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면 촬영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우아아, 하며 기쁨의 탄성이 터졌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완결까지 스태프들과 함께한 경험은 처음이라 홍화도 스태프들처럼 예에에, 소릴 지르며 애처럼 좋아했다. 수고하셨다는 인사가 쏟아지는 와중에 주완만 다른 이들보다 반 박자 느리게 행동했다. 키스 장면 촬영 이후로 영 정신을 못 차렸다.
“홍화 씨, 오늘 저녁에 회식할 건데 같이 갈 거죠? 주인공이 빠지면 쓰나.”
감독이 홍화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끌어당겼다. 호쾌한 행동이 어딘가 윤진과 닮았다. 홍화는 뺨을 긁적이며 곤란한 듯 미간을 구겼다. 정말, 너무나도 가고 싶지만 피치 못 할 사정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저도 너무 가고 싶은데, 선약이 있어서…….”
“무슨 선약이요?”
다른 스태프가 말을 걸어도 오 초 느리게 답하던 주완이 홍화의 한마디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했다. 홍화의 팔뚝까지 붙들고 매달려 언제 잡은 선약이냐고 취조하듯 물어봤다.
“……친구랑?”
당장 떠오른 빈약한 거짓말이 친구뿐이었다. 주완이 친구 누구, 장소는 어디, 남자인지 여자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파고들수록 거짓말만 늘어놓는 셈이라 홍화가 주완에게서 팔을 잡아 빼며 물러섰다.
“뭘 계속 캐물어? 왜, 너도 같이 가게?”
주완이 자꾸만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촬영 시간이 지체됐다. 계획대로라면 여섯 시에 끝났을 촬영이 두 시간이나 늦어졌다. 집에 들렀다가 씻고 움직이려면 서둘러야 해서 대꾸가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주완이 홍화의 팔을 다시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주먹만 꾹 쥐었다.
“그래도, 종방인데…….”
주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평소라면 달래주겠지만 마음이 조급해 홍화는 못 본 척했다.
“어쩔 수 없죠. 에이, 홍화 씨하고는 다음에 먹고 오늘은 주완 씨만 데려가야겠다. 주완 씨는 올 거죠?”
“저는…….”
“넌 당연히 가야지. 나야 가고 싶어도 못 간다지만.”
홍화가 어깨를 토닥이자 주완이 땅바닥을 파고들어 갈 듯이 상체를 굽혔다. 모처럼 감독이 초대장을 내밀었건만 주연 둘 다 거절하는 사태는 만들고 싶지 않아 홍화가 주완의 옆구리를 검지로 폭 찔렀다. 주완이 오뚝이처럼 번쩍 상체를 세웠다. 눈빛만으로 심부름시키던 군인 시절 짬밥으로 홍화가 주완을 향해 서슬 퍼렇게 눈을 치켜떴다.
“……가겠습니다.”
아쉬워하던 감독이 예에, 하며 만세를 불렀다. 홍화는 주완을 사람들 틈에 밀어 넣고 저는 뒤로 쏙 빠졌다. 기계적으로 그간 감사했다며 스태프들에게 따발총처럼 퍼붓고, 우울해하는 주완을 버리고서 부리나케 촬영장에서 뛰쳐나왔다.
명식을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택시를 타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씻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감고, 뛰어오느라 땀 난 몸 구석구석을 닦고 나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속옷도 이거 입었다가, 저거 입었다가, 언젠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 개시하겠노라 큰맘 먹고 구매한 브랜드 속옷을 챙겨 입었다.
열한 시까지는 아직 꽤 남았지만 괜히 마음이 급해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가 누구냐고 묻기에 이홍화라 답했더니, 따져 묻지도 않고 바로 카드키를 건넸다. 백영이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 그러면 다음 일 처리도 잘해놓을 것이지, 엘리베이터만 통과하게 해놓고 정작 현관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않았다. 카드키를 암만 도어락에 갖다 대봐도 먹통이었다. 백영은 지금 비행기를 탔을 테니 문자나 전화도 못 받을 테고. 하릴없이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유백영 인성이 그러면 그렇지. 속으로 욕하면서도 홍화는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차가운 바닥에 궁둥이를 대고 앉아있자 추위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홍화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엘리베이터와 핸드폰을 수시로 번갈아 보았다.
[형 어디세요]
[형 없으니 다 재미없어요]
[끝나면 연락 주세요]
[형 보고 싶어요]
홍화의 빈자리를 메우려면 부지런히 웃고 떠들어야 하거늘, 주완은 문자로 징징거리기 바빴다. 답장을 주면 꼬리 치며 전화하고 그 핑계로 빠져나올 똥강아지라 홍화는 아예 주완의 문자 알림을 껐다. 진동이 울리지 않자 사방이 고요해져서 엘리베이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홍화는 엘리베이터가 구웅거리는 기계음을 낼 때마다 고개를 반짝 들고 상단의 숫자를 살폈다. 일 층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면 발딱 일어났지만, 그것도 한 다섯 번 반복하자 지쳐서 숫자만 힐끔 바라보고 말았다.
양반다리로 앉았다가,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인터넷으로 우스갯소리를 보고 따라 웃다가, 예전에 올라온 제 기삿감을 찾아 댓글을 훑었다. 광고가 대부분인 댓글에 가끔 드라마 잘 봤다는 말을 보면 배시시 웃으며 ‘좋아요’를 누르고, 그것도 연기라고 하냐, 못생겼다, 등등의 악플엔 비추천을 눌렀다. 그거로는 분이 안 풀려 꼬우면 네가 연기하라는 댓글도 남겼다. 몇 개월 전이라 글쓴이는 제가 악플을 달았단 사실을 잊어먹었을 텐데 홍화 혼자 부지런했다.
분을 나타내는 숫자가 공 두 개로 바뀌었다. 앞의 숫자도 한 칸 올라갔다. 드디어 열한 시였다. 그전까지는 초조해도 영상이나 기사가 눈에 보였는데, 시간을 확인하고 나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 분이 지나고, 오 분이 지나고, 거기에 삼 분이 더 지났는데도 엘리베이터는 미동 없이 일 층에 머물러 있었다.
