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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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살 빠졌다?”

주완이 제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간 소속사에서 애를 어지간히 굴려댔는지 피부도 거칠거칠하고 눈 밑도 가뭇가뭇했다. 홍화를 보자마자 안을 듯이 달려오다가, 바로 코앞에서 멈칫하고서 주완이 눈가를 설핏 찌푸렸다.

“형, 반창고가…….”

주완의 눈빛에 대번 날이 섰다. 반창고를 떼어낼 듯이 손을 뻗기에 홍화가 유연하게 허리를 비틀며 빠져나갔다. 그놈의 잇자국이 여태 남아있었다. 유백영은 홍화의 목에 잇자국으로 흉터를 남기는 게 최종 목적인가 싶을 정도로 심심하면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냥 가볍게 베였어. 신경 안 써도 돼. 넌 요새 무슨 작품 들어가? 다이어트하나, 살 엄청 빠졌네. 다이어트하면 술 말고 그냥 밥만 가볍게 먹어야겠다.”

“아뇨. 다이어트 안 해요. 요새 잠을 좀 못 자서……. 그래서 살이 좀 빠졌나 봅니다.”

저번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만. 상심이 깊나 주완의 얼굴이 수척했다. 전보다 훌쩍해진 모습이 안쓰러워 어깨를 툭툭 치며 주완을 위로했다. 몸 관리에 들어간 건 아니라고 하니, 술 한 잔 마시며 한탄하면 들어줘야겠다.

윤진이 뒤늦게 합류했다. 주완과 달리 눈빛이 쌩쌩하고 온몸에서 밝은 기운이 넘쳐흘렀다. 영화 캐스팅이 이뤄진 이래로 윤진은 매일이 맑음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오늘은 제가 쏠 건데, 주완 씨 먹을 복이 좋네.”

“누나, 얘 원래 이것보다 통통한 앤데 살이 너무 빠졌어. 맛있는 거, 살찌는 거 먹으러 가자.”

“으이그, 네 걱정이나 해라. 얘는 만날 때마다 살이 쪽쪽 빠져 있어요. 기 빨아먹는 귀신이 붙었나.”

유백영이 귀신은 아니지만 기는 쪽쪽 빨아먹는다. 오늘 아침에도 야릇해지는 분위기를 막으려고 홍화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앞의 두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알아서도 안 되기에 홍화가 열이 오르기 전에 고개를 탈탈 털며 기억을 쫓아냈다.

“왜 그래?”

“……식전 운동.”

눈을 굴리며 어설프게 변명했다. 둘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보기 전에 홍화가 두 사람 어깨에 팔을 걸며 근처의 번화가로 질질 끌고 갔다.

술과 밥이 함께 나오는 데로는 역시 고깃집이 최고 아닌가. 윤진이 근처에 고기 좋은 곳이 있다며 둘을 안내했다. 입맛이 까다로워 극단에서도 맛집 탐색기로 불리던 윤진이라 홍화가 의심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저녁 시간이 아닌지라 가게 안은 셋 외에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윤진이 큰소리로 이모, 하고 부르자 나이가 지긋한 중년 여성이 부엌에서 복슬복슬한 검은 머리를 쑥 내밀었다. 앞치마에 젖은 손을 쓱쓱 닦더니 윤진을 보고 반색했다.

“아이고, 윤진이 아니여. 언제 오나 했네. 예전엔 자주 오더니만 요새는 통 발걸음 안 해서 궁금했지. 아니, 남자 친구는 얻다 두고 저렇게 잘생긴 청년만 둘이나 데려왔데? 새 애인들이여? 아따, 잘생겼구마.”

“아이고야, 이모 주책도 심하소. 그놈이랑은 헤어진 지 오래고, 이 친구들은 친한 동생들이에요. 고기 오 인분이랑 맥주 세 병이랑 소주나 줘요. 목살 좋은 거 들어왔어요?”

“난 원래 그놈 맘에 안 들었어. 잘 헤어졌어. 그리고 우리 집 목살이야 다른 데랑 비교하면 쓰나. 금방 갖다 줄게.”

태세 전환이 번개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 한 게 마음에 걸리는지 아주머니가 재빠르게 부엌으로 사라졌다. 전 남자 친구를 언급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윤진의 밝은 표정엔 흠집이 없었다.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 잘리는 것도 아니건만, 윤진은 미련 없이 깔끔하게 정리한 듯했다.

“누나, 요새 많이 바빠? 영화는 어떻게 됐어?”

“어휴, 말도 마라. 아주 그냥 바빠서 죽겠다. 내년 하반기 개봉 예정이라 정말 정신없거든. 오늘도 시간 간신히 낸 거야. 근데 너무 행복하다, 홍화야. 진짜 하루하루가 행복해. 감독님도 엄청 잘해주시고 다른 분들도 다 좋은 분들이라 촬영장 분위기도 끝내줘.”

“영화 제목이 뭐예요, 누님. 적어두고 기억했다가 개봉 당일에 바로 보러 가겠습니다.”

“<가까이 있는 당신에게>. 스릴러예요. 기억을 잃은 여자가 자기 과거를 찾아가면서 거기에 얽힌 사건들과 마주하는 건데, 소설이 원작이거든요. 원작도 재밌더라고요. 영화도 재밌을 거야.”

“누나가 작품 보는 눈이 좀 좋아. 영화도 대박 날 거야.”

홍화가 두 엄지를 치켜세우며 씩 웃었다. 윤진이 그런 홍화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렸다. 주완이 둘을 지켜보다가 저도 몰래 홍화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고 만지작거리다 떼어냈다.

영화 주제로 수다를 떠느라 아주머니가 다가온 것도 몰랐다. 아주머니가 푸짐한 밑반찬을 상에 내려놓으며 홍화를 흘끔 쳐다봤다.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진과 홍화를 번갈아 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듯이 어머머, 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마, 어마, 이 청년 티브이에서 나왔던 그 사람 아니여. 아이고마, 윤진이 네가 연예인도 다 데려오고, 많이 컸네. 거, 사인 좀 해주고 가소. 벽에 걸어 놓을 텡께.”

“이모도 참, 홍화 것만 쏙 받고 빼요? 나도 이제 영화에 나오는데 내 것도 가져가!”

“너는 영화 개봉하면 그날 걸어놓을 겨. 오늘은 저 청년 것만 챙겨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주머니는 윤진 몫까지 종이를 챙겨 와 사인을 받아 갔다. 연예인이 어디 자주 행차하시겠냐며 인심도 좋게 음료수에 빨갛게 잘 구운 새우 한 대접도 서비스로 줬다. 더 많이 데려오라는 뇌물이란다.

“딴 애들 데려왔을 때는 서비스는 눈곱만큼도 안 주더니 얘네 데려오니까 왜 이렇게 잘해줘요? 이거 차별 대우야!”

“그럼 진즉에 저렇게 잘생긴 애들 골라서 데려오지 그랬어. 어디서 비루먹은 개 꼬라지 한 놈들만 데려와서 그랬지.”

윤진이 징징대도 아주머니는 코웃음 치며 소라게처럼 부엌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윤진이 전 남자 친구 생김새가 비루먹은 개 같긴 했다고 깔깔댔다.

윤진의 영화가 잘 되길 빌며 건배를 하고, 술이 돌고, 홍화가 찍는 드라마의 대박을 기원하며 건배를 하고, 맥주에 소주를 들이부어 마시며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위장에 술을 퍼부었다. 안색이 영 안 좋아 걱정했던 주완도 작정한 듯 술을 물 마시듯 들이켰다. 홍화가 말려도 이 정도쯤은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큰소리를 떵떵 쳐댔다.

주완의 허풍은 한 시간도 안 되어 초라한 민낯을 보였다. 혀가 꼬부라지고 얼굴이 불그죽죽 물들었다.

“그래서……요, 제가……요. 김오늘을, 너무, 너무, 엄청 보고 싶어했는데에……. 그 미소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는데에…….”

간에 기별은 무슨, 간과 이별할 주량을 선보이며 주완이 테이블에 널브러졌다. 아직도 윤지건 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입만 열면 김오늘 타령이었다.

“이 친구 술이 약하네. 근데 김오늘이라니. 그게 누구야? 이 친구가 짝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돼?”

맥주 세 병, 소주 세 병을 골고루 비운 윤진이 멀끔한 낯으로 물었다. 홍화는 주완을 말리느라 술은 적당하게 열 오를 만큼만 마셨다.

“이 녀석이랑 웹드라마 찍었거든. 퀴어였는데, 내가 김오늘 역이고 이 녀석이 상대역이었어.”

“그런 건 또 언제 찍었데. 인기 많네, 이홍화. 그나저나 네가 김오늘 역? 그럼 얘가 좋아하는 애가 너야?”

“그럴 리가. 그냥 이 녀석이 거기서 헤어 나오질 못한 거지. 그런 거 있잖아. 로맨스 영화 찍다가 둘이 정분나는 거. 드라마 처음 찍어서 헷갈리는 걸 거야.”

“그런 것 치고는 진지하던데.”

“아니라니까.”

윤진의 헛된 망상을 끊을 겸 홍화가 빈 잔을 내밀었다. 윤진이 맥주와 소주를 섞어줬다. 쓰면서도 달큼한 술맛이 혀끝에 감돌자 밑도 끝도 없이 유백영이 생각났다. 촬영 전 전화했으나 바쁜지 받지 않았다. 문자도 없었다. 괜히 저만 속 끓이는 것 같아 속상했다.

“넌 만나는 사람은 있고? 예전에 넘치는 교통비 받았다는 친구 외엔 다른 소식이 없네.”

윤진이 히죽였다. 네 이야기라는 걸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홍화는 끝까지 발뺌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고백하고 싶어 목구멍이 근질거렸지만 밝힐 수는 없었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게 유백영이라는 사실만 숨기면 되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드디어 생겼어? 잘됐네. 누군데.”

“그건…… 말 못 하지.”

