 떨어져 나갈 줄 몰랐다. 어느새 딱딱해진 유두를 살살 잡아당기는 손짓에 반사적으로 다리 사이가 젖어 들었다.

“금세 딱딱해졌네요.”

아픔과 쾌락 사이에서 비틀대던 청아가 지독한 쾌락의 늪으로 단번에 내동댕이쳐졌다.

축축해진 아래가 불편해 허벅지를 꿈틀대자,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단한 팔뚝에 머리를 박은 청아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갗을 간지럽히자, 희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제 흔적을 가득 묻힌 채 신음하는 가이드를 보자 폭력적인 정복욕이 들끓었다.

얇은 카디건이 어깨 뒤로 넘어감과 동시에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카디건에서 팔이 빠지지 않은 채, 몸이 눌리자 결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팔목이 조여들었다. 불편함에 바스대자 위로 올라탄 그가 움직이지 말라는 듯, 어깨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느릿하게 고개를 숙인 희재가 새빨간 과실처럼 부어오른 젖꼭지를 입에 담았다.

“…그만, 아파…. 그만해, 흐윽, 아!”

“정말 아프기만 해요? 아니잖아.”

추웁, 춥. 홧홧한 열기를 담은 젖꼭지가 그의 입안에서 멋대로 굴려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위아래로 쓸어 주다 내키는 대로 쭉쭉 빨아 당기기도 했다. 간지러울 정도로 부어오른 유두 위로 뜨겁고 축축한 혀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청아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벗어나고 싶어 몸을 뒤틀어 보았지만, 팔이 뒤로 묶여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다. 커다란 손으로 밑가슴을 받쳐 보인 희재가 뽀얀 살결을 강하게 흡입하며, 울긋불긋한 흔적을 남겨 댔다. 끈적한 타액이 청아의 둥그런 옆 가슴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다.

“하지 마…. 싫, 어요… 흐윽, 우으… 아!”

그러나 공기 중에 차게 식은 유두 위로 뜨거운 입김이 닿았을 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젖꽃판이 온통 침으로 물들었다. 노골적이고 음란한 소리에 자꾸만 허리가 위로 떴다.

한참을 젖가슴에 달라붙어 괴롭히던 그가 허리를 세웠다. 청아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써 봤지만, 결박당한 팔과 침대 모서리에 걸쳐져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반쯤 튀어나온 젖가슴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쓸모없는 반항을 구경하던 희재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잔인한 웃음을 마주한 청아가 건전지 빠진 인형처럼 뚝 멈췄다.

“청아 씨, 하지 마요, 싫어요, 안 돼요는 섹스할 때나 하는 거지. 계약에선 하는 거 아니라니까.”

저항이 잦아들자 손을 뻗은 희재가 눈물에 젖은 눈가를 다정히 쓸어 주었다. 잔인한 말을 내뱉은 입술과는 달리,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손길에 한참을 망설이던 청아가 용기 내 입을 달싹였다.

“희… 희재 씨, 이 계약, 제가 원해서 한 거 아니에요. 부, 부모님이 억지… 아!”

“근데 여긴 왜 이렇게 젖었어요? 꼭 원해서 하는 거 같잖아.”

눈가를 쓰다듬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맞닿은 허벅지를 좌우로 넓게 벌렸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음부가 쩍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자 희재가 낮게 웃었다. 명백한 비소였다. 이 꼴이 되어 놓고도 찰나의 다정함에 기대려고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번들거리는 틈새 위로 몸집을 키운 성기가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난잡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툭 튀어나온 음핵 위로 그의 성기가 길을 내듯 지나가기도 했다. 스윽 비벼대는 몸짓에 내벽에 고여 있던 애액이 비질비질 쏟아져 나왔다. 진득한 애액을 뒤집어쓴 살 기둥이 들어올 듯 말 듯 한참을 희롱하며 질 낮은 성감을 끌어 올렸다.

“나 넣을까요? 여긴 이제 다 준비된 것 같은데.”

넋을 놓고 있던 청아가 팔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홰홰 저었다.

“또 싫다 그러네.”

입꼬리만 올려 보인 희재가 발긋한 음부 위로 성기를 턱턱 내리쳤다. 흠뻑 젖은 아래에서 물이 첨벙이며 튀었다. 난잡한 광경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소리 내 웃었다.

“너무 좋으면 싫다고 하는 편인가 봐요?”