열한 시에 온대놓고.
설마 엿 먹이려고 거짓말했나.
유백영에게 엿 먹이겠다고 꼼수를 부린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 유백영도 홍화에게 복수하겠다고 시간을 거짓으로 알려줬을 수도 있다. 원래대로 내일 오는데, 하루 꼬박 집 앞에서 기다려보라며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정말 그러면 어쩌지.
덜컥 유백영을 믿고 달려왔는데, 정말 속이려고 한 거면 어쩌지.
열한 시에서 이십 분이나 지났다. 홍화는 무릎을 세워 앉아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촬영에 지친 몸이 이제야 피곤함을 호소했다. 딱 십 분만 더 기다려보고, 안 오면 집에 돌아가서 다시는 유백영을 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홍화가 눈을 붙였다.
엘리베이터 벨트 감기는 소음에 눈을 떴다. 자다가 쓰러졌는지 새우잠 자세로 누워있었다.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끼우고 웅크려 자는 모습이 역에서 노숙하는 사람처럼 초라했다. 기껏 모양낸 머리는 후드 안에서 제멋대로 삐쳐있고, 눈두덩이도 통통하게 부었다. 거울이 없어 제 모습 확인 못 하고 홍화가 부스스한 꼴로 상체를 세웠다. 옷에도 주름이 잔뜩 졌다.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부터 꺼냈다. 밝은 빛이 눈 부셔 눈을 가늘게 떴다. 부재중 전화도, 문자도 없는 핸드폰에 시간이 떴다. 열두 시 이십칠 분. 한 시간이나 지났다.
“개새끼.”
유백영을 좋다고 믿은 저가 상등신이지. 한 번 속여먹으려는 걸 순진하게 넘어가서는. 시간만 버렸다. 회식 따라갔으면 술과 고기라도 얻어먹었을 것을.
하늘로 솟을 것처럼 부푼 기대감이 빵 터졌다. 터진 잔해물이 뾰족한 가시처럼 홍화를 향해 내리박혔다. 홍화가 몸을 웅크리고 가늘게 어깨를 떨다가 현관을 짚고 느릿느릿 일어났다. 고개를 숙이자 코끝에 물이 모였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문이 열립니다, 소리에 미처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쳐다봤다. 하필이면 이때에. 느리게 열리는 문틈 뒤로 유백영이 서 있었다.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유백영이 성큼 걸어 나왔다. 막 일어선 홍화를 보고 다가오려다가 한 걸음 앞에서 멈췄다.
“왜 바깥에서 기다려.”
사람 기대하게 해놓고, 기다리게 해놓고 하는 말이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어디 가까운 데 바람이라도 쐬고 온 사람처럼 옷차림이 가볍다. 긴 여행 갈 때 들고 갈 법한 캐리어나 배낭도 없었다. 몸만 달랑 왔다.
“열한 시에 온다며, 이 개새끼야.”
온다는 문자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유백영을 기다린 시간이 천만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약속 시간보다 고작 한 시간 남짓 늦었을 뿐인데도 그 안의 일분일초가 홍화에게는 영겁 같았다. 무려 한 시간이나 늦은 유백영이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 눈물이 어룽져서 유백영이 흐릿하게 보였다.
백영은 홍화를 지나쳐 현관문부터 열었다. 문이 열렸음에도 홍화는 바깥에 서 있었다. 욕을 퍼붓고, 너 따위 기다린 적 없다고 외치고서 당당하게 돌아가야 하건만, 자는 사이에 누가 몰래 발바닥에 접착제를 발라놨는지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홍화가 자꾸만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가며 운동화 코를 노려봤다. 못된 놈, 주인 말도 지지리 안 처듣는 못된 발.
백영이 현관에서 홍화를 쳐다봤다. 홍화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자, 우악스러운 손길로 홍화를 잡아 끌어당겼다. 문이 닫힙니다, 소리가 현관문 틈새로 흘러들어왔다.
백영이 홍화를 닫힌 현관문에 밀치고 고개를 틀었다. 홍화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벌어진 입술이 포개졌다. 숨 쉬려고 벌린 입안으로 물컹물컹한 혓바닥이 쑥 들어와 헤집고 다녔다. 고래 혀만 뜯어 먹는 범고래처럼 잔인하면서도, 허기져서 죽기 직전인 짐승이 고기를 뜯어 먹듯이 그렇게 절박했다.
홍화가 백영의 어깨를 밀어내다가, 떨리는 손끝으로 옷깃을 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움칫한 백영이 곧 홍화를 바투 끌어안았다. 틈 없이 들러붙어 윗입술도, 아랫입술도 뜯어 먹고 싶다는 듯이 질근질근 씹었다. 지끈한 통증에 어깨를 떨고 아프다고 칭얼대면서도 홍화는 백영의 옷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큼한 레몬을 문 것처럼 입안에 침이 감돌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열이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바닥에 눌려 차갑게 식었던 홍화의 뺨에도 홍조가 올랐다. 홍화가 고개를 돌리려 하면 잠시 떨어지는 것도 아쉬운 듯 백영이 두 볼을 한 손에 눌러 쥐고 가로막았다. 다른 손은 아래로 내려 홍화의 한쪽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쥐어짜인 엉덩잇살이 아파 홍화가 눈살을 찌푸리자 백영이 달래듯 입술 위에 쪽쪽댔다.
“아팠어?”
“개새끼야.”
입술로는 달래도 달아오른 아래는 마구잡이로 비벼대며 백영이 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홍화에게 숨 쉴 시간 따위는 주지 않고 혀로 혀를 얽고, 손으로 홍화를 더듬거리고, 그르렁대며 입술과 볼에 이를 세우거나 한 움큼 빨아들였다. 홍화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 피하자 드러난 목선에 빨판처럼 들러붙어 빨아대고 물어서 기어이 벌겋게 자국을 새겼다.
“아, 씨발. 이홍화.”