“짝사랑이야?”

홍화는 대답하지 않고 불판에 남은 고기만 뒤적거렸다. 좋아한다고 자각했을 때는 몰랐건만,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자존심에 옅은 금이 갔다. 유백영이 절 좋아할 리 없는데 제 마음만 요동치는 게 무척이나 억울했다.

“맞나 보네. 뭐, 외사랑 아닌 게 어디야. 알면서도 받아주지 않는 게 마음 고통은 더 심하잖아. 어, 백영이 나온다.”

홍화의 고개도 윤진을 따라 절로 돌아갔다. 작은 화면에 유백영이 나온 광고가 빠르게 지나갔다. 커피 광고였다. 유백영이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는 안타깝게도 저 커피가 아니었다. 원두를 직접 갈아 내려 마시는 방식을 선호해 인스턴트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쟤 저 커피 안 마시는데.”

“응? 뭐라고?”

요놈의 주둥이는 언제 한번 일 크게 치러야지 정신을 차리지. 홍화가 뜨끔한 내색을 숨기고 뭐가, 하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우리 백영이는 참 애가 참하고 착해. 지금까지 스캔들 한번 없고, 기부도 많이 하고. 이번 화재에도 통 크게 내서 화제였잖아. 이 바닥에서 보기 힘든 바른 청년이야.”

유백영의 돈지랄은 경계가 없구나. 좋은 일에도 쓰고, 저 불러내겠다며 회식 같은 쓸모없는 일에도 쓰고, 별 군데에 다 쓴다며 홍화가 피식 웃었다. 그보다 스캔들이란 말이 귀에 꽂혀 홍화가 입을 열었다.

“걔 스캔들 난 적 없어? 한 번도?”

“없어. 깨끗해. 걔는 아마 스캔들 터지면 다들 완전 발칵 뒤집어질걸? 찌라시에도 안 나오거든. 연애를 안 하고 사나. 나도 궁금하다. 너 예전에 백영이랑 같은 드라마 찍었잖아. 뭐 본 거 없어?”

과거에 배소희와 뭔가가 있었다는 건 들었어도 그 외엔 홍화도 몰랐다. 현재 밤낮 새벽 등등 시도 때도 없이 저와 입 맞추고 몸 섞는다는, 세상이 까무러칠 사실이 있지만 아무리 친누나 같은 윤진이라도 밝힐 수 없었다. 홍화는 모른 척 술만 들이켰다.

“에휴, 그래도 저렇게 잘생긴 인간이 수도승처럼 살겠냐. 주변에서 한번 자겠다고 득달같이 달려들겠지. 예쁘고 잘생긴 것들이 넘쳐나는데 다들 얌전하게 놀겠어? 나만 해도 유백영이 자자고 하면-,”

“어허, 이 양반이! 동생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홍화가 술잔을 테이블에 쾅 소리 나게 내려놨다. 그 탓에 곯아떨어진 주완이 흠칫하며 일어났다.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유백영이랑 만날 기회가 내 인생에 오겠냐. 없겠지.”

“저는 유백영이 싫습니다!”

주완이 대뜸 외쳤다. 홍화와 윤진이 깜짝 놀라도 주완은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눈앞에 유백영이 있으면 주먹으로 한 대 쳤을 것처럼 쳐다봤다.

“그 사람 못됐습니다. 나한테서 홍화 형을 빼앗아 갔어요.”

“내가 무슨 물건이냐. 그리고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백영이 훨씬 선밴데…….”

“기분 나쁩니다, 그 사람. 안 보였으면 좋겠어요. 미워요. 싫습니다. 그냥 싫어요. 홍화 형, 그 사람 만나지 말아요…….”

꼭 사정을 다 꿰고 있는 사람처럼 말해 홍화가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완은 홍화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비비적거리며 술주정처럼 홍화 형, 홍화 형 하고 비 맞은 땡중처럼 중얼댔다. 홍화가 머리통을 밀치자 이번엔 두 팔로 홍화를 껴안고 뺨에 뺨을 문질렀다.

“술 냄새나. 저리 가, 이 새끼야.”

“홍화 형, 내 김오늘…….”

“하이고…….”

윤진이 혀를 쯧쯧 찼다. 홍화도 관망하듯 혀를 차고 싶었으나 주완의 팔이 오라처럼 옆구리를 꽁꽁 싸매고 있었다. 에휴, 한숨 쉬며 머리를 토닥거렸다.

“……야. 이홍화, 너 목에 그거 뭐냐.”

“뭐가?”

윤진의 시선이 꽂힌 곳이 약간 허전했다. 홍화가 도로 수마에 빠진 주완을 밀치고 목덜미를 더듬었다. 목 옆에 붙어있어야 할 반창고가 주완의 머리통에 붙어있었다. 홍화가 테이블에 널린 새우 대가리보다 벌겋게 익어서 허둥지둥 상처를 가렸다. 이미 다 들켜 무너진 외양간에 망치 두드리는 행동이었다.

“너……. 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이홍화 열정적이네. 누가 그렇게 집요하게 상처 냈대. 워후, 뜨겁다, 뜨거워.”

“아, 그냥 지나가던 개한테 물린 거야. 뭐가 또 열정적이래.”

“내 시력이 도합 사 점 영인데 어디서 구라를 쳐. 내가 사람 잇자국하고 개 이빨 자국 구분 못 할 거 같냐. 누구야, 그거. 누가 이홍화의 몸뚱이에 도장을 쾅쾅 찍어놨어. 아주 그냥, 집착이 어마어마하구먼.”

“집착은. 아오, 그런 거 아니라고.”

“어떤 여자야. 누나한테 다 이야기해봐. 여자는 여자가 알지. 아님, 남자야?”

윤진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낮아졌다. 주완도, 윤진도 왜 이렇게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홍화가 주완의 머리에 땜통을 만들 것처럼 반창고를 거칠게 떼어 목에다 붙였다. 접착제가 효력을 다 해 붙여도 훌러덩 벗겨졌다.

“누나는 편견 없어. 홍화 네가 누굴 좋아하든, 만나든 응원할 거야.”

“……됐다. 말을 말자. 아, 헛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사장님! 여기 맥주 두 병이랑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아예 윤진의 지갑을 거덜 낼 기세로 안줏거리도 더 시켰다. 윤진이 생당근을 씹으며 말도 못 붙이겠다고 투덜댔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윤진에게 탈탈 털려 좋아하는 사람이 유백영이고, 걔랑 밤마다 몸 비비느라 바쁘다고 불어버릴까 봐 홍화는 흐름을 끊을 요량으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일어섰다. 이럴 때는 담배나 느긋하게 피우고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돌아오는 게 딱 좋았다.

윤진은 홍화의 머리 위에서 뛰어노는 사람이었고, 홍화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기자처럼 파고들기에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만으로는 주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윤진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더니 홍화도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취했다.

2차를 외치는 윤진을 택시 태워 보내고 나자 전봇대에 기대서 있는 복병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홍화를 쳐다봤다. 주완이었다. 윤진과 홍화가 부어라 마셔라 할 때 자고 있어서 그런지 눈이 전보다는 또랑또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술 취한 듯 보여 숙취 음료도 사서 손수 입에 대고 먹여줬다.

“강주완, 집 어디야. 택시 타고 가자.”

주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댔다. 잘 안 들려 홍화가 귀를 가까이 갖다 댔다. 중얼거림이 미끼였다는 듯이, 주완이 두 팔을 뻗어 홍화를 부둥켜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꼭 껴안고서 홍화 형, 홍화 형 불러댔다.

“형, 혹시 돈 안 필요하십니까.”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홍화가 놓으라고 툭툭 두드려도 주완은 홍화를 놓칠세라 불안한 사람처럼 팔뚝에 힘만 주었다.

“이자, 낮게 받을게요. 연체 금리도 낮춰주고 선이자도 적게 받을게요. 저한테 돈 빌려 가세요. 전 재산 다 빌려줄 수 있어요. ……아버지가 그런 일 하는 거 경멸했는데, 이거라도 해야지 안 되겠어. 형, 저한테 돈이라도 빌려 가세요…….”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였다. 홍화가 고개를 떼고 주완을 올려다봤다.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다가 홍화의 뺨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군대에서 아무리 괴롭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녀석이 뭐가 그리 서러워서 굵은 눈물방울을 후드득후드득 떨어트리는지. 홍화가 놀라서 주완의 양 팔뚝을 움켜잡았다.

“야, 너 왜 울어. 누가 울렸어. 왜 그래. 울지 마. 사내자식이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바깥에서 울면 어떡해. 뚝! 어서 뚝!”

“홍화 형…….”

손수건도 휴지도 없어 홍화가 소매를 길게 늘려 주완의 얼굴을 문질렀다. 한참을 훌쩍이던 주완이 홍화를 꼭 껴안았다. 좀 전보다는 여유롭고 넉넉하게. 코끝에서 주완이 자주 쓰는 향수 냄새가 났다. 백영과 달랐다.

“형, 뽀뽀해도 돼요?”

“안 돼.”

“키스해도 돼요?”

술주정 한번 더럽다.

“안 된다고.”

“다 안 되면, 섹스라도 해요, 우리.”

웬만한 술주정은 다 들어줘도 성추행 섞인 술주정은 처음이었다. 홍화가 손을 들어 주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세게 치고서 주완의 품을 빠져나왔다.

“미친 새끼야. 씨발, 술 깨면 넌 내 손에 뒈졌어. 일단 집에 가서 잠이나 처자. 한 번 더 그딴 소리 할 거면 네가 알아서 뒈지고. 택시 아저씨한테 다리 위에서 차 세워달라고 할 거니까.”

주완이 형, 하고 불렀으나 홍화는 택시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홍색 택시 한 대를 잡아 문을 열고 주완을 질질 끌어다가 안에 처넣었다.

“말할 정신은 남았으니까 주소는 네가 말해라.”

“형, 저는.”

