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최근 항상 그랬지만, 어젯밤은 유독 불면이 심했다. 기자회견을 볼까 말까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뒤척거리다가 벌떡 일어나고, 도로 누웠다가도 바닥에 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멍하니 시간 보내느니 대본이라도 한 줄 읽겠다고 펼쳤지만 역시나, 한마디도 안 읽혔다. 오늘 촬영이 몸만 쓰면 되는 거라 천만다행이었다.
배 긁으며 자고 있는 순덕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찬물을 뒤집어써 정신을 깨우고서 바깥으로 나섰다. 몸을 쓰더라도 대사는 있기에 조금이라도 연습을 해둬야 마음이 편했다.
대본을 말아 쥐고 바깥으로 나왔다. <라스트로드> 촬영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동트지 않은 새벽녘에 나와 홀로 대사를 연습했다. 그리고 갑자기 유백영이 나타나 제가 한 대사 뒤를 읊어줬다. 귀신 본 듯이 놀랐던 그때를 떠올리자 뜬금없이 키득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듣는 이 없던 웃음은 튀어나온 만큼 빠르게 잦아들었다. 홍화가 하……,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처럼 하얀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증거였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냥, 한때는 원수라고 이 갈던 상대를 좋아하고, 믿지 못해 악담을 퍼붓고, 이제야 후회하며 돌아가고 싶어 안달 난 제 상황이 웃겼다. 홍화가 짧게 대답하려다가 퍼뜩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홍화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백영이 옆에 서 있었다.
홍화가 바닥에 대본을 툭 떨어트렸다. 너무 놀라면 사고가 마비되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홍화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백영을 올려다봤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어 허한 눈이 헛것을 보나 싶었다.
백영도 가만히 홍화를 내려다봤다. 놀란 눈을 들여다보고, 광대뼈가 슬쩍 드러난 뺨과 마른 목, 셔츠 안으로 보이는 불거진 쇄골을 눈에 담았다. 손가락이 위로 올라올 듯 움찔거리다가 주먹 안으로 사라졌다.
“……한 대?”
백영은 손을 뻗는 대신 담배만 입에 하나 물었다. 홍화는 옆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백영이 믿기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했다.
홍화에게서 대답이 없자 백영이 제 담배에만 불을 붙였다. 두 모금도 채 빨지 않고 바닥에 버리고서 발로 비벼 껐다. 후우, 하고 한숨처럼 뱉은 숨에 흰 연기가 길게 뻗어 나왔다.
“여긴 왜 왔냐고 안 물어?”
“…….”
“못 올 데 왔냐고 내가 되물을 거고.”
“…….”
“그럼 넌 나보고 시내 호텔에서 묵었다며, 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
홍화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단 한마디도 못 뱉었다. 꿈에서나 보던 얼굴이 눈앞에 있는데, 손을 뻗으면 만질 수가 있는데 가위에 눌린 듯이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손끝마저 말을 듣지 않았다. 눈가만 뜨끈해지며 시야가 어룽어룽했다.
백영이 눈물을 닦아줄 것처럼 손을 뻗었다. 가위에서 벗어난 듯 홍화가 움칠하며 뒤로 물러났다. 백영이 멈칫하며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아직 소식 못 들었어?”
백영이 미간을 좁히며 내려 봤다. 무슨 소식인지 묻지 않아도 짐작은 갔다. 밤새도록 볼까 말까 고민한 기자회견이었다.
“대체…….”
하아, 하고 백영이 땅 꺼져라 무겁게 한숨지었다. 말은 나오지 않고 눈물만 눈가에 찰랑이며 고이다가 뚝뚝 떨어졌다. 오랜만에 보이는 모습이 못나게 질질 짜는 모습이라니,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다.
홍화가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 제 마음도 모르고 눈 밑에서 눈물이 또 솟아올랐다. 말을 못 하면 유백영의 얼굴이라도 눈에 담고 싶은데, 우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 마주 볼 수도 없다.
유백영은 묵묵히 홍화의 옆얼굴만 쳐다봤다. 손이 몇 번이나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볼일이 있어서 왔어. 볼일 보고 올라갈 거야. 그때…….”