불러놓고는 대답도 못 하게 입술을 막는다. 엉덩이를 쥐어짜던 손으로 홍화의 상의 밑 부분을 잡고 뒤집어 올렸다. 홍화가 놀라서 버둥거리자 백영이 힘을 써서 옷을 억지로 벗겨냈다. 홍화가 어, 하는 사이에 바지 벨트도, 지퍼도 내려가고 바지와 속옷이 단번에 내려갔다. 순식간에 알몸이었다. 기껏 신경 써서 속옷도 갖춰 입고 왔건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백영이 홍화의 양 허벅지 뒤에 팔을 걸어 번쩍 들어 올렸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발끝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 홍화가 허우적거리다가 두 팔로 백영의 목을 껴안았다. 백영이 제 어깨에 벌게진 얼굴을 파묻은 홍화를 불러 고개를 세우게 하고 쉴 새 없이 뽀뽀를 퍼부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면 입을 벌리라는 이야기고, 아이처럼 추켜 안으면 혀를 꺼내라는 이야기였다. 용케 알아들은 홍화가 백영의 명령대로 입 맞추다가, 백영이 한 걸음 움직이자 흠칫하며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두 다리로 백영의 허리를 휘감자 엉덩이 아래를 받친 팔에 근육이 불뚝 솟아올랐다.
침실로 가는 도중에도, 침대에 쓰러져서도 입맞춤이 끊이지 않았다. 입술에서 귀로, 귀에서 목선으로, 목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가슴으로 입맞춤―보다는 포식―이 이어졌다. 젖꼭지에 입김이 스치다가 뾰족한 혀끝이 찌르고, 넓적한 혓바닥으로 꼿꼿하게 선 유두를 쓸어 올렸을 때는, 그 감각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홍화가 기겁하며 백영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백영이 홍화를 보는 자세 그대로 뱀처럼 혀만 길게 빼 젖꼭지를 핥았다. 내려다본 장면이 지나치게 야해서 홍화는 머릿속이 다 화끈했다. 얼마나 색정적인지, 움츠린 다리 사이에서 흰 기둥도 산열매 색으로 익어 선단에 둥근 물방울을 맺었다.
백영의 입술이 가슴을 지나 배꼽을, 아랫배를, 허벅지 안쪽에 장난처럼 입 맞추고 그 안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홍화가 식겁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벌어진 입이 붉었고, 그 입안으로 역시 발갛게 성난 기둥이 말릴 틈 없이 쑥 들어갔다. 홍화가 으헉, 으헉 멋없는 소릴 내며 백영의 머리통을 껴안았다. 백영의 입안이 용광로도 아닐진대 혀가 스치는 아랫도리가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 같았다. 통통하고 말캉말캉한 기둥이 나무 기둥처럼 딱딱해지고, 쪽 하고 백영이 볼이 홀쭉해지게 빨아들이면 발가락이 달달 떨렸다.
“그만, 그만!”
이런 상황에서, 백영이 홍화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줄 위인이 아님을 알면서도 홍화가 통사정했다. 백영의 입안에 정액을 싸는 그딴 짓은, 그리고 조루로 낙인찍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몸통을 비틀고 백영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어도 벌주듯 쭙 소리만 강하게 냈다. 혀끝이 선단의 점 같은 구멍을 꾹 눌렸을 때는 참을 새 없이 액이 찔끔 새어 나왔다.
몸 전체가 백영의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사탕이 된 듯했다. 매끄러우면서도 축축하고, 흐느적거리다가도 불시에 단단해지는 혀가 움직일 때마다 사탕처럼 온몸이 조금씩 녹아갔다. 더 빨리면 젖 빨던 힘을 다 써서 참아내도 결국은 백영의 입에 거하게 쏟아낼 것이다. 그간 금욕한 바람에 작은 자극에도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느꼈다.
홍화가 백영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철썩철썩 때리고 손톱을 세워 밀어냈다. 백영의 볼만 홀쭉해졌다. 기둥이 죄다 들어가서, 혀가 뱀처럼 기둥을 따라 기어 올라가고, 날카로운 이 끝이 살갗에 스쳤다.
“―!”
드디어 백영이 머리를 들었다. 손바닥으로 홍화의 아랫도리를 감싸자 하얗고 진한 정액이 작은 분수처럼 위로 솟았다. 처음 나온 흰 물은 백영의 턱에 튀었고, 두 번째 나온 액체는 울컥울컥 솟아 백영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홍화가 눈을 질끈 감고 허벅지 안쪽을 버르르 떨었다.
“착하게 굴어서 상 준 거야.”
정액이 묻어 미끈미끈한 손바닥으로 홍화의 아랫도리를 주물럭대며 백영이 지껄였다. 풀 죽기는 했으나 손끝이 스치면 신경이 자작자작 졸아드는 기분이라 백영을 밀쳐내려 홍화가 애를 썼다. 번번이 실패하고 숨만 깔딱깔딱 내쉬었다. 판판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젖고 부푼 젖꼭지도 위로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백영이 홍화의 뱃가죽에 흩어진 정액을 손바닥으로 쓱 문질러 닦았다. 입술이 옆구리에 닿자 홍화가 이불을 쥐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려 했다. 단박에 잡혀 질질 끌려 내려왔다.
몸이 녹진녹진하고 예민해서 백영의 입술과 손이 닿는 곳마다 전류가 튀는 양 찌릿찌릿해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론 백영은 홍화의 사정을 봐주는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었기에, 제 아래서 뭉그적거리는 홍화를 압사시킬 듯 깔아뭉개고 목덜미와 쇄골과 턱과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젖은 손이 기둥을 타고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다가 끝끝내 맞닿은 살갗을 벌리고 그 안쪽에 닿았다.
“흐으.”
하지 말라고 백날 말해도 들어주는 위인이던가. 홍화는 피하는 대신 아래팔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리는 것만으로는 수치심이 가시지 않아 아예 얼굴을 반쯤 베개에 파묻었다. 가슴팍에 쪽쪽 입 맞추는 것으로 모자라 이로 살갗을 씹어대던 백영이 귀 아래를 콱 깨물었다. 상어가 따로 없었다.