“닥쳐. 술 깨도 당분간 연락하지 마.”

택시가 부서지라 문을 닫았다. 주완이 창에 손바닥을 대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홍화를 바라봤다. 홍화가 고개를 돌려 외면하자 택시가 출발했다.

다 돌려보내고 홍화만 남았다. 홍화는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담배부터 빼 물었다. 라이터가 틱틱거리기만 하고 불이 안 붙어 짜증을 내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팔을 내렸다. 다른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헝클다가 주완이 형, 형 읊조리며 울던 얼굴이 떠올라 욕을 뱉었다.

이건 아니잖아.

자신과 윤지건을 동일시해서, 그래서 김오늘에 대한 애정이 샘솟고, 그 애정이 홍화에게 옮겨온 것이라 여기려고 했다. 한데 주완의 우는 얼굴이, 홍화를 바라보는 눈빛이 윤진의 추측과 맞아떨어졌다.

“착각이겠지. 착각이어야지.”

그래야지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를 계속 유지하지 않겠나.

“…….”

홍화가 멈칫했다. 주완의 자리에 저가, 그리고 제 자리에 백영이 놓였다.

정의하지 않은 사이에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결된 끈이라고는 몸뿐인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이 관계에 끝을 보지 않으려면 무슨 마음을 숨기고, 어떤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씹.”

담배를 도로 물었다. 불이 붙을 때까지 라이터 부싯돌을 돌렸다. 끝내 불이 붙지 않아 필터를 문 입만 씁쓸해졌다.

마음이 복잡해 홀로 술 한 잔 더 하고 있을 무렵 백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홍화,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울적한 기분이 연기처럼 날아갔다. 백영을 보고, 그를 껴안으면 세상의 어떤 고뇌든 한낱 조약돌처럼 여겨질 것만 같았다.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근처라고, 걸어갈 거리라고 둘러대고 홍화가 밤길을 걸었다. 고깃집 사장님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그리고 알더라도 연예인 봤다며 들러붙을 사람이 없을 터라 마스크든 안경이든 안 쓰고 후드만 눌러썼다.

계속 걷다 보니 술기운이 사라지고 복잡한 마음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걸어오는 데 시간이 걸려 중간에 백영이 전화를 했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 헐레벌떡 뛰어갈 것만 같아서.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채 다 누르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막 씻고 나온 듯 백영의 맨 상체에 물기가 촉촉하게 어려 있었다. 홍화는 백영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며 두 팔을 넓게 벌리고 그 품에 뛰어들었다. 곰 인형처럼 백영을 껴안고 이마를 비볐다. 부들부들하지도, 폭신폭신하지도 않은 그 감촉이 어찌나 좋은지, 홍화가 배슬배슬 실실거렸다.

좋아한다는 고백만 안 하면, 이 자리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오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백영도 매정하게 내치지는 않겠지. 경멸하지도 않고, 곤란해하지도 않고, 그냥 거기에 사물처럼이라도 있으라고 두겠지.

이런 관계를 경험해본 적 없어서, 사람을 이렇게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홍화는 제 마음을 드러냈다가 버림받지 않을까 그저 무섭고 두려웠다. 좋아하는 마음은 흡사 초콜릿이었다. 달콤한 동시에 씁쓰름한.

“술 마셨어?”

현관문이 닫혔다. 홍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영이 홍화의 입술 앞에서, 그리고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댔다. 주인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냄새 맡는 강아지 같아 홍화가 키득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떤 새끼야.”

“……뭐가?”

주변 사람들이 다 신이 내렸나. 주완의 과감한 제안이 떠올랐지만 홍화는 순진한 척 눈을 끔벅거렸다. 백영에겐 통하지 않았다. 확인차 코끝을 홍화의 귀밑에 대고 숨을 흠뻑 들이켜더니 눈가에 금세 찬 바람이 불었다. 북풍한설이었다.

“너 향수 안 쓰잖아. 누구랑 굴렀어.”

“뭔 미친 소리야. 내가 누구랑 굴렀다고. 아, 진짜. 윤진 누나랑 술 한잔했어.”

“그게 끝이야?”

“……아는 후배랑.”

“후배 누구.”

“극단 아는 후배. 말하면 네가 아냐?”

주완이라고 밝혀도 누군지 모를 것을. 그놈의 성추행이 문제였다. 그게 마음에 걸려 백영에게 선뜻 주완의 정체를 알려줄 수 없었다.

“그 새끼하고 몸 비비고 왔어? 왜 이렇게 냄새가 진해.”

“넌 말을 해도 꼭 그딴 식으로 해야 하냐. 내가 걔랑 왜 굴러, 구르긴. 오해해도 정도가 있지, 내가 미쳤다고 동생 같은 애랑 구르겠냐.”

“저번엔 친누나고 이번엔 동생이야? 창의성 좀 있어봐라, 이홍화. 이리 와. 까보게.”

“뭘 까봐!”

홍화가 바락 소리를 질러도 백영은 거침없이 홍화를 발가벗겼다. 버둥거리는 홍화를 생선 비늘 벗기듯이 홀딱 뒤집어서 상의, 하의, 속옷까지 모조리 벗기고서 위아래로 빤히 훑었다. 감옥에 들어가는 재소자의 몸뚱이에 흉기가 남아있나 없나 살피는 교도관만큼이나 훑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젖꼭지와 배꼽, 아랫도리와 허벅지 안쪽을 훑는 시선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그만 쳐다봐.”

“자국은 없고.”

“미친놈아, 갑자기 자국 타령이야.”

홍화가 옷을 주워 들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에 백영이 팔을 뻗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홍화가 상체를 벌떡 세우고 백영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쳐도 찹쌀 반죽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는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홍화가 기겁해도 손가락을 기어이 엉덩이골까지 밀어 넣고는, 말랐는지 젖었는지, 말랑말랑한지 꿋꿋하게 닫혀있는지 문질렀다.

“하지 말라고!”

“진짜 안 했어?”

“안 했어, 안 했다고! 아, 만지지 마! 저리 가! 개새끼야!”

홍화가 있는 힘을 다해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러도 백영은 홍화를 품 안에 가두고 본인이 만족할 만큼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보들보들한 허벅지 안쪽과 불알도 손아귀에 쥐어보고 나서야 홍화를 번쩍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제발……. 상식 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 썼더니 발버둥 칠 힘이 없다. 홍화가 백영의 등을 주먹으로 퍽퍽 내려치면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철썩, 하고 제 엉덩이만 벌겋게 익도록 얻어맞았다. 홍화가 상체를 들고 으악, 으악 비명을 질러도 말 안 듣는 애 다루듯이 백영은 홍화의 볼기짝만 찰싹찰싹 후려갈겼다.

“누가 말없이 늦게 들어오고, 전화도 안 받고, 다른 남자랑 술 마시고 다니래. 봐줬더니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이 씨발, 이 개새끼야. 아파…….”

엉덩이가 불붙은 듯 뜨거웠다. 손바닥 넓이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커다랗고 두께도 두꺼워서 백영이 한 대 때릴 때마다 엉덩잇살은 물론 허벅지 살과 어깨까지 잘게 흔들렸다. 발끝이 아파서 굽고 눈 끝에 눈물이 찔끔 매달렸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만 종착지가 욕실이었다. 샤워부스에 홍화를 내려놓고서 백영이 물을 틀었다. 다행히 물이 따스했다.

“씻고 나와. 오늘 숙제 검사할 거야.”

“무슨 숙제? 개소리야, 또.”

“저번에 숙제 줬잖아. 오늘 검사할 거니까 씻고 나오라고.”

무슨 숙제였지. 술기운이 아직 덜 가셨는지 백영이 뭘 검사하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어보려는 찰나에 백영이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홍화만 미지근한 물줄기 아래 서서 숙제가 뭐였는지 반추했다.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고 그저 엉덩이만 얼얼하고 아프다. 홍화가 벌겋게 손자국 남은 엉덩이를 쓱쓱 문지르며 물 온도를 조금 낮췄다. 아파서 눈물까지 찔끔거렸으면서, 아랫도리에는 도톰하게 살이 쪘다. 이게 다 술 탓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익히고 나온 후에도 숙제가 무언지 떠오르지 않았다. 방학 내도록 펑펑 놀다가 마지막 날 밤이 닥쳐서야 밀린 숙제가 떠오른 애처럼 홍화가 쭈뼛쭈뼛 욕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백영이 상체는 여전히 홀라당 깐 채로 홍화를 돌아봤다. 한 손에 얼음 담긴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백영이 손목을 까닥이자 안에 담긴 호박색 액체가 그 안에서 찰랑거렸다.

“마실래?”

“……무슨 숙젠데.”

“진짜 기억 안 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홍화는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백영 근처를 얼쩡거렸다. 평소라면 백영을 따라 소파에 앉아 같이 티브이라도 들여다봤겠으나, 숙제라는 단어가 영 꺼림칙했다. 백영이 그걸 꼬투리 잡아 자신을 고문할지도 모른다는, 신기에 가까운 추측이 섰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이리 와.”

“나 그냥 들어가서 자면 안 될까.”

“마시는 게 좋을 텐데.”

유백영이 저런 식으로 나와서 홍화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홍화가 “잘 자라!” 하고 외치며 백영과 같이 자던 침실이 아닌, 좀 떨어진 손님방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안락한 제 반지하 방으로 도망칠 수도 없고,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은 상태로 찜질방으로 도망갈 수도 없어 선택한 마지막 보루였다.

혹시 몰라 문을 잠그고 귀를 갖다 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나, 문 열라는 소리가 들리면 온몸으로 문을 막고 저항군처럼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티브이 소리만 흐릿하게 들릴 뿐 유백영은 방문 가까이 오지 않았다.

오 분, 팔 분, 십 분.

