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첫 키스의 추억은 남의 가랑이 사이를 쪽쪽 빤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백영은 조수석이 불편하다며 뒷좌석으로 홍화를 구겨 넣고 입안에 그 큰 걸 욱여넣었다. 홍화의 머리를 쥐고 당기며 호된 입맞춤으로 빨갛게 익은 입속을 왕래했다. 유리창에 뒤통수가 통통 부딪치는 걸 감싸줘서 올려다보니, 그대로 콱 들이박았다. 안 다치게 도와주는 게 아니라 더 깊게 들어오려고 수 쓴 거였다. 입 써주는 게 어디냐고, 아프다고 칭얼대서 봐주는 거 아니냐며 사람 복장 뒤집는 소리도 했다.
「손으로 잡고 빠는 게 편할 거야. 아직 목구멍은 못 열잖아. ……그래. 이제 혀 쓰는 건 키스보다 낫네.」
목구멍은 못 연다면서, 본인이 그렇게 말해놓고는 싸기 직전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목울대를 검지로 내리그으며 여기를 열어야 한다고, 바나나를 껍질째 삼킨다고 생각하라고 미친 소리를 씨불였다. 바나나보다 크면서 그딴 걸 조언이라고 했다.
턱이 빠지라 벌려서 결국엔 다 삼켰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정액이 터졌다. 뱉고 나발이고 삼킬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목구멍에서 기둥이 빠져나오자 홍화의 혓바닥도 복날 개처럼 늘어졌다. 같이 딸려 나온 혓바닥 위에 백영이 둥근 끝을 문질러 닦았다.
그 비릿한 맛이란.
홍화가 소매를 늘려 입술을 화다닥 문질러 닦았다. 상처 난 곳이 도로 터져 핏물이 소매에 묻었다.
“갑자기 왜 그래.”
네 개의 시선이 꽂혔다. 홍화가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세웠다. 나영이 괜찮냐며 제 앞에 있는 고기를 홍화의 그릇에 옮겼다. 명식이 고기를 뒤집으며 혀를 찼다.
“애가 요새 이래, 자기야. 뭐만 하면 멍해 빠져서. 내가 영양제를 그렇-게 맞으라고 했는데도 안 맞는다니까. 저, 저. 입술 다 터지고 양 끝도 터진 것 좀 봐. 저거 영양 부족할 때 생기는 병이잖아.”
“바쁜 애가 영양제 맞을 시간이 어디 있어. 어휴, 홍화 너 살 빠진 거 봐라. 얼마나 빠졌는지 입술만 퉁퉁 부어 보이네. 요새 밥은 잘 먹고 다녀?”
입술이 부은 이유도, 입술 양 끝이 찢어진 이유도 때려죽인대도 못 밝혔다. 홍화가 열없이 제 얼굴을 쓱쓱 쓸어내렸다. 유백영도 그렇고, 보는 사람마다 해쓱하다며 병자 취급했다. 정작 본인은 마른 걸 잘 못 느꼈다.
“응. 오늘도 누나 덕에 입에 기름칠하는데, 뭘. 곧 엄청 살찔걸. 화면은 보통보다 뚱뚱하게 나와서 다이어트해야 할지도 몰라.”
“넌 더 쪄도 돼. 팍팍 먹어. 팍팍. 자기 뭐 해. 고기 더 안 굽고.”
명식이 손을 미적거리자 나영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 재촉했다. 명식이 홍화만 예뻐한다며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댔다. 애같이 뭐하는 짓이냐고 나영이 명식의 등을 호쾌하게 내려쳤다. 명식이 엄살을 부리며 바지런히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렸다. 나영에게 저 좀 봐달라며 어리광을 부리면서도 명식은 고기를 집어 홍화의 그릇에 올려놓기 바빴다.
“참, 저번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못 온 거야?”
고기를 입에 가져가던 젓가락이 허공에 딱 멎었다. 찰나였고, 금방 움직였지만 홍화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유백영과 밥을 먹고, 입 맞추고, 거기를 쪽쪽 빠느라 그랬다는 말을 어떻게 입에 올리랴. 그날 밤 일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입속과 덜 나은 입술이 화끈화끈했다.
“어……. 그냥. 갑자기 일이 생겨서.”
백영 앞에서는 거짓으로 둘러대는 것도 잘만 하겠더니만 둘 앞에서는 못 하겠다. 진실을 고할 수는 또 없어 얼버무렸다.
“요새 묘하게 비밀이 많아졌어, 우리 홍화가.”
사춘기 아들 둔 아버지처럼 명식이 말했다. 기특하단 투보다 서운하단 투가 강했다.
“비밀은 무슨 비밀.”