“얼굴 보여줘.”
“싫어.”
홍화의 대꾸가 마음에 안 차는지 백영이 잇자국 난 아래를 전보다 세게 깨물었다. 피 낼 듯이 깨물어 홍화가 아래팔을 내렸고, 동시에 아래에서 바깥 부분만 깔짝깔짝 긁어대던 손가락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백영에게 뱉으려던 욕은 죽고 으, 하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상처 낸 목 부근에 모기처럼 들러붙어 쭙쭙 빨던 백영이, 정액에 젖어 미끄러운 중지를 구멍 안으로 죄다 집어넣고는 깊숙한 안쪽에서 마디를 굽혔다.
“흐윽!”
“왜 이렇게 좁아. 친구들하고 안 놀았어?”
“무, 슨……. 아, 미친……. 으응.”
마지막은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호하게 흘러나왔다. 백영이 손가락을 거두는 듯싶더니, 성급하게 두 개, 그리고 세 개, 바로 네 개까지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점막을 꾹꾹 누르고 헤집으며 굳은 안쪽을 억지로 비집고 늘렸다. 젖꼭지를 빨린 것만큼이나 다리를 벌린 것도 오랜만이라 아직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는데도, 백영은 손가락을 구멍 안쪽에 깊게 처넣었다가 한 번 꾹 성의 없이 누르고서 쑥 빼냈다.
백영이 상의를 훅 벗어 옆으로 집어 던졌다. 벗는 틈에도 시선은 홍화에게 꽂혀 있었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 사이에 유백영을 두고, 시선이 적나라하게 꽂히는 상황이 온몸이 다 타도록 야했다. 보는 것만으로 아랫도리에 퉁퉁하게 살이 올랐다. 홍화가 모래에 머리 파묻는 타조처럼 베개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몸통은 드러내놓고 눈만 가려봤자 우스운 꼴이라지만 제 눈이라도 가려야 덜 부끄러웠다. 백영이 베개를 빼앗아 던져버리고 가까이 몸을 붙였다. 코끝을 마주 대고, 아래도 바짝 붙였다. 미끈미끈한 구멍 위에 선단을 대고서, 꾹 눌렀다.
지금 들어오면 찢어질지도 모르는데. 열 오른 눈을 한 백영을 보니 도무지 말릴 수가 없다. 하, 하고 홍화가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입을 벌렸다. 백영이 그 입술을 입술로 틀어막으며 양손으로 홍화의 양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바르르 떨리는 혀를 제 혀로 얽고, 그대로 홍화의 몸을 끌어당기고서 대가리도 제대로 못 무는 구멍을 힘으로 벌리고 들어갔다.
홍화가 다급하게 백영의 어깨를 쥐었다. 손톱으로 내리 긁으며 발끝까지 힘을 줬다. 조금 더 들어오면 배가 터질 것 같건만 백영은 멈춰주질 않았다. 아파서 발로 차고 싶다가도, 미간을 찌푸린 백영을 보면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어깨를 긁어 상처를 내는 것도 싫었다. 백영이 아플까 봐서 홍화가 손에서 힘을 풀고 대신 베갯잇을 움켜쥐었다.
눈물이 퐁퐁 샘솟다가 관자놀이를 타고 뚝뚝 굴러떨어졌다. 구멍이 벌어지는 감각이 오랜만이라 아프고 버티기 어려운데도 홍화는 일부러 더 넓게 다리를 벌렸다. 엉덩이가 끌려 올라가고, 안으로, 더 안으로 기둥이 속살을 밀며 들어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홍화는 백영을 밀치지 못했다. 때리지도 못했다. 눈물만 줄줄 흘려가며 입맞춤만이 구원인 듯 매달렸다. 아래가 빠듯하게 찬 것처럼 입안도 가득 찼다. 얼얼한 입안이 흠뻑 젖어 들자 힘 빠졌던 아랫도리가 발긋하게 익었다.
맞붙은 몸에 틈이 없었다. 입술도, 가슴도, 배도, 다리도 모조리 한 몸처럼 얽혔다. 홍화가 백영의 목에 팔을 두르자 입술이 떨어졌다.
홍화가 가슴팍을 부풀리며 밀린 숨을 들이켰다. 위로 들린 젖꼭지가 백영의 살갗에 문질러질 때마다 아랫구멍이 움찔댔다. 날개뼈 아래로 팔을 교차해 홍화를 끌어안은 백영도 홍화의 뱃가죽이 가늘게 떨릴 때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홍화, 하고 부르는 소리에 홍화가 허벅다리를 좁히며 백영에게 매달렸다.
“나 보고 싶었어?”
“그걸, 왜, 지금…….”
“여덟 번, 대답해야지.”
“싫…….”
“빨리.”
백영이 허리를 슬쩍 움직인 것만으로도 홍화는 온몸이 흔들렸다. 홍화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백영은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 대답을 해줘야 그만두든 움직이든 할 거라는 선전포고에 홍화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마주 보고 말할 용기는 없어 백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고, 싶……었어.”
“다시.”
“보고 싶, 었, 흐윽, 어.”
“다시.”
“보, ……!”
대답하라고 협박했으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영이 몸을 들썩였다. 눈곱만큼 바깥으로 나갔던 것이 안으로 푹 치고 들어오고, 조금 더 빠져나갔다가 내벽이 오그라들기 전에 또다시 벌리며 들어왔다.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베갯잇을 찢을 듯이 쥐고서 홍화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백영이 팔꿈치를 베개 아랫부분에 대고 홍화의 고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잡았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 얼굴에 입을 맞추고, 입술을 물고, 혀를 섞고, 버둥대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홍화를 잡아끌어다가 얼룩진 볼을 빨아올리고 깨물어댔다.
“어딜 도망가. 더 말해야지. 어서. 아직 몇 번 더 남았어. 얼른.”
“보고, 앗, 아, 아흐윽, 아!”
“빨리. 지금 말해.”
“고, 싶었, 어, 아, 흣!”
