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까지 손목 잡고 끌고 갈 것처럼 굴더니, 백영이 도착한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홍화를 조수석에 인형 던지듯 던져 넣고 저도 차에 올라탔다. 황망한 홍화가 당장 문을 열고 도망치려다가, 집 주소 아는 인간 앞에서 도망쳐봤자 소용없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포기했다. 시동 거는 백영 옆에서 안전벨트나 착실히 매고 가다가 정류장이라도 보이면 내려달라 하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아무리 양심 없는 놈이라도 설마 오지 산간에 떨어트리고 가진 않겠지.
“이홍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는 홍화의 가슴에 유백영이 커다란 바윗돌을 집어 던졌다. 몹시도 불안했다. 유백영이 성 붙여서 이름 부를 때에 좋은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백영 입에서 나온 제 이름 석 자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전 예고나 다름없었다.
“왜.”
최대한 덤덤한 척 꾸몄다. 차가 출발하고, 기둥을 빙글 돌아 지상으로 나왔다. 주완이 정문에서 나와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밖에서는 차 안이 보이지 않는지 주완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창문을 내려 인사하려다가 사람 약 올리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넌 신인한테도 봉사하냐.”
봉사. 적절한 단어였다. 물론, 소고기라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산됐으니 이득을 취하지 않은 무료 봉사라는 표현이 알맞았다. 제 연기가 좋다며 극찬하는 애한테 가르침을 약간, 아주 약간 준 게 뭐가 나쁘다고. 홍화는 당당했다.
“어. 도와달래서.”
운전대를 쥔 손등에 관절이 도드라지게 돋았다. 창밖을 바라보느라 홍화는 미처 백영의 손등과 미간을 보지 못했다. 형편없이 구겨져 있다가,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춰 세울 때쯤 주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네가 과거에 어떻게 몸을 놀리고 살았든 그건 신경 안 써. 그런데 지금은 아니지 않나. 난 남이 먹다 뱉은 거 주워 먹는 취미 없어.”
봉사와 몸에 대관절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사람을 씹다 버린 껌 취급하는 것도 화가 났다.
홍화가 턱을 괴고 창밖만 바라보다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며 백영이 액셀을 밟았다.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기판의 바늘이 시계 방향으로 휙 돌아갔다. 몸이 시트에 누룽지처럼 눌어붙어, 홍화가 벨트를 쥐고 간신히 떼어냈다.
“넌 개소리가 특기냐? 사람이 알아들을 말을 해야지 개가 알아들을 말을 해. 아니, 개도 못 알아들어, 네 말은.”
“네 지능이 개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야? 왜 못 알아먹어. 함부로 몸 굴리지 말라는 소릴 왜 못 알아듣지.”
“씨발! 몸 굴린 적도 없고, 굴린대도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네가 뭔데 간섭이야. 그리고 선약? 우리 사이에 그딴 게 있었냐? ……야. 속도 줄여!”
“왜 없어. 그딴 건 만들면 있어. 내가 왜 상관할 바가 아닌데? 박 탔고 박 탈 사람 권리야. 네가 성병이라도 옮으면 곤란해.”
“그건 무슨 신종 개소리야, 또! 속도 줄이라고!”
홍화가 꿱꿱거려도 백영은 속도를 줄일 생각도, 차를 멈출 생각도, 홍화 왈 개소리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기판 숫자가 백을 훌쩍 넘겼을 때 홍화는 차라리 거품 물고 기절하고팠다. 그러든 말든 백영은 차와 차 사이로 커다란 차체를 제멋대로 끼워 넣으며 운전 중이었다. 대로변에서, 다른 차들의 클랙슨 세례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백영은 난폭운전을 끝내지 않았다.
뉴스 기삿감이 되더라도 좋으니 경찰이 영웅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으면. 잡히면 마약을 투약했냐고 의심부터 받겠지만 심지어 그조차도 간절할 지경이었다.
“제발 속도 좀 줄이라고! 같이 미친놈으로 묶여서 기사에 뜨고 싶지 않으니까!”
“내 말 들으면.”
“뭐, 빨리 말해!”
신호등 파란불이 껌벅거리다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아무리 미친놈이더라도 사거리에서 빨간불을 어기지는 않겠지, 드디어 폭주가 멎겠구나, 안도한 순간, 백영이 핸들 각도를 홱 틀며 차체가 한쪽으로 치우칠 만큼 거칠게 유턴했다. 유리창에 홍화의 볼이 뭉개지면서 희끗한 자국이 남았다.
“개새끼야.”
“내 말 듣는다고 말해.”
“뭔지는 들어보고.”
“그럴 정신이 있나 봐.”
저쪽에서 경찰차 사이렌이 울리는 환청이 들렸다. 홍화가 사이드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창을 열고 몸을 빼며 욕을 외쳐대는 운전자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속도 숫자를 가리키는 바늘이 이제 이백에 도달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경찰이 와서 유백영의 팔목에 수갑을 걸 거란 홍화의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
운전대 잡은 유백영이야 애당초 미친놈이라지만 동승자인 홍화는 죄가 없었다. 같이 묶여 마약 검사받고 죄인 취급 받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제 요구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옆에 앉은 미친놈은 도로를 고삐 풀린 미친 망아지처럼 활주할 테고. 답은 유백영이 정해놓았다. 애초에 홍화에겐 한 가지 선택지만 줬다.
“알았어. 알았다고! 미친놈아 알았으니까 속도 좀 줄여!”
홍화가 창문 위에 달린 손잡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절절하게 외쳤다. 끼이익, 타이어 타는 소리가 나며 정지선 바로 코앞에서 차가 멈췄다. 신호등이 마침 빨간불로 옮겨갔다. 뒤에 늘어선 차들이 없어 망정이지 몇 중 추돌사고를 내고 저녁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할 뻔했다.
정작 광란의 질주를 끝낸 유백영은 범인 아닌 척 여유로웠다. 어쩌다가 같이 브레이크를 밟은 차들에게 비상등도 켜 보이며 정상인처럼 행동했다.
손잡이를 잡은 손바닥에 핏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하도 세게 쥐어 잘 떼어지지 않는 손가락을 조심스레 펼치고 팔을 내렸다. 팔도 저릿저릿했다. 흐어어, 길게 터져 나온 한숨에 영혼도 실려 날아가려는 걸 간신히 붙들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목숨이었다. 바람은 유백영이고 등불은 홍화였다. 바람이 멎어서 그나마 다행인데, 살겠다고 임시방편으로 얼기설기 막아놓은 터라 바람이 갑자기 폭풍우로 변해 몰아치면 끝장이었다.
유백영이 장기라도 내놓으라고 요구할까 봐 홍화가 한 손은 안전벨트 버튼에, 다른 한 손은 문고리에 댔다. 여차하면 도로로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너, 나랑 계약할래.”
철컥, 하고 안전벨트 버튼을 눌렀다. 죽이겠다는 협박도 아니고, 장기 밀매하겠다는 선언도 아니라 놀란 나머지 헛손질을 했다. 차가 출발했고, 홍화가 화들짝 놀라며 벨트를 다시 맸다.
“계약은 이미 회사랑 했어. 무슨 계약 말하는 거야.”
“이제부터 나하고만 자. 만나는 연놈 다 정리해.”
계기판부터 확인했다. 속도는 정상이었다. 유백영이 현재 제정신인지, 아니면 회까닥 돌았는데 정상인 척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얼굴부터 들여다봤다.
“뭘 봐.”