말끝이 흐려졌다. 홍화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투명한 콧물까지 배어 나와 썩 보기 좋은 꼴이 아닐 터라, 소매가 축축하게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홍화가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한 백영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가 홍화의 뺨엔 차마 대지 못하고 제 이마만 꾹꾹 눌렀다.
“……아니, 그전까지 기자회견 꼭 봐둬. 그리고 그만 울어. 촬영 앞두고 그렇게 울면 어쩌자는 거야.”
연기 연습하는 거라고, 쏟아지는 눈물만 아니면 치졸한 변명이라도 뱉을 텐데 딸꾹질마저 터져 말은커녕 숨쉬기도 힘들다. 홍화는 들숨 날숨만 크게 몰아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이대로 백영을 보내긴 싫어서, 단 한마디라도 나누고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싶은데 혀도 주인 닮아 멍청해졌는지 말을 안 듣는다.
“제발……, 이홍화.”
역효과였다. 이름을 부르자 눈물이 소낙비처럼 굵게 방울져 내렸다. 백영이 이를 으득 소리 나게 한 번 깨물고서, 천천히 허리를 굽혀 홍화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대본을 주웠다. 내밀어도 홍화가 넋 빠진 사람처럼 백영만 올려다보고 있기에 하는 수 없이 둘둘 말아 주머니에 꽂아줬다.
백영의 입술이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듯 달싹였다. 목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양 입술이 틈 없이 다물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홍화의 얼굴만 보다가, 깊게 한숨짓고 돌아섰다.
홍화는 백영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움찔대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었다. 판판한 손바닥에 초승달 모양의 손톱 모양이 아로새겨질 정도로 꼭 쥐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백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는 다리도 말문 못 열었던 목처럼 제멋대로 뛰어갈 것이다.
뛰어가고 싶어 안달하는 종아리와 발바닥을 안 된다고 수없이 다독이며 홍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들이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져 잘게 부서졌다.
순덕이 침대 구석에서 반대쪽 구석으로 몸을 굴려가며 끙끙대다가 번쩍 눈을 떴다. 어젯밤에 비몽사몽간에 돌아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을 떠보니 룸메이트인 이홍화는 사라졌고, 혼자만 방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아직 동이 제대로 트지 않은 아침이었다. 둘 다 오후 촬영이라 서두를 필요 없건만 부지런한 이홍화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일이다. 순덕이 늘어지게 하품을 터트리며 어슬렁어슬렁 베란다로 향했다. 다시 자봤자 뒤숭숭한 꿈에 시달릴 거, 그냥 일어나서 새벽 공기나 쐬며 촬영 전에 연습이나 해두려고 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 무심결에 멀리 내다보는데, 익숙한 머리통 하나가 대본을 들고 서 있다. 어제 입은 옷 그대로라 바로 이홍화란 걸 알아봤다.
누가 연습벌레 아니랄까 봐 새벽부터 사람 부담스럽게 연습에 몰입한다. 그 와중에 저를 깨울라 바깥으로 나간 홍화의 배려에 순덕이 피식 웃었다. 이 판에서 좋은 사람 찾기 참 힘든데, 저 친구는 알면 알수록 마음에 든다.
순덕은 홍화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다 홍화의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이었다면 누군지 바로 알아봤을 건데, 최근 핸드폰 게임에 열을 올렸더니 눈이 영 침침했다.
홍화가 대본을 툭 떨어트렸다. 그래, 이 새벽에 갑자기 뒤에서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면 저라도 홍화처럼 놀랄 것이다. 순덕은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나 궁금해 당장 달려가려다가, 일단 지켜보자 하고 쳐다만 봤다.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닌가. 남자가 손을 뻗자 홍화가 놀라서 피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좁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가 홍화와 간격을 유지하는 듯싶었다. 마치 잠깐이라도 닿으면 홍화가 도망치기라도 할 듯이, 접근이 조심스러웠다.
둘은 싸우지도, 화기애애하지도 않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남자가 가고 나서 홀로 남은 홍화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한참 동안 대본도 보지 않고, 무언가를 꾹 참아내듯이 아래만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로가 필요한 시점 같은데.