뺨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아래를 쳐대는 자극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아래에서 척척한 소리가 나자 쓰라린 고통이 멀어지고 정액을 줄줄 쌀 것 같은 감각이 아랫배에서 넘실거렸다. 아파서 베갯잇을 긁어쥐었건만, 지금은 기둥 끝에서 맑은 물이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걸 참으려고 베갯잇을 쥐었다. 머리에도 점점 열이 오르고 멍해져서, 귓가에 들리는 명령을 홍화가 넋 놓고 따랐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하라는데 온몸이 징징 울릴 정도로 쳐대서 입에선 말이 되지 못한 신음만 딸꾹질처럼 튀어 나갔다.
“왜, 말을 안 해. 계속해.”
하고 싶었다. 속이 답답해서 홍화도 토하듯이 뱉어내고 싶었다. 할 수가 없었다. 보, 자만 꺼내도 아래에서 망치질을 해대는데 말이 나올 리가. 홍화가 속이 타서 백영의 목에 매달려 목덜미를 콱 하고 깨물었다. 백영의 팔뚝에 근육만 불거졌다.
잠시 멈칫했던 몸짓이 거세졌다. 홍화의 입에서 신음이 아니라 숫제 비명이 터졌다. 지금까지 봐준 것처럼 백영이 상체를 세우고서 홍화의 옆구리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커다란 손이 양옆을 쥐고서 아래로 끌어당겼다. 홍화가 백영의 손목을 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발로 시트를 밀고 벗어나려다가 도리어 제대로 틀어박혔다. 홍화의 아랫배에서 꺼덕이던 퉁퉁한 살덩이가 빳빳하게 일어섰다. 불긋한 끝에 둥근 물방울이 맺혔다가 끈적거리는 점성을 자랑하며 아래로 길게 떨어졌다. 홍화의 한쪽 다리가 백영의 옆구리를 지나 아래로 쭉 뻗어지고, 허리가 완만한 곡선으로 휘었다. 치켜든 턱은 가늘게 떨리고 깨물려 핏물이 묻은 입술 사이로도 긴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으…….”
아랫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 느슨하게 풀렸다. 홍화의 눈동자도 멍하니 풀어졌다. 배에 흰 물은 튀지 않았다. 홍화는 눈을 껌벅이지도 못하고 시체처럼 늘어졌다. 사정보다 더한 절정이었다. 술에 취한 듯 세상이 핑글핑글 돌고 손끝 하나 까닥일 수가 없었다.
보통 때라면, 다른 때였다면 이제 그만하라며 백영을 말리려 들었을 테다. 오늘은 아니었다. 홍화는 가물가물한 눈을 힘겹게 뜨고 백영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대었다. 몸을 일으켜서 그 입술에 입 맞추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바들바들 떨리는 허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백영의 손을 끌어당겨 뺨에 댔다. 단단한 손바닥에 입 맞추고 백영을 바라봤다. 아직 모자랐다. 떨어진 기간만큼 오랫동안 이어져 있고 싶었다. 백영이 보고 싶었던 만큼 그 몸을 껴안고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백영은 다른 건 모른 체해도 모자라단 신호는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홍화의 허리에 팔을 감아 들어 올리고서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아래가 얼마나 깊숙이 결합을 맺었는지, 홍화가 입을 벌려도 숨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래가 맞붙을 때마다 홍화의 뱃속에 불길이 일었다. 제대로 뱉어내지 못한 아랫도리에서 흰 물이 찔끔찔끔 올라와 백영의 단단한 뱃가죽을 얼룩덜룩 물들였다. 삐쭉 배어 나온 정액이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면, 혀가 젖은 입안을 휘젓고 아래서도 깊이 치고 들어오면, 홍화는 예고 없이 치미는 절정에 백영의 어깨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도저히 백영을 품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입 맞추는 백영이 사랑스럽고 몸 붙은 시간이 기다려온 만큼 달았다. 홍화가 바란 만큼,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홍화는 어느 순간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기특하게도 그만하라는 말 한마디 안 하고 버틸 만큼 버티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뺨을 쓰다듬어도 손을 휘젓지도, 몸을 돌리지도 못한다. 야트막하게 솟았다가 가라앉는 뱃가죽이 아니라면 죽었다고 착각이 일 만큼 깊게 잠들었다.
백영은 그 옆에 누워 홍화의 온몸을 만지작댔다. 부은 젖꼭지와 흰 액이 투명하게 말라붙은 배꼽, 잇자국 남은 곳을 세세하게 덧그리고 도로 손을 올려 통통해진 입술도 꾹 눌렀다. 온기만 느껴질 뿐 도리질 치는 반응 한번 없었다. 보들보들한 뺨이 마음에 들어 만지작대다가 입술을 깊게 파묻었다. 그래도 홍화는 깨지 않았다.
쉬지 않고 돌아오느라 몸이 뻐근했다. 원래대로라면 하루 더 머물고 일행과 같이 움직여야 하나, 일정이 끝나자마자 비행기 표부터 끊고 첫새벽에 출발했다. 짐은 죄다 매니저에게 떠넘겼다. 같이 가자는 매니저에게 뒤처리를 맡기고서 신나게 달려왔건만, 연착되어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없을 거라고,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기다렸다고 해도 이미 집에 가버렸을 거라고 여겼다. 그걸 트집 삼아 이홍화를 실컷 맛보려고 했는데, 현관 앞에서 울먹이는 이홍화를 보자 머릿속이 깡그리 비었다. 이걸 어떻게 요리해서 어떻게 벗겨 먹을지, 고 입에서 어떻게 원하는 말을 끄집어내야 할지 그것만 궁리하느라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숨을 깔딱이며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이홍화는 정말이지 맛있어 보였고 맛있었다. 이홍화가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고기 취급받는 가축이었으면 목숨만 간당간당 붙여놓고 팔다리를 뜯어 먹었을지도 모른다.
왜일까. 이홍화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야기한다. 뜯어 먹고 싶다가도 살려주고 싶고, 귀여워해주고 싶다가도 괴롭히고 싶다. 아파서 우는 모습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동시에 쾌락으로 버들버들 떨어야 이홍화의 제맛이 살았다.