싸가지없음이 여전한 걸로 보아 충분히 정상이었다. 홍화는 눈을 끔벅끔벅 뜨며 정면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얼음 위에 있는 곡식 한 알 먹어보겠다고 입을 뻐끔거리는 멍청한 붕어 같았다. 유백영의 제안이 이해 가지 않아 머리를 굴리느라 눈동자가 멍하고 입도 헤 벌어졌다.
계약을 하자고 했다. 저하고만 자자고, 다른 사람들은 정리하라고. 뒤늦은 깨달음이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고, 그제야 유리에 비치는 홍화의 눈에 자각의 빛이 번뜩 스쳐 갔다.
“미쳤냐. 내가 너랑 왜 또 자. 안 자.”
“잘 생각해봐. 나보다 속궁합 잘 맞는 인간 있어? 너 내가 박아줄 때마다 싸던 거 잊었,”
“그런 적 없다고, 이 미친놈아. 몇 번을 말해.”
“그랬어. 박아줄 때만 그런 줄 아냐. 너 빨면서도 세웠잖-,”
“아아악!”
백영이 바로 안 가고 남아서 창문 안을 훔쳐본 줄 알고 홍화가 꽥 소릴 질렀다. 애국가를 불러서라도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졌어야 한다는 후회는 백날 해도 늦었다. 홍화의 시뻘건 살갗을 눈으로 훑은 백영이 핏 코웃음 쳤다.
“그걸 반찬 삼아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이 미친놈아, 그걸 음침하게 훔쳐봤냐. 네가 무슨 스토커야?”
“훔쳐본 적 없는데. 진짜 했나 보군.”
도둑이 제 발 저려 자백한 꼴이었다. 백영이 던진 말이 수천 개의 화살이 되어 홍화를 푹푹 꿰뚫었다. 피부가 터질 듯이 붉어졌고 피가 들들 끓다 못해 귀에서 증기가 샐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참회의 시간을 가진다 한들 이미 들킨 일을 되돌릴 수 있으랴. 그런 적 없다며 빤빤한 낯짝으로 거짓말을 하고 싶건만 온 피부가 다 뻘게져가지고는 연기도 못 한다.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고 공중으로 분해되고 싶은 심정으로 창밖만 죽으라고 노려봤다.
“어차피 내 말 듣는다고 약속했으니 구두 계약은 성립했어.”
“……무효야. 다 무효라고. 구두 계약은 개뿔.”
고릿적에도 안 먹힐 방식으로 협박하고, 사전 내용 고지도 없이 억지로 동의를 받아냈으니 백영이 백번 천번 우겨도 무효였다.
“블랙박스 틀어줘? 아, 네가 내 자지를 빨고, 발기하고, 그걸로 자위했다는 말도 녹음됐겠네.”
“……개새끼야.”
홍화가 바른말을 해도 상대는 미친놈이었다. 미친놈에게 정상인이 암만 떠들어봤자 소귀에 경 읽기였다.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잘못한 건 존나 많지. 따먹고 튄 것부터 시작해서. 그런데 과거 다 용서하고 받아주겠다잖아. 딴 사람하고 자지 말라는 거, 그게 그렇게 지키기 어려운 조건인가? 그렇게 발랑 까졌어?”
홍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 밤을 보낸 이는 유백영이 유일했다. 그러나 이 나이 먹어서 너와 자기 전까지는 동정이었다고, 딴 사람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노라 고백하기엔 속된 말로 쪽팔렸다. 헤픈 사람 취급도 싫지만 숙맥 취급은 더더욱 싫었다.
“만약 계……약한다고 해도, 내가 거기서 얻는 이득은 뭔데.”
“배역 꽂아준다고 하면 네가 화대라며 지랄할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자신을 잘 알기까지 해서 유백영이 더 무서워졌다. 홍화가 흘겨봐도 유백영은 부드럽게 핸들만 꺾었다.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최대한 들어줄 테니까.”
홍화는 진정 유백영이 무슨 마음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납치하듯 잡아 와 다른 이와 잠자리를 가지지 말라고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려 계약 같은 웃긴 짓거리를 일삼는다. 잠자리, 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홍화의 귀 끝이 또 붉게 물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섬광 같은 생각 한 줄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가설임을 알지만 홍화는 한번 물어보기로 했다. 보통보다 조금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아니.”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간격이 일 초도 안 걸렸다. 그럼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이면 이런 방식으로 협박하지 않았으리라.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달콤하게 속삭이고 어여뻐 하겠지. 여자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볼에 입 맞추던 백영을 떠올리자 연기임을 알면서도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정수리 위로 먹구름이 드리우고 금방이라도 뇌우가 몰아칠 듯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자려고 해.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할 거야. ……앞으로.”
“그럼 앞으로 날 좋아하도록 해. 너그럽게 봐주지.”
무슨 말을 듣든 자기 위주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여기에 있었다. 대꾸할 의지도 사라져 홍화는 가만히 찌그러졌다.
홍화가 입을 다물자 차 안에 침묵만 남았다. 원하는 바를 쟁취한 백영도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차 안은 조용했고, 이성을 되찾은―질주할 때도 아마 이성은 남아있었으리라 예상하지만― 백영은 온화하게 운전했기에 홍화는 난리 통도 잊고 깜박 졸았다. 그러다가 이곳이 적진임을 깨닫고 번쩍 눈을 떴다.
“야, 나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줘.”
티격태격하다가 내려달라고 말할 곳을 놓쳤다. 마침 시야에 정류장이 보여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백영이 정류장을 쓱 지나쳤다.
“어딜 가려고. 계약 이행하러 가야지.”
“무슨 헛소리야, 또.”
“오늘부터 유효한데 말 안 했나?”
그런 말 처음 듣는다. 어이가 없으니 말문도 막혔다. 홍화가 입만 쩍 벌리고 끌려올 때와 똑같이 황망한 얼굴로 백영을 올려다봤다. 홍화의 정신이 어디에 있든 차는 착실히 빌딩을 지나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백영이 주차까지 완벽하게 끝낸 다음에 홍화를 돌아봤다.
“오늘부터야.”
못 박는 말이었다. 홍화는 벙어리 된 심정으로 입만 뻥긋댔다. 백영은 멍해 빠진 홍화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홍화가 내릴 생각을 안 하자 빙 돌아 조수석 앞에 섰다. 허리를 굽히고 차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이렇게 놔뒀다가는 밤새 대치할 미래를 알고 있었으리라.
“내려.”
홍화가 벨트를 손에 쥐고 버텼다. 손아귀에 든 벨트가 엉망으로 구겨졌고, 꽉 깨물린 입술은 하얗게 질렸으며,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초점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누가 봐도 갈등하는 사람 얼굴이었다.
백영은 홍화가 열심히 재고 있는 저울이 거절 쪽으로 기울길 원치 않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홍화는 뒤꽁무니 보이며 도망갈 테고, 그렇게 되면 귀찮을 일만 늘어났다.
백영은 일단 차에서 홍화를 끄집어냈다. 벨트를 풀어주고 팔뚝을 잡아당기자 홍화가 미약하게 반항했다. 이득 운운하더니 막상 코앞에 닥치니 겁먹은 토끼처럼 굴었다.
누구 좋으라고 놓아주랴. 백영이 코웃음 치고서 정신 차리라며 홍화의 뺨을 손바닥으로 툭, 툭 느리게 쳤다. 뺨을 맞고서야 초점이 돌아온 홍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화급히 후드를 뒤집어썼다.
“……들어갈 거면, 빨리 들어가.”