“아니에요. 흐으… 그, 만해. 흣.”

귓가를 파고드는 난잡한 말에 마구 도리질을 치며 그를 부정하려 했다. 계속되는 마찰로 발갛게 달아오른 음부가 뜨겁고 가려웠다. 음핵을 꾸욱 누르는 성기 탓에 청아의 허벅지가 경련하듯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구걸해서 가이딩 받는 거, 기분 되게 좆같네. 흐으….”

구걸. 이토록 희재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만 골라 자신을 놀리는 그가 죽도록 미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툼한 성기가 여린 살을 밀어내며 쑥 들어왔다. 한껏 녹아내린 아래가 그의 것을 물어 대며 환호했다.

홧홧해진 눈시울을 감추려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미끌미끌한 애액이 난잡하게 튀어 대며 희재의 허벅지를 적셨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니었다. 욕정이고 육욕이였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열기에 눈앞이 흐려지면서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가이딩 해 준,다고 청아 씨가 갑인 줄 아나 본데, 아닌 거 알죠?”

“……아흐, 응… 아!”

갑이라니, 이 관계에서 자신은 정도 되지 못하는 참담한 신세였다. 결국 백기를 든 건 청아였다. 몸을 간지럽히는 쾌락에 얌전히 순응하자 그가 칭찬하듯 입을 맞춰 왔다. 눈을 꼭 감은 탓에 속살을 파고드는 살 기둥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툭 튀어나온 힘줄이 여린 내벽을 긁어내리며 빠르게 파고들다 슥 빠져나갔다. 한계까지 늘어난 음부가 발발 떨며 물을 쏟아 냈다.

품고 있던 에너지가 희재에게 몽땅 흡수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꼭 깊은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무력함이 온몸을 감쌌다. 아무리 발을 휘저어도, 절대 땅에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막연한 공포감이 청아의 호흡을 틀어막았다. 가까스로 발버둥을 치자, 두툼한 귀두가 질벽을 푹푹 때려 대며 저항을 막았다. 뒤로 눌린 팔이 아파 자꾸만 눈물이 났다. 꼿꼿하게 일어선 살 기둥이 자궁까지 닿을 듯 더 깊게 밀려 들어왔다.

“응, 흐… 읏! 안에 닿을 거 같… 아악, 하…으.”

“그러니까 앞으론 그딴 고집 부리,지 마요. 후… 내가 많이 봐줬잖아.”

“싫어…. 흐윽, 빼 줘요! 이제… 빼, 흐으.”

“하아…. 청아 씨가 아무리 싫,어해도, 나한테 필요한 건 이렇게 넣고, 싸는 가이딩이,거든요.”

청아의 자존심을 모조리 짓밟은 그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지독한 추삽질에 둘 사이를 이어 주던 끈끈한 액체가 허연 거품이 되어 음모에 지저분하게 달라붙었다. 턱턱 부딪혀 오는 허리 짓에 청아는 자꾸만 숨이 찼다.

뒤틀리는 몸 아래로 손을 넣어 허리를 들어 올린 희재가 처량하게 흔들리는 몸을 구경하며 거세게 좆을 박기 시작했다. 하얀 피부 위가 울긋불긋한 잇자국과 손 모양으로 엉망이었다. 제 입맛대로 바뀌어 가는 몸뚱이가 마음에 들었다. 어렵게 구한 가이드인 만큼, 쉽게 놓아줄 마음은 결코 없었다.

“깊어… 흐윽, 너무 깊어요… 싫어… 아파, 흐으… 히익.”

생경한 자극에 등 뒤로 꽉 짓눌린 팔과 뒤로 젖혀진 어깨가 주는 아픔은 잊힌 지 오래였다.

“‘싫어요.’가 아니라 ‘좋아요.’라고 해야지.”

“아, 앙… 흐으, 읏…. 아!”

“안에 쌀 거니까 잘 받,아먹어요.”

질벽 안으로 희뿌연 정액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쾌락에 정신을 놓고 무너져 내린 자신이 싫었다. 희재의 손안에서 엉망으로 놀아나다 반쯤 기절한 청아가 결국 눈물을 쏟았다. 펑펑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얀 시트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가 건네주는 다정함 한 톨로도 감사하게 살아야 하는 주제에 감히 욕심을 냈다. 조금 더 손에 쥐어 보려 발버둥 친 결과가 겨우 이거였다. 끝없는 슬픔과 비참함이 청아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 * *

달력의 날짜가 한 칸씩 줄어들 때마다 청아의 심장은 점점 더 조그맣게 쪼그라들었다. 그의 다정함을 훔쳐 남몰래 키웠던 마음은 어느덧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었다. 오지 않길 바랐던 희재의 약혼식이 어느덧 보름을 남기고 있었다.

