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을 닳도록 매만졌다. 오늘을 위해서 김지연은 오랫동안 가지 않은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하고, 피부 관리를 받고, 원피스를 구매했다. 추 부장이 치마 좀 입으라고 미친 소리를 지껄였을 때도 꿋꿋하게 바지를 고집하던 지연이었다.
김지연은 소위 말하는 연예인에 그간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지연의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될 종자들이었다. 가끔 드라마를 보면 재밌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약간의 소재 거리가 될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 김지연의 눈에 연예인이 들어왔다. 상큼함을 뽐내는 젊은 아이돌도 아니었다. 아니, 상큼하긴 하지만 십 대나 이십 대 극 초반인 그들에 비하면 나이가 제법 있는 배우였다.
맨 처음 그 배우를 본 건 <라스트로드>라는 드라마에서였다. 퇴근 오 분 전에 야근 거리를 안긴 추 부장을 안주 삼아 씹으며 맥주를 마시던 날이었다. 꾸물꾸물한 하늘에서 비를 뿌렸고, 김지연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티브이를 틀었다. 핸드폰에 시선을 꽂고 있어 사실상 티브이는 오디오 역할만 했다.
맥주 한 캔으로는 모자라 냉장고로 가려고 일어난 순간이었다. 어느새 방영 중인 <라스트로드>에서 어떤 청년의 얼굴을 화면 가득 잡아주었다. 선한 눈망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 눈이 카메라를 넘어 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심장이 쿵쾅거려서 김지연은 맥주를 가지러 가는 것도 까먹고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청년은 말더듬이 역할이었다.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방송이 끝날 때까지 그게 연기라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실제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와서 연기를 시켰나 싶었다.
유백영은 보이지도 않았다. 말더듬이 청년만 보였다. 소처럼 사람들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순수한 그 눈동자, 오동통하고 선이 깊어 소년처럼 보이는 그 입술, 짙고도 가지런한 눈썹과 오뚝한 콧날.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추 부장이 안겨준 스트레스가 단번에 날아갔다.
이홍화는 그렇게 김지연의 심드렁하고 메마른 인생에 촉촉한 비처럼 찾아왔다. 그 뒤로 김지연은 이홍화에 대한 정보를 찾는 낙으로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었다. 신인에 단역에 소속사도 없고 심지어 포털 사이트에 프로필도 없었다. 이홍화 라는 이름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눈을 부릅뜨고 찾아낸 정보였다.
집념은 승리했다. 이 잡듯이 정보를 찾다 보니 이홍화가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가 우연히 나온 첫 작을 제외한 나머지 공연은 빠짐없이 가서 봤다.
각설, 드디어 우리 홍화에게 공식 팬클럽이 생겼다. 혼자 인터넷에 우리 홍화 좀 봐달라고 드라마 캡쳐해서 올려, 인터뷰 긁어서 올려, 연극 좀 봐달라고 매달려, 주연들 너머로 흐릿하게 비친 장면까지 찾아서 올리며 홍보하던 고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홍화맘님 행복하시겠어요.
└드디어 팬클럽이 생겼네요. 홍화맘님 가실 거죠?
└저도 팬클럽 가입했어요. 홍화맘님 덕분에 홍화 씨한테 빠졌거든요.
└우리 홍화 주려고 선물도 샀어요.
쭉 달린 답글들을 뿌듯하게 보다가 김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곧 홍화가 무대 위에 오를 것이다.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감격이 찡하고 몰려와 코끝을 울렸다. 고생길만 죽으라고 걷던 내 새끼가 드디어 꽃길에 입성했다.
어이구, 이쁜 내 새끼.
김지연이 훌쩍거리자 동행한 이들이 어깨를 토닥였다. 다들 김지연이 그간 홍화를 알리고자 열심히 노력한 걸 알고 있었다.
아이라인이 번질까 봐 눈물은 그쯤 그쳤다. 고개를 위로 들고 깜박이다가 몇 명이나 왔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홀이 꽉 찰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상보단 사람들이 많이 왔다. 특이하게도 남자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보통 남자 배우는 여성 팬들이 대부분이거늘.
하긴, 우리 홍화가 남녀노소 모두 홀리는 매력이 있지. 김지연은 내 새끼가 최고라며 제 일도 아니면서 콧대를 드높였다.
지연이 두 손을 맞잡고 무대 구석을 바라봤다. 저기에서 이홍화가 나올 것이다. 무대만 죽으라고 쳐다보다가 목이 아파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무대 앞줄 구석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는 실내임에도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후드티를 입었다. 옆으로 고개를 길게 빼서 보니 검은 마스크에 안경테도 검은색이었다.
혹시 해코지하러 온 거 아니야.