순덕은 찬 공기에 코를 훌쩍이며 점퍼를 걸쳐 입었다. 김강수야 오지랖 좀 그만 부리라고 성을 내겠지만 가끔은 이 오지랖이 사람도 구한다고 순덕은 굳게 믿었다.
“아이고, 날 참 차다.”
순덕이 구수하게 읊으며 등장했다. 홍화가 황급히 눈가를 소매로 쓱 문지르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래봤자 눈가도 발갛고 눈알에도 핏줄이 올라와 운 흔적을 감추지는 못했다. 순덕은 못 본 척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홍화 옆에 섰다.
“왜 그렇게 울었어? 뭐가 그렇게 슬퍼서.”
“……지연우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요.”
홍화가 둥글게 만 대본을 만지작거렸다. 대본보다는 거기에 남은 온기라도 찾는 듯이.
“걔 인생이 좀 많이 불쌍하지. 그중 오늘이 최고 운수 더러운 날 아니야? 교통사고까지 나잖아.”
정부 요원에게 자료를 전달하려고 도로를 건너는 사이에 반대쪽에서 달려온 차가 지연우를 치고, 지연우의 자료는 정부 요원에게 건네지지 못한다. 홍화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감독이 입에서 침 튀기며 홍화를 칭찬하는 이유도 실은 죽으라고 굴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순덕은 종종 의심했다.
“근데 홍화야, 오늘은 웬만하면 대역 쓰면 안 될까.”
홍화가 채 울음이 가시지 않아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빨간 눈가도 코끝도, 흉하다기보다는 안쓰럽기만 했다. 순덕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일부러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어제 꿈자리가 영 뒤숭숭해서.”
무당의 피를 눈곱만큼이라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부인하고 싶건만, 가끔씩 번뜩이며 지나가는 불길한 감이나 꿈을 꿀 때는 핏줄의 힘을 이길 수는 없구나 싶었다. 순덕은 뒷머리만 벅벅 긁으며 잠을 설치게 만든 원인을 되새김질했다.
안개가 자욱한 평지였다. 저쪽에 우뚝 서 있는 뾰족한 산이 어두컴컴하고 거대하고 웅장하면서도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 마치 북망산을 그려놓은 듯싶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반대쪽으로 몸을 틀려는데, 흰 안개를 뚫고 흐리흐리한 인영이 불길함이 가득한 북쪽 산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말려야 한다고 순덕이 얼른 달려가 그 어깨를 잡아챘다.
―홍화야.
홍화였다. 어디 촬영이라도 있는지 펄럭펄럭한 흰 한복을 곱게도 차려입었다. 순덕이 예고도 없이 잡았는데도 놀라지도 않고 멍한 얼굴로 순덕을 쳐다보고서 홍화가 고개를 돌렸다. 발이 또 북쪽으로 향하기에 순덕이 홍화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정신 차려, 이홍화! 저긴 아니야,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릴 질러도 홍화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갔다. 힘이 장사라 순덕의 발도 홍화를 따라 질질 끌려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면서 홍화를 말려도 고삐 묶여 끌려가는 소처럼 방향은 그대로였다.
홍화의 소매가 부욱 찢겨졌다. 무거운 것이 어깨를 내리눌러 순덕이 홍화의 뒷모습만 보며 목청이 터지라 이름만 불렀다. 홍화의 뒷모습이 점점 옅어져 눈물이 오열로 바뀔 때쯤, 퍽 하고 누가 뒤에서 순덕의 등허리를 매서운 손길로 내려쳤다. 순덕이 눈물 콧물 다 뺀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흰 머리를 단아하게 쪽진 노파가 혀를 쯧쯧 차며 한심하단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이 모-옷난 것. 또 쓸데없는 오지랖 부리기는.
누군지 묻지 않아도 순덕은 노파의 정체를 알았다. 외가 쪽 고조할머니였다. 순덕이 놀라서 눈만 끔벅거리자 노파가 턱으로 홍화가 걷고 있는 길을 가리켰다.
―저치는 네 몫이 아니다. 네 몫이 아냐.