드디어 상호 간 계약 성립이었다. 백영이 히죽이며 홍화의 손목을 잡았다. 혹여 저를 속여먹을지도 모르는지라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현관에 주홍 불이 들어왔다. 홍화는 신발을 벗지 않고 머뭇거렸다. 뒤에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백영이 얼른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환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방 안이 어두컴컴했다. 홍화가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자 백영이 그 손을 막았다. 홍화가 뒤돌아보려 하자 우악스러운 손길로 코트를 벗겨 바닥에 내던졌다. 졸지에 옷을 뺏긴 홍화가 버둥거리니 가볍게 목덜미를 쥐고 닫힌 신발장 벽에 짓눌렀다.
“하, 지 마. 여기서는……!”
“확인부터 하고.”
백영이 홍화의 등에 바짝 붙어 둥근 귀 끝에 이를 세웠다. 볼 옆을 스치는 숨결이 이미 거칠었다. 홍화의 궁둥이 위쪽에 바짝 들러붙은 아랫도리도 기세가 흉흉했다. 바지 앞섶이 팽팽하게 부풀어서는, 옷자락이 막지 않았으면 홍화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오고도 남았다. 달아오른 묵직한 쇳덩이 같았다.
곰 같은 덩치에 짜부라져 발버둥 쳐도 겨우 바르작거리는 꼴이었다. 홍화가 고갤 휙휙 저으며 백영의 손등에 손톱을 세웠다. 길쭉하고 마디 굵은 손가락이 기어이 벨트를 풀고 바지춤과 속옷을 아래로 쭉 끌어 내렸다.
“……아!”
엉덩이의 반을 가리는 긴 후드티도 거꾸로 휙 벗겨냈다. 양말과 신발 빼고는 알몸이었다. 홍화가 욕을 짓씹어 뱉자 백영이 한 손으로 홍화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까 그 새끼랑 잤을 거 아냐.”
그런 적 없다고 사실을 외쳐도 손바닥 안의 메아리였다. 백영의 귀까지는 닿지 않았다. 볼기짝을 갓 쪄낸 찹쌀떡처럼 주물럭거리던 백영이 홍화의 뒤통수를 콱 쥐고 벽에 눌렀다. 손가락 틈으로 볼기 살이 도톰하게 부풀 만큼 세게 쥐고서, 기다란 중지로 골 사이를 쓱 쓸어 올렸다. 홍화의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궁둥이가 둥그렇게 올라붙었다.
“했어, 안 했어?”
“이거 놔, 미친……. 한 적 없다고!”
백영의 손가락 틈새로 홍화가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처럼 항의했다. 절절한 외침이 무색하게 손가락이 마른 구멍을 헤집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홍화의 발꿈치가 공중으로라도 도망갈 것처럼 쳐들렸다. 맨정신으로 견디기엔 그 감각이 지나치게 생소하고 아팠다. 길쭉한 손가락이 홍화의 사정 봐주지 않고, 뻑뻑하기만 한 속으로 끝까지 파고들었다.
“아……흐.”
“거짓말. 하고 씻었겠지. 거기 샤워실 있는 거 모르는 인간이 어디 있어. 소속사 연습실에서도 놀아나고, 간 크네, 이홍화.”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백영이 홍화의 말을 못 믿는 것처럼 안쪽 구석구석을 헤집고 눌러댔다. 어딘가 정액이 남아있으면 기어이 찾아내 긁어낼 만큼 집요했다. 반 마디 빠져나갔다가 손등을 처넣을 기세로 푹 찔러 넣었다.
홍화가 힉, 힉 새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맨살 찢는 통증에 기이한 느낌까지 뒤섞여 홍화의 발끝이 옴찔옴찔했다. 안에서 굵직한 손가락이 사이를 벌렸을 때는 홉 뜬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새어 나와 백영의 손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러다가는 선 채로 죽을 것 같아 홍화가 두 손으로 백영의 손목을 잡고 입에서 가까스로 떼어냈다.
“안 했어, 안, 앗, 했다고. 몇 번 말, 해. 흐윽.”
울면서 고백해도 백영은 기어이 구멍 주위를 약지로 슬슬 긁다가 꾹 밀어 넣었다. 홍화의 온몸이 굳건 말건 끝까지 쑤셔 박고 홍화를 괴롭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집에 제 발로 기어들어 왔을꼬. 땅을 쳐봤자 도망가긴 글렀다. 토끼처럼 꾀를 내어도 한번 된통 당한 백영이 또 속아주랴. 홍화가 허벅지를 발발 떨며 위기를 타개할 길만을 찾았다. 젖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껌벅이는 주홍 불을 받고 빛나는 술병들을 발견했다. 거실에 놓인 양주 장식장이었다.
차라리 술이라도 들어가면 고통도 수치도 덜할까.
“술 줘. 술, 읏, 먹고 할래.”
지금껏 백영과 밤을 보낼 적에 취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술에 취하건 약에 취하건 제정신에서 먼 상태가 되어야 몸을 섞는다는 자각도, 부끄러움도 덜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안쪽 구석구석을 비집고 눌러대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홍화의 무릎이 휘청 흔들렸다.
이런 취급 받고도 도망갈 곳이 없어 백영과 밤을 보내야 한다니. 비참함도 술로 씻어내야 했다.
“알코올 중독이야?”
그럴 리가. 해명하기도 전에 백영이 홍화를 어깨에 둘러멨다. 놔두면 현관문을 열고 도망갈 거라 여긴 것처럼 허리를 동여맨 팔이 억셌다. 졸지에 알몸으로 허공에 뜬 홍화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백영의 등 쪽 옷자락을 옴팡지게 움켜쥐었다. 다리를 들썩대자 백영이 궁둥짝을 휘갈기며 가만있으라 윽박질렀다. 철썩하고 볼기 갈기는 소리에 홍화의 비명이 섞였다.
“개새끼야, 악!”
백영이 소파에다 홍화를 짐짝처럼 메다꽂고 장식장을 열었다. 주둥이가 긴 병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돌아왔다. 어떻게든 틈을 노려 도망가려고 몸을 일으켰던 홍화가 백영이 돌아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백영이 비식 비웃고 술병을 유리 탁자 위에 내려놨다. 팔을 교차시켜 저가 입고 있는 옷도 훌렁 벗어버리고 홍화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백영이 다가온 만큼 홍화가 뒤로 물러났으나 소파 등받이가 등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굶주린 뱀 앞에 쥐요, 개구리로다. 더는 도망갈 곳도, 피할 곳도, 할 변명도 없는 데다가 상황을 빠져나갈 잔머리도 굴러가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데, 맨정신에 저지르기엔 앞으로 펼쳐질 일이 두려웠다.
무릎까지 굽혀 소파 벽에 껌처럼 들러붙었다가, 홍화가 불쑥 손을 뻗었다.
“술, 내놔.”
“아, 술.”
백영이 마침 깨달았다는 듯이 술병을 돌아봤다. 너그럽게 들어줄 요량인지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떴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눈빛은 따스한 미소와 상반되게 굶주려 보여 홍화가 긴장을 풀지 않고 마주 봤다. 백영이 빙긋 웃으며 홍화의 손을 맞잡았다.
“술 마시고 싶다고.”