홍화가 그딴 거 없다며 명식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았다. 나영이 손님이 고기 뒤집는 거 아니라며 홍화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아 명식에게 돌려줬다. 명식이 역시 홍화만 예뻐한다고 울상으로 고기를 구웠다.
“그런 거 정말 없어.”
“왜. 비밀이 있을 수도 있지. 홍화가 세 살짜리도 아니고. 이 양반은 네가 항상 제 품에 아기인 줄 안다니까.”
“홍화랑 내가 어떤 사이인데.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사이야! 홍화는 내가 육학년 때 교실에서 오줌 싼 것까지 안단 말이야.”
“형, 그건 극단 사람들도 다 알아.”
“네가 퍼트렸냐?”
“형이 술 먹고 불었어.”
명식이 그랬느냐고 뻘쭘하게 고기에 집중하는 척했다. 나영이 키득거리며 그 나이에 교실에서 실례하는 인간이 어디 있냐고 놀려댔다. 명식이 시뻘게져서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지!”라고 변명했다.
낄낄대며 먹다 보니 어느새 고기도 동나고 다들 배가 불렀다. 백영과 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묘한 긴장감으로 시간이 더디게 흘렀건만.
명식이 설거지하러 싱크대에 서자 나영이 굳게 닫혀있던 방문을 열었다. 삼색 털을 어여쁘게 입은 맹꽁이가 기품 있게 걸어 나왔다. 고 뚱뚱한 몸으로 어쩜 그리 총총 걷는지. 고상한 걸음으로 나영에게 몸통을 비비고 홍화에게 인사하듯 눈을 깜박였다. 연둣빛 눈이 색 옅은 에메랄드처럼 영롱했다. 홍화가 소파에 앉자 옆으로 다가오더니 무릎 위를 제 방석 삼아 앉아 골골거렸다.
“진짜 귀엽다.”
“우리 맹꽁이가 손님 대접은 제대로 하지. 간식만 좀 덜 밝히면 좋을 텐데, 저 돼지. 이참에 홍화야, 네가 맹꽁이 살 좀 가져가라. 넌 살 좀 붙고, 맹꽁이는 살 빠지고.”
접힌 목살에 옆구리 살도 두툼했다. 목을 긁어주자 맹꽁이가 고롱고롱 울었다. 심각하게 귀여워 사진을 안 찍으려야 안 찍을 수 없었다. 홍화가 찰칵찰칵 셔터를 눌러도 맹꽁이는 너그러이 앉아있었다.
허벅지 뼈가 맹꽁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금 가기 전에 설거지를 끝낸 명식이 과일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왔다. 맹꽁이가 홍화의 무릎에서 쿵 하고 바닥에 착지해 명식의 발치에 머리를 문지르며 환영했다.
“어구구, 우리 돼지. 예쁜 돼지.”
명식이 맹꽁이를 안아 들고 뽀뽀를 퍼부었다. 홍화 앞에서 얌전한 모습만 보여주던 맹꽁이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하악거렸다. 몸을 비틀어 명식에게서 탈출하고 콧방귀를 풍 뀌며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저 못된 것.”
예쁜 돼지에서 못된 것으로 떨어졌다. 나영이 저 인간이 또 저런다고 홍화 앞에서 흉을 봤다. 홍화도 맹꽁이랑 더 놀고 싶은데 명식이 쫓아버렸다며 장단 맞춰 수군거렸다. 맹꽁이가 매정한 거야, 명식이 억울함에 차서 변명조로 외쳤다.
“홍화야, 어차피 내일 새벽부터 촬영인데 오늘은 그냥 자고 가지 그러냐.”
홍화가 옷을 챙겨 입자 명식이 잡았다. 명식의 제안이 유혹적이지만 겨우 아홉 시밖에 안 됐다. 막차를 놓친 것도 아닌데 신세라니.
“집에서 쉬는 게 편해. 누나도 편히 자야 하고.”
“난 괜찮아.”
“아침에 둘 다 부스럭거리면 시끄럽잖아. 나 갈게. 다음에 촬영 없을 때 늘어지게 자고 갈게.”
다음을 기약하자 명식과 나영이 그래도, 하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명식이야, 홍화가 자고 가면 데리러 가는 번거로움이 줄어드니 좋았다. 다만 홍화는 나영이 걱정이었다. 휴일 없이 일하는 나영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밤뿐이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손님이 집에 있는데 어디 자는 맘이 편하랴. 홍화는 나영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 홍화야. 가기 전에 사인해주는 거 잊지 마라.”
“다음에 가게 꼭 들러. 사진도 좀 찍자. 떡볶이 맛있게 해줄게.”
명식이 후다닥 방에 들어가 펜과 종이를 들고 나왔다. 다른 팔에는 맹꽁이가 대롱대롱 안겨있었다. 맹꽁이가 심기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찌그러진 얼굴로 으아오옹 길게 울었다.
