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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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감이 가득했다. 증거물은 종이봉투에 넣어 옷장 서랍 구석에 숨겼다. 주인인 홍화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옷장이었다. 핸드폰 전원도 끄고 지갑은 돈 한 푼 안 빼고서 우체통에 넣었다. 유백영이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범인이 홍화라는 걸 알겠지마는, 물증이 없는데 무슨 수로 진범을 밝힐까. 언제나 그랬듯이 안면에 철판 깔고 난 그런 적 없다고 우기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감은 술 깬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환은 미래의 자신이 안을 거라더니, 그 미래가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될 줄은 홍화도 몰랐다. 숙취와 공포가 같이 몰려왔다. 술김에 저지른 미친 짓이었다. 돌이킬 수도 없었다. 술이 부모의 원수고 죽일 놈이었다.

사과하고 옷을 돌려준다고 해도 유백영이 받아줄까.

유백영, 네가 얄미워서 너 씻을 때 옷을 갖고 튀었어. 너 망신 좀 당해보라고. 술 깨고 나니 참 미안한 짓이었더라. 미안해. 옷 돌려줄게. 지갑은 손 안 대고 경찰서에 보냈어. ―지나가던 개가 웃을 대사였다. 유백영은 웃는 대신 홍화의 세 치 혀에 담배를 비벼 끄려 할 터.

차라리 유백영이 연락을 해서 지랄발광을 떨면 홍화도 할 말이 있을 텐데, 유백영에게선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아무리 백영의 핸드폰을 들고 튀었다 한들 다른 사람 핸드폰을 이용하거나, 돈이 넘쳐흐르니 새 핸드폰을 사서 연락할 수도 있잖은가.

한데 지금껏 문자도 전화도 없었다. 홍화만 홀로 초조했다. 망나니가 날 선 칼에 침 섞인 물만 푸푸 뿜어내고 제 주위를 휘휘 도는 기분이었다.

이실직고해서 매를 먼저 맞느냐,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가느냐. 홍화는 과거의 자신을 진심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홍화는 하루에도 수없이 옷장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종이봉투를 쥐었다가 구석에 숨겨놓기를 반복하며 마음을 졸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흘러도 백영은 연락하지 않았다. 백영의 매니저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혹시 그날 밤 모텔에 간 일은 술에 취한 나머지 꿈과 현실을 혼동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옷장에 숨긴 봉투를 꺼내 유백영의 옷을 펼쳐 봤다. XXXL. 만취해도 충동구매 할 옷 사이즈가 아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유백영 옷이었다.

봉투를 꼼꼼히 숨기는 그때에 핸드폰이 드드득 진동했다. 홍화가 깜짝 놀라 옷장을 마구 헤집으며 봉투를 깊게 숨겼다. 벨 소리를 문 두드리는 소리로 착각했으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었다.

혹시 유백영일까 봐, 종교도 없으면서 홍화가 성호를 그었다. 후하, 후하 복식호흡을 뱉고 핸드폰을 봤다. 윤태용.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여보세요.”

풀 죽은 기색을 숨기고 발랄하게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홍화 씨가 전화를 받았다며 호들갑 떠는 소리가 배경처럼 들려왔다.

―어, 나 저번에 사진 찍었던 사람인데……. 혹시 기억해?

“찰리 선생님을 어떻게 잊어요. 당연히 기억하죠.”

칭찬해준 사람을 어찌 잊으랴. 욕한 사람보다 칭찬해준 사람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만큼 인생에 칭찬이 드물었지만, 윤태용을 만나기 전에 욕을 하도 얻어먹어서 그런지 훨씬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게다가, 촬영 때에는 정신이 없어 몰랐다가 다 끝나고 나서야 윤태용 세 글자를 검색해봤다. 한글 이름으로는 정보가 나오지 않아 영어 이름을 검색했더니 찬란한 업적이 주르륵 떴다. 홍화만 몰랐을 뿐이지, 화보 촬영으로는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태용이 잠시 입을 다문 동안 주변이 더욱 시끄럽게 꺅꺅댔다. 홍화가 수화기에서 귀를 멀찍이 떼고서 슬쩍 후벼 팠다.

―별건 아니고……. 음. 맞아. 최종 컷 나와서. 우리 그날 같이 고르긴 했지만, 그래도 보정한 건 아직 못 봤잖아.

무슨 사진을 골랐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촬영도 끝나고 사진 선정도 끝나 있었다. 옆에서 이 사진 어떠냐고 물어본 것 같기도 한데, 괜찮다는 대답만 기계적으로 돌려주었더란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아? 사진 보여주고 싶은데.

“당연하죠! 있어요. 없어도 만들게요!”

운 좋게도 오늘 스케줄은 텅 비어있었다. 있어도 미뤄야 했다. 이런 유명한 사람과 친분을 쌓는 일이 어디 쉽다던. 홍화가 당장에라도 달려갈 듯이 외치자 태용이 까르륵 웃었다. 왜요, 괜찮대요? 홍화 씨 온대요? 같은 질문들이 홍화의 귀에도 들려왔다.

―그럼 세 시 어때? 우리 스튜디오 오던 길 기억나? 옆에 카페 있는데, 아니. 매니저하고 왔으면 모를 수도 있겠다. 주소 문자로 보내줄게.

친절하기도 하셔라. 홍화가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다가 보는 이 없음을 깨닫고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허공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시계의 작은 바늘이 숫자 3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꽃단장을 마치려면 시간이 촉박해 홍화가 욕실 문을 벌컥 열고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정수리를 때렸지만 벌벌 떠는 시간도 아까워 서둘러 박박 문질렀다. 물이 차디차 이가 달달 떨렸으나 기분은 좋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트로트가 콧노래로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지나가는 길에 항상 스쳐 갔으나 가격대가 높을 듯해 들어가보진 않은 카페였다. 홍화가 옷매무새를 다듬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에는 복작복작했던 것 같은데, 평일이라 그런지 내부가 생각보다 한산했다.

커다란 몬스테라 이파리가 가린 창가 쪽에 태용이 앉아있었다. 노트북으로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홍화를 발견하고 팔을 휙휙 흔들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나 일찍 왔지만 예의상 말을 건넸다. 태용이 저가 할 일이 있어 먼저 나온 거라며 손을 정신없이 휘저었다.

“사진이 나왔는데, 백영 씨에겐 보냈거든. 홍화 씨는……. 음. 직접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변명이 궁핍했다고 생각하는지 태용이 낯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홍화가 태용의 옆자리에 궁둥이를 들이밀었다. 모니터에 사진이 제각각의 크기로 흩어져 있었다.

“저번에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거든요. 선생님이 찍으셨으니 어떤 사진이든 멋있겠지만.”

“아휴, 무슨 그런 말을.”

홍화의 입 발린 칭찬에 태용이 두 뺨을 손으로 가렸다. 불시에 날아온 아부에 뺨도 귀도 붉게 달아올랐다. 홍화는 부끄러워하는 태용의 귓불을 발견하지 못하고 견학 온 아이처럼 눈만 초롱초롱 빛냈다. 모니터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어서 보여달라고 온몸으로 태용을 닦달했다. 태용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하고서, 그간 보고 있던 사진을 크게 키웠다.

“B컷부터 보여줄게. 홍화 씨 분위기가 잘 살아난 걸로.”

사진이 휙휙 넘어갔다. 수많은 파일 중 몇 개를 크게 키워 보여주며 태용이 턱을 괴었다.

“이건 홍화 씨 얼굴도 예쁘게 나왔고, 분위기도 잘 살았어. 근데 조금 우울해 보여서 B컷으로 뺐어.”

의자에 걸터앉아 창가를 바라보는 사진이었다. 블라인드를 통과한 햇살이 전신에 횡단보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속눈썹과 눈동자 색은 따스하게 달궈져 있는 반면, 늘어진 어깨, 어정쩡하게 굽힌 무릎, 바닥을 향해 처진 손이나 헤 벌어진 입술 등이 넋 빠진 사람 같았다. 우울하다는 감상이 딱 들어맞는, 그런 분위기였다.

“다른 것들도. 아쉬운 게 많지.”

앉아있거나, 눈을 감고 있거나,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사진이 느릿느릿 화면을 채웠다. 정면을 보고 있는 사진은 거울로 매번 보는 얼굴임에도 제가 아닌 듯 낯설었다.

“소품을 사용하는 건 아직 어색해. 백영 씨 같은 경우는 여기, 만년필을 쥐고 있는데도 자연스럽지? 그런데 홍화 씨는 책하고 몸하고 따로 놀아. 뭐, 경험 좀 쌓이면 나아지겠지만.”

소녀처럼 얼굴 붉힐 땐 언제고. 어느새 홍조를 지우고 이것저것 알려주는 모습이 자못 전문가다웠다. 홍화가 연신 고개를 주억이며 태용의 충고를 새겨들었다.

“아, 이건 백영 씨랑 같이 찍은 거. 이 사진은 고민 많이 했어. A컷이라기엔 주제에 좀 어긋나고, B컷이라기엔 둘이 너무 잘 살았고.”

이 사진은. 홍화가 눈을 크게 뜨고 모니터를 쳐다봤다. 다른 사진은 기억이 희미해도 눈앞의 사진은 언제 찍은 건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유백영이 제 옆구리를 뱀처럼 휘감아 질식시켜버리려던 순간이었다. 도망갈 듯 몸을 앞으로 굽힌 홍화와 그런 홍화를 잡아채 내려다보는 백영이 흑백으로 남아있었다.

“주제는 브로맨스였는데 이건 너무……. 음. 희영이는 아폴론과 다프네 같다던데. 홍화 씨도 그렇게 보여?”