괴로운 마음과는 달리, 희재와의 매칭률은 점점 안정 궤도에 접어들고 있었다. 차라리, 매칭률이 바닥을 쳤으면. 모든 쓸모를 다해 그가 자신을 버려 주었으면. 쓸모없는 바람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청아가 머리맡에 놓인 초대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보름이 지나면, 어떤 의미로도 그의 곁을 채울 수 없게 될 것이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청아를 지옥으로 몰고 갔다.

‘오늘도 늦게 오세요?’

‘아마도요.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꿈에 청아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던 청아가 꿈속의 희재를 바라보았다. 아마, 한 달 전일 것이다. 약혼 소식 따위 전혀 몰랐던. 잠이 덜 깬 청아가 침대맡에 앉아 넥타이를 매고 있는 희재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센터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폭신한 침대 위에서 달랑달랑 발을 흔드는 청아를 바라보던 희재가 자연스레 입을 맞춰 왔다.

‘…흐읏, 출근 안 하세요?’

‘곧 하려고요.’

그는 아마도 가이딩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희재에겐 간단한 점막 가이딩에 불과하겠지만, 청아는 그와 입을 맞추는 지금 이 순간이 못내 설렜다. 이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자꾸만 귓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정한 듯하면서도 자비 없이 사람을 몰아붙이는 희재의 가이딩 방식은, 순식간에 온몸의 진을 쭉 빼놓곤 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침대 위에 늘어져 있으면 그가 느릿하게 입을 맞춰 왔다. 입맞춤은 늘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게 못 견디게 좋았다.

허리를 숙인 채, 침에 젖은 입술을 부드럽게 핥던 희재가 뒷덜미로 손을 밀어 넣었다. 헤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온 따듯한 혓바닥이 입안의 여린 살점을 구석구석 핥다 이내 빨갛게 물든 혀에 눅진하게 엉겨 붙었다. 비누 향기와 닮은 향수가 청아의 코끝을 스쳤다.

잔잔해진 파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러운 뒷덜미를 끌어당기며 키스에 열중하던 희재가 짧은 비명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등허리를 덮은 청아의 머리카락이 소매 춤에 달린 커프스단추 사이에 엉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희재가 잠시 눈썹을 구겼다. 급히 손을 당기자 청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파요… 아!’

‘이게 무슨… 기다려 봐요.’

키 링처럼 달랑거리는 청아를 손에 매단 채, 팔을 뻗어 서랍을 뒤진 희재가 작은 쪽 가위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자 조막만 한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왜 가위를… 흐윽, 머리 아파요.’

‘가만히 있어요. 이거 잘라야 되겠는데.’

‘…어, 저 머, 머리카락은 안 돼요. 정말 안 돼요….’

황당한 대답에 희재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네. 내가 청아 씨 머리카락을 자를 사람으로 보여요?’

간신히 손을 빼낸 희재가 머리카락에 엉킨 단추를 톡 잘라 냈다.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확인한 청아가 긴장감에 꼭 참았던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웃으며 바라보던 희재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5분이나 지체되었다. 곧장 하얀 와이셔츠를 벗어 던진 뒤, 옷장으로 가 비슷한 계열의 셔츠를 꺼내 입었다.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청아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희재의 얼굴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녁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요. 갈게요.’

커다란 손을 들어 올린 희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청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에 와 닿는 온기만큼은 현실처럼 생생했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감은 눈을 뜨자 침대에 걸터앉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새카만 정장 차림의 그는 오늘따라 유독 서늘해 보였다. 꿈과는 달랐다.

“…당분간은 집에 못 들어올 거예요. 나한텐 지금이 꽤 중요한 시기라….”

맞닿은 살갗에서 요동치듯 일렁이는 희재의 파동이 느껴졌다. 파리해진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을 밀어낼 기운조차 없었다.

“가이딩도 가이딩이지만, 난 내 나름대로 청아 씨 많이 아끼고 있어요.”

“…….”