“엄청 맛있다고도 써줘.”
허공에 연습까지 하고 펜을 쥐었다. 사인은 일필휘지로 갈겨쓰고 엄청 맛있다는 글자는 정성을 다해 써내려갔다. 완성한 사인이 유명한 배우가 적은 것처럼 제법 그럴싸했다.
“홍화야, 혹시 아는 연예인들 있어? 누나가 공짜로 포장해줄게. 사인 좀 어떻게 안 될까.”
유백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 외엔 마땅히 사인을 받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 단역들이야 이제 연락하지 않으니 부탁하기 민망하고, 주완은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아 사인을 받아도 무용지물이었다.
홍화는 자신의 우물 같은 인맥을 뒤돌아보며 한숨지었다. 그간 발품 팔며 열심히 돌아다녔건만 인맥다운 인맥은 유백영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 인맥도 제대로 된 인맥이 아니었다. 원수지간이라면 모를까.
예전에 친해진 인물이 저를 함정에 빠트려서 그런지,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려 하면 혹시 사기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서 움츠러든 점도 있었다.
“아는 사람 만나면 사인 받아줄게.”
“그래. 근데 너네 소속사는 왜 모임 같은 거 안 하냐. 다른 데는 모여서 잘만 놀던데.”
명식이 지적했다. 홍화도 의문이었다. 잘 나가는 인물들만 모아둬서 그런지 소속사는 배우들의 친목에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저들이 알아서 만나고 알아서 놀라는 듯 방치했다.
방치라니. 두 번째 소속사의 악몽이 떠올라 잠깐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이번 소속사는 모임은 하지 않아도 다른 건 다 잘 챙겨주지 않나. 지금껏 겪어온 소속사들과는 다르다. 홍화가 애써 가슴을 쓸어내렸다.
“떡볶이 아예 오늘 바로 싸 갈래? 내일 촬영이라며.”
나영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말만 하면 당장 한가득 음식을 만들어 품에 안겨줄 기세였다. 홍화가 두 팔을 휘저으며 거절했다. 하루 지나면 맛없어지는 데다 촬영장에서 음식 나눠줄 만큼 친한 사람도 없다.
“그럼 반찬이라도 가져가. 밥통은 있지?”
“괜찮다니까. 밥은 거의 나가서 먹어. 마음만 받을게, 누나.”
“으이그. 나가서 사 먹는 밥이 퍽도 건강하겠다. 양념해놓은 고기 있으니까 그거 좀 가져가. 가게도 좀 들르고. 홍화 너한텐 돈 안 받을 테니까 배고프면 와서 먹고 가.”
나영이 대뜸 일어나 부엌에서 양념한 고기를 잔뜩 담은 통을 가져왔다. 홍화가 거절해도 명식까지 합세해 이거라도 먹어야 한다며 우겼다. 장가 안 간 남동생 챙기듯이 사과도 가져가라, 도라지즙도 가져가라, 한 꾸러미를 싸서 홍화의 손에 쥐여줬다. 냉장고가 코딱지만 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줘도 둘은 실온에 보관 가능한 걸로 골라 바리바리 안겼다.
“연예인 사인 많이 받아 올게.”
“그것 때문에 준 줄 아니. 그건 됐고 얼른 살이나 좀 쪄. 예전엔 보기 좋았는데 삐쩍 말라서 내 가슴이 다 쓰리다, 야.”
“고마워, 누나. 형.”
먼지 한 톨 안 묻은 순수한 진심이었다. 홍화가 명식을 껴안았다. 나영도 홍화를 껴안았다. 명식이 넓은 품으로 나영과 홍화를 꼭 부둥켜안았다.
홍화는 한참을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부모의 품은 안겨본 적 없어 모르나, 아마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홍화는 받아 온 음식부터 냉장고에 넣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예인 사인, 나영이야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는 했지만 고작 그런 부탁 하나 못 들어주면 홍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홍화는 망설이다가 백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젠간 만날지 모르나, 기약 없는 미래라 확실하게 약속을 잡아놓는 게 나았다.
[야]
보내놓고도 바로 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구석에 던져놓고 대본을 읽었다. 한 줄 읽고 핸드폰을 힐끔거리고, 다음 줄 읽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십 분 후, 핸드폰이 진동했다. 홍화가 번개같이 일어나 답장을 확인했다.
[왜]
[사인 한 장만 줘]
[왜]
[필요해서]
[싫어]
그깟 사인 한 장이 뭐가 어렵다고. 홍화가 분노에 차서 두 손가락으로 액정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공손하게 말해야지]
쏴대는 말을 세 줄 정도 완성했을 때 백영에게 답장이 왔다. 공손하게, 라는 표현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어느 때인가 백영에게서 직접 이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주면 안 되냐]
[안 돼]
단호하기는. 홍화는 단순하게 주세요, 까지 쳤다가 지웠다. 고작 말 한마디인데 괜히 하기 싫었다. 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세요, 한마디면 끝나. 다른 거 요구 안 해]
뒷말이 불길했다. 홍화는 굴하지 않고 치사하게, 라고 보냈다.