손가락 사이로 백영의 손가락이 슬며시 파고들었다. 깍지 낀 손을 제 입가에 가져가 손등에 입 맞추고 느리게 끌어당겼다. 깍지 낀 손은 점점 홍화에게서 멀어지고 백영은 점차 바짝 다가왔다. 어느새 코앞에 유백영의 얼굴이 있었다. 홍화의 뒤통수가 소파 등받이에 붙었다. 숨결이 윗입술을 스쳤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창호지 두께의 거리만 남았다. 코끝이 스쳤다. 백영의 고개가 기울어지고,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윗입술은 이미 닿은 것만 같다.
안 돼.
홍화가 손을 들어 백영의 입술을 텁 막았다.
“키스는 하지 마. ……그건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할 거야.”
이 정도 자존심은 세워줘야 했다. 아무리 잠자리를 동의했다손 치더라도 반 억지로 끌려와 몸을 섞는데 입맞춤 정도는 저가 결정하고 싶었다. 영화 속에서 유백영이 보여준 입맞춤이 잠시 떠올랐지만 홍화는 입술을 앙다물고 버텼다.
백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바닥에 막힌 입술도 말을 뱉을 듯 벌어졌다가 다물어졌다. 백영이 홍화의 손목을 잡고 제 입에서 떼어냈다. 상체를 세우고 홍화를 내려다봤다. 어둠에 묻혀 눈빛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혔다. 백영이 홍화를 소파에 처박고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백영을 등지고 서서 무릎 한쪽은 소파에, 다리 하나는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소파 등받이를 쥐고 벽과 마주 보는 자세로 있다가 홍화가 놀라 뒤돌아봤다. 뭐라 하기도 전에 백영이 술병을 들었다.
“취하고 싶다며.”
백영이 술병을 뒤집어 들었다. 허공에서 주홍빛 도는 술이 물줄기처럼 주르륵 떨어졌다. 양주 특유의 나무 냄새가 공기 중으로 훅 퍼졌고, 쏟아진 술 줄기가 홍화의 흰 엉덩이를 흠뻑 적시고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홍화가 화들짝 놀라도 백영은 술병을 놓지 않았다. 술병에 든 술을 모조리 쏟아붓고서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깨지고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홍화가 바르르 떨었다. 피부 위로 떨어지는 술이 차가웠다. 몸을 돌리려 해도 백영이 잡고 눌러 옴짝달싹 못 했다. 달콤하게 깍지를 꼈던 손으로 홍화의 뒷머리를 잡고 소파 등받이에 내리눌렀다. 항의를 뱉을 입도, 숨을 몰아쉴 코도 막혔다.
“소원대로 해줘야지.”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왔다.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었다. 술 냄새 나는 허벅지를 움켜쥐었다가 빙 돌아 오그라든 아랫도리를 한 손에 쥐었다. 아직 젖지 않은 아랫배와 배꼽을 젖게 하고 옆구리를 더듬으며 올라와 가슴을 문질렀다. 소름이 돋아 볼똑 선 젖꼭지를 백영이 검지와 엄지로 비틀고 꼬집었다. 홍화가 터드린 비명이 등받이에 막혀 허무하게 흩어졌다.
홍화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라치면 어김없이 백영이 막았다. 등받이에 얼굴을 박고서 백영의 손길을 견뎌야 했다. 젖꼭지를 으깨는 손가락과 움찔대는 홍화의 등 위를 스치는 숨결 같은 것을. 술이 쏟아진 곳도 홧홧하지만 그보다 뜨거운 곳은 백영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스쳐 가는 곳이었다. 목 뒤와 어깨 위와 날개뼈 아래와 푹 파인 등골에 입술이 슬쩍 닿았다 떨어지면 홍화의 허벅지가 꽉 오므라들었다.
젖꼭지를 퉁퉁 붓게 해놓고 백영의 손가락이 다시금 아래로 향했다. 온 길을 되짚어가듯 홍화의 가슴골과 명치와 윗배, 배꼽 위를 뭉근하게 덧그렸다가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그 아래로 내려갔다. 홍화가 다리를 닫아도 백영의 손이 그악스럽게 벌려놨다. 불알이 손에 잡히고, 술이 달궈놓은 손바닥에 아랫도리가 잡혀 찰흙처럼 주물러졌다.
“아, 흑……. 읏. 으. 흣.”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스쳐 볼기를 잡았다. 척척한 손으로 엉덩이를 엉망으로 적셔놓고 백영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다리 벌려.”
귀 바로 위에 백영이 입술을 대고 명령했다. 홍화가 불복했다. 허벅지에 힘을 주어 닫으려고 애를 썼다. 노력에 비해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홍화가 반항하자 백영이 허벅지 안쪽을 잡고 억지로 벌렸다. 벌주듯 엉덩이를 철썩하고 휘갈겨 홍화가 악 소릴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술 젖은 볼기짝에 시뻘겋게 손자국이 남았다.
“흐읏!”
축축한 검지와 중지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홍화가 허리와 고개를 바짝 세웠다. 바닥을 딛고 서 있던 다리 한쪽이 결국 꺾여 소파에 닿았다.
백영이 구멍 안을 들쑤시던 손가락을 잡아 뺐다가 약지까지 같이 쑤셔 박았다.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신 술은 엉덩이를, 손가락을 적신 술은 구멍 안에서 찌걱찌걱 소리를 냈다. 미처 구멍 안으로 스미지 못한 액체가 백영의 손등에 족적을 남기며 소파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백영의 손등 마디가 부드럽게 꺾일 때마다 홍화의 울음소리가 꽉 깨문 잇새로 새어 나왔다. 찔꺽거리며 술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보단 낮고 작았다.
손가락을 쭉 잡아 뺐다가 쑥 넣고, 끝까지 뺐다가 푹 넣으면 홍화의 등에 잔물결이 일었다. 가는 팔뚝도, 앙상하게 돋은 날개뼈도 떨리고 아래로 얼핏 보이는 부은 젖꼭지도 잘게 떨렸다. 불알은 쪼그라들고 기둥은 젖꼭지처럼 뚱뚱하게 부풀었다. 백영이 홍화의 살찐 아랫도리를 쥘 것처럼 구멍 안에 쑤셔 넣은 손가락을 구부리자 홍화가 목줄에 송곳니 박힌 짐승처럼 가늘게 떨었다.
홍화가 입을 벌리고 할딱였다. 아무리 숨을 몰아쉬어도 등받이에 입이 막혀 숨이 간당간당했다. 안을 죽으라고 파고드는 손가락도 목숨을 쥐고 흔드는 요인이었다.
손가락이 안을 들쑤실 때마다 척척하고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구멍 안도, 밖도, 술이 닿은 곳도, 백영이 건드리는 모든 곳이 불티가 튄 듯이 아프고 뜨겁고 따갑다. 형용 못 할 감각이 내장을 쥐어짜고 짜릿하게 흔들었다.
옅은 과일 향이 섞인 술 냄새가 콧속을 찌르며 취기를 일으켰다. 몸 안에 불이 옮겨붙은 듯하다. 취한 듯이 붕 떴다가, 백영이 구멍 깊숙한 어딘가를 꾹 누르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허벅지 안쪽이, 아랫도리가, 뱃가죽이 제멋대로 떨리고 머리가 몽롱했다.
처음과 달리 손가락이 빠져나갈 때는 아쉬운 신음마저 나왔다. 제 입에서 낸 소리인데도 남이 낸 목소리처럼 멀었다. 뒷머리를 누르는 손이 사라져 홍화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어지러웠다. 장면이 뚝뚝 끊겨 보였다. 허벅지 뒤쪽에 뭉툭한 끝이 닿았다. 살갗을 누르는 것이 술처럼 뜨거웠다. 엉덩잇살을 꾹 눌렀다가 위로 미끄러졌다. 잔뜩 젖어서 그랬다.