이홍화는 불을 지필 줄 알았다. 적어도 유백영에게는 그랬다. 가만히 두면 신경도 안 쓸 것을 이홍화는 어떻게든 저를 들쑤셔서 본모습이 드러나게 했다.
그 눈 때문에 그러나. 오른쪽은 순하면서도 왼쪽은 난잡하게 흐트러진 눈빛을 하고 있어서 그럴까.
다른 사람을 보고 연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게 생소해서 백영은 고개를 갸웃대며 이홍화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땀에 젖어 축축한 머리카락이 이상하게도 손가락에 착 휘감겼다. 불쾌함이 없었다.
다른 이들도 이홍화를 보며 저와 똑같은 가학성을 느낄까. 그럴 일은 없길 바란다. 이홍화를 괴롭히는 건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다른 누군가가 이홍화를 울린다면, 그게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이홍화를 건든단 말인가. 감히 누가.
아예 족쇄를 채워 집에다가 묶어놓고 키우면 마음이 편하련만.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옷 주머니를 뒤졌다. 손바닥만 한 상자를 열어 시계를 꺼내고 이홍화의 손목을 잡았다. 채우고 나니 하얀 손목에 검은 가죽 줄이 퍽 잘 어울렸다. 지나가는 길에 마음에 들어 충동적으로 사 온 선물치고는 보기 좋아 가만히 손목을 내려다봤다.
이대로 계속 채워놓고 싶지만.
“…….”
눈을 뜨면 화대냐고 지랄할 게 빤히 보여 손목시계를 풀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선물을 줘도 받아먹지 못하는 등신에게 바라는 게 과했다. 스스로 자처한 꼴이 우스워 피식 웃고서 백영이 홍화를 내려다봤다. 뺨은 눈물로 얼룩덜룩하고 몸뚱이엔 물고 빤 자국이 짐승에게 물린 양 선연했다. 눈가는 또 어떻고. 안기는 내내 울어서 발갛게 짓물렀다. 객관적으로 예쁘다고는 칭할 수 없는 모습인데도 백영의 눈에는 색다르게 보였다. 피로에 젖은 눈이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손바닥 밑동으로 꾹꾹 눌렀다가 다시 떴다. 그래도 이홍화는 이홍화다웠다.
홍화가 추운지 몸을 바르르 떨며 웅크렸다. 체액에 젖고 이불도 안 덮고 자니 추울 만했다. 백영은 홍화를 인형처럼 제 품에 끌어안았다가, 다리 사이에 손을 넣고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입을 꽉 다문 구멍이 손가락을 삼키자 진득한 정액이 바깥으로 흘러내렸다. 허벅지 안쪽에 남은 붉은 자국 위에도 희고 긴 줄이 그어졌다. 홍화가 자는 와중에도 백영의 손가락을 피하려고 끙끙대며 몸을 틀었다.
백영이 홍화를 토닥거리며 검지와 중지를 구멍에 넣고 구부렸다. 더 많은 양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대체 얼마나 싸댄 건지. 기다린 이홍화가 어여뻐 저 내키는 만큼 달려들었더니 이 모양이었다.
백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홍화를 아이처럼 들쳐 안았다. 정신 못 차리는 홍화의 머리통에 뽀뽀를 퍼붓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뜨끈한 물에 씻기고 보송보송하게 말려 품에 끼고 잘 생각이었다. 내일은 물론 내일모레도, 글피도, 그리고 다음 날과 그다음 날에도.
∞ ∞ ∞
뼈와 살이 녹는 열락의 날들이었다. 정기가 쪽쪽 빠져 요단강 건너기 직전에 홍화는 백영의 집을 빠져나왔다. 태어나서 모유 대신 장어를 처먹었나, 아주 그냥 사람을 엎었다 뒤집었다 짐승처럼 발정해서 겉살과 속살을 쥐락펴락 난리도 아니었다.
홍화도 처음엔 최대한 장단을 맞춰줬다. 하룻밤이 길긴 했어도 백영과 떨어진 시간만큼 길지는 않았다. 백영도 저만큼이나 그리워한 것 같아 기쁘게 뒹군 면도 있었다. 그러나 백영은 저보다 어렸고, 혈기가 넘쳤으며, 심지어 운동도 꾸준히 해 그 체력과 정력을 홍화가 견디기엔 버거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온몸의 물이 쭉쭉 쥐어짜이다가 말라비틀어지겠다 싶어 어쩔 수 없이 도망친 것이었다.
“어휴…….”
떠올린 것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워져 홍화가 옷자락을 팔락거리며 열을 식혔다. 삼 일간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며 평생 못 해본 야한 짓을 한꺼번에 몰아서 한 것 같았다. 힘들어서 그만하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가도, 백영이 씩 웃으며 볼에 뽀뽀하면, 그래, 사람 쉽게 안 죽더라 하고 백영의 품에 제 몸을 던졌다.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야.”
사흘간 꼼짝도 못 하고 녹아내리는 나날을 보내다가, 유백영이 스케줄이 있어 집을 비운 틈에 빠져나왔다. 어디 나가기만 해보라고, 그 성질 어디 안 간 백영이 협박했으나 홍화는 굴하지 않았다.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는 동안 핸드폰에 주완의 눈물 섞인 문자가 한가득 쌓여갔다. 명식도 너 어디냐고 걱정 어린 연락을 해왔다. 심지어 윤태용에게서도 잘 지내냐는 연락이 왔으나 핸드폰을 쥐고만 있어도 백영이 빼앗아 던져버리고 달려드는 바람에 답장도 전화도 아무것도 못 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눈을 가늘게 떴다. 홍화는 갓 출소한 사람처럼 아련하게 길가를 둘러봤다. 자그마치 삼 일 만이었다. 집 안에도 햇볕은 가득 들어왔지만 유백영이 시야를 가리고 있거나, 유백영 밑에 깔려있거나, 침대에 처박혀 있거나, 주방에서조차 유백영의 힘에 밀려 식탁에 엎어져 있는 등, 온건하게 일광욕을 즐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홍화는 모처럼 햇살을 즐길 겸 두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허리가 우두둑 비명을 질러 기지개는 삼 초도 이어지지 못하고 무너졌다. 물리고 빨리느라 살갗이 헤진 젖꼭지도 옷에 쓸려 쓰라렸다. 한 손으로는 가슴을, 한 손으로는 허리를 움켜쥐고 어정쩡하게 몸을 굽히자 사람들이 홍화의 기행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시선만 꽂혔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혀까지 쯧쯧 차거나 옆 사람에게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이상해 홍화가 옆 건물 유리창에 제 모습을 비춰 봤다. 목과 뺨에 잇자국이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붉고 푸른 멍이 장식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황을 의심할 몰골이었다.