가끔 그런 놈들 있지 않은가. 되먹지 못한 열등감으로 저보다 잘난 사람을 해치려는 부류가. 김지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드들이 상주하는 이곳에서 설마 이홍화를 건들지는 않겠으나, 위협적인 덩치와 저승사자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뒤집어쓴 꼬락서니가 몹시도 수상했다.
김지연이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동안 홍화가 무대 안으로 들어섰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에 지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꿈이 이루어진 날에 다른 사람에게 한눈을 팔다니. 팬의 도리가 아니었다.
이홍화는 푸른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흰 운동화를 신은 평범한 차림이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올렸다. 뒤에 펼쳐진 넓은 화면에 뽀얗고 말간 얼굴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둥그런 이마며 소년 같은 눈썹과 입술, 오뚝한 콧대가.
뭘 입든 이홍화가 아니 예쁘랴. 여고 앞에서 속옷도 안 입고 코트를 까대는 변태처럼 입어도 홍화는 예뻤다. 김지연의 눈에는 홍화의 얼굴이 진흙투성이가 되어도 예뻐 보일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이홍화입니다.”
마이크를 통해 홀에 울리는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청아하다. 김지연은 고막에도 이홍화 전용 필터가 끼어있었다.
사회가 우스갯소리를 적절하게 섞어가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들어오기 전 포스트잇에 질문 하나씩 적으라더니, 보드에 잔뜩 붙여놓고 홍화가 고르면 대답하는 식의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사회자가 짓궂게 그중 수위가 높은 질문을 뽑았다.
“홍화 씨, 지금 입고 있는 속옷 색깔이 무슨 색인가요?”
어떤 놈인지 훌륭한 질문을 했다. 김지연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느라 저쪽에 앉은 검은 남자가 입을 가리고 어깨를 가볍게 털며 웃는 걸 놓쳤다.
“어, 이런 질문에 답해도 되나요. ……까만색 입었습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높은 환호가 터졌다. 꺄으아악, 거기에 굵은 남자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황홀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김지연이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린 순서가 다가왔다. 추첨에서 뽑히면 무대로 올라가 홍화에게 아무거나 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이걸 위해서 김지연은 때를 빼고 광을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속으로 천지신명을 부르짖으며 번호표를 손에 쥐고 상자 속에 들어간 홍화의 손만 바라봤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제발 69번을 뽑으라고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다 찾으며 기도했다.
홍화가 상자 속을 휘젓다가 조그만 탁구공 하나를 꺼냈다. 한쪽이 찌그러진 탁구공이었다. 카메라가 탁구공에 적힌 번호를 화면에 보여줬다.
98.
김지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회자가 탁구공을 높이 들며 98번을 찾았다. 어떤 인간인지 운 더럽게 좋네. 김지연이 입술을 뒤틀며 주위를 돌아봤다.
검은 팔이 위로 올라왔다. 그 남자였다. 시커먼 차림인 남자. 사회자가 이리 올라오라며 남자를 불렀다.
남자가 성큼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갔다. 키가 얼마나 크고 다리가 어찌나 긴지 홍화보다 머리 하나 이상으로 컸다. 덩치는 어떻고. 쩍 벌어진 어깨와 등짝이 무슨 씨름 선수 중 금강급이었다.
순간, 김지연은 봤다. 홍화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카메라에 잡혔다가 다른 곳으로 금세 넘어갔지만 김지연은 놓치지 않았다. 이홍화만 바라본 지 몇 년인데 저 신호를 모르랴.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홍화 씨 팬입니다.”
목소리는 좋았다. 하나 답변이 불친절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말하지 않았다.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뭔지, 이홍화의 어디가 제일 매력적인지 등 질문하려던 사회자가 남자의 쏘아보는 시선에 입을 딱 다물었다. 눈빛이 사람 하나는 쉽게 잡을 듯이 날카로웠다.
차라리 빨리 소원을 들어주고 내려보내는 게 낫겠다며 사회자가 홍화와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재빨리 마이크를 고쳐 쥐었다.
“그럼 남자분의 소원은……?”
“뽀뽀해도 됩니까. 볼에 할게요.”
좌석에서 야유와 함성이 같이 터졌다. 김지연은 야유했다.
홍화는 웃고는 있지만 굉장히 곤란한 기색이었다. 거절하자니 소원 들어준답시고 추첨까지 해놓은 게 우습게 될 거고. 김지연은 홍화를 고민에 빠트린 저 남자가 추 부장과 동급으로 미웠다.
사회자도 당황했다. 얼른 수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홍화가 조금 더 빨랐다. 고민하는 듯 눈썹을 구기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네. 괜찮습니다.”
