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는 룸미러로 백영의 눈치만 힐끗힐끗 훔쳐봤다. 눈을 감고 의자에 뒤통수를 묻고 있으나 구겨진 미간이나 꽉 다문 입술이 폭발 직전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숨소리 한번 잘못 냈다가는 눈을 희번덕 뜨고서 짐이 사색 중인데 누가 감히 불경한 소리를 내었느냐며 목을 치라고 외칠 성싶었다.
백영이 지랄병에 걸린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사는 기분이었어도, 폭탄이 착하게 터진다는 신호는 보내줘서 그동안은 눈물 흘리며 감내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터졌다. 눈알에 광기가 번들거리는 것이 말려도 들을 상태가 아니라 지레 포기하고 얌전히 백영 말을 따라 난장판에서 도망쳐 나왔다.
평소에는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는 놈이 오늘따라 이것도 마음에 안 든다, 저것도 마음에 안 든다 퉁을 놓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옷은 과장 보태 수십 번 바꿨고 머리 모양도 트집을 많이 잡아 스타일리스트가 무슨 일 있냐고 매니저에게 물어볼 정도였다. 매니저도 알고 싶었다. 어디서 지랄병의 스위치가 눌린 건지 짐작조차 안 갔다.
“아, 씨발!”
매니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백영이 창가에서 고갤 돌렸다. 마주친 눈빛이 기가 약한 놈들이면 벌써 오줌을 지리고도 남을 만큼 포악스럽다. 오랜 세월 같이 지낸 매니저도 백영이 저런 눈빛을 보일 때면 가끔 무섬증이 돋았다.
“형, 회사로 차 돌려. 삼촌 좀 보게.”
촬영을 개판 쳐놓고 대표는 왜 찾는가. 자진해서 혼나러 가는 길은 아닐 테고. 매니저가 백영의 스케줄을 재빨리 머릿속으로 훑었다. 불미스럽긴 해도 촬영이 일찍 끝나 다음 스케줄과 약간 여유가 있었다.
“대표님은 왜.”
“그 새끼 자르게.”
“어떤 새끼. 오늘 사진 찍은 걔? 야, 개판은 네가 쳐놓고…….”
“아니, 김 팀장 그 새끼. 오늘 족칠 거야.”
“김 팀장이면……. 기획 쪽? 그 사람은 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었다. 사진사야 백영이 딱 싫어하는, 능력도 없는데 아부만 날리는 부류라 그렇다 치더라도 김 팀장에게 불똥이 튈 줄은 몰랐다.
“그 새끼가 일 처리를 거지같이 해서 일이 이 꼴 났잖아. 감히 누구한테 능력 좆도 안 되는 놈을 붙여서 이 사달을 만들어. 안 그래도 회사 이름 팔아서 어린애들 꼬셔대는 거 좆같았는데 잘됐네. 이참에 모가지를 잘라버려야지.”
“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문만 듣고 사람 잡으려고 해. 그리고 회사에서 사람 그렇게 쉽게 못 잘라.”
“그 새끼가 애 지우라고 돈 쥐여준 지망생이 한 수레 넘는 거 몰라? 그것도 돈 없고 뒷배 없는 애들만 골라서 따먹고 버려, 그 새끼. 사생활은 씨발, 회사에 똥칠하는데 그게 어떻게 사야, 공이지. 일도 좆같이 하는 게.”
남에게 관심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줄 알았더니, 더러운 사생활을 약점으로 틀어쥐었다가 제 화풀이 대상으로 써먹었다. 백영에게 혹, 약점 잡혔다가 제 인생도 골로 갈까 봐 매니저가 어깨를 움츠리며 매서운 시선을 피했다.
알면 알수록 무서운 인간이었다. 철없이 구는 모습도, 남에게 무심한 듯 보이는 모습도 사실 구미호 같은 본성을 숨기려는 가면이 틀림없었다. 왜, 옛날부터 분칠한 것들은 절대 믿지 말라지 않던가. 어른들이 침 튀기며 강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걸 대표님이 모를 리도 없고……. 능력이 되니까 그 자리에 남겨두는 거 아닐까.”
“……와,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너무하다. 지금 우리 삼촌을 그딴 쓰레기하고 동급 취급하는 거야? 삼촌이 다 알면서 그딴 새끼를 그 자리에 남겨뒀다고? 삼촌하고 같은 피 흐르는 사람으로서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이럴 때만 ‘우리’ 삼촌이지. 제 맘에 안 들 때는 감 떨어졌다느니, 나이만 헛먹은 영감탱이라느니 욕을 해대더니. 빈정거리기 대회, 앞뒤 다른 사람 대회가 있으면 유백영이 무조건 일등이었다.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직서를 유백영의 면상에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매니저가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땐 비굴하게 사과하고 네 말이 무조건 옳다고 맞장구치는 게 생존 전략이었다.
“아, 가는 길에 약국 좀 들러.”
“약국은 왜. 너 회사 들렀다가 다음 스케줄 가려면 시간 빠듯해.”
“가서 붕대하고 상처 잘 낫는 연고 좀 사줘. 반창고도.”
“너 어디 다쳤냐?”
신나서 물었다. 다른 때였다면 걱정하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의견 한번 잘못 달았다가 천하의 역적 취급받은 게 서러워 저도 모르게 나온 반응이었다. 백영이 핏 웃었다.
“내가 등신이야, 다치고 다니게. 나 말고. ……있어. 진짜 등신 같은 거.”
백영이 창 쪽으로 고개를 틀며 매니저를 외면했다. 욕은 해도 바를 약을 챙겨주는 게 수상쩍어 눈을 가늘게 뜨고 캐보듯 쳐다봤다. 백영은 매니저 따위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창밖만 응시했다. 멍한 눈이 졸린 듯도 하고, 깊은 상념에 잠긴 듯도 하다.
백영이 입을 다물자 차 안이 조용해졌다. 매니저는 모처럼 찾아온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 차도 평소보다 부드럽게 몰았다.
소음이 잦아들고, 백영이 이제 잠들었나 싶어 마음을 놓는 그 순간, 돌연 뒤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차 안이 고요해서 매니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누굴 욕하는지는 몰라도 괜히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 찾고 구박받을까 봐 매니저는 못 들은 척 앞만 쳐다봤다.
손은 씨발 어디서 찢어 먹어가지고.
걱정과 욕이 뒤섞인 말이었다. 백영과는 심히 어울리지 않았다.
∞ ∞ ∞
드디어 저번 오디션에 합격한 드라마의 촬영 일정이 잡혔다. 주인공 영입 문제로 난항을 겪더니 마침내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다만, 주인공이 원래 점지해둔 인물과 다른 이미지라 그런지 대본 역시 수정이 이루어졌다. 홍화가 맡은 캐릭터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추가된 장면이 있어 대본을 새로 받아 와야 했다.
“어, 홍화 씨?”
새로 받은 대본을 들추며 복도를 걷는 도중에 누군가 홍화를 불렀다. 홍화가 뒤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화보 촬영 때 홍화에게 사인을 부탁했던 보조였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보다니. 우연이네요.”
홍화를 만난 게 못내 좋은 듯 내내 싱글벙글댔다. 홍화도 마주 웃고 싶었지만 그때의 난동이 떠올라 표정이 어정쩡하게 굳었다. 보조가 홍화가 나온 방문에 달린 문패를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홍화 씨가 이 드라마에 출연할 줄이야. 저도 이번에 이 드라마 촬영 보조로 들어왔거든요. 면접 보고 나오는 길이에요. 결과는 당연히 합격.”
“어, 축하드려요. 그런데 원래 사진 쪽에서 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날 이후로 잘렸죠, 뭐. 돈 못 준다고 나가라고 하던데요.”
홍화의 낯빛에 한층 짙은 먹구름이 끼었다. 화보 촬영 시 장비 임대료가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파투를 내놨으니 사진작가가 보조에게 돈을 주기는커녕 자르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걱정하던 차였다. 보조가 홍화의 걱정이 사실로 이루어졌다고 도장을 쾅쾅 찍어대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미안합니다. 괜히 저희 때문에…….”
“에이, 홍화 씨 잘못 아니에요. 안 그래도 오늘 때려치울까, 내일 때려치울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됐죠, 뭐.”
“그래도요. 그때 유백영, ……씨가 난동만 안 부렸어도. 아니, 제가 좀 더 잘했으면…….”
“홍화 씨도 참, 그게 무슨 난동이에요. 백영 씨 정도면 양반이죠. 저는 촬영하면서 스타일리스트 얼굴에 침 뱉는 모델도 봤는데요, 뭘. 그 인간 요새 잘 나가던데, 과거에 침 뱉는 라마였던 걸 사람들이 알란가 몰라. 하하하.”
보조가 부러 소리 내어 웃으며 홍화의 부담을 덜려 애를 썼다. 여기서 땅굴 더 파면 듣는 이도 무안해질세라 홍화가 맞장구치고서 웃어넘겼다. 보조가 정 미안하면 사진이나 같이 찍어달라며 넉살을 부렸다. 못 해줄 것도 없기에 홍화가 흔쾌히 허락하고 심지어 번호까지 교환했다.
“홍화 씨는 백영 씨하고도 친한 것 같던데. 나중에 소개시켜주세요. 잘 나가는 사람들은 많이 알수록 좋잖아.”
“별로 안 친해요. 유백영, ……씨 하고는.”
“에이, 거짓말은. 안 친한 사람 도와주겠다고 백영 씨가 그랬겠어요? 다 친하니까 그랬겠지. 그날 백영 씨 화난 이유가 홍화 씨 때문이잖아요. 그 새끼가 홍화 씨한테 하도 욕 찍찍 뱉고 지랄 맞게 굴어서.”
사진작가에게 쌓인 게 많은지 부르는 호칭이 낮았다. 홍화는 보조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가장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한 답지를, 보조는 정답으로 여겼다.
“백영 씨야 기억 못 하겠지만, 저 예전에 그분하고 촬영한 적 있었거든요. 친절하지는 않아도 지킬 선은 딱 지키는 분이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화낼 이유는 홍화 씨 외엔 딱히 없던데.”
