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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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프트>는 대역의 사고에도 예정대로 촬영이 진행되었다. 문제의 바이크 장면이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나머지 몸 쓰는 역할을 홍화가 맡았다. 순덕이나 김강수가 무리하지 말라며 말렸으나 홍화는 쓱 웃고 말았다.

몸을 내버려 두면 자꾸만 딴생각이 빈자리를 메웠다. 정신없이 대본에 몰두하다가도 문득 멍하니 풀어지는 그 순간에, 이제는 떠올리면 안 되는 인물이 종이 위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잠이 부족해 침침한 눈을 비벼 허상을 날리고 다시금 대본을 소리 내어 읽기만 골백번이었다.

“지연우도 인생 참 처절해.”

옆에서 대본을 훑던 순덕이 혀를 쯧쯧 찼다. 홍화가 대사를 중얼거리다가 순덕을 보았다.

“없이 자란 놈이 유일하게 있는 혈육 살려보겠다고 아등바등 뛰어다녔는데 결국 동생도 죽잖아. 불쌍한 놈.”

홍화가 대본을 넘겨봤다. 순덕 말대로 지연우의 인생이 다사다난하긴 했다. 성장 과정도 불행했고 이제 빛 좀 보려는 찰나에 동생도 세상을 떠난다. 이 악물고 살아온 지연우에게 남은 건 오로지 돈뿐이었다.

“돈만 있다고 행복한 게 아닌데.”

지연우가 악역도 아니건만 이런 결말은 너무 슬픈 거 아니냐고, 순덕이 대본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지연우 팬들이 가슴 아파할 거라고, 최소한 동생은 살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정작 홍화는 지연우의 기구한 인생사를 보고도 별생각이 없었다. 가족을 잃는 건 큰 불행이지만 없어도 살아는 간다. 적어도 지연우는 돈이라도 쥐지 않았나. 남는 게 있으면 그래도 살아갈 힘은 주어진다.

남는 게 있다면.

“…….”

대본을 닫았다.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연습을 방해했다. 대사를 외우긴 했지만 그 위에 감정을 씌우기가 어렵다. 지연우가 동생의 죽음을 알고 오열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NG만 수없이 내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홍화 네 소속사는 바람 잘 날 없네.”

대본은 뒤에다 던져버린 순덕이 이번엔 뉴스를 확인하며 혀를 찼다. 소속사에 관련된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홍화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촬영 전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피했다.

순덕은 말없이 홍화의 뒷모습을 보다가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유백영 열애 소식은 터진 적 없다는 듯 싹 들어갔다. 뉴스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건 스페시아 엔터테인먼트 사내이사의 탈세 혐의와 성 접대 의혹이었다. 회사를 떠난 매니저가 앙심을 품고 담당 연예인과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유출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진 일이었다.

순덕은 뉴스를 휙휙 훑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유백영 열애 소식 약발이 떨어지기도 전에 연달아 큰 건을 터트리는 걸 보니, 박학정 의혹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괜찮을까.

김강수가 형님이 틀릴 수도 있으니 절대 아는 척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지만 순덕은 영 홍화가 걱정스러웠다. 촬영이 힘든 탓인지,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는지 촬영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포동포동 보기 좋게 살 오르던 홍화가 비쩍비쩍 말라가고 있었다. 말을 걸어도 놓치기 일쑤고, 심지어 실수도 잦아졌다.

물어봐도 별일 없다고 딱 잘라내서 오지랖도 마음껏 못 부리겠다. 참 괜찮은 친구라 더 친해지고 싶은데 무작정 들이대면 도망칠 것 같고. 순덕은 손가락 끝으로 입술만 툭툭 치며 촬영장을 바라봤다. 마침 홍화가 촬영할 순서였다. 지금까지야 굳이 연기력 발휘할 필요 없이 몸으로 때우기만 하면 됐던지라 괜찮았으나 오늘도 그럴까. 걸음걸이도 끄덕이는 고갯짓도 평소와 같다지만 걱정이 앞서는 건 막을 수가 없다.

카메라가 돌아갔다. 모든 일이 마무리될 즈음, 지연우는 병원에서 동생의 비보를 전해 듣는다.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다는 알림은 부재중 통화로만 남아있다. 일에 눈이 멀어 핸드폰을 멀리한 탓에 다른 곳에서 온 전화를 모조리 놓쳤고, 그중에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도 섞여 있었다.

감독의 컷 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말을 더듬거나 대사를 까먹지는 않았지만 홍화의 입 밖으로 나오는 어조가 영 책을 읽는 듯하다. 저렇게 연기를 못하는 녀석이 아닌데,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는지 짧은 대답에도 영혼이 없었다.

“홍화 씨, 거기서 감정을 좀 더 살려야죠. 동생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그렇게 무덤덤하면 어떡해. 인생의 목적이 사라졌는데.”

홍화가 입에 붙은 사과를 뱉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대사는 제치고 인생의 목적이 사라진, 이란 말만 중얼거렸다.

감독의 채찍질에도 홍화는 정신을 못 차리고 연달아 지적을 받았다. 동생의 죽음이 안 와 닿느냐고, 큰소리 내지 않기로 유명한 조연출마저 한 소리 거들었다. 홍화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는 사과만 거듭했다.

오 분만 쉬고 다시 가겠다며 감독이 쉬는 시간을 내주었다. 순덕이 득달같이 홍화에게 달려갔다. 풀 죽었으면 위로해주려고 했는데, 홍화의 얼굴은 멍하기만 했다. 순덕이 가까이 다가가도 홍화가 여전히 멍한 눈길을 주다가 형,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불렀다.

“인생의 목적이 사라지면 어떤 기분일까요.”

“허무하겠지. 허탈하고.”

“그래도 지연우한테는 돈이 있잖아요. 동생은 없어도. 가족 없어도 살 사람은 사는데.”

순덕이 입을 열었다가 꽉 다물었다. 홍화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밝고 아름다운 과거는 아닐 거라 짐작했다.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지연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가족을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잖아. 이제 지연우는 세상에 정말 혼자만 남았는데 그 외로움과 슬픔이 얼마나 클 거야.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위로가 안 되겠지.”

어쨌든 연기는 해야 하고, 홍화가 감독에게 잔소리만 배 터지게 얻어먹는 모습은 보기 싫어 순덕이 주절주절 떠들었다. 홍화가 멀거니 순덕만 쳐다봤다.

“사랑하는 사람…….”

홍화가 넋 빠진 사람처럼 그 말만 중얼거렸다. 오 분간의 휴식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갔다. 순덕이 홍화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한 번에 끝내자. 넌 할 수 있어.”

상투적인 응원이라도 홍화에게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홍화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카메라 앞으로 돌아갔다.

지연우는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손이 벌벌 떨려서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거짓말.』

당장 일주일 전만 해도 형과 함께 놀이공원에 갈 거라고 그림을 그리던 동생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저를 떠날 수는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요.』

믿지 못해서 정말이냐고, 거짓말 말라고 소리치면서도 한편으로 지연우는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함을 알았다.

사랑하는 동생은 이제 없다. 제 곁에도, 이 세상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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