노파의 말에 순덕이 눈물 고인 눈을 벅벅 닦아내고서 크게 떴다. 안개가 일렁이며 홍화를 잡아먹어 그 뒷모습이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홍화의 앞에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웠는데, 그게 북망산에서 온 사자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자세히 보려면 다가가야 하는데, 노파가 한 번 더 내려쳐서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꿈에서 깨고 나서도 맞은 부위가 얼얼했다.
제 몫이 아니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니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몸조심하란 말 외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더욱 속이 탄다. 순덕이 홍화의 두 어깨를 손에 꾹 쥐고 당부에 당부를 더했다.
“제발, 이홍화. 오늘만 형 말 듣자. 오늘은 꼭 대역 써.”
“형, 오늘이 저 마지막 촬영…,”
“어허! 형 말 들어. 알겠지?”
감독에게 부탁해서라도 홍화를 뒤로 빼야 했다. 순덕의 강렬한 눈빛을 보고도 홍화는 멋쩍게 입꼬리만 올릴 뿐 알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순덕의 꿈에선 북망산이 있었던, 현실에선 백영이 사라진 쪽으로 가만히 고개만 틀었다.
아침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에 회색 구름이 조금씩 모여들더니 곧 비라도 뿌릴 듯이 어둑어둑하게 물들었다. 기상청에서 비 소식은 없다고 한 터라 취소 없이 촬영이 진행되기는 하는데, 하늘을 보면 당장에라도 빗방울이 우르르 쏟아질 듯해 스태프들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순덕이 꿈자리를 운운하며 대역을 쓰라고는 했으나, 홍화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간 구르고 달린 모든 장면이 이 마지막 대목을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에 진짜 치이는 것도 아니고, 부딪치는 척하며 바닥만 구르는 장면은 <크라프트>에서 등장한 다른 장면보다 차라리 안전했다. 담벼락에서 떨어지거나 각목과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는 장면보다야. 순덕의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열에 다섯은 헛다리 짚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저 몸 쓰는 장면을 앞두고 걱정이 과해 꾼 꿈일 터였다.
홍화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아침에 본 유백영이 마음을 어지럽혀 다른 걱정거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무슨 볼일로 여기까지 온 걸까. 볼일이 끝나면 올라간다고 했는데, 그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전보다 살이 좀 빠졌던데, 혹 몸이 상한 건 아닐까.
만나면 한 대 맞을 각오도 하고 있었건만, 백영은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 점이 홍화를 더욱 서글프게 했다. 이제는 정말 끝난 사이구나 싶어서. 앞으로 따뜻했던 그 손 한번 못 잡겠다 싶어서.
걸음이 느려지다가 그 자리에 멎었다. 우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도 촬영이 끝나고서야 누릴 수 있는 사치다. 뺨을 짝 소리 나게 때리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효과는 없었다. 어딜 보고 어느 생각을 떠올리건 백영이 다른 걸 밀어내고 홍화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촬영장에 도착해도 백영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스태프의 인사를 받고 인사를 하면서도 백영 생각뿐이었다.
정신이 팔려 스태프들이 웅성거리는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홍화가 코디가 건넨 모자를 푹 눌러쓰며 고개를 들었다. 감독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주연 배우는 분명 아니었다. 주연은 오전에 이미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코디가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를 매만지며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곳을 연신 흘긋거렸다.
“아, 오늘 유백영 씨가 카메오 출연한다고 해서요. 나도 빨리 홍화 씨 옷 정리해주고 구경 갈 거예요. 어우, 웬일이야. 오늘 로또 살까 봐.”
코디가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재빨리 홍화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반대로 홍화의 뺨은 창백하게 가라앉았다. 가슴이 선뜩하고 차가워졌다가, 불시에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거세게 두근거렸다.
일부러 백영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데, 홍화 씨! 하고 누가 큰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방정맞은 목소리가 누군지는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았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돌아보자 감독이 두 손을 허공에 붕붕 흔들어가며 홍화의 시선을 끌었다.