사람을 이 꼴로 물어대다니, 좀비 같은 유백영. 유백영이 좀비였으면 홍화는 물려서 좀비가 되었더라도 다 뜯어 먹혀 뼈만 남았을 테다.
“개새끼가, 진짜.”
홍화가 씩씩대며 약국에서 반창고를 두 통이나 샀다. 약사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걸 후드를 눌러써 피하고서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 반창고를 붙였다. 눈에 드러나는 곳이야 거울 보고 붙인다지만, 젖꼭지는 바깥에서 붙이기 부끄러워 칸막이 안에 들어가 옷깃을 들쳤다.
“으…….”
가슴에도 백영이 남겨둔 자국이 빼곡했다. 오돌토돌한 젖꼭지 둘레엔 잇자국이 동그랗게 남았고, 젖꼭지는 입김만 스쳐도 쓰라릴 만큼 부었다. 급한 대로 옷을 입에 물고 젖꼭지 위에 반창고를 붙였다. 뗄 때 고통스럽겠으나 집에 가는 동안 옷에 쓸려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보다야 나았다.
“허억.”
건물을 나와 걸음을 옮기다가 허리를 부여잡았다. 틈틈이 찜질을 했어도 단번에 근육통이 가시지는 않았다. 하기야, 유백영의 체중을 견디느라 그 무리를 했으니 지금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나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칭찬해줘야 마땅했다.
이런 상태로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차체가 흔들리면 그 충격을 어떻게 버텨내려고. 홍화는 계획을 바꿔 명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식이 홍화의 전화를 받자마자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다고, 어디냐며 먼저 물어왔다.
차마 유백영네 집 앞이라고는 못 하고 홍화는 일부러 한 정거장 먼 곳이라고 대답했다.
―응? 거기는 너네 집하고 멀지 않냐. 거긴 어쩐 일이야?
“친구 만나러 왔지. 걔는 약속 있어서 먼저 갔어.”
홍화가 대충 둘러대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전화 붙들고 있다가 유백영 이름이라도 뱉으면 큰일이었다.
끙끙대며 간신히 정류장에 도착해 의자에 앉으려고 궁둥이를 갖다 댄 순간 허리가 징 하고 울렸다. 좋아하고 나발이고 유백영은 개새끼가 맞다. 홍화는 속으로 유백영에게 온갖 욕과 소소한 저주들을 퍼부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만 해도 허리가 같이 울려 얼른 손에 쥐고 꺼냈다. 설마 벌써 명식이 도착했나 싶었건만 개새끼라는 이름만 떠 있다. 그 명칭만 봐도 아랫배가 저릿저릿 아렸다. 홍화가 이를 갈며 문자를 확인했다.
[너 지금 집 아니지]
혹시 집에 남몰래 감시 카메라를 달았나 싶어 소름이 다 돋았다. 홍화가 팔뚝을 벅벅 문지르며 열심히 답장을 보냈다.
[거주 이전의 자유 모르냐]
[기어나갈 힘이 남아있었나 봐]
[봐줬더니]
문자 두 개가 연달아 화면에 올라왔다. 누구 탓에 허리 부여잡고 기어 다니는데. 야비하고 뻔뻔한 유백영의 작태에 이가 갈렸다. 홍화가 손가락에 분노를 가득 담아 자판을 부술 듯 쳐댔다.
[오늘 저녁에 데리러 갈게 어디 있을 거야]
홍화가 욕 섞인 저주를 완성하기 전에 백영이 선수를 쳤다. 홍화가 보내기 버튼 위에 손가락을 대려다가 한숨을 쉬며 길게 쓴 문장을 지웠다.
[말 안 할 건데]
[전화해?]
[내 집 간다]
전화하면 분명 억지를 부리며 복장을 뒤집을 거라 문자에서 끝내자며 홍화가 꼬리를 말았다. 비꼬지도 않고, 대들지도 않고, 평범하게 문자를 보냈는데도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받았다. 아침에도 백영 밑에 깔려 꿱꿱거리느라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왜.”
―심심해서.
“일 안 하냐?”
―아직 미팅 시작 안 했어. 곧 하겠지.
나가기 전에 계약이니 뭐니 말은 해줬는데 비몽사몽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올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맨 포르노 뺨치는 기억만 가득 떠올라 후드가 벗겨지도록 고개를 세게 털었다. 공공장소에서 아랫도리를 벌떡 세우는 변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끝나면 바로 데리러 갈게.
“날 그냥 우리 집에서 쉬게 냅 둬.”
―‘우리’라는 사전 정의부터 다시 알아봐. 끊는다.
끝까지 사람 약 올리더니 유백영이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끊긴 전화에 대고서 욕을 퍼부으려다가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꿀꺽 삼켰다.
이딴 녀석이 뭐가 좋다고.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놈이 뭐가 좋다고. 마음 흘러가는 거야 인력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지만 왜 하필, 하고많은 사람 중에 이런 개새끼를.