시간이 흐를수록 바짝 굳어있던 홍화의 어깨가 점차 아래로 누그러졌다. 종래엔 바닥에 앉아 문가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몸이 바닥에 쓰러지려고 할 때 퍼뜩 잠에서 깨어, 비척비척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유백영은 별다른 의도 없이 던진 말인데 괜히 과민 반응했다. 숙제고 뭐고 헛소리였다. 지레 겁먹은 게 부끄러워 홍화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촬영과 술자리에 시달리느라 노곤한 몸이 침대 밑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귀에 닿았다. 공포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었다. 어두운 방, 주인공이 이유 모를 무섬증에 시달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달달 떨고 있다. 살인마, 혹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방문을 열고 빛을 등진 채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온다. 손에 칼이 들려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얼굴이 녹아서 일그러진 귀신 몰골일 수도 있다.

잠이 누른 눈꺼풀이 무겁다. 홍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뜨려고 용을 썼다. 손끝 발끝을 힘차게 꼬물거린 결과 번쩍 눈을 떴다. 꿈인지 현실인지 잠시 헷갈려 눈을 끔벅였다가 이불 끝을 잡고 슬며시 내렸다. 검은 인영이 빛을 등지고 침대맡에 서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난리가 났다. 살인마냐, 귀신이냐. 손에 뭔가를 든 걸 보니 살인마로구나. 홍화가 히익,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살인마가 침대 옆 스탠드 불을 켰다. 히이익, 하고 홍화가 두 번 놀랐다. 상자를 든 백영이었다.

“어딜 도망가.”

집 안인데 도망이라니, 그저 안전한 곳이 어딘지 궁리하다가 들어온 것뿐이다. 홍화가 변명하려고 했으나 백영이 침대에 앉아 상자를 내밀어 말문을 열지 못했다.

“숙제 검사는 하고 자.”

“그러니까, 무슨 숙제.”

자는 것까지 깨워서 시키는 그 대단한 숙제가 뭔지 이제 홍화도 궁금했다. 백영이 상자를 턱 끝으로 가리켜 이게 답이구나, 하고 열어봤다.

“……야, 이 미친놈아!”

홍화가 상자를 침대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상자에서 길쭉한 살색 실리콘 덩어리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백영이 선물이랍시고 보낸 모델과 똑같은 놈이었다. 홍화가 시뻘건 얼굴로 악을 써도 백영은 홍화가 도망가지 못하게 차분히 팔목부터 잡았다.

“그래서 내가 아까 한 잔 마시고 가라 했잖아. 너 숙제 검사 편하게 받으라고.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

“야 이 씨, 하……. 내가 저걸 왜 해. 이게 지금 자는 사람 깨워서 시킬 일이냐. 제발 정상인의 범주에서 사고해주라.”

“저걸로 봐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어디서 큰소리야. 딴 새끼 냄새를 묻히고 올 거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않나. 너 오늘 숙제 검사 안 받으면 안 재울 거니까 그렇게 알아.”

“미친……. 나 집에 간다.”

“네 집에서 하게?”

저 흉물을 들고 쫓아와서라도 기어코 끝을 보겠다는 말이었다. 홍화가 질색하며 노려보자 백영이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와 홍화의 상의 잠옷 단추 하나를 톡 풀었다. 그 사이로 손을 미끄러트리고서는, 동글동글한 젖꼭지를 검지로 은근슬쩍 누르고 비틀었다.

“어서.”

홍화가 백영의 손목을 잡아도 젖꼭지를 굴리는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읏, 하고 신음이 튀어 나가 홍화가 얼른 손목으로 입을 가렸다. 백영이 그런 홍화의 뺨에 쪽 하고 입 맞췄다.

“보고 싶어.”

생략된 목적어가 뭔지 빤히 아는데도. 보고 싶다는 말은 홍화에게 줄을 연결하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끈의 끝을 쥐고 있는 주인은 물론 유백영이었다.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유백영 앞에서 저 흉물을 가지고 놀쏘냐. 홍화가 홀딱 넘어갈 뻔한 마음을 추스르고 백영의 손목을 움켜쥐고 빼내려 했다. 손목이 홍화의 살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손가락은 여전히 젖꼭지를 꽃잎 건드리듯 살랑살랑 건드리고 있었다. 홍화가 상체를 움츠려도 쫓아와 괴롭혔다.

“아니면 내 손으로 네 친구와 네가 얼마나 친해졌는지 직접 박아서 알아볼 거야. 물론 밤도 새야겠지. 어떡할래. 네가 하고 편하게 잘래, 아니면 내가 할까.”

이 세상 통틀어 유백영만큼 악랄한 인간이 또 있을까. 어떤 선택이든 벼랑에서 떨어질 결과만 주고서 백영이 친절한 척 빙긋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홍화는 유백영의 잘생긴 얼굴에 침 뱉고 싶은 울컥함을 느끼며 목울대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런들 저런들 유백영이 절 편하게 자도록 놓아준다는 아름다운 결말은 오지 않는다. 매는 먼저 맞고, 할 수 있으면 제 손으로 맞는 게 덜 아픈 길이었다. 홍화가 눈물을 꾹 삼키며 백영의 손목을 놓았다.

“딱 한 번만이야, 이 미친 새끼야.”

곱게 답해주기 싫어 욕을 붙였다. 눈물겨운 홍화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드디어 유백영이 손을 거뒀다. 홍화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침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최대한 빨리, 덜 쪽팔리게 하고자 마음은 먹었으나 정작 흉물을 손에 쥐자 저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 회의감이 몰려왔다. 홍화가 실리콘을 손에 쥐고 한숨만 줄줄이 뱉었더니 백영이 젤이 담긴 튜브 끝으로 어깨를 톡톡 치며 재촉했다.

“빨리해.”

“알아서 한대도. ……근데, 정말, 진짜로 해야 하냐.”

홍화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쳐다봐도 백영은 침대에 앉아 말없이 다리만 꼬았다. 지금이야 얌전하지만 언제 고삐가 풀려 미친놈이 저가 박아주겠다고 날뛸지 몰라 홍화가 일단 흡착판을 바닥에 고정했다. 허공을 향해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실리콘 덩어리를 보자 마음이 착잡하고 제 신세가 왜 이러나 싶어서 슬퍼졌다.

“고사 지내?”

“한다고. 누가 안 한댔냐.”

젤을 쭉 짜서 붓자 기세가 한층 흉흉해졌다. 스탠드 불빛을 받아서인지 내던졌을 때보다 성나 있는 듯하다. 저걸 깔고 앉으면 유백영의 사악한 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백영이 빤히 지켜보고 있어 몸이 탈 것처럼 부끄럽지만 이미 한다고 덤벼든 터라 물릴 수도 없었다.

홍화가 무릎을 벌려 바닥에 꿇어앉고서 젤이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린 실리콘을 쥐었다. 손에 닿는 척척한 느낌에 소름이 돋아서 어깨를 움츠렸다. 차라리 빨리 해치워버리자고 딜도의 끝부분을 엉덩이 사이에 밀어 넣고 꾹 눌렀다.

“읏.”

끝이 쉽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위로 미끄러졌다. 두 번째 시도도 엉망이었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풀어줘야 수월할 것 같은데, 유백영을 앞에 두고 스스로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생각하니 도저히 못 할 짓이라. 귀두 모양을 손으로 움켜쥔 채 헛짓거리만 했다.

홍화의 헛수고를 지켜보던 백영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홍화가 차마 유백영은 못 보고 아래만 보며 낑낑대고 있자, 백영이 홍화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홍화를 제 허벅지에 기대게 해놓고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봉긋하게 솟은 볼기짝 사이를 딜도가 뱀처럼 헤집고 다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내가, 앗, 손대지……!”

“도와준다니까.”

“필요 없…….”

홍화의 엉덩이를 쥔 백영의 손도 젖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꽉 다문 구멍을 헤집고 들어왔다. 홍화가 움찔하며 시트를 쥐어도 끝까지 파고들었다.

하지 말라는 말을 꺼내자 백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손가락을 안으로 미끄러트렸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면 홍화의 손등에도 관절이 도드라지고 손안에 말려들어 간 시트도 왕창 구겨졌다. 손가락 두 개가 곧 세 개가 되고, 네 개로 늘어나 홍화의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갔다가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빠져나왔다.

홍화가 흐느적흐느적 늘어졌다. 주둥이만 욕을 하고 반항했지, 몸은 입과 따로 놀았다. 아래가 볼똑 서서 더한 자극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길. 조금 더 크고 단단한 걸로, 마치 칼처럼 푹 찔러주길.

“……아!”

백영이 홍화의 양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상체를 추켜세웠다. 홍화가 정신이 덜 든 얼굴로 쳐다봤다. 몽롱한 눈이 홉 뜨인 건 그 순간이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틈이 생겼다.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홍화가 아래를 쳐다봤다. 백영이 홍화를 앉히려는 그 자리에 아까 붙여놓은 커다란 실리콘 덩어리가 있었다.

“싫…….”

무언가를 안에 넣어주길 바랐지만 저걸 원한 건 아니었다. 홍화가 다급하게 백영에게 매달렸다. 백영이 빙긋 웃어줬다. 그러나 홍화를 봐주지는 않았다. 홍화를 제 자리에 돌려놓고 어깨를 꾹 내리눌렀다. 흐물흐물해진 구멍이 단숨에 딜도 끄트머리를 삼켰다. 홍화가 흐으윽, 길게 신음하며 백영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홍화가 허벅지에 힘을 주고 일어나 있으려고 버텨도 백영의 손힘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어깨가 짓눌리며 두꺼운 기둥의 반이 훅 밀려 들어왔다.

“아, 읏!”

안쪽 점막이 늘어나며 양 엉덩이에 보조개가 움푹 팰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축축한 실리콘 덩어리를 조이자 고통과 쾌락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며 온몸의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백영이 달아오르게 만든 아랫도리가 빳빳하게 일어섰다가 투명한 물방울이 그 끝에서 찔끔 새어 나왔다.

“누르지, 마. 누르지 마!”