보조가 확신했다. 여기서 더 부정하면 백영을 소개해주기 싫어 발뺌하는 치사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판이었다. 없는 친분이라도 억지로 꾸며내야 만족할 성싶어, 홍화가 그쯤 진실을 숨기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예, 뭐……. 그랬나 봐요.”
“홍화 씨는 든든하시겠어요. 백영 씨 같은 사람이 적이면 무섭지만 제 편이면 좋잖아요.”
그러니 저에게도 꼭 소개해달라며 보조가 홍화의 손까지 잡고 신신당부했다. 적이어도, 제 편이어도 무서운 유백영과 뭐 그리 친해지고 싶다고. 사인까지 달라고 청한 이를 냉정하게 대할 수 없어 홍화가 알았다며 슬그머니 손을 잡아 뺐다.
“참, 홍화 씨 그거 알아요? 이쪽 대나무숲에 백영 씨 소문 쫙 퍼진 거.”
“무슨 소문이요?”
혹시 그 개 같은 인성이 드디어 만천하에 폭로되었나 싶어 홍화가 화색을 띠었다. 보조가 짓궂게 씩 웃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홍화의 귀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손을 둥글게 말아 혹시나 새어 나갈 소리를 차단하고서, 보조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백영 씨 완전 대물이라고.”
업계 사람들만 쓰는 게시판이 있었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암암리에 주소를 주고받아 홍화가 찾기에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혹시 거기에 제 뒷담화도 올라왔을까 봐, 알려줄 수 없다며 뻗대는 보조를 백영을 소개해주겠다고 살살 꾀어 주소를 알아냈다. 대부분은 이니셜 처리가 되어있으나, 조금만 더 깊이 살피면 대부분 누구인지 알아차리게끔 쓰여 있었다.
<이번에 같이 촬영한 Y씨 대박.>이라는 제목이었다. 손가락이 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사진사에 대한 욕이 절반이었고, 다음이 유백영 이야기였다. 욕이라도 잔뜩 쓰였으면 저도 동조의 댓글 한 줄 남기려 했건만, 사진사가 한 방 거하게 얻어먹어 속 시원하단 논조의 글이었다. 홍화에 관한 이야기는 사진사에게 애꿎은 욕만 얻어먹은 비운의 신인이 전부였다.
문제의 사족은 글의 마지막에 붙어있었다. 그 외에 할 말이 없는지 크다는 말만 적혀 있었다. 댓글이 저도 보고 싶단 성희롱이 반, 다 가진 놈이 그것까지 가졌다는 질투가 반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사실은 새끼손가락보다 짧고 가늘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들키면 명예훼손죄로 벌금 물까 봐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았음, 이라고 소심하게 달고 말았다.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게시판을 닫고 나니 마음이 싱숭생숭 울렁였다. 보조가 한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홍화를 위해 백영이 판을 뒤집어엎었다고. 제일 아닐 거라고 배제했던 선택지가 사실은 정답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누웠지만 백영의 속이 궁금해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 위에서 뒤척이기만 했다. 몸은 고단한데 정신은 말똥했다. 새 대본을 읽으면 복잡한 머리가 환기될까, 홍화가 기대를 걸고 대본을 펼쳤다. 이미 외운 부분은 넘기고, 새로 추가된 부분을 눈으로 훑다가 벌떡 일어났다.
“키스?”
추가됐다고 하더니 그 장면이 하필이면 입 맞추는 장면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키스신이 맞았다. 입맞춤을 촬영해본 적은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그 옛날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카메라 각도를 잘 조절해 둘이 고개만 비스듬히 틀어 눈속임으로 찍은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홍화는 입맞춤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 나이 먹어 키스 한번 못 해봤다는 말은 곧 죽어도 하기 싫어 다른 사람이 연애해본 적 있느냐 물으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끙끙 앓았지.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 등굣길에서 본 여자앤데, 단발머리가 예뻤어. 연극에서 본 대사를 적절하게 바꿔서 말하면 사람들은 그러냐며 수긍하고 넘어갔다.
연애는 무슨, 돈 버느라 힘들고 꿈 좇느라 누굴 보고 설렌 적도 없었다. 첫사랑, 첫 키스 그딴 달곰한 단어들은 홍화의 인생에 없는 존재였다.
홍화가 심각한 얼굴로 다른 배우들의 입 맞추는 장면을 검색했다. 프로는 아니어도 처음이라는 핑계로 어설프게 굴고 싶지 않았다. 상대 배우와 직접 호흡을 맞추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리허설 때나 되어야 기회를 잡지, 그전까지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아, 씨.”
운도 더럽게 없지, 가장 처음으로 검색된 장면이 유백영이 찍은 영화였다. 윤진의 손에 질질 끌려가 저도 본 영화였다. 그때는 보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게 앉아있다 나와서 이런 장면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다른 걸 보려다가 손이 미끄러져 동영상을 클릭했다. 홍화는 본인에게조차 본심을 숨기고 영상을 들여다봤다. 화면 안에는 지금보다 앳된 유백영이 상대 배우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항상 무뚝뚝하던 표정이 화면에선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여자가 먼저 백영을 냉장고 쪽으로 밀며 꼭 껴안았다. 키 차이가 많이 나 여자가 뒤꿈치를 바짝 들고 입을 맞췄다. 백영이 뽀뽀하기 편하게 고개를 틀고 허리를 숙였다가, 영 불편한지 여자의 엉덩이 밑으로 팔뚝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여자를 식탁에 앉혀놓고 나서야 본격적인 입맞춤이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입을 맞추는 순간에도 키득거림이 새어 나왔다. 벌린 입술로 여자의 아랫입술을 느리게 빨아들이고,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눈이며 코끝이며 볼에 사정없이 입맞춤을 퍼부었다. 상대역도 좋아 죽는 건 똑같았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두 팔로 백영의 목을 껴안고 입맞춤을 받았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영의 숨결이 거칠어졌고, 여자의 목덜미에 유독 붉게 익은 입술이 닿았다.
홍화는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푹신한 이불 위에서 무거운 동전처럼 핑그르르 돌던 핸드폰이 뒤집어졌다. 소리가 멎고 영상도 멎었다. 홍화의 숨도 영상 속의 백영처럼 거칠어졌다. 콧구멍을 벌름대며 씩씩대다가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다리 사이가 욱신대서 내려 봤다가 으, 하고 신음을 뱉었다. 아래가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밀고 올라왔다. 속이 답답하고 짜증나 죽겠는데 하반신은 다른 놈 것처럼 반응했다.
“씨발…….”
이걸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원망스레 노려보다가 고무줄을 슬쩍 당겨 안을 확인했다. 대가리가 꿋꿋하게 서 있었다. 애국가를 제창해도 경건한 마음이 들기는커녕 영상에서 보았던 백영과 상대 배우의 입맞춤이 배경으로 깔렸다.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조몰락거리다가 또 백영이 떠올라서 흠칫했다.
최근 안 해서 그렇다. 수컷이란 태생이 주기적으로 성욕을 채워줘야 하는데, 바빠서 못 했더니 별 쓰잘머리 없는 걸 보고도 발딱발딱 세우는 것이다. 한 발 빼면 이 뒤숭숭한 감정도 사라질 것이다.
홍화가 결연한 눈빛으로 야한 동영상을 틀었다. 바깥으로 신음이 샐까 봐 소리를 잔뜩 죽이고 홍화도 이불 밑으로 숨었다. 흔들리는 살색 영상을 보며 아래를 잡고 주물럭거려도, 살덩이 만지는 느낌만 날 뿐 별 감흥이 없었다.
차라리 이 영상보다는.
침 한 번 꼴깍 삼키고 아까 끈 영상을 다시 틀었다. 아래가 도로 빳빳해졌다. 백영이 나오는 영상을 반찬 삼기엔 고고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홍화는 아예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혼자 아래를 쥐고서 끙끙댔다.
풍만한 육체, 부드러운 살결, 통통한 입술, ……입맞춤.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모자랐다. 불알을 쥐어도, 기둥을 암만 꾹꾹 쥐어짜내도 비실비실했다. 이런 자극 말고 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배를 매만지거나, 좀 더 손을 올려서 가슴팍을, 거기에 매달린 젖꼭지를 비틀거나, 핥거나, 깨물거나, 아니면 조금 더 올라와서 입술을…….
손가락이 입술까지 올라왔다. 깨물고 있느라 부푼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가 슬며시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혀와 엉키고, 깊게 들어왔다가 입천장을 긁었다.
예전에 딱 한 번, 백영의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
아래에서 흰 물이 튀었다. 짧은 절정이 발가락 끝부터 머리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홍화가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꾹 감고 바르르 떨었다. 정액만큼 희게 물든 머리에 백영이 얼핏 스쳤다가 사라졌다.
숨이 막혀 이불 밖으로 머리통을 쏙 꺼냈다. 아래를 꽉 쥐고 있던 손도 꺼냈다. 손바닥에 흰 정액이 굵은 거미줄처럼 덕지덕지 엉켜있었다. 휴지로 대충 쓱쓱 닦았다. 쾌감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고, 자괴감과 자조감이 빈자리를 메웠다.
“……미치겠네.”
차라리 미치는 게 낫지. 그럼 자신이 미친 것도 모를 텐데.
홍화는 벽을 마주 보고 등을 새우처럼 말았다. 울고 싶었다.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가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작은 조약돌이 창가에 부딪히는 것처럼 탁, 탁, 하는 소리가 빠르고 짧게 들려왔다. 비라도 내리나 보다고 무시하고 자려는데, 잠결에 듣기에도 빗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흡, 하고 누군가 창밖에서 숨을 삼켰다. 숨소리가 질척하고 더러웠다. 그놈이었다. 홍화가 이불을 움켜쥐고 눈만 창 쪽으로 돌렸다. 가로등 불을 등져 검은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드리웠다.
이 개놈의 새끼, 내가 기필코 잡고 만다.
남의 면상에 정액을 갈긴 짓도 저놈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범죄렷다. 홍화가 단숨에 일어나 소리를 죽이고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문 열리는 소릴 들으면 튈지도 몰라 총알처럼 뛰어 올라가려고 종아리에 힘을 바짝 주고 준비했다.