홍화의 입에서 단 숨이 터졌다. 누가 목을 오래 조르다가 드디어 놔준 듯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뱀 몸통같이 굵다란 것이 볼기짝 사이를 느리게 훑고 갔다. 그러다가 드디어 제 굴을 찾은 것처럼 커다란 대가리로 누글누글해진 구멍을 꾹 눌렀다.
으, 하고 홍화가 고개를 돌렸다. 도망가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구멍 너머로 술 냄새가 솟구쳤다.
“……흐윽.”
좁고, 젖었고, 입을 다문 구멍을 무딘 끝이 열었다. 홍화가 다리를 떨며 소파 위를 무릎으로 기었다. 눈곱만한 거리였다. 주둥이를 기어코 구멍 안으로 밀어 넣은 뱀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홍화의 허리가 아래로 무너졌다. 아윽, 하고 우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홍화가 무너져도 뱀은 끝까지 짓쳐들어왔다. 대가리를 다 넣고, 대가리만큼 굵은 목을 욱여넣고, 그리고 그 아랫부분까지 욕심껏 몸통을 쑤셔 넣었다.
“아, 파, 아프…… 악!”
퍽, 하는 소리가 터지며 몸이 앞으로 밀렸다. 홍화의 이마가 벽에 닿았다. 홍화의 입도, 눈도 벌어졌다. 아랫입술이 덜덜 떨리고 궁둥이는 들린 채 허리만 아래로 훅 굽었다. 믿을 수 없어서, 홍화가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더듬었다. 젖은 뱃가죽을 꾹 누르자 툭 불거진 것이 손바닥 아래서 느껴졌다.
“싫…….”
감당할 수 없어서 거부하려는 찰나에 골반이 잡혔다. 뒤에 선 사람 살갗이 부딪칠 만큼 기둥이 내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가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내벽을 진득하게 적신 술이 기둥을 따라 나가며 구멍 밖으로 흘러넘쳤다. 허벅지를 타고 아래로 술이 흘러내리기 무섭게 기둥이 또 구멍 안으로 푹 틀어박혔다. 마개처럼 구멍을 막고 내벽 안에 술이 녹아들게끔 움직이지 않았다.
“취했어?”
홍화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렸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고개가 백영에게 밀려서 그러는지, 취했다는 응답인지는 홍화 자신도 몰랐다.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온몸이 눅진하고 술 냄새가 진동했다.
배가 아프고 벌어진 구멍이 아팠다. 그보다 아픈 건 배 속이었다. 기둥이 내벽을 거푸집 삼을 것처럼 들어와 움직이지 않았다. 안쪽 살만 옴찔대며 기둥을 조여댔다. 하아, 하고 낮은 신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홍화의 배가 볼록 부풀었다가 홀쭉 줄어들 때마다 골반을 틀어쥔 손가락이 땀에 젖은 피부를 할퀼 듯이 구부러졌다.
백영이 몸을 뒤로 물렸다가 박으면, 틈새 없는 구멍에서 질척이는 술이 질금질금 새어 나갔다. 홍화의 입에서 신음이 샜다. 아프다고, 그만둬달라는 애원이 반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소파에 기댄 무릎이 달달 떨렸다.
“아, 흐, 아파, 아……읏. 아.”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가 찔끔 나가고, 쑥 빠졌다가 대가리부터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끈으로 동여맨 주머니처럼 입 다물었던 구멍이 버거운 크기를 이기지 못하고 주름 하나 없이 벌어졌다.
허리가 자꾸만 무너졌다. 등받이를 지푸라기처럼 잡아도, 이를 악물어도 몸이 타는 감각은 끊임없었다. 파도처럼 확 몰아닥쳐서 머리꼭지를 태우다가 확 몰려나가 사람을 아쉽게 했다.
“아파. 조금, 만 살살…….”
백영이 한 번 쳐올릴 때마다 내장이 징징 울렸다. 누가 밑에다 대고 절구를 찧어대는 기분이었다. 몸 전체가 북을 감싼 가죽이었다. 두드리면 울리는.
견디고 버티기만 하는 동안 머리가 느릿느릿 멍해졌다. 점점 술이 오르고 있었다. 입으로 마시는 것보다 빨리 취했다.
“읏.”
울음을 그치려고 딸꾹질을 끅끅 뱉어내는 애처럼 홍화의 신음에도 딸꾹질이 겹쳐졌다. 홍화가 그만하라고 말릴 듯이 뒤로 손을 뻗어 골반을 틀어쥔 백영의 손등을 잡았다. 힘줄 돋은 백영의 손이 더욱 거세게 홍화의 골반을 틀어쥐었다. 홍화를 인형처럼 끌어당겨 아래도 빈틈없이 맞물렸다. 홍화가 입을 벌렸지만 비명엔 소리가 없었다.
이홍화, 하고 백영이 불렀다. 입을 벌리면 신음만 터지기 일쑤라 대답도 못 했다. 내벽을 푹푹 쑤시고 문지르는 기둥 때문에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한참 두들겨 맞으면 그 부분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처럼 아랫배도 점차 통증에 둔감해졌다. 게다가 내장을 꾹꾹 눌러대는 끄트머리가 깊은 곳 어딘가를 문지르기라도 하면, 허벅지 안쪽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엉덩이가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어깨를 움츠려도 목덜미에 오스스 돋은 소름을 없앨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제발 빨리 끝내달라고, 그만하라고 울먹이는 게 다였다.
허리가 붙들렸다. 갑자기 허공에 쳐들려 허우적거리다가 얼른 소파 등받이를 붙들었다. 등 뒤에 백영이 들러붙었다. 그 탓에 다 들어왔을 거라 속단한 기둥이 더 깊이 쳐들어왔다. 쳐들어와서 정복할 것처럼 부피를 키웠다. 안 그래도 찢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속살을 밀며 늘어났다. 홍화가 소파 가죽 위로 손톱을 세웠다. 저도 모르게 등받이를 팡 내려쳤다가 아예 제 몸뚱이를 욱여넣을 양 구는 백영의 골반 쪽을 다급히 밀었다. 백영이 그 손을 잡아 소파 등받이에 도로 박았다. 손바닥에 못을 숨긴 듯이 홍화의 손등을 짓누르고 아랫도리도 짓눌렀다.
“아- 윽!”
홍화의 아래는 아직 덜 익었다. 대가리는 발긋해도 기둥은 송이버섯 밑동처럼 둥글둥글하기만 했다. 저릿하다가도 아리게 쳐오는 고통에 풀 죽은 채였다. 백영이 불쌍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아래는 허리를 뒤로 슬쩍 물렸다가 쿡 누르며 죄다 박았다.
백영의 손아귀에 든 성기가 힘입어 섰다가, 불알까지 상냥하게 만져대니 빳빳하게 일어났다. 홍화가 손 떼라며 백영의 손목을 막았으나 힘이 하나 없었다. 꼭지 끝을 엄지로 문지르고 손가락 고리로 전체를 문지르자 홍화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뒷머리를 백영의 어깨에 문질러대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고개를 젖혀 드러난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렁대고, 발긋하게 물든 입술에선 그만하라는 열띤 사정만 거푸 터져 나왔다.
홍화가 도리질을 하며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백영의 손에 오줌 구멍을 후벼 파이고 아랫구멍도 쑤셔졌다. 남의 기둥이 몸 안에 들어와 움직이는 꼴이 느리고 또 느렸다. 천천히 열이 오르고, 다정하게 절정이 오면 모를까 이건 과격하고도 느려서 고통스러웠다.
