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으으, 허으으, 하고 홍화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누군가 정수리에 말뚝을 놓고 망치로 끊임없이 내려치는 고통이었다. 얼마나 술을 들이부었던지 윤진이 혀 차는 장면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목구멍은 말라붙기 직전이고, 속은 뱃멀미하듯 울렁였다.
침대에서 벗어나려다가 내려온 이불을 밟고 바닥에 자빠졌다. 쿵쾅 소리가 나며 코가 시큰하고 콧구멍이 뜨거웠다.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훌쩍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중과 입술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슥 훑자 벌건 핏물이 손바닥에 가득 묻어났다. 홍화가 으헉,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어지럼증이 몰려와 뒤로 나자빠졌다.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뒤통수, 콧대, 콧구멍, 배 속 등등,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홍화가 으윽,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려는데, 문가에서 짝, 짝, 하고 느린 박수가 들렸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보니 문가에 기댄 백영이 대놓고 홍화를 비웃었다.
“잘 논다. 재밌네. 더 해보지 그래.”
“……언제 왔어. 야, 사람이 넘어졌으면 좀 도와줘야 할 거 아니야.”
민망해서 뺨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면서도 홍화는 백영에게 도움도 안 주는 매정한 놈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백영이 예의 그 무뚝뚝한 얼굴로 다가와 홍화의 양 옆구리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레 일어서느라 뇌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돈 듯이 세상이 핑 돌았다. 또다시 넘어질 것 같아 백영의 옷자락을 붙들다가 본의 아니게 품에 안겼다.
운동을 하고 온 모양인지 안긴 품에서 체취가 진하게 느껴졌다. 땀 냄새 따위, 시큼하고 기분 나쁜 냄새 아니었던가. 백영은 그런 것도 없었다. 오히려 체취를 맡고 있으니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았다.
“정신 차려.”
홍화가 킁킁대고 있자 백영이 팔을 잡고 바로 세웠다. 흰 티에 피가 잔뜩 묻었다. 홍화가 콧물 닦듯이 손등으로 코피를 쓱 문질렀다. 손등에도 피가 한가득 묻어 나왔다. 멎은 줄 알았는데 줄줄 새고 있었다.
백영이 혀를 차며 상의를 훌렁 벗어 한 손에 뭉쳐 잡고 홍화의 코를 틀어막았다. 코피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홍화가 얼른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개 들지 마. 입으로 숨 쉬고.”
백영이 홍화의 뒤통수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콧방울 윗부분을 지그시 압박하며 지혈했다. 한참 후에 옷을 떼고 홍화의 턱을 들어 붉게 얼룩진 코 부근을 자세히 살폈다.
“이제 안 나네.”
백영의 손에 들린 티셔츠가 피투성이다. 저 비싼 옷을 지혈하는 데 쓰다니, 세탁비가 얼마나 들지 궁상스러운 걱정부터 들었다. 그러다가 옷 뒤로 백영의 맨살을 발견하고 홍화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한번 만져보고 싶은데. 분명 탄탄하고 부드럽겠지.
홍화가 입까지 헤 벌리고 뚫어지라 쳐다보자 백영이 피 묻은 티셔츠를 홱 집어 던지고 홍화를 욕실로 질질 끌고 갔다. 붙잡혀 가는 도중에도 홍화는 백영의 맨 상체에 눈이 팔려 멍하니 끌려갔다.
최근 백영의 꾸준한 고문으로 나름 몸매에 자신이 붙었다지만 백영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백만 년은 일렀다. 백영을 명공이 섬세하게 조각한 조각에 비유하자면, 홍화는 아이들이 진흙을 뭉쳐 해골에 던져 붙인 꼴이었다.
“씻고 나와.”
문이 닫히고 나서야 홍화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세면대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 속에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있어 두 눈을 크게 떴다. 눈은 퉁퉁 부어 소시지 네 개가 위아래로 붙어있고, 얼굴은 달덩이처럼 부은 데다 코피가 턱에 입술에 뺨에 얼룩덜룩했다.