문고리를 잡고 열기 무섭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마침 우편함을 열고 뭔가를 쑤셔 넣던 남자가 홍화를 보고 식겁해서 등을 돌렸다.
“너 이 개새끼, 거기 안 서!”
빌라 사람들이 다 깨도 상관없었다. 홍화는 눈앞의 변태를 잡아다가 경찰에 넘길 생각만 했다. 신고는 무리라도 범인 검거는 얼굴이 팔린다 한들 이뤄내야만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야심해 골목에 사람이 없었다. 둘만 야밤에 골목길을 질주했다. 그간 순찰을 공으로 피해 다닌 게 아닌 듯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몸짓이 쥐새끼처럼 빨랐다. 손이 옷자락에 닿을 듯 말 듯 하다가 쏙 미끄러져 나갔다.
“쫓아오지 마, 씨발!”
쓰레기봉투를 걷어차고, 빈 상자가 홍화의 눈앞으로 날아오고, 심지어 주먹만 한 벽돌도 집어 던졌다. 팔등으로 막아내며 집요하게 범인을 쫓아 뛰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남자의 뒤만 쫓아가다 보니 생전 처음 보는 골목이었다.
막다른 길이 나오자 남자가 홍화를 돌아봤다. 모자를 눌러쓴 데다 가로등도 없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윤곽으로 저보다 어리다는 것만 짐작했다.
“너냐. 내 집에 정액 뿌리고 간 새끼가.”
홍화가 주먹 관절을 우두둑 풀었다. 씨발, 하고 남자가 창의성 없는 욕을 뱉더니 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은빛 날이 번뜩했다.
“……개 같은 년이, 얌전히 집에서 잠이나 처잘 것이지 왜 따라와서 지랄이야.”
호기롭게 뒤쫓아 갈 땐 언제고, 칼을 보자마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보다 훨씬 미친놈이었고, 질이 안 좋았다.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목숨부터 보전해야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범인을 잘도 잡는다지만, 아쉽게도 홍화는 여기서도 조연이었다. 주인공이 나타나 구해주지 않는 이상 발 빠르게 도망쳐야 살았다.
주춤거리는 기색을 읽은 남자가 기세등등해졌다. 칼 손잡이를 고쳐 쥐고 홍화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홍화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그을 듯이 칼도 허공에 휘둘렀다. 팔등으로 막았다가 칼끝이 옷깃을 찢고 살갗도 찢었다. 면도칼에 손이 벤 순간처럼 핏물이 허공으로 후드득 튀었다.
윽, 홍화가 몸을 뒤로 물렸다. 화끈한 통증이 팔등을 가로질렀다. 남자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네년이 신고해서 존나 귀찮았잖아. 씨발년이, 예뻐해주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거 정신병이라고 지적해도 알아먹을까. 아픔도 지혈도 살아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홍화는 골목 밖을 힐끔대며 도망칠 틈을 찾았다. 소릴 질러도 밤이라 나올 사람이 드물고, 누군가 도와주기 전에 남자가 제 배를 찌르고 도망갈 확률이 더 높았다.
쫓고 쫓기는 입장이 바뀌었다. 이제 남자가 사냥꾼이고 홍화가 사냥감이었다. 홍화가 뒷걸음질 치다가, 남자가 칼을 휘두르는 그때에 냅다 골목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대로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려 했다. 남자가 쫓아왔다. 도망가는 홍화가 우스운지 히히거리며 쫓아오는데, 흘끔 본 행색이 살인마 그 자체였다.
공포영화에, 그것도 희생양으로 출현하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어 홍화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핏방울이 팔꿈치를 타고 투두둑 흩어지고, 숨은 턱 밑까지 차서 깔딱거렸다. 한계치까지 근육을 끌어올린 허벅지가 터질 듯이 아프고, 허파는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힘준 종아리는 단단하다 못해 쥐가 나려 했다.
명식이 운동하라고 했을 때 닥치고 할걸. 돈 내더라도 약수터 말고 좀 더 좋은 곳에서 전문가한테 배울걸.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진작 그랬다.
경찰서까지는 아니더라도 큰길까지만 나가면 사람들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홍화가 아픈 다리를 채찍질하며 달렸다. 옷자락이 몇 번이나 남자의 손아귀에 잡혔다가 빠져나갔다.
큰길이 코앞이거늘, 하필이면 신도 무심하지, 홍화의 한쪽 운동화 끈을 풀어버렸다. 발꿈치에서 신발이 덜렁거리다가 훌렁 빠져나갔다.
“―!”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홍화가 데굴데굴 구르다가 결국 남자의 손에 목덜미가 잡혔다. 씩씩대며 옷을 움켜쥔 남자가 홍화를 인적 드문 골목길로 질질 끌어당겼다. 홍화가 다리를 버둥대고 아아악, 소리를 질러도 불 켜지는 방 하나 없었다.
홍화가 온몸을 비틀며 남자의 손목에 손톱을 세워 쥐어뜯었다. 남자가 멱살을 잡았으면 어떻게든 물어뜯었을 텐데, 뒷덜미를 잡혀 이도 못 썼다. 이대로 끌려갔다간 최소한 뱃가죽을 칼로 난도질당할 것이다.
목숨이 경각일 때 초인적인 힘이 솟아나는 것도 주인공에게만 일어나는 기적이었다. 홍화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미친놈이 힘도 괴인이었다. 이대로 끌려가서 죽겠구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하늘이 보우하사 골목 저 끝으로 덩치가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그가 취객이라도 좋았다. 경찰을 부를 인지능력만이라도 남아있길 간절히 바라며 입을 벌렸다.
“살려주세요, 살……!”
남자가 홍화의 입을 틀어막았다. 구조 요청이 허망하게 사라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번 연도 운세는 안 봐서 모르지만 아마 좆같을 거라고 무당도 한마디 했을 것이다. 물에 빠져 익사할 뻔하질 않나, 미친놈 칼에 찔려 죽을 상황에 처하질 않나. 살아남으면 푸닥거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인영이 돌아봤다. 멀리 있지만 분명 이쪽을 봤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싶어서 홍화가 안간힘을 쥐어짰다. 활어처럼 펄떡이니 뒤에 선 남자가 주춤했다. 그 틈에 몸을 돌려 남자의 손등을 있는 힘껏 콱 깨물었다. 피 맛이 비릿하게 올라올 때까지 이를 세우고 놓질 않자 남자가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손이 떨어진 틈을 타 커다란 인영 쪽으로 달려갔다. 인영도 홍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걸음인데도 뛰는 듯이 빨랐다. 누구든 은인이다. 홍화가 눈물 콧물 팔에서는 핏물을 줄줄이 흘리며 귀신 본 애처럼 뛰었다.
“경찰, 경찰 좀 불러……!”
산발에 피범벅인 홍화의 몰골을 보고 인영이 제자리에 섰다. 홍화도 뛰다가 멈춰 섰다. 가로등 아래 선 인영이 홍화를 내려다봤다. 홍화도 올려다봤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하고, 안경을 써도 홍화는 인영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입이 쩍 벌어졌다. 뒤에도 미친놈, 앞에도 미친놈이었다.
“네가 여기 왜,”
눈물이 뚝 그쳤다. 안도와 경악이 동시에 치밀었다. 백영의 시선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 위에 닿았다가 홍화가 도망쳐 나온 골목길로 향했다. 불빛 닿지 않는 곳에서 남자가 숨죽이고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밤눈이 밝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그런 곳에서.
“이거 들어. 경찰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르지 마. 절대.”
백영이 손에 든 봉투를 홍화에게 건넸다. 홍화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영이 홍화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말릴 새도 없이 골목길 안으로 훅 사라졌다.
∞ ∞ ∞
칼을 쥐면 무적이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 있다. 눈앞에서 칼을 휘두르며 다가오지 말라고 입에 거품 물고 날뛰는 미친놈이 그런 부류였다. 무작위로 그어 내리는 행동이야 쉽게 파악 가능해서 빈틈을 노려 남자의 머리통을 쥐고 담벼락에 처박았다. 한 번으론 말을 안 듣기에 두어 번 더 쾅, 쾅 내려 박자 그제야 손에서 칼날을 떨어트렸다.
“뭐, 뭐야.”
이가 나갔는지 발음이 샜다. 무시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지갑을 꺼냈다. 무슨 자신감인지 지갑에 학생증도 넣고 다녔다.
“박명대 복지학과 스물네 살 곽상도.”
남자가 움찔하며 떨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 해서 겁을 집어먹을 테지만 미친놈 같아 약간의 협박을 더 하기로 했다. 백영이 눈높이를 맞춰 앉아 뺨을 툭툭 두드렸다.
“쟤 데리고 뭐 했어.”
“누, 누구.”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억이 나게 도와줄 겸 대가리를 후려쳤다. 누런 이 조각이 핏물에 섞여 튀어나왔다.
이홍화의 팔에도 피가 흘렀다. 칼날에도 핏물이 묻어있었다. 백영은 그대로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내려쳤다. 남자의 몸이 구겨진 종이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거푸 뺨을 후려치자 남자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후들후들 떨었다. 볼과 코가 퉁퉁 부어오르고 콧구멍 밑으로 피가 줄줄 새 턱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왜 건드렸어.”
“그, 그게.”
답을 기다리기엔 인내심이 짧았다. 백영은 남자의 입에다 쓰레기를 쑤셔 박고 공처럼 걷어찼다. 남자의 벌어진 입 사이로 노란 위액이 울컥 쏟아졌다.
남자가 축 늘어질 만큼 두들겨 패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아예 죽여버렸으면 좋겠는데, 감시카메라가 없는 골목이라도 살인은 법이 가로막았다. 제발 큰 사고 치지 말라던 삼촌의 눈물겨운 애원을 떠올리며 백영이 살의를 눌러 참았다.
대신 기절한 남자의 뺨을 깨어날 때까지 후려쳤다. 퍽, 소리가 다섯 번 정도 나자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백영을 보자마자 사지를 발발 떨고 울면서 발목에 매달렸다. 젖은 바지춤에서 지린내가 올라왔다. 입에서 쓰레기를 밀어내지 못해 나오는 말이 죄다 신음 같았다. 듣기 싫었다.