절정 직전이 자꾸만 등골을 전율시켰다가 사라지고, 백영이 멀리 빠져나갔다가 안으로 훅 치고 들어오면 다시 몰려왔다. 정액이 기둥 꼭지까지 차올랐다가 쑤욱 내려가고, 차올라서 오줌 구멍으로 찔끔 물방울을 내보냈다가 불알 안으로 쑥 꺼졌다.
홍화의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싸고 싶어 죽겠는데 싸질 못하겠다. 느리게 말고, 차라리 내벽을 지독하게 후려쳐주면 머리가 희끗해지는 고문이 끝날 것만 같다.
“빨, 리. 힛, 빨리.”
“빨리, 뭐. 말은 끝까지 해야지.”
어르는 말투가 다정해서 화가 난 홍화가 아래를 꾹 조였다. 흣, 하고 나오는 신음은 둘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홍화는 저가 조여놓고도 느껴서 그랬다. 백영이 복수하듯 홍화의 기둥 끄트머리를 엄지로 콱 긁었다. 홍화가 어윽, 어윽 울며 소파 등받이에 이마를 비볐다.
더는 못 참겠다.
“박, 아. 빨리!”
“말투 봐라. 부탁하는 태도야, 그게? 공손하게 말해.”
“씨, 허으, 흐……. 아. 제발. 빨리. 어떻게 좀, 제발, 개새끼야. 유백영…….”
여어엉. 이름 끝이 길게 늘어졌다. 투명한 액이 오줌 구멍을 적셨다.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불알이 빨리 정액을 뱉으라며 쾌감을 쥐어짜냈다. 내벽을 제집 삼은 기둥이, 그 끄트머리가 예민한 어느 곳을 꾹 눌렀다. 오줌 구멍에 둥글게 맺혀있던 점액질이 거미줄처럼 아래로 쭈룩 흘러내렸다. 허리가 알아서 요분질 쳤다. 궁둥이를 들이밀었다가 빼도 감질만 나고 느려 터졌다.
“제발, ……해주세요. 박아주, 흣. 아……. 세, 요. 유백영, 제발, 제발. ……백영아.”
미칠 것 같아서 별소리가 다 튀어 나갔다. 백영은 허락을 내리는 대신 소파의 푹신한 면에 홍화를 엎어놓고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눈 깜짝할 새였다. 홍화의 상체는 소파에 눌어붙고 궁둥이만 천장을 향했다.
백영이 술로 축축한 기둥을 손에 쥐고 그 꼭지를 구멍에 꾹 눌렀다. 그간 물고 있어 기둥에 익숙한 구멍이 누글누글하게 벌어졌다. 주먹 같은 꼭지를 삼키고 두꺼운 그 밑과 밑동까지 단번에 쑥 밀려 들어갔다.
“―!”
홍화가 소파 팔걸이를 쥐고 허리를 틀었다. 죄다 틀어박히자 눈앞에 번개가 번쩍 몰아치고 치지도 않는 천둥소리가 귓속에서 우르릉 터졌다. 핏, 하고 드디어 정액도 터졌다. 움푹 파인 배꼽에 묻고 가슴팍까지 점점이 튀었다. 오줌 털어내듯이 피핏, 잔 정액을 털어냈다. 풋내가 진하고 색도 진하다 못해 노리끼리한 색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다. 기력이 빠진 홍화가 흐물흐물 늘어졌다. 반면 백영은 이제야 시작이었다. 씹어 먹을 것처럼 조이는 걸 간신히 참아 넘기니 이제는 뜨뜻하고 축축한 입속처럼 내벽이 기둥을 핥았다.
홍화가 아는지는 모르나 백영 입장으로는 아주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제 볼일 끝났다고 협조 안 하는 홍화를 틀어쥐고 푹푹 쑤시고 흔들었다. 이기적인 게 얄미워 날개뼈 근처에 입술을 대고 힘껏 빨아들였다. 그걸로 모자라 이를 세워 물었다. 조금만 더 물면 상처가 남을 것을, 이홍화가 팔을 뒤로 뻗어 그쯤 해서 그만뒀다.
“왜, 다, 흐…… 끝, 앗, 났잖, 아. 아!”
“너만 싸면, 끝나? 세상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면 안 되지.”
백영이 홍화의 기둥에 불알까지 움켜잡고 협박하듯 몰아붙였다. 홍화가 몸서리치며 백영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아래를 흔들면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아까는 싸지 못해 돌아버릴 것 같았다면, 지금은 탈진한 상태에서 또 절정을 맞이했다가 정액 샘이 말라비틀어질 것 같았다. 마른오징어에서 물을 쥐어짜는 셈이었다.
“아, 흐, 아아, 악!”
그리고 유백영은 능히 마른오징어에서 물기를 짜낼 인간이었다. 무릎이 풀려 쓰러지려는 홍화를 손수 제힘으로 지탱하고 제멋대로 흔들었다.
홍화가 끙끙댔다. 아프기만 하면 도리어 견딜 만했을 것을, 절정이 가라앉은 몸이 또다시 달아올랐다. 불알이 욕을 하며 정액을 기둥으로 밀어 올렸다. 백영이 찌를 때마다 덜렁거리는 아랫도리에 색 없는 물이 맺혔다. 통통해지기는 하나 전처럼 발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느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찔꺽대는 소리가, 백영의 가쁜 숨소리가, 제 입에서 의지를 배반하고 튀어 나가는 신음이 귀청을 폭폭 찔렀다.
홍화가 허벅지를 움츠렸다. 엉덩이가 철벅철벅 얻어맞을 때마다 아랫배가 아프고 정전기의 파란 불꽃이 파직 튀듯 찌릿찌릿했다. 자위는 간질거리다가 싸는 삼 초가 끝인데, 다른 누군가에게 쑤셔지는 건 쾌락의 차원이 달랐다. 한 번 들어왔다가 살짝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내벽을 벌리고 흔들어대면 몸은 이미 절정이었다. 흔들다 끝에나 느낄 삼 초가 끝없이 이어졌다. 졸도할 것만 같았다.
기둥이 깊이 들어와 내벽 한구석을 짓이겼다. 너무 깊이 들어와 머리가 어찔했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고 잠깐 정신이 나갔는데, 눈을 떠보니 흔들리는 기둥에서 흰 물이 졸졸 흘러내렸다. 홍화의 발끝도 손끝도 곱았다. 두 번째 절정인데도 절정 같지 않았다. 첫 번째 절정을 맞이한 이래로 절정은 물러난 적이 없었다.
“그, ……만해. 흑, 흐윽, 아. 아, 아아. 아!”
무슨 말이든 들어주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백영이 홍화를 내리눌렀다. 기둥이 뽑혀나갈 때 아랫도리에서 또 찔끔 물이 샜다. 이제 끝이라고 홍화가 안도의 숨을 내쉬자, 그걸 비웃듯 백영이 홍화의 허벅지 안쪽을 잡고 벌렸다. 다리 한 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홍화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려 했다. 이제 더는 힘들었다. 제 체구에 버거운 크기의 성기를 아랫구멍으로 삼킨 것만으로도 분수 이상의 일을 해낸 것이었다.
양심 없는 유백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볼일만 봤다. 볼기짝을 잡아 벌리고 무자비하게 쑤셔 넣었다. 홍화의 목에서 목 졸린 소리가 새든 말든, 끝을 향해 갈 것처럼 빠르고 강하게 박아댔다.