못 들은 척 도망치고 싶건만 이미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홍화가 멈칫했다가 감독의 손짓에 목줄 걸린 개처럼 가기 싫은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백영 씨가 여기까지 왔는데 홍화 씨, 몰랐어요? 뭐야. 깜짝 선물이라도 준 거야?”
홍화는 감독만 보고 애매하게 웃었다. 백영을 봤다가 아침처럼 눈물이 터지면 곤란했다. 무리하게 돌린 목이 아프고 저려도 꾹 참았다.
“뭐, 둘이 대사 나누는 건 없으니 딱히 호흡 맞춰볼 건 없겠지? 백영 씨는 저쪽에 서 있으면 되고, 홍화 씨는 뛰어가면 되니까. 표시한 데 잊지 말고 확인하시고요. 홍화 씨는 영호 씨하고 어떻게 사인 주고받을지 한 번 더 체크해줘요. 신호 어긋나면 큰일 나니까.”
리허설할 필요 없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홍화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홱 돌아섰다. 백영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 다행이면서도 아쉽고 서러웠다.
“홍화 씨.”
그렇게 여겼는데, 차를 운전할 영호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홍화를 백영이 불러 세웠다. 스태프들의 눈들이 홍화 쪽으로 쏠렸다. 따끔따끔한 시선들. 홍화가 어렵사리 돌아섰다.
“네.”
얼굴은 보지 않았다. 목 아래로만 눈에 담았다. 단정한 넥타이, 몸을 감싼 검은 정장과 흰 셔츠, 넓은 어깨와 긴 다리, 검은 구두와 소맷단을 만지는 손을. 길고 투박하면서도 남자다운 손을 보는데도 눈가가 뜨뜻하게 달아올랐다.
“잘 부탁해요.”
“……네.”
목이 메 간신히 대답하고 고개까지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뒤에서 홍화가 가기만을 기다린 듯이 백영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화가 잠깐 고개를 돌리려다가, 저쪽에서 영호가 손을 높이 들고 저를 찾아 포기하고 앞을 봤다. 아침에 눈물을 다 쏟아 지금 울컥하고 올라온 눈물은 내리누를 수 있었다.
없던 장면이 하나 추가되었다. 원래 홍화만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뒹굴면 끝났는데, 맞은편에서 지켜보는 정부 요원이 한 명 생겼다. 홍화는 설명을 듣고도 왜 하필 이런 장면인가 싶어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순덕이 이런 일을 내다보고 대역을 쓰라고 그렇게 강조한 걸지도 모른다. 이미 직접 하겠다고 못을 땅땅 박아놨는데 인제 와서 못 한다고 발 뺄 수도 없고. 홍화가 쓰라린 위장 쪽을 꾹꾹 눌러가며 도로에 그려진 동그란 원의 위치를 거듭 확인했다.
“차는 저기, 흰 선 그려진 곳 있죠. 저기서 멈출 거예요. 홍화 씨가 사인 보내면 영호 씨가 브레이크 밟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아, 건너기 전에 백영 씨 한 번 보는 거 잊지 말고.”
“……예.”
이제는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홍화가 반대편에 서 있는 백영을 쳐다봤다. 다른 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백영만이 눈에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백영이 시선을 맞춰왔다. 도로 폭이 삽시간에 좁아들고, 백영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것만 같았다.
홍화가 먼저 모자챙을 아래로 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스태프들 사이에 수신호가 오가고, 살수차에서 물을 뿌려 물안개가 올라온 듯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다.
슬레이트가 쩍 벌린 입을 다물었다. 홍화의 머리 위에서 우산이 사라지고, 빗줄기 같은 물줄기가 모자와 어깨 위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지연우는 도로 건너편을 바라봤다. 연락을 나눈 정부 요원이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속 시간 오 분 전. 지연우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실내는 보는 눈이 많아 위험하단 판단하에서였다.
그에게 자료를 건네주면 이제 모든 일이 제 손을 떠난다. 지연우가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자 요원도 핸드폰을 꺼냈다가 도로 맞은편을 바라봤다. 약속한 이가 맞았다.
저가 선택한 일이 부디 옳은 일이길.
지연우는 하늘을 한번 봤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