“그러게 누가 건드리래.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팔등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던 게 떠오르자 백영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삼촌의 부탁이고 뭐고 눈앞에 있는 인간을 산 채로 토막 내야 성이 풀릴 듯했다.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남자를 실컷 밟다가 기절하기 직전에 발을 거뒀다. 손으로 더러운 뺨을 치며 또 깨우긴 귀찮았다.
남자의 얼굴은 이제 본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부어있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이 정도로 겁줬으니 다시는 이홍화에게 들러붙지 않겠지만, 백영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조금 모자랐다. 더 패야 직성이 풀리겠으나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남자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다른 손에 벽돌을 쥐자 남자가 눈치챈 듯 꿈틀거렸다. 하도 얻어맞아서 힘도 못 쓰면서 도망치려는 노력만큼은 가상했다.
백영은 쓸데없는 노력을 비웃고는 말뚝을 땅에 내려치듯 벽돌로 남자의 복사뼈와 발목을 내려쳤다. 망치질하는 손에 주저함이라곤 털끝만큼도 묻어있지 않았다. 뼈가 뚜둑 부러지는 소리는 터져도 틀어막힌 남자의 입에선 비명이 새지 않았다.
네 번. 반대쪽도 똑같이 네 번 짓이겼다. 당분간 평범하게 걷기는 어려울 것이다. 운이 나쁘면 아마 평생을 절룩거리며 살겠지. 아까 보니 잘 뛰던데, 범죄자 주제에 뜀박질이 빨라봤자 어디에 쓸까. 이런 놈들은 느린 게 경찰에도 좋고 사회에도 이로웠다.
“한 번 더 이 골목에서 보이면 그때는 혓바닥이야.”
혀를 내밀고 검지로 가리키며 친절하게 알려줬다. 남자가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정신없이 끄덕였다. 최소한 지금 뽑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알 머리는 있었다.
“억울하면 꼭 신고하고.”
수거한 핸드폰과 지갑을 눈앞에서 흔들어줬더니 남자가 온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신상 꿰고 있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의미를 굳이 해석해줄 필요 없어서 편했다.
백영이 눈매를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처럼 굽히며 남자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남자가 이제 놔주겠지, 희망 어린 눈으로 올려다봤다.
“그럼 잘 가.”
다정하게 인사하고 남자의 관자놀이를 겨냥해 벽돌로 후려쳤다. 남자가 흰자를 까뒤집고 기절했다.
옛날 같았으면 어디 네 군데는 더 부러트렸을 텐데 이 정도에서 끝내주다니. 역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해지는 법이다. 백영은 벽돌과 남자의 지갑, 핸드폰을 챙겨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길을 벗어났다.
홍화는 손톱을 딱딱 씹으며 안절부절못하고 골목 어귀만 서성거렸다. 빛 안 드는 골목길 안으로 달려갈 것처럼 몸을 뺐다가,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경찰을 부르러 가려다가도 백영의 당부가 떠올라 멈칫거리기만 수십 번이었다. 하필 핸드폰도 두고 와 가장 든든한 지원군인 명식도 부를 수 없었다.
만약 기다리는 사이에 백영이 베이거나 찔리기라도 하면.
온몸의 피가 팔등에 난 상처 밖으로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홍화가 하얗게 질렸다. 당장 들어가야 했다. 신발 한 짝이 저쪽에 뒹굴고 있었지만 챙겨 신을 정신이 없었다. 무작정 골목 안으로 발을 뻗었다.
검은 인영이 막 뛰어가려던 홍화 앞을 가로막았다. 동네 미친놈보다 훨씬 커다란 그림자가 홍화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내가 기다리라고 안 했냐.”
백영이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홍화가 눈물이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백영의 얼굴과 팔과 상체, 다리를 샅샅이 훑었다. 손이 멋대로 뻗어 나가 백영의 어깨와 가슴과 팔을 더듬었다. 혹시 저처럼 칼에 맞아 찢기거나 피 나는 곳은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찾았다.
백영은 무사했다. 다친 곳 한 군데 없이 멀쩡했다. 안도의 한숨이 내장을 다 훑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동시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홍화가 휘청거리자 백영이 팔을 뻗어 부축했다.
“미친놈은? 그 새끼는 어떻게 됐어. 도망쳤어?”
“다신 이 동네 안 오게 잘 타일렀어.”
“타일렀다고? 네가?”
유백영이 누구를 달랬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어서 홍화가 미친놈의 흔적이라도 찾아볼 것처럼 고개를 길게 빼 골목길 안쪽을 살폈다. 백영이 교묘하게 홍화의 시야를 가렸다.
“팔 줘봐.”
“팔은 왜.”
“다친 데 보여줘.”
미친놈에게 쫓기고, 백영을 만나고, 불안에 떠느라 제 상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음이 놓이자 그제야 고통이 밀려왔다. 홍화가 피범벅인 팔을 내려 봤다가 얼른 백영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 꼬락서니가 어떤지 인제야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산발에,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에, 신발 한 짝은 날아갔고 옷은 잠옷 차림이다. 그마저도 깔끔하지 않고 피투성이였다.
상처가 안 난 팔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쪽팔려서 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다 내놓을 수도 있었다. 왜, 항상 유백영에게는 제일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만 골라 보여주는 걸까.
“다친 데 보여달라고.”
백영이 홍화의 팔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골목 밖에서 백영을 기다리는 새에 피는 멎었다. 길게 찢기긴 했어도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병원 가자.”
“안 돼.”
유백영 입술이 한일자가 됐다. 눈에 불만이 그득했다. 마땅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홍화를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가서 입원시킬 게 틀림없었다.
“가서 뭐라고 해. 미친놈 막으려다가 칼에 베였다고 하면 경찰도 오고 그럴 거 아냐.”
“그냥 다쳤다고 해. 자세하게 안 물어봐.”
“이 시간에 연 데는 응급실뿐이라 서류에 보호자 이름도 적어야 해. 네 이름 적으면 기자들이 기삿감 생겼다고 몰려올걸.”
“매니저 불러. 그 인간은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아껴.”
“형 걱정시키기 싫어. 그리고 이거 병원 갈 정도 아냐. 그냥 침 바르면 나아.”
사실 응급실 비용 낼 돈도 없고, 명식도 경제 사정 안 좋은 건 마찬가지라 부르기엔 미안했다. 홍화가 백영을 납득시키겠다며 검지에 침을 발라 상처 위를 열심히 문질렀다. 생각보다 뜨끔해서 윽, 하고 신음을 삼키자 백영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넌 여기 왜 왔냐.”
가난이 부끄러운 건 아니라지만 백영 앞에서는 부끄럽다. 홍화가 주제를 돌렸다. 말을 꺼내고 나니 이 동네와 연이라곤 없는 인간이 왜 왔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거기다 마지막으로 본 날 대판 싸우지 않았는가. 갑자기 나타나서 친절 아닌 친절을 발휘하는 모습이 생판 남처럼 낯설었다.
백영은 대답 대신 홍화의 한쪽 신발을 찾아 발로 툭 차서 보냈다. 홍화가 신발을 신자 다치지 않은 팔을 잡고 근처 놀이터 벤치로 끌고 갔다.
“그거 줘.”
백영이 봉투 안에서 붕대며 소독약을 주섬주섬 꺼냈다. 미래라도 내다봤는지 내용물이 죄다 치료 관련 물품이었다. 홍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봐도 백영은 홍화의 소매를 걷고 상처 부위에 소독약을 바르는 데 집중했다. 소독약이 닿은 상처가 홧홧하고 따끔해서 눈물이 찔끔 샜다. 본능적으로 팔을 잡아 빼려 하자 백영이 단단히 잡고서 붕대까지 칭칭 감았다.
“손바닥.”
멀쩡한 쪽을 내밀었더니 한숨 쉬고 반대편을 잡아끌었다. 날이 지나 제법 아문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반창고만 붙여줬다.
홍화는 붕대 감은 팔을 들어 가슴 근처를 긁적거렸다. 칼이 긋고 간 팔등이 아리고 화끈거리는데도 가슴은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누가 거기에 아프지 말라고 입김을 후 불어준 것처럼.
백영이 딱히 걱정해주거나, 괜찮냐고 물어보거나, 고생 많았다고 토닥이는 것도 아닌데 치료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입꼬리가 제멋대로 솟으려고 해 입술을 앙다물고 힘껏 참았다. 그래도 올라갔다.
“그 새끼하고는 어떻게 된 거야. 아는 사이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얼굴에 정액 맞았다는 사실은 쪽팔려서 절대 말 못 한다.
“그냥 동네 미친놈이야. 나한테 계속 집적거려서 혼내주려고 쫓아갔는데 미친놈이 칼 들고 설치더라고.”
“……쫓아갔다고?”
“어. 아, 칼만 안 들었으면 내 손으로 잡을 수 있었는데. 그깟 거 껌인데, 진짜.”
홍화가 벤치에 팔을 걸며 센 척했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위신을 펴려고 용을 썼다. 굳이 도와줄 필요 없었겠네 하고 빈정대거나, 별 웃긴 소리 다 한다고 비웃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더니, 백영의 눈빛이 골목길 안쪽을 훑던 때처럼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넌, 뇌가 없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올라간 입꼬리가 단번에 내려왔다. 벤치 등받이에 걸었던 팔도 앞으로 돌아왔다.
“생각이 있어, 없어. 조금만 생각해도 위험할 거라는 건 뻔히 알지 않나. 그 정도 판단도 안 돼? 네가 애야? 아니 애도 씨발 그 정도는 알아. 어디라고 거길 쫄래쫄래 따라가. 그 새끼가 널 어떻게 할 줄 알고 따라가, 겁도 없이!”
“…….”
“너 나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그 새끼가 찌르고 도망가면 어쩔 뻔했냐고. 지금 지나다니는 인간도 한 명 없는데 찔리면 그대로 뒈지는 거야, 너. 상황이 눈에 안 보여? 그딴 일 있었으면 얌전히 경찰에 신고를 했어야 할 거 아냐!”
“경찰은…….”