소파가 침대처럼 삐걱거리며 바닥에 흰 흠집을 남겼다. 신음보다는 사람 죽어가는 소리가 홍화에게서 흘러나왔다. 침도 흐르고, 눈물도 흐르고 심지어 투명하고 가느다란 콧물도 흘러나왔다.
소파 등받이를 잡은 홍화의 손등 위로 백영이 손을 겹쳤다. 거대한 상체가 홍화의 흰 등을 내리눌렀다. 겹쳐진 아랫도리가 미미한 틈을 벌렸다가 순식간에 접붙었다. 홍화의 둥근 볼기가 얻어맞을 때마다 잘파닥거리고, 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파가 무너질 것처럼 끽끽끽 시끄럽게 울었다. 홍화의 신음보다는 소리가 작았다.
살려달라는 애원이 목구멍 위까지 올라왔다. 홍화가 팔걸이를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어 들어온 백영의 손가락이 가뜩이 눌렸다. 백영도 홍화의 손등을 힘껏 쥐었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틀어쥐고서 아래의 끄트머리만 남기고 전부 뺐다가, 마지막으로 퍽 박았다. 홍화가 고개를 소파에 파묻고 입을 벌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목이 막혀 꺽꺽대는 숨만 터졌다.
몸이 오그라들고, 내벽도 조여들었다. 기둥 모양을 따라 그리라면 따라 그릴 수도 있을 만큼 옥죄였다. 백영의 잇새로 낮은 탄성이 터졌다. 술이 찰박이는 내벽에 정액이 섞여들었다. 길고 굵게 터져 나온 첫 번째 정액이 내벽을 깊은 곳을 두드렸고, 두 번째 터진 정액은 안을 가득 채웠다. 홍화도 색이 옅어진 정액을 성기 끝에서 줄줄 뱉어냈다. 겹쳐 쥔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 ……흐…….”
기둥이 빠져나가자 술과 정액이 뒤섞여 같이 딸려 나갔다. 고문에 가깝게 쑤셔진 구멍이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영이 숨을 몰아쉬고서 땀이 배어 나와 미끈미끈한 홍화의 궁둥이를 쥐었다. 힘이 빠진 홍화는 도망가지도 못했다. 백영이 사냥한 사냥감처럼 홍화를 내려다봤다가, 슬슬 입 다무는 구멍에 손가락 세 개를 쑤셔 넣었다. 홍화가 허으윽 길게 울며 몸을 움츠렸다. 구멍에 쑤셔 박은 손가락 사이를 벌리자 정액과 술 냄새 섞인 정체불명의 액체가 붉게 물든 허벅지 안쪽과 불알에 긴 흔적을 남기며 소파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직 안 끝났어. 멋대로 다물지 마.”
뭐가 안 끝났는데. 홍화의 가슴팍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해 오르락내리락했다. 백영이 몸을 일으켜 안심한 찰나, 그가 홍화를 어깨에 짐짝처럼 짊어졌다. 백영의 등에 상체가 엎어진 홍화가 입을 쩍 벌리고 팔로 등을 쥐었다. 땀에 젖은 백영의 등이 미끄러워 손이 엇나갔다.
“어디 가. 그만, 나 못 해. 안 돼. 죽어, 진짜. 나 죽는다고!”
백영은 언제나 그랬듯 들은 척도 안 했다. 소파가 점점 멀어지고 침실 방문이 열렸다. 홍화가 벗어나려고 으등부등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 내던졌다. 침대가 출렁이며 소파가 그랬듯 삐걱거렸다. 구멍에서 액이 줄줄 흘러내려 홍화가 움찔하며 엉덩이에 힘을 줬다. 그래도 시트 위에 둥근 자국이 남았다.
“난 아직 한 번밖에 못 쌌어.”
“한 번이면 충분해. 나, 난 다 쌌…….”
“그거야 네 사정이지. 내가 봐줘야 하나.”
상호 동의. 백영에겐 웃기는 소리였다. 특히 이홍화에게 그딴 예의는 필요 없었다. 도망치려는 홍화를 낚아채 침대에 꽂아 넣고 다리를 벌렸다. 주인과 달리 착하게 뻐끔거리는 구멍에 제 아랫도리를 맞추고, 빈틈없이 끼워 넣었다.
시트를 잡고 엉엉 우는 홍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제 욕심을 채웠다. 홍화에겐 살과 뼈가 산 채로 깎이는 밤이고, 백영에게는 즐거운, 그런 밤이었다.
∞ ∞ ∞
“……힉.”
홍화가 엉거주춤 허리를 잡고 섰다. 사흘이 지났는데도 허리 근육통은 여전했다. 한의원에서 찜질을 해도 낫지 않았다. 침은 맞지 않았다. 죽어도 남에게 보일 수 없는 흔적이 전신에 빼곡했다.
팽팽 놀다가 운동하겠다고 경사 높기로 유명한 산을 택해 등산한 다음 날 같았다. 첫날보다야 낫지만 지끈한 고통은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흘렀다고 허리만 아팠다. 첫날에는 아랫구멍도 아프고 엉덩이에 힘을 줘도 구멍이 다물리지 않는 느낌이라 이렇게 평생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덜컥 겁마저 들었다. 숙취는 또 어떻고. 아래를 적셨을 뿐인데 입으로 마셨을 때보다 숙취가 강했다. 온 내장이 남은 술 냄새를 쥐어짜 목구멍 위로 올려 보내는 듯했다.
홍화는 책상을 잡고 힘겹게 옷을 벗었다. 알몸으로 욕실 안에 들어가자 욕실 거울에 제 몸이 비쳤다. 누가 홍화의 몸뚱이를 그림판 삼아 붉은 물감을 뿌려놨대도 믿을 만큼 얼룩덜룩했다. 삼 일이 지났는데도 자국은 옅어지기만 했을 뿐 그대로 남아있었다. 목덜미, 쇄골 위, 젖꼭지 부근은 집중 폭격당한 것처럼 울긋불긋하고 뱃가죽은 담뱃불로 지진 듯 벌건 자국이 여럿이다. 잇자국까지 군데군데 남아있어서 누가 보면 고문당했냐고 질문할 만했다.
고문이 맞지. 붉은 자국을 더듬다가 그날 밤이 떠올랐다. 앞으로 했다가, 옆으로 했다가, 일어나서 하고, 들려서 하고, 도망가다 잡혀서―힘이 없어 질질 기어가다가― 바닥에 짓눌려서 당했다. 어느 순간 필름 끊기듯 기억이 끊겼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구멍 안에 성기가 그대로 들어있어서 다시 기절하고 싶었다.
그나마 쥐똥만 한 양심은 존재하는지 손가락 하나 까닥 못 하는 홍화를 들고 백영이 욕조에 물을 받아 넣어줬다. 뒤처리도 해준다는 거 소릴 바락바락 질러대며 막았다.
네가 양심이 있냐. 있는 인간이 이러냐. 아침에 시체 치우려고 그랬냐, 등등. 목소리가 쉬어빠져 제 의사는 반의반도 전달이 안 되었으리라.
포악한 새끼. 홍화가 고개를 휘휘 저어 붉어지려는 얼굴을 감추고 샤워기 물을 틀었다. 찬물이 우수수 쏟아졌다. 고개를 들락 말락 간 보던 아랫도리가 찬물을 맞자마자 푹 수그러들었다. 홍화는 일부러 찬물을 더 맞고 서 있었다. 추워서 이가 달달 떨렸지만 그 밤을 되새김질하며 아래를 세우는 것보다야 나았다.