[5]
숫자 하나만 달랑 날아왔다. 홍화가 웬 숫자냐고 묻기 전에 4가 화면에 떴다. 3이 뒤를 이었다. 2. 불길함이 배가 됐다.
[1]
당장 주세요, 라고 안 보내면 일이 커질 것만 같았다. 유백영과 부딪친 경험들이 안 좋은 예감을 부채질했다. 홍화가 얼른 주, 까지 쳤다.
[0. 땡]
[주서ㅣ오]
늦었다. 홍화가 주세요, 라고 고쳐서 다시 보냈다.
[요구 하나 추가]
[치사한 새끼야]
[둘 추가. 괘씸죄로]
[네 사인 필요 없어. 안 받아]
강물 팔던 봉이 김선달도 이보다는 덜 쩨쩨했다. 받으면 좋겠지만 굳이 유백영일 필요 있나. 낯부끄럽긴 해도 촬영장 돌며 얼굴 익은 배우들에게 사인해달라고 쫓아다니는 게 나을 성싶다. 백영이 어떤 보답을 요구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보다야 안면에 철판 까는 게 쉬웠다.
홍화가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던졌다.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백영이 문자를 보냈다. 사진이었다. 흰 종이에 유려한 필체로 사인이 적혀 있었다.
[밑에 뭐라고 적어]
이렇게 해줄 거면서 사람 간 졸이게 협박은 왜 해. 분이 스르륵 풀렸다. 홍화가 누그러진 손길로 답장을 보냈다.
[먹어본 떡볶이 중에 최고!]
다음 사진이 왔다. 홍화가 보낸 문구가 사인 밑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혀 있었다. 사인은 고급스러운데 밑에 적은 글자는 괴발개발이었다. 꼭 남이 따로 적은 것 같아 홍화가 낄낄 웃었다.
[글씨 진짜 못 쓴다]
[한글은 잘 못 써]
홍화는 제 손글씨에 자부심이 있었다. 공부는 못해도 필기는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오죽하면 폰트로 만들어 돈 벌라는 소리도 들었을까. 그 유백영보다 잘난 점이 하나는 있었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내일 촬영이지]
[응]
[내일모레는]
촬영이 얼마나 이어질지 모른다. 내일은 출연하는 분량이 많아 새벽에 끝날 수도 있고, 야외 촬영이라 날씨에 따라 다음 날 아침으로 미뤄질 수도 있었다. 일기예보가 비 온다는 소식이 뜨긴 했지만 기상청이야 희대의 거짓말쟁이들 아니던가. 맑다고 해서 우산 놓고 갔는데 소나기 만난 날을 세자면 열 손가락을 다 쓰고도 모자랐다.
[어떻게 될지 아직 몰라]
[지금 갖다 줄까]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욕실 문을 열고 거울부터 봤다. 씻기는 했어도 잠을 못 자 피부도 꺼칠하고 상태가 딱히 좋지 않았다. 하, 하고 손바닥에 입김을 내 냄새도 맡아봤다. 양치질을 했는데도 고기 냄새며 마늘 냄새가 올라왔다.
[다음에. 오늘은 일찍 잘 거야. 새벽에 일어나야 해]
[봐주지]
저가 거절해놓고도 백영이 안 온다니 묘하게 섭섭했다. 홍화는 서운한 마음을 발로 퍽퍽 밟아 없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오늘 뭐 했어]
홍화는 줄줄이 늘어놓는 대신 열심히 찍은 맹꽁이 사진을 보냈다. 맹꽁이가 홍화를 올려다보는데, 까만 동공이 동그랗게 나와 상당히 귀여웠다. 실물의 사랑스러움은 다 못 담았을지라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충분히 귀여워 보이리라.
[너 닮았다]
어디가. 홍화가 맹꽁이 사진을 확대해 구석구석을 살폈다. 앙증맞은 분홍색 코, 호수 같은 눈동자, 하얗고 폭신폭신한 주둥이. 닮은 구석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못생겼어]
[맹꽁이는 귀여워.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귀여워]
[너 닮아서 못생겼다고]
하여간 꼭 초를 친다. 오디션에서 번번이 탈락하며 못났다는 소릴 들어 익숙하다지만, 백영에게 들으니 기분이 새롭게 나빴다. 똑같이 욕해주고 싶었으나 백영의 외모는 빈말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성격이라면 모를까. 인성 파탄에 가까운 이기적인 면모와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 철저하게 본인 위주로만 굴러가는 사고방식 등등. 욕하라면 3박 4일을 속사포로 쏟아낼 자신이 있었다.