“앞으로 더 잘해 줄게.”

잘해 준다고….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위로 서늘한 입술이 짧게 와 닿았다. 어떻게 이 순간마저 심장이 뛸 수가 있는지 자신의 미련함에 웃음이 나왔다. 새하얀 볼을 맴돌던 입술이 눈물에 젖은 입술로 내려앉았다.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던 슬픔마저 앗아 가는 키스였다.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온 혓바닥이 청아의 눈물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대답해야지.”

“흐…으, 네. 여기… 흐윽, 있을게요.”

“잘 생각했어요. 계속 내 옆에 있으면 돼.”

혀 밑바닥까지 부드럽게 핥아 올린 희재가 청아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같은 자세였지만, 꿈속의 키스와는 모든 게 달랐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굵직한 손 사이로 엉켜 들었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다정한 손길에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헐떡이는 호흡이 희재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손을 뻗어 희재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아팠던 기억보단 좋았던 기억만 가져가고 싶었다. 목덜미를 끌어당긴 청아의 손이 작게 떨렸다.

잠시 멈칫하던 희재가 고개를 숙여 더욱 깊게 입술을 섞어 왔다. 질척하게 엉켜 든 혓바닥 사이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뭉개졌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희재가 축축이 젖어 가지런히 감겨진 청아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청아는 자신의 가이드였다. 겁박으로 얻어 낸 여자의 체념이 기꺼웠다.

희재가 떠난 뒤, 텅 빈 집안에 홀로 앉아 있던 청아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청아 씨, 키스할래요?’

‘…그게, 저….’

‘그냥 가이딩이잖아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키스만큼 간단하고 쉬운 가이딩이 어딨다고.’

첫 키스, 첫사랑이었다. 그에겐 단순한 계약이었을지라도 청아에겐 달랐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늘 외롭고 애정이 고팠던 청아에게 희재는 꼭 아름다운 낙원과도 같았다. 그러나 감히 저 같은 건 발자국 하나 남길 수 없었던.

‘나 때문에 아픈데 두고 볼 수가 있어야 말이죠.’

‘희재 씨는 안 드세요?’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더 버틸 수 없었다. 구질구질한 욕심이, 미련한 마음이 더는 머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괜한 미련에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힘없이 서랍을 뒤적거리던 청아가 구석에 놓인 검은색 단추를 발견했다. 희재와 입을 맞추다 머리카락에 엉켜 들어, 툭 떨어져 나갔던 바로 그 단추였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떠나려고 하니, 좋았던 순간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화내고, 울리고, 겁박하던 희재의 모습은 단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졌다. 가이딩을 위해 존재하는 가이드라고 해도 상관없을 만큼 희재가 좋았다.

그러나 불덩이같이 뜨거워 내치지도, 품지도 못하는 마음은 앞으로도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들 게 뻔했다. 청아는 더 아프고 싶지 않았다. 단추를 손에 꼭 쥐어 보인 청아가 마침내 문고리를 잡았다.

* * *

퉁퉁 부은 얼굴로 가이딩 접수센터에 들어선 청아가 대기표를 들고 차분히 순서를 기다렸다. 대기 번호가 줄어들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직원과 마주 보고 앉자, 정말로 끝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안경을 쓴 채, 모니터를 응시하던 직원이 볼펜과 함께 새하얀 서류를 내밀었다.

“이쪽에 사인하시면 되고요. 상대 에스퍼 측의 동의도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은 한두 달 정도 소요될 거예요.”

“네. 감… 사합니다.”

“보통은 별 탈 없이 전부 해지되는 편이에요. 가끔 에스퍼들이 특정 가이드한테 집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선 자기들도 불편하니까 대부분 새 가이드를 찾거든요.”

사인이 완료된 서류를 받아 든 직원이 분주하게 컴퓨터를 두드렸다. 센터장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새로운 데이터가 업데이트됨으로써 적합한 대상을 추려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더 빨리 대체 가이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센터장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정말 끝이었다. 폭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희재라면 각인을 끊고 새로운 대체 가이드를 찾아 나설 게 분명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인 걸까. 텅 빈 복도를 걸어 나온 청아가 힘없이 땅만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나 싶더니, 시야에 드리워진 새카만 인영에 깜짝 놀라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얼빠진 웃음소리를 낸 이원이 손을 뻗어 청아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잠복하고 있길 잘했네.”

“……무슨 소리야?”