홍화는 아폴론과 다프네가 뭔지 몰랐다. 제 무식함을 드러낼 수는 없어서 입 다물고 사진만 보았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려는 자와 사냥하려는 자로만 보였다. 숨을 내쉬려고 입을 벌리고 할딱거리는 저와 그런 절 여유롭게 내려다보는 백영의 온도 차가 사막과 북극 차였다.

“사실 난 이 사진 좋아해. 브로맨스가 아니라 로맨스에 가까워도, 내가 원하는 분위기였거든. 꼭 사냥하는 것 같잖아. 매가 토끼 낚아챌 때나, 뱀이 먹이를 똬리 안에 가둔 듯한. 묘하지. 난 백영 씨가 이런 분위기 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사냥하는 분위기를요.”

“응. 뭘 하든 항상 무심하고 초연한 느낌이었거든. 어, 그럼 홍화 씨가 먹이가 되는 건가? 괜히 미안하네.”

태용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홍화가 허허 웃어넘기고 도로 모니터에 시선을 줬다. 사진 속 홍화는 백영의 팔에서 벗어나고픈 듯 굵은 손목을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무릎은 앞으로 튕겨져 나갈 것처럼 굽어 있고,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허공에 박혀 있었다.

“백영 씨는 이 사진 개인 소장할 거라는데, 홍화 씨도 필요하면 보내줄까?”

지 독사진이나 가질 것이지 왜 하필 이딴 사진을. 태용의 평이 맞았다. 암만 봐도 홍화는 질식하기 일보 직전의 먹이요, 백영은 사냥에 성공한 짐승이었다. 홍화는 묘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마음에 안 들어도 첫 화보 촬영한 기념으로 갖기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가 든 사진이지 않은가. 독사진이 최고라지만 유백영 정도는, 뭐. 홍화가 검지로 유백영의 얼굴을 살포시 가렸다. 그제야 사진이 완벽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홍화 씨, 지금 몇 시야?”

“네 시 삼십 분이요. 약속 있으세요?”

왜 이 사진이 B컷이 됐는지 그 이유만으로 한 시간을 훌쩍 채우고 이제야 A컷으로 넘어간 참이었다. 태용이 화들짝 놀라 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문자가 여럿 쌓여 있었다. 태용이 문자를 확인하더니 바로 전화를 걸었다.

급한 용무겠거니, 이해하며 홍화도 잠시 핸드폰을 바라봤다. 심지어 명식에게서도 문자 한 통이 없었다. 뭐가 온 척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하필이면 유백영과 나눈 문자함에 들어갔다. 위에 찍힌 날짜가 한참 전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깜박했어. 여기 스튜디오 바로 옆 카페인데 이쪽으로 올래요? 내가 커피라도 살게.”

누가 이쪽으로 온다는 말에 홍화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그래봤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코트만 걸쳐 입으면 끝이었다.

“응? 바로 코앞이라고? 알았어요. 어서 와요. 소개해줄 사람도 있고.”

늑장 피우며 코트에 팔을 꿰던 홍화가 멈칫했다. 소개해준다는 말에 슬며시 코트를 벗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홍화 씨. 내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시간 괜찮아? 아직 어리긴 한데 인성이 참 바른 친구거든. 홍화 씨하고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거 같아서.”

두말하면 입 아팠다. 잘 나가는 사람은 많이 알면 알수록 좋다던 보조의 말이 스쳐 갔다. 소개받을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잘 나가는 윤태용이 보증한다니, 밑져야 본전이었다.

“저야 감사하죠.”

“잘됐다. 이 친구도 배우 쪽으로 나가려고 준비 중인데, 홍화 씨가 도와주면 되겠다.”

마침 카페 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태용이 먼저 돌아보았다. 기다리던 사람인지 이쪽으로 오라며 홍화에게 그랬듯 손을 흔든다. 몬스테라 잎사귀가 정확히 얼굴을 가려 홍화에겐 큰 키와 짧은 헤어스타일만 보였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걸로 보아 아무래도 모델 출신인 듯싶었다.

“주완 씨! 이쪽이에요!”

남자가 잎사귀를 젖히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태용과 안면이 있는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태용이 벌떡 일어나 남자를 꼭 부둥켜안기까지 했다.

홍화도 같이 일어나 악수라도 해야 하건만, 입을 쩍 벌리고 그 얼굴을 구경하느라 궁둥이를 의자에서 떼지 못했다. 남자도 뒤늦게 홍화를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똑같이 입이 벌어졌다.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홍화를 보다가, 벌어진 입 그대로 이를 다 드러내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차렷 자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손가락을 바짝 붙여 손날을 만들고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이마에 붙였다. 귓불에 닿을 듯 치켜져 올라간 입꼬리를 결연하게 다물고, 45도 각도의 허공을 바라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충성! 신고합니다! 병장, 강주완은 인고의 시간 21개월을 뚫고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 고! 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커피를 내리던 종업원까지 돌아봤다. 주완은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홍화만 봤다. 인파 가운데서 신나게 컹컹 짖어놓고 주인에게 칭찬해달라고 꼬리 치는 개 같았다.

개. 맞는 말이었다. 강주완은 홍화에게 개 같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저 좋을 땐 강아지, 수틀리면 개새끼라 욕했던 후임이 태용이 소개해주겠다고 한 그 사람이었다.

여섯 다리는 무슨, 한 다리만 건너도 아는 사람이다. 세상이 참 좁았다.

에디터와 주완의 매니저까지 자리에 합세했다. 주완의 화보 촬영에 대해 논의하는 사전 미팅이었다. 홍화가 눈치껏 빠져줘야 했는데, 주완이 잡아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둘이 아는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홍화도 놀랐다. 윤태용을 통해 강주완과 재회할지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가 제대할 때 꼭 연락하겠다고 눈물짓던 강아지가 무사히 전역하고 그것도 모자라 화보 촬영까지 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홍화가 버릇처럼 주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완이 머리를 홍화 쪽으로 들이밀며 더 쓰다듬어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손바닥만 하던 강아지가―그때도 작지는 않았지만― 커다랗게 성장해 품으로 뛰어든 느낌이었다.

“이 친구가 원래 가수로 데뷔하려고 했는데, 연기 쪽에 흥미가 생겨서 그쪽으로 틀었다네요. 이쪽은 홍화 씨인데, 이미 알고 있다고?”

“네. 군대에서도 이 병장님 나온 건 다 챙겨 봤습니다. <라스트로드>랑 <적의 꽃>. <적의 꽃>은 너무했습니다. 추운 날인데 사람을 물속에 빠트리다니. 제가 게시판에 항의도 남겼습니다.”

정말 분했는지 테이블에 올려놓은 손이 주먹을 옴팡지게 쥐었다. 태용을 보러 왔으면서 주완의 눈은 홍화에게만 꽂혀 있었다. 아직 군대 물이 덜 빠져 모든 어미를 딱딱한 ‘다’로 끝내면서도, 눈동자만큼은 순박한 강아지처럼 또랑또랑했다. 홍화야 흐뭇했다. 괴롭히기도 많이 괴롭혔건만, 어김없이 제 팬임을 드러내는 후임이 예쁘지 않을 리 없었다. 단역이라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갔던 역할도 용케 발견해 봐주지 않았는가. 기특함이 두 배였다.

“이 병장님 제대하시고는 다 재미없었습니다. 축구도, 농구도, 행군도, 야간 보초도…….”

“아니, 잠깐. 행군하고 야간 보초는 원래 재미없는 거 아니야?”

매니저가 손을 들어 말을 가로막고 반박했다. 홍화가 가슴 깊이 동의했다. 군대에 다시 돌아가라 해도 못 가는 이유 중 단연 리스트 꼭대기에 있는 것이 행군과 야간 보초였다.

“이 병장님 계실 때는 재밌었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홍화가 아련하게 행군 때를 떠올렸다. 저야 요령이 생겨 가방에 빈 플라스틱 물통을 넣어 각만 그럴싸하게 잡았다지만, 이등병인 주완은 미련하게 십 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군장을 어깨에 지고 길을 걸었다. 그러니 고생 한번 안 해본 도련님의 발이 멀쩡할 리가.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핏물로 얼룩져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거 바보 아니야. 적당히 뺐어야지.」

「이병, 강주완! 괜찮습니다!」

그 아픈 발로도 벌떡 일어나 관등성명을 대는 녀석이 안쓰러웠다. 대충 꾀병을 부려 구급차에 실려 가도 될 텐데, 우직한 주완은 완주할 거라며 고집을 피웠다.

「으이그, 이리 줘봐.」

「이병, 강주,」

「시끄러. 조용히 해.」

아직 주완이 연습생임을 알기 전이라 베푼 호의였다. 홍화는 주완의 짐을 나눠 제 가방에 넣었다. 괜찮다고, 거의 울먹이며 말리는 주완을 밀치고 앞서 척척 걸었다. 홍화는 걷는 거라면 이골이 났고, 발바닥의 굳은살도 주완보다 단단했다.

“이 병장님 아니면 못 버텼을 겁니다.”

“나 없어도 군 생활 잘하고 제대했는데, 뭘. 언제까지 이 병장님이라고 부를 거야. 사회 물 덜 먹었다고 티 내냐. 그냥 형이라고 불러.”

“형……. 홍화 형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군대 말투 좀 그만 써, 인마. 딱딱하게 그게 뭐야.”

주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형이라는 호칭이 좋아 죽겠는지 형, 형, 홍화 형하고 돌림 노래를 불러댔다.