백영이 어깨를 누르려고 해 바지를 잡고 애원했다. 저걸 끝까지 삼키면 배 속도 머리도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눈물까지 매달고 읍소하자 백영이 자비롭게 홍화의 어깨에서 손을 거뒀다.

한숨 돌리기는 일렀다. 일어나고 싶어도 내벽이 쓸리는 느낌이 선명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아예 주저앉을 수도, 벗어날 수도 없어 홍화는 백영의 소매만 꽉 쥐고서 흐으, 흐으으 신음만 터트렸다.

볼이 벌겋게 상기됐고 눈 밑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잠옷 사이로 보이는 아랫도리는 토끼 귀 한쪽처럼 세웠고, 엉거주춤 벌린 다리 사이에는 흉악한 모조 성기가 반만 몸뚱이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 꼴이 얼마나 난잡한지 알지도 못하고 홍화가 백영을 잡고 울먹였다.

홍화는 그만하라는 허락만 기다리며 백영을 올려다보는데, 내려다보는 백영은 이렇다 할 말 없이 홍화의 열 오른 뺨만 쓰다듬었다. 음영이 드리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핥은 혀만 슬쩍 보였다가 사라졌다.

“이제, 그만…….”

짧은 한마디를 하는데도 뱃가죽이 움찔거리며 안에 든 흉물을 조여댔다. 홍화가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백영의 소매에 이마를 비볐다. 숨결이 달뜨고 소매를 움켜쥔 손가락이 거푸 움찔댔다. 몸뚱이가 아래로 가라앉지 않게 버티느라 허벅지는 달달 떨리고 있었다.

백영은 홍화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턱을 잡아 올렸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눈물이 어룽져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까 도와줬잖아. 보답해줘야지.”

무슨 보답. 홍화가 묻기 전에 숨을 내쉬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이 기어들어 왔다. 검지와 중지가 혓바닥과 뒤엉켜 놀다가 손가락에 얽고서 혀를 입술 바깥으로 끌어냈다. 빠져나간 혀끝에 뭉툭한 것이 닿았다. 아랫구멍으로 삼킨 것과 비슷한 모양에, 더 커다랬다.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두툼한 끄트머리가 입안으로 푹 치고 들어와 있었다. 홍화가 백영의 허벅지를 잡았지만 뒤통수를 움켜쥔 백영의 손아귀 힘이 더욱 강했다. 아래에서 반절이 단숨에 들어왔던 것처럼, 백영도 반절을 단번에 밀어 넣었다. 입이 한껏 벌어졌다.

“위아래로 삼키니까 어때. 좋아?”

혓바닥을 긁으며 빠져나갔다가, 홍화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같이 밀려 들어왔다. 입천장을 문지르고, 볼 안쪽의 야들야들한 살을 찢을 듯이 찔렀다가, 뱀이 굴 찾아가듯 긴 몸통을 목구멍에 깊숙이 처박았다. 구역질이 치밀어 뱉어내려고 몸을 뒤로 빼자 딜도가 구멍을 헤집고 안으로 조금 더 기어들어 왔다.

“―!”

홍화가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려도 뒤통수를 쥔 손은 그대로였다. 백영이 허리짓을 할 때마다 홍화의 몸이 흔들리며 간신히 버티던 허벅지도 무너질 것처럼 떨림이 일었다. 성기가 목구멍 깊숙이 들어와 피하려고 몸을 뒤로 빼면 가짜 성기가 아랫구멍 깊숙이 들어왔다. 찌릿찌릿한 전류가 아랫도리에 직격하고, 목구멍도 아랫구멍처럼 조여들었다. 백영이 큿, 하고 낮게 신음하면 그게 또 흰 물이 질금질금 샐 정도로 야해서 홍화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움츠리고, 아랫구멍을 조이고, 딜도가 안으로 들어왔다가 눈곱만큼 나가는 악순환이 끊임없었다.

“다는 안 넣잖아. 봐주는데 왜 이렇게 못해.”

말로는 구박하면서도 입에 물린 기둥은 홍화의 숨통을 틀어막을 듯이 부풀었다. 숨이 막혀서, 홍화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백영의 허벅지에 손톱을 세웠다. 새빨간 얼굴이 터질 듯해 백영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 젤을 발라 흉악해 보이던 딜도보다 더욱 흉흉한 놈을 홍화의 뺨에 문질렀다가, 홍화가 할딱일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고 도로 쑤셔 박았다.

홍화는 돌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탈출했을 거라는 후회도 뇌가 돌아가야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사고였다. 코로 숨을 쉬라는 백영의 지시도 귓바퀴에 닿았다가 튕겨 나갔다. 입술 바깥으로 침이 질질 새고, 간신히 버티던 허벅지에도 슬슬 힘이 풀렸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다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타고 뚝뚝 흘러 턱 밑에 고였다.

백영의 허리짓에 따라 홍화의 몸도 덜컥덜컥 흔들렸다. 딜도는 반 이상 삼켰다. 숨이 막혀 배에 힘을 주면 핏줄이 세세하게 그려진 딜도가 오그라든 내벽을 긁었다. 놀라서 힘을 빼면 백영이 용케 알고서 기둥을 입속에 더욱 깊숙이 처넣었다. 목구멍을 억지로 열고 그 안쪽까지 들어왔다가 혓바닥을 귀두로 긁으며 조금 빠져나갔다. 그때마다 입안에 침이 흥건하게 고였다.

……더는.

홍화의 어깨까지 빨개졌다. 허벅지를 빠득빠득 긁던 손끝에도 힘이 빠졌다. 허벅지에 모든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데, 백영이 빈손으로 홍화의 어깨를 잡았다.

델 것 같은 어깨에 손바닥을 올리고 그대로 내리눌렀다. 홍화가 힘에 밀려 철퍼덕 주저앉자 딜도의 나머지 부분이 구멍 안으로 쑥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백영이 홍화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목구멍 끝까지 밀어 넣었다.

“―!”

아래에서 정액이 참을 새 없이 터져 나와 바닥에 후드득 흩어졌다. 한 번으로는 모자랐는지 두 번째 정액도 짙고 뽀얗게 흘러내렸다. 발간 선단을 적시고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동그란 불알과 딜도의 고환 부위도 적시고 바닥에 고였다. 홍화가 버르르 떨었다.

홍화의 머릿속도 뿜어낸 정액 색과 다르지 않았다. 쾌감이 가시질 않아 몸뚱이가 멋대로 움칫거렸고, 그때마다 아직 안에 든 딜도가 점막을 긁어 식어야 할 열기가 다시금 솟았다. 손길 닿지 않은 젖꼭지마저 누구에게 빨린 것처럼 발딱 서서 예민하고 쓰라렸다.

목구멍을 틀어막았던 게 혓바닥을, 아랫입술을 긁으며 빠져나왔다. 홍화가 바닥을 짚고 격하게 기침을 터트렸다. 아래는 아직 안에 그대로 있어 기침을 하면서도 제대로 숨을 내쉬지 못했다.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어 가까스로 허벅지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는데, 겨드랑이 아래로 아까처럼 백영의 손이 들어왔다.

백영이 홍화를 아이 들 듯 번쩍 들어서 딜도가 저절로 빠져나갔다. 읏, 하고 눈살을 찌푸려도 백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후려치고 지나가 홍화가 떨리는 눈으로 백영을 쳐다봤다. 아래도 쳐다봤다. 홍화의 아래는 풀 죽어가는 반면 백영은 굳건하게 서 있는 딜도보다 빳빳했다. 홍화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다음에 닥칠 고문이 예지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백영이 홍화의 다리 한쪽을 팔꿈치 안쪽에 걸치고서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잠깐, 잠깐, 잠깐……! ……아, 아윽!”

홍화가 말리려고 백영의 어깨에 손바닥을 댄 순간, 입에 무지막지하게 처넣었던 것처럼, 딜도 위에 올려놓고 어깨를 내리눌렀을 때처럼 구멍 안으로 기둥이 쑥 치고 들어왔다.

무른 구멍이 헤 벌어지며 딜도를 삼켰던 것처럼 백영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딜도로 풀어놓긴 했어도 백영만큼 컸던 게 아니라 더 큰 걸 견디지 못하고 속살이 성기를 쥐어짰다. 바닥을 딛고 선 한쪽 다리의 무릎이 휘청 꺾여 반쯤 남은 기둥이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이대로 무너지면 뱃가죽이 뚫릴까 봐 홍화가 두 팔로 백영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입에선 단 숨과 신음이,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뱃가죽이 움칫댈 때마다 꽉 찬 배 속이 어색하고 야하고 징그러우면서도 발끝이 꼬물댈 정도로 오싹오싹했다.

“하, 아, 흐…….”

“꽉 잡아.”

키를 맞추느라 뒤꿈치를 들었건만, 백영이 나머지 다리 한쪽도 제 팔에 걸고 홍화를 훅 안아 들었다. 몸이 뒤로 휘청거려 홍화가 나무에서 떨어질 뻔한 사람처럼 백영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두 다리에 모두 백영의 팔에 걸리고, 엉덩이가 백영의 살갗에 붙을 정도로 결합이 깊어졌다. 허공에 들린 홍화의 다섯 발가락이 모두 안쪽으로 오그라들었다.

“안, 아니, 안, 제발, 아, ……악!”

백영이 몸을 슬쩍만 추어올려도 홍화는 온몸이 흔들렸다. 안을 쑤셨다가 빠져나오고, 안으로 다시 들어오면 내벽에 들러붙은 질척한 액체가 주름 없이 벌어진 구멍을 적시며 엉덩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철퍽철퍽 물기 어린 소리가 차지게도 났다. 홍화가 어흑어흑 울어도 젖은 소리는 귓가에 들러붙어 사라지질 않았다. 발버둥 치다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무서워 안간힘 써서 매달리다가도, 아래에서 백영이 칼처럼 푹푹 찔러대면 어디든 도망치려고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홍화가 아등바등하자 백영이 홍화의 엉덩이에 손자국이 푹 파일 만큼 세게 쥐고서 침대 위에 떨어트렸다.