홍화가 세면대 양쪽을 쥐고 으으으, 신음했다. 이딴 몰골을 유백영에게 보여주다니. 오늘은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씻고 나왔더니 백영이 주방에서 잠깐 뒤돌아봤다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홍화가 목을 길게 빼고 백영의 어깨 너머를 훔쳐봤다. 초록색 푸성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체 물이 도마 위에 시체 조각들처럼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놈들의 정체를 캐물으려는데, 백영이 커다랗고 투명한 믹서에 정체불명의 것들을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홍화가 입을 떼려는 순간, 믹서의 소음이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숙취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속이 울렁거리는 건 덜 가라앉아 홍화가 으, 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주춤주춤 거실로 도망치려는 걸 백영이 목덜미를 붙들고서 주방으로 끌고 왔다.
“마셔. 숙취에 좋은 거야.”
“나 아직 토할 거 같은데.”
“내가 먹여줄까, 아니면 그냥 마실래.”
홍화가 거부하면 사약 거부하는 죄인에게 들이붓듯 억지로 마시게 할 것처럼 백영이 가만히 쳐다봤다. 홍화가 마시기 싫다고 칭얼대도 백영은 컵을 쥐고 코앞으로 들이밀기만 했다.
“알았어. 마실게. 마시면 되잖아.”
설마 저를 죽이겠다고 독이라도 탔을까. 홍화가 콧구멍을 콱 틀어막고 정체 모를 액체를 꿀꺽꿀꺽 삼켰다. 꿀이라도 한 방울 타주지, 혓바닥에 소태껍질을 문질러도 이보다는 덜 썼다. 다른 때는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더니만. 술 먹고 들어온 홍화를 고문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맛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비우고 홍화가 혀를 내둘렀다.
“으웩.”
“잘했어.”
백영이 홍화의 덜 마른 머리카락을 칭찬하듯 헤집었다. 홍화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두 뺨을 손바닥으로 막고 초록 물 묻은 입술에 상 주듯 뽀뽀했다.
순간 심술이 돋은 홍화가 백영의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쓴맛이 가득한 혀를 쏙 집어넣었다. 피하려는 백영에게 매달려 녹즙 맛이 사라지게끔 제 혀에 얽힌 혓바닥을 쪽쪽거리며 빨아댔다. 입술을 떼자 백영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홍화를 내려다봤다.
“존나 쓰네.”
“이제 알았냐. 엄청 썼어.”
홍화가 키득거렸다. 백영이 원래 약은 입에 쓴 법이라며 홍화의 허리를 바짝 껴안았다. 쓰다고 이맛살을 찌푸렸으면서도 질리지도 않고 홍화에게 입을 맞췄다.
백영에게 억지로 떠넘긴 쓴맛이 도로 넘어왔다. 홍화가 저리 가라며 허리를 뒤로 빼고 도리질을 쳐도 백영은 끝까지 쫓아와 복수를 가했다. 쓴맛이 모조리 사라지고, 혓바닥이 달큼하다 못해 아릴 때까지 입을 맞추다가 홍화의 무릎이 흐물흐물 풀릴 때가 되어서야 백영이 입술을 놔줬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인데 하물며 이홍화야. 이제 입 맞추면서 제법 호흡도 고를 줄 알았다. 감개가 무량한 발전에 백영이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 홍화의 아랫입술을 제 입술로 감싸고 오물거렸다.
“간지러워.”
뭐라고 해도 백영은 홍화의 얼굴 곳곳을 맛보느라 대답도 안 했다. 홍화가 병 주고 약, 까지 말했다가 병 주고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고, 꿀이나 타주지 그랬냐고 에둘러서 투덜거린 후에야 얼굴을 떼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홍화. 너 오늘 스케줄 없냐.”
“있어. 근데 오후라……. ……지금 몇 신데?”
“두 시.”
홍화의 안색이 사색이 됐다. 으아악 소릴 지르며 부리나케 백영의 품을 빠져나와 핸드폰부터 찾았다. 옷을 탈탈 털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냈다. 화면에 임시 매니저에게서 온 부재중 통화가 여럿이었다. 세 시까지 촬영장에 도착해야 하건만 헤어며 메이크업까지 받으려면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숙취가 싹 달아났다. 홍화가 으악, 으악 비명을 지르면서 허물처럼 옷을 벗어 던졌다. 촬영에 늦다니, 그런 일은 이홍화의 배우 인생에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약속 시간도 제대로 못 지키는 배우라는 오명은 결단코 피하고 싶었다.
“지금 가도 별로 안 늦어. 내가 데려다줄게.”
“매니저가 기다리겠다고 계속 문자를, 아, 너네 집 주소를 알려줄 수도 없는데!”