큼큼, 태용이 헛기침을 해 둘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왔다.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홍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각 바라는 것이 다른 표정으로. 주완과 태용 말고 다른 이들은 원하는 바가 같아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게 기뻐 저도 모르게 떠들었네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사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딱 틀에 박힌 인사말이었다. 코트를 챙겨 드는 홍화를 주완이 덥석 잡고 늘어졌다. 옷자락 물고 잡아당기는 개처럼 울멍울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 병, 아니 홍화 형. 번호 주십쇼. 저 제대하고 형부터 찾으려고 했는데 아는 게 없어 연락도 못 드렸습니다. 알려주세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홍화가 번호를 입력하고 핸드폰을 건네줬다. 주완이 핸드폰을 소중하게 쥐고서 일어나 뾰족하게 세운 손날을 이마에 붙였다. 딱딱하게 각진 어깨와 꼿꼿한 허리에 아직 군대 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제대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병장 취급인지. 홍화가 하지 말라며 주완의 어깨를 툭툭 치고 고갯짓으로 다른 이들에게 인사했다. 태용이 아쉬운 듯 눈가를 구기며 손을 흔들었다. 주완은 홍화의 뒷모습이 카페 유리창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라면 두 봉과 사치를 부려 달걀 한 알도 샀다. 무려 1등급 유정란이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오랜만에 건강 생각해서 집어 왔다.

주완이 약속이 없었다면 함께 저녁이나 먹으려 했는데, 사전 미팅을 한다는 소리에 제안이 쏙 들어갔다. 저보다 주완이 받는 대접이 훨씬 나은 것 같아 속이 더부룩했다. 저가 촬영할 때는 사전 미팅이 뭔가, 부표처럼 휩쓸려 사진 찍기 바빴다.

홍화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태용이 보내준 사진을 핸드폰 화면에 띄웠다. 가로등 불이 흑백 사진을 진홍빛으로 비추었다. 저녁 시간이라 골목길은 한산했고, 홍화가 무슨 짓을 해도 간섭할 사람이 없었다. 홍화는 슬며시 화면을 확대해서 제 얼굴을 확인하고, 옆으로 쓱 밀었다. 잡티 하나 없는 잘생긴 옆얼굴이 화면에 가득했다.

아폴론과 다프네.

다음 기회에 아는 척이나 하자 싶어 자판을 두들겼다. 희멀건 조각상과 명화 사진이 열 페이지 넘도록 주르륵 떴다. 여자의 팔은 나무가 되고,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여자를 감싸는 그림들이었다. 시각 자료로는 이해하기 부족해 얽힌 이야기도 찾아봤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쓴 동화를 눈으로 쭉 훑고 결론을 내렸다.

“아폴론이 개새끼네.”

그러니까 애를 놀리긴 왜 놀려. 얕봤다가 큰코다쳤지. 하지만 에로스도 나빴다. 명색이 신이라면서 관대함은 눈곱만큼도 없고 잔인하다. 금 화살과 납 화살이라니. 이왕 쏠 거면 둘 다 금 화살을 쏴주든가. 다프네는 무슨 죄인지.

괜히 기분이 나빠져 좀 전 화보를 다시 봤다. 구도만 보면 도망가는 홍화를 잡으려는 백영이 아폴론이었다. 백영은 개새끼는 맞지만 아폴론은 아니었다. 금 화살이 아니라 납 화살 맞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는데, 이걸 어찌 아폴론이라 칭하랴.

금 화살을 맞은 사람은 아마도. 들키기 싫어 도망가려는 사람은, 아마도.

“……내가 돌았나.”

상황 판단도 엉망이고 착각도 심하다. 요새 입맛이 없어 매끼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양분 부족으로 뇌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긴, 예전이면 다섯 번 보고 외웠을 대사도 한 스무 번 봐야지 머릿속에 들어왔다. 대사를 외우는 중간중간에도 딴생각이 끼어들어 영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게 다 영양분이 부족한 탓이라며 홍화가 봉투를 품에 고이 안았다. 단백질 가득한 달걀만이 홍화를 멍청함에서 구해줄 귀중한 보약이었다.

빌라 앞에 있는 가로등이 수명이 다 된 것처럼 껌벅, 껌벅 눈을 감았다 떴다. 가로등이 눈을 감으면 빌라 유리창 너머로 흰빛이 새도 골목이 어둑어둑했다. 스산한 가을밤을 닮은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개 짖는 소리나 고양이의 가느다란 울음이 날 법도 한데, 구름이 끼고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그런가, 오늘따라 골목이 고요했다. 침침한 가로등도 음산한 배경에 불을 지폈다.

홍화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람쥐처럼 뽀르르 빌라로 달려갔다. 품에는 도토리보다 소중한 일용할 양식이 안겨있었다. 어서 가서 배를 채울 생각에 쿵쾅거리며 반지하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푸르스름한 빛에 의지해 번호 키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다녀왔다고 인사하고는 벽에 붙은 스위치에 손을 댔다.

“…….”

누르지는 않았다. 손가락이 멈칫했다. 주홍빛이 창 안을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어렴풋한 인영이 나타났다가 어둠에 가려졌다. 몸이 덜컥 굳었다. 쿵,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저번에 분명 미친놈이 다시는 이 동네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벌벌 떨었는데. 그 미친놈이 마음을 바꿔 기어이 집 안까지 기어들어 왔나. 얻어맞기는 유백영에게 얻어맞고 왜 저에게 화풀이를 하려 하는지.

홍화는 봉투 손잡이를 무기처럼 쥐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허벅지 근육이 탄탄하게 조여들었다. 인영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비닐봉지를 안면에 집어 던지고 냅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준비했다. 뱀을 마주한 쥐처럼 내뺄 틈새만 찾으며 문고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남자가 느린 손길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툭툭 흔들고 고개를 들었다. 천장과 남자의 머리 사이 폭이 좁았다. 남자가 만든 어둡고 커다란 그림자가 홍화의 위로 드리웠다.

“이홍화.”

익숙한 목소리와 덩치에 홍화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비닐봉지가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딱딱한 타일 위로 툭 떨어졌다. 퍽, 달걀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홍화는 내려 볼 수 없었다. 두 눈만 크게 뜨고 그늘진 곳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깜박.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가 남자의 옆얼굴만 슬쩍 비추고 죽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인영이 투덜거렸다. 홍화가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았다. 허둥지둥하다가 발이 꼬이고, 손이 미끄러져서 현관 타일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허우적대며 일어나려 했으나 비닐봉지를 밟고 도로 미끄러졌다.

백영이 느긋하게 다가왔다. 촌극이 우스운지 코웃음까지 쳐가며 홍화의 손목을 꽉 쥐고 잡아당겼다. 쓰러진 홍화가 헝겊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휙 딸려갔다.

“이렇게 겁먹을 거면 왜 튀어, 튀길.”

백영이 홍화의 멱살을 단단히 쥐고 끌어당겼다. 마침 가로등 불이 켜지며 백영의 얼굴을 비추었다. 눈매가 가느스름하고 입술 끝이 쥐꼬리를 앞발로 누른 고양이처럼 곡선으로 휘어져 있었다. 생명이 경각에 놓인 쥐는 필시 홍화이리라. 홍화가 바들바들 떨며 백영의 손목을 쥐었다.

다프네는 씨발, 나무라도 됐지.

언젠가 찾아오지 않을까, 공포영화의 다음 장면을 예상하듯 상상은 하고 있었지만 오늘 일어날 줄은 몰랐다. 누가 알았겠는가. 연락도, 예고편도 없었다. 맘 놓는 순간 날아온 발톱에 목덜미가 찍힌 격이다. 홍화의 안색이 천적 만난 문어보다도 빠르게 색이 바뀌었다. 불빛은 주홍색임에도 낯빛은 창호지만큼 창백했다.

“사람 뒤통수 신나게 때려놓고 잡히니 말이 없네. 왜 튀었는지 변명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이홍화.”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면, 도망갈 기회가 찰나라도 주어졌다면, 도망쳐서 안전하게 숨을 곳이 있다면 홍화는 백영에게 싸움을 걸고 맞받아칠 수 있었다. 협소한 공간에, 도망칠 곳이 없으며, 멱살까지 단단히 잡혀 있는 지금은 불가능했다. 홍화가 백 퍼센트 지는 게임이었다.

“옷은 돌려줄게.”

승산이 없대도 협상은 걸어봐야 하지 않나. 툭 던져봤다가 말 떨어지기 무섭게 백영이 손에 힘을 실었다. 홍화의 등이 단칸방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덜거덕 흔들렸다. 윽, 하고 홍화가 신음하자 백영이 제 잘못 없다는 듯 손을 풀고 양 손바닥을 들었다.

홍화가 바닥에 주저앉아 쿨럭거리며 막힌 숨을 뽑아냈다. 백영이 그 앞에 느긋하게 앉아 홍화와 눈높이를 맞췄다. 눈물 어린 홍화를 바라보다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홍화가 고개를 돌려도 끝까지 쫓아와 눈가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수 떼어주었다.

“말해보라니까. 궁금해서 그래. 그렇게 튈 거면 애초에 같이 간다고 하질 말았어야지. 사람 기대하게 해놓고, 자지는 발딱 세우게 해놓고 뒤통수를 때리면 내가 좀, 화가 나지.”

“……중간에 하기 싫으면 나와도 되는 거 아니야? 하기 싫어져서 나왔다, 어쩔래.”

주먹질과 발길질만 폭력이라 부르랴. 멱살을 쥐고 힘으로 벽에 밀친 것도 일종의 폭력이었다. 겁에 질려도, 불리한 상황이라도 울컥하니 말이 술술 나왔다. 백영이 목을 졸라도 할 말은 뱉고 죽을 거라며 홍화가 눈을 사납게 치떴다.