[넌 인성이 못생김]
유치하더라도 욕 얻어먹고 가만히 있기는 싫었다. 보내자마자 칸 옆에 숫자 일이 사라졌다.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홍화는 백영과 나눈 실없는 대화를 눈으로 훑고 핸드폰을 가슴 위에 올려놨다. 오래 쥐고 있어서 그런지 핸드폰이 뜨끈뜨끈했다. 데운 돌을 올려놓은 듯 가슴이 뜨뜻미지근하게 달아올랐다.
가슴에 물결처럼 진동이 일었다. 유백영이 뒤늦은 답변을 보냈다. 짧은 문장에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나도 알아]
[그만 자라]
성격 더러운 걸 안다니, 의외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지 않은가. 장점이 아주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홍화가 키득거리며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것만 같았다.
∞ ∞ ∞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명식의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스태프들이 좀비처럼 비척대며 촬영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홍화가 쉬는 동안에도 그들의 노동은 이어졌는지 몰골이 전보다 심각했다. 푹 익다 못해 속이 삭아가는 호박 같은 얼굴로 촬영장 주변을 쏘다녔다. 홍화와 안면이 있는 보조는 실상 홍화가 와도 한참 후에나 알아차렸다. 인사는 못 하고 으어어, 하고 죽어가는 소리만 냈다.
“죽겠어요. 돈 좀 벌겠다고 왔는데 병원비로 다 깨지게 생겼어.”
촬영 스태프가 과로사한단 뉴스야 심심치 않게 접해 홍화도 그들의 살인적인 노동량을 알았다. 그들에 비하면 홍화 본인은 탱자탱자 먹고 놀다가 돈 받아 가는 셈이었다.
쓰러지기 직전인 모습이 안쓰러워 홍화는 저 먹으려고 편의점에서 산 초코바를 보조의 주머니에 찔러줬다. 보조가 울먹이며 이 은혜 잊지 않겠노라며 훌쩍였다.
“딴 사람들은 인간 취급도 안 하는데. 홍화 씨가 날 살려주네요. 고마워요.”
“겨우 과자 하난데요, 뭘. 조금만 더 힘내세요. 파이팅.”
감동한 시늉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감격했는지 보조가 눈물 맺힌 눈 끝을 닦았다. 그도 잠시, 조연출의 호랑이 같은 일갈에 궁둥이에 불붙은 토끼처럼 뛰어갔다.
홍화가 등장할 장면을 촬영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오늘 분량의 대사를 살펴봤다. 키스 장면이 들어있었다.
돌연 유백영의 얼굴이 대본 위에 그려졌다. 뻔뻔하게 입맞춤을 요구하고 순진한 입술을 약탈해간 낯짝이. 홍화가 유백영의 얼굴이 사라지도록 빛의 속도로 대본을 닫았다.
추운 새벽인데도 더웠다. 촬영장 한가운데를 비추는 조명이 불처럼 활활 타올라 홍화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듯했다. 목덜미까지 뜨겁고 열병에 시달리는 것처럼 입술도 바짝 말랐다. 목이 말라 명식이 챙겨준 물통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지잉, 지잉 울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유백영이 문자를 보낸 듯해 얼른 꺼냈다. 주완이었다. 그간 바쁘다고 답장도 전화도 못 했다.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대뜸 전화가 왔다. 아직 대기할 시간이 남아 전화를 받았더니,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소리가 고막을 뚫었다.
―홍화 형!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멀리 떨어진 촬영 스태프의 귀에도 들어가게 생겼다. 홍화가 재빨리 촬영장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혹여 수다 떠는 소리가 감독 귀에 들어갔다가는, 배우가 기본자세도 안 되어있다며 어마어마한 잔소리와 짜증을 퍼부을 것이다. 아침나절부터 도끼 같은 눈초리를 받아서 좋을 일이 없잖은가.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일찍부터.”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아침 여섯 시였다. 할 것 없는 백수가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형. 오늘 새벽 촬영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더 일찍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혹시 주무실까 봐 지금 전화 드린 겁니다. 어디세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을 잘도 기억했다.
“촬영장이지. 이미 시작했어.”
―저, 구경하러 가도 됩니까?
가능할까. 촬영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은 근처에 오지 못한다. 통제하며 다른 길을 이용하라고 내쫓는 마당에 주완을 들여보내주진 않을 듯했다.
―홍화 형이 마중 나오면 들여보내줄 겁니다. 형이 연기하는 모습 꼭 보고 싶습니다. 제발요.