유백영을 좋아하는데, 그놈이 개새끼라고 하소연할 사람이 없어서 홍화가 가슴만 통통 치며 아이고, 아이고 속으로 곡소릴 냈다. 예전처럼 마음 놓고 미워하고 싶건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유백영의 냄새만 맡아도 어디 모자란 사람처럼 실실 웃음이 새서 들키지 않으려고 용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욕하려다가 아침에 백영이 제 이마에 뽀뽀하고 나가던 게 떠올라 뺨만 붉어졌다.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다정하게 굴어서 사람 애간장만 녹이는 못된 놈 같으니.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착실하게 검색창에 유백영을 입력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진 중에 얼굴이 잘 나온 사진을 찾아다가 확대했다. 잘생긴 그 얼굴을 보며 홍화가 또 해죽거렸다. 허리도 아프고, 물린 부위가 욱신거리는데도 유백영을 보면 그저 좋았다. 병원에 안 가 봐도 알았다. 아주 중증이었다.
조수석에 탄 홍화의 몰골을 본 명식이 히이익, 길게 비명을 질렀다. 후드와 반창고로 가린다고 가려질 자국들이 아니었다. 개한테 물렸다고 하면 당장 그 개를 잡아다가 보신탕으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팔을 걷어붙일 명식이라 홍화가 얼른 다른 변명을 궁리했다.
“길 가다가 자전거랑 부딪쳤어. 부러진 곳은 없고.”
“조심 좀 하지 그랬냐. 그 인간 연락처는 받아뒀어? 요새는 자전거 사고도 합의금 받을 수 있다는데.”
“에이, 무슨 합의금이야. 그냥 침 바르면 나을 건데.”
“네 몰골은 보고 말하냐. 무슨 미라 꼴을 해가지고는.”
명식이 코웃음 치며 글로브박스에서 손거울을 꺼내 건넸다. 아까 반창고 붙일 때 봤으나 모르는 척 명식에게 거울을 받아 살폈다. 하도 기력을 빨려 눈 밑이 퀭하긴 했다.
“이 정도야, 뭐.”
“이제부터 바빠질 건데 몸조심 좀 해. 함부로 다치지도 말고.”
“왜, 스케줄 잡혔어?”
물어봐 주기만을 기다린 듯 명식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졌다. 곰 같은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고 어깨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 듯 들썩였다. 홍화도 덩달아 흥분했다. 혹, 큰 역할이라도 들어왔나 싶어 벌써부터 가슴이 발딱발딱 뛰었다.
“강주완 그 친구 말이 거짓말은 아니데. 아직 정식으로 풀리지도 않았는데 입소문 났는지 여기저기서 너 좀 보자고 난리다. 아, 배역도 들어왔어.”
“진짜?”
홍화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상체를 아예 명식 쪽으로 틀고 쳐다봤다. 명식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돼서 허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여러 개 들어왔어. 네가 보고 결정해야지.”
“다 하면 안 돼? 어차피 나 요새 하는 것도 없는데. 뭐든 할 수 있어.”
“안 되지. 네가 한다고 해서 그놈의 퀴어인지 뭐시긴지는 그냥 넘어갔는데, 이제 너 이미지 잘 구축해야 한다. 들어오는 대로 다 했다가 헤픈 이미지로 굳어지면 어떡할 거야.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야. 그리고 그런 호모 역할 같은 거, 웬만하면 다신 하지 마라. 한 번이면 충분해.”
명식이 짐짓 엄하게 굴었다. 홍화는 호모가 병균도 아닌데 왜 자꾸 그러냐는 대꾸는 차마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친형 같은 명식에게 평생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 두 개나 생겼다. 명식의 반응을 보아하니 백영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으면 홍화를 잡아다가 머리를 밀고 깊은 산 속 절에 보낼지도 모른다.
“지금 가서 같이 보고 정해보자. 너 인마, 드디어 고생 끝이야!”
명식만 신나서 홍화의 등을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소리 높여 외쳤다. 홍화도 명식에게 맞춰준다며 두 팔을 들고 예에, 만세를 불렀다.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입맛은 맘속 깊이 숨겼다.
한가한 카페 구석에 앉아 명식이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한 더미나 꺼냈다. 대체 몇 개나 들어왔냐고 홍화가 묻자 명식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잇몸이 다 드러나도록 웃었다.
주인공 역은 없지만 전보다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은 배역들이 들어왔다. 신내림 받은 박수무당, 주인공의 푼수데기 친구, 천재 해커 역, 이렇게 세 개였다.
“박수무당은 너무 여성스러워. 이미 호모 연기했는데 여성스러운 걸 또 할 수는 없지.”
“형, 김오늘 역이 딱히 여성스럽지는…….”
“그래도, 인마. 그리고 친구 역 이거는 너무 촐랑대. 좀 묵직한 역할을 맡아야지 이렇게 푼수데기 역할 자꾸 하면 이미지가 너무 가벼워져서 안 돼. 그래서 난 네가 이거, 해커 역 했으면 좋겠다.”
“범죄자 역 또 해?”
“그건 미친 살인마였고 이건 머리 쓰는 거잖아. 거기다 중간중간에 액션도 들어가 있고. 이번엔 남성미를 제대로 보여줘야지.”
명식이 다른 대본은 다 치우고 마지막 대본을 홍화 앞에 밀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각종 해킹 대회에서 1위를 휩쓴 천재 해커로, 동생의 병원비를 감당하고자 범죄에 손을 대는 인물이었다.
“넌 눈빛이 좋아서 사연 있는 캐릭터랑 잘 어울려.”
캐릭터도, 캐릭터의 배경도 마음에 든다. 욕심 같아서야 세 개 다 스케줄 꽉꽉 채워 하고 싶지만 과식하다가 탈 날까 봐 겁났다. 웹드라마는 제 고집을 세웠으니 다음 역은 명식의 주장을 따르는 것도 괜찮을 듯해 홍화가 흔쾌히 마지막 시나리오를 골랐다.
벌써 역할을 골라 받는 위치가 되다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어떤 역이든 하고 싶어서 굽실대던 과거가 떠올라 감개가 무량했다.
“좋아. 그럼 이번엔 이걸로 간다.”
명식이 콧노래를 흥얼대며 담당자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홍화는 손에 쥔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백영에게 자랑할 거리가 늘었다. 오늘 만나면 이것부터 뽐낼 거라며, 홍화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창문 틈으로 스미는 바람이 어느새 따스해진 것처럼, 다사다난하던 인생에도 드디어 봄볕이 드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