“경찰은 뭐. 들키면 쪽팔려서 못 한다? 제발, 이홍화. 너 아직 그 정도 인지도 아니야. 네가 누군지 모르는 인간들이 더 많아. 네 목숨부터 생각했어야지 그깟 기삿감 무서워서 미친놈을 쫓아가서 잡으려고 해? 뒈지려고 환장을 했지, 네가.”
분노한 기색이 흉흉해 말문이 막혔다가 인지도 운운하는 대목에서 홍화도 울컥했다. 주먹이 버들버들 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듣자 듣자 하니까. 야, 내가 뒈지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구해준 걸로 생색 내냐? 아-, 고마워. 고마워서 뒈지시겠네. 근데 누가 구해달랬어? 너 아니어도 알아서 도망쳐서 잘 살 수 있었어. 어디서 영웅 행세야!”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유백영은 골목으로 뛰어들어 미친놈을 상대하고 홍화의 상처까지 치료해줬다. 영웅이 맞았다. 하지만 홍화는 고마움을 마음 뒷면에 숨겼다. 백영이 아픈 곳을 헤집고 찔러대서 고운 마음이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그래, 나 인기 없다. 너처럼 잘 나가는 인간 아니라서, 신고해도 기자들이 신경도 안 쓴다. 그런데 그런 걸 굳이 지금 이야기해야 해? 좀 괜찮냐고 묻는 게 먼저 아니냐? 넌 대체 성격이 왜 그 모양이야? 왜 그렇게 더러워?”
“더럽다고. 하,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냐. 미친놈한테 저 좀 죽여줍쇼, 뛰어든 네 행동은 안 보이지? 너야말로 성격이 왜 그 모양이야? 빨리 뒈지고 싶어서 그래? 내가 도와줘?”
“그래, 씨발, 빨리 뒈지고 싶다! 인생이 하도 좆같아서, 빨리 뒈지고 싶어서 뛰어들었다! 이제 만족해? 이게 네가 원하는 대답이야?”
“씨발, 이홍화!”
백영이 손을 뻗었다. 홍화가 매섭게 뿌리쳤다. 하필이면 붕대 감은 팔이라 핏물이 흰 붕대 위로 올라왔다.
“좆 까, 개새끼야.”
유백영이 밉다. 항상 미웠지만 오늘은 더 밉고, 더 증오스러웠다. 꼴 보기도 싫었다.
홍화가 씩씩대며 유백영의 어깨를 밀치고 놀이터를 벗어났다. 뒤에서 씨발, 하고 길게 욕하는 걸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우편함이 깨끗해졌다. 전단지만 깔끔하게 꽂혀 있었다. 창 앞에 쌓였던 콘돔도 사라졌다. 유백영이 남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줄은 몰랐다. 같은 미친놈들끼리 통하는 바가 있는 건지, 아니면 유백영이 정말 특수한 능력이라도 가진 건지, 어떤 방법으로 갱생시켰는지는 몰라도 홍화에겐 잘된 일이었다.
고맙다는 말은 못 했다. 그 뒤로 백영과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구해줘서, 치료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물 밑에 가라앉은 흙처럼 켜켜이 묵어가기만 했다. 타이밍을 놓친 말이 으레 그렇듯 점점 입에서 빼내기 어려운 표현이 되어갔다.
“하아.”
전단지를 도로 꽂아두고 빌라를 나왔다. 빌라의 외형이 전과 조금 달라졌다. 모든 창문에 창살이 꽂혀 있었다. 특히 홍화네 집 창문 앞은 다른 집 창문보다 창살이 촘촘했다. 그간 치안 문제로 입주민들이 항의해도 들은 척 안 하던 빌라 주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음을 바꿔먹고 설치해주었다.
다 잘된 일이다. 변태도 더 이상 출몰하지 않고, 귀찮게 굴던 유백영도 떨어져 나가고, 일도 조금씩이나마 늘어났다. 뒤숭숭한 마음은 짧은 사이에 워낙 많은 일들이 일어나 그렇다고 치부했다.
미친놈 일이 있은 후로 홍화는 약수터에 꼬박꼬박 출석 도장을 찍었다. 돈을 주더라도 더 좋은 시설을 이용하겠다는 각오는 통장 잔액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운동은 꾸준히 해야 효과를 보는 것이지, 돈 들인다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약수터를 향해 뛰어가려던 홍화가 잠시 멈칫했다. 맞은편에서 어딘가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잠깐 멈춰 서서 남자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시선을 느낀 이도 홍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남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홍화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창백하게 질렸다. 도망가고 싶은지 휠체어 바퀴를 잡고 미친 듯이 돌리는데, 아직 조작이 익숙하지 않은지 바퀴가 자꾸 헛돌았다. 남자가 씨발, 씨발 욕을 하며 상체를 앞으로 뺐다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홍화가 놀라서 달려왔다. 도와주려고 팔을 뻗자 남자가 두 팔로 머리를 가리고 아래턱을 발발 떨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오줌도 질질 지렸다.
“저기,”
“……죄송합니다! 저, 저, 다시는 안 오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다시는 안 보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앞니와 아랫니가 성하지 않은 남자가 거듭 사과했다. 홍화가 한 걸음 물러났다. 어둠 속이라 미친놈의 면상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그가 이 사람임은 알았다.
남자가 무릎을 질질 끌며 홍화에게서 멀어졌다. 홍화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엉금엉금 휠체어로 기어 올라가 바퀴를 굴렸다. 홍화는 남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만 봤다.
잘 타일렀다고.
하하, 하고 홍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지 않던가. 정말로, 매우 유백영다운 해결책이었다.
∞ ∞ ∞
유백영이 깽판 친 뒤로 화보 촬영은 취소된 줄 알았더니, 스튜디오를 바꿔서 다시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백영과 같이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피하고 싶건만, 인연을 관장하는 신이 저와 백영의 끈은 왜 끊지 않나 원망스러웠다. 홍화는 가기 싫은 발 질질 끌며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저번 스튜디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번 스태프들이 좀 더 활기차고 여유로웠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꾸벅꾸벅 인사하다가 저쪽에 앉은 백영과 눈이 마주쳤다.
예의상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나, 손을 들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백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에디터가 뭐라고 할 때마다 경청하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 옆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홍화도 눈을 돌렸다. 백영이 먼저 모른 척해주니 홍화로서야 편한 일이었다. 입맛이 씁쓸한 건 공복에 마신 커피 탓으로 돌렸다.
“피부가 어쩜 이렇게 고와요. 아기 피부 같네.”
단장하는 내내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칭찬을 쏟아냈다. 욕만 들어먹다가 칭찬을 들으니 하늘을 걷는 기분이라, 홍화가 칠칠치 못하게 으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거울 봐요. 어때, 괜찮아요?”
제 의견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머리를 박박 밀어도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하는 게 홍화의 위치였다. 무시하지만 않아도 감사할 환경에 친절하게 대해주다니, 이곳이 무릉도원이었다.
사진사의 표정도 시종일관 부드럽고 지시하는 사항도 구체적이어서 별 무리 없이 개인 촬영을 끝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백영과 같이 찍어야 한다니, 차라리 따로 찍고 합성하면 안 되냐고 사진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간절한 바람은 입 밖으로도 못 꺼내고 홍화는 백영과 카메라 앞에 섰다. 놀이터에서 언성이 오갔던 과거가 어제 일처럼 느껴져 섣불리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낯선 어른 보는 애처럼 쭈뼛거리며 주변에서만 알짱댔다.
“좀 가까이 서봐요. 처음 만나도 그보다는 가까이 서 있겠다. 백영 씨는 그 의자에 앉아주시구요.”
고풍스러운 의자에 백영이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홍화는 보지 않고 있다. 홍화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사진사의 재촉에 의자 뒤에 서서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홍화 씨, 무슨 가족사진 찍어요? 백영 씨가 아버지야?”
사진사의 너스레에 스태프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유백영이 아버지라니, 천륜을 저버릴 잔인한 말이었다. 홍화는 따라 웃지 못하고 빳빳하게 굳었다. 보다 못한 에디터가 홍화를 백영의 의자 앞에 앉혔다.
“이번 컨셉 잘 들어놓고는 왜 이래요. 브로맨스라고. 좀 더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야지, 이건 뭐 이십 년간 대화 없던 아버지와 아들 같잖아. 백영 씨 다리에 몸도 좀 기대고, 머리도 대고 그래요.”
신인이 무슨 힘이 있다고. 홍화가 얌전히 백영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는 척했다. 볼을 대기 싫어서 닿을 듯 말 듯 목에 힘을 주고 있자니 목덜미가 쥐 날 듯이 경련했다.
“백영 씨도 표정 풀어요. 오늘 이상하네. 계속 딱딱하게 굳어서.”
백영이 한마디 듣더니 홍화의 옆머리에 손을 올렸다. 홍화의 몸이 굳든 말든, 그대로 잡아 제 허벅지에 지그시 눌렀다. 홍화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티자 백영도 손등에 힘줄을 세우며 내리눌렀다. 홍화의 귀가 기어이 허벅지에 닿도록 누르고 나서야 딱딱하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홍화 씨도 표정 풀고. 누가 보면 저승사자한테 잡힌 사람이라고 알겠네.”
그 추측이 맞다고는 말 못 하고 홍화가 애써 안면 근육을 풀려고 노력했다. 옆머리를 쥐고 있는 백영의 손과 힘주느라 경련이 이는 목과 여차하면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 같은 백영을 코앞에 두고 있자니 아무리 애써도 마음먹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가 나오지 않았다.
어영부영하다가는 저번처럼 욕을 들어먹을까 무서워, 홍화가 백영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손바닥 아래에 잡힌 손등이 움찔했다.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고 바위에 들러붙은 불가사리 떼어내듯이 떼어냈다. 의외로 순순히 손을 거둬줬다. 깍지는 여전히 겹쳐진 채다. 찰칵, 소리가 터졌다.
“백영 씨 지금 그 표정 좋네요. 홍화 씨도. 조금만 더 가까이 붙어요.”
뭘 하든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협조해서 빨리 끝내는 게 낫다. 백영이 아니라 판판한 바위라 여기고 홍화가 아예 그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두 팔을 백영의 허벅지 위에 늘어놓고 머리도 괸 채 몸에서 힘을 축 빼고 늘어졌다. 흐물흐물한 문어처럼 붙어있자 사진사가 연신 “좋아요.”를 외치며 셔터를 눌러댔다.