백영의 손이 홍화의 오금을 잡고서 위로 꾹 눌렀다. 등이 침대에 닿아도 두 다리는 허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홍화가 도망칠 듯이 꿈틀거리자 백영이 침대에 무릎을 올리고 더는 깊숙이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배꼽이 다 아릴 정도로 욱여넣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모조리 집어넣자 홍화가 머리 위의 시트를 비틀어 쥐고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아랫도리에서 정액이 흘러나오지도 않았는데 절정이 찾아와 홍화의 온몸을 두드려 팼다. 배 속이 아프고 얼얼한데도 몸을 자작자작 태우는 불꽃들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아픔도 절정도 가시지 않은 와중에 시선이 부딪쳤다. 언제부터인지, 백영이 홍화의 얼굴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살피고 있었다. 시선이 꽂히는 부분마다 몸을 태우는 불꽃이 톡톡 옮겨붙은 듯 뜨거웠다. 열기에 숨이 막혀 입을 벌리자, 백영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타액을 꿀물처럼 꼴깍꼴깍 받아 삼키며 홍화가 힘겹게 팔을 들어 백영의 목에 둘렀다. 아직 밤이 끝나지 않았음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다.

∞ ∞ ∞

매니저는 몰래 백영을 훔쳐보다가 룸미러로 눈이 마주치고 지레 찔려 고개를 홱 돌렸다. 뭘 봐, 라는 차가운 대꾸가 돌아올 거라 예상하고 마음을 졸이는데, 의외로 백영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보통은 책을 보거나 잠을 청하는 백영이 최근 들어 핸드폰을 쥐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가끔은 사람 무섭게 핸드폰을 보고 실실거리기도 했다. 어디 아픈 게 분명하다고, 모르는 사이에 어디서 머리를 호되게 찧은 거라고 추측은 했으나 겁나서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요새 뭐 좋은 일 있냐?”

“없어.”

매니저 쪽은 보지도 않고 백영이 단칼에 잘랐다. 매니저는 믿지 않았다. 저번에 고요한 차 안에서 정말, 뜬금없이 백영의 허밍이 들려 얼마나 놀랐던가. 저와 백영 둘 이외엔 아무도 없었던지라 혹 귀신이 차에 탔나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핸들을 꺾을 뻔했다.

유백영이 콧노래를 부르다니. 귀신이 같이 차에 탔으면 귀신도 놀랐을 일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던데 혹 백영이 주변이라도 정리하고 목숨이라도 끊을까 봐 매니저는 실제로 불안했다. 백영 같은 인간이 목숨을 끊을 리 없음을 알면서도 간간이 보여주는 행동이 평소와 워낙 달라 괜히 걱정이 드는 것이다. 마침 대표에게 가는 길이라 이 심각한 사안을 보고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의견을 물을 참이었다.

“삼촌은 오늘 왜 보자고 한 거야?”

매니저의 생각을 읽은 듯이 백영이 물었다. 속내를 들킨 줄 알고 뜨끔했지만 매니저도 아는 바가 없어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막연하게 대표도 저와 같이 백영에게서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그 노친네가 갈 때가 됐나…….”

삼십 대 후반에 들어선 대표가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호칭이었다. 비슷한 나이대인 매니저도 덩달아 늙은이 취급당했지만, 그걸 대놓고 지목할 만큼 매니저는 대담하지 못했다. 너도 언젠가 늙을 거라며 속으로 소심하게 중얼대는 게 다였다.

매니저가 욕을 하건 말건 백영은 핸드폰만 귀에 갖다 댔다. 이윽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 뭐 하냐, 퉁명스레 물었다. 목소리는 찬기가 뚝뚝 떨어지는데 입술엔 방긋방긋 꽃이 폈다. 얼굴에 재가 묻어도 빛이 번쩍번쩍한 외모인데 웃기까지 하니 주변에 조명이 필요 없었다.

“저녁 먹지 마. 바로 들어갈 거야.”

매니저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마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백영이 기행을 벌이는 원인일 터였다. 목소리라도 들리면 누구인지 짐작이라도 할 것을, 운전석까진 들리지 않았다.

“알았어. 이따 연락해.”

툭툭거리는 말투와 달리 연락을 달란 말은 달콤했다. 이건 분명 춘풍이었다. 유백영을 맡기 전 여러 연예인을 거치며 단련해온 감이 이건 분명 연애라고 딸랑딸랑 종을 흔들었다.

사생활 노출이 아예 없는 연예인으로 유명한 유백영이 연애라니. 아무도 모를 은밀한 비밀을 매니저의 위치라 제일 먼저 알았다. 이런 희열감 때문에 이 일을 관두질 못했다. 매니저가 희희낙락하며 운을 띄웠다.

“너 연애하지?”

전화를 끊은 백영이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뺨이 붉어지지도, 눈빛이 반짝반짝하지도 않다. 보통 몰래 연애하던 다른 연예인들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며 몸을 비틀거나 다른 데 말하지 말라고 유난을 떨던데.

백영은 예의 그 무뚝뚝한 시선으로 매니저를 바라보기만 했다.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이 인간이 어디까지 아는지 가늠할 것처럼 가만히 지켜보는데, 그 눈이 꼭 짐승이 먹이를 앞에 두고 사냥을 할까 말까 간 보는 시선과 닮았다. 이 자리에서 백영이 저에게 해코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괜히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연애는 무슨. 바빠 죽겠는데 사람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

백영이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매니저가 재빨리 맞장구쳤다. 하마터면 지뢰를 밟을 뻔한지라 최선을 다해 백영의 비위에 맞춰줬다.

“맞아. 너처럼 바쁜 애가 언제 사람을 만나겠냐. 내가 착각했네. 그럼. 어렵지. 네가 무슨 연애야. 아니, 연애는 할 수 있는데 네가 안 하는 거지. 그렇지.”

횡설수설이었다. 백영은 대꾸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는 데만 집중했다. 입술이 한일자로 굳어있었다. 상대방과 통화할 때만 하더라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던 입술이었다.

더 건드렸다가는 지뢰가 핵폭탄급으로 터질지 몰라 매니저는 입을 다물고 핸들만 쥐었다. 오늘따라 회사로 가는 길이 멀고도 험했다.

“왜 불렀어?”

최소한의 인사도 없이 백영이 다짜고짜 목적부터 캐물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남자가 백영의 버릇없는 태도에 후우, 한숨만 한 번 내쉬며 안경을 벗었다. 삼십 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외모에, 백영과 놀랍도록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백영보다 선이 조금 더 각졌고 분위기가 중후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나이 차 나는 형제라고 주장해도 믿을 법했다.

백영은 볼일이 끝나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소파에 앉지도 않았다. 남자가 턱짓으로 앉으라고 권해도 빨리 본론이나 말하라며 팔짱을 꼈다.

“너 신수가 훤하다? 연애하냐.”

백영이 피식거리며 비웃었다. 매니저도 그렇고 저 인간도 그렇고. 다들 머리가 맛 갈 때가 되었는지 헛소리만 작렬했다.

“삼촌, 노망났어? 연애할 시간을 주고 말해. 노예처럼 굴리면서 무슨.”

“우리 조카는 어쩜 저리 말을 예쁘게 하는지. 너무 예뻐서 고 주둥이만 잘라다가 간직하고 싶네.”

“회사 간판 주둥이 잘라서 어디다 쓸라고. 빌딩 외관에 전시해놓게? 엄마가 한국 와서 아들 입술부터 본다며 좋아서 기절하시겠네. 남매간의 정이 참 눈물겨워.”

“뒈져도 주둥아리는 물에 뜰 놈 같으니.”

“그래서 내가 서핑을 좋아해. 익사할 위험이 없어서.”

농담 따먹기식 대화였다. 이런 대화 패턴에 익숙한 사장이 그쯤 해서 자리에 앉으라며 권했다. 말이 길어질 걸 알았는지 백영이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거만한 자세로. 다른 이가 보면 백영이 갑, 사장이 을로 보일 터였다.

“빨리 끝내. 나 바빠.”

테이블에 놓인 주전부리를 집어 먹으며 백영이 눈치를 줬다. 사장은 백영의 귀찮아하는 기색에도 느긋하게 깍지를 끼고서 책상에 팔꿈치를 괴었다.

“너, 예전에 배소희하고 잔 적 있지.”

“언제 적 이야길 하고 있어.”

고릿적 이야기다. 몇 번 밤을 보내긴 했지만 진지한 사이는 아니었다. 지금껏 유백영 인생에 몸은 섞어도 관계가 진지했던 이는 없었다.

“스캔들 한번 내자.”

“미쳤어?”

백영이 손에 든 땅콩을 투명한 유리그릇에 와르르 쏟아버렸다. 좀 전엔 그래도 들어주겠다는 태도였다면, 지금은 미친 사람 보듯이 사장을 쳐다봤다. 사장이 아무 말 없이 그 시선을 맞받아치고만 있자 백영이 하아, 길게 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박학정 스캔들 덮으려고?”

불법 선거 자금과 주가 조작 사건은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사장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백영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고 히죽거렸다.

“추대균, 유정성 뽕 빨고 애들 불러 나뒹군 거나, 고우나가 스무 살 어린 호스트들 불러서 떡 친 거나 터트리지 왜 하필 나야?”

“넌 한솥밥 먹고 사는 애들을 그렇게 매장하고 싶냐.”

“억울하면 깨끗하게 살았어야지. 누가 더럽게 살래. 삼촌이 관리 못 한 탓도 있잖아.”

“너도 억울하면 걔랑 자지 말지 그랬어.”

“안 그래도 존나 후회 중이니까 괜히 들쑤시지 마. 스캔들은, 씨발. 안 돼.”

백영이 더는 들을 말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사장은 백영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딱 한마디만 던졌다.

“이홍화.”

