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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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화 중간부터 출연하는 터라 홍화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촬영장에 사람이 복작복작했다. 야외 촬영이라 이쪽으로 오면 안 된다며 홍화를 가로막는 스태프에게 배우라고 알려주느라 땀 좀 흘렸다. 멀리 있던 FD가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촬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씨름만 하고 있었으리라.

홍화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기 직전에 꽃단장을 마쳤는데도 유리에 저를 비춰 보고 혹시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눈이 병자처럼 퀭하긴 했으나 분칠로 가려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어.”

카페 유리창에 익숙한 낯이 비쳤다. 화보 촬영에서 만난 보조였다. 보조의 안색에 비하면 홍화 얼굴은 양반이었다. 고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행색이 꾀죄죄했다. 턱수염이 듬성듬성하고 씻지도 못했는지 눈에도 흰 눈곱이 꼈다. 홍화가 손을 들고 아는 체를 하자 보조가 헤 웃었다.

“맞다. 이 드라마 홍화 씨도 나오지. 하도 바빠서 깜박하고 있었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말이 아닌데.”

본디 촬영에 들어가면 가장 고생하는 이들이 스태프라. 쪽잠을 자며 촬영에 매달리는 건 익히 알았다. 다만 과로로 시달리기엔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

“말도 마요. 나 진짜 죽을 거 같아. 이렇게 한가하게 잡담할 시간도 없어요.”

“촬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렇게 바쁘세요?”

“바쁜 것보다……. 아, 어제 안 왔구나. 어제 난리 났었어요.”

요약하자면 이렇다. 주인공인 배우와 주인공의 여동생으로 낙점된 배우가 사실은 원수 사이도 그런 원수 사이가 없는데, 아니나 달러 만나자마자 기 싸움을 그렇게나 벌여대더란다. 그러다가 결국 머리채까지 쥐고서 개판으로 싸웠다고. 워낙 급하게 배우를 지정해서 생긴 사고였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대본 집어 던지고 얼굴 할퀴고. 네년을 죽이네 살리네, 어쩌네 하는데 완전 상스럽더라고요. 어휴, 그것 때문에 촬영 미뤄져서 새벽에 간신히 끝냈잖아요. 덕분에 딱 한 시간 눈 붙이고 출근했어요. 지금 거의 39시간 연속 근무 중인 거죠.”

홍화가 뒤꿈치를 들고 먼발치를 바라봤다. 어제 촬영장을 뒤집어놓은 배우는 참하고 청순한 얼굴로 연기 중이었다. 여동생을 맡은 배우는 보이지 않았다.

“그분은 오늘 펑크 냈어요. 그래서 지금 편집부하고 대본팀 발등에 불 떨어졌어요. 그분 나오는 거 다 자르고 대역이나 회상으로 처리한다고. 감독님도 단단히 화났거든요.”

그래서 촬영장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구나. 감독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차마 주인공에게 소리를 지르지는 못하고, 애꿎은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퍼부었다. 주변 스태프들도 눈 위에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첫 단추를 개판으로 끼워서 이 드라마는 망할 거라며, 암암리에 생각하는 듯싶었다.

“이크. 나 가봐야겠다. 농땡이 들키겠네.”

보조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더니 스태프 쪽으로 뛰어갔다. 인사할 새도 없었다. 홍화가 보조의 등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저가 나올 장면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김진혜는 이혼을 결심했다. 서른다섯.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 ‘이혼녀’라는 타이틀을 달 순간이란 걸 그녀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배우자의 바람은 살면서 한 번쯤 지나가는 열병이라지만, 그 상대가 자신의 여동생이라 이야기가 달라졌다. 김진혜는 이혼 서류를 준비했고, 그 길로 남편 회사에 보냈다. 부디 차질 없이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기만을 바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눈에 띈 꽃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남편은 결혼 후 꽃을 사준 적이 없었다. 선본 후 두 번째 만남 때 준 작은 꽃 한 송이가 결혼 생활을 통틀어 전부였다. 그리고 여동생에겐 붉은 장미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보냈다. 동생은 탐스러운 꽃잎을 쓰다듬으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거라며 자랑했다.