옷을 갈아입는 사이 의자가 사라졌다. 빈 곳에 평평한 흰색 발판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홍화 씨하고 백영 씨 키 차이가 좀 나서요. 홍화 씨, 그 발판 위에 올라가 보세요. 둘이 마주 보고.”
발판 위에 올라가자 백영과 눈높이 차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직 자신의 키가 작았다. 상체만 앵글 안에 들어가면 되기에 슬며시 뒤꿈치를 들었다.
“편하게 쳐다보세요. 그냥, 친구 본다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이딴 친구 가진 적 없다. 홍화가 싸움 걸듯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백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여유롭게 서 있었다. 똑같이 고개가 삐딱하고, 눈빛이 불량했다.
“아니, 원수 말고 애인 보듯이 하라니까. 왜 둘 다 서로를 노려봐.”
눈빛에서도 티가 났는지 에디터가 바로 지적했다. 잔소리를 들었음에도 둘 다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홍화도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백영의 눈빛을 받아쳤다. 주먹까지 쥐고 견디는 홍화에 비해 백영은 천하태평이었다.
홍화의 눈동자가 먼저 잘게 흔들렸다. 백영의 눈에서 코끝으로, 코끝에서 입술로 시선이 내려왔다. 시선 끝이 백영의 입술에 닿자마자 홍화가 백기를 들며 고개를 돌렸다. 불현듯 갈증이 심해져 침이 꼴딱 넘어갔다.
“마주 보라고요. 홍화 씨 뭐 해요?”
말로는 뭔들 못 해. 마주 봤다가 또 입술만 보이면 어떡해. 가슴이 초조하게 뛰어 홍화는 화보고 나발이고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런 공포엔 면역이 없었다.
“보라는 말 안 들려?”
백영이 불쑥 큰손을 뻗어 홍화의 턱을 잡았다. 좋게 표현해 ‘턱’을 잡았다지, 실상은 턱주가리를 잡고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사진사가 때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도 너무 좋다며 백영을 부추겼다. 무릉도원이 아니라 도축장이었다.
홍화가 백영의 손을 내치고 얼얼한 턱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턱뼈를 부서트릴 작정이었는지 눌린 곳이 아릿했다.
“홍화 씨, 백영 씨도 안고 좀 그래 봐요. 적어도 우정으로는 보여야지, 지금은 무슨 둘 다 철천지원수들이 주먹질하기 전초 같아요.”
주제가 원수였다면 오 분 만에 촬영을 끝냈을 텐데.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하루를 허송으로 날리게 생겼다. 홍화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백영의 품에 폭 안겼다. 예고도 하지 않고 달려든 터라 백영도 적잖아 놀랐는지 두 팔이 어설프게 허공에 떠 있었다. 홍화가 이를 악물고 협조해라, 속삭이자 백영이 잠시 멈칫했다가 홍화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발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발판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좋아요. 잘하네. 진즉에 이렇게 하지. 홍화 씨 고개 조금만 이쪽으로.”
홍화가 백영의 품에 파묻혀 있는 구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셔터 눌리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백영의 옷깃을 잡아당겨 봐라, 품 안에서 뒤돌아서 봐라, 한쪽 팔을 백영의 어깨에 걸어보라, 등등 지시가 부담스러웠다.
홍화는 착실히 해냈다. 장식품처럼 서 있는 백영의 품 안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며 사진사의 지시를 수행했다. 홍화의 옆구리에 팔만 걸고 있던 백영은, 마치 사람들 다 자는 밤에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는 석고상처럼 천천히 양팔의 폭을 좁혔다.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하던 홍화도 배가 안으로 쑥 밀려 숨쉬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팔에서 힘을 풀라고 눈치를 줘도 백영은 알아듣지 못했다. 홍화 쪽은 아예 보지 않고 있었다. 홍화가 사진사의 눈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꿈틀대며 백영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버둥댔다. 쓸모없었다. 백영의 팔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홍화의 몸을 가두고 똬리를 틀었다. 홍화의 몸이 앞으로 굽으면 백영의 몸도 따라 굽었다.
홍화의 얼굴이 빨개졌다. 숨을 들이마시느라 입술이 벌어지고 백영의 키에 맞추느라 발뒤꿈치가 들렸다. 이러다가는 숨 막혀 죽을까 봐 황급히 백영의 팔을 툭툭 쳤다. 사진사가 찍다 말고 의아한 시선을 보낼 때가 되어서야 백영이 팔에 힘을 풀었다.
푸하, 하고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홍화가 먼 거리를 단숨에 뛰어온 사람처럼 숨을 할딱이며 백영을 째려봤다. 백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밀었다. 입술 선이 비틀려 있었다.
일부러 그랬다. 분명 일부러 그랬어.
홍화가 손을 잡지 않자 백영이 팔뚝을 쥐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얼굴이 빨간데.”
고의로 차로 쳐놓고 괜찮냐고 물을 위인이었다. 홍화는 주변 분위기부터 읽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들 앞에서 사람 죽이려 드냐고 화를 낼 순 없었다. 홍화의 눈에만 파렴치한 살인미수범일 뿐, 다른 이에게 백영은 서글서글하고 제 일 잘하는 배우였다.
“예. 괜찮아요. 조금 긴장해서.”
이딴 유치한 시비에 넘어갈쏘냐. 홍화가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숨기고 대꾸했다. 백영이 제법이라는 듯 쳐다봤다. 홍화도 피하지 않았다. 맞부딪친 두 시선에서 파직 하고 푸른 불꽃이 튀었다.
처음이 살갗 맞대는 정도가 깊었지, 후반부는 오히려 수월했다. 기껏해야 어깨동무나 옆에 붙어 앉아있는 게 전부라 서로를 보지 않고도 진행할 수 있었다. 의식하면 사진사가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지적해서, 둘은 아예 서로를 사물 보듯이 무시하며 촬영을 끝냈다.
“홍화 씨, 우리 다 같이 뒤풀이하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진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홍화에게 물었다. 홍화야 굉장히 좋았다. 인맥 싸움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곳인데 알아서 다가와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단박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사진사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촬영할 때도 알아봤지만, 남자치고는 손짓과 몸짓이 수줍음 많은 소녀 같았다.
“좋죠. 다들 가시는 거예요?”
“응. 백영 씨도 간대.”
“……유백영, 씨도요.”
홍화의 눈 밑에 잠깐 그늘이 드리웠다. 사진사가 눈치채기 전에 홍화가 노련하게 탐탁지 않은 티를 감췄다.
“백영 씨가 쏜다는데?”
돈이 넘쳐나면 불우이웃에게 투척할 것이지, 돈지랄이 과했다. 사진사와 친분을 다질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고. 급한 일이 생겼다는 말을 꾹꾹 누르고 홍화가 그것참 좋으신 분이네요, 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멀리서 백영이 홍화의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는 흥미 없다는 듯 다시 돌린다. 뒤통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주고 싶다.
“응. 백영 씨 좋은 사람이지. 무엇보다 잘생겼잖아요. 나 배우들 많이 보는데 백영 씨보다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홍화의 주변 모든 이가 입 모아 백영의 외모를 칭찬했다. 홍화도 사진사의 시선을 따라가 백영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콧날은 우뚝하고 뺨은 부드러우며, 귀와 턱이 이어지는 선은 강인하게 도드라졌다. 입술은 도톰하면서도 선이 깔끔하고, 색 또한 밝고 선명해 굳이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된다고 스태프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악의를 품고 봐도 못생겼다는 묘사는 붙일 곳이 없었다.
“예전에 해외로 화보 촬영 갔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백영 씨에게 들러붙던지. 거기 애들은 동양 사람들 무시하고 그런 게 좀 있는데, 백영 씨는 뭐. 미남은 전 세계 공통인가 봐.”
사진사가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꺄꺄 까마귀 소릴 냈다. 어린애면 귀엽기라도 하지, 나이 지긋한 남자가 하기엔 무리가 있는 행동이었다. 어렸더라면 질색하며 멀어졌을 테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제 속을 감출 수 있는 어른이었다. 홍화는 사진사의 과한 애교도 허허 웃어넘겼다.
“응, 그렇다고 홍화 씨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니까……. 홍화 씨도 잘생겼어. 근데 과가 다른 잘생김이야. 백영 씨는 모로 봐도 남자다, 이런 거고, 홍화 씨는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오른쪽은 정말 순하고 가련한데, 왼쪽은……. 이런 말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는데, 좀 야해, 사람이.”
“예? 야해요?”
“어. 좀 그런가?”
“아뇨.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서.”
생전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사진사가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홍화를 올려다봤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듯이 진지하고 깊게 살폈다.
“야하다기보다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고 해야 하나.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어. 보통은 모를 테지만 난 좀 알겠거든. 혹시 주변에 좀 맛 간 사람들 많이 꼬이지 않아? 도를 아십니까, 묻는 사람들 많지?”
신내림 받은 무당보다 정확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 바뀌길 기다리고 있으면,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홍화만 꼭 집어 도를 아느냐고 물었다. 관심 없다고 해도 집 부근까지 쫓아와 괴롭히는 인간들 역시 수두룩했다. 그뿐인가. 얼마 전에도 미친놈에게 시달린 데다가 유백영까지 옆에 붙어있었다.
홍화가 용한 무당 앞에 선 것처럼 주먹까지 꼭 쥐고 고개를 주억였다. 사진사가 홍화의 반응이 귀여운 듯 방긋 웃었다.
“배우 하기엔 좋은 조건이야. 그거에 꽂혀서 팬 될 애들이 꽤 있을 거거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사진사가 홍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 빙그레 미소 띤 얼굴이 심성 고와 보였다.
“여기, 내 명함. 나 원래 이런 거 안 주는 사람인데, 홍화 씨가 사람 괜찮아 보여서 주는 거야. 사진 찍을 일 있으면 연락 줘.”
하늘에서 떡이 뚝 떨어졌다. 홍화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명함을 받았다. 저도 주려는 찰나에 나갈 준비를 마친 스태프가 얼른 오라며 둘에게 손짓했다. 사진사가 총총거리며 뛰어갔고, 홍화도 일행을 놓칠세라 얼른 뒤쫓아 갔다.