“무르기 없다는 거 몰라. 약속했었잖아.”

“언제? 그런 거 정한 적 없어. 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잘 논다?”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는데 기억 안 나? 그 지능으로 대사는 어떻게 외우고 다니냐. 그리고 옷은 왜 들고 튀어.”

“약속은 씨발, 그런 적 없다고! 옷은 너 엿 먹어보라고 그랬다, 왜! ―읍!”

홍화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자 백영이 대번에 입을 막았다. 숨이 또 막혀 홍화가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발버둥 치자, 백영이 쉿 하라며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동네에 자랑하고 싶냐. 이홍화 집에 유백영 왔다고?”

“…….”

홍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방음이라고는 쥐뿔도 안 되는 반지하 방에서 소릴 질렀다간 빌라에 있는 모든 이가 둘의 대화를 들을 것이다. 목소리만으로는 누군지 알 길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라도 우연히 둘을 발견한 사람이 입소문이라도 퍼트린다면.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구설수의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홍화가 씩씩대며 백영을 노려봤다. 분을 삭이느라 홍화의 가슴팍이 위아래로 바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주먹을 쥐고 몸을 돌리려 해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백영이 비켜주지 않았다. 손목을 잡자 그제야 천천히 손을 떼어줬다. 벌린 입을 틀어막은 터라 백영의 손바닥이 입김과 침으로 축축했다.

“옷 돌려줄 테니까, 당장 나가. 이거 무단 침입이야. 알아? 안 나가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홍화가 밀쳐도 백영은 벽처럼 버텼다. 비키라고 해도 못 알아먹은 양 고개만 삐딱하게 틀고 홍화를 쳐다봤다. 가로등 불 탓인지 빛이 비친 옆모습이 묘했다. 다프네를 쫓던 아폴론이라고, 먹이 사냥을 마친 포식자라던 평가가 홍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사진과 비슷한 눈빛이었다. 오랜 가뭄에 물도 먹이도 취하지 못한 짐승이, 기나긴 인고 끝에 사냥감의 꼬리를 밟고 서서 내려다보는.

“못 들었어? 경찰에 신고할 거라니까. 빨리 꺼지라……고.”

홍화가 꾸물거리며 벽에 몸을 붙이면 백영의 몸도 그만큼 따라왔다. 홍화가 들썩이며 허리를 완전히 벽에 붙이자, 백영도 홍화를 벽에 짓눌러버리게끔 바짝 다가왔다. 입술 바로 앞에 백영의 입술이 있었다. 고개를 틀기만 해도 스칠 듯이 가까웠다.

“너 좋아한댔지. Blow job.”

말이 귀에 닿지 않았다. 온 신경이 눈앞의 입술에 쏠렸다. 백영이 여자를 품에 안고 입 맞추던 기억이 살아났다. 눈을 감고, 여자의 목덜미를 껴안고,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입맞춤을 퍼붓던 백영이.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머금고, 입술이 마주 붙고 나서는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조금만 입술을 내민다면 백영의 입술에 꾹 눌리리라. 벌어진 백영의 입술을 따라 홍화도 입술을 벌렸다. 벽에 닿은 뒤통수가 아파서, 조금만 고개를 앞으로 빼고 싶었다. 숨결이 살랑바람처럼 입술을 간질이고 스쳐 갔다.

백영이 일어났다. 눈까지 감았던 홍화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백영을 올려다봤다. 불빛을 등지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백영이 바지춤을 잡았다. 벨트가 철컥철컥 풀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홍화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홍화가 허둥지둥 도망가려 하자 백영이 머리카락을 붙들고 벽에 가볍게 짓눌렀다.

세게 박히진 않았더라도 뒤통수가 얼얼했다.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백영이 홍화의 코를 검지와 엄지로 틀어막았다. 어떻게든 입을 앙다물고 버텨보려던 홍화가 숨 막힘을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공기와 함께 뭉툭한 끄트머리가, 입술을 짓누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 세우면 안 돼. 지금도 죽이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백영이라면 충분히 홍화를 죽일 수 있었다. 목을 졸라 죽이든 자지로 숨통을 막아 죽이든, 칼로 찔러 죽이든 멍석말이를 해서 죽이든 본인의 의지를 이루고 완벽 범죄를 이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죽이고 싶단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홍화가 살려달라 사정하듯 백영의 양 허벅지에 매달렸다. 턱이 아프게 벌어지고, 입술의 양 끝이 찢어져 쓰라렸지만 유백영만이 절 살려줄 밧줄이라 간절히 붙들었다.

“좋아한다며. 응? 잘해봐.”

뭉툭하고 굵은 대가리가 혀를 꽉 누른 다음에는 기둥 차례였다. 힘줄이 불거진 기둥이 이미 꽉 찬 입안을 밀고 목구멍까지 들어갔다. 그래봤자 반도 채 다 들어가지 않았다.

백영이 초조한 듯 아랫부분을 쥐고서 홍화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고정했다. 턱이 아리도록 벌어지고, 그 겨를에 입안으로 양심 없는 기둥이 쑥 치고 들어왔다. 홍화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산 채로 꼬챙이에 꿰인 짐승처럼 눈가가 벌게지고 턱 아래로는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 입안이, 너무 좁아서…….”

기둥의 반만 들어왔는데도 목이 아팠다. 구역질이 올라오고 숨이 막혀 홍화가 백영의 허벅지를 빠드득 긁어 내렸다. 따끔할 텐데도 오히려 자극으로 받아들였는지, 백영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홍화의 머리통을 잡고 푹 찔러 넣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홍화가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백영의 탄탄한 허벅지 뒷면을 붙들었다.

등 뒤는 벽이요, 앞에도 벽이라. 좁은 벽 틈에 갇힌 사람처럼 홍화가 헐떡이며 몸을 틀었다.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백영의 손힘만 거세졌다. 아예 벽에 모기처럼 눌러 죽일 셈인지 홍화가 어떻게든 도망가려 하면 그만큼 쫓아와 입안에 성기를 처넣었다.

반만 들어갔던 것이 반의반만큼, 반의반의 반만큼 조금씩 더 깊게 밀려 들어갔다. 홍화의 목젖이 침입자에 밀려 얇은 살가죽을 밀고 위로 솟았다. 홍화가 아등바등 반항하자 백영이 아예 두 손으로 홍화의 머리를 잡고 끝까지 밀어 넣었다.

“코로 숨 쉬어.”

모가지가 불룩하니 부풀어 올랐다. 숨이 막혀 발가락까지 곱아들었다. 홍화가 백영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퍽퍽 치고 옷자락을 쥐어뜯어도 요지부동이었다. 씨알도 안 먹힐 조언만 해주고 끝까지 홍화를 죽이려 들었다. 홍화의 눈앞이 희미하게 물들 때쯤 되어서야 백영이 결박을 풀고 허리를 뒤로 물렸다. 푸하, 하고 홍화가 익사를 앞뒀던 사람처럼 숨을 토해냈다.

바닥을 짚고 끄윽거리며 헛구역질했다. 얼마나 깊이 들어왔다 나갔는지 식도가 죄다 타들어 갈 듯 아팠다. 눈물에 시야가 어룽지고 콧물에 침까지, 얼굴에서 쏟을 수 있는 물이란 물은 다 빠져나왔다. 혀까지 빼물고 헥헥거리는 홍화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 백영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짓눌렀다.

“좋아한다면서 존나 못하네.”

홍화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백영이 다시 다가왔다. 홍화의 머리를 단단히 고정하고, 자위 기구를 쥔 사람처럼 사정없이 입술 안으로 자지를 처박았다. 시뻘게진 입술이 한껏 벌어지며 열 오른 기둥 대가리와 그 아래 두툼한 부분을 순식간에 삼켰다. 숨 막힌 홍화의 얼굴도 입술만큼 빨개졌다.

보기 좋았다.

“협조하면 빨리 끝내줄게.”

홍화는 죽을 것 같았다. 작고하신 어머니가 강 저쪽에서 얼른 건너오라고 생전처럼 욕을 쏟아내는 듯했다. 빨리 끝내준다는 말만 귀에 들어와 홍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고 하는 발악이었다.

“착하다.”

백영이 홍화의 귓바퀴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홍화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 말라며 귓바퀴를 맴도는 손등에 제 손을 겹치자, 홍화의 목구멍이 미어터질 만큼 기둥이 부풀었다. 홍화의 볼에 눈물이 다시금 길을 만들며 적시고 지나갔다.

푹, 푹 찔러오는 몸짓이 거셌다. 뒤통수가 벽에 퉁, 퉁 부딪쳤다. 목구멍이 좁아지면 정수리 위에서 낮은 신음이 샜다. 볼 안쪽 살을 찔렀다가, 혓바닥 위를 농락했다가, 목구멍 깊숙한 곳의 크기를 늘릴 듯이 헤집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기둥이 들랑날랑하며 누른 입술은 피가 샐 듯 붉고, 볼이며 이마며 턱이며 할 것 없이 목 졸린 사람처럼 홍화의 살색이 벌그죽죽했다.

백영의 허벅지만 쥐고 버티는 그때에, 아랫도리가 찌릿했다. 깊숙이 들어와서 구역질을 일으키는 기둥이, 무딘 화살촉처럼 뭉툭한 끄트머리가 입천장을 쓸고 가면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가 옴찔거렸다. 축 늘어진 불알이 날 선 칼날을 앞에 둔 것처럼 오그라들고, 그 위에 얌전히 누운 기둥이 통통하게 살을 찌웠다.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당황스러워 홍화가 허벅지를 끌어모았다. 오줌이 마려운 것처럼 자지 끝이 찌릿찌릿했다.