“각인 해지 신청서 썼다면서요. 연락 듣자마자 바로 뛰어왔지.”

“…네가 뭔데 내 뒷조사를 해?”

“뒷조사까진 아니고 빽 좀 쓴 거죠.”

뻔뻔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차갑게 노려본 청아가 이원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러자, 왼쪽으로 한발 옮겨선 이원이 청아를 막아섰다. 딱 고등학생다운 유치하고 어린 행동이었다.

“비켜.”

싸늘한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웃어 보인 이원이 청아가 들고 있는 짐 가방에 시선을 두었다.

“설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죠? 금방 개 박살 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런 식으로 차이고 오란 뜻은 아니었거든.”

“…….”

“그 사람, 결국 약혼한다면서요. 그래서 도망가는 거고?”

부어오른 눈매를 확인한 이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연희재는 눈이 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임청아 같은 여자를 울릴 리가 없으니까.

가지런한 속눈썹을 바라보자, 문득 청아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가이딩이고 뭐고, 다 뒤집어엎고 나올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제 눈치를 보며 힐끔힐끔 눈동자를 굴리는 여자를 보자 홀린 듯이 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발이 굳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지 말래도 갈 것 같으니까…. 뭐, 택시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요.”

“싫… 어.”

“데려다준다니까?”

“나한테 더 이상 관심 갖지 마. 나 다시 여기 올 일 없을 테니까.”

“드디어 알았네? 내가 누나한테 관심 있다는 거.”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이원 또한 한순간에 모든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사고와도 같았다. 애틋한 눈매와 이름처럼 청아한 분위기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시큰둥한 태도로 까칠하게 굴었지만, 심장은 그렇지 못했다.

“가이드고 뭐고 다신 안 할 거야. 에스퍼랑 두 번 다시 엮이고 싶지도 않고….”

“나쁜 건 연희재인데 왜 나한테 불똥이 튀어요.”

“…….”

“존나 억울하네. 난 뭐 해 본 것도 없는데.”

“나 장난하는 거 아냐. 정말 다신 안 와.”

멀어져 가는 발소리를 듣던 이원이 성큼성큼 걸어와 청아의 앞을 막아섰다. 말릴 틈도 없이 청아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뺏어, 이원이 급하게 제 번호를 찍었다. 벅차오르는 숨과 새빨개진 귓가를 숨길 틈도 없었다.

“…정말 힘들 때, 너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으면 나한테 전화해요.”

“……그럴 일 없어. 이원아.”

“창피하면 잘못 눌렀다고 해요. 그럼 바로 달려갈 테니까.”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떨렸다. 귀 끝까지 빨개진 이원이 멀어져 가는 청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새하얀 벽에 애꿎은 이마를 쿵쿵 박았다.

친절한 목소리의 택시 기사는 새하얗게 질린 청아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차를 출발시켰다. 청아는 죄를 짓는 듯한 기분에 심장이 잔뜩 쪼그라들었다.

“한남동으로 가 주세요. 하나마트 쪽이요.”

“네, 알겠습니다.”

불안한 시선으로 길거리를 바라보던 청아가 차가 출발하는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탁 풀렸다. 눈물로 뻑뻑해진 눈을 억지로 감고, 차가운 유리창 위로 머리를 기댔다.

‘...정말 힘들 때, 너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으면 나한테 전화해요.’

‘……그럴 일 없어. 이원아.’

‘창피하면 잘못 눌렀다고 해요. 그럼 바로 달려갈 테니까.’

희재의 옆에 있어도 죽을 만큼 외롭고 힘들었다. 그게 싫어서 그를 도망쳐 왔다. 그러니 아무리 외로움에 사무칠지언정 혼자서 잘 이겨 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또 습관처럼 희재를 그리워할지 모를 테니까.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발길이 닿은 곳은 한중원의 저택이었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거대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 발로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짐 가방을 꼭 쥐어 보인 청아가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지영이 청아의 모습을 확인한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흉흉한 분노를 숨기고 있는 날카로운 눈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임청아, 넌 도대체 연희재가 약혼할 동안 뭐 하고 있었니?”

“…….”

“그 사람이 약혼한다고 이제 나가라고 하디?”

청아는 쫓겨난 게 아니었다. 희재의 곁에 있을 수 없어 제 발로 걸어 나온 것뿐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지영이 길길이 날뛰며 죽일 듯 달려들었다.