운 좋게 사진사 옆에 앉았다. 이름이 윤태용이었다. 한글 이름은 촌스러워 싫다고, 자신을 찰리라고 불러달라며 수줍게 부탁했다.
“찰리? 찰리.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
“아이, 무슨 선생님이야. 부끄럽게.”
“왜요, 우리한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으면서.”
옆에 앉아있던 스태프가 끼어들었다. 태용이 새빨갛게 익어서 두 손을 휘휘 저었다.
“너희야 나랑 한솥밥 먹는 식구들이고. 홍화 씨는 배우잖아. 배우한테 어떻게 선생님이라고 하라 해.”
“찰리 선생님?”
홍화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태용을 불렀다. 태용이 아까처럼 뺨에 손을 얹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번 봤다고 거북하지 않았다. 홍화가 소리 내어 웃자 태용의 얼굴이 델 것처럼 익었다.
“우와, 우리 선생님 홍화 씨한테 반했나 보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찌르면 터지겠네.”
“무슨 소리야! 홍화 씨가 처음치고는 워낙 잘해서 그런 거지!”
스태프가 놀리자 태용이 스태프의 등을 팡팡 내려치면서 홍화를 힐끔거렸다. 홍화의 입술 끝이 삐죽이 올라갔다. 미소가 숨겨지질 않았다. 욕만 들입다 처먹은 게 엊그제 일인데, 모델로서의 자질을 알아봐주다니.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홍화도 춤추게 했다. 홍화가 참지 못하고 꽃이 만개한 듯이 웃자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입까지 헤 벌리며 홍화를 쳐다봤다. 뚫어지는 시선도 못 느끼고 홍화가 해죽였다.
“아닙니다. 이게 다 선생님이 잘 지시해주셔서 그래요.”
겸양을 떨어봤지만 한발 늦었다. 춤이라도 추고 싶어 궁둥이가 들썩들썩하고 어깨도 움찔움찔했다. 흥을 감추려고 홍화는 얼른 술병을 들고 태용의 술잔을 채웠다. 두 손으로 공손히.
“홍화 씨는 애인 있어요? 반지는 없는데.”
스태프가 홍화의 술을 이어 받으며 물었다. 모두의 눈이 홍화의 손가락에 꽂혔다. 홍화도 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반지는 생전 끼어보지 못한 순결한 손가락이었다.
“나도 궁금하네요. 홍화 씨 애인 있어요?”
분명 저 끝에 앉아있었는데 어느새. 태용에게 술을 받던 홍화가 놀라서 손에 든 컵을 미끄러트렸다. 다행히 떨어트리지는 않았으나 맥주병이 흔들려 거품이 컵 위로 넘쳐흘렀다. 급히 주둥이를 갖다 대고 흰 거품을 호로록 들이마셨다. 거품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고 엄한 숨통으로 넘어갔다.
시뻘게진 얼굴로 쿨럭거리자 백영이 홍화의 등을 퍽퍽 내려쳤다. 얻어맞는 홍화의 몸이 앞뒤로 흔들릴 만큼 강하게.
“천천히 마셔요. 누가 보면 쫓기는 줄 알겠네.”
너만 아니면 돼, 너만. 홍화가 속으로 뭐라 하든 백영은 뻔뻔하게 홍화의 옆자리를 꿰찼다. 술병을 든 채 빤히 홍화를 쳐다보는데, 눈빛만 봐도 속내가 읽혔다. 따라줄 테니 얼른 마시란 시선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잔도 받으셔야죠. 여기까지 왔는데 섭섭하게.”
정말 속상한 듯 백영이 연기했다. 주변 이들도 한 잔 정도는 받아주라고, 백영에게 술 한 잔 받는 건 영광 아니냐면서 성화였다. 거절하면 역적으로 몰 분위기였다.
인기 없는 게 죄라며, 홍화가 잔을 비우고 백영에게 내밀었다. 백영이 버릇처럼 소주와 맥주를 섞어 건넸다. 새 숟가락 꼬리 부분으로 술을 섞는 손놀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안 마셔요?”
잔에 입도 안 댔더니 백영이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이것도 연기였다. 유백영을 안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연기와 진심은 구분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 홍화를 엿 먹이려는 수작이었다. 다만, 다른 이들은 유백영의 가면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직 홍화만이 알았다.
“그러게. 백영 씨 무안하게. 홍화 씨 잔 받아놓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귀해서 아껴 마실라 그랬어요. 유백영 씨가 따라준 건데, 가보로 남길까 하고. 성은이 망극하잖아요.”
“다 마시면 또 만들어줄 테니 아끼지 말고 마셔요.”
씨발.
“영광입니다.”
홍화가 억지로 웃고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잔을 몽땅 비우자 태용만이 무리하지 말라며 홍화를 말렸다. 태용의 등 뒤로 흰 날개가 보였다. 반면, 소주병 들고 대기하는 백영의 머리에는 시뻘건 뿔 두 개가 보였다.
“아까 한 질문 답 아직 안 해줬어요. 애인 있어요? 홍화 씨. 다들 궁금해하는데.”
그딴 거 알아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 스캔들 나는 것도 인기 있는 놈들의 특권이지 저처럼 땅바닥 기는 놈은 범죄를 저질러도 이슈가 안 된다. 술이 들어가자 마음이 삐뚜름해졌고, 그래서 대답하는 목소리도 비틀렸다.
“없어요. 백영 씨는요.”
백영에게 질문을 돌리자 멀리 떨어져 앉아있던 스태프들조차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내일 아침엔 대서특필로 보도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주목하는 걸 알면서도 백영은 어깨만 으쓱하며 손안에서 가볍게 술잔을 돌렸다.
“저도 없어요. 사는 게 바빠서 사람 만날 시간이 없네요.”
“나도, 나도 없어. 홍화 씨.”
태용이 냉큼 대답했지만 홍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백영에게 애인이 없다는 소리에만 귀가 번뜩 뜨여서 곱씹었다.
애인이 없다고. 그 잘난 유백영이.
“애인 없는 사람들끼리 술이나 마셔요. 에이, 우울하다, 우울해.”
스태프가 동참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우울한 솔로들의 모임인데도 홍화는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태용이 칭찬해서 그런 거라며, 홍화는 두 번째 잔도 남김없이 비웠다.
친목이 어지간한 사람들이었다. 3차까지 가자는 거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태용이 가지 말라며 팔뚝에 매달리는 걸 다른 스태프가 말려줬다.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시고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백영이 골목 쪽에 서서 이쪽으로 오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손으로 불러도 기분 나쁠 마당에 턱 끝으로 개처럼 불러대니 곱게 갈 마음이 쥐뿔도 안 들었다. 홍화가 대놓고 쳐다보면서 담배만 빼 물었다.
“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됩니다.”
편의점 점원이 유리문을 열고 덤덤하게 말했다. 장갑 낀 손가락 끝이 유리문에 붙은 금연 스티커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피우세요.”
다른 곳도 많건만 콕 짚어 가리킨 곳이 백영이 서 있는 골목이었다. 마스크를 반쯤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던 백영이 그 소릴 듣고 키득댔다. 점원은 모자를 눌러쓴 백영을 미처 못 알아보고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하긴, 검은 챙을 푹 눌러쓰고 턱을 마스크로 가린 사람이 연예인인지 범죄자인지 알 게 뭔가. 홍화가 터덜터덜 백영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남인 양 멀찍이 떨어져 담배를 물고 라이터 부싯돌을 돌렸다. 흰 불똥만 팍팍 튀어 오를 뿐 불꽃이 일지 않았다.
“불 빌려줘?”
백영이 물고 있는 담배 끝에서 붉은빛이 일렁였다. 연기를 들이마시느라 볼이 홀쭉해졌고, 그래서 완만한 곡선의 광대뼈가 뺨 위로 드러났다. 입술 틈에서는 흐린 연기가 뱀처럼 몸통을 비틀며 기어 나왔다.
한 번 본 장면이었다. 멱살 잡혀 강제로 불을 빼앗긴 날이었다.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픈 마음이 사라졌다. 필터가 축축한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갑 안에 돌려두려다가, 백영 앞에서 궁상떨고 싶지 않아 떨리는 손을 감추고 바닥에 멀쩡한 한 개비를 던져버렸다.
“됐다.”
“…….”
백영이 담배를 꼬나문 채로 골목 벽에 등을 기댔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더는 골목에 있을 이유가 없다. 등을 돌려 가려 했다. 백영이 팔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나랑 3차 가자.”
홍화가 잡힌 제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 봤다. 유백영이 원하는 3차가 무언지, 그 3차가 어디서 이루어지고 무슨 결과로 끝날지 불 보듯 빤했다.
불현듯, 유백영이 왜 이러는지 궁금했다. 술을 마셨고, 몸에 열이 올랐고, 그래서 다른 사람과 몸을 섞고 싶어서. 단순히 눈앞에 있는 다른 사람이 저라서. 추측이 그럴싸했다.
팔목이 아팠다. 품에 안겼을 때 유백영의 팔이 밧줄처럼 옭아맸던 옆구리도 아렸다. 잡혔던 턱은 얼얼함이 사라지질 않았고 쓸데없는 동정을 받았을 때가 떠올라 속도 쓰라렸다. 영웅인 줄 알았더니 속을 박박 긁어댄 순간도 스쳐 갔다.
숙취 음료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몇 캔을 쏟아붓더라도 결과는 같으리라. 제 속을 아프게 쥐어짜는 건 술이 아니라 유백영이었다.
백영이 담배를 버리고 홍화를 응시했다. 정수리를 찌르는 시선에 팔목에서 눈을 뗐다. 골목 밖의 화려한 불빛들이 백영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조명을 받을 때는 밝은 갈색이고, 어두운 골목 안에서는 속 모를 커피색인 눈동자였다.
“응.”
홍화가 그 눈을 보고 홀린 듯이 답을 내놨다. 홍화 역시 바라던 바였다.