함성이 다시 터졌다. 김지연은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양손에 나눠 쥐고 질근질근 물어뜯었다. 저 보들보들한 뺨에 뽀뽀라니. 남자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남자가 홍화의 턱을 고정하고서 가볍게 고개를 틀었다. 마스크를 내리고 홍화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림자가 얼굴을 가려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홍화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남자의 입술이 닿지 않은 반대편 뺨에 홍조가 돌았다. 조명 탓일 거라고, 홍화가 진실로 좋아서 하는 건 아닐 거라고 질시 섞인 눈으로 보다가, 김지연은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화면에 가득 잡힌 홍화의 표정에 미소가 없는데도, <오늘의 세계>에서 상대방을 보며 지었던 표정과 이상하리만치 비슷했다. 홍화가 나온 모든 드라마를 외울 만큼 돌려본지라 얼굴에 어떤 감정이 떠도 읽을 수 있다고 김지연은 자부하는 바였다.
남자가 홍화의 뺨에서 멀어지며 모자를 벗었다. 엉망인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마스크와 안경도 마저 벗었다. 시기 질투로 탄성이 가득하던 객석에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유, 유백영 씨?”
사회자가 말까지 더듬었다. 유백영이 사회자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카메라가 유백영의 해사한 미소를 잡아냈다. 웅성거림이 시장 한복판 데시벨로 상승했다.
“아까 이름을 말씀드리면 재미없을 거 같아서요. 홍화 씨 팬클럽이 오늘 창단된다고 들어서 팬으로서 놀러 왔습니다. 이홍화 씨 많이 사랑해주세요. 홍화 씨, 축하드려요.”
담백한 인사였다. 사회자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마이크를 입가에 갖다 댔다.
“아, 맞아요. <라스트로드>에서 유백영 씨와 같이 연기했었죠. 두 분의 우정이 무척 깊네요. 보기 좋습니다.”
우정이 깊다는 대목에서 백영이 상큼하게 웃었다. 한때 이를 능가할 외모가 없다고 극찬받은, 그리고 아직도 그만한 외모가 없다는 평을 듣는 대단한 미남이었다. 이홍화의 열렬한 팬인 김지연마저도 잠시 입을 헤 벌리고 유백영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사회자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수습했다. 이홍화 팬클럽 창단식이지 유백영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유백영이 산뜻하게 인사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팬클럽은 유백영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홍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백영을 흘끔거리느라 추첨에 뽑혀도 뽀뽀는커녕 포옹만 하거나,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김지연은 정신을 다잡고 홍화를 보는 데만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김지연은 멍하니 집에 돌아왔다. 창단식이 끝나니 꿈에서 깬 듯 정신이 몽롱했다.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어서 생생한 후기를 남겨야 하는데, 홍화의 미소가 눈앞에 어른거려 정신을 다잡기 어려웠다.
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 지연이 오뚝이처럼 벌떡 상체를 세웠다.
유백영은 창단식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붙어있었다. 시선이 홍화 말고 저에게 꽂혔음을 알면 알아서 꺼져줄 것이지. 그 뻔뻔한 행각에 김지연은 저가 유백영의 백만 안티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이홍화와 친했나. 김지연은 이홍화와 친한 배우들을 손으로 꼽아봤다. 마당발은 아니라 어울려 다니는 사람들이 한정적이었다.
“어라?”
문득 떠오른 기억에 지연이 얼른 노트북 전원을 켰다. 이홍화 관련 자료는 폴더에 담아뒀다. 그간 관심이 없어서 쳐다보지도 않은 유백영의 흔적을 이홍화가 나온 드라마에서 찾아봤다.
<라스트로드>, <적의 꽃>, <크라프트>까지. 카메오 출연이라도 홍화가 나온 작품에 백영이 한 장면씩은 꼭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 대성공을 거둬 시즌 2 제작을 앞둔 는 심지어 유백영이 감독이었다.
메이킹 필름도 다시 봤다. 홍화는 대부분 동료 배우들과 웃고 떠들었다. 김지연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동영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웃는 홍화 너머로 희미하게 유백영과 비슷한 덩치가 보였다. 홍화 쪽을 보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백영이 홍화를 보고 있거나, 홍화가 유백영을 응시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찍혀 있었다. 물론, 서로를 보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간 이홍화의 팬으로서 갈고 닦은 더듬이가 진실이 그 너머에 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우정이겠지. 우정일 거야. 우정이어야 해.
……우정이었으면 차라리 좋겠다.
김지연이 허탈하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털썩 등을 묻었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흐어어어, 길게 탄식을 뱉었다.
우리 예쁜 홍화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홍화가.
“난 오늘부로 유백영 안티다.”
원래 내 새끼에겐 누굴 붙여도 아까운 법이다. 지연이 흐어엉, 우는 시늉을 하며 맥주를 찾았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맥주가 오늘따라 참으로 쓰고도 달았다.
번외_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