“내가 데려다줄 거고, 전화는 차에 타서 해. 천천히, 이홍화.”
백영의 타이르는 말에도 홍화는 옷장에서 옷만 꺼내 입었다. 그래도 얼마간 묵었다고 여벌의 옷이 있어 다행이었다. 다람쥐가 낙엽 위를 구르듯 양말까지 재빨리 발에 꿰어 신은 홍화가 백영을 재촉했다.
“빨리 가자. 데려다준다며!”
그 와중에 모자도 푹 눌러썼다. 백영이 앞장선 홍화의 뒤에서 피식 웃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시기는 놓쳤지만, 이홍화의 태도를 보니 그리 심각한 사안은 아닌 것 같아 뒤로 미뤘다.
“예. 그럼 촬영 끝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늦게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차에 타서 매니저에게 따로 간다고 연락하고 전화를 끊었다. 예전에 홍화를 협박하던 운전 실력 어디 안 가 백영이 제시간보다 이르게 촬영장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도착 시간보다 빨라 홍화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덕분에 빨리 왔어. 고맙다.”
손잡이에 매달리느라 팔뚝은 저릿저릿하고, 간신히 가라앉은 숙취가 멀미로 돌아와 위장과 식도를 후려쳐댔지만 홍화는 일단 고맙다며 인사부터 했다. 백영은 아무 말 없이 운전대만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홍화.”
일찍 도착했어도 시간이 넘치는 건 아니기에 바로 차에서 내리려다가 돌아봤다. 백영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바래다준 대가를 원하는 눈치라 홍화가 능글맞게 씩 웃었다.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내릴까 하는 찰나, 명식의 외침이 떠올라 멈칫했다.
애써 누르고 있었건만.
백영은 홍화를 불러놓고 한참 말이 없었다. 명식 때문에 잠시 굳었던 홍화가 앞으로 기울인 고개를 뒤로 빼며 문고리를 잡았다.
“할 말 없으면 나 내린다.”
“……오늘 스캔들 하나 터질 거야. 믿지 마.”
“무슨 스캔들?”
“그런 게 있어. 시간 없다며. 어서 가.”
홍화가 더 캐물어보려고 해도 백영이 얼른 가보라며 손짓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홍화가 궁금증을 그대로 품은 채 차에서 내렸다.
대체 무슨 스캔들이기에 유백영이 예고까지 할까. 이따 쉬는 시간에 전화해서 물어볼까, 아니면 스캔들 터지기를 기다릴까.
……촬영 끝내고 나면 터져있겠지. 홍화는 의미심장한 예고를 뒤로 미뤄두고 일단 뛰었다. 더 꾸물거렸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게 지각 확정이었다.
『와, 너는 라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지금 삐까리가 살았나 뒈졌나도 모르는 판국에 라면이 넘어가냐고.』
『죽어도 먹고 뒈져야 때깔 곱다는 거 모르소.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니까 건드리지 마쇼. 예?』
지연우가 팍 짜증을 내며 나무젓가락에 컵라면을 걸었다. 깡패들 소굴에서 간신히 탈출해 처음 입에 넣는 음식이었다. 딴 곳에서 제 볼일 끝내고 돌아온 빈집털이범 오강덕이 그런 지연우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게 후려쳤다. 한입 가득 넣은 라면이 국물 위로 우르르 쏟아졌다.
『요 새파란 새끼가 말하는 거 보소. 뒤질래.』
『아, 진짜. 내가 건들지 말라 그랬지. 계급장 떼고 붙어보시든가.』
지연우가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홱 돌아봤다. 오강덕이 가소롭다는 듯이 허허허 웃다가 정색했다. 칼바람이 난무할 듯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맞은편에 앉아 과자를 주워 먹던 장물아비가 손을 흔들며 둘을 말렸다.
『왜들 그런대. 싸운 거 대장이 알면 우리 셋 다 죽어요. 난 살고 싶으니까 싸우려면 둘 다 안 보이는 데서 싸우고 와요. 죽이지는 말고. 아직 일 안 끝났으니까이.』
장물아비가 너구리처럼 능글맞게 슬슬 웃어대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지연우가 작게 욕을 읊조리며 소파에 앉아 먹다 남은 라면을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런 지연우를 험악하게 노려보던 오강덕도 싸움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아 구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