“이 멍청한 년아! 그렇게 좋은 건수를, 물어다 줬는데도, 그걸 못 먹어서… 어!?”

이마를 툭툭 건드리는 손가락이 꽤 아팠다.

“재주껏 옆자리라도 꿰찼어야지. 너 대체 뭐 하는 애니? 어쩜 이렇게 도움이 안 돼.”

“그…동안 키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뭐?”

“저 이제, 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충분히 할 만큼 했….”

순간, 매서운 손이 청아의 뺨을 후려갈기고 지나갔다. 머리를 강타하는 아픔에 휘청이자, 정신 차리라는 듯 반대편 뺨이 붉게 물들었다.

세 대, 네 대, 다섯 대. 청아의 얼굴이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서야 지영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급작스레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굵은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파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무작위로 쏟아지는 폭력엔 이골이 난 지 오래였다.

생생한 아픔보다 칼에라도 찔린 듯 욱신거리는 마음이 더 괴로웠다.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제 처지가 서러웠다.

“눈 시퍼렇게 뜨고 말하는 것 좀 봐.”

“…더는 못 해요. 정말로 저는 이제….”

강하게 어깨를 밀어내는 손길에 청아는 그대로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엄마.”

엄마. 어릴 적, 엄마라고 불렀다가 호되게 혼이 난 이후로 처음 입에 담아 보는 단어였다. 저도 모르게 목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에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대… 체 저를 입양하신 이유가 뭐예요?”

“…….”

“아무리 진짜 자식이 아니어도….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요. 흐윽… 도대체 왜… 이럴 거면 도대체 왜….”

“가이드로 쓸모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단지 그것뿐이야. 비싸게 팔리면 좋은 거고 아님 버리는 거고.”

청아는 단 한 번도 가이드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하거나 부정한 적 없었다. 그런데 이젠 가이드로 태어난 자신이 지긋지긋하고 증오스러웠다. 처음부터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윤지영도, 연희재도 만날 일 없었을 테니까.

“그래, 나가. 나도 제 밥그릇 하나 못 챙기는 머저리 같은 거 더는 필요 없으니까.”

“…….”

“뭐 덕분에 중원 씨 사업에 큰 다리 좀 놔 줬으니 고맙긴 했어. 더 쓸모가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이 정도라니…. 내 눈도 이젠 다 했나 봐.”

희재가 준 상처 위로 또 다른 상처가 새겨졌다. 너덜너덜해진 가슴이 못 견디게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둬 키우는 게 아니라더니.”

머저리, 짐승. 모두 저를 칭하는 말이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선 청아가 잠시 비틀대다 가방을 집어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벽을 짚지 않고서는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멍청한 두 다리는 자꾸만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대문 앞으로 힘겹게 나와 그대로 주저앉았다. 흘겨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찢긴 얼굴의 통증도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정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지, 이런 상황에서조차 희재가 보고 싶었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에 전화기를 꺼내 든 청아가 희재의 번호를 눌렀다.

- 밖이에요? 누가 함부로 나가래.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그의 귀에도 들린 모양이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래서 전화했어요.”

- 하아…. 도망이라도 가려고요? 근데 전화를 왜 했어. 안 잡히게 잘 숨어야죠.

“좋아해요. 희재 씨….”

-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열받게 만드는 재주도 있네.

이렇게라도 다시 한번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모두 털어놓고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단지 가이딩이 필요해서 날 곁에 둔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더는 희재 씨 곁에 있을 수가 없어요.”

-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희재 씨가 좋아요.”

말을 할 때마다 터진 입안이 욱신거렸다. 미련한 마음이라고 비웃어도, 미쳤다고 욕을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희재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정말 그게 다였다.

- 날 좋아하는 건 청아 씨 마음이지만, 이딴 식으로 도망가는 건 내가 용납 못 하겠는데.

“…….”

- 당장 돌아와요.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다정한 가면을 집어 던진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협박했다. 그럼에도 청아는 굴하지 않기로 했다.

- …하아, 머리채라도 잡고 끌고 와야 내 말 들을 거예요?

“……끊을게요.”

이로써 끝이었다. 마지막까지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꾹꾹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어터진 입술로 눈물이 흘러들자 고통은 배가 되었다. 전화를 끊자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좋아하지 말걸, 사랑하지 말걸. 아니,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멍울처럼 가슴에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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