백영의 발목을 잡아채기에 효과적인 단어였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걔가 뭐.”

백영이 돌아봤다. 쏘아보는 눈빛에 경계심이 역력했다. 사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어리디어린 조카를 쳐다봤다. 다른 때는 세상 무서울 거 없이 구는 놈이, 가끔 이렇게 믿기 어려울 만큼 순진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이들 눈에야 안 보이겠지만 갓난아이 때부터 지켜본지라 사장의 눈에는 잘 보였다. 무시하고 그냥 갔으면 모른 척해줄 텐데 참 착하게도 낚여줬다.

혹은 이제야 세상에 무서운 게 생겼을 수도 있다. 가령, 좋아하는 사람 같은.

악역을 맡기는 싫지만 장애물이 없으면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나. 천방지축인 조카를 골려줄 생각에 사장이 속으로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백영과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이었다.

“호모 새끼 하나 매장하는 거 일도 아니지 않니. 삼촌은 우리 조카가-,”

쾅, 소리가 터졌다. 언제 잡은 건지, 백영이 테이블에 놓인 두꺼운 유리그릇을 쥐고 야구공 던지듯이 사장을 향해 던졌다. 땅콩 같은 자잘한 주전부리들이 허공에서 흩어지고, 유리그릇이 사장의 뺨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가 뒤에 있는 유리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그릇이 부딪친 벽에 새가 머리를 박은 흔적처럼 희끗희끗한 흠집이 났다.

“……예쁜 선택을 하길 바라. 그 정도는 삼촌을 위해 해줄 수 있잖아.”

스캔들 터트릴 테니 그리 알고 입 닦고 있으란 이야기였다. 유백영이 손에 쥔 비밀이 많아 제 말 안 들어줬다고, 다 같이 죽자고 달려들면 곤란했다.

“좆 까. 노친네 삶이 길긴 했나 봐? 노망난 소리를 다 하고. 이홍화? 그깟 신인 하나 밟아서 어디다 쓸 건데. 그리고 그딴 걸 나한테 왜 말해. 무슨 상관이라고.”

“블랙박스, 이 개새끼야. 아주 그냥 죽고 못 살더만.”

“그게 뭐. 좀 논 거 가지고 그걸 걸고넘어져?”

“논 거라니 다행이네. 삼촌은 우리 조카가 호몬 줄 알고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거든.”

“…….”

“사랑하는 조카야, 내가 이렇게 치사하게 나와야 말을 들을래. 막말로 네가 사람 죽일 뻔한 걸 터트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없이 스캔들 터트리는 것도 아니잖아. 피 나눈 정을 생각해서 너한테 친절하게 미리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왜 개지랄이야. 너네 엄마가 광견병 주사 안 맞혀주디?”

당장에 책상을 넘어와 사장의 멱살을 쥘 것처럼 살벌하던 백영이 하, 하고는 손을 툭툭 털었다. 조금 전 표정이 연기였던 것처럼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만 남았다.

“요새 안소형 안 보이더라.”

뜬금없이 연예인 타령이었다. 사장은 눈썹 한 올 까닥하지 않았다.

“걔가 여기서 왜 나와.”

“새파란 어린애 끼고 노니까 재미 좋아?”

“…….”

백영은 증거가 없는 한 건들지 않는다. 모른다고 잡아떼도 먹히지 않을 거라 사장이 한 방 먹었다는 투로 손에서 깍지를 풀었다.

남들 약점 쥐고 흔들어대는 비열한 짓거리는 외가 쪽 특징이었다. 더군다나 유백영은 친가 쪽도 천의 얼굴을 자랑하는 정치 계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정치계며 연예계며 더러운 공작들을 보고 자라온 유백영이 얌전하게 물러설 리 없었다.

“걔 나이가 스물넷이었나. 한참 반짝하다가 최근에 싹 사라졌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궁금해하겠어. 뭐 하고 사는지, 어디서 사는지, 누구랑 떡을 치는지. 아, 걔 군대는 갔다 왔나. 부적합 판정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왜, 허리라도 안 좋대? 떡을 얼마나 쳐댔으면.”

순진하긴 개뿔. 정치판에 던져놔도 다 밟고 장관에 대통령까지 해먹을 용의주도한 놈이었다. 회사와 관련된 비리도 아니고, 그깟 사생활은 협박거리도 되지 않지만 조금 전 저와 똑같은 수법을 들먹이는 백영이 괘씸했다. 단언컨대 유백영은 분명 회사 주요 임원뿐만 아니라 소속사 연예인들과 관련된 더러운 비밀들도 죄다 손에 쥐고 있을 것이었다. 삼촌이라고 봐줘서 메추리 알 크기의 소소한 폭탄만 생일 폭죽처럼 터트려준 것이지, 제가 가진 중요한 패는 죽도록 안 보여줬다.

“넌 이 씨발 새끼야, 하나뿐인 삼촌한테 엿 먹이고 싶냐?”

“내가 뽕을 빨았어, 사람을 죽였어. 회사에 누가 되지 않게 선량하게 잘 살아왔는데 뒤통수를 치려니 화가 나, 안 나. 삼촌이야말로 피를 나눈 조카에게 이러면 기분 좋아?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지.”

“어차피 지금까지 스캔들 한 번도 안 났잖아. 고스톱 한번 짜고 치자는 건데 그 한판 끼기가 어렵냐? 내가 걔랑 결혼하래, 아니면 애를 낳으래? 딴 애들은 터지면 뒈지지만 넌 스캔들 터져도 영향도 안 받을 거 아냐. 그리고 사랑하는 조카 밀어 넣는 내 마음은 편해 보이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개중에 그나마 우리 쪽에 타격 안 입힐 애가 너라서 사정사정하는 거잖아.”

“개수작 떤다. 세무조사 피하려고 나 팔아넘기는 거잖아.”

“너도 네 이미지에 타격 입을 거 무서워서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이홍화 때문에 지랄병 돋은 거지.”

어느 날 갑자기 무명 배우 프로필을 가져와 회사에 넣어달라고 한 것도, 화보 촬영하다가 느닷없이 깽판 치고 나와 김 팀장을 자르라고 길길이 날뛴 것도 선을 연결해보면 도착 지점은 하나였다. 블랙박스 영상에 담긴 소리가 추측에 정점을 찍었다.

로맨스 연기를 할 때도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사람 부른 적 없던 놈이. 사장은 자신의 조카가 남자한테 홀라당 빠져서 헤벌쭉거리는 꼬락서니가 그저 신기했다. 얼마나 신기한지 스캔들 건은 뒤로 미뤄두고 조카의 정신머리부터 해부해보고 싶었다.

맨 처음 백영을 데리고 왔을 때가 떠올랐다. 해외에 놔두면 애들이나 패고 마약이나 팔며 베트남 갱들을 능가하는 사회의 해악으로 자라날까 봐, 그래 그 잘난 얼굴이나 써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한국에 데려왔다. 의외로 적성에 맞는지 본성 감추고 승승장구 잘 나가 마음을 놓고 있었건만, 이렇게 깜찍하게 놀고 있을 줄이야. 연애는 안 해도 떡메는 여자하고만 치기에 잠시의 일탈이라 봐주려 했는데.

이홍화. 연기도 곧잘 하고 눈빛이 좋아 잘만 밀어주면 무난히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을 가능성이야 있다지만, 프로필 사진만으론 모래알처럼 쏟아지는 배우 지망생들과 큰 차이를 못 느꼈다. 굳이 꼽자면 사람들의 변태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외모에서 풍기는 묘한 느낌만이 특이했다.

얼굴만 보자면 그보다 잘나고 예쁜 얼굴들이 이 바닥에 수두룩한데 왜 하필 이홍화일까. 이홍화에게도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유백영을 어떻게 구워삶았냐고.

“걔랑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삼촌이 처리해주면 좋지. 내 손 안 더럽히고.”

“뭐?”

“걔가 삼촌한테 밟혀서 이쪽 바닥에 얼씬 못 해도 상관없다고.”

허풍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사장도 바로 알아챘다. 조카의 사고체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사장이 혀를 쯧쯧 찼다.

잡설이 길었다. 백영의 말장난에 넘어가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느니 잘 알아듣게 타일러서 내보내는 게 이로웠다. 사실 이 일은 양해가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고, 백영이 괜한 복수심 불태우지 않도록 널 위해 미리 알려준다고 약간만 생색내려고 부른 것이었다.

“최대한 늦춰도 오 일이야. 터지기 전에 연락할 테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 처음엔 아니라고 반박 보도 낼 거고, 후에 인정한다고 할 거야. 파파라치 사진은 준비해놨으니까 더 찍을 필요는 없고. 너 어차피 쉬고 싶어 했잖아. 휴가 줄 테니까 마음껏 쉬고 와. 언론 잠잠해질 때까지만.”

“거절하는 말 못 들었어?”

끝까지 고자세를 유지하는 게 같잖고 울컥해 사장이 눈앞의 명패를 냅다 집어 던졌다. 백영이 어깨를 쓱 비틀며 피했다. 명패가 문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당히 해. 일 끝나면 네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줄 테니까.”

무심하던 눈빛에 흥미가 돌았다. 하여튼, 공으로는 말 안 듣지.

“회사라도 줄 거야?”

“주면 얻다 써먹을라고?”

“삼촌 엿 먹여야지.”

“널 데려온 이후로 엿은 차고 넘치게 처먹었어. 지금까지 친절하게 잘 대해줬으니 이번엔 내 말 들어. 사고 치지 말고, 입단속하고. 이홍화한테도 말하지 마. 걔가 갑자기 홱 돌아서 기자한테 불면 어쩔 거야.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들 관심 끌 수도 있으니까-.”

“이홍화가 멍청하긴 해도 그 정도 판단도 못 하는 애는 아니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모른다는 게 우리 집 가훈인 거 잊었어? 걔가 너한테 뭘 해줬기에 그렇게 넙죽 믿어? 하여튼, 그렇게 알고 가봐.”