김진혜는 충동적으로 꽃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꽃을 사고 싶었다. 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결혼을 선택했고, 시가의 시달림을 참아내다가 이제야 자유를 되찾았다. 선물 받을 가치는 충분했다.

가게 안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즐비했다. 장미가 단연 눈에 띄었다. 빨간 장미에 시선을 주었지만 저 꽃은 저를 위한 꽃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엇.』

『아…….』

커다란 화분에 가려진 꽃집 주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해사한 청년이었다. 낯이 익었다. 진혜는 저가 아는 이 중에 저런 청년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진혜 선배?』

청년이 제 이름을 알았다. 고운 목소리에 전구에 불 켜지듯 기억이 났다. 대학교 동아리 후배였다. 얼굴만 알고, 말은 거의 안 나눠본. 이런 곳에서 재회할 줄은 몰라 진혜가 어설피 마주 웃었다. 하필이면 이혼 서류를 날리고 온 이런 날에 과거에 알던 사람을 만나다니. 운이 좋지 않았다.

『저 혹시 기억하세요? 경진 대학교 영화감상 동아리요. 진혜 선배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반면 청년은 무척이나 반가워 보였다. 하얀 볼에 홍조를 띄우고 한 걸음 다가왔다. 청년에게서 꽃향기가 진동했다. 장갑에 든 풀물에서 나는 향일 수도 있고,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청년을 물들인 걸 수도 있다.

진혜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동아리에 속해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했다. 이런 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진혜는 고개만 가볍게 까닥이고 본론부터 꺼냈다. 서류를 보내기까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꽃을 안고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꽃다발 하나 사려고요.』

『아, 선물 주시려는 건가요? 원하는 꽃 있으세요? 오늘은 핑크 수국이 좋아요. 라넌큘러스도 괜찮고요. 달리아, 클레마티스도 싱싱하고 예뻐요.』

『아무거나……. 괜찮은 걸로 만들어주세요.』

청년의 수다스러움에 휘말려 아무렇게나 주문을 마쳤다.

『그럼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청년이 꽃을 한 움큼씩 뽑아 품에 안았다. 남자 여자 구분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 청년은 특히나 꽃이 잘 어울렸다. 향기도, 품에 꽃을 안은 모습도.

청년이 화분 뒤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꽃을 다듬고, 포장지를 펼치고, 어울리는 은은한 색의 끈을 찾아 마무리를 지었다. 일련의 과정에 현실감이 없어 진혜는 넋을 놓고 청년의 섬세한 손끝을 보았다. 꽃다발 포장에 집중한 청년은 진혜의 시선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아차렸다.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니면 원래 홍조가 있는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요.』

분홍색 커다란 꽃이 중앙에, 희고 작은 꽃망울들이 주변을 둘러싼 꽃다발이었다. 청년의 몸에서 풍기던 향이 꽃다발에서도 풍겼다. 진혜는 꽃다발에 코를 대고 흠뻑 들이마셨다.

『이거는 선물이에요.』

청년이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붉은 장미였다. 가시와 잎사귀가 제거되어, 꽃봉오리만 비닐 포장지 위로 달랑 올라온. 투박하고 소박하지만, 그래서 돋보이는 한 송이였다.

『음, 자주 들르시라는 뇌물?』

청년이 수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활짝 웃었다. 미소에서도 꽃향기가 났다. 진혜는 홀린 듯이 장미를 받아 들었다. 남편이 여동생에게 보낸 장미 바구니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눈앞의 장미 한 송이만 남았다. ‘나’를 위한 장미였다.

『고마워요.』

꽃집을 나오자 청년은 문 바깥까지 나와 진혜를 향해 팔을 휘휘 저으며 잘 가라 인사했다. 진혜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꽃집을 벗어났는데도 꽃향기가 진혜의 품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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