홍화의 고민을 알아챈 주완이 선수를 쳤다. 수화기 너머로 주완은 분명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고 있을 것이다. 간곡함이 홍화가 있는 곳까지 느껴졌다. 그간 주완에게 연락을 못 한 점과 저녁 식사를 잡아놓고 유백영에게 가버린 일, 연기를 봐준다고 약속해놓고 제 촬영이 바빠 등한시한 일 등등, 죄책감 가질 일이 많았다.
“알았어. 오면 연락해.”
보조 출연자 속에 섞어놓으면 되겠지. 한번 촬영장 안에 들어오면 사람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을 거고. 무엇보다 선배의 연기를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대는데, 열렬한 후배의 마음을 외면할 수야 있나. 지금이 딱 좋은 기회였다.
홍화는 주완에게 주소를 보내고 촬영장 근처로 돌아갔다. 대본을 열고, 후배에게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자 한 장면, 한 장면 곱씹으며 골몰했다.
도착했다는 연락을 듣고 나갔더니 예상대로 스태프가 쩔쩔매며 주완의 입장을 막고 있었다.
“에이, 진짜라니까요. 어. 저기 오신다.”
스태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주완이 고개를 들었다. 조난 신호를 보내듯 두 팔을 높이 들어 흔들자 스태프가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홍화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는지 한숨을 쉰다.
“안 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돌아가세요.”
“저도 배우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잘만 들여보내면서 저한테는 왜 그러십니까.”
이른 시간이라 구경꾼이 별로 없었다. 그런 중에 평화를 깨트리고 당당히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기는 주완은 분명 스태프의 눈총을 샀으리라. 홍화가 다가가자 주완이 공 뺏긴 개처럼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이 사람이 공 뺏은 범인이라는 양 스태프를 쳐다보며 홍화에게 눈으로 일렀다.
“아는 친군데 지각했네요.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홍화가 대신 사과했다. 머리까지 꾸벅 숙이자 스태프가 언짢은 듯 헛기침을 했다. 홍화를 위아래로 훑다가, 손에 들고 온 대본을 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다음번엔 미리미리 알려주세요. 통제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구먼.”
오가는 사람 하나 없어 주완 한 명만 막았으면서 온갖 생색은 다 냈다. 이 사람도 쉬는 날 없이 일했나 보지. 열악한 환경은 스태프 모두에게 공평했다. 홍화가 스태프의 가시 돋친 태도를 인자하게 웃어넘기고 뇌물 조로 챙겨 온 병 음료를 손에 쥐여줬다. 그제야 스태프의 주름진 미간이 스르륵 풀어졌다. 역시, 동서고금 막론하고 먹을 것보다 훌륭한 뇌물이 없었다.
스태프의 손에서 무사히 주완을 구출해 돌아왔다. 보조 출연자에 섞어둬야 하건만, 주완은 홍화만 졸졸 쫓아다니며 떨어지질 않았다.
“야, 너 저쪽에 가 있-,”
“형, 보고 싶었어요.”
주완이 홍화를 와락 껴안았다. 왜 다들 제 말을 끊지 못해 안달인가 모르겠다. 홍화가 비키라며 가슴팍을 밀어도 그간 산삼이라도 고아 먹었는지 힘이 장사였다. 시끄럽게 소리쳐 남들 이목을 집중시킬 수는 없어 애벌레처럼 굼틀대다가 말았다.
“숨 막힌다. 놔줘.”
등을 토닥이며 달래자 주완이 팔심을 풀었다. 홍화의 얼굴을 보고 한 번 더 세게 껴안았다. 백영보다야 작아도 홍화보다는 덩치가 훨씬 커 발꿈치가 절로 들리고 턱 밑이 주완의 어깨에 걸렸다. 목울대가 단단히 부딪쳐 홍화가 켁켁거렸다. 주완이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워서 제가 그만. 미안해요. 괜찮으십니까.”
홍화가 목기침을 하고서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주완이 낑낑대며 안쓰러운 얼굴로 홍화를 굽어봤다. 홍화의 안색이 조금이라도 창백해지면 당장에 안고 응급실로 날아갈 듯 두 손이 허공을 우왕좌왕 헤맸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군대에서도 과잉보호하더니 사회에서도 이랬다.
“괜찮아. 넌 군대에서도 그러더니 여기서도 그러냐. 내가 유리로 보이냐.”
“그래도……. 홍화 형, 자주 아프지 않으십니까. 발목도 쉽게 부러지고.”
같이 농구를 하다가 다른 팀에서 태클을 심하게 받아 발목을 삐끗한 적이 있었다. 스프레이 한번 뿌리면 나을 가벼운 염좌였다. 저가 보좌를 잘못해 생긴 일이라 여긴 건지, 주완이 새파랗게 질려서 응급실을 가야 한다고 생떼를 부렸다. 홍화가 그럴 필요 없다고, 주완을 발로 차 진정시키지 않았더라면 군 병원 응급실까지 냅다 안고 뛰었을 것이었다.