“큿…….”

백영의 신음이 귀에 닿자 굳지 않은 자지가 단단하게 일어섰다. 허벅지로 막으려 해도 비비적거려 자극만 심할 뿐 멈춰지지 않았다. 백영의 숨소리가 귀에 들러붙으면, 제 숨통을 막는 기둥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가 혓바닥 위로 미끄러지면, 제 손이 긁고 있는 백영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근육이 불거지면, 익은 자지에서 이슬 같은 물방울을 찔끔 새어 나왔다.

숨이 막혀서 눈이 뒤집히기 직전에 기둥이 빠져나가고 큼지막한 대가리만 입안에 남았다. 백영이 홍화의 양 볼을 지그시 눌렀다. 벌어진 입에서 혀가 길게 빠져나왔다. 그 위로 흰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한 차례 진한 정액이 쏟아지고 두 번째는 홍화의 머리카락과 이마와 볼에 떨어졌다. 세 번째 터진 흰 물은 다시금 홍화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삼켜.”

홍화의 혓바닥을 휴지 삼아 문질러대고서 백영이 명령했다. 산소가 모자란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웠다. 홍화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아픈 목구멍을 조이며 정액을 삼켰다.

썼다. 비렸다. 덜 익은 흰자 같은 식감이었다. 미끌미끌하고 맛조차도 하얬다. 콧구멍에도 정액이 튀어 쓰디쓴 풀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겼다. 떫은 감으로 혀 위를 문지른 것 같아 혀를 바깥으로 꺼냈다. 입술에 묻은 정액이 혀 뒷면에 옮겨붙었다.

으웩, 홍화가 바닥을 짚었다. 침을 퉤퉤 뱉고 입술을 벅벅 닦았다. 뱉어내는 침에서도 정액 맛이 났다. 막힌 숨을 몰아쉬면서도 홍화는 범인인 백영을 쳐다보지 못했다. 허벅지 사이에 억지로 끼운 아랫도리가 아직 죽지 않았다.

어느새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한 백영이 홍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홍화는 망연자실하게 바닥만 쳐다봤다. 머리카락 안을 쓸고 지나간 손가락이 아랫도리를 건든 듯했다. 허벅지에 힘을 줘도 또 찔끔, 새어 나왔다.

“난 또. 좋아한다고 노래를 해대서 엄청 잘하는 줄 알았지. 이래서야 어디 가서는 좋아한단 말 하지 마라. 너 존나 못해.”

“내가 뭘 좋아한, 다고.”

“Blow job. 자지 빠는 거 좋아한다며. 클럽에서 그랬잖아.”

느낌표가 머리를 텅 치고 지나갔다. 그딴 파렴치한 의미인 줄 알았다면 술조차도 입에 대지 않았으리라. 홍화는 공부는 뒷전이었고, 그중에서도 영어는 한국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거라 필요 없는 과목으로 낙인찍은 지 오래였다. 알파벳만 간신히 알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뭘, 씨발.”

목소리가 쉬었다. 소리를 지른 적도 없는데. 홍화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존나 못하는데 좋아만 하면 쓰나. 더 잘하게끔 내가 도와주겠다고.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는 Deep throat도 하자.”

“……꺼져.”

유백영의 입에서 나오는 영어 단어가 정상일 리가 없었다. 홍화가 앙칼지게 굴어도 백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배가 찬 짐승이 여유롭듯이 성욕을 채운 유백영도 관대했다. 홍화의 볼에 미처 닦지 못한 정액도 손수건으로 쓱쓱 문질러줬다.

“옷값은 이걸로 대신해줄게.”

“제발 꺼져.”

“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했다. 백영이 손수건을 바닥에 휙 던졌다. 홍화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은 손수건이었다.

홍화는 주먹만 꽉 쥐고 조용히 있었다. 백영이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고, 계단 올라가는 소리가 나고, 바깥에서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죄다 들은 후에 고개를 들었다.

“씨발.”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풀 죽어야 하는 아랫도리가 약 먹은 놈처럼 쌩쌩했다. 저도 정액을 빼고 싶다며 대가리를 꿋꿋하게 세우고 있었다. 제 몸에 달린 주제에 주인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뭣 같은 놈이었다.

홍화가 쌍시옷 달린 욕을 거푸 뱉어가며 바지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아귀에 잡힌 살 기둥이 홍화의 입안을 종횡무진 하던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엎드려서 열심히 쥐고 흔들었다. 흔들리는 커다란 가슴이나 숨넘어갈 듯한 높은 신음을 그려도 정액을 뿜을 만큼 야하지 않았다. 남자 위에 앉아 요분질 치는 여자와 그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엉덩이를 쥐는 남자를 상상해도 소금 안 친 국처럼 싱거웠다.

“아, 흐……. 아.”

입안도 허전했다. 뭔가를 입에 물고 싶었다. 바닥을 더듬자 손에 축축한 천 조각이 잡혔다. 타닥타닥 창문 너머로 누군가 지나가는 인기척이 들렸다. 신음을 막으려고 얼떨결에 손에 쥔 걸 입에 물었다. 비릿하고 짭짤한 맛. 냄새. 목구멍을 넓힐 듯이 쳐들어오던 굵은 살덩이. 생전 맛보지 못한 맛에 입안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으응, ……읍.”

찌푸린 얼굴. 머리카락을 쥐던 손가락. 착하다, 하고 어르는 목소리. 귓바퀴를 쓰다듬던 다정한 손길. 낮고 짧았던 신음. 뺨과 혀 위에 뿌려졌던 뜨끈한 정액까지.

“흐으!”

홍화가 궁둥이를 옴찔대며 몸을 떨었다. 잇새로 문 손수건이 튀어 나가려는 신음을 막았다. 짜릿한 전류가 머리부터 발끝을 오가며 남은 정액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손바닥으로 막았지만 바닥에 흰 물이 후드득, 후드득 튀었다.

“……미친.”

사정이 끝나자 정신이 맑아졌다. 홍화는 입에 문 손수건을 퉤 뱉어내고 바닥에 지저분하게 흩어진 정액을 벅벅 닦았다. 손수건은 다 쓴 걸레처럼 구석에 던져버렸다.

데굴데굴 몸을 굴려 이불자락 위에 누웠다. 방에 남은 냄새를 환기하려면 창문을 열어야 하지만 일어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청소도 식사도 모두 귀찮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지금 상태로는 산해진미를 입에 넣어도 정액 맛만 날 것 같았다.

홍화는 욕을 하며 입술을 문질렀다. 유백영이 뿌린 정액이 말라 비틀어져 흰 부스러기로 바스스 떨어졌다. 욕실로 달려가 씻으면 그만인데, 한 발자국 떨어진 욕실을 가는 것마저 번거로웠다. 소맷자락을 늘려 턱과 볼과 입술만 벌게지도록 문질렀다.

“미친 새끼가……. 그것만 존나 커서……. 개새끼. 나쁜 새끼. 블로우잡인가 뭔가를 내가 어떻게 알아.”

시부렁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욱신욱신해 유백영이 떠올랐다. 그런 자신이 싫어 눈에 힘을 콱 주어 감고는 잠을 청했다. 가로등이 깜박이다가 홍화를 도와주듯 꺼멓게 죽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 피곤해서 해결하지 못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홍화는 옷장 속에 숨겨둔 유백영의 옷을 꺼내 마구 짓밟았다. 유백영이라고 생각하고 발로 차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만이 답인데, 분리수거도 쓰레기봉투에 버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헌 옷 수거함에 넣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싫고, 쓰레기봉투는 돈이 아까웠다. 태워버리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마음 놓고 화형식을 거행하랴. 마음 같아서는 화장터에 가서 제사 없이 깡그리 태워 세상에서 이 옷의 존재와 존재했다는 증거마저 모조리 인멸하고 싶었다.

성내며 밟아댄 옷가지를 씩씩거리며 주웠다. 햇볕 아래서 펼쳐보니 그 크기가 남달랐다. 품이 넉넉하고 커다랬다. 홍화가 입으면 허벅지까지 내려올 길이에다, 어깨도 팔을 쭉 벌려야 할 만큼 넓고 소매도 길었다. 두툼한 두께와 옷 전체에 자르르 흐르는 윤기가, 홍화의 옷장에 있는 옷들이 모두 허접하게 보일 만큼 질 또한 좋았다.

홍화는 슬그머니 옷의 목깃을 뒤집어 로고를 찾았다. 모르는 브랜드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헉 소리 나는 가격대가 떴다.

겨우, 이딴 천 조각 한 장이.

“돈……지랄은.”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홍화는 옷의 먼지를 탈탈 털어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가격표 뒤에 적힌 끝없는 공을 보자 이성이 돌아왔다. 불미스러운 일로 옷값을 대신한다지만, 나중에 유백영이 변덕을 부려 옷값을 물어내라고 하면 통장 잔액을 탈탈 털어도 해결이 어려웠다.

정신적, 육체적 피해 보상비 아니었냐고 배 째라 내밀어도 되겠으나, 세상에서 가장 속 모를 인간이 유백영이었다. 미친놈이 길길이 날뛰며 옷 물어내라고 경찰에 신고할지 누가 알겠는가. 화근은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홍화는 옷이 담긴 봉투를 흉물처럼 검지와 엄지로 아슬아슬하게 들고서 옷장 속에 봉인했다.

∞ ∞ ∞

“홍화 형! 여기예요!”

주완이 벌떡 일어났다. 홍화를 향해 달려오고 싶은지 상체가 움찔움찔했다. 홍화가 다가가자 부둥켜안으려고 두 팔을 힘껏 뻗었다가 손가락을 오므리며 간신히 참았다. 꼬리가 달렸다면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돌려대고, 개였으면 바닥에 누워 배를 뒤집어 깠을 정도로 반가워했다.