“그래. 명패에 내 이름 박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회사 양도 계약서 준비해놔. 은퇴식도 같이 준비하시고. 노후는 어린 애인이랑 따뜻한 곳에서 알콩달콩 지내셔야지.”

“씨발 새끼.”

욕은 해도 일단 유백영을 달래는 데는 성공했다. 백영이 명패를 발로 툭 차서 책상 쪽으로 굴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조카만 아니었어도 바짝 태워 끽소리 못하게 밟아버리는 거였는데. 혈육의 정이 뭔지 반말을 찍찍 갈기고 개차반으로 굴어도 성질대로 죽일 수가 없었다.

사장은 책상을 정신 사납게 툭툭 두드리다가 참지 못하고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애인이 잔소리를 퍼부은 뒤로 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건만, 저 망할 놈의 새끼 때문에 금연은 열흘 만에 실패였다.

코를 골며 자던 매니저가 툭툭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혹시 몰라 문을 잠그고 잤더니 백영이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서 매니저를 깨운 것이었다. 창문 옆에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백영이 저승사자처럼 보여 단박에 단잠에서 깨어났다.

대표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심기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 보느니 조용히 가는 게 목숨 보전에 용이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쥐 죽은 듯 입 다물고 운전만 하려 했다.

차 안이 고요해 핸드폰 진동 소리도 지진이 났나 싶을 만큼 커다랬다. 백영의 핸드폰이었다. 왜, 하고 묻는 목소리가 심기 불편한 얼굴에 비해 부드러웠다.

“뭐라고?”

매니저가 두 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손바닥에서 진땀이 났다.

“저녁 같이 먹는다고 했잖아. 왜 갑자기 취소야. 어떤 새끼랑 같이 먹는데. ……대타? 그걸 네가 왜 뛰어.”

백영이 두 눈 사이를 검지와 엄지로 꾹꾹 눌렀다. 무척이나 피곤한 듯 미간을 일그러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작은 목소리만 백영에게 상황을 설명하듯이 이어졌다.

“어디서 하는 거야. 그리고 몇 시에 끝나. 문자로 보내. ……알았어.”

전화가 끊겼다. 백영의 미간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예전처럼 갑자기 욕설이라도 터져 나올까 봐 매니저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직서와 함께 진정제도 가슴에 품고 다녀야 할 필수품 목록에 올려둬야지 싶다.

시간이 흘러도 백영은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감고 있었다. 이대로 자려나 싶어 마음 놓는 순간, 뒤에서 아, 씨발! 하고 익숙한 욕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랐지만 매니저는 노련하게 핸들을 놓치지 않았다.

“노망 난 늙은이. 애첩 끼고도는 변태 영감탱이가, 씨발, 진짜.”

자세히는 몰라도 대표와 오간 대화가 화기애애하지만은 않았구나. 매니저는 짐작만 했다. 그래도 오늘 욕설은 딱 거기까지였다. 백영이 팔짱 끼고 잘 거라며 온몸으로 티를 팍팍 내 매니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회사까지 오는 길은 길고 험했어도 집까지 가는 길은 안락할 예정이었다.

∞ ∞ ∞

드라마 촬영한다고 전속 극단원을 그만두고, 객원으로 활동한다고 명분만 그럴싸하게 붙여놨을 뿐 사실상 거의 못 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쁜 목소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수화기 너머로도 잔뜩 울상이었다.

―홍화야, 너 스케줄 없으면 우리 좀 도와주라. 마땅한 사람이 너밖에 생각이 안 나. 우리 펑크 나게 생겼는데 하루만 도와줘. <열세 번째 장례식> 그거 있잖아. 거기서 네가 저번에 맡았던 막내아들 역이야.

안 그래도 내일은 가야지, 모레는 들러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차에 그쪽에서 오라고 권해주니 좋은 기회였다. 거기다가 예전에 해본 역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으나, 오늘은 아쉽게도 선약이 있었다.

“형, 오늘은…….”

―너 안 오면 오늘 완전 취소되는데 그럼 우리 당장 내일 먹을거리도 못 산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게 생겼어. 홍화야, 너 요새 좀 잘 나가잖아. 네 덕 좀 보자.

극이 취소되고 환불해서 남는 것 없는 것보다야 대타를 넣어 몇 푼이라도 건지는 게 낫기는 했다. 홍화가 선약이 있다고 말 못 하고 머뭇거리자 선배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척했다.

“공연 몇 시에 끝나는데.”

―여덟 시 반.

저녁 시간에 맞춰 끝나지는 않아도 너무 늦은 시간 역시 아니었다. 당장 알았다고 대답할 수는 없어 선배에게 바로 연락 주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백영 성격에 어디서 감히 먼저 약속을 취소하냐고 지랄할 거라고 예상했으나, 백영은 의외로 덤덤하게 홍화를 보내줬다. 장소와 끝나는 시간을 보고한다는 전제하에.

그리하여 오랜만에 극단에 발걸음을 했다. 윤진과 명식이야 다른 일이 바빠 없다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너도나도 홍화를 보고 안도하는 기색으로 달려와 껴안았다.

“우리 예쁜 홍화 왔어. 요새 잘 나가서 얼굴 보기 힘든 님이 여기까지 오시다니. 고마워서 형아가 눈물이 다 나네.”

“오버한다. 잘 나가긴 무슨. 그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거지. 그나저나 펑크는 왜 났어?”

“할머님 위독하시다고 연락받고 나갔어. 임종 지켜야 한다는데 그걸 어떻게 잡냐. 마땅한 사람 찾아야 하는데 언더 애들은 다들 못 한다고 발 빼지, 너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이 안 나더라. 와줘서 진짜 고맙다. 네가 우릴 살렸어.”

“상부상조하는 거지, 뭘. 다음에 맛있는 거나 사줘. 극본은?”

연습할 시간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대사야 머릿속에 다 남아있지만 배역을 맡은 사람들이 다 달라져 호흡은 맞춰보는 게 좋았다.

극본을 받고서 홍화가 무섭도록 집중했다. 아무리 대타라도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대충 하는 건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매표소 위에는 환불 공지가 붙어있었다. 극은 예정대로 진행하나 극단 사정상 배우가 바뀌어 환불을 원하면 해준다는, 극단원들의 눈물이 담긴 내용이었다.

환불을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어 표를 구하기는 수월했다. 백영은 손에 들린 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열세 번째 장례식>. 표와 함께 받은 팸플릿에는 이홍화의 얼굴이 없었다.

집에 돌아갈 거냐는 매니저의 물음에 충동적으로 이홍화가 알려준 소극장 주소를 말했다. 거기는 무슨 일로 가냐는 질문에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백영 자신도 왜 이리 발걸음을 했는지 이유가 명쾌하지 않았기에. 그저 이홍화가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이 다리를 이끌었다.

공연 시작 오 분 전. 극장 안에는 관객들이 별로 없었다. 백영은 무대에서 잘 보이지 않을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에는 소파 하나만 덜렁 있었다. 초라한 무대였다.

이런 무대에 이홍화가.

「걔가 삼촌한테 밟혀서 이쪽 바닥에 얼씬 못 해도 상관없다고.」

아예 진절머리난다고 이홍화가 이 바닥으로 고개를 안 돌려도 상관없었다. 사진에도 영상에도 남지 않고, 오직 제 품에만 안겨 있어도 좋았다. 다른 이에게 웃어줄 필요도 없고, 누구의 손길도 받지 않고, 누구의 부름도 받지 않고서 화분에 뿌리박은 식물처럼 제집 안에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었다.

그게 숨기지 않은 진심이었다. 이쪽 생리가 순수하게 연기를 좋아한다 한들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더럽거나, 비열하거나, 그도 아니면 뭐든 손에 쥐고 태어나야지만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지니는 진흙탕이었다.

처음엔 분명 누군가 이홍화의 뒷배를 봐주고 있으리라 여겼다. 한데 어떤 정신 나간 스폰서가 자신이 예뻐하는 배우를 반지하 단칸방에 살게 놔두겠는가. 화대라면 질색하는 모습도 연기가 아니라 진심에 가까웠다.

어떤 계기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르나, 이홍화는 아마 지금까지 자력으로 버텼으리라. 미친 듯이 힘들고, 미친 듯이 괴로웠겠지. 백영은 겪어본 적 없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왜. 여기가 대체 뭐라고. 제 모든 힘을 다 바쳐 매달릴 만큼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이홍화는 차라리 제 품에서 더는 더러운 꼴 보지 않고 얌전히 사는 게 나을 것이다.

백영이 피식거리며 자조했다. 애첩 끼고 사는 영감탱이라고 사장을 욕했건만, 저가 하는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장이 제 애인이 더러운 꼴 보는 거 싫다고―그리고 남들이 제 애인 보는 거 싫다고― 집에 들여다 놓지 않았던가. 노친네가 사람 하나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다고 빈정거렸는데 이제야 비로소 사장의 선택이 이해가 갔다.

전체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만 환하게 빛나며 막이 올랐다.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이홍화가 앉아있었다. 조명 때문인지, 이홍화가 빛 받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들며 이홍화가 객석을 돌아봤다. 두 눈동자에도 별이 떴다. 쉼 없이 반짝거려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는.』

울림이 좋다. 귀에 꽂히는 목소리다. 옆에 누워 대본을 들고 달게 속살거리던 목소리와는 살짝 달랐다.

『……의 막내아들 강학구입니다.』

이홍화가 소파 팔걸이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이 꼭 저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 백영이 움칫했다.

이홍화가 저에게 뭘 해줬기에 이렇게 넙죽 믿냐고.

그러게.

옷처럼 걸치고 다니는 우울함을 벗어던진 이홍화가 객석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 팔로 저를 와락 껴안을 듯해 백영이 앞으로 나아갈 것처럼 몸을 구부정하게 굽혔다.

다른 이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오로지 생동하고 역동하는 이홍화만 따라다녔다. 그렇게나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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