“됐어. 미안하면 저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방해하지 말고. 외부인 출입 금지니까 눈치껏 보조 출연자들하고 섞여서 움직여. 알겠어?”
“어, 저 이 감독님 압니다. 친한 형의 형님이세요. 인사하면 스태프들 사이에서 구경해도 될 건데.”
주완이 머리를 긁적이며 순박하게 웃었다. 감독하고 아는 사이일 줄이야. 그럼 저가 굳이 스태프에게 뇌물을 줘가며 고생할 필요가 없었잖은가.
“그럼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바로 들어오지, 왜 날 걸고넘어졌냐.”
“홍화 형을 먼저 보고 싶어서요. 감독님이야 나중에도 볼 수 있잖아요.”
홍화가 퉁을 놔도 주완은 사람 좋게 히죽거렸다. 이 강아지 같은 놈이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객관적으로 따지면 홍화보다 당연히 감독에게 먼저 가서 인사를 올려야 함이 옳았다. 저를 그만큼 좋아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할까. 주완의 뒤로 두툼한 강아지 꼬리가 흔들리는 환상이 보였다.
“난 봤으니까, 가서 감독님한테 인사부터 드리고 와. 그게 예의다.”
아직 어려서 촬영장의 예의범절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아이 가르치는 심정으로 홍화가 주완의 등을 툭툭 떠밀었다. 주완이 그러겠노라며 “충성!”을 외치고 감독에게 뛰어갔다.
쉬고 있는 감독과 몇 마디 나누더니 주완이 뒤를 돌아보며 홍화에게 손짓했다. 감독도 목을 길게 빼고 주완의 어깨 너머로 홍화를 쳐다봤다. 아는 사이라는 말이 허풍은 아니었다.
“형, 아니 감독님. 이 형이 제가 말씀드린 그분입니다. 군대 선임이신데 저에게 엄청 잘해주셨습니다.”
과자 사 와라, 양말 빨아 와라, 채널 돌려라 등등의 불합리한 명령을 주완이 잘 포장해서 둘러댔다. 홍화가 미약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감독 앞에 섰다. 좀비처럼 비척대는 스태프들에 비해 감독은 아직 살 만해 보였다.
“이 녀석이 그쪽하고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네. 예쁘게 봐줘. 귀찮게 굴어서 그렇지 천성이 나쁜 놈은 아니야.”
“예. 주완이 참 착하죠. 심성도 곱고 연기 연습도 열심히 하는 친구입니다. 안 예뻐할 수가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곧 촬영 시작하니까 가봐. 아, 이름이 뭐라고?”
“이홍화입니다.”
“이름 특이하네.”
이름을 묻고 반응해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감사할 일이 아니어도 고맙습니다, 크게 인사하고 홍화가 얼른 물러났다.
주완은 스태프들 사이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다 죽어가는 몰골인 스태프의 손에서 자진해 조명을 빼앗아 들었다. 그뿐이랴, 소품도 옮기고 슬레이트도 치고, 골골대는 스태프들을 대신해 일을 하겠다고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다녔다.
제 딴에는 도와준다고 헤집고 다니는 모양인데, 힘 넘치는 대형견 한 마리가 촬영장을 들쑤시는 꼬락서니라 간간이 눈을 흘기는 스태프들도 보였다.
한 번은 소품을 옮기는 걸 도와주겠답시고 스태프에게서 뺏어 들었다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 부딪쳐 상자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행히 부서진 물품은 없었으나 그딴 거 하나 관리 못 하냐는 잔소리는 물건을 빼앗긴 스태프에게 돌아갔다.
“제가 실수한 겁니다. 절 꾸짖으세요! 이분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차라리 입이나 다물고 있지. 주완이 제 책임이라며 앞장섰으나 가만히 있느니만 못했다. 소품 담당 스태프가 저는 괜찮다며,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주완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원래 악의 없는 민폐가 더욱 처리하기 곤란했다.
“감독님. 저 친구 좀…….”
보다 못한 스태프가 간곡하게 항의했지만 감독은 주완에게 적당히 하라고 타박만 주고 말았다. 오히려 스태프를 향해,
“네가 일을 못하니까 쟤가 날뛰는 거 아냐. 네 일이나 똑바로 해.”
라며 핀잔을 줬다. 홍화가 나서서 말리고 싶었지만 감독의 비호 아래 있는 주완은 촬영장에서 저보다 계급이 높아 보였다.
주완은 스태프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모르는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홍화만 보고 해맑았다. 마주 웃어줬다가 괜히 스태프들 미움을 한 몸에 살라, 홍화가 모르는 사람인 척 주완을 외면했다.