“어. 그래. 잘 지냈냐.”

홍화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주완이 목을 깊게 숙이며 더 쓰다듬어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다 큰 놈 애교는 징그러울 뿐이라 홍화가 주완의 머리통을 밀었다. 주완이 아쉬워하며 칭얼댔다.

“오랜만인데 조금 더 쓰다듬어주십쇼. 예전에는 많이 예뻐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시키기도 전에 군화에 광내주고, 속옷을 빨아서 착착 개어주고, 흰 우유 싫어하는 걸 용케 알고 초코 우유를 대령하니 미울 리가 있나. 추억을 꺼내는 게 귀여워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자 주완이 히죽대며 좋아했다. 아양을 계속 받아줬다가는 한도 끝도 없이 요구할 것 같아 홍화가 적당한 때에 손을 뗐다. 주완의 처진 눈꼬리가 아쉬움을 담고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졌다.

“커피 안 가져오냐? 사준다며.”

유백영이 벌이고 간 참극을 정리하고 있던 때에 주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귀찮아서 집에만 있으려는 걸 주완이 커피로 꾀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맛있다는데 커피라니, 귀찮던 마음을 접어 날려버리고 좋아라 나왔다.

맞다, 하며 주완이 일어나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홍화가 뭘 주문할 건지는 묻지도 않았다. 센스 있는 녀석이니 알아서 가져올 거라며 홍화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완이 유리컵 두 잔을 들고 왔다. 둘 다 생크림이 탑처럼 쌓인 음료였다. 풍성한 크림 위로 초콜릿 시럽과 초코칩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혀가 아렸다.

“홍화 형, 단 거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설탕 싫어하는 군인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어디까지나 고립된 곳에서 유일한 즐거움이 먹는 것뿐이라 그랬지 사회에 나와서는 쓴 커피도 줄곧 잘 마셨다. 얻어먹는 주제에 싫다 좋다 따질 만큼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기에 고맙다며 생크림을 베어 물었다. 찢어진 입술 끝이 따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혹시 잘못 주문했을까 봐 눈치를 보던 주완이 싱글벙글대며 커피를 쪽 빨아 마셨다.

“이번에 오디션을 보러 가는데, 자유 연기가 감이 안 잡힙니다.”

“트레이닝 안 받냐. 소속사에서 해줄 텐데.”

보통은 기획사에서 커리큘럼이다, 트레이닝이다 하며 소속된 이들을 바쁘게 굴렸다. 오죽하면 소원 중 하나가 마음 푹 놓고 자보는 것일까. 홍화야 극단과 병행하느라 다른 지원은 포기하고 캐스팅이나 오디션 정보 등만 소속사에 맡겼으나, 주완은 다방면에서 가꿔줘야 할 신인이었다. 입대 전 케이블 예능에서 얼굴 좀 비춰 다른 신인에 비해 인지도도 쌓은 아이를 소속사가 방치할 리 없었다.

“그룹으로 진행하는데 영 따라잡기 어렵더라고요. 다른 애들은 다들 연기 경험이 좀 있어서 저만 매일 뒤처져요.”

“소속사에서 일대일 트레이닝은 안 해준대? 그럴 리가.”

“요청해봤는데 그런 건 잘 나가는 애들만 해주더라고요. 저야 뭐, 신인이라 떨이 취급받습니다.”

가슴이 찡했다. 무명이 겪는 설움을 홍화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홍화의 과거보다야 주완의 현재 사정이 훨씬 낫긴 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명의 심정은 만고불변이었다.

“그래서 과외를 알아보는데 제 주위에서 연기 제일 잘하는 사람, 하니까 홍화 형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연기 학원보다 믿을 만하고.”

주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홍화가 으허허 방정맞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임 앞에서 무게 잡아야 하거늘 칭찬을 들으니 기쁜 마음이 넘쳐흘러 주체하기 어려웠다. 괜스레 헛기침을 하는 척 함박 미소가 걸린 입술을 숨겼다.

“무슨 소리야. 학원에 나보다 연기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난 가르쳐줄 만큼은 안 된다.”

“홍화 형이 자격이 안 되면 대체 누가 연기를 가르칠 자격이 있겠습니까. 저 진짜 <라스트로드>에서 반전 드러났을 때 소름 돋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하세요. 저는 정호가 범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잇따른 칭찬에 홍화의 입술 끝이 위로 쭉쭉 올라갔다. 빨대를 입에 물고 감춰봐도 기쁜 기색이 얼굴 만면에 드러났다.

“홍화 형만큼 연기 잘하는 배우, 제 주위엔 없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고기 사드릴게요. 네? 형. 홍화 형.”

주완이 홍화의 손까지 꼭 잡고서 통사정했다. 홍화가 망설이자 주완이 그간 홍화의 연기를 예찬하며 저도 그런 연기를 펼치는 게 꿈이라고 아첨을 해댔다. 거절하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시울이 불그죽죽했다.

사람의 도리가 있지,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매정하게 거절할 수 있나. 소고기와 커피 따위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아, 내가 쉬운 사람은 아닌데. 네가 그렇게 원하니 어쩔 수 있냐. 좀 도와줄게.”

홍화가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완이 발딱 일어나 홍화 옆으로 총총 다가오더니 대뜸 바싹 껴안았다. 커다란 품에 쏙 안고서 제 뺨을 고양이에게 비벼대듯 신나게 비벼댔다. 홍화의 볼이 납작하게 눌어붙어도 놔주질 않았다.

“역시 이 병장님이 최고십니다. 아니, 홍화 형이 최고예요!”

“징그러, 이 자식아. 떨어져. 떨어지라고.”

홍화가 머리통을 잡고 밀어도 주완은 꿋꿋하게 붙어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제 말 듣는 놈은 하나 없지. 홍화가 계속 이러면 연기 지도는 없는 일로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뒤에야 주완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준비해둔 건 있어?”

볼이 다 얼얼했다. 홍화가 볼을 문지르며 주완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아파도 좋다며 주완이 헤실거렸다.

“예. 아, 근데 자료 뽑아놓은 게 지금 연습실에 있어서……. 지금 시간이면 비어있을 거예요. 거기 가서 연습해요, 홍화 형.”

카페는 보는 눈이 많아 연습하기 어려웠다. 연습실이 있다니 고민거리가 하나 줄어 다행이었다.

“아, 맞다. 홍화 형, 저 제대 후에 소속사 옮겼습니다.”

주완의 이전 소속사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딱히 애들 등쳐먹던 곳이 아니란 감상만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홍화가 어디냐고 묻기 전에 주완이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속삭였다.

“형하고 같은 소속사로요.”

“나랑 같은 소속사?”

“예. 다행히 계약 해지 기간이랑 맞물려서 위약금 없이 진행했어요. 문턱이 워낙 높아 들어갈 때 조금 힘들었지만.”

홍화가 놀란 토끼 눈으로 주완을 쳐다봤다. 유명하기 짝이 없는 제 소속사가 아직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이에게도 열려있는 창구인 줄은 몰랐다. 하긴, 드라마에서 단역 한 번 나왔다고 계약서를 덜컥 들이미는 곳이니 주완이 못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소속사, 하니 자연스레 유백영이 떠올랐다. 홍화가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까칠한 칫솔로 혓바늘이 돋을 만큼 문질렀는데도 씁쓸한 정액 맛이 여태 사라지질 않았다. 혓바닥이 아니라 기억과 콧속에 박힌 듯했다.

홍화의 표정에 구김살이 가자 주완이 코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이쿠. 홍화 형, 이마에 주름지면 안 됩니다.”

주완이 굵은 엄지로 홍화의 양미간을 꾹꾹 눌렀다. 홍화가 고개를 흔들어 손가락을 털어내고 앞으로 멀찍이 물러났다.

“형은 피부도 어찌 그리 좋으십니까. 달걀흰자처럼 뽀얘서는. 좋은 곳 아시면 저도 알려주십쇼.”

“좋은 곳은 무슨. 잘 먹고 잘 자면 돼. 아, 빨리 안 와?”

걸음이 거북이 모양 느려 터졌다. 홍화가 다그치자 주완이 헤벌쭉하며 쫄래쫄래 따라왔다. 처음 봤을 때나 사회에 나온 지금이나, 홍화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꼴이 여전히 덜 큰 강아지였다.

스케줄이야 명식이 관리하기에 홍화는 딱히 회사에 갈 일이 없었다. 계약할 때 와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가슴이 떨려 회사 내부는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했다. 주완과 온 지금이 구석구석 볼 기회였다. 회사에 소속된 다른 걸출한 배우들―유백영 제외―이라도 볼까, 눈에 불을 켜고 두리번거렸다.

한데 홍화도 그랬거니와 회사에 출근 도장 찍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직원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고 주완에게 손목을 잡혀 연습실로 끌려 들어갔다. 연극 연습하던 공간처럼 한쪽 벽 전체가 거울이었다.

“저쪽에 샤워실도 있어요.”

욕실에 사물함에 정수기까지. 없는 게 없다. 더없이 훌륭한 환경을 보자 지금껏 홍화가 겪어온 기획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딜 견주어도 현재 소속사보다 나은 곳이 없었다.

홍화 나이 겨우 열일곱, 첫 번째 기획사는 연습비를 명목으로 목돈을 뜯어갔다. 새벽부터 새벽까지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모았던 큰돈을 눈 뜨고 떼어먹혔다. 깡패들을 앞세워 살고 싶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고 협박해 고소는 꿈도 못 꿨다.