골목길에서 가장 가까운 모텔에 들어갔다. 유흥가답게 무인 모텔이 많아 고르는 데 어렵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기 무섭게 우악스러운 손길이 홍화의 외투를 벗겼다. 상의의 아랫부분을 잡고 가죽 벗기듯이 위로 쭉 들어 올렸다. 홍화가 몸을 앞으로 훌쩍 빼며 백영을 피해 침대로 도망갔다. 백영이 모자와 마스크, 외투까지 바닥에 던지고 침대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너부터 씻어.”
다가온 만큼 궁둥이를 뒤로 느릿느릿 빼며 홍화가 백영을 말렸다. 백영이 제 윗도리를 훅 벗어 바닥에 집어 던지며 홍화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홍화가 팔꿈치로 몸통을 괴고서 눕지 않으려 버텼다. 백영도 손에 힘을 실었다. 홍화가 윽, 소릴 내며 침대에 뒤통수를 박았다. 침대가 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풀썩 꺼졌다. 완전히 누운 홍화 위로 그림자가 검게 드리웠다.
“벗어. 같이 씻게.”
“나 술 한 잔 더 하고. 아직 모자라.”
“뭐가 모자라. 여기까지 와서.”
홍화가 침을 꼴깍 삼켰다. 백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갈증이 인 것처럼 입술을 자꾸만 핥는 것이, 샤워하기도 전에 열이 잔뜩 오른 듯했다. 다리 사이를 내리누르는 백영의 가운데도 열 오른 주인과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홍화가 백영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리다가 가까스로 굵다란 팔 사이를 빠져나왔다. 보람 없이 바로 잡혀 백영 밑에 다시 깔리기는 했지만, 편의점에서 사 온 봉투를 낚아채는 건 성공했다.
“한 잔 더 하고, 담배 한 대만 더 피우고. 넌 피웠지만 난 아직 안 피웠어.”
“끝나고 마셔. 하면서 피우든가. 난 상관없어.”
엎드린 홍화 위에 제 몸을 내리누르며 백영이 속삭였다. 둥근 귀 끝을 잇새로 물어서, 홍화가 어깨를 움츠리며 나직하게 신음했다. 둥근 엉덩이 위로 아랫도리를 뭉근하게 문지르며 백영이 귀 뒤쪽을 뾰족한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홍화가 기겁하고 귀를 막자 그 손목을 가볍게 쥐고 침대에 처박았다. 꿈틀거리는 홍화를 결박한 채 귀에서 맛있는 냄새라도 나는 양 코끝을 비벼댔다. 하, 하고 입술 사이로 샌 한숨이 홍화의 귓불을 간질였다.
“흐으…….”
등 뒤를 짓누르는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가슴도 묵직하게 깔려 숨이 절로 할딱할딱 튀어나왔다. 못된 손이 상의 안을 파고들었다. 얄팍한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고, 살덩이라도 쥘 듯이 없는 가슴을 그러모았다. 젖꼭지를 검지로 꾹 누른 채 빙글 돌렸을 때는, 무슨 힘이 샘솟았는지 밑에 깔린 홍화가 뭍으로 뛰쳐나온 생선처럼 펄떡 뛰었다.
“너, 냄……, 흑. 냄새나!”
신음을 꼴깍꼴깍 삼켜 먹고 간신히 말을 뱉었다.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조몰락거리던 손짓이 딱 멎었다. 홍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낑낑대며 백영의 밑에서 빠져나왔다, 백영이 상체를 들고 계속해보라는 듯 쳐다봤다.
“담배 냄새, 술 냄새, 고기 냄새, 이상한 냄새는 다 나. 더러워서 하기 싫어.”
제발 먹히길 바라며 홍화가 인상까지 찌푸렸다. 그 와중에도 놓지 않았던 봉투에서 맥주를 꺼내고, 냄새를 피하는 양 돌아서서 캔 뚜껑을 땄다.
“그런데 같이 씻자고. 미쳤냐?”
냄새가 지독하다며 홍화가 창문까지 열었다. 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수고까지 보여줬다. 성냥 대가리가 타오르며 매캐한 냄새가 창밖으로 흘러나갔다.
백영이 손등에 코를 묻고 킁킁댔다. 제 딴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지 가늘게 실눈을 떴다. 홍화가 눈가를 찌푸리며 코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원래 진흙탕에서 뛰어논 개새끼는 제 몸에 무슨 냄새가 나는지 모르는 법이다.
“욱, 좀 가서 빨리 씻어!”
홍화가 닿기도 싫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맥주를 홀짝이며 진저리 치듯 멀어지자 백영이 혀를 차며 바지에 속옷까지 허물처럼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우박이 바닥 두드리듯 요란했고, 그제야 홍화는 팔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때는 지금이었다.
담배도 꺼버리고 캔도 소리 나지 않게 바닥에 내려놨다. 홍화가 발걸음 소리마저 죽인 채 바닥에 널브러진 백영의 옷을 하나씩 주워 품에 안았다. 굽힌 허리를 펴다가 유리 테이블을 건드렸을 때는 물 떨어지는 소리보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더 크게 났다. 흔들리는 테이블을 후다닥 잡아 세우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눌렀다.
속옷에 외투까지 야무지게 다 챙기고, 백영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도 주웠다. 혹시 백영이 짐승 같은 감으로 뛰쳐나올지 몰라 홍화가 손을 서둘렀다. 빠진 것 없이 싹 비운 방을 훑어보고 문고리를 잡았다. 물소리 흐르는 욕실을 힐끔 본 다음에, 홍화가 소리 없이 모텔 방을 빠져나왔다.
당장에라도 알몸인 백영이 뛰쳐나와 목덜미를 움켜잡을까 봐 보통 조마조마한 게 아니었다. 홍화가 쥐꼬리만큼 졸아든 심정으로 연신 뒤를 돌아보며 골목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올 때는 그리 짧았던 골목길이 미로처럼 굽이굽이 꼬여 있었다. 간신히 대로변에 들어서 수많은 인파 속에 섞인 뒤에야 콩닥거리던 가슴이 누그러졌다.
왜 바라던 바였냐고. 엿 먹이려고 그랬다. 이런 유치하고 치사한 방법으로라도 유백영의 심기를 긁고 싶어서. 눈곱만큼이라도 곤란해보라고 옷을 들고튀었다. 유백영은 선녀가 아니라 호랑이였고, 홍화도 나무꾼이 아니라 사슴에 가까웠지만 아무리 소심한 사슴도 소소한 복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하하.”
유백영이 숨 막히게 누른 옆구리가 아팠다. 억지로 잡고 일으킨 팔뚝에는 멍이 들었고, 허벅지에 기대라며 내리누른 옆통수는 아직도 얼얼한 기분이었다. 경찰에게 신고해도 기삿감도 안 된다며 무시했던 그 태도가 비수 같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내려다보는 시선이 두들겨 패는 몽둥이 같았다. 유백영의 모든 언행에 화가 났다.
물리적 힘으로 대항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되갚아주고 싶었다. 핸드폰까지 챙겨 왔으니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할 테다. 옷 뺏긴 사냥꾼처럼 쩔쩔매라지. 그러다가 사람들한테 발각돼서 쪽팔림에 몸부림치라지. 생각 같아선 당장 잡지사에 전화해 모 모텔에 알몸인 유백영이 있다고 제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하하하.”
홍화가 백영의 옷을 한 아름 안고서 배를 잡고 깔깔댔다. 주변 사람들이 미친 사람 쳐다보듯 해도 두렵지 않았다. 알몸으로 모텔에서 오도 가도 못 할 백영을 떠올리자 입안에 깨소금 한 움큼이 쏟아졌다.
후환은 두려웠다. 그러나 후환은 당장 오지 않았다. 그딴 건 미래의 자신이 걱정할 일이다. 현실의 자신은 입안 가득한 참기름 맛만 즐기면 그만이었다.
홍화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당당하게 걸었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오늘 같은 날은 엉덩이를 씰룩이며 갈 수 있었다.
∞ ∞ ∞
씻고 나왔더니 이홍화가 사라졌다. 옷도 사라졌다. 지갑도, 핸드폰도 없었다. 무인도에 나체로 고립된 상태였다. 범인은 추리할 필요도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만 나왔다.
“하.”
백영은 젖은 머리를 문지르던 수건을 침대 위에 내던졌다. 흐트러진 시트만이 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이었다. 아마 오 분 전, 혹은 그보다 이른 시간에 방을 떠났으리라. 쥐새끼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옷을 들고 나갔겠지. 선녀 옷을 훔치는 나무꾼처럼 비열하게 낄낄대면서.
엿 먹이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다 줄 것처럼, 본인도 원하는 척 모텔까지 와서 한눈을 팔게 하고 그사이에 옷가지를 가지고 튀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한 짓거리였다.
인정하자. 얕본 상대에게 발가락 한 번 피나도록 깨물렸다. 텅 빈 침대를 보고 백영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깟 몸 한번 섞겠다고 말 잘 듣는 개새끼처럼 홍화의 말을 따라준 제 꼬락서니가 웃겼고, 이딴 방식으로 뒤통수를 친 이홍화가 귀엽고 앙증맞아 깨물어주고 싶었다. 잘근잘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싶어서 이가 근질근질했다.
“존나 깜찍하네.”
이를 뿌득 가느라 잇새로 소리가 새어 나갔다. 어차피 튀어봤자 벼룩이고 날아봤자 손바닥 안이었다. 홍화를 손안에 가두듯이 백영이 주먹을 꾹 쥐었다. 두 눈이 문 쪽을 향했다. 문고리를 쥐고 안을 살피던 홍화를 발견한 듯 눈동자 안에 도는 빛이 맹렬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이홍화를 잡아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백영은 나가는 대신 방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졸린 목소리로 누구냐고 묻는 매니저를 다그쳐 깨우고서는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 이홍화의 체취가 얼핏 코끝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고 가증스러운 것을 믿은 저가 등신이지. 저번에 속아놓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저가 멍청했다.
백영은 홍화가 미처 챙기지 못한 담뱃갑에서 담배를 빼 물고 불을 붙였다. 이홍화가 피우는 담배에선 옅은 박하 향이 났다. 익숙한 맛이 아니라 그런가. 백영은 몇 모금 피우지 않고 시트 위에 담배 대가리를 짓눌렀다. 항상 달던 연기가 오늘은 다소 썼다.