양치기 소년도 진실을 말할 때가 있듯 기상청도 열흘에 한 번은 맞는 소릴 한다. 혹은 우리나라 기상청의 정확도가 매우 높아졌는데 홍화가 미처 알지 못했던 걸 수도 있다. 여하튼, 아침만 하더라도 해 뜨고 푸르고 쨍쨍하던 하늘이 홍화가 등장하는 장면을 찍을 때쯤 어둑어둑 물들었다. 삽시간에 구름이 모여들고 빗방울이 하나둘 땅 위에 짙은 원을 그렸다.
원래대로라면 비가 그칠 때까지 촬영을 연기해야 하지만, 감독이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이슬비인데, 뭐. 시간 아까우니까 그대로 촬영 진행해.”
라고 했으나, 홍화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시 배소희를 골탕 먹이고 싶어 그러리라. 달래는 건 분탕 친 다음 날 한 번이면 족했지, 두 번의 아량을 베풀 양반은 아니었다. 배소희가 본인 분량의 촬영을 앞두고도 뻔뻔하게 지각하고, 그런 주제에 사과 한마디 없이 샌드위치를 먹어댔으니 감독의 심기에 초를 뿌리고도 남음은 홍화도 이해했다.
스태프가 배소희에게 소식을 전하자 그녀가 먹던 샌드위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촬영을 준비해야 해서 더는 못 먹기에 버렸다는데 그 말을 누가 믿으랴. 괜한 불똥이 저에게 튈라, 홍화는 조심히 몸을 사렸다.
리허설은 비를 피해 꽃집 안에서 진행됐다. 대여 시간이 촉박해 최대한 빨리 호흡을 맞추고 끝내야 했다. 배소희의 입가엔 화딱지가 붙어있고, 조연출은 감독과 배소희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애꿎은 홍화만 잡고 있었다. 고래 싸움에 홍화 등이 터지게 생겼다.
“키스 한 번도 안 해봤어? 왜 이렇게 어색해. 좀 더 열정적으로 달려들라고. 이렇게, 이렇게.”
감독이 몸소 나서서 시범을 보여줬다. 감독의 손이 볼에서 떨어져 나가자 배소희의 입가와 미간에 주름이 자글자글 일었다. 감독이 홍화를 보고 있기에 망정이었다.
드디어 키스 장면이었다. 인생 통틀어 딱 한 번 해봤다고 고백하면 본인만 우스워질 테고. 홍화는 잘 좀 하라며 타박하는 감독에게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며 고개부터 숙였다. 눈칫밥 얻어먹은 세월이 길어 뭘 하든 사과가 먼저 튀어나왔다.
고개를 이리 틀고, 저리 틀고, 리허설에 입 맞추는 건 예의가 아닌듯해 어떤 방식으로 달려들 거라는 시늉만 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해. 답답하게 굴지 좀 말고.”
배소희가 부추겼다. 어차피 입술만 부딪치는 장면이니 못 할 것도 없다. 배소희의 뺨에 손을 올리고 입 맞추려는 순간, 둘 옆에서 슬레이트가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집중이 깨져 돌아보자 슬레이트를 든 주완이 겸연쩍게 시선을 피했다.
“두 분, 준비하시라는데요.”
어떻게 할 건지 보여줬으니 배소희도 알아서 맞춰주겠지. 홍화가 부딪치지 않은 입술을 쓱 닦고 제자리에 가서 섰다. 주완의 시선이 홍화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진혜는 일주일에 한 번 가게에 들렀다. 어느 날은 노란 수국을, 어느 날은 보랏빛 수국을, 어느 날은 흰 장미를 품에 안고 돌아갔다. 그녀가 오는 날은 청년이 일주일 중 가장 기대하는 날이었다. 밤새 잠 못 이루다가 새벽녘이 밝기도 전에 가게 문을 열었다. 그녀와 커피를 마시고, 영화도 봤지만 무엇보다 설렐 때는 그녀가 꽃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피어날 때였다.
진혜와 만나는 횟수가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청년의 마음에도 아직 죽지 않은 불꽃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대학생 때 그녀는 유홍초 같은 여인이었다. 눈길 가지 않는 들꽃 같은 이. 하지만 한번 눈에 보이면 소담한 사랑스러움을 느낄 이였다.
청년은 진혜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꼈지만 밝히지 못했다. 하늘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유홍초였다. 영원히 사랑스러우리란 꽃말다웠다. 유홍초의 꽃잎 색처럼 불꽃의 색도 진해졌다.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진혜의 모습이, 꽃보다 아름다운 그 모습이 청년을 잡고 흔들었다. 길고 오래 묵은 연정이 풍랑을 만난 듯 흔들렸다. 애정은 컵의 꼭대기까지 가득 차오른 물이었다. 한 방울만 톡 떨어지면 넘치고 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