두 번째 기획사는 홍화를 방치했다. 선 비용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선택했더니만 연습도 배역도 본인이 알아서 하라며 내버려 뒀다. 있느니만 못한 소속사였다. 어쩌다 들어오는 배역도 그나마 잘 나가는 배우에게 먼저 주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족 회사였고, 잘 나가는 배우라는 게 사장의 먼 친척이었다. 두 번째 소속사에서 얻은 것은 홀로 연습하는 버릇뿐이었다.

세 번째 기획사는 포주나 다름없었다. 들어오는 모든 신인에게 스폰서를 붙이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여자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술자리로 끌고 갔고, 남자에겐 자위 영상을 요구했다. 돈 많은 이들이 영상을 보고 마음에 드는 이를 골라 사장에게 언급하면 스폰서가 붙는 시스템이었다. 마나님이면 차라리 운이나 좋지, 보자고 요청하는 대부분이 남자였다.

홍화가 거부하자 사장이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내놓으라며 공갈을 쳐댔다. 어디서 깨끗한 척이냐고, 다시는 이 바닥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며 윽박질렀다. 기획사에 들어가는 족족 물 먹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홍화도 만만찮게 반항했다. 극단 사람들까지 팔 걷어붙이고 도와준 덕에 상처 하나 없이 가장 지옥 같던 기획사를 탈출할 수 있었다.

길고 긴 터널 끝에 도착한 네 번째 소속사였다. 작은 연습실부터 배우를 위해주는 게 드러나 가슴이 뿌듯했다.

이곳이라면 적어도, 계약 기간 동안 추잡한 사건에 휘말리지는 않으리라.

“홍화 형, 대본은 이거예요. 독백 부분은 표시해뒀습니다. 다른 건 그럭저럭하겠는데 이건 조금 많이 힘들어서……. 감정선이 잘 안 잡힙니다.”

감상에 빠져 있다가 주완이 든 대본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오뉴월의 푸른 지붕>이라는, 영화 대본이었다.

“못 본 영환데.”

“아, 그거 유백영이 감독한 독립영화입니다. 가명으로 출품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홍화가 저도 모르게 대본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어쩌다가 다리 많은 벌레를 손바닥으로 누른 사람처럼 손을 탈탈 털고서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주완이 이상하게 쳐다보기에 홍화가,

“바퀴벌레가 지나가서.”

라며 변명했다. 주완이 놀라서 대본을 주워 들고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어디요? 여기 방역업체가 관리한다는데 거짓말인가 봅니다. 홍화 형 벌레 싫어하시잖아요. 제가 잡겠습니다.”

“아냐. 잘못 본 거 같아. 그나저나 그게 유백영이 감독한 거라고?”

“네. 아쉽게 상은 못 받았지만 여러 군데 노미네이트도 되고 평론가 평도 좋았습니다. 저도 재밌게 봤어요.”

“무슨 내용인데?”

“푸른 지붕 아래서 같이 사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인데 지루하지 않아서 신기하더라구요.”

주완이 대본을 건넸다. 홍화가 백영의 옷이 든 봉투를 집을 때처럼 검지와 엄지로 대본 끝을 잡았다. 주완이 색 테이프를 붙여놓은 페이지를 열었더니 홍화와 비슷한 정리 노트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주완이 머쓱하니 뒷머리를 긁으며 볼을 붉혔다.

“열심히 적어두긴 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홍화 형이 한번 봐주시면……. 외우긴 다 외웠습니다.”

“해봐. 봐줄게.”

해달라고 그렇게 매달렸으면서 막상 하라고 멍석 깔아주니 못내 부끄러운 듯 주완이 몸을 꼬며 머뭇거렸다. 홍화가 구석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오디션 심사의원처럼 분위기를 잡고 앉았다.

“어서. 오디션 가서도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거야? 그럼 벌써 탈락이야.”

일부러 채찍을 휘갈기자 주완이 군기가 바짝 들었다. 가슴을 쭉 펴며 눈빛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고 홍화도 대본에 시선을 줬다. 검은 글자를 뚫고 흰 종이 위에 자꾸만 유백영의 환상이 비쳤다.

소고기가 걸려 있는데 농땡이 피우면 쓰나. 홍화는 눈에 힘을 빡 주고 주완의 연기에 집중했다.

같은 대사만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듣고 읽었더니 달달 외우게 생겼다. 홍화가 두 눈을 꾹꾹 누르며 피곤함을 달랬다. 지하라 빛이 들어오지 않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사물함 위에 걸려 있는 시계를 뒤돌아보고서야 세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알았다.

“야. 이쯤 하자. 죽겠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주완이 아쉽다며 조금 더 하자고 졸랐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체력이 아주 훌륭했다. 반면 홍화의 체력은 바닥이었다. 봐주고, 보여주고, 읽어주고, 지적했을 뿐인데도 몸이 녹초였다.

“형이 봐주니까 훨씬 잘 됩니다. 조금만 더 봐주시면 안 됩니까. 아직 세 개 더 남아있는데.”

처음에는 한 개만 봐달라고 하더니, 주완이 슬슬 욕심을 내며 다른 대본들을 끄집어냈다. 자유 연기는 기본 열 개 이상 외워둬야 한다며 모두 봐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아양까지 곁들이며 칭얼대기에 홍화가 못 이기는 척 받아줬더니 이 사달이 났다.

“안 돼. 나부터 죽겠어. 지금 세 시간째야. 집에 안 가냐. 배고프다.”

“앗. 죄송합니다. 시장하셨을 텐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얼른 씻고 나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홍화가 주린 배를 쥐고 잔뜩 불쌍한 척을 한 뒤에야 주완이 욕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주완이 사라지고 나서 홍화는 해변으로 떠밀려 온 해파리처럼 의자 위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주완 정도는 아니지만 보조를 맞춰주다가 홍화도 진땀깨나 흘렸다. 두툼한 맨투맨 티셔츠 안쪽이 땀으로 끈끈했다.

마땅히 갈아입을 속옷이 없어 참았다가 집에서 씻으려 했으나, 살갗 겹쳐진 곳에서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는 듯해 샤워실로 척척 걸어갔다. 아까 샤워기가 두 대인 건 확인해놓은 참이었다. 속옷까지 벗어 던진 홍화가 문을 홱 열자 주완이 기겁하며 다리 사이를 가렸다.

“아, 아니 이 병장님, 왜 갑자기 들어오십니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익혔는지 얼굴이 취객처럼 벌겠다. 홍화가 주완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얼굴만 물들였던 홍조가 목덜미까지 타고 내려왔다.

“씻으려고. 뭐 하냐?”

군대에서 볼 장 다 본 사이에 궁금하지도 않은 아랫도리 가려서 뭐에 쓰나 싶었다. 홍화가 무심하게 주완의 옆 칸에 서서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쏟아져 어깨를 옹송그리자 주완이 묘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래를 가린 손은 여전히 조신했다.

“병, 아니 홍화 형이 같이 씻으러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어. 찝찝해서 빨리 씻으려고. 거기 비누 좀 줘.”

주완이 두 손으로 비누를 쥐고 칸막이 너머로 팔을 뻗었다. 홍화의 몸은 다 가려도 주완은 머리 하나가 훌쩍 위로 솟는 높이의 칸막이였다. 홍화가 팔을 높이 뻗었으나, 고개를 숙이고 받느라 비누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검지와 엄지 사이를 쑥 빠져나간 비누가 바닥에 떨어져 홍화의 발치 멀리까지 굴러갔다. 홍화가 칸막이를 나와 비누를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

묘한 정적. 맨 등에 시선이 꽂혔다. 군대 내에서 떠들어대는 우스운 소리가 떠올랐다. 그거야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특수 상황이니 그렇다 치고, 사회에서야 통용되지 않는 말일 터다. 하물며 다른 인간도 아니고 똥강아지 주완이 음심을 품고 쳐다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그러니 등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시 같은 따끔함은 제 착각이다. 홍화가 피식 코웃음 치고 칸막이 안으로 돌아갔다.

“앗, 차거. 뭐야. 왜 갑자기 찬물이야.”

홍화의 어깨 위로 얼음장 같은 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주완의 샤워기에서 튄 물이었다. 홍화가 뭐라 해도 주완은 죄인처럼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물이 줄줄 흐르는 몸뚱이가 데친 문어 색이었다.

“그렇게 찬물 맞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 몸 관리해야지. 오디션이 코앞이라며.”

“……더워서요.”

열과 성을 다해 연습했으니 더울 만도 하다. 홍화가 찬물을 피할 겸 뜨거운 물을 틀고 비누칠을 했다. 등에 손이 닿지 않아서 도와달라고 쳐다보는데, 주완이 물을 끄고 홍화가 운을 띄우기도 전에 돌아섰다.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매정한 자식이 등은 좀 밀어주고 가지. 다 씻은 마당에 손에 비누칠하기 싫다는 뜻으로 알고 홍화가 알았다며 손을 흔들었다. 어디 아픈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주완이 재빨리 욕실을 벗어났다. 홍화야 비누칠하느라 주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수압이 제집보다 강해 여기서 씻길 잘했다며 버릇처럼 콧노래만 흥얼댔다.

드라이기가 없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고 나왔다. 주완은 거울과 마주 앉아 머리를 쿵쿵 박으며 알 수 없는 소릴 중얼대고 있었다. 대본 연습을 특이한 방식으로 한다며 홍화가 주완의 궁둥이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소고기 사준다며. 얼른 일어나.”