“괜찮냐? 얼굴이 말이 아닌데.”
룸미러로 명식과 눈이 마주쳤다. 하루는 꼼짝없이 죽고 이틀째 간신히 살아났다. 삼 일째라 그나마 산 사람 형태였다. 그래도 명식의 눈엔 홍화가 며칠 시름시름 앓은 사람처럼 보였다. 낯빛은 창백하고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 패딩 안으로 보이는 목 티가 헐렁한 게 구미호에게 정기를 죄다 빨린 사람 같았다.
“괜찮아.”
“안 되겠다. 오늘 촬영 끝나고 영양제라도 맞으러 가자. 저녁은 고기로 먹고. 안 그래도 나영이가 밥 한 끼 먹자더라.”
얼마나 안되어 보였으면 명식이 저럴까. 홍화가 계면쩍게 창문에 제 모습을 비춰 봤다. 자세히는 안 보여도 해쓱해진 꼴은 보였다. 피부가 반들반들하긴 해도 광대뼈가 슬쩍 보이는 게 살이 빠지긴 했다. 하긴, 저녁도 안 먹고 그 짓을 당한 데다가, 하고 난 다음에는 하루 한 끼 죽과 라면으로만 연명했으니 살이 빠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진짜 고기라도 먹어야겠다.”
고기, 하니까 불현듯 주완이 떠올랐다. 소고기 사준다는 고 예쁜 제안을 물리고 유백영의 손을 잡다니. 협박당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코앞에서 놓친 소고기가 여간 아쉽지 않았다.
몸이 고단해 잠만 자다가 놓친 주완의 연락도 꽤 되었다. 눈을 뜨니 부재중 전화에, 괜찮으냐 묻는 문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괜찮다고, 앓느라 연락을 못 했다고 답장을 보냈더니 대번에 전화가 왔다.
―제가 지금 가서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걱정되어 죽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고……. 그게…….」
차마 정사―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나 의문이지만― 때문에 몸이 축났다고는 밝힐 수 없었다. 홍화가 얼버무리자 저쪽에서 부스럭거리며 옷 챙겨 입는 소리가 들렸다.
―집 주소 보내주십쇼. 혼자서 아픈 게 제일 서럽지 않습니까. 갈게요. 제가 도와주게 해주세요.
「……됐다. 다음에 소고기나 사줘.」
―지금 사드릴게요.
「안 돼. 스케줄 있어. 다음에 보자.」
단호하게 거절하자 주완이 정말 안 되냐며 낑낑댔다. 이렇게 절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인생 영 개판으로 산 건 아니라며 홍화가 뿌듯해했다. 주완이 마지못해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저 연습 도와주시면 그때마다 소고기 사드릴게요. 촬영 잘하시고, 얼른 나으세요.
「오냐.」
전화를 끊고도 주완은 걱정하는 문자를 연달아 보냈다. 스토커 못지않은 정성이었다. 홍화는 성의 없이 이응 두 개만 보냈는데도 주완은 어디 아프면 꼭 알려달라고, 당장 달려가겠다고 극성이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진동이 울려 도로 꺼냈다. 주완이라면 확인만 하고 답장은 안 보내려 했다. 예상과 달리 개새끼란 이름이 떴다. 뭐 해, 라는 단 한마디와.
삼 일 만의 연락이었다. 그간은 죽은 사람처럼 문자 한 통 없었다. 뭘 더 바라랴. 원래 그런 놈이었다. 제 몫의 성욕을 풀고 나면 연 끈을 끊고 모르는 사람처럼 날려버릴 인간이었다. 개 같은 계약을 맺자고 우길 때는 언제고,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불시에 연락을 줬다.
홍화는 확인만 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제 스케줄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고하기 싫었다. 오랜만에 개새끼, 란 이름을 봐서 그런지 괜히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필시 불안해서 이러리라.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또 밤을 보내자고 요구할까 봐. 귀 끝이 간지러워 손가락으로 벅벅 긁었다. 긁기 전에도 귀 끝이 빨갰다.
[뭐 하냐고.]
문자가 또 왔다. 홍화는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문자 내용만 확인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손끝이 주인 마음 몰라주고 자꾸 꼼질거리며 핸드폰을 톡톡 건드렸다. 진동이 또 왔다. 애써 창밖만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재빨리 봤다.
[전화할까?]
그건 안 된다. 받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랬다가는 백영이 피의 보복을 강행할 것이었다. 얼마나 많이 당해왔던가. 전화 안 받았다고 쫓아오겠다는 협박에, 쫓아와서 집 안에 들어와 있고, 거기다가 말 못 할 그걸 입에 처넣기까지. 학습의 동물이라고 홍화가 놀라서 답장을 보냈다. 전화할까, 라고 묻는 말은 보기에만 달콤했다.
[해지 마 찰영 간다]
하지 마, 촬영 간다, 라는 짧은 말이 오타투성이였다. 키읔 자가 몇 개 떴다.
[무슨 촬영]
[드라마. 단막극]
[제목이 뭔데]
[블로썸]
[내용이 뭐야]
평범하고 소심하고 수동적으로 살아온 여자가 이혼을 결심하고 홀로 서는 내용이었다. 홍화는 여자를 짝사랑하는 꽃집 청년 역을 맡았다. 요약해서 들려주자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끝나고 전화해]
[시러]
싫어, 의 오타였다. 싫어, 라고 정확히 다시 보냈다. 제 의견이 확실히 전달됐으면 해서.
[약속 있어]
혹여 백영이 잡으러 올까 봐 약속을 들먹였다. 명식이 영양제 맞고 고기 먹자고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3일이면 충분히 쉬었잖아]
오타 하나 안 내는 게 유백영답게 정이 없었다. 충분히 쉬었다는 대목에서 화가 솟구쳤다. 명식도 알아차릴 만큼 낯짝이 귀신처럼 희멀건 하건만 정작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는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개새끼야 네 양심은 중동 갔냐]
[아직도 골골대면 네 체력이 맛 간 거지. 그 정도 체력 가지고 촬영은 어떻게 할래?]
[네가 건드리지만 아나도 건강하거든]
않아도. 젠장.
[끝나고 연락해. 네 집에서 볼 거 아니면]
[안 해 개새끼야]
[네 집에 침대 없어서 불편할 텐데]
억, 하고 홍화가 뒷목을 잡았다. 주위에 저혈압 환자가 있으면 백영 앞에 모셔다드리고 싶었다. 저혈압 치료에 화타가 인정할 명의였다.
명식이 무슨 일이냐며 놀라서 뒤돌아봤다. 홍화가 고개를 저으며 어설피 웃었다.
“너 정말 괜찮냐. 열도 오르는 거 같은데. 병원부터 갈까?”
이마에 손을 대니 명식 말대로 뜨끈뜨끈했다. 유백영 때문에 열 받아서 그렇다. 홍화가 차가운 창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와 맞댄 살갗에서 흰 김이 푸시시 올라올 것만 같다.
“그럼 촬영 늦어, 형. 괜찮아. 열 받는 뉴스 좀 봐서 그랬어.”
“그렇다면 다행인데…….”
명식이 말끝을 흐리며 전면을 봤다. 초록 불을 보고 액셀을 밟으면서도 거푸 룸미러로 홍화를 힐끔댔다. 홍화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쳐다봤다. 문자가 하나 더 떴다.
[연락해]
주완의 문자처럼 백영의 문자도 씹었다. 그 후로 문자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