거울을 앞두고도 홍화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주완이 힉, 하며 놀랐다. 후딱 일어나 기계처럼 뻣뻣한 자세로 앞장섰다. 그사이에 소고기 사주는 건 돈 아깝다고 생각이 바뀌었나, 홍화가 의심에 차서 고개를 기울이며 주완을 올려다봤다. 주완이 홍화의 시선을 피해 휙 고개를 돌렸다.

누가 사달라고 했나. 저가 먼저 소고기로 기대감을 높여놓고 이제 와서 아까운 티를 다 내니 홍화의 속도 좋지 않았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다. 홍화는 어린아이 주머니를 터는 못된 어른이 아니었다.

“난 돼지고기도 괜찮은데.”

그래도 대가는 받아야 하기에 등급을 낮춰줬다. 소고기보다야 부담이 덜 할 테니 집에 갈 차비 정도는 주머니에 남을 것이다. 제 자비를 알아주면 좋겠건만, 주완이 아니라고, 약속은 꼭 지킬 거라며 두 손을 부리나케 흔들었다.

“진짜 괜찮아. 나, 삼겹살도 잘 먹는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제 문제예요. 죄송합니다.”

“왜. 연습한 것 중에 잘 안 잡히는 거 있어?”

“아뇨. 아니, ……예. <오뉴월의 푸른 지붕> 마지막 부분이 잘 안 잡혀서 그게 좀. 조금 더 연습해보고 싶어요.”

“다음에 또 봐줄게. 오디션이 언제라고?”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뭐, 심사의원들이 열 개 다 보여달라고는 안 할 테고. 보통 한 여섯 개 정도 준비할 텐데 넌 많이 준비해놓네. 정 안 되면 다른 독백 보여줘. 아까 사채업자 역할 잘하드만. 혹시 과거에 애들 돈 뺏고 일수 놓은 경험이 있냐?”

옆구리를 툭 치며 농담조로 놀렸다. 주완이 시뻘게진 얼굴로 그런 적 없다며 고개를 털었다. 눈빛이 살벌했다며, 실제 사채업자면 오줌 지렸을 거라고 홍화가 낄낄댔다.

“빌린 적은 있어도 뺏은 적은 없습니다. 다 갚았어요. 가끔 돈을 빌려달래서 빌려줘도 이자는 시중 은행 이자율로 받았습니다. 연체 금리를 이십사 퍼센트로 조금 높게 책정했지만 늦게 갚아도 절대 협박하거나 폭력을 쓴 적은 없어요. 제가 깡패도 아니고, 사람 치면서 돈을 돌려받았겠습니까. 가끔, 아주 가끔 돈 안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화를 내긴 했어도 법을 어긴 적은 결단코 없습니다. 저, 선량한 시민입니다, 홍화 형.”

“……허.”

과거의 단면을 엿봤다. 홍화가 질색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주완이 입을 합 다물었다. 대출해주고 이자까지 꼭꼭 받는 이런 사람에게 과연 소고기를 얻어먹어도 될까. 홍화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주완이 연습할 때 보여준 사채업자 얼굴로 소고기에 이자 쳐서 갚으라고 협박할 것만 같았다.

“음, 우리 그냥 중국집 갈까?”

“아닙니다. 제가 잘 아는 고깃집 있습니다. 홍화 형 고기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오늘 제가 크게 한턱내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주완이 뒤에서 홍화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앞으로 밀었다. 잡지 않으면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홍화가 발꿈치를 바닥에 붙이고 버텨도 속 빈 마네킹처럼 밀려갔다.

“아니. 다시 생각해봐. 내가 중국집 정도면 연체 이자율을 적용해도 갚을 수 있거든. 근데 소고기는 좀 힘들 수도 있어서 그래.”

반 농담, 반 진심이었다. 주완을 놀리는 게 재밌어 홍화가 일부러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주완이 개의치 않고 등을 쭉쭉 밀다가, 이렇게 가다가는 하루 종일 회사 건물 안에서 씨름하겠다 싶어 냅다 홍화의 옆구리에 팔을 감았다. 회사 로비에 사람이 거의 없기에 그랬는데.

띵, 하고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다. 조용한 로비에서 유독 소리가 커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문이 느릿하게 입을 벌렸고, 안에 서 있는 이가 앞을 바라봤다.

정확히 홍화와 눈이 마주쳤다. 모자 그늘 아래 숨은 눈이 홍화를 봤다가 뒤에 선 주완을, 그리고 다시 홍화를 살폈다. 아는 얼굴임을 확인하고는 엘리베이터에서 성큼 나와 둘 앞에 섰다.

홍화의 눈이 커다래지다 못해 눈알이 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지게 생겼다. 보고 싶은 다른 배우들은 한 명 없고 왜 하필 유백영이 이날, 이 시간, 이 자리에 나타난 걸까. 운이 없어도 이쯤이면 지지리 박복하다.

홍화가 혀를 날름하며 찢긴 입술 끝을 핥았다. 유백영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짓의 증거였다. 목구멍이 칼칼하고 상처를 핥은 혓바닥에도 쓴맛이 감돌았다.

홍화가 앞으로 가다 멈칫하자 옆구리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주완도 백영을 마주 봤다. 홍화와 백영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갸웃거리며 둘을 유심히 쳐다봤다. 홍화의 옆구리를 감싼 팔은 절대 거두지 않고, 주완이 백영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강주완이라고 합니다!”

안면은 처음 텄을 텐데 넉살도 좋았다. 주완과 달리 홍화는 백영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난밤의 필름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상영되고 있었다. 누구도 안 볼 싸구려 B급 포르노가. 홍화의 의지는 아니었다.

홍화는 머리를 붕붕 털며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데 정신 팔린 나머지 젖은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주완과 백영의 가슴팍에 튀는 것도 몰랐다.

백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주완이 슬쩍 눈치를 봤다. 홍화의 옆구리에 못 박힌 주완의 손가락이 옷자락에 주름을 만들며 곱아들었다. 이대로 홍화를 옆구리에 끼고서 갈 길 가고 싶다는 심정을 손가락이 보여줬다. 백영은 눈만 가늘게 떴다. 홍화의 열 오른 목덜미와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과 꽉 깨문 입술과 특히 옆구리를 칭칭 휘감은 주완의 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디 가?”

“네?”

“그쪽 말고.”

주완이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백영은 주완이 뭘 하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털끝만치의 관심도 없었다. 보통 때라면 기본적인 예의라도 갖춰줬겠으나,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홍화가 여전히 시선을 못 맞추고 허둥지둥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들킨 사람처럼 굴지 않는가. 이홍화가 거짓말을 쳐댄 역사와 그간의 행적을 봐서는 억측 같은 추측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디 가냐고.”

“홍화 형은 저와 저녁 먹으러 갑니다. 선배님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다짜고짜 반말에, 무시에 기분이 좋을 리 없건만 주완은 끝까지 예의를 지켰다. 백영이 홍화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완을 쳐다봤다. 주완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인기 배우에, 기획사의 간판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신인은 매우 드물었다.

위치가 주는 위압감도 위압감이거니와, 백영 자체가 뿜는 기운도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홍화의 옆구리를 감싼 손등이 바늘 박히듯이 따끔했다. 주완은 오히려 홍화를 보호하듯 손아귀에 힘을 줬다.

“이홍화 씨, 저하고 선약 있는데.”

당사자인 홍화도 금시초문이었다.

“그새 잊었습니까.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런 적 없,”

“그때 먹은 걸로는 부족하다고, 더 먹겠다고 그랬어요, 이홍화 씨가. 이홍화 씨 입으로 직접.”

백영이 자신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떨어지고, 엄지가 뭔가를 훔치듯이 입술을 긁고 지나갔다. 홍화의 얼굴에 불이 붙었다. 옆에 붙어 선 주완이 열기를 느낄 만큼 홧홧하게 빨개졌다.

“그, 그런, 그런 적.”

“더 말할까요. 홍화 씨와 약속했던 그 상황을. 난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안 돼!”

홍화가 버럭 소릴 질렀다. 백영의 멱살이라도 쥘 듯이 몸을 앞으로 빼느라 주완의 팔에서도 벗어났다. 주완이 품던 새낄 잃은 양 홍화를 도로 품에 욱여넣으려고 했으나 홍화가 매몰차게 뿌리쳤다. 백영을 막는 게 먼저였다. 고 사악한 주둥아리에서 한마디라도 잘못 샜다가는 그간 쌓아온 평판에 금 가고 무너지고 덤으로 후배도 잃었다.

“주완아. 내가 다음에 연락할게. 미안하다.”

이 가는 목소리가 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진정하자고 속으로 되뇌며 주완의 등을 밀었다. 주완이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홍화 형, 그럼 약속 끝나고 술 한잔이라도…….”

“우리 오늘 술도 마실 거라. 오늘 밤은 힘들겠네요.”

주완이 희망도 품지 못하게 백영이 못을 박았다. 홍화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었다. 여기서 주완의 청을 들어줬다가는 저 요망한 주둥이에서 어느 망발이 튀어나올지 무서워 홍화는 입술만 질근질근 깨물었다.

“다음에 연락할게.”

다른 수가 안 보인다. 홍화가 주완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주완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네. 대신 다음에 한 번 더 봐주십쇼. 약속이요.”

주완이 새끼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우는 애 달래려면 뭔들 못 하랴. 홍화가 새끼손가락을 마주 들고 주완의 손가락에 휘감으려는 찰나였다. 백영이 홍화의 손목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주완의 새끼손가락만 허공에 외로이 남았다.

“우린 바빠서 이만.”

주완은 홍화의 옷깃조차 잡지 못했다. 백영이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홍화를 끌고 갔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가엾어도 주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주완은 멀어지는 홍화를 닭 쫓던 개 모양 허망하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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